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포티스가 이브 압생트의 독을 마신 날부터 14일이 지났다. 그동안 시스 황제는 포티스에게 최면을 걸었던 마술사를 찾아내 사형을 시키고, 영혼만 남은 이니스가 영원히 디 오르에는 나타날 수 없도록 조처를 했다.
장미가 만개하는 계절이었다. 무너진 연회장은 복구되었고, 부서진 마술사의 탑의 잔해는 사건을 잊지 않기 위해 남겨두었다. 7인의 마술사 중에서 남은 6인의 마술사가 더욱 강한 계약으로 황제와 묶인 것은 물론이었다.
시스 황제는 정사를 볼 때를 제외하면 대부분 포티스의 곁에서 지냈다. 맑은 공기가 들어오는 침실에서, 포티스는 마치 잠을 자는 것 같은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아나나스가 놓아둔 유리병에 들어있던 연보랏빛 액체는 점점 초록색에 가까워지는 듯했고, 포티스의 호흡도 평온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깨어나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 아나나스도 정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다만 자신이 행한 방식은 시간이 걸린다, 그렇게만 말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날 시스 황제가 포티스의 곁에 이터너티의 꽃다발을 가져다 놓았을 때도 여전히 포티스는 의식이 없었다.
포티스는 긴 꿈을 꾸고 있었고 흐릿한 안개에서 이따금 누군가 자신을 부른다고 생각했다.
“…포티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덧없는 신기루처럼 상대의 모습은 사라지고 말았다.
‘누굴까, 저분은….’
포티스는 혹시라도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어서, 온종일 초록빛인 꿈속의 세계를 헤매고 다녔다.
시스 황제가 침실에서 물끄러미 포티스를 내려다보고, 반지를 낀 포티스의 손에 입을 맞추고 있던 그 순간에 디 오르에 있는 많은 이들이 포티스를 떠올리고 있었다.
우선 포티스 덕분에 목숨과 지위를 부지했던 에스파렌스는 포티스가 크게 다쳤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무척이나 분해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황제 대신에 독배를 들었다는 것까지 알게 되어서는 잠시 말을 잃기도 했다.
‘포티스, 꼭 살아서…. 네가 그토록 원하던 황제와 행복해져라.’
포티스에 대한 이루지 못한 사랑을 씁쓸하게 전하고 있었다.
라케티카는 황제의 명에 따라 실론들이 제2기관을 출입하지 못하게 되면서부터 황족들의 작은 티 파티에 초대를 받아 그들을 즐겁게 해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황궁에서 한가롭게 티 파티를 즐길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소규모의 티 파티마저 열리지 않는 건 아니었던 것이다. 당연히 황족들의 화제는 포티스였다.
“황제께서 그토록 극진히 여기시다니.”
“새삼 사랑이란 대단한 가치라는 걸 깨닫는군요.”
벨저가 설득했던 황족들조차 시스 황제가 아우라와 미츠, 포티스의 아버지를 다시 황궁으로 불러들인 것을 보면서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라케티카는 황족들을 위해 시원한 차를 만들면서 포티스를 떠올렸다. 그는 특별한 뮤였고, 황제의 파트너가 되는 것이 마땅했다.
‘당신이 행복하길 바랍니다.’
무어와 헤카, 그리고 잔느, 리비는 제2기관에서의 교육이 중지되었기에 빈 시간을 서로 만나 건전한 모임을 하는 데에 썼다. 오늘은 무어의 저택에서 ‘브리슈’라고 불리우는 공을 가지고 하는 스포츠를 즐기고 있었는데 그들 역시 지금 디 오르의 열띤 화제인 포티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황제가 그를 선택한 건 당연한 일이네.”
무어가 그렇게 말하면서 풀숲에 떨어진 공을 손수 집어 오자 산뜻해 보이는 복장을 한 잔느가 미소를 보이면서 긴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얼굴이 무척 귀엽긴 하죠.”
무어가 잔느에게 공을 건네자, 정원의 파라솔 아래에 앉아서 낮술을 마시던 헤카가 잔에서 입을 떼어냈다.
