목차
외전
스무 살, 겨울
여섯 살, 겨울
여섯 살, 초봄
여섯 살, 봄
여섯 살, 초여름
여섯 살, 겨울
어느 날
작은 여름
보너스 트랙
스무 살, 겨울
* * *
“이거.”
짧게 말한 준희가 사진 한 장을 가리켰다. 앨범을 자주 들여다보진 않지만, 그때마다 가장 눈에 띄는 사진이었다. 두 팔을 번쩍 든 채 벌 서는 아이 모습. 댓 발 나온 입과 한껏 찌푸려진 눈썹의 주인공은 준희의 동생, 재혁이었다.
재혁은 범진의 기운을 정통으로 물려받아 어릴 때부터 에너지가 남달랐다. 다섯 살 무렵부터 초등학생이던 준희와 함께 태권도를 다니기 시작해 검도, 유도 등을 배웠고, 태권도는 시범단으로도 활약한 경력이 있었다. 재혁과 함께 태권도장에 다녔던 준희는 1년 내내 흰 띠를 매고 있다 관뒀다. 그즈음 찍힌 사진이었다. 초등학생처럼 보이지만 다섯 살에 불과한 재혁이 형을 밀쳤다가 범진에게 호되게 혼난 뒤의 모습.
“쪼끄만 게 성질 진짜 드러워 보이네.”
같이 앨범을 보고 있던 재혁이 입이 쭉 나온 꼬맹이를 가리켰다.
“기억나? 아부지한테 혼난 거?”
“아니, 근데 기억은 나지.”
응? 하고 재혁을 쳐다본 준희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었다. 재혁은 준희를 흘끔 보다 아니, 기억 안 난다는 말, 하고 고쳐 말했다.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도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무슨 재주로 이때 혼난 걸 기억하겠나. 하지만 재혁은 범진에게 얼차려를 하도 많이 받아 대충 예상할 순 있었다. 기억이 안 나도 기억나는 이 기분을 제 형인 준희는 모를 터였다. 맞을 짓을 해 맞은 거니 재혁도 억울한 건 없었다.
강렬하게 남은 기억 중 하나는 이거다.
5학년, 욕심이 많던 재혁은 넉넉하게 받는 용돈에도 늘 갈증을 느끼곤 했다. 먹고 싶은 건 자유롭게 사 먹는데, 갖고 싶은 걸 다 가질 수가 없었다. 거기다 재혁은 초딩이지만 꼰대 기질이 있어 야구부 후배나 4학년 동생들이 주머니에서 돈 꺼내는 꼴을 보지 못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어린애들이 돈 내고, 제 돈으로 피시방에 가는 게 왜 기분이 나쁜지.
용돈이 쉽게 동나는 건 정해진 결과였다. 어린 재혁이 떠올린 타개책은 몹시 단순한 것이었다. 아빠에게 비싼 에너지 드링크를 마셔야 한다고 거짓말하기. 초등학생답게 세부적인 계획은 생략하고 아빠에게 식음료비 15만 원을 받아 갔던 재혁은 두 달 만에 아버지에게 그 일을 들켰다. 그날 재혁은 아빠를 속인 죄로 엉덩이가 없어질 정도로 맞았다. 아파서 인상을 썼던 건 잠시였다. 상황이 다 끝난 뒤, 아빠가 제 엉덩이를 확인하곤 아무 말도 못 하고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이어 그런 아빠가 연고를 발라주는 손길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됐던 재혁은, 비로소 반성이란 걸 하게 되었다. 밖으로 나간 아빠가 아무리 그래도 아기 엉덩이를 그렇게 만들어 놓는 게 어딨냐고, 거의 처음으로 언성 높이는 걸 들은 후론 생각도 바뀌었다.
재혁은 제가 돈을 벌 때까지 기분이 좀 나쁘더라도 동생들이 알아서 돈 내는 걸 지켜보기로 했고, 갖고 싶은 건 솔직하게 말이라도 해보기로 했다. 180cm를 코앞에 둔 5학년 어린이 재혁이, 문밖에서 들리는 우리 아기, 우리 아기 엉덩이, 하는 아빠의 말에 머쓱해하며 눈물을 말렸다.
그 무렵은 재혁이 야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기도 했다.
