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Pride and Prejudice (4/6)

Pride and Prejudice

2003년의 늦가을.

스탠리 제이미슨은 리처드 베켓을 위해 친히 연극 연습에 동참하는 중이었다. 혹자가 보면 말도 안 되는 풍경이었다. 안경을 쓴 너드와 그럴듯한 미청년 둘이서 대사를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다니.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둘은 제법 열중하고 있었다.

“그 당시 제가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물론 그랬습니다. 제 허영심 때문이었지요.”

“그렇다면 저를 미워하셨겠군요.”

“전혀요.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제 분노는 제대로 방향을 잡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순간적으로 짧은 침묵이 있었다. 목석같던 남자가 일순 연기력이 느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흠흠. 스탠리는 우쭐했다. 역시 제 마인드 트레이닝이 효과를 본 것이리라.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베켓 녀석의 초점이 흐려져 있었다.

“뭐냐.” 너무 몰입한 거 아니야? 스탠리 제이미슨이 퉁명스럽게 한마디 했다. 그런데, 갑자기 남자가 천천히 저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지 뭔가.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었다.

-쪽.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제 입술에 느껴졌다. 그리고 살과 살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온기가 가셨다.

…….

스탠리 머릿속의 CPU, 그러니까 뇌가 과열되기 시작했다. 사태를 프로세스하는 데 너무 많은 연산이 필요했다.

‘저거 설마 새로운 형태의 괴롭힘인가.’

‘과다 몰입한 거겠지.’

‘아냐. 내가 환상을 체험하고 있는 확률이 0.00002% 정도 더 높아.’

스탠리 제이미슨이 뻣뻣하게 굳어서 눈동자도 굴리지 못한 채 서 있었다. 리처드 베켓이 다시 한번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는 다시 입맞춤을 하기 전, 스탠리의 안경을 벗겼다. 무력하게 벗겨지는 안경을 스탠리가 바라만 보았다. 안경을 한 손에 든 리처드 베켓이 다시 스탠리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약하고 부드러운 움직임이었으나 거부하기 어려웠다.

쪽쪽, 계속해서 망측한 소리가 나고 나서야 스탠리 제이미슨이 남자를 밀어냈다. 남자는 손쉽게 뒤로 밀려 떠밀렸다.

“너… 너 미쳤냐!?”

“…….”

스탠리가 입가를 소맷부리로 닦아내며 소리 질렀다. 이 미친 새끼가, 혀를 넣으려고 했다. 아니, 애초에 키스를 한 것 자체가 말이 안 됐다. 말도 안 된 짓을 저지른 당사자, 리처드 베켓의 얼굴이 붉었다. 습윤한 눈가가 더욱 축축해졌다.

한참을 둘은 대치 상태 속에 있었다. 키 큰 남자가 비켜 줄 생각을 안 하니, 스탠리로서는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전력을 다한다 해도 이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스탠리가 이를 아득바득 갈며 말했다.

“나를 노라라고 착각한 건 아니겠지.”

“응. 아냐.”

리처드 베켓의 눈은 여전히 몽롱했다. 스탠리는 아프도록 주먹을 쥐면서 남자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너도 날 괴롭히려고-.”

“스탠. 날 봐.”

남자의 손이 스탠리의 부러질 듯 약해 보이는 팔뚝을 잡았다. 스탠리가 벗어나지 못하자 남자가 그제야 안심한 듯했다. 그가 낮게 말했다.

“나. 너 좋아해.”

“……장난치지 말라고! 이 개새끼야!”

“정말, 정말 좋아해.”

“개자식! 손 놓으라고 했지!”

스탠리 제이미슨이 몸부림치는 걸 그만둔 건, 리처드 베켓이 눈물을 뚝뚝 흘리고 나서부터였다.

조각 같은 뺨을 타고 물방울들이 흐르기 시작하는 건 현실감이 희박한 광경이었다.

뚝. 뚝.

그 순간, 스탠리 제이미슨은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는 정확히 몰랐지만, 확실하게 좆 되었음을 알았다.

* * *

“야. 왜 울고 그래. 이래서는 내가 잘못한 것 같잖아.”

스탠리 제이미슨이 벤치에 앉아 남자를 토닥였다. 철옹성 같은 학교의 쿼터백이 제 앞에서 고백을 하더니 갑자기 눈물까지 흘릴 줄은… 어떻게 알았겠는가. 울고 싶은 건 오히려 스탠리 쪽이었는데도 말이다. 한참을 다독이고 나서야 남자는 눈물을 그쳤다. 젠장, 우는 것도 영화 같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우는 남자 주인공처럼 처연히 울고 있는 녀석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

남자는 그제야 부끄러운지 고개를 푹 수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로 꿈쩍도 안 했다.

“야. 너, 나 좋아한다고 그랬지?”

스탠리 제이미슨이 혼란스러운 가운데서 상황을 파악해 보려 했다. 당장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

리처드 베켓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격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장난 같은데.”

“……진짜야.”

“하지만 너는 노라랑 사귀잖아.”

“…….”

남자의 입이 합죽이가 되었다. 남자가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아주 작게 말했다.

“질투 나서.”

“뭐라고?”

스탠리가 얼빠진 표정을 하자 민망한 듯 그가 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노라 좋아하는 게 질투 나서.”

그래서 사귄 거야. 안 그랬으면 그럴 일 없었어.

“……와우.”

스탠리 제이미슨이 다리 교정 장치를 통통 치며 혼잣말했다. 도무지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연달아 들으니 호기심까지 동할 지경이었다.

“너 게이냐?”

딱히 혐오스럽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상상 초월의 충격이기는 했다. 여자애들에게 인기도 많고 데이트도 자주 하는 녀석이 저 같은 사람을 좋아한다니. 그건 어쩐지 이상하지 않은가. 그래서 그런 질문이 나오고 말았다.

“너만… 좋아.”

다른 사람을 이렇게 좋아해 본 적 없어. 그래서 혼란스러워.

남자의 대답은, ‘그래. 나 남자가 좋아.’보다 더욱 충격적이었다. 하고 많은 인간 중에 하필 저를 좋아할 사람이 존재한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그것도 남녀노소 인기 있는 녀석이! 그것은 리처드 베켓이 외계인이거나 러시아 스파이라는 것보다 이상한 소리로 들렸다.

차라리 노라 하트가 저를 좋아한다고 하는 게 현실적일 터였다. 최소한 그건 남녀 사이기라도 했으니까. 아니, 녀석 혹시 어디가 아픈 건가. 스탠리가 리처드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너. 정말 걱정된다. 어디 문제 있어? 열나는 거 아니냐? 힘든 일이라도 있으면 도와줄게.”

“…….”

스탠리의 걱정스러운 말에 리처드가 갑자기 화가 난 것 같았다. 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갔고, 그 모습을 스탠리가 망연자실하게 봤다.

“장난 같으면 그냥 갈게. 오늘 일은 잊어.”

리처드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을 내뱉었다.

그렇게 리처드 베켓이 가려는 것을 붙잡다가 스탠리가 그만 제 발에 제가 걸려 넘어졌다. 으악. 소리와 함께 거꾸러진 스탠리를 보고 리처드 베켓이 한달음에 달려나가 스탠리를 부축했다.

“……척 앤더슨이랑 계속 친해서, 나 괴롭히려고 그런 말 한 줄 알았어.”

남자의 품에 안긴 스탠리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한숨을 쉬었다.

리처드가 다시 조심스럽게 스탠리를 벤치에 앉혔다. 스탠리가 교정 장치의 이음매를 확인하고 다시 다리를 휘청휘청 움직여 봤다. 다행히도 부서진 곳은 없었다. 스탠리가 재차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너도 참 힘들겠다.”

“…….”

“하필이면 나 같은 걸 왜 좋아하는지 아직 이해가 안 되지만, 비밀로 해 줄게. 대신, 너도 이상한 짓 하지 마. 아까 전 같은 짓 말이야…. 그러면 당황스럽다구.”

스탠리가 침착하게 대답하자 리처드 베켓이 붉은 얼굴을 숙였다.

“…고마워.”

이상한 사람 취급 안 해서.

그래도 화 안 내서, 고마워.

* * *

남자 앞에서 씩씩하게 말해 버렸으나 부담감은 컸다. 젠장. 남자가 울기까지 해서 믿어는 주겠지만, 큰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스탠리는 하루의 일을 일기장에도 쓰지도 못하고 침대에 벌러덩 누워 끙끙거렸다.

‘그러고 보니까.’

첫 키스였다.

제 일생일대의 첫 키스를, 리처드 베켓이 가져갔다.

기대했는데, 하필이면…. 하필이면! 리처드 베켓이라니!

sdsakjdhsakhk! 의미불명의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다시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다. 씩씩거려도 분기가 풀리지 않았다.

“스탠리! 무슨 일이라도 있니?”

아래층에서 수전 이모가 놀란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그냥 벌레가 있어서!”

‘잘 생각해야 해. 스탠리 제이미슨.’

감정적으로 대응해서는 뼈도 못 추린다. 이럴 때일수록 전략적인 사고를 해야 했다.

잘못하면 학교도 졸업 못 하게 생겼다. 지금 스탠리는 큰 고래 세 마리(리처드, 노라, 척)에 끼인 새우 꼴이었다. 잘 처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도….

어쩐지 우쭐거리는 심사가 있다면, 미친 걸까? 스탠리가 거울 앞을 서성였다. 포즈를 잡아 보고 얼굴을 가까이 대보며, 제 모습의 어떤 부분이 멋진지 가늠해 보았다.

안경을 벗으니 나름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역시 좀 멋있지는 않은 것 같다는 게 결론이었다. 리처드 베켓에 비하면 저는 그냥, 특색 없다. 잘생기지 않았다. 못생겼다.

‘키도 좀 커야 하고. 운동도 열심히 해야겠네.’

꿈뻑꿈뻑 눈을 감았다 떴다가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리처드 베켓은 뭐가 아쉬워서 저 같은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다. 물론 스탠리는 스스로 생각해도 영특하다. 나름 씩씩하기도 하고. 상황에 비하면 밝은 편이다. 하지만 보통 그런 것 때문에 사람을 좋아하지는 않잖아. 10대에는 말이지, 아름답고 잘생긴 사람에게 끌리는 법이다.

리처드 베켓 같은 사람일수록 더더욱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그런 인기남일수록 외면만 보고 상대를 쉬이 선택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만약, 스탠리 제이미슨이 잘못 판단한 거라면? <오만과 편견>이 주는 교훈처럼, 스탠리 제이미슨이 그 영특한 머리로 남자를 잘못 판단했다면?

마음이 급격하게 불편해졌다. 연산 불가능한 오류처럼, 리처드 베켓은 스탠리의 인생이라는 코드에 끼어들기 시작했다.

* * *

다음 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다음 날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주 내내 아무 일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척 앤더슨이 말로만 뭐라 이따금 시비를 걸어올 뿐인, 일상적인 나날이었다. 하지만 스탠리 제이미슨은 그런 것 따위,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보다는 리처드 베켓이 아무 신호도 보내지 않는 게 굉장히 불안했다. 

마치 고백이 없던 일인 것처럼.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 남자가, 수상했다.

‘어쩌면 잘된 거지. 녀석도 적잖이 쪽팔릴 테고, 나도 어색하니까. 그냥 이대로가 나아.’

그러나 씁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쓰라린 느낌이었다. 잠시나마 뭔가를 기대했던 제가 바보같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 * *

스탠리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노라에 대한 생각을 그만뒀다. 그 남은 저장 용량에는, 리처드 베켓이라는 새로운 데이터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쉴 새 없이 연산이 돌아갔다.

처음에는 그저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 이라는 정보밖에는 없었다. 스탠리는 지척에서 남자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가 연습하는 걸 지켜보고, 그가 친구들과 대화 나누는 걸 곁눈질했다.

도달한 결론은 너무나 한심한 것이었다.