“보는 눈이 있는 거지, 바보인 줄 알았더니.”
그는 포티스가 황제의 파트너가 되었건 아니건 상관없었다. 어쨌든 기회란 기다리는 자에게 다가오기 마련이었다.
맞은 편에 앉아있던 리비가 책장을 팔락 팔락 넘기면서 헤카의 말을 받았다.
“그와 다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블라우의 작업실인 키친이 제2기관에서 황궁으로 이동되어서 키와 엘도 블라우를 따랐다. 엘은 그저 포티스가 황제를 사로잡은 일에 대해 놀라워할 뿐이었으나, 키가 부탁하면 포티스의 안위를 함께 걱정해주었다. 그날 오후에도 키와 엘은 여신 디 오르에게 포티스가 무사히 깨어나게 해달라고 무릎을 꿇고 조용히 기도하고 있었다.
‘포티스님이 무사하길.’
옵시디언에게는 포티스가 황제에게 건네야 할 잔을 대신 마셔버린 장면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았다. 자신의 저택에서 시간을 보내던 그는 포티스에게 보내기 위해 정원에서 신선한 꽃을 꺾어 풍성한 다발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미카엘과 운드는 제1궁의 앞에까지 도달해서 브라우니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포티스를 직접 만날 수는 없게 되어있는데도, 미카엘은 매일 같이 그가 깨어났는지 보러 오곤 했다. 운드 역시 미카엘을 따라온 것뿐이었지만, 포티스가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왜 들어갈 수 없는데?”
브라우니가 쩔쩔매면서 손을 앞으로 모았다.
“지금은 황제 폐하와 함께 계십니다.”
“그럼 나중에 다시 오면 돼?”
“포티스님을 만나실 순 없어요….”
결국 미카엘의 분노가 폭발하고야 말았다. 운드가 얼른 미카엘의 어깨를 붙잡았지만, 그는 거칠게 손을 떼어냈다.
“대체 언제쯤 깨어날 셈인지 직접 물어야겠어, 보고 싶다고!”
미카엘의 목소리가 제1궁의 입구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동안, 침실 입구에서 경비를 서던 니즈는 또 그 황족이 찾아온 것인가, 하고 귀를 매만졌다. 다짜고짜 포티스를 만나게 해달라고 하는 녀석이었는데, 당연히 면회 같은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얼핏 들린 보고 싶다는 말에는 니즈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포포스, 어서 깨어나서 다시 웃는 얼굴을 보여줘.’
그렇지만 모든 이들의 바람이 무색하게도 포티스는 여전히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시야는 점점 초록색에서 옅은 보랏빛으로 바뀌었다. 내내 앞으로 걷기만 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멀리 사각형으로 시원하게 빛나는 어느 여름날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포티스는 반가운 마음에 얼른 달려갔다. 포티스가 발을 내딛자마자 완전히 그 풍경 속에 뛰어들게 되어, 순식간에 서 있는 장소가 황궁으로 바뀌었다. 포티스는 눈을 깜박였다. 바로 눈앞에 어린 시절의 자신이 조마조마한 얼굴로 기둥 뒤에 숨어 있었다.
“…독을 쓰면 깔끔하게 죽일 수 있어. 누가 했는지도 알기 어렵고.”
“분명 시스가 처음 잔을 들겠지.”
그날은 황궁 파티 겸 시스 황자의 생일이었다. 따로 생일 파티를 열 만큼 계승권이 높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파티가 열린 김에 축하를 해주려는 분위기였다.
‘그래, 기억이 나….’
그들은 지금은 잊혀진 황자들로, 당시에는 시스보다 높은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들의 상대도 되지 않는 어린 시스에게 독을 먹이려는 것은 그저 잔혹한 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어린 동물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개체가 많이 줄어드는 것처럼, 황궁에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다. 갓 태어난 아이는 신성하기에 건드리지 않지만, 나이가 들면서 어느새 알던 황족들이 주위에서 하나둘 사라져가는 건 당연했다. 그렇게 해서 살아남는 자가 황제가 되는 것이다.
