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빙점(氷點) 下
이원에게 있어 사내와 여인이 입는 옷의 차이가 거의 없다는 것은 마지막 축복이었다. 사실 그리 축복이라고 할 것도 아니었지만. 산파 노릇을 했던 유모와 말 못 하는 계집종을 제외하면 그가 사내라는 것을 아는 자들은 없었다.
아비는 둘째 아들의 얼굴이 곱다는 것에 그나마 만족을 했고, 늘 얼굴을 가꾸라 짜증이 섞인 화를 내곤 했다. 아무리 사내가 치장해 봐야 여인들의 미색을 따라가긴 힘들 테니, 매일매일 향유를 섞어 목욕하고 피부에 과일과 약초를 갈아 섞은 것을 발랐다. 손끝과 발끝까지 어디서 캐 왔다는, 울퉁불퉁하고 얇은 돌로 굳은살을 관리하는 것이 이원의 오래 지속된 하루 일과였다.
이 집안에서 장녀가 치장에 부인 마님보다 많은 돈을 쓴다며 비웃음이 퍼졌으나, 또한 사실이기도 해 그 소문을 막는 일은 없었다. 오후부터 이어진 길고 긴 몸치장과 관리를 끝내고 이원이 몸을 일으키자 해가 완전히 저물어 있었다. 어찌 되든 권력이 하늘을 찌르는 집에서 굴욕적으로 큰 아이는 말을 점잖게 하지 않았다. 쫄쫄 굶겨 가며 뭐 하는 짓이냐고 아랫것들에게 짜증을 잔뜩 쏟아 낸 뒤에야 차곡차곡 개켜져 있는 옷을 집어 들었다. 짧지도 길지도 않게 키에 딱 맞춰 만들어진 장포*는 이원이 심의*만큼 즐겨 입는 옷이었다. 유모가 허리에 금실로 수레바퀴 무늬를 수놓은 까만 허리띠를 대어 주고 머리를 틀어 올린 뒤 연꽃 모양 장식을 꽂았다.
“이걸 꼭 해야 해?”
누가 봐도 여인의 장신구로 보이는 꽃 모양에 성질 아닌 성질을 벌컥 내자 다음 장식을 고르고 있던 계집종이 깜짝 놀랐다. 어깨를 파르르 떠는 걸 보자 이원도 화를 더 내지 못해 손을 내젓고 사람들을 물렸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머리카락과 몸에서 나는 향유 냄새가 코를 찔렀다. 분과 연지보다 이 향이 더 역하다. 이원은 속으로 불평하며 소맷자락으로 코와 입을 막고 후원으로 들어섰다. 여름이 한창인지라 저녁에도 고약할 정도로 무더웠다.
넓은 옷자락을 정리하고 정자에 기대앉았다. 벙어리 종이 주인의 눈치를 보며 술상을 내왔다. 열셋부터 입에 대기 시작한 술은 어느 순간 매일매일 마셔야 하는 일종의 중독 현상이 되었다. 뭐어, 술독에 빠져 사는 시인만 하겠는가. 그치들은 술을 마셔야 시를 쓸 수 있다는 괴이한 말을 떠들며 매일매일 주가에서 술값을 외상 하기로 유명했다.
도대체 그들에게 외상은 왜 해 주는 거야? 이원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멀찍이 놓인 상을 끌어당겼다. 상에는 평소와 달리 좋아하는 음식들이 잔뜩 올라가 있었다. 겉을 바싹 구운 만두 먼저 반을 뜯어 먹고 고기를 푹 우려낸 탕을 훌쩍 마셨다. 갈비를 입에 한 점 넣고 소홍주(紹興酒)를 홀짝 마셨다. 가장 좋아하는 술이었다.
일이 있어 어쩔 수 없이 바로 위의 형님이자 이 집안 장남을 따라 딱 한 번 절강성의 항주에 갔었는데, 그 옆 마을의 소홍이라는 곳에서 빚은 술에 반해 자주 찾게 되었다. 집에 있는 소홍주는 몸을 덥히고 기관지를 따듯하게 하도록 대추와 생강을 썰어 넣어 두었는데, 그 덕인지 마시면 입 안에 맴도는 향이 썩 근사했다.
“마지막 날에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술과 원림(園林)*의 여름 풍경에 취한 귀에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린다. 이원은 술을 머금은 채 눈을 찌푸리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해를 가로막고 선 남자 하나가 엄한 목소리를 냈다.
“너를 보고 종들이 뭐라 하겠느냐.”
“형님.”
“너, 말을.”
“뭐 어떻습니까. 어차피 마지막 날인데요.”
오늘 하루, 이원에게 잠을 자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어차피 새벽빛이 밝아 오기 전에 집을 나서야 했다. 흰 의복의 깃 끝에는 전부 검은 비단이 덧대어져 있었고, 각종 주술적 문양과 꽃, 바퀴 무늬를 금실로 촘촘하게 수놓아 신에게 바치는 제물을 잔뜩 꾸미고 있었다.
이런 옷 만들 시간에 맛있는 거나 좀 더 주지. 이원은 빈정거리며 구운 떡을 한 조각 입에 넣고 씹었다. 단과자와 국수와 고깃국도 이제는 안녕이었다. 몇 해만 더 일찍 장남으로 태어났으면 운명이 바뀌었을 테지만, 이미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이상 그는 맡은 일을 해야만 했다.
대놓고 싫은 티를 내며 술을 한 잔 더 마시자 장남의 얼굴이 보기 좋은 모양으로 일그러졌다. 화를 참는다고 씩씩거리는 꼴을 보다 고개를 휙 돌렸다. 어둠에 잠긴 후원은 정자 주변에 걸어 둔 등의 불빛에 아주 드문드문 보였다.
“감히 제사를 앞둔 몸이 술이라니, 네가 진정 실성이라도 했는지 물어보는 것이다.”
“형님, 여인인 척 치장하고 이날 이때까지 살아온 것으로도 모자라, 누이는 미친 황제께 보냈고 저는 불타 죽습니다. 실성하지 못할 이유는 또 무엇입니까?”
“말을!”
장남이 소리를 버럭 지르더니 주변에서 지키고 있을 아랫것들이 신경 쓰였는지 헛기침을 한번 했다. 흥. 이원이 코웃음을 치며 늘어지자 장남은 목소리를 낮춘 채 엄한 훈계를 시작했다.
“말을 가려 하지 못하겠느냐. 이 나라와 이 집안의 부와 영화가 다 누구에게서 나온 것이냐? 고귀하고 영민하신 황상과 신의 자비로움 덕이다.”
“그런 신이 자비로워 비를 주지 않으십니까?”
나라를 좀먹은 지독한 가뭄은 3년 내내 이어졌다. 아주 드물게 내리던 비는 최근 한 해는 아예 소식이 없었다. 원성은 얼마나 잦았으며, 그럴 때마다 잘난 황제는 폭군처럼 사람들을 잡아다 얼마나 죽였는가. 이 나라는 오래가지 않으리라.
이원은 누가 들으면 경을 칠 만한 저주를 퍼부으며 술 단지를 두 손으로 잡고 마셨다. 입구가 넓어 술이 옆으로 질질 샌다. 비싼 비단 옷깃을 적시도록 술을 잔뜩 마신 뒤에야 이원이 한숨을 푹 내쉬고 순한 어조로 말을 바꿨다.
“어차피 저는 해가 뜨기 전에 갑니다.”
“…….”
“누이가 보고 싶습니다.”
이원이 가족 중 유일하게 정을 주고 아낀 어린 누이는 지학(志學)(15세)도 되지 못한 나이에 불로불사를 이루지 못했다고 황제의 아래에서 욕을 당하고 사지가 찢겨 죽었다. 그 어리고 가냘픈 아이가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러웠을까. 이원에게는 술상을 사이에 두고 안줏거리를 축내던, 귀엽고 착하기만 하던 어린 누이가 늘 마음의 가시였다.
“가세요. 마지막 날에 형님과 쓸모없이 시간 쏟고 싶지 않습니다.”
“……너.”
“저는 이 집안도, 집안사람도 너무 싫습니다. 어쩌겠습니까, 그 정도는 이해해 주셔야지요.”
앞으로 이 집안에 여자아이는 영원히, 영원히 태어나지 않으리라. 흰 비단옷이 넝마처럼 찢겨 능욕을 당했다는 어린 누이의 구슬픈 악몽처럼 이 집에도 악몽이 내려앉기를.
그는 마지막까지 느긋하게 퍼질러 앉아 술을 홀짝 마시고 떡을 실컷 먹었다. 멀리 대기하고 있던 시종 하나가 종종걸음을 치며 온다.
“단과자 좀 더 줘.”
“알겠습니다, 아가씨.”
그릇된 호칭을 듣자 쓴웃음이 나온다. 마지막까지 사내가 계집인 꼴이라니. 얼굴이 굳자 종이 무슨 문제가 있냐 불안하게 눈치를 보며 물었다. 이원은 되었다며 손을 휘휘 내젓고 상아 조각이 달린 젓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낮에 저잣거리에서 만난 사내가 물었다. 살고 싶으냐고. 무엇을 알고 말했을 리가 없는데도 참 신기했다. 무서워 차마 대꾸하진 못했지만 내심은 살고 싶었다. 죽는 게 달가울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어느 누가 죽기를 원하겠는가. 살고 싶다. 이런 반편이 같은 모양으로 살아도, 그래도 살고는 싶었다.
종이 발 빠르게 가져온 떡과 당과를 마저 먹은 후 지저분해진 손을 물수건으로 닦았다. 입가까지 깔끔하게 닦자 기다리고 있던 유모가 올라와 홍화 꽃잎을 물들인 종이를 다시 입술에 물려 주었다.
“가실 시간입니다.”
“응, 알아.”
“……우리 아가씨.”
유모가 참지 못하고 눈물을 소맷자락으로 찍어 낸다. 성질만 더러운 주인을 모신다고 고생해 놓고 왜 눈물 바람이람. 우는 얼굴이 밉다 원성 듣기 좋은 말을 하는 대신 픽 웃으며 등을 한번 문질러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붉은 등을 들고 일렬로 늘어선 종들이 허리를 굽혔다. 이원이 붉은 신을 신고 손짓을 했다.
“가마를 가져와라.”
꽃 장식이 된 가마를 타고 저잣거리까지 나가 성문 앞에 만들어진 제단을 앞두고는 걸어서 올라가야 했다. 제단에 불을 붙이는 사람은 아버님이시다. 제 손으로 아들인지 딸인지 모를 것을 태워 죽이는 신선한 경험을 하는 것이다. 뭐, 누가 불타 죽는 경험을 하고 싶겠냐마는.
가마를 짊어진 일꾼들은 재빠르게 발을 놀렸다. 동이 트기 전에 불이 붙어야 하므로 다들 마음이 급했다. 유모가 한 맺힌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통곡하는 유모를 달래 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가뭄에도 무슨 힘이 났는지 잔뜩 구경 나온 사람들이 종이꽃과 등을 들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성문 앞에 다다르자 이원은 가마에서 훌쩍 내려 씩씩하게 걸었다. 제단까지는 금방이었다. 임시로 만들어진 계단을 오르기 전 잠깐 멈춰 서 위를 보았다. 까마득하게 높았다.
이원은 뒤를 돌아 말 못 하는 종을 불렀다. 어린 계집종은 머뭇거리다 이원이 한 번 더 재촉하자 재빠르게 뛰어왔다. 이원은 제 뒷머리를 고정하고 있던 장식을 빼서 종의 손에 쥐여 주었다.
“고생했다. 이거라도 받아.”
작은 눈이 울렁울렁한다. 벙어리로 태어났다고 갑자기 사내자식을 여인처럼 수발해야 했으니 그 마음고생이 얼마나 대단하였을까. 내친김에 그는 오른쪽에 꽂은 장식도 하나 더 빼서 손바닥에 올려 주었다.
“이것은 유모에게 주어.”
긴 머리가 풀어 헤쳐져 등 뒤에 길게 늘어진다. 검은 머리 타래에서는 아직도 지독한 향유 냄새가 났다.
“잘 지내라, 명아.”
계집종이 말 못 하고 우우 우는 소리를 목구멍에서 냈다. 괜찮다 밀치고는 직접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대나무를 잘라 임시로 만든 위태위태한 계단은 하나씩 밟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새벽바람에 머리 타래가 천지로 어지럽게 휘날렸다.
끝이다, 끝이 온다. 두려움에 숨이 멎는 것도 순간, 제단 가장 위에서 기다리던 사내가 이원을 잡아끌어 기둥으로 데려갔다. 가타부타 안됐다는 인사치레도 없이 덜덜 떨리는 몸에 동아줄이 칭칭 묶였다. 사내는 이원의 두 팔을 잡아 뒤로 꽉 묶고 허리와 다리도 고정했다.
작업이 끝나자 우락부락하고 험상궂게 생긴 사내가 말없이 힐끗 눈썹 한번 들어 올리곤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머리카락이 승천하는 용처럼 사방에서 흩어진다. 이원은 높은 곳이 싫었다. 무섭다, 무서워. 눈물이 떨어졌다.
불꽃이 타닥타닥 튀는 소리가 빠르게 들린다. 어마어마한 고함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잘 마른 나무 장작들은 불을 쉽게 옮겨 받았다. 눈물 몇 방울 제대로 흘리지도 않았는데 발끝까지 불길이 치솟았다.
신발부터 태우기 시작하는 고통스러운 화마를 보고 이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불길이 옷자락을 태우자 아래에서 울리는 환호는 점점 더 커졌다.
손끝에 불이 달았다. 몸을 감싼 의복에도 긴 불꽃이 튀었다. 눈에서는 여전히 눈물이 흘렀다. 아프다. 얼마나 많이 울어야 이 불꽃이 꺼질까. 비참하게도, 입술 사이에서는 비명이 참을성 없이 튀어나왔다. 기둥에 묶인 몸을 버둥거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머리카락이 오그라들며 머리 아픈 탄내가 풍겼다. 소리 높은 비명이 커질수록 제단 아래 미친 인간들의 환호성도 더욱 커졌다.
가짜 제물을 바친다고 비가 올 것 같으냐. 나를 죽인다고 너희들이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이원은 온몸을 쥐어짜는 고통에 울부짖으며 저주했다.
이렇게 허무하게 살기 위해 내가 태어났던가. 나를 낳아 주신 어머니…… 나를 받은 유모…… 말을 못 하는 계집종. 모두가 아들을 딸로 바꾼 끔찍한 사기에 동참한 범죄자나 마찬가지였다. 다들 벌을 받겠지. 이 화형식보다 더한 벌을.
눈물이 턱을 타고 흐른다. 불귀신이 되어 저잣거리에 영원히 박혀 있으면 어쩌나, 불안하고 외로워 헐떡거렸다. 고통은 잿더미, 분노는 화염, 저주는 대를 이어서. 점점 커지는 괴로움에 몸부림을 쳤다. 두툼한 칼날로 내쳐지는 생선 대가리처럼 펄떡 뛰어올랐을 때 불길이 일시에 멈췄다. 꿈처럼 고요한 정적과 함께 낯선 남자 하나가 보였다. 다 타서 무너지고 있는 제단을 밟고 올라선 남자의 신은 검었고, 입고 있는 장포는 흰색이었다.
세상이 온통 혼란스럽던 난세에 유교와 도교를 논하던 선비가 그렇게 입었을까. 고풍스러운 옷을 걸친 남자가 깃털 달린 부채를 옆에 선 시종에게 넘기고 눈웃음을 지었다. 시종은 세로로 쭉 찢어진 눈에 혀가 세 개로 갈라져 있고, 부채를 받은 손에는 물갈퀴가 달린 기이한 외양을 하고 있었다.
종종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주변을 둘러싼다. 검은 그림자로 보이는 이상한 것들이 지척에 잔뜩 늘어져 웅성거렸다. 사내가 손가락을 들어 입술을 가로질렀다. 동시에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틀어막았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것 같은 적막함 속에 사내가 입을 열었다.
「살려 줄까.」
“네……?”
「살려 줄까, 아가.」
그의 뒤를 따라 늘어서 있던 수십, 수백의 악귀들이 뺨을 푸르르 떨며 안 된다 소리를 질렀다. 그들의 살의에 뺨이 찢어지며 피가 주르륵 흘렀다. 그 분노에 찬 아우성에도 남자는 꼿꼿하였다.
「인간인데 인간이 아닌 사주로 태어나 기이하고도 가련하게 살지 않았느냐. 아가, 나를 따라올 테냐.」
“누구신데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날 모르니?」
남자가 선선하게 웃었다. 이원은 그 하얀 웃음을 끝없이 바라보았다. 꿈을 꾸는 것인가. 장자가 한 말이 생각났다. 지금의 나는 진정한 나인가? 아니면 나비가 꿈에서 내가 된 것인가? 내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내가 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그러고 보니 호접지몽에 대해 이야기한 책의 제목이 제물론이었다. 제물. 아, 우습구나. 이원은 헐떡이며 고통을 인내했다.
