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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달콤한 시간 (3/24)

3. 달콤한 시간

테두리의 페인트가 벗겨진 현관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있었다. 오랫동안 열리길 기다렸던 건지, 파리하게 질린 그녀의 발밑에는 검붉은 피 웅덩이가 가득 고여 있었다. 응고되어 끈적한 피를 밟고 선 맨 발등에 칼자국이 깊게 나 있었다.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살인마가 등 뒤에 붙이고 있던, 골목에서 죽은 여자.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라는 걸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여자가 원하는 말을 해 주겠다고 결심한 건, 등 뒤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모든 귀신이 명령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열어라, 말해라, 들여보내 줘.

목소리는 무채색이었다. 문고리를 잡아 여는 순간, 희망이 언뜻 보인 얼굴과 피 웅덩이는 강제된 꿈 안에서 유일하게 색을 띠고 있는 것이었다.

……들어오세요.

속삭이며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휘청휘청, 여자의 긴 머리가 휘날렸다. 붉은 발자국이 싸구려 장판 위에 찍혔다. 한 뼘도 안 될 것처럼 작은 발 크기가 더 안타깝다. 빛이 가장 적은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중얼중얼거리기 시작한 목덜미가 파르스름하다.

잔인하게 살해를 당한 여성은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죽인 남자를 기다리면서 살의와 절망에 가득 차서 이지를 지워 나갔다. 이미 머물러 있던 귀신들이 일제히 집 안을 어지럽혔다. 환희에 찬 표정이었다. 또 들여보내 줘! 또 어지럽혀 줘! 아우성치는 소리에 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보통 모든 인간은 자신의 영혼을 백 프로 온전히 소유한다. 그러나 나는 이미 절반 가까이를 귀신에게 내주고 있었다. 절반을 차지한 비율이 점점 기울어,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면 내 몸은 귀신들이 통과하는 구멍이자 창이 될지도 모른다.

아마 무당은 귀신들에게 무의식을 침범당할까 우려했던 거겠지. 영혼과 육체의 결합이 약해져 꿈에서 다른 공간으로 불려 갔던 것처럼. 언젠가 영원히 되돌아오지 못할 수 있다. 내 상태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귀신들이었다. 그들은 육체가 없어서인지, 타인의 혼백이 약해진 상태를 쉽게 알아보았다. 이 인간은 이미 한계에 도달한 생명이다. 그렇다면 손에 넣기 쉽다. 꿈을 통해 초대받자. 영혼의 빈틈을 차지할 수 있도록.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애원한다.

너는 살 만큼 살았잖아. 이제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줘.

그림자처럼 어두운 인생의 일면을 바라보면 열두 쌍의 눈동자가 반달처럼 웃어 주고 있었다.

기대해, 기대하고 있어. 네가 육신을 두고 떠나가는 그날을.

그다음은 아무나 엉금엉금 몸을 타고 기어 올라와 목을 졸랐다. 이진현에게 당했던 것과 똑같은 모양으로 신나게 내 목을 조르며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네가 알고 있는 세상은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고, 비참한 현실을 보지 못해 꿈을 꾸고 있는 거라며 속삭이고 괴롭혔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 눈을 뜨니 새벽 4시였다.

정신없이 잤던 것 같다. 목이 말라 전기 포트에 있는 물을 컵에 따르며 반쯤 열린 커튼 바깥을 보았다. 아직 하늘은 캄캄했다. 땀에 젖어 끈적거리는 티셔츠를 벗고 벽에 붙은 거울을 보았다. 목에는 열 개의 손가락 자국이 검푸른 색으로 올라와 있었다. 멍 자국을 살짝 건드리자 욱신거렸다. 붉고 푸른색으로 얼룩덜룩한 목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누가 봐도 목이 졸린 모습이었다. 얼굴에 핏기도 없으니 거의 죽어 가는 병자 꼴이다. 출소하고도 시간이 꽤 지났지만 살은 도무지 오를 생각이 없었다. 일은 고된데 먹는 양은 적으니 오히려 감옥에 있을 때보다 체중이 줄었다. 그때는 몸은 고되도 정신은 덜 피곤했으니까.

이래서야 바깥에 나가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목이 졸렸던 후유증인지 몸에서 미열이 떨어지지 않았다. 덥고 추운 게 동시에 느껴지니 머리가 띵했다. 자다 깨길 반복하며 하루 종일 습하고 어두운 방에 있어서 그런 건지, 목구멍 안에 곰팡이가 피어 있는 기분도 들었다.

창문을 반쯤 가리고 있는 커튼을 걷어 올리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무당에게 뒤늦게 연락을 했지만, 그녀는 당분간 찾아오면 안 된다는 말만 했다. 때가 되면 다시 연락할 테니 기다리라는 엄포에 꼼짝 못 하고 집에만 처박혀 있었다. 낮에는 너무 더워 깼다가 밤이 되면 귀곡성이 무서워서 잠에서 깼다. 위장이 텅 비어 있는 게 느껴졌다. 배가 고프진 않았다. 대신 감각이 살아났다. 혓바늘에 도포된 미뢰가 꺼끌꺼끌했다.

언제부터 나는 태양이나 빛과는 연관이 없어졌을까. 눈앞이 어두웠다. 벽을 더듬거려 짚고 걸어가 작은 창 너머를 보았다. 오늘은 불청객이 없었다. 아쉬운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살아 있는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었다. 방을 채운 죽은 자들보단 살아 있는 것을 보아야 숨을 쉰다는 자각이 들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는 언젠가 잊어버릴지 모른다. 이름과 나이와 가치관과, 살아가는 이유와 생존 전략, 좋아하는 것, 먹고 싶은 것과 사고 싶은 것, 사랑하는 사람들과 싫어하는 사람들.

-휴대폰의 전원이 꺼져 있어…….

하재연의 휴대폰은 3일째 전원이 꺼져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문자를 남겨 봤지만 여전히 회신이 없었다. 벽에 등을 대고 주르륵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마른 다리를 쭉 뻗자 오목한 발바닥 안쪽을 귀신 하나가 쿡 눌렀다. 간지러워 발가락을 오므렸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이상하게 재연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귓속을 낯선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나는 당신이 정말 싫어.

작업반장이 머릿속에서 불쑥 튀어나와 삿대질을 했다. 네놈의 액운에 휘말려 애꿎은 자신이 다쳤다고 저주를 퍼부었다. 민폐, 인간쓰레기, 나쁜 새끼. 피와 살점이 튀어 만들어진 건물이 우르르 무너졌다.

혐오가 뒤섞인 목소리는 귀신이 흉내 내는 것이란 걸 안다. 하지만 정말로 낯설지 않은 말이라 들을 때마다 사람들에게서 밀려나는 기분이었다.

쓸모없고 비참한 생각에 빠져 있다 결국 몸을 일으켰다. 깊이 고인 땀과 먼지를 씻어 낸 후 목에 있는 손자국을 가리기 위해 촌스러운 손수건을 찾아 묶었다. 우스꽝스러운 몰골이었지만 폭력의 흔적을 달고 돌아다니는 것보단 나았다. 신발을 신고 일어서자 집 안에 있던 귀신들이 우르르 시선을 내 등 위로 꽂았다. 등가죽이 벗겨지는 기분이었다. 몇 번 몸을 비틀어 근육을 풀어 주고는 문을 열었다.

아직 초대받지 못한 귀신들이 악취를 풍기며 문 앞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흐물흐물 녹은 입술을 움직이며 입과 손가락으로 똑똑, 노크 소리를 낸다. 애써 고개를 돌리고 1층으로 뛰쳐나왔다. 더운 바람이 코와 입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움직이기는 딱 좋은 낮이었다.

[나는 당신이 마음에 들어. 일하고 싶다면 시켜 주도록 하지.]

이진현 이사에게서는 구애와 비슷한 사업 권유가 끝없이 오고 있었다. 질식하기 직전까지 사람 목을 졸랐던 주제에, 무당이라니 흥미로워 잠도 못 잤다고 조롱하는 내용을 가득 담은 메시지를 틈만 나면 보내 휴대폰 문자 사서함을 채웠다.

[사실 권유나 제의라기보단 명령인데, 이것도 예지몽으로 미리 꾸셨을까?]

믿지 않는다는 티를 그렇게나 기분 나쁘게 낼 수 있는 것도 능력이겠지. 개새끼. 비틀린 심정을 억누르며 지하철 게이트에 카드를 찍었다. 재연이 사는 지역은 지하철을 타고도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것도 세 번이나 갈아타야 한다. 그쪽도 나름대로 구석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며 지하철 창문에서 시선을 뗐다. 여기는 귀신이 너무 많았다. 자살한 경우가 많기 때문인지, 쿵, 쿵, 하고 물체가 부딪치는 소리에 귀가 먹을 지경이었다.

멀미 때문에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자판기에서 탄산음료를 하나 뽑았다. 지하철을 타고 내렸을 뿐인데 해가 한 뼘이나 내려가 있었다. 높은 기온에 반팔과 반바지를 입은 사람들이 더 많은 날씨였는데, 목에 손수건을 칭칭 감고 있으려니 숨이 막혔다.

혹시 아파서 쓰러진 건 아닐까, 하룻밤 신세를 졌던 원룸에 가서 벨을 눌렀지만 응답이 없었다. 몇 번이나 문을 두드리면서 재연의 이름을 부르자 옆집의 남자가 뛰쳐나와 엄청나게 화를 냈다. 층간 소음의 주범이 되는 바람에 거듭 사과하고 나서 쫓기듯 건물 밖으로 나왔다.

아무런 소득도 없이 건물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기억을 더듬어 재연이 아르바이트하던 가게에 찾아갔다. 낮이어서 그런 건지 주인이 가게를 보고 있었다. 주말 낮인데도 손님이 거의 없었다. 처음 방문했을 때 골목 끝까지 줄이 길게 서 있던 풍경과는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파리가 날리자 기분이 좋지 않은지 주인은 휴대폰으로 드라마를 보면서도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주말 연속극인지 휴대폰에서 나오는 오디오는 엄청나게 시끄러웠다.

“저기…… 자동으로 두 장이요.”

“2천 원. 현금.”

주머니에 있던 천 원짜리 두 장을 꺼내 내밀며 눈치를 봤다. 주인은 입술을 꽉 다물고는 성의 없이 복권을 끊어 내밀었다.

“혹시, 아르바이트하는 남학생 오늘도 오나요?”

“뭐? 알바?”

“네, 하재연이라고요…….”

“그놈을 여기서 왜 찾아!”

주인이 침까지 튀겨 가며 버럭 소리를 지른다. 갑자기 급하다고 3일 전에 일을 그만둬서 민폐가 크다며 역정을 냈다. 나와 헤어졌던 날이다. 그때 하재연은 아르바이트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그만뒀다니 수상쩍었다. 하재연은 지금 어디 있지. 오늘은 주말이니 학교에 갔을 리도 없었다.

아니, 3일 내내 연락이 안 될 만한 사람이 아니다. 기묘할 정도로 눈치 빠르게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을 허락한다고 말하자 없어졌던 집 안의 귀신들. 무당의 충고를 무시하고 업을 쌓자마자 그것들은 기세가 등등해져 돌아왔다. 혹시, 내 잘못으로 가까운 사람들에게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면.

복잡한 심경으로 골목 안을 돌아다니다 공원에 도착했다. 아기자기한 쉼터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맞은편에 지팡이를 짚은 노인 두 명이 담소를 나누고 있는 게 전부였다. 나뭇가지가 뻗어 그늘이 져 있는 벤치 하나를 골라 앉았다. 휴대폰을 켰지만 여전히 재연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고민하다 서주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쪽도 연락이 안 되는 건 아닌지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전화를 받는다. 자고 있었는지 잠기운이 뒤섞인 몽롱한 목소리였다.

-어, 네가 어쩐 일이냐. 먼저 연락을 다 하고?

“미안. 물어볼 게 있는데.”

-응?

“하재연 어디 있는지 알아봐 줄 수 있어?”

초조함에 갈증이 올라왔다. 방금 마신 콜라가 배 속에서 끓어올랐다. 뿌연 거품이 밀도 짙은 색으로 올라와 넘쳤다.

-하재연? 걔는 갑자기 왜?

“갑자기 연락이 안 돼. 무슨 일이 있나 해서…….”

-사는 집엔 가 봤어?

“갔어. 그런데 없고, 일도 그만뒀다고 하고.”

-뭐야. 언제부터 그렇게 친해졌냐. 역시 하재연이 그 반반한 얼굴로 꼬신 건가.

“제발 닥쳐라.”

진심인데. 투덜거린 주영이 졸음이 조금 가신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았어. 나도 찾아볼게.

“응, 부탁할게.”

통화가 끝난 액정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한참 휴대폰을 내려다보다 한숨을 쉬었다. 생각보다 별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최근 있었던 일 때문에 괜히 예민해진 거로 생각하고 싶다.

넋을 빼고 앉아 있는데 분홍색 고무공 하나가 굴러왔다. 꽃무늬가 옹기종기 찍힌 공은 표면이 부드럽고 말랑말랑해 보였다. 어린아이들이 가지고 놀기 좋은 크기였다. 언제부터 놀고 있었는지 노란 원피스를 입은 꼬마 여자아이가 종종걸음으로 뛰어왔다. 머리에 꽂은 커다란 해바라기 꽃핀이 빛을 받아 눈부셨다.

“오빠, 그거 좀 주워 주세요.”

동그란 눈이 귀엽다. 선뜻 허리를 숙여 고무공을 주워 건네주자 재빠르게 품에 끌어안는다. 턱 밑에서 흔들거리는 단발머리에 햇빛이 총총히 반사되고 있었다.

“혼자 왔어?”

보호자로 보이는 어른은 없었다. 조금 전까지 대화를 나누고 있던 노인 둘도 자리를 막 뜨고 있었다. 해가 기울어 가는 시간에 아이 혼자 놀고 있는 게 영 신경 쓰였다. 무서운 일은 끝도 없이 일어나는데 혼자 지내야 하는 아이들이 더 많다. 범죄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상징처럼.

“네.”

“친구들은?”

“친구들 없어요.”

“아무도?”

“있긴 있는데 다 밥 먹으러 갔어요.”

풀 죽은 아이 얼굴과 어린 뺨에 맺힌 우울한 기운에 마음이 쓰였다.

“놀아 줄까?”

“정말요?”

확 밝아지는 안색을 보자 말을 잘 꺼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번 공을 주고받으며 놀아 주자 즐거운지 방글방글 웃는다. 우울했던 게 언제였나 싶을 정도로 아이는 발랄하게 공을 바닥에 굴렸다. 능숙하게 손바닥으로 고무공을 튕기며 잘하지 않냐며 자신의 재주를 보여 준다. 적당히 손뼉을 쳐 줬더니 까르르 귀여운 소리를 낸다.

“재밌다.”

“그래?”

“응.”

“그래도 이젠 늦었으니 얼른 집에 가.”

늦은 시간까지 붙잡고 놀아 준 사람치고 쓸데없는 잔소리였는데도 아이가 기분 좋은 얼굴로 활짝 웃었다. 손가락으로 말랑거리는 고무공을 꾹꾹 누르며 고개를 끄덕인다.

“한 번만 더 하고. 응?”

“좋아, 딱 한 번만이다.”

“신난다!”

몇 번째인지 모를 마지막 딱 한 번이다. 튕겨 낸 공을 잡아 휙 집어 던졌다. 힘을 너무 많이 줘 버렸는지, 길게 포물선을 그리고 날아간 공이 아이의 뒤로 떨어져 굴러갔다. 에잇. 아이가 투덜거리며 공을 쫓으러 뛰어갔다. 벤치에 앉은 채로 작은 몸이 야무지게 뛰어가는 걸 웃으면서 바라봤다. 어쩐지 강아지 같다. ‘물어 와!’라고 말하면 잽싸게 물어 올 것처럼…….

