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화염과 발자취
어제 새벽 늦게 근처 골목길에서 사람이 한 명 죽었다. 여자였다. 첫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무참하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시체는 꽤 잔인한 몰골이었는데, 피 묻은 발자국이 내 집 앞까지 연결되어 있었고, 범죄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흉기도 그 앞에서 발견 되었다고 한다.
자는 사이에 일어난 일을 가지고 어쩌란 말인가. 씻지도 못하고 강제로 서까지 끌려왔던지라 기분이 매우 불쾌했다.
“그래서 범인이 저다, 이런 말씀은 아니시죠?”
“그럼 그게 왜 너희 집 앞에 있어?”
“형사님, 제가 대가리에 총을 맞지 않은 이상은 그렇게 멍청하겐 안 하는데요…….”
“10년 더 살고 싶어서 그랬는지 누가 알아?”
형사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서류철로 머리를 후려쳤다. 짜증 나게. 입 안으로 욕설을 굴렸다.
“이거 안 보여? 이거?”
내 앞에는 달갑지 않은 식칼 한 자루가 있었다. 굳은 피가 손바닥 모양으로 선명하게 새겨진 칼자루와 무딘 칼끝을 보았다. 많이 본 모양이네.
“이게 왜요?”
“네가 예전에 사용했던 범행 도구랑 똑같잖아!”
“아, 추억 팔이는 별로 하고 싶지 않은데요.”
“이 새끼가 진짜!”
또 머리를 한 대 휘갈겨 맞았다.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한숨을 참았다. 흉기에 이어 사체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꽤 잔인한 수법에 뺨을 긁적였다.
“제가 죽였던 방식이랑 비슷하군요.”
“그래.”
“하지만 그때랑 다른 게 하나 있는 것 같은데요.”
“뭐가?”
고아원을 태웠던 불. 원장을 비롯한 더러운 모든 것을 소각시켜 이 땅 위에서 지워 내고 싶어 불을 질렀다. 나 자신조차도 더러워 불 속에서 죽어버리고 싶었다. 순간 이유 없는 불쾌감에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다.
“불을 쓰지 않았으니 저는 아닙니다.”
“개새끼가, 그 입 안 닥쳐?”
뺨을 한 대 후려 맞았다. 두개골이 다 흔들릴 정도로 얼얼했다. 손바닥으로 화끈거리는 부위를 감싸 쥐었다. 눈을 부리부리하게 뜬 형사의 얼굴 전체에 짜증이 가득 흐르고 있었다. 한 번만 더 비위를 거스르면 반항도 못 하게 두들겨 팰 기세라 한숨을 삼켰다. 짜증 나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사회생활 시작한 지 얼마나 된다고, 갑자기 이상한 놈이 나타나 단순한 트릭에 살해 협박이라니. 재수가 없어도 이보다 안 좋을 수는 없었다.
“저기요, 농담 아니고 저 아니라고요. 제2의 삶을 시작하고 있거든요.”
“개수작 부리지 마! 그럼 누가 이런 식으로 사람을 죽여?”
“그 사건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가능하죠.”
개구멍 같은 창문 너머에서 방 안을 노려보던 살의 가득한 눈동자가 기억났다. 과거의 적의는 어제처럼 선명했다. 불이 타던 그날 밤, 손에 남은 끈적거리는 장기의 감촉.
다리를 한 바퀴 휙 꼬아서 무릎에 두 손을 턱 얹었다. 건방진 자세에 화가 난 형사가 주먹으로 책상을 두들기며 야!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난장판으로 흐트러진 책상 모서리에 쌓여 있던 서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침 댓바람부터 혈압을 올리고 그러시네.
“잘 아시잖아요. 제 사건은 유명해요. 뉴스에도 나왔고, 원한 관계도 확실하니 그쪽을 알아보시는 게 더 빠를 것 같은데요.”
“너 이 새끼, 하필 우리 구역이라…….”
중범죄자는 늘 관리의 대상이다. 범행 도구가 현관문 앞에 처박혀 있었으니 보고서를 잔뜩 작성해야 할 게 분명했다. 물론, 나더러 쓰라고 시키는 게 아닌 이상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왜 뻔한 이유로 사람을 불러다 괴롭히는가, 그게 더 중요하지.
“지문, DNA, 행적, 범행 동기.”
“…….”
“뭐 하나도 저랑 맞는 거 없을 텐데, 땀 빼지 마시고 보내 주세요.”
날씨가 느긋하고 좋았다. 오늘은 바람도 좀 선선하고 날씨도 화창하고. 곁들인 말에 형사가 거품을 물었다. 뒷자리에서 계속해서 코를 풀던 다른 형사 하나가 쌍욕을 했다. 저 씨발 새끼!
욕을 한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범인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오지도 않을 텐데 다들 의욕만 과하다. 애초부터 골목에 그 흔한 CCTV 하나 달려 있지 않은 치안이 문제 아닌가.
“똑바로 대답 안 해? 이 새끼 이거 진짜.”
내 잘못도 아닌데 욕을 듣고 있자니 조금 억울해졌다. 벽에 걸린 둥근 시계를 흘끗 쳐다봤다. 똑딱똑딱 흐르는 시침이 아침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10시까지는 출근해야 했다.
“새벽에 어떤 미친놈이 저희 집 창문에 붙어서 칼 들고 설치고 있더라고요.”
“뭐라고?”
“쥐 사체까지 던져 주던데요.”
형사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져서는 앞으로 불쑥 다가왔다. 안 그래도 못생긴 얼굴인데 가까이서 보니 달갑지가 않았다. 질색하며 얼굴을 밀어 내자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욕을 마구 쏟아 냈다. 강력계 형사들은 왜 다 성격이 이따위야.
“직접 확인하셔도 됩니다. 바깥으로 난 창문 쇠창살에 칼로 긁힌 자국 있을 거예요.”
“정말이야?”
“네, 그렇습니다.”
“어떻게 생겼는데?”
“마스크 끼고 모자 눌러쓰고 있어서 안 보였어요. 덩치는 제법 있었고, 키는 180 정도?”
“또?”
“쥐 사체를 선물로 주는 건 너무하다 싶어서 다시 던져 줬더니, 앞쪽 골목으로 도망가더라고요.”
“그게 말이 돼?”
“그럼 안 됩니까?”
형사의 어깨 위를 쓱 올려다보았다. 검은 구름 같은 물체가 뭉실뭉실 피어올라 있었다. 원래 원귀들은 자기를 죽인 놈에게 붙기도 하지만, 자아를 상실하면 사리 판단이 되지 않으니 아무한테나 붙는 경우도 있다.
살인 현장을 들락날락하다 보니 대부분의 형사는 재수 없이 원한을 살 일이 많았다. 이쪽 어깨까지 넘보면서 슬금슬금 타고 넘어오는 놈을 손바닥으로 슬쩍 후려쳤다. 어깨 좀 뭉치셨겠어.
“그 새끼가 범인이라고?”
“똑같이 생긴 칼을 들고 있었으니까요.”
나무 손잡이를 단 식칼을 가리키며 대답하자 형사의 얼굴이 발로 밟은 요구르트 병처럼 구겨졌다. 사람 얼굴이 저렇게 못생겨질 수 있다니. 원장 탓에 대부분의 중년 남자에게 거부감을 느끼는지라 눈썹을 찌푸리면서 의자 뒤로 엉덩이를 바싹 붙여 앉았다.
“왜 신고를 안 해?”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직접 칼을 휘두르면서 위협을 하지도 않았으니 신고를 할 필요는 없죠. 해 봤자 이렇게 추궁만 당할 거고.”
“말하는 거 봐라.”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그만 보내 주실래요. 이제 출근해야 하거든요.”
아, 좀 태워 주세요. 뻔뻔하게 요구하며 심술궂게 웃자마자 몇 대를 또 두들겨 맞았다. 쓰레기라고 욕을 하는 형사들의 얼굴에는 살인자의 딱지가 달린 사람에 대한 혐오감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용의자가 따로 있다고 이야기를 해 줘도 그들은 아직도 나를 감옥에 집어 처넣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하긴, 빨간 줄이 그렇지 뭐.
용의자라 주장한 사내의 인상착의를 좀 더 자세하게 읊어 주고 그림까지 그렸다. 몇 번 더 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통보를 마지막으로 겨우 풀려났다. 이미 출근 시간은 지나 있었고, 배터리가 한 칸 남은 휴대폰에는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와 있었다.
쌍욕을 얻어먹겠구나. 일한 지 보름밖에 안 된 주제에 무단결근이라니. 고 영감을 끼고 있으니 잘리진 않겠지만 대놓고 싫어할 게 분명하다.
세수라도 하고 갈 요량으로 경찰서 화장실에 들어갔다. 뼈대 굵은 형사의 주먹으로 얻어맞아 그런지 벌써 퍼렇게 피멍이 올라오고 있었다. 입술도 찢어져 입가에 빨갛게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공무원이 폭력을 마음대로 행사해도 되는 건가. 대한민국은 썩었어. 속으로 투덜거리며 흐르는 물에 세수하고 바깥으로 나왔다.
사람이 죽은 날치고는 화창하고 상쾌한 날씨였다. 공사장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죽은 아가씨는 안타깝게 되었지만 그보다는 범행 방식이 더 찝찝했다. 최소한 재판 과정을 어느 정도 겪은 관계인. ……집까지 찾아올 정도로 의욕적인 원장의 광신도는 누가 있지.
천륜은 믿을 것이 아니었다. 한 번 버려진 탓에 고아원의 아이들은 소심했고 의젓한 척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나이를 먹고 독립을 시작하면 검은 그림자를 내보이는 놈들이 한둘은 있었다. 시간을 되돌리기 전에는 나이를 먹은 후에야 제대로 엇나간 놈도 있었다.
하지만 그놈들이 내 주소를 알 리가 없다. 출소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서주영과 하재연이 전부였다. 고 영감은 내 과거를 자세하게 알지 못하고, 드러난 피부만 봐도 젊은 남자의 외관이었다. 누구지. 새벽 내내 잠을 설치고 시달렸더니 머리가 쑤셔 왔다. 팔자가 흉악하네.
터덜터덜 걸어가다 택시를 잡고 공사장으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도착하자마자 작업반장의 욕설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이런 씨펄, 때려치워!”
“죄송합니다.”
굽실거리며 허리를 몇 번이나 숙이고 나서야 작업반장은 열이 시뻘겋게 오른 얼굴로 일당은 반만 주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한 시간 지각을 했다고 마음대로 일당을 반 토막 내는 처사가 부당했지만, 뭐라고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뒤늦게 남아 있는 궂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 건물을 엉금엉금 기어 올라가 철골 구조를 엮었다. 가랑이 사이에 철골을 끼우고 움직일 때마다 금속이 휘청휘청했다. 몇 개의 철근을 묶고 나서 기어 내려오자 고 영감이 기다리고 있었다.
“살인이라지?”
“그건 또 언제 들으셨대요?”
오늘 아침에 일어난 일을 빨리도 안다며 투덜거리자 고 영감이 힐힐 웃으면서 속삭였다.
“그쪽에 아는 놈이 있지.”
“발도 넓으시네요. 무슨 말을 하시려고요?”
“지각을 했으니 돈 벌려면 야간이라도 해야지?”
당분간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될 텐데 통나무* 처리를 하라니. 험상궂은 형사의 얼굴을 생각하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작업이 늘 있는 건 아니었다. 할 수 있을 때 잔뜩 해서 돈을 벌어 둬야 한두 달 치 월세를 낼 돈이라도 미리 모아 둘 수 있었다.
아무리 끔직한 일이라도 반복할수록 죄책감은 옅어지게 되어 있었다. 생각을 멈추고 노인과 작업반장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거절하거나 발을 빼려고 하면 영감은 분명 내 등을 떠밀어 콘크리트 배합기 안으로 집어넣어 갈아 버릴 것이다. 지금도 보아라,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두 번은 없다고 말하는 듯 눈이 번뜩였다. 혐오하던 인간과 똑같은 색을 띤 눈빛에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지난밤은 어땠나?”
“…….”
“두 다리 뻗고 푹 자야 해.”
그렇게 속삭이는 더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긴 망상을 했다. 기계 안에 뻣뻣하게 굳어 우둑거리는 소리가 나는 시체를 밀어 넣으면서, 내 영혼도 이렇게 없어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미 한번 운명이 바뀌었지만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으로 성큼 다가와 있다는 기분을 떨쳐 낼 순 없었다.
본보기로 죽였을까, 그 아가씨.
코끝에 꽃가루와 먼지 냄새가 다가와 앉았다. 에취, 재채기를 반복하며 코를 훌쩍거렸다. 4월 끄트머리에 안착했으면 날씨만큼 온화해야 할 텐데 바람이 영 차가웠다. 감기에 걸릴지도 몰라.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가뭄처럼 갈라져 나왔다.
“저 근처에 닭발을 죽이게 하는 곳이 있는데 갈람 가지.”
며칠 같이 일을 했다고 부쩍 친한 척하는 인부 하나가 선뜻 제의했다. 아니요, 거절하기도 전에 작업반장이 어깃장을 놓았다.
“일도 못 하는 새끼를 어디 데려간다 그래?”
술을 마신 것처럼 붉어진 얼굴을 보고 인부들이 다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짐짓 말없이 간이 의자에 걸터앉아 있자 작업반장이 다시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시펄, 고 영감만 아니어도 안 썼는데.”
“오늘은 정말 죄송했습니다.”
연거푸 사과하는데도 작업반장은 들은 눈치가 아니었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경찰서에 살인 혐의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는 말도 할 수 없어 얼굴을 문질렀다. 온종일 목장갑을 끼고 일했더니 손끝이 까칠까칠했다. 지문이 닳아 없어지도록 벽돌을 날랐더니 허리도 뻐근했다.
“하여튼 이래서 별 단 새끼들은 글러 먹었어. 저 봐, 뭘 했으면 하룻밤 새 얼굴에 피딱지를 달고 왔겠어?”
그 말에 누가 숨 참는 소리를 냈다. 프라이버시가 없다니까. 웃으려고 했지만 입매가 딱딱해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간접적으로 내가 전과자라는 걸 떠벌린 작업반장이 흐흐 웃으면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입 밖으로 벙긋벙긋 피어나는 담배 연기를 노려봤다.
“뭘 쳐다봐? 확 쳐 죽여 버릴까.”
악의적인 말투에 이쪽이 한 대 쳐 볼까, 고 영감이 얼마나 커버를 쳐 주려나, 고민하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조금만 각도를 신경 써서 휘두르면 얼굴에 멋진 멍 하나는 달아 줄 수 있었다.
교도소에서는 푼돈을 건 싸움이 간수들의 눈을 피해서 열리곤 했다. 그때는 온갖 변칙 기술이 난무했다. 팔꿈치로 옆구리를 찍고 사타구니를 걷어차면 어지간한 장골도 바로 일어나진 못했다. 그리고 그런 변칙 기술은 전부 몸으로 배워야 했다. 나중에는 맷집만 늘어 오래 버티고 있으면, 빨리 두들겨 맞고 쓰러지라는 욕설이 난무했었다. 눈 먼 주먹에 급소를 잘못 맞아 정신을 반쯤 잃고 바닥에 엎어진 적은 하도 많아 이골이 날 정도였고. 지금 와서 그렇게 배운 걸 복습해 봐도 나쁠 건 없지 않을까.
물론 잔인한 욕망을 실천에 옮길 수는 없었다. 작업반장도, 고 영감도 계속 얼굴을 봐야 할 사이였다. 짜증 나. 엉킨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내리며 화를 삭이는데 경쾌한 목소리가 뒤에서 나를 불렀다.
“형.”
커억, 옆에 있던 작업반장이 소스라치게 놀라 숨 막히는 소리를 냈다. 나도 익숙한 목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반동으로 싸구려 의자가 풀썩 뒤로 넘어갔다. 공사를 한다고 막아 둔 철조망 건너편에 반갑지 않은 얼굴이 있었다.
“하재연?”
“공사장에서 일한다고 해서 놀러 왔어요.”
“갑자기 왜.”
하필 왜, 이 시간에, 지금 여기에. 이틀 사이에 와르르 쏟아진 사건에 이제 와서 숨이 턱 막혔다.
“시험이 오늘 끝났거든요.”
재연이 프린트물을 흔들며 망쳤다고 농을 했다. 앞에 선 하재연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발치에 와 닿았다. 그림자끼리 끈적끈적하게 연결된 것 같았다. 친구인가 보네. 인부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재연의 얼굴을 보며 잡소리를 나누었다. 작업반장이 떠벌렸던 내 과거는 이미 잊은 얼굴이었다.
“어디 갈 곳이 있는데 같이 가지 않을래요?”
“잔업 있어서 못 가.”
“그럼 기다릴게요.”
“하재연.”
“10시에 끝나든 11시에 끝나든 상관없어요. 기다릴게요.”
범죄 은닉 현장에 타인을 둔다고? 안 될 말이었다. 몇 번 더 재연을 설득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는 모습에 작업반장이 혀를 차며 가라는 손짓을 했다. 눈에는 재수 없는 놈이라는 욕이 덕지덕지 매달려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그날의 일감을 내버려 둔 채 일어났다. 고 영감에게 사정을 설명하자 노인이 코를 풀면서 침을 퉤 뱉었다.
“두 번은 없어.”
“네.”
“얼른 그 핏덩어리 데리고 가.”
재연은 고 영감이 자신의 앞에 대고 재수 없다고 욕을 해도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넉살 좋게 꾸벅 인사까지 하더니 내 손을 잡아끌고 공사 터를 벗어났다. 모퉁이를 돌자 재연은 다짜고짜 나를 끌어안았다. 온종일 땀을 흘려 퀴퀴한 냄새가 날 텐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혀엉, 콧소리가 섞인 애교에 진저리를 쳤다.
“이거 놔.”
“오랜만에 보는 건데 좀 봐줘요. 반갑지 않아요?”
“전혀.”
“너무하네요.”
다 큰 남자애가 칭얼거려 봐야 귀여워 보이지도 않았다. 서글서글 사람 좋게 웃는 재연을 억지로 떨쳐 냈다. 재연이 그때까지도 들고 있던 프린트물을 길가 쓰레기통에 구겨 넣고는 갑자기 팔짱을 껴 왔다. 몇 번 실랑이를 벌였지만 결국 재연에게 한쪽 손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무거운 짐에 눌려 빨갛게 자국이 남은 손바닥을 만지작거리며 재연이 싱글벙글 웃었다.
“갑자기 어디에 가자고 찾아온 건데?”
“아, 그냥…….”
웃는 얼굴이 미묘했다. 무심코 재연의 온몸을 훑었다. 저기서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끼면 덩치가 비슷해 보일까. 재연은 호리호리한 체격이었기 때문에 그 정도 덩치를 만들려면 옷을 상당히 껴입어야 할 것이다. 두꺼운 옷을 몇 개나 껴입은 상태에서 길 가던 여자를 제압해서 살해하는 게 가능할까.
“야, 너 어제…….”
“쉿.”
“어?”
“조용히 해요.”
입술에 가만히 검지를 댄 재연이 뒤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공사장이 있는 방향이라 덩달아 뒤로 고개를 돌렸다. 간이 철골 위에 묶어 둔, 보기만 해도 묵직한 철근이 느슨해지고 있었다. 시간이 느려진 것처럼 느릿느릿하게 끈이 풀리고, 묵직한 쇳덩어리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어. 입 안에서 숨죽인 비명이 나지막하게 나왔다.
사고는 순식간이었다. 철근 몇 개가 일시에 엄청난 소리를 내면서 무너졌다. 누구야! 다친 사람 없어? 고함과 비명이 공사장을 뒤흔들었다. 뿌옇게 올라오는 모래 먼지를 보면서 입을 막아 목 안으로 들어오는 공기를 차단했다. 저곳은 내 담당 구역이었다. 놀라 뛰어가려는데 팔이 잡혔다.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재연이 못처럼 박혀서 팔을 틀어쥐고 있었다.
“이거 놔.”
“안 돼요.”
“사고 났잖아.”
팔을 빼기 위해 손을 흔들었지만 하재연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기형적일 정도로 강한 악력이었다. 뼈와 근육을 뚫어 버릴 것처럼 손가락 끝까지 힘을 꽉 준 재연이 나를 몸 쪽으로 잡아당겼다.
“못 가요.”
“뭐?”
하재연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사고가 나 누군가가 다쳤는데 그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형이 없어서 저 정도로 끝난 거니까, 가면 안 된다고요.”
이 애는, 도대체.
순간적인 공포가 발끝부터 치고 올라왔다. 오싹한 한기에 성대가 얼어붙었다. 붙잡힌 팔의 손끝이 얼얼하게 저렸다. 곤란하게 되었네. 재연이 소곤거리더니 팔을 잡아끌었다.
골목을 빠져나오자마자 우측에 자리 잡고 있는 커다란 프렌차이즈 카페에 들어갔다. 구석의 낮은 의자에 몸을 묻고 나서야 숨이 터졌다. 춥다. 몸을 웅크리고 숨을 고르고 있는 사이 재연이 커피 두 잔을 들고 돌아왔다.
