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섯 살, 봄 (24/29)

여섯 살, 봄

* * *

어딜 보아도 꽃을 매단 나무들이 즐비했다. 선재는 5월이 되면 준희와 어딜 가기로 많이 약속을 해놓은 터였다. 오리배 타러 가자, 놀이동산 가자, 준희 좋아하는 김 따러 가자, 하고. 재혁이 돌도 되기 전에 걸음을 떼긴 했지만 그래도 조심스러운 부분이 많았다. 본의 아닌 희생이라고 할까. 준희가 그런 것들을 감내하고 있는 셈이었다. 선재는 미안한 마음에, 시간만 나면 집과는 20분 거리의 공원에라도 나가보려 노력했다.

날이 따뜻해지면서 꽃나무에선 꽃잎이 떨어졌고, 발치엔 민들레 씨앗들이 휘날렸다. 선재는 그것만 봐도 좋아하는 준희의 모습에서 늘 눈을 떼지 못했다. 살짝 서늘할 때 핀 꽃들과 씨앗들이 준희를 중심으로 빙빙 돈다. 가운데 서서 눈꽃을 맞는 아이의 얼굴엔 보드라운 미소가 걸려 있다. 멀리 가지는 않고, 늘 비슷한 자리를 걸어 다니다가, 좀 놀았다 싶으면 바닥에 풀썩 주저앉는 아이.

‘준희 힘들어? 배고파?’

‘네, 주니 개란빵….’

‘응, 좀만 기다리자.’

‘네에.’

꽃놀이 명소까진 아니라도 공원 주변에 핀 꽃들을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선재는 근처 노점상들을 쭉 둘러보며 저기서 아부지 올 거야, 하는 말까지 덧붙였다. 사실 범진이 향한 곳은 가까운 노점상이 아니라 공원 입구에서도 한참 떨어진 포장마차인데도 말이다.

우연히 알게 된 포장마차에선 제대로 된 계란빵을 팔고 있었다. 촉촉하고 달콤한 빵 안에 든 짭짤한 반숙 달걀. 수제 토마토소스까지 정성껏 발려 가족의 간식으론 더할 나위 없는 메뉴였다. 한 2, 30분, 뒤에서 사진을 찍거나 야, 좋다, 야, 선재야, 하던 범진이 조용해지면 계란빵을 사러 간 것이었다.

그러고 몇 분이 지나면 인파 사이에서 범진이 아이를 안은 채 등장한다. 계란빵 네 개가 든 종이봉투와 함께. 준희는 식사 시간이라며 벤치에 앉아 두 손으로 계란빵을 받아 들고, 범진은 두 입에 계란빵 하나를 다 먹는다. 선재는 재혁의 손에 계란빵을 쥐여주고 나서야 제 몫을 먹기 시작한다.

공원에 나와 꽃비를 맞으며 먹는 계란빵이 그렇게 맛있을 줄이야.

불과 지난주에도 있었던 일을 생각하던 선재가 혼자 조용히 웃었다.

“오늘엔 어린니날 주니에 세상.”

생각이 현실로 돌아온 건 준희의 노래 때문이었다.

“오늘엔이 아니고 오늘은 아니냐.”

운전석에 앉은 범진이 웬일로 바른 가사로 지적해주는 것까지.

“네에.”

뒷좌석에서 어린이날 노래를 부르던 준희가 곧바로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준희는 에헥, 하고 목을 가다듬곤 범진이 가르쳐준 가사로 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오늘은 어린니날 주니에.”

“니도 저랬을라나?”

세상, 하는 아이 목소리는 뒤에서 계속 들리는 중이었다. 준희는 다음 가사는 모르는 듯 ‘오늘은 어린이날 준희의 세상’만 반복해서 불렀다. 그 소리를 음악 삼아 귀를 열고 있던 터라, 선재는 범진의 말에 뒤늦게 반응했다. 고개만 돌려 범진을 쳐다보자, 범진이 말을 풀어 다시 말했다.

“어? 저래 노래도 부르고, 어린이날도 좋아하고… 그랬냐?”

“내가?”

“어.”

“어릴 때… 조용해서.”

범진은 어떤 부분에 있어선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 특히 어릴 적 이야기나 과거사 등엔 거의 집착하지 않았다. 워낙 독점욕과 소유욕이 강해 과거에 만난, 스치기라도 한 남자들 목록을 죄 뽑아내 괴롭혀도 놀랍지 않을 텐데 실상은 그 새끼! 씨팔놈! 하며 잠깐 흥분하는 게 전부였다. 선재는 범진이 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것도, 모를 것도 같았다. 10년, 20년이 지나면 정확히 알게 될까? 다양한 생각들을 하는 사이, 범진 혼자 결정을 내 무슨 말을 하는 게 들렸다.

“조용하고, 이쁘기도 이뻤겠지. 보나 마나다.”

“…….”

“얼마나 이뻤겠냐? 지금도 이래 뒤지는데. 씹, 보는 사람마다 얼굴에 침 발랐겠지.”

그 말에 선재의 눈이 느리게 감겼다 뜨였다. 범진이 상상하는 제 어린 시절 모습은 간단하고 단순했다. 이뻤겠지. 선재는 어린 시절을 애써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 억지로 떠올려봤자 좋은 기억이 있을 리도 없었고. 하지만 범진의 단순한 말엔 복잡한 생각들이 지워졌다. 이쁜 어린이기만 한 제 가짜 과거가 마치 진짜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랬을까?”

“당연하지, 씨팔. 아재 그 씨팔롬들이 니 얼굴에다 얼마나 침질을 해놨겠냐.”

있지도 않고, 본 적도 없는 아저씨 이야기….

과거사에 큰 미련을 두지 않는 범진이지만, 상상력 하나는 뛰어났다. 사랑받는 아이 상상을 덩달아 하던 선재가 작게 미소 지었다. 어느덧 테마파크 입구와 가까워져 커다란 엠블럼 하나가 보이고 있었다. 카시트 벨트가 팽팽해지도록 몸을 돌린 준희가 ‘준희의 곰돌이’라 말하며 무언가에 시선을 빼앗겼다. 어린이날을 맞아 엠블럼 옆에 커다랗게 달아둔 동물 모양 풍선들이 하늘 바로 아래에 떠올라 있었다.

30년 전,

모 지역 산 중턱에 지어진 고아원을 두고 많은 말들이 오갔다. 원래는 학교가 들어설 부지라는 소문이 돌았던 터였다. 주변에 하나둘 아파트가 준공된 시기와도 맞물려 주민들의 반발은 상당했다. 그 고아원이 평범한 고아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지내는 아이들 절반이 오메가라는 특수 성별을 타고나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이었다. 시위에 동참한 어른들은 아이들이 불쌍하다고 얘기하면서도 오메가 아이들이 대부분인 시설이 자기들 동네에 지어지는 건 반대했다.

당시만 해도 오메가를 인간의 범주에도 넣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던 탓이었다. 말도 안 되는 차별적인 시선은 신체 능력이 뛰어난 알파에게선 일부 빗겨나 있었다. 원래는 비슷한 취급을 받았으나 알파 성을 가진 이들의 강인한 신체와 운동 능력 때문에 그들만은 인정하는 분위기가 됐던 것이다. 특히 스포츠 업계에서 큰 성공을 거둔 선수들 대부분이 알파 성을 타고 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이 매스컴을 타고, 세상에 알려지며 일반인보다 우월한 이미지로 굳혀지는 사이, 오메가 성을 지닌 이들은 알파와도 비교 선상에 놓이게 되며 곤욕을 치렀다. 잘난 거 하나 없이 희한한 페로몬 같은 거나 풍기며 발정기도 맞는 동물이 어째서 인간인가? 하는 화살이 오메가에게만 꽂히기 시작했던 것이다.

“선재야, 형아 왔는데.”

“…….”

구석에 혼자 앉아 있던 선재에게 다가간 건 명석이었다. 대학생인 명석은 고아원 소식을 접하고 사람들을 모아 이곳에 주기적으로 봉사를 오고 있었다. 아이들 대부분이 낯을 가리긴 했지만 몇 번 만나고 난 후로는 소통에 어려움은 없었다. 극소수의 아이들을 빼고.

“문방구 갈까? 사탕 사줘?”

“…….”

그 아이들 중 하나인 선재는 오늘도 말이 없었다. 처음, 고아원에 방문했을 때부터 구석에 서 있던 선재는 붙어 다니는 친구도 없는 듯했다. 사정을 물으니 원래 이곳에 있던 아이도 아니고, 여기서 얼마나 더 있을지도 모르는 아이라고 했다.

명석은 그런 아이에게 말이라도 시켜, 봉사하는 동안 만큼은 즐거움을 주고 싶었다. 불만이 있는 얼굴도 아니고, 누군가를 싫어해서 구석에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아서. 아무리 구석에 있어도 눈에 띌 만큼 예쁘장하게 생긴 아이라 관심에서 멀어질 수도 없었다. 명석은 무릎을 꿇고 선재의 손가락 하나를 살포시 잡았다.

“형아랑 갔다 오자. 저기.”

“…….”

삼삼오오 모인 아이들은 저마다의 놀이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구석에서 나오지 않으려는 선재의 손가락을 흔들어본 명석이 아이와 눈을 맞췄다. 얇은 속쌍꺼풀이 그어진 눈꺼풀이 나비 날개처럼 감았다 뜨였다. 그 안엔 제 모습이 훤히 비칠 정도로 투명하고 검은 눈동자가 있다.

“형아랑 진짜 문방구 안 갈래?”

다른 손도 내밀어 보인 명석이 얼굴을 좀 더 앞으로 붙이며 아이에게 물었다. 커다란 눈동자는 미세하지만 분명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주름 하나 없는 어린 입술에도 힘이 들어가는 게 보이자, 명석이 검지와 중지만 세우곤 아이의 손으로 가져갔다.

“형아 손 잡아봐.”

“…….”

그 말에 가만 서 있기만 하던 아이의 손이 떨리듯 흔들렸다. 오므라뜨리고 있던 손은 곧 펼쳐졌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손가락 두 개를 잡기 위해서였다. 어떤 힘도 느껴지지 않는 연약한 아이의 손이 명석의 두 손가락을 쥐었다.

“갈까?”

아이, 선재는 몸을 일으킨 명석을 올려다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몇 번씩이나 질문하거나 말을 걸어오는 일은 드물었다. 아이지만 천성이 신중한 선재는 저를 돌보던 엄마조차 더는 보이지 않게 되자 세상을 두려운 것으로만 인식했다. 또래 아이들에겐 다가갈 용기가 없었고, 어른들은 공포의 대상이기만 했다.

“선재는 뭐 좋아해.”

줄곧 두 손가락만 내어준 채 시설을 나온 명석은, 아이를 데리고 교각이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뭘 좋아하냐는 말에 대답은 없었지만, 아이는 아래로 강물이 흐르는 다리 위를 좋아하는 듯했다. 이따금 멈춰 서서 강물을 쳐다보거나 위쪽을 바라보는 등의 반응을 보였다.

“선재 사고 싶은 거 있어? 갖고 싶은 거.”

“…….”

반응이 원체 없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을 맞춰야 무슨 말이라도 할 것처럼 군다. 명석은 문방구에 도착해서도 아이와 눈을 맞추는 방식을 택했다. 한가운데 난 문방구의 창문으론 햇빛이 한 줄기 들이치고 있었다. 정확히 아이의 얼굴로 내려앉는 햇빛을 가려주며, 명석이 말을 더했다.

“응? 하고 싶은 거나.”

“…제요….”

말을 들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명석이 작은 눈을 최대한 크게 떠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뭐라고?”

“이름…… 영필로… 가르쳐……. 주… 제요….”

네, 아니오, 정도만 한다는 원장님의 말과는 많이 달랐다. 표현이 또래 아이들 못지않았다. 말을 걸어 놓고도 기대하지 않았던 명석은 한동안 뜸을 들였다. ‘영필’이나 ‘주세요’를 ‘주제요’로 발음하는 정도만 빼면 말하는 것에 문제도 없어 보였다. 곧바로 반응이 돌아오지 않자, 아이는 말도 덧붙였다.

“칭구들이… 이름… 쯜 줄 알아요….”

“아아, 그런데 선재는 몰라서?”

“…예에….”

“알았어, 형아가 가르쳐줄게.”

처음 써 보는 시옷은 모양이 이상했다. 선재는 놀이터 벤치에 앉아 처음으로 제 이름을 써 보았다. 선재의 성씨를 몰랐던 명석은 선재가 제 이름이 ‘미선재’라고 가르쳐줘 어딘가 이상하단 생각을 하고 고아원에 굳이 전화도 해보았다. 역시 미씨 성은 아니고… 민씨였다. 스케치북을 하나 사 ‘민선재’를 적어주자, 아이는 꼬불거리는 선을 그으며 어렵게 모양을 따라 했다.

“이름을 쓰고 싶었구나. 진작 말하지.”

재의 지읒을 겨우 그리듯 쓴 선재가, 명석의 말엔 느리게 입을 열었다.

“…예에…. 던재가 스, 쓰고….”

아이는 주로 시옷 발음에 서툰 모습을 보였다. 앞에서 미소 지은 명석이 선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가볍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작은 바람에도 훌훌 흩날렸다. 만지기까지 하자, 정전기가 올라 사방으로 뻗은 귀여운 머리카락들이 눈에 띄었다. 다른 손 하나도 들어 아이 머리를 두 손으로 고이 잡아준 명석이, 아래쪽에서 힘겹게 써지는 세 글자에 자꾸만 웃었다.

한여름, 비 내린 땅을 뚫고 올라온 지렁이들이 스케치북에 가득했다.

명석은 순수한 마음으로 이 아이의 미래가 순탄하길 빌었다.

사는 동안 비를 맞을 순 있다. 그러나 그다음 날, 거짓말처럼 푸르고 맑은 하늘이 이 아이 머리 위에 펼쳐지기를 바란다. 명석은 마음속으로 진심을 말하곤 아이를 쳐다봤다. 아이는 스케치북 다음 장을 넘겨 백지를 보이고 있었다. 말없이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서 이름을 또 써달라는 마음이 전해졌다. 흐뭇하게 웃은 명석이 펜으로 ‘민선재’를 다시 크게 써주었다.

