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ove is painful (2/6)

Love is painful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짝사랑은 고통스럽다. 그러나 17살의 스탠리 제이미슨에게 그것은 더더욱 괴로운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그의 짝사랑은 자기혐오와 한 쌍이기 때문이었다. 매일 아침 거울 앞에 서서 넌 쓰레기야. 넌 그녀와 어울리지 않아, 를 중얼거리는 남자를 상상해 보라. 그가 그 꼴이었다.

그는 성적인 상상도 하지 않았다. 감히 노라 하트와 함께하는 저를 그리지 못했다. 그저 그녀가 행복하기만을 바랐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그녀의 남자친구가 좋다는 건 아니었지만. 리처드 베켓은 노라 하트와 격이 맞지 않았다. 그녀는 좀 더 훌륭한 남자친구를 사귈 권리가 있었다. 뭐, 리처드 베켓이 좀 잘생기기는 했다. 좀이 아니라 특출날 정도로 빼어난 외모의 소유자기는 했지만, 스탠리가 보기에 그는 속 빈 강정 같았다.

어쩌면 애써 얄팍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던 걸지도 몰랐다. 그러나 스탠리 제이미슨은 그렇게 믿었다. 리처드 베켓은 세상 물정 모르고 제 외모만 믿는 녀석이라고. 미식축구를 잘해 봤자 그렇게 전국구로 잘하는 것 같지도 않고. 질 나쁜 친구들이랑 어울리는 멍청한 녀석이라고.

싫다고.

밉다고.

* * *

뒤숭숭한 꿈을 꾸고 나니 정비소로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리처드 베켓을 너무 미워했던 자신에게 열없는 기분도 들었다. 줄곧 싫어했던 녀석의 좋은 점을 발견해서 신경이 거슬린다고 해야 할까. 하여간 마음 한구석이 영 불편했다.

아침을 먹고 가라고 성화를 내는 수전 이모를 간신히 뿌리쳤다. 늘 씩씩하고 억센 제 어머니의 언니였다. 그녀를 보면 이혼 후 실의에 빠진 어머니가 이모가 사는 동네에 정착한 게 이제야 이해가 갔다.

툭 건들면 부서질 정도로 위태로웠던 어머니가 의지할 수 있는 데라고는 수전 이모밖에 없었던 거다.

겨울 아침의 밸린저 시티는 고요했다. 옅은 안개가 낀 동네는 신비로운 기운까지 풍겼다. 근처의 강 때문인가, 물 내음이 났지만 습기는 없었다.

노라 하트의 결혼식까지 2주가 남았다.

전부 태워 버리고 싶었다. 과거의 상처들, 거울 앞에서 내뱉었던 저주의 말들을 전부. 노라 하트에게 토해내듯 고백하고 다 끝내고 싶었다. 그녀에게 못 할 짓이란 걸 알면서도 그랬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주마등처럼 그간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한 달 전, 전 여자친구에게 맞은 뺨이 얼얼했다. 너는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야.

입가가 버석버석했다.

마을에 도착하니, 익숙한 추억의 내음이 났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마을을 돌아다녔다. 군데군데 새로운 가게들이 보였지만 전반적으로 17년 전과 같았다. 엔구이옌 가족의 집, 포터 아저씨가 하는 베이커리. 웬디스. 다이너. 멀리 보이는 그랜드 밸린저 쇼핑몰.

도서관.

마트.

애견 파크.

야구장. 

안 그래도 느린 발걸음은 더욱 느려지다가 결국 정비소 앞에서 멈췄다. 무슨 무슨 정비소가 아니라 ‘그냥’ 정비소. 튼튼하지만 낡은 철문과 색이 바랜 간판. 이 자리에 정비소가 있던가.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기억해낸다. 무뚝뚝하지만 솜씨 좋기로 유명했던 코든 영감이 운영하던 곳이었다.

지금은 어쩐지 리처드 베켓이 물려받은 모양이지만.

너무 일찍 왔나 걱정하기도 전에 철문이 스르르 열렸다. 끼익하는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열린 문 너머로 키 큰 남자가 있었다. 리처드 베켓이었다.

거친 타입을 좋아하는 여자들도 있다. 뉴욕에서야 저 같은 멀끔한 스타일이 인기가 좋지만, 남자 같은 스타일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많다. 진정성 있게 여자를 리드하는 타입 말이다. 리처드 베켓이 그 타입이 아닐까 싶었다.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남자가 먼저 스탠리를 불렀다.

“차 찾으러 왔어?”

“어. 너무 일찍 왔나.”

17년 전이라면 상상도 못 했을 조우였다. 찌질이 스탠리가 리처드 베켓에게 차 수리를 부탁하다니. 하지만 리처드 베켓은 담백했고, 별로 어색하게 굴지도 않았다. 그저 오랜 친구를 대하듯 편하게 그를 호명할 따름이었다.

“아니. 잘 왔어.”

리처드 베켓이 시트를 걷어내자 스탠리의 SUV가 보였다.

“음… 윤이 나는데. 세차도 했어?”

스탠리는 살짝 놀랐다. 부탁도 안 했는데 차를 청소해 줄 줄은 몰랐으니까. 무뚝뚝하게 굴던 남자가 그렇게까지 정성을 들였으리라고는 미처 기대하지 않았다.

“오랜만이라 반가워서.”

리처드 베켓이 차 보닛 위의 먼지를 털며 말했다. 평이하고 담담한 어조였다. 딱히 잘 봐 달라는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다른 뭔가를 원하는 것 같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스탠리의 마음속이 복잡해졌다.

결국 코트 안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지폐 몇 장을 손가락으로 골랐다. 비용은 이미 지불했지만, 팁이라도 더 얹어 줘야 할 것 같았다. 그 모습을 조금 늦게 본 리처드 베켓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 얼굴을 보고 나서야, 스탠리는 자신이 또 실수를 범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자는 무뚝뚝했지만 여러 종류의 무표정을 가지고 있었다.

아까 전의 호의적인 무표정과 지금의 뻣뻣하고 일견 적대적인 무표정을 일별하면서, 스탠리가 어깨를 수그렸다.

“팁인데…?”

“돈 받으려고 세차한 거 아니야.”

그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스탠리가 아랫입술을 저도 모르게 깨물었다. 지갑을 다시 안주머니에 넣으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다시 둘 사이에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스탠리가 어쩔 줄 몰라 주머니 안에 손을 집어넣은 채로 멀뚱히 섰다.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린 리처드 베켓이 혼자 되뇌듯 말했다.

“선생님께는 말씀해 뒀어.”

“……아, 아. 클레어 선생님.”

말은 꺼냈지만, 구체적으로 언제 만나야겠다 생각은 없었는데 남자는 정말 연락을 해 둔 모양이었다.

“번호 줄까?”

“음. 뭐. 그러면 좋지.”

스탠리가 제 주머니 안에서 아이폰을 꺼내 들이밀었다.

“번호 입력해 줘.”

남자의 손과 스탠리의 손이 잠시 부딪혔다. 잠깐, 아주 잠깐의 접촉이었지만 스탠리는 그의 손이 클 뿐만 아니라 무척 단단하고 뜨겁다는 것까지 알 수 있었다. 뼈마디 하나하나 튀어나온, 무척 남자답고 거친 손. 그 손 위에 놓고 보니 아이폰이 작은 장난감 같았다. 그가 하나하나 번호를 입력한 다음 스탠리에게 핸드폰을 되돌려줬다.

“……네 번호도 주라.”

스탠리는 제가 말해 놓고 스스로 흠칫 놀라 눈가를 떨었다.

도대체 왜? 다시 볼 것처럼 말하고 있지. 저 녀석이 껄끄러운데도.

“그래.”

눈앞의 남자는 속으로 물음표를 날리는 스탠리 제이미슨의 속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가 평연한 투로 제 번호를 저장했다.

* * *

[리처드 베켓]

핸드폰 전화번호부에 저장된 이름은 낯설었다.

남자의 이름을 몇 초 쳐다보고 있을 때 액정의 색깔이 바뀌더니 돌연 전화가 걸려왔다.

[유니스 킴]

지체 없이 통화 버튼을 스와이프해 전화를 받았다.

[스탠리. 여기 도착했다면서.]

“아. 어제 왔어.” 소문은 참 빨랐다. 리처드 베켓이 말을 퍼뜨리고 다녔을 것 같지는 않았고 아마 비숍 선생님이 따로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음. 잘됐다. 안 그래도 동창생들끼리 노라 결혼하기 전에 모이기로 했는데, 너도 참석해.]

‘참석할래?’가 아닌 ‘참석해’라니. 

강경한 어조에 살짝 어안이 벙벙했다. 그간 저에게 이래라저래라 명령을 내리는 사람은 없었는데, 유니스 킴은 단호했다. 통화하고 있는 상대가 백만장자라는 자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굽실대는 쪽보다는 그쪽이 훨씬 좋기는 했다.

잠깐 고민하다가 흔쾌히 참석하기로 한다. 고등학교 생활 내내 저를 무시하던 이들에게 골탕을 먹이고 싶기도 하고, 혹여 노라가 참석할까 궁금하기도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스탠리는 대답했다.

“그래. 나갈게. 언제 만나.”

* * *

약속은 주말 오후였고, 그 전날에 클레어 비숍 선생님을 만나기로 했다. 비숍 선생은 단번에 전화를 받았다. 스피커 너머의 목소리는 살짝 지쳐 있었지만 당당한 기개는 그대로라 스탠리는 안심했다.

[최근에 너를 많이 생각했단다.]

“네…?”

와이퍼를 페이스북에 매각한 이후로 딱히 눈에 띄는 활동을 하지는 않았는데, 선생님은 스탠리를 많이 생각했다고 했다.

[얼마 전 학교 창고에서 네 물건을 찾았거든. 만나러 올 때 돌려주마.]

“제 물건이요?”

딱히 학교에서 보관하고 있을 만큼 귀중한 물건을 잃어버린 기억은 없는데. 게다가 보통 유실물은 1년이 지나면 다 버리지 않나. 의아하기만 했다.

[일기장이더구나.]

그녀의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 * *

차를 몰고 학교까지 가면서 마음이 복잡했다. 일기장이라니. 하도 척 앤더슨이 그걸 가지고 괴롭히느라 어떻게 숨겨둔 기억은 나는데, 그게 왜 학교 창고에 있었지? 누가 또 본 거 아냐?

그 생각만으로도 토가 나올 것 같았다. 고등학생 시절의 흑역사는 30대의 건장한 남자도 거꾸러뜨릴 만큼 민망한 것이었다.

일과가 끝난 교정은 고요하고 광막했다. 잔디 너머 덩그러니 놓인 학교 건물은 회녹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우울한 색감에 눈살을 찌푸리며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17년 전의 그 풍경이 펼쳐졌다. 유령처럼 옛 학생들의 희미한 인영이 절로 떠올랐다. 복도를 정신 사납게 뛰어다니는 여자아이들. 사물함에 기대어 서서 잡담하는 유니스와 켄. 오늘도 사물함 안의 쓰레기를 발견한 스탠리 제이미슨. 스탠리를 바라보며 낄낄거리는 척 앤더슨. 구석에서 만화책을 교환하는 너드 무리. 

노라를 떠올렸다. 저 멀리서 단짝 팻의 귀에 속삭이는 노라. 그녀는 남자 친구와 늘 함께는 아니었다. 리처드 베켓은 자주 운동 연습에 참여했고, 노라는 노라 대로 치어리딩 연습으로 바빴다. 

학교 복도는 모든 게 익숙한 그대로였다.

“스탠리. 왔구나.”

멍하니 교내 정경을 들여다보고 있던 그의 뒤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클레어 비숍이었다. 단정하게 자른 단발은 하얗게 셌으나 한층 더 기품 있는 모습이었다.

“선생님.”

“오. 세상에. 멋있어졌구나. 아주 미남이 됐어.”

“……감사합니다.” 스탠리가 열없게 웃었다. 

클레어가 바투 다가오더니 그의 어깨를 친밀하게 툭툭 두드렸다. 예전에는 그녀가 시선의 위에 있었는데, 이제는 스탠리의 키가 그녀의 키를 훨씬 상회한다.

“교무실에서 차나 한잔하자꾸나.”

* * *

집으로 돌아온 스탠리 제이미슨의 손에는 한 권의 두꺼운 책이 들려 있었다. 하드 커버로 된 일기장이었다. 거무스름한 표지는 너덜너덜했고 종이는 누렇게 변해 있었다. 클레어 선생의 말에 따르면 누군가가 분실물 센터에 맡겼다가 곧장 창고로 간 것 같다고 했다.

젠장. 그사이에 일기를 본 녀석이 있다면 암살이라도 해 버리고 싶었다. 그러기에는 모든 게 늦었지만.

“음… 하.”

책을 펼쳐 읽기 전에 심호흡을 해 둘 필요가 있었다. 어렸을 때 저가 얼마나 허황된 생각을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오로지 노라 하트를 열렬히 사랑했고, 자신을 극렬히 미워했다는 것밖에는 기억에 남지 않았다. 사실 일기장에 적었던 구체적인 사실들도 무척이나 희미했다.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스탠리 제이미슨에게 고등학생 시절의 기억은 공란이었다.

대학생이 됐을 때는 고등학교의 기억을 마냥 지우고만 싶었다. 괴로워서, 끔찍하다고 생각해서 모든 것을 공들여 하나하나 잊었다.

고등학교 때의 기록을 불사르고, 오로지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새로운 삶에 몰입했다. 찌질이 스탠리 제이미슨이 아니라, 멋진 스탠리 제이미슨을 억지로 만들어 나갔다.

리처드 베켓이 문학 시간에 제 옆자리에 앉았다는 것조차 잊을 정도였으니까. 그 시도는 성공적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성공적으로 모든 것을 잊었다고 생각한 순간, 기억이 다시 찾아왔다. 거무스름한 낡은 일기장이라는 형태로 말이다.

스탠리가 조심스럽게 일기장을 열었다.

* * *

X월 X일

날짜 같은 걸 쓰는 건 이제 귀찮다. 나에게는 하루하루가 똑같으니까. 매일 괴롭힘과 따돌림의 연속이다. 척 앤더슨과 게일 루먼이 나를 미친 듯이 패면, 사람들은 멀찍이 떨어져 구경하는 나날의 연속. 하지만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나 보다. 좋은 일들도 간혹가다가 생기니까.

가령:

척 앤더슨과 겹치는 수업이 없다!

노라와 화학 수업을 같이 듣는다! (물론 아주 멀리 떨어져 앉지만.)

문학A 선생님이 무척 마음에 든다!

내가 짠 코드가 경진대회에서 우수상을 받는다!

뭐. 적어 놓고 보니 별거 없네. 하지만 이런 소소한 행운이라도 없으면 나는 거대한 삶의 무게에 짓눌려 압사했을지도 모른다. 특히 문학A 수업 선생은 내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는 것 같다. 내 에세이가 독창적이며 진솔하다고 칭찬해 줬다. 옆자리에 앉은 리처드 베켓이 아니라, 나를 보고 말해 줬단 말이지.

그러고 보니 리처드 베켓이 내 옆자리에 앉는다는 이야기를 썼던가? 그 재수 없는 노라의 남자친구 말이다. 처음에는 솔직히 무척 두려웠다. 척 앤더슨과 담배를 피운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혹여 나를 옆에서 쿡쿡 찌르며 괴롭히기라도 할까 봐.

실제로는 생각보다 별일이 일어난 건 아니었다. 녀석은 내 옆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만 할 뿐이었다. 가끔 옆을 힐끔힐끔 쳐다보면 잘생긴 얼굴이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솔직히 남자인 내가 봐도 놈은 잘생겼다. 나와는 완전히 다른 종족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나로 말하자면, 도수 높은 안경을 쓰고 있고, 교정장치를 끼고 있으며, 키는 작달막하고, 내반족을 교정하느라 흉측한 신발을 신고 있다. 젠장. 나뭇가지처럼 말라 있기까지 하니, 그 누가 나를 보고 리처드 베켓과 같은 종이라고 생각할까.

리처드 베켓은 키는 훌쩍 자라 있지, 어깨는 넓고 단단하지, 콧날은 곧고 얼굴은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유니스의 말에 따르면 눈 색깔이 호수처럼 푸르르다나. 난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화제를 돌려 이번에 짠 코드 이야기를 하자.

…….

그다음 페이지는 구구절절 너드스럽게 쓴 코드에 대한 감상과 자랑이었다. 스탠리는 어린 시절의 자신이 생각보다 씩씩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희미한 기억에 의하면 고등학교 시절의 자신은 자기혐오로 떡칠이 된, 무기력한 왕따였는데. 막상 읽어보니 일기는 우울하기는커녕 쾌활하기까지 했다.

생각보다 삶에서 좋은 점을 찾으려고 했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일기를 계속 읽어 나가다 보니 저녁 먹을 시간이 되었다.

* * *

X월 X… 아무튼 수요일.

척 앤더슨한테 맞았다. 정확히는 맞은 건지, 지나가다가 부딪힌 건지 애매하지만. 고의가 분명하다. 일부러 내가 노라가 곁에 있을 때를 노린 거다… 놈의 육중한 몸체에 부딪혀 내 몸이 날아갔고 안경은 저 멀리 사라졌다. 시력이 무척 나쁜 탓에 안경을 찾을 수 없어서 비참하게 바닥을 더듬거렸다.

시발. 나 자신이 너무나 역겨웠다.

키득거리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렸다. 팻이 분명 노라에게 내 험담을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참았다. 여기서 울었다가는 내 악명만 더 높아지니까.

노라 앞에서 애새끼처럼 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세상에서 제일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세상에서 제일 의외의 인물이 내 안경을 주워 준 거다.

리처드 베켓이 내 안경을 건넸다. 처음에는 누구 손이 이렇게 큰가 싶었다. 얼떨결에 안경을 손에 받아들고 고개를 들었을 때, 흐린 이목구비만 보였다.

흐리지만 반짝이는 얼굴이었다. 그놈. 리처드 베켓.

안경을 쓰고 덜덜 떠는 나를 붙잡아 일으켜 주기까지 한 놈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눈이 크다, 뭐 그런 실없는 이야기였는데, 참나. 그 소릴 듣고 고마운 마음이 싹 사라졌다. 내가 눈이 커서 어쩔 건데? 뭐 어쩔 건데!

* * *

저녁을 먹으면서 스탠리 제이미슨은 수전 이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특히 따라잡지 못한 동창들의 근황을 알아 둘 필요가 있었다. 몇 명은 미시건주를 아예 떠났고, 몇 명은 주저앉았다.

유니스 킴은 의사이고, 앤 아버에서 카이로프락틱 병원을 운영한다고 했다. 하긴, 그녀라면 충분히 뭐든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유니스 킴은 고등학생 때부터 어른스러운 점이 있었다. 저에게도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곤 했는데 대부분은 학업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공부를 잘한다는 점을 높게 산 모양이었다.

척 앤더슨은 아버지의 농장을 물려받았다고 했다. 하긴. 학교 때도 부농의 자식 행세를 마음껏 하고 다니던 놈이니. 척의 똘마니였던 게일 루먼이 그의 운전기사를 한다는 소식에는 폭소가 나왔다.

노라의 절친 팻 먼친은 앤 아버에서 디자인 회사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팻은 노라의 친구이자 같은 치어리더 동아리 소속이었는데, 스탠리를 무척 싫어했다. 마치 그의 존재가 노라의 결점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리처드 베켓은. 스탠리가 짐작하던 그대로였다.

“사고가 난 이후로 대학도 관두고 여기로 왔지. 얼마나 걱정이 됐는지 몰라.”

수전 이모가 매시트 포테이토를 뒤섞으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온종일 집에서 틀어박혀 안 나오는 녀석을 코빈 영감이랑 내가 끌어냈지 뭐니. 후. 알다시피 그 아이 집 형편이 워낙 안 좋았잖아.”

“집 형편이요?”

리처드 베켓의 가정사에 대해서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최대한 무심한 척 되묻자 수전 이모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말 하기 좀 그렇지만. 그 아이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에다 도박에 미쳐서 가산을 탕진한 양반으로 유명했는데. 아이 엄마가 고생고생하다가 결국 떠났어. 몰랐니?”

“몰랐어요.”

물론 몰랐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학교에서 철저히 소외되어 있었기 때문에, 뜬소문이나 가십을 아는 게 없었다. 누가 누구랑 사귄다더라, 누가 누구와 잤다더라. 이런 가십들. 오직 노라 하트와 리처드 베켓이 사귀는 걸 아는 정도였다. 하물며 누구의 가정형편이 어떻더라, 이런 정보는 관심도 없을뿐더러 누가 부러 말해 주지 않는 이상 알 길도 없었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 기억 나는 게 있기는 하다.

확실히 녀석의 아버지가 좀 이상하기는 했던 것 같다. 허물어져 가는 집에서 고성방가를 지르는 인간이었던 거로 아는데. 그걸 어떻게 아냐면…….

“그건 그렇고, 스탠. 노라에 대해서는 안 물어보니? 네가 워낙 노라를 좋아했어서 노라 소식부터 물을 줄 알았지 뭐야.”

수전 이모가 무거운 주제를 애써 돌리려는 듯 노라 이야기를 꺼냈다.

“…….”

