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자와 제자 자하의 대담이 적힌 죽간 위로 바람이 들썩거렸다.
이원은 휘파람을 불었다. 지나가던 뱁새 한 마리가 손가락에 내려앉았다. 통통한 몸을 부풀린 새가 휘파람에 맞춰 작은 날개를 퍼덕거렸다.
「친하구나.」
“오셨어요?”
어디를 다녀왔는지 아직도 한기가 묻어 있는 손이 머리를 슬슬 쓸어 넘겼다. 이원은 어색하지 않게 웃도록 노력했다. 지난겨울부터 둘의 사이는 이상할 정도로 경직되어 있었다. 막연하기만 한 이유는 어느 날 상청이 짓던 차가운 표정을 보고 나서 확실해졌다. 상청이 인간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사실을 이원은 그때 뼈저리게 느꼈다.
연인이 되어 줄까, 접문을 해 줄까 하며 그는 시종일관 다정하게 굴었지만, 이원이 인간의 탈을 벗어 던지지 못한다면 가식으로 끝날 일이었다. 어째서 사랑은 이리 사람을 유치하게 만드는 것일까. 이원은 부끄러움을 숨기지 못해 창밖을 내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홀로 붉어진 이원의 뺨을 보던 상청은 품 안에서 작은 꾸러미를 꺼냈다.
「선물을 준비했단다.」
“네?”
이원은 흰색 비단에 곱게 쌓인 것을 받아 들고 어리둥절해 고개를 갸웃했다. 풀어 보라는 재촉에 조심스럽게 비단 조각을 열었더니, 길고 붉은 끈이 하나 들어 있었다.
「저번 석찬 이후 생각을 좀 했단다. 해서 결심을 하게 되었지.」
“이건…….”
붉은 실은 별처럼 반짝거렸다. 명주실보다 얇은데 보석처럼 광택이 흘렀다. 홍옥 가루를 바른 옷감도 이보다 귀해 보이진 않으리라.
「보름쯤 전 월로에게 가서 받아 왔단다. 사실 네 짧은 생을 너무 묶어 두는 것은 아닌가 망설였는데…….」
만지기도 부담스러운 긴 실 위에 입을 맞추며 상청은 부드럽게 웃었다.
「인연을 맺을까?」
가슴이 마구 뛰었다. 겨우내 쌓였던 약간의 서운함은 눈이 봄날에 녹은 것처럼 씻은 듯 사라져 버렸다.
대번에 안색이 봄꽃처럼 붉어지는 모습을 보고 상청은 기분이 좋아져 휘파람을 불었다. 머리 위를 날던 제비가 날아와 꽃 한 송이를 내려놓고 다시 높이 날았다. 이 인연의 끈을 가져오기 위해 월화노인과 엄청나게 언쟁을 벌였다. 곤륜산이 떠내려가도록 싸웠으니 선계에 소문이 쫙 퍼졌을 것이다. 영보천존이 인간을 짝으로 삼았다고.
하지만 그러면 뭐 어떨까. 까만 눈에 기쁨이 번지는 것을 보니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말도 못 하고 가늘게 떨고만 있는 아이의 손을 끌어당겼다.
「물론 선택은 네가 하는 것이다.」
별을 박아 넣은 것처럼 반짝거리는 눈이 한 점 어두움도 없이 상청을 바라보았다. 상청은 인연의 끈을 연결한다는 게 무언지 알지도 못하는 인간을 두고 쓴웃음을 지었다가 냉큼 숨겼다.
「인간이 신과 연을 맺으면, 다시는 타인과 연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 두렴.」
“그렇습니까?”
「그래, 언젠가 네 수명이 다해 윤회를 시작하면 너는 홀로 외롭고, 외롭게 살 것이다.」
“그렇군요.”
이원은 마치 그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여상스레 대꾸했다. 겁을 먹거나 정색을 하겠지 단정 지어 생각하던 상청만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무섭지 않으냐?」
“무엇이 무서워야 하나요?”
만물지상을 아는 신보다 그중 일부밖에 알지 못하는 인간이라 더 용감할 때가 있었다. 이원은 진심으로 물었다. 평생을 다 걸어도 받지 못할 것 같은 구원과 사랑을 동시에 받았는데 후생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는지 의아했다. 이원이 정말로 인간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한 치 앞밖에 모르는 좁은 시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잘못은 아닐 것이다. 이원은 솔직하게 굴었다.
“후생은 제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지금 가장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훗날 새로운 네가 끝없이 고통받을지도 모르지.」
“죽어야 할 목숨이 살았으니 비참할 거라 이미 이야기하셨잖아요.”
인간 아이는 영리했다.
“매어 주세요.”
또한 마음을 동하게 할 줄도 알았다. 수줍은 듯 미소 짓는 입술은 끝이 올라가 있었고 잘 보이게 내민 손끝은 하얗고 투명했다. 사실은 붉은 실보다 봄꽃을 엮어 주는 게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
이미 약관(弱冠, 스무 살)도 지난 나이이니 인간으로 치면 성년인데, 술을 좋아해 늘 달고 산다는 것을 아는 데도 종종 손이 갈 때가 있었다. 지금처럼.
「자, 어떠하냐.」
월노는 인간과 그런 연을 맺는 것은 아니 된다 펄펄 날뛰었다. 분명히 후회하실 거라 태상노군과 똑같은 잔소리를 퍼부으며 실은 절대로 못 내놓는다고 난리를 부렸다. 상청도 그들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바보 같은 짓을 하고 말았다.
두 명의 손에 얌전히 묶인 채 연결된 실을 바라보며 이원이 입술을 칠칠찮게 헤, 벌렸다.
“좋아요.”
시와 글을 좀 더 열심히 배울 것을 그랬나 보다. 그래야 이 마음을 글월로 다 읊을 수 있을 텐데. 이원은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또 한 번 말했다.
“너무 좋습니다.”
활짝 웃는 아이의 모습이 마음에 들어 상청은 같이 웃었다. 둘의 등 뒤로 늘어진 버드나무가 아름다운 못에 나뭇잎을 흘렸다. 수많은 귀와 신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둘은 완전히 자신들만의 세상을 꾸려 나가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진 이원이 좀 더 어리광을 부리겠다고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평소라면 부끄러워서 소매도 겨우 잡을 텐데 인연으로 엮이고 나니 정말로 제 정인이 되어 주신 것 같아 뛸 듯이 기뻤다. 이원은 용기 있게 상청의 튼튼한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너는 얼마나 살려나?」
갑작스러운 질문에 이원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허리를 끌어안은 채로 얼굴을 위로 들자 상청의 눈이 아래로 내려와 시선을 맞춰 주었다.
“갑자기 무슨……?”
「선계의 음식을 먹고 시간을 멈추었지만 수명은 유한하단다. 네가 도(道)와 가까운 것도 아니니 불로장생은 요원한 일이지 않니.」
다정한 목소리와 따뜻한 시선으로 이런 말을 할 수가 있나. 이원은 충격을 떨쳐 낼 수 없어 입술만 벙긋거렸다. 물론 저는 언젠가 죽을 것이다. 태초부터 존재해 온 신과는 완전히 시간 선이 다른 것은 맞았다. 잘 알고 있는데도 왜 허공에 말을 내뱉고 억지 대화하는 기분이 드는 걸까.
기분이 정말로 좋았는데 단숨에 가라앉았다. 이미 묶인 붉은 실이 신과 연결된 것을 보며 이원이 물었다.
“그렇다면 언젠가 죽을 제게 마음을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런 것이 궁금하니?」
“궁금하지요. 남겨진다면 외로워지시지 않습니까.”
상청은 난간에 느슨히 몸을 기댄 채 제 손에 묶인 실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생각했다. 아이의 말은 맞았다. 언젠가 잡아 둘 수 없는 수명이 끝나고 나면 조금 허전하겠지.
「네가 어떻게 살아났는지 아느냐?」
그래서 상청은 질문으로 답을 했다. 작은 머리통이 갸웃하는 것을 보았다. 인간이란 모르는 것이 많다. 신들은 일부러 인간에게 제한적인 지식을 주었고, 직접 인계에 내려가 도와 지식을 전파했다. 그 모든 수고는 인간이란 아는 것이 적어야 탐욕을 덜 부린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아이도 알고 나면 탐욕을 부리려나? 냉소적인 질문을 던지며 상청은 설명했다.
「살고 싶어 했으니까.」
“저는 살고 싶다고 해서 스스로를 구할 능력이 되지 않았습니다.”
능력이 있었다면 여자로 위장하며 지내는 삶부터 이겨 냈을 것이다. 인간으로서 이원은 자신의 능력과 힘이 얼마나 미비한 것인지 잘 알았는데, 어찌 자기 자신을 구했을까.
