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기억과 상실
폭염과 가뭄에 다 타 버린 지난번 꿈속의 산과 달리 울창하고 녹음이 우거진 산이었다. 가는 길을 나름대로 매끄럽게 내놓은 산길은 울퉁불퉁한 흙길과 투박한 돌로 만든 계단이 번갈아 가며 이어졌다.
더운 햇살도 깊은 산중에는 맥을 덜했다. 땀을 훔치며 나뭇잎이 우수수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풍경을 한참 바라보았다. 슬슬 해가 지고 있는데 길은 끝이 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러다 산속에서 길을 잃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한 마음에 왔던 길을 내려갈까 생각했다. 그러기엔 뒤로 고개를 돌리기가 이상하게 찝찝해 망설이고 있는데 산 위에서 불빛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통통 튀는 것도 같고, 뚜벅뚜벅 걷는 것도 같이 움직이던 불빛이 이내 목전의 길에서 확연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정갈한 흰옷을 입고 등을 든 동자 한 명이 합장한다. 통통한 볼살과 광택이 흐르는, 윤기 나는 까만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것이 아닌 붉은 눈동자가 자신의 존재감을 주장하고 있었다.
“손님, 길을 안내해 드리러 왔습니다.”
“……어.”
카랑카랑하고 야무진 목소리였다. 어쩐지 익숙한 소년을 한참 빤히 내려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뭔지 알 수 없지만 묘하게 꿈이 아닌 것 같은 꿈이었다.
산에는 이제 안개가 깔리고 있었다. 빛이라곤 하나 없으니 발 아래를 비춰 주는 동자의 하얗고 붉은 등불이 아니면 꼼짝없이 큰일 났겠구나 마음속으로 안도했다.
높게 쌓은 돌계단은 주변에 있는 돌로 아무렇게나 만들어 둔 것처럼 높낮이가 일정하지 않아서, 어떤 것은 아예 손을 짚고 올라가야 안전할 만큼 높았다. 좁고 가파른 곳에 서면 동자는 발치를 조심하라 이르며 부지런히 움직였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짙은 안개 더미를 헤치고 비로소 평지 위에 섰을 때 동자가 한숨을 푹 쉬었다.
“손님, 장히 오셨습니다.”
산꼭대기 위에는 묘지가 있었다. 한두 개가 아니라 수십 개가 자리 잡은 거대한 공동묘지에는 푸른 불꽃이 둥둥 떠 있었다. 귀신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도깨비불 수십이 영혼의 개수만큼 준비된 오싹한 공간이었다. 묘지로 들어서는 길목 앞에는 인자한 관세음보살상이 향과 함께 준비되어 있었지만, 그의 관대한 마음으로도 망자들의 길을 비춰 주기에는 퍽 모자랐던 모양이다.
“저어, 손님.”
“응?”
“뒤를 돌아보지 않아 주셔서 기뻐요.”
수줍은 듯 웃는 어린 미동의 말이 의아해 눈을 동그랗게 떴을 때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자주 들은 것도 아닌데 서주영이나 엔지의 목소리보다 더 익숙한, 아마 과거의 기억이 중첩으로 쌓인 까닭에 더 실체감 있는 소리.
“형?”
“하재연?”
“형이 여길 어떻게 왔어요?”
검은 숲 사이에서 튀어나온 재연이 깜짝 놀란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조금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소개를 해 주려고 했는데 길 안내를 해 주던 동자는 오간 곳이 없이 사라진 뒤였다.
“어, 분명히 누가 데려다줘서…….”
하재연은 확실한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는지 그냥 미간을 살짝 좁힌 채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어쩐지 죄를 지은 기분에 머쓱한 미소를 지으면서 재연을 보았다. 꿈이라는 인지를 분명히 하고 있는데도 현실에서 재연을 만나고 있는 것 같다. 얼마 전에 본 모습과 별다를 바 없었지만, 재연은 이상하게도 비옷을 입고 삽을 두 자루 들고 있었다.
“여기서 뭐 해? 그 꼴은 뭐야?”
“뭘 찾고 있어서요.”
“……공동묘지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웃으면서 재연이 삽을 한 자루 내밀었다.
“이상하게 두 개 들고 오고 싶더라니…… 세상에는 우연이라는 게 없긴 하네요.”
나긋나긋하게 말하고 있는데도 언중유골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헛기침하며 공동묘지를 돌아봤다. 묘지와 삽이라니, 어쩐지 도굴꾼이 된 기분이다.
“맞아요.”
“어?”
“도굴꾼 맞다고요.”
어이가 없었다. 재연은 죽은 사람의 묘를 파내겠다는 끔찍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며 호주머니에서 마스크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마스크를 받아 귀에 걸자 입고 있던 비옷까지 벗어서 입혀 준다.
“진짜 묘를 파는 거야?”
“그럼 묘에서 제사를 지낼까요?”
순간 묘 앞에서 제사를 지내지, 누가 삽으로 파겠냐는 말을 하려다 겨우 참았다. 어차피 꿈인데 성질을 내는 게 더 이상하겠다. 한숨을 푹 쉬며 물었다.
“남의 묘를 막 파도 괜찮아?”
“괜찮아요.”
“무덤에서 산다는 게 이런 말이었어?”
“여기서 사는 건 아니고…….”
설명하기 힘든지 어색하게 말을 얼버무린 재연이 등을 떠밀어 한 사람의 무덤 앞에 섰다.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아직 잔디가 자리 잡지 않은 봉분의 사이사이에는 붉은 흙이 드러나 있었다.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비석에 적힌 글자를 읽어 보려 했지만 재연이 몸으로 교묘하게 가리고 있어 읽을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재연을 따라 삽을 봉분의 중간에 꽂아 넣었다.
범죄를 저지른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 건 꿈이라는 생각 탓이었다. 분명히 토토와 함께 산책을 나갔다 잠들었으니 꿈은 꿈이다. 멀쩡히 현실에서 눈 뜨고 산 아래에 가지는 않을 테니 확실히 꿈이다. 그러나 아주 현실적이었다.
매장된 관을 파내기 위해 쉼 없이 삽을 움직였다. 마스크를 끼고 비옷까지 겹쳐 입고 있으려니 땀이 비 오듯 흘렀다. 한참 삽질하자 무덤이 반쯤 파헤쳐졌다. 흙 사이에서 기어 나온 뱀 한 마리를 삽 머리로 내리쳐 던져 버린 재연이 땅에 삽을 꽂은 후 하늘을 보았다. 언제부터인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더운 숨을 내뱉으며 짙은 회색빛 하늘을 보았다.
차가운 비가 쏟아지니 더위가 좀 가셔 그나마 살 것 같았다. 쉬지도 않고 삽질을 했더니 어깨와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뻐근했다. 한참 흙을 파냈을 때 재연이 멈추라는 손짓을 하더니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
관은 텅 비어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무덤이 텅 비어 있었다. 관을 감쌌던 것으로 보이는 흰색 천 조각은 아직 삭지도 않았건만, 무덤 안은 나뭇조각 하나 없이 흙과 돌만 가득했다. 그렇다면 관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주인 없이 비어 있는 무덤을 한참 보던 재연이 물었다.
“목내이(木乃伊) 알아요?”
“몰라.”
“미라 같은 거예요.”
그런가. 이집트에서 비밀을 밝히다 미라가 잔뜩 쏟아지는 영화는 본 적 있다. 미라 사이에서 도망치는 주인공을 보는 재미가 쏠쏠해 재방송을 하면 놓치지 않고 봤다. 그런데 갑자기 미라 소리가 왜 나오지. 더러워진 손을 털어 내며 재연을 바라봤다. 그가 재차 물었다.
“건예자는 알아요?”
예전에 한 번 들어 본 적 있는 단어다. 분명 십이신장 중 누군가가 나를 죽이기 위해 그런 걸 보내 볼까, 이야기한 기억이 있다.
“몰라.”
“좀비 같은 거죠.”
하재연이 매우 간단하게 설명했다.
“……강시는 알아요?”
“응.”
강시는 영화로도, 문화적으로도 익숙했다. 관 속에서 튀어나와 두 팔을 앞으로 뻗고 콩콩거리며 뛰어다니던 강시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기도 했지만, 공포 영화의 기억 탓인지 어렴풋하게 오싹한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시체가 뛰어다니는 거 아니야?”
재연이 움푹 파인 무덤 안에서 나오며 대답했다.
“네. 그렇죠.”
“재연아?”
“강시가 되었군요. 재밌네요, 한국에서 강시라니.”
삽자루 위에 손을 얹고 있던 재연이 불그스레한 얼굴로 웃음을 지었다. 불쾌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마치 공포 영화에서 이상야릇한 장면의 초반을 보는 것처럼 서늘했다. 전혀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며 짜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얼굴에 머뭇거리다 물었다.
“이거 진짜 꿈인 거야?”
“그럼요.”
태연하게 대답하는 재연을 보며 진실과 거짓이 섞여 있는 질문을 던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재연은 여전히 삽자루 위에 몸을 기댄 채 비를 맞고 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쇠바늘 같은 빗줄기 속에 서 있는 남자를 보며 다시 물었다.
“……내 꿈이야, 네 꿈이야?”
“똑똑해졌네요.”
재연이 빗물에 젖은 손을 아무렇지도 않게 옷에 닦아 냈다. 어느 한쪽이라 대답하지 않고 장난스럽게 말을 돌리는 태도에 답답했지만 점잖은 척 입을 다물었다. 재연이 내 손에서 삽을 빼내더니 거슬거슬하게 살이 벗겨진 손바닥을 조심스럽게 닦아 주었다.
소중하게 대해 준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물어보면 제대로 대답하지 않는 태도는 늘 나쁘다고 생각한다. 침묵이 대가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재연은 지나칠 정도로 말을 아꼈다. 그러고는 쓸모없는 사랑에 대해 떠들기만 한다. 지금의 나로서는 공감이라고는 조금도 되지 않는 미련한 이야기를.
깨끗해진 손으로 재연의 오른쪽 눈가를 더듬었다. 이제 현실에서는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오른쪽 눈은 꿈에서도 반사광 없이 까맣기만 했다. 그림자에 숨은 얼룩 같은 갈색 점을 살며시 짚었다가 놓았다.
“안 보여?”
“그렇죠.”
“꿈에서라도 보이면 좋을 텐데.”
나는 정말 속상해서 한 말인데 재연은 기쁘다는 듯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마음 써 주는 거로 충분해요.”
“…….”
그런 말을 들어도 기쁘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눈을 내리깔고 침묵하자 재연이 짤막한 한숨을 쉬며 어깨를 잡아끌었다.
“……조금 더 올라갈래요?”
“뭐?”
정상까지 올라온 거라고 생각했는데, 안개가 걷히고 난 뒤의 산에는 좁고 야트막한 길이 위로 좀 더 뻗어 있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걷는 것도 좁아 보이는 흙길을 보고 오싹해 어깨를 움츠리자, 재연이 삽을 챙기며 괜찮다는 듯 고개를 횡으로 저었다.
“형이 다칠 일은 없어요. 말마따나 이건 꿈이고…….”
“재연아?”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어요.”
차마 그런 제의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결국 붉은 열기가 후끈후끈 올라오는 손바닥을 꼭 잡은 채 가파르고 좁은 길 안으로 들어갔다. 꼬불꼬불한 길을 걸으며 재연은 소리가 들려도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몇 번이나 다그치듯 이야기했다.
어쩐지 정말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재연의 손을 잃어버릴까 무서워서라도 꽉 붙든 채 물었다.
“귀신을 만나서 세 번 대답하면 영혼을 뺏긴다는 말 있잖아.”
“네.”
“뒤를 돌아보면 안 되는 것도 그런 이유야?”
“아. 뒤를 돌아보는 건…… 뭐라고 해야 하나.”
나무뿌리 하나를 타 넘는 걸 도와주며 재연이 수줍은 듯 작은 헛기침 소리를 낸 뒤에 대답했다.
“잠에서 깨어나거든요.”
“그래?”
“찾아와 줬으니까, 좀 더 오래 있어 주세요.”
하는 행동과는 달리 귀여울 정도로 순수한 티를 내는 재연의 말에 하는 수 없이 웃고 말았다. 같이 있어 달라는 말은 내가 먼저 했지만 들어 주지 않았던 주제에, 꿈에서 같이 지내 달라는 말이 가당키나 한가. 그러나 그 말의 오류를 지적할 수 없어서 말없이 한참 그 더운 손을 잡고 정상의 정상까지 걷고야 말았다.
한 시간이나 두 시간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그것보다 더 짧을 수도 있고, 더 길 수도 있다. 산속이라 분간이 가지 않는 시간을 소비하며 걸었다. 재연은 봉긋 솟은 봉우리 같은 곳에서 멈추고는 내 몸을 훌쩍 들어 바위 위에 올려 주었다. 평평한 바위에 걸터앉아 안개에 꿰인 것 같은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멀리 인가들이 잔뜩 몰려 있는 게 보였다.
“불빛이네.”
“오늘은 축제가 있으니까요.”
“축제?”
“가뭄을 해결하기 위해 제물을 바치는 거죠. 동이 틀 때 시작할 거예요. 저기 봐요, 높은 화형 터.”
하재연이 손가락으로 높은 산 위에서도 보일 정도로 거대한 나무토막의 탑을 가리켰다. 커다란 나무 말뚝이 중간에 박힌 곳을 보자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가뭄인데, 왜 제물을…….”
“신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서요.”
제물이 산 채로 태워질 제단에서 손가락을 뗀 재연이 새로운 곳을 가리켰다.
“강을 보세요. 이미 3년 내내 비가 오지 않아 물이 바닥까지 줄었어요. 이대로 가면 다 굶어 죽으니, 신의 화를 잠재우기 위해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죠.”
고저 없는 목소리를 듣고 있다가 그의 흰 뺨을 올려다보았다. 재연이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걸어 올라오는 것도 힘들 정도로 높은 산의 정상, 신의 분노를 원망하고 때로는 두려워하며 제물을 바치는 어리석은 인간들. 머뭇거리다 강을 가리킨 차가운 손을 잡아 아래로 내렸다.
“죄송하지만.”
갑작스러운 존대에 하재연이 의아한 얼굴로 옆을 돌아보았다.
“……신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그가 후련한 얼굴로 웃었다.
재연의 모습을 하고 있던 남자의 외관이 천천히 변했다. 입고 있는 옷은 여전히 현대의 옷차림이었지만, 늘어트린 긴 검은 머리카락과 섬뜩할 정도로 하얀 얼굴은 여전히 자연의 기준점을 닮아 있었다.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추상적인 외모였다.
그의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바람이 퍼져 나왔다. 신은 조금 신기하다는 기색으로 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하재연은 불행을 그렇게까지 관조하진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타인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이나 우울함을 지나칠 수는 있지만, 그 과정에서 감정을 아예 배제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화합하여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삶에서 가르쳐 왔기 때문에.
특히 산 아랫마을의 거대한 불행과 희생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사람은 이렇게까지 무디게 반응하는 경우는 잘 없을 것이다. 마치 그는, 그러니까 신은…… 인간들이 당연한 벌을 받고 있다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으니까.
짧은 말 한마디였지만 알아들었는지 신이 쓰게 웃었다.
“그래, 그렇군.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인간이 아니니 흉내가 고작이지.”
“인간이면서도 인간 흉내를 내며 사는 사람도 많은걸요.”
초월적 존재가 마치 인간이 어렵다는 것처럼 이야기해서 어색하게나마 위로를 해 버렸다. 조금 민망해져 괜히 옆머리를 긁적이며 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검은 눈동자는 신기한 빛을 띠고 있었다.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정신없이 쳐다보자 신이 가볍게 웃으면서 손바닥으로 내 눈을 가렸다.
“눈을 보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늘 듣지 않는구나.”
“……상냥하시네요.”
그의 의중이 어떻게 되었든, 신은 내게는 꽤 다정한 척 굴었다. 눈을 주의하라 이르는 것도 두 번째이다.
서늘한 손바닥을 감히 잡아떼며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 신발에 작은 돌 하나가 채여서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졌다. 바람이 불었다. 건조한 바람이었다. 가뭄이라는 것은 사실인지 밤에도 날은 타는 듯 더웠고, 메마른 공기는 들이마시기만 했는데도 폐가 쩍쩍 갈라지는 듯했다.
신이 옆에 서서 인세를 가리키며 조금 전까지 하던 설명을 계속했다.
“1년간 비가 오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가뭄 자체는 3년째 이어지고 있지. 비가 내린 경우가 손에 꼽을 정도이니 민심은 이미 엉망이란다.”
“그래서 제물을 바치는 건가요?”
“그래. 인간들은 우습지. 우리는 아래 권속조차도 함부로 내놓지 않거늘,”
“인간이 제물입니까?”
“소, 돼지는 재산이다. 그러니 인간을 올리는 거지.”
차가움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였다. 신은 인간을 경멸하고 있었다. 이때까지 내게 다정했던 것이 이상할 정도로 그는 발아래에서 벌어지는 광란의 화형을 냉소적으로 바라봤다.
“누가 죽나요?”
“……계집이지.”
“여자요?”
“그래. 아들은 대를 이어야 하니 딸을 죽이는 것이다. 대대로 제물은 모두 여아였지.”
“너무하네요.”
끔찍할 정도로 차별적인 발언이다. 너무 멀어서 잘 보이진 않지만 저곳은 현대와는 많이 떨어진 옛날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신이 옆에서 손을 뻗어 안개를 걷어 냈다. 그의 손짓 몇 번에 떨어져 나가는 희끗희끗한 구름 무리를 보았다.
“하지만 생각처럼 쉽진 않겠지.”
“왜요?”
“비는 그래도 내리지 않을 테니까.”
“당신께서 그러시는 건가요?”
“그래.”
신은 인간의 멸망을 바라고 있었다. 얼굴에 담긴 스산한 욕망을 읽었다. 눈을 계속 보면 좋지 않다는 경고를 들었는데도 그 얼굴에서 시선을 떼어 낼 수 없었다.
그는 지금도 인간을 너무나 미워하고 있었다. 어째서?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었는지 신이 아래를 바라보던 시선을 들어 내 뺨을 한 번 쓰다듬었다.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길이었다. 뼛속까지 식어 버리는 기분이다.
“오래전부터 인간의 멸망을 바랐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어째서요?”
“결국 이 세상은 신과 인간이 공존하고 있으니까. 인간이 죽고 나면 나 역시도 권위와 영세를 잃어버리겠지.”
“당신은…….”
“죽일 수 없노라면 인간을 사랑해 보고 싶었다.”
처음으로 그의 목소리에 온도가 깃들어 있었다. 허리를 굽혀 아래를 다시 한번 바라보며 신이 입술을 동그랗게 말아 휘파람 소리를 냈다. 아득하게나마 보이던 발밑 아래 인세가 모여든 구름에 가려졌다.
발치는 어둑어둑했고, 머리 위로 드리워진 별은 총총히 빛나는 꿈결 같은 세상이었다. 정말로 꿈이긴 하지만.
“그래서 시도했고, 나는 실패했다. 궁금했지. 왜 실패했을까……. 의아하고 궁금해 무던히 노력하고 갈등하면서, 답을 찾기 위해 긴 세월을 보내다 너를 만났다.”
“……저요?”
“그래, 너.”
“저를 사랑하세요?”
