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느 날 (27/29)

어느 날

* * *

겨울의 막바지, 재혁은 동계 훈련 때문에 자주 집을 찾지 못했다. 그래도 아빠나 형과는 자주 통화를 하고, 나눈 메시지도 많았다. 아부지와는 아빠랑 통화할 때 한 번 목소리를 들었으니 그걸로 됐고. 훈련을 순조롭게 끝낸 재혁은 누구보다 서둘러 훈련장을 벗어났다. 집에 도착해선 마음이 급해 문을 어떻게 여는지도 잠시 떠올리지 못했다. 아, 이거, 하며 되짚은 뒤에야 현관을 넘을 수 있었다. 일요일 오후, 가족들은 식탁에 둘러앉아 있었다.

“준희가….”

중문을 열자마자 들린 소리는 아빠의 것이었다.

“어? 재혁아.”

의자에서 일어나는 아빠를 쳐다보기도 잠시, 재혁이 식탁까지 빠르게 걸어갔다. 아직 점퍼도 벗지 못한 채였다. 무거운 가방을 바닥에 퍽 소리 나게 내려놓은 재혁이 다짜고짜 식탁에 두 손을 대고 말했다.

“처음부터 다시 말해요. 처음부터.”

“야, 아주 니가 가장이다? 인사는 안 하냐?”

정면에 앉아 있던 범진이 같잖다는 투로 재혁에게 반응했다.

“아부지, 지금 그런 소리 할 때예요? 형, 진짜야?”

통로 쪽 의자에 앉아 있던 준희에게 재혁의 눈이 닿았다. 준희는 동생이 왔다고 반기려다 재혁의 반응을 보곤 입을 닫았다. 뭘 묻는지 알겠고, 그게 진짜인 것도 맞는데…. 말하기 애매한 부분이 있어서다.

“둘 다 왜 이래.”

보다 못한 선재가 재혁의 팔을 뒤쪽으로 끌었다. 좀 전까진 범진을 말리느라 골머리가 썩고 있었는데, 갑자기 등장한 둘째 아들도 만만치 않은 반응이다. 이게 이럴 일인가? 싶은 선재가 이해되지 않는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말렸다.

“당신도 그만해. 무슨 이런 거로….”

“큰일 날 소리 하네, 이….”

아이들 앞에서 당신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선재와 달리, 범진은 이게, 이기, 하는 말버릇을 깨끗하게 고치지 못한 터였다. 그래도 나름의 격조를 지키려 노력하는 편인 범진이 중간에서 말을 멈췄다. 재혁과 둘만 있을 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지만, 준희 앞에선 언어를 순화할 때가 많았다. 오로지 준희가 걱정되는 마음에서였다.

재혁이야 욕도 잘 배웠고, 누구를 만나든 말든 지가 알아서 하면 된다. 하지만 준희는 말이 다르다. 혹시 욕설이나 거친 행동에 익숙해졌다가 되지도 않는 알파를 맘에 들어 하게 된다면? 만약에라도 그런 일이 벌어지면 혀를 깨물고 죽을 작정이었다. 범진은 늘 거기까지 생각하다 선재를 떠올리고 씨벌, 저거 두고 어째 죽냐, 하곤 생각을 고치곤 했다. 그러곤 저 대신 그 알파 놈 혀를 자르는 것으로 마음을 돌렸다.

최선은 어떤 알파 놈도 준희 앞에 평생 나타나지 않는 것이지만, 꼭 만나야겠다면 조선시대 노비 같은 놈이어야 했다. 범진은 장난삼아 노비 같은 놈을 몇 명 골라두기까지 했다. 최악은 피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깔아둔 스파이이자 준희 친구인 박정후가 찍어 보낸 사진에 충격을 받게 되었다. 노비는커녕….

[아버님… 이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연이어 도착한 사진 속에서 준희는 웬 비렁뱅이 같은 놈과 손을 잡고 있었다. 이 좋은 시대에 옛날 깡패 같은 머리를 하고, 한쪽 팔엔 굵다란 이레즈미 문신을 새긴 놈. 무슨 운동을 한 놈인지 떡대가 쓸데없이 좋은 것도 범진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었다. 하필? 하필이면 이런 새끼랑?

박정후에게 니. 내 말 잘 들으면 준희랑 잘되게 밀어준다, 한 적이 있던 범진이지만, 그건 다 개뻥이었다. 왕년에 동생들을 부린 적이 있던 범진은 박정후도 그 시스템에 자연히 녹였다. 박정후의 롤은 쓰다 버리는 카드였다. 이런 식으로 큰 건을 자주 물어다 준다면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랬다.

