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회고의 시간
하재연이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밤에 만났던 건 확실한데 그 뒤로 흔적이 없었다. 몸도 성치 않을 텐데 세상에서 몰래 감춰지기라도 한 것 같았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귀신들을 온몸에 붙이고 재연이 갈 만한 곳 모두를 뒤져 봤지만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엔지는 무언가 알고 있는 눈치였지만, 재연과의 계약에 걸려 이야기해 줄 수 없다고 했다. 무당을 찾아가 보았지만 그녀는 나를 만나 주지도 않았다. 하재연과 관계된,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을 찾아 애를 썼지만 흔적조차도 만나지 못했다
틈만 나면 재연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때마다 매정한 기계음은 통화가 불가능한 지역에 있다는 안내만 반복해서 떠들었다. 그가 살고 있던 원룸 주인도 재연이 월세를 넣어 줄 때를 제외하곤 따로 연락한 적도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하재연이 다니는 대학교에도 찾아갔었다. 하지만 조교는 재연이 학기를 마치기도 전에 휴학계를 냈다며 도리어 의심스러운 눈으로 내게 누구냐고 추궁을 시작했다. 쏟아지는 질문을 얼버무리며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고 갑갑한 건물 바깥으로 나왔다.
하재연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가 마음이 좋지 않을 때 숨어들 만한 장소도 몰랐고 도대체 누구와 뭘 하며 지냈는지도 몰랐다. 탈력감이 찾아오면서 허무하게 시간이 지나갔다.
재연의 우는 얼굴을 마지막으로 머리 한쪽을 도려낸 것처럼 기억이 썰려 있었다. 혹시 말을 듣지 않고 병원에 간 것 때문에 화를 당했다면. 그 불안감에 잠을 자지 못했다. 창백한 안색에 주영이 걱정 섞인 위로를 몇 마디 했지만, 말처럼 쉽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사이에 재연과 같은 병실을 쓰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아무 생각 없이 안부 인사나 할까 들렀던 당일 오후였다. 너는 뻥튀기 말곤 살 줄 아는 게 없냐 구박을 하면서도 맛있게 드시고 나서 주무시는 것 같더니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 깐깐하고 꼬장꼬장한 말과, 아닌 척 다정한 행동들. 후회가 많아 짙은 삶을 가졌던 사람 한 명이 세상을 영원히 떠났다.
유가족들에게 대신 연락을 해 주고는 한참이나 텅 빈 병실에 앉아 천장만 보았다.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업이 많아서…… 늘 안 좋은 상성을 불러일으키고 있어 할머니에게 영향을 준 게 아닐까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혼자 있으면 괴로웠다. 하지만 누군가와 같이 있는 건 무서웠다. 하재연이 보이지 않는 사이에 죽어 버린 거라면 나도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얼른 이 세상에서 지워져야 고통도 모르고 지옥에 처박혀 버릴 텐데.
“재연아.”
일이 많이도 꼬이게 만든 꼬마 귀신이 살던 놀이터에도 찾아가 보고, 재연이 찾아왔던 공사장 근처도 서성거렸다. 같이 마주 앉아 커피를 마셨던 카페에도 들어갔다. 여전히 하재연은 없었다.
허공에 대고 이름을 불렀다. 마음에 가시가 많아서 귀신들이 때를 놓치지 않고 문란하게 눈앞을 어지럽히며 괴롭혔다.
“너랑 있으면…….”
이상하지, 내가 평범해지는 것 같았는데.
가슴 한쪽이 눈물로 첨벙거리는 것 같았다.
하재연과 같이 있으면 매일매일 어렵고 무서운 일들이 잔뜩 일어났지만, 싫지는 않았다. 누군가의 뺨을 치고 소리를 질러도 괜찮을 것 같았다. 세상을 벗어난 기분이었다.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좀 더 그가 원하는 걸 들어주고 싶었다. 여태껏 늘 재연의 말을 듣지 않아 사고를 치고, 다치게 했으니까 좋아하는 키스라면 원하는 만큼 해 주고 싶었다. 섹스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혼자서 생각했었다. 처음 했던 관계는 제정신이 아니었어도 끔찍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으니까, 이제는 더 좋을 거라고…….
이게 무슨 생각이람. 병신이 된 기분이라 혼자 벽을 보고 웃었다. 괴롭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등을 구부린 채 시간을 때웠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었고 목이 마르면 물을 마셨다. 몸에서 냄새가 나면 씻었고 졸리면 잤다. 해가 언제 뜨고, 밤이 언제 오는지 관심도 없이 살다 세 번째 살인 사건이 일어나면서 정신을 차렸다.
세상은 관용적이지 않았다. 개인의 상황을 봐줄 리가 없다. 허름해진 마음을 파고 들어온 타인이 분노로 오열하며 목을 졸랐다. 저 사람들이 죽고, 울고, 저주하는 이유는 오로지 내게 있었다.
피해자들이 무고하게 살해당한 이유는 옛날에 소년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며 다들 침을 뱉었다. 집 앞에 오물과 쓰레기가 버려져 있는 건 예삿일이었다. 여름이라 쪄 죽을 것 같은 날씨에도 창문을 열 수 없었다. 창문을 여는 순간 바로 고함과 쓰레기가 창틀을 넘어 바닥에 떨어졌다.
세 번째로 죽은 학생은 열다섯이었다. 친구들과 피시방에 갔다가 헤어져 집에 돌아오는 길에 살해당했다. 이번에도 살해 방법은 똑같았고, 죽인 뒤에는 사체를 불에 태워 유기했다. 시커멓게 탄, 미래가 한참이나 남아 있는 아들의 시체를 본 부모의 마음은 멀쩡했을까.
알고 있다. 자식이 죽는 것을 보는 부모의 마음과 부모가 돌아가시는 걸 본 자식의 마음은 다르다는 것을. 이건 더 간악한 죄였다. 사람을 평생 비참하게 만들면서 살인범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잠에서 깨어난 열다섯의 밤, 흥분과 욕망에 사로잡혀 저질렀던 죄는 아직도 야금야금 발목의 살점을 물어뜯으면서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집주인이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대뜸 이사를 해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계약 기간이 1년도 넘게 남아 있었지만, 아무 말 없이 짐을 전부 뺐다.
주영이 다른 집을 구해 주겠다고 말했지만 사양했다. 회사 일로도 바쁜 사람을 안 좋은 일로 계속 불러내기 힘들었다. 하재연이 남겨 둔 집으로 가지도 않았다. 그곳이 어디든 잃어버린 것을 기다릴 정도로 성실한 마음은 가지지 못했다.
여전히 마지막 밤이 텅 비어 버린 채로 재연에게 사랑도 증오도 아닌 감정을 느끼며 살았다.
새로 구한 집은 전에 살던 집에서 몇 구역 떨어져 있었지만 비슷한 수준의 반지하였다. 몇 개 안 되는 짐을 풀고, 저번보다 조금 더 좁아진 곳에 웅크리고 있다 일어나 가스 불을 켰다. 시간은 싱겁다. 간을 맞추지 못해 밍밍한 미역국을 꾸역꾸역 삼기며 허무한 스물여덟 번째 생일을 축하했다.
한 해 중 가장 뜨거운 8월이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봄꽃이 풋풋하게 피어날 때 세상으로 겨우 나왔는데, 세상은 단맛을 조금 보여 주려다 말기만 했다. 잔인하다. 입은 여전히 단맛을 찾으려고 아이처럼 어리광을 부린다. 엄한 부모가 되지 못해 미안할 따름이었다.
***
강아지가 앙앙 울면서 바지 밑단을 잡아 뜯으며 침질을 한다. 오랜만에 보는 엔지가 강아지를 으샤, 안아 내 무릎 위에 올려 주며 차를 내주었다. 차가운 음료수를 입에 넣고 나서야 이게 오늘 처음 위에 집어넣는 음식물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원 씨, 안색이 안 좋아. 괜찮아?”
“아니요.”
빈말로도 괜찮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엔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손을 잡아 왔다. 가만히 부대껴 오는 여성의 부드럽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느끼다가 무심코 하재연의 손은 이것보다 단단하고 뜨거웠다는 생각을 해 버려 입술을 깨물었다.
“살도 많이 빠졌어. 재연 씨 기다리는 건 좋지만, 자기 몸도 챙겨야지.”
“기다리고 있지 않아요.”
부드러운 털을 가진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내 허벅지 위에 앞발을 꾹꾹 누른다. 귀여운 말티즈를 의무적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손가락 사이에 감기는 털은 포근하고 따뜻했다.
“제가 하재연을 왜 기다리죠?”
“이원 씨…….”
“솔직히, 이건 기다리는 게 아니잖아요.”
살아 있다는 것만 알아도 이렇게까지 죄책감에 시달리지는 않았을 거다. 어떤 괴담에 등장할 것 같은 현상이 그를 집어삼켰을지 모르는데, 멀쩡하게 생활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것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안다. 액막이가 하재연이라면 규칙이라는 것들은 머리를 써서 그를 먼저 죽이는 게 현실적이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르지.
이런 상태이니 카페에 출근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엔지가 재연의 성의를 이렇게 무시할 거냐고 설득하지만 않았어도 집에만 처박혀 있었을 것이다. 아주 가끔 일이 들어왔다고 연락이 올 때만 겨우 외출했다. 어차피 자주 바깥으로 나가도 여러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사흘에 한 번씩 내 행동반경에 대해 경찰에 보고를 올렸다. 이사한 뒤로 수상한 그놈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경찰은 살인마가 언제 다시 살인을 시작할지 모른다는 추측으로 매번 순찰을 돌고 있었다.
사회적으로는 대대적인 지탄이 일어났다. 보복 살인을 불특정 다수가 당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대상자의 신상을 공개해야 한다는 말도 많았다. 피해자의 유가족이나 그 주변에서 말이 새어 나갔는지 내 이름이 인터넷에 밝혀지는 것도 금방이었다.
내가 옛날 소규모 사설 고아원의 방화범이자 살인자라는 것도 빠르게 들통났다. 사회에서는 외쳤다. 저런 놈의 신변을 보호해 줄 필요가 어디 있냐고. 세 명의 피해자 역시 내가 죽인 거라고. 전과 1범이 아니라, 전과 4범의 살인자나 마찬가지라 진창길처럼 끈덕지게 욕을 해댔다. 너무 어릴 때 저지른 일이라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드물다는 게 그나마…… 정말로 그나마, 다행이었다.
강아지가 다시 멍멍 짖는다. 엔지가 건네주는 거울을 받아 책상에 내려놓고 칼과 방울을 빈손에 쥐었다.
이렇게 작은 미물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데, 나는 그러지 못한다. 여전히 살아야 하는 이유는 희박했다. 잘 살아야 한다는 이유는 더욱 부족했다.
아. 하재연이 있을 때는…… 그나마 나았지.
힘들다.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입으로 말해 버린 모양이다. 엔지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이원 씨, 힘들면 내가 할까?”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
왜 업을 덜어 내는 일을 해야 하지. 어차피 계속해서 원점으로 돌아가기만 할 뿐인데. 죽지도 살지도 못해서 이리저리 끌려다니던, 출소 후의 막된 삶과 지금이 뭐가 다르지.
이럴 거라면 나타나지도 말지.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해 줄 수 있는 것도 없는 척 말이라도 말지. 자신이 모든 것을 구원해 줄 거라고 말이라도 하지 말지.
악을 쓰는 것처럼 손바닥을 칼로 긁었다. 엔지가 너무 험하게 찔렀다고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기다리지 않고 방울을 입에 물었다.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울리자 강아지가 무릎 위에서 길게 기지개를 켰다. 눈을 질끈 감았다.
왜 나는 그래도 네가 보고 싶지 않을 때까지 보고 싶은 걸까.*
말도 못 하고 혀를 내밀어 학학대며 깡충거리던 강아지를 보내 주고 나니 피곤함으로 곤죽이 되어 늘어졌다. 한 시간이었나, 두 시간쯤 죽치고 앉아 쉬는 동안 엔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엔지는 일어나기 힘든 일이 갑자기 벌어지면 기분이 어떨 거 같아요?”
“응?”
엔지가 주먹을 뺨에 가져다 대며 갸웃했다. 그 모습이 귀엽다. 최근 여름이라고 짧게 자른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고르게 빗겨 주자 기쁘게 웃는다.
“신기한 일이 짠, 하고 펼쳐지는데 충격적인 거죠.”
“나는 늘 이런 일을 해서 그런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걸.”
후후, 엔지가 웃으면서 프릴이 달린 앞치마를 둘렀다. 자연스럽게 등 뒤에 늘어진 리본을 제대로 묶어 주었다.
“뭔가…… 중요한 걸 잊어버린 기분이라서요. 요즘은 늘 그래요.”
“어떤 걸 잊어버린 것 같은데?”
“그냥요. 웬디가 피터 팬을 만났던 걸 잊어버린 것 같은 기분?”
“이원 씨, 되게 꿈같은 이야기 잘하는 거 알아? 안 그렇게 생겨선.”
엔지가 하나 남은 컵케이크 위에 생크림을 동그랗게 짜 올리며 말했다.
“동화 같은 거 좋아하지 않잖아. 그런데 그런 이야기 하다니, 뭔가 귀여워.”
“귀엽나요.”
“응.”
어색한 칭찬에 겨우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엔지는 안도 반, 걱정 반인 얼굴로 내 손등을 토닥거렸다.
잘 먹고 다니라며 한 아름 챙겨 주는 음식을 받아 들고 카페 문을 나섰다. 뉘엿뉘엿 이제야 노을이 지고 있었다. 한여름이 중앙에 오면서 햇살의 기운이 강해져 눈이 따가울 정도였다.
여름에 태어났기 때문일까. 나는 여름을 좋아했다. 남들이 다 더워 죽겠다고 짜증을 낼 때도 살갗을 타고 흐르는 강렬한 열기가 좋았다.
체온이 높은 사람을 좋아했고, 열기에 익혀지는 지상의 열대야도 좋아했다.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을 정도였는데도 불구하고 올해 여름은 싫다.
그런 사람이 뭐라고…….
죽어도 후회는 없었다. 내가 먼저 삶을 끊어 내기 싫은 것뿐이지, 교통사고도, 불의의 사고도, 심지어 살인을 당해도 고맙기만 할 것 같았다.
나를 저주하던 그 남자가 하루빨리 나타나 칼로 배 속을 후벼 파 주면 좋을 텐데. 종종 죽임당하는 아찔한 환각에 머리를 짚었다. 아파도 기억에 남아 있는 겨우 그 정도겠지.
“야, 윤이원.”
어디선가 서주영이 불쑥 나타나 어깨를 쳤다. 시종일관 유쾌한 말투를 가진 친구를 만나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힘없이 비틀거렸더니 주영이 혀를 쯧쯧 찼다.
“아이고, 내 새끼를 누가 이렇게 속상하게 하냐.”
“닥쳐.”
“그냥 이 형님의 미모와 매력으로 만족하면 어때?”
“꺼져.”
“이때까지 너 뒷바라지해 줬더니 이제 와서 버리겠다 이거야? 너무한다, 정말.”
언제인가와 똑같은 말을 그대로 반복하며 주영이 서운한 척 흑흑 울었다. 저 푼수 같은 인간.
“하재연은 아직 연락 없어?”
“응.”
“사귀자마자 버리다니, 그놈도 상당히 윤이원 같은 놈일세.”
가만히 듣고 있으려니 어쩐지 기분 나쁜 말을 한다.
“너 지금 내 욕했냐.”
“뭐? 아니야. 원래 커플은 닮는 거라고.”
“이 개새끼.”
헛소리를 잔뜩 하는 주영의 등을 후려치고 앞서 걸어갔다. 아프다고 엄살을 떠는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재연에 대한 생각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한 달, 한 달을 넘게 기다리고 있다. 살아 있다면 살아 있다는 말 한마디라도 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의 존재가 아주 부피가 컸다는 걸 느끼고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 더운 체온을 느낄 수 있게 해 줬으면 좋겠다.
소주를 어느 정도 이상으로 마시자 가만히 숨만 쉬어도 코끝이 찌르르하면서 따가웠다. 취했을 때는 달달한 걸 먹어야 한다며 주영이 편의점에 가서 먹을 걸 사 왔다. 노란 빨대 끝이 넓은 입구를 한참 휘적거리다가 겨우 밀봉된 막을 뚫고 들어갔다. 달달한 향에 알코올 기운이 조금은 날아가는 것 같다.
바나나맛 우유를 쭉 빨자 주영이 내 앞에서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밀고 낄낄 웃었다. 찰칵찰칵, 촬영음이 목소리보다 더 시끄럽게 터졌다.
“사진을 왜 찍어?”
“귀엽잖아? 스물여덟 먹어서 바나나 우유에 빨대 꽂아 마시는 윤이원.”
“이런 씨발……. 사 준 건 너잖아.”
“다 노리고 사 준 거지.”
주영이 술에 만취한 사람 특유의 풀린 눈으로 멜론 맛 아이스크림 껍질을 벗겨 한 입 먹었다.
한참 뒤적거린 안주와 한 줄로 쭉 예쁘게 세워 둔 소주병을 하나씩 세더니 주영이 테이블 위에 늘어져 아흐흑 하고 우는 시늉을 했다. 옆 테이블에서 계속 눈이 마주치던 아가씨들이 몸을 움찔거렸다. 부끄럽게 공개된 공간에서 술주정으로 민폐를 부리는 놈을 한 대 후려쳤다. 시원한 소리가 났다.
서주영은 얻어맞은 뺨을 문지르다가 먹던 아이스크림을 입에서 뱉었다. 아, 멀쩡하게 생긴 놈이 왜 이렇게 더러워. 휴지로 뱉은 아이스크림을 치워 주고 다시 소주를 시켰다. 냉장고에서 술을 한 병 꺼내 오던 종업원이 만신창이가 된 테이블을 보고는 은근슬쩍 물었다.
“손님, 대리 불러 드릴까요?”
“안 취했는데요.”
“맞아! 나 안 취했어!”
서주영이 취한 사람 특유의 멘트를 치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속이 울렁거린다고 다시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종업원이 만취하셨는데요, 하는 얼굴을 숨기지 않고 어색하게 웃었다.
“제가 알아서 챙길게요.”
저놈의 주량이 저질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만취한 사람을 어떻게 집으로 옮길지도 미리 다 준비해 뒀다. 술을 마시기 전에 미리 받아 둔 주영의 집 주소와 차 키와 현관 비밀번호가 잘 적혀 있는 휴대폰 메모를 한 번 확인하고는 습관처럼 문자함을 열었다. 아무런 답장도 없는 쓸쓸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고 영감이 말했다. 바깥은 나를 받아 주지 않을 거라고. 어쩌면 고 영감 역시 오랫동안 더러운 일을 한 연륜으로 알아봤을지 모른다. 나 같은 인간은 평범해지지 못할 거라 생각했겠지.
교도소에서는 어떻게 살았더라. 정해진 일과대로 움직이는 게 오히려 지금보다 더 쉬웠다. 잠을 자라고 하면 얼른 자고, 일어나라고 하면 일어나고, 밥을 줄 때 먹었다.
범죄자들이 자기보다 약한 수감자를 괴롭히는 수법은 교묘했기 때문에 잠을 재우지 않는 폭력이 빈번했다. 앉기만 해도 죽여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아, 벽 모퉁이에 기대서서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뜬눈으로 밤을 날린 적도 많았다.
멀겋고 맛없는 국과 밥도 괜찮았다. 거기 일부러 벌레를 빠트린 다음 먹으라고 접시에 대가리를 처박아도 기꺼이 입을 벌렸다.
