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아이를 가져야 합니다 3권
17
그렇게 이틀을 바닷가를 내달리던 둘은 삼 일째 되던 날에 북쪽의 설원에 도착했다. 바닷가가 끝나기도 전부터 멀리서 눈이 쌓인 지대가 보이더니 어느 기점을 지나자 바닥과 사방에 눈과 찬바람이 가득했다. 포티스는 신기해하면서 지나온 경계를 살펴보려고 등을 돌렸다.
“마법으로 이어진 거야.”
니즈가 추운 날씨용 망토를 건네주면서 설명해주었다. 원래는 동쪽의 숲에서 바로 북쪽의 숲으로 이어져야 지리상 구조가 맞지만, 그 경계는 마법으로 들어갈 수 없게 막혀있고 대신 바닷가로 이어져 있다고 한다. 서쪽의 사막으로 건너갈 때도 마찬가지로 평범한 길로는 갈 수 없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해야 도달할 수 있었다.
“유배지여서 그런가 봐, 나도 잘은 몰라.”
“유배지….”
포티스는 망토로 머리와 몸을 감싸고 장갑까지 낀 채 말 고삐를 단단히 쥐었다. 혹시라도 몸이 너무 차가워질까 봐 걱정한 니즈가 발열석을 포티스의 옷 속에 넣어주었다.
“니즈님은요?”
“나는 괜찮아, 여기에 오니까 온몸에서 기운이 펄펄 나는걸.”
니즈가 포티스의 망토의 여밈을 채워주면서 들뜬 듯이 말했다.
“하지만 추운데….”
“난 추위가 좋아, 설원이 좋아~!”
그러면서 갑자기 검을 뽑아 들어 허공을 푹 찔렀다. 새빨간 피가 후두둑 떨어지면서 투명한 모습으로 가까이 접근했던 끈끈한 액체 같은 마물이 옆으로 툭 쓰러졌다. 절단면이 환하게 빛나는 눈송이로 변해 허공으로 떠올랐다.
“으읏….”
놀란 포티스가 몸을 움츠리자 니즈는 눈밭으로 힘껏 돌진하며 팔을 휘둘렀다.
“눈이 좋아!!!”
그 뒤로는 엄청난 강행이 이어졌다. 포티스는 눈보라에 맞서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게 고작이었는데, 니즈는 말을 탔는데도 어떻게 정확하게 마물이 접근하는 걸 알아차리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포티스가 물어보니 니즈는 혀를 내밀어 낼름 눈을 받아먹고는 이렇게 말했다.
“기사의 ‘감’이지! ‘감!’”
너무 아리송한 말이라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아마 파나라면 숙련된 기사들은 생물이 가진 적의나 살의를 느낄 수 있다고 설명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니즈였으므로 포티스는 알쏭달쏭한 채로 단순히 신기하다고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그는 정말로 들떠서, 이제는 포티스보다 한참 앞에서 마물을 없애고 있었다. 커다란 얼음 골렘도 니즈의 검에 맞으면 눈송이가 되어 사라졌고, 뾰족뾰족한 얼음 가시를 온몸에서 내뿜은 무서운 형체의 마물도 니즈 앞에서는 맥없이 쓰러질 뿐이었다.
“굉장해…. 니즈님, 조금만 천천히 가주세요!”
“알았어~!”
눈보라가 점점 강해졌고, 말도 걷기 힘들어했다. 하지만 니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에 맞서면서 말을 채근했고, 덕분에 그의 말 역시 덩달아 흥분해서 날뛰고 있었다.
“니즈님…!”
“얼른 따라와!”
그런 대화가 서너 번 반복되었을 때, 포티스는 문득 니즈의 특징적인 주홍빛 머리카락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어느 쪽이 나아가던 길인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바람이 강해졌다. 포티스는 당황해서 말을 우뚝 세운 채로 있는 힘껏 니즈를 불렀다.
“니즈님!”
하지만 대답 대신 바람이 휘오오, 하고 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포티스는 절망적으로 갈팡질팡하면서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선택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어딘가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왼쪽에 동굴이 있어. 쭉 달려.”
“니즈님? 니즈님이에요?”
포티스는 불안해하면서도 더는 고립되었다간 얼어 죽고 말 거라고 생각해, 말을 자신의 왼쪽으로 몰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아마도 환청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걱정이 슬슬 들 무렵,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것 같은 커다란 구멍이 뚫린 동굴이 보였다. 포티스는 주저하지 않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포티스는 말에서 내려 찬바람이 덜 들이치는 곳까지 앞으로 나아갔다.
‘마물이 나타나면 어쩌지….’
니즈가 없는 이상, 포티스는 마물에게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언제든 꺼내 들 수 있도록 단검이 있는 위치를 확인하면서 포티스는 결심했다. 마물이라도 절대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시스 황제를 두고 떠나오기까지 했는데, 여기서 여행을 끝낼 순 없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 나는 돌아갈 거야…. 아마도….’
하지만 그가 예전과 변함이 없다면, 그럴 수 없었다. 그의 있는 그대로를 사랑할 방법은 떨어지는 것뿐이었다. 멀리서라면 상처를 주거나 받지 않고 사랑할 수 있었다.
