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섯 살, 겨울 (22/29)

여섯 살, 겨울

* * *

“주니가….”

잠들었던 선재가 눈을 설핏 떴다.

겨울이고, 커튼이 길게 내려와 있어 몇 시인지 정확히 가늠되진 않았다.

그래도 날은 밝았을까? 최소한 새벽은 된 것 같았다. 선재는 커튼 사이로 떨어지는 푸른 빛에 의지해 아이 얼굴을 쳐다보았다.

“으응, 준희 왜….”

작은 몸을 끌어안은 선재가 부드럽게 들어온 머리통을 섬세하게 쓸어주었다.

무서운 꿈이라도 꾼 모양이었다. 재혁을 끌어안고 잠들었던 아이가, 어두운 아침에 아빠를 찾는 데는 그런 이유밖에 없을 터였다. 선재는 최대한 따뜻한 손길로 아이를 어루만져 주었다. 머리카락을 몇 번 쓸었을 뿐인데도, 준희에게선 금방 물기 어린 파우더 향이 올라왔다.

“주니가….”

“응, 괜찮아. 아빠 있잖아. 아부지랑 동생, 준희 아기도 있고.”

“여석살이에요….”

“…어…?”

가슴팍에 묻혀 있던 아이에게서 조용히, 그런 소리가 흘러나왔다.

선재는 한 박자 늦게 뜻을 파악했다. 오늘, 1월 1일부로 여섯 살이 된 준희가 한 살 더 먹은 걸 제게 자랑하는 소리였다. 어제저녁에 준희 내일 여섯 살 되네, 하며 아이를 들뜨게 했던 건 자신이었다. 선재는 여석살…. 하고 웅얼거리는 아이가 귀여워 소리 없이 웃었다.

“준희 여섯 살이네, 그래….”

“네에….”

“아기가 벌써 여섯 살….”

품에 안긴 준희가 몸을 조금 뒤척였다. 선재가 팔에서 힘을 풀자, 준희는 고개만 빼꼼 들어 아빠와 눈을 마주쳤다. 일어나 바로 이쪽으로 온 것인지, 아이의 속쌍꺼풀이 크게 부풀어 있었다. 물처럼 보드라운 아이 뺨에 손을 올린 선재가 미소만 띤 채로 그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아가는…. 뒤에….”

“아… 맞다….”

굳이 아기는 뒤에 있다고 정정해준 준희가 웃기면서도 귀여웠다. 선재는 아이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작은 몸을 제 얼굴로 조금 붙였다. 그러자 얼굴을 조금만 내려도 아이 머리칼에 입술이 닿았다. 선재는 입을 아이 머리카락에 붙인 채로 조용히 웅얼거렸다. 준희는 여섯 살이니까…. 하며 아이 말에 동조하는 척을 해주었다.

그렇게 조금 더 잠을 자려 했다.

준희도 선재의 품에 꼭 안겨 숨을 골랐고, 선재도 아이 몸을 끌어안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개, 씨이팔러미, 하는 소리가 아니었더라면 정말 잘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선재는 분명히 들은 범진의 잠꼬대 때문에 아이 얼굴부터 확인했다.

준희는 다행히 그 소리를 못 들은 듯했다. 눈을 감고 있다가, 아빠가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얼굴에 에…? 하며 부은 눈을 슬며시 뜰 뿐이었다. 아니, 아니, 하며 말을 돌린 선재가 다시 준희를 끌어안았다. 아니야, 준희 더 자자, 하며 작은 몸을 달래주었다.

잠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여섯 살인 걸 자랑하려 이곳으로 왔던지, 아이는 1분도 되지 않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선재는 품에서 느슨하게 아이를 놓고,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6시 42분. 아이가 눈을 뜨기에도 이른 시각이었다.

선재는 뜬눈으로 아이 등을 살살 두드려주었다.

불안한 마음에 이따금 뒤를 돌아보았지만, 범진이 잠꼬대를 더 하진 않았다.

가끔 새벽 나절에 갖은 욕을 하다 잠에서 깰 때가 있다. 화가 많은 탓에 꿈에서도 늘 누구와 싸우는지……. 오래된 잠버릇을 이해는 하지만, 아이가 있을 때 입에도 담지 못할 욕이 새 나오면 난감한 감정이 들곤 했다. 생각해보면 예전에, 강원도에서도 그랬던가? 선재는 무작정 집으로 들어와 밥 먹고 잠자고 씻고 했던 범진의 모습을 떠올렸다. 자다가도 뭔 놈아, 뭔 새끼야…. 했던 게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도 같았다.

선재는 여분으로 둔 땅콩 모양 아기 베개를 가져와 그걸 준희의 머리 밑에 넣어주었다.

재혁이 쓰는 베개 중 하나지만 준희가 베기에도 무리는 없었다. 선재는 아이의 얇은 눈꺼풀과 길게 뻗은 속눈썹만 계속해서 쳐다봤다. 제 귀 밑에 두 손을 넣은 채로, 고요하게 숨 쉬는 아이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개씨팔러미 때문에 잠은 깼지만, 잠이 더 안 온다면 이걸로도 충분했다.

* * *

시리고 건조한 날의 연속이었다. 새해가 되며 들떴던 기분이 며칠이나 갔나. 준희는 1월 1일에만 여섯 살이 된 걸 기념하고, 제 나이를 다섯 살로 말할 때가 많았다. 누가 몇 살이냐고 물으면 버릇처럼 손가락 다섯 개를 내밀곤 다석살이에요…. 하고 웅얼거리곤 했다. 누구보다 여섯 살이 된 걸 좋아하던 아이도, 아직 제 나이에 적응하지 못한 것이다.

오늘 아침에도 장난삼아 준희 몇 살이지? 물었을 때, 준희는 다석살, 하고 팔을 뻗으며 내리막길을 조심해서 내려갔다.