하긴 웃긴 일이었다. 애초에 노라 하트를 보려고 돌아온 고향이었는데, 노라의 근황을 물을 생각도 안 하다니. 스탠리 제이미슨이 아무렇지 않은 척 멀끔하게 웃었다.

“가장 마지막에 물으려고 했어요. 어때요? 노라 하트, 잘 지내죠?”

“하하. 그랬니. 노라는 꽃집을 운영하고 있단다. 곧 결혼하는 건 알지?”

근데… 수전이 살짝 조카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그. 너 괴롭히던 애 있잖아. 척 앤더슨. 노라가 그 녀석과 결혼하는 건 아니?”

* * *

식탁을 박차고 일어나 곧바로 유니스 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말 안 했어.”

[무슨 소리야?]

“노라가 척 앤더슨과 결혼하는 거. 왜 말 안 했는지 궁금한데.”

[아… 그러면 네가 안 올 줄-.]

“……내가 아직도 그 멍청한 찌질이로 보이냐. 너희들은.”

차갑고 경멸 어린 스탠리의 목소리에 유니스 킴이 답지 않게 목소리를 떨었다.

[정말 그러려는 생각은 아니…었어. 기분 상하게 했다면 미안하다.]

“나는 그놈이랑 화해할 생각은 없어. 노라의 결혼을 축복해 줄 생각도 없고.”

[무슨 소리야? 그러면 훼방이라도 놓겠다고?]

코웃음을 치며 전화를 끊었다. 뭔 일이냐고 묻는 수전 이모를 뒤로하고 2층에 있는 방으로 돌아갔다. 방의 풍경은 옛날 그대로였다. 벽에 붙어 있는 게임 포스터들. SUEDE의 로고가 크게 박힌 비닐 커버.

고등학교 시절의 스탠리 제이미슨은 존 카맥을 우상 숭배하며 컴퓨터에 푹 빠진 너드였다. 그러나 존 카맥처럼 사제 폭탄을 주조해 은행을 털 생각도, 브렛 앤더슨처럼 헤로인과 코카인을 할 용기도 없었다. 그저 짝사랑의 열병에 시달리던 얼간이였을 뿐이었다.

다 부수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내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휴대폰을 노려보다가, 문득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흐릿한 이목구비. 제 안경을 건네주던 남자의 얼굴을.

“…….”

대관절 왜 노라 하트가 비열한 척 앤더슨과 결혼하게 되었는지 알아야 했다. 착한 노라의 성정을 두고 보면 완전히 사기 결혼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그 사정을 제일 소상히 알 만한 이는 바로, 노라의 전 남자친구인 리처드 베켓이었다.

* * *

남자의 집은 걸어서 몇 분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가까이 살았는데, 지금껏 체감하지 못했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지근거리에서 보이는 남자의 집을 보자 이상한 기시감이 떠올랐다. 

그가 사는 2층짜리 주택 앞에 도착했을 때, 남자는 이미 문밖에 서 있었다.

리처드 베켓이 살던 주택은 17년 전과 달리 깨끗하게 개축되어 있었다. 떨어지기 직전인 판자나 무너져 내린 계단은 이미 누군가가 깨끗하게 고쳐 놓은 후였다. 전반적으로 소박하지만, 나쁜 집은 아니었다. 현관 앞에 선 남자는 막 샤워를 마친 것처럼 깨끗했다. 숱 많은 머리칼은 잘 정리되어 있었고, 턱도 매끈했다.

‘면도했나?’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는지, 남자는 깨끗하게 면도까지 한 모양이었다. 남자의 차분한 얼굴을 보고 나서야 제가 얼마나 경우 없이 굴었는지 자각이 들었다. 밤 11시에 대뜸 전 여자친구에 대해 물어볼 게 있다고 하다니. 이 동네에 오니 예전의 사회성 없는 너드로 돌아간 것 같아 면구스러웠다.

남자 쪽에서는 순순히 알겠노라 했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어이없을까 싶었다.

“나와서 기다릴 필요는 없는데.”

괜히 민망한 심사를 불퉁한 말로 중화시켜 보려 했다.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오는 데 얼마 안 걸리는 거 아니까.”

“그러게. 이렇게 가까이 사는데 오늘 처음 오다니. 진짜 웃기지?”

허허롭게 웃었지만 리처드 베켓이 호응해 주지 않자 스탠리의 웃음은 곧 어색한 헛기침이 되었다. 둘은 침묵하며 실내로 들어갔다.

* * *

실내는 놀라울 정도로 정돈되어 있었다. 남자 혼자 사는 집이라고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아니, 남자 혼자 사는 집? 여자친구나 아내가 있는지도 모른 채로 만나자고 하다니. 지나치게 성급했다. 

“나 혼자 살아.”

그는 스탠리의 속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푹신푹신해 뵈는 가죽 소파에 앉자 남자가 주방 쪽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뭐 마시고 싶은 거 있어?”

“음… 안 줘도 되는데… 커피 말고, 아무거나. 고마워.”

손으로 볼우물을 쓸었다. 리처드 베켓은 이제 담배도 피우지 않는 모양이었다. 집 안에서 담배 냄새는커녕 깨끗한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전반적으로 살림을 잘하는 사람이 사는 공간같이 차분했다. 엉망진창인 스탠리의 뉴욕 오피스와는 딴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가 쿠키가 담긴 트레이와 머그잔을 냈다.

“…어… 정말 고맙다.”

받아든 머그잔은 뜨끈했다. 따뜻하게 우유를 데운 모양이었다. 고소한 우유 냄새가 긴장된 마음을 일견 녹였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고 했지.”

남자가 자연스럽게 대화의 포문을 열었다.

“아. 맞아. 맞다. 그래.”

하마터면 이곳에 제 발로 걸어온 이유까지 잊을 뻔했다.

“…….”

남자가 손가락 끝으로 쿠키 트레이를 스탠리 쪽으로 밀었다. 그 호의적인 제스처에 한결 용기가 생긴 스탠리가 더듬더듬 질문을 시작했다.

“노라 하트가… 척 앤더슨과 결혼하는 거… 알지?”

“응.”

간결한 대답에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저를 내리쬐는 태양이 떨어지는 느낌.

“노라는… 너랑, …너랑 사귀었잖아?” 스탠리가 망연자실해하며 물었다. 

“졸업하고 바로 헤어졌어.”

남자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마치 지구는 둥글다, 해는 서쪽으로 진다, 이런 단순 사실관계를 말하는 투였다. 스탠리가 용기를 냈다.

“하지만 너희 둘. 사이 좋았잖아.”

그래. 차라리 노라 하트가 리처드 베켓과 함께였다면 납득했을 거다. 속으로는 엄청 욕하고 훼방 놓으려고 했겠지만, 적어도 그러려니 했을 거란 말이다.

리처드 베켓이 노라의 격에 안 맞는다고 생각한 건 맞다. 하지만 척 앤더슨이라니. 그건 격이 안 맞는 정도가 아니라 대재앙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혼란스러울 틈도 없었다. 리처드 베켓이 2차 폭탄을 투하했기 때문이다.

“별로. 우리 사이, 사실 그렇게 좋지 않았어.”

마시던 우유를 쏟을 뻔한 스탠리가 멍하니 리처드 베켓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사실 지구는 둥글지 않습니다.’ ‘해는 동쪽으로 집니다.’라는 말을 들은 것 같았다.

“어째…서?”

리처드 베켓과 노라 하트는 달과 지구 같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동전의 양면. 스탠리 제이미슨은 무의식적으로 둘을 묶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노라 하트를 사랑할수록 리처드 베켓을 미워했던 거다. 노라 하트가 아니었다면 리처드 베켓을 그렇게 질투할 일도 없었다.

그런데, 그게 사실 아니란다. 전부 착각이었단다. 그것은 노라 하트가 척 앤더슨과 결혼한다는 이야기보다 배는 충격적이었다. 죽고 못 사는 것 같았던 둘의 사이가 사실 그렇게 좋지 않았다니.

“난 다른 사람 좋아했거든.”

리처드 베켓이 쓸쓸하게 웃었다.

* * *

다른 사람 좋아했거든.

남자는 단 한마디로 스탠리 제이미슨을 혼란에 빠트렸다. 과거의 기억이, 그 성채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고?”

“응.”

정작 그런 핵폭탄급 선언을 한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다. 리처드 베켓은 제 몫의 머그잔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우유를 마셨다.

“그 사람이랑 사귀려고 노라와 헤어진 거…냐?”

스탠리가 얼빠진 상태에서 질문했다.

리처드 베켓의 마음을 얻은 미스터리한 여성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아무래도 엄청난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아니. 그 사람은 몰라.”

또 물음표 한 다발이 스탠리의 머릿속에서 폭발했다. 천하의 리처드 베켓이 고백하고도 넘어가지 않을 이가 어디 있단 말인가. 녀석이 마음속에 담아 두고 삭이는 타입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도대체 왜 고백을 안 했지? 100퍼센트 성공할 고백을?

“왜 고백 안 했어.”

물론 스탠리 제이미슨은 제가 한 질문이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것임을 알았다. 왜 고백 안 했어, 라니. 게다가 이곳에 찾아온 목적은 노라 하트에 대해서 묻기 위함이지 리처드 베켓의 신상을 캐려는 의도는 아니었단 말이다.

하지만,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고,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 잘난 인간인 줄 알았던 리처드 베켓이, 그가-.

고백을 하지 않을 정도로 소중한 사람이 따로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스탠리가 그렇게 질문을 던지자, 리처드 베켓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나이 서른넷. 어째 하이스쿨 때보다 원숙한 미남이 된 것 같았다. 낮은 조도의 조명 아래에서 그의 눈은 짙은 남청색이었다. 거친 바다 같은, 깊은 해구의 심연 같은 색깔. 그가 그런 눈으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멋쩍은 기분이 된 스탠리가 헛기침했다.

“그 사람은 나 싫어해서. 그냥 짝사랑이지.”

리처드 베켓의 평연함이 처음으로 깨졌다. 살짝 떨리는 말꼬리가 증거였다. 그가 말을 끝낸 후 입을 꾹 다물었다. 

아.

스탠리 제이미슨이 입을 벌리고 멍한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봤다.

모두가 알다시피, 짝사랑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한 번도, 단 한 번도. 리처드 베켓에게 그런 아픔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입을 꾹 다문 리처드 베켓의 얼굴은 덤덤했다. 그 무표정한 얼굴에서 그의 감정을 유추할 수는 없었다. 마치 장막 너머로 숨어든 것 같은 의뭉스러운 표정이었다.

“아. 그래.”

그래. 그렇구나. 안됐다. 나도 짝사랑 때문에 10년은 족히 고통받았거든? 우리에게 공유할 수 있는 아픔이 생겼구나. 술이나 한잔하자.

술술 나와야 할 사교적 언변들이 기도에 꾹 막힌 것처럼 나오지 않았다.

리처드 베켓과 노라 하트는 졸업하자마자 이별했고 그 뒤로 그녀가 누구를 사귀건, 누구와 결혼하건 그의 소관은 아니었다. 아는 것도 별로 없을 터. 다짜고짜 남자를 찾아온 자신이 바보 같았다.

괜히 성급하게 굴어버렸다.

“나. 나는… 미안하다.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서. 괜히 너 괴로운 질문만 한 것 같다.”

과거의 아픔에 매몰된 나머지, 눈앞의 남자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 17년의 세월 동안 그가 겪었을 고통에 대해서는 한치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아까 전 수전의 말을 들어서인지 더 자괴감이 들었다. 알코올 중독 아버지와 집을 나간 어머니. 교통사고까지. 그에 비하면 저는 행운아였다.

“아냐. 괜찮아. 노라 결혼식 때문에 온 거라고 짐작은 했어.”

남자가 씁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원망한다거나 짜증을 내지는 않는 것 같았다.

“…….”

“노라 좋아했잖아.”

이번에는 리처드 베켓 쪽에서 질문했다.

“…그래.”

“……지금도?”

질문하는 리처드 베켓의 입매가 살짝 경련했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그 기류 변화를 전혀 감지하지 못한 채 너스레를 떨었다.

“…뭐. 그런 셈이야. 하하. 바보 같지? 그러고 보니 너랑 나랑 학창 시절 공통점도 다 있고 그렇네. 짝사랑으로 고통도 다 받고.”

눈앞의 남자가 연적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스탠리는 솔직하게 말을 터놓았다. 하찮은 유머로 앞에 있는 남자를 위로해 주고픈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그 대답과 동시에 부르르 떨리던 리처드 베켓의 입매가 이죽이듯 비틀렸다.

남자가 다시 그 적대적인 무표정으로 숨어들었다. 긴장된 입매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눈이 매서웠다. 뭔 실수라도 했나 싶어 스탠리 제이미슨이 목덜미를 매만졌다. 하기야, 애초에 갑자기 와서 이러쿵저러쿵 아픈 연애사를 들추는 게 문제인 것 같았다.

이만 나가야 할 타이밍인 게다.

“아. 이만 가야겠다. 늦은 밤에 갑자기 불쑥 찾아와서 미안.”

“…그래.”

스탠리 제이미슨이 현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리처드 베켓은 배웅조차 하지 않았다.

* * *

X월 X일

비가 계속 온다. 머리가 아프고 무릎이 지끈거린다. 어머니한테 말씀드렸더니, 성장통이라고 하신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냥 내가 약골이라서일 확률이 높다. 비가 오거나 말거나 기분은 최악이다. 오늘 수학 시간에 앨런 선생이 내가 버릇이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난 그냥 계산 실수를 지적한 것뿐인데.

내 계산이 맞는다는 걸 알면서도 선생은 나를 훈계하고, 애들은 깔깔 웃는다. 그냥 입을 닫고 살아야 하는데 감히 말을 한 내 잘못이다.

오늘 있었던 그나마 좋은 일이라고 하면 만화를 좋아하는 레슬리와 말을 섞었다는 거다. 나는 코믹스에 그다지 관심은 없지만 (솔직히 코드 짜는 게 훨씬 재밌다) 포스터는 적어도 나를 때리거나 욕하지 않으니까. 사실 척 앤더슨만 아니었다면, 내 인생이 이렇게 힘들어지진 않았을 거다. 그놈만 없었다면 레슬리는 물론이요, 노라와도 친하게 지낼 수 있었을 텐데.

그놈의 부유한 아버지 어쩌고만 아니었다면, 진작에 징계를 먹일 수 있었을 거다. 

코드 이야기 말고 뭔가를 더 쓰고 싶은데… 아. 오늘 리처드 베켓에게 내 노트를 빌려줬다. 왜 그 자식은 1등 유니스 말고 내 노트를 가져다 쓰는지 모르겠다. 괜찮냐고 몇 번이고 물어보길래 그냥 가져가서 찢거나 불태워도 된다고 했다. 그랬더니 표정이 팍 식는 게, 내가 또 실수했나 싶었지 뭔가. 나야 정말 그 노트는 필요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말한 것뿐이다. 난 이미 노트 내용을 컴퓨터에 다 옮겼으니까.

* * *

사실 괘씸해서 동창생들의 얼굴도 꼴 보기 싫었다. 하지만 이왕 미시간까지 온 거 한바탕 야단법석이라도 피울 요량이었다.

솔직히, 자랑하고 싶기도 했다. 몰지도 않는 슈퍼 카 다섯 대를 가지고 다니고, 심심풀이로 집 한 채쯤 살 수 있는 재력을 가졌다고. 조만간 개인 헬리콥터를 사들일 예정이라고. 꽤 괜찮은 외모를 가꿔냈고, 인기도 많다고. 한껏 자랑하고 싶었다. 혹자가 역겨운 속물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정확히 그런 잣대로 사람을 평가하고 괴롭혔던 인간들이니까. 그대로 돌려줄 생각이었다.

모임 장소는 1시간 거리에 있는 앤 아버의 펍이었다. 차를 몰면서 스탠리 제이미슨은 후면 미러로 제 모습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완벽했다.

체형 교정, 시력 교정 수술, 운동을 통해 다져진 몸까지. 키는 20대 전반에 걸쳐서 폭발적으로 자랐다. 이런 얼굴과 몸으로 한 번도 이성에게 거절당한 적 없었다. 그런데도 늘, 언제나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난 사실 쓰레기니까, 저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아. 더 나아지지 않으면 안 돼. 저 사람도 내 옛날 모습을 알게 되면 비웃을 거야. 내면의 부정적인 목소리는 멈출 줄을 몰랐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자연스레 단발적이고 가벼운 교제를 추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30줄에 접어들자 그 기믹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잦아졌다. 분명히 사전에 가벼운 만남을 지향한다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헤어지는 게 힘들어졌다. 상대는 계속해서 깊은 관계를 요구해왔다. 그걸 방어해내는 게 힘에 부쳤다. 연애는 일종의 지루한 공성전 같은 게 되어 버렸다.

연이어 관계에 실패할수록 그의 안에서 첫사랑의 이미지는 과장되어 갔다. 노라 하트는 아름다우며, 저를 전부 이해하는 첫사랑의 상징 같은 것이 되었다. 그녀의 옆에 선 리처드 베켓 역시 신화 속 인물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이미지조차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리처드 베켓이 사실 노라를 그렇게 사랑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자, 노라의 광휘도 점점 걷혀 가는 기분이었다.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제 사랑은 그렇게 얄팍했던가?

노라 하트를 좋아하지 않았어. 나는 다른 사람을 사랑했어. 남자의 그 말이 생각 이상으로 큰 대미지를 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깨달음이 있었다. 17살 리처드 베켓 역시 저랑 비슷하게 짝사랑으로 힘겨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샤덴프로이데 같은 게 아니라, 진심으로. 진정으로 타인에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말 이상한 느낌. 그저 평면적으로 이해했던 그림이, 갑자기 입체적인 미로가 된 느낌이었다.

비가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트렁크에 우산을 넣어 놓기를 잘했다. 와이퍼를 작동시키자 물방울들이 흔적 없이 사라졌다가, 또다시 생겼다. 

* * *

X월 X일

역시 리처드 베켓은 멍청한 놈이다. 노트를 잃어버렸다고 해서 그러려니 했다. 이미 컴퓨터로 다 옮겨놨다고 하니 무척 안심하더라. 딱히 일부로 그랬을 것 같진 않고, 참으로 얼빠진 녀석임이 틀림없다. 뭐라도 주겠다고 하는 걸 가까스로 뿌리치고 학교를 빠져나왔다. 저놈에게 붙들려 있다가는 비교만 된다고.

노라 앞에서 녀석과 비교당하는 수치를 겪을 바에는 차라리 창문 밖으로… 아니. 됐다.

아 그리고 또 그놈의 연극. 우리 학교에는 지랄 맞은 창의력 활동 시간이 있다. 말이 창의력 활동 시간이지 더러운 일들을 자꾸 시킨다. 창의적으로 감정을 표현해 봐요! 웃기고 자빠지겠다.

개뿔이 창의력이지. 난 이미 코딩으로 창의성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다고.

....만약 그뿐이었으면 내가 이렇게까지 싫어하진 않았을 거다. 반을 전부 합쳐서 활동시키니까 문제지. 날 징그럽게 괴롭히는 놈들과 한 공간에 있어야 한다는 게 끔찍하다.

아무튼, 이번에는 연말까지 <오만과 편견>을 연극으로 만든다는데, 영국 시대극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뭘까 참으로 궁금하다. 제발 하느님, 나무나 돌멩이 역할을 주세요. 아니면 소품팀이라든가. 대사 있는 건 제발 내게 안 왔으면.

연극 수업은 시작되지도 않았지만 이미 정해진 배역도 있다. 여자 주인공 역할은 역시 노라 하트다. 남자 주인공 역할은 공석이다. 다아시 역할을 척 앤더슨이 탐내고 있는데 웃기는 일이다. 그 녀석이 <오만과 편견>을 읽었을 거라는 생각도 안 들고, 일단 외모부터가 별로인걸. 리처드 베켓 옆에 서면 놈은 그냥 납작 눌러 놓은 감자 같다.

아, 그리고 이번에 경진대회서 받은 상금으로 컴퓨터를 새로 맞추고 카메라도 사기로 했다. 이번에는 엄마도 반대하지 않는 눈치다.

한 번 사이트를 만들어 보고 싶은데, 그 사이트는…

X월 X일

그래. 좋아. 연극을 하는 건 그렇다고 쳐. 할 수도 있는 거다. 하지만 왜 나까지 붙들려서 그 연습 시간에 참여해야 하는가. 나는 막간에 소품 나르는 역할인데.

그 때문에 버스도 못 타고, 리처드 베켓의 차를 얻어타야 했다. 그 녀석 집이랑 내 집이 가깝다는 이유에서였다. 조수석에 노라 하트가 탄 건 좋았지만, 노라의 표정이 무척 안 좋았다. 당연했다. 연습 시간 내내 둘이 싸웠으니까. 결론적으로 나는 죽을 맛이었다.

사건의 전모를 밝히자면, 다음과 같다. 

리처드 베켓이 갑자기 자기는 다아시 역할이 하기 싫다지 뭔가. 그냥 소품 담당이 하고 싶다고 해서 우리 모두 난리였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말도 안 된다고 난리를 쳐서 겨우 진정시켰지만, 여주인공 역할을 맡기로 한 노라는 이미 기분이 상해서 둘이 싸우고 난리도 아니었다.

