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26)

23

“포티스!”

시스 황제가 쓰러지는 포티스의 몸을 안으며 이름을 불렀지만, 이미 포티스는 정신을 잃었다.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피를 토해내는 탓에 연회장에 있던 모든 이들은 굳어버린 것처럼 그 광경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세상에…!”

누군가 틀어막은 비명처럼 억눌린 소리를 내자, 그것이 신호가 된 것처럼 홀에 있던 모두가 술렁이며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엔지니어를 불러와!”

니즈가 날카롭게 파나를 향해 외치자, 파나는 즉시 몸을 돌려 연회장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입구로 향해 문을 열자마자 바깥에서 누군가 즉시 파나의 발목을 후려쳐 바닥에 나뒹굴게 만들었다. 아마 평소였다면 파나는 문밖에 누군가 있다는 걸 알았을 텐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방심하고 말았다.

“포티스!”

시스 황제는 포티스의 정신을 차리게 하려고 애를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대량의 피를 토해내고 난 뒤 포티스는 꼼짝하지 않았고 점점 창백해져만 갔다. 시스 황제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포티스를 안아 일으켜 직접 옮기려고 했다. 그런데 파나가 나뒹군 입구 너머로, 황금색 깃털을 투구에 단 사병들이 어느 새에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

니즈 역시 굳은 얼굴로 재빠르게 연회장의 다른 입구와 창문들을 살펴보았지만, 아까까지만 해도 커튼과 유리 너머로 감청색 하늘이 보였는데 지금은 갑옷을 입은 사병들이 금빛 유령처럼 창문이란 창문에는 빽빽이 둘러싸고 있었다. 홀에서 나가는 입구는 모두 막히고 말았다.

“비켜.”

시스 황제가 포티스를 안은 채 사병을 무시하고 나아가려 하자 니즈가 얼른 그의 앞에 서서 등을 보이며 가로막았다. 어디선가 신경질적인 박수 소리가 들렸고, 나이츠 오브 디아망의 기사들 그리고 시스 황제의 시선이 그 방향으로 향했다.

박수를 친 것은 벨저였다. 그는 이제 유쾌하고 절망적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아, 황제 폐하는 역시 곱게 죽지 못할 운명이로군.”

시스 황제는 쓸데없는 입씨름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 안고 있는 포티스의 몸이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당장 저것들을 치워.”

“난 당신이 싫소.”

시스 황제의 말에 대한 대답이라는 듯이 벨저가 거칠게 내뱉었다. 시스 황제는 점점 초조해지면서 차갑게 가라앉았다. 당장이라도 벨저를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들고 싶었다.

“네가 하는 행위의 의미를 알고 있겠지.”

“아 물론…. 내 목숨은 이미 내놓았으니. 나는 그저 당신이 너무나 싫단 말이오. 그러니 황제의 자리를 내려놓지 않겠나? 그 뮤를 살리는 대가로.”

시스 황제는 어깨까지 오는 은발을 전부 뒤로 넘겨 깊이 패인 주름이 드러나 있는 벨저의 얼굴을 응시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저자가 가로막지 않는다면 포티스는 살 수 있었다.

“니즈.”

부른 것만으로도 니즈는 빠르게 반응해, 시스 황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들었다.

“할 수 있어.”

앞에 있는 금빛 깃털이 달린 투구의 사병을 돌파해 나아갈 수 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러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 점은 시스 황제도 이해하고 있었다. 나이츠 오브 디아망의 기사들 전원이 사병을 처리한다 해도 한계는 있었다. 하물며 시스 황제는 느끼지 못했지만, 니즈를 비롯한 나이츠 오브 디아망의 기사들 몇몇은 이미 밖에 있는 사병에게서 마법 언어를 느끼고 있었다. 마술로 불러낸 생명이 없는 끈질긴 인형이라면 싸움은 더욱 길어질 것이었다.

‘벨저를 치는 편이 낫겠지.’

시스 황제는, 황족과 귀족이 모인 자리에서 누군가를 죽여버린다는 상황이 주는 충격과 여파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바닥을 굴렀던 파나 역시 어느새 일어나 침착하게 한 손 검을 꺼내든 상태였다. 그들은 니즈가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니즈 역시 시스 황제와 마찬가지로 가장 단순한 방법은 벨저를 죽이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 그런 분위기를 읽기라도 한 것처럼 벨저가 거만하게 입을 열었다.

“나를 죽여봤자 해독제를 잃을 뿐이오.”

“…….”

“다시 한번 묻지, 정말 황제에서 내려올 생각이 없나.”

“네가 황제가 될 셈인가, 벨저.”

“난 당신에게 그 뮤의 가치가 이 디 오르보다 크냐고 묻고 있는 것이오.”

“……. 포티스는 소중해. 그리고 디 오르 역시.”

벨저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다면 아우라는 어째서 소중하게 대해주지 않았지?”

