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chadenfreude (1/6)

Schadenfreude

샤덴프로이데.

타인의 불행을 두고 느끼는 극렬한 희열. 또는 도취감. 스탠리 제이미슨은 인터넷에서 그 단어를 알게 되었을 때 무한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것은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소속감, 승인받았다는 안정감,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언어화할 수 있다는 성취감의 혼합이었다.

그는 자신이 타인의 불행을 두고 느끼는 이 복잡 미묘한 즐거움이, 적어도 제가 사이코패스여서가 아니라는 점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짧은 토막 기사로 나온 한 젊은 유망주의 사고에 대해서 그가 느끼는 쌉싸름한 기쁨. 그것은 너무나 비밀스러운 기쁨이었지만, 적어도 붙일 만한 이름이 있는 감정이었다.

‘꼴 좋군.’

고등학교 때 사랑했던 여자의 남자친구이자, 미식축구팀의 에이스이자, 학교에서 모든 인기를 독차지했던 리처드 베켓의 부상 소식을 두고, 저 하나쯤은 기뻐해도 괜찮지 않을까?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의 총량이 정해져 있고 그것을 고등학교 때 몰빵한 거라고 치지, 뭐. 어디까지나 그의 운이 나쁜 거다.

물론 잘못된 감정이란 건 안다. 아무리 증오했어도, 부러워하고 열패감을 느꼈다 해도 타인의 미래가 망가지는 것에 대해서 기뻐해서는 안 된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짧은 단신으로 처리된 기사를 읽고, 또 읽으면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노라 하트에 대해서 생각했다. 자신이 하이스쿨 3년 내내 사랑하고, 사랑해서, 죽을 것 같았던 여자에 대해서. 금발 머리의 치어리더. 상냥하고 아름다웠으며 저 같은 찌질이 왕따에게도 온정의 손길을 내밀던 이였다. 그러나 노라 하트의 곁에는 늘 그녀의 남자친구인 리처드 베켓이 있었다. 당시 리처드 베켓은 더티 블론드를 한 눈부신 미남이었다. 늘 저를 벌레 보는 것 같은 눈길로 보던 남자였고. 그런 그가 사고를 당해서 더 이상은 선수 생활을 못 하게 되었다고 한다.

스탠리의 고등학교 시절 별명은 다음과 같다.

찌질이. 못난이. 멍청이. 너드. 교정기 낀 가고일.

그러고 보니 리처드 베켓은 스탠리 제이미슨을 지독하게 괴롭히던 족(jock) 무리와도 친했던 남자였다.

하하. 꼴 좋다. 보기 좋게도 인기남과 찌질이의 인생이 반전되어버렸다.

‘아냐. 옛날 생각에 사로잡히지 말자. 그런 꼴 좋다는 생각이야말로 찌질이다운 거다.’

그때의 스탠리는 지금은 없다. 현재 그는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신생 기업의 임원이었다. 고등학교 이후로 교정도 마치고 키도 훌쩍 자라고, 운동도 열심히 했다. 환골탈태할 정도로 뒤바뀐 그의 모습은 명실공히 훌륭한 미남이라고 할 수 있었다. 늘 데이트 상대가 끊이질 않았고 외로울 밤이 없었다. 하이스쿨 때의 못난이, 멍청이, 절름발이 스탠리는 눈을 씻고 뒤져봐도 보이지 않을 터였다. 지금 그는 사람들의 열띤 찬사를 받는 세련된 남자였으니까.

아무튼지 간에, 그 깡촌 하이스쿨의 프롬킹 따위……. 신경 쓸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

스탠리 제이미슨은 밭은 한숨을 내뱉은 뒤 인터넷 창을 껐고, 그 뒤로 리처드 베켓에 대한 사실을 깡그리 잊어버렸다.

* * *

7년 뒤.

* * *

미시건주의 밸린저 시티는 말이 시티지 인구 2만 명 8천 가구 정도의 애매한 마을이었다. 큰 쇼핑몰 하나 외에는 볼거리라고는 하나 없는 평범한 미국의 마을. 농경지가 있고, 근처 작은 냇가에 낚시하러 오는 낚시꾼들이 있고, 주민들은 보통 조용히, 평범한 일들을 하며 조용히 살았다. 주로 근처의 큰 도시인 앤 아버에서 출퇴근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마을이었다.

