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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2. HAPPY, AND(2) (21/24)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이원은 혼자였다. 이상한 기분에 집 안 곳곳을 기웃거렸지만 재연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한낮이었는데도 캄캄한 밤 같다. 이원은 그렇게 넓지도 않은 아파트가 이상하게 무서워 침실 구석에 웅크리고 앉았다.

전에도 똑같이 눈을 뜨니 재연이 없어진 적이 있었다. 오른쪽 눈을 잃어버려 성하지도 않은 몰골을 하룻밤 사이에 숨겼지. 찾으려고 애를 쓰다 술을 먹고 병신처럼 잠들고, 하다못해 공사장에 또 찾아가 나쁜 짓을 반복하면서 이러면 재연이 찾아오겠지 하는 삿된 기대감을 가졌다.

이원은 당시를 곰곰이 생각했다. 뭐가 그렇게 마음과 행동을 채찍질했던 걸까. 재연을 보면 무서워 죽겠는데 보지 않아도 죽을 거 같아서 억지로 제 무덤 파는 짓을 사서 했다. 결국 반지하 단칸방 창문에 재연이 나타났을 때는? 당시 이원은 말하지 않았지만 전율했다. 자신의 판단이 맞았으니까.

재연은 이원이 그리워할 때는 와 주지 않았다. 오직 재연의 목표에서 벗어나는 짓을 저질렀을 때. 업을 쌓고, 말을 듣지 않고, 위험한 일이 생겼을 때만 찾아와 주었다. 그는 정말로 자신의 액막이라고 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얼룩진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손을 맞잡고,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혀를 섞는 행위가 얼마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던가.

하재연은 윤이원에게 매우 충성스러운 연인이었지만, 종종 꼭 들어줬으면 한다고 간절하게 한 부탁은 들어주지 않아 사람 속을 까맣게 태웠다. 어쩌면 그건 하나의 복수일지도 모른다. 재연이 혼자 애를 태운 세월은 더 길었을지도 모르니까. 서운하게 만들어서 다시 보면 좀 더 매달리게 하려는 계략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적어도 몸을 섞고 난 뒤에는 옆에 있어 주면 좋을 텐데.

이원은 애써 마음을 달래며 이사 선물로 엔지가 만들어 준 뜨개 담요로 몸을 칭칭 감은 채 자신의 그림자를 한없이 내려다보았다. 외로웠다. 열이 오른 머리가 좀 더 사람을 유치하게 만들었다. 서주영 같은 인간보다 자신이 훨씬 더 어른스러울 거라고 자신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아 이원은 홀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외로워하는 주인을 눈치챘는지 거실에서 홀로 공을 굴리며 놀던 토토가 방 안에 들어왔다. 까만 점까지도 애교스러운 토토는 귀를 쫑긋거리며 앞발로 이원의 손가락을 턱 짚었다. 엔지가 제일 처음 만났을 때 묶어 줬던 빨간 리본을 보란 듯이 흔들거리며 몸을 한 바퀴 굴렸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들어오자마자 옷을 벗고 난리를 치느라 놀아 주지도 못했다. 이원은 손가락으로 토토의 목을 살살 긁어 주며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뭐예요, 나를 그렇게 귀여워해 주지.”

토토와 이원이 둘 다 멈칫하더니 동시에 방문을 쳐다보았다. 어딜 다녀오는 길인지 한기를 꽁꽁 싸매고 돌아온 재연이 장갑을 벗어 서랍장 위에 내려놓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사람과 동물이 똑같은 표정으로 쳐다보니 어쩐지 부끄러운 것도 같고, 부담스러운 것도 같고.

성큼성큼 이원의 앞으로 다가온 재연이 코트도 벗지 않고는 쪼그려 앉아 찬 손으로 이원의 이마를 짚었다.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노곤하다 못해 절절 끓는 열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침대에 누워 있지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요?”

조금 짜증스러운 목소리에 울컥한 이원이 눈을 치켜떴다.

“왜 화를 내?”

‘열심히 자다 눈을 떴더니 네가 없어서 궁상을 떨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할 자신이 없어 이원은 최대한 기분 나쁜 티를 내며 대들었다. 음…… 재연이 눈을 가늘게 뜨고 볼까지 부풀린 이원을 바라보았다. 열에 들떠서 새빨갛게 변한 얼굴은 우습게 말하면 화가 난 복어 같았고, 예쁘게 말하자면 토마토 같았다. 눈은 열에 달아올라 촉촉하고 입술에는 물어뜯은 자국이 그대로 남아 부어 있다. 저 사람은 자기가 무슨 꼴로 사람을 유혹하는지 알기는 할까. 하늘만큼 말할 게 많은 것 같지만 설명해 주기에는 너무 귀찮아 그냥 대꾸도 없이 몸을 번쩍 들었다.

토토가 이원의 품에서 팔짝 뛰어내렸다. 이원의 몸을 덮고 있던 담요도 풀썩 바닥에 떨어졌다. 하얀 토끼가 하얀 담요를 뒤집어쓰고 폴짝폴짝 뛰며 바닥을 어지럽혔다. 재연은 이원을 다시 침대에 눕힌 뒤에야 코트를 벗었다.

“화를 내는 게 아니고 걱정하는 거죠.”

“걱정 좋아하시네, 그럼 왜…….”

따져 묻다 말고 이원이 입을 닫았다. 어쩐지 좀생이가 된 기분이다. 너그러운 사람이 되긴 역시 팍팍한 세상이라고 생각하며 이불만 끌어 올리자 재연이 옆에 걸터앉아 가슴을 토닥거렸다.

“많이 아파 보여서 약을 사러 다녀왔어요.”

“비상약 있잖아.”

깨었을 때는 옆에 없었던 주제에 다정하게 구니 더 마음이 물러졌다. 완전히 찌그러진 복숭아 같은 심장을 숨겨 보겠다고 몸을 말았다. 새우처럼 구부린 등을 쓰다듬으며 재연이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본인은 숨긴다고 하는 것 같은데, 완전히 퉁퉁 부은 뺨을 보니 귀여울 정도였다.

“몸살보다는 다른 쪽으로 아픈 거라 특별한 약을 처방받아 왔어요.”

“응?”

“역신에 영보천존에, 나까지 있는데 몸이 멀쩡할 거란 귀여운 생각을 하진 않겠죠?”

“…….”

그래서 아픈 거였던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이원이 이불을 곱게 말았다. 재연은 이불에 둘러싸인 누에고치 같은 이원을 품 안에 가득 끌어안고 이마를 마주 댔다. 뜨거운 이마가 바깥 냉기를 옮겨 온 품에서 조금이나마 식어 간다.

“직접 약을 좀 지어 왔어요. 밥 먹고 먹어요. 응?”

“……어.”

“화도 풀어요. 일찍 오려고 했는데 너무 오랜만에 가는 거라 조금 헤맸어요.”

“화 안 났거든.”

“그럼 다행이고.”

품에 안긴 채로 눈을 조금 굴리던 이원이 몸을 조금씩 움직여 완전히 재연의 위로 올라갔다. 이불에 사람 하나까지 완전히 올라탔으니 무거울 만도 한데 재연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이원의 목덜미와 귓불과 뺨에 차례대로 쪽쪽 입술을 부딪친 재연이 싱그럽게 웃으면서 등을 토닥거렸다.

“형.”

“응?”

어제 섹스하는 내내 생각했던 계획이지만, 말하면 내년까지도 화를 낼 것 같아 재연은 말하려다 말고 웃으며 깊게 키스했다. 조금 멈칫하던 이원이 부드럽게 입술을 열고 혀를 받아 주는 것도 괜찮았다. 싫은 일은 미뤄야지. 나중에 혼나도록 하자. 중요한 일을 말 안 하는 나쁜 버릇을 버리지 못한 재연은 잘 포장해 온 약재를 생각하며 잠자코 이원의 뺨을 도닥거렸다.

“뭐야.”

“예뻐해 주지 않으니 내가 대신 예뻐해 주고 있는 거죠.”

“궤변도…….”