아이를 어린이집 차에 태워주고, 선재는 집으로 돌아와 침실 옷장부터 뒤졌다. 어디… 뒀었는데. 찾으려던 건 딱 이맘때 입히려고 했던 재혁의 우주복이었다.

이내 티셔츠 사이에 고이 접혀있던 우주복을 발견한 선재가, 그걸 꺼내 침대 위로 올라갔다. 몸을 왼쪽으로 돌렸다, 오른쪽으로 돌렸다, 하던 아이를 똑바로 눕히고 옷을 갈아입혀 주었다.

“어이구, 좋네.”

좋아하네, 하며 너스레를 떤 선재가 웃는 재혁의 얼굴에 덩달아 미소지었다.

“좋아….”

말을 더하려던 선재가 문 열리는 소리에 뒤로 돌았다. 씻고, 옷을 대충 챙겨 입은 범진이 바스락 소리를 내며 방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재혁이 귀여워 정신이 잠깐 팔렸지만,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는 의식은 있었다. 일어나 옷장 앞으로 간 선재가 추운 날 주로 입는 바지와 맨투맨 하나를 골랐다.

어련히 재혁을 잘 봐주겠지, 싶었다. 선재는 잠옷 단추를 하나씩 풀며 뒤를 슬쩍 봤다.

“…뭘 봐.”

“왜. 내 니 보면 안 되냐?”

“…그래.”

“그래는 뭔 그래. 이기 아침부터.”

아이는 아이대로 놀고, 범진은 저만 쳐다보고 있었다. 노골적인 시선에 옷을 훌렁훌렁 벗기가 꺼려진다. 선재는 잠옷을 걸친 채로 어렵게 맨투맨을 입었다. 바지는 무릎까지 오는 코트를 입고서야 벗었고. 종아리가 빼꼼 드러나는 걸 쳐다본 범진은 어이없는 웃음만 지었다. 선재는 그 웃음을 못 본 체하고 제 할 말만 했다.

“준비 다 했어.”

“어쭈?”

“가자.”

“어쭈구리?”

이럴 땐 아이를 안고 먼저 나가는 게 상책이었다. 선재는 멀뚱하게 누워있는 재혁을 품에 안고 방문을 열었다.

“저거 봐, 재혁아…. 눈이 안 녹았지….”

날이 많이 풀리긴 했지만 겨울인 건 변함이 없었다. 선재는 재혁이 처음 맞는 겨울을 어떻게든 잘 기억했으면 싶었다. 이렇게 아이와 사무소를 들르는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집 주변에도 작은 텃밭이나 숲이 있지만, 도로를 타면서 보게 되는 풍경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선재가 창밖으로 보이는 눈 내린 풍경을 하나하나 짚어주었다.

“우욱….”

“응, 눈.”

“그기 눈이냐. 토할라 하는 거구만.”

옆에서 범진은 이런 식으로 시비를 걸 때가 많다. 선재는 조수석에서 재혁에게 이것저것 가르쳐 주고 있을 때면 범진의 말을 대부분 무시하곤 했다. 저거 봐, 하는 선재의 말에서 다정함이 묻어났다. 또 해보세요, 누운.

“우… 욱!”

“잘하네.”

“뭐를 잘해. 니는 뭐만 하면 잘한다 하드라.”

“뭐, 잘하니까 잘한다 하지.”

“니 아 그래 잘못 가르치면 큰일 난다. 학교 가서, 어? 따른 아들 다 겨울에 눈 온다, 하고 있는데 점마 혼자 우웩, 우웩, 하믄 어짤라고.”

“아직 말 못하니까 그렇지. 그런 건 내가 알아서,”

“뭐, 지금 보면 순 엉터리밖에 안 가르쳐주는구만.”

“괜히 시비야…. 자기는 방법 있나….”

다정한 의미의 ‘자기’가 아니었으나 범진이 입을 씰룩대며 반응했다.

“자기?”

“너는 있냐고, 방법.”

딱 잘라 너라고 말한 선재가 그러면 아이를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넌지시 물었다.

“무슨 방법이냐. 자기나 더 해봐라.”

그 말에 선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자기. 섹스할 때 저도 모르게 뱉어버린 말이었는데, 그 후 저런 식으로 자기, 여보, 하는 호칭에 집착할 때가 있었다. 처음엔 그게 뭐가 어렵나, 싶어 별생각이 없었었다. 이상할 것도 없으니까 계속해 줄 의향도 있었고.

하지만 범진이 출근하던 어느 날, 무심코 ‘여보’를 입에 올렸다가 큰일을 치렀었다. 어색하게나마 갔다 와, 하는 말끝에 ‘여보’를 붙였는데 범진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었다. 정돈이 덜 된 셔츠를 바지에 욱여넣던 타이밍이었다. 손을 멈춘 범진은 그대로 바지를 벗었고, 그렇게 신발장 근처에서 일을 치르게 되었다. 그날 중요한 약속까지 파투 낸 범진을 보며 선재는 다시는 그런 호칭을 입에 담지 말아야겠다 다짐했다. 범진아, 그게 아니면 최범진. 죽을 때까지 그렇게 부르겠노라고.

선재는 그때를 떠올리다 법, 법, 소리에 아이를 내려다봤다. 이렇게 어설프게 소리를 뱉는 예쁜 아이를. 매끄러운 회색 길이 앞쪽으로 훤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 주변을 두른 산들은 대부분이 흰 눈을 맞은 채였다. 버석하게 마른 풍경 위로 내려앉은 눈. 선재가 차창을 손가락으로 톡 치며 아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야.”

옆에서 들린 야, 소리에 선재가 눈동자만 굴려 핸들을 쳐다봤다.

“니 한 살 더 먹었지.”

새해를 맞은 지도 몇 주가 지나고 있었다. 1월 1일에 들었어도 별로였을 질문을, 범진은 잊을 만하면 건네오고 있었다. 한 살 더 먹은 걸 약 올리나? 싶었으나 그런 의도는 없어 보였다. 선재는 와, 하고 범진이 무슨 말을 할 것 같자 곧바로 말을 막았다.

