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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빙점(氷點) 上 (7/24)

5. 빙점(氷點) 上

충분히 힘을 썼고,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는데도 주변에 귀신이 들끓는다. 공기가 탁해질 정도로 우글거리는 귀신이 꾸역꾸역 주위를 채워 나갔다. 재연은 이런 힘이 있는 존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것에게 참으로 너그러우시지.

이원의 손가락 하나라도 뜯어 먹으려고 와그작 입을 벌리는 귀신을 걷어차 내쫓으며 재연은 앞을 노려보았다. 이제는 보기만 해도 짜증이 치솟는 흰 의복이 바람에 휘날린다. 거대한 산 하나가 움직이는 것 같은 웅장한 위압감이 영혼을 뒤흔들었다.

더러운 인간 세상 따위에는 발을 내디디지 않겠다는 것처럼, 몸을 공중에 띄운 채 뒤에는 수백 수천의 백귀를 거느리고 선 남자가 뺨을 손바닥에 대고 기울이며 권태로운 모습을 취했다. 바람이 날카롭게 불어서 빳빳한 새 병원복의 옷깃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었다. 재연은 축 늘어진 이원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품에 안긴 몸에서 나는 열기가 아직도 현세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목을 베어 버리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무형의 칼날을 드리우던 신이 이내 픽 웃으며 재연의 자유를 억압하던 힘을 거둬들였다. 재연은 뜸 들이지 않고 바로 그의 행위를 비난했다.

“이렇게 나타나는 건 계약 위반이야.”

반 토막 난 무례한 말투에 뒤에 포진한 귀신들이 하나같이 험상궂은 낯을 하고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십이지신들은 보이지 않았다.

재연은 아직도 신이 자신에게 준 시간이 남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턱을 치켜들고 가장 거만한 말투로 사실을 적시했다.

“아직 시간이 되지 않았어.”

「알고 있어.」

“왜 벌써 나타난 거야? 형의 앞에서만도 두 번이야. 더는 안 돼.”

그 어느 누가 신이 자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인간을 좋아하는 건 괴짜 중의 괴짜 신뿐이다. 보통 모든 지체 높은 영혼과 신과 왕들은 인간을 끔찍하게 미워했다. 인간이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도 그들이 볼 수 있는 눈을 거둬 가 버렸기 때문이다.

신을 볼 수 있는 것은 몇 명의 허락받은 사람들뿐. 큰 신을 받은 무당이라든가 대가를 치르고 시간을 뒤바꾼 인간들, 예를 들면 윤이원과 자신.

「그것은 네 연인에게 따져 물어야 할 것이 아닌가? 나도 불쾌해. 저 아이가 왔다 가면 내 아이들이 매우 기분 나빠 한단 말이지.」

“과한 참견이잖아. 끌려간 건 이쪽이야.”

「나는 신이니, 세상 만물에게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옳지.」

“쓸데없는 참견이라고 이야기했어.”

하재연은 고개를 들어 올려 허공에 부유한 채 깍지를 끼고 있는 신을 보았다. 신은 네가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처럼 눈을 휘저으며 환하게 웃었다.

“십이신장도 거느리지 않고 묶어 둔 주제에 신의 행세를 할 셈인가?”

「무례해.」

신이 지적하자 잇따라 다른 목소리가 악의에 가득 찬 소리로 수군거렸다.

「맞아, 무례하군.」

「왕께서는 왜 저런 인간에게 자비로우시지?」

「모를 일이야. 멱을 따 버리고 싶구나.」

「쉬잇, 조심해. 그랬다간 우리가 역으로 해를 입는다고. 저렇게 더러운 영혼이라니…….」

시끄러운 놈들을 한번 노려본 재연이 다시 신을 보았다. 신은 즐거웠다. 저 어린 인간이 사지를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인연과 생과 사를 바꿔 놓겠다고 애를 쓰는 것을 보면 기분이 좋았다. 또한 불쾌하기도 했다.

잠든 이원을 다시 고쳐 안고 단단하게 경계하는 재연을 내려다보던 신은, 우습다는 듯 바짝 다가가 그 예쁘장한 얼굴 위에 속삭였다.