벽돌로 머리를 내려치려고 했던 놈도 있었고, 뜻대로 하지 않는다고 목을 조르다가 독방에 끌려간 놈들도 많았다.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내 입에 쑤셔 넣으며 자위하던 괴팍한 새끼들도 많았지. 그런 놈들이 주변에 들끓을 때가 숨 쉬기는 더 쉬웠던 것 같다.
타인을 괴롭히고 윗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만 살아가는 놈들을 보면 나는 다르다고, 뜻과 정의를 조금은 가졌었다 몰래 승리감에 취하기도 했었으니까.
어차피 나를 위한 복수였다는 것을 잊은 채로, 그저 의미 있는 살인이었다고 도취해 잊어버린 죗값을 이제야 치르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죽고 싶을 때마다 벌을 받는다 생각하며 참으려고 노력했는데 미묘하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감으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비난하고 있었고 나는 너무나 억울했다. 입을 벌리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변명하고 싶었지만 커다란 손바닥이 갑자기 입을 틀어막아 말도 못 하고 발버둥만 쳤다.
입을 닥치게 만든 놈은 하재연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그는 낯선 얼굴로 서서 불결한 벌레를 손에 쥐어 잡은 표정으로 더러운 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며 뺨을 세게 쳤다.
아직 제대로 녹이지도 못한 단 과자를 턱을 쥐어 벌리고 강제로 뺏어 갔다. 정말로 너무하다. 너무했다……. 징징 울리는 머리를 잡고 미간을 찌푸렸다. 골이 쪼개질 것처럼 아팠다.
“서주영.”
“어어? 왜?”
“나는 말이야, 내가 살고 싶어서 다 죽였거든.”
코가 따가워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주영이 지저분한 테이블 위를 휴지 뭉텅이로 쭉 쓸어서 닦아 내고 몸을 일으켰다. 흘러내린 술에 젖은 와이셔츠 소매도 걷어 올리고, 얼굴을 빤히 바라봐 준다. 한번 마음먹으면 말을 들어 주기 위해 애를 써 줘서 조금 고마웠다.
단 한 명이었지만, 면회를 와 준 사람이 있어서 교도소의 지옥 같은 삶도 버텨 냈다. 신은 나에게 운과 복록을 전부 써 비참하기만 할 거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사소한 행운이 남아 있어 다행이었다.
“내가 살고 싶어서, 분해서 죽였단 말이야……. 그런데 이상하잖아.”
“윤이원? 무슨 말이야?”
“왜 원인은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지?”
“너 취했냐?”
“결국, 잘 생각해 봐. 내가 그때 죽이지 않았으면 더 많이 죽었을 거잖아. 그런데 왜 나한테만 그래……?”
착한 일을 했다. 희생한 거라고 사실은 우쭐해했다. 그러니 인정받고 싶다는, 우울하고 치졸한 마음이 푹신푹신하게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처음에는 달콤한 빵이 부풀어 오른다고 생각한 게 실은 음식물 쓰레기가 오래되어 가스가 차오른 것이었다.
“망가졌어.”
“…….”
“그래서 영감 밑에서 일을 했어. 이제 사람을 죽이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죽였다니?”
서주영이 눈치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불안함이 언뜻 보이는 얼굴을 보며 힛, 얼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취한 건 주영이 아니라 나인 모양이다. 불안한 마음은 사실 더 커서, 뭐라도 말해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코가 매워 눈물을 찔끔 흘리면서 떠들었다. 금기라는 걸 알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는 지킬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재연의 사정을 봐줄 것도 없다.
“……시체를 갈아서, 사람을 죽…….”
“자자, 거기까지.”
우아한 목소리가 귓가를 부드럽게 스쳤다. 온몸에 소름이 쭉 끼쳤다. 뒤에서 불쑥 나타나 입을 틀어막은 남자의 손목에 매여 있는, 묵직해 보이는 손목시계에서 광택이 흘렀다.
“이러면 곤란한데, 윤이원 씨. 내가 그쪽을 좀 마음에 들어 하긴 했지만 사업 비밀을 흘리고 다니면 죽일 수밖에 없잖아?”
검은 양복을 입은 놈들이 가게로 줄줄이 쏟아져 들어와 일사불란하게 손님들을 내쫓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즐겁게 술이나 마시고 있던 사람들이 위압적인 조폭들의 모습에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짐을 챙겨 허겁지겁 떠나갔다. 알바생들과 사장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상태로 구석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서주영이 술이 다 깬 얼굴로 씨발, 하고 대놓고 욕을 했다. 그 정도로 달갑지 않은 상대였다. 요즘 조용하다 했더니 갑자기 끼어들 줄 몰랐다. 재연도, 엔지도 없는데. 이번에는 또 얼마나 대단한 역풍을 맞을지 기대가 된다.
얼굴을 굳힌 채로 조용히 숨만 쉬자 내 입을 덮고 있는 그의 손이 슬금슬금 올라가 코까지 덮어 버렸다. 숨이 막혀 버둥거리자 주영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저기, 제 친구 좀 놔 주시면 안 될까요.”
“입이 방정이라면 죽여야 못 놀리지 않겠어?”
“…….”
사업상 들통나면 안 될 큰 치부를 떠들려고 했으니 죽일 마음이 든 것도 이해는 된다만,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타이밍도 참 기적 같아라.
점점 더 숨이 막혀 왔다. 억지로 산소를 들이켜 보려 했지만 단단히 틀어쥔 손가락은 조금의 빈틈도 없었다. 이진현은 사람을 죽이는 방법에 익숙한 인간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주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피라도 다 빼앗긴 사람처럼 창백해진 주영의 안색을 지켜보던 남자가 뒤늦게 손을 풀어 줬다.
흐으, 모자란 산소를 허겁지겁 들이켜며 기침을 쏟아 냈다. 갑작스러운 고문에 뒤통수에서 눈 쪽까지 이어지는 두통이 찾아왔다. 눈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주영이 허둥거리며 부축했다.
“이사님은 갑자기 찾아와서 술맛 떨어지게 하시는 게 취미입니까?”
서주영이 간만에 짜증을 냈다.
“취미라니, 겨우 두 번째라고.”
이진현은 주영의 오류를 정정하며 신사인 척 여유롭게 의자에 앉았다. 가게 안에서 쭉 정렬한 채 서 있는 어깨들을 보고 주영이 질렸다는 얼굴로 혼자서 꿍얼꿍얼 욕을 했다. 남자는 관심도 없다는 얼굴로 손을 들었다.
“여기, 술 한 병 주지. 테이블도 정리해 주고.”
사장이 허겁지겁 뛰어와 소주와 소주잔을 내밀었다. 손이 덜덜 떨리는 걸 보니 이 상황에 심장이 쫄아 붙은 모양이다. 미안합니다. 속으로 사과의 말을 읊고는 빈 쟁반 위에 먹다 남은 안주와 쓰레기들 치우는 걸 도와주었다.
알바생은 거의 울먹이면서 무거운 쟁반을 들고 쏜살같이 도망갔다.
벌벌 떨면서 사장이 두 손을 공손하게 모아 메뉴판을 내밀었다. 이 와중에도 영업을 계속하겠다는 용기가 대단하다.
“뭐, 뭘 드릴까요……?”
“치킨.”
“여, 여, 여기는 닭이…….”
곱창집에서 치킨을 찾는 병신이 어디 있지. 서주영도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어이없는 눈으로 이진현을 보았다. 오로지 분위기를 쑥대밭으로 만든 원흉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왜? 소주에는 치킨이잖아?”
맥주겠지. 눈을 찡그리고는 메뉴판을 손으로 밀쳤다.
“여긴 곱창집이라 닭 안 팝니다.”
“그럼 아무거나 줘.”
사장은 울기 직전인 얼굴로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주방으로 달려갔다. 거의 초고속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매운 곱창볶음이 한 상 차려졌다. 호일 위에 수북이 올라간, 기갈나는 맛의 곱창을 쳐다봤다. 어쩐지 처음 시켰던 2인분보다 많아 보인다.
“뭐 해? 먹지.”
밥맛을 떨어트려 놓고는, 나서서 젓가락을 들며 권유하는 바람에 주영과 같이 억지로 젓가락을 들었다. 숯불 맛이 나는 매운 곱창을 씹으며 소주잔을 부딪쳤다. 별로 건배하고 싶지 않은 사람과 앉아 술을 마시니 취하지도 않는다. 주영도 만취해 해롱거리던 얼굴은 날려 버린 채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맛있네. 맛집인가?”
“그냥 굴러다니는 흔한 집이에요.”
또 찾아오면 사장님이 힘들 것 같아 대신 대답해 줬더니 저 벽에 붙어서 울컥하는 표정을 짓는다. 뭐야, 하고 쳐다봤더니 다시 바닥으로 시선을 공손하게 돌리는 모습이 뭔가 참 이상한 기분이었다.
매운 향이 올라오는 청양고추 몇 개를 걷어 내며 불손한 자세로 입을 열었다.
“부탁인데 연락 좀 하고 와 주시면 좋겠습니다.”
“연락을 안 하고 와야 이런 쥐새끼 같은 현장도 잡고 그러지 않겠어?”
방금 전 내 발언을 지적하며 이진현이 부드럽게 웃었다. 웃음 안에 숨겨진 농밀한 살의를 읽고 그냥 입을 다물었다. 저 남자의 사업이 어떤 방식으로 꾸려졌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악연이 이어졌다.
입이 백 개라도 할 말 없는 상황이다. 사고뭉치는 맞네. 자조하면서 양파 하나를 씹는 거로 대꾸를 마쳤다.
“이상하게 윤이원 씨 찾는 건 힘들단 말이야. 결국 서주영 씨를 미행하는 수고까지 하게 만들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생활을 침범당한 주영이 젓가락을 떨어트렸다. 팔자에도 없는 스토킹을 당하다니. 서주영은 정신이 몽롱해 보이는 꼴로 허우적거리다 고개를 떨어트렸다. 미안하다. 허공에 의미 없는 사과를 했다.
이진현의 번호는 전부 차단했다. 집주인의 요구에 허겁지겁 이사까지 했으니, 다른 방도가 없어 서주영의 뒤를 쫓은 것은 어찌 보면 상식적인 일이었다. 주영에게 별다른 말을 해 주지 않은 나도 문제였다.
“자, 윤이원 씨. 나랑 식사 한번 할까?”
정말 싫다. 얼굴을 대놓고 찌푸리자 이진현이 즐거움에 가득 찬 꼴을 하고는 활짝 웃는다. 사람을 엿 먹이기 위해 작정한 모양이다. 절반이라도 상황의 진실을 알고 있는 주영이 눈치를 보다 왈칵 끼어들었다.
“그쪽이 뭔데 제 친구랑 밥을 먹습니까?”
“윤이원 씨랑 사업적인 관계가 조금 있어서 그런데, 서주영 씨가 무슨 상관이지?”
“절대 안 됩니다.”
“왜 안 되는데?”
“하여튼 안 됩니다.”
‘댁이 역신의 후손이라서요’까지 터트리지 못하는 서주영은 술기운 덕에 미묘하게 공포를 잊은 것으로 보였다. 이진현과 내가 붙어 있어 봐야 매우 좋지 않다는 사실은 빼놓고 계속해서 입을 나불나불 떠들어 댄다.
어쩌면 간덩어리는 서주영의 머릿속에 있어서 뇌를 짜부로 만들어 버린 게 아닐까. 그래서 주영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하는 걸지도 모른다. 막으려고 주영에게 손을 뻗는데 남자는 그런가? 하고 고개를 갸웃하더니 폭탄 발언을 던졌다.
“그럼 서주영 씨가 나랑 먹지?”
“네? 제가 왜요?”
질색하는 얼굴로 주영이 두 손을 내저었다. 거의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아, 윤이원 씨랑 밥 못 먹게 했으니 그쪽이 나랑 먹어 줘야겠다고.”
실실 웃으면서 해괴한 논리를 구사하는 이진현을 보고 주영의 얼굴이 굳었다. 이게 아닌데, 나는 호모가 아닌데. 딱 그런 얼굴로 있는 주영이 다시 거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팔이 잡혔다.
“어디 한번 매력 구경 좀 하자고.”
“전 이미 다른 남자가 있습니다.”
“뭐?”
얼굴이 굳었다. 얘는 진짜 미친놈이 아닐까. 이 술주정뱅이를 빨리 보내고 뒷정리를 감당하는 게 낫겠다. 합리적인 생각을 마친 후 손짓으로 알바를 불렀다. 알바가 불행한 얼굴로 주춤거리다 한 발짝 떼는 순간 서주영이 탁자를 내리쳤다. 그러고는 긴장한 얼굴로 웅변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외쳤다.
“제 직장 상사입니다. 엄청난 매……력을 가진 싸……랑스런 분이죠.”
맨 정신이 아닌데도 상사 칭찬은 해 주기 싫었던 모양이다. 한심한 직장인 새끼……. 친구라지만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병신 짓만 골라서 하는 모습을 쳐다보자 주영이 뿌듯한 얼굴로 히히 웃는다. 전혀 웃기지 않았다. 이진현이 다시 사실을 지적했다.
“말투가 좀 이상한데.”
“말투가 이상한 것이 제 매력입니다.”
“그런 것 같아. 그러니까 다음번에 저녁이나 먹어 볼까?”
술에 취한 게 확실해 보이는데 주영이 자연스럽게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확인하는 척하며 지껄였다.
“아, 사장님 호출이 왔군요. 안녕히 가세요. 가는 길에 이원이 좀 데려다주시고요. 제 불쌍한 친구에게 집적거리지 말아 주세요. 혹시라도 저녁은 사 줄 생각 마시고 일용할 양식 사라고 현금으로 주십쇼.”
“…….”
처음으로 저 괴물 같은 남자가 좀 불쌍해졌다. 서주영은 부르지도 않은 대리가 왔다며 술집을 뛰쳐나갔다.
거의 10초 만에 날렵한 몸짓으로 사라진 새끼를 보면서 저게 친구가 맞나, 고민했다. 분명히 이진현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면회를 와 줬던 주영에게 생명의 은인 같은 고마움을 느끼기도 했었는데.
이진현은 활짝 열린 문과 이쪽을 한 번씩 번갈아 보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손을 내밀었다. 정중해 보이는 몸짓과 달리 얼굴은 험악했다.
“일어나. 데려다주지.”
“괜찮습니다.”
“짜증 나게 튕기지 마. 차여서 뭐 하나 죽이고 싶으니까.”
한 번 더 차이면 세상 사람 다 죽이겠군. 아무 말 없이 고이 따라 나가 차에 올라탔다. 분명히 재연과 엔지에게서 경고를 들었으니 이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나는 건 아닐까. 걱정이 산더미처럼 쌓여 우글거렸다. 벌써 아파지는 머리를 쥐고 고민에 빠졌다.
차 실장에게 운전을 맡기고 뒷좌석에서 다리를 꼬고 앉은 남자가 맥주 캔 하나를 땄다. 혼자서 맥주를 마시는 모습이 광고의 한 장면 같다고는 생각했다.
스산할 정도로 나뭇가지 흐트러지는 소리가 차 지붕 위를 뚫고 들어온다. 가시방석에 앉아 그런지 등줄기가 따끔거린다. 애써 마신 술이 아무 소용이 없어졌다.
지금 사는 집 주소를 불러 주자 운전석에 앉은 남자가 말없이 핸들을 돌린다. 내비게이션의 안내 음성을 따라 차는 흐려진 밤의 흐름처럼 천천히 굴러갔다.
당장 목을 다시 졸라 버릴 것 같더니, 이진현은 맥주 한 캔을 다 마실 때까지 아무 말도 없었다. 주유하기 위해 차가 잠깐 멈춰 섰을 때 차창 바깥으로 쓰레기를 건네준 남자가 입술을 떼었다.
“이상하단 말이지.”
“뭐가요?”
“그쪽을 찾으려고 했는데 찾을 수 없더군. 무슨 수를 쓴 거지?”
영문 모를 말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차창에 팔꿈치를 대고 비스듬하게 기댄 남자는 가식적인 웃음을 입가에 겨우 걸쳐 놓고 있었다.
“무슨 말씀을…….”
“우리는 사람을 찾는 데 아주 익숙해.”
“…….”
“당연하지, 돈을 빌리고 그대로 도망가 버리면 곤란하니까. 전국에 눈이 있고 수족처럼 부리는 것들이 잔뜩 있어. 경찰, 검찰 어디든 연줄은 잔뜩 만들어 뒀지.”
더러운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이진현이 조금 더 누그러진 눈을 했다. 여전히 불쾌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윤이원 씨는 못 찾겠더라고. 휴대폰도, 사는 곳도 알았으니 이사를 했다고 해도 어려울 건 없었는데…… 정말 이상하지 뭐야.”
남자의 신체가 이쪽으로 쏟아졌다. 어깨를 누르고 올라타더니 놈은 흥미로운 얼굴을 하면서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이제 내가 서주영 씨한테 미행을 붙여 가며 인내심 있게 기다릴 수밖에 없던 이유를 알겠어?”
“모르겠…… 비키세요.”
무거워. 비싼 외제 차라고 해서 남자 둘이 포개져 누워 있는 게 편안하고 좋을 리가 없었다. 뒤척거리며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는 동안 주유를 끝낸 실장이 다시 운전석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해괴한 꼴을 봤을 텐데도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시동을 켜고 차를 출발시켰다.
“정말 이상하단 말이지……. 죽여 버리는 게 나은가 하면 또 그럴 마음까지는 들지 않는단 말이야.”
“뭐가 이상합니까. 좀 비키세요.”
“말 돌리지 말고 대답해 주면 좋겠는데.”
“저도 모르겠다고요.”
아는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없다. 과거에 대한 기억도 불신하는 마당에 이진현이 죽이겠다고 협박이라도 하며 물어본다고 해서 대답해 줄 수 있을 리가.
이진현의 손이 목덜미에 올라와 앉았다. 힘을 세게 주지도 않았지만, 적당히 갑갑할 정도로만 목을 덮어 요령 좋게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언제든 죽일 수 있다고 보여 주는 것처럼 시위하는 이진현의 눈은 동공이 좁고 가파른 뱀과 같았다. 소름 끼치는 백사의 눈동자가 면전을 뒤덮을 것처럼 훑어 댔다.
“이사님이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흠.”
“저는 외출도 잘 안 하고 있었으니, 못 찾으셨을 수도 있죠.”
핏줄이 불룩하게 올라온 손등을 잡아떼어 내며 반박하자 이진현이 재미없다는 얼굴로 몸을 비켰다.
“좋아, 알아낼 방법은 더 있으니까 이번에는 넘어가도록 할까.”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해야 하나요?”
“필요 없어.”
헤드라이트를 켠 차가 막 터널에 진입했을 때 남자는 이제 생각났다는 것처럼 호들갑스러운 몸짓과 함께 입을 열었다.
“아, 요즘 뉴스를 타던데? 유명인이 되어서 기분이 좋겠어.”
“…….”
13년 전의 화마, 타 버린 고아원과 잔인하게 살해당한 원장, 용의자는 열다섯 살 소년, 그리고 소년에게 원한을 밀어붙이는 연쇄 살인마의 잔인한 행각은 매스컴을 들끓게 했다. 용의 선상에서 배제되었지만 경찰에서 나를 고운 눈길로 봐 줄 리가 없었다. 될 수 있는 대로 외출을 자제해 달라는 경찰의 요청에 따라야 했다. 물론 나는 경찰의 말을 고분고분하게 듣는 사람이 아니었다. 칩거한 대부분의 이유는 하재연의 부재였다.