기억을 더듬던 범진은 쪼잔한 질문을 하나 던졌다.

“니 아부지랑 평생 살겠다고 안 했냐?”

“네…. 아부지랑 평생 살 거예요.”

“근데 금마는 뭐냐. 난 금마랑은 살 계획이 없는데?”

“동생…. 학교에서 만났는데 착해서 몇,”

“동생? 형 동생이 나 말고 누가 있는데?”

준희의 동생 발언에 흥분한 재혁이 식탁 위에 고이 있던 식빵을 한 손으로 찌그러뜨리며 물었다.

“아니, 재혁아. 빵….”

선재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재혁을 타일렀다.

“아.”

식빵을 놓아준 재혁은 입고 있던 자켓을 벗어 가방 위에 던지듯 올렸다.

“당연히 형아 동생은 재혁이 하나뿐이지.”

그사이 들려온 소리에 재혁이 바로 입을 열었다.

“근데 왜 동생이래. 형 어디 가서 동생 만들고 그런 사람 아니잖아. 우리 형, 내 목숨…! 내가 형 어떻게… 저기 했는데.”

어떻게 키웠는데, 하려다 말을 바꾼 재혁이 답답함에 미간을 찌푸렸다. 범진이 그런 재혁을 보곤 헛웃음을 쳤다.

“임마 이거 내보다 더하냐.”

범진의 정면에서, 범진을 쳐다본 선재가 둘 다 똑같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와중에 재혁이 흥분해서 말하는 바람에 제 의자가 자꾸만 옆으로 밀리고 있었다. 몸을 아무리 똑바로 세워봐도 거구의 아들이 미는 힘엔 속수무책으로 몸이 밀렸다.

“응…. 아니지…. 재혁이가 싫어하면 안 할게.”

다시 들려온 준희의 음성에 재혁의 고개가 돌아갔다. 이건 뭐 조삼모사도 아니고…. 애도 이렇게 달래진 않을 터였다. 아부지가 같이 살자고 하면 순하게 그러겠다고 하고, 동생 만들지 말라고 하면 또 그러겠다고만 하는 형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재혁은 준희의 부드럽고 단정한 말투 때문에 더욱 열이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저렇게 말하면 따질 수도 없어서다.

“형 진짜, 너무하네….”

“어이, 니 근데 자꾸 내꺼 밀어쌀래?”

“난 괜찮아.”

준희에게 닿을 정도로 몸이 밀리던 선재가 괜찮다며 손을 올렸다. 범진의 말에 뒤로 한 걸음 물러난 재혁이지만 화가 주체되진 않는 모양이었다. 자꾸만 씩씩거렸다.

범진은 재혁이 물러나고, 선재가 똑바로 앉는 것까지 보고서야 고개를 돌렸다.

“금마를 동생으로 안 치겠다는 그기 뭔 말이냐. 안 만나겠다고?”

“아부지가….”

“말하지 마, 준희야. 준희가 알아서 판단해.”

조용히 입을 연 준희 옆에서 선재가 준희의 편을 들었다.

“아빠!”

“이!”

동시에 말한 재혁과 범진이 서로 눈을 맞췄다. 범진은 제 소리가 더 컸음에도 재혁이 선재에게 큰소리 내는 것에 눈썹을 크게 올렸다. 여전히 흉기 같은 손을 올려 재혁의 입을 가리켰다.

“예, 죄송함다.”

대장인 아부지에게 바로 죄송하단 뜻을 내비친 재혁이 선재에게도 아빠 죄송합니다, 하고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뭐가 죄송해, 하며 입을 연 선재는 종합적으로 말을 보탰다.

“…누가 누구한테…. 아니, 하여튼.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잖아. 사람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이렇게 하는 거… 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겉모습만 보고….”

“화아….”

속으로 이거 아직도 세상 물정을 모른다며 한탄한 범진이 담배 태우듯 아득한 숨을 뱉었다. 겉모습이 어쩌고 어째? 겉모습으로만 판단해도 충분하다. 제가 빌어먹게 나쁜 새끼인 것처럼 그 상그지 같은 놈도 뻔했다. 민선재 이거는 아직도 지가 납치당해서 사는 줄은 모르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금이야 옥이야, 좋은 거, 해달라는 거 다 해 바친 귀한 아들이 저 같은 씹새끼에게 납치되는 꼴을 볼 수는 없었다. 선재는 제가 평생 잘해주고 있으니 논외였다. 어쩌다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된 범진이 혼자 픽 웃었다. 자꾸 상황에 맞지 않는 웃음을 지었다.