한마디로 특색 없는 작은 마을이라고 해야 할까. 벤츠 SUV를 운전하며 스탠리 제이미슨은 저의 선택을 후회했다. 전화만 아니었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하이스쿨 이후로 전화번호를 바꾸지 않은 제 잘못이었다.

고등학교 동창이자, 학생회장이었던 유니스 킴이 직접 전화를 걸어 온 게 발단이었다. 

저의 짝사랑, 영원한 마음의 상처인 노라 하트가 결혼한다는 소식이었다. ‘그래도 너는 노라랑 친했잖아, 그래서 혹시나 전화해 봤어.’ 스피커 너머 유니스의 목소리는 씩씩했다. 스탠리는 그 소식을 듣고 전화기를 떨굴 뻔했다. 말을 바보 같이 더듬으며 아. 그래. 그렇구나. 기계처럼 대답했다. 결혼식 참석을 권하는 말에 차마 거절의 변을 댈 수가 없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노라 하트를 (짝)사랑했다.

고통스럽게 마주한 진실이 다시금 파헤쳐져 엉망진창이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알량한 호승심이 고개를 들었다. 결혼식을 올리기 전, 노라를 찾아간다면? 환골탈태한 멋진 모습을 보여 주고, 진심으로 너를 사랑했다고 고백한다면…….

하이스쿨 때의 체구 작은 너드가 20년 정도 뒤에 미남자가 되어 돌아온다,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의 플롯 아닌가. 스탠리 제이미슨은 저에게 어느 정도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부도덕한 짓이었지만 지금까지 쌓아온 커리어는 노라에게 인정받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그녀를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자동차 운전대를 꾹 잡으며 중얼거렸다. 차는 며칠 전에 사들인 것이라서 몸에 잘 맞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최근에 그는 직접 운전할 일이 별로 없었다. 전용 기사가 늘 운전을 도맡아 한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는 혼자 차 안에서 고백을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가상의 아름다운 노라 하트에게, 그는 계속해서 느끼한 사랑의 말을 뱉고 내뱉고 또 토해냈다.

“노라. 난 사실 널 좋아했어.”

“아니지, 노라. 이게 바보 같이 들린다는 걸 알지만-.”

테이크 3.

“노라, 사랑해. 이 말밖에는 할 수 없어.”

“노라”

노라, 노라, 노라 하트-.

어쩌면 그는 지나치게 열중한 것일지도 몰랐다. 차가 갑자기 멈추어 서서야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 * *

젠장, 되는 일이 없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차 문에 기대어 서서 무력하게 정비공을 기다렸다. 새로 산 독일제 차가 국도 한복판에서 고장이 날 줄이야. 다행이라면 밸린저 시티가 코앞이라는 거였다. 구글링해 마을의 (유일한) 정비소에 전화를 걸었고, 곧 사람이 올 거라는 언질을 받았다.

한 몇십 분 정도를 기다렸을까. 초목으로 푸르른 지평선 너머로, 거무스름한 형체가 보였다.

‘견인차로군.’

다행히 견인차 정도는 가지고 있는 정비소인 모양이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제 비스포크 양복에 주름 하나 안 지게 성의껏 손질한 뒤, 자세를 고쳐 잡아 섰다.

견인차는 척 봐도 연식이 있어 보였다. 운전하는 사람은 수염을 까칠하게 기르고 있었고 캡을 쓰고 있었다. 아마도 정비공인 모양이었다. 그가 차에서 내렸다. 키가 190cm 정도 되어 보이는, 척 봐도 몸 좋아 보이는 이였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목덜미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아마 남자는 저를 알리라. 밸린저 시티에서 난 유일한 위인, 타임지에 표지를 장식한 IT의 귀재, 아무튼 성공한, 사업가가 바로 스탠리 제이미슨이었으니까. 

