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포티스, 일어나야지?”
니즈는 3시간이 한참 지나 포티스를 잠에서 깨웠다. 원래는 말들을 쉬게 해주고, 풀을 먹게 한 다음 바로 포티스를 깨울 예정이었지만, 너무나 곤히 잠든 포티스의 얼굴을 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
니즈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맛있는 냄새가 풍겨서 포티스는 눈을 깜박이며 깨어났다.
“얼른 식사하고 떠나자.”
그러면서 낮 동안 충분히 달려 남쪽의 바다에 도착해야 한다고 말했다. 포티스의 영지는 황궁이 있는 수도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었기에 좋게 말하면 자연이 아름다운 지방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변두리였다. 그래서 황궁 근처의 지형은 잘 알지 못했는데, 바다가 있다는 얘길 듣고 깜짝 놀라면서 얼굴이 환해졌다.
“바다요?”
“그래, 인어도 있고, 맛있는 물고기랑 게도 있지…. 어쨌든 우리가 먹을 건 지금 이거지만.”
그러면서 말린 고기를 불에 구운 것을 건네주어서 포티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얼른 받아 물었다. 황궁에서 수급한 음식이었기에 말린 고기는 수분이 적당히 있었고, 질기지도 않은 데다 적당히 간이 되어있었다.
잦아드는 모닥불을 끄기 전 니즈는 당을 보충하기 위해 챙겼던 하얗고 폭신폭신한 크림 마시멜로를 꼬치에 끼워 흐물흐물하게 만든 후에 포티스에게 건네주었다.
“든든히 먹어둬야지, 계속 달릴 거니까.”
“니즈님은요?”
“나는 포포스 것 한 입만 먹자.”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포티스가 든 크림 마시멜로를 베어 먹었다. 입가에 녹은 크림 마시멜로가 수염처럼 붙은 바람에 포티스가 소리 내 웃었다.
“좋아, 겨우 웃어줬네.”
포티스가 크림 마시멜로를 작게 깨물어 먹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네?”
“내내 심각한 얼굴이었잖아, 포티스. 네가 선택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거니까, 용기를 내.”
시스 황제에 대해서 언급을 하려다가, 니즈는 어쩐지 귀찮은 기분이 들어 그만두었다. 지금 이 분위기에서 시스 황제의 얘기를 꺼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 그건…. 실은….”
포티스는 혹시 아이를 받아들인 뮤에 대해 니즈가 알고 있는 게 있을까 싶어서 조심스럽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아이가 생긴 것 같다고?”
니즈는 그야말로 깜짝 놀라 포티스의 배를 내려다보고 다시 포티스를 응시했다가 또 내려다보았다. 포티스는 어쩐지 부끄러워져서 손으로 볼록한 배를 덮어 가렸다.
“추측이지만요…. 니즈님은 혹시 아이를 받아들이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 게 있으세요?”
“일단 배가 나와.”
그러면서 조심스레 포티스의 배에 손을 가져다 대고 얼굴을 맞대기도 했다.
“…그 외에는요?”
“그건 모르겠어. 파나가 있으면 물어볼 수 있었을 텐데…. 아는 게 많거든.”
순간 그가 황궁을 완전히 떠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한 일이 떠올라 포티스는 흠칫 놀랐다. 시스 황제를 다신 만나지 않는다니, 어디로 가야 한다는 걸까? 포티스가 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생각에 잠긴 사이 니즈는 포티스의 옷을 들쳐 가만히 디아망 마크를 꾹 눌러보고 있었다.
“…거기 만지시면 제가 좀 힘들어지는데….”
그런데 말해놓고 보니 실론이 디아망 마크를 만지거나 누르면 이상한 쾌감이 올라왔는데 묘하게도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포티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니즈의 손을 잡아 배에 갖다 댔다.
“이상해요, 왜 그 느낌이 안 들지….”
“뭐?”
“니즈님은 괜찮으세요? 저랑 닿으면…. 하고 싶어지잖아요.”
“그런가?”
사실 니즈는 최근 내내 포티스를 향해 욕정을 느끼던 중이라 포티스가 그렇게 말해도 즉시 무슨 뜻인지는 바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다시금 포티스의 배를 매만져보고는 곧 앗, 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게 없다! 찌릿찌릿한 거!”
“그렇죠! 닿아도 아무렇지 않아요!”
포티스가 기뻐하며 배에 올라와 있는 니즈의 손을 겹쳐 잡자 니즈의 뺨에 순간적으로 미세하게 홍조가 돌았다. 그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했다.
“불편했었지? 잘됐네.”
“네에, 다행이야…. 사실 니즈님과도 하게 돼버려서 약간은 슬펐어요.”
그 말이 니즈의 마음 어딘가에 콕 박히는 것 같았다.
“…왜?”
니즈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물었지만, 포티스는 고개를 숙이고 나와 있는 배를 보느라 알지 못했다.
“좋은 분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친구면 좋겠다고….”
단순히 친구라니…. 거의 겪어보지 못한 복합적인 기분과 약간의 실망을 느끼면서 니즈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 이상 대화를 이어간다면, 포티스에게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말까지 들어야 하고 또 자신 역시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맞장구를 쳐야 할 것 같았다.
니즈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어떻게 보아도 약간 토라진 듯한 태도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영리한 두 필의 말들은 길게 늘여서 묶어둔 줄 근방의 풀들을 먹으며 얌전히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뭔가 잘못했나 봐….’
겁을 먹은 포티스가 시무룩해 하자, 그 모습을 잠시도 견디기 힘들었던 니즈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포포스, 넌 너무 둔해.”
“제, 제가요…?”
“그래, 거기 침낭 정리해줄래?”
“앗, 죄송해요. 제가 바로 했어야 했는데….”
대화가 알쏭달쏭하게 흘러가 버려 포티스는 그가 거칠게 벌떡 일어난 이유가 자신이 게을러서라고 판단하고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출발하자!”
파나가 봤다면 여행이라도 떠나는 것처럼 여유 부리지 말라고 했을 것이 틀림없는데, 사실 니즈로서는 아슬아슬하게 허용되는 시간에 맞춰 행동하는 것이었다.
니즈가 탄 말이 맑은 오전의 햇살을 가르듯이 내달리면 포티스가 탄 암말은 발끝을 통통 튕기는 것처럼 경쾌하게 따라붙었다.
식사 때마다 잠깐 말에서 내려 쉰 것을 제외하면 둘은 낮 동안 내내 숲을 달렸고, 이틀에 걸쳐 마침내 동쪽 숲을 건넜다. 다행히도 동쪽 숲의 마물은 낮에는 대부분 거의 무해한 것들만이 활동했다. 휴식을 취해야 하는 밤에는 서로 번갈아서 잠이 들었지만, 니즈가 설치한 마물 경계석 덕분에 자잘한 마물은 피할 수 있었고, 한 차례 위기가 있었지만 마침 깨어있는 게 니즈였기에 무사히 마물을 처리할 수 있었다.
삼 일째 되는 낮, 키가 큰 나무들이 점점 관목으로 변하고 드문드문해지나 싶더니 순식간에 눈앞에 새파란 바다가 나타나서 포티스는 조그맣게 탄성을 질렀다.
“바다예요!”
“응, 여신 디 오르의 눈물이지.”