남자는 아름답다. 움직임은 절도 있고, 우아하며 외견은 나무랄 데 없다. 사람들에게 거리를 두기는 하지만 무례하지도 않다. 인정하자. 그가 여자애들에게 인기가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슬퍼 보인다.

전학 첫날부터 그렇게 생각하기는 했다. 푸른 눈이 다소 냉소적이라고, 말이다. 어쩐지 슬퍼하고 있다고 멋대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런 슬픔의 기운이, 첫 키스의 눈물과 겹쳐지자 꽤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녀석은 왜 운 걸까.

왜 슬퍼하는 걸까?

왜 나에게 키스한 걸까?

리처드 베켓에 대해 그렇게 한참 생각하고 나면 무릎께가 아팠다.

성장통이었다.

* * *

리처드 베켓이 스탠리에게 말을 다시 건 건, 연극 축제 전야였다.

또 마지막까지 저녁 늦도록 연극 연습을 도와주고(부려먹히고) 리처드 베켓의 차를 타고 집으로 갔다. 옆자리에 앉은 노라는 말이 없었다. 그녀가 먼저 내리고 둘만 차에 남았다.

“연기 이제 잘하더라?”

스탠리가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었다. 안 그래도 어색한 분위기가 일순 더욱 긴장됐다.

어쩐지 책망하는 투가 되었는데,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다. 아니 정말 없었다고 할 수 있을까. 스탠리는 최근에 남자 때문에 제대로 사고할 수 없었다.

“너 생각했어.”

남자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스탠리 제이미슨의 눈이 커졌다.

“날 생각했다고?”

“그래.”

차가 멈췄다.

“다 왔어.”

남자가 꼼짝도 하지 않고 말했다. 후면 미러에 비친 그의 표정이 덤덤했다.

“또 모른 척할 거야?” 

스탠리가 반사적으로 추궁하기 시작했다.

“……무슨 말이야.”

남자가 고개를 돌려 뒷좌석에 앉은 스탠리를 쳐다봤다. 어두침침한 차량 실내등 아래에서 얼굴의 음영이 돋보였다. 

“그런… 그런 말을 해 놓고, 또 아무 일도 없었단 것처럼 굴 거냐고.”

스탠리 제이미슨이 공연히 달아오르는 제 볼을 무시하며 남자를 쏘아봤다. 리처드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저번처럼. 또… 못 참을까 봐.”

남자의 눈가가 그림자에 잠겨 그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스탠리 제이미슨의 등줄기를 따라 일순 소름이 돋았다.

“……?”

못 참다니. 무슨 소리야. 스탠리 제이미슨의 CPU가 보란 듯이 또 작동을 정지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계속해서 핵폭탄을 투여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또 말했다.

“나, 너 좋아하는 거 맞아.”

“…내가, 내가 그런 대답을 바란 것처럼 말하지 마!”

스탠리가 벌컥 차 문을 열었다. 이번에는 나자빠지지 않도록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 차에서 폴짝, 내렸다.

스탠리가 제집까지 홀홀 뛰어 사라질 때까지. 차는 그곳에 있었다.

* * *

하이스쿨 연극제는 마을 교회를 빌려 진행되었다.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었으나, 밸린저 시티 사람들은 적극적이었다. 교회 담임 목사인 포그 씨가 먼저 연극 무대로 교회가 어떻냐고 제안해 온 것부터 시작으로, 다들 난리도 아니었다.

하긴, 그만큼 동네에는 볼거리며 구경거리가 적었다. 사람들은 유흥을 즐기려면 시내 유일의 영화관에 가거나(그나마 걸려 있는 영화도 얼마 없었다) 앤 아버, 디트로이트에 가야 했다.

소품 팀은 무대 맨 뒤에 서서 관람해야 한다는 방침이 적잖이 짜증스러웠다. 안 그래도 다리가 불편한 스탠리는 그냥 집으로 갈까, 하다가 그냥 구석에 쭈그려 앉았다. 다리가 아팠다. 그냥 가면 되는 걸 알면서도,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나름 연습을 도와준 입장에서, 리처드가 연기를 잘해 냈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런데 그러다가도, 괜한 심술이 났다. 콱 대사나 까먹어라.

‘유치하네. 스탠리.’

사실 리처드 베켓의 잘못은 없었다. 기습 키스를 한 거야 지탄받아 마땅한 행동이었지만, 누구를 좋아하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저도 리처드도 남자지만, 스탠리는 그렇게까지 그게 잘못되었다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역시 사회성이 없어서인가.’

남자애들이 모멸적으로 해 버릇하는 말들은 그도 알고 있었다. 호모 새끼라느니, 별종이라느니. 어쩌면 리처드 베켓이 저를 모른 척한 이유가 거기에 있겠다 싶었다. 들키고 싶지 않은 거다.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람을 놀려 버릇하는 취미는, 스탠리에게 없었다. 그냥…. 좀 특이하다 싶은 정도? 그러나 그것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하고 많은 사람 중에 하필 저냐는 것이었다. 그건 몇 주가 되도록 풀지 못한 미스터리였다.

스탠리가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내반족 교정기를 문지르고 있을 때, 막이 올랐다.

* * *

리처드 베켓은 나무랄 데 없는 다아시였다. 훌륭했다. 엘리자베스에게 고백하는 장면에서는, 상대 배역이 아닌 관중석을 보고 방백 하듯 했다. 그게 또 좋은 평가를 받았다. 뭐, 다행인 셈인데. 어째 조금 찜찜했다.

리처드 베켓의 시선이 잠시 방황하더니, 구석에 있는 저를 보고 대사를 읊는 것 같았지 뭔가.

에이. 아니겠지.

‘저 바보 같은 자식 때문에 나까지 노이로제에 걸렸네.’

스탠리는 애써 그 불길한 생각을 뒤로 밀어 놓았다.

연극이 끝나고 마을 사람들은 교회 앞에서 장터를 열고 춤을 추며 놀았다. 스탠리는 터덜터덜 가벼운 가방을 짊어 메고 회랑을 빠져나갔다. 그때였다.

“스탠리.”

저를 잡는 손길에 뒤를 돌아보니 남자가 있었다. 가발을 막 벗었는지 머리가 잔뜩 헝클어져 있는 남자가. 옷은 아직 무대 의상 그대로라서 불시착한 시간 여행자 같았다.

“으…응?”

스탠리가 멈칫하자, 리처드 베켓이 손을 느슨하게 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여전히 단호했다.

“나랑 이야기 좀 해.”

“너랑 무슨 이야기를 한다고….”

“……제발. 잠깐이면 돼.”

“……그래. 알았다, 알았어.”

스탠리가 또 한숨을 쉬었다.

“30분 뒤에 도서관 뜰에서 만나.”

“…….”

리처드 베켓은 대답도 듣지 않고 유유히 무대 뒤편으로 사라졌다. 스탠리는 비척이며 걸어 나갔다.

또 고백해 온다면, 어쩌지.

아니. 사실은 다 장난이었다고 하면 어쩌지.

어느 쪽도 마땅치 않았다.

노라는 어떻게 되는 걸까. 아니, 나는.

그러나 거절할 수도 없었다. 남자가 나쁜 행동을 할 이는 아닌 걸 알면서도 무서웠다. 둘 사이에는 힘의 차이가 있었다. 학교의 생태계는 잔인하고 솔직하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가진 거라고는 지성밖에 없는 피식자이고 리처드 베켓은 덩치 큰 맹수다.

‘그런 녀석이 내 앞에서 우니까 얼마나 놀랐겠냐고.’

그래도. 그래도, 그런 생각은 있었다. 리처드 베켓이 제게 몹쓸 짓을 할 인간은 아니라는 믿음. 일전에 제게 모른 척한 걸 사과하기도 하고, 그간 이것저것 편의를 봐준 사람이었으니까. 갑자기 괴롭혀 오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도 리처드 베켓은 척 앤더슨과 놀고, 싸움질까지 하는 녀석이기도 했다. 담배도 대놓고 태우고. 대마초도 한다 했다. 그런 녀석을 완전히 신용할 수 있을까?

어쩌면 좋지. 이런 거에 벌벌 떨 나이는 졸업했다고 생각했지만, 괜히 무서워져 발걸음이 늘어진다. 그러나 어찌어찌 도서관까지 도착하기는 했다. 해가 아직 지려면 한참 남았고 바람은 따스하기까지 했다.

스탠리는 저려 오는 다리를 무시하고 뜰까지 걸어 나갔다. 잠깐 벤치에 앉아 있었을까, 한눈에 봐도 리처드 베켓인 게 분명한 사람이 다가왔다. 녀석은 후드에 청바지 차림이었는데 급하게 나온 것 같았다. 머리는 바람에 헝클어져 있었고 얼굴은 붉었다.

혹자가 보면 야성미(?) 넘치는 면모가 있었다.

“할 말 있다며.”

스탠리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이자 리처드 베켓이 목덜미를 매만지며 어찌할 줄 몰랐다.

“스탠리.”

리처드 베켓이 스탠리 앞에 섰다. 혈색 좋은 얼굴에 밀색 머리까지, 남자의 뒤에 후광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괜히 비참해진 스탠리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에 비하면 자신이 얼마나 부족해 보일까 하는 자의식 때문이었다.

“…….”

“나….”

젠장. 젠장. 그것이 온다. 리처드 베켓이 또 간지러운 사랑 고백을 하면 어쩌지. <할로윈>에서 살인마 마이어스가 쫓아오는 것보다, <샤이닝>에서 잭 니콜슨이 도끼를 들고 달려오는 것보다 무서운 기분이었다.

“나. 노라 하트랑 헤어질 거야.”

그리고 도끼가 내리치는 순간이 왔다. 스탠리는 화들짝 놀랐다. 목부터 등줄기까지가 싸늘했다.

“뭐라…고?”

“노라랑 헤어질 거라고.”

“……그래…?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기뻐해야 하는데, 노라가 드디어 저 거머리 같은 놈이랑 헤어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는데. 왜 이렇게 소름이 돋고 무서운지 모를 일이었다.

“널 좋아하니까.”

“……야. 너 또라이냐.”

스탠리가 화를 참다못해 리처드를 비난했다. 스탠리는 애초에 척한테도 중지 손가락을 내미는 기개를 보이곤 했다(그리고 더 맞았다). 그런 그인 만큼 지금 리처드의 태도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비난당하건 말건 꿋꿋했다.

“바보 맞아.”

네 앞에서는 바보 맞다고.

스탠리의 퉁명스러운 대꾸에도 불구하고 남자가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말했다. 이럴 때를 보면 확실히 그는 경기 중의 쿼터백이 맞았다. 태산 같은 기백 하나는 인정해야 했다. 그 기백을 또라이 짓에 쓴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그래. 졌다, 졌어. 일단 병인지는 모르겠지만 장난은 아니다. 이 말이네.”

스탠리가 팔짱을 끼고 한숨을 쉬었다.

“…….”

끄덕끄덕. 리처드 베켓이 고개를 끄덕이며 스탠리 옆에 앉았다.

이런 걸 보면 좀 귀여운 구석이 있는 것 같기도… 아냐, 아냐. 정신 차려. 스탠리 제이미슨. 지금 눈앞의 남자는 골든 래트리버가 아니라 사자다. 호랑이다. 놈은 불량학생이라고. 어떻게 하면 남자를 완곡하게 거절할 수 있을까…. 스탠리가 한참 머리를 굴리다가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스탠리가 씩-. 사악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증명해 봐.”

“……음?”

“내일 학교에서 나 만날 때마다 꼬박꼬박 인사하고, 나랑 같이 밥 먹어. 그러면 진지하게 생각해 줄게. 아, 물론 등하교도 같이해야 해.”

리처드 베켓의 표정을 읽기란 어려웠다. 어쩐지 미묘해 보이는 그 얼굴을 보니 괜스레 씁쓸했다. 얼핏 보면 쉬운 과제지만, 하이스쿨의 청소년에게는 헤라클레스의 과업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하이스쿨 카스트의 최하에 있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일은.