「네가 아무리 시끄럽게 떠들어 봐야 나는 신이지.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신.」

“…….”

「계약 위반은 너야. 감히 대가를 내고도 약속을 어기는 그 작태는 참아 줄 수가 없어.」

하재연의 일차적인 대가는 침묵이다. 윤이원에게 삶과 현상에 관해 설명하기 위해 최대한 교묘하게 대가를 피해 설명했지만, 본인도 아슬아슬하게 위험 수치에 도달했다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조금 전처럼 그의 기억을 건드리는 말은 거의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하지만 재연은 거리낌이 없었다. 더 많은 대가를 내놓고 더 많은 기적을 일으키면 된다. 영혼과 힘과 정신의 틈새를 갉아먹는 짓 따위는 아무렇지 않았다.

「또 이런 짓을 하면 그때는 남은 시간을 회수할 테니 각오해.」

신이 우아한 얼굴을 바짝 들이민 채로 으르렁거렸다. 신은 인간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윤이원과 하재연이 특별하게 강한 염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그는 절대로 이런 더럽고 불쾌한 인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이 둘은 언제나 사랑스럽고 비열해서 자신을 즐겁게 해 주고 있었다.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옳은지도 구분하지 못하여 당당하게 업보에 발을 담가 두 번이나 육체에서 멀어지고 말았던 윤이원은 특히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얼마나 지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지?」

애처롭게 발치에 매달려 빌던 벌레 같은 추악한 자태가 신의 무료함을 날렸다. 오랜 세월 고통을 모르던 그는 하재연의 괴로움에 처음으로 생동감을 느꼈다.

이를 드러내며 행복하게 웃는 신의 모습을 보며 재연이 이를 악물었다.

「결국 너는 내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지 않았던가?」

“약속은 지킬 테니 걱정하지 마. 그리고 이 사람도 지킬 거고.”

「과연 그럴 수 있으려나.」

둘의 관계에 대해서 당사자만큼이나 잘 알고 있는 신이 손을 뻗어 사랑스러운 외관을 한 하재연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둘은 매우 다른 외모를 가지고 있고, 다른 가치관과 다른 사랑법을 구사했지만 사실은 알고 있다. 둘은 닮았다. 쓸모없는 일에 열을 내고 힘을 빼는 것이.

「과거의 사랑을 다시 이루는 것조차 힘든 네가 성공할 수는 있을까.」

“초 치지 말고 꺼져.”

「아아……. 그래. 나는 네가 약속만 지켜 주면 되니까 신경 쓸 문제는 아니지.」

신은 허리를 숙여 재연이 대가로 지불한 오른쪽 눈동자를 보았다. 아주 기분이 좋았다. 둘이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일의 그 끝이 어떻게 될지 뻔히 보였기 때문에. 그런데도 기적을 볼 수 있기를 바라는 모순적인 생각에.

「괜한 짓을 하지는 마.」

마지막으로 충고를 건넨 신은 나타났을 때와 똑같이 한순간에 주변을 정리하고 사라졌다.

아름다운 신이 있던 위치를 노려보던 재연은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신이 떠남과 동시에 이원의 몸을 드는 내내 팔과 다리에서 느껴지던 통증이 없어졌다.

“쓸데없는 친절을…….”

하재연은 화를 삼키며 눈을 감은 연인의 곱게 잠든 얼굴을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다. 이원은 잘 챙겨 먹지 않아 말라 있었고 늘 안색이 좋지 않았다. 거스러미가 종종 일어나는 손톱 주변과 갈라진 입술까지 사랑스럽다고 느끼는 것은, 정말로 좋아하고 있기 때문이다.

윤이원이 모든 잡음을 들을 수 있을 때나 재연은 실컷 괴로워할 수 있었다. 그는 괴로웠다. 이원이 아무것도 모른 채로 왜곡된 행동과 말을 하고 울면서 하재연에게만 복합적인 감정을 느낄 때마다 죽어 버리고 싶었다. 얼마나 더 노력해야 연인은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리고 얼마나 노력해야 자신은 윤이원에게 지었던 죄를 갚을 수 있을까. 눈을 감으면 기억은 생생하다. 늘 그날로 돌아가고 싶다고 빌었기 때문이었을까. 모르겠다.