“여기,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시죠?”
“어떻게…….”
출소 후 카페는 처음이었다. 내 커피 취향은 서주영도 몰랐다. 누구에게 들었다고 둘러댈 수도 없을 텐데 재연은 태연하게 앞자리에 앉아 커피를 건넸다. 여러 사람이 앉았던 의자는 쿠션이 꺼져 딱딱하고 불편했다. 몇 번 몸을 틀다 바깥을 향해 비스듬하게 몸을 기댔다. 창은 밤공기에 식어 싸늘했다.
무거운 공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재연은 커피를 빨대로 쭉 빨았다. 얼음이 가득 든 잔 표면이 축축했다. 얼음이 달랑거리다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이상한 표정 짓지 마세요.”
하재연이 먼저 운을 뗐다.
“옛날부터 단 건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추측한 거예요.”
저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입술을 열고 험한 말을 쏟아 내는 대신 빨대를 물었다. 차갑다. 기억에서 잊혔던 씁쓸한 커피 맛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그래, 이전에는 블랙커피를 좋아했다. 직접 내려 마실 정도로 좋아해서, 아침마다 큰 컵 가득 채운 커피로 하루를 시작했다.
옷도 장신구도 관심이 없었지만 비싼 커피 머신에 욕심을 냈다. 백만 원이 훌쩍 넘는 고급 기계를 사기 위해 야금야금 비상금도 모으고 있었다. 재연은 내게 주는 선물로 새로운 원두를 한 달에 한 번씩 사 들고 돌아왔다. 아침마다 졸린 눈으로 기계를 돌리면 퍼져 나오던 고소한 원두 향과 그 옆에서 잠을 좀 깨야겠다며 막 내린 커피가 담긴 머그컵에 얼음을 몇 조각 집어넣던 하재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이미 사라진 미래다. 하재연이 그 시간들을 알 리가 없다. 심장 부근을 꽉 눌렀다. 쿵쿵 뛰는 심장 박동이 손바닥을 아프게 자극했다.
“아까 했던 말, 뭐야?”
“벌써 본론으로 넘어가려고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야기나…….”
“하재연.”
조금만 더 스트레스를 받으면 피라도 내뱉으며 기절할 것 같았다. 스물네 시간 가까이 정신이 혹사당했다. 여기서 사건이 하나만 더 일어나도 미쳐 버릴지 모른다. 스트레스가 골을 내리치며 부족한 정신력 대신 체력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달팽이처럼 시간이 느리게 미끄러졌다.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신 재연이 한숨을 쉬었다.
“형을 보러 온 건 맞아요.”
“여기서 일하는 건 어떻게 알았는데?”
“저번에 잠깐 마주쳤잖아요?”
고 영감을 만나러 왔다가 공원에서 마주쳤던 때를 이야기하는 건가. 최소한 믿을 수 있는 변명을 해야지. 고개를 흔들며 바깥을 쳐다봤다. 형. 재연이 불렀지만 일부러 무시했다.
해가 진 거리에는 퇴근하는 직장인과 하교하는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저 많은 인파 사이에는 드문드문 가로등처럼 박힌 귀신들도 보였다. 그것들은 우울한 눈이나, 원망에 가득 찬 눈으로 살아 있는 것들을 쳐다본다. 붙박이처럼 서 있는 귀신들도 많지만 움직이는 것들도 있었다. 도로에 붙어 길을 건너는 사람의 발목을 붙들어 사고를 유발하거나, 괜히 서 있는 사람의 등을 밀어 넘어트리고, 껌처럼 어깨와 머리카락에 달라붙어 괴롭히는 것들.
“……너 만나기 거북해.”
“왜요?”
“속이 시커먼 것 같으니까.”
“아주 순수한 마음인걸요?”
순수하다니. 뻔뻔한 단어 선택에 웃음이 나왔다. 가릴 생각도 없이 대놓고 비웃자 재연이 따라 웃었다. 깨끗한 미소였다.
“정말인데.”
“거짓말하지 마.”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스스로 생각해.”
“아아, 싫은데.”
능글맞게 웃으면서 말을 돌리는 저 화법이 짜증 났다. 하재연의 얼굴을 흘끗 노려봤다. 흰 뺨은 곡선이 둥글게 지어져 있었다. 매끄럽게 떨어지는 선과 면을 잘 조합해 붙여 놓은 것 같은 얼굴이다. 잘 찾아보면 오른쪽 눈 바로 밑에 점이 있었다. 번진 것처럼 흐린 갈색 점이라 뭐가 묻었다고 생각해서 곧잘 손으로 문지르곤 했었던, 옛날에는 좋아했던 외모의 한 부분이었다.
까만 눈을 반짝이며 재연이 웃는다. 혀를 차며 시선을 피했다. 바깥으로 눈을 돌리자마자 길가에 우두커니 서 있는 눈이 붉은 남자 귀신과 시선이 마주쳤다. 접착제를 붙인 것처럼 눈을 움직일 수 없었다. 피눈물을 줄줄 흘리던 귀신이 허공에서 발버둥을 쳤다. 어둠의 구석구석 닦여 나가지 못한 찌꺼기처럼 눈에 거슬리는 광경이었다.
“너 도대체 뭐야?”
입은 움직였지만 여전히 그 귀신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피골이 상접한 귀신이 행악질을 하면서 귀곡성을 내질렀다. 마이너스 파동을 가진 비명에 귀가 따끔거렸다.
“뭐라뇨?”
“너 이상해.”
“이상한 건 형도…….”
“어물쩍 넘어가지 말고.”
귀신은 스스로 목을 조르고 있었다. 나사못처럼 빙글빙글 돌아간 목 가죽이 손톱 사이에서 짓이겨지다 껍질이 벗겨지는 것처럼 훌렁 벗겨졌다. 살점의 절단면이 그대로 드러났다. 욱, 입술을 씹으며 헛구역질을 했다. 그제야 눈이 돌아갔다. 재빨리 커피를 입에 넣었지만 이미 비위가 상한 뒤였다.
바닥에 고인 커피를 전부 마셔 버리고 난 뒤에야 숨이 돌아왔다. 가끔 저렇게 끔찍하게 자학하는 놈들이 있었다. 괴롭히려고 일부러 하는 행동인지라 끝나기 전까지는 눈을 뗄 수도 없어서 더 고약했다. 여러모로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팔뚝에 올라온 소름을 슬슬 문질렀다.
“……방금 전 사고, 제대로 대답해.”
턱을 괸 채 잠시 얼굴만 바라보던 재연이 다 마셔 버린 컵에서 얼음을 하나 꺼내 깨물었다. 입 안에서 와드득하는 시원한 소리가 났다.
“제가 촉이 좋아요.”
촉이라. 예상보다도 못한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뭐, 얼굴을 보니 전혀 안 믿는 것 같네요.”
“너라면 믿겠어?”
“믿어야죠. 커피 한 잔 더 사 올게요.”
“필요 없어.”
“형 얼굴, 지금 창백한 건 알아요?”
비웃는 것처럼 토막 난 웃음을 흘린 재연이 빈 컵을 치우고는 계산대로 갔다. 지갑을 꺼내고 주문하는 뒷모습을 보면서 얼굴을 문질렀다. 유리창에 반사된 내 모습은 피를 뺏긴 사람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결국 재연이 다시 사 온 커피를 전부 마시고 나서야 속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의자에 푹 기댄 채 차갑게 식은 손끝을 꾹꾹 눌렀다. 손발이 차가워서 아플 정도였다. 저린 손을 꽉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재연이 제 컵에서 얼음을 꺼내 입 안에 넣고 굴리며 입을 열었다.
“촉이 좋다는 게 농담은 아니에요. 가끔 꿈을 꾸거나, 이상한 기분을 느낀다거나…….”
“…….”
“저도 새삼 신기하네요. 선조가 유명한 무당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무당 좋아하시네. 확실히 재연은 어릴 때 울음을 터트리면서 잠에서 깨어나던 적이 많았다. 무슨 꿈을 꿨는지 식은땀에 흠뻑 젖어 칭얼거리며 안겨 들었었다. 그 귀여운 악몽은 어릴 때로 끝이었고, 다 자란 하재연은 아주 드물게나 악몽을 꿨다며 애처럼 품 안에서 골골거렸다.
“그럼 내가 이미 알았겠지. 어릴 때는 없던 능력이 스물이 넘어서 갑자기 생겼다고?”
“형, 왜 이렇게 날카로워요?”
테이블 위로 빛이 반사돼서 날카로운 윤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위장이 따끔거렸다. 온종일 고생해 편도가 부었는지 침을 삼킬 때마다 목구멍이 쓰라렸다.
“아까 뭔가 보기라도 했어요?”
“…….”
재연이 상체를 앞으로 내밀어 무릎을 잡아 왔다. 차갑게 식은 손이 무릎뼈를 꽉 움켜쥐었다 놓았다. 순간 몸 안에 무쇠 막대가 틀어박힌 것 같았다. 꼬챙이로 관통당해 늘어진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형 말만 들으면, 마치 형도 그런 영감이 있다는 것 같잖아요.”
“…….”
“그래요?”
“아니, 아니야.”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꺾인 고개 사이로 얼음이 잔뜩 녹아 물처럼 변한 커피잔이 눈에 들어왔다. 커피잔을 손안에 꽉 쥐었다. 조금씩 떨리는 잇새를 내리 물었다. 손끝부터 서서히 체온이 식었다. 온몸에 한겨울에 내린 서리처럼 소름이 돋았다. 앞에 앉은 재연이 공포의 상징물처럼 느껴졌다.
“그렇죠. 흔한 재능은 아니잖아요, 이런 게.”
“……그래, 그러네.”
“뭔가를 대가로 바쳤다거나…… 그러지 않는 이상.”
손바닥 안에서 얇은 테이크아웃 컵이 구겨졌다. 재연의 손가락이 손등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말속에는 잘 갈려 날이 선 화살촉이 숨겨져 있었다. 대가. 나는 다음 생에서 누려야 할 복록을 대가로 바치고 돌아왔다.
“떠네요. 내가 무서워요?”
분명히 다정한 말투로 걱정해 주는데, 이유 없이 하재연이라는 사람이 무서웠다. 지금 당장 몸을 덮칠 것처럼 큰 그림자가 앞에 있는 것 같았다. 식은땀이 고인 손바닥을 컵 표면에 문지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래요. 그럼 이제 일어날까요.”
재연이 커피잔을 뺏어 들며 다른 쪽 손을 뻗는다. 에스코트라도 해 주는 것처럼 눈앞에서 흔들리는 손을 무시하고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그가 산뜻한 얼굴로 휴지통에 일회용 컵을 갈무리해 버리며 잔잔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 조금 전까지 무섭던 감정이 바람에 흩날렸다.
거리가 조용하다. 재연이 거리에 나와 한 발짝 걸을 때마다 종종 뭔가가 다른 골목으로 질주해 사라졌다. 몇 번을 봐도 신기한 장면이었다. 줄줄이 늘어선 가로등을 지나고 수십 개의 보도블록을 밟는 내내 하재연은 입을 다물고 조용하게 있었다. 침묵이 거슬렸다.
지하철 역사 입구에 도착하고 난 뒤에도 재연은 말은 없었다. 가볍게 손을 흔들며 배웅하는 모습을 보다 그의 셔츠를 잡아당겼다. 재연이 여전히 입을 다문 채 눈짓으로만 물었다. 어둡게 내려앉은 그림자 속에서도 미모가 해사하니 빛이 나고 있었다. 셔츠를 잡았던 팔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아프다. 입술을 잠깐 달싹거렸다가 무겁게 열었다.
“어제…… 뭐 했어?”
“왜요?”
재연이 천진해 보일 정도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한다. 망설였다. 어젯밤, 새벽에 나를 찾아왔던 살인 용의자로 너를 의심하고 있다고 이야기할 순 없었다. 재연이 내 어깨를 잡아 상체를 바로 세웠다. 그제야 바닥을 향해 구부정하게 서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공부했죠. 시험 기간이라고 했잖아요.”
“새벽에는?”
“자취방에 있었죠. 친구랑 같이.”
“…….”
대답에는 막힘이 없었다. 친구랑 같이. 재연이 덧붙인 말이 마치 자신의 알리바이를 증명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들렸다. 20대의 대학생이 하루에도 수십 건씩 일어나는 살인 사건을 관심 있게 전부 찾아볼 리가 없었다.
“적어도 형네 집 근처에는 없었어요.”
말문이 막혔다. 재연이 다 알고 있다는 얼굴로 힘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갑자기 볼을 꽉 잡아 와 깜짝 놀라 눈을 마주쳤다. 얼빠진 내 얼굴이 재연의 눈동자 중앙에 박혀 있었다.
“좋아요, 힌트를 줄게요.”
“힌트……?”
“네.”
“무슨 힌트?”
음, 재연이 자신의 아랫입술을 만지작거리다가 가볍게 깨물었다. 피가 돌기 시작한 붉은 입술이 모양 좋게 움직인다.
“만날 때마다 형이 궁금해하는 걸 하나씩 말해 주죠. 대신 나도 조건이 있어요.”
“뭔데?”
“허락한다고 해 주세요.”
“뭐?”
“허락한다고 말해 주면, 가능한 조금이라도 더 이야기해 드릴게요.”
처음 집에 찾아왔을 때, 재연은 허락을 받고 나서야 들어왔다. 아, 평범한 인간이 아니구나. 이제야 제대로 깨달았다.
“……허락한다.”
“감사합니다.”
씩 웃는 하재연의 입가에 보조개가 파인다. 말을 한 후 달라진 건 느껴지지 않았다. 몸 이곳저곳을 만지며 이상이 있는 건 아닌가 확인해 봤지만 멀쩡했다. 어떤 걸 허락받은 건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재연은 ‘다음 차례에.’라고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허무하게 뭘 팔아 버린 기분에 두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눈을 깜박이자 인사가 들렸다.
“들어가서 쉬세요. 얼굴이 좋지 않네요.”
컨디션이 최악이었는데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망설이다 돌아서는 재연을 붙들고 재차 물었다.
“……같이 갈 곳이 있다면서?”
“아, 그거요.”
기분이 좋아 보이는 재연이 내 몸을 꽉 끌어안았다 놓았다. 손끝으로 입술과 눈가를 차례로 건드리며 간지럽힌다. 얼굴이 간지러운 건데 이상하게 신경이 간질거렸다. 발을 뒤로 빼자 순순히 놓아 주고는 조심스럽게 등을 떠밀었다. 그의 체온이 따뜻하다는 게 유일한 신뢰였다. 살아 숨 쉬는 사람이라는 신뢰.
“그 말을 믿었어요?”
가볍게 웃는다. 말투도, 행동도, 웃음도 가볍기 그지없다.
“형이 보고 싶어서 온 거잖아요.”
나는 평생을 무거웠으니 저게 사랑일 리가 없다.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는 내내 홀로 곱씹었다. 사랑이 아니다. 과거의 연인이라 착각에 빠진 것뿐이다.
평소보다 훨씬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늘 우중충하던 건물 주변이 이상하게 화사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도, 질척거리던 계단도 그랬다. 산뜻한 느낌까지 드는 현관문을 한참 노려봤다. 이것들이 또 무슨 장난을 치는 건지 불안함을 담고 문을 잡아 열었다. 집 안에서 바람이 환하게 불어왔다.
어. 몇 차례나 눈을 비벼가며 집 안을 보았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들끓던 귀신들이 하나도 없었다. 천장에 매달린 남자도, 장롱 위에 웅크리고 있던 여자도, 천장 귀퉁이에 사는 놈과 주방에 사는 놈, 화장실과 장판을 굴러다니던 얼빠진 놈도……. 신발을 던지듯 벗고 달려 들어가 구석구석 뒤져 봤지만 정말 단 한 놈도 없었다.
“이, 이쁜이들 어디 갔니……?”
되지도 않는 애칭으로 불러 가며 구석구석 찾아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단체로 가출이라도 한 것 같다. 일단 끼니라도 때우기 위해 컵라면 하나를 뜯었지만 불안한 기분에 다리가 들썩거렸다.
매운 냄새에도 식욕이 돌지 않았다. 분명 하재연과 관련이 있었다. 허락한다는 말과 귀신들이 없어진 게 관련이 있다면?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맞아떨어지는 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익어 가는 컵라면을 쳐다보기만 하며 복잡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늘 귀신들이 들끓어 시끄럽던 집은 조용해졌지만, 마음은 편해지지 못했다. 나가라고 소리를 질러도 꼼짝 않고 버티던 놈들이었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수가 늘어 있었고, 외출하려고 문을 열면 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옷자락과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골탕을 먹이는 것처럼 집에 돌아오면 방 안을 어질러 뒀고, 가끔은 위험할 정도로 질 나쁜 장난을 치는 경우도 있었다. 귀신이란 게 어차피 사람이 죽어 만들어진 원혼들이다. 그것들은 죽음과 친했다. 원망과 미련이 남아 이승에 머무는 만큼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싫어했다. 혹시 사라진 귀신들이 문제가 되면 어쩌지. 설마 허락한다는 말이 큰 실수는 아니었을까.
불안함이 커지는데 갑자기 오른쪽 귓가에 쇠 긁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컴컴한 그림자는 언뜻 보기에 귀신이 돌아온 모습처럼 보였다.
“그렇게 내가 보고 싶었나? 하루 만인데.”
창문 너머에는 달갑지 않은 손님이 있었다.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의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그의 손에는 이번에도 식칼 하나가 들려 있었다.
컵라면이 퉁퉁 불어 간다. 젓가락으로 면을 한번 뒤섞고는 상에 내려놓았다. 남자는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칼로 쇠창살을 긁고 있었다. 칼자국이야 남겠지만 저걸로 창살을 잘라 내긴 힘들 텐데 놈은 집요해 보였다. 원한이 서린 놈의 등 언저리를 노려봤다. 저놈이다. 골목길 살인자의 주범. 증거는 없었지만 알 수 있었다. 저놈의 등 뒤에 귀신이 하나 매달려 있었으니까.
배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귀신의 혈색은 우습게도 좋았다. 하나로 묶인 긴 머리가 흐트러져 있었다. 얼마나 오래 붙어 있었는지 온몸에 핏자국이 흥건했다.
“할 말이 있으면 나한테 직접 해.”
“…….”
“애먼 사람 죽이며 돌아다니지 말고, 나한테 하라고.”
살인 사건이 일어난 직후라 순찰이 강화됐을 텐데도 뻔뻔하게 칼 들고 설치는 놈이 있다니. 집에 들어오면서 본 골목길 저편의 노란 테이프를 친 현장 모습이 생생히 기억나는데. 지금이 그리 늦지 않은 시간인데도 동네에는 그림자 한 조각 없었다. 흉흉한 일에 몸을 사리느라 술집도 몇 군데만 드문드문 문이 열려 있었다.
남자의 목 안에서 가래 끓는 소리가 났다. 여자가 붉은 눈동자를 굴리면서 흑흑 흐느껴 울었다. 원망과 귀기가 가득 찬 소리에 우울증이 밀려온다.
“살인은 업이야.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어.”
인간의 영혼은 쉽게 손상된다. 맨 정신을 가진 사람이 영혼을 스스로 더럽히는 걸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
마스크에 가려진 입술이 움직이는지 천이 들썩거렸다. 너무 조용하고 쉰 목소리라서 거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한 마디는 확실하게 알아들었다.
남자는 손에 쥔 칼을 가방 안에 밀어 넣은 후 일어섰다. 어깨에 매달려 있던 불쌍한 귀신이 주르륵 미끄러져 남자의 발목을 잡았다. 가련한 얼굴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간다. 지금처럼 발목에 매달려 살려 달라고 빌었겠지. 아직도 쉬지 않고 벙긋거리는 입술이 하는 말은 죽어갈 순간에도 그의 귀에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귀신은 저주했다. 너 때문에 죽었다. 귀신은 다시 저주했다. 너는 왜 대가를 치르지 않았나. 귀신은 다시 저주했다. 너 때문에 죽었다.
그래, 나 때문에 무고한 사람이 죽었다. 남자는 어쩌면 몇 명을 더 죽일지도 모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집에서 뛰쳐나왔다. 어디로 갔을까. 으슥한 골목 구석구석을 뛰어다녔지만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갔을까. 숨이 차 기침이 터지려는 걸 참으며 몸을 돌리는데 어디선가 매캐한 탄 냄새가 났다. 왼쪽 골목이 소란스럽다.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재빠르게 뛰어갔다. 길가에 있던 작은 술집 하나가 벌겋게 타오르고 있었다. 바깥으로 뛰쳐나온 손님들과 아르바이트생들, 길거리의 다른 잡상인들이 타오르는 불을 하염없이 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진짜 이게 무슨 일이래.”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 하나가 전화로 속닥거린다.
“응, 갑자기 어떤 남자가 뛰어 들어오더니 불 지르고 도망갔다니까. 근처에서 살인 사건도 나고. 무서워서 못 살겠어, 정말.”
