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복수
똑똑.
노크를 했다. 문 앞에서 잠시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한 팔에 서류 더미를 낀 채, 연오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가주님, 계십니까? 전달해 드릴 안건이…….”
하제의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방금 자고 일어났는지, 엉망으로 구겨 버린 화장지처럼 아무렇게나 뭉쳐 있는 이부자리만이 그를 반길 뿐이었다.
벌써 나가셨나? 아닌데. 그럴 리가 없는데. 그렇게 부지런하고 성실한 분이 결코 아닌데. 연오는 미심쩍어하며 인적 없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박연오? 연오야?”
연오가 빈 이부자리 앞에서 잠시 고민에 잠겨 있으려니, 저만치 안쪽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방에 딸린 욕실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하제의 목소리가 타일 벽에 부딪혀 웅웅 울렸다.
“네, 연오입니다.”
“야, 수건 좀 가져와 봐라.”
“네?”
“샤워하는데 수건 안 갖고 들어갔어. 아, 물 흐른다. 빨리!”
그의 가주가 내리는 명령은 오늘도 참 고상하고 품위가 넘쳤다.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윗사람이 시키는데 따라야지. 연오는 한숨을 쉬며 서랍장을 열어 새 수건을 꺼냈다.
“여기, 수건 가져왔습니다.”
수건을 들고 반투명한 문 앞에 선 연오가 조용히 고했다. 문을 살짝 열고 손만 내밀어서 수건을 가져갈 줄 알았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따뜻하게 데워진 습한 공기가 안쪽에서부터 확 밀려 나왔다.
“고맙다. 방바닥에 물 흘리면 너, 또 잔소리할 거잖아. 문지방 목재 썩는다고.”
유능한 베타를 고작 수건 심부름을 시키는 데 써먹은 게 스스로 생각해도 좀 아니다 싶었는지, 멋쩍게 자기변명을 한 하제가 검은 머리카락에서 물을 줄줄 흘리며 유리문을 열고 걸어 나왔다. 당연히 옷을 입지 않은 상태였다.
무심코 그의 젖은 머리칼과 목덜미, 맨 어깨와 가슴까지 보아 버린 연오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결코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본 기분이었다. 한순간 쿵, 하고 내려앉았던 심장이 급격하게 빨리 뛰기 시작했다.
“연오야. 뭐 하냐? 눈에 물 튀었어?”
하제가 수건을 받아들고 머리카락을 탈탈 털며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연오가 느릿하게 눈을 떴다. 시야에 어렴풋이 검은색이 들어왔다.
어쩐지 굉장히 당당하고 뻔뻔하게 걸어 나온다 싶더니, 하제는 속옷은 챙겨 입고 있었다. 검은색 속옷 아래로 뻗은 허벅지에 반쯤 아물어 있는 상처 자국이 눈에 띄었다.
“…….”
안도인지 실망인지 모를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어째서인지 스스로가 굉장히 저열하고 파렴치한 놈이 된 느낌이 들어서, 연오는 괜히 하제에게서 수건을 빼앗았다. 입고 있던 셔츠의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리고 하제의 머리를 대신 닦아 주기 시작했다.
하제는 그의 손길을 거부하기는커녕, 이때다 싶어 냉큼 세면대가 있는 대리석 상판 위에 올라앉았다. 연오보다 한 뼘 정도 아래에 있던 하제의 눈높이가 훌쩍 올라갔다.
“연오야.”
“네.”
“넌 왜 이렇게 자상해? 누구한테나 이렇게 잘 해 줘?”
가끔 좀 미친 짓을 하긴 하지만. 하제는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종종 스위치가 켜진 듯이 확 맛이 가 버리는 것만 빼면, 연오는 흠잡을 데 없이 유능하고 꼼꼼하며 다정한 남자였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이런 나사 빠진 놈도 제가 모시는 알파랍시고, 다 큰 시커먼 사내새끼 머리를 말려 주겠다고 손수 젖은 수건을 들고 있지 않은가. 언젠가 그와 짝을 짓게 될 이름 모를 늑대 아가씨가 부러워질 정도였다.
“네?”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정성 들여 닦던 연오가 한 박자 늦게 반문했다. 그로서도 하제의 뜬금없는 질문이 상당히 의외였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가주니까 그런 거냐? 넌 아버지한테도 상냥했어?”
“아니, 아니요. 그건 하제 님, 당신이어서…….”
꼭꼭 숨겼던 속마음이 흘러나왔다. 연오는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더듬더듬 고백했다. 그의 서투른 대답을 듣던 하제가 피식 웃었다.
“한때는 내가 자라면 당연히 네 가주가 될 줄 알았어. 몇 년이 더 지난 뒤에는 그걸 거부하고 싶어서 도망쳤고.”
하제가 연오의 손길을 받다 말고 고개를 푹 숙였다.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은 머리카락이 늘어져 그의 표정을 가렸다.
“그런데 이렇게 다시 돌아왔지.”
“가주님께서는 화리연에 돌아온 것을 후회하십니까?”
애써 태연한 어조를 가장하여 물었다. 하제의 말을 듣느라 잠시 느려졌던 연오의 손이 다시 머리카락의 물기를 툭툭 닦아내기 시작했다.
“당신을 강제로 데려온 제가 미우십니까? 다시 인간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으신가요.”
“…….”
상대에게서는 씁쓸한 침묵밖에 돌아오지 않았다. 연오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불안해졌다.
하제를 이곳에 데려온 것만으로도 자신의 할 일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제를 끌고 와 가주 자리에 앉혀 놨으니, 이제 그가 자신에게 자결을 명한다 하더라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지만 욕심은 끊임없이 덩치를 불렸다. 막상 화리연에 돌아온 하제와 얼마간 지내다 보니, 앞으로도 계속 그의 곁에 있고 싶어졌다.
그가 자신을 단순히 수많은 가신들 중 한 명으로만 여긴다 해도 좋았다. 그렇게라도 옆을 지키고 싶었다.
“가주님.”
저도 모르게 재촉하는 듯한 말이 나갔다.
“말하고 싶지 않다.”
하제가 여전히 시선을 떨군 채로 고개를 저었다.
“굳이 너한테 얘기해야 할 이유는 없잖아.”
아, 그런가. 아직도 여기서 달아나고 싶으신 건가. 내가, 이 도시가…… 싫으신 건가.
연오가 소리 없이 웃었다. 창백한 웃음이 그의 단정한 입매를 타고 바스스 번졌다.
“아예 당신이 이 저택 밖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죽이라고, 지령을 고쳐 내릴까요?”
“……뭐?”
하제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방금 자신이 뭘 들었는지 믿기지 않았다. 말투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평온해서 더 현실감이 없었다.
“당신은…….”
세면대 옆에 걸터앉아 있던 하제에게로 연오가 상체를 기울였다. 자신의 몸으로 상대방을 가두듯이.
그가 한 손을 뻗어 하제의 옆을 짚으려 했다. 그러나 스르르 뻗어 오던 연오의 손이 언뜻 하제의 상처 부근을 스쳤다.
“읏!”
둔탁하게 번지는 통증. 짤막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연오가 불에 덴 듯 흠칫 놀라며 황급히 손을 떼고 멀어졌다.
“아, 아닙니다. 가주님, 실언…… 제가 실언을…… 했어요.”
그조차도 자신이 한 말이 믿기지 않는 듯, 놀란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 * *
“가주님. 저번에 제가 드린 책은 읽으셨습니까?”
“어? 아, 그거. 자기 전에 읽으려고 머리맡에 놔뒀는데.”
“놔뒀는데요?”
“펴자마자 누가 머리를 후려친 것처럼 정신이 가물가물해져서 어쩔 수 없었어.”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냥 졸려서 퍼질러 잤다는 말씀이네요?”
“아니, 뭐……. 굳이 그렇게 말해야겠다면 그런 셈이고.”