노라를 화나게 하다니, 리처드 베켓에게 짜증이 났지만, 사실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었다. 베켓 녀석에 따르면, 연기는 죽어도 못 하겠다는데 그럴 수 있는 거다. 아무리 잘생겨도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싫을 수도 있지. 각자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

그 소심한 깜냥으로 미식축구는 어떻게 하냐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노라가 쏘아붙였다. 리처드 베켓이 반박하기 전에 차가 노라의 집 앞에 도착해서 정말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내가 있는 자리에서 다시 싸움이 날 뻔했다.

노라가 내리고 난 이후에 리처드 베켓이 어색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왔다. 나야 뭐. 그냥 이해한다고, 힘들 수도 있다고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침묵했다. 정말 어색한 5분이었다.

* * *

앤 아버는 보스턴이나 뉴욕에 비하면 무척 소박한 도시였다. 그러나 밸린저 시티에 있다 보니 큰 빌딩이 솟아오른 것만 봐도 마음이 시원해질 지경이었다. 역시 나는 도시 체질인가 보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실없이 생각하며 차를 빌딩 공용 주차장에 댔다.

동창 모임이 열리는 펍은 금주령 시대의 분위기를 어설프게 흉내 낸 곳이었다. 낮에도 어두침침한 실내에 촛불같이 생긴 조명들이 있었고 벽에는 마피아들의 머그샷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이런 펍 안 간 지 꽤 됐지.’

나무 계단을 내려가고 예약된 단체실 안으로 들어서자 17년 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들이 있었다. 가장 정중앙에 앉은 유니스 킴, 구석에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레슬리 포스터, 어쩐지 뜨악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고 있는 팻 먼친, 그리고 밴드부 아이들, 뮤지컬부 아이들.

노라와 척이 없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대외용 미소를 지어 보이자 긴장된 분위기가 일순 풀렸다. 다들 스탠리에게 과장된 환영의 인사를 건네며 소란을 부렸다.

“이따가 사인이나 하나 해 주라.”

“아니, 사진 찍어 줘. SNS에 올리게.”

“와이퍼에다 올리게? 그거 스탠리가 만든 거잖아. 소름 돋는다.”

“하하. 나중에 사진 다 같이 찍자. 오랜만이야 다들.”

혹자가 보면 아주 절친했던 사이인 줄 알겠다. 사실 저는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던 왕따였는데. 스탠리가 속으로 조소하며 레슬리 옆에 앉았다.

“스탠. 안녕.”

레슬리는 안경을 쓰윽 들어 올리며 고개를 까닥했다. 스탠리가 마주 웃었다.

“너 화면에서보다 잘생겼다.”

레슬리가 사실을 적시하는 투로 무덤덤하게 말했다.

“아… 아. 고마워. 하하.”

레슬리 포스터는 학교 때도 그랬지만 직설적인 구석이 있었다. 가감 없는 칭찬이 그렇게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유니스 킴이 멀찍이서 스탠리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게 느껴졌지만, 겉보기에 나쁘지 않은 분위기였다. 다들 저의 근황을 이야기하거나, 주로 스탠리의 사업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어째 스탠리 본인보다 그들이 와이퍼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는 느낌이었다.

“와이퍼 안 하는 인간이 없잖아. 사람들이 그러더라. 와이퍼 안 하는 사람은 와이퍼 만든 스탠리 제이미슨밖에 없다고.”

“진짜. 늘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왜 넌 계정 안 만들어.”

“그래, 그래. 근황이라도 좀 서로 알고 살자.”

스탠리 제이미슨이 어깨를 으쓱했다.

“별로. 난 사람들이 하는 걸 보고 싶었지, 나 자신에 대해서는… 그렇게 올릴 게 없어서.”

부분적으로 맞는 사실이었다. 굳이 SNS를 하지 않는 이유가 몇 개 더 있기는 했다. 1. 시간이 없었다. 늘 사이트 유지 보수를 하다 보면 계정을 운영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은퇴해서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아진 지금도 계정을 생성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두 번째 이유는 다소 속물적이었는데, 2. 신비함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괜히 사생활을 노출시켜서 테크 구루의 신성한 이미지를 훼손할 필요는 없었다. 

진짜 이유가 어쨌건 간에, 스탠리의 대답에 다들 멋지다고 난리였다. 무슨 말만 하면 웃음보가 터지는 좌중을 보며 스탠리는 고양되기보다는 쓸쓸한 기분을 느꼈다. 어쩌면 정확히 이런 이유 때문에 SNS를 하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 교류할수록 외로워지기만 하니까. 

대화의 주제를 옮길 겸, 궁금한 것도 질문할 겸, 스탠리가 넌지시 말했다.

“안 온 애들이 좀 있네.”

노라와 척 앤더슨이 보이지 않았다. 척 앤더슨이 저 때문에 지레 내뺐다 치더라도 노라 하트가 안 보이는 건 좀 이상했다.

“아. 노라랑 척은 결혼 준비로 좀 바빠서. 이것저것 정해야 할 게 있대.”

유니스 킴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척 앤더슨이 스탠리를 괴롭힌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흥겨웠던 테이블의 분위기가 자못 소강 되었다. 다들 조금씩 스탠리 제이미슨을 곁눈질하며 분위기를 살폈다. 마치 그가 어떻게 나올지 가늠하는 것 같았다.

“리처드 베켓 다친 거 알지?”

테이블 끝에서 누군가가 뜬금없이 리처드의 이야기를 꺼냈다. 스탠리가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로 말을 꺼낸 당사자를 노려봤다.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 남자였다. 마크였나, 트로이였나. 흔하고 흔한 방관자 중 한 명. 가끔 스탠리를 못난이라고 부르던 그런 가해자 중 한 명일 이였다. 그가 스탠리의 시선을 호기심으로 해석했는지 말을 이어 나갔다.

“그거 사실 술 먹고 운전하다가 다친 거래. 걔랑 노라랑 깨지고 일 되게 많았다. 넌 그때 학교에 없었지? 척 앤더슨네 집안이 리처드 베켓 아버지한테 돈 꿔 준 것 때문에 난리가 나가지고-.”

“잠깐. 뭐라고?”

전혀 모르는 사실이었다. 그때의 스탠리는 MIT 합격장을 받고 들떠 있었을 터. 거의 밥 먹듯이 조퇴를 하거나 학교를 나가지 않았던 터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아무튼 두 집안 사이에 채무 관계가 좀 있었는데, 척 앤더슨이 그것 때문에 리처드 베켓에게 뭐라고 좀 했나 봐. 둘이 개싸움 했다고. 완전 난리였어.”

“맞아. 학교 물건 다 부서졌지. 선생님들 다 와서 말려도 계속 싸우더라.”

팻 먼친이 그때를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며 어깨를 매만졌다.

“솔직히 리처드 베켓 지금 보면 뭐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더라. 인생은 진짜 알 수 없는 거야. 우리 스탠리는 이렇게 잘 풀렸는데, 그 프롬킹 녀석은 지금 정비공이고.”

불콰한 취기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기 위해 헛기침을 했다. ‘우리 스탠리’라니. 어이가 없었다. 저를 언제 챙겨나 줬다고.

거기에다 사람이 없는 자리에서 흉을 보는 건 스탠리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속으로 혼자 욕이나 하는 건 몰라도 이런 식은 싫었다.

그러나 스탠리의 헛기침이 마치 허락이라도 되는 것마냥 남자가 더 크게 떠들었다.

“그 뒤로 리처드 베켓 동창 모임에도 안 나오잖아. 하긴, 나 같아도 쪽팔려서 안 나올 것 같긴 해. 스탠리 얼굴을 걔가 어떻게 보겠어.”

…….

그 말을 듣자마자 속에서 왈칵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리처드 베켓이 내 얼굴을 왜 못 보는데.

그 자식이 왜 쪽팔려야 하는데.

왜 너는 나오고, 리처드 베켓은 이 자리에 못 나오는데.

“그러는 너는 내 얼굴을 지금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하네.”

스탠리 제이미슨이 매섭게 대답했다. 감정적이기보다는 무척 냉정하고 단호한 어투였다. 고등학교 시절 이후로 스탠리 제이미슨은 분노를 누구보다 세련된 방식으로 표출하게 되었다. 오랜 수련의 결과였다.

“아… 아. 그건… 야. 말을 왜 그렇게 하냐.”

마크인지 트로인지 알 바 아닌 남자가 얼버무리기 시작했다.

“그냥, 좀 웃겨서. 리처드 베켓이 적어도 너보다는 내게 더 인간답게 대해 줬거든.”

“…….”

"왜. 안 웃겨? 나한테 못난이니, 아스퍼거니, 그런 소리 지껄였던 인간들이 갑자기 싹싹하게 구는 게 안 웃기고 배기냐고."

순간, 단체실이 적요해졌다. 난리를 피우겠다, 양껏 자랑하겠다 생각했지만 이런 식으로 산통을 깨트릴 계획은 없었는데. 하지만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저를 온갖 별명으로 부르며 괴롭히던 인간들이 돌연 상냥하게 구는 꼴을 견딜 수가 없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잘생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눈은 웃지 않은 채로. 어떻게 나오는지 잠깐 구경이라도 할 요량이었다.

좌중의 적요를 깨뜨린 건 팻 먼친이었다.

“미안… 스탠리. 사실 너한테 못되게 굴었던 거 계속 후회했어…. 내가 인간이 덜됐었나 봐.”

그래, 그래. 우리가 잘못했다. 스탠리, ‘그때’는 우리가 어렸다. ‘그때’는 편협했어. 사람들이 갑자기 참회의 변을 지껄이기 시작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성공한 네가 참아라.

와하하. 웃어 버리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스탠리 제이미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건 대꾸할 가치도 없었다. 자리에 없는 리처드 베켓에게는 사과 안 하고, 이제 성공한 스탠리 제이미슨에게는 사과한다 이거지. 재밌는 태도들이었다.

“다들 사과 좀 하지 마.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잖아. 물론 괜찮다고는 말 안 할게. 죄책감은 그냥 느끼고 살아. 다들 그렇게 인간이 되는 거지.”

코트를 두르며 스탠리가 문가로 나아갔다. 길쭉길쭉한 보폭. 영화의 한 장면같이 퇴장하는 남자를, 다들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반가웠다. 얘들아. 나는 속이 안 좋아서, 먼저 나갈게.”

* * *

X월 X일

그놈의 연극. 물론 제인 오스틴에 대한 유감은 없다. <오만과 편견>은 훌륭한 작품이니까. 난 사랑 이야기보다는 군상극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오만과 편견>에서 제일 좋은 점은 이거다. 그 소설은 우리가 쉽게 타인을 오해하고 평가한다는 교훈을 준다. 타인은 늘 불확실한 존재라는 거 말이다.

그건 코딩과 비슷한 재미다. 사람들은 코드가 확실한 무엇인가로 아는데, 아니다. 코딩은 결국 사람이 하는 거고, 사람이 하는 게 다 그렇듯이 언제나 불확실하다.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은 마치 사람을 이해하는 과정과 비슷해서, 우리는 언제나 창의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물론 코딩을 잘한다고 해서 사람을 잘 대하는 건 아니지만. 내가 그 사회적 실패의 증거지.

아무튼, 각설하고 요즘 학교 연극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리처드 베켓은 진짜 잘생겼는데, 배우 체질은 영 아닌 것 같다. 다아시가 원래 좀 무뚝뚝한 캐릭터긴 한데 리처드 베켓은 거의 종업원이 사람 대하듯 여주인공을 대한다. 게다가 사랑에 빠져 정열적으로 고백하는 장면에서는….

문제가 심각했다. 리처드 베켓은 거의 노라를 바라보지도 않고 말하더라. 마치 정치적 웅변을 하는 느낌? 부끄러운 걸까. 하긴 나 같으면 노라 앞에 제대로 서 있는 것도 불가능하다. 덜덜 떠느라 무대 바닥이 울릴걸? 

리처드는 노라와 단둘이 같이 있을 때는 자연스러울 텐데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으니까 행동하기가 더 힘든 모양이었다.

위컴 역할인 척 앤더슨이 지랄하기 전까지는, 나도 리처드 베켓이 불쌍하다는 한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야. 베켓, 약골 스탠리가 너 대신 다아시를 하는 게 어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노라가 화를 내줘서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척 앤더슨은 지랄을 멈추지 않았다.

그 자식이 내가 시발 엘리자베스를 해야 한다고 개소리를 하는 통에, 모두가 깔깔 웃고 난리였다. 난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만 바보같이 껌뻑였다.

리처드 베켓의 얼굴이 새빨간 걸 보니, 좀 심각한 징조였다. 아니, 나를 들먹였다고 그렇게까지 화가 난 걸까. 좀 무서워져서, 얼른 자리를 피했다.

* * *

‘이제 노라에 대해서 누구에게 묻지도 못하겠군.’

괜히 정보원(?)인 동창생들에게 화를 냈다 싶었지만, 그렇다고 후회스럽지는 않았다.

스탠리가 집에 들어와 코트 자락에 묻은 물기를 털자 수전 이모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굳이 수프를 끓여 주겠다는 수전 이모에게 거듭 괜찮다 말하며 계단을 타고 방으로 돌아왔다. 전에는 을씨년스럽고 저주스럽기만 했던 유년기의 풍경이, 지금은 꽤 괜찮게 보였다. 어린 자신에게 도피처가 되어 주었고, 꿈을 이룰 수 있게 해줬던 작은 방.

어쩌면, 정면으로 화를 낸 게 도움이 된 걸 수도 있다. 나는 괜찮지 않았다고. 나는 그렇게 끔찍한 대우를 받을 인간이 아니었다고 말하기를 잘했다 싶었다. 17년 동안의 자기혐오가 고작 그 정도로 사라지진 않을 테지만, 분명 진일보의 순간이었다.

차분히 자리에 앉아, 책상에 놓인 일기장을 더듬었다. 처음부터 제대로 읽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바로 저를 위해 정의를 실현하는 길이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일기장의 맨 첫 페이지를 펼쳤다.

* * *

우리 사이에는 깊은 슬픔이 있고 그 슬픔은 너무도 습관적이라 나는 그걸 사랑과 구분할 수 없어.

앤 카슨 <남편의 아름다움>

* * *

X월 X일

일기를 쓰기로 결심했다. 한동안 그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않아서, 이렇게라도 적지 않으면 내 인생을 기억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아 말이다. 어머니는 일하느라 바쁘시지, 학교 놈들은 멍청하지, 인터넷에서 사귄 친구들은. 글쎄, 난 인터넷에서 사귄 사람들을 별로 믿지 않는다. 사실 나보다 나이가 20살이나 많은 프로그래머들을 친구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밸린저 하이스쿨에 다닌다. 나는 열여섯 살이다. 그리고 내 인생은 정말 개 같다.

밸린저 시티는 빌어먹을 작은 동네라서 주니어 하이스쿨 아이들은 그대로 같은 하이스쿨로 간다. 그 말인즉슨 개 같은 척 앤더슨과 게일 루먼, 그리고 그들의 똘마니들 역시 계속해서 나와 같은 학교에 다닌다는 이야기다.

내가 이 거지 같은 동네로 온 계기는 복잡하다. 일단 어머니의 눈물이 있었다. 아버지란 인간이 저보다 스무 살이나 어린 여자를 새로운 사랑이랍시고 데리고 온 날, 집안은 난리가 났다. 난 내 방 안 구석에서 달달 떨며 우리 집도 이모와 이모부처럼 이혼이라는 걸 하는가 싶었다.

결국, 기나긴 어쩌고저쩌고 법정 공방 끝에 내 부모님은 이혼했고, 나는 어머니 편에 딸려서 이곳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오해 말라. 이건 어머니의 탓은 아니다. 달리 어찌할 수 있었겠는가. 10년 동안 하지 않은 회계사 일을 다시 시작하면서 우리 어머니… 진짜 고생 많이 하셨다. 그렇다고 크게 가난해진 건 아니었지만, 화목한 집 분위기는 물 건너가 버리고 말았다. 우리 모자 사이는 삭막하기 이루 말할 수 없게 되었다.

그건 그렇고.

밸린저 주니어 하이 시절은 꽤 괜찮았다. 나는 존재감 없이 평탄하게 학교를 다니는 ‘듯했다.’ 노라 하트와 몇 번 말을 섞었고, 너드 친구들 틈에 섞여서 최대한 양아치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했다.

뭐, 다 망했지. 내가 노라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척 앤더슨이 나를 제 따돌림 먹잇감으로 점찍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너무 우울하니까 굳이 길게 구구절절 늘어놓지는 않겠다. 이사를 가자거나 홈 스쿨링을 하자고 말을 할까 몇 번이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힘든 우리 어머니의 어깨에 짐을 하나 더 놓을 수 없었고 홈 스쿨링을 하기에는 내 자존심이 너무 상했다.

너 같은 인간에게도 자존심이 있다고? 거참 신기하구나! 그렇다. 나에게도 자존심이 있다. 나는 내가 언젠가 꼭 성공할 거라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지금은 똘추 같은 모습일지는 몰라도, 기대하시라. 이 일기는 언젠가 역사의 한 페이지에 당당히 등재될 거니까!

그때가 되면 노라도 나를 당당히 본모습대로 봐줄 것이다. 그리고 리처드 베켓 녀석은 멍하니 승리자를 쳐다볼 뿐이겠지.

그러니까 아직 이 정도의 시련에 굴복할 수 없다.

* * *

일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신감에 스탠리 제이미슨이 괜히 혼자 멋쩍어했다. 일기의 초반부는 제법 패기로웠다. 그건 사실 조금 서글픈 일이었는데, 갈수록 내용이 우중충해진다는 건 이미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척 앤더슨의 괴롭힘은 점차 수위를 더해 갔고, 거기에다 노라 하트에 대한 짝사랑은…….

-쾅

우르르 쾅쾅. 빗줄기가 더욱 거세진 데다가 천둥 번개까지 쳤다. 범상치 않은 날씨에 스탠리 제이미슨이 인상을 찌푸리며 휴대전화로 날씨를 검색했다.

동부 권역에 호우 경보가 내려진 지 몇 시간 되었다. 방의 유리창이 바람에 부딪혀 달달 떨렸다.

몸을 씻고 난 다음 침대에 누워 일기장을 계속해서 읽어 나갔다. 압권은 코드를 그대로 노트에다 적은 부분이었다. 총 5장의 페이지가 전부 C++ 코드로 이루어져 있었다. 코드 다음으로 지분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노라 하트였다.

노라 하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구구절절 볼펜으로 쓰여 있었다, 노라가 울적해 보여서 괴롭다, 노라가 행복해서 다행이다, 따위의 이야기였다. 무슨 자기가 노라 하트의 수호천사라도 되는 양 굴었던 게 부끄러웠다. 

그러나 하고많은 노라에 대한 언급 중에서 어째서 스탠리가 그녀를 좋아하게 됐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건 이해할 수 있었다. 노라 하트는… 노라 하트는 만인의 연인이었으니까. 그 누구도 그녀를 보고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을 거다. 리처드 베켓이 밸린저 하이스쿨의 남자 우상이었다면, 노라 하트는 여자 우상이었다. 둘은 밸린저 하이스쿨의 완벽한 선남선녀였다. 커플. 한 쌍의 백조 같은 두 사람.

두 사람.

왠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리처드 베켓을 억지로 그 그림에서 지워내고 저를 대입해 봤다. 리처드 베켓이 더티 블론드라면 저는 검은 머리. 리처드 베켓이 파란 눈동자라면 저는 진한 초록 눈동자.

그런데 이상했다. 해상도가 맞지 않는 기분이었다. 노라 하트의 옆에 선 스탠리의 형상이 어그러졌다. 맞지 않는 퍼즐처럼 덜그럭거렸다.

‘그럼 당연하지. 지금의 나는 젠장맞을 30대고 내가 아는 노라는 17년 전의 노라 하트니까.’

생각을 애써 지워내고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

그리고 충동적으로 와이퍼 앱을 깔았다.

웃긴 일이지만, 와이퍼를 페이스북에 매각하고 난 뒤로 스탠리는 제 폰에서 앱을 지웠다. 어떻게 자기가 손수 만든 앱을 지울 수 있냐고들 하지만, 어쩐지 그 로고를 바라만 봐도 지긋지긋했다.

흥미가 떨어진 거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업 아이템을 찾아야 한다고, 이건 자연스러운 권태라고 생각했다.

와이퍼 특유의 총천연색 반짝이가 흩뿌려지며 계정 생성 창이 열렸다. 반짝이를 두고 리드 디자이너와 벌였던 개싸움이 생각났다. 돌이켜보면 웃긴 추억들이었다(참고로, 스탠리는 반짝이가 없어야 한다는 쪽이었다).

ID :

realstanleyjameson

PW:

**********

‘이미 있는 아이디입니다.’

“뭐야.”

검색해보니 아이디를 선점한 계정은 제 팬이 운영하는 것인 듯싶었다. 연예인도 아닌 저에게 팬 계정이라니 이게 무슨 남사스러운 상황인가 싶었다. 계정을 들여다보니, 스탠리 제이미슨이 나온 각종 사진을 크롭해서 올린 다음 온갖…. 민망한 말들을 지껄여 놓았다. ‘스탠리 제이미슨의 쇄골 우물에 물을 담을 수 있을까?’라는 말은 정말 약과였다.

“이건 음담패설인데.”

