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살, 초봄
* * *
“주니 배 바앙.”
“그렇게 좋아?”
“네에.”
재혁이 처음 맞는 봄, 선재는 준희가 바앙, 하는 소리에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언젠가부터 배를 타고 싶어 한 준희의 소원을 들어주는 날이었다.
범진은 탐탁지 않은 듯, 애기 니는 비행기 타야지, 했지만 준희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말로만 네에, 하곤 다음 날에도 계속 배 장난감을 들고 다녔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배 바앙, 하는 소리를 내곤 했다. 배가 그런 소리를 내며 바다 위에 떠 있는 걸 분명 어디서 본 모양이었다.
“배 바앙.”
배를 타러 가는 날까지도 배 장난감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내 새끼가 배 타고 싶다는데. 어찌 안 태아주냐.”
작년부터 봄이 되면 여행을 떠나려고 했다. 범진은 괌이나 발리를 첫 여행지로 정했지만, 아이들이 어려 거기까진 무리일 듯싶었다. 국내에도 못 가본 데가 많은데. 선재는 그러면서 제주도가 어떻겠냐고 했다. 시시하다던 범진이지만 결국 여행지는 제주도로 정해졌다.
선재는 옛날에 딱 한 번 제주도에 가본 적이 있었다. 백창우와 살 때였다. 명목은 여행이었지만, 백창우는 일 핑계로 2박 3일 내내 선재를 혼자 호텔에 내버려 두었다. 밤에 잠시 들를 때 빼고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혼자 밥을 먹고, 혼자 로비를 돌아다닌 선재는 늘 혼자서 방에 들어가곤 했다. 근처에 있던 김밥가게에서 김밥만 계속 먹은 기억이 있었다. 그 기억이 좋지 않아 제주도에도 별 감흥이 없었는데. 범진과 같이 가면 괜찮을 것 같았다. 아니, 좋을 것 같았다.
편도로 배를 예약해둔 범진은 니가 배 타는 게 얼마나 번거로운지 몰라서 그런다, 하며 준희에게 겁을 줬지만 아이는 그래도 헤, 웃기만 했다.
4박 5일 일정에, 돌아올 땐 비행기를 타기로 했다.
배를 어디서 탈지는 선재와 범진, 둘이 같이 골랐다. 어떤 건 배가 좋아도 시간대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어떤 건 항 근처가 허허벌판이라 가기가 꺼려졌다. 자기 직전, 불 꺼진 방에 누워 범진이 이거는, 이거는, 하면서 보여줄 때마다 선재가 다른 거…, 하거나 괜찮다, 하고 속삭이듯 말했다. 그렇게 정하게 된 배편이었다.
아침에 뜨는 배를 예약했고, 전날 선착장 근처 호텔에 도착해 그곳에서 묵었다.
호텔은 가족 위주 손님이 많은 시설이었다. 방도 넓은 방이 많고, 규모는 작지만 작은 수영장까지 갖추고 있었다.
새벽부터 일어나야 하는 일정이었다. 아이가 수영장에 관심을 보였지만, 객실 한쪽에 마련된 스파 시설에 만족하기로 했다.
제일 먼저 잠든 건 준희고, 그다음이 재혁, 선재는 세 번째로 잠이 들었다. 20분 거리에 유명 횟집이 있다던 범진이 회를 사러 나간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범진은 소주 네 병과 종류별로 산 회를 들고 들어와선 허망한 얼굴로 객실을 둘러봤다. 테이블에 간단한 술상을 차리고 선재를 슬쩍 깨워도 봤지만, 잠꼬대로 괴롭히지 마, 괴롭히면 가만히 안 있어, 하는 소리를 듣곤 깊이 잠이나 재워주고 테이블 자리로 돌아갔다.
그날은 유독 쓰게 술을 삼킨 날이었다. 말술인 범진은 컨디션이 좋을 땐 소주 7병, 8병까지도 무리 없이 마시곤 했지만 빨리 처먹고 빨리 잠이나 처자자, 하는 생각으로 마시기 시작한 소주엔 몸에서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결국, 4병을 다 마시긴 했지만 선재 옆으로 가 자려고 했던 계획은 완전히 틀어지고 말았다.
다음 날, 가장 먼저 기상한 선재는 침대가 빈 걸 알아채곤 상체부터 벌떡 일으켰다. 범진이 제일 먼저 일어날 리가 없어서였다. 아이들 둘은 곤히 잠들어 있는데 범진을 찾을 수가 없었다. 간단한 조리기구들이 놓인 공간에도 누가 술 먹은 흔적만 가득했다. 선재는 일어나 그쪽으로 갔다가 고함을 지를 뻔한 걸 간신히 참아냈다. 범진이 테이블 아래, 바닥에서 시체처럼 잠들어 있는 걸 봤기 때문이었다.
그대로 다가가 범진아, 범진아, 해도 범진은 깨어나지 않았다.
결국 소리를 들은 준희가 침대에서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와 아부지를 같이 깨웠다.
아부지, 범진아, 최범진, 아부지, 하는 소리에 재혁이 울어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몇 초 지나 으, 으, 씨벌…. 하며 깨어난 범진의 입을 선재가 막아 “씨벌.” 하는 욕을 아이가 듣진 않았다. 쌍꺼풀 여러 겹을 만들며 눈을 뜬 범진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두 눈은 벌겋게 충혈돼 있었고, 입술은 사포로 문지른 듯 껍질이 거칠게 일어나 있었다. 안색도 누렇게 떠 상태가 정말 좋지 않아 보였다. 진지하게 집으로 돌아갈까, 생각한 선재였지만 그 상태로도 배 타야지, 하고 초점 없는 눈으로 말하는 범진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 후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선재는 아이 둘에 범진까지 신경 쓰느라 승선권을 확인할 때까지 혼자 어딜 많이도 돌아다녀야 했다. 최범진, 아기들 잘 안고 있어, 하고 정신 차리라는 듯 두 아이를 맡기고 가면 범진은 딱 그것만 해내곤 했다. 선재는 멀리서 넋 나간 얼굴로 준희와 재혁을 안은 범진을 어디서든 쉽게 찾아내곤 했다. 상태가 나빠도 덩치가 산만 한 건 변함이 없었으니까.
여객선에서 객실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선재는 객실 문을 발견하곤, 수련원 교관이라도 된 양 준희 먼저, 재혁이 형아 따라서, 최범진 이리 와, 하며 셋이 객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왔다. 범진은 마지막 힘을 다 쏟곤 침대에 기절하듯 누웠다.
“아부지 기절했다.”
“아부지….”
그 말에 반응하는 건 준희가 유일했다. 특실이라지만 나란히 이층 침대가 놓인 간소한 구조였다. 서서 보면 커다란 몸을 일 층에 구겨 넣은 범진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준희는 그런 아부지의 침대 앞에 쪼그리고 앉아 한참이나 얼굴을 만지는 듯했다.
재혁은 애틋한 부자 옆에서 침대 기둥을 잡고 춤을 추고 있었다.
두 달 전만 해도 몇 걸음 걷는 게 전부였는데, 이제는 많이 걸어도 넘어지지 않았다.
어디서 배운 것인지 저런 춤도 곧잘 췄다. 기둥을 잡으면 잡는 대로 엉덩이를 씰룩대며 흔들고, 뭘 잡을 게 없어도 나름대로 중심을 잡고 몸을 들썩거리는 게…. 예사 몸짓이 아니었다.
객실로 들어오자마자 이층 침대 계단을 짚고 춤추기 시작한 재혁을, 선재가 웃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옆에서 형아가 아부지, 눈을 떠세요…. 하든 말든 작은 몸을 들썩대기만 하는 것이다.
10분쯤 지나 조용해진 재혁은 굳이 2층으로 올라가길 원했다.
선재는 차마 재혁만 2층에 두지 못했다. 쓸데없이 과감한 아이가 바닥으로 떨어질지도 몰라서였다. 준희, 잘 있지? 하며 가끔 1층을 내려다보며 2층에서 재혁을 안고 있어야 했다. 준희는 아침 일찍 출발해 정신이 없었던지 꾸벅꾸벅 졸다 잠이 들었다. 재혁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들었고, 선재도 재혁 옆에서 새우잠이 들어 1시간이 지나서 깼다.
“뱍.”
눈을 뜬 건 재혁 때문이었다. 코앞에서 뱍뱍 소리를 내고 있어 눈이 절로 떠졌다.
“아기… 깼네….”
“뱍.”
“어?”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듣고 따라 하는 것인지는 몰랐다.
“뱍.”
알아듣지 못하는 아빠의 얼굴이 재밌는지, 재혁은 또 뱍, 소리를 내며 선재를 쳐다봤다.
“병아리인가…?”
“뱍.”
나날이 새로운 언어를 입으로 익히고 있는지라, 선재는 재혁이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웬만해선 반응해주곤 했다. 벅벅, 법법, 하는 소리를 자주 내는데 그걸 변형시킨 발음인가? 끝까지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선재가 그저 병아리야, 하며 재혁을 안아주기만 했다.
“주니가 떠나요.”
준희도 잠에서 깨어난 모양이었다. 1층에서 들린 소리에 상체만 밖으로 내민 선재가 고개를 숙이고 비죽 튀어나와 있는 아이 발을 쳐다보았다.
“준희 깼네? 어딜 떠나?”
“바다에로 떠나요.”
“아, 그래. 바다로 떠나는 거지.”
엄밀히 말하면 섬으로 떠나는 거지만 뜻 전달은 충분히 된다. 선재는 아이들도 깼겠다, 이참에 갑판 위로 나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배 안부터 둘러보고. 정신없이 객실을 찾아 들어왔지만 메인 라운지는 훑으면서 객실 층으로 들어섰던 참이었다. 규모가 큰 여객선이라 빵집부터 편의점, 식당가까지 제대로 갖추어져 있었다. 오면서 얼핏 봤던 기념품 매대에도 들르면 좋겠지. 대충 계획을 그린 선재가 2층에서 먼저 내려와 재혁부터 바닥에 내려주었다.
“준희 아빠랑 밥 먹으러 가자.”
“네에, 떠나요.”
열심히 잤던지 준희 뒷머리가 일부러 헤집은 듯 엉망이었다.
손으로 뒷머리를 만져주던 선재가 옆 침대도 쳐다봤다.
지독한 술병에 걸린 범진은 아직도 한밤중이었다. 멀쩡한 호텔 침대 놔두고 바닥에서 발견될 때부터 알아봤지만…. 와중에 셔츠를 벗어젖혀 상반신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선재는 무심하게 다가가 범진의 코 밑에 제 검지를 갖다 댔다. 한 3초 손을 대보고 있던 선재는 금방 손을 뗐다. 살아는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아이들과 객실 문을 나섰다.
“준희 여기 어딘지 알아?”
“배…. 배 바앙.”
“그렇지, 준희가 타고 싶어 하던 배.”
“네에, 바앙.”
양쪽으로 아이들을 낀 선재가 걸음이 제일 느린 재혁의 속도에 맞추며 걸었다. 준희는 이맘때 겨우 기어 다니기만 했는데. 말도 안 되는 성장 속도를 보여주는 재혁이 선재는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짧은 팔과 짧은 다리를 야무지게 교차하며 걸어 다니는 아기의 모습에, 선재가 가만히 있다가도 입꼬리를 올렸다.
멈춘 지점은 계단 바로 앞이었다. 휘어진 모양의 계단이 라운지와 널찍하게 연결돼 있었다. 한눈에 보이는 라운지를 끝에서 끝까지 훑어본 선재가 우와, 하며 재혁을 품에 안았다. 갑자기 버둥거리거나 돌발 행동을 할 때가 있어 재혁은 꼭 두 팔로 안아야 했다. 준희 아빠 잡아봐, 말하자 준희는 녜, 하고 선재의 바지통을 인형 안듯이 끌어안았다.
“준희 조심해서.”
“네에.”
“조심.”
“네… 에….”
아빠 허벅다리를 붙잡고 내려가던 준희가 힘겹게 대답을 내뱉었다. 생각보다 높이가 있어 선재도 조심해서 한 발씩 내디뎠다. 허공에 발차기하듯 발을 내민 준희는 현저히 느린 속도로 계단을 밟았다. 그래도 너무 느려서…. 조심, 준희 조심, 하며 괜한 겁을 줬나 싶어 선재가 전혀 다른 말을 내뱉었다.
“아부지가 없네.”
“네에, 아부지가 업서요.”
“아부지 없어도 괜찮아?”
“으으응….”
준희가 매미처럼 딱 붙고, 재혁도 막무가내로 몸을 뻗으려 해 진땀이 흘렀다.
겨우 계단을 다 내려온 셋이 향한 곳은 기념품 매대였다.
준희는 키가 작아 위쪽에 있는 물건들은 볼 수 없었다. 까치발을 들었다가 말았다가. 한껏 키를 키웠다가도 금방 풀썩 내려앉는 준희가 포기한 듯 선재만 올려봤다. 선재는 안고 있던 재혁을 바닥에 내려주고, 준희를 위로 들어 올렸다.
기념품은 팔찌 정도가 전부고, 나머진 다 아이 장난감이었다.
근처에 있던 다른 아이가 떼를 쓰며 우는 것도 보였다. 왜 이렇게 장난감이 많나 싶었는데 떼쓰는 아이를 보니 이해가 갔다. 하나 안 사주고는 못 배기겠네….
“준희 갖고 싶은 거 있어?”
“네에…. 주니 배애.”
이리저리 눈을 돌리던 준희가 가리킨 건 작은 크기의 배 모형이었다. 지금 승선한 배와는 전혀 상관없는, 평범한 장난감 배였다. 범진이 크리스마스에 불도 들어오고 소리도 나는 배 장난감을 주기도 했지만 정작 들고 다니는 건 손에 맞는, 작은 배 모형이었다. 이번에 고른 것도 그와 비슷했다.
“배가 그렇게 좋아?”
“녜에.”
“준희 그… 어부 될 건가 보다.”
해군이나 선원 같은 직업도 떠오르지만, 준희가 어부만은 확실히 알아 그 직업을 입에 올렸다. 응? 멋진 어부, 하자 준희가 알아듣곤 고개를 끄덕였다.
“녜…. 주니가 물꼬기 잡아주께요.”
“응…. 아빠 큰 물고기 잡아줘.”
“네에.”
진지한 얼굴로 대답하는 준희를 보자 웃음이 실실 나온다. 선재는 입꼬리가 올라간 것도 모르고 준희를 쳐다보다 아, 소리를 냈다. 무릎에서 느껴진 인기척 때문이었다. 슬쩍 보자 제 바지를 잡고 엉덩이를 씰룩대는 재혁이 보였다. 노래가 크게 나오고 있었는데, 거기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이었다. 얼이 빠진 선재가 준희를 내려주며 재혁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펑퍼짐한 바지가 씰룩대는 움직임을 극대화하고 있었다. 재혁은 굉장한 춤꾼이 될 모양이었다.
“재혁아.”
“…….”
고개를 스윽 들면서도 씰룩대는 걸 멈추지는 않는다. 선재의 손을 잡은 준희가 나머지 한 손을 허공에다 흔들었다. 한 손으로 치는 박수였다.
“이렇게 드릴까요?”
그때 매대 뒤에서 상체를 숙이고 있던 직원이 고개를 들었다. 골라놓은 실 팔찌 네 개와 배 장난감을 가리키며 구매 의사를 물었다.
“네. 주세요.”
대답한 선재가 계산을 빠르게 끝내고 작은 봉투 하나를 받아 들었다. 그걸 팔에 건 채, 셋은 식당가로 향했다. 따로 출입문 같은 건 없는, 푸드코트처럼 생긴 식당가였다. 창가 자리가 하나 나 있어 그리로 가 아이들을 먼저 앉혔다. 창밖으론 푸르게 펼쳐진 바다가 보이고 있었다. 와, 와, 하는 준희에게 아빠 먹을 거 사서 올게, 말한 선재가 자리를 떠 키오스크로 향했다.
메뉴 몇 가지를 주문해 아이들과 나눠 먹을 생각이었다. 재혁 또래 아이들은 무른 이유식을 먹는 경우가 많지만 재혁은 웬만한 음식은 다 소화하는 편이었다. 병원에서 그걸 권하기도 했고. 얼마 전부턴 우유도 간식으로만 주고 있었다. 이 자라는 속도도 빨라 벌써 12개의 작은 이를 보유 중인 아기. 어제 입 안을 봤을 때 또 하나가 더 자라는 것 같긴 했는데.
삼계죽과 함박스테이크를 주문한 선재가 주문표를 받아 들었다.
범진에게도 먹여야 하나. 술병 난 걸 처음 봐 메뉴 선택부터가 곤란했다. 숙취엔 보통 얼큰한 메뉴지만 몰골을 봤을 땐 죽이 나아 보였다.
죽 메뉴에서 한참 망설이던 선재가 메뉴 두 개의 주문표만 받아 들고 자리로 돌아갔다.
기왕 사 가는 거 따뜻한 죽이 좋을 것 같으니 중간에 다시 주문할 생각이었다.
테이블로 돌아온 선재는 주문표만 남기고 다시 어디론가 향했다. 이번엔 정수기 쪽이었다.
푸드코트 한가운데 위치한 정수기 때문에 아이들과는 꽤 멀어졌다. 선재는 정수기 앞에 도착해선 작아진 아이들을 계속 쳐다봤다. 동시에 컵 하나를 들어 물을 받았다.
“안녕하세요.”
“…….”
“저, 안녕하세요.”
다른 테이블에서 들린 인사 소리인 줄 알았는데, 같은 목소리로 누가 안녕하세요, 인사하며 제 앞을 가로막았다. 팔이 흔들린 선재는 거의 다 받았던 물을 바닥에 쏟고 말았다. 챙, 하는 소리에 뒤로 물러난 선재가 바닥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어, 물…. 괜찮으세요?”
“아, 네. 괜찮습니다.”
소리에 고개를 든 선재가 예의상 답했다. 마침 옆을 지나가던 직원이 대걸레를 가져와 정수기 주변을 닦기 시작했다. 선재는 죄송하다고 말하며 주변을 서성이다, 바닥이 깨끗해지고 나서야 남은 컵 하나를 쥐었다.
“그, 제가 들으려고 들은 건 아닌데.”
“…….”
처음 보는 사람이고, 뭘 들었다는 건지도 몰랐다. 선재는 무표정한 얼굴로 남자를 쳐다보기만 했다.
“아이들 혼자서 키우신다고, 아까 들어서요.”
“…예?”
“사실 저기, 객실 층에서 내려올 때부터 봐서….”
“…….”
“저 그렇게 닫힌 사람 아니에요.”
선재는 제 앞을 가로막은 사람이 얼마나 닫혔는가는 관심이 없었다. 컵을 쥔 손은 아직 물기에 젖어 있었다. 다른 손으로 그 손을 닦아낸 선재가 딱딱한 투로 말을 뱉었다.
“아…. 예. 죄송합니다.”
“에이, 제가 뭐라고 했는데요. 뭐가 죄송해요.”
“…….”
“입장 충분히 이해하지만 제가 그쪽 사정 이해한다면, 말이 다르지 않을까요?”
아리송하게 말하는 남자와의 거리가 가까웠다. 선재는 의도적으로 체향을 맡으려는 듯 앞으로 다가오는 남자 때문에 자꾸만 뒷걸음질을 쳤다. 흘끔 쳐다본 아이들은 압빠, 하며 손만 흔들고 있었다.
“저 용기 내고 말하는 겁니다…. 저랑 딱 한 번만 만나보시면 안 될까요? 저 진짜 초면에 이런 말, 어떻게 들으실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운명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위에서 내려오실 때부터.”
“저는….”
“부담 갖지 마세요. 아이들 때문에 꺼리는 거면 저는 상관없다니까요. 또 말하지만, 그쪽 사정 다 이해합니다.”
“부담이 아니라 멀쩡한 가정….”
무슨 말을 하려 해도 남자가 틈을 주지 않았다. 멀쩡한 가정이 있다는 말까지 하려던 선재가 컵만 든 채로 남자를 쳐다봤다. 말을 끊으며 아이, 부담 가지지 마시라니까요, 말하는 남자의 얼굴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답이 없다고 느낀 선재는 대꾸하려던 마음을 눌렀다. 조용히 물이나 받고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솔직히, 저 진짜 그만큼 그쪽한테 반해서 말하는 건데, 아이 둘 데리고…. 누구 만나기 쉽지 않잖아요.”
예전부터 말이 안 통하는 사람과는 대화를 길게 끌어본 적이 없었다. 여태 말한 걸 들어보면 그런 사람일 확률이 매우 높았다. 말을 하려 해도 그 말을 자꾸 끊고….