하제는 길게 뻗은 사랑채의 마루를 따라 걸었다. 그의 뒤를 따르며 벽하가 종알종알 잔소리를 퍼부어 댔다. 하제가 오만상 미간을 찌푸렸지만, 벽하의 잔소리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일 잘하고 빠릿빠릿해 보인다고 기쁜 마음으로 벽하를 받아들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제는 곧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
똑똑하고 두뇌 회전 빠르고 기억력 뛰어나고 다 좋은데, 얘는 너무 깐깐했다. 깐깐하고 꼼꼼하기가 아주 밀가루 거르는 체 수준이었다.
최근 벽하는 가주로서 지녀야 할 기본 지식을 하제에게 주입하겠답시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책이니, 전 가주가 작성한 서류니, 가신들이 올린 보고서니 하는 종이 뭉치를 바리바리 싸 들고 온종일 하제를 따라다녔다. 당연하게도 하제는 그 모든 열의가 몹시 피곤했다.
“본격적인 실무에 들어가려면 화리연의 세력 구도를 파악해야 하니, 이번 주말까지는 꼭 읽으시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상식도 모자라고 학식도 없는 분이 왜 책을 안 읽으세요? 네? ‘책이 사람을 만든다’ 모르십니까? 인간들도 이런 말 쓰지 않아요? 공부 좀 합시다, 제발!”
한 걸음 반 정도 뒤에서 뒤따라오던 연오가 살의 어린 눈으로 벽하를 노려보았다.
“가주님께 말버릇이 그게 뭐지? 예의를 갖춰라.”
“예의? 예의라고요? 연오랑 당신이 할 말입니까? 가주님한테 예의가 제일 없는 게 바로 당신 아닌가?”
“뭐라고?”
“영경에서 가주님한테 다짜고짜 마취제를 주사한 뒤에 둘러메고 왔다면서요? 탈출한 가축을 포획하는 농장주도 아니고, 그게 대체 무슨 끔찍한 짓인지!”
하제를 내버려 둔 채 등 뒤에서 두 남자가 다투기 시작했다. 벽하가 하제에게 쪼르르 다가와 그의 소맷자락을 붙들었다.
“가주님, 저자를 가까이하지 마세요. 쟤가 여기서 제일 속이 시커먼 놈입니다. 가주님 앞이라고 내숭 떠는 꼴 좀 보시지요. 아주 가증스럽기가 짝이 없습니다!”
“말이 쓸데없이 많군. 네가 가주님 곁에 머무를 수 있는 것도 가주님께서 자비를 베푼 덕인 줄 알아라. 내 마음 같아선 당장 네놈을 묶어다가 광에 처넣어 버리고 싶으니까!”
“당신 제정신입니까? 베타라고 공손하게 대해 줬더니 이 작자가 정말!”
둘 사이의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이러다간 아주 주먹이 오갈 기세였다. 결국 하제가 짜증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만, 충분히 알겠다. 벽하야, 네 말에도 어느 정도 공감은 한다만. 연오가 좀 제정신이 아니긴 하니까.”
“…….”
“그런데 짜증 나는 걸로는 너희 둘 다 똑같거든? 그러니까 작작 좀 해라. 빡 치기 전에.”
“예?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그거 아십니까? 가주님 안 계실 때 연오랑이 얼마나 포악하게 구는지…….”
더는 벽하가 입을 놀리게 둘 수 없었다. 연오가 성큼성큼 다가와 벽하와 하제 사이를 뚝 갈라놓았다. 그는 하제를 뒤쪽에서 반쯤 끌어안다시피 하며 소맷자락으로 하제의 시야를 가렸다.
“가주님. 저 간사한 놈이 하는 말은 듣지 마십시오. 오로지 제 말만 듣고, 저만 믿으시면 됩니다. 제가, 이 연오가 당신의 오른팔이지 않습니까.”
“하!”
기가 차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벽하가 코웃음을 쳤다.
다른 이들 앞에서는 폭군이나 다를 바 없으면서, 하제 앞에서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충견인 척 애교를 떤다. 가증스럽고 괘씸해서 열이 뻗쳤다.
하제의 입장에서는 연오고 벽하고 뭐고, 그냥 두 놈 다 성가셨다. 제발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져 줬으면 싶었다. 요즘 그는 어찌나 시달렸던지, 아주 벽하와 연오를 주인공으로 한 악몽까지 꿀 기세였다.
그때 마침 저 건너편 마당에서 누리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하제는 두 남자가 티격태격 다투는 틈을 타 잽싸게 누리를 불렀다.
“누리야!”
“안녕하세요, 가주님.”
덩치 큰 청년은 멀리서 우렁차게 외치는 하제의 목소리에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하제가 자신보다 나이도 어리고 몸집도 작은데도, 그는 매번 꼬박꼬박 예의를 갖추었다.
“이리 와 봐라!”
“네?”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누리는 착실히 그의 명에 따랐다.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졌다 싶자, 하제는 폭이 얼마 되지 않는 마루에서 용케 도움닫기를 하더니……. 누리에게로 냅다 뛰어내렸다. 누리는 물론이고, 말싸움을 벌이던 벽하와 연오까지도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퍼억!
“으아, 가주님?”
품 안에 묵직한 체중이 실렸다. 누리가 반사적으로 하제를 덥석 받아 안았다. 200cm 가까이 되는 남자가 180cm 가까이 되는 남자를 안아 든 모습은 누가 봐도 그다지 아름답지는 않았다.
그의 목에 매달린 하제가 호기롭게 외쳤다.
“가자.”
“어디를요?”
“저 새끼들 없는 곳으로!”
“네? 네에?”
“달려라, 누리!”
누리는 얼떨떨해하면서도 일단 하제가 시키는 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연오와 벽하의 모습이 점점 시야에서 멀어졌다. 둘 다 우뚝 굳어서는, 얼빠진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야말로 닭 쫓던 개 꼴이었다.
* * *
누리는 하제를 양팔로 안아 든 채 열심히 달렸다. 그는 결국 하제를 자신의 방에 데려갔다. 누리의 생각에 연오랑도 벽하랑도 찾아오지 않을 만한 곳은 여기밖에 없었다.
하제를 방바닥에 앉힌 누리가 고이고이 간직해 오던 아끼는 과자를 내어 주었다. 나름의 손님 대접이었다. 하제는 그 사이에서 과일 맛 사탕을 하나 골라 포장지를 까서 입에 넣었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아니, 쟤들이 자꾸 나 공부 안 한다고 잔소리하잖아. 벽하는 대놓고 갈구고, 연오는 대놓고는 안 하는데 눈빛으로 욕하고.”
“…….”
누리가 잠시 짠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게 진작 공부 좀 하지 그러셨어요, 라는 속마음이 고스란히 보이는 표정이었다. 하제는 그의 한심함 섞인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포도 맛 사탕을 입에 넣고 우물우물 굴렸다.
“뭐, 그래도…… 공부는 좀 덜 해도 되지 않을까요? 가주님은 강하니까요.”
“그래?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가주님은 여기서 가장 강한 분이시니 가주가 되신 거잖아요.”
“그렇지.”
“그러니까 학문이나 지식이 좀 모자라시더라도 다른 분들이 잘 채워 주면 된다고 생각해요.”
“백번 옳은 말이다. 짜식, 너 뭘 좀 아는구나.”
하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누리의 논리는 완벽했다. 흠잡을 곳이 없었다. 역시 이 늑대 소굴에서 진정한 그의 편은 누리밖에 없었다.
“저…….”
누리는 말을 꺼내 놓고 잠시 우물쭈물했다. 하제는 왜 그러냐는 듯 그를 응시하며 천연덕스럽게 두 번째 사탕을 깠다. 이번에는 복숭아 맛이었다.
“전 어떻게 하면 가주님처럼 강해질 수 있을까요?”
“어?”
“가주님은 알고 계시잖아요. 강해질 수 있는 비결이요…….”