그 두서없는 질문에, 신은 조금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웃음 지었다. 어렴풋이 과거의 그리움을 살피는 빛에 마음 한구석이 먹먹해졌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늘 도와주시니까요.”
고통이 차올라 죽어 갈 때 살려 줄까 물어보던 다정하고 잔인한 음성을 기억한다. 절절한 듯하면서 부드럽던 그 오묘한 기색을 알고 있다. 몇 번이나 살려 주었고, 도와주었다. 토토에게 씌여 있던 악령을 지운 것도 그가 한 일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신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아니.”
“다행이네요.”
하재연만으로도 벅찹니다. 농담처럼 진심을 말하자 신이 푸스스 힘없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널 사랑하는 건 그 아이지, 내가 아니다. 하지만 관찰하고는 있단다. 너와 그 아이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궁금하구나.”
“왜 하필 저희입니까?”
수많은 연인이 사랑으로 목숨을 버리기도 하고 가족을 버리기도 한다. 전 세계를 뒤지면 우리보다 더 절절한 사랑을 하는 이들이 많을지도 모른다. 신이 꼭 나와 하재연에게 집착할 필요는 없을 텐데도, 우리는 선택받았다. 이상한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밤바람에 흩어지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북두칠성이 크게 빛나고 있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밤이었다. 여름의 하늘은 낮았고 색이 짙었다.
“인간 하나가 규칙을 교묘하게 어기고 눈을 피해 이야기했다지.”
“……?”
“그 애는 신이 될 운명이었다.”
신은 재연과 무당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아, 갑자기 무당의 독한 목소리와, 칼날 같은 태도와 비례하는 다정한 걱정이 그리워졌다. 무사할까, 장군신이 지켜 주고는 있지만 벌을 피할 수 있을까. 무당이 말할 때마다 흔들리던 신당을 생각하며 마음이 무거워졌을 때 신이 재차 읊었다.
“천 년이 무색하다. 2천 년도 넘게 돌고 돌아 마침내 찾아낸 영혼이었다. 인간이자 인간이 아니었으며, 신이 되기에는 불완전해 이번 삶을 거치고 나면 나에게 돌아올 아이였다.”
“……신의 후손은 아니라고…….”
“후손은 아니야.”
그는 미운 표정을 지었다. 하재연을 매우 싫어하는 태도를 남김없이 드러내며, 한숨을 한 번 쉬었다. 보지 말라고 했잖니. 그는 아이를 꾸짖는 것처럼 손끝으로 내 눈꺼풀을 톡톡 두들겼다. 바닥으로 눈을 내리 깔자 신이 다시 말을 이었다.
“운명을 그렇게 타고난 것뿐이지.”
“그럼, 재연이는…….”
“신이 될 자가 겨우 인간 하나로 천명을 버릴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신이 노한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그의 마음에 화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산과 하늘이 진동했다. 마른하늘에 벼락이 떨어지자 인간들이 슬피 우는 아우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겨우 너 같은 것에게 그리 마음을 줄 거라 믿고 싶지 않았다.”
“제가 미우십니까?”
“아니.”
여전히 노한 음성으로 신이 속삭였다.
“네게는 감정이 없다. 하나 그 아이는 아끼지 않는다.”
“어째서요?”
“너무 인간적이니까.”
“…….”
“똑같은 과오를 반복해서 저지르는 너희 인간들을 내가 사랑해 줄 이유가 무엇인가?”
이미 신이 말하는 사랑은 너무나도 이성적인 것이었다. 그는 초월적 존재였고, 재연이 하는 이기적인 사랑은 알지 못했다.
“충동적인 것으로도 모자라 홀로 인간이자 신의 행세를 동시에 쥐고 나에게 대드는 그것을 사랑할 수 없다.”
신이 재연에 대해 분노에 차 설명하는 것을 듣고 깨달았다. 신은 재연의 사랑을 증오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재연이든 나든, 홀로 시간을 돌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소원을 들어준 것은 신이면서 틀린 선택을 했다고 원망하는 모순적인 존재를 바라보며 또 한 번 물었다.
“제가 여기서 만난 것은 처음부터 당신이었나요?”
“아니.”
“그럼 언제부터?”
“이곳에 올라오던 사이에 바꿔치기했지.”
그가 불쾌한 얼굴을 지우며 슬며시 웃었다. 내가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듯 손으로 얼굴을 어루만지고 이마 중앙에 입술을 붙이며 귀애했지만, 마음에 와 닿지는 않았다. 이미 더운 체온을 가진 존재를 알았기 때문이겠지.
손장난을 치는 것처럼 한참 어루만지던 신이 이내 떨어져 나가며 중얼거렸다. 닿았던 곳이 칼에 베인 것처럼 쓰라렸다.
“절대 알아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한 장난이에요.”
“그러게, 오래 살다 보니 이런 것도 즐기게 되는구나.”
손으로 세는 것도 어려울 만큼 긴 시간을 보내 왔을 존재는 말이 없었다. 한참을 서 있으니 다리가 아파, 다시 바위 위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아래를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다. 모여든 구름 아래 하염없이 아름다운 불빛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멀리서도 눈에 띌 정도로 커다란 불꽃이 하늘하늘 용의 승천처럼 흔들렸다. 제물이 불에 타고 있으려나.
액막이. 하재연이 나를 위해 선택했던 단어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재액을 대신 받으며 내 생명을 연장하려고 애를 쓰던 그 힘겨운 얼굴. 여전히 재연이 무엇 때문에 시간을 돌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오로지 신이 말한 대로 사랑과 비슷한 어떤 이유가 있을 거라 추측만 할 뿐이었다.
눈을 감은 채 바람을 즐겼다. 숲 안에서 바깥으로, 허공에서 숲 안으로 휘몰아치는 바람은 상쾌한 상록수의 향을 가지고 있었다. 여름에 피어나는 꽃향기가 섞여 있다.
옆에 선 신이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오래된 것 같은 곡조였다. 반복되는 느릿느릿한 흐름을 따라 허밍을 따라 넣었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요.”
마음을 잠시나마 편안하게 해 주던 음악이 뚝 끊겼다. 바람도 잠깐 멈춘 고즈넉한 산 정상에서 신이 손끝으로 하늘의 저편을 가리켰다. 말없이 그 손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풀 한 포기 없는, 죽은 자의 땅이 보였다. 황폐한 땅은 메말라 있었고 바위와 붉은 흙 사이로 검은 강이 흘렀다.
“곧 저 강에 갈 것이니 뱃사공을 위한 삯을 준비하렴.”
“거의 끝인 모양이네요.”
“아마도.”
물결이 넘실넘실 흔들린다. 저 멀리 검은 물이 뱃전을 두들기는 게 신기하게도 생생하게 보였다. 나룻배 위에 앉아 노를 쥔 노인이 손을 흔들흔들 저으며 이리 오라 불렀다. 이리 와라, 이리, 나에게…… 얼른……. 홀리는 것 같은 목소리에 얼른 머리를 흔들어 상념을 떨쳐 냈다.
“시간을 돌린 대가가 생각보다 크네요…….”
“네가 수많은 윤회를 반복하며 쌓아 올린 운과 복록은 대가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나름대로 착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늘 인간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하지만 끝에 가서 깨닫는 것이다. 자신 역시도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경고를 들었지만 그때 나는 충동과 갈증에 목이 타는 듯 뜨거웠었다. 거리낌 없이 불타는 분노와 욕망에 신의 손을 잡았었다.
“솔직히 나조차도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단다.”
신은 신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희생이나 타인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욕망이나 분노가 판단을 어떻게 파꾸는지. 대가가 얼마나 크든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은 놀라울 정도이다. 바라든 바라지 않았든, 염원을 들었노라 말하며 불길을 헤치고 신이 나타난 것은 일반 사람이 겪기 힘든, 환상 같은 일이었으니까.
“역시 기대하게 되려나.”
“……무얼요?”
“후회나 기적.”
무당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하재연도 그런 이야기를 했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이미 기적을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그러나 희망적인 단어는 아니었다. 신이 한 번 더 읊었을 때에는 정말로 불행한 기적을 말하는 것 같다는 착각마저도 들었을 정도다.
모든 사람이 나를 보고 인간으로서는 지기 힘들 만큼 커다란 업을 졌다고 말했다. 그사이에서 기적이 이어진다면 어차피 운이라고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세상을 힘겹게 계속 살아가는 것뿐이니 불행한 기적이 아닐까. 우울하게도 그런 생각을 했다.
“무엇이든 좋다. 보여 주렴, 인간답게 너희들이 운명에 패배하거나, 또는 기적처럼 살아남는 것 전부.”
“……신께서는…….”
저 아래서 타오르는 불에 산소가 잡아먹혔는지 목이 갈라졌다. 마른침으로 혀뿌리까지 적시고 목에 힘을 주었다. 이렇게 노력하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을 만큼 속의 애간장이 답답했다.
“자비로우시군요.”
“내가 그런가.”
그렇게 생각한다. 신은 인간을 지독하게 싫어하고, 하재연의 인간적인 면모 역시도 끔찍하게 미워하면서도 인간적인 선택을 들어 주고 있었다. 신이라는 존재는 다 이런 것일까. 인간에게서 태어난 존재를 신으로 만드는 것 역시, 어느 정도 이 위대한 자에게 인간을 향한 호의가 조금이라도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본인이 더욱 지친 얼굴로 내 손을 잡아 주었다. 차가운 신의 손에 조금이나마 온기가 돌고 있었다.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겨주며 신이 눈을 맞춰 왔다. 검고 푸른 회색빛이 섞여서 흔들거리는 눈동자를 하염없이 보았다. 눈이 아프진 않았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그의 눈동자는 색이 변했다.
“이미 너무 많이 틀어졌는데도 끝의 끝까지 걸어왔으니 결국 변하는 것도 생기지 않겠니.”
“저희가 행복해지긴 할까요.”
“그럼.”
신이 웃었다. 자신감을 가지라는 것처럼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의 속이 냉정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미 한 번 이루었으니 어려울 것 없다. 물론 해결이 잘되었을 때의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게 뭐야. 불가능한 상황을 이야기하는 신에게 화를 낼 수도 없어 어정쩡하게 웃어 버리자 신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자, 내가 너를 잠깐 뺏었다고 화가 많이 난 것 같으니 돌려주도록 할까.”
신이 갑자기 바위에 앉은 몸을 뒤로 밀치며 배웅하는 것처럼 손을 흔들었다. 팔을 신을 향해 뻗은 채 그대로 산 아래로 추락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폭우가 쏟아졌고, 무덤을 파헤치느라 묻은 진흙이 씻겨 내려갔다. 장대비에 흠뻑 젖어 가는 시야 사이로 신이 웃었다.
「이미 옛날에 연이 끝나 버린지라 같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짧은 시간 안에서도 운명은 변화하고 있으니…….」
안녕, 아가.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아기를 부르는 것처럼 신이 작별 인사를 고한다. 그의 시간은 얼마나 남았는지 물어봐야 했었다. 좀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더 많이 알고 싶었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잔뜩 굴러떨어졌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보면 안 됩니까, 입을 벌렸지만 빗물이 들어찼을 뿐이다.
눈을 뜨자마자 빠알간 눈동자와 마주쳤다. 석류 알갱이를 콕 박아 둔 것처럼 반질거리는 눈이 방긋 웃는다. 꿈 한번 시원하군. 벌써 해가 지기 시작한 방 안에서 누운 채로 중얼거렸다. 가슴팍 위에 올라타 있던 토토가 움찔거리더니 앞발로 꾹꾹이를 했다. 초롱초롱한 눈동자와 쫑긋 솟은 귀를 보고 등을 슬슬 쓰다듬어 주었다.
“그거 너냐.”
낑, 토토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더 매만져 달라고 몸 위에서 마음대로 굴렀다.
“꿈에서 도굴이라니, 너무 험악한 장르잖아…….”
바라는 대로 온몸을 슬슬 쓰다듬어 주며 푸념하자 토토가 들은 척도 안 하고 손안에서 어리광을 부렸다.
처음 꿈속에서 길을 헤매기 직전에 마중 나왔던 동자는 아마 토토가 아니었을까. 인간의 귀를 하고 있었지만 토끼 귀가 붙어 있는 모습도 분명 잘 어울릴 거 같다. 그나저나, 토토는 살이 이렇게 쪘는데 왜 그 동자는 날씬했지. 의심스러운 눈으로 토토의 늘어진 뱃살을 노려보며 주물럭거리자 토토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다가 기어이 손가락을 물었다.
완전히 삐졌는지 얼굴을 숨기고 웅크린 모습을 보다 기어가 먹이통에 들어 있는 당근 몇 조각을 꺼내 줬다. 그러니 완전 백치가 된 얼굴로 먹이를 와삭와삭 씹기 시작한다.
“너 계속 이렇게 먹으면 진짜 토끼 통구이로 만들어 버린다.”
덜떨어진 지능을 지적하자 토토가 늘어진 채 당근을 씹다가 우뚝 멈췄다. 불안하게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는 모습이 매우 귀여웠다. 재연이를 만나게 해 주는 건 좋지만, 신까지 만나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 존재를 보면 괜히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죄를 지은 것도 없는데 이상한 기분이다.
음산하게 웃으면서 통통하게 살 오른 몸 이곳저곳을 쿡쿡 찌르며 괴롭혔다. 토토가 겁을 집어먹고 와들와들 떨었다. 그 와중에도 끝도 없이 당근을 씹고 있는 걸 보니 정말 잡아먹히고 싶은 모양이다.
“영물이니까 먹으면 수명 연장에 도움이 되려나.”
토토가 기어이 입에 물고 있던 당근을 후드득 뱉었다. 넘겨짚은 말이 사실인 모양이다. 오, 대단한데. 작은 몸을 들어 올려 가죽을 어떻게 벗기면 잘 벗길 수 있을까 고민에 빠졌다. 보슬보슬한 토끼 꼬리를 툭툭 치면서 겁을 주자 토토가 거의 울먹거린다.
“토끼가 스트레스에 약한 동물이라는 거 알고 그러는 거예요?”
귀에 익은 목소리에 번개가 친 것처럼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아직 해가 덜 진 초저녁인데 재연이 서 있었다. 노을이 타오르는 것처럼 붉었고, 날이 더워서인지 재연의 뺨도 불처럼 뜨거워 보였다.
손가락으로 리듬을 타는 것처럼 창을 툭툭 치며 재연이 웃었다. 숨기려 한 것 같지만 더운 날씨만큼 불쾌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아주 멀쩡해 보이네요.”
분명히 신은 재연이 화가 났다고 말했었지……. 눈앞에서 바꿔치기 당했으니까 저 정도로 참는 것도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음, 뭐. 덕분에?”
“남은 속이 무너지는데 자기는 데이트나 즐기고.”
“데이트라니…….”
전혀 아닌데, 강제로 데이트가 되어 버렸다. 욕심 많은 심술꾸러기처럼 얄미운 말을 하는 재연을 보며 난처한 웃음을 흘렸다.
“내가 일부러 따라간 것도 아닌걸.”
“알아요. 그러니 더 화가 나는 거지.”
“나 참.”
부스럭거리며 이불을 걷어 내고 일어났다. 너무 오래 잤는지 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비틀거리는 몸에서는 축축한 땀 냄새가 났다. 흔들리는 골을 붙잡으며 토토를 먼저 창틀에 올려놓고 밥상을 밟고 섰다. 재연과 어느 정도 눈높이가 같아진 뒤에야 잠긴 창문을 열었다.
손가락으로 잠깐 재연의 뺨을 건드려 보았다. 뜨거웠다. 신이 재연의 얼굴을 하고 있을 때는 그렇게 차가워 보이더니, 지금은 뜨거운 기운이 와글와글 뭉쳐져 있는 것 같다. 역시 다르다. 이렇게 다른데 왜 신은 알아채지 못할 거라 이야기했었을까.
“무덤은 왜 파고 있었어?”
“천성이 도둑놈이라서?”
“천성 좋아하시네.”
하재연은 도둑질이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다. 기분이 안 좋다고 미운 말만 신중하게 골라서 떠드는 것 같은 모습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더운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훔쳐 올리며 재연은 예쁘게 뻗은 손가락으로 내 짓궂은 장난에서 구원받은 토토를 쓸었다. 덕분에 목숨의 위협에서 벗어난 토토가 골골거리며 귀엽게 애교를 부리자 재연이 입에 손끝을 물려 주며 잠깐 놀아 주었다. 둘의 사이좋은 모습을 보고 있다 물었다.
“옷은 왜 그런 차림이야?”
하재연은 까만 옷을 입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정장이었다. 검은 넥타이와 아래위로 맞춰 입은 검은 정장. 상복이다.
옷차림을 지적당한 재연이 잠깐 망설이다 손을 잡아 왔다. 깍지 껴 오는 손가락 마디마디가 뜨겁고 열이 잔뜩 올라 있었다. 상기된 뺨을 하고서는 재연이 말했다.
“……저랑 어디 좀 갈래요?”
“어딜?”
설마 무덤이니 어쩌니 하는 이상한 곳으로 데려가는 건 아닐까. 걱정도 잠시였다. 최대한 어두운 옷을 입으라는 말에, 눈치를 보다 카페에서 일할 때 입는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었다. 넥타이도 재킷도 없어 망설였지만 재연이 시간이 없다며 재촉해서 그냥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토토는 가방에 넣어 버렸다.
답답한지 가방 안에서 부스럭거리며 요동치는 토토를 어르고 달래며 집을 나섰다. 하재연은 가는 길에 아무 옷 가게나 들어가 검은색 카디건과 넥타이를 사서 내밀었다. 재킷이 아닌 카디건을 보며 물었다.
“왜 카디건이야?”
“이게 좀 더 실용성 있으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별스러운 이유였다. 망설였지만 재연은 꿋꿋하게 재촉했다. 결국 가격이 얼마인지도 모르는 카디건을 주는 대로 입고, 셔츠에는 넥타이를 매고 다시 걸었다. 남자 두 명이 상복을 입고 걸어가자 사람들이 가끔 흘끗흘끗 쳐다보며 속삭였다. 더운 여름에 시커먼 옷을 입으니 을씨년스러워 보였을지도 모른다.
재연은 중간에 택시를 잡아탔다. 어느 대학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재연은 카드로 택시비를 계산하고는 지하에 위치한 장례식장에 들어갔다. 입구에 들어섰을 뿐인데 벌써 숨 막히는 귀기로 몸이 떨렸다. 본능적으로 재연의 팔을 붙들었다. 재연이 괜찮다는 듯 어깨를 살짝 두드려 주고는 구둣발 소리를 내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
모세의 기적이라도 보는 것처럼 귀신들이 양옆으로 쭉 갈라졌다. 재연이 멍청하게 서 있는 나를 잡아끌며 설명했다.
“여긴 사람이 너무 많이 죽어서…… 저도 다 쫓아낼 수는 없어요. 조금만 참으세요.”
“알았어. 그런데 장례식장은 왜? 누가 돌아가셨어?”
불안한 마음이 올라왔다. 넘실넘실 차오르는 물결 같은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묻자 재연이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부고를 받았어요.”
“누구?”
“……어머니요.”
“…….”
무언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첫인상이 영화처럼 남아 있는 여성이었다. 다친 재연의 병실에 찾아와 다짜고짜 핸드백을 휘두르던 그 완고한 표정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말 한마디 없었는데도 악을 쓰는 것처럼 재연의 머리를 밀치고 때리던 그 불행한 기색의 여성이 죽었다고. 좀 더 힘을 줘서 재연의 팔을 잡았다.