「구원이 흔한 것이냐. 우리는 바라지 않는 것을 들어주지 않는다. 강제할 수도 없다.」
“강제할 수 없다고요?”
「너는 살기를 간절히 바랐기에 살았지.」
“그 말이 거짓이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오기라거나 순간적인 복수심 같은. 똑똑하게도 인간의 본성에 대해 지적하는 이원을 내려다보며 상청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너는 살아나지 못했을 것이다. 마음을 준 것도 이와 같다. 네가 강렬하게 열망했기 때문에 인연은 이어졌단다. 기억하렴. 우리는 한 점의 흔들림 없이 바랄 때만 기원을 들어줄 수 있단다.」
흔들림 없는 열망. 한참을 품에 안긴 채 고민하던 이원이 재차 물었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의 기원이 신께 들리지 않는 것은 어떤 연유에서입니까? 수백, 수천만의 기원이 모두 순수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네 이름자가 원(願)이었나?」
대답은 안 하고 이름의 뜻이나 묻는다. 일단은 그렇다 고개를 끄덕였더니 신이 손으로 입가를 쿡 찔렀다. 생각 없이 찔린 부위를 핥았는데 무엇을 발랐는지 달콤한 맛이 났다.
「세상의 흥망성쇠는 홀로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듯 강한 염원을 신들이 모두 듣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 어떨 때 선택을 받습니까?”
호기심 어린 질문에 상청이 조금 짓궂게 답했다.
「예쁘면?」
“……농은 하지 말아 주세요.”
「진심인데.」
겉껍데기에 싸여 있다고 안을 보지 못한다면 신의 이름자부터 버려야 할 것이다. 영보천존인 신은 늘 어둠 속에 숨어서 인간들을 바라보았고 그만큼 그들의 안쪽을 잘 살펴볼 수 있었다.
「태초에 인간들의 염원을 들어주었던 신들이 있었으나 모두가 실망했다.」
감상에 젖어서일까, 오래되었지만 상청에게는 어제 일 같기만 한 과거 이야기가 쉽게 나왔다.
「인간은 이상하게도 누리는 것이 많아질수록 아귀가 되어 아우성을 치더구나.」
「전쟁을 보았느냐. 가뭄에도 술과 꽃으로 목욕하는 자들은 또 보지 못했느냐?」
이원은 지금 이 나라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이 땅의 패자, 나라를 모두 통일하고 넓은 중원을 차지한 자가 있다. 황제는 고작 서른아홉에 이 땅의 역사를 달리하는 대업을 이루었다. 모든 것을 가졌으며 인간이나 신처럼 고귀하게 추앙받으며 권좌에 오른 황제는 자신의 권위를 펼쳐 보이겠다며 사람들을 외곽에서 강제로 복역시켰다.
강대한 국가를 만들겠다고 선포하며 한 정책은 오히려 나라를 좀먹었다. 이제는 그로도 모자라 무한한 생명을 원했다. 자신의 어린 누이도 그 탐욕으로 죽지 않았던가.
「지금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놈도 고약하고 방자하기 짝이 없지.」
「시황제를 말씀하십니까.」
「황제라. 그 말부터가 우습지. 겨우 인간 주제에 삼황오제(三皇五帝)*의 글자를 따다니.」
이원은 삼황오제 중 한 명을 실제로 만난 적이 있다. 열로 앓아누웠을 때 약을 지어 주러 온 신농이 삼황 중 한 명이지 않았던가. 이원의 뺨에 입술을 붙이며 상청이 잠깐 눈을 감고 최초의 역사를 기억했다.
처음 누런 먼지가 펄럭이던 땅 위에 복희와 여와, 신농이 내려가 인간을 만들었고 공생하기 시작했다. 많은 자들의 합의와 찬성이 있었기 때문에 행한 일이지만 상청은 아직도 분했다. 땅이 더러워지고 탐욕이 곤륜산을 무너트리고 음양오행을 어지럽히고 나서야 인간을 사랑하던 것들도 정신을 차리겠지.
왜 태상노군이 그렇게 인간과 어울리는지, 원시천존이 인간을 눈감아 주는지 상청은 이해할 수 없었다. 많은 신들이 인간에게 너무나 호의적이기에 상청은 여전히 잊힌 신으로만 존재했다.
그림자의 역할을 자처하는 영보천존은 인간들에게는 이름자도 잘 모르는 신이 되었고, 귀신들의 왕으로만 남았다. 누군가는 영보군, 하고 그를 친근하게 부르며 인간들 앞에서 위명을 떨쳐 보는 것이 어떻겠냐 설득했지만 단칼에 거절했다.
「인간이란 분수를 모른다.」
“…….”
「종종 나는 왜 우리가 인간과 공생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단다. 얼마나 더 나라를 갈아 치워야 조금 멀쩡해지려나?」
신이 말하는 인간에 대한 불신과 증오는 역사와 함께하고 있었다. 이원은 어두워진 눈을 숨기려고 일부러 품 안을 파고들어 버렸다.
「이런, 무섭니?」
아니라 대답하고 싶었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상청은 품 안에 웅크리고 숨을 죽이는 아이의 등을 도닥거렸다.
「무서워하지 말렴. 너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니지 않니.」
이원은 그가 무섭지는 않았다. 단지 자신마저도 탐욕스러운 인간으로 변해 그를 실망을 시킬까, 그것이 무서웠다. 속이 상한 마음을 삼킨 채 숨어 있자 다정한 척 하지만 차가운 손이 어깨를 잡아 왔다. 이끌리듯 몸을 떼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름답게 웃고 있는 얼굴이 얼어붙은 몸을 달랬다. 미끄러지듯 날래게 입술이 겹쳐졌지만 이원은 속 시원하게 웃지도, 감동하지도 못했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무엇을 읽고 있었지?」
다시 묻는 말에 고개를 거두고 제목이 적힌 죽간의 앞을 내려다보았다. 오래 읽어 먹이 흐릿하게 바래 있었다.
“춘추(春秋)입니다.”
「재미도 없는 것을 붙들고 있구나.」
상청은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대놓고 싫은 티를 내는 모습을 보며 이원이 짤막하게 웃었다.
“왜 그렇게 질색하세요?”
「글쎄다, 나는 인간이 기록한 사서는 그리 즐기지 않는단다.」
“춘추는 사실적이지 않습니까?”
「기록하는 자가 이것이 사실이라 읊으면 그것이 죄다 사실이더냐? *」
읽고 있던 죽간을 멋대로 뒤적거리며 상청이 약간의 짜증을 냈다. 역사를 실질적으로 살아 목격하는 자와 그것을 기록하는 사람의 생각은 분명 차이가 있긴 할 것이다. 춘추라고 해서 개인의 비판적 의식이 들어가지 않은 것도 아니긴 하지만, 상청은 과할 정도로 싫어했다. 이원은 자신이 무슨 잘못이라도 지은 건 아닌가 눈치를 보았고 상청은 여전히 책장만 휙휙 넘기며 읽었다.
「숨기고자 하면 숨겨지는 것이 진실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진실이 밝혀지기 마련이지 않습니까?”
「네가 사실 사내아이라는 것은 밝혀질 것 같으냐.」
몸을 내리 죄는 말이었다. 이원은 황망한 시선을 둘 곳이 없어 아무렇게나 놓여진 죽간에 적힌 글자를 내려다보았다. 무엇이 적혀 있는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잠시나마 잊고 지냈던 과거가 떠올랐다. 인간의 기억력은 얼마나 하찮고, 무거웠던 것은 얼마나 가벼워지는가. 자신은 여인의 치장을 했던 날도, 비참함에 몸을 웅크리고 울었던 날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저는.”
「네가 남아라는 것을 알고 있는 자도 있었지만, 망자(亡者)는 원래 말이 없지 않으냐.」
이상한 말에 이원은 움츠러든 어깨를 펴고 상청을 올려다보았다. 상청은 혼돈이 깊게 머물러 있는 눈을 잠깐 바라보다 그 위에 입을 맞췄다. 부끄러운 소리가 났다. 눈꺼풀 위에 몇 번 더 입술을 붙여 주자 창백하던 얼굴에 혈색이 돌아온다. 어떻게 보면 참 쉽기도 하고 귀여운 아이인데 말이지. 상청은 그리 생각하며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 몇 개를 늘어놓았다.
「화형의 제물로 올려진 그날 밤에, 네가 남아라는 걸 알고 있던 여자 둘은 모두 죽었다.」
“……유모가?”
그리고 말 못 하던 종이?
머리 장식을 쥐여 줄 때 눈물만 뚝뚝 흘리던 억척스러운 얼굴을 생각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잔인한 사람이었다는 말인가? 이원은 무너지는 고개를 겨우 바로 들었다. 상청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진정한 사실을 읊었다.
