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흩어지는 시간
토토는 졸지에 빨간 털을 가진 토끼가 되었다. 핏물을 잔뜩 뒤집어쓰고 울고 있는, 쓸모라곤 없는 토끼 뒷덜미를 잡아 씻겨 내보낸 뒤 팔자에도 없는 화장실 청소를 세 시간 내내 했다. 피가 천장까지 튀는 바람에 생각 없이 샤워기를 거꾸로 들고 천장으로 물을 쏘았다가 흠뻑 젖기까지 했다.
피와 수돗물이 광란의 파티라도 하는 것처럼 뒤엉켜 하수구 구멍으로 질질 빨려 들어가는 걸 보고 있으려니 딱 죽을 맛이었다. 씨발. 물이 쏟아지는 샤워기를 집어 던졌는데, 하필 금이 가 있었는지 딱 그 부분의 타일이 또 깨지는 바람에 머리를 싸맸다.
역겨운 일까지 해 가며 월세를 낼 두툼한 돈뭉치를 손에 쥐면 뭐 하는가. 집에서 살 수 없게 되었는데. 엉망이 된 집을 둘러보니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이건 주인에게 보여 줄 수도 없을 만큼 완전히 내부가 엉망이었다. 한 달 내내 버는 돈 이상을 수리비로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타일이 깨진 건 그렇다 치더라도, 장판이 찢어진 거나 벽이 깨진 건 변명도 불가능하다.
골머리를 잡으며 떨어져 나온 시멘트 가루 따위를 전부 쓸어 쓰레기통에 밀어 넣고 찢어진 장판 위에는 얇은 이불을 깔았다. 수습한다고 해 봤지만 여전히 사람이 살지는 못할 것 같은 환경이다. 강시의 피가 줄줄 흘러내린 화장실을 쓰면 저주라도 받는 거 아닐까. 털이 아직 축축한 토토를 수건으로 닦아 주며 고민에 빠졌다.
설마, 이진현 좀 만났다고 타이밍 좋게 재수가 없었던 건 아니겠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면서도 매우 가능성 높은 그 사실을 배제할 수가 없는 게 문제였다.
평소에는 나름 얌전하던 귀신들이 떼를 지어 사람의 움직임을 막고, 멋대로 집 문을 열어 줄 정도가 되었다는 건 심각하게 오염되었다는 뜻이다. 이대로 뒀다간 토토가 문제다. 한 번 악령에 씌어서 오염된 전적이 있는 애니까 이번에는 더 쉽게 물들지도 모르지.
털이 거의 다 말라 보송보송해진 몸을 굴리며 좋다고 난리를 치는 토토의 해맑기만 한 얼굴을 보다 뒷덜미를 콱 잡아 들었다. 토토의 짧은 앞다리와 뒷다리가 바둥거린다.
“이사하자, 이사.”
온 지 하루 만에 어딜 가. 토토가 표정으로 대답한다. 쓰읍, 혼내는 척 눈을 부라리고는 토토의 우리를 분해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당장 오늘 밤 잘 수도 없는 방이었다. 출소할 때부터 들고 나왔던 보스턴백에 손에 잡히는 대로 짐을 챙겨 넣었다. 산책이라도 가는 줄 알고 목줄을 입에 문 채 눈을 초롱거리고 있던 멍청한 놈이 분위기가 안 좋다는 눈치를 챘는지 주머니 안으로 얌전히 기어들어 갔다.
현관 문고리에는 손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이쪽은 모르고 닦지 않은 모양이다. 핏물이 조금 붙어 있는 금속 표면을 물티슈로 쓱쓱 닦고는 문을 활짝 열었다. 이번에도 귀신 한 마리가 서 있는 건 아닌가 속으로 조금 졸아 있었는데 다행히도 아무것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뒤돌아본 방에서는 한 뭉치로 엉켜 있는 귀신들이 천장이나 벽, 장판, 모서리, 어디에서든 아무렇게나 달라붙은 채 이쪽을 쏘아보면서 실실 침을 흘리며 웃고 있었다. 정서상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었다. 저런 꼴을 그 살인마 새끼도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적어도 사람 괴롭히고 협박하러 왔다가 텅 빈 방 꼴을 보고 엿이나 먹었으면 좋겠다. 어차피 되는 것도 하나 없는 인생, 다른 놈이라도 엿 먹이면 즐겁지 않겠는가.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박자에 맞춰 흔들리는 감각이라도 즐기는 것인지 호주머니 바깥으로 머리를 빼낸 토토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하얀 바람이 불어오는 한여름 밤이었다.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길거리에는 귀신이 사람 행세를 하고, 사람이 귀신처럼 걸어 다니는 묘한 밤이었다.
취객을 태워 가려고 대기하고 있는 택시 하나를 잡고는 무당이 사는 집 주소를 불렀다.
“거기 보살님 용하지? 근데 이 시간에 무당집에는 무슨 일로 가?”
“뭐…….”
꽤 유명한 무속인이라서 택시 기사도 알고 있는지 운전대를 잡는 내내 시시콜콜한 걸 캐물어 대기 시작했다.
“우리 사돈처녀에게 큰일이 났었는데, 보살님이 딱 알려 줘서 그래도 찾았다 아니야.”
“무슨 큰일요? 사기?”
“납치당했었거든.”
택시 기사가 무뚝뚝하게 이야기하며 붉게 변한 신호에 맞춰서 천천히 차를 세웠다.
“거참, 사돈댁에서도 막둥이라 애지중지에, 우리도 딸처럼 예뻐하던 애인데, 집에 놀러 왔다가 택시 타고 돌아갔다더니 소식이 없어. 이틀간 온 가족이 죽어라 뛰어다녀도 못 찾았지. 경찰 측에서는 3일 지나면 잠정적 사망으로 봐야 한단 헛소리를 하지 뭐야.”
“아…….”
무서운 이야기였다. 최근 범죄는 날이 갈수록 질이 나빠졌고 피해자들은 점점 늘어났다. 언제 죽을지 몰라 눈을 굴리는 세상이라니, 나와 비슷하다. 쓴웃음을 짓고 있자 택시 기사가 묵묵하게 이야기를 계속 이어 나갔다.
“애라도 찾자 싶어서 지푸라기 잡는 마음으로 거기를 떡 갔지.”
“네.”
“연락도 안 하고 다짜고짜 갔는데, 거 보살님이 갑자기 딱 나오더니 인왕산 둥치 어디다, 그 말만 하더라고.”
“…….”
“다들 울고불고 애 엄마도 산발을 해서 다 같이 뛰어갔지. 근데 진짜 딱, 말한 거기 있는 거야. 손이랑 발이 묶여서는 짚으로 덮어 둔 곳에……. 이상하지, 거길 어떻게 알았을까.”
조수석에 앉았기 때문에 운전석에서 핸들을 돌리거나 기어를 바꾸는 기사의 움직임이 생생하게 들어왔다. 중년쯤 되어 보이는 기사는 그 이야기를 할 때마다 손등에 힘을 꽉 줬다. 핏줄이 울룩불룩하게 서면서 의문스러운 목소리가 꼬리를 물고 뒤따라 나왔다.
“용하기도 하지……. 아직도 기억나. 무섭게 노려보던 보살 눈빛이.”
미터기의 요금이 2만 원을 넘어가고 익숙한 동네의 골목으로 들어왔을 때였다. 저기 세워 주세요, 노란 전등 빛이 깃발에 스며 펄럭이는 곳을 가리키며 말하자 기사가 차를 그리로 끌고 갔다. 만 원짜리 세 장을 내밀고 잔돈을 거슬러 주던 기사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것처럼 유순한 얼굴로 물어 왔다.
“총각도 뭘 좀 보는 사람인가?”
“네.”
사실은 아무런 능력도 없는 인간이었지만 이번에는 한 번 긍정해 보았다. 그렇게 대답하지 않으면 괴로워 미칠 만한 것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보입니다.”
택시 기사 목 언저리에 진득진득하게 달라붙어 있는 원혼을 가엾게 쳐다보다 차 문을 세차게 닫았다. 차에 붙어 있으니 얼마 안 가 사고가 나겠지.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고 나서도 사후 세계를 편안하게 즐기지는 못할 것이다.
늘 느낀다. 사람은 상상 이상의 죄를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른다고. 사랑에 미쳐서 정을 주며 길러 줬을 양부모를 팔아 버린 하재연.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살인을 가십거리처럼 떠드는 더러운 인간. 엉망으로 일그러진 원혼을 보지 못하니 마음이 편하겠지.
끈에 졸린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손목과 발목을 하고 눈을 붉히던 여자 귀신의 모습을 떨쳐 내려고 애쓰면서 무당의 집 앞을 서성거렸다.
방과 마루를 막고 있는 중문이 열리더니 나이 든 여자가 바깥으로 나왔다. 맨발에 슬리퍼 하나를 신고 선 무당이 혀를 찼다.
“넌 뭔데 또 그런 거나 마주치고 오는 거냐.”
“역신을 만나서 그래요.”
재수가 없긴 정말 없는 모양이다. 어느새 등 뒤에 달라붙은 머리카락 뭉치를 돌아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무당이 아직 잠이 덜 깬 얼굴로도 독설을 퍼부었다.
“죽는 게 능사지, 능사야. 그런데 이젠 죽으면 재미가 없어서 곱게 죽여 주지도 않겠다.”
“인기가 많아서 피곤하네요.”
택시에서 옮겨 붙은 듯한 머리카락을 떼어 내려고 등과 어깨를 털었지만 머리카락은 점점 더 심하게 헝클어져 몸에 달라붙었다. 이 정도로 원혼이 강한데 뻔뻔하게 운전대를 잡고 있는 택시 기사는 얼마나 신경 줄이 거센 거지. 짜증을 내며 머리카락을 잡아 쥐어뜯었다.
“그런다고 풀릴 거 같으냐. 평생 달고 살아라. 머저리 같은 것.”
“보고만 있지 말고 도와주세요.”
“싫다.”
“아, 정말…….”
다 때려치울까. 성질이 곤두서서 마당에 누워 시위라도 할까 고민하는 찰나 토토가 주머니에서 폴짝 어깨로 뛰어올랐다. 목에 붉은 리본을 묶고 귀여움을 한껏 자랑하는 모양새에 무당까지 움찔한다.
귀를 쫑긋거리면서 무던히도 말간 눈동자를 깜박거리던 토토가 입을 벌렸다. 당근이 필요한가 싶어서 주머니를 뒤지는데 토토가 갑자기 등 뒤에 붙은 머리카락을 덥석 물었다. 너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굳어 있자 토토가 망설이지도 않고 야금야금 머리카락을 씹어 먹어 댔다.
“너, 너, 너!”
이게 뭘 먹는 거야.
황급하게 뱉으라며 엉덩이를 때렸지만 토토는 맛도 없을 머리카락을 열심히 씹어 먹는다고 정신이 팔려 있었다. 흰 털로 뒤덮인 분홍빛 주둥이 사이를 비집고 나온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은 호러 그 자체였다.
“먹지 마, 배탈 나!”
말려도 소용이 없다. 토토는 몸에 엉킨 머리카락을 다 먹어 치우고 난 뒤에 만족한다는 얼굴로 손바닥 위에서 벌렁 엎어졌다. 그 대참사를 보고 있던 무당이 질린다는 얼굴로 말했다.
“너는 뭐 그런 것을 데리고 다니는 게야.”
“그런 거라니…….”
반박할 수가 없다. 제가 엄청난 걸 먹어 치운 걸 아는지 모르는지 토토는 배가 부른 듯 뒷발을 바둥거리면서 즐거워했다. 한숨을 짧게 내쉬고 얼없는 표정을 한 무당에게 토토를 번쩍 들어 건네주었다. 토토가 무당의 손바닥 위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순진무구한 얼굴을 보니 조금 미안하다.
“당분간 토토 좀 부탁드릴게요.”
“나보고 토끼 뒤치다꺼리나 하라고?”
“네.”
“이런 몹쓸 놈이.”
“부탁드려요. 지금 집은 저도 못 살아요.”
엉망이 된 집을 무당이 모르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비스듬하게 짝다리를 짚고 서서 웃기만 하자 무당이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그따위로 살지 말고 한 명이 쳐 내라.”
“쳐 내요?”
“몇 번이나 조각난 인연의 끈을 억지로 끌어다 묶었으니 팔자가 개차반이 아니냐. 이별의 부적이라도 하나 써 주랴.”
“재연이가 찢어 버릴걸요.”
씁쓸한 사실을 지적하며 마음대로 마루 위로 올랐다. 바리바리 싸 들고 온 토토의 우리를 마음대로 다시 만들었다. 원래 쓰던 먹이 접시와 물 접시도 그대로 넣어 뒀다. 토토는 무당의 품에 안겨서는 정말 저를 두고 갈 거냐는 듯 혼자 한참이나 울먹거리고 있었다.
귀엽게 꼬물거리는 주둥이를 몇 번 어루만져 주자 한참 말이 없던 무당이 등을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갔다. 닫히지 않고 열려 있는 문이 들어오라는 말을 대신해 주었다. 나쁜 사람은 되지 못하는 모습이 어쩐지 웃겨 슬그머니 방 안에 들어갔다. 한창 누워 있었을 이부자리를 정리해 벽 쪽으로 치운 무당이 한쪽 무릎을 당겨 올려 앉았다.
토토는 처음 오는 집이 신기한지 이곳저곳을 종종거리며 돌아다니다가 이내 한곳에 가서 정착했다. 십이지신이 그려진 탱화 앞이었다. 제 본래 주인이자 어버이를 알아보는 모양인지 연신 쫑긋거리는 귀를 보며 무당이 주는 물을 한 잔 마셨다.
“장군님이 안 계시네요.”
“그래.”
“…….”
“이제 안 계시지.”
“……죄송합니다.”
무당에게 있어 목숨 그 이상으로 소중한 것은 모시는 신이다. 장군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이번에도 하재연이 그를 빌려 갔거나 아니면 무당 스스로 업을 받아 더 이상 신의 뜻과 하늘의 흐름을 읽을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었다. 무당은 이제 계시지 않는다 말했으니 아마 후자일 것이다. 내게 재연의 비밀에 대해서 이야기했기 때문이겠지.
“후회하지 않으세요?”
“무얼?”
“도와주셨지만 저는 결국 하재연이 미워졌는걸요.”
아무 맛도 나지 않는 물인데 맛이 비리다. 투명한 물 안을 한참 들여다보던 무당이 얼굴을 찡그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되었다. 너희 일이 아니냐.”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더는 할 말도 없어 방에 앉은 채로 천천히 잔뜩 그려진 벽화와 어지럽고 화려한 탱화만 둘러보았다. 십이지신은 물론이고, 팔이 여러 개 그려진 부처의 모습도 있었다.
“저건 뭐였죠? 미륵?”
“멍청한 놈,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이시다.”
“아.”
그런 이름도 있었지. 기독교처럼 예수나 마리아 하나만 모시면 안 되는 걸까. 이놈의 불교나 도교나 무속 신앙은 신이 많아도 너무 많다. 불량하게 다리를 펴고 앉아 하나씩 구경하다 푸른 옷을 입고 있는 수염이 긴 할아버지를 발견했다.
“단군인가요?”
“……뭐?”
“단군 할아버지…….”
딱 저렇게 생겼던데. 눈을 깜박이면서 무당을 바라보자 무당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이 무식한 놈아, 천존 아니시냐.”
“천존이 뭔데요?”
“원시천존!”
“아…….”
전혀 모르겠다. 멍청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자 토토가 폴짝폴짝 뛰어와 무릎 위를 산 넘는 사람처럼 끙끙대며 올라온다. 편안하게 자리를 잡도록 도와주고는 무당의 얼굴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럼 상청은 누군가요?”
“…….”
무당의 입이 딱 다물렸다. 수많은 집 중에서 고르고 골라 무당의 집에 온 것은 내가 바보가 아니라는 걸 입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마 무당은 그 이름의 뜻을 알고 있을 것이다.
오랜 시간 침묵한 채 고민하던 무당이 깊은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다시 숨을 들이켰다. 가슴을 부풀게 했다 금방 꺼져 나간 그 시간의 공백에 향냄새가 가득 채워졌다. 무당은 한번 천장을 의미 없이 올려다보다 이내 고개를 떨어트리고 종이 하나를 끌어다 상 위에 올렸다.
“상청은…….”
두툼한 손으로 무당이 한자를 적어 넣는다. 공부를 따로 했는지 원래부터 명필이었는지 그녀가 써 낸, 꽤 멋들어진 획을 가진 한자어가 종이 위에서 윤곽을 그렸다.
“삼청(三淸) 중 하나를 말하는 것이다.”
“삼청이요?”
“옥청, 상청, 태청. 도교에서 가장 고귀한 세 명의 신을 부르는 말이지.”
묘하게 무당의 눈동자가 떨린다. 글자를 적어 넣은 종이를 무당 대신 들어 초에 붙였다. 불꽃을 머금고 서서히 타들어 가는 종잇조각을 보고 있다 남은 재를 훅 털어 냈다.
“이젠 이야기를 잘해 주시네요.”
“어차피 나는 이제 끝이니까.”
하늘하늘, 어쩐지 장군신의 그림자가 무당의 얼굴 근처에 지는 것도 같았다. 활짝 열린 장지문을 통해 방에서 마당을 내다보면 아직도 어두운 하늘과 전등 빛에 붉게 물든 마당의 그림자가 보인다. 펄럭거리는 흰색과 붉은색 깃발도 언젠가는 마당의 저 밑으로 내려오게 되겠지.
이제 무당으로서의 힘을 잃은 그녀는 거의 마지막 남은 자투리의 신력을 끌어내고 있었다. 겨우 1년도 가지 못한 채로 무당의 위명을 잃어버렸는데도 안색이 나쁘지는 않았다. 타인의 업을 읽기 위해 자신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이런 무당의 팔자를 타고 난 자들은 전생에 업이 많아서 그렇다고 했다. 죽고 싶었으나 신의 손에 살아나 종이 되었는데, 결국은 그 신을 다시 잃어버렸으니 아마 힘든 삶이었으리라 희미하게 추측할 뿐이다.
“다들 옥황상제가 가장 높은 신이라 생각하지만 저 태초에는 원시천존을 필두로 한 세 명의 신이 계셨으니…… 그곳에서 원시천존이 태어나 세상 만물이 모습과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시작이 된 신인가. 오묘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무당의 얼굴을 응시했다. 무당의 얼굴에 서린 푸르스름한 귀기가 여름밤조차도 서늘하게 만들고 있었다. 추운지 토토가 옷 속을 파고 들어와 엉겨 붙는다.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면서 이야기를 경청했다.
“이 원시천존을 옥청(玉淸)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 신에게는 오른팔과 왼팔이 있는데, 왼쪽에 계시는 분이 인간들을 사랑하는 자이자 실질적으로 인계에서 원시천존의 언어를 행하는 자, 태상노군이라 부른다.”
“태청(太淸)?”
“그래.”
대답 잘한 학생을 보는 것처럼 무당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중앙의 원시천존. 왼쪽의 태상노군, 그럼 우측이…….
“상청은…….”
마지막 대답을 들려주기 위해 무당이 입을 열다가 갑자기 입에 거품을 물더니 앞으로 고꾸라졌다. 억 소리를 내며 몸을 반쯤 일으키자 토토가 옷 안에서 굴러떨어져 바닥에 엎어졌다. 눈을 까뒤집고 기절한 무당의 뺨을 치고 찬물을 뿌렸지만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코에서 새어 나오는 숨소리가 미세하다.
멀쩡하게 움직이다 고꾸라진 사람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허둥지둥하다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휴대폰을 겨우 기억해 찾아 들었다. 통화권역 바깥이라는 표시가 뜨는 액정을 보고 나서야 다른 사람 행세하는 것을 좋아하는 악질적인 취미를 가진 존재가 하나 있다는 것을 기억했다. 눈을 감겨 준 뒤 축 늘어진 몸 위에 이불을 끌어다 덮어 주고 나서 한숨을 쉬었다.
푸른색과 붉은색이 잔뜩 뒤섞여 그려진, 화려한 벽화를 바라보았다. 그림 속 인물들은 다 나이 들었고 부리부리한 얼굴의 못생긴 영감이었다. 실제로 보았던 그 존재의 얼굴을 떠올려 보니 너무 심할 정도의 초상화라 웃음이 나온다.
“……중년 여성의 몸에 들어앉은 건 너무 변태스럽지 않습니까.”
「너는 내가 몇 살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드물게 유쾌한 목소리가 울린다. 그림에서 연기처럼 새어 나와 흰 옷감을 펄럭이는 신을 흘끗 올려다보았다. 토토가 갑자기 바닥에서 팔짝팔짝 뛰더니 신에게 달려가 아양을 떨기 시작했다. 갑자기 대단한 배신을 당한 기분이 들었다.
「귀엽군. 너 같은 인간에겐 어울리지 않는 영물이지.」
토토가 세상을 다 가진 얼굴로 귀를 쫑긋거렸다. 어이가 없어서 뒤로 나자빠지기 직전인 나를 버려둔 채, 신은 토토를 안아 들고 얼렀다.
어떻게 보면 악령에게 물들어 더러워진 토토를 실제로 구해 준 것은 신이니, 저렇게 좋아하는 쪽이 맞긴 하지만 묘한 실망감에 입술을 슬며시 깨물었다. 왜였을까, 뭐든 조금만 사랑을 받으면 제 것이라 생각하는 버릇은 고쳤다고 생각했는데.
인간 아닌 둘의 애틋한 교감을 바라보고 있자 신이 흘끗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쳤다.
「이런 인간보다 나는 몇천 배를 더 많이 살았어.」
“그래도 여자 몸에 들어가 있는 게 좋은 행동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습군. 신인 나에게 인간의 규율을 들이밀지 마라.」
“그 규율의 태반은 원시천존과 당신이 정한 것이죠.”
말대꾸가 잘도 튀어나왔다. 되바라진 인간의 말에도 신은 자애로운 척 웃고만 있었다. 여전히 인간이 아닌 듯한 외모였다. 어쩌면 그림을 저따위로 그려 둔 이유가 저 미인을 그림 속에 베껴 넣을 재주가 없어서 그런 건 아닐까. 물론 늙어 빠진 노인으로 그린 건 너무한 처사지만.
「배운 게 없으니 무지한 것이 당연한데, 이쪽 세상에 익숙하구나.」
“그거야…….”
점점 더 알아 가고 있으니까, 하고 대답하려 했는데 입술이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업이나 행위의 대가를 잘 아는 이유는 시간을 돌리기 위해 지옥에서 보낸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시간은 악질적인 고문이었지 공부 시간이 아니었다.
지옥에서는 신이나 귀신들의 세상에 대해서는 수박 겉 핥기 수준의 지식만 쌓았다. 십이지의 이름과 그들의 언어와 이야기, 관례와 법칙에 대해서는 더더욱 알지 못하는 게 맞았다.
왜 알고 있는 거지. 멍청하게 눈을 깜박거리자 신이 미세하게 흐려진 눈을 하고는 뺨을 쓸었다.