지금 이 상황도 재연이 있었으면 막아 줬을까. 이진현에게 험한 말을 쏟아 내며 전력으로 그의 존재에 혐오감을 나타내 줬을까.
생각해 보면 하재연이 그럴 이유도 없긴 했다. 만에 하나 기적처럼 재연이 과거의 일을 해결할 방법을 모조리 알고 있다고 해도…… 고운 방법으로 복수를 하지 못했던 행동에 대해 실망하지 않았을 거란 보장도 없었고. 실제로도 얼마 전까지 혐오했다고 했었지.
그렇지만, 사귀자고 했을 때 그렇게 좋아해 줬잖아. 이상하다……. 이상해.
“이사님이 반쯤은 도와주신 거죠.”
“내가?”
“당신과 원장은 관계가 있었으니까요.”
“아하……. 사업 파트너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설마. 나는 그런 피라미 같은 놈을 취급해 주진 않아.”
그럴 거라곤 생각했다. 하지만 이 남자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원장도 그런 식으로 돈을 벌어 살림을 꾸려 나간다는 어이없는 발상을 하지는 않았겠지. 적어도 아이들을, 형제들을 팔아 치워 놓고 잘했다고 박수받고 싶어 하진 않았을 거다.
“하지만 권혁대가 그런 식으로 살해당했다니 의아하긴 했지.”
“……뭐가요?”
“누가 봐도 모방 범죄잖아, 그거.”
이진현의 손가락이 뱃가죽을 일자로 내리그었다.
“열다섯 먹은 애새끼가 인간의 장기를 다 꺼내 들었다고? 그것도 그렇게 깔끔하게 분해를 했다고?”
먹었던 것이 그대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저 멀끔한 얼굴에 토사물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으면 그나마 봐 줄 만하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참 이상해. 그 하재연이라는 친구도 그렇고 말이야, 이쪽 일을 아주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잖아. 마치 권혁대의 범죄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처럼.”
“아닙니다.”
“아니라고 하기엔 권혁대와 아주 닮았잖아, 너.”
이진현은 상대의 정신을 무너트리는 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가장 싫어하는 자와 닮았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그의 혓바닥에는 독이 들어 있었다. 뚝뚝 떨어지는 저 독 냄새로 많은 사람의 시체를 밟고 서서 부와 명예를 누리고 있겠지.
“처음 너에 대한 고 영감의 보고를 받고 생각했지. 아, 이 새끼는 일을 시키면 아주 잘하겠구나. 교도소에서 그렇게 독하게 버텼다니 재밌는 놈이군.”
“전혀요.”
저런 끔찍한 인간에게 좋은 평가를 받아 봤자 기분 좋을 리가 없다.
“죄책감을 느끼는 건가? 설마. 그렇게 생각하지 마.”
“죄책감을 느끼면 안 됩니까?”
“이봐……. 사람을 죽인 자는 죄책감을 느끼지도 못해.”
누가 그걸 허락했지? 이진현이 몸에 바짝 붙어서 정신을 내리쳤다. 옳다. 죄책감을 가질 거였으면 고 영감의 밑에서 그런 일을 하면 안 되는 거였다. 원장을 죽였을 때도 후회하고 참회했어야 했다. 하지 않아서 법정에서 받을 수 있는 만큼의 형벌은 거의 끌어모아 받았다. 판사도 국선 변호사도, 검사와 관계자 모두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도 나는 법정에서 난동을 부리며 또 죽여야 한다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죄책감을 느낄 수 없잖아. 죽었던 건 이쪽인데, 왜 나는 보호받지 못하는지 의문을 느끼지도 못했다. 아주 오래, 꿈과 현실을 분리할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 흐른 뒤에는 이미 교도소 안이었고, 변기에 머리가 처박힌 채 물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또래의 소년들이 나를 향해 살인자라고 이를 보이며 낄낄 웃었다. 바지춤을 까고 모욕적인 자세를 취하게 하며 교도관들의 눈을 피해 개돼지 취급을 했다. 다 비슷하게 타락해 들어온 주제에 나는 홀로 최저와 최악의 감정을 받아 처먹은 오물과 똑같은 취급을 당했다.
인간은 공평하지 않았다. 교도소에서도 권력은 사람에 따라 나뉘어져 있었고, 범죄에 따라 가혹 행위가 결정되었다. 신문에서도 꽤 이름 날렸던 탓일까, 어디서든지 관심거리였다. 다들 장기를 들어내는 행동을 다시 해 보라며 옆구리를 걷어차고 짓밟으며 부모를 죽인 새끼는 육시를 해야 한다며 떠들었다. 원장이 결코 내 부모는 아니었음에도.
“그럼 원장은요?”
“권혁대가 왜?”
“그 사람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게 당연한 겁니까? 그렇다면 저는 다시 그 새끼를 죽일 겁니다.”
차량의 속도가 점점 줄어들었다. 이진현이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것처럼 내리누르듯 기대던 몸에 힘을 조금 뺐다. 얼른 거리를 두고 멀어져 구석에서 몸을 웅크렸다. 여기가 달리는 차 안이 아니라 바깥 공간이었으면 좋겠다. 분리될 수 있도록.
“허락 따윈 필요 없어요. 당신이 할 말도 아니지 않습니까.”
맹금류에게 목숨을 빼앗길까 봐 둥지에서 몸을 웅크린 불쌍한 설치류라도 보는 것처럼 딱한 눈으로 쳐다보던 이진현이 혀를 차며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그만하겠다는 몸짓과는 달리 그의 얼굴은 하얀 얼음이 깔린 것 같았다.
“뭐, 좋아. 실제로 내가 할 말은 아니지.”
“…….”
“집에 도착한 것 같은데, 오늘은 이만 보내 줄까.”
달칵, 자동차의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가만히 이진현의 얼굴을 노려보다 문을 열고 다리를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렸다. 발과 지면이 붙고 나서야 안정감이 찾아왔다. 기습적으로 불쑥 열린 문을 향해 몸을 내민 남자가 내 어깨를 잡아 비틀며 목소리를 울렸다.
“당신 친구에게 고마워해. 기분이 조금이나마 풀리게 만들어 줬으니까.”
두려움 따위 알코올과 함께 저 세상으로 날려 보낸 주영의 변죽 없는 헛소리가 나름대로 마음에 들긴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생각해 봐야 할 거야. 그렇게 입이 가벼운 놈을 사회에 풀어 둘 정도로 나는 관용적인 사람은 아냐.”
남자가 등을 세게 밀며 경고했다. 차에서 내리는 중에 밀리는 바람에 그대로 아스팔트 위에 고꾸라졌지만, 이진현도 수행 중인 차 실장도 신경 쓰지 않았다. 차 문을 닫은 후 창문을 내린 남자는 오히려 웃으며 손을 흔든다. 빠르게 사라지는 차의 꽁무니를 한없이 바라보며 한참을 주저앉아 생각에 빠졌다.
이제 무엇이 잘못되었다든가 어떤 것에 오류가 있다든가 하는 것을 생각하기는 싫었다. 지친다. 누구도 내가 저지른 살인의 동기와 범죄의 이유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다들 결과만 중요하게 생각한다.
어떤 영화에서, 작은 섬 안에서 노예처럼 부림을 당하며 수많은 강간과 폭력을 인내하며 살아온 여자가 있었다. 그러다 소중하게 아끼던 딸이 죽었다. 그녀는 딸의 죽음을 목격하고도 입을 닫아 버린 마을 사람들을 향해 분노해 무자비한 복수를 시작한다. 그녀가 벌인 끔찍한 살인 사건의 전말에 대해 누가 관심을 가질 것인가.(*영화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
아마도 그것이 영화가 아닌 현실이라면 이번에도 경찰은 그녀의 잔인한 수법과 죽인 사람들의 숫자에 대해 조명을 맞출 것이다. 살인의 전말도 밝혀지겠지. 하지만 사람들은 살인자에게 동정이 왜 필요하냐고 떠들 것이다.
세 명의 피해자들이 죽을 이유는 없었지. 하지만, 내가 죽을 이유도 분명히…… 없었다. 27만 원에 팔릴 이유도 없었다.
겨우 몸을 일으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불도 켜지 않아 어두컴컴한 집의 후덥지근한 방에서 웅크리고 벌레처럼 누웠다. 슬금슬금 다가온 여자 귀신 하나가 나와 똑같은 몸짓으로 나란히 옆에 누웠다. 눈이 새파랗게 따라다닌다.
이사를 왔다고 해서 귀신들이 하나도 없는 것은 아니다. 붙어서 따라온 귀신들, 새로 들어온 귀신들. 좁은 방에서 산소를 소비하는 사람은 한 명뿐인데 귀신들이 많은 탓일까, 이상하게도 늘 공기가 희박하다.
숨 쉬기 어려운 방 안에서 이진현이 했던 말도, 주영에게 하려던 말도 잊으려고 애써 노력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 창문을 두들겼다. 늦은 시간에 창문을 두들길 만한 사람은 없다. 설마, 역신이나 살인마? 두 단어가 기습적으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두려운 기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때 잊으려고 노력했지만 잊지도 못했고, 기다리려고 했지만 기다리지도 못하게 만든 사람의 목소리가 느슨하게 울렸다.
“형.”
“…….”
“형, 이거 좀 열어 봐요.”
그렇게나 오래 사람의 애를 태웠던 재연이, 모자를 푹 눌러 쓴 채 창가 근처에 쪼그리고 앉아 나를 부르고 있었다. 정신을 반쯤 놓고 엉금엉금 기어가 잠금장치를 풀려다 말고 움찔했다. 손이 창문을 열어선 안 된다고 반항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열지 않아도 괜찮아요.”
공중에서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을 보던 재연이 낯선 얼굴로 웃었다. 내 이상한 행동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하재연, 너 맞아……?”
“맞아요. 거부 반응이 더 심해진 모양이네…….”
또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며 고개를 홀로 끄덕인 재연이 창문에 자신의 손바닥을 가만히 가져다 대며 붙였다. 애틋하기까지 한 다섯 손가락이 맞붙어 있는 유리창을 바라보기만 했다.
“안 오려고 했는데…… 걱정돼서 안 올 수가 없었어요.”
이진현, 그 남자 만났죠? 재연이 웃는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아니, 역신쯤 만나서 생명의 위협을 받아야만 겨우 나타나 주는 이 사람에게 어떤 말도 해 줄 자신이 없었다.
“미안해요.”
“……도대체 뭐가?”
“기다리게 해서, 말없이 떠나서.”
“나는 너 기다린 적 없어.”
늘 생각한다. 하재연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그의 생사를 걱정하기만 했을 뿐이다. 이제 살아 있다는 걸 알았으니 걱정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그저 네가 밉다.
“형.”
“…….”
“우리 아직 사귀는 거 맞죠?”
웃음이 나왔다. 바보 같을 정도로 힘 빠지는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
“우리가? ……아닌 거 같아.”
거부의 의사를 밝혔는데 재연은 하나도 상처받지 않은 얼굴로 웃었다. 저렇게 웃을 수 있나, 신기할 정도로 산뜻하게.
“윤이원.”
“…….”
“이원이 형.”
“…….”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유리창에 막혀 있어 재연의 손을 잡아 보지도 못했다. 하재연은 문을 열어 달라고 보채지도 않았다. 적당히 가로막혀 있는 이 관계가 가장 알맞다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작별 인사를 한다.
말릴 틈도 없이 훌쩍 일어나 가벼운 발걸음으로 멀어지는 등을 보고서야 후회했다. 가지 말라고, 옆에 있어 달라고 해야만 했다.
문을 열고 손을 잡았어야 했다.
돌아와, 돌아와…….
***
바스락, 다 타 버린 나뭇가지가 발에 밟혔다.
바람에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따가운 눈을 홉뜬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불바다. 불바다였다. 민가 곳곳에서 튀어나온 사람들이 땅을 내려치며 절규하고 있었다. 거대한 가뭄의 뒤를 이은 산불에 민심은 엉망이었다.
산발이 된 긴 머리카락을 모아 그러쥐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먹구름이 낀 하늘에서는 이제야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제물을 꼭 받으셔야만 했을까. 원망을 담아 검은 하늘을 몇 번이고 노려보자 벼락이 훅 하고 떨어져 마을 중간에 있는 오래된 신목을 후려쳤다. 불에 타서 쓰러지는 나무가 지면에 닿는 순간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기억을 확인하기 위해 창문으로 다가갔다. 반쯤 아스팔트에 먹힌 유리창에 드러난 틈으로 손바닥 자국이 정확하게 찍혀 있었다. 고스란히 남은 그 흔적을 보고 나서야 재연이 정말 왔다 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마른세수를 한 번 하고는 화장실에 기어들어 갔다.
씻고 나가 동네에 있는 할인점에서 수박을 한 통 샀다. 무릎 위에 곱게 잘 익은 수박을 올려 두고는 한참 버스를 타고 구불구불 동네를 돌아 서울에 진입했다. 거친 운전에 멀미를 했다는 걸 빼면 원하던 동네에 이상하리만큼 무사히 내릴 수 있었다. 실험이라도 할 겸 버스를 탔는데 무사고로 도착한 걸 보면 역신이든 뭐든 나름대로 합격점을 줄 수 있었다.
스산한 동네에서도 무당의 집은 특히나 티가 났다. 휴가 중이라는 팻말이 걸린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색색의 천을 묶어 둔 나무가 마당 한쪽에 자리 잡고 있고, 그 밑에 있는 평상에는 나뭇잎과 먼지가 수북했다.
이번에도 들어오지 말라고 내칠 줄 알았더니, 뜻밖에 무당은 마루에서부터 버티고 선 채로 마중을 나와 있었다. 오늘도 소복에 곱게 쪽 찐 머리를 하고 뒷짐까지 진 채 매섭게 노려보는 그녀를 이길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멋쩍게 수박을 내밀자 말없이 신당 안으로 들어간다.
마루 위에 수박을 올려 두고는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내려놓고 안으로 따라가자 무당이 궁둥이를 붙이기도 전에 독설로 안부 인사를 대신했다.
“못난 놈, 얼굴만 반쪽이구나.”
“풍채가 참 좋아 보이시네요.”
일부러 반죽 좋게 대답하고는 방석을 깔고 앉았다. 권하지도 않았는데 자리에 앉는다고 무당이 또 뭐라고 구시렁거리며 화를 냈다. 방긋방긋 철없는 사람처럼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이상하게 장군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장군님은요?”
묻자마자 무당의 표정이 대답해 주기 싫다는 것처럼 퉁명스럽게 변했다. 저런 태도를 보이면 꼭 답을 듣고 싶다. 일부러 바짝 다가가자 무당이 기겁하면서 몸을 뒤로 후다닥 피했다. 사람을 역병 취급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마음속으로 상처받았다고 투덜거리는데 그녀가 에이 씨팔, 하고 무당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욕을 하면서 대답했다.
“……멀리 가셨다.”
“네?”
“하재연, 그놈이 부탁한 게 있어서 조금만 그놈 도와 달라 치성드려 보냈다, 왜!”
모시는 신을 그렇게 남한테 막 붙여 줄 수 있는 건가? 들었던 사실이나 일반적 편견과는 전혀 다른 상황인지라 불신에 찌들었다는 걸 숨기지 않고 말했다.
“무당 일은 어떻게 하시게요?”
“휴업이지, 뭐. 고얀 놈.”
어쩐지, 휴가 중이라는 팻말을 괜히 걸어 둘 사람이 아닌데 왜 일을 쉬나 했다. 몸이 아픈 건 아니라고 생각하자 이상하게도 안도의 한숨을 저절로 밀려 나왔다. 무당은 별놈을 다 본다는 얼굴로 쳐다보더니 앞에 놓인 찻물을 혼자 벌컥 들이켰다. 사람이 찾아왔는데 물 한 잔도 안 주는 모습이 이제는 나름대로 정겨웠다.
“보살님은 재연이랑 어떻게 아는 사이세요?”
“…….”
무당이 찻물을 마시다 말고 쿨럭쿨럭 사레들려 기침을 한다. 내 일까지 알고 있을 정도면 꽤 오래전부터 재연과 알고 지냈을 것이다. 가만히 팔짱을 낀 채로 쳐다보자 입을 가리고 기침을 연신 하던 무당이 성질을 버럭 냈다.
“아, 왜 그런 걸 묻고 그래!”
“제 애인이라서요.”
솔직히 사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재연에게 한 대답에 거짓이 섞이진 않았다. 원망이 생겼을지언정, 말 한마디 없이 떠났다 얼굴만 내민 그놈을 내가 얼마나 좋아할 수 있겠는가.
“재연이가 대답해 줄 것 같진 않아요. 하지만 제 일이잖아요. 저라고 입만 벌리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요.”
그런데도 그 애의 마음이 아직 나에게 있다면 무당은 나의 핑계를 받아 줄 것이다. 무당은 가만히 찻주전자에서 다시 차를 한 잔 따르며 추측에 침묵으로 긍정했다.
“지난겨울이었나, 신내림 안 받겠다고 악다구니 쓰고 바나나 잔뜩 먹어 병원에서 생사를 헤매고 있을 때 그놈이 불쑥 나타났다.”
그녀는 무당이 된 지 오래된 사람은 아니었다. 서울 쪽에서 불쑥 나타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으니 아마도 저 말은 사실일 것이다.
“한국에서 보기 드문 거신이 선택한 종이 누구인지 궁금해서 왔다고 하면서 물어보더구나.”
“뭘요?”
“살 건지, 죽을 것인지.”
사실은 저승사자라고 생각했다며, 무당은 농담처럼 무서운 이야기를 하며 짧게 웃었다.
“살아 있길 바랐으나 죽을 운명도 있으니, 죽길 바랐으나 살아 있는 운명이라고 더 기구할 것 없다고 말했었지.”
“…….”
“알레르기가 올라와 호흡도 곤란한 사람을 붙잡고 신내림 받는 것을 도와주었다.”
하재연이 죽을 운명이라고. 무당의 서글픈 인생보다 그쪽에 신경이 더 쏠렸다. 살길 바랐는데 죽을 운명이라. 그건 어떻게 보면 내 삶과도 닮아 있었다.
원장이 배신하지 않았으면, 그렇게 잔인하게 살해당하지 않았으면 나는 기억에서처럼 잔잔하고 소박한 삶을 살았겠지. 그렇게 살다 보면 재연을 점점 더 많이 사랑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그쪽이 내 신엄마인 셈이다.”
“재연이는 신내림을 받지 않았잖아요.”
“그래, 그 애는 무당이 아니지.”
찻잔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김이 다 죽어 버릴 때까지 무당은 말없이 녹색 찻물만 노려보았다.
“신을 모시지 않아도 그만한 힘이 있는데, 이번에 장군님을 잠깐 모시게 해 달라 하길래 이상하다 생각은 했었다. 그런데 네가 찾아온 걸 보니 알겠더라. 일부러 데려갔구나, 싶어서.”
“일부러요?”
“우리는 신을 모시니 대가 없이는 함부로 떠들지 않는다.”
알고 있다. 그들이 얼마나 칼같이 복채를 받는지. 신의 힘을 빌어 과거나 미래를 읽고 조언하는 것은 하늘의 역을 사는 일이다. 무당이 장수하지 못하는 것도 그런 업보 탓이라고 들었다.
“지금은 장군님이 계시지 않으니 알고 있는 것 죄 말한다고 해서 그리 크게 해가 될 것 없다는 말이다. 뭘, 네가 신경이나 쓰겠느냐마는.”
“…….”