특히 리처드 베켓처럼 폼 나는 녀석들일수록 더더욱 쪽팔리는 일은 하고 싶지 않은 법이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생각했다. 리처드 베켓의 마음이 어떤지는 몰라도, 그는 절대 이 문턱을 넘어오지 못할 거라고. 어쩌면 그게 둘에게는 최선이었다. 각자의 지지부진한 삶에서 최선을 다하고, 서로 얽히지 않는 것 말이다.

하지만 이대로 남자가 다음 날부터 저를 모른 척한다면?

아마도, 그래… 아마도.

조금은 멋쩍겠지. 서운하기까지는 안 해도. 그래도….

스탠리는 저 혼자 고개를 저으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정지시켰다.

* * *

스탠리 제이미슨의 예상이 보기 좋게 빗겨 나간 건 바로 그다음 날부터였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스탠리에게 수전 이모가 던진 한마디가 시작이었다.

“스탠리. 저 차… 네 친구 차니?”

“네?”

저는 친구가 없는데요. 그 말을 애써 목구멍 너머로 씹어 넘긴 후 주방에 난 창을 바라봤다. 보란 듯이 집 앞에 지프가 주차되어 있었다. 그걸 보고 머리가 띵, 망치에 얻어맞은 것처럼 멍했다.

누가 봐도 저 차는-. 저 또라이 새끼가.

“리처드 베켓 차…인 것 같은데요.”

설마. 스탠리의 등골이 오싹했다. 진심으로 약속을 이행하려는 건가? 스탠리 쪽에서는 전혀 기대 없이 던진 한마디였다.

“어머. 너랑 같이 등교하려는 거 아니니? 아니면 무슨 일이라도 있니?”

“……잠시만요.”

스탠리가 허겁지겁 가방을 들고 현관 바깥으로 나갔다. 집 밖으로 달려 나가 한달음에 지프 차 옆에 섰다.

이내 지프의 차창이 내려갔다. 리처드 베켓이 해맑게, 아니 천연덕스럽게 인사했다.

“안녕.”

“무슨 짓이야.”

리처드 베켓이 진지하게 모르겠다는 순진한 표정으로 응수했다.

“너 데리러 왔지. 같이 학교 가자.”

……어이가 없었다. 늘 모든 걸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리처드 베켓은 마치 오작동한 프로그램처럼 곤혹스럽게 굴고 있었다. 

“무슨 짓이냐고!”

“네가 먼저 제안했잖아.”

리처드 베켓이 그제야 진지하게, 장난기 없는, 차분한 눈으로 스탠리를 내려다봤다. 듣고 보니 그건 그렇다. 스탠리가 먼저 리처드 베켓에게 과업을 내리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남자가 실행할 거라는 생각은 1mg도 안 했다. 스탠리가 어버버 변명하듯 말했다.

“내가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야…. 그렇다고 진짜 나랑 같이 학교 가면 비웃음거리 돼. 눈에 띈다고.”

“괜찮아. 이렇게 하면 네가 진지하게 생각해 준다고 했으니까….”

비웃음 같은 건 무섭지 않아. 남자가 말끝을 흐리며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진지하고 씩씩한 태도는 잃지 않은 모습이었다. 스탠리가 고개를 황망하게 저었다.

정말… 저 또라이는 약으로 구제할 수도 없는 병에 걸린 게 분명하다.

* * *

그날 스탠리와 리처드의 동반 등교는 소소한, 아니 거대한 파문을 일으켰다. 그건 별다를 일 없이 일과가 돌아가는 밸린저 하이스쿨의 일대 사건이었다. 가장 핫한 아이와 가장 쿨하지 못한 아이가 같이 보란 듯이 등교를 하다니. 그것도 ‘같은’ 차에 타서.

그러나 그 사건은 그날 오후에 있을 또 다른 대형 사건에 묻히고 말았다. 리처드 베켓이 노라 하트와 헤어진 것이다.

엉엉 우는 노라를 남자애들과 여자애들이 다독이고 있었고 리처드 베켓은 훈련하느라 보이지 않았다. 다들 동요하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스탠리 제이미슨에게 진상을 묻는 이는 없었다.

하긴, 어느 누구도 천하의 리처드 베켓이 노라 하트를 차고 스탠리 제이미슨에게 구애하는 중이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아마 리처드 베켓과 함께 진실을 알 유이(二)한 사람일 스탠리 제이미슨은,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왠지… 이게 다 자기 때문인 것 같았다. 눈물을 펑펑 흘리며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노라를 보며, 심장이 가쁘게 뛰었다.

정말, 정말 나 때문에… 노라를 찬 거야?

정말?

<삶이 그대에게 레몬을 준다면, 그것으로 레모네이드를 만들어라.>

몇 년 전, 그러니까 90년대 유행했던 음악이 스피커를 통해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레몬 트리>. I wonder how. I wonder why. 스탠리 제이미슨은 인이 박인 선율을 애써 무시하며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래. 제 앞에 앉은 남자를.

조금 전만 해도 스탠리 제이미슨이 앉은 테이블은 휑했다. 그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앉지 않은 것이다. 익숙한 풍경이었고, 밸린저 하이스쿨에서는 일종의 불문율 같은 관습이었다. ‘스탠리 앞의 의자는 비어 있을 것.’ 그런데 그 유구한 관습이 오늘 깨어졌다. 배식을 받은 리처드 베켓이 스탠리를 향해 다가가자 전교생이 숨을 참는 게 느껴졌다.

공기의 밀도가 팽팽하니, 긴장감 있었다. 리처드 베켓이 탁 소리와 함께 배식판을 스탠리의 앞에 두자 극도로 긴장된 분위기가 폭발하고 말았다. 학생들이 수군거리거나 말거나 리처드 베켓은 앞에 앉아 묵묵히 포크와 스푼으로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연습 직후라 적잖이 배가 고픈 모양이었다. 그는 스탠리가 먹지도 않고 멀뚱히 저를 쳐다보자 신경이 쓰인 것 같았다. 그가 고개를 들더니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자신이 파장의 근원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배 안 고파?”

“…뭘 먹을 생각이 뚝 떨어진다.”

“…….”

“아니다. 됐어. 네 또라이 같은 진정성은 알아줘야겠네.”

스탠리가 뜨거운 얼굴을 숙였다. 자승자박이었다. 이런 식으로 전교생에게 주목을 받게 되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뒤를 돌아보자 완전히 얼이 빠져나간 척 무리가 보였다.

젠장. 나도 이제는 모르겠다.

조금 통쾌하기는 했다. 리처드 베켓이 결국 선택한 건 너희가 아니라 나라고. 좋아한다느니 정신 나간 소리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스탠리가 사과 파이를 포크로 찍어 리처드 베켓의 트레이에 놓았다.

“입맛이 없으니까. 이것도 네가 먹어.”

이제 보지 않아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전교생의 표정이 마치 스크림 가면처럼 일그러져 있으리라는 걸.

“잘 먹을게.”

그걸 모르는 건지, 알면서도 괘념치 않는 건지. 리처드 베켓이 애플 파이를 넙죽 입에 넣고 먹었다. 우물우물, 맛있게 먹는 게 보기 나쁘지 않았다.

* * *

학교가 끝나고 나서야 일이 터졌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려고 나가는데, 척 패거리가 교문 앞에 딱 버티고 서 있지 뭔가. 돌아가려고 발걸음을 돌리는 스탠리를, 그들이 쫓아왔다.

“야! 멈춰!”

“……싫어!”

하지만 스탠리 제이미슨이 휘청휘청 뛰어 봤자였다. 금방 스탠리의 어깨가 거친 손에 붙들렸다. 그대로 바닥에 거꾸러진 스탠리 위로 거센 목청이 들렸다.

“도대체 무슨 수작이야!”

“리처드 베켓에게 돈 꿔 줬냐?”

“이 개새끼가!”

아니, 좀. 뭘 물어볼 거면 대답할 시간을 주든가. 사정없이 몰아치는 비난에 스탠리가 얼떨떨해졌다. 눈만 끔벅이고 있자 사무엘 케이시가 화가 난다는 듯 주먹을 치켜 올렸다. 그리고 그때였다.

“그만.”

뒤에서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무엘 케이시를 내동댕이치듯 밀친 형체가 스탠리를 일으켜 세웠다.

“뭐 질문할 게 있으면 나에게 해야지.”

서글서글한 목소리의 리처드 베켓이었다. 그러나 그의 인상 좋은 얼굴에는 억눌린 분노가 역력했다.

“리치. 너 오늘 왜 이러냐? 노라랑 헤어지고 이제는 저 찐따 새끼랑 어울리고. 너답지 않게 왜 그래.”

“뭐… 그냥?”

남자의 대답에 척 앤더슨의 표정이 보기 좋게 짜부라졌다.

“그냥?”

“스탠리, 가자. 집까지 데려다줄게.”

리처드 베켓은 척 앤더슨의 반문에 응답하지도 않았다. 그가 스탠리의 등 뒤에 묻은 먼지를 큰 손으로 시원스럽게 털어냈다. 그리고 널브러진 스탠리의 가방을 가뿐하게 들어 제 어깨에 멨다. 스탠리에게 버거운 짐이, 남자에게는 휴지보다 가벼운 것처럼 보였다.

차에 들어가자마자 너 나 할 것 없이 둘은 푸하하 소리 내 웃기 시작했다.

“척 녀석 얼굴 봤어!”

“하하하!”

리처드 베켓은 핸들을 붙잡고 끅끅 웃었다. 스탠리는 얼마 만에 파안대소하는지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웃음이 멈추고 난 후 리처드 베켓이 예의 그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운전을 시작했다.

“이제 약속 지켜.”

“…응?”

주택가로 진입해 들어왔을 때 남자가 대뜸 말해 왔다. 스탠리가 고개를 갸웃하다가 아… 하며 스스로 깨달았다.

“진지하게 생각해 준다는 거?”

“…….”

끄덕끄덕.

아까 낄낄거리며 크게 웃고 났지만, 생각해 보니 웃을 때가 아니었다. 남자는 정말 스탠리가 내려 준 과업을 전부 완수한 것이다. 이제 빼도 박도 못 하게 되었다는 생각에 위기감이 들었다.

“……그래…… 약속은 약속이지.”

스탠리 제이미슨이 안경을 벗고 눈을 닦았다.

이걸 어쩐담.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 * *

진지하게 생각해 준다. 참으로 해석하기 모호한 말이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이 말의 애매함을 이용해 최대한 시간을 벌기로 했다. 일단 가장 큰 문제가 있었다. 1. 스탠리 제이미슨은 여자를 좋아했다. 그 말인즉슨, 남자와 어쩌고저쩌고한 사이가 된다는 것 자체를 아예 상상조차 해 보지 않은 것이다. 평생 혼자 사는 한이 있더라 하더라도 말이다.

‘나랑 사귀고 싶다는 건 성적으로 이것저것도 하고 싶다는 건가.’

…음…. 물론 그렇겠지. 일전의 키스를 생각해 보면. 첫 번째는 솜털 같았고, 두 번째는 꽤 농염했다.

“그러고 보니 그 미친놈… 혀도 넣으려 그랬어.”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만약 사귀게 된다면, 그 ‘짓’도 하게 될 거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자신이….

“그건 절대 용납 안 되지. 그럼 그렇고말고.”

스탠리 제이미슨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일단 무지막지하게 아플 거고…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흥분할 리가 없었다.

스탠리는, 팔 위의 돋은 소름을 가라앉히려 연신 살갗을 쓰다듬었다.

* * *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리처드 베켓은 스탠리를 픽업하러 차를 몰고 왔다. 둘은 같이 밥을 먹었으며, 훈련이 없는 날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게 되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으로서는 신기한 일이었다.

