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해열차가 포티스의 몸의 열을 식혀주어서 포티스는 편히 쉴 수 있었다. 얼마간 잠들었다가 깼더니, 시간을 알 수 없어서 마음이 철렁했다. 포티스는 자신을 안고 있는 시스 황제의 팔에서 한참 동안 조마조마하다가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창밖의 달이 환하게 빛났다. 포티스는 허둥지둥하면서 시스 황제에게 편지라도 남기기 위해 종이를 찾았지만, 그런 물건은 서재에나 있을 법했다. 그러나 포티스는 서재의 위치를 몰랐고, 다른 방을 찾아 다녀오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그래서 자신이 반지 외에 지니고 있던 유일한 물건인 보석 나비를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황제에게 바치는 선물로는 초라했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 나비는 다행히 흠이 나 있지 않았다.
‘돌아올 거에요, 진실을 확인하면…. 그럼, 그때 황제 폐하하고의 관계도 확실히 할 수 있을 거예요.’
다시는 보지 않는 사이는 되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포티스는 속으로 인사를 하고는 조용히 침실을 빠져나왔다. 다행히 입구는 커튼을 두른 게 전부여서 별달리 큰 소리가 나지는 않았다.
포티스는 가진 것도 없었고, 입고 있는 것도 뮤용 튜니카가 전부였다. 여행을 떠나기에 적당한 차림새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달빛에 의지해 더듬더듬 정원의 입구에 도착해 니즈를 기다리는데, 밤하늘이 높고 공기가 싸늘했다. 포티스는 알 수 없는 불안함을 느끼고 몸을 떨었다.
‘정말로, 정말로 떠나는 거야….’
그때 포티스의 뒤편에서 어떤 그림자가 다가오더니 어깨를 단단히 쥐었다. 포티스가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램프도 들고 있지 않은 니즈가 덩달아 깜짝 놀랐다.
“왜 그렇게 놀라, 포포스?”
“아, 그게…. 황제 폐하인 줄 알고요….”
“여긴 그의 성이니까 마주쳐도 이상하지 않지. 그러니 빨리 나가야 해.”
니즈의 목소리 덕분에 포티스는 이것이 현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는데, 멀리서 조그맣게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리더, 같이 가야죠. 저희는 리더처럼 밤눈이 밝지 않다고요.”
“아직 젊은데 그래서 되겠어?”
니즈가 조그맣고 날카롭게 말하자 램프를 든 파나와 라토가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를 해 보였다. 니즈는 몸을 어두운색의 상·하의로 갖춰 입고 망토를 두른 가벼운 차림이었는데, 알고 보니 짐을 전부 두 실론이 들고 오고 있었다. 파나는 니즈의 검을, 라토는 두툼한 짐가방을 어깨에 걸친 채였다.
그들은 다가오더니 포티스에게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 대접은 그다지 받아보지 못한 포티스가 당황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눈치를 보면서 조그맣게 말했다.
“실, 실론님을 뵙습니다….”
그러자 니즈는 눈이 동그랗게 되었고, 파나는 곤란한 미소를 띠었고 라토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지금은 그런 예를 갖출 필요가 없습니다, 포티스님.”
파나가 상황을 정리하며 가방에서 포티스가 입을 어두운색의 상하의를 꺼냈다.
“바깥에선 자유 시민처럼 바지와 셔츠를 입는 편이 활동성이 좋아요.”
“고마워요….”
포티스가 얼른 대답하고 등을 돌린 채 옷을 벗자 라토가 당황하면서 얼른 몸으로 포티스를 가려주었다.
파나가 헛기침을 하며 리더를 응시했다.
“가방에 침낭과 식량이 들어있어요, 어떻게 쓰고 먹는지 알죠. 리더?”
“날 바보로 보는 거야? 침낭은 이렇게 저렇게 펼치고 빵은 이렇게 저렇게 썰면 되잖아.”
그러자 파나의 미간이 약간 좁아졌다. 둘의 대화를 들으면서 니즈의 저런 면 덕분에 파나가 걱정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저렇게가 뭐죠? 지금 당장 침낭을 펼쳐보라고 하고 싶지만, 시간이 많이 없습니다. 가급적 멀리 가야 하니까요.”