기분 나쁘기보다는, 이상했다. 웃기기도 했고.

스탠리 제이미슨의 눈동자는 어두운 숲 같고, 그 안을 헤집어 놓고 싶다는 대목에서 그가 끅끅 웃었다.

웃긴 건 웃기다 쳐도 멀쩡한 정신으로 볼 수 없는 계정이었다. 재빨리 페이지를 나간 스탠리가 이번에는 떨리는 엄지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입력했다. 17년 동안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 검색이었다.

Norah J. Hardt.

여러 명의 노라 제이 하트가 떴다. 빨간 머리, 검은 머리, 브루네트. 아냐 아냐. 개중에서 미시간주에 사는 금발 머리 노라 하트를 찾아야 했다.

“아.”

프로필 사진이 꽃인 노라 하트 계정을 눌렀다.

팔로워 894 팔로우 1023

가게 계정은 아닌데도, 팔로워와 팔로우 수가 범상치 않았다. 뭐, 그럴 수도 있지. 타인의 삶을 관음하고 있다는 옅은 죄책감과 민망함을 느끼며 페이지를 스크롤 했다.

스크롤에 걸리는 시간과 속도를 코딩한 건 바로 자신인데, 그 0.05초가 살 떨리게 힘들었다. 괜히 그동안 노라 하트를 찾아보지 않은 게 아니었다.

대부분 셀피와 먹을 것 사진, 단체 사진, 꽃 사진들로 이루어진 페이지였다. 평범한, 자기 삶을 잘 사는 사람의 페이지. 그럼. 그렇지. 예상했던 대로였다. 사진 속의 노라는 17살이 아니었지만, 더욱 생기 있고 아름다웠다. 하이스쿨 때는 좀처럼 웃지 않았던 그녀가 와이퍼에서는 환한 건치 미소를 자랑하고 있었다.

마치 진정으로 행복해졌다는, 그런 미소였다.

하지만, 하지만. 하이스쿨 때의 감정이 되살아나는가 하면, 그건….

그리고 그때.

우지끈,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번뜩였고, 그와 동시에 집 안의 모든 전원이 나갔다.

* * *

1. 주택가 송전탑 옆의 거대한 나무가 벼락을 맞아서 쓰러졌고, 2. 그 때문에 고압선이 절단되었으며 3. 집 안의 모든 전기가 나갔다-고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친절하게 설명했다.

집 안에 있는 초를 몇 개 켜고 푹푹 한숨을 쉬었다. 전화를 해 보니, 비가 내리는 동안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밸린저 시티에 있는 집이라면 고치는 데에 일주일은 족히 걸릴 거라고 했다.

물론 당연한 일이었다. 미국은 빌어먹을 정도로 넓은 주제에 인프라는 엉망진창이며 밸린저 시티는 항상 앤 아버 다음 다음의 다음이니까. 거기에다 지금 같은 라인에 있는 집들은 전부 전기가 나간 것 같았다.

물론 당장에 돈을 쓴다면 어찌어찌 해결될 수도 있지만, 이런 궂은 날씨에 송전탑에 사람을 보내기는 양심에 걸렸다. 

안절부절못하는 수전 이모를 진정시킨 다음, 스탠리 제이미슨이 휴대폰으로 뭔가를 검색했다.

“스탠리, 괜찮은 거니?”

“잠시만요.”

밸린저 시티에 묵을 만한 숙소 따위를 검색하다가 관뒀다. 더러운 곰팡내 나는 모텔밖에 없는데 진드기가 있을 그곳에서는 죽어도 묵기 싫었다. 그렇다고 앤 아버까지 가기에는….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섬뜩한 불빛이, 그러니까 누군가가 집 앞에 서 있었다.

정확히는 사신 같은 형상을 한 사람이 휴대용 랜턴을 든 채로 서 있었다. 

달달 떨고 있는 이모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그녀를 안심시킨 뒤, 스탠리는 현관문을 열었다.

“누구십니까.”

스탠리가 휴대폰의 서치라이트를 켜자 우비 입은 사람이 스탠리의 쪽으로 손전등을 비췄다. 그 빛에 놀라 눈을 질끈 감은 스탠리는 그대로 물웅덩이 속으로 나자빠졌다.

스탠리, 괜찮아? 강렬한 음성이 웅웅 귓바퀴 밖으로 맴돌았다.

형상의 정체가 리처드 베켓이라는 건, 진창에 처박히고서야 알 수 있었다. 

* * *

리처드 베켓의 얼굴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창백했다. 마치 스탠리 제이미슨이 진창에 박힌 게 다 제 잘못이라는 듯이 괴로운 표정이었다.

스탠리의 몰골이 말이 아니기는 했다. 검은색 머리칼은 푹 젖어 있었고 셔츠 역시 몸에 딱 달라붙었다. 속옷까지 완전히 젖었다. 스탠리는 매끈한 뺨에 묻은 진흙을 털어냈다.

리처드 베켓 앞에서 이런 물에 젖은 생쥐 같은 꼴을 보이다니. 끔찍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리처드 베켓은 어지간히 미안한 모양이었다. 제 우비를 벗어 스탠리에게 씌우려는 그를 만류했다. 난 이미 젖었는데, 무슨 소용이냐.

“그리고 너희 집은 괜찮고.”

“응. 다른 라인이라서. 너 눈썹에 진흙.”

리처드 베켓의 투박한 손이 제 눈썹 가에 묻은 진흙을 떼어냈다. 손끝이 달달 떨리는 게 어지간히 미안한 모양이었다.

음. 상냥하기도 하셔라. 스탠리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아무튼 정황을 종합해 보자면, 리처드 베켓은 우지끈 소리가 나자 걱정이 되어 스탠리의 집까지 왔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친절의 이유를 해석할 겨를은 없었다.

“나. 잠깐 너희 집에서 씻어도 될까.”

일단 지금의 이 더러운 상태부터 해소해야 했다. 리처드 베켓의 집에 출입하는 게 어색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작금의 기분이 너무 끔찍했다.

“그래.”

“염치없긴 한데 우리 이모도 좀 모실 수 있을까. 어둠을 무서워하셔서.”

리처드 베켓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남자의 목울대가 떨리는 게 보였다.

* * *

정말, 대단한 하루였다.

동창들에게 엿을 날리고, 노라 하트의 계정을 찾아내고, 집이 정전되고, 리처드 베켓 앞에서 진창에 넘어지고.

그의 집에서 샤워까지 하는-. 그런 멋진 하루.

다행히 깨끗한 손님방이 있어서 수전 이모는 편히 잘 수 있게 되었다.

방 두 개가 또 있었지만, 한 곳에는 침대가 없다며 리처드 베켓이 제가 소파에서 자겠다고 했다. 그걸 또 말리다가 결국에 스탠리 쪽이 떠밀리듯이 욕실로 갔다.

‘그런데 이거 자연스럽게 내가 자고 가는 게 되었네.’

하긴, 수전 이모만 여기 두고 갈 수는 없는 노릇. 리처드 베켓이 잠깐 부엌으로 간 사이에 스탠리 제이미슨은 샤워실 앞에서 옷을 훌렁훌렁 벗었다. 은근히 한기가 올라오는 것이, 빨리 몸을 뜨끈한 물로 씻어내야겠다 싶었다.

달라붙은 셔츠를 벗고, 버클을 끌렀다. 헬스와 퍼스널 트레이닝으로 다져진 몸은 제가 봐도 만족스러웠다. 물론 당장 한가롭게 스스로를 관상할 틈은 없었다. 빨리 뜨거운 물 속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바지를 내리는 순간, 거울 뒤에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리처드 베켓이 큰 수건을 들고 그대로 망부석마냥 멈춰 서 있었다.

어쩐지 조금 머쓱하기는 했다. 남자의 몸이 저보다 좋은 건 한눈에 봐도 명백한데, 아까 전의 뿌듯함이 씻겨져 나가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아. 고마워. 수건 나한테 줄래?”

스탠리 제이미슨이 허허롭게 타월을 받아들었다. 스탠리에게 수건을 건네준 남자는 대답도 안 하고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나름 예의를 지킨다고 저러는 모양이었는데, 스탠리는 별생각 없이 마저 바지를 벗은 뒤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길게 샤워를 끝마치고 난 뒤 스탠리는 타월로 몸을 닦았다. 남자의 욕실은 단순하고, 모든 것이 정연하게 있어야 할 자리에 놓여 있었다.

‘이렇게 깨끗한 욕실 가진 남자는 또 처음 보네.’

헐레벌떡 칫솔을 입에 물고 아침 서류를 챙기는 저랑 너무 비교되는 세간살이였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나름(?) 깔끔한 성격이기는 했지만, 엄청난 멀티 태스커였다. 그의 집에는 모든 것이 불규칙하게 흩어진 상태로 놓여 있었다. 미니멀리즘과는 거리가 먼 생활이었다. 

부들부들한 타월이 기분 좋게 몸의 물기를 닦아 나갔다. 또 다른 긴 타월을 허리 밑으로 두른 스탠리가, 욕실 문을 열고 외쳤다.

“리처드. 혹시 내가 입어도 되는 옷 있어?”

입고 온 제 옷은 이미 진흙투성이라서 손 쓸 속이 없었다.

스탠리가 외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옷가지가 커다란 손에 들려 들어왔다. 빼꼼, 문 안으로 들어온 커다란 남자의 손이 귀엽기도 하고 웃겨서, 스탠리가 끅끅 웃었다.

“아… 음. 아무튼 옷 고맙다.”

남자가 준 후드는 지나치게 커서 소매가 남았다. 스탠리의 키가 6피트 정도 되는 걸 생각해 보면 대단했다. 괜히 전 미식축구 선수가 아닌 것이다. 트레이닝 바지 역시 살짝 커서, 스탠리는 바짓단을 접어야 했다.

속옷은. 그래. 어디 가서 꿇리지 않는 몸인데도 어쩐지 넉넉한 속옷 사이즈에, 스탠리 제이미슨의 얼굴이 붉어졌다. 허벅지가 이렇게 굵다는 걸… 부러워해야 하나.

‘괜한 생각 말자.’

스탠리가 모락모락 김이 나는 욕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어슬렁어슬렁 거실 쪽으로 가자 남자가 소파에 앉아 마른세수를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원래 항상 멀끔하게 넘기는 스탠리의 머리칼은 현재 이마를 덮고 있었다. 그가 ‘야.’ 하며 리처드를 부르자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남자의 얼굴을 보자 스탠리가 할 말을 잃었다. 속옷을 입으면서 했던 잡생각 때문일 수도 있고, 남자의 눈이 너무 푸르러서였을 수도 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가 얼버무렸다.

“아. 아냐. 그, 내가 소파에서 잔다니까.”

스탠리가 한 손으로 이마를 쓸어올렸다. 리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럴 때 보면 맹수와 같이 생긴 남자였다.

“내가 빠뜨렸잖아.” 

“뭔. 헛발질 한 건 난데.”

가벼운 실랑이를 하다가, 문득 생각이 난 게 있어 스탠리가 덧붙였다.

“리처드. 나 얼마 전에 하이스쿨 애들과 만났다.”

“…그래”

스탠리가 리처드가 앉은 옆자리에 풀썩 앉았다. 저에게는 조금 긴 소매를 접으며 그가 툴툴댔다.

“그냥. 앞으로는 볼 일 없을 것 같더라. 내 학창 시절이 그렇게 장밋빛은 아니잖냐.”

“…….”

“그런데, 너… 요즘 그 애들 안 만난다며.”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던진 질문이었다.

“꽤 됐어.”

리처드가 덤덤하게 말했다.

침묵.

“나쁜 새끼들.”

스탠리의 말에 리처드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튼 소파는 내 거야. 네가 계속 이러다간 우리 같이 소파에 얽혀 자겠어. 그러고 싶냐.”

“…….”

* * *

농담 한마디에 순순히 방으로 돌아가다니. 실없는 놈. 

픽 웃으며, 스탠리가 이불을 끌어 올렸다. 단정한 냄새. 남자의 체취와 섬유유연제가 섞인, 좋은 향. 거실은 난방을 격하게 해서인지 무척이나 따뜻했다.

* * *

눈을 떴을 때는 오전 9시였다. 이토록 늦게 일어난 것도 오랜만이었다.

‘아.’

간밤에 수전 이모랑 저랑 남자 집에 쳐들어와서 잠을 잤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리처드 베켓 집에서 샤워도 하고 잠도 자고. 미쳤군.

자리에서 일어나자 거실에 놓인 쪽지가 보였다. 단정하지만 선 굵은 글씨체로 휘갈긴 쪽지였다.

-수전 이모는 바래다 드렸어. 아침은 테이블에 있으니까 먹고 가.

…….

뭘 먹고 가라는 건지.

졸린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는 저 혼자인 것 같았다.

곤히 자고 있으니까 내버려 둔 걸까. 거실을 둘러보니, 정돈된 살림이 어쩐지 서늘해 보였다. 확실히 깔끔함에 비해서 생활감은 부족해 뵈는 곳이었다. 비르적거리며 식탁 쪽으로 다가가자 거꾸로 덮인 트레이가 보였다. 그걸 걷어내니 프렌치토스트와 구운 소시지가 깔끔하게 담겨 있었다.

“……?”

뭔,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지금껏 사귄 여자친구에게도 하지 않은 정성인데. 생각보다 섬세한 구석이 있거나… 아니, 수전 이모가 해 준 거겠지. 픽. 웃으며 접시를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 * *

[열쇠는 매트 아래에 넣어놨다. 하루 신세 지게 돼서 미안하고 고맙다.]

리처드 베켓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렇게까지 남자에게 신세를 질 생각은 없었는데. 밸린저 시티에 돌아와서 별일이 다 생긴다 싶었다. 수전 이모는 아마 사서로 일하는 지역 도서관에 간 모양이었다. 날씨도 개었으니 사람을 불러 전기를 고칠 요량이었다.

[알았어.]

이내 무뚝뚝한 답신이 돌아왔다. 역시 그답달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저도 모르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 * *

X월 X일

내 불행의 시작을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그건 역시 리처드 베켓이 전학 온 날인 것 같다. 그때를 기점으로 내 인생이 극도로 팍팍해졌다.

8학년 봄 어드메, 놈이 전학 왔을 때, 교실의 분위기를 기억한다.

다들 한날한시 한 초에 숨을 동시에 멈추는 기적을, 나는 봤단 말이다.

대각선 자리에 앉은 노라 하트가 얼굴을 찡그리는 걸 나는 봤다. 하긴, 그 정도의 아름다움은 심장에 통증을 일으킬 수 있다.

베켓 놈의 얼굴을 본 이상 나 역시 바보같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밸린저 시티에 있을 리 없는, 시원시원한 골격의 미남이었다.

밀색의 더티 블론드에 햇빛에 살짝 탄 우윳빛 피부, 그리고 푸른 눈동자. 곧은 선으로 이루어진 얼굴. 넓은 어깨. 그러니까 신이 좋은 것들만 넣어 만든 사람이란 이런 거구나… 싶었다.

그런데 어째선지 난 그 얼굴을 보고 생각했던 것 같다.

쟤는 왠지 슬퍼하고 있다고.

녀석이 팀의 쿼터백 자리를 꿰차고, 학교 최고의 인기남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는 걸 보면서도 난 늘 그렇게 생각했다. 놈은 우울하다. 슬퍼하고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녀석의 사정이었다. 놈의 전학 이후로 척 앤더슨은 나에게 분풀이를 시작했고, 노라 하트는 쌀쌀맞게 굴기 시작했으니까 나는 리처드 베켓이 달가울 리 없었다.

여기서 왜 척 앤더슨이 나에게 지랄을 하는지 덧붙여 둘 필요가 있다. 척 앤더슨 역시 노라를 짝사랑하는 건 모두가 안다. 근데, 리처드 베켓에게 제 짝사랑이 푹 빠지게 됐으니- 자기혐오를 나에게 푸는 거다. 한마디로 화풀이 샌드백이라는 거지. 

노라의 내게 쌀쌀맞게 구는 이유는 그 누구라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거다.

내가 쪽팔린 거겠지. 리처드 베켓에 비해서 흉한 내가 부끄러운 거다.

결론적으로- 나로서는 정말 그 아름다움이 곧 재앙이었다.

* * *

X월 X일

내가 왜 척 앤더슨에게 맞는지 아는가?

나는 녀석을 무서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맞고 울면서도 녀석에게 미안하다고 하지 않는다. 그 자식 말에 따르면 나는 ‘뻔뻔하다.’ 눈치가 없고, 사회성이 없고- 아무튼 뭔가가 잘못되어 있다.

나도 내가 뭔가 잘못된 것 같다. 하지만 척 앤더슨 같은 놈에게 빌려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 그건 자존심과는 다른 문제다. 그냥… 보편적인 인간성 문제지. 

내 판단은 오로지 노라 하트 앞에서 흐려지는데, 그녀를 생각하면 나는 정말 벌레가 맞는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누구나 비참한 존재가 된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 거다. 난 언제나 그 아이 앞에서 왜소한 존재가 되어버리고 만다. 

* * *

전기 설비를 수리하는 팀을 부르고 슬슬 시내를 걸었다. 노라의 결혼식까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괜히 초조해졌다. 전화번호를 모르니 와이퍼로 그녀에게 연락할까.

연락해서 사랑한다고 말하자.

그대로 이 도시를 떠나자.

‘너는 사랑을 몰라.’

뉴욕 소호에 위치한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말 그대로 따귀 세례를 받았다.

여자친구의 말에 따르면 스탠리는 과거에 사로잡혀 있고, 이기적이며 사랑을 모르고-. 자아도취적인 인간이었다.

스탠리 쪽에서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는데, 왜냐하면 모든 건 사전에 합의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깊은 관계로 절대 빠지지 않고 드문드문 데이트도 하고 섹스도 하자는 이야기. 헤어질 때는 언제라도 헤어지자는 이야기, 그 정도는 여자도 이해했을 거라 생각했다.

여자친구의 말에 따르면 스탠리 제이미슨은 여러 가지 혼란스러운 시그널을 보냈다. 그녀에게 매주 다른 꽃을 줬고, 같이 하와이에 가자고 했고, 개인 소유의 별장에 데리고 갔다. 하지만 여자친구는 그게 가장 화나는 일이 아니라고 했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사실에 화가 나. 스탠리 제이미슨.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좋아하면서 이토록 비참한 기분을 느껴서는 안 된다고 봐.

-내가 그러라고 한 것도 아니잖아. 어째서. 자신감을 가져. 스스로를 사랑-

<짝> -따귀 맞는 소리-

‘하…’ 하필이면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기분이 공연히 나빠졌다.

길을 걷다가 누군가가 핸드폰을 들어 저를 찍는 것을 보면서 스탠리가 씁쓸하게 웃었다.

“셀피로 찍어요. 이러면 제가 어색하잖아요.”

“아… 죄송합니다.”

스탠리가 어깨를 으쓱하며 여자와 같이 사진을 찍었다. 흠잡을 데 없는 자상한 태도에 행인들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비가 내리고 난 뒤라 물을 머금은 풀냄새가 알싸했다.

스탠리는 계속 걷고 걸어, 마을 유일의 서점을 지나갔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올 때까지, 그는 계속해서 어떤 아름다움에 대해서 생각했다.

“여보세요.”

[스탠리. 오랜만이야.]

노라. 노라 하트.

노라가 전화를 걸어왔다. 

* * *

처음부터 그 녀석이었다고. 리처드 베켓은 생각했다.

* * *

리처드 베켓은 생각했다. 

제 아비라는 작자가 지역 펍을 개박살낸 뒤로 쫓기듯 이사 온 곳이었다. 짐을 옮기는 내내 뼈마디에 울긋불긋한 멍을 훈장처럼 뻐기고 다니는 아버지를 보면서, 그를 목 졸라 죽이고 싶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다.

같이 오토바이를 몰던 패거리와 헤어지게 된 게 그렇게까지 아쉽지는 않았지만,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대도시 디트로이트에서 밸린저 시티니 뭐니 하는 깡촌이라니.

적어도 이제 아버지 베켓은 아들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그가 리처드 베켓의 손목을 부러뜨려 보안관이 출동한 이후였을까. 아니, 정확히는 아들이 제 키를 훌쩍 넘게 자라 건장해졌을 무렵이었을 거다. 그때 이후로 그는 귀신같이 폭행을 그만뒀다. 늘 술에 절어 있는 사람치고는 기민한 상황 판단이었다. 

아버지 베켓, 세스 베켓은 소싯적에 미남자였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때를 회상하면 늘 눈시울을 붉히며 상념에 빠지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리처드 베켓은 귀를 닫고 차를 몰고 나갔다.

과거를 반추하며 추억에 목을 매는 것만큼 꼴사나운 일은 없었다. 그래서 리처드 베켓은 생각했다. 가장 멀리 나아가겠다고. 그곳이 어디가 됐건 간에 이 망할 집구석에서 탈출하겠다고 말이다.

