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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엔드(HAPPY END) 4권 (완결)-9. 시간에 못을 박아 걸었다 (16/24)

9. 시간에 못을 박아 걸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목에 끈이 감겨 있었고, 끝은 천장과 연결되어 있었다. 머리 한쪽이 제대로 깨졌는지 두통이 엄청났다. 눈앞도 흘러내린 피로 범벅이라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현기증이 나 몇 번이나 욕설을 퍼부으며 인내하고 인내한 뒤에야 시야가 트였다. 휘청거릴 때마다 발밑에서 뭔가 덜그럭 소리를 내며 턱턱 채였다. 소주병을 담아 두는 초록색 플라스틱 박스가 발밑에 끼워져 있었다.

“너를 죽이려고 내가 왔지.”

몸을 받친 박스가 덜컹거렸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술을 마셨는지, 약이라도 했는지 완전히 풀린 눈을 한 놈이 손가락 끝을 빨면서 지껄였다.

“네가, 네가 감히 나를 집어넣어?”

“내가 넣었어? 네가 잡힌 거지. 병신 새끼.”

여전히 도발에 약한지 바로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다. 더러운 놈. 일부러 화를 북돋으려 침을 뱉었다. 힘없이 떨어진 타액은 놈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상자만 더럽혔다. 놈에게서 지체 없이 따귀가 날아왔다. 상자가 한 뼘쯤 밀려 나가며 바닥을 끽 긁었다. 겨우 한 발로만 몸을 지탱하자 목이 졸렸다. 기도를 조여 오는 따가운 감촉에 숨을 크게 헐떡이며 쏘아붙였다.

“개새끼야, 너는 나보다 더 악질이야.”

얼마나 오래 정신을 잃고 있었는지 바깥은 깜깜했다. 절기상 여름이 아닌 가을로 넘어가면서 해가 짧아진 탓도 있겠지. 어둑한 건물 안을 비추는 건 틈새로 스민 가로등 불빛뿐이었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다. 머리가 깨진 부위가 욱신거린다. 이마를 찡그린 채로 입을 열어 되는대로 퍼부었다.

“네가 죽인 사람들은 죽을 이유도 없었어. 원한? 그 원한 나한테 풀었어야지, 살인마 새끼.”

“너는 늘 거짓말만 하잖아!”

남자가 침을 튀기며 가래 낀 소리를 질렀다.

“경찰이 나, 나를 쫓지도 않았어! 잡았다고 거짓말을 했어. 감히!”

연쇄 살인마들의 가장 큰 특징은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을 때 극도의 실망과 분노를 느낀다는 것. 조명이 자신을 비출 날만을 기다리며 쾌락에 빠져 있는데 잡혔다는 거짓 발표를 보았으니 아마 더 화가 났겠지.

“결국 잡혔잖아.”

“도망쳤어!”

“또 잡힐 거야. 이진현도 너를 버렸으니까.”

“아니야, 아니라고. 너만 죽이면 다 멀쩡하고, 돌아가고…….”

끝없이 살인을 저질렀던 놈의 몸은 타르처럼 끈적거리는 검은 액체로 푹 젖어 있었다.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겠지만, 발목을 붙잡은 수많은 시체가 끝도 없이 이어져 바닥에 질질 끌려다니고 있었다.

어째서 내게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분노하는가. 저번 삶에서는 출소 후에 얼굴조차 마주친 적 없던 놈이었는데. 그가 이진현을 만나고 더러운 일을 하면서…… 업이 자라면서 살아 있는 악귀가 만들어졌을까. 놈의 눈은 검은 액체에 완전히 녹아들어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침을 튀기며 내 뺨을 치는 놈의 입과 코에서 악취 나는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죽어, 죽어!”

“죽여.”

“너만 죽으면! 우리는 다 잘…….”

“고아가 잘살면 뭘 얼마나 잘살아, 등신 새끼.”