“웃기는…. 준희 들어가. 재혁이도… 옷 갈아입고 씻어.”

“아빠, 이거는 아니에요.”

선재의 말에 불복한 재혁이 검지까지 흔들며 이건 아니라고 말했다.

“뭐가 아니야. 너 왜 자꾸 아부지처럼 이상해져?”

웬만해선 누구의 흉을 보지 않는 선재가 마음에 고인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뭐?”

뭐라 했냐, 지금? 하고 머리를 식탁 쪽으로 붙인 범진이 눈만 들고 선재를 쳐다보았다. 이거 봐라? 하는 말이 대놓고 얼굴에 쓰여 있었다.

“저기, 아부지…. 재혁아… 내가 안 할게. 나도 우리 가족이 싫어하면… 만나기 싫어요.”

난장판이 된 회의 끝물에 입을 연 준희가 그 말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늦게 입학하고, 학교를 쉬기도 했던 터라 대학에서도 동기들이 준희보다 모두 어렸다. 그런 게 눈치가 보여 준희는 누가 먼저 말 걸기 전엔 쉽게 말문을 트지 못했다. 술을 잘 못해 모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적이 없었다. 먼저 손 내미는 동기들이 있긴 했지만, 모두 알파에다 이상야릇한 목적들이 있었다. 그러다 툭, 말을 걸어온 사람이 사진 속의 그 동생이었다. 외모가 눈에 띄고 말도 툭툭 건네긴 하지만 그때마다 아부지가 생각나 좋은 마음만 들었었다. 그래도… 다들 싫어하면 어쩔 수 없지. 준희는 데이트 같지도 않은 데이트를 하필 아부지가 봤나, 싶어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러냐? 만나기 싫으냐?”

“만나기 싫은 게 아니라 둘이서 이러니까….”

준희의 입장을 대변해주려던 선재가 준희의 도리질에 말을 멈췄다.

“아니에요, 아빠. 막 그런 사이도 아니라…. 그냥 밥만 먹었어요.”

준희도 당장 드는 감정에 확신이 없었다. 안 좋아하는 게 맞겠지. 어쩐지 겉도는 듯한, 저와 비슷하게 느껴지는 그 애에게 동병상련이라도 느꼈던 게 분명하다. 몇 번 말을 하다 보니 아부지가 생각나 편해지고, 그 모든 과정이 신기해서 밥도 먹었겠지. 갑자기 손을 잡은 것에 놀라긴 했지만, 어색하게 손을 빼내기까지 10초도 걸리지 않았었다. 어쩌다, 누구에게 사진을 찍힌 것일까?

잠깐 깊은 생각에 잠겼던 준희가 뒷모습을 보이는 재혁에게 다가가 등을 두드렸다. 어디 가서 동생 안 만들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 말에 무표정하던 재혁이 얼굴 근육을 느슨하게 풀었다. 재혁이 가만있다 건넨 말은 “나 솔직히, 좀 그랬어.”였다.

둘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선재는 손등으로 이마를 짚었다. 범진의 마음이 이해는 가지만, 영향을 끼쳐놓고 저렇게 정색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어린 준희에게 구경을 시켜준다며 도사견을 집에 끌고 온 것도, 산에 사는 들개들과 친구를 맺어준 것도, 문신 범벅인 사내들을 삼촌, 아저씨, 하며 따라다니게 만든 것도 다 본인이 아닌가? 덕분에 준희는 초등학교 첫 소풍 때 어디서 풀렸는지도 모를 셰퍼드, 도베르만 떼에도 강아지야~ 하며 따라갔다가 사고를 당할 뻔했다. 반 아이들이 울고불고 난리가 난 와중에 강아지야~ 하며 따라갔다고 하는데. 선재는 이번 일이 그때 그 소식만큼은 놀랍지 않았다.

준희도 성인이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다. 솔직히 사진을 처음 봤을 때 당황을 하긴 했지만, 그보다 더 현란한 문신을 한 사람과 저는 살고 있질 않나. 게다가 그렇게 나쁘지도 않다. 솔직히 몇몇 순간을 제외하면 좋다. 아주. 사람의 진심은 팔뚝이나 겉모습으로는 드러나지 않으니까. 그건 가슴속에 있는 것이다. 아무리 날건달처럼 보여도 속엔 소중한 뭔가가….

