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ove transcends (3/6)

Love transcends

오직 사랑만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이 공허한 우주를 그 질서로 메운다.

* * *

리처드 베켓이 노라 하트의 고백을 받아들인 건 충동적이었으나, 동시에 지극히 계산적인 결정이었다. 밸린저 시티로 온 지 2년 차가 되던 해 봄이었다. 고백 당시 노라 하트의 얼굴은 역광을 받아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리처드는 묻고 싶었다. 악의 없이, 순수하게 질문하고 싶은 게 있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너를 좋아하더라.

어떻게 한 거야. 그 마법을, 어떻게 부린 거야? 

하지만 대신 나온 말은 그래, 좋아. 사귀자. 나도 네가 좋은 것 같아. 였다. 

* * *

오늘이 노라 하트의 결혼식인 걸 잊을 뻔했다. 거뭇하게 올라온 수염을 면도하고 깨끗하게 몸을 씻었다. 그날 이후 이틀을 꼬박 방 안에서 식음을 전폐했다. 지동설을 받아들여야 했던 옛 유럽인들의 심경이 이랬을까. 하루아침에 우주의 중심이 바뀐 기분에 제대로 정신 차리기가 어려웠다.

1. 리처드 베켓이 나를 좋아한다.

2. 나는 노라 하트를 좋아하지 않는다. (적어도 노라 하트는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17년 동안 노라 하트를 사랑한다는 착각 아래에서 행동해 왔다. 그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노라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으니까. 그녀는 친절하고, 생각 깊고, 생기 넘쳤다. 17살 남자아이가 좋아하기 쉬운 존재라고 해야 할까.

노라 하트와 키스했을 때, 세상이 바뀌는 기분 같은 건 들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첫 키스도 아니었고, 수많은 여자와 그런 행위를 했으니까. 그렇게 항변하고 싶었는데, 목이 죄어오는 기분이었다. ‘넌 사랑을 몰라.’ 전 여자친구의 말이 둑처럼 그의 모든 말문을 막았다.

노라 하트의 말들이 해일이 되어 그 둑을 덮치고, 스탠리의 마음을 묵사발로 만들었다.

그래. 그렇다고 치자. 리처드 베켓이 저를 좋아한다고 치자. 그러면 스탠리 제이미슨은 무얼 해야 하나. 그의 부탁대로 마을을 떠나 뒤도 돌아보지 않는 게 그나마 할 수 있는 최선일 것 같았다.

별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없지 않은가.

깔끔하게 떠나 주는 것만이, 제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였다.

* * *

잘 보관된 슈트를 꺼내 입었다. 최고의 재단사라는 양반에게 부탁한 맞춤 정장을 몸에 두른 후 시계를 찼다. 빼어나 보이고 싶기보다는, 제대로 예의를 갖추고 싶을 따름이었다. 거울에 비친 번듯한 제 모습은 다소 피폐해 보였지만 근사했다. 

차를 몰고 앤 아버에 있는 예식장으로 갔다. 가서 깽판을 놓겠다든가 하는 의도는 없었다. 노라에게 미리 언질을 줘 괜찮다는 확답을 받았다. 적어도 제 청춘 시기의 마지막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싶었다. 성급하게 마무리를 짓고 다시는 되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예식장은 성대하고 화려했다. 지역 유지인 척 앤더슨다운 선택이었다.

사람들이 없는 후미진 곳에서 어슬렁거리며 시간을 보내다가 예식장 맨 뒷자리에 앉았다. 팸플릿에 있는 시간보다 10분이 지연돼서야 식이 시작됐다. 조명이 어두워지고, 신랑 신부가 입장하는 자리에 꽃이 놓이고, 둘이 천천히 길을 걸어 나가고, 사랑의 맹세를 하고, 키스를 했다. 척 앤더슨의 느물느물한 얼굴이 조명을 받아 번들거렸다. 놈이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걸 보니 마음 언저리가 부글거렸지만, 신부에 대한 예의로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노라 하트, 어른스러운 행동은 다 하는 여자였지만 그녀 역시 마음에도 없는 남자와 결혼하는 게 현실이다. 인생이란 그런 식의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었다.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려고 감히 노력해서도 안 되는 모순들.

식이 끝나고 곧바로 피로연이 열렸다. 앤더슨 가족은 적잖이 신이 났는지 술과 음식을 잔뜩 케이터링 업체에 주문해 놓았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가장 구석에 있는 둥그런 원탁에 앉아 술만 따라 마셨다. 무대에서는 가수가 엘비스 프레슬리의 를 불렀다.

원탁에 앉은 다른 사람들은 스탠리를 힐긋힐긋 바라보며 서로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험악한 남자의 분위기 때문에 섣불리 말을 걸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은 팬 서비스고 뭐고 해 줄 기분 아니었으니까.

“스탠리.”

빈 의자에 한 여자가 앉았다. 유니스 킴. 검은 머리를 올리고 간소한 새틴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어색하게 인사를 걸었다.

“어. 유니스.”

“왔네?”

“뭐. 그렇지. 깽판 놓을 생각은 없으니까, 안심해.”

“…….”

유니스가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자리를 뜨자, 스탠리 제이미슨은 다시 칵테일을 들이켰다. 몇 잔째인지도 알 수 없었다.

‘완전히 꼴불견이네.’ 결혼식에 와서 술이나 퍼마시는 동창생이라니. 끔찍했다. 원탁에 있는 사람이 핸드폰을 들어 올려 그의 사진을 찍으려고 했다.

“찍지 마세요.”

스탠리 제이미슨이 단호하게 경고했다.

머뭇거리며 다시 핸드폰을 주머니 속에 넣는 사람을 외면하고 다시 술을 마셨다. 마음이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저 멀리 테이블에 앉은 척 앤더슨과 노라 하트가 보였다. 누가 보면 행복에 겨워하는 이상적인 한 쌍이었다.

척 앤더슨 같은 새끼는 행복한데, 왜.

자신과 리처드 베켓의 고통을 생각하며 한 잔 더 하는 와중에, 저 멀리서 척 앤더슨과 눈이 마주쳤다. 시발. 재빨리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늦었다. 남자가 그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자리를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아뿔싸, 다리에 힘이 다 풀려 있었다. 술이 세지도 않은데 과신한 탓이었다. 제기랄.

“스탠리.”

언제 저를 스탠리라고 부르기나 했다고, 척 앤더슨이 역겹게 굴었다. 늘 아스퍼거 증후군에 빗대어 ‘스탠리-퍼거’라고 부르거나, 병신이라고 부른 주제에. 손에서 땀이 차기 시작했다. 맨정신이었다면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말로 후려쳤을 텐데, 술 때문인지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난 그때의 스탠리 제이미슨이 아니야.’ 트라우마 증상이었다. 하하. 17년이 지났는데도 입안에 고이던 피의 맛과 지하실의 쿰쿰한 냄새는 잊히지 않았다.

간신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척.”

“…음… 아… 와 줘서 고맙다… 야, 엄청 신수가 훤해졌는데?”

척 앤더슨이 몸 둘 바를 모르며 어색하게 말을 붙였다.

“덕분에.”

스탠리 제이미슨이 냉소적으로 일갈하자, 척 앤더슨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가 다시 허둥지둥 사라지는 걸 보며 스탠리 제이미슨이 하하. 힘없이 웃었다. 개새끼. 그 정도 배알밖에 없으면서 남을 괴롭히길 괴롭혀?

한참을 술을 따라 마시며 사람들을 구경했다. 사무엘 케이시는 감옥에 갔다지만 나머지 패거리들은 다 참석했다. 그들은 힐끔힐끔 스탠리 제이미슨을 봤지만, 감히 말을 걸지는 못했다. 그렇겠지. 지금의 스탠리 제이미슨은 ‘신수가 훤해’졌으니까.

술을 너무 마셨다는 생각에 자리를 떠, 휘청이는 걸음으로 화장실로 갔다.

‘여기서 그만 마셔야지. 이게 뭔 행패냐. 스탠리 제이미슨.’

볼일을 보고 손을 씻는데 문밖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음성에 흠칫, 몸이 굳었다.

“아, 시발. 스탠리 제이미슨이 여기 왜 있냐.”

게일 루먼의 목소리였다.

“나도 몰라. 어떻게 알고 왔는지.”

모르는 목소리였지만, 저건 아마 척 앤더슨 패거리 놈이겠고.

“좆나 잘생겨지긴 했다. 그 찌질이 새끼가 뭘 먹고 저렇게 컸대.”

“그나저나 제이미슨도 왔는데 베켓은 왜 안 왔냐.”

“너 기억상실증이냐? 척이 그 새끼 다리 부러뜨렸잖아.”

뭐.

음주운전 사고라며.

물을 그대로 계속 틀어놓은 채로, 스탠리 제이미슨이 굳었다.

화장실 안에 스탠리 제이미슨이 있는 걸 모르는지 목소리들이 계속 지껄였다.

“아, 맞다. 17년 전 일이라서 까먹었나. 그 자식이 빚 못 갚겠다고 그랬다가 처맞고 합의금으로 청산했지 아마.”

“그게 다는 아닐걸. 나도 그 자리에 없어서 자세하게는 몰라. 아무튼, 그 뒤로 잠잠한 거 보면 좀 불쌍하더라.”

처음으로 느끼는 순도 높은 살의에, 스탠리 제이미슨이 몸을 떨었다. 그대로 수도꼭지를 잠그고 화장실을 나갔다.

저를 보며 웅성거리는 무리를 지나쳐, 예식장 문가를 지나쳐 그대로 중앙으로 직진했다. 그가 언제 취했냐는 듯 번듯한 보폭으로 척 앤더슨과 노라 하트가 있는 자리로 다가갔다.

“스탠리.”

노라가 눈을 크게 뜨고,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어느덧 가수는 프랭크 시나트라의 를 부르고 있었다.

척 앤더슨의 바보 같은 얼굴이 저를 돌아보자마자, 스탠리 제이미슨은 주먹을 내질렀다. 그대로 남자의 얼굴이 돌아갔다.

첫 폭력의 쾌감은, 짜릿했다.

그를 한 대 더치자 척 앤더슨이 의자에서 굴러 넘어졌다. 그 위를 올라타고 사정없이 남자를 때렸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이제 키가 남자와 비슷하게 컸고, 운동으로 다져진 몸은 날렵했다.

피로연장이 아수라장이 됐다. 신경 쓰이는 바는 아니었다. 오로지 눈앞의 개자식을 죽도록 때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죽어. 죽어, 시발 새끼야.

피가 튀기고 나서야, 스탠리 제이미슨은 끌려나갔다.

* * *

적막한 불면의 밤. 리처드 베켓은 집 앞에 차가 정박하는 소리를 들었다. 듣고 있던 라디오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방에 난 창밖으로 벤츠 SUV가 보였다. 그는 그 차를 안다. 제 손으로 속을 열어, 직접 매만졌던 차니까. 스탠리 제이미슨의 차. 제가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남자의 차였다. 공포 반, 기대감 반에 심장이 조여 온다.

-탕탕

문을 거세게 두드리는 소리에, 잠깐의 번민이 스쳤다.

열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열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지만,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그러다 덜덜 떨리는 큰 손이 현관문을 결국 열고야 만다.

언제나 이성을 배신하는 몸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차가운 공기와 함께 알싸한 알코올 냄새가 밀고 들어왔다. 눈앞의 스탠리 제이미슨은 엉망진창이었다.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양복은 구겨져 있었고, 셔츠의 윗단추 몇 개가 터져 있었다. 피가 묻은 손, 입가는 맞았는지 붉은 멍이 들어 있었다. 순간, 급격한 분노로 판단이 서지 않았다.

스탠리 제이미슨에게 손을 대는 이가 있다면 맹세코, 맹세코 죽여 버리리라.

그와 별개로 남자는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눈가는 몽롱했고, 뺨이 붉었다. 정돈된 머리가 살짝 흐트러져 유혹적인 낌새까지 풍겼다. 리처드 베켓이 혼란 속에 아무 말도 못 하자, 스탠리 제이미슨이 그의 몸에 바투 붙었다. 후끈, 비벼진 부싯돌처럼 스파크가 튀었다.

“한번 확인해 보자.”

알 수 없는 소리와 함께 그가 리처드 베켓에게 다가가더니 그대로 입을 맞추었다.

* * *

처음에는 입술과 입술의 가벼운 부딪힘이었다. 리처드 베켓은 더 이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없었다. 17년 동안 갈망해 왔던 순간이 일어나고 있는데 무슨 생각 따위를 하겠는가. 스탠리 제이미슨의 입술에서는 독한 술맛이 났다. 달큰한 솔향이 뒤이어 이성을 완전히 잠식했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두 손으로 리처드 베켓의 얼굴을 부여잡더니, 재촉하듯 쪽쪽 소리를 내며 입술을 빨았다.

여기서 거절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았다. 지금 스탠리 제이미슨은 제정신이 아니며, 술에 진득이 취해 있는 상태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리처드 베켓은, 그럴 수 없었다. 남자를 뿌리치는 선택지는 애초에 주어지지 않았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마음이란 걸 알면서도-. 이 한순간만큼은 붙잡고 싶었다. 부여잡고 평생을 혼자 살아도 되니까, 제발.

제발.

그가 망부석처럼 서서 키스를 받다가, 스탠리를 거칠게 끌고 실내로 들어갔다. 동시에 너 나 할 것 없이 입이 열렸다. 리처드 베켓의 묵직한 혀가 스탠리 제이미슨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숨이 막히는 듯 헐떡이는 스탠리 제이미슨의 목소리가 달았다. 잠시 숨을 틔워 주는 사이 그의 재킷을 벗기고 소파에 쓰러뜨렸다.

다시 입술이 부딪혔을 때는, 전혀 입맞춤 같은 게 아니었다. 포식이었다. 리처드 베켓이 거대한 몸으로 남자를 짓누르며 그를 맛보았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학학, 소리를 내며 리처드 베켓의 거대한 혀를 빨고 입술을 핥았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흘리는 타액을 남김없이 삼키며 리처드 베켓이 계속해서 입안을 탐했다. 뜨거운 살덩이들이 섞여 열락의 황홀경을 만들어냈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단단해지는 제 앞섶을 느끼며 신음했다.

스탠리가 고개를 돌리고 나서야 키스가 끝났다. 둘은 헐떡이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습한 목소리로 말했다.

“잊게 해 줘.”

남자는 언제나 그에게 지옥과 천국을 동시에 선사한다.

리처드 베켓은 일생일대의 시험에 들었다.

“…….”

리처드 베켓은 예의 그 말수 없는 남자가 아니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의 말이 그를 자극했다. 흉흉한 야수의 고삐가 풀렸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어떤 윤리나 상궤도 막을 수 없는 욕망이 해갈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후회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

리처드 베켓이 스탠리 제이미슨의 셔츠를 찢어발기며 그의 목덜미에 키스했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고개를 들어 올리자 훤히 드러난 빗장뼈가 황홀했다. 늘 그곳을 맛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17년간 몇 번이고 꿈을 꿨다. 스탠리 제이미슨을 범하고, 또 몸을 섞고, 가끔은 사랑까지 나누는 꿈을. 깨고 나면 자기혐오에 몸서리칠 정도로 저속한 꿈이었으나 잠들기 전 언제나 다시 꾸기를 기도했던 꿈이었다.

목덜미를 가볍게 깨물자 아래에 깔린 남자가 신음했다. 벗긴 셔츠를 완전히 던져 버리자 훤칠한 상반신이 드러났다. 아름답게 주조된 몸을 눈에 만족스럽게 담았다. 리처드 베켓이 남자의 유실을 입에 머금었다.

“읏… 응… 흐…으… 학!”

스탠리 제이미슨이 답지 않게 신음하는 소리는 듣기 흡족했다. 손으로는 남자의 바지 버클을 끌러내며 계속해서 남자의 살굿빛 유두를 입으로 애무했다. 이미 리처드 베켓의 물건은 완전히 발기한 상태라 바지가 터져 나갈 지경이었다.

스탠리를 눕혀 놓고 제 옷을 벗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애무만으로도 완전히 기진맥진했는지 달달 떨며 끙끙댔다. 위에 저를 덮치는 남자가 나신이 된 것을 본 스탠리 제이미슨이 흠칫, 몸을 떨었다. 단단한 근육으로 되어, 강인해 뵈는 몸이었다. 모르는 사람은 두려울 수도 있는 몸. 그것을 보고 위축된 스탠리를, 리처드가 키스하며 달랬다. 멍든 입가를 개처럼 핥았다.

재개된 애무에 스탠리 제이미슨의 눈이 다시 욕정으로 흐려졌다. 그것을 신호탄으로, 스탠리 제이미슨의 드로어즈를 벗겨냈다. 역시 발기한 그의 성기는 프리컴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걸 뜨거운 입안으로 머금자 남자의 발이 곱았다.

“으…흑… 응, 흥… 아냐… 거긴…!”

물건을 거세게 빨자 스탠리 제이미슨이 리처드의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했다. 얼마 안 가 스탠리가 토정했고, 리처드 베켓은 정액을 남김없이 핥았다.

“미친, 새끼야….”

스탠리 제이미슨이 몸을 바르작거리며 리처드 베켓의 물건을 쥐었다.

“왜 이렇게, 큰… 건데….”

공포심이 들 정도로 흉악한 그 물건을 손으로 매만졌다. 착실하게 부피를 더해가는 그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결의와 함께 머금었다. 입이 한가득 남자의 성기로 가득 찼다. 술에 가득 취해 있었지만, 그동안 받아왔던 펠라티오를 생각하며 힘겹게 입을 움직였다. 입술이 부르틀 정도로 큰 크기였다. 열심히 혀로 귀두를 핥고 남자의 기둥을 빨았다.

남자의 거대한 손이 스탠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정한 손길에 더 열심히 펠라티오를 하는 스탠리 제이미슨을 보며 리처드 베켓이 낮게 앓는 소리를 냈다. 스탠리 제이미슨의 번듯한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자 제 물건을 그의 입에서 뺐다.

무게를 완전히 싣지 않은 상태에서 남자와 계속 키스를 했다. 몸이 뒤엉키고 스탠리 제이미슨이 끙끙거리며 남자의 발기된 성기를 느꼈다.

스탠리가 쉰 목청으로 속삭였다.

“끝까지 해 볼래?”

알코올과 폭력 직후의 아드레날린으로 제정신이 아닌 남자였다. 리처드 베켓이 그것만은 안 된다는 생각에 몸을 빼자, 스탠리 제이미슨이 팔을 끌었다.

“여기서 뺄 거냐.”

“……후회할 거야.”

너는 모르지. 내가 얼마나 참고 있는지. 리처드 베켓이 남자를 내려다봤다. 나신이 되어 욕망에 몸을 뒤트는 스탠리 제이미슨을.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 몸이 군데군데 새빨갰고, 리처드 베켓에게 빨린 부위는 키스 마크가 올라와 있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팔로 몸을 일으켜 남자의 손을 잡았다. 두껍고, 또 길고, 뼈마디가 굵은, 일하는 손. 그것을 신기한 듯 지분거리다가 입으로 빨기 시작했다.

리처드 베켓이 경악에 차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두 손가락을 빨면서 스탠리 제이미슨이 그를 올려다봤다.

마치 도발하는 모양새였다. 완전히 이성을 증발시키는 눈빛. 제가 욕정하는 초록 눈동자.

리처드 베켓이 빨리고 있는 손이 아닌 다른 손으로 스탠리 제이미슨의 턱을 쓰다듬었다. 마치 고양이를 다루는 듯한 손놀림이었다. 그 큰 손에 스탠리가 얼굴을 기대고 한숨을 쉬었다.

손이 빠지자 리처드 베켓이 스탠리를 거칠게 눕혔다. 남자의 침으로 축축한 왼손이 단숨에 스탠리의 성기 아래, 회음부를 파고들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충격으로 인해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며 다리를 벌렸다. 남자답게 곧게 뻗은 다리를 들어 올렸다. 리처드의 힘 때문에 곧바로 뒤집힌 몸에서 손쉽게 밀부를 발견해 더듬어 나갔다.

“아… 기분 이상해….”

끝이 뭉그러지는, 술에 전 발음에 죄책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 감정은 이내 뻐끔거리는 구멍의 광경에 증발되고 말았다. 연한 붉은 빛의 그곳에다 저의 두꺼운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힘으로 들어 올려진 다리가 달달 경련했다.

“아… 아… 악….”

스탠리 제이미슨의 종아리가 경련했다. 근육이 보기 좋게 붙은 허벅지가 점점 벌어졌다.

그리고, 그리고 또 그리던 순간이었다. 남자의 뻑뻑한 내벽이 거친 손가락을 만나 자르르 경련했다. 그것을 부드럽게 풀어 주며 내벽의 온도를 느꼈다. 적당히 입구가 넓혀졌을 때쯤, 손가락을 빼고 남자에게 다시 입 맞췄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침까지 흘리며 울고 있었다. 단정하니 번듯한 남자가 엉망진창으로 풀어져 있는 모습은, 무섭게도 기분 좋았다. 입가를 핥고 눈에다가 입맞춤한 리처드 베켓이 흉흉하게 발기한 제 물건을 밀부에 맞췄다.

“이거, 이거 찢어지는….”

스탠리 제이미슨이 그 소리와 함께 악, 숨도 못 쉬고 입을 벌렸다. 남자의 두꺼운 귀두가 구멍 안에 진입하자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스탠리의 번듯한 흉부가 오르락내리락했다. 귀두가 완전히 들어가자, 남자가 제 물건을 서서히 넣기 시작했다. 이미 정성스럽게 풀어 놓은 구멍은 뻑뻑하지만 착실하게 남자의 기둥을 받아들였다. 스탠리는 허벅지를 완전히 벌린 채로 눈물을 줄줄 흘렸다.

뿌리 끝까지 물건이 들어가고 살결과 구멍이 맞닿았다. 아래에 깔린 남자의 성기가 완전히 죽어 있는 것을 확인한 리처드가 두꺼운 손으로 세심하게 물건을 매만졌다.

“너무… 너무 힘들어….”

우는소리를 하며 스탠리가 팔뚝으로 눈가를 훔쳤다. 그러다가 성기에 오는 자극 때문인지, 완전히 자극된 내벽 때문인지 그의 몸이 펄떡 뛰었다.

동시에 다시 빳빳하게 세운 잘생긴 물건에 리처드 베켓이 저도 모르게 웃었다. 제 아래에서 쾌감을 느끼며 우는 스탠리 제이미슨이라니. 서서히 허리를 움직이자 제 기둥을 머금었다가 아쉬운 듯 달라붙으며 놓아주는 내벽이 보였다.

“더 움직일게. 참아 줘.”

스탠리의 무릎에 버드 키스하고 좀 더 박차를 가했다. 음낭이 스탠리 제이미슨의 회음부와 마찰되는 살 소리가 났다. 고요한 방 안에 두 남자의 신음과 그런 음란한 소리만이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추삽질 했을까, 리처드 베켓이 물건을 완전히 뺐다. 그가 스탠리의 복부에 토정했다.

* * *

모로 누운 나신을 따뜻한 물수건으로 깨끗하게 닦으며, 리처드 베켓이 남자의 귓가를 더듬었다.

관계 직후 까무룩 잠든 스탠리 제이미슨의 눈가가 발갰다.

주취건, 연민이건, 호기심이건 상관없다. 17년 동안 기다려 왔으면서 한순간의 정욕을 못 이겼다. 남자를 이용했다는 생각에 끔찍한 기분이었지만, 그렇다고 후회가 되지는 않았다. 후회할 수 없었다. 그건 제 욕망의 어두운 일면이었다. 순수한 사랑 따위는 되지 못하는, 저열한 욕정.

그가 남자의 손을 끌어올려 입 맞추었다. 눈물이 스탠리 제이미슨의 길쭉한 손가락에 떨어져 흘러내렸다.

* * *

맞닿은 이불의 감촉이 좋아서 자꾸만 파고들게 된다. 두껍고 푹신푹신한 이불에 이마를 기댔다. 머리를 만 갈래로 쪼개는 것 같은 숙취와 가루가 된 것 같은 하반신이 괴로웠다. 뭔가 엄청난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여러 가지 기억들이 콜라주처럼 섞였다. 다아시의 대사를 연습하는 리처드 베켓 옆에서 꾸벅꾸벅 졸던 기억과 남자와 함께 하교하던 기억, 그리고.

그리고 남자의 밑에 깔려 엉엉 울며 쾌감에 몸서리치던-.

잠깐.

퍼뜩 눈이 떠졌다. 시발. 욕과 함께 일어난 스탠리 제이미슨은 지금 자신이 어디, 누구와 있는지 기민하게 확인했다. 일단 저의 집은 아니라는 점에서 절망적이었다. 제발, 제발 꿈이기를. 하고 많은 사람 가운데 ‘그’ 리처드 베켓과 잔 게 아니라고 말해 줘.

하지만 하반신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몸 아랫부분이 꼼짝 못 하게 아팠다. 그도 그럴 것이 그 큰 물건을 받아들이….

“그만. 잠깐.”

혼잣말을 내뱉은 스탠리 제이미슨이 매트리스를 짚고 일어났다. 알몸의 상태에서 질질 발을 끌고 거울 앞에 섰다.

“하…….”

온몸이 말도 아니었다. 부르터서 딱지가 진 입술, 군데군데 난 울혈. 다행히도 몸은 깨끗했다.

남자가 기절한 저를 씻겨 줬을 거라는 생각에 얼굴이 새빨갛게 익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었다. 유감스럽게도 기억이 부표처럼 하나둘씩 수면 위로 떠 오르기 시작했다.

먼저 키스한 사람? 스탠리 제이미슨. 유혹한 사람? 역시 스탠리 제이미슨이었다. 남자가 저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알고서 저지른 짓이었다. 그 순간 스탠리의 머릿속에 전 애인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재판을 열기 시작했다. 전 여자친구들이 스탠리의 무심함을 성토하다가 한목소리로 말했다.

“만장일치로 스탠리 제이미슨의 유죄를 선고합니다. 사형.”

죄책감뿐만 아니라 생리적으로 무릎이 후들거리는 수치심이 있었다. 남자의 손가락을 빨고, 의기양양하게 굴었던 제가 미쳤나 싶었다.

“자. 일단, 난 헤테로라고.”

누가 듣지도 않는데 혼잣말해 본다. 어떤 여자와 자면서도 이런 식으로 까발려지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폐부를 만천하에 열어젖히는 느낌이었다. 엉엉 울고, 다리를 벌리고, 남자를 받아들였다.

허리를 짚고 끙끙거리자, 문이 열렸다. 헉. 그대로 침대 위의 이불로 몸을 가렸다. 젠장, 이미 볼 장 다 본 사이에 내외하는 건 웃기는 일이지만, 지금은 적어도 제정신이었다. 남자가 다시 문을 닫고 저 너머에서 말했다.

“입고 나갈 옷 줄게.”

아. 그렇지. 제 옷은 이미 넝마가 되었을 터. 비틀거리며 문 앞까지 걸어 나가 남자가 손으로 건네주는 옷가지를 받아들었다. 문 너머에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젠장. 네가 한숨 쉬기는 왜 쉬어. 적어도… 멀쩡한 정신이었으면서.

아니다. 다 제 잘못이다. 미시간 오대양호에 몸을 던져볼까. 잡생각을 하면서 맨투맨을 입고 드로어즈를 위로 끌어 올렸다. 바지를 입으려는 순간, 억. 소리와 함께 거꾸러졌다.

“스탠리.”

남자가 내지르는 단말마 소리를 듣고 곧바로 리처드 베켓이 튀어나왔다. 그가 바닥에 쓰러진 스탠리를 부축하러 몸을 숙였다.

