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보너스 트랙 (29/29)

보너스 트랙

* * *

“형님, 여깁니다.”

“누가 모르냐? 개새끼야, 누가 모르냐고.”

앞창만 쳐다보던 범진이 손을 올려 남자의 머리를 가격했다. 어? 씨발? 하며 가볍게 터치(?)하는 것에 가까웠지만 남자는 범진의 손이 날아올 때마다 어깨를 움츠렸다. 오늘, 중요한 일이 있다며 어린 동생 하나를 달고 나온 범진은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쉽게 내리지 못했다. 혹시 주소가 잘못됐나 싶어 사실 확인을 시켜준 동생에게 괜한 화풀이나 할 뿐이었다.

“야, 니가 앞장서.”

“예, 형님!”

확실히 이런 일이 처음이긴 했다. 범진과 동행한 동생은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앳된 사내였다. 뺨에 아직 젖살이 남은 사내가 범진의 말에 부리나케 차 밖으로 튀어 나갔다.

앞쪽에 서 고개를 반쯤 숙인 사내가 범진이 내리기만을 기다렸다.

“하아, 씹.”

한껏 인상을 찌푸리며 차에서 내린 범진이 커다란, 오픈 기념 풍선들이 날리는 모 유아용품점 앞에서 걸쭉한 욕설을 내뱉었다.

이 짓까지 해야 하나? 좆나 씨발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이곳까지 왔다. 백화점도 잠시 생각했지만 소문이 날까 봐 그러지 못했고, 마침 가까운 거리에 새로 오픈한 유아용품점이 있어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까까머리 어린 사내를 쳐다본 범진이 턱짓으로 매장을 가리켰다.

아침부터 화를 내며 동생들을 불러 모은 범진은, 그중 입이 제일 무거울 듯한 놈 하나를 골랐다. 아픈 어미가 있는 놈이고, 제가 병원비 명목으로 돈을 쥐여준 적도 있는 놈이었다. 선재가 안 좋은 일을 당해 입원했을 때 몇 명 돌려가며 병실 앞을 지키라 세워둔 적이 있는데, 그 인원 중 한 명이기도 했다. 범진은 선재 대신 아침밥을 훔쳐서 처먹고 있던 놈의 모습을 떠올리다 손을 올렸다. 퍽, 소리가 나도록 뒷머리를 때렸다.

“함만 더 훔쳐먹으면 뒤질 줄 알아라.”

“아니, 그, 아…. 네, 형님.”

사내가 곤란한 표정을 짓다가도 알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잊을 만하면 그래 맛있었냐? 돼지새끼가 어디서 누구 밥을 훔쳐 먹냐고, 그 째깐한 거 밥을 니가 처먹어? 하며 타박할 때가 많았다. 배가 고프긴 했지만, 하도 먹으라고 말해 어쩔 수 없이 먹은 건데. 한 번도 부연 설명을 해보지 않은 사내가 머리만 긁적였다. 찰지게 맞은 탓에 마사지라도 받은 듯 머리에선 시원한 느낌이 들고 있었다.

매장 안은 쾌적했고, 어디선가 좋은 향기도 나고 있었다.

동생이 먼저 들어간 뒤에야 발걸음을 옮긴 범진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개쪽팔린다고 생각했지만, 매장 안엔 멀쩡한 남자들도 많이 보였다. 가족 단위 손님들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범진은 어느 매장에서 판매 중인 실리콘 턱받이를 보다 코웃음을 쳤다.요즘은 아니고, 예전에 준희가 자주 찼던 턱받이와 모양이 비슷했다. 무슨 괴상한 가방을 앞에다 차고 있나, 했는데 턱받이였다. 선재 몰래 준희에게 다가가 턱받이를 살살 건드리며 웃긴 표정을 지어 보이면, 아이는 겍겍 소리를 내며 웃곤 했다.

‘내가 아기한테는 해코지하지 말랬잖아…. 왜 이러는데…? 도대체 왜!’

참다못해 언성을 높인 선재에겐 황당한 마음만 들었을 뿐이다.

핑계를 댈 줄 모르는 성격 탓에 뭘 했다고 말하기도 좀 그랬다. 범진은 그때마다 씨팔, 그니까 제대로 하라고, 하면서 험상궂은 표정만 지어 보였었다. 그런 게 몇 번이나 된다. 선재는 아이 관련된 일엔 쉽게 좌절하고, 쉽게 눈물을 보였다. 혼자 울고 있는 선재에게 다가가 뭐 하냐고 물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아기는 건드리지 말라는 말을 듣곤 했는데. 다시 한번 어이가 없어진 범진이 쩝, 소리를 내며 턱받이로부터 멀어졌다.

오늘 이 좆같은 유아용품점을 찾은 건 카시트를 사기 위해서였다.

유일한 목표를 생각해낸 범진이 얼굴을 위로 쳐들어 매장을 샅샅이 살폈다.

“야, 저 의자.”

“예?”

“저거, 씨발. 암거나 달라 해.”

대충 말한 범진이 벽면에 다닥다닥 진열된 카시트를 가리켰다.