포티스가 아무리 애를 써도 그들의 얼굴은 어두운 그림자가 내린 것처럼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말과 행동거지를 보아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아이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술병에 초록빛 이브 압생트를 넣어 병을 잘 흔들어 섞어놓고는, 마치 즐거운 일이라도 벌인 것처럼 웃으며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황제가 그 술을 먼저 마실지 모르는데도, 그들은 시스 황자를 죽여버릴 생각뿐이었다.
어린 포티스가 잠시 완전히 몸을 숨겼다가 연회장 안으로 조심조심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두려운 것처럼 술병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 내가…. 그랬구나.”
포티스가 멍하니 중얼거림과 동시에, 그가 있던 공간과 시야가 변했다. 이번에는 실론과 파즈가 가득 들어찬 황궁 파티의 연회장이었다. 어린 포티스는 아버지의 손을 잡은 채 연신 술병이 놓여있는 회장의 중앙을 돌아볼 뿐이었다.
마침내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황제와 그 바로 곁에 조금 지루한 듯한 얼굴의 시스 황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당시에는 황제가 되는 것에 관심이 없었고, 계승권 싸움을 질색하는 상태였으며 차기 황제로 유력한 황자와도 그럭저럭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독배를 받을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날따라 황제는, 어린 시스가 생일이라는 것에 마음이 쓰여 얌전한 이 황자에게 살갑게 대해주어야겠다고 느꼈던 참이었다. 그래서 직접 그의 손을 이끌고, 연회장 중앙에 있는 테이블로 다가와 잔에 술을 가득 따라주었다.
“오늘은 시스 황자의 생일이오. 모두 마음껏 축하하고 즐기시오.”
말이 끝나자마자 황제가 시스 황자에게 잔을 주려고 팔을 천천히 내렸다. 어린 포티스는 그 모습을 보면서, 결국 아버지의 손을 뿌리치고 잔을 향해 다가가고 만다.
‘마시지 마세요, 마시면 안 돼!’
그렇게 말을 하면 좋았을 텐데, 마음이 급한 나머지 황제의 손에서 잔을 빼앗고 그대로 자신이 마시고 말았다. 무조건 시스 황자가 독을 마시지 않게 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포티스의 아버지, 모인 황족과 귀족들 그리고 황제와 시스 황자가 당황한 것도 순간일 뿐이었다. 포티스는 입을 열더니 붉은 피를 울컥 토해냈다. 그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피로 물든 자신의 손을 보며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이게 무슨 일인가…!”
황제가 당황한 채 시스 황자를 자신의 등 뒤로 숨겼지만, 포티스가 자신 대신 잔을 받고, 쓰러지는 모습을 시스 황자는 전부 보았다.
연회장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포티스는 쓰러졌는데도 여전히 붉은 피를 간헐적으로 토해냈다. 순식간에 온몸이 땀으로 젖어 들었다. 아버지가 포티스를 안아 들고 엔지니어를 불러줄 것을 외치고 있었다.
“황제 폐하 대신 독배를 마셨어….”
그 모습을 입구에서 지켜보던 포티스가 중얼거리자 다시금 풍경과 시야가 바뀌었다. 이번에는 황궁 안에 있는 어떤 방이었고, 침대에 누워있는 어린 자신이 보였다. 곁에는 아버지와 시스 황자가 함께 있었다.
술에 들어있던 독은 포티스처럼 어린아이가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목격자와 각종 증거들이 있었기에 독살을 준비했던 황자들은 바로 붙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어린아이의 손으로 마구잡이로 제조한 이브 압생트에는 108가지의 독이 포함되어있었고, 도저히 포티스를 살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어째서 이 애가 내 술을 마신 거야?”
“그건…. 아마도, 황자님이 마시지 못하게 하려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어린 나이다 보니….”
쏟거나 버린다고 생각은 하지 못하고 마셔버린 모양이라고, 슬픔을 꾹 억누른 목소리로 말을 이은 아버지는 시스 황자에게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그의 방문을 거절하지 않았다.
‘날 위해서….’