동시에 스탠리가 거세게 손을 뿌리쳤다.

“아.”

숨 막히게 어색한 긴장감이 둘 사이를 팽팽하게 가로질렀다. 스탠리가 홍조 가득한 얼굴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혼자 입을 수 있어.”

첫날밤을 치른 왕족처럼 굴기는 싫었으나, 도저히 뻔뻔스럽게 굴 수 없었다. 고등학교 동창과 섹스를 했다. 그것도 야만적일 정도로 격렬하게 몸을 섞었다. 술기운에 잊기에는 너무나 통렬한 경험이었다.

기분 안 좋았냐고 하면, 꼭 그런 것도 아니라서 더 문제였다. 끔찍하기만 했다면 그냥, 야. 미안하다. 나는 역시 여자가 좋은가 보다. 하며 껄껄 능갈 칠 수 있었을 거다(물론 질 나쁜 제스처였다). 그러나 어젯밤은 분명 저도 느끼고 있었다. 물론 쾌감이야 원나잇 스탠드 사이에서도 느낄 수 있는 거니까, 큰 문제는 아닐지도 모른다. 헤테로 섹슈얼도 동성 간의 성교에서 느낄 수 있는 거고.

진짜 문제는 리처드 베켓이 저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상황에서 스탠리 제이미슨이 무슨 말을 하든 상처는 그가 받게 되어 있다.

젠장. 남자가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바지를 주워 입었다. 맨투맨도 바지도 헐렁하다. 남자의 허벅지 사이즈는 도대체 얼마나-. 아. 컸지.

“젠장….”

허벅지가 어찌나 근육으로 실하던지, 저를 추어올리는 힘이 장난이 아니었다.

-이런 것까지 기억하기는 싫었는데. 구역질이 나오는 걸 참으며 (여기서 방에 토까지 하면 인간이 아니다) 맨투맨의 소맷부리를 접었다. 스탠리 제이미슨도 꽤 큰 키인데도 남자의 몸은 거대할 정도라 옷이 약간 맞지 않았다.

“하… 이걸 어쩌지.”

빨리 밸린저 시티를 벗어나야 할 것 같다.

* * *

어기적어기적 1층으로 내려오자 제임스 베켓이 커피를 따르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예의 완벽한 아침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프렌치토스트와 잘 구운 소시지, 스크램블드에그. 약간의 샐러드.

역시 그날의 아침 식사는 남자가 차린 것이었다. 눈썹을 들어 올리며 스탠리 제이미슨이 한숨을 쉬었다.

젠장, 허니문도 아니고 이게 다 뭔가 싶었다. 앉지 않고 벽에 기대선 스탠리 제이미슨을, 남자가 좀처럼 쳐다보지 않았다. 그의 귓가가 시뻘겠다.

울고 싶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당장 문가로 탈주하고 싶은 욕망을 참으며 한 단어씩 꾹 눌러 말했다.

“어젯밤 있었던 일 말이야.”

“…….”

“내가 잘못했다. 술에 취해 있었지만, 그러면 안 되는 거였어. 실수였지.”

-탁.

남자가 소리 나게 식기를 내려놨다. 그가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고, 둘의 눈이 마주쳤다. 시선이 얽혀 들어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리처드 베켓의 목소리가 성마르게 거칠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까. 음. 그래, 없던 일로 하자고. 이건 완전히 술김에 저지른 일이니까.”

“난 안 돼.”

“뭐?”

스탠리 제이미슨의 눈썹이 팔자로 휘었다.

“넌 없던 일로 할 수 있지만, 난 안 된다고.”

“야. 미안하다고 했잖아.”

“잔인하네. 스탠리 제이미슨.”

“그래. 내가 잔인하다. 내가 죽일 놈이야. 그렇지만, 미안하게도 난 헤테로고-. 여자가 좋다고.”

그럴 계획이 아닌데도 불뚝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 뭐야. 책임이라도 지라는 거야? 남자의 태도는 무척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그가 무엇을 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지난번의 망한 연애들을 데이터베이스 삼아 복기해 본 결과, 하나의 결론이 도출되었다.

: 난 지금 좆 됐다.

하룻밤의 정사로 뭔가를 요구당하는 건 딱 질색이었다.

“내 아래에서 울 때는 그렇게 여자가 좋아 보이진 않던데.”

리처드 베켓이 마주 이죽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남자에게서 나오는 비꼼은 타격이 컸다. 내상을 입은 스탠리 제이미슨이 목청을 높였다.

“야. 그건 취해서 그렇지. 아래 만져 주면 상대가 누구든 서게 돼 있어.”

“…다른 사람이랑도 이런 짓 했어?”

하.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스탠리 제이미슨이 황당함에 입을 벌리고 멍하니 남자를 쳐다봤다. 장막 너머의 침착한 그는 온데간데없었다. 오로지 질투에 눈이 먼 청년이 있을 따름이었다.

물론 남자와 뒹군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나 불퉁한 심사가 치밀어 오르는 통에 말이 가시 돋치게 나왔다.

“네가 알아서 뭐하게. 한 번 잤다고 유세 부리는 거냐.”

“…….”

남자의 눈에 불거진 핏줄이 생경했다. 사실, 지금 스탠리 제이미슨은 조금 무서웠다. 장성한 남자가 공포심이라니, 조금 우스운 일이기는 했지만 눈앞의 리처드 베켓은 낯선 사람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어젯밤 저를 깔아뭉개던 그 힘을 가진 남자였다.

반발심이 들었다. 남성성을 증명하려는 헛된 의식의 발로라 해도 좋았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허풍을 쳤다.

“그래. 이런 짓 많이 했다. 내가 워낙 문란해서 말이야. 이 사람 저 사람이랑 재미를 봤는데-.”

그 순간, 리처드 베켓이 바투 다가오더니 스탠리 제이미슨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억센 손아귀에, 스탠리 제이미슨이 맥없이 끌려갔다. 다 큰 스탠리 제이미슨이 남자는 깃털처럼 가벼운 모양이었다.

“도발하지 마.”

음산한 목소리. 스탠리 제이미슨이 침을 꿀꺽 삼켰다.

“…놔.”

“너 만진 인간들, 다 죽여 버리고 싶으니까. 작작 해.”

“…….”

“…….”

“놓으라고 했다.”

남자의 뜨거운 체온이 느껴지자 얼굴이 붉어졌다. 지난밤의 정사로 인한 흥분인지, 당장의 분노 때문인지 분간이 쉬이 가지 않았다. 리처드 베켓이 마지못해 손아귀를 놓자 스탠리 제이미슨이 멈춘 숨을 몰아쉬었다.

“……나랑 잤다고 해서 네가 뭐라도 된 것처럼 굴지 마. 리처드 베켓 네가 아무리 나를 좋아했어도, 몸이 얽혔다고 해서 우리 사이가 달라지는 건 없어.”

“…….”

“...이런 건 수천 번도 해 왔던 짓이니까.”

말이 비수가 되어 그대로 리처드 베켓의 목덜미에 꽂혔다.

* * *

너는 나의 죽음이었다.

너는 내가 붙들고 있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떨어져 나가는 동안에도.

- 파울 첼란

* * *

무슨 정신으로 리처드 베켓의 집에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남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저를 바라만 보고 있었기 때문에, 되레 더 괴로워졌다.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아냐, 헛말이 튀어나왔어. 괜한 허세였다. 한 번 차분하게 이야기해보자.’

이 두세 마디가 나오지 않아, 스탠리 제이미슨은 거세게 현관을 밀어젖히고 주차해 둔 차 안으로 들어갔다. 오만함은 스탠리 제이미슨의 가장 큰 악덕이었다.

차 안에서 핸들을 내리치며 분기를 삭였다. 지난밤에 남자에게 깔려 엉엉 울던 자신보다, 지금의 멍청한 자신에게 더 화가 났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당장 리처드 베켓에게 내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그가 스탠리를 사랑한다고 해도, 스탠리 쪽에서는

그를 사랑할 수 없으니까.

그냥, 상상이 잘 가지 않는 영역이었다.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리처드 베켓의 마음이야 잘 모르겠지만, 그와 자신이 같은 감정이 아닌 건 분명했다. 그리고 모든 관계에 있어 이런 불균형은 껄끄럽기만 할 뿐이었다.

책임질 수 없는 정도로 큰 감정은, 걸리적거릴 뿐이었다. 제 커리어에서건, 연애 생활에서건.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질렀군.’

녀석이 인간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놈은 잘생겼고, 과거에는 저의 뒤를 이것저것 봐줬다(흑심이 있다고는 해도). 일하는 모습에는 품위가 깃들어 있었다. 한마디로 보기 좋은 그림 같은 인간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그런 건 명화나, 멋진 영화 한 편으로 대체할 수 있는 거다.

리처드 베켓은 좋아하기에는, 너무 미지의 존재였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그에 대해서 그다지 잘 알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와 저 사이에는 메워지지 않는 거리감이 있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17년 동안 철석같이 노라 하트만을 봐 왔지 그 옆에 선 남자는 신경 쓰지 않은 까닭이었다.

알아가면 되잖아.

알량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그러나, 생리적인 거부감이 있었다. 그와 저는 본질적으로 다른 인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애초에 나를 좋아한 네 녀석의 잘못이다. 말도 안 되는 책임 전가를 하며 분을 가라앉혔다.

차를 수전 이모 집 주차장에다 댔다. 거칠게 집 안으로 들어서서 바로 위층으로 올라갔다.

“얘, 어머. 얼굴이 왜 이러니?”

창백한 수전 이모에게 대꾸도 하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가 캐리어 안에 짐을 쑤셔 넣었다. 일기장을 들고 잠시 고민했다. 이걸 불태워 버릴까. 버려 버릴까. 그러다가 벌어진 캐리어 위에 내던졌다. 젠장. 창고 같은 데다 쑤셔 박거나 해야지.

* * *

6개월 뒤.

내몰리듯 돌아온 뉴욕은 마경이었다. 대개 서부 해안을 끼고 성장한 다른 IT 기업들과 달리 와이퍼는 보스턴에서 설립돼 뉴욕에서 컸다. MIT를 졸업한 스탠리 제이미슨의 성장 배경과 같이 가는 것이었다. 그런 만큼 뉴욕은 제2의 고향이요, 홈그라운드나 진배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문 너머의 풍경은 을씨년스럽게 느껴지기만 했다.

“어딜 봐요?”

“그냥. 마천루가 솟아 있는 걸 보니 좋아서요.”

눈앞의 파인다이닝을 쳐다볼 바에는 차라리 괴괴한 바깥을 보는 게 나았다. 테이블 너머의 여자를 쳐다보는 건, 더더욱 못 할 짓이었고. 물론 그게 여자의 잘못은 아니었다. 스탠리의 마음속에 있는 ‘전 애인 위원회’가 서슬 퍼렇게 그의 양심을 시험하고 있었다.

그날 밤 이후로 어떤 잠자리도 갖지 않았다. 않은 게 아니라 ‘못 했다.’ 리처드 베켓의 목소리와 그가 저를 짓누르던 무게가 계속해서 생각이 났다. 결정적인 문제도 있었다. 그것은-.

수치스럽기 그지없었지만, 서지를 않았다. 발기부전인가 싶어 3개월 만에 간 병원에서는 심인성 질환이라는 모호한 병명을 댈 뿐이었다. 그럼 그렇겠지. 스트레스를 줄이세요. 일을 줄이세요. 완벽주의를 버리세요. 심호흡하세요. 의사는 하나도 도움 되지 않는 조언을 조언이랍시고 되뇔 뿐이었다. 

스탠리만이 진실을 알고 있었다. 순전히, 순전히 이건 리처드 베켓과의 밤과 연관된 일이라는 걸.

여하건 간에, 친구의 소개를 받아 마련된 자리였다. 여자는 깨끗한 인상의 브루넷 미인이었는데, 뉴욕대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평소 같았으면 스탠리의 취향 정 가운데에 들어오는 이였다. 

“뉴욕 토박이가 아니신가 봐요.”

“아, 네. 미시건의 소도시에서 자랐습니다.”

“의외네요.”

“뭐가 의외죠?” 

“도시에서 자라서, 도시에서 쭉 자랐을 것 같은 인상이라서요.”

스탠리 제이미슨이 멋쩍게 웃었다.

“딱히 그곳에 추억이 있지는 않죠. 여기가 제 고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거짓말. 머릿속의 전 여자친구 위원회가 아닌, 양심이 속삭였다. 일기장에 다 써 있잖아.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일들이 그곳에 있잖아.

식사가 끝나고 둘은 뉴욕의 거리를 걸어 나갔다. 초여름의 밤이라 선선하면서도 걷기 좋은 날씨였다. 리처드 베켓을 만났을 때는 겨울이었는데, 시간은 느리면서도 빠르게 지나갔다. 여자를 택시에 태워 보내고 자괴감에 빠져, 한숨을 내쉬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데도, 끽연이 고팠다.

얼마 후면 회사 일도 재개다. 와이퍼에서 다시 스탠리 제이미슨을 부른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다. 창조주 같은 존재가 빠져나가고 나자 갈피를 잡지 못하던 회사는, 3분기에 어닝쇼크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했다. 설상가상으로 경쟁 업체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물론 챙길 건 챙겼으니 스탠리 제이미슨이 책임져야 할 상황은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뭐라도 붙잡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기분에, 스탠리 제이미슨은 전면 복귀를 약속했던 것이다. 그와 함께 홍보 차원에서 HBS 나우가 제작하는 2부작 다큐멘터리를 승인했다. 그냥 입에 발린 말만 하면 되겠거니 싶었다. 나는 천재고, 이 세상은 소수의 천재가 움직이는 거라고. 이따위 개소리를 늘어놓으면 되겠지.

밤에는 지독하게 외로웠다. 골수까지 스미는 고독이 있었다. 정말 침대 모서리라도 붙잡고 결혼해야 했나. 단발성 연애로 그나마 막아 왔던 마음이 지금은 완전히 구멍이 숭숭 뚫린 채로 누수되고 있었다. 조금만 참으면 회사 일로 밤새 외롭지 않을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자신이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는 자각은 있었다. 리처드 베켓의 심장에 적확하게 칼을 꽂았다는 생각. 네가 척 앤더슨보다 더하지 않니? 너는 역시 잔인한 인간이야. 추악한 인간이야. 척 앤더슨 무리가 너를 정확하게 본 거지. 양심이 속삭였다.

수면제를 손에다 탈탈 털었다. 섹스도 자위도 하지 않고 보낸 6개월, 스트레스는 있는 대로 쌓이고 죄책감에다가 과거의 유령까지 극성이었다. 어느 하나 엉망진창이지 않은 데가 없었다. 겉으로는 멀끔한-뉴욕 최고의-신랑감 행세를 하고 있었지만, 실상 그는 마트료시카였다.

세련된 외관 안에 약한 어린이가 웅크리고 있는 꼴이었다. 그 어린이는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봐줬어! 누군가가 나를 줄곧 좋아해 왔어!’ 스탠리 제이미슨은 그 어린이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그를 다락방에 가뒀다. 조용히 해. 그런 일은 없었어. 잊어. 아무것도 아니니까. 리처드 베켓은 그냥 지나가는 인간들 중 하나라고.

‘확 아무 남자랑 해 버릴까.’ 그러나 주위의 괜찮은 남자 인간들을 볼 때면 하나 같이 끌리기는커녕 무덤덤한 느낌밖에 오지 않았다. 그들과 성교를 한다는 건 생리학적으로도 심리학적으로도, 또 형이상학적으로도 불가능했다.

수면제를 먹기 직전, 핸드폰이 계속해서 울렸다. 받아든 핸드폰의 액정에는 리처드 베켓의 번호가 찍혀 있었다.

* * *

“……여보세요.”

작은 기대감이 꽃피우고 있는 걸 애써 무시한 채로, 전화를 받았다. 침착해야 해. 스탠리 제이미슨. 평정심을 잃어서는 안 돼. 만트라를 중얼중얼 속으로 되새겼다. 그러나 남자의 목소리는 청천벽력의 소식을 전해 왔다.

[제이미슨. 지금 수전 이모가 위독하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얼굴에서 핏기가 일순 가셨다.

* * *

다시 그 SUV를 타고 앤 아버의 미시간 대학병원으로 가는 내내 초조했다. 핸들을 잡은 손에서 자꾸만 땀이 찼다. 쓰러진 수전 이모를 리처드 베켓이 발견해서 병원에 데려갔다고 했다. 다행히도 골든타임 안에 시술이 이루어져, 예후가 좋다고도 했다. 어머니한테 연락을 돌리고 우선 저 먼저 수전 이모를 살피기로 했다.

남자는 줄곧 수전 이모를 돌봐주고 있었구나. 그 생각에 울컥 감정이 받쳐 올랐다. 너는 도대체 내게 왜 그러냐. 차라리 욕을 하고 개새끼라고 비꼬면 편할 텐데. 이런 식의 절절한 호의는 더 괴로울 뿐이었다.

중간중간 다이너에서 끼니만 때우고 열 몇 시간을 운전해 도착한 병원은 적요했다. 데스크로 가 이름을 대니 간호사가 깜짝 놀라며 그를 쳐다봤다. 미안하지만 여기서 자기소개를 하거나 사인을 해 줄 여유는 없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제 꼴이 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아마 눈가에는 눈그늘이 져 있을 거고, 턱 가는 살짝 까칠하겠지. 간호사를 따라 병실로 갔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경과를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단계라고 했다. 수전 이모만 있겠거니 싶어 아무렇지 않게 문을 열었는데, 길쭉한 병상 옆에 큰 남자가 앉아있었다. 바보같이 다시 닫을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장장 6개월 만의 재회였다. 남자가 제게 청천벽력 같은 고백을 한 지 6개월. 스탠리가 그 남자의 심장에 칼을 꽂은 뒤로 6개월. 리처드 베켓은 살짝 피로해 보이는 것을 제외하면 그때와 같았다. 급하게 나왔는지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이었는데도 화보 같은 모양새였다. 그에 비하면 저는, 지금 완전 폐인의 몰골이었다.

“제이미슨.”

남자가 저를 덤덤히 쳐다봤다. 그 차분한 시선이 괴로웠다.

“리처드.”

수전 이모는 쿨쿨 잠이 들어 있었다. 둘은 서로를 응시했다.

까칠한 턱을 매만지며 스탠리가 등 뒤의 문을 닫았다. 초호화 1인 병실이라니, 역시 돈은 많은 것을 해결해 준다.

“수전 이모는?” 어색하게 먼저 말을 꺼내며 상황을 모면해보려 했다. 

“수술 끝나고 안정 취하는 중이셔. 잘 끝났지만, 며칠은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고-.”

다행이야. 리처드 베켓이 안심하라는 듯이 스탠리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마음속 둑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너는?”

“뭐?”

“젠장.”

왈칵 응결된 감정의 덩어리가 치밀어 올랐다. 젠장, 젠장. 수전 이모가 괜찮아 보여서 눈물이 나오는 것뿐이다. 유년기의 절대적 지지자였던 그녀가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그래서 우는 것뿐이라고. 절대 남자가 반가워서라든가, 미안해서가 아니었다. 스탠리는 그렇게 속으로 변명했다. 

얇은 여름용 양복의 팔뚝으로 눈가를 훔쳤다. 정말 오랜만에 흘리는 눈물이 하필 남자 앞에서 터지다니.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뜨거운 눈물이 계속해서 터져 나오자 몸을 뒤로 돌렸다. 그러자 얼마 안 가 거대한 품이 스탠리를 끌어안았다. 그것은 마치 완전히 짜 맞춰진 퍼즐의 일부가 되는 경험이었다. 저를 감싸 안는 온전한 열기. 잠깐이나마 세상과 견고하게 연결되는 기분.

단단하고 또 뜨거운 품이 그를 껴안자, 스탠리가 남자의 목덜미에 제 이마를 파묻었다. 섬유 유연제 향과 기름 냄새가 만족스러웠다. 제기랄. 내가 너에게 칼을 꽂아도, 너는 언제나 나를 이렇게-.

남자가 투박한 엄지손가락으로 스탠리의 눈가를 닦았다.

“수전 이모, 괜찮으실 거야.”

가까이에서 남자의 금갈색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차갑다고 생각했던 파란색 눈은 너무나도 따뜻해,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울어도 잘생겼네.”

리처드 베켓이 중얼거렸다.

“제길. 놀리지 마.”

스탠리 제이미슨이 제 손등으로 물기를 닦아내며 씩씩거렸다. 남자의 티셔츠에 제 눈물 자국이 찍힌 걸 보니 괜히 웃음이 나왔다. 울다가 또 웃다가, 제정신이 아니구만.

하지만, 제정신이 아니어도 괜찮지 않을까? 성공 가도만 맹렬히 좇았던 인생이었다. 그러니 단 한 번만이라도-.

* * *

긴긴 포옹 뒤에 스탠리는 리처드의 품에서 마지못해 빠져나왔다. 진득한 해후 이후에는 다소간의 어색함이 있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뒷덜미를 지분거리며 수전 이모의 안색을 살폈다.

이혼 후에 어머니는 회계사 일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종일 직장에 붙들려 힘겨워하는 어머니 대신, 어린 스탠리 제이미슨을 챙긴 건 수전 이모였다. 스탠리가 괴롭힘으로 힘들어했을 때 그에게 전적인 사랑을 퍼부은 것도 그녀였다. 그런데도 그간 이모를 잘 챙기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창백한 안색의 수전 이모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더니 눈을 떴다.

“어머. 스탠리. 네가 왜 여기 있니?”

“…리처드가 전화했어요.”

“뉴욕에서 여기까지 열 시간은 족히 걸리는데. 이런 이런, 괜한 고생을 했구나.”

“……이게 무슨 고생이에요. 제가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스탠리 제이미슨이 아랫입술을 씹었다. 다시 눈물이 치밀어 오르려고 하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주름진 이모의 손을 제 손으로 마주 잡았다.

수전 이모가 리처드와 스탠리 제이미슨을 번갈아 쳐다보니 호호 웃었다.

“너희 둘이 이렇게 있는 거 보니 마음이 부자가 된 것 같다. 화해는 했니?”

아. 이런. 눈물이 쏙 들어가는 이야기였다. 수전 이모는 둘이 한바탕 ‘그 짓거리’를 하고 나서 싸웠다는 디테일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냥 싸운 줄로 아는 것 같았다. 얼굴이 홧홧해져 괜히 열없이 웃어 본다.

“화해할 게 뭐가 있어요. 우리 안 싸웠잖아.”

리처드 베켓을 향해 뒤돌아보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대충 장단 맞춰.’

“……걱정하실 일은 없었어요….”

리처드 베켓이 어색하게 덧붙였다. 수전 이모가 스탠리를 노려봤다.

“하이스쿨 때는 서로 안 친했던 건 알지만, 이제 좀 연락도 하고 그러렴. 스탠리, 리처드가 얼마나 예의 바르고 착한 애인 줄 아니?”

“뭐예요. 명색이 제가 조카인데 저 녀석만 칭찬하고. 좀 서운한데요.”

스탠리가 입을 삐죽이며 삼십 대 남자답지 않게 애교를 부렸다. 수전 이모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나저나 둘 다 좀 쉬렴. 스탠리는 면도 좀 하고. 그 멋진 얼굴 함부로 하고 다녀서는 안 되지.”

* * *

특실이 괜히 특실은 아니었다. 1인용 병실에는 간병인용 간이침대와 널찍한 소파, 텔레비전이 구비되어 있었고 개인 욕실까지 붙어 있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병원 1층에 딸린 마트로 가 세면도구 및 면도기를 샀다.

젠장. 이제 어떻게 한담. 리처드 베켓을 보고 적잖이 반가웠던 건 사실이지만, 그를 향한 감정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몰랐다. 확실한 건 놈을 계속해서 무시하고 외면할 수는 없다는 거다. 그래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이렇게 심란할 때일수록 침착하게 대응해야 해.’

그 와중에 신기한 건, 남자와 있으면 머릿속이 평화로워진다는 사실이었다. 제 머릿속의 시끄러운 ‘전 애인 위원회’라든가 양심이라는 외피를 둘러싼 자기혐오가, 오로지 리처드 베켓과 있을 때는 잠잠했다. 그 고요함은 확실히 매력적이었다.

조건 없는 사랑에는 치유적 효과가 있는 모양이지. 빈정거리며 병실 안 욕실로 들어가 면도를 했다. 얼굴까지 빡빡하게 닦은 후 거울을 들여다봤다.

* * *

수전 이모가 다시 눈을 붙이고 나서야 남자와 단둘이 있을 수 있었다. 둘은 병원 지하의 푸드 코트에서 밥을 먹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오믈렛을, 리처드 베켓은 치킨 수프를 시켰다. 둘은 말없이 마주 앉아 밥을 먹었다.

“리처드.”

“…왜. 제이미슨.”

“그렇게 안 부르면 안 되냐.”

별안간 스탠리 제이미슨이 불퉁하게 쏘아붙였다. 리처드 베켓이 숟가락을 식판에 내려놓고 스탠리 제이미슨을 바라봤다. 뭐가 문제냐는 시선에 스탠리가 횡설수설했다.

“그러니까, 그 성으로 부르는 거. 그냥 이름으로 부르지 그래. 예전처럼.”

“그야….”

남자가 한숨 쉬었다. 그가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이야기했다.

“네가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

…할 말이 없다. 이거 완전히 제 수에 제가 당한 셈이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헛기침을 몇 번 한 후 교섭에 들어갔다.

“그야… 내 말은 뭔가 깊은, 그러니까 네가 원하는 그런 관계는 힘들다 이거였고-.”

“그럼 넌 뭘 원하는데. 섹스 파트너?”

리처드 베켓의 눈빛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섹스 파트너란 말에 몇몇 사람들이 이쪽을 지켜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당황하며 손가락을 제 입에다 가져다 댔다.

‘조용히 해!’

“…….”

“그러니까, 내 말은. 난 널 너무 모른다 이거야. 우리가 다시 만나서 제대로 이야기를 나눈 시간도 별로 안 되잖아.”

“…….”

리처드 베켓이 눈을 깜빡였다. 그의 짙푸른 눈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너야 나에 대해서 많이 알겠지만. 난 네가 어떤 사람인지, 그간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잘 몰라.”

“…….”

리처드 베켓의 번듯한 미간에 주름이 졌다. 스탠리가 하는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모습이었다. 희망적인 기분으로, 스탠리가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니까, 일단 친구로 시작하자- 이거지.”

제 말에 제가 감탄하며 스탠리가 속으로 손뼉을 쳤다. 그래, 남자답고 쿨 하게 가는 거다. 이 제안만 통한다면 (비록 원나잇을 하기는 했으나) 저에게는 좋은 친구가 생기는 거다. 과거를 온전히 이해해 주고 받아들여 주는 친구. 죄책감을 덜면서 리처드 베켓과 이어질 수 있다는 건 멋진 일이었다.

반면 리처드 베켓의 반응은 살짝 시큰둥했다. 실망한 것 같기도 하고, 어쩐지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그가 툭, 내뱉었다.

“프렌즈 위드 베네핏으로 들리는데.”(*서로의 필요에 의해 가끔 성관계를 맺는 친구)

“사람 말을 진짜 이상하게 듣는 재주가 있다, 너.”

스탠리 제이미슨이 숟가락으로 리처드 베켓을 가리키며 투덜댔다.

“…그렇다 해도 내가 선택권이 있는 건 아니니까.”

리처드 베켓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수프를 떠먹었다. 방금 그가 내뱉은 말의 뜻을 헤아리며 스탠리가 남자를 쳐다봤다.

“그 말은, 친구 하는 거… 괜찮다 이거지?”

“……그래.”