「그날 있었던 일은 사관에 의해서도 기록되었지. 뭐라고 적었더라…… 이씨 가문의 차녀, 원이 가뭄을 위한 제물로 바쳐졌다. 하늘에서 받으실 수 있도록 제단은 산처럼 높았다. 많은 이들이 기뻐하며 신에게 빌었다. 불타는 제단은 크고 밝아 해가 두 개 뜬 것 같았다. 황제께서는 가문의 희생으로 곧 비가 내릴 테니 걱정하지 말라 수고를 치하했고…….」
“…….”
「황제의 총애를 받아 대흥을 얻는 것 같던 가문은 그로부터 보름 뒤에 멸족을 당했다.」
“…….”
이원은 눈을 깜박였다. 상청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이해가 가지 않아 감정이라곤 깃들어 있지 않은 새카만 그의 눈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말을 하다 말고, 상청은 혀를 차며 손바닥으로 이원의 눈을 덮어 버렸다.
「내 눈을 오래 보면 좋지 않다고 말하지 않았니.」
“가문이…….”
「인간이 나의 눈을 보면 빛을 잃는단다.」
“어째서, 멸족을…….”
「말을 듣지 않는구나.」
둘은 완전히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가려진 시야에는 어둠이 습하게 잠겨 있었다. 말을 하기 위해 이원은 입을 열었지만,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이원은 원하는 것을 묻기 위해 노력했고, 더불어 한참을 망설이고 또 망설인 뒤에야 겨우 하나를 물을 수 있었다.
“어째서 제 가문은 죽임을 당했습니까?”
「겨우 그런 것이 궁금하니?」
“제, 집이었으니까요. 제 혈육이니까요.”
「너를 사지로 내몬 가족이 무엇이 소중하다고?」
상청은 이원이 하는 말이 정말로 이해되지 않았다. 왜 그런 사소한 것을 묻는지 알지 못하였으나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 주었다.
「비가 내리지 않았으니까. 황제를 기만하였다는 죄를 물어 죽임을 당했지. 필요하면 사관이 기록한 문서를 가져다주랴?」
숨이 막혔다.
자신이 지내는 이 산은 늘 풍요롭고 눈과 비가 제때에 내려, 가뭄으로 사람들이 받았을 고통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있는 힘껏 팔뚝을 꼬집어 보았지만 눈물만 나왔을 뿐이었다. 손바닥 중간이 갑자기 습해지자 상청이 놀란 것처럼 몸을 조금 움찔거렸다. 이원이 손을 들어 눈을 가린 손바닥을 끌어 내렸다. 신의 얼굴은 여느 때와 변함없이 평온하기만 했다.
눈이 부셔서 그런가, 다시 한번 눈가가 젖어 왔다. 분명 아파야 할 곳은 눈인데 이상하게도 가슴팍이 시리고 따가웠다. 이원이 인간이라는 것을 상청이 아주 종종 잊었다가 깨닫는 것처럼 이원도 눈앞의 남자가 영보천존임을 다시금 깨달았다. 아무리 웃는 얼굴로 가장하여, 자신을 달콤하고 사랑스럽게 어루만져 주었다고 해서 그가 신이 아닌 것은 아니었으므로.
“왜……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까?”
「제물은 거짓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지.」
골목길에서 처음 마주한 뒤로 남자의 태도는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 인간을 연인으로 두었다고 해서 연인의 종족이 면죄부를 받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것을 봐 주었어도, 봐주지는 않았다. 이원은 상청궁에서의 풍요로운 삶에 사로잡혀 너무 많은 것을 방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상청은 이대로도 아무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그의 무심한 대답과 변하지 않는 표정이 비가 내리지 않아 수많은 사람이 가뭄으로 죽는 것을 방관하고 있었음을 알렸다.
“그래도…… 비가…… 아니, 저는…… 남자지만…….”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도 잘 몰랐다. 이원은 매달리는 것처럼 상청의 흰 옷자락을 쥐었다. 소매가 넓은 옷도, 넓은 가슴팍도 늘 안겨 있기 좋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는 어찌 이렇게 무심하실 수 있단 말인가. 아니면 그저 착각이었나. 그랬던가.
“왜 말해 주지 않으셨습니까?”
「물어보지 않았으니까.」
“왜 비는 내리지 않았습니까?”
「말했잖니, 제물은 가짜였으니까.」
“제가 여아였다면 비를 주셨을 겁니까?”
「아니.」
“어째서요?”
「내가 왜 인간의 흥망성쇠에 관여해야 하느냐.」
신은 그림처럼 매끄럽게 웃었다. 여름의 초목이 향기를 진하게 내뿜어 코와 입을 구실하지 못하게 막았다.
「나는 신이란다.」
“…….”
「원아, 내가 왜 인간의 기원을 들어주어야 하지?」
소매를 쥔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이원은 상청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채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는 대답을 듣길 바란 것은 아니었다는 듯 재촉하지 않은 채 차갑게 식어 가는 몸을 버려두고 정자에서 일어났다.
홀로 버려진 채 이원은 허망하게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제야 붉은 실이 이어졌는데 어째서 끊어진 기분이 드는 것인가. 천상계에서 단숨에 지옥으로 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어찌 이리 비참하지. 무슨 말이라도 해 보려고 입술을 움직였는데 짐승 울음소리가 나왔다. 얼른 손을 올려 얼굴가를 더듬었다. 축축했다. 왜 이런 것으로 우는 것이냐, 자신을 달랬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싫어하던 가문인데 몰살당하면 또 어떤가. 살거나 죽거나, 인간 세상의 일은 이미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아닌데. 상청의 말 하나 틀리지 않았는데도 숨통이 조였다. 헐떡거리며 울음을 뱉어 내는 소리가 원림에 가득 찼다.
「왜 울고 있느냐.」
속이 상할 대로 상해 있는데 인자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달래는 목소리인데 더 아프라고 긁어 대는 느낌이라 두통이 왔다. 이원은 젖은 눈을 들어 올렸다. 보기만 해도 짜증이 치솟는 쥐대가리와 백발의 노인이 함께 서 있었다. 이원은 고개를 돌리며 불손하게 대꾸했다.
“별일 아닙니다.”
「이놈 말하는 꼴 좀 보게.」
갑자신장이 버릇없다고 으르렁거렸다. 이원은 눈물방울을 매단 채 위엄은커녕 하찮아 보이는 쥐 머리를 보며 코를 들이켰다. 훌쩍, 그 가련한 소리에 갑자신장은 화를 내려다가도 김이 샜다. 절대 옆에 있는 태상노군이 그만 되었다고 손을 저어서는 아니었다.
「조금 전 언쟁을 보았다. 괜한 모습을 훔쳐보아 미안하구나.」
“되었습니다.”
되긴 뭐가 되었어? 옆에 있던 갑자신장이 끼어들어 쏘아붙였다.
그분은 우리의 왕이시다. 오로지 귀신의 영혼만을 챙기고 사랑하시는 귀들의 왕이시다. 수많은 존귀한 신들을 왕이라 부르지 않으나 우리는 영보천존만은 애정을 담아 왕이라 부른다.
「너는 인간이라 모르는 모양인데, 본디 신이란 영원을 사는 존재라 인간과는 어울릴 수가 없단다. 이 모자란…….」
“알아요!”
찢어질 듯 병약한 목소리에 심술궂게 으르렁거리던 갑자신장이 말을 하다 말고 눈을 크게 떴다. 성격이 조금도 좋지 못한 인간의 눈에서 무언가가 뚝뚝 떨어졌다. 그 눈에서 흐르는 물방울은 운다 하면 피눈물을 흘리며 원통해하는 귀신들의 것과는 달리 투명해 빛이 통과하고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고 말했지만, 그 얼굴은 모든 것을 상실한 자와 비슷했다. 이원이 소맷자락으로 흠뻑 젖은 얼굴을 닦아 냈다.
“그렇지만 저는 인간 아닙니까. 그래요, 이기적으로 굴어 보았습니다. 평생에 단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던 것을 가지게 될 것 같아 주제도 모르고 잡아 보았습니다.”
아름다운 원림은 어느새 주인을 새롭게 인식한 것 같았다. 늘 달빛을 받는 연못의 중앙에 놓인 정자에 앉아 다리를 뻗고 책을 읽거나 술이나 차를 마시며 경치를 구경하고, 새롭게 쓴 글귀와 시를 하나씩 물속에 빠트리던 자의 기분에 맞추어 가냘픈 나뭇가지를 흔들며 잎을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계절이 빠르게 지고 있었다.
언젠가 봄이 좋다면 유지해 줄까 물었던 오만한 신의 제의가 생각나 이원은 힘없이 웃었다. 어찌 보면 미물이나 마찬가지인 정원도 자신의 마음을 달래 주려 하는데 왜 신이라는 것들은 모르는가.