“어제…… 뵈었지요…….”
저잣거리에서 한 번 보았던…… 그래, 어제 우연히 만나 집까지 데려다준 그 사내가 맞다고 긍정하듯 빙긋 웃었다. 몸에 걸친 정갈한 흰 의복도 하얀 얼굴도 저 험상궂은 악귀들을 거느리는 이상한 존재로는 보이지는 않았다. 희미하게 웃던 사내가 다시 말했다.
「사내로 태어나 여복을 입고 자라 형체와 혼을 숨겨 귀신에게 잡아먹히지 않고 겨우 명줄을 이어 나갔으나, 그 끝이 산 채로 공양되는 것이라니 안타깝고 가련하다.」
그는 마치 이원의 운명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이야기했다. 아니, 저렇게 많은 귀신을 부리는 자가 사람은 맞단 말인가. 눈을 크게 뜨고 사내의 얼굴을 정신없이 보았다. 하얗고 아름다운 얼굴을 지나 그의 눈에 닿았을 때 그가 가볍게 혀를 찼다.
「내 눈을 보지 말아라.」
“……네?”
「인간이 나의 눈을 보면 그 빛을 잃는단다.」
부드럽게 타이른 남자가 숨을 잠깐 고르고는 손을 뻗었다. 이원은 여전히 벌레처럼 기둥에 묶인 채 남자가 내민 하얀 손과 얼굴만 번갈아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네 운명도 지독하구나.」
“…….”
「죽어야 하는 목숨이 살게 된다면, 부와 귀는 역시 누리지 못하겠지. 그런데도 네가 살기를 바란다면, 살아라.」
몸을 묶은 끈이 풀렸다. 불에 녹은 살과 뼈가 다시 아물었다. 자유로워진 두 손을 뻗어 남자의 손을 홀린 듯이 잡았다. 불길 속에서도 차갑고 시린 손바닥을 꼭 쥐자마자 신기하게도 아픔은 오간 곳 없었다.
한없이 백치 같은 표정을 짓는 이원을 보며 남자가 조금 메마르게 웃었다. 아주 충동적인 일이었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는 이 덜 자란 청년의 독백을 생생하게 들었다. 어젯밤, 죽간을 한 쪽씩 부러뜨리며 자신을 불렀다.
신이 자신을 받아 주시려나. 비는 내리려나, 눈은 오려나, 풍년이 들려나…….
그리 열성적인 부름이라니. 재미있는 아이가 아닌가. 남자는 조금 더 입술을 바짝 말아 올리면서 웃었다. 불이 자박자박 타들어 가다 꺼졌다. 열기가 한 아름 가시고 한결 낮아진 기온이 몸을 감싸 안았다.
「나와 가자꾸나.」
높은 제단을 걸어 내려오며 남자는 이원에게 산동성의 풍취에 대해 들어 보았냐고 다시금 물었다. 없노라, 고개를 젓자 남자는 자신이 지내는 청도의 여름은 아주 아름답다고 자랑하듯 떠들며 휘파람을 불었다. 정신을 미처 다 차리지도 못하고 이원은 남자가 하는 말에 고개만 휙휙 끄덕였다.
몇 시진 뒤 다 불탄 잿더미를 치우며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이제 신이 기뻐하시어 곧 비가 올 것이라고.
제물로 바쳐진 자의 이름은 원이었고, 이씨 가문의 첫째 아가씨였다. 기이하게도 그 아가씨는 여인네치고 키가 조금 크고 어깨가 넓어 사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얼굴이 퍽 고와 아닐 것이라 다들 웃고 넘겼던, 대문 출입이 드물고 말수 없이 조용한 사람이었다.
***
「원아.」
“네?”
동그란 창에서는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이원은 서적에 코를 박고 있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흰옷을 걸친 남자가 웃으면서 손짓을 했다.
“어쩐 일이세요?”
「시킬 것이 있어서.」
푸른 천으로 감싼 보자기를 풀자 낡은 죽간이 세 권 나왔다. 오래된 책을 내려다보다 얼굴을 찌푸렸다.
“하나라 건국기……?”
「응.」
“이런 것이 있습니까?”
「있지. 나는 하나라의 건국을 지켜보았으니까.」
남자의 여상스러운 말을 듣고 이원은 아직도 적응되지 않는 그의 어마어마한 나이에 짧게 혀를 찼다. 버릇없어 보이는 행동에도 남자는 이원을 구박하지 않았다. 저 어린 청년이 얼마나 혹독하게 살아왔는지 아는 까닭이었다. 물론 남자의 뒤를 보좌하는 다른 하위 신들은 그런 이원도, 관대한 남자의 행동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노군에게 가져다주렴.」
“태상노군을 말씀하시는 거죠?”
「그럼.」
이원은 지체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잣거리에서 처음 본 남자가 만나러 왔다고 한 형제는 바로 태상노군, 노자였다. 그리고 자신을 불길 속에서 구해 준 남자의 이름은 영보천존, 위대한 도교의 삼신 중 한 명이었다.
살다 살다 신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경우도 다 있지. 이원은 불편한 티를 숨기지 않고 구겨진 옷자락을 정리했다. 남자는 자연스럽게 잘 다려져 걸려 있던 백색 장포를 내려 이원에게 내밀었다. 그 수발을 익숙하게 받고는 이원이 보따리를 챙겨 들었다.
“노군께서는 태청궁에 계시나요?”
「응, 천마를 타고 가렴.」
“……그건 무서워요.”
하늘을 나는 말을 어찌 타란 말인가. 입술을 비틀며 투덜거리자 남자가 유쾌한 목소리로 소리 내서 웃었다.
그래도 이원은 차마 웃지 말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남자가 수족처럼 부리는 하위 신들과 귀신들이 왜 자신을 그냥 두는가. 이원이 이 높은 산, 산동성 청도의 노산에 오게 된 뒤로 남자의 얼굴에 웃음이 늘었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었나.
이원은 두 손을 모아 쥐고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다녀오겠습니다, 상청(上淸).”
「험한 길 조심하렴.」
가볍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 남자의 얼굴은 서글서글하고 유쾌해 보였다. 품 안에 들린 묵직한 보따리를 잘 여며 잡고 별채를 나서자마자 기분 나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귀하신 몸이 땅바닥에 주저앉아 흙이나 긁어 대다 벌떡 일어난다.
이런 포기를 모르는 쥐대가리. 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뚱하게 얼굴을 굳히자 쥐 머리를 한 갑자신장이 냉큼 달려들었다. 어찌나 세게 몸을 부딪쳐 오는지 뒤로 한참이나 밀려날 지경이었다.
“이거 놓으십시오.”
「이런 야박한 놈을 보았나!」
“시끄럽습니다. 심부름 가야 합니다.”
「마작을 치자니까!」
“둘이서 무슨 마작을 칩니까.”
대놓고 면박을 주자 갑자신장의 얼굴이 팽하니 일그러졌다. 툭 튀어나온 주둥이 옆에 달린 수염이 징그럽게 움직인다. 인간의 말 한 마디, 한 마디 재수 없고 거만해 화딱지가 난 갑자신장이 도도한 이원의 얼굴을 쏘아보며 으르렁거렸다.
「이번에는 네놈을 이길 것이다, 이 비겁한 사기꾼.」
“사기꾼에게 뻔히 사기당하는 자가 어리석지요.”
「네, 네, 네놈이 그러고도 상청을 모시는 게 가당키나 하느냐!」
이원은 분을 못 이겨 버럭버럭 소리 지르는 쥐를 휭하니 스쳐 지나갔다. 저 갑자신장을 알게 된 것은 상청궁에 거주하게 되고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화상은 흉터도 없이 아물었지만, 불에 타들어 가던 고통이 가시지 않아 고열에 들떠 끙끙 앓기만 이레째였다. 겨우 몸을 추스르고 별채 안뜰에 갔는데 마작을 치는 열두 짐승들을 보고 그대로 다시 기절했다. 식은땀까지 흘려 가며 악몽에 시달리다 일어났더니 이번에는 쥐 머리가 제 얼굴을 빤히 보고 있어 두 번째로 기절했다. 나중에는 재수 더러운 꿈을 꿨다고 엉엉 울며 상청의 품에 매달려 칭얼거리기까지 했다. 그 일은 이원의 가장 끔찍하고 수치스러운 과거사 중 하나로 남아 버렸다.
하여튼 그런 생각하기도 싫은 첫 만남 이후 상청은 자신을 모시는 하위 신들과 이원을 직접 소개해 주었다. 아마도 이원이 또 이상한 괴물들을 보고 놀라 자지러지는 걸 우려해 예방 차원에서 한 일이었지만, 이원은 여전히 불쾌하기만 했었다.
정원 누각에서 이곳에 머물게 되었다고 인사를 하던 날의 일이었다. 한참 자기소개를 한다고 앞다투어 떠들던 자들 사이를 처음으로 치고 나온 것이 갑자신장, 십이지의 쥐였다.
쥐는 근엄한 척 제 소개를 하다 말고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방만하게 선 이원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다 외쳤다.
「네, 네놈!」
“전 네놈이 아니라 이원입니다.”
「이 마작꾼!」
“마작꾼이라니요. 객이 거주하는 별채 안뜰에서 마작을 치던 분은 당신이 아니십니까.”
「생각이 안 난단 말이냐? 저잣거리 다관의 마작 패거리가?」
갑자신장이 체통도 잃고, 제가 상전으로 모시는 신의 앞에서 길길이 날뛰기를 수 초 지나서, 이원이 손바닥을 주먹으로 탁 쳤다.
“아, 그 다관이요?”
태연하고 뻔뻔한 반문에 갑자신장은 뒤로 넘어갈 것처럼 거품을 물었다. 회색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기까지 하며 쥐가 소리를 크게 질렀다.
「이 사기꾼!」
“어찌 사람을 사기꾼으로 몰아가십니까?”
여전히 이원은 뻔뻔하게 물었다. 그 다관 드나들며 마작 치는 객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이원도 뻔질나게 찾아든 다관에서 같은 사람 만나 마작을 쳤던 적은 드물었다. 한번 보면 잊힐 면식이 아닌데, 저런 쥐대가리와 노름했던 기억은 더욱 없었다.
「네놈 떠난 자리에 패가 굴러다니는 걸 내가 보았느니!」
“아하…….”
소맷자락에 넣어 둔 패가 굴러떨어졌나 보다. 흠, 잘 숨긴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이원은 조금 전까지 온갖 기묘한 신들을 만나 무서워했던 것도 잊고 대꾸했다.
“알아채지 못한 쪽이 어리석습니다.”
「왕이시여! 이런 인간을 정말 거두실 겁니까!」
목덜미를 잡고 갑자신장이 자지러졌다. 한곳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고 떠돌아다니기 좋아하는 친우인 태상노군을 찾아 왕이 수도나 대륙의 각 등지로 향하면, 갑자신장은 그를 보필하기 위해 인두겁을 뒤집어썼다. 그럴 때면 종종 허락을 구하고 몰래 인간들 틈에 껴서 노름을 하는 것이 갑자신장의 낙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작에도 일가견이 있는지라 늘 자신 있게 쳤고, 돈을 몇 푼이나 따 와서 신이 재주가 좋구나 칭찬을 해 주면 또한 즐거운 일이었다. 한데 지난번 행차에서 저 인간이 좋은 옷에 말간 얼굴로 나타나 뚱하게 몇 번 탁탁탁 치더니 점수를 척척 내 버려 얼마나 속이 거멓게 썩었던가?
처음에는 저놈 참 재주 좋고 운도 좋구나 싶어 인사하고 기분 좋게 헤어졌었다. 그러다 짐 하나 두고 온 게 늦게야 기억나 찻집에 다시 들렀더니 글쎄, 앉은 자리에 패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게 어디서 구른 건가 고민에 고민하다 패를 뒤져 보니 아뿔싸, 개수가 모자란 것을 알아내었다. 이미 도망가 버린 사기꾼을 잡지도 못하고, 몇 푼이나 잃어버린 돈이 아까워 씩씩거렸던 것이 엊그제인데 떡하니 그 사기꾼이 제 발로 나타났던 것이었다.
사기꾼에게 속은 불쌍한 인간……이 아니고 짐승이 슬퍼하든 말든 이원은 짐짓 가여운 얼굴로 상청의 옷깃을 잡고 매달렸다.
“속은 놈이 잘못이지요. 그리고 군자가 어찌 겁박을 하십니까?”
「이 방자한 인간!」
“거참, 죄송합니다.”
「내가 너 이곳에 사는 것을 찬성할 것 같으냐? 내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너를 쫓아내 염라의 앞으로 보내겠다!」
상청은 이 기묘한 대치를 아주 오묘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제재가 없자 갑자신장은 좀 더 길길이 날뛰었고, 이원은 점점 끝을 모르고 하늘로 치솟는 갑자신장의 분노를 빤히 보다 대답했다.
“참으로 인에 뜻을 둔다면 악한 짓을 하지 않습니다.(苟志於仁矣, 無惡也.)” (*공자 논어 이인(里仁) 편 제사 4-4)
그 재기 발랄한 대답에 신이 소리 내서 웃으며 싸움을 중재한 것이 몇 개월도 더 지난 일이었다. 그 뒤로도 갑자신장은 툭하면 찾아와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가르자고 졸라 댔다.
갑자신장은 이겨 보겠다고 난리였고 이원은 이미 결판이 난 승부를 다시 하는 멍청이가 어디 있냐고 일갈하며 무시하는 것이 노산, 상청이 거주하는 궁에 으레 일어나는 습관 같은 풍경이었다. 그리고 당사자인 이원은 그것이 지긋지긋하기 그지없었다.
「한 판만 치자는데 왜 자꾸 빼고 그러는 게야?」
“하기 싫으니까요.”
「한 번만 하자니까!」
“거, 그리 달라붙으면 여자에게 인기 없습니다.”
「뭐?」
칙칙한 쥐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진다. 이제는 대꾸도 못 하고 열이 받아 펄펄 날뛰는 갑자신장을 버려두고 이원이 재빠르게 발걸음을 놀렸다. 옆집, 옆집 하지만 태상노군이 지내는 태청궁은 부지런히 걸어야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런 심부름은 아침에 주셔야 밤이 되기 전에 돌아올 텐데. 이원은 투덜거리면서도 그런 시간을 잊은 심부름을 잘 받아 하곤 했다.
그는 아직도 이 높은 산봉우리의 삶이 어색하여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불길에서 환몽이라도 꾸는 줄 알았더니, 진실로 불로불사의 상징인 신이 나타나 자신을 구하여 집과 더운밥과 옷을 주었다. 신선들이 먹는다는 증조(蒸棗, 대추)와 반도(蟠桃)*를 간식으로 내주었다. 어째서 신이 자신을 이리 아껴 주는지 이유도 듣지 못한 채로 벌써 시간이 흘러 나뭇잎이 색이 변해 떨어지고 있었다.
가파른 길을 한참이나 걷다 평평한 바위를 만나 걸터앉아 가쁜 숨을 고르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무릉도원처럼 펼쳐진 산세와 구릉, 가파른 절벽에는 구름이 걸려 긴 띠를 만들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뱀, 어떻게 보면 용 같은 모양이다.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쳐 내고 한참, 아주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제물로 바쳐진 때는 한참 전이었고, 사람이 타 죽는 것을 구경하며 기뻐하던 사람들의 무리에서도 떨어져 나왔다. 그 뒤 신선놀음하며 창가에 걸터앉아 불태워지지 않은 책을 구경하는 것이 하루의 삶이었다.
상청은 늘 이원의 곁에 붙어 있지 않았고 자주 자신의 집을 비웠다. 다른 자들이 하는 말을 들어 보면 보통은 구릉의 근처에서 산책을 하거나 원시천존이 지내는 옥청궁에 자주 가서 지낸다고 했다. 신은 불타 죽어 가던 걸 덥석 주워 온 것치고는 이원을 자주 홀로 버려두었다.
그렇다고 이원이 그의 태도에 그렇게 섭섭함을 느낀 것은 아니다. 그는 아이가 아니었고, 신이 인간 한 명에게 관대하게 시간과 애정을 쏟는다는 건 오히려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가끔 신이 찾아와 궁금한 책이 있냐고 물어보면 대답했고, 그러면 며칠 뒤에 불쑥 다시 나타나 책을 주는 것이 전부였다. 신에게 왜 자신을 데려오셨냐 물어보았지만 대답하기 꺼려 하였기에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제물이자 제물이 아닌 까닭일까, 인간 세상에 비는 내리지 않았다. 이원은 건조하고 텁텁한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폐까지 묵직하게 차오르는 내음에 비 냄새는 한 방울 섞여 있지 않았다.