그를 바라보는 누리의 눈빛에는 순수한 선망만이 담겨 있었다. 그때 본당에서 보여준 서열 정리가 몹시도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하제는 그냥 스트레스 해소 겸 개새끼들을 두들겨 팼을 뿐인데, 어느새인가 그는 누리의 안에서 우상이자 영웅이 되어 있었다. 괜히 멋쩍어진 그가 저만치 시선을 돌렸다.
“비결은 무슨 비결이야. 그냥 닥치는 대로 살다가 정신 차려 보니까 이렇게 된 거지, 뭐.”
“가르쳐 주세요. 저도 가주님처럼 되고 싶어요.”
“가르쳐 줄 것도 없어. 검술이야 뭐, 너 지금도 잘 하잖아. 하던 대로 해.”
“이 정도로는 안 돼요. 더 강해져야 해요. 그러니까, 가주님. 네?”
누리가 맑은 갈색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하제를 빤히 바라보았다. 덩치 큰 연상의 남자가 물끄러미 쳐다보는데,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괜히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해졌다.
아, 얘는 왜 이렇게 쓸데없이 귀엽지. 해달라는 거 다 들어주고 싶잖아. 하제는 자꾸만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가르쳐 줄 거 없다니까?”
“부탁드릴게요.”
“안 되는 건 안 돼.”
“제가 아까 연오랑이랑 벽하랑한테서 구해 드렸잖아요.”
“야, 누리야. 네가 언제부터 그런 계산적인 남자였냐? 진정한 늑대는 사소한 일에 연연하지 않는다.”
“저 포기 안 해요!”
하제가 그를 뚫어져라 마주 보았다. 안 된다고 말하는 듯한 단호한 눈이었다. 누리도 지지 않고 시선을 마주했다.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누리도 누리 나름대로 간절했다.
두 남자는 한동안 눈싸움을 하며 눈도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서로를 응시했다. 점차 눈이 뻑뻑해졌다.
하제가 이래도 포기 안 할 거냐는 듯, 슬쩍 미간을 찌푸리며 조금 더 고개를 가까이했다. 이대로 기세에 밀리면 하제가 그의 청을 들어주지 않을 것 같아서, 누리도 한껏 눈에 힘을 주고 버텼다.
“…….”
“…….”
그러다 문득 하제의 장난기가 동했다. 심각하게 인상을 쓴 하제와 결의를 굳힌 누리의 얼굴이 점차 가까워졌다.
둘 사이의 간격이 한 뼘도 남지 않았을 무렵, 하제가 갑자기 고개를 불쑥 들이밀고 씩 웃으며 누리의 코끝에 뽀뽀를 했다.
쪽.
“으아아악!”
“컥!”
대경실색한 누리가 반사적으로 팔을 휘둘러 하제를 밀쳐냈다. 졸지에 그의 탄탄한 팔에 명치를 얻어맞은 하제가 바닥에 나자빠졌다.
쿠당탕!
“헉, 가주님! 괜찮으세요?”
“으윽. 큭, 누리야. 존나게 아프다……. 네 가주 죽는다…….”
“안 돼요, 가주님. 죽지 마세요! 으아아, 죄송해요! 제가…… 제가 대체 무슨 짓을.”
힘없이 쓰러져 나뒹구는 하제를 뒤늦게 발견한 누리가 쩔쩔매며 그를 안아 올렸다. 누리의 품 안에 축 늘어져서 끙끙 앓는 와중에도 하제는 싱거운 소리를 해 댔다.
“저는 어렸을 때 매번 누나들한테 졌거든요. 운동도 못 하고, 공부도 못 하고, 둔해서 뭘 하든 못 따라가고……. 그래서 가주 자리에서도 일찌감치 밀렸고요.”
방 벽에 기대어 다리를 뻗고 앉은 누리가 어렵게 말을 이었다. 하제는 누리의 이불을 제 것처럼 두른 채 그의 옆에 웅크려 앉아 하소연을 들어 주고 있었다.
결국 둘 사이의 실랑이는 하제의 패배로 끝났다. 누리의 주먹맛을 보고 나니 도저히 안 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맨날 무시당해서, 여기서만은 정말 제대로 잘 해 보고 싶었는데. 그게 너무 힘들어요.”
“왜……. 쿨럭, 무슨 일인데?”
무심코 말을 꺼냈다가 아까 얻어맞은 명치가 아파 와서, 하제는 잔기침을 한 번 했다. 기가 죽어 축 늘어진 채 그의 눈치를 보던 누리가 말을 이었다.
“요즘 제 순찰 구역에서 자꾸 문제가 생겨요.”
“문제?”
“독수리랑 까마귀랑 매들이요. 그 사람들이 자꾸 질서를 무시해요. 길거리에서 아무한테나 시비를 걸기도 하고, 괜히 종업원이나 노점상한테 나쁜 말을 해요.”
“…….”
“요즘 새들이 엄청 세력이 강해졌거든요. 그래서 아무도 뭐라고 못 해요. 대놓고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아니니까 체포도 못 하고. 아메샤 스펜타가 뒤를 봐 준다는 소문도 있고요.”
까마귀들의 수장은 독특하게도 ‘총수’라는 직함으로 불렸다. 기업 냄새가 물씬 나는 그 직함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들은 돈에 관련한 쪽으로는 기가 막히게 발이 빨랐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여러 방면에서 돈을 쓸어 모으다 보니, 현재에 이르러 화리연에서 그들의 영향은 무시할 수 없을 수준이 되었다.
“순찰 나갈 때마다 그 사람들이 저 보고 덜 떨어져서 집안에서 버림받은 놈이라고, 바보라고 비웃는데……. 제가 못 지켜 준 피해자들한테도 미안하고, 너무 서럽고…….”
말을 잇다 말고 누리는 무릎에 고개를 파묻으며 푹 엎드렸다. 이윽고 그의 떡 벌어진 어깨가 미미하게 들썩이기 시작했다. 하제의 표정이 굳었다.
“너…… 울어?”
“저는 막 강해져서 착한 사람들도 지켜 주고, 가문에 도움이 되고 싶은데……. 제가 너무 무능해서, 그 사람들 말처럼 모자란 반푼이 늑대라서 그런 걸까요…….”
소리도 제대로 못 내고 몸을 웅크린 채 훌쩍훌쩍 우는 누리를 보니 마음이 아팠다. 동시에 누리의 동료로서, 무리를 책임져야 할 우두머리로서, 영역을 침범당한 늑대로서 화가 났다.
하제는 빠드득 이를 갈았다. 시발, 어떤 놈이야. 어떤 빌어먹을 날짐승이 내 새끼를 울려. 내 새끼라기엔 나보다 나이가 좀 많지만……. 아무튼.
“누리야, 연장 챙겨라.”
하제가 흉흉한 낯으로 씩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민을 털어놓긴 했지만 이런 반응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 미미한 불안감을 느낀 누리가 그를 따라 일어섰다.
“네?”
“피바다 한번 만들러 가자. 그 미친놈들이 누굴 건드려? 뒤지고 싶나.”
“아니, 잠깐만요, 잠깐, 가주님!”
그는 살기등등한 기세로 방을 박차고 뛰어나가려는 하제를 뒤에서 부둥켜안아 간신히 말렸다.
하제는 연오더러 한 번 맛이 가면 눈에 뵈는 게 없는 놈이라며 불평했지만, 누리가 보기에는 그놈이 그놈이었다.
* * *
하제와 누리는 대로변이 한눈에 들어오는 2층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난간 너머로 길을 지나는 인파의 모습이 고스란히 보였다.
그들의 앞에 오목한 그릇이 하나 놓여 있었다. 보드랍게 갈린 얼음, 달콤한 연유, 그 위에 올라간 색색의 과일들. 두 남자는 과일 빙수 한 그릇을 사이에 두고 사이좋게 나눠 먹던 중이었다.
“그 새끼들이 여기 자주 출몰한다고?”
잠복 수사 나온 형사처럼 비장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던 하제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거리에서 말썽을 일으킨다는 새들의 깃털 꽁무니라도 보이면 당장이라도 달려가 작살을 내 놓을 기세였다.
“네. 몇 번 보긴 했는데, 오늘도 나타날지는…….”