졸린지 이원이 말을 하다 말고 하품을 크게 했다. 재연이 식사는 해야 한다며 억지로 늘어진 몸을 붙잡아 일으켰다. 놀아 주지 않는다고 서럽게 눈물을 흘리는 살찐 토끼를 잡아 배 위에 올려 두었더니 따뜻해서 더 졸린 모양이다. 연신 하품을 하며 고개를 꾸벅거리느라 재연이 가져다주는 죽을 겨우 먹었다.

이원이 그렇게 내내 침대에서 수발을 받으며 토토의 털 고르기나 도와주는 사이, 재연은 주방에서 조심스레 약재를 달였다. 곧 온 집에 한약 냄새가 가득 찼다. 쓰고 고약한 냄새를 맡으며 이원은 눈을 찌푸렸다. 도대체 무슨 약이길래 냄새가 이렇게 지독한 거지.

후각이 예민한 토토가 먼저 발버둥을 치며 자지러졌다. 먹던 당근을 뱉고 냄새가 고약한지 뒹굴어 대는 토토를 창가 위에 올려놓고 거실로 나가자마자 이원은 눈을 의심했다.

“……그게 뭐야?”

“어, 나왔어요?”

보면 안 되는데. 재연이 길고 흉측한 것을 집게로 집은 채로 모르는 척 끓고 있는 약탕기만 쳐다보았다.

“그게 약이라고?”

어이가 없어서 소리도 못 지르겠다. 이원은 재연이 집어 들고 있는 뱀을 보며 이마를 짚었다. 저 새끼는 감기 몸살이 정력 부족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집게에 붙잡힌 뱀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버둥거렸다. 머리가 세모꼴에 비늘이 번들거린다. 누가 봐도 독사로 보이는 저걸 내 입에 처넣으려고 했다고. 이원은 재연의 입에 저 뱀을 산 채로 집어넣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뭐, 약이죠.”

“너나 먹어.”

“형, 나 이거 가져온다고 새벽부터 고생했단 말이에요.”

“내가 시켰어?”

“진짜 귀한 거란 말이에요. 볼품없어 보이지만 300년은 족히 넘…….”

“…….”

뱀이 캬악,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울었다. 재연이 슬그머니 헛기침하며 약탕기로 시선을 돌렸다. 300? 300년 넘은 독사를 먹이려고 했다고? 열이 있는 대로 받은 이원이 뭐라고 하려 입을 벌리자 재연이 눈치채고는 잽싸게 뱀을 커다란 약탕기 안에 던져 넣었다.

뚜껑을 닫고 꽉 누르자 약탕기가 요동쳤다. 눈앞에서 벌어진 대참사에 이원은 할 말을 잃고 뻔뻔한 재연의 얼굴만 구경했다. 쟤가 정신이 나갔나. 감기 몸살에는 해열제와 비타민 정도면 충분했다. 쌍화탕이라도 끓이나 기대했던 자신이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 대추 넣고 팔팔 끓이는 쌍화탕에서 이런 고약한 냄새가 날 리 없지.

한참을 요동치던 약탕기가 잠잠해지자 재연이 손을 떼며 싱긋 웃었다. 이원은 속는 셈 치고 물었다.

“안에 뭐 들었어?”

“보셨다시피 질 좋은 뱀이죠.”

“또?”

“뱀 말고는 그냥 약재죠. 뭐, 감초나 인삼이나…….”

“내가 열어?”

완전히 굳어서는 무섭게 으름장을 놓는 얼굴을 보며 재연이 한숨을 쉬었다. 안방에서 한참 조용하기에 잠이라도 자는 줄 알고 내버려 뒀더니, 갑자기 튀어나오는 바람에 결정적인 걸 들켰다. 약탕기 안에 자라와 잉어도 들어 있다는 걸 알면 화내겠지. 거기다 이미 한참을 끓여서 꼴도 말이 아닐 것이다. 눈으로 봤다가는 토악질을 할지도 모르는데. 재연은 팔팔 끓는 약탕기를 옆에 두고 한참 머리를 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완고한 애인이 고분고분 넘어가 주진 않을 것이다.

흘끗 앞을 보자 팔짱을 끼고 선 이원의 뺨이 흥분으로 붉었다. 화를 참느라 꾹 다물린 입술을 본 재연이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지는 건 자신이다.

“자라, 잉어, 뱀…… 뭐 그 정도죠.”

“그게 내가 아픈 거랑 무슨 상관인데.”

“음, 그 자식의 부탁 들어줘야 하잖아요?”

그 자식…… 이원은 여전히 방만하기 짝이 없는 재연의 어휘 선택에 잠시 침묵했다.

“그런데 뱀은 왜?”

“기억 안 나요?”

“안 나.”

“에이, 하나 짐작될 텐데.”

“몰라.”

“혀엉.”

코맹맹이 소리 섞인 애교에 이원의 표정이 아주 조금 풀어졌다. 귀신같이 그것을 눈치챈 재연이 슬금슬금 다가와 허리를 끌어안았다. 젠장, 이원은 완전히 늘어질 뻔한 얼굴을 겨우 수습했다. 어린아이처럼 애교를 떨며 봐 달라고 머리를 비벼 대는데 귀여워서 죽을 것 같았다. 이게 다 콩깍지겠지. 다 큰 징그러운 사내자식이 뭐가 예쁘다고. 물론 예쁘긴 예쁘지만. 아아, 내 인생은 망했어. 늘씬한 미녀들보다 하재연이 예쁘게 보이다니. 속으로 청승을 떠는 이원의 귀에 침질하며 재연이 웃었다.

“용은 기억하죠?”

“……아.”

재연의 품에 안긴 채로 이원은 이 땅에 고독하게 머물렀던 마지막 용을 떠올렸다. 규룡, 치우.

“치우 님?”

“겨우 용 한 마리에게 님은 무슨.”

어디 가서 말했다간 돌 맞아 죽을 소리를 태연하게 지껄이며 재연이 이원의 뒷목에 입술을 붙였다 뗐다. 소름이 오스스 돋는 것 같아 이원은 목덜미를 한 번 짚었다가 재연을 올려다보았다. 불만족으로 울기 직전인 어린애처럼 투덜거리며 재연이 설명했다.

“용의 기운이 아직 형에게 남아 있거든요. 되게 맛있는 냄새도 나고.”

코를 갖다 대고 킁킁거리며 재연이 음흉하게 웃었다. 처음 관계를 맺었을 때가 생각나 이원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화가 나서 길길이 날뛰던 하재연과 일을 쳤지. 엔지의 카페를 찾아왔던 이진현 이사가 역신의 후손이라는 걸 그제야 알려 줘 놓고는 조심성 없이 굴었다고 된통 혼이 나지 않았던가. 돋아난 비늘을 툭툭 긁으며 재연이 떠들던 조롱은 그렇다 치고 집까지 가는 택시에서부터 몸이 달아올라서 난리도 아니었다. 그때부터 몸이 헤퍼진 게 아닐까. 아니라면 남자끼리 하는 섹스로 이렇게 느낄 수 있나?

이원은 혼자 공포와 비슷한 생각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혼자 과거를 헤맨다고 정신이 쏙 나간 모습을 보며 재연이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그는 뒤끝이 조금 심한 사람이었기에 아직도 속을 뒤집던 이원의 행동을 생각하면 짜증이 났다. 사랑하는 건 사랑하는 거고, 짜증은 짜증이지.

“어제 욕실에서 딱 알았어요. 솔직히 아직 남아 있을 거란 생각을 못 했는데 형 흥분하면 달고 부드러운 맛, 아니 냄새가 나고.”

“닥쳐.”

“조금 더 박아 주면 저번처럼 비늘이 돋아나지 않을까요?”

“입 닥치라니까.”

“그래서 생각한 건데, 아예 그 용의 기운을 다시 뒤집어씌우면 될 것 같더라고요.”

“닥치…… 응?”

이원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입으로 욕을 하다 말고 멍한 표정을 짓는 것이 귀여워 재연이 참지 못하고 키스 세례를 퍼부었다. 얼굴에 수도 없이 내려오는 입맞춤을 멀뚱히 받으며 이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용의 기운을 씌워?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재연이 세운 원대한 목표를 이해하지 못하고 가만히 뽀뽀나 받고 있었더니 재연이 약탕기 안을 긴 대젓가락으로 한번 뒤적거리고는 다시 설명을 이었다.