근처 화단 앞에 주저앉아 상가를 집어삼키는 화마를 구경했다. 가까이에 있었는지 경찰차가 먼저 도착하고 뒤이어 소방차가 따라왔지만 작고 오래된 가게는 손쓰기 어려워 보였다. 불현듯 살갗이 따끔거렸다. 온몸이 녹아내리던 고통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당시의 불길은 무엇보다 뜨거웠고, 내가 지닌 번뇌와 업은 무거웠다.
“이 새끼, 니가 여기 왜 있어?”
누가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아침에 집까지 찾아왔던 형사였다. 내가 감시 대상자라는 사실이 그제야 기억났다.
휴대폰으로 한참이나 전화를 하던 아가씨와, 사진과 동영상을 찍던 행인들이 이쪽을 쳐다보며 수군거렸다. 억척스러운 형사의 손길을 뿌리치고 일어났다.
“우연이에요.”
“우연? 우연 좋아하시네. 이 자식 안 되겠어.”
“정말 우연이라고요.”
“그럼 네가 여기 왜 있어?”
“……저녁 운동하고 있었어요.”
“운도옹?”
형사는 기가 차다는 듯 침을 탁 뱉이더 내 멱살을 틀어쥐었다. 연행이라도 해 갈 것처럼 험상궂은 표정이었다. 결국 옆에 있던 여자를 불러 내가 언제 도착했는지 증언을 받아냈다. 그제서야 형사는 미심쩍은 얼굴로 멱살을 풀어 주었다.
티셔츠는 싸구려 면이라 이미 쭉쭉 늘어나 있었다. 손가락 골을 따라 주름이 잡힌 천을 보고 욕을 뱉었다. 형사는 미안한 기색도 없이 두고 보자고 손가락질을 하며 다른 목격자와 이야기를 하러 사라졌다.
맥이 다 빠졌다. 하루가 이렇게 길어서야 제대로 살긴 글렀다. 내일 일하러 가기 싫다. 재연이 찾아와 야간작업에 빠졌으니 고 영감도 작업반장도 한 소리 할 게 분명했다. 다리를 질질 끌며 집에 돌아와 퉁퉁 불어 국물이 사라진 컵라면을 억지로 씹었다. 소화가 안 되는지 배 속이 더부룩했다.
작은 창에서 가로등 불빛이 어둑하게 반짝거렸다. 마음만 어수선해지는 집 안 구석에서 무릎을 모으고 쪼그려 앉았다.
분명히 나는 12년, 아니, 13년 전 살인과 방화를 함께 저질렀다. 이제는 과거다. 신경 쓰지 말아야 하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무거웠다. 등에 앉은 화상 흉터가 자꾸만 쓰라렸다. 보이지 않는 상처를 벽에 숨기며 숨을 참았다.
***
사고가 터졌던 공사장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천만다행으로 죽은 사람은 없었지만 하필 아래에 있던 사람 다리가 깔렸다고 했다. 영 못 쓸 정도는 아니고, 봉합 수술을 하고 몇 개월 치료를 받으면 정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문제는 그 사람이 다름 아닌 작업반장이었던 것이다. 불행한 사고였으나 언행이 거칠고 더러운 인간이었던지라 인부 중 몇 명은 알게 모르게 꼴을 보지 않아 후련하단 뒷말을 하고 있었다.
고 영감이 따로 불러서는 당분간 야간작업은 둘이서만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당장 노인의 일손을 도울 사람이 없으므로 잘려 나가지 않을 수 있었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계속해서 더러운 일을 해야 한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한낮은 여름만큼 무더웠다. 지난밤에 그런 사고가 있었으니 다들 자리를 뜨지 않고 돌아가며 몇 번이나 안전장치를 반복해서 확인했다.
햇빛 아래를 돌아다니다 보면 안전모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체열이 땀이 되어 흘러내렸다. 뜨거운 태양을 고스란히 얼굴로 받으며 높게 세워지고 있는 건물 위를 올려다보았다.
튀어나온 쇠파이프가 흔들흔들 그네처럼 움직였다. 몇 번을 고쳐 묶어도 똑같았다. 끝에 목매 죽은 귀신 하나가 그림자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혀를 길게 늘어트린, 얼굴이 새파란 귀신이 목에 걸린 긴 끈을 벅벅 긁었다. 손톱 밑에 낀 검고 누런 살점이 우스울 정도로 생생하게 보였다. 파이프는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아이고, 거슬려 죽겠네.”
인부 중 하나인 창 씨가 이쪽으로 걸어오며 욕을 했다. 일반인의 눈에 보이지 않을 테니 소음의 원인이 뭔지 알 턱이 없다. 몇 번이나 파이프를 묶었다 풀길 반복하다 지쳤는지 창 씨는 담배를 꺼내서 흙바닥에 아무렇게나 풀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다른 인부들도 한둘씩 주섬주섬 담배를 꺼내 곳곳에 앉았다.
나도 드럼통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담배를 꺼냈다. 필터 안에 묻혀 있는 캡슐을 송곳니로 깨물고 불을 붙였다. 하얀 연기나 뱉으며 앉아 있자니 여유롭게 느껴진 모양이다. 인부들은 감시자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쑥덕거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요즘 재수가 없으려니 집에도 물이 새지 뭐야.”
“그럼 집주인에게 말해야 하는 거 아냐?”
“말했더니 기다리란 말만 하잖아. 개새끼.”
걸쭉한 욕설을 기점으로 너 나 할 것 없이 재수 없는 일을 한 보따리씩 늘어놓았다. 남자들의 수다도 별다를 것 없었다. 오히려 거친 일을 하다 보니 입이 더 거칠었다. 한번 터지기 시작하니 봇물 터지듯 줄줄 새어 나왔다.
“요즘 연희동에 유명한 무당이 하나 있다지?”
“진설댁 말하는 거 아닌가?”
“맞아, 거기.”
무당이라는 말에 귀가 쫑긋거렸다. 안 듣고 있는 척 괜히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머리를 빡빡 민 인부가 잡소리라며 어깃장을 놓았다.
“거기 별로야. 나도 마누라가 용하다 그래서 찾아가 봤더니 대뜸 굿을 하라지 뭐야. 미쳤나,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 바쁜데 천만 원을 어디서 구해?”
“굿하라 그러는 무당은 다 사기라잖아, 사미 보살은 찾아가 봤나? 거기가 용해.”
“어허이, 사미 보살 유명했던 게 10년 전인데, 이미 약발 다 떨어졌지 뭐야.”
오늘의 뜨거운 감자는 무당인가 보다. 담배를 한 개비 더 꺼내 입에 물고 인부들을 구경했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창 씨가 갑자기 박수를 쩍 치더니 침을 튀기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 사람들이, 요즘 최고는 바나나야, 바나나!”
“갑자기 뭔 과일 이야기야?”
“몰라? 바나나 보살이라고 아주 용하다고 난리가 났어. 그 집 대문 앞에 외제차만 줄줄이 열 대, 스무 대라니까.”
“이름부터 우습구먼. 창 씨, 뭔 헛소리야.”
“진짜라니까. 이름이 그런 거야, 바나나 먹다 신내림을 받아서 바나나 보살이라고.”
묘하게 구체적인 에피소드였다. 거짓말은 아니겠지……. 바나나 보살이라니 귀엽기까지 한 이름이다. 간판에 그런 이름이 적혀 있는 것도 위엄이 설 것 같진 않은데. 고민하다 저기, 하고 운을 띄웠다. 저들끼리 시끄럽다가 일제히 고개를 휙 돌려 쳐다보는데 무서울 정도였다. 어색하게 한 번 웃고는 창 씨를 보고 목을 울렸다.
“혹시 그 무당 주소 아세요?”
“바나나 보살?”
“네.”
“아니, 젊은 놈이 무당은 왜 찾아?”
“그냥…… 모르세요?”
“알기야 한다만.”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하는 창 씨를 붙잡고 주소를 알려 달라고 졸랐다. 옆에서 하는 양을 보고 있던 인부들이 하나둘 면박 주기 시작했다.
“젊은 놈이 무당은 왜 찾아. 그냥 닭발이나 먹으러 가지?”
“아, 그 촌할매 닭발집 맛있지.”
“맛있고말고.”
무당 뒤를 이은 화제는 닭발집이었다. 최근 불티나게 팔린다는 매운 닭발 가게는 인부들의 고정 술집이 된 것 같았다. 인부들은 무당보다 닭발이 중요하다며 같이 가자는 강요 아닌 강요를 시작했다.
젊은 놈이 사회성이 떨어진다, 애교가 없다, 실컷 잔소리를 하더니 결국 저녁에 먹으러 가야 한다는 이야기로 결론이 났다. 매콤한 양념과, 간이 딱 좋은 주먹밥과, 고기와의 비율이 적절한 오돌뼈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듣다 지쳐 갈 때 고 영감이 나타나 지팡이를 휘둘렀다.
다들 허둥지둥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창 씨는 문자로 주소를 보내 주겠다고 말하며 수레를 끌고 사라졌다. 뒤에 대고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는 일을 시작하는 척 주변 눈치를 보며 받은 문자를 확인했다. 생각보다 먼 곳에 있진 않았다. 오늘은 야간작업이 없으니 바로 찾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팔자가 좋지 않은 건 확실하니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가 물어보면 해답이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하재연에 대한 이야기를 묻고 싶은 욕심이 가장 컸다. 귀신이 보이지 않았다면 평생 그런 건 믿지 않았겠지만, 이제는 제 발로 무당을 찾아갈 만큼 미신과 가까워졌다.
일하는 내내 마음은 이미 콩밭에 가 있었다. 해가 지자마자 작업복을 내던지고는 냉큼 몸을 뺐다. 인부들이 배신을 한다고 뒤에서 고함을 쳤지만 나 몰라라 하고 지하철역으로 달려갔다. 몸에서 땀 냄새가 찝찝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공사장에 비치된 싸구려 탈취제라도 일단 뿌리고 나왔지만 혹여나 냄새난다고 쫓겨나면 어쩌나 걱정이 밀려왔다.
신을 모시는 자들은 날카롭거나 예민한 경우도 많았다. 신내림을 받은 지 얼마 안 된 경우에는 특히 콧대가 높고 도도해 손님을 가려 받는 경우가 더 많으니 소문대로라면 지금이 절정일 것이다. 최대한 실실 웃으며 비위라도 맞춰 얼굴을 봐야 했다.
창 씨가 준 주소를 보며 몇 번 골목길을 소용돌이처럼 헤매다 부식 가게를 발견했다. 망설이다 바나나를 한 손 샀다. 바나나 보살이라니까, 바나나 좋아하지 않을까. 8천 원이라는 거금을 들인 바나나를 품에 안고 다시 동네를 몇 바퀴 돌아 겨우 간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찾으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애들 손바닥만 한 간판에 튀어나오려는 욕을 겨우 삼키며 대문 근처를 기웃거렸다. 외제차가 늘어져 있다더니 마당도 담벼락 근처도 썰렁했다. 서울에 흔하지 않은 주택가 동네였지만 으리으리하지도 않았다. 마당에 평상 하나가 놓인 집은 남부식 마루가 있어서인지 낡은 시골집 같아 보였다. 한쪽에는 색색의 깃발이 묶여 늘어진 커다란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그 아저씨가 사기 친 거 아냐? 괜히 시간을 낭비했나, 고민하는데 누가 집 안에서 마당으로 휙 뛰쳐나왔다. 흰색 한복을 입고 쪽 진 머리를 한 중년의 여자였다.
“어, 음…….”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녀가 무당인 듯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확 분위기가 찌그러지는 것처럼 날카로워졌다. 매우 불쾌해 보인다. 오늘은 기분이 나빠 손님을 받지 않는 건가. 다시 오기 싫은데, 어쩌지. 최대한 비굴한 자세로 손에 들린 바나나를 머쓱하게 내밀었다.
“점 좀 보러 왔는데…….”
바나나 알레르기가 있다는 무당의 욕설과 함께 내쫓겼다.
처량하게 담벼락에 쭈그리고 앉아 바나나를 줄창 까먹었다. 온종일 힘쓰는 일을 하다 먹었더니 꿀맛이었다. 알레르기가 있다면서 바나나는 왜 먹었던 거야.
우물우물 퍽퍽한 바나나 속살을 씹으며 무당의 이름을 원망하고 있으려니 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다시 바깥으로 나온 무당이 바가지에 있는 물체를 휙 뿌렸다.
“악!”
굵은 소금과 팥에 눈알이 따끔따끔했다. 머리에 뿌옇게 내려앉은 소금을 털면서 질색팔색을 하자 무당이 눈을 부릅떴다.
“재수 없게, 썩 안 꺼져?”
재수 옴 붙었다며 노발대발하는데 억울해서 참을 수 없었다. 그녀의 등 뒤에 서 있는 우락부락한 몸집의 장군만 아니었어도 이미 떠났을 거다.
이 세상에서 무당이란 이름으로 점을 보는 사람은 수백 수천일지도 모르지만, 그중 진짜는 드물었다. 여자는 진짜 무당이었다. 그것도 꽤 고위 신을 모시고 있는 사람이다. 아마 신내림도 고통스럽고 힘들었겠지. 커다란 칼자루를 쥔 신이 입을 벙긋거렸다. 들리진 않았다. 신이 될 만한 계급을 가지고 있는 영들은 대리인을 통해서만 이야기한다.
쉴 새 없이 팥과 소금을 뿌리며 화를 내던 무당은 장군신이 하는 말을 듣고 나서야 씩씩거리며 화를 삭였다. 눈치를 슬그머니 보다가 바나나 껍질을 구석에 휙 던지고는 먼지를 툭툭 털었다.
“……장군님만 아니었으면 진작 쫓아내는 건데. 꾸물거리지 말고 얼른 들어와!”
무당의 뒤를 따라 신당 안으로 들어갔다. 신령들이 오색찬란하게 그려진 벽화와 촛불, 몇 가지 공양미와 과일이 뒤편에 늘어진 전형적인 신당의 모습이었다. 무당은 방석 위에 앉자마자 빽 소리를 질렀다.
“신을 모시고 있는 놈이 여긴 왜 와?”
“신이요?”
이건 무슨 헛소리인가 싶었다. 잠자코 눈을 깜박이고만 있자 무당이 답답한지 가슴을 퍽퍽 내리쳤다.
“무시무시한 놈일세, 이거. 우리 장군님 정도가 아니면 네놈 때문에 나는 장사 접어야 했어!”
“저 무당 아닌데요.”
“이 망할 놈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지만, 고무신으로 복날 개처럼 맞았다. 알딸딸할 정도로 맞고 일어났더니 무당이 내 앞에 음료수 캔을 집어 던졌다.
“그거나 처먹고 꺼져!”
“……이거 콜라인데 던지시면 어떡해요?”
“몰라, 모자란 놈!”
오늘 장사를 다 잡칠 거 같더라니. 무당이 토라진 듯 몸을 모로 틀고는 짜증을 냈다. 땄다가는 대참사가 벌어질 것 같은 콜라 캔을 옆에 밀어 놓고 무당을 조르기 시작했다. 무당이 반대쪽으로 몸을 팩 틀었다. 모로 보나 완전히 마음을 돌려먹은 모습이었다.
오늘 치 일당을 거의 고스란히 주머니에 넣어 왔다. 이때까지 술값으로도 허투루 돈을 써 본 적이 없었으니 무당에게 넉넉하게 쥐여 줘도 생활비를 충당하는 데 무리는 없을 것이다. 반으로 접힌 흰 봉투를 조심스럽게 내밀자 무당의 눈이 뱁새처럼 가늘어졌다.
“돈은 드릴 테니까 정확하게 이야기해 주세요. 신이라뇨?”
“진짜 몰라?”
“신을 모시고 있었으면 제가 점을 보러 왜 옵니까!”
“무당은 원래 자기 일은 못 봐.”
그거야 맞지만. 이상하게 말이 통하지 않는 기분이었다. 한숨을 쉬는데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무당이 모시는 장군신이다. 눈이 마주쳤다. 역시, 인간이 아닌 존재는 여전히 볼 수 있었다. 그들도 나를 알아차렸다. 단지 집에 붙어 있던 귀신들만 감쪽같이 사라졌을 뿐이다.
“……귀신을 봅니다.”
“근데?”
“집에 있던 귀신이 갑자기 사라졌어요.”
“그리고?”
“그게 끝인데요.”
“…….”
무당이 욕을 하더니 손에 들린 돈 봉투를 낚아채 머리를 철썩 때렸다. 그제야 제대로 눈을 맞추며 한참을 집요하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말없이 시선을 마주 했다. 인간 세상의 외곽을 꿰뚫어 보는 눈동자였다.
“자네, 신내림도 안 받고 신을 부린다는 게 무슨 말인 줄 알아?”
무당이 벽에 등을 기대더니 무릎 하나를 세워 앉으며 물었다. 독기가 빠진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한테 신이 붙어 있다는 말조차 처음 듣는다. 그녀가 허공에 대고 몇 번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장군신의 입술도 같이 움직인다.
“자네가 모시는 신은 나도 처음 봐. 너무 커서 어지간한 무당은 자기 신을 뺏길 테야. 나야, 장군님이 무시무시하고 대단한 무장이셨으니 괜찮은 거지.”
내가 대단한 신을 모신다고?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들기며 무당의 말을 들었다.
“신내림도 받지 않고, 대가도 치르지 않았는데 도와주다니 보통 신은 아니지.”
“혹시 보실 수 있습니까?”
“아니야, 나는 못 봐. 우리 장군님도 못 봐. 만나면 고개도 못 들 거야.”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쏘아붙인 무당이 어깨를 잡고 부르르 떨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보자 입 안이 끈끈했다. 지난 삶에서, 장기밀매 집단에게 끌려가 죽임을 당할 때 살고 싶냐고 물었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건 정말로 신이었나. 고아원이 불에 탔을 때 멀쩡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신이라서였나. 미안하지만 줄곧 악마라고 생각했다.
“그 신은 오래가지 못해.”
“어째서요?”
“우리는 공생이야. 장군님은 나에게 답을 알려 주고, 나는 다른 사람들이 준 대가를 올리고 열심히 기도를 드리지.”
무당과 신의 관계라.
“그러나 자네의 신은 아무것도 받지 않아. 일방적으로 힘을 쓰고 있으니 신이 버틸 수가 없어.”
“…….”
“잊지 말어, 신이 죽으면 무당도 죽어. 응, 우리는 종이고 딸이고 아들이고 한 몸이란 말이야. 신을 담는 그릇인데, 내용이 없으면 텅 비는 것이 당연하지.”
결국 신내림을 받으라는 말인가. 신내림이라니,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단어였다. 살다 살다 무당이 되는 미래를 생각해 보긴 처음이었다.
“영 모르는 얼굴을 하는 걸 보니 정말 신내림을 받지 않은 모양이구만.”
“네.”
“혹여나 신내림을 원한다면 찾아오게. 도와줄 테니.”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자 무당이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어려운 길이지.”
“어…….”
“신내림 받기 싫어 죽으려고 발버둥을 쳤어. 빌딩에서 몸을 던져도 살았고, 과속하는 차에 치여도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거야. 그냥 다쳐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묘안을 냈지. 나는 바나나만 먹으면 호흡 장애가 올 정도로 알레르기가 올라와. 한 손을 혼자 다 먹고 실려 갔어. 못난 년을 장군님이 그래도 어여쁘다 살리셨지.”
바나나에 그런 사정이 있었던 모양이다. 다른 사람의 운명을 점치고 대가를 받으니 업과 함께 삶이 꽤 평온하진 않았을 게 분명하다. 더군다나 저 정도의 신이 붙어 있었으면, 무당 자신도 많은 대가를 치르고 유년 시절을 보냈을 게 분명했다. 내 짐작이 맞다고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장군신이 둥글게 웃었다. 험악하던 인상이 조금 웃었다고 부드럽게 변한다. 아, 이 무당을 많이 아끼는구나.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은 어떠신데요?”
“지금은 좋지. 장군님 없인 내가 못 살지.”
시원스레 웃던 무당이 이온 음료 캔을 하나 따서 꿀꺽 마셨다. 덩달아 목이 타 잠잠해진 콜라 캔을 따고 한 모금 마셨다. 목구멍 안에서 거품이 퐁퐁 터졌다.
무당이 젖은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며 한숨을 푹 쉬었다.
“내 할 말은 끝났으니 자네 질문에 대답을 해 주자면, 집에 있던 잡것들은 전부 자네 신이 데려가신 거야.”
신이 데려갔다고? 문득 하재연이 허락하라고 조르던 모습이 기억났다.
“그럼…….”
“왜 그러나?”
“잡귀들이 사라지기 전에 허락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관련이 있을까요?”
음료수 캔을 하나 더 따며 무당이 혀를 찼다. 열이 오르는지 벌겋게 변한 얼굴을 뻔뻔하게 바라보았다.
“자네 정말 무당은 아니구먼.”
“아니라니까요.”
“누구한테 그런 말을 했는데?”
“아는 동생이요.”
“생일을 아는가?”
“……압니다. 그렇지만 태어난 시간은 몰라요.”
“불러 봐.”