재연은 양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친어머니는 아니라지만, 그래도 거두고 키워 준 사람인데 이렇게 있어도 되는 걸까. 상주는 누가 보는 거지. 질문하지 않았지만 대답을 재촉하는 것처럼 손을 잡아끌자 재연이 옆을 돌아보며 웃었다.
“외삼촌이 상주세요. 어머니의 유언이었어요. 저한테 상주 맡기지 말아 달라고.”
“……왜?”
“절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으니까요.”
“아버지는?”
“아프셔서 아직 병원에 계세요. 오래 버티시는군요. 너무 급하게 몰아넣었나.”
버틴다니. 오싹한 말이었다. 마치 그의 아버지가 죽기를 바라는 것 같은 말투에 손에 줬던 힘을 조금 풀자, 재연이 다시 손을 고쳐 잡으며 안쪽에 있는 장례식장을 찾아 들어갔다. 이미 장례식장 안에는 몇 팀의 사람들이 교자상 앞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재연이 나타나자 조금 소란스럽던 이야기 소리가 뚝 끊겼다. 친척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죽은 여자의 소중한 아들이 아닌, 귀신을 보는 것처럼 꺼리는 기색이었다. 재연은 아무렇지도 않게 한쪽에 비치된 소독 젤로 손을 한번 닦고는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삼베로 만든 상복을 입고 있던 나이 든 남자가 곡소리를 내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외삼촌.”
“…….”
“고생하시네요, 감사합니다.”
예의상으로 한 인사인데도 외삼촌이라는 남자는 못 들을 것을 들은 사람처럼 한차례 부르르 떨었다. 재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향을 하나 피우고 절을 두 번 했다. 허겁지겁 재연을 따라서 절을 하고 일어났을 때 조의금조차 준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장 기본적인 예의를 잊다니. 민망한 마음에 허둥지둥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며 봉투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는데 재연이 등을 떠밀었다.
“괜찮아요. 이제 나가요.”
“재연아.”
“여기 있어도 좋을 거 없으니 가요.”
부드럽게 말하고 있었지만 완곡한 명령에 가까웠다.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외삼촌 되는 사람을 향해 엉거주춤 묵례하고는 바깥으로 나왔다. 가장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자 일하는 아주머니들이 상을 차렸다. 재연이 수저를 쥐여 주고는 직접 소주와 맥주를 가져왔다.
양어머니였고, 사이가 조금도 좋지 않았다고는 해도 이 정도면 심각할 정도였다. 남보다도 못한 조의의 표시에 밥술을 뜨다 말고 입술을 씹었다.
재연은 가방 안에서 답답함에 미쳐 가던 토토를 꺼내 방석 위에 올려놓고, 술안주로 내주는 당근 조각을 몇 개 부러트려 앞에 놓아 주었다.
“안 먹어요? 육개장 맛이 꽤 괜찮다던데.”
“너는?”
“전 괜찮아요.”
먹으라고 손짓을 하는데 거절할 수 없어 국에 밥을 말아 입에 넣었다. 온종일 굶었더니 그래도 배가 고팠는지 꾸역꾸역 음식이 들어간다. 한심해서 조금 번잡한 마음으로 얼얼해진 입술을 핥으며 앉아 있자 재연이 빈 그릇을 치워 주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연이 완전히 주방 안에 들어갔을 때, 기다린 것처럼 사람들이 요란하게 혀 차는 소리를 내며 떠들었다. 가만히 고개를 숙인 채로 멀리서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 언니한테 저거 빨리 갖다 버려야 한다고 이야기했는데.”
“그렇다고 입적한 애를 어떻게 다시 파양해. 그거 입양했다고 좋게 보는 사람들 많았으니 은희야 눈치 보여서 버리지도 못한 거지.”
“아무리 그래도 고아잖아. 씨도 모르는 애를 아들이라고 끼고 살더니, 저것 좀 봐. 머리 좀 컸다고 형부 앓아눕자마자 싹 돌변해서 언니 죽어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거. 솔직히 형부랑 성이 같지만 않았어도 눈에 띄지도 않았을 애 아니야.”
“어렸을 때는 그래도 엄마 엄마 하고 따랐다며?”
“그러니 더 끔찍하지. 솔직히 말이야, 요즘은 대학생쯤 되면 모르는 거 없다며? 나는 가끔 형부 아픈 것도 쟤가 뭐 한 거 아닌가 싶어. 은희 언니 돈이 좀 많았어? 재산이…….”
수군거리는 목소리들은 재연이 다시 나오자 뚝 끊겼다. 재연은 어머니 쪽 친척들로 보이는 사람에게 신경도 쓰지 않고 돌아와 앉았다. 안주가 담겨 있는 접시를 잔뜩 테이블 위에 올리고는 소주 뚜껑을 딴다.
“신경 쓰지 마세요.”
쓰지 않을 수가 없는데, 재연은 불가능한 이야기를 하며 술을 따라 주었다. 억지로 잔을 받아 한 잔 막 삼켰을 때, 조금 다급하게 뛰는 소리가 들리더니 장례식장에 엔지가 나타났다. 연락을 받고 급하게 왔는지 숨까지 헐떡거리고 있었다. 화려한 옷이 아닌 평범한 옷을 입은 엔지는 처음 본다.
신발을 벗고 올라온 엔지가 재연과 나를 발견하더니 화색을 띠면서 다가왔다. 한 번 재연의 손을 꽉 잡아 준 엔지가 절을 하고 오겠다며 안으로 들어갔다. 가방 안에서 꺼내 든 흰 봉투를 보자 또 마음이 무거웠다.
“조의금, 나도 내야 하는 거 아니야?”
“괜찮아요.”
“그래도 예의가 있는데…….”
“엔지는 힘이 있으니까, 분향하고 명복을 빌어 주면 좋은 기운을 받아 떠날 수 있어요. 그런데 형은…….”
말을 다 끝내지는 않았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어 쓴웃음을 지었다. 재연이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안주 접시를 밀어 주었다.
“형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그런 상황에서 조의금을 주면 더 재수가 없어요.”
“재수가 없다니.”
“조금이라도 가릴 건 가려야죠.”
“그럼 장례식장도 오면 안 되는 거 아냐?”
“그건…….”
하재연이 불편한 웃음을 지으며 소주를 직접 따라 마셨다. 맨 정신에 하기 힘든 이야기라도 되는 것처럼 거푸 술을 들이켠다. 빨리 마시면 안 좋다고 말려야 하나 망설이는데 엔지가 다가와 그의 등을 툭 쳤다. 재연이 술을 따르다 말고 엔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재연 씨, 괜찮아?”
“그럭저럭.”
“……그래. 나도 술이나 한 잔 줘.”
“음복부터 해.”
“응.”
새로 온 손님을 확인하고는 아주머니들이 식사를 내왔다. 육개장에 숟가락을 담그며 엔지가 더위가 조금 가신 듯 한숨을 쉬며 식사를 시작했다. 한 그릇을 다 비우기를 기다린 뒤 재연이 곧바로 술잔을 내밀었다. 빈 그릇을 옆에 치우고 엔지가 조심스럽게 소주를 바로 비웠다.
그 뒤로는 오징어채나 땅콩, 편육 같은 걸 중간중간 입에 넣으며 말 없는 음주가 계속되었다. 소주병이 금방금방 늘어 갔지만 오간 말수는 적었다. 엔지는 끝도 없이 좋은 곳에 가실 거라는 말만 계속했다.
막 저녁 11시를 넘겼을 때 엔지가 술에 취해 붉어진 얼굴을 하고는 중얼거렸다.
“이제 어쩌려고?”
“모르겠어.”
“재연 씨 혼자서 하기 힘들잖아.”
“알아.”
알아듣지 못할 이야기였다. 졸음이 고이는 눈꺼풀을 힘겹게 뜨고, 신중해 보이는 둘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다 물었다. 아까부터 생각하던 이야기였지만, 취하기 전까지는 물어볼 용기가 안 나 참고 또 참은 궁금증이었다.
“재연아.”
“네?”
“그 무덤 주인이…… 어머니셨어?”
관조차도 사라져 텅 비었던 무덤. 만든 지 얼마 안 되어서 축축하고 습기가 가득하던, 뿌리 덜 내린 잔디의 녹색.
엔지가 작게 기침 소리를 냈다. 에어컨을 틀어 준 장례식장은 조금 추울 정도였다. 카디건을 벗어서 엔지에게 건네주며 재연의 눈을 보았다. 그의 눈은 꿈에서 본 신과 비슷하게 오묘한 빛을 띠고 있었다.
“네.”
“…….”
“저 때문에 돌아가셨죠.”
“어, 하재연, 윤이원.”
적막 사이를 가르고 끼어든 목소리에 재연의 눈을 피해 앞을 보았다. 신발장에서 구두를 벗다 만 주영이 손을 흔들었다.
서주영은 아무렇지도 않게 묵직한 공기를 깨트리고 성큼성큼 걸어와 재연의 등을 툭 두드렸다. 브리프 케이스를 옆에 떨어트린 주영은 별다른 말도 없이 안쪽 방에 들어갔다. 아마 절을 하고 나오겠지. 단단한 질감의 브리프 케이스를 챙겨 옆에 밀어 놓자 신기한지 토토가 걸어가 앞발을 톡 소리 나게 올렸다.
“하재연, 아까 그 이야기…….”
“나중에 할까요.”
재연이 손가락을 들어 입술에 붙이며 그린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엔지가 짧게 콜록대는 소리를 내며 찬물을 마셨다.
절을 마친 주영이 자연스럽게 건너편에 앉았다. 재연이 수저통에서 수저를 챙겨 내밀었다. 육개장과 밥을 받으며 주영이 맥주부터 한 잔 쭉 마셨다. 후우, 급한 것을 내려놓는 것처럼 길게 숨을 뺀 주영이 숟가락을 국에 담그며 혀를 찼다.
“분위기가 영 아니네.”
“호상은 아니니까요.”
그래, 아직 젊은 여성이었다. 잘 관리한 몸매와 피부는 물론이고, 손끝까지 곱게 단장한 모습을 떠올리면 갑작스러운 죽음이 더 의아스러운 일이었다.
재연이 앉은 테이블이 꽉 차자 주위에서 쏟아지는 눈총은 조금 더 심해졌다. 아무리 피가 섞이지 않은 양어머니라지만, 눈물 한 방울 흘리지도 않고, 상주 역할도 맡지 않은 채 지인들과 멀거니 앉아 술만 마시는 꼴이 정상적으로 보일 리도 없었다.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는 것은 재연도 마찬가지구나. 아득하게 그런 생각을 하며 주영에게 술잔을 건넸다.
“어쩌다가? 이런 거 물어도 괜찮아?”
이미 물어 놓고, 주영이 뒷말을 붙이며 술을 마셨다. 덤덤한 말투였다. 어차피 주영도 재연과 양부모의 관계가 꺼림칙하다는 건 알고 있었던 모양인지 별다른 감정은 없어 보였다.
“혈액 부족으로 온 쇼크요.”
“혈액 부족?”
“쓰러진 채 발견되셨는데, 몸에 피가 하나도 없었다고 하네요.”
괴담처럼 오싹한 이야기였다. 주영은 비위가 상하지도 않는지 아무렇지 않게 밥을 퍽퍽 떠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섭네. 오늘 잠 못 자겠다.”
전혀 무서워 보이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다. 어이가 없어 눈을 조금 찡그린 채 피식 웃자 주영도 덩달아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엔지가 소주잔을 앞으로 뻗으면서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두들겼다. 주영이 밥을 먹다 말고 술을 마셨다. 건배는 없었지만, 건배나 마찬가지인 행동이었다.
누군가가 죽었고 그 장례식장에 애도를 표하기 위해 모였지만 아무도 진심으로 슬퍼하지 않았다. 가끔 엔지는 카페에 온 진상 손님 이야기를 했고, 요즘은 더워서 컵케이크나 쿠키 대신 차가운 젤리나 푸딩이 더 잘 나간다는 사소한 이야기를 했다.
서주영은 요즘 회사 분위기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예의 그 사장이 연애를 제대로 시작하면서 부하 직원들이 다 안정적인 퇴근은 물론이고 위장약 복용도 그만두었다는 그런 말들.
중간중간 사업 이야기가 나오며 이진현 이사에 대한 말도 덩달아 튀어나왔다. 사업상 자주 부딪치고는 있었지만 별다른 사적인 터치는 없었지만 딱 한 번, 나의 안부를 물었다는 말에 재연이 대신 불편한 한숨을 쉬었다. 아니, 이진현이 불편하기보다는 술기운이 올라와 속이 불편해졌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요즘에는 안 부딪쳤지.”
최근 이진현 이사와는 만날 일이 없었다. 처음, 아니 두 번째로 엔지의 카페에서 만났던 밤에 혹독한 일을 겪었더니 자연스럽게 그자와 만나면 꺼림칙한 기분을 받았다. 이성을 반 토막 냈던 밤을 기억하고 있는지 재연이 천천히 입꼬리만 올려서 웃고는 술을 마셨다.
새로 받아 온 오징어와 떡, 전 같은 걸 잔뜩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엔지는 그렇다 치고, 남자가 세 명이다 보니 받아 와 먹는 음식만 해도 끝이 없었다. 편육 하나를 입에 가져가며 슬쩍 앞에 앉은 재연을 보았다. 입 모양으로 왜요, 하고 묻는다.
“강시.”
“응?”
“아니야.”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저편의 세상에서 재연이 텅 빈 무덤을 보며 강시라고 이야기했다. 강시라니, 귀신도 모자라서 강시가 쫓아와 죽이기라도 한다는 건가. 한숨 대신 호박전 하나를 입에 넣었다. 엔지가 옆에서 슬금슬금 김치전 하나를 집어 먹었다. 배도 부르고 졸린지 눈을 느릿느릿하게 깜박거리고 있었다.
마지막 한 병 남은 소주병을 끝끝내 딴 주영이 내 잔을 채워 주며 이것저것 안주를 앞에 밀어 준다.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쳐다보니 뺨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대답했다.
“하루 만에 왜 이렇게 살이 빠졌냐? 꿈에서 정기라도 빨렸어? 좀 먹어라.”
“…….”
서주영은 날카로운 것인지 얼빠진 건지 모를 인간이다.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망설이다 기름기 범벅의 전이나 주는 대로 얌전히 받아먹었다. 배는 진작 불렀지만 술이 안주를 부르는 까닭에 꾸역꾸역 들어간다. 한참 잡담을 나누던 엔지와 재연이 동시에 젓가락질을 멈췄다. 갑자기 분위기가 서늘하게 변했다.
엔지가 어깨를 재빠르게 움츠리더니 핸드백을 다급하게 뒤져 작은 통 하나를 재연에게 내밀었다. 무언가 붉은 액체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최고급 경면주사(鏡面朱砂)*야.”
“고마워.”
한쪽 팔로 머리를 받친 채 주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일반인은 아예 모르겠지만, 배운 게 있다 보니 눈치껏 뭔지 알아볼 수 있었다. 부적을 적을 때 쓰는 물감이다. 재연이 재킷과 와이셔츠 소매를 같이 걷어 올리고는 나를 손짓으로 불렀다. 영문을 몰라서 고개를 갸웃하자 재연이 눈웃음을 지었다. 꿍꿍이가 시커멓다 못해 불온하게 보인다.
“뭐야?”
대신해서 주영이 물어본다. 겉모습만 보면 시뻘건 물감을 검지에 묻히면서 이상하게 웃고 있는 정신병자다. 하재연은 대꾸 없이 고개를 젓더니 재촉하듯 또 한 번 손짓했다.
“빨리 와요. 시간 없으니까.”
“뭘 하려고…….”
투덜거리면서 얼굴을 들이밀자 재연이 깨끗한 손으로 흘러내린 앞머리를 정리하고 드러난 이마에 경면주사로 무언가를 적어 넣었다. 눈을 깜박이면서 재연의 손끝을 읽어 내려고 노력했다. 옆에서 의아한 얼굴로 보고 있던 주영이 대신 글자를 읽었다.
“상청? 상청이 뭔데?”
“뭐, 이름쯤?”
재연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엔지가 건네준 물티슈로 더러워진 손가락을 닦았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갑자기 일회용 마스크를 하나 꺼내 다짜고짜 착용시켰다. 코와 입을 딱 닫고 있으니 숨 쉬기가 답답해 저절로 얕은 호흡만 하게 된다. 어쩐지 익숙한 상황이다.
뭔가 알 것 같아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자 서주영만 혼자 고개를 갸웃했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모를 것이다. 깔끔하게 싹싹 비워져 나간 공간과, 당근도 뱉어 버리고 내 가랑이 사이를 파고 들어와 오들오들 떠는 토토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낯익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여전히 왁자지껄했다. 시간이 점점 늦어지면서 많은 손님이 자리를 잡고 앉았지만, 저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두 손으로 토토를 감싸 안으며 막 마루 위로 올라온 자들을 보았다.
검은 소매 안에서 두툼한 장부를 꺼낸 저승사자가 목만 쭉 빼내고 코를 킁킁거렸다. 더러운 냄새라도 맡았다는 것처럼 창백한 인상이 더럽게 구겨졌다. 하재연이 불쾌하다는 듯 손을 휘둘렀다. 서주영만 영문을 모르고 주변을 빙빙 둘러보다 답답해 미칠 것 같은지 입을 열었다.
“야, 갑자기 왜 그래? 어라, 이상하게 춥네. 뭐 귀신이라도 있나?”
“……주영 씨 되게 똑똑하다.”
엔지가 틀린 단어를 사용했다. 멍청한 거라고 지적해 주고 싶었지만 눈치가 있는 탓에 말도 못 하고 눈만 데구루루 굴렸다.
“장례식장에 귀신도 많을 텐데 왜 이렇게 다들 쫄아 붙었어? 아, 뭐 저승사자라도 왔어?”
서주영은 자기가 말해 놓고 웃긴지 테이블을 치면서 웃었다. 옆에 서 있던 저승사자가 덜떨어진 벌레를 보는 얼굴로 주영을 쏘아보았다. 재연이 웃음을 참으면서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아직 덜 지워진 경면주사가 손톱 끝에 남아 있는 게 보였다.
“참으세요. 일반인이라 보지 못하니.”
「죄인은 말이 없다.」
저승사자 세 명 중 맨 오른쪽에 선 하나가 입술을 떼어 토하는 것처럼 서슬 퍼렇게 면박을 주었다. 하재연은 전혀 거리낌이 없다는 얼굴로 웃기만 했다. 엔지가 약하게 헛구역질을 하며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갑자기 저런 것들이 몰려오니 영 속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피부가 따끔따끔하게 쓰리고, 공기가 물렁거리는 푸딩이 된 것처럼 숨 쉬기 힘들다.
오로지 주영과 재연만 멀쩡해 보였다. 한 명은 몰라서 용기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아는데도 미쳤는지 용기가 넘쳤다.
“편안하게 죽은 사람만 데려가시지 왜 오셨을까.”
「죄인은 말을 허락받지 못한다.」
“나는 죄인이 아닙니다.”
하재연은 겁대가리를 완전히 상실한 모양이었다. 보는 사람, 아니 보는 저승사자 입장에서는 완전히 눈이 돌아갈 만큼 뻔뻔한 얼굴이었다.
