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1. 외톨이 늑대 (1/19)

효후(哮吼)

1권

1. 외톨이 늑대

효후(哮吼)

짐승이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소리

* * *

때는 한겨울, 혹한의 칼바람이 불어닥치는 날씨였다. 창밖에 무시무시한 기세로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온갖 방한구로 단단히 무장한 어른도 자칫하면 병에 걸릴 정도로 추운 날일진대, 열 살이나 되었을까 한 어린아이가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수인이 인간보다 튼튼하다지만, 털가죽이 덮인 짐승의 모습이 아닌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상 근본은 똑같았다.

눈앞의 소년은 짐을 챙겨 들고 일어섰다. 있으나 마나 한 옷 몇 벌, 그리고 약간의 금전이 전부였다.

“가지 마세요.”

금방이라도 훌쩍 떠나 버릴 것 같은 상대의 기색에 아이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아이는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소년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안 됩니다. 날이 너무 춥습니다. 지금 나가면 얼어 죽으실 겁니다.”

“안 죽어. 그리고 이것 좀 놓지그래. 아버지가 돌아오시기 전에 나가야 해.”

돌아온 대답은 단호했다. 어떤 말을 해도 상대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차가운 절망이 내려앉았다.

“하제 님.”

자존심을 모두 버리고 무릎을 꿇었다. 팔을 벌려 필사적으로 소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에, 기분이 상하거나 비참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 상황이 몹시도 슬펐다.

“왜…… 왜 굳이 가야 하시는 건가요? 이대로 지내시면 되지 않습니까. 여기는 뭐든지 있습니다. 옷도, 음식도, 충성스러운 수족들도 얼마든지 있고…… 무엇보다 하제 님을 사랑하는 가주님이 계시고요.”

“…….”

“게다가 이제 몇 년 후에는 하제 님께서 가문을, 이 모든 것을 물려받으실 것 아닙니까. 저는 도대체 왜 당신께서 떠나려 하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등을 돌리고 금방이라도 방문을 열어젖힐 기세이던 소년이 우뚝 멈추었다. 어린 늑대의 노란 눈동자가 자신을 붙잡은 이를 언뜻 돌아보았다.

창밖에는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발이 휘날리고 있다. 이 날씨에 어린애 혼자서, 그것도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이자 귀한 도련님으로 살아온 소년이 집을 뛰쳐나가서 무사할 확률은 몹시 희박했다. 그를 말려 줄 가주가 돌아올 때까지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어야 했다.

“바깥세상은 무섭습니다. 당장 이 도시만 해도, 수인이라고는 하나 짐승보다도 야만적이고 인간보다도 교활한 자들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게다가 인간 세상은 말할 것도 없고요.”

“연오야. 나는 죽으러 가는 게 아니야.”

“죽으러 가는 게 아니면, 뭡니까! 이 날씨에 부모도 식솔도 집안도 다 뿌리치고 혼자 나가시겠다는데.”

“살려고 가는 거지. 사람답게 살려고.”

하제가 손을 뻗어 그보다 머리 하나가 큰 소년의 뺨을 가볍게 툭 건드렸다. 장난스러운 손짓이었다. 절대 놓아주지 않으려는 듯 하제의 허리를 품에 꽉 끌어안고 있던 연오가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우리는 수인(獸人)이기 전에 사람(人)이잖아. 너희들이 우리 아버지한테 충성하는 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부귀영화를 주는 것도, 다음 대 가주 자리를 약속한 것도 아닌데 목숨을 바쳐서 충성하잖아. 우두머리(Alpha)라는 이유로.”

“그건…….”

“나는 그게 싫다는 거다. 알파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얻는 충성은 내 쪽에서 사양이야.”

하제가 피식 웃었다. 앳된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어른스러운 표정이었다.

“나는 야성이니 습성이니, 그런 것에 휘둘리지 않고 살 거야. 인간 세상이라…… 그래, 그것도 좋겠지. 그 사람들은 본능을 따르기보다는 계산으로 행동한다고 하니까.”

연오는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핑계로는 하제를 결코 회유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전략을 바꾸었다.

그는 품에 안긴 상대의 팔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하제가 휘청거리며 반사적으로 연오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연오는 품 안에 들어온 소년을 필사적으로 끌어안으며 애원했다.

“제가 싫습니다.”

“…….”

“하제 님이 떠나시는 건 제가, 박연오가 싫단 말입니다. 저는 당신이 없으면 못 삽니다. 까마귀 둥지에서 절 구해 주신 게 하제 님이시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버리고 가려고 하시다니요. 멋대로 데려오셨으면, 끝까지 책임도 지셔야죠. 그럴 거면 애초에 왜 절 구하셨어요.”

지금 스스로가 하고 있는 행동이 유치한 떼쓰기에 불과함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구차한 핑계를 대서라도 하제를 붙잡고 싶었다.

처음부터 자신의 세상에는 온통 하제밖에 없었다. 제 세상이 자신을 버리고 떠난다니, 차라리 심장을 생으로 뜯어내는 것이 덜 아플 것이다.

연오는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겨울 아침에 얼어붙은 호수의 표면 같은, 옅은 푸른색의 눈동자가 슬피 일렁였다.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있는 잘생긴 남자아이가 무릎을 꿇은 채 간청하는 모습은 몹시도 애절했다. 그 누구든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였다.

“박연오.”

“네…….”

“연오야.”

연오는 목 너머로 솟아오르는 울음을 삼키며 나직하게 대꾸했다.

“네, 당신의 연오입니다.”

하제는 손바닥으로 연오의 어깨를 짚은 채 느릿하게 상체를 낮추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연오의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연인 간의 애정 행각은 아니었다. 서열을 확인하는 늑대들의 행동이었다. 하제는 연오의 입술을 살짝 깨물고 곧 떨어져 나갔다.

“네 이름, ‘연오(延烏)’가 무슨 뜻인지 알아? 오래된 설화에 나오는 어부의 이름이잖아. 어느 날 바다에 나갔다가 그대로 다른 나라로 건너가 버리게 되었다고 하지. 그 뒤로 이 나라의 태양이 빛을 잃어서 온통 하늘이 캄캄해졌다던가.”

지금보다 훨씬 어렸던 하제가, 간신히 글을 뗀 그 어린아이가, 그때 글공부용으로 읽고 있던 설화집을 뒤져서 붙여 준 이름이었다.