입가에 걸려 있던 웃음이 서서히 경직되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이상하게 눈에 거슬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지금은 노을이 진 시간이다. 해가 서편으로 넘어가면서 길게 그림자가 지고 있었다. 세 배는 길어진 가로등의 그림자. 한 뼘 늘어난 햇빛이 투과된 고무공의 그림자. 나뭇가지와 잎과 꽃의 길쭉한 그림자. 벤치와 내 늘어진 육체의 그림자.

온갖 그림자가 뒤섞인 놀이터의 바닥에 아이의 그림자는 없었다.

막 공을 끌어안고 돌아오던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해맑고 천진하던 미소가 순식간에 뚝 그쳤다. 놀아 줘서 고맙다고 애교를 부리던 얼굴은 오간 데 없었다. 목덜미 부근에서 명랑하게 흔들리던 검은 단발 한쪽에 꽂아 둔 화사한 머리핀의 색이 뚝 떨어졌다. 아이의 발밑부터 천천히 세상이 흑백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진공 포장처럼 꼼꼼하게 밀봉된 세상이다.

「아, 들켰네.」

어린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성성한 백발을 휘날리며 아이는 냉소적인 표정을 지었다. 사람이 아니었구나, 그제야 깨달았다.

「이제 알아차리다니, 꽤 둔하구나.」

“질이 나쁘잖아.”

「응? 설마. 알아차리지 못한 오빠가 더 바보지. 몰랐어? 혼자서 멍청하게 이야기하며 공중에 팔을 뻗는 오빠 때문에 저기 앉아 있던 늙은이들도 도망갔다고.」

키득키득 웃는 목소리는 여전히 밝고 애교가 넘쳤다. 목소리를 내 인간인 척 행동하고, 이지를 가진 귀신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작은 공원 안에서 오랫동안 살아왔던 지박령인 모양이다. 당하고 나서야 왜 공원에 사람이 적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귀신이 나와 홀린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면 어린아이부터 발길을 끊는 법이다.

“여기서 죽었어?”

「실례되는 질문이잖아.」

“실례는 그쪽이 먼저 했어.”

「까다롭긴.」

아이가 고무공을 바닥에 퉁퉁 튕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기서 죽었어. 죽은 과정도 말해 줄까?」

“필요 없어.”

「사양하지 않아도 괜찮아.」

속삭이는 목소리 끝에 환영이 펼쳐졌다. 단발머리를 한 어린아이가 고무공을 굴리며 놀고 있었다. 머리에 있는 해바라기 꽃핀이 귀엽다. 들꽃이 무성하게 피어난 놀이터에 아이는 혼자 있었다. 해가 저물어 가고 마지막으로 자리를 뜨는 친구를 배웅하며 한숨을 내쉰다.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일을 나간 엄마는 오늘도 늦다.

시무룩한 얼굴로 고무공을 품에서 굴리는데 누군가 나타났다. 아저씨가 놀아 줄까, 하는 말에 신이 나 고개를 끄덕였다가 살해당했다.

변태적인 소아성애자는 아니었다. 그냥 정신이상자였고, 백치에 가까운 지능을 가진 남자는 만화책에 나오는 엽기 살인 사건을 읽고 흉내 냈던 것뿐이었다. 만화에 나오니까 똑같이 따라 해 봤다고. 법원에서는 그의 정신병을 이유로 솜방망이 판결을 내렸고, 하나뿐인 딸이 죽은 동네에서 생활할 수 없었던 엄마는 이사를 했다.

떠나지 말라고, 자신은 이곳에 있다고 몇 번이나 소리쳐서 불렀지만 사람들은 자신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다. 정말로, 정말로 오랜 세월이었다. 아이는 엄마를 기다렸다. 꽃 한 송이라도 놓아 주던 이웃들의 발걸음이 뜸해지고, 또 오랜 세월이 지났다. 긴 시간 내내 아이는 엄마를 기다렸다. 피어 있던 들꽃이 뽑히고 낡은 미끄럼틀 대신 파란색 귀여운 미끄럼틀이 들어왔다. 모래 대신 말랑말랑한 인공 바닥재가 새로 깔리고, 여름이면 시원한 물장난을 칠 공간도 생겼다.

해가 질 때쯤 아이들 앞에 나타나 놀아 달라고 졸랐지만 다들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점점 인적이 드물어진 공원은 더운 여름에 물을 채워도 사람들이 잘 찾지 않았다.

오랜만에 인간이 놀아 줬다. 어리석고 멍청한, 이미 인간의 도리를 저버린 인간이었으나 아이는 관대했다. 조금 기뻤다. 이것이 아이의 가감 없는 순수하고 슬픈 사고였다.

불행한 과거 기억을 보여 준 건 짓궂은 장난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를 속였어도 미워할 수 없는 것은 정말로 아이가 즐거워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고무공을 던지고 받는 놀이 정도야, 오랜 세월 지박령으로 머물러 온 아이에게는 시시했을 테니까.

세월이 지나 낡은 꽃핀을 머리에 고쳐 꼽은 아이가 사근사근한 어투로 말했다.

「그래도 놀아 줬으니 오빠, 충고를 하나 해 줄게.」

“충고?”

「지금 전화 올 사람과 친하게 지내.」

아이가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휴대폰을 가리켰다. 아무 연락도 없는 휴대폰 액정은 잠잠하게 가라앉은 검은색이었다. 무슨 말이야, 물어보려던 찰나 진동이 울렸다. 온종일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던 사람의 이름이 떠 있었다.

「오빠의 죽을 팔자를 막아 주고 있으니깐.」

“죽을…… 팔자?”

휴대폰은 끝없이 울리고 있었다. 받지 않으면 그만 걸어도 될 텐데, 전화는 끊겼다가 몇 번이나 다시 이어졌다. 마치 저 아이와의 대화를 방해하고 싶은 것처럼.

아니야, 자의식 과잉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전화는 쉼 없이 울렸다. 아이가 한숨을 쉬었다.

「이제 그만 가야겠어. 다음에 또 놀아 줘야 해?」

“팔자를 막아 준다니, 그게 무슨…….”

「안녕, 오빠.」

“잠시만.”

물어보기도 전에 아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놀이터 근방을 구석구석 뒤지며 단발머리 소녀를 찾았다. 고무공의 흔적이라도 찾으려고 애썼지만 보이지 않았다. 하재연은 벌써 일곱 번째 전화를 걸고 있었다.

‘형이 없어서 저 정도로 끝난 거라고요.’

공사장에서 사고가 날 때 하재연이 나를 꽉 붙잡고 그런 말을 했다. 소름이 오싹하게 끼쳤다. 그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 주위에 일어날 일, 사건과 문제점. 농담처럼 자신에게 신기가 있다고 말했다. 그게 사실이었고, 모든 접점에 하재연이 수작을 부리고 있었다면? 이진현 이사를 만날 일조차 예상하고 있었거나, 집에 있는 귀신들을 잠깐 거둬 간 것도 하재연이라면?

걸려 오는 전화를 무시하고 무작정 재연을 찾아 뛰어다녔다. 어디서 알 수 있지. 나는 어떻게 살아 있는 거야?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동네를 돌아다녔다. 뜨거워진 휴대폰을 손에 쥐고, 손바닥 살을 울리는 진동의 감촉을 느끼면서 풍차처럼 수 바퀴를 돌았다. 머리 대신 눈앞이 핑글핑글 돌았다.

결국 돌아온 곳은 놀이터였다. 아까 전에 앉아 있던 벤치는 다른 사람이 등을 구부정하게 숙인 채 차지하고 있었다.

액정을 내려다보던 남자가 손가락을 움직여 한곳을 누른다. 내 뒷주머니에서 죽을 듯이 울리던 진동도 같이 멈췄다. 재연아. 입 모양으로 이름을 불렀다. 소리가 나지 않았을 텐데 재주도 좋게 고개를 든다.

“……하재연.”

“어, 형이다.”

창백한 얼굴이 노을에 딱 보기 좋은 색으로 물들었다.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변하는 얼굴이, 마치 놀아 준다고 말하자 즐거워하던 귀신과 비슷했다.

지금, 사람을 자연스럽게 귀신과 비교했다. 거북한 마음에 한 발짝 뒤로 주춤거렸다. 하재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여기 있어요? 전화를 안 받아서 무슨 일이 있나 걱정했어요.”

“그게.”

“혹시 여기까지 나 찾으러 왔어요?”

뇌는 어지러운 구조로 만들어져 있었다. 행동과 사고를 지시하는 뇌에서, 이성적인 부분은 몇 퍼센트나 될까.

인간은 본능적으로 비상식적인 일을 믿지 않으려고 한다. 우연이란 말은 단단하게 굳어진 방어적 사고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나는 하재연을 대상으로 몇 번이나 그 단어를 읊었다. 우연이 겹쳐진다면 필연이다. 내가 누군가에 의해 계획된 코스를 걸어가고 있었다면. 모든 기억이 왜곡된 과정으로 유도된 방향이었다면……?

“연락을 못 받은 거 미안해요, 배터리가 다 된 줄도 모르고 있어서…….”

“…….”

“주영이 형한테 연락받았어요. 갑자기 어머니가…… 아, 그러니까 양어머니께서 아프셔서 본가에 들렸다 오는 길이에요.”

왜 처음부터, 하재연을 만났을 때 공포심을 느꼈는지 알았다. 나는 짐승이다. 몸을 낮추고 먹잇감의 긴장이 풀어지길 기다리는 포식자의 눈깔을 제대로 마주하고 있는 연약한 짐승이었다.

너를 믿지 않을 거야. 중얼거리며 한 발짝 더 뒤로 물러섰다. 재연이 의아한 얼굴을 하며 다시 한 발짝 붙어 왔다. 형? 한없이 깨끗한 얼굴이 손을 뻗었다. 순간 소름이 끼쳐 와 본능적으로 팔을 휘둘렀다. 피부가 거세게 마찰하는 소리가 났다.

화끈거리는지 손등을 잠깐 감싸 쥐었던 재연이 의아한 얼굴로 바라봤다. 의심이 나쁜 병이라는 걸 알면서도 하재연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친하게 지내라고? 저렇게나 기질이 귀신에 가까운 인간인데, 신이 될 뻔했던 인간이라는데. 귀신이 하는 말을 믿을 것 같아? 뻔뻔하게 그 꼬마 귀신을 교육했을지도 모르지.

“……가까이 오지 마.”

“뭐라고요?”

재연이 당황해서는 되묻는다.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다짐하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왜 그래요? 연락 못 받아서 기분 많이 상했어요?”

부드럽게 어르고 있었지만 저게 달콤한 맛을 가진 독이라는 걸 안다. 끝은 분명히 쓰고 비릴 것이다. 쉬어 살점이 문드러져 잡고 있던 손도 같이 썩어 버릴지도 모른다.

“도대체 뭐야?”

“형, 설명을 해 주세요. 갑자기…….”

“괴롭히지 마.”

과거에서 돌아와 눈을 뜬 이래로 한 번도 고통스럽지 않은 적이 없었다. 원장을 혐오했던 원인을 이번 생에서 내가 직접 행했을 때, 몇 번이나 불안한 정신을 억지로 붕괴하고 다시 쌓았다. 그러나 낡고 해진 블록 장난감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견고한 집을 지을 수는 없었다.

수십 번 무너졌다. 귀신들에게, 사람들에게. 나 역시도 스스로를 수천 번 무너트렸다. 혐오에 이기지 못한 손으로. 그러니 하재연까지 이래서는 안 된다. 손가락으로 건드리면 오므라드는 미모사가 될 수는 없노라고.

“죽을 팔자를 막아 주고 있다고?”

“형.”

“누구 마음대로?”

“…….”

“제발 나 좀 이대로 놔둬.”

“…….”

“네가 괴롭히지 않아도 나는 죽어!”

육체가 혼의 무게를 버티지 못한다면 끝은 죽음이다. 잘 알고 있었다. 매일 밤 꿈에서 집으로 악귀들을 초대하고 있었으니 얼마 남지 않았다. 저번 생에서는 스물아홉에 죽었던가. 이번에는 그것보다 더 일찍 죽을지도 모르겠다. 아마, 이번 해가 가기도 전에.

깨달았을 때 찾아온 것은 비탄보다는 환희였다. 이 죽음을 막아서는 안 된다. 그럴 권리가, 하재연에게는 없었다.

“야, 윤이원.”

재연이 갑자기 이름을 불렀다. 존칭어가 생략되어 있었다. 늘 무릎을 한 뼘씩 굽히고 내 얼굴을 올려다보던 재연의 자세가 발돋움하고 한껏 선 것처럼 높아졌다. 저절로 시선이 딸려 올라갔다.

“내가 우스워?”

화가 난 얼굴이었다. 왜 화를 내는 거야? 자신의 마음대로 조종당하지 않아서 분한 걸까. 생각을 멈추고 재연을 올려다보았다.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하얗고 파리하게 질린 얼굴이 멍이 든 목의 피부를 닮아 있었다.

“살려 달라고, 살고 싶다고 한 너는 어디 갔어?”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노력하고 있으니 알아 달라는 말은 하지 않을게.”

“…….”

“하지만 노력하는 사람 맥이 꺾이는 소린 하지 마.”

어둡게 깔린 목소리가 애원하고 있었다. 아픈 표정을 짓고 있는 하재연의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무슨 노력을 하고 있는데……?”

목소리가 떨렸다. 괴로움은 산 자의 몫이었다. 정확하게는 내게 주어진 몫이었다. 지옥에서 그렇게 하라고 가르쳤다. 그게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나를 위해 누군가 노력할 거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다.

단 한번도 삶을 바꾸기 위해 노력한 적이 없었다. 어쩌다 보니 태어나자마자 버림을 받았는데, 우연히 발견되어 원장의 손에 길러졌다. 원장은 끔찍한 여장을 시켰지만 그 기대감과 사랑을 배신하고 싶지도, 상황을 개선하고 싶지도 않아 노력하지 않고 그저 현실에 순응했다. 마지막에도 죽음의 고통과 복수의 의무 앞에 주어진 길이 달콤했기에 선택했다. 회귀의 과정과 지옥의 인내 역시 선택을 이루기 위해 강제된 일을 행하였을 뿐이다.

나에게 노력이라는 것은 단어였지 삶은 아니다. 한 번도 이번엔 잘 살아 보겠다고 노력하지 않았으니 남의 노력은 더욱 어색했다. 하재연이 왜 나를 위해.

의문이 들었을 때, 재연이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이고 속삭였다.

“나는 알고 있어. 당신이 삶을 반복했다는 걸.”

“어떻게……?”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고 재연의 팔에 매달렸다. 후들거리는 몸을 잡아 세우며 재연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살짝 벌려진 입술 사이에서 악물린 잇소리가 나왔다.

“그게 중요해?”

“그럴…… 아무도 몰랐어. 어떻게.”

“나는 다 알아. 당신이 원장을 왜 죽였는지, 왜 그렇게 살고 있는지도 알지.”

그렇지만, 하재연은 말에 전환점을 만들고는 내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끼워 넣어 안아 들었다. 성큼 가까워진 거리를 통해 재연의 체향이 느껴졌다. 품 안에 코를 박고 있으니 바람 냄새가 났다. 흙냄새 같기도 했고, 수풀의 냄새도 났다. 달콤하기도 했고, 맵고 쓰린 담배 냄새도 섞여 있었다.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향이었지만 불쾌하진 않은 냄새다. 오히려 기분을 편안하게 만드는 살냄새였다.

“그렇지만…… 나는, 형을…….”

입술을 한껏 깨물었다 놓은 재연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체향이 조금 더 짙어졌다. 그것은 눈을 간지럽히고 머리를 망가트렸다. 손가락으로 뇌를 주무르는 것 같은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다.

“형이 무슨 짓을 해도 말리지 않아요.”

“뭘……?”

“어떤 업을 쌓더라도, 하고 싶은 대로 살도록 지켜 줄게요.”

“도대체 왜……?”

“나는 그자가 아니야.”

