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유리 방울꽃도 약재로 쓸 수 있다고 브라우니가 알려준 덕분에, 포티스는 열심히 유리 방울꽃을 삶아 즙을 만들었다. 꽃에서 얻는 순수한 액체는 몇 방울 되지 않았지만, 브라우니는 그 정도만 있어도 열을 내리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좀 더 꺾어올걸….”
“이 정도로도 적당히 많은걸요, 포티스님.”
아무리 약을 발라 몸 안을 진정시킨 상태였어도, 포티스는 또다시 이예티가 우글거리는 밖으로 나갈 엄두는 나지 않아, 아쉬워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도 아이를 잃을 생각은 없었지만, 시스 황제의 아이라고 생각하니 더욱더 조심해야겠다는 결심만 들었다.
포티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미츠와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했으니, 시스 황제와 얽혀있는 문제들을 푸는 건 시간과 인내심을 가지고 임해도 좋을 것 같았다. 포티스는 마침내 시스 황제와 다시금 대화를 해볼 용기가 생겼다. 어째서 그가 거짓말을 했는지 알고 싶었다. 시스 황제의 모든 것이 수수께끼투성이였지만, 그래도 포티스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괜찮을 거야….’
“니즈님, 이걸 드세요.”
“으응….”
니즈는 포티스가 건네준 컵을 제대로 들지도 못할 정도로 온몸에서 열이 나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비록 전문 엔지니어가 제조한 약은 아니었지만, 브라우니는 긴 삶을 사는 만큼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유리 방울꽃과 샤토드네쥬에서 자생하는 실버베리를 넣어 해열제를 만들었다.
“수 시간 내에 상태가 좋아질 거예요.”
브라우니가 자신 있게 말하자, 포티스는 겨우 안심할 수 있었다.
“으윽…. 뭐야, 써….”
포티스가 받쳐준 컵에서 김이 올라오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니즈가 불만을 토로하는 바람에 포티스는 조바심이 났다.
“니즈님! 열이 무척 심하니까, 꼭 드셔야 해요.”
“으으…. 맛, 없어….”
“쭉, 쭉 드세요. 좋아요, 잘 드신다.”
겨우 니즈에게 차를 전부 마시게 한 포티스가 큰일을 해낸 것처럼 한숨을 내쉬고 니즈가 덮고 있는 이불을 잘 토닥여주었다.
“포포스.”
옆으로 누운 니즈가 눈을 감은 채 포티스를 찾았다. 포티스가 가까이 다가가자 니즈는 이불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포티스는 그 손을 잡았다.
“가족들을…. 만나니까, 어때?”
“정말 좋아요, 행복하고…. 데리고 와주셔서 고마워요, 니즈님.”
“그으래….”
니즈가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그대로 잠들어버린 거라고 생각하고, 포티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갑자기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니즈님…?”
“내가 한 말 기억나? 같이 떠나자고 한 거. 아직도 유효해.”
“…….”
포티스는 난감해져서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지도 못하고 침대 아래에 쭈그리고 앉았다. 자신은 이미 황궁으로, 시스 황제에게 돌아가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아이의 아버지가 시스 황제라고 밝히는 건 좋지 못하다고 판단한 포티스가 찬찬히 말을 골랐다.
“저는…. 미안해요, 황궁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니즈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포티스를 응시했다.
“그래, 그렇구나….”
역시 시스 황제를 선택했다고, 그게 네 선택이라면 받아들이겠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어쩐지 눈이 감겨서 니즈는 말을 잘하지 못했다. 차에 들어있는 성분이 금방 몸 안에 퍼진 모양이었다.
“좋아해….”
그래서 니즈가 잠들기 전에 남긴 말은 그게 전부였다. 포티스는 그가 깨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미안해요….”
그렇게 조그맣게 말하고는 방 밖으로 나왔다.
이예티에게 당한 상처는 아직 덜 아물어서, 걸을 때마다 뱃속 어딘가가 잘못된 것처럼 욱신욱신 아팠지만, 계속 쉴 순 없었다.
샤토드네쥬에는 브라우니가 단둘뿐이라서 정원을 관리하는 일이 터무니 없이 고되었다. 그러나 성의 바깥을 감싼 침엽수 안쪽에 있는 과실수들은 반드시 관리해야 척박한 샤토드네쥬에서 적절한 식량을 얻을 수 있었다.