“그는…. 사랑을 찾아 떠난 것에 불과해.”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조용한 연회장에서 둘이 주고받는 말은 또렷하게 들렸다. 귀족과 황족들은 이 상황에 대해 경악을 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흥미를 끌기도 해서 바깥에 사병들이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벨저는 아우라가 살아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마지막까지 황족들을 자신의 편에 남겨두는 것이 중요했다. 자신의 죽음으로 모든 게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스스로 정한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모습을 최대한 연기했다.

“아우라는 당신이 버렸소, 황제여. 그 포티스라는 뮤를 선택하기 위해서.”

“…….”

그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시간 낭비였다. 시스 황제가 라토에게 지시를 내렸다.

“벨저를 쏴.”

“그렇지만 해독제가….”

“상관없어.”

궁에는 최고의 전문 엔지니어가 있다. 그들이 해독할 수 없는 약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벨저가 다시금 미소를 보이더니, 재빠르게 품에서 단검을 꺼내 자신의 가슴에 찔러넣었다. 한 번만으로는 피가 배어 나오는 정도에 그치자, 연거푸 찔러 결국 붉은 피가 연회장 바닥에 줄줄 흐르고 말았다.

동시에 입구를 막고 있던 사병들이 일제히 움직이며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비명이 들리고 유리가 깨지고, 그들은 창문을 넘어 황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니즈가 곧바로 한 손 검을 휘두르면서 사병의 갑옷의 틈을 찔러넣었다.

“터져라!”

안쪽을 찔렀을 때의 감촉이 지나치게 딱딱해서 섬뜩할 정도였다. 사병들이 천장에 달라붙어 황제에게 오는 것으로 보아 역시나 속에 있는 건 마법 언어가 깃든 인형인 것 같았다.

니즈의 한 손 검에서 발동한 마법이 실내에 온통 흰 눈을 쏟아냈다. 니즈는 황제의 앞을 막으면서 사병들을 처리했고, 라토와 파나 역시 황제를 엄호하며 바싹 붙어있었다.

“앞을 뚫어.”

시스 황제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니즈는 좀처럼 여유를 내지 못했다. 검에 꽂힌 사병을 완력으로 휘둘러 서넛을 한 번에 눈송이로 바꾸며 처리를 해도 도무지 줄어들지를 않았던 것이다. 갑옷을 입은 사병들은 고통도 모르는지 쓰러져도 신속하게 일어나 반격했다. 황제에게 다가오려는 단순한 움직이지만, 손에 칼을 들고 있고 머릿수가 되다 보니 위협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안 돼!”

“증원을 요청해야 해요!”

라토가 화살 한 대로 사병 넷을 한 번에 처리하며 외쳤다. 파나는 예상외의 상황이 나름대로 즐거웠는지 집중한 채로 침착하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시스 황제가 파나의 옷깃을 붙잡았다. 몰두해서 사병을 처리하던 파나의 몸이 기우뚱 기울어지면서 당황했다.

“날 엄호해서 밖으로.”

“네? 하지만 지금…. 연회장이 빙 둘러싸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가급적 크게 소란을 일으켜, 마술사들이 상황을 파악할 수 있도록.”

그들은 황궁 파티와는 무관한지라, 평소에는 마술사의 탑과 개인실에서 각자 원하는 연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황궁 안이 시끄러워진다면 그들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파나의 검이 지닌 기술은 그에 적합하지가 않아 황제의 의중을 다시 한번 물으려고 했을 때, 유리창 쪽에서 아무런 소리도 없이, 그러나 공기를 통해 무언가가 터졌다는 걸 직감할 수 있는 진동이 느껴졌다. 동시에 흰색 불빛이 점멸했다. 틀림없이 마술사가 일으킨 불꽃이었다.

“마술사가 왔어!”

세아가 기뻐하며 사병을 마음껏 걷어찼다. 세아에게 걷어차인 사병들은, 엉겨 붙어있던 또 다른 사병들 무리로 떨어져 한 번에 우르르 쓰러졌다. 황족과 귀족들이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창을 통해 사병의 잔해가 쏟아졌다. 바깥은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었으나, 싸우는 소리가 들리는 거로 보아선 황제의 병력이 도착한 듯싶었다.

“포티스가 위험해.”

마침내 초조해진 시스 황제가 축 늘어진 포티스의 뺨을 매만졌다. 파랗게 질린 뺨에 온기라고는 없었다.

커다란 떨림과 함께 창문이 있는 구석의 한쪽 벽이 크게 무너졌다. 그리고 그곳을 통해 먼지를 뒤집어쓰고 분홍빛 로브를 입은 마술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후드로 얼굴을 가려 나이나 외모를 알 수는 없었지만, 키가 작은 그의 손짓에 따라 마치 자석에라도 이끌린 것처럼 사병들이 공중에서 날아다니며 서로 뭉쳐졌다.

“황제 폐하!”

마술사의 뒤에 숨어 있던 엔지니어가 황제를 살피고자 했지만, 황족과 귀족들이 일제히 뚫린 입구로 빠져나가고자 해서 엉망이 되어버렸다.

“맙소사, 밀지 말아요!”