뜻을 모를 리가 없었다. 연오에게 있어서 이름을 받는 순간은 한낱 더러운 가축에 불과했던 자신이 사람으로, 인격체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널 왜 구했느냐고? 잃어버린 태양을 되찾아 오는 데 이유가 필요한가?”

하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산뜻하게까지 느껴지는 어조로 말했다. 확신에 찬 음성이었다.

“굳이 가셔야겠습니까?”

“그래.”

“지금 가면, 이런 식으로 저와 가주님을 내팽개치고 가면 전 평생 하제 님을 증오할 겁니다. 그래도 가실 겁니까?”

조마조마한 침묵이 흘렀다. 하제는 대답 대신 연오의 품에서 벗어나 문간으로 걸어갔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연오의 증오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가야겠다고, 하제의 뒷모습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를 차마 잡지 못한 채, 연오는 무릎을 꿇은 그 자세 그대로 멀어지는 하제를 침통하게 바라보았다.

“네 이름대로, 이 화리연에서 밝게 빛나는 태양이 되어 줘. 너라면 잘 할 수 있을 거야.”

“저는…….”

“우리 연오랑, 똑똑하고 강하잖아. 아버지 밑에만 있기는 아까운 인재야. 나중에 형편 되면 꼭 독립해서 나가. 너도 네 팩(Pack)을 꾸려야지. 가주님 소리도 들어 보고, 부하도 잔뜩 거느리고, 좋은 반려를 맞아서 자식도 낳고.”

싱긋 웃는 얼굴이 얄미울 정도로 후련해 보였다. 하제는 연오가 이렇게까지 자존심을 내팽개치고 애걸복걸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떠나려고 하는 것이다.

태어나서 십 년도 안 산 어린 늑대가 뭘 안다고. 이제껏 가주의 외동아들이자 차기 가주로서 실컷 귀여움만 받으면서 유복하게 산 주제에 뭐가 그리 갑갑하고 불합리하다고, 자신을 낳아주고 키워 준 안락한 보금자리를 걷어차고 험한 바깥세상으로 나가려 하는지.

연오는 하제가 미웠다. 단순히 밉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었다. 배신감이 들고 서운하고 증오스러웠다. 옅은 살의마저 일었다.

단출한 짐 꾸러미를 어깨에 걸친 채 하제가 짤막한 인사를 건넸다.

“잘 지내.”

그것으로 끝이었다. 하제는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다음에 다시 보자, 같은 인사는 빈말로라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이번 생에 다시 만날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못을 박듯이.

탁.

문이 닫혔다. 두 사람의 길이 돌이킬 수 없이 엇갈리는 순간. 잔인한 이별이었다.

* * *

수도(獸都) 화리연(禍理淵). 각양각색의 수인들이 모여 세운 도시의 이름이다.

인간의 영토에서는 평생을 살아도 몇 번 보기 힘들다는 수인들이 이 도시에서는 차고 넘칠 만큼 흔했다. 새가 번화가를 거닐고, 물고기가 자동차 운전대를 잡고, 고양이가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토끼가 공원에 앉아 신문을 읽었다.

수인들은 짐승으로서 가지고 있던 본성을 각자 세련된 방식으로 발전시켰다. 쥐들은 소식을 주고받는 거대한 네트워크를 만들었고, 까마귀들은 더 큰 부를 추구하기 위해 기업을 세웠으며, 무리 생활을 하던 개들은 가문이라는 형태로 그들의 서열을 유지했다.

수도 화리연에는 모든 희귀하고 이상하고 기묘한 것들이 모여 있었다. 검은 기왓장을 얹은 전통 가옥과 화려한 네온사인을, 시멘트 빌딩 사이에 뒤엉켜 늘어진 전선과 칼을 찬 무사를 동시에 목격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바로 이곳, 화리연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기상천외한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않을 것 같은 화리연이지만, 이 도시에서도 주민들을 일제히 동요시킨 사건이 있었다.

검은 털의 늑대가 다스리는 가문, 서문가(西門家)의 가주가 살해당한 것이다.

살해당했다는 사실 자체는 그다지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다른 대도시가 그러하듯이, 화리연에서도 살인사건이야 흔하지는 않아도 아예 없는 일 또한 아니었으니까.

다만, 살해당한 대상과 방법, 그리고 범인이 문제였다.

으슥한 뒷골목을 지나다가 재수 없게 강도를 만났을까? 만약 그렇다 해도 유서 깊은 서문가의 가주가 순순히 당했을 리가 없다.

한 집단의 우두머리 자리에 있다는 것은, 이 수인들의 도시에서는 그만한 무력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강도에게 당해 명을 달리하기는커녕 강도를 뼈째 씹어 먹을 정도로 강한 늑대였다.

그렇다면 영역 다툼을 하던 적대 세력의 소행일까? 가장 납득이 가는 가설이지만 이것도 정답은 아니었다.

서문가는 권세를 불리거나 힘을 키우는 데는 별 관심이 없는 가문이었다. 가주를 비롯한 혈족들과 그 아래 딸린 가신들만 먹여 살릴 수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입장을 몇 대째 고수하고 있었으므로, 적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이 기묘한 살인사건이 벌어지자 도시 전체가 동요했다.

피해자가 심장에 총을 맞아 사망했다는 것 외에는 아무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무차별적으로 벌인 살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동안 화리연의 주민들은 늦은 외출을 자제하고 문단속을 철저히 했다.

범인의 정체와 목적이 미궁에 빠짐과 동시에, 다음 가주의 행방도 미궁에 빠졌다. 가주의 부인이 자식을 낳다가 산고로 죽고 가주에게는 어렵게 얻은 아들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 아들 또한 어릴 적에 집을 뛰쳐나가 버린 상태였다. 즉 서문가의 핏줄을 이은 이는 지금 이 집안에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야생 늑대들이었다면 기다렸다는 듯이 부두목(Beta)을 새 우두머리로 세웠을 테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현재 베타 자리에 있는 이의 충성심이 너무 강했다. 주인의 자리를 가로채는 불경을 저지르느니 차라리 죽음으로 죄를 갚을 사람이었다.

주군의 공석이 길어질수록 집안에는 어수선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잘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착착 돌아가던 일이 어그러지고, 곳곳에서 문제가 우후죽순처럼 솟아났다. 소위 말해 제대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는 무정부 상태였다.

결국 서문가의 늑대들은 저택을 뛰쳐나와 사방팔방으로 발 벗고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유일한 가문의 후계자이자 서문가주의 하나뿐인 아들, 서문하제를 찾아 새 가주로 추대하기 위해서.