* * *

“아, 우리 친구는 내년에 타면 되겠어요.”

직원이 아쉽다는 듯 준희의 등에 손을 올렸다. 이미 준희 뒤로 한 아이가 키를 재려고 대기 중인 상태였다. 눈금판 앞에 서 있던 준희가 눈을 끔벅거리며 아래쪽으로 내려왔다. 100cm 이상만 탑승 가능한 놀이기구가 왜 이렇게 많은지. 게다가 보호자 탑승도 안 되는 작은 놀이기구라 준희가 탈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벌써 세 번째. 110cm 이상 탑승 가능한 놀이기구 앞에서 키를 잴 때만 해도 준희의 표정은 밝았었다. 어린이 친구 내년에 타요, 하는 말에 네에, 하고 직원을 향해 밝은 웃음도 지어 보였다. 선재도 키가 대충 표기되었을 거라 생각해 105cm는 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림도 없었고, 준희는 100cm 표기 판에도 머리카락조차 닿지 않았다. 긴장한 듯 눈을 위로 들던 아이 모습이 생각나, 선재는 팔을 벌리며 다가오는 준희를 무릎을 굽히면서까지 안아주었다.

“준희 이거 말고 그럼….”

“애기, 아부지는 저런 거는 취급도 안 한다.”

그 소리에 울기 일보 직전이던 준희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선재도 범진을 쳐다보았다.

“저 봐라, 저거 공룡알 다 깨졌다 아니냐.”

“…….”

방금까지 준희가 타고 싶어 하던 공룡알 놀이기구를 턱으로 가리킨 범진이 썩었다는 소리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공룡알 한 알당 아이 한 명이 탑승 중이었다. 특유의 전자음과 함께 잘만 돌아가던 놀이기구가 애꿎게 범진의 비난을 받았다. 가만히, 준희의 머리에 손을 대고 있던 선재가 아이 얼굴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어? 저거는 2등만 타는 거다. 니 맻 등이냐. 니 목에 찬 거 그거, 아부지가 뭐라 했냐고.”

“아부지 깨비….”

“그래, 그럼 맻 등이라고?”

“이, 일등에요.”

제 다리에 얼굴을 기대고 있던 아이가 일등, 하며 손을 위로 뻗었다. 동시에 검지 하나를 삐죽 내밀었던지 손으로도 1이 표현돼 있었다. 선재는 손가락 하나를 든 채로 범진에게 걸어가는 준희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재혁은 범진 바로 옆에 있었다. 갑자기 일등이라며 다가오는 제 형에게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아부지 품에 형이 안기자 저 또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재혁은 앞으로 걸어가 선재의 손가락 두 개를 꾹 쥐었다.

“안아줘?”

“가!”

선재가 재혁에게 물었다 ‘가!’ 하고 크게 말하는 소리에 바람 새듯 웃었다. 키워본 아이가 준희와 재혁이니, 재혁이 무슨 행동이나 말을 할 때마다 준희의 그맘때 시절과 비교하게 된다. 준희는 재혁처럼 소리 지르듯 말한 적이 없었다. 아직 무른 아기 성대로 이렇게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건 범진의 덕(?)인 듯싶다.

“가? 아빠 어디로 가?”

“야!”

이번엔 ‘야’였다. 재혁은 어디라도 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상체를 반쯤 숙여 아이 입 근처를 닦아준 선재가 고개를 들어 범진과 준희 쪽을 쳐다봤다.

분명 우울한 얼굴이었는데. 준희는 안쪽으로 넣었던 도깨비 목걸이를 밖으로 꺼내 건 채, 범진의 품에 기분 좋게 안겨 있었다. 범진은 저거면 되겠네, 하고 아이를 보호자 동승이 가능한 놀이기구로 이끄는 듯했다. 짧은 순간, 범진은 뒤돌아 윙크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그 얼굴을 본 선재는 아이 손을 붙든 채로 잠시 얼었다. 버릇됐나…? 되게 별론데….

속으로 투덜거린 선재가 재혁의 손을 잡고 앞쪽으로 걸어갔다.

놀이기구가 가까이 있는 데다 줄도 길지 않아 탑승은 금방 할 수 있었다.

범진이 일 등짜리라며 준희와 함께 탄 놀이기구는 평범하고 작은 열차 기구였다. 천막처럼 생긴 지붕 아래 미니 레일이 있고, 그 위를 열차가 달렸다. 단독 탑승이 120cm 이상만 가능한 기구라 속도는 꽤 나는 것처럼 보였다.

선재는 재혁과 함께 대기열 바깥에 서서 긴장한 표정으로 기차에 앉는 준희를 쳐다보았다.

“형아랑 아부지랑 저기 있지.”

손으로 가리키자 재혁도 한쪽 팔을 들었다. 곧 출발한 기차는 처음엔 느리게 레일을 탔다. 범진이 팔을 뒤로 걸어 준희의 몸 전체를 안듯이 감싸고 있었다. 보호해주는 아부지도 있어선지, 얼굴에 긴장이 가득하던 준희도 이내 어색한 미소를 입가에 걸어 보였다.

짧은 레일에, 경사도 완만한 편이지만 어쨌든 내려가는 구간도 있었다. 선재는 열차가 올라갈 땐 준희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뒤쪽 레일을 탈 때도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고, 속도가 꽤 붙어 내려올 때야 준희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음악 소리와 주변 소음으로 준희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선재는 입을 크게 벌리고 울고 있는 아이 모습은 정확히 보았다.

느린 기구도 많이 타보지 않은 아인데. 범진이 괜히 동승 가능한 기구를 태워 아이 표정이 저렇게 변했다. 선재는 우앙, 울면서 내려오는 준희 때문에 깜짝 놀랐다가, 범진이 옆에서 장난치듯 준희의 볼을 꾹꾹 누르는 걸 보곤 휴대폰을 들었다. 빠르게 사진을 찍자 아이의 우는 얼굴과, 장난스럽게 준희의 볼에 손을 갖다 댄 범진의 모습이 그대로 찍혔다. 그렇게 몇 번 더 준희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열차의 속도가 줄어들었다.

아이는 이미 다 울었던지, 기구가 멈추고 나서는 울 것 같은 표정만 짓고 있었다.

그대로 범진의 품에 안겨 내려오는데, 다시는 타고 싶지 않단 얼굴이었다.

출구에서 뭐라고? 하며 품 안의 아이에게 말 거는 범진의 모습이 보였다.

“…니 그럼 안 되는데?”

“주니…. 일등…. 안 하게씁니다….”

“진짜 하기 싫으냐?”

그렇게 묻는 범진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 번졌다.

“일등 안 하게씁니다….”

누가 시켜서 합니다, 습니다, 하는 어미를 사용할 때는 있지만 혼자 나름대로 적용해 말하는 건 거의 처음 보는 것이다. 선재는 일등은 안 하겠다는 준희의 말엔 눈을 꾹 감을 수밖에 없었다. 서러움에 잔뜩 젖어 든 아이 얼굴 앞에다 대고 웃음은 뱉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간신히 한 차례 웃음을 참은 선재가 준희의 엉덩이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그래, 준희 하고 싶은 대로 해. 저것도 다시는 타지 말자…. 재혁이도 형아 위로해주세요.”

잡고 있던 재혁의 손을 끌자, 재혁은 기다렸다는 듯 무슨 말을 팩 내뱉었다.

“현아! 애기!”

뜻 모를 말을 지를 때가 훨씬 많지만, ‘형아’나 ‘애기’는 또렷이 들리는 편이다. 범진의 품에 안긴 준희를 향해 크게 말한 재혁이 깨금발까지 들어가며 제 형을 불렀다. 형아! 애기! 하고.

하지만 준희는 아부지 품이 좀 더 필요한 듯했다.

“우응…. 애기, 기, 다려 주세요….”

저를 부르는 소리에, 준희는 짧은 팔로 범진을 가득 안은 채 재혁에게 말을 남겼다. 형아로서 우는 모습을 보일 수 없단 마음과, 범진의 넓은 품에 안겨 안정을 찾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드는 모양이었다. 선재는 딸꾹질 때문에 준희의 작은 등이 들썩거리는 걸 보곤 범진의 허리를 꼬집었다.

“잘 골라서 탔어야지.”

“뭐. 니도 사진 찍드만.”

“사진은 그냥.”

말을 잇지 못한 선재가 재혁의 손을 잡은 채로 준희의 뺨을 닦아주었다. 처음에야 아이가 울고 있으니 당연히 놀랐다. 하지만 준희가 입을 크게 벌리고 엉엉 우는 건 잘 볼 수 없는 모습이기도 했다.

목도 못 가누던 시절을 빼면, 준희는 제 감정 표현에 서툰 아이였다. 생각이 섬세하고 여린 아이라 아무리 울고 싶어도 쉽게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지 못했다. 그랬던 아이가 고개를 한껏 들고 펑펑 우니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들었었다.

준희는 이전과 다르게, 조금은 과감하게 삶을 배워나가는 중이었다.

기껏해야 작은 소리로밖에 울 줄 모르던 아이가 입 안이 훤히 보이도록 울 줄 알게 되고, 누가 괴롭히면 목에서 무서운 펜던트를 꺼내 당당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는 말도 들었다. 선재는 아이에게까지 스며든 범진의 방식이 그리 나쁘지 않단 생각을 가졌다. 웃기고 기가 찰 때가 대부분이지만, 어쨌든 준희에게 긍정적인 영향은 끼치는 것 같아서. 그런 준희를 보는 제 마음도 훨씬 편해졌고 말이다.

“으응, 이제 아가한테….”

아부지 어깨에 손을 대고 몸을 뻗댄 준희가 내려가고 싶단 의사를 내비쳤다. 재혁이 여태 저를 기다리고 있다 생각해서였다. 그 말에 범진은 아이를 내려주었다. 준희는 발이 바닥에 닿자마자 두리번거리며 동생부터 찾았다. 다소 멀뚱멀뚱하게 서 있던 재혁이지만 그런 형아의 몸짓엔 현아, 하고 준희를 불렀다.

“아기….”

준희는 재혁을 발견하자마자 두 팔부터 뻗었다. 그대로 재혁을 안아준 준희지만, 재혁은 이미 준희의 턱 끝까지 자라 있었다. 준희가 제대로 안기엔 버거운 동생이었다.

“재혀기도 형아 되면 저거 탈 수 있서요…. 지금은 형아만 타…는….”

재혁을 몇 번 토닥거린 준희는 열차 이야기부터 꺼냈다. 말에 울음기가 어려 한 호흡으로 끝까지 말하는 건 어려운 모양이었다. 준희는 마침 내려오는 기차를 향해 손가락을 들어 보이기도 했다. 그 모습에, 범진이 대놓고 헛웃음을 쳤다.

“저래 부풀리네. 니랑 하는 게 비슷하다.”

“뭐가….”

갑자기 화살이 선재에게 꽂혔다. 물론 범진 앞에서 거짓말을 친 적도 많고, 없던 일을 있었다 얘기하기도 했지만, 그건 다 예전 일이 아닌가. 범진에게 마음을 연 후로는 굳이 속이거나 부풀릴 필요가 없었다. 진심으로 모르겠단 심정으로, 선재가 범진을 쳐다보았다.

“그런 게 있다.”

“이제 혼자서 비밀도 만들고.”

“허, 뭐시라고?”

“말 안 해주는 거 보면,”

“뭔 비밀. 내가 비밀이 어딨냐?”

언성을 높인 범진이 선재를 끌어 제 옆에 바짝 붙였다. 허리로 들어오는 팔에, 선재도 범진의 손목 근처에 손을 댔다. 준희는 재혁에게 자꾸 열차 기구가 안 무섭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아기야, 무섭지? 형아는 괜찮아, 하는 식으로. 딸꾹질 때문에 말이 멈추는 것치곤 내용이 너무 태연했다. 가볍게 웃음 지은 선재가 어? 하는 범진의 소리엔 고개를 돌렸다.

“내가 비밀이 어딨냐고.”

“…그런 게 있다면서.”

“씨발, 그딴 거 없다.”

주어도 불분명하고 뜻도 없는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 게 있다’고 말한 범진이긴 하지만 뭐라고 말했는지도 잊은 것 같고… 선재는 입을 닫고 앞만 쳐다봤다.

“이래 좆 세우고 쳐 돌아다니는데 무슨 비밀이 있겠냐.”

웃던 선재가 표정을 굳히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정말로 좆 모양이 그대로 잡혀 앞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어린이날이고, 사람도 이렇게나 많은 데서. 지퍼 형태를 따라 단순히 천만 앞으로 튀어나왔다고는 볼 수 없었다. 그저 자지 그 자체였다.

“이게 왜 이렇….”

“니가 내 꼬집었다 아니냐.”

무슨 소린가 했으나 준희를 안고 출구로 나온 범진을 꼬집은 기억이 났다. 선재는 불과 몇 분 만에 이렇게 부푼 자지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범진의 그곳이 푹 죽어있을 땐 바깥 일을 볼 때뿐이었다. 선재는 그런 사정도 굳이 알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범진이 사무실에서, 니 없을 때 내 자지 어떤지 보여줄까, 하고 바로 지퍼를 내리고 축 처진 자지를 보여줘 알게 된 적이 있었다. 그때 범진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래 동물 새끼는 아니야. 내가 니 만나기 전에는 별명이 좆바위였다. 이 씨바, 좆대갈이 바위처럼 꿈쩍도 안 해가.’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주변에 범진을 그렇게 놀려먹을 사람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니까. 미쳤다고 성질 더러운 범진에게 그런 별명을 붙였으려고. 당시에도 믿지 않았고 지금도 믿지 않는 별명을 떠올린 선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저와 있을 땐 이렇게까지 사람 구실을 못 하는지. 얼마나 좋아하면 이럴까, 싶은 생각도 후에나 드는 것이었다. 당장에 이렇게 된 바지춤을 보면 앞이 아득하기만 했다.

한숨을 다 쉰 선재는 옆쪽으로 눈을 들었다. 줄곧 저만 쳐다보고 있었던지 범진과 그대로 눈이 맞았다.