내가 욕심이 많아서? 지은 죄가 커서? 성격이 나쁘고 독한 놈이기 때문인가.
그런 벌은 저 지옥 어딘가에 내려 주시지 그러셨나.
“축복을…….”
이원은 스스로가 지독하게 모자란 놈이라고 욕했다.
“한 명이라도 축복해 주실 줄 알았습니다. 걱정과 경고가 아닌 축언이요. 다 괜찮을 거라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요.”
뒤늦은 말을 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때도 시기도 늦어 버린 투정은 적어도 이 노인에게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원하는 자는 들어 주지 않을 것을 알아 이원은 그냥 쓸쓸하게 웃었다.
태상노군은 침묵했다. 그는 이원의 서러움에 조금이나마 공감했다. 시간이 얼마가 더 지나도 이 아이는 자신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듣지 못할 것이다. 자신조차도 해 준 적이 없었다. 그렇게 너그럽게 도를 깨치면 인간도 신선이 될 수 있다고 떠들어 놓고는 정작 신과 사랑을 할 수 있다고는 말해 주지 않았다.
“상청께서도 해 주시지 않는데 누구에게 바라겠습니까.”
그래, 상대가 상청이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신선계에는 수많은 신들이 있었고, 인간과 관계를 맺어 반인반신의 영웅을 낳은 자들도 있었다. 이원 역시도 그렇게 결실을 볼 수도 있었지만…… 태상노군은 단 한 번도 흔하다면 흔한 사례를 이들에게 갖다 붙여 보지 못했다.
상청이 누구인가. 영보천존이다. 혼돈의 상징이었다. 태상노군의 쌍둥이 형제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노자라는 이름으로 인계에 나가 설법을 전파하는 빛이라면, 영보천존은 귀신들을 어루만지며 그림자 속에서 뒷면을 보았다. 인간과 지독하게 친하지 않은 신이었다.
방금도 듣지 않았나. 정인이 되었다고 당당하게 말한 뒤로 솜털처럼 짧은 시간이 흘렀을 뿐이었고 그는 바뀌지 않았다. 사랑에 대해 근본적인 이해조차도 하지 않는 신은 그저 순리와 율법, 강함만을 추구하는 자였다.
태상노군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영보천존이 인간을 사랑한다면 그 결말을 저주와 비슷하게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태상노군은 하나하나 다 설명을 해 줄 수가 없었다. 축복이라는 것은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언행이다. 불안과 이성적인 판단을 모두 잊고 행복해지라 말해 주는 게 어려웠냐 물으면…… 절대로 아니었다.
“하지만 바랐습니다.”
아이는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것이 죄입니까? 제가 욕심을 과히 부려 화를 샀습니까.”
아니란다, 태상노군이 달래 주기도 전에 이원은 감히 확신에 차서 먼저 답했다.
“아니요, 저는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눈 안에서 깊은 슬픔이 불꽃이 되어 터졌다.
“제 죄는 하나뿐입니다, 노군.”
이원은 종종 상청의 부탁으로 꾸러미를 들고 가파른 산을 걸어 태청궁의 문을 두드렸다. 그때도 이원은 태상노군을 노군, 하고 줄여 부르며 즐겁게 웃었다. 칭송과 경애를 담았던 호칭은 이제 와 처연한 원망을 담고 있었다.
“그저 너무 오래 살았다는 거예요.”
찢어질 듯 가난한 마음이었다. 이원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차마 웃을 수가 없었다.
「원아.」
이름자가 불렸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신께서 말씀하시는데 대답도 없다고 갑자신장이 무슨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구박이 없었다. 그게 더 서러워 이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죽어야 할 혼이 살아, 운과 복록은 없이 비참하기만 할 거라 하셨는데…… 이상하게 하루하루 즐겁고 너무 편해 의아했습니다.”
정말로, 이렇게 행복하고 평온한데 어째서 비참할 거라 하셨을까 생각했었다. 상청은 자신에게 다정하셨고, 상전의 눈치를 보아 그런 건지 몰라도 귀신들도 무례하게 굴진 않았다. 집안에서는 늘 목숨을 위협당하여 눈치만 보고 살았는데 이곳에서는 그럴 일도 없었다. 먹고 싶은 것은 늘 주었고, 흰 겨울 새벽에도 원한다면 자두와 수박을 먹을 수 있었다.
몸이 편해지니 마음이 방만해진 것이다.
내 아비와 다를 바가 없구나. 부와 권력의 맛을 보았더니 잃을 수가 없어 사내자식을 여자로 바꾸어 사지로 내몬 것과, 감히 가져서는 안 될 것을 바란 내가 무엇이 다르던가.
나는 죽었다. 불길에 죽어 이미 존재하지 않는 혼이었다.
“피곤하네요.”
「…….」
“무례하지만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일 보고 조심해서 돌아가십시오.”
꾸벅 절을 하고는 제가 머무는 별채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겁다. 축 처진 어깨는 노골적일 정도로 안쓰러웠다.
태상노군과 갑자신장은 서로 눈을 마주치고는 나란히 한숨을 쉬었다. 옳으나 옳지 않은 짓을 한 기분이었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갑자신장이 먼저 발뺌을 했다. 누가 이 상황에서 죄책감을 덜어 내고 싶지 않으랴. 태상노군마저도 고개를 저으며 정자에서 물러났다. 해야 할 일이 아직 많았다. 한 인간에게 계속 신경을 쓰고 있을 수는 없었다.
다음 날이었다. 안 그래도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진 마음이 통제되지 않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눈이 보이지 않았다. 홀로 어둠의 세계에 툭 하고 던져진 기분이었다.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앞을 잘 보던 별채 손님이 갑자기 실명이 되었다 난리를 치니 아랫것들도 당황해 혼비백산이었다.
열병이야 익숙하다지만 눈이 안 보이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 아닌가. 상청을 찾아 고해야 한다고 한 놈이 일렀지만, 그는 지금 신선계의 고위 신들과 함께 모여 인간 세상의 역사를 논하고 있었다. 늘 이원의 병을 보아 주던 신농 역시도 삼황오제의 하나로 회의에 참석하고 있던 것이 문제였다. 역사의 흐름을 논하는 회의는 언제 끝이 날지 몰랐고, 아무도 근처에 갈 수 없었다. 결국에는 그저 기다리라는 말만 있었을 뿐이다.
그저 몸이 불편한 것이라면 하루 이틀쯤이야 더 참을 수 있다. 그러나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은 당장 공포심을 일으킨다. 만만한 귀신들조차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어린 인간의 마음에 텅 빈 공터가 생겼다는 사실은 알게 모르게 바람을 타고 널리 퍼졌다. 지켜 주는 자는 아무도 없었고, 앞을 보지 못하는 인간은 홀로 무방비하게 방치되었다.
이원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던 귀들도, 적대를 가지고 있던 귀들도 똑같은 귀신이었다. 그것들은 인간의 불안한 마음을 파먹고 산다. 귀신을 사랑해 그것들이 인간에게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잊었던 상청의 두 가지 실수 중 하나였다.
“이건 무슨…….”
당장 찻잔을 잡는 것조차 힘들다. 씻는 것은 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욕조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미끄러져 머리통이 깨질지도 모른다. 이원은 요를 잡아 구기며 여린 입 안쪽을 어금니로 질끈 깨물었다.
조금 전부터 닫힌 방문 바깥과 창밖이 소란스러웠다. 귀곡성이 들끓고 있어서 도저히 방을 나갈 수 없었다. 허기와 갈증도 잊고 마른침을 삼켰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름 정답던 것들이 왜 이렇게 난리를 치는지 이원은 이해하지 못했다.
발끝으로 앞을 조심스럽게 더듬어 마른 바닥을 확인하고는 침상에서 겨우 밑으로 내려갔다.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깜박거려도 한 줄기 빛조차 새어 들어오지 않았다.
두려움이란 이런 것인가.
자신과 눈을 오래 마주치면 좋지 않다던 상청의 말이 머릿속을 빙빙 맴돌았다. 그러고는 이내 날카롭게 이를 딱딱 부딪치며 신경질적으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너같이 말 안 듣는 것은 필요 없단다. 독종 같은 인간. 뺨을 내려치는 잔인한 말에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이건 환상이다. 들어 본 적 없는 말이다. 잘 알고 있는데도 너무 생생했다.
꿈속에서 육신이 짓이겨진 누이가 나왔다. 머리가 산발이 된 채로 축 늘어진 그녀의 아랫도리에는 유혈이 낭자했다. 불로불사를 평범한 인간이 이루어 줄 수 있을 리가 만무한데도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능욕을 당했다. 열둘이었다. 겨우 열둘인 아이에게 황제는 그렇게 무참한 짓을 하고는 사지를 찢어 죽였다.
