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독과 스위츠(Sweets)
꿈에서 좀 더 말쑥한 차림의 하재연이 나왔다. 최근 유행하는 옷을 걸쳐 입고 가방을 든 앳된 얼굴은 지금과 똑같았지만 우울한 기운이 싹 가신 긍정적인 낯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잡아챘다.
재연은 뜨거운 커피가 가득 담긴 테이크 아웃 컵을 입가에 가져다 대고 가볍게 한 모금을 물었다. 손님도 적은 카페에서 괜히 테이크 아웃잔으로 받아 밖으로 들고 나온 것은 나와 오래 앉아 있기 싫다는, 빙 둘린 은유적 행위였다.
구질구질하게 그를 붙잡고 사랑한다고 말했던 것은 나였다.
재연은 사랑한다는 고백에, 그때까지의 무덤덤한 얼굴을 집어치우고 경멸하는 감정을 드러냈다. 구역질과 분노를 담고 살인자는 용서받을 수 없다며 저주의 언어를 또박또박 뇌까렸다.
하재연의 예쁜 입술에서 튀어나온 말에 마음이 찢어졌다. 하지만 복구할 수는 없었다. 방향과 주체성을 잃은 감정이 갈라진 틈을 비집고 흘러나와 발치를 적셨다. 재연을 거부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은 이런 말을 듣게 될 줄 알고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생을 반복하면 원망이 짙어지고, 해를 거듭하면 증오는 더 깊어지겠지. 그러니 아무것도 바라지 마.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
휘청거리는 난간을 붙잡았다. 천둥이 심하게 치고 폭우가 쏟아진다 했더니 정전이 되었다. 여기가 어디지, 고민하는 사이에 주변에서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이 울면서 깨어나는 소리를 들으며 이곳이 고아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충 어르고 달래 잠자리로 돌려보내고는 우비를 걸치고 휴대폰 불빛에 의지해 나갔다.
옆 공터의 공용 주차장이 물바다가 되어 있었다. 허벅지 반까지 물이 꽉 차올라 터져 나갈 지경이었다. 소용돌이를 치는 것 같은 난리 속에 어떻게 알았는지 달려 나온 주인들이 자가용에 불을 켜고 황급히 빠져나가려 노력했다. 이미 몇몇 차들은 침수가 되었는지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커다란 우산을 든 한 양반이 아이 씨, 짜증 섞인 거친 소리를 냈다.
가로등이 켜져 있는 것을 보니 정전이 된 건 건물뿐인 듯했다. 낡은 집이라 가끔 태풍이 불면 전기가 끊긴다. 이미 한밤중이라 다행이었다. 아니면 아이들이 한바탕 울음을 흘렸을 테니까. 곧 전기가 다시 돌아올 거라는 안내를 받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흘릴 수 있었다.
정전이 잠입한 건물은 어둑어둑했다. 불면증을 이기기 위해 샀던 향초로 대신 복도를 밝혔다. 라벤더 냄새가 빗물을 뚫고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얘야, 그만 보아라.’
방에서 황급히 나온 원장이 손사래를 쳤다. 자다 일어났는지 러닝셔츠에 팬티 차림이었다. 꼴불견인 차림새로 그가 말했다. 세상에 불난리와 물난리는 구경하는 것이 아니란다. 원장은 우습게도 미신을 믿었다.
어둑어둑한 방에 돌아와 보니 불청객이 와 있었다. 시선을 비스듬히 내리깐 옆얼굴을 보다 초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내려가서 자동차 보고 올게.’
아이들과 교외에 놀러 갈 때 쓰는 중고 봉고차를 언급하며 변명했다. 좀 높은 쪽에 차를 대 놓아 문제가 없겠지만, 걱정되는 척 다시 방문을 나섰다. 재연이 의자에서 일어나 팔을 잡았다. 방금 보고 왔잖아요.
결국 바깥으로 나가려던 발을 돌려 부엌으로 들어갔다. 성인이 되고 나서 얻게 된 것은 고아원의 물건을 마음대로 사용하거나 규칙을 어길 수 있다는 자유였다.
프라이팬에 계란과 식빵을 구워 두 사람 몫의 토스트를 만들었다. 냅킨에 감싼 토스트를 한 손에 들고, 자는 아이들이 깨지 않게 조용히 빨래를 널어 두는 베란다로 나갔다. 낡은 창틀에서 새어 나온 빗물로 바닥은 물투성이였다. 바가지 하나를 뒤집어 깔고 앉아 폭우를 감상했다.
원장이 미신을 믿는 관계로 우리는 모두 오묘하고 기이한 미신을 믿었다. 그럼에도 물 천지가 된 세상을 구경하는 것은 매우 흔하지 않고 재미있는 일이라 여겨지는 것이었다.
‘한 번도 이런 일 없었잖아. 왜 이래요?’
‘뒤쪽 하천이 범람했나 봐. 내려가서 보고 오든지.’
‘귀찮아요.’
‘별게 다.’
한참 더럽다가 요 몇 년 사이 그나마 맑아진 하천은 며칠씩 이어지는 폭우에도 넘친 적이 없었는데, 희한한 일이었다. 더러운 흙탕물이 차들을 집어삼키는 걸 보면서 토스트를 한입 물었다. 달콤한 딸기잼과 짭짤한 계란 프라이, 바삭바삭한 식빵이 잘 어울린다.
공터에 만든 주차장은 이제 완전히 물에 잠겨 차 지붕만 겨우 보이고 있었다.
‘비싼 차 많은데, 아깝겠다.’
‘다 보험 들어 뒀겠지.’
그 뒤는 다시 묵묵히 때 아닌 홍수와 장마를 구경했다. 무뚝뚝하고 더운 여름이 반쯤 쓸려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토스트를 반쯤 먹었을 때 재연이 몸을 뒤로 젖히며 말했다.
‘형, 나랑 자요.’
키스와 스킨십은 모두 끝낸 뒤였다. 마지막 단계인 섹스를 앞두고 재연을 피하자 그는 신사적인 척 사람을 괴롭혔다. 반쯤은 아들처럼 키우던 사람의 밑에서 다리를 벌리는 건 달갑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재연은 무료한 듯 덤덤한 목소리로 재차 말했다.
‘허락해 주세요.’
내가 그 무더운 어느 날 여름, 재연의 말을 들어 주었던가.
눈을 떴을 때는 아직 새벽이었다. 새벽빛 사이에 침전해 있는 먼지를 바라보다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재연은 전화에 몰두해 있었다. 이상하게도 내가 깨어 있다는 걸 아직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보이지 않는 막이 사이에 쳐진 것 같았다. 목이 마르다. 재연을 부르려고 했지만, 몸이 무거워 손가락도 제대로 들어 올리지도 못했다.
“알아.”
하재연은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홀로 일갈했다.
“그래, 기다려. 기다리면…… 다시 완전해질 수 있어.”
‘나는 완전한 존재다.’
누군가 애틋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 나는 타인이 필요치 않구나.’
그 말이 나에게 찢어지게 상처를 안겨 주었다.
환청인가. 기이한 목소리에 눈을 한 번 깜박이자 눈물이 떨어졌다. 전화를 끊은 재연이 뒤를 돌아보더니 깜짝 놀란 얼굴로 휴대폰을 한쪽에 떨어트려 놓고는 몸을 부축했다.
“어디 아파요?”
“아니…….”
손이 뺨과 눈가를 어루만지며 토닥여 준다. 지난 밤, 재연과 관계를 맺었다. 사귀지도 않으면서 사고를 쳤다. 밤에 가졌던 열락을 생각하면 팔꿈치까지 소름이 오슬오슬 돋아나는 기분이었다.
얼마 전까지도 몸뚱이의 순결이나 섹스가 비위 상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건 아이들이 물을 뿌려 만든 흙덩어리 주먹밥보다도 가치가 없었다. 재연의 욕구를 들어주는 것도 귀찮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원장의 변태적 성향이 신체적인 접촉에 대한 거부감을 만드는 데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는 추측할 수 있었다. 여성의 옷을 입지 않겠다고 하자마자 화를 내며 폭력을 휘둘렀으니까.
남자로서 남성성을 무시당하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었고, 트라우마를 안겨주었다. 그 때문에 타인의 앞에서 남성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는 성기를 드러내길 원하지 않았었다. 그 바람에 과거에는 반년을 넘게 질질 미뤘던 행위를 이번에는 물불 가리지 않고 단번에 저지르다니. 아무렇지 않아진 걸까, 아니면 잊은 걸까.
“몸이 너무 아파.”
“갑자기 무리해서 그래요. 잠깐만, 고개 좀 숙여 봐요.”
어질어질한 머리를 푹 숙이자 재연이 뒷목을 덮고 있는 티셔츠를 들췄다. 따뜻한 숨결이 닿았다 금방 떨어져 나갔다. 어젯밤만큼 끔찍한 쾌감이 들지는 않았다. 조금 긴장한 목을 거북이처럼 움츠리자 재연이 뒷목을 매만지고는 순순히 떨어져 나갔다.
“이제 완전히 없어졌네요. 다음부턴 그 남자는 피하세요.”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니까…….”
“아예 포기하지 말란 말이죠.”
입가에 물컵을 가져다 대어 주며 재연이 훈계하듯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차가운 물을 허겁지겁 들이켜면서 눈만 돌려서 방을 살폈다. 내가 살던 때와 달라진 것 없는 좁고 숨 막히는 구조인데 온화한 느낌이 든다. 몽롱한 정신으로도 바람 냄새가 난다고 느꼈던 건 착각이 아닌 모양이었다.
조금 습한 냄새. 곰팡이와 눅눅한 지하의 습기 냄새가 아닌, 비와 물 같은 습한 냄새. 자유롭고 시원한 공기. 하재연의 품에 비스듬하게 안긴 채 바깥으로 난 창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새벽인지 하늘은 반쯤은 까맣고 반쯤은 푸른색이었다. 거의 남빛이 대부분인 하늘을 멍하니 보고 있자 재연이 뺨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역신에 대한 전설을 알아요?”
흥미로운 이야기에 재연의 얼굴을 올려다보자 입술에 가벼운 립키스를 해 온다.
“처용가에 나오는 역신?”
“그건 한국의 무속 신앙에 가깝고요.”
“달라?”
“흠…… 보편적인 역신에 대한 공통적인 이미지가 있긴 한데요, 발생한 전설은 차이가 있죠.”
재연이 몽롱한 눈으로 창문을 계속해서 바라보며 설명했다.
“옛날이야기를 읽어 보면 역신은 황제의 어리석은 세 아들이 죽어서 변한 거라는 전설이 있어요.”
신기한 이야기다. 어어, 이상한 추임새를 넣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재연이 다시 한번 뺨을 꼬집었다. 피부가 얼얼하게 땅겼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하나는 강물 근처에 살며 역귀라 불리게 되었고, 하나는 시냇가에 살며 도깨비라 불리고, 또 하나는 건물의 모퉁이에 살며 아이들을 놀라게 했다고 해요.”
“신기하네. 그렇게 종류가 많아?”
“네. 그런데 우리는 인간의 배에서 태어난 존재에 신(神)을 붙이지 않거든요.”
“그럼?”
“타락해 악한 마음과 불행의 근원이 된 신이 있었어요. 상제는 그를 세 개로 쪼개 인간 세상에 던졌더니 왕비의 배에 잉태되어 태어나 세상에 질병과 악을 주었다……. 이런 류의 전래 동화라고 할까요.”
귓불을 날름 빨고는 재연이 중얼중얼 설명을 이어 나갔다. 가혹할 정도로 거친 섹스를 한 탓에 몸은 앉아만 있어도 후들후들 떨렸지만, 어쩐지 이 분위기를 벗어나고 싶진 않았다. 재연이 넋을 놓은 것처럼 많은 이야기를 해 주는 경우도 드물었으니까.
“그 남자는 천신에게 버림받아 역신이 된 자의 후손이죠.”
역신이기 때문에 악업을 저질러도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당연하며, 그 대가는 주변인들이 더 가혹하게 치르는 팔자를 가진 흉성(凶星)의 사주라 설명했다. 불공평하다고 말했더니 재연은 사주는 사주일 뿐이라고만 이야기했다. 실컷 역신 어쩌고 할 땐 언제고, 설득력이 전혀 없는 말이었다.
“역신이 형의 인생을 결정짓는 주축에 서 있는데 인생이 잘 풀릴 것 같아요?”
“말이 너무하다.”
그 전에 벌어진 일의 규모가 장난이 아니잖아. 용에, 신에. 투덜거리면서 시선을 돌리자 재연이 턱을 쥐고 가볍게 흔들면서 손가락으로 창틀을 가리켰다. 시선을 따라갔지만 별다를 것 없는 풍경이었다.
“저긴 왜?”
하재연은 대꾸 없이 쇠창살이 로 막힌 창문을 꼿꼿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서서히 밝아지고 있는 하늘에 의지해 창문을 계속해서 노려보았다. 역시 다른 건 없다. 귀신이 들러붙어 있지도 않았으며 아주 뽀송뽀송하니 기분 좋은 햇살이 슬슬 내려앉기 시작하고 있었다. 희미한 물 얼룩, 쇠에 남은 닳은 손자국과 희뿌연 마른 자국…….
위화감에 눈을 깜박깜박 몇 번이나 감았다 뜨길 반복했다. 가슴팍을 꽉 끌어안은 채로 재연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길고 텀이 긴 재연의 호흡을 따라 하며 좀 더 창틀을 보았다. 좁은 방이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
시력이 나빠진 거면 좋겠는데, 남자라서 알기 쉬운 무언가의 흔적이 보였다.
“어제 창문으로 훔쳐보는 놈이 하나 있었거든요.”
“…….”
“혼자서 헉헉거리다가 자위를 하던데, 급해서 말해 주는 걸 까먹었어요.”
하재연은 지금 이걸 변명이라고 하는 걸까. 황망하게 고개를 올린 채로 정액이 말라서 굳은 흔적만 쳐다봤다.
“아무리 죽이고 싶은 상대라도, 그렇게 야하게 우는 걸 보면 흥분되나 보네요. 남자란 역시.”
“……너도 남자야.”
남자들끼리의 저질스러운 정사 장면을 보였다는 것에 대한 수치심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부정하고 싶을 정도로 죄책감이 머리를 콱콱 때렸다. 왜 잊고 있었을까, 그 음산한 스토커. 아무리 정신이 없었다지만 그건 홀시해서는 안 되는 대상이었다. 재연이 턱선에서 목으로 이어지는부근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형이 역신만 만나지 않았으면 나랑 사고를 치진 않았겠죠. 그 전에 보살님의 말을 듣고 빠르게 일을 접었다면 그 남자와 안면을 틀 일도 없었겠지만.”
“…….”
“살려 달라고 했죠.”
“…….”
“그렇게 해 줄 수 있어요. 충분히.”
그건 마치 ‘살려만’ 주겠다는 의지 같았다. 입술이 본능적으로 파르르 떨렸다. 재연이 치워야겠네, 투덜거리며 일어나 싸구려 물티슈를 몇 장 뽑아 들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남이 뿌려 두고 간 정액을 닦는 얼굴은 아무 감정도 들어 있지 않은, 고요하고 텅 빈 그릇 같았다.
창문을 꼼꼼하게 닦아 낸 재연이 더러워진 물티슈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현관문으로 나갔다. 어디 가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잠금장치를 풀고 문을 활짝 열었다. 막 문을 두드리려고 주먹을 들어 올리던 남자 두 명이 입을 벌린 채로 굳었다. 면식이 있는 형사였다.
간밤의 정사로 인해 재연의 어깨와 등에는 손톱자국으로 가득했다. 불그죽죽한 피부 위의 상처와 브리프 한 장만 걸친 맨몸을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내고 재연이 문가에 기대섰다. 헐벗은 남자를 보고 놀랐는지 형사들이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고 허둥거리다가 헛기침을 했다. 저러다 본론으로 들어가려면 평생 걸릴 것 같아 먼저 물었다.
“새벽부터 어쩐 일이세요?”
“……거, 그러니까.”
“말씀하시죠.”
“윤이원 씨가 살인 사건 용의자로…… 지목이…… 커흠…….”
나이 지긋한 형사 하나가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 마른기침을 했다. 구를 만큼 굴렀을 경력의 형사면서 왜 남자의 알몸에 저렇게 민망해하는지 모르겠다.
찾아왔는데 이불 속에만 있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엎드린 채로 엉금엉금 기어 서랍장을 뒤지는 흉내를 냈다. 그러자 재연이 다가와 아무렇지도 않게 속옷과 갈아입을 옷을 꺼내 주었다. 뒤처리된 상태라 다행이었다. 정액 범벅이 된 몸을 들키는 것보단 나았으니까. 형사가 보고 있든 말든 느릿느릿 옷을 입고 뻐근한 허리를 짚으며 일어났다. 재연이 말려 올라간 셔츠를 정리하고 구깃구깃해진 머리카락을 빗겨 줬다. 스킨십이 길어지는 동안 형사의 얼굴도 묘하게 변해 가기 시작했다.
깨끗한 손바닥을 공연히 툭툭 털며 형사를 흘끗 봤다.
“그런데 무슨 사건요?”
“그건 서로 가서 이야기합시다.”
“좋아요. 그런데 알리바이도 확인 안 한 사람한테 용의자라고 하지 마세요.”
“이번에도 증거가 나왔는데 무슨 소리야!”
한 번 비꼬았더니 못 참고 버럭버럭한다. 저 급한 성격은 다행히 팔아먹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저도 모르는 증거나 보러 갑시다.”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꾸했더니 형사가 성질을 못 이겨 뒷목을 잡았다. 하재연이 그러지 말라는 듯 내 입술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꼬집고는 옷을 챙겨 입었다.
“가려고?”
“아침 강의 있거든요.”
대학생이었지.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편안하게 차려입은 옷과 묵직해 보이는 검은색 스포츠백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연이 싱긋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뺨에 입을 맞췄다. 형사들의 헛기침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따라가는 게 좋을까요?”
“아니야, 나 늦어질 거 같으니까 엔지한테 말이나 전해 줘.”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재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먼저 운동화를 구겨 신는다. 태연하게 집을 나서는 애를 붙들고 형사가 거, 하며 인상을 괜히 험악하게 썼다. 재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 큰 애가 귀여운 척 고개만 까딱거리는데 미워 보이진 않는다.
“자네는 누구인가?”
“아는 사람이요.”
“어젯밤부터 같이 있었나?”
“그런데요?”
하재연이 당연하다는 듯 긍정했다. ‘보시다시피’라는 말은 하지 않아도 방금 전까지의 행동이 증명하고 있었다. 둘 다 정사 후의 몰골이 확실했으니까. 형사는 조금 전의 반라 쇼가 생각났는지 다시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마약 난교 파티도 보셨을 법한 분이 왜 저러실까.