해협이 마치 물방울이 툭툭 떨어져 이어진 것처럼 생긴 덕분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태양이 막 지평선에서 피어오르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석양이었고 포티스는 가볍게 피로감을 느꼈다.
“자, 오늘은 여기서 노숙이야.”
니즈가 쭉 뻗은 유연한 몸을 튕기며 모래사장으로 뛰어내렸다. 니즈의 안광이 거의 없는 눈이 드물게도 빛났고 그는 급하게 상의를 벗으면서 바닷물로 들어갔다. 해가 져서 물이 차가워졌을 텐데도 니즈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포티스가 말을 세우고 조심스레 내려서면서 외쳤다.
“니즈님! 차갑지 않으세요?”
“괜찮아, 포포스도 들어올래?”
“저는 여기 있을게요!”
넓게 펼쳐진 바다를 보면서 포티스 역시 고운 모래에 발을 내디뎠다. 말들은 여행에 익숙한지, 포티스가 니즈에게 가르침 받은 대로 가죽 주머니에 바닷물을 떠서 소금기를 없애는 약과 뒤섞은 다음 먹도록 해주자 편안하게 물을 받아마셨다.
포티스 역시 땀에 젖은 몸을 씻고 싶었지만, 그보다 먼저 쉬고 싶어서 모래사장에 풀썩 주저앉아버렸다. 내내 실내에서 생활을 하는 데다 별다른 활동도 하지 않았던 포티스가, 추적자가 따라붙을지도 모르는 여행을 급히 감행하는 건 어느 정도 버거운 일이었다.
“후우….”
포티스는 무릎을 세워 팔로 감싸 안았다. 니즈가 물속에서 마물처럼 보이는 투명한 물고기를 맨손으로 잡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바닥의 고운 모래를 손으로 쓸었다. 그러다가 속이 빈 하얗고 깨끗한 조개껍데기가 몇 개 있기에, 포티스는 그중 커다란 머리빗처럼 뾰족뾰족한 돌기가 달린 소라를 집어 들어 귓가에 대어보았다. 공기가 모이면서 바다에서 들리는 파도와 유사한 소리가 들렸다. 포티스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 소라껍데기를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포포스, 이걸로 저녁 먹자!”
동쪽 숲을 급하게 빠져나오느라 말린 고기로 끼니를 해결한 게 지겨웠는지 니즈는 한껏 신이 나 있었다. 포티스는 살며시 웃으면서 그가 들고 있는 투명한 물고기를 살펴보려고 몸을 일으켰다.
사방이 탁 트여 숨을 곳이 없었지만, 그만큼 추적자가 나타나는 것도 알아보기 쉬웠다. 모닥불을 피워 옷을 말린 다음, 투명한 물고기에 향신료를 골고루 뿌려 식사를 마친 둘은, 포티스가 양보하여 니즈가 먼저 잠을 자기로 했다. 남쪽 바다에는 시간대별로 나타나는 마물이 달랐는데, 어떤 마물이어도 포티스는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또 마물 경계석을 무시하는 마물도 존재했다. 그래도 늦은 새벽보다는 밤 나절이 덜 위험하다고 판단한 니즈는 먼저 침낭으로 파고들었다.
“그럼, 위험하면 바로 날 깨워.”
혹시라도 포티스가 말을 하지 못할 상황을 대비해, 니즈는 포티스와 자신의 팔을 디아나 줄을 감아 묶어두었다.
“그럴게요, 푹 주무세요.”
“잘자, 포티스.”
다행히도 니즈는 머리를 대면 바로 잠드는 타입이어서, 조금 뒤척이더니 곧 쌔근쌔근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포티스는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바닷가는 밤이 되면 싸늘하다는 걸 깨달았다.
시간은 조용히 흘렀다. 이따금 주위를 둘러보며 경계하던 포티스는 자연히 시스 황제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는 지금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여전히 그가 준 반지를 끼고 있던 포티스는 살며시 그것을 매만져보았다.
“네 생각을 하고 있었어.”
돌연 그런 목소리가 들려 포티스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기척도 없이 나타난 시스 황제는 언제나와 같은 정장 튜니카를 걸쳤고, 고운 모래를 밟고 있었다. 모닥불이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시스 황제는 조용히 포티스를 응시하더니, 자세를 낮춰 앉아있는 포티스와 시선을 맞추고 뺨을 붙잡아 키스했다. 그와 이렇게 마주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여긴…. 어떻게….”
“네가 있는 곳이라면 당연히 찾아가지.”
마치 모든 일이 없던 것처럼 황제는 평온한 태도로 포티스의 허리를 안으며 그를 바닥에 눕혔다. 포티스는 순간 니즈가 깰까 봐 걱정되어서 팔을 최대한 위로 뻗었다. 그러자 당겨졌던 디아나 줄이 느슨해졌다.
“그래도….”
포티스는 무슨 말을 할지도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입을 열었지만, 곧 안으로 들어오는 부드러운 혀를 받아들여 더는 말하지 않아도 되었다.
“으응….”
시스 황제의 키스는 케이지드에슈에 있을 때의 그를 떠오르게 만들었다. 그를 처음 만났던 순간과 그를 좋아하게 되었던 순간을 생각하면서 포티스는 열심히 그의 키스에 응했다. 시스 황제에게서는 희미한 바다 냄새가 풍겼다. 그것이 의아했지만, 바닷가에서 물향이 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기에 포티스는 곧 잊고 말았다.
그의 손길이 포티스의 몸을 옷 위로 어루만지자, 포티스는 전율하며 바들바들 떨었다. 분명 발정기도 끝났고 실론과 닿아도 흥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는데, 어째서인지 알 수 없었다.
‘그야…. 특별하니까….’
다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이 그는 단 하나의 존재였다. 포티스는 디아나 줄이 묶이지 않은 팔을 그의 목덜미에 둘렀다. 모닥불과 달빛 덕분에 시스 황제의 은발이 스스로 빛나는 것처럼 반짝였다.
포티스는 잠에 취한 것처럼 멍한 기분으로 시스 황제가 상의를 걷는데도 얌전히 있었다. 부드러운 가슴이 드러나고 시스 황제가 얼굴을 파묻으며 뺨을 문질렀다. 유두가 금방 세워진 건 물론이었다. 가슴에서 따끔한 느낌이 들었다. 포티스가 내려다보면 시스 황제는 눈을 감고 유두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쪽쪽, 하는 부끄러운 소리가 들려서 포티스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 황제, 폐하….”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시스 황제는 너무 매정하지 않은 어조로 그렇게 말하고선 포티스의 배로 내려가 디아망 마크를 문질렀다. 분명 니즈가 만졌을 땐 별 느낌이 없었을 텐데, 뱃속으로 화끈하게 퍼지는 뜨거운 감각에 포티스는 하아, 하고 숨을 들이켰다.
‘이상하게 바뀐 걸 알아버리셨을 텐데….’
하지만 시스 황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고, 포티스도 상관이 없다고 여겼다. 지금 중요한 건 시스 황제와 자신이었다. 포티스는 니즈의 존재도 잊었다.
그가 배를 천천히 만지면서 하의를 벗겨냈다. 포티스는 발정기용 속옷을 벗어둔 상태였는데, 그 덕분에 눈부신 흰 피부가 곧장 드러났다.
“부끄…. 러워요.”
“넌 내 소유잖아, 포티스.”
“…맞아요.”