그의 아비가 자존심과 자식을 팔아 치우면서 유지했던 가문은 곧 스러지려나. 이원은 이제는 아련해진 소란한 저잣거리와 소풍을 즐기던 정자를 생각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얼른 걸어 언덕을 두 개 넘어야 태청궁이다. 멀리서 오느라 고생을 했다고 쥐여 주는 간식거리나 먹고 잡담을 나누면 해가 질지도 모른다. 밤길에 산은 위험하니 해가 지기 전에 빨리 갔다 돌아오는 것이 좋았다. 손차양을 만들어 바라본 산길은 좁고 꼬불꼬불했다. 이원은 잡생각을 떨쳐 낸 후 보따리를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오느라 고생했다. 뭐라도 먹고 가련?」
“아니요, 시간이 늦어 바로 돌아가 보려 합니다.”
태상노군은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수염이 긴 노인이었다. 이원은 처음 그를 만났을 때, 상청…… 영보천존과는 전혀 다른 늙은 모습에 마음속으로 깜짝 놀랐었다. 영보천존은 장성한 사내의 매끄러운 얼굴이었으니까. 거기다 외모는 어떤가, 옥안(玉顔)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미형의 사내가 아니었던가. 이 세상 사람은 가질 수 없는 미색이니, 가끔 저를 보러 온 신의 얼굴에 넋을 놓아 찻잔을 떨어트린 적도 한두 번 있었을 정도였다.
그만큼 절색이라, 처음 노자를 보러 가자 채비하라는 상청의 재촉에 이원은 속물적인 생각으로 꽤 기대하였다 실망한 적이 있었다. 태상노군은 그런 이원을 보고 괜찮다며 싱글싱글 웃었다. 본노(本老)는 원래 인간으로 태어나 노화를 막을 수 없다 이야기했다. 원시천존도, 영보천존도 세월의 흐름을 타지 않는 신인데 어찌 태상노군만 인간의 몸이냐 궁금하여 물었더니 영보천존이 친절하게 대답했다.
원시천존이 혼돈에서 태어나 좌와 우에 자신의 분신을 하나씩 두었는데 정신체는 영보천존이요, 육체는 태상노군이라고 한다. 상청궁을 받은 영보천존은 도리와 정신을 맡아 음지에 머물렀고 태청궁을 받은 태상노군은 노자라 불리며 인세에 내려가 원시천존의 정신을 설파했으니 둘의 임무는 아예 다르다, 그리 들었었다.
납득이야 했지만 여러모로 기이한 일이었다. 신이 인간이 되었다니. 집에서 몰래 죽간에 적힌 도덕경(道德經)을 읽을 때만 해도 그가 인간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은 해 보지도 않았었다. 지금 나라를 두려움에 떨게 만든 위대하신 황제가 들으면 깜짝 놀라 방법을 알려 달라 무릎이라도 꿇지 않겠는가. 어찌 보면 황제는 수많은 사람 잡아 죽이며 불사초 구해 오라 윽박지르기 전에 노자를 먼저 잡았어야 했다.
그런 잡생각을 하다 말고 이원이 눈을 둥글게 구부려 웃자 노자도 맞장구치듯 껄껄 웃으며, 요깃거리나 하라면서 차를 담은 수통과 떡을 싸서 주었다.
「정말 자고 가지 않아도 되겠니?」
“폐를 끼칠 순 없으니 얼른 떠나겠습니다.”
「가는 길 조심하거라.」
“노군께서도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두 손을 모아 공손히 인사를 건네고는 상청궁에 비해 아담한 태청궁 정문을 다시 타 넘어,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금방 배가 고파져 차와 떡을 먹어 치우고, 손에 묻은 고물을 핥으며 바삐 걸음을 움직이길 한참, 뉘엿뉘엿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곤란하게 되었다. 이원은 속으로 어두운 밤의 산길이 얼마나 무서운지 되새기며 이마를 짚었다. 낮이 긴 여름을 생각하고 움직인 탓이었다. 해는 빠르게 서편으로 넘어갔고, 긴 그림자가 등 뒤로 서늘하게 늘어지더니 어느새 새카만 밤이 돼 버렸다.
등도 들고 오지 않았는데 어쩌면 좋담. 한참을 망설이다 오는 길에 잠시 머물렀던 바위가 있는 언덕까지 겨우 길을 더듬어 찾아갔다.
평평한 바위는 그래도 한 몸 누워 쉴 수 있을 만큼 넓었다. 짐도 없으니 그냥 장포를 풀어 이불 대신 덮고 하룻밤 잔 다음 새벽 해가 뜰 때 움직이면 될 것이다. 숲에서 혹시나 들짐승이 튀어나오진 않을까 걱정이 가물가물 눈을 가렸다. 혹시나, 신들이 거주하는 이 깊은 산에 인간을 해치는 사악한 것들이 있을까 싶다가도 무서움에 침을 꼴딱꼴딱 삼켰다.
가을밤은 추웠고 몸이 금방 으슬으슬 떨렸다. 장포로 온몸을 둘둘 말았지만 곧 이가 딱딱 부딪칠 정도로 추위가 찾아왔다. 깊은 산속은 마을보다 수배로 더 추웠다. 열이 빠지니 허기가 졌다. 떡과 차를 일찌감치 다 먹어 버리지 말걸, 그때 쉬지 말고 좀 더 열심히 걸을걸.
태어날 때 받은 외로움이란 새로운 곳에서 살게 되었다고 쉽게 지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늘 귀신과 하위 신들이 머물고, 상청을 뵈러 온 객들로 북적거리는 상청궁이 그리웠다. 인간인 그를 아니꼽게 보면서도 끼니 때마다 음식을 차려 주고, 입이 심심하면 말하기도 전에 간식을 내주는 그들이 죄다 그리웠다.
딱딱한 돌바닥은 얼마나 차가운지, 목화솜 넣어 꼼꼼하게 시침질한 이불이 아닌 얇은 옷을 덮으려니 얼마나 형편없는지. 잔뜩 굶주려 고깃국에다 고기와 들나물을 잔뜩 다져 넣어 구운 빵을 먹고 싶었다.
형편없다. 세도가의 집에 태어나 여장을 했을지언정 늘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고 살았다. 그러다 불에 타 죽을 운명에서 벗어났다고 또 호의호식하여 욕심이 투덕투덕 붙어 불어난 모양이었다. 이렇다면 불로불사에 집착해 잔혹한 정치를 반복하는 황제와 다를 바가 무엇인가.
자신을 독하게 욕하며 이원은 몸을 둥글게 말았다. 추운 밤 잘못 나서 고뿔이라도 걸리면 어쩌나, 가물가물 감기는 눈을 억지로 들어 올리며 괜히 아는 시라도 몇 자 외워 보려 애를 썼다.
“너무 복이 미어터진 건가.”
이럴 줄 알았으면 갑자신장과 마작 한판 얼른 치고 늦지 않게 데리러 와 달라 부탁이라도 해 볼 것을. 뒤늦게 후회를 하며 주린 배를 움켜쥐고 끙끙 앓으며 애써 잠을 쫓고 있는데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소름이 쭈뼛 끼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더니, 이원의 눈에 샛노란 눈알 두 개가 크게 들어왔다.
대경실색하여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자 노란 눈이 달보다 환하게 번뜩이더니 이내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세상에, 대호(大虎)가 어째서 이런 곳에 있는가. 몸집이 집채만 한 호랑이를 보며 이원이 아주 미세한 비명을 흘렸다. 겨우 목숨을 구걸해 살았더니, 운과 복록이 없어도 지독하게 없구나. 이런 외로운 산 중턱에서 호랑이 밥이 되다니. 눈을 질끈 감고 송곳니가 날아와 목덜미에 이를 박는 것을 기다렸다.
한데 한참을 기다려도 몸을 덮치는 위협적인 기색이나 무서운 통증이 없었다. 몸을 한창 움츠리고 있다 슬그머니 눈을 뜨자 익숙한 듯 낯선 얼굴이 난처하게 웃고 있었다.
「내가 놀라게 했구나.」
“상청께서……?”
「네가 오지 않는데 해가 저물어, 찾으러 왔단다.」
상청은 옆구리에 끼고 있던 호랑이를 몇 번 쓰다듬어 주고는 등을 툭툭 쳤다. 호랑이는 애교라도 부리는 것처럼 꼬리를 살랑거리더니 크게 한번 울부짖고 깊은 산중으로 달려갔다.
어안이 벙벙해 입만 슬쩍 벌리고 한참 말도 못 하고 있자, 상청은 직접 걸어와 이원의 몸을 잡아 일으켰다. 차갑게 식은 몸이 손에서 느껴지자 저절로 상청의 이맛살이 찌푸려진다. 상청은 생각 없이 오후에 심부름을 보냈던 자신의 실수를 탓하며 입고 있던 장포를 벗어 이원에게 덮어 주었다.
「입어라. 몸이 차갑다.」
“아,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
「어른이 주는 건 거절하는 게 아니지.」
“저도 성인입니다.”
「까마득한 노인인 나에게 나이로 승부라도 하자는 것이냐?」
짓궂게 그리 묻는데 딱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원은 멋쩍게 웃으며 장포를 받아 꿰입었다. 옷을 한 겹이라도 더 걸치니 그나마 살 것 같았다.
둘은 손을 잡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걸었다. 신발이 타박타박 바닥에 닫는 소리만 한참을 울렸다. 이원은 차가운 신의 손을 잡은 채 고민하다 물었다.
“아랫것 보내셔도 충분한데 어찌 몸소 오셨습니까?”
「그거야, 너는 내가 거둔 아이니 그렇지.」
“하지만 식사와 의복은 다른 자들이 늘 챙기지 않습니까.”
「내가 침선과 요리에는 재주가 없어 딱하게 되었구나.」
“그런 말이 아닙니다. 탓하는 것이 아니라…….”
「알지, 그저 내가 마중 오고 싶었단다. 안 되느냐?」
이원은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린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워 귀와 뺨을 발갛게 물들였다. 어두운 밤이지만 달은 밝았고, 신은 충분히 그 앳된 얼굴의 측면을 감상할 수 있었다.
“……와 주셔서 좋습니다.”
「다음에도 와 줄까.」
“……네.”
수줍게 웃는 모습을 보고 상청도 그 얼굴을 따라 꽃처럼 웃었다. 이원이 그 황홀한 미모와 웃음에 대한 면역력이 부족해 걷다 말고 멈춰 넋을 놓자, 신이 좀 더 화사하게 웃었다.
처음 길에서 만났던 아이를 보고 단박에 눈치챘다. 저 몸 뒤에 엉킨 수많은 업과 불결한 죄, 또한 자신과 연결된 제물의 끈을. 그런데도 불구하고 살고 싶어 눈을 반짝이는 모습에 홀린 듯 구해 데리고 와 버렸다. 하지만 여전히 인세에 비를 내려 줄 생각이 없었고, 노자는 중립을 지키는 원시천존과 인간에게 적대적인 자신을 번갈아 찾아오며 마음을 좀 고쳐먹으라 화를 내곤 했다.
물론 상청은 마음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인간 주제에 땅에 피를 흘리고 옥좌를 차지한 이번 황제는 눈에 차지도 않았고, 그 악덕한 꼴로 불로불사를 가지겠다고 천박한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하지만 이 아이는 조금 마음에 든다. 고집이 세고 오만하게 떠들지만, 사실은 외로움을 많이 타고 늘 타인의 눈치를 보는 유약한 면모가 꽤 귀엽고 작은 동물 같지 않은가.
오래 버려두었다 가끔 읽고 싶다던 책이나마 내밀면 못내 좋아 얼굴을 붉히는 것이…… 마음에 들어오기도 하고.
졸린지 손을 잡고 걸으면서도 눈을 반쯤 감고 꾸벅거리는 작은 얼굴을 보다 물었다.
「업어 주랴.」
“네?”
「곤해 보이는데, 업어 줄까.」
졸다 말고 이원이 눈을 크게 떴다. 앞에 보이는 달빛 탓인지 하얗고 말갛게 보이는 신의 얼굴은 사심 한 점 없어 보였다. 그저 반달처럼 웃고만 있다. 빛이 부스스 흐르는 고즈넉한 산길이었다.
한참을 망설이다 이원이 고개를 저었다.
“여복 입고 여인 행세를 하며 자랐다고 해서 여인은 아닙니다.”
「여인은 무조건 약하고, 사내는 지켜 줘야 한다는 게 어디 법으로 있더냐?」
“해도 군자의 도리로…….”
「나에게 인간의 도리를 권하지 말아라.」
신이 엄중하게 이야기했다. 이원은 설핏 상처받아 입을 다물었다. 조금 시무룩해 보이는 기색이 느껴지자 결국 상청은 마음이 약해져 살살 어르는 말을 꺼냈다.
「남자라고 해서 업힌다고 부끄러울 거 없단 말이지, 화를 낸 것이 아니다.」
“압니다.”
「근데 왜 토라졌느냐?」
“토라지지 않았습니다.”
괜히 고집부리며 이원이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한 갈래로 단정하게 묶은 머리는 목 뒤에서 흔들거렸다. 상청은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아이를 더 추궁하지 않고 조용히 팔을 잡아끌었다. 노랗게 물든 낙엽이 가득 쌓인 길 위에서, 친히 등을 보이고 앉은 신의 모습에 이원이 숨을 참았다.
「업히렴.」
“제가 감히…….”
「그리 걷다가 동이 터도 도착을 못 하겠으니, 얼른.」
인간인 주제에 감히 고귀한 신에게 업혀도 괜찮은 걸까. 그의 수족들이 그 꼴을 보고 기함을 하면 어쩌나. 이원은 망설였지만 상청이 또 한 번 다그치자 결국 못 이긴 척 업히고 말았다.
다 커서 누군가의 등에 업힌 기분을 어찌 말로 다 하겠는가. 상청에게 보이지 않을 테지만 어쩐지 민망해 슬그머니 얼굴을 가렸다. 엉덩이를 단단하게 받쳐 든 상청의 팔이 한 번 몸을 번쩍 추어올리더니 어렵지 않게 휘적휘적 산길을 걷는다. 빠르게 변하는 풍경을 보며 이원이 번뜩 무언가가 생각나 잘생긴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상청.”
「……왜 아첨하는 것처럼 귀엣말하고 그러느냐.」
조금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지만, 이원은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목에 두른 팔에 힘을 줘 신의 이름을 불렀다.
“상청께서는…….”
밝은 달 아래 홀로 사뿐사뿐 움직이는 남자의 걸음걸이는 좁고 가파른 산길을 말을 탄 듯 쾌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제가 밉지 않으십니까?”
뭐 그리 대단한 걸 물어보려 귓가에 속삭이나 했더니, 영 쓸데없는 말이었다. 상청은 깃털만큼 가벼운 무게를 일부러 또 한 번 추켜올리고는 대답했다.
「나는 인간을 좋아하지 않는단다.」
“저도 인간인데요?”
「그럼 너 역시도 좋아하지 않겠지.」
“자신의 이야기인데 왜 그리 남 일처럼 이야기하십니까?”
「무릇 신이라는 존재가 그런 것이다. 노자와 그리 자주 붙어 술이나 마시면서, 무위자연이라는 말도 들어 보지 못했느냐.」
딱 두 번 술잔을 잠깐 기울였던 적이 있을 뿐인데 얄밉게도 말꼬투리를 잡고 늘어진다. 미운 소리를 하는 목을 힘주어 잡은 이원이 빠르게 쏘아붙였다.
“무위자연은 순리를 따르는 삶이 아닙니까. 이것과 무슨 상관입니까?”
「그러니, 그 순리가 마음 아니더냐.」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씩씩하게 산골짜기를 울렸다.
「너는 개가 좋다고 해서 모든 개가 좋더냐? 하미과를 좋아하면 썩은 하미과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느냐?」
“아니요.”
「나 또한 그렇다. 인간이지만 그중 덜 미운 인간도 있고, 더 미운 인간도 있다. 순리란 그런 것이다. 마음 가고 정 가는 대로 사는 거지.」
“그렇담 제가 좋단 말이세요?”
「인간치고는.」
“너무 알쏭달쏭하게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퍽 좋단 말인가, 아니면 그리 좋지는 않지만 완전히 미워하진 않는다는 말인가. 죽을 목숨을 살려다 별채에 앉혀 뒀으니 호감이 있다는 것일까. 이원은 아주 자주 상청이 가지고 있는 마음에 대해 고민했다.
많은 이가 이원이 홀로 앉아 술 마실 때면 기웃거리고 상청이 애첩이나 미동을 들여놓았다고 이를 까 대고는 했다. 태상노군마저도 처음 이원을 마주했을 때는 당황한 티를 숨기지 못하고, 어쩌다 저런 나이 많은 영감에게 코가 꿰였냐 물어봐 사람을 얼빠지게 만들어 놓았다. 외모만 보면 태상노군이 훨씬 나이가 많아 보이는데도.