“나도 힘이 돌아왔으니까요. 형이 지금 달여 주는 약 잘 먹으면 시간에 딱 맞춰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자세한 설명을 해 달라고.”

“음…….”

대충 넘겨 주면 좋을 텐데. 본인의 문제는 생각하지 않고 이원의 의심병이 지나치다고 생각한 재연이 뾰족하게 변한 눈꼬리 끝에 입을 맞추며 난처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아까 본 뱀은 사실 이무기예요.”

“……뭐?”

“어차피 이 땅에서 용이 자라긴 힘들거든요. 기운도 부족하고, 여러 이유가 있지만요. 하여튼 허무하게 꿈을 키우느니 형 배 속에 들어가는 게…….”

“…….”

“자라나 잉어도 비슷한 애들이에요. 아, 잉어 배 갈라서 내장 빼낼 때 진주가 나왔는데 그걸로 반지라도 해 줄까요?”

윤이원은 충격을 받았다. 하재연은 자기 생각 이상으로 성격이 모난 모양이었다. 이 정도면 사이코패스나 다름없지 않나. 몇백 년 묵은 영물을 자신에게서 용의 기운을 끌어내겠다고 잡아 죽여 약탕기에 끓였다니. 그것도 모자라서 진주를 뭐? 반지를 해? 이원은 약탕기에서 산 채로 삶긴 물뱀 시리즈에게 미안해 죽고 싶었다. 집게에 잡힌 채 펄떡거리며 사악한 소리를 내던 뱀이 이렇게 불쌍하게 느껴지긴 처음이었다.

“넌 죄책감을 가져야 해.”

“죄책감이라뇨. 걔들이 영광이지.”

“죽는 게 뭐가 영광이야.”

“아니…… 형, 지금 그 뱀이 나보다 더 소중하다는 거예요?”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 이원은 아까부터 계속 미친 소리만 해 대는 재연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재연은 양심이 없는 사람처럼 입술을 삐죽거리며 긴 대나무 젓가락을 위협적으로 흔들었다.

“저거 구해 오겠다고 힘들게 뛰어다닌 나는 신경도 안 쓰고 왜 뱀 걱정을 해요?”

“뱀이 아니고 이무기라며.”

“그 큰 이무기 잡아다 작게 줄인 것도 나인데.”

“그러니까 왜 잡아 와서…….”

“자라도, 잉어도 엄청 컸는데! 약탕기까지 사 왔더니 무거워 죽는 줄 알았는데…….”

재연이 칭얼거렸다. 기가 막혀서 말도 못 하고 입을 뻐끔거리자 재연이 옆에서 끝없이 종알거렸다. 뱀에게 졌어, 저런 짜증 나는 성격의 이무기가 뭐가 좋다고 아끼는 거야, 언제는 내가 제일 좋다며, 사랑이 식은 거야, 죽을까.

정신이 사나워 죽겠네. 이원은 팔팔 끓는 약탕기를 보며 한숨만 푹푹 쉬었다. 저걸 누가 말리겠는가. 세 마리 영물이 고스란히 끓고 있는 역겨운 물은 결국 제가 죄다 마시게 될 것이 분명했다. 어쩌다 비위까지 실험당하게 생겼다. 이원은 끝도 없이 팔자 타령을 하며 알겠다고 한숨을 쉬었고, 재연은 품에 이원을 끌어안고 승리감에 도취해 몰래 웃었다.

***

토토는 이원이 약을 마실 때면 구석에 숨어서 오들오들 떨었다. 자기도 약탕기에 삶길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지능이 떨어지는지 아무리 숨어 봐야 빨간 리본 끈이 그대로 보이거나 희고 통통한 엉덩이와 꼬리가 보이곤 했다. 이원은 약 냄새를 풀풀 풍기며 토토를 잡아다 뽀뽀를 하는 가학적 취미가 생겼다.

코를 막아 가며 겨우겨우 들이켠 약사발을 내동댕이치듯 멀리 던지고 이원이 침을 퉤퉤 뱉는 시늉을 했다. 재연이 바닥에 조금 고인 약까지 다 마셔야 한다며 억지로 입을 벌리고 한 모금을 마저 밀어 넣게 했다. 약은 엄청난 맛이 났다. 쓰고 진하고 느끼하고 비리고 달고 매웠다. 500년쯤 묵은, 썩은 음식물 쓰레기 맛 같다. 이원이 감상을 읊었다.

“최악이야.”

“그래도 잘 참네요.”

토할 줄 알았는데. 재연이 뻔뻔한 얼굴로 중얼거리고는 그릇을 싱크대에 넣어 두고 돌아왔다. 토토를 끌어안고 한참 괴롭히던 이원은 재연이 다가오자 입을 벌렸다. 젖은 입술 사이로 커다란 사탕이 한 알 들어왔다. 까끌까끌한 사카린이 묻은 옛날 사탕을 빨면서 토토와 코를 부대꼈다. 여전히 공포에 시달리는 토토가 앞발로 이원의 코를 마구 때렸지만 물러나지 않는다. 둘의 하극상 같은 꼴을 지켜보던 재연이 뒤로 불쑥 다가와 목덜미를 콱 깨물었다.

“흣!”

감도 좋은데. 재연이 중얼거리며 코를 목덜미에 푹 파묻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하루에 세 번, 약을 꼬박꼬박 복용한 지 오늘로 5일째였다. 이원은 약의 부작용인지 뭔지 모를 것 때문에 하루 종일 침대에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크리스마스를 허무하게 날렸다. 덕분에 배부른 호랑이가 된 건 하재연이다. 그는 5일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자신의 욕구를 있는 대로 발산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용의 신체. 슬금슬금 티셔츠 안을 파고드는 손등을 꼬집어 떼어 내며 이원은 한숨을 푹 쉬었다.

약을 복용하게 되면서 외출은 엄금이 되어 버렸다. 답답하다고 난리를 쳐서 잠깐 동네 산책하러 나가는 길도 반드시 하재연이 동참했다. 온몸에서 단내가 풀풀 나는 바람에 이원의 주위로 잡귀부터 좀 큼직한 악령까지 거의 빠짐없이 꼬였다고 보면 된다. 아마 이원의 눈이 예전 같았으면 밤에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할 거라고, 재연은 아파트 창문 바깥에 빼곡하게 모여든 귀들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얼굴이 전부 녹아내린 귀신 하나가 창문을 이마로 쿵쿵 쳤다. 재연은 조금 냉정한 시선으로 창문 바깥을 노려보며 이원의 업을 빌어 겨우 세상에서 풀려날 수 있었던 용을 생각했다. 이미 인계의 탁한 기운에 더럽혀져서 승천할 힘을 잃어버린, 상처 입은 뿔 달린 용은 자신과 닮은 존재였다. 하재연 역시 신계에는 절대로 속할 수 없는, 인간에 가까운 덜떨어진 하자품이었으니까.

여전히 알 듯 모를 듯 바보처럼 구는 상청을 생각하며 재연은 윤이원의 윗입술을 빨았다. 아랫입술은 며칠째 내내 혹사당했더니 제대로 건드리지도 못할 정도로 피멍이 심하게 들었다. 몸의 밑바닥에 조금 고여 있을 뿐인 용의 기운을 꺼내는 건 많은 힘을 필요로 했다.

스무 시간 가까이 약한 불에 탕제를 달이는 것도 정성이 필요했지만, 신의 힘은 필연적이었다. 반편이 취급을 받지만 하재연의 근원은 신에게 속해 있었기에 그의 기운을 섞을 수 있는 육체적 교합은 물과 친한 용의 기운을 끌어내기에 적합했다.

“오늘도 해야 해?”

“매일매일, 꼬박꼬박.”

“아무리 생각해도 너한테 너무 좋은 일 같아…….”

“이런, 봉사하는 사람도 배려해 줘요.”

봉사 좋아하시네. 욕을 하려다가도 뻔뻔하게 셔츠와 바지를 벗겨 내는 손을 결국 뿌리치지 못하고 이원이 몸을 늘어트렸다.

“얼마나 더 마셔야 하는데?”