“새로 산 제 차가 갑자기 멈춰서 말입니다.” 스탠리가 능숙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근데 이상하게도, 남자는 꾹 얼어붙어 가만히 저를 지켜볼 따름이었다.

아하. 뉴스에만 나오는 사람을 직접 보려니까 적잖이 긴장되는 모양이었다. 남자는 꽤 굵은 선의 미남이었지만(그리고 정색하니까 꽤 무서웠지만), 아무튼 제가 신경 쓸 인사는 아닌 듯싶었다. 사인이라도 해 줘야 하나. 곤란했다.

“저기요? 죄송합니다만, 제가 빨리 마을로 가야 해서-.”

스탠리가 살짝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추궁했다.

그러자 갑자기 남자가 캡을 벗었다. 덥수룩한 더티 블론드가 그의 이마를 덮었다.

……?

아.

이런. 

시발.

그제야 스탠리 제이미슨은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리처드 베켓. 

제 열등감의 알파이자 오메가요, 모든 만악의 근원-

평생의 연적이 그의 눈앞에 있었다.

* * *

밸린저 시티로 가는 길은 숨 막히도록 어색했다. 애써 차창으로 시선을 돌려 봤지만, 별달리 볼 것도 없어 곤혹스럽기만 했다. 그저 드넓은 초목만이 펼쳐져 있을 따름이었다.

곁눈질로 힐끔힐끔 쳐다본 남자의 옆얼굴은 단단하고 거칠었다. 반짝이기만 했던 하이스쿨 프롬킹은 그간 적잖이 힘겨운 시간을 보낸 것 같았다. 거칠거칠한 수염과 피로한 눈가. 움푹 팬 볼우물. 그러나 그의 안광만큼은 눈부실 정도로 푸르렀고 전체적으로 남자다운 매력이 있다고 할 수 있는 얼굴이었다.

“너. 뉴스에서 봤어.”

적요를 깨고, 리처드 베켓이 먼저 말을 건넸다. 중립적인, 낮은 저음의 목소리에서 감정을 읽어내기란 불가능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몰락하고 피폐한 남자를 다시 보게 된다면, 분명 흥겨운 기분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되레 이런 씁쓸한 기분이라니. 마치 어린 시절의 모든 것이 부정되는 기분. 이상하고 또 이상했다.

“아. 그래. 뭐…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닌데.”

순전한 겸손 치레였다. 제가 생각해도 대단한 게 맞기는 했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동료들과 설립한 기업 ‘와이퍼’는 8억 달러에 페이스북에 인수되었다. 기업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은 뒤, 스탠리는 ‘연구’ 활동에 몰입하고 있었고 TED 같은 강연에서도 얼굴을 비추었다. 결론적으로, 그는 현재 엄청난 위업을 이루고 잠정 은퇴한 상태라고 해야 할까. 30대의 나이에 이렇게 멋진 삶이라니. 얼마나 행복한 인생인가 스스로가 생각해도 놀라웠다.

“대단하더라.”

잠깐의 침묵 끝에 운전석의 남자가 대답했다. 담백한 한마디였다. ‘대단하더라.’ 꿈에서 복수를 그리던 연적으로부터 나오는 말치고는, 지나치게 담백했다. 스탠리 제이미슨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제가 고등학교 내내 질투하고 집착했던 복수의 상대는 스탠리 제이미슨이라는 인간에 대해서 그렇게까지의 관심은 없었던 거다. 그냥 허심탄회하게 ‘대단하더라’라고 말할 수 있는 정도의 관심.

아무런 증오도, 열등감도 없이 순순히 상대방을 칭찬할 수 있는 정도의 관심.

중립적인 그에 비교하면 자신은 얼마나 유치했던가. 그 생각에 스탠리는 좌불안석이 되었다.

“아. 고맙다.”

대답은 평연히 했지만, 빨리 차에서 내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리처드 베켓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난 네가 성공할 거라고, 예전부터 생각했어.”

…?

뜻밖의 한마디에 스탠리가 왼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리처드 베켓은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눈가의 주름마저 멋있어 보이는 그런 따뜻한 미소 있잖은가. 처음 보는 사람도 살살 녹일 그런 미소를 지으며 무던하게 말했다.