누이는 이제야 다시 나타나 매정한 오라비를 욕했다. 어째서 공양 한 번 치러 주지 않았냐고 화를 냈다. 동강 난 사지를 바닥에 굴리며 고함을 치는데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잘못했노라 이마를 돌바닥에 찧으며 사죄했지만, 누이의 분은 풀리지 않았다. 누이는 이원을 저주했다. 고작 열두 해를 산 자는 생귀가 되어 목을 졸랐다.
오라버니, 왜 그러셨어요. 왜, 저를 버리셨어요.
누이의 피눈물이 뚝뚝 떨어져 이원의 가슴팍을 적셨다. 둥그렇게 번진 핏방울 고인 부근을 시작으로 심장을 뚫고 몸 안에서 수많이 많은 손이 튀어나왔다. 이원의 사지를 뚫고 나오는 흰 손들은 점점 많아졌다. 그것들이 배 속의 장기를 휘젓고 심장을 움켜쥐자 코와 귀에서까지 피가 줄줄 터져 나왔다. 배에서 솟아 나온 손은 이내 팔뚝까지 올라왔다. 피가 다 빠져나가 하얗게 질린 손에는 핏줄이 우뚝 맺혀 있었다. 이원은 저것이 누구의 팔뚝인지 알았다.
누이, 유모, 말 못 하는 종, 아버님, 형님, 어머니, 가솔과 근방의 사람들.
그 모든 것들이 이원의 몸 안에 있었다. 흐르는 더러운 피에 잠겨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왜 너만 살았느냐며 꿈속에서 분탕질을 쳤다.
아아, 아아아. 이원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비명을 질렀다. 텅 빈 마음에 나를 좀 들여보내 달라고, 생명의 정수를 빨아 먹게 해 달라고 귀신들과 죽은 것들이 죄다 모여들어 아우성을 치며 괴롭혔다.
이원은 썩은 피를 게워 내며 바닥을 뒹굴었다. 보이지 않는 눈 안에서 새로운 눈이 열렸다. 익숙한 방의 천장에 귀신 하나가 긴 사지를 늘어트리고 거꾸로 붙어 있었다. 각기 다른 괴물의 팔다리가 달린 귀신은 몸이 너무 아프다며 비명을 질렀다.
꿰엑, 돼지 목을 조르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긴 몸이 방바닥에 철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가 다시 벽을 타고 기어 올라가 천장에 머리를 쾅쾅 처박았다. 서로 다른 팔다리는 완전히 따로 놀아서, 어떤 것은 벽을 긁고 어떤 것은 천장에서 떨어지기 위해 몸을 쿵쿵 쳐 댔다.
자신은 저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상청을 골목길에서 처음 만나고 헤어진 날, 가위에 눌리며 보았던 괴상한 귀신이다. 저 끔찍한 것이 왜 다시 나타났는가.
전신에 죽음이라는 것을 매단 귀신이 인간 머리를 한 상체를 번쩍 치켜들었다. 각기 다른 수많은 사지가 징그럽게 벌떡거릴 때마다 뱀의 몸뚱이에서 비린내 나는 비늘이 툭툭 떨어졌다.
네가 죽어야 우리가 산다. 맨 처음 달린 인간의 손이 튀어나와 목을 졸라 댔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어그러진 몸을 들썩였다. 무력하게 방치된 몸 안으로 귀신이 들어와 텅 빈 마음을 후려쳐 부쉈다. 새파란 음기를 띤 빛을 쪼인 눈이 고통을 호소했다.
“아악, 으아아!”
아프다, 너무 아팠다. 눈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시야에서 발버둥 치다 입 안에서 비린 맛이 크게 나는 피를 한 움큼 왈칵 토하며 바닥을 굴렀다. 눈은 다시 보이지 않았다. 귀신은 어디로 갔는가. 누군가 와서 구해 주었으면 좋겠다 빌었으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오히려 방 바깥의 아우성이 더 거세졌다. 더 파헤쳐라, 더 크게 벌려서 들쑤시고 비워라! 그 고함을 따라 점점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성대가 찢어질 것처럼 목이 다 쉬도록 울면서 괴로워하고 머리를 쿵쿵 처박았다.
아니, 제 머리를 잡고 처박는 자는 따로 있었다. 이원은 보이지도 않는 손이 제 긴 머리채를 잡고 방 안 이곳저곳을 질질 끌려다녔다. 어둠이 눈에서 튀어나와 몸을 적신다.
벌을 받는 건가, 혼자 살아 있는 죄를? 인간임에도 신에게 편파적인 사랑을 원한 욕심의 죗값을 치르는 것인가?
아니면…… 이 또한 상청이 원하셨나.
빈 마음을 찢어 대며 귀신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외쳤다. 어찌 살아 있느냐. 살았는데 죽었고, 죽었는데 살았으니 너는 유혼(幽魂)보다 못한 존재구나. 깔깔 웃는 입들은 죽음을 강요했다. 죽어라, 죽어라, 죽어야 여기 올 수 있으니 죽어라.
또한 귀신들은 죄책감을 부채질했다. 네가 호의호식을 누리며 지내는 동안 집이 모조리 불탔다. 네 아비는 다섯 필의 말에 사지가 묶여 찢겨 죽었다.
이원은 귀신의 외침을 들을 때마다 비명을 질렀다. 나중에는 목이 완전히 나가 피만 줄줄 흘렀다. 몸에 부딪힌 집기가 부서져 바닥을 굴렀다. 해가 졌는지 방 온도가 식자 괴롭힘은 더 심해졌다. 방바닥을 긁다 손톱이 부러지고 생짜로 뽑힌 머리카락이 한 뭉치는 되었다. 눈물이 줄줄 흘러내린 눈가가 짓물러 따갑고 쓰라렸으나 돌봐 주는 이 하나 없었다.
얼마나 자신이 편안하게 살았는가. 이원은 침상이 있는 부근에서 몸을 웅크린 채 벌벌 떨면서 참회했다. 미안하다, 미안합니다. 대상도 모르는 존재에게 끝없이 빌며 울다 토하고, 악을 쓰며 기절했다가 다시 억지로 깨어나 문초를 당해 까무러치기를 반복했다.
죽어서도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고통의 시간은 어느 순간 끝이 났다. 혼곤해진 몸으로 늘어진 채 앞을 보았다. 기이하게도 다시 세상이 보였다.
“아…….”
목소리도 멀쩡하게 나온다. 상처 입고 굴렀던 몸도 말끔해져 있었다. 엉거주춤 의자 하나를 짚고 일어나 면경을 보았다. 며칠인지도 모르는 시간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굶으며 고문을 당했는데도 혈색이 돌고 있었다.
“이게 어찌 된…….”
꿈이었을까. 그런 꿈을 꿀 수 있나. 비틀거리며 방 바깥으로 나갔다. 소란스럽던 것들은 다들 시침을 뚝 떼고 비질을 하거나 창문을 닦고 있었다. 그중 닭 부리를 가진 것 하나를 붙들고 물었다.
「뭐야.」
“지금 며칠이나 지났어?”
「네놈이 밥도 걷어차고 처박혀 두문불출하더니 헛소리를 하는구나. 딱 사흘이다.」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버텼다고? 이원은 뱃가죽을 더듬었다. 몸은 전과 다를 게 하나 없어 보였다. 오히려 가벼웠다. 뭔가 텅 비어 버린 기분이 들기도 했다.
시끄럽게 굴지 말고 좀 비키라는 짜증에 등을 돌려 별채 바깥으로 나갔다. 잎사귀 비비는 바람 소리가 크게 들렸다. 교량까지도 가지 않고 풍성한 녹음을 보고 있는데 이상하게 숨이 막혔다. 작은 꽃의 잎맥 하나까지도 전부 눈에 들어왔다. 지금 불어오는 바람은 동풍이다. 이른 새벽이슬이 아직 가시지 않았는지 달콤한 맛이 혀에 감겨 들어왔다. 몸이 왜 이런지, 혼의 반 이상을 좀먹은 것이 무엇을 시키는지도 모르고 다리를 움직였다.
저곳으로 쭉 가면 상청이 있다고 누군가가 귀에 대고 달콤하게 속살거렸다. 가서 네 존재 이유를 여쭤보렴. 그 요사스러운 말에 이원은 고개만 끄덕였다.
상청의 실수 중 다른 하나는 이원이 겪을 사태를 조금도 예견하지 못하고 신들과의 회합에 참석했다는 것이다. 시공간을 걸어 닫고 이야기를 나눌 때는 어떤 것도 끼어들지 못했다. 모든 귀와 눈을 차단하고 겨우 사흘 밤낮을 논했을 뿐이지만, 그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이원의 혼과 육은 완전히 욕을 당한 뒤였다.
