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꿈속의 남자
품 안의 남자는 미동도 없었다. 젖은 몸을 닦아 준다고 귀찮게 구는데도 한 번도 깨지 않았다.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을 쥐고 엉망이 된 엉덩이 사이를 대충 닦아 내며 약한 탄식을 흘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아래에서 정액을 받아 낸 몸은 완전히 만신창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번 삶에서 그와 처음 맺는 관계인데, 이런 꼴이라니.
속에서 자기 연민과 죄책감이 뒤엉켰다. 따뜻하고 말랑해진 몸뚱이를 안고 웅크리며 생각했다. 점점 더 수렁으로 빠지는 것 같은 깊은 회상이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인간이라는 것은 축복이었다. 많은 인간이 신의 힘을 부러워했지만 나는 오히려 인간이기에 기뻤다. 인간, 인간이라는 사실 하나만이 그 존재와 나를 가로지르는 유일한 차이점이자, 가장 큰 차이였다. 또한 동일하지만 완전히 다른 두 존재에 걸린 운명을 이겨 내는 한 가지였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신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인간만을 사랑하겠다고 선포하며 영혼까지 불에 태워 자살한, 죄 많은 사람.
용의 기운에 물들어 달라진 몸으로 시작한 강압적인 정사에 지쳐 나가떨어진 얼굴은 곤해 보였다. 옛날에는 이 얼굴에 그래도 살이 조금 올라붙어 말랑거리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볼품없이 말랐다. 식사 자체를 잊고 있다가 먹을 것이 있으면 몇 끼 분량을 다 먹어 치울 기세로 달려든다고 들었다. 왜, 도대체 무엇이 이 사람을 조급하게 하는가.
보고만 있어도 인내심이 흩어진다. 이 얼굴로 다른 곳을 향해 웃으면, 울면, 화를 내고 내가 알려 주지 않은 이야기를 들으면…… 슬펐다. 죽고 싶었다.
「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어.」
“……알아.”
「나는 더 기다려 줄 수 없다는 사실도 기억해.」
“그래, 기다려. 기다리면…….”
「우리는 완전해져야 하니까.」
“다시 완전해질 수 있어…….”
그러니 제발 꺼져. 속에 있는 짜증을 삼키며 대꾸하자 기분 나쁜 목소리는 금방 흩어져 버렸다. 속에는 슬픔이 산재해 있다. 몸을 웅크려 혼몽에 젖은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직 덜 닦아 낸 땀과 정액이 몸에 남아 있었지만, 그 흔적을 마저 지우지 않고 꽉 끌어안았다.
***
우리에게는 연민이 필요했다.
잠을 자고 밥을 먹으며 몸을 추스르는 것조차도 힘들었다. 조금만 신경의 끈을 풀면 그림자에서 십이지의 사지를 가진 귀신이 뛰쳐나와 이원에게 달려들었다. 최초에 인간의 업을 매개로 해서 탄생한 이 귀신은 끌어안고 있기만 해도 벅찰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가장 통제하기 힘든 것은 열두 팔다리 중 인간의 팔뚝이었다. 그것만큼은 신의 힘으로 내리쳐도 악의를 삼키지 못했다. 이원의 업은 사실 귀와 신보다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더 컸기 때문이다.
전생에서는 홀로 수많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도록 방치하고 살아온 대가, 가뭄의 대가. 현세로 오면서는 살인, 화마. 그에게 원한을 가진 살인마가 저지른 추가적인 희생자의 반쪽짜리 업.
시발, 도대체 그가 무엇을 잘못했지? 죽기 싫어 팔을 벌렸는데 세상은 그것을 이용해 더 비참하게 죽으라고 악다구니를 쓰고 있었으면서, 이제 와서 탓을 돌려 댄다. 이렇게까지 잔인한 업보를 쥐여 주는데 내가 어떻게 이것들을 존중할 수 있지.
지네가 또다시 기어 올라와 발목을 졸랐다. 화를 참지 못하자 지네는 캭 거리는 소리를 내며 다시 숨어 들어갔다.
신체는 점점 더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고 있었다. 상청의 이름을 빌려 쓸 때마다 그 속도는 빨라졌다. 어차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모두 원하는 일에 대가를 치러야만 하지 않은가. 그것을 이때까지 누구보다 잘 통감하고 있지 않았나.
이원을 구하기 위해서는 신의 힘을 사용해야 한다. 힘이 싫어하는 존재에게서 나왔다는 것이 짜증 나고 증오스러워도 계속해서 쓰고, 휘둘러야 한다. 권력의 암투라면 그 위에 올라 투쟁해야만 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게야?’
무당은 도통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남들과 다르게 살기 싫다는 이유로 자살하려고 했던 자는 모른다. 살고 싶은데 강제로 죽음에 몰리는 자의 기분을.
‘재연 씨, 이원 씨와 만났어. 만났는데…… 감당할 수 있어?’
엔지가 전화를 걸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보이는 자의 눈에 그는 끔찍한 생귀로 보일 것이다. 걸어 다니는 시체처럼 그의 가까이만 있어도 덩달아 악행의 풍랑에 잠기는 최악의 운을 타고 났으니, 웬만한 사람은 그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런 존재였다.
하지만 감당할 수 없으면 어쩔 것인가.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 또 뭐가 문제란 말인가.
나는 오로지 윤이원을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다. 첫 삶에서부터 그의 이름은 원(願). 환생을 거듭해도 소원(所願), 청원(請願), 원정(願情) 등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었던 이름. 성은 무수히 많이 바뀌었고, 이름은 뜻만 같고 발음은 아예 다를 때도 있었고, 또다시 본래의 이름을 되찾을 때도 있었다. 어떨 때는 여성이었고 어떨 때는 남성이었다. 나보다 어리기도 했고 나이가 많기도 했다.
한결같이 그만을 사랑했다.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끝이 불행하거나 불행하지 않거나, 만나서 어떻게든 인연이 이어지기 시작했다면 사랑은 얼음이 녹아 물이 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해동되어 흘러내렸다.
‘무조건 한 사람만 사랑해야 한다니, 억울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
늘 호기심 많은 엔지가 물었다. 그녀가 상처를 주기 위해 그런 말을 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화를 내지 않았다. 똑같은 질문을 다른 이에게서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너는 불만스럽지 않나? 신의 힘을 가지고 태어나서도 겨우 한 사람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나는 화를 냈다.
‘왜 그는 나만 사랑해야 하지?’
나는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났다. 영혼부터 이름이 주어지기를 재연이라 했다. 다시 연소하는 불꽃. 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 다른 인연을 얻고 다채로운 삶의 바퀴를 굴릴 수 있었는데도, 위대한 존재에게 억류되어 하나의 인연만 맺었다.