당연히 아우라는 그런 일을 하지 못했고, 미츠와 아버지, 그리고 브라우니들은 대낮에 부지런히 과실수들을 돌보았다. 실버베리는 아침부터 해가 떠 있는 낮 동안 열매를 맺고, 저녁에는 수확하지 못한 열매가 이슬처럼 사라져버렸다.
이예티에게 당해 찢어진 털옷은 아우라가 말끔하게 고쳐주었지만, 기장이 약간 짧아져서 다리가 약간 추웠다. 포티스는 종종걸음으로 샤토드네쥬의 입구를 빠져나갔다. 정원에서 일을 하고 있는 아버지와 미츠, 브라우니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모두 천으로 된 자루를 옆에 하나씩 놓고 장갑을 낀 손으로 차가운 실버베리를 따고 있었다. 그 열매는 별다른 맛이 없지만, 간이 잘 배어들어 향신료만 있다면 어떤 맛의 음식으로든 만들 수 있었다.
“미츠야.”
포티스가 다가가서 동생을 부르자 미츠가 돌아보았다. 미츠는 보지 않은 사이에 키가 훌쩍 자라 이제는 포티스보다 약간 커진 상태였다. 그 모습이 어엿한 하나의 실론 같아 포티스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띠었다.
“형, 안에서 쉬고 있어도 돼.”
“아니야, 나도 도와줄게. 일손은 많을수록 좋잖아.”
브라우니가 관목에 달린 실버베리를 딸 동안 포티스는 자신의 키가 닿는 놓은 가지에 열린 실버베리를 조금씩 따서 천으로 된 자루에 집어넣었다. 낮에 보니 실버베리는 꼭 진주처럼 동그랗고 연한 광택이 있었다. 실버베리를 차근차근 따면서 포티스는 시스 황제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잘 지내고 있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그를 해안에서 보았을 때, 그는 포티스를 데리러 왔다. 그가 자신을 보내주던 모습을 떠올리자 포티스는 어쩐지 마음이 아파졌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물러난 이유를 알 수 없었고, 당시에는 떠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여겼음에도 한구석에 아픔이 남아있었다.
‘황제 폐하….’
샤토드네쥬는 침엽수가 바람을 막아주어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인 설원보다는 덜 춥게 느껴졌지만, 실버베리를 따고 있는 동안 서서히 몸이 차가워졌다.
그렇게 한참을 실버베리를 따면서, 무의식적으로 시스 황제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가까이 다가왔다.
“포티스.”
“네, 아버지.”
포티스가 찬바람에 빨갛게 된 볼로 자신의 아버지를 올려다보자 아버지는 드물게 미소를 보였다. 아버지의 뺨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차갑게 굳어있었다. 포티스는 자기도 모르게 아버지의 팔을 붙잡았다. 포레스트 영지는 따뜻하고 포근한 지역이었다. 평생 그곳에서 지낸 아버지에게 샤토드네쥬의 환경은 힘겨울 것이다.
‘황제 폐하에게 말씀드려서 아버지만이라도 포레스트 영지로….’
하지만 그러려면 시스 황제가 포티스를 만나 대화할 의사가 있어야 한다. 포티스는 이제 와서 그가 자신을 다시 만나줄 거라는, 알 수 없는 믿음을 가졌다는 걸 깨달았다. 다신 보고 싶지 않을 수도 있었다.
포티스가 열매를 따던 손을 멈추고 가만히 생각에 잠긴 것을 보면서 아버지는 가만히 포티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 죄송해요. 생각 좀 하느라….”
“앞으로 어쩔 셈이냐.”
“…우선은, 황궁에 가보려고 해요.”
아버지에게 자신이 뮤가 되었고 아이도 가졌다는 사실을 숨기기로 했기에 포티스는 말을 고르면서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포레스트 영지를 돌려받을 수 있는지, 또 미츠와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찾아보려고요.”
“그럴 필요는 없단다.”
아버지가 어째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 의문이 들어 올려다보면, 아버지의 얼굴은 생각보다 편안했다.
“미츠가 벌인 일이니, 책임을 져야지.”
“그건 그렇지만, 이런 곳에서…. 언제까지 계시게 할 수는 없어요.”
“네가 어쩔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확실히 황제의 파트너인 파즈의 문제였다. 아마 무언가 해줄 수 있는 이가 있다면 그건 시스 황제뿐일 것이다. 포티스도 그 사실은 알고 있었기에 잠자코 아버지의 의견을 수긍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분명 다른 방법이 더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자기 나름대로 황궁에서 방도를 모색해볼 예정이었다.