「나는 내 뒤를 캐고 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아.」
불쾌했다는 말을 도도하게 돌려 말하는 신을 보며 말했다.
“상청은, 재연이가 자신의 진명이라며 적어 준 이름이에요.”
「그래서?」
“어째서 인간인 하재연이 당신의 이름을 쓰고 있는 겁니까?”
세상의 혼백을 빨아들인 것처럼 하얗고 어두운 빛을 가진 신이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거세게 쿵쿵거리며 울리는 집, 홀로 딸랑거리며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방울. 방 안으로 공기와 바람, 해와 구름, 땅과 하늘……. 자연의 여러 가지 색깔이 잡다하게 섞여 들어왔다.
「나는 잊힌 신. 원시천존과 태상노군의 그늘에 숨은 자.」
원시천존과 태상노군은 인간에게 흔하고 익숙한 이름이다. 그러나 숨어 있는 이 신은 존재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 역시도 몰랐다. 당연하다. 신은 인간에게 두려운 존재이자 모든 생명의 끝이며, 또한 실체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인간 세상에 내려가 나라를 키우고 설법을 전파한 태상노군과 정반대되는 위치에 서 있는 존재.
누군가가 귓가에 정답을 속삭였다.
「근원이자 혼돈이며, 무이자 유이고,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것이 시작되기 전을 상징하는 신의 이름.
「말해 보아라. 나는 누구인가?」
신의 눈이 반짝거린다. 기묘한 기대에 부풀어 있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지켜보다 대답했다.
“혼돈의 상징이신 영보천존께서…… 인간의 세상에 관여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무도 알려 준 적이 없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영보천존. 잊힌 신의 이름. 혼돈이자 근원의 상징, 태극(太極)의 본래 이름.
대답하고 나서야 그의 모습이 왜 희고 검은 색으로 치장되어 있는지 알았다. 백색과 흑색의 꼬리와 머리가 맞물린 태극도는 영보천존을 대표하는 상징물이었으니까.
「알아보는구나.」
“그렇게 다 알려 주셨는데 모르면 말이 되지 않지요.”
건네주는 토토를 다시 돌려받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토토가 이제는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손바닥 위를 한 바퀴 구르면서 애교를 부렸다.
“어째서 관여하십니까.”
「…….」
“왜 이토록 고귀하신 존재가 하필 저와 하재연을 선택하셨습니까.”
세상에는 불행하게 죽는 것들이 차고 넘쳤다. 죽을 때 원망과 한이 맺힌 목소리가 들려 선택 받았다고 치부하기에 그는 내 인생에 너무 많은 관여를 하고 있었다. 아예 흩트려 놓을 정도로, 모든 것을 망가트릴 정도로 많이, 그리고 낯설지 않게.
“왜 하재연이 당신의 이름을 쓰고 있습니까?”
「……내 이름은 여러 개가 있단다. 그중 하나가 상청경영보군(上淸境靈寶君)이지. 나는 그걸 빌려준 것뿐이야.」
“인간이 신의 이름을 빌린다는 게 가능합니까.”
「그럼, 그 인간은 내 시간도 빌려 갔으니 불가능한 건 없지.」
눈을 휘며 자애로운 척 웃어 보이는 신의 얼굴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하재연이 신의 시간을 빌리고, 이름을 빌릴 만큼…… 절박했던가.
그런 일이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이미 논할 문제가 아니었다. 허리를 펴고 일어나 신의 눈을 응시했다. 신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비스듬하게 떨어트렸다. 고매하신 그가 도대체 왜 이만큼 인세에 관여하고 있단 말인가.
그는 신이다. 고귀한 지위에 있었으나, 인간들의 머리에서 잊힐 정도로 어둠에 가까운 신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신, 그것의 정점에 서 있을 만큼 위대한 존재라는 말이다.
“하재연이 저승사자에게 그렇게 무례했던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겠네요…….”
‘염라가 제 몫을 못하는 것은 아니냐,’
하재연은 장부를 들고 이곳에 찾아왔던 저승사자에게 면박을 날렸다. 염라대왕은 영보천존보다 한참 밑에 있는 신이니, 그의 이름을 빌려 사용하는 재연이 저승사자에게 무례하게 굴어 볼 만했을 것이다.
하재연은, 도대체 얼마나 무식하게 일을 하는 거지. 인간인 주제에 이렇게 높은 곳에 위치한 신의 이름과 그의 시간을 빌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한 일일까.
도대체, 겨우 그깟 사랑이 재연을 일방적으로 목매게 할 이유가 뭐가 있었을까.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일이다. 지금이나, 시간을 돌리기 전이나 똑같이 재연을 사랑했다는 기억은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재연이 놓친 나는 불타는 듯 애절하게 그를 사랑했고, 지금의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고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식어 버린 첫사랑이라도 되는 것처럼 새침을 떠는 감정을 몇 번이나 들쑤셔 보았지만, 정답을 찾아낼 수 없었다. 질문에 해답을 바라는 것처럼 절박하게 신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매끄러운 옥구슬처럼 깔끔하게 웃은 신이 길게 내려온 옷자락을 정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
「하재연은 시간을 돌리는 대가 중 하나로 네 기억과 감정을 팔아 치웠지.」
“……어째서.”
「너는 평생 그 아이를 사랑하지 못해.」
그는 정말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발끝에서 흔들리는 흰 옷자락이, 불어오는 바람의 상쾌한 향기와 어딘지 눅눅하게 배어 있는 생강 향이 마음을 무섭도록 뒤흔들고 있었다.
「하재연이 바라는 것은 이루어 주지 않고,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않고, 사랑하면 사랑하는 기억이 지워지고, 설레도 그 감각이 잊히는 너를—」
끔찍한 기분이라 소리 내서 울어 버리고 싶었다. 평생. 신이 말하는 그 단어가 주는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괴로웠다. 아무리 사랑해도 사랑하지 못하고, 아무리 좋아해도 눈을 감았다 뜨면 그 사랑이 다 사라져 버린다니, 차라리 미쳐 버리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이는 사랑하고 있단다.」
나는 아마 하재연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이미 보답받지 못할 사랑을 결심하고 시간을 돌린 것이다. 취향이라면 가혹한 일이었고, 저지를 수밖에 없는 선택이었다면 가련하다.
사랑을 하는 인간에게 가장 큰 시련을 주어 놓고 신은 후련하고 유쾌한 얼굴로 웃기만 했다.
「신기하지 않은가.」
내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툭 건드리며 신이 키득키득 웃음소리를 냈다. 경박해 보일 만한 웃음이었지만 너무나도 존귀했던 탓에 손톱만큼도 그런 티가 나 보이지 않았다. 너무 완벽한 존재는 한참이나 하재연을 향한 비웃음을 꾸역꾸역 흘리기만 했다.
「네 머리가 이미 누군가에게 조작당하고 있다는 게.」
‘기억을 얼마나 맹신하고 있어요?’
하재연이 물었다. 기억을 도둑질하는 게 뇌라는 건 알고 있냐고. 내 기억 어딘가가 가짜로 심어진 기억이라면 어떨 것 같냐고 물었던 건…… 이미 하재연은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얼마나 그를 사랑했을까. 왜 사랑한 기억을 지워 버렸을까. 아직도 마음속 희미한 부분은 상대에 대한 배려 따위 없이 이기적인 사랑을 행사하는 하재연이라도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사랑이 커다랗게 부풀어 오르고, 불타오를 것처럼 뜨거워지지 않는 것은 뇌가 조작을 하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너무 불공평하잖아.
하재연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잖아.
하재연을 미친 듯이 사랑해 봐야 짧은 순간이 끝나고 나면 잊히는 사랑이라니.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사랑이라니. 하재연은 그야말로 세상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유일무이한 짝사랑을 하고 있었다.
사람의 뇌를 마음대로 주물러 그 감정의 찌꺼기만 남겨 놓은 주제에, 신은 죄책감도 없이 뻔뻔하고 말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가 만나는 무수히 많은 살인자와 도둑과 사기꾼들.」
“…….”
「너는 그런 것들을 사랑해야 한단다.」
“…….”
「불행하게도 하재연을 사랑할 수는 없으니까.」
세상에 넘치는 것이 있다면 사랑이었다. 수많은 성욕과 색욕을 가진 무수히 많은 연인들이 있었다. 다들 제 짝을 가지고 사랑을 했고, 나란히 그 사랑의 크기를 주고받았다. 연인이란 그랬다. 하지만 나와 하재연은 그럴 수가 없었다.
동의를 구하지도 않은 채 가져가 버린, 상실한 사랑의 크기가 너무 커 숨을 쉴 수 없었다. 점점 굶주린다. 점점 죽어 갈 것이다.
“어째서, 왜, 그걸 대가로…….”
「응? 그거야 당연하지.」
신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턱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혼백이 쓸린다. 몸에 소름이 끼쳤다.
「나는 그놈이 싫으니까. 가장 고통스러울 만한 방법을 찾아낸 것뿐이란다.」
어째서 신은 이토록 하재연을 싫어하는 걸까. 둘 사이에 흐르는 고약한 전류에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속이 쓰라렸다.
내가 들은 것이 진실이 아니길 바랐을 때, 신이 자신의 눈과 내 눈을 바짝 붙였다. 꼭 닿은 시야 안에서 우주가 보였다. 그가 속삭였다.
「그럼 부탁해 보렴. 하재연을 도와줄까, 아니면 그 택시 기사를 죽여 줄까?」
“…….”
질문은 하찮았다. 당연히 하재연이었다. 아무리 재연이 이기적인 사랑 방법을 내게 강요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내게 소중했던 인간이다. 도와줘야 함이 옳았다. 하지만 입술은 천 근의 무게를 단 것처럼 무거워 움직여지지 않았다. 세상에서 억울하게 살해당하는 수많은 사람들보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재연을 도와야 하는 것이 맞는데. 어째서지?
하재연을 고를 수가 없었다.
「선택지가 너무 어려웠니? 다시 물어보랴. 하늘의 뜻을 어긴 무당에게 신을 돌려줄까, 하재연을 구렁텅이에서 꺼내 줄까.」
당연히 하재연을 골라야 했다. 이성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뭘 망설이는 거야, 하재연을 골라. 신이 도와준다면 이 거지 같은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는 위대했으니까.
그런 자애로운 속삭임에도 끝내 재연의 이름은 입술에서 튀어나오지 않았다.
머리에 있는 충동이 이성을 죽이고 소리를 질렀다. 너는 그를 미워해야 해, 증오해야 해. 그게 네 삶의 이유야, 존재의 가치야.
손과 발이 덜덜 떨렸다. 온몸이 떨리고 식은땀이 흘러나왔다. 눈물까지도 찔끔 흘러나왔을 즈음에 신이 조용히 말했다.
「대답이 없구나.」
“저는, 저는…….”
「보렴, 너에게는 그와 함께 살아남을 의지가 하나도 없어. 너는 그 인간보다 발끝에 차이는 돌부리 같은 것들을 더 소중하고 사랑스럽게 여긴단다.」
“어째서요……?”
「그렇게 설계되었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도록 내가 만들었으니까.」
머릿속을 뒤죽박죽으로 뭉개고 주먹으로 내리쳐서 사람을 괴롭히고 있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재연의 인생을 암흑으로 밀어 넣은 인간이 나라도 된다는 것처럼 찌르고 있었다.
겨우 이런 암시 하나로 감정이 퇴색될 수 있단 말인가. 재연을 향한 사랑이 깊어지고 깊어졌는데, 해를 거듭하고 생을 반복할수록 절절해지는 사랑의 감촉을 잊을 수가 없는데. 손으로 허겁지겁 빠져나가는 슬픔을 막아 봐야 썰물처럼 이미 모든 것이 사라지고 모래만 허허벌판에 펼쳐져 있었다.
“분명히 사랑했었어.”
「그건 맞지.」
“왜 지금은……?”
「과거잖니. 그리고 설령 네가 아직 하재연을 사랑한다고 해도 세 번째 업보를 쌓게 만든 그를 용서할 수나 있었을까.」
……재연이 시간을 되돌린다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남겨 뒀던 쪽지를 읽고 조금이라도 배려를 해 줬다면 이런 일까지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업과 죄를 짓고 지옥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것은 나. 적어도 재연은 평온한 인생을 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분명 하재연은 잃어버린 삶을 내게 되찾아 주고 싶어 이런 일을 벌였겠지. 한 번도 원한 적이 없던 행복이었으니 이제 와서는 그 가치가 너무 가벼워졌을 뿐이지만.
「인간은 이기적이야.」
“맞아, 그리고 신도 이기적이지.”
대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신의 말을 반박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울렸다. 고개를 돌려 마당을 돌아보았다. 온몸이 검은색 일색인 재연이 대문을 열고 들어와 마당 중앙에 서서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한 건지 비릿한 혈향이 가득 풍겼다. 손에 낀 검은 장갑에는 핏물이 고여 뚝뚝 떨어질 것처럼 질척거리는 게 눈으로도 보였다. 그걸 느꼈는지 신이 자연스럽게 코를 쥐며 비난했다.
「온몸에 죄악의 냄새가 나는구나. 그렇게까지 자신의 수명을 연장하고 싶던가?」
“그럼 시간을 더 주든가.”
「이미 너무 많이 빌려 갔어.」
신은 조용히 하재연의 말을 지적하고 있었다. 이름과 시간을 전부 빌렸다고 들었다. 재연의 시간이 이미 끝났다는 암시도 몇 번이나 들었다. 확인 사살을 하는 것처럼 냉정하게 요구를 거절하는 신의 모습에 재연이 픽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러면 남의 인생 초 치지 말고 꺼져 버려.”
「버릇이 없군.」
신이 하얀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마자 하재연이 마당 어귀에 있는 평상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그가 무력을 행사하는 것은 지금 처음 보았다. 늘 신기한 환상이나 손장난 따위만 치던 존재가 갑자기 힘을 사용하자 시간이 뚝뚝 단절된 기분이었다. 초 단위로 시침이 움직일 때마다 하재연이 마당 구석구석으로 처박히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뼈 마디마디가 꺾이는 소리가 들렸다. 신이 손가락을 천천히 구부릴 때마다 재연의 입 안에서 신음이 완전히 뭉개졌다.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재연이 커다란 핏덩이를 속에서 토해 냈을 때, 황급하게 신의 팔을 잡았다.
“그만하세요.”
「왜 말리지?」
“너무 과하잖아요!”
「네가…… 잘 모르는 모양인데.」
아름다운 얼굴이 웃고 있으면 보기 좋아야 할 텐데 오히려 섬뜩했다. 매끄럽게 단장된 웃음을 흘린 신이 느릿느릿하게 사실을 늘어놓았다.
「나는 신이란다.」
“…….”
「세상 사람이 막연히 부려 먹는 잡귀 같은 신은 더더욱 아니지.」
그의 존재는 어떤 신보다 고귀한 위치에 있었다. 그에 비견될 만한 존재는 원시천존이나 태상노군뿐이니, 이 상냥한 목소리와 냉혹한 성품을 가진 신을 말릴 수 있을 만한 자는 이곳에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난 인간이 싫어. 특히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는 것은.」
신은 냉정하게 말을 자르고는 다시 한번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하재연의 몸이 마당의 끝에서 끝으로 날아가 뒹굴었다. 바닥에 처박히자마자 대량의 피를 왈칵 토해 낸 재연의 몸이 경련을 일으키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느껴졌다.
「한계에 도달해 강시의 피라도 빨아 먹고 생명을 부지하는 그 불쾌한 꼴을 스스로 보고도 느끼는 바가 없느냐?」
“시끄……러…….”
「이미 인간조차도 되지 못한 네 몰골은 정상적인 인간이라도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냉소적인 신의 말에 더더욱 충격받아 헐떡거렸다. 하재연이 모습을 숨긴 동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으나, 정말로 알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간절할 만큼 신의 언어는 역겨웠다. 그 무거운 시신을 가져간 이유가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였던가.
입을 틀어막고 주저앉았을 때 거대한 힘에 놀랐는지 덜덜 떨던 토토가 다가와 품에 엉겨 붙었다. 그러나 조그만 토끼 한 마리로는 여전히 한기가 가시지 않아 덜덜 떨기만 했다.
「이미 시간은 끝났어. 내가 더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가?」
“안, 끝났…… 살아, 있…으니까…….”
하재연이 쿨럭, 피를 소량 뱉어 내며 가늘게 뜬 눈으로 내가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시선은 흐릿했지만 빛이 있었다. 아직 살아 있다. 펄떡거리며 뛰는 심장에 가시가 박히는 통증이 일었다.
비틀거리며 일어선 재연이 입가에 흘러내린 피를 손등으로 닦아 냈다. 신을 똑바로 노려보는 눈길에는 독기가 흘렀다.
“돌아가.”
「싫다면?」
신도 재연도 서로를 지독하게 싫어하고 있었다. 이유를 모를 만큼 두 존재는 강하게 부딪치고 있었다. 둘 다 서로에게 뭐라고 지껄였다. 갑자기 바람이 부딪치는 소리가 커져 귀가 먹먹했다. 찌르듯 시린 눈을 떠서 앞을 보았을 때 재연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어쩔 수 없네.”
「…….」
“다음 생을 기약하겠어.”
「너…….」
“영원히 쫓아갈 거야, 저 사람을.”
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아니, 나무판자가 쪼개지고 땅이 갈라지는 소리였다. 무엇이 문제였는지 세상 전체가 완전히 뒤흔들리는 소리가 나더니 신은 눈에 띌 정도로 확연하게 분노하기 시작했다.
재연이 바닥에 쓰러졌다. 길게 뻗은 솟대와 깃발과 마당에 심어진 나무와 어우러지던 평상의 다리가 부러져 휘었다. 집은 멀쩡했으나 집을 둘러싼 모든 것은 정상이 아니었다.
땅이 울렸다. 바람이 진동하고 있었고 신의 소맷자락이 부풀었다.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재연이 고통에 차서 비명을 질렀다. 바닥으로 물건들이 전부 가라앉고 있었다.
「인간의 본색을 버리지 못하고 신을 농락하려 한 죄는 죽음뿐이지.」
신의 노기 띤 음성이 뚝뚝 끊어질 때마다 재연의 비명이 찢어질 듯 크게 울렸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서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토토가 정신 차리라는 듯 손가락을 물고 늘어졌지만 살펴 줄 수 있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수십 배, 아니면 수천 배? 모르겠다. 재연은 신이 만들어 낸 중력에 고통받고 있었다.
재연의 몸은 몇 번이나 위로 떠올랐다 아래로 처박혔다. 뼈마디를 부술 듯이 짓누르는 형체 없는 힘이 그의 몸을 험악하게 다루고 있었다. 그때마다 재연이 고통을 참기 위해 손톱을 세워 바닥을 긁었다. 이미 온몸이 엉망이었다.
「이대로 죽여 버릴까.」
“……죽이면, 너도…….”
재연이 헐떡거리면서 핏물투성이인 얼굴을 들어 올렸다. 고통으로 완전히 일그러진 주제에 웃으려고 용을 쓰는 모습에 소름이 끼쳤다.
“너도 벗어나지 못할 거야…….”
「…….」
“……사라져.”
산이 무너지는 것처럼 거세게 콰르르 돌 떨어지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서서히 진동이 멎었다. 재연이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거렸다. 그사이 땅이 도로 붙었고 무너진 솟대와 깃발이 다시 하늘을 향했다. 부서진 모든 것들이 시간을 돌린 것처럼 다시 말끔하게 복원되는 신기한 과정을 눈으로 지켜봤다.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마당을 원래대로 돌린 신이 갑자기 내 어깨를 잡았다.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를 만큼 깜짝 놀라 신의 얼굴을 올려 보았다. 차가운 손가락이 다가와 목울대를 툭 쳤다. 숨을 참고 있었는지 갑자기 호흡이 입 안에서 마구 터져 나왔다. 심장이 펄떡펄떡 뛰었다.
거친 기침이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자각도 하지 못한 채 막았던 기도가 열리자 폐와 심장이 미친 듯이 움직였다. 신은 재연을 대하던 것과는 완전히 판이한 태도로, 내가 호흡을 제대로 고를 때까지 한참 인내심 있게 기다린 후에야 인사를 건넸다.
「또 보자꾸나.」
“어…….”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자 신이 곁눈질로 하재연이 서 있는 마당을 보았다. 완전히 피 칠갑을 하고서 비틀거리던 재연이 거의 흰자위만 보일 정도로 눈을 홉뜨고 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자 신이 이어서 말했다.
「그때는 내 이름을 불러 줘도 좋겠구나. 친우는 나를 영보군(靈寶君)이나 태상도군(太上道君)이라 부른단다. 상청이라 불러 주는 것도 좋겠지. 그쪽이 가장 친숙하니까.」
“도대체, 누구, 마음대로?”
몸을 제대로 추스르지도 못하면서 재연이 끼어들며 화를 냈다. 신은 코웃음을 치면서 제 할 말만 늘어놓고 있었다.
「그때까지 저 빌어먹을 천것과 잘 지내보도록 해라. 어차피 사랑하지도 못할 거, 동정을 베푸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저는…….”
눈을 굴리며 대답할 말을 찾기 위해 애쓰는데 갑자기 이상한 감촉이 입술에 닿았다. 이게 뭐지. 갑자기 판단력이 흐려져 눈을 크게 떴다. 눈앞에 자연의 웅장함이 드리워진 기분이었다. 하얗게 안개 낀 산은 엄청나게 높았고 깎아지를 듯 거대한 절벽은 신의 위상을 그대로 빼닮았다.
코로 숨을 들이마셨다. 절벽에 군데군데 피어난 진분홍 철쭉의 향이 느껴졌다. 흰 옷자락은 차마 손으로 잡기 민망할 정도로 고급스러운 질감이었고 입 안을 휘감는 혓바닥과 타액의 감촉은 질척거렸으나 달콤한 맛이 났다. 동물적인 충동이 이성을 짓밟았다.
귀접을 당하면 끔찍할 정도로 끝내주는 오르가슴을 느낀다고 했었다. 신과의 교접은, 그럼 얼마나 대단한 오르가슴이지? 눈앞이 아찔했다. 좀 더, 그렇게 생각했을 때는 허리 근처가 근질근질한 지경이었다.
헉, 잠깐 떨어져 나간 입술 사이로 스며든 산소를 급하게 빨아들였을 때 아슬아슬하게 붙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는 것이 느껴졌다. 신은 축축하게 젖은 내 입술을 한번 핥았다. 죽도록 싫어한다는 인간인 내게 주둥이를 강제로 부대낀 주제에, 신은 기쁨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얼굴을 보니 천년 묵은 체기가 좀 가시는군.」
“당장 꺼져……!”
야차 같은 얼굴을 한 재연이 마당에서 방 안까지 단숨에 뛰어 올라오자마자, 신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재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감쪽같이 모습을 감춰 버린 존재는 기체보다 잡기 힘들었다.
「어디 한번 날뛰어 봐. 아직도 기대하고 있으니까.」
실체는 사라지고 목소리만 조롱의 기색을 가득 머금은 채 귓가를 파고들었다. 하재연이 입술을 악물고 으드득, 하고 뭔가 부서트리는 소리를 냈다.