“흠흠, 혹시 상황에 따라서 진술하러 와야 할지도 모르는데 연락처를…….”
“형 쪽으로 연락 주시면 가겠습니다. 형, 저 갈게요.”
“그래, 가.”
타이밍 좋게 현관문을 열었을 때부터 알아보긴 했다. 하재연은 분명히 이번 사건을 예상했을 것이다. 남들보다 많은 것을 알면서 살인도, 지저분한 자위행위도 방관하고, 한 걸음 떨어져 있겠다는 태도가 기이하다. 어차피 많은 이해를 바라고 저 애와 지내는 것은 아니었다.
시큰둥하게 배웅하며 집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여전히 집 안에서는 상쾌한 기운이 느껴졌다. 귀신이라곤 한 줌도 없는 방 안에서 의미 없이 공기를 움켜쥐었다. 손에 잡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형사가 빨리빨리 움직이라고 짜증을 낸다. 알았다고 대충 대꾸하고 소지품을 챙기는 척 서랍장과 구석 이곳저곳을 뒤지며 시간을 채우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사가 우악스럽게 뒷덜미를 잡아끌었다.
“야, 이 새꺄.”
“왜요.”
“모자도 없냐?”
“없어요.”
“김 형, 거 마스크라도 줘 봐.”
얼굴이 좀 더 젊어 보이는 형사가 호주머니를 뒤져 하얀 일회용 마스크를 찾아 내밀었다. 강제로 얼굴을 가리고 나오자 앞에 스타렉스가 한 대 주차되어 있었다. 아직 소문이 난 건 아닌지 동네 자체는 조용했다.
“영장 발부된 거 아니니 조사만 받으라고 조용히 불렀다. 이런 시펄.”
가래 끓는 목소리를 내며 형사가 담배를 물었다.
“왜 그러시는데요.”
지난 밤 섹스의 후유증으로 아직도 허리가 작신작신 쑤셨다. 뒷좌석에 늘어지듯 앉아 투덜거렸더니 형사가 눈을 홉뜨며 중얼거렸다.
“오늘 새벽에 일어난 살인 사건 용의자로 낙점이다. 정확하게는 보복 대상자.”
“네……?”
“선배님, 그런 이야기 지금 막 하셔도 됩니까?”
운전하던 젊은 형사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대화를 막았다.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팬 형사가 괜찮아, 하고 손을 내젓더니 이마를 툭툭 친다. 그리 불쾌하지는 않았다.
“죽은 남학생 시신 위에, 정확하게 네 이름 석 자 써 두고 이 사람 대신 죽은 거라고 적어 놨다 이거야.”
“……그것참.”
“덕분에 부모는 난리가 났어.”
“그렇겠네요.”
“경찰서에 가면 좀 쥐어뜯기고, 원한 관계 조사받아.”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은 부모를 잃은 자식의 슬픔보다 더 크겠지. 어쩐지 하늘빛이 우울했다. 하루마다 짙은 일만 일어나니 늘 어제의 일이 기억나지 않았다. 더 오래전, 세밀해야 할 기억도 퇴색한 걸 보니 그저 기억력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감옥처럼 캄캄한 곳으로 달려가는 차에 앉아 재연을 생각한다. 엔지와 주영과 이진현과 무당과 작업반장을 떠올린다. 잃어버린 것과 얻어 낸 것에 대해 탐구한다. 나를 버리고도 원장이 우아하고 행복한 척 살았을지에 대해 고려한다.
인간은 언제나 생각에 빠져 있다. 아마도, 추측이지만 그 생각이 모든 것을 망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형사가 시키는 대로 차에서 미끄러지듯 내려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다. 묵직한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중년의 여성이 덮치듯 달려들어 멱살을 쥐는 바람에 넘어졌다. 딱딱한 맨바닥에 부딪쳤지만 위에 올라탄 사람이 너무 아파 보여 차마 화를 낼 수 없었다. 아아! 고성을 지르면서 슬픔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여성은 자신의 상실을 보여 주고 있었다.
“너 때문에 내 아들이 죽었어!”
가슴팍을 밀치고, 온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분노로 울면서 바라고 외친다. 내 아들을 돌려 달라고.
집안 살림에 두꺼워진 손바닥에 반비례하는, 그녀의 가벼운 손목을 쥐고 고개를 저었다. 사과는 하지 않았다. 형사 몇 명이 달려들어 여자를 몸에서 떼어 놓았다. 발버둥을 치며 엉엉 우는 여자를 놓고 느릿느릿 걸어가 데스크에 앉았다. 조사 중이던 형사가 미간을 좁히고 혀를 찼다. 츳츳거리는 적나라한 소리에 여자가 울부짖었다.
형사들은 갑작스러운 살인 사건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불려 나와 뛰어다닌 듯했다. 옆자리 형사가 손짓으로 불러 앉히며 대략적인 사건 경위를 설명했다. 피해자 이 군은 올해로 열다섯 살. ……분명히, 원장을 죽였던 시절의 나와 같은 나이인 새파랗게 어린 중학생이었다. 외고를 노릴 만큼 열성적인 우등생이었으며, 학원에서 늦게 들어오는 길에 살해당했다. 갈가리 찢긴 아들의 사체에 여자는 정신을 놓았다고 했다.
새삼스럽게 느꼈다. 복수를 위한 보여 주기식 살인치고는 잔인할 정도로 무차별한 행위였다. 한동안 잠잠하던 놈이 왜 하필, 때에 맞춰서 집에 나타났는지 모르겠다.
“원한 관계가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저번 살인 사건 때 집 앞에 보란 듯이 흉기가 있었잖아요.”
“왜 그렇게 한 거로 생각하십니까?”
“제가 그 사람의 부모를 죽였으니까요.”
대답하자마자 옆에 앉아 진술하던 여자가 외쳤다. 이 살인마! 아들을 잃은 여자가 울부짖으면서 옆에 있던 연필꽂이를 붙잡아 던졌다. 말릴 틈도 없이 나무로 만들어진 연필꽂이가 내 옆머리를 가격하고 바닥을 굴렀다. 비스듬한 모서리에 긁혔는지 머리가 따끔거렸다.
오열하며 욕설과 저주를 퍼붓던 비련한 여자가 끌려 나간 뒤에야 제대로 된 취조가 시작되었다. 형사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고작 한 사람이 나갔을 뿐인데 수사실 내부는 텅 빈 것처럼 을씨년스러웠다.
손깍지를 낀 채 책상 위에 올리고 기지개를 쭉 켰다. 죽은 학생은 안타깝게 되었지만…… 그래, 오늘도 살아남았으니 살아 있는 인간의 본분을 해야 했다. 진술을 마치고 나면 엔지의 카페로 가서 일하자. 업을 쌓는 건지, 덜어 내는 건지 모를 일을 반복해야지. 홀로 판단을 끝내고 입을 열었다.
“형사님도 아시겠지만 사람 찢는 게 보통 힘으론 안 되잖아요?”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며 용의자에 대한 평가를 추려 나갔다. 창문에 매달려 노려보던 그 시커먼 놈의 체격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덩치가 크고 최소 키 180 정도 되는, 악력이 매우 좋은 자.”
용의자는 이번에도 장기가 잘 떨어져 나가 있었다고 했다. 생채기가 아주 조금씩 나긴 했지만 깔끔한 해부였다고 한다.
“그리고 장기를 잘 발라 낼 수 있을 만큼 인간의 신체에 해박한 자.”
싸늘한 침묵이 내부를 맴돌았다. 옆에 선 중년의 형사가 씨발, 하고 의미 없는 욕설을 뇌까렸다.
“아마 행복 고아원 출신일 거예요. 그 사건을 정확하게 이해했을 정도면 나이가 어느 정도 있을 테니…… 그렇게 인원이 많지는 않겠네요. 불러 드릴까요?”
본래 그렇게 큰 고아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상급생들로 치는 또래 아이들의 이름과 얼굴은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사실 가장 쉬운 방법은 창틀에 묻어 덜 지워졌을 정액을 채취해 검사한 후 해당되는 사람을 잡아다 알리바이를 추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려 주지 않았다.
재연은 형사가 찾아올 것을 알면서 일부러 물티슈로 그 자국을 제거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재연의 선택이라면 인간성이 위태로워도 그가 하고 싶은 대로 둘 작정이었다. 재연 역시도 어찌 되든 나의 모든 선택을 존중해 주겠다고 했으니까.
천천히 모든 고아원생의 이름과 특징을 이야기했다. 형사는 눈을 시퍼렇게 뜨고 불러 주는 말을 모조리 받아 적었다. 유독 원장을 따랐던 아이들을 따로 골라내다 한 이름에서 눈이 멈췄다.
열다섯 살, 원장을 죽이기 전 마지막으로 팔려 나갔던 형제의 이름이었다. 소심한 성격에 예민해서 조금만 스트레스를 받으면 음식을 게워 냈다. 그 바람에 늘 왜소해서, 구석에서 와들와들 떨기만 했다. 억지로 달래 바깥으로 내보내면 옷 어딘가를 찢어 먹거나 다치는 바람에 울면서 돌아왔다. 조금만 더 빨랐으면 이 아이도 구할 수 있었겠지.
“…….”
이진현이 했던 말이 뼈아프게 느껴졌다. 영웅 놀이에 심취해 있던 것은 아니냐고. 아니야, 부정하는 것처럼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았다. 이곳만 오면 늘 시간이 지루했다. 엔지는 이미 바쁘게 가게 오픈 준비를 하고 있겠지. 술을 잔뜩 마신 다음 날이라 혼자 일을 하려면 바쁠 텐데. 손이 망가지지 않게 대신 설거지도 해 줘야 하는데. 쓸데없는 걱정을 하며 손가락으로 책상을 다각다각 두들겼다.
그 여름날 밤의 행위는 많은 사람들을 상처 입혔다. 손가락을 녹이던 살점의 고통을 그 아이는 다시 나에게 주고 싶은 것일까. 이미 받았는데, 다시, 또다시.
“먼저 불러올 수 있는 사람 있는가?”
집에 찾아왔던 중년의 형사가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 연락처를 켰다.
연락을 받은 주영은 회사 일도 마다하고 빠르게 찾아왔다. 오자마자 믹스 커피부터 한 잔 마시더니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를 꿰차고 앉아 진술을 시작했다. 어젯밤 늦게까지 같이 있었다는 말에 형사들이 서로 슬금슬금 눈치를 봤다.
주영은 어제 있었던 일을 적당히 부풀려 장황하게 설명하고 형식적인 시늉으로 명함을 건넸다. 명함에 찍힌 대기업의 이름과 직함에 형사들은 깔끔하게 오해를 지웠다. 오히려 비정상이라면 어디 가서 남부럽지 않을 주영이 정상적이라고 착각했는지 감동하는 표정까지 지었다. 다음 차례로 와야 할 재연의 연락처를 넘겨주고 나서야 귀가를 허락받을 수 있었다.
“고생시켜서 미안.”
“뭐 이런 걸 가지고?”
서주영이 장난스러운 얼굴로 내 허리와 엉덩이를 툭툭 치더니 차에 들어가 있으라고 하고는 근처 커피숍에 들어간다. 조수석에서 안전벨트를 맨 채 기다리자 금방 아이스커피 두 잔을 사 들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건네주는 커피를 고맙게 받아 빨대를 물었다. 음료가 차가웠다.
“우리 이원 씨, 인기가 아주 좋으셔.”
“그러게나 말이다.”
“안 그래도 너한테 연락하려고 했는데, 빨리 해 주니 좋긴 하네.”
“좋은 일도 아닌데.”
흠, 주영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눈치를 본다. 어제 이야기를 하겠구나, 하는 생각에 잠자코 기다리기만 했다.
“너 정말 보여?”
“응.”
“하재연도 보이고?”
“그런 거 같아.”
“……내가 궁금한 게 있는데.”
지금 물어본 건 궁금한 게 아니었나 보다. 김빠진 얼굴로 어, 하고 대답하자 주영이 눈을 한번 휘릭 굴렸다.
“꿈은 진짜냐.”
“…….”
“하재연은 그게 각색된 거라고 이야기했거든. 그런데 걔가 한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듣고 났더니, 네 말이 꼭 거짓은 아닌 거 같아서.”
“뭐…….”
째깍째깍 시간이 흐른다. 빨대를 잘근잘근 씹어 물면서 고민했다. 어디부터 설명할까. 하지만 귀신을 보거나, 본 적이 있다면 무속 신앙을 믿지 않더라도 비교적 쉽게 수긍할 수 있다. 사주팔자와 인과 관계 같은 것도 대한민국에 오래 자리 잡은 관념이었다. 하지만 시간을 되돌리는 것은 그 관념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다.
“미래야.”
“미래?”
“그래, 그대로 살았다면 일어났을 미래…….”
이진현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변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도 완벽하게 믿지는 않아. 하지만 이진현 이사는 원장 선생님과 아는 사이였어. 입양된 애들 중 연락이 되는 사람도 없고.”
“그건 그렇네.”
주영이 머리 뒤로 팔을 받치며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뭐야, 네가 내 생명의 은인인가.”
아니다. ‘원래대로’의 삶에서도 주영은 스무 살이 되자마자 고아원을 떠나서 동기들 중 유일하게 잘 먹고 잘산다. 지금처럼 좋은 대기업에 들어가 고액의 연봉을 받으며 인생을 즐긴다. 이런 위험하고 비합리적인 일에 휘말리지는 않는, 괜찮은 삶의 보유자였다.
“그렇다면 나도 도와줘야겠네. 걱정 마라, 형님의 매력으로 그 이사님을 처리해 주지.”
“……네가 뭐라고?”
“어허, 내 매력이 장난이 아니거든. 이진현 이사랑 같이 있으면 재수가 없다며? 그러니 아예 내 매력에 홀딱 빠트려서 네 생각도 안 나게 하는 거지.”
주영이 참으로 좋은 보답이라고 자화자찬을 하기 시작했다. 손바닥으로 나불거리는 아가리를 탁 때리고는 출발을 강요했다. 주영은 완전히 삐진 채로 차를 몰았다. 시끄러운 목소리를 듣고 흘리며 진술을 되새겼다.
진술 과정에서 어젯밤의 일을 아주 자세하게 서술했다. 일하던 카페에서 술을 한잔하고 나와 재연과 집으로 가 몸을 섞었다. 본인은 게이다. 그 말을 하는 내내 행위의 서술은 노골적이었고, 형사는 몇 번이나 그만하라고 했지만 꾸역꾸역 떠들었다. 불안함이 눈에서 떨어지고 있었다는 걸 형사도 알아챘을 것이다.
저지른 죄는 특정한 다수를 대상으로 분을 샀다. 고아원의 모든 원생들. 피범벅이 된 몸을 보며 토악질을 하던 동생들의 혐오스러운 표정.
형사는 원생 중 한 명이던 서주영에게 물었다. 살인과 방화로 한 번에 터를 잃게 한 윤이원이 밉지 않았습니까? 서주영이 어이없는 얼굴로 되물었다. 제가 괜찮다는데 왜 그러세요? 참고로 ‘왜 그러세요?’라는 말이 ‘왜 지랄이세요?’를 순화시킨 거라는 데에 5백 원을 걸 수 있었다.
그 뒤에도 형사는 주영에게 시시콜콜 내 원한 관계를 캐물었다. 서주영은 아주 적당한 사회인의 얼굴을 하고 형사의 말을 한 마디, 한 마디 꼬박꼬박 쳐 냈다. 어찌나 잘 돌려서 비꼬는지 듣고 있는 사람이 눈치채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너 말이야.”
얼음만 남은 테이크아웃 잔을 빨대로 쭉쭉 빨며 운을 뗐다. 주영이 응? 하면서 신호에 맞춰 서서히 차를 세웠다.
“왜 나한테 찾아왔었냐?”
“찾아와?”
“감옥에서나, 지금이나. 원한은 없어도 꼭 친구로 지낼 필요는 없잖아.”
사실을 지적하자 주영이 음, 하면서 라디오를 틀었다. 오전 11시를 알리는 음악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진 라디오 DJ가 오늘 날씨에 대한 찬사를 흘려보냈다. 햇빛도 바람도 소풍 가기 좋은 최적의 온도! 평일이라는 게 정말 아쉽네요. 흘러나오는 즐거운 노랫소리까지. 살인 사건과는 전혀 관계없이, 오늘도 참으로 즐거운 세상이었다. 이런 건 비뚤어진 사고방식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
“어, 내가 이야기했나? 지금 사장님이 내 후원자라고.”
“그런 거 같기도 하고.”
기억은 안 나지만 시시콜콜하게 듣기 싫으니 아는 척 흘려보냈다. 주영이 핸들을 천천히 꺾으며 씩 웃었다. 과거에 젖어 들어간 얼굴로 주영이 신나게 말했다.
“그때 사장님이 그랬거든. 애미 애비 없이도 얼마든지 인생 역전 가능하니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
“그 말에 감동해서 찝찝한 건 전부 잊어버리기로 했어!”
이 새끼에게 너무 많은 고차원적 사고방식을 요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닥치라는 뜻으로 콘솔에서 주영이 마시던 커피를 꺼내 빨대를 입에 물려 주고는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바퀴가 굴러갈 때마다 머리가 유리에 자잘하게 콩콩 찍혔다. 후루룩, 주영이 빨대로 음료를 힘차게 빨아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형사가 두 번째로 의심 대상에 올린 사람은 하재연이었다. 나와 재연이 명확하게 서로의 알리바이를 증명하고 있었음에도 의심을 사게 된 이유는 재연이 공범일 가능성 때문이었다.
같은 고아원 출신이면서도 나와 몸을 섞을 만큼 친밀한 관계. 살인 사건 같은 큰일로 형사가 나를 찾아온 것을 보고도 태연하게 집을 나섰다는 것. 이상하게 거리껴지고 찝찝한 느낌이 드는 인간. 재연은 가까이에 있는 자신의 원룸을 두고 굳이 일산까지 넘어왔다. 주영은 하재연을 제외하면 내 주소를 알려 준 사람은 없노라 자신했다.
잠든 나를 두고 몰래 집을 나서 칼을 쓰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쇠창살에 묻은 정액 따위야, 행위 후 나온 정액을 긁어다 발라 놓고 보란 듯이 시나리오를 만들어 떠들면 된다. 범인이라고 가정하면 완벽할 정도로 끼워 맞추기 쉬운 남자였다. 체구가 다른 것은 옷을 껴입으면 충분히……. 쾅, 소리 날 정도로 크게 머리를 창문에 박았다. 주영이 깜짝 놀라면서 괜찮냐 물어본다. 대답 없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엔지는 재연이 나를 살리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것은 믿으라고 했다.