“최대한 많이요. 열흘은 꼬박 채워야 해요.”

“열흘이면 딱 말일이잖아.”

12월은 31일까지 있었다. 상청이 정해 준 기한도 딱 그때였다. 실패하면 어쩌려고 이러나, 걱정과 불안함에 휩싸여 투덜거리자 재연이 가슴팍 근처에 솟아난 비늘을 손톱으로 툭 건드렸다. 등줄기가 찌르르 울리는 쾌감에 이원이 허리를 굽혔다.

“으, 그거…… 하지 마라니까.”

“자아, 원래 이런 건 둘 다 즐겨야죠.”

사탕이 반쯤 녹아내린 입술에서는 단 향기가 났다. 재연은 기분 좋게 눈을 감으며 손안에서 흐물흐물 풀어지는 이원의 육체를 즐겼다. 이제 날짜가 되면 강 아래의 무덤으로 가기만 하면 된다. 그곳에 이원의 육체를 노리는 귀신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제대로 된 백귀야행을 거쳐 올라가는 것보다야 낫다. 사실 그곳보다 빠르고 쉬운 길도 없었다.

이원은 금방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재연은 이원을 울리는 게 좋았다. 이제 더는 울지 않을 거라고 눈을 강하게 뜨는 연인이 자신의 품 안에서 약해지면 기분을 다감하게 만들었다. 사랑해요. 재연이 늘 같은 사랑을 고백하며 깊게 몸을 파묻었다. 전율하며 울음을 터트리는 소리에 날개뼈 부근에 소름이 돋았다.

***

열흘째가 되었다. 집에 고인 약탕의 냄새는 빠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 해의 마지막을 남기고 크리스마스 이후로 내내 눈이 내렸다. 재연과 이원도 집에 갇혀서 눈이 내리는 걸 구경했다. 이러다 말일까지 내리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오늘은 해가 짱짱하게 빛이 났다. 이원은 눈이 그치면 오라던, 신선 같은 꿈속 노인의 말이 아득하게 생각나 눈을 감았다.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긴 진녹색 코트에 회색 머플러를 두른 재연이 현관문 앞에 서서 빨리 나오라고 다그쳤다. 이원은 패딩 점퍼를 입고는 허겁지겁 토토를 안아 들었다.

“왜 이렇게 급해?”

“시간을 맞춰야 해서요.”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오후 1시가 조금 넘어 있었고 정오가 지나 높게 뜬 해에 눈이 조금 녹아 있었다. 재연은 차 키를 챙겼는지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확인하고는 이원의 손을 잡아끌었다.

먼 산에 올라가는 내내 이원은 조수석에 앉아 졸았다. 열흘간 복용한 약은 천천히 몸을 바꿔 놓았고, 동시에 피로가 따라왔다. 재연은 자신의 코트를 이원의 목 끝까지 꼼꼼하게 덮어 주고는 차를 몰았다. 산 위의 절로 향하는 길은 가파르고 험했다. 경사가 심하게 진 곳을 지나가는 동안에도 이원은 한 번도 깨지 않은 채 잘 잤다.

서울 도심에서 북으로 정확하게 세 시간. 재연은 입구에 있는 공터에 차를 주차하고 이원을 깨웠다. 오래 웅크리고 있던 몸을 펴고 차 문을 열자 토토가 제일 먼저 눈밭으로 뛰어 들어갔다.

“오랜만이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이원이 고개를 돌렸다. 무당은 여전히 눈빛은 성성하니 빛이 났고, 조금 야윈 몸에 누빔을 한 쥐색 법복을 걸치고 있었다. 하재연과 이원이 기적적으로 또는 기적 그 자체로 살아났지만 무당이 떠나 보낸 장군신까지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정겹던 신당을 정리하고 엔지의 소개로 주지 스님 한 분만 계시는 자그마한 산골 절에서 일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잘 지내셨어요?”

“그냥 그렇지.”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여전한 모습에 이원은 멋쩍게 씩 웃었다. 무당과 이원이 소소하게 안부 인사를 주고받는 동안 재연은 말없이 신을 벗고 대웅전 안으로 들어갔다. 석가모니불이 인자하게 웃고 있는 작은 대웅전에는 재연의 양어머니가 모셔져 있었다.

양부모의 복록마저 이원을 구하기 위해 미쳐서 팔아 치웠다. 다들 재연에게 죽음을 경고했었다. 상청마저도 천륜도 아닌 인륜으로 만들어진 양부모와 양자의 관계를 희생시켜 억지로 끌어다 썼으니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받을 거라 분노했다. 재연은 다정한 양부모를 뒤틀어 자신을 미워하게 했고, 결국 그들이 비참하게 죽게 했다. 속죄는 어울리지 않았다. 한 사람을 구하겠다고 손에 잡히는 대로 팔아 치운 것들이 너무 많았다.

재연은 향을 하나 피웠고 두 번 절했다. 신으로서 무릎을 꿇고 명복을 빌었으니 다음 생에서라도 행복하시겠지. 하지만…… 현재가 비참하면 후생이 무슨 소용일까. 재연은 보장된 미래를 박차고 끔찍한 현실을 바꾸려다 실패했던 사람을 알고 있었다. 비참했던 결말도 잘 알고 있었다. 하재연은 그 사람을 사랑하지만, 종종 이원이 미련하다고 생각했으며 깊은 죄책감에 시달렸다.

부처에게는 절을 하지 않았다. 그는 신으로서 가져야 하는 자존심이 강요된 인간이었다. 불교에 귀의한 사람처럼 세 번 절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저승사자에게도, 하다못해 염라대왕이 찾아와도 하대를 하는 것은 같은 이유다.

향냄새가 나무의 마른 질감과 섞여 은근하게 퍼졌다. 곧 눈이 내릴 것 같다. 재연은 문간에 기대서서 즐겁게 떠드는 이원을 바라보았다. 꼬박 열흘째 마신 약과 저와의 교합으로 이원에게서는 용의 그림자가 보였다. 꿈틀대는 비늘, 마른 몸에 번진 구름과 비의 기운.

“하재연.”

이원이 가만히 선 재연을 불렀다. 조금 마른 손가락이 하늘을 가리킨다. 짙은 구름이 번져 있는 하늘에서 눈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아, 코트를 여미며 재연이 탄식했다. 구름 사이로 용이 승천하고 있었다. 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눈 온다. 크리스마스에는 잠잠하더니.”

산에 용이 있으니 그런 거겠지. 비와 구름을 몰고 다니는 현재 자기 상태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바보 같은 사람을 보며 재연이 픽 웃었다. 이원은 아무것도 모르는 말끔한 천치처럼 눈을 깜박였다.

이제 모시는 신은 없지만 오래 살아와 감이라는 것이 있는 무당이 한발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주름살에 근심이 얹혔다. 애써 못 본 척하며 재연이 입술만 겨우 끌어 올렸다. 다른 종파의 영역에 들어온 찝찝함이 손바닥에 식은땀으로 맺혔다.

“형도 인사해 줄래요?”

“응?”

“어머니한테.”

이원은 잠깐 시체가 된 듯 아득한 수렁에 빠졌다 겨우 기어 나왔다. 차갑게 젖은 재연의 손바닥을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에 남은 그녀의 마지막은 언제나 시체보다 더 창백한 빛을 띤 강시의 얼굴이었다. 피범벅이 된 입가, 소름 끼치는 송곳니와 뒤집힌 눈알. 그 끔찍한 모습을 서슴없이 도끼로 내려치던, 인간 같지 않던 하재연.

병세가 깊다는 양아버지가 어떻게 되었는지 이원은 물어보지 못했다. 알려 줄 리도 없는 이야기였다. 이원을 제외하고는 소중한 것이 없다고 당연하게 말하는 사람이 하재연이다. 그는 인간이길 포기하고, 마지막 남은 인간적인 정서조차도 윤이원에게 죄다 부어 넣었다.

이원은 늘 재연을 대신해서 그의 양부모들에게 빌었다. 용서해 달라는 말은 꿈에서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이 주는 벌과 원망을 모조리 받으면서 이번 삶만이라도 재연의 곁에 있고 싶으니까. 반대로 원장이 용서해 달라고 종종 다 일그러진 몰골로 나와 기어 다니며 바짓가랑이를 붙들었지만, 단 한 번도 선처를 해 주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번 삶이 끝나면 어떻게 될까?