* * *

그렇다면 그 늑대들이 목숨을 걸고 찾아 헤매고 있는 당사자는 과연 그 시각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화리연의 경계를 훌쩍 벗어나 인간의 영토로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인간들이 쌓아 올린 문명의 불빛이 찬란하게 거리 구석구석을 밝히는 불야성의 도시, 영경(榮京). 빼곡하게 건물들이 들어선 뒷골목에 작고 허름한 식당 겸 술집이 하나 있었다.

“뭐야, 이 새끼. 수인이야?”

갑자기 쩌렁쩌렁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술에 거나하게 취해 혀가 꼬부라진 음성이었다. 홀이 일제히 조용해지며 몇 개 없는 테이블에 앉은 손님들의 이목이 한곳에 쏠렸다.

“손님, 잠깐만요. 이것 좀 놓으시고…….”

테이블 사이를 바삐 오가며 술병과 쟁반을 나르던 청년은 길고 숱이 많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어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 긴 머리채를 움켜잡은 남자가 다른 이들이 들으라는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다.

“와. 말세네, 말세. 시발! 어딜 짐승 새끼가 식당에서 서빙을 해? 음식에 털 날리면 어쩌려고.”

“윽!”

남자의 손아귀에 잡힌 머리채가 확 당겨졌다. 두피가 통째로 뜯겨 나가는 듯한 아픔에 절로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양손에 접시가 가득 쌓인 쟁반을 들고 있어서 남자의 손길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청년은 아픔으로 비틀거리면서도 손에 든 쟁반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아무리 여기가 싸구려 식당이라도 최소한의 위생은 신경 써야 하는 거 아냐? 엉? 씨이발, 짐승 누린내 때문에 술맛 달아나면 책임질 거야!”

취객은 청년의 머리채를 붙잡은 채 다른 한 손으로 테이블을 탕탕 내리치며 성질을 냈다.

인간들의 도시에서 수인을 목격하기란 몹시 드물었다. 그렇다고 아주 희귀한 것도 아니었다. 도시 곳곳에서 종종 이질적인 외모의 수인들이 눈에 띄었다.

대놓고 짐승의 귀나 꼬리가 달려 있거나, 짐승의 머리에 사람의 몸이 달렸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그러나 수인들은 어딘가 인간들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머리와 눈 색이 특이하다든가, 하는 행동이 색다르다든가.

그런 미묘한 차이를 귀신같이 알아챈 인간들은 수인들을 차별하고 멸시했다. 핍박을 받는 수인들이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으므로, 인간들이 꺼리는 힘들고 자잘하고 고된 일이 수인들의 몫이었다.

허름한 식당 종업원 정도면 양반이었다. 수인들은 마약 운반책이나 밀수업 같은 뒤가 구린 일부터 마피아 히트맨이나 살인 청부업자, 용병 같은 험한 일들을 도맡아 했다.

저렇게 수인에게 대놓고 혐오감을 드러내며 욕설을 퍼붓는 사람들도, 가끔이지만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돌아보던 손님들이 이윽고 하나둘 시선을 거두며 관심을 돌렸다. 저런 일에 엮여 봤자 좋을 게 없었다.

“어이, 그거 사실이냐? 가축이랑 인간이 떡 쳐서 나온 게 너희라며?”

남자의 폭언은 점점 수위가 높아졌다.

“넌 종이 뭔데? 뭐냐고. 사내새끼가 머리 이 지랄로 기르고 있는 거 보니까 말인가? 어? 이거 딱 말 꼬랑지 같은데.”

“…….”

수인에게 종이 뭐냐고 직접적으로 묻는 건 무례한 행동이었다. 애초에 같은 수인들끼리는 겉모습만 봐도 알아보았으니 물을 필요가 없었다. 저런 식으로 면전에다 대고 혈통을 캐묻는 건 인간들뿐이었다.

“너희 아비가 암말이랑 그 짓 해서 너 낳았냐?”

남자가 킬킬 웃더니 말의 울음소리를 우스꽝스럽게 흉내 내며 청년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었다. 어깨 아래로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이 우악스러운 손아귀 안에서 마구잡이로 농락당했다.

“아, 아닌가. 그 반대인가? 축생이랑 붙어먹은 게 다른 쪽인가? 왜, 말 좆이 그렇게 크다며. 네 어미가 짐승 좆질에 한 번 맛들었다가 못 잊은 거 아니냐?”

“당신…….”

청년이 이를 빠드득 갈았다. 갖은 고초를 당하면서도 순박하게 깜빡이고만 있던 검은 눈동자에 분노의 기색이 어렸다.

“왜, 치게? 어, 칠 거냐고! 쳐 봐. 열등한 짐승 새끼가 어딜 인간한테.”

술집 안의 분위기가 급격하게 험악해졌다. 심상치 않은 기류를 파악한 손님들이 슬그머니 일어나 계산을 하고 자리를 떴다. 아직 남아 있는 몇몇은 경찰을 불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허, 씨발. 술맛 존나게 떨어지네. 야, 술이나 한 병 더 가져와!”

“싫어요.”

청년이 고개를 홱 휘저어 남자의 손에서 머리카락을 빼냈다.

“당신 같은 사람한테 드릴 술 없습니다. 나가 주세요.”

“뭐라고? 너 방금 뭐라고 했냐?”

남자가 텅 빈 술잔을 테이블에 집어 던지듯이 내려놓고, 자리를 박차며 일어섰다. 그 기세에 밀려서 탁자 아래로 수저가 후드득 떨어졌다.

수인 따위를 인간 사회에 어울려 살게 해 주니까 이런 일이 생기는 거다. 더러운 짐승 주제에 분수를 모르고, 자기가 인간인 줄 알고 기어오르는 거지.

본때를 보여줘야겠다고, 취기가 머리끝까지 오른 남자는 생각했다. 저 새끼를 끌어다가 당장 마구간에 처넣고 고삐를 매어 놔야…….

“손님. 무슨 일이십니까?”

흐려진 머릿속으로 이어 가던 생각이 도중에 뚝 끊겼다. 뒤를 돌아보자 허리에 앞치마를 두른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이곳의 주방장인 모양이다.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다갈색으로 보이는 눈동자가 취객을 위아래로 훑었다. 머리채를 잡은 것만으로 움찔하며 기가 죽던 종업원과 완전히 다른 태도였다. 애초에 그 순한 청년과는 인상부터가 달랐다. 결코 만만치 않아 보였다.

남자는 일순간 기가 죽었다. 하지만 기가 죽은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괜히 더 건들거리며 윽박질렀다.