망설이다 익숙한 재연의 생년월일을 불렀다. 고아원에 버려진 아이였던지라 태어난 시간까진 모르지만, 버려졌을 당시 바지 주머니에 생일과 이름이 적힌 쪽지가 들어 있었다. 매년 그 날짜에 생일 축하를 해 줬기 때문에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무당은 불러 주는 숫자를 종이에 받아 적었다.
“이름은 하재연입니다.”
“뭐?”
사주팔자를 적어 넣던 무당이 갑자기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이 기이한 모양으로 변하더니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사람의 사주가 맞습니까?”
무당이 하재연, 하재연, 하고 몇 번이나 중얼거리더니 부정이라도 탄 사람처럼 손안에 있던 종이를 박박 찢어 버렸다. 몸을 한차례 파르르 떤 무당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인간이네.”
“…….”
“인간이야, 인간.”
잘못 짚었던가. 묘한 실망이 들었다.
무당이 쌀을 한 줌 집어 탁자 위에 뿌렸다. 사방으로 퍼지는 쌀알을 보며 앞뒤로 몸을 흔들고 중얼중얼 알 수 없는 말을 읊던 무당이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눈알이 핑핑 돌아가는 모습이 기괴하다. 무례한 줄 알면서도 있는 대로 얼굴을 찡그렸다. 빠르게 쏟아지는 말 중 딱 하나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어디까지 말을 해야 합니까? 뒤에 선 장군신이 무언가를 대답했다. 그 뒤로는 다시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의 반복이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무당이 손바닥으로 흐트러진 쌀알을 탁자에서 치우며 한마디를 툭 던졌다.
“하지만 신이 될 뻔한 사주는 맞아.”
“……네?”
“몰라, 난 몰라! 이제 썩 꺼져! 바나나도 챙겨서 꺼져 버려!”
얼굴에 바나나를 집어 던지며 역정을 내는 무당을 붙잡고 매달리다 버선발로 채였다. 결린 옆구리를 부여잡고 끙끙 앓으며 한 마디라도 더 들어 보려고 애를 썼지만 여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종국에는 방구석에 앉아 팔짱을 낀 채 모르쇠로 일관하기 시작했다. 냉랭한 얼굴로 무시하는 태도를 보고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그머니 신당을 벗어나자 무당이 발소리를 내며 뒤따라 나와 등 뒤로 또다시 소금과 팥을 신나게 뿌렸다. 잡귀도 아닌데 잡귀처럼 쫓겨나니 정신이 얼떨떨할 지경이었다.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겨우 마당에 나와 평상에 주저앉았다. 하재연이 아니고 내가 조상 중에 무당이 있는 거 아니야? 신이 붙어 있다고? 그렇다면 왜 저번 삶에서는 귀신 같은 건 볼 줄 몰랐던 거지? 아니, 그 전에, 악마든 신이든 시간을 거스르는 능력이 흔한 것은 아니었다. 달콤한 제안을 건네던 목소리도, 지옥도, 그 바로 앞에 펼쳐진 천국의 모습도 생생하게 기억 났다.
미쳐서 제대로 꿈이라도 꿨던 게 아닐까. 시발, 정말 제대로 굴러가는 게 없네.
우울해져서 남은 바나나 하나를 더 까서 입 안에 넣었다. 퍽퍽하고 묵직한 단맛이 목구멍 안으로 넘어가자 머리가 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어느새 해가 완전히 떨어져 있었다. 집까지 언제 돌아가나. 지하철을 타면 두 번은 더 갈아타야 하는 거리였다.
바나나 껍질을 구석에 마음대로 휙 버리는데, 대문 근처에서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남자 둘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니까 이건 불법입니다, 사장님. 불법이라고요.”
“네가 무슨 상관이야. 내가 하겠다는…….”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보세요.”
“그런 게 무슨 상관이야.”
“연애는 쌍방향…… 어?”
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랑이의 주인공 중 한 명은 서주영이었다. 옆에 있던 남자가 따지다 말고 멈춰 선 주영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붉고 파란 깃발이 펄럭이는 마당 중앙에서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서 있는 남자는 보기 드문 화사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주영이 놀란 얼굴을 숨기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윤이원? 네가 여긴 왜 있어?”
“주영이 친구?”
남자가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주영이 매우 내키지 않은 얼굴로 나를 소개했다.
“사장님이셔. 윤이원이라고, 제 친구입니다.”
“서 비서가 왕따인 줄 알았는데 친구가 있었군.”
주영이가 자주 말하던 사장이 이 남자였던 모양이다. 높은 지위에 있는 게 몸에 습관처럼 스며들어 있었다. 거만한 태도는 눈빛에서도 드러났다.
“사장님, 늘 말씀드리지만 야근만 안 시키시면 제 인간관계를 걱정하실 필요가 없으실 겁니다. 그리고 전 사장님보단 친구가 많은데요.”
“입 닥치고 가서 일이나 해.”
사장과 비서 관계가 맞는 거겠지. 이상한 의심을 숨길 수가 없었다. 대놓고 툴툴거리던 주영이 사장을 대신해서 문을 두드렸다. 무당은 대꾸가 없었다. 조금 전 기분이 나빠져서 나를 쫓아냈으니 한참 동안 손님을 받지 않을지도 모른다.
“시발, 퇴근해야 하는데.”
불행한 월급쟁이의 표본인 주영이 욕을 하더니 다시 한번 주먹으로 문을 두드렸다. 여전히 무당은 안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급기야 주영이 손과 발을 이용해서 문을 두들겨 패는 동안 사장은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담배까지 물고 버티는 모습이 여간해서는 돌아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 사장님께서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역시 사업과 관련한 질문이려나. 기업인이 무당에게 할 만한 몇 가지 질문을 머릿속에서 떠올리는데 사장이 유유자적한 태도로 대답했다.
“궁합.”
“네?”
“궁합을 보러 왔지. 주영아, 비켜 봐.”
스트레스라도 푸는 것처럼 문을 신나게 두들겨 패던 주영을 옆으로 밀어 낸 사장이 벨을 점잖게 한 번 누르더니 외쳤다.
“더블로 드리겠습니다.”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이 열렸다.
“뭐 해? 냉큼 들어오지 않고.”
“…….”
서주영은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저 무당은 돈 앞에서만 문과 입이 열리는 모양이다. 세속에 찌든 무당이 고개를 쓱 돌리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성질을 냈다.
“바나나 총각은 아직도 있었어? 재수 없으니 얼른 꺼져.”
“……네. 일 보세요.”
“쓸모없는 주영아, 너도 차 놓고 들어가. 오랜만에 인간관계 발전에 도움을 주지.”
도움이 안 되는데요. 주영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충분히 큰 목소리였지만 무당도 사장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싱글벙글 웃으며 사이좋게 집 안에 들어갔다. 주영이 10년쯤 늙은 얼굴로 뒤돌아섰다.
“……밥이나 먹을래?”
“……그래.”
반쯤 먹어 치운 바나나를 끌어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닭발이나 먹으러 가자. 이 근처에 닭발 맛집 있어.”
“……그래.”
그놈의 닭발. 요즘 닭들은 고생이 많다. 치킨으로도 튀겨져야 하고 발도 내줘야 하고. 한숨을 푹 쉬자 주영이 복 나간다고 잔소리를 했다.
오전부터 방금 전까지 있었던 주영이네 사장의 행패를 들으며 끌려간 닭발집은 정말 사람이 많았다. 혼자서 이것저것 잔뜩 주문을 마친 주영이 얼굴을 찡그렸다.
사장 개새끼, 하는 게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자기 주변에 요즘 게이밖에 없다고 푸념했던 게 생각난다. 음. 귀신도 보고 신내림도 권유받는 마당에 친구의 커밍아웃이 무슨 상관인가 싶어 망설이다 용기를 내 응원했다.
“예쁜 사랑 해라.”
“……뭐라고?”
“예쁜 사…….”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그러는 거 아니다.”
진심으로 혐오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길래 머쓱해져서 물었다.
“사귀는 거 아니야?”
“애인 따로 있으시거든.”
으으, 주영이 어깨를 부르르 떨면서 소주를 꼴깍 마셨다.
“미안.”
“미안하면 마셔.”
한입에 소주잔을 비우자 다시 투명한 알코올이 콸콸 쏟아진다. 기본 반찬으로 나온 양배추 샐러드 하나만 가지고 소주 한 병을 비워 냈다. 코가 알딸딸할 때쯤이 돼서야 느릿느릿 닭발이 나왔다. 지나치게 생생한 모습을 하고 있는 닭발을 젓가락 끝으로 툭 건드렸다. 징그러워. 주영이 비닐장갑을 끼며 먹을 줄 모른다고 면박을 했다.
발라 주는 살점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숟가락으로 밥을 펐다. 원래는 주먹밥으로 만들어야 하지만 귀찮아 그냥 비빔밥처럼 퍼먹는 중이었다. 주영이 밥에 닭발 양념을 쓱쓱 비볐다. 혀가 아릴 정도로 매운데 땀까지 흘려 가며 열심히 먹는 모습이 신기했다.
전투적으로 한참을 먹기만 하던 주영이 문득 깨달았다는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야, 너는 왜 거기 있었냐?”
“점 보러 왔지.”
“무슨 점?”
“인생 점.”
간단하게 대답하자 주영이 미간을 팍 찌푸렸다.
“그 무당이 손님 가리기로 유명한데, 네놈의 뭘 보고 받아 준 거지?”
“한 번 쫓겨나긴 했었어.”
“바나나를 들고 가니 그렇지.”
바나나 알레르기는 제법 유명한 소문이었나 보다. 주영의 말을 대충 흘려들으며 찬물을 마셨다. 컵 표면에 부딪힌 얼음이 바삭하고 흩어지는 소리가 났다.
“아, 하재연이랑은 아직 만나?”
“응? 그렇지, 뭐.”
“진짜 너 좋대?”
“그런 거 같기도 하고…….”
갑자기 술기운이 올라오는 기분이다. 무거워진 어깨를 점점 테이블 가까이 붙이며 한숨을 크게 쉬었다.
“그거 참, 이상한 놈일세.”
서주영이 혼자 궁시렁거린다. 뭐라고 하든 말든 개의치 않고 계란탕을 크게 한술 떴다. 닭발은 싫었지만 매운 양념과 계란은 잘 어울렸기에 주먹밥과 계란탕에만 집중했다. 스테인리스 표면을 숟가락으로 긁어 가며 열심히 턱을 움직였다.
재빠르게 닭발 몇 개를 더 뜯어 먹은 주영이 소주를 추가하며 코끝을 문질렀다. 술기운이 올라왔는지 얼굴이 붉었다.
“네가 상처받을까 봐 가만히 있긴 했는데…….”
“응?”
“그놈, 네가 출소하기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너를 엄청 싫어했어.”
“……뭐?”
“눈에 나타나면 죽여 버릴지도 모른다고 화를 낸 놈이 걔다.”
계란탕이 속 안에서 꽉 얹힌 기분이었다. 주영이 살점 하나를 입에 쏙 집어넣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의도로 그러는 건진 모르겠지만,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아.”
죽여 버리겠다며 화를 냈다고. 아…… 맞다. 잊고 있었지만 하재연은 나만큼이나 원장의 사랑을 받았고, 명령에 복종하는 순종적인 아이였다. 내가 고아원의 사무를 보지 않았다면 분명 재연이 그 자리를 대신 받았을 것이다.
자상한 원장을 하루아침에 잔인하게 살해했는데 그걸 너그럽게 이해해 줄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명목으로 하는 일은 과연 얼마나 허용되는가. 뚝배기 안에 숟가락을 담그다 말고 무심코 물었다.
“너는?”
“응?”
“서주영, 너는 어떤데?”
질문은 필시 날카로웠을 것이다. 주영이 처음으로 낯에서 표정을 지웠다. 침묵이 뒤섞인 얼굴의 그늘에 술집의 번잡한 소음이 깃들었다. 저것을 지옥에서는 번뇌라고 불렀다.
“……전부 믿지는…….”
않지만, 주영이 무거운 목소리를 내며 운을 뗐다. 평소에는 팔푼이 같은 행동을 하며 무게 잡는 걸 질색하던 놈이 나서서 목소리를 깔았다.
“불가능한 일도 없다고 생각해. 왜, 나도 우리 사장님 보면서 세상엔 저런 믿을 수 없는 인간도 없다고 느꼈거든.”
참 헤픈 이유다. 그렇게 말하는 대신 빙 돌려 대꾸했다.
“참 좋은 직장이다.”
“그렇지?”
소주잔을 입가에 가져간 주영이 씩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을 여전히 믿진 않아.”
“응.”
“하지만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거라곤 생각해.”
아, 그 말은 하나의 위로가 되어 주었다. 잔이 출렁거리며 술이 흘러 넘쳤다. 눈물이 떨어지는 것 같다. 이 닭발집은 계란탕이 제일 맛있다며 꾸역꾸역 계란을 입에 밀어 넣는 내 어깨를 두들기며 주영이 웃기만 했다.
“뭐, 다른 놈들 의견은 전혀 다르겠지만. 나도 이렇고 너도 이런데 하재연은 또 그렇겠지.”
하재연. 이름을 듣고서야 무당의 말이 생각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신이 될 뻔한 사주. 무당은 거짓을 말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완고한 장군을 모시고 있는 여자가 입을 함부로 놀릴 리가 없다.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나. 불가능하다. 신은 육체가 없다. 언젠가 늙어서 스러지는 인간의 육체를 가진 신은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 영원하므로 우리는 그것을 신이라고 부르니까. 그럼 신내림도 받지 않았는데 신으로서 내 뒤를 지켜 주는 자는 누구지. 별개로, 재연은 어쩌다 신이 될 수 없었던 거지.
넋을 놓고 멍하니 소주잔만 바라보았다. 주영이 갑자기 내 미간 사이를 콱 찔렀다. 버튼이 눌린 로봇처럼 기계적으로 입을 열었다.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니까 사람이겠지?”
“응?”
“원래 사람 마음이 간사하니까.”
“뭐라고?”
“아, 주꾸미 먹고 싶다.”
“눈앞에 닭발 있거든.”
“난 주꾸미가 더 좋아.”
“참 나.”
마지막으로 한 숟갈 남은 계란탕을 얼른 퍼서 입에 넣었다. 주영이 숟가락을 들다 말고 치사하게, 하고 투정 부리며 입술을 비튼다. 먼저 먹는 사람이 임자라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주장하며 배부른 한숨을 쉬며 숟가락을 턱 내려놓았다. 주영이 숨이 죽은 샐러드를 젓가락으로 뒤지며 장난을 쳤다. 샐러드 접시를 뺏어 들고 입 안에 잘 말아 만든 무 쌈을 물려 줬다. 우물우물 쌈을 받아먹은 주영이 느릿느릿 눈을 깜박였다. 취한 모양이었다.
소주를 한 병 더 주문하기 위해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부르며 주영이 말했다.
“다음엔 주꾸미 먹으러 가자.”
“그래.”
“모르지? 요즘엔 피자도 줘.”
“어, 그래.”
안다. 가 본 적이 있었다. 나쁘지 않은 가격에 구성이 괜찮다는 이유로 손님이 북적거렸다. 처음에는 한 곳만 있었는데 장사가 잘되니까 동시다발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었지. 옛날에, 고아원에서 걸어 15분 거리에도 하나 있어서 재연과 자주 먹었다.
“얘는 무슨 말을 해 줘도 시큰둥해서 재미가 없어.”
투덜거리는 주영의 입에 다시 남은 닭발을 박박 긁어 싼 쌈을 처넣었다. 매워,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주영은 입 안에 든 것을 맛있게 씹어 삼켰다. 입 안이 얼얼해 얼굴을 찌푸리는 걸 고소하게 쳐다보다 뺏었던 샐러드를 긁어서 먹었다. 마요네즈 드레싱에서 느끼한 맛이 났다. 미끄덩거리는 입술을 빨며 잠깐 고민하다 물었다.
“너 하재연 어디서 사는지 알아?”
“응? 알기야 안다만.”
“알려 줘.”
서주영이 젓가락 끝을 어린애처럼 빨다 뺨을 붉혔다.
“진도가 너무 빠르지 않냐?”
“그런 거 아니거든.”
“쳇. 일 끝내고 갈 거면 아르바이트하는 곳을 추천할게.”
“스토커냐, 그런 것도 조사해 두고.”
“네 감옥살이 뒷바라지도 했는데 이 정도야.”
유쾌하게 웃으면서 주영이 새로 딴 소주를 홀짝 마셨다.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이명이 들리는 귓구멍을 손바닥으로 꾹 막았다 떼며 불러 주는 주소를 휴대폰 메모를 켜서 찍었다. 아직도 자판 두들기는 게 어색했다. 여전히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부랑자였다.
***
허름한 원룸촌 중앙에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건 흔한 광경은 아니었다. 거친 일을 하는 사람들도 보였고, 양복을 입은 직장인이나 꽃무늬 바지를 입은 아줌마, 지팡이를 짚은 노인들도 더러 있었다. 공통점이라고 해야 하나, 특이한 점은 늘어선 줄 대다수가 4, 50대의 중년들이라는 것이다. 줄은 금방금방 줄어들어서 오래 기다리지 않고도 금방 계산대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매표소처럼 작게 만들어진 복권 가게는 두 평은 될까 싶을 정도로 작았다. 딱 복권과 담배만 팔았지만 눈을 자극하는 게 있었다. 가게 앞에 대문짝만하게 적힌 복권 명당이라는 광고판이었다. 허접스럽게 A4 용지에 매직으로 ‘개업 후 4회 연속, 총 9회 1등 당첨’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손님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복권, 아니면 담배까지 함께 사서 재킷 안쪽 주머니에 조심스럽게 집어넣었다. 모두가 자신이 일확천금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푼 얼굴이었다. 앞 손님이 계산을 끝내고 돌아섰다. 머뭇거리다가 한 발짝 앞으로 내디뎠다.
“형?”
“……안녕.”
“형이 이런 곳에 올 줄 몰랐네요.”
갑자기 찾아왔으니 놀랄 법도 한데, 하재연은 웃으면서 마음대로 자동으로 로또 두 장을 끊어서 건네줬다. 무심코 받아 뒷주머니 안에 접어 넣었다.
“어…… 목이 좋네.”
“터가 좋은 거겠죠.”
오류를 정정하며 재연이 피식 웃는다. 실제로 텅 빈 골목에 길게 늘어져 있는 줄은 비정상적으로 보였다. 옆에 있는 구멍가게에서 간간이 음료수나 아이스크림을 사 목을 축이는 사람들만 있었다.
주거 구역인데도 인적이 드문 동네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오직 복권을 사기 위해서 한쪽 다리를 덜덜 떨며 모여 있었다. 앞에 널린 지저분한 쓰레기를 뭉쳐서 통 안에 집어넣은 재연이 다시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왜요?”
“그게…….”
머뭇거리고만 있자 뒤에서 아저씨 하나가 크게 소리를 쳤다.
“거, 다 샀으면 이제 뺍시다!”
지방에서 올라왔는지 사투리가 억세다. 화들짝 놀라 얼른 줄에서 물러났다. 재연이 다음 손님에게 5천 원짜리를 받아 넣고 능숙하게 로또를 끊으며 말했다.
“형, 20분 뒤에 교대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어?”
“물어보고 싶은 게 있죠?”
다 안다는 얼굴로 느물느물 웃는다. 민망해져 말없이 목덜미를 긁었다. 아직도 한참 밀려 있는 줄을 보며 재연이 다시 사그라든 미소를 입꼬리 근처에 걸치고는 사무적으로 로또를 끊기 시작했다. 줄은 금방 줄어들었고, 정확하게 20분 뒤에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가 가 보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마지막 손님을 마무리한 재연이 가방을 챙겨 나오자마자 손을 잡더니 확 끌고 동네 안쪽으로 들어갔다. 회색 건물이 빙글빙글 섞인 미로 같은 동네였다. 길을 잃어버릴 것만 같아 잡힌 손을 꽉 붙들었다.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한참을 걷던 재연은 어린이 놀이터 앞에서 멈춰 섰다. 바닥이 푸른색으로 오목하게 파인 특이한 곳이었다. 여름에는 그곳에 물을 채워 물놀이를 할 수 있게 만들어진 놀이 시설이라는 간판을 흥미롭게 읽었다.
하재연은 놀이터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을 벤치 위에 올려 두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초조하게 라이터를 켜며 짝다리를 짚는 모습이 익숙해 보였다. 의외였다. 담배를 저렇게까지 자주 피우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으니까.
과거의 재연은 비흡연자에 가까울 정도로 드물게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었다. 성격과 말투는 기억과 비슷했지만 또 달랐다. 저렇게 능숙하게 가식을 떠는 아이는 아니었다. 늘 사랑과 감정에 솔직했었으니까. 그렇게 키운 것은 윤이원, 과거의 나였다.
“갑자기 찾아오고. 형이 먼저 와 준 게 처음인 거 알아요?”
자판기에서 음료 두 개를 뽑아 하나를 건네며 재연이 묻는다. 어, 음료수를 받으며 대답했다.