남자가 피곤한 듯 대답했다. 그가 시선을 수프로 내리깔았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남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주먹을 식탁 위로 들어 올렸다. 리처드 베켓이 의문스러운 표정을 하자 그가 말했다.

“피스트 범프. 이거 항상 해 보고 싶었거든.” 

“…….”

리처드 베켓의 짙은 눈썹이 의문으로 들어 올려졌다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그가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쉬더니 마지못해 제 손을 잠깐 스탠리의 주먹과 부딪혔다.

“뭐야, 그 표정은. 부끄럽냐.”

“…내가 이렇게 유치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게 실감이 안 나서.”

그 말에 어쩐지 간지러운 기분이 든 스탠리가 한껏 너스레를 떨었다.

“난 원래 이렇게 유치했어.”

“…….”

리처드 베켓이 웃었다. 그거야 이미 알고 있다는, 미소였다.

* * *

캘리포니아 산타 바바라에 있는 초호화 별장에 기거하는 어머니는, 수전 이모의 소식을 듣자마자 비행기를 탔다고 했다. 그녀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언니!”

어머니는 스탠리를 지나쳐 곧장 누워있는 수전 이모에게 와락 안겼다.

“어머 어머, 얘. 왜 이렇게 호들갑이니.”

“왜 이렇게 야위었어. 언니. 그러게 내가 같이 캘리포니아로 가자고 했잖아.”

제 언니와 한껏 회포를 푼 어머니는 병실에서 나와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둘에게로 다가갔다.

“스탠리, 옆의 멋진 친구는 누구니?”

어머니가 샤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직도 현역으로 회계사 법인을 운영하는 어머니였다. 날카로운 눈매에 살짝 주눅이 든 스탠리가 조심스럽게 남자를 소개했다.

“리처드 베켓이라고… 기억하세요? 하이스쿨-.”

“아… 미식축구. 알다마다.”

어머니가 여유로운 미소를 짓다가 갑자기 뭐가 생각이 났는지, 표정을 굳혔다.

“너. 그런데, 스탠리 괴롭히던 애들과 친구 아니었니?”

“아… 엄마. 뭘 생각하시든 그거 아니에요.”

어머니는 무슨 생각인지 저를 서른넷 어른이 아닌 철부지 아이로 보는 모양이었다. 뒤늦게 아들의 왕따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은 그녀였기에, 이해가 되는 면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당장은 그녀의 추궁이 괜한 참견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리처드 베켓은 진지했다. 그가 스탠리의 어깨를 잡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맞습니다. 저, 척 앤더슨과 친했어요.”

어머니가 쓰게 웃으며 리처드 베켓을 노려봤다.

“……어머. 그런데 무슨 낯으로 스탠리의 친구를 자처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투명한 안경알 너머로 어머니의 뜨거운 노기가 느껴졌다. 이건, 위험해.

“오해예요. 오해. 저 녀석이 앤더슨과 친구기는 했지만, 저를 뒤에서 많이 도와줬거든요. 너무 화내지 마세요.”

스탠리가 하하 웃으며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뭐, 그렇다니 일단 알았다. 알다시피 스탠리가 성공한 뒤로 이상한 사람들이 자꾸 달라붙어서. 나도 신경이 날카로워졌어. 미안하다.”

어머니가 고개를 도리도리 젓더니 지나가며 리처드 베켓의 어깨를 툭 쳤다. 그녀가 다시 병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스탠리 제이미슨이 리처드의 얼굴을 살폈다. 남자의 얼굴에서 불쾌함이나 분노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덤덤한 얼굴에 스탠리가 괜히 풀이 죽었다.

“학교 졸업하기 직전에 어머니가 알고 엄청 우셨거든.”

스탠리가 3년 동안 줄곧 괴롭힘당해 왔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바닥에 주저앉아 몇 시간을 울었었다. 그때를 회상하니 어쩐지 마음이 무거워져 스탠리가 리처드 베켓을 괜스레 쿡쿡 찔렀다.

남자는 스탠리의 손가락이 자신의 단단한 허리를 쿡쿡 장난스레 찌르는 걸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다 그가 말했다.

“미안.”

리처드 베켓의 갑작스러운 말에 스탠리 제이미슨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뜬금없이 사과냐.

“아무리 그래도, 척 앤더슨과 어울려 놀면서….”

괴롭힘에 일조한 거 맞아. 비겁했어. 당당하게 앞에서, 그만하라고 했어야 했다. 몇 번이고 두들겨 패서 그만두게 해야 했어. 리처드 베켓이 저를 쿡쿡 찌르는 스탠리의 손가락에 제 손등을 가져다 대며 사과했다.

“야. 사과 좀 하지 마. 우리 둘 진짜 이상하다. 서로 얼마나 더 미안해질 수 있느냐 대결하는 것 같다고.”

“앞으로도 계속 사과할 거야.”

남자는 요지부동이었다.

“뭐냐. 그만하라니까.”

스탠리 제이미슨의 귓바퀴가 뜨거워졌다. 뜬금없는 때에 훅 치고 들어오는 남자의 모습에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

리처드 베켓의 진지한 눈빛에 스탠리가 결국 머쓱하게 씩 웃었다.

‘내가 졌다, 졌어.’

“그러면 네가 사과할 때마다 내가 받아 주마. 됐지?”

* * *

스탠리 제이미슨이 미처 알지 못하는 사실은, 그가 별생각 없이 던진 한마디가 남자에게는 또 다른 구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계의 지평을 넓히고 온기를 가져다주는 작은 빛이었다.

* * *

잊힌 기억 조각-

“이건 콜린 퍼스가 다시 살아나도 안 돼.”

스탠리 제이미슨이 한숨을 쉬었다. 멀쩡히 살아 있는 배우가 죽고 전생(?)해도 안 된다. 그만큼 리처드 베켓의 연기는 뻣뻣했다. 단순히 못 하는 게 아니라, 성의 없어 보이기까지 하는 연기라고 할까. 처음에는 못하거나 잘하거나 알 바 아니라고 생각해서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품 정리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가 큰 몸을 쭈뼛거리며 저를 찾아오지 뭐던가.

“뭐야?”

리처드 베켓이 혼자 있다=나름 안전하다, 도식을 되새기며 스탠리 제이미슨이 남자를 올려다봤다. 안경을 한 손으로 들어 올리며 한껏 똑똑한 척해 본다. 리처드 베켓의 입매가 살짝 올라갔다.

“스탠리.”

“…?”

“나, 대사 연습하는 거 도와줄 수 있어?”

“응, 내가? 노라랑 같이 하는 게 더 좋을 텐데.”

“그게…….”

리처드 베켓이 부드러운 금발을 헝클며 우물쭈물했다. 저 녀석이 부탁 하나 저렇게 못 할 만큼 숫기가 없었나? 스탠리가 볼 안의 살을 씹으며 의문스러워했다.

“노라랑 할 때면 좀, 부끄러워서 말이야.”

“……하긴.”

문학A 시간에 늘 옆자리에 앉아 도움을 줬던 스탠리였다. 하긴, 이런 부끄러운 부탁은 저에게 하는 게 이상한 것 같지는 않았다. 문제는, 스탠리가 도움을 주고 싶냐였지만. 당장은 얄밉고 질투 나는 녀석이었다. 놈에게 이득이 되는 일은 딱히 해 주고 싶지 않았는데.

근데 그게 참. 녀석이 참 절박해 보였다. 거기에다, 무대 위에서 리처드 베켓이 실수라도 한다면 그 불명예는 노라까지 뒤집어쓰는 거였다. 그건 싫어.

아무리 질투가 난다고 해도, 진심으로 부탁해 오는 사람에게 미운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배낭에서 수첩을 꺼내 제 번호를 적었다. 그가 북 소리를 내며 종이를 찢어 리처드 베켓에게 건넸다.

“주말이라면 시간 돼.”

“…….”

연극 연습을 도와달라는 거였는데, 스탠리 제이미슨의 실행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당장 번호도 주고 시간도 잡는 박력이 못내 귀여워서 리처드 베켓이 피식, 웃었다.

그가 종이를 받아들자 스탠리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번호 다른 애들한테 알려 주면 안 돼. 장난 전화하고 그러면….”

“그럴 일 없어. 맹세할게.”

리처드 베켓이 그 종이를 금지옥엽이라도 되듯이 고이 접어 제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며칠 뒤 일요일. 둘은 도서관 앞 야외 쉼터에서 연습에 매진하고 있었다. 리처드 베켓은 대사는 전부 외우고 있었다. 그건 정말 다행이었지만, 연기가 문제였다. 아무리 하이스쿨 연극이라고 해도 적당 선이 있는 거다. 특히 유희 거리가 부족한 밸린저 시티에서는 더더욱 높은 수준이 요구되었다. 사람들이 연극을 잔뜩 기대하기 때문이었다. 

슬슬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날씨였지만 햇살이 따사로워 바깥에 있기는 나쁘지 않았다.

“다아시가 더티 블론드인 것도 좀 이상해. bbc 드라마가 워낙 유명해서 그런지 보통 흑발이라고 상상하니까.”

“…정말? 흑발이 더 좋아?”

리처드 베켓이 제 머리칼을 훑으며 실망스러운 표정을 했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남자를 쳐다봤다. 햇살에 비쳐 밀색 머리가 금사처럼 빛났다.

“…난 금발도 멋지다고 생각해.”

노라 하트도 금발이지. 그럼, 그렇고말고. 스탠리 제이미슨이 씩 웃고는 수첩에 다시 끼적끼적 글을 적었다. 연기 문제점들과 개선 방안을 도표로 만들어 적기 시작했다. 그가 연필로 노트를 툭툭 치며 투덜거렸다.

“가장 큰 문제점은, 감정이 들어 있지 않다는 거야.”

“…….”

리처드 베켓이 스탠리 제이미슨 옆에 앉았다. 둘의 몸이 가까이 붙었고, 따사로운 바람이 둘을 휘감았다.

“좋아하는 사람을 생각해. 너 같은 경우는 노라가 앞에 있는데 뭐가 문제야.”

스탠리가 무릎 위에 턱을 괴고 몸을 수그렸다. 리처드 베켓의 손이 그의 등 위에서 방황하다가 다시 거둬졌다. 살짝 뼈가 나온 등까지, 역시 사슴 같다고 비밀스럽게 생각했다.

리처드 베켓이 결국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네가 한 조언, 잘 생각해 볼게.”

“자. 그럼, 이렇게 이해해 봐. 네가 좋아하는 사람-그러니까 노라-과 단둘이 있다고 생각해 보라구.”

“그래.”

그가 싱겁게 대답했다.

“알아들은 것 같지 않은데.”

“…지금 한번 연습해 볼까?”

리처드 베켓이 웬일로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가 벌떡 일어서더니, 스탠리 제이미슨을 향해 대사를 읊기 시작했다.

“당신은 내게 가혹했지만, 유익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당신 덕분에 저는 겸손해졌지요. 당신은 제가 얼마나 모자라는 사람인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익숙한 대사 처리 때문인지, 분위기에 이끌려서인지 스탠리가 곧이어 자연스럽게 엘리자베스의 대사를 읊었다.

“그 당시 제가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물론 그랬습니다. 제 허영심 때문이었지요.”

“그렇다면 저를 미워하셨겠군요.”

스탠리 제이미슨의 말끝이 파르르 떨렸다.

“전혀요.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제 분노는 제대로 방향을 잡기 시작했어요.”

대사를 핑퐁처럼 주고받으면서 열기가 올라왔다. 눈앞의 리처드 베켓은 예의 그 대사만 읊는 로봇 같던 남자가 아닌, 다아시 그 자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이게 바로 메소드 연기의 힘이군. 스탠리가 생각했다. 저의 특훈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얼마간의 침묵이 있었다.

“…….”

스탠리 제이미슨이 얼빠진 얼굴로 남자를 응시했다.

그가 입술을 달싹이더니, 차분하게 대답했다.

“거봐. 내가 말했던 대로 하니까 잘되잖아.”

* * *

어느 정도 호전된 수전 이모는 어머니와 함께 산타 바바라에 있는 호화 병원에서 안정을 취하기로 했다. 장시간의 비행이 걱정스러웠지만, 어머니는 완고했고 수전 이모도 괘념하지 않는 것 같아 알겠다 했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SUV를 일단 밸린저 시티 이모네 집 앞에 주차했다. 와이퍼를 다시 지휘하기 전까지 시간이 조금 있었다. 그동안 ‘고향’에서 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리처드 베켓’

핸드폰 화면 위의 이름을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날숨을 내쉬었다. 먼저 돌아간 녀석과 메시지로 이야기를 나눴다. 정확히는 스탠리 제이미슨이 실없는 소리를 하면, 그가 받아 주는 식으로 대화가 진행되었다.

스크롤을 올려 지난 메시지들을 봤다. 어머니는 간병인 침대에서 자고 저는 소파에 누워서 잠을 청할 때였다. 도통 수마에 들지 않아 리처드 베켓에게 메시지를 보냈었다.

[야.]

얼마 지나지 않아 답이 돌아왔다.

[무슨 일 있어?]

스탠리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냥, 심심해서. 넌 안 자고 뭐 하는데.]

5분 만에 도착한 메시지는 짧지만 함축적이었다.

[생각하고 있었어.]

[생각?]

[내 생각은 아니…겠지? :/ ]

스탠리가 장난스러운 이모티콘을 곁들였다.

남자는 아니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대신 답신은 짧고 굵었다.

[다쳤을 때 생각.]

마음에 무거운 돌을 던진 것처럼 마음이 가라앉았다. 괜히 남자를 심란케 한 것 같아 면구스러웠다.

스탠리가 답장하지 못하고 망설이자 다른 메시지가 왔다.

[별건 아니고. 수전 이모 뵈니까 옛날 생각이 났어.]

[정말 괜찮아. 걱정 마.]

핸드폰의 액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창백한 빛이 스탠리 제이미슨의 얼굴을 비추었다.

내가 그때 있었으면, 좀 더 나았을까.

내가 네 곁에 있었다면 너는 덜 아팠을까.

미처 보내지 못한 메시지였다.

* * *

그 뒤로 며칠간의 시간이 흘렀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산책을 했고, 밀린 독서를 했다. 레슬리 포스터에게 북 클럽도 다시 나가겠다 얘기도 해 뒀다. 틈틈이 와이퍼와 관련된 구상을 노트에 적기도 했다.

노트에 쓴 첫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연결될수록 무조건 좋은 것일까?’

그 옛날, 리처드 베켓이 했던 말이 뇌리에 박혀 떨어지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을 연결하는 앱을 만든 게 되레 사람들을 더욱 외롭게 한 건 아닐까. 그것은 일종의 화두가 되어 끈질기게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 * *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얼굴을 닦고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스탠리는 조깅을 한다는 핑계로 거의 매일같이 정비소에 들렀다. 사무실에 앉아 뜨거운 커피를 마시거나 선풍기 옆에서 책을 읽곤 했다.

오늘은 퍽 단출한 외출옷을 입고 밖을 나갔다. 여름이었지만 아침이라 나름 선선했다.

정비소 쪽으로 다가가자 두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손님인가 싶어, 기웃기웃거리니 코든 영감과 리처드였다. 코든 영감이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었다. 헛기침하며 인기척을 내자 둘이 스탠리를 의식했다.

코든 영감은 능글맞은 인사로, 수전 이모와 죽이 잘 맞아 어렸을 때도 알고 지냈던 사람이었다. 핼러윈이나 크리스마스 때 찾아가면 맛없는 계피 사탕을 왕창 주던 남자. 어느새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지만 정정했다.

‘아파서 관둔 줄 알았지….’

“스탠리 보이! 오랜만이구나.”

그가 끌끌 웃으며 스탠리의 어깨를 탁! 소리 나게 쳤다. 한참 큰 어른 같았던 코든 영감은 어느덧 스탠리 시선의 아래에 있었다.

한참의 악수가 끝나고 코든 영감은 리처드에게 눈짓하더니 자기는 담배를 피우러 가겠다고 했다. 그렇게 정비소에는 둘만 남았다.

“아까 그거 뭐였지?”

스탠리가 얼떨떨하게 말했다.

“그거라니?”

“코든 할아버지가 너에게 윙크했잖아.”

“…안 했는데.”

“했는데?”

“……난 모르는 일이야.”

“뭐… 알았다.”

스탠리가 약간 찜찜한(?) 기분을 무릅쓰고 정비소 안을 둘러봤다. 전반적으로 정연한 공간이었지만, 낡은 기물들이 더러 눈에 띄었다.

‘…….’

스탠리가 정비소를 둘러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리처드 베켓이 서둘러 그를 사무실 안으로 안내했다.

“바꿔 줄까?”

스탠리가 무심히 말을 꺼냈다.

“뭐를?”

“그냥. 정비소 견인차. 연식이 좀 있어 보여서, 내가 새로 마련해 줄까 싶은데.”

“…….”

리처드 베켓이 다시 땅을 쳐다봤다. 그의 목덜미가 발그레해졌다. 남자가 시선을 피한다는 것과 더불어, 좋지 않은 징조였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혹시나 있을 오해의 소지를 불식하기 위해 말을 덧붙였다.

“이건 별 뜻은 없어. 내가 돈이 좀 많냐. 그렇다고 내가 앨론 머스크처럼 우주 사업을 해, 건물을 세우기를 해. 돈 썩히기도 그렇고, 일단 친구끼리 약소한 선물쯤은 주고받을 수 있는 거잖아….”

“괜찮아.”

“괜찮다면-.”

스탠리가 뒷말을 귀 기울여 들었다.

“안 해 줘도 괜찮다고.” 리처드 베켓이 입으로만 웃었다. 눈은 웃음기 없이 단호했다. 약간 씁쓸한 표정에, 괜히 반발 심리가 들었다.

“친구끼리 자존심 세우는 거 아니다.”

“…자존심 세우면 안 돼?”

“…….”

리처드 베켓은 그렇게 화난 것 같지는 않았지만 단호했다. 그가 뜨거운 차로 목을 축이더니 차분하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 친구지만… 난 너 아직 좋아해.”

“야….”

“그냥, 바보 같아도. 너에게는 손 벌리고 싶지 않아.”

“…….”

아뿔싸. 스탠리가 제 머리통을 휘갈기고 싶은 욕망을 참으며 신음했다. 남자를 고려하지 않고 철저히 제 본위로만 생각하다 보니 일어난 참사였다. 그래, 리처드 베켓은 저를 좋아한다. 17년하고 6개월이 지나서도 여전히.

스탠리가 혼자 끙끙대자 리처드 베켓이 그의 등을 살살 두드려 줬다.

“괜찮아. 나 화 안 났어. 그냥….”

“…아냐, 내가 생각이 짧았다.”

“추궁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리처드 베켓의 큰 손바닥에서 나오는 열을 기분 좋게 흡수하며, 스탠리가 중얼거렸다.

“정 그러면 오늘 저녁에 외식이나 할래? 매일 냉동 음식만 먹으니까 물려.”

리처드 베켓을 사선으로 흘겨보며 남자가 청년답게 씩 웃었다.

“그리고 이건 내가 사도 되는 거지?”

* * *

낮에는 음식점, 밤에는 술집을 겸하는 곳이었다. 앤 아버까지 가기에는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아무거나 사 주고 싶지는 않았다. 리처드 베켓에게 가장 단가 높은 마을 레스토랑을 대라고 으르자 알려 준 곳이었다. 나름 러스틱한 인테리어에 여기저기 붙어 있는 재즈 밴드 포스터가 인상적인 곳이었다.

‘뉴올리언스에 온 것 같네.’

물론 배타적인 분위기는 단연코 아니었다. 군데군데 자리에 앉은 젊은이들이 잡담하고 있었고 노인들이 모여 차를 마시며 포커를 치고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저편에서 여자가 왔다. 머리를 질끈 묶은 중년의 여성이 둘에게 메뉴판을 들이댔다.

“리처드. 오랜만에 왔네.”

그녀가 걸걸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아. 리지. 오랜만이에요.”

리지? 그래, 애칭으로 부른다 이거지. 살짝 심기가 가라앉은 스탠리가 질세라 돌아앉았다. 그가 여자에게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 멋진 청년은… 설마, 내가 아는 그 사람이니?”

“안녕하세요. 스탠리 제이미슨입니다. 리처드 친구예요.”

스탠리 제이미슨이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다. 여자가 더운 숨을 몰아쉬더니 떨리는 손으로 응했다.

“세상에, 밸린저 시티 출신이라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리처드랑 친구인 줄은 몰랐네요! 이거 끼리끼리라고 해야 하나…. 둘이 친구였구나.”

“과찬이세요. 저 녀석에 비하면 전 한참 모자라는걸요.”

“괜한 소리 마셔요. 실물이 훨씬 멋들어졌는걸요. 우리 가게에 오신 것도 영광인데, 서비스라도 따로 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음식 맛있게만 해 주세요.”

“그럼, 당연하지. 내가 있는 한 허투루 음식 나오는 일은 없을 거예요.”

리지가 손을 내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하. 가능한 한 자주 올게요.”

스탠리가 씩 웃자 볼우물이 멋지게 팼다.

“그럼, 제이미슨 씨도 앞으론 고향에 자주 내려와요. 멋진 모습 자주 비춰 줘야 우리 밸린저 사람들도 힘내지.”

그녀가 주문서를 받아들고 카운터로 사라지자 스탠리가 리처드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살짝 가라앉은 것 같은 얼굴에 괜히 농담을 걸었다.

“원래 저렇게 수더분한 스타일이신가. 엄청 친절하시네.”

“네가 마음에 들었나 보지.”

“뭐야. 그런 소리는 왜 하냐. 그냥 친근한 스타일이신 것 같은데.”

“…어차피 리지 결혼했어.”

“나 원 참. 어이가 없네-.”

저런 식의 추궁은 정말 너무했다. 물론 스탠리의 업보기는 했다. 자신이 문란하다느니, 아랫도리 놀리는 건 예삿일이라느니 허풍을 잔뜩 친 것이 후폭풍이 되어 돌아오고 있었다. 무심히 턱가를 괸 리처드 베켓의 눈빛이 자못 서늘했다.

그 순간 얄궂게도 띠링-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을 확인해 보니 뉴욕에서 만났던 여자, 맬리사 해밀턴의 이름이 떠 있었다. 젠장, 하필 이때.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명색이 친구가 소개해 준 여자인 만큼 그래도 전화를 받는 게 예의일 것 같았다.

아니, 애당초 내가 왜 녀석의 눈치를 보고 있는 건데. 불뚝한 심사가 된 스탠리 제이미슨이 핸드폰을 당차게 스와이프했다.

“여보세요.”

[스탠리, 오랫동안 연락이 없어서 전화해 봤어요. 제가 눈치 없게 구는 거라면 죄송해요.]

그날 이후로 연락 한 번 주지 않았다는 게 생각이 났다. 이런, 매너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아, 제가 경황이 없어서요. 가족이 아픈 것도 있고-.”

[지금 바쁘세요?]

“아….”

스탠리가 리처드 베켓을 넘겨 보았다. 진지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얼굴에 양심이 아팠다. 아파야 할 이유가 없다는 걸 이성으로는 알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가 눈을 딱 감고 이야기했다.

“미안해요. 제가 너무 바빠서… 한동안 만나기는 힘들 것 같네요. 정말 미안해요.”

한참을 중얼거리며 대화에 응하다가 핸드폰을 껐다.

“젠장. 미안하다. 너 맛있는 거 사 주려고 온 건데, 이런 통화나 하고-.”

얼굴이 홧홧했다. 호기롭게 전화를 받았지만, 어쩐지 어색한 기분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구원의 사도처럼 음식과 맥주가 나왔다.

폭챱, 스테이크, 감자 샐러드까지 푸짐한 요리에 스탠리가 군침을 삼켰다. 파인 다이닝보다는 확실히 이런 손맛 나는 요리가 취향이었다.

스탠리가 폭챱과 스테이크를 리처드 쪽으로 밀었다.

“많이 먹어라.”

남자에게 뭘 자꾸 사 주고 싶고, 먹이고 싶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에게 이런 순전히 이타적인 감정은 무척 드물었다. 그에게 있어 관계란 일종의 게임 같은 것이었다. 인간들을 조종하는 소시오패스와 거리가 먼 스탠리였지만. 자신이 무엇을 내주면 상대방도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라면, 그냥 주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제 마음 한 자락은 못 내줄지언정 적어도 자신이 돈으로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해 주고 싶었다. 그걸 단순한 동정심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남자는 먹으라는 요리는 안 먹고 맥주로 목을 축였다. 꿀꺽꿀꺽 남자답게 오르내리는 목울대가 퍽 보기 좋았다. 그가 조용히 읊조렸다.

“녹색 눈이 질투의 상징인 거 알아?”

“음?”

“…문학A 시간에 셰익스피어 배웠잖아. <오셀로>.”

“그럼. 비숍 선생님이 얼마나 혹독하게 가르치셨던지, 대사 한 줄 한 줄 다 기억난다.”

스탠리가 씩, 웃었다. 리처드 베켓의 미소가 잔잔하게 떠오르며 둘은 추억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 * *

식사는 나름, 아니 무척이나 즐거웠다. 무뚝뚝한 남자는 의외로 즐거운 대화 상대였다. 리처드 베켓 앞에서는 필요 이상으로 멋있게 보이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다. 그저 스탠리는 스탠리면 되는 일이었다. 그보다 쉬운 일이 어딨을까. 위선도 위악도 가장할 필요가 없었다.

둘은 집까지 걸어갔다.

“야, 정말 맛있었다. 매일 가고 싶을 정도야.”

스테이크는 두툼한데도 간이 잘 배어 있었고 굽기도 적당했다. 폭챱은 양념이 맛있었다. 식욕이 없어 늘 끼니를 때우는 둥 마는 둥 하던 스탠리도 오랜만에 포식했다. 물론 기분 좋은 건 음식 때문만이 아니었다.

남자에게 뭔가를 사 주기는 사 주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하하. 앞으로 이런 식으로 자꾸 사 줄 거다. 기대하라고. 다음은 명품 슈트와 구두야. 남자의 어깨에 그림같이 어울릴 코트도 살까. 아마 보기만 해도 흡족하기 이루 말할 데 없을 것이었다.

술기운에 자꾸만 20대 같은 치기 어린 마음이 솟아올랐다.

어느덧 둘은 리처드 베켓의 집까지 도착했다. 어째선지 제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취했으면… 데려다줄까.”

리처드 베켓이 주저하며 말했다.

“뭐, 내가 맥주 같은 거 마시고 취하는 사람 같냐.”

리처드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야.

남자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순간, 스탠리가 그를 불렀다.

남자가 돌아섰고 둘은 한참 서로를 바라봤다.

“아니다. 잘 자.”

스탠리 제이미슨이 아랫입술을 씹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의 뒷모습을, 리처드 베켓이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 * *

오 나의 군주시어 질투를 조심하소서!

자신이 먹고 사는 고기를 조롱하는 초록 눈의 괴물일지니….

셰익스피어 <오셀로>

* * *

이번 북 클럽의 책은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였다. 처음 보는 작가인데 몇 년 전에 꽤 화제가 된 책이라고 하니, 제가 그간 독서를 퍽 안 하기는 했다 싶었다.

줄거리 자체는 단순했다. 성실한 문학 연구자인 주인공이 묵묵히 살다가 묵묵히 죽는다. 익숙한 주제 의식(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이기는 했으나 문장의 밀도가 높아 쉬이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았다. 나름 나쁘지 않은 책이라고 생각했지만, 여기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살짝 아리송했다.

물론 기우였다. 아서 프랭클린과 레슬리 포스터가 서로 설전을 벌이는 통에 상황이 꽤 흥미로워졌다. 리처드 베켓과 켈리 클루게는 상대적으로 침묵을 지킨 편이었다.