시스 황자가 희생하는 사랑을 처음으로 깨닫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모두들 포티스가 살아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전문 엔지니어가 정성껏 돌보고 있었지만, 해독은 아주 느리게 진행되었을 뿐이고, 독이 퍼지는 속도가 빨랐으니 결국은 죽게 될 운명이었다.
“시스 황자님, 잠시 포티스를 지켜봐 주십시오.”
포티스의 아버지가 전문 엔지니어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방 한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무리 황자라고는 하나 어린아이였으니, 포티스의 예후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공공연히 크게 나눌 만큼 아버지는 어리석지 않았다.
시스 황자는 포티스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면서 그의 손을 가만히 쥐어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결심하며 그의 곁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여신 디 오르여, 만약 그를 살려주신다면, 평생 그를 좋아하겠어요.’
신에게 무엇을 하겠다, 자신의 무엇을 내놓겠다, 라는 식의 기도가 아니라는 점에서 어린아이다운 내용이었지만, 시스 황자는 매일 시간이 날 때마다 포티스를 찾아와 기도를 했다. 그리고 그 바람은 지나치게 순수했기에 여신 디 오르에게 닿았다. 포티스가 기나긴 가사 상태에서 깨어난 것이다.
깨어나던 순간, 시스 황자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하지만 브라우니에게 소식을 전해 듣고는, 뺨을 희미하게 붉힐 정도로 기뻐했다. 그 사실은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반드시 황제가 되어 그와 함께하겠다고. 포티스가 실론이라는 사실은 그를 결코 절망하게 만들지 않았다.
이러한 일들을 포티스는 이제 전부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 포티스는 어린 시절의 자신이 깨어나는 모습과 굳은 결심을 하는 시스 황자를 보면서 입가에 손을 갖다 댔다. 자신은 신의 축복을 받았던 것이다.
‘내 생명은 황제 폐하의 것이었어.’
자신이 그를 살렸지만, 그 역시 자신을 구해주었다. 포티스는 이제야 자신이 내내 꿈속에서 찾아다녔던 상대가 누군지 깨달았다.
‘황제 폐하.’
그걸 알아차린 동시에 현실에서의 포티스의 손끝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크게 숨을 들이쉬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처음에는 눈 부신 빛 덕분에 사물이 잘 분간되지 않았지만, 이내 이곳이 익숙한 침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
“포티스.”
얼마간 눈을 깜박이고 있었더니 바로 곁에서 무척이나 그리운 목소리가 들렸다. 침대 주변은 꽃다발이 가득해서 포티스는 꼭 꽃에 파묻혀있는 기분이 들었다. 향도 무척이나 좋았다. 포티스가 무어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가 포티스를 와락 끌어안았다.
“다행이야, 깨어나서.”
포티스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너무 좋아하는 분…. 드디어 찾았어요.”
내내 꿈에서 시스 황제를 찾아다닌 탓에 그런 말을 하게 된 것이었지만, 시스 황제는 의아해하는 기색 없이 그저 웃어주었다.
“날 찾았어?”
“네에, 계속, 계속….”
“나는 널 기다렸어.”
“보고 싶었는데….”
포티스가 행복에 겨운 채 미소를 띠고 눈을 깜박이면서 시스 황제를 마주 안았다.
“정말 좋아해요….”
그렇게 중얼거리면 시스 황제는 마치 포티스의 존재를 확인하듯이, 그의 뺨에 뺨을 맞대면서 생생한 감촉을 느꼈다.
침실 밖을 지키고 있던 니즈가 안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고는 눈을 빛내며 기뻐했다. 그러나 이전의 그와는 다르게 무작정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조용히 입구에서 물러났다. 두 사람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 즐거운 소식을 전하기 위해 나이츠 오브 디아망의 기사들이 묵는 별관으로 조금 천천히 걷다가, 이내 날 듯이 달려갔다.
그 사이 시스 황제와 포티스는 서로에게 이끌려서 당연하다는 듯이 입맞춤을 나누고 있었다. 시스 황제의 손이 포티스의 가운 사이를 파고들었고, 포티스는 그의 손길을 느끼면서 크게 숨을 내쉬었다. 꽃향기가 가득한 침실에 포티스의 가쁜 숨이 더해졌다.
