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섯 살, 겨울 (26/29)

여섯 살, 겨울

* * *

그해 겨울, 범진은 작은 무인도 하나를 매입했다.

아는 사람이 헛소문을 듣고 산 땅이었는데, 그걸 제가 샀다는 것이었다.

뭘 하려고 그런 걸 샀냐는 말에, 범진은 다 이유가 있다는 말만 하며 자세한 답은 해주지 않았다.

‘그니까, 니가 내랑 함 가보고. 내년에 아들이랑 놀러 갈 수 있을지, 없을지 함 보자.’

버릇처럼 그 말을 하긴 했지만, 선재는 진짜 무인도에 가볼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개인 소유의 무인도가 그렇게 많다는 범진은 배를 타고 섬으로 향하는 내내 점 같은 섬들을 손으로 뻗어 가리켜 보였다. 선재는 패딩에, 이불에, 범진이 억지로 씌워준 귀마개 모자 때문에 겨울 바닷바람에도 코끝만 조금 벌겠다.

“네…! 영채 씨! 오늘 밤에, 9시 전까지는 들어가요!”

일전에 제주도를 여행할 때 탔던 큰 배와는 흔들림부터가 달랐다. 범진이 사적으로 돈을 내고 이 보트 같은 배를 빌렸다. 선재는 선실 벽면이나 손잡이를 잡지 않고서는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 요란한 모터 소리와 함께 물살을 가르는 배는 속도를 올릴 때마다 뱃머리가 큰 폭으로 떠올랐다. 선재는 선미 쪽에 튀어나온 받침 발판 위에 겨우 자리를 잡았다. 주변 소음이 워낙 커, 전화를 해도 상대방의 소리 같은 게 잘 들리지 않았다.

“네! 아홉 시요! 근데 더 빨리 갈 수도 있어요!”

마지막까지 크게 외친 선재가 영채의 대답을 듣곤 전화를 끊었다. 범진이 갑자기 오늘이 날이라며 배를 태우기까지 2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선재는 어, 사장님 못 들으셨어요? 하고 묻는 영채 때문에 억울함을 느꼈다. 왜 영채 씨에겐 말을 해주면서, 제겐 당일이 돼서야 말을 해주나 싶어서였다. 그 말에 범진은, 닌 생각이 많아서 일단 내가 저질르고 봐야 한다는 이유를 댔다.

“…….”

틀린 말은 아니라, 선재는 돌이켜 생각하면서도 코만 조금 훌쩍였다.

선주는 말할 것도 없고, 범진이나 선재도 뱃멀미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거센 속도로 물 위를 달리는 배 위에서 멀미까지 했더라면 답도 없을 것이었다. 선재는 몸을 한껏 오므라뜨린 채로 뱃머리에서 선주로 보이는 사람과 말을 나누는 범진을 쳐다봤다. 진짜, 몇 년을 같이 살아도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인 건 변함이 없다.

범진도 셔츠 위에 가벼운 점퍼 하나를 걸치고 있었다. 처음엔 선재에게 이것저것 설명을 해주다가, 선재가 흥미를 잃고 선미로 가버리자 선장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제가 선택해 선미에 앉았으나, 선재는 곧 무료함을 느껴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뱃머리에서 범진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왜.”

“그냥, 서 있게.”

“야, 이거 이불 똑바로 싸매고.”

제일 마지막에 걸친 이불은 두꺼운 담요에 가까웠다. 범진이 차에 늘 두고 다니는 담요인데, 한 번도 써본 적은 없었다. 겨울 캠핑용이지만 겨울에 캠핑을 하기엔 아이들이 많이 어렸다. 범진은 차박을 하거나 즉흥적으로 떠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지만, 면역력이 약한 아이들 때문에 제 취향과는 맞지 않는 여행지를 고를 때가 많았다. 그러다 결국엔 못 참고 무인도를 사버린 것일까? 선재는 귀마개 모자를 쭉쭉 내려주는 범진의 손길에 한쪽 눈을 감았다.

범진의 말처럼, 아이들과도 놀러 올 수 있는 장소면 내년이라도 올 것 같긴 한데.

이름이 주는 위화감이 대단했다. 무인도라니. 개인 소유의 섬이라고는 하지만 무인도 표류, 조난, 그런 것들만 떠올랐다. 선재는 그나마 배가 늦은 저녁 시간에 다시 올 거라는 범진의 말만 믿고 갑판에 올랐다.

“이제 구경할 맘이 드냐.”

출발한 지 40분쯤 지났을까. 선재는 범진이 저다, 저, 하고 손으로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당연히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그나마 배가 설 만한 납작한 돌 언덕 같은 건 눈에 보였다. 초장부터 가파른 돌산을 올라야 하나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가 보다.

곧 뭐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아랫면 고무바퀴와 돌바닥이 충돌하는 소리였다. 선재는 아무 생각 없이 서 있다 크게 휘청거렸다. 범진의 팔이 곧장 허리로 와 감기긴 했지만, 범진 또한 중심을 잡느라 어, 씨벌, 하는 소리를 냈다.

먼저 뱃머리를 건너뛰듯이 하선한 범진은 한쪽 발을 뱃머리에 다시 올려 손을 뻗었다. 선재는 굳이 범진이 손을 잡아주려 해 탐탁지 않은 기분을 느꼈다. 뒤에 사람이 빤히 쳐다보고 있어서다. 얼마나 운동신경 없고, 사람 구실 못하는 사람으로 보겠나. 아무리 그래도 남잔데 이 정도는. 범진 때문에 이불을 억지로 망토처럼 둘러쓰고 있던 선재가 자신 있게 발을 내디뎠다.

“악!”

뱃머리 발판 쪽이 생각보다 미끄러웠다. 순간 넘어질 뻔한 선재의 몸을 범진이 한쪽 팔로 낚아채듯 잡았다. 높이도 있어 위험할 뻔한 순간이었다. 허공에서 달랑거리던 귀마개 모자가 반쯤 벗겨져 머리칼을 아슬아슬하게 감싸고 있었다. 범진은 예상을 하기라도 했는지,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선재의 털모자를 다시 씌워주며 앞에 좀 미끄럽다 안 했냐, 하기만 했다.

부끄럽다…. 범진만 있으면 모르겠지만 뒤에 사람이 있어 의식이 된다. 선재는 흠, 기침을 하며 범진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리곤 세상 누구보다 번듯한 사람인 척 어깨를 똑바로 세우고 섰다.

“가자, 범진아.”

괜히 의젓하게 말한 선재가 먼저 범진의 손을 잡았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커다란 손을 잡아끈 선재가 암석 위를 몇 걸음 걸었다.

“니 뭐 연기하냐…?”

조용히 몇 걸음 따라오던 범진이 말을 걸어왔다.