시스 황제는 포티스의 발목을 붙잡아 입을 맞춘 후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그대로 다가오자, 정장 튜니카 아래에서도 확실하게 느껴지는 발기된 성기가 포티스의 엉덩이에 닿았다. 포티스는 두근거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어서….”
포티스가 그의 튜니카 자락을 잡아끌자, 시스 황제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두툼하게 힘줄이 돋은 성기를 받쳐 잡아 포티스의 다리 사이로 밀어 넣었다.
“앗…!”
미끈한 성기가 몸 안을 채우자 단번에 쾌감이 치솟았다. 포티스는 그를 더 잘 받기 위해 다리를 활짝 열었다. 시스 황제는 포티스의 배 위에 손을 얹고, 다른 손으로는 허리를 감싸 쥔 채 빠르게 성기를 박아넣었다. 포티스의 몸이 흔들거리면서 몸이 점점 위로 쓸려 올라갔다.
“하앗, 아…! 으응…!”
그의 성기가 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 감미로웠다. 포티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시스 황제를 올려다보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가 포티스의 손을 마주 잡아주었다. 그가 이렇게나 다정하고, 또 이상한 지시나 강요도 없이 자신만 바라봐주다니 무척 행복해진 포티스의 눈가에 눈물이 방울방울 맺혔다.
“좋아해요, 항상, 좋아했어요.”
그러자 시스 황제는 대답 대신 포티스의 몸을 끌어안으면서 하반신을 바싹 밀착해왔다. 그리고 뜨거운 숨을 내뱉으면서 포티스에게만 들리도록 낮게 말했다.
“나도 좋아해, 포티스.”
“정말….”
포티스가 눈물을 툭툭 떨구면서 시스 황제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이대로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어떤 대가를 치러도 좋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포티스는 내벽을 빠르고 깊게 휘적이는 성기의 감각에 끙끙거리며 고개를 옆으로 떨구었다.
그러자 자신을 보고 있는 니즈의 동그랗고 파란 눈동자와 딱 마주쳤다. 평소에는 안광이 거의 없다시피 한 그 눈은 어쩐지 반짝반짝했고, 입은 약간 놀라서 벌어져 있었다.
‘누…. 누구더라…?’
포티스는 당황해서 섹스를 멈추려고 했지만, 시스 황제의 어깨를 붙잡아도 소용없었다. 니즈는 하품을 한번 하더니 벌떡 몸을 일으켰다.
“포포스, 그거 마물 시노메어야.”
“마, 마물….”
마물이라는 단어를 입밖에 내뱉자마자 시스 황제의 청초한 모습이 순식간에 녹아내린 촛농처럼 일그러지더니 커다란 연체동물로 변했다. 모닥불을 받은 표면의 빛깔은 밝았고, 더듬이가 까닥이는 머리는 포티스의 목덜미에서, 하반신은 다리 사이에서 꾸물거렸다.
“아….”
그제서야 꿈결처럼 느껴졌던 순간들이 산산조각으로 깨지고, 현실로 돌아왔다. 제정신을 차린 포티스가 눈을 꽉 감으면서 시노메어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니즈와 연결되어 있는 디아나 줄을 당기면서 말했다.
“니즈님! 도와주세요…!”
“뭐? 그건 별로 해가 없는 마물이야. 단지 상대가 섹스 가능한 상태인지만 확인하고, 섹스만 할 뿐이지.”
“그, 그치만….”
포티스가 울먹이면서 새빨간 얼굴로 외쳐도, 니즈는 히죽 웃기만 하더니 디아나 줄과 연결된 팔이 들썩이는데도 신경 쓰지 않고 기지개를 켰다.
“네가 너무 즐거워 보여서 말이야…. 끝까지 하게 둘까 했는데.”
“하고 싶지 않아요!”
포티스가 즉시 답하자 니즈는 끄응, 하고 일어나더니 커다란 연체동물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빨리 가버려~! 저리 가~!”
그리고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스윽 빼내 들자, 말을 알아듣는 것도 아닐 텐데 순간 흠칫하더니 내벽에 넣었던 자신의 생식기를 꺼내고는 꾸물꾸물 움직여 어둠 속으로 도망쳤다. 생긴 것에 비해 움직임이 민첩했다.
“세상에….”
분명 슬라임이나 케르베로스에게 당한 적도 있었지만, 아무리 여러 번 겪어도 마물이 자신의 몸을 원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고 부끄러웠다.
포티스가 끙끙거리며 옷가지를 주워 입자 니즈가 크게 하품을 하면서 묶여 있던 디아나 줄을 풀어냈다. 그러면서 시노메어는 조개껍질에 모래처럼 숨어 있다가 껍질에 다가오는 생물에게 달라붙는다는 설명도 해주어서, 포티스는 울먹이는 얼굴로 주머니에서 조개껍데기들을 털어버렸다.
“이제 내가 경계를 설게.”
어쩐지 너무한 기분이 들어 포티스는 입을 삐죽이며 니즈를 응시했다. 그걸 알아채고 니즈가 헤벌죽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왜?”
“언제부터 깨셨어요?”
니즈는 아무렇지 않게, 하지만 포티스에게서는 시선을 피하고는 말했다.
“아, 황제 폐하….”
“마, 말하지 마세요! 저는 마물인 줄 몰랐어요!”
부끄러워진 포티스가 몸을 움츠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쨌든 네게는 황제였잖아? 얼른 자. 일찍 떠날 거니까.”
묘하게 그의 태도가 차갑다고 생각하면서 포티스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채로 침낭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래도…. 너무해요, 마물이 안에 들어왔었는데.”
“응응, 미안해.”
그의 무성의한 말투에 포티스는 슬퍼져서 얇은 침낭 속에서 고개를 떨구었다. 풀 벌레 우는 소리가 잔잔하게 들렸다가 다시 끊기길 반복했다.
모닥불을 응시하면서 앉아있던 니즈가 한참 만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넌 황제를 너무 좋아해.”
얼핏 무언가 소리를 듣긴 했지만, 포티스는 막 잠에 빠져들던 참이라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대로 쌔근쌔근 편안한 숨 소리를 내며 잠이 들고 말았다.
니즈는 포티스가 잠이 들자 모닥불을 뒤적이고는 생각에 잠겼다. 아직까지 추적자가 따라붙지 않다니, 묘한 일이었다. 하지만 가까이서 지켜봐 온 황제의 성격이라면 반드시 한번은 마주칠 것 같았다.
‘황제가 포티스를 포기할 리 없지.’
그러면서도 포티스를 옆에 두고 괴롭히는 것을 떠올리면, 니즈 자신도 그다지 어른스럽지 않은데 마음이 갑갑해졌다.
포티스도, 니즈도 무언가 생각을 했고 그것들이 천천히 변해가는 새벽이었다.
포티스가 누가 업어가도 일어나지 않을 만큼 깊이 잠든 사이, 니즈는 발굽이 있는 다리가 여덟 개 달린 ‘육지마’라고 하는 마물을 처리했다. 단독 행동을 하는 마물이었지만, 한 육지마가 죽으면 다른 육지마를 끌어들이기 때문에 침착하고 까다롭게 행동해야 했다.
니즈는 마법을 전혀 쓸 줄 몰라, 검으로 육지마의 일부를 눈송이로 만들어버리거나 팰 수밖에 없었다. 육지마를 여덟 마리가량 잡고 났더니 근방에 있는 성체 육지마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빠른 시간 내에 많은 육지마가 사라졌으니, 생존에 위협을 느낀 모양이었다.