누리가 자신감 없는 어조로 말끝을 흐렸다. 사실은 오늘만큼은 그들이 안 나타났으면 싶었다. 죽을까 봐 걱정되었다. 하제가 아니라 그들이.
나름대로 눈속임을 한답시고 그들은 일상복을 입고 나왔다. 옷자락이 길고 허리끈에 술이 달린 서문가의 정복(正服) 대신 누리는 크림색 니트를, 하제는 남색 스웨트 셔츠를 입었다.
두 남자는 핑크색 스푼으로 얼음 위의 새콤달콤한 과일 조각을 듬뿍 올려 퍼먹으면서도 쉴 새 없이 난간 너머로 경계심 가득한 눈길을 던졌다.
마지막 딸기 한 조각을 가지고 누리 네가 먹어라, 가주님이 드세요, 하며 서로 주거니 받거니 양보하느라 잠시 한눈판 사이, 아래쪽에서 큰소리가 났다.
“뭐야, 씨발년아. 그래서 사과를 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순간 주변이 확 조용해졌다가, 이윽고 군중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하제가 스푼을 든 채로 난간 너머를 내다보았다. 남자 한 명과 남녀 한 쌍이 거리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시뻘겋게 얼굴을 붉히고 화를 내고 있는 남자는 새까만 머리카락에 양복 차림이었다. 까마귀……. 드디어 목표물을 발견했다. 그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는 하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반대로 맞은편에 선 두 남녀는 둘 다 머리카락이 밝은 갈색에 보들보들했다.
남자는 하제나 누리와 같은 갯과 수인이었지만, 늑대인 그들에 비해 훨씬 덩치가 작았다. 몹시도 앙증맞고 어려 보이는 인상에, 눈이 머루처럼 둥글고 까맸다. 포메라니안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여자는…… 잘 구운 빵 같은 빛깔의 폭신폭신한 머리카락 위로 똑같은 색깔의 둥근 귀가 불쑥 솟아 있었다.
“죄송해요. 제가 세탁비를 드릴 테니까.”
“아니, 이 옷이 얼마짜린 줄 알고 세탁비를 드린다 만다 지랄이냐고! 어?”
커피 잔을 든 여자가 당황하여 발을 동동 굴렀다. 넘쳐흐른 커피가 그녀의 손을 흠뻑 적시고 바닥에도 스며들어 있었다. 맞은편에 있는 남자의 가슴팍도 짙은 갈색으로 젖었다.
뻔한 상황이었다. 맞은편에서 오던 여자가 그와 부딪쳤고, 옷에 커피를 쏟아 버린 것일 터였다.
“제 동생이 한순간 앞을 못 살폈나 봅니다. 저도 사과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개 수인 또한 어쩔 줄 몰라 하며 꾸벅꾸벅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그러나 까마귀 수인의 분노는 쉬이 풀리지 않았다.
“시발, 덜떨어진 잡종 같은 걸 밖에 데리고 나오니까 이 사달이 나는 거 아냐!”
폭언이 떨어졌다. 여자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주변에서 흘긋흘긋 구경하던 행인들마저도 한순간 숨을 멈추었다.
수인들은 인간의 모습과 동물의 모습, 두 가지를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었다. 그래서 혹자는 수인을 각각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과 동물을 합친 가장 완전한 종족이라 일컬었다.
수인과 인간의 혼혈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었다. 스스로의 모습을 조절하지 못해서, 귀나 꼬리 같은 신체 일부가 짐승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몸의 특정 부위에만 털이나 비늘이 돋기도 했다.
그래서 혼혈들은 인간들 사이에서나 수인들 사이에서나 곧장 티가 났다.
“어디서 되다 만 암캐가 뻔뻔하게 길에 돌아다니고 있어. 열등한 혼혈 주제에!”
“제 동생을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그녀의 오빠가 이를 악물고 나섰다. 까마귀가 피식 웃었다.
“짐승 귀를 훤히 드러내놓고, 부끄럽지도 않나? 이거 아주 수치를 모르는 년이군. 야, 너 꼬리도 달려 있냐?”
“네? 그게 무슨.”
그는 여자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저열하게 웃었다. 상대를 샅샅이 핥는 것 같은 꺼림칙한 시선이 그녀가 입은 원피스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긴 치마 입은 거 보니까 딱 그거네, 꼬리 숨기려고.”
검은 머리의 남자가 성큼 간격을 좁혔다. 다짜고짜 원피스 자락을 들추어 보려는 손길에 여자가 다급하게 물러서며 비명을 질렀다.
“꺄악!”
“뭐야, 이 미친년이 오버하기는. 내가 뭐 다른 짓 한대? 시발, 그냥 꼬리 있나 없나만 보자는 거잖아.”
근처 가게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경비원이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경비원 제복에 방탄조끼까지 갖추어 입은 건장한 체격의 셰퍼드였다.
“선생님, 그만 진정하십시오. 계속하시면 신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넌 또 뭐야? 아, 같은 종이라고 저 놈년들 감싸 주는 거냐? 돈만 주면 좋다고 꼬리 흔드는 개새끼들이.”
그 광경을 숨을 죽이고 지켜보던 하제는 스푼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난간에 다가갔다.
에이, 여긴 2층이고 저긴 1층인데. 그래 봤자 뭐, 난간 너머로 소리 지르고 욕하는 것 말고는 못 하시겠지……. 누리는 조마조마한 마음을 억누르며 그렇게 생각했다.
결론적으로 그는 하제의 성질머리를 얕보았다.
주르륵.
하제는 빙수 그릇을 들어, 그 안에 남아 있던 내용물을 까마귀의 머리 위에 쏟아부었다. 정수리부터 흘러내린 녹은 빙수 때문에 머리카락이며 얼굴, 옷이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었다.
“…….”
상황 파악을 못 해 멍청한 표정을 한 남자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제가 난간에 기댄 채 텅 빈 그릇을 거꾸로 들고 흔들며 웃었다.
“나도 나름 개새끼라. 같은 종 좀 감싸 보려고.”
누리는 깊이 좌절하여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 가주님. 제발 좀.
“이건 또 뭐 하는 미친놈이야…….”
달콤한 냄새가 나는 액체를 뒤집어쓴 채 남자가 망연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물론 어이가 없을 것이다. 웬 난데없는 놈이 나타나서 위에서부터 빙수를 뒤집어씌웠으니까.
“그러는 너희는 대체 뭐 하는 놈들이냐?”
하제가 다짜고짜 물었다. 상대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난간을 붙잡고 곧장 아래층으로 뛰어내렸다.
누리는 또다시 경악했다. 가주님, 대체 왜 그러시는 거예요. 고양잇과 수인들이야 몇 층짜리 건물에서도 잘만 뛰어내리지만 우린 그러면 죽어요! 다리랑 척추 부러진다고요……. 안절부절못하던 그는 결국 계단을 통해 하제를 따라 내려갔다.
누리의 우려와 달리 하제는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착지하긴 했지만 멀쩡해 보였다. 곧 중심을 잡은 그가 손을 탁탁 털며 까마귀에게 다가갔다.
“며칠 전에 골목에서 인간 폭행한 것도 너희들이지? 긴가민가했는데 그 시꺼먼 옷 꼬라지 보니까 딱 알겠네.”
“갑자기 무슨 개소리야, 씨발. 가만히 있는 사람 붙잡고 증거도 없는 소리를 지껄여! 이 새끼가 광견병 걸렸나.”
하제가 툭 던진 말에 까마귀 수인이 얼굴을 붉히며 길길이 성을 냈다. 한때는 제법 세련되었을 검은 정장이 커피에 빙수까지 끼얹어지고 나자 처참해졌다.
“대체 왜 그러는 건데.”
“…….”
“인간이랑 혼혈에 억하심정 있냐? 그 사람들이 네 돈 떼먹었어?”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던 남자가 폭발했다. 그는 한쪽에 물러서서 얼굴이 새파래진 채 이쪽을 쳐다보는 여자에게 삿대질을 했다.