그때 동굴 안쪽에서 파란 불빛이 아른거리더니 창백한 형체가 포티스를 향해 스르륵 다가왔다. 포티스는 깜짝 놀라면서 말 고삐를 쥔 채 뒤로 물러났다.
“누…. 누구예요?”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되네. 여기로 인도한 것은 나니까.”
순간 마물이라고 생각해서 움츠러드는데, 자세히 보니 마물보다는 오히려 반투명한 사람에 가까웠다.
“…유령이에요?”
“그래, 망령인 셈이지.”
상대는 비록 투명하게 보이긴 했지만, 고풍스러운 옷을 입고 있는 데다 머리에 얼음으로 만든 관도 쓰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상당히 잘생긴 얼굴에 키도 크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포티스는 유령은 질색이라 울먹이는 얼굴이 되면서 뒷걸음질 쳤다. 자신을 망령이라 소개한 그는 포티스가 금방이라도 동굴 밖으로 나갈 것처럼 보이자, 아쉬워하는 기색을 보이며 멈추어 섰다.
“너무 무서워하지 말게. 나는 아무런 힘도 없으니.”
“그, 그치만 유령이잖아요….”
“그렇다면 이런 모습은 어떨까?”
상대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모습이 일렁이면서 발끝부터 의복, 머리까지 어딘가 익숙한 형태로 바뀌어나갔다. 보랏빛 망토가 달린 정장 튜니카, 작은 빛에도 반응하는 화사한 은발이며, 훤칠한 키까지…. 틀림없는 시스 황제의 모습이었다.
“황제 폐하….”
분명 그가 이런 곳에 갑자기 나타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포티스는 홀린 듯이 말고삐를 쥔 손을 늘어트리곤 상대가 자신에게 다가오도록 내버려 두었다. 어쩐지 공기가 무겁게 느껴졌고, 숨쉬기가 힘들었다.
“내 이름은 벨무트, 원하는 대로 불러도 좋아.”
“그치만, 폐하…….”
벨무트는 시스 황제의 모습을 한 상태에서도 여전히 반투명했지만, 아까보다는 뺨에 생기가 있었고, 손에 잡힐 듯한 존재감도 느껴졌다. 그는 흥미롭게 자신의 모습을 한번 살펴보더니 포티스의 얼굴에 손을 갖다 댔다. 포티스는 멍한 눈을 반쯤 감고는 살짝 몸을 떨었다. 눈앞에 있는 시스 황제에게서 시선을 떼기가 어려웠고, 방금 전의 상황과 현재의 공간도 잊고 말았다.
“자, 이리 와. 네가 원하는 걸 해줄 테니까.”
그러자 포티스는 벨무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 동굴 안쪽의 딱딱한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웠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설원의 마물인 눈보라의 망령은 생물이 호흡하는 공기를 조종해서 뇌를 마비시키므로 포티스는 머릿속이 흐릿해진 상태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능력을 상실했다. 그런 상황에서 시스 황제의 모습을 한 벨무트를 이상하다고 여길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황제 폐하….”
무언가 말하려는 포티스의 입에 벨무트의 촉수의 끝 같은 푸른색 혀가 들어가고, 포티스는 멍한 상태로 받아들였다. 심장이 두근거렸고 체온이 올라갔다. 벨무트는 손쉽게 포티스의 의식을 지배하고, 그의 옷을 벗겼다. 망토와 어두운색의 의복을 들추자 약간 부푼 배가 드러났다. 벨무트는 입맛을 다시면서 그의 바지를 끌어 내렸다.
아이를 가진 뮤를 먹는 것은 어쩌면 처음인 것 같았다. 벨무트는 그의 의식이 돌아오지 않도록 정신 지배를 놓지 않으면서 포티스의 다리를 잡아 벌렸다. 깨끗한 흰 피부가 추위 탓에 군데군데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입구 역시 마찬가지였다.
벨무트의 차가운 손이 포티스의 피부를 어루만지고, 배에 닿자 포티스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섹…. 섹스, 하고 싶지 않아요….”
분명 정신이 마비되었을 텐데도, 포티스가 작게나마 자신의 의사를 표현해서 벨무트는 내심 깜짝 놀랐다. 정신 지배를 받는 가운데 가장 사랑하는 상대의 모습으로 다가가는데도 거절을 하다니 뜻밖의 일이었다.
“날 좋아하잖아?”
벨무트는 상냥하게 포티스를 회유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자신의 말을 들은 포티스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치만…….”
“그럼 안될 것 없잖아.”
생물을 직접 만질 수 없어 사냥조차 하지 못하는 눈보라의 망령에게 먹히고 마는 이유는 이 마물이 모습은 물론 행동까지 능숙하게 구현해낸다는 점에 있었다. 거의 실제 시스 황제와 비슷한 언행에 포티스는 쉽게 동요했다.
“…좋아했는데.”
“알고 있어.”
벨무트의 모습이 점차 선명해졌다. 먹잇감 덕분에 실체를 가질 수 있는 벨무트는 섹스를 하고 먹이를 먹어 치우는 순간에만 실존할 수 있었다. 그는 살며시 웃는 얼굴로 포티스의 허벅지가 배에 닿도록 잡아 눌렀다. 그리고 발기된 성기를 꺼내 좁은 입구에 갖다 대고 포티스의 허리를 붙잡아 자신 쪽으로 끌어오면서 성기가 살살 돌려지도록 밀어 넣었다.