“으엑, 구려.”
니즈는 육지마의 파란 피가 여기저기 흩뿌려진 옷의 냄새를 맡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육지마에게 깨물리거나 걷어차이는 등 가벼운 찰과상을 입긴 했지만, 니즈는 언제나 그렇듯이 가장 앞서면서도, 가장 끝까지 남는 나이츠 오브 디아망의 리더다웠다.
“포포스, 슬슬 안 일어나려나….”
포티스만 남겨두고 마물 경계석 근처를 벗어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뒤에서 펼쳐진 동쪽 숲에서 마물이 기어 나오거나 앞쪽의 바다에서 뜬금없이 마물이 불쑥 솟아 올라올 수도 있었다.
그래서 니즈는 육지마의 피를 뒤집어쓴 그대로 얼굴만 옷에 문질러 닦고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포티스가 좋아하는 게 황제 외에 무엇이 있을까, 같은 것들을 떠올려보았다.
그러나 포티스가 깨어난 것은 동이 틀 무렵이었다. 바다에서 태어나는 것 같은 눈 부신 태양이 포티스의 닫힌 눈꺼풀을 건드렸을 때야말로 포티스는 갑작스레 잠에서 깨어났다.
특별히 무슨 소리가 들려서는 아니었다. 니즈는 턱을 괴고 바다를 보고 있다가 포티스를 응시하곤 웃어주었다.
“세상에, 그게 뭐예요? 냄새도 나요.”
“이거, 마물 피. 슬슬 해도 떴겠다, 금방 닦고 올게.”
“다치진 않았어요?”
“으응, 별것도 아닌데~”
니즈가 바닷가로 향하면서 등을 보이고 손을 흔들었다. 포티스는 기지개를 켜면서 어쩐지 불안한 기분이 들어 멀리 보이는 숲을 응시했다.
그 순간,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날카로운 화살이 바람을 가르며 포티스 발치의 모래사장에 푹 하고 박혔다. 그 소리를 니즈가 놓칠 리 없었고, 곧바로 포티스 쪽으로 달려오며 팔을 뻗었다.
“이쪽으로 와!”
그러나 곧바로 다음 화살이 포티스의 발목을 꿰뚫었고, 포티스는 사냥당한 짐승처럼 고꾸라지고 말았다.
“포포스!”
니즈가 달려오는 게 보였지만, 포티스는 그 짧은 거리를 이동할 수가 없어서 끙끙거리며 팔만을 뻗었다. 다시금 화살이 몇 발이나 날아왔고 니즈는 검을 꺼내 그것들을 쳐내면서 포티스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러나 나이츠 오브 디아망의 기사들이 사용하는 게 틀림없는 장검이 보란 듯이 니즈의 왼쪽 뺨에 생채기를 내며 뒤로 휑하니 날아갔고 포티스의 뒷면의 허공이 일렁이며 투명한 막이 걷히듯 진짜 모습이 드러났다.
시스 황제가 건장한 은빛의 말을 탄 모습으로 포티스의 곁에 서 있었다. 그러자 곧장 지금까지 들리지 않았고, 보이지도 않았던 말발굽 소리가 세차게 들리면서 다른 이들도 한 번에 모습을 드러냈다.
화살을 쏜 것은 당연히 라토였다. 그는 여전히 니즈를 향해서 활 끝을 겨누고 있었는데 입술을 깨문 모습을 보아 내키지 않는 게 틀림없었다. 장검을 던진 건 누군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나이츠 오브 디아망의 기사들 중에서 니즈의 약점인 왼쪽 시야를 알고 있는 건 많지 않으므로 아마도 파나일 것이다.
‘짜증 나네….’
그러나 니즈는 기죽지 않고 오히려 낮게 으르렁거리면서 그들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짜증이 난다는 건 파나와 라토가 자신을 뒤쫓아와서가 아니었고 시스 황제가 나이츠 오브 디아망의 기사 6명을 전부 데리고 나타나서도 아니었다. 포티스가 다친 데다 완전히 시스 황제의 수중에 있어서였다.
시스 황제는 특별한 말도 없이 말에서 내려 포티스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순간 뜨거운 기운이 몸속에 확 돈 덕분에 움찔하고 포티스의 몸이 떨렸다.
“…데리러 왔어.”
시스 황제가 낮게 말했다. 니즈가 둘을 향해 다가오기 위해 발을 움직인 순간 휙 하고 말에서 뛰어내린 파나가 빠르게 말했다.
“니즈님, 저와 상대해주세요.”
“뭐? 비켜!”
하지만 나이츠 오브 디아망의 다른 기사들도 일제히 말에서 내려 다가오자 니즈는 검을 든 채로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빠르게 파나가 경쾌하게 장검을 휘두르면서 니즈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은 평소에 좋은 동료였기에, 이렇게 개인적으로 겨룰 일은 대련을 제외하면 거의 없었다. 파나는 같은 장검을 쓰는 사용자로서 니즈와 제대로 된 대결을 꼭 해보고 싶었던 참이었다.
니즈가 검날이 망가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파나의 검을 힘껏 위로 받아쳤다. 눈송이로 변하는 마법은 효과가 없었는데, 나이츠 오브 디아망의 기사들이 쓰는 무기를 만든 대장장이는 애초에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같은 기사끼리 사용하리라고 여기고 만들어진 그것들은, 서로에게 걸린 마법이 통하지 않았다. 그러니 순수한 기술, 체력, 센스의 싸움이었다.
“그렇게 휘두르면, 얼마 싸우지 못할 텐데요!”
“시끄러워!”
다른 나이츠 오브 디아망의 기사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라임이 휘두르는 창이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며 니즈의 몸통을 노렸고, 낮은 곳에서 파고들어 오는 세아의 빠른 공격, 그리고 제이의 단단한 맨주먹과 유우가 사용하는 채찍이 니즈의 검에 얽혀들면서 다섯은 일사불란하고 신중하게 싸움에 빠져들었다.
라토만은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져서 황제를 지키듯이 엄호하는 데에 그치고 있었다. 분명 제대로 싸우지 않았다고 추궁당할 텐데도, 그는 니즈를 몰아가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을 생각인 게 틀림없었다.
햇살을 반사하며 디아나로 만든 온갖 무기들이 허공에 반짝이며 수를 놓았다. 니즈는 말없이 그 공격을 전부 받아내고 있었지만, 조만간 지칠 가능성이 컸다. 각각의 무기를 다루는 데에 있어서 최고의 재능을 가진 이들을 뽑은 것이 바로 나이츠 오브 디아망의 기사들이었다.
옆에서 그런 소란이 있는데도 시스 황제는 편안한 어조로 포티스에게 말을 걸었다.
“이리 와.”
“다리가 아파서….”
그러자 그는 무심하게 화살을 움켜쥐고 비틀면서 뽑아냈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포티스는 헉, 하고 숨을 들이켜면서 작은 비명을 내는 데에 그쳤다. 뒤늦게 피가 퐁퐁 솟으며 고통이 올라왔다. 시스 황제는 자신이 걸친 정장 튜니카의 보라색 망토 자락을 찢어 포티스의 상처에 감아주었다.