그즈음 모터 소리가 나더니, 배가 점차 멀어지는 게 보였다. 선재는 배가 나무에 가려질 때까지 범진의 손을 끌다가, 둘만 남게 되자 범진을 앞장세웠다.

“누가 봐도 내가 형인데 그림이 이상하잖아.”

“뭐가 그림이 이상해. 니가 뭘로 보인다고?”

“형.”

비스듬히 보이는 산길 쪽으로 선재를 이끌던 범진이 그 소리엔 멈춰 섰다.

“야, 누가 봐도 닌 형 같은 게 아니고, 내 마누라다. 형 같은 소리 하네. 첨 본 아들이 다 니 내보다 에린 줄 아는데.”

“에린줄이 뭔데.”

“어린 줄로 안다고.”

범진은 은근히 형인 걸 강조하는 선재에게 늘 이런 말을 해왔다. 니는 형 같은 게 아니라 내 마누라다, 낸 씨발 이딴 형 없는데? 마누라뿐이 없다, 하는 말. 그런 말은 선재도 많이 들었지만, 뒤이어 들린 주변 사람들의 생각 같은 건 처음 듣는 것이었다. 범진의 손을 잡고 산길을 밟기 시작한 선재가 그럴 리가 없다며 의아해했다.

“잘못 들었겠지.”

“아인데. 니 고삐린 줄 아는 아도 있었다.”

“그거는 너 들으라고 한 소린가 보네.”

아마 결혼한 걸 아는 사람일 테니까. 선재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흙길을 밟았다. 바닷물에 잠긴 암석 구석에 이런 산길이 있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나무들, 특히 해송이 길게 뻗어있어 하늘에 닿을 것 같았다. 선재는 범진을 따라 걷고, 말하면서도 위쪽을 계속 쳐다봤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페인트칠을 한 것처럼 새파랬다.

“그 새끼 내한테 존나 처맞았는데.”

“…왜 때려.”

“씨발, 내 앞에서 니 이쁘단 소리 하는데 내가 안 패주고 배기냐? 죽일라다가 말았다.”

분명 대놓고 그렇게 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선재는 눈으로 본 듯한 상황에 한숨부터 쉬었다. 사각사각 나뭇잎이 밟히는 산길과 시원한 파도 소리, 푸른 하늘까지 전부 좋은데. 범진에게서 그런 말을 들어 힘이 빠졌다.

“사람 때리고 그러면 안 돼.”

범진이 누굴 때렸다는 소리를 듣자 앞 상황은 생각도 나지 않았다. 선재는 앞으로 척척 나아가던 범진의 손을 버티듯 잡고 그런 말을 내뱉었다. 범진의 대답까지 들어야 속이 시원할 듯했다.

버티는 선재를 느꼈는지, 범진이 뒤를 돌아보았다.

“왜.”

“사람 때리지 말라고.”

“하, 야…. 내가 뭐 그래 했겠냐? 그냥 딱밤만 멕였다.”

“…진짜지.”

범진이 씌워준 귀마개 모자가 약간 삐뚜름하게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선재는 근엄한 표정으로 범진에게 확인하듯 물었지만, 범진은 선재의 얼굴을 다른 마음으로 쳐다봤다. 운동할 때도 100 이상으로 뛰지 않는 심박이, 선재만 봤다 하면 병 걸린 사람처럼 뛴다. 진짜 병신 다 됐다고 생각한 범진이 반질반질, 투명한 윤기가 도는 하얀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약간 추운지 코끝과 뺨에 붉은 물이 들었는데, 그마저도 욕 나오게 예뻤다.

“존나 진짜. 니 그리고 씨발, 오늘 개같이 이쁘네.”

“그런 말 할 거면 가던 길 계속 가자.”

난데없는 말을 하면 이렇게 환기를 시켜줘야 한다. 선재는 언뜻 보이는 고지에 범진의 잡은 손을 앞으로 밀어냈다. 범진은 왜, 진짠데, 하며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산길이라지만 완만한 편이라 올라가는 데 무리는 없었다. 선재는 앞에서 뒤돌아보는 범진과 이따금 눈을 마주치며 정상으로 추정되는 지점까지 올랐다.

훤히 드러난 흙바닥은 누가 평지처럼 골라놓은 듯했다. 불 피운 흔적이 있고, 가건물도 하나 있었다.

“내가 전에 한번 와봤그든.”

범진은 손을 놓지 않은 채로 그 가건물로 향했다.

농막처럼 보이지만 사람이 지냈다거나, 세월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범진은 익숙한 듯이 건물 문을 열어젖혔다. 따로 잠금은 해놓지 않은 모양이었다.

“옛날에 이 자리에 집이 있었는데. 그거 다 밀고 올린 거다, 이게.”

“근데 아직….”

실내라고 이름 붙이기도 무안한 공간이었다. 정리되지 않은 패널과 하얀 가루가 앉은 바닥면, 창문도 비닐에 덮여 제구실을 하긴 힘들어 보였다.

“주인이 마무리를 안 해서. 니 이거 맘에 드냐? 여따 마저 지었으면 좋겠냐?”

“아니….”

“여 옆에 짝은 발전기 하나만 두고, 어? 그거는 요새 얼마 안 한다고. 물도 지하수 빵꾸 뚫는 거 헐값에 한다. 내가 제대로 함 조지보까? 함 조지봐?”

“아니라고 했는데…?”

“니 말만 해라. 내가 그런 건 전문이다 아니냐.”

“…그래.”

그리고 야, 저거, 하는 범진의 소리에 선재도 고개를 돌렸다. 범진이 가건물 구석에서 발견한 건 커다랗고 길쭉한 낚시 가방이었다.

범진은 푸른색 낚싯대 하나를 꺼내며 끝부분과 손잡이 부분을 유심히 살폈다. 선재는 바로 앞에서 범진의 심각한 얼굴을 가만 들여다보았다. 가끔 뭐에 집중하느라 표정을 굳힐 때가 있다. 그럴 때 범진은 입버릇처럼 씨벌, 하는 말도 하지 않았고, 눈썹도 뭐에 데인 듯 현란하게 꿈틀거리지 않았다. 험상궂게 눈을 치떠서 그렇지 이렇게 보면 되게 귀엽고… 눈썹뼈도 멋있게 나와 있다. 그게 잘생기고, 좋다는 소리는 아니고, 그냥 그렇게 생겼다는 말이다. 선재는 저도 모르게 감상했다가 혼자 부정하며 조용히 헛기침했다.