“그래도 황제 폐하께서는 널 잊지 않으셨지.”
“…네?”
포티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그게 무슨 이야기인지 물으려고 했을 때, 뒤에서 무언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포티스가 돌아보자 미츠가 구멍이 뚫린 자루에서 떨어진 실버베리를 보고 난감한 표정으로 엉거주춤 서 있었다. 포티스는 웃으면서 그에게 달려갔다.
“여기 구멍이 생겼네.”
“거길 좀 묶어야겠어, 아! 형…. 쏟아지잖아.”
미츠의 당황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포티스의 서툰 손놀림으로 구멍이 더욱 벌어져서 자루 안에 있던 실버베리는 남김없이 눈밭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어안이 벙벙한 미츠를 보고 있자니, 포티스는 웃음이 나왔다. 미츠의 얼굴이 부드러워지면서 크게 나무라지 않는 태도로 포티스의 어깨를 툭 밀었다.
“너무해, 이거 어떻게 할 건데.”
“주워 담으면 돼, 괜찮아. 뭐든….”
돌이킬 수 없는 일은 없다고 말하려다가, 포티스는 문득 시스 황제를 떠올렸다. 그와의 관계 역시 고쳐나갈 수 있다면 좋을 것이었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마음이 따끔거려서 포티스는 얼른 구멍이 난 부근을 묶었다.
“자, 네가 들고 있어. 내가 담을 테니까.”
그러면서 미츠가 들고 있는 자루로 실버베리를 양손 가득 담아 옮기기 시작했다. 이 작은 사건을 아버지가 잔잔한 눈빛으로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안 도와주셔도 돼요, 금방 할 것 같아요.”
“형 정말 서툴다, 실버베리를 전부 흘리고 있어.”
결국 미츠가 실버베리를 담기로 하고, 포티스가 자루의 입구를 들고 있기로 했다. 미츠는 재빠른 손놀림으로 금방 실버베리를 주워 담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에서 예전보다 미츠가 장성했다는 걸 깨달은 포티스는 그를 기특한 눈으로 응시했다.
‘미츠야, 네가 행복하면 충분해.’
그때 문득 실버베리를 담던 미츠가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형, 떠날 거야?”
“…응, 돌아가 봐야 해. 해야 할 일도 있고….”
“우리는 괜찮으니까, 형만 잘 지냈으면 좋겠어.”
포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속으로 그들을 샤토드네쥬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고 마음먹었다. 포레스트 영지에서 살았던 아버지와 미츠, 그리고 황궁의 생활에 익숙해져 있는 아우라에게 샤토드네쥬는 정말로 고된 유배지였다.
‘적어도 따뜻한 곳에서 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마침내 실버베리를 전부 자루에 담았다. 포티스는 다시금 실버베리를 채취하는 일도 돌아갔다. 아버지가 했던 신경 쓰이는 말에 대해선 이미 까맣게 잊은 뒤였다.
그렇게 찬바람을 맞으며 뼛속까지 몸이 차가워졌다고 느낄 때쯤, 샤토드네쥬에서 아우라가 나타나 외쳤다.
“식사하세요!”
포티스는 뻐근한 팔과 허리를 폈다. 안 그래도 한창 배가 고픈 참이었다. 실버베리가 든 자루를 묶어두자 브라우니가 한 손으로 가볍게 몇 개의 자루를 움켜쥐고 옮기기 시작했다. 셋은 브라우니에게 실버베리를 맡겼다.
샤토드네쥬로 들어선 포티스는 아우라와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사실 실제 식당으로 지어진 공간은 다른 곳이었었고, 이곳은 작은 방을 식당으로 사용하는 것에 불과했는데 발열석 덕분에 온통 훈훈한 기운이 가득했다.
식탁에는 실버베리와 허브를 넣어 끓인 스튜가 놓여있었고, 우유가 있을 리 없는데도 풍부하고 부드러운 향이 났다. 그리고 식탁에는 초췌하지만 익숙한 얼굴이 주홍빛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넘기고 있었다.
“포포스.”
“니즈님! 이제 괜찮으세요?”
포티스가 다가가서 니즈의 이마를 짚어보자 니즈는 한순간 흠칫했다가 곧 부드럽게 그의 손길을 밀어냈다.
“응, 포포스가 유리 방울꽃을 구해왔다면서?”
“네! 마침 근처에 피어 있었어요.”
니즈는 잠시 생각하더니 일어나 포티스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밖엔 마물이 있으니까, 나 없이 나가는 건 위험해.”