죽음의 공포가 지척에 다가온 순간에도, 내 독설은 멈출 줄을 몰랐다. 열정적으로 떠들었다. 이 밤이 다 가기 전에 이놈이 빨리 눈이 뒤집혀야 했으니까.

기이하게 자라난 원망의 덩어리가 비틀거리며 커다란 검은 봉지가 놓인 곳으로 걸어갔다. 똑바로 걷지도 못하고 비틀거리는 꼴을 보니 정말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었다. 쭈그려 앉아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피우더니 놈이 뭐라고 끝없이 중얼거리며 커다란 봉지를 열었다. 뚜껑이 열려 있는 소주병이 넘어지며 술이 콸콸 흘렀다.

놈은 봉지에서 큰 통을 꺼내 뚜껑을 따고 안에 든 액체를 뿌리기 시작했다. 시멘트를 발라 둔 바닥 위에 고약한 냄새를 가진 액체가 줄줄 흘렀다. 휘발유 냄새였다. 드디어 끝나는구나 싶자 안심이 될 정도였다. 관자놀이에 고여 있다 뺨과 턱을 죽 따라 흘러내린 핏물이 뚝뚝 떨어져 운동화 코를 더럽혔다.

불길이 확 스쳤다. 깨진 소주병과 휘발유가 뿌려진 건물 구석구석으로 연계 작용이라도 하는 것처럼 재빠르게 불꽃이 달라붙었다. 불을 지른 놈이 비틀대며 걸어와 내 다리와 허벅지, 사타구니를 더듬으며 헉헉거렸다. 구역질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끈적거리고 찌든 냄새가 나는 혀가 목덜미를 쓸었다. 이번에는 정말 올릴 뻔했다. 몸이 비틀거릴 때마다 발아래의 박스가 아슬아슬하게 흔들거렸다. 놈은 점점 더 바짝 몸을 붙이고 킁킁대며 개처럼 체취를 핥았다. 온몸을 더듬는 굵은 손이 담쟁이덩굴처럼 위로 올라와 내 목을 감싸 쥐었다.

눈을 뜨고 천장 위를 보았다. 아. 탄식과 비슷한 깨달음이 입에서 나왔다. 언제부터인지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있던 지네 귀신이 툭 떨어져 살인범의 몸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순식간에 목이 졸렸다. 거구의 남자는 목 정도는 똑 분지를 수 있을 만큼 아귀힘이 좋았다. 엄청난 힘에 숨통이 막힌 채 몸이 흔들렸다. 깔깔거리는 괴성과 비웃음이 한참이나 울리더니 놈이 오른발을 들어 발판으로 삼고 있던 플라스틱 상자를 걷어찼다.

“그래, 그게 무슨 상관이야.”

몸이 휘청거리며 줄에 묶인 채 늘어졌다. 산소가 부족하자 귀에 이명이 울렸다. 입가에 침이 샌다.

“내가, 내가? 아니야, 우리가? 그래, 우리가 이겼어…….”

이성을 상실한 눈깔이 한 바퀴 빙그르르 돌더니 히죽 웃었다. 딱딱한 페인트 바닥을 때리는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유리문이 한번 훅 열리자 바람이 불었다. 불길이 한 치는 더 길어졌다.

고통스럽다. 한 뼘도 더 멀리 떨어져 바닥을 구르고 있는 상자는 용을 써도 발에 닿지 않았다. 목을 사정없이 조여 대는 끈은 자비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플라스틱 박스에 불이 붙었다. 주황색 화염에 삼켜진 박스가 형체도 없이 일그러져 녹아내리면서 악취를 뿜었다. 고통으로 침이 질질 새어 나왔다. 괴로워, 숨 막혀. 목이 졸려 눈과 혀가 뽑혀 나갈 것처럼 압력에 쭉 빨려 나왔다. 커억, 쉰 소리를 내며 한 번 더 몸을 흔들었다.

