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섯 살, 초여름 (25/29)

여섯 살, 초여름

* * *

무더위가 엄습하기 직전, 초여름에 가장 중요한 날이 있다.

바로 범진의 생일. 매번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범진에게 그럴듯한 선물도 제대로 사준 적이 없었다. 처음 몇 년은 사이가 좋지 않아 생일이 언제인지도 몰랐고, 마음을 주게 된 다음에 맞은 생일 땐 갓난쟁이가 태어나 있었다.

선재는 여름에도 추위를 느낄 정도로 몸이 많이 쇠약해져 아이를 낳고 몇 달은 범진의 품이 집인 것처럼 지냈다. 어딜 혼자 나가기엔 컨디션이 나쁠 때가 많았고, 범진이 내 생일이라고 깝치면 가만 안 둔다고 으름장을 놓아 엄두를 내지 못한 것도 있었다. 막상 다가온 생일에도 이거는 그냥 수금 받는 날이다, 말한 범진의 말을 믿었었다. 하지만 11월, 범진이 제 생일은 그렇게도 현란하게 기념해주지 않았나.

한 바퀴를 더 돌아 다가온 범진의 생일엔 그럴듯한 선물 하나는 꼭 주고 싶었다.

복합몰을 들른 것도 그 때문이었다. 범진에겐 영채와 함께 마트를 갔다 오겠다고 말한 참이었다. 며칠 전에 말했을 땐 범진이 내랑 같이 가야지, 하고 날짜까지 정해줘 더는 우길 수가 없었는데, 오늘 낮에 갑자기 영채와 마트를 가겠다고 말한 것엔 범진도 방도가 없는 듯했다. 경기 북부에서도 외곽 쪽에서 볼일을 보고 있어 바로 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스케줄을 알고 있던 선재가 나름 머리를 쓴 걸, 범진은 영원히 모를 터였다.

선재는 “니 내랑 토요일에 마트 가기로 했잖냐.” 하는 말에 그거는 대형마트고, 이번엔 영채와 작은 마트만 갔다 오면 된다고 둘러댔다. 그 말을 하면서는 등에 땀이 조금 흘렀었다.

복합몰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둘러본 곳은 디지털 용품점이었다. 스피커부터 이어폰, 카메라 등이 길쭉하게 이어진 쇼케이스에서 적당한 조명을 받고 있었다. 선재는 안으로 들어와 스피커부터 하나하나 살펴봤다.

사실 범진이 제일 좋아하는 건 금이다. 그걸 제일 잘 알고, 구매 시도도 해보았지만 2주 만에 다른 선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여러 종류의 금목걸이를 보유한 범진이지만 무게나 크기는 거의가 비슷했다. 하나를 몰래 사진으로 찍어 인터넷에 문의를 했을 때, 최소 10돈이고, 오프라인 기준으로 500 이상은 잡아야 한다는 답변을 받은 적이 있었다.

집안일은 영채가 거의 하고, 먹을거리는 범진이 알아서 주문을 넣거나 구매한다. 어딜 놀러 가거나 바깥으로 나갈 일이 있어도 범진과 함께라 선재는 돈이 필요한 적이 없었다. 범진은 그래도 돈을 주려 했다. 니 그래도 어느 정도는 갖고 있어야 한다고, 주머니에 지폐 몇 장을 억지로 넣어주곤 했다.

그게 백만 원이나 될까.

그마저도 흩어져 있어 부지런히 찾아야 손에 쥘 수 있는 금액이었다.

목걸이 시세를 안 선재는 그날부터 당장 범진에게 생전 안 하던 소리를 꺼냈다.

‘나 용돈 줘.’

‘뭐?’

평소에도 억지로 돈을 주려고 하니 이상하게 보일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범진은 니가 돈 왜, 돈 줘도 안 받드니 무신 바람이 불어 이 지랄을 해쌌냐고 걸쭉하게 반응해 선재를 당황시키기만 했다.

‘비상금은 갖고 있어야 되니까.’

‘…그래, 니가 뭐 애를 둘이나 까놓고 도망을 가겠냐, 뭐를 하겠냐.’

‘…아직도 그 얘기.’

범진은 약만 올리고 안 줄 것처럼 굴다가도 뒷주머니에서 두둑한 지갑을 꺼냈다. 딱 반을 뽑아 선재에게 건네는데, 그 돈만 백만 원이 넘었다. 중간중간 5만 원권도 섞여 있어 선재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금액이었다. 그날 저녁, 2층에서 돈을 세고 내려온 선재는 여전히 태연하게 보이려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거실을 돌아다니다 범진에게서 ‘니 상태 쫌 이상한데.’ 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때까진 범진도 별생각을 안 하는 듯했다. 일이 이상하게 꼬인 건 다다음 날부터였다. 다음 날에도 나 용돈, 하고 손을 내민 선재는 범진이 돈? 하는 소리에 입을 꾹 다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쓰읍, 하고 고개를 갸웃한 범진이었으나 일단 50만 원 정도를 더 주긴 했다. 거기서 며칠 텀을 가지거나 아니면 그 돈으로 타협이 가능한 선물을 찾아야 했는데…. 선재는 그다음 날에도 ‘용돈 줄 수 있어?’ 물어봤다.