어떤 마물들은 아이를 받아들인 뮤를 완전히 해칠 수 없다는 걸 니즈 역시 까맣게 잊어버린 게 틀림없었다.
‘마물과 섹스를 하는 건 싫어….’
이예티를 떠올린 포티스가 몸서리를 치면서 약간 뒤늦게 니즈의 말에 수긍했다. 미츠와 아우라에게 자신이 이예티에게 당한 걸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해서, 니즈와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앞으로는 그럴게요.”
“흐아암~”
니즈가 기지개를 켜고, 실버베리로 만든 스튜를 먹기 시작했다. 포티스 역시 무척 배가 고팠기에, 수프를 열심히 먹었다. 실버베리는 껍질이 부드럽게 녹아버려 알맹이만 탱글탱글하게 익어있었는데, 허브의 향이 더해져서 풍부한 맛이 났다.
“이거, 엄청 맛있어요.”
그러자 미츠가 기쁜 듯이 웃었다.
“형이 실버베리를 좋아해서 다행이야, 좋은 열매거든.”
하지만 니즈와 시선이 마주친 포티스는 그가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실버베리가 아무리 맛이 있고, 브라우니가 많아져 생활이 편해진다 해도 샤토드네쥬는 유배지였다.
식사를 마치고 포티스는 아우라를 도와 묵묵히 식탁의 뒷정리를 했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본 것은 짐을 정리하고 있던 니즈였다. 포티스가 스스럼없이 다가가 니즈 곁에 앉았다.
“니즈님, 뭐 하시는 거예요?”
“응? 보다시피 정리.”
“벌써요…?”
포티스를 쳐다보지도 않고 약이며 침낭을 정리하던 니즈가 마침내 고개를 들어 포티스를 응시했다.
“그래, 황궁으로 돌아갈 거잖아? 빠른 시일 내에 가야 하지 않겠어?”
사실 황제와 헤어졌을 때의 상황을 생각하면, 포티스 역시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쓸쓸한 샤토드네쥬에 가족들을 두고 떠나는 상황이 썩 내키지는 않아서, 가능하면 더 머무르고 싶기도 했다. 그런 포티스의 마음을 알아챈 니즈가 웃으면서 말했다.
“포포스, 여기서 하려고 한 일은 가족을 만나는 거였잖아.”
“…그건 그렇지만….”
“이제 황제와의 일을 해결해야지, 안 그래?”
“…그래야겠죠.”
“내 생각에는, 아마도 황제는 널 만나고 싶어 할 것 같거든.”
곁에서 몇 년이나 지켜봐 온 바로는, 황제는 쉽게 포기나 단념을 하지 않으면서도 목표가 있다면 반드시 손에 넣는 자였다.
“그…. 그렇다면….”
포티스가 얼굴을 붉히자, 어쩐지 괜히 말한 것 같다는 가벼운 후회가 밀려왔다. 포티스가 행복하면 좋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자신이 둘의 사이를 돈독하게 만드는 역을 맡고 싶지 않았다.
“뭐어~ 그래도 그만한 병력을 끌고 왔다가 빈손으로 갔으니 썩 좋지는 않겠지.”
포티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뭘 모르는 포티스가 보기에도 나이츠 오브 디아망의 기사들이 전부 온 것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왜 보내주셨는지, 잘 모르겠어요.”
니즈는 다시금 답을 알면서도 회피하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그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고는 짧게 생각했다.
‘이런 마음이…. 질투였던가?’
그날 남쪽의 바다에서 니즈가 얻은 승리는 강렬했지만, 유효기간이 짧았다. 그런 생각이 스치자 갑자기 속이 갑갑해서 니즈는 한순간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러나 포티스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없어서, 가까스로 간신히 숨을 내쉬었다.
“그건…. 황제에게 물어봐, 나도 몰라.”
그리고는 고개를 휙 돌려, 포티스에게서 시선을 떼고 짐가방의 입구를 묶기 시작했다. 포티스는 어쩐지 그가 평소와 달리 차갑다고 느끼고 당황해서 우물쭈물했다. 결국 니즈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포티스에게 미소를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아~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포포스, 언제 떠날 거야?”
“…글쎄요, 좀 더 머무르고 싶기도 해서….”
“그럼 일주일만 더 있자.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여기서 실버베리만 먹고 살 순 없을 것 같거든.”
“…역시 그렇겠죠?”