“그들이 운이 나빠 저를 선택했습니다. 그것이 제 죄입니까?”
「질이 나쁘다. 그러니 너에게도 죄를 물어 데려갈 것이다.」
“제 어머니는 이미 죽었습니다. 피가 전부 빨려 인간이 아닌 것이 되었으니 살아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수명이 남은 것을 죽이고, 수명이 떨어진 것을 살려 놓으랴.」
「이미 인간이 해선 안 될 짓을 몇 번이나 행하였는데, 명부의 왕이 너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무례하고 오만한 것, 이번에도 또 우리 차사들의 임무를 방해하려 약이 바짝 올랐구나.」
왼쪽 편에 선 자가 눈만 뒤집듯 굴려 이곳을 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괜히 움찔해서 고개를 살짝 숙였다. 품 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토토를 몇 번 얼러 주자 차사가 영물이라고 중얼거리며 창백한 입술을 벌려 앓는 소리를 냈다.
“나는 죄가 없습니다.”
하재연은 차사들의 화난 목소리를 가로지르고 제 할 말만 던졌다. 입을 딱 다물고 소주를 따르는 모습에 저승사자들이 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분노의 기색을 남김없이 보였다. 가만히 젓가락 끄트머리를 입에 물고 있던 서주영이 눈을 굴리다 떨떠름하게 물었다.
“쟤 혼자 무슨 소리냐.”
서주영의 눈에는 재연이가 혼자 떠들고 있는 꼴로 보였을 테다. 망설이다 주영의 앞에 놓인 빈 잔에 소주를 콸콸 따라 주며 얼른 마시라고 손짓을 했다. 엔지가 눈치 좋게 얼른 끼어들었다.
“나중에 알려 줄 테니 일단 마셔요.”
“응? 왜? 왜요? 나만 왕따시켜?”
주영이 잔을 비우면서 또 헛소리를 한다. 짜증스러워 입 안에 안주를 쑤셔 넣고 빈 잔에 소주를 콸콸 부어 넣었다. 주량이 약한 놈이라 몇 번 반복하자 눈이 풀려서는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한참 의식이 저편으로 멀어져 가는 모양이다.
주영의 묵직한 몸을 질질 끌어다 구석의 벽에 기대게 해 놓고 재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도 저승사자와 끔찍한 대치가 이어지고 있었다. 무슨 대화를 했는지 분위기는 더 흉흉해져 있었다.
“증거를 가져오세요.”
「증거라니, 장부와 다른 날에 사람이 죽어 나자빠진 것이 증거다!」
소리를 지르는 저승사자를 보고 재연이 눈을 찌푸렸다.
“죽인 자는 당신들보다 위에 있는 섭리들입니다. 누구 하나를 죽이고 싶어 미쳐 날뛰는 것이 그녀를 데려갔으니 그리로 가서 물어보십시오. 벌을 받아야 하는 자가 과연 누구인지 말입니다.”
「말이 고약하다. 감히 인간 주제에 신을 들먹이고…….」
“그럼 내가 틀린 말을 했습니까?”
「감히 누구에게 대드는가! 그 죄를 물어 불지옥에 떨어트릴 것이다.」
“저승사자씩이나 되어서 사람을 겁박하는 게 취미인가?”
조금 소리 나게 술잔을 내려놓으며 재연이 음울한 미소를 지었다. 반쯤 내려깐 눈에서 어둑어둑한 빛이 보였다. 다 탄 재처럼 회색이었다.
“나는 오로지 운을 팔았을 뿐이다.”
「이런, 지독한 놈……!」
“누구 하나가 운이 없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조차 제대로 살지 못할 것 같아, 부득이하게 내 양부모의 운이라도 팔아 치워 보태 주었을 뿐이다.”
「그것이 수명을 판 것과 무엇이 다른가!」
세 명이 합창하듯 비명을 질렀지만, 정작 비명을 지르고 싶은 것은 이쪽이었다. 엔지가 옆에서 손을 꼭 잡아 왔다. 눈이 갈증에 물을 들이켜는 사람처럼 허겁지겁 고정된 곳을 바라보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토토가 손가락 끝을 물어 왔다. 아프지 않았다. 손가락이 아닌 다른 곳이 아프기만 했다. 심장이나, 뇌나, 눈이나 몸의 어떤 한구석이.
무슨 짓을 한 건가. 하재연이, 저게 사람인가.
윤이원을 살리기 위해서 제 부모의 운을 팔아 죽게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 말을 하는 재연에게는 죄책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
“관계없지. 운은 사람이 세상을 편안하게 사는 데 필요한 것이고, 그것이 없다고 꼭 수명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재수 없게 죽을 확률이 커질 뿐이 아닌가.”
「네가 농간질을 하지 않았다면 87세까지 장수할 운명이었다.」
“늙기 싫다고 말했으니 이게 효도일 수 있지.”
꼬박꼬박 말대답을 하는 하재연의 얼굴은 소름 끼칠 만큼 인간 같지 않아 보였다. 재연아, 그러면 안 돼. 이름을 불러 그를 말리고 나쁜 말을 쏟아 내는 입을 틀어막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눈이 핑핑 돌았다.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잊어버려 시리고 따가운 통증이 반복해서 찾아들었다.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면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안타깝지만 그 정도의 장난질이 내 수명과 바꿀 것은 아니다. 오늘도 허탕을 쳤으니 면이 안 서겠군. 그래도 돌아가.”
「네가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으냐?」
“나를 용서할 것은 네놈들이 아니야.”
하재연이 나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눈이 마침내 감겼다. 눈물이 잔뜩 고인 눈 위로 눈꺼풀이 덮이자 눈물이 좀 더 줄줄 흘렀다.
“감히 너희들이?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한심한 것들이 나를 용서하고 말고를 어떻게 논하지?”
시큰거리는 눈이 한창 진정할 때까지 어둠 속을 허우적거리다 눈을 다시 떴을 때, 재연은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나를 용서해도 될 사람은 네놈들이 아니야…….”
완전히 만취한 사람처럼 몇 번이나 그 말을 중얼거린 재연이 고개를 들었을 때는 누가 봐도 억지웃음으로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억장이 무너진다. 재연이 저지른 끔찍한 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뭐라고, 도대체 그 후회나 사랑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다고 천륜을 어기고 양부모를 마음대로 팔아 치워 수명보다 일찍 죽게 만들었는가.
이 인연 사이에서 엮인 사람은 도대체 몇 명인가. 이딴 의미도 없는 행위를 계속해 나간다는 이유로 나는 왜 고통받아야 하는가.
온갖 폭언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너무 많은 말이 섞여 입이 막혀 버린 게 다행일 지경이었다. 토토가 그러지 말라는 것처럼 앞발로 손등을 긁어 댔다. 아, 죽고 싶다. 이게 다 뭐야.
머리라도 처박고 싶어 한참 어지러운 심장을 쿡쿡 때렸을 때 이글거리는 눈으로 재연을 쏘아보던 저승사자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사라졌다. 엔지가 긴장이 풀렸는지 벽에 등을 기대고 옆으로 쓰러졌다. 토토가 귀를 쫑긋 세우고는 그쪽으로 뛰어갔다. 걱정이 된 모양인지 킁킁거리며 숨소리를 확인한다. 마음을 쓰는 몸짓이 예뻐 보였는지 엔지가 토토를 품에 안고 몸을 웅크렸다. 규칙적으로 가슴팍이 오르내린다. 정말로 잠든 건지, 자는 척하는 건지 모르겠다. 서주영도 벽에 기댄 불편한 자세로 코를 골고 있었다.
초록색 유리병 밑에 조금 고여 있는 소주를 멍하니 바라보다 물었다.
“재연아, 그만할래?”
눈앞에 지쳐 앉아 있는 남자는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입에 남아 있는 소주 맛은 찝찝했다.
“제발 그만하자.”
왜 장례식장에 데려왔는지 알겠다. 그녀는 나로 인해 죽었으니까, 그런 꼴을 당했으니까 와서 명복이라도 빌어 주지 않으면 또 업을 받을 것이다. 하재연의 모든 행위는 한 사람을 위해서였다. 타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재연 본인조차도. 그래, 본인조차도.
저승사자의 말은 모두 옳았다. 죽었어야 하는 건 하재연이고, 나였다.
하재연이 테이블 위로 몸을 쏟듯이 밀었다. 달칵하고 무거운 테이블이 밀리는 소리가 났다. 눈길이 쏟아지는데도 재연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비틀거렸다. 연신 마른침을 삼키다 말고 일어나 늘어진 팔을 잡아당겼다. 여기서 계속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순순히 따라 일어난 재연이 남아 있는 조문객에게 의례상 인사를 건네고는 슬리퍼 하나를 꿰어 신었다. 만취한 것처럼 비틀거리는 몸을 한쪽 어깨로 받치고 병원 건물을 완전히 빠져나왔다. 에어컨 바람이 빵빵하게 불어오던 건물 안에서 나오자 더운 열기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재연이 숨을 들이켜더니 어깨를 밀치고 떨어져 나가 나무둥치를 잡고 고개를 숙였다.
곧바로 구역질을 시작하는 재연의 등을 두드려 주며 미리 챙겨 나왔던 생수를 따서 내밀었다. 하재연은 충혈된 눈으로 겨우 물병을 받아 입을 헹궜다. 몇 번이나 마시던 물을 뱉어 내며 토하고, 또 입을 헹구기를 반복했다. 보는 사람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하재연의 괴로운 몸짓은 계속되었다. 결국 다시 장례식장에 들어가 물과 입가심할 사탕을 챙겨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계속된 토악질에 지쳤는지 벤치 하나를 잡고 늘어진 재연이 더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차가운 물에 얼굴과 손이 흠뻑 젖어서는 온몸이 축축했다. 얼굴이 달뜬 것처럼 붉어져 있다. 열이 나는지 끙끙 앓는 소리를 낸다. 불쌍한 이마를 짚어 주다 아직 내 이마에 적어 둔 글자를 지우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생수에 손을 적셔 닦아 내자 붉은 물감이 손에 물들었다.
물기를 툭툭 털고 대충 닦아 낸 손으로 재연의 뺨을 매만졌다. 여전히 뜨겁다. 재연이 기운 없이 느릿느릿 손을 올리다 영 다른 곳을 짚고는 떨어진다. 초라하게 비어 있는 그의 손을 한참 내려다보다 남은 손으로 꽉 잡아 주었다. 하재연은 아직도 물건을 종종 잘못 건드려 떨어트리곤 했다. 외롭게 남은 한쪽 눈 때문에.
“……원이 형…….”
조그만 목소리에 어쩔 수 없이 귀를 기울이게 된다. 연약해 보이는 모습은 재연이 어릴 적을 그대로 생각나게 했다. 이미 몇 번이나 어지럽혀져 더러워진 기억이지만, 울음을 터트리던 어린 시절만큼은 잊을 수 없다.
더워도 추워도 늘 함께 복도를 걸었다. 똑같이 손을 나란히 잡고 한 발, 한 발 맞춰서 걸었다. 지치거나 힘들어하면 업어 주었다. 가끔 재연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형의 입술에 물감이 묻었다며 덜 지워진 립스틱을 닦아 주곤 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나를 좋아했다. 나만 보면 울다가도 입술을 꼭 악물며 울음을 그치던 고집스러운 아이의 애교를 아꼈었다.
하지만, 옳지 않은 일은 하지 말라며 혼내기도 많이 혼냈다. 나이 터울이 비슷한 아이들이 잔뜩 모인 고아원에서 맏형 노릇을 했으니 저절로 엄해졌다. 이 꼴이 나기 전에는 분명 잔소리를 달고 살았었다. 정말로 양심 없는 짓은 하지 말아라 그렇게나 혼을 냈었는데…….
“하재연.”
열이 오르는지 물기가 말라 갈라진 재연의 입술에서 쌔액, 하는 숨소리가 들렸다.
“사랑의 크기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아?”
누가 물어본다면, 이런 행위를 저지른 이상한 사람에게 나의 전부를 다 바쳐 사랑할 것이냐 물어본다면, 결코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내 복록을 파는 것으로도 모자라 타인의 운까지 끌어다 처박아 쓰는 비이성적인 행위를 나는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 대답하겠다. 그것이 필사의 사랑도 아니고 하재연이라는, 어쩌면 뜬금없이 이 삶에 내던져진 인물이라면 더더욱 발길을 돌릴 것이었다.
그렇게 하는 게 옳았다. 이런 평형 따위 없는 사랑이라면 일찌감치 끝내야 덜 상처받는다. 오로지 한곳만 보고 있으면 시선이 부딪치고 뒤틀려 깨져 버린다. 아, 조금 더 일찍 마음을 접어 버릴걸. 지독한 후회에 몸을 웅크렸다.
재연이 눈꺼풀을 들어 올리더니 엄지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꾹 눌렀다. 연약한 점막이 치아에 눌린다. 아프다.
“네, 맞아요. 차이가 있다는 걸 알아요.”
“…….”
“형의 사랑이 더 크죠.”
그럴 리가 없는데. 눈을 깜박거렸다. 재연이 입술 안쪽을 벌리고 손가락을 넣었다. 생수에 몇 차례나 젖었던 손가락은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무색무취의 향이다.
“알고 있죠?”
“뭘.”
“……미안해요.”
두서없는 사과였다. 정신없는 머리를 긁어 대는 두통에 눈이 찌푸려졌다. 자연스럽게 눈물이 떨어진다. 혀끝을 슬쩍 건드리고 손가락을 빼낸 재연이 한숨을 쉬었다.
“울지 마요.”
“……안 울어.”
“내가 잘못했어요?”
“아니.”
“내가 잘못했구나.”
사람 말을 듣지도 않고 재연이 혼자 상처받는다. 재연의 머리카락과 턱을 잡아당겨 입술을 붙였다. 마른 입술과 달리 축축하게 젖어 있는 입 안에서는 싸구려 딸기 사탕의 단맛이 났다.
바깥이었고, 언제든 사람이 이쪽으로 올지 모르는데 정신을 놓고 엉겨 붙었다. 침이 가득 고였다. 치아와 혀를 가득 훑고 빨아 대는 입술을 정신없이 문지르며 재연의 뜨거운 목덜미를 잡았다.
골이 뒤흔들린다. 눈앞이 어지럽고 눈물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더운 열과 숨을 한 번에 밀어 넘긴 것처럼 몸이 달아올랐다. 재연이 이를 세워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번갈아 깨물었다. 아플 정도로 꾹 깨물고 난 뒤에는 혀로 샅샅이 핥아 온다. 더웠다. 입 안에서 끈적거리며 녹았던 사탕처럼 미끄러져 내릴 것 같았다.
“흐, 으음…….”
호흡이 뒤섞인다. 젖은 셔츠를 말아 올리고 재연이 허리에 손을 올렸다. 뜨겁고 뜨거운 게 달라붙었다. 아, 등을 굽히며 재연의 뺨을 힘껏 잡아 쥐었다. 어느새 벤치 위에 똑바로 앉은 재연이 위에서 내리 쪼는 것처럼 강하게 입술을 맞춰 왔다. 젖은 입술에서는 끔찍할 정도로 질척거리는 소리가 났다. 귀를 때린다, 감각과 피부를 때린다. 시각과 후각, 청각을 자극했다. 키스가 이렇구나, 하재연과 하는 스킨십은 이런 거구나. 늘 느끼면서도 또 새삼스럽게 다시 느끼는 것이다.
매달리는 것처럼 주저앉아 재연의 목에 매달렸다. 흐으, 우는 것처럼 힘껏 숨을 들이켠 재연이 거친 숨을 훑어 내며 목 위로 이를 드러냈다. 펄떡이는 혈관을 정확하게 꽉 짓누른 치아가 뜨거운 피부를 가를 것만 같았다. 아. 재연을 쥔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목덜미를 한참이나 짓씹고 떨어져 나온 재연이 백지처럼 하얀 웃음을 지었다.
“나는요, 앞으로도 더 많이 팔아 치울 거예요.”
“하재연.”
“얼마든지 팔 수 있어요. 어차피 이건 내 업이니까 형과는 관계도 없어요.”
자살을 대신해 주겠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조리도 두서도 없는 말을 들었더니 이성이 헝클어졌다.
“그리고 시간을 벌어서, 최대한 잔뜩 모아서…….”
형형한 눈동자 속에는 그늘이 있었다. 전에는 저 눈에 별도 있었고 태양도 있었는데, 너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겨울처럼, 밤처럼 산재한 검은빛이 가득한 재연의 눈을 넋을 잃고 보았다.
“당신이 제대로 살 수 있도록.”
알아요? 겨우 마지막이었는데, 형은 나 때문에 끝을 내지 못했어요.
속삭임은 짧았다. 두 팔을 쭉 뻗으며 재연이 웃기만 했다. 입술 끝에 걸린 조각난 마음이 흩어져 바닥에 곱게 깔렸다.
“나는 그렇게까지 살고 싶지 않아.”
목소리가 떨렸다. 이렇게까지 많은 것이 망가질 거라 예상했다면 시간 따위 돌리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시간을 돌리고 원장을 죽인 후 곧바로 자살했을 것이다. 망설임 없이 신이 나를 포기할 때까지 목에 칼을 찔러 넣었겠지.
맞아, 원래는 죽으려고 했었다. 공포와 후회, 분노가 질척거리도록 쌓여서 살고자 하는 의지는 이미 없었다. 막상 자살이라도 하려니까 아프고 무서워서 불을 질렀다. 다 타서 뼛조각만 남은 시체가 된다면 괜찮을 것 같아서. 그 뜨거운 불에 감싸이면 혼자여도 외롭지 않을 것 같아서.
굳은 뺨이 녹았다. 마음도 업화의 불꽃에 녹았다. 흐물흐물 녹아 진창길에서 강이 된 마음에 상처가 바윗돌이 되어 가라앉았다.
“살고 싶을 때도 있었어. 죽었을 때, 고통스러웠을 때…….”
재연은 그 아픈 강기슭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흠뻑 젖어 발장난을 친다.
“하지만 나는, 나는 정말 누군가를 희생시키며 살고 싶진 않았어.”
손으로 마음을 떠낸 것처럼 텅 빈 곳을 들어 보여 준다. 형, 이거 봐요. 물고기를 잡았어요.
고아원 근처에 있던 작은 개울에서였나. 산업 폐수가 흘러 들어가기 전까지는 맑았던 물에서 다 같이 논 적이 있었다. 그때는 행복했나?
“네가 줘도 받지 않을 거야.”
“윤이원.”
“운이고 나발이고,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나는 왜…… 내가 왜 시간을 건넜어?”
기억이 산산이 조각난다. 뇌 끝까지 예쁘게 짜 맞춰져 있던 퍼즐이 신발에 밟혀 우두둑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우르르 쏟아지듯 나를 끌어안은 하재연의 몸이 내 상체 전부를 짓이기고 있었다. 흙바닥에서는 젖은 비린내가 났다. 몰래 버린 담배꽁초가 군데군데 흩어진 것도 보였다. 작은 개미 한 마리가 불빛 언저리를 미친 듯이 맴돌았다.
“살아, 제발, 살아. 아니야, 제발 제대로 살아. 잘, 잘 살 수 있었잖아.”
화를 내는 재연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비켜, 하재연. 무거워. 이거…… 좀…….”
“나랑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기적으로 살아 볼 수 있잖아!”