소독기를 쳐다보며 물을 받던 선재가 은빛 표면에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한쪽 눈을 미세하게 움직였다.
“개씨팔놈이 뭘 껄떡대냐.”
설마 하고 돌아본 선재가 범진을 발견하곤 물 따르는 걸 멈췄다. 얼핏 보면 낯빛이 좋지 않아 다른 사람인 줄 알았을 텐데, 오늘 범진이 술병 난 걸 누구보다 잘 알았던 터다. 범진인 걸 모를 리 없었다. 물이고 뭐고 냅다 범진의 팔부터 잡아챈 선재가 그를 뒤로 끌기 시작했다.
“예? 저 아십니까?”
어떻게든 상황을 무마시키려는 선재와 달리, 남자가 오기로 한마디를 뱉었다.
“니 아냐고? 씨벌, 모른다. 그러는 니는 내 마누라 알아서 말 걸었냐.”
한 발짝 물러났던 범진이 상체를 내밀며 앞으로 다가섰다. 선재가 옆에서 끌지 않았더라면 남자와 몸이 완전히 붙었을지도 몰랐다.
“허, 참 어이가 없네요.”
“어이가 없어? 개씨팔롬이 뒤질라고 환장을 했나…. 씹새꺄. 니 목숨 두 개냐?”
이성적으로 화를 토해낸 남자가 허, 하는 소리를 계속해서 냈다. 선재는 범진의 팔을 단단히 붙들어 손이 나가지 않기만 빌었다. 계속 뒤로 끌고는 있는데 버티는 범진이 벅차게만 느껴졌다. 우뚝 선 범진은 흉터가 푹 파이도록 얼굴을 찌푸렸다. 속에서 뭔가가 올라올 때 저런 식으로 참고는 한다. 선재가 그 얼굴을 보곤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두 개냐, 한 개냐.”
“…….”
남자 얼굴 코앞에 손을 들이댄 범진이 두 개, 한 개를 손가락으로 표현하며 물었다. 손이 눈앞에 놓이자 위협을 느꼈는지, 남자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도 입만 슬쩍 움직이고 말았다.
“이 씹창럼이 좆 찌꺼기만 낸다고 그기 좆인 줄 알고 씹…. 야.”
야, 부르는 소리에 남자의 미간이 살짝 조여들었다.
“함만 더 쥐좆만 한 거 들이대면 닌 내 손에 디져. 뼈때기 다 빠개서 저따가 던져버린다.”
범진이 가리킨 건 아름다운 바다였다. 유독 날이 좋아 오전인데도 바다 표면이 햇살로 반짝이고 있었다.
팔을 잡고 있던 선재는 제 귀가 오염된 기분이 들어 눈가에 힘을 주었다. 한 대도 맞지 않았는데 맞은 느낌이 든다. 짧은 욕이야 자주 듣지만, 이런 식으로 모욕적인 욕은 저도 오랜만에 듣는 것이었다.
“멀 쳐다보냐, 씨팔. 좆물통에다 칼질 함 해주랴?”
“…됐으니까 가자. 제발.”
말리듯 팔을 여러 번 잡아당기자 범진의 눈도 선재를 향했다. 그 틈에 남자는 하아, 하며 뒤로 돌아서는 듯했다. 선재는 곁눈으로 남자를 살피며, 범진과 계속해서 눈을 맞췄다.
“애들 물 마시고 싶대. 가자.”
팔을 뻗어 물컵 하나를 쥔 선재가 턱짓하며 다른 물컵을 가리켰다. 범진은 허, 하고 남자의 뒷모습을 눈으로 잠시 좇을 뿐, 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이내 선재가 가리킨 물컵을 잡은 범진이 그 안에 물을 받으며 입을 열었다.
“야…. 니 남편 할라니까, 씨발, 쉬지도 못하고 이래, 내가 개고생을 한다.”
“…오해한 거야.”
“뭔 오해. 야, 알파 계셰끼들은 암만 나부랭이라도 있다 아니냐. 니 쌍판을 보면 절로 따라가게 돼 있그든…? 점마도 봐라, 내 꾸린내 니한테서 못 맡는 거 보면은 하자 있는 새낀데도.”
“아무도 안 따라와.”
“화아, 좆도 모르는 기 또 말대꾸한다.”
내가 이래서 마음 편히 쉬지도 못한다고, 아파도 아픈 게 아니라는 범진은 투덜대면서도 선재의 허리를 한 팔로 감았다. 빠르게 차오른 물은 컵 위로 넘쳐흐르고 있었다. 손이 젖고 있는 걸 본 선재가 가자, 하며 범진의 몸을 끌어당겼다.
울퉁불퉁한 겨울옷을 입은 아이들이 손을 흔들어주고 있어 다행이었다. 빨리, 아까부터 마시고 싶어 해서, 하며 아이들 핑계를 댄 선재가 범진을 자연스럽게 테이블 쪽으로 이끌었다.
“뭐 시켰냐.”
“…죽이랑 함박스테이크.”
“너거 입이 세 갠데 꼴랑 그거 시켰다고.”
“제주도 가서도 뭐 먹어야 되잖아.”
“그거는 그거고.”
배고프지 않을 정도만 먹을 예정이었는데, 범진의 쓸데없이 큰 통 때문에 일이 커질 것만 같았다. 범진은 아이들을 향해 야, 애기들, 배고프냐, 안 고프냐, 묻기도 했다. 아까 목숨이 몇 개냐고 물었던 것과 투가 비슷했다.
“주니 배고파요…!”
“아오!”
고개를 끄덕거리며 힘차게 대답한 준희와, 그런 준희를 따라 한다고 끝말만 겨우 따라 한 재혁이 눈을 반짝거렸다.
“니는 벌써 승질이 그래가 어쩔래. 하, 이게 씨잘데기 없이 내를 닮아가.”
큰일이라며 혀를 찬 범진이 재혁의 볼을 아프지 않게 튕겼다.
재혁의 아오, 소리를 열받아서 낸 소리라고 착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애한테 할 만한 착각인가? 선재는 범진의 말을 2초 뒤 이해하고 입을 열었다.
“무슨 성질…. 그런 거 아니거든. 앉아서 밥이나 먹어. 죽 하나만 더 시켜서 올 테니까.”
“니 지금 감히 하늘 같은 서방,”
실실 웃으며 입을 연 범진이 말을 다 끝맺지도 못했다.
“전복죽 주문한다.”
휙, 선재는 그 말만 남기고 뒤로 돌아섰다. 일자로 걸어 키오스크까지 향하는 모습을 빤히 쳐다본 범진이 초당 한 번씩은 웃음을 날렸다. 이제 말 끊기는 기본으로 하고, 조용히 하란 말도 어찌나 많이 하는지 모른다. 웬 풋좆 같은 게 난입해 기분을 망치긴 했지만 저렇게 생겼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범진은 단 한 순간도 쿨하게 받아들인 적이 없지만 속으로 쿨한 척을 하며 선재를 쳐다보았다.
손가락, 옆얼굴, 허연 어깨, 배꼽, 복숭아 속 같은 엉덩이, 섹쉬한 사타구니. 자체 스캔을 하며 부랑배처럼 선재의 위아래를 훑던 범진이 눈빛을 느낀 선재와 눈이 마주쳤다. 선재도 불량한 시선을 느꼈는지 입 모양으로 그만 봐, 보지 마, 같은 말 따위를 내뱉었다. 범진은 알았다, 하면서도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계속 변태처럼 쳐다보았다.
* * *
제주도에 도착해 가장 먼저 한 일은 렌트카를 빌리는 일이었다. 선재는 도착하기 30분 전에 잠이 들어버려, 비몽사몽한 상태로 여객선을 나서야 했다. 아기들 둘은 범진의 두 팔에 각각 매달려 있었다. 범진이 니 뒤에서 내 잡아라, 해서 선재는 범진의 허리춤을 잡은 채로 이동했다. 잠이 덜 깬 선재는 밖으로 나올 때까지 잠꼬대 같은 걸 중얼거렸다. 하나는 나 줘… 아기… 무겁잖아…. 하면서도 정신은 차리지 못했다.
“아빠 주니가 깨워주까요…?”
고개를 들면 범진에게 안긴 준희 얼굴이 보였다. 아이는 범진이 걸을 때마다 위아래로 들썩거리고 있었다. 선재가 씩 웃었다.
“어떻게…?”
“압빠 깨워주께. 아빠 가야지, 우리 아빠 칭구들 보러 가야지.”
아침에 준희를 깨울 때 제가 하던 말들이었다. 준희 친구들 보러 가자, 우리 준희 가야지, 하던 게 생각이 나 웃음이 났다. 아이는 그 말에 언제나 마법처럼 눈을 뜨곤 했는데,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말이 통할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와…. 아빠 준희 때문에 진짜 깼다….”
대단하다, 준희…까지 덧붙이자 아이는 정말로 뭔갈 해낸 얼굴을 해 보였다. 작은 입이 서서히 벌어지다 예쁜 웃음을 만들어냈다. 헤에, 하는 소리도 들렸다. 그 소리에 범진도 고개를 돌려, 니 왜, 뭐, 하며 뜻이 모호한 물음을 건넸다.
“주니가 깨워조서요.”
“께 먹고 싶냐.”
아이 둘을 안고 성큼성큼 앞으로 가던 범진은 ‘깨워줬어요’의 ‘깨’만 알아듣고 엉뚱한 말을 던졌다. 범진이 아이 말을 잘 못 알아듣는 것도 있지만, 커다란 버스와 관광객 무리가 갑자기 지나가 소리가 묻힌 탓도 있었다.
준희는 그 말을 듣곤 범진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곤 전혀 다른 소리에도 네에, 하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통통하게 부푸는 뺨을 쳐다본 선재만 뒤에서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택시를 잡고 렌트카 사무실에 도착하기까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외관이 컨테이너 박스처럼 생기긴 했는데 주변에 사람도 많고, 차도 쉼 없이 드나들고 있었다. 범진은 근처에 있는 사람 중 제일 튀었다. 활짝 열린 사무실 문을 주인처럼 왔다 갔다 하며, 어디서 이쑤시개 하나도 가져와 입에 꼬나물고 있었다. 거기에 짝다리를 짚고 앞을 쳐다보고 있으니 건물로 가까이 다가갔던 손님들도 여기가 맞나, 하고 간판을 다시 확인하고 있었다. 아이들과 벤치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던 선재가 범진의 모습을 보곤 입을 열었다.
“범진아.”
소리에 휙 시선을 돌린 범진이 곧바로 무슨 말을 내뱉었다.
“니 배고프지.”
다 아는 것처럼 짚지만 틀린 예상이었다. 선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잠시만 이리 와봐.”
애꿎은 사람에게 욕을 하거나 무턱대고 주먹부터 들이대는 버릇은 고쳤지만. 사람 의식 안 하는 건 여전했다. 선재는 양옆에 아기들을 앉힌 채로 범진에게 손짓을 했다. 빨리. 하는 눈빛까지 보내자 범진의 입이 씰룩대기 시작했다. 물고 있던 이쑤시개는 개박살이 난 상태였다. 그걸 큰 휴지통에 팩, 뱉은 범진이 벤치로 향했다.
“차 언제 나와?”
“곧 나온다.”
보폭이 커 몇 걸음 만에 금방 앞에 섰다. 범진은 검지로 선재의 턱을 툭, 올리며 보채냐, 했다.
“…너무 앞에서 그러고 있으면,”
“최범진 씨?”
그때 사무실에서 빼꼼, 모습을 드러낸 직원이 범진의 이름을 불렀다.
범진은 연신 선재의 얼굴을 조몰락대다 고개만 슬쩍 돌렸다.
“왜요.”
“…네? 차… 이제 곧 들어와서요….”
부르면 당연히 가야지, 거기서 ‘왜요.’ 같은 소리나 하고 있었다. 선재는 그냥 가, 하면서 범진의 배를 뒤쪽으로 밀었다. 와중에도 손이 닿은 걸 느끼곤 가슴부터 배까지 꿀렁대는 움직임이 징그러웠다. 단단한 근육 결을 얼떨결에 만진 선재가 찝찝한 얼굴로 손을 거두었다. 범진은 뭐가 그리 좋은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도 웃음을 참지 않았다. 혀로 아랫입술을 덮은 채로 계속 웃었다.
* * *
이른 저녁쯤 들른 식당은 규모가 큰 대게 전문점이었다. 1층에 직판장이 따로 있어 구경할 거리도 많았다. 2, 3층이 초장집이고, 입구엔 2층에 아이들을 위한 놀이시설이 있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커다란 미끄럼틀과 볼이 가득한 풀장, 그물망처럼 생긴 거대 트램펄린까지 본 선재가 준희 좋겠네, 하고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네에…! 주니 노리터.”
벌써 발을 동동거리는 아이지만 밥은 먹여야 했다. 준희 밥 조금만 먹고, 저거 타자, 하니 아이가 야무지게 고개를 끄덕이며 예! 외쳤다. 열심히, 또 많이 먹어보겠단 의지를 저도 모르게 드러낸 것이었다. 예쁜 얼굴에 힘이 들어가는 걸 본 선재가 웃음을 참으며 자리를 찾았다.
킹크랩 3kg에, 육지에서 쉽게 먹어볼 수 없는 갈치회와 고등어회도 주문한 참이었다.
“아, 맞은편에…. 자리 넓은데….”
“여도 충분히 넓은데. 왜.”
재혁을 유아용 의자에 앉히고, 선재는 준희를 먼저 앉히고 그 옆에 앉았다. 잠깐 자리를 비운 범진이 돌아와 앉은 자리가 제 옆이라 굳이…. 싶어 건넨 말이었다. 창가에 앉은 준희는 넓게 펼쳐진 바다에 시선을 빼앗겨 줄곧 그쪽만 쳐다보는 중이었다. 가운데 낀 선재가 재혁의 핑계를 댔다.
“재혁이는 내가 먹여야지.”
이렇게 앉으면 재혁에게 손이 잘 닿지 않는다. 선재는 복도에 다리 한 짝을 내밀면서까지 제 옆에 앉은 범진을 타이르려고 했다. 평소엔 맞은편에도 잘 앉으면서 오늘은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지.
“왜 니만 먹여야 되는데.”
“넌 이상한 것도 그냥 넣잖아.”
자기 밥에 이물질이 들어간 줄도 모르고 그냥 먹는 범진을 몇 번이나 봐온 터였다. 예전엔 진심으로 싫어해서 말 한마디 한 적이 없지만, 요즘은 그걸 보면 제가 먼저 빼주거나 걷어주곤 했다.
제일 최근에 유산지가 붙은 빵을 통째로 반이나 먹어 뒤늦게 아랫면에 붙은 종이를 떼준 적이 있었다. 뭐라고 하면 안 죽는다, 안 죽어, 하고 그냥 넘어가는 범진이라 말도 통하지 않았다. 집에서야 먹이란 것만 먹이면 돼서 별문제 없지만. 식당, 그것도 재혁에겐 제 손길이 필요할 터였다. 요리를 못해서 그렇지 게살을 깨끗하게 발라 먹이는 데엔 문제가 없었다.
“내가?”
“빵도 껍질째로 먹는 사람이… 아기한테는 잘도 발라서 주겠다.”
중얼중얼 말하는데, 범진이 팔로 허리를 감싸는 게 느껴졌다. 눈을 들자 코앞까지 붙은 범진의 얼굴이 보였다. 이미 입꼬리가 쭉 올라간 게 혼자 무슨 생각을 하고, 뭐 때문에 웃는지가 염려스러울 지경이었다.
“니는 진짜…. 국보기념물이다.”
한국엔 국보 아니면 천연기념물밖에 없는데…. 잠시 생각한 선재가 바짝 올라간 범진의 눈썹을 보다 입을 열었다.
“그런 거 없는,”
데…까지 말하려고 했지만 범진이 말을 잘라 중간에서 끊겼다.
“씨발 눈알…. 콧구녁 깜찍한 거 봐라…. 닌 뺨에도 핏줄이 이래 비쳐가지고….”
“…….”
사람들 지나다니는 식당 안에서 이게 무슨 짓…. 선재는 그런 생각을 하느라 대꾸할 타이밍을 놓쳤다. 준희가 뒤에서 바다에 온 주니에요, 하며 창밖 풍경에 빠져 있었고, 재혁은 왁자한 식당 중앙에서 퍼져 나오는 노랫소리에 몸을 들썩대고 있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손으로 만지면 없어지고, 씨벌.”
손가락 하나로 뺨을 누른 범진의 얼굴이 점점 벌게져가고 있었다. 선재는 씨입, 핏줄 봐라, 핏줄,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엔 고개를 양쪽으로 저었다. 밥도 안 먹고 이게 무슨 짓인가? 옆으로 몸을 슬쩍 빼자, 범진이 그 틈에 제 몸을 붙여왔다. 웬만큼 말로 달래선 맞은편으로 가 앉지 않을 듯했다.
“아, 그럼 아기 잘 발라주든지…. 껍질 같은 거 안 들어가게.”
마침 2층 입구로 들어선 직원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곧 고등어랑 갈치, 맞으시죠, 하는 소리가 들렸다. 범진의 손은 여전히 허리에 가 있는 채였다.
회 접시 한쪽에 붙은 종이를 떼어낸 직원이 범진과 선재를 흘긋거리곤 너무, 하고 입을 열었다.
“좋아 보이세요.”
“그랍니까, 아줌마? 결혼한 거 티 좀 나요? 내랑 야랑 결혼한 거 티 납니까?”
직원의 립서비스에 금방 반응한 범진이 들뜬 투로 말을 이었다.
“예? 아, 네. 당연히 나죠.”
속으로 왜 이래? 하는 생각만 한 선재가 잠시 멈칫하는 직원의 얼굴을 걱정하듯 쳐다보았다. 아무리 육지의 온갖 사람들이 다 모이는 식당이라도 범진 같은 사람은 처음 봤을 터였다. 선재도 이런 말을 하는 범진은 적응이 되지 않았다. 마치 자랑하듯 으스대는 투로 말하던 범진이 이번엔 손까지 들어 옆을 가리켰다.
“와, 아줌마 뭐 좀 볼 줄 아네. 임마 이거는 작년에 낳은 거요.”
유아 의자를 가리킨 범진이 임마, 라고 재혁을 칭했다. 재혁은 여전히 몸을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아까까진 많이 들썩이고 있었는데, 잔잔한 음악이 나오면서부터는 그에 맞춰 최소한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재는 훑듯이 쳐다본 재혁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제 막 아장아장 걷는 아이가 진심으로 박자를 타나 싶어서였다.
조용하게 흐르는 음악에서 포인트가 될 만한 부분을 캐치해 고개를 까딱, 손을 번쩍, 드는 아이 모습에 선재는 점점 심각해졌다. 저 정도 재능이면 부모도 단단히 각오해야 할 것이다. 여느 부모처럼 대단한 착각 속에 빠진 선재가 직원의 억지 웃음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 하하.”
“어디 가면 다 닮았다 하든데, 그래 닮았습니까.”
“어우, 모르고 봐도 아들인 거 알겠는데요.”
“하, 내가 내 닮게는 안 나왔으면 했는데, 절마처럼. 절마 저거는 이쁘게 잘 나왔그든. 하는 짓도 임마랑 딴판이다.”
절마, 하고 손날을 뻗은 곳엔 뒤통수만 보이는 준희가 있었다. 바다 위로 비행기가 날아드는 게 신기한지 아이 손이 유리창에 딱 붙어 선을 그리고 있었다. 비행기가 오른쪽에서 왼쪽을 향할 때마다 짧고 통통한 손가락이 주우욱 선을 그리며 유리창에 문질러졌다.
“와씨, 기분 좋네.”
그 소리에 앞을 본 선재가 들썩대는 범진의 몸짓에 상체를 옆으로 피했다. 별로… 좋을 게 있었나? 쓸데없는 소리는 더 안 했으면 좋겠는데. 속으로 생각하고 직원이 가기만 기다리는데, 범진이 어, 이거, 하며 요란하게 움직였다. 바지 주머니에서 꺼낸 건 지갑이었다. 지폐 두 장을 꺼내 직원에게 건넨 범진이 이거 아줌마 팁, 하고 기분 좋은 듯 말했다.
“에이, 손님…. 진짭니까….”
“그럼 진짜지. 내가 가짜 취급하는 놈으로 보이요.”
정말 별소리를 다 했다. 아뇨, 그렇게는 안 보이죠, 하는 직원이 인사를 하고 테이블을 떠날 때까지도 범진의 으스댐은 멈출 줄을 몰랐다. 팁으로 말도 안 되는 금액을 건네니까 물었을 뿐인데, 거기다 대고 제가 가짜 취급하는 놈으로 보이냐니…. 직원이 돌아가서 무슨 소리를 할지 겁이 났다.