회합을 끝낸 그는 기분이 나빴다. 이번 회합에서는 현 황제의 퇴위와 나라의 변경을 논했다. 쓸데없이 인간의 우두머리를 바꿀 것이 아니라 나라를 싹 밀어 버리면 될 것을, 왜 이렇게 시간 낭비나 일삼는지 모를 일이라며 상청은 한참을 투덜거렸다. 여와가 인간을 위해 몸으로 하늘의 구멍을 막았을 때도 미쳤다고 생각했지만, 그 정도가 너무 심하다. 겨우 인간인데. 머릿수가 많은 것을 제외하면 아무런 가치도 없는데.
결과적으로는 오늘도 자신의 주장은 들어 먹히지 않았다. 게다가, 인간을 땅 위에서 지우고 싶으면 품 안에 거둬들인 인간 아이부터 죽이라니, 미친놈들이 아닌가. 상청은 평소보다 더 마음이 좋지 않았다.
어지러운 마음에 사로잡힌 상청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원림에서 시작해 기암절벽으로 이르는 산책길이었다. 조금만 걸으면 바로 나오는 아찔한 절벽에는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난 소나무가 땅 위로 뻗어 올라와 있어 이 원림의 사소한 자랑거리가 되어 주었다.
길가에 중간중간 심어 둔 능초(陵苕, 능소화)가 제철을 맞아 잔뜩 피어 있었다. 푸른 잎사귀와 어우러지는 붉은 꽃잎이 부러 꽃잎사귀를 살랑살랑 흔들어 비위를 맞춘다. 그 아기자기한 교태가 눈을 즐겁게 해 주었다. 부드러운 꽃잎을 정답게 어루만지다 절벽의 바로 앞까지 도달하여 아래를 보았다.
뾰족한 솔잎이 신을 알아보고 반갑게 흔들린다. 진한 향기까지 풍기며 마음을 평온하게 달래는 것이 말만 하는 다른 신들보다는 낫다는 기분까지 들었다. 오래 서서 아찔한 아래의 돌과 계곡을 감상하고 있는데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돌아본 자리에는 뺨이 붉어진 앳된 얼굴과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부산스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시간과 공간이 격리된 곳에서 소득 없는 이야기를 떠드는 사이, 아이가 아팠다고 전해 들었다. 사실은 아픈 것이 아니었지만 상청은 몰랐다.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귀신들이 고하는 것을 의심 없이 믿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프다 들어선지 과연 뺨이 조금 핼쑥해져 있었다. 제대로 묶지 않아 엉망으로 흩어지는 머리카락을 한참 보다 상청은 품 안에서 푸른 비단을 잘라 만든 머리 끈을 꺼냈다.
「머리가 엉망이구나. 묶어 줄까.」
이미 머리 끈까지 꺼내 들고는 의사를 물어보시는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이원은 다정하게 웃는 신을 보며 불과 이틀 전의 논쟁을 떠올렸다. 사실 논쟁도 아니었다. 일방적인 사형 선고였다. 아니, 사형은 아니다. 마음이 유약한 탓이리라. 지금 당장에라도 절벽 아래로 몸을 내던져야 한다는 속삭임을 애써 무시하고 상청을 보았다.
「머리가 많이 길었구나.」
“그렇습니까?”
「그래.」
이곳에서는 성년의 남자답게 머리에 관을 하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고 머리를 여인처럼 틀어 올려 묶을 이유도 없었다. 늘 풀어서 늘어트리거나 대충 질끈 묶어 두어서 길었는지 관심도 없었는데, 시간이 지난 만큼 머리카락이 자라긴 한 모양이었다.
순순히 돌아서자 상청은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올려 하나로 잘 묶어 주었다. 곱게 묶인 머리를 어색하게 매만지며 이원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다정한 상청의 손끝을 용기 내서 붙들었다. 혼몽에 젖어 있는 듯 손을 잡았는데도 이상하게 감각이 없었다. 부드러운 손등을 가볍게 쓸며 이원은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어찌 이곳에 왔더라. 어쩐지 눈이 바늘에 찔린 것처럼 따가웠다. 누가 등을 퍽퍽 밀었다. 재촉에 못 이겨 여쭈었다.
“상청께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이런 곤란한 것은 어찌 또 묻는 것일까. 집요할 정도로 달라붙는 시선을 냉정하게 떨쳐 내며 상청은 한숨을 곤하게 쉬었다. 토론은 꼬박 사흘을 쉬지 않고 이어졌고, 이견은 좁혀지지 않았으며 오늘은 회합을 빼고도 아주 바쁜 날이었다. 잠깐 산책을 한다고 해서 여유로워 보인다면 그것은 아니거늘, 왜 이 아이는 며칠 전의 일을 아직도 끌고 와 귀찮게 구는 것일까.
“인간은 외롭고 기댈 곳이 필요해 사랑을 합니다. 상청께 사랑은 어떻습니까?”
상청은 지쳤고 기분이 나빴기에 이원이 악몽과 혼란으로 가지게 된 틈을 몰랐다. 사흘간 혼이 욕을 보면서 단단하게 묶여 있던 마음이 틀어져 부조리가 생긴 것 또한 몰랐다. 이원이 죽은 운명을 가진 산 자였기 때문에, 육체와 영혼을 차지하고 있는 업이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을 수도 있었다. 그는 오로지 이 논쟁에서라도 이기겠다는 마음밖에 없었다.
「나는 완전한 존재다.」
사랑한다고 믿었던 자가 애틋한 목소리로 다름을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 나는 타인이 필요치 않구나.」
찢어지게 상처를 안겨 주었다.
「어째서 내가 인간과 똑같은 이유로 사랑할 것이라 믿는 것이냐.」
고집스럽고 완고한 목소리가 질문을 던졌다.
「내가 묻겠다. 사랑이란 위대한가?」
어려운 질문에 이원은 가만히 두 손을 내렸다. 절벽에서 자라난 푸른 송은 가지마저도 단단하여 풍랑에도 멀쩡하구나. 헛생각을 하며 겨우 대답했다.
“옛 성현들은…… 모두 사랑이 위대하다고 말했습니다.”
자칫 혀를 씹을 뻔하여 말도 더듬었다. 어리숙하게 바라보는 눈을 보았다가 금방 시선을 돌리며 상청은 혀를 찼다.
「원아.」
타이르는 음성이 이름을 먼저 불렀다.
「순수하고, 잔인하구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이원은 제 발치만을 어정쩡하게 내려다보았다. 누군가 다시 살금살금 똬리를 틀고 지껄였다. 보아라, 보아라, 산 이유를 보아라. 이것은 죄악이다. 죽은 자가 신을 틀어쥐었으니 업은 네 탓이다.
「사랑은 절대적이지 않다.」
시끄러운 마음의 소리보다 저 한마디가 상처를 주었다. 지난 수많은 밤, 사랑에 빠져 잠 못 이루며 품었던 기대감은 허상이 되었다. 사랑은 뜬구름 잡는 소리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았는데도 기대하였던 자신이 모자랐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루어 주지도, 들어주지도 않는단다.」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도 어째서 상처가 되는 것일까. 이원은 스스로가 의문스러웠다. 또한 의문을 가졌다. 그렇게 말씀하실 거라면 어째서 정인이 되어 준다고 하셨을까.
그 속내를 읽고 다시 요사스러운 목소리가 잔인한 사실을 속닥거렸다. 네가 바랐기 때문에. 겨우 그 이유 하나뿐이었다. 냉정한 말을 들으며 이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 외로울 것 같았다. 이미 지독하게 외로운지도 모르겠다.
「내가 너를 사랑하니, 너의 기원을 들어 비를 주었어야 함이 옳으냐? 너 하나를 향한 애정이 신으로서 나의 판단을 이겨야 하는 거였나?」
사랑이란 본디 그렇다고 들었다. 부러라도 이기심을 부리고, 투기라도 하고 싶어 하지 않았던가. 사랑이 처음이라 그런가. 아무리 여자 행세를 하고 있었어도 몰래 바깥에서 일부러 여성을 만나 연애놀음 비슷한 것이라도 해 봤어야 공감이나마 할 터인데.
“저는…….”
그러니 상청의 말은 전부 틀렸다.
“저는 그런 것을 바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원은 매일 잠을 설쳐 가며 생각했었다. 이 사랑이 정말 버거우면 어떻게 헤쳐 나갈까. 일단 손을 쥐고 놓지를 말아야지. 상청의 말 그대로 순진하고 어리석은 결심이었다. 이런 말을 들을 줄 알았다면, 정인이 되어 주랴 물으셨을 때 고개를 저었을 것이다. 입을 맞춰 주랴, 읽고 싶은 책을 구해 주랴, 먹고 싶은 과일 사 주랴, 좋아하는 단과자와 냉차 주랴 물으셨을 때도 고개를 저었을 것이다.