그자. 재연은 모르는 누군가에 시선을 두며 화를 내고 있었다. 눈에 보일 정도로 선연한 분노가 재연의 손가락을 타고 꾹 날개뼈를 눌렀다. 정확하게 화상 흉터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이었다.

등을 더듬던 재연이 남은 손으로 가만히 이마를 매만졌다. 부드러운 손가락 끝이 이마와 뺨을 간질간질하게 쓸고는 내게 입술을 붙여 왔다. 눈꺼풀과 입술, 턱 끝으로 차례대로 입을 맞춰 오더니 거추장스러운 손수건을 풀어내고는 멍이 얼룩덜룩하게 들어 있는 목덜미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너는 누구야……?”

번뇌가 태어났다면 하재연이란 사람은 아닐까. 아주 이상한 생각을 하며 재연을 보았다. 웃었다. 그는 철학적인 덩어리 같았다. 존재하기 때문에 내게 번뇌를 안겨 주는 것이다.

“형을 사랑하는 사람.”

시간을 돌릴 기회를 주었을 때, 신은 내 미래에 대해 예언했다. 너는 운과 복록을 전부 써 버렸으니, 인생은 비참하기만 할 것이다.

“윤이원을 사랑하는 사람.”

목이 메였다. 오늘은 집에서 쉬어야 했는데 아무래도 무리를 한 모양이다. 통제를 어긋난 몸에서 열이 오르고 있었다. 재연의 눈동자에 비친 모습은 걸어 다니는 해골 같은 몰골이었다. 피골이 상접한 저 꼴이 예뻐 보이지는 않는데. 낯선 사랑이 버거워 쓸모없는 생각을 했다.

***

사랑에 대해 구술해 볼 기회를 가져 보자. 윤이원이란 인간이 태어나 배워 온 사랑은 두 종류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나는 원장이 준 박애주의적 사랑과 재연이 넘겨준 이기주의적 사랑. 두 가지가 내가 배운 사랑이다.

당황스러운 마음은 그 이분법적인 감정에서 태어났다. 과거에 얼마나 재연을 사랑했냐 물어본다면 아주 평범한 사랑이었다고 대답할 수 있었다. 어릴 적 손을 잡았던 뜨뜻미지근한 박애와 동정이 자리를 잡고 나이를 먹어 성인의 사랑이 되었노라, 몇 번이고 말할 수 있었다. 먼저 사랑을 해 주겠다 결심한 적은 없었다.

처음 배웠던 사랑이 배신으로 끝이 나서일까. 재연의 사랑은 좀 더 빨리 잊혔다. 재연이 졸라 시작된 연애 관계였으니 집착이 깊을 수는 없었다. 원장에게 분노해 시간을 돌렸을 때조차 재연과 나눴던 사랑을 되짚어 본 적이 없었다. 뼛속까지 절망하는 이유 중 하나가 하재연이 된 적은 있었어도, 그게 전부가 되어 주진 않았다. 나는 이기적인 인간이다.

“그래서 부모까지 팔아먹고도 저 산송장을 지키겠다고?”

무당의 목소리다. 가늘게 눈을 떴다. 어둑어둑한 방 안에 험상궂은 탱화(幀畵)*가 눈에 들어왔다. 무당이 신을 모시고 손님을 받는 신당이었다. 빛이 드리운 벽에 장군신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 바로 아래에 앉은 재연의 얼굴이 반쯤 녹은 촛불에 그늘져 애처로워 보였다.

“송장이 아닙니다. 제 연인이에요.”

“이런, 미련한 놈.”

“…….”

“얼마 못 갈 시체를 끌어안고 살면 행복할 것 같으냐?”

“그럼요.”

하재연의 목소리가 타는 듯 뜨거웠다. 아. 손가락을 잡아 오는 재연의 온기는 잊히지 않을 추억을 가지고 있었다. 점점 올라간다. 온도가 상승한다. 기억이, 사랑의 감정이 넓어진…….

깜박깜박, 시야가 좁았다 서서히 넓어지기 시작했다. 조금 오래되어서 추억에서 흙먼지 빛깔이 나는 이야기였다. 예전에 재연이 사랑한다고 고백한 후로, 다시 시간이 지나서 합당하게 또 한 번 사랑을 의논할 시기의 어떤 말이었다.

우리가 배워 온 말의 정의는 의사소통의 도구였다. 하재연이 사용하는 말은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도 되었지만 감정을 전달하는 기교에 가까웠다. 스무 살이 된 그 애가 처음 내게 한 말은 입을 맞추고 싶다는 절절한 성욕이었다.

키스하기 전이나 섹스를 하기 전 재연의 행위는 꽤나 단계적이었다. 머뭇거리다가 입술에 한 번, 귓불과 눈 밑을 한 번 더듬었다. 손가락 끝에 꼼꼼히 입을 맞추는 것 역시 그의 오래된 습관 중 하나였다. 분홍빛이 근근이 도는 손톱을 아프지 않게 깨무는 재연의 뺨을 비벼 봤다. 남자애 같지 않게 복숭앗빛이 도는 부드러운 살결까지, 사랑을 몽글몽글 채워 만든 사람 같았다.

하재연은 내 몸을 번쩍 들어 올리곤 했다. 다 큰 남자를 들어 올리면 힘들지 않냐고 물었다. 재연은 깃털보다 가볍다며 신이 나서 웃었다. 어렸던 아이가 활짝 피어서 두 팔로 나를 안아 올리는 데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학생이던 재연의 고백을 받은 후 부담스러운 마음에 무시하고 외면했지만 아이는 기어코 성인이 되었다.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사계절 내내 사랑이 사무쳤다. 정말로 좋아했다, 사랑하고 또 사랑했다. 사랑에 파묻혀 죽어 버리고 싶었다. 따뜻한 온기, 돌풍처럼 불어오는 꽃잎의 바람과 입술 사이를 파고들던 언어의 달콤함.

“그럼요, 얼마나 기꺼운지 모릅니다.”

깜박, 깜박…… 시야가 점점 더 깨끗해졌다. 손가락에 힘을 겨우 줘서 고리를 거는 것처럼 쥐자 재연이 웃는다. 뺨을 토닥거리면서 얼러 주는 몸짓에 다시 잠이 쏟아졌다. 눈을 감을까 말까 고민하는 걸 알아챘는지 무당이 성을 냈다.

“그만 자고 일어나. 젊은 놈이 왜 이렇게 빌빌거려?”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머리만 들어 올려 앞을 봤다. 무당이 풀 냄새 날 것처럼 빳빳하게 다듬은 한복을 입은 채 무릎 한쪽을 세워 앉아 있었다.

왜 여기……. 입 모양만 움직이며 벙긋거렸는데도 재연이 용케 알아채고 대신 대답했다.

“형이 걱정돼서 와 주셨어요.”

“내가 저놈을 뭣 하러 걱정해? 저놈이 멍청하게 굴어서 화병이나 안 나면 몰라.”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그리고 내가 온 거냐, 네놈이 기어코 찾아온 거지.”

재연이가 사근사근하다. 무당에게는 저 뻔뻔하고 의뭉스러운 인간도 내숭을 떠는 모양이었다. 그의 부축을 받아 몸을 완전히 일으켜 앉았다. 등과 허리를 받쳐 주는 팔에 기대서 무당을 보았다. 안색이 그리 좋지는 않아 보였다. 머리가 희끗희끗하게 세 있다. 벽을 차지한 장군신도 꽤 피곤한 얼굴이었다. 영혼도 피곤함을 느끼던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 물었다.

“둘이 아는 사이였어요?”

“아니.”

“아뇨.”

사이좋게 똑같은 대답을 한다. 아무리 봐도 아는 사이 같은데. 의심을 숨기지 못하고 얼굴 표정을 일그러트리자 재연이 히죽 웃었다.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사이일 뿐이에요.”

“이해관계라니, 이 막돼먹은 놈이.”

“환자 앞에서 거친 언행은 삼가세요.”

이해관계치고는 사이가 좋아 보이는데……. 더 말해 봐야 싸움만 붙일 것 같아 한숨을 쉬고 말았다. 재연이 뒤에서 끌어안은 채로 부스럭거리더니 쟁반 하나를 허벅지 위에 올려 준다. 묵직하고 따뜻한 무게에 무심코 쟁반을 내려다보았다. 고소한 계란죽이 담겨 있었다. 파와 양파, 당근까지 곱게 썰어 넣고 끓여 알록달록한 색이 꽤 예뻐 보인다.

“형 온종일 잤어요. 좀 먹어요.”

“어, 응…….”

“자요.”

죽 한술을 곱게 뜬 숟가락이 영 불편하다. 뻐근한 목 근육을 억지로 돌려 뒤를 돌아봤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재연이 숟가락을 위아래로 살짝 흔든다.

“안 먹어요?”

“내가 먹을 수 있는데.”

“아하, 그럼요.”

대답은 잘하는데 숟가락을 넘겨주진 않는다. 멀뚱멀뚱 보고만 있으니 숟가락으로 입술을 꽉꽉 눌러 오기에 어쩔 수 없이 받아먹었다. 조금 식은 죽은 고소하고 부드러웠다. 한 입을 삼키고 나니 다음은 아예 조르는 것처럼 입을 벌리고 죽을 주는 대로 삼켰다. 달고 부드럽다. 마음 같아서는 두 그릇, 세 그릇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무당이 그 꼴을 보고 역겨웠는지 침 뱉는 시늉을 하며 화를 냈다.

“망할 놈, 남의 집을 꿰차고 앉아서 처먹으니 잘 들어가더냐?”

“……뭐…….”

재연의 품 안에 안긴 채로 주변을 훑었다. 몸 주위를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초가 켜져 있었다. 상당한 폐를 끼쳤다는 자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몸과 정신의 틈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손을 뻗은 채 앞뒤로 돌리다 손가락을 하나씩 구부려 보았다. 천천히, 최대한 부드러운 동작으로 접었다 손을 펼쳤다. 생각대로 따라 주지 않던 몸이 다시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잘 챙겨 먹고 기력을 회복하면 금방 험한 일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상했다. 하재연을 찾기 위해 동네를 돌아다니던 순간에도 영혼은 몸에서 찢어져 나갈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꼬마를 귀신이라고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던 것도 그런 문제였을 것이다.

“왜, 멀쩡하니 신기해?”

멀찍이 떨어져 사람을 구경하던 무당이 면박을 먹였다. 완고한 얼굴을 빤히 바라보자 점점 더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더니 토라지는 것처럼 몸을 완전히 틀어 앉아 버린다. 속이 꿍한 모양이다.

“저, 어떻게 된 거예요?”

“몰라.”

“산송장이라고 하셨잖아요.”

“귀도 밝다, 이놈아.”

날 선 목소리에 섞인 한탄이 느껴져 쓴웃음을 지었다. 쟁반을 옆에 내려 둔 재연이 몸을 고쳐서 끌어안으며 대신 대답했다.

“괜찮아요. 음…… 그냥 다 괜찮아요.”

“괜찮긴 뭐가!”

“보살님.”

“이런 젠장.”

둘이서 의문스러운 대화를 하며 투닥투닥 싸운다. 답답하니 제대로 설명을 좀 해 줬으면 좋겠는데. 생산성이라곤 조금도 없는 대화를 경청하는 척하다 촛불 하나를 손바닥으로 완전히 눌러 꺼 버렸다.

“형!”

“이놈아!”

손바닥 중앙에 정확하게 남아 있는 화기에 재연이 얼음을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무당은 목까지 빨갛게 변해서는 소리를 버럭버럭 질렀다.

“생각이 있어, 없어? 치성드리기 위해 켜 둔 촛불을 그렇게 함부로 끄면 어쩌자는 거야!”

“어차피 장식용이었잖아요.”

“뭐어?”

“다는 몰라도 조금은 알아볼 수 있어요. 이때까지 괜히 살았던 건 아니에요.”

“저게 정말 입만 살았구나.”

기가 막히다며 무당이 혀를 찼다. 없는 힘까지 다 끌어모아 싱글싱글 웃어 주자 무당이 힘 빠지는지 시름시름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무모한 일 좀 하지 마세요.”

하재연이 다친 손바닥 위에 얼음 조각을 올리며 혀를 찼다. 차가운 얼음이 손바닥 위에서 화기를 식히며 천천히 녹기 시작했다. 오목한 손바닥 중앙에 고이는 찬물을 빤히 바라봤다.

재연은 얼음이 다 녹을 때까지 기다렸다 수건으로 손바닥을 닦고 연고를 발라 줬다. 까맣고 단정한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섬세한 사람이구나, 하고 객관적이지 못한 평가를 했다.

“눈꼴 시린 것들.”

“저는 빼 주세요.”

간질간질한 짓을 하고 있는 건 하재연 한 명이다. 나는 죄가 없다. 뻔뻔하게 바라보자 무당이 입술을 푸들푸들 떨면서 앞에 있는 찻물을 벌컥 들이켰다.

“됐다, 됐어. 이제는 말 좀 듣고 하지 말라는 건 하지 말아라.”

“노력은 해 볼게요.”

“노력이 아니고 하지를 마! 네놈 때문에 몇 명이 고생이냐.”

“그게 제 마음대로는 안 되던데요.”

“이 자식은 왜 이렇게 말대꾸를 해 대?”

“그만.”

화를 내는 무당의 말을 끊으며 재연이 슬금슬금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싫으시겠지만, 저는 이원이 형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게 둘 거예요.”

“자네 정말 미쳤어?”

“이야기했잖아요. 어차피 저쪽에서도 가만 놔둘 사람은 아닙니다. 발버둥 치느라 힘 빼느니 그냥 편하게 살도록 내버려 둬 주세요.”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재연과 무당이 하는 이야기는 낯설고 먼 나라의 주제같이 느껴졌다.

업을 쌓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무당과, 노력해 봐야 쓸모없으니 그냥 살게 내버려 두라는 재연의 주장이 팽팽하게 부딪혔다. 가볍게 하재연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붉은 초가 뚝뚝 녹아내리는 걸 잠깐 곁눈질로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보살님, 걱정은 감사하지만 재연이랑도 해야 할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아요.”

시간을 되돌렸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왜 하재연이 내 팔자에 관여가 되어 있는지. 물어봐야 할 것은 많았다. 지독하게 엉킨 머릿속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뜻을 알아차렸는지, 무당이 무릎을 짚으며 천천히 일어났다. 방을 한 바퀴 걸으며 촛불을 다 끈 무당이 신당 중앙에 있는 초와 향불만 관리하고는 조그만 가방을 집어 들었다.

“어디 가세요?”

“바람 쐬러 간다. 젊은것들끼리 이야기하거라.”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내 참.”

무당은 마지막까지 퉁명스러운 대꾸로 면박을 주며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재연이 몸을 부축해 다시 눕혀 줬다. 잡은 소매를 놓지 않도록 노력하며 새카맣게 가라앉은 눈을 바라봤다.

하재연이 이부자리 주변의 부산스러운 물건과 거의 다 녹은 양초를 정리하는 동안에도 내내 소매를 쥐고 놓지 않았다. 불편할 텐데 재연은 손을 놔 달라고 말하는 대신 자신의 손이 닿는 곳까지만 정리하고는 옆자리로 돌아왔다. 이마를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베개를 편안하게 고쳐 주며 시중을 들었다. 역시 불필요할 만큼 과하게 섬세했다. 아니, 순종적이었다.

성에 찰 만큼 정리를 끝낸 재연이 소맷자락을 쥔 내 손을 빼내고 다시 고쳐 깍지를 껴 왔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꽉 얽고 나서야 준비가 끝났는지 긴 숨을 내쉰다.

“이야기해 주려고?”

“음…….”

“어떻게 아는 거야?”

“다 말할 수는 없어요.”

“왜?”

“제한이 걸려 있으니까요.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에요.”

“이번 일이 그 정도로 끝난 건 네 덕분이야?”

“글쎄요.”

“그런 거 같은데.”