포티스는 두려운 듯이 눈을 꼬옥 감고 있었다. 성기는 뻑뻑하게 들어갔고, 좀처럼 입구의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벨무트가 성기를 넣은 둘레를 손으로 누르면서 풀어주자 그제야 약간 느슨해지면서 성기를 받아들이는 듯싶더니, 다시 도중에 긴장되면서 꽉 조여졌다.
“괜찮아, 힘을 풀어.”
“…….”
포티스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면서 가슴께가 크게 오르내렸다. 벨무트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성기를 뿌리까지 삽입했다. 안쪽은 부드럽고 따뜻해서 벨무트의 기분이 고조 되었다.
‘정말 맛있겠어.’
어째서 뮤가 혼자서 눈이 쏟아지는 설원을 헤매고 있었는지, 벨무트는 알 바 아니었다. 그저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허기와 욕구를 채우는 게 중요했다. 벨무트가 포티스의 손목을 잡아 누른 채 허리를 움직이자 그 반동으로 포티스의 몸이 들썩였다.
“아, 아파….”
체액이 조금도 나오지 않아, 성기가 뻑뻑하게 마찰되었다. 하지만 벨무트는 상관하지 않고 성기를 드나드는 일에 집중했다. 살아있는 몸에 닿을 수 있다는 것이 그에게는 무엇보다 기쁜 일이었다.
“윽, 아파요…!”
“참아.”
포티스의 몸이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욱여넣어 박아대는 탓에, 포티스는 엉덩이를 한껏 들고 몸이 접혀진 채로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구 들썩여졌다. 거칠게 넣은 성기를 문 입구가 발갛게 부풀었고, 억지로 짜내진 체액이 몸속 깊은 곳에서 조금씩 샘솟았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이상하게도 포티스는 조금도 쾌감을 느끼지 못했다.
“윽…. 싫, 싫다고 했는데….”
포티스가 몸을 꿈틀거리자 벨무트는 자신이 완전히 제압했다고 생각했는지, 포티스의 손을 놓아버렸다. 포티스는 지속되는 아픔 속에서 벨무트를 올려다보고는 그가 약간 반투명하다고 생각했다. 그 사실에 집중하자 어쩐지 머리가 지독하게 아프면서 두통이 일었고, 숨이 가빠져서 금방 다른 생각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다시금 벨무트의 머리카락을 보고 있자 같은 생각이 떠올랐고 포티스는 단검이 들어 있던 위치를 떠올렸다.
‘어쩌면…. 어쩌면…. 마물일지도 몰라….’
말이 추위를 느낀 탓에 희미하게 울음소리를 냈다. 그러자 포티스는 여기가 설원이라는 사실을 떠올렸고 불편했던 호흡이 해소되면서 순식간의 벨무트의 모습이 다시 처음에 보았던 유령으로 바뀌었다. 벨무트가 사용한 정신 지배가 풀린 것이다. 포티스는 온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꺼내든 단검으로 벨무트의 어깨를 찔렀다. 그러자 벨무트의 어깨가 뚫리면서 흐트러지더니 상처를 감싸며 뒤로 물러났다.
“어떻게 풀려난 거지?!”
포티스는 벌떡 일어나 즉시 바지를 올리고 동굴 입구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말 고삐를 움켜쥐고 바로 말에 올라탔다.
벨무트의 고통에 찬 신음이 안쪽에서 들려와서 포티스는 두려움에 떨며 말을 몰았다. 그가 금방이라도 포티스의 목덜미를 잡아챌 것 같았다.
황급히 말을 몰아 밖으로 나오다가 포티스는 무언가와 부딪힐뻔했다.
“포포스! 한참 찾아다녔잖아? 왜 안 따라왔어?”
온몸이 눈에 덮인 니즈였다. 그는 활짝 웃으면서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포티스는 당황해서 입을 벌렸다가 무작정 니즈의 팔을 잡아끌었다.
“안, 안에….”
“마물이 있어?”
그리고는 호기롭게 말에서 훌쩍 바닥으로 내딛더니 동굴로 뛰어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니즈의 목소리가 바깥으로 들렸다.
“터져라!”
포티스는 그 마물이 시스 황제의 모습으로 변했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귀를 막고 있었다. 작게 벨무트의 비명이 들린 듯하고, 곧 니즈가 마실이라도 다녀오는 것처럼 편안하게 밖으로 나왔다.
“오래 묵은 눈보라의 망령이더라고.”
“…….”
포티스가 잠자코 침울하게 시선을 떨어트리자 니즈가 말에 올라 포티스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설마 당했어? 포포스 넌 정말 약하다니까.”
니즈의 태평한 어조에 포티스는 두려움이 사라지고 불쑥 어떤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너, 너무해요…!”
“응?”
포티스가 니즈의 옷자락을 꽉 붙잡으면서 약간은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두고 가지 마세요.”
그러자 니즈는 밝게 웃었다. 포티스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 우선 기뻤고, 언제나 소심한 듯한 그가 무언가 요구했다는 것도 특별한 기분이 들었다.
“응! 그럼 몸에 줄이라도 묶고 갈까?”