하루아침에 동정을 뺏긴 것도 아니고 이미 어지간한 건 죄다 빨아 봤던 입술인데도 방금의 상황은 포르노를 보다 들킨 기분이 들었다. 반쯤 성기가 흥분했다는 사실까지 깨달으니 딱 죽고 싶을 정도의 수치감이 몰려왔다. 무시무시한 표정을 한 재연이 턱을 잡아 올리더니 눈을 치떴다. 핏물에 얼룩진 얼굴은 공포 영화 수준이었다.
“지금 사람 두들겨 맞는 꼴을 보면서 키스를 해요?”
“아니, 하재연, 나는…….”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인가. 변명을 늘어놓으려고 했지만 변명할 거리도 없었다. 아래쪽으로 흘끗 시선을 내린 재연이 싸한 얼굴을 하고는 입술을 휙 비틀었다.
“아, 좋아요. 변명이라고 해 봐야 그 개 같은 새끼에게 들어야겠지만…….”
“재, 재연아?”
“여기서 할까요, 나가서 할까요?”
재연의 몸에서는 아직도 피 냄새가 지긋지긋할 정도로 심하게 나고 있었다. 토해 낸 핏물과 처음 올 때부터 튄 핏물이 같이 엉겨 붙은 장갑을 툭툭 벗어 던지고는 맨손이 내 팔목을 잡았다. 뜨거운 체온에 놀라 딸꾹질이 나왔다.
붙잡힌 손목 부근에서 맥박이 두근두근 뛰었다. 품에서 주르륵 옷자락을 잡고 미끄러진 토토가 발끝을 핥으며 뒹굴었다. 재연이 손을 잡아끌었다. 축축하고 끈적거리는 피 냄새가 공기를 완전히 뒤덮고 있었다. 무당은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고, 새벽은 꾸역꾸역 침묵의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안개와 비슷하게 꺼질 듯한 미소를 그린 재연이 재차 물었다.
“여기서 하고 싶다면, 나는 상관없어요.”
그의 목소리는 이미 쉬어 있었고 여름 기온과 잘 어울릴 만큼 열정적인 색을 띠고 있었다. 당황했다. 왜 상황이 이렇게까지 돌아갔을까. 역시 이진현을 만났던 것이 이런 상황을 낳을 만큼 대단히 안 좋은 한 수였던 것일까. 머리가 핑글핑글 회전하며 현기증을 호소했다.
재연이 모양새 좋은 입술을 움직이며 새처럼 재잘재잘 떠들었다.
“그 작자…… 좋아요, 이젠 다 알겠지. 영보천존이 다녀갔으니 보살님도 당분간은 눈을 뜨지 못할 테고, 이대로 하는 것도 나쁘진 않죠.”
형이 보여 주는 게 취향이라면. 더운 숨과 함께 섞인 음탕한 소리가 귀를 더럽혔다.
“아직도 용의 기운이 몸에 남아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빨아 줄까요?”
“너는……!”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화도 내다가 눈물바다에 술로 진창길을 걸었던 게 며칠이나 되었던가. 몸을 점령하던 무기력한 감각은 어디 가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게 아니라면 당장 나와요.”
짐승처럼 흉포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목줄이라도 걸린 애완견처럼 질질 끌려 나왔다. 토토가 마당까지 따라 나와 폴짝거렸지만 차마 이 꼴로 토토까지 챙길 수는 없었다. 재연이 마당을 밟을 때마다 핏물이 흔적처럼 남았다. 재연이 다쳤다는 걸 기억했지만, 치료부터 하라는 말을 했다간 마당에서 일을 벌일 것 같은 꼴이라 입을 닥쳐야만 했다.
가장 가까운 모텔을 비집고 들어간 재연은 방에 들어가는 내내 씨발이라는 말만 거의 다섯 번을 넘게 했다. 씨발 말고 개새끼나, 갈아 마실 새끼라든가 하는 저주는 손가락을 다 세어도 모자랄 정도였다. 어디서 배워 온 욕인지 하수구 같은 더러운 말을 줄줄 늘어놓는 입술을 갈아 버리고 싶다는 얼굴로 쳐다보자, 재연이 이가 뿌득뿌득 갈리는 소리를 내며 입술 얌전히 말아 넣으라고 윽박질렀다. 지은 죄도 없이 죄지은 사람처럼 내 입을 손바닥으로 막아야 했다.
방 안은 음침했고 관리도 제대로 되지 않았는지 구석구석 먼지가 쌓여 있었다. 신발을 신은 그대로 방 안에 들어온 재연이 나를 메치듯 들어 침대에 던지더니, 제 신발을 툭툭 벗어 던지고는 입고 있던 검은색 티셔츠를 벗었다. 허물처럼 말려 올라간 천 조각이 나풀나풀 먼지 덩어리 위로 떨어졌다. 풀썩 내려앉는 가벼운 소리와 동시에 재연이 침대 끝에 걸쳐진 내 발에서 양말과 운동화를 함께 벗겼다.
맨발에 거칠거칠한 모텔 침대 시트가 문질렸다. 한쪽 다리를 세운 채 긴장해서 오금을 오그라트렸을 때 재연이 꺼질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직 몸에 용의 기운이 남아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있을 리가…….”
죽음을 원하던 치우 님에게 피를 주는 바람에 정신없이 재연과 사고를 쳤던 것도 이미 한 달도 넘은 이야기이다. 치사하게 아직까지 들먹이며 몰아세우다니. 변태적인 태도에 눈살을 찌푸리자 재연이 이로 턱 끝을 꽉 깨물면서 웃었다.
“설마, 겨우 그 정도로 몇천 년을 산 용의 기운이 빠질 거라 생각한 거예요?”
“알 리가 없잖아!”
“알걸요?”
하재연의 목소리는 신의 음성과 매우 닮아 있었다. 목소리가 비슷하다기보다는 조롱할 때의 말투가 정말로 똑 닮아 있었다.
“몸이 기억하고 있을 텐데요.”
치즈를 감싼 비닐 껍질을 벗기는 것처럼 남의 옷을 훌렁 벗겨 버린 재연의 손가락이 가슴팍에 닿았을 때부터 성교는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키스였다. 불결해진 입술을 소독이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물고 빨아 대더니 나중에는 그게 온몸으로 옮아 붙었다. 손과 입술만 사용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핥아 내려오는 전희는 미치는 게 낫겠다 싶을 만큼 길고 집요했다. 손가락과 입술이 국부를 제외한 모든 곳을 더듬었다. 유두가 비틀렸을 때 바로 성기에서 울컥거리며 정액이 터졌다.
하재연은 칠칠맞지 못하다며 성기를 어디선가 꺼내든 긴 끈으로 묶고 엉덩이를 때렸다. 학대 같은 애무였다. 뒤를 쑤시지도 않았고 성기를 잡아 흔들지도 않았는데 두 번이나 배 속이 화끈거릴 만큼 오르가슴을 느꼈을 때는 눈물이 홍수처럼 줄줄 새어 나왔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억울함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오면 울음소리로 변해 있었다. 사람이 울고불고 까무러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몸 전체를 뱀처럼 비벼 대기만 했다. 유두를 세차게 흡입하는 것처럼 빨고 비틀 때면 찢어진 전선에서 스파크가 튀어 감전되는 것 같았다.
혓바닥이 뱀처럼 피부 겉면을 기어 다니며 핥고 지나가면 죽어 버리고 싶을 만큼 쾌감이 솟구쳤다. 재연이 옆구리와 척추까지 잘근잘근 물고 빨며 입술을 미끄러트렸고, 젖어 들어가는 비부만 제외한 나머지 하체를 모조리 주물렀다.
제발 안에 넣어 달라고, 안쪽을 쑤셔 달라고 두 손을 모아 싹싹 비는 추태까지 보이자 재연은 드디어 엉덩이를 잡아 벌리고 입구를 더듬었다. 하지만 성기를 넣어 주진 않았다. 보이지 않아도 입구가 저절로 벌렁거리고 있단 걸 알 수 있었다.
성기를 단숨에 삼킬 수 있을 만큼 흐물흐물해져 뭔지 모를 액을 질질 흘리는 곳을 한참이나 살피던 재연이 손끝으로 입구 근처를 쓸었다.
“흐으……!”
“좋아요?”
“너, 너으…… 아!”
음란하게 허리를 들썩거리며 수치도 잊고 애원했는데 안에 들어온 건 손가락이었다. 억울해서 미쳐 버릴 것 같았는데 그 손가락 끝이 내벽 안쪽을 문지르고 쑤시는 순간 주먹으로 침대 매트리스를 내려치며 울음을 터트리는 수밖에 없었다.
재연은 내 몸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샅샅이 내벽 안쪽을 훑었다. 손가락이 반 바퀴쯤 빙글빙글 돌면 울었고, 입구에 손가락 끝이 닿을 정도로 깊게 삽입되면 또 울었다. 안에서 손끝이 수영이라도 하는 것처럼 허우적거리면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중지와 검지를 물고 있는 엉덩이 안쪽이 간지러웠다. 어떻게든 해 달라고 울먹이다 등줄기를 퍽퍽 내리찍는 쾌감에 머리를 침대 헤드에 박았다. 단단한 나무 판에 머리를 박으면서 쾌감을 버티려고 허우적거리는 꼴에 재연이 혀를 차면서 다리를 붙잡고 밑으로 몸을 질질 끌었다.
쾌감이 주먹으로 온몸을 두들겼다.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뭉개 버리겠다는 것처럼 내장을 들쑤셨다. 겨우 손가락 두 개가 삽입되었을 뿐인데 내벽 전체가 갓 만들어 식히지도 못한 푸딩처럼 무너졌다.
혀와 눈이 풀렸다. 성기라도 시원하게 사정할 수 있다면 조금 나았을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충족은 다른 곳에서 찾아오는 것이다. 머리를 녹진하게 만든 성욕에 온몸을 비틀었다. 하재연이 내 입술을 벌리고는 바짝 달아오른 성기를 들이밀었다. 정액이 뚝뚝 흐르는 건 재연의 아랫도리도 마찬가지였다. 바짝 달아오른 육욕이 저절로 타액에 젖은 혓바닥을 내밀게 했다. 개처럼 무릎을 꿇고 엎드려 그의 선단을 핥았다.
퀴퀴하게 환기도 제대로 안 된 방은 산소가 부족했다. 목구멍까지 꽉 들어찬 성기도 호흡을 방해했다. 머리가 띵해져 입을 크게 벌린 채로 훌쩍거렸더니 재연이 한숨을 쉬면서 입 안에서 성기를 빼내고 침대를 빠져나갔다.
삑 하고 기계 전원 소리가 들리더니 곧장 냉기가 쏟아졌다. 입을 벌린 채로 쌕쌕 숨을 내쉬자 재연이 물병을 따서 입 안에 생수를 흘려줬다. 반쯤은 질질 흘렸고 반쯤은 목 안으로 넘어갔다. 어느 정도 갈증이 해소되자 입술을 닫고 고개를 비틀었다. 재연이 남은 물을 모조리 마시고 빈 병을 집어 던졌다. 젖은 입술을 벌리고 들어온 손가락이 비트는 것처럼 앞니와 아랫니를 벌려 틈을 만들고 바짝 솟은 성기를 다시 들이밀었다.
자연스럽게 귀두 끝부터 핥으면서 국부까지 천천히 내려갔다. 재연의 손바닥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볍게 어깨와 뺨을 토닥거렸다. 잘하고 있다는 듯한 가벼운 애무에 용기가 솟아 좀 더 깊게 성기를 삼키고 빨았다.
목구멍 안까지 바짝 들어와 구역질을 일으키는 선단에서는 찝찝한 쿠퍼액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입 안에 시큼한 침이 잔뜩 고여서 성기를 축축하게 적셨다. 정신없이 성기를 빨면서 후들거리는 손을 뻗어 기둥을 붙들고 흔들었다. 재연이 유두를 손톱을 세워 세게 문지르며 욕을 지껄였다. 입에서 기묘한 비명이 터졌다.
“흐, 으, 아아! 아!”
“여기만 문질러 줘도 좋아요? 완전히 젖었네…….”
몸이 이렇게 아작이 날 줄 알았다면 엔지의 카페에서 아르바이트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죽은 치우를 향한 분노는 쾌감에 사로잡혀 금방 지워졌다.
흑, 울음을 터트리면서도 멈추지 못하고 입술로 성기를 문지르고 빨았다. 제발 뭐라도 해 줬으면 좋겠다. 몇 년을 굶은 걸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게걸스럽게 성기를 입 안으로 조여 물자 재연이 좀 더 힘을 줘서 유두를 긁고 비틀었다. 아래에서 무언가 질질 흐르며 마찰되어 질척거리는 소리가 귀를 따갑게 적셨다. 제발. 말도 하지 못하고 숨을 크게 들이쉬며 헐떡였다. 무너지는 도미노처럼 셀 수도 없을 만큼 강한 절정이 거칠 것 없이 쏟아졌다.
하재연은 하라는 삽입은 해 주지 않고 집요하게 몸을 더듬어 댔다. 마음이 완전히 틀어진 모양이다. 입을 열면 성기로 목을 더 깊숙하게 찔렀다. 억지로 목구멍을 열고 혓바닥을 움직여 핥자 혓바닥을 누르고 처박힌 선단 끝에서 정액이 터졌다. 질질 흐르는 정액을 강제로 빨아 먹었다. 숨이 막히고 구역질이 나서 생리적인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제야 겨우 재연의 성기가 입 안에서 빠져나갔다.
새빨갛게 변해서 사출하지도 못하고 흔들리는 성기가 아프고 따가웠다. 끈이 딱딱하게 부푼 살점을 파고들었다. 이대로 잘려 나갈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흐, 너, 너무…… 흑, 내가 뭘…….”
내가 뭘 잘못했는데. 찌질하게 말을 더듬으며 울먹이자 재연이 무릎 뒤쪽으로 손을 넣어 다리를 들어 올렸다. 정상위로 바뀌는 자세에 울먹이다 말고 기대감에 입술을 벌리고 손가락을 핥았다. 아직도 입 안에서는 정액의 큼큼한 맛이 나고 있었다. 부족해. 입술과 손끝을 스스로 핥고 빨며 중얼거리자 재연이 손에 힘을 줬다. 허벅지가 눌려서 아팠다.
손을 더듬더듬 뻗어 아랫배를 짚었다. 먹이를 앞두고 느긋한 척 구는 포식자의 얼굴을 어지럽혀야 했다. 아무 말이나 지껄여서, 최대한 천박하고 야한 말을 해서, 어, 그래서……. 하재연을 욕해야지. 나쁜, 더러운 새끼. 입과 머리와 몸이 죄다 따로 놀았다.
“여기, 여기 부풀게, 꽉.”
“진짜…….”
“제발, 흑, 넣어 줘. 싫어어, 이거, 흐으, 풀어 줘.”
푹 꺼진 아랫배를 문지르며 헐떡거리자 재연이 쌍욕을 했다. 씨발이라고 했는지 썅이라고 했는진 모르겠지만 쌍시옷 소리가 나오기는 나왔다. 재연이 성기를 칭칭 동여 묶은 길고 가느다란 끈을 잡아당겨 풀어내는 것과 동시에 좁은 입구를 비집어 열면서 뜨겁고 두꺼운 성기를 처박았다.
코 속에서까지 정액이 질질 새어 나오는 기분이었다. 인내하고 인내한 끝에 오는 사정은 대단히 길었고 제멋대로 몸을 경련시켰다. 사지를 부들부들 떨며 본능적으로 정액을 흘리는 성기를 잡아 흔들었다. 엉덩이 사이로는 남자의 성기를 빨고 손으로는 자위하며 앞뒤로 오르가슴을 번갈아 느끼는 기분은 솔직히 최고였다.
이대로 섹스만 하고 싶어. 그걸 머릿속으로 생각했는지 입 밖으로 내뱉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후자일 거라고 여기는 건 재연이 다짜고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채워 달라고 애원하던 아랫배는 이미 불룩했다. 느낌상으로는 확실히 그랬다. 엉덩이 사이를 한껏 벌리고 들어온 성기가 왕창 빠져나갔다가 어마어마한 질량을 자랑하며 처박혔을 때는 교성을 내지르는 것 빼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 아아, 싫, 거기! 아!”
섹스가 이런 거라면 중독되는 사람이 이해된다. 성관계를 위한 곳도 아닌데 성기를 넣고 엉덩이 사이로 천하게 빨면서 앞으로는 질질 정액을 쏟아 냈다. 재연이 다리를 점점 더 위로 밀어 올렸을 때는 하체가 공중에 붕 떠서 덜렁거리며 성기가 왔다 갔다 하는 부위가 정확하게 보였다.
주름이라고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팽팽하게 당겨진 애널을 꽉 채운 성기는 검붉었고 눈으로 보기에도 단단하고 뜨거웠다. 후끈거리는 체온을 가진 살덩어리가 엉덩이 안을 꽉 채웠다가 나가떨어질 때마다 머리를 내려쳐 깨 버리고 싶은 쾌감에 소리를 내질렀다.
좀 더, 좀 더 많이 넣어 줬으면 좋겠다. 좀 더 빠르게, 더 강하게, 미친 듯이. 재연은 주문을 하면 들어주겠다는 것처럼 턱을 잡아 올렸다. 추태를 부리며 질질 흘린 침이 입 안을 매끄럽게 만들었다. 흐느끼면서 공중에 뜬 엉덩이를 작게라도 흔들었다. 재연이 작은 웃음을 흘렸다.
“더 해 줘요?”
“으, 흐으, 네, 아니, 흣, 응, 몰, 아니야.”
“뭐라는 거야, 정말.”
내가 듣기에도 알아듣지 못할 언어였다. 재연이 가볍게 웃으면서 지적하더니 골반을 딱 붙이고 좀 더 안으로 매끄럽게 삽입해 왔다. 재연이 손을 떼자 다리가 힘없이 매트리스 쪽으로 늘어졌다.
재연이 허리를 잡아당기자 발뒤꿈치가 침대 시트를 훑으며 흔들렸다. 허리를 쥔 재연의 팔뚝을 긁자 몸을 딱 붙인 채 빠르게 성기를 퍽퍽 쑤셔 박았다. 너무 좋아. 호르몬과 포르노에 휘둘리는 청소년도 하지 않을 만한 소리를 지껄이며 다리를 벌렸다. 재연이 성기를 안으로 밀어 넣을 때를 맞춰 엉덩이에 힘을 주면 안에 들어온 성기의 모양이 귀두부터 끝까지 다 느껴질 정도였다.
희미한 신음을 내며 재연이 허리를 바짝 숙였다. 이미 퉁퉁 부어오른 유두를 빨며 골반이 부딪칠 만큼 세게 성기로 안쪽을 쑤실 때마다 내 눈앞에서 빛이 번쩍번쩍 터졌다. 허으으, 괴상한 신음을 내며 어깨를 비틀었다. 애액과 재연이 안에 흘려 넣은 정액이 질척거리며 엉덩이를 완전히 적셨다. 좀 더, 더 하면. 헐떡거리며 숨을 크게 쉬었을 때 재연이 바짝 쪼아 붙이듯이 몸을 들이밀며 배 속 한구석을 거세게 두들겼다.
“흐, 거…… 거기! 아악!”
이대로 죽어 버리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강한 오르가슴이 전신을 통째로 잡아먹었다. 흔들거리던 성기에서 정액이 줄줄 흘렀는데도 여전히 반쯤 서 있었다. 눈을 멀겋게 뜨고 천장을 보았다. 싸구려 무늬가 빙글빙글 뒤섞였다.
성기를 삽입한 채 재연이 중얼거렸다.
“부족해.”
“재……여…….”
이름을 불러 보려고 했지만 재연이 더 빨랐다. 삽입된 상태로 몸을 뒤집히자 비명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젖은 허벅지를 주무르고 때리며 재연이 질질 싸지르며 젖은 꼴 좀 보라고 희롱을 퍼부었다. 눈물과 타액으로 푹 젖은 얼굴을 시트 위에 문질러 닦으며 훌쩍거리자 재연이 어깨를 누르고 엉덩이를 들어 올리게 했다. 짐승들이 성교하는 자세를 취한 채 숨을 짧게 뱉으며 긴장하자 그의 엄지손가락이 먼저 잔뜩 벌려진 내 애널을 쑤셨다.
침과 숨이 동시에 꿀떡 넘어간다. 끄으, 숨 막히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뒤로 젖히자 재연이 빠르게 엄지로 젖은 애널 안을 한 바퀴 돌리고는 성기를 때려 넣었다. 아량이라곤 없이 곧바로 시작되는 거친 몸짓에 다리를 바둥거렸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몸을 비틀고 악을 쓰자 재연이 입술을 물어뜯으면서 화를 냈다.
“그 새끼는, 이미 버려 놓고 왜!”
그의 불쾌함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재연이가 무엇 때문에 화를 내는지 잘 알 수 없었다. 화를 내는 대상이 고명하고 잘나 빠진 영보천존이라는 건 알 수 있지만, 정말로, 왜…… 아니, 물론 화가 나겠, 근데 왜 내게 화풀이를, 이상한 생각이 뒤죽박죽 머리를 구겨 대기 시작했다.
좀 더 열심히 생각할 것들이 있었는데 섹스 도중에는 차마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교도소에서 두들겨 맞을 때는 딴생각을 잘만 했는데, 왜 재연과 관계를 맺으면 할 수 없는 거지. 이게 다 그 파충류용 때문이다. 이진현 때문이다. 몸이 이따위로 변하다니, 이러다가 정말 섹스에 중독이 돼서 하루에도 수십 번 자위를 해야 하는 건 아닐까. 그것도 성기를 잡고 흔드는 게 아니라 뒷구멍에 손가락을 쑤셔 넣는 방식으로.
몸은 주인의 통제를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재연은 내 성기가 끝도 없이 정액이나 싸지르는 꼴이 불경스럽다며 흔들거리는 성기를 꽉 쥐거나 손바닥으로 때렸다. 몸의 취약점이면서 떨어지는 고통에도 성기는 시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 정력이 이렇게 좋다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이제는 진득하지도 않은, 묽고 투명한 액을 질질 흘리는 아랫도리를 무참하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재연, 이…… 웃, 제, 흐윽, 싫어.”
“뭐가, 후우, 싫어요?”
엉덩이 살집을 밀어 올리고 뿌리까지 때려 박은 성기에서 두 번째 사정이 시작되었다. 배 속에 정액이 더부룩하게 올라 찼을 때 허벅지를 벌벌 떨며 만족스럽게 탄식했다. 이제야 뭔가 해갈된 느낌이었다.
게슴츠레하게 눈이 풀린 채로 그대로 고꾸라져 엎어졌을 때 재연이 몸 위를 타고 올라왔다. 두 번째 사정을 끝내고 조금 말랑거리는 성기가 각도를 다르게 해서 배 속을 휘저었다. 몸 안쪽이 출렁거리는 것 같았다. 아직도 성기 끝으로 콱콱 들쑤셔진 안쪽이 후들후들했다. 아랫배를 감싸 쥐고 엎드린 채로 코를 훌쩍였다. 몇 번이나 좋아 자지러진 주제에 아직도 애널 안을 채운 성기에 흥분하려 하는 내 꼴이 혐오스러울 지경이었다.
