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아이를 가져야 합니다 외전
외전
아름다운 겨울날이었다. 샤토드네쥬만큼은 아니지만, 황궁이 있는 수도에도 눈이 내렸다. 올해 시스 디 오르는 31세였다.
“휴가가 필요해.”
눈을 그다지 좋아하는 건 아니었는데, 마침 포티스가 황궁에 와있었으므로 시스는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는 자신의 아이를 받아들인 포티스를 반려로 맞이한 직후부터 왕좌를 굳건하게 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그가 포티스를 갖기 위해 황제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은 일들을 한 것은 사실이었고, 아우라의 아버지인 벨저 디 오르가 휩쓸고 간 귀찮은 뒤처리, 마술사와의 계약에 더욱 제약을 두는 등 시간을 들여 해야 할 일이 많았다.
“후우.”
결국 시스 황제가 둥글게 말린 종이 뭉치를 내려놓으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벽난로에 불을 활활 지핀 데다 내내 난방이 잘 되는 실내에만 있었더니 갑갑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털 망토를 몸에 가볍게 두르고 집무실을 나섰다. 긴 복도를 지나 황궁 입구로 빠져나가자 허공에서 눈이 팔랑팔랑 떨어져 내리는 풍경과 서늘한 바람이 뺨에 닿았다.
‘이 근처에 있겠다고 했는데.’
숲으로 둘러싸인 황궁의 정원은 무척 넓었다. 만약 포티스가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브라우니에게 포티스를 찾아달라고 지시하는 편이 빠를 것이다. 그런데 쌓인 눈을 밟자마자 어디선가 익숙하고 큰 목소리가 들렸다.
“아샤! 이거 봐라!”
“와아아!”
나이츠 오브 디아망의 기사인 니즈 하트가 설산의 호랑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눈이 오는 날씨에도 기운차게 커다란 눈덩이를 굴리고 있었다. 그리고 곁에는 감기에 걸릴까 봐 털옷을 겹겹이 입힌 탓에 몸이 통통해진 어린 아샤가 잘 뭉쳐지지 않는 눈을 손에 쥐고 그저 주물럭거렸다.
“몸통은 이 정도면 될까~?”
“더 크게…. 더 크게…!”
뺨과 코가 발갛게 물든 아샤가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 아마도 눈사람을 만드는 모양이었다.
“니즈님, 정말 크게 만드셨네요.”
뒤이어 들려온 밝은 목소리에 시스 황제는 걸음을 멈추었다. 셋이 함께 눈밭에서 흥겨워하고 있었다. 아마도 아샤와 놀아준다는 명목이겠지만, 니즈나 포티스 역시 상당히 즐거워 보였다.
“이것보다 더 크게 만들 수 있다고.”
니즈가 자신만만하게 말하면서 눈덩이를 굴리려다 말고 갑자기 휙 고개를 돌렸다. 시스는 그저 조용히 서 있었을 뿐인데, 그는 익숙한 기척을 알아차렸다.
“어라, 황제. 언제 온 거야?”
“…방금.”
시스 황제의 시선은 포티스에게로 향해있었다.
“시스…!”
포티스가 마치 꽃이 활짝 피는 것처럼 발그레한 얼굴로 시스 황제에게 미소를 보였다. 그는 아샤만큼은 아니라도 제법 단단히 추위 대책을 하고 있었는데, 귀까지 덮는 솜 모자와 두툼한 망토 덕분에 동글동글해 보였다. 포티스가 서둘러 시스 황제에게 다가왔다.
“순식간에 눈이 쌓였어요, 저희는 아샤하고 놀아주려고….”
꼭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고 싶었는데, 자리에 니즈가 있어서 시스 황제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황제는 바쁘니까 말이지.”
“…별로 바쁘진 않아.”
“테이블 한가득 서류를 쌓아두고 있던데~”
시스 황제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니즈는 힘차게 눈덩이를 더욱 크게 굴리며 멀어졌다. 아샤가 시스 황제와 눈덩이를 번갈아 보면서 고민하다가 마치 강아지처럼 니즈를 쫓아 달려갔다.
“저기, 그래서…. 눈이 오기 시작했을 때 집무실에 갔지만, 너무 바빠 보이셔서….”
“그래도 불렀으면 나왔을 텐데.”
특별히 니즈를 질투하는 건 아니라고 여기고 싶었는데, 그다지 쉽지 않았다. 시스 황제의 기분은 아까보다 더 차분해진 상태였다.
“…그럴 걸 그랬어요, 미안해요.”
그러나 포티스가 황금빛 눈을 다정하게 반짝이며 시스 황제가 곁에 있어서 너무나도 행복하다는 태도로 옷자락을 살짝 움켜쥐자 약간은 누그러졌다.
‘역시 쉬고 싶어. 둘이서만 편하게.’
시스 황제가 포티스의 허리를 끌어당겨 자신 쪽으로 밀착시켰다. 포티스는 웃는 얼굴로 눈을 감으면서 가만히 안겨 왔다. 눈앞에 있는 포티스를 얻고자 노력했기에 후회는 없었고, 책임감도 갖고 있는 상태였지만 그래도 역시 휴가만은 아쉬웠다. 설마 몇 년 동안 이렇게 바쁘게 지낼 줄은 예상하지도 못했다. 물론 포티스가 포레스트 영지에 머물고 있을 때는 그를 만나러 짧게 황궁을 떠나기도 했지만 그건 여행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시스…. 조금 피로해 보이시는데 안으로 들어갈까요?”
포티스가 손에서 두툼한 장갑을 벗더니 맨손을 시스의 뺨에 갖다 댔다. 따뜻한 체온이 포티스의 손에서 전해져와서 시스 황제는 무심코 그의 손등을 겹쳐 잡았다.
“그러고 싶진 않아.”
“그럼 제 장갑이라도 끼세요. 털 망토만 두르시다니, 실내랑 온도 차가 심한걸요.”
“…괜찮아.”
하지만 포티스가 장갑을 벗어들고 시스 황제의 손에 끼우려고 하는 바람에 시스 황제는 그에게서 장갑을 빼앗아 든 다음 도로 포티스의 손에 끼워 주었다.
앞쪽에서 짧은 환호가 들렸다. 니즈가 안 그래도 큼직했던 눈덩이를 더욱 크게 만든 모양이었다. 포티스의 시선이 잠시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향하자 시스 황제는 포티스의 뺨을 쥐고 입맞춤했다. 순식간의 포티스의 온 신경이 맞닿은 입술과 몸에 쏠렸고, 추위 탓에 약간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던 뺨이 더욱 붉어졌다.
“후우….”
입술을 떼어내자 입김이 둥글게 퍼져나갔다. 포티스는 약간 휘청이면서 시스 황제에게 몸을 기댔다. 그는 지금 자신의 파트너인 시스 황제에게 강한 끌림을 느꼈고, 시스 황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곳은 황궁 안이었고, 포티스는 더 이상 뮤가 아니었으므로 정원에서 아무렇게나 취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 시스 황제는 포티스의 흐트러지거나 흥분한 모습을 그다지 남에게 보이는 걸 달가워하지도 않았다.
만약 둘만의 낙원이 있다면, 깨어나서 입 맞추고 섹스를 해도 상관없을 텐데. 물론 그래도 포티스는 상당히 부끄럼을 타겠지만, 그런 점이 포티스의 매력이었다.
‘케이지드에슈?’
포티스와의 추억이 가득한 장소였다. 그러나 그곳은 유래가 그다지 좋지 않았고, 어차피 황궁에 속해 있기에 완전히 자유롭지도 않을 것 같았다. 시도 때도 없이 귀족이나 신하들이 자신을 찾을 게 뻔했다. 시스 황제는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서 오로지 포티스와 어린 아샤에게만 집중하고 싶었다. 하지만 한 국가의 황제가 자유 시민처럼 평안하게, 조촐하고 작은 집에서 인생을 향유하며 지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들과 황제의 삶은 엄연히 달랐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시스 황제는 휴가에 대한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포포스!”
니즈가 아샤를 번쩍 안아 들고 손을 흔들었다. 둘 앞에는 커다란 눈사람이 세워져 있었는데 거의 시스만 한 크기인 듯싶었다.
“마마! 파파!”
아샤 역시 웃으면서 손나팔을 하고 시스 황제와 포티스를 불렀다. 시스 황제가 포티스의 허리에 팔을 휘감은 채 함께 걸어가려고 했을 때였다.
“주인님, 주인님!”
브라우니가 추운 날씨용 솜옷을 갖춰 입은 채로 총총 나타났다.
“무슨 일이지?”
“귀족들이 황제 폐하를 알현하기 위해 홀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오늘 그런 일정이 있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가능하다면, 오늘 꼭 만나 주십사하고 있습니다.”
브라우니는 고개를 숙여 공손히 말하고는 시스 황제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라도 쉴 시간이 있으면 좋으련만. 시스 황제가 신속하게 결단을 내리고 아쉬운 듯 포티스에게서 몸을 떼어냈다.
“아….”
포티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리둥절한 채로 시스 황제를 응시했다. 시스 황제가 포티스의 솜 모자를 쓴 머리에 손을 얹어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
“일이 생겼어. 놀고 있도록 해.”
“시스….”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는 포티스를 두고 등을 돌리자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시스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포티스가 거리를 좁히며 다가오더니 시스 황제에게 살짝 기대면서 팔에 뺨을 문질렀다.
“끝나시면 같이 시간을 보내요. 네? 기다리고 있을게요.”
“좋아. 약속할게.”
시스 황제가 포티스에게 부드러운 눈길을 보내고는 옅게 웃었다. 포티스는 시스 황제의 모습이 제1궁 안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니즈와 아샤에게로 향했다.
“응? 황제는?”
니즈는 아주 가뿐하게 아샤를 무등 태운 채였다. 눈밭에서 4살짜리 아이와 놀아주는 데다 끊임없이 뛰어다니는데도 전혀 피곤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기운이 넘쳤다.
“일이 생기신 모양이에요.”
“아하~”
니즈가 히죽 웃었다. 아샤는 눈을 깜박이며 포티스에게로 팔을 뻗었다.
“안 돼. 요 꼬마 돼지야. 넌 무거워서 포포스가 들어주지 못한다고?”
“파파가 없어….”
아샤가 띄엄띄엄 말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마, 파파와 함께 눈 속에서 놀려고 기대했다가 실망한 것 같았다. 연보랏빛 눈동자가 흐려지더니 금방 눈가가 빨갛게 되면서 눈물이 고였다.
“울지마, 아샤. 착하지….”
달래주려고 했지만, 어린 아샤는 울보에다 소심해서 걸핏하면 시무룩해지기 일쑤였다.
“눈물 같은 건 쏙 들어가게 해줄게!”
니즈가 주머니에서 바삭바삭하게 부서지는 데다 잼과 크림이 함께 들어있는 과자를 꺼내 아샤의 입에 쏙 넣어버렸다. 어린 아샤는 울먹이면서도 입에 들어온 과자를 우물거리느라 곧 우는 걸 잊어버렸다.
“다행이다. 고마워요, 니즈님.”
포티스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들과 동물은 간식으로 다스리는 게 좋지.”
“그렇지만, 제가 했을 땐 잘 안되어서요….”
어린 아샤를 요령 있게 다루는 니즈를 보고 포티스 역시 사탕이나 과자를 준비해 자신의 아이를 달래보려 한 적이 있었지만, 항상 성공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매번 어린 아샤를 손쉽게 다루는 니즈가 신기하게 여겨졌다.
“그래? 아무래도 나하고 있는 게 익숙해져서 그런가.”
포티스가 포레스트 영지에 가 있을 때도 어린 아샤는 황궁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어린 아샤가 시스 황제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비록 나이츠 오브 디아망의 기사들이 보모는 아니었어도 오고 가며 브라우니와 함께 살핀 덕분에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게 되었다.
“저보다 니즈님을 더 잘 따르는 것 같아서 걱정이에요.”
그 말에 니즈가 밝게 웃음을 터트렸다. 눈발이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그럴 리가 있어? 다 마마가 좋고, 파파가 좋아서 그런 거지. 나야 놀아주는 동물이나 장난감으로 여기는 거 아닐까.”
정말 그렇다 해도 상관이 없다는 태도로 니즈가 포티스에게 안으로 들어갈 것을 권했다. 눈이 오는 풍경은 근사했지만, 나와 있는 시간이 길어진 덕분에 아무리 두툼하게 차려입었어도 발끝부터 서서히 싸늘해지고 있었다.
“동물이라니, 전혀 그렇지 않아요.”
포티스는 솜 모자를 여미다가 당황해 혀를 씹었다. 아닌 게 아니라 니즈는 확실히 별명처럼 야생동물다운 구석이 있었다.
“뭐가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는 거 다 안다고.”
그러고는 이대로는 눈사람이 되어버리겠다면서 포티스를 남겨두고 먼저 아샤를 어깨에 태운 채 빠르게 황궁 입구로 휑하니 가 버렸다. 포티스는 포석에 눈이 덮인 탓에 미끈거려 빠르게 걷지 못했다.
“같, 같이…. 가요! 니즈님!”
“포포스 느림보!”
“정말 너무해요!”
여러 마리의 새들이 눈 덮인 나뭇가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서로 몸을 문질렀다.
셋이 눈을 털어내고 온기가 감도는 황궁에서 간식을 먹고 있을 때, 시스 황제는 언제나처럼 나른한 얼굴로 귀족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귀족들이 가져오는 것들이 대개 그렇듯이 뻔하지만 지루한 일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해결하는 데에 반드시 시스 황제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랬기에 시스 황제는 우선 차분하게 이야기를 경청하고, 동시에 해결 방법을 여럿 생각해두었다. 하지만 세 귀족은 누구 하나 자신의 의견을 굽히려 하지 않았기에,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며 길어졌다.
“거기까지.”
시스 황제가 그렇게 말할 때까지도 논의는 계속되었다. 시스 황제는 그들의 갈등과 얽힌 이해관계가 금방 풀어질 거라고 판단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그것까지 도와야 할 이유는 없었으므로 각자 생각할 시간을 가지라고 말하고 돌려보냈다. 귀족들은 우선 갑작스럽게 자신들을 맞이해준 데에 대해 감사를 하고 물러갔다. 가뜩이나 해가 빨리 지는 계절이라 밖은 벌써 흐릿하게 어두워진 상태였다.
포티스와 어린 아샤가 아직도 밖에 있을 리는 만무했다. 힐끗 정원을 내다보니 눈이 말 그대로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아까 니즈가 만들던 눈사람의 잔영이 희미하게 보이는 듯했다. 시스 황제는 털 망토를 몸에 두르고 마차에 올랐다. 미노타 마부는 시스 황제가 딱히 목적지를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제1궁으로 출발했다. 치워도 계속해서 쌓이는 눈발은 그 누구도 어쩔 수 없었기에 제1궁으로 향하는 길은 미끄러워 천천히 갈 수밖에 없었다. 시스 황제는 가벼운 피로를 느끼며 마차의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댔다.
‘눈이 내리는 건 여신 디 오르의 의지지만. 올해는 심하군.’
물론 쌓인 눈을 기뻐하는 포티스나 어린 아샤를 보면 눈이 아주 쓸모없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마차가 걷는 것보다는 조금 나은 속도였다.
‘내 마술사가 어떻게든 할 수는 없을지.’
아니면 적어도 시스 황제가 눈 덮인 황궁에서 벗어나도록 해주었으면 했다. 눈과 휴가, 마술사는 전혀 연관이 없는 일들이었는데도 시스 황제는 가만히 그것들을 떠올려보았다.