“…그러지는 않으셔도 되지만요….”
포티스가 한숨을 쉬며 살짝 물러나자 니즈는 더는 다가가지 않았지만, 포티스에게 입을 맞추고 싶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갈게, 따라와. 저쪽에 쉴만한 곳이 있어.”
“그럴게요, 고마워요.”
니즈의 등을 바싹 따라붙으며 앞을 향해 나아가면, 군데군데 마물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흔적과 핏자국들이 떨어져 있었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도 니즈는 오히려 기운이 펄펄 나는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곳은 작은 오두막이었다. 오두막 근처에는 커다란 나무가 세 그루 있었는데, 모두 눈의 무게를 간신히 이겨내고 있는 듯했다. 니즈가 앞장서서 오두막의 문을 열자 퀴퀴하게 묵은 냄새가 올라왔지만, 그래도 무너질 것 같지는 않았다.
안으로 들어서자 오두막 가운데에 아직 피가 번들거리는 커다란 고깃덩어리가 있었다. 포티스가 놀라면서 단검을 꼬옥 쥐자 니즈가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이거, 오늘 너랑 네 식사야.”
“…잡아 오신 거예요?”
“물론이지.”
오두막은 유배지로 가는 길목에 지어진 것인지 마차를 세워둘 만한 공간도 있었다. 그래서 니즈는 그곳에 두 필의 말을 묶었고 포티스는 얌전히 오두막에 앉아서 몸을 쉬고 있었다.
발열석을 이용해 오두막 안에 있는 화로에 불을 붙이고, 니즈는 커다란 고깃덩어리 앞에 털썩 앉아 손질을 하기 시작했다. 털과 가죽을 벗겨내 살점만을 발라내는 걸 보면서 포티스는 그것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무슨 고기예요?”
“응? 마물이야.”
“네?”
포티스가 당황하면서 살짝 물러나자 니즈가 피투성이가 된 손을 들어 보였다.
“이 지역의 특징인데, 마물도 제법 맛있어.”
“니즈님은…. 여러 가지를 많이 알고 계신 것 같아요.”
맛있다는 말에 아까 자신을 덮쳤던 벨무트가 떠올라 포티스가 어깨를 살짝 떨면서 화제를 바꾸었다.
“뭐 그냥 평범하지.”
니즈는 특별히 쑥스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검으로 고기를 스윽 스윽 잘랐다. 장검을 이용하는 게 위험해 보여서 포티스가 단검을 건넸다.
“아, 배고프다~”
니즈가 피에 젖은 손을 눈덩이에 문질러 닦고 와서는 발열석 위에 고기가 끼워진 꼬치를 올리고 굽기 시작했다. 이제 평범한 음식 재료로밖에 보이지 않아서, 포티스 역시 짐에서 향신료를 꺼내 고기 위에 살살 뿌렸다.
“…저 못 먹을지도 몰라요.”
“맛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사실 맛이 문제는 아니었지만, 포티스는 그냥 수긍했다. 니즈에게 어째서 마물을 먹는 게 불편한지 납득 시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어떤 마물인지 알 수 없는 고기구이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식감이 이상할까 봐 조심조심 베어 물었는데도, 고기가 부드럽고 육즙이 많아 순식간에 입안에 침이 고였다.
식사를 마친 후, 둘은 말없이 발열석 근처에 모여 앉았다. 오두막에 창은 없었지만, 약간 부서진 문틈으로 온통 싸늘한 흰빛이었던 밖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차라도 마시려고 물주머니와 컵을 꺼내는데, 발열석을 뒤적이던 니즈가 문득 이렇게 물었다.
“포티스는…. 앞으로 어쩔 셈이야?”
내내 고민했지만 좀처럼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이어서 포티스는 가만히 발열석이 빨갛게 점멸하는 모양을 응시했다.
“글쎄요…. 아이도 있고,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어디든 좋으니까, 나랑 멀리 가서 살지 않을래?”
“…네?”
너무나 명백한 의미를 띈 말이었기에 약간 둔한 부분이 있는 포티스로서도 도저히 모를 수가 없었다. 니즈의 말은 마치 고백처럼 들렸다. 니즈가 포티스 쪽을 응시했다. 안광이 없는 푸른색 눈은 진지했다.
“나는 포티스가 받아들인 아이라면, 내가 아버지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해.”
“…그렇게 말해주셔서, 감사드려요….”
하지만 그것이 수락이 아니라는 것을 모를 만큼 니즈가 어리석지는 않았다. 포티스는 가만히 고개를 떨구고 있었는데, 어두운 빛깔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에 가려진 뺨이 약간 붉었다.
“그래~ 천천히 생각해봐, 응? 곧 샤토드네쥬에 도착해.”
“……. 고마워요.”
아버지와 미츠의 생사를 확인하기도 전에 파나에게 황궁을 떠나는 것도 방법의 하나라고 들은 것도, 니즈가 떠나자고 말한 것도 그렇게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지만, 약간 혼란스럽긴 했다. 돌아간다 해도 정말로 이대로 시간이 쭈욱 흐른다면 자신은 아이를 낳게 될 텐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또 다른 이의 아이를 받아들인 자신을 시스 황제가 어떻게 여길지도 알 수 없다는 점이 포티스의 마음을 괴롭게 했다.