알아들은 동생이 아, 예, 하며 빠르게 그쪽으로 다가갔다. 상주하는 직원은 없는지, 다른 매장에서 한 직원이 나와 까까머리 사내를 반겼다. 반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뒤쪽에서 걸어오는 범진까지 쳐다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카시트 보러 오신 건가요?”

“예? 아, 네.”

얼떨결에 대답한 사내가 범진을 흘끗 쳐다봤다. 뒤쪽에 선 범진은 저와 전혀 상관없는 일인 듯 귀나 후비고 있었다. 짝다리를 짚고, 눈은 높은 천장에 둔 채였다.

“어, 실용적인 제품들은 이쪽에 있구요. 프리미엄급은 이렇게. 보통 오래 쓰시려는 분들은 프리미엄급으로 많이 가시죠. 요즘은 팔기도 많이 하시잖아요. 이게, 볼 때는 비슷해 보여도 내구성이 차원이 다르거든요. 특히 이 제품은 유럽 안전 인증도 받았구요. 만져보세요. 이 부분이 최고급 울 재질이라 겨울에도 따뜻하고.”

어어, 하며 손을 갖다 댄 사내가 뒤쪽을 다시 쳐다보았다. 다리를 바꿔서 짝다리를 짚은 범진은 관심이 전혀 없어 보였다. 아무거나 사라고 하셨으니까…. 손에 닿는 부드러운 느낌에도 뭘 사면 좋을지만 생각한 사내가 옆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거는…?”

“네, 이것도 많이들 찾죠. 20만 원대에서 이 정도 퀄리티 나오긴 힘들거든요. 저희가 오픈 기념으로 저렴한 제품들도 환불, 교환 기간을 넉넉하게 잡았어요. 혹시 문제 생기셔도 1년 안에만 오시면 무상 교환이 가능합니다.”

“아, 무상으로.”

“예, 책임 따지지 않고 교환해드려요.”

어린 사내의 생각은 이랬다. 통이 큰 편인 형님이긴 하지만, 밥 가지고 그렇게 저를 괴롭혀대는 사람이기도 하니…. 싼 걸 골라야 위험이 적을 듯했다. 옆에서 백만 원대 제품에 비할 순 없지만 나름 좋게 나왔다고 설명하는 직원의 말에 확신도 생겼다. 실용적인 제품을 사는 걸 형님은 더 좋아할 터다. 보기엔 큰 차이도 없질 않나.

백만 원대 제품엔 쿠션도 있고, 뭐가 매끈해 보이기는 하지만.

좀 더 간결한 모양의 검은 카시트를 가리킨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이거 하나 사겠습니다.”

“네, 이게 두 가지 버전이 있는데…. 혹시 아이….”

나이를 물으려던 직원이었으나 찰싹, 하고 들린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뒤에 있던 남자가 여태 저와 대화하던 남자의 머리를 때리는 소리였다. 둘 다 이십 대 초중반으로 보이긴 하나 뒤쪽에 있던 남자가 몇 살 더 형 같긴 했다. 뭐가 못마땅한지 인상을 잔뜩 쓴 채 앞으로 나온 남자가 쏘아붙이듯 말했다.

“야 이 새끼야, 니 새끼나 후진 데 앉혀라.”

“…죄송합니다, 형님.”

순간 얼어붙은 직원이 한쪽 눈썹을 세운 남자의 얼굴을 쳐다봤다. 뒤에 있어 얼굴은 자세히 보지 못했었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지저분하게 그어진 흉터였다. 까무잡잡하게 태운 얼굴에서도 선명하게 보일 정도라, 직원은 긴장되는 마음부터 느꼈다. 남자가 검은 셔츠 소매 단추를 풀곤, 팔꿈치까지 셔츠를 올려붙였다.

“뭐 쳐다보는데. 달란다고 이거 줄라 합니까?”

“예?”

“어디서 싸구려를 디밀고.”

검은 카시트를 내려다본 범진이 짜증 난단 얼굴로 턱짓을 했다. 저거, 하며 가리킨 건 은은한 윤기가 도는 카시트. 직원이 설명에 열을 올리던 그, 프리미엄급 카시트였다. 몇 초 지나 상황을 파악한 직원이 표정을 바꿨다. 금세 예, 하고 웃으며 두어 걸음 뒤로 가 해당 카시트를 가리켰다.

“아아, 저게 싸구려… 까진 아니지만 확실히 이거에 비할 순 없죠.”

구매는커녕 매장 전체에 해를 끼치겠단 표정으로 직원을 바라본 범진이 고개만 한 번 까닥였다.

“손님 안목이 있으시네요. 혹시 아이 나이는 어떻게 될까요. 이건 나이대별로 라인이 세 개나 있어서,”

“뭐 한, 세 살인가…. 네 살인가 그러는 것 같더만.”

“어….”

눈을 크게 떠 생각하던 직원이 그 눈을 몇 번 깜박였다.

“키가 한 요 정도 되나요?”