그 이야기를 남김없이 전해 들은 뒤 상청은 별말 없이 그저 객이니 잘 모셔라, 가볍게 한마디만 했던 것이 첫 달의 일이었다. 여름이 맥없이 지나가고 가을 역시 다 가고 있는데도 상청의 태도는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묘하게 다정하면서도 차가운 그 선에 이원은 종종 조급해졌다.
“절 버리지만 마세요”
「나는 거둔 것을 버리지 않는다.」
“약속은 지키세요. 죽을 목숨 감언이설로 속여 살린 건 상청 본인 아니십니까. 저는 외로움이 많아 홀로 살진 못합니다.”
「어째서?」
“인간이니까요.”
당연하다는 대답에 상청은 잠시간 침묵했다. 그의 궁이 지척이었지만, 일부러 걸음을 조금 느리게 하며 인간이기 때문에 홀로 살지 못한다는 아이의 말이 무슨 뜻일까 한참을 생각했다. 그리고 이내 그는 신답게 진리에 가까운 대답을 찾아 내어놓았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지.」
“그렇습니까.”
「그래서 집단을 이루고 더불어 사는 것이다. 누군가를 공경하거나 통치하는 질서를 만들어 내고…….」
잠깐 말을 멈춘 뒤 상청이 길게 호흡했다.
「원래부터 불완전하므로 타인이 필요하다. 말 못 하는 짐승도, 물고기와 새들도 그렇다.」
“상청께선 어떠신데요?”
「우리가 왜 신인가.」
당연한 말을 괜히 묻는다는 타박을 빙 에둘러 말하며, 궁궐처럼 너른 대문 앞에 선 상청이 이원의 몸을 땅에 내려 주었다.
「신이란 완전하여, 타인이 그리 필요치 않은 법이지.」
“…….”
「자, 들어가자꾸나. 밤이 깊어 다들 걱정을 하겠다.」
친히 업어 주고 손을 잡아 주는 상청의 행동은 다정하였으나 말은 다정하지 못했다. 모순덩어리가 서 있는 기분에 이원은 잠깐 정신을 놓았다가 겨우 다잡았다. 주인과 객을 기다리느라 잠그지 않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등을 들고 선 시종 귀신 한 마리가 뛰어와 시중을 들었다. 상청은 곤하겠다며 이원의 등을 밀어 별채까지 배웅하고는 바로 안채로 사라졌다. 밤중 산행의 대화는 이원의 속을 답답하게 만들기만 하다 더 이어지지 못한 채로 끝이 났다.
어쩐지 맥이 빠지는 느낌이라 이원은 왜 이리 늦었냐 구박하는 귀신의 머리통을 한 대 꾹 쥐어박고는 말없이 신발을 벗어 던졌다. 씻고 침상에 누우라며 귀신이 벌컥 화를 냈지만 일어날 생각은 없었다. 마음이 심란하니 창밖을 두들기는 바람 소리마저 소란스러웠다. 푹신한 요를 당겨 몸을 덮으며 한숨을 쉬었다.
어린 인간은 더운 속내에 잠 못 이루고, 오랜 시간 존재해 온 신은 낯섦에 잠 못 이루는 밤이었다. 눈치 빠른 귀신들은 제 주인 심경을 거스를까 봐 그날 밤은 조용조용 지냈다.
***
쾌청한 날씨의 어느 날이었다. 아침부터 조금씩 말소리가 들리며 소란스럽더니, 점심시간이 지나자 시끄러워 도무지 뭘 할 수가 없을 만큼 왁자지껄했다. 오수를 즐기려고 하다 결국 침상에서 기어 내려와 창문을 열었더니, 마당에 온갖 잡귀들이 우글우글 모여 번잡하기 그지없었다. 보기 고역인 꼴과 멀쩡한 꼴을 가진 놈들이 다 모여 잠을 방해하고 있기에 뭐야, 하고 화를 냈더니 그나마 얼굴을 익혀 두었던, 이름이 황조란 놈이 달려와 독촉을 하기 시작했다.
「이런 게으름뱅이야. 아직 채비도 안 하고 무얼 해?」
“어딜 가는데.”
「중양절(重陽節)*이 오늘이잖아.」
“아…….”
벌써 그렇게 날이 흘렀던가. 매일 산 구석에 갇혀 인간 아닌 것들과 어울려 생활하니 해가 어떻게 변하는지도 몰랐다. 머리를 짚은 채 신음하자 황조가 두 눈을 드륵드륵 굴리며 이원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얼른 옷을 입고 머리를 빗어. 상서로운 날이니 거봉(巨峯)*에 올라가 북구수(北九水)* 내려다보며 운치를 즐길 예정이야.」
“인간인 내가 너희랑 왜 놀아?”
「이놈 혓바닥이 고약하구먼. 빨리 준비 못 해? 객들도 다 참가해야지. 상청궁 주인이 주최하는 연회인데 무전취식이나 하는 객이 왜 빼고 성질이야?」
하는 말마다 이원의 심기를 벅벅 긁어 댄다. 뭐라고 더 쏘아붙일까 하다 황조의 말도 틀리진 않아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있는 옷은 전부 흑색 아니면 백색이라, 그냥 위아래로 나누어진 검은 옷을 입고 위에 다시 하얀색 심의를 걸쳤다. 들고 갈 짐도 없어 어젯밤 읽다가 만 춘추(春秋)*를 집어 품에 넣고 나오자 황조의 얼굴이 아주 제대로 일그러졌다.
「네놈은 꼴이 뭐가 그래?」
“뭐가.”
「인간들은 놀러 갈 때 다 그리 칙칙하게 입어?」
“흰옷이 뭐 어때서.”
저것들이 금쪽같이 모시는 삼신 중 하나인 태상노군마저도 흰색 심의를 즐겨 입는데 왜 저 지랄이란 말인가. 이원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자 황조가 이 멍청한 놈 좀 보라며 펄쩍 뛰었다.
「중양절이니 국화 무늬 수놓은 옷을 입어야지!」
“난 바느질에 재능이 없어.”
「누가 너더러 만들래? 나가서 사 오면 될 것 아냐.」
“귀신인 너네야 이 높은 산봉우리 달음질치듯 내려가지만, 나는 아니거든? 게다가 돈 한 푼도 없는데 인간 세상 내려가서 뭘 살 수 있단 말이야.”
「이런 못난…… 영보천존께서는 네게 금덩이 하나도 안 쥐여 주시든?」
저놈이 영보천존께 예쁨이나마 받는 줄 알았는데 영 아닌 모양이었다. 황조는 어린 인간이 딱해 혀를 끌끌 차며 소매에서 농구(農具) 모양을 한 청동 조각 몇 개를 꺼내 주었다.
이원이 영문을 모르고 손을 벌려 그것을 받았다. 쇠로 만들어 그런지 꽤나 묵직하다.
「포전(布錢)*은 내게 많으니 들고 가 옷 한 벌 지어 입어. 나들이 갈 옷은 인간들도 좀 화려하게 입던데, 너는 뭣 했길래 다 그러냐?」
“흰옷과 검은 옷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입는 옷이라고. 거기다가…….”
이원은 손에 들린 발이 나누어진 납작한 포전을 보면서 기가 막혀 한숨만 푹푹 쉬었다.
“현재 황제께서 화폐 모양을 통일한 지도 해가 꽤 지났는데 이걸 돈이라고 주냐?”
「뭐? 모양이 바뀌어?」
“그래, 이 덜떨어진 놈아.”
청동 조각을 황조의 이마 쪽으로 정확하게 집어 던지고 손을 툭툭 털었다. 이마를 얻어맞은 황조가 화를 내며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거 인간 놈들, 마음도 빠르게 변하지. 이걸 얼마나 오래 썼는데…….」
“세월 가는 것도 모르는 쪽이 더 멍청하지.”
「뭐라고? 감히 인간이…….」
「거기서 뭣 하느냐.」
막 말싸움이 붙어 몇 번 말을 주고받는데, 조용한 목소리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황조가 깜짝 놀라 바닥에 무릎을 꿇고 납작 엎드렸다. 곁에 다가온 상청은 평소와 비슷하게 흰 옷차림이었으나 중양절을 기념하기 위해서인지 옷깃에는 화려한 금빛 국화가 수놓아져 있었다. 인기척도 없이 어느 순간 다가와 있는 것은 그가 신이기 때문일까.
이원은 머뭇거리다 황조를 따라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상청은 늘 이원에게 예절에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했지만, 곁에서 보는 다른 귀들은 동의하지 않았다. 상청이 눈을 떼고 있거나 자리를 비울 때면 이원에게 찾아와 예절을 지키라 강요 아닌 강요를 하곤 했다.
「무릎 꿇을 필요 없대도.」
“하지만…….”
무슨 말을 더 하기도 전에 상청은 이원의 팔을 잡아 일으키고 옷에 먼지까지 손수 털어 주었다. 황조의 눈이 좀 더 싸늘하게 변했다. 총애를 받는 이원을 질투하는 눈은 아니었다. 그저 ‘저렇게 오냐오냐 대접받는데 애첩이 아니라고?’ 같은 의문을 날리는 눈이었을 뿐이다. 이원조차도 상청이 왜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관대한지 알 수가 없었다.
「얼른 가자. 이러다가 해도 지고 국화도 시들겠구나.」
“꽃이 하루아침에 어찌 시듭니까.”
「밤에만 피는 꽃도 많은데, 하루아침에 시드는 꽃은 어디 없겠느냐? 어제 미리 가 보았더니 국화가 장관이더라. 얼른 꼭대기에 올라야 해 질 때 장관을 구경하며 액운을 떨칠 수 있단다.」
다정하게 설명하니 차마 뭐라고 더 대꾸하지도 못하고 상청이 내민 손을 잡았다. 어깨를 감싸 안은 손길에 어쩐지 등줄기가 굳었다. 휘파람 소리와 함께 구름이 몰려왔다. 코와 입을 막고 눈을 가린 뿌연 안개 속에서 잡은 손에 힘을 주자 웃음소리가 들렸다.
눈 한 번만 깜박했을 뿐인데 발밑에 다듬어지지 않은 버석한 흙길이 밟혔다. 눈과 코를 가리던 구름 떼가 발밑으로 내려갔다. 노산의 오른쪽, 왼쪽, 그리고 중앙, 세 곳에서 흘러내려 오는 물은 환수(環水)*로 북구수를 이루었다. 바람이 크게 맴돌아 옷자락을 흔들었다. 잘 묶어 뒀던 머리카락이 강풍에 풀어져 휘날렸다.
허공에 수놓인 검은 머리 타래와 멍하게 풀어진 얼굴이 잘 어울린다 생각하며 상청은 이원의 머리카락에 손수 붉은 수유(茱萸)를 꽂아 주었다. 빨간 열매를 단 얼굴이 비슷한 색으로 붉어졌다. 사내아이치곤 예쁜 얼굴이라 그 아비도 오래도록 남들의 시선을 피해 속일 수 있었겠지.
「등고(登高, 높은 곳에 오르는 일)하기에는 네가 너무 힘들 것 같아 우리 먼저 왔는데 싫으니?」
“……아니요, 좋습니다.”
귀엽게도 어린 인간의 입술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 발아래를 내려다보는 검은 눈동자는 색이 짙었고 물기에 조금 젖어 있었다.
“붉은 수유는 귀신을 쫓는 것인데, 이리 꽂아 주셔도 됩니까?”
「뭐 어떠니.」
“중양절 자체가 음기를 막기 위한 날인데, 귀신들이 즐긴다니 이상합니다.”
괜히 마음이 간지러워 이원은 세간의 뻔한 사고에 대해 떠들었다. 조금 버릇없는 말일 수도 있으나 상청은 그냥 웃기만 했다.
「우리에겐 분명 그렇지만…….」
그 웃음이 하늘과 똑 닮아 있어 이원은 넋을 잃었다. 밤 같으면서 새벽 같았다. 짙은 안개 낀 날이기도 했고, 태양 빛이 찬란한 날이기도 했다. 잘 여문 곡식이 익어 가는 들판 같았고, 꽃이 가득 핀 후원과도 닮아 있었다.
「너에겐 중요하잖니.」
“…….”
「구구귀일, 백세성선(九九歸一,百歲成仙).」
99가 되면 다시 1이 되고, 백이 되면 신선이 된다.
9월 9일, 중양절에 산에 올라 속삭이는 남자를 보며 이원은 아득한 기분에 숨을 멈췄다.
「오래오래 살거라.」
인간인 이원은 무한한 시간을 살아가는 상청에게는 너무 짧은 시간을 사는 존재였다. 늘 별채에 앉아 동그란 창을 열어 놓고 책을 읽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리 오래가진 않겠지. 상청의 눈에는 이원이 죽을 때를 놓쳐 받게 될 고통과 업이 보였다. 하지만 그는 말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감수하고도 살겠다고 손을 잡은 것은 이 인간이었으므로.
그 작은 인간이 손을 잡아 오며 붉은 수유처럼 환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마음을 담은 감사 인사를 싫어할 자가 있을까. 상청은 기분이 좋아져 이원의 손을 잡아끌고 국화가 흐드러지게 핀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막 도착한 귀신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떠들어 댔다. 잔치 자리를 좋아하는 것은 인간보다 귀들이 더했으니, 액운을 쫓는 날이거나 말거나 자기들끼리 먹고 마시고 웃었다.
이날을 위해 담근 국화주를 한 잔 받아 상청은 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 손을 따라 올라오는 어린 인간의 시선이 마음에 들었다.
「봄에는 난초, 가을에는 국화라, 오래도록 끊임없이 이어지리라. 춘란혜추국, 장무절혜종고(春蘭兮秋菊,長無絶兮終古)」(*중국 초나라의 시인 굴원의 『초사』, <구가(九歌) / 예혼(禮魂)>)
환호와 함께 제대로 된 잔치판이 벌어졌다. 국화꽃을 올려 구운 떡과 달콤한 과자를 먹으며 다들 흐드러지게 핀 국화의 풍취가 얼마나 좋은지, 저 멀리 흐르는 환수는 얼마나 풍요로운지 떠들었다. 가뭄은 깊었으나 상청을 비롯한 세 명의 신이 거주하는 산은 물줄기가 멈추지 않았다. 인간 세상의 비탄은 오직 인간의 몫일 뿐 영생을 사는 자들의 몫은 아니었다.
오랜만에 손님이 찾아와 시끌벅적한 산봉우리 위는 국화주의 향에 흠뻑 젖어 갔다. 이원은 기회를 잡은 귀신들에게 단단히 붙잡혀 술을 잔뜩 받고 있었다. 인간인 이원을 위해 준비한 자리이기도 하니 술을 거절할 만한 구실도 없을 것이다. 술을 마시는 걸 즐기는 편이었지만, 하도 끝없이 술이 주어지자 이원은 일찌감치 취한 기색이었다.
눈은 세 개, 손가락은 네 개인 여자 귀신이 일어나 옷자락을 흔들며 춤을 추었다. 외눈박이와 두눈박이, 세눈박이가 전부 일어나 국화 꽃잎을 뿌리며 노래를 불렀다. 이원은 종종 풀린 눈을 하고 상청을 보았다. 상청과 눈이 마주치면 도둑질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깜짝 놀라 시선을 피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한잔 받으세요.”
먼저 말을 건 적도 드물면서 술에 취해 용기가 났는지 이원이 다가와 불쑥 술병을 내밀었다. 상청은 기분 좋게 잔을 들어 향기로운 술을 받았다.
“상청께서도 오래오래 사세요.”
신인 그에게는 너무 당연한 말을 덕담처럼 신중하게 한다. 그래서 신은 그의 집이 비가 오지 않아 멸족당했다는 것을 당분간 더 숨기기로 했다. 국화주에 잔뜩 취해서 얼굴이 붉어진 채로 함박웃음 짓는 얼굴을 보았으니까.
그는 자신의 마음을 다 몰랐다. 신으로서 세상을 관할하는 것도 귀찮기만 한데 미물보다 작은 인간 하나에게 신경 쓰는 마음이야 얼마나 관심이 있었겠는가.
그게 화근이었다. 사소한 이유에서 불행은 찾아온다. 아직은 둘 다 깨닫지 못한 이야기라 시간은 평화롭게 지나갔다.
***
겨울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함이 산골짜기에 가득 내렸을 때, 이원은 간만에 들떠 있었다. 심중에 들어 앉아 자신을 간지럽게 만들던 존재가 외출을 제의했기 때문이었다. 노자가 태청궁을 비우고 인간 세상에 내려간 뒤 근 한 달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방랑벽이 심한 신 때문에 원시천존이 거주하는 옥청궁에서 있을 회의가 진척이 없어 찾아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한다.