포티스는 그가 너무나 위압적으로 느껴져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는 가자는 말도 없이 포티스의 팔을 붙잡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얼마간 절뚝이며 시스 황제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던 포티스는 그가 자신을 안아 들어 말에 태우려고 하자 버티고 서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전…. 지금, 돌아갈 수…. 없어요….”
“왜?”
“아버지랑…. 미츠를…. 만나야 하고….”
그러자 뜻밖에도 시스 황제는 묘한 말을 꺼냈다.
“너는…. 내가 싫어?”
“…그리고…. 네?”
당황한 포티스가 휙 고개를 들어서 올려보아도, 그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왜 내게서 떠나는 거지?”
“떠, 나는 게 아니라…. 잠시….”
포티스가 니즈의 상황을 살피며 말을 이으려는데, 라임의 디아나로 만든 단단한 창이 니즈의 팔을 꿰뚫었다. 포티스는 흠칫하고 놀라서는 곧 애원하듯이 시스 황제의 손을 붙잡았다. 맞닿은 피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니즈님을 살려주세요!”
“항상 다른 이의 목숨을 부탁하는군. 이번엔 뭘 할 거지?”
포티스가 초조하게 자꾸만 그들을 돌아보자 시스 황제가 큼직한 손으로 포티스의 뺨을 붙잡았다.
“뭐든 한다는 약속도, 증명도 넌 지키지 않았지.”
“……. 잘, 하지 못해서…. 죄송해요.”
그러나 노력까지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포티스는 시스 황제의 지시와 요구를 받아들이려고 했다. 그랬기에 그가 크게 매정한 어조로 말한 것도 아닌데, 마음이 아파서 눈물이 나왔다. 포티스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 속에 차오르는 말들을 조금씩 꺼내고 말았다. 옆에서는 여전히 싸움이 계속되고, 무기와 무기가 부딪히기도 하고, 긴장이 흐르는 가운데 몇 마디의 말이 오고 가기도 했다.
“저는 역시…. 좋아하는 사람하고만…. 하고 싶은 걸요, 도저히, 불가능해요…. 아, 아무하고나 그런 짓을 하는 건….”
시스 황제는 가볍게 한숨을 쉬면서 포티스의 입술을 매만졌다. 처음에는 옆에서 들리는 소음이 사라지고, 그다음에는 파도 소리가, 그리고는 눈앞에 있는 시스 황제만 보였다.
그리고 무언가 말하려는 사이 그의 시선이 포티스를 지나 옆으로 향했다.
“포티스를…. 내버려 둬.”
피투성이가 된 데다 여기저기 생채기가 잔뜩 나고 왼팔에 구멍이 생긴 니즈가 검으로 모래사장을 찔러 겨우 몸을 버티고 서 있었다. 다른 나이츠 오브 디아망의 기사들은 대부분 바닥을 뒹굴었고 파나조차 검을 떨어트린 상태였다. 온갖 무기가 몸을 압박하는 가운데, 니즈는 검에만 의지하지 않았다. 걷어차고, 상대의 무기를 빼앗아 사용하는 등 가능한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하나둘씩 상처가 생겨 피에 젖어갈수록 니즈는 더욱더 끓어올랐다.
“니즈님, 괜찮으세요?”
포티스는 시스에게서 벗어나려고 하면서 니즈를 돌아보려 애썼다. 그 순간 시스 황제는 뭐라고 하기 어려울 만큼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그 감정의 정체를 찬찬히 확인하기 위해 포티스를 놓아버린 순간, 포티스는 곧장 등을 보이며 니즈에게로 절뚝이며 달려갔다.
“…….”
“…저는 아직 싸울 수 있지만.”
라토가 작지만 또렷하게 말하고 황제를 지키듯이 앞에 붙어섰다. 그리고 황제에게만 들리도록 말을 이었다.
“…싸우고 싶지 않아요.”
니즈의 몸을 포티스가 부축하자, 그는 휘청하고는 포티스의 어깨를 붙잡아 밀어냈다.
“난 괜찮아. 물러나 있어, 다른 녀석들도 죽은 건 아니거든.”
말 그대로 그들은 기절을 했거나, 혹은 무기를 잃어 더는 싸울 수 없는 상태일 뿐이었다. 포티스는 그래도 고개를 흔들면서 니즈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괜찮아요, 그보다 니즈님이 많이 다치셨어요….”
어째서 포티스는 니즈를 저렇게 걱정하는 걸까? 알 수 없는 기분에 이번엔 불쾌감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그것들은 결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시스 황제의 이성은 상황에서 물러날 것을 종용했지만, 그의 마음은 차갑게 타올랐다.
“황제 폐하, 우리를 그냥 보내줘. 꼭 돌아갈 테니까.”
“그렇다면 어째서 몰래 도망간 거지? 꼭 야반도주라도 하는 것처럼 사라졌더군.”
그런 말은 덧붙일 필요가 없었을 텐데, 시스는 자신의 상태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깨닫고 즉시 침착해져야겠다고 판단했다.
“안 보내줄 거였잖아~! 다 안다고.”
불필요한 말싸움이었다. 슬슬 동료를 걱정하다 못해 안절부절못하게 된 라토의 어깨가 조용히 떨리면서 소리 없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때 동쪽 숲이 끝났던 부근에서 굉장한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칼과 활로 무장한 군대가 등장했다. 숲에서 달려오느라 대열이 흐트러지긴 했지만, 한번 모습을 나타낸 뒤로는 끝없는 병력이 이어지고 있었고, 푸른 로브를 걸친 엔지니어에 분홍빛 로브를 입은 마술사까지 대동한 상태였다.
“우리를 보내줘, 부탁할게.”
마술사를 데려온 이상, 이제 승리는 시스 황제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마법은 드래곤에게서 온 것으로 매우 강력했다. 가만히 있는 이를 순식간에 미치게 하거나 불태워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힘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른다.
시스 황제는 니즈의 직위를 해제하고, 이대로 포티스를 데려갈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포티스가 마치 니즈와 시스 둘 중에서 니즈를 선택한 것처럼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떠난 순간이 잊혀지지 않았다.
자신만을 좋아하고, 관계를 갖고 싶다고? 그게 사실이라면 포티스는 자신의 곁에 남았어야 한다. 겨우 시스의 마음이 가라앉았다.
“가라.”
시스 황제는 그들에게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자신을 호위하며 대열을 갖추기 시작하는 군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공격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라토가 눈물을 머금은 채 니즈에게 겨누었던 활을 내리면서 급하게 말을 탄 전문 엔지니어에게 달려갔다.
“부상자가 있어요!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안 돼요!”
상황이 정리되었다고 느낀 순간, 니즈는 포티스의 손을 이끌어 말을 태우고는 힘껏 내달렸다. 니즈는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다고 느꼈지만, 포티스가 말 고삐를 잡고 이끌어주었다.
‘황제 폐하….’
하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사실을 알고 싶어 하는 자신을 이해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포티스는 심란한 마음으로 말을 좀 더 빨리 몰았는데, 그 바람에 뒤에서 죽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포포스, 좀 더 천천히….”
“미, 미안해요….”
아무것도 자신들을 가려줄 게 없는 펼쳐진 해변이었기에 포티스는 적어도 둥그런 해협의 뒤편으로 가고자 내달렸던 것이었다. 물론 시스 황제가 자신들을 놓아주는 척 속이고 덮칠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어쩐지…. 화가 나신 것 같아….’