“너 신이 될 뻔했다던데.”
“네?”
“무당한테 물어봤어.”
뻔뻔하게 남의 사주를 팔아 점을 봤다고 고백했다. 굳은 채로 눈을 깜박거리던 재연이 한순간에 웃음을 터트렸다. 배까지 잡고 큰 소리로 웃는데 민망해서 얼굴에 열이 올랐다. 적어도 하재연은 자신의 팔자나 이상 증세에 대해서 거리낌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 형 정말…… 물어봐도 된다니까 왜 남한테 내 이야기를 물어요?”
“대답 안 해 줄 거 같아서.”
“내가 인간이 아닌 거 같아요?”
인간이 아니면 뭐지, 귀신인가. 재연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씩 웃었다.
“형이 판타지를 좋아하는 줄 몰랐는데.”
불가능한 이야기란 말을 돌려 말하며 재연이 두 번째 담배를 꺼냈다. 정말 어불성설이었나. 무안한 마음과 불신이 콘크리트 배합기를 켠 것처럼 시끄럽게 뒤섞였다.
연기를 입 바깥으로 내뱉으며 재연이 담배를 쥔 손가락을 까딱했다. 하늘로 올라가는 흰 줄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평온하고 조용한 놀이터였다. 사람의 그림자도, 귀신의 그림자도 없는 텅 빈 놀이터의 전경을 얼마쯤 봤을까, 가로등에 불이 탁 켜졌다.
“물어보고 싶은 건 그게 전부예요?”
재연은 무엇이든 알려 줄 것처럼 선선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질문하는 대신 내 손가락 끝을 의미 없이 가볍게 구부렸다 폈다. 부드러운 말투가 용기를 부추겼다. 손에 꽉 하고 잡힐 것 같은 실마리들이 엉킨 채로 발치를 굴러다녔다.
“뭘 물어봐야 할지 모르겠어.”
“왜요?”
“복잡하고 어려우니까.”
“음, 이상하네. 내가 생각했을 땐 형의 행동들이 더 복잡했는데요.”
그 뒤로는 다시 대화가 끊어졌다. 머리가 아파서 대화할 의욕이 사라졌다는 게 더 정확했다. 미지근하게 식은 음료수를 다 마시자 재연이 자연스럽게 빈 캔을 받아 쓰레기통에 넣고 돌아왔다. 배려가 습관처럼 물들어 있었다. 지금 재연은 스물셋이다.
지난 삶에서 스물세 살이던 재연을 정확하게 기억한다. 어른스럽긴 했지만 연애 경험이 적었던 탓에 에스코트에 능숙한 사람은 아니었다.
확신했다. 지금의 하재연은 옛날에 알던 하재연이 아니었다. 저 속에 들어앉아 있는 것은 온전한 생명체가 아니었다.
“누구야?”
“네?”
“누군데 하재연으로 살고 있는 거지?”
“저는 하재연인데요.”
재연이 곤란한 얼굴로 웃었다. 손가락에서 피우다 만 담배가 튕겨 날아간다.
“이때까지 고민하다 내린 결론이 겨우 그거예요? 진짜?”
재연은 상체를 바짝 붙이고 빠르게 말했다. 위협적으로 느껴져 몸을 뒤로 물린 채 어물거리며 대답했다.
“기억이랑 다르니까.”
“기억 속의 나는 겨우 열 살이었어요. 형과 나는 12년, 아니, 13년 만에 재회했고요. 그런데 기억이랑 다르다고 말할 수 있어요?”
“모순적이잖아.”
한 명쯤 더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흠이나 상처가 아니었다. 아랫입술을 한 번 꾹 물었다 놓으며 지적했다.
“내가 출소하기 전까지만 해도 네가 나를 싫어했다고 서주영이 그랬어.”
“음…… 그땐 어렸다고 칠까요?”
“불과 몇 달 전이었는데?”
하재연이 하는 말과 행동은 전부 이상했다. 인과가 들어맞지도 않았고, 타당한 구색이나 이유도 없었다. 오히려 이상한 행동으로 의심을 부추겼으니, 그와의 만남이 위험하다면 여기서 끝내는 게 좋았다. 나는 아직도 재연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는 얼마든지 반지하 골방이 보이는 창문에 달라붙어 칼을 들고 위협을 할 동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방화와 살인 역시도 저지르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처럼 보였다.
미친놈은 정상이 아니다.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라는 단어가 만연하는 세상이다. 재연이 나를 극도로 혐오해 사랑하는 것처럼 연기한다는 추측이 그럴싸하게 여겨질 만큼.
하지만 하재연은 내 머릿속의 모든 추측을 비웃는 것처럼 시종일관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웃음을 참는 것처럼 입술을 딱 붙여서 늘어트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형, 기억을 얼마나 맹신하고 있어요?”
“뭐?”
“기억을 도둑질하는 게 뇌라는 건 알고 있어요?”
처음 듣는다. 갑자기 시작된 정신 분석학 강의에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외국에서는 자신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가짜 기억을 심어 주는 실험을 했었죠. 대부분의 실험 참가자가 성공했고, 결국 실험자들의 상태가 심각해지기 전에 실험을 그만두기까지 해야 했어요.”
“응……?”
“모르겠어요? 기억을 심는다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재연이 한 발짝 다가왔다. 몸에서 담배 냄새가 났다. 덩달아 담배가 피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초조해서일지도 모른다. 가볍게 다리를 떨었다.
“만약 형의 기억 어딘가가 가짜로 심어졌다면 어떨 거 같아요?”
“뭐?”
재연은 손가락을 자신의 입술에 꾹 눌렀다 떼며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설명을 늘어놓았다.
“예를 들어, 어떤 알리바이를 반복해서 주입시킨다면 형은 정말 자신이 그랬다고 믿을 수 있어요.”
“…….”
“뇌는 기억을 정확하게 기록하지 않아요. 기록은 얼마든지 지워지고, 덧입혀질 수 있죠.”*
그건 그렇다. 내 과거였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게 몇 가지 있었다. 고아원에서 관리했던 서류의 내용이나 원장과 관련한 기억들, 그 당시 같이 지냈던 아이들의 얼굴, 지난 삶에서 내 대학 전공이 무엇이었는지, 나 자신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들. 짚고 보니 꽤 많았다. 그제야 지난 12년이 길었다는 게 느껴졌다.
“생각해 보세요. 무당을 만난 건 확실한가요?”
“재연아, 나는…….”
“무당이 했던 말을 본인이 듣고 싶은 대로 기억을 한 건 아니었을까요?”
“그건 아니야. 무당을 만난 날 서주영도 만났으니까.”
목소리가 갈라져서 나왔다. 주영이를 만나서 닭발까지 먹고 술에 취해 겨우 집에 들어갔던 일이 불과 어제였다. 과거라고 말하기도 무색한 최근의 일이 그렇게 빠르게 왜곡될 수는 없었다.
하재연은 물러서지 않고 재차 물었다.
“무당이 사기꾼이라면?”
“아냐, 그 무당은 진짜야.”
“그걸 어떻게 확신하죠?”
무당에게 딱 붙어 있는 무서운 장군신을 보았노라 이야기할 순 없었다. 입을 열고 숨을 헐떡거리자 하재연이 몰아치듯 떠들었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들어서 그게 진짜라고 순진하게 믿어 버렸다면?”
코가 닿을 정도로 바짝 붙어선 재연이 ‘좀 더’라고 중얼거리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의 입술과 혓바닥이 움직일 때마다 새어 나오는 소리가 내 숨통을 조여 왔다.
“더 나아가서, 원장을 죽인 것도 거짓이라면.”
우리의 기억은 완벽하지 않다. 추억은 미화된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고개를 떨어트렸다. 까만색 운동화가 보였다. 재연은 밝은색 운동화를 좋아했다. 활발했고 운동량도 많았다. 지금 신고 있는 것처럼 새카만 운동화를 사 주면 멋이 없다고 투덜거렸던, 이 모든 기억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일까.
“형이 맹신하고 있는 어떤 기억이 전부 왜곡된 것이라면.”
과거를 걸어 되돌아 왔다는 기억이 전부 틀렸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럼 나는 경찰의 말대로 조현병이고, 사이코패스이며…… 그저 한순간의 충동과 분노로 부모를 죽인 살인마이자 자기 연민과 우울함에 빠져 사는, 패배한 인생의 보유자가 된다.
인생을 제대로 돌아보기 싫어 햇빛도 들어오지 않은 감옥에서 기억을 만들어 블록처럼 쌓아 올렸다면. 눈을 깜박였다. 허무함이 12년이라는 인생의 공백에 달라붙었다.
바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여긴 어디지? 고민하다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렸다. 하늘이 없었다. 천장, 아니면 다른 것이 무너지고 있었다. 기왓장, 나뭇조각과 돌, 불에 탄 종이, 파편, 옷가지와 끊어진 붉은 끈. 무엇이든 물체는 가라앉고 있었다.
첨벙. 바닥에 물이 고여 있었다. 아니다, 이곳은 바다였다. 물속이었다. 알고 있던 모든 것들이 부서져 양수에 잠긴 것처럼 산산이 가라앉는다. 깊은 물의 흐름을 따라 떠돌며 흘러간다. 저 멀리 높은 곳에서 태양 빛이 수면을 비추고 있었다. 찬란함은 멀었고, 물속은 차가웠다.
이번 삶도 이렇게 끝이 나는 건가. 바뀌는 것은 없었던가. 한숨을 집어삼켰을 때, 손바닥이 마주치는 소리가 났다.
“정신 차려요.”
코앞에 선 하재연이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눈을 몇 번 더 깜박거렸다. 뭐라고 다시 말을 하는데 귀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재연이 손을 들어 가볍게 뺨을 쳤다. 볼이 따끔거리면서 감각이 서서히 돌아왔다. 균형 감각이 무너진 몸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힘이 하나도 없었다. 지나치게 생생한 환각이었다. 아직도 물에 잠겨 있는 것처럼 손발이 차갑고 시렸다.
한기가 몰아치기에는 지나치게 날씨가 좋은 5월의 밤이었다. 길거리를 다녀도 실내보다 실외 노점에 앉은 사람들이 더 많은 온화한 계절에 추워서 덜덜 떨자 재연이 입고 있던 얇은 겉옷을 벗어서 내밀었다.
“농담이었어요. 놀리질 못하겠네요. 사람 무섭게 만들고…….”
“너도 무서운 게 있긴 해?”
점퍼를 받아서 팔에 꿰며 억지로 태연한 목소리를 냈다. 아무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무서워서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그럼요, 있죠.”
“뭔데?”
“형이 죽는 거 아닐까요.”
“내가 죽을 일이 뭐 있다고 죽어? 사람 죽이지 마라.”
“안 죽여요. 진짜, 사람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너무 극단적이지 않냐면서 재연이 키득키득 웃었다. 웃는 모습이 천진난만해 보였다. 꽃송이째로 떨어지는 능소화와 닮은 외모였다. 그래, 붉은 꽃을 닮았다.
재연이 기억 왜곡에 관한 이야기를 해서일까. 오늘도 공사판 일을 하고 쉬지 못해 지쳤기 때문일까. 또는 두려운 것을 피하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
“내가 얘기했나?”
“네?”
“너 웃으면 꽃 닮았어.”
뚫린 입이라고 말이 줄줄 입 밖으로 새어 나온다. 공포에 질린 입술은 수치를 잊은 모양이었다. 재연이 황당한 듯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번에는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남자에게 꽃을 닮았다는 말은 오버였나. 무안한 마음에 목 근처를 긁적이기만 했다. 그래도 무거웠던 공기가 가벼워진 건 좋았다. 손톱이 긁고 지나간 피부가 간질간질하다.
한참을 웃던 재연이 갑자기 어깨를 잡아당겼다. 균형을 잃고 허우적거리다가 품에 안겼다. 하재연이 뻣뻣하게 굳은 내 팔을 풀어 자신의 허리에 올리게 했다. 숨을 깊게 내쉬었다. 가슴팍은 따뜻했고, 심장 소리가 들렸다. 일정한 박자로 쾅쾅 뛰는 소리가 울린다.
“들려요?”
“이거 좀 놓으면…….”
“뛰고 있잖아요.”
“……좋겠는데…….”
간지러운 말에 발가락이 곱아드는 것 같았다. 여전히 미묘하고, 웃음이 크게 걸린 얼굴로 재연이 아이를 어르는 것처럼 속삭였다.
“그러니까 난 인간 맞아요.”
원래 술 취한 사람은 자신이 취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법이다. 재연의 이상한 논리에 반박할 근거를 찾지 못해 묵묵히 심장 소리만 듣고 있었다.
땅에 오래 끌리는 리어카 소리 같았고, 전기 퓨즈가 꺼지는 소리 같기도 했다. 심장은 깜박거리는 전류의 신호처럼 길고 오래 뛰었다.
“자, 봐 봐요.”
재연이 내 손을 끌어 자신의 뺨 위에 올렸다. 손가락으로 재연의 눈가와 뺨을 조심스럽게 더듬었다. 부드럽고 말랑거렸다. 꽃잎의 촉감과 비슷했다.
기분이 좋은지 고양이처럼 눈을 지그시 감은 재연이 어리광 부리듯 손바닥에 뺨을 비벼 왔다. 깊은숨을 터트리며 재연이 속삭였다.
“저는 살아 있어요.”
“네가 죽었다는 말은 아니었는데.”
“알아요. 아주 멀쩡하고 평범한 인간이란 말이에요. 의심하는 것도 이해가 되긴 하지만, 좀 독특한 개성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안 될까요.”
“개성이라고 치기에는 좀 그렇잖아.”
“개성입니다.”
뭔가 한 마디도 지질 않는다. 내 주변은 전부 입만 살았어. 멍한 정신으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재연이 슬금슬금 어깻죽지를 쓰다듬으면서 팔에 힘을 줬다. 누군가에게 세게 안겨 있기는 오랜만이었다. 타인의 체온이 따뜻했다. 봄이라도 역시 밤이라 조금 추웠을지도 모른다. 포근함을 느끼자마자 머릿속이 차곡차곡 정리되기 시작했다.
누구보다 기억을 믿지 못하는 것은 나였다. 판타지 소설보다 더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꿈의 일종으로 취급할 수도 있었다. 아니, 꿈이라고 해도 비웃음을 살 만한 일이었다.
그래서 12년 동안 틈만 나면 신문을 읽으려고 애를 썼다. 신청할 돈이 없어서 신문을 받아 보는 사람의 좆이든 발가락이든 되는대로 빨았다. 신문을 읽는 것은 그럴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신문은 세상의 변혁과 가치관과 사고에 대해 재빠르게 서술했다. 모든 글자를 외울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가지고 있던 미래의 기억이 정확하다는 것은 세상의 흐름으로 알 수 있었다. 외국에서 일어난 테러 사건, 개발 도상국 간의 전쟁, 스마트폰의 개발, 인터넷의 발달, 사회를 뒤흔들었던 정재계의 스캔들, 빅 이슈, 대통령 당선의 결과. 매년 그런 일들이 똑같은 시기에 동일하게 발생할 때마다 내가 과거를 거슬러 올라왔단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정도로 정밀한 조작은 불가능하다. 그 사실을 깨닫자 안도의 숨이 쉬어졌다. 눈가에 고여 있던 액체가 떨어져 찝찝하게 입술을 적셨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형, 아파요?”
하재연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며 속삭였다. 흉곽을 부풀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안도감이 들었다. 재연이 주는 안도는 아니었다. 그저,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과 살인의 동기가 편협한 망상이 아니라는 사실에 평화가 찾아왔을 뿐이다.
어느 순간 완전히 그에게 의지한 채 안겨 있었다. 하재연은 가만히 내 등을 토닥거렸다.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조심스럽게 내 앞머리를 흐트러트리고 귓가를 간지럽히는 손길이 나쁘지 않았다.
누가 발을 잡아채 잠의 세상에 끌고 가고 있다. 강제는 아니었다. 순순하게 수면의 호수에 목까지 잠겼을 때, 재연이 조용히 뇌까렸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가볍게 혀를 차는 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알아, 나도 생각이 있어.”
질책하는 어투였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
「우리는 네가 정말 싫어.」
누군가가 말했다. 그러나 입은 아니었다. 아가리, 그래 아가리다. 짐승들의 입이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다.
「이런 나약한 인간 하나가 세상을 어지럽힌다니, 용납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냐. 굳이 저걸 살려 둬야 할 필요가 있나?」
아가리 하나가 쑥덕거리며 침을 퉤 뱉었다. 입술 바깥으로 나온 폭이 좁은 혓바닥은 두 갈래로 찢어져 있었다. 길게 공중에서 퍼덕거리는 요사스러운 혀를 보고 뱀이구나, 깨달았다.
「아니야, 저걸 죽이면 우리까지도 섭리를 거스르게 된다고. 괜히 인간 하나로 업을 질 수는 없는 노릇이지.」
노란 부리가 움직인다. 축 늘어진 붉은 육수(肉垂)*를 보았다. 저것은 닭이다.
「그렇다면 다른 인과를 보내 죽게 만들면 되는 것 아니야?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건 우리와 상관이 없어.」
간사한 목소리가 부추기기 시작했다. 털로 뒤덮인 얼굴 사이에 들창코가 두드러진다. 원숭이의 형상이었다.
열두 개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내 몸 주위를 둥글게 둘러싸고 있었다. 침묵할 줄 모르는 아가리들은 하나같이 언성을 높여 자기주장을 시작했다.
물에 빠트려. 아니야, 쇳덩어리에 치이게 하는 게 나아. 그건 저번에 실패했잖아? 역시 목을 졸라 버려. 머리에 돌을 떨어트려. 지저분하게, 시체가 추하잖아. 다들 조용히 못 해? 그냥 한 명이 나서는 건 어때? 네가 해. 아니야, 네놈이 해.
투닥거리며 싸움이 붙기 시작한다. 시끄러워, 그만 좀 떠들어. 속으로 짜증을 냈다. 멀리서 이야기하는 것 같으면서도 쩌렁쩌렁한 대화 소리에 골이 울렸다. 목소리는 하나같이 개성적이었다.
「다들 시끄러워.」
가느다랗고 높은 톤의 목소리가 지적하자 잡음이 뚝 끊겼다. 부드러운 털이 달린 다리가 공중에서 휘적휘적 발짓했다.
「인간이 깨어났다고.」
어두컴컴한 공간이 단숨에 밝아졌다. 빙글빙글 내 몸을 둘러싼 원형의 그림자가 부산스럽게 쑥덕거렸다. 이제 그들은 인간의 언어가 아닌 무언가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림자들의 주둥이가 쩍 벌어지며 혀를 신나게 움직인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도록 해.」
꼭대기, 12시의 방향에 자리 잡은 쥐가 바닥을 쳤다. 쿵, 하는 소리에 다들 입을 딱 다물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태워 죽이고 싶은 것처럼 쏘아보는 시선에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부드러운 천이 몸에 휘감겨 있었다. 처음 보는 복식과 천이었다. 알몸 위에 어설프게 걸쳐 있는 옷을 대충 싸매서 치부를 가리자 뱀이 다시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잡아 놓은 김에 죽여 버리는 건 어때?」
「맞아, 여기서 죽여 버린다면 흔적도 남지 않을 거야.」
「육과 혼을 완전히 뜯어내자. 이 공간에 가둬 버리면 육체는 일어나지 못할 테니.」
이것들이 사람을 앞에 두고 태연히 위험한 대화를 나눈다. 생사를 두고 논하는 목소리에 장난기가 없어서 소름이 끼쳤다. 왜 이런 놈들이 남의 꿈에 갑자기 튀어나와 악담을 나누는 거지.
「건예자(乾麑子)*를 보내는 건 어때?」
「멍청한 놈아, 그건 낮에는 돌아다니지 못해. 강시(僵尸)가 나아.」
「그건 강시도 똑같아. 건예자의 악취면 충분히 죽잖아.」
「당장 죽진 않아. 게다가 이 땅과는 어울리지 않다고. 여긴 광맥도 적잖아.」
건예자? 처음 듣는 단어에 귀가 쫑긋했다. 살인 공모를 짜고 있는 놈들에게 친한 척 말을 걸기는 싫었지만, 멀쩡한 정신으로 듣기에는 영 불편한 주제라 용기를 내서 슬쩍 말을 걸어 보았다.
“저기요.”
「도철(饕餮)*을 보낼까?」
「그것도 좋지. 그놈은 볕 속에서도 돌아다닐 수 있어.」
들리지도 않는지 여전히 저들끼리만 이야기를 나눈다.
“저기, 죽이는 것도 좋은데 일단 질문 좀 받아 주시면…….”
「뭐야, 인간. 시끄러우니 닥쳐.」
말발굽이 횡으로 선을 그었다. 입이 딱 다물렸다. 환장하겠네. 본드라도 바른 것처럼 딱 달라붙은 입술을 떼려고 애를 쓰며 끙끙 앓자, 그 꼴이 우스꽝스럽다고 한바탕 조롱을 들었다. 한참 입술을 가지고 씨름하다 힘만 빠져 벌렁 바닥에 누웠다. 꿈이니까 언젠간 깨겠지.