“무슨 말 하려고. 욕할 거면 하지 마.”

“어쭈?”

“아기 앞에서.”

“어릴 때 욕도 좀 들어주고 해야지.”

“…….”

그런 논리는 하도 들어 이제는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다음에 무슨 말이 나올지도 대충은 예상 가는 게 있었다.

“내를 봐라. 욕 그래 듣고 컸는데. 뭐 떨어지는 게 있냐?”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는지… 선재는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간신히 억눌렀다. 겉으로 보면 문제없긴 하지만, 속을 범진처럼 키워내고 싶진 않았다. 최소한 다른 사람에게 험한 말 하는 아이는 안 됐으면 싶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 부분은 교육으로 채워줄 수 있으니까.

“좆 크지, 돈 많지. 딱 그거 두 개면 살아가는 거다.”

“…….”

“아니냐? 니 내가 좆 이만하고 개그지였으면 내 좋아했을 거냐?”

엄지로 검지 한 마디를 짚어낸 범진이 ‘이만한 좆’을 표현했다. 거기에 개거지…. 선재는 단 두 개만 자신 있어 하는 범진을 익히 알았다. 성기와 재력. 어떤 날엔 다른 것도 자랑할 때가 있었지만 그 두 개는 빠진 적이 없었다.

“그게 무슨…. 중요한 거라고.”

“야, 니 심각한 소리 하네. 돈이랑 마누라 잘 쑤시주는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르고, 어?”

“…도착했다…. 우리 아기 내리자.”

사무소 앞엔 범진의 전용 자리가 따로 있었다. 처음엔 그저 가까운 자리에 대는 줄 알았으나, 언제 가도 한 자리가 비어있곤 했다. 그 칸에 차가 들어가자마자 선재가 아이 몸을 살짝 들었다. 문을 열고 재혁을 바닥에 내려주자, 재혁은 그하, 하는 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켰다. 옆에서 골프공만 한 아기 손을 잡아준 선재가 걸어봐, 하며 아이 옆에서 박자를 맞춰 주었다.

보닛 앞에서 짝다리를 짚고 선 범진은 둘의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

잠깐 고개를 들었던 선재는 입이 헤벌쭉 벌어진 범진을 보곤 금방 고개를 내렸다. 뒤뚱거리긴 하지만 아이는 몇 걸음 정도는 쉽게 걷는다. 천천히 세 걸음 정도 걸어 낸 아이를 단숨에 안아 든 선재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다 놀았냐.”

“어…. 들어가.”

작년 이맘때, 아니, 이보다 조금 더 따뜻했을 때. 선재는 배에 재혁을 품은 채로 이곳을 드나들곤 했다. 변한 게 하나 없는 것이다. 크게 부풀었던 배가 쑥 꺼진 것 외엔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보닛을 둘러 오던 범진의 표정까지도.

그런 얼굴과 마주 보게 되어 고개가 절로 내려갔다. 뭐가 좋아서 그렇게 웃을까, 싶어서. 감정 표현에 서툰 제가 보기에 범진은 모든 감정을 온몸으로 드러내는 사람 같았다. 좋으면 웃었고, 너무 좋으면 욕하며 웃곤 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범진이 아이를 안아 들었다. 선재는 순식간에 재혁을 빼앗겨 팔을 든 채로 범진을 쳐다봤다. 범진은 그런 선재의 손을 잡고, 한쪽 팔로만 아이를 안았다.

“니 아 안고 있다고 내 손 안 잡아줄 거 아니냐.”

“…뭐…. 잡으면 잡는 거지.”

“뭐? 하, 씨. 말하는 거 봐라.”

손으로 꽉, 선재의 손을 쥔 범진이 건물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선재는 최대한 범진의 뒤에 선 채로 그를 따라 사무소 문턱을 넘었다. 아직도 직원들의 면면을 전부 알지는 못한다. 사무소에서 민우라는 직원이 잘린 후로 또 그와 비슷한 사건이 생길까 최대한 조심해오고 있었다.

가끔 마주치는, 사무소 직원인 영원의 입에서도 수상한 말을 몇 번 들었었고.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 게 죄는 아니었다. 선재는 이곳에서 범진이 유일한 알파라 생기는 문제에 관해 어떻게든 무관심한 척을 해왔다. 신경은 쓰이지만 그런 걸 범진에게 말했다가 무슨 후폭풍이 불어올지 몰랐다. 그건 제가 원하지 않았다.

소장실로 들어간 선재는 버릇처럼 안마의자에 앉았다.

뒤이어 들어온 범진은 아이를 들쳐 메듯 안고 있었다.

“그렇게 안으면은….”

“하한!”

혹시 배가 눌릴까 걱정한 선재와 달리 재혁이 보기 드물게 웃는 소리를 내며 즐거워했다. 범진이 가만히 안아주는 건 싫어하지만 저렇게 험하게 안아줄 땐 두 눈이 반짝이는 아이였다. 곱고 예쁘게 아이를 키우고 싶은데, 재혁은 거칠고 희한한 것들에 관심을 보일 때가 많았다. ‘하한’ 하고 특이하게 웃는 아이 소리에, 선재가 마지못해 웃음을 머금었다.

“어쭈? 내가 니 롤라코스타냐.”

“하한!”

“어? 임마 보게?”

입으론 시비를 걸고 있지만 반복되는 동작으로 아이의 흥미를 유발하고 있었다. 선재는 말만 좀 착하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뒤로 젖혔다.

“어.”

마침 들린 똑똑, 노크 소리에 범진이 문을 열었다. 문밖엔 직원 하나가 곤란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선재는 무슨 일이 있나 보다, 하는 생각만 하고 범진을 쳐다봤다. 범진의 입에선 어디, 하는 말이 나왔다. 그러면서 밖으로 나가버리자, 아이 혼자 문 앞에 멀뚱히 서 있게 되었다.