벌름거리는 안쪽을 가볍게 휘저은 성기가 빠져나가자 배 속이 텅 빈 기분이 들었다. 커다란 성기를 정신없이 조여 물던 애널이 벌려지며 액체를 꿀렁꿀렁 토해 냈다. 배 속이 부글거렸다. 너무 많이 얻어맞아서 안에 멍이 잔뜩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덜떨어진 생각을 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코에서 세찬 숨이 나온다. 숨이 가라앉을 때까지 재연은 가만히 등을 어루만졌다.
“좀 괜찮아요?”
“응…….”
피곤하다. 이제 끝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웅크렸다.
“그 자세론 안 할 건데.”
이게 무슨 소리야. 하재연은 매우 상냥하게 짧은 휴식을 주었다는 것처럼 긴말 없이 팔을 잡아 들어 올렸다. 몸이 붕 뜨며 뒤로 넘어가더니 엉덩방아를 찧고 주저앉은 자세 그대로 삽입당했다. 입을 크게 벌린 채 팔을 앞으로 내저었다. 잡히는 건 없었다. 백치처럼 공중에 팔을 허우적거리자 재연이 뒤에서 내 허리에 팔을 감고는 수직으로 쳐올렸다. 목구멍까지 성기로 채워진 고깃덩이가 된 것 같았다.
“아, 흐으, 앗! 아!”
“되게 좋아하네요. 형…… 허벅지까지 조이고 있는 거 알아요?”
찰딱거리며 가장 깊은 지점만 빠르게 찍어 대는 성기가 원망스러웠다. 찌걱거리는 소리가 입구를 듬뿍 적신 정액의 양을 입증해 주었으며, 입술을 수십 번 깨물다가 쉰 목으로 교성을 내질렀다. 이미 너덜너덜해진 아랫입술에서 피가 질질 흘렀고 혈관까지 정액이 침식할 것처럼 몸이 흔들렸다. 눈앞이 번쩍거렸고, 입구에서 문질러지는 사타구니의 꺼끌꺼끌한 음모의 감촉까지 까무러칠 정도로 좋았다.
“흐, 윽, 그만, 그, 아아! 흣! 그마안!”
“제발. 하아, 형은 제발…….”
무언가를 부탁하는 재연의 몸이 겨우 손가락에 닿았다. 허벅지 위에 올라탄 채로 몸이 수직으로 철썩거렸다. 목덜미를 꿀렁거리며 재연이 거친 숨을 헉헉 뱉어 냈다. 미끄러지는 손을 몇 번이나 고쳐 올려 그의 목에 매달렸다. 다리를 벌린 채 성기로 배 속을 두들겨 맞을 때마다 환희와 어둠이 수천 번씩 정신을 번갈아 가며 차지했다.
하재연이 허벅다리와 무릎 쪽으로 손을 넣어 몸을 들어 올렸다. 몸 위에 닿은 손이 뜨끈뜨끈했다. 불안정하게 벌어진 입구 끝으로 귀두만 빼고 쭉 꺼낸 성기를 느리게 처박으며 웃었다. 수치스러운 자세에 눈물을 터트리자 재연이 뺨 쪽으로 입술을 붙여 오며 눈물을 빨아 마셨다.
“아마도 나는 점점, 더, 인간 같지 않아지겠죠.”
“흐읏, 으, 하! 아아! 재, 여…… 흣!”
너무 슬픈 말에 정신이 뭉텅뭉텅 썰려 나갔다. 배 속을 꽉 채우고 있는 성기의 질량감과 끈적거리는 정액이 온몸을 뒤덮었지만 공허했다. 아무리, 아무리 괴로울 정도로 끝내주는 쾌감을 받아먹어도 끝없이 공허했다.
간지러운 내부를 북북 긁고 밀려 올라간 성기가 배 속을 쿵쿵 때리며 세 번째 정액을 쏘아 보냈을 때, 내 성기에서 물이 줄줄 흘렀다. 이게 뭐야. 탈진 직전까지 간 몸을 겨우 웅크리며 헐떡거리자 재연이 물렁물렁해진 성기를 뽑아내고 엉덩이 사이를 가볍게 손가락으로 쓸었다.
그것마저도 반응해 찔끔거리며 애액을 뱉어 내는 성기를 손바닥으로 누르고 산소를 짧게 짧게 빨아들였다. 목이 완전히 가 버린 듯 쉰 소리가 쌔액거리면서 빠져나왔다. 가볍게 애널 안쪽에 손가락을 구부려 넣은 재연이 고인 정액을 빼낼 때, 성기에서 남아 있는 것 같지도 않던 정액이 찔끔찔끔 방울져서 흘렀다. 반항할 힘도 없어 가만히 사지를 뻗은 채로 누워 있자 재연이 밑에 깔린 시트를 빼내 더러워진 다리 사이를 마저 닦아 주었다.
물 좀 마실래요? 조용한 음성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입에 댈 수 없었다. 모조리 토해 낼 것 같은 거부감에 가볍게 콧잔등을 찡그린 채 몸을 닦아 주는 손길만 받고 있었다. 거친 천으로 피부를 북북 닦아 낼 거라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재연의 손길은 조금 전과는 달리 매우 상냥하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험한 정사를 치른 몸은 여전히 욱신거렸다. 하루 정도는 꼬박 앓을지도 모른다. 재연이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허벅지 안쪽을 터치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갑자기 희망이 생기네요.”
희망. 뜬금없는 잠자리만큼 뜬금없는 소리에 재연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재연이 조금 머뭇거리다 더딘 속도로 말을 이었다.
“인간인 하재연은 사랑할 수 없지만, 인간이 아닌 나라면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말은 냉소적이었지만 재연의 감정까지 그렇지는 못했다. 일그러진 불길이 뚝뚝 떨어진다. 흐리멍덩한 시야에서 희고 잘생긴 얼굴이 반짝거렸다. 재연은 여전히 바지를 입고 있었다. 허벅지까지만 바지와 브리프를 내리고 저질스럽게 섹스를 했었다. 어쩌면 개돼지가 되어 본능적인 삶을 사는 것이 인간보다 덜 부담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또는…….
“재연아.”
그의 이름을 부르고 말을 꺼낸 건 아주 충동적이고 이성적인 계획 아래에서 이루어졌다.
“재연아, 아니지……?”
심장이 쿵쾅거렸다. 추리는 어렵다. 보통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이 명제는 절대로 아닐 거라는 하나의 확신을 이유로 용의자를 선상에서 빗겨 낸다. 그렇게 주변으로 의혹은 확산된다. 이 명제는 반드시 참이기 때문에 명제에 어긋나는 모든 것은 거짓이라는, 아주 취약한 편견이 새로운 궁금증을 만들기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자. 하나의 명제가 거짓이라면? 참이라고 당연히 믿고 있던 것이 사실은 거짓이라면 많은 의문이 시원하게 풀리게 된다.
문제는 그것이 거짓이라면 이때까지 믿고 있던 다른 명제 역시도 반전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런 깊은 사고에 대해 넌더리 내는 종족이기 때문에, 또한 사실이 아니길 바라기 때문에, 일부러 길을 비껴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두커니 선 재연이 눈썹 한쪽을 내려트리며 허탈하게 웃었다.
“뭐가 되었든 신의 뜻대로 흘러가는군요.”
신이 말하기를 재연은 죽은 몸을 찾아 고인 시간을 핥아 마시며 덧없이 삶을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이것 말고도 사실의 끝을 붙잡고 매달려 있어 몸을 무겁게 만드는 생각이 두 개쯤 더 있었다.
수건을 가져오겠다며 욕실로 들어가는 재연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결정을 내려야 하는 건 나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고열을 동반한 몸살을 크게 앓았다. 양심이 쥐꼬리만큼은 존재하는지 뜨거운 물에 수건을 적셔 몸을 닦아 주고 물을 먹여 주며 시중을 드는 척하던 재연은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어오른 목으로 미지근한 이온 음료를 겨우 삼키다 흘끗 재연을 올려다보았다. 재연은 빠트린 소지품이 없는지 한 번 확인하더니 무덤덤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갈게요.”
“뭐……?”
“바빠요.”
“야, 너…….”
어이가 없었다. 황당해서 입만 벙긋거리고 있자 재연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더니 한 마디 더 했다.
“저에게 시간이 없다는 건 형도 알고 있잖아요.”
“너 나 좋아하긴 해?”
“…….”
하재연이 말간 얼굴로 바라본다. 해서는 안 되는 말이라는 걸 알았지만 후회는 상처에 가려 보이지 않겠지. 재연은 대답이 없었다. 짧게 한숨을 쉬며 손을 내저었다. 그게 끝이었다. 재연은 아파서 골골거리는 사람을 두고 매정하게 방을 나가 버렸다.
가겠다는 사람을 잡지도 못하고 가라앉은 숨을 내쉬면서 얼마쯤 더 잤을까, 시끄러운 진동 소리에 억지로 눈을 떴다. 모르는 번호 열한 자리가 액정 위에 떠 있다. 손안에서 윙윙 떨리는 휴대폰을 한참 노려보다 통화를 수락했다.
“네.”
-너, 너, 너 이 새끼! 너 어디야?
중년 남자의 걸걸한 욕과 고함이 다짜고짜 터졌다. 어안이 벙벙해서 아는 사람인가, 다시 한번 휴대폰 위에 적혀 있는 숫자를 읽어 보았다. 역시 모르는 사람이다.
“누구세요?”
신원이나 알고 욕을 듣자, 하는 마음에 되묻자 순간적으로 저쪽 편이 한참 조용해졌다. 옆에서 진정하세요, 같은 말을 하며 웅성거리는 소리가 죄다 들렸다. 콧김 내뿜는 소리만 한참 들리더니 다시 벼락같은 고함이 왁 하고 파도처럼 터졌다.
-네 담당인 김 형사다, 이 시팔 새끼야!
아. 그러고 보니 아직 잡히지 않은 살인범을 경계하느라 일주일에 한 번씩 형사가 집에 들러서 확인한다는 사실을 깜박 잊었다. 창문으로 개판인 집 상태를 넘겨다보고 놀라서 전화한 모양이다.
근육이 뭉치고 뒤틀려 삐거덕거리는 몸을 끙끙대며 일으켜 앉아 전화를 고쳐 잡았다.
“아, 죄송해요. 까먹었어요.”
-너는 까먹는 것도 정도가 있지…….
형사가 기가 막히는 소리를 내며 한참 뭐라고 전화에 대고 중얼중얼 떠들었다. 대충 들어 보니 사람 하나 잘못 맡아서 개고생한다는 푸념이었다. 그런 푸념은 사람 한번 잘 골라 지정해 준 검찰이나 경찰청장에게 하지, 왜 내게 하냔 말인가. 눈만 껌벅거리고 있으려니 열이 오른 머리가 어지럽다. 배가 고프다, 하고 꼬르륵거리는 위장을 붙들고 있으니 형사가 또 화를 냈다.
-집은 개판이고, 너는 연락도 안 되고! 이 잡놈의 새끼가 진짜 사람 혼을 빼놓고 있어!
아니, 뭐……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우물거리며 죄송해요, 한마디만 내뱉자 다시 형사가 저편에서 펄펄 날뛰었다. 약 올리는 게 아니고 정말 진심으로 사과한 건데. 찝찝한 입 안을 쩝쩝 다시고 있자 형사가 이내 진정했는지 냉큼 캐물었다.
-집은 왜 이렇게 개판이야? 도대체 너 무슨 일이 있었어?
“집에 들어가셨어요? 그거 무단 침입인데.”
-문 열려 있었다.
“음…….”
이상한 일이었다. 토토를 데리고 나올 때 분명히 닫고 나온 것 같았는데. 어차피 귀신들도 이제 사물을 툭툭 건드리며 문 활짝 열어 주는데 도가 텄으니 이번에도 그런 경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문제는 완전히 박살이 난 방 안을 뭐라고 변명하느냐였다. 누가 봐도 날카로운 것에 긁혀 찢어진 장판이나, 엉망이 된 가구와 부서진 벽, 혹시나 다 치우지 못한 핏물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화장실에.
-대답 안 해?
딱딱하게 물어보는 형사의 목소리에 신음을 흘리며 이마를 짚었다. 강시가 다짜고짜 나타나서 제 목을 찢으려고 하기에 도망치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않은가.
머뭇거리다 또 화를 내며 빨리 말하라고 닦달하는 형사에게 겨우 한마디 했다.
“치정 싸움했어요.”
-……뭐?
형사가 반문한다. 입맛을 쩝쩝 다시고는 되는대로 신나게 떠들었다.
“저를 받아 주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는 미친놈이 있어서 하는 수 없이 방 안에 들였는데 지금 애인이 나타나서 그 미친놈 멱을 따 버리겠다고 난투극을 벌였거든요. 둘이 어찌나 험하게 싸우는지 저는 구석에서 오들오들 떨기만 했습니다.”
-이런 미친놈이…… 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럼요. 참고로 지금 애인이 이겼어요.”
-야!
“진짜예요, 저도 얼마나 억울한데. 방이 그런 꼴 날 줄 알았다면 문 안 열어 줬어요.”
최대한 가련한 투로 이야기하자 형사가 콧김을 내뿜으면서 씩씩거렸다. 믿거나 말거나였지만, 강시가 저를 죽이려고 했습니다보다는 멀쩡한 변명이었다. 헛소리하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는 형사에게 최대한 상세하게 끝내주는 어젯밤과 질투에 불타는 내 님의 정력에 대해 쉬지 않고 지껄였더니 전화가 끊겼다.
이게 무슨 꼴이야. 그나마 상태가 멀쩡한 이불을 끌어 몸을 둘둘 말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하재연은 사람을 이 꼴로 만들어 놓고는 두 다리 멀쩡하게 잘도 걸어 나갔다 이거지. 이래서야 현실에 집중하기도 어려웠다.
방 뺄 때 되었다고 카운터에서 인터폰이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재연에게서 연락을 받았는지 엔지가 모텔로 찾아왔다. 가랑이 사이야 당연히 깨끗하고, 샤워도 했었고, 옷도 제대로 입고 있었지만 정액이 묻어 뭉쳐 구겨 놓은 시트라든가 휴지 덩어리를 보여 주는 기분이 그리 유쾌하진 않았다.
엔지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얼굴로 나를 부축해 얼마 떨어지지 않은 무당집으로 데려갔다.
무당은 정신을 차렸는지 연한 미색 모시 법복을 위아래로 한 벌 차려입은 채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불청객을 본 얼굴이다. 토토만 유일하게 제자리에서 폴짝 뛰며 주인을 반겨 주고 있었다.
“잘하는 짓이다.”
“뭐가요?”
“네놈 하는 꼴이.”
“아침부터 구박이라니…….”
엔지가 내 등을 떠밀며 아침부터 얼굴 찡그리지 말라고 상냥하게 한마디 했다. 마루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토토를 주워 들고 방 안에 들어갔다. 환하게 피어 있는 촛불과 향로를 보며 무당에게 물었다.
“일하세요?”
“그래.”
“어떻게요?”
무례한 질문이었다. 무당의 권능을 거의 상실한 그녀는 이제 손님을 받고 점을 칠 수 없다. 불쾌하게 들릴 텐데도 무당은 아무렇지도 않게 흘끗 옆얼굴만 보여 주고는 자리에 앉았다.
“뭐가 문제냐, 너와 저 아가씨가 있는데.”
“저랑 엔지요?”
“그래.”
엔지는 그렇다 치고, 내가 할 만한 일이 있기나 할까. 어찌 되었든 임시방편으로나마 일을 해야 한다는 무당의 말에 시키는 대로 얌전히 옆에 앉았다. 아직 열이 내리지 않은 몸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으려니 후들후들 떨렸다.
엔지가 구급상자에서 찾아 준 해열제 두 알을 먹은 후 뜨겁게 끓인 차를 다섯 잔쯤 마시면서 병자 흉내를 제대로 내고 있을 때 대문 근처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계십니까?”
자리 지키고 앉아 있는 무당과 한 명의 병자를 대신해서 엔지가 마중을 나갔다. 무속 신앙의 상징 같은 무당집에서 레이스와 프릴을 나풀나풀 대는 아가씨가 튀어나오자 방문객인 남자는 매우 당황한 것으로 보였다. 마루로 손님을 데려온 엔지가 붙임성 있게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손님을 방 안으로 들여보냈다.
저는 차를 가져오겠다고, 다시 집 문이 열린 쪽으로 돌아가는 엔지를 잠깐 보곤 손으로 입을 가려 보이지 않도록 짧게 짜증을 뱉었다. 팔자가 사납다 못해 지독한 수준이었다. 남자는 나도 한눈에 알아볼 만큼 매우 특징적인 이유를 가지고 무당을 찾아왔다.
그의 오른손 약지에 끼워진 알이 반짝이는 반지와, 그 옆 새끼손가락에 묶인 붉은 실은 축 늘어진 채로 중간이 끊겨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어디론가 이어져 있어야 할 실이었다. 실을 이어 보겠다고 애쓰는 것처럼 끊어진 부분에 잔뜩 헝클어져 엉겨 붙은 머리카락 타래를 보며 숨을 삼켰다.
“아침부터 죄송합니다. 연락을 받지 않으셔서 다짜고짜 왔는데도…….”
“본론.”
무당이 매우 재수 없게 남자의 인사를 잘라 버렸다. 무안한 얼굴을 한 남자가 뒤통수를 긁적이더니 정좌로 무릎을 꿇고 앉아 얼굴을 어둡게 굳혔다.
“제 약혼녀가 죽었습니다.”
“알아, 근데 난 죽은 사람은 못 살려.”
“그게 아닙니다, 저는, 죽인 사람을 찾고 싶습니다.”
이 남자……. 초조한 마음에 주먹을 꽉 쥐었다.
해열제를 먹었는데도 열이 펄펄 끓는지 몸 전체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누워서 하루가 다 가도록 잠이나 잤으면 좋겠다. 토토가 무릎 위에서 저 오싹한 머리카락을 먹겠다고 엉덩이를 씰룩거렸다. 이 돼지 같은 놈. 머리를 콩콩 때리고는 달래느라 쪼갠 간식 하나를 입에 물려 주자 남자가 그걸 봤는지 희미하게 미소를 그렸다.
가볍게 노크한 엔지가 쟁반에 음료수를 네 잔이나 받쳐 들고 방 안에 들어왔다. 사양하는 남자에게 하나, 무당과 나에게도 하나씩 건네준다. 얼음을 잔뜩 채워 넣은 매실청을 마시자 좀 살 것 같았다. 한 번에 원샷을 하자 무당이 거지 쳐다보듯 보더니 제 몫의 음료수까지 마시라고 컵을 밀었다.
“흠, 흠.”
부산스러워진 현장을 정리하기 위해 헛기침을 한 무당이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범인 찾는 건 경찰에게 맡겨야지, 왜 이런 곳에 와서 찾고 난리인가.”
“경찰은 안 됩니다. 이미 포기했어요.”
“과학이 얼마나 발달했는데, 언젠가는 잡겠지.”
“보살님 덕분에 시신도 찾았습니다. 제발, 돈은 달라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아니, 내가 알려 준다고 하면 어쩔 건가? 무당이 말하길 이놈이 범인이라더라, 하고 경찰에게 넘기면 거기서는 믿어 준다던?”
“…….”
무당도 알고 말하는 것이다. 남자는 본론을 꺼내 들 때부터 표정에 살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뚝뚝 떨어지는 미련과, 복수심. 저 얼굴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은 나다. 원장을 도려내 살점을 저밀 때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을 테니까. 식칼이 낡아 날이 무디다는 것조차 행복했다. 몇 번이나 더 찔러 넣어 좀 더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었으니까. 날 끝부분이 닳아 뭉개지고, 나무 손잡이가 느슨하던 칼.
정론을 지적당한 남자는 입을 다물고는 앞에 있는 차가운 음료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훔쳐 닦은 남자가 흉흉한 눈을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대답만 해 주세요.”
“젊은 양반이 그런 생각 하면 못써.”
“누군지 압니다. 그런데 혹시, 정말 1퍼센트라도 아닐까 봐 찾아온 것뿐입니다.”
옆에서 조용히 앉아 있던 엔지가 나에게 살랑살랑 손짓했다. 엄한 얼굴빛을 한 무당을 흘끗 보고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엔지에게 다가갔다. 엔지가 귓속말로 물었다.
“이원 씨, 일할래?”
“엔지?”
“사람이 손님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건 아니거든…….”
알쏭달쏭한 짧은 이야기를 마친 엔지가 다시 몸을 옮겨 무당에게 귀엣말을 건넸다. 무당은 완전히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몇 번이나 엔지의 말에 타박을 주더니 결국에는 팔짱을 끼고 뒤로 물러섰다. 남자는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앉아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 왜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 이야기해 주시겠어요?”
엔지가 상냥하게 남자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 부드러운 태도와 달리 매우 강압적으로 보이는 모습에 남자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꿈에 계속 납치당해 죽은 약혼녀가 등장해서 울고 있다. 자신을 죽인 사람 좀 죽여 달라고 애걸복걸을 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그런 이야기였다. 남자가 이야기할수록 새끼손가락에 묶여서 흔들거리는 붉은 실의 끝에서 머리 뭉치가 산발이 된 채 엉켜 붙었다. 엽기적인 광경이다.
조금 눈을 찌푸린 채로 뜨끈뜨끈하게 달아오른 품 안에 토토를 꽉 끌어안았다. 조금만 풀어 주면 뛰쳐나가 저 머리카락을 또 죄다 씹어 먹을 것 같았다. 맛있는 먹잇감을 빼앗겼다고 생각했는지 토토는 조금 시무룩한 얼굴로 먹던 간식도 뱉어 버리고는 시위를 했다. 달래느라 배를 긁어 주는 동안 엔지는 남자와 이야기가 전부 끝난 모양인지 등을 한 번 두드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앞이 흐릿흐릿했다. 짙은 얼룩이 진 것처럼 먹먹한 시야에 눈을 몇 번 감았다 떴다. 마루를 내려가 신발을 신는 남자의 어깨가 축 처져 있다. 망설이다 기가 죽은 남자를 불렀다.
“저기, 약혼자 씨.”
“네?”
“거짓말 아니고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그 범인…… 곧 죽을 테니까 손 더럽히지 마세요.”
복수에 미쳐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것을 놓치는지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저 남자까지 그런 꼴이 되도록 그냥 보내기에는 남은 양심이 쿡쿡 가시에 찔리고 있었다.
바닥에 드문드문 떨어진 머리카락이 점점 좁아지는 시야 속에서도 아쉽다는 듯 축 늘어져 꿈틀거렸다. 살해당한 원혼은 멀쩡하지 못하다. 아마 제 약혼자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같이 죽자며 꿈에 나타나 가식을 떨어 대는 것이 분명했다. 아마 그 택시에 탄 다른 젊은 남자들에게도 많이 엉겨 붙어 있겠지. 택시에서 나오자마자 한참을 엉겨 붙어 사람을 옭아매던 징그러운 머리카락을 생각하며 조금 어깨를 떨었다.