무당이 새파란 빛을 띠는 눈동자를 굴리며 수심에 젖어 먼 천장을 보았다. 그녀는 역풍을 맞을 것을 걱정해 그동안 사실에 대해 말해 주길 망설였지만, 신을 모시지 않는 지금이라면 기회를 잡아 최대한 많은 것을 알려 줄 것이다.
기대감에 부풀었다. 무릎 꿇고 앉은 다리가 저렸지만 참을 수 있었다. 무당이 적당히 주름 잡힌 손을 들어 내 머리를 툭툭, 투박하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네가 와서 그 애의 사주를 물었지. 깜짝 놀랐어.”
“뭘요?”
“아무리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던 놈의 사주가 그때는 흐릿하게나마 보였으니까.”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고, 무당은 재연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외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 될 뻔한 사주라고 그랬지.”
“……네.”
“그놈은 너 때문에 신이 될 팔자를 버렸다.”
천천히 고개를 올리고 무당의 얼굴을 보았다. 공기는 묵직하게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무당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노란 전등과 붉은 촛불의 어슴푸레한 빛이 아른거리며 그림자를 만들어 우리를 우울하게 했다.
신당에 걸린 무서운 얼굴의 탱화와 자애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관음보살의 얼굴이 단숨에 눈에 들어왔다.
칼을 들고 한 발로 귀신을 누르고 있는 작두장군의 그림도 보였다. 아무런 일도 없는데, 이곳에만 지진이 오는 것처럼 찻잔이 달그락거렸다.
“신이 될 몸이라니, 그 얼마나 기이하고 대단하더냐? 나도 물었다.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윤회를 벗어나 해탈하여 신으로 귀의한다면 그 얼마나 영광된 일일 것이냐고.”
상상도 해 보지 않은 이야기였다. 하재연은 왜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지, 어떻게 무너지지 않고 액운을 대신 받아 주고 있는지도 알 것 같았다. 어쩐지 어깨에 힘이 빠졌다. 무너지는 상체를 이성이 겨우 받아 주었다. 반쯤 맥이 꺾인 꼴을 보고 무당이 혀를 찼다.
“그놈은 윤회를 계속하고, 업보를 지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야기했었지.”
“……후회한다고 했어요. 자신이 액막이라고 말해 줬을 때 저한테 후회하는 게 있다고…….”
“그래, 후회하겠지. 네가 죽은 이유가 그놈 탓이니까!”
다시 한번 방 안이 진동했다. 섬뜩할 정도로 윙윙거리는 바닥에 손을 짚고 무당을 바라보았다. 정신을 차리려고 했지만 벌려진 입조차 다물지 못했다. 덜 떨어진 인간이 되어 전세와 현세, 내세를 굴러다니는 기분이다. 지푸라기로 만든 허수아비도 지금의 나보다는 정상이리라.
“나에게 도와 달라 무릎 꿇고 부탁하며 말하더라. 저 때문에 네가 두 번이나 죽었다고.”
“제가요?”
나는 한 번 죽었다. 정확하게 기억한다. 살점이 두 번이나 뜯겼다면 기억하지 못할 수가 없다.
“그럴 리가 없어요. 저는, 한 번…….”
반박하기도 전에 무당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더 설명해 주지는 않았지만 무당의 얼굴은 확신에 차 있었다. 모든 것을 아는 자의 눈이다. 떨리는 손을 들어 무당의 소맷자락을 쥐었다.
“이것만은 나도 말을 못 한다. 말을 하면 너나 그놈이나 둘 다 다쳐서 어쩔 수가 없어.”
“제가 뭘 잊고 있는 건데요……?”
이 세상에서 격리된 건 나였다. 타인에게서 격리된 것이 아니다. 무언가를 아주 깨끗하게 잊어버려서 격리당한 것뿐이었다. 그런 판단이 들자 슬퍼졌다.
하재연은 분명히 내가 잊어버린 어떤 기억 때문에 이런 짓을 하고 있었다. 그걸 알아내면 우리는 둘 다 행복해질 수 있을까. 아니면 좀 더 편하게 긴장을 풀고 살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답답함에 속에서 단내가 차올랐다. 심장이 좀 더 빠르게 박자를 올렸다. 쿵쿵 떨리는 집과 함께 퍼지는 두통에 얼굴을 찡그렸다.
“세상일이 마음대로 살아지더냐. 만나고 싶지 않아도 만나고, 헤어지고 싶지 않아도 헤어진다.”
별다른 설명 대신 무당이 조언이나 위안과 닮아 있는 말을 해 주었다. 이렇게 집이 흔들리면 마루 위에 올려 둔 수박이 떨어져 깨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그녀를 보았다.
“다 가진 것 같아도 순식간에 잃어버리는 게 산다는 것이다. 너는 얼마나 더 허무하겠느냐.”
“허무라니…….”
“재연이 놈이 준비가 다 되어 가니 나타난 걸 게다. 걱정을 너무하지 말아라.”
이제 일어나라며 무당은 손짓으로 휙휙 내저어 축객령을 내렸다. 태풍에 휩싸이기라도 한 것처럼 떨리는 집에서 무언가를 더 물어볼 수도 없었다. 내일은 올 수 있을까. 내일도 만나면 이야기를 해 줄까. 당장 불안한 내일을 약속할 수 없어 무당의 얼굴을 하염없이 보기만 하다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을 다물고 있었지만 두려움으로 파르르 떨렸다. 지금 이 문을 나서는 순간 귀신들이 순식간에 엄청나게 따라붙을 게 뻔했다. 무당도 희생했지만 듣기 위해서는 나 역시도 희생을 치러야 한다. 하재연과 함께 의미 모를 일에 휘말리면서 신체 일부가 잘려 나가는 섬뜩한 감촉 하나만은 익숙해졌다.
옆으로 떨어진 찻잔을 바로 올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무당이 물에 빠진 사람처럼 손을 허공에 휘저으며 못다 한 말을 이어 했다.
“아야, 그래도 하나는 굳세게 마음에 품고 살아라.”
“어떤 거요?”
“너나 그 애나 서로 좋아한다는 마음 하나는 지니고 가거라.”
“왜 하필 그거예요?”
“그게 아니었으면 너희 둘이 그 꼴이 날 일도 없었을 테니까.”
본인부터 운명이라는 굴레에 갇혔기 때문일까. 무당은 운명이라는 기이한 것에 사로잡힌 나를 안타까울 정도로 다정하게 보았다. 매일 싫어하는 티만 내던 사람이었으면서 이렇게 다정해진 것을 보니 눈물이 나왔다.
그녀가 털어놓은 일부의 진실과, 점점 더 거세지는 감각이 시간의 한도를 알려 주었다. 저승사자가 찾아왔을 때 장부에 적힌 대로라면 나는 이미 죽고 없어야 했다. 눈을 속여서 억지로 정해진 수명을 늘렸으니 얼마 안 가 들통이 나겠지.
“세상에는 기적이 없다. 내가 무당인데, 신을 모시는데 어찌 알 수 없겠느냐. 그런데 기적이 하나 있었다. 짧게나마 신을 모시면서 본 많은 사람 중 유독 너였다.”
하재연과 처음 관계를 가졌을 때 기적에 대한 말을 잠깐 스치듯 들었다. 나를 보며 기적을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저 그가 뜬구름 같은 말을 한다고만 생각했었다.
‘어차피…… 것도…… 만…….’
의식이 흐려지는 바람에 제대로 듣지 못했던 마지막 말을 이제야 확실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어차피 그것도 만들어진 것이지만.’
언급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를 했기 때문일까. 무당의 신당은 멀미가 날 정도로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 정도면 장군신이 돌아오고 나서 신벌을 받을 수도 있는데 무당은 두려움 대신 나에 대한 딱함을 담고 있었다. 아직도 누군가는 타인을 위해 희생하고 있었다. 그런 팔자를 타고났기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무당은 따뜻하긴 했지만, 재연보다는 체온이 낮아 어쩐지 싸늘하다는 느낌이 드는 손으로 내 손을 잡아 주며, 애틋한 목소리로 달래듯 말했다.
“만들어진 것이라고 어찌 그게 기적이 아니겠냐. 세상에 어떤 사람은 태어난 것 자체도 기적이라 여기더라.”
“맞아요.”
“…….”
“재연이가 기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건 알겠어요.”
하지만 그러기에 시간도 힘도 부족하다면 그 애가 내 옆에 있는 것만이 기적이라고 생각해요. 무당에게 할 말이 아니라 문장을 꿀꺽 위장 속으로 내려보내며 침묵했다. 끝맺음 없는 말을 이해했는지 무당은 그 뒤로 말이 없었다.
가라, 그냥 가라. 뒷모습이 쓸쓸하게 인사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바깥으로 나왔다.
햇살이 시위를 당겨 심장을 겨냥했다. 화살촉이 날카롭게 살점을 찌르고 들어와 영혼을 도려냈다. 기적이란 무엇인가. 고작 살아 숨만 쉬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기적이 될 수 있을까.
더위에 지친 한여름 오후에도 길거리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맨살을 시원하게 드러낸 옷차림을 하고 너 나 할 것 없이 부채를 흔들거나 휴대폰에 꽂아서 사용하는 작은 미니 선풍기를 틀고 다니며 깔깔거렸다. 홀로 저 일상에서 동떨어진 기분이었다.
종종 문이 열려 있는 가게에서 쏟아지는 에어컨의 냉기에 잠깐씩 걸음을 멈췄다. 가게에서 틀어 둔 TV에는 사회에서 논란이 된 사건에 대해 파헤치는 수사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었다. 내가 저지른 살인과 지금 벌어지는 보복 살인이 나왔다. 하도 유명해진 사건이라 발길을 멈추고 화면을 유심히 보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화면 구석에 재방송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는 걸 보니 이미 방영했던 내용인 모양이다. 와, 옆에서 감탄하는 남학생을 곁눈질로 보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가방에서 도수 없는 안경을 꺼내 썼다. 어릴 적 사진이 인터넷에 퍼지면서 어쩔 수 없이 가지고 다니게 된 물건이었다.
프로그램에서는 내 일인데도 낯선 이야기를 하나하나 시간순으로 밟아 나가고 있었다. 이미 기억조차 나지 않는 봉사 활동 영상이나 지역구에서 유치하는 고아원 어린이 합창단의 모습에 어깨를 움츠렸다. 오랜 시간 이어지는 방송은 타인의 인생을 보는 것같이 이질적이었다.
‘그 친구가 조용한 사람이었죠. 별별 일이 터져도 하도 가만히 있으니까…….’
예전 교도소의 소장이 화면에 나와서 예전 교도소 생활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집단 괴롭힘을 많이 당했고, 불미스러운 일로 독방에 격리된 적도 많았다는 설명과 함께 몇 년간 지냈던 교도소 안의 모습을 하나씩 확인시켜 주었다.
방송은 좀 더 노골적이고 자극적인 장면을 이끌어 냈다. 열기는 뜨거웠다. 거주지와 신상이 들통나는 것도 금방일 것 같았다. 추격을 받아야 하는 건 연쇄 살인마인데 사람들은 어린 살인마의 인생을 낱낱이 까발리고 있었다. 죄를 지은 것은 오직 나뿐이라 말하는 것이다. 살인의 위협을 받는 건 내가 아니었나. 왜 나만 사회적인 말살을 시키려는 거지.
억지스러운 관계의 추궁이 이어졌다.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담임 선생님이 모자이크 처리된 채 인터뷰를 했다. 윤이원은 나인데 그들은 본인의 이야기라도 된다는 것처럼 허풍스러운 말을 떠들었다.
어둡고 음침했어요. 어린아이치고는 너무 어른스럽게 굴고, 식사도 잘 안 하고 운동을 싫어하고…….
운동을 하지 않았던 건 원장이 금지했기 때문이다. 식사를 적게 했던 것 역시도 원장이 금지했기 때문이었다. 어른스러워 보였다면 고아원에서 어린 동생들을 돌봤기 때문이겠지. 왜 나에게 묻지는 않고 자신들 멋대로 판단을 내리는가.
브라운관을 노려보며 질문에 질문을 거듭해서 던졌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다.
“대박이다. 진짜, 죽은 사람들 불쌍해서 어떡해?”
“어우, 저런 놈 때문에 애꿎은 애들만 불쌍하게 죽고…….”
누군가 옆에서 알지도 못하고 떠들었다. 알지도 못하면서 남의 일에 참견하고 본인이 법관이라도 되는 것처럼 엄하게 형벌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무리에서 뒷걸음질 쳐 빠져나왔다.
해는 여전히 무더웠다. 정처 없이 헤매다 갈 곳이 딱히 없어 카페 하나를 찾아 들어가 커피를 시켰다. 알바생은 안경 너머에 있는 얼굴을 살피는 것처럼 빤히 바라보며 진동벨을 건네주었다. 이따금 나를 향한 시선이 따끔따끔하게 꽂히는 것 같아 무서웠다.
커피를 받아 오고 나서도 빨대 끄트머리만 바라보며 하염없이 시간을 죽였다.
피곤하고 지루했다. 얼음이 반쯤 녹았을 때 누군가 카페 안이 너무 덥다는 투덜거려서 고개를 들었다. 에어컨이 고장이 났는지 알바생이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허둥거렸다.
반사적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천장형 에어컨의 바람이 나오는 틈 사이에 흰 손이 삐죽 나와 있었다. 손톱이 괴물처럼 긴 손가락의 관절이 사방으로 꺾이며 꿈틀거리더니 이내 쑤욱, 팔꿈치까지 삐져나왔다.
납작하게 눌린 팔은 살가죽이 전부 벗겨져 있었다. 소름이 끼친다. 이내 머리카락이 한 움큼 쏟아지더니 인간의 몸으론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좁은 틈에서 상체가 빠져나와 대롱대롱 매달렸다. 혀를 바닥까지 늘어트린 악귀가 킬킬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알바생은 귀신의 혓바닥을 자기가 밟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리모컨으로 에어컨을 몇 번이나 껐다 켜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귀신은 공중에서 두 팔을 미친 것처럼 휘저으며 상체를 흔들더니 이내 쑥 하고 완전히 빠져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몸이 납작 으깨지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찌푸렸다. 끔찍한 몰골이었다.
비틀거리며 일어선 귀신이 몸을 흔들며 미친 듯이 소리 내서 웃는다. 앞에 있는 커피를 집어 들었다. 얼른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야겠다. 빨대를 힘차게 빨아올리는데 옆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아아안녀어엉하아아세에에요오오.」
고개를 옆으로 90도 이상 꺾은 귀신이 서서히 몸까지 완전히 직각으로 꺾으며 웃었다. 바짝 다가와 옆얼굴을 쳐다보며 낄낄 웃는 모습을 쳐다볼 자신이 없어 침을 삼켰다.
「유우운이이이워어언씨이이?」
귀신이 일부러 발음을 질질 끌어 가며 내 이름을 부르자 온몸에 소름이 쭈르륵 돋아났다. 찢어진 입을 오물거리면서 귀신이 제 머리를 엉망으로 쥐어뜯으며 몸부림을 쳤다. 아파! 아파! 제 머리를 뜯던 귀신은 쉰내를 풍기며 소리 질렀다.
“어, 켜졌다.”
아무것도 모르고 즐겁게 떠드는 알바생의 목소리를 들으며 최대한 침착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컵을 들고 있는 손이 가늘게 떨렸지만 이 정도면 숨길 수 있었다. 기괴하게 몸을 비튼 귀신이 코끝을 찡그리면서 훌쩍거렸다. 그녀가 질질 몸을 끌고 따라올 때마다 악취와 검은 액체가 뚝뚝 흘렀다. 울렁거리는 속을 부여잡고 바깥으로 도망치듯 나오자마자 귀신이 꿈틀거리며 허리에 팔을 감았다.
「뵙고자 하는 분이 계시는걸요.」
언제 말을 늘였냐는 듯 적당한 빠르기로 이야기한 여자 귀신이 시커먼 코피를 줄줄 흘리면서 히죽 웃었다. 결국 반항도 못 하고 시키는 대로 움직여야 했다.
하아, 좋아. 귀신이 바닥에 질질 끌리는 혀로 땀에 젖은 내 허리께를 날름 핥았다. 달갑지 않은 성희롱에 소름이 가시지 않은 팔뚝을 긁으며 구석진 곳까지 걸어갔다.
“누가 보자고…….”
이상하게 햇빛이 들지 않고 서늘한 골목 안에 도착하자마자 귀신이 팔을 풀고 바닥에 납작하게 붙었다. 사지를 버둥거리며 웃을 때마다 입과 코에서 벌레가 뿜어져 나왔다.
「멍청이! 멍청한 벌레 새끼!」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에 고개를 들었다. 얼굴 위로 뜨거운 액체가 튀었다. 온몸을 시커멓게 감싼 남자가 칼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고깃덩어리 같은 것을 미친 듯이 찌르며 짐승같이 신음하고 있었다.
“…….”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주춤거리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섰을 때 바닥에서 고기 조각처럼 난자당하던 누군가가 팔을 뻗었다.
“살려…… 살려 주…….”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작은 음성은 마지막 칼질 한 번에 비참할 정도로 빠르게 꺼졌다. 칼을 휘두르던 남자가 펄쩍 뛰어오르더니 뒤를 돌았다. 충혈된 눈이 번들거렸다.
“너, 너, 너 누구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남자가 칼을 치켜들고 슬금슬금 다가왔다. 골목 안에 피 냄새가 진동을 했다.
“여, 여긴 어떻게 찾아왔어?”
위협적인 몸짓에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이쪽까지 사람을 속여 끌고 온 귀신은 바닥에 개구리처럼 납작 엎드린 채 여전히 킬킬거리며 웃고 있었다. 한심한 자식! 개자식! 욕설이 뺨을 후려친다. 긴 혀가 젖은 땅을 때리며 침을 질질 흘렸다.
“나, 나는…… 그러니까…….”
공포에 질려 턱 끝까지 마비가 왔다. 남자와 거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주춤거리며 계속해서 몸을 뒤로 빼다가 귀신의 손에 발목이 잡혀 바닥에 넘어졌다. 붉은 눈이 번뜩거리더니 순식간에 칼이 날아왔다.
필사적으로 몸을 굴려 피했지만 허리가 긁혔다. 남자가 괴성을 지르며 억센 팔뚝으로 숨통을 졸랐다. 엄청난 거구에서 나오는 힘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발버둥을 치며 반항하자 사정없이 주먹으로 후려쳤다.
살려 달라고 소리쳐야 해. 침을 질질 흘리면서 비명을 지르다 우연히 남자의 사타구니를 걷어찼다.
무릎에 정확하게 부딪힌 고간은 완전히 흥분한 상태였다. 찰나였지만 딱딱한 성기를 확인하자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이 자식은 정말로 미친놈이었다.
남자가 끙끙 앓는 사이 허겁지겁 도망치려 했으나 몇 걸음 떼기도 전에 머리카락이 잡혔다. 남자가 손가락으로 내 머리카락을 엮고 미친 듯이 흔들자 두피가 화르르 타오르는 듯 아팠다. 상체가 완전히 마음대로 흔들렸다. 남자가 두들겨 패는 대로 소리를 질렀다.
“아악! 아, 허억.”
솥뚜껑처럼 큰 손이 따귀를 쉴 새 없이 갈겼다.
“이 씨발, 흐, 씨발, 이 새끼가 어디서.”