***

열 살, 어린 나이에 모든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고아원이 불에 탔다. 모두가 하루아침에 집을 태우고 자신들의 아버지를 살해한 윤이원을 미워했다.

하재연도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이원을 친형처럼 따랐기 때문에 그 배신감은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살인의 방법이 끔찍하고 잔인해서 그의 범죄는 더 소문이 자자하게 돌았다. 개 같은 자식. 그런 놈은 교도소에 처박혀 그대로 죽어 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끝끝내 이원이 자신의 눈앞에 나타났을 때는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혐오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과 똑같은 표정으로 착한 척, 아직도 사랑하는 척했을 때는 목이라도 졸라 버리고 싶을 만큼 재연은 그 사람이 싫었다.

재연의 입장에서 서주영은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딴 살인마의 어디가 좋은지 친구라며 감싸려 하는 모습은 정말 최악이었다. 자신들의 인생에서 윤이원만 빠져 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 완벽했을 거라고 그의 앞에 대고 수백 번 질타를 했다.

어린 나이를 전부 교도소에서 보낸 윤이원은 출소 후 늘 사회생활을 힘들어했고 부족한 학벌과 능력 탓에 생활고에 시달렸다. 주영이 몇 번 슬그머니 일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지만 냉정하게 거절했다. 살인마를 품을 정도로 재연은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었다.

사고가 있은 후 재연은 유복한 가정에 입양되었고, 언제나 남들보다 빠른 나이에 성취를 이루어 냈다. 그리고 별문제 없이 자라 명문 대학교에 들어갔다.

내외적으로 사회적인 기반은 충분했다. 복학해 스물셋이 되었을 때는 대학교에서 유명해졌다.

일찌감치 재연에게 눈도장을 찍으면서 졸업하면 자신들과 같이 일해 볼 생각이 없냐 명함을 건네는 스타트업 사장들도 많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고아원 동기들이 친해져서 밥 한 끼라도 얻어먹어 볼까 기웃거리기도 했다.

서주영은 설득이라도 하듯 몇 번 더 윤이원이 월세를 내기도 빠듯해한다는 말을 했다. 돈을 빌려주려고 했지만 그가 거절했다고도 이야기했고, 공사장에서 일하다 그가 철근에 깔리는 바람에 죽지는 않았지만 팔과 다리를 많이 다쳐 일을 그만뒀다는 말도 전했다.

재연은 겨우 대학생이었고, 양부모가 경제적으로 부유하다고 해서 그런 인간에게 쓸 돈은 없었다. 쓸데없는 소식을 전해 준다고 주영에게 몇 번이나 화를 냈다.

노골적으로 끔찍히 싫어하는 티를 냈기 때문인지 결국 서주영은 입을 다물었다.

윤이원은 불편한 인간이었다. 사회에서 우연히 재회하자 그 사람은 유난히 살가운 척하며 보고 싶었다는 소리를 지껄였다. 기쁜 티도 났었고, 뭔가를 바라는 표정으로 수줍게 쳐다보기도 했다. 그런 행동이 어릴 때 돌봐 준 값이라도 치르라는 건가 싶어 전부 역겨웠다. 그랬던 윤이원도 이제는 잘 나타나지 않았다.

최근은 주영이 연락해도 잘 받지 않더라는 이야기를 듣고도 며칠이 더 지났다.

가만히 있기만 헤도 뜨거운 여름 햇빛에 숨 쉬기도 힘든 무더위의 8월 초였다. 한 달, 아니 두 달? 석 달 만일지도 모른다. 소식만 가끔 들었던 사람이 나타났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당신이랑 할 말 없어.’

‘…….’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잖아.’

‘……미안, 부탁이 있어서…….’

허름한 행색을 한 이원은 많이 지친 얼굴이었다. 교도소에 갔다 온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무슨 싸움을 또 했는지 오른쪽 눈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보는 사람이 다 기분 나쁜 모습으로 애처로운 척 주변의 튀어나온 물건에 부딪혔다. 창백한 얼굴과 달리 긴팔 티셔츠에는 여름 무더위의 열기가 꼼꼼하게 스며들어 있는 게 보였다.