“정말이에요. 궁금하시면 딱…… 한 3일만 참아 보세요.”
“……그, 그쪽도 무당이십니까?”
“아닌데요.”
신내림도 안 받았는데 뭐. 투덜거리며 손을 휙휙 흔들었다.
“하여튼 꿈에서 무슨 짓을 해도 듣지 말고 딱 3일만 참으세요. 그 정도는 기다리실 수 있잖아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얼른 돈 내고 가세요.”
“네? 네.”
남자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품 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소심하게 마루 위에 올려놓았다. 엔지가 후다닥 뒤를 쫓아가 명함 하나를 건네주며 또 꿈을 꾸면 찾아오라고 어르고는 배웅했다. 심드렁하게 팔짱을 끼고 늘어지자 무당이 뱀처럼 흰 눈을 뜨고는 휙 째려봤다.
“이것이 진짜.”
“왜요.”
“사람 수명 함부로 이야기하는 거 아니야, 이놈아!”
“아, 그렇다고 살인이라도 하라고 엎드려 빌 수는 없잖아요.”
“이게 말이라고 막 하고 지랄이야.”
“됐어요. 어차피 망한 인생인데…… 엔지.”
방 안으로 다시 들어오던 엔지가 응? 하고 되물었다.
“그리고 보살님.”
“왜.”
“저 좀 이상한데요.”
태연한 척했지만 삐걱거리는 척추를 따라 흐르는 땀은 막을 수 없었다. 아파 죽겠다.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말했다.
“눈이 안 보여요.”
뒤돌아 떠나간 남자를 마지막으로 시야가 새카맣게 변했다. 우주의 공간 같았다.
엔지와 무당 모두 뒤로 넘어갈 듯 까무러쳤다. 갑자기 멀쩡하던 눈이 왜 안 보이는 거냐고 호들갑을 떨던 엔지가 재연에게 전화를 하겠다고 뛰쳐나갔다. 말도 못하고 놀라 소스라치는 무당이라도 겨우겨우 진정시킨 뒤에야 간신히 환자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공간을 조심스럽게 더듬었다. 근처에서 조그맣게 몸을 말고 있는 토토를 끌어다 배 위에 올려놓고 있으니 그나마 안정이 찾아왔다.
놀라긴 했지만 짚이는 곳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신은, 그러니까 영보천존은 몇 번이나 경고했었다. 그의 눈을 오래 보면 좋지 않다고. 하지만 대화하면서 계속 내 눈을 빤히 보는 건 그쪽이잖아. 이런 빌어먹을 신.
그와 하재연에게는 악질적인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재수 없게 둘 다 중요한 건 가르쳐 주지 않고 돌려 말한다는 점이었다.
침묵과 망각. 둘 다 이번 삶에서 매우 중요한 대가라는 건 알고 있지만 한순간에 사람 거동을 불편하게 만드는 정도는 너무하잖아.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의미 없이 눈을 뜨고 어두운 시야를 한없이 들여다봤다.
“이원 씨, 정말 괜찮겠어?”
“그럼요. 아마 곧 돌아올 거 같은데…….”
오히려 하재연이 좀 더 걱정된다. 신의 존재를 본 결과로 장님행이라면 액막이에 속하는 하재연은 무슨 꼴을 당하고 있을지 모르는 일 아닌가. 이미 재연은 오른쪽 눈 하나가 멀었으니까.
“네가 혼이 나간 거지, 무슨 정신머리로 신 눈이나 찍찍 쳐다보고 있어?”
옆에서 무당이 역정을 냈다. 억울해서 가슴이 답답한 건 이쪽인데 괜한 욕을 먹으니 기분이 좋진 않았다. 입술을 삐죽거리자 토토가 꼬물거리며 얼굴을 짓누르고 올라와 빨리 나으라는 것처럼 눈꺼풀을 할짝거렸다. 고맙긴 했지만 토끼 침질이 마음에 들지는 않아 들어서 다시 배 위에 대충 올려놓았다.
“사람이 말을 하면 눈을 봐야죠, 그럼 어떡해요.”
“넌 아주 정신을 못 차렸어. 그냥 싸게싸게 나자빠져라.”
“보살님, 그런 말은 좀…….”
“왜 못해? 재연이가 아주 사람을 잘못 골랐어.”
엔지의 만류에도 굴하지 않고 제 하고 싶은 말을 실컷 퍼붓는 무당의 목소리를 들으며 작게 웃음을 흘렸다. 무당이 뭘 잘했다고 웃냐고 또 표독스럽게 쏘아붙인다.
“저도 그렇게 생각은 해요……. 아, 우리 재연이 참 불쌍해서 미안하네.”
실없는 소리를 하며 빈정거리자 기다렸다는 듯 따박따박 무당이 구박했다.
“얼빠진 소리 하고 자빠졌구만.”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지박령 신세였다. 형사는 빈집털이라도 당한 건 아니냐고 캐물어 댔지만 눈이 안 보이는 상황에서 만날 수도 없었다. 허리와 엉덩이 안쪽이 콱콱 쑤신다는 음담패설을 때아니게 쏟아 내고 난 뒤에야 전화벨 소리에서 벗어나게 될 수 있었다.
계속 신당에 누워 있을 수도 없어 조그마한 건넛방에서 누워 지내게 되었다. 선물로 들어온 휴지라거나 과일, 쌀을 보관하는 곳인지 잡동사니를 치운다고 엔지가 고생을 많이 했다.
에어컨이 없어 선풍기를 틀어 둔 쪽방에서는 털털거리는 모터 도는 소리와 함께 종종 선풍기 머리가 턱턱 꺾이는 소리가 났다. 더워서 시름시름 앓으며 보이지 않는 앞을 몇 번이나 크게 뜨고 감으며 땀에 젖었다.
앞이 캄캄하니 다른 쪽의 감각이 크게 높아졌다. 어쩐지 이진현의 음성이 들린 것도 같고, 일을 당분간 또 못 하게 되었다 연락해야 한다는 것도 기억이 났다. 찾아온 손님을 완곡하게 달래 돌려보내는 무당의 목소리도 들었고 엔지의 발랄한 목소리도 가끔 들려왔다.
째깍거리는 시계의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다는 걸 알았다. 시끌벅적하기도 하고 조용하기도 한 공간에서 미동도 없이 누워 숨을 내쉬면 코끝이 간질간질했다.
***
사방이 어둠뿐이라는 건 시간의 부스러기를 핥아 내기 좋다는 말이었다. 꿈을 꾸기도 좋은 시간이었다. 하루에 스무 시간 이상 기억이 마구 뒤섞인 꿈을 꾸었다. 재연이 냉담하던 때의 슬픈 과거도 다시 복습했고 그것보다 더 오래된, 살해당하기 전 자그마하던 어린 시절의 꿈도 꿨다.
신기한 건 꿈속에서는 앞을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어둑어둑한 길에 가로등이 놓인 것처럼 앞이 확 트이고 빛과 색이 찬란하게 보였다.
혼이 빨리는 것처럼 새로운 꿈에 내던져졌는데, 길도 변했고, 입은 옷도 기억에 의존이라도 한 것처럼 달라져 있었다. 저 멀리 반짝이는 빛을 향해 끝도 없이 걸었다.
가는 길은 좁았다가 넓어졌고, 구불구불하게 꼬여 있었으며 가끔은 배경도 달리는 말을 탄 것처럼 휙휙 변했다. 이런 배경이면 늘 빼먹지 않고 나타나 사람을 협박하던 십이지신 같은 건 보이지 않았고, 새하얀 설원과 불타는 평지가 시선을 어지럽혔다.
맨발로 걷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가벼운 신이 신겨졌다. 검은색 가죽에 백색 직물을 덧대 만든 기두리(岐头履)*의 때가 탈까 조심조심 걸었다. 남성용 신발은 이것 하나뿐이니 아껴야 했다. 헐떡이는 뒤축을 맞추기 위해 집어넣은 가죽 조각이 신발 밖으로 튀어나와 다시 제대로 밀어 넣고는 길을 따라 사뿐사뿐 걸었다.
나중에는 기이하게도 넝쿨무늬 수를 놓은 검은색 포(袍)를 옷 위에 걸치고 있었고, 무릎에서 흔들거리는 포의 깃을 잡아 정리했을 때는 어떤 복잡한 시장통 다관(茶館)*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뭐 해? 자네 차례야.」
앞에 앉은 수염이 숭숭 난 사내가 빨리 치라고 타박을 한다. 이게 무슨 일이지, 어안이 벙벙해 입을 벌리고 있자 왼쪽에 앉은 남자가 식탁을 퍽퍽 주먹으로 쳐 댔다. 입을 조금 벌린 채 손이 시키는 대로 마작을 쳤다.
네 명이 둘러앉은 식탁은 좁았고 옆자리 남자들의 몸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났다. 마침내 일렬로 늘어선 패를 밀어 넘어트리자 다들 한목소리로 투덜거리더니 반량(半兩)* 다섯 개를 툭 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샌님인 줄 알았더니 왜 이렇게 잘 쳐?」
잘 친 건가? 뭔지 알지도 못하고 나무를 깎아서 만든 싸구려 마작 패를 쳐다보았다. 다관 주인이 다 쳤으면 그만 일어나라고 골을 냈다. 음식도 제대로 시키지 않고 들어앉아 도박판을 벌인 무리들 때문에 화가 난 모양이었다.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방금 딴 동전을 두 개 집어 건네자 조금 인상이 펴진다.
어둑어둑한 가게 안쪽에서 노란 눈이 번뜩이는 것도 같다. 들고양이의 눈이 보였던 구석을 슬그머니 훑어보고 뒷짐을 지고 나오자 더운 여름 길바닥에서 나는 흙먼지 냄새가 훅 끼쳤다. 저 멀리 사막에서 불어온 모래가 이까지 온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목이 타서 헐떡거렸다. 그러나 물이 너무 귀한 마당이라 갈증을 달래 줄 만한 것은 거의 팔지 않았다.
연신 마른침을 꿀떡이며 손으로 태양 빛을 가리고 거리를 돌아보았다. 이상하다, 복잡하고 오래된 골목과 지저분하게 닦아 둔 길거리에 있는 모든 음식은 처음 보는 것이었으나 낯설지가 않았다. 하미과를 꼬챙이에 줄줄이 꿰어 놓고 팔던 상인 하나가 손짓을 하면서 목청을 울렸다.
「거기 도련님, 하나 사 먹지 그래. 반량 한 장이면 충분하다고!」
이상하게, 처음 듣는 발음의 언어가 낯설지 않았다. 께름칙한 기분에 어깨를 움츠리고는 동시(東市)*에서 연흥문(延興門)으로 나가는 방향으로 빠져나왔다. 뒤에서는 누가 자꾸 이름을 불렀다. 이원아, 이원아! 그 환청 같은 목소리를 피하고자 도망치듯 발걸음을 점점 빨리했다. 신발 바닥이 바닥에 탁탁 끌리는 소리가 나면서는 기억이 팽이처럼 제자리를 돌아 구심점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이 거리를 잘 알고 있었다. 다섯 살 먹은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개구멍으로 집을 빠져나와 홀로 저잣거리를 쏘다녔다.
복역에 끌려가는 젊은 남자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물이 솟지 않는 우물 근처에 모여 앉은 여인네들에게서 말을 타고 꼬박 아흐레를 가야 하는 마을이 연좌(連坐)*로 전부 불에 태워졌다는 소문을 듣기도 했다. 황제가 직접 통치하는 함양(咸陽)*은 그나마 사정이 나았으나 가뭄에 무거워진 분위기는 좀처럼 회복될 줄을 몰랐다.
가뭄이 길어질수록 아버님의 숨은 무거워졌다. 얼마 전 내 키가 컸다는 소식을 들으시자마자 불러서 회초리를 드셨다. 사실 회초리라고 하기에는 너무 굵은 몽둥이였다. 흠씬 맞아야 자라지 않는다는 말을 연거푸 하시며 까무러칠 때까지 때리고 욕을 했다.
일반적인 집안에서는 아들이 장성하면 기뻐하기만 할 텐데, 이 집은 내 몸뚱이가 커질 때마다 가족들의 신경줄이 곤두섰다. 식사는 늘 제한되었으며 한 번도 푸짐하게 무언가를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옆에서 시중드는 사람은 나이 든 유모 한 명과 까막눈에 벙어리인 계집종 하나뿐이었다.
이번에 또 몰래 저잣거리로 나갔다는 걸 알면 화를 내시겠지. 그럼 뭐 어쩌랴. 이제는 그 화도 부리지 못할 것이다. 길 한복판에서 불타던 책더미를 몰래 훔쳐보았을 때처럼 끝이었다.* 아직도 서랍장 중간의 이중 바닥에 몰래 숨겨 둔 경서를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이젠 그것을 태워야겠다.
쓸쓸한 기분에 한참을 앞도 보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인 채 걷다 누군가의 가슴팍에 이마를 들이박았다. 세게 부딪쳤는지 낯선 남자가 비틀거린다. 당황해 얼른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앞을 보지 못해서…….」
「괜찮아.」
남자는 전혀 괜찮지 않은 목소리로 툴툴거리며 대꾸했다. 구겨진 옷자락을 탁탁 털어 내는 손길 속에 짜증이 곤두서 보인다. 고개를 푹 숙인 채 괜한 시비가 붙는 것은 아닌가 난처해하자 두 번이나 연거푸 괜찮다고 말하며 남자가 물었다.
「못 보던 도련님인데, 이런 곳에는 어쩐 일이야?」
「그저 걷다 보니…….」
「세상 물정을 모르는군.」
「네?」
「세상이 이리 흉흉한데 좋은 옷을 입고 걸어 다니면 좋은 먹잇감이 아니면 무언가? 정말로 철없군. 어디 치마폭에 살았나 보아.」
원색적인 비난에 얼굴이 붉어진다. 남자의 말대로 너무 오래 걸었는지 처음 보는 골목에 서 있었다. 드문드문 부랑자 같은 꼴을 한 거지들도 보였다, 번뜩이는 눈빛이 무서워 주먹을 꾹 쥐자 남자가 조금 부드러워진 음성으로 어르며 손을 뻗었다.
「하는 수 없지. 따라와. 데려다줄 테니.」
그리 말하는데 거절할 수가 없었다. 손을 잡지 않아도 된다 극구 거절했음에도 남자는 책망 어린 말을 하며 손을 잡길 권유했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커다랗게 자랐는데, 손을 잡고 남자의 뒤를 따라 걷는 것이 민망했다. 시답잖은 말 몇 마디를 주고받으며 쫄랑쫄랑 걷다 보니 익숙한 저잣거리였다. 여전히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몇 해 전만 해도 그나마 사람이 많은 편이었는데, 요즘은 가뭄에 입에 풀칠하기도 힘드니 다들 살벌해진 분위기였다.
우리 집안도 분서(焚書)에 속한 류의 가업이 아니라 겨우 살아남았다. 이 나라 유일한 통치자가 점술과 미신을 믿는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신뢰는 수많은 나라의 재산을 갉아먹고 도적을 들끓게 했으며, 나에게 있어서도 불행한 일이 되었다. 또한 아버님과 어머님에게 있어서도 마음을 무겁게 하는 일이 된 것이다.
「댁이 함양이십니까?」
「아니야.」
남자의 말투는 미묘하게 억양이 달랐다. 그 부분을 묻자 남자가 웃으면서 출신지를 밝혔다.
「나는 산동(山東)에 살고 있지. 청도(靑島)*에는 온 적이 있나?」
「멀어서 가 본 적이 없습니다.」
「넓은 바다도 좋지만, 노산(崂山)*이 가장 일품이지. 한번 보러 와.」
「……네. 한데, 멀리까지 오셨군요.」
「내 형제가 이곳에 있거든.」
내게 좋은 옷을 입고 철없이 돌아다닌다며 지적했지만, 남자의 옷차림도 그리 값싸 보이지는 않았다. 어쩌면 황제의 눈에 들어 권력을 얻어 보고자 하는 아첨꾼의 가문일지도 모른다. 요즘 함양에는 죄다 그런 이들뿐이었으니까.
「탑이 높게 쌓였군.」
그 말에 고개를 들고 주작대가(朱雀大街)로 이어지는 명덕문(明德門) 앞에 높게 쌓인 나뭇더미를 바라보았다. 길게 솟은 나무 기둥은 마치 산적을 꿰어 두기 위해 다듬은 대나무 꼬챙이 같았다.
「노한 신을 달래기 위해 제물을 바친다라…….」
「…….」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집을 위해서였지만, 그래도 저것만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슬퍼서 저절로 마음이 요동쳤다. 그리고 억울하게 죽은 막내 누이가 생각나 눈시울이 붉어졌다. 갑자기 눈물을 보이자 남자는 당황한 듯 나를 달랬다. 그런데도 슬픈 것은 마찬가지였다.
「사내가 되어서 갑작스레 왜 우나?」
「불쌍해서요.」
「제물로 바쳐질 자가?」
남자는 의아한 투로 중얼거렸다. 전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아마 관련도 없는 제물을 사서 걱정하는 심약한 마음을 꼬집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는 영 딴말을 했다.
「이 나라 사람들은 멍청해. 제물 따위에 비가 내릴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럼, 인간들이 자연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을 것 같아? 이 나라의 황제조차도 인간인데, 비가 내릴 리가.」
「그런 불경한 말을…….」
황제는 이 나라의 유일무이한 권력자였다. 그의 말 한마디에 하루에도 몇십 명이 수명을 달리했고, 마을 하나가 불타는 건 예삿일이었다. 이 넓은 토지를 다스리는 황제는 말 그대로 신이었다. 그는 영원한 통치를 위해 불로불사를 염원하며 아버님을 독촉하고 있었고, 식솔들과 형님은 늘 죽음의 공포에 함께 시달렸다.
「뭐, 내일 당장 제물이 타고 나면 결과가 나오겠지.」
「…….」
무섭다. 그리고 우울하다. 슬픈 얼굴로 나무 제단을 한참이나 바라보았을 때 남자가 물었다.
「살고 싶나?」
「……네?」
「그런 얼굴로 보이기에.」
슬쩍 웃으면서 능글맞게 어깨를 으쓱이는 남자를 한참이나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왜 거짓을 말하지?」
마치 사람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말하는 남자를 보고 억지웃음을 지었다.
「거짓이라뇨, 아닙니다. 제물은 대대로 여아였고 보시다시피 저는 남자입니다. 오해하진 마십시오.」
「알아.」
걷다 보니 어느새 고래 등 같은 집 대문 앞이었다. 수도 근방에서 규모로는 따라올 곳이 없을 만큼 거대한 사합원(四合院)*은 안쪽의 정원이 신선이 사는 곳 같다 해서 선유원(仙遊院)이라고 불렸다. 감히 황제께서 기거하시는 궁이 있는데 신하의 집이 선유원이라 불리다니. 입단속을 아무리 해 봐도 끌어모은 부와 재산, 명예는 집안을 황상의 신발로 밟아 죽여야 할 눈엣가시로 만들었다.
「이제 가 봐.」
이 집안사람이라 말한 적도 없는데, 어찌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우연히 만나게 된 이 남자는 참 기이한 사내였다.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좋은 게 좋은 거지 싶어 허리를 숙이고 감사 인사를 건넸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가볍게 인사를 받아 준 남자가 막 발걸음을 돌렸을 때였다. 어쩐지 그 등과 걸어가는 모양새가 너무 익숙해서 이름을 불렀다.
「재연아?」
재연이 누구지? 그런 이름은 살아생전 처음 들어 보았다. 그런데도 마치 혀에 통증이 떨어지듯 살이 에이는 이름이다. 재연, 재연이 누군가. 혼자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그 남자가 매우 설익은 표정을 지었다.
「왜 그 이름을 부르지?」
육중한 문이 쾅, 하고 거센 소리를 내며 닫혔다.
멀리서 유모가 이름을 부르는 소리와 노한 아버님의 호통 소리에 귀를 막고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시끄러운 소음과 아버님을 말리는 아랫것들의 애원, 아우성이 고막을 찢어 버릴 것 같았다. 침상 안에 기어들어 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을 몰아쉬었다. 오래 동시와 서시를 부지런히 오가며 걸었더니 곤했는지 시끄러운 와중에도 까무룩 잠이 들었다.
얕은 잠을 깨운 것은 뭔가 축축하고 찝찝한 액체였다. 얼굴을 적시는 간질간질하고 불쾌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 눈을 떴다. 천장이 이상한 색으로 젖어 있었다. 한 방울씩 얼굴로 떨어지는 액체를 손으로 닦아 확인하자 핏물이었다. 끼에엑, 사람의 소리가 아닌 것이 어딘가에서 들렸다.
벌떡 일어나 휘장을 열어젖히고 주변을 보았다. 다리가 열두 개에, 입과 눈이 죽죽 찢어진 귀신이 비늘이 덕지덕지 붙은 몸을 흔들며 땅바닥에서 방으로 기어들어 오고 있었다. 좁은 방 문턱을 타고 넘은 귀신은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좁은 몸체를 아무렇게나 부딪치다 빠르게 벽을 타고 천장으로 기어갔다.
귀신은 거꾸로 천장에 매달려 상체를 길게 늘어트리고 몸을 덮고 있는 이불을 사각사각 긁어 댔다. 그것은 소의 발굽처럼 생긴 다리, 쥐의 다리, 뾰족한 용의 다리, 십수 가지 짐승의 다리를 온몸에 주렁주렁 달고 고약한 웃음소리를 냈다.
가장 앞에 달린 것은 사람의 손이었다. 천장에서 점점 더 몸이 떨어지더니 이내 풀썩거리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처박혔다. 몸 바로 옆으로 떨어진 귀신이 상체를 서서히 일으키더니 혀를 날름거렸다. 가로가 찢어진 뱀의 혓바닥이 내 목부터 뺨까지 길게 핥았다. 소름이 쭉 끼친다.
분명히 꿈이다. 깨어나면 된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몸은 손가락 하나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귀신이 상체를 뒤로 젖히고 미친 것처럼 춤을 추며 웃었다. 몸에 지네처럼 달린 팔과 다리가 버둥거리며 바닥을 두드리고 손뼉을 쳤다. 흔들거릴 때마다 귀신의 몸에서 벗겨진 비늘이 방 안 전체에 덕지덕지 묻었다. 짐승의 비린내가 심하게 났다.
뾰족하게 솟아난 아가리를 벌려 바싹 얼굴을 들이밀자 입에서 저절로 흐, 하고 숨 들이켜는 소리가 나왔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이 눈에 들어가 따갑다. 실핏줄이 다 터진 귀신의 붉은 눈깔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순간 끔찍해서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초가 켜진 방 안에는 한 해 전 잃어버린 누이가 붉은 옷을 입은 채 소리도 없이 울고 있었다.