침을 뱉은 남자가 다시 칼을 주워 칼자루로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생리적으로 눈물이 질질 흐르며 눈앞이 번쩍거렸다. 그대로 바닥에 엎어져 나뒹굴자 남자가 칼을 고쳐 쥐며 다가왔다. 그의 누런 이에서 침이 질질 흘렀다. 흥분과 욕구로 번들거리는 눈알을 보며 몸서리쳤다. 이놈은 정말로 나를 죽일 생각이다.
아, 겨우 이렇게 끝내려고 지저분한 인생을 보낸 건 아니었다. 되는대로 주먹과 발을 휘두르며 남자의 손아귀 안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다. 악다구니를 지를 때마다 남자는 머리카락을 더 세게 움켜쥐며 몸을 흔들었다.
“이거 놔! 놓으라고, 놔!”
“이 씨발, 씨발 새끼! 입 닥쳐! 당장 죽어!”
“사람, 악! 사람 살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팔꿈치를 휘둘렀다. 명치를 얻어맞았는지 다시 휘청거리는 남자의 손을 뿌리치고 달려가다 또 얼마 못 가 잡히길 반복했다. 바닥을 구르며 몸싸움을 벌이다 몇 번이나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피부 위를 긁고 지나갔다.
머리를 부딪쳤는지 눈앞이 어지러웠다. 몸싸움 과정에서 눈 아래쪽에 피멍이 든 남자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칼을 번쩍 들어 올렸다. 눈앞에서 섬뜩한 빛을 내는 칼을 보고 이를 꽉 물었을 때 골목 밖에서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렸다.
“비명이 들린다고?”
“아까 들었다니까.”
“뭐야, 무섭게……. 거기 누구 있어요?”
남자의 얼굴이 굳었다. 순간적으로 상황을 재려고 눈을 굴리는 틈을 놓치지 않고 주먹을 휘둘렀다. 남자가 놓친 칼이 내 목덜미를 조금 베고 떨어졌지만 멈추지 않았다. 최대한 힘을 쏟아 안면을 후려치며 소리 질렀다.
“여기 살인 사건이에요! 도와주세요!”
소리를 들었는지 근처에서 서성이던 사람들이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화를 숨기지 않고 포효하며 두 손을 뻗어 목을 졸랐다. 컥, 숨통이 졸리는 건 둘째 치고 다친 목이 눌리자 아파 죽을 것 같았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복부에 되는대로 발길질하는 동안 도착한 사람들이 비명과 함께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베인 목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얻어맞은 온몸이 죽을 것처럼 아팠다. 바닥에 엎어져 헐떡거린 채 숨을 가다듬었다. 제압을 마친 사람들이 다가와 부축해 줬다.
등을 두드리며 괜찮냐고 물어보는 다급한 소리에 바닥에 흘린 안경부터 더듬어 찾았다. 누가 주워다 준 안경을 끼고 나서야 겨우 고개를 들 수 있었다.
“학생, 괜찮아? 지금 경찰 불렀어.”
비슷하게 둥그런 테의 안경을 낀 중년 남자가 괜찮냐고 다급한 인사를 건넸다.
“네…… 괜찮, 괜찮아요…….”
후들거리는 다리 때문에 한참 일어나지 못하고 주저앉아 덜덜 떠는 사이 사람들에게 붙잡힌 남자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그제야 한숨 돌리며 놈을 관찰할 수 있었다. 순식간에 사람 하나를 후려치던 힘은 대단했지만 거구인 덩치에 비해 키가 그렇게 크진 않았다. 온몸이 검정 일색이라 안면이 익은 살인마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별일 없이 끝났으니 다행이긴 한데, 바닥에 엎어진 채 깔깔거리며 웃고 있는 악귀를 고약한 놈이라고 생각하며 노려보았다.
찾는 사람이 있다니, 저렇게 추악하게 생긴 악귀의 말을 믿는 게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신이 나를 부르는 거라고 생각해 버렸다. 신이 저런 저급한 악귀를 수족으로 부릴 리가 없는데, 바보같이.
뚝뚝 흐르는 눈물과 땀을 닦아 내며 숨을 고르는데 악귀의 웃음이 뚝 하고 멎더니 순식간에 형체가 녹아내렸다. 바닥에 시커멓게 타르 같은 액체가 고였다. 그걸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숨을 멈춘 채 악귀가 있던 자리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멀리서 경찰차 소리가 들린다. 일어나 위치를 확인시키기 위해 소리 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득했다.
***
칼에 베인 상처가 많아 병원에서 한차례 치료를 받고 참고인 자격으로 경찰서로 동행했다. 몸에 담요를 두르고 부축을 받으며 서 안으로 들어가자, 미리 연락을 받고 기다리던 담당인 김 형사가 기함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너는 뭐 사건을 몰고 다니냐!”
잽싸게 다가와 한 대 후려치는 바람에 머리가 띵했다. 출혈이 꽤 있어서 빈혈약과 안정제를 처방받아 온 사람에게 너무한다 싶다. 물론 서울 안에서 일어난 일에 일산 지역의 형사가 불려 왔으니 귀찮은 일이라고 생각하긴 하겠지.
“죄송해요. 어쩌다 보니.”
“죄송이고 나발이고, 아이 씨…….”
머리를 거칠게 벅벅 긁은 형사가 짜증을 내면서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형사는 바닥이 울릴 정도로 다리를 덜덜 떨어 대며 입 속으로 중얼중얼 짜증을 냈다.
“야, 너는 좀…… 거 좀 집에 있으라니까!”
“저도 먹고 살아야죠.”
드레싱을 받은 상처 부위를 긁으며 대꾸하자 김 형사가 가래 끓는 소리를 내더니 제 분에 못 이겨 성질을 부렸다. 다른 형사 몇이 눈치를 보면서 헛기침을 했다.
“으흠, 흠. 그래도 덕분에 미친 새끼 하나 잡았으니까 진정하지, 김 형사.”
“아, 진짜 내가 쟤 때문에 돌아 버리겠네.”
형사는 담배를 피우고 싶은지 연신 입술을 매만졌다. 운 나쁘게도 TV에서 뉴스 속보로 살인범을 잡은 용감한 시민과 대낮에 벌어진 참극을 두고 치안 부재에 대해 요란하게 떠들었다. 형사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런 시팔, 저거 꺼!”
막내로 보이는 형사가 허둥지둥 TV를 끄자마자 김 형사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우악스러운 소리를 냈다.
“야, 세상에서 너 찾겠다고 난리를 치는데 이번 일이라고 설마 모르겠냐.”
“언젠가는 알겠죠.”
“너 이, 시발. 살인 몰고 다니는 놈이라고 낙인 찍히는 거 한순간이야!”
“이미 찍혔는데요.”
“이 새끼가 여전히 아가리만 살아서.”
거품을 물며 뒷목을 잡는 형사를 보며 붕대 끝에 긁혀 간질간질한 피부를 벅벅 긁었다. 어쩌라고, 그런 눈으로 쳐다보자 형사가 한숨을 푹 쉬면서 손가락으로 까딱까딱 자리로 부른다. 느릿느릿 다가가 앞에 앉았다.
형사야 호들갑을 떨었지만 사실 눈앞에서 사람 하나 더 죽은 건 별거 아니었다. 갑자기 녹아 버린 악귀가 더 중요했지. 분명히 그때 보았다. 매우 불쾌해 보이는 신을.
차마 그 이야기를 할 수는 없어 사회를 지글지글하게 달구는 모방 범죄의 증식에 대해 귀 따갑게 듣기만 했다.
이 정도쯤 되면 한 발짝 걸을 때마다 살인 사건이 한 번씩 일어나야 하는 것 아닐까. 형사가 왜 이런 일이 자꾸 네 주변에 일어나느냐고 가슴을 치고 답답해해도 뾰족하게 대답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쩌다 그 골목길 안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부터 장황하게 떠들다가 아침에 눈 뜨자마자 무당집에 들렀다는 걸 알게 된 형사들은 전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용의자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인적 관계를 조사한다고 한참을 시달리고 났더니 저녁 8시가 지나 있었다. 형사가 밥이나 먹고 하자며 시켜 준 짜장면 한 그릇을 먹고 모포를 대충 둘둘 둘러쓰고 소파에 누워 잠을 잤다. 전과야 어떻든 목격자가 되어 버린 탓에 당분간 피곤할 것 같았다.
새벽녘에 잠을 자다 깼다. 오랜만에 꿈도 꾸지 않고 조금 깊게 잤던 것 같다. 당직을 서게 된 형사 두 명이 옆에 있는 소파 베드에서 코를 골고 있었다. 생각보다 조용한 밤이다.
눈을 가늘게 뜨고 휴대폰으로 인터넷 기사를 읽었다. 살인마 전 씨(가명, 46세)를 잡은 용감한 시민들……. 골목에서 뛰어 들어와 구해 준 사람들의 인터뷰가 인터넷 홈페이지 메인에 떠 있었다. 잇달아 올라온 기사에는 이번 살인은 모방 범죄일 가능성이 크고 최근 떠들썩한 연쇄 살인범은 아직 체포되지 않았다는 내용이 추가로 덧붙여져 있었다.
집이라고 딱히 편안한 건 아니지만,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재연이에겐 미안한 마음이지만 살인범에게 칼 맞아서 죽는 게 좀 더 쉽고, 마음 편한 인생의 엔딩일지도 모른다. 어휴, 작게 한숨을 쉬면서 몸을 한 번 뒤척거렸다.
으음, 조금 떨어진 곳의 형사가 같이 몸을 뒤척이며 잠꼬대를 한다.
천장을 멍청하게 바라보며 낮에 봤던 그 에어컨 귀신이 지금까지 본 놈들 중에서 가장 외양이 징그러운 것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진 않을까, 헛생각했다. 왜 신이 그 귀신을 죽였는지도 알 수 없다. 나한테 관심 있나. 또 헛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면 매번 큰일을 겪거나 공간의 틈에 갇힐 때마다 나타나 구해 주었었지. 마작도 대신 쳐 줬고, 처음 십이신장에게 협박을 당하고 있을 때는 조건 없이 돌려보내 주기도 했었다. 죽었을 때는 시간을 돌리겠냐고 제의했었고…….
쓰으, 입 안에서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저절로 났다. 갑자기 큰일을 당했을뿐더러 무당의 이야기만 조합해도 꽤 머리 아픈 이야기였다. 내가 두 번이나 죽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녀가 허튼소리로 거짓을 말할 사람은 아닐 것이다.
……재연이 시간을 돌린 건가.
믿고 싶진 않지만 거대한 힘을 가진 신의 개입,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던 하재연.
휴대폰에서는 수면 위에 반사된 불빛처럼 액정의 빛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조금 잡고 있었다고 그새 뜨거워진 휴대폰을 옆에 놓고 천장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재연은 노골적일 정도로 기억을 의심하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가 낸 대가가 침묵이라면 하재연은 내가 ‘알 수 없는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한 이후 시간을 돌린 후 그 부분을 숨기고 있었다.
한 번 시간을 돌린 사람을 또 살린다고. 살아 본 결과 몸소 체험했다. 업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가중 처벌이라는 것도 분명히 존재한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좀 더 비참하게 살 가능성도 있겠지. 이진현이나 연쇄 살인범과의 만남을 그 정도로 생각해 두면 될까.
“하아.”
이걸 믿어야 하나. 참 믿어지지 않는다. 머리카락을 한참 헤집으면서 고민하다 빙글 등을 돌려 엎드렸다. 뜨끈뜨끈한 휴대폰을 툭툭 치면서 조금 서늘한 서 내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냉소적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솔직히 이제 와 알게 되었다고 해서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뿌연 먼지가 흩날린다. 그리 열심히 청소하지 않은 환경에 호흡기 질환이라도 밀려올 것 같았지만 그럭저럭 참을 만했다. 언제라고 잠자리가 그렇게 깨끗했던 적은 없었으니까. 모포를 자리에 둔 채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한여름이지만 오늘은 열대야가 그렇게 심하진 않았다. 더운 공기를 한 입 삼키며 창문으로 바깥을 넘어 보았다.
귀신이 득실득실하게 깔렸다. 건물 전체를 포위한 숫자는, 서울 전역에 있는 것들을 전부 끌어모아 처박아 둔 것처럼 많았다.
현기증에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는 순간 강물을 느꼈다. 발가락 끝을 적시고 있는, 이 어둡고 출렁거리는 깊은 강은 저승의 상징이다.
순간 언젠가 꿈에 나왔던 장면이 눈앞에 환각처럼 다시 나타났다. 희미한 추론의 끝에 진실이 어느 정도 맞닿아 있었기 때문일까. 환각은 상당히 생생했다. 양복을 입은 하재연, 화를 내는 얼굴, 냉정하고 삭막한 얼굴…… 반쯤 당황한 서주영.
아직은 그 뒤편의 과거를 알고 싶지 않아서인지 그림은 그쯤에서 멈췄다. 어질어질 밀려오는 현기증을 흔들어 떨쳐 내고 창문에 세워진 쇠창살을 움켜잡았다. 막 새벽이 오고 있었다.
멀리 정문 게이트를 열고 첫차가 출근을 한다. 어제 그런 일이 생겼으니 다들 이른 출근을 하는 모양이었다. 제자리로 돌아가 모포를 다시 덮어쓰자 옆 형사의 휴대폰에서 알람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슬슬 도착해서 분주하게 일을 하기 시작하더니, 9시 쯤 담당 형사가 도착했다. 그가 출근하자마자 어제 제대로 진술하지 못한 부분을 보충하고, 당분간은 증인 보호 프로그램에 넣어 주겠다고 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구석진 곳에서 걸레질하고 있던 막내 형사가 으악 비명을 지르면서 달려왔다. 그가 내민 번뜩이는 휴대폰 액정을 잠깐 읽은 형사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아,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이럴 줄 알았어.”
김 형사가 의자 위에 늘어지며 불행한 소리를 냈다. 친절하게 나도 보라며 띄워 준 인터넷 뉴스 기사에는 최초의 사건 목격자가 ‘윤 씨’라고 일제히 보도하고 있었다. 아침 새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시리얼을 한 숟갈 뜨다가 입맛이 떨어져 그대로 쟁반 위에 올려 두었다.
“뭐, 방법이 없네요.”
“방법? 방법이 아니잖아!”
김 형사가 소리를 지르는 동안 다른 형사들은 찔끔 어깨를 움츠리며 제 할 일을 하기 바빴다. 출근하자마자 요란하게 터진 기사에 다들 윗선에 불려가 쥐어 터질 일이 상상되는지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고의든 아니든 이 중에서 기자에게 사건에 대한 내용을 넘긴 사람이 있겠지. 추측하기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책상 위에 엎어진 채 ‘죽음을 몰고 다니는’, ‘제2차 복수극’ 등등 코털만큼도 이해 안 되는 자극적인 타이틀로 적힌 기사를 읽으며 한숨을 쉬었다. 신상이 털렸으니 이번 사건 관할인 경찰서도 이미 기자들이 잔뜩 포진해 있을 것이다. 이러다 얼굴이 팔리는 건 한순간이지. 위기감이 조금은 들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귀찮은 얼굴로 진동이 울리는 휴대폰을 들었다. 누구의 연락처를 빌렸는지 등록되지 않은 번호로 이진현 이사에게서 유명 인사가 된 걸 축하한다는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짜증을 내면서 삭제했더니 그다음에는 서주영에게 문자가 왔다.
[괜찮아?]
괜찮지 않을 건 뭐가 있나 싶다.
[응, 괜찮은데.]
[나한테 방송국인데 인터뷰할 수 있냐고 연락 오더라.]
[그러냐, 미안하다.]
[미안할 건 없는데……. 유명인 친구를 둬서 좀 뿌듯하다. 나 인터뷰해도 돼?]
[일해.]
안부가 참으로 싱겁다. 한숨을 쉬다 굶는 것도 아까워 눅눅해진 시리얼을 한 숟가락 퍼먹었다. 앞에 앉은 형사가 삼각김밥을 뜯으며 이를 박박 긁었다.
“니들 다 입 좀 조심해라. 어? 여기서 말이 새어 나가는 거 아니면 어디서 나가?!”
앞에 앉은 사람 놀라게 왜 소리를 지르는지 모르겠다. 입 안에 시리얼을 한가득 머금은 채로 흘끔 눈치를 보다 얼른 우적우적 씹어 삼켰다. 당직을 섰던 형사 하나도 옆에 앉아 똑같이 시리얼을 씹었다.
“김 형사, 그렇게 성질내지 말고 일단 기사부터…….”
“이미 나간 기사 우리가 어떻게 막아요, 아, 참 나. 기자 새끼들도 진짜 보도에 환장을 해서…….”
증인 보호니 목격자 진술이니 하는 명목으로 데려다 놨지만 홀랑 털려 버린 상황이니 경찰 측에서도 무안한 모양이었다. 다들 눈빛으로 네가 팔았냐, 하고 서로를 의심하고 있는 꼴이 참 보기 정겨웠다.
시리얼의 설탕이 녹아 단맛이 나는 우유를 후루룩 마시고, 아까 뜨거운 물을 부어 둔 작은 크기의 컵라면을 끌어왔다. 딱 먹기 좋게 익은 컵라면을 한 젓가락 들어 올리자 앞에서 유심히 보고 있던 형사가 물었다.
“넌 밥이 넘어가냐?”
“먹고 살아야죠. 좀 드실래요?”
“너나 먹어라.”
참, 어제 죽을 뻔한 놈이 비위도 좋다. 형사가 빈정거리는 것처럼 혀를 끌끌 차며 혼자 또 난동을 부렸다. 성격이 저래서 오래 살지는 못할 거다. 뒷덜미에 딱 달라붙은 덩어리진 형체 없는 연기를 보며 형사의 남은 수명을 점쳐 줬다.
“형사님, 혈압 조심하세요. 그러다 훅 가요.”
“너 때문에 가겠다, 너 때문에!”
“그럼 그냥 또 이사를 할까요? 돈만 빌려주시면 여기, 딱 이 근처에 원룸 잡을게요.”
팔자에도 없이 본인이 담당하는 구역에 전과자 하나, 살인 사건 하나가 생긴 탓에 스트레스가 늘어난 형사가 버둥거리다 말고 우뚝 멈췄다. 슬금슬금 입꼬리가 기어 올라가자 묘한 기류가 사무실 안을 흔들었다.
살인 사건 처리하기도 바쁜 마당에 가장 골칫거리인 인간의 이사 제안에 옆에서 시리얼을 먹던 형사가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 헛기침을 했다.
“흠, 흠. 여긴 땅값이 비싸서…….”
“그래! 어, 서울, 여기 공기도 안 좋고 살 곳이 아니라니까.”
“일산이 딱 사람 살기 좋지.”
정말 싫은 모양이다. 아무 대꾸 없이 컵라면을 먹자 조금 희망에 들떠 있던, 일산에서 온 담당 형사의 얼굴에 다시 깊은 수심이 드리워졌다.
“이사 좀 가라.”
“죄송.”
“……아, 이걸 불쌍해서 팰 수도 없고.”
대놓고 동정받는 건 그렇다 치고, 이미 충분히 두들기지 않았나. 새삼스럽다는 얼굴로 한 번 쳐다봐 주자 김 형사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쓱 눈을 내리깔고 다시 컵라면이나 먹자, 형사가 편의점 봉투 안에 들어 있던 삼각김밥 하나를 던져 주고는 씩씩거리면서 일어났다. 대한민국 경찰들은 성격이 다 이런가.
투명한 비닐을 뜯고 전주비빔밥이라고 적힌 삼각김밥을 열심히 먹었다. 중간중간 라면 국물도 마셔 가며 야무지게 먹자 옆에서 보고 있던 다른 형사 하나가 잘도 먹는다고 감탄했다. 먹고 살아 보겠다고 그 난리를 치면서 인생을 뒤엎었는데 이제 와서 못 먹을 건 또 뭐란 말인가. 신나게 남은 음식들을 다 해치우고 사이다 캔까지 하나 따서 마셨다.