‘니 뭐 사고 싶은 거 있냐? 내가 오늘 사줄게. 가자.’

‘아닌데, 그런 거 아니고.’

‘그런 거 아니면 뭐.’

‘아니, 그래서 말한 거 아니잖아.’

‘뭐. 낸테 무슨 동의 구하냐. 뭔 말이 하고 싶은데. 뭐가 갖고 싶은데.’

‘갖고 싶은 거 없다고. 그냥 돈 줘. 돈 내놔.’

선재는 망했다는 생각 때문에 다짜고짜 돈 달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범진의 표정이 확 변한 것도 그쯤이었다. 한 번도 안 했던 말을 3일 연속으로, 그것도 속 시원히 말도 안 해주자 한계가 찾아왔던 탓이었다. 선재는 니 그래 비상금 모아가지고 뭐 할 건데, 진심으로 그런 거 모을라 하냐? 묻는 말엔 말문이 닫혔다. 범진이 엉뚱하게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그런 거 아니니까…. 주기 싫으면 주지 마.’

‘허어?’

그러고 가만히 다른 곳을 쳐다보자 범진이 마지못해 70만 원 정도를 더 주었다. 돈을 주긴 하지만 표정은 풀지 않은 채였다. 선재는 불퉁해진 얼굴로 억지로 범진을 쳐다봐야 했다. 내가 니한테 돈이 아까워서 안 주겠냐, 난 니한테 간이고 부랄통이고 다 주는 새끼다, 하는 범진의 얼굴도 싸늘해져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간 바로 다음에 부…. 같은 단어가 와 헛웃음을 쳤을지도 모르지만, 심각한 상황에서 언급된 말엔 선재도 미소 한 번 띠지 않았다. 그렇게 내려앉은 침묵을 깨트린 건 아차, 하고 제 잘못을 인정한 선재였다. 수상한 행동을 한 건 자신이었다. 그것도 며칠 내내. 결국 우물쭈물, 먼저 사과한 선재가 옷 사고 싶어서…. 하고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했다.

바로 다음 날, 백화점에서 썩 원하지도 않았던 명품 코트를 사게 된 선재는 이런 건 죽어도 싫다드만, 하는 범진에게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옷은 예쁘지만 무슨 놈의 코트가 몇백만 원이나 하는지 도통 이해를 할 수 없어서였다. 겁나서 어디 입을 수나 있을까? 안 그래도 범진이 저 입으라고 몇 번이나 명품 의류를 사온 적이 있다. 그것들도 다 그만한 돈을 지불하고 산 것일까? 집으로 오는 내내 그런 생각에만 잠겨 있던 선재는, 다음 날부턴 범진에게 돈의 디귿 자도 꺼내지 않았다.

원래 갖고 있던 돈 102만 원, 첫날 받은 113만 원, 둘째 날 받은 55만 원, 마지막 날 받은 71만 원까지 해 총 341만 원을 끝으로 500만 원 모으기 작전은 성대하게 막을 내리게 되었다. 더 했다간 괜한 의심을 살 것 같고, 밖에서 단기간 할 수 있는 일로는 많은 돈을 벌지도 못할 것이었다. 했을 때의 상황도 적지 않게 걱정되고…. 선재는 혼자서 조용히 패배 선언을 한 뒤, 아예 다른 선물 쪽으로 눈을 돌렸다.

원목 스피커에 눈길을 주던 선재가 그동안 있었던 일이 떠올라 혼자 슬쩍 웃었다. 그렇게까지 무리한 건 제가 처음 챙기는 범진의 생일이라서다. 늘 주는 것에만 혈안이 된 범진에게 저도 기억 남는 선물 하나는 꼭 해주고 싶어서.

목걸이는 못 사게 되었지만 그런 목걸이야 집에 많지 않은가. 처음엔 아쉬웠으나, 범진에게 정말 필요한 걸 주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도움이 될 만한…. 좀 요긴하게 쓰일 만한 것….

이곳이라면 그런 게 있을지도 모른다. 선재는 스피커 진열대에서 점점 멀어지며 건너편을 쳐다보았다. 아이들에게도 범진의 생일 선물 하나씩을 고르라 말해둔 터였다. 준희는 범진에게 스티커를 주고 싶은지 뱅글뱅글 돌아가는 스티커 판매대 앞에서 연신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아마 위쪽에 진열된 스티커도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영채가 그런 준희를 드는 것까지 쳐다보고, 선재는 몸을 돌렸다.

밖에서 보면 용품점이 자체 매장으로 보이지만, 바로 옆 매장과 연결된 구조였다. 선재는 잡다한 디지털 액세서리 코너를 지나 전자제품 매장으로 넘어갔다.

곧장 눈에 띈 건 메인 유리 테이블 위에 놓인 노트북들이었다. 가장 구석에 놓인 노트북 자판을 건드려본 선재가 부드럽게 눌리는 납작한 자판에 눈을 깜박였다. 이런 데엔 완전히 문외한이라 사더라도 가격을 봐야 할 것 같았다. 백만 원대 제품부터 아주 비싼 노트북들까지 가격대는 다양했다.

“야, 이 돈 주고 이 스펙 실화냐.”

“어, 진짜. 이거 살 바에 조립컴 두 개 조진다.”