낚싯대와 조각 몇 개를 옆으로 던져둔 범진은 안에서 낚싯대 하나를 더 꺼냈다. 둘 다 민물낚시를 했을 때 썼던 낚싯대보다 길고 고급스러웠다. 선재는 범진이 안에서 뭘 꺼내 들 때마다 그게 뭔지만 대충 구분하고, 다시 범진의 얼굴로 시선을 가져갔다. 범진은 시종 조용하다 한마디를 꺼냈다. 이거는 쫌, 니가 다루기 힘들고, 하면서 다른 낚싯대 하나를 더 꺼냈다. 무슨 낚싯대가 저렇게 많이 들었나 몰랐다. 선재는 짧게 생각하고 또 범진의 얼굴을 쳐다봤다.

“니 이거 주면 하겠지.”

“…어?”

“춥냐?”

“…아니.”

“근데 왜 볼따구가 밖에 있을 때보다 더 뻘겋냐.”

“어, 아니…. 추워.”

선재는, 뒤늦게 범진의 얼굴을 쳐다보느라 빨개진 제 얼굴을 알아차렸다. 춥다는 건 반사적인 거짓말이었다. 범진은 이불 둘러라, 하고 선재가 이불을 망토처럼 덮어쓰길 기다렸다. 선재는 낚싯대를 든 채로 저를 쳐다보는 범진의 눈빛을 이기지 못해 팔에 걸려 있던 이불을 한 번에 펼쳐 어깨에 감았다. 그래도 건물이라고 안으로 들어오자 바람 한 점도 불지 않는데. 이런 데서 무슨 추위를 타겠다고….

“니 같은 거 감기 들게 하면 내가 죽어서도 천벌을 받지 않겠냐.”

“…뭔 소리야.”

범진은 니 같은 거, 하면서 낚싯대에 릴과 줄을 연결했다. 범진이 아까 던져뒀던 물고기 조각은 루어, 쉽게 말해 미끼였다. 선재는 떡밥 낚시밖에 해보지 않아 그게 미끼인 줄은 몰랐다. 무슨 기념품 같은 건 줄 알았지. 범진은 여러 루어 중 이게 니 꺼네, 하면서 선재를 향해 작은 물고기 하나를 내밀었다.

“니 빵댕이 색.”

“뭐?”

두 개의 낚싯바늘을 단, 분홍색의 물고기였다. 특히 배 쪽에서 분홍빛이 선명하게 돌고 있었다. 범진은 그걸 보여주기만 했다. 사방으로 뻗친 바늘 때문에 선재의 손이 닿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손으로 잡아보려던 선재가 루어를 뒤로 홱 빼내며 날을 세우는 범진을 쳐다봤다.

“어디. 달아주면 해라.”

“…너는 뭐 할 건데.”

“난 이거.”

루어 여러 개를 부려놓은 범진은 하나를 발로 밟았다. 은색으로 번쩍거리는 물고기였다. 갓 잡힌 멸치를 티브이에서 본 적이 있는데, 색과 모양이 비슷했다.

“그게 더 잘 잡힐 것 같은데….”

“아니, 닌 그래도 니 궁디 색깔로 해야지.”

“이상한 소리 좀 그만해.”

범진은 허, 웃기만 하고 선재의 말은 듣지 않았다. 낚싯대 두 개를 제대로 세팅하는 내내 선재를 놀렸다. 분홍색 루어를 걸 때 특히 니 궁디, 니 빵디, 하면서 멈출 줄을 몰랐다.

범진은 세팅을 끝내고서도 선재에게 낚싯대를 쥐여주지 않았다.

“내 거 줘.”

“알았다.”

낚싯대 두 개를 들고 문밖을 나설 때까지도 알겠단 소리만 반복했다. 선재는 범진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낚싯대 하나를 빤히 쳐다봤다. 붕어낚시로 경력을 쌓은 참이다. 얼떨결에 하게 된 바다낚시긴 하지만 상상의 나래가 절로 펼쳐졌다. 이런 데서는 뭐가 잡히지? 고등어 같은 게 잡히려나? 그런 건 집으로 갈 때 가져가도 될 것 같았다. 커다랗고 푸른 고등어 한 마리를 낚는 제 모습을 상상하던 선재가 범진의 말에 걸음을 멈췄다.

“야, 니 여서 잠시만 기다려봐.”

“왜.”

“일단 자리 보고, 다시 올 테니까는.”

흙길 바로 옆으로 가파르게 깎인 절벽이 드러났다. 계단식으로 깎여 저 바다까지 이어져 있었다. 높이가 아찔한 건 아니지만 발로 디딜 구석은 별로 없어 보였다. 선재는 일단 있어 보란 말에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범진이 하는 걸 쳐다보았다.

범진은 제멋대로 생긴 거대한 바위들을 자유자재로 넘고 다녔다. 멀리 돌아가면 더 완만한 돌을 고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범진은 그런 식으로 머리를 쓰진 않았다. 못하는지 어쩌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래쪽 절벽까지도 금방이었다. 선재는 흙을 턱턱 차서 계단을 만들거나, 발로 직접 밟아가며 적당한 자리를 찾는 범진을 멍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옛날 옛적에 태어나서 범진을 만났더라도 굶어 죽지는 않았을 것 같다. 낚싯대를 놓고 돌아오는 범진을 보면서는 몇 년 전 일이 생각났다. 산을 타 넘고 시설로 찾아오던 범진의 모습이.

겨울이고, 눈이 많이 내려 등산로가 폐쇄됐을 때도 범진은 시설로 찾아와 제 얼굴을 보고 가곤 했다. 멧돼지를 봤다는 허풍은 믿지 않지만, 야생동물 출몰은 물론, 사냥 허가 구역도 있다고 듣긴 했었다. 웃통을 벗고 산을 내려가던 날 사냥꾼이라도 있었다면? 선재는 그날 범진이 총 맞지 않고 산을 다 내려간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냥 배 섰던 거기서 하면 되지….”

“거는 뭐 없고.”

어느새 다시 올라온 범진이 내만 따라와라, 하며 바위 하나를 턱 내려갔다.

“나 일단 이거 좀 두고 올게.”

험한 길을 타려면 거추장스러운 이불부터 걷어야 할 듯했다. 선재는 뒤편을 가리키며 잠시 다녀오려 했지만, 범진이 쓰읍, 하며 손을 뻗어와 그러지 못했다.

“됐다. 닌 그냥 낸테 매달리기만 하면 된다.”

선재의 팔목을 잡아챈 범진은 남은 한쪽 팔로 선재를 재촉했다. 어쩔 수 없이 한 손으로 이불을 쥐고, 한 팔을 범진의 어깨로 뻗은 선재가 어색하게 몸의 중심을 기울였다.

그런 바위가 몇 개나 나왔다. 선재는 체력이 부쳐 마지막 바위에선 식은땀을 흘리며 범진의 품에 안겼다. 힘을 쓴 적은 없는데, 괜한 무안함 때문에 몸이 굳어 그 티가 나는 거였다. 선재는 낚싯대 앞에 도착해선 심호흡하듯 숨을 쉬었다.