* * *

어색하게 학생들과 인사했다. 경탄과 경계의 사이에 자리한, 익숙한 반응에 리처드 베켓은 고개를 숙이고 짐을 챙겨 자리에 앉았다. 나이도 나이인 만큼 외모에 대한 자의식이 없을 리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무거운 천형이었다. 아버지를 닮았다는 제 얼굴이 카인의 낙인처럼 무서웠다. 마치 저도 그런 최악의, 쓰레기 삶을 살게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사람들은 그의 이모저모를 줄자로 재며 다가올 것이고, 몇 번의 제스처로 상황은 정리될 것이다. 서열의 상위권에 등재된 이후로는 예상했던 것처럼 일이 진행될 터였다. 괜찮은 여자애들과의 데이트, 미식축구부 연습, 남루한 차에서의 섹스, 싸구려 대마초, 과속 드라이브.

남자애들이 권해 올 담배, 엑스터시, 음담패설이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동시에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리처드 베켓은 어렸지만 닳아 있었고, 저를 성인이라고 생각지도 않았다. 그냥 말 그대로 ‘되는 대로’ 살았다.

미식축구만이 그를 완전히 엇나가지 않게 도와주는 방파제였다. 그마저도 완전히 좋지는 않았지만. 구부정한 자세로 큰 키를 구겨 앉은 자리 옆에는 금발의 여자아이가 앉아있었다.

“안녕.”

수줍게 말을 건 여자아이는 꽤 귀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고개를 까딱이며 마주 인사했다. 조금 어색한 기분에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니 척 봐도 도수 높은 잠자리 안경을 낀 남자애가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정도 도수라면 왜곡이 심할 법한데 큰 초록색 눈이 울먹울먹하는 듯해 기분이 이상했다.

“뭐냐.”

남자애가 계속 뚫어지라 노려보자 욕이라도 한마디 해 줄까 싶은 순간이었다. 저의 등을 두드리는 몸짓에 뒤돌아보니 척 앤더슨이 있었다. 아버지의 친구 로스 앤더슨의 아들이자 어렸을 때 알고 지내던 이였다. 사실 이곳으로 이사를 올 수 있었던 것도 앤더슨네 가족 덕분이었다.

“요, 리치. 잘 왔다.”

“척.”

억지로 피스트범프를 하며 웃어 보였다. 딱히 마음에 드는 자식은 아니었지만, 방금 전학을 왔다는 것을 (그리고 아버지의 채무를) 생각해 보면 친하게 지내서 나쁠 것 없는 놈이었다.

학교의 주먹 척과 리처드가 서로 친하게 인사하자 좌중의 시선이 반짝였다. 리처드의 서열이 확정 지어지는 순간이었다.

* * *

방과 후 폐차장에서 담배를 피우며 척은 제 패거리를 소개해 줬다.

리처드가 옆자리의 그 이상한 남자애에 대해서 넌지시 물어보자 그가 할 말이 많은 것처럼 지껄이기 시작했다.

“아, 걔. 스탠리 제이미슨이라고 병신이야. 완전 우리 학교 공식 찌질이랄까. 컴퓨터 책 끼고 사는데 지가 무슨 빌 게이츠인 줄 알고 거드름 피우는 게 존나 웃겨.”

“그냥 우리는 걔를 스탠리-퍼거라고 불러. 그 새끼가 쳐다볼 때마다 면도칼로 확! 죽여 버리고 싶더라고.”

게일 루먼과 사뮤엘 케이시가 같이 담뱃재를 털며 낄낄거렸다.

“걔 엄마도 걔는 안 좋아할 거다. 솔직히 좀 불쌍해.”

“그 새끼 딸도 안 친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미친. 걔가 노라 하트에게 보내는 눈빛 봤냐? 몇 번은 쳤을걸.”

게일 루먼이 흉내를 내며 돼지 멱따는 소리를 냈다.

“…노라 하트가 누군데.”

대화의 주제를 돌리고자 재차 질문을 던졌다.

“금발 머리 치어리더 주장 있어. 오늘 네 옆자리 앉은 여자애.”

“아.”

그래서 그렇게 나를 쳐다봤던 거군. 리처드는 간단히 상황을 정리했다. 제 짝사랑이 새로운 남자에게 홀리는 꼴에 부아가 치민 모양이었다. 웃기지도 않았다.

리처드가 건성으로 척 앤더슨의 중얼거림을 흘려들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드라이브나 하자. 속도 좀 내고 싶어.”

* * *

리처드 베켓은 자신을 잘 안다.

사실 미식축구를 어느 정도 잘하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걸 안다. 제 아버지의 외모를 물려받은 제가 그의 개차반 인성 역시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알코올 중독자나 거리의 부랑자로 끝나지 않으려면 기적적인 계기가 필요하다는 것도 말이다.

리처드 베켓은 제가 느끼는 답답함을 해명하지 못했다.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 나아갈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이 지긋지긋한 일상에서 도약할 수 있을까. 답은 불투명했고, 미끌미끌한 물체처럼 손에서 빠져나갔다.

그는 학교 수업은 잘 안 들으면서도, 학교를 좋아했다.

그 외의 세계에 대해서 무지했으니까.

제가 승리자가 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공간이었으니까.

어쩌면 그 답답함 때문일지도 몰랐다.

느닷없이 도서관에 간 것은.

미식축구 연습이 끝나고 지친 몸을 끌고 도서관에 갔다. 매주 금요일마다 야간 개장을 하는 곳이었다. 저 수많은 책 가운데는 제가 찾는 해답이 있을까. 새로운 지평이 있을까. 자신을 좀먹어 가는 갈증에, 무의식적으로 서가를 뒤적이며 답을 구했다.

그러나 평소 책과 담을 쌓은 대가는 혹독했다. 뭐가 뭔지, 무엇부터 읽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뭐 찾아.”

불퉁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옆을 돌아보니 일전의 그 초록 눈이었다. 학교에서 늘 따돌림당하는 스탠리 제이미슨. 인사답지 않은 첫 대면 후로 한 달간 말도 섞지 않은 이였다.

가끔 학교 복도에서 마주치는 그는 늘 괴롭힘을 당하고 있거나 혼자였다. 그런 그가 저를 향해 말을 거는 상황이 꽤 초현실적이었다.

“…….”

스탠리 제이미슨이 어깨를 으쓱했다.

“척 앤더슨이랑 친하게 지내더라.”

딱히 원망하는 말투는 아니었지만 당황스러웠다. 리처드 베켓은 당돌한 남자의 말에 어떻게 대꾸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저렇게 예측할 수 없는 반응은 처음이었으니까. 늘 제 앞에서 입에 발린 말만 하는 이들, 폭력적인 이들만 상대해 왔는데 이런 진솔한 말에는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스탠리 제이미슨이 물기 어린 초록 눈을 꿈뻑꿈뻑이며 소곤거렸다.

“그래도 넌 날 괴롭히지 않을 것 같아서 인사했어. 책 읽으러 온 거 보면 적어도 지금은 말이야.”

안녕. 스탠리 제이미슨이 양손에 가득 든 책을 이고 등을 돌렸다.

“저기.”

리처드 베켓이 그를 붙잡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검은 뒤통수가 멈칫하더니, 남자가 마른 몸을 돌아 세웠다. 백지장같이 하얀 피부가 도서관의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투명하게 빛났다.

“추천… 부탁해도 될까.”

리처드 베켓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하자, 놀랐는지 안 그래도 큰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 모습에 어쩐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눈앞의 남자가 학교의 왕따니, 뭐니 하는 것이 하나도 중요치 않았다. 오로지 인적 없는 도서관에 둘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이 감각되었다. 이해하기 어려웠다. 

“무슨 책을 읽고 싶은데?”

스탠리 제이미슨은 아직 변성기가 완전히 오지 않은 목소리로 사근사근 말했다. 마치 새순 같은, 첫눈같이 여린 목소리였다.

가장 최근에 본 영화인 <스타워즈 2: 클론의 습격>을 떠올리며 리처드 베켓이 대답했다.

“스타워즈 같은 건 없어?”

뱉어 놓고 보니 민망했다. 저의 멍청함이 그대로 드러날 것 같아 민망스러웠다. 그러나 스탠리 제이미슨은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아. SF 말하는 거구나. 따라와.”

아무도 없는데도, 정숙을 유지하려는 듯이 사뿐사뿐하는 걸음걸이가 보기 좋았다. 무릎까지 감싼 긴 교정 신발은 사슴의 발 같았다.

스탠리 제이미슨을 따라 도착한 곳은 소설 서가였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한참 책등을 쓰다듬던 스탠리가 ‘찾았다!’ 미소 지으며 책 몇 권을 꺼냈다.

그 해사한 미소와 동시에 리처드 베켓의 무거운 심장이 쿵. 바닥으로 떨어졌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불길하다. 불길하지만….

“네가 뭘 좋아하는지 잘은 모르지만….”

로저 젤…젤라즈니라는 이상한 이름을 가진 사람의 책 한 권, 우르슬라 르 귄이라는 역시 이상한 이름을 가진 사람의 책 한 권이 들이밀어 졌다. 엉겁결에 리처드가 책을 받아들자 스탠리가 살포시 웃었다.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와 <바람의 열두 방향>이야. 정말 재밌다고.”

* * *

집까지 가는 길 내내 스탠리는 종알종알하였다. 주로 제가 하는 컴퓨터 작업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역시 사회성은 참 없는 아이였다. 그러나 그게 나쁘게 보이지 않는 건 왜일까.

자신이 헌신할 수 있는 세계가 있다는 게 굉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태까지 그게 왜 놀림거리라고 생각했는지, 옛날의 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내 꿈은 사람들이 서로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드는 거야.”

스탠리 제이미슨이 삐악거리는 목소리로 재잘댔다. 리처드 베켓이 웃음을 참으며 대꾸했다.

“그래?”

“그걸 컴퓨터로 하는 거지.”

“그냥 말로 하면 되잖아.”

리처드 베켓이 응수하자 스탠리 제이미슨이 미간을 찌푸렸다. 찌푸린 미간을 손가락으로 펴 주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리처드가 웃었다.

“그냥 표시로 하는 거야. 리플라이를 달 필요도 없이 클릭만 하면 되게.”

리처드 베켓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스탠리 제이미슨이 신난다는 듯 계속 말을 했다.

“난 개개인에게는 관심이 별로 없는데, 사람들이 상호 작용하는 거 보면 재밌더라. 그런 걸 연구할 수 있는 게 있으면 좋을 것 같지 않냐.”

내 도구를 사용해서 일종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거지. 사회학도들이 아주 좋아할 거라고. 스탠리 제이미슨이 흥겹게 중얼거렸다. 이미 리처드 베켓이 듣고 있다는 건 고려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리처드 베켓이 묵묵히 말을 듣다가 한마디 거들었다. 둘은 갑자기 보도블록 한가운데서 멈추어 섰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두꺼운 안경을 고쳐 쓰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렇게 되면 더 외로워지지 않을까.”

리처드 베켓이 제 모자란 말주변에 얼굴을 붉히며, 괘념치 말라 손짓했다. 저도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없었다. 스탠리 제이미슨 옆에 있으면 더욱 바보가 되는 기분이었다.

“…….”

그러나 그 바보 같은 말에 의문의 일격이라도 당한 것처럼, 스탠리 제이미슨이 뻣뻣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그냥 바보 같은 말이야, 신경 쓰지-.”

“너 생각보다 똑똑하구나.”

생각보다, 라는 말이 제법 도발적이었음에도 악의는 없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두꺼운 안경을 쓰윽 고쳐 썼다.

“근데 왜 그런 애들이랑 어울려?”

“…….”

안경알이 가로등의 빛을 반사했다. 투명한 초록색 눈을 볼 수 없어 답답했다. 그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질문은 마치, ‘지금 네가 딛고 선 이 땅이 마음에 들어?’라는 질문처럼 들렸기 때문에.

* * *

그 질문을 받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척 앤더슨의 아버지가 우리 집에 돈을 많이 빌려줬거든.

…….

아니, 내가 애초에 그런 놈들 수준밖에 못 돼서. 멍청하고, 못 되어 먹은 인간이라서.

울컥, 올라오는 분노는 스탠리 제이미슨을 향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리처드 베켓의 뻣뻣하게 굳은 얼굴을 본 스탠리 제이미슨은 다른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가 어깨를 움츠리며 강종강종 앞으로 나아갔다.

“아무것도 아니야. 내일 봐.”

리처드 베켓은 스탠리 제이미슨이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 *

집에 돌아오자마자 꼰대의 술주정이 시작됐다.

“왜 이렇게 늦게 돌아오냐. 또 술 처먹었지? 이 아비는 어디에다 두고! 사 온 거 있으면 내놔라.”

“…….”

대꾸도 안 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삐걱거리는 계단 소리, 녹슨 현관문 소리가 무척 거슬렸다. 집안은 알코올과 담뱃재 냄새로 푹 젖어 있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에게서는 우유 냄새만 날 것 같았는데. 그 명징한 대비에 다시 울컥 화가 났다.

그 작달막한 너드가, 저를 계속 화나게 한다. 쾅. 거세게 방문을 닫자 아래층에서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대충 무시하고 침대에 걸터앉아 빌려 온 책을 꺼냈다.

<바람의 열두 방향>

낡은 표지를 쓰다듬자, 아까 전 도서관에서의 해사한 미소가 생각났다.

“…….”

아랫입술을 피가 나기 직전까지 짓씹었다. 그냥 신기하고, 기분 나빴던 거다. 저랑 다른 세계 속에서 희희낙락하는 그 미소가. 단지 그뿐이었다.

책을 조심스럽게 펴서 첫 페이지부터 읽기 시작한 것은. 그저 무시당하기 싫다는 호승심 때문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저는 정말 좆 된 거니까.

* * *

다음 날 지프를 타고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숱한 아이들이 인사를 걸어왔다.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애들도 더러 있었다. 그들에게는 미소를 지어 주는 것만으로 대충 인사를 갈음했다. 학교 안 사물함 쪽으로 가자 척 앤더슨 패거리가 손을 흔들었다. 그들 옆에는 노라 하트랑 맷 먼친도 있었다. 둘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리처드 베켓에게 인사했다.

“안녕.”

“응.”

고개를 끄덕이자, 팻 먼친이 뭐가 재밌는지 노라 하트의 귀에 속삭였다. 사무엘 케이시가 리처드에게 어깨동무했다. 어제 한 엑스터시가 얼마나 좋았는지 낄낄거리는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복도를 눈으로 훑었다.

자신이 뭐를 찾는지 모르는 채로, 그렇게 계속 복도를 응시하고 있을 때였다.

“어제 책 잘 읽었어?”

시선의 아래였다. 언제나 사각에서 튀어나오는 녀석, 스탠리 제이미슨. 큰 눈을 꿈뻑이며 바투 다가온 그가 천연덕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동시에 소란스러웠던 교내가 정적에 잠겼다.

교내 최하 서열의 찌질이가, 최고의 인기 그룹에 붙어 질문을 던진다. 그것도 ‘어제 책 잘 읽었어?’란 질문을. 늘 스탠리 제이미슨을 못살게 구는 척 앤더슨조차 할 말을 잃은 상태였다.

“리처드 베켓.”

“…….”

노라 하트가 눈을 크게 뜨고 둘을 번갈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뒤에 선 아이들 역시 숨을 멈추고 리처드 베켓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학교 인기 스타께서, 스탠리 제이미슨으로부터 책을 빌렸다고? 이게 무슨 소리지? 해명이라도 요구할 기세였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리처드 베켓이 속으로 저를 칼로 찌르는 상상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어깨를 으쓱하며 패거리에게 미소 지었다. 저 녀석이 왜 저러는지 모르겠어. 얼버무리며.

“저게 미쳤나. 얼른 꺼져.”

척 앤더슨이 때리는 시늉을 하자 스탠리 제이미슨이 흠칫, 뒤로 물러섰다.

“……그래. 그러기로 했구나.”

스탠리 제이미슨이 우물거리는 혼잣말에, 리처드 베켓이 미간을 찌푸렸다.

“쟤 정신이 나간 거 아니야?”

뒤에서 누군가의 말이 신호탄이 되어, 복도의 아이들이 전부 웃기 시작했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깔깔거리는 인파를 헤치고 화장실로 사라질 때까지 웃음은 계속되었다.

* * *

이유를 알 수 없는 깊은 불쾌감이 온종일 머리를 무겁게 하고 있었다. 설마 그 너드에게 모른 척했다고 이리 찜찜한 걸까. 그래. 그러기로 했구나. 그 두 마디에 주체할 수 없이 화가 났다. 처웃고 있는 면상들에 주먹을 날리고 사물함을 부수고 싶었다.

“베켓! 베켓!”

별안간 들리는 노성에 헤드기어를 벗었다. 노기등등한 감독이 저의 어깨를 밀었다.

“왜 이렇게 난폭하게 굴어. 연습게임이다. 연습게임. 이러다 누구 하나 결딴나는 꼴 보고 싶어?”

“…죄송합니다.”

“후. 됐다. 됐어. 오늘은 이만하는 게 좋겠다. 네 개인적인 불쉿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잘 해결하라고. 이러다가 고교 대항전에서까지….”

노감독이 마른세수를 했다. 적잖이 신경이 곤두선 모양이었다. 아니, 저의 몸 안에 가득 들어찬 분기를 생각해 보면, 리처드 베켓의 상태가 더 심각했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장비를 걷어낸다.

샤워실에 들어가 뜨거운 몸을 닦아냈다. 그 누구도 제 곁에 다가오지 않았다. 연습게임에서 지나치게 살벌하게 군 모양이었다. 정작 본인은 의식도 못 했다는 점이 어이없었다.

몸을 말리고, 옷을 입은 리처드 베켓은 헐렁한 크로스백을 어깨에 멨다. 자연스레 발걸음이 도서관 쪽으로 옮아갔다.

“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미안하다. 사실 그 책 재밌었어. 바람의 열두 방향. <오멜라스를 떠는 사람들>이 제일 좋았어. 근데 아까 전은, 내가, 내가. 내가 괜히 긴장해서, 실수한 거야. 사실은 나-. 

너랑 친해지고 싶어.

도서관으로 들어가자마자 작은 인영이 보였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긴 테이블의 끝에 앉아, 커다란 대학 교재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안경까지 벗은 채였다.

“…….”

녹색 눈이 깜빡이지도 않고 글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 눈 나빠져. 그 한마디를 내뱉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을 때,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인상을 잔뜩 쓴 채로 저를 쳐다보다가 안경을 더듬어 찾아 썼다.

“…….”

스탠리 제이미슨이 갑자기 책들을 반납대에 가져다 놓더니,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서둘러 짐을 다 가방에 욱여넣은 스탠리 제이미슨이 절뚝거리며 도서관 문을 나섰다. 멀뚱히 서 있는 리처드 베켓은 마치 없는 사람인 것처럼, 그를 지나쳐서 유유히 도서관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스탠리.”

리처드 베켓이 불러도 스탠리 제이미슨이 안 들리는 척 계속해서 휘적휘적 발걸음을 옮겨 나갔다.

리처드 베켓이 한두 걸음 걸어 나가면 금방 잡힐 거리였다. 그가 계속해서 느린 보폭으로 스탠리 제이미슨에게 따라붙자, 남자가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섰다. 성질이 머리끝까지 뻗친 모양이었다.

“뭔데.”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단단한 소라껍데기 안에 숨어든 소라게 같은 인상이었다. 리처드 베켓이 목덜미를 긁적였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고개를 돌렸다. 눈물은 없었지만, 눈가에 가득한 물기에 몸서리가 쳐졌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못난 얼굴은 아니었다. 눈, 코, 입이 단정하게 있을 자리에 있었다. 다만, 무지막지한 교정기와 안경, 그리고 사춘기 특유의 설익은, 정연하지 못한 골격이 있을 뿐이었다. 성장이 끝나고 나면 꽤 괜찮은 얼굴이 될 터였다. 

“할 말 있어서 온 거 아니야. 뭐냐고, 베켓.”

스탠리 제이미슨이 뿌루퉁한 목소리로 재촉하고 나서야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긴장감 때문에 손가락이 절로 곱았다. 초조해하는 리처드 베켓을 올려다보며 스탠리 제이미슨이 크게 한숨 쉬었다.

“미안.”

리처드 베켓의 말에 스탠리가 한숨을 쉬다 말고 눈을 다시 동그랗게 떴다.

“…….”

“미안해. 학교에서 무시해서….”

침묵. 스탠리 제이미슨이 피로한 얼굴로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가 힘 빠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해해.”

스탠리 제이미슨에게 체념은 일상적인 모양이었다. 그가 가감 없이 이해한다고 대답하자 마음이 더욱 괴로워졌다. 녀석에게 있어 체념이 익숙해질 때까지 얼마나 많은 이런 작은 배신들이 있었을까.

이해해. 그 말은 즉 이런 이야기다. 너 역시 다른 아이들과 같으니까, 나는 익숙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들과 다르다고.

* * *

노라 하트가 하는 꽃집은 쇼핑센터 안에 있었다. <밸린저 몰>이라는 3층짜리 복합 쇼핑센터는 말이 쇼핑몰이지 대도시에 있는 복합 문화 공간을 어설프게 따라 한 곳이었다. 안에는 마을 유일의 영화관과 스타벅스가 있었고, 마을 농부들의 직판 매장이 설치되어 있었다.

둘은 그 스타벅스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솔직히 아까의 통화를 어떻게 끝냈는지도 의문이었다. 어. 어. 그래, 잘 지냈지. 결혼 축하한다. 그렇게 어색하게 인사치레를 하다가, 얼굴이나 한번 보자고 했던 것이 곧장 카페에서 만나는 것으로 되었던 것이다.