조립컴…? 선재는 바로 옆 테이블에 진열된 노트북들을 만지는 고등학생들의 대화에 안 그런 척 귀를 기울였다. 저도 바보는 아니라 조립 컴퓨터 정도는 안다. 한 박자 늦게 알아들은 선재가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꼈다. 이후 들려오는 그래픽 카드나 알티엑스 어쩌고 하는 소리엔 길 잃은 아이 심정이 되어버렸지만….

그들은 아예 게임으로 화두를 넘겨 대화를 지속했다. 선재는 노트북 앞에 서면서는 범진의 사무소 생각도 나고, 분명 들고 다닐 일도 있을 것 같아 한 노트북에서 손을 거두지 못했다. 가격이 330만 원으로, 빨갛게 강조된 설명글들이 많은 걸 보아 꽤 좋은 노트북인 것 같았다. 사람들의 출입이 많은 공간이어서 그런지 직원들은 하나같이 바빠 보였다. 선재는 한 번 둘러봤다가 마땅한 직원을 찾지 못해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저기요.”

그때, 바로 옆에서 들린 소리에 선재의 고개가 돌아갔다. 노트북이 어떻고, 게임이 어떻고, 하던 예의 그 고등학생 중 한 명이었다. 키가 큰 데다 확 풍기는 산뜻한 체취 같은 것도 있어 교복을 입지 않았다면 학생인 걸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선재는 분위기나 제 후각을 예민하게 만드는 체취 때문에 그가 알파 고등학생인 걸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예…?”

“저, 제가, 그, 아까부터… 봤는데요…. 근데, 저….”

“…….”

처음엔 저기요, 하고 말을 잘 시키더니 막상 제대로 입을 열면서는 한 문장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다. 벌겋게 달아오르기까지 하는 얼굴에, 선재는 학생이 어디가 아픈 줄로 알아 걱정이 되었다. 곧 쓰러지기라도 할 것 같았다.

“어디 아파요? 저기요.”

소리 내 직원을 부르려던 선재를 만류한 건 갑자기 등장한 다른 고등학생이었다.

바로 앞에 서 있던 고등학생 뒤에서 손사래를 치며 아니요, 아니요, 했다. 그 반응에 손을 내린 선재가 눈을 앞으로 들었다.

“그런 거, 아니, 아니고요. 아까부터…. 마음에 들어서요. 번호 주시면 안 될까요?”

“…에?”

“그… 그쪽도 맞는 것 같아서…. 저 고등학생이긴 한데요. 3학년이고, 어차피 스무 살 되면 다 같은 어른이니까, 아….”

학생이 말한 ‘그쪽’은 특수 성별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었다. 긴장해서 아무런 말이나 내뱉은 학생이 같은 어른이니까, 하곤 후회하듯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면서도 자기 어필은 해야겠는지 말을 더 붙였다.

“저 진짜 몇 개월 안 남았는데요….”

“…어….”

“…….”

그 말만 남긴 학생은 어, 하고 짧은 반응만 보인 선재의 다음 말만 애타게 기다렸다. 입술을 사리물고 쳐다보는 그의 얼굴에서 붉은빛이 걷히지 않았다.

“어, 학생… 너무 미안합니다. 제가, 그, 결혼을 해서….”

선재는 왠지 모를 미안함 때문에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누군가의 접근에 이렇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처음인 것 같았다. 범진의 체향을 감각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고3이라는 말도 거짓말일지 몰랐다. 어리거나, 열성 중에서도 둔감한 알파들은 같은 알파의 체향을 잘 감지하지 못하는 면이 있다. 선재는 괜히 제 나이도 미안하고, 여기 온 것도 미안하고, 학생이 이런 말을 꺼내기까지의 과정조차도 미안했다. 난감한 표정으로 결혼했다고 말한 선재가 고개도 살짝 숙였다.

“아….”

학생은 충격을 받았는지 아…. 하면서도 자리를 뜨지 못했다. 뒤편에 있던 다른 학생이 몸을 당기기 전까지 계속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선재는 대신 인사하는 뒤편 학생과만 눈을 마주쳤다. 번호를 물어봤던 학생은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바닥을 보며 끌려가고 있었다. 얼마나 끌려갔을까. 선재 또한 노트북으로 눈을 내릴 즈음, 저들끼리 뭐라 호들갑을 떨며 멀어지는 게 들렸다. 선재는 덩달아 열이 오른 얼굴로 다급하게 직원을 불렀다.

“저, 저기, 이거 지금 사려고 하는데요.”

마침 빠르게 지나가던 직원이 선재를 보고 멈춰 섰다.

“아, 그러세요? 정확히 그 모델 구매하시려는 건가요?”

“예, 이거요. 당장 주세요.”

빨리 나가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급하고 강압적으로 말을 뱉어버린 선재가 제 말투에 제가 더 놀랐다. 단어만 몇 개 더 조합하면 범진이 말했대도 믿었을 만했다. 직원은 웃으며 예에, 하고 모델명을 정확히 확인하고 자리를 떴으나, 선재는 미안해서 그가 돌아올 때까지 아랫배에 두 손을 고이 모으고 있었다.