계속 재연에게 안겨 있었으니 몰랐다. 하재연의 목에는 어제까진 없던 푸른 멍이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이 익숙한 상처가 어떤 것인지 안다. 엄지손가락을 시작으로 목 주변을 감싼 다섯 손가락 자국. 이진현에게 식당 안에서 목이 졸렸을 때 생긴 멍이었다.

“재연아.”

“네, 형.”

“하나만 물어보자.”

재연이 손을 꽉 잡아 왔다. 살아 있는 사람의 심장 고동이 느껴졌다.

“미안해요.”

“……뭐가?”

“그것까진 물어보지 마세요.”

무엇을 질문할 거라 생각했던 걸까. 재연은 아무것도 듣지 않은 채 거절의 의사를 밝혀 오기만 했다.

“왜?”

“그건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까요.”

시간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물이 쏟아지는 소리, 모래와 자갈이 굴러가는 소리, 자동차 타이어 소리와 인간의 육신이 뼈 위에서 고스란히 삭아 없어지는 소리. 너도 시간을 돌렸냐고 물어보고 싶었으나 하재연은 고요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점점 졸음이 쏟아진다. 재연이 새로 초 하나를 뜯어 촛대 위에 올려 두고는 성냥을 그어 불을 붙였다. 방 안에 촛불 그림자가 가득 찼다. 투명하고 붉은 불빛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일단은, 저도 꿈을 꿨다고 해 둘까요.”

“…….”

“물론 형의 꿈과는 다른 의미예요.”

나는 여태껏 시간을 되돌린 과정을 꿈이라고 표현했다. 재연은 그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아니라면, 하재연의 행동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걸까.

“그럼…… 왜 네가 내 액막이가 된 거지?”

액막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조건이 필요하겠지. 그러나 나와 재연은 액막이가 되기 위한 간단한 의식조차 치르지 않았다. 이렇게 일방적이라니. 우리는 피가 이어진 가족도 아니었다. 자연적인 액막이가 될 수도 없는 관계였다. 이상하다. 이 세상은 틀어져 있었다.

“그게 궁금했어요?”

너무 빨리 알아 버렸네. 그 애도 참, 곤란하게. 섬뜩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며 재연이 어깨를 으쓱했다.

“형이 만들어 낸 인과 관계, 두 번째 삶.”

“…….”

“누군가 액막이가 되지 말란 법이 없죠.”

“너.”

“이렇게 강한데.”

보이지 않는 것을 잡아 흔드는 시늉을 하며 재연이 능청을 떨었다.

“맞아요, 나는 형의 액막이에요.”

“어째서?”

“내가 그렇게 되길 원했으니까.”

누가 바깥에서 방문을 두들겼다. 쾅쾅쾅. 소리는 제법 컸다. 무당을 찾아온 손님일까, 신당 중앙에 누워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고 하자 재연이 어깨를 눌러 왔다.

“왜…….”

재연이 손가락을 입술에 붙였다. 쉿. 시종일관 상냥하고 부드럽던 얼굴이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지금부터 소리 내지 말고, 최대한 가만히 있어요.”

“……?”

“내가 사용할 수 있는 힘은 아직 한정적이에요. 공간을 침범당하면 힘들기도 하고…”

“공간?”

“뭐, 이런저런 범위를 말하는 거죠. 우리한테 있어서 아주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고요.”

영 알아듣지 못할 말이다.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재연이 내 입술 근처를 엄지로 문질러 주며 엄한 어조로 말했다.

“여튼, 알았죠? 절대로 움직이고, 말하면 안 돼요.”

엉거주춤 고개를 끄덕이자 재연이 희미하게 웃고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누가 다시 한번 요란스럽게 방문을 두들겼다.

재연이 꺼낸 것은 파르라니 빛이 나는 칼이었다. 하얀 날은 어둑어둑한 방 안에서도 빛을 뿜고 있었다. 재연이 칼끝으로 자신의 검지를 찔렀다. 금방 붉은 피가 송글송글 맺혔다. 무슨 짓이야, 몸을 움찔 떨자 재연은 다시 한번 엄하게 내 입술에 손가락을 꾹 눌렀다.

“임시방편이니까 제가 한 말 잘 지키셔야 해요. 꼭이요.”

고개를 끄덕이자 재연이 착하다는 듯 웃으며 검지를 들어 내 이마 위에 글씨를 적어 넣었다. 일정한 획이 있는 걸 보니 한자였다. 몇 글자를 적는 것으로 준비가 끝났는지 재연이 몸을 일으켰다.

쾅쾅쾅! 누가 다시 문을 세차게 두들겼다. 재연이 닫힌 방문 앞에 서서 물었다.

“누구십니까?”

「우리는 초청받은 객이다. 만날 사람이 있으니 문을 열어 주시게.」

“초청하지 않았으니 객이 아닙니다.”

문 밖의 손님은 두 명인 것 같았다. 두런두런, 어수선한 목소리가 문 뒤에서 들리더니 다시 문을 거칠게 두들겼다.

「집주인이 아닌 자가 초청을 말할 수는 없다.」

“지금은 내가 주인입니다.”

무당은 자리를 비워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잠깐 고개를 돌려 한숨을 쉰 재연이 재차 말했다.

“들어올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만날 사람은 자네가 아니다. 들어가겠다.」

“무례합니다.”

둘 다 물러서지 않은 채 티격태격 말다툼이 이어졌다. 도통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 손님에게 졌는지, 재연이 결국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남자 두 명이 서 있었다. 키가 7척(*약 212cm)은 되어 보이는 데다 온통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하얀 백지 같은 낯 위에 검은 갓을 쓰고 있는 꼴은 마치 조선 시대에서 건너온 것 같았다.

“여기에 당신들이 데려갈 자는 없습니다.”

「초대를 받았노니.」

“초대하지 않았습니다.”

「허락해라.」

귀밑까지 찢어진 입과 퀭한 눈두덩이는 목탄을 칠한 것처럼 검은색이었다. 검은 소매 사이를 삐죽 찌르고 나온 손가락은 해골처럼 말랐으며 손톱은 뾰족했다. 휑하게 벌어진 입과 눈만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뚜렷한 존재감을 가진 자들이었다. 말로만 듣던 저승사자다.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당해 낼 수 없는 흉흉한 몰골을 보고도 재연은 고개를 저었다. 저승사자들은 화가 많이 났는지 길길이 날뛰면서 자기들끼리 흥분하기 시작했다. 집이 흔들거린다. 이불을 꽉 잡은 채 숨을 참았다.

화를 숨기지 않은 저승사자가 다시 하재연에게 명령했다.

「허락하라.」

이미 그들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였다. 재연은 문고리를 잡은 채 입을 다물고 있다 한숨을 짧게 쉬었다. 물러서기라도 할 것 같은 태도에 사자들의 노기가 조금 잦아들었다. 최소한 집이 흔들리는 건 멈췄다. 저들을 들여보내도 들키지 않을 수 있을까. 이마에 적힌 글자가 몸을 감춰 주고 있다는 건 느꼈지만, 저승사자는 귀신이 아니다. 급이 어떻게 되든 신과 같은 위치에 있었고, 인간이 대들 수 있는 대상은 아니다. 불안함에 마른침을 삼키는데 재연과 눈이 마주쳤다. 재연은 조금 웃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완고할 정도로 당당한 태도로 말했다.

“물러가라.”

조금 전까지 쓰던 존대는 어디로 집어치웠는지, 반 토막이 난 대답에 저승사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쾅쾅, 발을 구르고 화를 낸다. 집이 다시 흔들거리며 촛대와 쌀과 과일을 담은 제기가 무너져 바닥을 굴렀다.

「인간이 감히 우리를 막을 수 없다.」

“물러가라. 그 장부는 틀렸다.”

재연이 저승사자들의 손에 쥐고 있는 장부를 가리키며 고개를 저었다. 두 명의 저승사자가 한차례 더 비명을 지르며 분노했다. 재연아. 벽과 바닥이 갈라질 것처럼 엄청난 지진이 이어졌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에 이 광경이 보이면 안 될 텐데. 눈을 질끈 감고 진동이 멈추길 기다렸다.

한참 화를 내던 저승사자 중 한 명이 한기를 씩씩 뿌리며 장부를 펼쳤다.

「이것은 염라대왕께서 관리하는 장부로, 성좌신(星座神)*과 옥황상제의 손을 거쳐 탄생하니 인간이 오차를 논할 수 없다.」

「그렇다. 허락받지 않은 자가 장부를 고쳐 쓰면 온몸이 녹아내릴 것이다.」

“장부는 틀렸다.”

「인간은 장부를 볼 수조차 없으니, 네 말은 궤변이다.」

“그렇다면 읽어라, 장부에 적힌 글자를. 틀렸다는 것을 알려 주겠다.”

저승사자 두 명이 소곤거리더니 자기들끼리 합의를 본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이 시킨다고 해서 장부를 진짜 읽다니, 되게 순진한 놈들일세. 그 와중에 딴생각을 하면서 흉흉한 살기가 흘러나오는 문 앞을 계속해서 쳐다봤다.

오른쪽에 선 사자가 장부를 받아 들더니 글자를 읽기 시작했다.

「윤상화, 김여정의 자식 윤이원. 1989년 8월 7일 출생. 1990년, 부모 사망 후 고아원에 입적. 2003년 사람을 죽이고 방화를 저지른 뒤 2004년 교도소에 수감. 2017년 출소 후 2017년 5월 21일 사망.」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달력을 보았다. 오늘은 5월 21일이었다. 저승사자들은 정확한 시간에 찾아왔으며 장부에 적힌 인생은 소름 끼칠 만큼 정확했다. 재연은 도대체 뭘 믿고 장부가 틀렸다는 말을 한 건지. 저승사자를 상대로 거짓말을 했다간 죄가 클 것이다. 하지만 재연은 여전히 평온한 얼굴이었다.

“다시 읽어라.”

「뭐라?」

“틀렸으니, 다시 읽어라.”

「인간이 발칙하다.」

“말했어. 틀렸으니, 그 밑의 글자를 다시 읽어라.”

그러자 이번에는 왼쪽에 선 사자가 장부를 다시 건네받아 글자를 노려보았다. 쭉 찢어진 눈이 점점 더 경악에 차기 시작했다.

“장부에 적힌 글자 밑의, 작은 글자까지 마저 읽어라.”

「이게…… 이게 뭐지?」

“읽어.”

하재연의 목소리는 쩌렁쩌렁한 저승사자와 달리 단조로운 음색을 띠고 있었지만 울림이 있었다. 명백한 명령조의 말투였는데도 저승사자는 분기를 띠는 대신 홀린 표정으로 장부를 계속해서 읽어 나갔다.

「……윤상화, 김여정의 자식 윤이원. 1989년 8월 7일 출생. 무난하고 평온한 인생을 살다 2018년 8월 7일 장기 적출 및 과다 출혈로 사망.」

그것은…… 내 첫 번째 삶이었다. 원장에게 배신당해 온몸이 찢어지고 잡아 뜯어지는 아픔에 까무러쳐 죽었던 삶이다. 결과적으로 이미 한 번 죽음을 맞이했었으니, 저 장부가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인간은 모두…….

“인간의 삶은 한 번뿐이다. 그런데 삶이 두 개나 적혀 있다니, 틀린 장부가 아닌가.”

한 번의 삶을 살고 난 뒤에, 내 인생에 개입한 존재는 저승사자보다는 높은 지위의 신이었다. 고작 저승사자 정도 되는 수준의 신을 십이지들이 왕으로 모시지는 않으니까.

꽤 충격을 받았는지, 저승사자 두 명은 나란히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왼편이 장부를 내려치며 화를 냈다. 그들에게 있어서 장부에 적힌 글자는 근원이 어긋난 수준의 일인 듯했다.

「이럴 수가 없다. 인간인 네가 무언가 요술을 부린 것이다.」

“장부에 손을 대면 녹아 없어진다고 말한 것은 그쪽이다. 틀린 장부를 보고 사람을 데려가려 하다니, 염라가 제 몫을 못하는 것은 아니냐?”

대놓고 자신들을 부리는 자를 욕하자 이번에는 오른쪽이 고함을 쳤다.

「무엄하고 고얀 놈이다. 인간인 네가 감히 염라대왕을 무시할 수는 없노라.」

“하지만 그대들은 틀렸어. 기억해야 할 것이다. 나는 윤이원의 액막이. 직성(直星)*도 그에게 해를 끼칠 수가 없다. 액막이조차 죽지 않은 자에게 세 번째 죽음을 강요하여서는 안 된다.”

「좋다. 염라께 다시 보고를 하고 데리러 올 것이다. 보이지는 않아도 우리는 그가 저 방 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노니.」

「그리고 그때는 자네의 세 치 혀도 진상할 것이다.」

장부를 품 안에 소중하게 집어넣은 저승사자 둘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차례대로 저주를 퍼붓고는 등을 돌려 사라졌다. 소용돌이가 치는 것 같던 어두컴컴한 복도가 환해지고도 재연은 한참이나 그곳을 노려보다 문을 쾅 닫았다.

“……불 좀 켤까요?”

“……어, 응.”

재연이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올렸다. 주변이 밝아지자 엉망으로 어질러진 방이 좀 더 적나라하게 보였다. 과일이나 떡은 그렇다 치고, 저 쏟아진 쌀알은 어떻게 치우나 한숨이 나왔다. 무당이 돌아와서 이 꼴을 보면 분명히 화를 내겠지. 자신에게 진상된 음식이 저 꼴이 났으니 장군신도 같이 화를 낼지 모른다.

돌아오기 전에 청소라도 해 두자 싶어 이불을 밀치고 몸을 일으켰다. 재연이 다가와 엄지로 이마를 문질렀다. 아, 이마에 적은 글자가 궁금했는데. 점칠 때 쓰는 거울을 집어 들고 들여다봤지만 글자는 완전히 뭉개져 있었다. 이마를 보며 울상을 짓자 재연이 뺨을 툭툭 두들겼다.

“궁금해도 안 돼요.”

“뭐라고 적은 건데?”

“제 이름이요.”

“뭐야, 그럼 봐도 되잖아.”

“진명(眞名)이라 알려 줄 수 없어요.”

“어?”

“원래 이쪽 사람들은 그런 이름이 하나쯤 있거든요.”

그런가……. 기운이 빠져 들고 있던 거울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하재연에 대해 아는 게 정말 하나도 없었다. 아니지, 이쪽 세상과 연관이 있을 거란 생각을 못 했던 거다. 나부터가 시간을 돌리기 위해 지옥에 있지 않았다면 까맣게 몰랐을 만한 이야기들이 아니었나.

“그럼 나도 있어?”

“어…….”

물어보고 나서야 아차 했다. 자기 이름을 남에게 물어본 꼴이다.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는 재연에게 손사래를 치려는데 갑자기 고개를 끄덕인다.

“알긴 알죠.”

“응? 진짜?”

“네.”

“뭔데? 그런데 어떻게 아는 건데?”

“형이 허락한다고 했으니까요.”

“그 허락의 범위가 얼마나 넓은 거야?”

이쯤 되면 지긋지긋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서류에 지장이라도 잘못 찍은 기분이라고 투덜거리면서 빗자루를 찾아 들어 바닥을 쓸었다. 먼지와 머리카락이 같이 뒤섞인 쌀알이 쓰레받기를 묵직하게 채웠다. 재연이 쓰레기통을 가져와 뚜껑을 열어 주며 웃었다. 대답은 없었다.

제대로 알려 줄 거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액막이라면 공생 공사의 관계나 다름없겠지. 정확하게는…… 하재연이 나보다 먼저 죽겠지. 액막이의 의의는 상대를 살리는 것에 있다. 공생 공사는 틀린 말이다. 역시 비합리적인 관계다. 하재연에게 해 주는 것 하나 없이 받기만 하다니.

흠집이 난 과일을 골라내 깨끗한 것만 제기 위에 담아 올리고, 쌀 포대에서 새로 쌀을 퍼 와 놋그릇에 담고, 향불을 다시 피워 올리자 정리가 대충 끝이 났다.