상청은 친구 하나가 여럿 귀찮게 한다며 한참을 투덜거리다, 이원에게 같이 내려가자고 제의했다. 이원이 대답도 못하고 얼어 있자, 상청은 한참을 웃다가 겨울이니 따뜻한 솜옷도 좀 사고 너 필요한 물건도 사자며 꼬드겼다. 이원이 거기에 홀랑 넘어가 날을 잡고서 기다린 게 딱 사흘 전이었다.
「준비는 다 했니?」
“네.”
「춥지는 않느냐?」
“……산동은 함양에 비해 훨씬 따뜻합니다.”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라 얼굴을 붉히며 대꾸하자 상청은 더 묻지 않고 손을 잡았다. 이원은 가슴이 또 멋대로 콩닥거려 한숨을 쉬었다. 중양절, 덕담을 건네며 웃는 상청을 본 이후로 이상하게 가슴이 혼자 울렁거린다.
여인네도 아니고 남신의 모습을 한 자에게 괜히 마음이 혼란스러운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너무 오래 여장을 하고 지냈다 해도 여인의 마음을 가지게 된 것도 아닌데…….
입술을 깨문 채 고민에 빠진 이원의 머리 뒤통수를 보면서도 상청은 말을 아낀 채 웃기만 했다. 그는 신이었고 저 인간의 마음 따위는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기 때문에.
물론 이상하기야 했다. 목숨을 구해 주긴 하였고, 태어날 때 달갑지 않은 연이 이어져 있기야 했지만 그게 연정까지 이어지리라곤 생각해 보지 않았으니까. 상청 자신은 생각지도 못한 연을 욕망해 속 안에 깊은 마음을 보관하는 이 어린아이를 어찌하면 좋으려나.
「가면 무엇을 할까?」
“태상노군을 먼저 찾으셔야죠.”
「그치야 어디서 술을 마시면서 취해 설법이나 늘어놓고 있겠지. 찾는 것은 금방이니 네 일부터 해결하자.」
“그럼…….”
이원은 망설이지 않고 가게 하나를 가리켰다. 허름한 찻집이었다. 반짝거리는 이원의 눈과 손가락이 야무지게 가리키는 찻집을 몇 번이나 번갈아 보다 상청은 그냥 웃어 버리고 말았다.
「마작이 그렇게 좋으냐?」
“그럼요. 재밌습니다.”
「겨우 도박인데.」
“그러나 그 안에는 도교의 진리가 들어 있지 않습니까.”
「마작꾼들이 그런 걸 생각하고 치겠니.」
“저는 아니까 괜찮잖아요.”
「갑자신장이 그리 졸라 대는 건 무시하더니, 적극적이구나.」
“그거야…….”
치아까지 드러내며 이원은 환하게 웃었다.
“조르는 걸 보는 게 더 재밌는걸요.”
「나쁘구나.」
“성격이 좋지야 않습니다.”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도 결국은 이원의 뜻대로 다관 안에 들어가고 말았다. 몇 명은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하고 있었고, 몇 명은 손가락 안에 마작 패를 쥐고는 달그락거리고 있었다.
이원은 뭘 좀 먹지 않겠냐는 상청의 부름에도 홀린 듯 마작 패 사이에 끼어들었다. 생기발랄한 모습에 상청은 이번에도 잔소리 하나 제대로 못 하고 웃기만 했다. 저렇게 좋아하는 걸 알면 몇 명 모아 같이 마작이라도 칠걸 그랬나 보다. 물론 신인 자신과 치면 이원은 분명 재미없다며 패를 집어 던지고 화를 내겠지만.
상청은 마작 판에 태연하게 끼어든 이원을 뒤에서 구경하며 랑야태(琅琊台)*를 시켜 술병째로 들고 마시며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는 마작을 구경했다.
마작 치는 소리는 요란스러웠고 다관은 사람들로 시끌벅적했으나 흔한 저잣거리 바닥에 널린 잡귀는 보이지 않았다. 구석구석을 훑어보면서 상청은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원래 마작 치는 소리는 귀신을 쫓는다는 속설이 있긴 했다. 실제로 효과를 크게 가진 건 아니었지만.
상청은 신이었고 상제와 염라 말고도 서왕모 등 여러 고귀한 신을 거느렸으나 잡귀 또한 아끼는 자였다. 귀신이란 인간에게서 태어나나 인간이 아니었고, 대부분 인간을 싫어하였으며 혼돈에 가까워 상청에게는 오히려 더 친숙한 존재였다.
귀에 좌르륵 울리는 마작 패의 소리가 싫은 건 아니었으나 인간들이 하는 노름이 재미있을 리는 없었다. 무료하게 한참을 지켜보았을까, 패했는지 이원이 시무룩하게 뺨을 부풀렸다. 이번에는 속임수 쓰진 않은 모양이지. 수염이 지저분하게 엉킨 사내들에게 한참 놀림을 받던 이원이 고개를 휙 돌려 상청을 보았다.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움직이자 하얗게 뻗은 두 손이 불쑥 다가온다.
“돈 좀 주셔요.”
「……응?」
“돈이 없습니다.”
전냥도 없이 마작을 쳤단 말인가. 이런 어이없는 아이 같으니라고. 상청이 기막힌 웃음을 터트리든 말든 이원의 표정은 변화도 없고 뻔뻔하기만 했다. 그러나 상청은 그 두꺼워 보이는 낯짝 아래의 미미한 홍조를 읽었다. 귀엽긴.
그가 너그럽게 품 안에서 작은 돈주머니를 꺼내 내밀었다.
「너무 많이 하지는 마렴.」
“네.”
싱글벙글 웃는 이원의 옆에서 머리가 지저분하고 옷깃에 목 때가 너저분한 사내 하나가 걸걸한 목소리를 냈다.
“뭐야, 도련님이 아니라 미동(美童)이었나?”
그 조롱에 이곳저곳에서 웃음이 터진다. 이원이 얼굴을 굳힌 채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상청 역시도 끼어들지 않고 잠자코 술을 마셨다. 이원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한 탓도 있었고, 미동이라는 글자를 풀이해 보면 썩 틀린 말도 아니었으니까.
가만히 앉아 손끝으로 글자 3이 적힌 마작 패를 굴리던 이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 정인이 조금 눈이 높아 저를 아끼십니다.”
정인. 그 단어에 웃음이 터졌다. 이원이 불안한 눈으로 흘끗 뒤를 보더니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뻗어 패를 뒤섞었다.
“그러니 그 입 닥치고 치십시오.”
얼굴은 예쁘장했고 나름대로 구슬픈 과거도 가지고 있었지만, 이원의 성격은 딱 그만큼 좋지 못했다. 뒤에서 상청이 지켜보든 말든 그는 마음껏 사기를 쳤다. 패를 집었다 놓았다 할 때마다 감쪽같이 손가락 사이로 빨려 드는 상아색 마작 패가 재밌기까지 했다. 상청은 아까와 달리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며 술을 한 병 더 시켰고, 이원은 저도 달라 어리광을 부리며 뻔뻔하게 입술을 벌렸다.
시중드는 하인처럼 입가에 술잔을 대어 주고 떡과 전병도 먹여 주자 이원은 마작을 치면서도 야무지게 받아먹었다. 뾰족하게 올라간 눈 끝이 불쾌함을 보여 주었다.
“더 하실 건가요?”
내리 여덟 판을 친 후에 이원이 고개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사내들의 얼굴은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저는 볼일 없으니 일어나겠습니다.”
남의 돈주머니를 먼지 하나 없이 탈탈 털고 나서 이원이 태연하게 작별 인사를 했다. 사내 중 한 명이 거칠게 욕을 했다. 이원은 신경도 쓰지 않고 냉정한 얼굴로 남은 떡 한 조각을 얼른 집어 먹고 상청의 손을 잡아 끌어당겼다. 상청은 들고 있던 술병을 내려놓고 이원의 불만스러운 투정에 이끌려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로 어지러운 시내 거리를 한참이나 걸어 나와서야 이원의 굳은 표정이 조금 풀렸다.
“……죄송합니다.”
「왜 사과를 하느냐?」
“버릇없이 굴어서요.”
「별로 그렇진 않았는데.」
“……거짓말을 해서요.”
「꼭 솔직하기만 하면 재미있겠느냐. 인간에게 거짓과 그름, 화와 업, 분노와 살인을 가르친 것도 우리인데.」
사내들을 속여 부끄러웠던 것일까. 상청은 어림짐작하며 뺨을 붉힌 채 울적한 표정을 짓는 이원을 슬슬 달랬다. 이원은 불안함이 서린 얼굴로 위를 흘낏 쳐다보더니 다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마작을 치면서 사기를 쳤던 것을 사과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정인이라 그랬잖아요.”
완전히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이원이 겨우 소리를 내 말을 했다. 그는 방금 전부터 마음이 완전 타들어 가 죽고 싶을 지경이었다.
“욱하는 바람에…… 거짓말을 해서…….”
「…….」
상청은 조금 고민했다. 말까지 더듬거리며 손짓, 발짓하는 어린아이를 보며 어디까지 자신의 마음을 내주어야 좋을지를 생각했다. 오늘 해야 할 일도 산더미인데 충동적으로 연애놀음을 저질렀다가 하루가 꼬박 다 지나면 어쩌려나. 하루 만에 끝날 거라 생각해 방을 잡지도 않았는 데다 나라 분위기가 흉흉하니 노숙을 하기도 좋지 않았다. 상청은 단숨에 노산에 돌아갈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백치처럼 고민하다 충동에 사로잡히기로 결정했다.
「나는 인간을 싫어한단다.」
자주 들었던 말이지만 이원은 마음을 다쳤다. 저 아름다운 신은 인간을 싫어한다고 쉼 없이 이야기했다. 거짓말을 하며 마음대로 군 자신은 정말로 인간다운 꼴을 보였으니 싫어할 만도 했다. 받아 주지 않으시더라도 다시 사과하려고 입을 열었는데 상청은 계속해서 자신의 말을 이어 갔다.
「번잡하게 자라나 세력을 넓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 몇 번이나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었지.」
“…….”
때때로 인간사에 관여하고 있노라 말하며 상청이 눈을 접어 달콤한 앙금처럼 웃었다.
「노자와 천존이 뜯어말리지 않았다면 이 땅은 일찌감치 그 운명을 달리했을 것이다.」
오만한 말이었지만, 그가 신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이원은 고개를 떨어트리고 상청이 마음을 고치지 않았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잠깐 상상해 보았다.
「하도 말리기에 왜 나를 말리느냐 물었더니 천존은 둘째 치고 노자는 그러더구나.」
“뭐라고 하셨는데요?”
「자신은 인간을 아주 사랑한다고. 그 변덕스러움과 덜 배운 천진함이 좋다고.」
“…….”
「나에게 인간을 좀 사랑해 보라 그랬지.」
먼 나라의 이야기 같다. 이원은 입술을 깨문 채 상청이 과연 인간을 사랑할 수 있을까 회의감을 가졌다. 아까 마작을 칠 때도 그는 미동이라고 모욕을 당하는 자신을 도와주지는 않았다. 정인이라 맞받아치는 것도 가만히 두었다. 이원은 그것을 상청이 자신을 싫어하지는 않으나 관심을 두는 것도 아니라 해석했다. 소극적으로 변한 태도를 보며 상청이 손을 내려 이원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놀랐는지 동그랗게 뜬 눈을 보며 상청은 마작을 치던 독한 얼굴과는 너무 다르지 않냐고 지적하며 노래하듯 말했다.
「인간을 사랑할 마음도, 사랑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상청……?”
「너는 사랑할 수 있으려나.」
푸른 바다와 붉게 물든 산을 담은 눈이 접히며 가까이 다가왔다. 이원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숨만 삼키는 사이 입술이 붙었다 떨어졌다.
조금 축축하고 더운 감촉에 얼어붙어 눈만 깜박이는 꼴을 보고 상청이 귀엽다는 듯 웃으며 다시 입술을 붙였다. 또 한 번 반복된 접문(接吻)에 완전히 놀란 이원이 파랗게 질려서 바들바들 떨었다. 머릿속이 완전이 먹통이었다. 신나게 마작 칠 때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이, 이게…….”
이게 뭐람. 홀로 질문과 답변을 반복하는 머리가 시켜 나온 말이라곤 겨우 이거였다.
「정인이 되어 줄까?」
자애로운 질문에 멍해 있던 이원이 고개를 횡으로 저었다. 거절의 표시에 상청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를 좋아하지 않느냐?」
“조, 좋아하지만…… 이건…… 저는 이러려고는…….”
마음에 품어 봐야 다 품어지지도 않을 위대한 존재였다. 이원은 손톱만 한 속내가 너무 부끄러워 몇 번이나 연거푸 거절의 이유를 줄줄이 늘어놓았다. 한참을 어색한 변명을 듣던 상청이 손으로 이원의 입을 막아 버렸다.
「너는 내가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데.」
“…….”
「싫으냐?」
“싫은 게, 아니라. 저는, 감히, 인간인데…….”
숫제 울 것처럼 벌벌 떨며 말을 더듬는 작은 얼굴을 손으로 감싸 쥐고 상청이 기분 좋게 웃었다.
「쉬잇.」
“…….”
「원래 입을 맞출 때는 눈을 감아야 운치 있는 법이란다.」
이번 입맞춤은 조금 더 길었다. 시킨 대로 눈을 질끈 감아 버리는 귀여운 모습을 감상하며 상청은 딱 다물린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농밀하고 음탕한 혀의 행동에 완전히 얼어붙어 바들바들 떠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한참 뜨거운 체온을 가진 입 안을 더듬고 핥다 천천히 입술을 떼어 냈다.
“이게…….”
「접문이지.」
“이, 이런 건.”
「또 해 줄까?」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이를 꼬드기는 것처럼 살살 달래는 상청의 뒤통수에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 도둑놈의 새끼.」
「아.」
「네놈이, 양심도 없구나.」
「……노자, 어쩐 일로 제 발로 나타나셨나.」
음탕한 장면을 들켜 버렸다는 기분에 이원이 기절할 것처럼 비틀거렸다. 다 큰 시커먼 놈이 까마득하게 어린 인간을 희롱하는 꼴을 제대로 구경한 태상노군은 독설을 쏟아 내려다 완전히 얼굴이 벌개져 울먹이는 이원을 보고서 그냥 한숨만 푹 쉬었다.
「……객잔으로 가자.」
그의 나지막한 권유에 상청도 이원도 말없이 걸음만 옮겼다.
골목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화려하게 세워진 5층짜리 객잔이 있었다. 1층은 차와 음식을 팔았고, 2층은 좀 더 돈 있는 손님들을 받았으며 3층부터는 창기와 연동(孌童, 남창)을 살 수 있었다. 결국은 그렇고 그런 짓을 하기 위한 음란한 곳이라는 말이다.
계단을 오르며 살결을 내놓은 여인들을 볼 때마다 이원의 얼굴이 붉어졌다. 가끔 곱게 치장한 여인들이 화려한 미남인 상청을 꼬드겨 손님으로 받으려고 다가왔다 물러가곤 했다. 그 앞에 수염이 허연 노인이 있기도 했고 목표였던 남자의 품에 어리고 화사한 얼굴을 한 미동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원은 어린아이도 아닌데 다 커서 남의 무릎에 앉아 있는 게 어색해 자꾸 뒤척거렸다. 상청이 불편하니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말한 뒤에야 겨우 힘을 풀고 푹 파묻힌 채 노자가 쥐여 준 당과만 만지작거렸다.
「보는 눈도 많은데 그게 무슨 해괴망측한 꼴이냐? 좀 풀어 주어라.」
노자가 보다 못해 한 소리 하자 상청이 무슨 소리냐는 듯 눈썹을 흘끗 들어 올렸다.
「사귀는 사이인걸.」
당과를 딱 한 입 먹은 이원이 사레들려 쿨럭쿨럭 기침을 했다. 눈물을 쏙 빼 가며 목이 찢어져라 기침을 하자 태상노군이 찻잔을 쥐여 주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겨우 진정한 이원이 목을 가다듬으며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처럼 천진하고 밝아 보이는 눈동자가 반짝 빛이 났다.
「아주 정상적인 행동이지.」
「네놈이 오래 살더니 드디어 실성했구나.」
이곳에 인간이 아닌 것들이 있었다면 무례함을 무릅쓰고서라도 맞다고 고개를 끄덕일 말이었다. 상청은 혼자 심드렁했다. 꼬장꼬장 늙은 벗의 잔소리는 제일 듣기 싫었다.
「염라가 화가 났던데.」
「왜.」
「죽을 인간 혼을 거둬 상청궁에 박아 놓고 데려가지 못하게 해서 지옥이 엉망이라고 투덜거려.」
「그것들 일하는 꼴은 둔해 빠진 주제에, 왜 화를 내는 거지?」
상청은 정말로 의문이라는 목소리로 되물었고, 태상노군과 이원은 둘 다 입만 곱게 다물었다. 죽을 목숨을 부지해 살았던 이원은 눈치가 빨랐고, 염라가 화난 이유가 자신에게 있다는 것 또한 빠르게 알아냈다.