“니 어쩔래.”
“…뭐가.”
“니 이제 내랑 그렇고 그런 사인 거 모르는 사람이 없다.”
“진짜….”
웃겨서 말도 안 나온다. 실컷 자랑하듯 말해놓곤 이런 말이었다. 예전에… 혼인신고 할 때도 어쩔 거냔 식으로 말을 해온 적은 있었다. 그때도 이 정도로 기분이 좋았었나? 그땐 그냥 서류 작성하고…. 밥만 먹은 것 같은데. 연못 앞에서 저를 괴롭혔던 기억은 난다.
“어? 니 내랑 아기 만든 것도 온 천하 사람들이 다 안다고.”
평소에 강한 발음으로 애기, 애, 정도로만 말하는 범진의 입에서 처음 듣는 듯한 호칭이 나왔다. 선재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직 술병이 다 안 나았나…. 과하게 기분 좋아 보이는 범진에겐 그런 생각만 들었다.
“회나 먹자…. 그 문제는 좀 이따 생각해볼게.”
“화아, 이거.”
“준희 이리 와…. 회 한번 먹어보자….”
준희는 연초에 처음 회를 먹어보았다. 그때도 맛보듯이 먹여, 이번에도 갈치회 한 점, 고등어회 한 점 정도만 입에 넣어줄 생각이었다. 젓가락으로 갈치회를 집어낸 선재가 은색 껍질을 쳐다보곤 그걸 잠시 옆쪽에 놔두었다. 준희의 입에 넣어준 건 얇은 고등어회 한 점이었다. 간장에 살짝만 찍어 입에 넣어주자, 아이는 입을 뽀뽀하듯 내민 채로 그걸 야무지게 씹어서 먹었다.
“맛있어요?”
“네에.”
고개를 끄덕인 아이지만 당장은 바다를 계속 쳐다보고 싶은 듯했다. 애초에 회를 여러 점 먹일 생각은 없었으니, 킹크랩이 나오면 아이에게 제대로 먹여야겠다 싶었다. 선재가 맛이서요, 하고 유리창에 이마를 붙이는 준희의 모습을 웃으며 쳐다보았다.
“야, 니도 먹어봐.”
“어…. 맛있어?”
“이거, 이래…. 김에다 싸서.”
범진이 고등어회 여러 점을 생김에다 쌌다. 선재는 김 한 장을 펼쳐 범진이 하는 대로 고등어회를 올리고, 양념도 그 위에 올려보았다. 김쌈을 싼 범진은 손으로 돌돌 말곤 그걸 선재의 입으로 가져갔다. 제 쌈을 싸던 선재가 입술 바로 앞으로 온 쌈엔 입을 아, 벌렸다.
“맛있지.”
“…우응.”
너무 크게 싸긴 했어도 맛은 좋았다. 선재는 뺨 한쪽이 부푼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범진은 그 얼굴을 보곤 또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다가 고등어회를 한 움큼 집어 먹었다. 김쌈에 싸는 게 맛있다면서 본인은 그냥 무식하게 먹었다. 같은 걸 먹는데 입에서 뻐걱뻐걱하는 소리도 들렸다. 선재는 조용히 있다가 제 앞에 둔 미완성 김쌈을 다시 싸기 시작했다.
“자….”
“내 먹으라고?”
“그래, 자….”
표정 없이 쌈만 든 선재의 얼굴에 조금씩 균열이 일었다. 범진이 쌈은 물론 젓가락까지 먹으려 들었기 때문이었다. 안 돼, 하고 젓가락을 뽑아내지 않았다면 목이 찔릴 때까지 그랬을 거다. 테이블에 젓가락을 놓은 선재가 일부러 왐, 왐, 왐, 소리를 내며 쌈을 먹는 범진을 곁눈으로 쳐다보았다.
“야, 민선재.”
대충 먹곤 제 이름을 불렀다.
“왜.”
“사랑한다?”
“…….”
“니는.”
“여기 식당인데.”
사랑하는 거 알지,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당장 생각해도 범진이 그런 말을 하는 모습은 많이 떠올랐다. 하지만 저는 사랑한단 말을 자주 하진 않는 편이었다. 범진의 태도가 장난스러운 것도 있지만, 시도 때도 없이 말하는 건 왠지 내키지 않았다. 거기다 장소도 적당치 않았다. 집이라면 모를까 이런 데서 고등어회 먹다 사랑한단 말을 하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타이밍에 나온 킹크랩은 엄청난 크기를 자랑했다.
직원은 예의 그 직원이었다. 또 같은 테이블로 서빙을 온 걸 보면 범진이 그렇게까지 진상처럼은 느껴지지 않았던가 보았다.
손질이 다 되어 나온 킹크랩이라 살 바르는 건 어렵지 않았다. 1차로는 범진이 살을 발랐고, 2차로 선재가 세세하게 살을 골랐다. 작은 앞접시에 먼저 채워진 게살은 준희 앞에 놓이게 되었다. 아이는 예전부터 게는 그럭저럭 잘 먹는 편이었다. 달달하고 탱글탱글한 살점이 입에 맞는지, 바다에, 바다다, 하던 아이도 마시따, 하며 게살을 입에 넣기 시작했다.
재혁의 입에도 게살이 몇 번이나 들어가고, 선재도 범진이 주는 다리 살을 계속해서 받아먹었다. 범진은 제 몫은 대충 먹었다. 건성으로 발라낸 살을 입에 넣은 탓에 빠각, 하는 소리가 들린 게 몇 번이었다. 그거 먹지 말고 이거 먹으라고 말해도 칼슘, 하며 씩 웃기만 했다.
또 빠각, 소리가 들렸다.
“그러다 이 다 나가지.”
몇 번이나 들린 소리에 범진의 입을 쳐다본 선재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통째로 씹지 말고….”
“흐, 야.”
일부러 그런 것만 먹는지 범진이 빠그작, 먹다 말고 묘한 웃음을 지었다. 흘끗 쳐다본 선재가 바로 무시하곤 발라진 게살을 준희의 입에 넣어주었다. 준희는 앞접시에 담긴 게살도 아직 다 먹지 못한 채였다. 아이는 갑자기 입 안으로 들어온 게살을 다 먹곤 헤, 주니 만이 먹었다, 하며 굳이 얼마나 먹었는지를 표현했다. 이제 그만 놀이방으로 가고 싶다는 마음을 드러낸 것이었다.
“니 그때 생각나냐. 내 니한테 첨으로 가재 멕인 날.”
놀이 공간 쪽으로 시선을 돌렸던 선재가 갑자기 들린 말에 범진을 쳐다보았다.
“언제…?”
“왜, 니 행실이 드르배가지고 다이렉트로 짤린 날 있다 아니냐.”
“…그거 다 너 때문이잖아.”
범진의 입에서 더러운 행실 같은 말이 나오자 이질감이 엄청났다. 선재는 공원 한복판에서 키스하다 걸린 그날을 어제 일처럼 생생히 떠올렸다. 확 붉어진 얼굴로 범진을 쳐다본 선재가 더 말하지 말란 뜻으로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날도 내 니 앞에서 껍데기 다 씹으면서 먹었는데.”
생각해보니 그날 게 요리 같은 걸 먹은 것 같았다.
“그때 니가 별소리 했는 줄 아냐. 진짜 잘못 씹어가 아, 했을 때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드만.”
“그거는….”
“그때 내 알았다 아니냐. 이거 생각보다 인정머리가 졸라리 없네. 얼굴만 이쁘고 딴 거는 개판이고나.”
“뭐라고?”
되묻는 말에 범진은 낄낄 웃기만 했다. 선재는 범진 앞에서 유독 냉담했던 제 모습을 인정하긴 했다. 하지만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았나. 염치도 없이 그런 평가를 했었다는 게 더 어이없었다.
“니가 천사인 거는 오직 니, 이 얼굴 때문에.”
“볶음밥 나왔습니다.”
선재는 범진의 헛소리와 함께 나온 게딱지 볶음밥을 준희의 그릇에 덜어주고, 준희 이것만 딱 먹자, 하고 아이를 달랬다. 아이가 금방이라도 놀이장에 가고 싶은 눈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은 아이지만 작은 숟가락을 들고 네에, 하며 밥을 떠먹기 시작했다.
“밥이나 먹어.”
커다란 게딱지를 통으로 내민 선재가 범진의 손에 숟가락을 쥐여주었다.
추가로 주문한 죽은 10분 뒤에 나올 거라 했다. 선재는 볶음밥 맛을 보곤, 재혁이 먹어도 되겠다 싶어 범진의 게딱지에서 밥을 조금 가져와 그릇에 반듯하게 펼쳤다. 아기 줘, 하고 범진에게 내밀자 범진이 아나, 니 밥, 하며 재혁 전용 테이블에 그 그릇을 올렸다.
“주니가 노리터에 가까요…?”
그렇게 범진의 헛소리를 차단하고 볶음밥을 먹고 있는데 옆에서 준희 소리가 들렸다. 아이 윗입술 바로 위에 밥풀이 하나 붙어 있었다. 한 숟갈 정도 그릇에 밥이 남긴 했지만 이만하면 열심히 먹었다 싶었다. 피식 웃으며 밥풀을 떼준 선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가고 싶어?”
“가자, 니 내랑.”
몸을 일으킨 범진이 통발을 건지듯이 준희의 몸을 쑥 빼냈다. 반쯤 접힌 아이 무릎이 테이블 밖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의심 어린 눈으로 범진을 보기도 잠시, 아이를 안은 범진이 가보자, 하며 빠르게 놀이방 쪽으로 향했다.
모니터로 놀이 공간 안을 볼 수 있어, 선재는 재혁이 밥 먹는 걸 보며 그 화면에도 시선을 기울였다.
아이들만 가득했던 화면은 어떤 남자의 등장으로 꽉 차게 되었다. 넓은 등판을 보이며 풀장으로 들어간 남자는 몸을 수그리고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들을 사방으로 날리며 일어나는 남자의 모습에, 선재가 얼굴을 붉혔다. 한 아이가 공을 많이 맞아 어색한 얼굴로 남자를 쳐다보는 것도 보였다. 저러면 아이들이 싫어하지…. 속으로 생각한 선재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였다. 재혁을 안고 그리로 가보려고 하는데, 제 남편임이 유력한 남자가 또다시 같은 짓을 하는 게 보였다. 그러나 이번엔 아이들의 반응이 달랐다.
범진처럼 공을 마구 튕기며 놀아대기 시작한 것이다. 선재는 멈칫하다 자리에 다시 앉았다. 한가운데 보이는 건 좋아서 방방 뛰는 준희 모습이었다. 어른답지 않게 놀아주는 아부지가 그렇게도 좋은지, 두 팔을 뻗는 아이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추태도 저런 추태가 없다 싶은데, 아이들에게 가끔 먹힐 때가 있었다. 이번에도 먹힌 범진의 괴상한 행동에 선재가 모르겠네…. 하며 자리를 지켰다.
* * *
첫날 숙소는 북쪽에서도 꽤 구석에 위치하고 있었다. 바다가 보이는 객실을 잡았지만 도착했을 때 이미 늦은 저녁이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로비 바깥쪽에 호텔 조명이 켜져 있어 커다란 야자나무 정도는 볼 수 있었다. 일교차가 심한 초봄의 제주도라, 기온이 급격하게 내려간 뒤였다. 선재는 맑은 콧물로 촉촉해진 준희의 코 밑을 보곤 안 되겠다며 들어가자고 말했다. 그러고 아이 코를 손으로 슥 닦아주는데, 제 코에도 범진의 손이 닿았다. 니는 안 흘리는 줄 아냐, 하며 범진이 제 콧물을 닦아준 것이었다.
…물 마시다가 묻었나 보네, 하는 혼잣말을 남기고 호텔 안으로 들어간 선재는 로비 한쪽에 있던 티슈로 제 코를 정리하듯 닦았다. 곧 들어가게 된 객실은 엄청난 면적을 자랑했다. 문을 열자마자 멀찍이 선 통창들이 드러났고, 1층에선 볼 수 없던 근사한 밤 풍경도 창에 비쳤다. 해 뜨면 더 멋있어지겠다. 선재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겠단 생각을 하며 구매한 물품과 짐들을 정리했다.
내일은 숙소에서 좀 쉴까? 원래라면 천천히 관광할 계획이었는데 오늘 웬만한 걸 다 했다. 처음엔 준희가 바다를 좋아하니 밥 먹고 바다만 들렀다 가자, 했는데 근처 유명 시장이 있어 그곳도 찾게 되었다. 사람이 많긴 했지만 돌아다니는 덴 문제가 없었다. 하나 문제가 있었다면 준희가 신기한 소품들에 마음을 빼앗긴 것 정도일까.
마트 장난감 코너에서도 움, 하고 지나칠 때가 많은 아인데. 한라봉 모자를 쓴 곰 인형이나 한라봉 가방에선 눈을 떼지 못했다. 안 된다고 말하면 떼쓰지 않는 아이지만, 범진은 아이가 뭘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어도 그걸 다 아이에게 쥐여주었다. 니 이거 갖고 싶네, 하면서. 그렇게 사게 된 것들이….
선재가 다른 침대에 올라간 한라봉 가방과 인형을 허무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저건 특별히 준희가 좋아해서 방까지 들고 올라오게 된 거고, 저 밖에도 다양한 장난감, 간식 같은 것들이 차에 가득 실려 있다. 모두 준희의 눈이 닿았던 것들이었다. 그러고 5분 거리에 있는 다른 바다에도 들렀다가, 겨우 숙소까지 도착하게 되었다.
침대 옆 소파에 앉아 있던 선재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정신없긴 한데 재밌네…. 혼자 그런 생각을 하다 시선을 돌렸다. 욕실 쪽에서 딸깍, 하는 소리가 들려서였다.
“…….”
욕실에서 씻던 사람은 범진이고, 그런 범진이 나올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당장 보게 된 알몸엔 말문이 막혔다. 아무리 애들이 자고 있다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선재가 수건을 들고 범진에게 다가갔다.
“허리에 좀.”
“뭐. 새끼들 다 자는데.”
그래서 이 흉물 같은 걸 잘도 내놓은 거구나. 선재는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범진을 쳐다보았다. 얼굴에 딱 그렇게 쓰여 있었지만, 범진은 읽어내지 못했다. 이 얼굴로 내를 쳐다보면, 하며 감상이나 뱉으려 했다. 얼굴로 올라온 손에 고개를 저은 선재가 수건을 펼쳐 범진의 허리에 둘렀다.
“혹시 모르니까.”
“씨발, 난 안다.”
맥락 없이 안다고 말한 범진이 선재의 입술을 한입에 삼켰다. 쭉 빨리듯 먹혀들어 간 입술에 뒷걸음질을 친 선재가 범진의 어깨를 밀어내며 자리를 피하려 했다. 괜히 시끄럽게 했다간 아이들이 깰 수도 있었다. 난감한 얼굴로 어깨를 밀던 선재가, 자꾸 쿡쿡 찔러오는 성기 때문에 표정을 찡그렸다.
“우웁…….”
쑵, 추읍, 하는 소리를 내며 입술을 빨고 혀를 넣는 범진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요며칠 너무 정신이 없어 잠자리를 가지지 못했었다. 여행 준비로 바빴고, 어제도 회랑 먹을 것 좀 사 오겠다는 범진을 두고 그냥 잠들지 않았었나. 아침에 깨보니 시체처럼 잠든 범진이 있었을 뿐이다. 며칠 고생 아닌 고생을 한 탓인지, 범진은 술병의 여파에도 성기만은 자꾸 세웠다. 화장실로 가는 저를 빤히 쳐다보다 서고, 낮은 돌담 앞에서 바다와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와중에도 제 얼굴을 흘끗 보곤 그대로 성기를 부풀렸었다.
마지못해 뒷걸음을 친 범진이 파우더룸까지 들어와 입술을 뗐다.
“니 내가 기분 뒤지게 해줄게.”
“하아, 무슨…. 됐으니까….”
“뭐가 돼.”
“난 괜찮으니까….”
“궁디나 까봐라.”
싫은 듯 망설이자 범진의 손이 지퍼로 곧장 닿았다. 제지할 틈도 없이 바지가 내려가고 팬티까지 반쯤 벗겨진 선재가 곤란한 얼굴로 무릎을 모았다. 범진은 어이, 이쁘이, 하고 선재의 성기를 툭 건드리며 인사를 하곤, 그의 엉덩이를 가볍게 짝 쳤다. 움찔거리며 뒤로 돈 선재가 거울로 비치는 제 얼굴을 의식하듯 피했다.
“뭐…. 아, 더, 더럽게….”
엉덩이가 벌어지는가 싶더니 범진의 얼굴이 그 사이로 들어온 게 느껴졌다. 혀가 구멍을 찌른 것도 금방이었다. 선재는 곧게 서 있다 허리를 반쯤 숙였다. 추욱, 축, 처음은 천천히 빨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속도가 붙어 내벽을 거침없이 찌르는데, 그걸 견디기가 힘들었다. 물기 어린 소리는 범진이 일부러 내는 소리도 아니었다. 점점 이상한 감각이 올라오고, 범진이 혀기둥 중간까지 밀어 넣으며 성기를 넣는 것처럼 굴자 다리에 힘도 풀릴 것 같았다.
“아, 아흐…. 으…. 그, 그만…. 좀….”
혼자만 말하게 되는 이 순간이 달갑지 않았다. 범진은 제 구멍과 입을 맞추고 있느라 말이 없었다. 추욱, 추욱, 하는 소리가 아니면 귀로 들리는 범진의 기척이랄 게 없었다. 반쯤 발기한 제 성기를 내려다본 선재가 곧바로 눈을 들었다. 벌게진 얼굴과 눈이 마주치는 것도 곤혹이고, 고개를 숙이면 보이는 성기 반응도 수치심을 들게 만들었다. 와중에도 성감이 증가해, 배 속에서 간질거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흐으, 최, 버, 범…. 아흑….”
두 발이 곱아들도록 쾌감을 느낀 선재가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 한 번 휘청하자 범진의 혀가 구멍에서 빠졌다. 선재는 그제야 숨을 골랐고, 범진은 느릿하게 몸을 세워 거울을 보며 제 입을 쓱 닦았다. 얼굴은 만족한 듯 웃고 있었다.
“존니 맛있네.”
선재는 그런 말 하는 범진을 차마 거울로 볼 수 없었다. 며칠만의 섹스라고 최근엔 느낀 적 없는 부끄러움마저 밀려들었다. 마치 몸만 가까웠던 그 시절처럼. 범진은 선재의 입술에 짧게 키스하곤 뒤로 가 섰다. 초저녁부터 땡땡하게 발기해있던 자지라 언제 넣어도 무리는 없었다. 선재의 구멍을 빠느라 더 크게 부풀어버린 그 자지를, 범진은 선재의 질척해진 구멍에다 대고 척, 척, 치듯이 대가리 쪽을 마찰시켰다.
“그, 렇게 하지 마….”
“알았다, 씨발. 바로 박아준다.”
하지 말란 뜻이었는데, 범진은 바로 박아달란 말로 알아들었다. 귀두로 구멍을 툭툭 때리거나 회음부를 누르는 행위를 자주 하긴 했지만, 어쩐지 오늘만은 내키지가 않았던 건데. 선재는 갑자기 반이나 들어온 자지 때문에 앞으로 밀리며 숨을 삼켰다.
“허읍…! 으…. 윽….”
넓게 다리를 벌린 범진이 선재의 골반에 손을 대고 거울을 쳐다봤다. 거울에 거의 바짝 붙어 있는 데다 머리칼이 죄 내려와 있어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한 손으로 선재의 상의에 손을 넣은 범진이, 이미 퉁퉁하게 서 있던 유두 돌기를 꼬집듯이 잡고 빙빙 돌렸다.
“아, 아흑…. 아, 왜, 흐…!”
반동이 크도록 아래쪽에서 위로 박는 듯 허리를 쓰기 시작한 범진이, 선재가 고개를 위로 들며 반응하는 걸 쳐다보았다. 흰 목이 그대로 드러나고, 앞머리가 양옆으로 갈라져 예쁜 이마와 눈, 코, 입이 차례로 드러난다. 평소엔 푸른 빛이 돌 정도로 하얀 얼굴인데, 비협조적이라도 어쨌든 섹스가 시작되면 곳곳이 붉어지기 시작한다. 범진은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몇 번 연속해서 강한 힘으로 내벽을 비비고 들어갔다.
“야, 내가 오늘, 씨입, 뭔 생각 했는지 아냐.”
속도를 늦추지 않고도 수월하게 말한 범진이 선재의 귀 끝을 살짝 씹었다.