손에 남은 끈적한 먼지를 씻어 내고 마루에 앉아 쉬는데, 재연이 와서 흠집이 났던 오렌지 하나를 까서 입에 물려 준다. 상큼한 단맛에 우물우물 빠르게 씹어 삼켰다.

얌전히 받아먹자 기분이 좋은지 재연이 아예 오렌지를 바구니에 가득 담아 와 마루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야금야금 받아먹다 보니 오렌지 하나가 금방 없어졌다. 재연은 새로 하나를 들고 칼로 솜씨 좋게 껍질을 벗긴다. 한 꺼풀씩 벗겨 조각을 낼 때마다 오렌지 향이 툭툭 퍼진다. 마루 밑에 다리를 내려 동동 흔들면서 바깥 공기를 마시니 기분이 좋았다.

저승사자가 다녀간 집이라곤 생각하기 힘들 만큼 조용했다. 푸른 빛을 띤 하늘을 보며 괜한 말을 했다.

“새벽이네.”

“저승사자들은 보통 이맘때 다녀가니까요.”

“보살님은 늦은 시간에 어딜 가신 거래.”

“바다에 새벽 기도 가셨을 거예요.”

“친하네. 어떻게 아는 사이야?”

“그냥, 자연스럽게 알고 찾아가게 된 거죠. 서울에서는 이 보살님이 받은 신이 가장 강하니까요.”

“너도 참 용하구나.”

빈정거리는 거였는데 하재연은 신경도 안 쓰고 웃는다. 정말로, 이런 애가 왜 나한테 목을 매는지 모를 일이었다. 혹시 기억하고 있을까. 과거를 알고 있다고 했으니, 둘이 사랑을 했던 조각 같은 일들 말이다. 나를 사랑한다고 했으니 답은 정해져 있지만 무서워서 묻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와서 재연을 한 번 더 사랑한다면 지칠 것 같다. 돌이킬 수 없는 사이에 흠뻑 빠지면 좀 더 행복하게 살고 싶어질 테니까. 둘이 서로를 지켜 나가는 해피 엔딩을 꿈꾸게 되겠지. 헛된 망상이다.

쓸모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재연이 오렌지를 하나 집어 먹여 준다. 상큼한 향이 입 안을 꽉 채웠다.

물수건으로 손을 꼼꼼하게 닦은 재연이 갑자기 내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그러고 보니 재연이 내 목에 있던 멍을 가져갔다는 게 기억났다. 서늘하게 드러난 재연의 목을 훑었다. 원래 내 목에 있던 상처보다 더 심해 보였다. 치료도 하지 않아 그대로 드러난 상처는 끔찍한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상처를 옮겨 갈 정도의 액막이라니. 왜 이런 짓을 했을까. 나는 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상대로 허락한다는 경솔한 말을 했을까.

“형은 원래 죽을 팔자였어요.”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며 재연이 웃는다. 오렌지를 가득 먹여서 입 안을 막아 줄까. 이야기를 꺼내는 그 얼굴이 꽤 피곤해 보였으니까, 맛있는 걸 먹인 후 재워 주고 싶었다.

“목을 졸랐던 놈은 원래대로라면 형을 죽이러 찾아온 거였죠.”

무거운 사실을 들으면 슬프고 미안할 테니까.

“자신들을 배신한 셈이었으니까요. 하지만 틀어진 거예요.”

“네가 한 일이야?”

“맞아요. 정확하게는 나와 보살님이 같이 노력했죠.”

하재연은 고집이 센 아이였다. 어릴 때부터 업어 기르며 옆에서 살뜰히 보살폈다. 그래서 장점도 단점도 어떤 부분은 나와 똑같이 닮았다. 괜한 허세를 부리는 것, 전부 짊어지고도 괜찮은 척하려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오렌지 향이 솔솔 나는 뺨을 잡고 입술을 맞췄다. 재연의 입술에서 부드럽고 달콤한 향이 났다. 기분이 좋은지 눈이 둥글게 접혀 있다. 생글생글 웃으며 다시 쪽쪽 입을 붙여 온다.

젖은 입술을 가볍게 빨며 재연이 천천히 입 안을 가르고 들어왔다. 음, 신을 모시는 무당집 마루에서 잘하는 짓들이라 생각하면서도 순순히 입술을 내줬다. 키스는 오랜만이었다. 재연의 혀는 뜨겁고 축축했다. 입 안 점막을 구석구석 가르고 핥고 천천히 떨어져 나간다.

“알아요? 그 꼬마 말대로 형은 이대로 있으면 죽어요.”

눈을 깜박거렸다. 키스를 받았더니 기분이 좋았다. 재연이 푸른 입김을 내뱉으며 한 번 더 아랫입술을 가볍게 부딪치고 떨어져 나왔다.

“운 좋게 조금 더 산다고 쳐도 언젠가 반드시 죽겠죠.”

“인간은 언젠가는 다 죽어.”

“네, 하지만 형은 더 고통스럽겠죠. 형의 첫 삶이 그랬던 것처럼요.”

“…….”

“원래도 부족한 복록을 버리고 시간을 돌렸으니 삶은 더욱 비참하고 세상은 뒤틀려 있을 거고.”

동녘에서는 해가 밝아 오나 이야기는 밤처럼 무겁고 우울했다. 바깥으로 난 마루에서는 바람이 환하게 불을 밝히는 것처럼 불어왔다.

재연이 손을 뻗어 허벅지와 허리를 잡아당겨 꽉 끌어안았다. 이제 둘이 붙어 있으면 덥다고 느껴질 만큼 무더운 날씨가 되었다. 여름도 성큼이다. 사계절 중 가장 좋아하는 여름이었으나 기쁘지 않았다.

“형도 느끼지 않았어요? 이 세상은 형을 거부하고 있다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재연의 왼쪽 가슴에 귀를 붙였다.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들린다. 언제부터인가 기이한 사고를 겪을 때면 이 소리를 들어야 안심이 되었다.

살아 있다는 감각. 재연이 인간이라는 규칙적인 진동.

……세상이 내가 기억하는 구조대로 만들어져 있다는 안심.

바닥의 나뭇결이 한번 핑그르르 돌았다. 귓가와 뺨 옆으로 바람과 머리카락과 숨결이 우수수 떨어졌다. 딱딱한 나무 바닥의 촉감이 등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재연의 손이 찬 배를 어루만졌다. 입고 있던 티셔츠는 싸구려라 잘 늘어났고, 마른 몸에는 커서 성인 남자의 팔뚝 하나쯤은 충분히 넣을 수 있었다.

남의 집 마루에서 배를 다 까 놓는 건 좀 아닌 거 같은데. 망설이면서도 재연의 행동을 저지하지는 않았다. 재연이 내 평평한 배 위에 입술을 붙였다. 따뜻하고 간지러운 기분에 몸을 비틀었다. 입 근처에서 한숨이 간질거린다.

“형은 죽고 싶어요?”

노골적인 자세를 취하고 나눌 만한 주제는 아니었다. 대답하는 대신 재연의 손을 잡아끌어 손가락 끝에 입술을 붙였다. 손톱이 정갈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결이 서 있지도 않고 반짝반짝 윤기가 흐르는 모양 좋은 손톱이다. 손가락까지 예쁘네.

하재연이 매끄러운 손톱 면을 입술 위에 문질렀다. 입을 조금 벌리고 혀를 내밀어 끝을 살짝 핥았다. 무난하고 평범한 살갗의 맛이었지만 오렌지 향이 나고 있었다. 축축해진 손가락 끝을 좀 더 용기 내서 빨았다. 쪽, 쪽. 귀여운 소리가 입술에서 나왔다.

독특할 것 없는 손가락을 핥으면서 두 손으로 흘러내린 재연의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새카만 머리카락에 가려진 눈이 우울한 빛을 띠고 있었다. 물기를 머금은 것도 아닌데 괜히 울 것 같은 눈동자가 미안해 뺨과 귓불을 살살 문질렀다. 재연이 눈을 내리깔면서 낮은 한숨을 쉬었다.

“살고 싶다고 했잖아요.”

“…….”

“살려 달라고 말했잖아요.”

아랫배에 흥분한 성기의 감촉이 느껴지고 있었다. 바지춤 너머에서 부풀어 오른 딱딱한 물건에 섹슈얼과 에로티시즘이 뭔가 고민해 봤다. 무거운 주제에 다가갈 바에야 이대로 몸을 섞어 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이를 세워 재연의 손끝을 조금 세게 깨물자 눈살을 찌푸린다. 송곳니로 정확하게 찔렀더니 아픈 모양이다. 잇자국이 난 검지를 확인한 재연이 벌이라도 주는 것처럼 아랫입술을 가볍게 꼬집었다 놓았다.

“죽음은 익숙하잖아, 재연아.”

“…….”

“이미 원하는 건 이뤘으니까…….”

솔직히 언제 죽어도 미련은 없었다. 살고 싶은 욕심과 죽고 싶은 욕심은 정확하게 반반으로 공존하고 있었고, 살고 싶은 만큼 죽고 싶었다. 재연은 그런 애매한 대답에 화가 난 모양이었다. 갈비뼈와 어깨를 짓누르는 손바닥의 힘이 점점 더 강해진다. 성인 남자의 몸을 받치고 있으려니 무거웠다. 아, 삶의 무게가 딱 이 정도 되는 것은 아닐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재연의 팔꿈치를 툭툭 쳤다.

“무거워.”

“…….”

“내려와.”

말을 잘 들을 것처럼 생긴 순한 인상이 확 일그러졌다. 재연이 고압적인 태도로 어깨를 누르고는 상체를 숙였다. 눈동자가 일순 푸른빛을 띠었다.

“알아요? 형이 살고 싶은 욕구를 지우고 죽어야 한다 생각하는 것조차 이 세상이 그렇게 시키고 있기 때문이에요.”

“재연아.”

“자살을 강요하는 세상이라니, 왜 반항해 볼 생각을 하지 않죠?”

“그게 무슨…….”

“운명에 순응하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요? 형의 업이 얼마나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백 년? 2백 년? 지옥에서 천 년을 굴러도 환생은 구경도 못 할 상황인데!”

업이 그렇게 많이 쌓였던가. 시간을 거스를 기본 조건이라도 갖추기 위해 지옥에서 속죄의 시간을 보냈었다. 도깨비는 가시가 성성한 톱을 휘두르며 죄를 갚으라 소리를 질렀다. 무쇠도 녹아내리는 뜨거운 화염. 이번에도 죽으면 그곳에 돌아가는 건가.

“하지만 그건 안 돼.”

재연이 울었다. 눈 아래가 젖어서 오른쪽 속눈썹 그늘에 가려진 조그마한 갈색 점이 축축하게 빛났다.

“죽는다고? 윤이원이? 절대로 안 돼.”

늘 꿍꿍이만 많고, 숨기는 것도 많아서 사람을 조급하게 애를 태우더니 지금은 눈물을 뚝뚝 흘린다. 저승사자를 상대로도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던 사람이라곤 생각하기 힘들 만큼 여린 모습이었다.

“형은 살아야 해요. 나는 그러기 위해 형의 액막이가 되었어요.”

“도대체, 내가 뭐라고?”

하재연이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처음으로 보는 그의 진짜 얼굴이었다.

“후회를 하기 때문입니다.”

“…….”

“후회를 해서요…….”

도대체 무슨 후회인지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내 품 안에서 곤히 숨을 내쉬며 울음을 삼키는 재연을 꾹 끌어안고 생각했다.

제대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옆에서 질척거리는 죽음의 그림자를. 아마 이대로 두면 얼마 안 가 완전히 삶을 잠식하겠지.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다. 정말로. 이번에는 저번 생처럼조차도 살지 못하겠지만 최악이었냐 물어보면 그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부드러운 재연의 머리카락을 끌어당겨 입을 맞추며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재연은 여전히 물러설 수 없었던 모양이다. 토끼처럼 빨갛게 변한 눈동자를 들어 올린 채로 재연이 바지 뒷주머니에서 작은 종잇조각 하나를 꺼내 건넸다.

“이게 뭐야?”

“새로 일할 장소예요.”

“일?”

“형은…… 업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 계속 일을 해야 해요. 그것만은 내가 도와줄 수 없는 부분이라…….”

종이 안에는 주소가 하나 적혀 있었다. 재연이 뺨과 입술을 목덜미 근처에 붙여 오며 중얼거렸다.

“가서 내가 소개해 줬다고 하면 돼요.”

“응.”

“많은 사람을 만나고, 삶에 미련을 가지고.”

“……응.”

“나를 사랑해 줘요.”

애원하는 호흡은 빠르고 뜨겁고 거칠었다. 화한 민트 향의 숨결이 바람처럼 불어왔다. 사랑이라는 감정만큼은 정확히 대꾸해 줄 수 없어 고개만 끄덕였다. 재연이 왈칵 울음을 터트리는 것 처럼 짧은 숨을 규칙적으로 내뱉으며 가슴 위로 얼굴을 묻었다.

햇살이 완전히 떠오르는 아침이 되었다. 기온이 점차 오르기 시작했다. 사랑에 대한 전조 증상처럼 지열에 아지랑이가 올라와 물감처럼 섞이기 시작한다. 마음이 흐려졌다.

***

집에서 역까지 걸어가 지하철을 타고 한참 앉아 있다 효창공원역에 내리면 딱 45분이 걸렸다. 재연이 소개해 준 새 직장의 주소는 역에 내려서 다시 7~10분 정도 걸어야 했다. 쉽게 말하면 이래저래 한 시간이 걸리는 위치였다. 시간과 상관없이 환승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장점이었다.

뜨거운 태양을 받아 간질간질한 머리를 긁적이며 대학교 방향으로 난 골목을 따라 쭉 걸어갔다. 휴대폰 내비게이션이 시키는 대로 오른쪽으로 한 번, 왼쪽으로 두 번 돌고 났더니 흰색 간판에 금색으로 네온사인을 붙여 놓은 아기자기한 카페가 하나 튀어나왔다.

달콤한 시간. 카페의 이름을 괜히 한 번 따라 읽고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한적하니 텅 빈 공간이었다. 크고 작은 너댓 개의 테이블이 놓여져 있고 말린 꽃과 빈티지 소품들로 장식된 아기자기한 카페였다. 낡고 손때가 묻어 있는 타자기를 들여다보다 계산대를 기웃거렸다. 가게는 텅 빈 채로 어디에도 인기척이 없었다. 주인이 없는 집에 무례하게 들어온 기분이라 어색하게 발을 굴리다 다시 바깥으로 나갔다.

주택가처럼 작은 건물들이 다닥다닥 자리 잡은 골목 안쪽에서 잡음이 들리고 있었다. 몸을 돌려 그쪽으로 걸어갔다. 비포장도로와 나지막한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분리수거를 하는 공간이 나왔다.

처음 눈을 채운 것은 하늘색이었다. 무릎까지 오는 앙증맞은 길이의 원피스는 공주들이 입는 옷 같았다. 밑단을 꽉 채운 레이스와 프릴, 스커트 하단의 크고 작은 해바라기 무늬 자수와 나풀거리는 소매. 옷차림과 비슷한 분위기로 땋아 내린 머리 위로 하늘색 리본이 흔들거린다. 옷과 세트인 듯 리본에도 노란 해바라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어지간히 보기 힘든 독특한 옷차림을 한 여자 한 명이 불한당 같은 남자 두 명의 사이에 끼어서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거 놓아 달라고 말씀드렸어요.”

여자가 경고하는 투로 또박또박 이야기한다. 가만히 그 광경을 좀 더 지켜봤다. 뒤에서 통로를 막고 있던 하나가 웃으면서 나풀거리는 스커트를 들추는 시늉을 했다.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화를 냈다. 명백한 희롱이었다.

“빼지 말고 같이 놀자니까? 응? 이런 옷은 어디서 사서 입는 거야?”

“어휴, 지가 공주인 줄 아는 거지.”