인간은 재미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리처드 베켓은 의외의 면모로 스탠리를 놀라게 했다. 남자는 생각보다 진중한 면이 있었다. 나름 미래에 대한 고민도 많은 것 같았고… 문학A 시간은 둘의 밀담 시간이, 스탠리의 노트 귀퉁이는 채팅방이 되었다.

졸려.

리처드 베켓이 끼적인 글에 스탠리가 답신을 남겼다.

-자지 마 중요한 부분이라구.

씨익. 남자가 곁눈질로 웃는 것을 보니 공연히 볼이 달아올랐다. 리처드 베켓이 다시 그 아래에 낙서를 했다.

-:( 내가 바보라서 그런가 하나도 이해 안 가

스탠리가 머뭇거리며 필기만 하자, 리처드가 아래에다 추가로 낙서를 적었다.

-네가 도와주면 좋겠는데

-바쁘지? T.T

‘…….’

스탠리가 한숨을 쉬었다. 젠장. 리처드 베켓이 턱을 괴고 저를 바라보고 있는 꼴이 꽤 우습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시하기 어려웠다. 반짝거리는 푸른 눈 위에 드리워진 금색 속눈썹이 아름다운 차양 같았다. 계속 옆을 돌아보다가 흠칫, 하며 다시 앞을 보게 되었다. 훔쳐보는 것 같아 괜스레 부끄러웠다. 한참을 고민하던 스탠리 제이미슨이 끄응… 한참 고민하다가 볼펜으로 대답을 휘갈겨 적었다.

-알았어. 근데 그냥은 안 돼.

-?

남자가 적은 물음표 아래에 빠르게 다시 재답변을 적었다.

-나 운동하는 거 도와주면 공부 도와줄게.

-:D

곧바로 바보 같은 스마일리 페이스가 덧붙여졌다. 피식. 스탠리가 어이가 없어 웃었다. 저렇게 알기 쉬운, 해맑은 반응이라니. 그러나 스탠리 제이미슨은 이제 안다. 남자가 마냥 밝기만 하지는 않다는 것을. 그만이 안고 있는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태껏 스탠리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또라이 같은 소리를 하는 녀석이라고 해도 마음에 상처를 주기는 싫었다.

남자의 눈에 담긴 슬픔은 이를테면, 일종의 경고 문구였다.

<이 상자를 열지 마시오>

그러나, 금기는 오히려 더 욕망을 추동질하는 법이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어느새 남자의 보폭에 맞춰 걷고 있었다.

그와 함께하는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 것인지도 모르는 채로.

* * *

“어머! 스탠리가 친구를 데려온 건 처음인데.”

수전 이모의 열화와 같은 반응에, 스탠리의 낯이 더욱 붉어졌다. 리처드 베켓이 시원스럽게 웃으며 인사해 보였다.

“안녕하세요?”

“아니, 참… 베켓 씨네 아들이 훤칠하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소문 이상으로 멋지구나! 뭐라도 먹으면서 공부할래?”

“괜찮아요. 이모, 저희 둘 이만 올라가 볼게요.”

이대로 가다가는 수전 이모가 리처드 베켓을 수양아들 삼겠다고 할 것 같았다. 아주 가끔 나오는 쓸쓸한 면모와 대비되게 평소의 리처드 베켓은 어른들에게 싹싹했고 무척 밝았다. 누구나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인간형인 것이다.

스탠리가 리처드 베켓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찌르며 계단을 향해 고갯짓했다. 둘은 같이 계단을 올랐다. 스탠리의 방문 앞에 선 리처드가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가 고갯짓했다.

“그냥 네가 열어도 상관없는데.”

스탠리가 툴툴거리며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적당한 무질서와 질서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있는 정경이 펼쳐졌다. 흔한 사춘기 남자애의 방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정리는 되어 있었다.

살짝 머쓱해진 스탠리가 목덜미를 만지작했다. 다행히 침대나 책상 위는 얼추 단정한 편이었다.

리처드가 앉은 자리 옆에 스탠리가 다른 의자를 끌어 앉았다. 책상이 넓어서 두 사람이 함께 공부하기에는 알맞았다. 스탠리가 필기 노트를 펼치며 중얼거렸다.

“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 * *

공부는 의외로, 정말 의외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리처드 베켓은 집중력이 좋았고, 게으름도 피우지 않았다. 비록 2~3시간 정도라고 해도 사실 그 시간 내내 계속 집중력을 유지하는 고교생이 많지는 않으니까.

스탠리의 말을 차분하게 듣던 남자가 수식을 풀어 나갔다.

“뭐… 나쁘지 않네. 금방금방 이해하는 편이야.”

“정말?”

기쁘다. 헤헤. 보이지 않는 거대 꼬리가 붕붕거리는 것 같았다. 괜히 쓰다듬어 주고 싶게시리. 스탠리 제이미슨이 안경을 벗어 닦았다.

“그동안 왜 공부 안 했어? 이렇게 금방 배우잖아.”

“…….”

남자의 꼬리가 다시 축 처지는 기분에 스탠리가 제 입을 탓했다. 괜한 말실수를 한 것 같았다.

“한심하지. 사실… 공부하려는 이유를….”

못 찾았거든. 별로 하고 싶은 것도 없었고.

“미식축구 잘하잖아. 너.”

스탠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리처드 베켓이 고개를 저었다.

“전국구로 잘하는 건 아니니까.”

“뭐야. 프로로 굳이 데뷔하지 않아도… 대학교에서 전공을 바꿀 수도 있다고. 일단 주립대라도 가면 할 수 있는 게 많잖아.”

“그래도…… 난 잘하는 게 없어서.”

남자의 말에 스탠리가 아연실색했다. 잘하는 게 없긴 뭐가 없어. 괜스레 화가 나, 스탠리 쪽에서 남자를 변호하기 시작했다.

“네가 잘하는 게 없긴 뭐가 없어. 배우는 것도 빠른 편이고, 건강하고… 어… 또 멋지고….”

“……나 정말 멋져?”

“…으… 아… 말이 그렇다는 거지!” 

스탠리가 우물우물 말 뒤를 흐렸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고, 갑자기 남자가 스탠리의 손을 끌어당겼다.

-쪽.

남자가 다시 볼에 키스를 했다. 스탠리가 으악! 소리를 지르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아래층의 수전 이모가 올라오면 안 되었기에.

‘너 이 미친놈아. 뭔 짓이야!’

소리를 내지 않고 입 모양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리처드 베켓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사과했다. 남자의 눈은 축축했다.

“미안. 너무 좋아해서….”

“…[email protected]#@##!#@#”

스탠리가 벌떡 일어나 침대에 앉아 이불을 팡팡 두드렸다. 소리를 지를 수도 없고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너 이 새끼, 이거 추행이야. 말해도 알아들어 처먹을 놈이 아니었다. 차라리 벽에다 대고 소리를 지르지, 저 무고하다는 눈빛에다 대고 욕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야. 너 계속 이러는 거 반칙이야. 난 진지하게 생각해 준다고 했지, 너 받아 준다고 한 적 없어!”

“미안….”

“휴….”

스탠리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가 혀로 입술을 축이더니 말했다.

“게다가 살짝 담배 냄새 난다고.”

“…….”

리처드 베켓의 낯이 금방 어두워졌다.

“아니, 엄청 심한 건 아닌데. 아무튼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이렇게 기습 공격하면 안 되지.”

“담배 끊을게.”

리처드 베켓이 변죽을 울렸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했을 텐데.”

전혀 말이 안 통하는 대화 상대였다. 스탠리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리처드 베켓은 눈을 빛내며 결의를 새로 하느라 바빴다.

“담배도 안 피우고, 공부도 열심히 할 거야.”

“……그러든지.”

스탠리 제이미슨이 불퉁하게 말했다. 

* * *

리처드 베켓은 열심히 하겠다는 말 하나는 지켰다. 정말 의욕적으로 공부에 임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살짝 의기양양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째선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척 패거리가 지나치게 조용했다. 리처드 베켓에게 아는 척하지 않고, 스탠리를 괴롭히는 것도 그만두었다.

이대로 가만히 물러설 치들이 아닌데. 괜스레 걱정스러웠다. 물론 저야 그냥 한두 대 맞으면 끝날 테지만, 리처드 베켓은….

그 녀석까지 괴롭힘에 휘말리게 둘 수는 없었다. 같이 지내 본 결과, 리처드 베켓은 (또라이기는 해도) 꽤 괜찮은 녀석이었으니까. 시도 때도 없이 좋아한다고 하는 방정맞은 놈이었지만, 생각보다 순진하고 또 해맑은 남자이기도 했다. 긴 금색 속눈썹을 깜빡이며 남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다고 고백해 올 때는 꽤 멋지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자신의 취약점을 드러내 보이는 남자들이 흔치 않다는 건 알고 있다. 스탠리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도 쓸데없는 허장성세를 부리며 강한 척해 보이곤 했으니까. 하지만 리처드 베켓 옆에서라면 스탠리도 편한 기분이 되었다. 그 역시 제 옆에서는 그런지, 나름 내밀한 속내를 비쳐오곤 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스탠리는 가슴께 한쪽이 간질간질했다.

딱히 정의 내리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노라 하트를 볼 때의 두근거림과는 다른 종류의 간질거림이었다.

부드러운 장미 꽃잎을 손등으로 매만졌을 때 느끼는 감각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그런지 리처드 베켓이 저 때문에 괜히 불이익을 받지 않았으면 했다. 리처드가 며칠 내내 제 앞자리에 앉아 점심을 먹는 상황이 즐거웠지만 말이다. 뭔가 학교 아이들에게 중지를 치켜드는 기분?

“너, 나랑만 다니니까 귀찮지 않아?”

“별로.”

리처드 베켓은 오늘도 여전히 천연덕스러웠다. 해시 브라운을 포크로 찍어 입으로 운반하며 그가 스탠리를 바라봤다. 스탠리가 밭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 인기 없어질 것 같아서.”

언제나 당당한 스탠리의 목소리가 답지 않게 기어들어 가는 투였다. 리처드 베켓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 여전히 괜찮아.”

학교에 척만 있는 것도 아니고.

하긴, 괜한 걱정인지도 몰랐다. 리처드 베켓은 여전히 미식 축구부 친구들이 있었고, 아이들은 그를 동경했으니까. 다만 스탠리와 관련된 뜬소문이 돌아다니고 있기는 했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리처드 베켓의 약점을 잡아도 단단히 잡았다는 이야기였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마약을 구해 준다느니, 리처드 베켓이 스탠리 제이미슨의 하인이라느니. 이대로 가다가는 스탠리 제이미슨이 사실은 마피아의 자식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올 것 같았다.

‘약점을 잡긴 했지.’

스탠리가 씁쓸하게 자조하며 제 식판에 놓인 연어구이를 리처드 베켓의 식판으로 옮겼다.

“괜찮다면 신경 쓰지 말고. 이거나 먹어.”

* * *

리처드 베켓이 미식축구 연습을 하는 날이면, 스탠리도 자연스럽게 기다리게 되었다. 주로 관중석에 앉아서 노트나 책을 펴 놓고 공부하면서 남자를 기다렸다. 마치 그의 애인이라도 된 것 같아 민망했지만, 버스를 타고 가는 것보다는 리처드의 지프를 차고 가는 편이 발이 편했다.

조금 으슬으슬한 것 같아 몸을 움츠리자, 경기장에서 몸을 풀고 있던 리처드 베켓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추워?”

“…조금? 그렇게까지 춥지는 않고.”

“이거 덮어.”

남자가 선뜻 내민 것은 야구부 저지였다.

“……고맙다.”

큼지막한 저지를 무릎 위에 올려 두고 계속해서 책을 읽었다. 하지만 집중하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우선 관중석에 앉아 있는 것은 스탠리뿐만이 아니었다. 여학생 두 명이 스탠리 쪽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

“믿을 수 없어.”