선재는 현금 손님이라 어떤 혜택도 받지 못하고 노트북을 구매했다. 당연히 카드를 받을 거라 생각한 카운터 직원이 당황한 얼굴로 돈을 세었다. 선재는 커다란 쇼핑백 하나와 10만 원 정도를 남긴 뒤에야 그 매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오늘 있었던 일은 향후 50년 정도는 범진에게 말할 생각이 없다. 아니, 그때도 얘기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속으로 중얼중얼, 쉼 없이 말한 선재가 매대 사이로 보이는 영채의 머리를 발견하곤 곧장 그리로 갔다.

영채의 손을 각각 잡은 아이들이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영채 씨.”

“어, 사장님. 고르셨어요?”

압빠, 하고 붙어오는 아이를 쓰다듬어 주며, 선재가 네, 대답했다.

“준희도 스티커 골랐어요. 이거, 키링이랑요.”

작고 투명한 봉투는 준희가 들고 있었다. 아이 손으로 시선을 내려 보자, 홀로그램 동물 스티커와 작은 강아지가 매달린 금색 열쇠고리가 눈에 띄었다. 금색인 거 말고는 범진과 매치되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으나, 그걸 고른 아이 마음이 중요한 거니까. 선재는 잘했다고 말하며 준희의 머리를 부드럽게 만져주었다.

“재혁이는 이게 마음에 드는 것 같아요.”

앞 매대 쪽으로 턱을 내민 영채를 따라 선재의 눈도 돌아갔다. 여러 개의 오르골 중 몇 개에서만 음악이 나오고 있었다. 매장 전체에서 나오는 노랫소리 때문에 선명하게 들리진 않았지만, 분명 맑은 연주 소리가 퍼지고 있었다. 재혁은 특히 산타가 눈을 뿌리는 스노볼 오르골에 관심을 보였다. 스노볼은 위쪽에 붙어 있었고, 오르골 연주는 선물상자 뚜껑이 열리면 나왔다.

“재혁이 이거 아부지 줄까?”

“에!”

대충 알아듣고, 대충 대답하는 재혁이지만 얼굴에 웃음이 피었다. 이번 외침은 저도 무슨 생각이 있어 하는 소리 같았다. 말을 조금씩 하게 되어 빠빠, 압부, 바빠, 에, 예, 아니, 같은 소리 정도는 잘하게 된 재혁이 굳이 “에!”하는 대답을 건넨 것이다. 선재는 그 오르골까지 사서 복합몰을 나왔다.

생일은 며칠 뒤였다. 일부러 미리 선물을 사둔 선재는 아이들의 선물과 제 선물을 옷장 한구석에 잘 묻어 두었다. 범진보다는 저나 영채의 손이 자주 닿는 아이들 옷장 속이었다. 쌓아 올린 옷들 뒤편에 두니 감쪽같았다. 설사 옷 하나쯤 범진이 아이에게 입혀준다고 해도 들키지 않을 정도였다.

범진의 생일 전날, 선재는 영채와 몰래 케이크를 사려다 실패했다. 잠든 아이들을 두고 영채와 30분 정도 외출을 했는데, 하필 그 타이밍에 정확히 범진의 전화가 걸려왔기 때문이었다. 주변 소란 때문에 거짓말을 칠 순 없는 상황이었다. 범진 또한 선재에게 “니 내 코 빠진 날이라고 깝치고 다니는가 본데.” 하고 눈치챈 듯 말해 어쩔 수 없었다. 영채는 상황을 표면적으로만 이해했다. 옆에서 “그래, 맞다. 어쩔래.” 하고 포기한 듯 말하는 선재 사장님을 보며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예측했다.

아, 들켰네. 범진 사장님이 오시겠구나, 하는 사이 정말로 빵집 문을 열고 범진이 등장했다. 사무실과 가까운 위치고, 잠시 시간이라도 난 것 같았다.

여름날, 범진은 셔츠보다는 검은색 면 티셔츠를 선호했다. 팔을 움직일 때마다 반소매 안쪽에 새겨진 문신들이 보였다 말았다 했다. 덩치가 문짝만 한데도 몸선이 둔하지 않아 옷 태가 깔끔하게 떨어졌다. 굵직한 목과 적당히 각진 얼굴은 떡 벌어진 어깨와 위화감 없이 어울렸으며, 눈썹뼈와 적당히 불거진 이마 아래 시원한 이목구비도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각도에 따라 긴 눈매가 부각되어 소년 같은 인상이 되기도, 그 눈이 똑바로 향하며 사나운 얼굴로 변하기도 했다.

누군가를 찾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고 등장한 범진은 유리 쇼케이스 앞에서 시선을 멈췄다. 한 걸음 물러나 1층부터 3층까지 진열된 케이크를 보고 있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구분 못 할 리 없었다. 쓱 입꼬리를 올리며 다가간 범진은 그의 허리에 손을 넣었다.

“즈기요. 누구 줄라고 이딴 거 살라 합니까.”

선재는 짧게 놀랐다가, 범진의 얼굴을 확인하곤 케이크 쇼케이스로 눈을 돌렸다. 하얀 초콜릿이 올라간 케이크를 살지, 그나마 범진이 좋아하는 티라미수 케이크를 살지 고민하던 참이었다.

“어? 누구 줄라고.”