“잘 먹었습니다.”
“……어디 가세요?”
막내 형사가 크림빵을 뜯다 말고 멍청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디를 가긴. 뒷주머니에 지갑과 휴대폰을 챙겨 넣으며 대꾸했다.
“집 가야죠.”
“안 돼요! 기자들이 아직 저렇게 많은데 혼자 가시려고요?”
“아니라고 잡아떼면 되죠.”
“그게 가능하겠어요?!”
형사가 거의 울먹거리면서 책상에 있는 차 열쇠를 집어 들었다.
“태워 보내라고 안 그래도 명령 떨어졌었어요. 당분간은 신변 보호해 드릴게요.”
“아니, 뭐…… 누가 저 죽일 것도 아니고.”
사람은 딱히 무섭지 않았다. 칼에 몇 번 찔려도 쉽게 죽지 않는다. 인간의 육체가 의외로 튼튼하다는 것은 원장을 도륙 내면서 뜻밖에 알게 된 사소한 지식이었다. 교도소에서 얻어터질 때도 이쯤 되면 골병이 들어 죽겠다 싶었는데 의학이 어찌나 발달했는지 기적처럼 살려 놨었다. 오히려 과학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귀신이 더 오싹했다.
“그래도 태워 드리겠습니다. 여기 마스크 끼세요.”
동정받는 범죄자가 된 기분이었다. 어색한 기분으로 황사용 마스크 하나를 뜯어서 끼고 뒷문으로 슬금슬금 나가 경찰차에 올라탔다. 어디서 담배를 피우고 왔는지 담배 냄새를 풍기며 따라온 담당 형사가 같이 뒷좌석에 탔다.
막내 형사가 시동을 켜고 긴장된 얼굴로 차를 몰았다. 기자들 시선 끌기용으로 차 한 대가 먼저 빠져나가고 난 뒤, 남은 거추장스러운 무리를 사이렌을 울려 쫓아내고서야 겨우 도로 위를 달릴 수 있었다.
도로 위에서 형체가 제대로 잡히지 않은 영혼들이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옛날에는 저런 것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이제 좀 더 많이 볼 수 있게 된 모양이었다. 기뻐할 일은 당연히 아니었지만 하나하나 깜짝 놀라기도 지쳐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면서 모자란 수면을 보충하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옆에 앉은 형사가 힐끗 쳐다본다. 주머니에서 엉덩이를 괴롭히고 있던 휴대폰을 꺼내 들어 화면을 보자 엔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형사가 수상쩍은 외국인의 이름에 다시 쓱 눈치를 본다. 야쿠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고민하다 통화를 수락했다.
“여보세요?”
-이원 씨! 괜찮아?
오늘따라 괜찮냐고 물어봐 주는 사람이 참 많다. 나쁘지 않은 것도 같다.
“괜찮아요. 걱정해서 전화한 거예요?”
-응, 그렇지. 아침에 뉴스 보고 깜짝 놀랐어…….
깜짝 놀라 마시던 주스도 뱉어 버렸다고 귀여운 목소리로 종알거리는 엔지와의 통화를 엿듣던 형사의 표정이 점점 이상해졌다. 잠깐 손으로 마이크를 막고 선수 쳐서 말했다.
“알바하는 곳 사장님이거든요.”
“아, 누가 뭐래?”
형사가 무안한지 툴툴거렸다. 당사자가 천하태평일 거라고는 생각 못 하는지 엔지는 쩔쩔매면서 상황이 많이 안 좋냐고 물어보기 바빴다. 괜찮아, 걱정 마, 아무 문제없을 거야. 스스로도 믿지 않는 희망적인 말을 억지로 뱉으며 통화를 한참 했을까. 엔지가 조금 망설이다 물었다.
-이원 씨, 그럼 오늘은 집에만 있어야 해?
“아뇨, 외출해도 돼요.”
누가? 형사가 옆에서 눈을 부릅떴고 운전 중이던 막내 형사는 브레이크를 밟고 신호등 앞에 멈춰 섰다. 급정거에 앞으로 쏟아진 몸을 수습하고 다시 휴대폰을 귀에 붙였다. 엔지가 속삭이는 것처럼 조그맣게 이야기했다.
-오늘 손님이 오실 거라서……. 그런데 그분이, 음, 나 혼자 하긴 그래.
“알았어요. 언제까지 가면 돼요?”
-시간 되는대로. 바로 와 주면 좋고.
“그럼 바로 갈게요. 저기 형사님, 차 좀 돌려 주실래요. 효창공원역이요.”
막내 형사가 말없이 액셀을 밟았다. 마스크 안으로 얼굴을 숨기고 낄낄 웃으며 뒷좌석에서 뒹굴자 김 형사가 너는 아주 빌어먹을 새끼라고 욕을 퍼부었다. 그렇다고 간다는 사람을 막을 수는 없었는지 경찰차는 그대로 유턴을 하고 서울 시내를 다시 질주했다. 중간중간 불법 유턴을 하거나 불법 주정차 된 차들과 각종 신호 위반 차량의 딱지를 실컷 화풀이하듯 끊으면서.
“싸게싸게 꺼져라.”
조금 멀찍이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워 준 형사들은 거의 날아가듯 차를 몰고 사라졌다. 형사치고 소심하네. 손을 툭툭 털듯이 인사를 하고는 엔지가 있는 카페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평소라면 이런 식으로 상황이 안 좋아졌을 때 부르지는 않을 텐데 갑작스럽게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긴 건 아닌가 걱정이 들었다.
중간에 엔지가 문자로 사 와 달라고 부탁한 청경채 두 통과 당근 한 묶음을 사 들고 카페 문을 두드렸다. 일찌감치 Close라는 팻말이 걸린 문이 빼꼼 열리더니 엔지가 방긋 웃으며 튀어나왔다. 오늘도 화사하고 치렁치렁한 옷차림이다. 토끼 귀처럼 생긴 블라우스 깃과 무릎 위에서 흔들거리는 분홍색 레이스를 보니 감탄이 나왔다.
“오늘도 예쁘네요, 엔지.”
“고마워!”
오늘은 컨셉이 토끼야. 맞춤으로 분홍색 에이프런까지 두른 엔지가 귀엽게 주먹을 쥐어 보이며 가게로 들어갔다. 하늘하늘 흔들리는 리본과 귀여운 머리띠를 보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음…….”
가게 안은 난장판이었다.
“토끼가 번식률이 높아서…….”
엔지가 흑흑 우는 흉내를 냈다. 가게 안은 번식률이 높다는 토끼들이 난무하고 있었다. 바닥에 잔뜩 깔린 건초와 이름 모를 풀, 청경채, 당근을 아삭아삭 씹어 먹으며 토끼들이 깡충거렸다. 토끼 옷이라는 게 컨셉인 줄 알았는데 가게 컨셉이 토끼인 모양이었다.
신발 위로 올라와 끈을 오물오물 씹어 대는 토끼를 조심스럽게 발에서 떨어트리며 엔지를 돌아보았다. 엔지는 신선한 청경채와 채를 썬 당근을 뿌려 주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 토끼는 다 뭐예요?”
아무리 밀어 내도 잘근잘근 눈에 보이는 건 죄다 물어 대며 치대는 토끼들을 보며 묻자, 엔지가 씩 어색하게 웃으면서 양손을 공손하게 앞으로 뻗었다. 누군가를 가리키는 것 같긴 한데.
“수월(水月) 보살이라고 불러 드릴까요, 묘신장이라고 불러 드릴까요?”
「정묘신장.」
“아하, 좋아요. 정묘신장 님, 이쪽은 윤이원 씨라고 합니다. 뭐, 두 분 다 면식은 있으시죠?”
“…….”
전혀 인사하고 싶지 않은 사람, 아니 신이 어울리지도 않는 카페에 앉아 있었다. 토끼의 두상과 인간의 몸을 한, 동양의 신 중 가장 보편화한 생활의 상징 같은 신. 십이신장 중 토끼띠를 대표하는 신이 한가로이 차나 마시고 있었다.
왜 여기 계세요, 하는 얼굴로 쳐다보자 찔리는 게 있는지 토끼가 은근히 민망한 얼굴로 시선을 피한다. 솔직히 말해서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 갑주까지 걸친 거대한 토끼가 부끄러워해 봐야 전혀 귀여워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발치에 굴러다니는 수많은 토끼도 전혀 귀여워 보이지 않았다. 발로 밀어도 유난히 따라붙어 입을 오물거리는 한 마리 빼고.
몸뚱이는 하얀색인데 눈가에만 얼룩처럼 까만 무늬가 나 있다. 아, 귀여워라. 꿈틀거리고 손이 많이 가는 것들은 좋아하진 않지만, 가끔 맹목적으로 따라붙어 꼬리를 흔들면 예뻐해 주긴 했다. 신발끈을 씹어 먹을 기세로 오물거리는 토끼를 번쩍 안아 들자 정묘신장이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인간, 그게 뭔지는 알고 안는 거냐?」
“뭔데요? 토끼 아니에요?”
설마 귀여운 껍데기를 뒤집어쓴 흉악한 괴물인가. 품에 안기자마자 이제 다 이루었다는 것처럼 골골거리는 토끼를 심각한 얼굴로 바라보자 정묘신장이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으로 한마디 내뱉었다.
「어제 너랑 만났을 텐데.」
“어제 사람만 잔뜩 봤지 토끼를 만난 적은 없는데요.”
서울 한복판에서 토끼를 만날 일이 그렇게 흔하진 않다. 어제는 길가에 강아지를 데리고 가는 사람도 유독 없는 날이었다. 품 안에서 토끼가 코끝을 찡긋거리면서 털 고르기를 시작했다. 한 손바닥 안에 딱 맞게 들어오는 사이즈의 작은 얼룩 토끼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하자 신장이 말했다.
「좁고 인간들이 많이 앉아 있는 장소에서 만난…… 그게 기억이 안 날 수 있는 건가?」
인간이 앉아 있는 장소……? 무언가 생각이 날 듯 말 듯 기억 장치를 자극했다. 순한 눈동자의 토끼를 한참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토끼가 털을 고르다 말고 고개를 갸웃한다.
“……그, 에어컨 귀신이요……?”
설마, 귀신이 어떻게 토끼야. 어색하게 한번 웃었는데 굳어진 정묘신장의 표정이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설마 정말로?
귀엽게 꼬물거리고 있는 토끼를 한번 내려다보자 정묘신장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엔지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지는지도 모르고 바닥에 당근을 뿌리느라 바빴다.
「심부름을 시키려고 내려보냈는데 악령에게 씌여 타락했다 겨우 살아났지.」
킁킁, 토끼가 냄새를 맡는 시늉을 하더니 옷깃을 잘근잘근 씹었다. 허리를 굽혀 당근을 한 주먹 집어 주었다. 귀여운 토끼의 얼굴 어느 부분에서도 에어컨에서 빠져나와 미친 것처럼 웃었던 귀신의 얼굴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미 악에 물들어 내가 손수 그 타락을 제하려 내려왔는데 원래대로 돌아왔다. 인간이여, 무슨 요술을 부린 것인가?」
“아닌데요.”
그런 능력이 있었으면 어제 그렇게 골목길로 끌려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얼굴을 찡그리면서 토끼신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어제 자신들의 왕이 나타나 악령을 가뿐하게 치워 버렸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모양이었다. 휘적휘적 걸어가 그의 앞에 있는 의자를 빼내 앉았다.
도도하기 짝이 없는 정묘신장은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며 내게 예의가 없고 방만하다며 날뛰었지만, 별로 무섭지도 않았다. 꿈이나 비현실적인 세상도 아니고, 인간 세상인 데다 엔지가 옆에 있으니 안전한 건 자명한 일이었다. 혼자 오들오들 떨고 있는 토끼의 머리와 등을 슬슬 쓰다듬어 주며 고개를 조금 들어 올렸다. 얼굴이 눈동자처럼 빨갛게 변한 정묘신장이 씩씩 거친 숨을 내뿜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종종걸음으로 토끼들을 헤치고 달려온 엔지가 찻물을 주전자에 조금 더 부어 넣었다. 토끼들에게 얼마나 시달렸는지 옷에 당근이며 청경채 같은 채소 조각들로 엉망이었다. 극성맞은 아이들을 돌보는 보모의 표정을 지으며 엔지가 다시 터벅터벅 토끼들 사이로 돌아갔다.
뜨겁게 데워진 찻주전자를 잠깐 바라보던 정묘신장이 한참 망설이듯 손가락으로 탁자를 툭툭 두들기더니 침처럼 빠르게 말을 뱉었다.
「어찌 되든 내 아이를 도와주어서 고맙네.」
“아니, 뭐…….”
내가 도와준 거 아닌데.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가져간다는 말이 이런 상황 아닐까. 싫어하는 인간에게 인사치레를 하느라 입 안에 가시라도 돋았는지 정묘신장은 험상궂은 얼굴로 찻물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겨우 사과 인사만 하고 넘어가실 건가요?”
「뭐?」
보송보송한 토끼 귀가 쫑긋 올라간다. 최대한 뻔뻔한 얼굴로 품 안에서 뒹굴뒹굴하며 귀여운 척 애교를 떠는 토끼를 번쩍 들어 올렸다.
“자식처럼 아끼는 생물을 구해 줬으면 뭔가 대가가 있어야죠.”
「뭐야?」
“대가 그렇게 좋아하시잖아요.”
두 번이나 목숨의 위협을 받으며 엿 먹었는데 호락호락하게 인사만 받고 넘어가기에는 뼈까지 원한이 사무쳐 있었다. 마작을 칠 때는 다 같이 사기 치는 것에 일조하지 않았는가. 한쪽 눈썹을 까딱하며 바라보자 툭 튀어나온 앞니를 뿌득뿌득 소리 내서 갈며 정묘신장이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중얼중얼 알아듣지 못할 언어로 욕을 퍼붓는 꼴이 기분이 많이 상한 모양이었다.
좀 더 귀여워하라고, 두 손안에 얌전히 안겨 흔들리는 토끼를 그네 태우듯 휙휙 흔들어 주며 재차 물었다.
“내놓으세요.”
「인간 주제에 나를 상대로 거래하려는 것인가!」
소리를 버럭 지르면서 털을 뿜어 봤자 저쪽이 빚을 진 이상 손쉽게 해를 가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거래라뇨, 그런 거 안 합니다.”
「그럼 그 고약하고 오만방자한 태도는 무엇이냐?」
“아니, 뭐…… 이게 목숨값 거래도 아니잖아요.”
목숨을 놓고 어쩌니저쩌니 하는 게 아닌 이상 거래를 해 본 적도 없고, 거래할 생각도 없었다. 교도소에서도 몰상식한 놈들이 툭하면 죽여 버리겠다고 떠드니 어쩔 수 없이 그놈들의 발밑에서 미친놈처럼 굴렀던 것뿐이다. 같잖은 토끼 한 마리 목숨이 얻어걸린 거로 거래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진심이 조금이라도 느껴지긴 했는지 붉으락푸르락 얼굴색을 일일이 변화시키던 정묘신장이 점점 마음을 가라앉혔다. 공중에 미친 듯이 날리던 털도 그제야 조금 잠잠해졌다. 엔지가 뒤에서 콜록거리면서 목이 칼칼한지 맨 기침 소리를 냈다.
「……그럼 무엇을 바라는가? 나의 귀여운 아이를 구해 주었으며 내 아이 또한 바라고 있으니 보답은 하겠다.」
“음…….”
「나는 십이신장의 네 번째, 인간들처럼 사악하고 비열하지 않으니 무엇이든 너의 분수와 노력의 한도에 맞춰서 소원을 들어주리라.」
“업이나 지워 주시면?”
「그건 안 된다.」
거대한 토끼가 한쪽 눈만 찌푸리며 짜증을 내는 모습은 그리 보기 좋지 않았다. 인간이란 도통 만족을 모르는 놈들이라고, 다시 한차례 욕을 퍼부어 댄 신장이 몸을 앞으로 쏟아 내듯 기울이며 으르렁거렸다.
「고귀하고 길한 나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네놈의 업은 조금이라도 덜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나의 아이를 구했다고 하나 나에게 수하가 그 아이만 있는 것 또한 아니다. 인간으로서 차마 입에도 담지 못할 업을 산 주제에 그 업을 지워 달라니, 정녕 심판의 칼이라도 맞고 싶은 것이냐.」
협박을 고상하게도 한다.
“그럼 나중에 이야기하겠습니다.”
「나중에?」
“네, 적당하게 뭔가 생각나면 그때 이야기하죠. 마음에 딱 들 만큼 적당한 소원을 생각해 둘게요.”
무릎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겁 많은 토끼의 앞발을 들어 까딱거리며 대답하자 정묘신장이 귀를 쫑긋거리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내가 구해 준 아이가 아니니 대가를 꼭 받을 필요도 없는데. 태연하게 토끼털이나 같이 골라 주며 시간을 보냈다. 바닥에서 긁어모은 청경채 조각을 전부 다 먹였을 때 정묘신장의 귀가 파르르 떨리더니 일직선으로 곤두섰다.
「좋다, 그렇게 하지.」
“네?”
「언제든 마음이 정해지면 소원 하나를 들어주마.」
“아……. 뭐, 네.”
이상하리만큼 싱거운 대답에 정묘신장의 얼굴이 조금 찡그려졌다. 뻔뻔하게 무릎에서 바둥거리는 토끼를 내밀었다.
“무지막지한 소원을 들어 달라고 할 생각은 없으니 표정 푸시죠.”
「…….」
이건 정말로 진심이었다. 십이신장들이, 이 땅에 존재하는 수많은 원귀가, 그리고 그들의 왕인 이름 모를 신이 인간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든 나와는 관계가 없었다. 일방적인 화풀이라고 곤란하게 생각하기만 했지, 보복할 마음은 없다. 커다란 소원을 바랄 마음도 없다. 겨우 작은 토끼 한 마리였으니까.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내려오신 거라면 감사합니다.”
「…….」
“의외로 예의는 있으셨네요.”
「이 버릇없는 놈이 입만 떠드는구나.」
“네, 그러니 얘 데려가세요.”
목숨을 건졌다는 토끼를 흔들며 일방적으로 작별 인사를 해 버리자 정묘신장이 석상처럼 굳은 채 귀신 홀린 표정을 지었다. 커다란 귀를 연신 쫑긋거리는 게 내적인 갈등에 한창 시달리는 모양이었다. 왜 저러나? 잠깐 보고 있자니 신장이 몸서리치며 외치듯 한마디 툭 던졌다.
「그 애는 네게 주마.」
“네?”
「그 애가 네 곁에서 보은하고 싶다고 해서 내려온 것뿐이다. 내가 겨우 인간 따위에게 감사할 것 같으냐.」
토끼가 보내지 말라는 것처럼 앞다리와 뒷다리를 동시에 바둥거린다. 슬픈 눈망울을 하고 나를 글썽글썽 바라보는데 황당함이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얘가 나한테 왜 이러나.
“저 동물 안 키워요.”
「방법이 없다. 그 애가 바란다면 나는 보내 줄 것이다.」
“저희 집에 귀신 많이 사는데요.”
「악령이 씌어도 네가 또 제거하면 될 일이니 문제가 없다.」
“아니……!”