남자들은 낄낄거리며 남의 옷차림을 비웃었다. 여자의 얼굴이 점점 빨갛게 변했다. 모처럼 예쁜 옷을 봤다고 생각했는데, 생긴 것부터 날티가 나더니 입도 배려라곤 없는 놈들이었다.

보지 않았다면 모르겠지만, 목격했으니 도와줘야 할까. 빼빼 마른 내 손목을 잠깐 들어 보다가 골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저기요.”

“응? 뭐야, 저 새낀. 야, 형님들 바쁘니까 꺼져라.”

여자가 고개를 휙 돌려 쳐다보더니 간절한 얼굴을 한다. 차마 말은 하지도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는데 곤란한 상황이긴 했던 모양이었다.

노골적으로 도와 달라는 표정을 짓는 여자를 보고는 한 걸음 더 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놈이 위협적으로 내 어깨를 밀쳤다. 뒤로 크게 휘청거렸지만 꼴사납게 넘어지진 않았다.

“형님은 그쪽이 아니라 나 같은데.”

욱신거리는 어깨를 손바닥으로 털며 대꾸하자 양아치가 코웃음을 치며 웃었다.

“이 새끼가 미쳤나. 야야, 좋은 말로 할 때 꺼져라. 응?”

그러니까, 아무리 봐 줘도 20대 중반으로밖에 안 보이는 놈이 초면에 반말하면 화가 나기 마련이다. 한숨을 쉬면서 머리를 샛노랗게 물들인 놈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아무리 바싹 마른 몸이라도 교도소에서 구를 만큼 구른 몸이었다. 약자를 괴롭히는 희열에만 가득 찬 놈들이 득실득실한 곳에서 10년이 넘게 썩었는데 이런 놈들을 무서워하기에는 경력이 아깝다. 경력이라고 쳐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을 하는 대신 한 놈의 목울대를 틀어쥐고 벽 위로 처박았다. 고개를 대충 휙휙 돌려 남자의 몸을 확인했다. 반팔을 입은 팔뚝에 잉어 모양 이레즈미*가 그려져 있었다. 꼴에 정말 양아치처럼 사는 모양이다.

기도가 눌린 놈이 쿨럭거리면서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쯧, 혀를 차면서 인생의 조언을 해 줬다.

“학교도 안 가 본 새끼가 사람 못 알아보고 떠들지 마.”

“이 미친 새끼가 어디서…….”

옆에 있던 놈이 주먹을 휘두르기에 그대로 무릎을 걷어찼다. 억!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덩치는 산만 해서는 급소를 맞았다고 일어나지도 못하고 끙끙 앓는 꼴이 보기 좋진 않았다. 목을 쥐고 있던 놈을 바닥에 밀치고 옆구리를 걷어찼다. 두 명을 상대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발과 팔뚝으로 각각 기도를 막고 있으면 장정도 어지간해서는 팔에 힘이 빠진다. 몸으로 그런 사실을 알려 줬던 놈들에게 이제 와서 고마워해야 하나. 한숨을 쉬면서 숨통을 꽉꽉 눌렀다.

역시 겉치레만 가득하지 아는 것 하나 없는 놈들이 거품을 물며 버둥거렸다.

“공사라도 당해 보고 싶은 거 아니면 조용히 가라.”

아무리 허세라도, 팔뚝에 이레즈미를 그려 넣는다면 교도소의 은어 정도는 알아들을 것이다. 공사장이었든 공사를 하는 인간이든 교도소에서 그 행위를 하거나 견딘 자의 의미는 크다. 몇 번을 곱씹는다. 육체보다 정신에 남은 공사의 의미를.

다행히 완전히 모자란 놈들은 아니었는지 얼굴색이 점점 하얗게 변한다. 손과 발을 치워 주자 흙바닥 위에서 벌떡 일어난 놈들이 두고 보자는 형식적인 대사를 내뱉으며 달려갔다.

손에 붙은 것 같은 찝찝한 피부의 감촉을 털며 한숨을 푹 쉬었다. 취직하러 왔는데 어쩌다 보니 깡패 같은 시늉을 해 버렸다.

교도소에서 틈만 나면 죽어라 사람을 패며 고상한 척 무도의 위대함에 대해 떠들던 최 씨에게 감사해야 하나. 씁쓸한 입맛을 다시고 있는데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고개를 돌려 옆을 보자 하늘하늘, 화려한 원피스에 둘러싸인 여자가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아.”

공사며 학교 같은 질 나쁜 은어에 폭력까지, 안 좋은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찰을 부를 걸 너무 나섰나 싶어 무안해진 찰나에 여자 쪽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곤란했는데 덕분에 살았어요.”

“아니에요. 별로 도와 드린 것도 없는데.”

머리에 매달린 하늘색 리본이 팔랑거린다. 정수리를 가득 덮을 정도로 커다란 리본인데 과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화려한 옷을 잘도 소화해 낼 정도로 예쁜 아가씨가 90도로 허리를 꾹 꺾으며 정중하게 인사하자 얼굴에 열이 올랐다. 손사래를 치는데 여자가 재차 물어 왔다.

“혹시 윤이원 씨 맞으세요?”

“……어.”

긍정에 가까운 애매한 소리를 내자 여자가 과연, 고개를 크게 끄덕이면서 손을 잡아 왔다.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즐거워하는데, 세상이 밝아지는 기분이 들 정도로 예쁜 모습이다. 뭐라고 설명하긴 힘들었지만 사람으로 치면 하재연과 동류의…….

“역시나! 만나서 반갑습니다. 재연 씨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들은 거랑 똑같이 생기셨네요.”

이 여자가 카페의 주인이었나 보다. 황망한 기분으로 눈을 깜박이고 있자 자기 마음대로 신나게 손을 흔들어 악수했다. 작은 손은 의외로 힘이 좋고 단단했다. 야무지게 몇 번 아래위로 손을 흔들더니 다시 고개를 꾸벅 숙인다.

“코지마 엔지(小島エンジ)라고 해요. 잘 부탁드립니다.”

“어…… 네…….”

허둥지둥 같이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이름이 낯설다. 일본인인 것 같은데 한국어를 왜 이렇게 잘하는 거지. 어색한 상황이 적응되지 않아 멍청하게 서 있다 등이 떠밀려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앉으라며 직접 의자를 하나 빼 주기까지 한다. 궁둥이만 겨우 걸치고 앉자 엔지 씨가 가게 문에 걸려 있는 팻말을 ‘Close’로 돌려놓고 돌아와 재잘재잘 이야기했다.

“이름은 일본인이지만 아버지가 한국인이세요. 부모님은 다 일본에 계시고, 저는 한국에서 할아버지가 하시던 카페를 물려받았어요.”

“그…… 그럼 코지마 씨?”

“엔지라고 불러 주세요.”

더운 한낮 열기를 땅이 꾸물꾸물 먹어 치우고 있었다. 슬슬 올라오는 지열에 리모컨을 들어 가게 천장에 있는 에어컨을 켠 엔지가 숨을 푸하, 하고 내쉬고는 비닐에 쌓인 옷을 내밀었다.

“자, 이건 저희 카페 유니폼. 일단 갈아입으시고 일에 관해 이야기해 보실까요?”

“……네.”

어쩐지 묘한 박력이 있는 아가씨다. 얼떨결에 옷을 받아 들고 안내해 주는 탈의실로 엉거주춤 걸어 들어갔다. 재연에게 속았다는 배신감이 드는 건 왜일까.

티셔츠를 벗고 비닐을 벗기며 이마를 찌푸렸다. 역시, 잘 모르겠지만 속은 것 같다.

엔지가 입고 있는 옷에 비해 유니폼이라고 건네준 옷은 평범했다. 흰 셔츠와 검은색 바지, 그리고 허리에 두르는 앞치마였다. 앞치마도 검은색인 걸 보니 색을 맞춘 모양이다.

린넨 재질이라 빳빳한 느낌이 나는 앞치마를 풀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괴황지(槐黃紙)*가 안감에 꿰매져 있는 걸 발견했다. 왜 부적이 유니폼에 붙어 있는 걸까. 정말로 이 카페는 멀쩡한 직장이 맞을까. 우울함에 느릿느릿해진 손을 뒤로 뻗어 허리 매듭을 묶고는 바깥으로 나갔다.

방금까지 앉아 있던 카페 테이블 위에 있는 두 잔의 유리컵 안에는 얼음이 가득 든 커피가 담겨 있었다. 접시에 쿠키를 담아 내오던 엔지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활짝 웃었다.

“와, 역시 옷이 날개네요.”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유니폼은 여분으로 한 벌 더 드릴 테니 깨끗하게 세탁해서 입어 주세요. 카페에 있는 세탁기를 쓰셔도 좋아요.”

빠르게 말을 한 엔지가 접시를 테이블 위에 올리고는 쟁반을 옆쪽에 밀어 놓았다. 이어진 엔지의 손짓을 따라 맞은편에 앉았다. 더운 날씨와 어울리는 아이스커피를 한 모금 쭉 마시자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카페 일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기본적인 카페 메뉴 숙지와 제조법, 그리고 오픈 시간은 10시 반이니 10시까지는 출근해 달라는 말이 뒤를 이었다.

청소 도구의 위치와 주방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설명을 듣는 사이 커피 한 잔이 금방 비었다. 연습도 할 겸 커피 메이커에 남아 있는 커피를 잔에 반씩 붓고 다시 얼음을 채워 돌아왔다. 엔지는 말을 오래해 피곤한지 손바닥으로 광대뼈를 빙글빙글 문지르고 있었다.

“자, 기본적인 설명은 했으니 이제 두 번째 설명을 드려야겠네요!”

손가락 두 개만 펼쳐 들고 웃는 모습에 올 게 왔구나, 하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앞치마 안에 붙은 부적과 관련이 있나요?”

“아, 그거 설명해 드리는 걸 깜박했네요. 맞아요.”

되도록 무서운 일을 먼저 설명해 주면 좋았을 텐데. 뒤늦은 부탁을 마음속으로 하며 엔지의 얼굴을 쳐다봤다. 초콜릿 칩이 가득 박힌, 쫀득한 미국식 쿠키를 하나 쪼개 먹으며 엔지가 말을 이었다.

“이 카페는 두 가지 일을 하고 있어요.”

‘두 가지’라고 말하며 엔지가 손가락을 팔랑거리다 하나를 접었다.

“팻말이 ‘Open’일 때는 사람인 손님을 받고요.”

설마, 하는 생각이 스칠 무렵 엔지가 씩씩하게 남은 손가락을 마저 접으며 손뼉을 짝 쳤다.

“‘Close’일 때는 사람이 아닌 손님을 받습니다.”

하재연이 소개해 준 일이 역시 멀쩡한 일이었을 리가 없다. 사랑이니 어쩌니 하더니 결국 귀신 소굴에 사람을 던져 넣는 건가. 얼굴이 점점 굳어 가는 걸 봤는지 엔지가 깜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앗, 걱정하지 마세요. 악령이 들어오긴 힘들어요, 앞치마 안에 붙어 있는 부적 보셨죠? 그건 옥추부(玉樞付)라고 해요.”

“…….”

말투만 들으면 굉장히 판매 수완이 좋을 것 같은 사람이다. 내용은 빼고. 멍하니 말을 경청하고 있자 엔지가 난처한 웃음을 흘리면서 덧붙였다.

“이 건물에 수귀팔문부(囚鬼八門符)* 부적도 있다고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 전에 한국어인데 이해할 수 없었다.

“저는 무당이 아닌데요…….”

“음, 무당이랑은 별로 관계가 없고요…….”

메모지에 한자를 몇 개 적은 엔지가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옥추부는 옥추경*이라고 봉안과 퇴마, 액운과 악귀를 막아 주는 경전에서 나온 부적이거든요, 성능이 좋아요. 수귀팔문부는 방위 부적이라 가게에 사용하고 있고요. 사방으로 뚫린 팔문을 지키고 악귀를 잡아들여 주는 거죠. 귀신을 잡아들이는 수귀(囚鬼)의 역할이 크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태우면서 관리도 해 주고 있어요.”

길고 장황한 설명을 줄이자면 이 카페도 귀신 소굴이란 말이었다. 무당이랑 별로 관계가 없다고? 엄청난 관련성을 띠고 있는 것 같은데.

“전 귀신을 보는 걸 제외하면 일반인인데요.”

“앗, 알아요. 그런 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이 카페에서 귀신들을 대한다는 건…….”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엔지가 숨을 한번 고르더니 눈을 빛냈다. 곧은 시선에 등줄기가 간질간질했다.

“우리는 영혼의 의뢰를 받아요. 영혼의 소망과 원망을 해결해 이 땅에서 성불시키기 위한 일을 하는 거죠. 윤이원 씨는 업을 줄이기 위해 하시는 거니까 더 좋아요. 그냥 인간을 상대로 덕을 쌓는 것보다 대가가 훨씬 크거든요.”

업. 얼음이 반쯤 녹아 투명해진 커피잔을 끌어당기며 물었다.

“제 이야기를 들으셨나요?”

“재연 씨에게 부탁을 받은 정도예요. 여기서 일하게 해 달라고 하더라고요.”

“친하세요?”

“동종 업계라고 해야 할까요? 그 친구가, 참 재밌는 사람이죠. 혜성처럼 등장해서는 일을 척척 해내서 유명해요.”

남에게서 듣는 재연의 또 다른 모습이다. 역시 이쪽 일을 하고 있었구나. 커피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남은 쿠키를 밀어 주기에 고맙게 받아먹었다. 찐득한 초콜릿과 견과류가 달고 고소하게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엔지가 아무렇게나 낙서한 종이와 쓰레기를 모아 버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영을 볼 수 있다곤 하지만 일반인에게 일을 시키는 건 저로서도 리스크가 큰일이에요. 하지만 재연 씨가 왜 그렇게까지 부탁했는지 알겠네요.”

천천히 말을 맺으며 엔지가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훑어봤다. 서서히 핥아 내리는 것처럼 살피더니 목 너머, 등 뒤편 어딘가를 노려봤다. 거리가 부정확할 정도로 먼 곳을 향한 시선이었다. 소름이 끼치는 감각에 발끝을 오므렸다.

“세상에 위반되는 업을 졌군요.”

“…….”

“재연 씨가 버텨 주지 못한다면 끝이겠어요.”

그녀가 보는 눈은 거의 정확했다. 적어도 재연의 말과는 다른 점이 없었으니, 둘이 손을 합쳐 사기를 치는 게 아니라면 내 생명의 끝은 거의 목전이었다. 저승사자가 찾아올 정도의 액운이라니. 아흔이 넘은 노인도 나보다는 명줄이 질길지도 모른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엔지는 굳은 얼굴을 풀면서 설핏 웃었다. 갑작스럽게 무거워진 분위기를 깨고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옆에 둔 쟁반에 빈 커피잔과 접시를 챙겨 올리며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들어오세요.”

팻말은 분명히 ‘Close’로 돌려 둔 거로 아는데, 노크하고 들어오는 손님이라면……. 확인하듯 엔지를 바라보자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다.

서서히 문이 열리더니 한적한 오후의 빛을 받은 노인이 서 있었다. 지팡이를 짚고 뒷짐을 진 채로 가게 안을 멀뚱히 쳐다보던 노인이 물었다. 중절모와 잘 차려입은 양복이 굽은 등을 하고서도 그를 멋진 신사처럼 보이게 했다.

“부탁이 있어 왔소이다.”

“네, 무엇이든 말씀하세요.”

엔지가 상냥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들어오라 손짓을 했다. 노인이 반색하며 한 걸음 안으로 들어왔다. 착각인지 노인의 얼굴에서 주름이 조금 옅어진 것처럼 보였다.

“내 어머니를 찾고 있소. 아주 어릴 적 헤어져 얼굴도 모른다지.”

이가 빠져 어눌한 발음으로 웅얼거리던 노인이 다시 한 발짝 걸었다. 이번에는 눈에 띌 정도로 확연하게 주름이 없어졌다. 엔지는 쟁반을 계산대에 올려 둔 채로 아무 말 없이 노인을 바라보았다.