허리를 감쌌던 손이 앞쪽으로 닿아와 배를 어루만졌다. 손길에 잠시 고개를 내렸던 선재가 불편한 듯 어깨를 움직였다. 긴팔원숭인가? 팔도 참 길다. 선재는 배까지 닿은 범진의 손에 얼른 케이크부터 사야겠다 싶었다.

“저기….”

“야, 니 내 말은 씹냐….”

분명 이쪽으로 오던 직원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계산대에서 다른 손님의 빵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선재는 흠, 하는 소리만 내곤 범진을 쳐다봤다. 빵집에서 이러는 범진이 싫긴 싫은데, 예상치 못하게 만나선지 반가운 마음도 들었다. 그러면서 티라미수 케이크로 마음을 굳힌 선재가 범진의 씹냐는 발언에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뭐.”

“누구한테 줄라 하냐고….”

“있는데. 내일 생일인 사람.”

“이야, 그 참…. 누군지 복 받았네. 니한테 케이크도 받고.”

어디 밖에 있다 왔는지 범진의 얼굴엔 땀이 조금 맺혀 있었다. 어쩐지 몸이 더 뜨거운 것 같기도 하고. 선재는 건강하게 태운 범진의 얼굴을 가만 쳐다보다 손을 올렸다. 가장 눈에 띄는 이마 쪽 땀방울을 손으로 슥, 쓸어주자 범진은 입맛을 다셨다.

“니, 이게….”

무슨 짓이냐, 하는 말은 작게 들렸다. 직원이 카운터 너머에서 선재에게 기척을 해왔다.

“케이크 드릴까요?”

“아, 네. 티라미수로 주세요.”

“네!”

이미 계산을 끝낸 영채는 빵집 입구 쪽에 서서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선재는 빠르게 포장되는 티라미수 케이크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옆에서 범진이 제 손을 쥐고 이기 손이냐, 하며 흔들어 대고 있어도 상관하지 않았다. 땀 한번 닦아줬다고 갖은 유난을 떤다…. 바로 옆에서 나오는 에어컨 바람 때문에 가볍게 훌쩍거린 선재가 포장된 케이크를 받아들었다.

올 땐 영채의 차를 탔지만, 갈 땐 범진의 차를 타야 했다. 영채는 집에 안 들러도 돼서 오히려 좋은 눈치였다. 평소보다 이른 시각에 인사를 하고 떠나는 영채의 뒷모습을, 선재는 손을 흔들며 지켜봤다.

범진은 빵집을 나와선 잠시 건물 옆으로 가 전화를 받았다. 또 욕 한 바가지를 누군가에게 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사람 없는 데서 하니 그것만은 다행이었다. 선재는 간식용 빵 몇 개와 범진의 케이크를 든 채로 범진을 기다렸다. 영채의 차는 이미 도로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었다.

이내 모습을 드러낸 범진이 에어컨 바람 찹드냐, 물으며 선재에게 다가갔다.

“뭐가.”

“빵집에. 바람 니한테 좀 찹겠드만.”

“별로….”

여름에도 에어컨 바람을 많이 쐬면 곧바로 콧물을 흘리는 선재라, 범진은 차에 선재를 태우면 혼자 운전할 때보다 차내 기온을 8도 이상 올리곤 했다. 아이들이나 선재가 차에 타지 않는 경우 희망온도는 매번 최저에 닿아있곤 했다. 범진은 어쩌다 차에 태운 다른 사람들이 덜덜 떠는 건 당연히 상관하지 않았다.

차에 타자마자 온도부터 올린 범진이, 선재가 안은 케이크 상자를 쳐다봤다.

“황송하다, 황송해.”

“황송은 무슨….”

“내가 안 황송하겠냐.”

오른손을 뻗어 선재의 뺨을 쥔 범진이 그 얼굴을 가볍게 흔들었다. 오리 입술이 된 채로 도리도리 강제로 고개를 저은 선재가 케이크 상자에 가만히 손만 올리고 있었다. 내일 생일이니까, 그렇게 좋아하는 오리 입술 실컷 보라는 뜻에서였다.

“어쭈, 가만있네.”

“우으.”

“내 귀빠진 날이라고 봐주는 거냐.”

선재가 입을 쭉 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애들 둘이 잠들어 있어, 집에는 빨리 가봐야 했다. 하아, 하고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것 같자, 선재는 애들 이야기를 꺼냈다. 영채 씨도 보냈으니 빨리 가봐야 한다 범진을 타일렀다. 입맛을 다시던 범진은 그래, 새끼들은 봐야지, 하며 손으로 선재의 두 손을 아무렇게나 잡았다. 그렇게 손가락 몇 개가 범진의 손에 꽉 잡힌 채로, 차는 주차장을 벗어났다.

* * *

생일 당일, 아이들은 자정에 잠시 잠을 깨었다. 잠옷을 입은 채로 케이크를 들게 된 아이들이 범진을 향해 생일 노래를 불렀다. 그 앞에 털썩 앉은 범진은 아이들이 다가올수록 숨을 들이켜며 무슨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생일 축하 노래가 끝나자, 케이크 위에 꽂힌 가는 초들을 향해 휘파람 같은 숨을 불었다. 한꺼번에 귀찮다는 듯 세게 불어 꺼버릴 줄 알았지만, 케이크 한 바퀴를 쭉 돌아 그 불들을 껐다.

“아부지에 생일…!”

“와봐라, 니.”