불태워지는 공포 속에서도 살 것이냐 묻는 감언이설에 고개를 냉정히 저었을 것이다.
어디서 능초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꽃송이가 통째로 툭툭, 바닥에 내려앉아 아름답고 슬프게 제 명을 다한다.
“반짝이는 삶도 제가 바란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원은 가슴을 움켜쥔 채 무릎을 꿇고 웅크렸다. 심장이 아팠다. 그래, 어찌 네모와 원이 능히 맞으며, 바라보고 있는 것이 다른데 누가 서로 편안한가. (*하방환지능주혜(何方圜睆之能周兮), 부숙이도이상안(夫孰異道而相安), 굴원,『이소(離騷)』)
“저는 그런 것을 바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너는 무엇을 원한 것이냐. 상청은 물어보려고 했으나 마주친 아이의 눈동자가 너무 낯설어 입을 벌린 채 소리를 내지 못했다.
“왕이시여, 제가 태어난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친 목소리로 이원이 물었다. 상청은 방금 바라는 게 무엇이냐 물어보려 했던 것이 부질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결국, 타인의 생명을 짊어지고 죽기 위함입니까?”
이 말을 하는 이원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사는 이유, 존재의 가치, 사랑에 대한 공정한 시선. 그따위의 진리와 비슷한 이야기들.
눈앞의 어린 인간은 오로지 공포와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눈에서 눈물이 새벽별처럼 흘러 하얗게 질린 입술을 적셨다. 귀신들이 본다면 잡아먹기 좋은 먹잇감이라고 침이라도 꼴딱 삼키려나. 무의식중에 그렇게 생각했을 참이었다.
그제야 알았다. 영민하였으나 순간 아둔했던 신의 눈에 비로소 흠집이 난 정인의 육신과 혼이 들어왔다. 저 안에 차 있는 어둠은 무엇인가. 깜짝 놀라 황급하게 손을 뻗었으나 아이는 뒤로 물러섰다.
“저는 죽겠죠. 이번에도, 그렇게…….”
제가 바라지 않는 의지대로. 자조적인 말에 상청은 황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눈앞에 선 인간의 영혼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억지로 붙들어 둔 혼이 발버둥을 쳤다. 상청은 저것이 어떤 현상인지 알았다. 급한 마음에 일단 말리고서 달래 보려 했다. 그러나 도통 알 수 없는 사이에 생겨난 악심과 인간의 분노를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원아.」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텅 빈 눈동자가 하늘과 땅을 한 번씩 보았다. 이원은 이미 망자의 강에 몸을 반쯤 담그고 순리를 읽고 있었다.
“연 따위는 끊어 내면 그만입니다, 신이시여.”
「……원아, 아가.」
“저는 저만을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날 것입니다.”
완고한 대답에 상청은 머리가 하얗게 변할 만큼 분노했다. 어리지만 영리하다고 생각했던 인간이 겨우 사흘 사이에 몸과 마음을 어둠에 잡아먹혀 헛소리하고 있었다. 죽음을 앞두고도 담대하던 시선이 마음에 들어 데려왔는데 어째서 이렇게 실망하게 한단 말인가. 그는 머리 한쪽을 짚은 채 화를 삭이며 둘 다 익히 알고 있는 진실을 다시금 읊어 주었다.
「신과 인연이 닿았던 자는 타인과 인연을 맺을 수가 없다.」
“알고 있습니다.”
「아는데 왜 그리 고집을 부려!」
결국 노성이 울렸다. 둘의 대치를 몰래 훔쳐보던 것들이 모두 깜짝 놀라 몸을 납작 엎드렸다. 꼿꼿하게 서 있는 자는 상청 본인과 그 앞에서 노성을 듣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버르장머리 없는 인간뿐이었다.
그토록 눈을 마주 보지 말라고 경고를 했는데, 이원은 두려울 것 하나 없다는 듯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무시무시할 정도로 싸늘하게 상청을 노려보고 있었다. 새파란 하늘을 찌를 듯이 담은 눈을 깜박이지도 않은 채 이원이 말했다.
“그깟 하늘의 연 따위 무시하고 목숨을 바쳐 저를 사랑해 주는 자를 만날 것입니다.”
「이미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하지 않았느냐.」
“사랑에 미쳐 천륜도, 인덕과 규율도 모두 어기는 자를 선택하겠습니다.”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또 한 번 윽박지르려 했다. 상청은 저 혼을 재워서라도 묶어 두려 했다. 어디서 났는지 모르는 억겁의 죄를 속에 쑤셔 놓고 흔들리다니. 정을 주고 인연을 맺었던 것이 아까울 정도로 엉망이었다.
「왜 지저분한 것에게 홀려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이야!」
“저는 진실을 보고 있습니다.”
울고 있는 이원의 눈동자에는 목소리에 없는 흔들림이 있었다. 탁해진 빛을 띤 눈은 이미 다른 것들을 보고 있었다.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는 고립된 풍경을 반사시키는 검은자위에 상청은 비명을 삼켰다. 왜 이 꼴이 되어 있는가, 어째서 이 영혼이 너덜너덜해져 이승에서 멀어져 있는가.
불길한 마음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북두성군이 와서 저 아이를 혼돈의 별이라고 언급했다. 아이는 그의 말처럼 완전히 수렁에 빠져 있었다.
“제 시간은 오래 머물러 있었지요.”
이원이 속삭였다. 바람이 흔들거렸는데, 얼굴에 불길이 느껴졌다. 그 기운에 상청은 화라도 내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었다. 어디선가 나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단단하게 잘 묶어 두었던 시간이 느슨하게 풀어진다. 살기를 바라는 집념에 의해 고정되었던 축이 이제 삶을 포기해 무너지고 있었다. 아이의 뺨에 더운 불이 번졌다. 이름자와 마찬가지로 소원을 비는 그 입술은 지독할 정도로 강했다.
「원아, 아가, 이러지 말아라. 제발…….」
신은 존재한 이후 처음으로 애원했다. 지금 붙잡으면 돌아올까. 어떤 말을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상청은 이원을 달래 보려 했다. 손이라도 잡으려 다가서면 점점 더 뒤로 물러나 억지로 웃는 얼굴을 보며 상청은 몇 번이나 고개를 저었다.
“이제 축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무엇이 이만큼 잘못되었던가. 상청은 어디서부터 건드려야 저 어둠이 사라질지 알고 싶었다. 인간을 미워하지만, 너는 사랑했으니 그렇다면 된 것 아니냐 거듭 호소해 보았으나 이원은 고개를 떨어트린 채 답이 없었다.
어둠에 잠긴 눈이 손가락에 묶인 붉은 실을 보았다. 처음 이 실을 건네주셨을 때는 기뻤지. 고작 인간인 주제에 주변의 만류와 걱정을 무시하고 고집을 부렸다. 저렇게 까마득한 존재인데, 너무 다른 자인데도 나만은 괜찮을 거라 방만하게 신을 사랑해 이 꼴이 났다. 이원은 사랑의 결말이 수치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배웠다.
누군가가 축복을 한 번이라도 해 주었다면…… 나았으려나. 아니, 아니다. 어차피 결심했으니 어떤 예외도 없어야 했다. 자의와 타의가 섞인 줄 모르고 이원은 그것이 전부 자의라고 믿었다.
혼란스러운 축으로 자라고 태어나 쌓아 온 업은 이미 도를 넘어 재앙을 일으켰다. 본인이 어떻게 휩쓸리는지도 모르고.
“말씀대로 저는 인간이니, 이제 인간을 사랑하려 합니다.”
「원아.」
“이때까지 주신 은혜는 혼백이 되어서나마 잊지 않겠습니다. 수복강녕하시옵고…….”
흰옷이 잘 어울리는 앳된 청년이 스산하고도 아름답게 웃었다. 늘 원아, 하고 부르면 돌아오던 사랑하는 웃음에 상청은 숨을 삼켰다. 하지 말아라, 만류해 보기도 전에 이원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새끼손가락에 묶인 끈을 끊어 냈다. 그 순간 이원은 팔 전체가 잘려 나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 누구와도 인연이 이어지지 않는다고. 그러나 외로워도 지금 이 순간만큼 외롭지는 않을 것이다. 활짝 웃었을 때 요란한 박수갈채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기억해 주시겠습니까.”
「그만하거라.」
“진심으로 은애했습니다.”
「너는 지금 사악한 것에 마음을 뺏긴 것뿐이다.」
“그것 역시도 제 마음입니다.”