마차에서 내려 제1궁으로 들어서는 동안에, 시스 황제의 은발에 설탕 같은 눈이 쌓였다. 그는 자신의 곁에서 종종걸음으로 따르는 브라우니에게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으면서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제1궁의 복도를 거닐었다. 정원의 장미나무는 얼어붙은 가지를 드러내고 있었고 그 위로 눈이 쌓여 더욱 추워 보였다. 공기가 서늘했다. 복도 쪽으로 길게 늘어진 불빛을 보자 시스 황제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아마도 포티스일 것이다.
시스 황제가 브라우니에게 물러나라는 손짓을 했다. 브라우니가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주인님.”
불빛이 비치는 방은 시스 황제가 겨울에 자주 머무는 방으로 쾌적하고 따뜻한 공간이었다. 한가운데 놓인 테이블에 앉은 포티스가 브라우니의 도움을 받아 아샤에게 저녁을 먹이고 있었다.
“자, 조금만 더 먹자. 아샤.”
“으응….”
어린 아샤가 손에 든 인형을 만지작거리면서 입을 벌렸다. 테이블 위에는 아샤가 먹을 수 있는 식자재를 자잘하게 잘라 조리한 요리들이 여러 가지 놓여 있었다. 어린 아샤는 특히 바스트라 수프를 무척 좋아했다.
인형에게서 시선을 돌리던 어린 아샤가 먼저 시스 황제를 발견했다. 아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포티스의 무릎에서 꾸물대며 내려와 시스 황제의 망토 자락에 매달렸다.
“파파….”
시스 황제는 어린 아샤를 안아 들었다. 어린 아샤의 몸은 따끈하고 좋은 향이 감돌았다. 포티스와 꼭 닮은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시스 황제의 뺨을 간지럽혔다.
“시스! 오셨어요.”
포티스 역시 두 눈 가득히 기쁨을 드러내며 서둘러 시스 황제 곁으로 다가와 팔을 한껏 벌려 시스 황제를 끌어안았다. 가느다란 포티스의 등에 시스 황제가 큼직한 손을 얹었다.
“춥지 않았어요? 귀족들과 만난 일은 잘 끝났나요?”
“…괜찮아, 끝났어.”
“같이 식사해요. 아샤는 먹었지만, 저는 시스를 기다렸어요.”
시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포티스는 어린 아샤를 자신의 품으로 데려가려 했지만, 그는 파파에게 꼭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안고 있을게.”
“파파…. 보고 싶었는데….”
아샤가 파고들며 칭얼거렸다.
“그랬어? 늦게 와서 미안.”
포티스는 시스 황제가 의자에 앉는 걸 보곤 브라우니에게 서둘러 요리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브라우니 여럿이 금방 테이블 위에 따끈한 요리들을 가져다 놓았다. 시스 황제는 그다지 식욕이 없었지만, 포티스가 의욕적으로 시스 황제의 앞접시를 채워주고 그 자신도 포크로 음식을 한입 가득 떠먹는 것을 보자 약간은 먹을 기분이 들었다.
방안은 훈훈했으며 곁에는 포티스가 있고 품에는 어린 첫째 아이가 안겨 있었다. 시스 황제는 오랜만에 안락함을 느꼈다.
“그래도 저녁에 함께 있을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너하고 눈을 보고 싶었어.”
물론 아샤하고도. 그렇게 덧붙이며 고개를 기울여보니 어린 아샤가 손을 뻗어 시스 황제의 뺨을 꾹꾹 매만졌다.
“저도 그렇긴 하지만, 눈은 지금도 오는걸요. 시스와 먹는 식사도 맛있고요.”
신하들이 좀 더 일을 능숙히 처리하면 좋으련만. 요 몇 년간 시스 황제가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관리했더니 그들은 오히려 다소 느슨하게 풀어진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포티스에게 할 수는 없어서 시스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 어린 아샤의 몸을 조심스럽게 고쳐 안았다. 그 잠깐 사이에 시스 황제의 품이 기분 좋았는지 아샤는 기분 좋은 숨소리를 내며 웅크리고 잠들어버렸다.
“시스, 저에게 주세요. 그리고 좀 더 드시는 편이 좋아요.”
포티스가 잠든 어린 아샤를 받아들고 브라우니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어린 아샤의 곁에 밤새 브라우니가 붙어 있을 것이었다. 시스 황제는 앞접시에 얹어진 요리들을 조금씩 맛보고, 입가심으로 그라스 젤리를 먹었다. 향기로운 허브향이 입안에 감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포티스가 돌아왔는데, 그는 브라우니에게 이제 돌아가 봐도 좋다고 말하고는 시스 황제의 바로 옆에 앉아 테이블에 팔을 올려 턱을 괴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시스의 은발을 귀 뒤로 쓸어 넘겨주었다. 포티스의 손가락에서 차가운 금속인 디아나 반지가 반짝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편안하다는 생각.”
포티스가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시스 황제가 스푼을 내려놓더니 갑자기 포티스를 공주님 안기로 안아 들었다.
“아….”
시스 황제의 목에 팔을 두른 포티스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포티스를 요리가 놓여 있지 않은 테이블 한쪽에 눕혔다. 등이 차갑지 않도록 자신의 털 망토를 깔아둔 채였다. 그리고 차가운 손으로 포티스의 뺨을 매만지고, 포티스가 입고 있는 파즈용 겨울 실내복의 단추를 풀어냈다. 제1궁은 무척 따뜻했기에 안에 입는 옷은 그다지 두껍지 않아 몸의 부드러운 선이 드러나 보였다. 허리에 묶은 끈을 풀어내자 옷이 흘러내릴 듯 헐렁해졌고 포티스의 한쪽 어깨와 쇄골뼈가 드러났다.
“여…. 여기서요?”
약간 당황한 포티스가 시스 황제의 어깨에 힘없이 손을 얹었다.
“내가 지금 먹고 싶은 건 너뿐이야.”
“그렇지만…. 아.”
시스 황제는 더 이상 포티스가 저항하지 못하도록 입을 맞추면서 그의 가느다란 손목을 잡아 누르고 다리 사이로 몸을 밀어붙였다.
“으응….”
시스 황제의 혀가 매끄럽게 들어와 포티스의 입 안을 헤집었다. 그 부드러운 감각에 포티스의 몸에서 힘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시스 황제는 아까 낮에 눈 내리는 정원에서 포티스를 봤을 때부터 강한 욕정에 사로잡혔다. 원래 한 쌍의 파트너는 서로에게 끌리는 법이었는데, 시스 황제는 최대한 욕구를 억누르며 귀족들의 알현을 허락했던 것이다.
비록 혀를 섞은 입맞춤은 거칠었어도, 포티스의 의복을 들쳐 가슴이 드러나도록 걷어 올리는 시스 황제의 손길은 부드러웠다. 실내의 공기에 익숙해져 있던 분홍빛 작은 유두에 차가운 손끝이 닿자 포티스가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입술이 떨어지고 시스 황제의 얼굴이 포티스의 귓가로 향하자 포티스는 흥분해서 헐떡이며 시스 황제의 품에 파고들었다.
“하아, 읏…. 간지러워요.”
포티스를 향한 강렬한 욕구에도 불구하고 시스 황제는 포티스를 바로 취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에 반응하며 응하는 모습을 즐기고 싶었다. 포티스의 다리 사이에서 투명한 체액이 스며 나와 엉덩이골을 타고 테이블로 흘러내렸다.
“간지러워서 싫어?”
“응…. 아니, 너무 좋아서…. 시스….”
시스 황제는 포티스의 귓불을 가볍게 물었다 놓고 귓속으로 바람을 불어넣으며 질척한 소리가 들리도록 혀를 놀려 귓바퀴를 핥았다. 포티스의 가느다란 다리가 파들거리면서 그의 몸 아래에서 약하게 꿈틀거렸다.
“맛…. 맛있게 먹어주세요, 시스….”
숨을 헐떡이며 포티스가 조그맣게 말했다. 시스 황제는 대답하는 대신 귀에 입을 맞춘 다음 의복이 걷어 올려져 드러난 포티스의 통통하고 부드러운 가슴에 입술을 갖다 댔다.
“읏…. 응…!”
포티스가 부들부들 떨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본능적으로 하체를 들어 시스 황제의 몸에 닿으려고 했다. 시스 황제는 차분하게 그와 몸을 겹쳐 힘으로 제압하면서 혀로 유두를 핥고 빨아들였다. 그것만으로도 포티스의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쾌감이 밀려 나와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포티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깜박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살짝 벌어진 입안에서 촉촉하게 젖은 혀가 보였다.
시스 황제는 잡고 있던 포티스의 손목을 놓아준 다음 가슴을 손바닥으로 감싸 봉긋해지도록 움켜쥐었다. 그리고 손가락이 유두에 스치도록 아슬아슬하게 건드리며 살며시 주물렀다. 포티스가 숨 막히는 듯한 소리를 냈다. 다리 사이에서 체액이 울컥울컥 쏟아져 테이블의 끝을 타고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아, 시스…. 시스…. 못 참겠어요….”
자신의 가슴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시스 황제의 머리와 목을 감싸 안으며 애가 탄 포티스가 울먹였다. 몸은 한껏 달아오른 채 익숙하고 단단한 시스 황제의 성기를 원하고 있었다. 안이 허전하고 비어있는 느낌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크고 두꺼운 게 마구 쑤셔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계속 들었다.
“조금만 더.”
하지만 그런데도 시스 황제는 서두르지 않고 포티스의 여유롭게 포티스의 가슴을 애무했다. 손끝으로 유두를 긁듯이 살살 건드리다가 엄지와 검지로 쥐고 천천히 굴리기도 했다. 포티스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절레절레 흔들면서 시스 황제의 가슴을 주먹으로 약하게 탁탁 두드렸다.
“시스, 시스….”
“아직이야.”
시스 황제의 단호한 어조에 포티스가 순간 참는듯한 얼굴을 하면서 눈을 감았다. 그러나 쾌감은 계속해서 따라붙었고 포티스는 몸을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윽….”
결국 포티스가 숨을 죽이면서 입술을 꽉 물었다. 포티스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던 시스 황제가 엄지로 그의 입술을 눌러 벌리게 했다. 아주 약한 힘으로 손끝을 물고 안타까워서 쪽 소리 나게 빨아들인 포티스가 조르듯 가슴을 앞으로 내밀었다. 시스 황제는 포티스의 가슴 바깥쪽의 둥근 라인을 살며시 쥐었다가 놓아주고 하얗고 매끄러운 배로 내려갔다. 포티스는 안달하면서 그의 손이 닿는 곳에 더 바싹 밀착하려고 몸을 들썩였다.
“가만히 있어.”
“하지만, 시스….”
포티스가 진한 황금색 눈동자로 애원하듯 올려보아도 시스 황제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 미소를 보이면서 포티스의 뺨에 입을 맞출 뿐이었다. 결국 포티스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시스 황제는 자신의 품 안에 있는 음란하고도 사랑스러운 파트너를 물끄러미 응시했다가 이내 배를 살짝 압박하며 눌렀다. 예전에 그 자리에는 뮤라는 표식의 디아망 마크가 있었지만, 아이를 낳은 뒤로는 말끔하게 사라졌다. 그런데도 시스 황제에게 희롱 받을 때의 쾌감은 이전보다 더욱 강해져서 포티스는 발끝을 움츠리며 훌쩍였다. 뱃속이 간질간질했고, 체액을 머금은 입구가 저절로 빠끔거렸다. 그럴 때마다 안에 고여있던 투명한 액이 흘러나왔다.
“하아, 하아….”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았는데, 포티스는 이미 한껏 안긴 것 같은 흥분에 휩싸여 머릿속이 점점 흐릿해졌다. 시스 황제의 손이 다리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와 체액으로 범벅이 된 입구 주위를 매만질 때는 자신도 모르게 들뜬 신음을 크게 내며 졸랐다.
“아아…. 어떻게든,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시스….”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모르겠는데.”
물론 시스 황제 역시 지극히 흥분한 상태였다. 그는 금사로 무늬가 들어간 겨울용 상의와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바지 앞부분이 한눈에 보아도 불룩하게 부풀어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주어질 짧은 쾌감을 자꾸만 미루면서 포티스의 몸 구석구석을 훑었다. 애초에 그는 상대를 다소 괴롭히는 취향이었다. 특히 포티스가 미약하게 저항하다가 끝내 눈가를 붉게 물들이고 눈물을 떨구면, 사정하지 않아도 강한 만족감이 차오르곤 했다.
시스 황제가 민감한 입구 주변을 손바닥으로 감싸 눌렀다. 그러자 질척한 소리가 나면서 체액이 묻어났다. 안에 삽입할 것도 아니면서 압박하듯이 눌러대자 입구가 움찔움찔 떨렸다. 결국 포티스는 크게 숨을 헐떡이며 시스 황제에게 매달렸다.
“더, 더는…. 더는…. 참지 못, 하겠어요….”
신선한 이슬 같은 눈물방울이 포티스의 달아오른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포티스는 몸속이 너무 끓어올라 애타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서 스스로의 손등을 물면서 참아내려 했다. 물론 그걸 본 시스 황제는 그렇게 되도록 두지 않았다.
“어떻게 해주길 바라.”
“…….”
포티스가 허벅지를 움츠렸다. 시스 황제는 가만히 대답을 기다리면서 손끝을 입구에 살짝 집어넣고 아주 천천히 안을 문지르며 자극을 주면서 헤집었다.
“넣, 넣어 주…. 세요…. 시스의 것….”
지금까지 시스 황제와 수없이 많이 행위를 해왔는데도, 지금처럼 애태울 때면 포티스는 언제나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한결같은 모습이 시스 황제의 기분을 충족시켰다. 그러나 시스 황제가 잠자코 뼈가 느껴지는 감촉이 좋은 손끝을 내벽에서 빼내 버리자 포티스는 눈물이 가득한 눈을 깜박이면서 스스로 밑을 향해 손을 뻗은 다음 입구를 벌려 보였다.
“여기, 여기에….”
포티스가 아무리 한껏 양옆으로 벌려도 입구는 무척이나 좁았다. 하지만 안쪽으로 번들거리는 분홍빛 내부와 투명한 체액이 엿보였다. 무척이나 자신을 갈구하는 포티스의 행동에 시스 황제는 옅게 미소를 보였다. 그리고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고 빨면서 천천히 벨트를 풀어냈다.
“읏…. 으….”
커다란 성기가 옷 밖으로 드러나자 포티스가 손을 뻗어 더듬더듬 시스 황제의 것을 손바닥 전체를 사용해 매만졌다. 단단하고 뜨거운 감촉과 함께 표면에 드러난 힘줄이 닿자 저절로 입안에 침이 고여 흘러내렸다.
“안에 넣어줬으면 해?”
“네, 네에…. 제발…. 어서….”
포티스의 이마에는 식은땀마저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포티스는 당장이라도 원했다. 다시금 다급하게 매달리며 재촉하자 그제야 시스 황제의 성기가 입구에 닿았다.
“아! 하앗….”
포티스가 주먹을 꼭 쥐면서 허리를 비틀었다. 삽입만으로 형언할 수 없는 깊은 쾌감이 밀려왔다. 포티스의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내벽이 성기를 조였다가 떨어지는 걸 느끼며 시스 황제는 포티스가 절정에 달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이었고, 섹스는 이제 시작이었다.
“으으응…! 읏…!”