“야, 원래 바다낚시는 자리 잡을 때가 젤 힘들다.”

어딘지 모르게 속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선재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범진은 선재의 낚싯대를 던져주고, 왼편으로 가 제 낚싯대를 멀리 던졌다.

“니 함 끌어봐. 어? 손에서 그게 진동하듯이 뭐가 온다.”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는 건 민물낚시 때와 비슷했다. 이거 이렇게 안쪽으로 돌리면 돼? 물은 선재가 어, 그래! 하는 범진의 대답을 들었다. 멀리, 앞쪽으론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선재는 뭐가 바로 낚일 것 같은 예감에 처음부터 낚싯대를 힘주어서 잡았다.

그렇게 10분이나 갔을까. 범진이 노래미 한 마리와 우럭 두 마리를 건져 올리는 동안 선재의 낚싯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야, 물 반 개기 반이네, 하는 범진과 제 사정이 많이 달랐다.

선재는 뚱하게 낚싯대를 들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나 다시 던지고 싶은데.”

“어, 떤져준다.”

범진이 바로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선재는 아니, 하고 제가 캐스팅을 할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범진은 가까이 다가와서 함 던져볼라고? 했다.

“어, 한번 해보게.”

“그럼 함 해보든가. 위로 그래, 그래, 들어가지고 팍, 치듯이 떤지면 된다.”

그래, 그래, 하는 소리에 맞춰 선재가 낚싯대 줄을 위로 끌어 올렸다. 팍, 치듯이. 이불은 이미 패딩 위 허리춤에 둘려 있었다. 선재는 보다 자유로워진 팔로 범진의 말을 되새기며 팍, 낚싯대를 앞으로 던져보았다.

“머, 나쁘진 않네.”

루어는 바로 앞에 떨어졌다. 원래 첨 하면 물에도 제대로 못 넣는데, 말한 범진은 잘했다고 하면서도 그 낚싯대를 다시 위로 건져 올렸다. 니 뒤로 빠지봐, 하는 소리에 선재는 옆걸음을 쳐 범진과의 거리를 벌렸다.

곧 세차게 허공으로 던져진 루어가 바다 한가운데로 폭 빠졌다.

“근데 니 못 잡아도 재밌어하네?”

“…원래 낚시 좋아하니까.”

“니가 뭐를 좋아한다고?”

선재는 웃는 낯으로 묻는 범진에겐 대답을 아꼈다. 누가 봐도 무시하는 투였다.

“니 붕어 낚을 때도 최범진, 잡아줘, 최범진, 이거 해줘, 그라지 않았냐.”

“…그땐 배 무거웠으니까 그렇지.”

“그냐?”

“그래.”

“쓰읍, 내 기억하기로는.”

그때였다. 범진이 말을 이으려다 어,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돌렸다. 앞으로 뻗어있던 낚싯대도 끊어질 것처럼 휘고 있었다. 범진은 확인하듯 낚싯대를 위로 두어 번 들어 올리곤, 한 손으로 선재의 팔을 잡았다.

“자, 이거 잡아봐라.”

얼결에 낚싯대를 건네받은 선재가 잔뜩 휘는 낚싯대와 바다 표면을 번갈아서 쳐다보았다.

옆에서 땡기고, 놔주고, 하는 범진의 말에 맞춰 릴을 감거나 풀거나 했다. 얼마나 큰놈이 걸렸는지, 팔에 없는 힘줄이 다 올라올 정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끌려 나온 물고기는 어두운 갈색을 띠고 있었고, 크기도 생각만큼 컸다.

“야, 왕건이네. 민선재! 내 마누라 첫 작품!”

그런 말을 크게 외친 범진이 부끄럽지 않았다. 주변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선재는 빠르게 낚싯대를 가져가 줄을 짧게 만들고, 고기를 한 손으로 쥐는 범진을 쳐다보았다. 범진의 손에도 빠듯하게 잡힐 만큼 튼실하고 커다란 물고기였다.

“야, 놀래미가 이래 큰 건 첨 본다.”

“그래? 많이 큰 거야?”

“어. 씨팔, 내 자지만 하냐.”

노래미를 다리 사이에 갖다 댄 범진이 그걸 지저분하게 흔들어 댔다. 선재는 으, 하는 표정만 지을 뿐 말을 보태진 않았다. 상황은 다르지만 비슷하게 행동하는 범진을 몇 번 본 터였다. 이제 이 정도로는 화들짝 놀라지 않는다.

“이거 한 개만 따까 먹어보까.”

“뭘 먹어?”

“이거. 따라와 봐.”

범진이 노래미 한 마리를 들곤 바위 사이로 가려진 길을 가리켰다. 따까 먹어보자는 게 닦아서 먹는다는 소리인가? 선재는 그 말을 처음 듣는 듯해 범진의 등을 보며 걷는 내내 그걸 어떻게 먹어? 어디서? 하는 소리만 내뱉었다. 범진이 정한 낚시 장소까지는 길이 험했는데, 바위 너머 바다로 통하는 길은 또 완만한 편이었다.

바닷물이 넘실대는 돌바닥까지 내려와서, 범진은 귀퉁이에 자리를 잡았다.

선재도 그 옆에서 쭈그리고 앉아 범진이 하는 걸 지켜봤다.

“니 쫌 이상하지 않드냐.”

“뭐가.”

“저 위에서는 니 낸테 매달려가 내려왔는데.”

“어.”

“이짝 길은 왜 걸을 만하지, 안 했냐.”

“어, 여기는 산길이랑 연결돼 있으니까.”

다 안다는 투로 자신만만하게 입을 연 선재가 뒤를 한번 돌아봤다. 범진은 선재의 아는 척에 입꼬리를 올렸다.

“뭐를 연결돼. 뭐를. 니가 낸테 안아줘, 하는 거 보고 싶어가 그딴 길만 고른 거지.”

“뭐?”

“니 아 뱄을 때 낸테 이거 해줘, 저거 해줘, 하면 내 기분이 얼마나 째졌는지 아냐.”

범진은 그런 말을 하며 주머니에서 잭나이프 하나를 꺼냈다. 노래미 대가리를 바위에 쳐 기절시킨 다음이었다.

“내 일으키 봐~ 내 밥 먹이 줘~ 하면은.”

그렇게 명령하거나 거들먹거리며 말한 적은 없었다. 선재는 노래미 내장이 칼에 슥슥 발라져 나오는 걸 보며 표정을 찡그렸다.

“내가 언제. 다른 사람이랑 살았나 보네.”