케이크는 바닥에 놓이고, 준희가 범진의 품에 먼저 안겼다. 재혁도 기분이 좋은지 범진의 남은 품으로 제 몸을 맡겼다. 앉은 자세로 두 아이를 안은 범진을 보니 괜한 기분이 들었다. 아직 20대인데, 저렇게 능숙한 게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선재는 잡다한 생각을 하며 벽면에 붙어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축하해, 말했을 뿐인데 마음이 자꾸만 울렁거렸다.

아이들이 자다가 깨었던 걸 아는지, 범진은 아이들을 안은 그대로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 한 1분쯤 지나 거실로 나온 범진은 팔부터 크게 벌렸다.

“니도 앵기야지.”

선재는 가슴을 두어 번 퍽퍽 치는 범진을 보며 앞으로 다가갔다. 포옹이야 많이 해왔지만, 쭉 눈을 맞추며 다가간 적은 별로 없는 듯했다. 뻘쭘하게 다가선 선재가 어깨만 범진의 몸에 살짝 기댔다. 그러자 범진의 손이 허리로, 등으로 단숨에 올라왔다. 이내 푹 안긴 자세가 된 선재가 짙게 느껴지는 범진의 체향을 맡으며 제 손도 범진의 등 뒤로 가져갔다.

“내가 니 얼마나 사랑하냐.”

선재의 머리카락과 귀가 다 뭉개질 정도로 얼굴을 붙인 범진이 그런 말을 꺼냈다.

“내가 어떻게 알아.”

“씨발, 그럼 누가 알아주냐.”

장난처럼 어떻게 아느냐 대꾸하긴 했지만, 얼마나 사랑한단 말은 본인이 해야지….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도 서로의 마음을 전부 알 수는 없으니까. 깊고 캄캄한 밤의 구석에 이런 집이 있고, 이런 사람들이 그 집에 사는 것처럼. 마음의 검은 바다를 속속들이 들여다볼 순 없는 노릇이다. 그 사소하고 깊은 내면을 어떻게 다 알겠나.

하지만 선재는 이 밤, 이 집에서.

특수 효과음처럼 울리는 범진의 심장 소리엔 그 생각도 모두 잘못된 것만 같았다.

드러내고, 표 내고, 내내 한낮인 바다가 범진의 가슴속에 있는지도 몰랐다.

그 쏟아지는 바닷물을 흠뻑 맞고 선 사람이 자신일까?

선재는 눈을 살포시 감고 뺨을 몇 번 범진의 몸에 비볐다. 그러자 심장은 더욱 크게 뛰었다.

“난 니 좆나 사랑해.”

“…알아.”

“모른다매.”

“좆나 사랑하는 건 아는데….”

작게 말한 선재가 범진과 같이 발을 뗐다, 붙였다, 하며 제자리에서 걸었다.

“씨입, 그거 알면 끝이다.”

“…아니.”

“뭐. 말대꾸 할라고?”

불만이 있어 ‘말대꾸’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게 아니었다. 범진은 선재가 말에 토 다는 걸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인간이었다. 그건 옛날에도 같았다.

“야, 말대꾸 하니까 몇 년 전에, 니 생각나고 그러네.”

“뭐.”

“니 내가 말대꾸하지 마라, 반항하지 마라, 그라면 내 야리면서 울고 그랬다 아니냐.”

“…….”

“어? 내 싫기는 졸라 싫은데, 짬보라서 찔찔 짜기는 해야겠고.”

짬보라는 단어에 인상을 쓴 선재가 범진을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봤다.

“…안 울었는데.”

“그라믄. 니 눈으로 싼 그기, 오줌이었냐?”

“하, 뭐래….”

끌끌 웃은 범진이 하여튼, 하며 선재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내가 니한테 개새끼짓도 참 많이 했지만은.”

어쩐 일로 반성하는 시간을 가지나 몰랐다. 눈을 느리게 깜박인 선재가 위에서 떨어지는 음성에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낸 니만 내꺼가 된다 하믄, 그 짓거리 백번도 더 한다.”

선재는 범진과의 첫 만남이 생각나 말을 잇지 못했다. 별로… 그렇게 만나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좀 더 정상적으로, 평범하게 만났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여전히 아쉬운 게 그거 하난데, 범진은 그때로 돌아가면 또 똑같이 시정잡배가 될 각오로 말을 한다.

“내가 이래 생겨먹은 개색기라서 미안.”

그래도 안 그랬으면, 하고 있는데 범진이 대뜸 사과를 해왔다.

“…미안한 건 아는가 보네….”

나오는 대로 말한 선재가 여전히 범진의 체온을 느끼고 있었다.

“근데 내 많이 고쳤다 아니냐? 근데 니 첨 볼 때로 돌아가면, 내도 어차피 그때의 내 아니겠냐. 니같이 천사 같은 게 내를 얼마나 개씹 드러븐 새끼로 볼지도 뻔하고? 그니까 낸테는 그 방법뿐이 없지.”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지 말지.”

“그라지, 뭐. 내 지금은 니 말 들으니까.”