원래 왔다 갔다 하니 신경 쓸 건 없었다. 선재는 혼자 남겨진 아이를 향해 가벼운 손뼉을 쳤다. 몇 걸음 걸으면 제 손에 몸이 잡힐 것 같았다. 옳지, 하며 의자 쪽으로 아이를 유인한 선재가 재혁의 몸을 위로 들어 올렸다.

“재혁이 이제… 뛰겠다.”

품에 아이를 올리고 몸을 기댄 선재가 의자의 각도만 조금 조절했다.

따뜻한 아이 몸을 느끼기도 잠시, 바깥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어이, 씨발. 그게 왜 우리 책임인데? 하, 이 새끼 그만 살고 싶어가 환장을 하네.]

선재는 제 가슴팍에 누운 아이를 흘끗 쳐다봤다. 혹시 무슨 소리를 들었을까, 했던 거지만 재혁은 평온한 얼굴로 옆을 쳐다보고 있었다. 머리를 쓰다듬어준 선재가 소란이 끝나기만 기다렸다. 유독 화난 듯한 음성이긴 하지만, 저러다가도 금방 조용해지곤 했으니까.

[조뺑이만 졸라게 치다가 티 나와서는. 뭐, 이 씨팔럼아? 니 낸테도 똑같이 씨부리봐. 아구지 벌리보리고, 씹새야.]

“…….”

무의식적으로 아이 귀를 가린 선재가 손바닥에 힘도 주었다. 괜한 말도 덧붙였다. 어, 재혁아…. 졸리지…. 재혁은 아기답게 잠이 무척이나 많았다. 몸을 잘 눕혀 주고 분위기만 조성해주면 금방 눈을 껌벅거리곤 했다. 아니나 다를까. 무거워진 눈꺼풀을 쳐다본 선재가 아이를 안은 채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바로 앞 길쭉한 소파에 재혁을 눕히고, 선재는 문을 쳐다봤다. 문밖에서 나는 씨팔, 씨팔, 하는 소리 때문에 안 나가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범진이 과하게 흥분했다면 주변에 말릴 사람이 없을 것이다. 선재는 혹시 큰일이 벌어질까 재혁을 몇 초 보지도 못하고 문에 붙었다. 둔탁한 소리도 함께 들리고 있어 여유를 부릴 새가 없었다.

언젠가 범진이 말하기로, 직원이 모두 오메가다 보니 그걸 알아챈 알파 노동자들이 시비를 걸어오는 일들이 많다고 했었다. 다시 말해보라 윽박을 지르는 걸 보면 아마도 그런 일일까. 긴장한 마음으로 문을 연 선재가 바깥 상황을 살폈다.

사무소 입구 쪽에서 어디, 하며 팔을 들어 올리는 범진의 모습이 보였다.

선재는 순간 달려가려고 하다 마음을 접었다. 이미 범진에게 맞은 남자의 모습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범진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남자를 향해 어디서, 어? 니 씨발놈이, 하고 마무리하듯 위협만 주고 있었다.

문제 생기는 건 아니겠지….

속으로 걱정하기도 잠시, 누가 범진 옆으로 가 붙는 게 보였다.

“소장님, 죄송해요. 제가 알아서 잘 처리해야 했는데.”

선재는 예쁘장한 그의 얼굴에 눈을 돌렸다가, 다시 범진을 쳐다보았다. 둘의 거리가 가까워 누구를 보고 있어도 옆 사람의 잔상 같은 건 남는다. 선재는 소장님, 하고 또 부른 직원 때문에 뒷걸음을 쳤다. 직원이 범진의 큰 손을 덥석 잡아서만은 아니었다. 그냥, 상황도 종료된 것 같고, 누가 저를 보고 아는 체라도 할까 신경이 쓰였다.

선재는 범진을 몇 초 더 응시하기만 하다 소장실로 발길을 돌렸다.

벌컥, 범진이 문을 열고 등장한 건 그로부터 5분이 지난 다음이었다.

선재는 소파에 앉은 채로 범진을 쳐다보았다.

“뭐 했냐.”

“아무것도 안 했는데….”

“뭐. 숨이라도 쉬었을 거 아니냐.”

“…….”

말없이 재혁 쪽으로 시선을 내린 선재가, 옆자리에 범진이 털썩 앉는 걸 느끼고 움찔했다.

“…아기 자잖아.”

“엥? 내 안 자는데?”

순간 소름이 돋은 선재가 말문을 완전히 닫았다.

범진이 저를 애 취급할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어허, 민선재.”

어깨를 두르는 몸짓에도 시선을 돌리자, 범진이 거만한 투로 이름을 불렀다.

“오늘 왜 이래 팅기쌌지. 낸테 버릇없다고도 안 하고?”

몇 주 전 일이었다. 벌써 몇 주나 지난 일을 범진이 또 들먹거리자 선재의 얼굴에 바로 붉은 물이 들었다. 술을 한 잔 마시고 속말을 그대로 뱉어버린 게 발단이었다. 선재는 야, 민선재, 하는 범진의 말이 반복되자 “나보다 여덟 살이나 어린 게.” “예절 교육이 안 됐다.” “준희랑 같이 어린이집 다녀.” 하며 계속 술주정을 한 적이 있었다. 나중엔 예, 그럴까요, 하며 장난하는 범진에게 호통도 쳤다고 하는데. 거기까진 기억이 없었다.

“…사람 바보 만들어서 그렇게 한 게 자랑이라고.”

“내가 니를 언제 바보로 만들었냐. 앞에서 찌질하게 예, 예, 하기만 했는데.”

“…….”

“야, 그리고 내 그때 니한테 물은 거 다 듣지도 못했다.”

“…뭐.”

작게 대꾸한 선재가 범진 쪽으로 눈을 돌렸다. 거리가 가까워 범진의 얼굴은 바로 보였다.

“내가 그때 니한테 이상형 물어봤그든.”