그러면서 니즈의 허리에 있는 홀더에 검집을 단단히 고정해주고, 가방도 어깨에 짊어지도록 도와주었다.
“포티스님은 체력이 거의 없어요, 뮤는 힘을 잘 쓰지 못하니까 리더가 책임져야 합니다.”
“당연한 소린 안 해도 돼. 이 잔소리쟁이야.”
니즈가 불평하며 파나를 노려보았다가 포티스가 옷을 다 갈아입은 걸 알아채고 다가갔다.
“귀엽다, 포포스. 바지도 잘 어울리는구나. 아니 오히려 이쪽이 더 어울린다고 할까? 뮤용 튜니카는 사실 옷 같지 않아.”
“원래 그런 용도로 만들어진 게 아니긴 합니다.”
파나가 거들었다.
“저기, 나도 약간은 도울 수 있게 해줄래요…? 힘이 그렇게 없진 않고…. 가방 정도는 들 수 있어요.”
포티스가 조그맣게 말하자 라토가 니즈의 짐을 덜어 작은 꾸러미를 만들어주었다. 포티스는 사실 자신이 전부 짐을 들고 싶었지만, 몸을 치료했다고 한들 섹스밖에 하지 않아 체력이 거의 없는 상태이긴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작은 꾸러미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이건, 포티스님의 호신용 무기입니다.”
파나가 차고 있던 단검 중의 하나를 포티스에게 건넸다. 디아나로 만든 것이 분명한 시원하고 가벼운 데다, 디아망이 세공되어있는 검이었다.
“원래 실론이셨으니 기본적인 호신술을 아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상대가 실론이면 어렵겠지만, 마물이면 조금쯤 시간을 벌 수 있으시겠죠.”
“호오, 포포스가 정말 그래?”
포티스는 마물을 상대할 자신은 없었지만, 자신도 한몫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잊지는 않았어요, 싸울 수 있어요….”
그러자 파나가 놀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포티스의 팔을 붙잡으며 설명했다.
“당신 곁에는 짐승 같은…. 크흠 동물처럼 날쌔고 강한 리더가 있으니 싸울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니 리더 곁에 꼭 붙어 계세요, 그저 만일의 경우를 말한 것뿐입니다.”
“아….”
“그래 맡겨둬, 포티스.”
“잘 다녀오세요, 리더.”
라토가 상냥하게 니즈를 격려했다. 넷은 몇 마디를 더 주고받았는데, 파나가 작별할 시간이라는 걸 상기시켜주자 니즈가 둘과 빠르게 악수를 했다. 포티스는 고맙다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넷은 제1궁의 정원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밤눈이 가장 좋은 니즈가 앞장섰다.
“같이 떠나고 싶은데, 아쉽네요.”
파나가 붉은 장밋빛 머리카락을 넘기며 포티스를 향해 말했다. 포티스는 약간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는 걸 깨닫고 얼른 대답했다.
“아, 네에….”
“리더는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셨어요, 그 증거로 저희와 함께 떠나지 않은 겁니다.”
“저도 아마….”
하지만 그렇게 말을 꺼내자마자, 정말 황궁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스 황제의 마음이 변할지도 몰랐던 것이다. 비록 포티스가 그와 알고 지내고 싶다고 해도, 그쪽에서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었다.
“당신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포티스님. 황제 폐하는 했지요, 덕분에 지금 황족과 귀족들의 불만이 상당히 심해요.”
“무…. 무슨 얘기에요?”
“뮤를 제1궁에 머물게 했으니까요.”
역시 자신과 같은 낮은 신분이 황제와 함께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파나는 지금까지 뮤들은 황제의 제1궁에는 머물지 못하고, 기껏해야 본궁에서 방치된 상태로 지내는 게 전부였다고 했다. 운이 좋아 첩으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저택에서 정식 파트너인 파즈의 질투를 과연 혈혈단신인 뮤가 견뎌낼 수 있었을까? 그들의 수명은 지나치게 짧았고, 아이를 남기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파나가 설명해주었다. 포티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제가 떠나니까….”
“아니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뮤가 스스로 원해서 황제 폐하를 떠나갔다면 더 큰 문제가 되지요.”