“최범진~ 내 발 쭈물러 봐~”

아주 그칠 줄을 몰랐다. 장난기 가득 끝 음을 늘이며 실실 웃는데, 무슨 말도 나오지 않았다. 선재는 어이없는 웃음만 한 번 짓곤, 살과 뼈가 분리되는 노래미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런 거 어디서 배웠는데?”

“알면 니 기절한다.”

“…기절한다고…?”

“씨팔, 농담.”

얼굴을 구기며 웃은 범진이 하얀 살점 하나를 길게 잘라냈다. 이렇게 바로 회 떠서 먹는 건 처음이었다. 안 그래도 회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선재는, 손질하는 과정까지 지켜봐 그걸 입에 넣는 건 꺼려졌다. 하지만 범진이 살점을 흔들며 내밀어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꼬소하지.”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식감이었다. 맛이야 양념이 없으니 거의 느껴지지 않고…. 계속 씹다 보니 범진의 말처럼 고소한 맛은 나는 것 같았다. 범진은 크고 두툼하게 썬 노래미 살을 제 입에 넣었다. 니가 잡은 거, 내 마누라 첫 개기, 하면서 노래미를 먹어 치웠다.

낚시를 더 하고 가건물로 올라왔을 땐 주변이 어둑했다. 선재는 낚시 가방 뒤에 있던 낚시 의자 하나를 펴 놓고 앉았다. 범진과 함께 있을 땐 이곳이 어딘지 신경 쓰이지 않는데, 범진이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심장이 조금 빨리 뛰곤 했다. 너무 어둡고, 바람이 나뭇가지 흔드는 소리도 조금…. 검붉은 바다 끝을 지켜보던 선재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범진아.”

분명 가건물 뒤쪽으로 갔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선재는 어디냐고 물은 다음에야 범진의 대답을 들었다. 건물 뒤쪽에서 성큼성큼 걸어오는 소리도 들렸다.

“간다, 가.”

건물을 끼고 모습을 드러낸 범진은 나뭇가지들을 가득 들고 있었다. 선재 앞엔 이미 두 개의 구멍이 파진 채였다. 그중 커다란 구멍에 나무들을 넣은 범진이 라이터로 곧장 불을 붙였다. 흙바닥에 털썩 앉아 불을 피우는 범진을 보곤, 선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앉아.”

“뭐를.”

“의자에…. 나 여태까지 앉아 있었어.”

“쥐랄한다.”

억세게 발음한 범진이 한 번 픽, 웃고는 선재를 쳐다봤다.

“잔말 말고 앉아라. 어디서 찬 바닥에 앉을라 하냐.”

“너도 춥잖아. 그럼 같이 앉든지….”

보트는 2시간 뒤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선재는 이불까지 덮어써 별로 춥지 않았지만, 범진은 패딩도 두껍지 않은 것을 걸쳤다. 아무리 열이 많은 사람이라도 추울 것이다.

“같이 앉기는 무슨…. 아니다, 씨바, 그래 할까?”

나무를 맨손으로 뒤적이며 불길을 내던 범진이 무슨 생각에선지 몸을 바로 일으켰다. 선재는 씨발, 이거, 하면서 다가온 범진의 손을 피하지 못했다.

가볍게 뺨을 꼬집은 범진이지만, 손에 검댕이 묻어 선재의 얼굴에도 검은 자국이 묻었다.

선 자세에선 서로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범진은 선재의 코도 손으로 만진 다음,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러곤 이리 와봐라, 하며 선재의 팔을 끌어당겼다.

같이 앉자고 말한 선재도 어떻게 같이 앉을 수 있을지는 몰랐다.

특유의 엉성한 몸짓으로 다가간 선재가 엉덩이 이리, 하는 범진의 말을 듣곤 그의 허벅지 위에 엉덩이를 걸쳤다. 한쪽 허벅지에 대강만 걸친 자세라, 바로 옆으로 범진의 얼굴이 보이고 있었다. 범진은 엉덩이만 살짝 댄 선재를 그대로 뒤로 눕혔다.

“아, 깜짝… 이야.”

아기처럼 안긴 자세에, 선재가 먼저 말을 내뱉었다. 범진은 아래로 내려다본 선재의 얼굴에 검댕이 묻은 걸 그제야 발견했다. 코에도 까만 게 묻어 있었다.

“니 꺼먼 거 이거 내가 묻혔냐.”

“그런가 보지…. 나 좀 내려가자….”

“뭐를 내려가. 니는 니 남편이 차가운 맨바닥에 앉았으면 좋겠냐.”

“아니, 너 앉으라고.”

“하나뿐인 니 남편인데, 내가. 내 동상 걸리가 죽으면 니한테 딸린 건 아들밖에 없을 긴데, 그 아들 데리고 어디서 밥이나 읃어먹을 수 있겠냐? 니 그 성격에?”

“…….”

그럼 혼자 의자에 앉으면 되지 왜 이렇게 생난리를 부려가며 제 몸을 놓아주지 않는지 몰랐다. 이런 자세에서 불편한 건 범진뿐이었다. 선재는 양팔로 몸을 안정적으로 끌어안은 범진 때문에 편하기까지 했다. 옆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도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잠깐 어이없는 눈으로 범진을 쳐다보던 선재가 허무한 웃음만 뱉곤 힘을 풀었다.

그러자 범진의 눈도 가만히 아래로 향했다.

뺨과 코에 검댕이 묻은 걸 쳐다보며 웃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표정을 바꿨다.

씨팔, 진짜 개같네, 하면서 얼굴을 내렸다.

범진은 그대로 선재의 입에 키스했다. 혀를 쭉 넣어 연한 입 안 살을 건드리고, 혀를 빨며 누구의 것인지 모를 침을 막무가내로 삼켰다. 처음엔 움찔한 선재도 안을 점령한 범진의 혀를 제 혀로 살짝씩 건드리며 입을 맞췄다. 츠읍, 하고 살 맞대는 소리 외엔 들리는 게 없었다. 선재는 파도 소리도, 옆에서 탁탁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나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간 키스를 받아주던 선재의 입에서 웁, 하는 소리가 맺혔다. 범진이 옷 속에 손을 넣어왔기 때문이었다. 패딩 안으로 들어온 것까진 알았는데, 피부를 그대로 만질 줄은 몰랐다. 대충 덥힌 손이 안으로 쭉 밀려들고 있었다. 곧 젖꼭지에도 닿자 선재가 힘을 줘 팔을 밀어냈다.

“거긴 하지 마, 좀.”

“왜.”

“밖이잖아.”

“밖인데 뭐. 니랑 내 말고 누구 더 있냐?”

범진은 여전히 손을 젖꼭지에 댄 채로 말을 더했다. 거기요, 누구 있습니까? 하며 큰 소리를 질렀다.

“있으면 씨바, 나와봐라!”

“누가, 그런…. 아, 이상…. 하잖아….”