재혁은 손대는 운동마다 결과를 만들어냈고, 야구부도 들자마자 주전 선수로 이름을 올렸다. 초등학생 때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일본의 스카우트가 재혁을 보러 온 일도 있었다. 국내 프로팀 관계자가 재혁의 학교를 찾아오는 건 매년 있는 일이었다. 재혁은 타고난 힘과 체격도 좋았지만, 공을 골라내는 선구안도 또래 애들에 비해 뛰어난 편이었다. 그 나이대 투수가 던지는 공이 얼마나 대단하겠냐마는 재혁은 그 날아다니는 공 중 스트라이크 존에 꽂히는 공만 정확히 골라 외야로 곧잘 날리곤 했다. 무슨 운동을 해도 잘했을 거라는 감독의 말처럼, 재혁은 기본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케이스였다.
운동 재능 외에도 물려받은 게 있어서 문제였지만.
때는 중학교 2학년, 4:2로 이기고 있던 8회 초에서 심판이 재혁에게만 불리한 판정을 내렸다. 심판은 누가 봐도 볼인 공이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왔다고 우겼다. 그것도 연달아. 한 번 더 이런 판정이 나오면 칠 것도 없이 서서 삼진을 먹고 들어갈 상황이었다. 재혁은 첫 판정에는 심판을 노려보기만 했지만, 두 번째 판정 때는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씨발놈이, 하고 심판을 쳐다보며 욕설을 뱉었다. 그리고 그 소리는 하필 오디오로 들어가, 인터넷을 뒤지면 재혁이 “씨발놈이.” 하고 말하는 걸 언제든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재혁은 그날도 아부지한테 뒤지게 처맞겠다고 생각했다. 하는 게 운동이라 맷집은 좋지만 아부지 손맛까지 커버할 정도는 아니었다. 웬만한 어른들보다 힘이 좋은 재혁이 유일하게 팔씨름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이 범진이었다. 아빠랑 형아가 관중석에 앉아 있는데도 그런 사고를 쳤으니 아부지가 가만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경기가 끝나고, 재혁은 전혀 다른 소리를 들었다.
‘야, 내가 봐도 뽈이긴 뽈이드라.’
‘…예?’
‘그래서 욕한 거는 뭐,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냐.’
범진 또한 돌발적으로 욕하는 건 그때까지도 못 고친 터였다. 재혁이 찰지게 욕을 배운 것도 다 범진 덕이었다. 범진은 술을 가르쳐주듯 욕도 제대로 배워야 한다고, 재혁만 불러 경상도 욕, 전라도 욕, 강원도 욕 등을 나눠서 가르친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상대를 몰래 패는 법, 상대방 귀에만 들리게 욕하는 법 등을 알려주기도 했다.
대회 도중 욕설 뱉은 아들에게 무던한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다 범진은 재혁이 무슨 짓을 해도, 그게 선재나 준희 관련된 일이 아니면 그냥 넘어가곤 했으니까.
재혁은 유치원 때부터 누굴 때리거나 오동통한 팔에 상처를 새겨 올 때가 많았다. 그럴 때 범진은 심각한 선재 앞에서 동조하는 척만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저도 그렇게 커서다. 남 부럽지 않게 돈을 써가며 곱게 키운다 한들, 알파 아들놈이 오메가 아들놈과 같을 리 없었다.
유초딩 시절 재혁은 아빠 속도 많이 썩이고, 형인 준희를 괴롭히기도 했지만, 아부지의 참교육 덕택에 제가 보호해야 할 두 사람만은 제대로 정립할 수 있었다. 아부지만큼이나 책임감을 가지게 된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학부모 참관 수업 등으로 아빠가 학교를 찾는 날이면, 재혁은 누가 제 아빠를 몇 초 이상 쳐다보는 것에 엄청난 거부감을 가졌다. 초등학교 다닐 때, 선생 같지도 않은 선생이 아빠에게 추근댄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필 참관 첫날에 아부지가 일이 있어 아빠만 학교로 오게 되었는데, 그날 이후로 선생이 아빠에게 요상한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재혁에게도 그 선생의 질문 세례는 이어졌었다. 아버님이 과일 좋아하시니? 아버님 주말에 따로 뭐 하시니? 연락이 잘 안되시네. 그게 오래가진 않았다. 바로 다음 주, 사심 때문에 일찍 면담 일정을 잡은 선생이 아부지를 봤기 때문이었다.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아는 마트 배달 직원이 마음을 못 숨기겠다며 새벽에 현관문을 두드린 것, 아빠 나이의 반도 안 되는 딴따라 같은 놈이 아빠를 따라왔다 아부지가 처리한 일, 마트에서 잠시 혼자 있는 아빠를 변태 싸이코가 추행한 일 등 말하자면 입만 아픈 수준이었지만 선생까지 그럴 줄은 몰라 충격이 상당했었다.