“어떻게 하면 죽는데.”

“뭐. 좆 말이냐?”

선재가 범진의 눈에 시선을 고정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제가 어떻게 하면 자지가 좀 죽겠냐고 순수한 의도로 물어본 것이었다. 알 만큼 알고, 섹스도 많이 했지만 발기한 자지 사정 같은 건 본인이 제일 잘 알 것이다. 선재는 사람들 많은 데서 흥분한 적이 없어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없었다. 기껏 해봐야 웃긴 표정이나 협박성 말 같은 것만 떠올랐다.

“내가 웃긴 표정 같은 거 지어줄까.”

의견을 제시한 건 선재 쪽이었다. 범진이 곧바로 대답하지 못한 건, 설마 이게 지금 여기서 자지를 빨아준다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놀이동산 한복판이라…. 그건 천하의 범진조차도 망설이게 하는 장소였다. 선재의 ‘웃긴 표정’ 발언에 범진이 김 샌 표정을 지어 보였다.

“씨발, 니 콧구녁 보고 흥분하는 게 낸데. 좆이 잘도 죽겠다.”

“…….”

순수하게 도와주려고 제안을 건넸던 선재가 차갑게 정돈된 얼굴을 하곤 범진을 쳐다봤다.

“뭐. 무서버 디지겠네.”

“거짓말하면 벌 받아.”

선재는 범진의 무섭단 발언을 예전부터 좋아하지 않았다. 입으로만 무섭다고 말하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와, 무서버라, 야, 씨, 무섭습니다, 형님, 같은 말들만 몇 번을 들었는지 몰랐다. 거짓말하면 벌 받는다는 말에, 범진이 한쪽 얼굴에 힘을 주고 웃었다. 뭔가를 참는 듯한 표정이었다.

“벌 씨발, 함 받아보자.”

“…….”

“니한테 평생 쪼임 당해 뒤지기, 니 겨드랑이 빨면서 칼빵 당하기 그런 거면 난 괜찮그든.”

“…제발 입 좀,”

닫아, 하고 손을 올린 선재가 더 말하려는 범진의 윗입술을 손가락으로 쥐었다. 잡아 내리려는 시늉을 하자, 범진은 뭐가 즐거운지 입 안에 있는 이 전부를 보이며 웃었다. 꼬집듯 윗입술을 쥐고 있던 선재가 미친 사람처럼 웃는 범진의 반응엔 손을 놓았다.

“벌이 또 뭐가 있겠냐. 함 생각해보자.”

허리를 감고 있던 손을 치워낸 선재가 몇 걸음 앞으로 가 아이들 어깨를 손으로 만졌다.

조그만 아이 둘이 고개를 들고 저를 쳐다보자, 굳었던 얼굴에 힘이 들어갔다. 방금 범진에게 들은 말은 애써 무시하고, 부드러운 표정으로 아이 둘을 향해 말을 걸었다.

“이번엔 재혁이도 탈 수 있는 거 타자. 준희는 타고 싶으면 타고, 타기 싫으면 타지 마?”

“네에.”

더는 준희의 어깨에서 느껴지는 흔들림 같은 게 없었다. 선재는 아이 둘이 손잡은 걸 보고 어느 쪽에 서야 하나 고민했다. 일단은 아이들을 데리고 다른 놀이기구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범진에게 잠깐 앉아 쉬라고 하고, 셋이서 좀 놀다가 오면 범진의 거기도 괜찮아질 수 있으니까. 혼자 판단한 선재가 뒤에서 아이들 어깨를 살짝 밀어냈다.

“저기, 저거 탈까?”

범진과 말을 나누면서 보게 되었던 기구. 재혁보다 작은 아이도 탑승한 걸 보고 다음은 저기로 가야겠다 생각했었다. 범진에게 사정이 생겨, 일단은 셋만 가야 할 것 같지만.

“애기, 다 울었냐!”

눈치껏 쉬고 있을 줄 알았으나 큰 소리로 애기를 부르는 범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준희는 우렁찬 범진의 소리에 화들짝 놀라 반응부터 했다. 녜, 하고 여기 있다며 한쪽 팔을 들었다.

“내 시끼.”

“…….”

뛰듯이 성큼성큼 걸어온 범진은 아이들 앞에서 자세를 낮춰 앉았다. 팔을 뻗으며 두 아이 다 안아 들려고 했으나 재혁은 거부했다. 어리고 작은 손이라 밀치기보단 흥, 하고 돌아서는 것에 가까웠다. 이 자식이, 하는 소리를 낸 범진은 준희만 번쩍 안아 들었다. 선재는 눈을 내려 범진의 바지춤을 살폈다. 주먹으로 때리기라도 했는지 아까처럼 흉측하게 앞으로 튀어나오진 않은 채였다. 내심 안심한 선재가 재혁의 손을 잡으며 범진의 옆에 섰다.

기구는 예상처럼 준희도 즐겁게 탈 수 있는 기구였다. 느릿느릿한 회전목마에 가까울까. 아이들 표정이 세세하게 보일 정도로 속도가 나지 않는 놀이기구. 선재는 울타리 바로 앞에서 손 흔드는 준희와 재혁의 모습을 열심히 사진으로 남겼다. 재혁도 신이 난 듯 몸을 일으키려 하거나 상체를 양쪽으로 흔들었다.

출구로 나올 때도 아이들 표정이 밝았다. 동생을 챙기겠다고 두 손으로 불편하게 재혁의 손을 잡고 나온 준희가 아기가 여기 있다며 재혁의 손을 앞쪽으로 내밀었다.

“준희 동생 잘 챙기네.”

“네에.”

“애기 니 이건 왤케 잘 타냐.”

“…헤에.”

아직 눈이 좀 부어있긴 하지만, 어쨌든 본때는 보여줬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범진의 띄워주기에 아이는 의심이 조금도 깃들지 않은 얼굴로 맑은 웃음을 지었다. 다시 일위로 등극했다는 말엔, 자세한 뜻도 모르면서 신이 난 듯 범진 앞에서 발을 조금씩 굴리기도 했다.

그런 준희를 안아 올리며 범진이 한 말은 “직이는 내 아기”였다.

선재는 못 들은 척 재혁을 뒤로 끌며 딴청을 부렸고, 준희는 범진의 칭찬에 에, 하고 작은 소리만 나는 웃음을 지었다.

주차장으로 향했을 땐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야간 공연도 예정돼 있었으나 아이들이 피곤해하는 것 같아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공원엔 식당가도 잘 조성이 되어 있었다. 스테이크집에서 돈가스와 스테이크, 필라프를 시켜 먹고, 나와서도 츄러스, 핫도그 등을 간식으로 먹어 차를 탈 때까지도 배고프지 않았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준희는 돌아오는 차에서 곰돌이 모자와 풍선 두 개, 누르면 광선이 나오는 팔찌까지 찬 채로 잠이 들었다. 재혁의 팔에도 똑같은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이렇게, 이렇게, 하며 동생에게 팔찌 누르는 걸 가르쳐주던 준희의 목소리가 느릿느릿 퍼지자, 선재의 눈도 자동으로 감겼다. 눈을 떴을 땐 익숙한 울타리가 보이고 있었다.

“방금 돈가스 먹었는데?”

선재는 집에 도착했다는 생각과 범진이 수고했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그러나 정신이 아직 아득한 잠결이라, 마음과 달리 엉뚱한 잠꼬대부터 입으로 뱉었다.

“그래, 니 돈가스 먹었지.”

잠꼬대에 웃은 범진이 옆을 보며 선재의 턱을 손가락으로 톡 쳤다.

부옇게 어두운 하늘엔 붉은 구름과 회색 구름이 반반씩 떠올라 있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걸 보면 곧 비라도 올 모양이었다. 끔벅거리며 앞을 쳐다보던 선재가 다시 올라오는 범진의 손엔 정신이 번쩍 드는 걸 느꼈다.

“돈가스 맛있었냐….”

“…깼어.”

범진이 잠결인 제게 이상한 말을 시킨 적이 몇 번 있었다. 이번에도 돈가스 얘기를 하며 야한 말을 할 것 같았다. 짧게 대꾸하곤 입을 꾹 닫은 선재가 옆을 쳐다보았다.

“깼다고 굳이 왜 말하냐. 꼴리게.”

“…뭐?”

“조때가리 개꼴린다고.”

그게 왜 꼴리는지도 모르겠지만 갑자기 욕설을 붙이며 말하는 범진에겐 큰소리가 와락 나왔다.

“내가…! 아기들… 앞에서…!”

준희 앞에서 성적인 말을 가감 없이 내뱉진 않는데. 선재는 깜짝 놀라 언성을 높였으면서도 뒤에 앉은 아이들이 신경 쓰였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뒤쪽으로 고개 돌린 선재가 아무도 없는 뒷좌석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마술을 부린 듯 카시트 두 개엔 풀린 벨트만 얹어진 채였다.

“애들 어디 갔는데…?”

“집에. 대충 씻기고 방에 넣어줬다.”

“재웠다고…?”

그렇게 시간이 많이 지났다는 소린가. 선재가 의심하는 투로 물었다.

“어, 니 여서 30분은 넘게 잤다 아니냐. 뭐를 한 게 있다고….”

씩 웃은 범진이 선재의 뺨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입 안까지 진동이 올 정도라 선재는 곧바로 한쪽 눈을 찌푸렸다. 범진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운전에, 공원에서도 아이들 둘을 주로 안았던 건 범진이었다. 재혁이 싫다고 할 때를 빼면 두 아이를 한꺼번에 안고 있을 때도 많았다.

뭐…. 하고 작게 말한 선재도 반박할 거리는 찾지 못했다.

“뭐? 투정 부리냐.”

“…….”

“야, 이 이쁜 거 이거, 해 다 졌는데도 빛이 난다, 빛이 나.”

“…….”

“니 이래 이쁘게 태어난 거 후회 쫌 하냐?”

“…….”

범진이 혼자서 이런저런 소리를 할 때, 선재는 입을 닫고 있을 때가 많았다. 기분 좋아지라고 하는 소리인 건 알겠다. 하지만 사람을 때리듯이 말을 해 바로바로 반응해주기가 어려웠다. 질문에도 입을 닫고 있던 선재가 어? 후회 쫌 하냐고, 하며 되묻는 범진에겐 입을 열었다.

“무슨 후회….”

“니가 이래 생겨가 내가 니를 어쩔 수 없이, 어? 불가, 그 뭐냐……. 불강정으로 니한테 쫌 그랬는데.”

불강정? 혹시 불가항력? 맥락을 통해 전혀 다른 단어를 유추해낸 선재가 범진에게 단어와 뜻을 제대로 가르쳐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헷갈릴 만한 단어들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사업을 하는 사람이니 그 정도는 정확히 알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니 뭐, 그래서, 후회 쪼금이라도 하냐?”

“…딱히….”

중얼거리듯 말한 선재가 뜸을 들이며 뒷말을 이었다.

“너 말처럼… 그렇게 생기지도 않았고… 애초에….”

“화아, 누가 그거 물었냐.”

“뭐…. 태어난 거 후회하냐면서….”

“아니, 씨발… 그래, 내가 그래 묻긴 물었지.”

흥분하며 욕을 했다가도 급하게 인정하는 모습이 범진다웠다.

“아, 씨. 모르겠다. 닌 그냥 내 거다.”

질문이고 뭐고 결론부터 내버린 범진이 에라 모르겠단 식으로 등을 좌석에 퍽, 부딪혔다. 선재는 말없이 범진을 쳐다보다 눈을 천천히 내렸다. 꼬집혔단 이유로 과하게 발기했던 자지는,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내내 조금 덜 발기하거나 대차게 발기하기만 반복했었다. 완전히 가라앉은 적은 없었다.

범진의 질문도 그렇고, 바지춤을 보자니 나오려는 말이 있었다. 선재에게 후회하고 말고는 철 지난 화두일 뿐이었다. 지금은 어떤 것도 후회되지 않았다.

“…빨아 줄까…?”

조심스럽게, 그러나 이 관계를 확신하고, 후회하지 않는단 뜻에서 입을 연 선재와 달리 범진은 조심성 없게 입을 열었다.

“뭐, 자지?”

“…….”

…후회하지 않는 게 맞겠지. 선재는 바로 자지? 하며 확인하는 범진을 향해 숨 섞인 웃음을 뱉었다. 범진은 물어놓고 대답은 듣지 않았다. 이미 지퍼로 향했던 커다란 손에 자지가 잡혀 나오는 게 보였다. 간혹 조수석에서 몸을 뻗어 범진의 자지를 빨아줄 때가 있었다. 그때 기억을 되살린 선재가 기다렸다는 듯 튀어나온 자지엔 상체를 옆으로 뻗었다.

“씨이팔, 니가 내 자지를 다 빨겠다고 하고. 이게 세상이다.”

이게 세상이야, 하는 범진의 소리를 무시하고, 선재는 좆대를 쥐고 입을 아 벌렸다. 차내 공간이 널찍하긴 하나 다리를 반쯤 올리고 상체를 기울이면 어렵지 않게 입이 닿는다. 자지의 끝부분만 입에 암, 담은 선재가 손으로 기둥을 쓸며 고개를 움직였다.

“씨이발, 니같이 깨끗한 게 내 좆이나 빨고 있고….”

칭찬인지 욕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선재는 눈썹에 힘을 준 채로 머리를 천천히 왔다 갔다 했다. 불뚝하게 튀어 오른 자지 혈관이 선재의 입술과 입 안 살, 혀를 긁듯이 스쳤다.

“화아….”

거칠게 감탄하는 소리를 내면서도 손만은 부드러웠다. 선재의 뒷머리통에 손을 갖다 댄 범진이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뒤쪽으로 쓸어주었다. 이 각도에서 선재가 좆을 빨고 있으면 옆얼굴이라도 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다. 어설픈 손짓으로 귀 뒤로 머리를 넘겨준 범진이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뺨과 살짝씩 찌푸려지는 눈가를 보곤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맛 좋냐….”