“뭐야……. 시발. 여긴 대체 어떻게 돼먹은 곳이야. 일하는 새끼들이 하나같이 싸가지가…….”

“그래서, 뭐가 필요하십니까?”

“술. 새 술 가져오라고! 말귀를 못 알아 처먹어!”

“아, 술이요.”

주방장이 씩 웃으며 손에 든 술병을 들어 보였다. 방금까지 주방에서 요리를 하다 나왔는지,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채였다. 깨끗하게 씻은 맨손이 물기에 젖어 있었다.

그런데 저 술, 요리용으로 쓰던 와인 아닌가? 뚜껑도 이미 열려 있고, 내용물도 반 이상 비었는데…….

“주문하신 술 여기 있습니다, 이 새끼야.”

남자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주방장이 호쾌하게 팔을 휘둘러 그의 머리에 술병을 내리쳤기 때문이다.

퍼억!

경쾌한 소리가 났다. 깨어진 와인 병 파편이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그 일격으로 남자는 바닥에 죽은 개구리처럼 엎어졌다. 바닥을 타고 질질 흐르는 액체가 피인지 레드 와인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하제 씨!”

어찌할 바를 모르며 발을 동동 구르던 종업원이 대경실색하며 비명을 질렀다. 그나마 남은 손님들마저 이 소동을 보더니 기겁하며 가게를 빠져나갔다.

“가리온, 가게 문 잠가라. 커튼도 치고.”

“예에? 미쳤어요? 살인은 안 한다면서요, 살인은!”

“인간을 얕보지 마. 이 새끼들 약해 보여도, 이 정도로는 안 죽어. 가끔 좀 후유증이 남긴 하던데, 죽지는 않더라고.”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어…….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서?”

주방장이 태연하게 대꾸하더니 고꾸라진 남자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섰다. 그의 손에는 남자의 머리를 후려갈기느라 박살이 난 와인 병의 목 부분만이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었다. 삐죽삐죽 날이 선 단면이 섬뜩했다.

“씨발, 나이를 먹어도 곱게 처먹어야지. 뭐? 아비, 어미가 어쩌고 어째? 말 좆이 뭐?”

“…….”

의식을 잃은 자는 말이 없다.

“말 한번 존나 상스럽게 하네. 입에 걸레를 처물었나. 야, 주둥이가 달리 주둥이인 줄 알아? 겉껍데기만 인간이면 뭐 하냐. 너같이 말을 좆같이 하는 새끼 입은 입이 아니야. 주둥이지.”

그걸 듣던 가리온은 어이가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말을 상스럽게 하기로는 둘이 비등비등해 보였지만, 하도 본인이 뻔뻔하게 나오니까 그냥 그러려니 했다.

술병으로 상대의 대가리를 깨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술집의 주방장, 하제는 병목을 치켜들고 씩씩대며 쓰러진 남자에게 다가섰다. 잽싸게 입구에 자물쇠를 채운 가리온이 다가가 그를 뒤에서 붙들었다.

“이번엔 진짜 큰일 나요. 하제 씨! 저번에도 웬 마피아 조직원 잘못 건드렸다가 경비원들한테 쫓겼잖아요. 무장한 남자들이 가게 앞에 어슬렁거린다고, 무서워 죽겠다고 손님 다 끊기고!”

“그건 그 도베르만 새끼들이 밸이 없는 거지.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그렇지, 어딜 인간한테 충성하면서 꼬리를 흔들어? 이래서 개새끼들은 안 된다니까.”

“뭔 소리야, 진짜! 인간들 지키는 경비원들이나, 인간들한테 요리 해 주는 하제 씨나, 그 요리 인간들한테 서빙 하는 저나 똑같이 이 사회의 톱니바퀴예요! 직업에 귀천이 어디 있어요?”

“아, 몰라. 됐고, 가리온. 나 지금 이 새끼 후장에 술병 박아 줄 거야. 비켜 봐.”

“아아악, 정말 왜 그러세요!”

하제는 양어깨를 가리온에게 붙들린 채로도 기세 좋게 허공에 발길질을 해 댔다. 지칠 줄 모르고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성질을 부리는 게, 화가 나도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아무리 가리온보다 하제의 체격이 작아도 맹수는 맹수였다. 완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미친놈은 힘이 장사라더니, 말리기 더럽게 힘들었다. 가리온은 지금 그를 안 말리면 자기도 같이 죽는다는 마음가짐으로 젖 먹던 힘까지 짜내 하제를 붙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수인에 대한 여론이 좋지 못한 도시인데. 제 성질을 못 참고 손님에게 패악을 부리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러다가는 진짜 영경 전체에 하제에 대한 지명수배가 떨어질 판이었다.

사람이 모두 빠져나가고 텅 빈 허름한 술집에서, 초식동물 한 마리와 육식동물 한 마리의 힘겨운 몸싸움이 이어졌다. 잔뜩 분노한 하제의 잇새로 사람의 말소리라기보다는 짐승의 으르렁거림에 가까운 것이 새어 나왔다.

“짐승 좆질이 뭐? 맛 들였다가 못 잊어? 씨발. 저기요, 손님. 좀 일어나 보세요. 손님께서는 박혀 보셨나 봐요? 어? 짐승 좆에 박혀 봤냐고!”

“제발요, 하제 씨. 이제 그만 하세요. 당장 술병으로 저 사람 머리 내려친 것만 해도, 신고 들어가서 경찰 오면 곤란해진단 말이에요.”

“야, 가리온 넌 화나지도 않아? 내가 중간에 안 끼어들었으면 계속 저 새끼한테 머리채 잡혀서, 부모가 어떻고 짐승 좆이 어떻고 하는 말 꾹 참고 끝까지 들었을 거 아니냐고. 내 말 틀리냐?”

하제가 자신의 양팔을 붙든 이를 휙 돌아보았다. 울분에 찬 노란 눈동자가 가리온을 노려보았다. 선명한 빛깔의 홍채 가운데에 동공이 확 좁혀지는 게 적나라하게 보였다.

“안 참으면 어떡해요. 저 사람 때리기라도 해요? 그래 봤자 손해 보는 건 저밖에 없는데. 인간이랑 수인이 싸우면, 처음에 시비 건 게 누구든 간에 무조건 수인 잘못이잖아요.”

“그렇다고 가만히 있어?”

“그럼 어쩌라고요!”

“싫다고, 하지 말라고, 좆 같다고 지랄해! 이겨 먹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지지는 말아야 할 거 아냐!”