노라 하트가 제 번호를 안 건 놀랍지 않았다. 아마 유니스 킴이 전달해 준 것이리라. 약속보다 몇 분 일찍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와이어드> 기자의 인터뷰 요청이 한 건, 에서 스탠리를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찍겠다는 건도 있었다.

‘오늘 자 가디언 읽어 봐요.’

비서 로라에게서 온 메시지에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무슨 이야기인가 싶어 뉴스 웹사이트를 눌러 보니, 스탠리 제이미슨에 대한 논설문이 게재되어 있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처럼 생긴 조각상이 부서지는 이미지가 크게 실려 있는 기사였다.

<르포: 스탠리 제이미슨, 현대의 프로메테우스인가 프랑켄슈타인 박사인가.>

기사의 골자는 다음과 같았다. 처음에는 <와이퍼>에 대한 찬사와 얼마나 스탠리가 천재인지에 대해 구구절절 쓰여 있었다. 그러나 점점 논조가 바뀌더니, 마각을 드러냈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만든 와이퍼 때문에 인간관계는 피상적으로 변했고 사람들은 불행해졌고, 북극곰들과 범고래들이 슬픔에 겨워 죽어가고 있다. 그러니 그를 화형에 처하자. 아니 투석형에 처해 마땅하다. 대충 이런 이야기였다. 

게다가 이 대목은-.

‘스탠리 제이미슨은 보기 드문 외모로 큰 관심을 얻은 바 있지만, 본인의 사생활은 베일에 싸여 있다. 이러한 신비주의적 제스처는 스티브 잡스를 어설프게 모방하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 자신의 창조물로 인해 비탄에 싸여 있다는 소문이 진실일까?’

“이게 무슨.”

찌라시도 아닌 정론지에서 이런 추측성 멘트를 싣다니, 악의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댓글난으로 가자 평소의 신문 사이트답지 않게 옥신각신 난리도 아니었다.

alexhamilton:

슈퍼 모델 전 여진과 안 좋게 헤어진 것만 봐도… 와이퍼도 별생각 없이 만든 것 같은데. 페이스북도 우연의 산물이잖아.

droughtiiia:

적어도 스탠리 제이미슨은 흙수저에서 시작했지. 그건 알아줘야 해.

feltcofffffeee:

명색이 영국 언론의 자존심이, 이런 비난 일색의 기사를 실어도 되나요?

atlasnovalis:

내 생각에 그는 끝내주는 나르시시스트일 것 같아. 그렇지 않고서는 그런 앱을 못 만들지.

osawamegumiii:

저 정도로 생겼는데 나르시시스트가 아니라면 그쪽이 더 무서운데요. 하긴, 제이미슨 씨는 와이퍼 계정도 없다지요.

paulallen:

실리콘밸리의 억만장자들이야말로 자식들에게는 핸드폰도 안 주고 sns도 못 하게 한다던데, 비슷한 거 아님? 

…….

사실 언론의 공격이 완전히 부당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아무리 노력하고, 또 노력해도- 인종차별적, 성차별적 계정들을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게 불가능하다고 해도 포기해서는 안 됐을까? 끝까지 책임져야만 했을까? 어쩌면 정말 스탠리 제이미슨의 탓일지도 몰랐다. 

‘…….’

결정적으로 ‘와이퍼’ 인기 스타의 자살이 있었다. 와이퍼에서 뷰티 사진과 동영상을 올려 유명해진 10대 여성이 온라인상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끊은 사건이었다. 그런 유사 사건들이 계속해서 벌어지자, 스탠리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이 만든 게 무엇이었는지, 더 이상 알 수 없어졌을 때 그는 일선에서 물러나 뒤로 빠졌다. 

“스탠리.”

침울한 생각에서 그를 건져낸 것은 상쾌한 여성의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어 보니 노라 하트가 서 있었다. 단출한 청바지 차림에 천 가방을 멘 착장이 퍽 자유로워 보였다. 애써 미소를 짓자 그녀가 마주 미소 지었다.

아주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미소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 마음은 한없이 가라앉기만 했다.

* * *

둘은 커피를 한 잔씩 시키고 어색한 인사를 나눴다. 노라 하트는 확실히 하이스쿨 때보다 밝아진 모습이었다. 길었던 금발 머리는 단발로 짧게 잘랐고 양팔에는 장미 덩굴 문양 문신이 있었다.

“내 결혼식 축하해 주러 온 거라고, 생각해도 되나?”

노라가 장난스럽게 한마디 하자 스탠리가 엷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겸사겸사.”

‘아니지, 미친 새끼야. 노라 하트한테 사랑한다고 말해야지.’ 이성을 관장하는 전두엽이 필사적으로 소리를 질렀지만 어쩐지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스탠리의 담담한 반응에 노라가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가방을 뒤졌다.

“아. 그래. 고마워! 스탠리. 자, 여기.”

노라 하트가 가방에서 편지 하나를 건넸다. 그녀의 달달 떨리는 손끝으로 종이가 팔랑였다.

받아들기도 전에 그것이 청첩장임을 알았다.

“…고마워.”

스탠리 제이미슨의 심장이 곤두박질했다. 그러나 눈앞의 해맑은 노라 하트 앞에서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하… 스탠리. 사실 내가 지금 되게 염치없이 군다는 거 알아.”

노라 하트가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

“척이랑 너랑 굉장히 사이 안 좋았잖아. 아니, 정확히는 척이 널 괴롭혔지. 이렇게 청첩장 건네는 거. 굉장히 잔인할 수도 있는 거. 알고 있어.”

“뭐. 옛날 일인걸. 별로 신경 안 써.”

스탠리 제이미슨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나도. 나도… 널….”

노라 하트의 눈이 금방 글썽였다. 그녀가 억지로 먼 곳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나도, 널. 꿀꺽. 스탠리가 침을 삼켰다. 그다음 문장에 따라서 제 인생이 바뀌리라 생각하면서. 그러나 노라가 내뱉은 문장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나도 널 미워했고.”

“……음?”

스탠리 제이미슨이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했다. 날 미워했다고? 그랬었나? 아니야, 노라는 언제나 내게 친절-.

그럴 리가 없다. 노라 하트가 날 미워했을 리가. 그랬다면 금방 알았을 거다. 스탠리 제이미슨의 시선은 언제나 그녀를 향해 있었고, 그녀는 늘 자상하게 저를 돌아봐 줬으니까. 물론 가끔 저를 부끄러워하기는 했지만, 진심으로 미워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그녀는 이상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실… 항상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어.”

노라의 목소리는 한껏 잠겨 있었다.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마치 고해소 앞에 선 신자처럼.

“나, 아직도 리처드 베켓을 좋아해.”

* * *

“나, 아직도 리처드 베켓을 좋아해.”

그 뜬금없는 말이 둔중한 흉기처럼 스탠리 제이미슨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실연의 아픔이라기보다는 끔찍한 소외감으로 인한 통각이었다. 그동안 나를 미워하면서, 리처드 베켓을 줄곧 사랑했노라는 전언. 그것은….

“하지만, 곧 결혼-.”

“알아. 나도 나 자신이 끔찍해.”

그녀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툭툭 찍어낸 그녀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아직도 리처드를 좋아하면서, 척 앤더슨과 결혼하는 나 자신이 끔찍하고 저주스러워.”

“…….”

그러면 그만하면 되잖아. 그 결혼 안 하면 되잖아. 그렇게 말하면 되는데, 입에서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해야 할 말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내가 도와줄까?”

자신의 첫사랑을 위해서, 원탁의 기사처럼 나서야 할 때가 있는 거다.

“노라 하트. 그 결혼 하지 마.”

차마 나에게로 오라는 말은 못 하면서, 그가 노라의 손끝 위에 제 손을 올렸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신뢰가 가는 미소. 어떤 여자도 그의 그런 미소에 넘어가지 않은 적은 없었다.

“리처드에게 다시 잘 말해 보면 되잖아.”

리처드 베켓에게도 좋은 일일 거다. 기약 없는 짝사랑에 매달리기보다는, 새로운 사랑(정확히는 옛날 사랑)을 찾아 정착하는 게 낫지 않을까? 녀석의 생활감 없는 집구석을 생각했다. 

그래. 좋은 생각이다. 좋은 생각인데…….

어째서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불길한 느낌이 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

노라가 잠시, 눈을 크게 뜨고 저를 쳐다보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녀가 씁쓸하게 웃으며 청첩장을 스탠리 손에서 거두어 갔다.

“리처드 베켓이 말 안 했나 보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숨 쉬었다.

“괜찮아. ‘너’에게서 위로나 충고 듣고 싶진 않다. 미안해. 네 잘못은 아닌데. 내가 힘들어서….”

카페에서 유유히 사라지는 그녀를 보며 스탠리 제이미슨은 대관절 영문을 모른 채로, 어리둥절하게 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도대체 리처드 베켓은 무슨 말을 안 했다는 거며, 그녀는 왜 하고많은 사람들 중에 ‘자신’에게서 위로를 듣고 싶지 않다는 것인가.

‘설마… 나 아직도 따돌림당하는 거야…?’

* * *

평생 연모하던 짝사랑으로부터 그동안 무척 미워했다는 말을 들었다. 위로도 받고 싶지 않을 정도로 밉고, 결혼식 청첩장도 주기 싫다고.

그대로 자리에 앉아 질질 짜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기에, 스탠리 제이미슨은 지친 몸을 일으켜 쇼핑몰 화장실로 갔다. <스타벅스에서_우는_제이미슨.jpg>가 바이럴하게 퍼지는 초유의 사태만큼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수많은 사람의 연애를 (와이퍼를 통해 간접적으로) 주선해 준 자신이, 제 진실한 사랑만큼은 이룰 수 없다는 게 아이러니했다.

화장실 세면대에 몸을 걸치고 얼굴을 쓸었다. 우려했던 것처럼 수도꼭지 터지듯 눈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목덜미가 지끈지끈하게 아팠고, 눈가가 뻐근했다. 그대로 세면대 거울에 비친 저를 바라보며 숨을 골랐다. 창백한 얼굴의 남자가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는 것을.

“저기… 혹시….”

뒤쪽에서 볼일을 보고 나온 남자가 아는 척하는 것을 그대로 무시하며 수도꼭지를 틀었다.

“스탠리 제이미슨 아닙니다.”

의도한 것 이상으로 날 선 대답이 나왔다.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화장실을 나가는 남자를 내버려 두고 빡빡하게 차가운 물로 세수를 했다. 리처드 베켓. 리처드 베켓. 그놈의 리처드 베켓. 정작 그는 노라 하트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까지 완벽했다.

‘끝까지 추한 감정 느끼게 하는군.’

리처드 베켓의 잘못은 하나도 없었다. 오로지 자신만이 저열한 열등감과 피해의식에 잠겨 있는 것이었다. 세간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와이퍼를 만든 건, 멋도 모르는 청소년에게 핵무기를 던져 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고. 그 역시 영원히 열일곱을 벗어나지 못하는 애어른이었으니까.

머리가 아프다.

이별로 인한 충격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생리적인 소름이 돋았다. 오한이었다. 어제 진창에 빠진 게 문제였나 싶었다. 아무리 날씨가 풀렸다고 해도 겨울이었다.

* * *

어찌어찌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금세 열이 올랐고, 시야가 뱅글뱅글 돌았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얼굴을 씻고 약을 입에 털어 넣자 금방 잠이 들었다. 점점 꿈속으로 잠겨 들면서, 그는 노라 하트의 분홍색 청첩장을 생각했다.

* * *

졸업 이후로 누군가가 학창 시절을 물어보곤 하면, 스탠리 제이미슨은 얼버무리곤 했다. 다른 시간 선의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낸 스탠리 제이미슨의 이야기를 지어내거나, 아무 일도 없었다며 주제를 돌리는 식이었다. 알몸을 보이는 것보다 수치스러운 과거였기 때문에 어머니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저 자신에게도 그 과거는 비밀이었다.

어쩌면 그는 과거를 의도적으로 잊기 위해서 노력했다고 볼 수 있다. 가지고 있는 학창 시절 사진도 없이,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 하나 없이, 가짜 친구들과 있었던 가짜 추억들을 주워섬기고 또 주워섬겼으니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짝사랑이었던 노라 하트는 점점 다른 사람으로 변모했다. 다른 추억들이 덧붙여지고, 원래 있던 기억들을 덜어내며, 점점 완벽한 첫사랑으로 그녀를 만들어 나갔다.

올바르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겁쟁이처럼 직면하지 못했다.

파일을 삭제하듯이, 그렇게 과거가 간단히 삭제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 * *

2003년. 조지 W.부시, 브리트니 스피어스, 마이클 조던의 해-

그리고 학교 창고에 갇혀, 구석에 앉아 몸을 웅크리고 있는 스탠리 제이미슨이 있다. 상상의 세계로 도피하는 것은 그의 특기다. 그는 철제문에 머리를 기댄 채, 스티븐 킹의 소설에 대해서 생각한다. 캐리처럼 초능력을 가진 것도, <스탠 바이 미>의 녀석들처럼 절친한 친구들을 가진 것도 아닌 자신이 조금 초라하다.

화학 시간은 꼼짝없이 못 가게 생겼다. 아깝네. 좋아하는 수업인데.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까무룩 잠이 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부드럽게 제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있다. 제 볼을 툭툭 건드리다가 긴긴 한숨을 내쉬는 사람이 있다. 볼을 건드리던 손길은 어깨로 내려와 스탠리 제이미슨을 살살 흔든다.

“스탠리.”

“음…….”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고 안경을 고쳐 쓰자, 걱정스러운 얼굴의 리처드 베켓이 보인다. 베켓이 왜? 이상하다. 얼마 전 도서관에 와서 저에게 미안하다고 뭐라 했던 건 기억하는데. 그 이후로 말을 걸거나 따로 친근하게 굴지는 않아서,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근데 그런 그가 왜 지금 여기에 있지?

…….

“아. 척 앤더슨이 이제 나가도 된대?”

“…….”

리처드 베켓이 입을 꾹 다문다. 음영이 진 얼굴이 퍽 흑백 영화의 남자 주인공 같다. 아마 그는 저를 척 앤더슨과 같은 패로 묶어 버리는 스탠리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 적시 아닌가. 스탠리가 비뚤어진 입매로 조소한다. 설마 구하러 와 줬을 리는 없을 테고… 순수한 선의를 믿기에는, 스탠리의 마음에 여유가 너무나도 없다.

바지를 훌훌 털고 어깨를 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나 있을지 알 수 없다. 벌써 하교 시간이려나. 괴롭힘당하는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태평하지만, 그건 일종의 방어기제다. 무감각을 과시함으로써 자존심을 지키려는 발악이다.

“앞으로 이런 일 없게 할게.”

리처드 베켓이 주먹을 꾹 쥔 걸, 스탠리 제이미슨이 흘겨본다.

“네가 왜?”

스탠리 제이미슨이 냉정하게 대답한다. 도서관에서의 부드러움은 온데간데없는 냉랭한 말투에, 리처드 베켓의 주먹에 힘줄이 돋는다. 그 의연함과 서늘함이 오히려 남자를 거세게 충동질하는 것은 둘 다 알지 못하는 사실이다.

“…….”

“아무튼, 말은 고맙다. 베켓.”

스탠리 제이미슨이 터덜터덜 걸어 나가는 것을, 리처드 베켓이 바라본다.

* * *

“요, 리처드!”

낄낄거리는 무리가 보인다. 어스름이 진 폐차장은 소위 불량 학생들의 성전이다. 보안관들이 순찰을 가끔 하곤 하지만 그들이 발견할 수 있는 건 꽁초 몇 개와 엑스터시 잔여물 정도다. 명실공히 밸린저 시티 ‘주먹’들의 놀이터인 이곳은, 마을 사람들이 공동묘지보다 꺼리는 곳이 되었다.

무리 중에는 여자애들도 보인다. 삶의 권태에 지친 얼굴을 한 아이들이다. 리처드 베켓은 그들에게는 볼일이 없다.

그가 성큼성큼 걸어 나가 척 앤더슨에게 바투 붙는다.

“척.”

일견 차가운 리처드 베켓의 얼굴에, 무리가 흠칫- 몸을 떤다.

“리치, 창고에 가봤냐? 장관이지? 스탠리-퍼거 새끼 바지에 지리지는 않았을까 몰라.”

역시, 너였구나. 리처드 베켓의 마음이 싸늘하게 식는다. 술에 취해 역정을 내는 아버지를 볼 때보다 더… 경멸스러운 마음이 든다. 눈앞의 친구도 아닌 놈의 대가리를 당장 깨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분노다. 왜지? 이유를 탐색할 겨를 같은 건 없다. 

“……안 하면 안 되냐.”

“뭐…?”

“스탠리 제이미슨 괴롭히는 거. 안 하면 안 되냐고.”

척 앤더슨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하기 시작한다. 우두머리 수컷으로서의 자존심을 다친 것이다. 리처드 베켓의 표정은 명경지수지만, 그 밑에 깔린 거센 분노는 명백하다.

상황은 매초 악화된다. 분위기에는 긴장감이 맴돌기 시작한다.

“야. 뭐야, 갑자기 왜 그래. 스탠리 제이미슨에게 약점이라도 잡혔냐? 그 새끼가 딸 칠 거리라도 있대?”

척 앤더슨이 너스레를 떨며 분위기를 무마시키려 하지만, 리처드 베켓은 웃지 않는다.

“야. 진심이야?”

“……제이미슨, 그냥 내버려 둬.”

낄낄거리는 무리에 얼음물이 끼얹어진 것처럼 적요가 감돈다. 그만큼 리처드 베켓은 당장이라도 결딴을 낼 것 같은 태세다. 

“미친, 왜 갑자기 꼰대처럼 구냐. 재미없다, 야.”

“그래. 제이미슨이 대주기라도 했냐? 왜 그래.”

“농담 아니니까, 건드리지 않겠다고 말해.”

리처드 베켓의 어조는 평이하지만, 그를 아는 사람이면 남자가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다.

“씨발.”

척 앤더슨이 담뱃재를 폐차 보닛에 비벼 끈 다음 침을 뱉는다. 여자애들이 뒤로 물러서서 사태를 관망하기 시작한다.

주먹을 먼저 내지르는 건 척 앤더슨이지만, 리처드 베켓이 상대를 가격하는 데에 성공한다.

사뮤엘 케이시와 남자애 한 명이 리처드 베켓에게 달려든다. 그렇게 일방적인 싸움이 시작된다.

* * *

리처드 베켓의 턱 가와 손등에 멍 자국이 가득했다. 뼈마디가 욱신거렸다. 그 울긋불긋한 광경에 기분 나쁘게도 아버지가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척 앤더슨이 항복의 뜻으로 손을 들어 올리고 나서야 주먹질을 그만뒀다. 상대의 뼈가 부러지거나 한 곳은 없었지만, 확실히 고통을 준 것 같아 속이 시원했다. 눈물까지 짜는 놈의 면상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물론 제 피해도 만만찮았다. 두 명이 더 달려든 통에 1대 3의 불리한 싸움이었다. 리처드 베켓의 승리로 끝나기는 했지만, 적잖이 이곳저곳이 아팠다. 눈가가 벌써 부풀어 오르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아마 자못 흉한 꼴이 될 것 같았다. 저에게 잔소리를 할 감독의 얼굴이 눈에 선연했다.

잠깐의 통쾌함은 이내 걱정과 자괴로 얼룩졌다. 한참을 지친 몸을 끌고 밤거리를 돌아다녔다. 터진 입가에서 나오는 피가 짭짤했다.

어머니에게는 무어라고 말해야 하나. 아버지란 작자는 그저 귀찮을 뿐이었지만, 제 상처들을 보며 괴로워할 어머니 생각에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앤더슨 가족에서 어떻게 나올지도 걱정되는 건 사실이었다. 그들이 독촉이라도 해 온다면… 무모한 짓을 벌였다는 자각에 마음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뭐라고. 그깟 너드가 뭐라고 제가 이런 바보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그냥 무시하면 되는데, 눈 딱 감고 끝내면 될 일인데-. 그 녀석이 자꾸 눈에 밟혔다. 가만 놔둘 수 없었다.

야트막한 둔덕에 앉은 채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무뎠던 고통이 차차 생생하게 엄습해 오기 시작했다. 그는 백팩의 뒷주머니를 뒤져 담뱃갑을 꺼냈다. 탁탁.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고 한 모금을 빨아들이자 한결 통증이 둔하게 감각되었다.

한 대 한 대를 길게 태우며 생각했다. 창고에서 잠든 스탠리 제이미슨을. 헐렁한 맨투맨 사이로 비치는 하얀 목덜미를. 빗장뼈 근처에 찍힌 검은 점을. 감은 눈에서 우아하게 뻗어 나온 속눈썹을 생각했다. 눈가에 얼룩진 눈물 자국을 리처드의 손그림자가 더듬었다.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당장 녀석을 깨워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선뜻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내밀한 소망이 근육과 뼈마디를 마비시켰다.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 * *

몇 시간 정도를 밖에서 서성이다가 집에 들어왔다. 쿵쿵 소리와 함께 아버지 베켓이 그에게 다가왔다. 창백한 얼굴을 한 남자가 손을 들어 올리더니, 그대로 멍투성이인 아들의 뺨을 내리쳤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맞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리처드 베켓은 이미 몸싸움으로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대로 힘없이 뺨이 돌아갔고, 아버지 베켓이 소리를 질렀다.