“이 소설은 잘 쓰이긴 했지만, 주제 의식은 흔한 것 같고, 솔직히 그렇게까지 호평을 받아야 할 이유도 모르겠어요. 주인공 빼고 다른 인물들도 호감이 안 가요.”

레슬리 포스터가 날카로운 비판을 던졌다.

“주제 의식이 흔하다, 특이하다로 어떤 작품의 완성도를 따질 순 없다고 생각해요.”

나름 열기가 소강되고 다들 의견을 정리할 때쯤, 클레어 비숍이 각자 인상 깊었던 구절을 말해 보라고 했다. 한 명씩 돌아가며 이야기를 하고, 제 차례가 오자 스탠리는 접어놓았던 페이지의 귀퉁이를 잡아 폈다.

그는 마지막 부분에서 나름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짧게 낭독했다. 저를 향해 온전히 집중하는 집단의 열기가 느껴져 좋았다. 마지막은 리처드 베켓의 차례였다.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는 사랑이란 은총도 환상도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사랑이란 무언가 되어 가는 행위, 순간순간 하루하루 의지와 지성과 마음으로 창조되고 수정되는 상태였다.”

그의 낮은 목소리에 실린 구절이 좋았다. 이런 문장이 있었나. 스탠리가 시선을 리처드 베켓의 무릎에 고정했다.

* * *

서점을 빠져나올 때, 켈리 클루게가 둘 앞으로 돌연 다가왔다. 여자의 갈색 볼이 발그레했다. 그녀가 작은 쪽지를 리처드 베켓의 큰 손 안에 쑤셔 넣고는, 씩 웃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그 미소를 안다. 그의 심장이 갑자기 추락했다.

리처드 베켓이 질문하기도 전에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달아났다. 운동화를 신은 발이 가벼웠다.

“뭐야. 러브레터냐?”

요즘 세상에 자필로 된 러브레터를 건네는 사람이 있다니. 과연 문학 애호가답군. 그러나 실소를 머금을 겨를은 없었다. 북 클럽에서 고양된 감정이 일순 와장창 깨졌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리처드 베켓의 손바닥, 정확히는 그 안에 있는 쪽지를 노려봤다.

리처드 베켓이 스탠리가 보이지 않는 방향으로 종이를 폈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고 글자 열을 눈으로 좇더니, 그것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뭐야.”

“그냥. 아무것도 아니야.”

리처드의 목덜미가 불그죽죽했다. 남자는 당황스럽거나 부끄러울 때면 목부터 열이 오른다. 그 사실을 관찰로 아는 스탠리가 추궁을 계속했다.

“러브레터 맞나 본데.”

남자가 고개를 수그렸다.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 모양새에 기분이 상했다. 더욱 당황스러운 건, 남자의 반응이었다. 저에게 터놓고 말도 하지 않는 게 영 이상했다.

이 더러운 기분은 뭐지.

아니, 애초에 내가 왜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거지.

뭐. 리처드 베켓이라고 계속 스탠리 제이미슨을 짝사랑하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어째선지 짜증스러웠다. 

둘은 한참을 말없이 길을 걸었다. 습윤하지만 끈적이지 않는 바람이 둘 사이로 불었다. 리처드 베켓이 먼저 입을 열었다.

“화났어?”

“아니. 내가 화날 일은 아니지.”

하하. 참고 참던 냉소가 결국 터져 나왔다. 애새끼처럼 구는 자신에게 화가 나오면서도 공연히 남자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친구끼리 이런 이야기도 못 나누냐. 솔직하게 터놓고 말할 수 있는 거잖아. 왜 숨기는 건데.

아니,

너, 나 좋아한다며.

속으로 내뱉은 마지막 한마디가 제 심장을 역으로 찔렀다.

“내가 거절했으면 좋겠어?”

리처드 베켓이 내뱉은 말에, 스탠리 제이미슨이 걸음을 멈췄다.

“뭐.”

“내가 고백, 거절했으면 좋겠냐고.”

리처드 베켓의 얼굴 절반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나머지 얼굴 반쪽에는 처연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었다. 적지 않은 세월을 끈질기게 버텨 온 사람 특유의 그것. 그 아름다움에 반한 사람들이 분명히 많을 거라고 생각하니 속이 부글거렸다.

어쨌든 남자가 떠보는 게 아니라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스탠리는 볼 안의 살을 씹으며 속으로 욕지거리를 주워섬겼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래.”

거절했으면 좋겠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바닥을 보며 말했다. 어쩐지 패배를 인정하는 기분이었다. 인간관계라는 것에 승패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만사가 게임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는 습관적으로 낙심해 버리고 만다.

그런 복잡한 남자의 마음을, 리처드 베켓은 미루어 짐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거절할게.”

남자가 그렇게 말하더니, 먼저 앞서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젠장. 스탠리 제이미슨이 이번에는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별들이 무심하게 빛났다.

* * *

눈을 뜨자마자 일과가 시작된다. 씻고,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거울 앞에 서서 제 모습을 한 번 확인한다. 그리고 곧장 신발을 신고 길을 나선다. 정비소까지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는다. 어쩐지 가쁘게 뛰는 심장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빠르게 걸어 나간다. 아침 일찍 문을 연 정비소는 언제나 기름과 철 비린 냄새가 난다.

“스탠리 보이! 리처드는 지금 차 견인하러 나갔단다!”

작업복을 입은 코든 영감이 그에게 손을 흔든다.

자신이 당연히 리처드 베켓을 찾을 거라고 생각하는 영감이 마뜩잖았지만, 반박할 수도 없었다. 남자가 없다는 이야기에 괜히 풀죽은 저를 보기만 해도 답은 명확하잖은가. 스탠리 제이미슨이 어깨를 으쓱한다. 그가 의자를 가리키며 무연히 말한다.

“여기서 기다려도 되겠죠.”

“…둘이 친하게 지내는 게 보기 좋구먼.”

코든 영감이 끌끌 대는 웃음소리가, 어째 다른 속셈이 있는 것 같다. 내친김에 궁금한 거 몇 가지를 묻기로 한다.

“영감님.”

“왜 이놈아.”

“리처드는 언제부터 여기서 일했어요?”

“그게, 참. 보자… 10년은 된 것 같구나.”

코든 영감이 아연한 시선을 문밖 풍경으로 던졌다. 그가 더듬더듬 옛날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 * *

코든 영감 말에 따르면, 그가 리처드 베켓을 처음부터 기꺼워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다지 곱게 보이지 않았다 했다. 리처드 베켓은 훤칠한 미남자에다 쿼터백이었지만, 코든 영감은 그가 다른 운동선수 출신처럼 거들먹거린다고 생각했다. 동네 골칫덩어리인 척 앤더슨과 같이 다니는 점에서도 일단 마이너스였고.

그랬던 그가 리처드 베켓에 대한 첫인상을 수정한 건 아주 사소한 계기 덕분이었다. 리처드 베켓이 혼자 다짜고짜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다고 찾아온 것이다. 몇 번 거절했는데도 끈질겼다고 했다.

“아마 돈 나올 데가 없어서 그런가 싶기도 했지만, 나 원…. 녀석이 배우고 싶다고 안달이 났길래 거뒀지. 너도 알지 않니. 녀석이 한 번 마음을 먹으면 집요하다는 거 말이다.”

“그렇죠.”

스탠리 제이미슨이 멋쩍게 웃었다.

“그렇게 미식축구 연습이 끝나면 우리 정비소로 와서 일하는 거 배우고, 그렇게 성실한 아이였다. 그런데 그러던 녀석이 갑자기 사라졌지 뭐냐.”

스탠리 제이미슨이 숨을 멈췄다. 수전 이모가 지나가듯 했던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식음을 전폐하고 집 안에 처박혀 있던 녀석을 꺼낸 게 수전 이모와 코든 영감이었다고. 피가 서늘하게 식는 기분이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녀석에게 사고가 났지 뭐냐. 퇴원하자마자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 걸 네 이모와 내가 간신히 설득했지. 아직 죽기는 이르다고 말이야. 그런 말도 있잖니. 삶이 레몬을 주면, 그걸로 레모네이드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 말이다.”

“죽기는 이르다니요. 무슨 일이-.”

스탠리 제이미슨의 가슴께가 서늘했다.

죽음? 리처드 베켓이 그런 극단적인 생각을 했다고? 그 정도로 고통을 받았단 말인가. 자신이 리처드 베켓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코든 영감이 몇 번 헛기침하며 문가에 눈짓했다. 남이 없는 자리에서 내밀한 이야기를 하기에는 부담스러운 모양인가 싶었다.

“알겠어요.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녀석에게는… 비밀로 할게요.”

“그래. 아무튼… 난 베켓 녀석을 높이 평가한다고. 동료로서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서 말이다. 정직한 노동의 진가를 아는 아이지. 그런 덕목은 요즘 드물잖니.”

“정직한 노동의 가치라.”

스탠리 제이미슨이 씁쓸하게 웃었다.

둘이 한담을 나눌 동안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견인차와 함께 들어온 것은 익숙한 모양의 차체였다.

음. T사에서 나온 전기차가 왜? 설마….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모든 T사를 몰고 다니는 인간이 다 그놈일 리는 없다고 마음을 다스렸다. 그때, 견인차 조수석에서 남자가 내렸다.

예감은 언제나 배신하지 않는 법이다.

“뭐야! 스탠! 네가 왜 여기 있어? 아니, 널 찾으러 온 거긴 한데! 여기서 볼 줄은 몰랐지!”

말 한마디 없이 찾아온 불청객. 피닉스 크로포드.

피닉스 크로포드. 저의 전 동업자. 전 동료.

빌 게이츠가 폴 앨런을 만나 마이크로소프트를 세우고, 스티브 잡스가 워즈니악을 만나 애플을 세웠듯이 스탠리 제이미슨은 크로포드를 만나 와이퍼를 세웠다. 세간은 그렇게들 말하곤 했다. 사실 스탠리 제이미슨 역시 그 사실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MIT에서부터 녀석은 천재였고, 크로포드의 코딩 없이는 그렇게 훌륭하고 빠른 웹, 애플리케이션을 만들 수는 없었을 거다.

둘은 최고의 동료였다.

피닉스 크로포드가 정치에 관심을 가지기 전까지는.

뉴에이지니 자본주의를 해킹하느니(<매트릭스>가 좀 선풍적이기는 했다) 여러 사상에 잔뜩 심취해 있던 녀석은 어느 날 60년대 록스타처럼 길게 기른 머리를 잘랐다. 그러고는 갑자기 예비 정치인이 되어 돌아왔지 뭔가. 물론 그것만이라면 별문제는 아니었다. 어차피 스탠리로서도 개인의 정치적 입장에 간여하고픈 마음은 없었다. 공화당이건 민주당이건 아나키스트건, 일만 잘하면 되는 거다.

그러나 그의 견해가 와이퍼에 스며들기 시작하자 갈등이 시작되었다. 대통령, 하다못해 주지사가 될 수 있다는 과대망상을 심어 준 작자가 어딘가에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스탠리와 남자 사이의 골은 깊어졌고, 결국 그 갈등은 스탠리 제이미슨의 퇴사에 일조했다.

그랬던 저 자식이 왜 여기 있지? 그러나 질문도 하기 전이었다. 정장을 입은 놈이 서서히 다가오더니-안경은 새로 바꾼 모양이었다- 망연히 의자에 앉아있는 스탠리 제이미슨을 포옹했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당황하며 남자의 어깨너머로 리처드 베켓을 바라봤다. 리처드 베켓 역시 적잖이 충격받은 모양이었다.

눈빛만으로 대화가 통하면 좋으련만.

* * *

피닉스 크로포드의 옛날 모습은 저와 다를 바 없는 너드였으나 지금은 신인 정치인 같은 모양새였다. 얼굴은 평범하게 잘생긴 축에 들었지만, 거들먹거리는 미소가 전반적인 인상을 해쳤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포옹을 억지로 풀며 하하, 웃었다.

“피닉스, 네가 여긴 웬일이냐.”

“당연히 널 보러 왔지. 스탠.”

“전화라도 하지 그랬어.”

이를 앙다물며 간신히 분노를 억눌렀다. 제가 퇴사할 때는 후련해했으면서 정작 필요할 때가 되니까 알랑방귀 뀌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

“내 전화 차단했던데? 그런 상황에서 구질구질하게 굴기보다는 직접 만나서 소통하는 게 좋지. 그게 우리 기업문화잖아?”

시발. 이런 데서 무슨 기업문화 운운을. 그냥 난 네가 좆같았던 거야.

“됐으니까, 일단 내게서 좀 떨어져 줄래.”

스탠리 제이미슨이 한숨을 쉬더니 남자의 품 안에서 완전히 빠져나왔다. 남자가 뿌린 머스크한 향수 내에 머리가 아팠다. 그러고 보니 남자의 차. 어째서 견인된 거지?

“근데 오는 길에 차 고장 났어?”

“아. 근방에 전기차 충전소가 없어서.”

…….

“생각을 하고 살아라, 좀.”

스탠리 제이미슨이 참다못해 남자에게 성을 냈다.

“괜찮아. 차야 또 사면 되는 거고. 이건 그냥 폐차하든가-.”

“미쳤냐. 왜 멀쩡한 차를 폐차시켜.”

저도 백만장자지만 이래서 부자들이 싫다. 모멸스러울 정도의 변덕. 어쩌면 자기혐오일지도 모르는 그 감정을 담아 남자를 비난조의 눈으로 쳐다보자 피닉스 크로포드가 슬금슬금 꼬리를 내렸다. 그가 스탠리에게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네가 여기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데리고 가려고 왔지.”

스탠리 제이미슨의 볼이 홧홧해졌다.

* * *

“아, 둘이 친구였구나!”

피닉스 크로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정비소를 나와 카페에 앉아 있었다.

아까 리처드 베켓의 아연한 표정을 생각하니 적잖이 입이 썼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 동업자는 입을 나불나불하기 시작했다.

“꽤 멋있게 생겼더라. 네 친구.”

“…그래.”

알겠으니까 그냥, 제발, 좀, 가.

피닉스가 눈치 없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 디트로이트에 잘 곳도 마련해 놨다고. 와이퍼에 대한 네 구상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핀. 내 입장은 그냥 똑같아.”

“그래, 그래. 네 말이 다 옳다고 쳐. 내가 다 잘못했다고 쳐. 안 그래도 얼마나 고통받은 줄 알아? 그놈의 광고, 알고리즘, 알고리즘! 감사니, 위원회니 모든 사람이 날 죽일 놈으로 몰지 못해서 난리라고. 뭘 바라는 건지 모르겠어. 제기랄.”

“그래서, 내가 너 대신 십자가에 걸리기를 원해?”

스탠리가 한숨 쉬며 말했다. 미간을 엄지로 꾹 찍어 누르며 밀려 들어오는 두통을 막아 보려 애썼다.

“그러기보다는, 이제 네가 얼마나 잘해 내는지를 보고 싶은 마음이지.”

피닉스 크로포드가 사악하게 웃었다.

* * *

피닉스 크로포드가 여기까지 행차한 건 그만큼 그가 애타있다는 방증이다. 하지만 그의 사정이 어떻건 간에 스탠리는 이 모든 상황이 짜증스러웠다. 오로지 저만을 위한 시간을, 웬 시답지 않은 놈이 훼방을 놓는다는 게 화가 났다.

남자와 카페에서 와이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진땀이 빠졌다. 그가 지금은 적어도 디트로이트로 갔다는 게 마음의 위안이었다. 속을 터놓고 하는 대화가 아니라 포커를 두듯이 상대방의 패를 추측해 가며 말을 해야 한다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뉴욕이나 실리콘 밸리에서는 일상처럼 해 왔던 교섭인데도, 염증이 났다.

리처드 베켓과의 대화와 정반대였다. 그의 앞에서는 패를 다 까 보여도 안전한 기분이 들었다.

그 생각만으로도 씁쓸한 감정이 일었다. 피닉스 크로포드를 처음 만났을 때는 평생 함께할 친구 중의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되고 말다니. 지성과 부에 있어서 맞는 동류가, 결국 가장 어색한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만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마트에 가서 가장 비싼 와인을 사 들고 리처드 베켓네 집의 문을 두드렸다.

“리처드. 리처드, 안에 있어?”

얼마 후 남자가 문을 열었다. 스탠리가 힘겹게 웃어 보아도 무표정인 그. 불길했다. 술병을 들어 보이자 그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

리처드 베켓이 눈가를 한 손으로 쓸었다. 뭔가를 생각하던 그가 스탠리를 안으로 들였다.

* * *

워낙 말수 없는 남자였지만, 기분이 좋지 않은 건 분명해 보였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저기압이었다.

어쩌면 그건 스탠리가 제 울적한 기분을 투영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스탠리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소파에 앉아 손을 비볐다. 셔츠를 팔목까지 거둬 입었는데, 덥지가 않았다. 그보다는 한기가 들 정도로 선선한 여름밤이었다.

리처드 베켓이 와인잔에 포도주를 적당히 채운 뒤 냈다. 둘은 말없이 잔을 기울였다.

먼저 말문을 연 건 스탠리였다.

“피닉스 참, 이상한 놈이지. 내 전 동료인데… 워낙 하는 짓이 독특해서 오해를 많이 사. 그래도 나쁜 녀석은 아니고. 좀 재밌는 놈이야-.”

“…그 자식이랑도 잤어?”

“뭐?”

스탠리 제이미슨이 얼빠진 얼굴로 리처드 베켓을 바라봤다. 리처드는 스탠리를 쳐다보지도 않고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손등에 돋아난 힘줄이 눈에 띄었다.

주마등처럼 지난번 내뱉었던 말이 지나갔다.

‘그래. 이런 짓 많이 했다. 내가 워낙 문란해서 말이야. 이 사람 저 사람이랑 재미를-.’

제기랄. 제가 개소리를 한번 거하게 했구나 싶었다.

그래도 업보라고 하기에는 이건….

좀 심하잖아? 하다 하다 못 해 느끼한 크로포드 자식과 저를 엮다니-. 녀석의 머릿속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미쳤냐? 내가 피닉스 크로포드랑 잘 바에는 수도원에 들어간다, 진짜.”

“…….”

“야. 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를 무슨… 진짜… 이상한 사람으로 보고 있었냐?”

차마 ‘그거 사실 다 뻥이었고, 남자는 너뿐이었어.’ 따위의 수치스러운 말을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억울하고 화가 나는 것도 사실.

스탠리 제이미슨이 남자의 뜨거운 손을 잡아챘다.

그러자 그의 표정이 따뜻한 조명 아래에서 훤히 드러났다. 푸른색 눈과 잔뜩 긴장된 붉은 눈매. 짓씹은 아랫입술까지.

리처드 베켓의 질투심 어린 표정은 충격일 정도로 흥미로웠으나, 분노는 여전했다. 저를 뭐로 보고 그런 괴상한 추궁을 한단 말인가. 호승심과 함께 약간의 짓궂은 심사가 받쳐 올랐다.

“……내가 재밌는 사실 하나 알려 줄까?”

스탠리 제이미슨이 남자의 손목을 붙잡고 낮게 속삭였다.

“나 너랑 잔 뒤에, 안 선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굳은 얼굴을 한 그를 보며 하하. 나직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말이지. 너랑 했을 때가 가끔 생각이 난다고. 그래서인지, 잘 안 된다. 그….”

다른 사람이랑 같이…. 그거, 못하겠더라고.

알잖아. ‘그거.’

* * *

스탠리 제이미슨이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리처드 베켓은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면 제가 모자란 사람이어서일지도 모른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저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부서지고 남은 잔해들로 간신히 만든 성이 있다. 그것이 지진이라도 난 듯 종횡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의 말은 그에게 순수한 기쁨을 줬다. 기분 나쁠 정도의 기쁨. 저의 내장이 안쪽부터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비겁한 희열이었다.

힘을 주어 떠듬떠듬 말했다.

“장난치지 마.”

너는 가끔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매일 자기 전마다 그날을 생각했으니까.

그는 생각했다. 비열하게 스탠리 제이미슨을 취하고 남자의 안에 저를 박아 넣은 날을. 명화의 귀퉁이에 거짓 서명을 하듯 그렇게 불법적으로 소유권을 주장했던 날을 생각했다. 그의 기억력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고 끈질겨서, 6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모든 것을 머릿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 수치심을 줬다. 스탠리 제이미슨을 생각하며 자신을 위로할 때면, 그는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다. 저에게 환희를 가져다준 남자가 동시에 그를 지옥에 빠뜨리기도 한다는 게 아이러니했다.

(다른 사람이 스탠리 제이미슨을 자신이 그랬듯이 만졌다고 생각하면 구역질이 났다. 폭력적인 분노가 꿈틀거렸다.)

* * *

스탠리 제이미슨이 손을 놓았다. 리처드가 자유로워진 손으로 다시 얼굴을 감쌌다.

“장난이 아니야. 난 사실을 이야기하는 거라고.”

30대에 발기부전이라. 웃기지 않냐. 너도 이제 나를 비웃을 구실이 하나 생긴 거야. 스탠리 제이미슨은 가장 죽도록 수치스러운 비밀을 꺼내 남자에게 들이밀었다. 그래야 어느 정도 공평할 것 같았다.

“그 많은 주식이 다 무슨 소용이냐. 그 짓을 못 하는데. 좋은 날 다 갔지.”

“안 비웃어.”

리처드 베켓의 목뿐만 아니라 눈 밑까지 살짝 홍조가 져 있었다.

“……말하고 나니 후련하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힘없이 웃었다.

리처드 베켓이 한숨 쉬며 마주 웃었다. 둘은 한참을 그렇게 멋쩍게 낄낄거렸다. 그러다가 스탠리 제이미슨이 아무렇지 않은 척, 떨리는 목소리로 제안했다.

“한번 확인해 볼래?”

리처드 베켓이 웃음을 멈췄다. 그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장난치지 말라고 했-.”

“장난 아니야. 궁금해서 그래.”

“…….”

“정말 그날 밤의 일 때문인지, 확신하지 못하겠어서-.”

“…….”

“젠장, 됐다. 내가 괜한 소리를-.”

스탠리 제이미슨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는 것을 리처드 베켓이 밀어 넘어뜨렸다.

“……!”

“이런 식으로……. 희망 고문하지 말랬지.”

리처드 베켓이 소파 위에 누운 스탠리 제이미슨을 내려다보았다. 스탠리의 관점에서, 올려다본 그의 모습은 부끄럼 타는 소년과는 거리가 멀었다. 드리워진 그림자 속에서 빛나는 두 눈이 야행성 맹수 같았다. 포식당하기 직전의 섬뜩함에 스탠리가 몸을 떨었다. 처음 느껴 보는 공포심이었다.

“일부러 그러는 거지?”

“…무…슨.”

“나 미치라고.”

둘은 한참 동안 긴장 상태에서 서로를 노려봤다.

리처드 베켓이 먼저 스탠리 제이미슨의 목덜미를 틀어쥐고 거세게 입을 맞췄다. 입맞춤이라는 단어는 부적절할지도 몰랐다. 그만큼 억세고 난폭한 움직임이었다. 그가 스탠리 제이미슨의 입술을 빨다가 살짝 씹었다. 재촉하는 움직임에 스탠리 제이미슨이 신음하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거대한 혀가 그의 입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남자가 스탠리의 혀를 빨고, 입을 애무하듯 키스했다. 나름-이성과-키스 경험이 있는 스탠리조차 질질 끌려가듯 했다. 그는 시작과 동시에 주도권을 상실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거대한 남자에게 깔려 끙끙대는 자신이 너무나 낯설었다. 지난밤의 일은 주취 중에 일어난 일이라고 쳐도, 이건 나름 멀쩡한 정신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니까. 완전히 몸과 정신을 갈취당하는 기분이 자못 번지점프를 하듯 아찔했다.

이런 걸 죽음 충동이라고 하나. 샤덴프로이데처럼 그에 걸맞은 단어가 어디 있을 텐데. 그러나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남자의 거센 움직임에 마주 반응하는 것조차 힘에 부치고, 온몸에 기분 좋은 탈력감이 들었다. 동시에 아랫배가 묵직하게 차고 오르는 기분에 손가락이 절로 곱았다.

리처드 베켓이 입술을 뗐다. 그의 억센 손아귀가 스탠리 제이미슨의 바지춤으로 향했다.

“아… 악….”

스탠리 제이미슨이 경악에 휩싸여 단말마의 비명을 내질렀다. 남자의 손이 닿은 바지 앞섶은 명백하게 단단했다.

“확인. 됐지?”

남자가 매섭게 말했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지금 남자의 눈에 비친 제 모습이 얼마나 바보 같을지 생각했다. 살짝 벌어진 입과 줄줄 흐르는 타액. 몽롱한 눈동자와 찌푸려진 미간. 늘 다듬어 왔던 세련된 모양새는 오간 데 없이 욕정으로 흐트러져 있다니. 그러나 제 위의 남자 역시 피차 마찬가지였다.

어엿한 성인인 두 사람이 발정기가 온 젊은 사자들처럼 뒹굴었다는 사실에 수치스러웠지만, 아래에 잔뜩 피가 몰린 작금의 상황을 해결하는 게 우선이었다.

“젠장. 떨어져.”

“…….”

“떨어지라고!”

스탠리 제이미슨이 젖먹던 힘까지 짜내 남자를 밀쳐내려 했다.

그때 남자가 꿈쩍 않고 버티는 통에 스탠리가 옆으로 구르면서 협탁 모서리에 강하게 부딪혔다.

악.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스탠리가 바닥을 굴렀다.

리처드 베켓이 놀란 듯 재빨리 몸을 뗐다. 저를 부축하려는 남자를 뿌리쳤다. 고개를 들자 고통스러운 표정을 한 남자가 있었다.

스탠리가 그대로 집 밖을 뛰쳐나갔다. 얼굴 옆면이 둔중하게 아팠다.

남자는 쫓아오지 않았다.

* * *

눈가가, 아니 왼쪽 얼굴이 시퍼렇게 부어올랐다. 아픈 것보다는 수치스러웠다. 거울을 볼 때마다 그날 밤의 상황이 떠올랐다.

잠이 들면 그는 악몽에 시달렸다. 양심 위원회가 다시 등장했다. 그들은 스탠리를 피고인석에 두고 엄중한 심판을 내렸다. 그들이 한목소리로 선고를 내리자 스탠리는 무저갱 속으로 떨어졌다.

* * *

밸린저 시티에서 디트로이트까지는 1시간 30분 정도의 거리였다. 굳이 오겠다는 피닉스의 제안을 뿌리치고 직접 디트로이트까지 운전했다. 남자가 제 유년기의 풍경을 버젓이 활보하게 놔둘 수는 없었다. 간밤에 잠을 자기는 했는데 충분한 휴식을 취한 것 같지 않았다. 자꾸만 시선이 풀렸고, 시야가 몽롱했다.

눈가에 푸르게 멍이 든 스탠리를 본 피닉스가 아연실색했다. 스탠리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술에 취해서 넘어졌어. 별거 아니야.”

잠깐 주저하던 피닉스가 다시 제안했다.

“역시… 나랑 같이 돌아갈래?”

“…….”

스탠리가 어둑한 눈가를 비비며 피닉스 크로포드를 쳐다봤다.

“아니면, 빌 게이츠처럼 ‘생각주간’이라도 가지는 거야?”

“…….”

스탠리 제이미슨이 피식, 웃었다.

“너 그렇지 않아도 롱아일랜드에 별장 있잖아. 거기에 비하면 여기는 자연도 그다지 볼 게 없더라. 근처에 송어 낚시 명소가 있는 것 말고는. 이런 곳에서 뭐 할 게 있다는 건지 모르겠어.”

