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HAPPY, AND
아이스크림 가게는 파리가 날렸다. 그거야, 겨울이니까. 어지간히 마조히즘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면 추운 겨울에 내장까지 얼어붙을 만큼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올 이유는 없었다.
그런고로 재연과 이원은 둘 다 널찍한 손님용 소파 위에 늘어져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올라간 토토가 유독 살찐 배를 자랑하며 둥근 면을 따라 빙글빙글 돌아다녔다. 요즘 이 토끼는 살만 가득 쪄서 동면에 들기 직전의 짐승으로 보였다. 이원은 그럭저럭 토토를 예뻐했지만, 재연은 솔직히 토토가 싫었다. 보고 있자면 정묘신장과 십이신장, 상청까지 굴비처럼 줄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토토는 미움을 받는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덜떨어진 눈치로 재연에게 달라붙어 있는 걸 즐겼다.
늘어진 채로 옥수수 뻥튀기를 주워 먹던 이원이 푸념하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우리 이렇게 장사 안돼서 망하면 어떡해?”
“돈 있잖아요.”
재연은 다정하게 말했다. 문제는 그 다정함이 다른 사람에게는 분노를 조장할 만한 발언이었다는 것이다. 이원은 지적하는 대신에 얄미운 그 입술을 살짝 꼬집었다 놓았다.
“너 성격 좀 고쳐…….”
“형한테는 다정하니 괜찮잖아요.”
손님도 없다고 신이 나서 이원의 얼굴을 붙잡고서 재연이 쪽쪽거리며 입술을 부딪쳐 온다. 재연은 날이 갈수록 기분이 좋아졌다. 반신으로서 가졌던 능력은 죄다 잃어버렸는데도 상쾌하고 통쾌하게 복수를 이룬 사람처럼 콧노래를 부를 때도 잦았다. 저놈이 저렇게 긍정적인 인간이었나, 이원은 하루에도 열 번씩 깨달음 아닌 깨달음을 얻은 채 고개만 끄덕끄덕했다. 본인이 저렇게 뻔뻔한데 어떻게 말린단 말인가.
재연은 이원이 그렇게 빈정거리든 말든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 엿 같은, 본체랍시고 사람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물 먹이는 걸 좋아하던 놈이 무슨 심보인지 삶을 돌려줬다. 그 덕인지 뭔지 얻어 낸 달콤한 평화를 즐기는 건 그의 사소한 행복이 되었다.
사실 그때, 불길에서 죽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재연은 자주 그렇게 생각했다. 둘 다 이 삶 이후의 윤회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이제 이원은 평범한 사람과 비슷한 수준의 업과 복록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저지르고 겪어 온 일들이 평범한 삶을 살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잡다한 생각을 전부 밀어 놓고 재연은 다시 이원의 턱을 잡았다. 말랑말랑한 마시멜로 같은 얼굴을 만지자 이원이 웃으면서 입술을 슬쩍 벌린다. 재연은 한숨을 쉬면서 입술을 비비고 깊게 혀를 섞어 넣었다. 한참 입을 맞추며 재연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아예 지워진 과거가 아니기 때문일까, 둘은 여전히 불가사의한 일을 겪기도 했다. 상가와 집을 구할 때는 두 번이나 곤욕을 치르기까지 했다. 처음 갔던 부동산은 치안이나 소문이 안 좋은 집, 바퀴벌레 알집이 바닥 중간에 떨어진 곳 따위를 보여 줘서 바로 잘라 냈었다. 두 번째로 찾아간 부동산은 좋은 집을 구해 주겠다고 떠들며 적극적으로 차를 끌고 이곳저곳을 다녔다.
처음 내리 보여 준 집 두 개는 죄다 음습했다. 둘러보는 둥 마는 둥 하며 거절하자, 여자는 까다롭기도 하다고 투덜거리며 세 번째 집으로 데려갔다. 문제는 그 빌라가 건물 입구부터 들어가기 싫어 치가 떨릴 정도였다는 것이다. 보는 눈과 힘을 잃었다곤 하지만 감각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자살이라도 했나? 왜 저 모양이야. 두 사람이 머뭇거리며 움직이지 않자 부동산 여자는 정말 괜찮은 집이라고 다그치며 둘을 질질 끌고 빈집 앞까지 데려갔다.
현관문 비밀번호를 툭툭 치고 문을 열자마자 풍기는 악취에 둘 다 말도 없이 내달려 바로 옆 건물 편의점에 들어갔다. 동시에 소금을 집었을 때는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재연은 식은땀에 젖어 파리한 얼굴을 보며 ‘보였어요?’ 하고 물었고 이원은 고개를 흔들었다. 역시 눈이 트인 것은 아니다. 그냥 비정상적으로 저 집이 끔찍했던 거지. 몇 명이 죽어 나자빠진 거야. 재연이 쌍욕을 삼키며 굵은 소금을 몸에 집어 던지고 있는데 부동산 여자가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그러고는 소금으로 액땜을 하는 둘을 보며 아주 째질 것처럼 눈과 입을 찢으며 웃었다. 이히힉, 끼히히, 히히…….
그 뒤로는 미안해도 그냥 엔지에게 동반을 요청했었지. 얼마나 소름 끼치는 장면이었던가. 이마를 손으로 덮으며 재연이 긴 한숨을 뿜자 이원이 고개를 갸웃한다. 키스 잘하다가 한숨을 쉬니 이상하게 여겨졌나 보다.
“어디 아파?”
“아니에요.”
“아파 보이는데…….”
최근이라고 해야 하나, 지옥 같은 여름이 완전히 지나고 휴식기에 접어든 인생 속에서 이원은 재연을 깨지기 쉬운 유리 장식처럼 대했다. 어렸을 때 보살폈던 버릇이라기보단 그게 자신이 해야 할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재연은 이원의 그런 관심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좋았다. 그저 누군가에게는 줄 수 없어 미안할 뿐이었다.
반쯤 내리깐 이원의 눈에는 걱정이 스며들어 있다. 장사는 일찌감치 접고 침대에 파고들었으면 좋겠다. 조기 퇴근을 하자고 꼬드긴 뒤에 배불리 먹여 기분이 좋아진 이원의 옷을 한 장씩 벗겨 내고 맨살 위에 적당히 부드러운 이불을 덮고 지분거리고 싶다. 그런 음탕한 생각이 머릿속에 채워져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 되자 재연은 이원의 귀를 살짝 깨물고는 몸을 일으켰다.
“왜?”
“그만 가게 정리해요.”
“응? 벌써?”
“가끔은 이런 날도 있어야죠.”
“아무리 그냥 하는 장사라지만 너무 대충하는 거 아냐?”
입으로는 걱정하는 척 잔소리를 늘어놓으면서도 이원은 신이 나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안 그래도 지루하던 차였는데 집에 돌아가서 제대로 늘어져라 낮잠이나 자는 게 좋겠다. 밀린 책을 읽거나 영화를 봐도 좋겠지. 배달 음식을 시켜 먹을까? 둘은 사이좋게 동상이몽을 꿈꿨다.
재연은 뒷정리를 하겠다며 창고로 들어갔다. 이원은 패딩 주머니 안에 토토를 넣었다. 돼지처럼 먹어 뚱뚱해진 토토에게는 겨울 외투 주머니가 딱 안성맞춤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조금 자라는 것 같더니, 이제는 몸집이 커지진 않고 살만 토실토실하게 찌고 있다. 토토가 귀를 쫑긋거리면서 도르륵 몸을 파고들자 주머니를 툭툭 두드린 이원이 개수대에서 스쿱을 씻으려고 물을 틀었을 때였다.
갑자기 정전이 되며 사방이 깜깜해졌다. 이원은 본능적으로 눈을 찡그렸다. 마감하겠다고 블라인드까지 전부 내려 둬 눈앞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 전에 전기가 내려갔으면 아이스크림은? 저번에 한번 두꺼비집이 내려가 아이스크림이 죄다 녹아내렸던 끔찍한 역사를 떠올리며 이원이 비명을 질렀다.
“내 아이스크림!”
정전에 놀라 창고에서 뛰어나온 재연이 앞치마에 더러워진 손을 닦으며 정정했다.
“아이스크림이 아니고 젤라또라니까요.”
“내 아이스크림!”
이원이 재연의 말을 무시하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겨울이라 그렇게 빨리 녹지도 않을 텐데 유난이라고 생각하며 재연이 괜찮다고 이원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괜찮아요.”
“안 괜찮아! 내 아이스크림 다 녹으면 어떡해? 두꺼비집 열어 봤어?”
“젤라…… 뭐, 됐어요.”
아직 오후 5시였다. 블라인드를 내려 뒀다곤 하지만 기이할 정도로 사방은 어둠뿐이었다. 재연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빠르게 납득할 수 있었다.
“전기는 안 켜도 돼요. 누군지 아니까.”
“응?”
이원이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재연은 설명하는 대신 왼쪽 눈을 가린 채 오른쪽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액막이로 지내며 지불했던 대가 중 하나인 오른쪽 눈은 사건이 끝난 뒤에도 빛이 돌아오지 않았다. 재연이 평생 가지게 된 반쪽짜리 새카만 어둠을 이원은 정말로 마음 아파했다. 하지만 지금은…….
“힘이 돌아왔어요.”
가려져 있던 눈이 열렸다. 재연은 익숙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눈을 들어 앞을 보았다. 재수 없는 면상을 보니 속이 뒤틀렸다. 1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뻔뻔하게 찾아오다니. 입술을 깔끔하게 올리며 빈정거렸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재연아?”
불안한 목소리로 이원이 재연을 불렀다. 재연이 손을 뻗어 이원의 어깨를 감싸 안자, 익숙한 목소리가 공중에 울렸다.
「은혜를 입었으면 갚아야지. 결초보은이라는 말을 모르나?」
“누가 도와 달라고 했어?”