“그래, 그냥 있으니까 어떻게든 먹고 사는 거지. 나라면 참 우울할 것 같아서~ 고기를 좀 먹어봤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여기는….”
니즈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마물이 있잖아, 마물이. 천지에 널렸다고.”
“그렇지만, 분명 드시지 못할 거에요.”
포티스 역시 처음에는 거부감을 가졌던 것이다. 하지만 니즈가 흥, 하고 콧바람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어떻게든 먹게 할 테니까, 내게 맡겨.”
그래서 그날 오후, 니즈는 검을 챙기고 샤토드네쥬의 열병이 나아 두 번 다시는 그 병에 걸리지 않게 된 가뿐한 몸으로 설원을 향해 떠났다. 포티스도 따라가려고 했지만, 니즈는 웃으면서 ‘날뛰기엔 혼자 있는 게 적합’하다고 말하면서 포티스에게 인사했다. 샤토드네쥬의 입구까지 마중 나간 포티스가 지금이라도 같이 가자고 하면 갈 수 있다는 표시를 내면서 말했다.
“그치만, 혼자서 괜찮으시겠어요?”
“마물보다 내가 더 강해, 걱정 마.”
그리고는 포티스를 뒤로하고 가뿐히 나가서, 저녁나절이 되어서야 온통 마물의 피를 뒤집어쓴 채 돌아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인 데다, 이번엔 그 증거품인 마물의 고기까지 손질해서 덜렁덜렁 들고 오는 바람에 무방비하게 니즈의 모습을 본 아우라가 깜짝 놀라 얼음장처럼 창백해졌다.
“세상에, 마물의 고기 같은 건 먹을 수 없어요!”
아우라가 어찌나 단호하게 질색하던지, 포티스는 백번 공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거부감이 들죠, 꼭 드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살면서 마물을 먹는다는 말도 들은 적이 없어요, 저는 실버베리면 충분하니까.”
하지만 마물의 일부분인 고기는 그저 신선한 피가 감도는 식자재로 보일 뿐이었다. 아버지와 미츠는 니즈와 아우라 사이에서 말을 아꼈다.
“앞으론 안 가져올게? 모처럼 손질했는데, 아깝게 됐네.”
“…….”
그 말에 아우라가 한순간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래서 포티스는 용기를 내서 니즈를 거들기로 했다.
“이곳에는 짐승이 없잖아요, 그러니…. 마물을 먹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저…. 저도, 먹어봤는데 나쁘지 않았어요.”
“포티스님이 마물을 드셨어요?”
아우라가 놀라며 입가에 손을 갖다 대는 바람에 어쩐지 쑥스러워졌지만, 포티스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길 오는 동안, 필요해서…. 고기는 중요하잖아요.”
“…….”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개인이 아닌 한 실론의 파트너로서의 책임감을 느낀 아우라는 결국 손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제가…. 요리를 해보도록 하지요. 모처럼 니즈님이 준비해주셨으니.”
“정말이야? 잘됐네.”
니즈가 아우라를 향해 헤벌쭉 웃어 보였다. 포티스는 마물의 고기를 꺼려하는 아우라를 위해 함께 곁에서 요리를 돕기로 했다. 요리라고는 초콜릿 차를 만들 줄 아는 게 전부였지만, 아우라가 안심할 수만 있다면 마물의 고기를 다루는 데에 아주 능숙한 것처럼 굴 수도 있었다.
“정확히, 어떤 마물인가요?”
아우라는 앞에 놓인 고기에서 시선을 살짝 비켜 니즈에게 물었다. 니즈가 솔직하게 이예티의 고기라고 말하려는 찰나, 포티스가 얼른 니즈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 그게 중요할까요? 이미 고기가 되었으니까….”
아우라가 그래도 알고 싶다고 하면 어떻게 둘러대나 고민하는데, 다행히도 그는 혼란스러운지 포티스의 말에 쉽게 수긍하고 말았다.
“그렇군요….”
마침내 아우라가 마물 고기를 정면으로 살펴보면서, 약간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걸….”
“아, 제가 옮기는 걸 도와드릴게요.”
포티스는 앞장서서 핏물이 흥건한 고기가 담긴 자기 그릇을 안아 들었다.
‘마물의 고기든 뭐든, 영양분을 보충할 수 있다면 뭐든 좋아.’
분명 자신도 마물의 고기를 꺼린 적이 있었는데도, 이제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같았다.
“이왕 만드는 거, 맛있게 되면 좋겠어요.”