그 말을 하며 팔을 한 바퀴 돌린 범진이 소매 단추까지 풀곤 주먹을 쥐었다.

“니 이상형. 뭐 대충 알 것 같긴 한데. 뭐냐.”

일부러 힘을 줘 전완근이 갈라지도록 만드는데, 참 유치하단 생각밖엔 들지 않는다. 선재는 어이가 없어서라도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허, 소리를 냈다.

“어? 함 말해봐라.”

장난이거나 스치듯 한 말이면 그러고 마는데. 어쩐지 오늘은 대답까지 듣겠단 의지가 느껴졌다. 범진의 눈과 전완근을 차례로 쳐다본 선재가 흠, 하며 소파 등받이에 등을 붙였다.

“착하면 좋을 것 같은데.”

“뭐?”

“착한….”

“하, 착한 기 뭐. 어디 그딴 게 니한테 쌀 한 톨이나 멕일 수 있을 것 같냐? 착해? 씨이발, 그 정신으로 살다가 개죽음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다.”

갑자기 발끈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는데, 그 반동에 아이가 발차기를 해 선재의 허벅지를 꾹 눌렀다.

반사적으로 손을 내린 선재가 괜찮다며 재혁의 발목을 만져주었다. 그래도 깨지 않고 잠만 잘 자는 걸 보면 범진과 참 닮았다 싶고….

범진은 앞에서 야, 착한 그기 어? 하며 말도 안 되는 소리만 내뱉고 있었다.

고개를 든 선재가 눈을 깊이 감았다 뜨곤 입을 열었다.

“뭐라고 얘기해야 되는데…. 순 깡패에다 한국에서 성질 제일 더러운 사람이라고 해야 되나…. 뭐….”

그건 또 무슨 말이냐는 표정을 지은 범진이 쓰읍, 하며 짝다리를 짚었다.

“니 뭐 낸테 삐진 거 있냐.”

원래 사람 감정이라곤 전혀 신경도 안 쓰는 사람이었는데. 선재는 범진이 쥐톨만큼 변해가는 부분 중 하필 그런 부분도 껴 있어 난감함이 느껴졌다. 삐진 적은 없지만, 범진이 대놓고 물어오니 정말 삐지기라도 한 것 같았다. 왠지 뜨끔한 선재가 전혀, 하고 짧게 답했다.

“내가 니 도사잖아.”

그 말을 하며 옆자리에 앉은 범진이 선재의 턱을 손가락 세 개로 쥐었다.

“이 디지게 이쁜 얼굴에 뭐가 있다.”

지금…. 하고 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봐 부담감이 엄청났다. 선재는 오만상을 찡그리며 머리를 뒤로 빼내려 했지만, 손가락 세 개를 벗어나기 쉽지 않았다.

“음.”

어울리지 않게 으음, 음, 하는 소리를 내던 범진이 뭔갈 알아챈 듯 아, 했다.

선재는 범진이 뭐라도 알았을까 괜히 긴장하며 눈을 들었다.

“알았다, 내 먼저 한다.”

속으로 뭘? 하고 의아해한 선재가 범진을 계속 쳐다봤다. 여전히 세 손가락에 턱이 잡힌 채로 그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를 기다렸다.

“내 이상형이 궁금하다, 니 그 말이지.”

완전히 틀리게 짚은 범진이 오만한 투로 떵떵거렸다.

“모르겠냐? 낸 씨발, 존나게 이쁜 거. 뒤지게 이쁜 거. 니 내 좆마니 때 모르지. 낸 씨바 그때부터 이거, 쌍판만 졸라 밝혔다. 근데 니 봐라. 니 없는 세상에서 내가 이상형을 찾을 수가 있었겠냐? 그러니까 바아로 니한테 꽂혔지. 니 아니었음 내 평생 쏠로다.”

선재는 눈만 천천히 깜박이며 그 말을 들었다. 왠지…. 되게 멋있는 말 한다고 착각할 것 같은데.

“낸 그렇게 생각한다. 대가리가 벼도, 할 줄 아는 거 개뿔도 없어도.”

말이 어디까지 튀어 나가나 들어주던 선재가 거기서부턴 싸한 기분을 느꼈다.

“내가 그딴 거 신경이나 쓰겠냐? 내가 씨발 벌어주고 먹이주는데 그지깽깽이인 게 중요하겠냐고.”

욕하는 건가…?

차라리 아까 거기서 멈췄으면 됐지 싶었다.

선재는 하아, 한숨 쉬듯 숨을 뱉곤 등받이에 붙였던 상체에서 힘을 더욱 뺐다.

“그런 거 좋은 말 아니야.”

“뭐.”

“…됐다.”

딴엔 좋게 말한다고 생각할 텐데. 어쨌든 빈 대가리, 할 줄 아는 거 개뿔 없는, 그지깽깽이가 저란 소리 아닐까? 선재는 오버해서 생각하는 것도 같았지만, 그럴수록 더욱 제게 하는 말 같아 기운이 없어졌다. 매번 얼굴 가지고 그러는데, 사실 얼굴이 이쁘다는 것도 다 자기 눈에 씐 콩깍지에 불과했다. 무심코, 정말 무심코 아까 범진의 손을 잡았던 직원의 얼굴을 떠올린 선재가 눈을 느리게 껌벅거렸다.

“…직원들도 얼굴 보고 뽑나…?”

혼잣말인 듯 중얼거린 선재가 범진의 눈은 쳐다보지 않았다.

예전부터 외모가 준수한 직원들을 보긴 했지만, 아까 그 직원은 멀리서 봤을 때도 와, 할 정도로 예쁜 얼굴을 갖고 있었다. 범진에게 스스럼없이 대하는 걸 보면 성격도 답답하지 않을 거고…. 할 줄 아는 것도 많겠지.

“그거는 왜.”

미묘하게 표정을 바꾼 범진이 한쪽 눈썹을 올리며 물었다.