귀족과 황족들은 황제가 뮤를 공개하고, 최소한 정식으로 본궁에 데려다 놓기를 바라고 있었다. 아마도 몇몇 황족과 귀족 실론들만이 맛본 뮤를 안으려는 의도도 없지는 않겠지만, 그들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사면조차 받지 못한 뮤는 죄인이나 마찬가지였다.
포티스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어물거렸다. 밤눈은 물론 귀까지 밝은 니즈가 돌아보면서 날카롭게 속삭였다.
“포포스를 괴롭히지 마.”
“그냥 필요한 말을 좀 한 것뿐이에요.”
파나가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당신께서 다시 돌아오신다고 했으나, 황제 폐하의 의중은 알 수 없지요. 공개적으로 찾으러 나서기라도 하면 뮤가 도망갔다는 걸 알리게 되니, 저희도 최선을 다해 막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되도록 빠르게 처리하고 오세요.”
그리고 포티스만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낮췄다.
“아니면 그대로 떠나는 것도 방법입니다.”
“그건….”
영원히 시스 황제의 곁에서 멀어지라는 말이었다. 포티스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도 모르면서 입을 열었을 때, 니즈가 자리에 멈춰 섰다. 본궁으로 들어서는 길에 접어든 참이었다.
“자, 여기까지면 돼.”
“아시죠, 리더? 샛길로 가시면 말을 준비해 놨어요. 숲을 통해 나아가세요.”
“알아, 너 점점 걱정이 많아지네.”
니즈의 고개가 불만스럽게 기울어지면서 파나의 잔소리를 들었다. 라토가 말리지도 않고 살며시 웃고 있는 걸 보면 항상 있는 일인 모양이었다.
“저기, 오늘….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포티스는 목소리가 충분히 들릴 만큼 소리를 내어 인사를 하고 고개를 숙였다. 파나와 라토 역시 고개를 숙였다.
“저희 리더를 잘 부탁합니다.”
마침내 둘을 뒤로하고 니즈와 포티스는 본궁에서 바깥으로 향하는 숲을 파고들었다. 본궁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는 지대였는데, 마물이 있어 평소에 통행로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방향이었다.
한참을 길도 없고 풀이 웃자란 숲길을 빠르게 걸었다. 포티스는 벌써부터 숨이 차는 것 같았다.
“니즈님, 조금만 천천히….”
포티스가 헐떡이면서 앞서가는 그의 손을 꽉 붙들었다. 포티스의 손에서는 땀이 촉촉이 배어 나온 상태였다.
“안돼, 시간을 너무 지체할 수 없어. 해가 뜰 때까지는 이 길에서 떠나야 해.”
“하지만….”
그때, 돌부리에 걸린 포티스의 몸이 크게 휘청하면서 넘어졌다. 니즈가 뒤를 돌아보는 찰나, 그의 뒤편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마물이 덮치려는 순간, 그는 이미 돌아보지도 않은 채 검을 빼든 상태였다.
“터져라!”
그러자 반투명한 유리 같은 검신이 달빛에 환하게 빛나면서 옅은 보랏빛을 띠었다. 니즈는 순식간에 뒤에 있던 밤의 장막과도 같은 롬브레리도를 베어 없애고, 포티스를 포위하며 다가오던 세 마리도 단숨에 베어버렸다. 마물들은 니즈가 들고 있는 검의 빛에 닿기만 해도 눈송이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포티스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니즈가 자신의 어깨를 감싸고 나서야 상황을 이해했다.
‘니즈님…. 강하구나.’
자신은 크기가 3m에 달하는 커다란 망토를 펄럭이는 것 같은 롬브레리도를 보았을 때 도무지 쓰러트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굳어버렸던 것이다.
니즈가 포티스의 앞에 앉아 등을 보였다.
“자 업혀, 대신 짐은 네가 들어줘.”
“죄송해요….”
포티스가 니즈의 가방을 건네받아 어깨에 걸치고 얌전히 업혔다. 니즈는 기운 좋게 벌떡 일어나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괜찮아, 넌 깃털만큼 가볍다구.”