“허, 어으…! 흐으!”
“그 새끼한테, 허, 내가 니 박는 거, 보여줄라 하다가,”
그 말을 하면서는 흥분이 되는지 숨이 거세졌다. 선재는 거칠게 들어오는 자지에 뜻만 겨우 알아챌 뿐이었다.
“아…! 으, 나, 좀, 아…. 이거….”
“어? 씹, 내가 그 짓거리 못 하겠냐….”
“아, 버, 범… 흑, 아… 아!”
“하아, 왜.”
가까이 붙으며 선재의 얼굴에 제 얼굴을 붙인 범진이 자지로 계속 같은 곳을 찍었다.
내벽이 마찰 때문에 미세하게 부풀고, 흐물거리는 구멍 새론 범진의 혈관 그득한 자지가 들락날락한다. 선재는 아까부터 애무를 당하기도 했고, 범진이 예민한 기관을 자꾸 찔러대 갈수록 몸을 떨어댔다. 결국, 짧은 시간 안에 정액을 주륵 싸버린 선재가 다리를 후들후들 떨었다. 아무리 뒤에 범진이 서 있어도 두 다리로 지탱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깊이 들어갔다 나온 자지 때문에 틈이 만들어지고, 선재가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아, 허어…. 흐어….”
간신히 버텨낸 선재가 범진의 성기 모양 그대로 벌어진 구멍만은 드러내지 않으려 애를 썼다. 몇 초 지나 뻐끔대며 닫히긴 하겠지만, 박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정액을 싸버린 것에 부끄러움이 밀려와서다. 선재는 그러나, 갑자기 빠진 거대한 범진의 성기 때문에 간질거리는 감각을 느끼는 것만은 참아내지 못했다. 급하게 다리를 모았지만 범진이 발로 제 발등을 누르고 있어 한계가 있었다.
“아, 아흑.”
아랫배에 아무리 힘을 줘도 소변이 찔끔거리며 새 나왔다. 약하게 한 번 물이 새는가 싶더니 참으려 할수록 내벽의 간질거리는 감각이 아랫배를 에워싸며 물줄기를 쏟게 만들었다. 선재는 결국 울면서 오줌을 싸며 두 다리를 발발 떨었다. 섹스할 때면 정신이라도 없지, 그때도 미치겠는데 범진의 성기가 들어찼단 이유로 내벽이 멋대로 수축하며 소변을 싸게 만든 것이다. 얼굴을 가린 선재가 와중에도 오금을 최대한 조이며 뭐든 안 싸려고 힘을 주었다.
그때, 범진이 코앞까지 다가와 손을 걷어내는 게 느껴졌다.
“씨발, 이 얼굴로 질질 싸대니까 내가 사냐, 죽냐.”
“흐으…. 으….”
“씨바, 마저 뜨자.”
그대로 두 팔을 무릎 아래로 넣은 범진이 선재를 위로 들어 올렸다. 다리가 한껏 벌어진 채 위로 붕 떠, 선재는 아찔한 심정으로 범진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잠시 대리석 선반 위에 엉덩이가 앉는가 싶더니, 범진의 좆이 구멍으로 들어왔다. 선재는 달랑 들린 두 다리를 움칠거리며 범진에게 매달렸다. 그리곤 몸이 다시 붕 떴다.
몰랐고, 살면서 해볼 생각도 없었던 체위. 이젠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다. 선재는 가만있어도 절로 들썩대는 엉덩이 때문에 다리를 계속 들었다 놓았다. 단단히 붙잡힌 채로도 손쉽게 자지를 빼내고 넣길 반복하는 범진은 힘든 기색도 없어 보였다. 찔꺽이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선재는 눈만 꾹 감고 범진의 목에 매달렸다. 한껏 벌어진 다리와 달리, 몸이 범진에게 안겨있어 내벽이 멋대로 휜 채였다. 그 길을 벌리며 들어오는 자지 때문에 아랫배가 아릴 정도였다. 선재는 민감해진 내벽을 모조리 긁고, 해질 듯 얇아진 점막을 사정없이 비벼대는 자지 때문에 숨까지 헐떡였다. 찔꺽, 퍽, 하는 소리가 멋대로 엉키고, 선재는 무릎 아래로 들어온 범진의 팔 위에서 경련을 일으키듯 몸을 떨었다.
“아, 안, 허, 윽!”
“야, 고개 들어.”
화가 나 직설적으로 뱉는 범진을 알고, 그 화에 서운하지도 않지만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울컥했다. 선재는 섹스나 키스를 하다 화내는 범진을 몇 번이나 봐온 터였다. 낮고 거친 목소리에, 선재가 퍽, 퍽, 엉덩이가 흔들리는 와중에도 고개를 들었다.
“말, 왜…. 흐! 그렇, 허윽, 게….”
“뭐, 씹…. 하아.”
범진은 선재가 빼꼼 든 얼굴로 입을 그대로 들이댔다. 빨아대기 시작한 건 눈가였다. 붉게 오른 눈가가 범진이 쭉쭉 빨면서부턴 침까지 흥건해지게 되었다. 좆나 개 같다며 닿는 대로 입을 맞춘 범진은 허릿심으로만 선재의 엉덩이를 튕겨댔고, 갈증이 나면 선재를 들쳐 안듯 힘을 줘 엉덩이로 손을 가져갔다.
“하, 흑, 아, 아흑!”
그때부턴 박수라도 치듯 짝짝,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진다. 각도상 보통 성기 사이즈라면 쉽게 빠질 법도 한데, 범진의 자지는 이 각도에서도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다. 구멍 주름을 죄 펼치며 들어간 자지 기둥이 모습을 온통 감췄다가도 푸릇푸릇한 혈관이 새겨진 채로 밖을 빠져나오기가 몇 번. 내벽이 쉼 없이 벌어져 애액을 바닥으로 뚝뚝 흘리던 선재가 참지 못하고 범진의 가슴팍에 얼굴을 댄 채로 소리를 질렀다.
“아흑, 아! 으으…. 아!”
하얗게 오그라든 발가락이 위로 뻗쳤다 크게 흔들리며 아래로 점점 내려왔다. 선재는 추위를 타는 듯 온몸을 크게 떨고, 등이 오목하게 팰 정도로 쾌감을 느끼다 두 번째 정액을 싸버렸다. 범진에 비하면 보얗기만 한 성기 끝에 동그란 액체가 맺혔다 범진의 배, 다리 사이를 적시며 몇 방울 떨어졌다.
힘이 빠져 팔을 툭, 놓고 또 툭, 놓아버린 선재가 고개를 저으며 힘겹게 범진에게 매달렸다. 아직 끝이 남아 있었다.
“으으, 흑, 으…. 흐으….”
“닌 내랑 영원히…. 이 짓만 하다 뒤지는 거다….”
잠깐 멈추고 그런 말을 뱉는데, 뜨거운 숨이 온 얼굴로 와 닿았다. 선재는 손을 놓을 듯 아슬하게 잡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느리게. 그리고 바로 다음, 엉덩이가 볼썽사납게 위로 들렸다 아래로 퍽, 내려왔다. 자지가 구불구불한 내벽을 곧게 벌리며 가장 예민하고 깊숙한 점막을 사정없이 찧었다. 저릿한 쾌감이 지속되던 참이었다. 선재가 고개를 흔들며 범진을 쳐다봤다.
“뭐. 씹, 싫다고?”
“또, 또 하면, 흑. 흐아아…!”
눈을 마주치는 동시에 내벽을 긁어댄 범진이 눈썹을 한껏 들어 올렸다. 선재는 말을 다 끝맺지도 못하고 몸을 빼내려 엉덩이를 들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감당하기 힘든 감각이었다. 이미 사정을 한 뒤라 정신이 반은 돌아와 있어서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재는, 또 한 번 같은 자리를 짓이겨대는 자지엔 엉덩이를 아래로 내릴 수밖엔 없었다. 본능적으로 허리를 굽혔다 펼치며, 자지 기둥에 제 깊숙이 위치한 장기를 비비려 했다.
“흐, 흐윽…! 아!”
“씨발, 내가 니 이딴 짓, 내 같은 쌍놈 새끼한테…. 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 선재의 엉덩이를 더 흔들어댄 범진이 미끄덩 닿는 내벽의 감각에 좆을 더 위로 쳐올렸다.
“아, 흐그…. 흑…. 아흑!”
그 감각까지 버티긴 역부족이었는지, 선재는 조금이나마 움직이던 걸 멈추고 범진의 몸에만 매달렸다. 정액이 또 한 번 주륵, 흘러내린 것도 그때였다. 싼 지 얼마나 됐다고 정액이 또…. 하는 생각도 범진의 품에서라면 금방 지워지고 만다. 니 또 지렸냐, 하고 속삭이는 범진의 말에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인 선재가 다시 거세게 쳐들어오는 자지에 입과 눈을 꾹 닫았다. 흡사 놀이기구라도 탄 듯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다. 선재는 몇 분이 지나 또 질금대며 정액을 싸버리고 말았고, 범진이 제 넓적다리를 크게 벌리고 서서 박는 움직임엔 기절 일보 직전까지 갔다.
“어, 어흐…. 어억….”
“씁, 싸줄게, 알았다.”
눈이 뒤집히려는 선재를 보다 못한 범진이 엉덩이를 제대로 들고 좆대를 거의 꽂듯이 엉덩이 사이로 밀어 넣었다. 체액과 마찰로, 이제 뿌옇고 진득한 액체만이 구멍에 맺혔다, 그 장력을 이기지 못하고 전득하게 바닥으로 떨어지는 식이었다. 범진은 벌겋게 올라오는 선재의 무릎 뒤도 생각이 나, 거의 위로 들쳐 올리듯 몸을 잡은 채로 좆기둥을 사정없이 쳐올렸다. 엄청난 속도에 원치 않는 자극을 당한 선재가 또 한 번 고함을 지르며 정액을 내버렸고, 범진도 그에 맞춰 희뿌연 정액을 선재의 내벽 깊숙한 곳에 분출했다.
“허어…. 억…. 흐….”
그러고 바로 몸을 내려준 범진이 욕실 바닥에 제 다리를 먼저 펼치고, 그 위에 선재를 눕혔다. 아직 발딱 서서 혈관이 돋아난 자지가 한눈에 보여, 선재는 가물가물한 정신으로도 도리질을 쳤다. 더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내 맘이다. 하는 건.”
“시비…. 그만…. 힘드니까….”
“내가 언제 시비를 걸었다고.”
그렇게 말하며 선재의 머리를 쓸어 넘겨준 범진이 반듯하게 드러난 흰 이마에다 입을 맞췄다.
“씨발, 이것도 이마냐… 쌀가루로 빚은 거지, 이게….”
“하….”
땀에 젖은 머리칼은 범진이 넘겨준 그대로 모양을 유지했다. 범진은 제가 씻겨 준다며, 잠 오면 자라는 말을 해왔다.
“1분만 이러고…. 일어날 건데….”
“그냐? 니 씹, 이래 가지고 내랑 백 살 먹을 때까지 씹질 하겠냐?”
그 말엔 입을 닫은 선재가 눈썹에 살짝 힘을 준 채로 범진을 올려다봤다.
“승질내는 것도 씨발, 이 지랄이라서.”
뭐든 좋은지, 범진이 선재의 얼굴을 두 손으로 쥐고 입을 들이댔다. 게임하듯 여 다이아가 있다며, 혀로 땀방울을 훑어 먹은 범진이 씩 웃곤 고개를 위로 들었다.
“야…. 우리 담에도 만나자. 알았지.”
생뚱맞은 소리를 즐기는 건 알지만, 이런 말은 이해할 시간도 필요했다. 흐리멍덩한 정신에도 뜻을 유추한 선재가 고개만 조용히 끄덕였다.
“그때 내가 아새끼들 이름 외워가 니 찾아갈 거니까.”
역시 다음 생을 얘기한 거구나, 싶은 선재가 입꼬리를 미세하게 올렸다. 가끔 감동적인 말을 할 때가 있는데, 타이밍상 지금인 것 같았다.
“니 내 보면 바로 바지 까고 대줘야 된다.”
몽글거리던 감정에 누가 찬물을 부었나 싶다. 평온한 표정이던 선재가 무표정이 되어 범진을 응시했다.
“어? 그게 길바닥이면 저 골목 드가서 대주고, 어디 찻집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하면 공중화장실이라도 드가서 닌 바로 이거 내밀어야 된다, 이 말이다. 알았냐.”
엉덩이를 슬쩍 움켜잡은 범진을 향해 팔을 든 선재가, 힘이 다 빠진 채로 범진의 뺨을 찰싹 때렸다.
“…쪽팔려….”
몇 년에 한 번 할까 말까 한 말을 입 밖으로 낸 선재가 아! 하며 제 뺨을 감싸 쥔 범진을 향해 끝까지 말했다.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 나랑 있을 때만 해….
“씨팔, 나도 품위란 게 있다.”
뺨 맞은 건 금세 잊었는지, 범진이 저도 품위가 있다며 선재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반사적으로 눈 감은 선재가 그 사이로 들어오는 혀를 마지못해, 그러나 기분 좋은 듯 맞았다.
* * *
그래도 배를 타보긴 했다고, 준희는 집으로 돌아와선 배 바앙, 하는 소리를 덜 내게 되었다.
배에 흥미를 잃어버린 건 아니었다. 이젠 다른 배로 관심사를 바꾸었다.
강변에 뜬 오리배들을 취재한 영상이 뉴스로 나온 적이 있었다. 저거는 모지요? 모일까요? 물어본 준희에게 오리배, 하는 대답을 내놓자마자 아이는 오리배 부릉부릉, 하는 소리를 냈었다. ‘배 바앙’처럼 계속 한 건 아닌데 그래도 오리배 태워주는 건 쉬우니까. 범진과 주말에 나들이라도 가볼 생각이 있었다.
하원 시간에 맞춰 밖으로 나간 선재가 차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5분이 지나자 도로를 타고 내려오는 차 한 대가 보였다. 바로 앞에 멈춘 차에는 양팔을 한껏 벌린 준희가 있었다. 똑같이 팔을 벌려 안아준 선재가 아이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감사합니다.”
“네, 아버님. 안녕히 들어가세요. 준희 안녕!”
“네에, 성생님…. 안영이 가세요…?”
두 손을 배에 모은 준희가 몸이 작은 기역 자가 되도록 상체를 숙였다. 웃으며 그 모습을 바라본 선재가 차 문 닫히는 소리를 듣곤 준희의 손을 잡았다. 그대로 아이를 뒤로 끌어주는데, 선재의 시선이 준희의 팔에 닿았다. 못 보던 팔찌가 팔에 채워져 있어서다. 플라스틱…. 어디 인형 세트에나 있을 법한 장난감 팔찌였다.
“준희 팔찌 이거 뭐야…?”
“녜에. 주니 칭구랑 바껐써요.”
“응?”
“주니에 칭구랑….”
혹시 싶어 팔을 만져봐도 잡히는 게 없었다. 선재는 아이 목도 더듬거리며 만져 보았다. 그러자 두툼한 옷에 숨어 있던 장난감 목걸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걸어가며 아이 목을 더듬거린지라, 준희는 영문도 모르고 길만 밟고 있었다. 플라스틱 목걸이를 만지던 선재가 아이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원래 준희 팔찌랑 목걸이는…?”
“녜에. 칭구한테 줬어요.”
“아…….”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준희가 친구에게 준 건 범진이 백금으로 맞춰온 미아방지 목걸이와 팔찌였다. 준희의 이름과 범진의 번호, 선재의 번호가 새겨진 기린 펜던트엔 최상급 천연석까지 박혀 있었다. 그걸 플라스틱 목걸이랑 바꿔오다니. 선재는 뚜벅뚜벅 나아가는 아이에겐 차마 무슨 말을 더 하지 못했다.
“주니 칭구랑 가자도 바꺼서 먹고, 목거리도 바껐써요.”
“응…. 그랬어…?”
“네에.”
귀금속은 과자가 아닌데…. 그런 말을 해봤자 준희가 알아들을 리 없었다. 자랑하듯 그 말을 내뱉은 아이는 어느새 문 앞에 도착해 찍찍찍 소리를 내고 있었다. 도어락 소리를 흉내 내는 거였다. 마지못해 다가간 선재가 문을 열어주자, 아이는 포르르 걸어가 신발장 문턱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선재는 안 보는 척 준희의 발목도 쳐다보았다. 목걸이, 팔찌, 발찌. 이렇게 맞췄는데, 다행히 통통한 발목에선 뭐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발에는 안 채워도 된다고 말했던 선재였지만 범진이 이런 건 오만 데 다 둘러야 잘난 자식인 줄 안다고 해 어쩔 수 없었다.
“친구 누구랑 바꿨어? 선생님은 아셔?”
“재워니요.”
한 가지 질문에만 답을 낸 준희에게 선재가 다시 물었다.
“응…. 선생님은 아셔?”
“으으응.”
고개 젓는 아이 모습에, 선재는 그저 웃으며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건 준희 거야, 준희가 잘 간직해야 해, 하는 말이 아이에게 얼마나 중요하게 들리겠나. 그저 제가 재원이란 아이의 부모님에게 연락하는 수밖엔 없을 듯했다. 용케 신발을 벗은 아이는 이번엔 놀이방 근처에 세워둔 곰인형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커다란 곰 머리를 안고 한다는 말은 “사랑해요.”였다. 뭐 하는 거지? 복잡한 생각을 뒤로한 선재가 준희를 향해 순수한 의문만을 품었다. 한 몇 초 곰인형에게 붙어 있던 준희는 바쁘게 숨을 내뱉으며 선재를 향해서도 다가왔다.
“사랑애요.”
자세히 들어보면 여전히 사랑애요, 하고 말하는 아이. 다리를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아이에게 손을 내민 선재도 대답을 해주었다.
“응, 아빠도… 준희 사랑해. 근데 이거 뭐 하는 거야?”
“수, 숙제예요. 헤.”
사랑한다고 말하기를 지령처럼 받았나 보았다. 착실히 이행하는 아이가 숙제라며 헤, 웃는 걸 보니 다른 생각이 더 들지도 않는다. 선재는 또 사랑애요, 하며 팔을 벌리는 아이에겐 품을 크게 열어주었다. 그래, 아빠도 사랑해.
그날 저녁으로 식탁에 올라온 건 미역국과 동그랑땡, 백김치, 포도, 저염 단무지였다. 미역국과 동그랑땡은 영채의 작품이고, 백김치는 늘 주문해 먹는 업체의 김치…. 선재는 그래도 포도는 한 알 한 알 깨끗하게 씻었다. 저염 단무지도 아이들 입에 들어갈 거라 얼마나 정성 들여 썰어냈는지 모른다.
이른 저녁을 먹은 재혁은 방에서 잠이 들었고, 준희만 저녁 시간에 맞춰 밥을 먹는 중이었다. 얼마나 열중해서 먹는지 인중에 미역이 붙어 있었다. 그걸 쳐다본 선재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준희 아저씨 됐다.”
“주니 아저씨?”
“응. 여기 수염 붙이고.”
선재가 제 인중에 손가락을 댄 채로 준희를 놀렸다. 아이는 그 얼굴을 가만 쳐다보다 웅? 하고 미역국밥에 수저만 빠트렸다. 이내 숟가락을 들어 올린 아이가 선재를 향해 팔을 쭉 뻗었다.
“아니야, 준희 먹어. 아빠는 진짜 배불러.”
“배에 또 주니에 아가 있서요?”
“…어? 아니, 아빠 배에 아기 이제 없어. 준희랑 재혁이랑 다 태어나서….”
“네에.”
밥을 많이 먹어 배가 부르단 소리였는데. 배 내미는 시늉을 해선지 아이가 이상하게 알아들었다. 그래도 차분하게 설명해준 선재가 얇게 자른 단무지와 깨끗하게 씻은 포도알을 납작한 접시 위에다 놓아주었다.
“준희 이것도 먹고….”
“…네에.”
제일 깨끗하고 좋아 보이는 포도알만 떼어내던 선재가 현관에서 들린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범진이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윙크를 하더니, 뒤에 있던 상자를 들고서야 안으로 제대로 들어왔다. 상자엔 고구마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선재는 일어나 손을 슬쩍 들었다. 가끔 손을 들고 안녕, 하고 인사할 때가 있는데 방금도 그런 식으로 손바닥을 보인 것이다.
범진은 상자는 내려놓았지만, 올라간 입꼬리를 내리진 못했다. 저 예쁜 얼굴로 뻣뻣하고 어색하게 구는 게 취향에 맞아 환장할 노릇이었다.