“말은 고맙다. 그런데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조금만 기다려 줄래.”

내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야.

* * *

하이스쿨 두 번째 해, 크리스마스 무렵의 일이었다.

시크릿 산타. 지정된 사람에게 익명으로 선물과 편지를 준비하는 이벤트가 있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그 유치한 이벤트에 성질을 내면서도 (저의 시크릿 산타가 척 앤더슨이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도 있었다) 내심 기대했던 것 같다. 제발 노라 하트의 시크릿 산타가 될 수 있기를 기도했다.

<유니스 킴>

추첨표에 적힌 이름은 다행히도 척 앤더슨이나 사무엘 케이시 같은 놈들은 아니었지만, 기대한 이름은 아니었다. 하지만 싫은 녀석도 아니니,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무덤덤한 기분이 들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서점으로 가 유니스 킴이 좋아할 만한 양장본 노트와 펜을 샀다. 그리고 쪽지와 함께 그것을 상자에 넣었다.

자. 이제, 이걸 어떻게 몰래 전달할 것인가. 스탠리는 학교에 두 시간이나 일찍 도착했다. 시크릿 산타 날이라고 사물함을 전부 자물쇠 없이 열어 놓은 복도는 낯선 풍경이었다. 유니스 킴의 사물함 안을 열고 그 안에다 선물 상자를 넣었다.

‘누가 훔쳐 가지는 않겠지.’

괜히 불안한 마음에 추가로 가져온 종이봉투와 비닐로 상자를 가렸다. 유니스의 사물함을 닫고 주위를 둘러봤다. 고요한 학교는 무섭기보다는 평온했다. 폭력도, 소란도 없는 공간이 꽤 마음에 들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어슬렁거리다가 제 사물함 앞에서 멈춰 섰다. 그것을 열자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들쥐 시체만 아니었으면 좋겠군.’

그러나 스탠리 제이미슨이 미리 비워 놓은 사물함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인 것은.

죽은 박쥐의 사체도 아닌, 쓰레기도 아닌, 칼도 아닌.

레이 브래드버리의 <민들레 와인>과 편지였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떨리는 손으로 쪽지를 접어 폈다. 줄이 그어진 노트를 찢어 만든 종이 위에 단정한 글씨들이 쓰여 있었다.

--

스탠리 제이미슨에게.

안녕? 나는 너의 시크릿 산타야.

이런 말 정말 웃기고, 쑥스럽네. 따지고 보면 거의 매일 보는 사이인데 시크릿 산타라니. 학교 아이들이 이 이벤트로 난리인 걸 보면 조금 웃긴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나 역시 좀 긴장하고 있단 게 이상해. 그리고 조금은 슬퍼.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게 딱히 없어서.

네가 좋아하는 걸 사 주고 싶은데, 나에게는 컴퓨터 관련된 걸 마련할 돈도, 머리도 없네. 결국 책을 샀어. 이미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팔거나 버려도 돼.

아니, 사실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 부분은 지워져 있었지만 주의해서 보면 알 수 있었다)

이 세상에는 나쁜 것이 너무도 많아. 그래서 가끔은 겁이 나기도 해. 나는 너처럼 세상을 솔직하게 바라보는 사람을 보면 두렵거든. 걱정이 돼.

두서없어서 미안. 크리스마스 잘 보내. 안녕.

-너의 시크릿 산타가.

--

“두렵다니.”

뭐지…?

쪽지만 보면 제 시크릿 산타가 저를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기분 나쁘다면 기분 나쁘고, 좋다면 좋은 기분. 그것은 산란하는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처럼 기이한 느낌이었다.

한마디로 불편하고 쑥스럽고, 또 이상했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그 쪽지를 일기장 사이에 끼워 놓았고 제 시크릿 산타를 찾으려 애쓰지 않았다 찾으려면야 찾을 수 있었다. 서점에 가서 레이 브래드버리의 책을 산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되니까.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 * *

디트로이트에서 밸린저 시티로 돌아오는 차 안, 스탠리 제이미슨은 후면 미러에 비친 제 멍 자국을 확인했다.

그리고 잠시 뒤, 그는 깨달았다.

‘너였구나.’

가끔 긴 시간 간격을 두고 오는 통찰이 있다.

* * *

밤 10시.

스탠리 제이미슨이 리처드 베켓에게 전화를 건다. 몇 번의 수신음 끝에 남자가 받는다.

“리처드.”

[…….]

“너, 내가 무서웠어?”

[……어떻게….]

시크릿 산타 이야기라는 걸 남자는 직감적으로 아는 모양이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대답했다.

“그냥. 갑자기 생각이 나더라.”

[…….]

“리처드. 지금도 내가 두려워?”

어때. 지금의 나도 그때처럼 세상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 같아? 아니면, 너무 비뚤어져 버렸을까.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나는 네가 두렵다.”

나를 좋아하는 네 마음이 두렵다. 네 마음의 크기가 두렵다.

하지만….

“우리 그냥, 한번 사귀어 볼까?”

* * *

“우리 그냥 한번, 사귀어 볼까?”

호기롭게 던진 한마디였다. 신중히 생각하고 내뱉은 말은 아니었지만, 진심이 아닌 것은 결단코 아니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타고난 승부사였다. 손해를 입을 수는 있어도 재밌어 보이는 기회를 그냥 놓치는 사람은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 기회라는 예감이 들었다. 지금 남자를 놓치면, 그다음은 없다.

그래, 스탠리는 남자를 놓치기 싫었다. 늘 번듯하게 웃는 남자를. 묵묵히 성실하게 일하는 남자를. 동시에 지독하게 끈질기고 맹렬한 남자를. 제 밑바닥까지 끌어안는 그 남자를 놓치는 게 아쉬웠다. 어떤 방식이든 옆에 붙들어 두고 싶은 독점욕이 불타올랐다.

답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자 절로 초조했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게 된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재촉하듯 말을 덧붙였다.

“내 말은, 진지하게 ‘미래를 약속하자는’ 건 아니고. 일단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면서-.”

이성과 교제할 때 하던 버릇이 그대로 튀어나왔다. 하지만 무례를 저질렀다는 자각은 없었다. 남자가 진심이라는 건 알지만 사귀는 건 또 다른 문제니까. 서로 맞춰갈 시간이 응당 필요하지 않겠는가?

잠시간의 침묵이 있었다. 

남자가 통화를 끊었다.

* * *

한달음에 남자 집으로 달려 나가고픈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지금까지 스탠리 제이미슨의 연애는 끝은 좋지 않다손 치더라도 시작은 늘 명쾌했다. 청사진이 딱 잡힌 프로젝트 같다고 해야 할까. 진지하지 않은 가벼운 교제를 시작하자, 이 말을 던지면 상대방은 희망을 품고 달려들곤 했다. 어쨌건 간에. 이런 불명확한 시그널은 처음이었다.

남자의 반응은 혼란스러움 그 자체였다.

리처드 베켓은 저를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너무 쑥스러웠나? 긴장되어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끊어 버린 건가?

설마 거절한 거야?

아니, 지난밤에 너무 재수 없게 군 게 문제였을까?

아아. 번연히 저를 좋아하는 남자를 향해 도발한 건 아무리 생각해도 죄질이 나빴다. 혹시 그 때문에 리처드가 저를 싫어하게 되었다면? 키스 후에 일어난 몸싸움을 생각했다. 빳빳하게 선 제 바지춤 아래의 물건을 쥐고 확인 끝났다며 날카롭게 응수하던 남자를.

그 시선에 흥분과 죄악감을 동시에 경험했었지.

뜬눈으로 밤잠을 설치고 정비소로 향했다. 가지고 있는 최대한 좋은 옷을 걸치고 피로한 눈가를 꾹꾹 눌러 마사지했다. 왼쪽 눈가에 시퍼렇게 들어 있는 멍이 유일한 문제였다. 고심 끝에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정비소에 도착하자마자 묵묵히 차체를 손보고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모자를 쓰고, 남루하지만 깨끗한 작업복을 입은 남자는, 스탠리가 온 줄도 모르는 것 같았다. 괜히 심술이 나고 초조해서 헛기침을 해 봤다.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다시 차체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명백한 모르쇠에 잔뜩 신경이 곤두섰다.

“뭐냐.”

“…….”

“너 왜 갑자기 이러는 건데.”

“별로. 할 말 없어.”

그렇게 나오시겠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성큼성큼 남자 앞으로 다가갔다. 쿨하게 해결하려던 마음은 진작에 가셨다. 지금부터는 이판사판이었다.

“설마 내가 전에 장난쳐서 삐졌냐?”

발기부전 농담이 남자에게 상처가 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남자가 괴로운 한숨을 쉬었다. 전혀 잘못 짚었다는 반응에 울컥 분노 수치가 상승했다.

“사귀어 보자니까. 그런 이유도 아니면…. 대답은 왜 안 하는데.”

승낙이건 거절이건. 확답이 나올 때까지 정비소를 빠져나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장난치지 말랬잖아.”

리처드 베켓이 차량의 보닛을 닫고, 스탠리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스탠리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맞받아쳤다. 

“장난 아니야.”

“…….”

“그래. 솔직히, 내가 네 녀석을 연애 감정으로 좋아하는지는 모르겠다. 인정해. 혼란스러운 게 사실이야. 하지만…….”

“…….”

“하지만, 계속 네놈이 신경이 쓰인다고…. 네가 이런 데서 일하고 있는 것도 짜증이 나고, 괜히 척 앤더슨 개새끼에게 무시당하는 것도 화가 나. 젠장. 그 여자에게 쪽지 받은 것도 화가 나… 죄다. 죄다 짜증 난다고.”

“……”

리처드 베켓이 묵묵히 연장을 정리함에 넣었다. 그가 기둥에 허리를 기대고 상체를 옹송그렸다. 그러나 연약해 뵈기보다는 고민하는 모양새였다. 스탠리가 계속해서 중언부언했다.

“제기랄. 나도 내가 무슨 소리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사귀면 알 수 있는 거 아니야? 말했잖아, 여유롭게 서로에 대해서 알아가면서 시작해 보자고.”

“모르겠어?”

“뭘….”

“난 여유롭게 안 돼.”

“…….”

“스탠리. 그냥 하는 소리면 취소해도 된다는 이야기야.”

리처드 베켓이 바짝 다가오더니 스탠리 제이미슨의 선글라스를 벗겼다.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리처드 베켓의 모습에, 스탠리 제이미슨이 당황했다. 그러나 리처드는 침착했다.

그가 장갑을 벗어 바닥에 떨구고 큰 손으로 스탠리의 볼을 감쌌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차분하게 스탠리의 멍을 쓰다듬었다. 아프지 않게, 부드러운 손길로였다. 그가 습윤한 목소리로 말했다.

“…널 아프게 하는 인간은 다 죽이고 싶은데.”

“…….”

“이번에는 그게 나라는 게 화가 나.”

“무슨… 그건 내가 실수로 굴러 넘어진 거야.”

스탠리 제이미슨의 심장이 가쁘게 뛰었다.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수준의 박동이었다. 무서웠다. 이대로 가다가는, 전부 그르쳐버릴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나는 너와 어울리지 않아.”

남자가 그 말과 함께 손을 내렸다. 그의 손가락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슬로 모션처럼 느리게 감지되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그게 다야?”

진부하다. 리처드 베켓. 스탠리 제이미슨이 마음에도 없는 날 선 말을 내뱉었다. 제 얼굴을 감싸던 온기를 그리워하면서.

“그래.”

“너, 나 좋아한다며.”

“그래.”

“내가 무슨 공주라도 되냐? 넌 기사고? 지금이 중세 시대냐?”

“난-. 아무것도 아니야.”

리처드 베켓의 입가가 비틀렸다. 그가 두 손을 떨궜다. 그 모습에 심장에 얼음 조각이 박힌 것처럼 아팠다.

“야.”

남자가 초광속으로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눈에 가까이 있는데, 바로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결국, 잡을 수 없다.

“대답을 원한다고 했지?”

아득히 멀리서 들려오는 것처럼 아연한 목소리였다.

“…….”

“거절할게.”

* * *

자존심이 상한 건 사실이었지만 그게 가장 큰 문제는 아니었다. 마음이 부스러지는 기분이었다. 친하게 지낸 지 오래되지도 않은 남자였는데도, 뭔가를 기대하고 있었던 걸까.

무한한 애정을 기대했다면, 스탠리 제이미슨은 천하의 개새끼였다.

‘이제는 정말 놈을… 놔주자.’

일전에 울먹이는 목소리로 저에게서 떠나 달라 했던 그였다.

집으로 돌아와 짐부터 쌌다.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두 번째 실연이었다.

처음은 노라 하트. 두 번째는 리처드 베켓.

아니, 어쩌면 첫 번째 실연일지도 모르겠다.

노라 하트에 대한 제 마음이 그저 설익은 동경에 지나지 않는 거였다면 말이다. 

왜 모든 중요한 것들은 뒤늦게 알게 될까. 미래에 좋아하는 사람을, 과거로부터 거슬러가 다시 마음에 담을 수 있는 걸까.

* * *

어제.

스탠리 제이미슨과 어수선한 미팅을 마친 피닉스 크로포드는 정비소 명함을 꺼냈다. 능숙한 손길로 번호를 입력한 후 전화를 걸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밸린저 정비소입니다.]

“일전에 T사 차 견인 맡겼던 사람입니다. 기억하시겠죠. 피닉스 크로포드.”

[……네. 무슨 문제라도.]

문제라면 있을 턱 없다. 전기차 수리는 정비소의 담당이 아니었으니까. 피닉스 크로포드가 능숙하게 포문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죠. 스탠리의 문제가 댁과 관련되어 있는 게 사실인가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척하지 마시죠. 10년을 넘게 봐 온 친구의 마음 정도는 눈치챌 수 있어요.”

[…끊겠습니다.]

“그 멍. 당신 때문이지?”

[…….]

“솔직히 당신을 추궁하거나, 비난하고 싶지 않아요. 오히려 동정심이 가는 편입니다.”

스피커 너머는 침묵만이 자리했다. 피닉스 크로포드는 엷게 미소를 지었다. 이번 상대는 꽤 신중한 사람인가 보군. 스탠리 제이미슨의 취향(브루넷, 활발한 성격, 여자)과는 오억 광년 떨어진 남자가 자못 흥미로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 흥미로움보다는 실리를 좇아야 한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그런 식으로 상대방에게 희망을 줬다가 뺏는 스타일이거든요. 아. 친구의 뒷담화를 하려는 의도는 없어요. 녀석의 연애 편력을 지켜본 입장으로서 충고를 드리는 겁니다.”

[충고 같은 거, 필요 없어요.]

남자의 목소리에 가득 담긴 적의. 입꼬리가 좀 더 올라간다. 남성 상대는 처음이라 조금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제대로 된’ 사람을 잡았을 줄이야. 하지만 상대가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스탠리 제이미슨은 망쳐 버릴 게 분명하다.

놈에게서 애초에 건실한 인간관계를 기대한다라. 얼토당토않은 소리였다. 하지만 피닉스 크로포드는 그것을 남자의 결점이라고 보지 않았다. 천재들은 원래 조금씩 문제가 있는 편이니까.

“그냥, 이런 말씀만 드리죠. 어차피 쓸모없는 일에 정력 낭비하지 말고, 스탠리를 놓으라고-.”

-뚝.

통화가 끊겼다. 피닉스 크로포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가능성을 타진했다.

* * *

“당신이 그쪽일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마주 앉은 남자에게서 나는 고급 향수 냄새가 불편했다. 그런데도 내색하지 않은 이유는,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부티크 호텔 최상층에 있는 루프톱 바였다. 시끄럽기는커녕 잔잔한 재즈와 사람들의 조심스러운 수런거림뿐이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제 잔에 뵈브 클리코 스파클링을 따르며 잔잔하게 웃었다. 눈앞의 남자는 그럴싸하게 생긴 장신의 미남자로, 유수의 로펌 파트너라 했다. 이름은 스티븐 알렌코였던가. 그다지 중요한 사항은 아니었다. 목적이 분명한 만남이었으니까.

“뭐, 저야 잘된 일입니다. 세상에 스탠리 제이미슨과 데이트할 날이 오다니.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데이트라. 많이 과장하는 것 같은데. 스탠리 제이미슨이 씁쓸하게 웃었다. 뉴욕으로 돌아온 지 한 달. 와이퍼에서 다시 일하게 된 지 2주 반 정도가 지났다. 일이 있어서 그나마 나았지만, 사람이 3대 욕구를 영영 해결하지 않고 살 수는 없었다.

거기에 불붙은 좌절감이 스탠리 제이미슨을 괴롭혔다. 어쩌면 가볍게 넘길 수도 있는 거절이었다. 첫사랑이 괜히 첫사랑이 아니지 않은가. 이루어지지 못해서 더 좋은 인연으로 남을 수 있는 거고, 애초에 친구로 시작하자고 했던 건 스탠리 제이미슨, 자신이었다.

그런데도 괴로웠다. 눈가의 멍은 완전히 나았지만 마음속에는 씻을 수 없는 멍이 남은 것 같았다. 계속해서 욱신거리는 결핍감이 있었다. 거슬렸다.

동성의 남자와 자 보려는 계획을 실행에 옮긴 건 어쩌면 바로 그 좌절감 때문일지도 몰랐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시선을 흐렸다. 속전속결. 빨리 취하고, 빨리 해결을 보자. 몇 잔이고 술이 식도를 타고 들어갔다. 두 번째로 밸린저 시티를 떠난 이후, 부쩍 음주량이 늘었다. 의사는 술을 줄이고 잠을 늘이지 않으면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그 조언은 상충하는 데가 있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자기가 어려웠고, 잠을 자는 건 애당초 불가능했다. 오로지 일만이 그의 안식처였다.

결국 끝의 끝까지 몰리고 나서야 선택한 게 고작 이런 거였다. 모르는 남자와 자 보기. 얼마나 초라한지, 자조의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 웃음을 상대는 다르게 해석한 모양이었다. 그가 유혹하려는 듯 스탠리의 왼손을 감싸 쥐었다.

소름이 돋는다. 평생 한 노동이라고는 서류 작업밖에 없었을 것 같은 매끈한 손이 기분 나쁘게 축축했다. 흡사 뱀 가죽같이 서늘한, 그러나 동류의 손이었다. 반사적으로 빼려는 손을 남자가 더 끈질기게 얽어맸다.

“처음은 아니라고 했죠?”

“뭐… 그런 셈이긴 합니다.”

스탠리가 어색하게 응수했다.

“그런데 처음이 꽤 좋았나 봐요? 이렇게 또 남자를 만나 볼 생각을 하신 거 보면.”

변호사 양반이 던진 한마디가 처음으로 스탠리를 흔들었다.

“…….”

“너무 고민하실 필요는 없어요. 헤테로들 중에 동성과 섹스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스탠리가 잔 가장자리에 이는 포말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좋았었나. ‘좋았다’는 표현은 너무나 많은 것을 생략하는 것 같았다. 완전한 놓아 버림, 끝까지 저를 몰아붙이는 악력. 그것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저와도 실망하지 않을 거예요. 아, 이거 너무 이상한 표현인가.”

하하. 변호사가 웃는 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 *

부티크 호텔의 스위트룸 층에서 내려 방으로 들어갔다. 술이 좀 들어가서 그런가, 호기로운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끔찍했다. 상대방을, 아니 자기 자신을 수단 삼아 괴로움을 잊으려고 하다니.

리처드 베켓이 좋아했던 그 남자아이는 어디로 간 것인가. 의문이었다.

세상을 똑바로 응시할 줄 알았던 남자아이 말이다.

문을 닫자마자 미니멀한 실내 구조가 펼쳐졌다. 그러나 그걸 눈에 담기도 전이었다. 옆에 바짝 붙어 선 남자가 스탠리를 돌려세웠다. 거센 힘은 아니었으나 순순히 고개를 돌린 스탠리가 남자와 입술을 부딪쳤다.

‘젠장.’

놀라울 정도로 감흥 없는 키스에 스탠리 제이미슨이 얼떨떨한 기분으로 입술을 핥았다. 상대방은 반대로 적잖이 흥분한 모양이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에 혹한 것이든, 그의 아우라에 흥분한 것이든 어느 쪽이건 상관없다는 투였다. 그가 스탠리의 슈트를 벗기려는 찰나였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상대방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 주도적인 타입이신가? 직접 벗는 쪽이 좋으신가 봐요?”

“더… 더, 못 하겠습니다.”

“네?”

남자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스탠리 제이미슨이 그로부터 몸을 떼며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이건, 도저히 못 하겠네요. 혐오스러운 건 아닙니다만….”

동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이걸 원하는 게 아닌 것 같아요.

“…….”

남자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상당한 타격을 입은 듯 보였지만, 그가 애써 괜찮다는 듯이 너스레를 떨었다.

“어쩐지, 대화 내내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계시더군요. 뭐…. 괜찮습니다. 싫다는 사람과 자는 취미는 저도 없으니까요.”

남자가 혀를 찼다. 그가 금방 셔츠 소맷단을 정리하고 곧바로 방을 나갔다. 남은 것은 멍하니 망부석처럼 서 있는 스탠리 제이미슨이었다.

그는 곧장 화장실로 들어가 입을 씻었다. 혐오스럽다면 가장 혐오스러운 건 바로 자신이었다. 음식 없이 술만 들이켜서인지 속이 안 좋았다. 곧바로 변기에 속을 게워냈다.

구역질 때문인지 눈물이 흘렀다. 다시 입을 깨끗이 닦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나는. 나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 했던 거지?

* * *

와의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중이었다. 아니, 적어도 초반부에는 그랬다. 제가 가는 곳이면 카메라가 어디든지 따라다닌다는 게 퍽 귀찮을 만도 했지만,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일과 관련된 일이라면 언제든지 좋은 모습을 연출할 수 있었다.

감독은 유쾌했고 스태프들도 그렇게 번다하게 굴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다가 갑자기 문제가 발생했다.

“유년기의 기억에 관해서 이야기해 주세요.”

“밸린저 시티에서 촬영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친한 친구는 있었나요?”

제작진들의 말에 따르면, 스탠리 제이미슨이 밸린저 시티를 방문하는 컷이 필요했다. 그냥 대충 몇 개의 사진으로 때우면 되지 않느냐고도 해 봤다. 그러나 3부작이나 되는 다큐멘터리라 절대 안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일단 다른 촬영분을 확보한 상태에서 는 더욱 끈질기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말을 넘겨듣는 척하는 것도 차차 힘에 부쳤다.

“뭘 걱정해? 그냥 한번 학교 둘러보고 ‘저는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한마디만 해.”

피닉스 크로포드가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커피를 추출하며 흥얼거렸다.

“절대 싫어.”

“왜. 그게 너의 인간미를 돋보여 줄 텐데? 사람들이 널 더 좋아하게 될 거야.”

“하. 반대겠지. 그리고 난 동정 같은 거 질색이야. 누가 날 연민한다는 생각만으로도 토가 나와. 차라리 미움받는 게 낫지.”

“그런 비위로 잘도 일하겠다.”

“네가 내 컨설턴트냐. 그만해라.”

그렇게 빈정거리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감독은 밸린저 시티 촬영분이 없으면 작업에서 손 떼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유쾌하게만 보았던 인사가 사실은 독불장군이라니, 괜히 다큐멘터리계의 거장이 아니다 싶었다.

“어쩌면 그게 너를 풀어 나갈 핵심이라고 보는 모양이지.”

피닉스 크로포드가 커피잔을 홀짝이며 중얼거렸다.

“내 핵심이 멍청한 하이스쿨 시절에 있다…라. 개소리.”

“정 께름칙하다면 그냥 시늉만 해. 그,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 한 명쯤은 있을 거 아니야. 그 사람한테 부탁하라구. 아 맞다. 정비소 친구는 어때-.”

“그만. 여기서 더 아는 척하지 마. 크로포드.”

스탠리 제이미슨과 피닉스 크로포드의 시선이 날카롭게 맞부딪혔다. 영역을 침범하는 건 용서하지 않는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다시금 눈빛으로 선언했다. 피닉스가 왼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워워. 너랑 싸울 생각은 없어. 그냥. 편하게 생각하라고. 그럴듯하게 구는 거 네 특기잖아. 대충 밸린저 시티 가서 추억에 잠긴 척하면 될 일이야.”

“…….”

스탠리 제이미슨이 공격적으로 피식, 웃었다.

네가 뭘 안다고.

피닉스 크로포드가 은근슬쩍 저를 조종하려 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학부 때부터 언제나 그랬다. 그리고 스탠리 제이미슨도 그에 대해서 별말은 안 했는데, 왜냐하면 그 역시 남자를 종종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수단 삼는 관계라고 할까. 

그러나 남자의 입에서 리처드 베켓이 나오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감히, 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나는 몰라도 리처드 베켓은 네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장기 말이 아니야.

만약 그가 남자에게 손을 뻗는다면. 스탠리는 난폭한 감정을 삭이며 볼 안의 살을 씹었다. 

* * *

결국 밸린저 시티에서의 촬영에 응한 건 귀찮은 마음 때문이었다. 더는 타인의 징징거림을 받아 주기 싫은 것도 있었고, 이런 식으로 굴다가는 오히려 수상하게 보일 것 같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피닉스 크로포드까지 관심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차라리 쿨한 척 몇 컷 찍고 오면 될 일을, 괜히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승차감이 좋은 차량 뒷좌석에 앉아 쪽잠을 잤다. 회사에서 붙여 준 운전사는 말수가 없어서 좋았다. 괜히 사근사근 말을 붙이는 타입은 별로 맞지 않았다.

일단 클레어 비숍 선생님의 양해를 구했다. 그녀가 제작진과 인터뷰를 하고, 또 스탠리를 만나 졸업 앨범을 보는 장면을 촬영하기로 했다.

그뿐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건 왜일까. 마음속의 설렘을 죽여 없애야 하는데도 어려웠다.

‘결국 돌고 돌아 다시 밸린저 시티군.’

피할 수 없는 저주같이 얽혀 들어온다.

마을이, 또 남자가.

* * *

촬영에 앞서 도착한 밸린저 시티는 똑같았다. 떠난 지 한 달 남짓 되었으니, 당연히 다를 게 없었다. 그럼에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리처드 베켓에게 차였는데도 마을은 멀쩡하다는 게 너무 이상했다. 저와 남자는 이렇게 변했는데, 마을은 그대로라는 게 어쩐지 불공평했다.

짐을 풀고 잠시 침대에 누웠다. 얼마 안 가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워 바깥으로 향했다.

늦저녁, 정비소는 문을 닫았을 때였다. 지친 몸을 끌고 그곳으로 걸어갔다. 무의식적인 움직임이었다.

불이 꺼진 정비소 앞에서 망연하게 섰다.

나는 무엇을 확인하고 싶은 걸까. 스탠리 제이미슨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니, 남자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손에 열쇠가 들린 것을 보아 막 문을 닫은 모양이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성큼성큼 그에게로 다가갔다.

저도 모르게 한마디가 나왔다.

“손 한 번만 만져 보자.”

“…뭐…?”

스탠리 제이미슨이 다짜고짜 리처드의 손을 폈다. 남자의 손금에 그의 운명이 나타나 있을까? 그가 그런 일을 당하고, 그렇게 힘들게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리라는 것이? 제 손과는, 변호사의 손과는 다르고 그 누군가의 손과도 다른 남자만의 손이었다. 검박한 아름다움을 가진 손.

남자는 제 손바닥을 살피는 스탠리를 흡사 유령이라도 되는 듯이 바라보았다. 현실감이 없는 모양이었다. 스탠리가 남자의 손을 쥐고 울 것처럼 말했다.