과연 그는 기둥에 묶인 채로 불타 죽었어야 함이 옳은 선택이었을까. 이원이 소리 없이 찻잔을 만지작거리는 동안 상청은 술 한 병을 빠르게 마시더니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오겠다며 일어났다. 그 와중에도 그는 이원을 의자에 잘 앉혀 놓더니 단과자와 떡을 쥐여 주며 가만히 앉아 있으라는, 쓸모없고 다정한 잔소리를 했다.
이원은 뭐든 먹으면 단단히 급체할 것 같아 접시를 얌전히 식탁 위에 밀어 놓았고, 대신 술을 한 잔 따랐다. 상청이 방금까지 쓰던 술잔은 싸한 향기가 났다. 입술을 몰래 훔치는 것처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잔에 입술을 대고 조심스럽게 술을 마셨다. 독주는 한 모금만 마셔도 얼굴과 심장이 화끈거릴 정도였다.
태상노군은 이원의 잔에 술을 다시 따라 주며 말했다.
「인간과 우리의 속도는 다르단다.」
“알고 있습니다.”
「영보천존은 결점이 없는 신이라 너와는 어울리지 않는단다. 네가 모자라거나 힘이 없는 인간이라서가 아니다. 그저 그에게는 사랑이 소꿉장난보다 못한 행위이니, 마음을 다치는 건 네가 될 것이다.」
자애로운 조언을 들으며 이원은 다시 술을 한 모금 삼켰다. 뺨이 더웠고, 혹독한 생각이 머리를 바쁘게 때렸다. 한참을 말이 없는 이원을 보고 태상노군은 한숨을 길게 쉬었다.
늘 사는 것을 무료해하는 영보천존. 삼청 중 상청의 직위를 가진 친우는 나쁜 짓을 하려 하고 있었다. 아이가 오로지 사랑이 고파 애달픈 꿈을 꾸고 있다면 꿈을 계속 꾸게 하는 것이 아니라 깨서 현실을 보게 해 주어야 했다.
「아가, 사랑이야 말로 독이다.」
“…….”
「너는 언젠가 늙고 병들어 죽을 것이나, 영보군은 오래도록 저 모습을 유지하며 살 것이다.」
“…….”
「인간은 죽으면 끝이다. 모든 것을 잊고, 지우고, 새로운 윤회에 오르게 되나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불멸자가 필멸자를 사랑하게 된다면 우리는 얼마나 오래 그 기억으로 괴롭게 살게 될 것인가?」
신은 망각을 모르는 존재였고 유구한 생명체였다. 사실, 생(生)이나 사(死)라는 단어는 그들과 어울리지도 않는 것이었다. 이원은 알았다. 이것은 이기적이라는 감정임을.
「또한 우리는 사랑에 평등하다. 우리는 만물의 위에 서 있기 때문에 개에게 주는 사랑과, 지친 거지에게 주는 사랑과, 연인에게 주는 사랑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저 노인의 모든 말이 맞음을 알면서도 이원은 고개를 아래로 숙인 채 중얼거렸다.
“알고 있지만, 저는 사랑받고 싶습니다.”
그는 한 번도 사랑을 제대로 받아 본 기억이 없다. 아비는 자신이 아들인 것을 들킬까 봐 숨겨 키웠고, 큰형은 저를 없는 자로 취급하였으며, 어머니는 여장을 한 아들이 수치스러워 몸을 감춰 마지막 날에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린 누이는? 작고 사랑스러웠던 누이는 그저 집안의 모든 사람을 가족이라는 이유로 사랑했을 뿐이다.
이원은 특별한 사랑을 받고 싶었다. 인간을 좋아하지 않는다 몇 번이나 말했던 신이 그에게 ‘너는 사랑할 수 있으려나’ 말했던 순간 희망이 도래하였다. 이원은 진흙탕 물보다 더 어둡고 세찬 사랑의 탁류에 휘말리고 싶었다. 고집이라고 한다면 맞다 긍정하겠지만, 몸을 사리고 싶지 않았다.
“정인이 되어 줄까 물으셨습니다.”
「아가야.」
“인간은 싫다, 싫다 하셨으면서 저는 싫어한다 하지 않으셨어요. 그 자비에 기대면 안 되는 것입니까?”
고집스러운 말에 태상노군은 혀를 찼다. 아이는 신의 거대하고 완벽한 존재에 홀렸고, 그 마음이 바라보고 있는 신은 냉혹한 자였다. 또한 인간을 몰랐다.
「원아, 잘 들어라. 영보군은, 상청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는 무엇도 사랑하지 않는다. 신으로는 자비로우나, 정인으로는 너를 원하는 만큼 사랑해 주지 않을 것이다.」
“알아요…….”
이원은 이미 취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술을 마셨다. 누구와 이야기하러 나갔는지 상청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고 태상노군은 근심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새빨갛게 변한 얼굴에서 가장 크고 깊은 것은 눈이었다. 검은 눈동자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떨어졌다.
“하지만, 저만을 사랑해 줄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
“세월이 지나고 지나, 바래고 닳아 없어지는 것이 어차피 애정 아닙니까. 날 때부터 받는다는 부모의 사랑도 없이 살았는데, 저는 괜찮습니다.”
「인연은 미리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저는 싫습니다. 세상의 그런 인연 싫습니다. 죽어도 사랑을 하고, 죽고 나서도 사랑을 하고, 죽고 난 뒤에 다시 삶에서 거듭 마주치는 사랑을 하지 못할 바에야…….”
이원의 마음은 초주검이 되었다. 그는 오래 사랑에 굶주린 어린 아귀였다.
“기억에라도 남는 사랑은 아니 됩니까?”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변질된 사랑의 일부라도 좋습니다. 어린 짐승에게 베푸는 자비로운 사랑이라도 저는 괜찮아요.”
「너는 후회할 것이다.」
태상노군이 말했고 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인간은 거짓말을 하고 있었고 한 신은 끝을 알 것만 같아 침묵에 젖어 들었다. 술 한 병을 전부 동낸 이원이 더워 축축한 목을 주무른 채 몸을 웅크렸다. 의자는 너무 크고 속은 불편했다.
조금 뒤에야 들어온 상청이 바람 냄새를 경쾌하게 풍기며 이원의 몸을 안아들었다.
「늦었군.」
「염라가 말을 듣지 않아서.」
「듣지 않을 만하지. 상제마저도 너를 걱정한다.」
「왜?」
「너는 사랑을 할 만한 자가 아니야. 그 아이를 놓아 주어 윤회의 틀에 올리게.」
「싫어.」
상청은 술 냄새를 풍기며 잠에 빠진 이원을 끌어안고 등을 도닥이며 심술궂게 웃었다.
「인간을 미워하는 내가 마땅찮지 않았나. 그러니 이 아이로 노력이나 해 보려고 하니 방해하지 마.」
「방해가 아니라…….」
「슬슬 가기나 하지? 원시천존이 기다리고 있어.」
말을 혼자 턱 하니 끊어 버리니, 더 대꾸할 기운도 없었다. 태상노군은 상청을 따라 일어나 맥없이 따라 걸으며 얼굴과 매우 잘 어울리는 긴 한숨을 쉬었다. 수염이 겨울바람에 흔들거렸다.
「벗이여.」
「왜 부르지?」
「잊지 말게. 그 아이도 인간이라는 것을.」
상청은 품 안에 안겨 숨을 쌕쌕 내쉬는 얼굴을 잠깐 바라보았다. 술에 완전히 곯아떨어져 코와 입에서도 술 냄새가 났다. 어린 나이에 절제도 모르고 마셔 고주망태가 되었는데도 그리 못나 보이진 않았다.
「알아.」
직접 구했으니 인간이지만 조금 특별한 인간이지. 거두어 먹이고 살려 놓았으니 얼마나 마음에 차는지. 상청은 조언이자 경고를 아주 시답잖게 넘겨 버리고는 빠르게 걸었다. 손짓 한 번에 바람이 불었고 긴 숨 한 번에 눈이 내렸다. 펑펑 쏟아지는 눈은 적어도 내년 봄 가뭄이 없다는 것을 알려 주었지만, 농작물이 얼어붙어 싹이 트지 않고 씨앗이 썩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산동은 그나마 상황이 나았지만, 황제가 사는 함양은 눈조차도 내리지 않을 것이다.
영보천존은 원시천존의 그림자에 속하는 신이었다. 그는 인간을 위해 자신의 힘을 사용할 생각도 없었고, 이기적이고 벌레 같은 것을 중하게 여기고 싶지도 않았다. 이 나라는 얼마나 빠르게 망하려나.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번 전쟁을 기대하며 구름 위에 올랐다. 옆에 나란히 선 태상노군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올 겨울은 혹독할 것이다. 내년 봄과 여름이라고 멀쩡할까. 저 신의 마음이 작은 인간 하나에 풀리지는 않을 텐데. 태상노군은 눈을 찌푸리며 가난에 굶주린 인간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구름이 발치라 흐리게만 보였을 뿐이었다.
***
외출하고 돌아온 뒤에 눈이 한차례 내려 산을 덮자 이원은 열병을 크게 앓았다. 하루 이틀은 추워 고뿔에 걸렸나 싶어 두었는데, 3일째에는 제대로 열이 올라 떨어지지 않았다. 상청은 아랫것을 시켜 신농(神農)*을 불렀다. 농업이 전부 끝나 오랜만에 휴식기에 들어갔던 신농은 영보천존이 부른다는 말에 외눈박이 소를 타고 한달음에 달려왔다가 인간을 보고 뒤로 반쯤 넘어갔다. 신농은 저것이 뭐냐며 요란을 떨다 뒤통수 한 대를 얻어맞고 겨우 진료를 본 뒤에 물었다.
「저는 약을 처방하는 것이 전부이니, 화타를 부르심이 어떠십니까?」
어린 인간이 아프니 기분이 좋지 않던 상청은 단번에 고개를 내저었다.
「화타야 특기가 외과 수술이 아니냐. 약으로 처방해라.」
지엄하신 고위 신의 말에 굴하지 않을 자는 없었다. 신농은 붓을 들고 열한 가지 약재와 스물세 가지 제조법을 처방했고, 한기를 너무 많이 쬔 까닭에 열병에 걸린 것이라 고했다.
겨울이라 솜옷을 둘둘 입혔지만 차가운 기운을 가진 귀신들과 요괴에, 상청까지 줄줄이 붙어 있었으니 인간의 육체로는 감당하기 힘든 냉기였을 것이다. 달인 약을 하루 세 번 먹여야 한다, 이런 재료는 먹이면 안 된다, 길고 긴 처방전을 쓰다 말고 신농은 슬그머니 상청의 눈치를 보았다.
「정신이 없어 먹지 못할 테니 제가 먹이겠습니다.」
시비가 공손하게 무릎을 꿇고 아뢰었다. 갑자기 옆에 잘 앉아 있던 상청의 기분이 확 나빠졌다. 아끼는 인간을 감히 시비가 건드린다고 화가 난 건가. 은쟁반을 든 채 덜덜 떠는 시비를 감싸 주려 신농이 얼른 끼어들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이리 주거라.」
「되었어. 내가 하지.」
상청이 퉁명스럽게 신농의 손등을 내려치며 약사발을 들었다. 신농은 그것만 듣고도 깜짝 놀라 심장까지 움켜잡았다. 저분이 정녕 인간을 마음에 두셨단 말인가. 곤륜산이 뒤집어질 만한 이야기였다. 상청을 마음에 품고 가슴앓이한 여신은 도대체 몇 명이며, 인간이 싫다 떠드신 말은 다 어디로 갔는가. 원시천존과 태상노군께서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계신다는 말인가? 인간을 신줏단지처럼 품에 곱게 안고 조금씩 약을 입에 흘려 주는 꼴이 거의…… 저것은……. 신농은 지금 눈앞에 보이는 신이 영보천존이 아니라 그의 탈을 뒤집어쓴 사악한 악귀라고 생각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크흠, 흠흠.」
「시끄럽게 굴지 말고 닥치고 꺼져라.」
「그…… 그리 붙어 계시면 안 좋다 이야기드렸지 않습니까. 되도록 제일 힘 약한 종을 시키십시오.」
「…….」
약을 먹이다 말고 상청이 눈썹을 추켜올렸다. 불쾌함이 가득 들어찬 모습을 보기만 해도 심장이 철렁거렸다.
「인간은 너무 약하군.」
「인간은 약하지요. 그리고 그 인간은 더욱 약합니다.」
「그리 약해 보이지는 않던데.」
제 눈에 보이는데 상청의 눈이라고 보이지 않을 리가 없다. 은근히 인간 아이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중얼거리는 상청을 보며 신농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했다.
「죽어야 할 것을 일부러 살려 놓았으니 건강은 점점 좋아지지 않을 것입니다. 운과 복록 또한 이미 얻은 것은 다 써 버려 없으니 주변까지 화를 부를지 모릅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뭘 말하고 싶은 거지?」
「보내십시오. 귀하신 마음만 상합니다.」
「시끄러워. 소를 잡아 고깃국부터 끓이기 전에 꺼져라.」
그런 폭언을. 소머리에 인간의 몸을 한 신농은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서 부랴부랴 짐을 챙겨 떠나 버렸다. 떠나는 뒷모습에 길고 구슬픈 소 울음소리가 들린 것도 같다. 상청은 날아가는 구름을 보며 피식피식 웃었다. 우락부락하니 생겨서는 마음만 여린 놈 같으니라고.
반쯤 식은 탕약을 만지작거리던 상청은 다시 고개를 돌려 열에 들떠 힘겹게 숨을 내쉬는 말간 얼굴을 보았다.
분명히 그는 이원에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도 살고 싶으냐 물었다. 그 물음에 이원은 힘들 줄 알면서도 살고 싶다고 말했다. 이렇게 죽으려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억울함과 분함이 가득 옹골진 빛이 마음에 들어 거두어들였다. 단정하게 꾸며진 방 안에 앉아 술이나 차를 마시며 죽간을 펼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마음에 들었지.
그래, 무언가가 마음에 든다는 생각을 해 본 것이 얼마 만인지. 조금 어색할 정도여서 금방 그 열기 어린 시선도 눈치챘다. 평소에 인간이 자신을 그런 시선으로 보았다면 산 채로 영혼을 말려 죽여 버렸을 텐데, 이 아이는…….
「원아.」
“으음…….”
자신을 부른다는 걸 용케도 눈치챘는지 아니면 그저 우연인지 열 오른 머리를 흔들며 이원이 조그맣게 신음을 흘렸다.
「얼른 나아라.」
상청은 땀에 젖은 이원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아프니 기력이 쇠하여 힘들기만 할 텐데 뭐가 그리 좋은지 이원이 웃었다. 새벽녘이 희미했다.
상청은 물론이요, 그의 궁에서 일하는 귀들의 혼을 쏙 빼놓더니 이원은 다음 날 열을 떨치고 눈을 떴다. 조그만 미열과 이따금 나오는 기침에 당분간 몸조리를 할 것을 강요당해 이원은 침상에 억류되어 갖은 요양에 정신이 없었다.
눈이 듬뿍 쌓인 겨울 산에서 귀들은 어디서 가져오는 건지 복숭아나 포도를 쟁반에 쌓아 가져다주었다. 이원은 기력을 보강해 준다는 약을 마시고 쓴 입을 헹구기 위해 복숭아를 한 입 씹었다. 겨울철에 복숭아라니, 황제도 못 누릴 호사가 아닌가. 쓴웃음을 지으며 달콤한 과즙을 목구멍으로 넘겼을 때, 눈밭에서 뭔가 풀썩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뭔가 싶어 꽉 닫힌 창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더니 흰 머리카락을 가진 조그만 아이가 눈밭에 완전히 파묻혀 있었다. 이원은 복숭아를 한 입 더 깨물었다. 아삭아삭, 복숭아 과육이 깨물리는 소리가 시원하게도 울렸다.
쫑긋. 아이의 머리에 달린, 흰 털을 가진 긴 귀가 꿈틀거렸다. 흠, 이원은 아이의 귀를 노려보며 복숭아를 한 입 더 먹었다. 와작와작. 그 소리에 귀가 또 꿈틀댔다.
복숭아가 거의 씨앗을 드러냈을 때, 눈밭에 퍼질러 있던 아이가 얼굴을 번쩍 들어 올렸다. 빨간 눈동자가 보리수 열매 같았다. 이원은 신기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다시 복숭아 하나를 집어 들었다. 월묘(月卯)인가? 저렇게 어린아이는 처음 보는데.