나는 가끔씩 모르는 척 살다 보면 감정이 희석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를 방치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나쁜 고집도 얼마 가지 않았다. 그는 홀로 무지했다. 업을 지고 있다는 자각도 없이 외롭게 세상을 떠돌다 쓸쓸하게 죽고 마는 혼. 텅 빈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무엇이 공허한지도 모르고 살던 그를 차마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세상은 인연이 완성되는 걸 호락호락하게 두고 보지도 않았다. 우리는 만나지 못하기도 했고, 일찍 죽어 버리기도 했고, 마음이 어긋나 파국으로 끝나기도 했다.
상청은 그것을 아주 싫어했다. 기껏 이승에 보내 놓았더니 제대로 하는 것 하나 없다고 욕을 했다. 그가 잘못된 건 오로지 네 탓이라고, 상청 자신이 실패했듯 나도 귀를 막고 눈을 감아 사지로 사람을 내몰았지 않느냐고 웃었다. 그 경박한 비웃음이 아직도 기억난다.
「풀어 줘, 풀어 줘, 풀어 줘」
이제 포기할 때도 되되지 않았냐고, 그림자 안에 있는 업이 몸을 덜그럭거리며 화를 냈다.
사랑하는 대상과 연을 맺길 바라고 있는데 포기할 미친놈이 어디에 있는가.
「풀어 줘, 풀어 줘, 풀어 줘」
어리고 순진했던 그의 마음을 이용해 피하지 못할 굴레를 만들어 버린 신이 잘못했다. 이원의 잘못이라곤 신을 인간답게 사랑한 죄뿐이다.
「풀어 줘!」
“닥쳐!”
시끄럽게 소리 지르며 꿈틀거리는 그림자를 발로 짓밟았다. 안에 들어 있는 귀신이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며 흐느꼈다. 업은 지독한 존재다. 첫 삶에서부터 현재까지 그것들은 무고한 이원을 매도했다. 너 때문에 우리 가문이 멸족당했어, 우리가 죽었는데 왜 너는 살아 있어, 뭐 그따위 말들로.
“개새끼들.”
머리를 쓸어 올리며 짜증을 냈다. 기가 죽었는지 조금 잠잠해진 귀신이 그림자 아래에서 둥둥 떠다녔다.
저게 업이라니, 윤이원은 살다가 겪는 일 중 가장 개 같은 일만 골라 겪는 불쌍한 사람이 아닐까. 애먼 사람을 붙들고 죄를 추궁하는 악귀들밖에 없는데 세상은 잘도 그것을 업이라고 포장해서 그에게 떠넘겼다. 그냥 세상의 업을 한곳에 죄다 뭉쳐서 잘못 찍힌 한 놈에게 몰아주었던 것뿐이잖아.
꿈속의 세상이 기분을 읽었는지 빛을 꺼트렸다. 조금 전까지 머리 위에 떠 있던 해가 지고 밤비가 내린다. 손바닥으로 쏟아지는 빗물을 받았다. 꿈이었으나 여름비와 축축하게 젖어 드는 풀과 흙냄새는 생생하게 오감을 자극했다.
「저곳입니다.」
남이 장군이 말했다. 부리부리한 눈을 한 장군은 얼마 전부터 무당의 곁을 떠나 나와 함께 있었다. 이 고집 센 장군은 자신이 선택한 인간에게서 떠나지 않겠다 완강하게 굴었지만, 같이 있어 봐야 이원의 업에 휘말려 더 위험하다는 설득에 어쩔 수 없이 나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
시야를 가리는 빗물을 손으로 훔쳐 내고 거무스름한 무덤 하나를 보았다. 번개에 정통으로 맞았던 뒤라 봉분은 완전히 파헤쳐져 있었다. 깊게 파인 구덩이 사이로 들어가 발로 관 뚜껑을 열어젖혔다. 얼굴이 새파란 시체 한 구는 누가 봐도 노인의 외관이었다.
빗물이 떨어지자 감겨 있던 노인이 두 눈을 번쩍 뜨더니 그대로 팔을 뻗고 달려들었다. 삽자루로 대가리를 내려쳤다. 강시가 캬악 소리를 내며 고통스럽게 발버둥 쳤다. 단숨에 목을 꺾었다. 우지끈거리며 부러진 목 위를 삽 대가리의 날로 내리쳤다. 강철 같은 피부가 찢어지며 안에 있던 뜨거운 피가 쏟아졌다.
몸을 적시고 입 안으로 흘러들어 오는 피를 빨아 먹으며 욱신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씨발, 짜증 나…….”
참으려고 해도 말이 험하게 나왔다. 이래서야 끝이 없었다. 인간의 몸을 유지하기 위해 썩지 않는 시체인 강시를 찾아 피를 마시기도 수십 구다. 그러나 아직도 찾는 것은 나타나지 않았다. 언제까지 무덤에서 뒹굴어야 하는 거지. 삽자루를 내팽개치고 발로 흙탕물을 튀기며 성질을 냈다. 남이 장군이 걱정스럽게 공중을 이리저리 떠돌았다.
「여기도 아니군요.」
“보면 몰라?”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침을 뱉었다. 벌써 한 달 가까이 꿈속 세상을 헤매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더 빨리 찾은 후 여기서 나갔어야 했으나 업이 무거워지면서 길이 꼬였다. 아주 먼 옛날부터 현재까지 연결되었던 자들의 무덤이 불규칙하게 나타나는 바람에 계속 허탕을 치고 있었다.
완전히 머리가 떨어진 시체를 집어 들고 아직도 흘러나오는 피를 핥았다. 지저분하고 더러운 맛이 나지만 억지로 삼켰다.
「다시 문이 열립니다.」
엄숙한 목소리가 빗줄기를 뚫고 울렸다. 삽 끝으로 썩은 나무 관을 내려찍으며 뛰어갔다. 며칠째 꿈속에서 경계의 문을 열어 무덤을 죄다 파헤치고 다녔다. 이원의 업에 가장 먼저 휘말려 죽은 사람을 찾아야 했다.
처음이란 무엇이든 아주 중요했다. 첫 업은 가장 기운이 왕성하다. 잘만 활용하면 이원이 이미 죽었다고 착각할 수 있게 저승사자의 눈을 속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기 위해선 양어머니가 필요했다. 인간으로서의 죄책감을 잊은 지 오래되었다.