「이런…….」
소설이나 드라마처럼 기억 상실에 걸려도 저 목소리만은 잊지 못할 것이다. 이원이 너무 놀라 딸꾹질을 시작했다. 보이지 않으니 아마 더 두려울 것이다. 재연은 눈앞에 상청이 서 있거나 말거나 이원의 코를 잡아 주며 다정하게 숨을 참으라고 얼렀다.
「나는 도움을 줬어. 갚아.」
“은혜는 대가를 요구하는 게 아니라는 말 몰라?”
「이 정도 요구는 해도 될 입장이지. 힘을 돌려준 이유를 모르겠나?」
여전히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원만 마른침을 삼키며 재연의 팔을 꽉 잡아 쥐었다. 옆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체온만이 겨우 이 상황이 현실이라는 걸 깨닫고 버틸 수 있게 해 줬다.
침묵하는 재연을 한참이나 보던 상청은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객(客)이라는 글자가 적힌 옥패였다. 그것을 흔들며 신이 달콤한 어조로 자박자박 설명했다.
「……어려운 건 아니야.」
“뭔데.”
「태상노군이 저 아이를 보고 싶어 하더군.」
태상노군? 태상, 노군? 이원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태상노군이면 삼청 중 하나인 신이 아닌가. 그 사람…… 아니, 신이 왜 나를 보고 싶어 하는 거지? 이원이 혼자 이해 못 할 상황에 허우적거리는 사이 재연이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인간이야!”
「너는 아니지.」
“윤이원은 인간이라고. 태상노군이 지내는 곳은 신궁인데 어떻게 인간이 찾아가!”
「신궁은 맞지만 태상노군이 지내는 곳은 아니야.」
“뭐?”
「내 궁이니까 알아서 잘 데려가. 나는 이야기했어.」
“야!”
참다못한 재연이 신의 권위를 깎아내리며 화를 내자, 상청이 얼굴을 찌푸렸다. 저 파편은 날이 갈수록 재수가 없어졌다.
「정말 버르장머리가 없군. 그대로 혼을 쥐어뜯어 내 안에 처넣기 전에 시키는 말은 들어.」
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협박에 이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재연은 딱 그만큼 얼굴을 구겼다. 저게 자신의 본신이라니, 재연은 저 신의 밑에 자신이 묶여 있다는 게 세상 무엇보다 싫었다. 서로가 서로를 극도로 싫어한다는 사실은 관심도 두지 않고 상청은 제 할 말만 계속해서 내뱉었다.
「기한은 올해 말일까지다. 통행증이 있으니 굳이 대륙으로 오지는 마. 네가 오면 짜증이 나 북풍이 심하게 몰아칠지도 모르니.」
“그렇게 잘났으면 지금 바로 보내 주면 되잖아.”
「……저 아이는 네게 귀속되어 있어서 내가 힘을 쓰지 못해.」
“…….”
「그러니 혼자 잘해 보도록 해. 반편이라도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속을 있는 대로 다 뒤집어 놓고 상청은 웃으면서 허리를 굽혔다. 그는 주저앉은 채로 멍하게 입만 벌리고 있는 이원의 뺨을 툭 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귀만 열어 두고 있다 갑자기 뺨을 건드리니 놀란 모양이다. 앉은 채로 파르르 떠는 꼴이 귀여웠다.
「평온하게 지내고 있느냐.」
“말 붙이지 마, 보지도 마. 건드리지 말고 그냥 꺼져.”
재연이 옆에서 지랄을 했다. 상청은 손가락을 튕겨서 그 시끄러운 입을 닫아 버리고 여전히 얼어붙어 있는 이원의 얼굴을 손끝으로 가볍게 쓰다듬었다.
「뭐…… 시간은 많으니, 다음에 또 보자꾸나.」
“아…… 예에…….”
이원이 시선을 어디 둬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며 반쯤 반사적으로 주섬주섬 대답하자 재연의 얼굴이 더 험악하게 변했다. 좀 더 시끄럽게 싸움이 붙기 전에 상청은 허공에서 모습을 감췄다. 전기가 다시 들어오며 가게에 어울리지 않게 경쾌한 소리를 내며 불이 켜졌다. 밝아진 시야에 눈이 따가웠다. 이원이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전에 재연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짜증을 냈다. 둘이 사이좋게 꾼 악몽은 아니었다. 건네준 옥패가 손안에 쥐어져 있었으니까. 재연은 옥패를 일그러트릴 듯이 세게 쥐었다.
오랜만에 카페 문을 일찍 닫고 자리에 앉은 엔지는 눈치를 봤다. 한 명은 새파란 얼굴이고, 한 명은 화가 얼마나 많이 났는지 얼굴이 악귀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토토가 엔지의 품에 엉겨 붙은 채 오들오들 떨었다. 힘을 회복한 재연은 거의 주체 못하는 수준으로 기운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재연 씨, 화나는 건 알겠는데 그만하면 안 될까? 응?”
엔지가 울먹이는 목소리를 냈다. 유일하게 혼자서만 영력이 빵점인 이원은 조심스럽게 눈을 굴리다 재연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재연은 그제야 냉기만 풀풀 날리는 걸 멈추고 숨을 가늘게 내쉬었다.
“그 새끼는 볼 때마다 사람을 열 받게 해.”
“…….”
신에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이원과 엔지는 둘 다 똑같은 생각을 했지만 똑똑하게도 입 밖에 뱉지는 않았다.
“뭐가 잘났다고 은혜를 갚으라 마라야?”
신이니까 그렇지. 이원과 엔지는 이번에도 똑같은 생각을 했지만 침묵을 선택했다. 재연만 혼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면서 성질을 퍽퍽 내다 담배를 피워야겠다며 가게 바깥으로 나갔다. 둘만 덩그러니 남은 카페 안에서 이원이 망설이다가 물었다.
“저기…… 엔지, 인간은 신궁에 못 들어가나요?”
“응? 아, 재연 씨가 화내는 거 보면 아마 그렇겠지…… 나도 잘 몰라.”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서 고른 옷인지 핀턱이 잡혀 있고 목에 두툼한 리본을 묶은 블라우스 위에 붉은색 점퍼스커트를 맞춰 입은 엔지가 뺨을 긁적거렸다. 화려한 옷차림과 다르게 소탈한 목소리로 엔지는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찻잔에 떠 있는 레몬 한 조각에서 상쾌한 향이 났다.
“신들이 거주하는 곳이잖아. 현재는 중국 산동성에 유적처럼 관광지가 되긴 했는데…… 그건 인간들이 지은 거라서. 아마 신께서 말씀하신 곳은 정말로—”
중간에 엔지가 손을 180도로 뒤집어 보였다.
“이렇게 뒤집힌 세상에 있을 거야. 귀신들, 요괴들, 그런 것들만 속한 세상 말이야.”
일반 민간인인 이원이 눈을 다시 깜박거렸다.
“찾아가는 게 가능해요?”
“음…… 재연 씨가 그쪽 관계……자……니까?”
“관계자 아냐.”
담배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들어온 재연이 짜증 나는 목소리로 말을 툭 끊어 버리고는 이원의 옆을 파고들어 앉았다. 옆구리 사이에 쿡 매달려 징징거리는 애처럼 구는 재연을 받아 주며 이원이 엔지와 서로 눈치를 주고받았다.
“그런 놈이랑 관계없어. 재수 없는 새끼. 왜 나타난 거야? 잘 살고 있는데.”
엔지의 한이 서린 눈빛을 받다 못한 이원이 한숨을 푹 쉬면서 재연을 슬슬 달랬다.
“그래도, 그쪽이 도와준 건 맞잖아…….”
“도와주는 게 당연한 거였어요. 버려 놓고 주워 가려고 하고, 잃어버렸으면서 가지려고 했기 때문에 이런 인과가 생겼던 거나 마찬가지인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냥 사람 한 명 보는 게 뭐가 어렵겠어.”
“어렵죠. 사람이 아니고 신이잖아요. 어떻게 육체를 가지고 신궁에 가요?”
“……그렇다고 안 갈 수는 없잖아.”
“안 가고 말지. 할 일도 없나? 재수 없는 새끼.”
“…….”
아아, 이런 애가 아니었는데. 이원은 완전히 비뚤어진 재연의 투덜거리는 말에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사랑하는 연인이 고통받고 있으면 적당히 눈치채고 기분을 좀 풀어 줄 만도 하지 않나. 그보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심술을 부려. 이원이 소리 없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이 엔지는 차를 좀 끓여 오겠다며 어색한 몸짓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도망쳐 버렸다.
고요하게 초침 소리가 똑딱똑딱 울린다. 손목시계에서 움직이는 태엽 소리가 선명하게 들리는 착각까지 들 정도였다. 이원은 한참 불행에 자극받으며 앉아 있다 눈을 가볍게 밀어 떴다. 재연은 여전히 심통 난 얼굴이었다.
“……갈 방법이 아예 없는 거야?”
이원은 조심스러웠다. 올해 그들이 방법이라는 것을 찾기 위해 애를 쓰다 도달한 결과가 어떤 것이었나. 자살이나 마찬가지인 살해였다. 불에 타던 늦은 밤에 절망은 얼마나 심장을 짓눌렀던가. 이원은 이번에도 신의 요구가 그만큼 끔찍하진 않을까 무서웠다.
혹시라도 재연이 또 다치면 어쩌나, 세상이 원망을 풀지 못하여 또다시 부조리한 인과의 축이 되면 어쩌나. 이원이 불안한 얼굴로 재연의 손을 매만졌다. 바깥에 서 있다 들어와 손가락은 조금 차가워져 있었다. 손끝을 꾹 감싸 쥐자 금방 체온이 달아오른다. 재연은 말없이 손을 고쳐 잡아 이원의 손목 안쪽에 입을 맞췄다. 간질간질하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니까 통행증을 줬겠죠.”
“음…….”