그래서 포티스는 다시 화제를 살짝 바꾸기로 했다. 니즈는 마물 경계석을 세워두고는 눈을 깜박이며 포티스의 질문에 답을 해주었다.
“샤토드네쥬? 이름대로 꽁꽁 얼어붙은 성이야. 근처에 보이는 거라곤 전부 설원뿐이니 상당히 지루할지도 모르지, 그곳에서 지내는 건.”
“식량은 어디서 해결할까요?”
“마물을 먹어도 되지만, 잡기 힘들다면야…. 열매 종류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겠지.”
포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원이라 수렵도 불가능하지 않을까 했는데, 다행히 눈이 내린 땅에서도 자라는 식물이 있는 모양이었다.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 동안 포티스의 몸에 긴장이 풀리면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러자 니즈가 옆으로 가까이 다가가 포티스의 몸을 받쳐주었다. 포티스는 니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편안한 숨을 내쉬었다.
“……. 네가 정말 좋아, 포티스.”
어쩌면 처음 봤던 순간부터 포티스가 좋았을지도 모른다고, 니즈는 생각했다. 다정한데다 소심하고, 한편으로는 곧은 부분이 사랑스러웠다. 만약에 그가 시스 황제가 아닌 자신을 봐준다면, 자신의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포티스를 곁에서 지키고 싶었다.
‘그치만 포티스는, 황제를 좋아해….’
물론 자신도 시스 황제를 좋아했다. 시스 황제에 대한 호감이 없었다면 니즈는 나이츠 오브 디아망의 리더 자리에 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니즈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면서 웃었다. 좋아하는 둘이 행복하길 바라면서도 포티스를 원한다니, 이상한 감정이었다. 또 그 과정에서 시스 황제가 변함없이 자신을 그대로 대해주기를 바랐지만, 니즈는 그 하나하나가 모두 욕심이라는 걸 알았다.
‘포티스의 마음에 달린 일이니까.’
그래도, 포티스가 자신을 선택해준다면 무척 기쁠 것이다. 니즈는 무리를 짓고 싶은 상대가 있다면 역시 포티스뿐이라고 느끼면서, 잠든 포티스를 내려다보았다.
밤이 점점 깊어가고 있었고, 오두막은 눈에 파묻힌 듯했다. 북쪽의 설원 지역은 워낙 넓었기에 마물의 분포도 상당히 퍼져있었다. 그날 밤은 어떤 마물도 둘을 찾지 않았다.
다만 포티스의 잠자리는 편하지 않았는데, 시스 황제가 꿈에 나왔던 것이다.
케이지드에슈처럼 둘만이 편히 머물 수 있는 공간에서 알몸이 된 포티스는 시스 황제가 자신의 뺨을 만지는 손길을 느끼고 있었다. 뺨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그의 손이 닿는 곳마다 피부가 화끈화끈했다. 시스 황제 역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포티스는 그의 알몸을 몰래 훔쳐보면서 살펴보면서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그가 부드럽게 포티스의 뺨과 목덜미를 입술로 훑어 애무하고, 가슴과 배도 찬찬히 쓸어내렸다. 포티스는 부끄러워하면서도, 그의 손에 더 밀착할 수 있도록 허리를 들어 올렸다.
“아, 기분…. 좋아….”
시스 황제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면서 포티스와 몸을 겹쳐 안았다. 하반신의 연결부가 맞닿은 상태로, 포티스는 다리를 벌려 그를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앗….”
들어온다는 예고도 없이, 시스 황제의 발기된 성기는 포티스의 안으로 뜨겁게 침범해왔다. 그 순간 기분이 너무 좋아서, 포티스는 몸을 긴장시켜 내벽을 조였다.
“기분 좋아?”
“아…. 좋아요….”
시스 황제가 포티스의 위에서 움직이자, 포티스의 몸이 위아래로 가볍게 흔들렸다. 몸속이 녹아버릴 것만 같은 달콤한 열기가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하아, 으응…!”
안을 파고들 때마다 쾌감이 샘솟고, 빠져나갈 때는 안타까움이 더해져 점점 흥분이 쌓여갔다. 포티스의 호흡이 약간 거칠어지면서 허리를 비틀었다.
“귀여워, 포티스.”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리자 흥분을 참을 수 없어졌다. 포티스는 빠르게 자신의 몸을 가르며 들어오는 성기의 감각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읏, 아앙….”
포티스가 시스 황제의 움직임과 엇갈리게 허리를 흔들자 연결부가 맞물리면서 질척질척하게 젖은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 역시 포티스의 기분을 고조시켰다.
“아…!”
다리를 움츠리며 절정에 달하자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시스 황제는 그런 포티스를 가만히 내려다보면서 뺨을 만져주었다.
“왜 날 떠났지?”
어쩌면 이 순간에는 대화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왜냐면 지금은 단 둘뿐이니까. 어떤 이해관계도 얽혀있지 않고, 다른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포티스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렇게 무언가 대답하려는 순간, 포티스의 의식은 갑자기 끌어 올려졌다.
“포포스, 일어나야지.”