한 명은 브릿지를 한 금발 여학생이었고, 다른 한 명은 머리를 땋아 올린 아이였다. 둘이 스탠리를 쳐다보며 계속해서 수군거리자, 스탠리가 참지 못하고 먼저 쏘아붙였다.

“할 말 있으면 그냥 물어봐도 돼.”

“헉!”

“말했어!”

둘이 동시에 외치자, 어쩐지 머쓱한 기분이 되었다. 스탠리가 안경을 올리며 시큰둥하게 둘을 쳐다봤다.

“정말 물어봐도 돼?”

“에이미!”

브릿지 여자아이의 이름은 에이미인 모양이었다. 스탠리가 고개를 성의 없게 끄덕이자 그녀가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무릎 위의 그 점퍼. 정말 리처드 베켓 거야?”

저의를 알기 어려운 질문에, 스탠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게 뭐가 어때서? 

“대박. 대박. 노라랑 사귈 때도 그렇게 안 했는데, 소문이 진짜인가 봐!”

“소문? 무슨 소문?”

스탠리가 되묻자 에이미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리처드 베켓이 너에게 약점 잡혔다고들 그러던데?”

“…….”

스탠리가 씁쓸하게 웃자 그것을 승인의 표시로 받아들였는지 여자들이 더욱 수군거렸다.

“다 헛소문이야.”

침묵.

에이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스탠리가 차분하게 설명했다.

“난, 난 그냥 녀석의 시험공부를 도와주는 거야. 베켓은 대신 내 운동 연습을 봐주고. 상호 부조라고 할까. 아무튼...아무튼 간에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 어두운 거래는 없다고.”

물론 스탠리는 리처드 베켓이 제게 고백을 했다느니 하는 소리는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다. 어차피 그런 이야기를 해 봤자 그 누가 믿겠는가.

“하긴. 그거 말 되네. 리처드가 대학교 준비를 한다는 게 사실이었어.”

에이미와 옆의 여자아이는 빠르게 수긍했다.

“야. 에이미, 경기장이나 봐. 리처드 베켓 존나 잘생긴 거나 감상하라고.”

옆의 친구가 알 바 아니라는 듯 에이미의 어깨를 툭툭 쳤다.

‘…….’

다시 리처드 베켓을 눈이 빠지도록 열중하며 구경하는 여자아이들을 보면서 스탠리는 그들이 왜 관중석에 앉아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순전히 학교의 잘생긴 쿼터백을 구경하기 위해 운동장으로 나온 것이었다. 미식 축구 따위는 알 바 아니었다(사실 그건 스탠리도 마찬가지였고). 열렬한 팬들이 보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리처드 베켓은 이따금 관중석을 흘겨보기만 할 뿐 제대로 돌아봐 주지 않았다.

연습이 끝나고 선수들이 샤워실로 들어갈 무렵이었다. 에이미가 짐을 챙기더니 대뜸 스탠리에게 악수를 건네왔다.

“내 이름은 에이미 로저스야. 밴드부고. 너보다 학년은 어리지만, 나이는 같아. 아파서 한 학년을 쉬었거든.”

“아. 그래. 내 이름은-.”

“스탠리 제이미슨. 이미 알고 있어.”

에이미 로저스는 스탠리가 마지못해 뻗은 손을 잡고 가볍게 악수를 하더니, 친구를 데리고 사라졌다.

여자아이와 악수를 한 건 참 오랜만이라서 얼떨떨했지만, 딱히 기분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리처드 베켓의 추종자가 제게 살갑게 군 건 처음이라 신기하기는 했다. 아마도 리처드가 저를 잘 대해 줘서 대접이 달라진 걸까. 스탠리 제이미슨은 잠시 더 책을 읽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 했다. 그때였다.

길쭉하고 큰 인영이 스탠리의 작은 몸체 위에 드리워졌다.

“으…. 음?”

스탠리가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노을빛을 온몸으로 받고 있는 리처드 베켓이 서 있었다. 노을빛의 붉기 때문인지 살짝 화가 났는지, 얼굴이 붉은 그가 스탠리가 들고 있는 야구 저지를 단숨에 가져갔다.

“가자.”

스탠리는 남자를 따라 초록빛 잔디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주차장에 도달해 남자의 지프 조수석에 앉았다.

운전을 하면서 그는 내내 말이 없었다. 어쩐지 불편한 침묵에 스탠리가 먼저 말을 꺼냈다.

“연습은 잘됐어?”

“어.”

단답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신나서 온갖 미식 축구 용어를 늘어놓았을 그인데. 확실히 왜인지는 몰라도 기분이 나쁜 것 같았다. 스탠리가 남자의 무표정한 옆얼굴을 일별한 후 한숨을 쉬었다.

리처드 베켓이 먼저 의표를 찔렀다.

“그 여자애들이랑 재밌어 보이더라.”

남자가 툭 내뱉은 한마디에 스탠리의 한숨은 콜록거림으로 바뀌었다.

“음… 뭐, 이상한 애들도 아니었고, 별 이야기 안 했는데?”

“…….”

리처드 베켓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점점 차 안의 분위기는 답답해져만 갔고 스탠리는 영문도 모른 채 당혹스러워졌다.

“나랑 이야기하는 것보다 재밌었어?”

또 다른 침묵 끝에 이번에는 리처드 베켓이 포문을 열었다. 스탠리는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끼며 차창으로 몸을 바싹 붙였다.

“무슨 뜻이야?”

설마 저 자식. 질투……하는 건가? 리처드 베켓이 스탠리 제이미슨에게 질투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경악을 숨기지도 않고 리처드 베켓을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그 여자애들이랑 즐거워 보였다고. 별다른 뜻은 아니야.”

리처드 베켓이 뒤늦게 아무렇지 않은 척 능청을 피웠지만, 이미 스탠리 제이미슨은 경악에 질려 있는 상태였다.

“너 질투하는 건 아니지?”

공교롭게도 동시에 차가 집 앞에 멈춰 섰다. 리처드 베켓이 천천히 스탠리에게로 고개를 돌리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얼굴이 다시 붉어져 있는 게, 꼭 비밀을 들킨 것 같았다.

“야.”

“그래. 나 질투하는 것 같다.”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어퍼컷처럼 스탠리의 명치를 강하게 올려쳤다.

“걔네들은… 너 보느라 여념이 없었어.”

나 따위에게 관심도 없었을걸. 대관절 무슨 헛소리냐. 스탠리가 겸연쩍게 되받아쳤다.

“그래도. 나는 안 보고, 다른 애들이랑 떠들고 있으니까….”

기분이 안 좋았던 것 같아. 이상한 이야기지? 리처드 베켓이 눈을 내리깔았다. 파들거리는 속눈썹과 곧게 뻗은 콧등을 보니, 그가 뭔가 타당한 소리를 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는 개뿔. 스탠리가 리처드 베켓의 어깨를 팔로 툭툭 치면서 그를 나무라듯 타일렀다.

“네 팬클럽은 너에게 충성스럽다고. 이상한 생각 좀 하지 마.”

“그런 게 아니야!”

리처드 베켓이 작게 힘을 주어 말했다.

“난, 난 네가 날 봤으면 좋겠어.”

……뭐라고?

“…….”

방심하고 있는 순간에 꽂혀 온 공격이 매서웠다. 스탠리의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미안. 보채려는 건 아니었는데.”

리처드 베켓이 차 문의 잠금을 풀었다. 스탠리가 문을 열고 내리려 발 한쪽을 밖으로 뺐다. 아무 말 없이 나가려던 스탠리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야. 리처드.”

“…….”

“앞으로 널 보려고 노력할게.”

스탠리가 그 말을 툭, 던지듯 말하고 차 문을 폴짝 뛰어나갔다. 부끄러워진 그가 그렇게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리처드 베켓이 멍하니 지켜보았다.

* * *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가슴이 터질 것같이 부풀어 오른다. 팽배한 기대감으로 벅차오른 심경을 주체할 수 없다. 진부한 비유라는 걸 알지만, 몸이 가볍게 날아오를 것만 같다.

리처드 베켓이 기분 좋게 휘파람을 불며 공부에 매진하고 있었다. 스탠리가 체크해 놓은 곳을 확인하고 공부한 범위를 꼼꼼하게 복습했다. 리처드 베켓은 지금껏 자신이 공부와 연이 없을 줄로만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집에 책이라고는 싸구려 타블로이드 잡지뿐인 데다가 리처드의 부모는 자식의 교육에 대해서 작은 관심도 쏟지 않았다.

사실, 그들은 리처드가 저들과 다른 길을 걸어 나갈 거라는 기대를 품지 않았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는 하지만, 하나뿐인 아들이 여러 가지 가능성을 탐색할 기회도 주지 않은 것이다.

리처드의 어머니는 10년 전까지만 해도 리처드의 성적표를 읽기라도 했으나, 그녀 역시 어느새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물질적인 조건만을 탓할 수는 없었다. 집안과 학교에 팽배한 타성은 전염성이 강했다.

그나마 운동에 적을 두고 취미를 꾸준히 붙여 온 게, 리처드를 크게 엇나가게 하지 않았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좋아하는 아이로부터의 과외가 단숨에 리처드 베켓을 우등생으로 만들어 주지는 못할 터였다. 그러기에는 도외시해 온 학업의 양이 어마어마했다. 그러나 적어도, 리처드는 한 걸음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스탠리는 시니컬한 구석이 있지만(그리고 그마저도 사랑스러웠다) 좋은 선생이었다. 당장 정답을 맞히느냐 틀리느냐가 아니라 리처드가 얼마나 열의를 가지느냐를 중시했다.

‘역시, 좋아하기를 잘한 것 같아.’

속으로 한 말인데, 공연히 두 볼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와 원대한 꿈, 그리고 반듯한 행동거지에 반한 것이었다. 분명히 그뿐이었는데, 점차 다른 면들도 눈에 띄기 시작했다.

만약 스탠리를 지척에서 지켜보기만 했다면, 두고두고 아쉬웠으리라. 사실 연극 연습 직후의 고백도 무척 충동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무슨 정신으로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무서웠다.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게 무서웠고, 그로 인해 제가 사회적으로 매장될까 봐 무서웠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것은 그 사실로 인해 스탠리가 저를 경멸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안 그래도 스탠리에게 저는 바보 같은 족(jock, 운동을 좋아하는 부류)이었다. 게다가 척이랑 대외적으로 친하기까지 해서 곱게 보일 리 없는 자신이, 스탠리에게 고백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운명의 신이 도우사, 충동적으로 내뱉은 한마디가 되레 저를 살렸다. 스탠리는 역시 마음이 넓은 아이였다. 아직 저를 받아 주겠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내치거나 욕하지도 않았다.

스탠리가 그저 마음씨 좋아서, 연민을 베푸는 거라 해도 좋았다. 괜찮았다. 만약 리처드 베켓이 좀 더 멋진 사람이 된다면, 스탠리가 인정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된다면.

“리처드. 리처드!”

아래층에서 아버지의 노성이 들려왔다. 단꿈을 방해받아 짜증이 난 리처드가 연필을 책상에다 탁. 내려놓았다.

리처드 베켓의 아버지가 리처드를 부를 때는 오로지 심부름을 시키거나 신세 한탄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냥 무시했다가는 어머니가 들볶일 터. 리처드 베켓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터덜터덜 내려가니 세스 베켓이 소파에 누워 맥주 캔을 홀짝이고 있었다.

“왜요.”

“최근에 척이랑 싸웠니?”

“…….”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예상은 했다. 그러나 막상 실제로 닥치니 무척 짜증스러웠다. 지금 세스 베켓이 제 교우 생활을 걱정하는 것은 순전히 채무 관계 때문이었다. 돈을 빌린 곳으로부터 독촉을 받거나 더 빌리지 못할까 봐 저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거였다.

리처드 베켓이 입을 꾹 닫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세스 베켓이 다 마신 맥주 캔을 손으로 찌부러뜨린 뒤 그것을 책상 위로 내던졌다.