“저…. 이제 다 기억해요.”
“…….”
시스 황제는 가만히 포티스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포티스는 황금빛 눈이 가늘어지도록 미소를 보이면서 그의 옷깃을 쥐었다.
“제가 황제 폐하 대신….”
“독을 마셨지.”
“이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죠….”
가운의 끈을 풀면서 시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와 같은 이브 압생트를 마신 것이 어떠한 작용을 했는지, 아니면 아나나스가 만든 엘릭시르의 효과인지 몰라도 포티스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포함하여 모든 기억을 되찾은 상태였다.
“그걸 왜 잊어버렸는지 모르겠어요. 무척이나 큰 사건이었을 텐데….”
“충격을 받아서 그랬겠지. 네가 깨어난 것부터가 큰 기적이었으니, 아무도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았어.”
포티스는 이제야 아버지가 말했던 시스 황제가 자신을 잊지 않았다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가운이 완전히 옆으로 젖혀지고, 포티스의 흰 나신이 드러났다. 시스 황제의 손이 분홍빛 유두를 스치고, 볼록한 배로 내려가 디아망 마크를 살며시 감싸며 애무했다. 그것만으로도 포티스의 다리가 떨리며 호흡이 가빠졌다.
“황제 폐하….”
“그냥 시스라고 불러.”
포티스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의 이름을 천천히 발음해보았다.
“시스….”
“불렀어?”
“이대로 영원히 곁에 있어 주세요.”
“약속할게.”
둘의 입술이 다시금 겹쳐졌다. 혼미하게 그의 혀를 받아들이던 포티스는 입술이 떨어지자 그의 등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확인하듯 시스 황제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 다른 사람하고는 섹스하고 싶지 않아요. 시스하고만.”
“나 역시 너의 그런 모습은 이제 원하지 않아.”
마침내 그가 포티스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포티스는 기쁜 나머지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사랑해, 포티스.”
“저도, 너무너무 사랑해요.”
이제 더는 대화가 필요치 않았다. 포티스는 적극적으로 시스 황제의 성기를 받아들이기 위해 다리를 벌렸고, 시스 황제 역시 포티스의 한쪽 무릎을 세우게 하고 입구를 엄지로 살짝 늘여 잡은 뒤 붉게 발기된 성기를 삽입했다.
“아아….”
성기가 내벽을 채우며 안을 가르고 들어왔다. 포티스는 심호흡을 해서 몸의 긴장이 풀어지길 바랐지만, 그의 것이 너무 큰 탓에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금세 체액이 배어 나와 안이 미끌미끌해졌고, 시스 황제가 두어 번 드나드는 사이 질척한 소리가 나게 되었다.
“아, 응….”
몸이 안달 나면서 녹아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포티스가 그의 움직임에 맞추어 허리를 흔들자 시스 황제는 포티스의 양다리를 어깨에 걸쳐서 연결부가 바싹 치켜 들리도록 했다. 분홍빛 입구가 전부 드러나고, 포티스는 부끄러운 나머지 귀까지 새빨갛게 되고 말았다. 흥분했다는 증거인 체액이 성기를 문 입구에서 거품이 섞인 채 흘러나와 다리 사이가 온통 번들번들했다. 시스 황제는 그것을 힐끗 보고 포티스를 향해 희미하게 미소를 보였다.
“기분 좋아?”
“좋…. 좋아요…. 앗!”
포티스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시스 황제의 성기가 단숨에 뿌리까지 들어왔다. 그의 고환이 연결부에 세차게 부딪히면서 퍽, 소리가 났다.
“꺄아…!”
포티스가 허리를 크게 튕겼다. 성기가 안쪽의 휘어진 부분을 자극해 크게 한번 찔린 것만으로도 허리가 저릿저릿할 만큼의 쾌감이 올라오고, 눈물이 고였다. 그리고 그대로 거칠고 빠르게 드나들자, 포티스는 시스 황제에게 바싹 매달렸다.
“하아, 윽…. 사, 랑해요…!”