재연에게는 하지 않을 질문을 공중으로 던지며 이원은 걸치고 있던 점퍼를 벗어 재연에게 건네주고 부처에게 먼저 절을 했다. 무릎을 꿇고, 이마와 팔꿈치를 바닥에 대고 엎드려 양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해서 귀에 붙였다. 오체투지(五體投地). 노골적일 정도로 부처를 떠받드는 몸짓이 담긴 절을 보며 재연은 짜증을 숨기기 위해 팔짱을 꼈다. 이원은 어떤 상황이든 주어지면 열정적으로 굴었다. 예전에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재연은 늘 후회를 했다. 벼랑에서 굴러떨어진 사람이 보이는 조급함이 언뜻언뜻 이원의 얼굴에 비칠 때마다 자신의 힘이, 능력과 노력이 전부 모자랐다는 비참한 생각이 들었으니까.

삼배를 마치고 합장을 끝낸 뒤에 이원은 재연의 어머니에게 절을 했다. 망자에게 하는 두 번의 절은 삼배하는 만큼 시간을 오래 끌었다. 한참 뒤에야 허리를 펴고 일어난 이원의 목덜미에 용의 비늘이 돋아나 있었다. 강력한 짐승의 기운을 둘렀는데도 어쩐지 위태로워 보인다고 생각하며 재연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유시(酉時)였다. 때맞추어 닭이 울었다.

“형.”

반절을 끝내고 선 이원을 향해 재연이 손짓했다. 슬슬 이매망량의 문이 열릴 때였다. 죽은 용, 치우의 힘은 비. 물속에 살던 영물의 힘을 복용한 지도 꼬박 열흘. 십이지의 열 번째 시간인 유시의 상징은 닭이다. 시작을 알리는 짐승.

또한 세상 모든 귀신과 도깨비를 가리키는 이매망량에서 망량 (魍魎, 물귀신)은 세 살 먹은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수신(水神)이다.

대웅전이 흔들렸다. 하나, 둘, 셋. 재연은 속으로 숫자를 세며 품 안으로 이원을 잡아당겼다. 모신 위패가 달그락거리며 소리를 냈다. 재연에게서 아무것도 듣지 못한 이원만이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재연아, 이거 왜…….”

“숨 쉬지 마세요.”

“뭐?”

“귀와 신은 숨을 쉬지 않으니까요.”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코와 입을 손으로 틀어막은 재연이 속삭였다.

“망량은 적흑색, 영혼은 적색, 용은 흑색, 수신의 빛은 푸른색, 용의 비 역시 물의 색. 이 땅의 유일한 용의 후계자가 오셨으니 문을 열어라.”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이원이 겁에 질린 채 앞을 보았다. 텅 빈 허공이 가로와 세로로 길게 찢어지더니 환한 빛이 터졌다. 눈이 부셔 질끈 감은 채로 어깨를 웅크렸다. 감은 눈꺼풀 위를 미친 듯이 때리던 흰빛이 잠잠해지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안도의 한숨을 쉬는 재연의 소리에 이원은 슬며시 눈을 떴다.

푸른 물줄기가 머리 위에 있었다. 바닥은 흙이 드러난 거칠고 마른 땅이었다. 누군지 모르는 자의 무덤이 반쯤 파헤쳐진 채로 서늘하게 버려져 있었다. 바람에서는 녹슨 철 냄새가 났다. 속을 뒤집는 악취와 풍경에 이원이 헛구역질을 하자, 재연이 어디서 났는지 모를 접선을 꺼내 부채질을 해 주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도 속은 나아질 생각이 없었다.

“여기, 욱, 여기 어디야?”

“무덤이요.”

“갑자기 무슨 무덤에…….”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다시 한번 살핀 재연이 이원을 재촉했다. 영문도 모르고 이원은 질질 끌려 황폐한 길을 걸었다. 수십 개의 무덤이 전부 파헤쳐져 있었고, 귀신 하나가 갈라진 무덤 틈 사이로 고개를 처박고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척추뼈가 울룩불룩한 사지로 봉분을 감싸고 있던 귀신이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입에는 시체의 골 찌꺼기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야구자(野狗子)*가 아가리를 쩍 벌리더니 이원에게 돌진했다. 재연이 재빨리 팔로 후려쳤다. 날아간 귀신이 몸을 뒤틀며 울부짖었다. 이원도 울부짖고 싶었지만 재연이 입을 틀어막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시 몇 개의 무덤을 지나쳤을 때는 피부가 검붉은 귀신이 시체의 배를 가르고 긴 손톱에 간을 꿰어 먹고 있었다. 붉은 눈이 희번덕 빛이 나더니 길게 늘어진 귀를 움직이며 입맛을 첩첩 다셨다. 재연은 길을 가로막은 귀신의 목에 나뭇가지 하나를 찔러 넣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원을 잡아끌었다.

좁은 길을 걸을 때마다 이원의 목덜미에 난 비늘을 시작으로 팔과 다리까지 비늘이 번지듯 돋아나기 시작했다. 손톱이 뾰족해지고, 까만 눈이 푸르게 변하면서 머리카락이 길게 자랐다. 이원은 자신의 몸이 변한지도 모르고 재연을 따라 정신없이 걷고 있었다. 무서운지 재연의 팔에 꽉 매달린 채 떨어 댄다. 이제는 귀신들이 이원을 보고 두려워 도망치고 있는데.

치렁치렁 내려온 머리카락이 길게 자라 발목에서 흔들릴 즈음에, 이원의 동공이 세로로 쭉 길어진 것을 보고는 재연이 걸음을 멈췄다.

“형.”

“어, 어?”

어찌나 얼어붙었는지 목소리가 쭉 갈라져서 나온다. 재연은 기묘하면서도 사랑스럽게 보이는 이원의 동공을 바라보다 헛기침을 한번 했다.

“이제 다 왔어요. 몸이 아프거나 그러진 않죠?”

물으면서도 재연은 혹시 자신이 예상하지 못한 사태가 생기진 않았을까, 차게 언 뺨을 쥐고 이원의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눈까지 변할지는 몰랐는데, 이원은 생각 이상으로 더 저주받은 영매 체질인 모양이었다.

“괜찮아. 이제 설명이나 해 줘.”

이원이 입을 열어서 말을 하는데 물 향기가 났다. 잔잔하고 깊은 영혼에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아, 이것 참 취향에 들어맞네. 재연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이원을 당장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입맛만 다시고는 길 끝을 가리켰다.

“편법이긴 한데요. 망자의 길 끝에는 늘 문이 있어요.”

“생문(生門)?”

엔지의 카페에서 이원은 구천을 떠도는 영혼의 소원을 들어주고 생문을 통해 이승에서 저승으로 보내는 일을 자주 했었다. 그가 아는 영혼이 지나는 올바른 길이란 늘 생문이었다. 배운 것을 잘 기억하는 좋은 학생이지만, 수없이 많은 도교의 주술과 귀나 신들의 언어와 규칙을 다 알 수는 없는 법이었다.

“태상노군은, 그러니까 노자는 인간 세상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상선약수(上善若水). 수선리만물이부쟁(水善利萬物而不爭), 처중인지소오(處衆人之所惡)(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으며, 누구나 싫어하는 낮은 장소에 머무른다).43)”

어려운 한자어의 음과 뜻을 하나씩 읊으면서 재연은 서서히 윤곽이 드러나는 신궁의 문을 보았다. 커다란 대문은 높고 웅장했으나 소박하고 단아한 맛 또한 있었다.

“고기어도(故幾於道)” (*그렇기에 물이란 도의 본래 모습에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다 / 노자, 『도덕경』 8장, 상선약수(上善若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물을 가장 사랑한 자는 노자였다. 그러니 그가 물을 마다할 리도 없었다.

“지금 형은 물이에요. 용의 힘을 겉에 씌웠으니 큰 물줄기가 된 셈이죠. 형이 열흘간 열심히 고아 먹은 잉어와 자라, 이무기 모두 큰 물줄기에 오래 기생하고 있던 것들이었어요.”