“아직 시간도 많으니 괜찮아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신경을 안 쓸 수가 있나. 이원은 생각과는 전혀 반대로 고개만 끄덕끄덕했다. 곧 크리스마스고 올해가 끝나기 전까지 가야 한다고 했으니 12월 31일은 더 금방일 테고…… 마음 놓고 제야의 종소리도 듣지 못하겠네. 가벼운 한숨을 삼키며 재연의 품에 조금 더 매달리듯 안겼다.
고분고분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재연이 조금 안정감 있는 웃음소리를 흘리며 몸을 꽉 안아 주었다. 따뜻하다 못해 더운 체온에 푹 쌓인 채로 이원이 다시 한숨을 집어삼켰다. 그는 신이 비밀을 이야기할 때 끼워 말했던 재연에 대한 모든 사실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재연이 반신으로서 가지는 힘은 강하다. 그러나 힘이 다시 돌아왔다면 육체가 멀쩡할 리가 없었다. 가급적이면 빨리 해결해야 재연이 건강하겠지.
주방에서 뭘 하는지 엔지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고, 붉게 열이 달아오른 난로에서는 뜨끈거리는 모터 소리가 났다. 이원은 졸음이 쏟아져 하품을 길게 하며 기원했다. 재연아, 오래오래 살아라.
생각을 읽을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재연이 웃었다. 다정하고 나지막한 웃음을 들으며 이원은 잠에 빨려 들었다. 신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울렸다.
「과거를 얼마나 보았느냐. 너에게도 시간의 속박은 풀리기 시작했던가.」
그렇습니다. 가끔 봅니다. 만발하는 원림의 꽃, 산천의 소음을 삼키던 짙은 눈발, 국화 피던 넓은 산봉우리와 마을로 흘러내려 가던 산줄기를 빙 둘러 흐르는 맑은 계곡…….
흰옷이 눈을 사로잡았다. 휙 불어오는 바람, 옷깃과 밑단에 칼처럼 반듯하게 덧댄 검은 천. 고대 지식인들의 복장을 한 남자의 머리와 수염은 서리처럼 하얗게 새어 있었다.
「당과 좀 먹겠느냐, 아가.」
인자한 노인이 물었다. 그의 손에 쥐어진 납작한 단과자를 보고 이원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제 단것을 옛날만큼은 좋아하지 않았다.
「많이도 컸구나.」
자신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혼을 훑는 시선이 이상하게 불쾌하지 않았다. 이원은 눈을 내리깔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은 자란다. 변하고, 바뀌고, 영원하지 않았다. 신인 그가 기억하는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눈이 그치면 오려무나. 오는 길 험하지 않게, 서로 손을 잘 붙들고 조심조심…….」
자애로운 노인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이원은 얼굴을 조금 찡그리고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면서 눈을 떴다.
“일어났어요?”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재연이 묻는다. 이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반쯤 일으켰다. 2인용 가죽 소파는 엔지의 카페에 있는 가구 중 하나였고, 이곳은 카페였다. 엔지는 없었다. 어둠 속에서도 흰 털이 파르라니 빛이 나는 토토는 당근 조각을 코앞에 두고 자고 있었다.
“나 얼마나 잤어?”
꽤 오래 누워 있었는지 목이 쉬어 있었다. 난로는 공기를 따뜻하게 달구어 주었지만 그만큼 건조하게도 만들었다. 목이 칼칼해 기침을 몇 번 하자 재연이 따뜻한 물이 담긴 컵을 건네주며 대답했다.
“세 시간쯤.”
“깨우지 그랬어.”
“꿈을 꾸는 것 같아서요.”
‘같아서요’라고 했지만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힘이 돌아왔다고 했던가. 이원은 일반인보다는 다양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전생의 집안은 주술로 특화된 가문이었으며, 현재 삶에서는 지옥과 회귀를 거치면서 알게 된 것도 많아졌다. 그러나 재연이 최고위 신의 파편으로 부여받은 힘이 어느 정도일지는 감이 오지 않았다.
으음, 이원이 조금 품 안에서 머뭇거리자 재연이 다정하게 귓불과 흘러내린 머리카락 따위를 쓰다듬어 주었다.
“엔지는?”
“먼저 퇴근하라고 했어요.”
“응…… 혼자 기다린다고 지루했겠네.”
“아니요.”
부끄러운 말이었지만, 이원은 밤중에 재연과 단둘이 한 공간에 있는 것이 좋았다. 외설적인 장면을 생각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갇혀 있어야지만 그를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이 들어서였다. 이원은 아직도 그가 재연을 버리고 홀로 헤매는 꿈을 꾼다.
재연은 돌아오지 않는 외로운 곳에서 육체와 혼, 눈과 귀를 잃어버렸다. 이원은 인연과 기억을 잃어버려 떠오르지도 않는 무언가를 찾으며 혼자 걷기만 하는 우울한 꿈을 꾸다 눈을 떴을 때 재연이 있으면 기분이 좋아졌다. 오래 이렇게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서주영은 이원의 고백을 듣고 의부증이라고 말했다. 이원은 의처증이라며 울컥해서 반박하고 싸우다 끝이 나 버렸지만, 사실 그것은 의부증이나 의처증이 아니라 우울증이었다. 트라우마에 의해 생겨난 윤이원의 기묘한 우울증을 하재연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재연은 종종 이원이 먼저 잠이 들 때까지 그 옆을 지켰다. 불안감은 빈자리에서 시작되는 것이니까.
“형 자는 얼굴 보니까 좋았어요.”
말투는 듣기 좋을 만큼 부드럽고, 언어의 온도는 따듯하다. 빨간 열선이 달아올라 있는 난로는 여전히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약한 소음이 울렸고 재연의 품은 넉넉했다. 이원은 다시 잠이 올 것 같아 가물가물한 눈꺼풀을 겨우 밀어 올렸다.
“……눈이 그치면 오라고 하시던데…….”
“흠.”
“어떻게 오라는 말은 없으시던걸.”
정말 알쏭달쏭하게 말하는 걸 좋아하는 자들이다. 기지개를 쭉 켜고 하품을 길게 했다. 온몸이 나른했다. 과거와 관련된 꿈을 꾸고 나면 자고 일어나도 피곤했고 머리까지 멍했다. 말소리에 잠에서 깼는지 빨간 눈을 굴리는 토토를 잡아 들고 재연의 품에서 겨우 벗어났다.
눈이 그치고 안전하게 가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눈이 내리기 전에 집으로 얼른 돌아가고 싶었다.
한파를 피할 두툼한 외투를 나란히 껴입고, 엔지의 카페 문을 단단하게 잠근 뒤에 어둑어둑한 길을 걸었다. 눈이 곧 쏟아질 것처럼 하늘은 온통 흐린 남색이었다. 토토는 추운지 조금 식은 핫팩이 들어 있는 주머니 안에서 얼굴을 내밀지도 않았다.
“배는 안 고파요?”
“조금. 너는?”
“나도 조금요. 저기라도 들렀다 갈래요?”
재연이 지하철역 근처에 있는 조그마한 포장마차를 가리켰다. 어묵 꼬치가 길쭉하고 촘촘하게 올라와 있다. 매콤한 냄새를 맡자 갑자기 허기가 밀려와 이원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재연은 본능만 있는 어린 짐승처럼 구는 이원을 보고 잠깐 웃고는 손을 잡아끌었다.
후덕한 인상의 아저씨가 목장갑을 끼고 주걱으로 떡볶이 냄비를 젓다가 고개를 든다. 추위에 볼이 붉었다.
“어서 오세요. 뭘 드릴까?”
“뭐 먹을래요?”
외식을 한다거나 배달 음식을 시킬 때면 재연은 이원에게 늘 선택의 권리를 양보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음…… 그게…….”
이원의 눈이 빠르게 흔들렸다. 그는 빨갛게 양념이 잘 졸아든 떡볶이를 한번 봤고, 큼직하게 썰린 무와 꽃게, 고추 몇 개가 둥둥 떠 있는 어묵 국물을 노려보았다. 그 뒤에는 비닐이 덮인 순대와 노란 튀김옷을 입은 것들까지 꼼꼼하게 훑었다.
남자 둘이서 먹는 거니 이것저것 시켜도 어지간해서는 다 먹어 치울 텐데 이원은 매일 고민했다. 뭘 먹지, 뭘 시키지. 이것도 저것도 먹고 싶은데, 딱 하나만 골라야 하나. 신메뉴가 맛이 없으면 어쩌나. 그런데 여기 양이 많지 않았나? 다 먹을 수 있을까. 먹고 싶다고 전부 시키기에는 돈이 아깝지 않을까.
멀리 나간 사고는 단순히 참치 김밥과 돈가스 김밥 중에서 뭘 먹을까 고민하는 귀여운 수준을 이미 떠나 있었다. 조금은 궁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재연은 이원의 그런 우왕좌왕한 모습을 즐겼다.
“……네가 고를래?”
결국 선택하는 걸 포기하고 이원은 재연에게 메뉴 주문을 양보했다. 늘 있는 일이라 재연은 고개를 선선히 끄덕이고 주문을 넣었다.
“이것저것 조금씩 담아 주세요. 두 명이 적당하게 먹을 만큼요.”
“순대는 섞어 드릴까?”
“허파와 간만 주세요.”
“튀김은 직접 골라요.”
빨간 손잡이가 달린 집게를 건네받으며 재연은 접시 위에 튀김을 골라 담았다. 이번에도 이원에게 묻지는 않았다. 입맛은 잘 알고 있었으니까. 바삭하게 튀겨진 고구마와 고추 튀김, 김말이, 새우에 오징어까지 골고루 담았더니 접시가 무거웠다. 재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그가 하는 모습을 한참 보던 이원이 이제 그만, 하고 제동을 걸었다.
재연은 착실하게 집게를 내려놓고 아저씨에게 튀김을 건넸다. 방금 튀긴 거라 따뜻할 거라고 말하며 아저씨는 그대로 튀김을 먹기 좋게 잘라 되돌려 주었다. 넉넉하게 담은 떡볶이와 순대, 튀김, 어묵 국물.