「울지 말아라.」
「미안합니다, 미안해요, 오라버니. 제가 미안해요…….」
「내가 더 미안하다. 너를 어쩌면 좋을까.」
입이 마음대로 움직여 누이를 달랬다. 다섯 살 터울의 어린 누이는 아직 열둘밖에 되지 않았는데 무참하게도 홀로 보내야 했다. 오라비가 되어서 그녀를 제대로 사랑해 주지도 못했는데. 맛있는 것과 좋은 옷을 해준 적도 없었고, 경치 좋은 곳으로 여행도 실컷 못 가 보고 이대로 허무하게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
눈물로 얼룩진 여린 얼굴을 쓰다듬어 주자, 참기 힘들었는지 어린 누이가 품 안으로 쏟아져 울음을 터트렸다. 엉엉 우는 등을 토닥거리며 달래 주었다. 그것조차도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찢어졌다. 울음소리가 이중, 삼중으로 겹치는데 장지문 바깥에서 누가 조용히 고했다.
「아가씨, 주인 어르신이 오셨습니다.」
「…….」
그 잘난 인간이 후원까지 무슨 일이시란 말인가. 얼른 눈물을 그치라 누이를 달래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새 참을성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아버님은 길게 자란 수염을 쓰다듬으며 역정부터 냈다.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추태냐? 지금이 몇 시인지 아느냐?」
「언니 있는 방에 놀러 온 여동생 아닙니까. 추태라고 할 것이 있나요.」
「이런 괘씸한!」
소리를 버럭 지르자 놀랐는지 누이가 어깨를 움츠렸다. 눈물이 어룽져 훌쩍거리는 누이를 어르고 달래 먼저 방 바깥으로 보냈다. 내일이 마지막인데 괜히 좋지 않은 이야기로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예쁜 꽃신 신고 나가는 모습을 지켜본 후 주변 하인들을 죄다 물렸다.
「이번엔 저 어린 것을 팔아 버린다고 합시다. 다음에는 어쩌실 겁니까?」
「네놈이…….」
「멀쩡하게 양물 달고 태어난 사내자식을 후원에 처박아 놓고 여장을 시켜 기르면 액막이로 쓰실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 입 닥치지 못하겠느냐!」
「어차피 또 누군가 팔아야 하지 않습니까. 이번에는 그 잘난 황상을 위한 제물이라 칩시다. 다음은요? 그다음은요? 더는 도망칠 구석도 없습니다!」
시작부터 점술로 부흥한 집안이다. 나라나 개인을 위해 도술을 위시하며, 전세를 거쳐 와 나라의 시작점에 이르기까지 그 누구보다 많은 악업을 저지른 곳이 이 가문이었다. 지금 와서 눈 가리고 아웅 해 봤자 소용이 없었다.
남자는 가문을 이었고, 여아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주술을 받기 위한 액막이로 길러졌다. 하지만 차곡차곡 쌓아 온 업은 가문의 흥망을 흔들어 대기 시작했고, 소가주로 계시는 큰형님 이후부터 태어난 여아는 전부 줄줄이 갓난쟁이일 때 고꾸라졌다. 무너지는 발판이 무서웠던 아버님은 지어서는 안 되는 죄를 지었다. 사내아이를 여자로 기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행히도 다섯 해 뒤에 어린 누이가 드디어 태어났으나, 여아로 자라던 것을 남자아이로 다시 소개할 수도 없었다. 나는 그대로 후원에 처박혀 큰형님이 거주하시는 상방(廂房)에 발조차 들이밀지 못하고 살았다. 사람들에게 들켜 멸문지화라도 당할까, 내 키가 컸다는 소리만 들어도 찾아와 발로 사람을 밟아 대는 인면수심의 인간이 나의 아비라니, 통탄할 노릇이다.
「그 입 닥치거라. 낳을 것이다. 여아만 태어나면 들키지 않을 것이라고!」
「언제요? 정이가 태어나고도 이미 열두 해가 지났습니다. 다들 큰딸이 아닌 작은딸을 먼저 보낸다고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지요.」
장에 나가고, 길거리에 나가 듣는 소문은 한결같았다. 아무리 입조심을 시켜도 거짓은 들통나게 되어 있었다.
「다들 기이해합니다. 잘 나타나지도 않는 딸이 혹여나 아들은 아닐까, 하면서요.」
「이놈이 정말!」
결국 뺨을 한 대 대차게 얻어맞았다. 온 힘이 실려 있었는지 따귀를 맞자 머리까지 얼얼하게 아팠다. 욱신거리는 뺨을 쓰다듬으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황제께 저 핏덩이처럼 어린 누이 진상하시고 신께도 빌어 보십시오. 비를 달라고 말입니다. 가뭄이 벌써 2년째입니다. 내년에도 비가 오지 않으면 저 역시도 벗어날 수 없겠죠.」
아마 신이 노하시어 폭우와 해일을 보낼지도 모릅니다. 산 채로 태워진 재물이 여아가 아닌 남아라는 사실에 말입니다.
조롱하는 말에 아비는 분노를 참지 못해 문을 박차며 뛰쳐나갔고, 어린 누이는 밤이 새도록 울다 다음 날 황궁으로 끌려갔다. 큰형님은 누이의 마지막을 보지도 않은 채 상방에서 두문불출이었다. 이 수치스러운 가문의 역사를 제 손으로 끝낼 수만 있다면, 신에게 몇 번이고 몸이라도 팔 텐데.
하지만 몸뚱이도 하나고 혼 역시도 하나였다. 삶 역시도 이것이 전부였으니, 신은 자신을 능멸한 제물과 인간을 용서하지 않으리라.
회상은 회반죽처럼 엉망이었다. 혀가 짧은 어린아이가 되었다가 더 나이를 먹기도 했다.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었다. 손이 잡힌 꼭두각시처럼 굴었다. 물감이 뒤섞인 것처럼 오색빛으로 빙글빙글 소용돌이를 치던 물이 색을 다 먹지 못해 시커멓게 토해 냈을 때 저주처럼 마지막 시간이 와 있었다.
해가 지나도 비는 내리지 않았고, 어린 누이가 명을 달리한 지도 꼬박 한 해를 다 채웠다. 그래, 딱 이맘때였던 것 같다. 그사이에 키가 더 자랐고, 골격이 튼튼해졌으며 남성으로서의 성질이 더 뚜렷해지고 있었다. 고기 반찬 하나 제대로 먹여 주지 않았으면서 사내새끼는 어쩔 수 없다고 흠씬 맞았다. 아버님은 언제나 조급했다. 망루만큼 높게 쌓이는 제단이 그의 앓던 이를 빼 줄 시원한 화염이 될 것이다.
아, 슬픈 일이다. 마지막 밤인 오늘은 지독하게 길어 방에 앉아 잡생각에 빠졌다. 오늘 만났던 그 남자는 참으로 기이했다. 마지막에 그의 이름을 부른 것도 같은데,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외출은 재미있었지. 도박꾼들과 치는 마작의 마지막 판도 이겨서 재미가 있었다. 나쁘지 않은 삶이었다. 정말로, 손톱만큼은 그렇게 생각했다.
허무하게 가 버린 어린 누이는 마지막까지 나를 염려하여 애가 닳았었다. 제가 조금만 더 일찍 태어났으면 오라비는 차남답게 잘 사실 텐데 미안하다고, 그 어린 것이 눈물로 늘 얼굴을 적셨다.
미안한 것은 오히려 나였었다. 겁이 많고 나약해 이 집안의 병폐를 폭로하지 못하여 너마저 태어나게 만든 나를 용서해라. 우리 예쁜 아가.
아비의 눈을 속여 숨겨 둔 죽간을 하나씩 뜯어 조각조각을 내며 안녕을 고했다. 불타는 것은 어떠한 기분일까. 과연 신이 존재하신다면 이 몸을 받아 주기는 하시려나. 비는 내리려나, 눈은 오려나…… 풍년이 들려나…….
얇은 죽간이 자박자박 불타는 소리. 그래, 여름 무더위가 씻은 듯이 가시는 소리…….
***
“이원 씨! 이원 씨!”
그리고 나를 부르는 엔지의 다급한 목소리. 흐으으, 입에서 기운 빠지는 한숨 소리가 터졌다. 비로소 온몸을 짓누르며 괴롭히던 가위가 풀렸다. 팽팽하게 고무줄을 당기는 것처럼 몸이 튕기듯 위로 솟았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올 듯 펄떡거리며 뛰었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했다.
엔지가 경련하는 것처럼 벌벌 떨리는 몸을 누르며 이름을 자꾸 불렀다. 이원 씨, 윤이원! 이원 씨, 정신 차려. 무당도 옆에 있었는지 엔지를 도와 몸을 진정시키며 내 이름을 불렀다. 야, 이 멍청아, 미친놈아. 정신 차려, 정신 차려. 아, 이건 이름이 아니구나. 이 와중에도 무당의 험한 욕설에 피식피식 웃자 무당이 기가 막힌 소리를 냈다.
“도대체 이런 흉측한 놈이 어떻게 들어온 게야?”
“저도 그게…… 여긴 재연 씨가 결계를 만들어 둔 곳이잖아요.”
불안한 목소리로 엔지가 소곤거린다. 눈을 힘겹게 떴지만 아직 돌아오지 않은 시력 탓에 보이는 건 전부 어둠뿐이었다.
“으…… 엔지?”
“아, 이원 씨. 이제 좀 괜찮아?”
부드러운 손바닥이 이마에 닿았다. 시원한 온도에 조금 숨이 편안해졌다. 고개를 힘겹게 끄덕였더니 안도의 한숨이 대답 대신 돌아왔다.
“몇 시간 전이었지? 이원 씨 몸이 어떤지 보러 오려고 했는데 갑자기 이쪽 방에 들어올 수 없는 거야. 너무 놀라서 보살님이랑 나랑 한참 힘쓰다가 겨우 들어왔더니…….”
꿈이었지만 좁은 방을 미친 듯이 기어 다니다 천장에 달라붙어 몸을 늘어트리고 흔들다 떨어진 지네 귀신을 생각하자 속이 역해졌다. 십이지의 다리를 온몸에 붙인 그것이 정상적인 모습일 리는 없다. 헛구역질하며 숨을 껄떡대자 무당이 옆에서 물 잔을 입에 대 주었다. 본의 아니게 황송한 대접을 받으며 속을 가라앉히자 엔지가 손을 꼭 잡아 주며 등을 토닥거렸다.
“본 거야?”
“아마도, 가위에서…….”
“그렇구나.”
방 안에 귀신이 어떤 꼴을 하고 늘어져 있는지 볼 수 없어서 천만다행이었다. 그 몰골이 내 몸 위에 깔려 있기라도 했으면 눈 뜨자마자 다시 기절했을 테니까.
하지만 얼굴의 표정도, 방의 분위기도 읽을 수 없다는 건 역시 불편하다. 잠깐 숨을 골라 쉬었다.
“저기…… 이원 씨, 할 말이 있어.”
조심스럽게 운을 떼는 목소리에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내 손을 꽉 쥔 엔지의 손이 차갑고 축축했다. 엔지가 몇 번이나 침을 삼키고 마른 입술을 벙긋거리는 소리만 내자 보살이 그러지 말고 이야기하라 구박을 했다.
뭐든 그 말에 결심이 섰는지 엔지가 입을 열었다.
“이 집은, 재연 씨가 결계를 쳐 둔 집이거든. 악귀 들어오지 말라고…….”
“네, 그런데요?”
“그런데 방금 확인했더니 결계가 사라진 상태였어.”
“그게 왜요?”
“그…….”
눈을 뜨고 있어도 보이는 건 여전히 새카만 풍경이었다. 마음마저 새카맣게 달구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심장 언저리를 꾹 눌렀다. 피가 돌지 못하고 고여 있기라도 한 것처럼 썩은 물이 흐르는 것 같다.
“결계가 사라진 건, 술자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라서…….”
“…….”
“아무래도, 알려 줘야 할 거 같아서.”
엔지의 목소리가 조금 더 많이 떨린다. 직접적인 말을 피하고는 있었지만, 재연의 생사를 가늠할 수 있는 말에 조용히 고개를 떨어트렸다. 아직 제대로 풀어 나가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끝날 리가 없다.
하재연이 분명 관계를 하면서 말했다. 인간이 아닌 자신은 좋아할 수 있지 않겠냐고. 엔지의 손을 다시 고쳐 잡으며 무당을 불렀다.
“보살님.”
“왜.”
“재연이를 봤어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재연이가 있는 세상이어서 볼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불분명하게 뒤엉킨 꿈과 현실의 세계를 분리해 내려고 애썼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재연을 만났는데, 재연이가 아니었어요.”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 오래된 거리가 생생하다. 잘 닦인 길 위는 삭막한 모래 먼지, 사방을 둘러봐도 드넓은 평지와도 같은 광활한 대지. 오래되어 죽은 고어와 단어.
“보살님, 엔지. 재연이가 왜 신이 될 사주죠?”
인간은 신이 될 수 없다. 인간이었으나 신이 된 존재를 하나 알고 있긴 하다. 위대한 삼청, 가장 높은 세 명의 신 중 하나, 원시천존의 오른편에 선 태상노군. 춘추 전국 시대부터 진나라를 거쳐 한나라까지 살았다고 전해지는 인물, 노자. 영보천존이 원시천존의 정신적인 분신이라면 육체적인 분신은 노자라고 말한다.
그를 제외하고 인간이 그렇게 높은 지위에 올랐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하재연이 태상노군일 리는 없다. 그렇다면 재연이 신에게 속수무책으로 모든 것을 내주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신에게 속박당할 수 있으며 권능도 미비한 존재는 누구지. 보이지 않는 눈을 연신 깜박거리며 재차 캐물었다.
“제가 또 뭘 기억하지 못하죠?”
신이 망각과 침묵을 말했을 때 일찌감치 알아차려야 했었다. 기억이 온전하지 않은데, 이미 군데군데 다 잘려 나간 기억인데 가지고 있는 기억이라고 온전할 리가 없었다. 최초부터 기억은 모조리 틀려 있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원장을 죽인 것도 살해당한 것도 교묘하게 끼워 맞춰지고 조작된 망상일지도 모른다.
그래, 아마도 많은 것이.
기억을 찾아야 했다. 하재연을 살리는 것은 그다음의 문제였다.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사소한 기억들이 머리에서 폭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힘든 기억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현실이고, 꿈과 거짓은 얼마만큼 교묘하게 이 발치 앞에 자리 잡고 있을까.
살해당했다는 기억이 거짓이었거나, 어쩌면 살아 있다는 자체가 잘 만들어진 사상누각일지도 모른다. 두려운 일이었다. 내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불신해야 한다니. 손톱만 한 배려도 남겨 주지 않는 폭력적인 계책에 나는 괴로웠다.
스스로의 헐떡이는 숨소리가 마치 몸을 짓누른 지네가 꿈틀거리며 내는 비명처럼 느껴져 이불보를 밀어젖혔다. 드러난 몸 위로 토토가 뛰어오르는 감촉이 느껴진다. 배에 대고 머리를 문지르는 귀여운 털 뭉치가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기온을 뿜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추울까. 지금이 여름은 맞나.
“우리는…….”
엔지는 아주 조그맣게, 조그맣게 이야기했다.
“재연 씨의 말을 들어야만 해. 그게 규칙이거든.”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천치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누군가가 더 죽거나 말거나 내 알 바가 아니었다. 그래, 사랑하는 기억조차 지워진다는데 재연에게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겠지. 동의도 없이 자기 몸을 내던지면 감동이라도 받을 거라 생각했다면, 그것은 재연의 오만이었다.
“나는 미련이 없어요.”
“……이원 씨…….”
“솔직히, 하재연이 입을 닫고 사람을 따돌릴수록 더 그렇게 된다고요.”
말을 해야 알아차릴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누군가 알려 주는 사실과 힌트와 직접 찾아낸 오류만으로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알아차릴 수는 없는 법이었다.
하재연은 시작부터 모든 것을 이야기해야 했다. 규칙, 또는 대가. 그런 게 무슨 소용인가. 나는 시간을 돌리는 대가로 지옥과 업을 감내하기로 한 사람이다. 그렇게까지 해서 얻어 낸 금쪽같은 기회를 살인과 방화로 허무하게 날려 버리는 수준의 사람이었다. 그 정도로밖에 인생을 다루지 않으니 재연도 똑같이 나를 허무하게 취급해야만 했다. 사랑이란 백일몽보다 못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랬다면 마음이 편했을 텐데. 최소한 1년이라도 행복하게 보낸 후 즐거운 마음으로 정말 꿈결 같은 이야기였다, 간직할 수 있도록 책이라도 한 권 실컷 써 버리고 생을 접어 버렸을 텐데. 이미 너덜너덜해진 마음은 아무리 예쁜 모양으로 접어도 금방 찢어지고 말 것이다.
“정말로…… 사람이 미쳐요. 알아요? 눈만 감았다 뜨면 내가 알던 사실이 전부 틀렸다는 걸 알게 되고, 새로 알려 주는 것들은 받아들이기도 힘들 정도예요.”
위태위태하다. 이 정도로 삐걱거리는 낡고 썩은 발판이라면 그냥 힘차게 발을 굴러 부숴 버리고 싶었다. 조금만 힘을 줘서 내려치면 조각조각 나 흩어져 유골 위에 쌓이겠지.
희미한 탐욕에 고개를 떨어트렸을 때, 보일 리 없는 시야가 열리며 이상한 광경이 보였다. 익숙한 검은색 고급 차량. 더운 여름에도 정장을 갖춰 입은 두꺼운 몸의 남자들이 우르르 마당 안으로 쏟아졌다.
맨 마지막으로 차에서 내린 사람은 이진현이었다. 재킷은 없고 셔츠만 편안하게 걸친 남자가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휘적휘적 걸어 집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눈을 깜박거렸다. 암흑과 이상한 풍경이 교차로 반복해서 보였다.
이원아? 무당이 불안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사람이 독한 것 같으면서도 참 다정하다. 희미하게 웃자마자 날카로운 목소리가 귀를 짓이겼다.
“어이, 무당. 아주 태평해 보이는군.”
“이진현 씨…….”
“찾는다고 아주 고생했어. 왜 이렇게 사람 엿 먹이는 걸 좋아하지?”
“여긴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절대 못 들어오는데. 기어가듯 흘리는 엔지의 당황한 목소리를 들으며 두 번 더 생각했다. 결계가 풀어졌다고. 아마 재연이 만들어 둔 벽은 이진현도 들어올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 사람의 얼굴을 기억에서 더듬어 만들어 내며 앞을 보았다. 캄캄한 어둠에서 이진현의 수하들이 집 안 곳곳에 발을 들이미는 딱딱한 구둣발 소리를 실컷 들었다.
“어떻게 들어오긴, 대문으로 잘 들어왔지. 문도 열려 있던데, 들어와도 되는 곳 아닌가? 그런데 아가씨는 구면이군. 오늘 옷 예쁘네.”
진현이 속사포처럼 줄줄이 말을 쏟아 내며 내 무릎 안쪽을 걷어찼다. 남의 집에 들어온 주제에 무례하게도 구두를 신고 있었는지 걷어 채인 안쪽이 유난히 아파 죽을 것 같았다. 이를 악물고 끙끙 앓자 이진현이 뒷목을 잡아 눌렀다. 배 위에 앉아 있던 토토가 제 몸이 눌리자 놀랐는지 팔짝 튀어 나가는 게 느껴졌다. 토토의 몸이 바닥 위를 데구루루 구르는 소리를 들으며 입술을 꽉꽉 깨물었다.
“하루 일하고 잠적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나?”
이진현은 누르던 뒷목을 잡아 올려 억지로 앉게 했다.
“죄송하게 됐네요.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거든요.”
“뭔데, 뭐 죽은 놈이 벌떡 일어나 설치기라도 했어?”
사업을 하는 인간이라 그런지 묘하게 촉이 좋다. 강시가 벌떡 일어나 설치는 시체는 맞지. 그래서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
“…….”
분위기가 삭막하다. 멀뚱멀뚱 앉아서 입만 내밀고 있자 기막힌 목소리가 울렸다.
“여기가 무당집이 아니라 정신 병원이었나?”
“……그…… 으…….”
엔지가 긍정도 부정도 아닌 소리를 냈다. 앞을 볼 수 없으니 이진현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어쩐지 비웃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인데.
“무당, 무당 떠들기는 했지만 시체랑 쇼까지 한다고 대답할 줄이야. 그리고 사람이 왔으면 좀 쳐다보지? 안 보는 사이에 눈이라도 멀었어?”
“네.”
“……내가 지금 예스맨이랑 대화하나?”
“진짠데요.”
저렇게 딱딱 사실만 집어 이야기하는 것도 능력이다. 감탄 반, 조롱 반 담아 빈정거리자 이진현이 씨발, 하고 욕을 하더니 사람을 걷어찼다. 엔지가 옆에서 펄쩍 뛰어오른다. 나풀거리는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꽃향기가 났다. 향수를 뿌린 모양이다. 시각 대신 후각과 청각이 곤두서니 꽤 신기한 느낌이었다.
“애인이랑 헤어져서 술 먹고 뒹굴고 있나 찾아갔더니, 집은 개판에 연락 두절에.”
“음…….”
“나는 그쪽이 경찰에 잡혀간 줄 알았다고.”
이진현과 그의 회사에 가장 비밀스러운 작업을 도맡아서 했으니 경찰에 붙으면 어쩌나 감시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다. 어찌 되었든 잘못했다는 사실은 알았으니 얌전히 두 손을 올려 보이며 사과했다.
“고의는 아니었습니다.”
“무단결근은 해고 사유야.”
“알고 있어요.”
하지만 눈이 보이지 않으니 휴대폰을 조작해 전화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얼마나 많은 일이 이틀 사이에 일어났던가. 일하고 돌아오자마자 강시로 집 안이 난장판이 되었지, 신과는 또 깊은 대화를 나눠야 했다. 신과 재연 사이에 끼여서 곤욕을 치르는 바람에 하재연이랑은 몸으로 대화를 나눴다. 그 뒤에는 갑자기 눈도 멀었지, 꿈은 개 같은 거로 골라서 꾸고. 세상에, 팔자 한번 기가 막힌다.
갑자기 수만 가지 기억과 지식에 몸이 먹히는 기분이었다. 입을 벌리고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고개를 저었다. 마비가 온 것처럼 굳어 가는 혀를 겨우 움직였다.
“눈이 안 보이는 건 사실입니다. 갑자기 멀었어요.”
“지랄하지 마.”
“정말입니다.”
“진짜야?”
“찔러 보세요.”
“사람 눈깔에 손 집어넣는 취미 없어.”
친절함을 최대한 발휘해 권유해 줬더니 거절한다. 김빠지는 기분에 욕을 중얼거리며 한마디 툭 던졌다.
“눈깔 판매는 하시면서?”
정확하게 그의 악업을 지적하는 말에 분위기가 심상찮아졌다. 무언가 빠져나가고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엔지가 소름 끼치는 비명을 질렀다. 귓불과 뺨이 후끈거렸다. 따끔하게 얼굴을 긁고 지나친 것이 쭉 몸을 빠져나가 벽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손을 들어 얼굴을 매만졌다. 손가락에 뭔가가 묻어났다. 냄새를 킁킁 맡아 보다 혀를 내밀어 핥았다. 비린 철 맛이 났다.
“정말 앞이 안 보이긴 하는 모양이군. 칼이 다가와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걸 보니.”