‘재수 없는 놈이네. 지금까지도.’

난 네 놈이 다쳤을 때 조용히 기뻐하기까지 했는데. 넌 내가 성공할 줄로 알았다고? 입바른 소리 하지 마.

“그래? 알다시피 난 그때 왕따였잖아. 그 누구도 내가 성공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텐데.”

스탠리가 고소(苦笑)했다. 십수 년이 지난 지금이야 대수롭지 않게 ‘왕따’였다고 말할 수 있지만, 밸린저 하이스쿨은 십 대의 스탠리에게 생지옥이었다.

사물함 안에 죽은 박쥐의 사체가 있다든가, 급식 판이 날마다 새로운 방식으로 엎어진다든가. 체육 시간에 들어온 고의적인 태클에 그대로 발목이 나간다든가.

화장실에 가두어져 1교시 내내 혼자 울부짖는다든가. 사람들의 조롱과 경멸하는 눈초리를 견뎌내야 한다든가. 급식 시간에 아무도 같이 앉아 주지 않아, 몰래 샌드위치를 싸서 먹는다든가.

그런데 ‘성공할 거라고 생각했다’고? 네가? 하이스쿨 최고의 포식자이자, 생태계의 우세종이었던 네가? 그렇게 태평하게 생각했단 말이야? 

스탠리 제이미슨이 정색하자 리처드 베켓이 고개를 살짝 돌렸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캘리포니아의 풀장같이 푸르른 청유한 눈빛이 스탠리의 옅은 초록색 눈동자를 지긋이 응시했다. 짜릿. 뭔가 목덜미가 간질간질한 기분에 스탠리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넌 똑똑했으니까.”

리처드 베켓이 조용히 속삭이듯 대답했다.

“…뭐.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한 것 같은데.”

스탠리가 양껏 이죽였다. 옆자리의 남자가 하는 말이 전부 속없는 사탕발림으로 들렸다.

“네가 내 숙제도 도와줬잖아.”

“……그랬나?”

정말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 이야기에 스탠리가 화도 잊고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리처드 베켓의 숙제를 도와줬다고? 에이, 설마. 리처드 베켓과 저는 말도 제대로 안 섞는 사이였는데. 그러나 생각해보면, 리처드 베켓은 적극적으로 스탠리를 괴롭히는 무리와는 달랐다. 그는 소위 말해 ‘쿨한’ 부류에 속해 있었고, 오히려 관망하는 쪽이랄까. 그저 운동장에 나가서 운동을 하거나 치어리더 여자아이들과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는 쪽이었다.

학교의 인기 스타께서는 왕따 하나를 괴롭히는 그런 질 나쁜 일에는 간여하지 않았던 거다.

스탠리 제이미슨의 리처드 베켓에 대한 증오는 순전히 첫사랑의 남자친구라는 점에 집중되어 있었다.

물론, 거기에 개인적인 열등감이 투사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무튼 제가 리처드 베켓의 숙제를 도와준 적이 있었던가. 스탠리가 골똘히 기억을 더듬는 동안 밸린저 시티의 푯말이 보였다. 리처드 베켓이 재차 속삭이듯 단서를 던졌다.

“클레어 선생님. 문학 시간.”

“아…!”

리처드 베켓의 간명한 단서 덕분에 오래전 묻혀 먼지가 두껍게 쌓인 기억이 빛을 되찾았다. 문학A 시간 때 리처드 베켓은 제 옆자리에 앉았다. 그는 종종 저에게 말을 걸기도 했고 저는 꿍얼거리며 거기에 (마지못해) 대답했던 것 같다. 숙제도 그 과정에서 도와줬을 테고.

잊어버린 퍼즐 한 조각을 찾은 것 같았다.

아니, 그런데 대관절 그 사실이 왜 기억이 안 났지? 어쨌건 반가운 기분에 스탠리 제이미슨의 얼굴이 밝아졌다. 클레어 비숍 선생의 문학A 시간은 지옥 같은 학교생활의 감로수 같은 구원이었다. 그녀는 밸린저 시티에서 저를 이해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지성인이었다. 문학A 시간은 신성한 토론의 장소요, 지적 결핍을 채워 주는 양식의 시간이었다.