떠밀려 나갈뻔한 엔지니어를 마술사가 손짓 하나로 구출해주자 그는 울상이 되었다.

“황제 폐하가 보이나?”

“중앙에 계십니다.”

“그럼 거기로 가.”

사실 바깥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마술사와 엔지니어가 이렇게 한 지점을 뚫은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사병들은 마법으로 움직이는 것이었는데, 황궁 주변을 빼곡하게 둘러싸고 있었고 일제히 연회장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이토록 강한 마법 언어는 일반적인 마술사가 구사할 수는 없었다. 마술사들은 모두가 마법 언어가 담긴 고대 유적을 발동시킨 것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고대 유적은 대부분 병기로 이용되었다고 추측되고, 아무리 작은 유적이라도 무척이나 강한 마법 언어를 품고 있었다. 지금처럼 작동이 되기만 한다면, 어쩌면 정말로 황제가 죽을 때까지 금빛 깃털을 단 갑옷 인형들이 달려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끝이 없잖아.”

자신의 연구실인 탑의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마술사 윌로그로프가 어이없어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높은 곳에는 세찬 바람이 불었으므로 그의 분홍빛 로브의 소매가 펄럭였다. 연회장이 있는 황궁 주위는 온통 금빛으로 번쩍거렸다. 어디서 계속 전이 되는지 갑옷을 입은 인형의 숫자는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윌로그로프는 결국 아래를 굽어살피며 대략적인 인형의 개수를 측정했다. 그가 한꺼번에 옮길 수 있는 생물의 수는 11개체, 하지만 만약 인형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옮기는 도중 파손돼도 상관이 없었으니, 마치 주먹으로 개미를 움켜쥐듯이 보내버려도 되는 일이었다.

“자, 이제 떠날 차례야.”

윌로그로프가 손을 움켜쥐자 아래쪽에 있던 금빛 갑옷들 사이에 뻥 뚫린 공간이 생겼다. 윌로그로프는 몇 번 더 손을 쥐었다 폈다. 그렇게 점차 갑옷들이 없어지고 있는 동안에도 빈 곳은 다시 채워졌다. 아래에서 흰색 마법의 불꽃이 피어올라 인형들을 날려 보냈다.

“나 참….”

윌로그로프가 혀를 차면서 양손을 들어 올려 손을 서로 가까이 갖다 댔다. 그러자 정원에 있던 엄청난 수의 인형들이 한 번에 사라져버렸다. 정말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틈을 타 황제의 병력과 마술사, 엔지니어들이 연회장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몇 걸음 옮기기도 전에 다시금 금빛 투구들이 번쩍이며 등장했고, 윌로그로프는 몇 번이나 그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버려야 했다. 윌로그로프가 이동시킨 장소는 언젠가 한 번 가본 적 있는 심해의 깊은 바닥이었는데, 옮겨진 인형들은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한편, 마술사에 의해 시스 황제에게로 날아간 엔지니어는 무사히 바닥에 안착한 순간, 벨저가 죽어있는 모습과 피에 젖은 포티스를 안은 시스 황제를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즉시 시스 황제에게로 다가왔다.

“난 다치지 않았어. 포티스를 살펴봐 줘.”

“알겠습니다, 황제 폐하.”

그리고 신속히 포티스를 바닥에 눕히고 맥을 짚어보았다.

“독을 사용했다고 했어.”

“달리 다치신 곳은 없는 것이라면….”

엔지니어는 품에서 도구를 꺼내 여러 가지 약제를 유리병에 넣고 혼합하더니, 그것을 포티스의 입에 흘려 넣었다.

다시금 무언가 폭발하는 진동이 느껴지고 이번엔 야외와 맞닿아있는 연회장의 외벽이 전부 우수수 무너졌다. 황족과 귀족들은 갑자기 앞을 가로막고 있던 벽이 사라진 탓에 먼지와 돌덩이를 뒤집어쓰긴 했지만, 일단 벽이 뚫리자 얼른 밖으로 향했다.

“상태는 어때.”

시스 황제가 초조하게 포티스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엔지니어는 아리송한 얼굴로 식은땀을 흘렸다. 독극물을 마셨을 때 가장 기본적인 조치를 취했지만, 포티스에게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마신 독의 종류를 정확히 특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포티스는 괜찮은가?”

그때 뒤편에서 갑자기 인형이 덮쳐왔는데, 니즈가 재빠르게 검으로 꿰뚫어버린 탓에 눈송이가 엔지니어의 머리로 떨어져 내렸다. 그는 조마조마하게 눈가를 덮은 눈송이를 걷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식을 잃으신 것뿐입니다. 다만….”

통용되는 해독제가 듣지 않는 데다, 죽은 게 아니라 의식이 없다는 점이 신경 쓰였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그가 마신 독의 이름도 알 수 없었고, 여러 가지를 시험해봐야 할 것이다.

바깥에서는 윌로그로프가 질린 얼굴로 계속해서 인형을 어딘가로 이동시키다가 못해 결국 손을 놓아버렸다. 7인의 마술사가 가진 마력의 양은 막대했지만, 단시간에 빠르게 소모되다 보니 역시 지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 짜증 나….”