시스 황제가 등을 보이며 가라고 말한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하아…. 모르겠어.’
한숨을 쉰 포티스가 말의 속도를 점차 줄이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니즈는 거의 말에 누워있다시피 했고, 시스 황제의 군대가 둥근 모양으로 파여있는 해협 건너로 보였다.
“니즈님, 여기서 상처를 치료하고 갈게요.”
“응? 뭐? 아니 그냥 가도 괜찮아.”
“그러다 죽어요…!”
포티스가 허둥지둥 말을 세우고, 겨우 챙긴 짐가방에 약이 들어있는 걸 확인하고 안심하면서 니즈를 부축해 모래사장으로 내렸다.
“아야야….”
니즈가 끙끙 앓으면서 겨우 몸을 눕혔다. 포티스는 물주머니를 꺼내 물을 마시게 하고, 상처를 살펴보았다. 왼쪽 팔에는 손가락이 들어갈 만한 구멍이 뚫려있었고, 자세히 보니 검은 옷은 온통 피로 말라붙어있었다. 조심스럽게 너덜너덜한 옷을 들치자 멍과 긁힌 상처가 잔뜩 드러났다. 다행히도 팔과 다리에 날카로운 무기로 베인 것들과 구멍을 제외하면 심각한 상처는 없는 것 같았다. 포티스는 떨리는 손으로 서둘러 약을 꺼냈다.
“상처에 쓰는 약 맞아요?”
“으응, 그거 맞아….”
포티스가 조심스럽게 니즈의 상처에 약을 꼼꼼히 펴 발랐다. 하늘에는 바닷새가 날아다녔고, 포티스는 니즈가 편히 눕도록 자세를 바꿔주면서 해협 건너로 시스 황제의 모습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그 은발은 금방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여기서 쉬어야겠어요.”
니즈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려 하면서 뒤를 응시했다. 둥근 해협 너머로 아직 병력이 남아있었다.
“황제도 아직 있네?”
“…….”
그 말에 포티스의 마음이 흔들리는 걸 니즈는 빠르게 알아챘다.
“황제하고 만나서 심란하구나.”
시스 황제에게는 자신을 싫어하는지, 니즈에게서는 그와 만나서 심란하지 않냐고 질문을 받자 포티스는 당혹스러워졌다.
“갑…. 갑자기 황제 폐하는 왜….”
말은 그렇게 했으면서도 포티스는 시스 황제와 닿았을 때 피부가 달아올랐던 것을 떠올렸다. 꼭 처음 뮤가 되었을 때처럼 몸이 흥분했다. 지금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닌데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흐음, 아무것도 아니야.”
니즈는 빙긋 웃었다. 굳이 대화를 더 이어가서 지금 느끼는 기쁨을 퇴색시키고 싶지 않았다. 포티스가 황제와 자신을 사이에 두고 자신에게 달려 와주었다는 점이 어쩐지 기분 좋게 느껴졌다.
“너, 발목은 괜찮아?”
“아….”
그제서야 포티스는 자신이 아까 활을 맞았다는 걸 떠올렸다. 시스 황제가 쏜 것은 아니지만 그의 기사가 맞추었으니, 그가 한 일이나 다름없었다. 어디든 쏠 수 있는데도 굳이 발목을 쏜 것이, 어찌 보면 짐승을 사냥한 것 같은 인상이 있었다.
“화살이 관통했었는데….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모르겠어요.”
니즈의 상처는 열심히 돌보았으면서 막상 보라색 천으로 묶인 자신의 발목을 살펴보길 두려워하면서 쩔쩔맨 덕분에, 결국 니즈가 끙차, 하고 몸을 일으켰다.
“살…. 살살…. 해주세요.”
포티스가 눈을 질끈 감은 채 발목을 내밀자, 니즈는 어쩐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포티스를 안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장난기가 발동했음에도 니즈는 우선 상처를 살펴보기로 했다.
단단히 묶인 천을 풀어내자, 작고 날카로운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니즈는 무심코 동그란 상처가 어디까지 뚫려있는지 궁금해서 손가락을 넣어보려다가 정신을 차리고 약을 발라주었다. 디 오르의 엔지니어가 개발하는 약들은 우수해서, 아마 상처는 몇 시간만 지나도 완전히 아물 것이다. 보라색 천은 황제를 연상시켰는데, 아마도 그의 정장 튜니카의 망토 조각이 틀림없었다. 상처를 주고 붕대를 감아주는, 병 주고 약을 주는 행위에 대해서 니즈는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독점욕이지.’
비록 실론이 여러 파즈와의 관계를 선호하긴 해도, 그들이 언제나 담백한 것은 아니었다.
니즈는 아무도 보지 못하게 혀를 쏙 내밀어 보이고는 상처 치료가 끝났는데도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포티스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다 됐어.”
“아, 다행….”
그리고 포티스가 눈을 뜨며 고개를 든 순간, 니즈는 포티스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포티스는 멍하니 입안으로 들어오는 혀를 받아들였다가, 뒤늦게 당황하면서 니즈를 밀어내려 했지만, 상대는 실론인지라 힘으로 이길 수는 없었다.
피부가 맞닿고 보니, 니즈의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고 포티스의 심장 소리 역시 그에 맞추어서 점점 빨라졌다.
한참 만에 입술이 떨어지고 나자 포티스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손등으로 입가를 가리면서 니즈를 응시했다.
“니…. 니즈님, 어째서….”
“그냥 해보고 싶어서 했어, 포포스가 귀엽길래.”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는 니즈는 다시 자리에 벌렁 드러누웠다.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 포티스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지만, 상대가 워낙 태평했으므로 곧 조금씩 침착함을 되찾았다.
“식…. 식사, 준비할게요.”
“으응~”
포티스는 아까보다 한결 나아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니즈가 회복되려면 시간은 더 걸릴 테고, 말린 고기만 먹을 수는 없으니까 바다에서 먹을만한 걸 찾아볼 생각이었다.
포티스가 해변을 거닐다가 고운 모래를 파내 안에서 조개를 주웠다. 조개껍데기가 많이 있었으니 아마 조개도 있을 거라고 예상했던 생각이 맞아서 포티스는 기뻐하며 옷 앞부분을 주머니처럼 만들어 조개를 집어넣었다. 다친 발목이 소금물에 닿아 따끔거렸지만,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뭐든 좀 더…. 영양이 있는 걸 섭취 해야 해.’
물속을 살펴보았더니 일전에 니즈가 잡아 왔던 투명한 물고기가 여러 마리 스치는 게 보였다. 포티스도 한 마리 잡아보려고 손을 물에 넣어보았지만, 스윽 지나가기만 하도 잘 잡히지 않았다.
“잘 안되네….”
그러면서 점점 깊은 물로 들어가면서, 포티스는 물속에 무엇이 있는지 보려고 잠수했다. 깜박이며 물에서 눈을 뜨자 바로 앞에 커다란 청록색 눈동자가 나타났다. 처음엔 눈만 있다고 생각했는데, 곧 해초가 붙어있는 검고 긴 머리카락, 가느다랗고 창백한 팔다리와 커다란 물고기 모양의 하반신도 보였다.
포티스는 뻐끔거리면서 인어다! 라고 말하려다가 물을 들이마셨다. 인어는 입을 벌리면서 웃는 듯하더니, 이내 포티스가 조심스럽게 옷으로 감싸고 있는 걸 보고는 손으로 둥근 모양을 만들어 보이며 따라오라 손짓했다.