그는 상청궁에 반년을 머물면서 인간이 아닌 존재들에 아주 익숙해졌다. 토끼의 외양을 가진 월묘는 물론이고 각종 귀신과 신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들은 수십 수천을 보았다 가장 꼴 보기 싫은 것은 십이지신의 처음인 갑자신장이었고 가장 친한 것은…… 뭐, 되었다. 인간인데 귀신들과 친해서 어디 쓸 텐가. 자신은 담이 작아 몸을 진찰하고 약재를 주러 왔던 소머리 귀신을 보고도 까무러치지 않았던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이원이 복숭아를 한 입 먹으려고 크게 입을 벌렸다.
「배, 백도.」
흠? 이원은 복숭아를 씹으려던 입을 다시 다물고 창밖으로 고개를 힐끗 내밀었다. 월묘로 보이는 아이가 창 바로 아래에서 고개만 든 채로 눈을 반짝 빛내고 있었다.
「백도 맛있겠다.」
월묘가 아니라 아귀(餓鬼)였나? 이원은 가련하게 목소리를 흘리는 아이를 깔끔하게 무시하고 복숭아를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붉은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더니 눈물이 뚝뚝 흘렀다. 오, 재밌는데. 이원은 좀 더 열성적으로 복숭아를 씹었다. 흰 과육이 몽땅 없어지자 아이가 힘없이 눈밭에 얼굴을 처박았다.
「내 백도…….」
언제부터 자기 백도였는지 모르겠다. 이원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다시 복숭아 하나를 집어 들었다. 막 입가에 복숭아를 붙이는데 갑자기 누군가 나타나 뒤통수를 퍽 하고 치고는 복숭아를 강탈해 갔다.
“아!”
얼얼한 머리를 붙들고 씩씩거리다 고개를 번쩍 들었더니 갑자신장이다. 상쾌한 마음으로 겨울 산의 전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저 재수 없는 쥐대가리를 보니 기분이 나빠졌다.
「이런 재수 없는 놈.」
누가 누구에게 할 말인가. 이원이 헛웃음을 흘리며 갑자신장을 노려보았다. 갑자신장이 우르르 까꿍, 지랄 맞은 소리를 내면서 월묘에게 복숭아를 주었다. 아이는 눈이 반짝반짝해서는 복숭아를 아작아작 씹어 먹기 시작했다.
“제 복숭아를 왜 그쪽이 마음대로 주고 그럽니까?”
「너는 인간이라는 것이 정도 없느냐? 아이가 먹고 싶다고 하면 줘야지.」
“아이라 해도 월묘 아닙니까? 저보다 나이가 많을 텐데요.”
월묘는 대개 성장이 느렸으며 천 년을 넘게 살았다. 나이로 생각하면 아이로 취급되어 오냐오냐 보호받아야 하는 건 자신이 아닌가? 이원이 삐뚤게 대답하자 갑자신장이 코웃음을 쳤다.
「네놈은 속에 시커먼 구렁이가 수천이라 전혀 아이 같지 않다.」
“그 말 그대로 돌려 드립니다. 게다가 토끼면 갑자신장과는 관계가 없는데 왜 나서고 그러십니까? 재수 없게.”
「말하는 싹수가 노랗구나.」
“칭찬 감사합니다.”
이원은 불퉁하게 대꾸하고는 지겹지도 않은지 마작을 치자고 조르는 갑자신장을 완전히 무시한 채 복숭아를 아작아작 갉아 먹는 월묘를 불렀다.
“야.”
붉은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간다.
“복숭아 먹었으니 꼭 갚아라.”
다시 한번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간다. 붉은 눈알이 홍옥 같아 꽤 고왔다. 이원은 접시에 올려진 하얗고 달콤한 복숭아를 하나 더 창 너머로 건네주며 말했다.
“은혜는 백 배다, 백 배. 알았지?”
「…….」
“왜 답이 없어?”
「……네.」
토끼 귀가 축 내려온다. 이원은 고리대금을 써 놓고도 뻔뻔했다. 복숭아를 열정적으로 먹는 월묘를 보고 웃으며 손을 휘휘 흔들어 주기까지 했다. 갑자신장이 순진한 애를 데리고 무슨 나쁜 짓을 한 거냐고 펄펄 날뛰었다. 그의 고함에 힘이라도 입었는지 다시 하늘에서 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보리 싹이 다 얼어붙겠구나. 이원은 그런 생각을 잠깐 하고는 그냥 눈을 감았다. 아직 완쾌하지 않은 몸으로 계속 일어나 있었더니 꽤 졸렸다. 하지만 더 자면 소가 될지도 모르겠다 싶어 좀 더 깨어 있기로 했다.
턱을 한 손으로 받친 채 이원은 복숭아를 이로 열심히 긁어 먹는 아이를 빤히 내려다보다 물었다.
“누굴 따라왔어? 부모님은 어디 계셔?”
미아가 된 아이에게 적합한 질문이었다.
「정묘신장과 함께 왔지요. 지금은 바쁘세요.」
정묘신장? 토끼신의 몸종인가. 이원은 여전히 복숭아를 갉아 먹는 어린아이를 보다 창 바깥으로 불쑥 몸을 내밀었다. 팔을 쭉 뻗자 대충 거리가 닿는다. 손짓으로 가까이 불러 귀를 슬쩍 건드렸다. 쫑긋거리는 하얗고 부드러운 털의 감촉이 꽤 좋았다.
“어쩐 일로 왔는데?”
「무슨 일을 한다고 하셔서…… 근데 복숭아 향이 나서 저만 여기로 왔어요.」
순박하고 청량한 말이었지만 내용은 텅텅 비어 있었다. 그냥 복숭아 먹고 싶어 침 흘리다 무리를 무단으로 이탈했다는 말이군. 불쌍한 월묘 미아를 대들보에 매달아 놓는 게 좋을까, 고민하며 이번에는 포도를 한 알 입에 넣고 굴렸다.
「잘한다.」
바로 옆에서 들리는 냉정한 목소리에 놀라 목구멍으로 넘기던 포도가 다시 튀어 올라왔다.
“쿨럭, 쿨럭.”
순식간에 꺼끌꺼끌해진 목을 붙잡고 몇 번 기침을 한 뒤에 겨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몸이 나은 뒤로 보이지 않던 상청이 서 있었다. 그의 눈이 어린 월묘를 담은 것을 보고 이원은 헛기침했다. 사레가 들린 목이 따끔따끔 쑤셨는데 어쩐지 죄책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겨우 복숭아 두 알에 백 배의 은혜를 맹세받다니, 고약하구나.」
“……여기서 뭐 하세요?”
나쁜 짓을 하다 걸렸더니 어쩐지 눈을 마주치기가 부끄러웠다. 심술을 괜히 부렸나 보다. 소매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웅얼거리자 상청이 눈을 접어 웃으며 머리를 토닥거렸다.
「정말 인간답다고 해야 할지.」
“전 인간인걸요.”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대답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좀 더 혼이 날 것 같았는데 어쩐지 옆이 조용했다. 실망하신 건가. 걱정이 내려앉은 채로 침묵이 한참 이어지자 결국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이원이 먼저 입술을 열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왜…….”
「…….」
“그……런…….”
상청의 눈은 유례없이 싸늘했다. 이원이 그 하얀 냉기를 이기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창 바깥에서 복숭아를 씹던 월묘 아이도 놀랄 정도였다. 여전히 입술을 다문 채 냉정한 표정을 짓고 있던 상청은 이원의 손가락이 차갑게 식은 뒤에야 긍정했다.
「그래, 인간이지.」
“…….”
「잊을 뻔했구나.」
이원은 손가락이 따끔거린다고 생각했다.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다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만을 이야기했을 뿐인데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 자체가 큰 죄악이라도 된 기분이…… 들었다.
왜인지 모르게 그 사실이 비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원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으며 농조로 대꾸했다.
“그럼요, 벌써 잊으시면 안 됩니다.”
월묘 아이가 푹 쌓여 있는 하얀 눈밭을 가리키며 이원은 재차 이야기했다.
“저는 저 눈보다 빠르게 얼어붙고, 빠르게 녹아요.”
「……그렇지.」
“인간이니까, 절대로 잊지 마세요.”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주 불안했노라, 심장이 껄떡대며 뛰고 눈물이 나올 것처럼 무서웠노라, 이원은 생각했다. 신이라는 꼬리말을 붙이고 있는 이 위대한 남자가 언젠가 정말로 인간의 유한한 생명에 대해서도 잊을 것 같았기에.
태상노군이 했던 경고가 귓가를 빙빙 맴돌았다. 신에게 사랑이란 인간과 다르다. 후회를 할 것이다. 듣기 싫은 잔소리인 척 귀를 막고 복숭아를 집어 크게 한 입 물었다. 달콤한 과즙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사랑을 받고 싶었다. 믿기만 한다면 신은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억지 위안을 했다.
***
겨울이 끝나기 전에 이원은 한 번 더 크게 열병을 앓아 상청의 근심을 샀지만, 다행히도 금방 털고 일어났다. 이제는 그가 앓아눕는 일이 일상생활과 비슷해서, 귀신들은 더는 호들갑을 떨지 않고 의술에 일가견이 있는 신들을 불러서 그의 열을 고쳤다.
여름의 끝에 이곳에 오고도 계절이 벌써 두 번 넘게 변화하고 있었다. 봄꽃이 만연한 산에 불어오는 춘풍은 색이라도 띠고 있는 것 같았다.
산등성이에 피어 있는 철쭉과 진달래꽃을 보며 이원은 산맥을 따라 흐르는 하류를 내려다보았다. 산맥은 생명이 찬연했다. 겨우내 내렸던 눈도 다 녹았다. 봄 나비가 흔들거리며 춤을 췄다.
이원이 정자에 늘어져 활짝 핀 꽃을 목이 빠져라 바라보자 상청은 원림을 봄으로 유지해 줄까 물었다. 까다롭기는 하지만 어렵지도 않아 제의했는데, 이원은 기겁하더니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아니요, 그게 아니고요.
일단 말리고 보는 조급한 목소리는 술안주로 알맞았다. 꽤 귀여운 모습이라 일부러 꼭 해 주겠다고 했더니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그보다 순리대로 흘러가는 자연이 좋다며 상청을 말리느라 진땀을 엄청나게 뺐다.
결국 원림은 이원의 뜻대로 여름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 뒤에도 상청은 조금 장난스러운 면모를 보이며 이것저것 해 줄까 물었다. 오래 살아온 자신답지 않다는 것을 알았지만 즐거웠다. 그는 이원을 당황스럽게 만들어서 횡설수설하며 자신을 말리는 모습을 보는 걸 최근의 낙으로 삼았다.
이번에도 괜히 별채를 전부 뜯어고쳐 사방을 터 줄까, 하고 물어 아이의 얼을 빼놓고 돌아온 길이었다. 상청은 산꼭대기의 정자에 앉아 고정공주(古井貢酒)의 뚜껑을 땄다. 향기가 진해 백 리 밖에서 냄새만 맡아도 취한다는 말이 있는 만큼 술의 향은 농밀했다. 안휘성의 술을 마시며 산을 내려다보니 마치 구자산(九子山)*에 있는 것 같군. 병째로 술을 마시며 상청이 힐끗 아래를 보았다.
아름답게 꾸민 원림은 세공품처럼 작게 보였지만, 신의 눈은 먼 곳에 있는 것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이원은 또 책을 읽고 있는지 돌돌 말린 죽간을 쥐고 있었다. 재미도 없는 인간의 역사서가 뭐가 좋은지 하나하나 허투루 넘기지 않고 읽는다. 더위 탓에 연신 냉차를 마시는 홍안(紅顔)을 보니 저절로 미소가 나왔다.
연인이 된 후로 이원의 존재는 귀신들 사이에서 요란할 정도로 유명해졌다. 한 번이라도 영보천존께서 마음에 두셨다는 인간을 만난 적이 있는 귀신들은 죄다 문초라도 겪는 것처럼 다른 신들에게 불려 가 질문 세례를 받는다고 들었다. 그것은 상청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이른 시간부터 달려와 잔소리를 퍼붓는 놈이 거슬려 죽여 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래서라니요,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내 마음이지. 염라도 한 수 접고 돌아갔는데, 왜 자네가 와서 시끄럽게 구는지 모르겠군.」
고정공주를 바리바리 싸 들고 찾아온 북두성군(北斗星君)*은 상청의 싸늘한 말 한마디에 깊은 한숨을 푹푹 쉬었다. 다들 영보천존을 어떻게 좀 해 보라고 난리도 아니라는 사실을 아시긴 할까, 이 완고한 신은.
다들 처음에는 그 소문이 뜬구름 잡는 괴담이라 치부했다. 다른 신도 아니고 영보천존이 인간 아이를 품었다니. 인간을 그보다 더 싫어하는 신은 없었다. 툭하면 지금 왕이 꼴 보기 싫으니 멸망시켜 버려라, 나라 자체가 만들어지는 게 짜증 나니 혼란의 시대로 두어라 등등 열을 내며 잘 만들어 둔 잔칫상도 엎어 버리는 게 그의 특기가 아니었나.
북두성군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영보천존이 데리고 다니는 십이신장들이 너무나 상세하게 인간에 대해 설명하고, 신농이 직접 그를 진료했다 증언까지 하지 않았으면 더더욱 믿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최근 남두성군(南斗星君)*과 이야기를 끝낸 후 염라까지 만나고 왔다. 염라는 좋지 않은 표정으로 덕분에 장부 하나가 아예 쓸모가 없어졌다고 투덜거렸다. 염라에게 장부에 무슨 일이 있었냐 물었더니, 답 또한 가관이었다.
「숫자가 왜 이딴 식이냐 맘에 안 드신다고 장부를 통째로 가져가셨다지요.」
「겨우 그런 걸 일러바쳤단 말이냐? 하여튼 염라는 그 얼굴로 너무 소심해.」
「염라를 두고 소심하다 말씀하시는 분은 천하에 영보천존 외에는 없을 것입니다.」
「시끄러워, 잔소리를 할 거면 가도록 하게.」
고정공주만 아니었으면 진작 내쫓았을 거라고 대놓고 투덜거리는 얼굴은 솔직한 만큼 낯설었다. 늘 권태에 젖어 있던 신이 생기를 가진 것은 좋았으나 인간이라니…… 영 악질적인 방법이었다.
「사실 제가 와야 하나, 남두가 와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 인간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자네의 소관도, 남두의 소관도 아니니 신경을 쓰지 마시게.」
「상청!」
「시끄럽다.」
상청은 혀를 차며 들고 있던 병뚜껑을 산 아래로 날렸다. 근처에서 빙빙 돌고 있던 매 하나가 휙 하고 낚아채 갔다. 정말로 이 신은 마음을 돌릴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태상노군을 제일 먼저 찾아가 조언을 구했을 때, 소용이 없을 것이라 하던 충고가 이런 뜻이었나. 북두성군은 나오려는 한숨을 억지로 참으며 헛기침을 크게 했다. 이러나저러나 해도 눈앞의 남자는 자신보다 높은 신이었다. 어디 자신보다 높은가, 그보다 높은 자는 신선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것이었다. 어느 누가 저 존재를 강제하겠는가. 다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인간과 신의 놀음을 보고 있기만 했다. 북두성군도 눈에 보일 듯 둘의 미래는 훤했다. 비참하고 절망적이기까지 할 텐데 왜 자꾸 고집을 부리시는가.
「멀리서나마 저도 그 인간 아이를 보았습니다.」
북두성군이 본 이원의 모습은 갑자신장과 무슨 말을 하는지 열을 올리며 떠드는 모습이었다. 사내아이라고 들었는데, 꽤 마음을 흔들 만한 고운 얼굴이었다. 축 늘어진 나뭇가지 사이에 보이는 모습은 과실처럼 달아 보였으나, 입술에서 나오는 말은 시비조에 독설이었다. 외모와 정반대되는 성격도 어찌 보면 충분히 매력적이었고, 눈에 바로 보이지 않는 영혼도 빛이 고운 편이었다.
「꽤나 곱더군요.」
그러나 인간이지 않은가. 북두는 상청을 이해할 수 없었다.
「상청, 어찌 수많은 존재 중 하필 인간을 고르셨습니까?」
「그건 너희들 탓이 아니냐.」
듣기 싫은 소리를 늘어놓아 짜증이 났는지 상청이 탁자 위로 술병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성을 냈다.
「허구한 날 바짓가랑이 붙들고 매달려 인간 세상으로 눈 좀 돌려라 떠들어 댄 건 너희였다.」
「이것은 다르지 않습니까?」
「무엇이 다르지?」
「저희는 신으로서 인세에 관여하시라 말씀드렸지, 한 인간만 점찍어 귀애하라 이야기드린 것이 아닙니다.」
「인간 전부가 버러지 같아 짜증이 나니까 일단 하나라도 좋아해 보자 데려온 것뿐이다.」
기가 막힌 말이었다. 진심이라면 그것대로 악취미였고, 진심이 아니라도 달가운 말은 아니었다. 북두성군이 입을 쩍 벌린 채 굳어 있다 뺨을 씰룩거리며 물었다.