지상에 있는 작은 분홍빛 로브를 뒤집어쓴 7인의 마술사 중의 한 명인 델타 역시 지긋지긋한 기분으로 인형들에게 불덩이를 날려 보내고 있었다. 오직 살아있지 않은 갑옷에게만 불이 옮겨붙도록 해두었는데, 위쪽에서 자신과 손발이 맞지 않는 마술사가 인형들을 이동시키고 있어서 불이 조금도 확산하지 않았다.

“윌로그로프! 그만둬!”

델타가 발을 구르며 화를 냈지만, 윌로그로프는 지상에 있는 조그마한 분홍빛 얼룩 같은 델타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밖이 소란스러운 사이, 시스 황제는 연회장 내부로 진입한 마술사와 나이츠 오브 디아망의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고자 했다. 하지만 갑옷 인형들이 일제히 시스 황제를 따라왔으므로 그는 이 장소에 남기로 하고, 치료를 위해 포티스만 먼저 옮기기로 했다. 니즈와 마술사 하나가 그 임무를 맡았다.

“맡겨둬. 꼭 무사히 깨어나게 만들 테니까.”

엔지니어도 아니면서 호언장담을 하는 그를 보면서 시스 황제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다시 만날 때 포티스는 분명 정신을 차리고 있을 것이다. 그는 황궁의 엔지니어를 신뢰했다. 시스 황제는 가만히 서서 여전히 자신에게로 끝없이 다가오는 갑옷 인형들을 응시했다. 비록 마력은 없었지만, 지식은 있었기에 그도 이제는 이것이 단순히 마법 언어의 힘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활과 검을 사용하는 병력이 갑옷 인형들을 물리적으로 부수기 시작했다. 마술사의 마법과 함께 좋은 효과를 일으켜, 갑옷 인형이 줄어드는 듯했다.

“이거론 안돼. 고대 유적을 찾아서 없애야지.”

로브로 가린 온몸이 땀에 푹 젖은 마술사 델타가 비트적거리며 앞에 있는 갑옷 인형 더미를 불덩이로 만들었다. 이런 경우는 기본적으로 유적 사용자의 몸을 뒤지는 것이 현명했다. 델타가 작은 다리를 움직여 폴짝폴짝 뛰듯이 시스 황제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황제 폐하.”

“너는….”

“7인의 마술사 델타입니다. 이번 소란의 원인은 무엇인지요?”

옆에서 갑옷 인형을 꿰뚫어 장미 넝쿨이 자라게 만든 파나가 대답을 대신했다.

“반역입니다! 제12 가문의 벨저 디 오르가 벌인 일이죠.”

“그는 죽었어.”

델타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위를 둘러보더니, 벨저의 시체로 다가갔다. 그리고 끙차, 소리를 내면서 엎드려있는 그를 바로 눕혔다. 벨저는 눈을 뜬 채 죽었다. 피가 말라붙은 손에는 마법 언어가 새겨져 있었다. 델타는 그 화려한 필체를 바로 알아보았다.

“이니스….”

고대 유적은 평범한 자가 혼자서 발동시킬 수 있을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당연히 마술사의 협력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자신이 벨저의 조력자였음을 숨기지도 않은 필체의 주인은 바로 7인의 마술사 중의 하나인 이니스였다.

한편, 포티스는 마술사와 동행해 혼란스러운 황궁이 아닌 제1궁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니즈가 아무리 강인한 체력을 가졌다고 해도, 분명 수백 개의 갑옷 인형을 혼자 상대했다면 반드시 지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동행한 마술사 에르다 덕분에 비교적 쉽게 돌파할 수 있었다.

에르다가 투명한 비눗방울을 소환해서 그 안에 자신과 니즈, 포티스를 태운 채 공중에서 이동한 덕분에 제1궁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갑옷 인형들은 황제만을 목표로 하는지, 묘하게도 그들을 먼저 공격하지는 않았다.

제1궁에 들어서자마자 니즈는 브라우니를 찾았다. 만약 연회장에서도 브라우니가 부를 수 있었다면 바깥으로 소식을 좀 더 빠르게 알릴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연회 도중에는 들어오지 못하도록 되어있었다.

“부르셨어요, 니즈님.”

브라우니는 제1궁에서 묵고 있는 니즈의 시중을 들어주었기에, 곧바로 망설임 없이 니즈에게 다가왔다. 니즈는 포티스를 안은 채 성큼성큼 걸으며 말했다.

“비상사태야, 황제가 위험하니 아직 연회장으로 가지 않은 마술사가 있다면 바로 보내줘.”

브라우니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독을 연구하는 전문 엔지니어를 불러줘. 포티스가 위험해.”

그러자 브라우니는 서둘러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모습을 감추었다. 니즈는 포티스를 침실에 데려다 놓고는 초조하게 그의 손을 붙잡아보았다. 점점 온기가 사라졌었는데, 아까 엔지니어의 응급처치 덕분에 상태가 더 나빠지지는 않았는지 손이 미지근했다.