포티스가 아우라와 함께 샤토드네쥬의 주방으로 향하면서 말하자, 아우라가 묘한 얼굴을 했다.
“마물이니, 그렇게 맛있지는 않을 거예요.”
“아…. 그치만, 아우라님이 만들어주신다면 분명 맛있을 거예요.”
아우라는 까다로운 실버베리도 능숙하게 다룰 줄 알았고, 식자재가 부족한 샤토드네쥬에서도 최대한의 활용을 할 줄 아는 파즈였다. 아우라의 음식을 맛본 포티스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노력해보겠습니다.”
여전히 마물 고기에 대한 불신은 사라지지 않은 듯하였지만, 막상 주방에 도착해 고기를 내려놓고 보니 도구를 든 아우라는 차분함을 되찾았다.
“포티스님은 허브 손질을 도와주세요.”
“그럴게요…!”
그날 저녁은 요리한 마물 고기를 먹게 되었다. 소박하게 간을 해서 허브와 실버베리 샐러드를 곁들인 마물 고기가 식탁에 올라오자 니즈는 물론 미츠나 아버지도 큰 흥미를 보였다.
“이게 정말 마물이라니, 믿을 수 없네요.”
“독 같은 건 없으니까 먹어도 괜찮아.”
자신이 직접 요리한 것도 아니면서 니즈가 어쩐지 우쭐한 모습으로 말해, 포티스는 웃고 말았다.
“마물이라…. 나도 아직 먹어본 적은 없네.”
태평한 니즈를 제외한 모두가 약간은 긴장한 상태로 고기가 담긴 접시를 응시하는데 아우라가 묘한 양가감정을 느끼면서 입을 열었다.
“…맛있을 거예요, 분명히. 맛있다니, 이상하지만….”
아우라의 말끝이 흐려지는 걸 듣자마자 미츠가 분연히 일어나 나이프를 들어 고기를 적당한 크기로 썰기 시작했다. 뼈가 붙은 고기의 단면은 훌륭하게 육즙이 흐르고 따끈따끈하게 익어있었다.
“잘 먹을게요.”
미츠가 웃는 얼굴로 아우라를 바라보자, 아우라는 살짝 뺨을 붉히면서 미츠를 도와 모두의 접시에 익은 고기와 샐러드를 덜어주었다.
“흐응, 맛있게 먹겠습니다~”
덥석 고기를 베어 문 니즈는 그대로 우물우물 삼켰다. 그리고 꾸미지 않은 솔직하고 순수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이거, 진짜 맛있는데.”
그러자 어느새 약간 찜찜하게 남아있던 마물 고기라는 생각은 희미해지고, 아우라가 만든 훌륭한 요리라는 인식만이 남아 모두가 나이프와 포크를 들었다.
니즈와 함께 먹었던 마물 고기구이도 맛있었지만, 이처럼 제대로 된 고기 요리를 맛보고 나니 무척이나 행복한 기분이 들어 포티스는 고기를 우물거리면서 기쁘게 웃었다.
그날 이후부터 니즈는 샤토드네쥬에 식량으로서의 마물 고기를 공급하기 위해 매일 같이 마물을 잡으러 나섰다.
“그거 봐, 내가 말했지. 마물은 맛있다니까.”
포티스는 샤토드네쥬에 일주일 더 머물렀다. 그리고 약간 조바심을 느끼면서,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고 니즈와 함께 말에 올라 그곳을 떠났다.
샤토드네쥬로 갈 때에는 미츠와 아버지의 안부 탓에 조급했는데, 돌아올 때도 그리 마음에 여유가 있지는 않았다.
‘빨리 황제 폐하를 만나고 싶어.’
꿈에서라도 마음을 전달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막상 꿈에서 그를 만나면 현실의 걱정 같은 건 잃어버리고 섹스에 몰두하게 되고 말아서 안타까움이 더해질 뿐이었다.
두 사람이 동쪽의 숲에 도달한 건 저녁 무렵이 되어서였다.
“흠, 어쩔까. 새벽이 될 때까지 기다릴까?”
마물 경계석을 세우면 어느 정도 대비를 할 수 있었지만, 서큐버스가 나타날까 봐 걱정이었다. 저번에는 멋모르고 당했다고 하지만, 이번엔 포티스도 니즈도 확실히 원하지 않을 만큼 곤란한 상태였다.
포티스는 함께 멀리 떠나서 살아가자는 니즈의 제안을 거절했고, 니즈 역시 포티스의 선택을 존중해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섹스라도 하게 된다면, 서로에게 좋지 못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물었으면서도, 니즈는 포티스가 대답하기 전에 말을 바꾸었다.