생각이 클레어 선생한테까지 다다르자 스탠리 제이미슨이 흥분해서 질문을 던졌다.

“혹시, 비숍 선생님 요즘 뭐하시는지 알아?”

“어. 지금도 학교에 계셔.”

“정말 잘 됐군. 마을에 온 김에 뵙고 가야겠어.”

“내가 말씀드려볼까. 종종 그분과 뵙거든.”

……?

종종 뵙다니? 굉장히 이상한 소리였다. 애초에 리처드 베켓이 클레어 선생과 그렇게까지 친했던가? 공부에는 영 관심이 없는 놈으로 알았는데. 그 의문스러움이 감지된 듯 리처드가 허허실실 웃었다.

“선생님, 요즘 마을 도서관에서 독서 모임을 운영하시거든. 나도 거기 나가.”

“뭐라고. 네가 북 클럽을 나간다고.”

…….

속으로만 해야 했을 말이 흥분된 김에 쏟아져 나왔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혀를 깨물며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아니, 사람이 살다가 갑자기 책에 관심이 생길 수도 있고, 북 클럽이 별 대수도 아닌데 마치 남자를 무시하는 투가 되어 버렸다.

“좀 이상하긴 하지. 다친 이후로 책에 관심이 생겼거든.”

남자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스탠리 제이미슨은 민망함을 주체할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리처드 베켓은 역시 제 모든 열등감의 도화선이었다. 그의 가까이에 있기만 해도 실언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게다가 부상이 언급되니 더 남자를 볼 낯이 없어졌다. 그의 불행 앞에서 작게나마 기뻐했던 제가 끔찍한 인간 같았다.

“…그. 그래. 좋네. 책 읽는 거 좋지.” 스탠리 제이미슨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거의 다 왔다.”

차가 정비소에 멈추어 섰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남자와 계속 있다가는 제 해묵은 열등감과 콤플렉스만 드러날 것 같았다.

* * *

남자는 스탠리의 차를 꼼꼼하게 살폈다. 그의 작업복은 낡았지만 깨끗했고 손은 투박하나 정교하고 섬세했다. 긴 손가락이 보닛을 열고 차체 내부의 이모저모를 살피는 모습은 퍽 보기 좋았다. 그가 이런 사람이었나? 하이스쿨 3년간 알지 못했던 성실한 모습에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잠깐의 점검을 마치고 리처드 베켓이 저를 향해 말했다.

“내일 아침까지 수리할 수 있을 것 같아. 점화 플러그가 고장 나서 생긴 문제니까 교체만 해 주면 될 거야.”

차분한 목소리에 스탠리는 어. 그래.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만난 동창은 어엿한 직업인이 되어 있었다. 그가 꿈꾸는 길은 아니라 하더라도.

우물쭈물하는 스탠리에게 리처드가 여상히 물었다.

“…혹시 묵는 곳까지 데려다줄까?”

“아냐. 아냐. 걸어갈 수 있어.”

실로 걸어서 10분 거리에 숙소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옛집이. 지금은 제 이모가 사는 곳이었다. 몇 주 동안 신세를 지기로 했으니 문제없기는 했는데….

“혹시 네 이모 집으로 가는 거야?”

리처드의 낮고 진중한 목소리가 다시 돌아왔다. 스탠리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모 집이라고 하니까 이상한 감이 없잖았다. 그도 그럴 것이 17년 전만 해도 저와 어머니의 집이었으니까.

“그래. 내일 봐.”

제 정비소 명함을 건넨 남자가 살풋 웃었다. 거칠거칠한 얼굴에 도는 온기가 마치 정말 친한 친구를 대하듯 했다. 살짝 혼란스러웠지만 그다지 나쁜 기분은 아니라, 명함을 받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비소로부터 멀리 걸어 나간 스탠리 제이미슨이 고개를 돌렸을 때, 리처드 베켓은 제 차를 살피고 있었다.

* * *

17년 전.