고아원이 불탄 뒤로 나를 길러 주겠다며 나타난 양부모는 다정하고 좋은 사람들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병신 머저리로 자랐을 때는 나 역시도 착한 아들이었다. 양부모에게 사회적으로 성공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다는 일념으로 명문대에 들어갔고 차근차근 공모전 수상 경력을 쌓아 나갔다.
그중 몇 가지 아이디어가 채택되어 상금을 받았다. 부모님은 내가 무언가 하나를 이룰 때마다 크게 기뻐하시며 용돈을 두둑하게 주었다. 다정다감한 부모·자식 간의 관계가 깨진 것은 세 번째 인생이 시작된 후였다. 10년이 넘게 쌓여 있던 유대는 무너지는 빙하처럼 녹아내려 몇 개월 사이에 늪 같은 수렁에 빠졌다.
“피 안 섞인 부모를 죽인 내가 어떻게 보이지?”
「제게 물으십니까.」
“여기 대화할 사람이 당신 말고 누가 있어?”
눈을 찌푸리며 쏘아붙이자 남이 장군이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다. 말투가 날카롭다는 걸 알았지만 고칠 생각도 없었다. 파편이라고 해도 본신이 영보천존이다. 장군의 이름을 가진 자가 내려다볼 수 없을 만큼 높은 존재.
또 짜증이 난다. 가장 높은 지위를 가졌으면서 그 신은 왜 성격이 그렇게 글러 먹었지? 그런 완고하고 이기적인 꼴로 살아와서 여럿 피곤하게 만드는 게 아닌가. 세게 발을 구르며 활짝 열린 문 너머로 뛰어들었다. 발밑에서 썩은 나뭇가지가 와작거리는 소리를 내며 빈 깡통처럼 우그러졌다.
「제가 감히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째서?”
「원하시는 목표를 위한 행동이시니까요.」
“남이, 그대도 참 이상한 말을 하는군. 인간으로 태어나 피는 안 섞였다지만 부모를 팔아 넘겼는데 판단할 문제가 아니야?”
「어떤 말을 듣길 원하십니까.」
“개새끼라는 말.”
장군이 낯빛을 어둡게 굳혔다. 미안하지만 진심이었다.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일에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누군가 내게 인간의 마음을 깨우쳐 주었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나에게나 그에게나 세 번째 삶이 시작되었을 때였다. 내 영혼이 신에게 돌아가는 과정을 방해한 대가로 이원의 업은 무시무시하게 커져 있었다. 나 혼자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무게를 덜기 위해 가장 먼저 선택한 사람은 내 양부모들이었다.
내 몸은 기둥이었다. 양부모와 엔지와 무당은 내가 심은 나무에서 뻗어난 굵거나 잔 가지들이었다. 어쩌면 잎사귀일 수도 있었다. 관계가 깊을수록 강력한 구속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렇다고 죄가 아닌 것은 아니었다.
천륜으로 이어진 핏줄도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꼴이 될지 모르고 운이 나빠 나를 아들로 길러 냈을 뿐이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양어머니는 자신의 행운을 팔아 버린 나를 본능적으로 미워했다. 양아버지는 건강이 나빠져 병원 신세를 지기 시작했다.
친척들은 이상해진 가족 관계를 휜 눈으로 쳐다봤고, 친구들은 멀어졌다. 본인들도 이유를 모른 채 무작정 나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이다. 어차피 이제는 중요하지도 않은 사람들이라 나도 붙잡지 않았다.
「이미 대가를 치르시지 않았습니까.」
“그렇다고 죄가 사라지는 게 아니잖아.”
그의 악운을 다른 이에게 강제로 먹이는 대가로 생겨난 업은 나에게 돌아왔다. 죄를 지으면 인간성을 상실한다.
“나는 당신의 딸에게도 똑같이 업을 주었는데, 그건 왜 화를 내지 않지?”
「살려 주셨으니까요.」
“살려 준 대가를 받은 것뿐이지.”
「이 늙은이의 목숨 역시 구해 주셨으니 과합니다.」
“늙은이라고 하지 마. 진짜 늙은 사람 기분 나빠.”
인간으로서의 나이는 어렸지만, 영혼의 나이는 남이 장군보다 한참 많았다. 턱으로 흘러내리는 빗물을 몇 번이나 손등으로 훔쳐 내면서 새로운 무덤 찾아다닐 때, 갑자기 공간이 열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뭐야. 이질적인 기운을 느끼고 멈춰 섰다.
그가 데리고 다니는 토끼, 월묘의 기운이…… 이런. 남이 장군이 눈치 빠르게 사라졌다. 삽자루를 움켜쥐고 뛰었다. 빠르게 땅이 말라붙고 비가 그쳤다. 흙먼지를 잠재운 깨끗한 밤하늘 아래에 그립던 얼굴이 보였다.
“하재연?”
여기 오면 안 되는 사람인데 왜 온 거야. 미칠 것 같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때까지 꿈속을 전전하며 헛고생한 보상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이 모순적인 마음이 나와 그를 둘 다 죽이고 있으나 그저 환하게 웃어 버렸다. 어리둥절한 옆얼굴은 나를 지옥으로 데려가기 위해 온 천사 같았다. 아, 윤이원. 내 사랑. 절절한 감정을 속삭이는 대신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건네는 것으로 욕망을 접어 넣었다.
내가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함은 결국 귀신에게 던져 주었다. 귀신은 입을 벌리고 그걸 우적우적 뜯어 삼켰다. 피와 살점이 남아 있는 손바닥이 질척거린다.
하얀 얼굴이 피로에 젖어서도 흙먼지가 앉은 내 뺨을 문질러 준다.
이 세상을 위한 제물로 태어난 남자를 사랑하는 미친놈은 나 하나뿐이라는 생각이 만족스러웠다.
***
「시간 끝났어.」
“안 끝난 거 다 알아.”
「그럼 계약이 끝났다고 할까?」
“그 입 좀 제발 닥쳐.”
상청은 툭하면 눈앞에 나타나 알짱거렸다. 좋아하는 귀신들을 두고 왜 인간인 우리에게 관심을 두는지 모르겠다.
“너 관음병 환자야?”
「입조심해.」
“그럼 뭔데. 정신병 환자? 자신이 미친 걸 인정 못하는 놈은 구질구질해.”
말은 날카롭게 튀어 나갔다. 그의 앞에서 비밀을 제멋대로 떠벌린 놈이 뭐가 좋다고 대접해 줘야 하지.
「너희 둘을 구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지.」
대꾸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성미를 긁으며 반응을 유도하는 신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다.
“……우리는 알아서 잘 살 거야.”
「네가? 겨우 파편인 네가?」
나는 부족하다. 그를 구원할 수 없다. 알고 있지만 왜 고집을 부리고 싶을까. 자신이 얼마나 큰 희생을 했는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를 보면 애간장이 탔다.