눈물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시스 황제는 절반도 넣지 않은 성기를 귀두 끝만 걸치도록 확 빼냈다가 단숨에 뿌리까지 전부 박아넣었다. 물론 한 번에 다 들어가지 않고 중간에 걸렸는데, 그 순간 포티스는 손으로 입을 막고 끙끙 앓았다. 그리고 이내 힘으로 밀어 붙여져서 내벽 끝의 휘어진 부분까지 전부 채워지자 스스로의 손을 가슴 위에서 기도하듯 붙잡고 절정에 달했다.
“아, 아아…. 시스, 읏….”
“포티스, 귀여워.”
차분한 말과 달리 시스 황제의 허리 움직임은 거칠었다. 그는 더 들어갈 곳이 없는데도 계속 강하게 박으며 포티스의 몸을 자신 쪽으로 끌어왔다. 포티스는 엉덩이를 한껏 든 채였다. 시스 황제가 포티스의 허벅지를 배 쪽으로 잡아 누르며 위에서 아래로 힘껏 쑤셔 박았다.
“으응! 앗! 흐읏…!”
시스 황제의 아래서는 자그마하게만 느껴지는 포티스의 몸이 마구 들썩였다. 연속으로 절정을 느끼다 보니 이미 쾌감 말곤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하는 채로 그저 반사적으로 안에 들어온 시스 황제의 성기를 열심히 빨아들이며 조였다.
강하게 찌르는 동안 연결부에서 철퍽철퍽하고 마찰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렇게 한참 허리를 움직여 포티스의 혼을 쏙 빼놓은 시스 황제는 이내 느긋하게 안을 파고들며 드나들었다. 포티스가 그의 몸 아래에서 녹아버리는 건 물론이었다.
열은 오를 만큼 올랐고, 절정도 잔뜩 했지만, 포티스의 몸은 정액을 원했다. 끈적한 액체를 몸속에 가득 받아들일 때의 감각을 떠올리며 포티스가 거친 숨을 쌔액쌔액 내쉬었다.
“후우, 후…. 윽.”
다시금 시스 황제의 허리가 힘껏 움직여 안을 찔렀고, 포티스는 발끝을 가득 움츠리면서 절정했다. 그 감각을 채 즐기기도 전에 뱃속이 화끈해지도록 정액이 밀려 들어왔다. 포티스가 허리를 쭉 펴면서 고개를 확 젖혔다. 얼굴과 가슴께는 온통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약간 괴로운 듯 찌푸린 표정에 쾌감을 가득 담고 있었다.
“핫, 아…. 아아….”
내벽이 정액을 듬뿍 흡수하면서 허리와 엉덩이가 경련이 일 듯 파들파들 떨렸다. 시스 황제가 가벼운 한숨과 함께 성기를 서서히 빼냈을 때도 포티스는 여전히 눈을 감고 움츠러든 채였다.
“포티스.”
“…….”
그는 즉시 대답하지 않았는데, 기나긴 여운을 견뎌내는 중이었다. 시스 황제가 다시 포티스를 부르며 붉어진 귓가와 뺨, 입술에 천천히 입맞춤을 하자 그제야 포티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멍하니 시스 황제를 올려보았다.
“아….”
둘의 몸은 기분 좋은 땀으로 젖어있었다. 시스 황제가 포티스의 뺨에 뺨을 맞대고 가만히 배와 허리를 매만졌다. 그게 기분 좋아서 포티스는 작게 소리 내 웃었다.
“간지러워요…. 시스….”
“하지만 싫지 않잖아.”
“으응…. 전혀…. 좋아요.”
포티스가 대답을 하고는 시스 황제의 등에 팔을 둘러 끌어안았다. 그리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정말 좋아, 정말 좋았어요….”
“나도.”
시스 황제는 테이블에 놓여 있던 깨끗한 손수건으로 포티스의 다리 사이를 닦아주었다. 드디어 원하던 정액을 머금어서인지 통통하게 부풀어 오른 입구는 살며시 닫혀있었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기에 포티스는 시스 황제가 해주는 대로 받아들였다. 시스 황제는 자신의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나서 포티스의 옷을 제대로 입혀주고 허리에 끈을 묶어주었다.
“시스….”
테이블에 뺨을 대고 누워있는 포티스의 눈이 촛불의 빛을 반사했다.
“포티스.”
나직하게 화답하면서 시스 황제는 포티스를 안아 들었다. 점점 노곤하게 졸음이 쏟아졌기에 포티스는 시스 황제의 품에 기대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는 얌전히 안겨서 시스 황제의 침실로 이동했다.
침실의 중앙에는 커다란 나무가 있고 그 윗부분은 둥글게 뚫린 구조였는데, 눈이나 비가 들이치지 않도록 마술사들의 마력이 깃들어 있었다. 감청색 밤하늘에서는 여전히 탐스러운 눈이 하늘하늘 떨어지고 있었고, 그것을 본 포티스가 약간 잠이 깨서 시스 황제에게 잠자리에 들기 전에 같이 차를 한잔 마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네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시스 황제가 브라우니를 불러 이터너티의 차를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시스 황제는 푹신한 소파에 앉아 포티스를 자신의 무릎에 앉혀두었다. 테이블에서 다소 거칠게 행위를 즐긴 이후라 포티스는 소파에 앉기가 힘들어했다. 하지만 둘만 있는데도 포티스는 여전히 그런 애정 행각을 쑥스러워했다.
“그렇지만, 시스가 불편할 텐데….”
“전혀. 넌 무척 가벼워.”
첫째 아이인 어린 아샤를 가진 후인데도 포티스의 몸은 가느다랗기만 했다. 시스 황제가 그러한 사실까지 언급하자 포티스는 더는 사양하지 않고, 얌전히 앉아 브라우니가 가져다주는 차를 마셨다. 그리고 간간이 고개를 들어 눈이 내리는 모습을 살펴보았다. 눈은 천장 위의 공간에 닿자마자 녹아 물방울이 되어 옆으로 흘러버렸지만, 계속해서 쏟아지는 눈송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시스 황제는 무의식적으로 포티스의 허리에 손을 얹어 가만히 매만지면서 생각에 잠겨있었다. 애초에 그는 말이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기에 포티스도 그의 침묵에 익숙해져서 딱히 말을 걸려 애쓰지 않고 달콤한 차를 음미했다. 시스 황제의 마음속에는 어떤 계획이 있었고, 그는 날이 밝자마자 그 건에 대해 마술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물론 시스 황제는 지시하고, 마술사는 실행하게 될 것이다.
다 마신 찻잔을 내려놓은 포티스가 시스 황제를 바라보았다가 그의 어깨에 턱을 갖다 대면서 끌어안았다. 그와 가까이 있고, 이렇게 닿을 때면 한없이 편안하고 충만한 기분을 느꼈다.
“졸려?”
“으응…. 아직, 아니요….”
“그럼 조금 더 이대로.”
포티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심장 소리가 가까이서 규칙적으로 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포티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시스 황제가 포티스의 곱슬곱슬한 어두운 빛깔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촛불이 타올랐다.
다음날, 포티스가 깨어난 건 새벽이었다. 어느새 침대 위에서 푹신한 이불을 덮은 채 시스 황제의 품에 안겨있었다. 무척이나 따뜻하게 자신을 감싸주는 느낌에 포티스는 살며시 웃고 말았다. 그러나 곧 브라우니에게 맡겨두었다지만, 어린 아샤에게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꼼지락거리며 빠져나오려는데 좀처럼 시스 황제의 팔을 풀어내기가 어려웠다.
‘정말 꽉 안고 계셔….’
한참을 꼼지락거리던 그는 시스 황제가 깨어날까 봐 결국 그대로 안겨있었다. 아무리 자신이 1년에 몇 개월쯤 포레스트 영지에 가 있는 걸 허락했다고는 해도 막상 이렇게 시스 황제를 만나러 오면 그는 다시는 결코 포티스를 떼어놓지 않을 것처럼 굴곤 했다. 어제처럼 거듭해서 강하고 깊게 행위를 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역시 좀 외로우신 걸지도 몰라….’
포티스는 그의 잠든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고민했다. 자신이 시스 황제에게 무언가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레스트 영지에 가는 걸 그만둔다면 시스 황제도 어린 아샤와 있을 시간이 더 많아질지도 모르지만, 의외로 포티스는 자신의 개인적인 생활에 대한 고집이 있었다. 포레스트 영지의 숲의 공기, 가족들과 익숙한 저택은 포티스의 일부였다. 만약 황궁에서만 살게 되면 포티스는 가을 낙엽처럼 바싹 마르고 빛이 바랠 것이다.
‘그건 어쩔 수 없어도…. 기쁘게 해드릴 만한 게 있을 텐데….’
이런저런 가능성을 여러 가지 떠올려보는 동안 포티스의 황금빛 눈이 깜박였다.
‘기쁘게….’
하지만 좀처럼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포티스는 시스 황제의 체온 덕분에 다시 잠들어버렸다.
시스 황제는 포티스가 곁에 있어 준 덕분에 깊이 잠들었고, 언제나 일어나는 시간에 개운하게 기상했다. 그는 이불에 폭 파묻혀 있는 포티스의 머리를 커다란 손으로 조심스럽게 쓸어주고는 깨우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침대에서 내려왔다.
아침일 텐데도 천장 위로는 희끄무레한 하늘이 펼쳐져 있을 뿐이고, 변함없이 눈이 오는 듯했다. 눈이 얼마나 쌓였을까? 시스 황제가 가운을 걸친 채 방을 나와 정원으로 통하는 복도로 나왔다.
세상은 온통 은빛이었다. 실내에 있을 때는 따뜻한 공기에 감싸여서 잘 몰랐으나, 막상 밖으로 나와 정원으로 들어가는 길에 접어드니 싸늘한 대기가 신선하게 느껴졌다. 키가 크고 사시사철 초록 잎이 남아 있는 나무에도, 낮고 가느다란 장미나무의 가지 역시 눈이 한가득 쌓여 있었고, 눈 속에 파묻힌 보석 꽃은 반짝이며 진한 향을 뿜어냈다. 눈 위에는 새의 작은 발자국이 몇 개 있을 뿐이었다.
시스 황제는 눈밭을 걸으며 가벼운 해방감을 느꼈다. 눈송이가 어깨에 쌓여갔지만 개의치 않았다. 커다란 정원을 전부 돌고 싶었지만, 이제 하루를 시작해야 했다. 시스 황제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발걸음을 돌렸다.
간단히 아침을 챙긴 시스 황제가 황궁으로 향하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포티스는 침대에서 부스스 일어났다. 그것도 먼저 깬 어린 아샤가 브라우니와 함께 포티스를 찾아와서였다.
“왜 이렇게 졸린 지….”
포레스트 영지의 저택은 벽난로에 불을 때야만 난방이 되었지만, 황궁은 실내라면 어디라도 포근할 정도로 따뜻해서 더 그런 것 같았다. 포티스가 눈가를 문지르며 무릎에 앉은 어린 아샤를 자신 쪽으로 꼬옥 끌어안았다. 어린 아샤는 바삭거리는 빵에 크림과 잼을 바른 걸 들고 있었는데 작은 입을 오물거리면서 열심히 먹었다.
“마마.”
“으응, 아샤.”
“오늘도…. 눈사람 만들고 싶어….”
입안 가득 빵이 들어있는 데다 아직 어려 발음이 부정확했지만, 포티스는 쉽게 알아들었다.
“그렇게 할까? 다 먹으면 옷을 갈아입고 같이 나가보자.”
아침이라 그다지 식욕이 없었던 포티스는 가볍게 산벨 열매만을 잘라 먹었다. 어린 아샤가 의자에 앉아 발목을 까닥까닥 흔들었다.
식사를 마친 둘은 온도 차이로 인해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단단히 옷을 챙겨 입고 브라우니와 함께 제1궁의 정원으로 나왔다. 하지만 이내 어린 아샤를 안아 들어야만 했는데 밤사이 내린 눈의 양이 어마어마해서 키가 작은 아샤는 눈더미에 파묻힐 정도였다.
“제가 도와드리겠어요, 포티스님.”
브라우니가 눈삽과 빗자루를 들고 부지런히 움직여 기다란 의자에 있는 눈을 치운 다음, 주위의 눈을 정리해두었다.
“내가 돕지 않아도 괜찮아?”
포티스는 어린 아샤를 안은 채로 안절부절못했지만, 브라우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을 계속했다.
“금방 할 수 있어요, 포티스님은 가만히 계셔도 돼요!”
긴 의자 위에는 눈이 가득 쌓인 커다란 나무가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다. 포티스는 그 아래에 조심스럽게 앉으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정말 많이 오네.’
어제 눈이 왔을 땐 운치 있고 즐거웠지만, 이틀째 강한 눈발이 이어지자 감기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어린 아샤는 포티스를 닮아 모든 계절의 자연을 사랑했다. 그래서 지금처럼 눈이 펑펑 오는데도 포티스의 품에서 바둥거리며 눈송이를 잡으려고 장갑을 낀 동그란 손을 뻗었다. 포레스트 영지에 있을 때도 자연은 어린 아샤의 가장 좋은 친구였다. 온갖 곤충을 비롯해 커다란 나무들이 뻗어 올라간 가지의 경계를 한참이나 바라보곤 했다.
마침내 브라우니가 포티스가 앉아있는 주위의 눈을 깔끔하게 치웠다. 브라우니는 쌓여 있는 눈보다 키가 작았는데도 신기하게 눈 속으로 빠져버리거나 하지 않았다.
“내려, 내려갈래….”
어린 아샤가 연보랏빛 눈을 깜박이며 포티스를 응시했다. 포티스는 그의 솜 모자를 단단히 눌러 귀까지 가려주고는 바닥에 내려주었다.
“와아아!”
온통 눈이 반짝이는 정원에서 어린 아샤가 드물게도 커다랗게 소리를 지르며 달려 다녔다. 포티스는 새벽에 잠깐 깨어났을 때 했던 생각을 떠올렸다. 시스 황제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황제였고, 필요한 것은 모두 갖추고 있었으며 원하는 건 언제든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 그에게 무얼 선물하면 좋을지 알기 어려웠다.
물론 요리를 해서 그에게 건네줄 수도 있었다. 포티스는 차근차근 요리를 익혔기에 더 이상 만들 수 있는 요리가 초콜릿 차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번 먹으면 끝이니까….’
아무리 맛있고 훌륭한 요리도 한 끼라는 말이 있었다. 미식을 취미로 가진 이에게라면 더할 나위 없이 흥미로운 선물이겠지만 애초에 포티스는 입이 짧아서 그러한 재미를 몰랐고, 시스 황제 역시 맛없는 요리를 먹지 못할 뿐, 맛이 아무리 좋다 해도 즐기는 타입이 아니었다.
“마마!”
뽀득뽀득 눈을 밟으며 마음껏 달리던 어린 아샤가 찬 바람에 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하고 포티스에게 다가와 장갑을 낀 손으로 꽁꽁 뭉친 눈을 포티스에게 건넸다.
“선물….”
그것은 눈 뭉치에 조금 더 작은 눈 덩어리가 위에 붙어 있었다. 포티스는 가만히 받아들고 살펴보았다.
“새를 만든 거니?”
“맞아! 여기엔 없지만….”
그러면서 어린 아샤는 새가 우는 소리를 흉내 냈다. 그것은 포레스트 영지에 있는 저택에서 아침나절이면 정원과 창틀에 앉아있곤 하는 새의 울음소리였다.
“마마에게 주고 싶어.”