“저딴 걸 감싸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열등한 것들이 우리들 사이에 끼어서 누릴 거 동등하게 다 누리겠다는데, 역겹잖아!”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누리가 쩔쩔매며 하제의 뒤에 가 섰다. 말로 지원사격을 하지는 못할망정, 몸으로라도 그를 지키겠다는 심산이었다.
하제를 형형하게 노려보던 까마귀의 시선이 뒤쪽의 누리에게로 옮겨 갔다. 알겠다는 듯 남자의 새카만 눈이 가늘어졌다.
“이건 또 누구야. 호해가의 머저리 늑대 아닌가. 너무 멍청해서 가문에서도 포기한 병신새끼. 네가 왜 이 미친놈이랑 같이 있지?”
누리의 낯이 모멸감으로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문 채, 피하지도 물러서지도 않고 자리를 꿋꿋이 지켰다. 두 늑대를 번갈아 가며 지그시 응시하던 남자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제 누군지 알겠군. 서문찬의 아들. 이름이, 서문하제였던가.”
“내가 그렇게 유명인이었나? 좀 쑥스러운데. 사인이라도 해 줘?”
하제가 피식 웃으며 상대방에게 까딱 턱짓을 했다.
“기껏 알아봐 줬는데 미안하게 됐다. 나는 네 이름을 모르거든. 이름 말해줘 봐, 원하는 문구도 있으면 말하고. 사인 밑에 써 줄 테니까.”
“미친 새끼. 너 같은 놈 밑에 있는 늑대들이 불쌍하다!”
남자가 살기등등하게 눈을 부라리며 축축하게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당장이라도 상대에게 달려들 것처럼 공격적인 태도였다.
누리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는 두 명의 남녀에게 소리 없이 손짓을 했다. 정말 가도 되는 건지 갈등하며 하제와 까마귀 수인을 번갈아 보던 그들은 이내 뒤돌아 길 반대편으로 쪼르르 사라졌다.
“웬 시꺼먼 치킨 새끼들이 내 영역에서 좆같이 설쳐대니까 내가 이 지랄을 하는 거 아냐. 그거 알아?”
하제의 입가에서 미소가 싹 사라졌다. 그는 표정을 싸늘하게 굳힌 채, 확 낮아져서 우울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들이 칼로 찌르고 길에 버리고 간 그 사람, 죽었어. 그날 밤에 바로.”
남자가 발작적으로 일그러진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그래서, 라고?”
하제가 멍하니 반문했다. 너무도 상식 밖의 소리를 들어서 순간 머리가 멈췄다. 화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지? 일단 첫째로 그 죽었다는 인간이 누군지 난 전혀 모르는 일이고, 둘째로 그깟 인간 한 명 죽은 것 가지고 왜 유난인지 모르겠는데.”
“…….”
“제 아비 죽은 줄도 모르고 인간들 틈에서 놀다가 이제 돌아온 주제에 잘난 척하긴. 동족의 배신자라는 소문이 정말이었군. 서문가의 가주가 추잡한 인간들 편을 들다니, 이제 그 집안이 망하는 것도 순식간이겠어.”
그 자리에 아연히 서 있던 하제가 뒤늦게 상대의 말을 이해했다.
“뭐라고?”
머릿속을 순수한 살의가 채웠다. 넋 나간 것 같던 그의 얼굴에 서서히 분노가 번졌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나고, 맹수의 울음이 나지막하게 새어 나왔다.
“가주님, 안 돼요, 참으세요!”
이대로 놔뒀다간 정말 길바닥에 피바다가 만들어질 지경이었다. 누리가 다급하게 달려들어 하제의 팔을 뒤에서부터 붙잡았다.
“오늘 일은 철저히 갚아 주지. 우리 까마귀들은 은혜와 원한은 결코 잊지 않으니까.”
그는 오물로 엉망이 되어 버린 검은 정장 상의를 벗더니 짜증스럽게 탁 털었다. 그 모습이 까마귀가 파드득 날개깃을 떨치는 모습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서문하제. 그렇게 쓸데없는 짓을 하고 다니다간…… 후회할 거다, 조만간.”
까마귀 수인은 끝까지 히죽대며 그들을 비웃은 후에야 자리를 떴다.
그가 악담을 퍼붓고 사라지는 내내 하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눈을 내리깐 옆얼굴이 터지기 직전의 시한폭탄 같았다. 누리가 불안한 눈으로 검은 남자의 뒷모습을 흘끔 돌아보았다.
* * *
방 안의 조명을 끄고 이부자리 옆에 있는 작은 탁상용 등만 켜 두었다.
하제는 무릎까지 이불을 덮은 채, 그 따스하고 은은한 불빛에 의지해 책을 읽었다. 어두운 데서 글씨를 본다고 눈이 나빠지는 일 같은 건 수인들에게 존재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늘 누리와 외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미 쌓여 있는 책 더미 위에 더 읽어야 할 책 몇 권을 태연자약하게 추가하며, 연오가 그의 곁에 다가와 앉았다. 저거 다 읽고 나면 나 은퇴해 있겠네. 책 읽다 뒤지겠다. 하제는 침통한 심정으로 무릎 높이까지 쌓인 책을 힐끔 보았다.
“그래.”
“돌아오신 이후로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으십니다.”
“누리가 힘들어해서 그렇지, 뭐.”
하제는 애써 책에 시선을 고정하고 잘 읽히지 않는 문장들을 읽어 내려갔다.
오늘 까마귀에게서 들었던 말을 연오에게 고스란히 전하고 싶지 않았다. 너 같은 놈 밑에 있는 늑대들이 불쌍하다느니, 아비가 죽은 줄도 모르고 인간들 틈에서 놀던 동족의 배신자라느니 하는 말들.
첫째로는 연오의 윗사람으로서 그런 모욕적인 말을 하나하나 전하기엔 좀 자존심이 상해서였고, 둘째로는…… 그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외출에서 돌아온 뒤로 하제는 기분이 상당히 저조한 상태였다.
“누리가 힘들어한다고요.”
“응. 일 때문에 부담이 많은가 보던데. 걔는 뭐든지 너무 열심히 하려고 하니까.”
“…….”
“그래서 가주로서 위로해 주려고, 맛있는 거 먹이고 둘이서 좀 놀다 왔다. 별일 없었어.”
“가주님.”
하제의 옆에 단정히 앉아 있던 연오가 문득 무릎걸음으로 그의 이부자리 위에 올라섰다. 폭신하게 깔려 있던 비단 금침 한구석이 푹 꺼지는 느낌에 하제가 그를 돌아보았다.
“저도 힘듭니다.”
“뭐?”
“저도 힘들고 부담스럽습니다. 왜 전 위로 안 해 주십니까.”
차고 투명한 눈동자가 주황색 조명 아래에서 수정처럼 빛났다. 하제에게 바짝 다가선 연오가 무릎을 꿇고 앉아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하제는 그 순간 읽던 책의 내용을 죄다 까먹었다. 잠깐의 정적 후에 그가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이 자식이 뭐라는 거야?
“호해유리에게는 입맞춤도 포옹도 거리낌 없이 해 주시면서, 왜 저한테는…….”
“연오야. 베타 일이 그렇게 힘드냐? 다른 놈한테 넘길까?”
연오는 입을 꾹 다물고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이 아니잖습니까.”
와, 이 새끼 하극상 하는 거 봐라. 가주한테 성질내는 게, 여차하면 아주 내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을 기세인데. 하제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가주님. 저도 힘들어요.”
연오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무뚝뚝하고 담백하기 그지없는 남자의 저음. 표정도 목석처럼 무미건조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하제는 그가 자신에게 애교를 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드러운 이불 위를 연오의 팔이 짚었다. 스스로의 몸을 지탱하느라, 마디가 시원시원하고 큼직한 손등에 언뜻 핏줄이 섰다.