시계추처럼 좌우로 진자 운동을 하던 몸이 갑자기 맨바닥에 떨어졌다. 코를 잘못 부딪쳐 코피가 줄줄 흘렀다. 깨진 머리가 다시 망가졌는지 이제는 참을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쿨럭, 커헉, 헉…….”

목을 조르던 굵은 끈을 찢어 낼 것처럼 벅벅 손톱으로 긁으며 미친 듯이 숨을 들이켰다. 산소 부족으로 시달리던 뇌는 완전히 엉망이 되어 가고 있었다. 순두부를 짓밟아 으깨는 것 같은 고통에 발버둥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불이 사방을 뒤덮고 있었다. 바닥을 손으로 짚고 반쯤 일어난 채로 붉은 그림자가 일렁거리는 건물 내부를 둘러보다 위를 보았다. 천장에 묶여 늘어진 끈의 중앙이 시커멓게 타 있었다.

천장까지 올라붙은 불이 위에서 터지고 있었다. 스프링클러는 작동하지 않았다. 잿더미가 뺨과 눈앞을 더럽혔다. 연소하여 매캐해진 공기에 닿자 눈이 따가움을 호소했다. 얼굴을 문지르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줄이 끊어진 건 정말로 천운이었다. 마지막에 그렇게 추하게 혀를 빼놓고 매달려 죽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역시 죽는 건 무섭구나. 무슨 정신으로 그때 자살했을까. 용기 있다, 윤이원.

목 뒤에 늘어진 잘 꼬인 새끼 타래 끝이 불에 타 잿더미가 되었다. 불길이 혀를 내밀어 팔뚝을 핥았다. 아프다, 따갑고 뜨거웠다.

쿵, 누군가 잠긴 문을 발로 걷어찼다. 그놈이 돌아온 건가.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리며 앞을 보았다. 커다란 유리문 너머에 하얗게 질린 얼굴이 보였다.

“재연아……?”

“초대해! 이거 열어!”

불길에 갇히고도 막연하던 공포가 눈앞에 옷을 입고 서 있는 기분이었다. 몸을 뒤로 내빼며 머리를 흔들었다.

“윤이원, 열어! 초대하라고!”

하재연의 몸이 새카맣게 얼룩져 있었다.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 거지. 이해할 수 없는 장면에 눈을 의심했다.

「나는 저런 건 모른다.」

등 뒤에서 가슴팍을 꼭 끌어안으며 신이 속삭였다. 재연이 유리문을 흔들 때마다 그에게서 핏물이 줄줄 흘렀다.

“…….”

「인간도 신도 아닌 추악한 것이 내 일부라니, 믿을 수 없다.」

열쇠로 걸어 잠근 문도 아니었는데 재연은 들어올 수 없었다. 이미 인간의 근원을 벗어난 재연은 인간의 육체를 덮어쓰고 있지만 신과 비슷했다. 그는…… 업보의 공간에는 초대받지 않고 들어올 수 없을 것이다.

처음 살았던 좁은 지하 단칸방에서도 그랬다. 엔지의 카페에서 역시 그랬다. 업보가 사방으로 폭발할 것처럼 터질 때, 재연은 관여할 수 없도록 묶여 있었다. 내 손으로 끊어 버렸지만 인연이 알려 주었다.

유리를 세차게 내려치며 재연이 아아악, 비명을 질렀다. 그 고통스러운 비명에도 달려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전생이나 환생이나, 시간의 역행이나 귀신, 업과 복록, 이런 일들이 과학적으로 이루어지기는 했던가. 아마 이번에도 이 빌어먹을 세상의 규칙 중 하나가 제대로 똬리를 틀고 방해하고 있겠지.

하지만,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른다. 누구도 구해 주지 않으니 무서워도 도망치지 못하고 죽을 수 있으니까.

「나는 저것이 너무나 밉다.」

“…….”