나는 그런 거 할 재주 없는데. 답답함에 말도 못 하고 씩씩거리자 조금 통쾌한지 신장이 슬며시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주먹을 쥐었다 펴자 가게 바닥을 지저분하게 더럽히며 깡충거리던 토끼들이 일제히 손바닥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허리케인이 휩쓸고 간 것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엔지가 너덜너덜해진 옷을 털며 진 빠진 숨소리를 냈다. 잠깐 돌아본 엔지의 표정은 완전히 녹초였다. 십이신장이 와서 갑자기 나를 찾았으니 깜짝 놀라기도 했을 것 같다. 안쓰러운 마음으로 엔지를 바라보다 다시 정묘신장 쪽으로 고개를 바로 했다.
신장은 갑주와 옷깃을 바로 하고는 손등을 날름날름 핥아 털을 정리했다. 저것만 보면 영락없는 토끼의 모습이다.
「나의 아이는 인간 세상에서 귀한 영물이니 아끼고 보호하라.」
“그냥 데려가시면…….”
「너 따위 더러운 놈이 무엇이 좋다고 남겠다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자식을 이기지 못하는 것 또한 부모이지.」
혼자 할 말을 다하며 감상에 젖은 정묘신장은 말리기도 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삽시간에 남은 건 지친 엔지와 엉망이 된 가게, 손안에서 귀엽게 몸을 굴리는 토끼 한 마리뿐이었다. 데굴데굴, 자기를 예뻐해 달라는 듯 애교를 떠는 토끼 목덜미를 잡아 내려놓았다.
“……청소부터 할까요?”
“응.”
엔지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지푸라기를 옷에서 떼어 내면서 지친 목소리로 동의했다.
수많은 토끼가 뒹굴고 난장판을 치다 돌아간 흔적은 대단했다. 쓸어도 쓸어도 나오는 토끼털과 똥까지. 그러니까 결국 엄청난 양의 당근과 건초, 청경채 같은 먹이를 잔뜩 먹어 치우고 싼 똥들 때문에 카페 안은 전쟁이었다. 소독해야겠다며 엔지가 지친 얼굴로 중얼거렸고 나는 아무 말 없이 공기 청정기를 가장 세게 틀었다.
빗자루로 몇 번을 쓸고 닦은 다음에는 걸레질을 반복했다. 락스를 희석시킨 물에 빨아 가며 바닥을 박박 닦고 나니 그나마 깨끗해졌다. 엔지는 그사이 먹을 걸 잔뜩 만들어 왔다. 홀로 남은 토끼는 배가 부른지 바닥에 떨어진 당근을 갉아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배를 내놓고 뒹굴었다. 엔지는 그런 토끼가 귀여운지 옆에 쪼그리고 앉아 털을 슬슬 골라 주고 있었다. 풍족한 기쁨이 깃든 얼굴을 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엔지가 키울래요?”
짧은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즐거워하던 토끼가 몸을 딱 굳혔다. 금방 눈물까지 글썽이며 자신을 버릴 거냐는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옆에 있던 엔지까지 덩달아 슬픈 목소리로 설득을 해 왔다.
“이원 씨, 생명은 함부로 버리는 게 아니야.”
“아니…….”
“묘신장께서 주신 아이잖아. 귀하게 키워야지.”
“음…….”
두 사람, 아니 한 사람과 한 짐승에게서 농락당하는 기분이다. 결국 자신을 버리면 귀신이라도 되겠다고 시위하듯 털을 뿜는 토끼를 안아 올렸다. 이렇게 보니 에어컨에서 빠져나왔던 혀가 길게 늘어진 악령은 생각나지 않을 만큼 귀엽다.
“이름 지어 줘야지?”
“그런 것도 지어 줘야 해요?”
“영물이니까. 이름을 지어 주고 권속으로 삼으면 도움이 될 거야.”
“어떤 부분에서요?”
“악몽을 쫓아내 줄지도 모르고.”
이런 조그만 토끼가 악몽을 쫓아내 주려나. 능력이라곤 하나도 없어 보이는 데다 십이신장의 권속이면서 인간 세상에 내려오자마자 악령에 씌였다는 멍청해 보이는 토끼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불신 어린 시선에 토끼가 기분이 상했는지 앞발을 버둥거린다. 작명 센스는 없는데. 한참 고민하다 이름을 불러 주었다.
“토토.”
“이원 씨, 토끼라서 토토는 아니지……?”
“아니에요. 복권 당첨되라고 토토.”
엔지가 어색한 얼굴로 웃었다. 토토가 불만을 표하는 양 버둥댔지만 몇 번 더 토토, 하고 불러 주자 결국 기운을 빼고 축 늘어진다. 돈이나 가져와라, 토토야.
그제였나, 월세가 빠져나가 줄어든 지갑을 생각하며 토끼의 말랑거리는 몸을 흔들었다. 토토가 눈을 지그시 감고 골골거렸다. 아무래도 딴청을 피우는 것 같았다.
작은 토끼라 잃어버리기 쉽다며 엔지는 가게에 있는 끈을 가져와 붉은색 목줄을 만들어 주었다. 목덜미에 빨간 리본을 묶고는 고리로 연결하자 그럴듯한 모양의 목줄이 완성되었다. 토토는 목을 감싼 줄이 거슬리는지 뒷발로 목을 박박 긁었다.
연신 오물거리는 입 안에 작은 당근 조각을 넣어 주고 한결 깨끗해진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엔지가 입 안에 주먹밥을 밀어 넣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십이신장이 갑자기 내려와서 엄청 놀랐어. 이원 씨를 찾으니까 정말 무슨 죄라도 지었나 했는데, 감사 인사를 하러 온 거였다니. 귀여운 영물도 주셔서 참 다행이네.”
“아뇨, 뭐.”
얻어걸린 셈인데 아무도 믿어 주지 않는다. 무릎에서 데굴거리는 토끼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내 몫으로 덜어 낸 주먹밥을 먹었다. 김과 야채 조각을 넣고 소금으로 간을 한, 평범한 맛의 주먹밥인데도 손이 갔다. 엔지가 국물을 넉넉하게 해서 끓인 떡볶이를 한 그릇 가득 퍼 왔다. 카페인데 커피는 팔지도 않고 밥만 축내는 기분이다.
“아, 맛있어.”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고 엔지가 행복한 얼굴을 했다. 주먹밥 위에 달큼하면서도 매운 떡볶이 국물을 끼얹고 한입 먹으며 고개를 같이 끄덕였다. 중노동 끝에 먹는 밥은 꿀맛이긴 했다. 엔지는 맵다고 연신 부채질을 하면서도 젓가락질을 멈추지 않았다. 쫀득쫀득한 떡과 어묵을 같이 건져 먹고, 주먹밥을 한 입 먹고, 다시 매운 양념 국물을 한 숟가락 먹었다.
둘 다 배가 고팠는지 말도 없이 고개를 박고 먹기만 했는데 넉넉하게 만들어 둔 주먹밥과 떡볶이를 전부 거덜 냈다. 시원한 커피까지 한 잔 마셨더니 엄청나게 부른 배만 남아 있었다. 엔지가 조금 얼떨떨한 목소리로 말했다.
“뭔가, 굉장히 허무한 느낌이야…….”
“나도 그래요.”
토토는 바닥에서 몸을 옆으로 뉜 채 쿨쿨 잘도 자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기도 귀찮아 앞치마만 풀어 걸어 두고는 흐물흐물해진 몸을 일으켰다. 혼자서 팔자 좋게 자는 작은 토끼를 셔츠 앞주머니에 넣으니 사이즈가 딱 맞았다. 자다 깬 토토가 놀랐는지 바둥거리다 다시 셔츠 주머니 안에서 얌전히 눈을 감았다. 겨우 8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밤이 깊은 것처럼 피곤하다. 하품하며 기지개를 쭉 켜자 엔지도 반쯤 눈을 감은 채 늘어져 하품을 따라 했다.
“가려고?”
“네. 혹시 또 일 있어요?”
“아니……. 십이신장이 왔다 갔으니 당분간 기가 약한 영혼은 들르지도 못할 거야. 일반 영업만 해야겠어…….”
잠에 찌들었는지 축 늘어진 목소리를 내며 엔지가 가게를 닫자고 몸을 일으켰다. 대충 정리된 가게 안을 한번 둘러보고 설거지를 끝낸 뒤에 불을 끄자 고즈넉한 정적만 남았다. 어둑어둑한 카페에서 수국의 향이 은근하게 느껴졌다.
가방을 챙긴 엔지가 먼저 작별 인사를 한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 등을 두드려 보내고 보안 장치를 세팅하고 나니 정말로 끝이었다. 하루하루가 이렇게 스펙터클해서야 심장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다.
불안하게 두근거리는 심장을 한두 번쯤 두드리고 얼굴을 가리기 위해 도수 없는 안경을 꼈다. 언론에서 난리를 치고 있으니 이런 얼굴쯤 금방 들킬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다. 살인범과의 몸싸움 과정에서 바닥에 구르고 부딪혀 욱신거리는 어깨와 허리를 문지르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잽싸게 걸었다.
그런데 토끼를 데리고 지하철에 타도 되는 건가?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주머니 바깥으로 삐죽 튀어나온 토끼 귀는 가릴 수 없을 것 같은데. 자느라 바쁜 토끼의 씰룩거리는 통통한 몸을 내려다보며 고민에 빠졌다.
결국 셔츠 주머니 위로 삐져나온 귀를 손바닥으로 가리고 어정쩡한 자세로 지하철에 올라탔다. 사람들이 불룩 튀어나온 주머니가 의심스러운지 흘낏흘낏 곁눈질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빈자리에 앉았다. 얌전하게 자고 있으면 좋을 텐데 문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토토가 잠에서 깨어났다는 것이었다.
영물이라면서 눈치라고는 조금도 없는지 토토가 셔츠 주머니 안에서 꿈지럭거렸다. 앞에 서 있던 여고생 두 명이 어어, 하고 감탄사 비슷한 걸 냈다. 아 씨. 짜증스럽게 손바닥으로 셔츠 주머니를 꾹 눌렀지만 겁도 없이 토토가 틈새로 머리를 빼꼼 꺼냈다.
“이게 진짜…….”
뻔뻔하게 아예 주머니에서 나오려고 헥헥거리는 토끼의 콧잔등을 툭툭 때리자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다리를 바둥거린다. 여고생들은 토끼의 귀여운 외모에 난리를 치고 있었다.
“아우, 너무 귀엽다.”
“아저씨, 아저씨가 키우는 토끼예요?”
“이름이 뭐예요?”
아저씨라니. 묘하게 상처가 되는 호칭을 듣고 대꾸 없이 하하 웃기만 했다. 그런 호들갑 떠는 반응과 달리 나이 있는 어르신들은 동물을 데리고 지하철을 탔다며 대놓고 불평을 했다. 결국 지하철에서 일단 내리고 다음에 오는 차를 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행동을 몇 번이나 반복했더니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두 배는 더 걸렸다. 오는 길에 철물점에 들려 짐을 잔뜩 샀더니 팔다리가 후들거렸다. 녹초가 된 몸을 질질 끌고 집에 돌아와 갑갑해서 죽으려고 하는 토끼를 풀어놨다.
집 안에 있던 귀신들이 일제히 낯선 생명체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성격 나쁜 놈들은 대놓고 토끼를 툭툭 친다. 토토는 집을 뛰어다닌 지 20초 만에 겁먹은 얼굴로 바들거리더니 똥을 쌌다. 아, 씨발. 짜증을 내며 토토를 번쩍 들어 올리자 품 안에 엉겨 붙어 온다. 이렇게 허접스러운 놈이 영물이라고? 정묘신장 그 새끼한테 최대한 엿 같은 소원을 빌겠다고 다짐하며 신문지를 가득 깔고 그 주변으로 철물점에서 사 온 철망으로 임시 울타리를 만들어 줬다. 엔지에게 받아 온 수호부 부적까지 등에 한 장 붙여 주자 토토가 한결 안심해서는 바닥을 굴러다닌다.
작은 종지에 물과 야채를 각각 담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귀엽고 약하기 짝이 없는 토끼를 구경하기 위해 얼쩡거리는 귀신들을 손으로 내쫓고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는 동안 추한 몰골의 귀신들에게 적응했는지 토토는 다시 입으로 철망을 물어뜯으며 꺼내 달라고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겁대가리를 상실한 게 아닐까. 토끼가 겁이 많다는 말은 다 거짓이었나. 온몸으로 난리를 치는 토토를 팔짱을 낀 채 한심하게 내려다보았다.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신문지까지 죄다 물어뜯고 물그릇은 엎어 버렸다. 버릴 수도 없고……. 철망만 믿기로 하고 이불을 깔고 누웠는데 갑자기 누가 뺨을 툭툭 건드려 옆을 보니 토토가 애교를 떨고 있었다.
귀신들이 철망에 장난을 친 건가. 여전히 토끼 꼬리나 귀를 건드리며 킥킥거리는 놈들을 휘휘 흩어 버리고 다시 토토를 울타리 안에 집어넣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슬픈 표정을 하더니 조그마한 네모 구멍으로 머리부터 집어 넣고 물렁물렁한 찰흙 인형처럼 빠져나오는 꼴을 보고 경악해서 토토를 집어 들었다. 토토가 초롱초롱 눈을 깜박이며 귀여운 척 애교를 떨었다.
“너, 토끼 맞냐.”
맞겠지. 하는 것처럼 토토가 귀를 쫑긋거렸다. 내일은 좀 더 촘촘한 그물망을 사 와야겠다고 결심하며 토끼가 멋대로 뛰어다니게 내버려 두었다. 여전히 귀신들은 무서운지 등에 부적 한 장을 감아 두고 팔짝거리는 모습이 나름대로 보기 좋긴 했다. 털이 날리는 것만 빼면.
생각 없이 맥주 한 캔을 따고 앉아 토토의 귀여운 무법자 꼴을 지켜보는데 갑자기 창문을 툭툭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펄쩍 뛰어오를 정도로 놀라 맥주 캔까지 쓰러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쯤 남은 맥주가 바닥에 흘러 이불까지 적셨다. 넋 빠진 얼굴로 입을 벌리고 창문을 쳐다보았다.
“……하재연?”
어둠을 등불처럼 매달고 재연이 찾아왔다. 얇은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쪼그려 앉은 재연이 씩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조금 높은 창문을 바라보다 낮은 탁자를 가져가 밟고 올라섰다. 토끼가 깡충거리며 탁자 위로 올라왔다. 재연이 흘끗 흰빛을 뿜는 하얀 토끼를 보았다. 얼굴이 딱 그만큼 창백했다.
“어디서 지내?”
“……무덤이요.”
무덤. 그 말만 들으면 섬뜩한 단어였다. 정말로 어디 산속의 무덤 굴에서 지내기라도 하는 건지, 잔뜩 야윈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물었다.
“누구의?”
“…….”
그는 대답이 없었다. 알려 주지 않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다리 높이가 틀린지 밟고 올라선 작은 탁자에서는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오늘은 어쩐 일이야.”
이진현을 만난 것도 아니고, 오늘은 무탈하다면 무탈한 하루를 보낸 편이었는데. 뭐, 어제 살인 사건을 겪었었고, 오늘은 정묘신장을 만났으니 찾아왔을까. 최근에 일어난 사건과 일어날 사건을 가장 잘 알고 있을 테니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충고라도 해 주러 왔을까. 조금 자조적인 태도로 물었는데 재연이 뜬구름 같은 미소를 그리더니 대답했다.
“반달이 떴는데…….”
“반달?”
“혼자 보기 너무 아까워서요.”
하재연의 귓불과 목덜미 사이에, 낮은 곳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보이는 그 텅 빈 곳에 그림 같은 반달이 떠 있었다. 오늘따라 유독 노랗고 커다란 달을 보며 묘신장이 원래는 달 토끼를 관리하는 수월 보살이라고 불렸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그가 내려왔기 때문일까. 달이 밝다. 크고 가깝고 낮았다. 그제야 누군가를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이 밀려왔다. 우리는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도 되는 것처럼 붙어 서서 애틋해했다.
얇은 유리창 너머로 눈웃음이 화답처럼 돌아왔다. 적당히 사랑스러워 보이는 웃음이었지만 오랫동안 방치된 탓에 마냥 좋은 감정만 올라오지는 않았다. 바깥으로 난 쇠창살을 붙잡은 채 망설이던 재연이 물었다.
“토끼 키워요?”
“응, 오늘부터.”
“귀엽네요.”
다 알고 있으면서,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재연의 얼굴 앞에 토토를 들어 보여 주었다. 더럽고 때 낀 창문 너머에 있으면서도 재연은 토끼를 귀여워해 주는 것처럼 손가락을 유리창 위에서 문질렀다.
“토토야.”
“토끼라서 토토?”
“응.”
그 뒤로는 대화가 끊겼다. 나는 재연의 어깨 위에 솟아오른 반달만 보았고, 하재연은 달이 아닌 내 얼굴만 보았다. 말도 없이 적막해진 공간에서 재연의 힘 때문에 귀신들이 구석으로 밀려나자 한결 움직이기 편해졌는지 토토가 꼬물거리며 곰살맞게 창틀 위를 뛰어다녔다.
재연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그래도 하루에 한 번씩은 꼭 생각하게 된다. 최근 좀 더 살아 있기 힘들어진 이 세상에서 견디면서부터 그 생각의 깊이가 깊어졌다. 운과 복록을 모두 지불하고도 모자라 지옥에서도 버텨야 했으니 좋았던 감정은 이미 퇴색된 함정이라고, 날이 닳은 창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제는 스스로 부정하고 있었던 행복에 대한 규정을 다시 쓰기로 했다. 누군가 내가 행복하길 바란다면 나는 불행하지 않은 채로 살 수 있었다. 시간이 아주 조금 남았더라도.
“돌아와.”
“…….”
“하재연, 돌아와서 나랑 있어 줘.”
하재연이 결국 그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무슨 상관일 것인가. 저 초췌한 얼굴을 보아라. 나를 대신해서 진 업보를 내려놓는다고 또 무슨 상관일 것인가.
“죽는 순간까지 외로운 건 싫어.”
“……형.”
“내가 이기적이야?”
울먹이는 하재연을 보며 덩달아 눈물을 글썽였다. 어린아이처럼 소리 지르고 울고 싶은 마음을 참고 겨우 목소리를 냈다.
“내가 도대체 뭘 얼마나 인내해야 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집에 들어오기는커녕 창문을 열어 달라는 사소한 요구조차도 하지 못하는 저 겁 많은 태도에 진저리가 났다. 사랑에 대한 꽃노래는 시들어 초라해졌다.
“나는 죽어도 괜찮아.”
내 말에 하재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로 나는 이기적인, 구제 불가능한 인간이었다. 이런 몰골을 스스로 가장 비난하고 자조하면서도 말을 뱉어 버린다.
“정말이야.”
“형…….”
“왜 내 기준의 행복은 몰라?”
창문에 기댄 손가락에 힘이 들어간다. 재연의 단단한 손가락과 울 것처럼 한없이 일그러진 표정을 보며 흔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허겁지겁 창문의 안전장치를 풀고 크지도 작지도 않은 창을 겨우 밀어 열었을 때 바람처럼 재연의 눈물이 방 안으로 떨어졌다. 그의 두 손이 뻗어 와 뺨에 닿는다. 그제야 안도의 숨이 터졌다.
“그럼 내 기준은요?”
종종 그는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면 말이 짧아지는 모양이었다. 그게 좋았다. 깍듯한 존대에서 기습적으로 부르는 나의 이름이 마치 좋아한다는 말처럼 들렸다.
“윤이원, 나는……. 제발, 죽고 싶다는 말은 하지 말아요.”