어린 아샤가 포티스가 고맙다고 하기도 전에 휙 등을 돌리더니 다시 쪼그리고 앉아 눈을 뭉치기 시작했다. 새를 몇 마리든 만들고 싶은 모양이었다. 포티스는 그 모습을 보면서 살며시 웃었다. 사실 그 새를 좋아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어린 아샤였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저 아샤가 자신에게 그것을 주었다는 사실이 기분 좋았다. 아마 시스 황제 역시 포티스가 좋아하는 것들을 막무가내로 선물해도 기쁘게 받아줄 것이다. 어린 아샤의 선물은 포티스의 기분을 밝게 해주었고, 선물에 대한 고민을 약간이나마 덜어주었다. 시스 황제가 무엇이라도 좋아하리라는 확신이 수줍게 들었다.
‘그래도 가급적이면 정말 기뻐서 깜짝 놀랄만한 걸 고르고 싶어.’
어린 아샤는 엉성하게 눈을 뭉쳐 만든 새를 벌써 세 개째 만들고 있었다. 포티스는 그 곁에서 함께 눈을 뭉칠 요량으로 다가가서 쪼그리고 앉았다.
“마마도?”
“마마는 아샤가 좋아하는 크림 바른 빵을 만들어 볼게.”
“정말? 만들 수 있어?”
어린 아샤가 놀라움과 기쁨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론이지. 기다려 보렴.”
포티스가 눈덩이를 장갑을 낀 손으로 움켜쥐어 솜씨 좋게 뭉쳤다. 그리고 손바닥에 올려놓고 어린 아샤가 아침에 먹었던 둥근 빵 모양을 만들었다. 아샤는 주먹을 꼭 쥐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크림과 잼을 표현하기 위해 포티스는 파릇파릇한 정원수에서 떨어진 잎사귀를 주워 눈으로 만든 빵 위에 덮었다.
“크림빵!”
어린 아샤가 양손을 흔들면서 만져보고 싶어서 안달하자 포티스가 웃으며 손에 쥐여주었다. 아샤는 진지한 얼굴로 눈을 빛내며 잎사귀를 꾹 눌러보았다.
“나도…. 나도 만들어 볼래….”
브라우니가 둘을 거들어 푸른 잎사귀를 여러 장 가져왔다. 어린 아샤는 신중하게 눈을 쥐고 주물럭거리며 뭉쳤다. 쓰고 있는 솜 모자에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포티스가 어린 아샤의 몸에 붙은 눈을 털어냈다. 아직 손의 근육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은 데다 두툼한 솜이 들어간 장갑을 끼고 있어서 손놀림이 영 신통치 않았지만 그래도 어린 아샤는 기뻐하며 바닥에 여러 개의 빵 덩어리를 만들어놓았다. 그런 다음 잎사귀를 얹어 모양을 냈다.
“아샤가 제일 잘 만들었어.”
“아샤님이 최고예요.”
포티스와 브라우니가 칭찬해주자 어린 아샤는 기분 좋은 듯 눈 바닥에 풀썩 앉아버렸다. 눈으로 빵을 만드는 일에 질리기도 전에 이번엔 브라우니가 솜씨 좋게 둥근 모양을 빚고 토끼 귀처럼 잎사귀를 잘라 붙여놓았다. 눈을 대신할 건 없었지만, 어린 아샤가 스스로 생각해냈다.
“보석 꽃의 잎을 붙이면 돼!”
제1궁의 모든 것은 시스 황제의 것으로 감히 브라우니가 꺾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포티스가 직접 눈을 헤집고 가서 보석 꽃의 매끈하고 통통한 꽃잎 두 개를 떼어와 눈토끼에게 붙여주었다. 그러자 그것은 마치 생명력을 가진 진짜 토끼처럼 눈이 반짝였고, 어린 아샤는 무척 흡족해하며 눈토끼의 등을 토닥였다.
포티스와 어린 아샤가 눈 속에서 오전 나절을 보내고 있을 때, 시스 황제는 집무실에서 일찍부터 둥글게 말려있는 종이 뭉치를 확인했다. 아무래도 여신 디 오르는 샤토드네쥬뿐만이 아니라 모든 대지를 차갑게 뒤덮고 싶은 듯했다. 시스 황제가 투명한 보석인 디아망을 가공해 만든 창으로 잠시 바깥을 살피려 했지만, 세찬 바람 탓에 별로 보이는 게 없었다.
그가 보려는 것은 마술사의 탑이었다. 4년 전 마술사 이니스가 단독으로 벌인 일로 얼마 동안 마술사의 탑은 무너진 채로 방치되었지만, 귀족이나 황족들이 강력한 힘을 가진 마술사가 통제되길 원했기에 새로운 탑을 건설해야만 했다. 물론 이니스가 저지른 죄를 마술사들 전부가 연대 책임질 필요는 없었는데, 그렇다고 이전처럼 내버려 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그들은 거처를 잃은 마당이었으므로 이내 자신들의 연구 목적을 위해서 모든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전보다 더욱 폐쇄적인 공간이 되고 만 마술사의 탑을 마음껏 개조했다. 겉모습은 이전과 비슷했지만, 그 안은 전혀 달랐고 그러한 공간에서 마술사들은 미친 듯이 연구에 몰두했다. 시스 황제와 7인의 마술사 간의 계약은 더욱 강력해져서 여러 가지 제약을 받기도 했지만 어쨌든 마술사라는 족속은 어떤 상황에서라도 즐거움을 찾는 법이었다. 그 새로운 마술사의 탑에는 시스 황제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접근할 수 없었다.
시스 황제는 돌돌 말린 새로운 종이를 펼쳤다. 글자들이 잘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의 책임을 다했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 시스 황제는 온갖 귀족과 신하들이 올린 서류를 확인했다. 어떤 것들은 휙 내던지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꼼꼼히 확인했다. 이 국가, 디 오르는 전적으로 시스 황제에게 모든 걸 의지하고 있었다. 물론 시스 황제가 그만큼 뛰어난 지배자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후, 더는 못 해.”
날이 흐려서 마치 시간이 정지된 공간에 갇혀 있는 듯했다. 시스 황제는 나른한 얼굴로 어깨를 편 다음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브라우니를 호출했다.
“부르셨어요, 주인님.”
“간단히 식사를 차려줘.”
물론 그는 종이가 쌓여 있는 집무실에서 먹을 생각은 없었다. 만약 소망이 있다면 포티스와 점심을 함께 하고 싶었지만, 식사를 마친 후에 해야 할 일이 더 있었다.
식사는 황궁의 넓은 홀에서 이루어졌다. 밖이 어두웠기에 기다란 테이블 군데군데에 촛불이 켜졌다. 간단히 하라는 시스 황제의 주문 덕분에 일반적인 황제의 식탁 보다는 간소했다. 식사용 둥근 빵과 크림과 잼, 김이 올라오는 포타쥬, 신선한 과일 몇 종류가 들어간 샐러드, 두툼하게 삶아내 소스를 끼얹은 고기도 있었다. 시스 황제는 우선 머리를 맑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허브를 넣은 뜨거운 차를 마셨다. 그리고 포타쥬와 고기 몇 점을 먹고는 남은 요리에는 손도 대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시스 황제가 식사를 마치자 브라우니가 시중을 들어주기 위해 다가왔다.
“주인님, 집무실까지 동행할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잠깐 밖에 나갈 테니까.”
“하지만 오후에는 황족들과 티타임을 가지기로 약속되어있으세요.”
“오래 걸리지 않아.”
그러자 브라우니가 시스 황제에게 털 망토며 장갑 등 외출용 몸단장을 도와주었다. 시스 황제는 잠자코 있었다. 황궁 밖은 혹독한 겨울이었다.
“이제 됐어.”
시스 황제가 브라우니를 뒤로 하고 복도를 지나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공기가 몸속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러나 그는 추위에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쌓인 눈을 과감히 밟아 마술사의 탑으로 향했다. 정원을 가로질러 가면서 머리카락에 쌓이는 성가신 눈발을 털어내기도 했다.
그는 어렵지 않게 마술사의 탑에 도달했다. 사실 황제라면 그저 탑이 보이는 방향의 길로 나아가면 되고 그 외의 귀족이나 황족은 길을 빙빙 돌게 되어있기에, 마술사의 탑이 황궁과 거리가 멀고 가까운 것, 혹은 탑의 존재를 숨기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었다.
마술사의 탑 입구에는 눈이 쌓인 가시덩굴이 가득했는데, 그것들은 시스 황제가 다가오자 마치 스스로 물러나는 것처럼 뒤얽혀있던 가시들을 풀고 입구를 드러냈다. 시스 황제가 발걸음을 옮기자 잠깐 빛이 깜박이더니 어느새 탑의 최상층으로 이동되어있었다.
둥근 모양의 방은 사방에 길쭉한 디아망 창이 달려 있고, 바닥에는 디아망 무늬가 새겨진 카펫이 깔려있었다. 그리고 불꽃이 타오르는 벽난로와 소파 하나, 천장에는 인공조명이 흐릿한 빛을 뿜으며 공간을 비추었다. 이 자리는 당연히 마술사를 만나러 오는 황제를 위한 것이었지만, 시스 황제는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마술사들이 층층에 있는 자신의 거처를 공개하고 싶지 않아 하는 버릇이 있었으므로 시스 황제가 한 수 물러준 것이었다.
소파에 적당히 앉아있자 어느 순간 홀연히 분홍빛 로브를 입은 7인의 마술사 중 한 명인 델타가 나타났다. 시스 황제는 그가 이 둥근 방안의 벽 어딘가에서 들어왔다고 생각했지만,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델타가 격식을 차려 인사를 하고, 시스 황제 앞에 차분히 서 있었다. 시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익숙한 얼굴인 윌로그로프가 황급히 나타나 시스 황제 앞에 예를 갖추었다. 아마도 시스 황제가 탑에 들어설 때 각 층에 소식이 갔을 것이다. 그러나 윌로그로프가 나타난 뒤 30분이 지나도록 다시 모습을 보인 건 아나나스뿐이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는 무슨 흥미로운 연구를 하고 있었는지 분홍빛 로브에 약간 그을음이 있는 상태였고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었다.
“아, 다들 뭘 하고 있는 건지.”
당황한 윌로그로프가 자신의 손을 맞잡고 비틀었다. 그러나 마술사는 원래부터 제멋대로인 족속들이었으므로 시스 황제는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다만 그래도 정해진 법이라는 게 있기에 이렇게 물었을 뿐이다.
“자네가 그들을 전부 데려오겠나.”
“아….”
당황한 윌로그로프 대신 아나나스가 말을 받았다.
“저희는 서로의 층에 왕래하지 않습니다, 황제 폐하. 아마 들어가기 힘들게 되어있을 거예요. 연락을 취해 볼 수는 있습니다.”
“계단을 통해 오르내리는 게 아닌 것만은 확실하군.”
아나나스는 여전히 웃으면서 긍정했다.
“물론입니다. 이번엔 아예 계단 자체를 만들지 않았어요!”
“그거 흥미롭군. 그럼 자네들은 서로의 거처가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모르는 건가?”
“뭐랄까, 서로 공개할 수 없는 영역 같은 것이라고 할까요….”
흐려진 말끝에 델타와 윌로그로프 모두 확실히 그렇다는 표정을 내비쳤다. 죽어도 보여줄 수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웬만해선 감추고 싶은 장소가 바로 마술사의 거처였다. 아나나스는 이제 시스 황제가 곧 본론을 꺼낼 것이라고 생각하고 화제가 바뀌길 기다렸다. 그런데 뜻밖에도 시스 황제는 마술사의 거처에 흥미를 보였다.
소파의 팔걸이에 팔을 얹고 턱을 괴고 있던 시스 황제가 물끄러미 그들을 응시했다.
“한번 확인하고 싶은데.”
“네?”
“황제 폐하….”
“……!”
셋은 동시에 화들짝 놀랐으나 시스 황제는 그다지 농담을 하는 편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 있는 누군가는 자신의 거처를 공개해야 할 판이었다. 황제가 그렇게 언급한 이상 당황하거나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윌로그로프가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황제 폐하, 상의를 해도 괜찮겠습니까? 분명히 저희 중 하나의 거처를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세 명의 마술사는 구석에서 서로를 마주 본 채로 대화를 나눌 준비를 했다. 시스 황제의 앞인지라 큰소리를 내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서둘러 의견을 교환했다.
“난 안돼!”
델타가 딱 잘라 거부했다. 지금 델타는 자신의 전공이 아닌 분야를 공부 중이었고, 거처는 온갖 마법 식물과 도구들이 뒤엉켜 공간을 떠다녔다. 마땅한 이유조차 말하지 않고 거부하는 델타를 보고 윌로그로프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나나스?”
“저는…. 보여드려도 괜찮긴 한데요…. 황제 폐하가 개구리로 변하면 곤란하지 않을까요?”
“그런 엘릭시르를 연구하고 있는 거야?”
“어떤 물건이 다른 물건으로 변하게 만드는 과정을 습득하고 있었어요.”
사실 윌로그로프는 아나나스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는 주로 엘릭시르를 다루는 마술사로 아무래도 거처에 위험한 것들이 널려있을 듯싶었다.
“어쩔 수 없어. 황제 폐하의 명을 거절할 수는 없으니, 내 거처로 할 수밖에.”
“대범하네요, 윌로그로프. 자신 있어요?”
“청소라도 해둔 거야? 여유만만하네.”
아나나스와 델타의 얼빠진 반응에 윌로그로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건 아니라고! 델타, 넌 싫다고 했잖아! 아나나스는 수상한 연구 중이고!”
그러나 이미 둘은 윌로그로프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둘은 기대에 차서 시스 황제에게 윌로그로프가 거처를 개방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전했다. 당황한 윌로그로프는 뒤늦게 그들에게 합세했다.
“보잘것없는 마술사의 거처이나,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출발하지.”
윌로그로프가 앞장서서 벽의 한 공간에 반짝이는 빛으로 이루어진 문양을 만들어냈다. 윌로그로프가 시범 삼아 먼저 들어서고, 시스 황제가 들어간 후 그 뒤를 바싹 따라 델타와 아나나스가 함께 했다. 벽에 생겼던 빛은 사라지고 마술사의 탑 최고층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여긴….”
싱그러운 풀 향기가 풍겨 왔고, 점차 가까이 있는 커다란 나무와 우거진 잎사귀, 넝쿨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운 장소였다.
“평범히 제가 좋아하는 걸로 꾸민 공간입니다, 황제 폐하.”
다른 두 마술사도 감탄하며 풍경을 둘러보았는데, 아무리 봐도 탑 내부의 비좁은 한 층이라고 불 수 없이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심지어 새소리마저 들렸다.
“따듯하군….”
“아, 제가 추운 걸 싫어합니다. 밖은 지금 한창 겨울일 테죠? 나가본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그래. 황궁은 너희의 도움 덕분에 그리 춥지는 않지만, 야외는.”
시스 황제가 천천히 걸음을 뗐다. 바닥엔 푹신한 흙이 깔려있었고 초여름의 신선한 대기의 냄새가 났다. 심지어 어디선가 한 줄기 바람마저 불어왔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대나무로 만든 소파와 여름용 담요가 높여있고, 같은 재질로 만든 커다란 테이블이 있었다. 위에는 온갖 서적이 아슬아슬하게 각각의 탑을 이루며 쌓여 있었는데 한쪽 바닥에는 책이 무더기로 쏟아져 있었다.
“여기서 독서를 하거나 서신을 쓰기도 합니다.”
“어느 정도로 넓은 거지?”