니즈의 안광이 없는 파란 눈이 달빛이 내리는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보였다. 둘은 그대로 헤매는 일 없이 말이 놓여있는 장소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도중에 잠을 자던 슬라임을 니즈가 밟는 바람에 결국 그들을 조각조각 내야 했지만, 별수 없는 일이었다.
“말은 탈 줄 알아?”
“네, 많이 탔었어요.”
니즈가 포티스를 안장에 올려주고 자신도 말 위에 올라탔다. 둘은 밤새 달려서 황궁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갈 예정이었다. 사실 마물이 등장하는 동쪽 숲은 이미 시작이었지만, 진짜 동쪽 숲이 펼쳐진 지역은 훨씬 광활했던 것이다.
“그럼 출발하자.”
둘이 말을 출발시키고, 숲길을 휙휙 달려나갔다. 포티스는 아주 잠깐 뒤를 돌아보며 시스 황제를 떠올렸다. 파나의 말 덕분에 어쩐지 마음이 훨씬 심란해졌다.
‘……. 많이 좋아했어요.’
그 순간 시스 황제는 잠에서 잠시 깬 상태로 포티스가 없어진 것을 알았다. 그러나 포티스가 자신에게서 떠났을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던 그는, 포티스가 화장실이라도 갔다고 생각하고 잠시 동안 그를 기다리다가 곧 다시 눈을 감고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포티스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그래서 그가 포티스가 남긴 보석 나비를 발견한 건 아침나절이었다. 시스 황제는 브라우니를 시켜 포티스를 찾아보게 하고, 그가 제1궁 어디에도 없고, 정원에조차 없다는 걸 알았을 때는 시간이 상당히 소요된 상황이었다.
그는 테이블에 있던 보석 나비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나이츠 오브 디아망의 기사인 니즈를 찾았다. 그러나 니즈 대신 온 것은 파나였다. 황제는 정적인 성격이었지만, 황제의 뮤가 도망을 친 이상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어 파나는 마음의 준비를 한 상태로 그를 만났다. 파나는 침착해지려고 애쓰면서 시스 황제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힌 채 예를 갖추었다.
“……. 니즈님과 포티스님은 떠났습니다, 황제 폐하.”
“어디로?”
“위치는 저도 알지 못하나, 목적지는 알고 있습니다. 포티스님은 아버지와 동생을 만나러 가셨어요.”
“죽었잖아.”
황제가 한 말을 부정해야 할지, 파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 역시 실제로 확인한 것이 아니어서 말을 하기가 어려웠지만, 두뇌가 명석한 파나는 실수를 하지 않았다.
“……. 직접 확인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래. 내 나이츠 오브 디아망의 기사와 나의 뮤가 도망을 쳤다라….”
시스 황제는 조용히 손에 들고 있던 보석 나비를 떨어트렸다. 원래부터 연약했던 그것은 떨어지자마자 산산조각이 나면서 파편을 흩뿌렸다. 시스 황제는 보석 나비를 짓밟은 채로 디아망 무늬가 선명한 눈동자로 파나를 내려다보았다.
“당장 뒤쫓을 준비를 해.”
제1궁에서 파나가 쩔쩔매고 있을 때, 두 사람은 막 황궁에서 연결된 숲의 끝자락에 도착해있었다. 밤새 달려와 말도 니즈도, 포티스도 지쳤다. 특히 포티스의 체력이 부족해서 나중에는 말 한마디가 따라오게 하고, 니즈와 포티스가 함께 말을 타야 했다.
니즈는 마물을 경계하면서 포티스에게 자신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게 했는데, 그러고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하반신에 이상한 반응을 느꼈다. 몸이 살짝 달아오르고, 묘한 기분이 들었다.
“…포포스, 아직 발정기야?”
“미안해요…. 냄새가 많이 나요?”
포티스가 사과하면서 조그맣게 물어서, 니즈는 곤란해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그와 붙어있는 피부에서 포티스의 온기가 전해지면서 몸이 묘하게 나른해졌던 것이다.
‘뭐, 그래도 참으면 되지.’
니즈는 계속해서 느껴지는 신호를 무시하면서 말을 몰다가 주위가 점점 밝아진 것을 보고 지도를 꺼내 지형을 확인했다. 그리고 말을 멈추게 하고, 포티스를 돌아보았다.
