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EPILOGUE
미루고 미뤄 둔 마지막 이삿짐 박스를 정리하다 무언가를 발견했다. 주방에서 한참 뭔가를 하며 부스럭거리던 재연을 소리 높여 불렀다.
“하재연.”
“왜요?”
“이거 뭐야?”
낡은 복권 용지는 재연의 개인 통장 사이에서 나온 것이다. 원본도 아니고 종이에 인쇄된 복사본. 꾸깃꾸깃하게 반으로 접힌 것을 펼쳐 보이자 재연이 아, 하고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당첨 복권이요.”
“뭐?”
“처음 당첨된 기념으로 한번 인쇄했던 것 같네요.”
당첨 복권? 뻔뻔한 얼굴을 캐내듯 째려보았다. 학교 수업도 잘 안 들어간 대학생이 상가 살 돈이 어디서 났나 했더니…….
어렴풋이 재연이 아르바이트하던 복권 가게에 붙어 있던 투박한 문구가 생각났다. 4회 연속, 총 9회 1등 당첨. 그 문구를 보고도 한 점의 의심이 없었던 걸 보면 나도 참 순진한 모양이었다.
“너, 꼼수 썼지.”
“꼼수라뇨, 정당한 쟁취죠.”
“남은 평생 한 번이라도 당첨되려고 노력하는걸?”
“에이.”
되지도 않는 어리광을 부리며 재연이 눈가에 입을 맞췄다. 뽀뽀하면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얘를 생활력이 강하다고 봐야 해, 아니면 치사하다고 봐야 해…….
그 생각은 입술로 내려와 빈틈을 파고드는 뜨겁고 축축한 혀의 감촉에 잊혀졌다. 조금 더 높은 재연의 목에 두 팔을 감고 매달리며 행복을 다시 꿈꾼다.
우리는 아이스크림 가게를 열었다. 더운 여름에는 장사가 잘되고 겨울은 파리가 좀 날리고 봄가을은 그럭저럭인 가게다. 인심이라도 후해 보이려고 찾아오는 근처 학교 여고생들에게 커다란 스쿱으로 아이스크림을 떠 줬다.
인간이 아닌 것은 보이지 않게 되었고, 1층 전체를 다 태웠던 큰 불길에도 살갗에는 흉터가 없었다. 살인범은 건물 한쪽에서 미라처럼 쪼그라든 시체로 발견된 지도 1년이 지났다. 이진현을 만나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십이지신이 나오는 꿈을 꾸지 않은 지도 딱 그만큼 흘렀다.
이것이 기적인지, 아니면 신이 준 마지막 시련인지는 알 수 없었다. 새끼손가락을 아무리 보아도 붉은 실은 흔적도 없었고, 재연은 초대받지 않아도 어디든 들어갈 수 있었다.
미쳐 버린 정신이 만들어 낸 환각일지도 모르고, 지옥에서 보여 주는 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손을 잡으면 체온이 느껴졌고, 몸을 섞고 입을 맞추면 감촉이 있었다. 이번 삶이 끝나고 나면 재연은 정말로 신에게 돌아가고 나는 외로이 환생의 궤도에 오를지도 모른다.
그래도.
재연이 말했던 대로…… 우리가 시간을 걸어 두었다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뭐 시켜 먹을래요?”
“치킨.”
“치킨 되게 좋아하네.”
재연이 밉지 않게 타박하며 눈꺼풀 위로 짧게 짧게 입을 맞춰 왔다.
둘이서 어설프게 운영하는 가게에는 종종 주영이 들렀다. 엔지와 무당도 와서 딸기 맛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우리는 마지막이 될 평범한 삶을 살게 되었다.
행복이 따스한 소리를 내며 익어 가는, 부드럽고 온화한 날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