“하아… 큰일이다, 큰일이야…. 사람 보는 눈이 이래 없어가….”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범진이 걱정된다는 투로 말을 걸어왔다. 얼굴은 웃고 있었다.

“뭘. 준희도 생각이 다 있으니까….”

“그래, 니도 생각이 있으니까 내를 주섰고?”

“…….”

그 말엔 대답을 못 한 선재가 방에나 들어가라며 범진을 밀쳤다. 불과 몇 년 전인가. 어디 가서 말도 못 할 일을 겪고 난 후론 스킨십에 신중하게 되었다. 특히 집에서. 선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아이들이 사라졌나부터 살폈다. 물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재혁은 씻고 있는 듯했고, 준희는 방에 들어간 것 같았다.

“간도 크다. 그기 뭔줄 알고 애기랑 사귀라고. 니가 진짜….”

“뭐.”

“내 같은 거는 어디 저, 바다에 돌 매달고 빠트려도 모자란다. 근데 씨, 애기가 내랑 비슷한 거랑 만나는 그기…. 니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너 같은 사람이 뭔데. 맨날 헛소리만….”

“니 설마 지금 내가 좋게 보인다, 이 말이냐.”

그 말을 하며 씰룩쌜룩 입꼬리를 올리는데, 좀 거슬리는 게 아니다.

“그게 왜 그렇게 연결,”

“몇 년 전에 애 밴 거는 까묵었냐? 그때 내 죽일라 하드만.”

근데 그기 내 탓이냐, 하는 범진을 향해 얼굴을 찌푸리긴 했으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재혁을 낳은 후로는 임신 걱정을 해본 일이 없었다. 우성, 특히나 알파를 배 속에 품는 경우에 종종 불임을 야기한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선재는 재혁을 낳은 후로 몸까지 많이 쇠해, 더는 임신이 어렵겠다는 의사의 말에도 놀라지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고, 아쉬울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산 시간만 10년이 훌쩍 넘는데.

1년에 한 번꼴로 받는 정기 건강검진에도 범진은 뭐 마려운 개마냥 선재를 따라붙곤 했다. 특수 성별 진료과로 가보셔야겠다는 의사의 말엔 범진이 앞장을 섰다. 범진은 진료실로 가는 내내 야, 무슨 걱정이냐, 하면서 제가 더 사색이 된 얼굴로 복도를 걸었다. 운동 더 열심히 할걸, 몸에 좋은 거 더 많이 먹을걸, 하고 후회하던 선재는 상담실에서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을 들었다.

‘임신 반응이 있는 것 같아서요. 초음파 따로 더 보시고 가셔야 할 것 같네요.’

임신? 밤에 범진의 입에서가 아니면 들을 일이 없는 단어였다. 선재는 당황한 나머지 예? 하고 되묻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옆에서 범진은 뭐, 어디 봅시다, 하고 봐도 소용없는 차트와 컴퓨터 화면을 번갈아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야, 쒸, 하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기는 잠시였다. 아주 옛날, 선재가 재혁을 어떻게 낳았는지를 떠올린 범진은 초음파로 임신 판정을 받은 즉시 시술 예약부터 잡았다. 2주. 건강검진이 아니었더라면 모르고 넘어갔을 주 수였다. 선재는 범진을 곁에 둔 채로 간단한 시술을 받았다. 원래 토기가 치밀고 어지러워야 했지만 그런 반응은 없었다. 문제는 집에 돌아왔을 때였다.

범진은 아이들에게 과시하듯 그날 있었던 일을 모두 전했다. 아를 배게 돼서, 임신을 했지만서도, 하며 요란하게 말하는 범진의 소리를 듣고 어떻게 누워만 있겠나. 적당히 둘러대길 바랐는데 전혀 다른 방향으로 말하고 있었다. 이 나이에 임신한 게 무슨 자랑이라고 저렇게 떠벌리듯 말하나 몰랐다. 더는 참지 못한 선재가 화가 반쯤 나선 방문을 열었다.

‘말 그렇게 하면 애들 오해하잖아. 아부지 말 심각하게 듣지 말고.’