“여기서 잠시만 눈을 붙이고 가자. 많이 달려왔으니 괜찮을 거야.”
“죄송하고, 감사해요. 니즈님….”
그러자 니즈가 히죽 웃으면서 먼저 말에서 내리곤 포티스를 안아 내려주었다.
“네가 그렇게 말할 때면 기분이 좋더라, 역시 실론은 착한 일을 하고 살아야 해.”
“니즈님도 참….”
둘은 피곤했지만, 가볍게 잡담을 주고받을 정도는 되었다. 그런데 침낭을 펼치는 순간, 묘하게 정신이 흐릿해지면서 눈을 깜박일 때마다 심한 졸음이 덮쳐왔다. 니즈가 아차! 하고 생각하는 순간, 의식이 끊겼다.
숲속에서 반투명한 유령 같은 마물이 둘 사이에 사뿐하게 날 듯이 내려앉아 니즈와 포티스의 목덜미를 차례차례 깨물었다.
니즈가 다시 눈을 뜬 것은 채 5분도 지나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당황한 그가 자신의 목을 확인했을 때, 서큐버스의 키스가 분명한 흔적을 보고 신경질을 낸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 짜증 나! 가뜩이나 참고 있었는데….”
깨자마자 바로 하반신이 뻐근해지고, 평소엔 하지도 않던 야한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니즈는 침을 꼴깍 삼킨 다음 자신의 뺨을 찰싹 때리고 포티스를 살펴보았다. 포티스 역시 굶주린 서큐버스의 키스를 받은 상태였다.
‘하필이면 황궁을 거의 벗어났는데….’
니즈가 짜증을 내고 있는데, 포티스가 작게 신음을 하며 헐떡였다. 실론인 자신과 달리 뮤인 포티스에게는 훨씬 강한 효과가 나타나는 모양인지, 뺨이 새빨갛고 바지가 오줌이라도 싼 것처럼 축축하게 젖은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어쩔 수 없네.”
니즈는 한숨을 내쉬고 포티스의 입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분명 짐 어딘가에 라토가 이것저것 싸준 꾸러미에 서큐버스의 키스를 치료하는 약도 있겠지만, 사실 서큐버스의 낙인을 받으면 한번 섹스를 해야 약의 효과가 통했다.
“포포스, 마물에게 당해서 섹스를 해야 해. 듣고 있어?”
“으, 읏….”
포티스가 눈물을 글썽이면서 몸을 웅크리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성기를 빨고 싶고 박히고 싶다는 생각으로 꽉 차서 자신도 모르게 손이 바지로 내려가 입구를 매만질 정도였다.
“아, 윽….”
“미안해, 포포스.”
니즈가 포티스의 바지를 휙 벗겨냈다. 그러자 긴 발정기용 속옷이 체액에 푹 젖어 있었다.
속옷을 치우면 이번에는 미끈하게 젖은 분홍빛 입구가 드러났다. 입구에는 꿀렁꿀렁 흘러나온 체액의 거품이 일어있었다. 포티스는 몽롱한 정신으로 자신의 앞에 있는 상대가 누군지 기억하려고 애썼다. 주홍빛의 머리카락을 봤을 때만 해도 생각나지 않았지만, 가라앉은 파란 눈을 보자 단번에 떠올랐다.
‘그래, 나는 황궁을 나왔었어…. 하지만 어째서 갑자기 이렇게….’
“니즈님….”
포티스가 끙끙거리며 띄엄띄엄 부르자 니즈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해가 떠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귀찮은 녀석에게 당했지 뭐야.”
“으읏…. 그, 몸이 이상해, 요….”
일시적으로 발정기일 때보다 훨씬 강한 성욕이 포티스의 몸을 덮쳤고, 마치 미약이라도 먹은 듯한 상태가 되었다. 니즈는 아무렇지도 않게 땀에 젖은 포티스의 뺨을 짚어보고는 차근차근 상의를 벗겨주었다.
“저, 어떻게….”
“걱정 마, 포티스. 지금 안아줄게.”