추읍, 춥, 하는 소리는 느리게 퍼졌다. 좆을 빨아주겠단 사람치고는 기술이 형편없었다. 범진은 선재의 작은 움직임에 실실 웃음만 머금고 있었다. 딴엔 열심히 한다고 귀 뒤로 넘겨준 머리칼이 앞으로 몇 가닥 삐져나올 정도로 움직이고 있는데, 입술이나 혀가 유독 무르고 연해 간지럽다는 느낌이 강했다.

“이로 깍 씹어봐라….”

“읍…. 으읍….”

어설프게 고개를 움직이던 선재가 그 말에 이를 세웠다. 미세하게 으, 하는 표정을 짓곤 살보다 이가 더 닿도록 만들었다. 그러자 머리에 닿았던 손에도 힘이 들어가고, 범진이 하체를 앞으로 내미는 것도 느껴졌다. 그 탓에 선재의 입으로 자지 일부가 더 들어왔다. 목 끝을 찔린 것도 그때였다.

“읍, 압.”

아픈 티를 내며 고개를 빼낸 선재가 벌게진 눈을 들어 범진을 쳐다봤다.

“왜 갑자기 찔러….”

“침이나 딲고 말해라…. 침이나….”

선재는 웃는 얼굴로 제 입 근처를 닦아주는 범진 때문에 마음이 울렁거렸다. 징그러울 정도로 거친 사람이지만 참 많이 변했다는 생각. 언어가 순화되지 않는 면은 있어도 예전에 비하면 짐승이 인간 된 수준이었다. 괜히 훌쩍거린 선재가 몸을 완전히 뒤로 빼내며 조수석에 앉았다. 앞을 쳐다보고 또 훌쩍, 소리를 내자 이번엔 범진이 조수석 쪽으로 몸을 완전히 붙여왔다.

“잘 빨지도 못하는 기 빨아준다고 지랄할 때부터 알아봤다….”

“…….”

말은 한없이 거칠지만 얼굴에 닿는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선재는 콧대를 구기며 얼굴 전반에서 느껴지는 따가움을 몰아내려 했다. 방금까지 범진의 성기를 물어 입도 얼얼했다. 자꾸 닿는 범진의 손을 아래로 내리고, 선재는 범진을 쳐다봤다.

“이리로 와…. 넣게 해줄게.”

“어쭈…? 뭘 넣게 해준다냐. 내가 박고 싶음 박는 거지.”

“…하, 그럼 맘대로 하든가.”

그런 사람이 펠라 하다 만 사람 입을 닦아주나. 범진이 제 맘대로 한다며 즐거운 얼굴로 차 문을 여는 게 보였다. 수치심도 없이 발딱 선 자지를 꺼덕이며 보닛을 빙 둘러 오는데, 괜히 이리 오라 말했나 싶었다. 선재는 조수석 열리는 소리에 코를 훌쩍이며 밖으로 나섰다. 빈 조수석에 범진이 앉자, 선재가 익숙한 듯 그 위에 올라탔다.

차 문이 쾅, 닫히고 의자가 반쯤 누웠다. 선재는 범진에게 몸을 붙인 채로 바지를 천천히 벗었다. 팬티도 엉덩이 부분까지 벗어 내리자, 범진의 손이 노출된 엉덩이에 닿는 게 느껴졌다. 앞으로 퍽, 끌어당긴 범진의 손길에 선재가 가슴께를 범진의 얼굴에 부딪혔다.

“아, 힘 갑자기 주지 말랬지…. 괜히 부딪히고….”

주물럭, 주물럭, 엉덩이 두 짝을 농락당하는 와중에도 세게 부딪힌 범진의 얼굴이 걱정되었다. 선재는 두 손으로 범진의 얼굴을 살피고 콧대도 위쪽으로 들어보았다. 눈을 감고 음미하듯 손길을 느끼기만 하던 범진은 몇 초가 더 가서야 눈을 떴다.

“젖도 좀 빨자.”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내민 범진은 혀를 딱딱하게 세워 어느 한 지점을 정확히 찔렀다. 하얗고 빳빳한 면 셔츠를 입고 있던 선재가 젖꼭지에 닿은 혀를 느끼곤 몸을 화들짝 뒤로 뺐다.

“뭐를 그래 놀래냐. 까봐라, 젖 빨아줄게.”

“…아플까 봐 걱정하고 있는데…. 그런 말이나….”

“뭐. 젖이 뭐가 어때서. 니 순우리말 무시하냐.”

대충 젖이 순우리말이라 때려 맞춘 범진이 선재를 가르치듯 타박했다.

“저, 젖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걱정해주면,”

당황한 듯 ‘젖’까지 입에 담은 선재의 말에 범진이 씩 웃으며 여유 있게 받아쳤다.

“그래, 고맙다, 내 마누라. 내 걱정하는 거 니밖에 없지.”

“…….”

“이제 젖 구경 좀 하자.”

“…….”

매일 보고, 또 지독하게 애무하는 범진에게서 그런 말이 들리자 인상이 써졌다. 선재는 어느 순간부터 밖에서 상체를 노출해본 적이 없었다. 재혁을 낳고 유즙이 분비된 탓도 있지만, 범진이 과도하게 물고 빨아 젖꼭지가 원래보다 많이 부풀게 되었다. 일반적인 남자의 젖꼭지라고 보기는 어려워졌다. 옛날엔 기회가 별로 없어서 그랬지, 보통 사람들처럼 상반신을 드러내는 것에 큰 거부감을 가진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엉덩이에 손자국이 남을 정도로 만져대는 범진 때문에, 선재가 어쩔 수 없이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안에 입고 있던 속이 다 비치는 얇은 면티 한 장은 제대로 벗지 못했다. 범진이 안 벗어도 된다며, 겨드랑이까지 티셔츠를 끌어 올렸기 때문이었다.

옷을 입은 것도, 안 입은 것도 아니었다. 선재는 오로지 밋밋한 가슴을 노출하기 위해 끌어 올려진 티셔츠 때문에 얼굴이 붉어졌다. 차 안은 덥거나 춥지 않았다. 딱 적당했고, 오히려 포근할 정도로 따뜻한 편이었다.

그런데도 툭 불거진 젖꼭지 때문에 선재는 팔을 자꾸만 안쪽으로 모았다. 바로 앞에서 쳐다보고 있는 건 아무래도 좀 그랬다. 유두 부근을 가리려던 선재가, 갑자기 씨이팔, 하고 욕을 뱉으며 혀를 댄 범진 때문에 양 주먹을 꽉 쥐었다. 성기만큼 억센 혀가 젖 돌기에 닿아 춥, 춥, 소리를 내고 있었다. 표면도 얇아진 선재의 젖꼭지는 본의 아니게 예민한 감각을 몰고 왔다. 혀 기둥을 세우고 젖꼭지를 핥고, 입으로 쪽쪽 빠는 범진 때문에 선재가 불편한 듯 다리를 움직였다. 바지를 반만 깐 탓이었다.

허벅지 사이가 답답하고, 성기도 차츰 고개를 들었다. 버둥거리는 발짓을 느낀 범진이 젖꼭지 애무를 하면서 선재의 바지를 벗겨 주었다. 선재가 다리 한 짝을 들면 재빨리 천을 벗겨내는 식이었다. 맨다리에, 위로 들려 올라간 티셔츠만 남은 선재는 제 차림이 어떤지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앞으로 튀어나온 젖꼭지가 범진의 입 안에 있어 몸만 발발 떨었다.

“아, 흐…. 너, 너무 그렇게 하면, 으….”

“안 좋냐.”

입만 살짝 떼고 말한 범진이 혀기둥을 젖꼭지에 비비며 말했다. 그 감각에도 상체를 떤 선재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하으….”

“니 전에 젖만 빨리고도 쌌다 아니냐.”

“내, 내가 어, 언…. 흑!”

범진이 선재를 자극하듯 말했다. 정확히는 박으면서 빨았을 때 그런 반응이 있었다. 여전히 젖꼭지에 혀를 댄 채로 손을 내린 범진이 선재의 배까지 닿아있던 제 자지를 아래쪽으로 내렸다. 다른 손으로 선재의 엉덩이 한 짝을 벌리며 끌어당기자 푹 파이듯 균열 난 자리가 있었다. 손으로 물을 얼마나 쌌는지를 확인한 범진이 얼추 젖어 든 구멍으로 자지를 천천히 밀어 넣었다.

“아, 아욱…. 흑…. 우으….”

기둥이 구멍을 벌리고 들어가자, 선재가 범진의 어깨를 잡고 엉덩이부터 어깨까지를 조금씩 떨었다. 삽입이 빨라 고통이 수반되는 듯했다. 눈치챈 범진이 다리를 제대로 고정해 선재가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왔다. 엉덩이에 한 손을 두고, 나머지 한 손은 선재의 젖꼭지로 가져갔다. 검지로 젖 돌기를 빠르게 치듯이 만져주자, 자지를 뻣뻣하게 감싸고 있던 내벽이 조금씩 풀어졌다. 뜨끈하고 축축하게 감싸지는 느낌에, 범진이 검지를 더욱 빠르게 놀렸다.

“끄으, 흐윽!”

너무 거세게 손을 놀렸기 때문일까. 선재는 성기가 삽입된 지 1분도 되지 않아 첫 정액을 느물거리며 싸댔다. 질금거리며 분출된 정액은 사방으로 튀지는 않고, 다만 범진의 복근 쪽으로 흘러내렸다. 농도가 현저히 묽어 물처럼 보이는 정액이었다. 제 배에 층층이 맺힌 야한 물에, 범진은 혀로 입술을 쓸곤 손으로 배를 한번 쓱 만졌다.

정액이 손에 그대로 묻긴 했으나 쉽게 흘러내리려고 했다.

급하게 손가락 하나를 입 안에 넣은 범진이 그걸 쪽 빨아 먹었다.

“야한 맛 나네.”

“왜, 머, 머, 멍는데….”

발음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선재가 기막힌 광경을 보며 말을 더듬었다.

“뭐. 왜가 어딨냐.”

동시에 엉덩이 두 짝을 앞으로 잡아당긴 범진이 삽입돼 있던 자지의 각도를 고쳤다. 순간 내벽이 휘는 느낌에, 선재는 다시 범진의 어깨에 손을 대고 고개를 뒤로 꺾었다.

“하아, 흐….”

“좋냐, 선재야.”

“흐, 으…. 으으…. 흐윽….”

“좋다고 안 하네.”

“으끄…. 끅….”

“이거, 또.”

충분히 좋아하는 것 같지만 범진은 짓궂은 데가 있었다. 언젠가부터 선재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매사가 엉성한 선재는 섹스에는 더욱 능숙해지지 못했다. 말은 태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행동에서 미숙한 점들이 드러났다. 카섹스만 해도 그렇다. 대체 몇 번을 했는지 셀 수도 없으나 움직이란 말을 하지 않으면 다리만 꼼지락거리고 있을 때가 많았다.

선재의 팔꿈치를 앞으로 당긴 범진이 젖고, 빨개진 얼굴에 눈길을 보냈다.

각도가 각도인지라 푹 숙여봤자 그 얼굴이 훤히 보였다.

“계속 내가 할까?”

“…흐으….”

“…니 좀 안 흔들래?”

“…싫…어…흐.”

위에서 엉덩이 흔들라는 말을 선재는 좋아하지 않았다. 일부러 그렇게 말한 범진이 씩 웃으며 선재의 팔꿈치를 끌어당겼다. 그럼 내가 해야지, 하곤 다리를 앞쪽으로 내밀어 선재의 몸이 제대로 닿도록 끌어당겼다. 그러자 가슴이 붙고, 선재의 머리통도 어깨로 툭 와 닿았다. 범진은 그때부턴 잘 아는 스팟만 건드렸다. 일단 자지 각도를 방광에 가깝게 붙이고, 뭉툭한 대가리 부분을 깊은 점막 바로 앞쪽으로 밀어 넣었다. 누르듯이 자지를 삽입하자 선재에게선 바로 반응이 왔다.

“아, 싫, 싫은, 흑, 으….”

“그래…. 하아, 싫어해서 어떡하냐….”

말만 그렇게 한 범진이 유독 부드럽게 닿는 점막을 계속해서 찔렀다. 선재의 약한 부위 중 하나, 오메가의 임신 기관이었다. 방광까지 찧으며 올라오는 자지에, 선재가 손을 내려 곧장 배로 가져갔다. 여전히 범진에게 안긴 모양새여서 틈을 파고들어야 배를 만질 수 있었다. 쿵, 쿵, 찧는 듯한 느낌에 선재가 파들거리며 다리를 들었다 놓았다. 양말이 신겨진 발도 바짝 들려 동그랗게 오므라진 채였다.

“니 여 좋아하지.”

“으, 흐으, 흑…. 끄으…!”

“여따 싸주는 게 그래도 제일 좋다 아니냐.”

흔들림 없이 자지로 찔러주던 범진이 그 말엔 탁한 눈이 되어 선재를 바라봤다. 숨을 허덕거리던 선재도 범진의 눈을 애처롭게 쳐다봤다. 몸이 밀착되어 움직임의 폭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정확히 그 부분만 찧는 범진에겐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 마음을 덮는 감각. 간질거리는 아랫배와 쿵쿵 울리는 자지의 진동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으…! 끄…. 흑….”

소중한 아이들이 태어난 후의 임신 기관은 지나치게 예민한 성감대일 뿐이었다. 선재는 젖꼭지처럼 표면이 닳은 점막을 찔러대는 범진의 자지를 어떤 식으로도 버티지 못했다.

“아, 하아…! 으가…!”

우는 소리나 정확한 신음을 뱉는 것도 어려웠다. 선재는 멍한 눈으로 고개를 살짝만 들고, 안쪽을 누르듯이 꾹 닿은 범진의 자지에 소변만 찔끔찔끔 분출했다. 몸을 떨 때마다 약한 줄기의 소변이 성기 밖으로 이따금 조록거리며 새 나왔다.