하제의 반응을 낱낱이 살피듯 빤히 눈을 맞추며 고개를 가까이하다가, 연오는 그의 입가에 자신의 입술을 가만히 눌렀다. 아양을 떨듯 코끝을 뺨에 비비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다 큰 청년 둘이서 하기는 매우 묘한 행동이었으나, 그들은 인간이 아닌 수인이었다. 오로지 갯과 수인들끼리기에 할 수 있는 친근함의 표현이었다.
이놈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치대지? 젖도 못 뗀 새끼처럼 달려드네. 진짜 힘든 일 있었나? 하제는 별생각 없이 그를 받아 주었다.
연오의 체중이 실리며 몸이 점차 뒤로 넘어갔다. 무릎 위에 펼쳐져 있던 책이 툭 미끄러져 떨어지고, 중심을 잡기 위해 하제의 한 팔이 자연스럽게 연오의 등을 끌어안았다.
어두운 방 안을 어른어른 비추는 부드러운 조명, 이부자리 위에 앉은 채 깃털처럼 가벼운 접촉을 주고받는 두 남자. 누가 봐도 야릇한 분위기가 감도는 장면이었으나 당사자 둘만 몰랐다.
이불을 짚고 있던 연오의 손이 조심스럽게 뻗어 왔다. 길고 단정한 손가락이 하제의 뺨을 잘못 만지면 깨져 버리는 유리 공예품을 만지듯 매만졌다.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아직 솜털이 좀 남아 있는 귓바퀴를 부드럽게 덧그리는 그의 손이, 왠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갑자기 왜 손을 떠는 거지. 영문을 모르는 하제가 노란 눈을 멍하니 깜빡였다.
“하제 님, 입을…….”
윗입술 바로 위에서 연오가 조금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제는 그가 요구하는 대로 순순히 입술을 살짝 벌렸다.
연오가 입술을 깨물고 문지르게 해 달라고 보채는 일은 저번에도 있었다. 늑대들끼리 상대방의 안부를 묻고 서열을 확인하는 습관적인 행동 같은 것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모양새가 별로 좋지 않으니 사람 모습으로 하는 일은 잘 없고 대부분은 짐승인 채로 하지만, 굳이 이대로 하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그런 것이려니 했다.
하지만 곧 벌어진 입술을 상대방의 입술이 틀어막고, 그 사이로 혀가 밀려들었다. 이건 뭔가 아니다 싶었는지 하제가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흐, 읏…….”
부지불식간에 터져 나온 숨결마저 연오에게 잡아먹혔다. 단단한 손이 사려 깊지만 단호하게 턱과 뺨을 감쌌다. 연오는 하제를 아예 담요 위에 쓰러뜨려 버릴 기세로 밀어붙였다.
입안이 뜨거웠다. 도자기로 만든 것처럼 서늘한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연오의 입술은 홧홧한 열기를 품고 있었다.
처음에 고개를 뒤로 물리며 몸을 사리던 하제는 목 안으로 불만스러운 신음을 흘리더니 역으로 달려들었다. 이대로 연오에게 기세에서 밀릴 수 없다는 본능적인 승부욕이었다.
“…….”
하제와 연오의 눈이 마주쳤다. 노랗고 푸른 두 쌍의 눈동자. 아주 짧은 순간 허공에서 무언의 대화가 오갔다.
이윽고 무언가 납득했는지 연오가 얌전히 눈을 감았다. 순종적인 태도였다. 짙은 색의 속눈썹이 가만히 드리워졌다.
그러나 하제는 끝끝내 눈을 감지 않았다. 동공이 확 좁아진 노란 눈동자가 입을 맞추는 내내 연오를 잡아먹을 듯이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입맞춤은 생각보다 길게 이어졌다. 보통의 입맞춤보다는 다소 적나라하고 과격한 면이 있었지만, 어찌 됐든 간에 둘은 한참 동안 키스에 열중했다.
야릇한 긴장의 끈이 끊어질 듯 위태롭게 이어지던 어느 순간, 입술을 떼고 조금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연오가 사르르 눈을 떴다. 그는 열 오른 푸른 눈으로 희미하게 웃었다.
“……위로 감사합니다.”
난초 향이 날 것 같은 단정하고 잘생긴 얼굴에, 입술만이 붉게 달아올라 젖어 있었다. 그 부조화가 묘하게 음란했다.
* * *
“누리야. 정말로 강해지고 싶어?”
그다음 날, 하제가 진지하게 물었다. 보기 드물게 심각하고 비장한 표정이었다. 누리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냉큼 수긍했다.
“네.”
“내가 빡세게 굴려도 참을 수 있겠냐?”
“네! 이제 가주님한테도, 다른 사람들한테도 짐이 되고 싶지 않아요. 어제 일도…… 애초에 제가 모자라서 가주님이 험한 일을 겪으신 거니까.”
그 와중에도 지나치게 착해 빠진 누리는 자신을 탓하고 있었다.
하제는 양심이 좀 찔리는 것을 느꼈다. 사실 굳이 따지자면, 어제 일은 누리가 모자라서 그렇다기보다는 하제의 성격이 필요 이상으로 더러웠기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정말로요.”
“나중에라도 이의 제기 안 하고? 후회도 안 하고?”
“가주님이 손수 시켜 주시는 거니까요! 뭐든지 군말 없이 할게요.”
한 치 의심도 없는 순수한 신뢰가 돌아왔다. 하제의 죄책감이 좀 더 커졌다. 하지만 그는 곧 고민을 그만두고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아.”
하제가 조용히 마당 건너편을 가리켰다.
“누리야, 가서 창고에서 목검 가져와라. 지옥훈련을 시작하자.”
“…….”
“아, 들것이랑 구급상자도 가져오고. 혹시 모르니까.”
등골이 오싹해졌다. 과연 자신의 결정이 잘 한 짓이었는지, 누리는 조금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누리만을 위한 하제의 일대일 단기 속성 족집게 강의가 시작되었다. 사실 강의라고 하기는 많이 어폐가 있었는데, 그 어떤 중요한 시험을 코앞에 둔 학생도 이렇게 혹독한 경험을 하지는 않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빠각! 퍽! 콰앙!
“으으…….”
온몸이 하제의 목검에 작신작신 다져진 누리가 앓는 소리를 냈다. 긴소매 옷에 가려져서 보이지는 않지만, 전신에 골고루 멍이 들어 있을 게 분명했다.
하제는 누리를 참 알차게도 굴렸다.
몸풀기 삼아 기초 훈련을 조금 하고 나면, 남은 시간은 죄다 실전 대련이었다. 그러니까 대련을 빙자한 두들겨 패기였다.
하제는 늑대 수인치고는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큰 편도 아니었다. 180cm 남짓이면 그들 중에서는 평균이었다.
누리보다 한 뼘이 넘게 작은데, 체격이 우락부락한 것도 아닌데, 검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썼다. 하제가 후려갈기는 부분마다 억 소리가 나게 아팠다. 그는 후유증을 남기지 않으면서 상대에게 효율적으로 고통을 주는 방법을 알았다.
“일어나라. 아직 시작도 안 했다.”
하제가 목검으로 자신의 어깨를 안마하듯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누리는 울상이 되어 비척비척 일어났다.
“가주님은 어떻게 하나도 안 지치셨어요?”
“갑자기 불려 나가서 밤새 뒤지게 기합받고 새벽부터 바로 막노동해 봐. 몇 년 정도만 그렇게 구르면 너도 나처럼 돼.”
“기합이요? 대체 가주님이 왜 그런 짓을…….”
누리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수인들의 세계에는 신분제가 없었지만, 그래도 하제는 나름대로 명문가의 도련님이었다. 누가 감히 서문가의 금지옥엽 외동아들을 괴롭힌단 말인가.
“내가 수인이니까. 아니꼬워서 그랬겠지.”
누리는 다짜고짜 홀몸으로 집을 뛰쳐나간 어린 하제가 인간 세상에서 어떻게 지냈을지 생각해 보았다.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인간들보다 신체 능력이 뛰어나고 생존력도 강하니, 어떻게든 연명할 수야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힘들고 괴로운 일을 수도 없이 많이 겪었겠지.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하제는 바닥에 떨어진 누리의 목검을 주워 건네주며, 짧은 휴식의 중단을 선언했다.