“뭐…. 경비가 있으면 내가 기절시키면 되지. 제1궁으로만 무사히 간다면 황제가 있을 테니 별일은 없을 거고.”
“그렇군요….”
하지만 여전히 포티스가 망설이자, 니즈가 팔짱을 끼면서 포티스를 응시했다. 달빛이 두 사람을 비추었다.
“걱정돼?”
“조금….”
니즈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면서, 그다지 내키지는 않지만, 순전히 포티스를 위해 입을 열었다.
“황제는 네가 왔으니 분명 맞이할 거야.”
니즈의 말에 안심을 느끼면서 포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새벽까지 기다릴 것도 없어.”
그래서 둘은 수 주 전에 떠나왔던 숲길을 다시 되짚어 황궁을 향해 나아갔다. 숲을 헤치고 걸음을 옮길수록 포티스는 점점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샛길을 통해 황궁으로 잠입하고, 제1궁으로 가는 동안, 아무도 마주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직 저녁나절이었기에 본궁에는 황족이나 귀족 실론들이 머물고 있어서 둘은 몇 번이나 낮은 나무 아래나 긴 정원수 그늘에 숨어야만 했다.
또 한번은 외딴 길을 은밀하게 걸어오는 황족 일행과 딱 마주칠 뻔했는데 당황한 니즈가 그들을 다짜고짜 때려눕히는 바람에 순식간에 그 누구도 아무런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자리에 뻗어버렸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니즈는 빠르고 짧은 생각 다음 곧장 몸이 나가는 편이라서 이미 상황은 끝나버린 상태였다. 포티스는 쩔쩔매면서 기절한 실론들에게 다가가 살펴보려 했지만, 니즈가 그의 팔을 휙 붙잡아 데려왔다.
“귀신이라도 만났으려니 생각하겠지.”
재미있게도 니즈의 낙관적인 생각은 딱 맞아떨어져서 그 가문의 황족은 한동안 밤마실을 하지 않게 되었다.
제1궁의 입구에 도달하자마자 포티스는 집에 돌아온 것 같은 그리움을 느꼈다. 정원에서 풍기는 진한 장미 향이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회랑으로 접어들자 니즈가 포티스를 향해 말했다.
“난 동료들을 만나러 가볼게.”
어차피 포티스가 돌아온 것을 알면 니즈에 대한 시스 황제의 처분도 결정될 것이었다. 어쩌면 기사직을 박탈당할 수도 있는데도, 니즈는 태평할 뿐이었다.
“…지금까지 고마웠어요, 니즈님.”
“별걸 다~”
니즈가 휙 하니 등을 돌려 제1궁에 마련된 나이츠 오브 디아망의 처소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포티스는 그의 모습이 어둠 속에 녹아들 때까지 응시하다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시스 황제의 침실로 이어지는 회랑을 쭈욱 따라 걷기 시작했다.
처음 얼마간은 약간 긴장한 채로 발걸음을 빨리했는데, 계속해서 걷다 보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제1궁의 회랑이 길긴 했어도 무한하지는 않을 텐데, 어쩐지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고, 옆으로 지나치는 정원의 모습도 계속 반복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왜 이러지…’
차오르는 불안감에 포티스가 걸음을 멈추고 숨을 죽인 채 얼어붙은 것처럼 가만히 서 있자 저 멀리서 희미한 인영이 보였다.
시스 황제인 걸까?
“황제 폐하….”
그렇게 불러보았더니, 그림자가 살짝 흔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포티스는 불안함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를 향해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디뎠다.
“황제 폐하…!”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는 그를 계속 응시하면서 포티스는 떠밀리는 것처럼 빨리 걷다가 이내 내달리게 되었다.
일정한 모양의 정원수 그림자가 포티스의 곁을 스치고, 회랑의 긴 기둥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제발, 기다려주세요…!”
마침내 그와의 거리가 좁혀지고, 포티스는 숨을 몰아쉬면서 몇 걸음을 남겨두고 멈추어 섰다.
‘이상해…’
상대는 시스 황제가 아니었다. 그가 입고 있는 분홍색 로브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포티스는 알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분홍색 로브를 입은 마술사가 포티스를 향해 홀연히 돌아섰다. 그가 들고 있는 것은 긴 금속 줄에 매달린 타오르는 듯한 붉은 보석으로 포티스는 알지 못했지만, 자연적으로 만들어지는 보석은 아니었다. 명백히 엔지니어의 기술과 마법이 혼합된 결정체였다.