‘만 원만 빌려줘.’

‘뭐?’

‘돈이 없어서, 만 원만…….’

서주영도 있을 텐데 구태여 자신이 사는 원룸까지 찾아온 이유를 몰랐다. 현기증이 나는 것처럼 윤이원이 몸을 웅크렸다. 가식적인 태도라고 생각해 짜증을 내며 지갑에서 만 원짜리를 되는대로 꺼내 던졌다.

몰상식한 사람처럼 돈을 바닥에 던졌는데 이원은 화를 내지 않고 그중 한 장만 집어 들었다. 심지어 웃고 있었다.

‘집 근처에 아직 5천 원짜리 정식을 파는 곳이 있어. 찌개도 주고 제육볶음도 주는데, 맛이 꽤 괜찮아. 그거 먹고 싶었거든.’

‘그럼 오천 원만 달라고 하지, 왜 만 원이야?’

기분이 나빴기 때문일까, 이상한 시비를 걸었다. 이원이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기까지 걸어왔거든.’

이원이 사는 집은 분명히 일산이었다. 재연의 원룸은 서울 중심부에 있었고 지하철을 타도 오래 걸릴 거리였다. 걸어서 올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다. 꼭두새벽부터 출발하면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미치지 않고서야 차비 몇 푼을 위해 이 더운 날씨에 고생하며 걸을 이유는 없었다. 하재연은 그게 간악한 자의 거짓말이라고 믿었다.

‘이제 갈 때는 편하게 가고 싶어서.’

바닥에 버려진 다른 돈은 줍지 않은 채 윤이원이 나지막하게 인사했다.

‘고마워, 갚을게.’

‘필요 없어.’

‘그래? 그래도…… 갚아야지.’

꼭 갚겠다며 보는 사람의 마음이 이상할 정도로 상쾌하게 웃었다. 그 얼굴에 마음이 울렁거렸다.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등과, 반팔 티셔츠를 살 돈이 없다고 시위하는 것처럼 팔만 걷어붙인 두꺼운 긴 소매 옷이 거슬려서. 헤어지는 그 마지막 순간의 순간까지도. ……마치 사랑하는 사람처럼 재연을 다정하게 바라보던 한쪽짜리 눈이.

그냥 잘 짜인 영화처럼 구성된 동정심의 일환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재연도 냉정하게 등을 돌렸다.

그날 뒤로 이틀 만에 윤이원의 부고를 받았다. 시신을 태우는 날 와 달라고 주영이 연락을 했다. 윤이원과 마지막으로 연락했던 사람이라서 서주영이 상주의 자리를 받았지만, 유명무실한 이름이라고 했다. 고아인 데다 그 고아원마저 제 손으로 지워 버린 인간이니 친인척이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심심한데 자리라도 지켜 달라는 전화에 재연은 결국 일을 미루고 봉안당에 딸려 있는 화장장을 찾았다. 윤이원에 대한 어떤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서주영은 유일하게 고아원 동기 중에서는 민폐 없던 괜찮은 형이었던지라 그에게 예의를 보이는 것뿐이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그가 가는 길은 초라했다. 관도 수의도, 안치되는 장소까지 가장 싸구려인 화장이었다. 식이라는 말을 붙이기도 그저 그런, 초라한 마무리였다. 윤이원의 휴대폰에 등록된 몇 명의 사람들에게 문자를 돌려 뒀지만 그 짧은 몇 시간을 위해 윤이원을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술이나 한잔하고 갈래?’

까만 양복을 입고 한참 말없이 서있던 주영이 물었다.

‘그래요.’

어차피 마지막이었다, 예의라도 마저 차리자는 마음으로 재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근처에 있는 허름한 식당에 마주 앉아 국밥을 한 그릇 먹고 소주를 마셨다. 주영은 내일은 회사에 출근해야 할 텐데도 과음을 했다.

만취한 그가 이마를 감싸고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더니 품 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주었다. 반 접힌 봉투를 흔들며 주영이 꼬부라진 발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거…… 네 거다.’