그런데 그걸 역으로 뒤집어 보자.
재연은 노력하고 있다. 나를 살리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나를 ‘살려 놓기’ 위해서.
내 생존과 재연의 힘에 무슨 영향이 있는 것인가. 날카로운 바늘이 머리를 파고들었다. 따갑고 아프다. 사고 회로가 정지된 느낌이었다. 길가에 우두커니 서 있는 많은 귀신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잠깐…… 문득 특별한 귀신 하나가 생각났다.
“야.”
“응?”
“나 지금 내려 주라.”
“어? 왜? 너 효창공원 쪽으로 가야 하는 거 아니야?”
“갑자기 볼일 생겼어.”
주영이 얼떨떨한 표정을 한 채 브레이크를 밟았다. 뒤차가 경적을 세게 울렸다. 서주영이 뻔뻔한 얼굴로 웃었다.
“그럼 얼른 내려야지!”
“…….”
내려 달란다고 도로 중간에 차를 세우는 미친 새끼가 친구라니,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거의 쫓겨나듯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허겁지겁 내렸다. 바로 옆이 인도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주영이 창문을 내리고는 휘휘 손을 흔들고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고래고래 욕을 지르는 대신 휴대폰을 꺼내 저주하는 욕설을 잔뜩 적어 보냈다. 당분간 꿈자리 사납길 바라는 마음도 꾹 눌러 담았다.
한참 흰빛이 나오는 휴대폰을 보고 있다 바로 걸음을 옮겨 택시를 잡아탔다. 주소를 불러 주고 시트 위에 기대앉았다. 초조한 마음에 손가락이 저절로 곱아들었다.
재연의 집 근처 동네까지 20분이 걸렸다. 차가 막히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카드 기계에서 승인 완료라는 글자가 뜨자마자 굴러떨어지듯 내려 골목 안으로 달렸다. 복권과 담배를 파는 가게는 오늘도 손님이 드물었다. 욕쟁이 영감이 담배를 문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가게를 한달음에 지나쳐 놀이터까지 뛰었다. 더운 땀이 등을 축축하게 적셨는데 배 속은 얼음을 삼킨 것처럼 차가웠다. 사각형으로 만들어진 동네를 안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푸른색 바닥재를 깐 어린이 공원이 나온다. 서늘한 바람이 귓가를 스치고 멀어졌다. 여전히 아이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을씨년스러운 장소였다.
“제발.”
단발머리 아이 귀신이 말했었다. 재연은 내가 가진 죽을 팔자를 막아 주는 사람이니 친하게 지내라고. 그 아이의 눈에는 뭔가 다른 것이 보일지도 모른다. 묻고, 해답을 구하자. 어긋난 의심이라면 씨앗부터 제거해야 했고, 합당한 의혹이라면 그를 불신하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꼭 그래야만 하는가? 어지러운 마음에 놀이터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제발, 이야기 좀 해 줘.”
눈앞이 노란색으로 물들었다. 청명한 파란 하늘과 어울리는 빛깔이었다. 여전히 노란 원피스에, 샛노란 해바라기 꽃핀을 머리 한쪽에 찔러 넣은 아이가 웃고 있었다. 통통하고 말랑한 손바닥을 내밀어 내 머리를 토닥토닥 쓰다듬어 준다.
「오빠, 안녕.」
“…….”
「또 놀아 주러 왔어?」
해맑게 웃는 아이의 뺨은 분홍색. 귀신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생생한 기운을 띠고 있는 아이는 여전히 그림자는 가지지 않고 있었다.
“얼마든지 놀아 줄게.”
애절한 마음을 담았다. 아이가 다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생글생글 웃었다.
“알려 줘.”
「뭘 알려 줄까?」
“내가 모르는 것들.”
「그건 너무 광범위한걸.」
아이가 손가락을 까딱했다.
「그럼 오빠가 바라는 것을 보여 줄까?」
시야가 어두워졌다. 땅으로 순간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은 순간, 아이가 손을 꼭 잡아 왔다. 부드럽던 살과 피부가 딱딱한 해골 뼈로 변했다. 살과 피부 가죽이 썩고 총총히 빛나는 눈이 있던 자리가 움푹 팼다. 삽시간에 시체와 뼛조각으로 변한 아이의 썩고 삭은 치아가 딱딱하게 맞물려 씨익, 웃는 모양을 만들었다.
「지금부터 세는 거야.」
하나, 둘, 셋, 넷……. 파랗게 질린 뺨을 딱딱하고 바싹 마른 뼈가 길게 긋는다.
「대장각시 태문 열고 귀을각시 길을 여니 썩은 손목 마주 잡고 태을각시 귀문 열어 오소서 나에게 오소서」
물결과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가자 가자 불러서 가자 북망산천 멀어지니 이승으로 굿 받으러 나오소서」(*타살 군웅굿 中)
영혼이 뜯어졌다. 빈 육체를 내려다보며 아이의 혼이 내 혼의 손을 잡아 쥐었다. 아이가 조금 슬픈 표정을 지었다. 해골이라 표정이 읽히지 않는 데도, 뭔가 슬프고 비참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세상이 보였다. 블록 장난감처럼 차곡차곡 벽돌 같은 것이 쌓여서 만들어진 모양이었다. 하나하나 틈 없이 꽉 채워져서 지구의 모형을 만들고 있었다. 바다와 섬과 대륙이 파란색과 초록색과 흰빛을 띠고 있었다.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산과 꽃과 들판과 하늘도 섬세한 블록이 끼워 맞춰져 있었다. 정교한 예술품이자 아름다운 조형이었다.
사람들이 걸어 다녔다. 태엽을 끼우고 돌리는 것처럼 일정한 방향과 속도를 향해 하나둘, 하나둘 구령을 외며 열심히 이동하고, 머무르고, 일을 하고, 뛰어논다. 그중 태엽 하나가 유독 뒤로 튀었다. 찰칵찰칵, 역운동하는 소리를 내며 반대로 회전했다.
아름다운 지구의 모형 중 유독 딱 하나만 구체에서 벗어나 튀어나와 있었다. 그건 온통 일그러져 꼴 보기 싫은 모양을 하고 있다. 곡괭이를 든 인부들이 튀어나온 것을 콱콱 찔러 팠다. 얼른 파내야겠다는 것처럼 열심히 땀을 흘렸다. 귀기 서린 인부들의 붉은 눈동자가 번뜩이며 팔을 높이 치켜드는 순간 장면이 변했다.
섬세한 소리를 내며 활을 쥔 손이 아래위로 움직였다. 현악기와 타악기가 합을 맞춘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어울림을 냈다. 화려한 오케스트라, 인간과 세상의 화합을 상징하는 거대한 파이프오르간이 독주를 시작했다.
「오빠는 불협화음이지.」
홀로 오케스트라의 대합주를 방해하는, 뒤처지고 모난 악기. 음이 어긋나는 것을 가만히 두고 있을 지휘자는 없었다. 지휘자가 봉을 두드리며 화를 낸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언제나 나를 죽이려고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자연의 섭리와 법칙에 어긋나지 않을 수준으로, 그러나 한입에 꿀꺽 삼키려고 하는 것이다.
존재했다는 씨앗조차 남기지 않아야 한다. 그러니 남자인 내가 이성에 관심이 없는 것 또한 당연했다. 네가 죽어야 우리가 살아난다. 세상은 혹독하고 매섭게 질타했다.
「세상의 부조리 그 자체.」
다시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아이가 작은 지구의 구체를 들어 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손바닥 안에서 작은 빛을 내뿜으며 자전하는 모형을 바라보는 아이의 얼굴 구석에 그늘이 졌다.
“나는…… 왜 부조리가 된 거지?”
「오빠가 세상을 저버렸으니까.」
“왜?”
「자신의 운명을 인정하지 못하고 시간을 돌린 순간, 오빠는 세상의 적이 된 거야.」
꽃처럼 여린 입술이 재잘재잘, 음악 기호를 나열하는 것처럼 사실을 늘어놓았다.
「그 사람은, 오빠의 부조리를 원래대로 되돌려 놓으려고 애쓰는 자.」
“왜?”
「그리고, 그걸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몽글몽글 환영이 피어나 재연의 현재를 보여 줬다. 그는 아무것에도 관심 없는 무감각한 눈으로 강의를 듣고 있었다. 희게 드러난 옆얼굴을 보며 옆에 앉은 여자 두 명이 얼굴을 붉히면서 속닥거렸다. 재연은 자신에 대한 호감을 드러내는 안부 인사에도 단답형으로 대꾸했다. 무뚝뚝한 말투와 태도에 다른 곳에서 다시 수군거림이 커졌다.
쟤가 걔라며? 좀 이상한…… 얼굴은 멀쩡한데…… 사고가…….
사람들의 얼굴은 반과 반이었다. 재연을 향한 이상한 소문에 거리낌을 나타내는 자들과 번듯한 외모와 가식적인 매너에도 호감을 보이는 자. 누군가는 그걸 어른의 여유라고 표현했지만, 내 눈에는 단단한 권태로 보였다. 오랜 시간 쌓여 구축된 권태로움. 재연은 아무것에도 관심 있지 않았다. 강의를 듣고 필기를 하는 성실한 태도를 유지하고, 자신을 향해 오는 인사에 하나하나 답을 해 줬지만 호감을 가진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매일매일 다정한 척 조잘거리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내 앞에서 보여 주던 얼굴은 간 곳 없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언뜻언뜻 지겹다는 듯한 감정이 교수의 강의에 섞여서 바깥으로 새어 나왔다. 처음으로 읽었던 재연의 민얼굴이 기억났다. 후회하고 있다던, 힘 빠진 미소.
그는 가벼운 태도를 하고 무거운 말을 했다. 가끔은 무거운 태도를 하고 가벼운 언어를 사용했다. 원하는 말은 기다려도 해 주지 않았고, 상황이 벌어지는 것도 벌어지게 될 것도 방관했다.
“왜 하재연이 유일한 사람인데?”
하재연은 액막이다. 그가 죽으면 막고 있던 모든 액이 나에게 쏟아지겠지. 세상의 부조리라고. 오케스트라의 불협화음이라고. 이 세상이, 모두가 나를 죽이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면 그 살을 버티는 재연은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그거야 당연하잖아.」
현세를 비추는 거울을 쓰다듬으며, 아이가 다시 해골로 화(化)하며 속삭였다.
「저 사람이, 오빠를 부조리하게 만든 근원이니까.」
무료한 표정으로 턱을 괸 채 볼펜을 빙글빙글 돌리던 재연이 행동을 우뚝 멈추고 천천히 이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시선이 닿았다. 어떻게? 놀라서 중얼거리는 순간 험악하게 일그러진 얼굴의 재연이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친 행위와 음성이 촉각으로써 피부에 닿았다.
윤이원!
재연이 소리를 질렀다.
일본에는 카미카쿠시(神隱し)라는 말이 있다. 정확히 풀어 해석하자면 신(神)이 숨겼다(隱し). 그 단어는 이름만 바뀌어 각국의 구석구석에서 괴담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인간의 존재 자체를 세상에서 소멸시키는 어떤 기괴 현상.
시커멓게 시야가 변하자마자 그대로 추락했다. 재연의 과거를 짓밟고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낱낱이 흐트러지고 빗겨 나간 인생의 과업을 모조리 들춰낸 채 날것의 영혼이 바닥에 부딪혔다. 너무 아파서 신음이 저절로 입 바깥으로 꾸역꾸역 차고 올라왔을 정도였다. 얼얼한 몸을 추스르는 데만 시간이 한참이나 걸렸다.
“으…… 여긴…….”
몸을 반쯤 일으켜 고개를 들었더니 커다란 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정확하게는 진의 중앙에 떨어져 있었다. 타오르는 촛불, 금빛으로 적힌 진언(眞言)이 빛이 났다. 타닥타닥 불꽃 튀는 소리와 함께 사슬로 연결된 채 둘러앉은 십이신장들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졌다.
「꼴이 좋구나, 본인이 육체를 차 버렸으니 혼이 욕을 당하는 꼴이 아닌가.」
이곳에 또 오게 되다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이려고 했을 때 뭔가가 발목을 잡았다. 황망한 얼굴로 내려다본 자리에는 커다란 사슬이 있었다. 아니, 족쇄라고 부르는 것이 맞았다. 뺨 위로 뭔가가 떨어졌다. 비였다.
천장에서 비가 스며들어 흐르고 있었다. 두 손을 뻗어 흐르는 물을 받았다. 완전히 쏟아지기 시작했는지 금방 손바닥 안에 가득 고였지만, 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거대한 동굴에 갇힌 것 같은데 날씨만 느껴진다니, 이상한 곳이다. 갇힌 건가? 중얼거리자마자 쫑긋 솟은 토끼의 귀를 한 십이지신이 와르르 웃었다. 앞니가 날카롭고 뾰족했다.
「인간에게 살해당하고, 인간에게 버림받은 영혼이 멀쩡할 거 같으냐.」
그의 말을 필두로 십이지신들이 일제히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비웃음을 보냈다. 거대한 진 속에서 제물이 된 채 사정없이 정신이 혹사당했다. 사방을 둘러봤지만, 빛이라곤 한 점도 없었다. 족쇄는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무거워지기만 했다.
얼굴로 흘러내리는 빗물을 훔치며 눈을 찡그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천장 중앙이 울렁거리면서 무언가를 보여 주고 있었다. 해바라기 꽃핀이 어른거린다. 그 아이. 의미 없이 손을 허우적거리며 뻗었을 때, 아이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쓰러진 육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 몸은 비에 옷과 머리카락이 푹 젖은 채로 공원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팔랑팔랑, 노란 원피스 자락을 흔들며 몸 주변을 빙글빙글 돌던 아이가 화창한 햇살처럼 웃었다. 비는 여전히 쏟아졌다. 동굴 천장에서 머리 위로, 몸과 바닥으로.
아이가 고개를 번쩍 들고는 팔을 뻗어 인사를 하는 것처럼 손을 흔들었다.
「오빠, 안녕.」
“왜, 거기에…….”
혼이 떨어져 나가 껍데기만 남은 내 육체를 어루만지며 아이가 상냥하게 웃었다.
「정말 고마워.」
세상은 나를 죽이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은 절호의 기회였고…….
남은 육신이 코와 입을 벌리고 숨을 들이쉰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빨리듯 아이의 영혼은 주인이 비어 있는 육체 안으로 들어갔다. 눈을 뜨고, 손가락을 움직이며 ‘윤이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쏟아지는 소낙비에도 뺨에 핀 붉은 열꽃이 그 또는 그녀의 환희를 기록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살아나는 거야.」
그 기회를 잃을 리가 없다.
아이는 인간이 미웠다. 어린 나이의 죽음,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도망치듯 떠나 버린 어머니의 슬픈 외면, 사람이 죽은 뒤로 놀이터에 귀신이 나타난다고 끊어진 발걸음. 공 몇 번을 주고받아 줬다고 그 분노가 사라질 것 같은가. 아니다, 그럴 수 있었다면 원혼으로 남아 이곳의 지박령이 되지도 않았겠지.
과연 그녀가 멀쩡할 것 같으냐, 그럴 리가 없다! 십이지신들이 내가 가진 순진한 믿음과 무지를 비웃으며 열광했다. 눈앞에서 환희의 고조로 비명 같은 함성을 내지르는 아이는 미친 사람처럼 비에 젖은 놀이터를 뛰어다녔다. 움직이고 살아가기에 모자람이 없는 성인의 육체. 질린 기색도 없이 밝게 웃는 아이를 보며 말을 잃었다. 생각이 모자랐다. 아니,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육체를 빼앗겼으니 이제 정말로 영혼만 남았다면, 드디어 저것을 죽여 없애도 된다.」
이를 드러내는 소(丑)의 십이신장을 필두로 모두가 와르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번 손짓을 할 때마다 족쇄가 우르르 땅바닥에 끌리며 마구잡이로 끌려갔다. 영혼에 생채기가 잔뜩 새겨졌다. 맨바닥을 질질 끌려다니며 혹사당했을 때, 자정의 자리에 앉은 쥐가 내 목을 틀어쥐며 웃었다.
「불행하고 불운하도다. 수많은 기회가 주어졌으나 기회라고 생각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이런 꼴을 당한 것이 아닌가.」
「인간이란 그렇지. 주어지면 모르고 잃으면 후회하면서 세상에는 불만만 가지고.」
「아예 밟아 꺼트리고 싶은데…….」
혀를 끌끌 차며 인간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십이신장을 두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바닥에 엎어진 채 무릎을 꿇고 쓰러진 나와 저 위에서 웃고 있는 얼굴은 대조적이었다. 똑같은 얼굴인데도 이질적이고 낯선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아무도 느끼지 못하겠지만, 저건 본인이 아닌데. 입 안에서 피가 왈칵 올라왔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비는 끝도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흐릿한 하늘과 잘 어울리는 음울한 얼굴이 들떠 자신의 축제를 희락하고 있을 때 빗물에 철퍽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윤이원이 몸을 돌렸다. 지금 달려오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놀이터를 바로 코앞에 두고 무릎을 짚은 재연이 숨을 헐떡였다. 대학교에서 바로 뛰쳐나온 걸까. 놀라지는 않았을까. 불안한 마음에 손톱으로 바닥을 긁었다. 손톱 주변을 따라 구석구석 흠집이 났다.
“형, 도대체…….”
“미안.”
“괜찮아요? 아까 그건 뭐예요?”
“그, 장난에 휘말렸어.”
아이는 내 흉내를 그럴듯하게 내고 있었다. 잘못했다는 표정과 뻔뻔한 표정을 반쯤 섞어 수월하게 윤이원다운 행동을 구사했다. 아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육체를 잃어버릴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지금은 잠깐 점령한 수준이겠지만, 이대로 혼백과 육신이 멀어지게 되면 완전히 저 몸을 내줄 것이다.
그렇다면, 몸을 가진 귀신은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가.
“공간을 넘다니, 그런 짓을 하면 몸에 무리가 얼마나 갈 거라고 생각하는 건데요?”
“실수를 해서…… 그런데 이젠 괜찮아. 걱정시켜서 미안해.”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을 제쳐놓고 재연이 한숨을 쏟아 내며 몸을 끌어안았다. 윤이원은 유능하고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재연의 등을 마주 끌어안은 채 눈을 굴리며 우물쭈물 변명을 주워 삼킨다. 재연은 그게 나라고 완전히 믿고 있는 것 같았다.
“몸이 차갑잖아요.”
“…….”
“이야기는 나중에 들을게요. 일단 집으로 가요.”
걱정하고 있다는 티를 내며 재연이 듣기 나쁘지 않은 잔소리를 했다. 그가 걱정스러운 기색을 담아 손을 잡아끈다. 윤이원은 수줍은 척 웃으며 하재연의 손에 잡힌 채 순순히 걸어갔다. 뒤에서 종종걸음으로 따라가는 얼굴이 사악하면서도 평화로웠다.