겨우 한 뼘이 벌어진 거리를 다가갈 수 없었다. 제 마음대로 작별을 고하는 목소리에 상청은 생각했다. 인간이 싫다. 어째서 인간이란 이리 무정하고 연약한 생명인가. 어찌 저렇게…… 어둠에 먹히기가 쉬운가.
「너는 행복해질 수가 없다.」
“알고 있습니다.”
「사랑받을 수도 없다.」
“그것 또한 잘 압니다.”
「불행한 삶을 거듭하기 위해 윤회에 오르겠다고?」
이미 계절이 변했는데, 기이하게도 찌는 듯한 무더위였다. 마지막 더위가 심술을 부려, 한 뼘 앞서 도착한 태양이 볼을 도닥거린다. 이원이 찢어질 듯 가파르게 숨을 몰아쉬었다.
“행복하세요, 상청.”
「…….」
“오래오래, 행복하세요.”
이전에 국화주를 건네며 그가 이원에게 말했었다. 오래오래 살 거라. 그 축원은 아무것도 아닌 말이 되었다. 머리를 곱게 묶어 주었던 푸른색 비단 머리끈보다 실속 없는 것이 되었다. 사랑은 끝을 지닌 약조와 함께 사라졌다. 상청은 처음으로 자신의 힘과 기원에 무기력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을 느끼게 한 가장 악랄하고 힘없는 인간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청거렸다.
이원이 눈을 힘겹게 떴다. 태양 빛이 뜨거웠다. 몸 전체가 서서히 발화하고 있었다. 머물렀던 시간, 정박하여 있던 신체. 불길에 상하기 직전에 고정해 두었던 세상이 다시 돌아갔다.
능초 한 송이가 다시 툭, 통째로 떨어진다. 손가락도, 발가락도, 종종 상청이 빗으로 착실하게 빗겨 주던 머리카락과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어 주던 뺨이 불길에 태워졌다. 우습게도 그때만큼 아프지는 않았다. 지난 사흘 밤의 고초와도 비교할 수가 없었다. 평온했다.
고통은 금방이었다. 백골도 남지 않았다. 북녘에서 별이 마지막으로 반짝일 때 이원의 혼백은 거두어졌다. 스산히 흩어지는 먼지 같은 육신을 보며 상청은 눈을 감았다 떴다. 그는 세상의 모든 만물을 굽어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이 사랑하던 인간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모든 인계와 신선계를 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적막한 세상이었다.
「행복하라고?」
상청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는 외롭게 서서 불에 그슬린 자국만 한참을 보았다. 누구도 감히 신에게 말을 걸 수가 없었다.
「행복하라니…….」
행복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상청은 질문을 던졌다.
발밑에서 허무하게 떠나간 아이의 자국이 꿈틀거렸다. 그는 그슬린 자국에서 튀어나온 업을 짓밟았다. 그리고 기다렸다.
하루가 지났다. 이틀이, 칠일이 지났다. 다시 한 달이 더 지났다. 마침내 신은 비명 같은 고함을 지르며 화를 냈다. 나약한 귀신들은 그 기운에 일제히 절멸을 맞이했으나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귀신들은 한참 멀리 떨어져서 신의 기분이 풀리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화가 거두어져 평화가 왔을 때도 그는 같은 곳에 서 있었다.
남은 귀와 신들은 여전히 서서 움직이지 않는 자신들의 왕을 어찌하면 좋을지 몰라, 머리를 맞대고 궁리한 끝에 우르르 태청궁에 몰려가 태상노군을 모셔 왔다. 사정을 들어 알고 있던 태상노군이 단숨에 날아왔다.
상청은 여전히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팔을 감싸고 흐르는 폭 넓은 소매가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가을 낙엽이 뒹굴어야 마땅한 날씨였는데 그가 서 있는 땅만 아직 늦여름의 푸른빛을 유지하고 있었다. 텅 빈 눈동자가 여전히 녹음이 찬란한 정원을 찬찬히 거치며 무언가를 찾아 헤맸다. 고목처럼 우두커니 서서 빈 허공을 살피는 친우의 모습에, 태상노군은 한숨 대신 수염을 한번 쓸어내렸다.
영보군. 태상노군이 친우의 이름을 친근하게 불렀지만 상대는 미동도 없었다. 상청은 기다리고 있었으나 바라는 자는 돌아올 수 없는 망자가 되었다.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친구여. 당신은 이매망량(魑魅魍魎)*의 왕이기에, 너무나도 완벽한 신이기에 인간을 몰라 애석하게 되었구나. 그들은 쉽게 배반하고, 분노하고, 사랑하고 슬퍼한다.」
「…….」
「마음은 우리의 생각보다 불안해, 한 면은 늘 어둠과 친하니 영혼이 좀먹히기는 쉽다.」
상청은 태상노군의 말을 들으면서 생각했다.
그래, 되짚어 보니 그날이 망혼일(亡魂日)*이었다. 처서가 지나 가을이 온 줄 알았는데 망혼일을 기념이라도 하는 듯 더위가 기어올랐다.
내가 완전하기 때문에 그 아이가 죽었다.
상청은 다시 한번 생각했다. 내가 완전한가?
「나는 어째서 실패했지.」
완전한 존재라 그리 자부하고서는 사랑은 이루어 내지 못했다. 왜 자신은 붉은 실로 인연을 맺으면서까지 그 아이를 잡아 놓으려고 했던가. 모든 아랫것이 말릴 때도 왜 듣지 않고 곁에 두려고 했던가.
물었다. 이원이 그렇게 자주 물어보던 것처럼 상청은 그제야 묻고 또 물었다. 돌아오지 않는 답변을 찾아 질문이 애처롭게 허공을 떠돌았다. 떠나간 혼을 그리워한다.
죽을 목숨인 아이를 거둬 살렸다. 다들 말렸지만 어쩐지 마음이 쓰여 집에 데려다 놓고 사랑을 주었다. 신이기 때문에 사랑은 공평하다고 생각했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길가에 걷어차이는 흔한 귀신들보다 그 아이를 더욱 아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약관이 갓 지난 나이로 아이는 죽었다. 정확하게는 상청의 무심함이 아이를 살해했다.
사랑에 버려졌다 생각해 상청을 원망하며 스스로를 살해했다. 마음의 어두운 틈을 그리 벌려 놓지 않았으면, 한 번이라도 아이를 배려하여 보살피게 했으면 좋아졌을까. 그렇지 못했으니 그 자진을 방조한 것은 자신이다.
아이는 영원히 행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게 더러운 원혼에게 사로잡혀서든 아니든, 자신의 선택을 책임지기 위해 영원히 구천을 떠돌며 죄를 추궁당하겠지.
데려오지 말 것을 그랬나. 순리대로 살고 죽게 놓았어야 했나. 비를 내려 줄걸 그랬나. 태상노군의 말을, 다른 신들의 말을 귀담아들어 그냥 품지도 말았어야 했나.
내가 왜 고집을 부렸지. 응? 너 내가 미워 혼을 내려 대답이 없는 것이냐?
나는 그저 더위에 붉어지는 너의 뺨이 좋아 이리 오래 여름을 묶어 놓고 기다리는데 왜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는 것이냐.
「살아라, 원아.」
인간을 사랑하겠다는 아이의 말은 쓸쓸했다. 그렇다면 그 마음을 들어주어야지. 아이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이제 하나도 없지 않은가. 나는 신이지만 무력하구나. 처음으로 자신의 무능력을 통감하며 그는 괴롭게 말했다.
「죽어야 하는 목숨이 살았으니, 부와 귀도 역시 누리지 못하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살기를 바란다.」
그 언제의 말을 뒤늦게 반복하며 상청은 기원했다.
「……살아다오.」
애타는 마음도, 분한 마음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마음도 전부 도려내어 인간으로 만들었다. 진흙으로 육체를 만들고 숨결을 불어넣어 눈을 뜨게 했다. 그리고 그것의 이름을 재연(再燃)이라고 붙였다. 이원의 목숨을 졸라매던, 불꽃을 다시 피워 회귀의 굴레로 밀어 넣었다.
크게 도려낸 연모라는 마음은 그가 바라는 대로 인간의 윤회에 올라 사랑했던 아이의 곁으로 갔다. 재연의 탄생과 동시에 사랑의 아픔과 고통을 모두 잊은 상청은, 그것들을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꺼내 보았다. 그리고 종종 물었다.
「내가 잘못을 했나……?」
대답을 해 줄 자는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태상노군조차도 그 쓸쓸한 혼잣말에 아무런 대답도 해 주지 못했다. 그에게는 오직 기억만이 남았다.
버들가지 같던 몸짓. 소매를 쥐고 묻던, 수줍고 열망 어린 음성.
인간이라 하여 너를 믿지 않았던 나, 그리고 인간이라 나를 믿지 않았던 너.
우리는 무엇이 잘못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