의아한 마음으로 편지 봉투를 받아 열어보았다. 꾸깃꾸깃 손자국이 잔뜩 난 봉투 안에는 천 원짜리 몇 장과 동전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10원짜리부터 500원짜리까지 마구 뒤섞인 돈을 하나씩 세었다. 다 합쳐서 꼭 만 원이었다. 쇠 냄새가 나는 동전 덩어리를 꾹 쥐었다. 아가리를 억지로 벌리고 무거운 납을 집어넣은 기분이었다.

‘그놈이 남겨 뒀더라. 너한테 빌린 돈이라고.’

‘…….’

인간 같지도 않은 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보여 준 마지막 얼굴은 매우 인간적으로 보여서, 그래서 혼동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재연은 고집을 부렸다. 그 비참할 정도로 인간적이던 윤이원의 표정이 싫다고.

‘진짜 아무도 안 오는구만. 다 연락은 돌렸는데…….’

주영이 씁쓸하게 웃는다. 늘 농담하길 좋아하던 사람의 얼굴이 침울했다.

‘형은 왜 그렇게 그 인간을 좋아해요?’

서주영은 질문을 듣고는 잠깐 가게 입구에서 보이는 분향소 표지판을 쳐다보았다. 재연도 그것을 따라 보며 윤이원을 기억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시든 얼굴은 빛이 없었다. 굳은 입매와 눈가는 예전처럼 고집스러웠지만 그것에 애정이 생길 리가 만무했다. 어릴 때는 정말로 천사 같았지만 지금은 오래된 악마의 형상처럼 보였다.

‘살인범이잖아요. 그것도 그 어린 나이에…….’

잔 안에 담긴 소주가 출렁거렸다. 주영이 부추전을 입 안에 쑤셔 넣고 씹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였지, 고등학생 때 면회를 갔다가 원이한테 물어봤다. 왜 그랬느냐고. 그 사람을 왜 죽이고 싶었냐고.’

‘…….’

‘사이코패스인 줄 알았지.’

그렇다. 우리는 모두 그가 사이코패스라 입을 모아 욕했다. 병적으로 그를 미워했다.

‘꿈을 꿨단다.’

‘……꿈?’

몇 번 보지 않은 만남에서 왜 이렇게 친한 척 구냐고 물어본 적 있다. 꿈에서, 하고 말을 꺼내다 말고 웃던 이원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일부러 꾸며 가식을 떠는 거라 여겼던 미소가 이제는 애틋하게 다가왔다. 내뱉었던 언어는 날카로운 바늘로 변해 웃는 얼굴을 찔렀다.

‘원장 선생님이 애들을 입양 보내는 척, 인신매매하는 꿈을 꿨대.’

‘뭐라고요?’

막장 드라마보다 못한 몽상에 헛웃음이 나왔다. 숨기지 않고 실소하자 주영도 피식 웃으면서 젓가락을 놓았다.

‘성인이 되고도 아무도 몰랐는데, 너까지 원장 선생님 때문에 죽었다는 거야. 그 사실을 알자마자 자기도 살해당하는…… 그런 악몽을 꾸고 나니까 눈을 뜨자마자 죽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더라.’

‘정말, 그 정도면 정신병 아닙니까.’

우스운 이야기다. 무슨 꿈이 그렇게 생생할 수 있다고, 열다섯 먹은 아이가 성인 남자를 그렇게 잔인하게 찢어 죽이고 불을 질렀을까. 허황된 이야기다. 어쩌면 자신의 행동을 변론하기 위한 답일지도 모른다.

재연의 날 선 대꾸에 주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똑같이 대답했어.’

‘…….’

‘그랬더니 자기도 정신병이 맞다고 이야기하더라.’

‘뭐예요, 그게.’

‘그러게나 말이다, 이미 죽은 애한테 물어봐서 어디 쓰겠어.’