왜 모르는 거야? 입에서 불순한 원망이 터졌다. 이때까지 나에 대해 그렇게 잘 알고 있었으면서 정말 저게 내가 아니라곤 생각하지 못하는 건가? 나를 부조리하게 만든 근원이라며. 그렇다면, 왜 내 근원은 알아보지 못하는 거지. 액막이라면서…….
갑자기 얼마 전의 기억이 하나, 머리 저편에서 살점을 꾹 뜯어 먹었다. 처음 십이신장들에게 살해의 위협을 당하다가 겨우 풀려났을 때, 저승사자가 찾아왔었다. 하재연은 으름장을 놓으며 액막이가 죽지 않았는데 내가 죽을 수는 없다고 화를 냈다. 장부가 틀렸다고, 사자를 조롱하며 그들을 헛걸음하게 했었다. 그 말을 응용하자면 세상이 나를 죽이기 위해서 가장 먼저 죽여야 하는 것은 재연이 된다.
하재연이, 죽는다고?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차올랐다. 나에게 아무것도 아닐 거라 생각했던 사람의 죽음을 떠올리자 심장이 무너졌다. 아니,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분명히 나는 세상의 규율을 어기고, 시간을 거슬렀으며 복수를 쟁취했다. 그 대가로 세상이 내 존재를 죽여 꺼트리고 싶어 한다면 언젠가 죽어 줄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게 왜 행복을 얻은 후는 안 되는 거지. 자연사는 도대체 왜 안 되는 것이지.
서른을 넘어서까지 살아 볼 수는 없을까. 마흔은, 가정을 이루고 번듯한 직업을 가지는 것은. 재연과 평화로운 연애를 계속할 수는. 그 전에 왜 나만 그렇게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해야 했지?
이 세상은 불공평하다. 화를 뱉어 내는 것처럼 주먹으로 땅을 내리쳤다. 비에 젖은 땅은 현실과 똑같이 질척거렸다. 뺨에 진흙이 튀었다. 주먹 쥔 손의 밑동이 죄다 까졌지만 멈출 수 없었다. 몇 번이고 땅을 내리쳤다.
더러운 진흙이 목과 팔에 튀었다. 비에 젖어 엉킨 옷을 쥐어뜯으며 바닥에 이마를 박았다.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분명히 살아 있는 것은 괴로웠고, 괴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 역시도 괴로웠다. 그러기에 억울했다.
“이것 봐, 열나잖아요.”
하재연이 내가 아닌 나의 이마를 짚으며 걱정한다. 이질적인 내가 부끄러운 웃음을 흘리며 재연의 목덜미에 이마를 비볐다.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처럼 칭얼거리자 재연은 더 나무라지 않고 젖은 옷을 벗기고 따뜻한 김이 나는 수건으로 몸을 닦아 주었다. 제 옷에서도 여전히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는데, 윤이원이 가장 우선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헌신적으로 굴었다.
“재연아, 머리 아파…….”
똑같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데도 나와는 달라 오싹했다. 늘 보던 내 육체가 다른 생명이 되어 움직이는 걸 보고도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윤이원이 두 팔을 뻗어 재연의 머리를 감쌌다. 재연이 투덜거리다 물수건을 바닥에 던져 버리고는 몸을 숙였다. 두 사람이 입을 맞췄다.
두통으로 쪼개질 것 같은 머리를 쥐었다. 왜.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경멸했다. 본인에 대한 경멸이었고, 이지를 상실한 경멸이었다. 누구를 향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재연을 믿지 않고 귀신에게 그의 정체를 추궁하려고 해서? 하지만…… 이렇게 될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잖아.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눈물이 계속해서, 계속해서 끝도 없이 떨어졌다. 천장의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나를 보고 있던 십이신장이 하나둘 혀를 찼다.
「어쩌지?」
「죽여야지.」
「왕께서 노하시면?」
「액막이가 곧 죽고 나면 노하실 이유도 없지 않은가?」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십이지신의 왕, 신. 쉰 목을 움직여 그것의 명칭을 발음했다. 엉금엉금 기어가 쥐의 옷자락을 잡았다. 옆에 앉아 있던 소머리를 한 지신이 노해 버럭 외쳤다.
「감히 인간이 어디라고 손을 대는가!」
겨우 음성만 들었는데도 찢어질 것같이 아팠다. 인간은 약하구나, 당연한 말을 의미 없이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십이신장 중 하나, 갑자신장(子神神將)께 빕니다.”
눈물이 떨어졌다. 재연이 죽어서는 안 된다. 머릿속의 관념처럼 잡은 의지는 하나였다. 하재연이 죽길 바라지 않았다. 내가 대신 죽어서라도 그를 지키고 싶었다. 왜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무엇이든 걸 수 있습니다. 내기를 하시죠.”
손에 무언가가 잡혔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쏟아지는 사각형의 물체를 손에 가득 쥐어 내밀며 지껄였다.
“제가 이기면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진다면, 자진하겠습니다.”
자살은 영혼이 저지르는 가장 큰 죄의 일종이었다. 업이 무궁무진하게 쌓인 상태에서 자살 한다면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손을 더럽히지 않고 죽일 수 있다는 제의에 열두 신장들이 수군거리며 너도나도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꽤 괜찮은 제의가 아닌가?」
「인간이 술수를 쓰면 어쩌지?」
「감히 우리를 두고 패악을 부리겠는가.」
「인간은 교활하니 편법을 쓰지 않을 이유도 없다.」
「그래, 믿을 수 없어.」
불신으로 여론이 와르르 몰려갈 때, 쥐가 바닥을 퉁퉁 치며 일갈했다.
「조용, 조용!」
다들 입을 딱 다물고 눈을 데구루루 굴린다. 초조한 마음에 숨을 삼키면서 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쥐는 자신의 옷을 쥐고 있는 내 손과, 다른 손에 쥐어진 마작패를 보며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내 말했다.
「형제들이여, 본인이 죽음을 선택한다면 왕께서도 우리를 나무라진 못하실 것이다.」
「옳구나.」
닭머리가 무릎을 탁 쳤다.
「이번에는 방해를 받지 않고 끝을 낼 수 있음이 확실하니 내기에 응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만약 지면 어쩌려고?」
「어차피 저것은 우리의 손이 아니더라도 죽기 마련이니 나쁠 것이 없다.」
순식간에 내기에 응하는 분위기로 뒤집혔다. 손안에 들어 있는 마작패를 꽉 쥐었다. 살면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마작을 쳐 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닥에서 솟아난 테이블 위에 마주 보고 자리를 잡았다. 정면에 자리 잡은 갑자신장이 테이블 위에 마작패를 쏟았다.
십이지신들이 갑자신장의 등 뒤에 둘러앉아 속닥속닥 즐거운 기색을 냈다. 빠져나갈 수 있다면 이것이 마지막 기회였다. 내기에 응했다는 것은 그들에게 나를 돌려보내 줄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 다시 육체를 차지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
내기는 십이지신의 첫 번째, 쥐를 상징하는 갑자신장과 일대일, 삼세판으로 결정이 나는 승부다. 하재연. 재연아. 울림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름을 부르며 패를 섞었다.
자갈 굴러가는 소리를 내며 흐르는 상아색 패를 뒤집은 채로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이상하게도 머릿속에 마작을 치는 방법이 줄줄이 떠올랐다.
패를 열세 개씩 위아래로 두 겹으로 포개어 쌓아 놓고 손을 떼자, 쥐가 먼저 주사위를 굴렸다. 4가 나왔다. 침을 삼키고 작은 주사위를 굴렸다.
5가 나왔다. 선(先)이다. 쥐가 손짓한다. 다섯 번째 줄에 있는 패 네 개를 가져왔다. 쥐도 자신의 패를 집었다. 다시 패를 네 개 집었다. 패를 가져오는 행동이 반복되고, 각각 패를 나란히 앞에 깔았다.
선으로 먼저 열네 개의 패를 쥐고 읽었다. 어지럽게 섞인 글자를 두고 고민하다 8통을 버렸다. 쥐가 버린 패를 잡아 중간에 끼워 넣고 4만을 버렸다. 쥐의 바로 뒤에 있던 호랑이가 휘파람을 휘익 불었다. 그게 강풍이라도 되는 것처럼 쥐의 패를 툭 밀쳐 바닥에 늘어놓았다.
一一一二二二四五六六七七七九九
「이겼다.」
담배 연기를 뱉는 듯 짧게 터지는 음성에는 가소로움이 깃들어 있었다. 손안에 소중히 쥐고 있던 패가 흐트러졌다. 쥐의 앞에 청일색(凊一色)*이 한 줄로 놓여 있었다.
주위를 둘러싸고 마작판을 보고 있던 다른 십이지신들이 날카로운 환호성을 내질렀다. 역시나 대단하다, 인간이 감히 우리를 이길 리가 없다.
오만함에 들뜬 목소리가 공포로 변해 이성을 찢었다. 허벅지 위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다음 두 판을 전부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 식은땀이 툭 떨어졌다.
「두 번째 판을 시작하겠는가?」
일생에 한 번도 하기 힘든 인화(人和)*를 여유롭게 완성한 쥐가 물었다. 방법이 없었다. 엉망으로 섞인 패를 중앙에 던지자 쥐가 패를 섞기 위해 소매를 걷어붙였다. 와르르, 다각다각 마작패가 섞이는 소리를 들으며 초조하게 몸을 들썩였다.
막 주사위를 집어 들어 굴리려고 할 때 숨죽이는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 뒤에서 눈을 가렸다. 따듯한 품에 안겼다. 노랫가락 같은 소리가 인사를 건넸다.
「시간을 좀 더 주겠다고 한 지가 언제인데, 빨리도 왔구나.」
왕이시여. 십이지신들이 초조한 몸짓과 함께 질색하는 음성을 터트렸다. 등 뒤의 존재는 어떤 나무람도 없었는데 눈을 가린 손가락 틈새로 보이는 심약한 양과 토끼가 벌써부터 눈물을 글썽였다.
팔을 올려 눈을 가린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지만, 이름 모를 존재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두 눈을 능히 막고 오른손에 들려 있던 주사위를 부드럽게 가져갔다.
「내가 대신 치자꾸나.」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열두 신장들이 일제히 파르르 떨며 고개를 처박고 외쳤다. 뒤에 서 있던 신이 발을 한 번 굴렀다.
쿵, 하고 바닥에 발이 떨어지자마자 중앙에서 바깥으로 바람이 훅 하고 퍼졌다. 눈을 가리니 공기의 분위기가 더욱 예민하게 다가왔다. 그의 위압감은 대단했다.
「대리인이 있으면 안 된다는 규칙을 정했는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내가 쳐도 괜찮겠지. 마작은 얼마 만이던가.」
은근한 즐거움이 깃든 목소리를 들으며 눈이 가려진 그대로 뒤로 물러났다. 완전히 얼굴을 볼 수 없도록 정 뒤편으로 끌려와 무릎을 꿇고 앉았을 때, 눈앞의 신은 소매를 걷어 올리고 마작패를 다시 섞고 있었다. 상아로 만들어진 고급 패가 흰 손안에서 자유자재로 놀아났다. 반듯하게 마작패를 늘어놓은 신이 주사위를 굴렸다.
「6이구나. 굴리겠나?」
「선을 가져가시지요.」
갑자신장이 송구한 낯을 숨기지 않으며 어깨와 머리를 낮추었다. 신은 사양 없이 패를 잡아갔다. 쥐도 재빠르게 자신의 몫을 챙겼다.
묵묵하게 패를 정렬하고, 마지막 패를 하나 더 가져온 신이 중간의 공간을 벌리고 패를 끼워 넣었다.
시선이 집중되고 있었다. 그는 가벼운 손짓으로 상 위에 자신의 마작패를 밀어 넘어트렸다.
“…….”
白白白發發發中中中東東東西西
청일색과 반대로 자패만 이용해서 만든 역만, 자일색(字一色)*, 그리고 대삼원(大三元)*, 사암각(四暗刻)*. 방금 갑자신장과는 또 다른 족보였다. 확률만 0.0003025퍼센트. 구련보등(九連寶燈)*보다 내기 힘들다는 천화(天和)*가 펼쳐졌다.
단숨에 판을 끝낸 것치고 신은 무료한 기색이었다. 비어 있는 왼손을 옆으로 내밀자 원숭이가 무릎걸음으로 기어가 길게 대가 뻗은 담뱃대를 공손하게 바쳤다. 신기하게도 담뱃잎에 저절로 불이 붙어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신의 왼손이 담뱃대를 잡은 채 옆으로 기울었다. 소매가 치렁치렁하게 길어 바닥에 끌릴 정도였다.
앞에 놓인 패를 손가락으로 툭 쳐서 중앙으로 밀어 던지며 신이 말했다. 골이 난 것 같은 짤막한 말투였다.
「제대로 하거라. 장난을 칠 나이는 지나지 않았니.」
싸늘한 기운이 맴돌았다. 점잖은 척 앉아 있던 신이 담뱃대의 끝부분을 물고 빨았다. 행위나 의복, 말투까지 모두 고풍스러운 존재였다. 십이신장에게 왕으로 불리는 존재라면, 그는 얼마나 오랜 세월을 살아온 존재일까. 신의 주변을 호위하듯 둘러싼 지신들에게 붙잡힌 채 그의 뒷모습만 한없이 보았다.
쥐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며 잘못을 빌었다.
「소인이 경솔하고 천하여 잘못을 저질렀으니, 용서를 구합니다.」
「괜찮다. 나 역시도 장난을 친 건 마찬가지이니.」
오른손으로 주사위를 던졌다가 받으며 신이 웃었다. 공기가 진동하며 기압이 올라갔다. 귓가가 먹먹해져 눈을 감은 채 소리 내서 침을 꿀꺽 삼켰다. 고막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상황에서도 속에서 분노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첫판을 조작한 거였어? 어쩐지, 나오기 어려운 패를 한 번에 성공한다 했더니. 신장이니 신이니 해 봐야 사기꾼 같은 새끼들이었다. 자기 마음대로 점수를 낼 수 있으면서 삼세판 내기를 받아들인다는 건 그냥 희망 고문이나 당하다 죽어라, 이런 말 아닌가. 재수 없어.
기분 나쁜 티를 내며 얼굴을 구겼는데 생각을 읽었는지 앞에 앉은 신이 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눈이 마주친 쥐는 슬며시 딴청을 부리면서 다시 제대로 정좌를 했다. 뻔뻔하기 짝이 없는 놈들. 잇새로 우둑거리는 소리를 내자 소가 발굽으로 무릎을 툭툭 치며 엄한 눈을 했다.
첫판, 선이 시작과 동시에 점수를 내는 것.
마지막 승부의 결정을 내기 위해 패가 아작거리는 소리를 내며 뒤섞였다. 쥐는 정성껏 패를 섞은 뒤 두 손을 모아 주사위를 내밀었다.
신은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주사위를 가져와 굴렸다. 이번에도 6이었다. 암묵적으로 선공이 주어졌다.
패를 집어 가며 신이 한숨을 쉬었다. 그의 언행 하나하나에 지신들은 하나같이 긴장하며 촉을 곤두세웠다. 두런거리는 잡담도 뚝 끊긴 지 오래였다. 쥐는 얼굴이 달아오른 채로 연신 식은땀을 소맷부리로 훔쳐 닦았다. 잘칵거리는 소리를 내며 패가 달그락거렸다.
신의 뒤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반쯤은 그의 패가 그대로 보였다. 순서대로 나열된 패를 한참이나 넋을 놓고 보았다. 패가 들어왔다 나가고, 다시 집어 들었다 버림을 받고, 또 판이 돌고 돌았다.
갑자기 복숭아꽃이 활짝 핀 나무 아래에서 마작을 쳤던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 머리가 아프다. 잡념을 떨쳐 내는 것처럼 마른세수를 한 번 하고 고개를 들었다.
십이지신들이 시끄러웠다. 다들 입을 가린 채 속닥거리면서 눈을 마주친다. 왜 저러지, 하고 눈치를 봤더니 그나마 친절한 척 굴던 양이 신의 패를 가리켰다. 등에 가려져 반쯤은 보이고 반쯤은 바깥에 나온 패를 읽었다. 왼쪽에 1만(一萬)이 세 개. 그리고 우측에 9만(九萬)이 둘……. 설마.
「쉬잇.」
다들 숨을 삼키고 뒤집어진 패를 향해 손을 뻗는 신을 주시했다. 천천히 패를 가져온 신이 손바닥 안에서 패를 뒤집어 확인하고는 끝에 붙였다. 패와 패가 딱 하고 부딪친다.
마작패는 신기하게도 듣기 좋은 소리가 났다. 매끄럽게 좌르륵 굴러가는 소리, 자갈과 돌이 물 안에서 닿는 소리. 마작은 세상의 규율을 적용해 만든 놀이라고 했다. 철학과 우주의 규칙을 담은 내용이라 복잡하고 어려웠으며, 패를 섞는 소리는 액운을 쫓아낸다고 한다.
一萬 一萬 一萬 二萬 三萬 四萬 五萬 六萬
七萬 八萬 九萬 九萬 九萬
인생에 단 한 번 하기도 힘들다는 순정구련보등(純正九蓮宝燈, 구련보등 9면대기, 더블 역만이 된다.)이 펼쳐졌다. 십이지들이 승패를 모두 잊고 일제히 손뼉을 치고 축언을 올렸다.
「역시 대단도 하시다.」
「힘도 쓰지 않으시고 순수하게 이기신 것 아니냐. 역시 왕이시다.」
「보는 것만으로도 경이롭지 않은가. 분명 올해는 길(吉)할 것이다.」
마작을 친 장본인이 인간이 아니기 때문일까, 신이 도와야 만들어진다는 족보가 마지막 내기의 끝을 장식했다. 갑자신장은 자신의 패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두 손을 비비며 찬양을 늘어놓았다.
신은 그 모든 게 재미없는 것처럼 굴었다. 수식어가 잔뜩 붙은 축사를 한 번 손을 내저어 끊어 버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 앉은 십이지 중 하나가 내 뒤통수를 내리눌러 시선을 바닥으로 고정시켰다. 신이 발소리를 내며 가까이 다가왔다. 긴장으로 몸이 뻣뻣하게 굳어 간다. 머리를 잡은 손에도 힘이 바짝 들어가 있었다.