중학교에 들어와서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우와 니네 아버지…. 니네 형…. 같은 소리를 하도 들어 이골이 날 지경이었다. 가끔 핀트를 희한하게 맞춘 놈들만 아부지, 범진을 영화배우 같다며 찬양하곤 했다. 재혁도 아부지가 조폭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 같다는 말에는 동의했다. 그건 아무렇지 않았다.
최초로 크게 일이 터진 건 야구부 모임에서였다. 안 그래도 형을 소개시켜 달라던 선배가 하나 있었는데, 그가 어디서 뭘 보고 와서는 떠올리기도 싫은 씹소리를 내뱉었다.
‘재혁아, 니네 아버님 겁나 아름다우시더라. 형 소개 안 시켜줄 거면 아버님이라도,’
‘개새끼야, 뭐라 했냐, 니 지금?’
‘뭐? 이 새끼가…?’
재혁은 선배의 황당한 낯에다 그대로 주먹을 내리꽂았다. 중학생. 어리다면 어린 나이지만 더럽고 저급한 말들을 하는 무리들도 분명 있었다. 특히 재혁은 야구부 선배들이 그런 말을 하는 걸 몇 번이나 봐왔던 터였다. 형을 소개해 달란 말엔 아뇨, 하고 자리를 지나칠 수 있었지만 희롱하듯 아빠가 아름다우니, 어쩌니, 하는 것까진 참을 수가 없었다. 뒤에서 저들끼리 어떻게 쑥덕댈지도 뻔했다. 조용히 배트 정리를 하던 재혁이 돌변해서 선배를 엎어뜨리기까진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주변에 있던 부원들이 재혁을 막아도 봤지만, 되려 그들 얼굴에도 주먹질이 가해질 뿐이었다.
그 정도까지 심하게 폭행을 행사한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학교에서 연락을 받은 건 선재였지만, 자세한 경위 등은 범진 혼자 알게 되었다. 하필 그날 선재에게 열 기운이 있어서였다. 내내 마음을 졸였던 선재는 두 사람이 태연하게 집에 들어온 걸 보고서야 안심했다. 작은 다툼이 있었고, 형식적으로 부모를 호출한 거였다는 범진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전말은 이랬지만 말이다.
다른 학교로 전학 갈 가능성이 있을 정도로 사안이 심각했지만, 범진이 천만 원을 물어주면서 합의로 끝나게 되었다. 범진은 상황을 들어보고 재혁이 독단적으로 개망나니짓을 했다면 소년원에 그냥 보낼 생각이었다. 천성이 저를 닮아 인간이 아주 못 될 수도 있었다. 선재의 피도 섞여 괜찮겠거니 했는데 결국 이런 일을 쳤다. 그런 생각을 가지며 학교로 갔고,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가만히 앉아만 있었는데. 들린 말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저희 애도 잘못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성희롱은 무슨 성희롱이라고, 그게.’
경위서에 작성된 성희롱이라는 단어에 상대 아버지가 짜증 난 듯 말을 이었다. 아무 표정이 없던 범진의 눈가가 구겨진 것도 그때였다.
‘뭔 성희롱.’
짧은 혼잣말을 하고 경위서에 손을 댄 범진이 한쪽 눈썹을 위로 든 채 그걸 읽어 내렸다. 그럼 그렇지, 선재의 성스러운 피까지 섞인 아들자식이 아주 개망나니짓을 할 리가 없었다. 충분히 이해되는 상황에 종이를 테이블로 턱, 붙이듯 내려놓은 범진이 입을 열었다.
‘어이, 아부지요. 느그 아들놈이 내 마누라한테 성희롱한 거 맞네. 이기 성희롱이 아니면은, 내 니 마누라 소개받아도 돼요? 됩니까?’
담당 선생 및 교감, 교장은 범진의 말투를 익히 알고 있어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으로 범진과 만나게 된 남자는 어벙한 얼굴로 눈만 깜박였다. 뭐요? 하고 반박할 듯 대꾸한 것도 잠시였다.
‘이까지만 하지? 엄밀히 말하면 피해자는 낸데?’
내 마누라가 당한 긴데, 하는 소리에 말을 잃은 남자가 허, 소리만 내며 옆을 쳐다봤다. 선생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거지만 아무도 그와 눈을 맞추려 하지 않았다. 범진이 이 학교에 장학금 명목으로 학기마다 돈을 대주고 있어 교직원들도 난감하긴 마찬가지였다. 뒤이어 들린 내 천만 원 줄 테니까, 그걸로 끝냅시다, 하는 소리에 선생들이 합을 맞춘 듯 입을 열었다.