윤이원으로 꾸며 저승사자의 눈을 속이려고 했던 양어머니의 시체는 귀신들에게 빼앗겨 강시가 되었다. 왜 그런 고생을 했던가. 허무함은 숨기려고 해도 숨겨지지 않았다. 매일매일 모든 수단과 방법을 하나씩 뺏길수록 생각이 없어졌다.
그가 내 비밀, 신과 나의 관계, 그와 나의 잊힌 과거를 알아낼수록 죽음은 섬뜩하게 낫을 휘둘렀다. 신은 점점 더 우리의 감정과 현생에 개입했다. 이미 전생부터 현생까지의 고리는 풀려 버렸고, 나는 해묵은 죄인이 되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사랑, 인연, 업과 대가. 그런 게 죄다 발목의 인대를 끊어 먹고 있었다.
「어디 한번 날뛰어 봐. 내 눈에 보이는 끝이 너에게는 정녕 보이지 않는지 궁금하군.」
마지막까지 날카로운 말이 심장을 후비고 멀어졌다.
끝이 보이지 않을 리가 없다. 끝에서 윤이원은 늘 울었다. 울고, 괴로워했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세상이 머리채를 잡고 휘두르는 대로 꼭두각시처럼 움직였다. 죽으러 달려가라 하면 달려갔고, 손가락이라도 자르라고 하면 망설임 없이 손을 잘랐다. 눈을 뽑고, 자신의 배를 직접 가른다.
미래는 고정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매번 꿈을 꿀 때마다 보이는 꿈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그가 비참하게 살다 눈 한쪽을 잃어버리고 죽는 꿈.
어째서 오른쪽 눈의 상실은 빼먹지 않고 보여 주는지.
매번 꿈에서 깰 때면 죄책감에 휩싸여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내가 너무 안일한 회귀의 맛에 빠져, 스스로가 평범한 영혼이라는 착각에 젖어 사랑을 잊지만 않았어도 그런 결과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내 손으로 상처를 주고 내 손으로 죽음으로 내몰았다. 아직도 그것만 생각하면 심장이 저렸다. 그의 인과와 업을 전부 대신 짊어지려 안간힘을 쓰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몇 번을 대신 희생해도 내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가 살인의 죄를 쓰고 사회에 나와 숨을 쉬는 것조차 벅차하듯이 나 역시 그의 창백한 얼굴만 봐도 이미 보이지 않게 된 오른쪽 안구를 뽑아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티를 낼 수는 없겠지. 함박웃음을 지으며 뺨을 당겼다. 온몸이 잘못된 업에 신음을 내고 있었다.
나는 인간인 것이 좋았다. 사람이라서 사랑할 수 있었고 사랑받을 수도 있었다. 그것만이 유일한 자부심이나 마찬가지였다.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권능을 사용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염원을 들어주었는지, 환생을 반복할수록 나는 점점 신의 파편이었던 기억을 잊어 더 인간다워졌다.
그럴수록 이원과 사랑을 이루는 횟수는 더 줄었지만, 괜찮았다. 인간이 아닌 힘으로 붙잡아 두는 것보다 우연과 운명에 의지해 만나 기적처럼 사랑하는 게 더 행복했다. 멀리서만 지켜보는 것도 정말로 나쁘지 않았다. 인간을 사랑하겠다고 말한 야멸찬 입술이 내 이름을 불러 주면 아득한 사랑에 젖어 발버둥 쳤다.
그러나 신은 지독했다. 조각이라고는 해도 자신의 분신인 나에게 사랑했던 연인인 윤이원을 두고 요구한 대가는 잔인했다.
윤이원은 인간인 하재연을 더 이상 사랑하지 못한다.
인간이라는 치졸한 자부심에 젖어 있던 나를 모욕하는 것 같았다. 그럴 때마다 거대한 상처를 연인에게 안겨 주고 외면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고 매번 자기 위안을 해 봤지만 괜찮았던 적이 없었다. 입술이 거짓에 가득 차 속삭이는 ‘나는 괜찮다’는 말은 늘 스스로의 심장을 저격하는 화살이 되었다.
그는 신이라는 존재 자체를 극도로 싫어했다. 그것도 모자라 인간인 나도 사랑하지 못했다. 사랑이라는 미미한 감정은 사라진 채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고, 시간을 동의 없이 돌려 거대한 업을 지게 한 존재에 대한 배척감이 남았을 뿐이다.
상청의 말은 모조리 맞았다. 나는 신이 아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가진 수명은 너무 짧다. 고작 평범한 인간의 육신으로 업을 죄다 짊어지는 것은 벅찬 일이었다. 신의 권능을 어느 정도 행사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그와 나 둘 다 진작 고꾸라졌을 테지. 하지만 이렇게 발버둥 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인간으로 있고 싶은데, 그저 그의 손에 구해졌던 고아원 꼬마로 남고 싶은데…… 이제는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반대로 희망이 생겼다. 인간인 나를 사랑할 수는 없지만, 인간을 벗어난 나를 사랑하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 신도 인간도 아닌 인두겁을 쓴 괴물이라도 된다면…….
더럽게 추락하고 타락한 귀신의 꼴을 해도 그가 사랑해 준다면 나는 견뎌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평범한 범주를 벗어나기만 하면 두려운 모양이었다.
‘재연아, 아니지……?’
그가 불안한지 떨리는 눈에 억지로 힘을 주며 물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나는 손쓸 수도 없을 만큼 엉망으로 엉키고 파괴된 운명에 속으로 울음을 삼켰다.
‘뭐가 되었든 신의 뜻대로 흘러가는군요.’
신은 사랑이 가치가 없기를 빌었다. 이 세상에 뿌려져 이루어 낸 사랑의 결실이 얼마나 큰지 알면서도 저가 실패했다고 개 같은 고집을 부려 댔다. 내가 그의 힘을 빌려 시간을 벌고, 혼의 인연을 대가로 계약을 맺었을 때도 망설이지 않고 조롱했다. 네가 윤이원을 사랑하지 못했듯, 윤이원 역시도 너를 사랑할 수 없노라고.