젖은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포티스는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동시에 안고 있는 시스 황제의 몸 역시 기분 좋은 땀으로 젖어 든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아…. 행복해.’
너무 좋아해요, 유일한 저의 황제 폐하.
마치 포티스의 마음을 눈치챈 것처럼 시스 황제가 포티스의 손을 자신의 뺨에 갖다 대고 입을 맞추었다. 그의 연보랏빛 눈동자가 가늘어지면서 미소를 보였다.
“사랑해, 포티스.”
포티스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디 오르 전체가 끓어올랐다. 포티스가 어린 시절 시스 황제 대신 독배를 들었다는 이야기가 다시 조명되면서, 시스 황제에 대한 포티스의 순수한 애정이 화제가 되었다. 더군다나 아우라와 미츠, 그리고 포티스의 아버지까지 샤토드네쥬에서 돌아와 얼굴을 비춘 상태였으므로 시스 황제가 뮤에 푹 빠져서 정사는 잊고 지내고, 파트너인 파즈를 내쳤다는 소문도 순식간에 잠식되었다. 포티스가 아우라에게 곤란한 듯이 벨저의 소식을 전했을 때, 아우라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무 이유 없이 상대를 미워할 수 있는 타입이죠, 죽어서 오히려 행복할걸요.”
사실 벨저가 아우라에게 해준 것도 없긴 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자신의 자식에게까지 이러한 평가를 받았으니 벨저의 죽음은 보람 없이 마무리되었다.
포티스의 건강을 위해 공식적으로 파트너가 되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발표만 하고, 황궁 파티는 미뤄지게 되었다. 대신 안달이 나 있는 젊은 실론과 파즈들을 위해 대연회가 성대하게 치러졌다. 포티스는 제1궁에 머물며, 지인과 친구들을 맞이하며 건강을 회복했다. 사실 아나나스의 엘릭시르 덕분에 포티스의 몸 안에 독은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간 아이를 받아들인 몸으로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고 시스 황제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서, 포티스는 잠자코 늦여름과 가을을 느긋하게 쉬면서 보냈다. 그러나 겨울이 오고 공기가 시원해져 배가 부를 만큼 불러오자 어쩐지 포레스트 영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겨울 아침에 들리는 새소리, 눈에 덮인 뾰족한 나무들, 차가운 얼음 속에서도 피어나는 온갖 종류의 식물들이 포티스의 향수를 자극했다.
“포레스트 영지에서 겨울을 나고 싶다고?”
그날도 어김없이 침실에서 뜨거운 섹스를 나눈 뒤 시스 황제의 가슴께에 기댄 포티스가 망설이며 조그맣게 말을 꺼낸 참이었다.
“네에, 그리워서….”
사실 포레스트 영지에는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이 지내고 있었다. 아우라를 황궁으로 돌아오게 하려고 했지만, 아우라와 미츠 쪽에서 정중히 거절했다. 벨저의 반역으로 인해 제12 가문은 적출당한 상태기도 했고, 아우라는 일을 잘하는 브라우니 몇만 있으면 황궁 밖에서 사는 편이 좋다고 했던 것이다.
시스 황제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과 포레스트 영지의 거리는 꽤 되었지만, 그를 보내주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시스 황제는 이제 확연히 불러온 포티스의 배에 손을 얹으면서 다정하게 포티스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래, 황궁보다는 그쪽이 더 편할 테니까.”
포티스가 밝은 미소를 보이면서 시스 황제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허락해주셔서.”
포티스는 그해 겨울을 포레스트 영지에서 보냈다. 일주일에 한 번은 말을 타고 달려온 시스 황제와 반가운 재회를 했다. 시스 황제가 오는 날이면 포티스가 온몸을 꽁꽁 싸매고 저녁나절부터 밖에서 기다리곤 했다. 그리고 그의 모습이 나타나면 추위로 붉어진 뺨을 더욱 붉히면서 말에서 내리는 시스 황제를 안았다. 해가 완전히 저물기도 전에 포레스트 영지에 눈이 쌓이는 도중 뜨거운 정사를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