범진은 제 위에 앉혀놓은 선재의 얼굴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걸 볼 때 극도의 흥분감을 느끼곤 했다. 두 눈이 엉뚱한 허공을 짚고, 꾹 다물려 있던 입술도 벌어지기 시작하면 선재는 어김없이 뭘 싸도 싸버리곤 했다. 뿌옇고 상아색이 도는 범진의 진한 정액에 비해, 선재의 정액은 소변과 간신히 구분이 가능할 정도로만 부옜다. 이미 그 정액은 싸버린 뒤니 지금 조금씩 지리고 있는 건 소변일 터다. 범진은 뒤로 꺾이려는 선재의 몸을 잡고 선재의 엉덩이를 튕겨내듯이 하체에 힘을 실었다. 힘이 빠진 와중에도 팔이나 허리를 떨며 어떻게든 소변만은 참아내려 하는 움직임이 느껴졌으나 자지를 쳐올릴 때마다 찔끔, 찔끔, 맑고 노란 액체가 자극을 이기지 못하고 새 나오는 게 보였다.

“다, 다른…. 흑…!”

애원하듯 말하면서도 점막을 찔릴 때마다 오줌을 싸버리는 선재의 얼굴에 당혹감이 가득 번졌다. 힘을 잃은 얼굴에서도 그 기색이 선연히 드러났다.

원래 차 안에선 짧게 섹스를 끝낸 적이 많으니까, 선재는 편한 장소에서 하는 것처럼 저를 극한으로 몰고 가는 범진이 당황스러웠다. 선재의 퍼덕임에 잠시 움직임을 멈춘 범진은 허리를 느슨하게 쓰며 자지를 선재의 축축한 내벽에 끼우기만 하고 위로 눈을 들었다. 노골적인 감각과 눈빛이지만 선재는 우선 말부터 하고 보았다.

“자, 자꾸 그러면 차… 어, 엉망….”

“야…. 그러면 좋지. 뒤지지. 니 냄새 다 밴 차를 어서 사겠냐.”

“내가 싫, 흑. 흐윽!”

“뭐. 씹, 내가 좋은데.”

좋다며 선재의 엉덩이를 앞뒤로 당겼다가 뺀 범진이 주먹까지 쥐고 부르르 떠는 선재를 보곤 엉덩이 한 대를 가볍게 쳤다.

“정 그러면 완전히 안기봐.”

위로 반듯하게 상체를 세우기 전까진 계속 범진의 품에 몸을 붙이고 있었다. 선재는 범진이 제시한 대안이 겁나면서도 별다른 방도를 찾지 못했다. 몸이 고장 난 것처럼 여기저기로 튀어대고 있었다. 선재는 툭툭 경련하는 안쪽 허벅지 근육을 범진의 몸에 제대로 붙이고, 벌겋게 달아오르고 젖은 얼굴을 범진의 목덜미 쪽으로 완전히 가져갔다. 코가 짓눌릴 정도로 가까이 붙자 성기도 범진과 제 몸 사이에서 구겨지듯 묻혔다.

한쪽 팔이 등에 닿는가 싶더니 그 손이 머리로 올라왔다. 선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예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눈을 꼭 감고 등을 떨자, 범진이 하체를 쓰며 뺨을 뻑 빨았다. 뻑, 하는 소리와 뺨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부수적일 뿐이었다. 마지막인 듯 치고 올라오는 자지에 내벽 세포 하나하나가 다 반응하며 억센 기둥을 비벼댔다. 안을 뚫어대는 감각에도 정신을 잃을 것 같은데 방광을 밀며 박혀오는 자지가 특정 부위를 찔러대는 것엔 감히 생각조차도 할 수 없었다. 껍질에 가까운 표면이 범진 때문에 더할 나위 없이 약해져, 자지 끝으로 찔릴 때마다 끔찍할 정도의 흥분감을 몰고 왔다. 선재는 결국 고함을 지르다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범진의 목덜미에 입을 댄 채로 엉엉, 애처럼 울 수밖에 없었다.

“아, 아! 아, 흐엉…. 흐…!”

“후으.”

범진도 피치를 올리면서는 거친 숨만 내쉬었다. 뻥 터뜨린 울음은 점차 신음에 섞여 흐느끼는 소리로 변해갔다. 선재는 들썩이는 몸을 범진에게 딱 붙인 채로 엉덩이에서 아랫배까지 전달되는 자지의 울림에 울음으로 반응했다. 퍽, 퍽, 진득하고 난잡한 교접음이 거센 속도로 치달아가자 선재가 몸을 발발 떨며 웅얼댔다.

“지, 진짜, 흐으으…. 싸, 쌀 거 같…. 흑!”

“니 낸테, 후, 쌀라고 매달맀다 아니냐.”

“으, 으윽, 흐으…. 어엉….”

포기한 듯 길게 울음을 내뱉은 선재가 끼어있던 성기에서 소변을 줄줄 쏟았다. 몸이 딱 붙은 채여서 젖는 건 오직 벗다 만 범진의 셔츠 자락뿐이었다. 제 옷에 싸라고, 몸을 안아준 범진 때문에 선재는 도중에 멈출 생각조차 못 했다. 멈출 수도 없었다. 몸에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물이란 물을 다 싸버리고 나서야 요의도 가시게 할 수 있다.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물을 지리며 우는 소리를 내기 시작한 선재가 찔꺽대며 들어오는 자지에 고개를 이리저리 저었다.

“아기…. 허엉….”

울음 섞인 신음 사이로 짧은 단어 하나가 튀어나왔다. 그 말에 눈을 번뜩인 범진이 하체를 더욱 비비며 자지를 위로 쳐올렸다. 끝에 걸리는 볼록하게 튀어나온 아기집 입구를 사정없이 긁으며 물었다.

“허, 왜, 또 애 밸까 봐?”

선재도 이성을 놓았고, 범진도 섹스를 하며 화가 치미는 상태까지 치달았다. 본능과 단편적인 감정만 남은 절정의 순간엔 누구도 사실을 따지지 않았다. 원래 장난치듯 니 임신하면, 하고 가정하던 범진의 눈도 반은 맛이 가 있었다. 흉하고 탁한 기운만을 뿜으며 선재를 노려보고 있었다. 턱, 턱, 흔들리는 의자 위에서 아기…. 하는 말만 꺼낸 선재도 꿈같은 쾌락 위를 간신히 건너고 있을 뿐이었다. 이미 질척하게 젖은 내벽을 좆기둥 전체로 비비고 들어오는, 그러면서 힘껏 열리고 있는 안쪽 점막과 세포를 비비듯이 문지르는 범진의 자지에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응…. 아기, 흑, 흐윽…!”

“씨이팔, 그 새끼 내가, 배게 해줄게, 씨입.”

흥분이 극에 달한 범진이 선재의 머리통을 쥔 채로 아래를 퍽퍽퍽 치받았다. 이미 깊숙한 곳까지 박혀 있고, 자제가 자세인지라 한번 뺐다가도 곧바로 그곳으로 가 박혀 들었다. 연속된 빠른 움직임에 다리를 양옆으로 펼친 선재가 발등이 오므라들도록 하체 전체를 굳혔다. 선재의 머릿속에도 아기가 생길 것 같다는, 막연한 감정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흐려지고 뿌옇게 점멸하는 정신을 끊어질 듯한 성감이 잇고 있었다. 더는 낼 물도 안 남은 선재지만, 마지막, 범진의 정액이 장기를 적시면서는 앞과 뒤가 모두 흥건해지고 말았다. 아랫배가 지잉 울릴 정도로 바닥까지 긁어낸 소변인지 정액인지 모를 액체가 성기 구멍 한가운데서 방울처럼 맺혀있다 떨어지길 반복했고, 범진의 정액이 싸질러진 내벽에서도 자지가 꿈틀거릴 때마다 많은 양의 애액이 분출돼 사정 뒤에도 물에 절여진 것처럼 구멍 내벽이 물렁대며 부어올랐다.

범진은 자세가 자세이니만큼 거하게 싸지른 바로 다음 자지를 빼냈다. 번들대는 자지가 빠져나온 다음에도 선재의 구멍은 살짝 조여들기만 할 뿐 자지가 박혀있던 모양 그대로 벌어져 있었다. 그 틈으로 투명한 애액이 나오더니, 점차 부연 색 액체가 비치고, 마지막엔 걸쭉한 범진의 정액 그대로가 질질 흘렀다. 선재는 그때까지도 범진의 품에서 몸을 떨고만 있었다. 내벽에 싸진 범진의 정액이 칠이 된 것처럼 주름 사이사이 끼어 열기를 전달하고 있었다. 이렇게 괴로울 정도로 극한으로 몰린 건 상당히 오랜만인 듯했다. 선재는 잔뜩 벌어진, 범진이 연속해서 찔렀던 그 부위 때문에도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다 끝난 다음에도 벌름대며 생식기능을 하려는 입구의 움직임 때문에 배가 아릿하게 아팠다.

“민선재…. 좋아 죽든데….”

왼팔로 머리를 둘러 선재의 왼쪽 귀까지 손을 뻗은 범진이 뺨에 달라붙은 젖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손길에 눈을 파르르 떤 선재가 눈꺼풀을 닫았다 천천히 까만 눈동자를 보였다. 아래 눈 점막에 가득 맺혀 있던 눈물이 시선을 옮기자마자 아래로 주르륵 떨어졌다. 다른 손을 선재의 얼굴로 올린 범진이 그 눈물을 엄지로 닦아주었다.

“하아, 내가 니 안 울릴라고 노력은 좆나 하는데.”

입을 닫고 있어도 코로 훌쩍대는 소리가 샜다. 가만히 범진의 말을 들은 선재가 말할 때마다 엉덩이 쪽에서 툭툭 닿아대는 자지 때문에 허벅지를 조금씩 움직였다.

“떡 치다 우는 거는 내가 뭐 어떻게 해줄 수가 없다.”

“…적당히… 하면….”

섹스하고 나서의 첫마디. 떨리는 음성을 다잡은 선재가 턱도 없는 대답을 내면서도, 여전히 범진이 하는 대로 가만히 안겨 있었다.

“니만 보면 자지가 발딱발딱 스고.”

숨소리 같은 훌쩍임이 범진의 말 사이사이에 배경음처럼 깔렸다.

“니 한마디에 좆물이 부글부글 끓고.”

선재의 머리에 손을 대고 있던 범진이 아주 서서히, 열감이 가라앉는 뺨을 손가락으로 툭 튕겼다.

“좆물집이고 좆이고 개좆대가리처럼,”

“그런 말… 좀…. 흑, 그만….”

아무리 범진의 말에 익숙해지고, 장난식으로 따라 한 적도 많다지만 대체 한 마디에 좆을 몇 번이나 넣는지 몰랐다. 아이들 있을 때 얼마나 언어를 순화하는지가 이런 데서 드러나면서도, 선재는 그게 기특하기보단 몇십 년에 걸쳐 범진의 말버릇을 고쳐야 하는 제 미래부터가 암담해졌다. 훌쩍거리며 손을 든 선재가 범진의 입을 막았다.

“크으, 씨발….”

손목을 턱, 잡아챈 범진은 섹스 후에 남은 잔향 때문에 선재의 손바닥에서 코를 떼지 못했다. 살갗이 연한 선재의 손바닥을 코끝이 뭉개질 정도로 계속해서 킁킁거렸다.

“니, 사람은, 맞지.”

니, 하고 킁킁. 사람은, 다음에도 킁킁. 마지막으로 맞지, 하면서도 손을 킁킁댄 범진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울음이 거의 가신 선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실없는 짓을 하는 범진이 어이가 없으면서도 웃겨, 선재는 퉁퉁 부어오른 얼굴로 엷은 미소를 띠었다. 몸에 힘이 빠져 말도, 웃음도 못 지을 것 같은데 범진이 옆에 있으면 뭐라도 하게 되었다.

“이 씨발, 이딴 게, 내꺼라고. 씨이발. 잘 태어났다.”

최범진! 하고 고개를 들고 고함지르는 범진 때문에 선재의 몸도 들썩거렸다. 둘 다 아랫도리를 내놓고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몰랐다. 선재는 “잘 태어났다, 최범진!”을 들으면서는 눈으로도 웃었다. 속눈썹이 촉촉하게 젖어 웃는 것도 우는 것 같았지만, 좋은 감정으로 내는 웃음이 맞았다. 괜히 속이 간질거렸다.

잘 태어났다고 말하고 기분 좋게 웃는 범진에겐 선재도 이런 말을 해주고 싶었다.

“나도….”

뻐끔대던 입으로 조용히 말을 꺼내자, 범진이 저 잘났다는 식으로 웃고 있다가도 단번에 고개를 내리고 선재를 쳐다봤다. 손가락으로 선재의 볼을 살살 만지며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렸다.

“좋아…. 태어난 거….”

“말하는 것도 이거…. 어….”

이래 이뻐가, 하며 선재의 몸을 끌어안은 범진이 아래로 고개를 내려 선재의 얼굴을 반강제로 들었다. 그러면서 파고든 데는 선재의 입술이었다. 바로 추웁, 소리를 내며 닿는 입술에 선재도 입을 열고 범진과 키스를 나누었다. 뜨거운 혀가 제 입 안을 쓰는 것도 좋지만, 맞물리듯 닿는 입술의 감각도 좋았다. 꽤나 따스한 봄날인데도 범진의 입술은 살짝 터 있었다. 그 입술이 닿을 때의 느낌. 눈을 감은 선재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차츰 하얘졌던 뺨을 다시금 붉게 물들였다. 서른이 훨씬 넘어 느끼기엔 너무 낯간지러운 기분이었다. 선재는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 시절에 첫 키스를 나누었다면 아마 이런 기분이었으리라 예상했다. 떨리고, 간지럽고, 마음은 풍선을 단 듯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려 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다. 자연스럽게 입을 떼자, 범진이 침으로 번들거리는 입술로 뭐가 생각난 듯 어, 하고 말했다.

“내 니한테 줄 거 있네.”

여태 범진의 몸 위에 올라타듯 앉아 있던 선재도 그 말엔 몸을 옆으로 빼냈다. 범진은 쫌만 기다려보란 말만 남기고 트렁크로 가 뭔가를 뒤적였다. 뒤로 슬쩍 돌아본 선재였으나 범진의 모습 외엔 보이는 게 없었다. 내놓은 성기가 부끄러워 계속 그 각도로 몸을 꺾고 있기도 좀 그랬다. 운전석에 던지듯 벗어둔 옷가지 하나를 가져와 아랫도리를 가린 선재가 하도 비비적대 윗배까지 내려온 티셔츠를 마저 내렸다. 젖꼭지가 드러날 정도로 들려 올라갔던 티셔츠였는데 일을 치다 보니 어느덧 이렇게….