「너 역시도 밉다.」

신은 전혀 악의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옛날, 최초의 너를 사랑하지만 않았어도 나는 완전함만을 알았겠지. 너를 알아 나는 불완전해졌고, 더럽고 쓰디쓴 감정이 무엇인지 배웠다.」

“윤이원, 초대해! 초대하라고!”

「보아라, 이미 인간의 껍데기를 잃어 초대 없이는 들어오지도 못하는 저 비천한 것을.」

하재연은 악다구니를 쓰고 있었다. 고함을 지르며 유리문을 세차게 두들기는 모습을 말없이 보았다. 이미 불은 1층 내부를 흔적도 없이 태우고 있었다. 이 안에 들일 수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 깨어났는지, 정묘신장이 왜 그의 혼을 놓치고 말았는지 알 필요도 없었다. 재연이 입고 있는 환자복은 터진 상처로 피가 둥그렇게 번져 있었다.

병원에서 여기까지 얼마나 먼 거리였지. 그냥 잠들어 있으라고 했더니 아물지도 않은 몸을 끌고 뛰어왔나. 그는 맨발이었다. 아프겠다. 단단한 유리에 부딪혀 엉망이 된 주먹이 마음을 찔렀다. 마치 스크린으로 보는 영화의 이질감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래도 엉망이 된 모습은 그대로였다. 저건 살아 있고, 움직이는 하재연이었다.

“미안해.”

“윤이원!”

“……너까지 버리진 말아 줘.”

모든 것을 잃어버린 표정을 짓는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느슨해진 토목이 시체처럼 썩어 무너져 내렸다. 원귀들이 기뻐 날뛰었다. 아. 불이 몸을 덮었다. 상상 이상의 고통에 숨을 멈췄다.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손이…… 닿았나? 마음으로 재연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공기보다 가볍고 아스라한 감촉, 더운 숨보다 뜨거운 것이 나를 안았다.

“재연아?”

절대로 들어올 수 없을 텐데 눈앞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나를 칭칭 끌어안은 재연은 군데군데가 불꽃에 그슬려서 상처투성이였다. 멀쩡한 곳은 하나도 없었지만, 재연은 여전히 무너지지 않은 눈을 내게 바짝 들이밀었다. 그의 눈 안에서 푸른 불꽃과, 별이 회전했다.

“여긴, 어떻게…….”

“형.”

거의 미칠 것 같은 얼굴로 재연이 웃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는 모습이 줌 인처럼 시선을 사로잡았다. 하재연은 흐느끼듯 희미한 울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나는 또 형을 죽이는군요.”

“재연아.”

“저번에도, 이번에도, 매일매일…… 형을 내가 죽이네요.”

“재연아, 안 돼.”

그가 보는 곳에서 죽고 싶지 않았다. 자아와 인격을 상실하고 신에게로 돌아가면 아픈 것도 잊힐 테니까. 조용히 잠들 듯, 평온하고 고요하게 마지막 생을 맺게 해 주고 싶었다. 나야말로 늘 후회하지 않았던가.

“너, 너 아프잖아. 나는 초대도 안 했는데, 어떻게…….”

눈물은 전염병처럼 빠르게 번졌다. 불을 꺼트리지 못하는 미미한 눈물이 재연의 손가락과 입술을 적셨다. 그 옛날부터 나 역시도 재연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왜곡된 과거에서, 내가 절망을 마주하고 시간을 돌리기로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재연이 고통스러운 삶을 보내는 게 싫었을 뿐이다. 결국 내 선택은 잘못되었고 우리는 고통스러웠지만…… 정말로, 나는 망가져도 재연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미래를 바꿨다. 이번에도 너는 자각도 못 하는 사이에 잘 끝날 거라고, 칭얼거리듯 말하며 어깨를 밀어 냈다.

“잊힐 거야. 다 지워질 거야.”

“형.”

“다음 생에서 너 없이 나는 살고, 우리는 그렇게 멀어지고…….”