상청은 나와 그가 가장 비참하고 힘들 만한 것을 대가로 요구했다. 이원을 사랑해서 나를 이 땅 위에 만들어 내놓고는 그가 죽기를 바라다니. 고아원 원장 같은 인간쓰레기도 신보다는 낫다고 느껴졌을 정도였다. 신은 악감정을 그대로 받아치고 조롱했다. 실패하든 성공하든 마음껏 해 보라 배를 잡고 웃었다. 신은 잃을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몸을 섞고 난 뒤에도 끊어진 인연의 끈은 붙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혼미해서 오락가락하는 그의 옆에 잠깐 앉아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붉은 끈을 이었다. 그러나 몇 번을 묶어도 풀리고 또 풀린다. 전생에서 강제로 끊어 냈기 때문이었지만, 나는 고집을 꺾을 생각이 없었다. 이번 삶이라도 이게 튼튼하게 묶여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번 삶이라도, 조금만 더 같이 있고 싶은데.
이번 수명이 끝나면 내 존재는 소멸한다. 상청의 안에 들어가 완전한 존재를 구축하고 나면 이원은 평생 홀로 구천을 떠돌겠지. 육도와 팔문, 윤회를 거쳐 환생해도 짝이 없는 거리를 방황하며 살겠지.
싫다. 너무 싫다.
외로워서, 당신이 죽지 않았는가.
나는 반쪽짜리라 전부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상청과 그의 사이에 있었던 일 중 일부는 알았다. 그것은 나에게도 존재하는 기술적인 굴레였다. 그가 왜 상청과의 연을 끊고 자살로 생을 마무리했는지에 대한 답은 인상 깊게 남아 있었다.
사랑을 받을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지독하게 외로움을 타서 혼자서는 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잘 알고 있으니 더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윤이원.”
이름을 부르면 마음이 떨린다.
“좋아해.”
고백을 하면 세상이 무너졌다.
자신이 외로워서 타인이 외로운 것도 불안한 눈으로 보는 사람이라, 나는 늘 사랑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나를 무서워해도, 미워하고 화를 내고 소리를 질러도, 가끔은 말을 듣지 않아 애먼 속을 태워도 내 사랑은 꿋꿋했다. 흔들림이 없었다.
「어차피 이번 생이 끝나면 너를 잊을 사랑인데, 여기서 그만 포기하지 그래.」
듣기 싫은 목소리가 마음을 심란하게 만든다. 평온하던 물결이 첨벙이더니 금방 흙탕물이 되었다.
“시끄러워.”
「나는 조언을 해 주는 거야.」
꼴도 보기 싫은 신이다. 그를 이 상황까지 몰아세워 놓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한발 뒤로 빠져 상황을 관전하는 주제에. 숨길 것도 없이 욕설을 한바탕 퍼붓자 무덤덤한 얼굴이 조금 찌푸려졌다.
「고약한 것만 배웠군. 조잡한 혼이라 그에 어울리는 것만 배웠나?」
“그 조잡한 것을 왜 다시 회수하려고?”
「불완전하니까.」
“하, 불완전한 놈이 불완전한 거 주워다 붙이면 다시 멀쩡해질 것 같아?”
눈앞의 신은 병신이었다. 나는 언제나 영보천존이라는 신을 그렇게 규정했다. 마음의 구멍이 그저 영혼 조각이나 맞춘다고 해결될 거라 믿는 한심한 존재.
이런 게 최고위 신이라니, 인간들도 불쌍하기 짝이 없다. 싸늘하게 조소했다. 신에게 하는 조소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내뱉는 지독한 말이었다. 자신도 이 모자란 신의 힘을 빌어 기적을 이루려고 하지 않는가. 어차피 다 엉망이었다. 그중에서도 사지가 검은 줄에 엉겨 붙어 업이 이끄는 방향으로만 움직이는, 꼭두각시 같은 윤이원이 특히 그랬다.
아무도 그를 구할 수 없을 거라 말했다. 무당도 엔지도, 미미한 힘으로는 티끌만 한 흠집이나 내는 것이 전부라며 고개를 저었다.
알고 있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어떻게 포기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사랑, 희생. 그리고 사랑.
윤이원이 물었다.
당신을 사랑하냐고.
너무나 사랑해서 나는 늘 소망하는 것이 있었다.
두 손을 쫙 펼쳐 예쁘게 묶인 붉은 끈을 보았다. 금방 끊어졌다. 아쉬워 머리를 깨부수어 죽고 싶은 심정으로 활짝 웃었다. 웃지 않으면 정신이 망가졌다. 방법은 없었다.
***
시간은 미친 듯이 지나갔다. 꿈과 현실을 오가던 도중 오른쪽 눈이 열렸다. 경계선에 홀로 멈춰 서서 하늘을 보았다. 답답하게 한쪽 시야를 가리고 있던 어둠이 물러갔다. 눈에서 빠져나온 어둠은 흘러가 꿈속 세상의 절반을 가렸다. 그의 눈이 멀었구나. 막연하게나마 깨달았다.
손에 들고 있던 강시 한 구를 아무렇게나 집어 던지고 경계의 바깥으로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그림자 안에서 숨어 있던 지네 귀신이 함성을 지르며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잡을 힘이 없었다. 이미 너무 오래 싸워 몸속이 만신창이었다. 손에 잡히는 물건 아무거나 들고 휘둘렸다. 귀신이 뱀 몸뚱이에 달린 인간의 팔을 길게 뻗어 내 목을 휘어잡았다.
목뼈가 단숨에 부러졌다. 귓가에 이명이 길게 흘러나오며 죽음을 경험했다.
고요하던 강물이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삯을 받고 저승으로 가는 배를 띄우는 사공은 보이지 않았다. 배가 물살에 흔들리다 부서졌는지 나무 파편만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욕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시커먼 해일이 온몸을 집어 삼기며 물 아래로 몸을 처넣었다. 육신과 뼈가 108개로 산산조각 나며 부서졌다.
정신을 차리니 꿈이 무너지고 있었다.
툭툭, 하늘에서 날카로운 조각이 떨어져 발등을 찔렀다. 구축하고 있던 인간과 신의 경계가 무너지고 새가 하늘에서 바다로 날았다. 오래된 낡은 서적이, 흰 장포와 귀퉁이가 닳은 마작 패가 하나둘 가라앉았다.
고통에 발버둥 치다 눈을 희번덕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피를 게워 냈다. 시커먼 피가 입 안에서 쏟아졌다. 억지로 삼켰던 강시의 핏물이 발치에 웅덩이처럼 고였다.
“허억, 헉…….”
「역신이 그에게 갔군.」
느릿하게 소식을 알려 주는 목소리에 힘겹게 눈을 떴다. 갑자기 피를 토하며 욕을 당했다 싶었더니 역신이 또 그를 찾아간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운명의 고리, 역신의 후손.
한 발을 들어 공중에 띄웠다 다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몸이 가벼웠다. 눈과 귀에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규칙과 제어가 보였다. 시커먼 밧줄, 낡은 새끼줄, 높은 장작, 불타는 시신.