거칠게 몸을 흔든 다음 커다란 목소리로 깨우는 게 바로 니즈의 방식이었다. 포티스는 어안이 벙벙해서 멍하게 눈을 뜬 다음 이곳이 설원 한복판인 것을 깨달았다. 눈가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있고, 시스 황제의 감촉 역시 생생한데 꿈이라니 믿기 어려웠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끙끙거리던데.”
포티스가 고개를 저으면서 몸을 일으키는데, 바지가 축축하게 젖은 게 느껴지고 진한 미드 향이 풍겼다. 포티스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자, 니즈가 알아채고 히죽 웃었다.
“아, 야한 꿈 꿨구나. 포포스도 참.”
“제, 제가 꾸려고 한 게 아니라….”
“그래~ 일단 좀 닦는 게 어때? 마물들이 자극을 받을지도 몰라.”
“그…. 럴게요.”
포티스는 니즈에게서 등을 돌리고 물에 적신 천을 건네받아 몸을 닦았다. 다리 사이도 꼼꼼히 문지르고, 체액이 젖어 든 바지도 꾹꾹 눌렀다. 그런데 문득 떠오르는 의문이 있었다.
“…마물이 자극을 받는다는 게 어떤 의미예요?”
니즈가 짐을 정리하면서 태평하게 말했다.
“뮤의 체액은 마물이나 동물도 좋아하거든.”
“설마….”
순간 끔찍한 생각이 스쳤지만, 포티스는 이종인데 그럴 리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런데 그게 무색하게도 니즈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맞아. 발정하거든.”
“그…. 그건 이상해요!”
당황한 포티스의 작은 비명에 니즈가 고개를 끄덕이며 짐을 들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어쨌든 조심할 수밖에 없어.”
포티스가 겨우 고개를 끄덕이고는 옷의 여밈을 단단히 채웠다. 그리고 몸을 닦은 천은 발열석에서 불을 붙여서 태워버렸다.
낡은 오두막이었지만 그래도 밖보다는 따뜻했는데, 문을 열고 나서자마자 매서운 바람이 둘을 덮쳤다. 말들은 니즈가 돌봐주어서 그럭저럭 추위를 잘 버티고 있었다.
“출발하자!”
“어제처럼, 막 앞서가시면 안 돼요, 니즈님!”
“알았으니까, 잘 따라와.”
그렇게 둘은 눈이 내리는 북쪽의 설원을 달렸다. 니즈가 지도 보는 감각은 정확해서, 주위에는 눈과 산이 있을 뿐인데도 그를 따라 달리면 어느새 기다렸다는 듯이 오두막이 나타나 제대로 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
이틀 낮을 달리고, 삼 일째 되는 날 오전 무렵에는 눈이 잠시 그쳤다. 옅은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는 동안 니즈와 포티스는 앞으로 나아갔다. 드디어 샤토드네쥬가 시야에 보이기 시작했다.
포티스가 쉬는 것도 잊고 계속 가고 싶어 했기에, 니즈는 그에게 맞추어주었다. 점점 커다란 성이 가까워질수록 포티스의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렸다. 마침내 커다란 침엽수들이 눈 쌓인 가지를 축 늘어트린 입구에 도달했다. 포티스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샤토드네쥬가 우뚝 서 있는 주위에는 성을 둘러싸듯이 빽빽한 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포티스가 조급해하며 성의 입구로 나아가는데, 누군가가 움직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옆에는 자그마하고 익숙한 브라우니도 보였다. 누군가는 말발굽 소리를 듣고 이쪽을 응시한 상태였다.
‘설마, 미츠야…?’
“미츠!”
포티스가 드물게 힘껏 외치면서 말을 몰아가자, 상대도 포티스를 알아본 것 같았다. 그 역시 포티스가 달려오는 방향으로 다가왔다. 말에서 뛰어내리다시피 해서 내려온 포티스는 동생 미츠를 와락 끌어안았다.
“포티스 형….”
“널 보러, 왔어! 아버지는?”
포티스가 울먹이면서 띄엄띄엄 묻자 미츠는 포티스와 꼭 닮은 얼굴을 환하게 밝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도 샤토드네쥬에서 함께 살고 있어.”
그리고 포티스가 뭐라 하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우린 형이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어.”
“나도….”
포티스가 눈가와 코가 빨갛게 되도록 울먹이느라 말을 잘 잊지 못하는 사이, 뒤따라온 니즈가 말 두 필을 한 번에 이끌고 왔다.
“휴, 여긴 춥긴 해도 제법 근사한 성이잖아?”
“눈을 즐긴다면 나쁘진 않은 곳이죠.”
미츠가 포티스의 어깨를 감싸 안고 토닥여주면서 니즈와 인사했다.
“형을 데리고 와주셨군요?”
“으응, 맞아. 머나먼 여행이었지.”
둘이 가볍게 통성명을 했다. 둘은 나이가 같았지만, 미츠는 존대가 편하다는 이유로 말을 놓지 않았다.
“자, 포포스. 이제 그만 들어가자. 계속 울면 감기 걸려. 아이에게도 안 좋다고.”
그 말을 듣고 미츠가 의아해하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아이…?”
“아….”
뮤가 된 사실은 포티스에게 말하게 했어야 했다는 걸 깨달은 니즈가 어색하게 곧바로 브라우니에게로 관심을 돌려 말을 쉬게 할 곳이 있는지 물었다.