파란색 플라스틱 의자를 끌어다 앉고 둘은 나란히 포크를 들었다. 고소한 냄새를 맡았는지 주머니에서 죽은 듯이 웅크려 있던 토토가 얼굴만 빠끔히 내밀었다. 재연은 선심 쓰듯 겉에 붙은 튀김 부스러기를 물려 주었다.
조용히 바스락거리며 분식을 먹는 소리만 들렸다. 떡볶이는 생각보다 매워 이원은 자꾸 국물을 찾았다. 겉에 묻은 양념을 포크로 긁어 주며 재연은 다정하게 수발을 들었다. 연인에게 온 힘을 쏟고 있는 상체와는 다르게 아래쪽은 사정이 달랐다.
세상이 이렇게 지저분했던가? 재연은 어이없는 생각을 하며 웃음을 지었다. 잃어버렸다 되찾은 힘으로 보이는 세상은 완전히 엉망이었다. 길거리에 너저분하게 쓰레기처럼 널린 악취 같은 악령들, 이지를 상실한 검은 그림자, 타인의 뒤에 바짝 따라붙어 불행과 사고를 조장하는 어두운 생명체. 그것들은 바닥과 가로등 사이, 자동차의 그림자에 스며들어 달콤한 향을 풍기는 이원을 향해 침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저것의 영혼은 달고 지독하다. 먹고 싶다, 데려가고 싶다. 예전 놀이터에 머물러 있던 소녀 귀신이 그를 눈여겨봤던 것처럼, 여전히 귀신들에게 있어 신의 사랑을 받았던 몸뚱이는 좋은 먹이였다.
재연은 운동화 뒤축으로 땅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는 악귀의 정수리를 찢어발겼다. 그리고 힘을 뿌렸다. 강대한 기운에 몸을 움찔거리며 기어 오던 것들이 깜짝 놀라 도망가기 시작했다. 재연의 힘의 기원인 상청은 귀신들에게 늘 관대하고 자비로운 신이었으나 재연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인간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이원이 원한다면 평생 인간답게 살 생각이었다.
“맵다.”
정말로 매운지 이원의 입술이 퉁퉁 불어 있었다. 재연은 붉어진 그의 아랫입술이 매우 귀엽고 야하다고 생각하며 말없이 우유를 사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편의점이 있는 쪽으로 향하는 재연의 뒷모습을 보며 이원은 코를 훌쩍거렸다. 천막 하나로 바람을 막고 있는 포장마차 안은 추웠다. 상황을 보던 아저씨가 칭찬을 슬쩍 건넸다.
“친구가 착하네.”
“음, 네.”
친구가 아니고 연인이지만, 이원은 정정해 주지 않고 슬그머니 웃으면서 순대나 먹었다. 얼마나 매운 고춧가루를 쓰는지 혓바닥이 다 얼얼했다. 떡볶이는 더 손대지 못하고 튀김과 순대만 깨작깨작 먹었다. 방금 전 재연이 편의점으로 떠날 때만 해도 맑던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길 가던 사람들이 중간중간 멈춰 서서 뿌연 하늘을 정신없이 바라본다. 갑자기 천막이 확 열리더니 한기가 쏟아졌다.
“…….”
“이게 누구야.”
포장마차의 주황색 불빛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고 있었다.
갑자기 먹고 있던 튀김을 뱉고 싶어졌다. 이원이 눈을 거멓게 내리깔고 애꿎은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저건 환상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오늘 연거푸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단 말이지. 중얼중얼 현실 도피를 시작하는 이원을 보고 이진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여기서 엉덩이만 내놓고 뭐 하세요? 빨리 들어가시…….”
이번에는 이원의 얼굴도 일그러졌다. 얼굴만 들이민 주영은 직장 상사의 사업 파트너와 제 친구의 얼굴을 한 번씩 돌아보다 손뼉을 짝 쳤다.
“이야, 기가 막힌 인연이네. 둘이 사귀는 게…….”
“닥쳐…….”
힘없이 얼굴을 가리고 이원이 욕을 지껄였다. 갑자기 부산스러워진 좁은 천막 안을 보고 주인 아저씨만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장 열 받은 건 당연히 하재연이었다. 재연은 초콜릿 우유 하나를 달랑 들고 포장마차로 돌아오자마자 이진현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상황 파악이야 끝난 얼굴이었지만, 그렇다고 화를 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기묘한 호모 치정극 같은 대치가 이어졌다. 서주영은 이원이 먹다 포기한 떡볶이를 대신 질겅질겅 씹으며 탄식을 내뱉었다.
“이쯤 되면 질긴 인연이지.”
“조용히 해, 조용히.”
“나는 언젠가 셋이 같이 살아도 응원을…….”
“너야말로 왜 같이 있었는지 설명하지 그래.”
이원이 으르렁거리며 가장 중요한 문제를 지적하자 주영의 표정이 뚝 하니 바위처럼 굳었다. 돌덩어리처럼 딱딱해져서 말도 안 하고, 떡볶이를 먹던 손짓도 멈춘 채 멍청하니 앉아 있는 걸 보고 이원이 눈을 찡그렸다. 얘 뭐 해? 시끄럽고 요란하게 정신을 일깨워 줄까 고민하는데 옆에 앉아 순대를 징그러운 남의 내장처럼 보고 있던 이진현이 끼어들었다.
“사업 접대 목적으로 만나기로 했었는데, 양 사장은 갑자기 펑크 내고 대리로 나온 게 서주영 씨.”
“…….”
요즘은 비서가 사장 대리로 접대도 하는 건가……. 회사 생활은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이원이 잘못된 상식을 배웠다. 그나마 상식적인 인간으로 살았던 재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형, 생각하는 그거 아니에요.”
“아니야?”
“저쪽이 특수한 거죠. 그리고 접대를 누가 포장마차에서 떡볶이 먹으면서 해요?”
듣는 포장마차 주인 아저씨는 기분 나쁠 수 있지만 사실이었다. 이원이 맞는 말이라 고개를 끄덕끄덕하자 이진현이 웃는 얼굴로 뒷말을 이었다.
“문제는 레스토랑 예약이 누락되었는지 안 되어 있더라고. 나 참, 두 번이나 차이다니. 기분도 나쁘고 눈에 보이는 세 번째 음식점 아무 데나 들어가서 먹으면서 얘기합시다, 했더니 여기였어. 오해는 곤란해.”
그것도 곤란하다.
“아니, 제가 잘 아는 한정식집으로 모신다고 했는데 여기 들어오신 건 이사님이지 않습니까.”
주영이 매우 예의 바른 태도와 다르게 매우 징징 짜 붙이는 목소리로 주절주절 변명했다. 그 불행한 목소리를 냉담하게 무시하고 이진현이 신랄하게 비난을 퍼부었다. 그에게는 잘못은 주영의 사장이 해도 벌은 비서가 받는다는 특수한 법이 존재하고 있었다.
“접대를 받는 건 나니까 내 마음이지.”
“허, 사람도 죽여 놓고 내 마음이지 하시겠네요.”
“응.”
“…….”
저게 허세가 아니라는 걸 이 자리에 앉은 두 명의 인간과 한 명의 반인반신은 잘 안다. 재연은 저런 말을 듣다 이원의 귀가 썩어 버리는 건 아닌가 심각하게 고민했고, 이원은 정말로 귀가 썩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윤이원 씨는 오랜만이군?”
이진현이 젓가락을 든 채 그렇게 이야기했다. 이원은 잠깐 침묵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한 분식만 파는 곳이라 술을 마실 수 없다는 게 갑자기 조금 아쉬워졌다. 남자 넷이 덩치를 웅크리고 앉아 있는 좁은 천막은 들어오려던 사람도 그냥 나가 버릴 정도로 분위기가 흉흉했다.
“그쪽 게이 무당도 오랜만인데 표정 좀 풀지?”
“별로 반갑지 않아서요.”
재연은 대놓고 짜증을 냈다. 이원과 주영이 동시에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 없었다. 술 대신 어묵 국물을 홀짝 마신 이진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조미료 맛이 거슬리는지 물잔을 들어 올린다.
“방화 사건 이후로는 처음이군.”
그들이, 정확하게는 재연이 특히 이진현을 싫어하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그는 매우 적절하게 사람이 기억하기 싫은 부분을 되짚어 저격했다.
귀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축복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등 뒤에는 아직도 수십 수백의 원혼들이 주변을 맴돌며 자신을 제발 봐 달라고 곡성을 내고 있었다.
과거의 일에 죄책감을 가지는 것조차도 죄스러워 말도 꺼내지 못하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이원을 곁에서 지켜봤던 재연은 시선을 잠깐 바닥으로 내렸다. 검은자위와 흰자위가 바뀐 귀신 하나가 이원의 다리 사이에서 침을 흘리며 헐떡이고 있었다. 말없이 매섭게 쏘아보자 귀신이 귀곡성을 흘리더니 재빨리 도망쳤다.
이원은 윤회의 이후까지 끌고 갈 업에서도, 부조리의 축에서도 벗어났지만 세상의 관심과 환대를 받는 것은 아니었다. 신의 축원을 입은 몸, 오래 축적된 업의 향기. 여전히 세상은 가끔 그를 보면 침을 꿀떡꿀떡 삼켰다. 저걸 죽여 먹어 치우면 얼마나 달고 맛있을까 고민하면서.
그래, 재연이 반신이고 둘을 지켜보는 신이 위대한 영보천존일지라도 세상이 이원 자체를 지워 없애려고 이를 갈며 그의 등을 나락으로 떠밀었던 과거를 바꾸는 건 불가능했다. 그 부동산 여자만 봐도 어떠했던가. 재연은 가볍게 한숨을 삼키면서 이원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건강한 거 보니 좋은데. 어때, 다음에 같이 식사나 할까? 내가 지은 죄도 있고 말이야.”