‘아…. 따라가도 괜찮을까?’
인어는 바닷가에서 언제든 나타날 수 있었고, 엄밀히 따지자면 마물은 아니었다. 포티스는 조금 망설이다가 그를 따라 안쪽으로 헤엄쳐 나아갔다.
열대의 바닷속은 색색의 물고기와 산호가 가득했고, 연분홍색 해파리가 떠다녔다. 인어는 포티스를 더 깊은 바다로 안내하려는 것 같았지만, 포티스가 발이 닿는 바닥을 가리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납득했다. 물속이라 대화는 통하지 않지만, 의사소통은 되는 것 같았다. 인어가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망설이더니 위를 가리키곤 자신은 더 깊은 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응? 무슨 의미지?’
화려한 빛깔의 물고기 떼가 둘 사이를 가르고 지나갔다. 포티스는 숨을 쉬기 위해 우선 물 위로 올라가기로 했다.
“후아.”
커다란 조개가 있는 곳을 알려준다는 뜻이 아니었는지 고민하면서 동동 떠 있다가, 포티스는 결국 다시 잠수해서 무성하게 자란 해초를 채취했다. 제대로 조리하는 게 아니면 썩 맛이 좋지는 않겠지만, 조개와 함께 구우면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두어 번 물속을 오고 가는 사이, 포티스는 슬슬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도 인어는 나타나지 않았다. 원래 장난스러운 생물이라, 포티스가 빠져들지 않자 그대로 흥이 식어 떠나버린 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무언가 포티스의 다리를 밑에서 확 끌어당겼다. 깜짝 놀란 포티스는 물을 약간 삼켰지만 금방 숨을 참고 바닥을 디딜 수 있었다. 물거품이 가라앉고 보니 인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머리만 한 커다란 조개를 내밀었다. 포티스는 당황했지만, 살짝 웃으면서 조개를 받았다.
‘고마워요.’
포티스가 입 모양으로 빠끔빠끔 말하자, 인어 역시 포티스를 흉내 냈다. 하지만 언어가 다른 탓에 포티스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 바람에 속상해진 것인지 인어는 갑자기 휙 등을 보이더니 그대로 파란 물살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사라졌다.
포티스는 얼른 물 위로 올라와 해변을 향해 헤엄쳐 나왔다. 커다란 조개 덕분에 얕은 해변에서 주운 조개들은 모두 놓아주었다. 어차피 전부 먹을 수도 없었다. 아직 햇볕이 따뜻해서 물이 차갑지 않는다는 게 다행이었다.
포티스가 조심스레 살펴보니 황제의 병력 역시 바닷가에 자리를 잡아 야영 준비를 끝낸 것 같았다. 대규모의 병력이 진을 치고 있는 모습을 보자 약간 두려워진 포티스는 서둘러 헤엄쳤다.
한편 시스 황제의 의아한 결정 탓에 황제의 군대는 물론 엔지니어와 마술사도 약간 놀란 상태였다.
“부상자를 먼저 돌본 뒤에 떠나겠다.”
그러나 누가 부상을 당했는지를 알고 나서는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나이츠 오브 디아망의 기사들은 황제가 가장 아끼는 인력이었고, 그들이 엉망이 된 채로 황궁으로 귀환하는 것도 모양새가 나빴던 것이다. 비록 나이츠 오브 디아망의 기사들끼리 싸운 것이었어도 말이다. 하지만 이만한 병력을 가지고 왔는데도, 도망친 뮤와 나이츠 오브 디아망의 기사를 놓아준 것은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화젯거리게 될 것이었다. 요즘 황궁은 황제의 소문으로 술렁거리는 상태였다.
“그럼 바로 치료를 하겠습니다.”
디 오르의 치유술은 그다지 발달하지 않았다. 그들의 기술은 지혈을 하는 데에만 쓰이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에서 겪는 엄청나게 큰 상처가 아닌 이상 피는 곧 멎기 마련이다. 대신 약초와 일반적인 의술의 개발이 뛰어나서 전문 엔지니어가 뼈를 맞추고, 상처를 꿰매는 등의 일을 도맡아 처리한 후에는 항상 약을 사용했다. 엔지니어들은 바로 도구를 챙겨 다친 기사들을 수습했다.
파나는 막사에 편히 누워 아까 일어난 일을 떠올렸다. 니즈의 몸은 그 자체가 흉기라고 할 정도였는데, 익히 알고 있는 니즈의 약점인 왼쪽 시야를 노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꽉 다물어!’라는 외침이 들리자마자 바로 강한 주먹이 날아왔다. 파나는 장검을 사용했기에, 갑작스레 장검의 빈틈으로 뛰어들어 얼굴을 후려치는 공격에는 대비할 수가 없었다.
‘하여간 굉장한 분이라니까.’
파나가 막사 옆자리로 들어온 세아와 몇 가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시스 황제는 자신의 곁에서 양산을 받쳐주는 시종을 대동하고 둥글게 파인 해협의 앞부분을 응시했다. 말 두 마리가 묶여진 부근에 포티스와 니즈가 있을 것이다. 그는 곰곰이 자신이 왜 포티스에게 떠나라고 했는지 생각해보았지만, 답이 금방 나오지는 않았다.
황제가 되기로 결심한 날부터 매일 원하는 것을 손에 넣어오며 결국 왕좌까지 차지한 그로서는, 친구를 사귈 시간이나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로 인해 벌어지는 질투라는 마음도 알 틈이 없었다.
하지만 니즈는 그가 가장 아끼는 기사였고, 포티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둘이 동시에 자신을 배신하고 떠났으니, 시스 황제가 갖가지 감정을 느끼는 것은 살아있는 생물로서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끓어올랐던 감정은 이제 밑바닥에 가라앉았다. 그래서 그는 포티스처럼 보이는 형체가 바닷가로 가까이 다가가 일정하게 허리를 숙이며 무언가 줍는 것을 보면서도 별다른 동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렇게 가까이 있으니까.’
포티스는 자신이 원한다면 언제든 다시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만약 포티스와 니즈가 그들이 말한 것과는 달리 타국으로 떠나 작은 마을에 안착해서 살아간다고 해도 시스 황제는 그들을 찾아낼 자신이 있었다. 그로서는 포티스가 죽더라도 쉽게 놓을 생각이 없었다.
포티스가 없었다면 자신 역시 황제가 되지 않고, 108 황족 가문 중의 하나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포티스와 만난 그날부터 달라졌고, 그 뒤로 쭈욱 그대로였다.
포티스가 물을 뚝뚝 흘리면서 뭍으로 올라왔다. 어쩐지 몸이 젖은 게 개운하고 기분이 좋았다. 포티스는 아직 다 낫지 않은 발을 절뚝이면서 니즈가 누워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니즈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금방 준비해드린다고 했는데, 늦어서 죄송해요….”
그러나 니즈는 쿨쿨 소리를 낼 뿐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음식을 다 만들고 나면 그를 깨우기로 하고, 포티스는 발열석에 불을 붙였다. 발열석의 편리한 점은 아무것도 태울 게 없더라도 불이 유지된다는 점이었다.