인연도 끊어 냈잖아, 그렇게 말하려는데 재연이 중간에 말을 잘라 냈다.

“형이 없는 세상은 재미가 없을 거예요.”

재미, 겨우 그런 사소한 이유를 말하는 얼굴이 온통 일그러져 있었다. 울음을 가득 삼킨 목소리로 재연은 애써 눈을 접어 웃고 있다. 억지로 근육을 비틀면서도 최대한 예쁘게 웃어 보려고 한참 애를 쓰고 있었다. 자신을 좀 보라는 것처럼, 사랑해 달라고.

“내 인생에 못처럼 박혀 있던 형이 떨어져 나가면, 나는 무슨 재미로 시간을 보내죠.”

우리가 그렇게 오래 함께 있었나? 이전 생에서 80번쯤은 나 없이도 재미있게 살았으면서. 불길에 몸이 녹아 불타면서도 매우 쓸모없는 생각을 했다.

“텅 비어서, 열어 보기도 무서울 거야.”

그의 품에 끌어안기자 뜨거운 숨이 돌덩이처럼 굳은 몸을 따스하게 만들었다.

“그러니 이제 내가 당신을 지킬게.”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죽게 할 수 없어서, 나처럼 비참한 인생을 보내게 하고 싶지 않아서 노력했다. 지옥과 온갖 업을 짊어지고서라도 재연을 다시 한번 제대로 살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실패했다. 하재연 역시도 나를 위해 복록을 전부 버렸으므로.

결국 처음부터 선택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은 절망이었다. 원망하면 오히려 좋을 텐데, 가슴 아픈 광경을 보여 주고 자살과 마찬가지인 타살을 선택했는데도 재연이 찾아왔다. 찾아올 수 없을 텐데도 와 주었다. 다가온 죽음을 자각하자 공포는 덜 자란 어른을 어린아이로 만들었다.

“재연아, 무서워.”

아프다. 불은 무섭다. 늘 저것이 나를 영혼까지 태워 먹었다.

“나 너무 무서워.”

재연이 좀 더 세게 나를 안았다. 저도 많이 아플 텐데, 군소리 없이 입술을 내 얼굴 위에 꽃처럼 내려앉혔다. 재연의 체향은 불상 앞에 피운 향처럼 달콤하게 점점 짙어졌다.

차가운 것이 코끝에 닿았다. 세상이 동정을 베풀어 주는 걸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귀신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천장에서 하얀 입김 같은 것이 떨어지고 있었다. 차갑지만 포근했다. 바다에 눈이 내린다. 이곳은 바다였다, 더운 바다.

아아……. 눈이라고 생각한 것은 파편이었다. 세상이 무너지고 있었다. 품에 안아 주던 재연은 오간 곳 없이, 나 홀로 맨발에 치렁치렁한 옷을 입은 채 정처 없이 걷고 있었다. 저기 어딘가에 호신부를 기록한 죽간이 떨어져 있었다. 액운을 받는 방법이 적힌 금기의 주술책도 다 찢겨 있었다. 멀리 보이는 불탄 장작이 한 무더기 바닷물에 실려 떠내려가고, 그 옆으로 다 해진 가죽신도 흘러가고 있었다.

저기, 언젠가의 생에서 정표로 주고받은 가락지가 흐른다. 잡으려고 손을 뻗으며 한참을 뛰었지만, 떠내려가는 속도가 더 빨랐다. 아쉬움에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너희는 너무 많은 업을 쌓았다. 똑같이 시간을 되돌렸고, 반복할수록 죄는 더욱 커졌지. 이제야 모든 것이 소각되었어. 이제 지불할 대가는 남지 않았다.」

대가……?

「지불할 수 없다면 어쩔 건가? 배를 탈 것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승의 문턱을 보았다. 벌써 한쪽 귀퉁이가 허물어져 녹아내리고 있었다. 저기에 다시 발을 들이밀면 이제는 육과 혼이 윤회의 굴레에 걸치지도 못할 정도로 망가질지 모른다.