어정쩡하게 몸을 일으켰던 선재는 범진이 주방 쪽으로 오면서 의자에 다시 앉았다. 식탁 가장자리에 앉아 있던 준희가 반가운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니 코 밑에 이거 뭐냐.”
그때 다가온 범진이 상체를 숙여 아이 입술에 뽀뽀를 했다. 짧게, 입술만 닿았다 떨어지는가 싶었지만 아이 인중에 달라붙은 미역까지도 빨아 먹은 것 같았다. 가려졌다 드러난 준희의 얼굴이 깨끗해져 있었다.
“주니가 미억국을 잘 머거요.”
“그냐?”
“네에.”
아이가 작은 숟가락을 들고 환히 웃었다. “주니가 미억국을 잘 머거요.”는 자기 의견이 아니었다. 제 아빠가 영채에게 하는 말을 듣고 그대로 따라 한 것이었다. 선재는 그걸 듣고 혼자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한 손으로 눈을 쓱 닦으며 앞을 보자, 옆으로 상체를 꺾은 범진의 얼굴이 보였다. 여태 외투도 안 벗고 이런 장난을 치고 있었다. 손을 뻗은 선재가 범진의 얼굴을 똑바로 세웠다.
“왜 웃냐.”
“…준희 웃겨서.”
“왜.”
저 말투, 하고 말을 꺼내려 했으나 오늘 낮에 있었던 일부터가 생각이 났다. 어린이집에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재원의 부모님과 연락까지 나누었지만, 답은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죄송하다고, 당장 내일 돌려드리겠다는 재원의 어머니와 달리, 아이는 바꿔서 가지게 된 목걸이와 팔찌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가져가? 시러! 이제 내 거야! 하는 소리 같은 걸 분명 들었었다. 그 친구와 어린이집에서 계속 봐야 하니, 억지로 빼앗는다고 끝날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아, 준희, 아부지한테 사과해야지.”
“네에. 아부지 미안함니다.”
말을 듣자마자 사과한 준희가 얼굴로는 또 이이, 웃기만 했다. 그래도 아부지가 준 거 그렇게 바꾸고 하면 안 되지? 준희가 아부지 오면 미안합니다, 해야 해? 그런 말을 했더니 저렇게 녹음한 것처럼 미안하단 소리를 입에 담은 것이다. 웃음을 참은 선재가 뒤돌아보는 범진을 쳐다보았다. 사과를 왜 하는지, 당연히 모르겠단 얼굴이었다. 뭐가 미안하냐, 하고 턱을 든 범진이 준희를 다시 쳐다보았다.
“니, 뭐.”
의자 하나를 꺼내 앉은 범진이 아이와 눈을 마주쳤다.
“응?”
빵긋 웃으며 응? 하고 의아해하는 준희에게 선재가 대신 말했다.
“준희 오늘 목걸이랑 팔찌, 친구랑 바꿨지.”
“뭐?”
범진이 어이없이 웃는 얼굴로 선재를 뒤돌아보았다.
“네에. 아부지. 이거. 주니.”
마침 식탁에 플라스틱 목걸이와 팔찌가 있었다. 바로 앞에 있던 접시를 뒤로 치워낸 선재가 준희가 말하는 걸 쳐다보았다. 뭘 잘못했는지 깨달은 아이가 범진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하려나 싶었다. 왠지 뿌듯한 얼굴로 준희를 쳐다보게 되는데,
“주니꺼.”
그건 아니었다.
단순히 준희 거, 하고 자랑하려고 목걸이와 팔찌를 가리킨 아이가 기대감에 찬 얼굴로 범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니 원래 팔찌랑 목걸이랑 바깠다고? 이걸로?”
“네에.”
“화아, 진짜냐.”
범진이 입꼬리 한쪽만 올린 채로 뒤를 돌았다. 눈이 마주친 선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 앉았다.
“이거 완전히 돈 먹는 하마네, 하마야.”
‘하마’에 맞춰 준희의 볼을 두 번,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린 범진이 고개를 양쪽으로 저었다.
“니 그거 한 개 얼마짜린지 아냐?”
범진이 두 팔을 뻗으며 묻자, 준희가 기다렸다는 듯 범진의 품에 안겨들었다. 형아라고 재혁에게 아가, 아가, 하지만 선재의 눈엔 준희가 더 아기 같았다. 개구리 포즈로 범진의 품으로 넘어간 아이가 영문도 모르고 눈을 끔벅였다. 아이 입장에선 목걸이를 바꾼 게 놀이에 불과할 테니까.
“니 아부지도 바꿀 수 있냐.”
“네에…?”
얼마짜린지 아느냔 질문에 웃기만 하던 아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심각해져서 네에? 하고 고개를 드는데 범진이 어? 하며 다리를 떨었다. 아이가 흔들리면서 범진의 옷자락을 꼭 쥐었다.
“아부지가 준 거 친구랑 바꾸고 그러면은, 어? 아부지도 바꿀 수 있지.”
“…주니에 아부지는 항개에요….”
“뭐?”
“항개….”
1개. 바꿀 수 없고, 아부지는 오직 하나뿐이란 말을 아이는 그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했다. 선재는 그 말을 하고 범진에게 울 듯이 안겨드는 준희 때문에 손으로 눈을 가렸다. 분명 혼내야 하는 게 맞는데, 낮에는 물론, 지금까지도 어떻게 꾸중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너무 웃기고 사랑스러워 웃음만 자꾸 샜다.
“한 개뿐이 없는데 아부지를 그렇게 바꾼다고.”
“으으응…. 아부지는 안 바꺼요….”
“아부지가 주는 보석은 바꾸고?”
“보서억?”
“니 목에. 목걸이랑. 팔찌랑.”
“주니 칭구 집에….”
“아부지가 줬는데 그게 니 친구 집에 있음 되냐. 안 되냐.”
“안 대요.”
“그지?”
“네에.”
아이가 제대로 알아들었나 모르겠다. 선재가 의심을 담은 눈으로 준희를 쳐다봤다. 알아들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니 그 알맹이 그게 깜찍해서 어? 니 친구들이 다 바꾸자고 했나 보네.”
“네에.”
범진이 혼잣말하듯 하는 소리에 준희가 그저 네, 하고만 대답했다.
선재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었다. 알맹이?
“내가 그거를 기린 말고, 다른 걸로 한 개 더 맞춰봐야겠다.”
“뭐…. 펜던트?”
대화에 끼어든 선재가 궁금한 듯 물었다.
“그래.”
아기 기린 펜던트. 범진이 골랐다고 보기엔 너무 귀여운 디자인이었다. 눈과 뿔 부분에 박힌 천연석은 범진의 스타일인데, 통통한 아기 기린은 범진과 괴리감이 있었다. 당연히 범진의 취향은 아니었고, 이게 아이들이 좋아하는 디자인이라고 추천을 받았다고 했다. 인기 많은 디자인이라 아이들이 모두 목걸이를 탐냈다… 그럴 수도 있겠네. 선재도 범진의 생각에 반쯤 동의해 고개를 끄덕였다.
항개, 아부지는 항개, 하던 준희는 뒤늦게 범진의 품에서 내려왔다. 그대로 거실로 향한 아이는 소파 위로 철퍼덕 엎어졌다. 느릿하게 고개 드는 아이 모습까지 지켜본 뒤에야 선재는 눈을 돌렸다.
포도알을 껍질째 씹어먹던 범진이 뭐라고 말을 건네서였다. 뭐라고? 하며 다시 묻자, 범진은 이거 니가 뗐냐고, 하며 포도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어.”
“니가 뗐을 줄 알았다.”
“…왜. 이상해서?”
“누가 이상하다냐? 니 약간 그거 있네. 자격지심.”
“…네가 하도 나 이런 거 못한다고 하니까.”
“야, 포도알 떼는 것도 못하면은 어? 병원 가봐야 된다.”
“…….”
“하, 이거 또 삐질라 하네.”
“안 삐졌는데….”
“주디 한 댓 발로 티 나와놓고, 안 삐졌단다.”
“입 안 내밀었는데….”
“안 삐짔는데…. 안 내밀읐는데….”
“따라 하지 마.”
“떠러 허지 머.”
우습게 흉내 낸 범진이 실실 웃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선재의 허리를 손으로 감자, 선재는 얼굴을 뒤로 빼고 눈을 멀리로 돌렸다. 그러자 거실에서 놀고 있는 아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소파에 누워 팔과 다리를 뾰족하게 뻗은 모습. 저렇게 로켓 모양을 하고 저 좁은 면적에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게 요즘 아이의 취미였다. 한 번도 떨어진 적은 없지만, 혹시 떨어질까 걱정이 된다.
“준희, 그거 하지 말라고, 아빠가….”
그 말에 준희는 헥헥대면서도 네에, 하며 반응을 해왔다. 로켓처럼 팔을 쭉 뻗은 채로 가만히 멈춰 있었다. 저 상태로 그만하란 말이 아니었는데….
옆에 달라붙은 범진을 치워내며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방 안에 있던 재혁도 울기 시작했다.
평범해서 특별한, 어느 저녁이었다.
2주일 뒤, 범진이 새로 제작해온 목걸이와 팔찌엔 무시무시한 도깨비 펜던트가 붙어 있었다. 만화에서 나오는 귀여운 도깨비라고 생각한 선재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범진의 몸에 새겨진 그 도깨비 얼굴과 비슷했다. 절에 가면 탱화에도 이런 도깨비가 있지 않나? 이런 걸 아이 목걸이랑 팔찌로 한다고? 도대체 어디서 제작은 해왔을까 싶었다.
무엇보다 아이가 이런 걸 마음에 들어 할 리가 없었다.
“애기. 아부지가 이거 해왔는데. 봐봐라.”
디테일도 쓸데없이 좋고 난리였다. 커다란 콧구멍에 번뜩이는 사백안, 수북한 수염, 훤히 드러난 이빨 따위가 눈을 사로잡았다. 뿔엔 붉은 유색석이 박혀 있었다. 그 뒤에 어울리지 않게 음각된 글자, ‘아기 최준희’
휴대전화 번호 두 개는 ‘아기 최준희’를 둥글게 감싼 형태였다. 이전 목걸이에도 ‘아기’를 새기더니 또 ‘아기’를 붙여서 제작했나 보다.
아무튼, 준희가 싫다고 고개 젓는 상황만 그려졌다.
다가온 준희의 표정을 살핀 선재가 손부터 뻗었다.
“준희 맘에 안 들면….”
“니. 아부지가 제일 쎈 거 알지. 이기 뭔 거 같냐. 아부지 몸에 있는 거 아니냐. 이거만 끼면은 니는 그냥 어? 천하무적 돼 뻐리는 거거든?”
“주니에 아부지?”
범진이 그렇게 말하든 말든, 아이는 제 작은 손으로 목걸이를 쥐어 펜던트를 신기하단 눈으로 쳐다봤다. 그게 아부지라고 생각한 건지 자꾸 같은 말을 반복해서 했다. 주니에 아부지? 주니에? 하고 범진의 부추김에 맞춰 목걸이와 대화라도 시도하는 듯했다.
“그래, 그게 일종의 니 아부지다.”
“네에. 주니. 이러케.”
착용은 할 줄 모르는 아이가 목걸이를 제 연한 쇄골뼈에 붙이곤 배를 내밀었다. 이렇게, 하면 목에 그게 걸릴 줄 안 모양이다. 스티커나 냉장고 자석을 붙이듯 제 쇄골 위쪽에 목걸이를 붙여본 아이가 손을 떼자마자 바닥으로 떨어지는 목걸이에 이…. 하고 상체를 숙였다.
“준희 이거 하고 싶어…?”
먼저 허리를 숙인 선재가 그 목걸이를 주워 올렸다.
“녜! 주니! 아부지랑!”
“이거 아부지 아니고…. 도깨빈데….”
사실을 짚어준 선재가 준희의 표정을 살폈다. 준희는 선재의 말에 고개만 끄덕이며 똑같은 말을 또 외쳤다.
“주니 아부지!”
역시 내 애기다, 하며 준희를 들어 올린 범진은 팔찌도 주섬주섬 꺼냈다. 아이를 안은 채여서 쓸 수 있는 손이 하나밖에 없었다. 연신 주니 아부지, 주니, 하며 몸을 움직이는 준희에게 선재가 제 손에 있던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범진은 뭉툭한 손끝으로 팔찌를 계속 만지다 안 되겠던지 쓰읍, 하며 입으로 그 팔찌를 가져갔다.
“내가 할게.”
팔찌를 손에서 뺏어 든 선재가 고리를 풀어 준희의 팔에 감아 주었다.
“이야, 이거 대회 나가야 된다. 니 일등이그든, 지금?”
보자며 아이를 내려준 범진이 희한한 띄워주기를 시작했다. 그 말에 아이는 또 배부터 내밀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입술은 왜 앙다무는지? 결연한 의지가 엿보이는 얼굴에 선재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범진이 다짜고짜 대회에 나가야 된다고 말하는 것도 웃기고, 일등이란 말에 장군 같은 포즈를 취하는 아이 모습은 더 웃겼다.
“주니, 일뜽.”
“그래. 니 일등.”
범진이 일등을 확인시켜주곤 아이를 안아 올렸다. 한 걸음 물러나 아이를 쳐다보고 있던 선재의 입에도 옅은 미소가 피었다. 서로 되게 안 맞을 것 같은데 이렇게 죽이 잘 맞아서…. 아이는 범진을 잘 알지 못할 때부터 아부지, 아부지, 하며 범진을 따랐었다. 혹시 아저씨가 시켰어? 그 아저씨가 괴롭혔지? 물어봐도 아이는 고개만 갸웃하고 저를 바라봤을 뿐이었다. 그때를 떠올린 선재가 신기하단 눈으로 준희를 쳐다봤다.
“내가 니껏도 맞춰 왔는데.”
아이를 안은 채 주머니에 손을 넣은 범진이 가는 체인 같은 걸 꺼냈다.
이거, 하고 내민 건 목걸이였다.
“뭔데…?”
“니껏도 주문하는 김에 넣었거덩. 봐봐라.”
목걸이를 건네받은 선재가 제 손에서 감겨있던 부분을 풀었다. 허공으로 착, 떨어지는 목걸이엔 그새 익숙해진 뭔가가 달려 있었다. 도깨비 펜던트였다. 준희 목걸이에 달려 있던 것보다 약간 더 컸다.
“재혁이 거?”
제 거라고는 하지만 제 것 같지는 않고, 그렇다고 재혁의 것이라고 보기엔 너무 길었다. 집에만 있는 아기에게 미아방지 목걸이를 걸어줄 필요도 없는데…. 모르겠단 얼굴로 줄을 감아본 선재가 펜던트 뒷면에 눈길을 보냈다.
“내 아기… 민….”
차마 제 이름까지 읽어내지 못한 선재가 말을 멈췄다. 내 아기 민선재. 바로 아래엔 범진의 번호가 음각돼 있었다.
“내가 니도 어디서 잃어버릴까 봐 겁나서.”
“…내가 이상한 짓 그만하랬지.”
이기 이상한 짓이라고? 하며 범진은 아이를 고쳐 안았다. 아이 목에서 작게 쟁그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왜, 니도 내 애기 맞지.”
“…웃기네…. 할 거면 네가 해야지, 나이도 여덟 살이나….”
투덜거린 선재가 그러면서도 계속 목걸이 줄을 만졌다. 펜던트가 손에 집히자 그 부분엔 손끝이 더 오래 머물렀다. 좀 정상적인 거 주면 어디가 덧나서. 결혼반지도 중국 부호들이나 할 법한 걸 해오고, 얼마 전에 선물이라고 내밀었던 금목걸이도 체인이 터무니없이 굵었다. 이젠 미아방지 목걸이를, 그것도 무서운 도깨비 얼굴로 해와 저를 난감하게 만들고….
“나이 어리다고 애기라 하냐?”
보통은 그렇다.
“낸테 애기 같으면 그게 애기지.”
“…….”
당당한 얼굴이던 준희는 범진의 품에서 입을 어, 벌리고 끔벅끔벅 졸고 있었다. 선재는 다짜고짜 우기는 범진으로부터 눈을 내려 아이 얼굴만 쳐다봤다.
아이 머리로 손을 뻗은 선재가 준희 나한테 줘, 하고 아이를 받아 들었다.
원래 30분 전에 잠들었어야 했는데, 범진이 하필 낮에 목걸이를 찾아와 아이가 낮잠 잘 타이밍을 놓쳤다. 선재는 준희를 안고 재혁이 잠든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어 재혁 바로 옆에 몸집이 약간 더 큰 준희를 뉘어주었다. 많이 자는 재혁 때문에 낮에도 커튼 칠 일이 잘 없다. 어두운 방 안을 둘러본 선재가 아이들 얼굴에 각각 눈길을 보내다 방 밖으로 나왔다.
“야.”
“…왜.”
껄렁하게 다가오는 범진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소리 나지 않게 방문을 닫은 선재가 니, 하고 말문을 여는 범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약 먹었냐.”
“무슨 약.”
보약 말하는 건가. 하루 한 번 아침에 먹는 거라 이미 먹은 후였다.
“보약은 아까.”
“약 같은 것도 씨발, 안 빠는데 쌍판이 이래 이쁠 수가 있냐.”
“…….”
“이래 생긴 아가 내 새끼를 둘이나 낳고.”
어? 말이 되냐? 하는 것에 대꾸해줄 말은 없었다. 선재는 준희까지 ‘내 새끼’로 쳐주는 범진에게 위화감도 느끼지 못했다. 매번 저렇게 말해 선재도 이제 준희를 범진과 낳은 아이라고 착각할 때가 많았다. 준희의 어떤 모습을 보며 저런 건 최범진을 닮은 건가…? 생각하다 아차, 하곤 했다.
“…….”
“야, 그리고 뭐? 니가 애기 아니라고? 이래, 이래 봐도 애기구만.”
범진은 이래, 하면서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가 금세 선재를 향해 눈빛을 쏘았다.
“좀… 그만해. 알겠으니까.”
사람을 이렇게 세워놓고 저런 소리를 쉽게 한다. 선재는 아무리 둘만 있어도 노골적인 범진의 표현에는 적응을 못 할 때가 많았다. 아니, 적응은 됐는데 무슨 반응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와 허리를 감는 범진의 손길엔 어깨가 모였다.
“목걸이는.”
“…주머니에.”
“안 거냐?”
“…….”
말없이 범진을 올려다본 선재가 갑자기 닿는 입엔 고개를 뒤로 뺐다. 난데없는 공격이었다.
“하, 이거 아직도 뽀뽀할 때 놀라네. 어? 야. 니 왤케 깜찍하냐.”
손으로 선재의 콧방울을 세게 잡았다 놔준 범진이 두 손으로 코를 가리는 선재의 행동에 또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와하, 하고 고개를 꺾으면서까지 웃었다.
“이러면 코 아프다고.”
“아픔 내가 낫게 해주면 되지.”
아니냐, 하면서 다가온 범진의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웃음을 다 걷어내지 못해, 얼굴에 은근한 미소가 떠 있었다. 그다음은 뻔했다. 선재는 바로 입 안으로 들어온 범진의 혀 때문에 숨이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허리를 가볍게 감고 있던 손도 선재의 얼굴로 올라와 뺨을 우악스레 쥐었다. 우읍, 우웅, 소리가 날 때마다 범진이 혀끝으로 연한 살을 사정없이 쓸고 문질렀다.
입술이 떨어진 건 몇 분이 지나서였다. 만족한 얼굴을 한 범진이 곧바로 떨어진 선재의 얼굴을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부은 입술을 우, 내민 선재의 얼굴이 드러났다. 보얬던 살에 붉은 기가 돌고 있고, 눈 아래도 촉촉하게 올라와 있다. 착하게, 가만히 잘 살던 사람을 가만 내버려 두지 않는 이 얼굴. 이 쌍판.
“니 어디 가서 내 잊어버리면은. 목걸이 이거.”
선재의 주머니에 손을 넣은 범진이 목걸이를 꺼냈다. 아이 팔찌보단 고리가 커 범진도 두 번 시도 만에 줄을 일자로 펼칠 수 있었다. 줄의 양 끝을 잡고 선재를 안듯이 목 뒤로 손을 가져간 범진이 또 두 번 시도 만에 고리를 제대로 채워주었다. 손을 떼자, 도깨비 펜던트가 선재의 목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선재도 살벌한 도깨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거 사람들한테 보여주면 된다. 알았지.”
어이가 없어 말도 안 나오려는데, 범진은 짐짓 심각한 얼굴로만 말을 이었다.
“…아니….”
진심인가? 사람을 뭘로 보고….