“행복하거나 불행한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노인은 이제 중년이라고 부를 만한 외모가 되었다. 목소리가 분명해졌고, 말투도 변했다. 굽은 등이 일직선이 되고 걸음걸이가 바르게 바뀌었다. 신기하기도 하고 오싹하기도 한 장면에 눈을 뗄 수 없었다.

“그저 얼굴이 보고 싶고, 살아 있는지 알고 싶고, 죽었다면 죽은 것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이제 그는 청년이 되었다. 2, 30대 남짓의 얼굴을 한 청년은 쾌활한 인상에 튼튼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깨끗한 눈매와 입술만 봐도 호감을 살 정도의 외형이 보기 좋았다. 일자로 바르게 펴진 등과 어깨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처럼 자신감이 넘치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괴롭거나 불행한 것을 원하지 않아요.”

이제 청년은 소년이 되었다. 앳된 얼굴과 조금 불안한 사춘기의 얼굴로 자신의 다짐을 스스로 외우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버렸으니 복수하고 싶은 건 절대로 아니에요. 그냥 딱 한 번만, 만나 보고 싶었어요. 원망하지 않아요.”

어린아이의 언어는 순진하고 믿음직스러웠다. 커다랗고 까만 눈망울에 부모에 대한 그리움이 뚝뚝 묻어났다.

그 뒤로 그는 말이 없었다. 점점 더 걸어와 테이블과 완전히 가까워졌을 때 그는…….

“태어나지 못하고 죽은 영혼이에요.”

엔지의 목소리가 어두워졌다. 손을 뻗어 몸을 웅크리고 있는, 작은 태아의 형태를 갖춘 영혼을 붙잡았다. 심혈관에서부터 시작된 힘찬 생명의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혼이었다. 제대로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가게에 들어왔던 것처럼 자랐을까. 야무진 아이의 모습도 있었고, 자신감이 넘치는 청년이었으며 다정해 보이는 중년이자 신사다운 노인이었다. 한 사람의 가능성이 무시된 결과를 보자 숨이 막혔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죽어 버린 사람들 여럿이 동시에 떠올라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원장에게 입양을 핑계로 팔려 가 죽임을 당했던 형제들 또한 저렇게 잘 자랐을지도 모른다. 고아원이 불타지도 원장이 죽지도 않았으면 남은 형제들이나마 잘 살았을지도 모른다. 이진현 이사의 말이 떠올랐다. 편하게 살 수 있었는데, 왜 영웅 심리를 가장해 끔찍한 살인을 저질렀느냐고 물었었다. 대답할 수 없었다.

“이원 씨는 업이 많아서…… 감당하기 힘든 손님이 많이 오실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힘내요.”

“……네.”

위로의 말을 들었지만 힘이 나지 않았다. 작은 고동 소리를 내는 태아의 영혼을 끌어안고 엔지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엄마가 누구인지 알 방도가 없는데…….”

“주술의 도구는 거울과 검, 방울이죠.”

엔지가 대답하며 카운터로 가 작은 주머니 하나를 가져왔다. 붉은색 비단으로 만들어진 주머니 안에는 동그란 거울과 작은 방울, 손바닥 길이만 한 폭이 좁은 단검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물건을 전부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방울을 입에 머금고, 칼로 손가락에 피를 내서 거울에 떨어트리기만 하면 돼요. 그리고 꿈을 꾸면 금방이에요.”

“엄청 비현실적이면서도 간단하네요.”

“비현실이란 건 원래 주문만 외우면 짜잔, 하고 해결되는 거라서요.”

어깨를 치며 장난스럽게 윙크를 한 엔지가 직접 방울을 들어 입 안에 넣어 주며 설명을 계속했다.

“혹시나 영혼이 악령으로 돌변할 기세가 보여도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가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 팔문신장(八門神將)이 바로 잡아가실 거예요.”

방울을 물고 있어서 대답할 수가 없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엔지가 손에 힘을 줘 어깨를 꾹꾹 눌렀다. 말은 없지만 힘내라는 응원에 눈을 질끈 감고 검지 끝을 찔렀다. 따끔한 감각과 함께 흐른 피가 거울 중앙에 정확하게 떨어졌다. 수면 위에 물방울이 떨어진 것처럼 거울 표면이 일렁거리더니, 빠르게 핏물을 흡수하며 시야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꾸륵거리는 배 소리, 장기 기관이 움직이며 활동하는 소리, 어둡고 캄캄한 시야와 흐느끼는 호흡 소리, 울음소리와 심장이 쾅쾅 뛰는 소리에 귀가 시끄러웠다. 몸을 축축하게 감싸고 있는 물결에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곳은 배 속이다. 부탁을 하러 온 영혼이 살았던 유일한 집이었다. 하얗고 맑은 창은 한 여자를 비춰 주었다.

여자는 많이 울었다. 아이를 낳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나이는 어렸고 경제 능력은 없었으며, 남자는 임신한 사실을 알자마자 떠나갔다. 여자의 사정을 도와줄 집은 아니었다. 임신으로 몸은 무겁고 입덧으로 살이 빠졌지만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그나마 친구 하나가 닭죽과 물김치를 싸다 줘 겨우 먹고 버텼다.

친구는 아이를 지우라고 말했다. 친구 말대로 아이를 낳아도 문제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배 속의 아이가 편안하고 잘 자라고 있다고 산부인과 의사가 말했기 때문이다. 아이가 생긴 걸 안 뒤로 매일매일 빠짐없이 울었다. 속상하고 슬픈 마음에 울면서도, 여자는 아이를 낳기 전까지만 울겠다고 다짐했다. 혼자서라도 아이를 낳아 멋지게 잘 키우고 싶었다.

당장 급한 대로 집세를 내고 병원비를 벌기 위해 일을 했다. 어린 여자애가 일을 하니 주방 이모들이나 손님이 늘 무시하고 구박을 했지만 여자는 참았다. 그 당시는 미혼모에 대한 복지 정책이 하나도 없는 시절이라 여자는 그저 힘들기만 했다. 몸이 고된 건 참을 수 있었지만, 배가 불러 오는 여자를 보는 사회적 시선이 냉정하고 차가운 것은 참을 수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열심히 살았다.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공원에 소풍을 가는 상상을 하면서 배냇저고리를 골랐다. 임신 20주쯤 되던 시기였다. 혹사한 몸이 화근이었을까, 늦은 퇴근길에 길가에서 쓰러졌다. 다리 사이로 피와 양수가 줄줄 흐르는 걸 보고 지나가던 사람 두 명이 신고를 해 겨우 병원에 실려 갔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연락을 받고 달려온 친구가 어깨와 가슴팍을 밀치고 때리면서 엉엉 울었다. 바보 같은 년이라고 마구 구박을 했다. 괴로운 일이었다.

여자는 아이를 낳기 전까지만 울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여자는 울었다. 아이를 낳지 못했기 때문에 여자에게는 매일매일 울 수 있는 구실이 생긴 거나 다름없었다. 보란 듯이 잘 살고 싶었지만 눈물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래도 인생은 꼭 힘들지만은 않아서, 또다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 다행히도 그 남자는 좋은 사람이었다. 여자를 이해했으며 사랑으로 품어 주었다. 남자는 여자를 존중했고 여자도 남자를 존중했다. 둘은 서로에게 좋은 이해자였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아이가 생겼다. 완벽한 가정을 이루어 축복받은 임신을 했지만 여자는 자신이 잃어버린 첫 아이를 잊지 못했다. 식당일을 하며 한 푼, 두 푼 아껴 모은 돈으로 샀던 배냇저고리를 새로 생긴 아이에게 주었다. 그 아이를 사랑으로 길렀다. 잃어버린 아이도 이렇게 웃게 만들어 줄 수 있었을 텐데, 늘 후회했다. 태명을 소리 내 불러보지도 못했다. 왈칵왈칵, 그녀는 죽기 전까지도 아이를 낳기 전이라 말하며 그렇게 많이 울었다.

천수를 누렸으며, 성실하고 다정한 남자를 만났다. 아이는 튼튼하게 자라 제 몫을 하는 사회인이 되었으니 불행하고 슬프면서도 행복한 삶이었다. 휴먼 드라마에 나오는 누군가의 뻔한 감성팔이 이야기를 읽은 기분이었는데도 눈물이 났다.

다행스럽게도 그녀가 정말로 나쁜 사람이 아니라서, 아이를 정말로 사랑했기 때문에 슬펐다.

「……엄마를.」

영혼이 엄지를 입에 넣고 빨다 말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만나서 울지 말라고 해 주고 싶었어요. 매일 울었거든요.」

“…….”

「그런데 내가 너무 어려서, 찾아오는 시간이 오래 걸렸나 봐요.」

아이의 영혼은 순수하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다음에 다시 태어나면 그때도 엄마의 아들이나 딸로 태어나고 싶어요.」

“……그래.”

「형아도 울지 마세요. 고마웠어요. 안녕.」

침에 퉁퉁 불은 짧은 손을 흔들며 영혼이 웃었다. 품 안에서 천천히 떠나가는 영혼은 다시 한 걸음씩 걸어 나아갈 때마다 나이를 먹었다. 점점 자라나 이내 지팡이를 짚었다. 곱은 허리에 팔을 올린 노인이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싱긋 웃어 주며 여덟 개의 문 중 유일하게 열려 있는 곳으로 갔다.

생문(生門)이라는 글자가 적힌 곳이었다. 다시 새로운 삶의 궤도에 오를 준비하던 노인이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뭐라고 말했지만 슬퍼서 잘 들리지 않았다. 먹먹한 귓가에 얼굴을 온통 찌푸리며 울었다.

울지 마세요.

안타까운 목소리가 들렸다.

“원이 형.”

하재연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며 뺨과 눈을 어루만졌다. 검은색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쓰고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꽉 끌어안아 준다. 왜 여기 있을까. 과보호 같은 행동을 지적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안도가 찾아와 재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눈물이 펑펑 흘러나온다. 세상에 존재하면서 숨을 쉬고 있는 것까지도 괜한 죄책감이 찾아들어 딸꾹질이 나왔다. 그렇게 멋진 아이가 태어나야 했어. 세상에 태어날 수 있는 생명이 제한적이라면 내가 그때 죽어 버리고, 그 아이가 선택받아야 했던 건 아닐까. 숨을 헐떡거리며 고통에 몸부림치자 재연이 계속해서 등을 문지르며 쓰다듬었다.

“형, 그만 울어요.”

“흐…… 이가, 윽, 애 여이…….”

아직 입 안에 물고 있는 방울 때문에 발음이 새어 나온다. 혀 짧은 소리를 내며 웅얼거리자 재연이 손가락을 입 안에 밀어 넣고는 방울을 빼냈다. 타액에 끈적끈적하게 젖은 방울이 짤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티슈 위에 떨어졌다.

티슈를 뽑아 젖은 내 입술을 닦아 주고 자신의 손가락까지 마저 닦은 재연이 핏자국이 남은 단검과 거울들을 다시 주머니 안에 넣으며 고개를 돌렸다. 계산대에 서 있던 엔지가 움찔거리더니 딴청을 부리기 시작했다.

“엔지, 초보한테 너무 과하잖아.”

재연이 화를 낸다. 싸늘하게 굳은 재연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던 엔지가 두 손을 들며 어깨를 으쓱했다.

“어쩔 수 없었어. 부탁한 건 너라고, 하재연 씨.”

“너 정말…….”

“앞으론 더 더러운 꼴도 보게 될 건데 과보호는 옳지 않아.”

“과보호라니.”

“아니라고 하진 않겠지.”

“말조심해. 화낼지도 모르니까.”

“으…… 알았어, 알았다고.”

일을 소개해 주고 부탁을 할 정도니 친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편견이었나 보다. 둘은 사이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이를 드러내고 화를 내던 재연이 잇새로 짧은 숨을 내쉬더니 목덜미를 파고 들어와 얼굴을 묻어 버렸다. 시근덕거리는 호흡이 마치 투정 부리는 아이를 보는 것 같아 가볍게 등을 토닥거렸다.

끊임없이 흐르던 눈물은 어느새 말라 있었다. 뻐근한 얼굴 피부를 문지르자 엔지가 찬물에 적신 손수건을 내밀었다. 레이스가 무려 세 겹이나 달려 있었다. 얼굴을 닦을 용도라기엔 황송할 정도로 화려한 천을 들고만 있자, 재연이 대신 집어 들어 눈과 뺨을 닦아 줬다. 엔지가 머리 위에 묶인 리본을 고쳐 매고는 허리 위에 손을 올렸다.

“참 나, 그게 과보호가 아니면 뭐라는 거야? 이원 씨는 스물여덟이라고.”

“시끄러워.”

“성격이 나쁘다니까.”

엔지가 혀를 차더니 먹을 걸 가져다주겠다면서 등을 돌려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작지는 않은 카페에 재연과 둘만 덩그러니 앉아 있으려니 어색한 기분이었다. 우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도 민망하다. 몸을 조금 비틀자 재연이 애완동물을 어르는 것처럼 내 턱과 머리를 일정한 규칙으로 쓰다듬으며 쇼핑백 하나를 내밀었다.

“뭐야?”

“갈아입을 옷이에요. 당분간은 우리 집에서 지내세요.”

“갑자기 왜?”

남의 집에서 지내는 건 불편한 일이다. 늘 좁고 북적거리는 교도소에서 지냈기 때문에 이젠 다른 사람과 같은 방에서 살고 싶진 않았다.

내 휴대폰을 마음대로 열어 제가 사는 원룸의 현관 비밀번호를 찍어 주던 재연이 내 얼굴에서 불만스러움을 읽었는지 말을 이었다.

“같이 살자는 건 아니에요. 나는 형 집에서 지내려고 하는데, 괜찮죠?”

“내 집?”

“사람이 살 만한 환경으로 만들어 둬야죠. 거긴 너무 위험해요.”

“나는 괜찮은데…….”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아요. 내가 형의 액막이라는 걸 기억해 주세요.”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말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집은 더럽고 햇빛도 부족한 반지하에, 살인범까지 찾아오는 위험한 곳이었다. 혼자 보낼 수 없어 머뭇거리자 재연이 주먹 쥔 내 손을 들어 쪽쪽 립키스를 날렸다. 유난히 입맞춤을 좋아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괜찮아요. 믿죠?”

“믿고 말고를 떠나서…….”

모로 보나 이상한 사람을 어떻게 믿으라는 말일까. 나도 믿음직스러운 사람은 아니지만 재연은 나보다 더 이상한 사람이었다. 애매하게 말을 흘리기는 했지만 전혀 믿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들어오지만 않았지, 초대해 달라고 집 앞에 줄 서 있던 귀신들 꼴을 보면 뒤로 넘어갈 거 같은데.

애매하게 웃기만 하자 재연이 장난스럽게 손가락 마디를 깨물었다.

“너무하네.”

쓴웃음을 삼키는 재연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정말로 믿음이 안 가는 사람인데 어떻게 그 집에 보낸단 말인가. 스스로 부조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조르는 것처럼 아프게 손가락을 깨물어 오는 재연을 이기지 못해 도어락 비밀번호를 알려 주었다. 재연은 비밀번호를 휴대폰 안에 입력하고 나서야 손을 풀어 주었다.

“아주 난리가 나셨어.”

그사이 주방에서 나온 엔지가 이것저것 잔뜩 올린 쟁반을 든 채로 퉁명스럽게 빈정거렸다. 여태까지 본 모습으로는 상냥하기만 한 아가씨였는데, 재연을 상대로는 태도가 날카롭다. 재연은 엔지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엔지의 쟁반을 받아 들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사이가 나빠도 무거운 걸 들어 주는 매너는 있나 보다. 엔지가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맞은편에 있는 의자 하나를 빼서 앉았다.