신이 다가와 손가락으로 옆얼굴을 천천히 따라 그렸다. 간질간질한 감촉에 목을 움츠리자 엄지와 검지로 턱을 잡아 추어올린다. 머리를 누르고 있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자유를 찾은 얼굴이 신의 의도대로 아래에서 위로 천천히 올라갔다. 눈에 새겨질 만큼 느리고 길게, 처음으로 정면을 보았다. 빳빳하게 세워진 흰 목덜미와 그만큼 하얀 옷깃과, 얼굴이 드러났다. 그림 같은 붉은 입술이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매번 어리석고 불행하고, 무모하기만 하구나.」
“…….”
「그렇게라도 살고 싶어 하는 너도, 그렇게는 살기 싫어하는 너도, 나쁘지는 않지.」
처음으로 신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미를 가지고 있었다. 수려하고 아름다운 얼굴은 여성적이지도 남성적이지도 않은 중성의 외모였다. 얼굴 위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는 웅장한 자연과 초목을 닮았다. 대지와 화산을 가졌다. 숨을 쉬면 바람이 움직이고 눈을 깜박이면 태양이 다시 떠올랐다.
어쩐지 맥이 풀렸다. 나는 무엇을 기대했을까. 그는 세상의 그 누구와도 닮아 있지 않았다.
이때까지 했던 의혹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의문을 종식시키는 우아한 미인이었다. 감히 인간이 닮을 수 없는 외모였다. 밤하늘을 스포이트로 빨아서 색을 불어넣은 것 같은 눈동자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눈만 마주 봤을 뿐인데, 마치 우주의 한복판을 빙글빙글 춤추는 기분이었다.
눈이 건조한 모래바람을 오래 맞은 것처럼 따가웠다. 인간이 아닌 신을 보았다. 거대한 존재의 힘에 보호해 줄 육체가 없는 영혼은 살이 저미는 것처럼 상처 입었다.
「내 눈을 오래 보면 좋지 않단다.」
신은 마작을 치기 위해 조금 걷었던 소맷자락을 내려 눈을 가려 주었다.
“당신은…….”
「이제 돌아가야지.」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억겁이자 영겁이며, 영원불멸이고, 불생불멸의 존재다.」
앞을 가리고 있는 하얀 천을 걷으며 신이 천장을 가리켰다. 내 겉가죽을 뒤집어쓴 귀신을 친근하게 바라보고 있던 재연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찰나였지만 강하게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하게 눈이 마주쳤다.
시선을 떼어 내지 않은 채로 재연이 입을 벙긋거렸다. 뭐라고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짧은 말과 함께 입꼬리를 당겨 웃는 재연을 보는 순간 마음 한복판에 실금이 갔다.
「빚을 지고, 인간인 주제에 신에게 감히 내기를 제안했으니 너의 업은 다시 원점이 되었구나.」
멍청한 얼굴로 신을 바라보았다. 신이 웃으면서 뺨을 톡톡 두들겼다.
「사실 보고 있으면 즐겁다. 너나, 그나, 이길 수 없는 운명을 두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
“……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까. 에둘러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 신이 입을 가리고 한숨을 쉬었다.
「어려운가?」
“어렵습니다.”
「어려우면 내기에 걸었던 것처럼 스스로 자진해라.」
다정하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을까. 신의 음성은 냉정하게 박자에 맞춰 뚝뚝 떨어졌다.
그의 기분이 불쾌하다는 것을 알아챈 십이지신들이 먼저 바닥에 얼굴을 묻고 조용한 척 시침을 떨었다.
「실패하면 실패한 대로, 성공하면 성공하는 대로 나는 나의 염원을 이루겠지.」
“당신의 염원이 무엇입니까?”
싸구려 유리병 안에 갑자기 팔팔 끓는 뜨거운 물을 부어 버린 것처럼 숨 한 번 내쉬는 찰나에 금이 가면서 유리가 깨졌다.
「네 죽음.」
“…….”
「그걸 바라지만, 시간을 더 주겠다고도 이야기했지. 돌아가라.」
한눈을 팔아 버린 사이에, 주인을 잃고 움직이는 육체가 살의에 번뜩였다. 안 돼. 몸 안을 차지하고 있는 영혼을 잡아 뜯어 내쫓으며 의지를 되찾았다. 절대로 나갈 수 없다고, 겨우 반나절 차지한 몸뚱이를 자신의 것이라고 울부짖으며 아이가 눈에서 피눈물을 쏟았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튿어진 옷자락, 그녀의 해묵은 분노.
비켜.
「싫어, 가지 않을 거야.」
나가, 내 몸이야.
「싫어, 이건 이제 내 몸이야.」
그에게서 손 떼.
「왜? 그는 이 육체를 빼면 알맹이엔 관심 따위 없어!」
분노로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아이가 이를 악물었다.
「오빠가 궁금해하는 것을 알려 주었으니 대가를 받아야지?」
나의 것이되 자유롭지 못한 두 손이 있는 힘껏 재연의 무방비한 몸뚱이를 밀었다. 활짝 열린 창문 밑으로 하재연의 몸이 천천히 기울었다.
재연아. 황급하게 팔을 뻗었지만 손가락이 결국 그를 놓쳤다. 아주 잠깐 손톱이 딱 하고 마작패 부딪치는 것처럼 닿았다 멀어졌다. 재연아. 추락하는 것은 내가 아닌데 귓가로 바람이 소름 끼치게 휘몰아쳤다. 온몸의 뼈가 부서진 것처럼 아팠다.
***
노크를 하려다 말고 문에 바싹 귀를 붙였다. 안쪽은 아무 소리도 없이 조용했다. 방금 무리로 와글와글 몰려들어 음료수를 축내던 재연이네 대학교 과 동기들이 벌써 떠난 모양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심각한 얼굴로 공책을 내려다보고 있던 재연이 고개를 들었다.
“형, 왔어요?”
팔과 다리에 깁스를 하고, 머리에 붕대를 칭칭 동여맨 재연이 멀쩡한 팔을 흔들었다. 가벼운 웃음에 화가 날 정도였다. 비어 있는 의자 위에 선물로 사 온 오렌지 주스 상자를 올리고 간이침대에 걸터앉았다.
거대한 창 같은 공간 너머로 서로를 관찰하고 마음 졸이기만 했던 게 불과 사흘 전이다. 3층 원룸 바깥으로 떨어진 재연은 이틀 넘게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 어제 아침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검사 결과는 부러진 상처를 빼면 심각한 외상은 없었지만, 부딪친 머리에 이상이 생겼을까 봐 마음 졸이면서 밤을 새워 기다렸다. 사실 기다렸다 말하기도 애매한 게, 시간이 지나도 몸의 균형 감각이 돌아오지 않아 평지에서도 넘어지고 물만 마셔도 위액까지 게워 냈다.
사람이 창 바깥으로 떨어졌는데 도무지 구급차를 부르지도 못하고 몇 번이나 속을 게워야 했다.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동안 길을 지나가던 행인이 구급차를 불러 재연은 겨우 병원에 실려 갈 수 있었다. 집 안에서 일어난 사고를 확인차 경찰이 병원에 들렀지만 응대할 상황이 아니라 미뤄지고 말았다.
병실이 모자라 급한 대로 2인실을 잡고 들아가서도 간이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 몸살을 앓았다. 의식이 없는 환자 옆에서 같이 비몽사몽이라며, 재연에게 링거와 해열제를 놔 주던 간호사가 쓴웃음을 지었었다.
바쁜 와중에 잠깐 들렀다 간 무당은 영혼이 너무 오래 육체를 떠나 있었던 후유증일 거라고 혀를 찼다. 겨우 반나절인데도 반동은 그렇게 컸다.
시험공부를 해야 한다고 억지로 보고 있던 노트를 덮으며 재연이 손짓한다. 지은 죄가 있어서 순순히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자, 턱을 감싸 쥐고 이리저리 얼굴 구석구석을 확인했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순수해 보여서 소름이 돋았다.
“형은 멀쩡해서 다행이네요.”
나쁜 말을 할 것 같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형? 무덤덤한 얼굴을 보자 속에서 무언가가 왈칵 터져 나왔다.
“나 잠깐만.”
재연이 붙잡기도 전에 빠르게 병실 바깥으로 나와 1층으로 내려갔다. 재연이 의식을 차린 뒤로 얼굴만 봐도 눈물이 울컥울컥 나왔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를 보여 주기 싫어 억지로 울음을 참고 참으며 건물 바깥으로 나왔다. 흡연실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던 중에 한 무리의 학생들이 눈에 들어왔다. 재연이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던 사람들이었다.
짜증 날 정도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던 그들은 이틀을 꽉 채워 혼수상태였던 사람 앞에서 웃기지도 않는 농담 따먹기를 하며 선물로 사 온 주스를 본인들이 전부 다 마셔 버리고는 30분도 안 돼서 일어나 버렸다.
애써 슈퍼까지 새로 음료수를 사러 간 나는 안중에도 없었겠지. 불쾌하다. 얼굴을 찌푸린 채 자기들끼리 신나서 이야기하고 있는 놈들을 흘끔거렸다.
중간에 선 키가 제일 큰 학생이 손짓까지 동원하며 떠들었다.
“갑자기 베란다에서 떨어질 수가 있나? 진짜 이상하지 않냐.”
“그치, 이상해. 간호사가 그랬는데, 병실에서 간호하던 그 오빠가 한 짓이라는 말도 있다던데?”
“대박, 진짜?”
“응. 그래서 경찰이 찾아와서 조사하고 그랬대.”
두 차례에 걸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의 관계인에다 창문 바깥으로 떨어진 경위도 불분명해 형사가 두 번이나 왔다 갔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재연이 여러 차례 사고였다고 못을 박아서 망정이지 애매하게 말꼬리만 흐렸어도 나는 그대로 끌려가 각종 문초를 당했을 게 뻔했다.
담배 맛도 떨어질 것 같아 비닐도 뜯지 않은 새 담뱃갑을 다시 호주머니 안으로 밀어 넣었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나뭇가지를 집어 들고 긁적거리며 의미 없는 낙서를 그렸다.
“걔 수업 중간에 갑자기 소리 지르며 뛰쳐나갔다며? 그래 놓고 떨어진 거라던데, 좀 오싹하지 않아?”
“야, 그때 소리친 이름이 병실에서 간호해 준다던 사람 이름인 건 알아?”
키가 좀 작고 덩치가 있는 사람이 말을 신나게 이어 갔다. 다들 서로의 눈치를 보며 좀 더 목소리를 낮추기 시작했다. 그래 봐야 타인에 대한 모독과 흥미로 들떠서 멀리서도 쉽게 들렸다.
“맞아. 나도 그때 걔랑 같은 수업 듣고 있었어. 하재연 1학년 때만 해도 멀쩡했는데, 작년 겨울부터 갑자기 이상해지지 않았어?”
“걔 방학 때 신내림 받은 거라는 말도 있던데.”
“와, 신내림이면 진짜 무섭다. 가끔 좀 소름 끼치긴 했잖아. 걔 옆에 있다가 귀신 붙으면 어떡해?”
“굿하는 거 아냐?”
“점 봐 달라고 하면 안 되나?”
길고 지루한 소문을 재밌다며 자기들끼리 잔뜩 꺼내 둔 학생들은 한참이나 그 자리에서 하재연에 대한 구설수를 지껄였다. 마지막은 자기들끼리 축제 기간에 점집을 차리자며 조롱조로 왁자지껄 웃음을 터트리는 것이었다.
소수의 사람을 대상으로, 또는 단둘이서 믿기 힘든 현실을 공유하는 것은 괜찮다. 서주영은 믿을 만한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이라고 해 봐야 관계자나 마찬가지인 엔지와 무당이었다. 하지만 대다수를 상대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건 다르다. 대다수가 하지 않는 행위를 하는 것은 세상을 상대로 벽을 치는 것이다. 타인에게서 분리될 필요가 없는 사람에게 그걸 강요한 건, 생각 없이 행동한 나였다.
정말로 순진했나. 하지만 놀아 줬더니 고맙다고 웃어서…… 또 놀아 달라고 말하던 아이였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믿었다. 의심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없었다.
액막이로도 모자라 사회적 편견까지 얻게 했다. 하재연은 얼마나 더 잃어버리게 되는 거지. 벽 뒤에 몸을 숨긴 채 고개를 떨어트렸다. 속에 있는 장기를 모조리 게워 내고 싶었다.
건물에서 떨어졌지만 사실 팔다리나 머리가 다친 건 문제가 아니었다. 정밀 검사를 끝내고 난 뒤에, 의사가 불러 재연의 몸 상태에 대해 설명을 할 때 알았다.
‘오른쪽 시신경에 문제가 있습니다. 추락 사고의 후유증은 아닌 것 같은데…….’
깨어난 이후로 재연의 시선은 계속해서 조금씩 엇나가 있었다. 믿을 수 없어서 괜히 또 놀리는 거로 생각하고 싶어 일부러 멀리 있는 물건을 직접 집도록 유도했다. 하재연은 열 번이면 열 번 전부 다 헛손질을 했다.
깨끗하고 예쁘던 시선이 모나고 흐트러졌다. 오른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서야 귀신이 가져간 대가가 무엇인지 혹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겨우 몇 마디 말. 내 존재가 세상에게 끼치는 영향과 형평성에 대한 이야기. 그 정도 사실을 알기 위해 나는 육체를 빼앗길 뻔했고, 실제로 목숨이 위험했었다. 하재연은 크게 다치고 한쪽 눈을 잃었다.
시신경과 연결된 뇌에도 문제가 없었고, 각막이나 망막에도 이상 증세는 하나도 없었다. 그냥 하루아침에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몸 반쪽이 없어진 것과 다름없는 분실인데 하재연은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했다. 눈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빈손으로 병실에 들어가기 싫어 자판기에서 이온 음료 캔 하나를 뽑았다. 파란색 캔을 손에 들고 문 앞을 알짱거리는데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늘 잠만 자는 옆 침대의 할머니인가, 싶었는데 이미 익숙해진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무당이 또 찾아온 모양이다.
아, 되는 일이 없구만. 문에 등을 기대고 주르르 미끄러져 앉아 캔을 땄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흘끔거리긴 했지만 별 부끄러울 것도 없었다.
방음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문 사이로 바짝 붙어 앉으면 대화 내용을 엿듣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무당이 푸르르, 하고 입술 터는 소리를 내더니 쏘아붙였다.
“금쪽같이 아끼더니 네가 꼴이 좋구나. 봐라, 저런 업을 막으려 애를 쓰니 그 꼴이 나는 것 아니냐.”
“전 괜찮은데요.”
“무어가? 눈 병신이? 저것은 어쩌자고 또 업을 졌단 말이야?”
“형이 원해서 업을 지는 건 아니잖아요.”
내 잘못을 감싸는 재연의 태도에 무당이 크흥, 하고 시끄러울 정도로 거세게 콧방귀를 꼈다.
“이 멍청한 것아, 내 무수히 많은 사람을 보았지만 너 같은 놈도 처음이요, 바깥의 저놈 같은 인간도 처음이다.”
움찔, 몸을 떨었다. 엿듣고 있는 걸 알아챈 모양이다. 무당은 못 속이지.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병실에 들어가지 않은 채 잠자코 쪼그려 앉아 있었다.
“이제 저놈도 알 거 아니냐? 네가 아무리 열심히 살리려고 해 봐라. 무슨 소용이 있어? 저놈은 죽으려고 해도 곱게는 못 죽는다. 죽이면 저들도 살을 받으니 저놈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다 자멸하게 하려고 용을 쓰는데, 너만 살리려고 애간장을 들들 끓여 봐야 무슨 소용이냐?”
“하지만, 형도 노력하고 있잖아요.”
“뭔 노력? 쟤는 살려는 노력을 못 해. 잘하려는 노력도, 업을 덜어 내려는 노력도 못 해. 그런 구조로 태어난 놈인데 네가 노력한다고 이룰 성 싶어? 정신 차려라, 너 정도 능력이면 산골에 신당을 차려도 손님이 오천 명이요, 너로 인해 빛을 이룰 사람이 수백이요, 네 자체가 빛이 될 터이니 깔고 앉을 돈이 평생을 이어질 것이다.”
무당이 성질에 못 이겨 말을 와르르 뱉어 내고는 휴우, 한숨을 길게 쉬었다. 한 마디, 한 마디 들을 때마다 심장에 바늘을 끝까지 밀어 넣는 기분이었다. 바늘을 삼킨 것 같기도 했다. 굽이굽이 혈관을 타고 흘러 전신을 찌르는 고통이었다.
“보살님, 형이 그러고 싶어 그러는 건 아니잖아요. 뭐라고 말씀하셔도 저는 마음 안 바꿔요. 그러기로 했어요. 형이 하는 선택이 최악이든 차악이든 저는 지켜 줄 거예요.”
“눈도 잃고, 팔다리도 분지르고. 이제 너는 뭘 더 바쳐 가며 쟤를 지킬 테냐? 너 죽으면 저것도 죽는다. 저승사자도 쫓아 보내 봤으니 다음에는 장부라도 훔쳐 숫자를 새로 써 넣을 수 있을 줄 알았느냐. 저걸 죽이려면 차사가 무어냐, 염라대왕도 장부를 다시 쓰고 또 쓸 것이다.”
“장부를 바꿔 오면 그 장부를 찢을 거고, 사자가 직접 오랏줄을 들고 오면 그걸 불태울 겁니다. 눈을 줬으니 다음에는 귀도, 혀도 줄 수 있어요.”
“미친 거야, 네가 정신이 나간 게 아니냐? 왜 자꾸 고집을 부려? 아이고, 장군님. 저게 진짜 뇌가 빠졌나.”
무당이 속이 터진다며 한숨을 쉬는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들렸다.
“시간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다. 준비라고 할 것도 없이 부딪쳤는데, 버텨 봐야 무엇이 변하기나 하겠더냐?”
“준비가 부족하진 않았어요. 우리는 꿈을 꾸고 있으니까.”
“그게 만능은 아니니 하는 말이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왜 그리 악다구니를 쓰는 게야?”
“잘 알고 있으니까 이러는 거죠.”
“…….”
“잘 알고 있는 것들을 하나씩 준비해 두는 것뿐이잖아요. 이미 시간이 부족한 거와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무엇을 해도 죽을 놈이니 그만하라는 무당의 설득과, 똑같은 태도로 거절하는 재연의 대화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복도 끝에서 병들어 죽은 귀신들이 멀리서 흘끗거리며 바닥을 천천히 기어 오기 시작했다. 뼈다귀가 보일 정도로 빼빼 마른 손가락이 복도 바닥에 끌릴 때마다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차가운 이온 음료를 꿀꺽 삼키며 천장 전등을 올려다봤다. 거뭇거뭇한 먼지가 끼어 있었다.
한참 그렇게 다투더니 무당은 너랑 대화하기 짜증 난다고 성질을 내며 말을 끊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장군신이 먼저 문을 뚫고 훌쩍 복도로 나왔다. 여전히 부리부리한 얼굴을 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장군신이 미미하게 입술을 올려 웃는다. 슬금슬금 다가오던 잡귀들은 장군신의 기운에 눌려 다시 자취를 감춘 뒤였다.