“확인 방법이 과격하시네요.”
“툭하면 숨고 연락 두절인 윤이원 씨만 할까?”
“그쪽도 남의 집에 무단 침입은 좀 과하다고 생각하시죠?”
“원래라면 서주영 씨 멱이라도 따 왔어. 봐준 거니 고마워해.”
서슬 퍼런 목소리로 협박하는데 할 말이 없어 입술을 꽉 물었다. 치아에 얼금얼금 씹히는 살덩어리를 뱉어서 화를 내고 싶었다. 이유 없는 분노였다. 아직도 앞은 보이지 않는다. 갑갑한 눈동자를 벅벅 긁어 껍질을 벗겨 내면 보이려나. 여자들에게 보여 주기에는 과하게 잔인하려나.
앞을 더듬으며 대충 이진현과의 거리를 가늠하는데, 바보같이 저에게 손을 뻗은 줄 알고 토토가 달려와 손바닥 위에 안착했다. 인간 같지 않은 주제에 그 꼴은 귀여워 보였는지, 이진현이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이런 피라미 같은 인간에게 힘 빼야겠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관심이 과한 겁니다. 관심은 주영이에게 써 주세요.”
“아, 차인 거 실시간으로 보고도 그래?”
그런 사태도 있긴 있었지. 어설프게 헛소리만 하다 도망가 버린 주영이 다시 생각나 혼자 낄낄거리며 웃었다.
비웃는 것처럼 보였는지 이진현이 다시 얼굴 가까이 훅 들어왔다. 팔이 움직이며 손바닥이 날아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빠르게 움직이며 불어오는 바람이 뚝 멈추며 칼날에 그였던 뺨 위에 닿았다. 내려치는 줄 알았는데 그냥 손가락으로 상처를 짓누르고 문지르기만 했다.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따귀를 한 대 맞는 게 덜 아플지도 모른다. 욱신욱신 거리는 상처를 손끝으로 한참 헤집어 댄 뒤에야 이진현이 느릿느릿 말했다.
“눈이 갑자기 안 보일 리는 없고, 해괴한 무당질 한다고 그런 모양인가?”
“대충 그렇죠.”
“보이면 다시 일하러 와. 내가 목줄까지 묶어서 감시하기 싫으니까.”
“안 갈 건데요.”
“뭐?”
이진현이 기가 막힌 소리로 반문했다. 돈도 많고 젊은 주제에 벌써 가는귀가 먹었나. 엔지가 이원 씨, 하고 우는 목소리로 말렸다. 걱정 따윈 훌렁훌렁 넘기고는 거만한 투로 대꾸했다. 제 무덤 하나 푹푹 파는 건 원장에게 죽을 때부터 특기 아니었던가.
“이제 볼 장 다 봤으니 안 간다고요.”
“윤이원 씨, 죽고 싶어?”
“돈이 필요해서 들렀던 것뿐이에요. 월세 냈으니 이제 안 갈 겁니다.”
“돈이 필요하면 대출을 이용해야지, 개 같은 소리 하고 있어.”
“이빨 까는 게 특기라.”
“이 정신병자 새끼를 죽여 버리면 내 속이 시원하려나.”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이진현의 목소리에 기다렸다는 듯 대꾸했다.
“죽여요. 어차피 죽을 텐데.”
“이 새끼가 정말…….”
“안 돼! 하지 마세요, 이원 씨!”
엔지가 비명을 질렀다. 딱 그 높은 소리가 이명이 되어 귓가 언저리에 맴돌 즈음 목에 사내의 거친 손바닥과 매끄러운 손톱이 닿았다. 정확하게 급소를 노리고 달려든 차가운 육체 사이로 미어지는 숨소리가 울렸다.
“그만.”
누군가 팔을 벌려 이진현과의 거리를 떼어 놓았다. 중앙에 서서 힘겹게 중재를 외친 몸이 화를 삭이는 소리를 냈다. 심장 소리가 들린다. 두근두근하거나 혹은 산소가 부족해 펄떡거리며 날뛰는 아우성, 쾅쾅 발길질하며 우울증 앓는 박자, 바람과 비슷한 체향.
“엔지, 결계가 무너졌으면 당장 다시 쳤어야지.”
“재연 씨!”
“완전히 엉망이잖아.”
생사가 불분명할 거라던 재연이 사지 멀쩡하게 등장한 모양이다. 걱정이란 얼마나 쓸데없는 것인지 한순간이나마 깨달았다. 갑자기 튀어나온 사람 때문에 놀랐는지 이진현이 데려온 쓸모없이 덩치 좋은 어깨들이 방 안에 뛰어드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아우성과 고함이 시끌벅적하게 터졌다. 좁은 방 안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산소가 모자랄 지경이었다.
괜찮은 거냐, 저놈은 어디서 들어왔냐. 미칠 듯이 많은 사람의 소리가 거슬려 귀를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몸을 웅크리고 잇새로 산소를 미친 듯이 빨아 당기자 이진현이 닥치라고 짜증을 쏟아 냈다.
“여긴 어떻게 들어왔지, 무당?”
“무당이라고 하지 마시죠.”
하재연의 목소리가 바로 지척에서 들린다. 손을 더듬어 그의 팔꿈치 근처를 찾아냈다. 밑으로, 밑으로 조금씩 내려가면 혈관과 근육, 뼈, 가죽이 엉켜 있는 손목이 나온다. 손가락을 둥글게 굴려 손을 잡았다. 손바닥에 착 감싸인 피부와 근육이 팽팽하게 부풀더니 이내 부드럽게 변했다. 안도가 흐느적거리며 내려왔다.
“이원이 형이 말이 과했습니다. 대신 사과드리죠. 돌아가세요.”
“그쪽한테 들을 말은 아니야. 나는 확신했거든. 저쪽을 살려 두면 안 되겠다고 말이야.”
“어차피 죄 없는 사람도 죽이고, 죄 있는 사람도 살리지 않습니까. 한 명쯤 더 살리세요.”
“내가 왜?”
“이쪽에서 밀고할 성격이 아니라는 것 아실 테니까요.”
“혹시 모르지. 죽음은 최선의 침묵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대치는 고요하게 이어졌다. 재연이 한참 동안 침묵하고 있자 이진현 쪽에 가벼운 한숨이 나왔다.
“무시무시하게 쳐다보지 마. 정말로 그 눈깔도 뽑아서 팔아 버리고 싶으니까.”
“…….”
“오늘은 가지. 어이, 윤이원 씨. 다음에는 숨어서 뒹굴지 말고 부르면 나와.”
마지막까지 짜증 나는 인사도 잊지 않는다. 완전히 떠날 생각인지 우르르 발소리가 다시 요란하게 울렸다. 엔지가 허으응,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울음을 터트렸다. 무당이 울지 말라고 엔지를 달래기 시작했다. 같이 달래 주고 싶은데 일어나서 한 걸음만 걸어도 그대로 어딘가에 부딪혀 구를 기분이라 얌전히 침만 삼켰다.
한참 동안 좁은 방에는 엔지의 울음소리만 들렸다. 재연은 무당이 엔지를 달래는 동안 가만히 있었다. 가녀리게 목소리를 떨며 우는 그녀를 말리지도 않고, 무당에게 집을 어지럽혀 미안하다 사과와 안부를 묻지도 않고, 손목을 꼭 쥐고 있는 내 손가락을 떨쳐 내지도 않았다. 손끝에 느껴지는 맥박에 박자를 맞춰 숨을 조용히 내쉬었다. 서서히 불안함이 가라앉았다.
하재연은 그녀들을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드디어 엔지의 울음이 멎자 무당이 엔지를 부축해 방을 나섰다.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재연이 손을 빼냈다. 또 가는 거야? 속이 까맣게 끓어 괴로울 때 재연이 씨발, 하고 쌍욕을 뱉었다. 불꽃처럼 얼굴에 튀는 분노에 깜짝 놀라 어깨를 굳히자 성큼성큼 걸어와 머리카락을 휘어잡았다.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끼어 들어간 머리카락이 뽑힐 것처럼 당겨져 뜨끔거렸다.
“형은 미쳤어요?”
화난 목소리가 그저 무섭지만은 않았다. 어차피 이런 일이 생길 거라는 걸 예상하고 저질렀으니까.
“도대체 왜 사람 말을 안 들어!”
늘 괜찮아요, 형은 하고 싶은 거 다 해요, 지지배배 새처럼 짖어 대던 재연의 목소리에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어 마음이 편안했다.
“내 마음대로 하라며.”
“윤이원, 너 정말…….”
“그래서 내 마음대로 했는데, 뭐가 문제야?”
눈앞이 까만색이라 답답하다. 희고, 파란색도 보고 싶었다. 재연의 반들거리는 눈동자와 입술의 선이 궁금했다.
“지금은 아니잖아요. 이진현 조심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고 경고했는데 왜 거기에 가요?”
“내 인생이잖아. 네가 무슨 상관이야?”
“그 인생에 노력하고 있는 거 알아 달란 말 안 했어. 하지만 기운 빠지게는 하지 말아야죠!”
“아, 그래. 내가 잘못했습니다! 됐어?”
너무 괴롭다. 이성은 그를 사랑해야 한다고 평가하는데 마음은 쥐어뜯겨 나간 것처럼 잔해밖에 없었다.
“어차피 너는 혼자 감감무소식이잖아. 그래서 만나려고 그 인간 좀 썼어! 안 그러면 와 주지 않을 테니까!”
재연은 몸을 숨기고 사라졌을 때도 내가 이진현을 만나면 짧게나마 얼굴을 보여 주었다. 몇 번이나 바쁘다며, 일이 힘들어 한참 보지 못할 것처럼 굴어 놓고 이진현과 마주치면 늘 나타났다. 그래서 공사장에 갔다. 빠르고 간편한 방법이었다.
이기적으로 시간을 돌려 버린 하재연이 너무 미워서 싫어하는 짓만 골라서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얼굴은 보고 싶었고, 만나고 싶었다. 과격한 방법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외로웠다.
시끄러운 감정 소모라고 온몸의 세포가 한숨을 연달아 내쉬었지만…… 세상은 부조리하니까 더 많은 부조리를 직접 실현해도 나쁠 것 없잖아.
뺨이 더운 걸 보니 눈물이 나오는 모양이다. 아프다. 다 파내어서 흔적만 남은 흙구덩이를 맨몸으로 뒹굴며, 파묻혀 죽어도 좋으니 목구멍까지 따뜻하게 메워 달라 소리라도 치는 기분이었다.
“나 살기 싫다고 했잖아.”
“……형.”
“제발 좀 그만해. 나는 네 계약 따위에 관심 없어.”
“하지만요.”
재연이 볼 위에 난 상처 부근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럼 형은 다음 생에도, 그다음 생에도 나를 사랑하려고 할걸요.”
지금도 너를 사랑하지 않는데? 그 끔찍한 의문을 재연이 툭툭 건드려 지웠다.
“나는 형의 다음 생에도, 그다음 생에도 없을 텐데…….”
“…….”
“외롭잖아요…….”
왜 없는데? 울먹이며 물었다. 재연은 이번에도 대답 없이 작게 웃기만 했다. 다친 곳 아프겠다. 애간장이 절절 끓는 목소리는 농염하고 화염을 듬뿍 머금고 있었다.
이전 생, 그리고 그다음 생. 아마 몇 번이나 반복했을 우리의 기억. 그 기억마저 뜯어져 온전하지 않은 사람을 붙들고 재연은 고집을 부리기만 했다. 어둑어둑한 시야를 한 겹 더 덮은 손바닥의 체온이 뜨끈뜨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희미한 기척이 든다. 매끄러운 몸이 벽을 타고 넘는 소리. 지네 귀신이 생각나 어깨를 움츠리자 재연이 등을 끌어안아 주며 괜찮다 달랬다.
“눈을 고쳐 줄게요.”
방 바깥으로 나가 붕대를 가져온 재연이 절대로 바깥쪽 눈은 뜨지 말라고 이상한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눈꺼풀 위에 무언가를 잔뜩 적어 넣었다. 그의 피로 쓰고 있는지 눈꺼풀 위에서 코까지 비린내가 뚝뚝 떨어졌다. 깨알 같은 글씨로 범벅이 된 눈꺼풀을 끌어 닫고 얌전히 앉아 있자 그 위로 붕대를 둘러 주었다. 하루 동안은 이러고 있어야 한다는 말에 토토나 끌어안고 있으니 재연이 뺨을 툭툭 두드리고는 일어났다.
“가려고?”
“네.”
“왜 그렇게 잘 떠나?”
“……그래도 이진현은 만나지 마세요.”
“재연아, 다음은 왜 없는데?”
“만나고 싶지 않아도 만나게 되는 건 알지만…… 어쩔 수 없죠. 그래도 가급적이면 피하세요.”
“하재연.”
또 이런 식이다. 본인은 절대로 이야기해 주지 않아서 사람을 열 받게 만드는 저 화법, 태도.
골이 났다는 걸 알면서도 재연은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품 안에서는 토토가 졸린지 꼬물거리고, 얇은 벽 사이로는 엔지와 재연의 대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렸다.
“결계가 깨져서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무슨 일이야?”
“올 게 온 것뿐이야.”
올 게 왔다. 무서운 말이다. 떠지지 않는 눈을 통해 상황이 그려진다. 아마도 곤란한 표정을 하고 있을 엔지와 얼굴이 무시무시할 하재연. 그러고 보면 은근히 반말을 편하게 한다. 가끔 이름을 불러 대면서 반말을 하는 게 괜히 나온 태도는 아닌 모양이다.
심각한 와중에도 그런 발견이 웃겨서 혼자 피식거리고 있으니 토토가 앞발을 버둥거린다. 배가 움직여서 불편한 모양이다. 등을 토닥거리며 이어지는 대화에 집중했다.
“알아, 엔지. 그래도 마지막까지 조금이라도 지켜 줘.”
“이젠 힘들어. 이원 씨가 바라는 것도 아니고. 알잖아, 세상이 비틀린 축을 용서할 것 같아? 아무리 애써도 계속 다른 쪽으로 걸어갈 거야.”
“상관없어. 나도 이젠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으니까,”
강제력? 그 말을 들었을 때, 보일 리 없는 눈앞에 흐릿하게 무언가가 보였다. 방 밖으로 나갔던 지네 귀신이 다시 담을 타고 벽을 기어 집 안으로 들어온다. 엔지와 마주 보고 서 있던 재연이 앞으로 손을 뻗었다. 징그럽고 고약한 귀신이 들어오려다 말고 우뚝 멈춘다. 엔지는 등을 돌리고 있어서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모양새로 재연을 설득하려 애썼다.
“재연 씨, 정말 그렇게 해야 해?”
“방법이 없어. 저승사자 눈만 피해. 조금만 더 버티면 되니까.”
무뚝뚝하게 대답한 재연이 엔지와 무당에게 차례로 짧은 인사만 건네고 황급히 집을 나갔다. 마당으로 나가자마자 재연이 무릎을 짚으며 후우, 하고 더운 숨을 뱉었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 롱 테이크 화면처럼 길게 이어졌다. 벽 쪽에 매달린 채 집 주변을 서성거리던 지네 귀신이 마당 위를 매끄럽게 기어 재연의 옆구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끔찍한 몰골을 한 귀신이 붙어 있는데 재연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수족처럼 끼고 허리를 바로 했다. 식은땀이 걷히고 말끔해진 얼굴로 대문을 향해 발을 뻗는 재연에게는 그림자가 없었다.
이건 환각인가. 눈을 감고 있으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텐데. 무엇보다 나는 분명 작은 방 안에 있었다. 이 방은 신당과는 달라 바깥으로 트여 있는 마루도 없는데 마치 내다보는 것처럼 마당 전체를 관찰할 수 있었다. 습관처럼 눈꺼풀을 움찔거렸다.
갑자기 뒤를 돌아본 재연이 빙긋 웃었다. 눈이 마주친 건 기분 탓일까. 무당집의 바깥을 빠져나가는 재연에게는 다시 그림자가 생겨 있었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 안에서 열두 가지 모양의 손발이 허우적거렸다. 뱀 꼬리가 길게, 길게 늘어진다. 스산한 소리가 울렸다.
***
신기하게도 눈은 정말 좋아졌다. 만 하루가 지나서 붕대를 풀자 이전과 다를 바 없이 깔끔한 시야로 사물이 보였다. 엔지와 무당은 전부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감긴 눈에서 보였던 환각 탓에 입 안이 찝찝했다. 오히려 계속 앞을 보지 못하는 대신 전에는 볼 수 없던 것을 보면 좋겠다는 과격한 생각마저 해 버렸다.
다친 곳도 없었고, 밥까지 잘 챙겨 먹었더니 당장 밖으로 외출도 할 수 있을 만큼 기력이 솟았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팔다리 이곳저곳을 움직이자 엔지가 다가왔다.
“오늘 할 일 있어?”
“아뇨, 없어요.”
“그럼 카페 갈래?”
“카페요?”
“응. 나 여기 있겠다고 며칠 동안 문 못 열었잖아. 먼지도 많이 쌓였을 텐데, 도와줘.”
괜히 일을 시켜서 조금이라도 나를 잡아 두려고 하는 게 눈에 보인다. 뻔한 속내였지만 오래 집 안에 박혀 있어 답답하던 찰나라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걸어가는 내내 엔지는 조잘조잘 귀엽고 발랄한 이야기를 했다. 최근 어둡고 우울하던 모습은 오간 곳 없이 맑고 유쾌한 모습에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쏟아지는 사람들 사이를 이리저리 피해 나란히 지하철에 올라탔다.
카페가 있는 곳까지 가는 내내 편안하게 자리에 앉아 죽어 있던 휴대폰을 다시 켜서 만지작거렸다. 걱정하는 주영에게 살아 있다는 문자 몇 통을 보내 주고 습관적으로 뉴스 기사를 검색하다 무심코 막 새로 올라온 기사 하나를 읽었다.
도로 중간의 참변, 택시 기사 김 모 씨(51세, 남) 차 안에서 피살, 용의자는 도주…… 몸싸움의 흔적이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 면식범의 소행일 가능성이 클 것으로 예상하며…… 경찰은 블랙박스를 확보해 수배령을…….
몇 줄 안 되는 짧은 기사였는데 등골이 오싹했다. 이어폰을 낀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엔지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흐느적거리며 눈을 뜬 엔지가 왜? 하며 반쯤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말없이 휴대폰 화면을 보여 주자 손등으로 눈을 비비적적거리며 천천히 기사를 읽더니 마지막에는 두 손으로 휴대폰을 붙든 채 입을 떡 벌렸다.
“이, 이, 이, 이거.”
“그 남자에게서 연락 못 받았어요?”
“안 왔어! 휴대폰은 늘 확인하고 있는데…… 세상에.”
복수하겠다고 말하던 약혼자는 위태로워 보였다. 그의 몸 전체에 엉켜 있는 머리카락과 산발한 원혼, 끊어진 붉은 실이 기억났다. 죽음으로 끊겨 버렸지만 인연이 아예 지워지는 건 아니다. 들러붙은 혼에게 조종되는 것이 눈에 보여 꿈을 꾸면 찾아오라고, 이틀만 기다리라고 말을 했는데.
꼭 이틀째 되는 날 사고를 치고 만 것이다. 몇 시간만 더 기다렸어도 택시 기사는 사고로 죽었을 텐데, 어째서…….
“일단 내리자.”
효창공원역에 도착하자 엔지가 팔을 잡아끌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 문이 닫히기 전 아슬아슬하게 지하철에서 빠져나왔다. 둘이 뜻도 없이 손을 꽉 잡고 아무 말 없이 발을 빠르게 놀려 걸었다. 얌전하게 호주머니 안에 몸을 넣고 있던 토토가 갑자기 바둥거리면서 머리를 불쑥 내밀더니 폴짝 뛰어내렸다.
잡을 새도 없이 다짜고짜 뛰어가는 바람에 엔지와 함께 혼비백산하며 토토의 뒤를 따라갔다. 둥글고 하얀 꼬리가 흔들린다. 잡으면 저 뽀얀 엉덩이를 세게 두들겨 줘야겠다고 맹세하며 미친 듯이 뛰었다.
“야, 너 멈춰!”
“저기 있어!”
엔지가 힘들어 죽겠다고 헉헉거리며 아스팔트 위에 그대로 쓰러졌다.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소리를 내는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고 바닥에 엎어진 토토를 주워들었다.
멍청한 표정을 한 토토가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다는 것처럼 태연히 뒷발로 털 고르기를 한다. 그러곤 사람을 질식사시킬 기세로 털을 뿜어 댔다. 이쪽은 한여름에 죽어라 뜀박질해서 땀이 비 오듯 흐르는데, 이 멍청하고 도움 안 되는 토끼가.
“토토, 너 진짜 혼날…….”
“안녕하세요……. 여기서 뵙네요…….”
갑자기 누군가가 불쑥 나타나는 바람에 경기를 일으킨 것처럼 제자리에서 뛰어올랐다. 인기척도 없이 모습을 드러낸 검은 물체가 슬며시 웃었다. 얼굴에 아직 튀어 있는 핏자국과 입술에 바른 어울리지 않는 색의 립스틱이 소름 끼쳤다. 팔 척 귀신을 본 줄 알았다. 약혼녀를 죽인 범인을 알려 달라고 애원하던 남자는 피골이 상접하고 피폐해져 귀신 같은 꼴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귀신일지도 모르지. 여자처럼 화장한 얼굴은 분명 정상은 아니었다.
움푹 파인 눈두덩이와 쪼글쪼글해진 입 주변은 젊은 남자라기보다는 80대 노인으로 보일 정도였다. 시퍼렇게 둥둥 뜬 얼굴과 그 위에 엉성하게 칠한 눈 화장을 보고 놀라 헛발질하자, 남자가 슬그머니 다가오며 걱정하는 척했다.
“괜찮으세요? 아이고, 아프시겠어요…….”
남자가 저벅저벅 걸어올 때마다 아스팔트가 녹는 끔찍하고 머리 아픈 악취가 났다. 이지를 상실한 남자의 등 뒤에 거미처럼 딱 달라붙은 여자가 몸을 미친 듯이 흔들면서 깔깔대고 웃었다. 이미 옛날의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을 만큼 한에 파묻혀서 엉망이 되어 있었다. 분한 심정을 이해한다. 껌딱지처럼 이승에 눌어붙어 원한을 풀고 싶겠지. 하지만 이렇게 하면 사랑하는 사람 역시 지옥에 빠트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잖아.
“꿈을 꾸면 바로 오라고 했잖아요!”
“네? 뭐라고요? 잘 안 들리는데요?”
동공이 풀린 남자가 입을 움직일 때마다 입술 사이로 머리카락 뭉치가 툭툭 떨어졌다. 귓구멍에도 머리카락이 줄줄 삐져나와 있었다. 팔다리가 긴 젓가락처럼 가느다랗게 변한 채 휘적이고 있었다. 이 정도면 상태가 심각했다. 코와 입을 막고 한 발짝 물러서자 엔지가 뛰어와 가로막고 섰다.
“이원 씨, 얼른 피해!”
“엔지는요?”