시스 황제가 물었다. 델타와 아나나스는 윌로그로프의 취향을 알게 되어 상당히 흥미로운 듯했다.
“크기는 사용하는 마력에 비례합니다. 사방 어느 쪽으로 향하든 보이지 않는 벽에 닿게 되어있습니다. 끝에 갈 수 있다면요.”
윌로그로프는 황제의 마술사였기에, 만약 시스 황제가 원하기만 한다면 좀 더 내밀한 공간으로까지 안내할 각오를 했는데, 시스 황제의 용건이나 흥미는 사실 이미 충족된 상태였다.
“하루면 충분하겠지.”
혼자서만 의미를 알아들은 아나나스가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댔고, 델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윌로그로프가 그들을 대신해 대답했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것과 완전히 같은 나의 공간을 원해….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고, 경치 좋은 바다가 좋겠어.”
그리고 기한에 대해 자신의 마술사들이 더는 말을 덧붙이지 못하도록 이렇게 말을 이었다.
“나의 마술사, 디 오르 최고의 마술사가 일곱이나 되니 아마 충분하겠지.”
시스 황제의 한마디로 상황은 그렇게 결정되었다. 윌로그로프는 구체적인 지시 사항을 전달받길 원했기에, 시스 황제가 요구하는 바를 천천히 설명했다. 그것은 마법의 낙원이자 자그마한 섬이었고 하루 만에 그 공간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사실에 마술사들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마술사의 탑에서 일을 처리한 시스 황제는 황궁으로 돌아와 오후의 일정을 수행했다. 그는 처음으로 마술사를 소유했다는 사실에서 깊은 만족감을 느꼈다. 물론 4년 전 고대 유적이 발동되었던 사건에서도 마술사들이 큰 역할을 해준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건 사실 마술사 이니스로부터 발생했던 재앙이어서 시간이 지날수록 시스 황제의 기분은 가라앉았다. 7인의 마술사가 자신들의 마력을 짜내 시스 황제와 황궁을 지킨 건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황족들과의 티타임은 주마다 있는 일로 대화의 주제는 대부분 비슷했다. 원래 무난한 사교 활동이란 그렇게 흘러가는 법이었다. 시스 황제는 티타임의 주체로서 대화를 듣고 적절한 반응을 보였지만, 주로 화제를 꺼내 떠드는 이들은 황족들이었다.
시스 황제가 허브를 듬뿍 넣은 차를 천천히 마셨다. 마술사의 능력으로 실내를 따뜻하게 하는 건 좋았지만, 끝없이 나른해지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도 비교적 다른 때보다는 즐거웠는데, 마술사를 만난 일이 상당히 흡족했기 때문이다.
“엣취!”
포티스가 크게 기침하며 타오르는 벽난로 앞에서 달달 떨었다. 제1궁의 정원에서 눈을 가지고 놀던 포티스, 어린 아샤, 브라우니는 눈발이 거의 눈보라처럼 바뀌었을 때 부랴부랴 안으로 들어왔는데 아무래도 그사이에 찬 기운이 몸에 스며든 모양이었다. 실내 공기가 숨 막히도록 따뜻한데도 포티스의 기침은 좀처럼 멎지 않았다.
브라우니가 부산을 떨며 이터너티의 차를 끓여왔고, 어느샌가 늘어난 다른 브라우니들이 어린 아샤의 시중을 들었다. 겨울용 솜옷과 솜 모자는 밖에선 유용했지만, 안으로 들어오니 눈이 녹아 젖어버려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브라우니들은 손쉽게 어린 아샤의 옷을 벗겨냈고 그에게 보송보송한 겨울 실내복을 입혔다. 짧은 망토가 달린 귀여운 의복이었다.
“으음…. 내가 할…. 에취!”
포티스는 자신의 아이인 만큼 어떻게든 돌보는 일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콧물까지 흘러내려 브라우니에게 제지당하고 말았다.
“포티스님, 홑몸이 아니시니 감기라도 걸리시면 큰일이에요. 얌전히 계세요.”
“아….”
브라우니의 말도 맞는 것이긴 했다. 이제는 어린 아샤는 물론 시스 황제도 함께 생활하고 있었으니까.
“으으….”
포티스가 떨면서 찻잔을 받아들고 차를 넘기고 있자, 어린 아샤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마마, 아파?”
“아, 아니…. 아니야. 괜찮아질 거야.”
분명 함께 눈을 맞고 실컷 놀았는데 어린 아샤는 아이여서 그런지 여전히 팔팔하고, 기침은커녕 아무렇지도 않았다. 포티스는 뒤늦게 좀 더 자신의 몸을 단단히 싸맸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마마….”
어린 아샤가 포티스가 덮고 있는 담요 자락을 끌어당겼다. 포티스가 손을 뻗어 어린 아샤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정말 괜찮아, 아샤야. 배가 고프지는 않니? 뭐라도 먹을래?”
“으으응….”
그때 브라우니들이 어린 아샤와 놀아줄 요량으로 여러 모양으로 세공된 디아망과 나무틀을 가지고 왔다. 틀에 맞춰서 디아망을 끼워 넣는 놀이였다. 하지만 보석의 투명한 광채도 어린 아샤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어린 아샤는 훌쩍이며 포티스의 옆구리로 파고들었고, 결국 담요를 들치고 안으로 들어오게 해서 새가 알을 품듯이 보듬어주어야 했다. 그래도 그렇게 해주자 어린 아샤는 눈물을 그쳤고 담요 끝을 둥글게 말아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 공간이 편했는지, 몸을 카펫이 깔린 바닥에 찰싹 붙인 채 어린 아샤는 편안하게 브라우니들이 분주하게 안을 돌아다니는 모습을 구경했다.
“아샤님, 이것 보세요!”
브라우니 몇이 포티스가 편히 쉬도록 어린 아샤와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했지만, 그는 눈앞에서 반짝이거나 황홀하게 움직이는 장난감들에 잠깐 손을 뻗을 뿐 거기서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이대로 내버려 두어도 될 것 같아.”
자신의 아이가 우는 것만 아니라면 포티스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서 브라우니에게 미소를 보였다. 포티스는 따끈따끈한 물주머니 같은 아샤를 자신의 무릎에 앉히고 그대로 안고 있었다.
그렇게 오후 시간이 흘러갔다. 아무래도 아이와 있다 보면 하루가 정신없이 금방 저물고 만다. 더군다나 낮 동안 내내 흐린 날씨였기에, 포티스는 시스 황제가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제1궁에 들어섰을 때 예기치 않은 선물을 받은 것처럼 깜짝 놀라 눈을 반짝였다.
“어서 오세요!”
“파파.”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가진 둘이 동시에 시스 황제에게 달려들었지만, 그는 누굴 먼저 안아주어야 할지 고민하지 않고 어린 아샤를 재빠르게 한쪽 팔에 안아 든 다음 그대로 포티스를 감싸 끌어안았다. 어린 아샤는 둘 사이에 끼어서 행복한 듯 소리 내 웃었다.
“보고 싶었어.”
“저도, 저도요!”
시스 황제가 포티스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포티스는 뺨을 붉히긴 했지만, 마찬가지로 똑같이 그에게 입맞춤을 돌려주었다.
“고생하셨어요.”
“딱히…. 그보다 낮에 지루하지 않았어? 종일 눈이 왔으니까.”
둘이 밀착해서 대화를 나누려는 바람에 어린 아샤가 팔을 뻗으며 바둥거렸다. 포티스가 얼른 시스 황제에게서 아이를 받아들었다.
“괜찮았어요. 아샤랑 브라우니하고 눈으로 이것저것 만들었거든요.”
“파파에게…. 보여줄래….”
그리고는 어린 아샤가 드물게 흥분해서 시스 황제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실내에 눈으로 만든 것들을 가져오면 녹아버릴 테니, 낮에 그들이 만든 건 전부 정원에 놓아두었다.
“시스….”
어린 아샤에게 이따 나가보자고 해야 할지 망설이면서, 포티스가 시스 황제를 응시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스 황제는 자신의 첫째 아이, 어린 아샤를 포티스만큼 아끼는 것은 아니었으나 파트너와 함께 만들어낸 아이였으니 충분히 소중히 여겼다. 그래서 그는 어린 아샤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야 할 책임감을 느꼈다.
“보고 싶어. 안내해줘.”
정원 입구에서 시스 황제는 포티스, 어린 아샤 그리고 브라우니가 열심히 빚어놓은 눈토끼들을 감상했고, 잎사귀가 얹어진 눈으로 만든 음식 같은 무언가도 살펴보았다. 브라우니가 손을 댄 눈토끼를 제외하면 모양새는 훌륭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시스 황제는 자신이 황궁에서 맡은 바를 행하고 있는 동안 포티스와 어린 아샤가 무얼 하면서 시간을 보냈는지 알 수 있어서 흥미로워했다.
“잘 만들었어.”
“이게, 내가 만든 거….”
어린 아샤가 어쩐지 우물쭈물 부끄러워하며 눈토끼를 들어 보였다. 시스 황제는 어릴 때 계승권이 그다지 높지 않았고, 황제에게 칭찬받은 기억도 그다지 없었다. 그러나 그는 흠잡을 곳 없는 태도로 허리를 굽혀 눈높이를 맞춘 다음 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뺨에 입도 맞추었다.
“아샤는 손재주가 좋아. 여기 있는 눈토끼 중에 가장 귀엽게 생겼어.”
어린 아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토끼를 들고 있던 손을 꼼지락거리며 몸을 들썩였다.
“제일 귀여워…?”
“정말이야. 마마도 열심히 했는데, 아샤의 솜씨가 최고네.”
포티스 역시 어린 아샤의 뺨에 뺨을 맞대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마마파파와 셋이 함께 하는 것만 해도 즐거운데 그 둘이 관심을 갖고 칭찬하니 어린 아샤는 쑥스러워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이거, 마마하고…. 브라우니하고, 이렇게….”
이번엔 어린 아샤가 낮에 했던 일을 설명하고 싶어 했다. 시스 황제는 포티스만큼 어린 아샤의 말을 잘 알아듣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주의 깊게 귀를 기울였다.
“낮에 재밌게 놀았구나? 춥지는 않았어?”
어린 아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눈이 많이, 왔지만…. 괜찮아…. 요!”
“그래, 장하구나.”
포티스는 두 실론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다가 적당한 순간에 끼어들었다.
“이제 들어가자. 파파는 배가 고프실 테니까.”
“나도…. 먹고 싶어….”
마치 배가 고프다는 말에 반응한 것처럼 어린 아샤는 갑작스럽게 강한 허기를 느꼈다. 그리고 정원 바닥에 웅크려 앉으면서 눈토끼들이 사이좋게 있도록 내려놓은 후 흥분해서 후다닥 앞서 달려나갔다.
“마마, 파파…! 빨리….”
그러나 어린 아샤는 멀리 가지 않은 채로 손을 흔들며 둘이 오기를 기다렸다. 시스 황제가 차분하게 포티스의 손을 움켜잡았다. 장갑의 감촉이 만져졌지만, 그 아래로 가늘고 작은 포티스의 손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들어가자.”
“네에.”
정원에서 제1궁으로 돌아오면 브라우니들이 벌써 저녁 식사를 준비해둔 뒤였다. 셋은 다시 훈훈한 온기 속으로 들어섰다. 식사가 차려져 있는 테이블은 갓 만들어서 올린 요리 덕분에 공기가 한층 더 따뜻하고 향기로웠다.
“고기….”
확실히 커다랗고 잘 구워진 칠면조 구이가 테이블 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어린 아샤가 흥분하여 브라우니의 도움을 받아 작고 높은 의자에 앉았다. 시스 황제와 포티스 역시 편안히 자리를 잡았고, 칠면조 구이와 과일, 그리고 허브를 가득 넣은 차를 넉넉히 먹고 마셨다. 낮의 왕성한 활동 덕분인지 어린 아샤는 평소의 두 배로 먹었다.
저녁 식사 후 셋은 침실이 있는 방의 넓은 침대 위에서 느긋하게 카드를 펼쳐두고 긴 겨울밤을 보냈다. 어린 아샤가 각자 말을 가지고 승패를 겨루는 솔레이유 게임의 규칙을 이해하기는 어려웠기에 포티스와 시스 황제가 옆에서 패를 봐주며 의논하고 적절한 것을 골라주었다. 그래서 정당한 솔레이유 게임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셋은 나름대로 즐거웠다.
특히 어린 아샤의 손에 초보자의 행운이 주어진 것처럼 굉장한 패가 한 번에 들어와 마마와 파파의 재산인 보석 주화를 몽땅 털었을 때는 시스 황제마저 소리 내 웃었을 정도였다. 서로 장난으로 카드 패를 내고, 어린 아샤가 보석 주화를 더 많이 가져가도록 돕다 보니 승자는 쉽게 정해졌다.
“우리 아샤가 이겼어.”
시스 황제가 직접 어린 아샤의 머리에 작은 왕관을 씌워주었다.
“승자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
포티스가 어린 아샤의 옆에서 속삭이며 소원을 말하도록 권유했다.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도 된단다.”
“으으응….”
그러나 어린 아샤의 생각에는 마마와 파파가 있으니 더 필요한 게 없을 것 같았다. 더군다나 둘에게서 보석 주화도 잔뜩 챙긴 참이었다.
“으으으응…. 보송보송하고 따뜻한 게 좋아….”
시스 황제와 포티스는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을 하기 어려워서 어린 아샤의 입에서 적당한 답이 나올 때까지 스무고개처럼 물어야만 했다. 아이의 말은 난해했으나, 마침내 포티스가 실마리를 잡았다.
“뭔지 알겠어요. 아샤는 동물 친구가 필요한 것 같아요.”
그러면서 얼마 전에 만난 어린 아샤와 같은 또래의 황족이 데리고 있던 복슬복슬한 마물에 대해서 언급했다. 아샤는 또래 아이를 무척이나 불편해하고 잘 어울리지 못하는데, 그때만은 열심히 말도 걸고 복슬복슬한 마물을 조심스럽게 안아보기도 했다.
“동물 친구라.”
시스 황제는 그러한 것을 원한 적이 없었다. 그가 원했던 최초의 욕망은 포티스였고, 그 어느 것도 포티스만큼 갖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첫째 아이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해줄 생각이었다.
“아샤에게 어울리는 친구를 찾아줄게.”
“파파! 고마워…. 요!”
어린 아샤가 기쁨에 차서 시스 황제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포티스가 쿡쿡 웃으면서 시스 황제의 어깨에 기댔다.
“좋겠다, 아샤.”
“너무 좋아…!”
어린 아샤는 둘 사이에 빈틈없이 파고들어 앉은 다음 한참 동안 시스 황제에게 말을 걸었다가 포티스에게 매달렸다가 하더니 이내 동그란 눈을 절반쯤 감으면서 졸았다. 어린 아샤가 잠투정을 하며 양팔로 시스 황제와 포티스를 끌어당겼다.
“아샤, 졸리는구나.”
“안…. 졸려….”
“어디 안 갈 테니까, 편하게 자.”
“으으응….”
하지만 어린 아샤는 마마와 파파와 함께 있는 게 좋아서 어떻게든 더 버티려고 했다. 그래서 한참을 더 투정하더니 결국 포티스의 배에 달라붙어 잠들고 말았다.
“아샤는 소심하고 잘 울면서 고집은 엄청나요.”
그것이 자신을 닮았다는 의미인 걸 알아챈 시스 황제는 옅게 웃으면서 포티스의 어깨를 감싸서 자신을 마주 보도록 했다.
“그래서, 싫어?”