“괜찮다고, 씨입….”

다리 뒤를 잡아주던 범진의 손이 가슴으로 와 있었다. 선재는 범진의 손가락이 젖꼭지를 비비고 흔들 때마다 다리를 크게 움칠거렸다. 귓가에서부터 열감이 느껴져, 목과 가슴께도 뜨겁게 울리고 있었다. 돌기를 손마디로 문지르고, 손가락으로 잡고 자극을 주는 범진의 행위에 차마 무던할 수 없었다.

“…으…. 이상해….”

“자꾸 이상하다 하냐…? 혀 빼봐.”

동아줄이라도 잡듯 혀를 내민 선재가 붉은 살덩이를 범진에게 쑥 빨아 먹혔다. 범진은 짐승 같은 키스를 하면서도 손만은 거두지 않았다. 딱딱하게 솟아오른 그 돌기를 쉼 없이 괴롭혔다. 그렇게 몇 분씩이나 희롱을 당하자, 선재가 한계에 다다른 듯 두 손을 바르르 떨었다. 끙, 하는 소리가 들렸을 땐 범진도 입을 떼고 선재의 얼굴을 쳐다봤다.

“흐….”

작은 소리만 남긴 선재는 입술을 채 닫지 못했다. 울상이 된 눈이 그대로 감겨있었고, 모닥불 빛으로 보이는 얼굴은 그 이상으로 붉게 달아오른 채였다. 품에 선재의 몸이 가득 들어와 있어 떨림이나 반응 같은 건 범진에게도 쉽게 전달됐다. 괴롭히듯이 젖꼭지를 애무하고, 입과 혀를 빨아 젖힌 탓에 뒤로 물을 좀 지린 모양이었다. 대번에 알아챈 범진이 씨발, 그랬냐, 하면서 선재의 뺨에 제 뺨을 붙였다.

“왜, 사람을….”

키스와 애무만으로 가벼운 절정을 맞은 탓에, 말에 온갖 감정이 묻어 나왔다. 범진은 그저 웃는 얼굴로 선재의 뺨에 제 뺨을 마찰시키고만 있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래, 내 니 혼자 그래 만들고. 공정하지 못했다.”

그런 소리를 하며 선재를 들고 일어났다. 텅 빈 의자에 선재를 앉혀 준 범진은 모닥불 앞에서 바지 지퍼를 내렸다. 드로어즈에서 자지가 튀어나온 건 금방이었다. 언제부터 발기했는지 색이 시커멓고 각도도 위를 향해 있었다. 선재는 단번에 자지를 꺼낸 범진 때문에 표정만 찌푸렸다.

“아니, 누가….”

“아, 씹. 뜨거라. 이거 완전 자지구이 아니냐.”

자지구이, 하면서 앞으로 걸어 나온 범진이 애써 피워놓은 모닥불을 비난했다. 선재는 덜렁대는 거대한 몽둥이가 가까워져 어쩔 수 없이 침을 삼켰다. 묵직한 귀두 끝에서 뭐가 나오는 게 보일 만큼 가까워지자, 선재의 입도 천천히 벌어졌다. 범진은 무릎을 약간 굽혀 자지가 위로 더 치솟도록 각도를 조절했다. 앉은 채로 자지를 빨 선재를 배려해준 것이었다. 잠깐, 하고 망설이던 선재였지만 곧 고개를 숙이곤 자지 끝을 입으로 물었다.

입에 넣어봤자 어차피 기둥 중간 정도까지만 넣을 수 있다. 선재는 입천장을 긁으며 지나가는 범진의 좆에 눈을 찌푸리면서도 입술을 연신 앞으로 내밀었다. 혈관이 벌떡거리는 좆대는 겨울인데도 뜨겁기만 했다. 제 입 안보다 뜨거운 기둥이 비로소 목구멍 안쪽까지 닿자, 선재가 고개를 뒤로 뺐다가 다시 그만큼을 입 안에 머금었다. 범진은 선재가 빠는 것에 맞춰 허리를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아랫입에 박듯이 선재의 입 안에서 은근하게 자지를 흔들어 댔다.

“씨팔, 이쁜 거.”

츄웁, 웁, 하고 살 빨리는 소리에 범진은 더욱 흥분했다.

입 안이 좁아 어떻게 넣어도 자지 전체로 속살이 닿는다. 하지만 범진은 그 이상으로 벅차고 흥분되는 마음 때문에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했다. 선재만 보면 만지고 싶고, 빨고 싶고, 좋아 죽게 만들고 싶은 이 마음을.

“씨이팔, 누가 니를 이래, 하아, 길바닥에서 자지 빠는 아로 만들었냐.”

당연히 제가 그렇게 만들었다. 다 아는 걸 새삼스럽게 물어보면 흥분감이 극도에 달해 이걸 빼놓고 지나갈 수가 없었다. 범진은 느리지만 꾸준히 왔다 갔다 하는 선재의 머리통을 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미숙하기 짝이 없는 입짓에도 자지 근육들이 추잡하게 꿈틀대고 있다. 범진은 손만 가볍게 선재의 머리에 댄 채로 허리를 뭉근하게 놀렸다. 실제로 박는 듯이 목구멍을 쑤시자 귀두와 좆대를 감는 젖은 살점들이 이리저리 맞부딪혀 극상의 감각을 선사했다.

“하아, 씨발.”

선재도 손을 올려 기둥 끝을 비벼주고 있지만, 그걸론 모자랐다. 범진은 자지를 선재의 입 안에서 빼냈다. 집이면 이렇게 계속 물려도 문제가 없을 테지만, 여기서 언제까지고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푹, 하고 입 안에서 빠져나온 자지는 위로 고개를 쳐들며 침을 풀풀 털어댔다. 범진은 그대로 좆대를 잡아 선재의 얼굴 앞에서 자위하기 시작했다. 멋대로 날뛰는 자지를 잡고 척, 척, 쳐대자 선재도 익숙한 듯이 자지와 범진의 얼굴을 번갈아서 쳐다보았다.

자지 치는 소리가 주변의 어떤 소리보다 크게 울렸다. 범진은 한 손으론 선재의 턱을 잡은 채로 자지를 마구 쳐댔다. 귀두가 입술이나 뺨에 닿기도 했지만, 어디로 쑥 들어가지는 않았다. 한동안 거칠게 자위하던 범진이 선재의 아랫입술을 엄지로 벌렸다. 선재도 그땐 눈을 꾹 감고 범진의 귀두를 입 안으로 넣었다. 그것만으로도 입 안이 꽉 찰 듯했으나, 그건 전초전에 불과했다. 쪼글쪼글한 입천장 주름을 스치며 사정감을 맞은 범진이 그대로 정액을 싸댔다. 분출은 짧게 끝나지 않았다. 어렴풋한 소리까지 내며 입 안에 들어차는 정액은 진하기도 몹시 진했고, 범진의 짙은 체향까지 품어 가만히 머금고 있기엔 무리가 따랐다.