낙천적인 생각을 하며 바닥을 뒹굴뒹굴했다. 딱딱한 흙바닥에 누워 있으려니 삭신이 쑤셨다.
「어차피 죽음은 인간과 가까워. 우리가 애를 쓰지 않아도 죽을 거야.」
「벗어날 방법도 없을 거야. 순리도 인간과 가까워졌어.」
「그런데 죽었는데 또 살아나면 어쩌지?」
「왕께서 또 나서실 수도 있잖아.」
「설마, 또 그러시겠어.」
「그분은 종잡을 수 없다고.」
「아니야, 다음은 없다고 분명…….」
분명히 내 신상의 이야기일 텐데도 어쩐지 관심이 가지 않았다.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중 이상한 내용에 신경이 곤두섰다. 왕, 죽음, 순리? 흙바닥에 낙서를 하던 손가락의 움직임이 느리게 변했다. 신경 쓰지 않는 척 눈치를 봤다. 분명 동물들은 내가 시간을 돌리기 전 과거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수군거리던 목소리들이 다시 아래로 가라앉았다.
「입조심들 해.」
경고하는 건 이번에도 똑같이 털이 달린 다리였다. 그 위로 한참 시선을 올리자 희미하게 둥글게 원형으로 말린 뿔이 보였다. 양은 온화한 표정으로 동료들을 윽박질렀다.
「우리의 왕께서 싫어하실 거야.」
소가 한숨을 쉬며 양을 거들었다.
「하여튼, 다들 말만 많담.」
「시끄러워. 그럼 이 인간은 어쩌지?」
「돌려보내야 하는데.」
제발 잠에서 깨어나게 해 주라. 지쳐서 속으로 중얼거리자 토끼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흰색 귀가 쫑긋거리고 붉은 눈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돌려보내는 법을 까먹었어.」
“뭐라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입이 트여 섬광처럼 말이 터지는 바람에 목소리가 꺾였다. 목을 쥐고 쿨럭쿨럭 기침을 내뱉자 재밌는지 다들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돌려보내는 법을 까먹었다니. 일반적인 꿈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자는 사람을 강제로 끌고 와 놓고서 죽으라고 악담을 퍼붓더니 뒤처리는 나 몰라라가 아닌가. 이건 사람보다 더 나쁜 놈들이다. 억울함을 가득 담아 노려보자 쥐가 코를 찡긋거리며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나는 죄가 없어. 다른 놈들이 저지른 일이야.」
「혼자만 치사하게 빠지다니. 좋은 생각이라고 한 놈은 어디의 누구지?」
「내가 알아. 하이(亥)*야.」
「막내를 말리지 않은 네놈들이 제일 나빠.」
양이 부루퉁한 목소리로 엄하게 꾸짖는다. 다들 사태의 심각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즐겁게 떠들기 바빴다.
“사람 방치하지 말고 책임지셔야죠.”
「책임이래, 웃기는 소리를 하는구나. 우리가 너랑 혼인이라도 했나?」
코웃음을 치는 목소리에 기가 막혔다. 지금 여기서 말장난을 나눌 처지가 아니었다. 주위는 어두컴컴했다. 시간도 공간도 제대로 알아보기 힘든 곳에 계속해서 처박혀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당장 내일도 일하러 나가야 했고 잔뜩 벌려진 채 해결되지 않은 것도 많았다. 살인 및 방화범도 잡아다 누군지 알아내야 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이것도 다 꿈이 아닐까. 꿈은 무의식의 세계라니까…….
재연에게서 한차례 정신 분석학 강의를 들었던 탓에 머리가 그런 쪽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이것도 최면의 일종일 수도 있지. 꿈을 요란하게 꾸지 말라는 법은 없다. 쫓기는 꿈, 하늘을 나는 꿈처럼. 소년 교도소에 있을 때는 토끼를 통해 변종 바이러스가 발생하는 이상한 꿈도 꿔 봤다. 이번엔 동물을 대상으로 한 판타지 오컬트 세상인가. 역시 인생이 피곤하니 이런 일도 겪는구나.
갑자기 무기력해지기 시작했다. 오히려 교도소에 있을 때가 지금보다 속은 편했다고 생각하면 너무 극단적일까. 교도소는 늘 똑같은 사람들만 보고 똑같은 일과대로 움직인다. 상상할 거리도 변하는 것도 없던 삶에서 극적인 일이 갑자기 벌어지니 뇌가 밥값을 하는 모양이었다.
역시. 가지런히 무릎을 모으고 앉아 합리적인 판단에 고개를 혼자 끄덕끄덕했다.
생각을 읽었는지 누가 혀를 찼다.
「정신이 왜 이렇게 연약해 빠졌어?」
「인간이니까 빨리 미쳤나 보다.」
미친 사람 처음 보나. 갑자기 사람을 불러다 앉혀 놓고 죽이니 살리니 어떻게 죽이니 떠들어 댄 그쪽들 정신이 더 이상하다고 비꼬자 다시 조용해졌다.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지만 여전히 사방은 새카만 어둠이었다. 바닥에는 둥근 진이 그려져 있었다. 다들 자신을 상징하는 글자를 깔고 앉아서는 쑥덕거린다. 인간처럼 옷을 입었으나 동물의 외관을 한 모습은 징그럽고 수상쩍었다.
인간이 머릿속으로 그릴 수 있는 판타지는 어디까지인가. 무당에게 들렀다가 하재연으로 화룡점정을 찍은 정신이 역시 너덜너덜해져 있었나 보다. 사람은 육체와 정신이 함께 건강해야 해. 힐링에 도움이 되는 서적이라도 읽어 볼까.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리며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양의 뿔을 툭툭 건드렸다. 양을 선택한 이유는 그나마 나를 편들어 주거나, 중재하는 역할을 했었기 때문이다.
“저기, 저 좀 도와주시죠.”
양의 좌우에 앉은 원숭이와 말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왜 이렇게 표정들이 아니꼬워, 좀 웃어 보지. 머릿속으로 생각하자마자 등 뒤에서 누가 조용히 읊조렸다.
「저 놈이 미쳤나?」
「……혼나면 어쩌지?」
「…….」
다들 내가 완전히 미쳤다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싸가지 없는 새끼들. 입술을 비틀면서 벌떡 일어나 까만 공간을 만졌다. 촉감도 형체도 없는데 막힌 것처럼 손이 뻗어지지 않는다. 꼭 구름처럼 이상한 공간이었다.
역시,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까. 저것들이 제2, 제3의 자아라 나를 걱정하면서 치료를 권장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경찰도 조현병을 의심했으니 이제 와서 진실을 직면한다거나…… 그럴 리가 없겠지.
한숨을 쉬면서 뒤를 돌아 둘러앉은 놈들을 바라보았다.
십이지(十二支). 십이신장(十二神將) 또는 십이신왕(十二神王)이라고 불리는 존재들은 귀신이라고 치부해도 될 만큼 하찮은 존재들이 아니었다.
한 종교에서 시작해 오래도록 자리 잡은 열두 신들은 도교와 불교를 동시에 아우르고 있었다. 지옥에서도 그들의 명성은 유명했다. 어차피 업과 번뇌를 지우는 지옥은 불교의 교리와도 관련이 깊은 곳이었으니까.
눈을 감으면 선명한 지옥이 보였다. 육도윤회(六道輪廻)*를 위한 문을 지키던 태산대왕(泰山大王)*의 짜증 섞인 투덜거림과, 칼날에 몸이 썰리며 비명을 지르던 죄지은 내 혼이.
가자 가자, 피안으로. 피안으로 아주 가자. 영원한 깨달음으로.*
지옥에서 일하는 자들은 중생의 구원을 위한 노래를 부르며 그곳에 처박힌 죄인들을 고문했다. 경문 한 구절에 채찍질이 두 번, 도교의 교리 두 마디에 화염지옥이 네 번. 지옥을 다스리는 대왕들의 욕설에 사지가 찢기는 게 다시 한번. 시간을 반복하기 위해 운과 복록을 긁어 쓰고도 부족해 처박혔던 그곳에서는 지독할 정도로 쓸모없는 상식을 잔뜩 안겨 주었다.
그래서 확신할 수 있는 건데, 일반적으로 신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이유도 없이 인간의 꿈에 생생하게 튀어나와 가타부타 욕을 하며 떠들어 대진 않는다.
“땅을 지키는 열두 신장이 제게 무슨 일이십니까?”
「우릴 알아?」
「아네. 무식한 줄 알았더니.」
무식하다는 걸 강조하며 웃음을 터트리는데 신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성격 나쁜 신들이 열둘이나 있다. 약자는 이쪽이고, 참아야 하는 것도 이쪽이며, 조언이라도 얻어서 빨리 돌아가야 하는 것도 이쪽의 문제였다. 한 걸음 물러서서 최대한 공손한 말투로 물었다.
“무당이 말했던 신이 당신들이십니까?”
「무당?」
「그 여자 있잖아, 남이 장군이 붙은 인간 여자.」
「아, 그 성격 급한 인간.」
자기들끼리 빠르게 정보를 주고받더니 자정의 자리에 앉은 쥐가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우린 네놈 따위의 신이 아니다. 우리는 약사경(藥師經)*의 후손을 보호하지, 네놈 같은 더러운 영혼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럼 돌려보내 주세요.”
「그럴 수 없다.」
“왜요?”
「우리에겐 그럴 능력이 없다.」
“그럼, 당신이 말하는 왕은 보내 줄 수 있나요?”
「너는 그걸 부탁할 자격이 없다.」
끝이 없는 말장난을 하는 기분이었다. 돌려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못 보내 주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기는 싫으니 입을 다물어라’라는 뻔뻔한 결론으로 이어진다. 아파져 오는 골을 붙잡았다.
왕을 언급하자마자 분위기가 날카롭게 변했다. 다들 입을 딱 다문 채 눈짓만 서로 주고받았다.
“그렇다면 왕이 무당이 말한 신인가요?”
「대답할 가치가 없다.」
“그렇게 완고하시면 여자한테 인기 없는데.”
딱딱하게 굳은 공기 속에서 대꾸하는 사람은 쥐 하나뿐이었지만, 내가 빈정거리자 쥐마저도 낯빛을 바꾸고 으르렁거렸다.
「인간이 한결같이 방자하구나. 불쾌하다. 역시나 죽여 없애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쥐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다들 환호성을 내질렀다. 비명에 가까운 환호였다.
그래, 죽여. 여기서 죽여 형체를 지워 버리자. 어두컴컴한 공간이 떠들썩해졌다.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른다. 이게 생생한 환각이라면 좋겠는데. 손바닥에 고인 식은땀을 훔치며 가볍게 바라던 순간, 검은 공기가 찢어지더니 빛이 새어 들어왔다.
「조용, 너희들이야말로 늘 입이 방자하다.」
열두 신들이 곧바로 고개를 처박았다. 부드러운 흙과 풀, 땅의 냄새, 공기와 바람의 향이 났다.
「끝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는데도 벌써 혼과 육이 버티질 못하는구나.」
이 음성을 기억하고 있다. 손가락 끝이 파르르 떨렸다. 믿고 싶지 않을 만큼 익숙한 체취, 사악하지만 다정한 목소리, 명령이 섞인 말투, 바닥에 끌리는 긴 옷자락, 흰 발등과 검은 가죽신.
무거운 공기가 머리와 등을 짓눌러 강제로 무릎을 꿇게 하였다.
「업을 쌓으니 혼이 지상의 기운을 버티질 못해 이런 곳에 끌려오는 것이다.」
나를 향해 가볍게 질책하는 목소리는 미미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십이지신들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너무 관대하셔. 우리가 얼마나 고생을 하는지.
「할 일이 남았으니 여긴 아직 네가 올 곳이 아니다.」
당신은 누구야? 희미한 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그는 질문을 들었으면서도 대답하지 않았다. 무당도 알고 있어, 당신의 존재를. 추궁하듯 두 번째로 물었다. 그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누군가 너를 부르고 있구나.」
무엇의 왕이고 무엇의 신인지, 이름과 지위가 불분명한 존재가 명령했다.
「소원대로 돌아가라, 아침이 되었으니.」
***
따뜻한 온도가 느껴졌다. 공포로 곱은 손가락과 발가락을 뻗고 어깨를 들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의 장신을 보았다고 느낀 순간, 그보다 더 눈부신 전등이 눈을 내리 찔렀다.
“지각하니까 그만 일어나요.”
누군가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눈이 부어서 뜨기가 힘들었다. 묵직한 암막 커튼같이 꽉 덮인 눈꺼풀 사이로 스며드는 전등 빛이 따끔거렸다. 눈알을 소금물에 담근 기분이다. 정확하게는 소금물에 담갔다는 표현이 맞았다. 눈가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괴로웠다. 매우 슬픈 감정으로 집약된 영혼을 보았다.
“어…… 하재연……?”
강제로 몸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억지로 일어나 앉았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봤더니 처음 보는 집이었다.
“형이 일어나지 않아서 제 집으로 데려왔어요. 근처였거든요.”
“아.”
주영이 불러 준 주소는 두 가지였다. 하재연의 자취방,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 두 주소는 한 블록 차이로 붙어 있었다.
“대학교까지 바로 가는 버스도 있고, 지하철도 있고, 집세도 싼 편이고요.”
“살기 좋은 동네는 아닌 거 같은데…….”
재연을 만나러 왔을 때 봤던 동네 분위기를 기억했다. 텅텅 빈 것처럼 아무것도 없었다. 동네 중간에 덩그러니 만들어진 놀이터가 이상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적막한 곳이었다. 고만고만한 편의점도 없는 동네에서 한 블록 떨어져 있다고 뭐가 많이 달라질까 싶었다.
“형이 나한테 그런 말을 해요?”
웃음기가 서린 지적에 생각을 하다 말았다. 그래, 주변에 늘어진 구멍가게와 술집들로 새벽까지 시끌벅적하고, 치안이라고는 조금도 좋지 않은 동네의 반지하 자취방에 사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수건과 새 속옷을 쥐여 주고 화장실로 떠밀길래 영광스럽게도 티끌 하나 없는 깨끗한 욕실에서 씻을 수 있었다. 입었던 속옷은 고민하다 뭉쳐서 쓰레기통에 밀어 넣었다. 아깝긴 했지만 입던 속옷을 벗어서 들고 다니는 것도 못 할 짓이었다.
샤워기 아래에서 뜨거운 물에 몸을 적시다 깨끗하게 반짝거리는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더운물을 한참이나 맞았으니 홍조가 올라야 하는데, 얼굴이 회색빛이었다. 입술도 핏기가 모조리 빨려 나간 것처럼 창백하기만 했다. 아, 머리 아파. 또 두통이었다. 미간을 짚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만 어려운 일을 겪고 나면 편두통 때문에 머리가 반으로 쪼개지는 것처럼 아팠다.
십이신장이 왕으로 모신다면 보통 신은 아닐 것이다. 그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진 귀신들은 진명에 약하다. 이름을 찾아내면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도대체 어떤 재주를 부려 수백만 신들 중 하나를 찾아낸단 말인가.
뽀얀 김이 서린 유리를 손으로 한 번 문질러 닦고는 옷을 입고 바깥으로 나갔다. 더운 욕실에 갇혀 있다 나오니 공기가 나름대로 선선하다. 재연은 작은 상을 방 중간에 펴고 있었다. 일회용 용기가 상을 가득 채웠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콩나물국밥이다. 식당에서 포장해 온 기본 반찬과 새우젓을 보고 있으려니 조금 의외였다. 내가 알고 있는 하재연은 요리에 소질이 없지는 않았으니까. 고아원에서도 요리를 자주 도맡았었다.
“사 왔어?”
“형 깨우기 전에요. 밥은 잘 안 해 먹어서.”
미닫이문을 열고 부엌을 내다보았다. 부엌에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다. 가스레인지에는 기름이 튄 흔적은커녕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다. 흔한 밥솥이나 전기 포트 하나 없이 텅 빈 싱크대 위를 보고 있자 재연이 변명하는 것처럼 말했다.
“그래도 수저는 있어요.”
아무리 봐도 식당에서 몰래 가져온 것 같은 쇠 수저를 내밀며 재연이 앉으라고 재촉했다. 식으니 어서 먹어요. 고개를 끄덕이고 맞은편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따뜻한 국물이 식욕을 자극했지만 어쩐지 잘 넘어가지 않았다. 숟가락을 든 채 방 안을 둘러보았다.
텅 빈 집은 하재연의 분신 같았다. 최소한의 가구와 생필품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 흔한 전기밥솥도 없는 집에서 살고 있다니, 이상하게 안쓰러운 기분이 들었다. 식어 가는 국밥을 바라보다가 자세를 바꿔 쪼그려 앉았다. 궁상맞게 숟가락을 들고 있다고 재연이 한 소리 했지만 맛있게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입양되었을 텐데. 서주영이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이 집은 부모의 손길이 닿은 집이 아니었다. 손님도 내가 처음일지 모른다. 그 정도로 사람의 온기가 드문 집이었다. 구석에 먼지가 쌓여 있다거나, 꼼꼼하지 못해 기름이 튀어 얼룩진 벽지라도 있으면 숨통이 트였을 텐데 집은 깨끗하기만 했다.
“언제부터 살았어?”
“얼마 안 됐어요. 이사 온 지 네 달 정도.”
“대학교가 가까워?”
“아뇨.”
다시 한번 방 안을 둘러보았다. 음식이 튄 흔적 따윈 남기기도 싫다는 것처럼 하얀 벽지를 보고 있으려니 속상했다.
“있잖아, 재연아.”
변함없이 똑같은 이름인데 혓바닥에 달라붙은 글자가 너무 녹아 탄 캐러멜 같았다. 취할 듯이 단 향기가 났지만 먹을 수 없는 쓴 탄내에 머리가 아팠다.
“왜 이렇게 살아?”
목 안을 넘어가는 밥알이 까끌까끌하다. 재연이 눈을 깜박거리더니 숟가락을 슬그머니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나는 이렇게 살 수밖에 없어서 이렇게 사는데…….”
이른 아침에 콩나물국밥이나 먹으면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아침 댓바람부터 무슨 요란인가 싶었다. 재연은 당황하지 않고 점잖게 휴지를 몇 장 뽑아 건넸다.
“왜 내가 불행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거야……. 대답하려다가 말문이 막혔다. 입을 뻐끔거리고만 있자 재연이 가볍게 꾸짖는 목소리를 냈다.
“다른 사람의 삶을 보고 뭐라고 평가하는 건 월권이나 마찬가지예요.”
엄한 말투가 가시처럼 콕콕 날아와 박힌다. 손가락을 잡아서 꽉 묶어 놓고 바늘로 찌르는 것 같았다. 아팠다. 비명을 지를 수 없는 고문의 현장이었다. 수치와 후회가 뒤늦게 찾아와 고개를 푹 숙였다. 목덜미가 붉어지는 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는 형은 뭐가 그렇게 불행한데요?”
하고 싶은 걸 했지만, 그게 불행해지는 과정이었으니까……? 재연의 말에 속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내 불행에는 별 대단한 이유가 없었다. 그냥, 시간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내가 모아 둔 복록을 전부 써야 한다고 들었기 때문에 불행한 삶을 살 거라고 단정 지었을 뿐이다.
“별로 그렇진 않은데.”
결국 먹지 못한 아침 식사가 놓인 작은 소반을 밀어 놓고 무릎걸음으로 다가온 재연이 내 얼굴을 들어 올렸다. 양 뺨을 꽉 잡은 손바닥이 뜨끈뜨끈했다. 아침 꿈에서도 이 체온이 정신을 깨웠다.
어리광을 부리는 것처럼 눈을 감고 재연의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손바닥의 간질간질하고 부드러운 촉감이 좋았다. 험하고 궂은일에 벌써 갈라지고 굳은살이 딱딱하게 잡힌 데다 교도소에서 자주 다치는 바람에 엉망으로 흉터가 자리 잡은 내 손과는 전혀 다르다.
하재연의 손가락을 잡고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역시, 손끝까지 곱고 정갈하다. 줄을 길게 선 사람들에게 느린 것 같으면서도 재빠르게 복권 용지와 담배를 건네던 모습이 기억이 났다. 종이를 넘기는 일이 잘 어울릴 것 같은 외모였다. 한숨 대신 짧고 조용한 호흡을 뱉었다. 역시 하재연은 달라졌다. 독립을 주장하며 스무 살이 되자마자 갖가지 아르바이트에 매진하던 아이는 가고 없다.
“커피 좋아해?”
“우유 넣는 거 좋아해요.”
“……나는 블랙이 좋은데”
“알아요.”
조심스럽게 손을 빼낸 재연이 어깨를 끌어안았다. 품 안에 갇히자 더운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나쁘지는 않은 품이다. 골초 특유의 담배 냄새가 섞인 체향도 싫지는 않았다. 담배 연기야 내 손끝에도 늘 남아 있는 친숙한 것이다.
“담배는 하루에 얼마나 피워?”
“한 갑 정도.”
“골초네. 요즘 담배 비싸서 못 사겠던데.”