무슨 포장이라도 하려 방문을 나선 거지만, 범진이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다. 수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선재는 팔이 퉁퉁 부은 채로 걱정하지 말란 말만 연발했다. 그러다 부은 팔을 범진에게 들켰고,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팔이 붓는단 말을 병원에서 들은 후였는데도, 그날 범진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병원에 전화를 하고, 의사 주소를 부르라며 오랜만에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선재는 그럴 때 범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잘 알았다. ‘자꾸 그러면 나 더 아파.’

그 말에 범진은 거짓말처럼 목소리를 죽였고, 적어도 선재 앞에선 휴대폰을 들지 않았다.

아빠의 아프단 말만 들은 두 아들은 방문 앞에서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준희는 아빠, 내가 맛있는 거 많이 해줄게, 다 해줄게요, 하며 눈물을 훔쳤고, 재혁은 뭐? 그건 안 되지…. 그런 거 먹으면 아빠 큰일 나…. 내가 해야지, 하며 본의 아니게 태클을 걸었었다.

병원에서 돌아온 그 날이 제일 기억에 남지만, 선재의 기억엔 이런 장면들도 선명히 남았다.

팔은 물론 복부에도 압박감이 생긴 탓에 거동이 쉽지 않았다. 시술 직후에나 상태가 괜찮았지, 갈수록 뻐근한 통증이 온몸을 에워쌌다. 선재는 재혁이 태어난 해에 그랬듯, 범진의 큰 품에 안겨 매일매일을 보냈다. 식탁에서 밥 먹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팔이 불편한 선재의 입에 밥을 넣어주는 건 범진의 특권이었다. 준희나 재혁이 하겠다고 해도, 범진이 이런 건 내만 하는 거라며 양보를 해주지 않았다. 특히 재혁에게 이거는 내꺼고, 닌 나중에 니꺼한테나 해주라는 철없는 소리를 했었다.

인간아, 인간아…. 당시 범진에게 제일 많이 했던 말이었다.

오랜만에 인간아, 말해본 선재가 범진의 눈을 위협하듯 쳐다봤다. 범진은 그 앞에서 입을 씰룩이며 웃고만 있었다. 이내 얌체처럼 눈을 가늘게 뜨며, 알았다, 알았다, 말한 범진이 바로 옆에 있던 식탁 의자에 털썩, 앉았다. 범진은 선재의 팔을 끌어당겨 허벅지 위에 앉히곤 식탁에 있던 보약 한 포를 제 쪽으로 끌어왔다.

간만에 약발이 제대로 드는 보약이었다. 이것 때문에 엉덩이도 포동포동하게 오르고, 산을 오를 때도 뒤지게 힘들어하진 않는다. 밤에도 마찬가지였다. 범진은 음침하게 뻗치는 생각에, 역시 한번 쓰레기는 영원한 쓰레기라는 결론을 내리며 보약 모서리를 손수 까주었다.

유독 쓴맛이 나는 약이었다. 선재는 출렁거리고 있는 까만 물을 마지못해 받아 마셨다. 한 모금 마시고 앞을 보고, 한 모금 삼키고 표정을 굳히고. 몇 번이나 반복된 뒤에야 약을 비울 수 있었다.

안 쓰냐, 하고 물어온 범진에게 쓰다, 대답한 선재가 뒤이어 들려오는 쓰면 내 빨아라, 하는 소리는 가볍게 무시했다.

선재는 범진의 허벅지에 앉아 약간 높은 시선으로 집 안 전체를 둘러보았다. 커다란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 검은색 가죽 소파, 매끈한 벽면…. 평소와 똑같은 집 안 풍경이 좋은 날씨 때문에 특별하게 보였다.

빛을 피하듯 고개를 슬쩍 돌린 선재가 입을 열었다.

“좋은 사람인데.”

“뭐.”

“너… 안 나빠.”

“쥐이랄.”

“어휴…. 그만하란 소리도 안 나오네.”

웃음과 함께 내뱉어진 지랄 소리에 선재가 포기한 듯 고개를 저었다. 따뜻하고, 약을 먹어선지 속도 든든해진 기분이 든다. 선재는 몸을 범진에게 한껏 기댄 채 눈을 감았다. 그러자 눈에 따갑게 닿던 빛이 얼굴을 따스하게 만지는 느낌이 들었다. 선재는 이날의 감각을 잘 기억했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이 순간이 소중해질까 겁먹었을 때처럼.

겨울의 찬 바람을 우리는 모르는 이 순간이 좋아서, 이 집과, 당신이 좋아서.

선재는 또 다가온 겨울 속에서도 후회하지 않았고,

사랑과 사람을 믿었다.

범진을, 그 기적을 오래도록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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