“…….”

에르다는 자신이 할 일이 더는 없자 우두커니 서서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니즈는 포티스가 걱정되어 여전히 긴장 상태였다.

“저기, 마술사. 해독에 관해 아는 마법이 있어?”

“…….”

에르다가 말없이 고개를 젓자, 포티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강력한 마술사라고 해도 그들은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만 강할 따름이었다. 나이츠 오브 디아망의 기사들이 각각 잘 다루는 무기가 있듯이 당연한 일이었는데, 니즈는 마음이 급한 나머지 그런 간단한 사실도 간과하고 있었다.

“니즈님, 전문 엔지니어가 도착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브라우니는 전문 엔지니어 셋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브라우니가 이야기를 전달해 다른 브라우니들 역시 마술사가 있는 곳으로 찾아가는 중이었다. 마술사들은 누군가 자신의 공간에 불쑥 나타나는 걸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브라우니가 순간 이동으로 도달할 수 없어서 직접 찾아가야만 했다.

“그래, 독을 연구한 자가 있어?”

급하게 오느라 이마에 흐른 땀을 씻어내던 전문 엔지니어들이 전부 앞다투어 포티스의 상태를 보려 했다. 브라우니가 현명하게도 식물과 마물 그리고 인공적으로 조합해 만들어진 독을 연구하는 엔지니어들 전부를 데리고 왔던 것이다. 마침 그들은 바깥에서 느껴지는 무시할 수 없는 소란에 화가 나 연구실을 뛰쳐나온 참이었다.

전문 엔지니어 셋은 각각의 방식으로 포티스의 상태를 확인했다. 마치 가수면 같은 상태, 체온이 떨어지고 피를 많이 토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자 전문 엔지니어 중 하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엔지니어의 처치를 받았습니까?”

“해독제를 마시게 한 것 같은데, 별다른 차도는 없어.”

“이브 압생트.”

엔지니어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니즈가 그를 빤히 응시했다. 별로 좋은 징조는 아닌 듯했다.

“어서 치료해줘.”

“안타깝지만 니즈님, 이 독에는 해독제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니즈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는 사이, 델타는 브라우니가 전달한 소식을 듣고 나타난 마술사들에게 황제를 습격하는 갑옷 인형들을 맡겨두고, 이니스가 거주하는 마술사의 탑으로 향하고 있었다. 함께 가는 마술사는 아이나로 마력을 강하게 만드는 보조에 능한 자였다. 가급적 강한 기술을 가진 마술사와 함께하고 싶었지만, 황제를 위험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래도 고대 유적을 막지 못하면, 어차피 결과는 똑같지만 말야.’

윌로그로프가 잘 해주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계단이 빙글빙글 이어진 탑을 숨 가쁘게 올라가 꼭대기 방의 문을 걷어찼다. 안쪽에서 대량의 안개가 새어 나왔고, 델타와 아이나는 독가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로브의 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내부에는 온갖 크고 작은 생명이 없는 인형들이 장식되어있었고, 방 한가운데에 있는 푹신한 소파에 이니스가 잠든 듯이 기대있었다. 그의 창백한 검은 머리카락은 뺨에 달라붙어 있고 마술사의 상징인 분홍빛 로브조차 입고 있지 않은 알몸이었다. 마치 전신이 쇠사슬로 구속된 것 같은 형상이 주변에 투명하게 비치고 있었다.

“이니스.”

의외로 마술사끼리 싸움을 할 때는, 실력행사가 아니라 대화부터 시작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순식간에 둘 중 하나가 죽고 끝이 나는 것이다.

이니스는 여전히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듯 꼼짝 않고 있었는데, 델타와 아이나가 한걸음 떼자마자 초록빛 눈이 반짝 열리더니, 마치 육신을 누군가 억지로 일으킨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델타.”

“고대 유적을 멈춰줘야겠어. 애초에 너 같은 마술사가 왜 이런 저급한 일에 끼어들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설득하는 마당에 이니스의 심경은 거스르지 않는 편이 좋은데도, 델타는 참지 못하고 덧붙이고 말았다. 이니스가 관여한 덕분에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일반적으로는 황제의 최강 기사인 나이츠 오브 디아망이 사태를 제압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마술사 하나가 개입한다면, 그 격차는 하늘과 땅처럼 크게 벌어지고 만다.

“벨저는…. 내가 원하는 걸 갖고 있었어.”

“…….”

델타는 감히 무엇 때문에 이렇게 큰 사건을 만들었냐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마술사들은 모두가 그랬다. 원하는 것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했다. 델타 역시 너무나 갖고 싶은 걸 상대가 갖고 있다면 어쩔 수 없이 응했으리라.