손으로 제 허벅지 중간 정도를 가리킨 직원이 예의를 차리며 물었다.

범진이 아래를 내려다보곤 눈을 치뜨며 고개를 들었다.

“그래 될라면 멀었는데. 낸테 앵기면 딱 이 정도.”

실제 아이를 안은 듯 팔을 둥그렇게 내민 범진이 다리는 여기까지 온다며 제 벨트 주변을 가리켰다. 씁, 이것보다 더 내려오나? 하고 혼잣말을 내뱉었지만, 그에 대답해줄 사람은 없었다. 뻘쭘하게 뒤에 서서 두 손을 모으고 있던 어린 사내가 아예 다른 쪽을 쳐다봤다. 처음부터 알아서 하시지….

“아아, 그럼 토들러 라인으로 가시면 되겠네요.”

“…알아서 하쇼.”

뒤늦게 남의 일인 양 고개를 돌린 범진이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야.”

“예.”

범진의 부름에 바로 다가온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이 새끼가 일하는 데 넋이나 빼고 있고.”

뒤지고 싶냐? 하는 말까지 들은 사내가 죄송하다며 몇 번이나 거듭 사과했다. 범진은 지갑으로 동생의 머리를 치려다 겁만 주고 말았다. 지갑에서 꺼낸 돈은 대충 백오십만 원 정도다. 오만 원권 몇십 장을 동생에게 건넨 범진이 뚜벅뚜벅 걸어 카시트 판매장을 벗어났다. 뭔 짓을 했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잘한 짓이긴 할 거다. 혀로 입술을 쓴 범진이 자꾸 지어지려는 웃음을 참으며 유아용품점을 벗어났다. 5분도 안 되어 직원 둘과 함께 나온 동생 놈이 형님! 설치도 해준답니다! 하는 말에 또 금방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차 주변에서 멀어지긴 했지만.

카시트 설치가 되는 동안,

범진은 멀찌감치 멀어져 시간을 보냈다.

담배를 한 대 빨고, 고개를 위로 들어 하늘이란 것도 쳐다봤다.

선재가 가끔 이런 짓을 한다. 제 시선을 피하느라 눈이 다른 곳을 향할 때도 있지만. 하늘이나 산, 주변 풍경들에 시선을 빼앗길 때가 있다. 그때마다 시비를 걸거나 발을 툭툭 차곤 하는데. 오늘은 선재가 곁에 없어 그럴 사람이 없었다. 범진은 해를 쳐다보느라 잔뜩 구겨진 얼굴로 고개를 내렸다. 얼마 만인가. 이렇게 순순히 눈을 내려 본 적이. 범진은 우연히 쳐다본 태양에도 악의를 갖고 그걸 쳐다볼 때가 많았다. 이딴 거에 질쏘냐, 하며 최소 1분은 태양을 올려본 뒤에야 고개를 내리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그런 대결(?) 없이 대충 감상만 하고 차 쪽으로 시선을 돌린 것이다.

선재처럼, 선재가 하는 것을 따라 해보려고.

요즘은 인간이 되고 싶은 생각이 많이 든다.

인간다운 게 뭔지 생각도 해보고, 그것들이 하는 사랑이 뭔지도 궁금할 때가 있다.

하지만 범진은 자신이 없었다. 해본 적이 없었고, 배울 수도 없는 영역이란 생각이 들었다.

쉬운 삶이기만 했는데 요즘은 그런 게 어려웠다.

하, 숨을 쉰 범진은 담배를 길바닥에 버리려다 굳이 몇 걸음 걸어 재떨이에다 그걸 툭 던졌다.

“씨발새끼. 니 또라이지.”

열 번 중 한 번은 선재가 하란 대로 하는데, 할 때마다 좆같은 기분이 드는 게 사실이다.

‘침을 왜 거기 뱉는데….’

‘아기 있는데 담배….’

‘꽁초 쓰레기통에 버리지….’

자조적인 질문을 내던진 것도 잠시, 망설이듯 그런 말을 하는 선재의 얼굴을 떠올리자 스멀스멀 웃긴 기분이 들었다.

아까부터 형님! 부르던 동생 놈은 뭐가 답답했던지 이쪽으로 걸어오는 중이었다.

범진이 야, 가 있어, 말하곤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터벅터벅,

널찍한 주차장을 가로지르는 범진은 알지 못했다.

돌아서서 걷는 제 뒷모습으로 얼마만큼 따스한 햇볕이 내려앉는지를. 무엇이 달라지고 있는지를.

〈할 수 없는 것들〉 외전 끝

할 수 없는 것들 외전2

ⓒ 2022, 고귤

이 책은 (주)북팔이 작가와의 계약에 따라 발행한 것으로, 본사의 서면 허가 없이는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초판 발행일 2022년 6월 29일

지은이 고귤

펴낸이 강승우

펴낸곳 (주)북팔

출판등록 2011년 3월 25일

홈페이지 novel.bookpal.co.kr

블로그 blog.naver.com/bookpalbooks

저희 북팔은 작가님들의 스토리를 언제나 기다리고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