윤이원의 사인은 자살이었다. 사체가 있던 곳은 인적이 뜸하다고도 할 수 있는 외곽이었지만 여름이라 금방 썩어 악취가 나는 덕분에 금방 발견했다고 들었다. 문제는 시신의 오른쪽 안구가 적출된 상태라고 들었다. 붕대를 감고 있었던 이유를 그렇게 알았다. 눈이 어디에 쓰였는지, 어떻게 팔았는지 한바탕 경찰 수사가 일어났었다. 재연과 주영은 주변인으로 한두 차례 조사를 받았지만 장기밀매와는 관련도 없는 사람들이라 역시나 무사히 풀려났다.

그의 통장에 입금된, 안구의 가격으로 보이는 큰돈은 몇 차례 푼돈으로 나뉘어 밀린 월세를 내고 빚을 갚는 데 쓰인 뒤였다. 대포 통장에서 들어온 돈이라 출처는 미지였고, 워낙 연고 없는 인간이니 수사는 하는 둥 마는 둥 하다 그대로 종결될 가능성이 높았다.

통장에 들어 있던 마지막 몇십만 원도 장례를 위한 비용으로 주영이 마저 사용했다고 한다. 최대한 간결하게 끝내고 나니 돈이 딱 맞아떨어져 통장에 10원짜리 하나도 남지 않았다고, 윤이원이 사실 천재였던 거 아닐까, 하고 주영이 실없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하재연은 윤이원이란 인간 자체가 정말로 종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고작 만 원을 빌리기 위해 먼 길을 걸어왔던 남자. 꿈이라는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사람의 배 속을 온통 꺼내 피로 뒤범벅이 되었던 윤이원. 그의 우울한 얼굴이 오래되어 아득했다.

‘피곤하다.’

‘이제 슬슬 갈까요.’

‘그래야겠지. 그런데 왜 이렇게 발이 안 떨어질까.’

남아 있는 술을 빙글빙글 돌리며 주영이 마음을 홀렸다. 평소에는 잘만 하는 시답잖은 소리 하나 없이 묵묵하다. 정말로 마음이 안 좋은 모양이었다.

‘……형은 그 사람 좋아했어요?’

‘불쌍하지 않냐? 불쌍하잖아, 마지막까지…….’

걘 정말 괜찮은 애였잖아? 이미 지나간 과거를 언급한 주영이 완전히 취했는지 식탁 위에 엎어졌다.

빈 소주병을 옆 테이블로 옮겨 놓고 재연은 다시 꾸깃꾸깃한 만 원어치의 돈을 꺼내 보았다. 쏟아지는 동전에 손톱 크기 만큼 작게 접은 딱지가 섞여 있다는 걸 그제야 발견했다. 얼마나 작게 접었는지 애를 썼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잠깐 망설이다 종이를 살살 펼쳤다.

연필로 써서 번지고 얼룩진 종이 위에는 윤이원이 직접 적은 듯 보이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생을 반복하니, 인연은 더 짙어지더라.

해를 거듭하니, 사랑이 더 깊어지더라.

그러니 아무것도 버리지 마, 아무것도 포기하지 마.

의문스러운 내용이었다. 그러나 재연은 몇 줄의 글귀를 읽는 순간 자신이 언젠가 아주 먼 옛날 같은 돌아오지 않을 세상에서 그를 사랑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이상하게도 살인의 동기라는 그 꿈처럼 허황한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윤이원이 장미꽃처럼 어여쁘게 뺨을 물들이며 손을 잡았다. 재연아, 좋아해. 그가 먼저 해 주는 고백은 아주 귀한 것이었다. 재연은 유쾌하게 대답했다. 나도 좋아해요.

그럴 리가 없는데, 재연도 이원도 지금보다도 더 자란 성인의 모습이었다. 또한 이원이 이를 악물고 고통스럽게 머리를 박았다. 자신이 멍청해서,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죽였다고 괴로워했다. 이상한 기억이었다.

재연은 이원의 부고를 들은 뒤 처음으로 울었다. 겨우 열다섯이었던, 예전의 천사 같은 그의 모습을 생각하며 오래 울었다. 오래, 그 쪽지가 눅눅하고 짙게 젖어 들 때까지 울다 지쳤을 때, 사람도 다 빠져나가 한적하고 고요한 식당에서 거스러미처럼 우울한 목소리가 깔렸다.