벨저는 정말로 죽는 순간까지 운이 좋은 실론이었다. 비록 처음에 교섭을 시도한 마술사의 마법 언어는 포티스의 강한 의지 덕분에 실패했지만, 두 번째로 찾아낸 마술사가 다름 아닌 7인의 마술사인 이니스였다. 심지어 황제와 맺은 강한 계약까지 깨버렸으니, 이니스는 곧 육체를 잃을 것이다.

“벨저는 죽었어. 계약도 끝났을 테니 이제 그만 고대 유적을 멈춰.”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이니스가 쿡쿡 소리를 내 웃으면서 나신을 일으켰다. 투명한 쇠사슬로 구속되어 움직임이 힘겨워 보였지만, 어쨌든 움직일 수는 있었다.

“어째서?”

“한번 생각해보렴.”

이니스가 팔을 들어 올렸다. 그것이 마법 언어를 발동하는 자세임을 알아챈 델타가 얼른 팔을 앞으로 뻗었다.

“어째서?”

“넌 모르지, 원하는 걸 갖는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말이야.”

이니스의 말은 들은 델타가 입술을 깨물며 마법 언어에 대비하는 순간, 탑이 무너질 듯이 흔들렸다.

그때 니즈는 전문 엔지니어를 추궁하고 있었다.

“해독제가 없다니, 말도 안 돼. 넌 전문 엔지니어잖아?”

니즈가 발끈하며 전문 엔지니어의 푸른색 로브의 멱살을 잡았다.

“뭐든 해봐, 포티스를 죽일 셈이야?”

“우선 손을 놓아주시지요.”

“…미안.”

니즈가 순순히 사과하자 전문 엔지니어는 평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다른 전문 엔지니어와 상의해 도구들을 꺼내놓고 약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벨저가 어떻게 어디서 그런 독을 구한 거야?”

“…황족이라면 손에 넣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겁니다.”

하긴 마술사와 고대 유적까지 발동시킨 것을 보아 벨저는 시스 황제를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 말고는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실론이었던 것 같다.

그 순간, 이니스가 있던 마술사의 탑이 거대한 소리를 내며 무너져내렸다. 델타는 아이나와 함께 돌무더기에 깔리기 전에 겨우 탈출한 참이었다.

‘세상에, 자살을 했어.’

대체 이니스가 얻은 것이 무엇이었길래? 자살까지 감행하며 혼자 간직하고 싶은 것이 있단 말인가? 델타는 이니스를 이해할 수 없다기보다는 그가 소유하게 된 ‘무언가’에 강한 흥미를 느꼈다.

고대 유적을 발동시킨 이니스의 육체와 영혼이 분리됨에 따라 갑옷 인형들의 소환도 중단되었다. 윌로그로프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벌써 셀 수도 없이 인형들을 머나먼 심해로 옮기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옷 인형들의 움직임이 멈추더니 하나둘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져 나뒹굴기 시작했다.

‘겨우 끝났나.’

마술사의 탑에서 아래를 굽어보던 윌로그로프는 로브가 온통 식은땀으로 젖어 있는 것을 깨달았다. 고대 유적을 상대하는 건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생명이 없고 끈질긴 갑옷 인형이 쏟아져나오다니. 윌로그로프는 상황이 정리되면 즉시 심해로 가서 자신이 전송한 갑옷 인형들의 상태를 확인해보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마술사 특유의 탐구심이었다.

‘더군다나 이 정도로 갑옷 인형이 딸려 나올 정도라면 보통 마력으로는 불가능해.’

윌로그로프는 이미 현장에 보이지 않는 7인의 마술사 중의 한 명이 연루되어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흰 불꽃과 비눗방울이 보였으니 적어도 델타와 에르다는 아닐 것이다.

오래간만에 겪는 지독한 마력 소모였다. 곧장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가서 쉬고 싶었지만, 황제와 계약한 마술사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윌로그로프는 지상으로 뛰어내렸다.

“하, 겨우….”

파나가 한 손 검을 떨어트릴 듯이 팔을 아래로 늘어트리며 눈을 깜박였다. 세아도, 다른 나이츠 오브 디아망의 기사들도 모두 지친 상태였다. 조금만 더 시간이 걸렸더라면, 자신들은 버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시스 황제는 나이츠 오브 디아망의 기사들과 마술사, 엔지니어에게 둘러싸여서 단지 보호받고 있을 뿐이었지만, 얼굴은 무척이나 싸늘하게 굳어있었다. 만약 포티스가 잘못되었다면, 벨저는 시스 황제에게 최고의 일격을 가한 셈이었다.

연회장은 이제 한쪽은 무너지고 안쪽은 엉망이 된 잔해만 남아있었다. 먼지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시스 황제가 아무런 말도 없이 몸을 돌려 제1궁으로 가려 했다. 그러자 지상에 닿은 윌로그로프가 허겁지겁 시스 황제의 앞으로 나아가 예를 갖추었다.

“…….”

조금이라도 시간이 지체되는 것이 참을 수 없었지만, 시스 황제는 가까스로 감정을 억눌렀다. 7인의 마술사는 바로 황제의 마술사이며, 그가 지금까지 어딘가에서 황제를 위해 싸웠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황제 폐하.”