“야! 얘들아, 이거 봐라! 시발, 존나 웃기네!”

“그거, 그거 돌려줘….”

스탠리 제이미슨이 허우적거렸다. 척은 그런 스탠리가 웃긴다는 듯이 그를 발로 차 거꾸러뜨렸다. 척의 패거리가 모여들었다. 그들이 스탠리의 일기장을 보며 크게 폭소했다.

“나는… 노라… 하트를… 사랑한다! 아, 존나 웃겨!”

“노라 생각하면서 딸 친 것도 썼을 것 같은데! 빨리 찾아봐!”

“시발, 절름발이 주제에! 야, 당장 노라한테 보여 줘야지.”

패거리들이 저속한 욕지거리를 주워섬기는 소리가 왁자했다.

“제발. 제발… 뭐든지 할게. 제발….”

스탠리가 척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자존심이고 뭐고 필요치 않았다. 오로지 이 수치가 저의 선에서 끝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노라가 알게 되는 날에는 끝장이다. 그녀는 저를 경멸할 것이고, 그나마 보여 주는 친절도 끝날 것이다. 안 돼. 안 돼….

발길질이 두세 번 더 이어졌다. 가슴께가 너무나 아파 눈물이 핑 돌았다. 멍 하나가 더 추가되려는 순간, 갑자기 발길질이 멈췄고 좌중이 고요해졌다.

“너희들 당장 관둬라.”

차분한 목소리가 패거리를 손쉽게 압도했다.

“리처드! 그러지 말고 우리랑 이거 볼래? 존나 웃기다. 저 교정 장치 가고일 새끼가 네 여친에 대해서 쓴 게….”

“필요 없어. 그냥 내버려 둬.”

“큭큭. 베켓 놈 기분 나빠하는 거 봐. 됐다 됐어.”

스탠리가 바들바들 떨며 고개를 들자 어깨를 으쓱하는 척이 보였다. 눈이 마주친 남자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이 일기장 가지고 싶어?”

“척 앤더슨. 그냥 줘. 뭐 하는 건데.” 리처드 베켓이 답지 않게 신경질적으로 나오자 척 앤더슨이 흥이 떨어졌다는 듯이 툴툴거렸다. 그가 일기장을 스탠리의 머리로 던졌다.

“아!”

두꺼운 책의 모서리가 앞 통수를 거세게 가격했다. 단말마와 함께 스탠리가 몸을 웅크렸다.

“…베켓, 이리 와 봐. 담배나 한 대 피우면서 이야기할 게 있어.”

척 앤더슨이 리처드 베켓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유유히 사라지는 것을, 스탠리 제이미슨은 바라봤다. 눈물이 뚝뚝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 * *

“헉…!”

눈을 뜨고서도 스탠리 제이미슨은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등학생 때와 똑같은 방이었다. 마치 자신이 17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에 소름이 돋았다. 그 지옥의 시기를 다시 살라고 하면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얼굴을 만져 보고서야,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저는 지금 옛날의 집, 이모의 집에서 묵고 있는 30대의 성공한 스탠리 제이미슨이라는 것을, 가까스로 떠올렸다.

‘제기랄.’

핸드폰을 확인하니 새벽 다섯 시였다. 시간은 나쁘지 않은데, 꿈의 내용이 너무나도 기분 나빴다. 고향에 돌아오자마자 옛날 일이 떠오르다니. 좋지 않은 징조였다.

‘…….’

그런데 껄끄러운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리처드 베켓이 그때 저를 도와줬었나? 생략되거나 굳이 기억하지 않은 사실이었다.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 맞아. 그래서 더 기분 나빴었다.’

가끔 척 앤더슨과 그 패거리에게 쥐어 터지고 있을 때, 리처드 베켓이 제동을 걸곤 했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마치 흙장난 좀 하지 말라고 잔소리하는 선생님 같았지. 그 시혜적인 제스처에 저는 오히려 더 모멸감만 느꼈었다.

‘하지만….’

뭐. 나름… 고마운 건가?

‘그래도 나를 도와준 거니까.’

혼란스러운 새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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