“자, 다시 수업 시작하자. 갈 길이 멀다.”
“으윽, 네.”
당장이라도 바닥에 주저앉고 싶을 만큼 힘들었지만, 스스로 하겠다고 자처한 일이니 그만두자 할 수도 없었다. 누리는 끙끙대며 목검을 지팡이 삼아 짚고 일어섰다.
하제의 수업은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누리에게 소위 말하는 정신 단련을 시켰다.
“상대가 시비를 걸면 어떻게 받아쳐야 한다고?”
“아, 안 돼요! 싫어요! 하지 마세요!”
솥뚜껑만 한 주먹을 앙증맞게 꼬옥 말아 쥔 누리가 외쳤다. 결연한 표정이었다. 나름대로 단호하게 외친다고 외친 것이었다.
“하……. 미치겠네.”
하제는 근심 어린 표정으로 이마를 감쌌다. 대체 이 귀엽고 순수한 생물을 어떻게 가르치지? 이 무섭고 험한 세상에 쟤를 어떻게 내놓지? 덩치만 커서는, 알맹이는 완전 하룻강아지나 다름없었다.
“누리야. 그렇게 해서 어떻게 나쁜 놈들을 물리치겠냐. 그 새끼들 오히려 건수 하나 물었다고 좋다고 달려들걸. 만만해 보이면 안 돼.”
“역시 그렇겠죠…….”
“자, 따라해 봐라.”
“네!”
“씨발 놈이 어디서 시비 걸고 지랄이야.”
“…….”
“대가리 빠개지고 싶나.”
하제가 팔짱을 낀 채 진지하게 말했다. 이를 악물고 살벌하게 내뱉는 단어들이 너무 무서워서, 누리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저, 전 못해요! 그런 말, 전 도저히.”
“못 한다는 말은 세상에 없다! 안 한다는 말만이 있을 뿐이지! 못 한다고 느껴진다면 그건 네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노련한 교관 같은,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서 꼰대 느낌 가득한 대사였다.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누리가 너무 황당해서 입을 딱 벌렸다. 이런 말 하긴 죄송하지만, 그의 가주님은 좀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십여 년의 타지 생활이 이렇게까지 사람을 바꿔 놓을 수도 있구나 싶었다.
“따라해 보라니까. 네 주둥이는 얼굴 피부 모자라서 찢어 놨냐? 대가리는 머리카락 키우는 화분이냐? 네 머릿속에는 뇌 대신 우동 사리 들었냐?”
“네 주, 주둥이는……. 흐으, 못 하겠어요.”
“못 한다는 말 한 번 할 때마다 대련 한 번씩 추가할 거다.”
“으아아!”
누리가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당장 저택 뒤에 있는 냇가에 가서 흐르는 물에 귀를 씻고 싶었다.
평생 들을 비속어를 오늘 다 듣는 느낌이었다. 그는 진저리를 치며 귀를 틀어막았다. 그렇지 않으면 귀에서 피가 날 것 같았다.
그 뒤로도 하제의 비속어 강의는 계속 이어졌다. 만약 방송이나 서적에 실린다면, 대다수를 검열하여 삭제 처리해야 할 욕설들이었다.
* * *
해가 진 뒤의 으슥한 골목길. 품 안에 식료품 봉투를 안은 남자가 인적 없는 길을 종종걸음으로 지나고 있었다.
남자는 평범한 인간이다. 아니, 사실 평범하지는 않았다.
그가 살던 곳에서야 ‘평범한 인간이다’라는 말이 몹시도 당연하게 통용되지만, 이곳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여긴 사람 모습을 한 짐승의 꼴을 한 사람……. 아무튼 온갖 기상천외한 수인들이 바글바글한 도시였으니까.
남자는 사랑 하나만 믿고 모든 걸 다 버리고 화리연에 왔다.
그가 사랑한 여인은 영롱한 오드 아이가 매력적인 고양이 수인이었다. 어딜 고양이 따위와 결혼을 하느냐고 집안에서 반대가 극심했으나, 부모의 만류를 뿌리치고 사랑의 도주를 감행한 것이다.
빨리 집에 들어가야지. 집에 가서 우리 여보야 밥해 줘야지. 좀 있으면 야근 마치고 퇴근할 텐데, 그전에 상 차려놔야 하는데.
그는 훈제연어와 참치 통조림 따위가 가득 든 봉투를 품에 꼭 끌어안고 걸음을 서둘렀다. 그의 ‘여보야’는 생선을 좋아했다.
최근 도시 분위기가 흉흉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곳곳에서 이상한 사건들이 일어났다. 이유 없이 누군가가 맞아 죽었다. 누군가는 이유 없이 공공장소에서 처참한 모욕을 듣기도 했다.
화리연에서 몇 없는 극소수의 인간들, 그리고 그보다 더 보기 힘든 수인 혼혈들은 바깥출입을 삼갔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집 밖에 나가야 하는 순간이 있었다. 바로 지금 같은.
신문이나 뉴스에서 보도되는 수많은 사건 사고들을 보며 대다수가 생각한다. 에이, 설마 나한테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
그 사건의 피해자들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히익! 누, 누구세요?”
섬뜩한 기척이 등 뒤를 스치고 지나갔다. 남자가 기겁하며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의 뒤에는 을씨년스럽게 펼쳐진 텅 빈 골목뿐이었다.
“착각했나.”
오싹 소름이 돋은 팔을 문지르며 다시 가던 길을 가려는 순간, 눈앞에 펄럭, 검은 옷자락이 드리워졌다.
“으아악!”
“어딜 밤늦게 싸돌아다니시나. 인간 주제에 겁도 없이.”
분명히 아무도 없었을 텐데. 그 자리에는 새카만 옷을 입은 괴한이 어느샌가 나타나 있었다.
“왜, 왜 이러세요. 저는 아무 잘못도 안 했어요. 살려주세요. 네?”
그의 손에 큼직한 칼이 들려 있는 것까지 확인한 남자는 다리가 탁 풀렸다. 그는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무작정 빌고 또 빌었다.
“난 너 같은 새끼들이 제일 짜증 나. 무고한 피해자인 척하는 놈들.”
괴한이 푹 한숨을 쉬었다.
“수인들을 잡아다가 신기하다고 해부해 보고, 강간하고, 죽이고 난 뒤에는 박제까지 해 놓고. 다 너희 인간들이 한 일이야. 근데 왜 이제 와서 아닌 척 불쌍한 척해?”
“살려주세요……. 으흑. 한 번만.”
“뭐, 나도 사실 죽이기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 시킨 일은 해야지, 어쩌겠어.”
새까만 옷차림의 수인은 칼을 치켜들었다.
여보야, 미안해. 오늘 저녁은 못 해 줄 것 같아. 나 없어도 가다랑어 맛 간식 꼭 챙겨 먹고. 손톱도 제때 갈아 주고, 매일 빗질하는 것도 잊지 말고. 남자는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서는 벌벌 떨며 눈을 꼭 감았다.
퍼억!
그때, 질끈 감은 눈 너머로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커억.”
목이 졸리는 것 같은 신음. 남자가 슬그머니 눈을 떴다. 방금까지 자신을 위협하고 있던 검은 옷의 괴한이, 누군가에게 목덜미가 잡혀 허공에 달랑달랑 떠 있었다.
술 달린 옅은 푸른색 철릭을 입고 허리에 장검을 찬 갈색 머리의 청년은 몹시 키가 컸다.
시뻘겋게 충혈된 눈, 눈 아래에 진 그늘, 얼굴 군데군데 작게 난 생채기까지. 모든 요소가 모여 그의 인상을 험악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세상의 모든 분노와 번뇌를 짊어진 것 같은 표정. 그야말로 흉악했다.
“너, 너…… 컥, 뭐 하는 놈…….”
허공에 뜬 이가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쳤다.