시스 황제가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윌로그로프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은 일단락되었습니다. 이제 현장 지휘를 제가 맡아도 되겠습니까?”

사실 시스 황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이곳에 있고 그를 지키려는 목적이었으므로 시스 황제를 중심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시스 황제가 허락하자, 윌로그로프는 시스 황제의 앞에서 물러나 그가 가고 싶은 곳으로 향할 수 있게 해주었다. 파나와 라토가 무기를 바로 쥐고 시스 황제를 호위했다. 그의 발걸음이 닿는 곳은 제1궁이었다.

윌로그로프는 남은 나이츠 오브 디아망의 기사들과 검과 활을 쓰는 일반 병력들, 그리고 마술사, 엔지니어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부터 제가 지휘하겠습니다. 오늘 저희는 고대 유적의 마법 언어의 힘을 상대했습니다. 이제부터 그 잔해를 찾으러 갈 겁니다.”

그 순간 니즈는 심각한 얼굴로 포티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포티스를 응시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전문 엔지니어의 말은 이러했다.

“이브 압생트는 해독제가 있을 수가 없지요, 2가지 이상의 독이 결합하였으니 몇 개를 해독한다 해도 남아있는 독이 목숨을 빼앗을 겁니다.”

그러면서 최대한 많은 독에 통용되는 약을 써보기로 했지만, 전문 엔지니어들은 상황에 약간 회의적이었다. 포티스의 피를 검사한 결과, 벨저가 사용한 이브 압생트는 9가지의 독이 섞여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하나하나의 성분을 알아내다가는 포티스가 죽고 만다. 엔지니어와 니즈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런 상황에서, 시스 황제가 급하게 파나와 라토를 거느린 채 침실로 들어섰다. 그의 특별한 정장 튜니카는 피와 먼지로 엉망이 되어있었지만 개의치 않는 듯했다.

“포티스는?”

“면목이 없어….”

니즈가 입을 열었지만, 시스 황제는 그를 지나쳐 포티스의 곁으로 다가왔다. 원래도 흰 피부였지만 지금은 그저 창백했고, 손 역시 겨우 미지근한 정도였다.

시스 황제가 몸을 휙 돌려 전문 엔지니어에게 답을 요구하는 시선을 보냈다.

“사용된 독은 9가지 조합의 이브 압생트입니다.”

“……. 이브 압생트?”

분명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사실 2가지 이상의 독이 섞이면 무조건 이브 압생트라고 부르니 그럴 만도 했는데, 어딘가 기억의 한구석을 자극하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왜 깨어나지 않았지. 치료는?”

전문 엔지니어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가까스로 1종의 독에 해당되는 해독제를 썼습니다. 하지만 8가지를 전부 알아내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고….”

“브라우니, 7인의 마술사를 불러와.”

그러자 즉시 그 자리에 브라우니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깊이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시스 황제가 막연히 포티스의 손을 쥐고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로 전문 엔지니어에게 말했다.

“마술사가 있으면, 방법이 있을 테지?”

“……. 마법 언어의 힘을 빌리면 저희가 하지 못하는 영역까지 확장할 수 있을 테니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래, 포기하지 마. 반드시 살려내.”

시스 황제가 그대로 포티스의 곁에 머물러 앉자 전문 엔지니어는 다시금 자신들의 지식과 도구로 남은 8가지 독을 알아내기 위해 애를 썼다.

니즈와 파나, 라토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후 한쪽으로 물러났다. 셋도 피로에 지친 상태였다.

“밖은 어때?”

“갑옷들이 갑자기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마술사의 탑이 하나 갑자기 부서져 버렸고….”

“그래…. 그럼 됐어. 어쨌든 지금은 포티스가 걱정이야.”

그들이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 제일 먼저 마술사 아나나스가 제1궁으로 접어들었다. 아나나스의 연구실은 깊은 지하여서, 밖에서 일어나는 소란은 전혀 모르고 있다가 브라우니에게 소식을 듣고 위로 올라와 엉망이 된 지상을 보고 멍한 상태였다.

7인의 마술사의 대부분은 윌로그로프가 지휘하는 대로 무너진 마술사의 탑을 살피러 갔다. 그는 이니스가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번 소동의 원인이 이니스라고 짐작을 했던 것이다. 또한 합류한 델타가 증언을 해주었으므로, 그들은 남은 마술사들을 이끌고 고대 유적을 확보하러 나섰다.

브라우니가 시스 황제의 명령을 전달하러 갔지만, 시스 황제가 바라는 마법 언어를 가진 이는 애초부터 많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도움이 될지 모르니, 7인의 마술사 외의 마술사에게서도 해독에 관해 마법 언어를 가진 자가 있는지 파악해 제1궁으로 보냈고, 엔지니어가 다루는 약과는 전혀 다른 개념의 엘릭시르를 다루는 아나나스가 오게 된 것이다.

아나나스가 침실로 들어섰을 때는 이미 마술사 몇 명이 포티스의 몸에서 독을 뽑아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피를 뽑아요?”