지금에 한해서만 말을 잘 듣겠다는 범진의 말이 얄밉게 들렸다. 그럼 결국, 그때로 돌아가면 또 그런 전쟁 같은 나날들을 보내야 한다는 소리네. 선재는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막막함을 느낄 만큼 지금 상황에 만족했다. 다시 태어나도, 몇 번을 태어나도 이만큼 행복하긴 힘들 것 같았다. 이렇게 사랑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감상하듯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뜬 선재가, 무언가 생각난 듯 짧은 탄성을 뱉었다.

“아.”

“왜.”

“선물…. 깜박했네.”

손으로 범진의 가슴을 밀어낸 선재가 주방 식탁 쪽으로 향했다. 아이들과 함께 선물을 주려고 했지만 타이밍상 그게 잘 안 되었다. 결국 커다란 쇼핑백 안에 든 걸 선재 혼자서 하나둘 꺼내게 되었다. 처음에 나온 오르골 상자에 범진은 이기 뭐냐, 하는 말만 하고 그걸 작동도 잘 시키지 못했다. 그게 아니고, 이거 돌려서.

튀어나온 부분을 몇 바퀴 돌리자 투명한 연주 소리가 흘러나왔다. 범진은 태어나 그런 건 처음 보는지 한 손으로 쥐고 그걸 위아래, 옆으로 돌려보기만 했다. 이기 뭐 하는 건데. 음악이 나오고, 스노볼에서 눈이 내리고 있는데도 뭐 하는 데 쓰는 건데. 그런 소리만 반복했다.

“뭐 하는 데 쓰고 그런 건 아니고…. 재혁이가 고른 거, 장식 비슷한 건데.”

굳이 설명을 해줘야 알아들었다. 장식, 하고 피식 웃은 범진은 금마 취향 희한하네, 하는 말만 남겼다. 그래도 어린 아들이 주는 첫 선물이라고 음악을 바로 끄거나 하지는 않았다. 선재는 다음 선물을 꺼냈다.

“이거는 준희가 산 거.”

“어디서 샀다냐.”

스티커와 귀여운 열쇠고리에 범진이 또 피식 웃었다. 스티커는 정말 쓸데가 없고, 열쇠고리는 강아지 외에도 하얀 꽃이 달려, 성인 남성, 그것도 범진이 쓰기엔 턱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범진은 그 자리에서 네모난 제 차 키에 강아지 열쇠고리를 걸었다.

“히야, 이딴 걸 내가 쓴다.”

“이쁘네. 좀…. 이미지가 반대니까 사람들이 오히려 좋게 생각할 수도,”

“뭔 이미지. 이딴 거 단 거 보면은 내를 개호구새끼로 보지 않겠냐.”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싶었으나, 범진은 기꺼이 개호구새끼가 되고 싶은 얼굴이었다. 웃음이 만연한 얼굴에선 어떤 불만도 느껴지지 않았다. 선재는 가만, 그 얼굴을 쳐다보다 쇼핑백에서 마지막 선물을 꺼냈다.

“이거는… 내가 산 건데.”

“이기 뭔데.”

“…보면 알지.”

부피부터가 다른 상자에 범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받을 선물이 기대돼서…라기보다는 어쭈? 어쭈구리? 하는 말버릇이 얼굴에 그대로 묻어나는 것 같았다. 선재는 범진의 얼굴을 쳐다보며 무슨 반응이 나올지를 기대했다. 얼굴 근육을 사납게 움직이고 있긴 하지만, 막상 선물을 보게 되면 어떤 얼굴이 될지.

“노오트북?”

‘노’ 자에 힘을 준 범진이 끝까지 센 어투로 말했다. 선재는 단 세 글자가 반응으로 돌아와 어벙한 얼굴을 했다.

“얼마짜린데, 이거.”

“아니, 뭐… 가격을 물어. 선물인데.”

눈만 들어 선재를 쳐다보던 범진은, 상자 안으로 손을 넣어 제품명과 그 아래 쓰인 스펙과 설명 따위를 줄줄이 읽었다. 그러다 뭔가를 알아챘는지 바로 고개를 들었다.

“백만 원짜리는 아닌 것 같은데.”

“…그냥, 좀 줬는데, 왜.”

“니 돈이 어딨어서.”

“있는데.”

“돈을 그래 줘도 받지도 않던 게, 돈이 어디….”

무슨 생각이 난 듯, 범진이 말을 하다 말았다. 몇 주 전, 선재가 이상한 행동을 하던 게 떠올라서다.

“니 그래서 그때 내한테 그랬냐? 비상금 모은다 하면서?”

“내 돈도 들어가 있어.”

“그 돈 그것도 다 내 돈 아니겠냐.”

“그게 왜,”

“화아, 야.”

역시 오랫동안 준비해서 금을 주는 게 나았나? 범진은 별로 좋아 보이지도 않고, 돈이 어디서 났냐는 말만 계속 묻고 있었다.

“어? 니 이리 와봐.”

손을 뻗은 범진이 선재의 팔목을 잡히는 대로 쥐었다.

“야, 누가 니한테 이런 거 사라드냐.”

끌어당기는 힘에 풀썩 앉은 선재가 범진과 눈을 맞췄다.

“…그렇게 싫으면 다른 거로 바꿔도 돼.”

“허, 야.”

“왜.”

“내가 니한테 돈 주는 거는.”

“…….”

“니 어디 저, 까자나 사 먹으라고 주는 긴데.”

“…….”