“친구 녀석 이야기를 듣자 하니 최근에 웬 책상물림이랑 어울려 다니는 것 같더구나.”

“…그래서요?”

최대한 입을 다무는 편이 낫다는 걸 알면서도 불퉁한 답이 튀어나왔다. 스탠리를 책상물림이라고 말하는 남자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 봤자 소용없는 일이야. 나름대로 공부라도 해 보려는 모양인데, 어차피 우리 집은 너 대학 보내 줄 형편 같은 거 안 된다. 괜한 고집 부릴 필요 없다는 이야기다.”

그 말이 도화선이었다. 리처드 베켓에게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이었다. 운 좋으면 미식 축구로 장학금을 받아 작은 대학교에 갈 수는 있겠지만 그 이상은 바랄 수 없다는 걸. 공부 같은 것 해 봤자 좋은 대학은 꿈도 꿀 수 없다는 것 말이다. 그리고 리처드 역시 양친에게 손 벌릴 생각 같은 건 없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이런 저열한 방식으로 현실에 직면하게 되니 화가 안 날 수가 없었다. 이미 그가 원하는 답은 정해져 있는 것 아닌가. 척한테 사과해라. 저번에 그랬던 것처럼 무릎 꿇기 싫으면.

화가 난다. 눈앞의 비루먹은 남자에게.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자기 자신에게 더 화가 난다. 미성년자라는 신분이 구속처럼 느껴졌다. 물론 당장 성인이 된다고 해서 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 나라는 돈이 없는 인간은 인간 취급을 안 하는 곳이니까.

결국, 감내해야만 한다. 무릎을 꿇고 조아려야 한다. 힘이 생길 때까지. 그러나 과연 그런 날이 올까? 두 발로 설 수 있는 날이 올까.

리처드 베켓은 거창한 걸 바라지 않았다. 미디어 재벌들의 권세도, 프로 선수들의 명예도 감히 바라지 않았다. 그건 저와는 먼 별세계의 일이었다. 자신 같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스탠리처럼 반짝이는 사람만이 쥘 수 있는 보석이었다. 리처드 베켓은 다만 자존을, 자립을 원할 뿐이었다. 떳떳하게 제 손으로 벌어먹을 것을 사고 제가 사랑하는 사람 옆에 설 수 있을 정도의 자립을.

그러나 그런 날이 올까? 고등학교조차 척 부모의 적선으로 다니고 있는 자신이, 과연 이 지긋지긋한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을까?

* * *

[내일 공부는 못할 것 같아. 미안.]

전화를 받은 수전 이모가 스탠리를 불러, 리처드 베켓에게 전화가 왔다고 했다. 스케줄을 조정하느라 종종 전화를 주고받아 대수롭지 않게 수화기를 건네받았다. 그러나 수화기 너머 들려온 목소리가 퍽 어두워서, 스탠리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

“…괜찮아?”

의도치 않은 걱정이 비집어져 나오고 말았다. 괜한 참견이라는 걸 알면서도, 차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착 가라앉은 낮은 목소리가 너무나도 신경이 쓰였다.

[…….]

수화기 너머의 침묵이 불길함을 가중했다. 스탠리가 꼬불꼬불한 전화기 선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괜찮아. 별건 아니고, 아는 분 도와드릴 일이 있어서.]

“아, 그래. 그럼 월요일에 학교서 보자.”

달칵. 수화기를 제 위치에 돌려놓으면서도, 찝찝함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문득, 수전 이모가 지나가는 소리처럼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당시에는 리처드 베켓과 친하지 않아서 흘려들었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의미심장했다.

‘그 집 가장이 알코올중독이잖니. 하도 고래고래 노성을 질러대서 경찰이 몇 번 방문하기도 했어.’

리처드가 사는 집의 허름한 외관을 떠올렸다. 가끔 길가에서 마주치던 베켓 부인의 지친 얼굴도. 그러자, 다시 물었어야 했다는 후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제넘지 말자.’

괜히 참견했다가는 리처드의 자존심만 건들 것 같았다. 애초에 절친한 친구 사이도 아니지 않은가.

‘아무 사이도 아니지.’

하이스쿨 졸업과 함께 끝날 관계였다. 냉정한 현실 인식이 찾아옴과 동시에 입이 썼다.

* * *

밸린저 시티에서 30분만 운전해 나가면 작은 골프 코스가 있다. 초원이 드넓은 미시건 주에는 골프코스가 이곳저곳 조성되어 있었다. 그곳도 개중 하나였다. 리처드 베켓은 지프를 운전하며 담배를 피우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그래도 스탠리를 생각하면 절대 피우지 않을 요량이었다. 벌써 몇 주째 성공적인 금연을 하고 있는데, 고작 스트레스 때문에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고작, 개 같은 앤더슨 부부의 뒤치다꺼리를 한다고 담배를 다시 태울 이유는 없었다. 골프 캐디는 심부름꾼이 아니라 어엿한 직업이 된 지 오래지만, 앤더슨 가족에게는 아니었다. 그들은 종종 다른 가족들과 골프를 치러 나갈 때 리처드 베켓에게 골프채를 들게 했다. 물론 대가가 없는 건 아니라서 팁과 수당도 두둑이 챙겨 줬다.

물론 팁을 제외하고 다 가족 ‘저금통’에 들어가지만. 그러나 문제는 돈의 액수가 아니었다. 리처드 베켓에게 앤더슨네의 캐디 노릇을 하는 건 정말이지 싫은 일이었다. 차라리 공사판에서 노동을 하는 게 훨씬 나았다.

거들먹거리는 앤더슨 가족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힘든 일일뿐더러 척이라도 가끔 끼는 날에는 굴욕적이었다. 부자들의 골프 파티에 초대받지 못한 손님처럼 서 있는 건 또 어떻고. 평소라면 가뿐하게 들 골프 가방이 무거운 집처럼 느껴지기만 했다.

운전대를 잡은 손에서 힘이 자꾸만 풀렸다.

* * *

저녁 식사를 마친 후였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컴퓨터로 한참 코딩에 몰두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자꾸 먹통이 되는 화면에 짜증스러웠다. 자리에서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고 굳은 다리를 쭉 펴 본다. 그렇게 한참 몸을 풀고 있었을까, 아래층에서 수전 이모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얘! 리처드가 왔어!”

“네?”

오늘 분명 바쁘다고 했는데. 머리를 갸우뚱하며 스탠리가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현관 앞쪽으로 가니 리처드 베켓과 수전 이모가 서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 스탠리 왔다. 너희 둘이 안에서 이야기할래, 아니면-.”

“포치(porch: 건물의 입구에 지붕을 갖추어 차를 대도록 한 곳)에서 이야기할게요.”

스탠리가 앞으로 나아가며 말했다. 가까이서 본 리처드 베켓의 얼굴은 확실히 지쳐 있었다. 미식 축구 연습 직후의 기분 좋은 탈력감이라기보다는 소진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스탠리가 포치에 설치된 벤치를 가리켰다.

“앉아.”

리처드 베켓이 터덜터덜 자리에 앉았다. 초저녁의 바람이 제법 쌀쌀했지만 견딜 만은 했다. 뭔가 일이 있어 온 걸 텐데도 리처드 베켓은 묵묵부답이었다. 시선을 스탠리에게 맞추지 않고 자꾸만 고개를 숙이는 리처드를 보니 심상찮았다.

“……무슨 일 있어?”

“……그냥. 보고 싶어서.”

리처드 베켓이 그제야 고개를 들더니 스탠리를 바라봤다. 어둠 아래 그늘진 눈동자가 약간 축축했다. 스탠리 제이미슨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달아올랐다.

“그냥이 어디 있어. 짜샤.”

괜스레 장난을 걸며 스탠리가 오른발로 리처드 베켓의 운동화를 툭툭 쳤다. 리처드 베켓이 씩 웃으며 제 발을 마주 쳐 줬다. 그가 덤덤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나…. 대학교 안 갈 수도 있을 것 같다.”

“뭐?”

놀란 스탠리가 행동을 일순 멈췄다. 리처드 베켓에 고정된 시선이 파르르 떨렸다. 정작 리처드 베켓은 말을 꺼내고 나니 조금 후련해진 모양이었다. 그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너스레를 떨었다.

“우리 집안이 그렇게 넉넉한 것도 아니고, 좋은 제안이 들어와서….”

“좋은 제안이라고?”

“응. 우리 아버지 친구분께서 일자리를 제안해 왔거든….”

“……어떤 일자리인지 물어볼 수 있어?”

스탠리 제이미슨이 조심스럽게, 그러나 진중하게 재차 물었다. 그 진지함은 효과가 확실했다. 리처드 베켓의 건강한 목울대가 오르락내리락했다.

“비서 같은 건데…. 운전도 하고, 이것저것…. 꽤 큰 오렌지 농장을 가지고 계셔서. 뭐든 내가 할 일이 있을 거래.”

리처드가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턱을 괴고 초록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렸다.

“그냥 대학교 가면 안 돼?”

“…….”

“이런 말, 내가 잘 모르니까 할 수 있는 거겠지.”

스탠리가 포치 옆에 나 있는 묘목의 가지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사실 대학교에 간다고 해서 다 잘 풀리는 것도 아니고, 대학교에 가지 않는다고 해서 인생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다 사람에 달린 일. 하지만 리처드가 제 의지에 반해서 진학을 포기하는 건 싫었다.

“하지만 아까워.”

“……난 그렇게-.”

“지금부터 열심히 하면, 더 높은 곳을 목표로 할 수도 있어.”

세상 편한 소리인 걸 알면서도 만류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스탠리는 남자가 아까웠다. 공부를 옆에서 가르치면서 느낀 게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리처드가 꽤 괜찮은 학생이라는 거였다. 끈기도 있었고, 의욕도 있었다.

리처드 베켓이 작게 실소를 지었다. 뭘 모르는 소리를 한다는 듯이.

“우리 집, 그렇게 넉넉하지 않아.”

“…학자금 대출을 받으면-.”

리처드 베켓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표정이 답지 않게 냉랭했다.

“빚 같은 건 이제 넌덜머리 나.”

“……장학금을 받으면 되잖아.”

스탠리 제이미슨이 볼 안의 살을 씹었다. 이건 무슨 그 유명한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요’ 급의 이야기인가. 그런데도 실언인 걸 알면서도, 말을 멈출 수 없었다. 리처드 베켓이 고개를 돌렸다.

“나 가르쳐 봐서 알잖아. 난 그런 재능 없어.”

미식축구도, 공부도. 월등하게 뛰어난 건 아니지. 그냥 이 작은 소도시에서 뛰어난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알아. 전미 고교 풋볼 리그에서 명함도 못 내미는 학교의 쿼터백이라는 게 큰 의미가 있을까.

“공부를 더 하면 그래도……?”

“늦었어.”

“…….”

“미안. 스탠리. 이런 식으로 걱정 끼치려고 온 건 아니었는데.”

리처드 베켓이 고개를 푹 숙였다. 죄라도 지은 것마냥, 어깨가 축 늘어졌다. 스탠리가 자리에서 분연히 일어섰다. 남자의 심정을 짐작할 수는 없지만, 그가 적잖이 혼란스러운 상황이라는 건 분명했다. 턱없이 낮은 자존감과 막막한 현실. 그 두 가지가 남자를 사정없이 짓누르고 있단 건 분명했다.

“리처드.”

“……”

“힘들면, 정말 힘들면… 내게 이야기해도 좋아.”

“……!”

리처드가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희미한 가로등 빛에 남자의 얼굴선이 돋보였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어쩔 줄 모르는 채로 계속해서 말했다.

“젠장. 나 이런 건 익숙하지 않아서, 좋은 대화 상대는 아닐 거야. 우리가 오랜 친구도 아니고. 하지만 말이야…. 힘든 일이 있거나, 혼란스러우면, 내가 들어줄 순 있잖아?”