미광이 숲속에 있는 둘을 비추고, 새벽 안개가 감도는 가운데 니즈가 입고 있던 어두운 빛깔의 의복 상의를 벗었다. 니즈는 섹스를 그리 즐긴 건 아니지만, 경험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어서 이런 순간에는 둘 다 알몸이 되면 좋다고 알고 있었다.
니즈는 고개를 숙여 포티스의 입술을 살짝 물었다가 놓고는 혀를 넣어 빨아들였다. 혀가 입안 구석구석에 닿으면서 포티스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걸 느꼈다. 열이 나는 자신의 몸이 실은 차갑게 느껴지고 니즈와 닿은 부분만이 뜨거운 것 같아, 더욱 입술에 매달리게 되었다.
“하아, 하아….”
“하고 나면 금방 약을 줄 테니까.”
그가 안쓰럽게 자신에게 엉겨 붙는 모습이 측은하고 또 사랑스럽기도 해서 입술을 살짝 떼어낸 니즈가 포티스를 달랬다. 그리고는 바지를 벗어내 완전히 알몸이 되었다. 니즈의 성기는 채 발기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큼직했다. 니즈는 그것을 몇 번 주물러 세웠다. 그동안 포티스는 초조하게 침을 꼴깍 삼키며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크고 모양이 훌륭한 성기를 투명한 거품이 묻어있는 입구에 갖다 대고 꾹 밀어 넣는데, 그것만으로도 느낀 포티스가 몸을 들썩이면서 작게 신음을 냈다. 니즈는 특별히 섹스 상대를 거칠게 대하는 타입이 아니었고, 취향도 깔끔했다. 그는 드나들 때마다 안에서 체액이 샘솟는 게 기분 좋다고 생각하면서 안이 조여드는 감촉을 느끼고 있었다.
“아아….”
실론의 성기가 안으로 들어오자 포티스는 누운 채로 성기 모양의 도구를 사용하듯 엉덩이를 들어 흔들었다. 안을 가득 채우는 성기의 감촉이 기분이 좋았고, 몸 안에서 그동안 쌓인 무언가가 해소되는 것 같기도 했다.
‘기분 좋아….’
니즈는 니즈대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포티스가 움직이는 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분홍빛 유두가 옅은 햇살 덕분에 훨씬 부드럽게 보여서 홀린 듯이 양손으로 포티스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가슴은 작았지만 매끄러웠고, 통통한 감촉이 좋았다. 손끝으로 유두를 둥글게 매만지면 유두가 살짝 세워졌다.
“아, 읏….”
평소와는 다른 포티스의 들뜬 목소리가 들리자, 서큐버스의 낙인 탓인지 몸속이 확 끓어 올랐다. 니즈는 포티스의 상체에 자신의 몸을 겹치면서 그의 허벅지를 잡아 눌렀다. 그러자 연결부가 치켜들려 지며 포티스는 니즈의 몸 아래에 짓눌린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도 불편한 기색 없이 오히려 니즈의 등에 팔을 둘러 꽉 끌어안았다. 니즈는 포티스의 열이 오른뺨에 자신의 뺨을 맞댔다.
니즈는 포티스의 반응을 살피면서 기분 좋아하는 곳을 찔러주기 위해 허리를 부드럽게 움직였다. 니즈 자신은 섹스에 대해 큰 감흥이 없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겪게 된 상황에서 적어도 포티스라도 기분이 좋았으면 했던 것이다. 하지만 물건처럼 다루어지는 게 익숙한 포티스에게는 이렇게 상냥하게 대하는 것이 더욱 애를 태우는 방식이라는 걸 니즈는 모르고 있었다.
“앗, 아아…. 니즈님….”
니즈는 포티스가 자신을 부르는 순간 어떤 책임감을 느꼈다. 니즈가 들어올 때에 맞춰 포티스가 엇갈리도록 허리를 흔들자 연결부에서 찔걱찔걱한 소리가 났다. 내벽을 찔러 들어가는 건 부드러운 베일을 살며시 누르는 것과 비슷한 감촉이었다. 안은 뜨거운 데다 조여들어서 니즈의 호흡도 점점 가빠졌다.
“하아, 으응…. 앗…. 안돼….”
“…하고 싶지 않지? 미안해.”