“누가 내한테 돈 쓰라 했냐? 어데 쓸데가 없어서.”

듣기 좋은 말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나쁜 말도 아니었다. 눈을 맞추자마자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던 선재가 다시 범진의 얼굴을 쳐다봤다.

“내가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는데…. 왜 말이 많아….”

얼떨결에, 그것도 흐리게 말했지만 내용에 뼈는 있었다. 범진은 단번에 알아듣지도 못했다. 몇 초 지나고 나서야 웃음을 빵 터뜨렸다.

“뭐? 니 짐 뭐시라 했냐. 말이 많아? 푸하.”

“…그래, 내가 생일 선물 사고 싶어서 산 건데… 왜 상관해. 누가 그런 말 들으면 좋아할 줄 알고….”

“이야, 이게 이제는 별소리를 다 하네.”

“…나는… 내년에도 살 거고, 내후년에도 살 거니까 그렇게 알아…. 싫으면 이혼하든가….”

“뭐?”

“경제관 안 맞으면 갈라서야지….”

“이게 진짜 뭐라냐. 뭐가 씨, 뭘 갈라서?”

“…최범진.”

여태 웅얼웅얼한 말에 비해, 범진을 부른 음성은 날카로운 편이었다.

“뭐…!”

목소리를 크게 키우려다 간신히 누른 티가 났다.

“그냥 고맙다고 해.”

“허.”

“…내가 이거 사느라고 저기, 대형마트 우리 가는 거기도 훨씬 지나서,”

“씨이발, 언젠지 알겠네. 니 혼자 갔냐, 그때? 와, 겁도 없이 내를 속이고.”

“…혼자 간 거 아닌데.”

“누가 그 말 하냐.”

그 말엔 침묵이 잠시 감돌았다. 먼저 소리를 낸 건 선재였다. 씨…. 하는 소리가 아주 작게, 범진의 귀로 들어갔다.

“씨?”

“…씨….”

“또 씨, 했냐?”

“뭐… 하면 어쩌게.”

“할라면 제대로 해야지. 따라 해봐라, 최범진 씨발놈.”

그런 욕설엔 자연히 얼굴이 일그러졌다. 선재는 장난치듯 최범진 개씨발놈, 하는 범진 때문에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갑자기 그런 욕설은 왜 내뱉나? 선재는 범진의 생일이 1시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왜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어야 하나 자괴감이 들었다. 범진은 씨발놈, 개씨발놈, 하며 욕설의 강도를 높여만 갔다. 그러다 혼자 웃겨 죽을 것처럼 굴었다.

“…사람이 왜 그러지?”

불만을 표하듯 내뱉었지만, 진심으로 궁금하기도 했다. 선재의 의문에도 범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야.”

“…….”

“장난이고, 고맙다.”

“…….”

갑자기 팔을 잡아당겨 몸을 끌어안은 범진이 고맙다며 짧은 뽀뽀를 해왔다. 선재는 쪽, 입술에서 나는 소리에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어쨌든 고맙다고 하니 복잡했던 게 조금은 가시는 느낌이었다. 범진도 단순하지만, 저도 못지않게 단순한 사람인가 보다.

“그래도 돈은 이제 니한테만 써라. 알았지.”

범진이 하나를 양보했으니 저도 하나를 양보해야 한다. 선재는 말로 대답하긴 싫어 고개만 한번 끄덕였다. 그러곤 바로 입을 열었다.

“어차피 다 따라오면서 뭘 내가….”

“아, 요 앞에 슈퍼 생긴다 아니냐. 거서 맛있는 거 사 먹고 하라고.”

제 말에 앞뒤가 없는 걸 범진도 느꼈는지, 슈퍼 어쩌고 하는 말에 가벼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선재도 그 말엔 웃었다.

결코 원했던 반응은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대화가 웃기다는 생각은 들었다.

이렇게 또 한밤이 깊어가는 걸, 선재는 눈으로 창문을 스치며 깨달았다.

노트북과 케이크를 두고 새벽 세 시가 될 때까지 말싸움하고, 영화 보고, 뽀뽀하고, 최범진 씨발놈, 하는 시간.

선재는 범진과 느와르 영화를 보다 깡패…. 하는 말을 남기고 잠이 들었다. 범진의 허벅다리를 베고서였다. 천하의 죽일 놈이던 주인공이 끝까지 살아남아 서울 한복판을 거니는 엔딩장면은 범진 혼자서 봤다. 만족스러운 결말에 씹, 제대로 만들었네, 하는 감상을 남긴 범진은 뒤늦게 선재를 안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까 선재에게 한 말 중 반은 장난이지만, 반은 진심이다. 특히 돈을 제게 쓰지 말라는 건 뺄 것도 없이 진짜다. 그리고 정말 고맙기도 했다. 평생 더러운 길만 밟아온 제 삶에 몇 개씩이나 빛을 심어주어서.

그 빛이 있어 사람 비슷한 것도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표현에 서툴고, 다듬어지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게 돼서도 네게 패악질을 부릴 거라는 선언은, 범진에겐 더할 나위 없는 사랑 고백이었다. 터질 것 같아서 꺼낸 마음은 고작 그런 모양밖에 되지 못했다.

범진은 당장 드는 감정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그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선재의 머리통만 조용히 만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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