너무 주제넘은 이야기를 한 걸까? 자리에서 일어선 스탠리 제이미슨이 불안해하며 두 주먹을 질끈 쥐었다.

얼굴과 몸의 윤곽을 제외하고는 남자는 그늘 속에 있었다. 표정을 판별하기가 어려웠다. 인영이 점점 가까이 오더니 스탠리 제이미슨을 폭 감싸 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스탠리가 소리도 못 지르고 그대로 품에 안겼다.

“고마워.”

그가 그대로 스탠리의 귓가에 입을 맞췄다. 뜨거운 입술이 얼굴에 닿자 전기 신호가 짜릿-하며 신경을 긁었다.

‘@&@(#&^!(’

젠장, 마음이 약해진 틈을 노리다니. 이건 반칙이다. 그러나(스탠리가 한없이 물러터진 걸 수도 있지만) 외로움에 짓눌린 남자에게 싫은 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남자를 다독이며 떼놓고 그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일단 이야기를 해 보자고.”

* * *

리처드 베켓이 주저하며 풀어놓은 이야기는 다소 무거웠다.

가정 폭력, 거머리 같은 가난, 사적이고 복잡한 채무 관계까지. 척 앤더슨과 남자가 괜히 어울려 다니는 건 아니었다는 사실은 덤이었다. 남자가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어깨 위에 놓인 짐의 무게가 여실히 느껴졌다.

“너무 칙칙한 이야기였지?”

리처드 베켓이 씩 웃더니 스탠리의 어깨를 주먹으로 살짝 두들겼다. 괜히 분위기를 떠보려는 제스처에, 스탠리가 피식 웃었다. 그러나 입꼬리가 자꾸만 내려가고, 미간이 찌푸려졌다.

싫다.

리처드 자식이 힘든 게 싫다.

알 수 없는 심경의 변화였다. 타인이 어떻게 되든 크게 상관하지 않던 스탠리의 무심함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무책임한 이야기란 건 알지만.”

스탠리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

“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했으면 좋겠어.”

“…….”

하고 싶은 대로. 리처드 베켓은 처음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미래를, 그러니까 자신이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늘 흐린 흑백 화면에 가깝던 광경이 색채를 띠기 시작하고 구체적인 형상으로 응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 옆에 선 스탠리 제이미슨의 모습이 있었다.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 나가는 스탠리. 언제나 빛이 나는, 총명한 스탠리. 감히 그와 함께하는 미래를 전망해 볼 수 있는 것일까? 두려움에 리처드 베켓의 손이 떨렸다.

스탠리가 눈을 꿈뻑꿈뻑하더니, 대뜸 리처드 베켓의 두 손을 잡았다.

아무 말도 않고 얼굴만 시뻘게지는 것을 보니, 뭔가 응원의 표시인 것 같았다. 그게 못내 사랑스러워서, 리처드 베켓의 절망으로 가득했던 마음이 새로운 용기와 결의로 다시 부풀기 시작했다.

그래, 스탠리를 위해서. 스탠리 제이미슨을 위해서 힘내자. 언제고 앤더슨네에게 의지하면서 살 수는 없었다. 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특히 스탠리와 함께하고 싶은 것들이 각별했다. 그리고 그 일들을 조금이나마 손안에 넣기 위해서는 각성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리처드 베켓이 고개를 숙여 스탠리 제이미슨의 볼에 살짝 입을 맞췄다. 스탠리가 소스라치게 떨며 리처드 베켓의 어깨를 팡팡 쳤다. 그러나 스탠리의 볼에 옅게 비친 홍조를, 리처드 베켓이 놓친 것은 아니었다.

* * *

용기와 설렘, 첫사랑의 흥분으로 잔뜩 부푼 가슴을 지니고, 리처드 베켓은 집 앞에 섰다. 늘 피로와 절망, 또 다른 실망을 표상하는 낡은 집의 대문이 더는 무섭지 않았다.

* * *

“스탠리 조금만 더 힘내 봐.”

“헉… 알, 알겠…다고…!”

농구부도, 치어리딩부도 체육관을 사용하지 않는 시간대였다. 텅 빈 짐을 무대로 두 사람이 운동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리처드 베켓은 지도를 하는 것에 가깝겠지만. 내반족 교정기를 뺀 스탠리 제이미슨이 하나둘, 하나둘 박자에 맞춰 가볍게 조깅을 하고 있었다.

‘가벼운 조깅’이라기에는 뛰는 본인은 죽을상을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스탠리는 한 번도 이토록 먼 거리를 뛰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짐을 몇 바퀴 도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런 반면, 리처드 베켓은 하나도 힘들지 않은 듯 숨 쉬는 것조차 평연했다.

‘짜증 나….’

스탠리 제이미슨의 불퉁한 심사가 또 불거졌다. 물론 몇 년 동안 운동만 해 온 녀석과 너드인 자신을 비교하는 건 양심 없는 처사다. 그러나 지금 리처드 베켓과 스탠리 제이미슨은 같은 인간종인 게 이상할 정도로 다른 성능을 보이는 중이었다. 하느님 아버지, 어머니. 저를 어찌 이리 낳아 주셨나이까. 그런 스탠리의 짜증스러운 마음을 눈치챈 듯, 리처드 베켓이 페이스를 늦추기 시작했다.

“자. 이제 쉬자.”

땀 범벅이 된 스탠리 제이미슨에게 수건과 시원한 물이 담긴 플라스틱병을 가져다준 리처드 베켓이 씩 시원스럽게 웃었다.

“잘했어. 스탠리. 점점 나아지고 있어.”

정말? 그냥 그저 그런 립 서비스는 아니고? 그러나 스탠리 제이미슨의 의심도, 남자의 멀끔하고 순수한 얼굴 앞에서는 기세가 꺾였다. 마치 ‘네가 정말 정말 자랑스러워!’ 하는 듯한 리처드 베켓의 얼굴은 그야말로 스탠리 같은 삐뚤어진 마음조차 무장 해제시킬 정도였던 것이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짐 바닥에 주저앉았다. 리처드 베켓이 그 옆에 쪼그려 앉았다.

“교정기 없이도 이렇게 잘 뛰네?”

리처드 베켓이 상냥한 목소리로 스탠리를 다독였다.

“……이제 슬슬 벗어도 된다고 하긴 했어. 근데….”

사실은 무서웠다. 교정기 없이 살아가는 게. 자신이 제대로 걸을 수 있을지, 뛸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교정기에 의존해 온 거다. 한 학년 뒤에 벗어야지. 아니, 대학교에 입학할 때 벗어야지. 교정기와의 이별을 미루면서까지.

“잘했어. 정말 멋져. 스탠리.”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는 거야.

안 그래도 운동으로 붉어진 스탠리의 얼굴이 더욱더 홍조를 띠었다.

“뭐… 이 정도 가지고.”

스탠리가 복잡한 눈빛을 담아 교정기를 바라봤다.

“확실히 이제 이 녀석과 이별할 때가 된 것 같다.”

“…….”

“솔직히 말해서, 기분이 이상해.”

다리에 달린 교정 장치는 스탠리 제이미슨의 정체성이었다. 교정 장치와 헤어지는 것이 마냥 기쁘지만도 않았다. 뭔가 복잡 미묘한 감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럴 수 있어. 네가 행복하게 살아간다면, 저 녀석도 기쁠 거야.”

리처드 베켓이 교정 장치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물건 따위가 기뻐하고 말고가 어딨어. 이상한 놈.”

“…난 물건과의 인연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하거든.”

고든 영감의 가게에서 차를 수리하는 걸 도우면서 알게 된 사실이야. 어느 순간부터 보닛을 열면 그 차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차주와 어떤 관계였는지 보이거든. 물건 역시 뭔가를 기억한다고 생각하게 됐어. 역시 이상한 소리지?

리처드 베켓이 머쓱한지 하하 웃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한마디 더 쏘아붙여 줄까 하다가 그냥 관두었다. 대신 속마음으로, 교정 장치에 감사 인사를 건넸다.

지금까지 함께해 줘서, 고맙다.

* * *

시간이 흐르면서 리처드 베켓과 스탠리 제이미슨의 기묘한 공생 관계는 화제의 중심에서 멀어졌다. 그러니까, 적어도 의혹과 불신의 대상은 아니었다. 시간은 기묘한 존재라서, 흐르면 흐를수록 사람들은 익숙해지는 법이었다. 이제 학교 아이들은 스탠리를 찾을 때는 리처드에게 묻고, 리처드를 찾을 때는 스탠리에게 물었다. 그리고 둘이 같이 다니는 걸 이상하게까지 보지는 않았다.

스탠리 제이미슨 역시 마찬가지라서, 저를 태워 주고 제게 말 걸어주고 같이 밥을 먹는 남자의 존재를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과 남자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남자가 저를 좋아한다는 걸 평상시에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가 그저 좋은 친구 정도라고 생각하는 건 쉬웠다. 리처드 베켓은 학교에서는 전혀 티를 내지 않았으니까. 레트리버처럼, 큰 개처럼 다가왔으니까. 그리고 녀석은 꽤 좋은 대화 상대이기까지 했다. 스탠리가 공부를 가르친 지 몇 달이 지나자 빠른 속도로 진도를 따라잡았고, 따라서 학교 과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도 막힘이 없었다.

물론 변화는 리처드 베켓의 쪽에서만 일어난 건 아니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교정 장치를 벗었고, 제법 잘 뛸 수 있게 되었다. 미식축구 규칙도 잘 이해하게 되었다. 쿼터백이라는 게 왜 그렇게 대단하다고 칭송을 받는지도, 얼추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리처드 베켓이 왜 고교 대항전 준비로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근래 둘은 같이 공부할 시간을 내는 게 어려웠고, 따라서 밤늦게 전화를 나누곤 했다. 수전 이모가 전화기를 스탠리의 방에 옮겨 놓은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스탠리는 전화기를 어깨 사이에 끼워 놓고 코딩을 하며 리처드 베켓과 대화했다. 대부분 사소한 이야기였다. 연습 시합이 끝나고 집 가는 길에 고양이를 봤다든가. 요즘 컨디션이 유달리 좋다든가, 이대로 가면 고교 대항전에서 좋은 성적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든가. 스탠리는 그래. 응. 그렇구나. 잘됐네. 대꾸했지만, 결코 건성은 아니었다. 타닥타닥. 기계식 타자 음을 가로질러 흘러나오는 리처드 베켓의 목소리가 나쁘지 않았다.

“곧 시합이네.”

-응.

“나도 표 샀어.”

고교 대항전 표를 파는 부스가 학교에 설치되어 있었다. 한참을 기웃거리다가 표를 샀었다. 표를 파는 학급 임원 레슬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던 것도 기억이 난다. ‘너는 스포츠에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아. 리처드 베켓 보려고?’

뭐라 부정할 수 없어서 잠자코 표를 받아 들기는 했지만, 기분이 꽤 이상했다. 손안에 쥔 작은 표가 마치 다른 세계로 향하는 승차권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이랑 같이 모여서 운동 경기를 본 지는 정말 오래돼서 그럴지도 몰랐다.

아버지가 가정을 떠나기 전만 해도 일 년에 몇 번은 가족끼리 야구 경기를 관람했었다. 같이 응원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깔깔 웃었던 게 몇 년 전의 일이었다. 리처드 베켓과 이야기하면서 새삼 기억이 떠올랐다.

-잘해야겠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별로 없었다. 전쟁터에 나가기 전의 결연한 심정이 잔뜩 묻어나온 한마디에 스탠리가 피식, 웃었다.

“평소대로 해.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스탠리.

“응?”

-사랑해.

“…….”

어떤 말을 골라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좋아해, 가 아닌 사랑해.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열화된 음성으로도 무거운 마음이 여실하게 느껴졌다.

달칵,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어지고 뚜- 뚜- 연결음만이 들려올 때까지, 스탠리는 타자에서 손을 놓은 채로 수화기를 붙들 뿐이었다.