“피우다 보니 늘더라고요. 줄이려고 하는데 잘 안 되네요.”
재연은 담뱃갑에 딱 붙어 있는 후두염에 걸린 사진을 봐도 고쳐지지 않는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래. 고개를 끄덕였다.
“다르구나.”
“형?”
“정말 다 달라졌구나.”
인과가 변했는데 주변이 변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어쩌면 강압적으로 시간을 되돌려 미래를 바꾼 벌을 받는 것일지도 모른다. 옛날의 기억에 매달려 희망과 기대를 탕진하고 나면 살고자 하는 의욕이 더는 남아 있긴 할까.
매일 밤 악몽을 꾸고 일어나면 살아 있는 걸 후회했다. 지옥의 화염 속에서 들끓는 고통을 겪으며 괜한 선택을 했다고 후회했다. 그 과정에서 마음이 복수심에 불타 변질하였을지도 모른다. 과거를 잊을 수도, 버릴 수도 없게 되었다. 나와 똑같은, 아니 그 이상의 고통을 줘서 죽여야 한다는 목적만 남았던 그 순간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후회가 밀려온다. 지옥에서 모든 꼴을 다 보아 놓고 또 업을 쌓고 있으니, 왕이라는 존재가 말한 대로 혼과 육이 뜯어져 없어질 날도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또 살인을 방조하고, 시체를 유기하는 일련의 과정을 반복한다면 얼마나 갈까.
“……자취방에 누가 나타나.”
“나타난다고요?”
“마스크에 모자를 써서 얼굴은 모르겠는데, 내 과거를 알고 있는 사람 같아.”
등을 감싸 안은 재연의 팔에 힘이 꽉 들어간다. 그래, 꿈속의 수상쩍은 신의 말대로 아직은 끝을 낼 시간이 아니었다. 주어진 시간이 있다면 한계까지 늘여서 다 쓰고 싶었다. 미련을 많이 쌓아 놓고 싶다. 죽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제대로, 내일을 기다리며 살고 싶었다. 그걸 도와주는 사람이 하재연이었으면 좋겠다. 저번 삶도 그러했듯, 실낱 같은 미련이라면 이 애가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직은 죽고 싶지 않아.”
“……이원이 형.”
“살려 주라, 재연아.”
“……이원아.”
하재연이 이름을 부른다.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 형 이름을 막 부르고 말이야. 가볍게 스치고 떨어졌다 다시 꾹 눌러 오는 입술을 반기며 억지로 밝게 웃었다. 그래도 콧잔등이 일그러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남의 아침까지 덩달아 꿀꿀하게 만들어 버리고 나니 미안했다. 머쓱하게 늦은 아침 인사와 안부를 건네고 신발을 신었다. 재연은 오늘 오전은 볼일이 없다며 집 안에서 배웅을 마쳤다. 건물 바깥까지 따라 나오지 않아 다행이었다. 휴대폰으로 연락하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고 건물 바깥으로 후다닥 빠져나왔다. 오늘도 미세 먼지와 황사가 날아왔는지 공기가 텁텁했다. 괜히 마음이 껄끄럽다.
“이 괘씸한 놈.”
깜짝 놀라 헛숨을 삼키는 바람에 그 희끗희끗한 질감을 크게 빨아들였다. 전혀 달갑지 않은 인물이 건물 앞에서 아침을 반기고 있었다. 위엄 있게 버티고 있는 꽃신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머리를 깔끔하게 틀어 묶은 무당이 허리춤에 손을 떡 올린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무당의 등 뒤에 선 장군신도 여전히 위압적이다. 칼자루를 쥔 손등에 푸르고 붉은 혈관까지 보인다.
그제 이후로 처음 보는 무당은 외출한다고 꾸몄는지 한복이 아니라 절복을 입고 있었다. 그래도 비녀를 찔러 넣은 머리 타래나 황토색 옷은 시선을 끌기에 충분할 만큼 촌스러웠다.
“왜 여기 계세요?”
“나를 기다리게 만들어? 고얀 것.”
“아니, 스토커세요?”
소름이 쭉 끼쳤다. 내가 살고 있는 일산의 집도 아닌 서울에 있는 하재연의 집이다. 무당이 무슨 수로 여기까지 찾아올 수 있단 말인가. 뒷조사해 가면서 야금야금 따라다니지 않는 이상 어려웠다. 아무리 신기가 있어도 그렇지…….
“장군님이 얼른 채비하고 나가라 하셔서 왔더니만 네놈이었어.”
가능한가 보다. 요즘 무당들은 만능인 모양이다. 떨떠름한 태도로 물었다.
“보살님이 저는 왜 보러 오셨어요?”
“네 신내림 때문에 왔지, 어쩌긴 뭘 어째야!”
무당이 획 고함을 질렀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듣기라도 할까 봐 무당의 입을 손으로 턱 막아 버렸다. 무당이 눈을 부릅뜨더니 버둥거리면서 욕설을 내뱉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손바닥 안에서 입술이 침질을 해 대고 있으니 대충 감으로 찍었다.
쪽팔리게 남의 동네에서 신내림이니 무당이니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 순 없었다. 하재연도 언제 집에서 나올지 모르니 일단 자리를 피하는 게 급선무였다.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무당을 쓰레기장 옆으로 끌고 갔더니 다짜고짜 내 정강이를 걷어찼다. 뼈를 제대로 맞는 바람에 정강이를 부여잡고 앉아 끙끙 앓았다. 너무 아프니 비명도 나오지 않는다. 한참 앓는 소리를 내자 무당이 코웃음을 치면서 손바닥을 툭툭 털었다. 성격이 사나워 장군신을 모시는 모양이다. 속으로 구질구질하게 욕을 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아주 꿈자리가 사나워서 참을 수가 없어. 어쩌자고 그런 흉악한 짓을 하는 게야?”
“흉악한 짓이라뇨. 선량한 시민에게…….”
“네놈 주변의 시체 냄새가 역겹다, 이놈아!”
무당이 버럭 소리를 지른다. 아, 일하러 가야 하는데. 넋두리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네놈의 신이 어젯밤 꿈에 나타나 바람을 잘못 넣었다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니 내가 참을 수가 있어야지.”
“제 신이 왜 그쪽 꿈에 가십니까. 외도인데.”
“어이, 청년. 자네 계속 그렇게 업을 쌓으면 얼마 안 가 큰일을 치를 거야. 신병 지독하게 앓아 가며 난리를 치느니 그냥 신내림이나 받아.”
“꿈 이야기 좀 자세하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말 돌리지 말고 정신 차려, 이 모자란 놈.”
뒤통수를 내리갈기며 무당이 으르렁거렸다.
“제대로 살려고 해도 잘 못 살 놈이 어쩌자고 죽을 짓만 하는 거야.”
얼마나 악의를 품고 때렸는지 정신이 아찔했다. 두 번째 폭력을 시도하려는 무당의 손을 막으며 다급하게 외쳤다. 일단은 대화가 우선이었다.
“스톱, 스톱!”
“스톱은 뭐야, 한국어 써.”
결국 머리를 한 대 더 후려 맞았다. 얼얼한 머리통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 무당의 형형한 눈빛 뒤로 장군신이 빙긋 웃는다. 이 광경이 어지간히 재밌는 모양이다.
“꿈 이야기나 자세하게 해 주세요.”
“뭘 해. 할 말 없어.”
토라진 척 냉정하게 돌아서는 무당의 팔을 붙잡고 빠르게 떠들었다.
“제 일이니 저도 알아야죠. 게다가 십이지신이 왕으로 모시는 사람이 제 신이 될 순 없습니다. 불가능한 말이잖아요.”
“……얼빠진 놈 같더니 왜 그건 아는 게야?”
“제가 과거가 화려해서.”
농담을 던졌지만 무당은 반응이 없었다. 적당한 세월이 깃든 중년 여성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십이지신은 기본적으로 도교에서 시작되어 불교까지 이어지는 종교의 신이다. 결국, 한국의 신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샤머니즘은 전 세계 어디에나 있지만, 한국의 무당이란 당연히 한국의 무속 신앙을 바탕으로 한다. 한국의 신이 아닌 자가 한국인을 선택해 신내림을 하는 일이 흔할 리가 없다. 한국 땅에 있지도 말아야 할 존재가 왜 이 낮은 곳까지 내려왔는가? 그것도 수많은 사람 중 굳이 나를 선택해서 신내림을 강요한다는 것 자체가 그 신에게도 위험한 일이었다.
여긴 중국이 아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 국가다. 대륙의 신과는 기운이 맞지 않으니 십이지신들이 내 수명을 두고 험악한 언성을 하는 것도 이해는 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미 부조리의 절벽에 서 있는 인간이 나였으니까. 쓴웃음이 나온다.
“……신내림을 받는다고 해서 저나 그 신이 멀쩡할 거 같진 않는데요.”
“이놈이.”
“제 말이 맞나 봐요.”
“그래도 할 건 해야지.”
“보살님, 하란다고 하는 멍청한 놈이 세상에 어딨어요? 아시는 게 있으면 말해 주세요. 제 주변에 일어나는 일이 신과 관련이 있습니까?”
“……그건 아니야.”
“그럼요?”
“나도 말을 다 해 줄 순 없어. 우리는 입이 무거워야 해. 네가 신내림을 받으면 알게 될 거야.”
무당이라는 장래 희망을 가져 본 적은 없는데. 무당은 절대로 알려 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공황 상태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손으로 목덜미를 주무르며 애써 날카로운 신경을 접었다.
“시체 냄새가 난다는 건 무슨 말씀이세요?”
“시체가 네 옆에 딱 붙어 있으니 코가 쉴 거 같아 하는 말이다.”
주변을 한번 휘휘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요즘 들어 질 나쁜 귀신을 보는 경우도 드물었다. 집에 모여 있던 놈들이 싹 사라지면서부터다. 한 바퀴 휭 둘러보고는 무당의 눈을 마주 보았다. 흔들림도 없고 꼿꼿하다. 농담 따먹기나 하고 끝내려고 했는데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입술 사이로 흘린 미미한 웃음소리를 들었는지 무당이 얼굴을 무섭게 굳혔다.
“그만둬, 이놈아.”
“…….”
“네가 하는 모든 일이 전부 네 명줄을 틀어막고 있는데 어찌 거기서 그러고 있어?”
그런 일밖에 할 줄 모릅니다. 눈을 뜨자마자 부여받은 새로운 삶에서 행한 가장 첫 번째 충동이란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 전에도 그 뒤로도 가져 본 적 없던 강력한 살의 이후 가치관은 희미해졌습니다.
고해 성사와도 같은 생각이 잠깐 머릿속에 머물렀다 떠나갔다. 후회는 죄의식과 닮아 있었지만 다른 부류였다. 씁쓸한 한숨을 쉬며 무당이 얼러 왔다.
“아들놈 같아 하는 말이다. 내 말 들어.”
“……그럴게요.”
“꼭 오늘 그만둬야 해. 꼭이야, 절대로 미루면 안 된다.”
신내림보단 이 말을 하려고 왔던 거야. 무당이 마지막으로 걱정 섞인 엄포를 놓았다. 이 먼 곳까지 찾아와서 이야기할 정도면 정말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뒤가 구린 범죄였으니 이해하고 항복하듯 손을 들어 올렸다.
“알겠어요.”
“……가자마자 당장 그만둬.”
“그럴게요.”
“에이, 못난 놈. 나는 간다.”
“멀리 발걸음 하게 해 드려 죄송해요. 들어가세요.”
“인사만 번지르르해서는.”
무당이 투덜거리면서 등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갔다. 무당의 등 뒤에 붙어 따라가는 장군신이 잠깐 뒤를 돌아 나를 보았다. 시선 속에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가장 큰 것은 연민이었다.
죽은 혼에게도 동정을 받는가. 고소가 차올랐다. 아, 정말. 헝클어진 삶이다. 우두커니 서서 쓴 속을 달래다 걸음을 뒤로 물렸다. 일단은 출근부터 해야겠다.
고 영감을 만나서 그만둔다고 말해야지. 엄청나게 욕을 하겠지만, 꿈에 나온 십이지신들의 말싸움과 무당의 조언을 종합해 보면 몸을 사리는 게 맞을 것 같았다. 한 달 넘게 꾸준히 일했으니 그 돈으로 당장 몇 달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입 안이 피를 뭉쳐 넣은 것처럼 찝찝했다.
아슬아슬하게 지각하지 않고 작업장에 도착했다. 작업복으로 훌렁 갈아입고 인사를 대충 나누자마자 고 영감을 찾았다. 고 영감은 아침부터 컨테이너에 처박힌 채 호화롭게 에어컨을 틀고 누워 있었다.
혼자 뼈마디가 쑤신다고 끙끙 앓는 소리를 내는데 코웃음이 튀어나왔다. 새로 들어온 임시 반장은 고 영감과 맞지 않아 사사건건 부딪치는 바람에 몇 번이나 큰소리가 오갔었다. 고 영감이 지금 저러는 것도 화병이 난다고 유세를 떨고 있는 것이었다.
사람이 왔는데 일어나 인사할 생각도 없이 죽는다고 앓아 대는 얼굴을 보다 한마디 툭 던졌다.
“저 오늘로 일 그만둘게요.”
“뭐?!”
대번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고 영감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쪼글쪼글 주름진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야아, 윤이원이. 너 미쳤어?”
“제정신인데요.”
“몇 번 했다고 그만둬?”
“몰라요. 제 마음이죠.”
“이 새끼, 내가 너 이럴 줄 알았으면 안 시켰어!”
소리를 버럭 지른다. 누런 잇새로 침이 튀었다. 감옥에서는 화를 내면 무서웠던 영감이다. 하지만 지금은 무섭다기보단 짜증이 났다. 어차피 바깥세상에서는 똑같은 입장이었다. 서로의 죄질이 더하거나 덜한 것은 논쟁할 가치도 없는 게 아니던가. 태연한 척 의자에 앉아 고개를 내저었다.
“개인 사정이 있어요. 비밀이 새어 나갈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자네 진짜 이러기야?”
“좋게 봐 주신 건 아는데, 정말로 개인적인 사정 때문이에요.”
고 영감을 설득할 만한 이유가 없는 건 아니었다. 말도 없이 작업 현장까지 불쑥 찾아왔던 하재연은 좋은 이유가 되었다. 다음에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집 근처에 일어난 살인 사건으로 형사에게 용의자로 점찍혔단 이야기도 부러 꺼냈다. 재수 없으면 작업 중일 때 형사가 찾아올 수도 있다는 설득에 영감은 내키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 혼자 작업해야 한다는 부담 때문인지, 노인은 오늘 밤까지만 한 번 더 작업해 달라고 부탁했다. 오늘까지는 일하고 그만두면 괜찮은 거겠지.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이미 무거운 손을 축 늘어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 영감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최근 이런저런 사고로 밀린 통나무는 이미 컨테이너 안에 있었다. 검은색 시체 가방을 곁에 두고도 두 다리 뻗고 자던 고 영감이 징그러울 정도다. 미련 없이 오전 작업을 시작하려고 안전모를 걸쳐 쓰고 컨테이너 안을 빠져나왔다. 뒷짐을 지고 선 노인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진짜 더 하진 않을 게지?”
“네, 더 하다간 죄다 위험해질 거 같아서 그러는 겁니다.”
모자 버클을 채우며 대답하자 고 영감도 더는 말을 걸지 않고 문을 닫았다. 느릿느릿하게 소파에 눕는 모습이 창문 너머로 보였다.
오늘 그만 두는 건 맞으니 별일이야 있겠어. 찝찝한 마음을 떨치고 발걸음을 빨리했다. 임시 반장이 멀리서 손짓을 하고 있었다. 힘든 일에 바쁘게 움직이니 무거운 걱정도 금방 잊혔다.
해가 길어지면서 근무 시간도 길어졌다. 7시가 넘어서야 다들 손을 털고 허리를 폈다. 입 안에서 단내가 났다. 미지근해진 이온 음료 하나를 뜯어서 단숨에 비워 버렸다. 트럭이 수십 번 오가며 일으킨 흙먼지를 전부 들이마신 목구멍이 따갑다.
임시 반장은 저번 작업반장보다 더 독한 새끼였다. 눈을 희번덕 굴리며 인부들을 부려 먹었다. 공사 진행 속도가 더디다고 상부에서 엄청나게 갈구는 모양이었다. 이러니 부실 공사를 하는 거라고, 창 씨와 김 씨가 수런수런 욕을 하며 침을 뱉었다.
뒤늦게 작업반장을 불러 오늘부로 그만둘 거라 이야기했더니 남은 인부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공사장에서 야간에 몰래 하는 일이 있다 보니 고 영감은 사람을 뽑는 일에 늘 까다롭게 굴었다. 며칠 전에도 그런 일이 있어서, 일주일쯤 일했던 인부를 마음에 안 든다고 갑자기 잘라 버렸다. 시종일관 이런 식이라 영감의 눈에 차는 사람이 드물다 보니 일손 하나라도 영 아쉬운 모양이었다.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는 인부들을 보냈다. 그래도 두 달 가까이 일을 했다고 정을 조금 붙여 준 모양이었다. 입 안이 썼다. 마음이 단단히 상했는지 컨테이너에 처박혀 나오지 않는 고 영감을 기다리며 줄담배를 피웠다.
해가 저물고도 한참이 지나서 영감이 가방을 질질 끌고 바깥으로 나왔다.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가방을 받아 들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새로 뜯은 목장갑을 끼고 캐리어를 열었다. 반으로 쩍 갈라진 곳에서 시체가 툭 떨어졌다. 집어 들려다가 비명이 나올 것 같아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얼마 전 하재연과 카페에 앉아 있을 때, 눈앞에서 자기 목을 찢으며 귀곡성을 냈던 남자 귀신의 얼굴이었다. 고통이 속에서 갈기갈기 찢어졌다.
내 죄가 아니라고, 어쩔 수 없다고. 참으려고 해도 손이 덜덜 떨렸다.
견딜 수 없을 만큼 한기가 올라왔다. 몸이 덜덜 떨리니 치아가 딱딱 부딪쳤다. 왜 몰랐을까. 건물 안에는 숨도 못 쉴 만큼 원혼이 가득했다. 그냥 이 건물은, 생명을 뼈대로 삼아 올라가고 있었다. 모든 원혼이 온전하지 못한 자신의 시체를 원통하게 여기며 화를 내고 있었다.
“너 똑바로 안 해?!”
“죄, 죄송합니다.”
“이 새끼 갑자기 왜 이래?”
몇 번이나 모래를 엎지르고 실수를 하자 고 영감이 뺨이라도 칠 것처럼 위협을 했다. 고 영감의 마른 몸이 바짝 붙더니 육시를 할 욕을 하며 몸을 밀쳤다. 바닥에 넘어져 가방에 머리를 부딪쳤다. 시체는 눈 깜짝할 사이에 분쇄되어 걸쭉한 시멘트가 되었다.
굳은 손을 움직이다 몇 번이나 기계를 잘못 만져 큰일이 날 뻔했다. 와드득하는 뼈 으깨지는 소리가 역겨웠다. 겨우 공사를 마치고 나오자 고 영감은 다시 한번 걸쭉한 욕설을 내뱉기 시작했다. ‘숨기는 게 있다면 죽여 버리겠다’부터 나오는 협박과 나직한 분노를 들으며 목구멍까지 차오른 오한을 견뎠다.
“어이쿠, 저게 누구야.”
고 영감이 욕설을 멈추고는 탄성을 내질렀다. 묵직한 세단 한 대가 공사장 앞에 멈춰 섰다. 늘 오던 차가 아니었다. 이런 장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고급품이었다.
누군가 운전석에서 나왔다. 늘 시체를 배달하던 차 실장이었다. 그는 고 영감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휙 열리는 차 문에서 가장 먼저 나온 것은 사람이 아니라 귀신의 덩어리들이었다.
몇 겹이나 쌓여 있는지 모를 거대한 귀신의 덩어리들이 차 주변을 에워싸며 길을 열었다. 그 사이에서 연기처럼 새어 나온 남자는 거대한 존재감을 띠고 있었다. 골격이 단단했다. 눈대중으로 보기에는 차 실장과 차이 나는 신장도 아니었는데 우뚝 탑이 서 있는 것 같았다.
남자의 기세가 날카롭게 달려와 내 흉곽을 밀어 올리고 빗장뼈를 찌르고 있었다.
“아이고, 이사님. 어쩐 일로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미리 언질을 주셨으면 좀 더…….”
고 영감은 허리를 펼 줄도 모르고 침을 튀어 가며 연신 아부를 건넸다. 이사라는 남자의 몸에 빈틈없이 달라붙은 정장이 움직일 때마다 주름이 잡혔다.
“누가 일을 하다 말고 그만둔다고 해서 왔는데.”
고 영감이 아직도 허리를 뻣뻣하게 편 채 서 있는 나를 보고 화들짝 놀라더니 팔을 잡아챘다. 억센 힘에 눈을 찌푸리는 것도 순간이었다. 강제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자존심이 쓰라리다. 노인의 손을 팔에서 털어 내며 미간을 좁혔다. 그새 위쪽에 일러바친 모양이었다. 하여튼 교활한 영감네.