곧바로 문을 열고 나온 무당이 마땅찮은 눈으로 나를 쓱 노려보더니 어휴, 하고 한숨을 쉬었다.
“여기서 거지처럼 뒹굴고 자빠져 있지 말고 썩 들어가.”
“네,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너한테 배웅 받아 봐야 재수만 없다.”
마지막까지도 미운 목소리로 대꾸하며 무당이 쌩하니 떠나 버렸다. 그래도 그 삐뚜름한 태도에 걱정이 있다는 걸 알아 밉지 않았다. 인사도 거절한 찬바람 날리는 뒷모습을 천천히 곱씹다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재연은 침대 등받이를 세우고 앉아 있었다. 내가 온 것을 보고는 오버베드 테이블 위에 올려진 빈 주스 병을 치우다 말고 어깨를 으쓱하며 능청스럽게 웃어 준다. 저 노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문을 닫고 곁에 앉았다.
반쯤 남은 이온 음료 캔을 받아 간 재연이 자연스럽게 입술을 붙이고 음료수를 마신다. 좀 식었을 텐데. 처음에는 손바닥이 시릴 정도로 차갑던 음료수의 낮은 온도가 생각나 조금 아쉬워졌다.
미세먼지가 여전히 기승이라 뿌연 바깥을 보며 재연이 캔을 만지작거렸다. 테이블 위에 올라간 팔은 조금 말라 있었다. 재촉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침대 시트 위에 팔을 대고 엎드렸다.
다쳤는데, 그렇게 많이 다쳤는데, 머리에 손상이 적은 게 다행이라고 할 정도로 많이 다쳤는데, 재연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양부모에게서조차 연락도 의례상의 방문도 없었다. 친구라고 꼽을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전과의 유무를 빼고 보면 나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다. 늘 불행하다고 생각한 내 삶을 재연이 똑같이 따라 하고 있어서 사실은 속상했다.
“보자마자 형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았어요.”
머리카락을 살짝살짝 건드려서 손가락 장난을 치며 재연이 말했다. 고개를 묻은 채 고르게 숨을 내쉬었다.
“그냥 돌려받을 수 없다는 것도 알았죠.”
“…….”
“눈 한쪽이 안 보이는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이 세상에 형을 다시 불러올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다시 내줄 수 있어요.”
“평생 불구라고. 너는 왜 그렇게 생각이 없어?”
참으려고 했지만 속이 꺼멓게 썩어서 나쁜 말이 바깥으로 나갔다. 말을 내뱉는 순간 후회하며 입을 다물었다. 하재연이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든 건 나였다. 생각이 없었던 것도, 무모했던 것도. 불구가 되어야 했던 것도 나였다.
“미안해요.”
“……네가 뭐가 미안해?”
“……내 대가는…….”
하재연이 띄우는 운에 저절로 고개가 들렸다. 젖어서 뭉친 속눈썹을 억지로 들어 올리며 앞을 보았다. 재연이 쓴웃음을 띠며 눈물을 닦아 주었다.
“침묵이에요. 침묵을 대가로 형의 액막이가 된 거죠.”
그래서 말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너무 많다고, 웃으면서 손을 잡아 왔다. 하재연은 그냥 손을 잡는 것보다 깍지를 끼는 것을 좋아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얽히고, 꽉 붙들어 놓아주지 않는 것이 안도감을 주어서 좋다고 한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지만 완전히 피하게 해 줄 수가 없어서…… 그래서 그날도 형사가 찾아왔을 때 자리를 피했어요.”
“…….”
“형이 나를 의심할 거라고는 예상했는데, 멍청하게 그 귀신은 생각도 못 해서…….”
“…….”
“그래도 돌아오려고 형이 먼저 노력해 줘서 기뻤어요. 업은 얼마든지 져도 좋아요. 다시 돌아오기만 해 주세요.”
엉망진창으로 다친 주제에 씩씩하게 웃으면서 상대의 안위나 걱정하는 사랑은 둥근 감정이 아니었다. 깨지고 모난 주제에 왜 그런 행위가 상대를 상처 입히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거지.
“그러다 내가 또 이러면 어떡하려고?”
“또 내가 구하죠.”
“……무모하잖아. 너무 잔인하다곤 생각 못 해?”
“미안해요. 지금도 전부 말해 줄 수는 없어요. 알고 싶다면 형이 스스로 깨달아야만 해요. 하지만 그 누구도 형이 깨닫길 바라지 않고 있으니…… 안 되겠죠?”
울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서 얼굴을 바보처럼 잔뜩 구기며 눈물을 참아 봤지만 허사였다. 재연이 까만 눈동자를 깜박깜박, 감았다 뜨더니 잡은 손을 장난스럽게 하늘하늘 흔들었다. 그게 중간에서 조금 어긋나 있어서 더 서러웠다.
“형이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나에겐 기적이라서…… 아, 너무 좋다.”
손바닥에 입을 맞추며 재연이 얼굴을 비비적거린다. 그 애틋한 행동과 말 한마디 한마디 전부 날카로운 파편이었다. 금이 가 위태롭게 이를 드러내던 그릇은 깨져 버린 지 오래되었다. 하지만 하재연은 유리 파편에 맞아 자신이 피투성이가 되었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사랑을 표현해 왔다. 허공에서 조심스럽게 손짓하는 손을 결국 꽉 잡고 말았다.
“재연아.”
“네?”
“사귈까.”
“…….”
하재연이 말을 하려다가 멈춘 채로 얼굴을 빤히 들여다본다. 부끄러워 시선을 피한 채로, 잡은 손에는 진심을 담아 조금 더 힘을 주고 다시 한번 물었다.
“우리 사귈까.”
미련한 사람처럼 조금 벌린 입술이 예쁘다. 병색이 완연한 몸으로, 엉망진창으로 다친 채라 움직이기 힘들 텐데, 재연이 허리를 숙였다. 맞잡은 손 위로 얼굴을 묻은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죄를 구하는 사람처럼 웅크린 재연의 얼굴이 닿아 있는 손등이 젖고 있어서 차마 일으키지 못했다. 달아오른 그의 귓가를 가만히 남은 한 손으로 덮어 주며 다시 속삭였다.
“하재연, 나랑 연애할래.”
부끄러움을 무릎 쓰고 물어본 세 번째 고백에 아래위로 재연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상하다. 대가를 내준 적이 없는데.”
“…….”
“진짜 이상하다…….”
눈물로 흠뻑 젖어 간지러운 손을 닦지도 못한 채, 아픈 몸을 끌어안아 주었다. 줄 것이 하나도 없다. 갈취하는 것은 옳은 사랑이 아니잖아. 치명적인 독이라도 씹은 것처럼 숨이 막혔다. 죄의식이 나의 시야를 가렸다. 우리의 시야를 지웠다.
***
네 눈물이 내게 닿으면
난 무너지는 우주가 된다
- 조병화 詩, 꿈
오래 기억하고 있는 시를 곱씹으며 고민했다. 재연의 탄식 같은 중얼거림이, 그 눈물이, 느슨해진 내 굴곡진 마음에 타격을 때린 유일한 무기였을지도 모른다고.
하재연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정당하거나 그 이상의 대가를 지불하고 쟁취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꽉 움켜쥐어도 물을 움켜쥔 것처럼 손안에서 줄줄 빠져나가던 행운에 지쳤을 때 사랑은 늘 날카롭게 신경이 곤두서 있던 몸을 단번에 무너트렸다.
요즘 재연은 시종일관 행복해 보였다. 좀 더 순순해졌고, 잘 웃고 잘 떠들었다. 이야기라고 해 봐야 대학 생활의 소소한 에피소드나, 자기가 공부했던 내용을 알아 두는 게 좋다며 가르쳐 주는 비상식적인 내용뿐이었다. 재연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남는 시간은 많았고, 그 시간 동안 신어를 사용한 부적을 읽는 법과 기본적인 사용에 대해 배웠다.
그사이 옆 침대 할머니는 재연의 신봉자가 되었다. 무당이 들렀다 간 뒤에는 거의 눈물 바람으로 찬양을 늘어놓았다. 그녀는 뭐, 바나나 보살이라는 웃긴 별칭이 어쨌든 간에 서울 내에서 제일 유명한 무당이었고, 할머니는 그 나이 대의 사람이 대부분 그런 것처럼 무속 신앙에 많은 공을 들이는 사람이었다. 무속 신앙이라. 잠깐 원장이 생각났다. 발치까지 와서 출렁일 것 같던 여름의 장대비 역시도.
허리가 삐끗해서 입원했다는 할머니는 남자 둘이 온종일 붙어 있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천하태평이었다. 가끔 입이 근질거리면 먼저 세상을 떠난 영감 욕이나 괘씸한 자식들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지만 그 외에는 아침 드라마와 주말 연속극, 전국 노래자랑만 틀어 주면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다.
오늘도 TV에는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주말 연속극 재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한국 드라마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막장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었다. 기억을 잃었다 다시 찾게 된 여주인공이 남자의 품에 안겨서 엉엉 울었다. 틈을 타 남자 주인공의 옆을 꿰어 차고 있던 조연 여배우가 표독스러운 얼굴로 돌아서서 여주인공을 죽여 버릴 방도를 구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조연이 여주인공의 동생이라는 것이다.
으음, 재연의 침대를 반쯤 차지하고 드러누워 기가 막힌 꼴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대충 알아들었다는 듯 재연이 입을 막고 킥킥 웃어 댄다.
“저건 도대체 무슨 내용이야?”
“글쎄요, 자매의 위험한 사랑?”
“싸움이겠지.”
언니는 여동생이 애인보다 더 소중하다고 남자와 이별했다. 여동생은 이별 사실을 알고 언니 앞에서는 자기를 동정하는 거냐고 난리를 쳤고, 정신없는 와중에 남자에게는 달려가서 다시 사귀자고 매달렸다.
남자는 진짜 사랑하는 건 언니라 넌 안 된다고 말하며 냉정하게 고개를 돌렸지만 술에 취해서 사고를 쳤다. ……이건 어쩌자는 내용이지. 아침에 일어나 알몸의 여자를 보며 경악하는 남자 주인공을 보다 물었다.
“저 드라마 제목이 뭐라고?”
“형부는 외로워요.”
“…….”
제목을 미리 알았으면 시간을 쪼개서 보고 있지 않았을 텐데. 후회가 밀려왔다.
“재미없어.”
“할머니는 재밌게 보고 계시니까 참아요.”
저 아래 골목 슈퍼에서 사 온 옥수수 뻥튀기를 품에 낀 채 할머니는 수시로 등장인물을 욕하고 있었다. 저저 나쁜 년. 와작와작. 아이고, 남자 새끼는 왜 저리 줏대가 없어. 와작와작. 거시기를 확 따야지. 와작와작.
재연이 내 입에 뻥튀기 대신 감자칩을 물려 줬다. 나란히 소리 내서 와작와작 과자를 씹어 먹으며 민망한 기분을 애써 삼켰다.
사귀기로 했지만 바뀌는 것은 없었다. 아직도 재연을 보면 문득문득 낯설고 무서웠다. 재연은 여전히 나에게 바라는 건 하나도 없다는 식으로 행동했다. 지금도 입원한 사람은 재연인데 내게 과자를 먹여 주는 것도, 목이 마를까 봐 음료수를 수시로 챙겨 주는 것도 그였다.
내가 한 일이라곤 과일 바구니를 들고 병문안을 온 서주영에게 사귀는 사실을 공표한 것 정도였다. 서주영은 귀신이나 역신보다 게이 월드가 더 비현실적이라고 소리치고는 들어온 동선 그대로 뒷걸음질 쳐 사라졌다. 처음 재연이 내게 도둑 키스를 했다고 말했을 때 즐거워하며 게이 어쩌고 떠들던 놈은 어디로 갔는지 모를 일이다.
슬슬 의사가 회진을 올 시간이 되었기에 침대 아래로 엉금엉금 기어 내려갔다. 저번에 나란히 누워 있는 꼴을 들키는 바람에 괜히 면을 팔았다. 구겨진 시트와 이불을 정리하고 쓰레기통에 과자 봉지를 집어넣느라 허리를 숙이는 동안 타이밍 좋게 문이 열렸다. 인턴과 레지던트를 줄줄이 달고 들어온 담당의가 할머니에게 건강 상태와 거동에 대한 불편함을 몇 가지 묻고는 바로 재연에게 관심을 쏟았다.
하재연의 오른쪽 시력은 여전히 빛과 색이 돌아오지 않았다.
“학생, 오늘은 어떤가?”
“똑같아요.”
“왼쪽 눈은 잘 보이고?”
“네, 오른쪽만.”
인턴들은 꿀 먹은 벙어리였고 레지던트는 자기들끼리 차트를 확인하며 가능성에 대해 이런저런 설전을 벌였다. 저들끼리의 가장 큰 논제는 오른눈처럼 왼쪽도 이유 없이 멀어 버릴 가능성이 있느냐 없느냐는 것이었다.
그들이 심각한 얼굴로 해외의 사례를 찾아봐야 한다고 말하는 사이 정작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링거액 속도를 늦춰 달라고 부탁했다. 간호사가 얼른 속도를 조절하고는 타박상이 있는 위치에 드레싱을 새로 갈기 시작했다.
“정밀 검사를 한 번 더 받아 보지. 안과 전문의로 유명하신 의사 한 분이 이번 주 내로 복귀하시거든.”
“음…… 저는 검사를 안 해도 괜찮은데요.”
하재연은 속없는 사람처럼 웃었다. 옆에 앉은 채로 입을 꾹 다물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이유야, 대가로 내줬으니 그런 거겠지. 공상과학소설보다 못한 이야기를 과학의 선두 주자인 의사들이 믿을 리가 없다.
지루한 척 눈을 돌리고 알로에 주스 캔 하나를 땄다. 최근 자판기에서 파는 음료수를 하나씩 뽑아 마시는 재미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혹시 모를 원인을 찾아봐야지, 젊은 학생이 왜 그리 의욕이 없어.”
“그럼 그러도록 할게요.”
의사가 엄한 목소리로 꾸중하고는 가볍게 눈인사를 건넨다.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하며 배웅했다. 사람들로 북적거려 꽉 찼던 2인실이 겨우 다시 넓어졌다.
똑같은 복장을 한 사람들이 똑같은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건 역시 부담스럽다. 휴우, 안도의 숨을 쉬고는 알로에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혓바닥을 간질거리는 알로에 건더기를 어금니로 잘근잘근 씹으며 늘어져 있자 재연이 초콜릿 웨이퍼를 하나 까서 내 입에 물려 주며 뒷머리를 토닥토닥 쓰다듬었다.
“피곤하죠? 집에 돌아가서 쉬는 게 어때요?”
“아냐, 괜찮아.”
“일도 하러 가야 되지 않아요?”
“엔지가 괜찮다고 했어.”
“형, 그 일은 해야 해요.”
알고 있다. 하지만 재연이 다친 원인은 내게 있었고 아무런 방문객도 없는데 다리와 팔이 부러진 환자를 혼자 두고 갈 수가 없었다. 재연은 간병인을 구하면 된다고 말했지만, 입원비만 해도 많을 텐데 간병인에게까지 돈을 쓰게 둘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엔지는 당분간 카페를 닫아 둘 거라고 말했다. 자초지종을 들었기도 했고 여름이라 몰리는 손님들을 감당하면서까지 열심히 카페 장사를 하고 싶지는 않다고도 이야기했다.
요즘 그녀는 닫힌 문을 두드리며 찾아올 인간이 아닌 손님들을 위해 차가운 얼음물이나 한 잔 떠 놓고 부채질 하는 한량이라고 했다. 물론 그 손님들을 받는 게 내 일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병원에 입원하고 딱 10일째 되었을 때 재연의 양어머니가 찾아왔었다. 고아원을 불태워 버렸을 때 아직 어렸을 재연을 데려간 여자는 어떤 사람일까 늘 궁금했었다. 처음 병실에 들어온 여자는 머리를 짧게 커트하고 투피스 정장에 긴 스카프를 두른 우아한 차림새였다. 그리고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들고 있던 핸드백으로 재연의 머리를 후려쳤다.
옆에 있던 할머니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을 정도로 앞뒤 없는 행동이었다. 말리기도 전에 여자는 몇 번이나 재연의 머리를 치고, 또 치고, 밀고, 또 밀었다.
재연은 말리지 말라는 손짓을 하고는 끈덕지게 그 행위를 인내했다. 보는 사람의 속을 메스껍게 뒤집어 놓고 나서야 여자는 분이 풀린 듯 병실을 나갔다.
저, 저 여자 왜 저러나. 할머니가 말을 더듬으며 삿대질을 했고 나는 말을 잃어버린 채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어머니를 밉게 생각하지 마세요.’
마음을 읽힌 기분이었었다.
‘저 때문에…….’
재연이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인위적인 표정을 보니 속에 있는 말을 하나도 할 수 없어 고개만 끄덕였다.
‘아버지는 뭐 하셔?’
‘아버지는…… 아버지도 아프세요. 병원에 입원해 계신 지 좀 오래됐어요.’
‘돈 많이 들지 않아?’
‘원래 재산이 좀 있는 집이라…… 괜찮아요.’
저도 2인실에 입원해 있잖아요. 재연이 본인을 가리키며 씩 웃었다. 가짜 웃음이라는 게 너무 확연하게 보여 미운 말을 하지는 못했다.
그 뒤에는 둘 다 조용히 할 일을 했다. 재연은 노트북을 켜고 출석을 대신할 레포트를 작성하고 있었고 나는 그 앞에 앉아 재연이 공부해 두면 좋다고 빌려준 책을 읽었다. 복잡하고 어려운 용어와 한자가 잔뜩 섞인 책을 의미 없이 한 장씩 넘기며 확신했다. 재연이 지불한 수없이 많은 대가 중 양부모와 관련된 것도 있을 거라고.
이런 것 말고도 추측하는 것은 열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만큼 많았다. 재연이 말을 해 줄 수 없다기에 가늠만 하고 넘겼지만 물어보고 싶다고는 생각했다.
침묵은 도대체 몇 번째 대가냐고.
목숨 한 번에 눈을 팔았다. 수없이 많은 죽을 고비가 있었다면 재연은 눈 이상의 것들을 그만큼 계속해서 지불했겠지.
쓴 입 안에 다시 음료수를 가득 물었다. 빵빵하게 부푼 볼을 한참 보던 재연이 아무 말 없이 침대 주변으로 커튼을 둘러쳤다. 의문스런 행동에 입 안 온도에 미지근해진 음료수를 계속 문 채로 고개를 갸웃했다.