“당장 가서 사과하고 와라!”

“지금은 11시예요. 여보, 내일 날이 밝으면….”

해진 스웨터를 입은 어머니가 당장이라도 아들에게 달려들려는 남편을 막으며 울먹였다.

“너, 이 새끼. 뭘 잘했다고 집에 기어들어 와! 그 나이 됐으면 집안에 해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할 거 아냐!”

웃기는 소리였다. 집에 해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라, 펍을 박살 내고 술이나 퍼마시며 보조금에 연명하는 작자가 할 소리는 아니지 않은가.

“사과. 안 할 겁니다.”

리처드 베켓이 무표정으로 대답했다. 재고의 여지는 없었다. 아직도 제가 왜 그렇게 나섰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돌이킬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척 앤더슨에게는 절대 사과하고 싶지 않았다.

“이 미친 새끼가!”

“여보!”

베켓 부인이 남편에게 매달렸다.

“척 앤더슨에게 물어보세요. 누가 먼저 주먹질했나.”

“말 한번 잘했다. 앤더슨네에서 뭐라고 하는지 알간? 척 코뼈가 부러졌다더라. 오른쪽 손목은 염좌고. 너를 소년원에 넘기겠다고 난리 난리를 하는 걸, 이 아비가 무릎이 닳도록 빌었다!”

“소년원 가죠, 뭐.”

“이 자식이!”

“리처드!”

베켓 부인이 경악에 찬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아들의 확신에 찬 표정을 보며 단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남편이 아들을 쫓아내려는 걸 가까스로 말리고, 그를 식탁에 앉혔다. 찬장에서 비상 약품을 꺼내고 붕대를 가져왔다.

“제가 혼자 할게요.”

리처드 베켓이 식탁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제가 한 행동을 딱히 돌이키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어머니를 볼 낯은 없었다. 어머니 베켓은 눈가는 어두웠고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마켓에서 캐셔로 일하며 온종일 중노동에 시달리는 어머니였다. 끔찍한 기분이 엄습했다.

리처드 베켓이 혼자 하겠다고 했건만, 어머니 베켓은 묵묵히 아들의 손등에 연고를 바르고 터진 입가에 반창고를 붙였다.

“무슨 일인지 이야기할 기분이 드니?”

“…….”

거실에는 술을 퍼마시며 주정하는 아버지가 있었다. 어머니가 손으로 머리를 쓸어올리며 한숨 쉬었다.

“그 나이에는… 친구와 싸울 수도 있다는 거 안다.”

“…….”

별로 친구라고 생각도 안 하는 놈이었지만. 리처드 베켓은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 척네 아버지가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아.”

어머니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마치 얇은 얼음장처럼 위태로웠다.

리처드 베켓은 이미 짓무른 입술을 다시 짓씹었다. 어머니가 말하려는 바가 쉬이 짐작되었다.

“한 번만, 한 번만. 사과하고 오렴. 부탁할게.”

“…….”

“미안하다. 리처드.”

어머니가 머리칼을 쓸어올리던 손을 거두고 눈을 훔치기 시작했다. 끔찍했다. 이 가난. 이 불행.

스탠리 제이미슨의 재잘거리는 목소리를 반추하는 것만이, 고통을 경감시켜 줬다.

* * *

척 앤더슨과 세스 앤더슨, 로리 앤더슨. 앤더슨 가족이 리처드 베켓을 냉정히 응시한다. 훤칠한 청년의 얼굴은 멍으로 얼룩져 있지만, 그것이 그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든다. 마치 반항아 같은 아름다움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앤더슨 가족을 더욱 분개하게 할 뿐이다. 오른손에 깁스를 한 척 앤더슨에게 리처드 베켓이 더듬더듬 말한다.

“저번에는. 미안했다.”

척 앤더슨이 어깨를 으쓱한다. 그가 거드름 피우는 목소리로 말한다.

“뭐, 그럴 수도 있지. 남자들끼리 주먹 다툼 할 수도 있는 거고.”

그러나 세스 앤더슨은 그걸로 족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가 엄중한 목소리로 말한다.

“무릎, 꿇거라.”

“…아빠. 그냥 남자애들 싸움인데, 그럴 것까지는….”

“그러니까, 네가 무시당하는 거다. 척, 이럴 때는 확실하게 해 두지 않으면 안 돼.”

세스 앤더슨의 고압적인 목소리에, 척과 로리가 숨을 멈춘다.

“…….”

리처드 베켓이 무덤덤하게 세스 앤더슨을 쳐다본다. 중년 남성 특유의 고집스러운 눈동자. 마치 쿠키 위에 올려놓은 건포도 같은 그 눈동자는, 어떠한 타협의 여지도 남겨놓고 있지 않다.

리처드 베켓의 푸르른 눈동자가 세스 앤더슨을 불안하게 한 모양이었다. 중년의 남자는 홱 고개를 돌리며 혀를 찼다. 그가 비싼 손목시계를 쳐다보는 척했다.

“…….”

그리고 바로 그때, 리처드 베켓이 무릎을 꿇었다.

“잘못했습니다. 앞으로 아드님을 때리지 않겠습니다.”

감정가 없는 목소리는 마치 이미 녹음된 것 같이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굴욕은 짧지만, 가난은 길고 끈질기다.

* * *

다음 주 월요일, 학교는 작은 파문에 휩싸였다. 척 앤더슨이 깁스를 하고 나타나질 않나, 리처드 베켓의 눈두덩이가 푸르르지 않나. 사무엘 케이시는 더 가관인 꼴이었다.

한동안 설왕설래가 이어졌다. 그러다가 곧, 앤더슨 패거리가 같이 앤 아버에서 놀다가 깡패들과 부딪혔다는 설이 유력하게 제기되었다.

패거리 중 그 누구도 그 설에 수긍도, 부인도 하지 않았고 파장은 이내 가라앉았다.

리처드 베켓은 누군가가 멍에 대해서 물으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역시 다른 학교 애들이랑 싸우기라도 했나 봐. 멋지다. 리처드 베켓은 멍도 잘생겼네. 학교 아이들 사이에서 패거리의 부상은 또 다른 영웅담으로 소화될 따름이었다.

* * *

그 한바탕 싸움 뒤로 스탠리 제이미슨을 향한 괴롭힘의 수위가 퍽 낮아진 것은 사실이었다. 전에처럼 스탠리가 온몸에 멍이 생길 정도로 두들겨 맞거나, 창고에 홀로 가둬지는 일은 없었다. 패거리가 스탠리를 때리고 있다가도 리처드 베켓이 제동을 걸면, 다들 그만두곤 했다.

다만, 그들의 폭력은 좀 더 교묘해졌다. 사물함에 익명의 테러를 저지르거나, 의도하지 않은 것처럼 몸을 부딪치는 등 치사한 방식으로 바뀐 셈이다.

어쨌거나 스탠리 제이미슨은 수업을 빠질 일이 더 생기지 않게 된 것에 감사했다. 창고에 가둬지는 게 제일 싫었기 때문에, 그럴 일이 없어진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러나 안도감을 느끼는 한편으로 불안함이 엄습했다. 마치 태풍의 눈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스탠리 제이미슨의 심사와 별개로, 시간은 모두의 마음에 흔적을 남기며 앞으로 또 앞으로 움직인다.

여름이 다가오는 것이다. 

* * *

사흘을 꼬박 앓았다. 체력을 키우고 나서는 감기에 걸린 적이 없었는데, 사람이 안 하던 일을 하려니 힘든 모양이었다. 그래도 비몽사몽간에 할 일은 다 했다. <와이어드> 기자의 취재 요청에 응했고, 에는 완곡한 거절의 의사를 표시했다. 비서에게 할 일들을 간략히 하달했다. 밸린저 시티 체류 기간은 계획보다 길어질 거라는 이야기도 함께.

감기 기운이 완전히 가셨다는 판단이 섰을 때 비로소 스탠리 제이미슨은 생각했다. 리처드 베켓은 자신에게 무엇을 숨기고 있는 것인가. 노라 하트의 “아직도 말 안 했나 보네”라는 말이 침상에 누워있는 내내 귓가에 맴돌았다.

물론 실연은 가슴 아팠다. 제가 다시 잘하면, 노라 하트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신기할 정도로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그렇게 사랑을 쟁취한다 해도 그건 고등학교 시절의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또한, 혼란스러운 상태에 처한 노라를 이용하고 싶지 않은 것도 있었다. 

“단단히 꼬였군.”

저도 모르게 혼잣말이 나왔다.

“…음? 스탠리, 수프가 맛이 없니?”

“아. 아닙니다. 맛있어요. 수전 이모. 최고예요.”

따끈따끈한 채소 닭고기 수프를 입으로 운반하며 스탠리가 짐짓 웃어 보였다. 지금 당장 노라 하트의 결혼식보다 리처드 베켓이 신경 쓰이는 게 어쩐지 이상했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궁금한 것은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고, 그 집요함 덕분에 성공했다. 아무튼 그 문제의 호기심이 적색경보를 울리며 난리를 부리고 있었다.

전처럼 찾아가서 돌직구를 던져 볼까. 아니, 두 번은 통하지 않을 거다. 후. 리처드 베켓이 저에게 그것까지 순순히 대답해 주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멀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듯이 이럴 때일수록 끈기를 가지고 임해야 했다.

비밀이라 함은, 아마 일전의 그 ‘짝사랑’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걸 알아서 무얼 하겠다,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어쩌면 노라 하트와 그를 이어 줄 수도 있을 것이고, 리처드 베켓의 짝사랑을 도와줄 수도 있을 것이다. 딱히 중매를 서는 취미는 없었지만, 남자의 쓸쓸한 모습이 영 눈에 거슬리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일종의 보은이라고 치자. (일기의 도움을 받아) 더듬어 다시 살펴본 기억 속의 남자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저에게 친절을 베풀던 이였으니까… 좋은 녀석은 도와야지. 그럼. 스탠리 제이미슨은 결코 의인은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왠지 모를 결의가 차올랐다.

‘북 클럽….’

그러고 보니, 남자가 비숍 선생님이 주관하는 북 클럽에 다닌다는 이야기를 했었지.

“흠….”

푹 익은 셀러리를 씹으며, 스탠리 제이미슨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친밀감을 쌓는 게 우선이었다.

* * *

[그래. 북 클럽에 참석하고 싶다고?]

“네. 선생님. 선생님 얼굴도 뵙고, 오랜만에 책 이야기도 하고 싶어서요.”

입에 발린 소리를 하면서 옅은 죄책감이 들었지만, 오랜만에 책을 읽고 싶다는 마음만큼은 진실이었다. 문학과 프로그래밍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후자를 선택한 이유로, 스탠리 제이미슨은 독서를 멀리했다. 의도적이라기보다는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한 탓이었다. 상대적으로 한가한 지금이야말로 밀린 독서를 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본질적인 목표는 역시 하나다.

리처드 베켓의 비밀 짝사랑을 알아내는 것.

리처드 베켓과 노라 하트를 이어주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그와 자신 간의 친밀도를 올려야 했다. 그다음에 술을 먹으면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꺼내는 식으로….

[그래. 몇 주 동안만이라도 언제나 환영이란다. 목요일 저녁 여섯 시, 레스터 서점으로 오렴. 저녁은 먹고 오는 게 좋지만 쿠키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클레어 비숍 선생의 따뜻한 말은, 못난 제자의 마음을 잠시간 아프게 했다. 죄송해요. 선생님, 비록 제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지만…. 책은 열심히 읽겠습니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통화를 마치고 옷을 따뜻하게 갖추어 입은 다음 서점으로 향했다. 시간이 얼마 없는 만큼 북 클럽에서 읽을 책을 빨리 사야 했다.

* * *

레스터 서점은 쇼핑몰이 있는 곳과 주택가가 있는 곳 사이에 있었다. 길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는데, 옛날에는 비디오 대여점이었던 곳이기 때문이었다. 가끔 어머니가 적적할 때면 로맨틱 코미디를 빌려오는 심부름을 하곤 했었는데, 꽤 수익이 짭짤했었다. 옛 추억에 잠긴 스탠리가 휘파람을 불면서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규모는 확실히 작은 곳이었다. 그러나 따뜻한 인테리어에, 스탠리의 마음이 일순 녹았다. 보스턴에 살았을 적을 떠올리게 하는 흥취였다. 매사추세츠 공대. MIT의 도서관에서 마음껏 공부하던 시절. 겁도 없이 세상에 발자취를 남길 생각만 하던 자신이 떠올랐다. 그렇게 매대를 둘러보고 있을 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스탠리.”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그 목소리가 레슬리 포스터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어리둥절하며 끄덕, 인사했다. 물론 지난번에 좋지 않게 헤어지기는 했지만 그녀에게 딱히 악감정이 있지는 않았다.

“어. 레슬리. 여긴 웬일이야.”

“…내가 여기 주인인데.”

아. 그렇군. 코믹스를 좋아하던 레슬리 포스터는 커서 서점 주인이 된 것이다. 나름 어울리는 직업 선택인 셈이었다.

“그래. 이곳에서 북 클럽을 한다고 들어서.”

“어. 비숍 선생님께 들었구나. 어차피 우리 서점… 목요일 저녁이면 오는 사람도 없고, 비숍 선생님께서 주관하는 독서 모임이라길래 여기서 하시라고 했지.”

아, 근데.

레슬리 포스터가 고개를 갸웃했다.

“너, 여기 오래 있을 계획이야?”

스탠리가 멋쩍게 웃었다.

“아. 아마 당분간 여기서 쉬려고. 수전 이모도 있고, 나도 이제 그렇게 바쁘지는 않으니까. 잠정적인 은퇴라고 해야 할까.”

“아. 그래. 그러면 북 클럽 가입서 줄게.”

가입하겠다는 말도 안 했는데, 레슬리 포스터가 계산대 아래의 서랍을 열다니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빈 A4 종이였다. 어리둥절한 스탠리의 표정을 보며 레슬리 포스터가 웃었다.

“여기에 간략한 자기소개와 연락처를 쓰면 끝이야. 내가 어디 유출은 안 할 테니까… 뭐, 싫으면 대충 생략해서 써도 돼.”

얼떨결에 종이를 받아들었다. 레슬리 포스터가 후미진 쪽의 매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북 클럽용 책은 저기 있어.”

* * *

책을 한 무더기 결제하며, 스탠리가 푸념했다.

“이 독서 모임용 책들…. 설마 재고 처리용 아니야?”

“부정은 안 할게. 나도 먹고살아야지, 여기서 제일 잘 나가는 책은 요리책 같은 거라고. 그래도 <순수 이성 비판> 같은 건 비숍 선생님이 거르니까 걱정하지 마.”

“아. 그래.”

“못 믿는 것 같은데. 나중에 읽고 재밌다고 하지나 마셔.”

책 대여섯 권을 종이가방에 담고 오는 길 내내 왠지 모르는 설렘이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왜일까. 기분 좋을 일 따위는 하나도 없었다. 운명의 짝사랑은 저를 미워하는 데다가 곧 결혼까지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울음은커녕 희망적이기까지 하니, 제가 드디어 열 때문에 미친 게 아닐까 싶었다.

* * *

당장 모레까지 두꺼운 책을 다 읽어야 했지만 그렇게 긴장되지는 않았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속독가인 데다가 한 번 읽은 걸 좀처럼 잊지 않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한 뒤 느긋하게 침대에 기대 책장을 폈다.

‘지금 책이나 읽을 때냐. 노라가 결혼을 한다는데.’ - 같은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별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 * *

책을 절반까지 읽은 다음 저도 모르게 수마에 들었다. 일어나니 오전 여덟 시. 늦은 아침을 먹고 운동복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장기전인 만큼, 체력 관리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운동화의 뒤축까지 확인한 후 조깅을 나섰다. 겨울인 데다가 병에 걸려 나아진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가만히 있다가는 스트레스만 쌓일 것 같았다.

운동복 위에 두꺼운 목도리를 두른 스탠리 제이미슨이 헛둘, 헛둘. 도로를 가볍게 질주했다. 20분 정도를 그렇게 뛰었을까. 저 멀리 정비소가 보였다. ‘그냥’ 정비소. 처음에는 웃기지도 않다고 생각했던 간판.

목도리를 내리고 정비소를 아연히 쳐다보았다. 남자는 언제부터 일하기 시작해서, 언제 퇴근할까. 스탠리는 잠시 고민하다가 일부러 방향을 틀어 정비소로 다가갔다. 정비소에는 차 두 대 정도가 정박해 있었다. 전체적으로 낡은 곳이기는 했다. 그러나 정비소라기에는 놀라울 정도로 깔끔한 공간에 발을 내딛자, 인영이 차 뒤쪽에서 튀어나왔다. 그대로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설 뻔했다.

“정비소입니다. 아.”

리처드 베켓이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저를 보고 있었다.

정비소입니다, 손님을 반기기 위해 반사적으로 나온 말인 것 같았다. 아, 는 아마 놀라움을 표하는 감탄사겠고. 괜히 무안해진 스탠리 제이미슨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조깅하다가 들렀어.”

“…그래.”

리처드 베켓은 한참 작업 중이었는지 콧잔등에 기름 자국이 묻어있었다. 작업복에 청바지를 입은 남자는 양손에 부품을 든 상태였다. 그가 그것들을 가지런히 바닥에 정렬했다.

“하던 일 계속해. 방해하려고 온 건 아니야.”

“…….”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장갑을 벗기 시작했다. 그가 작업실 벽면에 걸린 거울을 보고, 흠칫. 했다. 귓가가 붉어진 남자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스탠리에게 물었다.

“…뭐라도 마시고 갈래?”

“…그래. 너만 안 바쁘면.”

“괜찮아. 금방 끝낼 수 있는 일이라서.”

어째선지 도저히 응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하긴, 북 클럽 건도 말해야지. 스탠리 제이미슨은 남자를 따라서 정비소 안에 있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 * *

남자의 사무실은 정비소와 같이 정연했다. 직종 특성상 물건이 번다하게 있을 수밖에 없는데도, 이렇게 잘 정리가 돼 있는 것을 보면 보통 노련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사무실의 소파에 앉은 스탠리 제이미슨 앞으로 따뜻한 밀크티가 놓였다. 푸른 머그잔에 두둥실 자줏빛 밀크티가 담겨서 고소한 냄새를 풍겼다. 간질간질한 기분에 스탠리 제이미슨이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음. 맛있다. 고마워.”

스탠리가 밀크티로 목을 따뜻하게 축이는 것을, 리처드 베켓이 지켜보았다. 그가 자연스럽게 질문했다.

“…감기 걸렸다면서.”

“그래, 좀 아팠는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냐.”

너무나도 태연하게 제 병색에 대해서 말하는 남자의 모습에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수전 이모한테 들었어.”

뭐야. 두 사람, 내가 떠난 사이에 언제 그렇게 친해졌나? 리처드 베켓이 수전 ‘이모’라고 하는 게 재밌었다.

“수전 이모랑 많이 친한가 보네.”

“…날 많이 도와주셨어.”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속삭이듯 사무실 공기를 진동시켰다.

그러고 보니, 수전 이모가 코든 영감과 같이 남자를 집 밖에서 꺼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수전 이모는 옛날부터 잔정이 많고 마을의 터줏대감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였으니 리처드를 도운 거였을까. 

“…어쨌건 간에. 나는 네가 반갑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속내를 드러냈다. 그와 친해지기 위한 술책이기도 했지만, 진실한 마음이기도 했다.

의도가 어떻든 스탠리의 말에, 거대한 남자가 굳었다. 그가 시리도록 차가운 눈을 가늘게 뜨고 스탠리를 일별하는 짧은 순간이 지나갔다.

남자가 침묵하며 저를 바라보는 그 순간의 긴장감은 은근히 컸다. 심장박동이 순식간에 가빠졌지만, 태연함을 가장해냈다. 스탠리가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나서야, 남자가 작게 헛기침했다.

“…나도.”

“음?”

스탠리가 짓궂게 못 들은 척을 하자, 리처드가 긴장을 풀고 씩 웃었다.

“그래. 나도 반가웠어.”

‘짜식. 웃으니까 진짜 멋지네.’

이대로 남자에게 다가가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이렇게 긴장되는 건 왜일까.

* * *

기왕 친밀한 기운이 조성되었으니 좀 더 속을 끌어내 보여도 될 것 같았다.

“여기 온 뒤로 네 생각을 조금 해 봤어.”

풀어낸 목도리를 만지작거리며 스탠리 제이미슨이 말했다. 남자의 얼굴이 저를 향해 온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동안 내가 널 괜히 미워하고, 질투했던 것 같더라고.”

“…….”

막상 내뱉고 나니 후회막심이었다. 그러니까, ‘패를 다 보여 주고, 자. 여기 내 불리한 카드가 있어.’ 하는 것 같은 느낌. 그러나 기왕 시작한 거 마무리는 지어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랑의 열병 때문이었지.”

“…….”

남자는 계속 침묵했다. 마치 저가 노라 하트의 ‘네가 너무 싫었어.’라는 말을 들었을 때와 비슷한 충격을 받는 것 같았다. 리처드는 스탠리가 자신을 싫어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왜 그런 표정 지어. 옛날 일 말하는 거야. 지금은 안 싫다니까? 뭔가…. 동지애도 느껴지고 말이야.”