포티스는 본능적으로 발을 뒤로 빼려고 했지만, 마술사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여길 보아라.”
마법의 언어였고, 포티스는 이끌린 듯이 붉은 보석을 응시했다. 마술사는 긴 줄을 움직여 보석이 양옆으로 천천히 흔들리게 했다.
“연회에서 시스 황제에게 독배를 건네라.”
마법 언어는, 인체에 미치는 결과에 비해 문장 자체는 단순하고 간결하게 이루어진다. 어떤 뛰어난 무인이라도 마술사의 마법 언어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었다. 황제의 기사인 나이츠 오브 디아망은 마법 언어에 대비하는 훈련을 해왔지만, 니즈를 포함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뾰족한 성과를 이루어내지 못했다.
아마 니즈가 포티스의 곁에 있었다면, 마법 언어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포티스를 이끌어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포티스가 난생처음으로 마술사의 마법 언어를 듣고 그것에 곧장 의문을 품은 것은 말도 안 될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 그럴 수는 없어…”
포티스가 귀를 막듯이 머리를 감싸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멍한 시선은 여전히 마술사가 든 붉은 보석을 향한 상태였다.
마술사가 한 걸음 더 포티스를 향해 다가왔다.
“이것은 실행될 일이다, 이것은 미래를 예견한 것이다….”
점점 속박처럼 조여오는 마법 언어가 지닌 힘이 포티스의 몸을 덮쳐왔다.
“안 돼, 그럴 수는…. 안돼….”
포티스는 미세하게 고개를 흔들었지만, 눈동자에서 초점이 희미하게 사라진 상태였다.
“시스 황제는 황제의 뮤의 손에 죽는다.”
그 마지막 마법 언어는 마치 대단원처럼 다가왔다. 포티스의 귓가에 마법적인 힘이 요동치는 움직임이 느껴지더니, 그대로 심장에 꿰뚫듯이 박혔다.
“……. 시스 황제에게, 독배를 드리겠어요.”
포티스가 느릿느릿, 그러다가 명확하게 발음하며 무력하게 양팔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아니, 아니 그럴 수 없어…!”
다시금 포티스가 강렬하게 저항하자, 마술사는 포티스에게로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덩달아 마법의 힘도 커지고 포티스는 심한 두통을 느꼈다.
“시키지 마세요, 황제 폐하를, 죽이지 말아요…!”
그 말과 함께 포티스의 몸에 스르륵 힘이 풀리더니, 가벼운 소리를 내면서 바닥으로 쓰러졌다. 뺨과 목덜미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대량의 하혈이 바지를 적시며 소리 없이 흘러나왔다.
분홍빛 로브를 입은 마술사는 황망히 포티스에게 접근해, 수면 암시라는 한층 더 강력한 마법을 사용하고자 했다. 그런데 누군가 오는 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민감하게 기척을 알아채고 허공에서 모습이 흩어지며 사라져버렸다.
그 순간, 시스 황제는 막 제1궁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그는 아무런 의심 없이 침실로 향하는 회랑으로 접어들었는데, 바닥에 쓰러진 포티스는 옷차림도 검고, 머리카락 색도 어두웠음에도 불구하고 단번에 알아보았다.
말도 안 되는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으로 포티스에게 다가가서 늘어진 몸을 일으키자, 손바닥이 미적지근한 액체로 젖어 들었다. 시스 황제의 튜니카와 보랏빛 망토, 그리고 손바닥이 차츰 붉은 피로 물들어갔다. 포티스가 언제,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도 생각해보지 않고 그는 곧장 입을 열었다.
“브라우니.”
“부르셨어요, 주인님.”
브라우니가 손을 모은 채로 나타났는데, 시스 황제는 그 모습이 드러나기도 전에 엔지니어를 데려오라고 말했다.
“주인님? 제가 먼저 상태를 봐도 괜찮을까요?”
“아니, 안돼. 엔지니어를 불러와. 지금 당장.”
그가 낮으면서도 무섭게 다그쳤기에 브라우니는 움찔하면서 놀라고는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엔지니어에게 가기 위해 모습을 감추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포티스.”
부드럽게 뺨을 문지르며 말을 걸어도 눈을 감은 포티스는 대답이 없었다. 계속해서 흘러내리는 피를 멈추게 하려는 것처럼, 시스 황제는 포티스의 몸을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