그때 조수석 문이 열렸다. 차 프레임에 팔을 턱, 올린 범진은 고개만 안쪽으로 빼고 선재를 쳐다보았다. 선재는 범진의 얼굴이나 차 문에 닿은 손엔 눈이 가지 않았다. 반쯤 일어나 불뚝거리는 자지로 먼저 눈이 내려갔다. 아무리 집 앞이고, 차 트렁크에 볼일이 있었다 해도 옷매무새는 좀 정리하고 가지, 하는 아쉬움이 들던 찰나였다.

범진이 내민 건 범진의 손만 한 상자였다.

“뭔데…?”

“어린이날 선물.”

범진의 말엔 소리 없는 웃음부터 나왔다. 선재는 상자를 두 손으로 받아 들어 윗면을 위로 들어 올려보았다. 안엔 플라스틱 뚜껑이 따로 덮여 있었다. 그것까지 걷어내자 갈색의 네모난 덩어리들이 빽빽하게 자리하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주변이 다소 어두워 단번에 알긴 어려웠으나 훅 퍼지는 냄새에 초콜릿임을 알 수 있었다. 위에 곱게 뿌려진 금가루는 범진이 올린 것일까? 각도에 따라 어두운 데서도 빛을 내는 금가루를 선재가 손으로 살살 쓸어 보았다.

“내가 이거, 어? 한 시간 줄 서서 샀다.”

서울 구석에 위치한 수제 생초콜릿 가게는 범진의 말에 의하면 좁기도 무지하게 좁고, 내부 시설도 허접하기 짝이 없다 했다. 그나마 금가루가 올라간 초콜릿이 메뉴에 있어 이걸 사 왔다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는데, 참 범진다운 평가와 센스가 아닐 수 없었다. 선재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범진과 초콜릿을 번갈아 쳐다보다 범진이 하나를 집어 내미는 것엔 입을 아, 벌렸다. 아직 눈물 자국이 남은 얼굴이지만 범진은 그 얼굴마저 보고 싶어 자지를 훤히 내민 채로 조수석 바로 앞에서 몸을 쭈그리고 앉았다.

“진짜로 맛이 있냐? 어떠냐.”

안 그래도 부었던 얼굴이라 초콜릿까지 입 안에 들어가자 한쪽 뺨이 한껏 부풀게 되었다. 선재는 입 안 가득 퍼지는 초콜릿 향에 한쪽 눈가를 조금 찌푸렸다. 금가루 맛은 어떤지 모르겠고, 달고 진한 초콜릿 맛에 혀가 징 울리는 것 같긴 했다. 쫀득하지만 살살 녹아가는 부드러운 초콜릿의 식감도 입 안 전체로 기분 좋게 퍼졌다. 아래에서 어쭈? 하는 얼굴로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보고 있던 범진이 눈에 들어온 건 그때였다. 맛있다며 고개를 끄덕인 선재가 상자에서 초콜릿 하나를 집어 범진의 입에도 넣어주었다.

쩍, 쩍, 갈라지는 초콜릿 식감이 범진의 입맛엔 맞지 않았던 듯하다. 범진은 선재의 손가락을 빨며 입 안에 넣은 초콜릿에 뭔, 씨발, 똑같은, 하는 소리만 반복했다. 잘 먹지도 않지만 먹어본 초콜릿과 별반 차이가 없단 반응이었다. 선재는 하나를 다 먹고 맛있는데, 하며 범진을 쳐다보았다.

“니 맛있으면 자주 사줄게.”

손 가득 초콜릿 상자를 올리고 있던 선재가 금세 삐뚤빼뚤해진 초콜릿을 한 번, 범진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몸을 일으켜 차 프레임에 손을 올린 범진이 보였다.

입술에 초코가 조금 묻은 채로, 선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인데도 많이 서늘하지 않았다. 정말 여름이 올지도 모르겠다. 선재는 당연한 여름의 도래에 괜히 벅찬 기분을 느꼈다. 범진과 함께할 여름이, 그다음 시간들이 자꾸만 기대되고 설레었다. 달큼하게 남은 입 안의 초콜릿 향기가 기분 좋게 올라오고 있었다. 산뜻하고 시원한 봄바람이 차 안으로 들어와 선재의 머리칼을 조금씩 흔들었다. 그 사이로 들어온 범진의 커다란 손도 선재의 뺨에 닿았다. 좋냐, 하며 실실 웃는 범진을 향해 선재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초콜릿과 봄, 그리고 어린이날, 다가올 시간들. 모든 것이 예쁜 상자에 담겨 제 앞으로 선물 된 것 같았다.

처음 받는 어린이날 선물은, 선물 없이 지나온 모든 어린 날들에 따뜻한 봄바람을 불게 만들었다.

범진은 옆에서 들어가자, 하고 있었다. 등을 내민 채였다. 초콜릿 상자를 덮은 선재는 그 넓은 등에 팔을 내밀어 기꺼이 업혔다. 아래에 두르고 있던 천이 내려가 엉덩이가 훤히 드러났지만 업히는 게 좋아 얼굴을 가만히 범진의 몸에 기댔다. 범진이 걸을 때마다 초콜릿 상자를 든 두 팔이 달랑거렸다. 선재는 기분 좋게 부는 바람에 눈을 감고 숨도 천천히 쉬었다.

범진은 바로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자지를 내놓은 게 부끄럽지도 않은지, 울타리를 끼고 푸릇하게 자라난 집 앞 잔디 근처를 몇 바퀴나 돌았다. 그러면서 기분 좋냐? 기분 좋아? 하면서 계속 선재에게 물었다. 선재는 달랑달랑 흔들리는 초콜릿 상자를 들고 응, 좋아, 대빵 좋아, 하며 범진의 물음에 반응을 해주었다.

초콜릿 향이 나는 봄바람.

그 바람 속에서 처음으로 아이가 돼본 것이다.

* * *

며칠 뒤, 범진은 아침부터 선재와 함께 준희가 다니는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새벽부터 호출된 영채는 선재에게 연신 미안하단 말을 들어야 했다. 아이를 추가로 맡길 때는 종종 있었으나 새벽부터 맡긴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채는 진심으로 괜찮아하며 어유, 너무 좋은데요, 하는 소리를 해 선재를 의아하게 만들었다.

선재는 범진이 영채에게 특별 일당을 더 높게 주는 걸 전혀 알지 못했다. 범진이 많게는 백만 원까지 하루 일당을 쳐줘, 영채는 오히려 추가로 아이들을 봐주거나 범진이 일찍 집으로 부르는 날이면 가슴이 설레기까지 했다. 오늘은 그런 날들 중 제일 가슴 뛰는 날이었고.

그걸 모르는 선재만 영채의 직업 정신을 감탄하고 난리였다. 혼자 여러 말들을 꺼냈다.

“영채 씨는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같지?”

“뭐, 사랑도 하겠지.”

“다른 사람 아기인데도 그렇게 사랑으로….”

“니 맘에 들면 그만이다.”

손을 옆으로 뻗은 범진이 선재의 두 손을 한꺼번에 꽉 쥐었다. 니 맘에 들면 그만이라는, 공격적으로 들리는 말을 하면서도 손으로 전달되는 체온은 따듯했다. 세게 잡혀 손뼈가 아리는 건 있지만 마사지 받는 정도로만 뻐근했다. 선재는 두 손이 꽉 잡힌 채로 구불구불한 차도 멀리를 내다봤다. 차창을 손가락 두 마디 정도 열어둬 안에서도 싱, 싱, 하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내 맘에…. 뭐….”

“또 뭔 소리를 할라고 쭝얼쭝얼대냐.”

골리듯 말한 범진이 브레이크를 밟아가며 차 시속을 내렸다. 급하게 떨어지던 속도가 계기판상으로 20을 겨우 웃돌게 되자, 선재가 뒤쪽을 쳐다보았다. 그 짧은 순간에도 범진과 눈이 마주쳤다.

“또 차도에서 차 멈춘다… 또….”

“뭐, 씨발. 여 차 5분에 한 대씩 지나가는데. 저거들이 알아서 가면 되지.”

대놓고 차를 멈추고 그런 말을 하는 범진에겐 한숨이 새 나왔다. 어깨까지 떨어트리며 긴 숨을 내뱉은 선재가 웃긴지 옆에서 처, 하며 범진이 크게 웃는 소리를 냈다.

“니 반응 이게 이따군데, 내가 지랄병이 안 도질 수가 있겠냐?”

“뭐. 내가 뭐 어쨌는데.”

“어느 누가 헤헹, 하고 한숨을 쉬냐.”

기껏 해봐야 하아, 하는 정도의 숨소리를 ‘헤헹’이라고 모사한 범진은 어깨까지 모아가며 선재의 행동을 과장해서 따라 했다.

“없는 사실을 자꾸….”

“므가 없어.”

“그런 적 없다고.”

“큰 거 안 바란다. 혀 십 초만 빨자.”

화끈한 거래라도 하는 양 단호하게 말을 던진 범진 때문에 선재도 그게 좋은 조건인가?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말 어디에서도 범진이 양보하고, 물러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범진의 말처럼 5분에 한 대씩 차가 지나가지도 않았다. 1분에 한 대씩은 지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바깥쪽 흰 선으로 오른쪽 바퀴 두 개가 완전히 나가 있긴 했지만 차도 자체가 좁아 같은 차선으로 오는 차들은 범진의 차를 둘러서 앞으로 가야 했다.

여기서 그러는 게 어디 좋은 조건이냔 말을 하는 것도 시간을 낭비하는 일일 뿐이다.

선재는 막무가내로 우기는 범진의 성정을 잘 알아, 짧은 생각을 거친 그 순간도 아까웠다.

“딱 십 초만 그럼.”

당하기 일보 직전인 선재가 진짜 십 초만…. 하고 혀를 에, 내밀자 범진이 웃으며 선재의 팔꿈치를 잡아당겼다. 몸이 가운데로 쏠리자 범진이 선재의 혀를 단번에 입으로 먹었다.

해는 왜 이렇게 밝은지. 선재는 국수라도 먹듯 추저분한 소리를 내는 범진 때문에 인상이 절로 구겨졌다. 일부러 들으라고 그런 소리를 내며 혀를 빨아 먹는 것 같았다. 혀가 쭉 밀려갈 정도로 빨아 먹던 범진은 제 혀를 선재의 입 안으로 내 부드러운 살점을 한 번에 훑기도 했다.

10초는 결국 5분이 넘었고, 선재의 뒷머리는 범진의 손이 닿았던 탓에 헝클어진 부분도 많게 되었다. 혼자 아무리 정리하려 해도 잠자다 나온 사람처럼 꼴이 너저분했다. 거울을 내려 옆으로 고개를 돌려본 선재가 도통 가라앉지 않는 머리카락 몇 가닥에 눈썹을 가운데로 모았다.

“야…. 니는 거의 사람이 아니그든.”

차를 출발시킨 범진은 그런 소리나 느긋하게 뱉었다.

“그래서 머리도 산발이 쪼매, 될 필요가 있고, 콧물도 쫌 거 인중에 묻히고 할 필요가 있다.”

“…….”

눈만 돌려 범진을 쳐다본 선재가 “아니면 눈썹을 아예 밀어 뻐려도 괜찮겠다.” 하는 말을 듣곤 차에서 내리면 꼭 한 대 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주문한 한복까지 찾느라 어린이집까진 빠듯하게 도착했다. 출발한 시간은 적당했으나 한복점에서 20여 분을 더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차를 세우고 키스한 시간까지. 선재는 비닐에 잘 싸인 한복을 안은 채로 차가 멈추기만을 기다렸다. 어린이집 바로 앞에 널찍하게 조성된 주차공간이 있었지만, 날이 날이니만큼 차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범진은 당장 보이는 자리 한 칸에 차를 능숙하게 밀어 넣었다.

시간이 좀 지나며 알게 된 건 범진이 주차를 매우 잘한다는 사실이었다. 주차 칸을 두 칸씩 차지하거나 길거리 한복판에 차를 댈 때가 많아 몰랐을 뿐이다. 커다란 SUV 차량인데도 경차 자리만큼 공간이 남은 그 칸에 범진은 정확하게 차를 넣었다. 문이 다 열리지도 않아, 선재가 조수석을 통해 먼저 내리고, 범진이 조수석으로 넘어가 몸을 겨우 빼내듯이 내려야 할 정도였다.

선재는 차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범진이 오자마자 겹쳐 들고 있던 한복에서 한쪽 팔을 빼내 범진의 팔을 퍽 소리 나도록 때렸다.

“아! 뭐냐.”

맞은 부위를 손으로 감싼 범진이 무덤덤하게, 그러나 억울한 투로 선재에게 물었다.

“…아까 때려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운전 중이라서.”

말을 흐리며 뒤로 돈 선재가 먼저 어린이집 건물로 향했다. 범진은 혼자 팔을 잡고 있다가 아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떠올려 보았다. 눈을 위로 들고 몇 초 생각하던 범진이었으나 키스하던 장면만 떠올라 후끈한 기분밖에 느끼지 못했다. 더 하면 자지가 설 것도 같았다. 이미 반 정도 힘이 들어가 있던 자지니 이렇게 신성한 장소에선 조심하는 게 좋을 듯했다. 입어야 하는 게 펑퍼짐한 한복이니 그건 다행인가. 범진이 야! 소리를 내며 아예 사라진 선재의 뒷모습을 빠르게 쫓았다.

2층에 도착한 범진은 이리 와, 하며 화장실 쪽에서 저를 부르는 선재의 소리에 곧장 그곳으로 걸어갔다. 선재가 건넨 건 포대 자루보다 더 커다란 한복이었다. 펑퍼짐한 의복이래도 기성으로 나온 한복은 범진에게 들어가는 것이 없었다. 결국, 또 입겠지, 싶어 두 사람 다 한복을 제작해 입게 된 것이다. 범진은 푸른빛이 도는 회색 한복을, 선재는 레몬색이 도는 한복으로 주문을 넣었다. 한복을 받았을 때도 건성으로 들여다본 범진은 화장실에서 처음 제 한복을 제대로 보았다.