“아니, 되게 잘생기고 예쁜 사람들 많은 것 같아서.”

“갑자기.”

별말도 아닌데 ‘갑자기’에 제 발 저린 선재가 입만 벙긋댔다.

범진은 한쪽으로 고개를 젖히는가 싶더니 쓰으읍, 소리를 내며 다른 방향으로도 고개를 기울였다. 잔뜩 올라갔던 눈썹은 조금도 처지지 않은 채였다.

“왜….”

하는 수 없이 먼저 입을 뗀 선재가 왜 저를 그런 눈으로 보느냐 반문했다.

“내가 뭘 했다고….”

이쯤 되면 범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재가 끝 음을 흐리고 주저주저하면 무슨 말이라도 나오기 때문이었다. 같이 살 섞으며 산 게 몇 년이나 된다. 옛날엔 그대로 입을 닫았다면, 이젠 불만이 있으면 무의식적으로라도 중얼중얼 말을 하곤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뻐끔대기만 하던 입술 새로 본격적인 소리가 나왔다.

“내가 남이랑 손을 잡았어…. 뭐를 했어…. 자기가 잡아놓고…. 웃기게….”

엥. 하는 표정으로 얼굴을 들이댄 범진이 가까워진 김에 선재의 뺨에 쪽 뽀뽀를 했다.

“아, 왜.”

진심으로 정색하며 한쪽 손을 올린 선재가 제 뺨을 부여잡았다. 옆에서 범진은 느긋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 니 뺨 있는 김에 뽀뽀한 건데.”

“…….”

비비듯 마지못해 손을 뗀 선재가 오른손으론 재혁의 발목 부근을 쓰다듬었다. 작고 통통한 발목까지 올라오는 양말엔 토끼 자수가 놓여 있다. 저도 모르는 새 해버린 말은 천천히, 뒤늦게 선재의 머릿속에 하나둘 들어왔다. 미쳤나? 제가 무슨 말을 한 거지? 깨달은 동시에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한 선재가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니 근데 말은 다시 해야 되지 않겠냐.”

“…뭐, 아니…. 전혀….”

“뭔 말 할라 하는 것 같드만?”

“그냥…. 얼떨결에 나왔고, 나는 그런 거 굉장히 쿨해.”

모호한 발언에 바로 말이 돌아오지 않자, 선재는 한 마디 더 덧붙였다.

“알다시피….”

‘굉장히’가 주는 어감이 도가 지나치게 어색한 걸 선재는 깨닫지 못했다. ‘알다시피’도 냉정한 척하기 위해 뱉은 말이지만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갔다. 쿨하다고 언급한 것도 후회되려 했다. 범진이 뭐라카냐, 하며 앞에서 히죽이며 웃고 있었다.

“뜨거븐지 차가븐지 낸 모르고요.”

“…….”

“말이나 정확히 해보소, 형님아.”

“…….”

오랜만에 들린 ‘형님’ 소리에 침을 삼킨 선재가 눈 둘 곳을 찾았다. 선재는 벽을 보고 바닥을 봤다가, 결국은 범진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얼굴만 살짝 돌린 채로 범진의 눈을 쳐다봤다.

“또 말 안 하면 괜히 오해 생길까 봐…. 하는 거고, 난 별 감정 없어…. 다시 말하지만…. 네가 다른 직원이랑 손을 잡든 뭘 하든…. 팀워크가 좋다는 증거니까 오히려 난 좋….”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던 선재가 범진의 되물음에 입을 닫았다.

“뭐? 직원?”

“그러면….”

“직원 누구, 혹시 니 내 싸울 때 봤냐. 그때 금마가 내 손 잡드냐?”

왜 그걸 제게 묻나 몰랐다. 선재는 궤도를 빙빙 도는 듯한 이 대화에 마침표만 찍고 싶었다. 이런 문제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범진을 흥분시킬 마음도 없으니까. 아까도 범진이 흥분해서 이성을 상실했을 때 그가 접근했던 모양이었다. 하나하나 생각해보니 앞뒤가 맞아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랬긴 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와, 씨바, 그건 아니지.”

“뭐….”

“야, 니 이라고 드가면 내 폰 훔치보다 찔찔 짤 거 뻔한데. 뭐, 쿨해? 팀워크가 디져?”

정말로 화난 상태에서 손이 잡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금방 얼굴을 일그러뜨린 범진에게서 진심이 묻어나왔다. 외려 당황한 선재가 아니, 하기도 잠시. 폰 보다 찔찔 짤 거 뻔하단 말을 뒤늦게 이해한 선재가 입술을 꾹 물었다 말을 뱉었다.

“누가 찔…. 하, 나 그런 적도 없으니까….”

“웃기네, 니.”

이젠 제가 더 화난 듯 이건 안 된다, 말한 범진이 큰 몸짓으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아기.”

“잠깐만 갔다가 오면 된다.”

그대로 이끌려 소장실 밖으로 나가자, 범진이 사무소 전체에 쩌렁쩌렁 울리도록 야! 하고 외쳤다. 이어 내하고 아까 손잡은 놈! 하고 외치는 소리에 선재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앉은 직원 중 한 명이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저, 고마워서 악수한 거요? 하고 몸을 일으키는 게 보였다.

“뭐 하는데…? 그만. 하지 마.”

범진의 손을 뿌리치려 해도 계속 그 자리였다. 이쪽을 쳐다보는 직원들 때문에 큰소리를 내거나 사력을 다해 힘을 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저요? 하며 일어났던 직원은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선재는 아득해지는 정신에 머리까지 짚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래, 니 따라와 봐.”

범진이 향한 곳은 사무소 뒷문이었다. 질질 끌려가던 선재가 문이 열리자마자 범진의 팔을 다른 손으로 때렸다. 그만 좀 하라고, 미쳤냐고, 그런 말까지는 차마 나오지 않았다. 뒤쪽에서 따라오던 직원을 힐끔 쳐다본 선재가 한숨을 쉬었다.