“…….”

“가축이 어쩌고, 더러운 짐승 새끼가 어쩌고 하는 말. 반박 안 하고 반항도 안 하고 그대로 얌전히 듣고만 있으면, 우리는 진짜 열등하고 미개하고 천박한 놈들이 되는 거야. 진짜로 짐승이 되는 거라고!”

가리온의 손아귀에 약간 힘이 풀렸다. 하제는 그 틈을 타 구속을 뿌리쳤다. 그는 분이 채 가라앉지 않은 눈으로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남자를 내려다보다가, 손에 든 병 파편을 아무 테이블 위에나 내려놓았다.

“그런데, 아니잖아. 우리는…… 사람이잖아.”

“일단, 가세요.”

슬퍼 보이기까지 하는 낯으로 그의 말을 듣고 있던 가리온이 하제를 떠밀었다.

“뒷문으로 나가세요, 경찰 오기 전에. 이 사람은 술 취해서 난동부리다 혼자 넘어진 거라고, 어떻게든 변명해 볼 테니까.”

“혼자서 괜찮겠어?”

“안 괜찮을 게 뭐가 있어요. 이제까지 제가 하제 씨 뒤치다꺼리를 한 게 한두 번도 아니고요.”

“……미안.”

가리온은 짙은 피로감이 담긴 얼굴로 하제를 마주 보았다. 서빙 일을 하느라 단정하게 묶어 올렸던 포니테일이 흐트러져서, 빠져나온 머리칼들이 아무렇게나 흘러내려 와 있었다.

“좀 잠잠해진 뒤에 연락할게요.”

끝까지 단호하게 손을 내저으며, 가리온은 하제를 주방 쪽으로 난 뒷문으로 내보냈다. 입을 꾹 다문 채 그를 뚫어져라 응시하던 흑발의 청년은 이윽고 낡은 나무문을 덜컥 닫으며 모습을 감추었다.

이제 가게 안에 남은 거라고는 엉망진창이 된 홀의 정경과 붉은 웅덩이 사이에 엎어진 취객, 그리고 가리온 자신뿐이었다.

“하아…….”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 * *

전선이 얼기설기 뒤엉켜 있는 뒷골목. 하제는 멍하니 벽에 기대어 섰다. 중구난방으로 세워진 건물들 사이사이에는 담배꽁초며 쓰레기 같은 것들이 쌓여 엉망이었다.

“…….”

착잡했다. 입맛이 썼다. 요리 일을 시작하면서 담배를 끊은 지 꽤 되었는데, 절로 담배가 당겼다. 그는 바지 주머니를 습관적으로 뒤지다가 담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허리에 두르고 있던 앞치마를 벗어 짜증스럽게 가게 문간에 내동댕이쳤다.

수도 화리연은 수인들의 유토피아였다. 그곳에서는 차별도 핍박도 받을 이유가 없었다. 화리연에서는 수인들이 지배자였으며, 오히려 수인 사이에 섞여 든 소수의 인간이 약자였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해할 수 없는 기묘한 신념들이 굳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인간은 수인보다 약하고 열등한 종족이라는 신념, 수인은 인간과 동물의 장점만을 모아 만든 가장 완벽한 존재라는 신념, 수인에게 남아 있는 동물로서의 야성은 신성하다는 신념. 그게 싫어서 집을 뛰쳐나왔다.

그는 사람이 사람 위에 서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왜 집안의 가신들이 아버지에게 간까지 빼다 바칠 것처럼 충성스럽게 구는지, 왜 알파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하제에게까지 굽실거리는지. 그 어린 나이에도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좋은 후계자를 생산할 우수한 유전자를 지닌 반려를 찾아서 짝짓기를 하는 것도, 가문을 굳이 자신의 피를 이은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도, 무엇 하나 수긍할 수 없었다.

하제는 서문가의 가주가 되고 싶지도 않았고, 늑대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평등하고 자유로운, 제 앞길을 스스로 선택할 권리가 있는 한 명의 사람으로서.

그래서 약속된 권력도, 안락한 부모의 품도 모두 버리고 뛰쳐나왔다. 하지만 긴 여행 끝에 도착한 이곳에는 또 다른 종류의 족쇄가 있었다. 멸시와 혐오라는 이름의 족쇄가.

“뭐 하나 내 뜻대로 되는 게 없냐.”

하제는 음울하게 한탄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높게 솟은 건물과 전선, 안테나 따위에 가려진 도시의 하늘은 손바닥만 했다. 그마저도 매연 때문에 뿌옇게 흐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다.

힘없이 벽에 기댄 채 탁한 빛으로 흐려진 하늘을 무심코 올려다보는데, 갑자기 검은 그림자가 불쑥 드리워졌다.

“……!”

하제보다 키가 훌쩍 큰 남자였다. 어렴풋이 적갈색이 도는 어두운색의 머리카락. 그 아래 얼음처럼 투명하고 새파란 눈동자가 그를 빤히 쏘아보았다.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려 했으나, 등 뒤로 벽이 가로막혀 있는 탓에 달아날 곳이 없었다. 하제와 낯선 남자는 좁은 골목길에서 한 걸음 반 정도의 간격을 두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처음에는 경찰인가 했다. 신고가 기가 막히게 빨리 접수되어서, 경찰이 그를 체포하러 왔나 싶었다. 하지만 하제는 곧 생각을 바꾸었다. 눈앞의 남자는 경찰이 아니었다.

항상 과로와 격무에 시달리는 민중의 지팡이들은 저렇게 형형하게 날이 선 눈빛을 하고 있지 않다. 경찰보다는 오히려…… 오래된 원수를 죽이러 온 복수자에 가까운 인상이었다.

“……누구?”

경계 태세를 취하며, 하제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절로 허리 뒤쪽에 손이 갔다. 주방 일을 하다가 나오느라 별생각 없이 뒷주머니에 과도 하나를 칼집째로 넣어 놨었는데, 여차하면 이 과도를 무기로 쓸 심산이었다.

“찾았다.”

“…….”

“서문하제 님.”

남자는 한 걸음 성큼 다가왔다. 그렇지 않아도 가깝던 간격이 더욱 좁혀졌다. 그는 고개를 비스듬히 숙여 하제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삼 년…… 삼 년 동안 꼬박, 화리연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혹시나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아서, 세상에 당신이 더는 없다고 믿고 싶지 않아서 몇 번이고.”

“……뭐?”