키스 때문에 붉어진 것도 있지만, 그런 취급을 당하는 것에도 열이 올랐다. 선재는 무슨 그런 말을 하느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라 입술을 자꾸 벙긋댔다. 범진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알았냐고, 알겠냐고 말을 묻고 있어 그마저도 하기 쉽지 않았다. 왠지 마음이 동해 침만 꿀꺽 삼키게 되는 이 상황에서,
“어? 니는 이래 생겨가지고 나이가 한 칠십이 돼도 납치당할 가능성이 있그든.”
범진이 그런 말을 덧붙였다.
“1절만 해.”
“밖에서 넋 놓고 있다가 그 꼴 나면 안 되니까는.”
“…….”
“내를 잃어버렸다. 화장실 갔다가 어디 엉뚱한 데로 나가버렸다. 그러면 바로 이거를 어? 옆에 있는 사람한테 보여주라고.”
“…….”
“자, 따라 해봐라. 우리 남편 찾아주세요.”
“뭐… 좀, 그만하지….”
“쓰읍, 해보라고.”
선재는 뭘 했다 하면 끝까지 하는 범진 때문에 골치가 살짝 아팠다.
“…이거 보여줄게. 됐지.”
손으로 펜던트를 잡은 선재가 옛다, 하고 한마디를 던졌다.
“아니, 자. 내가 옆에 있는 사람이다. 처음 보는.”
“…….”
범진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목까지 가다듬었다. 곧바로 한다는 말은 이거였다.
“왜요, 이래 이쁜데 무슨 일이 있습니까?”
…누가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렇게 말하나?
선재는 행인 역을 자처하면서까지 시뮬레이션을 펼치는 범진이 어이가 없었다.
“아….”
그래도 상황을 끝내려면 제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어깨까지 흔들어 대는 범진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어렵게 입을 연 선재가 숨을 가다듬었다.
“…하아… 세요….”
“예? 뭐라고요. 잘 안 들리는데요.”
“우리 남편… 찾아 주, 주세요….”
“아아, 남편. 오케이. 뭐. 여기 전화뻔호가 있나?”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도깨비 펜던트를 들춰본 범진이 어, 여기 있네, 했다.
“…….”
“남편 이름이 뭔데요.”
“…….”
“남편 이름이 뭐냐고요.”
점점 원래의 험악한 말투로 돌아가려 했다. 속 시원히 반응해주지 않는 제 태도에 갈증이라도 느꼈는지, 화아, 하는 소리도 들렸다. 흥분하거나 어이가 없을 때 저런 소리를 내뱉는다. 선재가 눈썹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끼다 입을 열었다.
“최… 범진이요.”
“아아. 최범진 씨.”
범진은 이름까지 들었는데도 모른 척하며 뒷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버튼을 띡, 눌러 화면을 쳐다보곤, 최범진, 하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그러다 행인에서 역할을 바꾸었는지 눈에 빛을 내며 야, 하고 선재의 어깨를 두 손으로 쥐었다. 이제 최범진 역을 할 생각인가 보다.
“니 내가 손 딱 잡고 따라오랬지.”
섹스하기 직전에 역할극을 종종 시도하는 범진을 알지만. 맨정신으로 이러자니 대체 무슨 속셈인지 몰랐다. 범진은 큰 손을 올려 제 어깨를 감았다. 일단, 하며 범진이 이끈 곳은 소파 쪽이었다. 털썩, 소파에 앉게 된 선재가 의아한 눈을 들어 범진을 쳐다보았다.
“뭐 하는데…?”
“뭐 하긴. 니 혼낼라고 그라지.”
말하며 옆자리에 앉은 범진이 선재의 머리통을 제 쪽으로 당겨 입을 맞췄다. 쪽, 짧게 뽀뽀하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니가 그래서 애기란 거다. 어디 가서 길이나 잃고.”
“아니, 내가 언제…!”
“어? 내 없음 어쨌을 건데.”
어이가 없어 입이 반쯤 열렸다 닫혔다. 얼굴에 미소가 떠 있었지만, 말에 걱정하는 기색이 분명 서렸다. 안도하는 것까지 진심으로 느껴지자 외려 말을 잃게 되었다. 범진이 코에 쭉, 뽀뽀하는 것에 얼굴을 찡그리기만 했다. 까칠하게 올라온 수염 때문에 얼굴이 따가웠다.
“니 딱 말해봐. 잘못했지.”
“…….”
눈만 올려 범진의 얼굴을 쳐다본 선재가 대답 안 하냐, 하고 다가오는 얼굴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마에 쭉,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고서야, 선재의 눈이 천천히 열렸다.
“내 손 놓치고 그래 딴 길로 새면은. 누가 떡이나 물어 주냐고.”
“…아, 알았어.”
마지못해 알겠다고 대답한 선재가 꽉 잡힌 어깨를 앞으로 빼내려 했다.
“알았냐? 니 딱, 길 안 잃을라면 내 손 잘 잡아야겠지.”
“…어.”
바로 앞에서 대답을 종용해와, 긍정하는 수밖엔 없는 듯했다.
“말해봐라, 잘못했다고. 그럼 내가 용서해준다.”
“…….”
사과를 바라는 사람치곤 너무 웃는 거 아닌가? 선재는 혼자 걱정하고, 혼자 혼내고, 혼자 좋아 죽기까지 하는 범진의 태도에 헛웃음이 흘렀다. 살짝 벌어진 입술 새로 허, 하는 소리가 새자, 범진이 뭐를 허! 는 허! 야, 하고 입을 벌려 코로 돌진했다. 으, 하는 소리와 함께 깨물린 코로 선재의 손이 곧장 올라갔다.
“아, 왜.”
“아프냐. 아픔 내가 빨아준다고.”
“…됐어.”
“니, 어쨌든.”
“…….”
“함부로 내 손 놓고 하면 진짜 혼난다. 알았냐.”
“…알았어.”
“오늘 잘못한 거 그럼, 마지막으로 다 읊어봐라.”
잘못한 것도 없는데 뭘 읊기까지 하라는지. 선재는 그러면서 범진의 반쯤 벌어진 입에 위협을 느꼈다. 또 코를 깨물릴 것 같아 아랫입술을 슬쩍 물어본 선재가 범진의 말을 토대로 잘못 같지도 않은 잘못을 하나 말했다.
“…너… 손 제대로 안 잡은 거….”
“너가 누군데. 누구.”
“…남편.”
“남편 손 안 잡은 그거 잘못했냐?”
확인하듯 묻는 범진의 말에 선재가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어떻게든 받아주고, 또 어이없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선재의 얼굴은 꽤 붉어진 채였다. 범진은 내가 이번만 용서해준다, 하며 선재의 뺨을 한 손으로 몇 번이나 눌렀다. 누를 때마다 입술이 튀어나오던 선재가 눈을 아래로 내렸다. 정면에서 보이는 범진을 피하려고 했던 거지만, 눈에 보인 건 범진의 두둑해진 지퍼 부근이었다. 뭘 한 것도 없는데….
그 황당한 놀이에 이 지경이 되었단 건가?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 진짜 변탠가? 혼란한 마음을 느끼기도 잠시, 범진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남편 마누라 사이면 씹을 하는 것도 당연지사….”
대낮에 그런 말을 한 범진이 부끄러웠다. 선재는 혹시 문이 열렸을까 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말투도 옛날에 살았을 법한 사람처럼 구사해 현실감이 없었다. 얼마 전에 같이 시대극을 봤는데, 그 영향인가 싶기도 하고. 곧 들린 이리 와 봐라, 하는 소리가 무색하게 범진은 제가 먼저 다가오고 있었다. 선재는 어느 틈에 소파 끝까지 몰려 있었다. 돌진해오는 범진 앞에서 눈만 푹 감은 선재가 입술로 물컹, 닿아오는 느낌에 침을 삼켰다.
* * *
“…….”
평소보다 잠에서 일찍 깬 건 범진의 손길 때문이었다. 뭘 지우려는 듯한, 입술 부근을 만지는 손길에 눈을 뜬 선재가 뭐…. 하고 잠긴 목소리를 냈다. 얼굴에, 이, 뭐가, 하는 소리가 계속 들려 잠을 다시 청할 순 없었다. 못 이긴 척 침대를 더듬거려 휴대폰을 잡은 선재가 얼굴을 화면에 비춰보았다.
어?
방 안이 어두워 카메라로 봐도 정확한 구분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입술 주변이 얼룩덜룩한 건 눈에 띄었다. 그래도 뭐가 또렷하게 보이는 건 아니라서. 미간을 조이며 화면을 쳐다보던 선재가 몸을 일으켰다.
방을 나와 욕실로 들어간 선재는 거울로 곧장 보이는 제 얼굴에 어깨를 들썩 떨었다. 어디 무서운 광대 영화에나 나올 듯한 얼굴이었다. 아니, 어쩌다가….
찬물을 튼 선재가 확인하듯 거울을 쳐다봤다.
“…….”
혹시 뭐가 묻었나 싶어 물로도 적셔보는데, 바뀌는 게 없었다.
입술을 감쳐 물어보자, 커다란 반찬통이라도 입에 물고 잔 듯한 자국이 진하게 올라왔다.
도가 지나치게 우스꽝스러웠다. 선재는 뒤로 가서 제 얼굴을 흘끔 봤다가, 손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도 거울을 봤다. 욕조에 들어가서도 제 얼굴을 훔쳐보듯 쳐다봤다.
어디서, 어떤 각도로 봐도 자국이 숨겨지지 않았다. 웃기고 이상했다.
화장실에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사이, 아이가 깼는지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범진과 함께 대화를 나누는 소리였다.
범진은 너거 애미를 찾으러 가볼까, 하고 일부러 저를 자극하는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아이한테도 아침 인사를 건네야 하는데. 차마 저 문고리 돌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선재는 점점 가까워지는 범진의 느그 어쩌고 타령에도 거울만 의식하듯 쳐다봤다.
“어? 너거….”
문이 열리고 보인 건 멍한 얼굴의 범진이었다.
잽싸게 얼굴을 가린 선재가 눈과 코만 내밀고 범진을 쳐다봤다.
“니 뭐 하는데.”
“…세수.”
화장실이고, 반쯤 막힌 입으로 대답해 소리가 울리듯이 났다.
“내 잘못 본 줄 알았는데, 니 손 치아 봐.”
“싫은데. 내가 왜.”
무작정 우기고 본 선재가 위로 올라오는 범진의 팔에 온몸 힘을 바짝 주었다. 범진의 한쪽 팔에 안긴 아이도 눈을 끔벅거리며 선재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졸음 앉은 아이 눈이 퉁퉁하게 부어있었다.
곧 잡힌 팔이 범진의 힘 때문에 부들부들 떨렸다. 왜 이렇게 억지로 사람을, 막무가내로, 하는 생각은 길게 가지 못했다. 범진과 힘으로 오래 대치하고 있을 순 없었다. 생각할 겨를 자체가 없던 것이다. 얼굴로 가 있던 손이 맥없이 거둬지고, 얼굴도 거의 동시에 들렸다. 선재는 둥그런 통을 대고 쭉쭉 빨기라도 한 듯한 제 입 주변이 드러나, 욕실 타일만 쳐다봤다.
“…뭐냐, 이게.”
“…몰라.”
범진에게 이렇게 흉한 꼴을 보인 적이…. 생각하던 사이, 준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여미…?”
범진의 까슬까슬한 수염을 늘 ‘수염이’라고 말하던 아이라 말뜻이야 바로 이해가 되었다.
붉은 수염처럼 보이겠지…. 그래도 아이가 겁먹지 않았다면 다행이다. 선재는 자꾸 이 뭐냐, 이게, 하고 몸을 붙이려는 범진에게서 아이만 안아 들었다.
“준희, 아빠 얼굴 이상하지.”
“네에……. 아니오….”
버릇처럼 네, 대답했다가 금세 대답을 바꾸었다. 품에 안긴 아이에게 말을 걸며 주방으로 향한 선재가 의자를 꺼내 아이를 앉혀 주었다. 환한 기운이 창 안으로 들어와 집 안 어디든 밝았다. 선재는 냉장실에 있던 호박죽을 꺼내 아이 먹을 몫만 데웠다. 냄비에서 부드럽게 풀어진 죽을 그릇에 담고, 방울토마토도 씻어서 작은 체에 담았다.
“수, 수여미…?”
그렇게 죽과 방울토마토를 앞에다 놔주는데, 아이 눈이 계속해서 제 입 주변으로 향해 있었다.
선재는 입을 가린 채 식탁 의자에 앉았다. 계속 시선을 뺏으면 아이가 밥을 못 먹을 것 같아서였다.
“어, 아빠도 수염 나서 그래.”
그렇게 말하자 준희가 놀란 듯 입을 벌리고 움직임을 멈췄다. 작은 숟가락을 쥔 채로 아기 동상처럼 얼었다.
“준희, 왜…. 아빠도 오늘부터 수염 나. 아빠도 아부지처럼.”
아이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단 얼굴이었다. 벌게진 피부 때문에 어디 아픈 줄로 아는 모양이었다. 아부지처럼, 아부지랑 똑같은 거라고, 색만 좀 다를 뿐이라고, 몇 번이나 말하고서야 준희의 시선을 돌릴 수가 있었다. 여전히 우음…. 하고 궁금한 얼굴로 제 얼굴을 쳐다봤지만 더는 몸을 굳히진 않았다. 혹시 애가 체할까, 선재는 그것만 걱정했다. 최대한 아이의 시선을 분산하며 죽을 먹였다.
아이 등원까진 1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준희는 죽을 다 먹고, 티비 앞으로 가 이리저리 걸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준희 뭐. 리모컨?”
“네에. 주니 틀려주세요.”
“아.”
선재가 알겠단 얼굴로 리모컨을 찾았다. 원래 테이블 위에 두는데, 범진이 사용을 했는지 눈에 띄지 않았다. 곧바로 소파 쪽으로 다가선 선재가 쿠션 사이에서 검은 물체를 집어냈다.
“찾았다, 아빠가.”
아이가 그 소리에 들뜬 얼굴을 하고 두 팔을 들었다. 빨리하고 싶다고, 티비 앞에서 자세도 잡았다.
준희가 기다리는 건 체조 영상이었다.
캐릭터 인형들과 어린아이들이 함께 체조를 하는 영상인데, 언제부턴가 그걸 따라서 하고 있었다. 소파에서 로켓처럼 몸을 쭉 뻗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것도 다 체조 동작에서 따온 동작이었다. 영상을 틀어주고, 선재는 소파에 앉았다.
앞으로! 가자! 가자! 하고 성우가 말하자, 준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네, 네에, 하고 대답을 했다.
그러곤 거실을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영상에선 모두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데.
벌게진 입으로 미소를 짓던 선재가, 제 얼굴이 이런 걸 깨닫곤 표정을 굳혔다.
아이가 뒤로 돌아봤다가 깜짝 놀랄 수도 있었다.
한참 준희를 의식하던 선재는 눈을 돌려 안방 문을 쳐다봤다. 아까, 준희가 죽을 먹고 있을 때 주방으로 들어왔던 범진은 제 얼굴을 코앞에서 들여다보려 했다. 야, 이게 뭐지? 하고 웃어 기분이 나빴었다. 마침 재혁이 칭얼거리며 잠에서 깨, 아이나 보라고 범진을 밀어냈었는데. 잘 달랬나?
일어난 선재가 준희 체조하고 있어, 하곤 방문으로 향했다.
아이는 체조에 푹 빠져 선재를 보지도 않고 네에, 했다.
방문을 연 선재는 작은 재혁의 몸부터 찾았다. 어딨지…?
“…어….”
문을 끝까지 열고서야, 각자 잠든 범진과 재혁의 모습이 드러났다.
용케도 아이를 달랬나 했는데 들어와 잠이나 자고 있었다. 재혁도 무던한 성격이라 한 번만 칭얼대고 말았나 보다. 저도 모르게 방안까지 들어갔던 선재가 문고리를 다시 잡았다.
“어, 야….”
“…왜.”
“니 그거, 병원은 가야 되지.”
멈칫한 상태로 범진의 말을 듣던 선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 치아봐.”
잠결인 탓도 있겠지만 음성이 유독 낮았다. 다가오며 그렇게 말한 범진이 선재의 얼굴을 제 쪽으로 돌렸다.
“…왜.”
“씁. 안 치우냐.”
한쪽 눈이 크게 떠지며 꿈틀거렸다. 옛날에 이 얼굴을 보면 무섭고 싫기만 했는데, 지금 보는 이 얼굴엔 안도감이 들었다. 걱정해주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반쯤 숙였던 고개를 든 선재가 손을 입가에서 내렸다.
“…원래 알레르기 있어서.”
혹시 크게 걱정할까 싶어 말을 덧붙인 선재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입을 꾹 물었다.
“니 내 몰래 군밤 팔다 왔냐, 밤에.”
“…….”
뒤에 나온 이래 군밤 장수가 돼도 이쁘네, 하는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뭐 때문에 군밤 장수를 붙였는지 알 것 같았다. 그려지는 이미지가 있었다. 손으로 입을 가리려고 하는데, 범진이 선재의 두 팔을 쥐고 얼굴을 들이댔다. 이마로 이마를 밀어내며 선재의 고개가 들리도록 만들었다.
“니를 내가 이래 둘 순 없지.”
“…제발, 그냥, 두, 둬,”
고개를 숙이고 싶어도 범진이 이마로 밀어내고 있어 쉽지 않았다. 눈꺼풀에도 힘이 들어가 손으로 눈을 크게 벌린 듯이 흰자가 많이 드러났다. 선재는 문 앞에서 범진과 힘겨루기 같은 걸 하게 돼 팔만 부들부들 떨었다. 힘을 최대한으로 주는 선재와 달리, 범진은 적당히 조절해가며 놀아주는 식으로 힘을 쓰고 있었다.
“내한테 옮기자.”
“…뭐….”
원맨쇼하듯 혼자서만 힘을 쓰던 선재가 얼굴 전체가 벌게져선 고개를 들었다. 범진의 말이 이해되지 않아서였다. 선재의 의아하단 얼굴을 내려다본 범진은 그대로 제 하관을 선재의 얼굴로 붙였다. 말만 ‘옮기자.’였지, 어떻게든 뺨을 맞대고 싶어 수작 부린 거였다. 선재가 두 팔이 붙잡힌 채로 슥슥 쓸리는 범진의 얼굴에 인상을 찌푸렸다.
간단한 일만 보고 데리러 오겠다던 범진은, 오후 두 시가 되어 집 앞으로 차를 끌고 왔다.
선재는 범진의 연락을 받고 영채에게 눈인사만 하고 집을 나섰다. 차는 집으로 통하는 길목 바로 아래에 서 있었다. 가볍게 뛰어 내려간 선재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웬 마스크.”
“얼굴이 이런데, 그럼, 아!”
새총 쏘듯 마스크 앞면을 잡아당긴 범진이 그걸 팩 놓았다.
얼굴을 엉성하게 덮은 마스크에, 선재가 줄 부근을 만지며 불평 섞인 목소리를 냈다.
“왜 괴롭혀, 왜.”
“씨발, 말하는 것도 봐라…. 야, 니 사람들한테 함 물어봐라. 내가 니 괴롭히는 게 정상인가 아닌가.”
당연히 비정상 소리를 들을 걸 제가 왜 묻나? 선재는 장난을 쳐놓고도 그래야 마땅하단 식으로 구는 범진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마음은 알겠지만 표현이 짓궂어 얼굴 찌푸려질 때가 너무 많았다. 지금도. 멀쩡히 쓰고 나온 마스크 줄이 늘어날 지경이었다. 선재는 마스크 안에서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굳혔다.
범진은 옆에서 또 삐쳤다며, 사람 신경을 거슬리게만 만들었다.
선재는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도 그런 말들에 크게 반응해주지 않았다.
범진이 또 장난을 친다고 마스크를 튕기면,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줄만 슥 넘겼다.
범진은 냉정하게 줄만 넘기는 선재를 보면서는 진짜 삐쳤다며, 차가 신호에 멈출 때마다 얼굴을 핸들에 붙이곤 조수석 쪽을 대놓고 쳐다봤다. 그런 얼굴은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보였다. 선재는 애써 다른 곳에 시선을 두며 범진과 최대한 눈을 맞추지 않았다.
도로를 얼마나 달렸을까. 광장과 넓은 주차장을 두고 여러 건물이 서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선재는 차가 멈추자마자 내렸다. 쾅, 문을 세게 닫고 운전석에서 내리는 범진을 가만히 지켜보는데.
“야, 이거 긴급상황이다.”
가볍게 걸어오며 그런 소리를 하는 범진에겐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차가, 어디 고장이라도 났나?
다가온 범진은 선재의 허리에 손을 두르며 앞으로 끌었다. 주차장을 가로지르며 한다는 말은 순 어이없고, 엉터리 같은 말들뿐이었다.