재연이 고함을 질렀다. 귓가 바로 앞에 찢어지듯 터진 음성이 마음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멍한 정신을 붙들고 얼굴을 보았다. 재연은 이를 악물고 울음을 참으려 했지만, 온통 일그러진 눈에서는 쉴 새 없이 눈물이 툭툭 떨어진다.
양어머니가 그렇게 돌아가셨는데도 죄책감 한 톨 없이 울지도 않더니 지금 와서 울고 보챈다. 어린아이처럼 소리를 지르고 떼를 쓴다. 몸만 컸지, 정신은 하나도 자라지 않았다. 나도 하재연도 마찬가지로…… 어떤 시간의 기점을 빙글빙글 돌고만 있는 것이다.
“이렇게는 살아도 사는 게 아니잖아! 평생 조심하고, 평생 저승사자들과 싸우고, 툭하면 저쪽 세상에 끌려 들어가고!”
나는 주먹으로 재연의 어깨를 힘껏 때리고 밀치며 똑같이 고함을 질렀다. 분노로 맞물린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내 몸이, 내 손이 너를 떨어트렸어. 기억해? 내가 네 눈 한쪽까지도! 뺏었잖아!”
이렇게 소리를 지르면 누군가가 달려올지도 모른다. 호모의 치정극을 보았다며 당장 뺨을 올려붙이고 침을 뱉을지도 모른다. 몸의 마디마디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저렸다. 비틀거리는 재연의 몸을 밀쳐 내고 멱살을 잡았다. 그대로 진창이 된 흙 위에 쓰러져 울었다.
“재연아, 재연아…… 도대체 뭘 후회하는 거야…….”
고르지 못한 숨 중간중간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잇새로 불충분한 산소를 미친 듯이 빨아 당겼다. 하재연이 더러워진 손을 어설프게 닦고는 내 눈물을 훔쳐 준다. 슬픔을 덜어 내는 것처럼 몇 차례나 계속.
“당장 내일 죽으면 중요할 게 뭐가 있어. 내가 괜찮으면 그게 전부 아니야?”
“맞아요.”
“그런데, 왜…….”
“하지만 욕심이 나잖아.”
앓는 목소리와 함께 등이 끌어안겼다. 더위로 숨이 턱턱 막혔다. 본의 아닌 몸싸움에 땀으로 온몸이 축축하게 젖었다.
“원래 모든 생명은 다 죽어요.”
비탄에 젖은 몸.
“하지만 다 생명의 규격을 맞춰서 살아가요.”
이기적인 희망.
“본래 형이 가졌어야 할, 크고 넓은 삶이 작아져 손톱만큼 남아 버렸을 때가 기억나요.”
일관된 사랑.
“슬펐죠. 절망적이었어요.”
등 뒤에 둘러진 팔에 점점 힘이 들어간다. 심장이 저릿하게 눌렸다.
“나는 그게, 원장 선생님의 탓이라곤 생각하지 않아요.”
깜박. 눈꺼풀이 저절로 움직였다. 안겨 있어서 재연이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원장의 탓이 아니면 누구의 탓인가. 그가 그런 끔찍하고 잔인한 행위만 저지르지 않았다면 시간 따위 돌리지 않았을 거다. 오로지 나를 죽여서, 그렇게 배신해서 시간을 돌렸……는……데…….
“제 잘못이죠.”
“네가 뭘 잘못했는데. 너 잘못한 거 없어. 재연아, 왜 그런 말을 해.”
하재연은 지독하게 후회했다. 마치 내가 그로 인해 죽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후회하고 또 후회한다고 했으며, 미치광이처럼 열성적으로 업을 덜어 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미치지 않았으면 피가 섞이지 않은 양부모라 할지라도 마음대로 운과 복을 팔아 버리지 않을 것이다. 흙의 수분도 마르지 않은 무덤을 가책도 없이 파지도 않았을 것이다. 강시가 되었다는 그 여인은 언제 어디서 나타나 재연의 목을 잘라 버릴지 모른다. 무섭다. 모르는 사실들이 너무 많다는 건 증오의 일종이었다.
“다요.”
“…….”
“아마,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사실 약속 따위 쓸모없다는 건 안다. 처음 한 가장 크고 무거운 약속은 재연이 스물이 되면 사귀기로 한 것이고, 두 번째는 원장과 자수하러 가자고 했던 것이다.
“그게 만약, 정말로 네 탓이라고 해도.”
이번에도 유명무실한 허세가 될 거라고, 스스로 인지하면서도 입술은 예쁘고 달콤한 말을 떠든다. 저 다 무너진 탑과 같은 남자를 위로해 보겠다고.
“원망 안 해. 아니, 내가 노력할게.”
하재연은 말의 차이를 알겠지. 무조건적인 면죄부를 주지 않은 나는 비열했다.
“사귀자고 했잖아.”
입 안에는 여전히 딱딱한 싸구려 알사탕의 단맛이 남아 있다. 진하고 끈적거리는 단맛이다.
“재연아, 이야기해 줘…….”
눈이 찡그려진다. 가로등 불빛이 너무 밝았고, 우리는 새카만 색이었다.
의미 없는 약속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재연은 그 얄팍한 위로에 희망을 품고 있었다. 악몽을 꾸고 일어난 아이처럼 몸을 덜덜 떨며 재연이 가슴팍 위에 뺨을 비벼 댔다. 쪼그라든 어깨를 꽉 안아 주자 재연이 갈라진 목소리를 몇 번 힘주어 냈다. 끈기 있게 기다리자 천천히 문장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조심스러운 말투, 소극적인 감정의 표출. 초점이 연신 사납게 바뀌는 눈동자.
“내가 형을, 아니, 그러니까…….”
“하재연, 천천히 이야기해.”
뺨을 어루만지며 몇 번이나 이름을 불러 봤지만, 재연은 얼없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흔들었다. 완전히 정신이 나간 모양이다. 두개골이 쪼개질 것 같은 고통을 참으며 재연의 늘어진 상체를 대충 끌어당겨 벤치에 앉혀 주었다.
축 늘어진 몸을 가다듬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무겁게 처진 몸 위로 졸음이 쏟아진다. 밤은 점점 더 깊어져 가고 있었다. 고요한 가운데 주변에 늘어진 귀신들이 가끔 빼빼 마른 팔을 들어 올리며 끽끽 울었다.
재연이 쇳소리를 내며 귀신들을 밀쳤다.
“몰랐어요. 몰라서, 형이 죽었어요.”
“…….”
“다 알게 되었을 때는 후회했어요.”
불안정한 호흡 탓인지 심장을 움켜쥐고 또 한참 헐떡거리던 재연이 갑자기 강시, 그 낯설고 끔찍한 단어를 중얼거렸다. 꼿꼿하게 서 있는 시체. 그런 게 이 야밤에 뛰어다니면 난리가 나겠지. 하재연은 자신을 키워 준 양어머니의 얼굴을 한 괴물을 보면 무슨 반응을 보일까.
“강시는 왜?”
“그건…… 형을 찾아갈 거예요.”
“그렇겠지. 나 때문에 죽은 셈이니까.”
“아닌데, 저 때문인데.”
파리하게 질린 낯빛의 재연이 웃었다. 웃을 일이 아니라 정말로 그 정도쯤은 예상하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귀신도 나를 죽이겠다고 설치는 판국에 한두 개가 좀 더 달려들어 붙는다고 무서울 게 뭐가 있을까.
사람이 아닌 것에는 익숙했고, 그것들은 원래 두려움을 느끼도록 만들어진 것들이니 상관없다. 걱정하는 것은 재연이 숨기고 있는 사실이다. 저 쓸모없이 늘어놓는 말 사이사이에 가려져 있는 불편한 진실. 조심스럽게 재연의 입술에 손가락을 올렸다 떼어 냈다. 죄를 짓는 재연의 입.
“너는 다르다고 했었지.”
“네?”
“업을 마음대로 쌓아도 좋다고,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게 해 주겠다고 했잖아.”
놀이터에서 꼬마 귀신을 처음 만났을 때, 그 아이가 재연을 가리키며 친하게 지내라 일렀다. 너는 누구냐고 물어봤을 때 하재연은 자신을 두고 ‘윤이원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처음에는 이상한 망상에 젖어 있는 놈이 아닐까 싶었다. 혼자만의 꿈을 꾸며 사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 와서야 세상에서 격리된 인간은 내가 아니었나, 다른 관점에서 사념하게 되었다.
“재연아, 나 가끔 이상한 꿈을 꿔.”
“…….”
“꿈에서 좀 다른 모습의 너를 봐.”
그 말에 속이 확 상해 버린 것처럼 얼굴을 굳히는 재연을 보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달라진 모습이 보여도 알맹이는 똑같았다. 쓸쓸한 고아원 정문에서 데려와 키웠던 아이는 누구보다 솔직한 성격이다. 옛날의 나와 닮았으니까.
“나를 욕하고, 미워하는 네가…….”
“형.”
“그게 네가 후회하는 거야?”
재연이 알아줬으면 하는 게 하나 있었다. 마지막 질문에 ‘겨우’라는 단어가 빠져 있다는 걸. 원장을 향해 망설임 없이 칼을 들어 올릴 때 모두가 나를 미워할 것이라는 건 알았다. 재연이라고 다를 것 없이 나를 향해 독한 말을 내뱉을 것도 예상했다. 그 일이 재연의 과거 속 나에게 상처가 되었을까. 아마 상처는 되었겠지. 하지만 하재연이 홀로 후회를 해서 무슨 소용인가. 이미 기억도 못 하는 이야기였다.
“……형은, 모르겠지만.”
“알아.”
하재연의 까만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그 적나라한 반응이 귀엽다 못해 무서웠다. 추측이 사실이 되는 건 최악이었다. 원장의 어둠을 알았을 때와 같이.
“서주영이 그랬었어. 교도소에서 나오기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네가 나를 죽이고 싶다고 말했다고.”
“…….”
“조심하라고, 고아원 형제 중에서 나를 좋아하는 놈은 하나도 없으니까 몸 사리라고 했었지.”
“……원이 형.”
“처음에는 내 집 근처를 알짱거리는 살인마 자식이 네가 아닌가 의심했어.”
교도소에 있는 동안 듣거나 보고 배운 것은 끔찍한 배신과 악랄한 이야기였다. 불신은 생존에 필요한 조건이었다. 그래서 하재연과의 첫 만남에 갑자기 애절한 척 굴다 내 배를 칼로 따고 뒤통수를 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늘 그놈의 덩치를 볼 때마다 재연이 꾸며 낸 몸이 아닐까 하고 새파랗게 노려봤었다.
“솔직히 못 믿겠잖아. 나를 싫어한다는 네가 하루아침에 사람이 돌변하기라도 한 것처럼 찾아와 절절한 사랑 고백에, 과거 이야기로 추억 팔이라니?”
하재연이 하는 사랑에 관한 언어가 전부 가꿔진 연기가 아닐까, 의심의 칼날을 곤두세우고도 기꺼이 집 안으로, 선 안으로, 터에 발을 들이게 했던 것은 어찌 되든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재연이 내 등에 칼을 박아 넣고 죽어 마땅했다고 발을 굴러도 상처는 미비한 흔적일 것이고, 배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믿었으나 행위는 믿지 못했다. 그는 한 번도 자신이 변한 이유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해 주지 않았으니까.
“사람의 마음이 변하는 건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비싸게 배웠지. 원래 그런 사람이거나, 시간이 지났거나, 아니면 근간을 뒤흔들 만한 이유가 생겼거나.”
처음 집에 찾아왔을 때부터 공사장을 찾아오며 숱하게 나에게 보냈던 무수한 경고들이 한 가지 가능성을 가리키고 있었다.
……모든 걸 알고 있다고 말했을 때부터 희미한 줄기로나마 확신할 수 있었다. 오로지 재연이 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기 때문에 일관되게 무시했다.
“정답이 뭐야?”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재연이 무성의 언어를 내뱉었다. 녹음이 우거진 여름 꽃의 향이 났다. 진중한 밤공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달았다.
“형은, 비참하게…… 살았어요.”
기억나지 않는 삶 하나가 눈에 언뜻 보이는 것 같았다.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 가난에 시달리다 죽었어요.”
“내가?”
“형이.”
종종 꿈을 꾸면…… 그래, 어색한 이야기들을 영화처럼 보았다. 기억에 없는데 재연이 낯선 모습으로 아픈 말을 내뱉어 상처를 받는 꿈을 보았다. 다치지도 않은 가슴이 욱신거렸다.
“너는 방관했고?”
“……네. 하지만, 저는, 나는.”
“알아. 끔찍한 범죄였고 이해하기 힘들었겠지. 서주영이 이상할 정도로 아무 생각이 없는 거야.”
“그렇지만 형이 말해 줬다면 달라졌을지도 모르잖아요.”
하재연은 고집스럽게 뺨을 부풀렸다. 그 지적은 어쩌면 옳았다. 타인에게 꿈에 대해 말해 볼까 생각한 적이 없었다. 정확하게는 꿈으로 가장한 비현실적인 기적에 대해서.
그러나 재연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 끔찍한 행위의 정당성도, 원장의 병폐에 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까닭은 오로지 하나였다. 말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미친놈 취급당할 테니 말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서주영은 꿈을 듣고 정신병이라고 말했으면서도 죄를 눈감아 주었다.
그와 비슷하게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하며 한 번쯤 제대로 더 이야기해 볼 수도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하고 싶지 않았다.
“한 번만이라도 형이 진심을 내보였으면 나는 달라졌을 거예요.”
“난 너한테 그런 걸 바라지 않았어.”
“형을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어요.”
세상에서 가장 가벼우면서 지키기는 어려운 말이다. 웃어 주었지만 재연은 따라 웃지 못했다. 새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덜덜 떨기만 하는 불쌍한 모습을 보고 있다 툭, 뱉듯이 말했다.
“죽음을 미뤄 뒀던 것뿐이야.”
이미 죽음에 대한 통증도 블랙아웃도 알고 있다. 두 번째 죽음을 기다리면서 산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거스른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알고 있으니까.
“모든 가능성을 제쳐 놓고, 과거에 어떤 사실이 있었는지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어.”
우리는 사랑했었지. 사귀었었지. 분명 육체적인 관계도 숱하게 맺었을 만큼 재연은 맹목적으로 나를 사랑했고, 보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그에게 열중했었다. 모든 커플이 그런 것처럼 사귈 때는 충실했다. 그러나 현재의 삶에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기대하는 것도, 가지고 싶은 것도 없었으니까.
“그래야만 이 순간이라도 너를 좋아할 수 있었으니까.”
이유는 하나였다. 재연이 정말로 맹목적이었기 때문에. 그가 무언가를 미친 듯이 후회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지극정성의 희생을 보여 주었기 때문에.
빛이 가려진 오른쪽 눈을 쓰다듬었다. 얇은 눈꺼풀이 힘없이 감겼다 올라간다.
“네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 하나는 믿었어. 정말이야.”
“형…….”
“하지만.”
재연아, 약속이란 아무것도 아니지. 지키지 못할 말을 잔뜩 하는 게 사람이지. 교묘하게 말을 뒤바꾸는 건 얼마나 쉽겠어. 겨우 약속 따위잖아.
“거짓말하고 있지, 너.”
어린 시절부터 보아 왔다. 어른이 된 후의 모습도 알고 있다. 내가 알던 하재연은 아무리 노력해도 거짓말을 못했다. 그래서 티가 난다. 참과 거짓을 반반 섞어 알아볼 수 없게 뭉개 버리는 모습이.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서슬 퍼런 눈동자가 반사된다. 재연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굳어 있을 때, 귓가를 가볍게 짚으며 자애로운 목소리가 공중에서 솟아났다.
「진실이라면 내가 알려 주지.」
신이었다. 하재연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돌변하더니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계약 위반이야!”
「너 역시도.」
땅 위를 디디고 마주한 한 인간과 공중에 뜬 한 명의 신이 서로의 눈을 터트려 버릴 듯 노려보았다. 신과 하재연이 관계가 있는 것은 어림짐작으로 알았지만, 오랜 세월 알아 온 적을 보는 것처럼 악의가 넘칠 줄은 몰랐다.
신과 하재연은 물과 기름이자 낮과 밤이었다. 팽팽하게 대립한 양 서로를 한껏 노려보더니 재연이 먼저 나서서 악담을 퍼부었다.
“신이란 것들은 원래 약속 따윈 지키지 않는 걸 미덕으로 여기는 건가? 당장 꺼져.”
「과연, 반죽 좋게 혓바닥만 놀려 넘어가는 솜씨가 매우 인간 같구나.」
“말싸움할 힘 없어. 그쪽이 한 계약이야, 지켜.”
「그렇다면 너는 그걸 잘 지키고 있나?」
신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재연의 코앞에 얼굴을 바싹 들이밀고 조소하더니 고개를 휙 돌렸다. 순간 깊고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짤랑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순식간에 다가온 신이 내 눈을 가리고 귀에 입술을 붙였다. 접촉 표면으로 차가운 한기가 스며든다.
「궁금한 것을 보여 주지. 물었었나, 행복해질 수 있냐고.」
“그만해, 안 돼!”
재연이 공기가 흔들릴 만큼 거센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그 위압감에 비틀거리자 신이 몸을 붙들었다.
「그럼, 얼마든지 가능한 이야기란다. 일방적으로는 말이야.」
“이게, 무슨…….”
「정말 조용히 지켜보려고 했는데, 저 더러운 것의 이기심은 봐 줄 수가 없어.」
독설이 섞인 신의 말을 마지막으로 머리가 백지장처럼 희게 변했다. 손바닥에 가로막힌 시야 사이로 쨍쨍하게 내리쬐는 햇살과 더운 공기가 뺨을 적셨다.
틈은 좁았다. 몸이 짓눌리다 펄떡거리는 생선처럼 부풀어 올라 터졌을 때 통증과 함께 눈을 떴다.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해를 가리기 위해 손차양을 만들어 눈썹에 붙였다. 희고 말끔한 건물 밑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담배를 피우면서 얼굴을 찡그린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잘생긴 옆모습. 가슴이 뛰었다. 더위 때문에 붉어진 얼굴이 마치 애가 타서 붉어진 것처럼 보일까 봐 몇 번이나 부채질로 얼굴을 식히고 쭈뼛쭈뼛 근처로 다가갔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기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정한 인사를 해 주지는 않아도 내게 내줄 조그만 여유는 있을 거라고. 여태껏 마음속으로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던 연인인가. ‘행복하지 않은 미래’를 선택해 버렸지만 추악한 교도소 생활도 저 하얗고 예쁜 얼굴만 닳고 닳게 떠올리며 버틸 수 있었다.
‘재연아, 저기…….’
‘뭐야.’
반쯤 태우던 담배를 그대로 바닥에 떨어트리며 남자가 짜증스러운 반응을 보인다. 아. 심장이 쓰라려 티셔츠 끝을 잡아당기며 늘어트렸다.
‘내가 보지 말자고 하지 않았어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이 정도 반응은 예상하였다. 괜찮다. 시간을 내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설명한다면 조금쯤은 믿어 줄 것이다. 서주영도 결국에는 불안정한 나를 받아 주지 않았던가.
희망을 품고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다. 햇빛을 머리꼭지 위에 받으며 선 남자는 찬란하기 그지없었다. 반짝거리는 사랑 빛이 툭툭 튀었다.
‘나는 당신이랑 할 이야기 없어.’
‘재연아, 제발 들어 줘.’