「신의 육체야. 어때?」
「필요 없어.」
대답하는 순간 인상이 저절로 찡그려졌다. 음성 기관까지 완전히 제멋대로였다. 성대가 울리는 게 아니라 정신이 울린다. 선 채로 구역질을 하자 신이 코웃음을 쳤다.
「너 같은 게 내 파편이라니.」
「닥쳐. 돌아갈 거야.」
「그 꼴로?」
상청이 지적한다. 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보았다. 몸은 변한 것이 없어 보였지만 여전히 위화감이 넘쳤다. 몸 어느 곳에도 어둠은 없었다. 그림자도 인기척도 존재하지 않는 낯선 몸을 내려다보다가 숨을 참고 버텨 보았다. 괴롭지 않았다. 늘 지니고 있던 업이 사라지자 공기가 된 기분이었다.
세상 어디에든 만물의 영혼이 존재하고 있었다. 빛과 어둠, 혼돈과 조화. 지구의 푸른 물속에도, 공기와 먼 우주 속에도. 그건 정말로 개 같은 감촉이었다.
「업을 데리러 갈 거야.」
「이미 풀어 둔 업을 어떻게?」
「강제력을 행사하겠어.」
네가 감히? 신이 비웃었다. 듣지 않고 벽을 찢어 내어 그 밑으로 떨어졌다. 업을 막지 못한 탓에 이원을 맡겨 놓은 무당의 신당이 완전히 엉망이었다. 역신의 기운이 사악하게 타오르는 게 느껴졌다. 지붕 위에 올라탄 지네 귀신을 보자마자 낚아채 강제로 몸에 쑤셔 넣었다.
귀신이 발버둥을 치면서 몸에서 반절이 새어 나간 채 꿈틀거렸다. 신이 귀에 대고 경고했다. 그걸 삼키는 순간 너는 버티지 못할 거야. 닥쳐. 머릿속으로 대꾸하며 남은 것을 마저 처넣었다.
귀신이 독을 뿜어 신경을 찢어발겼다. 빠져나오려고 애쓰는 대가리를 주먹으로 내려치며 고통을 참기 위해 애썼다. 겨우 마지막 꼬리까지 배 속으로 빨려 들어가자 멈춰 있던 심장이 인간의 업에 반응해 미친 듯이 뛰었다. 입 바깥으로 피가 튀어나온다. 죽은피를 다시 집어삼키고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오랜만에 보는 위태로운 연인을 잡아채 품속에 가둔 뒤에야 상황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발을 딛고 서 있는 것도 고통스러워 칼로 잡아 찢기는 것 같았다. 몇 번이나 말을 삼키고 숨을 내쉬어야 정신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엔지가 눈앞에서 긴장이 풀려 울기 시작했지만 달래 줄 기운이 없었다. 그를 붙잡고 체온을 느끼면서 같이 죽자고 날뛰는 귀신을 아래에 꽉꽉 밀어 넣었다.
그림자로 들어가기 싫다고 귀신이 내 심장을 물어뜯었다. 아픔에 머리가 하얗게 변한 채로 악취를 내장에서 코로 올려 보내 들이켰다. 그의 손목을 쥐고 체온을 느끼려고 애썼지만 신경이 날카로워져 참기 힘들었다.
쓸모없는 논쟁으로 힘을 뺄 생각은 없었는데, 망치가 되어 뇌를 내려치는 통증에 결국 화를 냈다. 화라기보다는 분노와 짜증을 그에게 표출해 버렸다. 내가 모자라서 이원이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살도록 해 주지도 못했으면서 왜. 자괴감과 분노는 똑같은 온도를 가지고 있었다.
팔팔 끓는 물에 영혼이 삼켜졌다. 더운 몸을 억누르며 겨우 그의 눈물을 닦아 줄 수 있었다. 신경이 끊어지면 귀신이 바로 뛰쳐나와 그의 몸 안에 들어가겠지. 그러면 첫 생과 똑같은 꼴이 날 것이다.
참아야 했다. 윤이원을 아직도 세상에 붙들어 놓는 유일한 이유는 그의 마음에 내심 살고 싶다는 여린 소망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이 업은 그의 몸에 들어가는 순간 본능을 죽인다. 죽고 싶다 바라는 순간 세상은 조금의 지체도 하지 않고 그를 불태우겠지.
안 돼. 죽지 마.
몽롱해진 정신으로도 그가 하는 말은 머릿속에 자리 잡아 나를 조금이나마 기쁘게 만들었다.
나도 당신을 만나고 싶었어요. 같이 있고 싶었어요.
솔직한 고백은 종이비행기처럼 날아갔지만 얼마 가지 못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단지 이번 생만 자신의 곁에 있어 달라고 부탁하는데 그걸 들어줄 수 없었다.
당신은 외로워서는 안 된다. 이번 생은 외로울지라도 다음 생은, 그다음 생은 외롭지 않을 수 있으니까.
내가 이기적인가.
힘없는 손으로 겨우, 내 이름도 아닌 글자를 두 눈꺼풀 위에 적어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을 감는 사이에 다시 몰래 붉은 실을 매어 보았지만, 묶는 그 순간 뚝 끊어졌다. 울고 싶어서 얼굴을 엉망으로 일그러트렸다. 그래도 참아야 했다, 참아야만 했다.
그렇지만, 마지막인데.
이번이 마지막 인생인데 좀 묶게 해 달라고. 개 같은 업보. 귀신의 꼬리가 심장을 내리치면 펄떡거리며 고동 소리가 울렸다. 비명을 참기 위해 몇 번이나 천장을 올려다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가 앞을 볼 수 없어 다행이었다. 엉망이 된 꼴을 보면 분명히 하얗게 질려서는 죄책감에 빠져 버릴 테니까.
“재연 씨.”
방 밖으로 나가자 엔지가 한결 나아진 얼굴로 이름을 불렀다. 공포에 질린 눈을 보고 힘없이 웃었다. 엔지는 괜찮은 사람이었다. 능력도 봐 줄 만했다. 그녀는 아마 내 몸속에 자리 잡은 업과 본체를 뚫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슨 일이야?”
“올 게 온 것뿐이야.”
인간으로서의 수명이 끝났다는 말을 알아들은 엔지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그녀의 우려와 걱정을 다 알아들었지만 멈출 수 있는 발걸음은 아니었다. 고지는 코앞이었다.
“저승사자 눈만 피해. 조금만 더 버티면 되니까.”