포티스는 서둘러서 인어에게 받은 커다란 조개를 불 위에 얹었다. 조금 후에 다물려있던 조개의 껍데기가 탁 열리면서 조개의 즙이 지글지글 끓기 시작했다. 포티스는 고민하면서 그 위에 파나에게 받은 단검으로 해초를 잘게 썰어 얹고, 짐을 뒤적여 향신료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열심히 뿌리고는 조갯살을 뒤적였다.
‘맛이 있을지 모르겠어….’
그런데, 묘하게도 분명 배가 그렇게 고프지 않았는데, 커다란 조개가 구워지는 냄새를 맡자 포티스는 갑자기 강하게 입맛이 당겨 침이 고일 지경이 되었다. 아직 익지도 않았는데 얼른 조갯살을 깨물어 보고 싶었다.
‘갑자기, 왜 이러지….’
그것이 배 속에 있는 아이의 영향이라는 것도 모르고, 포티스는 침을 꼴깍꼴깍 삼키면서 조갯살이 금방 익도록 칼집을 낸 다음 그사이에도 해초와 향신료를 밀어 넣었다. 소금기가 묻은 옷을 말리기 위해 상의를 조심스럽게 벗는데, 니즈가 잠에 취한 얼굴로 부스스 눈가를 문질렀다.
“이거 무슨 냄새야?”
“조…. 조개를 구웠어요.”
“뭐? 조개구나….”
포티스는 젖은 옷을 어떻게 하지, 고민하다가 도로 걸쳤다. 아까 그가 자신에게 키스를 했던 게 신경 쓰여서 어쩐지 벗고 있을 수가 없었다. 물에 들어가기 전이 미리 벗어뒀으면 좋았을 텐데 실수였다. 니즈가 하품을 하며 몸을 일으키고는 포티스가 가져온 조개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크다! 맛있겠다!”
“바다에서…. 인어가 줬어요.”
“먹으면 기운이 나겠는데?”
그러면서 니즈는 포티스가 들고 있던 단검을 가져가 조갯살을 좀 더 자잘하게 잘랐다. 조개구이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기침이 나왔지만, 그는 신난 얼굴로 열심히 조개를 뒤적거려 알맞게 익혔다.
“자, 먼저 먹어.”
포티스는 조심스레 포크로 조갯살을 꾹 눌렀다. 한입 넣자마자 간이 잘 밴 조갯살이 쫄깃하게 씹혔다.
“요리…. 성공했어요!”
포티스가 뺨을 빨갛게 물들이면서 기뻐하자, 니즈 역시 조개를 먹어보았다. 순간 해감되지 않은 조개에서 모래가 씹혔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고 포티스가 먹을 부위와 자신이 먹을 부위를 나눠놓았다.
“맛있다~ 포티스는 이 부분을 먹어.”
니즈의 것보다 적은 양이었지만, 포티스는 그가 환자인 데다 자신을 지켜주고 있으므로 더 먹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니즈가 모래가 씹혀서 그렇게 나눠준 거라고는, 요리에 서툰 포티스는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다.
‘모래야 어차피 나올 테니까 상관없지.’
하지만 뭐든 솔직히 말해버리곤 하는 니즈가, 포티스가 시무룩해질 것을 먼저 걱정한 건 상당히 특별한 일이었다. 기껏 자신을 위해 조개를 가져와 주었는데, 낙심하는 모습 같은 건 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열심히 모래가 씹히는 조개구이를 먹었다.
그렇게 오후 나절을 보내고, 바닷가에 석양이 내렸다. 그 사이 니즈는 많이 회복되었지만, 오늘 안에 바닷가를 떠나지 못할 것 같았다.
포티스가 돌아보면 시스 황제 역시 바닷가에서 밤을 보내는 것 같았다. 포티스는 그가 자신을 놓아주어서 다행이라고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딘가 마음이 안절부절못하게 되어서 당황스러웠다. 당장이라도 그에게 달려가고 싶기도 했다.
그런 마음에 부응하듯이, 주홍빛으로 물든 바다 저편에서 인어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포티스는 어쩐지 쓸쓸해져서 무릎을 팔로 끌어안고 가만히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날 믿고, 좋아해 주시면 좋겠어….’
시스 황제의 마음은 언제나 수수께끼였으므로 어쩌면 다시는 포티스를 보려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포티스 역시 그를 다시 볼 자신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가 또다시 실론과 억지로 관계를 시킨다면…. 그럼에도 그가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탓에 마음이 아팠다. 포티스는 눈을 꼭 감고 무릎을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면서 자신을 달랬다.
‘황제 폐하는 괜찮을 거야….’
그리고 뒤를 이은 생각은 조그맣게 입 밖으로 중얼거리고 말았다.
“나도 괜찮을 거야….”
멀리 떨어진다 해도 그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가 자신에게 준 목표가 버거울 뿐이었던 것이다. 포티스는 심경이 복잡해 감정이 이랬다저랬다 흔들려서 니즈가 자신을 아까부터 빤히 보고 있는 것도 몰랐다. 니즈는 그가 시스 황제를 생각하고 있다고 짐작하고는 몸을 옆으로 돌려 누워버렸다. 무심코 불쑥 나올 뻔한 좋아한다는 말을 삼키면서, 그 역시도 포티스를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 심란하네.’
누군가를 특별히 좋다고 여긴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물론 좋아한다는 감정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언제나 동료애를 넘은 적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포티스는 달랐다.
‘귀엽고, 소심하고, 잘 우는 점도 마음에 들어.’
거의 시스 황제와 비슷한 부분들을 니즈 역시 좋아하고 있었다. 다만 둘의 사랑의 방향은 잠시 스칠 뿐 한없이 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다.
‘네가 행복하면 좋겠어, 포포스.’
같은 시간, 시스 황제 역시 인어의 노랫소리를 듣고 있었다. 인어는 무해하고, 별다른 힘이 없었지만, 노래만은 아름답고, 사람의 감정을 움직이게 했다. 그는 황제를 위해 준비된 커다란 막사에 혼자 앉아 포티스와 닿았을 때의 감촉을 떠올리고 있었다. 가볍게 현기증이 나고 몸이 달아올랐다. 평소와는 다른 사뭇 강렬한 기분이었다.
시스 황제는 반지를 낀 손을 가볍게 쥐었다. 그가 살아있고, 자신이 살아있는 한 둘은 결코 떨어질 수 없었다.
다음 날 새벽의 동이 트기도 전에, 니즈는 포티스를 깨웠다. 둘은 밤새 마물 경계석을 놓아둔 채 마음껏 자버렸는데, 마물이 나타나도 시스 황제의 군대가 어떻게든 해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근데 실제로 그랬는지,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푹 잘 수 있었다.
“으음….”
포티스가 눈을 비비면서 일어나더니, 니즈가 이미 떠날 채비를 마친 걸 알고는 정신을 차리려고 자신의 뺨을 살짝 때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가요…!”
“응, 배는 아직 안 고프지? 참을 수 있어?”
사실 어쩐지 어제 조개와 함께 마른고기를 평소 먹는 것 이상으로 먹었는데도 속이 빈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포티스는 괜찮다고 말했다.
“그래, 출발하자.”
왼쪽 팔에 난 구멍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니즈는 빨리 황제의 시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가 마음을 바꿀까 봐 걱정되었다. 포티스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니즈를 따라 해변을 쭉 달렸다. 물론 황제의 군대는 두 사람이 떠나는 걸 알고 있었고, 황제의 명령이 있었기에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