「힘 빠져.」

환청이라고 생각했다.

「운과 복록을 전부 지불하고 시간을 돌렸으면서도, 말 한마디 못 하고 죽어 버리다니.」

시무룩한 목소리가 연신 중얼거린다.

「나는 뭘 기대했던 거지.」

한숨을 쉬는 목소리가 너무 생생해서 재연은 무심코 대꾸했다.

‘시간을 돌렸다고?’

「내 목소리가 들리나?」

허공에 갑자기 펄럭거리는 넓은 옷자락이 나타났다. 소주를 둘이서 여섯 병도 넘게 마셨다. 재연은 취해서 생생한 환각을 보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 ‘신’이라는 존재가 아주 흥미로운 제의만 하지 않았다면 환각을 무시하고 이원의 삶을 정신병자의 씁쓸한 결말이라고 치부했을 것이다. 남은 인생 역시도 모난 곳 없이 순탄하게 굴러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실체는 없을지언정 진짜였다.

「뭐야, 완전히 불량품은 아니었나 보군. 들을 수 있다니.」

신은 기뻤다. 이 교묘한 세상에서 원인이자 결과물인 두 명이 한꺼번에 강한 염원으로 자신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놀라웠다.

그리고 기대했다. 이번 인간들은 자신이 기다리던 무언가를 이루어 줄 수도 있을 거라 믿고 싶어졌다. 신은 인간을 제외한 모든 것에 너그러웠으니 이미 인간의 일반적인 굴레에서 벗어난 저 두 명의 것들에게도 너그러울 수 있었다.

그는 모든 ‘진실’에 대해 이야기했다. 진실은 하재연이 가지고 있던 좁지만 온전한 세상을 왕창 뒤흔들었다.

‘그러면, 나 때문에 그가 이런 선택을 했다고?’

「아니, 그건 아니지.」

목소리는 이번에는 아주 심술궂게 변해 대답했다.

「그저 네 업보이자, 네 원흉이지.」

귓속으로 암전된 과거와 우주가 파고들었다.

「겨우 그때의 이야기지. 별것 아닌 이야기지.」

그가 남긴 만 원. 이제는 편하게 가고 싶다는 어설픈 바람. 아무도 없이 홀로 먹었을 5천 원짜리 정식.

이원에게 주었던 마지막 싸구려 동정을 만회하고 싶었다. 후회하느냐, 물어본다면 수천 번이고 그렇다 대답하고 싶었다.

‘……윤이원.’

새파랗게 어린 나이로도 자신에게 다가온 성공의 지표는 빠르게 보였다. 그럴듯한 옷차림과 외모, 좋은 성적표와 돈 많은 부모. 사람들은 빠르게 다가왔다.

대외적으로 소문난 것만 보고 가치를 판단해 자신들과 친하게 지내길 강요했다. 윤이원도 그런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 숨길 수 없는 범죄자의 낙인, 언행에서 느껴지는 빈티와 구차함이 그렇게 단정 짓게 했다.

그가 옛날 어린 자신을 달래며 걸었던 것은 전부 과거의 일이다. 어릴 때의 은혜는 이미 더러워졌다고만 생각했다.

‘윤이원. 내 사랑.’

이원이 과거의 은혜에 대해 물질적인 보상을 요구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는 걸, 서툴러 몰랐다. 오로지 그는 자신이 지켜 낸 사랑의 흔적에 겨웠던 것뿐이었다. 살아 있는 자신을 보고 행복해했을 뿐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순해 빠지고 멍청할 수가 있었을까.

후회한다, 후회한다, 후회한다.

윤이원이 고통스러운 몇 개월 끝에 허무하게 죽고 난 뒤에 그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게 되자 수천 번 지옥 길을 걷는 것처럼 후회했다. 지옥 같은 진실을 마주쳤을 때 신은 부추기듯 물었다.

시간을 되돌리겠냐고. 쌓아 둔 모든 복록을 지불하고 지옥 불을 있는 힘껏 견뎌서 다시 사랑을 시작하겠냐고.