“이제 찾는 걸 그만두자고, 이렇게까지 찾았는데도 없으니 이미 돌아가셨을 거라고 다른 녀석들이 말해도…… 도저히 포기가 안 돼서. 그래서 이렇게 불결한 인간 소굴까지 찾아왔는데.”

가면이라도 쓴 듯 무표정하던 남자의 입가에 스르르 미소가 번졌다. 씁쓸해 보이는, 한편으로는 보는 이를 몹시도 오싹하게 만드는 웃음이었다.

“여기에 계셨군요.”

“뭐라고? 내 이름은 어떻게 아는 거지?”

이 도시에서 하제는 그냥 하제였다. 그의 성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같은 수인인 가리온조차도. 늑대와는 달리 말에게는 가문의 개념이 없었으므로, 가리온은 애초에 하제에게 성을 물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본명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하제가 빠득 이를 갈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재빨리 사방을 훑어보았다. 달아날 길이 없었다. 자신보다 체격이 훌쩍 큰 남자의 팔에 의해 퇴로가 모두 차단되어 있었다.

“가문에서 보냈군.”

상대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너, 누구야.”

결국 도주를 포기한 하제가 으르렁거리며 상대방을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한참이나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냐고 항의하듯이.

그러다가 쓰러지듯이 하제에게 고개를 기대며, 남자는 하제의 귓가에 진실을 흘려 넣었다.

“당신의…… 연오입니다.”

“……!”

따끔. 남자의 목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사이, 갑작스럽게 불쾌한 통증이 찾아들었다.

하제는 반사적으로 팔뚝을 감쌌다. 가느다란 주사기가 그의 혈관 안에 약물을 흘려 넣고는 능숙하게 빠져나갔다.

믿을 수 없었다. 대체 왜……. 하제는 밀물처럼 몰려오는 어지럼증에 절박하게 헐떡이며 연오를 노려보았다. 예전보다 체격이 훌쩍 자랐고, 무엇보다 인상이 많이 달라져서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다소 말수가 적었지만 성실하고 선량했던 그 소년은 차갑고 딱딱한 인상의 남자가 되어 있었다.

서문가의 가신, 박연오. 그는 하제가 어렸을 적, 아버지와 함께 까마귀의 수장을 방문했을 때 발견하고 동족에 대한 연민 반, 또래 사내아이에 대한 흥미 반으로 구해 온 이였다. 채 몸이 여물지도 못한 어린 늑대가 까마귀들 틈에서 얼마나 가혹한 취급을 당했는지, 사람 모습을 유지하지도 못하고 바닥에 웅크려 꼬리를 말고 있던 걸 금전을 지불하고 데려왔다. 까마귀들은 예나 지금이나 돈이라면 뭐든지 하는 이들이었고, 별 쓸모가 없어 구석에 처박아 놨던 다 죽어가는 늑대를 흔쾌히 내어주었다.

그 뒤로 연오는 서문가에 충성을 바쳤다. 연오를 구하자고 제안한 이는 하제였지만 최종 결정권자이자 권력자는 아버지였으므로, 어쨌든 결과적으로 연오는 아버지의 사람이라고 불러야 마땅했다.

왜 이제 와서 여기까지 나를 찾아온 거지? 가문에서도 이제 완전히 내놓은 자식이 돼서 나는 죽은 거나 다름없을 텐데? 족보에서 내 이름을 파낸 지 십 년이 넘지 않았나? 아버지께서 이제 와서 집 나간 아들놈이 그리워지기라도 하신 건가? 왜 굳이, 약물까지 써 가면서…….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가주님.”

흐려지는 의식 사이로 차분한 음성이 들렸다. 상사에게 다음 일정을 알리는 비서처럼 사무적인 어조였다. 가주님이라는 호칭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을 눈치챌 새도 없이, 하제는 의식을 잃었다.

* * *

널찍한 전통 가옥의 가장 안쪽에 있는 방. 정갈한 이부자리 가운데에 검은 머리의 청년이 누워 있었다.

약물로 억지로 재워서 데려온 걸 감안하더라도, 청년의 안색은 결코 좋지 못했다. 정신을 잃고 잠들어 있는 뺨은 파리했고, 아무렇게나 기르고 아무렇게나 자른 머리카락이 베개 위에 흩어져 있었다. 이불 밖으로 빠져나온 손에도 자잘한 흉터와 굳은살이 가득했다.

“연오랑. 가주님께서는 아프신 거예요?”

하제의 머리맡에 앉아 안절부절못하며 그의 용태를 살피던 남자가 슬쩍 뒤쪽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앉은뱅이 탁자 위에 다기를 올려놓고 찻물의 온도를 맞추던 연오가 그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대꾸했다.

“아프시겠지. 인간의 영토에서 지내는 동안 고생을 많이 하신 것 같으니까.”

“못 돌아오는 사정이 있으셨던 걸까요. 인간들이 억지로 잡아 놨다든가…….”

가신들 사이에서 서문하제의 평판은 그리 좋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최악이었다.

애초에 가문을 버리고 뛰쳐나간 것부터가 가주로서 자격 미달이었다. 우두머리에 대한 충성과 가족에 대한 사랑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하는 늑대들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평생 한 명의 반려만을 맞는 것도 늑대들 특유의 본성이었다. 결국 하제의 아버지, 전 가주는 부인이 죽은 뒤로 평생 정절을 지키다 끝내 목숨을 잃었다. 하제 외에 자식이 없었으니 가문의 대가 끊길 위기에 처했다.

그때 다른 늑대들은 연오에게 가문을 이을 것을 청했다. 그들은 이대로 가문이 사라지게 놔두느니, 서문가의 핏줄은 아니지만 베타인 연오가 가주 자리를 잇는 게 맞지 않겠냐는 주장을 폈다. 사실 그다지 틀린 말도 아니었다.

하지만 연오는 끝내 그들의 제안을 거절하고 일개 가신으로 남았다. 서문하제가 죽었다는 사실이 확실한 것도 아닌데, 아직 살아 계실지도 모르는 분의 자리를 자신이 함부로 빼앗을 수는 없다는 이유였다. 이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으므로 딱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가주 자리가 공석으로 비어 있는 삼 년 동안 가문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수많은 늑대들이 이 사태에 환멸을 느껴 서문가에 종속되는 것을 거부하고 뛰쳐나갔다. 살림은 곤궁해지고, 한때 식솔들로 붐볐던 거대한 저택이 을씨년스러워졌다.