이진현은 아주 신사적으로 이야기했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다 식은 튀김 그릇을 주영의 앞에 쓱 밀어 주고 재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은 죄가 있으면 보지 맙시다. 주영이 형, 다음에 봐요.”
“응? 어, 그래.”
주영이 아무렇지도 않게 튀김을 하나 입에 넣고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태평한 사람이라 저렇게 자주 이진현을 만나도 문제가 없을지 모른다. 재연은 어쩌면 서주영이 가장 독특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천막의 틈을 열었다. 눈앞에 버티고 선 가로등 불빛에 눈이 부셨다.
밝다. 그리고 환하다. 코끝을 적시는 겨울바람도 그렇게 느껴졌다. 옆에 서 있는 이원의 뜨거운 체온을 느끼며 재연이 잠깐 감각을 농밀하게 곤두세웠다.
이사님, 이제 사업 이야기 좀 하시면……. 두 사람이 사라지고 나서야 애원을 시작하는 주영의 목소리가 사이를 비집고 들렸다.
“……화났어?”
미지근해진 초콜릿 우유를 만지작거리며 이원이 물었다. 재연은 고개를 저었다. 이진현을 되도록 피해야만 했던 시절은 분명 있었지만, 이원은 이제 좀 더 자유로워지지 않았던가.
“아니에요, 갑자기 나타나니 놀라서 당황한 거지.”
“나는 서주영이랑 같이 있어서 더 놀랐어.”
그것도 맞다. 둘은 서로 눈을 마주치다 킥, 하고 웃었다. 재연은 지하철 대신 택시를 타자고 권유했다. 정신을 쏙 뺀 바람에 지쳤던지라 이원은 당장 고개를 끄덕였다.
밤이 늦었는데도 눈이 와서인지 도로는 조금씩 밀렸다. 둘 다 올라가는 미터기 요금은 신경도 쓰지 않고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손을 잡고 있었다. 윤이원은 이진현을 막 만나 불안한 정신을 부여잡고 악업이라면 닥치는 대로 저지르며 삶과 죽음 앞에서 갈팡질팡했던 때를 떠올렸다. 재연은 그 옆에서 상청의 부탁에 대해 생각했다. 태상노군이 만나고 싶다 했다고…….
불행하게도 또는 당연하게도 재연은 이원과 상청의 과거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하재연과 상청은 엄밀하게 말하면 동일인이었으나 둘이 가지고 있는 감정과 감각, 추억은 완전히 달랐다. 감정, 재연은 오직 감정만을 가진 덩어리다.
사랑, 그 자체.
윤이원을 바라보도록 잘 설계된 영혼이었고…… 그래서 재연은 상청을 질투했다. 단 한 번이라도 이원의 사랑을 받아 보았고, 사랑을 나누었고, 그의 마음에 상처를 입혀 사지로 내몰았던 자를 용서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쉽게 보면 불행의 원인이나 마찬가지인 자가 나타나 신이랍시고 설쳐 대며 이원의 앞에서 깔짝거리는 걸 보면 기분이 불쾌했다. 단 한 번도 옛날 연인을 위해 자존심을 버리고 비굴하게 세상의 진창길만 골라 걸어 본 적도 없으면서 애틋한 척하지.
재연은 입술을 물었다. 힘에서도 존재에서도 사랑의 시작에서도 밀리고 있다는 것은 비참한 기분이었다. 결국 이번 삶에서도 자신은 이원을 죽음의 코앞에 발 뻗게 했다.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고 상청의 도움을 받지 않았으면 그대로 망가진 채 끝났겠지.
왜 약할까. 이원을 지켜 줄 수 없는 이유는 자신이 정말로 반편이이기 때문일까.
이 머저리 같은 생각을 들었다면 이원은 화를 냈겠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에게는 남의 마음을 읽는 신묘한 재주는 없었다. 이원은 아무것도 모른 채 달콤한 우유를 마셨고 택시는 겨우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스물네 평 계단식 아파트는 게이인 두 사람이 살기에는 적당히 프라이버시가 유지되고, 이웃과 마주칠 일이 없는 괜찮은 곳이었다. 유일한 이웃인 옆집은 사이좋은 신혼부부가 살았고, 엔지가 가져다준 부적과 결계는 효과적이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이원은 안도와 비슷한 긴 숨을 내쉬며 주머니 안에서 토토를 풀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한참을 실려 오느라 멀미라도 났는지 오는 내내 끙끙거리던 토토가 신이 나서 바닥을 뛰어다녔다.
“아…… 집이 좋네. 지친다.”
이원이 다 마신 우유갑을 분리수거 상자에 집어넣으며 얼굴을 쓸었다. 오후 5시부터였나, 난리가 났지. 투덜거리며 하루를 회고하는데 재연이 갑자기 입고 있는 외투와 니트를 하나씩 벗겼다.
“야, 하재연. 뭐 해?”
사정없는 손속에 당황한 이원이 발버둥 쳤다. 재연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뻔뻔하게 바지 버클에까지 손을 가져다 댔다. 대놓고 고간 주변을 더듬는 불한당 같은 손짓에 이원이 기겁해서 손등을 내리쳤다.
“야!”
“피곤하잖아요. 제가 씻겨 줄게요.”
“꺼져!”
“애인한테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어금니를 꽉 깨물고서 재연의 불쌍한 척하는 표정을 노려봤다. 이원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가증스럽게 불쌍한 척 구는 저 인간이 잠자리에서 얼마나 변태적이고 비이성적인지. 씻겨 주는 것 좋아하시네. 씻겨 준다고 하면서 욕실로 끌고 가 일을 친 적이 얼마나 잦았던가. 안 그래도 좁은 욕실에 굳이 큰 욕조로 골라서 리모델링을 하더라니…….
최소한 섹스 관련으로는 불신의 극치에 달하는 재연이 불퉁하게 입술을 내밀고 삐죽거렸다.
“진짜 씻겨 주기만 한다니까요? 따뜻한 물에 푹 담그고 좀 쉬어요. 몸도 차갑잖아요. 긴장도 많이 했을 거고.”
“넌 안 믿어.”
“세상에서 나를 안 믿으면 누굴 믿으려고요?”
“너 말고 다.”
“정말 너무하네.”
꼬박꼬박 말대꾸하면서도 재연의 손은 빠르게 움직였다. 바지를 훌렁 벗기고 브리프만 걸친 엉덩이를 움켜쥐는 손을 느끼자 이원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꽥 질렀다.
“야!”
“네. 아, 예쁘다.”
“하재연!”
“어이쿠, 욕실이 가까워서 좋네요.”
“이게 진짜…….”
말리고 화를 내 봐야 불통이었다. 이원은 강한 힘에 질질 끌려가 욕실에 처박혔다. 재연이 눈을 접고 느물느물 속이 시커먼 웃음을 지으면서 얇은 브리프 위를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등줄기가 오싹하다. 입술을 핥느라 삐죽 나온 혀끝의 색이 붉었다. 재연이 욕조에 물을 틀고는 이원의 몸을 밀어 넣었다.
물기 없는 딱딱한 욕조 바닥에 엉덩이를 부딪힌 이원이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위로 들었다. 재연은 그제야 제 옷을 벗었다. 패딩을 벗고, 안에 입은 셔츠 단추와 손목시계까지 풀어서 바깥에 내던졌다. 옷 뭉치가 풀썩 떨어지는 소리에 이원은 귀까지 새빨갛게 붉혔다. 둘이 뭘 하나 궁금한지 토토가 다가와 기웃거렸다. 재연은 그 앞에 대고 문을 쾅 닫아걸었다.
철컥철컥, 벨트 푸는 소리가 욕실 안을 울려서 시끄러웠다. 점점 차오르기 시작하는 더운물을 손바닥으로 첨벙거리며 이원이 침을 삼켰다.
“씨, 씻겨 준다며……?”
“나도 옷은 벗어야죠. 다 젖잖아요.”
“아니, 홀랑 벗을 필요는 없잖아!”
기겁해서 소리 지르자 막 바지 지퍼를 내리려던 재연이 행동을 멈춘 채 흠, 하고 잠깐 고개를 갸웃했다.
“뭐, 좋아요. 형 취향도 가끔은 존중해 줘야…….”
도대체 자신의 취향이 뭐란 말인가. 이원이 불쾌한 얼굴을 하자 재연이 웃으면서 뾰족하게 튀어나온 입술 끝에 키스했다. 말랑거리는 입술이 얼굴 곳곳을 더듬다 떨어지자 이원이 조금 풀어진 얼굴을 했다. 재연이 더운물이 빠르게 차오르는 욕조 안에 입욕제를 풀어 넣었다. 상쾌한 향이 욕실에 가득 번졌다.
바지 밑단만 걷어 올리고 욕조에 걸터앉은 재연이 이원의 머리를 끌어 허벅지 위에 얹었다. 머리 감겨 줄게요. 중얼거리듯 말하고는 샤워기를 집어 들었다. 이원의 머리가 따뜻하게 젖었지만, 재연의 바지도 덩달아 흠뻑 젖었다. 이게 무슨 비합리적인 행동인가. 이원은 재연의 어설픈 행동을 지적하려고 했지만, 너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있어서 그냥 말을 하는 것 자체를 포기해 버렸다.
샴푸, 가구, 옷과 브랜드. 어떤 것에도 관심과 지식이 부족한 이원을 대신해 집에 있는 모든 물건은 재연이 골라 샀다. 샴푸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라일락 향기가 나는 샴푸를 한번 꾹 짠 재연이 손바닥을 비벼 거품을 내고는 젖은 이원의 머리카락을 골라내듯 잡아 쓸었다. 단단한 손가락이 두피를 긁고 지나갈 때마다 기분 좋은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재연은 노련한 마사지사처럼 귓가를 문지르고, 긴장으로 편두통이 슬금슬금 일어난 이마 주변을 쓰다듬듯 꾹 눌렀다. 완전히 풀어진 얼굴로 이원은 마치 손안의 고양이처럼 골골거렸다.