“삼켜요.”
재연이 뺨을 톡톡 건드리며 웃었다. 쟤 또 야한 생각 하는구나. 알면서도 선선히 입 안에 있던 음료수를 넘겼다. 재연이 입 안에 남은 음료수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입술을 꼭 붙였다. 쪽, 하는 소리가 났다.
너무 노골적인 키스 소리라 괜히 뒤로 고개를 돌렸다. 할머니는 아직도 막장 드라마에 집중하면서 뻥튀기를 와삭와삭 씹어 먹고 있었다.
“집중해야죠.”
“으음…… 우리, 병실에서 이러는 건 아니지 않을까.”
“안 봐요, 몰라요.”
아닌 것 같은데. 뻔뻔한 낯가죽을 노려봤지만 입술을 할짝대는 혀끝에 금방 엄한 표정을 무너트려 버렸다. 달달한 음료수를 핥아 먹는 고양이처럼 한참 입술을 빨던 재연이 고개를 조금 꺾고는 제대로 깊이 입을 맞춰 왔다.
입 안에 남아 있는 단맛을 모조리 핥아 먹을 기세로 키스에 열중한다. 장단에 맞춰서 눈을 감고 부딪쳐 오는 혀를 마주 섞어 줬더니 좋아서 웃는다.
혀뿌리 아래를 긁으면 머리 한쪽이 저릿저릿하다. 내가 좋아하는 곳이라는 걸 아는 재연이 한참 동안 얇은 피막 부위를 괴롭히고는 치아를 세워 입술을 아프지 않게 씹었다. 목덜미와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하아, 참았던 숨을 몰아서 뱉으며 재연의 어깨를 잡았다. 위로 올라가 힘으로 밀어붙이니 점점 더 몸이 뒤로 밀린다. 상체부터 침대 밑으로 고꾸라질 만큼 위태로운 꼴이 되고 나서야 재연이 입술을 뗐다.
타액으로 범벅이 된 입가 주변을 손등으로 쓱쓱 문질러 닦으며 괜히 툴툴거렸다.
“좀 적당히 해. ……변태 같아.”
“변태라뇨, 형을 위해서 참고 있는 건데요.”
재연이 가슴 한 부분을 쿡 찌르며 실실 웃는다. 예민한 부위를 건드리는 바람에 양팔을 교차시켜 상체를 가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확신하는데, 성격이 나쁜 놈이다.
“사귀잖아요. 그러니까 누릴 수 있게 해 줘요.”
“그냥 헤어질까?”
“헤어지면 구애를 다시 해야겠네요.”
태연하게 대꾸하며 재연이 목덜미 위로 입술을 붙였다. 키스 마크라도 남기겠다는 것처럼 빙글빙글 원을 그리던 혀가 이내 핏줄이 지나가는 자리를 길게 슥 그었다.
“그만 좀 하라니까.”
어깨를 밀어 내며 속닥거리자 재연이 눈웃음을 치면서 귀에 입술을 바짝 붙였다.
“그만하고 싶으면 오지 마세요.”
“야…….”
“내가 형이 피곤하니까 오지 말라고 하는 것 같아요?”
재연이 말을 할 때마다 뜨거운 숨결이 훅훅 불어 피부 위로 닭살이 점점이 돋아났다. 어깨를 움찔거리며 입을 다물자 재연이 아주 작은 소리로 혀를 찼다.
“여긴 병원이에요. 죽은 사람, 죽을 사람이 얼마나 많다고 생각해요?”
“알고는 있는데…….”
“죽을 사람이 있다는 말이 또 다른 의미로는 뭔지 알아요?”
“음.”
모르겠는데. 손톱 끝을 딱딱 부딪치며 시선을 점점 더 바닥으로 깔았다. 검은색 싸구려 슬리퍼와 조금 더러운 바닥과 치우지 못한 초콜릿 바 비닐이 보였다.
재연이 엄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올려 자신과 눈을 마주 보게 했다. 왼쪽 눈 대신 오른쪽 눈을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그것까지는 혼내지 않는다.
“여긴 하루가 멀다 하고 저승사자들이 찾아와요.”
“…….”
“괜히 마주쳐서 좋을 거 없어요. 제 말 무슨 뜻인지 알죠?”
“알았어.”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고집을 부릴 수는 없었다. 저승사자가 찾아왔을 때의 공포감도 잊은 것은 아니었다. 항복의 의미로 두 손을 들어 보이자 재연이 활짝 웃었다. 그 얼굴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죄의식과 비례하는 안도가 느껴져 밤에라도 찾아오겠다는 말은 더더욱 하지 못했다.
당분간은 혼자 있겠구나. 새삼스럽게 외로울 거라고 생각하며 재연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오랜만에 카페로 출근했다. 먼저 도착해 정리하고 있던 엔지는 나를 보자마자 앞치마를 매려다 멈춘 채로 눈물을 쏟아 냈다. 주룩주룩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을 펑펑 흘리며 횡설수설 사과를 하는데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급한 대로 싱크대에 걸려 있는 수건을 얼굴에 대 주자 좀 더 소리 내서 울었다. 공들여 한 화장도 눈물로 젖은 수건에 다 닦여 버렸다. 그래도 이곳저곳이 붉어진 얼굴은 여전히 말갛고 예뻤다.
“흑, 진짜 상상도, 흐윽, 못 했어.”
“이제 괜찮아요. 사실 저는 멀쩡한데 재연이가 많이 다쳐서요…….”
“재, 재연 씨, 성격은 나쁘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이라서 병문안, 흑, 가 보려고, 했는데 못 갔어.”
“가면 좋아할지도 몰라요.”
“분명히 화낼 거야.”
엔지가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풀 죽은 얼굴을 했다. 엔지는 요 며칠 사이 한꺼번에 일어난 일들이 다 자신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무리하게 용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설치고, 술을 먹자고 나서는 바람에 역신의 후손이라는 이진현 이사가 찾아왔을 때 대응도 제대로 못 했다고.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아 엔지는 재연이 역신을 만난 업을 대신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정확한 사정 설명을 해 줄 수도 없어 엔지의 말에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대답을 하며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는 등을 몇 번이고 계속해서 토닥거렸다.
“진짜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단 말이야. 재연 씨는 혼자 있어도 괜찮아? 이원 씨가 더 있어 줘야 하는 거 아냐?”
“간병인을 구할 거라고 재연이가 이야기하긴 했는데…… 잘 모르겠어요. 부모님이랑 사이가 좋은 것 같지도 않아서.”
“아, 그 부모.”
그녀도 재연과 부모님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는 듯했다. 씁쓸한 얼굴을 하며 엔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간병인 구하는 게 속 편할 수도 있지. 오늘 마치면 병원에는 들르려고?”
“아뇨, 금지 받았어요.”
“아, 병원의 기운이 그렇게 좋진 않지?”
업계 종사자인지라 쉽게 이유를 찾은 엔지가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도 눈물로 퉁퉁 부은 눈꺼풀을 하고도 힘차게 창문을 열고 곳곳을 환기했다.
“이원 씨 왔으니까 오늘은 영업해도 되겠다. 잘 부탁할게.”
“네, 잘 부탁해요.”
더운 여름 햇살이 쨍쨍했다. 그러고 보니 전 삶에서도 이맘때쯤 죽었던 것 같다. 시체는 더운 지열과 공기에 일찍 썩었을까. 그렇다면 악취가 끔찍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테이블 위를 정리하고 리모컨을 찾아 에어컨을 켰다. 금방 차가운 공기를 불어 넣는 에어컨 아래에서 한참을 서 있다 문에 걸린 팻말을 Open으로 바꿔 두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불 켜진 카페를 보았는지 손님이 들어왔다.
유난스럽게 더운 여름 날씨에 결국 엔지는 빙수 기계를 장만했다. 쏟아지는 주문에 최소한 기계값은 뽑겠다며 한숨을 푹푹 쉬며 과일을 꺼냈다.
두 잔의 아이스 라떼와 커다란 과일 빙수 하나를 서빙하자 여학생들이 탄성과 함께 너도나도 숟가락을 들었다. 냉동고 안에 얼음을 채워 넣은 후 모자란 과일을 깎고 있는데 엔지가 아이스크림을 올린 와플 한 조각을 건네주었다. 칼을 내려놓고 허리에 두른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아 냈다.
“아, 하루 종일 빙수만 만드는 것 같네.”
“여름이니까요.”
“여름 너무 싫어, 덥고 지치고…… 빙수는 왜 시작했지…….”
엔지가 의자에 늘어져 중얼거렸다. 하긴, 엔지처럼 화려한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에게 여름 날씨는 더 곤욕스러울 것이다. 한여름이 다가오면서 옷은 좀 더 가볍게 바뀌긴 했지만, 디자인만 그렇지 여전히 겹겹이 입은 옷이 무거워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엔지는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아 내리고, 옷깃을 따라 프릴이 달린 세일러 칼라 상의와, 파란색 스커트에 맞춰서 허벅지 반까지 오는 줄무늬 양말을 신고 있었다. 우리는 손 부채질을 하며 나란히 앉아 아이스크림이 녹아 흐물거리는 와플을 먹으며 무게 없는 수다를 떨었다.
“……래서 말이야, 점퍼스커트 사고 싶은데, 사 버릴까?”
“얼마인데요?”
“41만 원.”
“옷 가격치곤 너무 비싸지 않아요?”
“아아, 거기가 원래 좀 비싸. 흑, 그치만 허리선이 예술이라고. 이렇게, 이렇게.”
지갑 사정과 물욕에 대한 고뇌를 떠들며 엔지가 허공에 선을 그렸다. 얼마나 사고 싶은지 꿈에 나올 지경이라고 열심히 토로하는 엔지를 보다 문득 궁금한 게 있어서 물었다.
“엔지, 좀 예민한 질문이긴 한데요.”
“응? 뭔데?”
“그…… 다른 손님들 말이에요. 일반적이지 않은.”
손짓을 섞으면서 목소리를 낮추자 엔지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손님들에게 받는 대가가 복을 쌓는 것뿐이에요?”
“아아, 내가 이야기 안 해 줬나?”
눈을 동그랗게 뜬 엔지가 허둥거리더니 일어나 가게 안에 있는 타자기 하나를 들고 왔다. 오래된 타자기를 잘 올려놓고 엔지가 자신의 이름을 타자기로 쳤다. 낡아서 고장 난 줄 알았던 타자기가 갑자기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자동으로 빠르게 타자를 눌러 글자가 잔뜩 적힌 종이 하나를 완성했다.
손가락으로 종이 귀퉁이를 잡아 펼쳐 보이며 엔지가 쨘, 하고 귀여운 소리를 냈다. 종이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코지마 엔지, 서울 용산구 지점 승계자>
-출력일 6월 14일부터 역순 기재
1. 세발자전거
2. 길몽
3. 동물 영혼
…….
9. 규룡
…….
12. 태아 인도
13. 노인 부부
…….
이상 합계 : 4,621,540원
“지난 한 달간 일한 금액의 대가를 정리해 주는 거야. 복록이나 업을 덜어 내는 건 숫자로 표현할 수 없으니 본인이 감으로 느껴야 하는 거고 여기는 돈만 기록되거든.”
설명을 들으며 간단하게 약식으로 표현된 것을 신기하게 읽었다. 단어만 적혀 있는 정도였지만 이때까지 어떤 손님을 받았는지 확실하게 정리가 될 정도였다. 엔지는 자신의 정보가 적혀 있는 종이를 태우며 재차 설명을 이어 갔다.
“이원 씨는 등록된 사람이 아니라 내가 편법으로 돈을 따로 나눠 주고 있어. 등록하려면 시간도 오래 걸릴뿐더러…… 아마 통과되지 않을 거야.”
골치가 아픈 듯 눈을 조금 찌푸리며 엔지가 아래위로 내 몸을 훑어봤다.
“어쨌든 이원 씨는 업을 덜어 내는 게 급하잖아. 재연 씨한테 곤란할 때 도움을 받기도 했으니까 나도 도울 수 있는 건 도와줘야지.”
어쩐지 평범한 카페 아르바이트치고는 월급이 넉넉한 편이라고 생각했더니 이유가 있었다. 월마다 버는 돈은 다르지만 모자라지 않게 번다며 엔지가 웃었다.
“그런데 돈은 누가 주는 건데요?”
“이런 지점은 관리해 주는 협회가 있어. 그리고 돈은 손님들이 내시지.”
“어떻게요?”
“본인이 이승에 살면서 쌓았던 덕이나 저승길에 주어지는 노잣돈으로 치환해서 내는 거야.”
상당히 구체적이다.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타자기를 톡톡 두들겼다. 크림색 타자기는 아마 이 카페에서 오래 눌러앉아 이런 일상을 기록했겠지. 신기한 기분으로 의미 없이 타자 자판을 톡톡 두들겼다.
일반적인 타자기로서의 기능은 이미 고장이 나 눌러도 아무것도 출력되지 않는다고 설명하며 엔지가 일어서는 손님들을 향해 등을 떠밀었다. 쟁반과 행주를 쥐고 일어나 썰물처럼 우르르 빠져나간 손님들이 사용하던 테이블을 정리했다.
엔지는 손으로 얼굴을 받친 채 타자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모습에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용히 빈 그릇을 주방에 있는 식기세척기 안에 하나씩 집어넣었다. 막 세제 한 숟가락을 떴을 때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다음 팀이 카페로 들어왔다. 엔지도 생각에서 깨어났는지 몸을 일으켜 타자기를 가져다 두고 커피 추출기 버튼을 눌렀다.
평범한 카페 영업은 저녁까지 이어졌다. 한참 몰려온 손님들을 죄다 받고 난 뒤에 정신을 차리니 저녁 9시 30분이었다. 막 작동이 끝난 식기세척기 문을 열고 뜨겁게 살균된 컵과 접시를 정리하는 동안 엔지는 재고 주문을 끝냈는지 기지개를 쭉 켰다.
“아, 힘들다. 이원 씨는 오자마자 고생이네. 수고했어.”
“엔지도 수고했어요. 그런데 오늘은 그쪽 영업 안 해요?”
온종일 바뀌지 않은 팻말을 에둘러 말하자 엔지가 손사래를 쳤다.
“당분간은 보수 공사야. 재연 씨한테 한참 혼났거든. 역신의 힘을 억누르는 작업을 좀 더 하기로 했어.”
“저 때문이네요.”
“아냐, 나도 덕분에 경각심이 생겼는걸. 새로 주문한 부적이 오려면 며칠 더 남았으니 그때까진 힘내?”
“알겠어요.”
상냥하게 웃으며 등을 두들기는 엔지의 어깨를 마주 토닥거려 주고 허리를 폈다. 벌써 밤이다. 재연이 입원한 병원까지는…… 갈 일이 없지, 참.
오랜만에 할머니의 기침이나 가래 끓는 소리, 중얼거리는 잠꼬대와 주말 연속극의 잡음, 복도를 기어 다니는 귀신들의 발소리 없이 조용하게 잠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일이지만, 허전하다.
앞치마를 개켜서 올려 두고 퇴근 준비를 마친 엔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물었다.
“엔지.”
“응?”
“나 재연이랑 사귀게 됐어요.”
“어어?”
만화 캐릭터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잠시 굳어 있던 엔지가 활짝 웃으며 포옹을 해 왔다.
“뭐야, 왜 바로 이야기 안 했어? 축하해!”
“축하받을 일인가요.”
“그럼, 당연하지. 왜, 재연 씨는 이원 씨를 정말로 좋아하고 있으니까.”
엔지가 눈치 없이 시간을 질질 끌어서 미안하다며, 별것도 아닌 일에 사과를 했다.
“연애라니, 딱 불타오를 때지. 재연 씨 빨리 퇴원해야 하겠네. 보고 싶을 거니까.”
빨리 가라는 듯 내 등을 밀며 묘한 표정으로 입을 가리고 후후 웃는 엔지를 보다 같이 씩 웃었다. 그래, 역시 조금 보고 싶었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피곤하고 졸리니까 집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눈 깜짝할 사이 병원에 도착해 있었다. 전철을 두 번은 갈아타야 하는데 갈아탄 기억도 없다. 와, 나 좀 로맨틱한 것 같아.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 부끄러워 뺨을 짝짝 때렸다. 들어가면 혼나겠지. 화를 낼지도 모른다. 두 사람 다 위험할 수도 있는데 또 왔다고. 나는 바보야, 병신이야. 스스로에게 험한 말을 내뱉으며 한참 병원 근처에서 서성였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은 아직 이르다고도 볼 수 있었지만 병원 시간으로는 많이 늦은 시각이었다. 이제는 오가는 차도 없고 드문드문 택시만 예약이라는 표시등을 켜고 잠깐 머물렀다. 인적 드문 곳에서 발끝만 내려다보다 겨우 병원 부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도 익숙한 병원 본관 앞에서 한참이나 빙글빙글 돌며 망설이다 힘내서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업무가 끝난 로비는 조용했다. 엘리베이터 불빛만 조금 점잖게 빛을 내고 있었다.
문병 온 사람들만 들어갔다 나갈 수 있도록 열려 있는 샛문을 조심스럽게 지나 엘리베이터에 탔다. 재연이 입원한 8층까지 올라가는 동안 엘리베이터에서는 스산한 소리가 났다.
용기 있게, 시킨 말은 하나도 듣지 않으며 병원에 오긴 했지만 막상 병실 앞에 도착하니 들어가기 꺼려진다. 소심하게 문 앞에 쪼그려 앉은 채 조용한 병원 복도를 구경했다.
“어, 할머니.”
하필이면 재연의 옆 침대를 쓰는 할머니와 마주쳤다. 어색하게 인사를 하자 할머니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셨다..
“안 들어가고 여기서 뭣 해?”
“……사실 오지 말라고 했었거든요. 그런데 하루도 안 돼서 약속 깨고 들어가면 화낼 테니 여기서 멈췄어요.”
소심한 대답을 듣자마자 할머니가 입을 가리고 홍홍 웃었다. 나이 들어 밤잠이 없어진 할머니가 허리가 아픈지 툭툭 치며 뜻밖의 제의를 했다.
“그렇다면 할미랑 같이 산책이나 할 텨?”
“산책이요?”
“응, 그전에 옥수수 그것 좀 사 와, 뻥튀기.”
저번에 드린 게 몹시 마음에 드신 모양이었다. 결국 시키는 대로 근처 편의점에서 파는 뻥튀기 한 봉지를 사 왔다. 할머니가 기분이 좋은지 쪼글쪼글한 입을 벌리며 활짝 웃었다.