“…….”

“……저 문, 혹시 기억해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원은 거대한 물이 되어 흘렀다. 윤이원이라는 물이 흘러내려 도착한 곳은 도의 최고위 신, 원시천존과 영보천존, 태상노군이 각각의 궁을 지어 거주하는 삼청경(三淸境)이었다. 기억하지 못하는 곳인데도 어쩐지 정겨운 문고리에 이원은 속에서 무언가가 왈칵 치밀어 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거대한 문이 낡은 경첩 소리를 내며 열렸다. 속까지 녹슨 쇳가루가 떨어지는 기분에 재연은 손에 쥐고 있던 부채를 들어 얼굴을 가렸다. 상청 영보천존과 하재연. 두 존재는 겉의 외모는 달랐지만 영혼은 닮아 있었다. 귀신들은 육체를 보지 않는다. 괜히 칠칠하지 못하게 혼의 조각을 드러내 아랫것들에게 영보천존이 왔다는 왜곡된 인식을 심어 주고 싶지는 않았다. 윤이원의 옆에 서 있는 것은 인간인 하재연이 되고 싶었다.

얼굴을 반쯤 가린 재연이 이원과 동시에 문턱을 넘어 들어갔다. 문안은 황폐한 무덤의 땅과는 향부터 다른 달콤한 바람이 불었다. 버드나무의 잎이 푸르렀다. 커다란 못의 중앙에 세워진 정자까지는 교량이 놓여 있었다. 옛날에는 석량교(石梁橋)*였는데 이제는 아치형 석공교(石拱橋)*로 변해 있었다.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버드나무와 매화 꽃잎이 흩날리는 저 아름다운 원림에는 아치형 다리가 더 아름답게 보였다.

돌로 만들어진 튼튼한 다리의 중앙에 백발이 성성하고 수염이 길게 자라난 노인이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꽈리 열매로 만든 등을 든 종들이 교량의 가에 길게 늘어져 서 있다 동시에 허리를 숙였다. 젠장. 재연은 주술이 촘촘하게 새겨진 접선 뒤에서 입술을 비틀었다. 상청도 싫어하는 마당에 그의 오랜 친우인 태상노군이라고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같이 올 줄은 몰랐는데.」

낯설었으나 포근한 음성. 이원은 환한 웃음을 짓는 노인을 보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꿈속의 모습과 같은 존재였다.

“불청객이라 치부하세요.”

재연은 존댓말을 쓰는 것조차 불쾌했다. 자기가 손잡고 오라고 해 놓고 왜 어깃장이야? 눈을 내리깔고 나지막이 속에 든 불만스러운 말을 중얼거리자 노자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무례한 손님을 쫓고 싶어 안달이 난 종들을 조용히 시키고는 두 사람을 불렀다.

「오랜만이구나, 인간의 아이야.」

친근하게 인사를 건넨 노인이 잔잔히 웃으며 기억과 변함이 거의 없는 얼굴을 뜯어보다 의아함에 눈을 크게 떴다. 길게 찢어진 푸른 눈은 분명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아이의 몸에서는 물과 연꽃의 향이 가득 풍긴다. 그게 달아서 꽈리 등을 들고도 발을 동동 굴리며 군침을 삼키는 아랫것들까지 나올 정도였다.

본인은 모르는지 수런거리는 귀신들을 훔쳐보고 있었지만, 그 옆에서 얼굴을 가린 자는 태연했다. 이런, 태상노군이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오나 했는데, 허. 용, 용이라니.」

“네?”

그제야 이원은 자신의 몸이 이상하단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머리카락은 길어서 바닥에 질질 끌리고, 뾰족하고 긴 손톱과 손등까지 빼곡하게 돋아난 비늘까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이게 뭐야!”

이원이 제자리에서 방방 뛰며 고함을 지르자 재연은 얼른 휘파람을 불면서 딴청을 부렸다. 이 개자식. 일련의 사건들로 취약한 정신 상태를 가지고 있는 이원이 재연을 노려보다 옷을 뒤집어 몸 이곳저곳을 확인했다. 배는 물론이고 손등부터 팔뚝까지, 드러난 발목과 목덜미까지 피부가 제 몰골이 아니었다. 치렁치렁하게 길어진 머리카락은 또 뭔가.

“하재연, 너 맨날 말도 없이!”

“예쁘네요.”

길게 늘어진 머리를 하나로 모아 주며 재연이 슬슬 이원을 꼬셨다. 여기 오려면 어쩔 수 없었어요, 열흘간 내가 약탕기 앞에서 땀 뻘뻘 흘려 댄 거 기억하죠? 이무기 잡는데 그놈이 내 손등을 콱 물었다니까요, 아직도 여기 상처 있어요, 상처. 칭얼거리며 이원의 눈앞에 갖다 댄 손등은 아무리 봐도 조금 긁힌 수준이었다. 지켜보던 태상노군이며 하위 신들 전부 저런 상처에 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이지, 하고 생각했다.

“이…….”

“열흘이나 지났는데 아직 아물지도 않았다고요.”

다 큰 남자가 어리광을 부리니 욕이 튀어나올 거라 예상했는데 하재연 한정으로 한없이 약한 이원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설마 하며 지켜보는 구경꾼들의 마음을 무시하고, 삐죽 튀어나온 입술에서는 부드러운 말이 나왔다.

“아파?”

길어진 자신의 손톱에 혹시 긁히기라도 할까, 이원이 재연의 손을 조심조심 붙들고 상처를 살폈다. 재연은 입이 귀에 걸린 채로 웃으며 아프다고 말로만 엄살을 떨었다. 그 역겨운 꼴을 한참 지켜보던 태상노군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 친우는 이렇게 교활하지 않은데 말이지.」

“나는 상청이 아닙니다.”

기분 좋게 이원에게 걱정을 받고 있던 재연이 조금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그런 고지식하고 꽉 막힌 놈과 나를 비교하지 마세요.”

「이런…….」

태상노군은 더 말하지 않고 둘을 화려한 정자 안으로 안내했다. 봄꽃이 만연하여 꽃향기가 풍성하니 오랜만에 본 귀한 손님에게 술 한잔은 접대해야 함이 옳았다.

원림(園林)은 아름다웠다. 못에는 버드나무에서 흩어진 길고 푸른 잎사귀가, 잔에는 매화 꽃잎이 떠 있었다. 이원은 술잔 위의 풍류를 한참 동안 구경하다 흰색 꽃잎을 조심스럽게 건져 내고 꿀꺽 마셨다. 순식간에 목과 배 속이 타는 것처럼 후끈거렸다. 향만큼이나 센 독주였다. 재연은 옆에서 술을 병째로 마셨다. 지붕이 높은 정자는 뜨거운 태양 빛을 가려 주었고 바람 소리를 악기처럼 연주해 통과시켰다.

「사랑은 어떻더냐?」

“……태상노군?”

「노군이라 불러 주렴.」

글자부터 어려운 호칭을 겨우 외우며 이원이 조금 불안하게 얼굴을 들어 올렸다.

「나는 너를 기억한단다. 너는 나를 기억하느냐.」

“저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래, 그렇지만 기억하지 못하면 또 어쩌랴. 그저 사과를 하고 싶어 불렀단다.」

사과라니. 신이 한낱 인간을 불러서 하기에는 너무 거창한 것이었다. 옆에 앉은 재연은 말없이 인상을 찡그리며 방만하게 난간에 기대앉았다. 신이란 것들은 다 이렇게, 인간 세상의 혼란스러운 감정과 죄나 산적한 문제에는 관심조차 주지 않으면서 쓸모없는 제 근심은 재빠르게 덜어 내려 한다.

오로지 이원만이 태상노군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수많은 세월을 살아온 노인은 이야기 속에 나오는 신선의 모습 그 자체였다. 신선보다 더 높은 자이지만.

탁자에 가득한 음식을 이원 쪽으로 밀어 주며 태상노군은 수염을 쓸었다. 가득 담긴 신선한 과일과 음식을 한참 살펴보던 이원이 석류 하나를 집어 들어 반으로 쪼갰다. 알알이 꽉 찬 붉은 석류 알이 몇 개 떨어져 식탁 위를 굴렀다.