“싫은 건 아니지만…. 시스랑 비슷할 때마다 놀라고 재밌어서요.”
“너와 내가 만든 아이잖아.”
“그…. 그렇게 말씀하시면 부끄러운데….”
포티스가 뺨에 홍조를 띄웠다. 둘은 어린 아샤를 깨우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고개를 기울여 짧게 입맞춤을 여러 번 나누었다. 시스 황제는 문득 잊고 있던 용건을 떠올렸다. 제1궁으로 돌아오자마자 알려주려고 했는데, 둘과 함께 편안한 저녁나절을 보낸 나머지 잠시 잊고 있었다.
“내일은 좋은 소식이 있어.”
“네? 어떤 거예요?”
“자고 일어나면 알려줄게.”
“저 궁금해서 못 잘 것 같아요!”
포티스가 장난스럽게 말하며 눈을 반짝였는데, 시스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래도 지금 말하진 않을 텐데.”
“너무해요, 시스…. 이렇게….”
하지만 포티스의 말은 계속 이어지지 않았다. 비록 아이가 옆에 있긴 했지만, 키스 정도는 나누지 못할 것도 없었다. 시스 황제가 포티스의 뺨에 손을 대고 입술을 물며 혀를 넣었다. 포티스는 순순히 눈을 감았다.
“으응….”
한참 만에 입술이 떨어졌을 때 포티스는 시스 황제에게서 강한 끌림을 느꼈다. 흥분해서 뱃속이 간질거리는 느낌도 들었다. 그런 포티스의 몸 상태를 빤히 알고, 그 역시 마찬가지일 텐데도, 시스 황제는 포티스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둘 사이에는 어린 아샤가 발끝을 꼼지락거리며 누워있었다.
“정말…. 짓궂어요. 못 참을 것 같은데요….”
포티스가 약간 토라진 얼굴로 항의했는데, 시스 황제는 듣지 못한 척 자리에 누워버렸다. 그러면서도 이불 속으로 포티스의 손을 찾아 들어왔다. 포티스는 오랫동안 토라져 있지 못했는데, 아이가 있기에 행위를 할 수 없는 상황을 당연히 이해하기도 했고, 그가 자신에게 장난을 친다는 게 재미있고 좋았다.
“잘 자.”
“잘 자요, 시스….”
시스 황제는 금방 잠들었고, 포티스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가 언제인지 모르게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시스 황제는 침대에서 단잠에 빠져 있는 자신의 파트너와 첫째 아이를 깨우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가운차림으로 방을 나섰다. 브라우니에게 지시해서 몸단장하는 동안에 디아망을 가공한 투명한 창으로 내다보니 어제와 똑같은 풍경이었다.
“아침은 필요 없어.”
몸단장을 마친 시스 황제가 브라우니에게 말했지만, 오랫동안 시스 황제를 모셔온 브라우니는 비록 존칭과 존대를 사용하면서도 고집스럽게 시스 황제가 무어라도 속에 넣고 가길 바라면서 자꾸만 권했다.
“포티스님도 반드시 드시라고 했을 거예요, 주인님.”
“하….”
결국 시스 황제가 지고 말았다. 그는 브라우니의 말대로 뜨끈한 음료와 먹을 것을 조금이나마 챙겼고 포티스와 어린 아샤가 잠든 침실을 살짝 들여다본 다음 황궁으로 향했다. 몇 번이고 치워도 깊게 쌓이는 눈 덕분에 마차를 이용할 수 없는 지독한 날씨였다. 브라우니들이 간신히 시스 황제가 지나갈 길목만을 치우며 앞장섰다.
고생 끝에 도착한 집무실에서 시스 황제는 어제 제법 시일이 촉박한 일들을 제법 처리했다는 걸 확인했다. 자신이 반드시 필요한 일에도 전부 관여를 마쳤다. 그래서 어제보다는 덜 중요한 둥근 종이 뭉치를 하나씩 펴보면서 그는 드문드문 생각에 잠기곤 했다.
시스 황제는 포티스와 어린 아샤를 데리고 짧은 휴가를 떠날 예정이었다. 황제에게 휴일이라는 게 과연 가능할까? 그러나 모든 불가능한 일들을 그렇게 되도록 만드는 게 바로 마술사였다.
한참 동안 둥근 종이 뭉치를 살펴보던 시스 황제는 어젯밤에 첫째 아이와 한 약속을 떠올렸다. 어린 아샤는 계승권이 높은 황제의 정통 후계자였으니, 평범하게 복슬복슬한 마물 따위를 갖게 할 순 없었다. 심지어 또래의 황족이 이미 데리고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특별한 친구가 필요하겠지.’
시스 황제는 마물이 아닌 자동 인형을 생각했다. 등 뒤에 있는 기계 태엽 장치와 마력을 방출하는 영구기관을 심장에 삽입한 그것은 시스 황제가 어린 시절에 유행했지만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고 있었다. 물론 시스 황제는 가져본 적이 없었다. 다만 전대 황제가 그러한 자동 인형을 무척 애지중지했던 적이 있어서 드문드문 기억이 날 뿐이다.
‘이건 엔지니어에게 제작을 지시하고.’
자동 인형의 핵심인 마력을 방출하는 영구기관에 넣는 재료에 따라 자동 인형의 지능이 달라졌다. 시스 황제는 가장 희귀한 최상급의 재료를 아낌없이 사용하라는 내용의 서신을 작성해 브라우니에게 맡겼다. 눈보라에도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는 작은 요정은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둥글게 말린 서신을 챙겼다.
비록 황족들 사이에서 유행이 끝났다 해도 여전히 자동 인형을 연구하는 엔지니어들은 흥분해서 시스 황제의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최고의 자동 인형을 제작하기 위해 깊이 숨겨두었던 희귀한 재료를 아낌없이 꺼냈고, 여기저기 서신을 보내 내놓으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시스 황제의 첫째 아이가 소유할 물건이라면 아무리 값비싼 재료를 사용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시스 황제는 어린 아샤를 위한 선물이 그날 저녁에 준비가 돼 있길 바랐고, 촉박한 납품 기한에 엔지니어는 다른 분야를 연구하는 동료들에게까지 도움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슬라임의 손이라도 필요한 지경이었다. 그러나 하루 만에 마법의 섬을 만들라는 지시를 받은 7인의 마술사들도, 반나절 동안 자동 인형을 제작해야 하는 황궁 소속의 엔지니어들 누구조차도 납품 기한을 미룰 수는 없었다. 시스 황제는 자신이 지정한 시간까지 그것이 이루어져 있기를 원했다. 그게 바로 그가 바라는 것을 손에 넣는 방식이었다.
저녁이 되었다. 포티스가 약하게 감기 기운을 보인 데다 황궁 밖에 쌓인 눈이 위협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기에 그날 낮 동안 어린 아샤는 제1궁의 실내에서 머물러야만 했다.
“파파가 언제…. 올까…. 요?”
벌써 대여섯 번째 묻는 말이었지만, 포티스는 전혀 귀찮아하지 않으면서 대답해주었다.
“돌아오실 때가 되면.”
“빨리…. 와야 하는데….”
어린 아샤가 유달리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고 처음엔 의아했지만, 포티스는 곧 자신의 아이가 어젯밤 시스 황제와 나눈 약속을 기억한다는 걸 깨달았다. 시스 황제의 품에 안겨 있을 복슬복슬하고 따끈한 생물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자고 일어나면 잊어버릴 만한데도 용케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 귀엽게만 느껴졌다.
“파파만 보고 싶어?”
포티스는 마시던 찻잔을 치우면서 어린 아샤를 뒤에서 달랑 안아 들었다.
“으으응…. 마마도….”
어린 아샤는 눈을 깜박이며 포티스를 응시하더니 뺨에 입을 맞추었다. 지루하지 않도록 어젯밤에 가지고 놀던 카드 패와 보석 주화를 가져오자 첫째 아이는 금방 흥미를 보였다. 그는 포티스가 나누어준 카드 몇 장을 손에 엉성하게 들면서 온종일 생각하고 있던 화제를 꺼냈다.
“마마는…. 복슬복슬 따끈한 거 좋아?”
“물론이지. 안고 있으면 포근해서 기분 좋을 것 같아.”
그러자 어린 아샤는 입을 약간 삐죽이며 신중히 카드 패를 내려놓았다. 지금 둘이 함께 하고 있는 건 그저 같은 문양이 그려진 카드들을 모으는 단순한 것이었다. 포티스가 카드 중 한 장을 골라 내밀었다.
“오늘…. 꼭 올 거야. 내 복슬복슬…. 파파가 데리고….”
하지만 포티스는 그렇다고 긍정하는 대신 말을 조심스럽게 골랐다. 시스 황제가 날짜를 확언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면 좋겠네. 아샤가 안고 잘 수 있을 테니까.”
“…으으응!”
어린 아샤가 눈을 반짝이며 이번엔 다른 문양의 카드를 여러 장 내놓았다. 포티스는 그 문양의 카드가 없었기에 카드를 새로 받아야만 했다. 포티스와 벽난로 근처의 바닥에 앉아 이렇게 놀고 있는데도 어린 아샤의 신경은 온통 방의 입구를 향해 쏠려있었다. 그래서 복도에서 가벼운 말소리가 들렸을 때도 제일 먼저 벌떡 일어나 입구로 향했다.
“아샤!”
의외로 자신의 아이보다 훨씬 문양을 맞추는 게임에 몰두해있던 포티스가 카드를 내려놓고 얼른 뒤따랐다.
“파파…!”
복도에서 어린 아샤의 기쁨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시스 황제가 제1궁으로 돌아온 것이다.
“아샤, 잘 놀았어?”
“으으응…. 파파, 파파. 복슬복슬 따뜻한 건…?”
반드시 오늘 시스 황제가 데려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시스 황제는 자신의 첫째 아이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만족감에 옅게 웃었다.
“안에 들어있어.”
시스 황제의 뒤에는 브라우니 여럿이 커다란 상자를 높이 들고 있었다. 브라우니들이 가방을 방안으로 옮기자 어린 아샤가 눈을 반짝이며 안에서 나오는 포티스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오셨어요?”
포티스가 밝게 웃으면서 시스 황제의 손을 맞잡았다. 반대편 손에 작은 상자를 들고 있던 시스 황제는 그것을 포티스에게 내밀었다.
“…선물.”
“네? 선물? 저에게도 주시는 거예요? 헤헤.”
상자는 손바닥 2개를 펼친 정도의 크기였는데 포티스가 살살 흔들어보자, 가볍게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가서 열어봐. 여긴 추우니까.”
“좋, 좋아요! 시스도 어서 들어오세요.”
어린 아샤는 브라우니들의 도움을 받아 이미 커다란 상자의 포장을 푼 상태였다. 안에는 아직 성숙하지 않은 소년 체형의 자동 인형이 얇은 튜니카를 걸친 스스로의 몸을 끌어안은 채 웅크리고 있었다. 등 쪽에는 의심할 여지 없이 자동 인형임을 나타나는 태엽을 끼울 수 있는 장치가 드러나 있었다. 어두운 피부는 매끈했으며 복슬복슬한 머리카락은 옅은 사금 같았다.
“파파가…. 예쁜 누군가를 데려왔어!”
상자 속으로 손을 뻗어 피부에 손을 대본 어린 아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미소를 보였다. 자동 인형의 몸에는 기분 좋은 열기가 감돌았다. 포티스는 마치 어린 실론처럼 보이는 그 모습에 일단 놀랐지만, 이내 등을 보고 안심한 듯 감탄했다.
“시스, 이건 자동 인형…. 인가요?”
“맞아. 마술사와 엔지니어의 기술이 합쳐진 훌륭한 물건이야.”
“어릴 때, 아버지의 영지를 찾아온 황족분이 데리고 있는 걸 본 적이 있어요. 정말 오래전인데.”
“요즘은 자동 인형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어.”
“자동…. 인형…?”
어린 아샤는 대화를 이해해보려고 열심히 둘을 번갈아 응시했다. 시스 황제가 자세를 낮춘 다음 어린 아샤의 어깨를 감싸고서 태엽을 작은 손에 쥐여주었다. 그리고 이제 막 가동을 시작하려는 자동 인형을 일으켜 등 부분을 어린 아샤에게 보여주었다.
“여기에 태엽을 넣고 감으면 돼, 직접 해봐. 이 아이가 네 친구가 되어 줄 테니.”
시스 황제가 알려준 대로 어린 아샤는 서툰 손길로 힘껏 태엽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동 인형의 감긴 눈이 열리고 붙잡아주지 않아도 상자 속에서 비트적거리며 몸을 가누었다.
“…….”
자동 인형이 고개를 돌려 태엽을 쥔 어린 아샤를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는 가공한 디아망을 사용해 투명하게 반짝였다. 다양한 재료가 심장 부근에서 뒤얽혀 서로 강한 작용을 하며 마치 생명을 가진 것처럼 규칙적으로 두근거렸다.
“나…. 나는, 아샤…!”
“……. 아샤구나. 난 파사르.”
“파…. 사르.”
서로 인사를 나누자 약간 무기력하게 보였던 자동 인형 파사르가 태엽을 감은 주인을 인식하고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로 상자에서 벗어나더니 시스 황제와 포티스에게 예를 갖추어서 인사했다.
“시스 황제 폐하와 파트너 포티스님을 뵙습니다. 앞으로 두 분을 도와 아샤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저어…. 잘 부탁해요.”
자동 인형이 가동되는 모습에 긴장한 포티스가 어물어물 인사를 했지만, 시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둘의 허락을 받았다고 판단했는지 자동 인형 파사르는 어린 아샤를 능숙하게 끌어안아 주었다.
“아샤가 복슬복슬하고 따뜻한 걸 원한다고 들었어…. 그래서 내가 왔어.”
“맞아! 파사르…. 복슬복슬 따뜻해!”
자신이 생각한 복슬복슬하고 따뜻한 생물과는 약간 다르다고 느끼면서도 어린 아샤는 당연하게 자동 인형 파사르를 파파가 데려온 새로운 친구라고 받아들이고 친근하게 그의 긴 머리카락을 붙잡아 당겼다.
둘이 금방 함께 어울리는 모습을 보자 포티스는 신기해하면서 눈을 깜박였다. 시스 황제가 입을 열었다.
“이제 내 선물을 열어봐.”
포티스가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상자를 열자 디아망을 가공해 만든 구가 나왔다. 안쪽에는 어떻게 넣은 건지 자그마한 섬이 푸른 액체 위에서 천천히 떠다녔다.
“예뻐요, 장식품인가요?”
구를 흔들어보는 포티스의 손을 시스가 천천히 붙잡았다. 이제부터 진짜 선물을 그에게 알려 줄 생각이었다.
“마술사가 구축한 마법의 섬이야.”
“마법의 섬이요? 어떤 용도의…?”
“그래…. 오늘 너와 아샤를 데리고 그곳으로 휴가를 떠나려고.”
“네?”
완전히 핵심만을 언급한 말에 포티스가 좀처럼 따라오지 못하자, 시스 황제는 그의 손을 쥐면서 차근차근 설명했다. 마술사의 거처에 커다란 숲이 있었고 그것과 같은 원리로 이것을 만들게 했다고 하니 그제야 깜짝 놀라면서 뺨이 붉어졌다.
“저희가 이 안으로 들어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어.”
기분이 좋아진 포티스가 작게 소리 내 웃으며 시스 황제에게 몸을 기댔다.
“엄청 재미있을 거예요! 시스와 여행을 떠난다니 너무 기대돼요!”