다시 샤워기를 틀어 머리를 완전히 헹궈 냈을 때, 재연의 바지는 손쓸 곳도 없을 만큼 푹 젖어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재연의 물에 젖은 짐승같이 초라한 꼴은 신경도 쓰지 않고 이원은 눈을 감은 채 반쯤 졸아 댔다. 욕조를 채운 물은 따뜻하게 근육을 풀어 주고 있었고, 입욕제 향기는 상쾌하고 기분 좋았다. 머리를 단단하게 받친 재연의 팔과 다리마저도 좋았다. 이대로 잠들면 좋을 텐데. 그러나 소박한 바람은 이루어지는 법이 없었다.
미끄러운 무언가를 바른 재연의 손가락이 목덜미에 닿았다.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내고 막으려고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겨우 움직인 손가락 몇 개가 물 안에서 첨벙거렸다.
“여기 뭉쳤네요.”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목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부근을 누르며 재연이 귓불에 입을 맞췄다. 젖은 입술과 피부가 닿았다 떨어지는 소리가 무언가와 닮은 것 같아 이원은 말없이 어깨를 움츠렸다. 아, 정말 그냥 지나가진 않을 것 같은데. 피로로 점점 부어오르는 목과 뻐근한 몸. 침대보다 더 혹독하고 아플 욕실의 상황적 조건을 전부 고민하던 이원은 당해 주는 셈 치고 물었다.
“……하나만 말해.”
“네?”
“하나만 하자. 하나만 하고 빨리 쉬고 싶어.”
재연이 아주 이상한 표정을 했다. 저걸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떻게 벗겨 먹을까. 딱 그런 얼굴로 재연은 머뭇거리다 이내 화사하게 웃었다. 아주 신이 난 모양으로 재연이 이원의 뺨을 잡고 깊게 입을 맞췄다. 입 안에 들어온 혀는 뜨겁고 축축했다. 하아, 숨결이 동그랗게 말린 혓바닥 위에서 섞였다. 이원은 코로 텁텁하고 더운 공기를 빨아들이면서 재연의 목덜미를 껴안았다. 입술이 좀 더 짙게 붙었다.
생각해 보면 좀 더 빨리 이렇게 둘이서만 있고 싶었다. 해 질 녘 가게에서부터 얼마나 정신적으로 휘말렸던가. 안정감을 얻는 것은 아직도 재연의 품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의 세상에서 유일하게 더운 온도를 가지고 있는 이 체온과 열기, 사랑과 포옹……. 이원이 몽롱한 눈을 깜박이며 혀를 빨았다. 재연의 눈이 점점 더 크게 휘었다. 뺨이 움푹 패일 정도로 깊게 혀를 빨아들이던 재연이 잠깐 입술을 떼어 냈다. 더운 공기에 폭 잠겨서인지 아니면 성애를 건드려서인지 손바닥 안에 감지되는 이원의 온도가 뜨거웠다.
“하나만 해 볼까요.”
노곤노곤하고 기분 좋은 목소리로 재연이 이원의 뒤통수를 가볍게 눌렀다. 아직도 하체에 걸치고 있는 젖은 바지가 코끝을 스쳤다. 난 이거 싫은데. 이원이 불만스럽게 대꾸하면서도 혀를 내밀어 느슨하게 벌어진 바지 지퍼 사이로 부풀어 오른 브리프 위를 핥았다. 겨우 그것만으로도 재연이 탄식했다. 인내심이 너무 얄팍해진 것 같단 말이야. 입질 한 번에 쌀 것 같고……. 재연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자신의 얄팍한 인내심을 욕하며 엉덩이를 살짝 들었다.
젖은 바지와 브리프를 반쯤 내리고 제대로 자세를 잡은 이원이 입을 벌렸다. 그리 크게 벌리진 않았다. 조금씩, 선단 끝부터 고환이 있는 뿌리 끝까지 핥아 가며 충분히 적신 뒤 삼켜 주겠지. 재연은 자신이 가르친 그대로 행동하는 연인의 모습이 귀엽고 만족스러웠다.
“천천히, 하, 좋아요…….”
혀에 닿는 맛은 조금 찝찌름했다. 선단에서 흘리는 액은 적응되지 않는 맛이라고 생각하며 이원은 재연의 성기를 흠뻑 적셔 나갔다. 뜨겁고 축축한 입 안에 성기를 밀어 넣고 둥글게 입술을 말아 빨면 머리꼭지 위에서 묵직한 숨소리가 터졌다. 딱 그만큼 입 안에 들어 온 성기도 힘을 받는다. 외설적인 질감이었다. 사타구니 사이에 머리를 처박고 개처럼 신음하며 성기를 빨아 사정을 유도하는 건 과연 건전한 성행위라고 볼 수 있을까. 이원은 볼 한쪽을 터질 것처럼 누르는 성기를 목구멍까지 처박아 빨면서도 그런 도덕적인 의문을 떠올렸다.
잡생각에 빠져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재연이 머리를 좀 더 깊게 눌렀다. 목젖을 꾹 찔러 오는 두툼한 성기의 감촉에 올라오는 구역질도 이제는 익숙하다. 식도와 기도를 크게 벌리고, 코와 벌려진 입 틈새로 숨을 쉬면 저절로 성기의 전신이 빨렸다. 얘는 섹스 매너가 왜 이따위일까. 이원은 숨이 막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또 잡생각을 했다.
재연이 허리를 크게 쳐올렸다. 섹스라기보단 벌을 주는 것과 비슷한 행위였다.
“욱……!”
허벅지를 붙들고 있던 손이 손톱을 세웠다. 날카롭게 각도를 수직으로 바꾼 손톱은 튼튼한 허벅지의 안쪽 근육과 피부 대신 덜 벗겨진 바지의 젖은 천을 긁었다. 눈물이 퐁퐁 솟았다. 반쯤 밀려난 하체가 다시 입 안에 와서 가득 처박힐 때 잘못해서 치아로 긁어 버리면 어김없이 재연의 움직임은 더 잔인해졌다. 퍽, 퍽, 성기가 목구멍 안쪽을 범했다.
“음, 읍, 음…….”
이원에게는 전혀 좋지 않고, 재연에게는 매우 기쁜 일은 성기를 빠는 쪽이 이런 행위에 매우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구강성교의 뒤에 일어날 사건들이 차곡차곡 적립식 쾌감을 만들었다. 조금 있으면 벗겨진 몸을 뜨거운 손가락이 잘 더듬고, 핥고, 빨고, 둔부를 주무르고, 민망한 곳을 열어젖히고 들어와 점막 안쪽을 구부린 손가락으로 힘차게 긁겠지.
검지와 중지를 쭉 세우는 게 아니라, 접어서, 완전히 굵어지고 각진 것으로……. 그렇게까지 생각했을 때, 척추를 때리는 쾌감이 찾아왔다. 헉. 이원이 울다 말고 숨을 멈췄을 때, 입 안에 정액이 터졌다. 줄줄 흘러 목을 적시고 일부는 다시 바깥으로 흘렀다.
“아직도 제대로 못 받아먹는군요.”
식사 예절이 어설픈 아이를 두고 하는 말 같았지만, 반대로 아래 구멍이 헐겁다며 창부를 조롱하는 말 같았다. 이원은 그런 재연의 말투를 지적하지 않았다. 어쨌든 서로를 대상으로는 매우 사실적인 말이었으니까.
이원은 자신이 조금 변태 같다고 생각했다. 억압받는 것과 마찬가지인 삶을 살았는데 왜 아직도 이런 식으로 굴려지는 게 좋은가. 역시 원장이 준 좆같은 경험이 침대 위에서 수동적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걸까…….
“자, 핥아요.”
재연은 이원의 몽롱한 눈을 마주 보며 손가락을 입술 위에 가져다 댔다. 생각에 잠긴 채로도 이원은 순순히 입술을 벌리고 혀를 내밀어 손가락에 묻은 정액을 핥았다. 손가락을 죄다 빨고, 성기에 남은 정액까지 모조리 먹어 치웠을 때는 더워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입욕제가 듬뿍 들어간 욕조에 잠긴 몸은 미끈거렸다. 나가고 싶다. 찬물도 마시고 싶었다.
축 늘어져 숨을 내쉬자 재연이 반쯤 내려간 브리프와 바지를 마저 벗어 던지고 욕조 안으로 들어왔다. 아, 정말 싫은데……. 이원이 재연의 어깨를 조금 밀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더운물에 재연의 체온까지 겹쳐지자 더 더웠다. 제발 침대에서 하자, 이원이 애원했지만 허벅지 안쪽을 주무르는 손은 단호했다. 아주 조금 굳은살이 박혀 있는 손바닥이었다. 물에 미끄러져 허벅지 안쪽과 사타구니를 차례대로 쓰다듬고 엉덩이를 꾹 쥐었을 때, 이원은 재연의 어깨에 고개를 걸친 채로 헐떡거렸다. 애무라고 할 것도 없는데 오르가즘이 지척이었다. 이 문제덩어리 몸뚱이. 이원은 자신을 욕하며 약하게 재연의 미끄러운 어깨에 이를 세웠다. 재연이 조금 빠르게 엉덩이 사이의 골을 찾아 입구를 손끝으로 세게 문질렀다.
“아……!”
학습된 뇌는 다음 차례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제는 더운 공기에 숨통이 조이는 것도 잊어버렸다. 넓은 욕조에서 두 다리를 뻗어 재연의 허리에 감았다. 재연이 조금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원은 그 웃음이 순수하지 않다고 느꼈다. 잘 훈련된 개새끼를 귀여워하는 웃음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훈련을 잘 시킨 자신에 대한 뿌듯함일까.
물이 첨벙거린다. 손가락이 내부를 밀고 들어왔다. 꼿꼿하게 펴진 채로 들어온 손가락은 내벽 안에서 둥글게 구부러졌다. 그 휘어진 손가락 마디의 관절이 안을 쑤시는 것은 성기가 내벽을 처박는 것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흐으, 읏…….”