‘네, 아버님…. 재혁이가 더 잘못하긴 했지만…. 현우도 잘못했다고 하고, 야구부원들도 증언을 한 게 있어서….’
‘뭐라고요?’
‘아빠….’
당사자인 현우까지 제 아비 팔을 잡고 흔들었다. 범진은 그 자리에서 누군가에게 전화하며 경위서 귀퉁이를 찢었다. 손바닥만 하게 찢긴 종이는 남자에게 던져졌다. 계좌, 하고 남자를 쳐다보던 범진은 그가 펜을 들고 뭔갈 쓰려 하자 그제야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계좌가 뭔지는 애초부터 중요하지 않았다. 남자의 뜻을 꺾으려는 의도로 상황을 몰아간 것일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웬 남자가 5만 원권 다발을 들고 등장했고, 범진이 그 돈을 받아 테이블 위로 올렸다. 여기까지가 선재가 알지 못하는 일의 내막이었다.
그날 재혁은 니 따라와 봐, 말하며 학교 뒤로 향하는 범진의 뒷모습을 묵묵히 따라갔다.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 아래엔 의자도 하나 놓여 있었다. 누가 일부러 가져다 놓은 것 같았다. 거기 한쪽 발을 올린 범진은 야, 하고 재혁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격려에 가까운 손길이었다.
‘사람 패면 다 니한테 돌아온다.’
‘…네.’
‘근데, 씨팔, 팰 거는 패야지. 안 그냐?’
‘…아부지.’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씩 뜻이 통할 때가 있었다. 재혁은 괜히 아부지, 부르며 범진의 눈을 쳐다봤다.
‘또 그런 일이 생긴다, 하면 패는 것까지는 내가 니 응원한다. 근데 씹창을 만들어 놓으면은 누가 니를 정당방위라고 생각하겠냐. 니, 이 세상에 법이 괜히 있는 게 아니그든. 니 아부지가 법 좋아하는 거 아냐, 모르냐.’
‘알아요.’
‘그래, 내가 법 때문에 결혼도 했다. 쨌든, 조질라면 사람 없는 데서 조지든가, 그게 안 되면 니도 맞으라 이 말이다. 법이 괜히 있냐? 쌍방, 어? 이, 쌍방 정신을 여 머리통에다 새기라고.’
‘여’에서 손가락으로 재혁의 머리를 툭툭 두드린 범진이 ‘쌍방’을 강조했다.
‘예, 아부지.’
재혁은 아부지다운 가르침에 크게 감명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비슷해서 안 맞는다고 생각할 때는 있지만, 그래도 아부지는 아부지다. 이렇게 중학생의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의 깊은 가르침을 주니까. 범진은 옛날 회상을 하며 내가 딱 니처럼 그래 나대다가 이, 포승줄에도 묶여보고, 하는 말도 절로 뱉었다. 똑 닮은 아들놈에게 말해줄 조언이 한두 개가 아닌 듯했다.
재혁은 아부지의 아빠 쟁취기를 들으면서는 벅찬 기분까지 느꼈고, 적어도 아빠가 눈물 흘리는 일만은 없게 하리라 다짐했다.
“어? 재혁아?”
“어?”
“치킨 먹자고.”
아부지한테 혼난 역사를 차근히 떠올리다 보니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다. 재혁은 이후 성가신 일이 생기면 철칙을 지켜가며 싸움을 걸었다. 어깨빵 당한 척을 하거나, 니가 먼저 쳤다? 하며 머리를 내밀고 억지를 부린 뒤에야 주먹을 올려붙이곤 했다. 어울리지 않게 어, 순하게 반응한 재혁이 준희를 쳐다봤다.
“좋지.”
“아부지랑 아빠랑 저녁에 온다고 했으니까.”
“오긴 오네?”
“응, 아빠가 그러는데 엄청 좋대. 너 다음 달에 훈련만 아니면 넷이 같이 가는 건데.”
“난 뭐, 다음에 가도 되니까.”
여기에 그런 게 있다고? 할 만큼 외진 곳에 위치한 온천 이야기였다. 아부지가 알아낸 천연 온천으로, 이제 막 문을 연 곳이라 했다. 건물이 지어진 지 1개월도 지나지 않았고, 아는 사람만 찾는다는 외지의 온천. 아부지 말에 따르면 터진 게 물이 아니라 약이라고 했다. 강제로 온천에 끌려간 아빠한테선 몇 시간 뒤에 연락이 왔었다. 식당도 있고 욕탕도 희한하게 생겼다며 신기해하는 아빠의 음성. 들떠서 이것저것 말하던 아빠의 목소리를 떠올린 준희가 혼자 작게 웃었다.