절박한 마음을 담아서 졸랐다. 조금만 들으면 기억해 줄지도 모른다. 먼저 사귀자고 당당하게 고백해 오던, 이젠 가질 수 없는 하재연이 있던 과거를. 내가 얼마나 너를 그리워했었는지를. 우리 둘이 했던 키스, 나눠 입은 티셔츠, 아침에 나눠 마시던 커피 따위의 소중하고 사소한 추억 같은 것을.
‘뭘 들어?’
‘……내가, 이유가…….’
‘듣고 싶지 않으면 어쩔 건데?’
빈정거림 끝에는 씨발, 하고 쌍욕이 붙어 나왔다.
심한 무더위에 어지러워 주저앉았다 앞을 보았을 때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재연의 흰 등만 하염없이 볼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나한테 한 시간만 주면 되는데. 설명할 수 있는데. 원장의 부패와 짐승 같은 면모에 대한 증거를 보여 줄 수는 없었지만, 조금이라도 호소할 수 있다면.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 빈 마음을 부여잡은 채, 시간이 지나도 현기증이 가시지 않아 쪼그려 앉은 자세로 한참 입 속으로 준비했던 말을 되새겼다. 재연아, 좋아해. 있잖아, 원장이 나쁜 사람이라서 내가 시간을 돌렸어. 안 믿기지. 그런데 내가 너를 정말로 사랑해서 너를 구하고 싶었단 말이야.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역겨워서 미칠 것 같으니까.’
눈을 깜박였다. 시간이 빙글빙글 도는 팽이처럼 미친 듯이 축을 따라 돌아가다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슬슬 멈추길 원하는데 원했던 시간은 영원히 주어지지 않았다.
‘당신, 언제까지 앞에서 알짱거릴 거야?’
‘재연아.’
‘더러워.’
모욕과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결백을 믿어 주길 바라는 건 아니었지만 비참하단 생각은 하게 되었다.
능력도 연줄도 없는 삶은 외로웠다. 늘 나쁜 일이 일어났고, 결국 공사장에서 다치면서 욕 세례를 받고 쫓겨난 후에는 월세가 두 달이 밀려 봐줄 수 없다는 주인댁의 통보를 받았다.
주영에게 손을 벌리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주영은 동년배들 사이에서도 어마무시한 연봉을 받고 일하고 있었고,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몇 번이나 이야기했다. 하지만 수치스러워 말하고 싶지 않았다.
문제를 혼자서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은 착오였다. 세상을 덜 배워 먹어 무식한 자의 말로였다. 그렇게 증오하던 원장의 파트너에게 연락했다.
-뭘 파시게요?
‘음…….’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아서, 팔 수 있던 건 몸뚱이뿐이었다. 고민하다 눈을 팔기로 했다. 반쪽 눈으로 보면 더러운 것도 아픈 것도 반만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재연을 보러 갔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용기를 냈다. 더운 여름날 먼 거리를 걷는 것은 힘들었다. 몇 번이나 한참 쉬다가 움직여야 했다. 그래도 재연의 얼굴을 보니 피곤함이 좀 가시는 기분이었다. 안구가 적출된 부위가 따갑고 쓰라렸다.
너랑 밥 먹어 보고 싶었는데. 물어보면 그도 나도 상처받기만 할 거 같아 만 원 한 장을 받고 웃기만 했다.
아, 재연아. 생을 반복하니, 인연은 더 짙어져 보자마자 너만 사랑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해를 거듭하니, 사랑이 더 깊어져 상처가 커지고 커져 감당할 수 없는 흉을 남겼다.
그러니 너는 아무것도 버리지 마, 아무것도 포기하지 마. 희생 따위는 대가를 받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속 안에서 새카맣게 타 버린 말을 잔뜩 숨기며 바보처럼 굴었다. 죽었다 다시 살아났지만 다시 죽는다. 죽음은 늘 살아가기보다 쉬웠다. 마지막까지도 잔인하던 하재연의 얼굴이 실컷 우울한 회상으로 변했다. 몇백 번 틀어 댄 테이프가 늘어지는 것처럼 필름이 질질 끌렸다. 가위를 들고 중간을 싹둑 잘랐다.
선택과 가능성을 주었던 신이 나타나 물었다. 하얀 의복에는 바람과 숲의 향이 났다.
「시간을 돌려 운명을 바꾸었지만, 비참하게 되었구나. 후회는 없느냐?」
‘그럼요. 괜찮진 않지만 어쩔 수 없죠.’
주저앉아 조각조각 찢어진 기억을 들여다보고 있는 나를 보고 신이 또 한 번 물었다.
「두 번째 도전은 어떨까?」
‘두 번째요?’
「그래. 두 번째 시간의 역행은 어떨 거 같냐고 물었다.」
음……. 막 교도소에서 출소해, 6개월도 되지 않는 짧은 삶을 살다 죽었다. 명제부터 간단하게 실패했다, 로 이르는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보다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비참하게 살 운명이잖아요. 아무것도 못하고 돈에 쫓기기만 하고. 이젠 싫어요. 지쳤는걸요.’
말을 줄줄 늘어놓다 보니 머릿속에서 확고함이 자리 잡았다. 지쳤다. 아, 맞아. 기억난다. 저 삶은 정말 힘들기만 했다. 대가를 지불했지만, 대가를 받지 못한 노력은 메워지지 않는 빈 구멍을 남겨 주었다.
「왜, 그 하재연이 원해도?」
‘아, 더 싫네요.’
이젠 그 얼굴만 봐도 상처를 받을 것 같았다. 육체를 잃어버린 몸인데도 위가 쓰라린 것 같아 손바닥으로 배를 문질렀다.
‘적어도 그 애는 원하면 안 되죠. 이게 다 누구 덕분인데.’
「그런가.」
‘그럼요. 그런 쪽지는 왜 남겼겠어요? 누가 살아 달라고 빌어도 다시는…….’
신이 오묘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가위를 들어 조각난 기억을 한 번 더 싹둑, 자르다 말고 눈을 멍청하게 깜박거렸다.
‘다시는…… 신이시여?’
「안타깝구나.」
활짝, 만개한 모란처럼 환하게 웃은 신의 얼굴에 비린내가 잔뜩 섞였다. 피와 살점, 육체와 영혼의 냄새가 났다.
손을 뻗었는데, 쥐고 있던 것들이 힘없이 빠져나갔다. 예쁜 부분만 잘라 가지려고 했었다. 사랑한 기억, 많이 좋아했던 기억. 사랑을 받았던 기억만. 그 기억에는 원장도 없었고, 상처를 주던 하재연도 없었다. 세상의 좋은 것만 보는 하얀 백치처럼 굴기 위해 모아 두었던 소중한 기억은 신의 손짓 한 번에 일제히 소각되었다.
물도 저렇게 쉽게 흘러가진 않을 것이다. 모래알도 저렇게 날지는 않을 것이다. 왜,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것은 내가 목숨보다 중히 아끼던 소중함이 되어야 하는가.
눈을 감았다 떴을 때는 죽어도 잊기 힘든 시간의 굴레였다. 노란 눈에서 안광이 별처럼 빛이 난다. 신의 뒤를 따르는 백만의 귀신과 요괴와 인간들이 수군거리면서 약해진 몸을 개처럼 굴렸다. 괴로움이 지천으로 널려 나를 힘들고 괴롭게 할 때, 잊으리라 마음먹었던 사랑하는 목소리의 고통스러운 음성을 들었다.
「보상받지 못할 행위에 더 괴로워도, 더 비참하게라도 살아 보겠는가?」
그만해, 제발 나를 구하지마. 미친 사람처럼 발버둥을 쳤으나 나와 재연의 사이에는 깊은 골이 있었다.
‘네.’
신의 앞에 우뚝 선 하재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좌절, 분노, 경멸과 조롱.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입 안에 거품이 가득 들어차 그 선택을 말릴 수가 없어 비참하고 원통했다. 해묵어 썩은 냄새를 내는 추억이 덩어리져 눈과 코와 입과 귀를 틀어막아 사람을 병신으로 만들었다.
“……만, 그만두라고!”
애타는 목소리로 부르짖는 음성에 마지막 장면은 눈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단숨에 사라졌다. 현실의 눈을 가리고 있던 손바닥이 비켜 나가 선명해진 눈 안에 엉망진창으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녹초가 된 재연이 보였다.
우리 사이에는 거대한 벽이 있었다. 과거에는 골이 있었다. 그럼 미래에는 무엇이 있지?
“어째서, 왜!”
재연이 내 등 뒤를 버티고 서 있는 신에게 달려들었다. 신은 손을 뻗어 움직임을 멈추며 냉소적으로 지껄였다.
「보아라, 네 선택을.」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잖아…….”
「이미 경고했어, 너는 너무 많이 알렸다고. 그렇다면 나도 똑같이 보여 주어야 공평하지 않나?」
“이래서는 너무 가혹하잖아.”
허무하게 중얼거리는 재연의 뺨과 입술은 파리했고, 분노로 붉어진 눈은 뜨거워 보였다. 그 겹겹이 쌓인 대조적인 온도를 한참이나 바라보다 고개를 떨어트렸다.
「설마, 겨우 이 정도로?」
존재는 우리를 조롱하고 있었다. 어깨에 닿았다 떨어진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서 저온 화상을 입은 것처럼 쓰라렸다. 아니다. 화상을 입었던 등의 상처가 다시 곪은 기분이었다.
재연아.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는지 그가 몸을 떨었다. 냉막한 그림자가 드리운 바닥에서 먼지가 들뜬 춤을 추었다.
“나는 네게 다시 한번 사랑해 달라고 한 적은 없어.”
재연의 지친 얼굴을 몇 번이나 쓰라리게 더듬어 주었다. 충혈된 눈이 박제된 듯 가만히 굳어 있는 모습에서 누적된 피로를 느꼈다.
가혹하다고. 나 역시도 가혹하다는 그 말에 공감한다. 하재연이 감쪽같이 속이거나, 미리 모든 것을 알려 주고 시작했으면 이 정도로 가혹하다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눈알이 뻑뻑하다. 무너지려는 몸을 억지로 버틴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확신할 수 있었다. 후회를 해서 액막이가 되었다는 하재연. 나를 사랑한다던 말. 끝없이 나밖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꾸역꾸역 달려드는 재연의 어린 눈.
아닐 거야. 의미 없는 믿음을 중얼거리며 떨리는 손을 꽉 움켜쥐어 봤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나는 수십 번도 더 거절하고 싶은 선택을 했다고, 하재연 본인이 인정하지 않았는가. 신에 대한 반항과 냉소적인 위대한 존재의 태도가 알려 주고 있었다.
나는 죽었다. 죽어서 드디어 자유로워진 나를 다시 살렸다. 하재연이.
“네 욕심이야.”
“……형, 나는…….”
“나를 조금이라도 배려했으면 시간 따윈 돌려서는 안 되는 거였어!”
죽으려고 애를 썼다. 왜냐하면, 살고 싶은 의지가 없었으니까. 나는 성인군자도 아니고 용사도 아니다. 무사히 죽음을 맞이했을 때는 기뻐했다. 드디어 제 의지로 생명을 끝냈다고 손뼉이라도 치고 싶었다. 그걸 뒤엎고 헝클어트린 건 하재연이다.
다시 살아 보라고 억지로 멱살이 잡혀 내동댕이쳐졌을 때 내 좌절감과 배신감을 재연이 상상이나 해 봤을까. 이런 기억을 잊게 만들면 알아서 쉽게 풀릴 거라 생각했을까. 본인조차 아무것도 몰라 실패했던 해피 엔딩을, 이제 와서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건 오만이었다. 재연의 욕심이었고 이기적인 선택이었다.
겨우 본인의 후회 하나 때문에 나를 한 번으로 모자라 두 번, 세 번 죽게 만든 것이다.
“진심을 내보였으면 달라졌을 거라고?”
“…….”
“말을 했으면 들었을 거라고?”
“……형.”
“말을 해 볼 기회조차 주지 않았던 건 너잖아.”
과거의 하재연. 분노가 땅을 때렸다. 겨우 한 시간이다. 아니, 한 시간이나 걸릴 것 같으냐. 조금이라도 내 이야기를 들어 주길 바랐지만 너는 거절했다. 애처롭게 과거의 기억에 매달려 홀로 죄다 끌어안고 꾸역꾸역 살았구나. 저 삶에서 비련해져 이번에는 두 바퀴가 더 꼬였구나. 만신창이인 육신을 사지로 몰아넣고서 뒤늦게 외롭게 만든 것을 후회했다고.
후회했다면 이렇게까지 나를 괴롭힐 수는 없었다.
“왜 그랬어?”
“…….”
“왜 시간을 다시 돌려서 사람을 괴롭게 만들어야 했어?”
시간이 녹아서 뚝뚝 떨어졌다. 이리저리 구멍이 뚫려 험악해진 시간이 구불구불 덩어리져 피를 흘리며 훌쩍거렸다. 한 번만 다치면 되었는데, 두 번이나 다치게 만들어서 아프다. 배로 아픈 것도 아니다. 배의 배, 곱절의 곱절. 그 이상으로 괴로웠다.
“형은!”
하재연이 소리를 질렀다. 성대에 긁혀 나오는 쉰 목소리는 마치 비명 같았다.
“내가 죽였어요, 내가. 형이 죽으러 간다는 신호를 보냈는데…… 내가 눈치채지 못해서!”
재연이 손톱을 바짝 세워 본인의 오른쪽 눈가를 벅벅 긁었다. 할퀴듯 세로줄로 새빨간 상처를 입혔다. 학대당한 연한 피부가 부풀어 올랐다.
좀 알 것 같다. 의미 불명의 실명. 하재연이 뒤틀어 버린 바로 직전 삶에서 내가 팔아 버렸던 눈동자. 아마 이번에는 재연이 안고 간 대가의 일부. 빛을 잃어버린 오른쪽 눈을 보기만 해도 몸서리치게 마음이 아팠다. 왜 아파했을까. 우리는 똑같이 서로를 이유로 들었을 뿐인데.
이제는 저 눈을 봐도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애를 태우며 입을 맞추는 일 따위는 있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하고 또 결심했다.
“형은 나를 사랑해 줬어요.”
“…….”
“내가 그렇게 가혹하게 대하는데도 형은 끝까지 나를 사랑해 주고 있었으니까, 후회해서. 형을 이번엔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서…….”
희미하게 무언가가 떠올랐다. 무감각한 얼굴을 한 재연이 입술 사이로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말을 내뱉고 사람을 내쫓았다. 자신의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일갈하던 그 냉정함이 상처가 아니었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재연이 말하는 절절한 사랑의 상대자는 현재의 내가 아니었다. 과거의 감상에 젖어 희생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던 타인이다. 하재연만 그 안에 갇혀서 받아들이지 못하겠지.
“하재연. 나를 봐.”
고개를 겨우 들어 올리는 남자를 보고 두 손을 펼쳐 보았다. 겉보기에는 깨끗한 손이지만 이 손이 얼마나 더러워졌는지 잘 알고 있다.
“원장을 죽인 걸 후회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진심이다. 잠깐 읽었던 전생, 아니 모르겠다. 기억도 불분명한 이전의 자신은 어땠을지 몰라도, 후회하지 않는다. 몇 번이고 더 잔인하게 죽여 버렸어야 했다고 속앓이를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
“너한테 사랑받지 못했다고 후회하지도 않았어.”
“형.”
“나를 사랑해 주지 못했다고 후회한 건 네 일이지 내 일이 아니었던 거야.”
“원이 형.”
“후회한 건 하나뿐이었어. 시간을 돌린 것.”
전부 사실이었다. 짝사랑 따위로 후회한다면 아마 지구상 인구의 절반 이상은 사랑을 시작도 못할 테니까, 괜찮았다. 사실 이미 타인의 삶을 한 편 보고 만 느낌이라 전혀 해가 될 것도 아닌 기억이었다.
어찌 보면 기억이 아니라 추억이다. 아, 그때는 그랬었지. 행복하거나 괴로웠었지. 너를 믿지 못하거나 너에게 맹목적이었거나, 감정적인 것은 모두 추억이 되지 않았나.
“네 후회를 왜 내가 뒤집어써야 해?”
“…….”
“왜 사람을 결국 후회하게 만들어?”
하재연은 예쁘게 울었다. 나는, 하고 변명을 늘어놓으려 애쓰는 울먹거림을 듣고도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네 후회가 나를 또 죽게 만들고 있잖아.”
“나는, 단지…… 형이 행복해지길 바라서…….”
“행복하게 해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어?”
“…….”
“이야기를 들어 줬으면, 마음을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은 있었지. 너는 오로지 네 자신의 후회 때문에 나를 살린 것뿐이잖아.”
아마 모든 사실을 알아차린 뒤에는 괴로웠겠지. 그런 쓸데없이 희생적인 살인 행위가 용감하거나 감동적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마지막까지 짝사랑에 빠진 지질한 나에게 욕을 하고 침이라도 뱉었다면 분명히 후회했겠지.
하지만 재연이 신과 만나 어떠한 계기로 사실을 깨닫고 계약을 맺었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이제는 변해 버린 어떤 미래에서 재연과 사랑하긴 했었다. 현재의 삶에서도 조금이나마 사랑했었다. 하지만 무거운 건 기억나지 않는 사랑이다. 절절한 사랑을 했었으니 재연에게 그렇게 매달렸을까.
“기억을…… 가져가지 않았다면 오히려 행복했을까.”
몇 번이나 들었다. 기억의 유동성에 대해서. 그때는 내가 뭔가 끔찍한 잘못을 저질러 기억을 미화시켜 버린 것은 아닐까 두려웠었다. 눈앞에서 홀로 죄책감에 시달려 숨도 못 쉬는 남자에게 어떤 죄를 지어 추궁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 몰랐겠지, 일방적으로 내몰아 치며 겁박 같은 사랑을 속삭이는 본인은 알 수 없었겠지. 그러나 기억을 도둑질당한 나는 겉핥기처럼 반만 채워진 인생을 살고 있었다.
“너 때문에 시간을 돌린 것도 아니야. 너를 위해서 그 많은 업을 졌던 것도 아닌데 네가 왜 나서서 나를 망쳐!”
멈추려고 했지만 저절로 언성이 높아졌다. 하재연이 갑자기 피가 거꾸로 솟기라도 한 것처럼 진저리치더니 내 어깨를 밀쳐 낼 것처럼 쥐어뜯었다. 격렬한 움직임에 재연의 눈동자에서 흐른 눈물이 내 뺨으로 튀었다. 뜨거웠다.
“아니야!”
몸을 뒤틀며 재연이 화를 냈다. 분노에 미쳐 버린 사람처럼 혼자 날뛰며 울었다.
“그게 아니라고!”
「거기까지.」
하재연의 입에서 으깨지는 것처럼 나오는 비명을 가로막으며, 모든 상황을 일으킨 자이자 관전하고 있던 자가 끼어들었다.
아니라고 울부짖던 재연의 소리가 일시에 정적으로 변했다. 부드럽게 재연과 내 사이를 떨어트리며 신이 조곤조곤 타이르는 것처럼 내 뺨에 입을 맞췄다.
「사랑이란 위대한가?」
신이 물었다.
위대한 사랑……. 중얼거리며 형편없이 눈물범벅이 된 재연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다. 사랑이 위대해서 시간을 돌리고, 운명을 바꾸려 하고, 희생으로 업을 지거나 사고, 운과 목숨을 팔아 치웠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시작된 세 번째 삶은 그중 가장 비통했다.