“으에….”

적당한 속도로 자지를 빨다 정액을 받으면 선재도 스스럼없이 그걸 삼키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너무 급박하기도 했고, 정액의 양도 많아 바로 삼키는 게 불가능했다. 선재는 좆이 튀어 나간 동시에 입 양 끝으로 정액을 흘렸다. 와중에도 삼키던 버릇이 남아 입 안에 있던 일부 정액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야, 씨. 좆나게 쌌네.”

잠깐 쳐다보던 범진은 손을 올려 선재의 입가 근처를 닦아주었다.

“으게….”

“뱉을라고? 손에다 뱉아봐라, 그럼.”

뻐끔대는 입 바로 아래에 손바닥을 펼쳐 낸 범진이 다른 손으론 선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선재는 범진의 턱 부근을 올려다보기만 하고, 입을 크게 벌리지는 않았다.

바닥에 뱉으면 되는 걸, 굳이 왜 손에다 뱉으라는지 그 속을 알 수 없었다. 선재는 입에 남은 여분의 정액을 조금씩 삼켰다. 무의식적으로 정액이 넘어가던 것과는 표정부터가 달랐다. 긴장과 열기로 뺨이 조금씩 떨렸고, 손바닥을 펼치고 있던 범진에게도 그 움직임이 전달될 정도였다. 범진은 펼치고 있던 손을 위로 올렸다. 뺨과 눈가를 쓸어주며 바람 새듯 웃었다.

“쓰바, 뭐 좋다고 먹어주냐.”

“다 먹으라고….”

했잖아, 하고 선재는 겨우 덧붙였다.

“옛날에, 어? 옛날에나 그랬지.”

슥 웃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닦아준 범진이 잘못한 사람의 얼굴을 했다.

좆물이라도 억지로 먹여야 제 것이 되는 줄, 그래야 사람을 가질 수 있을 줄 착각하던 때가 있었다. 나중엔 선재 스스로 정액을 삼키게 되었지만 첫 단추는 분명 잘못 꿰놓은 게 맞았다. 허무한 얼굴로 웃은 범진이 선재의 얼굴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안 춥냐, 하며 그 뺨을 계속해서 세게 쓰다듬어 주었다.

“너나 바지 입어….”

어느 정도 추스른 선재가 아직도 바지를 깐 채로 덜렁거리고 있는 범진의 아랫도리에 인상을 썼다.

“난 이래 돌아다녀도 싸다.”

“그냥 좀 입으라고….”

벗어놓은 바지에선 흐린 불빛도 나고 있었다. 선재가 손으로 저거, 하고 가리키자 범진도 바닥에 벗어놓은 바지로 손을 내밀었다. 입지는 않고, 거기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어, 야.”

영채에게서 걸려온 영상전화였다. 범진은 휴대폰을 선재에게 건네주고, 그제야 바지를 입기 시작했다. 화면을 채운 건 소파에 나란히 앉은 아이들 모습이었다.

“흠, 준희야. 재혁아.”

목을 가다듬은 선재가 아이들을 향해 말을 걸었다.

[압빠, 주니도 고기배 타요?]

“응, 다음에, 준희 초등학교 가면 그때 오자. 지금은 위험해. 아빠도 지금 갇혔어.”

[네에?]

몇 개월 자랐다고 제법 똑똑하게 말하는 준희지만, 특정 발음이 늘어지는 건 옛날과 똑같았다. 네에? 하며 놀란 표정을 짓는 준희에게 선재가 말을 덧붙였다.

“응, 아부지 말 틀렸어…. 준희는…. 몇 년 뒤에 오자…. 알았지?”

[네에…. 그러면 주니가 출동을 하, 하까요?]

“응? 뭐가?”

[압빠랑 아부지랑 주니가 구해주께요.]

바지를 다 입은 범진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선재는 의자를 감싸며 옆쪽에 자리를 잡은 범진에게도 카메라를 기울였다. 그러자 두 사람 모습이 어둑하게나마 비쳤다.

“야, 애기 니 아직도 안 자냐.”

“아직 잘 시간 아니야.”

[아부지!]

“그래, 그래. 내가 니 한 개뿐인 아부지다.”

[네에, 아부지. 압빠랑 아부지랑 주니가 구해주게요.]

“아니야, 준희야. 아부지랑 아빠랑 갇히긴 했는데…. 집에 갈 수는 있어요.”

“뭐, 니 갇혔다고 했냐, 애기한테?”

[압빠! 집에! 집에!]

옆에서 한마디도 없던 재혁이 그제야 무슨 소리를 질렀다. 아빠에게 집에 오라 막무가내로 우기는 거였다. 아이 성대라 어른에 비할 건 못 되지만, 그래도 소리는 우렁찬 편이었다. 옆에 있던 준희가 깜짝 놀라 재혁을 안아주는 게 보였다. 재혁이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하는 아이 소리에 선재가 피식 웃으며 화면을 더욱 앞으로 당겼다.

“야, 니 내는 안 오라 하냐?”

재혁은 분명히 ‘아빠’만 불렀다. 아부지는 입에 담지도 않아, 범진이 못마땅한 심정을 그대로 내비쳤다.

“그래, 닌 그렇다 치고. 애기 니. 아부지 없어도 살 수 있냐?”

“묻는 것도 맨날 이상한 것만….”

[으으응…. 아부지…. 집에 도라와요…. 집에….]

똘똘하게 대꾸하던 준희의 발음이 흐려지는 것 같자, 선재가 분위기를 바꾸려고 고개를 흔들었다.

“어, 준희야, 아니야. 집에 갈 거야. 아부지랑 집에 갈게요.”

통화는 앞에서 후면촬영을 하던 영채가 적당한 타이밍에 마무리를 하며 끝났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해볼까? 하는 영채의 말에 준희는 “아부지….”를 남겼고, 재혁은 “빵!” 하고 난데없는 고함을 질렀다.

“간식으로 도넛 먹었나 보다. 빵, 하는 거 보니까….”

휴대폰을 건넨 선재가 그걸 뒷주머니에 넣는 범진을 쳐다보았다.

“도나쓰 몇 개 남았냐, 그거. 가는 길에 몇 개 더 살까.”

아니, 하고 말하려던 찰나에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범진은 뒷주머니에서 꺼낸 휴대폰을 이번엔 혼자서만 받았다. 몇 번 아, 예, 알아서 하십셔, 예, 말하고 빨리 끊긴 전화였다. 범진은 아쉬운 얼굴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곤 쩝, 하는 소리를 냈다.