이물질이 섞인 물은 미끈거렸다. 오일로 목욕을 하는 기분이었다. 재연이 입욕제를 아끼지 않고 쏟아붓는 것은 죄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겨우 신음을 참았다. 하지만 그 대가로 아랫배가 조여들었다.
“힘 빼요.”
재연이 경박하고 참을성도 부족한 엉덩이를 지적했다.
“이렇게 조이면 내 거는 어떻게 넣으려고요?”
이원은 분하고 억울했다. 그렇게 잘났으면 네가 깔려서 벌리던가! 물론 재연은 이원이 원한다면 정말 다리를 벌려 줄 정도로 헌신적인 연인이었다. 윤이원 본인이 그런 취미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관계는 늘 일정한 체계를 유지했다.
“힘 빼라니까요?”
글쎄, 네가 해 보라니까. 이원은 욕 같은 비난을 삼키며 헐떡거렸다. 내벽을 콱콱 눌러 대는 손가락 때문에 딱 죽을 맛이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엉덩이 사이가 좁혀지면서 마디 사이의 뼈와 굴곡을 빨아 먹을 듯 조였다. 미칠 것 같다. 가쁜 숨을 내쉬며 이원이 힘을 풀어 보려고 애를 쓰자 재연이 기다렸다는 듯 손가락을 끝까지 쑤셔 넣었다. 내벽 안쪽에서 혼자 구부려졌다 펴졌다, 반복하는 행위에 이원이 입을 벌리고 비명을 질렀다.
“아! 으음, 싫, 아프, 흐……!”
“아프긴요.”
“진짜 아프…… 아아!”
“더 굵은 것도 잘만 삼키면서.”
못된 지적을 하며 재연이 내벽 안을 꼼꼼하게 쑤시고 벌렸다. 손가락 두 개로 희롱당하는 몸은 어여쁘고 야했다. 관계를 맺을 때마다 재연은 최대한 이성적으로 굴도록 자제를 했다. 놀랍게도 이원이 느끼기에는 조금도 자제된 행동이 아니었지만.
내가 당신을 늘 욕보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은 알까. 재연은 눈앞을 허옇게 만드는 탐욕에 욕을 꿀꺽 삼키면서 솟아오른 귀두 끝으로 흐물흐물 풀어진 입구를 쑤실 것처럼 세게 비볐다.
“음, 헉…….”
뜨거운 열기에 이원이 이마를 어깨에 박고 마구 문질러 댔다. 성욕을 참지 못하는 애인을 보며 재연은 벌써 녹초가 된 몸을 어루만져서 달랬다.
“쉬이, 착하죠?”
이원의 눈초리가 아주 뾰족하게 변했다는 게 느껴진다. 적당히 타이밍을 맞춰서 재연은 벌어진 틈 사이로 성기를 처박았다. 뜨거운 내벽이 성기를 조이는 것과 동시에 어깨가 따끔거렸다. 이원이 손톱을 세워 재원의 어깨에 박아 넣으며 소리를 질렀다. 욕조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거센 교성이었다. 그래, 교성.
“안…… 아아악!”
손가락은 여전히 안을 차지하고 있었고, 두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어 자리를 잡은 성기는 아랫배를 찢어 버릴 것처럼 육중했다. 손톱으로 어깨부터 등줄기까지를 긁어내리며 이원이 발버둥 쳤다. 아프다, 정말로 아팠다. 본래부터 성교를 위해 만들어진 곳도 아닌데, 커다란 성기로도 모자라 손가락까지 넣다니, 이 개 같은 새끼.
이원이 주먹으로 재연의 등을 내려치며 뭐라고 욕을 하려 했지만 재연이 더 빨랐다. 솔직히 관계를 맺을 때면 재연은 늘 강압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순순히 당하는 이원이 너무 착해 빠진 거라고 생각하며 재연은 허리를 움직였다.
굵은 성기가 반쯤 빠져나왔다가 다시 안쪽으로 빠르게 처박혔다. 여전히 손가락은 그대로였다. 성기에 쑥 밀려 올라가거나 옆으로 벌어진 손가락이 애꿎은 내벽을 득득 긁어 댔다. 이원이 허벅지를 경련시키면서 울었다. 한계 이상으로 벌려진 입구며 내벽이 너무 아팠다. 손가락 사이를 비틀며 성기가 들어올 때마다 가슴이 펄떡거리며 뛰었다.
“아, 흐, 아프, 흡!”
가슴팍을 내려치며 울자 재연이 그제서야 안에 들어 있던 손가락을 빼냈다. 단단하던 성기도 같이 반쯤 딸려 내려갔다. 밑이 완전히 무너지는 감각에 이원이 이를 악물었다. 허리 아래가 벌써 감각이 없었다. 몸을 비틀 때마다 욕조 안에 차오른 물이 튀며 요란한 소리가 났다.
재연이 다시 이원의 허리를 붙들고 몸을 밀어붙였다. 이원이 뒤로 힘없이 밀려났다. 흐물거리는 다리가 발뒤꿈치로 욕조 표면을 찼다. 퉁, 하고 낭랑하게 울리는 소리가 났다. 이원이 물 안에 그대로 빠졌다. 뜨거운 물이 펌프질 하는 것처럼 기도로 빨려 들어온다. 허우적거리다 재연에게 잡혀 겨우 위로 올라왔다. 물을 몇 번 뱉어 내지도 못한 채 다리를 크게 벌리고 삽입당했다.
“흑……!”
뼛속까지 뻐근하게 힘이 들어가는 느낌이다. 내벽이 안을 벌리고 파고든 성기를 연신 빨아 댔다. 기분이 좋은가, 아니면 아픈가. 감각을 제대로 판단하지도 못하고 허우적거리다 재연의 어깨를 겨우 끌어안았다. 재연은 이원이 조금 더 편안하게 자리 잡도록 자세를 바로 해 주고는 웃었다. 그래, 웃었다.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힘찬 재연의 몸짓에 출렁인 물이 욕조 바깥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게 정액을 사출하는 소리와 닮았다고 생각하며 이원은 눈을 크게 떴다. 반쯤 뽑혀 나간 성기가 다시 그만큼 처박혔다. 철썩, 철썩, 물이 욕조 표면을 미친 듯이 때려 갈겼고 두툼하게 발기한 성기는 안쪽을 긁어 댔다. 정액이 뭉글뭉글 새어 나오는 귀두 끝이 도톰하게 올라온 배 속의 가장 흥분되는 부분을 문질러 댈 때면 비명이 터졌다. 이원은 재연의 어깨를 끌어안고 허리를 흔들었다. 헉, 허억, 침과 물이 섞인 입술 사이로 혀가 파고들었다. 뜨거운 혀에서는 물맛과 입욕제의 향이 났다.
평소보다 묽어진 타액을 빨아 넘기면서 무릎을 굽혔다. 정확히 구부러지는 사이에 재연의 허리가 끼어 있었다. 딱 맞는 골격이라고, 맞춰진 것 같은 몸이라고 생각하면서 숨통을 꾹 부풀렸다. 기분이 안 좋을 리가 없었다. 감각이 날뛰고 있었다. 아랫구멍이 저절로 벌름거리면서 성기를 조여 물었다. 뜨겁고 말랑거리는 내벽이 성기를 끝까지 빨아 대자 재연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핏물이 나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지에 이빨이 박혀 피를 빨아 먹혀도 이보다 쾌락적이지는 않으리라. 그래서 결국 피를 보았다. 아랫입술이 만신창이로 쥐어뜯긴 이원이 통증 섞인 비명을 질렀다. 욕조에 퉁퉁 부은 입술에서 흘러내리는 핏물이 툭툭 떨어졌다. 어차피 뜨거운 수증기와 입욕제의 향에 가려져 피 냄새는 티도 나지 않았다.
재연이 혀로 상처를 핥았다. 쥐어뜯긴 입술이 너무 쓰라려 이원은 고개를 내저으며 상처를 들쑤시는 것을 말리려고 했지만, 재연은 아무것도 배려해 주지 않았다. 이 나쁜 자식. 핏물을 빨아 대는 그를 욕하고 싶었지만 아랫배가 욱신거렸다. 말을 하려고 배와 목에 힘을 주면 아래쪽을 파고 들어와 있는 성기가 다시 움직였다.
“흐으으…… 읏, 흡, 아아…….”
그냥 좀 싸고 나가라. 이원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아픈 입술을 겨우 벌리고 입 안에 잽싸게 파고든 재연의 혀를 씹었다. 콱 씹힌 혀가 아픈지 눈썹을 조금 찌푸린 재연이 피가 비치는 혀를 빼내고 우물거렸다.
“고양이가 할퀸 기분이에요.”
“뭐라는 거야, 이 변태…… 아!”
“귀여워라.”
제발 닥쳐라. 박았으니 그냥 흔들고 싸고 빼라. 왜 말귀를 못 알아 처먹는 거지? 이원은 한숨과 짜증이 가득 섞여서 그냥 본인이 허리를 흔들었다. 허벅지를 타고 완전히 올라앉자 삽입된 각도가 조금 비틀렸다. 머릿속이 창백해질 정도로 기분이 좋다. 찢어진 입술을 조금 떨면서 이원이 허리를 조금 위로 당겼다 주저앉았다. 털썩, 수면이 비틀리는 소리와 함께 배 속을 뿌듯하게 채운 재연의 성기가 꿈틀거린다.
짜증은 금방 사라졌다. 무겁던 짜증을 가볍게 떠오르게 한 것은 역시나 학습되어 몸에 남아 있는, 잔열 같은 쾌락이었다.