저승사자들은 냉정하다. 죽음에서 그들의 눈을 피해 도망치는 건 어려웠지만 해야만 했다. 장부에 적힌 숫자 그대로 운명에 순응해 죽어 버리면 안 된다. 순리에 굴복하는 순간 노력했던 모든 것이 산산이 조각나 버리겠지. 그는 앞으로도 운명에 머리채를 잡힌 채 질질 끌려다닐 거고, 나는 그에게 아무런 마음도 써 주지 못하고 방관하며 자아를 상실해 버릴 것이다.
이제는 인간으로 태어난 하재연이 아니었다. 그를 대신해 죽을 수도 없었다. 이미 죽은 육체를 억지로 살려 끌고 다니는 것으로도 반쯤 미쳐 있었으니까.
아니지……. 그를 위해 시간을 돌리고 주변의 모든 것을 강제로 희생시켜 그를 살리려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었지.
무거운 몸을 힘겹게 이끌고 마당으로 나갔다. 마당 앞에 서성이며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십이지신의 팔다리가 들러붙은 지네 형상의 귀신이었다. 나는 저것들이 싫었다.
신을 능멸한 제물이라 받은 업, 죽어야 할 때를 놓치고 신의 힘을 빌어 살았기에 받은 업, 본인은 살아 목숨을 부지하고 수많은 사람을 가뭄에 말라 죽게 한 업, 신의 완성을 저지해 받은 업. 하지만 그 많은 업 중에서 이원이 순수하게 선택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를 죽이기 위해 피거품을 뿜는 귀신은 세상에 흩어져 있던 업이 합쳐져 만들어진 무거운 몸을 꿈틀거리며 다가왔다. 신의 혼으로서 처음 행사한 강제력이었다.
액막이가 되면서부터 몸 안에 지니고 있던 업이 꿈틀거리며 옆구리를 통해 빠져나갔다. 두 업이 하나로 뒤섞여 몸집을 부풀리고는 아가리를 벌렸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한 손으로 잡아챘다. 그림자에 쑤셔 넣기 직전 본능처럼 잠깐 뒤를 돌아 신당 옆에 있는 쪽방의 창문을 보았다. 그와 시선이 마주쳤으나 망설임 없이 뱀의 몸과 사지를 하나씩 짓밟았다.
꿈틀대는 꼬리 끝까지 그림자 속으로 집어넣자 마지막까지 독을 쏟아 내며 반항하던 귀신이 이내 잠잠해졌다. 속이 거북하다.
「이제 어쩔 거야?」
다 알면서 신이 묻는다.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업을 짊어진 몸뚱이가 꿈틀거렸다.
「절망하진 않을 텐가?」
혼자서 이 길의 끝까지 전부 알고 있으면서.
“절망하지 않아.”
「어째서?」
그걸 몰라서 묻는 건가.
“과하잖아.”
「…….」
“아직 전부 시도해 보지도 않았는데 절망하다니, 사치야.”
「그 아이는 죽어야 해.」
신은 지독했다. 우리가 당신을 잊고 살아온 죄라도 묻는 것처럼 집요하게, 집요하고 또 집요하게.
“내가 버티지 못한다고 했었나?”
그를 대신하여 몸 안에 넣은 업이 날뛰며 아우성을 쳤다. 입 밖으로 피를 한 움큼 뱉어 내며 웃었다.
“뭐 어때. 어차피 죽을 건데.”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전부 경쾌했다. 이미 고통으로 사지가 마비되어 있었지만 이성은 남아 있었다. 업을 지닌 나를 죽여라, 반대의 업을 쌓아 그에게 마지막 도움이 되어라.
살인범이 업을 더 많이 축적하는 것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이원도 나도 수명이 다해 이미 벼랑에 몸을 던지고 있었으니, 숨통을 끊기 위해 나타나겠지. 장부의 시간만 피하면, 그러면…….
「아이가 들으면 전혀 달가워하진 않겠군.」
“그래.”
「괜찮나?」
“어쩔 수 없잖아.”
인간이 아니잖아요. 나를 사랑해 주세요.
기원은 희망이 되어 멀리 날아갔다. 여전히 끊어진 붉은 실을 확인하며 웃었다.
「웃는군.」
내 행동이 이상하다는 듯 신이 말을 걸어 왔다. 그래, 나는 잠시나마 통증 없이 멀쩡한 사고로 대답했다.
“행복하니까.”
「행복하다고?」
“그래.”
「어째서?」
“몰라. 아파서 그런가? 알게 뭐람.”
다시 만난 그가 나에게 허락한다고 말해 주었을 때부터 사실 나는 불행하고 좌절했으면서도 행복했다. 액막이가 되도록 허락하였고 사귀자고 해 주었다. 나를 만나고 싶어 역신을 일부러 만났다고 했다.
거짓은 없다. 윤이원은 하재연을 사랑해 줄 것이다. 또한 과거에도 분명 사랑받았다.
“사랑은 이루었어. 행복도 이미 완성되었잖아.”
「…….」
“더 최선의 방법을 찾을 수 있었겠지.”
「…….」
“더 아름다운 방법으로 행복을 다시 완성할 수도 있었겠지.”
그러나 나는 정답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되었어.”
둘 다 행복해질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단 한 사람만 행복해지길 바란다.
“잠들어 있을 거야.”
「마음대로 해.」
“그러니 소원 하나 들어줘.”
「요구하지 마.」
“그 사람, 쓸쓸하게 내버려 두지는 마.”
이대로 죽어 버리면…… 이번 삶조차도 곁에 있어 줄 수도 없겠지. 고개를 떨어트리고는 외로워져 소리 내 웃었다. 신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나보다 더 많은 것을 보는 이 존재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살리겠다고 뛰어다니다가 살릴 수 없으니 업이나 덜어 내고 죽으라며 그의 등을 밀어 버린 내가 귀신보다 더 악하다고 생각하려나.
슬픈 미래를 예감하며 잠들기 직전, 수면 아래로 잠기는 의식을 붙들고 신이 물었다.
「어째서?」
“뭐가?”
「왜 이렇게까지 노력하는 거지?」
나는 신에게 연민을 느꼈다. 나보다도 완벽한 존재이면서 불완전한 정신을 가진 그를 동정했다.
「어차피 이룰 수 없잖아. 어째서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냐는 말이다.」
고집을 부리며 집요하게 캐묻는 신의 목소리에 어쩔 수 없이 쓴웃음을 지었다. 다 놓았고, 다 포기했다.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마지막은 더욱 비참했다. 끊어진 인연의 끈, 죽어야 할 나의 연인. 그러나 죽어 버린 장작 속에서도 불씨는 여전히 숨을 쉬고 있었다.
“사랑이란 위대해.”
마지막 힘을 짜내 속삭였다.