쟁반 안에는 아기자기한 다식들이 잔뜩 올라가 있었다. 재연이 내 손에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커다란 머핀을 쥐여 줬다. 시나몬 향이 섞여 있었다. 킁킁, 코를 가져다 대고 톡 쏘는 향기를 맡고 있으니 엔지가 티포트를 기울여 차를 따라 줬다.

“청귤 시나몬 컵케이크예요. 따뜻한 차랑 먹으면 기운이 좀 돌아올 거예요.”

“감사합니다.”

“뭘요. 잔뜩, 많이 먹어요. 살도 좀 찌셔야겠어요. 말랐다고 들어서 사이즈도 작은 거로 준비했는데, 셔츠가 크네요. 재연 씨는 그렇게 신경 쓰면서 왜 이원 씨 살은 안 찌웠대?”

엔지는 말이 빠른 편이었다. 숨도 쉬지 않고 와르르 쏟아 낸 엔지가 재연을 흘끗 보며 코웃음을 치더니 생크림이 잔뜩 올라간 컵케이크를 한 입 베어 물었다. 토스트 위에 잼을 펴 바르며 재연이 한숨을 쉬었다.

“기분 나쁘니까 시비 걸지 마.”

“어머나, 싫어.”

“그리고 왜 전부 밀가루야? 밀가루가 소화 잘 안 되는 건 몰라?”

“여긴 카페라고. 불만 있으면 식당으로 하나 개업하시거나.”

“서울은 포화라서 더는 지점 등록이 불가능하거든?”

“어쩌나, 아쉽겠어.”

그만 좀 싸워라. 속으로 푸념을 하면서 손에 들고 있던 컵케이크를 야금야금 먹어 치웠다. 종종 빵 안의 작은 청귤 조각이 씹히면서 입 안을 상쾌하게 만들었다. 달지 않은 차도 좋았다. 뜨겁고 단 음식을 먹으니 몸에 기운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숨을 길게 푹 내쉬면서 재연이 건네주는 토스트를 얼른 입에 넣었다.

더 따라 주는 차와 빵을 번갈아 가며 허겁지겁 입에 밀어 넣고 나니 정신이 좀 돌아왔다. 순식간에 텅 빈 접시를 보며 재연이 혀를 찼다.

“이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정신력이 많이 소모되기 때문에…… 엔지, 다음번엔 제대로 설명이라도 해 주고 시켜.”

“네, 네. 그러도록 할게. 이원 씨, 물어볼 건 더 없어요?”

엔지가 인간이 맞는지부터 물어보고 싶다. 우울한 생각에 머리카락 끝을 손톱으로 잘근잘근 누르면서 입을 열었다.

“서울은 포화라는 게 무슨 말이에요?”

“아, 그거요. 지역마다 이런 가게가 만들어질 수 있는 최대 개수가 정해져 있거든요. 서울은 정확하게 세 곳 있어요.”

“생각보다 적네요.”

“인구가 너무 많이 밀집되어 있어서, 가게가 많아지면 오히려 악령이 꼬이는 경우도 많아서 아예 제한해 버린 거죠.”

“아…… 그럼, 매일 이런 손님이 있는 거예요?”

“아뇨. 하루에 많아 봐야 둘 정도고, 아예 없는 날도 많아요.”

“그렇구나.”

재연이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머리카락에서 떨어트리며 마저 설명했다.

“보통 죽으면 다 저승사자를 따라서 이동해요. 죽은 자가 이 땅에 남아 있다면 100에 90은 원혼이 있는 자들이고, 가게에 찾아올 만한 이지가 없어 그 자리에 머무르기만 하죠.”

“그렇구나.”

“참고로 엔지는 인간 맞아요.”

“아, 그래.”

설명 참 고맙다……. 속으로 욕을 삼키며 어색하게 웃자 재연이 따라서 방긋방긋 웃는다. 화사한 미소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지만 아무리 봐도 본래 성격은 엔지 앞에서 보여 주는 모습 같다.

“적어도 재연 씨보단 인간다워 보이지 않아요?”

엔지가 손가락으로 본인을 가리키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놀리는 것처럼 엔지가 수줍게 보조개까지 패어 가며 웃자 재연의 입술이 꾹 비틀렸다.

“오늘은 첫날이니 먼저 들어가세요. 내일 뵐게요. 아, 다음에는 재연 씨가 데리러 와서 업어 가도 안 보내 줄 거예요!”

쾌활하게 떠든 엔지가 손을 흔들었다. 맞인사를 하기도 전에 재연에게 붙잡혀 질질 끌려 나왔다. 계속 생각했던 거지만 손과 팔뚝의 악력이 장난이 아니다. 고집불통인 아이한테 붙잡혀 과자 코너에 가는 부모 심정으로 따라 나갔다.

재연이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걷어차며 소리 없는 짜증을 냈다. 완전히 골이 난 모습이다. 이런 걸 보면 제 나이로 보이긴 하는데……. 한숨을 쉬며 재연의 팔을 토닥거렸다. 재연이 머리를 짚은 채 짜증스러운 투로 몇 마디 우물우물하더니 손깍지를 껴 왔다.

“……성격이, 좀, 가식적이긴…… 하지만.”

엔지의 성격이 정말 나쁘다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다.

“실력은 좋아요. 서울 지점 중에선 관리도 제일 잘되고 있고. 형이 일하기엔 편할 거예요.”

“응, 고마워.”

“그리고 카페 장사도 안 되는 곳이니까 일도 적고요.”

“……그래.”

누구의 성격이 나쁘다고 할 처지가 아닌 것 같은데. 내 앞에서는 꿍꿍이속을 제외하면 간과 쓸개를 내줄 것처럼 구는 게 더 이상하다.

잠깐 재연의 발걸음을 멈춰 세우고는 그의 얇은 목 폴라 티셔츠의 옷깃을 들췄다. 하재연의 목덜미에는 아직 푸른 멍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직도 낫지 않았구나. 다시 옷깃을 바로 해 주고는 말없이 걸었다.

재연이 모자를 고쳐 쓰고 옆으로 따라붙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어느새 해가 완전히 져 있었다. 말없이 한참 걷던 재연이 식당을 가리켰다.

“저녁 먹을래요?”

“방금 빵 먹어서 괜찮은데.”

“그래요. 그럼 다음에 먹어요.”

재연은 강요를 하지 않았다. 미련 없이 식당 앞에서 등을 돌린 재연이 담배를 하나 꺼냈다. 권유하길래 괜찮다고 고개를 젓자 혼자 불을 붙인다. 밤공기에서 사각거리는 이불 귀퉁이 접히는 소리가 났다. 오늘 왔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걸어서인지, 옆에 사람이 있어서인지 낯선 기분이 들었다. 재연이 손을 꼼꼼하게 잡으며 어깨를 기대 왔다. 영혼이 접촉하는 것처럼 말랑거리는 감촉이 느껴진다.

“형은 걱정할 거 없어요.”

“뭘?”

“내가 다 해 줄 테니까요. 앞으로 일어날 일들도, 일어났던 일들도…… 일어나게 될 일들도. 옆에 있게만 해 주세요.”

“되게 부담스러운 이야기인데.”

손바닥 중앙에 숨결을 불어넣는 것처럼 간질거린다. 재연이 씩 웃으면서 찬 바람 사이를 뚫고 휘파람을 분다. 밤에 휘파람 불면 뱀 나온다던데. 비현실과 가장 친해 보이는 사람이면서 미신을 믿지 않는 것처럼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리고 음을 불어 넣었다. 흥얼거리는 노래는 익숙했는데, 오래된 짝사랑과 관련한 가요였다.

옆에 있어 주세요, 사랑을 주지 않아도 좋아요, 나를 불러 주세요…….

재연이 하는 이야기 같아 가사를 떠올리기 싫었다. 괜히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어둑어둑한 밤 풍경 사이를 헤치며 걷기만 했다. 역시나, 재연과 있으면 귀신들이 보이지 않는다. 신기한 능력이다. 일방적으로 액막이가 되었던 것까지도.

“너 사실 성격 나쁘지?”

뜬금없는 질문에 재연이 휘파람을 우뚝 멈추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깜짝 놀란 얼굴은 그 나이의 대학생 남자애 같아 보여 웃음이 나왔다.

“엔지랑 대화하는 모습을 보니 그렇던걸.”

조금 전까지 한껏 서로를 꼬집고 빈정거리던 모습을 떠올리며 말하자 재연이 픽 웃었다. 어쩐지 불량해 보이는 얼굴이다.

“형, 나를 누가 키웠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응?”

“원래 자식은 부모를 닮는다고…….”

피식피식 웃음기를 섞어 가며 말을 모호하게 마치는 재연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재연은 다섯 살에 고아원에 들어왔고, 어쩌다 보니 내 손을 가장 많이 태우며 돌본 동생이었다. 삶을 돌리기 전까지는 대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뒷바라지를 해 줬던…… 게…….

“내 성격이 안 좋다 그거야?”

“설마요.”

“야, 사람의 성격은 사춘기에 가장 많이 변한다고. 적어도 네 사춘기 때는 내가 없었거든?”

“유아기도 무시는 못 하죠.”

할 말이 없어서 그냥 손을 젓곤 말았다. 재연이 소리 내서 웃으며 손을 꽉 잡아 왔다. 잡은 내내 손바닥이 점점 더 뜨거워져서 열이 나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였다. 막 불빛을 받아 빛나는 재연의 얼굴은 완전히 상기되어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달아오른 뺨과 귓가를 보니 하려던 말도 잊어버렸다.

그렇구나.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긴장을 한 채로도 투덕거리는 평범한 상황이 기뻐서 결국은 수줍게 웃어 버릴 만큼 재연은 흐트러져 있었다.

다 커서도 품 안에서 뒹구는 걸 좋아하는 소년의 표정이었다.

저 애도 소원이라곤 한없이 작고 가볍구나……. 쓰린 마음에 그냥 같이 박자를 맞춰 걸어 주기만 했다. 붙잡고 있는 손 사이로 심장 박동이 두근두근 뛰었다. 재연이 귓가에 입술을 붙이고 속삭였다. 키스하게 해 주세요.

하재연은 역병 같은 존재였다. 싫었다. 처음 재연을 만난 후 수많은 꿈이 다 공격적으로 변해 정신을 갉아먹었다. 염병, 과거의 기억이 이제 와서 다 무슨 소용일까. 재연은 아직도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지 않았고, 나는 시시각각 불안하고 괴로웠다.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귀신과, 저질렀던 죄와 잘못을, 죄책감을 재연은 아무렇지도 않게 취급했다.

원한다면 더 많이 저질러라. 무당이 반대하는 와중에도 재연은 덤덤하게 마음대로 살아 달라고 부탁했다. 역시 싫은 사람이다. 죄를 지으라고 부추기는 주제에 사랑을 고백한다는 건 모순적이다.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역병에 걸렸다면, 모두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면 결국 역병을 받아들이겠지. 혼자 살아남는 건 더 쓸쓸하고 괴로울 테니까. 기꺼이, 나를 죽여 달라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요? 재연이 입술을 가까이 붙이고 속삭였다. 조금 숙인 등, 밑을 내려다보는 시선과 아슬아슬하게 비켜 나간 숨결이 간지럽다.

그의 눈 안에 별이 들어가 있었다. 그저 땅과 유리창에 반사된 빛의 그림자인데도 이상하게 찬란했다. 두 손을 뻗어 재연의 뺨을 감싸 안았다. 재연이 기분 좋은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감았다. 손가락 안에 감겨드는 머리카락과 피부의 감촉이 부들부들하다.

“형은 너무 딴 세상에 빠져 살아요.”

“……응?”

“지나온 과거나 잘못에 왜 그렇게 연연해요?”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재연이 내 입술 중간을 엄지로 꾹 눌렀다. 자연스럽게 입술이 벌려진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뭘? 눈으로 대신 질문했다. 재연이 장난스럽게 귓불을 깨물며 혀로 가볍게 핥아 왔다. 따끔한 감각과 축축한 숨결에 소름이 익숙하게 돋았다.

“독한 주제에 물러 터지고 착해서…… 결국 거절하지 못하는 점이 형을 죽일 거라고.”

“위협하는 거야?”

“지적이죠.”

등 뒤에 딱딱한 담벼락이 닿았다. 재연이 귓가에서 목덜미까지 천천히 내려오며 숨을 들이켰다. 체향을 샅샅이 핥아 대는 것처럼 은밀한 행위였다.

“입술을 벌리고, 나를 받아 주세요.”

“…….”

“혀를 내밀고, 나를 삼켜 봐요.”

겨우 키스였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는데, 입맞춤에 머릿속이 혼탁하게 헝클어졌다. 맑은 물에 세제를 풀어 넣고 손으로 한 번 휘저은 것처럼 뿌옇게 변한다. 키스가 이렇게 정욕을 자극하는 행위였던가. 재연이 내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하아, 재연이 숨을 고르며 다시 입술을 부딪쳐 왔다.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 젖은 혀가 입 안 구석구석을 문질렀다. 혓바닥의 아랫부분과 볼 안쪽을 긁고 나갈 때마다 쾌감이 발가락을 마비시켰다. 혀와 입술이 떨어져 나가자 곧바로 손가락이 들어와 입 안을 점령했다. 성기를 핥고 빠는 것처럼 성실하게 재연의 손가락을 애무했다. 얼굴과 어깨를 쥐고 있는 재연의 손가락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재연의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리고 잡아당기며 키스에 매진했다.

숨이 점점 졸려 온다. 딱딱한 땅이 갓 구운 빵처럼 말랑말랑하게 변했다. 아, 기분 좋아. 재연은 정말로 전염병 같았다. 사고를 비천하게 바꾸고 육신을 괴롭혔다. 오른쪽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하지만 하재연이 주는 감각과 행위가 아닌, 그의 존재 자체가 미치도록 무서운 건 왜일까.

“윤이원…….”

이름 세 글자를 부르는 단순한 음성이 듣기가 싫은 이유를 모르겠다.

귀를 막고 몸을 웅크리고 싶었다. 당장 차가운 물에 뛰어들어 심장을 뒤흔드는 열기를 식히고 싶었다. 기꺼이 죽을 수 있었는데, 그런데.

“재연아…… 나, 네가 왜 이렇게 밉지.”

재연은 대답 없이 연거푸 입을 맞췄다. 얼굴 구석구석을 쓰다듬고 내려와 천천히 티셔츠를 들춰 올리며 재연이 허벅지를 붙잡았다. 손가락이 닿은 허벅지 안쪽이 불결할 정도로 뜨거웠다.

“내가 형에게 권유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뭘?”

“이런저런 나쁜 일들?”

“별로 없잖아?”

일도 소개시켜 줬으면서. 반쯤 무릎을 꿇고 앉을 기세인 재연의 어깨를 붙든 채로 고개를 갸웃했다. 재연이 씩 웃으면서 바지 버클 부분을 장난스럽게 물었다 놓고 대답했다.

“나는 형이 지금 당장 그 공사장으로 돌아가도 말리지는 않을 거라서요.”

“왜?”

“급해지면 형이 먼저 나를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너 성격 나쁘다…….”

“형 닮아서 그래요.”

“역시 성격이 나쁘다니까.”

헛웃음을 지으면서 점점 더 노골적으로 변하는 입술을 떼어 냈다. 재연이 아쉬운 얼굴로 순순히 물러났다.

“앞으로 할 일이 뭐든, 두려워하지 말고 하라. 그런 말이에요.”

“꿈보다 해몽이구나.”

재연이 어깨에 팔을 올리고 걸으며 장난스럽게 킥킥 걸었다. 입술에서는 다시 길고 느릿느릿한 휘파람 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사를 천천히 따라 부르며 지하철역까지 걸어갔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기 위해 등을 돌리는 순간까지 재연은 다정다감한 태도를 보였다.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 서서 가는 내내 생각했다. 투닥거리는 건 한순간, 농밀한 입맞춤으로 기적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도 찰나. 결국 심장의 끝에 고여 있는 마지막 한 숟가락을 퍼 올린 비밀스러운 감정은 꿀처럼 진하고 어두운색이었다.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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