하제가 차라리 일찌감치 죽고 부고가 전해졌다면 이렇게까지 상황이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연을 끊고 나 몰라라 하며 뛰쳐나갔다가, 이미 집안이 쑥대밭이 되어 버린 후에 뒤늦게 살아 돌아오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가신들 사이에서 하제에 대한 반감은 최근 매일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었다.

“불쌍한 가주님. 그동안 잠도 잘 못 잤나 봐요. 엄청 곤히 주무신다.”

그 큰 덩치가 무색하도록, 갈색 머리의 청년은 하제의 이부자리 옆에 웅크려 앉아 내내 그를 살폈다. 주인을 지키는 강아지 같았다.

청년의 이름은 호해유리(護偕儒理), 하지만 다른 이들은 모두 그를 누리라고 불렀다. 생긴 것에 어울리지 않게 앙증맞고 깜찍한 이름이었다.

호해가는 서문가에 필적할 정도로 늑대들 사이에서 명문가인데, 어디 한 군데 모자란 놈 같다고 자기 가문의 후계 싸움에서 일찌감치 밀려난 걸 서문가에서 받아들여 길렀다. 다른 대부분의 갯과 동물들이 그렇듯이, 늑대들의 사회에서도 우두머리가 되지 못한 알파의 자식들은 무리에서 내쫓는 게 원칙이었으므로.

연오랑이 모시겠다니까 대놓고 반발은 안 하지만 저 새끼 참 마음에 안 든다, 하는 티를 팍팍 내고 있는 늑대들 사이에서 이 청년이 그나마 하제에게 호감 비슷한 걸 보이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사실 누리는 누구에게나 호의적이었고, 누구에게나 금방 친근감을 표시했다. 평소에는 이런 성격 때문에 아무한테나 좋다고 꼬리를 흔드는 개도 아니고 품위 없다며 빈축을 샀지만, 지금만큼은 그의 낙천성이 참으로 기꺼웠다. 하제에게는 사방이 적인데 우방이 하나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가주님 이불 다시 덮어 드려도 돼요?”

“마음대로 해.”

누리가 연오에게 물었다. 곧 허락이 떨어졌다.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청년이 조심스럽게 팔을 뻗었다. 하제의 위로 상체를 기울인 채 팔꿈치 부근까지 흘러내린 비단 이불을 살며시 끌어 올려 덮어 주려는데…….

하제가 이불 속에서 움찔, 몸을 움직였다.

미처 피할 틈도, 상대를 말릴 틈도 없었다. 하제의 팔이 이불 밖으로 빠져나와 누리의 등을 냉큼 끌어안았다. 누리는 어어, 하고 얼빠진 소리를 내며 하제의 위로 쓰러졌다.

“뭐야, 귀엽게 굴긴. 한 판 하자고?”

하제는 눈도 안 뜬 채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웅얼거리더니 누리의 탄탄한 목덜미에 나른하게 입을 맞추었다. 누리의 얼굴에서 혈색이 싹 빠져나갔다.

“가리온, 우리 이쁜이…….”

“흐억, 으아아악!”

누리가 우렁차게 비명을 질렀다. 가주님이고 뭐고, 더는 눈에 뵈는 게 없었다. 그는 온 힘을 실어 하제를 매몰차게 퍽 밀쳐냈다.

“컥!”

억센 사내의 힘에 의해 하제는 바닥을 뚫고 들어갈 기세로 담요에 깊숙이 처박혔다. 긴 잠 끝에 간신히 일어난 하제를 일격으로 다시 쓰러뜨려 버린 누리는 처절한 고함을 내지르며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쾅쾅쾅, 대청마루를 울리며 멀어져 가는 그의 발소리가 참으로 묵직했다.

“…….”

연오의 기억 속에 있는 어린 시절의 서문하제는 항상 어른스럽고 차분한 소년이었다. 눈앞의 저 미친놈과는 좀 많이, 괴리가 있었다.

그 광경을 모두 목격한 연오는 잠깐 고민했다. 내가 이분을 데려와 차기 가주로 세운 게 과연 잘한 일일까, 하고.

“으으.”

누리의 거침없는 육탄 공격이 가물가물하던 하제의 정신을 일깨웠다. 그는 오장육부가 뒤흔들리는 듯한 충격을 느끼며 깨어났다.

매일 초저녁이 되면 가리온은 가게 오픈 준비를 끝내고 나서, 낮과 밤이 뒤바뀐 탓에 오후 내내 자고 있는 하제를 깨우러 왔다. 그럴 때마다 하제는 그에게 짓궂은 장난을 걸었다.

한 판 하자느니 이쁜이라느니 하는 것도 모두 그 장난의 일환이었다. 그럴 때마다 칠색 팔색을 하며 경멸의 눈길로 그를 쳐다보는 가리온의 반응이 웃겨서 일부러 더 능글맞고 징그럽게 굴었다.

방금도 평소와 다름없이 장난을 쳤는데…… 상대방의 반응이 좀 달랐다.

상대는 한심한 어조로 하제에게 핀잔을 주기는커녕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하제를 바닥에다 처박아 버리는 손힘도 뭔가 낯설었다. 가리온이 이렇게 힘이 셌나? 그러고 보니까, 내가 왜 침대가 아니라 방바닥에서 자고 있지…….

“……!”

하제는 눈을 부릅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를 둘러싼 낯선 풍경을 발견했다.

문과 창문마다 단아한 문양이 새겨진 격자가 끼워져 있었다. 창호지를 바른 창문 너머로 은은하게 빛이 스며들었다. 넓고 깨끗한 방 한가운데에서, 자신은 솜털처럼 보드라운 비단 금침을 덮은 채 다소곳이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서, 키 큰 남자가 조용히 찻잔에 차를 따르고 있었다. 꼿꼿하게 앉은 채 살짝 고개를 숙인 옆얼굴이 순종적이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불손해 보였다.

“몸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드십시오. 보약입니다.”

연오가 도자기 그릇에 담긴 한약을 정중하게 내밀었다. 하제는 그것을 본 체도 하지 않고 그를 추궁했다.

“박연오. 뭐 하자는 거야. 여긴 어디야?”

“아시지 않습니까.”

“내가 지금 왜 여기 있느냐고! 집 나간 새끼 그냥 뒤진 셈 치고 살 것이지, 갑자기 왜 이딴 식으로…….”

“전대 가주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다음 가주가 되실 분은 당신밖에 없습니다.”

하제의 말이 도중에 뚝 끊겼다. 아침 햇살을 받아 청명하게 빛나는 호박색 눈동자가 멍하니 연오를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왜?”