봉지를 든 채 다시 복도를 걷기 시작한 노인의 느린 발걸음에 맞춰 천천히 걸었다. 불 꺼진 복도는 너무 어두웠고, 어둠을 틈타 돌아다니는 위험한 것들이 보여 병원 산책로를 걷자고 제의했다. 밤공기가 괜찮다는 말에 할머니는 선선히 바깥으로 따라 나왔다. 어둑어둑한 와중에도 발치에 길을 따라 밝혀 둔 불빛으로 걷기 나쁘진 않았다.
할머니가 쪼글쪼글한 입 안으로 뻥튀기를 하나 털어 넣으며 물었다.
“꿀을 발라 뒀어, 뭣 하러 이렇게 열심히 오고 그래?”
“음…….”
“내 자식 놈들은 오라고 빌어도 오지를 않는구먼.”
자식을 타박하기보다 본인의 상처를 긁는 쓸쓸한 말에 어두운 밤하늘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뻥튀기 한 줌을 뺏어 쥐며 대답했다.
“언젠가는 재연이가 빌어도 오지 않을 거 같아서요. 미리 다 해 두려고요. 그래야 욕을 덜 먹죠.”
“아이고, 이게 무슨 헛소리여.”
할머니가 낄낄 웃으면서 자기 죽은 영감탱이와 하는 말이 똑같다고 웃었다. 드라마를 볼 때가 아니면 할머니는 수시로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무심한 자식들을 욕하며 제 팔자가 상팔자라고 한탄을 했다.
“할머니는 바람피우는 할아버지 어떻게 참으셨어요?”
“어쩌긴, 바깥양반이 그래도 참아야지. 그래야 좋은 아내라고, 그때는 다 그렇게만 배워서 애간장 태우느라 피눈물 흘렸지.”
옛날 사람. 이미 여든이 넘은 할머니는 늘 잘 손질한 백발을 곱게 쪽 찌고 있었지만, 쓸쓸한 사람이었다. 젊었을 적부터 속을 까맣게 썩인 남편 외의 다른 남자를 좋아할 줄도 모르는 완고한 사람이기도 했다. 아마 동성연애는 더 이해 못 하겠지.
“나는 잘 모르지만 총각 보살님이 자네 많이 좋아한다는 건 알어. 그러니 기죽지 마라.”
아마도 둘이 붙어먹는, 뻔한 관계를 다 봤을 사람이 편견을 깨고 따뜻한 말을 건넸다.
기죽지 마라. 부모가 없다고 놀림당하여 울면서 뛰어들어 왔을 때, 원장이 어린 나를 끌어안고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 할머니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얼굴 근육을 단단히 뭉쳐 고개를 끄덕였다.
바삭바삭, 우울한 마음은 모르고 옆에서는 뻥튀기를 신나게 소리 내서 씹는다. 이따금 너도 먹으라 한 줌씩 쥐여 주는 옥수수 뻥튀기를 하나씩 입에 넣으며 머리 위로 드리운 보라색 등나무 꽃을 한참 구경했다.
달콤한 향기가 진동했다. 만개하는 시기는 이미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관리를 잘한 건지 우연인지 아직도 싱그러운 꽃이 포도송이처럼 매달려 향을 뿜고 있었다.
“내가 오래 살아 보니 별걸 다 고집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시들어 땅에 떨어진 잎과 꽃을 바라보며 할머니가 눈매를 누그러트렸다.
“딸년이 하고 싶다는 일을 하게 해 주고, 아들놈이 장가가고 싶다는 여자를 맺어 줬어야 했지.”
“할머니.”
“나도 얼굴도 모르는 영감에게 열여덟에 시집가 그 고생을 했는데, 왜 똑같은 짓을 했는지 몰러.”
“…….”
“의사에 변호사를 시키는 게 아니라, 해외 저기 멀리 공부 시키는 게 아니라, 품에 감싸고 예뻐 죽으며 키웠어야 했다는 걸 몰라서 이렇게 외롭게 사는 것 아니야.”
죽을 때가 되니 후회가 되는구먼. 할머니가 팔뚝에 앉은 모기를 잡으려다 말고 헛손질을 하며 중얼거렸다. 위로가 될 말을 찾지 못해 망설이는 사이, 노인이 뻥튀기 봉투를 한 바퀴 돌려 묶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이제라도 다 이해해 보자고 생각했지. 어차피 죽으면 나는 끝인데, 뭐라고 말을 할 것이여.”
“……감사합니다.”
“뭐얼. 덥다, 어서 들어가 쉬어.”
할머니가 일어난 자리 주변에는 흘린 과자가 잔뜩 늘어져 있었다. 나이가 많이 든 노인은 먹는 게 반, 흘리는 게 반이었다. 어른거리는 불빛에 개미 몇 마리가 기어 다니는 게 보였다.
노인은 이제 허리가 아파 가야겠다고 말하며 발을 뗐다. 따라 일어나지 않고 앉은 채로 조심히 들어가시라 배웅을 했다. 반쯤 남은 뻥튀기 봉투를 야무지게 손에 쥐고, 흐물흐물한 걸음으로 병원 안으로 들어가는 노인의 굽은 등을 한참이나 보았다.
원장도 죽을 때는 후회를 했을까. 열다섯에 내 손으로 죽여 버린 그 원장 말고, 되돌리기 전의 삶에서 나를 죽였던 그 원장. 산 채로 잡아 뜯겨 죽어 가는 내게 울면서 미안하다고 했었다. 쇼크사하기 직전까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범벅된 우울한 사과를 일방적으로 듣고만 있어야 했다. 결국 네 탓이라는 말과 함께.
무언가의 힘으로 복수를 이루어 냈을 때,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인생이 망가졌고, 매일 밤 죄책감의 고통에서 시달렸지만, 열다섯으로 돌아간다면 또 한 번 원장을 죽일 것이다. 이번엔 더욱 잔인하게, 더 고통스럽게.
사람을 어떻게 하면 세밀하게 죽일 수 있을까?
일단은 사랑해 준 만큼 괴롭힐 것이다. 다정한 말을 해 줬던 몫만큼, 유약한 성정을 가진 따뜻한 가슴팍부터 살점을 도려내자. 손가락과 발가락을 하나씩 끊으며 비밀을 소리쳐서 말하게 하자. 어떤 장기부터 들어내야 죽지 않을까?
미리 마취를 놓고 수혈을 하면서 작업하면 더 오래 고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신장부터 떼어 내 눈앞에서 보여 주면 괴로워하겠지.
역시 안타깝다. 시간을 돌리고 싶다. 12년 형?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무기 징역도, 사형도 괜찮다. 평생 그 높고 좁은 교도소 안에 갇혀 살아도 되니까, 스물여덟이든 열여덟이든 죽어도 좋으니 다시…….
“형, 여기서 뭐 해요.”
끔찍한 타성에 젖어 있는 공간을 헤치고 반쯤 떨어진 길 위에 재연이 나타났다. 시간은 벌써 밤 11시를 향해 바짝 달려가고 있었다. 할머니가 병동에 들어가며 언질을 줬는지 재연이 목발을 짚고 다가와 있었다. 깁스를 한 발이 끌리는 소리와 목발 닿는 소리가 불안정하게 연속되더니 이내 재연이 완전히 등나무 그늘에 들어왔다.
조금 피곤한지 창백해진 얼굴을 마주 보기 힘들어 보라색 등나무꽃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재연이 옆자리에 앉아서 말없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새로 사 둔 샴푸의 풋풋한 향이 났다.
“……와서 미안해.”
“괜찮아요. 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 말라는 건 이리저리 잘만 해서 사고를 많이 쳤는데도 재연은 화를 내지 않았다. 저렇게 무른 태도를 보이니까 말을 듣지 않는 거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벤치에서 내려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재연을 올려다보았다. 어린아이처럼 구부정하게 앉은 나를 보고 재연이 귀엽다는 듯 웃으며 턱을 가볍게 매만진다. 두 팔을 쭉 뻗으며 그를 향해 솟구치듯 안겼다.
재연이 목발을 조금 옆으로 밀어 놓고 상체를 받아 줬다. 허벅지 사이를 파고 들어가 복부에 뺨을 기댔다. 하재연은 불편한 몸으로도 몇 번이고 등을 쓰다듬어 주며 혼자 무슨 좋은 생각을 하는지 드문드문 콧노래를 불렀다.
과거, 어릴 때의 하재연은 울보였다. 밤마다 무서운 꿈을 꿨다며 울거나, 이불에 실례해서 사람을 고생시켰다. 그것 말고도 초콜릿을 안 준다고 울고, 손을 안 잡아 준다고 서럽게 눈물을 뚝뚝 흘렸다. 좀 더 크더니 아디다스 운동화를 사 달라고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아, 그놈의 삼색 선이 찍찍 그어진 운동화가 뭐가 좋냐고 혼을 냈더니 나이키를 사 달라고 해서 더 열 받게 하던 어린아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곧잘 사소한 일로 툴툴거렸다. 왜 자신은 부모님이 없냐고 울며 보채면 재연을 안고 원장이 해 줬던 말을 그대로 들려주며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 주기도 했다. 순수하던 애정이 변질되어 중학교 교복을 입은 푸르던 소년을 성장시켰을 때 역시 기억한다.
다 커서도 여전히 나이키보단 아디다스가 좋다고 말하던 하재연. 사탕보단 초콜릿이 좋고, 아메리카노보다는 카페 라떼를 좋아했고, 까만색보단 남색이 좋다고 하며 호불호가 확실했던 네가 이젠 모든 것을 괜찮다고만 말한다. 좋거나 싫은게 아니라 인내할 수 있으면 된다는 것처럼.
“좀 걸을까요?”
네가 이렇게 달라졌다.
“……그래.”
움직이는 게 불편한 재연을 옆에서 부축하며 같이 캄캄한 산책길을 걸었다. 재연이 깁스를 한 발을 끄는 소리와 목발이 움직이는 소리가 엇박자로 울렸다.
이름 모를 노란색 꽃을 잘못해서 한 번 밟고, 재연의 몸무게를 휘청휘청 버텨 가며 산책로를 반쯤 걸었을까. 재연이 우뚝 멈춰 서 하늘을 보았다.
“오늘은 하늘이 깨끗하네요.”
그 말에 덩달아 목을 아프게 꺾고 하늘을 보았다. 과연, 오랜만에 탁한 서울의 공기를 잊은 화창한 밤하늘이었다. 짧게 자란 손톱처럼 가늘게 뜬 초승달 옆으로 별 몇 개가 빛이 나고 있었다. 푸르고 까만빛이 꾸덕꾸덕한 아크릴 물감처럼 뒤섞여 있었다. 희미하게 빛을 내는 별을 보며 여름철 별자리를 찾으려고 애를 쓰는데, 하재연이 손가락으로 그나마 밝게 빛나는 별 하나를 가리켰다.
“보여요, 저거?”
“응? 별자리야?”
“아뇨.”
자세히 보라며 재연이 손가락으로 정확하게 하늘에 있는 반짝이는 별을 짚었다. 높게 지른 손끝이 천천히 선을 그으며 온 밤하늘을 횡단하듯 춤을 췄다.
“저건 금성이에요. 그 옆은 목성, 저긴 토성…… 수성은 반대편이네요.”
하재연이 가리키는 손가락의 너비에는 검은 하늘만 있었지 별은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천문대도 아닌 서울 한복판에서 육안으로 행성을 구분해 볼 수 있을 리가 없다. 고개를 돌려 재연을 보았다. 조금 낯선 옆얼굴이 아주 미미한 미소를 띤 채 하늘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보여?”
“네.”
“토성이, 목성이 보인다고?”
“아……. 설마요.”
재연이 눈을 둥글게 휘면서 웃었다. 방금까지 별이 듬성듬성 빛나던 밤하늘을 세어 내던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접으며.
“그냥 대충 거리로 가늠하는 거예요. 설마 보일 리가.”
그래, 나조차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하재연을 온전히 믿지는 못했다. 방금 밤하늘에 찍어 냈던 별빛을 총총하게 드리운 것 같은 눈동자를 가까이 붙이고 입술만 움직여 딱딱한 미소를 짓는다.
“못 믿겠어요?”
“……응.”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요.”
키스나 해 주세요. 재연이 능청스럽게 말을 돌리며 얼굴을 가깝게 붙인다. 발돋움을 하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바깥이라 짧게 립키스만 했지만, 재연은 그것도 좋은지 활짝 웃었다.
노란 전등 사이로 날벌레들이 날아다니며 정전기 일어나는 소리를 냈다. 머리 위의 전등에서 전력이 끊기는 것처럼 딱딱 튀는 소리가 난다. 어딘가에 설치된 전자 벌레 퇴치기에서 끝없이 타닥거리는 불꽃 튀는 모닥불 소리가 났다.
깊은 여름이 다가선 향취가 은근하게 전신에서 현악기처럼 움직였다. 밤이 되어도 더운 지열에 땀이 삐질삐질 배어 나오지만,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더운 여름 밤바람을 타고 사랑의 달콤한 향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한순간, 생명이 막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이 활발한 계절에 피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주변의 온도가 내려갔다. 재연이 분명히 함께 있는데도 무슨 일을 당했는지 두개골이 깨진 환자 귀신 하나가 산책로를 벗어나서 사지를 굴러 기어 오고 있었다. 몸통을 쭉쭉 밀 때마다 배 속에서 흐른 장기가 보인다. 사고로 죽은 사람일까. 손상된 사체를 볼 때마다 원장에게 저질렀던, 그 후에 저질렀던 죄악을 떠올린다.
아직도 인간의 살점을 도려내, 이미 혼이 빠져나간 시체 가죽을 우그러트려 기계 안에 집어넣고 갈아 버리던 감촉을 기억하고 있다. 물컹거리던 핏덩어리의 감촉이 생생하다.
잡아서 터트렸을 때 얻던 쾌락에 자위했다. 재연의 품 안에서 몸을 둥글게 만 채로 빈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나야말로 인간일까.
“재연아.”
“네?”
“나 뭔가, 어딘가 망가진 거 같아.”
혐오스러운 건 혐오스럽지 않아졌고, 귀찮은 건 더욱 귀찮아졌다. 배덕한 행위에서 도덕적인 가책을 느끼지 않았고, 당연히 해야 할 영웅적 행위에서는 무감각해졌다.
나 때문에 재연이 다쳤다. 누군지 얼굴도 이름도 모르던 여학생과 남학생이 살해당했다. 둘은 영원히 목숨을 잃었고, 재연은 영원히 한쪽 눈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미안한 일이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가도 자신은 그들을 죽게 두고, 재연이 다치게 방관할지도 모른다. 개선하기 위해 시간을 되돌리는 짓은 한 번으로 충분했으니까.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서 발버둥 치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되어서? 아니면, 이미 이 세상은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 많이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서인가?
“너랑 만난 이후로…….”
이상해.
모든 복합적인 감정을 담아 조그맣게 이야기하자 재연이 웃었다. 불편한 다리로 일어서서 몸을 안아 준다. 더운 심장 고동 소리와 붉은 손바닥이 까칠까칠하게 변해 재연이의 병원 환자복에 닿았다. 뜨거운 여름을 닮은 체온이었다.
“그래요, 그렇겠죠.”
“그런 거야?”
“형의 업을 온전히 받는 건 저도 불가능해요. 그렇다면 그것들이 어디부터 건드릴 것 같아요?”
“……머리?”
이상해졌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대답하자 재연이 가만히 내 관자놀이 부근을 짚으며 말했다.
“그건 기억이에요.”
기억? 어쩐지 들었던 것 같은 단어에 재연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보이지 않는 오른쪽 눈으로 시선을 피해서.
“온전하지 못한 뇌의 기억, 사고의 단순화.”
인간의 뇌는 불완전해서 없던 기억을 섬세하게 짜 맞추고 있던 기억을 지워 버리는 데에 아주 천재적이다. 특히 잊고 싶었던 기억이라면 쉽게 잊고, 기억하고 싶은 것은 요령 좋게 기억한다. 거기에 조금 더 대단한 힘이 개입하면 아주 완벽하게 그 기억은 부적합하게 보존된다. 이전에 재연이의 자취방 근처 놀이터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형이 맹신하고 있는 어떤 기억이 전부 왜곡된 것이라면.’
모든 기억이 잘 조합된 모조품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냐고 말했다.
과거의 많은 부분을 기억해 내려고 애를 썼다. 재연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을 이야기해 보려고 하면 사흘 밤낮 떠들 수 있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사랑하고 싫어하던 또래의 친구들은 누가 있는지, 맛있게 먹던 음식과 특히 싫어하던 표고버섯, 탕수육이 먹고 싶다고 조르던 아이. 여름이 싫다고 했지만 더운 여름 햇살 속에서 가장 밝아 보이던, 내가 거둬 길렀던 나의 소년.
이런 기억이 다 틀렸을 리가 없어. 불안한 기분에 걸음이 휘청거렸다. 재연이 절룩거리면서 다가와 얼굴을 쓰다듬었다. 더운 날씨에 뜨거워진 손가락이 얼굴을 따라 그리며 부드럽게 목까지 내려왔다.
그의 손에 살의는 조금도 없었다. 그에게 살의와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 바로 나였다. 그래, 그렇다. 재연은 늘 위태롭거나 무언가를 숨기는 표정이 아니었다. 당황하는 감정이 튀어나와 입을 틀어막았다.
“아마 오늘도 잊으시겠죠.”
하재연이 울었다. 보이지 않는 한쪽 눈에서 가장 먼저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빛을 가지고 있는 왼쪽 눈에서도 곧바로 눈물이 흘렀다.
“매일매일 잊으시겠죠.”
“재연아?”
남들은 다 신는 운동화를 사 주지 않는다고 팬티 바람으로 시위하며 앞뜰을 뛰어다니던, 그 고집불통의 어린 얼굴을 하고 재연이 울먹이며 말했다.
나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나는 네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는 알지만 그렇게 열심히 사랑하진 않았다. 그저 네가 사랑을 말해서, 나도 너를 사랑하려 노력했을 뿐이었다. 지금도, 이번 삶에서도 저 사랑에 부응해 주려는 것뿐이었고……. 어느 순간부터 내 감정이 재연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가볍다 부정하기 시작했다.
“나를 사랑하는 기억은 잊으시겠죠.”
살아 있는 것에 의지가 존재하는가. 아니면 오로지 살아남으라 강요당해서 살아 있는 걸까. 사랑해 달라고 말해서 사랑하기 시작한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래도 괜찮아요.”
“…….”
“형이 망가진 건 당연한 거니까.”
열심히 살아도 사람은 후회한다. 후회란 삶의 마지막에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이 맞겠지.
시간은 벌써 밤 11시를 넘겨 자정으로 바짝 달려가고 있었다.
하재연은 중간중간 섬뜩한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오래도록 숨을 웅크린 그가 마침내 웃는 것에 성공했을 때는, 12시가 넘은 후였다. 시간을 움켜쥐고 달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