신이 요구한 첫 번째 대가는 윤이원의 기억이었다. 그리고 재연은 추가적인 계약을 요구했다. 계약을 통해 신은 이원의 기억을 지웠다. 그가 재연을 사랑했던 감정을 축소하고, 그가 재연을 마지막까지도 사랑했지만 보답받지 못하고 허무하게 생을 끝냈던 기억도 지웠다. 더는 이원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고 해도 무리 없을 정도로 교묘하게 정제된 기억을 집어넣고, 둘의 관계를 뒤바꿔 버렸다.

보상받지 못할 행위에 더 괴로워도, 더 비참하더라도 살아 보겠냐고 신이 또 한 번 물었다.

물론이다. 감내할 수 있었다. 시공 속에서 무너져 내리는 망각의 파편과 지식을 재연은 모조리 씹어 삼켰다. 가시 돋친 기억이었다. 오래된 사랑의 추억이었다.

형이 내 손을 잡고 걸었죠.

희생에 후회는 없을 것이었다. 윤이원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은 모든 걸 버리고 침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도, 더 많은 것을 계속해서 지불해야 한다고 말하면 기꺼이 내 버렸다. 이원의 진심 따윈 외면하고 떠나보냈던 만큼, 배의 배로 노력하여 지켜 낼 것이다. 그것이 하재연의 선택이었다.

이원이 버리지 말라 호소했음에도 불구하고 버려서 얻어 낸 마지막 기회였다.

형은 나를 살려 줬는데, 나는 형을 죽였네요.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재연은 기다리고 기다렸다. 그를 다시 만나면 무릎을 꿇고 빌고 싶었다. 이원이 받았던 고통을 조금도 헤아려 주지 못한 자신을, 금수만도 못 한 놈이라고 욕해도 좋았다. 막상 다시 만났을 때 진짜로 살아 움직이는 이원을 보고는 감동했다. 사랑한다고, 좋아한다고, 미안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먼저 해 줄 수가 없어 속상했다. 아니다, 억장이 무너졌다.

윤이원은 재연을 무서워했다. 그로 인해 자신이 두 번이나 시간을 거스르는 끔찍한 업을 졌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피했다. 그와 멀어질 때마다 그 역시도 과거에 자신과 똑같이 비참한 기분을 느꼈을 거라는 생각에 괴로웠다.

이미 인과 관계가 너무 엉켜 버려 이원이 제 발로 불구덩이에 뛰어 들어가는 걸 보고도 막을 수 없었다. 대신 다치고, 대신 힘들어하고, 대신 초조해하기로 하자.

대신 고통받아도 이원이 느끼는 죄책감은 일시적. 그의 액막이로 살아도 여전히 재연에게 거부감을 가지고 뒷걸음질 치던 불신이 섞인 눈동자. 위조된 사랑.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재연은 정말로 괜찮았다. 고통스러운 삶을 또다시 반복하게 만든 건 자신이다.

그런데도 먼저 사귀자고 말해 주었다. 키스도 해 주었다. 안게 해 주었다. 화를 내면 쩔쩔거리고, 자신이 죽여 버린 과거의 초췌한 안색보다 다양한 표정을 지었다. 충분하다. 재연은 노력했고, 노력할 것이다. 오랫동안 시간의 수면 속에 잠겨 과거 모든 기억을 꺼내 흐트러트리고, 찾아 이룰 것이다. 윤이원이 업을 벗어 던지고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두발짐승은 거두지 말았어야지, 형…….”

재연이 품에 안긴 이원의 등을 더듬었다. 그의 날갯죽지에는 흉이 내려앉아 있었다. 날개가 타 버린 것 같은 기이한 흉이었다. 우습게도 이원이 회귀한 흔적은 화상 흉터로 변해 남아 있었다. 고아원 화마의 결과물이 내린 짙은 기억이었겠지.

그것 또한 우리의 죄였다. 몇 번이나 생을 반복해 가지게 된 두터운 인연.

인연은 거듭할수록 짙어졌다. 사랑은 해를 거듭할수록 깊어졌다.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 버거웠다.

그러니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모든 것을 버리고도 잡으리라. 또 한 번 선택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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