당황한 아나나스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고개를 들이밀자 마술사들이 7인의 마술사인 아나나스에게 예를 갖추었다. 그러자 그가 그런 것은 필요 없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포티스님에게 쓰인 독은 이브 압생트로 마땅히 해독제가….”

“그래도…. 피를 뽑아서 독을 거른 다음 수혈하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나요?”

아나나스의 말에 전문 엔지니어들이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

“저희가 말렸지만, 전혀 들어주시지 않는군요.”

“제가 왔으니까, 어쨌든 그런 무식한 방법은 중단하도록 해요.”

그러자 그들은 소량의 독을 건져낸 채로, 다시금 포티스에게 피를 돌려보내 주었다. 아나나스는 시스 황제에게 예를 갖추고, 곧 신중한 태도로 지금까지의 경과를 전문 엔지니어와 마술사들에게서 전달받았다.

“이브 압생트, 1종은 해독했고 8종이 남아있다는 거군요.”

아나나스가 턱에 손을 얹고 고민하더니 곧 손짓 한 번으로 침실에 자신의 연구실 테이블을 불러왔다. 전문 엔지니어와 나이츠 오브 디아망의 기사들은 놀랐지만, 마술사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일은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테이블에는 유리로 된 둥글거나 네모난 각양각색의 재료가 담긴 병들과 사발, 말린 허브들, 어떤 생물의 뿔과 발톱 같은 것들이 놓여있었다.

“이브 압생트는 무척이나 재수 없는 독이지만, 살아남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죠.”

그리고는 시스 황제가 지켜보는 앞에서 재료들을 골라 사발에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전히 생각에 잠긴 채로 구불거리며 움직이는 마른 허브 다발을 집어넣더니 재료를 으깨면서 다졌다.

“제1궁에 피어 있는 꽃은 장미지요?”

시스 황제 대신 니즈가 대답했다.

“맞아.”

“그렇다면 잎사귀가 홀수인 장미를 구해다 주세요, 지금 당장.”

니즈가 침실 밖으로 사라지자, 아나나스는 여전히 고민하면서 다른 마술사에게도 비슷한 지시를 내렸다.

“마지막으로 황제 폐하의 피가 필요합니다.”

그 말에 내내 조용히 곁을 지키던 브라우니가 시스 황제의 앞을 막고 나섰다.

“피는 안 돼요!”

“필요한 정도만, 아주 조금 쓸 거예요.”

그러면서 아나나스는 시스 황제에게 당신이 선택하라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시스 황제가 브라우니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괜찮아, 포티스를 살릴 수 있다면 얼마든지 써도 좋아.”

“하지만, 주인님….”

황제의 피에는 여신 디 오르에게 받은 권능이 깃들어 있어 악용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자신의 주인이 그렇게 말하고 나선 이상 브라우니도 더는 막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뽑는지 확인하겠어요.”

결국 브라우니의 감시하에, 필요한 양인 7방울만을 채취하는 것을 보고서야 브라우니는 안심했다.

니즈가 장미를 꺾어오고, 마술사들이 신선한 이슬과 정제하지 않은 디아망 조각을 가지고 왔다. 아나나스가 그것들을 받아 사발에 넣어 다시금 으깨고, 걸쭉한 액을 유리병에 옮겨 담자 그것들은 놀랍게도 찰랑이는 투명한 액체로 변했다. 마지막으로 시스 황제의 피를 섞자, 그것은 연보랏빛을 띠었다.

“어떻게 치료를 하는 거지?”

사실 마술사들조차 아나나스가 행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그저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래서 시스 황제가 그렇게 물었을 때, 모두의 시선이 아나나스에게 쏠렸다.

아나나스가 유리병을 한번 흔들더니 포티스의 머리맡에 두었다. 그러자 일순 액체가 초록색으로 일렁이나 싶더니 다시금 차분한 연보라색으로 돌아갔다.

“포티스님 스스로 독을 이기게 만드는 것이에요. 이브 압생트에 섞여 있는 8가지 독을 해독하게 만드는 건 함정이니까요.”

그러면서 그것을 해내려면 긴 시간을 소모하게 되고 결국 포티스는 생명을 잃는다고 설명해주었다. 몸속의 피에서 독을 걸러 다시 집어넣는 것 역시, 지금처럼 8가지의 독이 요동치는 상태에서는 적합한 방식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해 시스 황제가 재차 물으려는 찰나, 포티스의 손끝이 희미하게 움직였다. 그것을 알아챈 시스 황제가 그의 손을 잡자, 분명 미지근했을 텐데 조금 더 따뜻해져 있었다.

“전 황제 폐하를 모시는 마술사인걸요, 믿어주시면 좋겠어요.”

아나나스가 어깨를 펴고 말하자, 시스 황제가 포티스에게서 아나나스로 시선을 옮겨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직 끝은 아닙니다. 독에는 이길 수도, 질 수도 있는 선택지가 있으니까요. 포티스님이 이겨내도록 여신 디 오르께 기도를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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