어차피 그와는 미움받고 미워하는 관계다. 상대가 뭐라고 생각하든 이제 상관없어.
마음이 헝클어져 죽어 가는 고통스러운 세상을 보았다. 이제는 나도 지친 모양이었다.
***
눈을 깜박거렸다.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며칠 전의 일이 방금처럼 생생하게 상영되었다.
잘못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나만 희생하고 끝을 내 버려도 그는 괜찮을 거라고, 아무렇지도 않아 할 거라고. 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눈에 보였다, 죽으려는 그의 발버둥이. 내 입으로 그가 죽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으려 하는 그의 자살 과정이.
세상의 어그러진 축을 짊어진 그와, 끊어진 인연을 몇 번이고 거듭 묶느라 손끝이 전부 닳아 헤어진 나.
그와 나, 우리.
윤회의 처음에는 그와 자주 만났었다. 신의 혼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이니 능력이 위대하고 대단해, 최초의 나는 인간이나 인간이 아닌 힘을 아주 자연스럽게 사용했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오래 지나 인세의 탁한 기운에 물들기 시작하자 나는 변했다. 최초가 인간이 아닌 존재라는 것조차 잊어버려 인간다운 실수를 하였다. 때는 이미 너무 늦어 그가 또 한 번 자신의 복록을 팔고 시간과 업을 거스른 뒤였다.
‘그러면, 나 때문에 그가 이런 선택을 했다고?’
‘아니, 그건 아니지.’
신은 이미 인간이 되어 버린 지 오래인 나를 지독하게 싫어하여 더욱 날카롭고 심술궂게 대답했다.
‘네 업보이자, 네 원흉이지.’
‘…….’
‘아주 태초, 우리가 하나였을 때…….’
그 말은 덜떨어진 파편의 귓속에 암전된 과거와 우주를 밀어 넣었다.
‘겨우 그때의 이야기지. 별것 아닌 이야기지.’
이원이 버리지 말라 호소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와 똑같이 행동했다. 다를 바가 무엇인가.
나 역시도 치졸한 자신의 감정에 사로잡혀 그를 사지로 내몰았다. 그가 자신의 눈을 팔고 자살하도록 했다. 자살이었으나 타살이었다. 신이 처음 저질렀던 과오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다.
왜 인간들이란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상청은 정해진 곳을 따라 무기력하게 걸어가기만 하는, 인간인 나를 비웃었다. 해내지도 못할 거대한 업을 풀겠다고 발버둥 치다 어김없이 연인을 사지로 밀어 보낸 어리석음에 탄식했다.
수많은 삶과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반듯한 자세로 잠들어 있는 그를 내려다보며 잠깐 침묵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생각보다도 강했다. 죽음을 감당하고서라도 나를 이기게 해 주겠다고 말했던 그 순간에 나는 이성을 잃었다. 업이 어떻게 튕겨 날아갔더라. 죽음으로 결박된 사지는 어떻게 풀려났더라. 지독한 불길에 갇힌 모습을 본 순간 나는 내 이름자부터 찢었다.
불. 다시 피어나는 불꽃. 그를 매번 죽이는 나의 이름…….
가장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죽기를 선택한 주제에, 무섭다고 결국은 내 품에 안기던 마른 몸.
잠들어 있을 거라고 했었나. 내가, 내 입으로?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괴물이었다. 윤이원이 죽는 것을 보고 마음이 만 갈래로 찢어지는 게 무섭다고 숨어 버렸으나, 내 연인은 용감하고 솔직하게 사랑을 말했다. 그의 입술이 사랑을 고백하는 모습에서 처음으로 보답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노력하는 것에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고 스스로 그렇게 세뇌했는데도.
그가 옆에 있어야지만 숨이 쉬어졌다. 온갖 통증으로 정신이 좀먹어 가는데도 눈앞에 그가 보이면 신기할 정도로 이성이 말끔해졌다. 내게 화를 내고 오해하고 냉정하게 밀쳐 내도 좋았다.
이 세상에서 당신만이 나에게 감정을 주는 존재다.
타오른다. 사랑과 혼이, 육체와 슬픔이. 오래된 인연과, 닳고 해어진 인연의 끈이. 이것이 백색이었으면 내 피로 물들어 붉어졌을 것이라 생각하며 상처 입은 그의 몸을 거세게 끌어안았다.
미래가 있을 거라고 이야기해 준 그를 사랑한다. 모든 세상의 순리를 거스를 정도로, 신의 뜻을 배반할 정도로.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나의 가치, 내 존재의 이유. 사랑, 사랑, 사랑.
참지 못하고 눈물이 떨어졌다. 사랑이 축축하게 젖어 갔다. 뜨거운 뺨을, 살아 있는 것을 증명하는 숨소리 위를 정신없이 매만지다 겨우 입을 열었다.
“……이번 생이 끝나면 귀속되겠어. 맹세하지.”
「…….」
“그러니 이번 생까지만…… 기다려 줘.”
이미 끝난 수명이 얼마나 연장되어 있는지 몰랐다. 하지만 아무리 길어도 스쳐 지나가는 삶은 순간이겠지. 그러니 두 번 다시 눈앞에서 연인이 자살을 택하는 끔찍한 광경을 목도하진 않으리라.
「나는 왜…… 너를 살렸지.」
의아함이 담긴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공간을 헤치고 서 있는 신은 홀로 외로이 동떨어져 보였다. 그 쓸쓸한 독백에 쓰디쓴 입술을 다물었다.
불길에서 문을 열고 들어가 야윈 몸을 끌어안는 과정 모두에 신이 개입되어 있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자신의 몫도 계약의 이행도 주장하지 않았다. 그것에서 이미 어떤 마음을 읽어냈으나 나는 무시했다. 그러나 하나 무시할 수 없는 것도 있었다.
「왜, 나는 나조차도 의문스러운 행동을 했을까.」
이 유약하고 아름다운 신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당신은 신답게 완전해져. 미친 사랑은 신과 어울리지 않으니…… 그대는 이미 완전해.”
「그렇다면 내 마음은 뭐지?」
“알려 주지 않을 거야.”
단호한 말에 상청은 눈을 크게 떴다. 당황스러운 감정을 읽을 수 있어 나는 그나마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사랑의 역경은 충분히 겪었으니까…… 경쟁자를 만들고 싶지 않아.”
「내가 그를 사랑하는가?」
“글쎄.”
나는 나와 똑같은 영혼의 모습을 한 신을 마주 보며 웃었다.
늘 차가운 낯빛 뒤에서 점잖은 채 인간을 관찰하던, 잊힌 신이여. 그대에게 줄 수 없어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