“아니요.”
옛날의 나는 하재연을 지금보다 조금 더 많이 사랑했지만, 보답을 받지 못하고 슬프게 끝이 났었다. 하재연은 지금의 나를 많이 사랑하고 있지만 그 역시도 보답받지 못할 것이다.
“허무합니다.”
「그래, 사랑이란 허무하구나.」
꾹 눌린 음성에서는 기쁨이 느껴졌다. 자조와 현실에 대한 감각이 가득 담긴 그것은, 유일한 승리자처럼 구는 신의 목소리였다.
「모든 것을 알고 있어 신이라도 될 수 있었던 것처럼 행위했던 자여.」
“…….”
「너 또한 그리 생각하겠지.」
폭력적인 언어의 대상은 내가 아니었다. 하재연이었다.
신의 길고 하얗게 뻗은 손가락이 나를 가리켰다. 재연은 보기 싫다는 것처럼 몇 번이나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는 이것이 과한 악몽일지도 모르겠다.
「보아라. 기억하지 못한 사랑은 얼마나 가치가 부족한가?」
재연이 창백하게 피가 빨린 얼굴로 웃기만 했다. 아주 울고 싶어 미치겠다는 얼굴로 웃고 또 웃었다.
「너의 능력은 얼마나 미비하고, 감정은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는 소나기와 같지 않은가?」
“그래…….”
하재연을 안아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하재연이 얼마나 절절한 사랑에 미쳐 있든, 중요한 것은 결과였다. 그로 인해 이런 삶을 살게 되었다면 미워할 것이다. 단 하루도 숨 쉬기 편했던 날이 없던 나를 이렇게까지 길게 달리게 했다. 합당한 분노였다.
인연은 어김없이 두터웠고, 사랑은 여전히 짙었으나 아무 맛도 나지 않아 씹고 삼키기에는 괴롭기만 했을 뿐이다.
재연아, 왜 버렸어. 재연아, 왜 포기했어.
구원도 바라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 생각해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피해자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알아…….”
하재연은 숨이 꺼질 듯 대꾸하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안녕. 누가 작별을 고했다. 재연도 아니고, 신도 아니었고, 주영이나 엔지도 아니었다. 이진현 이사도, 무당도, 고 영감이나, 그 어떤 자의 목소리도 아닌 것이 인연에 산뜻한 척 인사를 건넨다. 먼 나였다. 어느 외접원의 귀퉁이에 선 윤이원이 눈을 붉게 적시며 말했다. 안녕이라고, 이제 영원히 안녕이라고…….
“갈게.”
“…….”
“안녕.”
이번에도 어김없이 나였다. 안녕이라고 말하는 쪽은.
긴 가뭄을 해갈이라도 하는 것처럼 밤새 세찬 비가 내렸다. 폭우, 폭염, 몰아치는 천둥과 번개가 마지막 희망을 전부 씻어 내는 밤이었다.
***
제정신이 아닌 채로 집에 돌아왔다.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고, 휴대폰은 죽은 상태로 방구석에 던져두었다. 힘없이 늘어진 몸을 귀신들이 쉴 새 없이 건드리고 괴롭혔다. 정신이 무너지니 잠만 자면 가위에 눌렸다.
눈을 감았는데도 불타는 산과 마을, 이제야 내리는 비, 질척질척하게 젖어서 말로 뺨을 올려붙이는 재연의 얼굴이 반복해서 나뒹굴었다. 엉금엉금 기어가 칼을 꺼내면 남의 집에 빌붙어 사는 주제에 재수까지 없는 귀신 놈들이 다가와 손목을 후려치고 등을 내리눌러 끝을 내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사람이 죽겠다는데 왜 말리고 지랄인지.
서러워서 소주나 댓 병 진탕 마시다 숙취에 속을 죄다 게워 내고, 찌질하게 집 근처 24시간 해장국 집에서 눈물을 질질 짜며 다시 해장술을 먹었다. 피 대신 소주와 해장국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기분을 얻으니 어느 틈엔가 텅 빈 통장을 얻었다.
휴대폰은 깜박깜박하며 거의 죽어 있다 문득 정신을 차릴 때면 걱정이 쏟아지는 문자를 보여 줬다. 엔지는 토토가 풀이 많이 죽어 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멍하게 그 까만 얼룩이 귀여운 하얀 토끼를 생각하다 방바닥에 엎어졌다. 토토의 비린 동물 냄새가 그대로 남아 있는 엉성한 우리가 보였다. 시들어 빠진 무청이나 말라비틀어진 당근 조각이 아직도 남아 있다.
텅 빈 우리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보고 싶은데, 보고 싶지 않았다. 그냥 하재연과 관련이 된 거라면 뭐든 보기 싫어서 기억도 안 하고 싶었다.
“머리 아파.”
몸에서 꿉꿉한 땀 냄새가 났다. 에어컨을 켜고 있는데도 잠을 자고 일어나면 온몸이 땀범벅이라 하루에도 세 번, 네 번씩 다시 씻어야만 했다.
습기가 많다 보니 벌레가 많이 나타나는 건 예삿일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벌레 트랩을 갈아 치워야 하는 불행한 하층민의 인생도 이해해 주면 안 되나. 우울한 얼굴로 쓰레기통에 벌레 사체와 끈적거리는 트랩을 한꺼번에 처넣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눈을 감아도 재연의 얼굴은 선명할 정도로 잘 보였다. 마지막 장면을 잘라 눈에 렌즈로 끼워 넣기라도 한 것처럼 창백하면서 동시에 원망으로 붉어진 채 울고 싶어 미칠 것같이 바라보던 그 얼굴.
“상청.”
재연이 이마에 적어 줬던 단어를 외워 보았다. 이름, 아마 무당의 집에서 처음 저승사자를 만났을 때 적어 준 것과 같은 말일 것이다. 상청이 진명이라고. 정말로 처음 듣는 단어였다. 상청, 상청……. 그 이름을 수십 번 읊조리기만 했다.
피곤하다. 차마 깨울 수가 없는 남은 기억을 차곡차곡 접어 숨겨 놓고, 열기에 뜨겁게 달아오른 쇠창살을 손으로 잡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더운 여름을 오랜만에 제대로 만났다. 낮은 하늘과 공기에는 감촉이 있다. 막 비가 그친 하늘은 새파란 빛이었다.
[이원 씨, 토토가 기운이 없어. 보고 싶은가 봐. 안 데려갈 거야?]
엔지의 달래는 문자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울 수 있었다. 품 안을 잘 파고들어 와 쌕쌕 잘도 자던,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귀여운 내 토끼. 한숨을 푹 쉬면서 창문을 다시 닫아걸었다. 열어 봤자 좋은 기억도 없다. 아직도 창살을 사이에 두고 키스를 나눴던 밤이 기억난다. 달이 둥실둥실 노랗고 하얀색이던, 빛무리가 심하던 밤.
월세를 내야 한다. 먹고 살려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 엔지의 카페에서 일하지 않는다면 다른 일이라도 계속 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방 안에 콱 처박혀 지내는 게 어찌나 속이 편한 일인가. 하아, 텁텁하고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에어컨 찬 바람을 꽉 들이마시고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가야 할 곳도 한 곳이고, 갈 수 있는 곳도 한 군데뿐이다. 젠장, 하재연이 그렇게 노력하면 뭐 하나. 내가 바뀔 생각이 없는데.
방바닥에 벌렁 뻗어서 천장을 한참 바라보다 지갑을 챙겨 들고 일어났다. 그냥 가자, 되는대로 살아 보자. 그러다 보면 신이 말한 끝도 재연이 생각하는 끝도 어느 순간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름은 밤에 오히려 사람들이 더 많았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휘적휘적 걸어가 버스를 탔다. 최근 집에서 술 먹고 뒹굴기만 했더니 잠깐 걸었는데도 숨이 차 체력이 뚝 떨어진 게 느껴졌다. 냉방병에 시달렸는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차는 익숙한 길을 달렸지만, 풍경은 달라져 있었다. 녹음이 조금 더 우겨져 있었고 뻗은 나뭇가지는 더 길어져 있었다. 그림자가 길어지고 사람들의 옷차림이 가벼워졌다. 이미 계절이 변화한 지는 오래되었으나, 새삼스럽게 시간의 널뛰기를 구경했다.
버스에서 폴짝 뛰듯이 내려 어슬렁어슬렁 공사장으로 걸어갔다. 못 보던 사이에 건물은 많이 지어져 있었다. 건물 외관도 그럴듯했고, 1층에는 멀끔하게 시멘트 벽을 발라 둔 것이 넘겨다보였다. 아직 유리를 끼워 넣지는 않았는지 휑하니 비워진 구멍들이 스산하다. 바닥 이곳저곳에 널린 부산물들을 발로 툭툭 걷어차며 건물 안으로 쑥 들어갔다.
“뭐냐.”
콘크리트 배합기 앞에 앉아 있던 노인 하나가 쉰 소리를 내며 허리를 폈다. 이유 없이 손바닥을 툭툭 털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자연스레 인사를 건넸다.
“온다고 했잖아요.”
“뭐야, 비겁한 겁쟁이가 아닌가.”
고 영감은 안 보던 사이에 더 늙어 있었다. 주름진 얼굴에서 눈만 흉흉하게 빛이 나고 있어 더 소름이 끼쳤다. 영감은 여전히 엉덩이 아래에 커다란 시체 가방 하나를 깔고 있었다. 이젠 더 숨길 공간도 없을 것 같은데 꾸역꾸역 잘도 갈고 있다. 구역질 나는 영감의 눈을 피하며 임시로 달아 둔 문을 닫았다. 녹슨 소리를 내며 경첩이 덜그럭거렸다.
“왜 다시 온 게냐?”
“아니, 안 할 이유도 없어서요.”
한낮 내내 더운 열기를 꽉 채워 먹은 건물 내부는 찜통이었다. 이런 더운 곳에 잘도 앉아 있다고 혀를 내두르며 앞에 가서 섰다.
“내가 그랬지?”
고 영감이 이가 듬성듬성 빠진 쪼그라든 잇몸을 훤히 드러내며 킬킬 고소한 비웃음을 흘렸다.
“바깥은 바깥대로 자네를 받아 주진 않을 거야. 자네처럼 악몽에 취해 있는 놈을 누가 좋아해?”
“아, 거지 같은 소리는 됐어요.”
짜증스럽게 대꾸하며 영감 옆에 있는 가방에 걸터앉았다. 고 영감이 귀퉁이가 구겨진 담뱃갑을 내민다. 그러고 보니 담배를 안 피운 지는 좀 오래되었다. 선뜻 하나 꺼내서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를 오랜만에 꿀렁꿀렁 목 안으로 넘기며 짧은 웃음을 흘렸다.
“한 번만 더 물어보자.”
“뭘요.”
“왜 왔어?”
기운이 빠지는 기분이다. 담배를 입에 문 채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어두웠지만 개미의 그림자는 볼 수 있었다. 가슴에 멍이 들어서 숨을 쉴 때마다 어깨가 떨릴 정도로 아팠다. 묵묵히 그 통증을 인내하며 대답했다.
“이런 짓을 하는 걸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어서 손을 털어 내려고 했거든요.”
“한데?”
“그럴 이유가 없어졌어요.”
“뭐야, 차였냐.”
연애 놀음 한번 지겹게 한다며 고 영감이 소리 내서 웃었다. 정말로 지겨운 연애이긴 했다. 재연의 몫까지 포함하면 벌써 세 번째 사랑과 전쟁이 아닌가. 일일이 말할 수도 없는 죄책감에 활짝 웃는 척 맞장구를 쳐 주자 고 영감이 금세 흥미가 식은 얼굴을 했다.
“좀 재밌는 꼴을 보나 했더니, 네놈도 참 구차하구나.”
“허, 나이 드실 대로 드셔 놓고 이런 일 하시는 영감님은요?”
“네가 아직 거기 있었으면 예뻐해 줬을 텐데, 아쉽기도 하지.”
“지랄하시네.”
피우다 만 담배를 바닥에 집어 던지고 침을 뱉었다. 고 영감이 청소를 해야 한다고 성질을 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한번 침을 퉤, 뱉어 버리고는 담배를 한 개비 또 꺼내 들었다.
“전 다시는 안 들어갈 겁니다.”
“누구 마음대로? 이번 일도 들키고 덤터기라도 써 보지 않을 테냐?”
“저도 사람이라서…… 교도소에서 뒤지긴 싫거든요.”
시간은 얼마나 남았으려나. 한 달, 아니면 두 달? 어쩌면 그것보다 더 일찍, 미친 살인마가 나타나서 배를 칼로 쑤실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강시도 돌아다니는 끔찍한 세상이라니, 사람 목숨이 위태롭게 떠도는 어릿광대보다 더한 꼴이 아닌가.
콧물을 훌쩍거리며 담배 연기를 공중에 뿜었다. 장난처럼 도넛 모양을 만들어 올리자 고 영감이 꼴 보기 싫다는 듯 혀를 찼다.
“교도소에서도 곧 뒤져도 미련 없는 놈처럼 굴더니, 그 버릇을 못 버렸구나.”
“그 버릇에 일조하신 분께서 무슨…….”
“말버릇도 고약하긴.”
고 영감이 성질을 버럭 내려고 할 때 즈음에 바깥에서 자동차 바퀴 소리가 들렸다. 고 영감이 벌떡 일어나 건물 바깥으로 달려갔다. 딱히 굽신거리고 싶은 마음은 없어 여전히 시체 가방을 깔고 앉아 담배만 뻑뻑 피웠다. 터벅거리는 모래와 작은 돌 알갱이가 긁히고 밟히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장신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등 뒤에 큰 덩치의 차 실장과 고 영감, 그리고 수많은 귀신들을 줄줄 이끌고 왕처럼 거만하게 선 이진현 이사가 반가운 척 가식적인 안부 인사를 건넸다.
“얼굴 좋아 보이는군.”
“그렇습니까.”
“어쩐 일로 다시 왔지? 애인이 가만두지 않을 것 같았는데 말이야.”
“헤어졌거든요.”
뭐 부끄러운 일이라고 숨기겠나. 피식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하자 이진현이 조금 놀라는 얼굴을 하더니 성큼성큼 걸어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쪼그려 앉은 자세까지 뜯을 듯이 관찰한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쪽은 헤어질 마음이 조금도 없어 보이던데, 심경의 변화가 있으셨나 보지?”
“사람의 마음은 갈대 같다고 하지 않나요.”
그쪽이랑 농담 따먹기 하기 싫다. 그런 마음을 담아서 툭 쏘아붙이자 이진현이 흠, 하고 턱을 매만지더니 일어나라고 손짓했다. 돈 줄 사람한테 계속 개길 생각은 없어서 비틀거리며 가방에서 내려오자 뒤에 기립해 있던 실장이 달려와 가방을 열었다.
사지가 뻣뻣하게 굳은 채로 묶인 시체는 여름인데도 썩지 않았다. 방부제를 얼마나 들이부었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6, 70킬로그램쯤 되어 보이는 젊은 남성의 시체를 더위에도 보존하려면…… 방부제 값이 더 들겠네. 픽 웃으면서 건네주는 칼을 받아 들고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이런 거 하지 말라고 시키지 않았나? 이름이 뭐였더라? 그래, 하재연 씨가.”
“헤어졌다니까요.”
“그쪽이 그리 무모해 보이는 성격은 아니었는데. 내 착각인가?”
일하는 걸 보러 온 주제에 말이 많다. 노끈을 자르려다 말고 얼굴을 찡그리며 뒤를 돌아봤다. 팔짱을 끼고 선 이진현이 얼굴 가득 즐거움이 지끈거리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쥐고 있던 주머니칼을 접었다 펴는 걸 반복하며 입 안으로 우물우물 문장을 정리했다.
“전 좀 무모합니다.”
“흠?”
“서주영이랑 괜히 친구인 게 아니거든요.”
입만 살아서 날뛰는 걸 좋아하는 친구를 예시로 들자 이진현의 얼굴에 불쾌한 웃음이 가득 떠올랐다.
“아, 서주영 씨. 그치 가끔 일할 때 만나면 아주 재밌지. 일은 잘하거든.”
“뭐…… 사람은 원래 인격이 여러 개니까요.”
다정한 하재연과 이기적인 하재연이 공존하는 것처럼. 뒷말을 숨기며 눈을 내리깔자 이진현이 되었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말 빙빙 돌리지 않는 게 어때. 뭣 하면 여기 있는 사람 물려 줄까?”
“이사님.”
차 실장이 이진현을 불렀다. 손안에 있는 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튀어나온 칼날을 탁탁 접어 실장에게 던졌다. 엉겁결에 칼을 받아든 실장이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한다. 저런 눈치 없는 놈을 데리고 다닌다고 저 남자도 고생이 많아 보인다.
“좋아요. 물려 주세요.”
“들었지? 나가.”
“이사님, 저 새끼를 어떻게 믿고…….”
만류하는 말에 듣기 싫다는 듯 이진현이 인상을 구기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차 실장은 더 이상 말리지 않고 고 영감을 질질 끌고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꼼꼼하게 문까지 닫고 나가는 둘의 모습을 보고 휑하니 뚫린 창가로 다가갔다. 몇 번 휘적거리는 것처럼 술술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눈치껏 차 실장과 고 영감은 창가에서도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대화 내용이 들리진 않으리라 판단하고 이진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뭐가 궁금하십니까?”
“심경의 변화. 헤어진 이유.”
“제 사생활에 관심이 많으시네요. 저 좋아하세요?”
“헛소리하면 혀를 뜯어 버리지.”
무뚝뚝한 대답에 기가 막혀 웃음을 실없이 흘렸다. 저 남자도 독특한 인간이다. 누구보다 더러운 범죄를 저질러 부를 쌓아 온 주제에 미신 같은 이야기를 잘도 들어 주지 않았나. 전부 믿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떻게 보면 원장과 닮았다. 원장도 미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이상한 겁쟁이였으니까.
“원래 열심히 살 의지가 있진 않았죠. 그랬으면 처음 재판을 받을 때부터 수십 가지 이유로 항변이라도 했을 겁니다.”
“그거야 알지.”
“하재연이 살아 달라고 부탁을 하도 하길래 뭔지 모르고 끌려다니긴 했는데…….”
내 입으로, 직접 떠들고 있는데도 마음이 콱콱 쑤신다. 통증은 가실 생각을 않았다. 아예 뿌리째 뽑아 버렸으니 그 자리를 손가락으로 아무리 건드려도 텅 빈 구멍만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왜 빈자리에 신경이 남아 있을까. 없는데, 이미 없는데…….
어쩐지 속상한 기분에 괜히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휙 저었다. 괜찮지 않으면 어떤가. 다 그랬던 것처럼 교도소 생활도 어느 순간에는 적응했듯 익숙해질 테다.
“이사님은 애인이 사업 접으라면 접으실 겁니까?”
“아니.”
“저도 그런 거죠. 애인이 하란다고 다 하면 속 알맹이 없어 보이지 않습니까.”
“그치가 그렇게 노골적으로 굴던 사람이었나?”
“그럼요.”
하재연만큼 노골적으로 달려들던 사람도 드문 데다, 헛다리도 잘만 짚는다.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해관계가 맞지 않았어요.”
“흠.”
“저는 그냥…… 둘이 알콩달콩 연애하다 죽을 때 되면 죽자. 이렇게 생각했으니까요.”