“왜.”
웃는 얼굴을 쳐다본 재혁이 의아한 투로 물었다.
“아빠 가기 싫어했던 거 생각나서…. 아부지가 억지로 들쳐 메고 나갔잖아.”
“요새 하도 이상한 거 많이 먹이고 그러니까.”
의심할 만하지, 하고 덧붙인 재혁도 가볍게 웃었다. 태어날 때부터 ‘나 튼튼해요’를 얼굴에 써 붙이고 나왔던 재혁과 달리, 준희는 아빠 체질을 닮아 몸이 약한 편이었다. 형질 문제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몸이 튼튼하지 못했다. 범진이 그런 부자를 세트로 묶어 주말마다 산행을 시킨 지도 5개월이 넘어가고 있었다. 준희는 2주에 한 번꼴로 산에 올랐지만, 선재는 일주일에 최소 한 번은 산에 올라야 했다.
문제는 거기서 마셔야 하는 것들이었다. 각종 식물과 동물은 물론이고 양서류, 파충류에 이르기까지 약으로 안 먹어본 게 없을 지경이었다. 범진은 비위가 약한 두 사람을 잘 알아 제가 생각하기에도 괴이쩍은 보양식이면 말조차 해주지 않았다. 대충 가시오가피 끓인 물이라고 뻥을 쳤다.
온천수의 효능을 부풀리는 것도 그와 비슷한 맥락이었다.
‘죽은 호랑이도 살린 물이다, 그게.’
‘세상에 그런 게 어딨는데?’
‘어딨긴! 거 있지!’
선재는 집을 나서기 30초 전까지도 온천은 안 가겠다고 버텼다. 아무 온천, 가까운 데를 가면 모를까 몇 시간이나 운전해서 거기까지 왜 가나 싶어서였다. 그 말에 범진은 그 물이 보통 물인 줄 아느냐며 호랑이 얘기를 해댔고, 그러는 시간이 무려 30분을 넘어갔다. 워낙 기세 좋게 온천수의 효능을 읊은 터라 준희와 재혁도 그즈음 잠에서 깨게 되었다.
범진의 허풍과 속임수도 문제긴 했지만, 제일 문제인 건 잠도 제대로 못 잔 범진이 몇 시간을 운전해나갈 길이었다. 그런 거 없다고, 그냥 욕조 물에 몸 담그면 다 똑같다고, 범진을 생각해 말을 돌려도 범진의 죽은 호랑이 타령은 멈출 줄을 몰랐다. 결국 욱한 범진이 들소처럼 돌진해 선재를 둘러업었다. 범진은 준희와 재혁에게 간단한 말만 남겼다. 낼 온다, 하고 선재를 보쌈하듯 안은 채 현관에서 멀어졌다. 그게 어제 일이다.
“그래도 아빠가 엄청 좋다고…. 어, 이것도 있네.”
말하며 사진첩을 넘기던 준희가 어떤 사진에 시선을 기울였다. 두 팔을 번쩍 든 재혁이 아까 사진과는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이번엔 옆에서 그런 재혁을 끌어안고 우는 제 모습도 함께였다.
“이거 그거네. 형 밀쳐서 계란 다 깨트린….”
“아닌 것 같은데. 계란이… 없는 거 보니까.”
사진을 유심히 살피던 준희가 하여튼 내가 너 지켜줬다, 하며 고개를 들었다. 기억은 정확히 나지 않지만, 재혁이 아부지에게 혼날 때마다 그렇게 통곡을 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아직도 이렇게 애기니까 어릴 땐 더 신경 쓰였겠지. 아이였던 제가 보기에도 재혁은 애기 그 자체였던 모양이다.
애기, 하며 재혁의 어깨를 한 손으로 주무르듯 만진 준희가 다른 손으론 사진을 부드럽게 쓸었다. 애기 소리에 무안한 표정을 짓던 재혁은 이 말은 해야겠던지 입을 열었다.
“근데 형, 밖에선 내 가오도 있으니까….”
누구 있을 때는…. 하며 말을 덧붙인 재혁의 얼굴이 점점 빨개졌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형이 애기라고 불러 그 정도로 타협이 가능한 거였다. 최근에, 형의 ‘애기’ 소리에 누가 뒤돌아봤던 기억이 나 얼굴에 열이 올랐다. 재혁은 커다란 덩치로 쭈뼛거리며 내 가오…. 하고 중얼거리기만 했다. 저 쪽팔린다고 형에게 강하게 얘기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