“니 이래 삐친 거 내가 거의 몇 년 만에 보는데. 씨이팔, 어짜지? 완전 긴급상황이다, 이거. 어따 신고를 해야 되냐.”
“…하.”
좋아서 웃는 게 아니라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한껏 품으로 끌어당긴 범진 때문에 숨도 막힐 듯했다. 선재는 어깨가 꽉 잡혀 온몸을 오그라뜨린 채로 몇 걸음 걸었다. 놔, 놓으라고, 몇 번을 말해도 긴급상황이라는 말만 하며 입술을 얼굴로 붙이려 했다.
“안 놔? 가만 안 있어.”
가만 안 있겠다는 말까지 했을 땐 이미 상가 건물 앞이었다.
“이야, 이 긴급상황.”
바깥은 점차 날이 풀려 포근한 바람도 부는데, 상가 안쪽은 찬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도 안으로 들어왔다고 어깨를 감은 손에서 힘이 조금 풀어졌다. 선재도 더는 협박 같은 걸 하지 않고 계단 쪽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가 복도 끝쪽에 위치한 데다 병원이 2층에 있어 걸어 올라가는 게 더 나았다.
계단참까지 걸어 오른 선재가 그래도 불편한 어깨 때문에 몸을 비틀었다.
“놔봐.”
선재를 내려봤다가, 금방 웃은 범진이 어깨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니 그랬다가 감기 걸리면은. 내 하자는 대로 다 할래?”
그 말을 하며 계단을 밟는 통에 선재도 어쩔 수 없이 계단을 같이 디뎠다.
“하자는 대로 뭐.”
범진은 소리가 잘 안 들리는지 몇 번이나 뭐라고? 니 뭐라 했냐? 하며 선재의 입 앞에 제 귀를 붙여 댔다. 그에 선재가 반응한 것도 몇 번이었다.
“뭐라고?”
“하자는 대로 뭐…! 뭐 시킬 건데…!”
“안 들린다. 뭐라고?”
2층 입구와 복도를 지나 병원 자동문 앞까지 서서도 안 들린다고 말하는 범진에겐 표정이 굳었다. 괜히 성심껏 대답을 해줬다. 짧은 순간 후회한 선재가 입을 꾹 물고 어떤 반응도 해주지 않았다.
“씁, 안 들리네. 귀가 삐꾸가 됐나.”
아무도 믿지 않을 말을 꺼낸 범진이 선재의 어깨를 안고 앞으로 손을 뻗었다. 센서가 손을 인식하자 문이 확 열리며 바람이 불었다. 범진은 세게 부는 바람에 곧장 선재의 얼굴을 가렸다. 복도 창이 열려 있어 바람이 크게 일긴 했지만, 그만한 반응을 보일 일은 아니었다.
“아, 안 보여. 좀.”
보호 본능으로 손을 올린 범진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재는 앞을 가린 손에 좀, 하며 범진을 나무라기만 했다. 자꾸 이럴 거냐고, 입 모양으로 말한 선재가 범진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범진은 그 얼굴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음만 지었다.
“의사나 불러라.”
접수하란 뜻으로 말한 범진이 턱으로 옆을 가리켰다. 이 피부과는 작년에 준희 때문에 찾은 적이 있었다. 처음은 아니라고 익숙한 느낌을 받은 선재가 입을 다문 채 기침을 하며 접수대 쪽으로 향했다. 범진은 느릿느릿 걸어 의자 세 개를 차지하고 앉았다. 양팔을 한껏 뒤로 하고, 다리를 거만하게 꼰 채로 선재의 뒷모습을 감상했다.
사람이 얼마 없어 이름은 금방 불렸다.
의사는 40대 중반의 남자 오메가 의사였다. 의사가 또래 알파면 눈만 마주쳐도 발작을 해대, 선재도 오메가 의사와 마주하는 게 속이 편했다. 큰 병이면 무조건 대형 병원으로 가겠지만, 피부 발진이나 알레르기 때문에 병원을 들르는 거니 선재 또한 이곳으로 오겠다 예상은 했었다.
상담실로 들어서서, 선재는 데스크 앞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한 박자 늦게 들어온 범진은 데스크 바로 옆에 자리를 잡고 의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범진이 앉은 의자는 그 덩치를 버티기엔 너무 작았다. 바퀴도 성치 않은지 약간만 움직여도 끽, 소리가 났다.
“뭘로 이렇게, 문질렀어요?”
이렇게, 하며 손으로 입 만지는 시늉을 한 의사가 선재를 쳐다보았다.
선재는 딱히 기억나는 게 없었다. 입 근처에 닿는 거라곤 범진의 입술 말고는 없어서…. 마스크를 쥔 채로 생각하던 선재가 고개를 저으며 잘…. 하고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말을 제대로 꺼낸 건 의사와 더 가까이 앉아 있던 범진이었다.
“그, 아무래도 우리가 부부니까는 뽀뽀도 하고 키쓰도 하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선재의 눈이 옆으로 향했다. 왜 그런 말을 꺼내나 몰랐다. 범진은 자세도 제대로 잡았다. 원래부터 벌어져 있던 허벅지 위에 손을 턱, 올려 팔이 양껏 벌어지는 모습이었다.
“그라다 보니까는, 이게 이, 수염이 났을 때도 아 피부에 닿고 하는데.”
범진이 말한 ‘아(애)’는 선재를 뜻했다. 나이 삼십이 훨씬 넘어 애 소리를, 그것도 여덟 살 어린 범진에게서 들어 선재는 낯이 뜨거웠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 새도 이렇게 샐 수가…. 둘만 있을 때 들어도 남사스러운 단어였다. 선재는 미아방지용 목걸이로 장난을 치던 범진에게 한소리 하지 않은 걸 뒤늦게 후회했다.
“피부가 워낙 예민하신 분이라.”
“이야, 그거는 내가 모를 수가 없지.”
“…네, 어쨌든.”
무슨 반응이든 크게 하는 범진 때문에 의사가 웃음을 참는 게 보였다. 그래도 웃음이라서 다행인가? 예전의 범진은 의사가 옆에 있든 말든, 뭐가 부수고 싶으면 그걸 망설임 없이 부서트리곤 했다. 제발 그만하라고 애원도 해보고, 울면서 말린 적도 있었는데. 새삼 그때의 범진이 생각나, 선재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약은 3일 치로 나갈 거고요. 바르는 약이랑 해서,”
“그러면은, 그동안에는 입 대면 안 됩니까?”
“…네, 아무래도 조심하는 게.”
“입술은 멀쩡하든데.”
언제 자세히 봤다고 제 입술이 멀쩡한 걸 아나? 선재는 거기에 무슨 말을 보태려다 관뒀다. 사람이 있는 데서 범진에게 따졌다가 더 큰 상황이 돌아올 수도 있었다.
“네, 그렇긴 한데요. 어, 뭐…. 뽀뽀를 하시거나 하면 입술 주변 피부도 당연히 닿겠죠?”
의사가 뭘 입력하는 와중에도 최대한 범진에게 맞춰 설명을 해주었다.
범진은 그 말에 쫌 고난이도겠네, 하는 혼잣말을 뱉었다. 표정을 보니 다른 의도는 없어 보였다. 덤덤하게 쓰읍, 하는 소리까지 낸 뒤에야 선재에게도 눈을 던졌다.
“이래 손이 많이 간다, 니가.”
그 말은 일어나며 했다. 금방 어깨동무를 해오는 범진 때문에 선재는 의사에게 인사도 건네지 못했다. 고개를 돌리고 싶어도 몸이 꽉 붙들린 채여서 한계가 있었다.
“아니, 왜. 선생님한테, 인사.”
“이래 손 많이 가는 니를 어쩌면 좋겠냐.”
나가는 내내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들어오던 간호사와 눈이 마주쳐, 그에게 인사한 게 전부였다. 밖으로 나오고서야, 선재는 속에서만 끓던 말을 꺼냈다.
“무슨, 그런 소리를 해. 아까도, 우리끼리 장난한 말을 왜 남 앞에서 하는데.”
“뭔 장난.”
상담실 바로 앞은 대기 의자 하나와 가벽이 전부인 공간이었다. 복도라기엔 공간이 협소했다. 어깨를 가벽 쪽으로 붙인 범진이, 뭔 개소리를 하느냔 얼굴로 선재를 쳐다보았다.
“…애라고 했잖아.”
막상 말하려니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쭈뼛거리며 말한 선재가 범진의 눈을 피했다.
“애? 뭐 내가 니보고 아라고 하드냐?”
“…어.”
본인은 기억도 못 하는 듯했다. 작게라도 저를 놀리려던 속셈이 있는 줄 알았는데, 표정을 보니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짧게 범진의 눈을 올려다본 선재가 바로 딴 곳을 쳐다봤다.
“야, 씨. 니 애시끼인 거 들키면 안 되는데.”
“진짜 그만해. 오늘 하루종일,”
“니 오늘 목걸이는 챙겨 왔냐.”
결단코, 범진의 말에 동의해서는 아니었고, 혹시 범진이 되지도 않는 고집을 부릴까 봐 목걸이를 챙겨 오긴 했다. 하지만 이런 순간에 목걸이를 내밀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잠시 망설이던 선재가 거짓말을 쳤다.
“아니….”
“이게 큰일 날라고. 어디 이 험한 세상에.”
범진이 그런 말을 하며 선재의 어깨를 안았다. 가벽을 끼고 얼마간 걷자 주변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선재는 사람들의 눈초리가 제게 꽂히는 듯해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혼자 신이 난 건지…. 속이 다 보이는데도 그 속을 알기가 어려웠다.
데스크에서 간단한 안내를 받고 밖으로 나와, 맞은편 건물에서 약부터 받았다.
바르는 약, 먹는 약. 봉투 안을 확인해본 선재가 뒤늦게 고개를 들어 주변을 쳐다봤다.
카페와 식당은 물론이고, 옷가게만 해도 한 구역에 여러 곳이 붙어 있었다. 꽃집과 서점, 무인 세탁소도 눈에 띄었다. 선재는 옆에서 범진이 쳐다보는 것도 잊고 주변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눈이 멈춘 곳은 문을 활짝 열어둔 삼계탕집이었다. 학생들도 많이 지나다니는 거리라 위화감은 조금 들었지만, 맛집인 듯 손님들이 많았다.
“니 백숙 먹고 싶냐.”
“어?”
먹고 싶어서 쳐다본 건 아니지만 범진이 묻는 말에 부정을 하지도 않았다. 일단 범진이 뭐라도 먹어야 하지 않을까? 점심도 안 먹고 집으로 찾아온 것 같은데. 선재는 멕이줄게, 말하는 범진을 군말 없이 따라갔다.
“여기, 뭐. 능이 같은 건 없고요?”
자리를 잡자마자 다가온 직원에게 범진은 이상한 말부터 꺼냈다. 모르겠단 얼굴로 예? 묻는 직원이지만, 선재 또한 의아하긴 마찬가지였다. 이내 뜻을 알아차린 직원이 깨달음을 얻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아, 능이백숙이요? 저희는 예, 한방이랑 일반 삼계탕만 메뉴에 있어서….”
“그러면은, 한방 거시기에 임신한 사람 먹으면 안 되고 그런 거 있습니까.”
“아아, 그런 건 따로 없죠. 저희는 한방 재료도 모든 분들이 안전하게 드실 수 있는 것만 취급합니다.”
“내는 안 안전해도 되고요. 우리 마누라. 내랑 결혼한.”
또 시작이었다.
저번에 제주도에서 결혼한 걸 들킨(?) 뒤로 식당에서 얘기할 기회만 되면 저런 거짓말까지 쳐가며 결혼한 티를 내려고 했다. 무덤덤한 얼굴로 테이블만 쳐다보던 선재가 눈을 들고 혼자 열연을 펼치는 범진을 쳐다보았다. “이 사람한테 문제 생길까 봐 그라지. 아줌마, 내 이해하지요.” 상대방을 위하는 척도 해가며 대화하는 게 제법이었다. 정작 네, 네, 하고 웃는 직원은 큰 관심도 없어 보였다. 그저 주문이나 받으려고 펜만 만지작대고 있었다. 발을 뻗어 범진의 구두를 옆으로 슬쩍 쳐낸 선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냥 주문해….”
“니 괜찮겠냐. 계속 능이만 먹었다 아니냐.”
“아니, 당연히 괜찮지…. 그냥, 저, 일반으로 두 개 주세요.”
결국 주문을 넣은 건 선재였다. 네, 일반 두 개요, 하고 주문을 받은 직원은 펜으로 날리듯 뭔가를 쓰곤 잽싸게 자리를 떴다. 범진은 무슨 말을 하려던 게 남았던지 혀로 아랫입술만 쓸어대고 있었다. 그렇게 희한한 짓을 벌여놓고도 성에 차지 않는단 얼굴이었다.
“야, 씨. 티 별로 안 난 것 같은데.”
“…….”
“저 아줌마가 믿겠냐? 니랑 내랑 결혼한 거?”
“…말 그렇게 했으니까 당연히 믿겠지.”
“그냐? 믿을라나?”
그렇게 반응하면서는 어울리지 않게 목을 긁적였다. 선재는 범진이 왜 그런 걸 티 내려 하는지, 티가 나면 뭐가 좋은지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혼인신고를 하고, 아이까지 낳은 사실이 달라질 리는 없기 때문이었다. 워낙 눈에 띄고, 화려하고, 정신 사나운 사람이다 보니 저러는가 보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이해는 가지 않았다.
“근데 그러면 뭐가 달라지는데.”
“뭐.”
“아니, 저 사람이 어떻게 알든 무슨 상관….”
“어떻게 알든? 니도 지금 니 결혼한 거 후회한다 이 말이냐.”
“그게 왜 그렇게 되는데…?”
제 내키는 대로 듣고 해석한 범진이 그러면, 하며 테이블에 두 손을 올렸다.
“후회는 안 하냐?”
“…참….”
“어쭈?”
낯부끄럽게 대낮에, 그것도 삼계탕집에서 나눌 대화는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을 뿐이다. 결혼을 후회하지 않느냔 말을 왜 이런 데서, 이런 타이밍에 묻나? 선재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는 범진을 불안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여기, 주목 함 해볼랍니까.”
최대한 예의를 차려 말하는 것 같았으나 초장부터가 글러 먹었다.
“다름이 아니고, 내가 이번에 아부지가 된다고 하는데요. 그거 기념으로 여기 전체 금벨 함 울리겠습니다.”
금벨? 하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이내 아, 골든벨, 하는 소리가 어디서 나오고, 뒤이어 짝짝, 하는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꽤 자리가 차 있던 식당이라 박수는 곧 큰 소리가 되어 주변을 메웠다. 길가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안쪽을 쳐다볼 정도였다.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오른 선재가 축하해요, 하는 소리엔 울며 겨자 먹기로 자리에서 슬금슬금 일어났다.
“이름은 준희. 첫 아 이름 벌써 그렇게 정했습니다.”
“…….”
범진은 큰 소리로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정보를 전달했다. 선재는 몸을 돌려 꾸벅 고개를 숙였다. 축하한다고 가장 크게 말한 사람에겐 굳이 눈을 맞추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언뜻 둘러봤을 때 눈에 띄는 사람만 최소 15명…. 일반 삼계탕 한 그릇이 14,000원이고, 한방은 16,000원이니 대충 20명으로 계산해도 30만 원 넘는 돈을 뿌려야 한단 소리가 된다. 선재는 자리에 앉을 때까지 그 생각만 했다. 가족 외식에 돈을 많이 쓰는 것도 불만일 때가 있는데 처음 보는 사람들 삼계탕까지 사주려니 마음 한편이 착잡하게 식는 것만 같았다.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자리에 앉은 범진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을 꺼냈다.
“기분 직이네.”
“뭘 직여, 직이기는. 돈이나 버리고….”
“내가 뭘 버맀다고. 니 결혼식 하면 식사 대접하는 거 모르냐.”
“…이게 어떻게,”
“비슷한 거지. 어쨌든 축하해준다 아니냐.”
“…….”
빈약한 논리도 자신만만하게 우기니 이길 자신이 없다. 어쨌든 축하를 받았단 말엔 반박할 거리도 없었다.
“난 솔직히, 아직도 잘 안 믿긴다 아니냐.”
갑자기 꺼낸 말엔 어떤 감정도 섞이지 않은 채였다. 가볍게 툭, 뱉어 주제와 벗어난 소리를 하려나 싶었다.
“니가 내 꺼라는 거를, 내가 어째 믿냐고.”
“…….”
불도저처럼 모든 일을 주도한 사람이 그런 말을 해 낯설었다. 아무 관계도 아닐 때부터 범진은 ‘닌 어차피 내 거’ 하는 말을 달고 살았었다. 그랬던 사람이 이제 와 저런 소리라니.
저는 결혼이나 범진이 제 남편인 것에 대해 증명받고 싶은 적이 없었다. 누가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든 신경을 크게 쓰지 않는 편이었다. 제게 그토록 ‘애’라고 말하는 범진이지만 그런 데선 나이가 숨겨지지 않는 것일까. 선재는 누구보다 어린 범진의 한 부분에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사랑을 퍼붓는 것에만 열중하는 줄 알았으나, 결국 범진도 그 나이대 사람처럼 사랑 앞에서 기꺼이 유치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결혼했단 티를 내고 싶어 하는 범진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짧은 생각에 잠겼던 선재가 입을 열었다.
“네 거 아니면…. 내가 누구 건데….”
“뭐? 씨, 누구 건데, 니가. 내 말고 누구 거냐고…!”
“…….”
방금까지 애를 가졌다고 축하받던 남자의 입에서 큰 소리가 나오자 손님들의 눈도 이쪽으로 몰렸다. 등을 돌린 선재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이곳에 꽂히는 것쯤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다급하게 아니, 하고 작게 말한 선재가 하려던 말을 급하게 입에 담았다.
“그러니까…! 나 네 거 맞다고…! 아무 데도 안 가고, 나중에도 똑같이….”
중얼거리며 말한 선재가 남 보기가 민망해 고개를 푹 숙였다.
왜 말을 못 알아듣고 화부터 내고 난리지? 성질이 정말 더럽다. 듣기 좋으라고 간지러운 말을 해주려 했던 건데,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리고 말았다. 선재는 제 말에 바로 밝아지는 얼굴을 한 범진이 얄미웠다. 그냐? 하고 얼굴을 앞으로 내미는 범진을 최소 3일은 상대해주고 싶지 않았다.
* * *
“아, 아흑, 하아, 아…. 흐윽…!”
그랬는데….
“씹, 더 흔들어봐라.”
상대해주고 싶지 않았는데….
“그, 흐으, 윽……! 아! 아윽.”
왜 범진의 몸 위에서 이러고 있는지….
엉덩이 사이로 자지를 문 선재가 허리를 연신 흔들어 댔다. 범진의 손이 엉덩이를 꽉 잡은 채지만, 그와 별개로 허리가 요동치고 하체가 위아래로 뜨고 있었다. 범진은 씨팔, 더, 하며 흔들리는 선재를 꿰뚫을 듯 쳐다보는 중이었다. 엉덩이에 닿은 손에선 이따금 짝, 짝, 하고 볼기짝 때리는 소리가 났다.
“니, 씨발, 누가 이딴 거 가르쳐줬냐.”
“때, 흑, 리면 안, 안 해.”
찰싹, 맞은 엉덩이가 아팠는지 선재가 범진의 손을 잡은 채로 엉덩이를 흔들었다. 살살 친다고 치는데도 몇 대 연속으로 때려 통증을 느낀 모양이었다. 알았다, 하고 엉덩이를 꽉 쥐기만 한 범진이 벌겋고 흐뭇한 얼굴로 선재를 쳐다봤다.
“하, 한 번만 더, 때리면. 흐윽.”
“뭐, 오늘은 그래 맞기 싫으냐.”
평소에도 무의식적으로 엉덩이를 때릴 때는 많았다. 하지만 아까 삼계탕집에서 있었던 일도 그렇고, 선재는 최대한 무심하고 무감하게 이 섹스를 끝내려 했다.
구석 길로 이끈 범진이 근처에만 오면 찾는 모텔이었다. 살면서 대실이라는 것도 범진과 처음 해본 선재는, 몇 번이나 경험을 쌓은 뒤에도 얼굴이 벌게진 채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을 때가 많았다. 대실을 하면, ‘나 섹스하러 왔어요.’를 얼굴에 더욱 크게 새기고 들어가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범진은 니 맞기 싫음 못 때리지, 하며 엉덩이를 주물럭대기만 했다. 위아래로 크게 움직이던 선재의 움직임은 잦아들어 있었다.
“별로냐.”
“그냥…. 흐윽.”