인간을 미워하는 신이 묻는다. 시간을 돌리겠는가, 운명을 바꿀 대가를 치를 용기가 있는가. 이미 운과 복록은 다 써 버렸고 저승의 배를 타야만 하는데도 그리 물었다. 나는 죽었는가. 모르겠다. 전혀 아프진 않은데…… 뼈가 다 드러난 손을 펼쳐 보았다. 관절을 구부리자 문드러진 살이 바닥에 떨어졌다. 아무리 노력해도 잡히는 건 없었다. 분명히 그때 손을 잡았는데. 좀 더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허무한 기분이었다.

「죽진 않았어. 그 직전이야. 하지만 돌아가 봐야 괴로울 뿐이니 여기서 배를 타도록 해.」

어느새 물가에는 배가 하나 떠 있었다. 다 늙은 노인이 뱃머리를 노로 두들기며 어물쩍거리지 말고 빨리 올라오라 소리를 질렀다. 검푸른 물이 위협적으로 출렁거렸다. 신의 말은 옳았다. 더 고통받기 전에 여기서 혼을 던져 버리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직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아직 배를 탈지 안 탈지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재연이는……?

「그는 나에게 왔지.」

신은 자신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불완전한 혼에 조각을 딱 맞춰 끼워 넣으니,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하다고 말하며 웃었다. 하재연이 그의 안에 있다고? 한참을 바라보았지만 재연이로 느껴지는 건 없었다. 신은 여전히 신이기만 했고, 재연은 보이지 않았다. 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불안함 속에 피어나는 마음에는 희망이라는 불씨가 있었다. 신에게서 늘 하재연을 찾아냈다. 늘 재연의 이름을 불렀지만, 이번에는 부르지 않았다. 자비가 있을지 모른다고 실금 같은 기대를 했다. 그만큼 아주 조그맣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는 이겼나요?”

「…….」

“당신은 원하시던 기적을 보고 있나요?”

신이 웃었다. 대답은 그 웃음에서 읽을 수 있었다.

“한 번 더, 기적이 올까요”

그렇다면, 버틸까. 남은 혼을 불태워서라도 다시 돌아가겠다. 지옥에서 끌어온 연옥 불길이 일렁이던 이승의 문턱이 조금 더 무너졌다.

「뭘 지불하려고?」

“다 주었으니 이번에도 다 주겠어요.”

「다?」

“그래요, 전부. 나는 매 순간 그 애를 사랑하지 못했지만 결국은 사랑했어요. 그러니…… 우리에게는 또 다른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잖아요.”

서늘한 손가락이 닿았다. 신이 불에 탄 뺨을 쓸어내리자 일그러진 살점이 반듯해졌다. 녹은 눈꺼풀도 돌아왔다. 찢어진 머리가 아물었고, 뼈가 드러나던 손가락에 분홍빛 살이 돋아나더니 이내 온전해졌다.

「그와 나는 하나였다. 그러나 시간을 되돌리기 위해 나를 버렸다. 우리는 본디 하나였는데 너라는 존재 하나 때문에 둘로 나뉘어졌다.」

상처가 아문 몸 전체를 샅샅이 훑어 내리며 신은 원망에 관해 이야기했다. 내기와 계약과 오래 이어진 사랑에 대해 잠깐 생각하다 물었다.

“그래서 저를 미워하십니까.”

「나는 인간이 아니나, 신도 아니다. 나는 불완전하다.」

“…….”

「그러니 나 역시도 이제 네가 필요하구나.」

불에 데였던 뺨과 배가 화끈거렸다. 신이 새살이 돋아난 손을 가볍게 쥐었다. 짧은 입맞춤이 손등 위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아직도 바라고 있는 것이…… 그래, 있단다.」

“신이시여……?”