“지금 당장이라도 떠나도 돼.”
“갈래요!”
투명한 구 안은 초여름 날씨였다. 포티스는 얼른 입고 있던 겨울용 실내복을 갈아입었고 직접 시스 황제와 어린 아샤의 몸단장도 살펴봐 주었다. 그리고는 무엇이 더 필요할지 몰라 고민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 먹을 걸 가져가야 하지 않을까요?”
“필요한 건 전부 안에 있어.”
그 말에 마침내 포티스가 결심했다.
“그럼, 떠나요!”
마법의 섬으로 브라우니를 데려갈 순 없었다. 다만, 어린 아샤가 원하기도 해서 그들은 자동 인형 파사르도 함께 하기로 했다. 모두가 한자리로 모이고, 시스 황제가 디아망을 가공해 만든 투명한 구의 옆면을 톡 건드렸다. 반짝하는 빛과 함께 넷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밝은 빛 덕분에 포티스는 앞이 잘 보이지 않아 눈을 깜박였다. 그러나 이내 눈이 적응하자 앞에 펼쳐진 투명하고 아름다운 빛깔의 바다에 넋을 잃고 말았다.
“마마. 물이….”
어린 아샤가 호기심에 말문이 막힌 채로 뒤뚱뒤뚱 바다를 향해 다가갔다.
“제가 뒤따르겠습니다.”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자동 인형 파사르가 어린 아샤를 붙잡으러 달려갔다.
“물이…. 많아…! 파파…!”
소금기가 섞인 물 냄새, 출렁이는 규칙적인 파도 소리와 순백의 모래사장은 이상적인 바다 그 자체였다. 포티스가 시스 황제를 올려보았다. 그의 뒤편에는 외벽이 흰 조개껍데기 같은 질감의 3층짜리 건물이 있었지만, 지금은 둘러볼 틈이 없었다.
“어서 가요, 아샤가 불러요.”
자동 인형 파사르의 손을 붙잡은 어린 아샤는 파도를 피하기도 했다가 발을 적시기도 하면서 장난을 쳤다. 자동 인형인 파사르는 갑작스럽게 경험하게 된 마법의 힘에도 바다에도 그다지 놀라지 않고, 자신의 최대 관심사인 어린 아샤가 미끄러져서 다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마마와 파파가 다가오자 어린 아샤는 모래사장에서 주운 투명한 조개껍데기를 보여주었다. 포티스가 자신의 첫째 아이와 눈을 맞추었다.
“여긴 바다야. 아샤는 아직 본 적 없었지?”
“마마랑 파파랑 처음 왔어…. 요!”
모래사장은 햇살에 알맞게 달구어져 있어서 물에 닿아도 조금도 차갑지 않았다.
“바다에는 여러 생물이 살고 있어. 물고기나 인어도.”
어린 아샤는 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바다에 들어가서 그것들이 전부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 했는데, 포티스가 먼저 모래 깊숙이 사는 보석 조개를 찾아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기에 어린 아샤의 관심사는 당장 그쪽으로 바뀌었다.
“해볼래, 해볼래….”
“우선 이렇게 젖어있는 모래가 좋아. 조개가 숨어 있는 곳은 어딘지 알 수 없으니까 적당히 파보자.”
시스 황제는 얇은 튜니카 차림으로 바다의 지평선을 바라보며 미풍을 맞고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무척 기분 좋게 느껴졌다.
자동 인형 파사르와 어린 아샤가 포티스의 시범에 따라 모래를 파내기 시작했다. 너무 깊은 곳까지 팔 필요는 없었기에 만약 한 군데에 없다면 다른 쪽으로 이동하면 그만이었다. 모래는 부드러웠고, 어린 아샤의 힘으로도 충분히 쉽게 파헤칠 수 있었다. 포티스와 어린 아샤는 허탕을 쳐서 구멍을 여러 개 파놓았지만, 마침내 자동 인형 파사르가 보석 조개 하나를 발견했다.
“와아!”
그는 놀라는 어린 아샤의 손바닥에 그걸 올려놓았다. 어린 아샤는 엄지와 검지로 보석 조개를 집어 들고 햇빛에 비추어보았다. 조개는 이름에 걸맞게 다각도로 빛나는 껍질을 갖고 있었다. 일단 보석 조개를 하나 가지자 어린 아샤의 흥미가 다시 바다로 향했다.
“물에 들어가지.”
시스 황제가 앞서서 얇은 튜니카를 벗어 모래사장에 떨어트렸다. 그리고 수영을 배운 적 없는 어린 아샤를 걱정하는 포티스를 안심시켰다.
“이 바다에선 가라앉지 않아.”
“그럼 다행이에요. 아샤야, 피곤하면 바로 말해야 해. 마마랑 파파가 옆에 있을게.”
“으으응….”
어린 아샤 역시 금방 알몸이 되더니 자동 인형 파사르의 손을 이끌어 얕은 물로 첨벙첨벙 들어갔다. 포티스도 서둘러 얇은 파즈용 원피스를 벗었다. 시스 황제가 포티스의 가느다란 허리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시스…. 아샤에게 가봐야 하는데요.”
하지만 밀착하는 감각이 싫지 않아 손을 겹쳐 잡으면서 시스 황제를 응시했다. 햇살 아래서 포티스의 가느다란 팔다리는 눈부시게 빛났다.
“파사르가 있으니 괜찮아.”
“그, 그래도….”
시스 황제의 입술을 받아들이면서 포티스가 슬쩍 어린 아샤가 있는 방향을 살펴보면 파사르는 훌륭하게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어린 아샤를 향한 자동 인형의 집중은 느슨해지지 않았고, 계속해서 아이를 즐겁게 해줄 방법을 새롭게 생각해내는 듯 어린 아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지금 그들은 파사르가 건져낸 커다란 미역 덩어리를 만져보고 있었다.
“조금만.”
포티스가 키스에 응하길 재촉하는 시스 황제의 농밀한 손길이 가슴과 배, 그리고 민감한 옆구리를 매만졌다. 포티스는 이렇게 닿아있으면 언제나 그렇듯 시스 황제를 향해 강한 끌림을 느꼈다. 그러나 자신들의 아이 앞에서 지나치게 애정 행각을 할 수는 없어서 이렇게 속삭였다.
“키스…. 키스만이에요?”
포티스가 망설임 끝에 허락의 표시로 그를 마주 안았다. 우선 입술이 가볍게 맞닿았고 서로를 마주 안았다. 시스 황제는 포티스의 혀를 부드럽게 감아 빨아들였다. 포티스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하지만 적당한 순간에 입술이 떨어졌고, 포티스는 뺨을 붉히면서 시스 황제의 팔을 붙잡았다.
둘은 어린 아샤와 자동 인형 파사르를 향해 다가갔다. 햇살에 달구어진 몸에 시원한 물이 기분 좋게 감겨왔다. 마법의 섬은 여름과 바다의 가장 좋은 부분들만 모아둔 것 같았다. 물은 그다지 깊지 않은 데다 잔잔한 파도가 쳤고, 안에 사는 생물들 중에 어린 아샤에게 유해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둘은 어린 아샤에게 떠 있는 상태로 물장구치는 법을 알려주고, 몸을 붙잡은 채로 짧은 거리를 헤엄치게 도우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자신들의 첫째 아이는 물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물놀이는 석양이 질 때가 되어서야 끝났고, 항상 힘이 넘치는 자동 인형 파사르를 제외한 셋은 배고프고 기분 좋게 지친 상태가 되어 뭍으로 나왔다.
“아직 더 놀고 싶은데….”
시스 황제의 등에 업혀 있던 어린 아샤가 자꾸만 노을 지는 바다를 돌아보며 작게 말했다.
“아샤야, 내일…. 아니, 다음에 또 놀자. 우선 밥 먹고 쉬는 게 좋을 것 같아.”
마법의 섬에 언제까지 머물 수 있을지 몰라 포티스가 애매하게 대답했는데 시스 황제가 확언했다.
“내일도 놀 수 있어.”
“정말?”
“정말.”
마침내 어린 아샤가 만족스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스 황제는 포티스의 귓가로 고개를 기울여 이곳에서의 하루는 현실에서 한 시간밖에 되지 않는다고 알려주었다. 포티스가 기뻐한 것은 물론이었다. 아직 며칠이나 휴가가 남아 있었다.
바닷가에 있는 흰 건물로 들어간 그들은 소금기에 젖은 몸을 씻고 옷을 걸쳤다. 그러는 사이에 텅 비어있던 테이블 위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저녁 식사가 차려졌다. 미역과 생선이 들어간 스튜, 갖가지 허브가 뒤섞인 샐러드, 커다란 관자와 향신료가 들어간 수프 등 바닷가에서 맛볼 수 있는 진미였다. 직접 요리를 하는 수고를 던 포티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신기해요. 꼭 저희만을 위한 것 같아요.”
시스 황제가 옅게 미소를 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그들만을 위한 공간이 맞았다. 다른 이들이나 꼭 해야만 하는 일의 방해를 받지 않고 그저 쉬고, 떠들고, 편히 지낼 수 있었다.
“꼭 이렇게 지내고 싶었어. 나는 너와 아샤만 있으면 충분해.”
물론 휴식하는 순간에는 그렇다는 것이다. 시스 황제는 나름대로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고, 포티스 역시 그걸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테이블에 앉은 시스 황제에게 다가가 뒤에서 그를 힘껏 안아주었다.
“사랑하는 시스, 내내 바빠서 힘들었죠?”
“…조금.”
“정말, 정말 고생하셨어요.”
포티스가 먼저 시스 황제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들은 막 결합한 파트너처럼 서로의 몸을 쓰다듬고 끌어안다가 무릎에 앉히기도 했다.
자동 인형 파사르가 딱히 둘을 기다리지 않고 직접 오목한 그릇에 수프를 덜어내어 어린 아샤에 입에 조금씩 떠넣어 주었다. 원래부터 얌전한 편인 어린 아샤는 요즈음 들어 가장 씩씩한 모습으로 작은 입을 크게 벌려 수프를 먹었다.
시스 황제와 뺨을 맞대고 있던 포티스는 자신이 요리가 차려진 테이블 앞에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아샤에게 밥을 먹여야 하는데요….”
하지만 어린 아샤가 볼이 통통해지도록 야무지게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심지어 자동 인형 파사르와 어린 아샤는 식사를 하면서도 손을 이용해 가벼운 놀이를 즐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아샤는 괜찮으니까, 우선 너부터 먹도록 해.”
황궁에 있을 때는 항상 브라우니와 달라붙어 어린 아샤의 식사를 먼저 챙기곤 했기에 약간 어색했지만, 포티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스푼과 포크를 집어 들었다.
“이 샐러드에서 무척 좋은 향이나요.”
“바다에서 나는 식자재가 들어있어서 독특해.”
둘은 대화를 나누면서 느긋하게 먹고 마셨다. 이따금 둘의 시선이 어린 아샤에게 향하기도 했지만, 어린 아샤는 오히려 새로운 친구 파사르와 자기들끼리만 아는 대화를 나누는 데에 푹 빠져서 마마와 파파 쪽으로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식사가 끝나자 해가 완전히 졌다. 어린 아샤가 문득 자동 인형 파사르의 품에 안겨 열린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무언가 발견하고는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파파! 마마! 저기….”
시스 황제와 포티스가 함께 바깥을 살펴보면 바다 부근에서 작은 입자 같은 빛이 반짝이며 떠다녔다. 하늘 역시 쾌청하고 무척이나 높게 느껴졌다.
“저런 건…. 처음 봤어요. 예쁘다.”
“가까이 가볼까. 해변에 불을 피워도 좋고.”
“아, 거기에 마시멜로를 구워주면 아샤가 좋아해요.”
밤의 해변을 향해 나가는 걸로 결정이 났다. 필요한 건 전부 있다는 시스 황제의 말처럼 그들이 머문 흰 건물에는 장작은 물론 마시멜로나 꼬치까지 벌써 준비되어있었다. 건물의 현관문을 활짝 열자 저 멀리까지 펼쳐진 바다에서 마치 거품처럼 반짝이는 빛이 떠올랐다가 허공에서 흩어졌다.
시스 황제가 장작을 쌓은 다음 불을 붙였다. 딱히 열기가 필요한 건 아니었기에, 밤의 모래사장에 피운 모닥불은 그저 운치를 위한 것이었다.
자동 인형 파사르는 마시멜로를 꼬치에 하나씩 꽂았고, 어린 아샤와 그의 마마는 가까이 밀려오는 얕은 파도에 발을 담그거나 빛나는 입자가 섞인 물을 들여다보기도 하면서 해변을 거닐었다. 바닷물은 낮보다 차가웠지만, 피부에 닿는 감촉은 여전히 딱 좋을 정도로 상쾌했다. 둘은 마시멜로가 한참 구워지며 풍기는 향을 맡고서야 웃으면서 모닥불 근처로 나타났다.
“마마, 이거 먹어 봤어…. 요? 파파는…?”
약간 식은 마시멜로 꼬치를 파사르가 넘겨주자 어린 아샤가 포티스와 시스 황제에게 한입씩 맛보도록 했다. 그리고 음미했는지 궁금해서 둘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맛있어.”
시스 황제가 긍정해주자 어린 아샤가 자신도 마시멜로를 구워보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자동 인형 파사르가 불이 닿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꼬치를 쥔 어린 아샤의 팔을 붙잡아주었다. 포티스는 배가 부른 덕분에 자신의 몫인 마시멜로 꼬치를 그저 손에 들고만 있었다. 그의 눈은 꿈을 꾸는 듯했다.
“시스랑 이렇게…. 여행을 오다니 믿을 수 없어요. 정말 너무 기쁜 선물이에요.”
“꿈이 아니야. 앞으로는 원하면, 어디로든 널 데려가 줄게.”
포티스가 시스 황제의 어깨에 살짝 기댔다.
“마법의 섬에 데려와 주신 건 무척 기쁘지만…. 사실은요…. 시스하고 있을 수 있으면 전 어디든 좋아요.”
“정말로?”
포티스는 마시멜로 꼬치의 손잡이 부분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정말이에요…. 그냥, 매 순간순간이 행복한걸요. 시스가 이 세상에 있고, 저…. 저하고 서로 좋아하면서 지낸다는 게…. 또, 저희에게 소중한 아이 아샤도 있고요….”
그렇게 말하는 포티스가 사랑스러워서 시스 황제는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헤헤….”
품에 안긴 포티스는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면서 마주 안아주었다. 그런데 그때 무언가 둘을 덮쳤다. 놀란 포티스가 고개를 들면 어린 아샤가 둘 사이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무척이나 소심하고 울보인 어린 아샤는 이번에 포티스가 황궁으로 돌아왔을 무렵부터 많이 밝아진 상태였다.
“마마…. 파파…. 아샤도….”
“그래, 이리 와.”
시스 황제가 어린 아샤를 안아 들어 끼워 주었다. 양옆에 마마와 파파를 두고 어린 아샤는 짧은 팔을 힘껏 뻗었다.
“파사르…!”
부름에 자동 인형 파사르가 지체 없이 다가와 한 덩어리가 된 셋 위에 자신의 몸을 겹쳤다. 어린 아샤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감과 평온을 느끼고 기뻐서 숨이 막힌 듯이 소리 내 웃었다.
“너무 좋아….”
모닥불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배가 빵빵한 어린 아샤가 졸린 듯 연신 눈을 부비더니 부드러운 모래사장 위에서 무방비하게 팔다리를 쭉 편 채 잠들고 말았다. 포티스가 어린 아샤를 안으려고 했지만, 자동 인형 파사르가 고개를 저었다.