“이번에는 한 번만… 한 번만, 이렇게 안아 보자.”

스탠리 제이미슨이 리처드 베켓의 품에 제 몸을 겹쳤다. 뜨겁고 단단한 몸체를 옷가지 너머로 느끼면서 더욱 꽉 껴안았다. 그의 품에서 기름 냄새와 철 냄새, 그리고 솔 냄새가 났다. 방황하던 남자의 손이 스탠리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의 손길은 완강하고 흔들림 없이 단단했다.

편안하고 행복했다. 잃어버린 유년의 추억처럼.

둘은 한참의 포옹 끝에 아쉽게 몸을 뗐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말했다.

“고맙다….”

“…….”

“나, 뭐. 그냥 여기에 일이 있어서 왔어.”

“…그래.”

남자가 얼굴을 숙이며 대답했다. 이제야 현실감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계속해서 묵묵히 말해 나갔다.

“3일 뒤면 떠나. 그리고 다시는 안 돌아올 거야. 네 말대로.”

“…….”

“잘 있어. 그동안… 여러 가지로 미안했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몸을 빠르게 돌렸다. 제 표정을 들키기 싫었다.

거울이 없어도 알 수 있다. 가장 취약한 표정을 지금 짓고 있다는 걸.

동정심을 사고 싶지는 않았다.

* * *

카메라는 집요했다. 건조한 렌즈는 스탠리가 클레어 비숍을 껴안고 악수하는 장면을 면밀하게 추적했다. 둘은 반가운 것처럼 (실제로도 반가웠지만) 인사했다.

클레어 비숍 선생님은 차분하게 앉아 인터뷰이의 질문에 답했다. 스탠리는 어렸을 때부터 창의적이고 꼼꼼했다느니. 크게 될 줄 알고 있었다느니, 의례적인 답을 늘어놓았다. 이제 스탠리와 비숍 선생은 졸업 앨범을 들여다보는 컷을 찍고 있었다.

두툼한 졸업 앨범이 비숍 선생님 손에서 펴졌다. 스탠리는 졸업 앨범을 가지고 있지 않다. 정확히는 어딘가에 있는지 모른다. 그것을 찾을 생각도, 다시 펴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어쩐지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졸업 앨범이 카메라 앞에서 펼쳐지면, 옛날의 못난 제 모습이 만천하에 까발려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기가 들었다. 하지만 이제 와 막을 수는 없었다.

“자, 네가 여기 있구나.”

비숍 선생님의 손가락 끝에 스탠리의 이름이 이탤릭체로 적혀 있었다. 그리고 작은 네모 사진에 어린 스탠리 제이미슨이 있었다. 어정쩡하게 웃고 있는 검은 머리 소년. 두껍고 큰 안경 너머의 수줍은 눈동자. 비틀린 입매. 창백한 피부.

생각보다 그렇게 가고일 같지도, 이상하지도 않은 제 모습을 보고 스탠리는 놀랐다. 척 앤더슨이, 아니 밸린저 하이스쿨이 욕하고 비웃었던 그런 얼굴이라기에는….

그냥 평범한…. 수줍은 학생의 얼굴이었다.

허탈해서 절로 웃음까지 나왔다.

결국 스탠리 제이미슨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닌, 타인의 말에 줄곧 휘둘려 왔던 것이다.

대학교 입학 이후로 고등학교 시절 사진을 한 번도 보지 않았다. 어머니야 몇 장 가지고 있겠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건 전부 버려 버렸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스탠리 제이미슨은 상처 받았었다. 아무리 밝고 씩씩하게 살았다고 해도 속에서는 곪아가고 있었다.

과거를 부정하고 자신을 혐오하고 모든 것을 바꿔 나가며 전진했다. 그러나 전혀 소용이 없었다. 거대한 상처 위에 대충 거즈를 붙여 놓은 모양새였다.

선생님이 손가락을 치우자 이번에는 스탠리 제이미슨의 좌우명란이 보였다.

우스갯거리나 좌우명으로 채워진 다른 아이들의 칸과 달린 공란으로 남겨진 그곳은, 마치 스탠리 제이미슨의 공허한 마음 같았다.

“공란이네요.”

스탠리가 타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무심하게 말했다.

“너한테 몇 번이고 물었는데 그냥 비워 두겠다고 하지 않았니. 난 지금도 기억나는구나.”

“…….”

하긴, 졸업 앨범을 펴 볼 동문에게 할 이야기라고는 없었다. 잘 살아라. 따위의 넉살 좋은 말을 하기도 그랬고, 그렇다고 그럴싸한 포부를 남기기에는 너무 수줍었다. 결국 아무것도 정리되지 못한 채 넘겨 버렸다.

제작진이 물러나고 난 다음에 같이 빠져나가려는 스탠리 제이미슨을, 클레어 비숍이 불러세웠다.

“보고 싶은 게 또 있으면 찾아 주마.”

“글쎄요. 제가 보고 싶은 게… 아.”

* * *

프롬 사진을 보고 싶은 건 순전히 충동의 발로였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프롬에 나가지 않았다. 파트너를 구하지 못한 것도 있었고, MIT 합격증서를 받은 상황에서 애새끼들 놀음 같은 건 유치할 뿐이었다. 그런데도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선생님이 두툼한 앨범의 끝부분을 폈다. 프롬에 참석한 아이들의 단체 사진과 다 같이 춤을 추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대망의 프롬 커플 사진이 크게 있었다. 프롬에서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커플이 상을 받는 사진이었다.

모조 티아라를 쓴 노라 하트와 그녀의 뒤에 선 남자가 보였다. 새파랗게 어린 리처드 베켓이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노라 하트에게 온전히 스포트라이트가 가도록 잠시 비켜선 모습. 행복해 보이는 커플이라기보다는 연예인과 보디가드의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청춘 특유의 풋풋함이 사진 속에 가득했다. 리처드 베켓의 얼굴에는 현재의 스산함이 없었다. 해맑은, 그럼에도 쓸쓸한 젊음이었다. 어쩐지 아까웠다. 저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보지 못한 것이.

“원하면 복사라도 해줄까?”

비숍 선생의 한마디에 스탠리 제이미슨이 흠칫, 떨었다.

“아니, 괜찮습니다.”

“노라를 짝사랑했잖니. 기념으로 한 장 가지고 싶다면야 줄 수 있단다.”

“…아니요. 괜찮아요.”

“…….”

클레어 비숍 선생이 눈을 내리깔았다. 잠시 그녀가 뭔가를 생각했다.

“가끔은…. 그냥…. 솔직하게 터놓고 대화를 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단다.”

누구에게?

노라 하트에게?

아니면, 리처드 베켓에게?

스탠리 제이미슨은 클레어 비숍의 눈을 피했다.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 * *

누군가를 기다려 본 적 있어?

누군가를 너무나 기다려서, 시간이 정지해 버린 것 같은 느낌말이야.

나는 언제나 그런 기분이 들어. 네가 동부로 떠난 이후, 시간이 멈춘 것 같아 의아했어.

물론 세월은 여지없이 흐르고, 나는 더 이상 열일곱이 아니지. 시시하게 나이를 먹어가고 어른이 돼.

일상은 소중하지만, 너에 비하면 모든 것이 초라해. 그건 슬픈 일도 나쁜 일도 아니야. 나는 여전히 살아갈 수 있다는 데에 감사하고 있어.

너를 사랑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어. 이 아픔도 하나뿐일 테니까. 내가 끝까지 붙들 수 있는 고통이 있다는 게 삶의 위안이 됐어. 이상하지? 가끔은 고통만이 삶을 지탱하는 지지대가 될 수 있다는 말.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아.

아니, 네가 이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는 고통스럽지 않았으면 해.

리처드 베켓은 저를 꽉 껴안은 스탠리 제이미슨을 생각했다. 그것은 마치 피어나는 꽃을 보는 것 같았다. 전혀 연약하지 않은, 건장한 남자인데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남자가 고개를 돌려 우는 듯한 표정을 할 때는, 그 봉오리가 바람에 거세게 흔들리는 것을 보는 것 같았다. 위태로워, 그것을 꺾지 못하고 주춤하는 사이였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사라져 갔다.

그 뒷모습에 제가 기억하던 그 어린 스탠리가 겹쳤다. 사슴처럼 뛰어다니던 그가.

강연을 마치고 돌아서던 영상 속의 스탠리가.

정비소에서 나와 손을 흔들며 사라지는 스탠리가.

그가 기억하고 사랑하는 스탠리의 모습들이 무수히 많은 겹으로 얹히고 또 흩어지며 산란했다.

빛을 바라보는 것도 아닌데 자연히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 * *

스탠리 제이미슨이 촬영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목욕재계부터 하고 자리에 앉았다. 식탁에 랩톱을 두고 일을 했다. 일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리처드 베켓을 생각했다.

만약. 정말 만약에…. 남자가 저에게 프롬 신청을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물론 그러려면 이 세상 자체가 획기적으로 달랐어야 했겠다. 그리고 그 다른 세상 속에서도 둘은 무진장 헛발질을 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사라진 가능성에 대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나갔다.

어떤 평행 우주의 자신은 리처드 베켓과 프롬 파티에 참석한다. 둘은 낄낄거리며 장난을 치다가, 중간에 빠져나온다.

어떤 평행 우주의 자신은 리처드 베켓이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에 있는 그를 찾아온다. 괜찮냐고, 아프지 말라고 말한다. 남자가 다시 운동을 할 수 있게 돕는다.

어떤 평행 우주의 자신은 리처드 베켓에게 진지하게 고백한다. 그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고, 행동으로 마음을 표시한다.

어떤 평행 우주의 자신이라니. 그런 가정은 무의미하고 감상적일 뿐이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혀를 찼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띵동.

현관 벨 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신에 홀린 것처럼 저벅저벅 걸어 나가 문을 열었다. 바람이 훅 들어왔다. 그리고 솔잎 향까지. 스탠리 제이미슨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남자를 바라봤다. 그는 뱀파이어라도 되는 듯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거대한 남자의 그늘만이 집 안으로 침범해 들어왔다.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차마 적합한 고백의 표현을 찾지 못해 입술을 달싹이던 찰나, 그가 스탠리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큰 손에서 나오는 열기가 대단했다. 그가 스탠리의 입에 제 입술을 가볍게 부딪쳤다.

느린 키스였다. 저번의 키스가 격정 그 자체였다면, 지금은 다정한 대화를 나누듯이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입술이 벌어지고 타액이 섞였다. 뜨겁고 또 농밀했다. 스탠리가 남자의 볼을 제 손으로 감쌌다. 불현듯 남자가 전보다 많이 말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탠리가 다른 손으로 남자의 손을 잡고 그를 집 안으로 이끌었다. 뒤에서 문이 닫히자 키스는 더욱 격정적으로 되었다. 리처드 베켓의 달뜬 숨이 기꺼웠다. 거대한 맹수를 조련하는 것처럼 부드럽게 남자를 대했다. 그가 몰아붙이려고 하면 다독이면서, 또 그를 안심시키면서.

남자는 갈급했다. 그가 이번에는 스탠리의 목덜미를 빨기 시작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 스탠리가 남자의 단단한 등을 어루만졌다. 남자의 거대한 손이 스탠리의 등을 배회했다.

“침대에서. 침대에서 하자, 리처드-.”

그 말과 함께 리처드 배켓이 스탠리를 벽에 밀어붙이고 스탠리 제이미슨에게 다시 키스했다.

입술을 떼고 나서 바라본 남자의 눈이 몽롱했다. 맞닿은 하반신이 불편했다. 이 자식. 이렇게 쉽게 저에게 흥분해서 어쩌나. 스탠리가 제 처지는 생각도 않고 걱정했다.

하지만 동시에 아찔할 정도로 기분 좋았다. 남자가 저로 인해 발정한다는 것이.

* * *

침대에 들어가자마자 옷이 찢어 발겨지듯 벗겨지고 스탠리 제이미슨은 금방 나신이 되었다.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제 유년기의 온상인 공간에서 남자와 뒹군다는 것이. 하지만 리처드 베켓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가 제 옷 역시 날렵하게 벗어 던졌다.

그의 크고 단단한 몸체가 드러나자 어두운 곳에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의 몸을 훤한 곳에서 봤으면 제 얼굴이 보기 좋게 빨개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가 스탠리의 몸 위에 올라탔다. 그의 코와 스탠리의 코가 살짝 마주 부딪혔다. 개들이 하는 인사처럼, 친밀한 스킨십이었다.

남자가 농밀하게 입술을 빨기 시작하며 전희가 시작되었다. 그의 크고 단단한 페니스가 스탠리의 페니스와 비벼졌다. 지나치게 생경한 자극에 스탠리가 허벅지를 떨며 다리를 벌렸다. 그것을 기회 삼아 남자가 제 귀두를 스탠리의 회음부에 찔렀다.

“아…… 흑….”

연한 부분이 자극되자 스탠리가 놀라 신음했다. 그러나 제 위에 있는 남자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가 낮게 으르렁거리듯 신음하면서 스탠리의 성기와 제 성기를 같이 쥐었다. 남자의 단단한 성기가 민감한 살결에 마주 비벼지자 끔찍하게 간지러웠다. 스탠리가 흐윽, 소리를 냈다. 저에게서 나는 목소리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취약했다. 남자가 성기를 마주 매만지면서 스탠리의 목덜미와 빗장뼈, 그리고 가슴 윗부분을 빨았다.

천박할 정도로 선정적인 소리와 스탠리가 신음하는 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 한계까지 발기한 남자의 페니스가 무거웠다.

윗가슴에 키스하던 남자가 점점 내려와 스탠리의 유두를 빨았다. 살구색의 유두가 몇 번 빨리자 금방 섰다. 그다음 남자가 유실을 아프지 않게 물자 스탠리가 퍼뜩 몸을 떨었다. 짜릿한 전기가 척추를 관통하듯 놀라운 감각이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신음도 내리지 못해 학학 숨을 몰아쉬었다.

“가… 가슴을 왜-.”

“…기분 좋게 해 줄게.”

남자가 질척하게 유두와 그 주변의 살덩이를 빨자 다리를 비비 꼴 정도로 기분 좋은 감각이 연이어 이어졌다. 남자의 혀는 불처럼 뜨거웠다. 손으로 남자의 뒤통수를 쓰다듬으니 그가 기분 좋은 듯 허밍 했다.

하반신은 이미 엉망진창이었다. 스탠리의 기둥 끝에서 쿠퍼액이 흘러나와 축축했다. 그것을 윤활제 삼아 남자가 더 부드럽게 두 기둥을 동시에 잡고 흔들었다.

남자의 거칠거칠한 손에 맞닿은 피부가 기분이 좋아 허벅지가 잘게 흔들렸다. 스탠리가 신음 참는 것을 포기한 채로 소리 질렀다.

“리… 리처드… 아, 아… 응… 하….”

“스탠. 조금만, 조금만 참아.”

“그만, 너무….”

너무 이상해. 이건, 이상해. 그동안 해 왔던 섹스와 달리 쫓기는 기분이 들었다. 아찔했다.

“싫어?”

남자가 스탠리의 가슴을 빨다가 위로 그를 쳐다봤다. 그의 파란 눈이 제법 뜨거웠다. 눈이 마주치자 어쩐지 맹수를 대하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그건 아닌데….”

시발. 스탠리가 뭐라 말을 못 하자 파란 눈이 완만하게 웃었다. 그가 몸을 일으켜 세워 보기 좋게 부은 양 유두를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렀다. 스탠리가 몸을 다시 한번 떨었다.

“흐… 악….”

“계속 상상했어.”

너를 이렇게 만지는 것을.

남자가 스탠리의 유두를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돌렸다. 찌릿한 기분과 함께 시야가 점멸했다.

스탠리가 고개를 위로 올려 목덜미를 드러냈다.

상황이 파악되지 않은 채로 그렇게 굳어 다리를 벌리고 있을 때였다. 남자가 위로 제 몸을 붙여 오며 낮게 말했다.

“가슴 만져 준 것만으로 갔어. 너.”

“미친… 흐…. 미쳤어… 윽….”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여자도 아닌 제가 가슴 애무만으로 사정하다니. 단 한 번도 제대로 가슴이 만져진 적 없었다.

스탠리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뜨거운 액체가 베갯잇을 적셨다.

남자가 목덜미에 부드럽게 키스하더니 스탠리 제이미슨의 손을 붙잡아 제 페니스에 가져다 댔다.

“스탠리, 나도 만져 줘.” 

귀엽다기보다는 두려웠지만, 남자의 응석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양손으로 남자의 거대한 물건을 손으로 쥐었다. 핏발이 선 것이 무척 흉폭해 보였다. 생리적인 긴장감에 침을 삼켰다.

젠장. 입맛 다시는 것같이 보인 것 같아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남자가 몸을 일으켜 무릎으로 섰다. 그에 따라 스탠리도 몸 위치를 조정했다. 무릎을 꿇고 남자의 물건을 매만졌다.

맨정신에 이런 짓을 한다는 게 황당하면서도 자연스러웠다. 평소에는 제 물건을 제외하고는 볼 일도 없을 거라 생각했던, 남성기를 어루만지면서 애무하는 자신이라니. 그것도 이렇게 크고 무섭게 생긴 것을-.

이번에는 리처드 베켓이 스탠리의 볼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다음번에는 불 켜고 하자. 네 얼굴, 네 몸 보고 싶어.”

다음번에는, 이라는 말에 기름통을 부은 것처럼 단전이 활활 타올랐다. 그래. 그렇지. 남자가 저에게 찾아왔다는 것은, 다음번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고개를 숙이고 남자의 기둥에 제 볼을 비볐다. 정확히는 펠라티오를 하려고 한 것이었지만, 들뜬 나머지 귀두를 볼에 비빈 모양이 됐다. 그게 사랑스러운 듯 리처드 베켓이 낮게 신음했다.

“무리 안 해도 괜…. 흣…!”

스탠리 제이미슨이 엎드려서 남자의 귀두를 입에 물었다. 취중에서였지만 한 번 빨아 본 적 있는 물건이었다. 어떻게 가능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커다란 것을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빠듯했다. 입술이 터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받아 본 적만 있고 해 준 건 딱 한 번뿐이라 어색한 펠라티오였다. 그러나 스탠리는 최선을 다해 남자의 페니스를 빨고 핥고 맛보았다. 남자의 선액이 그나마 윤활제 역할을 했다. 돋아난 힘줄과 단단한 기둥이 입안에 길을 내는 것 같았다.

숨이 막혀 눈물이 나왔다. 코로 숨 쉬는 법이 아직 익숙지 않았다. 결국 몇 번 더 빨다가 입을 천천히 뺐다.

남자가 우는 스탠리의 볼을 한 손으로 감싸고 다른 손으로 제 물건을 쥐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 그가 몸을 떨었다. 격렬한 진동이 스탠리까지 떨게 했다. 그가 사정한 것이다.

축축하고 뜨거운 밤이었다.

따스한 기분. 단전부터 홧홧하게 불이 지펴 올라 전신에 온기가 퍼진다. 몸을 짓누르는 무게는 답답하기는커녕 편안하다.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다정한 손길이 떠나지 않는다.

오랜만에 좋은 꿈을 꿨다. 입가며 아랫도리며 홧홧하지만,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뼈마디에 붙은 근육들이 기분 좋게 지끈거렸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이불 속에서 뒤척이며 기지개를 켰다.

눈을 떠서 본 방의 정경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당연하지. 큰일이 있었으니까-.

아주 큰 일.

“하….”

저번처럼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다만, 비어 있는 옆자리가 신경 쓰였다. 팔을 뻗어 만진 빈자리에 여실히 온기가 남아 있다.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난 지는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그쪽으로 몸을 움직여 남자의 온기를 즐겼다.

간밤에 일어난 일들을 하나하나 곱씹었다. 남자와 몸을 겹쳤다. 콘돔과 젤이 없어 끝의 끝까지는 가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둘에게는 이제 ‘다음번’이 있었으니까.

사랑을 나눴다. 간질간질한 표현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스탠리 제이미슨이 제 얼굴을 베개에 파묻었다. 침대에서 두 번, 샤워부스에서 한 번 하고 깨끗한 침대보 위에서 서로의 몸을 지분거리다가 잠이 들었다. 농염했다가 또 실실 웃음이 삐져나오다가 다시 애절해지는 순간이 있었다.

‘다시 열일곱으로 돌아온 느낌이군.’

수많은 잠자리를 했지만, 이렇게 편안했던 것은 처음이었다. 침대 위에서 남자는 생각보다 귀여웠다. 응석도 부릴 줄 알고 큰 개처럼 저에게 부딪혀 왔다. 물론 마냥 귀엽다면 또 아니었다. 엄청난 마력의 차를 모는 느낌? 아니, 거대한 짐승 위에 올라탄 느낌이었다. 정신도, 이성도 없었다.

문이 삐걱 열리는 소리에 스탠리가 이불을 올려 얼굴을 덮었다. 이번에는 비록 맨정신으로 덤벼든 일이었지만, 그 모든 걸 보여 줬다는 생각에 부끄러웠다. 남자의 발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쿵쿵거렸다. 이불 위에 작은 무게가 느껴졌다.

남자가 스탠리가 덮은 이불 위에 작게 키스했다.

“잘 잤어?”

“…….”

“아침 먹어.”

남자가 스탠리가 덮은 이불 위를 툭툭 다독였다.

남자가 나가고 나서야 스탠리 제이미슨이 이불 속에서 빠져나왔다.

“미쳤어….”

스탠리가 머리를 헝클며 끙끙거렸다.

남자와 이미 갈 데까지 가기는 했지만(?) 모든 기억이 생생했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게 과거의 일이 아니라는 게 중요했다. 남자와 연인…. 관계가 된 걸까. 친구도, 프렌즈 위드 베네핏도 아닌, 섹스 파트너도 아닌, 정말로-.

이제 사귀게 된 걸까.

연인이 된 걸까.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현실감이 지나치게 부족했다. 두 발로 바닥을 딛고 섰지만 어쩐지 1인치 정도 붕 떠 있는 기분이었다. 이상했다. 등 뒤에 날개가 달린 것도, 초능력을 배운 것도 아닌데. 누군가와 잤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기분 좋아지다니.

깨끗한 브리프를 입고 있었기에 얼굴을 다시 씻고 그 위에 후드와 바지를 걸쳤다. 옷을 입으면서 거울을 바라본 스탠리가 경악했다. 목덜미부터 가슴까지 붉은 자국이 곳곳에 있었다.

“이 자식, 혼쭐을 내줘야겠어.”

거울에 비친 얼굴이 불그죽죽하게 달아올랐다. 첫 경험도 아닌데 이렇게 부끄럽고 속이 배배 꼬일 정도로 간지러울 줄이야. 걱정도 있었다. 지난밤에 제가 너무 애달프게 군 건 아닐까. 아니면 너무 숙맥처럼 보인 건 아닐까. 어긋나는 고민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이마를 덮은 검은 머리칼을 손으로 휘휘 쓸었다. 어쩐지 나이보다 살짝 어려 보이는 제 얼굴에다 옷차림까지 영락없이 20대로 보여 부끄러웠다.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고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갔다.

고소하고 입맛 돋우는 음식 냄새에 스탠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제집에는 음식이라고는 피자와 레토르트 냉동식품밖에 없을 터인데. 게다가 수전 이모가 이사하면서 냉장고를 싹 비웠다. 스탠리가 1층으로 내려오자 남자가 부엌에서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슬금슬금 뒤로 다가갔다. 남자는 눈치는 챈 것 같은데 어쩐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있었다.

스탠리가 널찍한 등판을 와락 껴안자 남자가 놀라서 프라이팬을 놓칠 뻔했다. 하마터면 대형사고가 날 뻔했다. 스탠리가 남자의 등을 더 와락 껴안으며 낄낄거렸다.

“…너 다칠 뻔했어.”

리처드 베켓이 걱정스럽게 중얼거리는 걸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스탠리가 남자의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우리 집에 먹을 것도 없을 텐데… 마트까지 갔다 왔어?”

“……가까웠어.”

“아주 매너 있으시구만. 새삼 반하겠어.”

남자가 고개를 기울여 스탠리의 머리통에 제 얼굴을 밀착했다.

요리는 간단하고 소박했다. 아침은 프렌치토스트에 스크램블드에그, 그리고 단순한 샐러드를 곁들인 것이었다.

남자가 아침을 먹는 저를 쳐다만 보는 것에, 스탠리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포크를 내려놓았다.

“내 얼굴 이렇게 자주 쳐다보면 닳는다.”

“…….”

정곡을 찔렸다는 듯이 남자의 얼굴이 홧홧해졌다. 저렇게 부끄러움이 많아서는 어떻게 지난밤, 그렇게 거칠었을까. 남자는 그 자체로 하나의 아이러니였다. 스탠리는 낮과 밤 사이의 낙차에 흡족했다.

“우리 사귀는 거 맞지?”

스탠리가 엉겁결에 내지른 질문에, 정적이 찾아왔다. 홧홧한 얼굴을 한 스탠리 제이미슨이 손을 뻗어 남자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

한참 말이 없던 리처드가 손을 돌려 스탠리의 손가락 사이에 제 손가락을 넣었다. 두 손이 꽉 맞물리면서 한 쌍이 되었다. 남자가 손을 들어 올려 스탠리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리처드 베켓이 제 뺨에 손등을 대고 말했다. 그의 눈이 스탠리를 쳐다보며 웃었다.

“네가 원하는 거면 뭐든지 좋아.”

“……야. 그건….”

그렇게 쳐다보면서 말하면 반칙이잖아. 스탠리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분했다. 남자로서 너무 멋진 놈이잖은가. 저도 그간 꽤 멋있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완벽한 패배였다.

그러나 패배가 즐거운 것은 처음이었다.

* * *

스탠리로서는 다행스럽게도(?) 오늘은 정비소가 쉬는 날이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속으로 히죽 웃었다. 남자와 이런저런 것들을 잔뜩 할 생각에 날아오를 것 같았다. 일단 평범한 데이트를 하나씩 다 해 볼 거다. 그리고 밤에는, 그래 밤에는…….

뭐, 저라고 음심 없는 성자는 아니니까.

게다가 지난 몇 개월간 해소되지 않은 욕구들이 잔뜩 있었다. 간밤에 어느 정도 해갈이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부족하고도 부족했다. 오히려 잠깐 맛본 게 더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데가 있었다.

에이, 하지만 30대고 한데 대학교 초년생들처럼 온종일 흘레붙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밤에 적당히 무드를 잡고 하는 게 맞았다. 스탠리가 거실로 걸어 나가며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리처드 뭐 할….”

그러자 남자가 스탠리를 뒤에서 껴안고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키스 마크 위에 남자의 입술이 다시 닿았다. 스탠리가 흑, 신음을 내며 몸을 빼려고 했지만 단단한 품이 더 거세게 얽혀 들어왔다. 힘이 장난이 아니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어느새 남자의 손이 스탠리의 후드 안으로 들어왔다. 넓은 손바닥이 스탠리의 복부와 가슴을 더듬기 시작하자 적신호가 윙윙 울렸다.

리처드가 간단하게 스탠리를 돌려세우며 고개를 돌려 입을 맞췄다. 가까이에서 본 남자의 얼굴은 맹목적이었다. 욕구로 가득 들뜬 눈빛에 스탠리가 긴장했다.

‘저 자식은 아침부터 붙어먹을 생각인 건가.’ 그렇게 하고도 또 할 생각이 든다니, 감탄이 들 정도였다. 스탠리가 간신히 남자를 떼어놓고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랬다.

“야. 그래도 이렇게 날이 밝은데 또 하기는 좀 그렇지 않냐?”

“…그래서 좋은 건데.”