스탠리 제이미슨이 한 손으로 턱을 괴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

남자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뭔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무겁게 한 번 끄덕였다.

“아. 사실 이 말 하려고 들른 건데. 나 내일 북 클럽에 참석하려고. 괜찮지?”

* * *

“이런 말은 조금 웃기게 들릴 수도 있지만, 저는 세상의 진보를 낙관하지 않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늘 긍정이 최고의 가치이죠. 특히 실리콘 밸리에서 우리 테키들은 기술이 세상을 구할 거라고 떠들어대는 묵시록의 나팔수입니다.”

몇 초의 휴지. 그리고 다시 스탠리 제이미슨이 청중을 향해 미소 짓는다. 좌중이 숨을 멈춘다. 그가 유능한 지휘자처럼 대화의 완급을 조절해 나간다.

“하지만 언제나 이단아로 살아온 저로서는, 그 가치에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출연한 TED 영상은 대중에 화제를 일으키며 공유되고 또 공유되었다. 프레임 단위로 찍혀 게시물로 만들어지거나, 열화된 화질의 영상으로 메신저 창에 띄워지거나 하는 식이었다. 공식 채널의 유튜브 영상은 금세 100만 회의 조회 수를 찍고, 300만 회를 돌파하며 현재 가장 많이 본 강연 3위의 자리에 올랐다.

세계 최대 신흥 SNS의 조물주인 그가 현대 기술의 병폐와 기술만능주의를 회의하는 내용은, 제법 신선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탠리 제이미슨은 당시에 완전히 소진된 상태였다. 그냥 내지르고 싶은 생각들이 있었다. 고양이들도 가끔 털 뭉치를 뱉는다고 하지 않던가.

스탠리 제이미슨은 북 클럽으로 향하며 리처드 베켓의 반응을 곱씹었다. 벌써 몇 번째 되먹임인지 몰랐다. 남자가 어떻게 반응하더라. 처음에는 겸연쩍어한다고 생각했다. 남자가 제 손을 폈다가 쥐었다가 하다가 말을 잇지 못하더니, 그냥 ‘좋아’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좋아.’ 그 짧은 말 가지고는 도저히 남자의 감정을 알 수 없었다. 약간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고. 너무 전진했나. 지나치게 친한 척 구는 게 이상해 보일 법도 했다.

젠장, 친화력이 좋아진 스탠리 제이미슨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 난이도가 높았다. ‘옛날에 연적이었던 고등학교 동창’과는 어떻게 친해져야 한단 말인가. 게다가 이 고등학교 동창은 저 혼자 열등감을 품어 왔던 저주의 대상이었다.

늘어난 테이프처럼 돌리고 되돌려 가며 주워섬기던 생각은, 서점 문을 열며 종료되었다.

* * *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선정된 책은 깊이가 없지는 않으면서도 흡인력 있는 필치로 쓰여 있었다. 북 클럽에 딱 적당한 책이었다. 대충 미국 중서부의 어느 숲을 지켜내려는 여러 사람의 이야기였다.

숲, 중요하지. 그럼. 거기 사는 동물들과 사람들도 중요하고.

처음 스탠리 제이미슨이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긴 탁자를 두고 앉아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검은 머리를 한쪽으로 땋아 내린 여성 한 명, 캡을 쓰고 있는 초로의 남자 한 명, 레슬리 포스터, 리처드 베켓, 그리고 클레어 비숍 선생님까지. 스탠리를 알고 있는 세 사람이야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넸지만, 나머지 두 사람이 기절초풍하는 통에 잠시간 소란이 있었다.

독서 모임 시간이 끝나고 사인을 해 주겠다고 몇 번이나 말을 하고 나서야 진정된 둘을 데리고 모임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클레어 비숍은 유능한 선생님의 기질을 발휘해 모임을 지혜롭게 이끌어 나갔다. 스탠리의 존재감 때문에 다들 바짝 긴장이 선 상태에서도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 대화에는 공백이 없었고 다들 진솔한 말을 할 수 있는 편안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개중 말이 가장 많은 것은 머리를 땋은 여성(이름은 켈리 클루게였다)과 레슬리 포스터였고, 스탠리는 중간중간 말을 보태는 식이었다. 리처드 베켓은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툭, 자기 생각을 던지는 편이었다. 그는 스탠리의 건너편에 앉아있었다.

남자의 숱 많은 머리칼이 유독 부드러워 보였다. 매끈한 턱의 선은 날카로우면서도 단단했다.

통주저음의 낮은 목소리는 수줍었지만 진지했다. 책에 붙은 메모지들이 많았다. 그것들을 손으로 더듬어 가며 페이지를 차분히 찾아가는 남자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이야기를 비숍 선생이 정리하고 다들 다음 주를 기약하며 모임이 끝났다. 약속했던 사인을 여섯 장이나 해 주고 나서야 켈리 클루게는 만족하며 사라졌다. 캡을 쓴 남자(아서 프랭클린이라고 했다)는 그에게 강한 악수를 건넸다.

집이 같은 방향인지라 스탠리와 리처드는 같이 길을 걸었다. 보도블록 위에 가로등의 불빛이 연이어 펼쳐져 있었다.

“아.”

코트를 여미며 스탠리 제이미슨이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소리를 냈다. 키가 큰 남자가 저를 살짝 내려다보았다.

“우리 이렇게 같이 걸어갔을 때가 있었지.”

희미했던 옛날 기억이 가로등의 불빛처럼 켜졌다. 

“……응.”

“맞아, 왜 지금 생각이 났을까. 도서관에서 만났었나. 내가 너에게 책을 추천해 줬고-.”

스탠리 제이미슨이 손가락으로 자신과 남자를 가리키며 하하. 맥없이 웃었다. 남자는 웃고 있지 않아 살짝 머쓱했다.

“뭐였지? 그 책 제목이….”

“<바람의 열두 방향>과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남자가 곧바로 대답했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잠시 침묵하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자신이 남자에 대한 기억을 윤색하거나 빠뜨리고 있는 게 아닐까. 스탠리가 잠시간의 생각 끝에 제안을 건넸다. 

“리처드. 기억이 난 김에 같이 술이나 마실래? 너무 많이는 말고. 맥주 한두 잔 정도.”

* * *

사실 이걸 노리고 있었다. 마트에서 사무엘 아담스와 버드와이저 됫병을 계산하며 스탠리 제이미슨은 제 화술에 감탄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도 능력이라고.

하지만, 이제야 기억났다는 자신의 말에 남자가 살짝 서운해했던 것 같기도 하고…. 너무 정 없게 군 것이 아닐까 싶었다. 

‘아…. 아까는 진짜 좀 미안하긴 하네.’

나름 학창 시절의 추억인데, 너무 잊고 살았다고 티를 냈던 것 같아, 민망했다.

“집에 먹을 건 있어? 아냐, 그냥 이것도 담자.”

민망함을 애써 잊기 위해 냉동 피자와 요리 재료를 가득 담았다. 말리는 남자의 말을 애써 무시했다. 자고로 맥주에는 정크푸드가 필요한 법이니까. 

마트에서 남자의 집까지는 10여 분 정도가 걸렸다. 그가 열쇠로 문을 열자 깔끔한 실내가 보였다. 전체적으로 원목으로 짜인 공간이어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살짝 썰렁할 뻔했다. 수전 이모 같은 생각이지만 정착을 하면 조금 더 나아지려나? 스탠리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코트를 벗어서 걸었다.

스탠리가 코트와 스카프를 벗을 동안, 남자가 피자를 오븐에 넣어 데워 놓았다. 그가 잔을 꺼내기 시작했다.

“냉장고 열어도 돼?”

그 말에 남자가 손을 뻗어 손수 냉장고 문을 열어 줬다. 그 안은 놀라울 정도로 정리되어 있었다. 채소는 채소대로 다듬어져 팩에 담겨 있었고, 고기는 또 고기대로 빵은 냉동실에 잘 얼려져 있었다. 혼돈의 구렁텅이인 스탠리 제이미슨의 냉장고와는 딴판이었다.

“야. 너 진짜 정리 잘하고 산다.”

처음 집에 들어왔을 때부터 생각했지만, 냉장고까지 보니 새삼 정말 깔끔했다. 냉장고를 훑던 스탠리가 질문했다.

“근데 술은 원래 안 마시나 봐?”

“응. 안 좋아해서.”

아. 실언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 지 1초 만에 실언하다니. 남자의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자였다는 사실을 잊었다. 리처드 베켓이 술을 싫어할 수밖에 없다는 걸 잊었다. 

“술 마시고 싶지 않으면…. 괜찮아. 아, 이거 내가 괜히 술 마시자고 부추긴 것 같다. 차라도 할까?”

“아냐. 맥주 정도는 괜찮으니까.”

잔을 닦고 있는 리처드 베켓의 뒷모습에서 감정을 유추해내기란 어려웠다. 스탠리가 멋쩍게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 * *

맥주가 한 잔 두 잔 들어가자 훈기가 올라왔다. 아까의 민망스러움은 온데간데없이 스탠리 제이미슨이 소파 어깨에 편히 몸을 기댔다.

“젠장. 사무엘 케이시 녀석이 연방 교도소에 있다고? 별로 놀랍지도 않네.”

은행 강도 혐의로 감옥에 간 놈이 별로 불쌍하지는 않았다. 척 앤더슨의 앞잡이인 놈은, 스탠리를 가장 적극적으로 괴롭힌 작자였다.

그건 그렇고, 남자와 이야기를 나눠 보니 은근히 공유하고 있는 추억들이 많았다. 일기에는 쓰여 있지 않았지만 둘은 제법 말을 섞기도 했고 문학A 시간에는 스탠리가 그를 많이 도와줬던 것이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척 앤더슨 패거리로부터 저를 나름(?) 보호해 줬던 게 남자였고.

둘은 나름의 공생 관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어린 스탠리는 자존심 때문에 그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았다. 새삼 떠오르는 기억들은 그렇게 나쁘지 않아서, 스탠리는 자신의 망각이 신기할 정도였다. 

스탠리가 급하게 만든 살사 소스에 프라이를 찍어 먹었다. 반대로 남자는 맥주도 음식도 거의 먹지 않은 채로 저를 온전히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남자가 수다스러운 편도 아닌데 편하다니, 웃기는 일이었다. 남자의 시선을 받는 일이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게….

이제 본론으로 가야지.

“노라, 결혼식 며칠 뒤잖아.”

“……그래.”

남자가 십여 분 만에 맥주를 홀짝였다. 그의 눈가가 술기운 때문인지, 감정의 동요 때문인지 자르르 떨렸다.

“사실, 얼마 전에 만났거든. 아프기 전에.”

리처드 베켓이 맥주잔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턱. 둔탁한 소리와 함께 테이블이 살짝 울렸다.

“네가 나에게 말 안 한 게 있다고 하더라?”

조금 취한 것 같아 스탠리 제이미슨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중요한 거라면, 나도 알 수 있을까?”

* * *

별로 웃긴 이야기는 아닌데 스탠리의 말을 듣자마자 남자가 웃었다. 실소라고 해도 좋을, 허탈한 미소였다. 뭐지. 내 말이 우습나. 공연히 기분이 나빠진 스탠리 제이미슨이 미간을 찌푸렸다.

“나 진지하다. 농담 아니야.”

“안 믿을 텐데.”

“뭐? 이 자식이… 그래, 그러면 어떤 말을 하든 진지하게 믿을게. 네가 사실 숀 코너리의 숨겨진 자식이라고 해도 믿는다. 내가.”

스탠리 제이미슨이 허리를 펴고 진지하게 눈을 마주쳤다.

“…….”

남자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면서, 스탠리가 아. 소리를 냈다.

설마….

“너… 레슬리 포스터 좋아하냐?”

…….

“……아니.”

리처드 베켓이 시선을 피했다. 이런 추궁을 받는 게 화가 나는 일인 듯 목덜미가 불그죽죽했다. 여기서 더 부추겼다가는 싸움이 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와 얼마 안 되는 기간 이룬 옅은 우정까지 잃을지도. 하지만 스탠리 제이미슨은 간절했다. 노라 하트의 결혼식까지 며칠 남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두 번째 기회는 없었다.

무리한 수를 던질 수밖에 없었다. 

“제발, 내가 도와줄 수 있잖아. 리처드. 내가 어딜 가서 퍼뜨릴 것도 아니고… 한 번만. 딱 한 번만, 서로 돕자.”

“네가 돕겠다고?”

또다시 실소. 리처드 베켓이 아연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사라지자 스탠리 제이미슨 앞에는 서늘한 얼굴이 있었다. 예의 또 그 적대적인 무표정이었다. 새삼 풍진 세월이 남자의 얼굴을 미려하게 조각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내가 내 모든 것에 맹세하고 돕는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재차 확언했다. 능변가가 되기는 했지만, 이런 식의 맹세는 그로서도 예외적인 일이었다. 스탠리가 진지한 얼굴로 남자를 바라봤다. 그러자 리처드 베켓이 포기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리처드 베켓은 무척 피로한 얼굴로 말했다. 그가 자신의 눈그늘을 쓸었다.

* * *

“뭐라고.”

취기가 곧바로 증발하는 느낌이었다. 머리를 얼음통, 아니 영구동토층에 처박은 것 같은 쨍한 충격에 몸조차 운신하기 어려웠다.

“야. 농담하지 말아줘. 진짜 이건 아니지.”

스탠리 제이미슨은 한껏 너스레를 떨었으나 저의 떨리는 목소리가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었다. 빈 맥주잔. 반쯤 남은 튀김. 남자의 집. 소파.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말 그대로 영혼이 몸 바깥으로 튀어 나가 제3 자처럼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얼빠진 표정으로, 리처드 베켓의 얼굴에서 농담의 기운을 살폈다. 필사적으로, 남자가 웃음을 터뜨리면서 ‘농담이야.’라고 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런 순간은 오지 않았고, 리처드 베켓은 손으로 얼굴을 쓸 뿐이었다. 그는 명백히 후회하고 있었다.

방금 그가 내뱉은 말을 조합해 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너,

나를, 나를 좋아한다고?

연산 불가, 오류. 런타임 에러, 컴파일 불가.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진짜냐?”

“…….”

남자의 얼굴에서 막 고백을 끝낸 사람의 풋내나는 설렘을 찾을 수는 없었다. 끝없는 고통, 떨어지는 바위를 다시 굴리고 또 굴리는 시지프스가 할 것 같은 괴로운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차라리 잘 됐어.”

남자가 말했다. 스탠리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하는 주문 같았다. 그의 얼굴에 진 그늘이 으스스했다.

“야. 뭐가 차라리 잘 됐는데.”

이 자식아. 무슨 소리야. 너 혼자 잘되면 끝이냐. 이해가 가게 설명 좀 해 봐.

도대체가.

설마-. 

“…….”

“너… 계속 나 좋아했냐? 고등학교 때부터?”

스탠리는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그래.”

리처드 베켓이 저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번듯한 눈에는 그새 핏발이 서 있었다. 남자의 표정에서는 격정보다는, 오랜 세월을 고통 속에 몸부림쳤던 시간의 흔적이 보였다. 등줄기에 서늘하게 소름이 타고 올라왔다. 

17년 동안, 17년 동안 나를 좋아했다고?

하지만, 그건-.

너무하잖아. 말도 안 된다.

“그래도 말이 안 돼. 나 완전… 그러니까 나 같은 걸-.”

“네가 움직이는 모습이 좋았어. 말하는 모습도. 미래를 이야기할 때 들떠 있는 표정도.”

리처드 베켓의 맑은 눈이 먼 곳을 바라보는 것처럼 일순 흐려졌다. 그가 엷게 웃으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부탁 하나만 할게. 제발 들어줘.”

그의 낮은 목소리가 습윤하게 울렸다.

“…….”

“…여길 떠나 줘. 스탠리 제이미슨. 네가 가까이에 있으면, 내가 너무 괴로워.”

* * *

남자가 그 말을 하면서 울었는지, 스탠리 제이미슨은 기억하지 못한다. 무언가를 기억하기에는 너무나 경황이 없고 놀란 상태였다. 충격이 극에 달하면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누가 고등학교의 자신을 좋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것도 가장 빛나는 사람이었던 리처드 베켓이.

그건 마치, 밤하늘의 별이 갑자기 저를 쳐다보며, ‘네가 좋아’라고 하는 수준의 충격이었다. 저요? 아니, 지금의 잘 조각된 저 말고, 진짜 저요? 과거 그 찌질이 중의 찌질이 스탠리 제이미슨 말하는 겁니까? 웃기지 말라고 해요.

웃기지도 않는다. 정말 웃음 따위 나오지도 않았다.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흉흉한 얼굴로 일기장부터 폈다. 그리고 밤을 새워 가며 읽었다. 어느 페이지를 펴도 그 이름이 있었다.

리처드 베켓.

리처드 베켓.

리처드 베켓.

리처드 베켓이 내 안경을 주워 줬다. 베켓 놈이 내게 연극 대사 연습을 부탁했다. 베켓이 나를 창고에서 꺼내 줬다. 베켓은 너무 잘생겼고, 내게 자꾸 말을 건다. 리처드 베켓. 베켓이 고등학교 대항전에서-.

리처드 베켓이, 베켓 녀석이. 리처드가-. 그 잘난 녀석이. 활자들로 두뇌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 

문자열을 토해내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며, 스탠리 제이미슨은 불면의 밤을 보냈다.

* * *

다음 날 일찍 길을 나섰다. 조카의 흉흉한 모습에 수전 이모는 덜컥 겁부터 난 모양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제 꼴이 어떻든 상관없었다. 당장 노라 하트를 만나야만 했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빠른 보폭으로 길을 걷다가 멈춰 섰다. 쇼핑몰 앞에서 전화부터 했다.

“노라.”

[스탠리.]

스피커 너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마치 이 모든 순간을 예견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지금 너 시간 돼?”

[없더라도 만들어 내야지.]

* * *

꽃집은 쇼핑몰 구석에 있었다. 스탠리의 초조한 모습을, 노라가 물끄러미 확인하더니 그를 데리고 계단을 올라 나갔다. 둘이 도착한 곳은 쇼핑몰의 옥상 정원이었다. 이름이 옥상 정원이지, 잘 관리가 돼 있지 않아 흡연자들의 담배 휴게소가 된 지 오래인 곳이었다.

“…스탠리, 할 말이 있다면서.”

노라 하트가 짧은 머리를 넘기며 차분하게 말문을 열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아름다운 노라 하트. 내 첫사랑.

“…….”

“리처드에게 이야기 들은 모양이네. 많이 놀랐겠어.”

그녀가 살짝 미소 지었다.

“……노라, 나는.”

“…엄청 충격받았나 봐. 말 안 해 준 내가 다 미안한데? 근데 그 녀석, 장난 아니야. 고등학교 때부터 그런 식이었어. 말을 안 하고 묵혀두는 타입이랄까?”

“……하….”

긴긴 한숨을 쉬며 스탠리 제이미슨이 먼 곳을 바라보았다. 가없이 펼쳐진 미시간의 주택가와 초목이 흐릿하게 보였다.

노라 하트가 입술을 달싹이며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제발. 스탠리… 리처드에게 더 큰 상처만 주지 마. 너무 오랫동안 힘들었던 사람이야. 그냥-.” 알잖아. 걔가 어떤 삶을 견디며 살아왔을지 생각해봐.

“노라 하트.”

스탠리 제이미슨이 그녀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가 여자의 두 손을 붙잡았다.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더 엉망진창이 되기 전에 할 이야기를 해야 했다.

“…널 사랑해. 네가 나를 미워했다고 해도, 난 널 좋아해 왔어.”

“스탠리.”

“제발. 노라. 난 너를 계속해서….”

좋아했어. 사랑했어. 네가 내 심판관이었어. 기준이었어.

고백을 들은 노라 하트가 눈을 내리깔았다.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던 그녀가 고개를 기울이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러면, 지금 키스해 볼래?”

“…뭐?”

“키스하면 알 수 있다잖아. 진짜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

“……그건….”

“확실해. 나는 알 수 있었거든. 리처드 베켓과 키스를 할 때마다 두 가지를 알 수 있었어. 그가 나를 미워한다는 사실 하나. 내가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 하나. 효과는 입증된 셈이지.”

“……노라, 나는-.”

“나 진지해. 스탠리 제이미슨, 내게 키스해 봐.”

스탠리 제이미슨의 훤칠한 얼굴에 고통의 빛이 스쳤다.

노라 하트가 그런 남자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것이 신호가 되어 둘이 입술을 부딪쳤다. 키 큰 스탠리가 고개를 숙이고 여자의 입술에 제 입술을 더욱 깊이 가져다 댔다. 차가운 바람이 둘의 품 사이로 지나갔다.

잠깐의 입맞춤이 끝나고, 둘은 서로를 낯선 사람처럼 쳐다보았다.

“스탠리, 이제 알겠어?”

그녀가 슬픈 미소를 지었다.

“넌 나를 좋아하지 않아.”

“....그런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좀 더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 충동적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노라 하트가 뒷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라이터로 담배를 태우면서 그녀가 씁쓸하게 말했다. 

“가끔 우리는 과거의 기억, 감정까지 꾸며내곤 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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