뒤지게 크네, 하고 화장실 칸 하나를 연 채로 옷을 갈아입기 시작한 범진은, 옆 칸에서 순서를 가르쳐주는 선재의 말에 피식피식 웃기만 했다. 어떻게든 입기만 하면 되지 뭘 저딴 걸 가르쳐 주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참견 당하는 게 좋아 어, 어떻게 하라고? 하며 선재가 두 번 세 번 말하게 만들었다. 제 활짝 열린 화장실 칸과 달리, 선재의 화장실 칸은 제대로 닫으라 말하고, 열리는지 안 열리는지 확인까지 하고 그 옆 칸으로 들어와 있었다.

다 갈아입고 화장실 칸을 나온 선재는, 문을 활짝 열어놓고 근육이 불끈한 다리를 내놓고 있는 범진 때문에 입술을 꾹 모았다. 분명 바지부터 입으랬는데 엉망으로 묶인 저고리 끈에, 마고자도 날라리처럼 걸치고 있었다. 힘이 들어간 입. 그게 화가 났다는 표현인 걸 아는 범진이 왜, 하면서 고개를 옆으로 젖히며 능글맞게 웃었다.

“내가 바지부터 입으랬잖아.”

“야… 니 졸라 이쁘네.”

걸어뒀던 바지를 펄럭대며 펼친 범진이 전혀 상관없는 말만 내뱉었다. 선재는 왜, 하며 이제부터라도 말을 들을 것 같던 범진이 천사, 이쁘네, 같은 말이나 하자 속이 조금 답답했다. 여기까지 와서도 다루기 힘든 범진 때문에 진땀이 흐르려 했다.

“씹팔, 내가 뭘 데꼬 사나 모르겠네. 하늘로 안 날라가게, 이거.”

대충 바지를 껴입고 선재의 어깨에 손을 올린 범진이 그 팔에 힘을 꽉 주었다. 선재는 범진의 몸을 밀어내며 마고자라도 제대로 입혀주려 했다. 아까 한복점에서 같이 설명 들을 때 귓등으로도 안 들었던 것 같아 화장실에서 설명을 해준 건데, 제 말 역시 어디로 들었나 몰랐다. 어~ 이렇게~? 하며 말꼬리까지 늘이듯 물어 잘 입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이거라도 제대로 걸쳐.”

“알았다, 알았다.”

마고자를 제대로 잡아준 선재가 끈으로 이어진 가운데 부분을 잘 여며 주었다.

마무리하듯 어깨선을 잡아주고 한복 여기저기를 털어준 선재는, 제 눈에 차림이 괜찮아진 것 같자 바로 범진의 팔을 잡고 앞으로 이끌었다. 환복 시간까진 계산하지 못한 터라 정말 아슬아슬하게 어린이집 문을 열게 될 것 같았다.

1층부터 3층까지 모두 어린이집 건물이나 오늘 모이기로 한 장소는 2층이었다. 준희를 포함해 열다섯 명 정도의 아이들이 부모님들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거의 마지막으로 등장한 선재와 범진은 본의 아니게 가장 태 나고 비싼 한복을 입고 등장해 어른은 물론, 아이들의 시선까지도 한눈에 받았다.

아이들 한복은 어린이집에서 제공되는, 디자인이 거의 비슷한 한복이었다. 크게 보면 주홍색과 흰색으로 나누어졌다. 준희는 주홍색이 섞인 한복을 입고 조금은 무표정하게 책장 앞에 앉아 있었다. 마지막까지 함께 놀던 아이의 부모님까지 도착해 이제 저 혼자 남아 블록을 만지작대던 중이었다.

종소리가 들릴 때마다 고개를 돌렸던 준희가, 마지막으로 들린 종소리엔 눈이 크게 커지며 몸을 일으켰다. 버선을 신고 있어 잘 달릴 수가 없는데도 아이는 스케이트 타듯이 최선을 다해 아부지와 아빠에게로 달려갔다.

“아부지…!”

“워씨, 국가대표 등장이다.”

더 앞에 보였던 게 범진이라 준희는 아부지만 부르며 달렸다. 아빠는 범진의 바로 뒤에 있어 안기고 나서야 눈이 제대로 마주쳤다.

“준희 안 미끄러웠어?”

“녜에.”

고개를 끄덕인 준희가 한복의 까슬까슬한 느낌에도 범진의 어깨에 뺨을 푹 묻었다. 고작 한 시간, 길면 두 시간 만에 봤는데도 아이는 유독 극적인 반응을 보이며 범진에게 안겨들었다. 뒤에서 준희의 볼을 살살 만져준 선재가 아기가 아부지 보고 싶었나 보다, 하며 마음을 읽어 주었다.

준희는 그 말에 끄덕이며 선재를 향한 마음도 내비쳤다.

“압빠랑 아부지랑 보고 싶었서요.”

“그랬어?”

“녜에….”

좀 더 위로하듯 물으면 아이 눈에서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선재는 저와 범진이 늦게 도착한 탓이구나, 하는 걸 늦게 깨닫곤 더 달래는 듯한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왐마, 이거 미끌거리는 거 봐라.”

범진이 안고 있던 준희의 발, 버선 면에 손을 대보곤 놀란 듯이 말했다.

“니 이거를 신고 그래 빨리 뛰어왔냐.”

“네에.”

볼이 눌리도록 범진에게 얼굴을 기댄 준희가 대답만은 바로바로 했다.

“역시 내 아기다.”

선재는 막연히 칭찬을 할 거면 달리기 잘한다, 달리기 선수 하면 되겠다, 하는 정도를 일반적인 상식선에서 떠올리곤 했다. 하지만 범진은 마무리가 간단했다. 역시 내 아기. 역시 닌 일등. 그런 식이었다.

준희는 범진이 언급하는 ‘아기’에는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기분이 좋은지 다리만 공중에서 파닥거리고 있었다. 분명 여섯 살 아이들만 있어야 하는 공간에서, 어떻게 보아도 준희보다 훨씬 큰 아이들만 부모 곁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선재는 또래 아이보다 작고 여린 준희가 뜬금없이 애틋해질 때가 있었다. 눈으로 동갑 아이들을 한꺼번에 본 게 처음도 아닌데 괜히 그런 기분이 들려고 했다. 준희는 범진의 칭찬에 들떠 도깨비 목걸이를 꺼내고 난리도 아닌데.

귀여운 아이 모습에 입꼬리를 올린 선재가 아부지가 뭐랬냐? 하는 소리를 들으며 준희의 뺨에 손을 올렸다.

범진이 제게 하는 것처럼 아이 뺨을 쓸자, 아이는 눈을 슬쩍 감았다 뜨며 범진의 말에 대답을 내놓았다.

“깨비랑 있스면 일등에요.”

일등이에요도 아니고 일등에요. 준희가 하는 고정 대답이었다. 사백안을 드러낸 도깨비 얼굴과 준희가 하나도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선재는 이보다 더 좋고, 행복한 그림은 떠올리지 못했다.

눈은 자연스레 범진에게로 향했다. 선재는 역시, 하며 아이의 엉덩이를 두드려주는 범진 때문에 엷게 웃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 부르는 준희의 소리와 안녕하세요, 하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선재는 준희를 쳐다봤다가 앞쪽으로도 눈을 돌렸다.

이벤트는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을 뒤늦게 기념하는 것에 의의를 뒀으나 형식은 이것저것 짬뽕이 되어 있었다. 맨 처음 선재는 범진과 함께 얼떨결에 고급 방석에 앉아 준희의 절을 받았다. 옆에 다른 아이들도 함께 제 부모님에게 절을 했으나 선재나 범진은 당연히 준희만 쳐다보고 있어 옆에 몇 명이 더 앉았는가는 눈치채지 못했다. 준희는 야무지게 절을 하고 반듯하게 서서 선생님의 말을 따랐다.

그다음 이어진 건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자랑하는 코너였다. 이벤트는 외부 진행자까지 초빙해 생각보다 체계적으로 이어졌다. 준희는 푸르게 칠한 배경 가운데에 뭘 꼬물꼬물 그려 놓았는데, 그게 가족인 건 마이크로 설명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이 사람은 주니…입니다…. 이 사람은 아부지입니다…. 이 사람은 아기…입니다…. 이 사람은 주니에 압빠…입니다….”

아무래도, 끝말이 ‘~니다.’로 끝나는 말투를 저것 때문에 완전히 익혔나 보았다. 준희가 ‘일등을 안 하겠습니다’라고 했었나? 선재는 테마파크에서 엉엉 울던 준희가 떠올라, 그림 소개하는 준희의 모습엔 입을 벌리고 웃기만 했다.

준희는 옆에 선 선생님이 이곳은 어디예요? 묻는 말에 “바다에 모습입니다….” 하는 말을 남기고 퇴장했다. 정말 제가 그린 그림 설명에 충실한 대답이었다. 아이들이 퇴장할 때마다 쏟아지던 박수 소리는 준희가 퇴장할 때 유독 컸다. 범진이 그 큰 손으로 손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무식하게 박수를 쳐댔기 때문이었다.

귀찮은 듯, 순서를 따라가던 범진은 가족 중 한 분이 대표로 나와 팔씨름을 해야 하는 코너에선 내가 니랑 준희 때문에 한복 입고 뭔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도 누구 한 명에게도 져주지 않았다.

선재는 양반다리에 준희를 넣은 채로 팔씨름을 관전했다. 토너먼트로 진행된 경기라 1차전부터 탈락자가 나오는 방식이었다. 개중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들이 있을 정도로 승패에 민감해져 갔지만, 준희는 지고 이기는 것엔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팔씨름 테이블에서 범진은 압도적인 힘을 자랑했다. 누구와 붙어도 쉽게 넘겼고, 결승까지 진출하는 데 오랜 시간을 쓰지도 않았다. 퍽, 퍽, 넘어가는 상대들이 하나같이 혀를 내둘렀다. 준희는 아부지가 상대방 팔을 넘길 때마다 헤에…? 하며 놀란 기색만 보였다.

“준희 좋은 거 맞지?”

“네에.”

앞서 결승이 정해진 참가자의 아이가 방방 뛰며 좋아하는 것과 달리, 준희는 범진의 결승 진출에도 매번 그랬듯 헤에? 하고 놀랐다가 박수만 조금 칠 뿐이었다. 돌아온 범진만 약간 상기된 얼굴을 하고 아이와 선재 앞에 앉아 “내 봤냐?” 했다.

“어…. 잘하더라. 근데 저분도 유도하셨대.”

진행자가 말을 했으니 범진도 들었을 것이다. 무제한 체급으로 지역대회까지 휩쓸었다는 유도선수 출신의 아버지. 범진처럼 알파인 듯했고 나이는 삼십 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낸테는 쨉 안 되지. 애기, 아부지 어떠냐.”

“아부지….”

준희는 범진이 어떻다고 말하지 않았다. 곧바로 대답했을 아이의 입이 쉽게 열리지 않자, 선재가 고개를 내려 준희를 쳐다봤다.

“준희, 왜?”

“아부지가….”

“…응?”

“아부지 왜. 니 왜.”

“아부지가 아파요….”

그러면서 눈을 깜박인 아이가 범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잠시 생각하듯 옆쪽으로 눈을 돌렸던 선재가 팔로 아이의 어깨를 감으며 아니야, 했다.

“아부지 아프고 그런 거 아니야.”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있어, 준희는 다른 사람들이 팔을 부들부들 떨며 팔씨름하는 것도 계속해서 봤던 터였다. 힘들어하고, 팔이 아파 보이는 사람들 때문에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선재가 시종 썰렁하게 반응하던 아이 마음을 그제야 알아채곤 연신 고개를 저었다. 범진을 향해서도 자초지종을 짧게 설명했다.

“자기 힘들고 그럴까 봐서.”

“머시라.”

사극 대사처럼 희한한 투로 대꾸한 범진은, 바깥이라고 ‘자기’ 호칭을 쓰는 선재 때문에 감회가 새로운 듯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일단 아이의 어중간한 반응에 무슨 말이라도 해줘야 했다. 이겼다고 다른 애들처럼 좋아할 줄 알았는데 준희는 누구 배에서 태어난 티라도 내는지 조심조심 걱정부터 하는 것이다.

“니 아부지 팔 만져봐.”

한복 팔을 내민 범진이 준희의 손이 닿자 주먹을 세게 쥐었다.

“어떠냐.”

“우…. 딱딱이에요.”

아이는 우와, 놀라다 말고 딱딱이라고 말했다.

“이래 딱딱하면 힘들고 아프고 그런 거 없다.”

그 말에 준희는 아부지…. 하며 제 한복 소매를 펄럭이며 박수를 몇 번 쳤다. 순간 준희 아버님, 하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 범진이 뒤를 돌았다. 작년에 비하면 약간 커진 박수 소리가 선재의 귀에 들렸다. 준희는 범진이 일어나 팔씨름 테이블로 갈 때까지 열심히 손뼉을 쳐주었다.

곧이어 등장한 상대방 아버지는 범진과 키가 비슷했다. 체중은 약간 비만한 탓에 범진이 20킬로 정도는 적게 나갈 것 같았다. 범진도 한 몸무게 하는데…. 속으로 생각하던 선재가 준희의 양팔을 제 양손으로 잡아 아부지다, 하고 같이 박수를 쳤다. 곧 테이블 위에 두 팔이 올라가고, 진행자가 긴장감 있게 분위기를 이끌어 흩어졌던 아이들이 주변으로 모였다.

선재가 고개를 잠시 내린 사이, 팔씨름 시작을 알리는 신호음이 크게 울렸다.

고개 든 선재가 이전과 달리 정중앙에서 머무는 두 손을 쳐다봤다.

“아, 아부지….”