「도와주지.」

이해할 수 없어 눈만 깜박거렸다. 신의 얼굴은 진중하면서도 조금은 허무해 보였다. 처음 시간을 돌릴 거냐 물어볼 때와 비슷한, 난처한 웃음이라 기분이 묘했다. 어쩌면 환각을 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늘 꿈과 현실의 세계를 혼동했으니까. 꿈이든 현실이든, 다행스럽게도 아프지 않았다.

「돌아가라.」

“…….”

「그러나 윤회가 모두 끝나, 혼이 죽음에 승차한 이후에는 다시 내게 와 다오.」

흐물흐물 녹은 이승의 문지방 위에 발을 얹고 내가 재연에게 했던 말도, 재연이 나에게 했던 말도 떠올렸다.

“한 번만 더 너와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순간 내 목소리를 누군가의 손이 억세게 움켜쥐었다. 헉, 목 뒤를 얻어맞는 것처럼 숨 막힌 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이승이었다. 와르르, 토목의 잔해가 무너져 우리의 육신과 혼을 내리쳤다. 마지막 사랑의 감옥 사이에 막혀 발버둥 쳤다.

지옥이 두려운가?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는 건 무서운가? 그렇지는 않았다.

그러면 무거운 업에 목이 졸려 세상에게서 버려지는 건 비참한가? 그럴 것이라 믿었지만 또한 아니었다. 세상에는 입증하지 못할 수많은 일이 있다. 믿을 수 없는 것과 믿지 못할 것 투성이인 세상에서 바로 서야 한다. 양손을 팽팽하게 당기는 것 중 하나의 증거가 무겁다 할지라도 가볍지만 존재하는 것들을 믿어야 한다.

믿음과 불신은 겨우 한 장 차이다. 희생과 배반 역시 마찬가지다. 배신을 당하는 것은 자신의 몫, 맹목적인 희생에 대한 판단 역시도 자신의 의지. 그러나 어느 한구석에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을 완전히 제외하지는 않아야 한다.

믿었기 때문에 우리는 만났다. 믿을 수 없는 사랑 역시도 시작했다. 그게 우리의 최후를 결정한다고 해도 후회는 없었다.

“윤이원.”

이름을 부르는 재연의 목소리는 뜨거웠다. 불 속에 갇힌 게 아니라 정염에 휩싸여 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시리던 세상이 비로소 따뜻해졌다. 왜 몰랐을까. 그렇다면 손과 발이 조금은 녹았을 텐데, 부드럽고 따스해져서 제대로 쥐었을지도 모르는데.

“거듭할수록 인연은 더 짙어지더라. 사랑은 더 깊어지더라.”

뜨거운 몸으로 불길에서도 근심 없이 재연을 끌어안았다. 우리는 전율했다. 이승과 저승을 모두 겪었던 영혼과 육체는 무서운 것이 없었다.

누구든 다 바랐을 것이다, 시간을 돌리고 운명을 고쳐 잡는 것을. 완전하진 않아도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을. 많은 것을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운명 대신 서로를 잡고 싶었을 뿐이다. 타오르는 불보다 마음속 화마가 더 거셌노라, 이제야 말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버리지 마.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마…….”

울면서 재연의 얼룩진 등을 쓸었다. 내가 포기했던 것을 너는 포기하지 마, 재연아.

악마인지 신인지 모를 것이 속삭인다. 너희에게 다시 기회가 있어. 너희가 합쳐서 세 번, 세 번이야. 서로 한 번씩 썼으니 마지막 남은 기회를 사용해 둘이 다시 한번 해피 엔딩을 가지는 건 어떨까?

그러나 대답하기 전에 재연이 놓치지 않겠다 다짐하는 것처럼 내 등을 감싸 안았다. 아무것도 없는 나의 세상에서 온도를 가진 것은 하재연이 유일했다.