남자가 풀죽은 표정을 하며 스탠리의 볼에 얕게 키스했다.

남자의 풀죽은 표정에 스탠리로서는 흔치 않게 관대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뭐, 어떤가. 블라인드도 착실하게 쳐져 있고. 한 번쯤은 체면을 놓아 버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게다가 뿌리치기에는, 남자가 너무 좋았다. 남자도, 남자의 몸도. 스탠리가 못 이긴 척 키스를 받아 주자 입놀림이 점점 더 농염해졌다. 남자가 키스하면서 자연스럽게 스탠리를 소파로 이끌었다. 물론 마냥 스무스하기만 한 것 아니었다.

그나마 스탠리가 남자의 힘을 제어할 정도의 완력이 되어 다행이었다. 단숨에 소파에 누워 남자에게 깔리는 모양새가 되었다. 꺼진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제 모습이 꽤 어색했다. 남자가 스탠리의 귓불을 살짝 씹은 다음에 말했다.

“딴생각하지 마.”

스탠리가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가 스탠리의 바지를 벗기고 제 바지를 벗고 드로어즈를 천천히 끌러 내렸다.

* * *

후드만 입고 아래는 벗고 있는 제 모습이 너무 이상하고 생경했다. 벗길 거면 다 벗겨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남자는 급한 모양인지 스탠리를 애무할 뿐이었다. 큰 손으로 스탠리가 민감한 곳을 자극하고 또 어루만졌다. 스탠리의 가슴과 허벅지 사이, 회음부를 꾹꾹 누르며 자극하자 수치스럽게도 금방 페니스가 섰다.

남자가 잠깐 몸을 일으키더니 뭔가를 가져왔다. 그 뭔가가 콘돔과 젤이라는 게 명백해지자 스탠리가 발로 남자를 차려 했다. 괜히 심술을 부리고 싶었다. 저게 얌전한 척은 다 하더니 섹스에 미친 놈일 줄이야. 남자가 씩 웃으며 허우적대는 다리를 잡아 그대로 제 허리에 감았다.

그가 스탠리의 무릎에 키스를 한 번 하더니 제 옷을 금방 훌렁훌렁 벗어 던졌다. 밝은 빛 아래에서 남자의 몸을 보자 흥분이 되기도, 부끄럽기도 했다. 이름도 잘 모르는 근육들이 단단하게 잘 잡혀 있는 데다가 뼈대 자체가 굵고 큰 느낌. 그리고 남자가 팽팽한 드로어즈를 벗자 드러난 물건은 그 자체로 기가 죽는 것이었다.

‘술을 얼마나 처먹었으면 저걸 넣을 생각을 한 거지?’

물론, 지금 스탠리 제이미슨은 저 물건을 맨정신에서 받을 생각이다. 그나마 젤이 있다는 게 다행인지도 몰랐다. 남자가 차마 똑바로 그것을 바라보지 못하고 방황하는 스탠리의 눈길을 확인했다. 그게 귀엽다는 듯이 몸을 기울여 스탠리의 입가에 키스했다. 진득하게 입술을 빨며 하반신을 얽었다.

거대한 남자의 물건이 스탠리의 물건에 비벼지고 허벅지와 허벅지가 부딪혔다. 남자의 거대한 상반신이 완전히 스탠리의 몸을 덮었다. 한참 스탠리의 입술과 혀를 빨고 지분대던 남자가 다시 몸을 일으켰을 때, 스탠리는 완전히 기진맥진해 있었다.

숨을 간신히 몰아쉬는 그는 완전히 관계 중인 작태 그 자체였다. 인텔리적인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그저 당장의 흥분에 쫓기는 모양새였다. 리처드 베켓이 미간을 찌푸리고 그 모습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그가 콘돔을 제 페니스에 씌웠다.

“조금만 다리 더 벌려 줘.”

“…….”

죽도록 부끄러웠다. 이 이상 수치스러울 데가 있나 싶었다. 벌건 대낮에 다리 사이를 훤히 드러내 놓는다니. 하지만 욕망의 해소가 더 중요했다. 스탠리가 눈을 질끈 감고 다리를 한계치까지 벌렸다. 리처드 베켓이 낮게 허밍 하며 손에 젤을 짜 발랐다. 그가 이윽고 젤을 그대로 스탠리의 밀부에 짰다. 차가운 젤의 감각에 스탠리가 고개를 돌렸다.

그만, 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남자의 두꺼운 손가락 하나가 스탠리의 밀부 주위를 더듬더니 안으로 침입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워 허벅지가 달달 떨렸다. 남자가 금방 스탠리의 한쪽 다리를 어깨 위에 올려놓았고 그대로 다리가 더 벌어졌다.

손가락이 비좁은 내벽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자 앓는 소리가 절로 났다. 그냥 손가락도 아니고 남자의 마디 굵은 손가락 두 개가 금방 밀고 들어오니 안쪽이 긴장했다.

거기에다 젤과 살이 질척이며 내는 소리가 천박할 정도로 선정적이었다.

“아파….”

“쉬이. 조금만 참으면… 안 아프게 해 줄게.”

남자의 손길이 부드럽게 내벽을 만지자 금방 이완이 되었다. 긴장이 조금 풀리자 손가락이 점점 더 대범하게 침범해 들어오더니 뭉툭한 데를 꾹 눌렀다. 그에 허리가 번쩍 들리며 눈이 풀리는 감각이 들었다.

“저번에도 이곳이었어.”

그가 고개를 돌려 스탠리의 허벅지 안쪽에 키스를 하더니 손가락을 더 과감하게 움직였다. 특히 아까의 스팟을 뭉근하게 찍어 누르자 스탠리가 앓는 소리를 하며 허리를 뒤틀었다.

“그만… 아…흐, 흐… 응… 리, 리처드… 흐… 읏….”

신음을 막을 정신머리조차 이미 없었다.

“……민감해.”

너. 다른 새끼들에게 그런 몸 보이지 마.

겁박인지 회유인지 모를 일이었다. 남자가 손가락 두 개를 빼자 구멍이 반사적으로 뻐금거렸다. 리처드가 풀린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젤로 번들거려서 필사적으로 자극을 구하는 구멍의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스탠리가 그에 맞춰 허리를 뒤틀고 신음하며 열락에 떨었다.

가해지는 자극에 착실하게 반응하는 몸을 보면서 참는 건 불가능했다. 남자가 가뿐하게 스탠리를 일으켜 제 무릎 위에 앉혔다.

“무슨…!”

그대로 스탠리 제이미슨의 눅진한 밀부에 제 페니스의 귀두를 집어넣기 시작하자 스탠리가 다리를 벌리며 치태를 부렸다. 그러나 정성 들여 푼 내벽이 착실하게 남자의 물건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결코 쉽지는 않게, 그러나 차근차근 남자의 물건을 받아들이며 스탠리가 경악했다.

내장의 안쪽부터 목으로 남자의 페니스가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에 생명의 위기를 느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남자의 선단이 점점 들어오자 스팟뿐만이 아니라 완전히 자극받은 내벽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주취 섹스의 기억이 밀려 들어오면서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리처드 베켓이 스탠리의 허벅지를 잡아 들어 올리자 그대로 다리를 벌린 채로 남자의 성기에 앉은 모양새가 되었다.

“힘 풀어. 그래. 그렇게.”

남자가 차분하게, 그러나 들끓은 목소리로 명령하자 스탠리가 더욱 흥분하며 몸을 떨었다. 그렇게 완전히 남자의 페니스가 들어오자 스탠리가 울기 시작했다.

“…너무, …너무 아프다….”

“괜찮아. 잘하고 있어.”

남자가 스탠리의 볼에 키스하며 하반신을 위로 부드럽게 쳐올리기 시작했다. 위태로운 자세였지만, 남자의 강건한 완력 덕분에 안정적이었다.

“스탠리, 스탠. 앞을 봐.”

스탠리가 고개를 들어 올려 앞을 봤다. 텔레비전의 꺼진 화면에 둘이 교접하는 모습이 그대로 비치고 있었다. 후드만 입고 있는 스탠리 제이미슨이 남자의 굵은 물건에 꿰뚫려 엉엉 우는 모습이. 하얗고 모양이 잘 잡힌 둔부가 한껏 벌어져, 남자의 흉포한 좆을 받아내고 있는 장면이었다.

“너무 예뻐. 보기 좋아.”

그 모습에 흥분이 된 건지, 내벽의 모든 부분을 자극하며 움직이는 남자의 페니스 때문인지 스탠리가 그대로 사정했다. 앞을 만져 주지도 않았는데도 가 버렸다. 평생 헤테로로 살아왔던 자신이. 이미 남자와 사귀기로 했지만, 막상 닥친 현실은 충격적이었다.

부드럽던 움직임이 더욱 박차를 가하며 거세지자 스탠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질척이는 젤과 살 소리, 그리고 스탠리의 회음부와 구멍 가장자리를 때리는 고환 소리가 들렸다.

“읏… 하… 하… 하…! 리처드! 리… 하… 흑….”

스탠리 제이미슨이 생전 내질러 보지 못한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동안 섹스를 하면 사정하고 끝이었는데 지금의 섹스는 사정 후가 더 힘들고 좋았다. 좋았다는 점이 충격적이었다. 남자의 거대한 품에 안겨서 이렇게 당하는 게 즐거울 줄이야.

한참을 그렇게 열락에 울부짖었다. 목이 쉴 정도가 되어서야 남자가 사정했다.

* * *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소파에 퍼질러 누웠다. 해는 벌써 뉘엿뉘엿 져 가고 있었다. 벌써 해거름이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제 몸을 닦는 물수건의 온기를 느끼며 기분 좋게 콧노래를 불렀다. 수없이 몸을 겹쳤다. 몸을 닦으려고 들어간 샤워부스에서 한 번, 거실에서, 또 방 안에서.

‘20대 얼간이들처럼 하루를 보냈군.’

평소 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과였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금욕하는 성정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성욕에 저를 맡기는 타입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 그가 애새끼처럼 남자의 몸을 탐하고 또 탐해졌다.

그리고 그건 썩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열락 그 자체였다.

온몸에 도저한 탈력감이 기분 좋았다. 남자의 손길은 섬세했고 또 강건했다.

물수건이 허벅지 사이를 가로지르자 스탠리가 헉, 소리를 내며 움츠러들었다.

“야. 너 나 닦아 주는 척하면서 사심 채우는 거 아니냐.”

“…….”

남자가 그 말을 못 들은 척하며 계속해서 스탠리의 몸을 지분거렸다. 이미 한 번 샤워를 한 직후였지만, 스탠리가 근육이 아프다며 우는소리를 해서인지 꼼꼼하게 다시 마사지하는 것이었다. 마사지만이 목적은 아닌 것 같았지만 뭐 좋았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욕망당하는 것에 익숙지 않았지만, 남자의 욕구라면 기꺼이 환영이었다.

“젠장, 이게 다 네놈 물건이…. 말을 말자.”

스탠리가 다시 모로 돌아누우며 끙끙거렸다. 리처드 베켓이 하하 낮게 웃으며 스탠리의 상박을 거대한 손으로 주물렀다. 그 기분 좋은 압박감에 고롱고롱 다시 선잠이 들 듯 말 듯 스탠리가 눈을 감았다. 그가 팔을 뻗어 남자의 뒷머리를 잡고 끌었다.

“좀 가까이 와.”

“소파가 좁아.”

“그래서 좋은 건데?”

하. 아까 전의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스탠리가 귀엽다는 듯 리처드가 한숨을 쉬었다. 그가 무릎을 꿇고 상반신을 스탠리 쪽으로 기댔다. 무게가 실리자 스탠리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가 손으로 리처드 베켓의 밀색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숱 많은 머리칼이 기다란 손가락 위에 쓸리는 광경이 퍽 보기 좋았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큰 개를 쓰다듬듯이 정성스럽게 리처드 베켓을 쓰다듬었다. 남자는 전혀 모멸적이지 않은 것 같았다. 오히려 기껍게 스탠리의 손에 제 얼굴을 기대었다.

“너랑 하고 싶은 게 많아.”

스탠리 제이미슨이 소파에서 일어난 다음 리처드 베켓에게 옆자리를 내줬다. 남자가 올라오자 스탠리가 남자의 어깨에 제 얼굴을 기댔다.

“뭐, 이렇게 집에서 뒹구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리처드 베켓이 스탠리 쪽에 얇은 담요를 제대로 덮어 줬다.

“내일 너랑 출근할래.”

스탠리가 무덤덤히 말을 꺼냈다.

“재미없을 텐데.”

리처드의 굵은 눈썹이 살짝 기울어졌다. 걱정하는 그 모습에 괜히 웃음이 나온다. 왜 자꾸 웃게 되는 걸까. 정작 웃긴 일은 없는데도 웃게 된다. 이게 바로 연애의 설렘이라는 걸까. 게임 스테이지 클리어나 프로젝트 성공의 기쁨보다 충만한 감정이었다.

“아냐. 난 너 일하고 있는 거 보기만 해도 좋더라.”

“…….”

남자가 한참 말없이 스탠리의 옆얼굴을 바라보더니 그대로 얼굴을 스탠리의 목덜미 가까이 붙였다.

그가 남이 듣는 것도 아닌데 작게 말했다.

“기뻐.”

“너 이렇게 내가 좋아서 그동안 어떻게 살았냐? 바보야.”

참. 저에게 안겨 오는 거대한 남자가 마치 10년 동안 생이별한 강아지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물론 둘은 체격과 종(?)부터가 다르다. 그런데도 안쓰럽고 또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울컥 받치는 감정이 있었다.

“내가 꿈꿀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어.”

네 곁은 더 빛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네가 점점 더 높은 곳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며 행복했지만, 점점 내 희망도 죽었어.

“그건 날 과소평가한 거야.”

스탠리 제이미슨이 강건하게 말했다.

“내가 너 아닌 사람 만난다고 더 잘 될 것 같냐.”

“그건 아니지만-.”

“17년 전에도 말이야, 나는 이미 멋진 사람이었어.”

나는 지금까지 옛날의 나를 지워 버려야 할, 잊어야 할 존재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게 말이지. 일기장을 뒤져 보니까 아니더라고.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강했어.

나는 괜찮은 인간이었어.

그런 나를, 네가 좋아했고.

“그래.”

리처드 베켓이 스탠리 제이미슨을 가장 사랑스러운 것을 보듯이 올려다봤다. 샛별을 올려다보듯 하는 그 표정. 그 푸른 눈에 비친 저의 표정 역시 마찬가지로 사랑에 빠진 얼굴이라, 스탠리 제이미슨은 동요했다. 이렇게 무방비한, 얼빠진 표정을 같이 짓고 있다니.

서로를 바라보며, 같은 표정을 짓는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고개를 숙였고, 둘은 다시 입을 맞췄다.

* * *

야속하게도 약속된 체류 일정의 막바지였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정비소에 앉아 책을 읽는 척하며 남자를 쳐다봤다. 리처드 베켓 역시 마찬가지로 정비하는 틈틈이 스탠리가 앉아 있는 쪽을 쳐다봤다. 크고 강한 남자가 연인 한 명 때문에 쩔쩔매는 모습을 보는 게 제법 쏠쏠한 재미가 있었다.

일이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무렵, 리처드 베켓이 난처해하며 물었다.

“미안. 재미없었지.”

“아니. 재미없기는 무슨. 아예 내 사무실을 이곳에 옮겨 놓고 싶었는데?”

“그건…!”

“왜. 와이퍼를 통째로 디트로이트로 옮겨볼까. 그러면 출퇴근 거리가 어떻게 되려나….”

“나 때문에 그럴 필요는 없어. 스탠.”

“…….”

농담으로 던진 이야기였지만 막상 입에 올려놓고 보니 꽤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스탠리가 침묵하며 이해타산에 골몰하자 리처드 베켓이 더욱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진심이야?”

“…이럴 때 쓰지 않으면 돈이 무슨 소용이겠어.”

“스탠….”

“…그래 일단은 농담이니까, 긴장 풀어. 그리고 이건 널 위한 게 아니라 내 복지를 위한 거라고.”

“일단은. 이란 말이지.”

리처드 베켓이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그의 귓가가 발그레했다.

* * *

남자와 연인관계가 되었다. 뉴욕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 생각뿐이었다. 이별이 아쉬워서 남자의 품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망부석처럼 서 있던 게 불과 몇 시간 전이었다.

뉴욕에 있는 집에 도착하고 나서도 오로지 그 생각으로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뉴욕 시내 한복판에 나가서 ‘난 리처드 베켓과 사귄다!’ 외치고 우스갯거리가 되는 상상까지 들었다. 이 좋은 걸 왜 진작 할 생각을 안 했을까.

엄밀히 말하면, 진작 하기는 했는데 접근법이 잘못된 것이었다. 좀 더 진정성 있게 다가갔어야 했는데, 늘 하던 버릇대로 했으니 당연히 통하지 않았던 거다.

[나 도착했어.]

씻고 누워서 한 첫 번째 일은 남자에게 메시지를 남기는 것이었다. 밤이 깊었다는 것을 알지만, 꼭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 피곤하지?]

얼마 안 가 답이 도착했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무의식적으로 미소 지으며 답장을 보냈다.

[아니. 피곤하지는 않아.]

[잘됐다.]

[사랑해.]

‘음. 실수했나?’

연인 사이에 사랑해. 같은 말은 원래 자주 주고받는 것 아니던가. 제가 너무 앞서나가 버렸나. 그 짧은 휴지만으로도 오만 잡생각이 다 들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핸드폰 화면을 끄고 눈을 감았다. 그러다 진동이 울렸다.

비몽사몽간에 받아든 전화의 스피커에서 소리가 났다.

[나도.]

“…….”

[나도, 사랑해.]

* * *

따지고 보면 그렇게 장거리 연애는 아닐 수도 있었다. 동부 끝과 서부 끝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나라도 아니고. 따지고 보면 같은 동부 권역이었다.

그런데도 답답하기 이루 말할 데 없었다.

주말마다 짬을 내 밸린저 시티까지 왔다 갔다 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벌써 방전되고도 남았을 거다. 주위에서는 이미 스탠리 제이미슨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며 난리였다. 여자친구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싶기는 했다. 지금까지 사귀어 온 애인들은 전부 여성이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그들의 착오를 교정해 줄 생각은 없었다.

리처드 베켓을 숨기고 싶은 게 아니라 그들로부터 보호하고 싶었다. 함부로 금지옥엽 같은 제 애인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암, 절대 보여 줄 수 없고말고. 특히 피닉스 크로포드나 타블로이드 매체와 같이 이리나 다름없는 작자들에게는 절대 알리지 않을 작정이었다.

주말마다 가서 한참을 뒹굴고 몸을 겹치다가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일과는 꽤 멋졌다. 스탠리 제이미슨의 데이트치고는 지나치게 소박하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멋들어진 데이트야, 계획이 다 있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컴퓨터 과학 전공자답게 정교한 로드맵을 가지고 연애에 임했다. 앞으로 할 일은 무궁무진했다. 

와이퍼 일을 해치우고 나면 남자와 함께 세계 각지를 돌아다닐 생각이었다. 아니면, 별장을 새로 지을까? 여러 가지 설레는 상상들이 서로 새끼를 치며 불어났다.

* * *

새벽 3시. 잠자던 그를 깨운 것은 전화였다. 가늘게 눈을 떠 확인한 발신자에는 피닉스 크로포드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

“왜. 웬만한 일은 네 선에서 끝내야지, 피닉스.”

스탠리가 나무라듯 이야기했다.

[당장 인터넷 켜 봐.]

“뭔데. 전쟁 났냐?”

[와이퍼에, 네…….]

뭔가 심상치 않은 기분에, 스탠리는 곧장 전화를 끊고 와이퍼 앱을 켰다.

회사용 계정으로 들어간 그곳은 이미 지옥이나 다를 바 없었다. 벌써 6개월도 훨씬 넘은, 스탠리 제이미슨이 피로연장에서 난장을 부리는 장면이 온천지에 있었다.

“…이게, 무슨.”

실시간 해시 태그 순위에 전부 스탠리 제이미슨의 이름이 올라와 있었다. 스탠리 제이미슨, 와이퍼, 와이퍼 창업자, 결혼식, 결혼식 난동.

영상이 바이럴해졌다는 것까지는 대충 이해한 스탠리 제이미슨이 곧바로 기사를 확인했다. 영상에 대한 추측성 찌라시들이 도저한 가운데 끔찍한 문장이 스탠리 제이미슨의 뒤통수를 갈겼다.

[백만장자의 불운한 사랑? 비극으로 깨진 하이스쿨 로맨스의 전모]

꽤 영향력 있는 타블로이드로 보이는 쪽에서 낸 기사였다. 설마 이건 저와 노라 하트를 엮는 기사인 것인가. 머리가 띵했다. 눌러 보니 과연 그랬다. 몇 달 전만 해도 변명할 여지 없는 대목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게다가 그 결혼식에서 벌인 난동은….

리처드 베켓에 대한 복수였단 말이다.

당장 변호사를, 변호사를… 스탠리 제이미슨이 황급하게 핸드폰의 전화번호부를 확인했다. 아냐, 이건 법적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성명문을 내고 전모를 제대로 밝히자.

자신이 만든 창조물이, 되레 창조주를 공격하고 있었다.

* * *

와이퍼에서 폭발적으로 인기를 끈 영상은 이제 텔레비전 네트워크에도 나타나고 있었다. 점입가경이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평소답지 않게 완전히 얼이 빠진 상태였다. 그는 주저하고 있었다. 수치심이 지나쳐서 압사당할 것 같았다. 무겁고 둔중하게 온몸을 내리누르는 모멸감이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이었다. 하이스쿨의 복도가 생각나는 건 왜일까. 모두가 널브러진 저를 향해 깔깔거리고 있다는 느낌이 다시 도졌다.

와이퍼의 주식이 떨어지는 것까지는 예상 범위 안이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제가 와이퍼에서 쫓겨 나갈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정작 당사자인 스탠리 제이미슨이 아는 것은 별로 없었으므로, 모든 것이 그럴듯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제 앞에 놓인 선택지를 일별해 보았다.

1. 척 앤더슨과 얽힌 원한 관계를 공개한다.

그럴 경우, 저의 고등학교 시절이 만천하에 낱낱이 까발려질 터였다. 물론 한참 지난 일이었다. 피닉스 크로포드의 말처럼 사람들은 그 소식을 듣고 스탠리 제이미슨을 동정할 터였다. 인간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일종의 ‘호감도’가 오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가장 싫었다. 같잖은 연민 따위, 원하지 않았다.

2. 사실을 말한다.

그러면 모양새가 더욱 이상해진다. 리처드 베켓이라는 제 친구, 아니 지금은 애인이 있는데. 녀석의 앞길을 망친 게 저 천하의 개자식이었단 말이죠? 그래서 한바탕했습니다. 복수를 한 거죠! 젠장, 그 누가 납득하겠는가.

3. 노라에 대한 질투심에 의해서 그랬노라고 이야기한다.

매스미디어가 떠들어대고 있는 이야기에 힘을 실어 준다.

아니, 아니. 그럴 수는 없었다.

세 번째 선택지는 애초에 제대로 된 것도 아니었다.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나를 결정하는 건 다른 사람의 의견이 아니다.’ 주기도문처럼 같은 문장을 속으로 되뇌고 또 되뇌었다. 그러자 보이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잊힌 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모든 순간이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아름다운 순간들은 존재했다. 그것은 모순 없는 진실이었다.

* * *

추적추적 이른 봄비가 밸린저 시티를 흠뻑 적셨다. 리처드 베켓은 퇴근하자마자 거실의 불을 다시 껐다. 고단한 하루였고, 괴로운 하루였다.

해명을 요구하고 싶냐고? 그런 마음이 안 들었다면 분명 거짓말일 게다.

분명 스탠리에게 묻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동시에 듣고 싶지 않은 말들이 있었다.

남자를 붙들고, 그의 진실이며 거짓말까지 꼭 붙들어 매서 꼼짝없이 놓지 않고 싶었다.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아. 내 곁에만 있어 줘. 그 여자를 계속 좋아한다 해도, 내 옆을 떠나지 마.

비참한 생각들이 부평초처럼 둥둥 떴다. 흡사 어항 같은 대기의 습도가 그의 심정을 대변했다. 그러던 와중 도어벨이 울렸다.

혹시, 그일까. 리처드 베켓의 큰 심장이 쿵쿵 무겁게 두근거렸다.

문을 열자 우산을 쓴 작은 형상이 보였다. 그림자 속에서 한 걸음 내디딘 형상은 이내 그 정체를 드러냈다. 노라 하트. 화장기 없는 얼굴이 울었는지 불그레했다.

“노라.”

마음에 돋아난 실망감을 감추려 얼굴에 표정을 없앴다. 노라가 조용히 말했다.

“나, 척이랑 헤어졌어. 완전히.”

“…….”

“웃기지 않아? 사실 너한테 복수하려고, 으스대려고 한 결혼이었는데. 이렇게 되어 버렸네.”

“……돌아가.”

수건이라도 챙겨 줄 요량으로 욕실로 들어가는 리처드를, 노라 하트가 붙잡았다.

“그날 이후로 모든 것이 초라해.”

“……손 놔.”

“우리의 초라한 모습을 봐. 그 누가 우리를 옛날의 그 프롬 커플이라고 생각하겠어.”

“…….”

“남루하고 찢어 발겨져서…….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있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리처드 베켓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응수했다. 그가 가차 없이 노라 하트의 손을 뿌리쳤다.

노라 하트가 쓸쓸한 눈으로 리처드 베켓을 응시했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너와 어울리지 않아.”

“……그건 상관없어.”

“어차피 안 될 거면, 차라리 나와 같이…. 같이, 어디론가로 가자.”

그녀가 고통스러운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미 제안의 답을 아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리처드 베켓이 숨을 잠시 고르고 말했다.

“노라. 미안. 널 이용했던 거. 네 마음을 가지고 장난쳤던 거 미안해. 그리고 나도 알고 있어. 스탠리 제이미슨이… 내게 과분하다는 거.”

“…….”

“하지만, 네 말대로 그렇게 도망칠 수는 없어.”

살면서 한 번이라도 제대로. 제대로 욕심이라는 걸 부리고 싶었다. 늘 바보 같이 빼앗기기만 했던 인생에서. 늘 만족하기를 강요당하고 절제하기를 요구받았던 삶에서. 단 한 번만이라도 욕심다운 욕심을 부리고 싶었다. 안 될까? 애초에 그럴 권리 따위, 제게는 없는 것일까?

하지만, 만약 제 욕심 때문에 스탠리 제이미슨이 떠난다고 해도.

그 끝이 끔찍한 파멸로 마무리된다 하더라도 저는 행복하게 눈 감을 수 있으리라.

“지금 행복하니까. 놓을 수 없어.”

“일이 터지고 난 뒤에도 스탠리가 너에게 돌아올 거라고 생각해?”

악의는 없는 질문이었다. 그녀가 진심으로 걱정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기다릴 거야.”

언제라도 괜찮았다. 이미 17년을 넘게 기다렸는데 거기에 몇 년의 세월이 더 추가된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는 꼭 돌아올 것이다.

* * *

스탠리 제이미슨이 발표한 입장문은 간결했다. 미사여구나 상황을 이해해 달라는 읍소 하나 없었다. 제가 동창의 결혼식에서 행패를 부린 것을 깔끔하게 인정하는 내용으로 시작되었다. 주취로 경황이 없었다는 맥락 같은 건 없었다.

그의 입장은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

저는 영상 속의 남자로부터 지속적으로 따돌림을 당했고 그 사실에 대해서 부끄러움 한 점 없습니다.

사적 복수가 옳다는 것도, 제 행동이 무조건 옳다는 것도 아닙니다.