「유흥이시라면 월로(月老, 월하노인)에게 끈은 왜 받아 가셨습니까?」
「내 마음이지.」
「이러다 큰일을 겪으십니다.」
「알아.」
「네?」
「안다고. 한데, 그럼 뭐 어쩌란 말이냐?」
이제는 대놓고 짜증을 내는 상청을 보며 북두성군은 속으로 가슴을 쳤다. 영민하신 분이 왜 인간에게 휘둘려 저런 무모한 짓을 저지르셨는지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다.
짜증이 나는 것은 상청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한 놈씩 번갈아 찾아와 마음을 고쳐먹으라고 했다. 아니, 연애놀음 좀 하는 것이 고쳐먹을 마음이던가. 자신들이 종종 인간으로 둔갑해 사랑을 나누는 것은 당연한 양 뻔뻔스럽게 굴더니 왜 이리 소란하게 구는지 알 수 없었다.
그깟 수명은 좀 고치면 어떻고, 죽은 사람을 살려 놓는 것은 또 무엇이 문제인가. 앞에서 떠들어 대는 북두성군마저도 마음이 약해 사람의 수명을 연장해 준 적이 있으면서.
고정공주 절반을 비우고 나자 입이 심심했다. 안줏거리라도 차리라고 할 것을 그랬다 후회하며 다시 원림을 보았다. 이제 이원은 책이 지겨운지 멀리 던져 버리고서 다른 귀신들과 말장난을 하는 중이었다. 저 재잘거리는 입술을 안주로 삼는 것도 나쁘진 않을 텐데. 꽤나 마음이 동한다.
「아니, 이런 심각한 때에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저 재수 없는 새끼. 상청이 입술을 비틀었다.
「나이도 어린놈이 꼬장꼬장하게 굴어서는 있는 여신들도 떨어져 나가겠구나.」
「…….」
500년도 더 전에 여신에게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한 적이 있던 북두성군이 애써 화를 삭였다. 대부분의 신들은 영보천존과 대화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성격이 괴팍하기로 유명한 자였으니까.
「내 성격이 딱히 좋지는 않지만, 북두 자네가 그런 표정을 지을 이유도 없는 것 같군.」
독심술도 그만하셨으면 좋겠다. 욕을 갈길 수도 없는 상전인지라 북두성군이 긴 한숨으로 모든 말을 대신해서 뿜어 냈다. 그제야 상청은 시선을 떼어 내며 코웃음을 쳤다.
「저자는 혼돈의 별입니다.」
북두성군은 죽은 자의 생명을 관장한다. 밤하늘에 가장 반짝이는 별을 보며 죽을 자의 운명도 점칠 수 있었다. 하늘을 보고 기운의 쇠락을 읽어 내는 주술법은 그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런 북두가 말한다. 이원이란 존재는 혼돈이니 버려야 함이 옳다고.
「저희에게 상청은 인간 하나보다 소중합니다.」
「나 역시도 내가 가장 소중하다.」
「그렇다면 사랑놀음은 빨리 그만두십시오.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죽지도 살지도 않은, 생귀와 마찬가지인 인간입니다. 마음에 빈 구멍 하나만 있으면 죽는 생귀요. 인간이란 본디 올곧지만은 않아, 삶에 대한 욕구는 있다가도 없어지곤 하니 못 볼 꼴을 보실지도 모릅니다.」
「알고 있다.」
「예에, 아시면 되었습니다. 제가 도가 지나쳤습니다.」
빈정거리는 북두성군의 태도를 따로 지적하지 않고, 상청은 묵묵히 술을 비웠다. 다들 하는 말은 똑같았다. 인간을 곁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물리십시오.
이상한 일이었다. 인간의 단점을 누구보다 싫어하는 상청이었고, 다른 신들은 인간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위해 여념이 없었다. 그들은 상청더러 인세에 관여를 좀 하시라, 혼돈과 멸망은 그만 부여하시라 떠들었다. 인간을 좀 더 사랑해 주라고 원시천존이 직접 이야기하기도 했다.
잘못이 무엇이지. 실수는 또 무엇인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었다.
아랫것을 시켜 북두성군을 배웅하도록 지시한 후 짜증 나는 마음을 풀기 위해 바로 아래로 내려갔다. 저녁 식사를 하려고 했는지 정자에 앉아 젓가락을 물고 있던 이원의 눈이 동그랗게 변한다.
“상청……?”
「이런, 식사 중인데 내가 방해했구나.」
“아닙니다. 저기, 드시겠어요?”
가득 차려진 음식을 가리키며 하는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인간 세상의 음식은 즐기지 않았다. 음식 냄새라고는 풍기지 않던 상청궁에 꼬박꼬박 세끼 밥상이 차려지게 된 것도 이원이 거주하면서부터였다. 변화가 나쁘지는 않았다. 가끔 제가 마시는 술을 탐내 한 잔을 얻어 마시고, 같은 향을 풍기는 입술을 취하는 것도 좋았다.
오리고기를 한 점 먹었는지 입가에 기름기가 반질반질하다. 손수 입술을 깨끗하게 닦아 주고 옆에 앉았다. 이원이 젓가락을 쥔 채로 움찔거린다. 생각해 보니 남이 밥 먹는 모습을 구경하는 건 또 처음이었다.
「이러다 식겠구나. 얼른 먹으렴.」
“저 혼자 먹기는…….”
「많이 먹고 쑥쑥 커야지.」
귀까지 빨갛게 변한다. 이미 다 컸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이원은 더 권하지 않고 식사를 재개했다. 젓가락질 몇 번만 구경했는데도 뭘 좋아하는지 눈에 들어왔다. 노골적일 정도로 솔직한 식사법이었다.
손이 거의 가지 않는 것을 보아 탕은 좋아하지 않는다. 찐 것과 볶은 것은 좋아한다. 편식을 할 것 같은데 야채를 데친 것은 뜻밖에 또 잘 먹는다.
돼지고기와 청경채를 같이 쪄 낸 것을 집어서 양파볶음과 한참을 먹다가 두부피와 버섯볶음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피에 야채와 저민 오리고기를 가득 넣어 말아 먹는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 있다. 기름진 입 안을 씻어 내기 위해 시원하게 우린 냉차도 드문드문 마시면서 식사에 열중하였다.
이원은 식사 예절이 바른 편이었다. 권문세가의 집에서 자랐기 때문일까, 젓가락질은 군더더기 없었고 음식을 흘리지도 않았다. 그와는 별개로 엄청 먹고 있지만.
주요리를 어느 정도 먹었는지 이제는 밥과 면으로 시선을 돌린다. 기름과 장에 야채를 듬뿍 넣고 볶은 면과 계란을 넣고 볶은 밥을 그릇에 그득 떠 와서는 그걸 또 우걱우걱 순식간에 다 먹었다. 밥을 먹는 얼굴이 기분 좋아 보인다. 처음에는 제 눈치를 보느라 깨작거리더니 이제는 신경도 안 쓰고 양껏 먹는다.
조금씩 만들어 올린 음식들이지만 그래도 1인분은 충분히 넘는 양인데, 저 많은 음식이 다 어디로 들어가는지. 이렇게 잘 먹었나, 하는 새삼스러운 기분까지 들었다. 생강 썬 것을 작은 종지 그릇에 덜어 내고는 장을 부어 간을 맞춘 이원이 이제는 교자 접시를 당겨 앞으로 가져왔다. 아직 뜨끈한 훈김이 나는 교자를 한 입 씹었다.
“하, 뜨거…….”
육즙에 입 안을 데었는지 웅얼거린다. 젓가락과 반쯤 베어 문 교자를 놓은 접시까지 양손에 움켜쥐고 뜨겁다고 입 안에서 김을 훌훌 뿜어 댄다. 상청은 고민하다 여분의 젓가락을 집어 들고 이원의 손에 있던 접시를 가져왔다.
“상청?”
여전히 교자를 씹느라 발음을 뭉개며 이름을 부른다. 언젠가 저 목소리로 영보군, 하고 불러 주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하며 상청은 좀 더 몸을 식탁에 붙여 앉았다.
「급하게 먹으니 데지 않니.」
“식었을 거라고 생각해서…….”
「김이 이렇게 나는데, 어리석구나.」
지적에 이원의 뺨이 붉어졌다. 솔직하다고 생각하며 상청은 젓가락으로 반쪽짜리 교자를 집어 들었다. 그 전에 장에 절인 생강을 두 쪽쯤 집어 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 하렴.」
“…….”
고기육즙이 묻은 입술을 핥다 말고 이원이 멈칫 굳었다. 저 신이 지금 무어라 이야기하신 거지? 식사 장면을 멀찍이 떨어져 보고 있던 귀신들까지 우뚝 굳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청은 교자를 계속해서 들이밀고 있었다.
「얼른.」
홀린 것처럼 입을 벌리자 적당히 식은 교자가 들어온다. 우물우물, 바삭한 피와 부추와 다진 고기를 섞어 향이 풍성한 속을 씹으며 이원은 얼빠진 얼굴로 있었다.
「맛있느냐?」
“감사합니다. 그러나 제가 먹을 수 있는…….”
「자.」
말이 아예 들어 먹히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이원은 순순히 입을 벌려 떠먹여 주는 음식을 받아먹었다. 음식 시중은 한 번도 해 보신 적이 없을 텐데, 젓가락 사용이 단정하고 섬세했다. 적당하게 좋은 크기로 자르고 식혀서 주니 어쩐지 맛도 더 좋았다. 점점 홀린 듯 받아먹다 중간에는 즐기지 않는 타조어두(剁椒鱼头)*를 주려 하기에 용기 내어 싫다고까지 할 정도였다.
그렇게 식탁이 거의 초토화가 되었다. 상청도 이원을 먹여 주는 중간중간 심심풀이로 먹긴 했다지만 적은 양이었고, 이원은 평소보다 훨씬 많이 먹었다.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아 끙끙 앓자 상청이 이마를 짚어 주며 훌쩍 몸을 당겨 끌어안았다.
「속이 불편하느냐.」
“조금…….”
「적당히 먹지.」
계속 주셨으면서. 이원은 불만스러운 마음을 숨기며 눈을 가늘게 떴다. 상청의 품에 안겨 있으면 서늘해서 더위가 잠잠해진다. 오후 늦게 내렸던 비 덕분에 축축하게 젖은 흙냄새까지 진하게 나고 있었다. 어린 짐승처럼 기지개를 쭉 켜며 기분 좋은 소리를 내자 웃음소리가 들린다.
「여름이 좋으냐.」
“네, 좋습니다.”
「더워 얼굴이 이렇게 붉어져 놓곤?」
“그러니까요, 이렇게 곁에 있어도 괜찮지 않습니까.”
조금만 오래 같이 있어도 한기에 몸살을 앓는 몸이었다. 여름은 더워서 눈치 보지 않고 안겨 있을 수 있어 좋다며 웃는 얼굴은 사랑스러웠다. 상청은 솔직하게 호와 불호를 이야기하는 아이를 아꼈다.
“정자에 앉아 있으면 식물이 자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생명력이 강해서 귀가 터질 것 같은데, 상청의 곁에 있으면 조용합니다. 시원하고 평온합니다.”
「나는 능음(凌陰, 석빙고)이 아닌데.」
“네, 그러해도요.”
부른 배에 흡족해하며 품에 얼굴을 묻어 오는 이원의 등을 쓸어내리며 상청은 눈을 감았다.
북두성군의 말이 귓가에서 시끄럽게 짖어 댔다. 이 인간을 어떻게 해야 하나. 어설프게 곁을 내주느니 다른 이들의 말을 따르는 것이 옳을까……. 고민이 깊어진 눈을 알아차리지 못한 이원은 그 냉기만 즐겼다.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정자에서 흘러나왔다. 해가 길어져 땅거미가 이제야 내리고 있었다.
「증부지로지곡직혜(曾不知路之曲直兮), 남지월여렬성(南指月與列星).」
내가 가야 할 길이 바른지 굽은지 몰라, 남쪽에 뜬 달과 늘어선 별만 바라보네. (*굴원, 『초사』, <구장九章 / 추사抽思>)
갑자기 들려오는 시에 이원은 품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집주인의 마음을 따라 빠르게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원림 어딘가를 응시하며 상청이 물었다.
「굴원(屈原)을 아느냐?」
“멱라수(汨羅水)에 투신하여 죽은 초나라의 시인이 아닙니까?”
「그래, 어리석은 경양왕과 그를 헐뜯는 신하들에게 추방당해 비참하게 죽은 자였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전란의 이야기에 이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황제가 이 땅을 통일하기 이전 혼란했던 시기에, 비참하게 목숨을 잃은 시인이 남긴 시였다. 자신도 접해서 마음에 드는 몇 편을 외우고 있었지만, 갑자기 그때의 이야기는 왜 하시는 걸까.
“굴원의 시를 좋아하십니까?”
「가야 할 곳도, 선택할 것도 잃은 자의 쓸쓸한 독백이 마음에 들어서 외웠지.」
인간의 서화에 관심이 영 없으실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 상청이 읊었던 시는 이원도 아는 시였다. 하지만 괜히 읊기가 싫어 부러 다른 말을 했다.
“저도 좋아하는 구절 하나 외워 드릴까요.”
「무언데?」
“교소천혜(巧笑倩兮), 미목반혜(美目盼兮), 소이위현혜(素以爲絢兮)”
보조개 고운 미소에, 아름다운 눈동자 반짝이니 흰 바탕에 놓인 고운 자수로다.
미인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시에 상청이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하하, 낭랑한 소리에 이원이 부끄러운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그건 내가 아름답다는 말인가?」
“……인(仁)을 마련한 뒤에야 예(禮)를 행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해 마세요”
「그럼 내 얼굴이 아름답지 않느냐?」
부담스러울 정도로 얼굴을 바짝 붙이고 조르듯 묻는데, 뭐라고 대꾸할 말이 없어 이원은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역시 너무 노골적이었나 보다.
“대충 그렇죠.”
「대충은 또 무슨 말이냐.」
“그냥, 부끄러우니 묻지 마세요.”
「식사를 실컷 해 놓고서는 이제야 외모를 칭양하다니.」
묻지 마시라니까. 이원은 투덜거리면서도 더운 뺨을 숨기기 위해 냉기를 실컷 들이켰다. 오늘따라 식사는 왜 그렇게 맛이 있었는지, 조금씩 먹여 주는 요리는 어찌나 단지 쉴 새 없이 먹어 버렸다. 너무 돼지처럼 먹었나. 이원은 제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마음을 겨우 숨기며 수줍게 웃었다.
「원아.」
“네, 상청.”
「너를 버리라는 말이 많은데.」
웃음기가 오간 곳 없이 사라졌다. 이원은 상청의 얼굴을 보려고 했으나, 등에 둘러진 팔이 힘주어 몸을 눌렀다.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한 채 꼼짝없이 상청의 품에 갇힌 이원이 눈을 어설프게 깜박거렸다. 방금까지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는 날아가고 없는 싸늘한 품속에서 미동도 없이 웅크리고 있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래도 약조하겠다. 네 수명이 끝날 때까진 꼭 곁을 지켜 주마.」
달리 말하자면 평생을 함께 있어 주겠다는 약조였지만, 이원은 그 말의 틈을 눈치챘다. 죽임을 당하거나 죽음을 끌어안으면 더 이상의 기적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끝을 둔 말에 화를 내야 할까, 아니면 그마저도 기뻐 울어야 할까.
고민하다 이원이 용기 내서 물었다.
“살다 보면 누구 하나는 저도 나쁘지 않다고 해 주시지 않을까요?”
「나에게 가장 우호적인 자는 태상노군인데.」
“…….”
「그조차도 해 주지 않았으니 확답을 하기 어렵겠구나.」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으시는 편인가요?”
「아니.」
“그럼 신경 쓰지 말아 주세요.”
처음 듣는 이원의 단호한 음성이었다. 흠, 상청은 생각에 잠긴 채로 이원의 등을 토닥거렸다. 눈치를 보던 귀신들이 올라와 상을 치우고 가벼운 술상을 차렸다. 유하주(流霞酒)*를 한 잔 따라 마셨다. 꽃과 과일의 향기가 풍겼다.
「한잔 마시겠니?」
“아니요.”
「그래, 그럼 이제 자렴.」
왜 갑자기 자라고 하는 걸까. 먹고 바로 잠이나 자는, 세상에 둘 없을 한량이라도 되라는 말일까. 이원이 조금 마음 상해 눈만 깜박이자 상청이 다시 달랬다.
「생각이 복잡할 땐 잠을 자는 거지.」
하지만 잠을 자고 일어난다고 해도 좋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원은 속마음까지 말하진 않은 채로 눈을 감았다. 갑자기 온몸에 한기가 지끈거리며 올라왔다. 역시 음식을 너무 과하게 먹었다고 생각하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