그는 가만히 되물으며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몹시도 차분한 반응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갑작스럽게 전해 들었는데도 그는 오열하지도, 현실을 부정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하제는 옛날부터 그랬다. 평소에 다소 충동적이고 다혈질인 듯 보이다가도, 이렇게 중요한 때에는 오히려 침착해졌다.

연오는 표정을 잃어버린 그의 얼굴에서 어린 날의 편린을 찾아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조금 안심했다. 아무리 실망스러워도, 아무리 안팎으로 많이 달라졌어도, 아무리 낯설어도…… 하제는 여전히 하제였다.

“살해당하셨습니다.”

“……범인이 누군지는 모르는 거고.”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범인이 누군지 안다면 ‘살해’라는 단어를 언급하기 이전에 그자의 이름을 가장 먼저 꺼냈을 테니까. 너희 늑대들은 그렇잖아. 우두머리를 해친 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잊지 않지.”

연오는 그 말을 수긍하거나 부정하는 대신 다소 뜬금없는 대답을 했다.

“당신도 늑대이시잖아요.”

하제는 착잡한 눈으로 바닥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연오는 그를 물끄러미 관찰했다.

짜증스럽게 찌푸려진 미간. 어른의 표정이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십 년이 훌쩍 넘는 세월을 떨어져 지내는 동안 그 보송보송하고 작던 남자아이는 청년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더라도, 그게 나를 이렇게 강제로 끌고 올 이유가 되나? 나는 이미 제 발로 가문을 뛰쳐나갔어. 모든 의무와 권리를 포기했단 말이야.”

“가문이 싫으십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나? 좋으면 내가 가출을 했겠어? 나는 이 도시가 지긋지긋해!”

“그렇게 떠나신 분치고는…… 인간의 땅에서도 잘 지내시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습니다.”

“내가 언제 네게 날 평가할 권리를 줬지?”

날 선 시선이 날아왔다. 하제는 연오를 흉흉하게 노려보았다.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상당히 고압적인 태도였다. 서열이 높은 늑대가 낮은 늑대를 대하는.

“죄송합니다. 제가 건방졌습니다.”

연오가 뻔뻔할 정도로 평온한 낯을 한 채 순순히 사과했다. 공손하게 사과하는 사람치고는 조금도 미안해 보이지 않았다.

“……돌아가겠다.”

결국 하제가 이불을 걷어치우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연오가 태연히 그 뒤를 따랐다.

“어디로 가신단 말씀이신가요.”

“영경으로! 가리온이 걱정할 거야. 아무 연락 없이 사라져 버렸으니까.”

“가리온이라면, 그 갈기가 검은 말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가주님과 함께 있던.”

“그래. 그 친구는 쓸데없이 잔걱정이 많아. 얼른 돌아가서, 아무 일 없었다고 말해 줘야…….”

“그렇다면 또다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려야겠군요.”

연오가 하제의 뒤에서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딱 잘라 말했다.

“못 가십니다, 영경에는.”

오래전 그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씁쓸한 기시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어린 시절처럼 무릎을 꿇고 하제의 허리를 껴안으며 떠나지 말아 달라고 애걸하는 대신, 연오는 말로써 하제의 걸음을 붙잡아 놓았다.

“영경에 사람을 풀었습니다. 인간들에게, 개와 쥐들에게, 고양이들에게…… 연락이 닿는 모든 이들에게 거금을 주고 의뢰했습니다.”

“무슨, 의뢰를…….”

“척살령을 내렸습니다.”

“……!”

“하제라는 이름의, 검은 털에 노란 눈을 한 늑대 수인이 보이면…… 그 즉시 죽일 것. 살해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끝까지 추적해서 숨을 끊어 놓으라고.”

“뭐라고?”

“영경뿐이겠습니까. 화리연과 경계가 맞닿은 모든 도시에 지금쯤 똑같은 지령이 떨어졌을 겁니다. 가리온을 찾아가시겠다고요. 그자도 같이 해를 입을지도 모릅니다. 타깃을 죽이려다 주변인이 다치는 것까지 모두 보상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거든요.”

하제에게서 빠득, 섬뜩하게 이 갈리는 소리가 났다. 그가 천천히 돌아보았다. 두 늑대의 눈이 마주쳤다. 어찌나 격렬하게 분노하고 있는지, 맹수의 으르렁거림이 하제의 목 너머로 나지막하게 새어 나왔다.

“씨발 새끼.”

연오는 살며시 웃었다. 뒷골목에서 하제를 처음 발견했을 때 보았던 것과 같은 웃음이었다. 단정한 얼굴 아래 얼핏 해묵은 광기가 비쳤다.

“제가 그때 말했잖아요, 하제 님. 이대로 절 버리고 가신다면…… 평생 당신을 증오할 거라고.”

살벌한 침묵 속에서 그를 쏘아보던 하제 또한 바스스 웃었다. 정말로 우스워서 웃는 게 아니었다. 노여움이 도를 지나쳐서 역으로 헛웃음이 나오는 것이었다.

쾅!

하제는 연오의 멱살을 잡아 벽에 밀어붙였다. 자신보다 거의 머리 하나가 큰 건장한 남자를 상대로도 용케 힘을 썼다.

연오는 순순히 그가 밀치는 대로 밀쳐졌다. 자신의 목덜미에 흐릿하게 와닿는 하제의 숨결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저는 어떻게든 당신을 가주 자리에 앉힐 겁니다. 제 주군은 당신입니다. 다른 선택지는 없습니다. 제게도, 하제 님께도.”

“죽여버리겠어!”

“절 죽이실 거라면 굳이 당신의 손을 더럽힐 필요 없으십니다. 가주가 되신 후에, 가주의 권한으로 제게 자살을 명하시지요. 기쁘게 따르겠습니다.”

“연오야.”

“네.”

“너, 미쳤구나.”

하제는 넋을 놓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의 손아귀에 힘이 스르르 풀렸다.

상대방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제정신이 아닌 자에게 제정신인 자의 말이 닿을 리가 없었다. 자신에게까지 뚜렷하게 전해져 오는 오싹한 광기에, 도리어 화조차 나지 않았다.

연오는 자신에게 퍼부어진 하제의 폭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 없이 빙긋 웃더니, 한 팔로 하제를 품 안에 꽉 껴안았다. 연오의 품에서는 그와 꼭 어울리는 차분하고 청량한 향이 났다.

충신의 탈을 쓴 반역자가, 정말로 기쁘다는 듯 다정한 음성으로 귓가에서 속삭였다.

“잘 돌아오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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