「살려 줄까, 이원아.」

목소리가 다정하고 애달프게 물었었다. 겨우 기억할 수 있었다. 운명의 회로와 영혼의 연결점, 그 끝. 우리의 시작을. 신의 나긋한 음성에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야말로 삶을 되돌릴 만큼 후회가 많은 인생을 살지 않게 되었다. 괜찮아. 신이 어린아이처럼 투덜거린다.

「너넨 재미가 없어.」

그의 말은 옳다. 삶이란 재미없이 시시하고 가볍기만 하였다. 그래도 날아가지는 못했다. 하재연이라는 중력이 붙들어 잡아 놓은 이 세상.

어리석어도 붙잡아 두고 싶었던 시간. 우리의 가벼운 이야기. 솜털이 내려앉아 젖은 흙바닥. 생명이 움트는 바람. 초록빛이 우거진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린다. 그 길을 따라 걸어야 해.

문을 열어 줘, 같이 손을 잡고 있도록 해 줘. 네 안에서는 그 어떤 죄도 용서받을 수 있어.

열심히 살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살고 싶었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그렇게 싹이 텄다. 푸르고 가벼운 새싹이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언어였다.

우리는 두 손에 시간을 비틀어 쥐고 미친 듯이 달렸다.

한 발, 별 헤는 밤. 두 발, 너를 그리는 밤.

‘저건 금성이에요. 그 옆은 목성, 저긴 토성…… 수성은 반대편이네요.’

‘보여?’

‘네.’

‘토성이, 목성이 보인다고?’

‘그냥 대충 거리로 가늠하는 거예요. 설마 보일 리가.’

유쾌하게 웃던 모습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오래전 울보였던 아이는 잘 웃게 되었고,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있잖아, 우리 박제가 돼요.”

박제……? 몽롱한 정신에도 그 단어는 섬뜩하게 다가왔다. 무서워하지 마,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준 재연이 이마를 맞대며 사랑스럽게 속삭였다.

“영원히 이곳에 못을 박아 걸어 두는 거예요”

“못을…….”

“기억하지 못할 테니 이렇게 흔적을 남겨요. 시간에 상처를 입혀서.”

새카맣게 가라앉은 재연의 눈가를 만지작거렸다.

“언젠가 수많은 윤회의 바퀴를 굴러다니다 잠깐 달칵 멈춰 섰을 때, 다시 눈이라도 마주칠 수 있도록.”

사랑했다. 너무 사랑해서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시간을 돌렸다.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더러운 반지하 원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내가 일어나 바깥으로 나오길 하염없이 기다렸던 너를 보고, 믿을 수 없겠지만 또 한 번 사랑에 빠졌다. 사랑은 사실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잊힌다고,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이제 너는 사라지고, 나는 죽을 거고, 이제는 너를 사랑했던 이 마지막 추억마저 잊어버리겠지만…… 재연의 말은 달콤하다. 기적처럼 우리가 다시 만날 것 같아 미소가 지어졌다.

“걸어 놓아요, 내 사랑.”

거듭할수록 인연은 짙어진다. 사랑도 깊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둘 다 삶을 반복할 마음은 없었다. 둘이 공평하게 한 번씩, 서로를 붙잡기 위한 길을 걸었다. 그러니 이제 다시는 지옥 불에 뛰어들지 않을 것이다. 또 다른 악을 길러 내지도 않을 것이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려 연인을 안았다. 안긴 것도 같고, 안은 것도 같다.

그날 본 별의 이름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을까. 잊었다면 뭐 어떤가. 발치에 흐르던 높은 물줄기도, 세찬 바람과 빛나는 별을 기억하지 않아도 우리는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래, 분명 실패도 성공도 익숙한 삶을 살아가게 될 거라고.

버린 것도 얻은 것도 많지만, 그것을 허물어트리는 삶이 되지는 않을 거라고…… 그 음성을 기억했다. 사랑했다. 사랑하고 싶었다. 분명히 어디에선가, 이 흔적을 기억하고.

<해피 엔드 完>

잘 지내세요? 누군가를 사랑하고 계신가요?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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