이딴 남자가 뭐라고 주절주절 이야기하고 있나 모르겠다. 어찌 보면 재연이 말한, 만나지 말아야 할 인간 베스트 1위인데. 스스로의 행동이 너무 웃겨서 실실 웃으면서 고개를 혼자 끄덕거렸다.
“하재연은 그런 연애 따윈 필요 없고, 제 사랑만 받아먹으라고 강요하더라고요.”
“뭐라는 거야.”
“국어 못하세요?”
농담 따먹기를 하면서 낄낄 웃었다.
“그 이기적인 태도에 지쳤다는 겁니다. 정확하게는 본인만 행복해지면 된다는 그 태도요.”
“뭐…… 그렇다니.”
의아한 듯 이진현이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의 연애사에는 관심이 없지만, 그 무당의 얼굴을 안 봐서 속은 시원하군.”
“좋으시겠네요.”
“그럼 이제 일하는 꼴이나 볼까.”
빈 캐리어를 질질 끌어와 걸터앉으며 남자가 명령했다.
“그거 하는 꼴 보러 온 거니까.”
아무 말 없이 노끈을 손가락으로 풀어내고 엎어져 있던 시체를 들어 올렸다. 축 늘어진 시체는 속이 비어 있다고 해도 무거웠다. 오른손으로 툭툭 기계를 켜면서 물었다.
“눈이 뽑히면 얼마나 아프죠?”
“그걸 왜 묻지?”
“궁금하니까요.”
“뭐…… 마취가 풀리고 난 뒤에 조금 쑤시겠지.”
조금 쑤신다는 개 같은 소리나 하고는 빙긋 웃는 얼굴이 얄밉다.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기계 안에 시신을 밀어 넣고 숨을 훅 내쉬었다. 눈이 생으로 뽑히는 감각은 아직도 생생했다. 그 통증의 기억이 너무 거세서 스스로 눈 한쪽을 팔아 버렸을 때는 얼마나 아팠는지 이미 잊었다.
궁금하다. 그때 비어 버린 눈을 더듬으며 느낀 통증이 하재연이 내뱉은 악담과 만 원짜리 동정보다 더 아팠으면 좋을 텐데.
시체의 뼈와 근육이 끊어지고 살점이 갈리는 소리를 들으며 시멘트 포대를 열고 삽 머리를 밀어 넣었다. 뒤에서 작업하는 걸 보고 있던 이진현이 말했다.
“잘하는군.”
“해 봤으니까요.”
“몇 번 안 하고 도망쳤을 때는 구역질이라도 심하게 하나 했는데, 실망이야.”
일부러 빈정거린다는 걸 안다. 하지만 이 남자가 하는 말은 마치 뺨을 후려갈기는 듯 거칠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떳떳하게 살았다고 상처를 받지. 엉망진창으로 긁힌 속내를 진정시키며 서서히 작동을 멈추는 기계의 통을 천천히 기울였다.
“사실 오늘은 저기 통에 처넣어 버릴 생각으로 왔는데…….”
끔찍한 살인 협박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며 이진현이 입맛을 쩝 다셨다.
“구구절절 연애 한번 지랄 맞게 하는 것 같은 무당과 헤어졌다니. 참, 못 죽이겠군. 나도 사람이 좋아서 탈이야.”
어처구니가 없다. 삽을 옆구리에 낀 채 어이없어 웃었더니 이진현도 따라서 피식피식 실소를 퍼부어 댄다. 얼굴에 악의 한 점 끼지 않은 상태로 사람을 죽이려고 했다 말하는 꼴을 보니 저 남자와 나의 차이를 조금 더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업을 쌓아도 그 대가를 치르지 않을 이진현. 어떻게 보면 이 악순환의 근원 같은 남자인데 하재연과 나처럼 영향을 받지도, 휘말리지도 않는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부럽다. 역신의 후손이라……. 나도 저렇게 오컬트 마니아들이 열광할 만한 신의 후손으로 태어났다면 좀 살기 편했으려나.
“구경 다 하셨으면 일어나시죠.”
모래 먼지가 까끌까끌하게 묻은 손바닥을 털어 내고 삽을 벽에 세웠다. 진현이 몸을 일으키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평평하고 고르게 채워진 벽면을 한참 들여다보던 남자가 갑자기 귀신 웃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한쪽을 손가락질했다.
“이거.”
“뭡니까?”
“머리카락.”
“…….”
활짝 웃는 남자의 모습은 인간 같지 않아 보였다. 머리카락이나 치아 같은 건 잘 갈리지 않는다. 아무리 튼튼하고 정교한 칼날이 들어간 기계를 돌려도 헝클어져 섞여 버리니까. 벽 사이에 그딴 게 나와 있다고 웃으며 지적하는 남자가 덜 굳은 벽에서 그 머리카락을 당겨 끊어 냈다.
“잘하도록 해. 본인이 맨 정신으로 그 기계에 처박히고 싶지 않으면.”
“그러죠.”
“자.”
품 안에서 흰 봉투를 꺼내 든 남자가 턱 끝을 살짝 치켜들었다. 손에 들린 봉투를 한참 바라봤다. 받아야 했지만 받고 싶지 않은 복합적인 마음이 울컥 차올랐다.
“안 받아?”
“받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성큼성큼 걸어가 봉투를 낚아챘다. 뭐가 그렇게 즐겁다고 또 한 번 유쾌한 웃음을 터트린 남자가 곧바로 등을 돌려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차가 세워진 곳 근처에서 맞담배를 피우고 있던 고 영감과 실장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진현은 수고했다는 말을 인사치레로 남기고는 곧바로 차를 타고 떠나 버렸다. 고 영감이 흘낏흘낏 눈짓하더니 역시나 인사도 없이 컨테이너로 들어갔다. 곧장 꺼지는 불을 보며 꼿꼿하게 세워 뒀던 허리를 숙였다. 위장이 너무 아팠다. 입술을 꽉꽉 깨물며 더러운 흙이 시체에 뿌린 방부제 냄새를 지울 때까지 숨을 멈췄다.
꼭 이 일을 해야만 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쉬운 일이었다. 이 일로 생기는 정신적인 고통과 덩달아 쌓이는 업 따위 이제 지적받고 싶지도 않았다. 재연이 내 손을 잡아끌며 꽃처럼 바보처럼 웃기만 했던 과거를 잊어야 한다. 정신 좀 차리라고 있는 힘껏 뺨을 때렸다.
뺨이 손바닥과 부딪치자 얼얼한 통증은 들었지만 정신은 이미 무너졌다. 갓 만들어 식힌 푸딩을 숟가락으로 으깨는 기분이다. 흙먼지가 더럽다는 걸 알면서도 얼굴과 옷을 더럽히고 있을 때, 숨을 삼키는 누군가의 호흡을 들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앞을 보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여자의 귓가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날씨가 더워서인지 하나로 모아 묶은 머리카락이 정수리쯤에서 말려 있었다. 오늘은 희고, 흰옷. 그러나 블라우스에 달린 리본과 구두는 까만색. 마치 끝나지 않은 장례를 애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엔지가 눈매를 늘어트렸다.
“이원 씨. 연락을 안 받아서 왔어.”
마지막으로 만난 후로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엔지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선뜻 손을 뻗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떨어져 서 있는 모습을 한참 보다 물었다.
“여기는 어떻게 알았어요?”
“음…….”
엔지가 난처한 목소리를 냈다. 아마도 하재연이겠지. 신과 한통속인 것처럼 굴며 다 알고 있다는 낭설을 퍼붓던 그 잔인한 연인. 쓴웃음을 짓자 엔지가 조심스럽게 품에 들고 있던 작은 바구니를 내밀었다. 바구니 안을 덮은 하얀 손수건이 번쩍 들려 올라가더니 눈물을 그렁그렁 단 토토가 폴짝 뛰어 발목에 달라붙는다.
남의 운동화 위를 제 집처럼 뛰어 앉아 울먹울먹거리며 얼굴을 비벼 대는 작은 동물을 보고 한숨을 지었다.
“토토가 많이 보고 싶어 해서 데려왔어.”
“엔지.”
“재연 씨,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진 알아. 하지만 토토는 데려가 줘.”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꼭 붙어서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구는 토토를 버릴 수도 없었다. 왜 사람을 잘못 골라서, 영물인 주제에 이렇게까지 구정물 냄새나는 사람 옆에 붙어 있으려고 하는 건가. 신물이 올라온다. 더는 말을 할 수 없어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토토를 안아 드는 수밖에 없었다.
“얼굴이 많이 안 좋아. 더운데 걸어가지 말고 택시 타.”
“그럴게요.”
“……그,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해. 아직 이원 씨가 할 수 있는 일도 많은걸.”
다정한 배려였지만 확답을 줄 수가 없었다. 이미 재연에게 달콤한 듯 입 안의 혀처럼 굴며 설탕처럼 녹아 없어지는 허무한 약속을 하고 단숨에 깨 버리지 않았는가.
엔지가 택시를 타고 가는 걸 확인하고는 뒤따라오는 택시를 마저 잡고 집으로 갔다. 택시 기사는 졸음이 오는지 이런저런 주제로 대화를 걸어왔다. 대충 맞장구를 쳐 주며 끝없이 수다를 떨었다. 영양가 없는 대화가 머릿속에 있는 상념을 날려 버리는 데는 도움을 주었다.
원룸 건물 앞에까지 도착하고 나서야 택시 기사가 입을 멈췄다. 이진현이 주었던 돈 봉투에서 그대로 5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빼서 내밀고 잔돈을 거슬러 받았다. 집은 바깥에서부터 썩은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주머니 속에서 얌전하게 졸고 있던 토토가 코를 움찔거리면서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살기 좋은 환경이 아닌데 토토는 왜 돌아온다고 고집을 부려서 사람 속을 썩일까. 엔지의 집이라면 상쾌하고 나보다도 상냥하게 대할 텐데. 매일 가죽을 벗겨 잡아먹겠다며 괴롭히는 내가 뭐가 좋다고. 토끼의 예민한 코를 일부러 톡톡 건드리고 집 문을 열었다. 이제 정말 한계였다.
현관문을 부술 듯이 닫자마자 토토를 내려놓고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속이 너무 안 좋아서 죽을 것 같았다. 시체를 만졌다. 그걸 또 죽였다.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더러운 일을 또 해 버렸다. 지저분해, 너무 괴로워. 몇 번이나 토를 하고 허공을 향해 하재연에 대한 욕을 오락가락한 정신으로 지껄이며 짜증을 냈다. 하재연에 대한 욕은 점점 더 거슬러 올라가 신에게, 고 영감에게, 엔지와 무당, 이진현 이사와 서주영, 죽어 버린 원장이나 그 시커먼 살인마에게까지 번져 갔다. 아무나 되는대로 잡아 족치듯 욕하며 찬물을 뒤집어썼다.
토토가 알코올이라고는 한 방울 들어가지 않은 술주정뱅이 노릇은 그만하라는 듯 발가락 끝을 대차게 깨물었다. 찬물에 몸이 젖어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나 하고 토토를 손으로 밀어 냈지만 말을 듣지 않는다. 울먹울먹거리는 입 모양을 한참 보다 젖은 손을 쭉 뻗어 머리를 쓸어 줬을 때 누군가 문을 쾅쾅쾅 두들겼다.
잘못 들었나. 토토를 마른 수건 위에 올려 주며 무릎을 일으켜 세워 막 상체를 들어 올렸을 때 다시 한번 누가 문을 두들겼다. 쾅, 쾅, 쾅.
박자를 세면서 두드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소리에는 일정한 간격이 있었다. 토하면서 손톱으로 벅벅 긁어 생채기가 범벅이 된 목을 가리며 현관문 근처로 다가갔다. 좁은 문구멍으로 내다봤지만 어두워서 그런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쾅, 쾅, 쾅.
다시 정확한 박자로 또 문이 흔들거렸다. 가슴팍쯤 되는 부분에서 진동이 울린다. 쾅, 쾅, 쾅. 또 문이 흔들렸다. 쇠로 만들어진 현관문이 우그러진다. 손을 쑤셔 넣기라도 한 것처럼 불룩하게 올라온 철판을 보고 뒷걸음질 치려고 했을 때 수십 개의 손이 등을 밀었다.
고개를 돌리자 집에 가득가득 넘치던 귀신들이 한데 엉켜 얼굴만 바글바글 내민 채로 입이 귀밑까지 찢어져 웃고 있었다. 끔찍한 악취를 풍기며 싱글싱글, 즐겁게 입에서 혓바닥을 내밀고 피를 질질 흘리는 광경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쾅, 쾅, 쾅. 다시 문이 흔들렸다. 단단한 쇠로 된 문이 좀 더 불룩하게 솟아올랐을 때 등 뒤를 밀던 귀신들이 팔을 뻗었다. 악몽의 한 장면처럼 천천히 잠금쇠가 풀렸다.
쾅, 마지막 담금질을 끝으로 열린 문밖에서 한기가 흘렀다. 하얀 것도 아니다. 피가 모조리 빨려 새파랗게 질린 사람이 우뚝하니 서 있었다. 꼿꼿하게 일자로 선 몸뚱이. 쭉 뻗은 팔과 손. 기다랗게 자라 있는 손톱보다 잇새로 비죽 튀어나온 날카로운 치아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귀곡성만큼 잘 어울리는 허연 치아에서 핏줄기가 질질 흘렀다.
찰나의 순간, 발치를 파고 들어온 토토가 바지 끝부분을 물고 잡아당겨 우당탕 소리를 내며 방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캬악, 토토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울었다. 토끼가 목청이 왜 이렇게 커. 멍청하게도 그런 생각이나 하면서 철근으로 내려친 것처럼 움푹 파인 벽을 멍청하게 쳐다봤다. 등줄기를 잡아 쥔 귀신의 손을 내려치며 방바닥을 머저리처럼 굴렀다. 손톱이 한 번 스치고 지나간 바닥에 깔린 낡은 장판이 살코기처럼 죽죽 찢어졌다.
“나가!”
강시의 손을 피해 좁은 집 안을 도망 다니며 토토에게 소리를 질렀다.
“얼른 나가!”
저 손에 걸리면 토토가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벽은 물론이요, 몇 없는 낡은 가구까지 부숴 버리는 괴력에 맞서 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굴러다니며 토토를 쫓아내려고 했다. 하지만 토토는 현관문 근처에 앉아서 나를 보며 울기만 했다.
“위험하니까 나가라고!”
이렇게 시끄러운데 위층에서나 바깥에서는 반응이 없다. 아마도 무슨 손을 썼겠지. 이를 악물고 휘두르는 팔을 피해 바닥을 기어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무로 만든 문이 쾅쾅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열 번을 두드리지도 않았는데 나무로 된 문이 산산조각 나면서 강시가 뛰어들었다.
생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쩍 벌린 아가리에서는 뱀의 소리가 났고, 주둥이에서는 끝도 없이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홀로 시간을 돌렸다고 생각했을 때, 그리고 재연이 시간을 돌렸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이렇게 죽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냥 적당히 자살해 버릴걸. 병신 같은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헛웃음이 터졌다.
팔을 한 번 휘두르자 수도관이 터지고 타일이 깨졌다. 제 뜻대로 되지 않자 강시가 전신을 뒤흔들면서 비명을 질러 댔다. 수도관에서 뿜어져 나오는 찬물을 흠뻑 뒤집어쓰며 눈앞에서 쏟아지는 강시의 핏발 선 눈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갑자기 잊고 있던 기억이 생각났다. 거하게 뒤통수를 치고 엿을 먹였던 꼬마 귀신이 말했다. 나는 세상의 부조리 그 자체라고. 운명을 인정하지 못하고 시간을 되돌려 벌을 받는 거라고. 하재연이 나를 부조리하게 만든 근원이라고 말했던 뜻을 이제야 깨달았다. 왜 그때는 몰랐을까. 멍청하니 이런 꼴을 당하는 것이다. 아, 정말 어이가 없다. 그때 알았으면 재연이 나 때문에 창문에서 떨어지고 눈 한쪽을 잃어버려도 그렇게 슬프진 않았을 텐데…….
아예 이렇게 죽어 버리면 통쾌하려나. 희미하게 웃으며 살의에 번뜩이는 흰 냉기를 맞을 때 무언가 묵직한 것이 빠르게 강시의 목을 내리쳤다. 갑자기 들이닥친 날붙이에 강시의 눈이 반쯤 튀어나왔다. 목을 반쯤 가른 채 꽂힌 손도끼가 다시 빠져나가더니 한차례 더 강게 강시의 목을 파고들었다.
나무로 된 도낏자루를 쥔 손이 익숙하다. 도끼의 날에는 괴황지로 만들어진 부적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핏물에 젖어 너덜너덜한 부적을 찰싹 붙인 도끼가 한 번 더 빠져나가더니, 목과 몸통을 이어 주던 마지막 살점을 끊어 버렸다. 강시가 되기 전 육체에서 빨아들인 피가 분수처럼 튀었다.
한때는 자신의 양모였던 시체를 도끼로 내려친 재연은 표정이 없었다. 목철도 뚫어 버린다는 손톱을 세우며 강시의 몸통이 반항하듯 꿈틀거렸지만 소용없었다. 주머니에서 부적을 한 장 꺼낸 재연이 라이터로 그걸 태워 바닥에 쓰러진 강시의 입 안에 쑤셔 넣었다. 그제야 경련 같은 움직임도 없어졌다.
제 얼굴을 적신 핏줄기를 핥아 훔치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도끼를 집어 던진 재연이 밖에 나가 커다란 검은 가방을 가지고 들어왔다. 지퍼를 열고 그 안에 강시의 시체를 쑤셔 넣었다. 커다란 시체 하나를 구부려 밀어 넣는 일련의 과정은 깔끔하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마지막으로 무거운 가방을 짊어진 재연과 눈이 마주쳤다.
입과 뺨, 눈꺼풀과 귓가까지 핏물이 전부 튀어 있다. 젖은 수건을 건네줘야겠다는 쉰 생각이 들었다. 이성이 어처구니없어하며 말을 아꼈다. 재연이 눈을 한 번 부자연스럽게 깜박였다. 무슨 말이라도 나와야 하는데 비명을 지르다 만 목구멍 안을 빙빙 맴돌았다. 오히려 재연이 조금 더 빨랐다.
“늦어서 미안해요.”
부조리를 원래대로 돌려놓으려고 애쓰는, 하재연.
그제야 재연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
“하재연.”
“갈게요.”
“하재연!”
커다랗게, 마지막 힘을 짜내서 불렀지만 재연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내가 잘못했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악을 쓰면서 피 웅덩이가 고여 있는 바닥에 엎어져 울었다. 버린 건 너잖아. 아니지, 버렸어야 마땅한 걸 버리지 못해 사람을 이렇게 고생시킨 건 너면서 왜 고집을 부리는 거야.
뭐가 틀렸어?
눈물이 떨어졌다. 토토가 하얗고 예쁜 털에 핏물을 뒤집어쓰면서도 다가와 주둥이를 비비면서 울지 말아라 애교를 떨었지만,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내가 틀렸어? 그렇다면 정답을 알려 줘, 정답을.
잃어버린 것이 너무 많다. 그런데 잃어버린 모든 것을 또 한 번 상실하고 말았다. 고독함만이 방에 남아 뒹굴었다. 휙 불어오는 여름의 공기에 피가 익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