재연이 몸을 뒤로 물려 주었다. 움직일 공간이 넓어지자 이원이 몸을 흔들었다. 크게 출렁거린 물이 등을 한 번씩 퍽퍽 두들겼다. 으, 재연의 어깨를 쥔 손가락의 뼈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재연은 손을 내려 이원의 엉덩이를 그러쥐고 벌렸다. 팽팽하게 당겨지자 삽입구가 넓어지며 성기가 좀 더 깊숙하게 들어왔다. 욕을 하는 대신 이원은 입술을 말아 넣으며 좋아하는 곳으로 삽입을 유도했다.
굵은 기둥이 턱턱 내벽을 완전히 밀어붙이고 처박혔다. 응, 흐읏. 입술 사이로 교성이 줄줄 흘렀다. 삽입할 때마다 이원의 성기에서 정액이 실금하는 것처럼 줄줄 새어 나왔다.
“좀, 더어…… 아! 흐읏, 하…….”
완전히 이성이 상실된 기분이다. 백지처럼 허옇게 변한 머리로 오로지 절정을 위해 허리를 흔들었다. 삽입 행위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 재연은 완전히 손을 놓고 이원이 허리를 흔들어 대는 것을 구경했다. 그는 물에 흠뻑 젖어서 입술에는 핏물을 매달고 음란하게 움직였다. 성기가 벌어진 구멍 사이로 처박힐 때마다 이원은 눈에 보일 정도로 몸을 격렬하게 떨었다. 그 정도 오르가슴이면 이미 사정을 끝냈을 텐데, 욕심을 잔뜩 부리는 나쁜 아이처럼 발기한 성기를 계속 제 안에 쑤셔 넣었다.
재연은 그게 좋았다. 이원이 쾌락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날뛰고, 음란하게 추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좋았다. 가슴이 섬뜩할 정도로 대단한 쾌락이었다.
“재연아, 더, 흐…… 힘들, 재, 재여……언, 아, 흑!”
힘들다고 말하면서 이원은 점점 더 크게 움직였다. 당장에라도 저 몸을 붙들고 미친 듯이 처박아 흔들고, 원하는 대로 싸 주고 싶다. 재연은 몽롱한 이성을 겨우 붙들고 혼자 드라이 오르가슴을 느끼기 위해 애쓰는 이원을 감상했다. 이원이 반쯤 울음을 터트리며 손톱으로 재연의 가슴팍을 긁었다. 쓰라리고 따끔한 감각도 기분이 좋았다.
좀 도와주기 위해 손을 뻗어 유두를 잡아당겼다. 이원이 진저리 치는 것처럼 울면서 사정했다. 이미 정액이라고 보기 힘들 만큼 묽었다. 재연이 제 입술을 핥았다. 허벅지를 움직여 반쯤 일으켜 선 이원의 허리를 잡아 내렸다. 내장이 불쑥 밀려 올라갈 정도로 성기가 끝까지 처박히자 이원이 혀를 내민 채로 울었다.
“아아, 아!”
고통은 느끼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지금은 뭘 해도 좋아서 질질 싸겠지. 잡아당겼던 유두를 빨아 주자 이원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내벽이 꿉꿉하다. 윗입만큼 아랫입도 편식을 몰랐다.
“후…… 좋아요? 여기, 여기도 빨아 줘?”
다른 쪽 유두를 긁으며 재연이 속삭였다. 끔찍한 기분에 이원이 고개를 미친 듯이 저었다. 제발 가게 해 줘. 다 쉬어 버린 목이 거의 찢어진 소리를 냈다. 이미 여러 번 갔으면서도 그런 너절한 부탁을 하며 애원한다. 이름 따라가는 거지, 뭐든지. 재연은 이원의 이름자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원(願)을 생각하며 허리를 크게 움직였다.
이원이 안에서 재연이 싸 주는 정액을 받을 때 가장 큰 오르가슴을 느끼는 것은 이미 오래된 공식이 되었다. 재연은 그게 몸이 떨릴 정도로 기뻤다.
재연의 성기가 안을 처박을 때마다 죽을 것 같았다. 얼른 재연의 귀두에서 울컥울컥 정액이 터지길 기다리며 이원은 미친 듯이 안쪽을 좁혔다. 재연이 손을 들어 거리낌 없이 엉덩이를 몇 번이나 때렸다. 허벅지가 벌게지도록 안쪽을 손으로 주무르며 제대로 받아먹으라고 조롱했다. 이원은 스스로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재연이 상체를 받쳐 주고 있어서 무너질 염려는 없었다. 그냥 시키는 대로 했다.
성기가 미친 것처럼 안을 찌르고 들어왔다. 몸이 번쩍 들렸다 다시 아래로 처박혔다. 수직으로 꿰뚫리는데 어떻게 기분이 이렇게 좋지. 제발. 이원은 구멍을 벌리던 손을 떼 내어 제 성기를 잡아 흔들었다. 앞뒤로 오르가슴이 번갈아 찾아왔다.
“흐, 거기, 더! 더 세게! 아웃!”
재연이 씨발, 하고 중얼거리며 허리를 끌어당겼다. 직격으로 깊숙한 부분에 처박힌 성기가 꿈틀거리며 정액이 터졌다. 질질 흘러나오는 정액을 내벽 전체에 문질러 발라 주겠다는 것처럼 성기가 몇 번 더 세게 들락날락했다. 참았던 만큼 재연의 사정은 길었고 이원 역시 묽은 정액을 줄줄 뱉으며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그렇게 조여 대면 또 해 버릴 거라고 경고가 들어왔지만 참을 수 없었다. 아래가 혼자 벌렁거리며 좋아 미치겠다고 성기를 쭉쭉 빨아 당겼다.
성교로 올라간 체온은 떨어질 틈을 주지 않았다. 물은 한참 전에 식었고 공기도 반쯤 식었는데도 심장이 벌렁거렸고, 말랑해진 성기를 아직 물고 있는 애널은 근질거리는 것처럼 오므려졌다 풀어지길 반복했다. 질금질금 흐르는 정액을 성기를 한 바퀴 움직여 빼내며 재연이 뺨을 핥았다. 이원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힘들어…….”
다 녹은 치즈 같은 음성에 재연이 키득키득 웃으며 다시 엉덩이를 주물렀다. 하지 마, 이원이 울면서 어깨를 밀었다. 재연이 귀를 빨아 대면서 속삭였다.
“형이 싼 만큼 나도 싸야죠. 불공평하게…….”
너무 많이 싸서 더 세워지지도 않을 것 같은 이원의 성기를 툭툭 치며 재연이 개 같은 소리를 지껄였다.
“나도 여기가 텅텅 비도록 싸 보고 싶은데.”
“성격 고치라고…….”
“다정다감한 연하 이미지를 포기할 순 없죠. 형, 입 벌려요.”
재연이 웃는다. 이원은 숨을 몰아쉬면서도 그 맹랑한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 다정다감한 연하와 입 벌리라는 명령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건가. 다리 사이를 발로 걷어차고 일어날까, 고민에 빠져 있는데 전구 빛에 재연의 눈이 반짝거리더니 이내 손가락으로 이원의 뺨을 톡톡 쳤다. 입 벌리라니까요. 이원은 강압적 말투와는 따로 노는 예쁘장한 표정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그랬지만 갈수록 제멋대로인 재연의 성격이 문제라고 생각하면서도 이원은 순순히 입술을 벌렸다. 이겨 낼 수 없다. 아이의 어리광을 있는 대로 받아 주며 키운 제 탓이다. 허무한 기분에 입 안을 점령하는 혀를 받으며 몸을 축 늘어트렸다.
고분고분한 모습에 재연은 기분 좋게 웃으면서 엉덩이를 붙잡고 다시 깊숙하게 삽입했다. 뜨거운 성기가 몸을 가르고 들어오자 자연스럽게 부르르 떨리는 이원의 몸을 마음껏 즐기며, 다시 한번 격렬한 섹스가 시작됐다.
이원은 두 번째 사정과 함께 침대로 가자고 애원했다. 이원의 등이 타일에 긁혀 엉망이었는데 재연은 봐주는 법이 없었다. 몸이 차게 식으면 샤워기로 물을 끼얹어 다시 따듯하게 만들었고, 감기에 걸리겠다고 거듭 호소하니 커다란 수건을 있는 대로 가져와 몸에 둘둘 말아 주고는 뒤집어 놓고 뒤에서 헉헉거렸다. 이원은 수건에 칭칭 감긴 채 제대로 발버둥도 치지 못하고 뒤에서 재연의 몸무게까지 전부 받아 내며 울어야 했다.
종국에는 탈진해서 기절까지 가면 재연은 달콤한 척 불러 억지로 깨워 놓고 다시 가랑이 사이에서 미친 것처럼 박아 댔다. 몇 번쯤 까무룩 기절했다 정신을 차렸을까, 이원이 제발 꺼지라고 화를 내며 발로 얼굴을 걷어찼지만 소용이 없었다. 하재연 혼자서만 체력이 펑펑 남아돌아 날뛰던 정사는 그날 새벽에나 끝이 났다. 이원은 차갑게 식어 버린 욕실에서 숨을 쌕쌕 내쉬었다. 몸이 완전히 맛이 갔는지 하반신은 감각도 없었고 열이 으슬으슬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너…… 이, 짐승만도 못한…….”
콧물도 나오고 머리도 띵했다. 이원은 열이 올라 시뻘겋게 변한 얼굴로 저주를 퍼부었다. 사람 한 명을 반쯤 죽여 놓고도 재연은 온통 싱글벙글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재연은 오늘 행위로 온종일 쌓였던 스트레스를 반쯤은 해소했다. 그래, 딱 절반쯤. 아직 절반이나 남아 있지만 봐주었다는 걸 알면 이원은 뭐라고 할까. 재연은 화사하게 방긋방긋 웃으면서 입을 쪽쪽 맞췄다. 후희라기보다는 귀여운 애교에 가까운 입맞춤을 받으며, 이원은 조만간 저 예의를 모르는 아랫도리에 크게 엿이라도 먹여야겠다고 이를 북북 갈다 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