테이블 근처에서 고함을 지르며 아빠! 아빠! 외치는 아이는 유도선수 출신 아버님의 아들인 것 같았다. 아이는 트램펄린이라도 뛰는 듯 엄청난 점프력을 자랑하며 제 아빠를 열렬하게 응원하고 있었다. 품에서 아부지…. 하면서 쳐다보던 준희가 무슨 이유에선지 조금씩 꿈지럭대기 시작했다.

“준희, 왜?”

고운 향기가 나는 머리칼에 턱을 대기도 잠시, 준희가 끙,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선재는 멍한 시선으로 준희의 뒷모습만 좇았다. 아이가 몇 걸음 걸어 도착한 곳은 테이블 근처였다. 경기 중인 범진 옆에 서서 뭔가를 유심히 지켜보는 듯했다.

아, 속으로 깨달은 선재가 팔씨름 테이블 앞에서 요란하게 돌아다니는 아이에게도 시선을 던졌다. 아까부터 제 아버지가 이겼으면, 하는 마음에 다소 격한 응원을 하던 아이였다. 그러면서 범진의 발을 밟거나 울 아빠 이겨, 하면서 범진의 다리를 밀어내기도 했는데, 그걸 본 준희가 제 아부지를 지키겠다고 저기까지 나간 모양이었다. 이내 범진의 허벅다리를 조그만 몸으로 폭 안은 준희가 단호한 표정으로 상대 아이를 주시했다.

그러는 사이 승패는 거의 결정이 나 있었다. 테이블 위 네모난 쿠션에 선수 출신 아버지의 손등이 닿을락 말락 했다. 몸이 죄 끌려가 있고, 얼굴빛은 검붉었다. 판이 뒤집힐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범진은 눈썹만 좀 꿈틀거릴 뿐 초반 힘겨루기 때와 큰 차이가 없는 모습이었다.

거의 정해진 결말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열심히 응원하던 남자애뿐이었다. 아이는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철석같이 믿었던 아버지의 패배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엉엉, 소리가 크게 울리고, 몇몇 아이들이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 된 게 보였다. 선재는 시선을 준희에게로 가져갔다. 심상치 않은 얼굴이 된 건 준희도 똑같았다. 입 끝이 삐죽삐죽 아래로 내려오더니 눈가에 벌건 물이 들기 시작하고, 이내 깜박인 두 눈에서 가랑비 같은 눈물 두 방울이 떨어졌다.

“…….”

잠깐의 적막이 지나간 뒤 범진의 승리가 완전히 결정되었다. 진행자가 준희 아버님이 이겼다고 외치자 상대방 아이는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준희는 원래부터 승패엔 관심이 없었다. 어린이집이 떠나가라 우는 아이 앞에서 원인 모를 눈물만 똑똑 흘려댈 뿐이었다.

선재는 근처 아이 세 명이 더 우는 걸 보고 제 얼굴을 문지르듯 만졌다. 한 명이 울면 떼를 지어 칭얼대는 아이들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되자….

범진은 우승을 해놓고도 별 감흥이 없는 듯했다. 다리에 걸린 게 뭔지도 몰랐던 눈치였다. 한번 아래를 쓱 보곤 거기 익숙한 준희의 머리통이 있어 니 왜 거 있냐, 하고 아이를 들어 올렸다. 저렇게 무감한 아부지를 지켜주겠다고 준희가….

“그래 좋냐? 이거 뭐 아까는 별로 좋아하지도 않드만.”

“아으부지…. 이…. 이….”

이긴 게 좋아서 운다고 생각한 범진은 이게 내 닮아서 승부 근성은 있네, 하는 허튼소리를 하며 자리로 돌아왔다.

“내가 힘으로는 어디 가서 안 뒤지지.”

뒤져? 안겨 있는 준희 때문에 신경이 약간 곤두섰으나 그 뜻이 아님을 깨달았다. 선재는 주니에 아부지, 하며 울고 있는 준희에게 위로하듯 말을 건넸다.

“우리 준희가 아부지 맞고 있으니까 지켜주겠다고….”

“아부지이…. 네에에….”

“뭘 지켜줘. 내가 맞았다고?”

“어, 옆에서 응원하던 애가 너 밀고, 발도 밟고 그랬는데.”

“…이제 너라 하냐?”

자기라고 한 번 언급했던 게 꽤나 인상에 남은 모양이다.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범진에게 선재가 못을 박듯 말했다.

“아까는 주변에 사람도 많고 해서.”

이런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준희는 범진의 품에서 서러운 듯 아아부지, 하고만 있었다.

마침 울던 아이들이 부모의 품에 안겨 뒤편으로 빠지는 게 보였다. 선재도 우선 그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 준희를 안은 범진의 몸을 뒤쪽으로 끌어냈다. 창가에 선 부모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애들을 달래고 있었다. 우는 아이를 세워놓고 훈계하는 부모도 있었다. 진행자가 마이크를 통해 말하고 있어 거리가 멀어진다 한들 소리가 안 들리는 것도 아니었다. 다음은, 하는 소리를 들은 선재가 준희를 범진에게서 받아 들었다.

“우리 준희 뭐가 서러워서.”

“아아부지….”

고전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한 맺힌 ‘아아부지’에 선재는 자꾸 웃음이 나려 했다. 감정에 동요된 아이 마음은 알겠으나 일단은 울면서 ‘아아부지, 으아부지’ 하는 게 너무 웃기기 때문이었다. 앞에서 니 왜 우냐, 하고 아이 머리를 흐트러뜨리는 범진도 비죽 새는 웃음을 못 참고 있었다. 실실거리며 아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선재는 책장으로 둘러싸인 벽면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창문을 열고, 준희를 안은 채로 바닥에 앉았다.

범진도 바로 앞에 앉으려고 했지만, 앞에서 들린 준희 아버님, 소리에 곧바로 뒤를 돌아봤다. 팔씨름 우승자와 준우승자에게 간단한 선물증정식이 있을 예정이라 했다. 아쓉, 귀찮냐, 하고 조용히 말한 범진이지만 어쨌든 일어나 선물을 받으러 갔다.

“준희야, 아부지 그래도 일등 했다고 저런 거 받는다….”

아이 등을 살살 만지며 앞을 쳐다보게 하자 준희도 ‘아아부지’를 멈추고 앞쪽으로 젖은 눈을 돌렸다.

준우승자에겐 과일 바구니가, 우승자에겐 한우 세트와 초콜릿 모양의 메달이 주어졌다. 그 메달은 원래 함께 선물을 받으러 나온 아이의 목에 걸릴 몫인 것 같지만, 진행자는 뒤편에서 울고 있는 아이들 중 하나가 준희라는 걸 눈치채고 예에, 하며 그 메달을 범진에게 그냥 건넸다.

범진은 저런 게 처음인지 표정이나 인사도 없이 한우를 받고, 메달도 손으로 대충 잡았다. 순간 눈이 마주친 선재가 범진을 쳐다보며 고개를 약간 숙였다. 인사해.

범진은 선재의 행동에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눈썹 끝을 살살 긁는가 싶더니, 몇 초 지나서야 상체를 꾸벅 숙였다. 언젠가 보았던, 범진의 동생들처럼 범진의 상체가 깍듯하게 수그러들었다. 어딘가 어색한 인사긴 하지만 선재는 사람들을 따라 손뼉을 쳐줬다. 그래도 저게 어딘지…. 준희의 작은 손도 선재를 따라 엉성하게 부딪히고 있었다. 언뜻 보이는 움직임에 고개를 내린 선재가 준희의 머리에 제 얼굴을 은근하게 붙였다.

“준희 이제 괜찮아?”

“네에.”

곧 돌아온 범진은 한우는 바닥에 내려놓고, 메달부터 준희의 팔에 휘휘 감아 주었다. 목걸이를 이런 식으로 감아 줄 때가 많아 준희도 익숙하게 팔을 쳐다보았다. 원래 두르고 있던 도깨비 팔찌와 초콜릿 메달이 정신없이 엉키는 게 보였다. 선재는 번쩍거리는 준희의 짧은 팔에 슬쩍 웃기만 했다.

다음은 아이들이 어린이집에서 어떻게 놀고, 자는지 등이 기록된 영상 관람 시간이었다. 쉬는 시간에 가까워 공간 전체가 부산스러워졌으나 선재는 영상에서 준희의 모습을 열심히 찾았다.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잠든 준희, 커다란 딸기 하나를 먹느라 곰돌이처럼 뺨이 부푼 준희…. 책장 앞에서 제자리 점프를 하는 준희에겐 고개가 갸웃 젖혀졌다. 왜 뛰었어? 물어도 아이에게선 별다른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선재는 으응? 하고 쳐다보는 아이에게 아니야, 하기만 했다.

어린이집 측에서 준비한 간식까지 먹고 나자 이벤트도 거의 끝나가는 분위기였다. 한참 지난 설날과 가정의달을 한꺼번에 기념하고, 형식은 운동회까지 섞인…. 예상보다 더 많은 것들이 혼재된 행사였다. 앞에선 아이들 상대로 여러 설문이 진행 중이었다. 마지막으로 저 가벼운 설문만 종료되면 모든 게 끝이 난다. 선재는 몇 시간 동안 곁을 지켜준 범진에게 수고했단 말부터 하고 싶어졌다.

“오늘 잘했네.”

“뭐.”

줄을 서 있던 아이들은 스티커 하나씩을 들고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잘했단 말에 뭐, 하기만 한 범진은 선재의 이마에 중지 손가락으로 가벼운 딱밤을 놓았다. 그러면서 내가 니 때문에 별걸 다 한다, 하는 말을 또 했다. 그런 사람이 팔씨름을 그렇게 열심히 하고…. 선재는 힘이 거의 실리지 않은 딱밤에도 괜한 엄살을 부렸다. 손으로 이마를 만지며 때리긴 왜 때리냐며 투정 섞인 작은 말을 내뱉었다.

“야, 여태까지 한 거는 약과네, 약과야.”

그때 범진의 시선이 다른 쪽으로 옮겨갔다. 선재도 고개를 돌렸고, 바로 앞에 아이들 다섯 정도가 와 있는 걸 보았다. 아이들은 선재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스티커를 내밀며 선재에게로 다가왔다.

“어…?”

맨 앞에 있던 아이가 먼저 선재의 손등에 스티커를 붙였다. 다음 아이, 그다음 아이도 손등에 스티커를 붙이고 갔다. 스마일 모양의, 특별할 건 없는 스티커였다. 노랗게 덕지덕지 묻은 손등을 덩달아 의아하게 쳐다본 범진이 아이들이 다 가고 나서야 뭐냐, 했다.

줄줄이 빠진 아이들 틈으로 준희가 보였다. 준희의 손에도 스티커 하나가 들려 있었다. 준희는 그 스티커를 범진의 울퉁불퉁한 손등에 붙였다. 잘 붙지 않자 아부지의 큼지막한 손을 제 두 손으로 들어 비비듯이 전체를 문지르기도 했다.

동시에 자, 하고 들린 진행자의 음성에 선재가 앞쪽을 바라봤다.

“우리 어린이집에서 제일 예쁘고 멋진 부모님이 준희 작은아버지로 선정이 됐네요?”

상황을 먼저 파악한 건 범진이었다. 아이들 눈에 가장 예쁘고 멋진 사람을 뽑는 시간.

처, 하고 헛웃음을 친 범진이 준희를 끌어안으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 결과에도 선물이 주어져, 당황한 얼굴의 선재가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선재가 받은 건 ‘얼짱’이 붙은 머리핀과 머그잔 세트였다. 범진은 그것까진 껄껄거리며 보다가 ‘얼짱’ 머리핀을 장난식으로 선재의 앞 머리카락을 넘기며 꽂아준 진행자에겐 저, 씨…. 하고 살벌하게 읊조렸다.

선재는 머리핀이 꽂힌 것도 의식하지 못하는지, 벌게진 얼굴로 컵만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봐라.”

“바라.”

범진의 말을 따라 한 준희가 손가락으로 선재의 머리핀을 가리켰다.

뒤늦게 아, 이거, 하고 머리핀을 빼낸 선재가 무안한 듯 마고자 주머니에 그걸 넣었다.

“니 봐라, 어? 저 머리에 쌩으로 피 안 마른 애들이 보기에도 니가 그렇다.”

준희는 범진의 현란한 그 말은 따라 하지 못했다. 턱이 두 개가 될 정도로 편하게 범진의 배에 제 뒷머리를 기대고만 있었다.

“그냥, 내가 안 무서우니까 투표했겠지.”

“야, 뭐를 안 무서워. 여 내 빼고 무서운 사람이 어딨냐.”

유·아동에게 어필되지 못하는 외모와 인상인 걸 본인도 인정하는 듯했다.

“애들이니까….”

“애들? 야, 내가 니 말했지. 닌 칠십, 팔십이 돼서도 방심하면 안 된다고. 그때 절마들 몇 살이냐. 그때도 애들이냐.”

한참 어린, 어리다고도 볼 수 없는 아기 같은 아이들 가지고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잠시 침묵을 지킨 선재가 눈썹에 힘을 주고 말했다.

“…오늘은 그만.”

“하, 보통 일이 아니다.”

보통 일이, 하며 고개 젓는 범진 때문에 준희의 몸도 들썩이며 움직였다. 다만 아이는 점심때까지 이어지는 이벤트에 피곤함부터 먼저 느끼는 듯했다. 범진의 배가 편했던지 눈만 느리게 끔벅이고 있었다. 한 몇 초 감고 있다가 뜨면 잠들지 않았던 척, 배시시 웃기만 했다.

선재는 그래도 컵 받았으니까 됐어, 하며 범진 옆에 앉았다.

옆에서 컵? 컵 내가 백 개, 오천 개도 사준다, 하는 범진의 소리가 들렸지만 못 들은 체했다.

이벤트가 정말 끝나 가는지 이별의 메시지가 담긴 노래가 어디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하는 노랫말이 아이와 듣기엔 조금 촌스러운 면이 있지만, 노래를 신경 쓰는 건 아마 저뿐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게 들린 것도 잠시였다. 옆에서 만 개? 씹억 개? 하며 터무니없이 수를 늘리고, 비속어를 섞는 범진 때문에 정신이 분산됐다. 선재는 필요 없다고 말하며 검지를 제 입으로 가져갔다. 쉿, 하고 범진에게 주의를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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