“30분 뒤에 배 도착한다는데.”

“그러면…. 이거 정리하자.”

“니랑 한 한 시간 정도 더 있고 싶드만.”

“한 시간이나 삼십 분이나….”

야, 삼십 분 차이면 크다, 대꾸한 범진은 발로 밟아 모닥불을 끄기 시작했다. 처음엔 번질 것처럼 크게 일던 불이었으나 범진의 발길질이 계속되자 힘을 잃었다. 이내 약한 불씨 정도만 남게 되고, 선재도 의자를 접어 가건물 안쪽에 그걸 세워놓았다.

불도 꺼지자 주변은 검은 장막을 드리운 듯 캄캄하기만 했다. 선재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범진이 움직이고 있는 걸 지켜봤다. 모닥불 주위엔 작은 불씨조차도 남지 않은 채였다.

“가자.”

“응.”

앞으로 다가간 선재가 범진의 손을 잡았다.

“이야, 앞이 안 보인다….”

얼마 가지도 않고 범진이 우뚝 멈춰 섰다. 선재도 범진과 몸을 붙여 앞쪽을 쳐다보았다. 나무판자 아래로 내려가야 하는데, 산길이 칠흑 같은 어둠에 뒤덮여 있었다.

“야, 안 되겠는데.”

“그래도, 천천히 가보자. 길이 험하진 않았으니까.”

나름의 솔루션을 제시한 선재가 먼저 범진의 손을 끌었다.

“니를 믿으라고? 여, 이래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데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니를?”

“…그러면.”

살짝 열 받은 선재가 짧게 대꾸했다.

“일단 내한테 업혀봐라.”

“어두운데 뭘 업어.”

“길이 쫍아가 둘이서 한꺼번에 가는 건 쫌 아니다 아니냐.”

“뭐가? 올라올 때처럼 한 사람 앞에서 가고….”

그 말에도 범진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선재가 생각할 땐 업고 가는 게 훨씬 더 위험할 것 같은데, 범진은 둘이서 걷는 게 더 위험하다고 우겼다. 결국, 등판을 내밀고 앉은 범진이 길 한가운데를 가로막았다.

“…아니, 내가 이해가 안 가서….”

“야, 내가 누구냐. 최범진이다.”

옆을 슬쩍 쳐다보며 그런 말을 하는 범진에겐 속내를 숨기게 되었다. 자기가 최범진인 게 뭐 어쩌라고…. 선재는 그러면서도 발걸음을 앞으로 천천히 옮겼다. 다리를 벌리며 범진의 등에 몸을 기대자, 엉덩이를 바로 받치는 팔이 느껴졌다. 곧 쑥, 시선이 높아지고 몸이 한 번 들썩였다.

“조심해서.”

“야, 근데 이래 업히는 건 아니지.”

“뭘.”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범진이 가만 서서 말을 걸어왔다.

“니 얼굴 쫌 더 앞으로.”

“뭐?”

“앞으로 붙여보라고. 내 여기, 여까지.”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범진의 행동에, 선재가 마지못해 상체를 들어 얼굴을 앞으로 내밀었다.

“내 턱에다가. 입술 쫌 내밀고.”

“뭐 하는데….”

“뭐 하긴. 제대로 업히는 거 가르쳐주고 있다 아니냐.”

몇 초 가만히 있던 선재지만, 범진이 꼼짝도 하지 않을 것 같아 고개를 옆으로 살짝 젖혔다. 그러자 범진의 턱 부근에 입과 코가 닿았다. 아주 이상한 자세였다.

“야, 좋다. 가자.”

흡족한 듯 소감까지 내뱉은 범진이 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선재는 숨을 쉴 때마다 따뜻한 숨이 제게 다시 돌아오는 걸 느꼈다.

“새끼들이랑 오기에는 좀 그렇냐?”

“어업…. 내년에… 는… 좀 그렇지. 아직 아기….”

뽀뽀하듯 범진의 얼굴에 입과 코를 붙이고 있어, 대답하기도 어려웠다. 범진은 길을 내려가는 내내 망설임이 없었다. 뭐에 씐 사람처럼 어둠에 뒤덮인 길을 잘만 내려갔다.

“여기 봄 되면 니 같은 거 졸라게 피그든.”

“…….”

들썩들썩. 범진은 앞도 제대로 보지 않았다. 졸라게 피그든, 하고 고개를 돌려 바로 옆에 있던 입술에 입까지 맞추는 여유를 보였다.

“내가 그 사진 보고 산 거다, 이거를.”

“…뭐… 피는데.”

“벌겋고 허연 거. 냄새 직이는 거. 여 쫙 펴가지고…. 보기 좋드라고.”

“…….”

“봄에 보면 된다.”

“…….”

“내 그때는 낚시 제대로 갈키줄게. 씨발, 얼마나 좋겠냐. 발전기도 한 개 딱 놓고.”

“…발전… 그거 얼마 하는데….”

“얼마 안 한다.”

말을 똑바로 안 하는 걸 보니 값이 꽤 나가는 모양이었다. 선재는 편안하게 업힌 채로 점점 가까워지는 파도 소리를 들었다. 어둠 속이지만 검푸른 하늘이나 까맣게 물든 바다 같은 건 제대로 보이고 있었다. 옛날엔 밤이 오는 게 무서웠었는데, 이렇게 외따로 떨어진 데서 맞은 밤도 이제는 무섭지가 않아서…. 뜨끈한 등판에 몸을 대고 있자니 잠도 오는 것 같았다.

“오자….”

“뭐.”

“둘이… 봄에….”

뺨을 범진의 몸에 댄 채로, 선재는 흐리게 중얼거렸다. 어느새 야트막한 언덕을 다 내려온 것인지, 아래쪽에선 바닷물 찰박이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선재는 그래, 내 니 훈련을 제대로 시키놓고, 하는 말에 고개만 조금 끄덕거렸다. 그런 다음엔 아이들과도 오게 될까? 눈을 감은 선재는, 문득 어느 날을 떠올렸다.

흐드러지게 핀 꽃을 봐도 봄이 언제인지 알 수 없던 때가 있었다.

아이에게 이게 봄이라고 알려줘야 하는데, 아는 게 없어 슬플 때가 있었다.

그런 제게 범진은 봄을 보여주려 한다.

따뜻한 등을 대고, 검게 펼쳐진 바다 앞에서.

언제든 돌아오자고 한다.

어떻게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범진과 함께 맞는 봄이, 이미 너무 아름답다는 걸 깨달아버린 뒤인데. 선재는 이제, 그 봄들을 포기할 수 없었다.

가르쳐줄 게 생기고, 말할 줄 알게 된 것들이 많아진 나날들을.

그 따뜻한 날 부는 한 점의 바람을.

영원히

잊을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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