“그럼요, 따라오세요.”
“기왕이면 풀도 뜯게 해주고 싶은데, 건초 같은 건 없지?”
“건초는 없지만, 먹이를 대신할만한 건 있답니다.”
둘이 대화를 나누며 멀어져가는 걸 가만히 듣고 있던 포티스가 겨우 고개를 들었다. 그간의 고통이나 괴로움 모두 한 번에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미츠가 살아있고, 아버지가 살아있다면 포티스는 더 바랄 것이 없었다.
“형, 추우니까 들어가자.”
“그래…. 아버지를 뵙기 전에 해야 할 말이 있어….”
샤토드네쥬의 성문으로 발이 푹푹 빠지는 눈을 밟아 걸어가면서 포티스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했다.
“나…. 뮤가 되었어.”
그 말에 미츠가 걸음을 딱 멈추더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포티스를 응시했다. 그리고 곧 죄책감에 입을 꽉 다물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 그래, 형이 벌을 받은 거구나. 나 때문에.”
“그치만, 그건 누명이잖아?”
포티스의 말에도 미츠는 묵묵히 포티스의 어깨를 감싼 채 걷기만 했다. 그리고 성문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서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 그건 사실이야, 형.”
그리고 미츠가 당황한 포티스에게 무언가 더 말하려고 할 때, 성 안쪽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따뜻한 털로 된 로브로 몸을 두르고, 곱슬곱슬한 은발은 한쪽으로 묶어 내렸다. 연보랏빛 눈동자에 디아망 무늬가 선명했다.
“이쪽은 아우라님, 나의 소중한 분이야.”
“이분은….”
아우라는 약간 놀라면서도 둘의 모습이 똑 닮았다는 점 덕분에 상황을 빠르게 파악한 듯 차차 침착해졌다.
“나의 형, 포티스예요.”
포티스는 여전히 미츠가 그러한 행동을 했다는 걸 믿기 어려워하면서도 눈앞에 정말로 황제의 파즈였던 아우라가 있었기에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곧장 예를 갖추려고 하자, 아우라가 고개를 저으면서 포티스를 일으켰다.
“전 이제 황족도 뭣도 아니니까, 그러지 않아도 돼요.”
그리고 얼른 말을 이었다.
“미츠가 무척이나 생사를 알고 싶어 했는데, 살아있어서…. 다행이에요. 추울 테니 안쪽으로 가지요.”
“아직 여기 있었어?”
곧이어 니즈의 밝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니즈는 아우라를 보자마자 곧장 허리 숙여 인사했다.
“나이츠 오브 디아망의 리더, 아우라님을 뵙습니다.”
“니즈가 당신을 여기로 데려온 거군요.”
아우라가 드디어 상황이 납득 되었다는 듯이 웃으면서 셋을 응접실로 이끌었다.
샤토드네쥬는 말 그대로 눈과 얼음으로 지어진 성이었지만, 바깥의 찬바람과 눈보라를 막아주는 데다 난방시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미츠는 브라우니와 함께 적어도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샤토드네쥬의 시설을 손보았다고 했다.
그리고는 자신에게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포티스를 보고 미츠는 겨우 입을 열었다.
“아우라님과 만난 건 세 번밖에 안 돼. 아우라님이 우연히 포레스트 영지에 오셨다가 길을 잃으셨을 때였지.”
포티스는 뭔가 상세한 이야기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미츠는 잠시 뜸을 들이면서 말을 골랐다.
“그리고 아우라님이 따로 황궁에서 나와주셔서 만났어. 세 번째 만났을 때 이미 우리 사이는 꽤 진전되었으니까, 언제든 대역죄로 체포되더라도 받아들일 생각이었어.”
그러면서 미츠는 옆에 앉은 아우라의 손을 꼭 쥐었다. 포티스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런데 이렇게 유배되고, 형과 헤어지게 되어서…. 우리는 형이 다른 지역에 혼자 유배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어.”
“저희는 샤토드네쥬에서 나갈 수가 없거든요.”
포티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무사하다는 걸 직접 확인한 뒤로는 포티스는 뭐든 다 괜찮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형이 뮤가 된 줄은 몰랐어.”
미츠가 괴로운 듯이 말하자 포티스는 그를 위로하려고 했다.
“괜찮아, 죽지도 않았고…. 그야 힘든 일이야 있었지만, 이렇게 살아있고 또 만날 수 있었잖아, 미츠야.”
“하지만 형은 포레스트 가문의 공작인데….”
“정말 괜찮대도. 그보다…. 네가 소중한 상대를 찾아서 형은 기뻐.”
포티스는 자신이 미츠를 너무 어린아이로만 생각해왔던 것을 반성했다. 미츠는 한 파즈를 사랑하고, 책임질 만큼 성장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동생이 자랑스러워서 저절로 허리가 펴졌다.
아우라는 살짝 미소만 짓고 있을 뿐 대화에 참여하지 않았다. 사실 아우라로서는 상당히 기분이 애매했는데, 아무리 시스 황제가 다른 누군가에게 마음이 가 있는 걸 알고서 파트너가 되었다지만, 그 상대가 설마 원래 실론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우라는 얌전하게 있으면서도 포티스의 몸을 꼼꼼히 살폈고, 그가 디아망이 박힌 반지를 낀 것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아니지, 그러니까 맺어질 수가 없었던 거겠구나.’