“이름을 들으니 누가 생각이 나서 와 봤지.”
“그래도 이렇게 직접 오실 필요야…….”
“근처였거든.”
무당이 왜 내게서 시체의 냄새가 난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남자에게서는 지독한 시체의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시체 더미 위에 올라탄 자였다. 시체를 만지고, 가학하고, 이용한 자에게서 나는 냄새는 전부 이렇게 고약하다. 무례하다는 걸 알았지만 코를 틀어막고 싶었다.
“이름이 뭐랬지?”
다짜고짜 남자가 이름을 물었다. 숨을 크게 들이켜지 않으려고 애쓰며 대답했다.
“윤이원입니다.”
“그래, 그 이름을 듣고 왔지. 쓰레기가 쓰레기 짓을 하거나 말거나 아무 관심도 없었는데 말이야.”
눈이 늑대처럼 살기를 띠고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무언가를 탐방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대부업체의 이사가 왜 여기에 왔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굴리다 어느 한 지점에서 뚝 멈췄다. 실질적으로는 대부업보다 장기밀매로 배를 불려 온 악질적인 기업. 그건 내가 죽여 버린 누군가가 하던 일이었다.
“너, 행복 고아원 출신이지?”
짐승처럼 다가온 남자가 목덜미를 틀어쥐었다. 살의는 없었지만 흉악한 태도였다.
“권혁대를 죽인 그 애새끼.”
맞았다. 남자는, 원장의. 아주 먼 과거, 아니…… 그 이전에 진짜 복수의 상대는 이 남자가 아니었던가? 눈앞이 어지러웠다.
무당이 말했다. 반드시 오늘은 그만둬야 한다고. 딱 오늘까지 하고 그만둘 요량이었다.
고 영감이 부탁하지만 않았다면 야간작업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해 버렸다. 어차피 한 번 발을 담갔으니 순순히 놔 주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흥미와 살의에 범벅이 된 얼굴이 시선으로 목을 졸라 왔다. 누군가 다리를 타고 올라온다. 진흙으로 변한 귀신들이 하나둘 바닥을 뚫고 고개를 내밀어 흘린 땀을 핥았다.
안전 불감증이라는 말이 있다. 설마 무슨 일이 있겠어. 대수롭지 않게 넘긴 불안함이 돌아와 사고를 불러일으켰다.
아, 시발. 좆 됐다. 쌍욕을 입에 담아 중얼거렸다.
***
대외적으로 L캐피탈의 대표 이사를 전임하고 있는 남자는 강제로 명함을 쥐여 주며 이름을 부르라고 강요를 하더니 이제는 혼자 신나게 식사 중이었다. 남의 의사는 신경 쓰지 않는 뻔뻔한 얼굴이었다. 차 실장도 물린 채 둘만 마주 보고 있으려니 위가 쑤셨다. 입 안이 말라 연거푸 찬물을 들이켰다. 식탁 위에 널려 있는 음식을 보고도 식욕이 돌지 않았다. 드레싱이 뿌려진 샐러드를 젓가락으로 집으며 남자가 흘끗 눈썹을 들어 올렸다.
“윤이원 씨, 남의 성의를 봐서 먹는 게 어때?”
“왜 같이 저녁을 먹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젓가락을 내려놓은 채 딱딱하게 대답하자 남자는 불쾌한 내색을 했다. 젊은 사업가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어도 그를 감싼 시체 냄새가 역겨워 토기가 올라왔다. 당신에게서 역겨운 냄새가 난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어 입을 다물고 버텼다.
“윤이원, 살인범 새끼가 고고한 척하면 안 되지.”
“그 살인범이랑 저녁을 들고 계신 건 이사님이신데요.”
“딱딱하긴. 내 밑에서 일하는 것도 아닌데 이진현 씨라고 불러 주면 어때?”
“싫습니다.”
이진현이 짧게 헛웃음을 지었다. 버릇없이 구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잠깐 불쾌한 표정을 한 남자의 얼굴을 보다 짐을 챙겨 일어났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할부금이 어마어마한 휴대폰과 낡은 지갑을 바지 주머니에 넣으니 끝이었다.
“다시는 볼 일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살인범인 건 피차 마찬가지니까요.”
“어, 그대로 나가면 재미없을 거 같은데.”
서늘한 목소리에 마음속으로 혀를 찼다. 휴대폰 번호는 어떻게 알았는지 아까부터 무당에게서 무시무시한 문자가 몇 통이나 도착해 있었다.
말을 듣지 않아 결국 일을 그르쳤다는, 몇 바퀴를 돌고 싶은 거냐는 분노가 적힌 글자에 새삼 후회하는 것도 잠깐이었다. 일단 이 남자와 헤어지는 게 더 급했다. 아까부터 몇 번이나 일어나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이진현은 여유로운 태도로 은밀한 협박을 늘어놓으며 발목을 잡아 눌렀다.
겉보기엔 그럴듯한 사업가가 되었다곤 하지만 남자의 근원은 조폭이다. 발을 놓아 주지 않겠다는 끈질긴 태도에 몇 번이나 자세를 고쳐 앉아야 했다. 나는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불쾌한 티를 내고 있는데도 이진현은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입술을 꿈틀거리다 다시 자리에 거칠게 주저앉자 그가 통쾌한 웃음을 터트린다.
“권혁대 죽었다는 보고를 받았던 것도 놀랐는데 범인이 어린 소년이라는 말에 더 놀랐지 뭐야.”
“어릴 때부터 싹수가 노랬나 보죠.”
“아, 보고서 받고는 깜짝 놀라긴 했지. 그 나이에 할 만한 행위는 아니더라고?”
“좀 조숙해서.”
입만 열면 비꼬는군. 내 말투를 지적하며 이진현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악취가 번지는 방 안에서 잘도 음식이 들어간다 싶었다. 아까부터 몰려들어 오는 귀신들에 방이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은 어린아이들이다. 눈이 퀭한 얼굴들이 전부 안쓰럽다. 남녀노소 관계없이 팔아 치웠겠지. 그래, 그런 범죄를 범죄라는 사고도 없이 행하는 사람이 눈앞의 남자였다.
놀라운 점은 그 많은 귀신 중 저 인간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없다는 사실이었다. 앞으로도 액운 따윈 끼어들 수도 없을 만큼 말끔한 존재감이었다. 그 대신 내 몸에 덕지덕지 붙어 오는 귀신을 짜증스럽게 떨어트렸다.
“그 남자는 인상 깊어서 기억하지. 얼굴은 못생겼는데 정말 성자 같은 말을 하더라고.”
실제로, 원장은 움직이는 입만은 아름다웠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우리는 감동하였고 기꺼워하며 그를 따랐다. 신이었던 아버지와 자신들이 그의 종이라는 걸 몰랐던 아이들.
“믿고 맡겼지. 사람이야 보잘것없었지만, 뭐 그것도 능력 아니야? 그런데 갑자기 덜컥 죽었다니, 이게 무슨 뒤통수야.”
이진현이 하는 말은 날카롭게 벼려진 칼처럼 과거의 상처를 헤집었다. 아무도 몰랐다, 원장이 고아원 아이들을 입양이라는 이름으로 빼돌려 인신매매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화재로 원장이 보관하던 서류는 소실되었고, 경찰은 당시 나의 정신 상태와 사건의 잔혹성에 집중했지 원장을 살해한 이유는 애써 찾으려고 하지 않았다.
‘열다섯 살짜리 소년이 원장의 잔혹한 비밀을 어떻게 알아낼 수 있었냐’라는 의문을 가지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식탁 아래에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래서 말이야, 윤이원 씨.”
“네.”
“우리 서로를 매우 잘 알고 있는 것 같지?”
남자가 눈을 번뜩였다. 재수라고는 더럽게 없구나. 속으로 한 번 더 팔자를 감탄하며 고개를 저었다.
“전혀 모르겠는데요.”
“왜, 나는 알겠는데.”
“뭘요.”
“알고 한 것치곤 소심하네.”
말장난이 이어졌지만 분위기는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제대로 체했다. 속이 불편해 손바닥으로 명치 부근을 꾹 눌렀다. 위 속에 피가 질철질척하게 차오른 것처럼 메스꺼웠다.
이진현은 저 홀로 신나게 젓가락질을 했다. 꽉 채워진 식탁 위를 짐승처럼 살펴보다 하나를 골라낸다. 물렁물렁한 순두부 위에 양념장을 뿌린 접시를 끌어가 숟가락을 집어 두부를 반 토막 냈다. 먹는 모습이야 시원시원했다. 저 귀신들 꼴이 안 보이니 맛있게 음식을 먹을 수 있겠지. 옆에 있는 아귀 하나가 고봉밥에 고개를 처박고 손으로 밥을 떠서 입에 쑤셔 넣고 있었다. 입 안을 가득 채워 가며 꾸역꾸역 밀어 넣는다.
납치당해 살해된 원혼은 대부분 시체조차 찾을 수 없어 제 날짜에 제사상을 받지도 못했다. 죽어서도 굶주려 이렇게 아귀가 되는 경우가 많다. 지옥에서도 수십, 수백만의 아귀들이 굶주림에 오열했다. 두툼한 쇳덩어리 위에 머리를 깨서 그 피를 받아 빨고 배를 채우던 자들…….
밥그릇을 옆으로 슬쩍 밀치자 이쪽으로 와서 미친 듯이 밥을 처먹는다. 아귀에게서는 악취가 났다. 불쾌한 속을 참기 위해 혼자 술을 한 잔 따라 마셨다. 이진현은 자신의 접시에서 시선을 떼지도 않고 물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뭘요?”
“권혁대 뒤가 구린 걸 알아서 죽인 거 아니야?”
“처음 듣습니다.”
“그래? 이상하네. 그럼 내가 권 원장 이야기했을 때 왜 떨었어?”
남자가 차고 있는 손목시계에서 초침이 움직인다. 무거운 금속의 감촉이 눈에서 귀로 옮겨 가는 것 같았다. 침묵처럼 느릿느릿 접시를 비운 남자가 입술을 핥았다. 그는 냅킨을 집어 들고 천천히 입 주변을 닦았다. 냅킨에 묻어 나온 얼룩을 반대로 접어 가린 이진현이 조용히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렸다. 일련의 과정은 아주 느리고 조용했다.
무성 영화를 틀어 두고 대사를 천천히 읽어 내리는 변사(辯士)와 닮은 사람이었다. 주변의 소음을 잡아먹는 남자였다.
이진현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사람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차근차근 낯빛을 잡아먹었다.
“겨우 열다섯인 애새끼한테 권 원장이 동업을 제의했을 리는 없고…… 어떻게 알았지?”
“…….”
“말 안 해?”
순식간에 거대한 체구가 식탁 위를 밟고 뛰어 넘어와 목을 졸랐다. 뒷머리가 바닥에 크게 부딪혔다. 숨 막혀. 다리를 버둥거리다 식탁을 발로 걷어찼다.
남자 두 명의 몸싸움에 크게 밀쳐진 식탁이 결국 뒤로 밀리면서 바닥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접시 깨지는 소리와 벽에 몸이 부딪치는 폭음이 난폭하게 울리는데도 종업원이 들어오지 않았다. 한통속이군. 손톱으로 나뭇결이 살아 있는 바닥재를 긁으며 욕지거리를 삼켰다.
이진현의 눈에서 흥분이 뚝뚝 떨어졌다. 손가락 마디마디 들어간 힘이 정확하게 숨을 억눌렀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으…… 흐…….”
고통스럽다. 괴롭다. 이건 기억과는 또 다른 통각으로 만들어진 죽음이었다. 인간이 죽는 방법은 다양하다. 하지만 몇 가지를 경험할 수는 없다. 단 한 번이면 죽고 없으니까. 두 번, 세 번 죽인다는 건 죽은 자에게 엄청난 모욕이었다. 죽음으로 이르는 과정, 그 고통을 몇 번이고 느끼게 해 주고 싶다는, 무성하게 자라난 살의.
천천히 손에서 힘을 빼며 이진현이 눈을 마주쳤다. 만면에 환하게 피어난 미소가 공포에 질린 사람의 얼굴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쿨럭, 겨우 숨이 트이자 기침이 터졌다. 목을 손에 쥔 채로 이진현이 턱 아래를 툭툭 쳤다. 산소 공급이 일시적으로 끊겼던 뇌가 어지럼증을 호소했다.
“다시 한번 물어볼게. 어떻게 알았어?”
“……꾸……으…니까…….”
“안 들려. 제대로 말해.”
목 안쪽이 부딪쳐 상처가 났는지 따가웠다. 몇 번이나 더 마른기침을 쏟아 내다 뺨을 얻어맞았다. 남자는 폭력도 묵직했다. 손목에 채워진 금속 시곗줄에 부딪쳐 생채기가 난 피부가 따끔거렸다.
“꿈을…… 꿨으니까.”
“뭐?”
만약에 그의 손에 죽는다면, 벌써 세 번의 죽음이나 마찬가지였다. 돌아와 살인을 저질렀을 때 나는 또 한 번 죽을 뻔했었으니까. 인간으로서 세 번의 죽음을 겪는다면 이젠 정말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 죽고 싶지 않아. 숨을 헐떡이면서 고개를 돌렸다. 관자놀이를 타고 눈물이 떨어졌다.
“제대로 말해.”
괴로워. 죽고 싶어. 생각이 완전히 엉켜 버린 채로 겨우 목소리를 쥐어짰다.
“꿈에서…… 원장이, 쿨럭, 그러는 걸, 알아서…….”
“꿈? 이봐, 윤이원 씨. 지금 나랑 장난해?”
“정말이에요. 정말로 봐서…….”
정말로? 이진현이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위협적인 손바닥 아래에서 목을 움직이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당, 무당이, 신기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나조차도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를 주섬주섬 늘어놓으며 울음을 삼켰다.
이진현이 찝찝한 얼굴로 손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그가 물러서자마자 반사적으로 구석에 처박혀 웅크린 채 몸을 보호했다. 식은땀이 흐른 얼굴이 찝찝했다.
남자는 자신의 손을 한번 닦아 낸 물수건을 앞에 던졌다. 조심스럽게 젖은 수건을 집어 들고 엉망이 된 얼굴을 닦았다. 입술을 움직이기만 해도 목 안쪽이 당겨 왔다. 손자국 그대로 목에 멍이 들지도 모르겠다. 여러모로 경사스러운 날이군. 안쪽 볼살을 잇새로 물며 자조했다.
“무당이라, 그것도 생각보다 괜찮은 변명이네.”
“……진짜로…….”
믿기진 않겠지만. 변명을 덧붙이려다 다시 고개를 저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왔다는 말은 무당이라는 말보다도 믿을 수 없는 판타지였다. 어차피 이진현도 더 추궁할 생각이 없었는지 손을 내저었다.
“좋아. 일단은 믿어 보기로 할까.”
“…….”
“그런데 말이야, 윤이원 씨.”
“……네?”
“생각 안 해 봤어?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이야. 한 사람만 희생하면 다른 애들이 편하게 사는데 왜 영웅의 흉내를 내는 거지?”
그거야, 내가 죽었기 때문이다. 고통스럽게 살해당했으니까. 얼마나 더 이 남자에게 이야기해도 되는 걸까. 망설이던 찰나 남자가 먼저 고개를 치켜들고 말을 이어 갔다.
“어떠한 변론도 없이 그대로 벌을 받았더군. 당신은 성자인가? 사람을 죽였는데, 그렇다고 주장하진 않을 거지?”
당연히 그럴 마음은 없었다. 윤이원이란 인간은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성자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나는 성자보단 악마와 가까운 인간이다.
“뭘 이야기하고 싶으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신고하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꼭 죽여야 했던 이유가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지, 동업자 씨.”
“……동업자라고 부르지 말아 주세요.”
“대답해.”
이진현이 명령했다. 숨을 쥐고 있는 건 상대방이었다. 잠깐 호흡을 고르고 대답했다. 성대가 울릴 때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죽여야 했습니다.”
“왜?”
“내가 그 사람을 죽이고 싶었으니까요. 그럴 만한 죄가 있었고.”
“지금은 권혁대가 하던 일을 자기가 하고 있잖아? 말이 좀 이상하지 않아?”
모순점을 파고들어 상처를 주기 위해 노력하는 화법이다. 저런 것은 형사들에게 닦달당할 때도 많이 들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으며 어깨를 폈다. 이미 이진현은 내 존재를 발밑의 벌레로 자각하고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괜찮다, 아직은 벌레니까.
“과거니까요.”
“과거라고?”
진현이 신랄하게 비웃었다.
“이봐, 과거에 미쳐서 사는 건 당신인 것 같아.”
나중에 또 봐, 윤이원 씨. 놀리는 것처럼 이름을 부른 남자는 엉망이 된 식당에서 뱀처럼 빠져나갔다. 좁은 문틈 새로 빠져나가는 회색 정장의 끄트머리를 보며 화를 삭였다.
과거, 과거라.
과거는 맞았다. 하지만 한 번도 원장의 배신을 잊은 적이 없다면 나에게 있어서 그건 과거가 될 수 없었다. 한 번도 좋은 꿈을 꾸지 않았고, 한 번도 좋은 삶을 살겠다는 희망을 품지 않았다. 기꺼이 시체를 분쇄하며 악업을 저질렀다. 과거에 사는 사람의 한계였다. 이제 와서 내가 원장보다 얼마나 더 나은 사람인가 판단할 수 없었다.
더하고 덜함은 없다. 가벼운 진리를 생각한 뒤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돌아가자. 그 목표 하나만 가지고 억지로 몸을 움직였다.
목이 졸려 퍼렇게 질린 안색으로 식당을 나서자 종업원이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금방 사무적인 얼굴을 하긴 했지만 부축까지 해 주며 출구로 안내했다. 약을 바르시거나 병원에 가시는 게 좋다는 과한 조언까지 건네며 친절한 태도를 보였지만 도착한 곳은 정문이 아닌 후문이었다. 쓴소리 대신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택시를 탔다.
택시 기사는 몇 번이나 내 목에 든 푸른 멍에 관해 물었다. 다들 남의 불길한 상처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다. 오뉴월에 목티를 입을 수도 없는 일인데.
당분간은 큰일 났다는 생각을 하며 차에서 내렸다. 끊어 주는 카드 영수증을 받아 골목 안쪽으로 빙글 돌았다. 지저분한 낡은 원룸 건물을 보자마자 괜히 반가움이 들었다.
빨리 들어가서, 내일은 하루 종일 잠만 자겠다고 결심하며 지하 단칸방의 문을 열었다.
“……야아, 오랜만이네.”
보이지 않던 며칠 새에 기세가 등등해진 귀신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노려봤다. 그러더니 입을 귀밑까지 찢어서 웃기 시작했다. 방바닥을 두드리고 손뼉을 치며 깔깔거린다. 기회를 놓쳤다는 게 무슨 말인지 좀 더 실감 났다.
업은 무엇일까.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 보지 않았다. 시간을 돌려준 존재도 그냥 대가의 일종이라고만 말했다.
지옥에서는 살아오면서 지어 온 죄의 무게라고 알려 주었다. 업이 많이 쌓일수록 인생은 고달파지게 되어 있다고. 그건 하나의 진리였다. 죄에는 필연적으로 업이라는 대가가 축적되어 끝까지 따른다는 것.
하지만 종종 그 정상적인 범주에서 벗어난 인간들도 존재한다. 오늘 만난 이진현 이사 같은 사람이다. 그는 업의 꼭대기에 앉아 있었지만 인생이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음 생에 이어질 만큼 업이 무작정 쌓이지도 않았다.
그건 그 남자가 부유하기 때문이었다. 부를 사회로 유통하는 사업가. 악업을 통해 벌어들인 돈을 사회에 풀면서 발생하는 덕치. 내가 받는 돈, 나 외에도 다른 수많은 사람이 받는 월급과 그로 인해 유지되는 더 많은 가정. 어쩌면 복지 사업 같은 걸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업을 쌓는 만큼 복록을 쌓아 올린다. 그로 인해 업의 고리에서 벗어나는 자. 남자의 주변에 붙은 수많은 귀신들이 결국은 그에게 해를 끼치진 못하는 모습이 내 추론이 사실임을 증명했다.
이게 뭐야. 허무한 웃음이 터졌다. 결국 누군가는 죄를 저지르고도 당당하게 사는데 누군가는 죄를 짓고도 대가를 치를 능력이 없어 평생을 밑바닥에 잠겨 있게 된다.
세상은 부조리해. 우울했다. 찢긴 입을 검은 실로 꿰맨 여자 귀신이 반갑다며 어깨 위에 발을 올렸다. 엄지발가락이 잘려 있었다. 여자가 깔깔깔 웃었다. 실에 꿰인 입이 열 갈래로 죽 찢어진 채 미친 듯이 돌아다니며 웃는 꼴을 보자 눈물이 나왔다. 볼 수 있는 자의 판단으로 말하자면, 역시나 나는 원장과 다를 바가 없다.
똑같이 최저의 인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