* * *

대도시의 스타디움에 비하면 초라하고 작은 경기장이었지만, 사람들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밸린저 하이스쿨과 옆 동네의 데이튼 하이스쿨과의 경기는 마을 사람들의 열화와 같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연극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각별한 관심은, 비교적 무관심한 스탠리조차도 피부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경기장 앞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파는 사람들, 표를 구하러 온 사람들, 응원하러 온 학부모들로 장사진이었다. 스탠리는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입구를 찾았다. 처음 온 장소라 모든 게 낯설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스탠리의 팔을 확 채잡았다.

브릿지 머리를 한 여자아이. 일전에 같이 리처드 베켓의 연습을 구경한 밴드부 여자아이였다. 에이미 로저스. 그녀는 먼저 스탠리를 붙잡았으면서, 스탠리가 고개를 돌려 저를 보자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에이미?”

“스탠리…?”

“……?”

“너. 정말 키가 커졌구나. 아. 아무것도 아냐.”

에이미 로저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손부채질을 했다.

“너도 보러 왔네.”

스탠리가 떨떠름하게 말을 건네자 에이미가 고개를 연방 끄덕였다.

“너 혼자 보러 왔어?”

“…뭐. 그렇지?”

“그럼 같이 앉자. 칼리도 같이 오기로 했는데, 오늘 열이 난다고 해서. 괜찮지?”

칼리는 그 친구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스탠리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자 그걸로 됐다는 듯이 손짓을 하며 그를 재촉했다.

입구 앞에서 줄을 서고, 검표원에게 표를 검사받고 둘은 경기장이 잘 보이는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청명한 가을바람 공기가 사람들의 피부를 훑고 이내 사라졌다. 구름 한 점 없는 높은 하늘이 고왔다. 스탠리가 안경을 잠시 벗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야.”

옆에서 부르는 소리에 재빨리 안경을 다시 썼다. 스탠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용건을 묻는 표정을 하자, 에이미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리처드 베켓과 어울려 다녀서인가? 너 신수가 훤해졌다?”

“무슨 소리냐.”

스탠리가 어이없다는 듯 따지자 에이미가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너 그때보다 키도 훨씬 커지고, 얼굴도… 뭐. 꽤 훤칠해졌다고. 칭찬이야!”

와하하. 에이미가 손바닥을 치며 웃었다. 스탠리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장난도 저런 장난이라니. 너무 하지 않은가. 스탠리는 그런 허언에 속아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투철한 자기 객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자신을 잘생겼다고 하는 건 세상에 딱 두 사람 정도라는 걸 잘 알았다. 하나는 스탠리 제이미슨의 어머니. 또 하나는 수전 이모. 스탠리의 아버지조차 스탠리에게 허투루로라도 잘생겼다는 칭찬은 안 했는데.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이제 선수들 입장한다.”

스탠리가 헛소리 말라는 뜻으로 에이미에게 팝콘 박스를 넘겼다.

* * *

리처드 베켓이 대표로 중앙선에 서서 상대 팀 대표와 동전을 던지는 것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공수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리처드 베켓의 얼굴은 헬멧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밸린저 하이스쿨이 공격하는 것으로 순서가 결정되고 선수들이 대열에 섰다.

경기장에 선 리처드 베켓은 평소의 그 배시시 웃곤 하는 큰 개 같은 남자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늑대에 가까운 인상으로 변모했다고 해야 할까. 먼 거리에서 봐도 범상치 않은 인물 같았다. 승리욕에 잠긴 운동선수는 역시 평소와는 다른 존재였다.

휘슬 소리와 함께 본격적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선수들과 선수들이 격렬하게 몸을 부딪치는 광경에 스탠리가 몸을 흠칫 떨었다. 쿼터백인 리처드 베켓을 견제하는 상대 팀의 손속이 거칠었다.

‘힘내.’

스탠리가 저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간절한 응원의 말을 삼켰다. 일각이 여삼추라, 찰나가 마치 늘어진 영화 필름처럼 천천히 감각되었다. 공이 리처드 베켓을 향해 날아오고, 남자가 그것을 받아들고 아름다운 일련의 동작을 거쳐 뛰어오른다. 상대 선수들이 마치 거센 파도처럼 그를 좇는다. 그리고 1, 2, 3. 남자가 엔드라인에 착지한다. 터치다운.

전후좌우에 앉은 관중석의 사람들이 천천히 일어서고, 수런거림이 환호성으로 발화하기 시작한다. 터치다운에 성공한 리처드 베켓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주위를 돌아본다. 그리고-착각에 가깝겠지만-그가 스탠리가 앉은 곳을 향해서 손을 뻗는다. 밸린저 하이스쿨 선수들이 리처드 베켓에게 달려들어 특유의 세리머니를 하기 시작한다.

스탠리 제이미슨의 심장이 아주 가파르게 뛴다. 스포츠 경기가 자아내는 아드레날린인 걸까. 아니면 그보다 더 무거운 감정의 소산인 걸까.

무서웠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저 녀석을-.

* * *

경기는 3대 1로 밸린저 하이스쿨의 대승이었다. 경기가 끝나고 사람들은 교가를 부르며 춤을 추고, 선수들은 서로 얼싸안으며 뒹굴기 시작했다. 치어리더들과 코치들이 뛰어나와 하이파이브를 했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그 광경을 아연히 바라볼 뿐이었다.

수전 이모가 스탠리 제이미슨을 픽업했다. 둘은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별말을 하지 않았다.

“경기는 어땠니? 우리 학교(수전 이모는 늘 밸린저 하이스쿨을 ‘우리 학교’라고 말했다)가 이겨서 너무 좋았겠다.”

“그냥. 뭐, 좋았죠.”

“음? 반응이 꽤 시큰둥하다?”

지금쯤 선수들은 친구들과 어디서 한바탕 음주 파티를 벌이고 있을 것이다. 그 광경에는 스탠리 제이미슨이 낄 여지가 없다. 스탠리는 그냥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시큰둥하긴요. 좋았다니까요?”

집에 도착하자마자 스탠리는 샤워를 하고 방 안에 틀어박혀 컴퓨터를 켰다. 코드를 마저 짜야 했다.

‘뭐냐. 스탠리 제이미슨. 또 무슨 심술이 난 거냐.’ 마음속 토라진 자아에 말을 걸어본다. 답은 역시 쉬이 돌아오지 않는다.

또 그 케케묵은 열등감인 거냐. 그 정도는 졸업했을 줄 알았는데. 리처드 베켓은 어찌 됐든 네 친구라고.

나를 좋아하기도 하고.

마지막 혼잣말에 공연히 두 볼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같잖은 우월감이나 느끼려고, 그런 사실까지 꺼내 오다니. 스탠리 제이미슨은 진정으로 자신이 한심했다. 기껏해야 방 안에 틀어박혀서 코드나 짜는 너드면서 ‘저 녀석은 어차피 나를 좋아하니까’ 따위의 수사로 자의식이나 살찌우고 있고.

끔찍했다. 애초에 리처드 베켓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도 불안정한 사실이지 않은가. 본인이야 뭐, 평생을 스탠리에게 충성 서약했다는 듯이 굴고 있었지만, 청소년기의 마음이란 워낙 변덕스러운 거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그의 마음은 언제든지 바람과 함께 사라질 수 있는 거다.

대학교에 가면 데면데면해질 수도 있는 사이. 아무것도 아닌 사이가 될 수도 있었다. 남자와 남자 사이에 뭘 할 수 있겠는가. 스탠리는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 전인미답의 영역이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속으로 한참 열심히 땅을 파고 있을 때, 도어벨이 울렸다.

“스탠리! 리처드가 왔는데?”

‘젠장.’

자괴감에 빠질 겨를을 주지 않는 놈이었다. 스탠리가 투덜거리며 터덜터덜 방에서 나와 층계참을 내려갔다. 현관 쪽을 쳐다보자 그곳에는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가 서 있었다. 유니폼 차림이 아닌, 그냥 평범한 외출복을 입은 남자가.

스탠리가 현관문을 닫고 포치의 난간에 기대앉아 리처드 베켓을 노려봤다.

“지금쯤 친구들이랑 술 먹고 있을 때 아니야?”

“……왜 안 기다렸어.”

“…응?”

리처드 베켓이 거친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돌려 도로변을 바라봤다. 무언가 화가 단단히 난 느낌이었다.

“경기 끝나고 인사하려고 했는데. 네가 없더라.”

“…기다려야 하는 거였어?”

스탠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승리 축하주 마시는 데 내가 낄 자리가 있냐.

그 순간, 리처드 베켓이 스탠리를 노려봤다.

청아한 푸른 눈이 어둠 속에서 해구처럼 음울하게 일렁였다. 별안간 리처드 베켓이 억센 손아귀로 스탠리의 어깨를 붙잡았다.

“넌 도대체…. 아직도 모르겠어?”

“모르다니-.”

heat skipped a beat. 말 그대로 심장이 덜컹거리는 순간이었다. 리처드 베켓이 분노에 찬 신음성을 내더니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단단하게 얽힌 손아귀 때문에 버둥거릴 수도 없었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그대로 무력하게 리처드 베켓의 입술이 제 입술과 포개지는 순간을 맞닥뜨려야 했다. 그것은 이전과 같은 버드 키스가 아니었다. 남자에게는 샤워젤 냄새가 났고, 경기가 끝난 지는 한참이 지났지만, 시합 직후의 짐승 같은 아드레날린의 기운이 도저했다.

스탠리 제이미슨이 입을 열지 않자 리처드 베켓이 사납게 입술을 물어뜯었다. 피가 나지는 않았지만, 아파서 반사적으로 입이 열렸다. 남자의 혀가 그대로 스탠리의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숨이 턱 막힘과 동시에 뜨거운 몸이 그대로 스탠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둘의 고개가 완전히 기울어지고 얼굴과 얼굴이 포개졌다. 남자의 입가가 사납게 뒤틀렸다. 그것은 순수하고 정갈한 입맞춤이 아니라 완전히 짐승에게 마운팅 당하는 듯한 모욕적이고, 또 야성적인 키스였다.

한참을 그렇게 당했을까, 스탠리가 가까스로 남자의 품 안에서 벗어났다.

-짝.

있는 힘을 다해 남자의 뺨을 후려쳤건만, 체격의 차이 때문인지 리처드 베켓의 고개만 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리 하나는 우렁차서, 수전 이모가 튀어나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뭐하냐.”

퉤. 스탠리가 입가를 훔치고 침을 뱉었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야속했다. 하지만 무서운 건 사실이었다. 지금이 집 앞만 아니었다면 진정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터다.

“……스탠리. 난.”

“변명하지 마. 개새끼야. 난 너 싫다고!”

스탠리가 잠긴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

“난 시발, 너 같은 게이 새끼도 아니라고! 착각하지 말란 말이야!”

서러운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안 돼. 스탠리 제이미슨. 시발, 여기서 울면 모든 게 웃겨지고 만다. 참아, 참으라고 새끼야!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이 스탠리의 몸은 스탠리를 배반하고, 눈물은 후두둑 셔츠에 떨어지고 만다.

“미안, 스탠리. 내가 잘못했어.”

“시발 너 같은 거 정말 싫어. 역겨워. 꺼져!”

스탠리 제이미슨이 씩씩거렸다. 안 그래도 부족한 폐활량 탓에 숨이 벅차올랐다.

“다신 내 앞에서 얼쩡거리지 마.”

그 말과 동시에 눈앞의 거대한 남자의 표정이 사정없이 창백해졌다. 마치 산산이 깨진 유리처럼 인상이 흩어졌다. 그것은 무척 놀라운 일이었는데, 몇 시간 전만 해도 눈앞의 상대방이 바위를 산산조각 부수듯 태산 같은 힘을 가진 사람과 동일인물이라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상처 입은 표정을 짓는 건데. 내 잘못이 아니다. 스탠리 제이미슨은 속으로 되뇌고 되뇌었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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