“야. 니 아까 내 손 잡았냐.”

하얀 바닥 위에서 걸음을 멈춘 범진이 직원을 가리키며 물었다. 팔목이 잡힌 선재도 방향 때문에 같이 따지는 모양새였다.

“네, 고맙고 그래가지구….”

“고맙다고 손을 그래 잡냐? 니 평소에도 내 손 잡았냐?”

“아니요….”

누가 보면 공금이라도 횡령한 줄 알겠다. 선재는 이렇게까지 일이 커진 것에 제 탓도 있는 것 같아 한없이 찔렸다.

“그만해. 저기, 이 사람 혼자, 그냥 장난치는 거니까요.”

“장난은 무슨. 야.”

“네.”

“니 딱 보고 말씀드려라. 다시는 싸모님 꺼 안 건들겠습니다, 하고.”

위협하듯 말을 던진 범진이 퍼뜩 하라며 직원을 부추겼다.

“네, 저…. 사모님 거 건들지 않겠습니다.”

“싸모님 다 가지세요.”

“…사모님 다 가지세요.”

“아니, 제가…. 사…. 그런 것도 아니고요. 아,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왜 이렇게 사람을 쓸데없이 곤란하게 만드나 몰랐다. 선재는 직원의 어깨를 두드리며 괜찮다고, 사모님 같은 것도 아니라고 굳이 말해주었다. 직원이 고개를 들어 선재를 쳐다보는가 싶더니, 범진과 눈을 마주치곤 고개를 또 푹 숙였다.

“뭘 씨발, 아니긴 아니야. 야, 니 알아들었으면 안으로 끄지.”

“…네.”

고개 숙인 직원이 바로 뒤에 있던 문을 열고 사무소 안으로 들어갔다.

선재는 그를 쳐다보다 시선을 돌렸다. 범진은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척, 그저 추위만 타는 양, 으, 씨발, 하고 엄살만 부리고 있었다.

“아기랑 나랑 집에 갈래.”

“왜. 밥 먹고 드가야지.”

“아니, 갈 거고…. 다시는 여기 안 올 거니까.”

“뭐를 안 와. 뭐 점마 보기 그래서?”

“너 때문이잖아.”

“뭐를. 니 점마가 낸테 어떻게 했는지 알아도 이라겠냐.”

“…뭐?”

“니 최근에 언제였냐. 내 폰 보다 걸린 거.”

“뭐….”

“2주 전이지?”

“…….”

정확히 2주 전이라고 말하자 할 말이 없어졌다. 선재는 그날, 욕실 앞에 널브러진 휴대폰을 어디 올려두려던 마음밖에 없었다. 하지만 편지 모양 알림이 뜬 것에 호기심이 들었고, 범진이 금방 나올 것 같지도 않아 그 자리에서 비밀번호를 눌러보았었다.

확인한 문자는 [형님 어제는 감사했습니다ㅠㅠ] 하는 평범한 문자였다. 사소한 거에도 감사합니다, 최고입니다, 하는 범진의 동생들을 잘 아는 덕에 그러려니 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다음 문자에서 수상한 메시지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사장님 저 내일 집들이하는데 오실래요??]

따로 저장된 이름은 없었다. 번호만 떠 있는 그 문자에, 선재는 위로 올려 다른 내용들을 확인해봤다. 범진이 답장 보낸 건 [이거 이렇게 하면 되나요?] 하고 도착한 계약서 관련 사진에 [ㅇ] 하고 대답한 게 전부였다. 그리고 그때 범진이 욕실 문을 벌컥 열어 폰을 확인하던 걸 들키게 됐다. 선재는 확인한 적 없다며 폰을 소파에 두고 방으로 도망갔지만 지나가던 개도 안 믿을 상황이었다. 범진이 마저 씻고 나오는 동안 선재는 방에 들어와 제 문자함과 범진과 주고받은 채팅 기록 같은 걸 괜스레 뒤져보았다.

[지금 뭐하는지 찍어서보내라]

[개이쁘다]

[좃이 섰다]

메시지를 참 대충 쓴다고 생각했지만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한 거였다. 선재는 동생들 문자엔 일절 답을 주지 않고, 일하는 사람과도 정말 필요한 말만 나누는 범진을 그동안 훔쳐본 문자들로 알게 되었다.

[민선재 예뿐이]

가끔은 그런 소름 끼치는 문자도 보낼 때가 있었다.

선재는 이것저것 보다가 바로 전날 나눈 대화 내용은 집중해서 읽었다.

[준히 보약이랑 개구리 시켰다]

보약 주문한 건 알았지만 개구리를 시켰다는 게 뭔 소리인지 몰랐다.

개구리를 시켰다고? 보낸 답장에 범진은 이렇게 반응했다.

[어 안먹어봣냐? 닭맛이다]

[허약채질 개선 발육 건강 에 최고]

주고받은 내용이 더 있지만 그즈음 선재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방문을 열고 발가벗은 범진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니 뭐 확인했냐, 니 내 감시했냐, 하며 들어온 범진은 비정상적으로 부푼 자지를 내밀며 그런 걸 묻고 있었다.

“…그게 왜.”

정확히. 그때의 전후 사정까지 떠올린 선재가 남 일 말하듯 퉁명하게 내뱉었다.

“니도 그때 보지 않았냐? 집들이 오라고 개지랄 떨어놓은 거.”

제가 확인했을 땐 집들이 관련해선 한 통밖에 보지 못했다. 선재는 방금까지 함께 있던 직원이 제가 찰나라도 의심을 품었던 사람인 것에 미안함부터 느꼈다. 하지만 개지랄이라면 그러고도 몇 번 더 메시지를 보냈다는 소리일까? 궁금해졌지만 차마 묻지는 못하던 선재에게 범진이 쏟아내듯 말했다.

“씨팔 뭔 집들이를 지난주에도 하고, 지지난 주에도 하고, 어? 이번 주에도 한단다.”