“밤바다가 아름답습니다. 두 분이 보고 오는 건 어떠신가요.”
그러면서 잠든 어린 아샤를 자신이 지키고 있겠다고 덧붙였다.
“어쩌지….”
포티스는 망설이면서 시스 황제를 올려보았다.
“그렇게 하는 건? 난 아직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어.”
시스 황제가 포티스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자동 인형 파사르가 어린 아샤를 안아서 흰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나서야 포티스는 등을 돌렸다. 그리고 시스 황제가 자신의 손을 붙잡자 살며시 감싸 쥐면서, 둘은 빛 입자가 보글보글 피어오르는 바닷가를 이리저리 거닐었다. 좀 더 먼 바다에서는 산호가 은은한 조명처럼 빛을 내고 있었다.
포티스는 물가에 앉아 빛 입자를 손에 담아보았다. 그것은 몇 번 깜박이더니 서서히 사라졌다.
“만지면 안 되겠어요. 없어져 버렸어….”
그렇게 말하면서 시스 황제에게 보여주려는데, 시스 황제는 아무 말 없이 포티스의 손목을 가볍게 쥐더니 그대로 부드러운 모래사장에 포티스를 쓰러트렸다.
“아….”
포티스의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렸다.
“넌 어디든 좋다고 했지, 내가 있으면.”
“네에….”
“난 그렇지 않아. 오직 너하고 함께, 널 독점할 수 있기를 원해.”
“그, 그렇지만, 아샤는….”
시스 황제가 옅게 웃었다.
“우리의 아이는 당연히 예외지. 하지만 아샤가 보는 앞에서 이런 걸 할 수는 없으니까, 요령껏.”
말이 끝나자마자 시스 황제의 입술이 포티스의 하얗고 길게 뻗은 목덜미에 닿았다. 그는 포티스의 만지기 좋은 피부를 좋아했다. 손쉽게 몸에 걸쳐진 얇은 파즈용 원피스를 걷어 올리고 목을 잘게 깨물면서 한쪽 가슴을 쥐고 주무르자 금세 유두가 빳빳하게 세워졌다. 포티스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더니 시스 황제의 머리와 목을 팔로 감쌌다.
“아, 읏….”
점점 호흡이 거칠어지며 서로가 서로에게 강한 끌림을 느꼈다. 사실 가까이 있을 때, 대화를 할 때, 잠시 피부가 닿을 때 등 시시각각 그러한 감각을 느꼈지만, 그들은 짐승처럼 아무 때나 뒹굴 순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거리낄 것이 없었고, 포티스는 혼미해져 가는 의식을 붙잡을 생각도 없이 시스 황제에게 완전히 몸을 내맡겼다.
“시, 시스…. 기분, 좋아요….”
내벽이 잔뜩 긴장해 수축하면서 포티스는 자신도 모르게 다리를 움츠렸다. 시스 황제는 잠시 몸을 일으키더니 입고 있던 얇은 튜니카의 장식용 끈을 푼 다음 옷가지를 벗어내 완전히 알몸이 되었다. 탄탄한 가슴 근육과 그 아래로 보이는 균형 잡힌 허리, 그리고 발기해 있는 성기가 보였다.
“저…. 저도, 저도 다 벗을래요….”
포티스는 서둘러 파즈용 원피스를 위로 올려 벗은 다음 약간 부끄러워하며 가슴께에서 자신의 손을 맞잡고 있었다. 시스 황제가 흥미로운 듯 달빛에 드러난 포티스의 몸 구석구석을 살피고, 포티스가 뺨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자 꽉 끌어안으며 덮쳤다.
“으응….”
애초에 저항할 생각도 없었지만, 힘이 빠지면서 몸에 열이 올랐다. 시스 황제는 포티스의 손목을 붙잡은 채 약간 통통한 가슴을 소리가 나도록 혀로 핥으면서 유두를 빨았다. 그가 가슴에 얼굴을 파묻다시피 해서 뺨과 입술로 문질러대자 포티스의 허리가 살짝 휘었다.
“앗…. 아아, 간지, 러워요….”
“그렇지만은 않을 텐데.”
시스 황제의 차가운 손바닥이 허벅지와 옆구리를 훑자 찌릿한 감각이 배를 타고 몸속 깊이 퍼져나갔고 그와 동시에 다물려진 입구에서 체액이 울컥울컥 흘러나왔다.
“후우, 아….”
금세 견디기 힘들어진 포티스가 시스 황제의 등을 끌어안아 하반신을 맞대고 문질러댔다.
“아직…. 아직은 안 돼.”
“하아….”
얕은 파도가 치는 해변에는 약간의 수풀과 바위, 이따금 심어진 나무 빼고는 둘 뿐이었다. 바로 앞에서 힘겹게 신음을 흘리는 포티스는 전부 자신의 것이었다.
‘머리카락도.’
시스 황제는 포티스의 곱슬곱슬한 데다 바다 소금 향이 살짝 풍기는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입을 맞추었다.
‘뺨도.’
입술이 뺨으로 옮겨갔고, 그의 두 손이 포티스의 상체를 천천히 훑으며 가뜩이나 열이 오른 포티스를 더욱 흥분하게 만들었다.
“으흑….”
결국 포티스는 눈을 감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눈가에 눈물방울이 맺혔다. 거칠게 호흡하느라 가슴께가 크게 오르내렸다.
‘내가 안고 있는 이 몸 전부 내 것이다.’
시스 황제가 포티스의 허벅지를 잡아 벌리며 한쪽 발목을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바다에서 올라오는 빛 입자와 밝은 달 덕분에 입구 주변이 온통 투명한 체액으로 번들거리는 게 전부 보였다. 입구는 빠끔 벌어져 있었다.
“…시스.”
포티스가 촉촉한 눈으로 시스 황제를 애원하듯이 응시했다. 그가 그렇게 자신을 바라볼 때가 즐거웠다. 그러나 시스 황제는 그다지 서두르지 않으면서 포티스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감싸 천천히 주물렀다.
“으응…. 아….”
덩달아 내벽 쪽이 당기며 안이 자극되자 포티스의 허벅지가 잘게 떨렸다. 시스 황제의 크고 힘줄이 돋은 성기의 감촉이 한없이 그리웠다. 포티스가 상체를 비틀면서 모래를 움켜쥐었지만, 그것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얼마나 원하는지 말해 봐.”
“많이, 많이요….”
급하게 헐떡이며 대답해도 시스 황제는 포티스의 가슴과 허리를 천천히 쓸어 애태울 뿐이었다.
“으으읏…. 시스, 시스…. 못 참겠어요…. 더는….”
포티스가 숨 막히는 소리를 내면서 자신의 몸을 훑는 시스 황제의 손을 약하게 붙들었다.
“시스, 시스…. 너무 원해요, 시스만을…. 원해….”
가까스로 조각조각 난 말을 조금씩 뱉어내자 시스 황제의 연보랏빛 눈동자에 깊은 만족감이 서렸다. 그가 듣고 싶은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나도 널 원해. 사랑해….”
위에서 포티스의 몸을 감싸면서 귀두 끝을 입구에 갖다 대자 포티스의 몸이 긴장과 흥분으로 파들파들 떨렸다. 이제 시스 황제도 한계였다. 빛이 떠다니는 바닷가의 경치가 근사했지만, 그런 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직 자신의 품에 안긴 포티스의 헐떡이는 숨소리, 체온,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향기만이 느껴졌다. 몸 중심부는 서로를 원했고, 약간 맞닿자마자 상대에게 뜨거운 열기를 전달했다.
“들어갈게.”
“으응…. 어서, 어서…. 마음껏, 들어와도 돼요…. 시스….”
모래사장에 누워있는 포티스의 몸에 밀착하면서 시스 황제가 성기를 밀어 넣었다. 성기가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소리가 질척하게 들렸다. 아직 끝의 일부만 들어왔을 뿐인데 전신을 타고 올라가며 쾌감이 느껴졌다. 시스 황제는 포티스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거칠게 파고들었다. 내벽이 기쁘게 성기를 받아들이면서도 안을 조여내자 체액이 넉넉히 흐르고 있는데도 가벼운 저항을 느꼈다. 그래서 그대로 더 파고드는 대신 성기의 기둥으로 내벽을 자극해 조금씩 삽입했다. 포티스는 그의 어깨에 한쪽 발목을 걸친 채로 자꾸만 몸을 움츠렸다.
“…으응! 아…!”
“괜찮아, 포티스.”
“……. 시, 스.”
시스 황제는 몸을 기울이며 연결부의 빈틈이 없도록 더욱 밀착하며 나아갔다.
“앗, 으응…!”
짧은 절정이 포티스를 덮쳤다. 내벽이 강하게 조여지는 감촉으로 그 사실을 알아챈 시스 황제는 태도를 바꾸어 조임에도 불구하고 단번에 끝까지 들어갔다. 성기의 굵고 단단한 끝이 휘어진 내벽을 힘껏 문지르고 찔러대자 눈을 꽉 감은 포티스의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하아…. 앗…!”
억눌린 신음과 타액이 포티스의 벌어진 입에서 흘러나왔다. 몸속을 꿰뚫는 것 같은 시스 황제의 거친 움직임에 채 익숙해지기도 전에 성기가 확 빠져나가더니 연결부가 맞부딪히는 질척질척한 소리를 내면서 깊게 드나들기 시작했다. 덩달아 포티스의 몸도 위아래로 흔들렸다.
“시, 시스…!”
쾌감이 몸속에서 폭발하듯 흘러넘쳤다. 시스 황제는 거듭해서 안을 찔렀고, 그때마다 포티스의 몸이 크게 떨렸다.
“아, 아아…!”
벌써 몇 번째 절정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뱃속에서 느껴지는 쾌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몸을 겹치면 겹칠수록 더욱 커져가기만 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느새 포티스는 허리를 흔들며 성기를 받아내고 있었다.
“좋, 좋아…. 좋아해요, 시스…! 정말, 좋아….”
“사랑해, 포티스.”
눈물에 젖은 포티스의 뺨을 살짝 핥은 시스 황제는 여전히 허리를 움직이는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서 포티스를 몰아붙였다.
“아…. 아아…. 으응…!”
포티스가 발끝을 움츠리면서 고개를 뒤로 젖혔다. 다시금 절정에 달한 것이다. 내벽은 성기를 감싸고 조이다가 곧 정액을 원하는 듯 옴찔옴찔 성기에 달라붙었다.
“…포티스.”
어깨에 걸치고 있던 다리를 내린 다음 자신의 허리를 감싸게 했다. 가늘게 떨리는 포티스의 배의 표면에 머금은 성기의 윤곽이 드러났다.
“하아, 후우….”
다리가 자유로워진 포티스는 그의 탄탄한 허리를 감아 더 깊이 들어오도록 끌어당겼다가 성기가 민감한 내벽을 찔러대면 주체할 수 없는 쾌감 탓에 파들파들 떨면서 엉덩이를 살짝 뒤로 빼곤 했다. 물론 시스 황제는 포티스가 도망가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후으읏…! 아…!”
성기를 귀두만 걸친 채 완전히 빼내자 벌어진 구멍에서 체액이 한가득 쏟아져 엉덩이골과 모래사장을 적셨다. 그대로 허리를 움직여 단번에 끝까지 박아 넣길 반복하자 포티스의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앗…! 아앙…. 응, 시, 스…!”
내벽이 간헐적으로 성기에 달라붙었다가 떨어졌다. 뜨겁고 매끈한 안의 감촉과 자신의 의지대로 흐트러지는 포티스의 모습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시스 황제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정감이 차올랐다.
“사랑해.”
시스 황제가 포티스의 움츠러든 손을 꼭 감싸 쥐며 입맞춤하고 깍지를 껴서 잡아 눌렀다. 그리고 안쪽 깊은 곳을 짧고 빠르게 치며 드나들었다.
“하, 읏…! 아…!”
자잘한 쾌감이 몰려와 끊임없이 뱃속을 휘저었다. 시스 황제가 성기를 뿌리까지 박은 채 사정하자 정액이 내벽으로 흡수되면서 긴장된 전신에 벼락같은 절정이 찾아왔다.
“하아, 아아…!”
길게 이어지는 여운 탓에 포티스는 눈물을 떨어트리며 시스 황제의 품으로 파고들었고 허리와 두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시스 황제가 가만히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포티스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눈물과 기분 좋은 땀으로 범벅이 된 포티스는 한참 뒤에야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전신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고, 시스 황제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다리가 풀려 옆으로 벌어진 채였다.
“…굉, 굉장했어요….”
내내 신음을 낸 탓에 갈라진 목소리로 포티스가 겨우 입을 열자, 시스 황제가 사랑스럽다는 듯이 깍지 끼고 있던 포티스의 손가락 끝을 살살 물며 장난스럽게 애무했다.
“나도 좋았어.”
“…시스가, 절 많이 원해서…. 너무 좋았어요.”
그 말에 시스 황제가 대답하려 한순간, 약간 당황한 포티스가 아직 성기가 들어와 있는 연결부를 내려다보았다. 안쪽에서 커져가는 시스 황제의 성기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 어째서 다시 그…. 커졌어요?”
“네가 귀여운 소릴 하잖아.”
“그, 그래도….”
“널 원해, 너뿐이야.”
포티스는 몸을 꼼지락거리면서 어떻게든 부끄러움을 떨쳐내려 했지만, 오히려 그런 움직임이 더 자극을 준 것 같았다. 성기가 완전히 발기한 듯 내벽을 밀어내며 안을 채우고 존재감을 과시했다.
“저도. 저도예요…. 시스만을 사랑해요.”
“그럼 한 번 더.”
“…좋아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둘은 서로 입을 맞추었다. 시스 황제의 손이 포티스의 가슴에 닿아 천천히 어루만졌다. 처음에 포티스를 충분히 애태우며 희롱했기에, 두 번째는 불필요하게 괴롭히지 않고 그저 포티스의 몸에 몰두했다. 쾌락으로 인한 신음과 한숨, 낮게 상대를 부르는 소리만이 잔잔한 해변에 울려 퍼졌다.
시스 황제가 포티스를 놓아준 건 새벽이 끝날 무렵이었다. 바다 저편이 희미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포티스는 자신에게 팔베개를 해준 시스 황제의 가슴께에 파고들었다.
“이대로 더 같이 있고 싶어요.”
“잠들어도 돼. 내가 데려갈 테니까.”
“그, 그래도….”
시스 황제가 고개를 기울여 포티스의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괜찮아.”
해안에서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면서 포티스는 시스 황제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바다에서…. 좋은 기억을 만들 수 있어서 정말 좋아요.”
자세히 묻지 않았어도 시스 황제는 포티스가 샤토드네쥬로 떠나면서 둘이 남쪽의 바다에서 마주쳤던 일에 대해 떠올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것은 서로에게 무척 상처가 되었는데, 지금은 상황도 환경도 달라 그저 편안하고 행복할 뿐이었다.
“더 즐거운 일을 할 수 있어, 앞으로도 계속.”
“정말 기뻐요. 사랑해요, 시스….”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널 제일 사랑해.”
“저도 시스에게 선물을 하려고 했는데, 도리어 제가 가득 받았어요. 고마워요.”
“…내겐 네가 선물이나 다름없어. 내 곁에 있는 너만을 사랑해.”
포티스가 말없이 시스 황제를 올려보다가 살짝 웃으며 눈을 감았고, 시스 황제는 그에게 이끌리듯 입을 맞추었다. 행복한 나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