“재연아.”
“형이, 살고 싶다고 했잖아. 제발 내 노력을 지워 버리지 마…….”
발돋움을 했다. 하재연은 시선을 맞추려는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빈틈없이 서로의 입술을 붙이고 나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마냥 불행한 것은 아니었다. 신이라는 존재는 선택하라고 했다. 타인의 행복과 자신의 불행에 대해서. 그 말의 힘에 이끌려 내 삶은 모조리 불행을 위해 선택된 길이라고만 생각했다. 혀에서는 타액 말고도 쇠창살과 먼지 얼룩의 맛도 났다. 그래도 거리낌이 없었다.
“최소한, 당신이 다음 생에라도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눈물 맛이 날 것처럼 축축하게 젖은 목소리로 하재연이 말했다.
“내가 없어도요.”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건 둘 다였다.
재연은 본인의 의사를 관철하기 위해서라는 변명만 남기고 떠났다. 텅 빈 창문을 앞에 두고 가만히 서 있었다.
홀로 보기 사무쳐서 찾아왔다는 아름다운 반달은 정말로 환하게 금빛을 띠고 있었지만, 함께 감상을 이야기할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의 고향이었을지도 모르는 달을 빤히 바라보던 토토가 이내 고개를 돌리고 품에 안길 듯 달려들었다. 토토는 따뜻하고 부드러웠지만, 이 작은 몸으로는 마음속의 공허가 빠질 리가 없다.
재연의 빈자리는 생각보다 타격이 훨씬 컸다. 처음 만나자마자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허우적거리는 내게 겨우 구명조끼 하나를 던져 주고 구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조악한 대처나마 재연은 내뱉은 말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다.
그보다는 남은 시간이라도 행복하게 모든 걸 이야기하고, 이해하며 같이 살고 싶다는 말이 더 듣고 싶었는데. 까만 밤을 맞으며 몸을 섞고 틈만 나면 손을 잡고 입술을 부딪치면 좋을 텐데. 교도소에서 목을 조르고 쾌감을 느끼는 변태 같은 새끼들이 아닌, 재연이 내 목에 리본을 묶어 주면 좋겠다. 토끼처럼, 애완동물처럼 다루어도 좋으니까.
처음으로 에고이스트적인 사랑을 이야기한 사람이다. 원장을 제외하고, 저번 삶에서도 이번 삶에서도 그런 사랑을 이야기한 사람은 재연이 유일했고 늘 마지막이었다. 그래서 오래, 생각보다 더 많은 정을 주게 된 모양이다.
옆에 있어 준다면 정이 발전해 사랑이 되고, 다시 발전해 커져 위대한 사랑이 될지도 모르는데. 이런 미적지근한 온도와 마음으로 얼마나 더 하재연의 일방적인 사랑을 견딜 수 있을까. 방파제는 풍랑을 이겨 내지만, 그건 방파제가 당연히 그런 역할을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하재연의 기이한 행동을 견디는 역할을 해 줄 수는 없었다. 아마도, 그가 영원히 그 무덤에 처박혀 시간의 중간선을 밟고 있는 이상은.
토토가 힘내라는 듯 뺨에 축축한 코끝을 붙여 왔다. 꽉 안아 주며 으슥한 골목길 너머를 보았다. 마음속으로 10초쯤 세었을까. 골목길 안쪽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달이 저렇게 밝은데, 온몸이 질척질척한 검은 것으로 물든 사람에게는 이상하게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품에 안긴 토토가 몸을 달달 떨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놈은 좀 더 악취가 심한 죄를 뒤집어쓰고 있는 듯이 보였다.
창문이 열린 것을 보고 천천히 웃는 놈의 치아가 허옇게 번득거렸다. 몸에서 군데군데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고, 늘어뜨린 장갑 낀 손에 쥔 식칼은 뭔가 모를 살점이 붙어 있었다.
남자가 소리 내서 웃었다.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토토는 좀 더 몸을 떨었다. 불쌍한 동물을 보호하듯 끌어안으며 길 위를 보았다.
낮과 밤이 함께 찾아오지 않는 순리를 지키듯 재연의 뒷자리를 차지한 남자가 히죽거렸다.
“하재연까지는 속였지만 나는 속이지 못해.”
다 쉬어 빠진 목소리가 귓가에 거슬리게 닿았다. 창살 사이에 두꺼운 팔이 끼였다. 재연의 팔이 그럭저럭 통과했던 창살의 간격이 좁을 정도로 남자의 육체는 거구인 편이었다.
순간 토토가 품 안에서 뛰어내렸다. 바닥에 처박히는 것처럼 엎어지는 걸 보고 깜짝 놀라 탁자 아래로 내려와 몸을 숙이는 순간, 정확하게 방금 전까지 얼굴이 있던 자리에 칼날이 멈춰 있었다. 토토를 주워 들다 말고 놀라서 멍해졌다. 조금만 늦었다면 저 칼에 안면이 관통당했을지도 모른다.
남자가 우격다짐으로 밀어 넣은 손에 잡힌 식칼 끝이 부르르 떨리더니 다시 좁은 창살 사이를 꾸역꾸역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토토가 입을 벌리고 조그맣게 우는 소리를 냈다.
“나를 죽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죽이는 이유가 뭐야?”
목소리가 잠겼다. 남자가 어깨를 떨면서 흐흐 소리 내어 웃었다. 우는 것처럼 기묘한 곡소리를 한참 내던 남자가 이내 시뻘겋게 붉어진 얼굴을 들어 올렸다. 어두운 밤이지만 모자 밑에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끼고 있어 여전히 얼굴의 대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너는 그럼 왜 죽였지?”
“…….”
“죽일 때 쾌감을 알아? 겁에 질린 얼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꿈틀거리는, 시체가 되기 직전의 살덩어리…….”
그는 성적인 쾌락이 고조에 달해 달뜬 듯한 어조로 말했다. 성도착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남자는 길고 자세하게 자신이 이때까지 죽였던 사람들이 얼마나 반항했고, 어떻게 테이프로 입을 막고 혀를 잘라 내어 죽였는지 서술했다.
처음 만져 본 부드럽고 물컹거리는 혀의 오돌토돌한 면과, 피부 가죽 뒤편의 미끄럽고 질척거리는 살점, 지방 덩어리를 말할 때는 속이 요동쳤다. 입을 틀어막아 올라오려는 속을 참으려 숨을 헐떡거렸다. 뜨거운 바람이 끝도 없이 집 안으로 불어왔다. 어디선가 틀어 둔 에어컨 실외기의 열기가 코와 입을 막았다.
“네가 지나다니는 곳은 불태우고.”
여름은 이미 더위와 함께 시작되었다. 곳곳이 태양에 녹아내릴 듯 불이 가득 오른 지상의 화염이었다.
“만나는 놈들은 죽일 거야.”
이미 놈은 살해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 채워져 있어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 들고 있는 칼만 아니었으면 달려가 얼굴을 가린 저 선글라스를 치워 냈을 것이다.
남자가 침을 흘리며 끅끅 웃었다. 가끔 입에 진한 거품을 물기도 했다. 저것이 어떤 증상인지 안다. 교도소에서 가끔 정신 착란 증세를 보이며 발광하던 놈들이 있었다. 마약사범. 아무리 치료를 받고 또 받아도 약을 달라고 구걸하며 머리를 벽에 내리치던, 중독된 인간들.
“너도, 너도, 너도 내가 죽여 버리고, 흐흐. 장기를 못에 박아 걸어 줄게. 더러운 네놈의 장기는 꺼내 말려야 깨끗해지지.”
“별 걱정을…….”
다 해 주네. 웃음이 나왔다. 저건 선구자도 아니고 흔하고 허접스러운 복수의 칼날도 아니었다. 그저 대단한 착각에 취한 살인마의 들뜬 표정이다.
“원장을 왜 죽였냐고?”
“…….”
“그 새끼가 나를 죽였으니까.”
뭐라고? 남자는 쉰 목소리로 헐떡거리며 쇠창살에 온몸을 붙이고 버둥거렸다. 당장에라도 그 조잡한 쇠막대를 잡아 뜯고 방에 들어오기라도 할 것처럼 막무가내였다. 방 안에서 이 흥미진진한 상황을 모두 보고 있던 귀신들이 통곡하며 손뼉을 쳤다. 남자는 모르고 있겠지만 그의 등 뒤에는 이미 죽은 자들이 잔뜩, 아주 잔뜩 붙어 있었다.
“무슨 헛소리야. 그럼 내가 지금 뒤진 새끼를 보고 있다고? 응?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씨팔 새끼가…….”
“안 믿기겠지만 진짜야.”
고 영감은 나에게 사람 속을 긁으며 조롱하는 말을 가르쳤다. 그리고 제대로 따라 하면 혀를 손가락으로 잡고 잘못했다고 빌 때까지 고문했다. 감옥 안에서 배운 우아한 생존법이란 일반적으로 타인의 정신을 주먹으로 마구 문지르고 두들겨 패 분지르는 것이다.
“방에 불려 가서 두들겨 맞아 가며 여장을 했지. 알아?”
“…….”
남자는 본인이 모욕적인 일을 당한 것처럼 가쁜 숨을 쉬었다.
“치마를 입고 스타킹을 신고 화장을 했어. 스무 살이 넘어서도 그 짓을 시켰지.”
“스무 살?”
말의 오류에 미쳐 버린 것처럼 남자가 중얼거렸다. 어차피 서로 미쳤기 때문에 이것을 미친 이야기로 곡해 없이 들을 수 있겠지. 누가 나의 무죄를 알겠어.
“꿈을 꿨어.”
품 안에 안긴 토토는 여전히 슬픈 소리를 내며 오들오들 떨었고, 실낱처럼 불행한 이야기에 귀신들이 서로의 몸을 부딪치며 일제히 자갈 같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지독한 악몽이었어. 네놈이 금쪽같이 모시는 원장이 나를 죽였어. 몸을 찢고 장기를 꺼냈어. 나는 똑같이 해 준 것뿐이야. 더…… 잔인하게.”
사실 더 잔인하지도 않았다. 나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오래 쌓이기 전에 배신당한 셈이니 나만큼 상처 받지도 않았겠지. 원장에게 죄책감을 가져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건 개소리야. 꿈이잖아! 꿈 따위를 꾸고 그런 짓을 하다니, 이 씹새끼. 개새끼, 빌어 처먹을 새끼.”
“그거 알아? 하느님은 인간을 조금도 사랑하지 않아.”
살인의 쾌락을 본인만 알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죄의 징벌을 본인만이 하고 있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야윈 고양이도 투쟁과 쟁탈과 생존을 위한 싸움을 한다. 숨만 크게 쉬어도 머리카락을 잡고 모욕을 주는 교도소에서도 생존을 위해 바닥을 기거나 이를 드러내는 것은 용서해 주었다.
“원장은 단지 자신만을 사랑해서 사랑을 베풀어 준 것뿐이야.”
“…….”
“사랑받고 싶어서 사랑을 주는 척한 것뿐이라고.”
“헛소리하지 마.”
“우리는 이용당했어.”
“닥쳐, 이 살인마. 뒤질 새끼,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내가 버린 게 아니야. 모두를 대신해서 버려 준 거라고.”
이진현 이사가 물은 적이 있다. 영웅 놀이가 하고 싶었나? 아니, 그럴 리가. 그것은 영웅이 되기 위해 휘둘렀던 위용 있는 칼날이 아니었다. 오로지 신의 패퇴를 기다리다 지친 악의에 찌든 반격일 뿐이다.
“너와 내가 같은 수준의 살인을 저지른 거라 착각하지 마.”
“……이, 시팔, 새끼가…….”
“개새끼, 너는 나를 죽였어야 했어.”
남자의 입아귀에서 뿌드득거리는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소음에 민감한 토끼가 귀를 접으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 까만 눈동자에 촉촉하게 몽글거리는 습기를 보고 품 안의 작은 동물을 잘 고쳐 안아 주었다.
“더러운 남창 새끼.”
하재연과의 관계라도 한껏 비꼬려고 애를 쓰는 놈을 보았다. 무엇이든 진흙발로 밟고 싶어 애를 쓰는 태도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섹스하는 모습을 보면서 흥분했어?”
“걸레 같은 놈, 씨발, 더러운, 창놈 새끼가…….”
“네놈에게도 다릴 벌려 줄까? 같이 교도소에 처박힐래?”
거기서도 내 엉덩이에 관심 가지는 새끼들은 아주 많았으니까! 소리를 지르자 토토가 깜짝 놀라 몸을 펄쩍 뛰더니 바닥에 내려가 풀쩍풀쩍 뛰어 이불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순식간에 허전해진 품 안을 내려다보다 웃었다.
“나는 12년이나 죄를 갚았어. 겨우 너 따위가 지금 와서 죄를 묻기 전에 이미 판사고 검사고 다 끝낸 이야기라고.”
“시팔 새끼, 네가 그렇게 뻔뻔하니까 죽이는 거야. 내가 다 죽여 버려서, 제기랄, 딴 연놈들이 던지는 돌부리에 머리라도 쪼개져서 뒤져야 한다고!”
천박한 말을 떠들 때마다 침이 튀었다. 지저분하고 불결한 몰골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놈은 늘 착각하는 게 있다.
“손 더럽히는 게 싫어?”
“뭐, 뭐?”
언제든 그는 나를 죽일 수 있었다. 사는 곳을 아니까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 칼을 휘두르면 끝이었다. 골목 어귀에서 몸을 숨기고 지켜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처음 찾아왔을 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칼로 명치 아래를 찔렀다면 나 같은 건 금방 죽어 버릴 텐데, 왜 그러지 않았을까?
그저 저놈은 자신의 손을 더럽히기 싫었던 것뿐이다. 신의 사제라도 되는 것처럼 제물을 바치는 것은 서슴지 않으면서, 사탄을 죽이면 오염될까 봐 무서워 죽이지 않는 것이다.
웃기지도 않는 일이다. 똑같은 살인일 뿐인데 어째서 나를 죽이는 것은 죄이고 타인을 죽이는 것은 죄가 아닌가.
“맞잖아. 날 죽이는 게 무서워?”
“아니야! 아니라고!”
“그럼 날 강간할래?”
혓바닥은 더럽다. 언어는 인간이 가진 최악의 무기라고, 달콤한 말로 상대의 속을 썩이는 방법 역시도 감옥의 많은 동거인들이 알려 주었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후려쳐서 타인의 저질스러운 내면을 뜯어내는 것에 쾌감을 배우라고 가르침을 당했다.
“하재연이 부러워?”
창문이 덜컹거렸다. 끈적끈적한 점액질이 장갑을 낀 손과 쇠창살 사이에서 멀어졌다 다시 붙었다. 놈은 흥분하고 있었다. 뇌 내의 지나친 망상에 미쳐 가는 입 모양은 마약 중독자와 동일했다.
“어쩌나, 안 되겠는데.”
허억허억, 거친 숨소리와 함께 창살 위로 얼굴을 처박으며 남자가 사타구니를 비비는 것처럼 몸을 바짝 붙였다
“내가 얼굴을 좀 따져.”
“……이…….”
“교도소에서도 예쁘다고 인기가 많았거든.”
“이, 더러운…….”
“그래, 더럽지. 그래서 못 죽이잖아. 네놈 손이 더러워질까 봐 망설이고 있겠지. 이 치졸한 새끼.”
손을 뻗어 남자를 가리켰다. 거구의 덩치에 하늘이 대부분 가려졌어도 달빛이 밝아 손가락 마디마디의 윤곽까지 확실하게 보였다.
“너는 곧 잡힐 거야.”
“……뭐?”
“다 너를 쫓고 있으니 금방 잡히겠지. 나는 범죄자가 아니야. 복역을 다 끝낸 전과자일 뿐이고, 네 착각과 달리 나는 네 범죄와 전혀 관련 없는 무고한 사람이니까.”
“아니야.”
“나 때문에 죽었다고 말해 봤자 죽인 건 너야. 너는 나보다 더 오래 교도소에 처박혀 썩을 거고, 거기서 뒈지겠지.”
“아니야!”
“교도소 선배님들이 너를 아주 예뻐해 주시지 않을까? 덩치 큰 놈들만 좋아하는 고약한 취향을 가진 새끼들도 많아. 살가죽이 뜯길 정도로 아파 봐야지. 너도 네가 죽여 버린 불쌍한 사람들처럼 길바닥 시체 꼴로 살아야지!”
놈은 떨고 있었다. 뇌가 망가진 놈들의 흔한 착각이다. 사회적으로 나에게 욕이 쏟아지고 있으니, 내 죄가 아니어도 벌을 받을 거라는 근거 없는 착각. 정말로 병신 같은 새끼였다.
앞으로 더 발생할지도 모르는 모방 범죄와 아직도 실마리조차 찾지 못한 경찰을 규탄하는 사회적 목소리가 커지겠지. 경찰은 더 힘을 내서 사람을 풀어 단서 하나라도 건져 내려고 애쓸 것이다. 저렇게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으니 언젠가는 꼬리가 밟히고, 정당한 대가를 치르기 위해 감옥에 처박힐 것이다.
그 옆에 내가 같이 설 일은 없다. 누가 뭐라고 과거를 손가락질하든, 나는 오로지 범인의 잔인한 살인 행각에 휘말린 사람이 되어 불쌍한 척 자기 변론을 하겠지. 그렇게 시끄러운 시간을 보내다 재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업이라는 다른 이유로 죽을지도 모른다.
죽고 나면 내 이름은 언젠가는 모두에게 잊힐 것이고, 연쇄 살인범의 이름만 모두의 기억에 남겠지.
그게 좋은 결말일 수도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사회 어딘가에서 한둘씩 더 죽는 건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미세하게 남은 양심과 상처가 심장 바깥에 튀어나와 있었지만, 나는 놈이 나를 죽일 때까지 무기력하게 팔을 내리고 서 있기만 할 것이다.
“기대되지 않아?”
하지만, 그러면 재연이가 슬퍼하려나.
“……그 전에 나를 죽여 봐.”
죽지 말라는 애원이 말한다. 예정된 결말을 하나라도 바꾸고 싶다면 움직여라, 행동해라, 사지에 먼저 목숨을 내던져라.
“경찰이 네놈을 잡기 전에, 죽여 봐.”
미끼를 던졌으니 기다렸다가 낚아채면 된다. 힘없이 창문에서 떨어져 나가는 불안정한 몸뚱이를 보며 웃었다. 재연에게 미안했지만, 사람은 성질이 나면 끝부터 보는 법이었다. 아니, 나는 원래 그런 성격이었다.
좁고 날카롭게 세운 살기가 따끔거리며 눈두덩이를 찔렀다. 졸음이 쏟아진다. 잘 시간이었다. 이불 속에서 아직도 훌쩍거리는 토토의 등을 쓰다듬어 주고 나도 이불 안에 몸을 숨겼다.
“미안해.”
토토에게 말하는 척, 빈방 안에서 속삭였다.
“미안해, 미안해…….”
생명력이 가장 강한 이 여름이 싫은 것은 처음이다. 어느새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토토를 품 안에 가두고 눈을 감았다. 날름 핥아 오는 축축한 혀 위에 눈물을 숨겼다. 허세를 부렸지만 교도소 안에서도 나는 패배자였고 약자였다. 사회 역시 사람들이 죽은 것은 내 탓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정말로 모든 악행이 내 탓으로 일어난 거면 좋겠다. 그때는 나를 죽여다오.
아무도 미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까, 빨리 시간이 지났으면.
신이 말한 주어진 시간이 얼른 끝이 났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