“…….”

“딴 아들한테 물어보니 씨이팔, 그딴 거 안 한다 하드라고. 그럼 뭐겠냐. 점마 저게 내만 초대해가 지 함 따묵게 할라는 거 아니겠냐.”

“…아니, 따묵… 하, 그럴 리가 없잖아.”

“그래? 니가 함 판단해보든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 범진이 임마가, 하며 문자 목록을 뒤졌다.

선재는 범진으로부터 한 걸음 이상 떨어져 있었다. 여 있네, 하며 범진이 휴대폰을 돌리자, 선재가 쭈뼛거리면서도 그쪽으로 다가섰다. 니가 봐라, 하는 범진의 말에 안 봐도…, 하면서도 손을 올려 화면을 터치했다.

범진의 말대로 집들이 오라는 문자가 가득했다. 답장이 없자 사실 이번 주에 하려고 했는데 다음 주에 해도 될 것 같다, 그다음 주엔 또 며칠 더 뒤에 하면 된다, 소장님 편하신 날짜 말씀해주셔도 괜찮다, 언제가 시간 괜찮으시냐, 저 요리 잘해서 맛있는 것도 엄청 많이 해줄 수도 있다….

“…….”

보기 싫다는 듯 다가선 선재가 누구보다 세심하게 한 자 한 자 확인하며 화면을 내렸다.

“봐라, 니. 근데 금마가 내 손까지 잡았다고? 그거는 아니지 않겠냐.”

“…….”

눈을 한 번 쳐다본 선재가 문자를 마저 읽어 내렸다. [힝 소장님 때문에 집들이 계획 늘어지는중…. 혹시나 오해할까 싶어 하는 말이지만 저 소장님 포함 직원들이랑 다같이 시간보내고 싶어서 그래요!] 하는 문자가 그가 보낸 마지막 문자였다. 불과 이틀 전. 선재는 다 읽고서야 손을 내리고 범진을 쳐다봤다.

“니 솔직히 말해라. 임마 이거 어짤까.”

“…….”

일 잘하면 상관없지,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하고 말하려던 마음이 속수무책으로 짓밟힌 뒤였다. 아무렇지 않게 다가가 덥석 손잡는 그의 모습과 메시지 내용들이 겹쳐 무슨 말도 나오지 않았다.

“화아, 이거 어떻게 보면 다 니 때문이다.”

“…내가 뭐.”

“니가 낸테 말 곱게 하라매.”

“그게 왜.”

“욕 좀 덜하고 하니까는 씨팔, 인기가 폭발이다.”

“…….”

정말 그게 이유인가. 그게 이유면 대체 어째야 하지? 선재는 혼란스러운 마음에 눈만 빠르게 깜박였다. 보기에 범진은… 여전히 잘생긴 건 아니지만…. 모르겠다. 이제 그렇게 말할 자신도 없었다. 선재는 내 어째야 되겠냐, 아니, 금마부터 어째야 될지 니 말해봐, 하는 범진을 텅 빈 눈으로 응시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제 마음을 범진이 알까 싶었다.

“…일 잘하시면….”

“일은 쫌 하는 것 같든데.”

“…….”

하필 일 잘하는 직원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한다니. 사적인 감정 때문에 범진이 하는 일에 피해를 끼칠 수는 없었다. 앞에서 범진은 니 춥네, 어? 하며 다가와 제 몸을 폭 끌어안고 머리를 만졌다. 귀가 뻘겋다, 하고 양손을 올려 귀마개처럼 막아주는 범진 때문에 주변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한… 달만 더 지켜보든가….”

“뭐. 한 달이나 시간을 끌라고. 와, 니 진짜 이상형은 둘째치고 내 좋아하는 거는 맞냐.”

“…그냥, 뭐….”

“화아, 그냥? 그으냥?”

실없이 웃으며 대꾸한 범진이 몸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선재는 이렇게 어이없는 방향으로 대화가 흘러가는데도 어떤 한마디는 꼭 하고 싶었다. 싸늘했던 공기는 범진의 몸을 안으면서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선재는 할까 말까 하다가 두 눈을 질끈 감고 입을 열었다. 안 하면 집에 가서 범진이 말한 대로 찌질하게 매일 폰이나 훔쳐보고 그럴 것 같았다.

“근데….”

“어?”

“인기 많아지면 욕… 좀 하든지.”

“뭐라고?”

“너무 심하게는 말고…. 적당히….”

욕을 줄이니 인기 폭발이라는 말이 이명처럼 귀에서 돌고 있었다. 선재는 귓불까지 다 빨개진 채로 그 말을 어떻게든 내뱉었다. 범진은 뭐라 캤냐? 뭐라고? 하며 말을 몇 번이나 더 들으려고 했다. 무슨 정신으로 그런 철없는 말을 내뱉었나, 싶지만 돌이키긴 늦었다. 범진은 다시, 함만 더 해봐, 하며 살짝 떨어져 선재의 양어깨를 쥐고 말을 토하라는 듯 계속 흔들었다. 선재는, 그렇게만 말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굴부터 목까지 다 벌게져선 범진의 눈을 피하기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범진의 쒸팔! 소리가 들려왔다.

“이래?”

“…좀 더 약하게.”

선재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대답했다.

“쉬벌?”

된소리가 약하게 들리니 훨씬 나았다. 선재는 침을 꿀꺽 삼키곤, 범진에게만 보일 정도로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욕하지 말라고, 그만하라고 정색을 해왔는데 이런 데서. 이런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선재는 알겠다, 쉬벌, 하고 몸을 끌어안는 범진에게 입도 벙끗하지 못했다. 내 사무소에선 니 하란 대로 한다, 하는 범진이 믿음직하게 느껴져 제가 미친 것 같기도 했다. 후우…. 넓은 품에서 혼자만 알게끔 한숨을 내뱉은 선재가, 손을 올려 범진의 등을 몰래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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