이원은 한쪽을 재연에게 건네주었다. 재연은 석류를 받아 들더니 자신이 먹는 게 아니라 알을 발라 이원의 입에 넣어 주었다. 어미 새가 새끼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이원의 입 안에서 새콤한 석류 알갱이가 톡톡 터졌다. 입가에 대어 준 명주 천에 씨를 뱉으며 이원이 기분 좋은 한숨을 쉬었다.

「전병도 먹으렴. 고기 산적과 단과자도, 선패도 다 네가 좋아하는 것들이 아니더냐.」

태상노군은 이원이 좋아하는 음식이라 말했지만, 상에 올라온 것은 대부분 본 적 없는 모양이었다. 홀로 과거와 동떨어진 듯 어지러운 기분을 겨우 숨겼다. 말없이 옆얼굴을 바라보던 재연이 대신 젓가락을 들어 음식을 이원의 입에 물려 주었다. 주는 대로 설탕과 기름에 볶은 호두와 삶아서 찢어 낸 닭고기를 말린 두부피에 싼 것, 오리고기를 썰어 만든 냉채를 차례대로 먹고 설탕을 넣어 바싹 구운 탕빙(糖餠, 중국식 호떡)을 먹었다. 잘 구워진 피 안에서 녹아 있던 뜨거운 설탕에 혀가 데었다.

“아파요?”

젓가락을 내려놓은 재연이 물었다. 고개를 저으며 말없이 차가운 술로 입 안을 식혔다. 재연은 먹지도 않는 복숭아를 손에서 굴리며 이원의 혀를 확인했다. 용의 기운에 먹혀 있어서 그런지 상처는 눈에 보일 만큼 빠른 속도로 아물고 있었다. 혀가 다 아문 것을 본 뒤에야 재연은 이원의 턱을 놓아 주었다.

꿈처럼 아름다운 풍경에 음식은 기름졌지만 자리가 불편했다. 이원이 눈치를 흘끗 본 뒤에 배가 부르다고 음식을 거절했다. 태상노군은 재연이 수건으로 이원의 입과 손을 닦아 주는 것을 보고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좀 더 먹지 그러니.」

“본론이나 말씀하시죠. 이곳에서 새해를 맞이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재연이 딱딱한 소리를 냈다. 그는 진심이었다. 고향이었으나 고향이 아닌 곳. 윤이원이 최초로 업을 쌓은 곳이자,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사랑했던 곳에 오래 있기 싫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상청이 나타나 빚을 갚으라고 하지만 않았어도 절대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

태상노군은 재연의 눈을 보았다. 모습을 숨기기 위해 부채로 얼굴을 가렸지만, 그의 친우와 꼭 닮은 혼의 모양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가, 저 아이는 결국 성공했는가. 불완전하게 태어났음에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겠지. 그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너와 영보군이 불행해질 것을 알면서도 지켜보기만 하였다. 방관한 나 역시도 가해자라 생각해 줄곧 후회하였다.」

가해자. 입이 쓴 단어에 이원은 잔에 조금 남은 술을 삼켰다. 술기운이 오르면 더워야 할 텐데, 오히려 손이 차가워졌다.

「나의 친우는 너무나도 완전해 자신이 만든 오류에 빠져 버렸지.」

“…….”

「네가 떠난 뒤로 그는 오래 힘들어했다. 그 상징이 네 옆에 앉은 자가 아니겠느냐.」

재연은 불안했다. 한 손으로 이원의 등과 허리를 끌어안은 채 매섭게 태상노군을 쏘아보았다. 이제 와서 겨우 얻은 사랑이다. 알량한 세 치 혀 놀림에 그의 마음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지금 와서 다시 가져가기라도 하려고? 신궁에 들어왔으니 거리낄 것도 없을 것인가. 입 안에서 혀를 깨물며 재연은 분노를 참았다.

「너무 미워하지 말아라.」

“미워하지 않아요.”

「그런가?」

“일단은…… 결국 도와주셨으니까요.”

「후회하진 않느냐?」

“후회요?”

후회 좋아하시네, 씨발. 가만히 듣고 있던 재연이 욕설을 중얼거렸다. 이원은 등 뒤에 바짝 붙어 앉은 더운 몸을 느끼며 웃었다. 심장 소리가 등 뒤에서 울린다. 왜 이렇게 불안해하는지 이원은 재연을 이해하면서도 이따금씩은 그러지 못하고 한없이 귀여워했다.

「그때 끝이 났으면, 이후의 불안감은 모르고 새롭게 살 수 있지 않았겠느냐.」

아……. 이번에는 이원이 불안해졌다. 억지로 벌어진 마음의 틈을 여미고 이원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그런가?」

“그랬으면 재연이는 너무 괴롭잖아요.”

불완전하거나 불확실은 감정의 일부일 뿐이었다. 그가 부족하거나 모자람이 없어 만난 것도 아니다. 자신이 외로워서 사랑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을 했다. 재연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곁에 있어 주는 게 전부였다. 오로지 불안감 때문에 끝을 원했다면 살고 싶었노라 강하게 염원하지도 않았다.

“나를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이상 이기적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때까지 쭉 이기적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이제라도 상대를 배려해 주고 싶다고 생각하면, 아직 덜 자란 걸까. 조금은 낯선 마음으로 이원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사랑이 어떠냐고 물어보셨죠. 상청께서도 제게 여러 번 물어보았습니다. 사랑은 위대하냐고요.”

그러나 이기적이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에 인간은 이기적이다. 윤이원에게는 상청과의 과거도, 태상노군을 알았던 자신도 너무나 옛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자신을 안아 주는 사람이었다. 타인의 상처를 신경 쓰기는 지쳤다.

“사랑은 위대합니다.”

「너는 해답을 찾은 모양이구나.」

노인은 자애롭게 대꾸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미 인간 아이의 눈은 확고한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상청과 재연이 동시에 서 있어도 재연의 손을 잡겠지.

이원은 두 존재가 같다고도 생각하지 않았고, 상대가 정해진 사랑이라 화를 내지도 않았다. 신에게 따질 마음도 없었다. 오히려 이원은 종종 재연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했다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근심했다. 그는 희생적인 사람이니까. 소중한 사람이니까.

그 달콤하고 순수한 마음을 읽으며 태상노군은 기분 좋게 웃었다. 자신의 친우는 결국 졌다. 오래도록 인간의 사랑을 외면한 대가를 받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가 졌다는 것은 깨달았다는 말일 것이다.

보아라, 오랫동안 늦여름에서 변하지 않던 원림의 시간이 이제야 흘러 사계절의 축복을 받고 있지 않나.

「그간 미안했었다.」

노인이 몰래 오래된 친구를 대신해 말했다.

「너를 몰라서, 믿어 주지 못해서, 내가 믿을 수 없는 자라 미안했었다.」

코끝으로 바람이 솔솔 불었다. 봄 냄새가 강렬했다.

「축복을 주려고 불렀다.」

“축복이요?”

두 쌍의 눈이 함께 태상노군을 보았다. 한쪽은 호기심이, 한쪽은 의심이 꽉 차 있었다. 상대적이면서도 비슷한 눈의 반짝임에 노인은 웃고야 말았다. 저래서야 너무 똑같지 않은가. 그의 친구는 저 둘을 두고 평생을 다 합친 것보다 더한 불평불만을 늘어놓았지만 노자가 보았을 때는 사랑스러운 연인이었다. 그들의 새끼손가락에 묶여 길게 연결된, 몇 번을 끊어 냈다가 다시 거듭 매듭지은 붉은 실을 보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 내 벗이자 벗이 아닌 자와, 아이야.」

누가 벗이냐며 재연이 딴지를 걸기 전에 태상노군이 먼저 말을 이었다.

「오래오래 살아라.」

“…….”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라.」

이원은 그 축언이 단지 태상노군이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어렴풋이 깨달았다. 자신의 옆에는 재연이 있었고, 그는 이미 먼 과거가 되어 버린 전생을 애써 기억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기억나는 장면도 있었다. 지난 일이었지만, 이원을 만들어 낸 기억이기도 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잊으려 하면 충분히 잊을 수 있었지만 더운 여름의 끝에 고정된 햇살과 아득하기만 하던 마지막 얼굴을 어떻게 지울 수 있을까. 덤덤한 표정을 한 재연도 이 정도는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네.”