당시의 저는 눈앞의 가해자를 때려 눕혀야겠다 생각했을 따름이었고 그건 분명 신사적이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이 일로 어떤 대가를 치르건, 마땅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국면의 전환이 일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미디어는 입을 다물었고, 신나게 떠들던 사람들도 겸연쩍게 주제를 돌렸다. 동정론이 잠깐 일다가 또 사라졌다. 학교 폭력과 관련된 이야기가 시사면에서 토의되었다.

사람들은 스탠리와 관련된 소동을 금방 ‘용서’했다. 금방 HBS나우의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었고,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소문은 소문으로 덮어라. 훌륭한 전술이었다. 스티브 잡스나 앨런 머스크의 케이스에서 엿볼 수 있듯이, 사람들은 소위 천재라는 사람들의 사생활에 관대한 면이 있었다.

물론 그게 다는 아니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의 성명문에는 전문가의 손길 같은 건 없었다. 그의 진솔하고 직접적인 메시지는 읽는 사람의 심금을 건드리는 구석이 있었다.

사람들은 진정성에 약하다.

투자가들은 와이퍼의 성장세에 집중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사생활 따위가 아니라 실적이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의 진두지휘 아래 와이퍼의 리브랜딩은 호평을 이끌어 냈으며 플랫폼은 다시 마이크로 SNS계의 선두를 탈환했다.

* * *

어른이 된다는 것은 뭘까. 30살이 넘은 지금도 그 질문은 내게 곤혹스럽게 다가온다. 웃긴 일이다. 어렸을 때는 무작정 나이만 먹으면 어른이 되고, 자유로워진다고 생각했으니까.

나이를 먹으면 절로 나를 얽어매고 있는 속박과 현실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물론 전부 착각이었지만.

하지만 누군가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게 어른이라고 한다면, 난 언제부터 어른이 됐는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너를 만나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부터야, 라고.

너를 다시 만난 이후로 나는 고백의 대가를 배우게 되었고,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무게를 띤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쩌면 지난 1년은 내가 늘 꿈꾸던 존재가 노라가 아닌, 네 옆자리라는 걸 서서히 깨달아가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네 부상 소식을 보고 떠올린 감정이 기쁨의 희열이 아닌, 저주 같은 과거로부터의 몸부림이었다는 것도 깨달았고,

사실 도서관에서 네가 내게 사과했을 때 고마웠다는 것도 새삼 알게 되었다.

사실, 그건 어린 나와의 화해이기도 했다.

인정하기 싫어서 그저 잊어버리고 마는 일들이, 우리에게는 또 얼마나 많을까.

그래. 내게 어른이 된다는 건, 그것들을 하나씩 다시 대면하는 일이었어. 리처드.

* * *

도어벨이 다시 울리자 리처드 베켓이 현관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눈을 감고 한번 숨을 내쉰다. 문고리를 돌려 천천히 열자 그 앞에 서 있는 인영이 있었다. 그 그림자가 와락 제 품 안으로 들어온다.

젖은 몸을 한껏 껴안고 사랑스러운 얼굴을 들어 올려 제 입으로 덥힌다. 해명을 요구하려는 마음 같은 건 이제 온데간데없었다. 오로지 지금 붙들고 있는 몸을 앞으로도 안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리처드.”

“……말해 줘.”

“…….”

“거짓말이라도 좋으니까, 혼자 생각하지 말고 말해 줘.”

뜨거운 액체가 볼을 타고 흐른다. 분명 빗물은 아닌 그것을, 스탠리가 손을 뻗어 닦아냈다. 푸른 눈동자에 대고 그는, 스탠리 제이미슨은 말한다.

나는,

너를,

…….

* * *

온몸의 근육 구석구석이 저리다. 기분 좋은 욱신거림 속에서 부유한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끙끙거리며 이불을 위로 올려 제 얼굴을 덮었다. 좋다.

“일어나야지.”

두껍고 커다란 손이 스탠리의 머리를 다정하게 쓸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답지 않은 응석을 부려 보는 것이다.

“꿈자리가 사나웠단 말이야.”

“……기분 안 좋아?”

이윽고 그 다정한 손길이 이불을 걷어냈다. 따사로운 오전 햇살이 스탠리 제이미슨의 얼굴을 따뜻하게 쪼이었다. 손은 곧이어 스탠리의 멀끔한 얼굴선을 가볍게 더듬었다.

“네가 밤새 괴롭히지만 않았어도 컨디션 좋았을 거다.”

스탠리가 툴툴거렸다.

남자가 스탠리 제이미슨의 볼에다 가볍게 키스했다. 보지 않아도 남자의 얼굴이 붉어져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미안. 참기 어려웠어.”

이 자식. 그 말에 살짝 장난기가 돈 스탠리가 이불을 한편으로 치웠다. 그가 제 목덜미와 가슴께의 울혈을 가리키며 말했다.

“무슨 참기가 힘드냐. 이제 가까이서 살고 이렇게 자주 보는데도?”

이 자국들 어떻게 할 거야. 아이고, 나중 가다가는 티셔츠도 못 입게 생겼네. 스탠리가 미간을 심술궂게 찌푸렸다. 눈앞의 남자는 멀끔한 차림에 커피 냄새가 솔솔 났다. 죄지은 표정을 짓는 그가 못내 귀여워 금방 표정이 풀려 버린다.

“가까이가 아니잖아.”

차 타고 30분 거리라니. 전혀 가깝지 않아. 남자의 안색이 어두워지는 걸 보면서 다시 어이가 없어진다.

“야. 그러면 같이 살자니까.”

“그건…….”

남자가 말꼬리를 돌리지 못하게 스탠리가 그의 손을 끌어당겼다.

“내 눈 똑바로 보고 말해. 뭐가 문제인 거냐.”

동거를 이야기하기에는 아직 둘의 교제 기간이 충분치 않은 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스탠리에게는 강한 확신이 있었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기어이 해내고 마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남자다웠다. 그러나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는 스탠리와 달리, 어떤 이유에서인지 리처드 베켓은 미적지근한 반응이었다.

미적지근하다기보다는, 내켜 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살짝 심술이 났지만, 시간이 필요하겠거니 싶었다. 그런데 바로 지금 이 순간, 석연찮음이 폭발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마음의 준비가 안 되긴. 보여 줄 건 다 보여줬는데, 할 것도 다 했고.”

“그래도, 같이 산다면, 그건… 공식적으로 되는 거잖아.”

엥. 스탠리 제이미슨이 눈을 홉뜨고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의 멀끔한 얼굴에서는 어떤 동요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그보다, 그는 담담해 보였다. 무덤덤하게 사실을 적시하는 투의 모습에 의아함이 치솟았다.

“그럼 지금 이건 공식적인 게 아니라고?”

몸도 겹치고 고백도 하고 근거리에서 살며 데이트도 하고. 이게 공식적이지 않다면, 뭐가 공식적이란 말인가. 물론 그 과정에서 사소한 오해와 다툼이 없던 건 아니다.

지난번 sns상에서의 난장판은 둘에게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다 극복했다고 생각했는데.

“자. 출근해야지. 아침 했어.”

크고 단단한 손이 이윽고 스탠리의 뒤통수를 기분 좋게 쓸었다. 그러나 기분이 좋아지기는커녕 더욱 가라앉기만 했다.

거대한 물음표가 둥둥 떠올랐다.

* * *

하루종일 회사에서 저기압인 스탠리 제이미슨을 보고 사람들은 살짝 놀란 눈치였다. 물론 그렇게 주눅이 들거나 눈치를 보는 일은 없었다. CEO가 어떤 기분이건 기업은 움직여야 하는 노릇이었다.

다만 복귀한 이후로 스탠리의 상태가 줄곧 좋았었기 때문에, 대관절 이 양반이 오늘은 왜 기분이 안 좋을까 하는 의문이 다였다. 하잘것없는 농담에 전혀 웃지 않고 일 관련 이야기만 하는 그 주위를 슬금슬금 피할 따름, 다른 반응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미묘한 기류를 스탠리 제이미슨 본인이 눈치채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오로지 아침의 대화가 맴돌 뿐이었다.

‘공식적이지는 않다.’

공식적이지 않다니.

그럼 이게 다 그놈한테는 한낱 불장난 같은 거란 말인가? 컵을 그대로 으스러뜨릴 만큼 힘을 강하게 주다가 손을 뗐다. 물론 리처드 베켓이 그런 음흉한 계산을 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 상상만으로도 목덜미가 지끈거렸다.

저에게 물을 끼얹은 전 애인이 일견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래. 감정의 불균형은 고통스러운 거지.

제기랄. 언제 그렇게 연애에 진심이었다고, 남자의 한마디 가지고 온갖 잡생각이 들었다.

‘아니. 오히려….’

반대라면? 그러니까, 남자가 여태껏 저를 못 미더워하고 있는 거라면?

스탠리가 여태 남자와의 관계를 단발성 만남으로 치부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거라면…. 그런 미적지근한 태도도 이해가 되는 것이었다. 스탠리를 못 믿는 것이다. 아니, 스탠리의 사랑을 받는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

‘이 자식. 왜 이렇게 자신감이 없는 거냐고.’

속상할 지경이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었지만 나름대로 진심을 표현하며 교제했다고 생각했는데, 남자는 여전히 자신이 없었다.

스탠리가 사는 뉴욕으로 일자리를 구해 들어온 남자를 보며, 이제 전부 게임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리처드 베켓은 제 모든 판돈을 걸지만, 반대로 스탠리가 제 몫의 대가를 치르는 것은 극구 사양하기만 한다.

불공평하다. 스탠리 쪽에서도 진지해지고 싶다. 늘 멋진 역할은 자신이 하고, 상대방은 깨질라, 부서질라. 고이 대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젠장할.”

“무슨 일이라도 있나 봐요.”

비서 중 하나인 알렉시아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하며 태블릿을 두드렸다.

“…알렉시아. 질문이 있어.”

“네?”

알렉시아가 태블릿을 널찍한 책상에 올려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 스탠리 제이미슨은 비서들에게 사적인 질문을 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늘 쿨하게 일만 하는 상사가 돌연 질문이 있다니 놀랄 노 자였다.

“너 같으면, 그게…. 애인이 ‘우리 관계는 공식적이지는 않잖아.’라고 말하면 어떨 것 같아?”

오. 맙소사. 게다가 연애 문제라니. 알렉시아 케틀러가 아는 바로, 상사는 연애 관계에 있어서 극도의 쾌락주의자였다. 물론 비도덕적인 행동을 하거나 양다리를 걸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지극히 타산적인 관점에서 연애에 접근하곤 했다. 그런데 그가 ‘을’의 입장에서 연애 조언을 구한다니.

“글쎄요. 기분 더러울 것 같은데요.”

와이퍼의 수평적인 기업문화는 비서로 하여금 직언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러면 그럴 때 너는 어떻게 할 거야?”

“뭐…. 일단 제가 그동안 해 왔던 연애들에 비추어 본다면… 공식적이지는 않다라. 솔직히…. 가망이 없는 말인 것 같은데.”

“그건 너무 극단적인데? 그 정도로 심각한 이야기야?”

스탠리가 벌떡 일어났다. 알렉시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제 상사가 이렇게 연애 감정에 휘둘리는 건 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 상대는 뭐가 돼도 소중한 존재인가 보다 싶었다. 그러나 그 소중하신 분은 참 나쁜 여자인 모양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정 희망을 붙들고 싶으시면, 분위기 좋은 자리에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 보는 건 어때요?”

“……그나마 좋은 생각이군.”

스탠리가 다시 자리에 앉으며 탁상을 두드렸다.

“이벤트도 좋은 생각이죠. 분위기 전환에 좋거든요. 퍼블릭 시어터 예약을 도와드릴까요? 뉴욕에 사는 이점을 최대한 누리셔야죠. 상대 여성분이 어디 사시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알렉시아의 말에 스탠리 제이미슨이 다시 일어났다. 스탠리가 입 모양으로 말했다.

‘좋은 생각이야.’

‘몇 번을 앉았다 일어났다 하시네.’

알렉시아는 심드렁하게 생각하며 패드 액정을 스와이프했다.

* * *

새로 일하게 된 브루클린의 정비소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정들었던 밸린저 시티의 정비소를 떠나는 건 퍽 어려운 일이었지만, 스탠리를 생각하면 대수롭잖은 대가였다. 고든 영감의 잔소리는 덤이었고.

당장 목숨이라도 바칠 수 있는데, 직장 좀 바꾸고 더 작은 데서 산다고 해서 뭐가 대수랄 게 있겠나.

다행히 모아 둔 돈이 꽤 있었다. 브루클린에 집을 구하고 주소를 바꿨다. 단지 이 모든 일이 스탠리에게 부담스럽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오늘도 위험했어.’

처음 스탠리가 같이 살면 안 되겠냐고 장난조로 물어왔을 때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기쁨과 환희로 판막이 부풀어 오르는 기분이었다. 눈물이 나려는 걸 간신히 참으면서 애써 말을 돌렸었다.

오늘 아침에도 또 같이 지내면 안 되겠냐 했을 때, 위험했다. ‘그래. 당장이라도.’라고 대답하려는 걸 이성을 총동원해서 막아냈다.

동거라는 건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저 좋자고 스탠리 제이미슨에게 대가를 치르게 할 수는 없었다.

이전의 영상 바이럴 사태는, 리처드 베켓의 마음에 커다란 흉터를 남겼다. 물론 잘 극복해내기는 했다. 스탠리는 여전히 리처드의 가까이에 있었고, 그를 만지고 키스하는 것도 리처드 베켓만의 특권이었다. 다른 누군가가 그 권리를 뺏으려 한다면?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그러나 동시에 스탠리 제이미슨의 위치가 불안정하다는 걸 뼛속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며칠간 폭락하던 와이퍼의 주식과 사람들의 비난, 언론의 공세. 그 모든 공격들이 스탠리에게 가해진다고 생각하니 숨을 쉬기 어려웠다.

동거한다면 모두가 알 것이다. 스탠리 제이미슨 옆에 자신이, 리처드 베켓이 서 있다는 것을. 물론 동성과 사귀는 건 미국의 IT업계에서 딱히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리처드 베켓은 제 손안에 쥐어진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경이로운 스탠리와 달리, 제게는 그를 사랑할 능력밖에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주저했다.

후회가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다시 물어온다면 그는 필경….

‘좋다고 하겠지.’

인내심도 없군, 리처드 베켓. 자조의 웃음을 지으려는 찰나였다.

“베켓? 저거 혹시 네가 아는 사람 차냐?”

친해진 동료의 질문에 리처드 베켓이 정비소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물론 알다마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소유하는 차들 중 한 대였다. 페라리 F12 베를리네타를 검게 도색한 물건으로, 잘 몰지도 않으면서 괜히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지? 야. 저런 차를 왜 사람 많은 뉴욕 거리에서 모냐. 저런 허세 부리는 놈들 때문에 문제야. 완전히 깽판 놓겠다는 거 아니-.”

리처드 베켓이 시뻘건 얼굴을 한 채로 차를 향해 걸어 나갔다. 그가 가까이 다가가자, 검게 선팅된 차창이 스르르 내려갔다.

선글라스를 한 스탠리 제이미슨이 고개를 까딱했다.

“퇴근 시간에 맞춰 왔어. 타.”

“…….”

후. 밭은 한숨을 내쉰 뒤 짐을 들고 조수석에 탔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꽤 멋을 부린 상태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세팅되어 흠잡을 데 없었다. 시계 하나에 집 한 채 정도 값이려나. 그러나 그런 장식물보다도 본체가 워낙 빛이 났다. 리처드 베켓은 조수석에 불편하게 앉아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

“그냥. 기분 좀 내보려고.”

너 데리고 오려고 일찍 퇴근했어. 스탠리가 품 안에서 멋들어지게 티켓 두 장을 꺼냈다.

“오늘 밤 뉴욕 퍼블릭 시어터에서 <오프닝 나이트>라는 연극을 하는데, 가장 좋은 자리 두 개 잡았어.”

“……갑작스러운데.”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해 보자는 거지. 집에서 뒹구는 것도… 뭐, 나쁘지 않지만.”

“하지만, 나… 지금 옷이-.”

평범한 후드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당장 집에 가서 갈아입어야, 아니. 그렇다 해도 지금 스탠리에게 걸맞은 착장을 찾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사자.”

스탠리가 쿨하게 말을 자르고 차를 움직였다. 거친 감각으로 도로를 향해 나아가는 차체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산다니-.”

“사귀는 사이에 할 수 있는 일을 하려는 거야.”

벼르고 벼렸던 일이기도 하지.

슈퍼 카는 엔진 소리가 사나웠다. 차체의 부르릉거리는 소리 이외에 둘 사이에 오가는 말은 없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그 적요가 적잖이 초조했다. 자신이 무리수를 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오늘은 제대로 자신의 능력을 보여 줄 셈이었다. 일종의 심술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둘이 도착한 곳은 명품 거리로 유명한 5번가였다. 예전의 아성은 없다지만 휘황찬란한 쇼윈도와 관광객들, 그리고 멋진 복장을 한 뉴요커들로 북적이는 곳이었다. 굉장히 혼잡한 교통은 스탠리의 차 앞에서는 해당하지 않았다. 사나운 택시들도 스탠리의 차체 앞에서 옆 차선으로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스탠리는 능숙하게 운전해 나아갔다. 차가 멈춘 곳은 버그도프 굿맨 백화점 앞.

“다 왔어.”

리처드 베켓의 안 좋은 예감이 현실화되는 순간이었다.

* * *

차는 대리주차를 맡기고 둘은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리처드 베켓이 스탠리 제이미슨에게 속삭였다.

“무슨 짓이야.”

“말했잖아. 명색이 사귀는 사이인데 애인에게 약소한 선물쯤은 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스탠리가 리처드 베켓을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스탠. 괜찮아. 나는 이런 거 바라지 않아.”

“이건, 내 마음-.”

그 순간 잘 테일러된 양복을 입은 남자가 둘 앞으로 다가왔다. 안경을 쓴 그가 살짝 고개를 기울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미스터 제이미슨. 저는 오늘의 쇼핑을 도와드릴 퍼스널 쇼퍼, 피에르 토마신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퍼스널 쇼퍼? 리처드 베켓이 할 말을 잃었다. 그 기세를 동원해 스탠리 제이미슨이 고개를 까닥했다.

“전달받으셨겠지만, 이 친구의 메이크 오버를 도와줬으면 좋겠군요.”

“스탠리!”

안절부절못하는 리처드 베켓을 손으로 꼭 붙들었다.

둘이 티격태격하건 말건 퍼스널 쇼퍼는 프로다운 차분함으로 질문하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스타일을 원하시나요?”

“깔끔-. 아, 잠깐만 있어 봐, 리처드. 깔끔한 스타일이 좋겠어요. 보면 아시겠지만, 원체 멀끔한 놈이라, 조금만 손봐 주세요.”

“흠. 그렇군요.”

프랑스인 같은 어투를 쓰는 퍼스널 쇼퍼는 고개를 까닥이며 리처드 베켓을 상하좌우로 스캔했다.

“확실히 프로포션이나 균형감이 좋은 분이십니다.”

“제발…….”

리처드 베켓이 손으로 얼굴 한쪽을 가렸다.

할 말이 있어도 제삼자 앞에서는 내뱉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그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고개를 다시 까딱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 * *

한 번도 직접 방문해 본 적 없는 백화점이었지만, 스탠리는 VIP 고객으로 등재되어 있었다. 그는 푹신한 소파에 눕듯 기대어 앉았다. 은전 서푼에 스승을 팔아넘긴 유다라도 된 것 같았다. 그래도 스탠리 앞에서 우스운 꼴을 보이고 싶지 않은 건지, 리처드는 처음에는 다소간 저항하다 순순히 퍼스널 쇼퍼를 따라 나갔다.

‘화났겠지.’

스탠리 제이미슨이 뭔가를 사 주거나, 도와주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남자니까. 하지만 그래도 뭔가를 주고 싶었다. 아니, 그런데 뭘 주면 안 되나? 저는 제게 이것저것 다 해 주면서, 스탠리는 뭘 해 주면 안 되느냐는 말이다. 의식의 흐름이 진행되면서 점차 분노도 더해졌다.

이렇게 돈으로라도 부채 의식을 심어 주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심술인가.’

애새끼 같은 심술에 불과한 걸까. 그럴지도. 스탠리 제이미슨이 좀처럼 휴대폰 액정 속 도표에 집중하고 있지 못할 때였다. 엘리베이터 쪽에서 차임벨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동화 속의 한 장면처럼 천천히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빠짝 긴장한 채로 굳었다. 눈앞에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이 천천히 감각되었다.

깔끔하게만 해 달라는 주문대로, 그렇게 호화스러운 차림은 아니었다. 고급 정장과 구두, 셔츠와 시계로 단장이 된 그는, 그러나…….

‘제기랄. 욕 나오게 잘생겼네.’

숨이 멎을 정도라는 말은 한심한 수사지만, 그런데도 스탠리는 잠시간 숨을 멈췄다. 머리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양복을 입은 제 남자친구는 번쩍였다.

리처드 베켓이 어색한지, 목덜미를 더듬었다. 그러다가 뭔가 결심했는지 그가 천천히 스탠리에게 다가왔다. 남자는 바투 다가서서 한쪽 무릎을 꿇고 스탠리의 손을 잡았다.

“어때? 마음에 들어?”

살짝 책망하는 투가 서려 있었지만, 마냥 화가 난 것 같지 않아 다행이었다. 가까이서 남자를 보니 뿌듯하기도 하고, 괜히 심장이 가쁘게 뛰기도 했다. 흠 없는, 번쩍이는 보석을 지근거리에 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

스탠리 제이미슨이 입을 꾹 닫은 채로 아무 말도 못 하자 장난기가 돌았는지 남자가 뺨을 스탠리의 손등에 댔다.

“별로인가 봐.”

“…아냐. 그냥. 신기해서….”

“스탠. 네가 주문해 놓고 신기하다니.”

리처드 베켓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며 스탠리의 볼을 꼬집었다. 그가 나직하게 웃었다.

“앞으로는 이렇게 놀라게 하지 마.”

* * *

극장은 차를 타고 20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차 안은 조용했지만, 스탠리는 더는 그런 거에 신경 쓸 수 없었다. 옆에 휘황찬란한 남자가 앉아 있어서 도저히 운전에 집중할 수 없었다. 아니, 원래 멋진 녀석이지만.

“…….”

그렇게 힐끔거리다가 그만 남자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새파란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치니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얼굴만 보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냐.’

젠장.

“…그렇게 좋아. 스탠?”

“아, 아냐. 그냥 신기해서 그래.”

정말 그렇대도. 그러나 말을 더듬는 바람에 신빙성이 급격히 떨어졌다. 스탠리가 이를 악물었다.

“…….”

리처드 베켓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뭔가를 생각하듯 남자가 말이 없었다.

* * *

가장 비싼 관람석에서 오붓하게 연극을 관람했다. 오붓하게, 라는 말이 적당할지 모르겠지만. 연극의 주제가 워낙 무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자와 밀착된 공간에서 같은 것을 본다는 게 좋았다.

극이 끝난 후 둘은 연극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레스토랑까지 걸어갔다. 스탠리가 예약을 걸어 뒀다는 말에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랬을 거로 생각했다고. 완벽하게 코스를 마련했구나, 스탠리. 리처드 베켓의 말에 어쩐지 머쓱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이거. 너무 나만을 위한 계획인 것 같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까.”

호텔 로비에서 스탠리가 우뚝 서더니 걱정스럽게 말했다.

“아냐. 좋았어.”

“…….”

“난 너를 위한 거라면 다 좋아.”

“…바보 같은 소리 하시네.”

정작 내가 원하는 건 해 주지도 않으면서. 스탠리 제이미슨이 고개를 돌렸다. 호텔 최상층에 위치한 프렌치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의 예약 시간이 가까웠다. 로비에서 투숙객들이 살짝 둘을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게 스탠리 때문이건, 리처드 베켓의 훤칠함 때문이건 그다지 신경 쓰이는 건 아니었다.

“…스탠리.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다면. 내가 더 먼저 고집을 꺾었어야 했나 싶기도 해.”

리처드 베켓이 덤덤하게 말했다.

“……고집이라니.”

스탠리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교교한 달처럼 빛나면서도, 지극히 정돈된 인상을 주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스탠리는 그런 얼굴 때문에 남자를 사랑하게 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음을 이런 식으로 받을 수는 없어.”

그의 올곧은 의지 때문이었다. 리처드 베켓은 어린 양을 다독이듯이 차분하고 담대한 태도로 스탠리를 얼렀다. 많은 생각을 거친 것처럼 말이 곧게 뻗어 나왔다.

“그러면 나는 어떡하라고. 나는 누굴 좋아하는 방법을 잘 몰라. 그래서 졸부처럼 돈으로 박치기하는 건데. 그것도 하지 말라니, 어쩌라는 거냐.”

로비의 숱한 사람들이 수군거리건 말건 스탠리가 꿋꿋이 말을 이어 나갔다.

“…….”

스탠리의 자기비하적 말에 리처드가 움찔, 했다. 스탠리가 그 틈을 타 계속 말했다.

“그래. 그래서 제대로 된 연애도 못 한 거야. 웃기지 않냐.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난 노라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면서, 눈앞의 사람들에게는 개차반으로 굴었던 거지.”

“…….”

“제기랄. 아무튼, 말하는 거에는 익숙하지 않다고. 널 좋아하는 걸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바보인 거지. 한심할 만해.”

너드 태를 못 벗어난 거야.

스탠리가 붉은 얼굴을 찬 바람 탓으로 돌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말을 듣자마자 리처드 베켓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치 지극히 사랑스러운 어떤 것을 보듯이 갸륵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손을 뻗었다. 단단한 손이 스탠리의 손가락 사이 사이를 간질이듯 매만졌다.

“나 역시 익숙한 건 아니야. 너를 혼자 좋아한 지 너무 오래되어서, 지금 상황은 내게도 새로워.”

하지만 같이 알아 나가자. 사랑하는 법을 배워 가자.

나는 역시 너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 같아.

리처드 베켓이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스탠리 제이미슨. 자신이 유일하게 사랑했고 사랑하는 사람.

20대 때는 무척이나 두려웠다. 다른 사람을 또 사랑하게 될까 봐. 사랑이라는 것은 무서운 주박이었고 리처드 베켓은 그 고통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운명은 또 다른 길을 내어주었으니, 스탠리 제이미슨이 이제 제게 사랑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스탠리가 감정에 복받치는 모습을 보자 뭔가가 꿈틀했다. 지각을 뚫고 나오는 용암처럼 마음이 동요했다.

“스탠리.”

“…….”

“우리 같이 살까.”

“…….”

“너와 나 둘이서, 어느 때가 됐건, 어디가 됐건 같이 있을까?”

“…….”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네 인생에 끼어들까. 그래도 되는 걸까.”

내가 이기적인 거겠지? 그런 욕심, 가져서는 안 되는 거겠지? 리처드 베켓의 목소리가 살짝 끝으로 가며 떨렸다. 하지만 힘 있는 말이었다.

“리처드 베켓.”

스탠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가 말했다.

“사랑한다.”

젠장. 같이 살자는 그 한마디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걸 안다. 눈앞의 남자가 어떤 장애물을 또 안간힘을 내 넘었다는 걸 안다. 스탠리가 스탠리 안의 틀을 깨부수며 전진하듯 그 역시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리처드 베켓이 그를 확 끌어당겨 입을 맞추기 시작하자, 레스토랑 예약도, 와이퍼도, 그의 이전 삶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오로지 그와 함께라는 감각만이 그를 온전하게 채우고 있었다.

그것은 최초의 승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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