“나는 괜찮아. 이런 일 많이 해 봤거든.”
소매를 걷어 올리고 부적을 야무지게 든 엔지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여름 더위에 고약하게 썩은 시체 냄새가 진동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부적을 코앞에 들이밀며 엔지가 숨을 크게 쉬었을 때였다. 무언가가 남자의 심장을 관통하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서늘하고 신경이 곤두서는 피 냄새. 입이 찢어진 지네가 심장을 입에 머금은 채 몸을 한 바퀴 굴리면서 피범벅이 된 머리를 흔들었다.
남자에게 붙어 있던 악령이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소리를 질렀다. 지네가 입을 쭉 벌리더니 한입에 심장을 집어삼켰다. 꿀꺽, 그 소리가 너무 크고 적나라해 구역질이 나왔다. 엔지는 참지 못하고 골목 한쪽으로 달려가 속을 게우기 시작했다.
눈이 어지럽고 따가웠다. 천천히 무너지는 남자의 몸 뒤로 낯설지 않은 사람 하나가 날이 엄청나게 긴 회칼을 든 채 서 있었다. 남자의 갈라진 상처에서 솟아난 핏물이 분수처럼 튀어 놈의 얼굴을 적셨다. 지저분해진 칼을 흔드는 놈의 입과 코, 귀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씩씩 거친 숨을 내쉬는 모습과 다 터서 거칠거칠한 손마디로 칼자루를 고쳐 쥐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찾았어, 드디어 찾았어.”
우직한 감탄사. 옛날 원장의 말투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온몸을 까만색으로 둘둘 감싼 남자의 얼굴에서 선글라스가 툭 떨어지더니 오른쪽 알이 빠져 발꿈치 뒤편으로 굴러갔다.
“죽일 거야.”
온몸을 비틀면서 죽일 거야, 죽일 거야, 하고 외치는 남자의 팔이 붕붕 휘둘릴 때마다 그의 몸을 꽁꽁 동여맨 지네 귀신의 팔다리도 같이 버둥거렸다. 지네 귀신의 팔과 다리가 사방으로 뻗어져 나간다.
나는 멍하니 눈을 두 번 빠르게 깜박거렸다. 얼굴 정면에 내리박혀 오는 칼날이 섬뜩하게 빛나던 순간이었다. 주먹만 한 돌덩이가 날아와 놈의 정수리를 때리고 떨어졌다.
놈의 칼이 툭 떨어져 선글라스 렌즈를 정확하게 깨 버렸다. 순간 파열음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엔지가 팔을 휙 잡아당기며 소리 질렀다.
“이원 씨, 뛰어!”
정신을 놓은 채 엔지에게 이끌려 미친 것처럼 달렸다. 하재연이 웃는다. 갑자기 그런 환각이 보였다. 남자에게서 빠져나왔는지 어느새 지네 귀신이 바짝 따라붙었다. 입 주변이 피범벅이 된 채 웃어 대는 귀신이 내 등을 덮치는 것과 동시에 구르듯이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급하게 문을 닫아 잠근 엔지가 헉헉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엎어졌다. 죽을 것처럼 힘들다. 전력을 다해서 뛰었던 것 같다. 귀신을 보고도 도망치지 않았는데, 사람이 무섭다고 도망치다니. 엔지가 부들부들 떨면서 휴대폰을 들어 경찰에 신고했다. 골목의 위치와 상황을 설명하자 경찰이 곧 출동하겠다는 대답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게, 무슨…… 헉, 일이에요?”
“나, 나도 몰라. 아니야, 알 거 같아. 재수가 없는 건 다 이유가, 후우, 있어.”
엔지가 금쪽같이 아끼는 비싼 옷이 먼지에 엉망인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자로 드러누워 중얼중얼 분노를 퍼부었다. 이름이 들리지 않아 막연하게 재연이에게 하는 말이 아닐까, 추측했는데 정말 엉뚱한 사람을 넘겨짚은 것이었다.
“역신! 난 진짜 그 남자 너무 싫어!”
이진현이 문제였던 모양이다. 그래, 그 남자를 만나지 않았으면 이렇게 이중, 아니 삼중으로 엿을 먹을 리가 없지. 너무 뻔한 해답에 얼굴을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다.
토토, 이 멍청한 토끼가 갑자기 뛰쳐나가지만 않았어도 아까의 끔찍한 상황은 피했을 텐데. 여전히 정신도 없고 생각도 없어 보이는 토끼는 밥을 달라고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마음먹었던 대로 엉덩이를 한 대 퍽 치고는 이진현이 역신의 후손이라는 사실에 대해 뼈저리게 통감했다.
“허…… 진짜, 왜 몰라봤지.”
“응? 왜? 그 사람 알아?”
엔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아 물었다. 치마가 둘둘 말려 올라가고 머리는 산발이 된 상태였는데도 궁금한 건 귀에 들어온 모양이다. 엉망이 된 머리를 빗겨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이나 본 사람이었다. 못 알아차렸다는 게 놀라울 정도로 자주 만난 사람이기도 했다.
“알죠. 출소하자마자 집에 찾아와서 사람 잡겠다고 설치던 놈.”
“그게 그놈이야?!”
전혀 짐작 못했는지, 엔지가 애써 빗겨 준 머리카락을 다시 산발이 되도록 쥐어뜯으며 비명을 질렀다.
“신고, 다시 신고하자!”
“아니에요, 누군지 알았으니까 신고하지 마세요.”
“뭐?”
휴대폰 액정에 손가락을 올린 채로 엔지가 멍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꽤 귀여운 표정이라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게 주소를 잘 알아내 찾아온다고만 생각했지, 나타나는 시간에 대한 공통점은 생각해 보려 하지 않았다.
그놈을 처음 만났을 때 살인범도 처음 나타났었다.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으니 얼굴을 떠올리지도 않았다. 선글라스만 벗었을 뿐이지만, 잊을 수 없는 얼굴이다. 늘 이진현과 함께 있었으니까.
차 실장. 고 영감의 밑에서 일을 했을 때 내게 시체 가방을 가져다주었던 거구의 남자. 계속 이진현을 따라다니며 수행원을 맡았던 자. 운전대를 붙잡은 채 말수가 적었지.
분명히 기억한다. 똑같은 얼굴이었다.
이진현, 그 인간. 뻔뻔하게 연쇄살인 관련자인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넘겼을 게 분명하다. 악질적인 놈. 이를 으드득 갈면서 휴대폰을 꺼냈다. 엔지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왜? 하고 묻는다. 대꾸 없이 잠자코 그동안 별 볼 일 없던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어쩐 일이야, 그렇게 사람 박대하더니?
“당신.”
-응?
“당신, 그쪽이 늘 데리고 다니던 수행 실장.”
매번 이진현과 함께 다니니 귀신들에 가려져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그 덩치가 흔한 체구는 아닌데, 체형도 똑같은데. 살짝 굽은 어깨마저도 이제 와서 생각하면 비슷한데 왜 몰랐을까. 이진현의 곁에서 붙어 다니며 노골적인 이야기는 모조리 들었을 테니 더 원망하기 좋았을지도 모를…… 씨발.
하재연이랑 처음 관계를 가졌던 날에도 분명히 이진현이 그놈은 먼저 퇴근하라고 보냈었다. 옷을 갈아입고 얼굴을 숨긴 채 찾아오기 딱 좋은 타이밍이었겠지. 머리를 죄다 쥐어뜯고 싶을 정도로 한심함과 분노가 차올랐다.
-차 실장? 그놈이 왜?
“그 사람, 행복 고아원 출신입니까?”
-아…… 이제 알았어?
이 개새끼. 재연이 경고할 때 들어먹고 인연을 끊어 버릴걸. 처음으로 깊은 후회가 둔기처럼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왜 이야기 안 해 주셨습니까?”
-안 물어봤잖아?
“그 새끼가 사람 죽이고 다닌 건 압니까?”
-그랬어? 요즘 심상찮아 보이더니…….
천하태평이다. 대놓고 화를 낼 수 없어 이만 북북 갈자 이진현이 전화 너머로 태평하게 뭔가를 지시하면서 되물었다.
-그놈. 그래, 권혁대가 죽고 난 이후에 고아원에서 데려온 놈이었지.
“그 자식이 사람 배 따고 내장 꺼내고 다닌 새끼라고요!”
-이상하게 네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다 싶긴 했지.
“그런 말이 나올 땝니까?”
-나한테 피해를 입힌 게 아니잖아, 안 그래?
이진현은 아주 냉정하게 말을 끊어 냈다. 그래, 그 실장의 살인 행각에 피해를 당한 것은, 죽은 사람들과 애꿎은 살인자와 사회의 공격을 받게 된 나였다. 덩달아 힘껏 야근하고 현장 조사에 나가던 경찰들……. 그런 피해에서 이진현은 완전히 격리되어 있었다.
통화 내용을 전달하고 있는 휴대폰은 발열로 뜨거운데, 이진현이 하는 말들은 전부 차갑고 지독하게 비인간적이었다.
-광신도는 다루기가 쉬워. 조금만 믿어 주는 척하면 간도 쓸개도 바치거든. 이미 잘 순화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권혁대를 떠올리고 있었단 말이야?
이진현은 완전히 악인이었다. 건달 같은 말투와 느슨한 행동으로 만들어진 인격의 틈에는 깊은 골이 있었다.
-곤란하네……. 그런 짓까지 할 거란 생각은 못 했는데. 아니, 하긴 했지만 깊게 알고 싶진 않았거든.
“사람이…… 얼마나 많이 죽었는데요.”
-이봐, 윤이원 씨. 아직도 영웅 놀이에서 졸업하지 못한 거야?
너 역시도 살인자잖아. 부드럽게 사실을 지적하는 이진현의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분노가 갈 길을 잃어버리고 몸을 비틀었다. 연골이 부드럽게 꺾이는 듯한 소리가 속에서 나왔다.
-왜 내 탓을 하지? 네가 권혁대를 죽이지만 않았으면 그놈이 살인을 저지를 일도 없었잖아.
“…….”
-적어도 그놈 앞에 나타나질 말았어야지.
교도소에서 고 영감을 만나 연이 이어졌다. 수많은 공사장 일 중에서도, 많고 많은 더러운 일 가운데서도, 그렇게 인연이 길어져 이 사내의 회사를 알게 되었다. 원장의 뒤에는 이진현이 있었고 이진현의 옆에는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았던 형제가 있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원장의 품에서는 가족이었던 누군가.
어쩌면 첫 만남에서 이진현이 내 목을 졸랐을 때 멈췄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시작점부터 틀려먹었다고 생각하고 황급히 발을 뺐어야 했을지도. 그럼 입막음을 위해 살해당했겠지만, 내게 복수한답시고 칼을 휘두르고 다니는 미친놈 하나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권혁대의 은인이라고 말했더니 두말없이 시키는 일은 다 하던 편리한 놈이었는데, 아깝게 되었군.
“당신…….”
-원한다면 신고라도 하도록 해. 물론 이쪽에서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말해 둘 테니.
이진현이 픽, 짧게 비웃는 소리를 내더니 그대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무참한 정신으로 멍하니 하얗게 달아오른 액정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답답한 마음을 참으며 고개를 들자 엔지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빠끔거렸다. 길게 뻗은 엔지의 손가락이 덜덜 떨리더니 어딘가를 가리킨다. 손끝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눈앞에서 창문이 산산조각 나며 터지더니 유리 파편이 우수수 튀었다. 가게 안으로 바람이 미친 듯이 불어왔다. 돌풍이 몰아치고 경첩이 덜그럭거렸다.
무슨 짓을 했는지 입 안에 피거품을 문 놈이 칼을 창문 근처에 찔러 넣고 있었다. 육중한 팔을 몇 번 더 움직여 남은 유리를 제거하더니 서서히 창문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창문 밑에 웅크리고 있다가 봉변을 당한 토토가 찍찍 우는 소리를 내며 달려왔다.
엔지가 신고하겠다고 다급하게 다시 휴대폰을 들었지만, 안으로 뛰어든 놈이 머리채를 잡아 던지는 바람에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엔지!”
투박한 손에 엉킨 그녀의 머리카락이 툭툭 끊어지는 소리를 냈다. 엔지가 꿈틀거리면서 희미하게 앓는 소리를 냈다. 살인범은 손안에 엉킨 머리카락을 툭툭 털어 내고 칼을 고쳐 잡았다. 칼날에는 커다란 살점이 아직도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핏물로 시뻘겋게 변한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그가 히죽 웃었다.
“다행이야. 여기 있을 줄 알았어.”
“너, 이 자식…….”
“감히 내게 거짓말을 해?”
“거짓말한 적 없…… 와악!”
방금까지 앉아 있던 자리에 칼이 내려와 꽂혔다. 장식을 위해 깔아 둔 러그가 그대로 찢어지며 잔털이 흩날렸다. 다시 칼을 휘두르려는 놈의 팔을 붙잡다 발에 걷어차여 쓰러졌다.
점점 더 거세지는 돌풍에 눈도 뜨지 못할 정도가 되자 경첩이 느슨해지며 잠겨 있던 문이 벌컥 열렸다. 보안 장치까지 뜯어져 너덜거리며 부품 몇 개가 바닥을 굴렀다. 문 바깥에 익숙한 것들이 보였다. 귀밑까지 찢어진 입술, 창백하다기보다는 귀기가 서려 있는 하얀 얼굴.
놈과 엎치락뒤치락 몸싸움을 하는 와중에도 그것들은 똑똑히 눈에 들어왔다. 엔지가 상체만 겨우 일으키더니 힘없는 비명을 질렀다.
“저승사자가, 왜…… 아직 시간이 아닌데…….”
몸이 부딪치면서 이마를 다쳤는지 엔지의 예쁜 얼굴 한쪽에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 눈먼 봉사처럼 칼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놈의 국부를 발로 걷어차고 엔지를 잡아 일으켰다.
“엔지, 일단 도망쳐요!”
“이 씨발놈, 어딜 가!”
몇 발짝 걷기도 전에 그대로 뒷덜미가 붙잡혀 바닥에 내리꽂혔다. 엔지가 옆구리에서 빠져나가 힘없이 쓰러졌다. 머리를 심하게 부딪쳤는지 아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젠장, 엔지만이라도 먼저 도망치게 해야 했는데.
몸 정중앙 쪽으로 칼날이 쑤셔 박힐 듯 떨어졌다. 몸을 한껏 굴렸지만 피하지 못한 채 허리와 팔꿈치 안쪽이 긁히듯 베였다. 핏물이 길게 선을 그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완전히 풀린 눈을 한 놈이 혀로 칼끝을 날름거리며 히죽히죽 웃었다.
“원장 선생님이 그럴 리가 없잖아. 네가 현혹한 거야. 네가 하느님을 죽였어.”
“하느님이 아니라고 말했잖아.”
“그건 네 망상이야!”
말이 통할 상대가 아니다. 재연의 뒤를 쫓아 나갔던 지네 귀신이 왜 저놈에게 붙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방어를 해 보겠다고 내던진 의자가 놈의 발차기에 박살이 나서 떨어지는 걸 보니 욕도 안 나왔다. 놈은 거구였고 그만큼 힘이 좋았다. 이진현의 옆에 딱 붙어 실장으로 다닐 정도면 격투 실력이 떨어지는 놈은 아닐 것이다. .
“생각해 보라고, 어떻게 이진현이 원장을 알고 있었겠어!”
“…….”
“둘은 똑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고! 원장은, 그 새끼 밑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테이블 하나를 넘어트려 놈을 깔아 버렸다.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보지 않았는지 멍청한 얼굴을 한 새끼가 입을 벌린 채 악취 나는 숨을 내쉬더니 테이블을 걷고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그럼…….”
“허억, 후…… 진짜야. 원장은 애들을 팔고 있었다고.”
다친 허리와 팔이 미친 듯이 쑤셨다. 격렬하게 몸을 움직였더니 심장도 헐떡거리며 뛰고 있었다. 숨을 헉헉 몰아쉬며 땀방울을 훔쳐 냈다. 피와 섞인 땀이 바닥에 떨어지고, 문 앞에 버티고 선 저승사자들은 장부를 짓이기듯 쥔 채 히죽거리고 있었다. 이제는, 너를, 데려가야지.
원장 선생님이, 하느님이, 돈? 아버지가. 형제를? 우리를? 팔았어. 장기. 살해. 약이라도 한 것처럼 몽롱하게 혼자 중얼거리던 놈이 턱 끝을 치켜들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서?”
“……뭐?”
“난 그런 거 몰라. 네가 원장 선생님 죽였어. 너도 죽어야 해.”
이런 미친 새끼. 목구멍 끝까지 욕설이 터졌지만 칼을 피하느라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뛰어야만 했다. 뒤에는 엔지가 있었고, 문 앞에 버티고 선 저승사자가 길을 비켜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숨이 부족해 고막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주방 쪽으로 뛰어가다 왼쪽 발목이 잡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발을 잡힌 채 질질 가게 중앙까지 끌려갔다. 발버둥을 치면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우악스러운 손아귀의 힘을 이길 수가 없었다.
저승사자는 초조하게 결말을 기다리고 있었고 경찰은 여전히 오지 않았다. 한두 명이라도 행인이 꼭 있던 골목은 오늘따라 인적이 없었고, 고함을 듣고 달려오는 사람도 없었다. 붙들린 발목이 비틀렸다. 엔지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귀신들이나 혼령을 상대하는 사람이지 거구의 남자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시퍼런 칼날이 살을 찢고 장기를 파헤치기 위해 높게 올라갔을 때 혀 차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엄청난 힘으로 내 목덜미를 잡아 던졌다. 몸이 공중에 붕 떴다가 큰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등 뒤에 닿은 의자가 밀려 넘어지며 우당탕하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장부를 들고 선을 긋기 위해 기다리던 저승사자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지고, 눈앞에서는 재연이 힘없이 웃고 있었다. 온몸이 쓰라리고 아팠는데 그의 모습을 보는 순간 통증조차 잊어버렸다.
“어, 어…….”
인간의 몸 안에서 칼을 쑥 뽑아낸 놈이 당황했는지 뒷걸음질 쳤다. 놈의 가슴팍에서 몸집이 줄어든 지네 귀신이 스물스물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귀신이 머리를 흔들며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냈다. 조금 전까지 사람 하나 죽이지 못해 안달 난 것처럼 덤벼들던 주제에, 귀신이 몸을 빼낼 때마다 갑자기 위축되더니 덜덜 떨기 시작했다.
“이, 이거, 내가 한 거 아니야, 아니야…….”
주춤거리던 놈이 변명 같지도 않은 헛소리를 하더니 뒷걸음질 치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문이 훌쩍 열렸다. 저승사자들은 입을 찢어지게 벌린 채 경악한 얼굴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놈은 찢어지는 비명과 통곡 소리를 내며 그들을 통과해 달려갔다.
가게 전체가 흔들렸다. 지진과 해일에 땅속으로 사라지는 물체처럼 재연이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엔지, 내가 저승사자만 피하랬잖아…….”
우습지도 않은 이유를 들며 엔지를 책망하더니, 재연이 입 밖으로 왈칵 핏물을 뱉어 냈다. 그림자가 꾸역꾸역 그를 좀먹고, 대신 그림자가 길게 뻗어 있어야 할 어둑어둑한 자리를 흘러나온 피가 대체했다.
바지와 손을 적시고 퍼져 나가는 핏물을 보자 입 안에서 목 졸리는 비명이 나왔다. 덜덜 떨면서 칼날에 섬뜩하게 관통당한 복부를 눌렀다. 피가 분수처럼 솟아나고 있었다.
“재연아, 하재연!”
재연이 웃었다. 배가 뚫려 피를 줄줄 흘리면서. 하얗게 질린 얼굴이 피에 젖어 엉망이었다. 아플 텐데, 재연은 아프지도 않은지 불태워진 허허벌판처럼 흐릿하게 웃으며 장갑 낀 손을 들어 올렸다. 뺨을 쓰다듬어 주는 손가락 위에 씌워진 검은 장갑이 차다. 눈물이 떨어졌다.
“왜 막았어, 바보야! 이 멍청아, 그깟 거 찔려도, 안, 안 죽는다고…….”
아, 이게 뭐야.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머리를 부숴 버리고 싶었다. 이건 꿈이야. 비현실의 세상이야. 그래, 지금 꿈을 꾸고 있어야 한다.
눈을 감았다 뜨면 다시 고아원이고, 자애로운 아버지, 우리의 하나님, 원장 선생님이 계시고 재연은 새벽에 울며 깰 것이다. 그럼 망설임 없이 그 어린 손을 붙들고 걸어 주면 된다. 언젠가 더 자란 재연이 중학교 교복을 입은 채 어색하게 고백하겠지. 그렇게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 이건 꿈이니까. 제발, 빨리 꿈에서 깨어나게 해 줘. 미친 것처럼 고개를 흔들어 댔다. 이리저리 부딪치고 깨진 상처에서 통증이 점점 더 퍼질 때마다 눈앞의 현실을 지워 달라고 피를 토하듯 빌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두 발로 걸어 다니던 몸에서 숨결이 점점 옅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붙잡아도 손가락 사이로 피가 왈칵 쏟아져 나온다. 사람의 생명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막아도 소용이 없는 불안함과 괴로운 감정이 칼로 변해 그를 죽이고 있었다. 출혈이 심해서 새파랗게 변한 입술로 재연이 속삭였다.
“형은…… 죽어야 해요. 웃기죠?”
“재연아, 하지 마, 말하지 마.”
“살리려고 했는데, 죽어야 한다니…….”
그런데 아직은 아니야. 재연이 말하면서 덩어리진 피를 뱉어 냈다. 엉망이 된 내장과 쑤셔진 상처에서 흐르는 피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재연의 손이 점점 더 차가워졌다. 몸도, 뺨도, 숨소리까지 차갑다. 늘 뜨겁던 재연이 차가워진다. 고통스러운 촉각이었다. 동상을 입은 팔다리를 잘라 내도 이것보다 아프지는 않을 것이다.
“안 돼. 재연아, 재연아…….”
죽어야 한다며. 그럼 죽어야지. 그 새끼의 칼에 내가 찔려 죽었어야 했다. 왜 하재연이 다쳐야 한단 말인가. 이렇게 끝날 수 없다. 이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멀리서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눈물로 흐릿해진 시야에 핏물이 듬성듬성 묻은 토토의 모습이 보였다. 하얀 털, 붉은 눈동자. 눈 주변에 있는 애교스러운 까만 점박이 무늬…… 토토. 입 안에서 이름이 흘렀다. 기억에서 잊힐 뻔했던 이름이 저 작은 몸을 보자 떠올랐다.
“정묘신장.”
평평하던 카페의 축이 기울어졌다.
“소원을 들어주세요.”
토토가 폴짝폴짝 뛰어온다. 그 붉고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보며 재차 불렀다.
“소원이 생겼어요. 제발 들어주세요.”
무엇이든 바치겠다. 제발 소원을 들어 달라 고통을 담아 외쳤다. 나룻배를 타고 저승의 강을 건너겠다. 현세의 삶에 미련 따위는 없었다. 앞으로 얼마든지 외로워져도 괜찮다. 하재연을 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