니즈가 포티스의 어깨를 감싸 안아 토닥이면서 살짝 달래주었다. 포티스는 훌쩍이며 니즈의 맨몸에 자신의 가슴과 배를 문지르기 위해 들썩였다. 몸이 뜨거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읏….”
짧은 쾌감이 연속해서 스치더니 곧 긴 절정이 찾아와 포티스는 입을 벌린 채로 타액을 떨구었다. 그 덕분에 내벽이 꽉 조여들었고, 니즈는 순간 숨을 멈추었다. 하지만 포티스가 절정을 느끼는 중이라는 걸 재빠르게 걸 알아채고 얼른 그가 기분 좋아했던 곳을 지근지근 찔러주었다.
“앗, 으읏….”
눈가에 이슬처럼 맺힌 눈물이 툭툭 흘러내리고, 뺨과 목덜미, 가슴을 발갛게 물들인 채 헐떡이는 포티스의 모습은 니즈의 상상 이상이었다. 정액을 짜낼 듯이 조이던 내벽이 순간 느슨해지자 니즈 역시 사정감을 느끼고 정액을 배출했다.
“후우….”
내벽에 정액이 닿자마자 흐르는 강한 쾌감은 포티스의 전신을 떨리게 했다. 포티스의 발끝이 끄덕끄덕 흔들렸다.
“하아, 아아, 으윽….”
포티스는 어떻게 해서든 쾌감의 여운에서 벗어나려고 손등을 깨물었다. 니즈는 안타까운 기분이 되어 포티스가 상처를 내지 못하도록 팔을 붙잡아 빼냈다.
“이제 약을 줄게, 물지 마, 안돼.”
약을 찾기 위해 짐을 뒤적이는데, 포티스가 풀밭에서 몸을 꿈틀거리며 끙끙 앓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니즈는 어느새 약을 찾아서 손에 들고 있었지만, 이런 걱정이 앞서지 않을 수 없었다.
‘서큐버스 키스의 효과가 더 강하니까, 한 번 더 해야 하나?’
“니즈님, 저….”
니즈가 다가가자 포티스가 힘겨워하며 니즈에게 다짜고짜 매달렸다.
“포포스, 너….”
말을 마치기도 전에 니즈의 몸이 먼저 반응하며 포티스의 입술을 덮쳤다. 그가 자신을 원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고, 니즈로서는 포티스를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서라면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니즈가 포티스의 뺨을 쥐고 혀를 얽게 하자 매끈매끈한 혀가 뒤섞이면서 질척이는 소리가 났다. 니즈는 키스에 서툰 편이었지만, 둘 중 누구도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았다. 닿아있다는 것 자체로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특히 포티스의 가슴 감촉이 마음에 든 니즈가 가슴 전체를 매만지며 애무하자 포티스의 입에서 들뜬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으응, 아….”
손을 가슴에서 배로 내리던 니즈는 디아망 마크를 기억해내고 살살 문질렀다. 보랏빛 디아망 마크가 자극되자 포티스가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입구에서 향이 진한 체액이 왈칵 쏟아져나왔다.
“좀 더 기분 좋게 해줄게.”
니즈는 포티스를 눕히고는, 짐승들이 교미할 때 그러듯이 포티스의 엉덩이를 치켜들려 지도록 하고 위에서 짓누르며 성기를 삽입했다. 니즈가 가장 좋아하는 자세였다. 허리를 움직이면 포티스의 몸이 들썩들썩 흔들렸다. 알몸이 된 둘의 섹스를 숲에 사는 생물들이 지켜보고 냄새를 맡았다. 미드 향은 마물에게도 영향이 있어서, 슬라임 몇 마리가 주위로 꼬물꼬물 몰려들었다. 니즈는 적당히 그것들을 손으로 밀어 치워냈다.
상체를 맞대고 압박하며 허리만을 움직이자 찌를 때마다 체액이 바닥의 풀을 적실 정도로 줄줄 흘러내렸다. 포티스는 쾌감에 울면서 니즈를 안았다.
“아앗, 아…!”