시스 황제는 아우라에게 아이만을 받아들이고, 그 외에는 뭐든 자유롭게 해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은 너무나 소중한 상대가 이미 있으니, 그 사실도 알고 있으라고 했던 것이다. 당연히 자존심이 상한 아우라는 시스 황제의 파트너가 되지 않으려 했지만, 아버지가 억지로 추진한 데다, 시스 황제까지 긍정한 상태였으니 이미 아우라가 어쩔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포티스에게 가벼운 질투를 느꼈다. 그런데 그 순간 포티스가 이런 말을 꺼냈다.
“실은 아이가 생겨서…. 사면을 받은 셈이거든. …그래도 아버지에겐 비밀로 해줬으면 좋겠어.”
아우라는 시스 황제와 한 번도 잠자리를 함께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뮤는…. 황제와 몇 번이나 밤을 보냈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 앉아있을 수가 없어서 아우라는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났다. 그럼에도 황족이었기에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자연스러웠다.
“아버님을 모시고 오겠어요.”
하지만 니즈는 그에게 뭔가 이상한 기분을 느끼고,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같이 다녀올게, 포포스~”
미츠와 포티스는 서로 대화를 나누느라 여념이 없어서, 포티스는 약간 늦게 대답했다.
“다녀오세요.”
응접실을 뒤로하고 나와서 니즈는 아우라와 나란히 걸었다.
“아우라님은 포티스의 동생을 얼마나 좋아해?”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의지가 되는 분이에요.”
그가 그렇게 묻는 의도를 몰라 살짝 고개를 돌려 니즈를 응시하면, 니즈는 히죽 웃는 얼굴로 그대로 아우라를 복도의 벽으로 밀어붙였다.
“뭘, 하시는 거죠….”
“미리 말해두지만, 포티스를 괴롭히지 마. 안 그래도 엄청 힘들었다고.”
“……. 전 그럴 생각이 없어요.”
아우라가 고개를 들며 니즈를 빤히 보았다. 하지만 니즈는 아까 포티스에게 스쳤던 아우라의 눈빛을 잊지 않았다.
“아우라님도 포티스의 동생과 도망갔으니까, 할 말이 없을 거 아니야?”
“그렇게 걱정되면, 24시간 붙어있지 그래요?”
“나 참….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긴 한데, 정말 궁금한걸.”
그리고는 아우라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아우라는 니즈보다 약간 키가 컸지만, 파즈인 이상 실론의 힘을 뿌리치기 어려웠다.
“놔주세요.”
“진짜로 가만두지 않을 거니까, 괴롭히지 마.”
니즈의 동그란 파란 눈이 아우라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아우라는 아무리 황제의 직속 기사라도 일개 귀족이 자신을 압박하는 게 불쾌했지만, 이렇게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았으니까, 놔줘요.”
겨우 니즈가 웃으면서 아우라의 손을 놓았다. 하지만 이 일 덕분에 포티스에 대한 아우라의 감정은 더욱 깊어지고 말았다. 둘은 말없이 천장이 무척이나 높은 서늘한 복도를 걸어 포티스의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그는 샤토드네쥬의 오래되고 넓은 도서관에서 읽을만한 책을 고르고 있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니즈의 모습에 놀란 것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기대도 갖고 있었는지 포티스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크게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살아있을 줄 알았네. 내가 여신께 계속 기도드렸으니.”
그리고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으며 당장 포티스를 만나길 희망했다.
나름대로 훈훈한 공기가 감도는 응접실에서 포티스는 미츠를 바라보며 빙긋 웃고 있었다. 미츠가 말하는 걸 듣기도 하고, 자신도 몇 마디를 하긴 했지만, 그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마침내 응접실의 문이 열리고 아버지가 들어섰을 때, 포티스는 벌떡 일어나 그에게 달려가 안겼다.
“아버지!”
“포티스.”
“다행이에요, 살아있어서….”
포티스가 다시금 왈칵 울음을 터트린 반면에 아버지는 눈가가 살짝 붉어졌을 뿐 눈물을 보이지는 않았다. 대신 포티스를 꽈악 안아주었다. 한참 만에 포티스는 겨우 아버지에게서 떨어졌지만, 곧장 다시 끌어안는 바람에 아버지가 포티스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주었다.
“우린 나쁘지 않게 지냈어. 포티스 너는 혼자서 어떻게 지낸 거냐.”
“저는….”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것들을 전부 자신의 입으로 아버지에게 밝힐 수는 없었다. 그래서 포티스는 서툴지만, 거짓말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저는 서쪽의 사막에 유배되어있었는데, 황제께서 사면해주었어요.”
“사면을?”
대역죄를 저질렀는데 사면을 받았다고 하면 아버지가 의심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아버지는 당연하다는 얼굴을 했다.
“그래, 황제 폐하께서 ‘그 일’을 기억하셨나 보구나. 적어도 너를 죽일 수는 없을 테지.”
의아해진 포티스가 입을 열려는데, 아우라가 둘 사이에 살며시 끼어들었다.
“먼 길을 오느라 힘드셨을 테니, 식사라도 하면서 회포를 푸는 게 어떤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