딴엔 열심히 움직인 듯 이마에 젖은 앞머리가 듬성듬성 붙어 있다. 범진은 싫은 듯, 짜증 난 듯, 오묘한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선재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열에 뜬 얼굴에 살짝 남은 저 알레르기 자국도 묘하게 꼴렸다. 범진은 선재의 팔꿈치를 꽉 잡아 몸을 못 움직이게 했다. 자지를 피하지 못하게 고정한 범진이 엉덩이 한쪽을 벌리며 자지를 깊이 밀어 넣자, 선재는 팔에 힘을 꽉 주며 배를 떨었다. 여태껏 반듯하게 서 있기만 하던 성기에서 액이 주르륵 흐른 것도 그때였다.
“그냥, 뭐.”
“그, 흐….”
“내 안아봐. 개같이 박아줄게.”
이미 정액 지린 걸 보여준 터였다. 선재는 벌겋게 오른 얼굴로 천천히, 범진의 가슴팍 쪽으로 몸을 숙였다. 스스로 몸을 붙인 선재가 아래쪽에서 거세지는 움직임에 눈을 질끈 감았다. 기승위를 하다 이런 자세가 된 적은 많은데, 오늘은 일이 많았어서….
부드러운 뒷머리통을 세게 쥔 범진은 제 하체를 반쯤 올려 선재의 엉덩이도 솟게 만들었다. 퍽, 퍽, 엉덩이를 통째로 치며 들어오는 범진의 자지는 처음부터 강도나 속도가 난폭했다. 입을 꾹 닫고 있던 선재가 그 자극을 이기지 못하고 울듯이 소리를 뱉었다. 우으…. 웁…. 하고 소리를 참던 입이 터지듯 열렸다.
“우으…! 흐…! 하, 아! 아흑!”
“씨팔, 뒤지네.”
“허, 하악! 흐윽! 아, 화, 화장시, 실! 하윽! 흑…!”
몸 위에 엎어진 선재가 범진의 어깨 부근에서 머리를 도리도리 저었다. 엉덩이가 공중에 솟다시피 하고, 내리려고 하면 범진의 자지가 치고 들어와 이 수치스러운 자세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선재는 아무리 부부간이라도 정도를 지나친 추잡한 자세를 꺼릴 때가 많았다. 하지만 지금, 엉덩이가 발랑 들린 채 허리가 꺾일듯한 선재는 내벽을 쩍쩍 벌리는 범진의 자지에 어쩔 줄을 몰랐다. 결국 온몸이 웅웅 울리는 느낌에 울음을 터뜨린 선재가 성기에서 노란 물을 지리기 시작했다. 멈추지 않고 들어오는 자지 때문에 힘을 줄 수가 없었다.
범진은 따뜻한 액체가 배를 에워싸는 걸 느끼고, 더욱 큰 폭으로 자지를 박아 넣었다. 벌어진 내벽을 쩍쩍 긁듯이 지나가고, 물 맺힌 점막이 죄 열리도록 빠른 속도로 하체를 붙였다. 선재는 절정 이상의 자극으로 인해 입도 제대로 다물지 못했다. 울듯이 허엉, 하는 소리만 낼 뿐 말, 간단한 단어조차도 입에 올리지 못했다.
“허, 허으…! 엉…. 헝…!”
틈을 놓치지 않고 더욱 세게 몰아붙이는 범진 때문에 성기에서만 뭐가 나오고 있었다. 선재는 섹스하기 전에 꼭 소변을 보는 편이었다. 한 번 비워도 어디서 묽은 오줌이 그렇게나 나오는지 몰랐다. 끝도 없는 자극에 방광이 아릴 정도로 소변을 싸버린 선재가 이어 질질 흐르는 정액 때문에 서러운 얼굴을 해 보였다.
“흐으, 으윽……. 흐어….”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어서, 이렇게 해도 되는지를 몰라서. 고개를 처박고 울기 시작한 선재의 뒷머리엔 쭉 범진의 손이 닿아있었다. 내벽이 팅팅 부은 게 자지로 느껴질 정도로 선재의 몸은 예민해진 상태였다. 지지부진한 기승위에 몸만 달아버린 것이다. 범진도 선재가 기승위를 할 때면 정신적으로 흥분되는 면이 컸다. 싸더라도 한 번 가볍게 싸고, 제가 마무리하듯 박아줘야 순서가 맞았다.
척, 척, 물 표면을 치는 듯한 소리가 아래쪽에서 들리고, 선재는 눈을 꾹 감았다. 치받치는 절정의 감각을 느낀 범진이 속도를 무서울 정도로 올렸기 때문이었다. 울음 섞인 신음이 피스톤질에 억, 억, 막힐 때마다 선재는 더 큰 울음을 토했다. 참기 버거운 쾌락과 감정이었다. 범진은 걸쭉하게 싸지는 정액을 그대로 선재의 점막 곳곳에 비비며 사정감을 맛봤다. 직전까지도 물 같은 정액을 내던 선재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진동이 크게 오는지, 어깨가 큰 폭으로 떨렸다 가라앉길 반복했다.
“씨이발…. 계속 나온다, 좆물, 씨발.”
다정하긴커녕 살면서 듣고 싶지도 않은 말들뿐이지만, 범진은 그 말을 하며 선재의 머리를 조심해서 만졌다.
“우으….”
고개를 내리면서 쩝, 소리를 낸 범진이 아쉬운 듯 말을 더했다.
“조디도 함만 빨고 싶은데….”
“후으…. 흐….”
선재의 입술에 제 엄지를 대보던 범진이 아쉬움이 남은 채로 이마에만 입을 맞췄다.
“다 나은 거 아니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붉은 자국이 흐리게 남은 입가를 만지는 손은 조심스러웠다. 선재는 범진의 손이 얼굴을 스칠 때마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다 나았네, 하는 소리에 눈을 뜬 선재가 들릴 듯 말 듯 말했다.
“아… 안… 흑, 나았… 어….”
“그냐. 안 나았냐.”
눈꼬리에 엄지를 올린 범진은 장난치듯 선재의 눈을 쭉 늘였다. 예쁜 얼굴은 어떻게 잡아당겨도 예쁘다. 새삼 그런 생각을 해본 범진이 제 몸 위에 엎어져 누운 선재의 얼굴 이곳저곳을 어르듯이 만졌다.
선재는 안 나았냐, 하는 범진의 말에 뒤늦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니가 안 나았다면 안 나은 거고, 중얼거린 범진은 좆을 빼지 않은 채로 선재의 뒷머리에 제 손을 갖다 댔다. 헝클어진 머리카락도 풀어줄 겸 몇 번 쓰다듬자 선재는 숨을 편안하게 쉬었다. 이러고 얼마간 잘 모양이었다. 범진은 반 정도 가려놓은 창가에 눈길을 보냈다가 곧장 선재를 쳐다봤다. 씨이팔, 천사. 좆물을 짜내는 천사. 말로 하면 선재가 잠에 못 들까 봐 속으로만 그 말을 읊었다.
* * *
“여보세요?”
신호음이 뚝 끊기는 느낌이 들어 전화를 받은 줄 알았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음이 들리자, 선재가 마지못해 휴대폰을 놓았다. 아무리 그래도 하루에 한 번은 연락을 해주지…. 창우가 집을 비운 지 벌써 이틀이었다. 어제, 거래처에 일이 생겨 이틀은 집에 못 들어간다는 문자만 받은 터였다. 이틀이 언제부터 언제까지를 얘기하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제가 아는 이틀이면 벌써 다 지났는데….
한동안 휴대폰만 쳐다보던 선재의 눈이 뒤쪽으로 향했다.
“준희야…!”
푹신한 매트를 따로 깔아 아이를 그 위에 두었는데, 언제 매트 밖까지 기어나갔나 몰랐다. 선재가 잽싸게 달려가 엉금엉금 기어가던 아이 몸을 잡았다. 위로 들어 올려 안자, 아이의 버둥대는 몸짓이 느껴졌다. 아직도 바닥을 기고 있다 생각한 모양이었다.
“우리 아기 기운이 좀 나나 보다.”
머리를 받치고 아이 몸을 살짝 뒤로 젖히자, 이제 막 올라온 아랫니 두 개를 보이며 웃는 아이 얼굴이 보였다. 이가 너무 조그매, 선재는 처음에 잇몸에 뭐가 묻은 줄로만 알았다. 손을 살짝 대보고서야 쌀알 같은 이가 잇몸 위로 올라온 걸 알게 되었다. 신기한 듯 준희의 입 안을 쳐다보던 선재가 어제보다 더 자란 듯한 유치에 제 입꼬리도 헤벌쭉 올렸다.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던 준희는 7개월에 접어들어서도 6kg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유식의 양을 늘려도 보고, 틈틈이 분유를 더 타 먹여봐도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너무 많이 먹였다고 병원에서 한 소리를 들었을 뿐이었다. 아이가 제 속도에 맞게 자라고 있어도 부모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선재는 괜히 제 형질을 물려준 것 같아 자책할 때가 많았다. 준희가 알파였다면 더 건강했을 테니까. 아이가 어떻게 태어나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건 제 욕심이었나 보았다. 더 튼튼하고, 더 건강한 아이로 태어나는 걸 바랐어야 했는데.
잠깐 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선재가 아이의 네모나게 벌어지는 입엔 웃음을 되찾았다.
“응? 좋아…?”
“…….”
아무 말도 없이 아, 벌어지기만 하는데 그게 그렇게나 귀엽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선재는 저와 너무 닮은 아기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창우의 허락을 받고 병원을 가게 되는 날이면, 사람들은 다 아이가 저와 닮았단 말을 건네주곤 했다. 선재는 가족이 없어 누구와 붕어빵이네, 같은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처음엔 그게 좋은지 나쁜지도 알 수가 없었다. 곱씹으면서, 계속 듣게 되면서, 그 말이 기분을 좋게 만드는 걸 알았다.
“준희랑 아빠랑 붕어빵이야…?”
“…….”
그 말에 아이가 서서히 닫히고 있던 입을 또 네모 모양으로 열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 같은데 제가 이해하지 못하니 답답한 마음이 든다. 선재는 아이 맘을 조금이라도 이해해보려 비슷한 표정으로 아이 흉내를 내보았다. 눈을 크게 열고, 아이처럼 오, 입을 벌리자 준희와 대화라도 하는 듯한 기분이 되었다.
이렇게 작고 천사 같은 아이와 대화를 나누는 날이 올까?
그때까지, 그 후로도, 제가 아이를 지켜줘야 한다.
선재는 준희를 낳을 때도 혼자였고, 아이를 키우는 동안에도 누군가와 함께해본 적이 없었다. 가끔 일을 도와주시는 아주머니가 오셔 궁금했던 걸 한꺼번에 물어보는 식이었다. 그때마다 인터넷이나 병원에서 알게 된 정보보다 유익한 내용을 알게 될 때가 있었다.
어쨌든, 그 아주머니도 창우가 고용해준 거니까.
그의 사랑 방식이 온전히 이해되진 않지만, 선재는 어차피 준희를 얻은 것으로 삶의 기회를 모두 썼다고 생각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 몇 번의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저는 준희를 택할 것이다. 그 선택엔 후회가 없었다. 연인이나 부부가 살아가는 방식은 다양하니까. 선재는 언제부턴가 바뀌기 시작한 창우의 태도에도 서서히 익숙해지는 방법을 택했다.
빈자리, 거짓말, 회피.
언제였나. 거실에서 누군가와 통화하던 창우가 재미가 없다, 목석이다, 질렸는데 남 주긴 싫다, 하는 소리를 들은 이후로 선재는 초연해졌다. 저 또한 창우를 사랑하냐고 물으면, 그렇게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그냥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나쁘지 않고, 능숙하게 거짓말하는 사람과 사귀고 아이를 낳고. 그게 사랑이라고 착각하며 사는 것. 사랑을 알게 될 리 없으니, 사랑 같지도 않은 사랑이 사랑이라 믿고 살아가는 게 제 인생의 길인 걸 진작 인정했다.
그 사랑이 우리의 방식인 것이고.
선재는 창우를 그렇게 사랑했다. 미워하지 않았고, 천천히 가는 시간에 몸만 맡겼다. 적당히 포기하는 건 오히려 달가운 선택지였다. 창우와 만나기 전엔 더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살았으니까. 창우의 속을 알 수 없었던 시간 동안, 선재는 창우에게 어떤 불만도 표출한 적이 없었다. 그런 선재가 유일하게 서운한 마음을 내비치는 게 준희의 호적 관련한 문제였지만, 그마저도 다툼으로 이어진 적은 없었다.
선재야, 내가 너 지켜주는 거야. 모르겠어? 준희 더 위험하게 만들고 싶어서 이래? 하고 물으면 할 말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한 번도 아니고 늘 비슷한 반응이 돌아왔다. 선재는 혼나듯 그런 말을 듣고 나면 준희를 볼 면목이 없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주지 못하는 게 어떻게 부모일까. 아이와 둘만 남은 집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자기 자신을 탓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면 슬퍼하거나.
그런 감정을 아이만은 못 느꼈으면 했다.
안 위험해. 우리 아기 위험하게 안 할게.
준희는 제 아빠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다. 몇 번이나 입술을 벙긋거리고, 짧은 팔을 앞으로 내밀어 잼잼을 하듯 주먹을 쥐었다 펴곤 했다.
기분 좋아?
선재는 준희의 작은 행동에도 크게 반응을 보였다. 제 주먹도 앞으로 뻗어 준희가 하는 걸 따라서 해보았다. 그때부턴 뒤에서, 방 밖에서, 누가 나가는 소리가 들려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세상이 아무리 험난하다 한들 이 아이 하나 못 지킬까. 괜히 자신감도 샘솟았다. 선재는 그렇게 세상을 다시 봤다. 미약하게나마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그 작은 아이 잇몸에 얹어진 쌀알.
선재가 놀리듯 쌀알, 하며 아이 입 안을 계속 쳐다보았다.
이렇게 작은 입에서 말소리가 언제 나올지….
알 수 없어서….
짧은 잠에 섞여든 꿈이었다.
선재는 옆에서 아부지! 하는 소리를 듣고 잠을 깼다.
재혁을 재우다 선잠에 들었던 모양이다. 잠든 재혁의 팔이 살짝 닿아있었다. 뒤척이며 고개만 돌리자 아부지, 하고 범진과 쌀보리 놀이를 하는 준희가 보였다. 쌀보리 놀이는 아이를 높이 들어 훅 떨어트리거나 비행기를 태워주는 등의 위험한 놀이 외에 범진이 할 줄 아는 유일한 놀이였다.
“와, 씨. 니 내한테 보리만 주냐?”
“헤헹.”
“또 해봐.”
“보니…! 아부지!”
“니 보니가 아니고, 따라 해봐. 뽀, 리.”
힘이 너무 들어간 탓인지, 특유의 희한한 발음이 말에 묻어 나왔다.
“뽀… 리…….”
“그래, 잘하면서.”
틀리게 가르쳐주고 잘했단 소리를 하는 범진이 웃겼다. 선재는 아예 몸을 돌려 준희와 범진이 노는 걸 쳐다봤다. 범진이 한 손을 펼치고 있고, 준희가 주먹으로 쌀 혹은 보리를 선택해 그 안에 넣는 놀이였다. 범진은 쌀과 보리 중 쌀! 하고 외쳤을 때만 준희의 주먹을 잡아야 했다. 보리를 외쳤을 땐 잡아봤자 소용이 없었다.
“보오… 니!”
긴장감은 하나도 없었다.
쌀의 쌍시옷 발음이라도 하고 보리! 하고 빠르게 외치면 모를까, 준희처럼 ‘보’ 자부터 외치고 보면 뭘 내밀지가 뻔했다. 아이는 무엇보다 여태 보리만 내밀었던 것 같았다. 또 보리를 내밀었다고 불평하는 범진의 소리가 들렸다.
“또 보리만 주고. 니 아부지가 그래 가르칬냐.”
“네에.”
그렇게 가르쳤다고 하는 아이의 말에 선재가 또 웃음을 참았다. 아이는 범진의 팔을 두 손으로 쥐곤 침대에 대고 있던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또 하자고, 또 손을 내밀어달라 요청하는 거였다. 하아, 고집부리는 게 즈그…. 하면서도 범진은 손바닥을 내밀었다. 커다란 손안으로 또 준희가 보리! 하며 제 주먹을 내밀었다.
“언제까지 보리만 주나 보자.”
제가 생각해도 너무하다고 생각했는지, 준희는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작디작은 등이 움찔거리며 긴장하는 게 티가 났다. 선재도 숨을 죽이고 준희가 뭘 내밀지를 쳐다보았다.
“싸… 싸리에요!”
재빨리 쌀만 외쳐도 모자랄 판에 “쌀이에요!”를 외친 준희가 과도하게 긴장한 탓에 옆으로 툭 쓰러지는 게 보였다. 얼마나 몸에 힘이 들어갔던지 그대로 중심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 범진은 익숙한 듯 팔을 뻗어 그런 준희의 등을 받쳐 안았다. 그리곤 제 품에 붙여 준희의 코를 가볍게 쓸며 장난을 쳤다.
“야, 니 높임말까지 따박따박 붙이면은 효율이 떨어지지 않겠냐?”
시비 거는 투로 조언해준 범진이 정전기로 풀풀 날리는 준희의 머리카락에 손을 댔다.
염력을 쓰듯 손을 위아래로 갖다 대본 범진이 붙어오는 머리카락에 혼자 씩 웃었다.
준희는 범진의 조언을 한참이나 생각하는가 싶더니, 늦게 입을 열었다.
“네에….”
“뭐만 하면 예에~ 니 그래 말한다고 세상이 그래 니께 되는 게 아니야.”
“네에…. 헤.”
아부지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네, 이거, 말한 범진이 준희의 양 뺨을 조물조물 만졌다. 니, 어, 아부지, 하며 낄낄 웃는 범진은 말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저 어, 니, 애기가, 했다. 그 사이로 준희가 까르르 웃는 소리가 섞여들었다. 범진이 괴롭히듯 간지럼을 태우고, 정전기 오른 머리로 장난을 치는데도 저렇게 좋아만 하고.
“자, 또 해봐라.”
허공에서 펼쳐진 손바닥으로 작은 주먹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이번에도 보리였다.
“보니!”
쌀은 잘 발음하면서 보리는 왜 자꾸 보니라고 발음하는지….
혹시 놀림당할까 봐 발음을 그때그때 잡아주곤 있지만, 힘겹게 똑바로 발음하고서도 원래 발음으로 돌아갈 때가 많았다. 여섯 살이긴 해서…. 괜찮을까? 만 4세. 믿을 수 없이 많은 시간이 지나갔으나 준희는 작년과 재작년에 비해서도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다. 보통 준희처럼 발달이 더딘 오메가 아이들은 학교 입학도 1년씩 미루곤 한다. 준희는 오메가 아이 중에서도 발달 정도가 상위 98%, 97%에 머물러 있어 그럴 확률이 더욱 높았다.
“헤엥, 아부지.”
“좋단다. 그래 좋냐?”
“네에.”
그래도 저렇게 말하고, 웃고, 감정 표현하는 걸 보면 다 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
선재는 복합적인 심정으로 준희의 동그란 등을 쳐다보았다.
“니 이거 달고 가니까 애들이 안 뺏들어가지.”
“네에, 주니만 조아해요.”
놀이를 하다말고 아이 팔을 잡은 범진이 미아방지용 팔찌를 가리켰다. 문제의 도깨비 얼굴이 달랑거리는 그 팔찌를, 준희는 어디서도 다른 팔찌와 바꿔서 오지 않았다. 목걸이도 마찬가지였다. 준희만 좋아한다는 말에 선재도 속으로 백번 동의했다. 준희와 범진이 아니면 누가 저런 흉악한 디자인을 좋게 생각하겠나.
“니 이거 차면 일등인 거 알지. 국가대표.”
“네에, 아부지 깨비랑 가치 있스면 일뜽에요.”
깨비. 둘이서 저런 별명도 붙였나 보았다. 선재가 ‘깨비’에 눈을 감으며 웃었다. 팔랑팔랑 날리는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봄의 바람이 따스하고, 바로 뒤에선 쌕쌕거리는 재혁의 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부지 깨비와 함께 있으면 무서울 게 없는 준희에겐 정말로 무서운 것 하나 없는 범진이 든든히 버티고 있다. 이 작은 세상쯤, 범진과 제가 어떻게든 지켜줄 것이다. 선재는 이렇게 따스한 날, 제 마음을 한껏 표현하는 준희가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키가 작고, 발음이 어떻고, 따위가 무슨 문제가 되려고.
선재가 안도감을 느끼며 다시 낮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