성기를 조이는 느낌 덕분에 니즈는 포티스가 다시금 절정에 달했다는 알 수 있었다. 그러자 자신이 포티스를 만족시켰다는 기쁨이 밀려오면서 니즈 역시 살짝 입술을 깨물고 사정했다.
“으읏, 니즈님….”
포티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고 현기증이 밀려오는 가운데 겨우 의식을 되찾았다. 방금 전까지는 머릿속이 희뿌옇고, 섹스를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막상 자신이 니즈와 했다는 걸 깨닫고 나자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아….”
심지어 자신과 니즈는 완전히 홀딱 벗은 상태였다. 포티스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자, 니즈 역시 희미한 홍조를 띄운 채 웃었다.
“이제 개운하지? 약을 먹으면 돼.”
“그…. 그렇군요.”
니즈는 디아나 케이스에 들어있는 사탕 같은 알약을 포티스의 입에 넣어주고, 자신도 같은 것을 먹었다. 피처럼 빨갛고 달콤한 맛이 나는 약이었다.
“…그런데, 포포스. 이 무늬가 아까랑은 다르네?”
“네…?”
니즈가 바지를 올리며 포티스의 디아망 마크를 건드렸다. 분명 마름모 모양일 텐데, 지금은 가운데에 작은 사각형이 그어져 있고, 그 안에 다시 작은 마름모가 들어있는 모양으로 변해있었다.
“언제 이렇게 됐지….”
당황한 포티스가 팔을 후들거리며 몸을 일으켜 배를 매만졌다. 순식간에 불안한 생각이 마음속을 스쳤다.
‘설마 아이를….’
“니즈님, 아까는 다른 모양이었다고 했죠?”
니즈가 태평하게 끄응, 하고 기지개를 켜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황족의 문양이었지.”
“그럼 잠깐 사이에 바뀐 거네요….”
포티스의 심각한 얼굴을 보고 니즈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게 달라지면 안 되는 거야?”
“아, 아니에요…. 그냥….”
섹스할 때 체액이 줄줄 흐르는 것도 똑같았고, 특별히 몸에 달라진 점은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차라리 발정기인 채로 온종일 체액을 흘려도 좋으니, 이 무늬가 원래대로 돌아갔으면 하고 문질러 보았지만 그대로였다.
“후우….”
아이를 받아들이다니, 더군다나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도 알 수 없었다. 포티스는 방금도 니즈와 섹스를 했고, 그 전에 <토끼 사냥>에서도 엉망진창으로 정액을 받았다.
포티스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자, 불편해서라고 생각했는지 니즈가 무언가 떠오른 얼굴을 하고는 가죽으로 된 물주머니를 열어 손수건을 적셔 건네주었다.
“땀이랑 체액 흘려서 불쾌하지? 닦아줄까?”
“아니에요, 제가 할게요….”
니즈에게 감사 인사를 하면서 등을 돌리고 몸을 닦는데도 아이 생각은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다리 사이를 닦고 난 뒤에 보니, 묘하게도 발정기의 체액이 더는 새어 나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아, 역시 아이를 받아들였어….’
니즈가 침낭을 펼치면서 포티스가 잘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포포스?”
“거, 거의 다 됐어요….”
포티스가 체액으로 범벅이 된 손수건을 건네길 주저하자 니즈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빼앗아갔다.
“앞에 수원이 있을 테니, 내가 빨아놓을게. 그보다 너하고 말은 좀 쉬는 게 낫겠어. 지금부터 3시간만 머물 거니까, 잠을 자둬.”
그러면서 포티스에게 어두운색의 상의를 입혀주었다. 포티스는 그가 챙겨주는 게 쑥스러워서 쩔쩔매면서 괜찮다고 했지만, 니즈는 개의치 않았다.
포티스가 침낭 속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니즈님은요?”
니즈는 옷을 전부 말끔히 갖춰 입은 상태였고, 평소의 정신력을 회복해 후방을 주시하면서 대답했다.
“난 누가 오는지 봐야지.”
“고마워요….”
니즈가 수면을 취하지 않는 이유는, 포티스가 쉬는 동안 추적자가 나타나지 않는지 경계하기 위해서였다. 포티스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드는 한편, 눈을 감자마자 졸음이 밀려와 포티스는 정신을 잃듯이 잠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