언젠가, 멀리 가는 사람이 남겨질 존재에게 했던 말이었다. 영생을 사는 신에게 죽음을 보여 주며 행복하게 지내라고 했다면, 나도 참 잔인한 존재였구나. 이원은 자신을 냉정하게 욕했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평생을 홀로 지낸 신은 오랜 시간 저 말을 되돌려 주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저 자존심이 상한다고, 비틀어진 욕망과 수치와 회의감에 사로잡혀서 천 년도 넘는 시간을 지켜보기만 했겠지. 마음은 그렇게 앓았을 것이다. 이원은 알고 있었다. 상청이 정말로 자신의 행복을 기리지 않았다면 이 세상에 재연이 태어날 일도, 그와 손을 잡을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태상노군께서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세요.”

재연이 손을 꼭 쥐어 온다. 따뜻하다. 이원은 그 손을 깍지 껴 맞잡으며 웃었다. 높은 산의 꼭대기, 구름이 저 아래에 깔린 노산의 높은 봉우리. 인간은 찾아올 수 없는 신묘한 공간이었지만 이원은 마음이 편안했다. 마치 고아원의 오래된 복도를 둘이서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저도 행복하겠습니다.”

「그래, 그러려무나.」

이만 가겠다고 이원이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그 옆에 삐딱하게 서서 목만 까딱 숙인 재연이 급한 사람처럼 팔을 잡아끌었다. 연인의 손에 끌려 몇 걸음 걷다 말고 이원이 다시 멈춰 섰다. 팔이 잡힌 채로 재연과 눈을 한번 마주쳤다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상 앞에 앉은 태상노군이 왜 그러냐 입 모양으로 물었다.

한참을 망설였다. 이런 것을 물었다가 더 괴롭게 여생을 보내게 되면 어쩌나 불안했다. 방금도 지적받지 않았는가. 아무런 불안도 없이 그저 새롭게 시작하는 게 낫지 않았냐고. 그러나 이원은 알았다. 불안함을 기꺼이 감수했기 때문에 하재연과 있을 수 있었다. 이번에 떠나고 나면 다시는 물어보지 못할 것이다.

“이번 생이 끝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공포가 기어 와 잘근잘근 발끝을 깨물었다.

“저희가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한동안 이것이 꿈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악몽을 꾸고 깨어날 때마다 꿈속의 꿈이 아닌지 혼동이 와 자해를 하기도 했었다. 재연도 이원도 말없이 조금씩 지쳤었다. 이원은 재연이 두려움에 떠는 자신을 안아 주는 게 싫었다. 늘 소원은 하나, 자신이 그를 안아 주고 싶었을 뿐이다.

“언젠가 재연이가 다시 상청의 품으로 돌아가도, 제가 윤회에 올라도…….”

상상하면 여전히 무섭고 외로운 일이다. 오로지 그것을 근심으로 삼아 그렇게 애타게 모든 것을 내버리고 달리던 연인이었다.

“다 행복하게 끝날까요?”

태상노군이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원은 재차 물었다.

“저 말고요. 재연이가 행복할까요?”

재연이는 이 삶이 끝나도 잊지 못하잖아요. 지우지 못한 불안함이 층층이 쌓인 목소리에 노인의 주름진 입술이 반쯤 열렸을 때, 재연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부채를 내던지고 이원의 시야를 막아섰다. 상처받은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재연…….”

허리가 번쩍 들려 안겼다. 반짝거리는 눈이 불안함에 흔들려 얼룩지고 있었다. 속이 상할 대로 상했다는 얼굴이 보여 이원은 기꺼이 더운 뺨을 끌어안았다. 재연이 입술을 한번 질끈 깨물었다 놓더니 입을 맞췄다. 눈앞에는 태상노군이, 다리에는 여전히 귀신들이 늘어서 있었지만 참을 수 없었다. 입술에 닿는 부드럽고 뜨거운 숨결에 내내 참고 있던 눈물을 조금 쏟았다.

“괜찮아요.”

까마득한 거리에서 계곡물 흘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착각이 일었다. 바람이 뺨을 스친다. 껴안은 몸에서 체온이 절절하게 끓었다. 용의 기운을 헤치고 안쪽에 가려진 이원의 영혼에서 나오는 향을 들이마시며 이제는 재연이 울음을 참기 위해 헐떡거렸다.

“윤이원,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모두가 보고 있는데 부끄럽지도 않은지 재연이 이원의 귓가에 끝없이 속삭였다. 봄 날씨를 가진 정원에서 바로 보이는 대문이 열렸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눈이 내리고 있었다.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 상청이 사랑이란 마음을 도려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던 기억이 잔재한 것처럼, 이원과의 사랑은 이 삶이 끝나고 난 뒤에도 존재할 것이다. 누군가가 이 장면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저희 갑니다.”

이원을 안아 든 채로 재연은 짧은 인사를 마저 하고는 성큼성큼 다리를 가로질러 건너갔다. 대문 밖에서는 한기가 느껴졌다. 눈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혼자가 아니니 가는 길은 그리 춥진 않을 것이다. 물이 마르기 전에, 이원이 인간의 육체로 되돌아가기 전에 돌아가야 했다.

「조심히 가거라. 평안하게, 행복하게.」

추위에 노출된 재연의 목을 꽉 끌어안고, 이원은 숨을 참았다. 한 해가 다 끝이 나고 있었다. 황폐한 무덤길을 다시 되돌아 걷는 중에도 시간은 흐르고 끝은 있었다. 돌아가는 내내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침묵이 무겁지는 않았다. 한참을 걷기만 하던 재연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미래를 생각하지 마. 현재에 집중해. 네 앞에는 내가 있잖아.”

“……재연아.”

숨이 젖었다. 이원은 속이 상해 고개를 떨어트렸다. 죄책감이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현재는 소중했다. 두 사람은 서로가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잘 알았기 때문에 무엇과도 현재를 바꿀 수 없어 품 안에 끌어안고 아껴 먹었다. 하지만 재연이 종종, 인간 같지 않은 말을 하면 미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런 비현실적인 일을 겪고 나면 점점 더 멀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재연은 이원을 이해했다. 태생이 달랐으니까. 인간으로 쭉 살아갈 이원은 언젠가 존재 자체가 사라질 재연을 생각할 때마다 악몽에서 간신히 깨어나 울었다. 윤이원을 달래면서 재연은 자신을 스스로 위로했다. 이미 두 사람의 연은 이번 생으로 끝이었다. 다음 생에, 미래에 이원은 재연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고 새로운 인연과 행복하게 살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 지금껏 노력하지 않았나.

이런 마음을 알게 된다면 윤이원은 화를 내겠지. 왜 자신을 혼자 두려고 하냐고 울면서 도망을 가 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하재연은 한 가지 약속밖에 해 줄 수 없었다.

“나를 신경 쓰지 마세요.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가 헤어져도, 내가 인간 세상에서 이제는 머물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다 괜찮아…….

저 멀리서 미래를 축복하는 노인의 달콤한 목소리가 귓가를 어루만졌다.

“약속했잖아요. 원한다면 언제든 멈춰 서서 기다려 줄 테니까.”

재연의 어깨를 붙잡고 이원은 씩씩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 대답 말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었다. 이원이 홀로 한참을 걷다가 무섭고 지쳐 도망친다면 똑같은 자리에 멈춰 서서 기다려 주고 있겠지. 자신이 얼마나 외롭게 기다려야 할지는 생각도 하지 않고, 바보같이. 그러나 이원은 그런 재연이 좋았다.

앞으로도 우리는 멀리 떨어질 이별을 미리 준비하면서도 ‘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마지막 글귀를 적어 넣기 위해 애를 쓰며 살겠지.

하지만 절대 불행하지는 않으리라.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이야기가, 행복이, 절정 같은 마음이.

오래되어 낡고 색이 바랬으며, 이리저리 찢어지고 다쳤기 때문에 위대한 사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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