청년이 한 손으로 그를 잡고 들어 올린 채 큭큭 하고 음산하게 웃었다. 장기간 폭력을 동반한 세뇌를 당한 데다 피로까지 겹쳐, 그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호해유리다.”
지옥에서 올라온 것 같은 을씨년스러운 저음으로 말하며 그는 상대의 목을 움켜쥔 손에 힘을 가했다.
“컥, 어억……!”
“감히 내 구역에서.”
말을 잇다 말고 누리가 고통스럽게 눈을 감았다. 하제가 자신의 머리에 강제로 쑤셔 넣은 온갖 비속어들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지난 며칠간 그는 아예 영혼을 육체로부터 뽑아내서 뚝딱뚝딱 뜯어고친 다음 다시 몸에 집어넣은 수준의 인격 개조를 당했다.
가주가 가주로 안 보이고 악마로 보일 정도면 말 다 한 것이었다. 근육통과 피로에 시달리다 까무룩 쓰러지듯이 잠들면 꿈속에서까지 하제의 악랄한 노란 눈동자가 그를 따라다녔다.
결국 그는 멘트를 생략하고 깔끔하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니다. 그냥 죽어.”
누리는 칼도 뽑지 않고 검집째로 검을 들었다. 퍽, 콰직, 푹, 콰드득, 빠악! 곧 어두운 골목을 시원하게 매타작하는 소리가 메웠다.
식료품 봉투를 안고 구석에 쪼그려 앉아 새파랗게 질려 있던 남자는 도중에 기회를 틈타 잽싸게 도망쳤다. 저 키 큰 청년이 아군이긴 한 것 같은데, 솔직히 적보다 더 무서웠다.
그날 골목에서 까마귀는 온몸의 깃털이 빠지도록 얻어맞고 빈사 상태가 되어서야 풀려났다.
하제의 지옥훈련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누리의 해맑음과 상냥함을 좋아했던 이들에게는 과연 잘 된 건지 아닌 건지 모를 일이었다.
* * *
쨍그랑!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하제의 손에서 컵이 떨어졌다. 안에 들어 있던 물이 바닥을 적셨다.
“망할…….”
하제가 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며 한숨을 쉬었다. 근육통으로 손이 덜덜 떨려서, 한순간 컵을 놓쳤다.
누리와의 지옥훈련은 하제에게도 여운을 남겼다. 흠씬 두들겨 맞은 건 누리인데, 하제까지 자다가 팔다리가 아파서 잠을 드문드문 깰 정도였다.
“물러서십시오. 깨진 조각에 베실 수 있습니다.”
연오가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왔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담담한 태도로 깨진 머그잔 조각을 주웠다. 집단의 2인자 자리에 있으면서도 허드렛일을 하는 것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됐다. 내가 할 테니 놔둬.”
“제가 하게 해 주십시오.”
“애초에 내가 실수로 깨트린 거잖아. 저지른 사람이 치우는 게 맞지.”
“몸도 성치 않으신 분께서요?”
“멀쩡하다만?”
“손을 사시나무 떨듯이 떠시면서 말해 봤자 설득력이 없습니다.”
“솔직히 맞는 말이긴 한데 연오 네가 말하니까 왠지 짜증 나는구나.”
하제는 그를 말리는 것을 포기했다. 하제의 안에서 연오는 거의 뭐, 불통의 아이콘 같은 이미지였다. 저 고집은 절대 못 말렸다.
연오가 깨진 컵 조각을 치우는 동안, 하제는 바닥에 털썩 앉더니 착잡하게 마른세수를 했다.
“누리 말이야. 더 혹독하게 시켰어야 했어.”
“그를 그렇게 몰아붙여 놓고도 성에 안 차십니까?”
누리와 하제가 죽음의 트레이닝을 했다는 사실은 이미 집안 전체에 쫙 퍼져 있었다. 그렇게 요란하게 칼부림을 하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가며 가르쳤는데, 말이 안 퍼지는 게 이상했다.
늑대들은 숙연해져서 하제를 슬슬 피해 다녔다. 새삼 놀랍지도 않았다. 서열 정리를 한답시고 목검을 들고 닥치는 대로 가신들을 때려잡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역시나 그들의 가주는 인성이 바닥이었다.
“왠지 마음이 안 놓여. 불안하다고.”
“무엇 때문에 그러십니까?”
근래 들어 하제가 부쩍 초조해 보이곤 했다.
몇 달 정도 길게 잡고 기초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가르쳐도 되었을 텐데, 하제는 며칠 만에 누리를 쥐어짜서 무시무시한 꼴로 개조시켜 놓았다. 마치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모두가 나한테 경고를 하고 있어.”
하제가 손바닥 안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연오는 하던 일을 멈추고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거다, 후회할 거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하나같이 짠 것처럼 그렇게 말한단 말이야.”
으슥한 골목 안에서 이름 모를 수인들에게 습격을 당했다. 아메트가 첫 번째 경고를 했다. 순찰 중에 죽어가는 인간의 칼을 맞았다. 병문안을 온 아메트가 또다시 경고했다.
누리와 함께 곤경에 처한 남매를 구하고 나서는, 이번엔 까마귀가 비슷한 말을…….
“이제까지는 뭐가 일어나 봤자 얼마나 대단한 일이겠냐 싶어서 무시했는데, 이번엔, 하아……. 모르겠다. 그냥, 직감이 안 좋아. 그때 내가 쓸데없이 상대를 도발해서, 누리까지 휘말리게 한 것 같아서.”
그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 동안 침묵했다. 동그란 정수리 위로 검은 늑대 귀가 축 처져 있는 환상이 보이는 듯하다.
연오가 하제를 달래기 위해 무어라 말을 꺼내려는 찰나, 그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힘없이 중얼거렸다.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하제가 느꼈던 불길한 예감대로,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날 늦은 밤, 서문가에 급하게 연락이 왔다.
누리가 습격당해 의식불명 상태에 있다는 내용의.
* * *
병실은 생기 없이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의료기기가 작동하는 소리, 복도에 의료진들이 돌아다니는 소리만이 희미하게 들렸다.
누리의 병실에 모인 남자들은 하나같이 침울한 얼굴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순찰을 다녀오겠다며 집을 나선 동료가 의식을 잃고 중상을 입은 채 실려 왔으니.
하제는 병상 옆의 의자에 털썩 앉았다. 평상복 차림의 그는 누리의 윗사람이라기보다는 아는 형의 문병을 온 동생처럼 보였다.
그의 넋 나간 것 같은 시선이 계속 누리의 창백한 얼굴 위를 더듬었다. 목에 두껍게 칭칭 감긴 붕대,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것처럼 파리한 안색, 그에게 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관과 선들. 반창고가 덕지덕지 붙은 이마 위로 윤기를 잃은 갈색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었다.
진술을 해야 할 당사자가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결국 사건의 정황은 현장을 조사한 이들의 추측으로만 재구성되었다.
일단 처참할 정도로 적의 수가 많았다. 최소 대여섯, 아니면 그 이상일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범인들은 깊은 원한을 가지고 누리가 순찰을 도는 길목에 숨어 있다가 의도적으로 그를 덮쳤다.
수적 열세를 직감한 누리는 근처의 다른 영역을 배회하고 있을 동료를 부르기 위해 하울링(Howling)을 시도했다.
결과는 잔혹한 보복이었다. 여러 개의 칼날이 집요하게 그의 목을 노렸다. 늑대의 성대를 찢고 기도를 가르기 위해 무자비한 칼질이 가해졌다. 바닥에 피 웅덩이가 생겼다.
범인들은 누리의 목을 반쯤 갈라놨으니 그가 곧 절명할 거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누리에게 끔찍한 보복을 가하고, 이제 더 미련은 없다는 듯 곧장 발을 뺐다.
그렇게 피가 많이 흘렀는데도 현장에는 피 묻은 손자국, 발자국 하나 없었다. 치밀한 자들이었다.
하제는 새하얀 천으로 꼼꼼히 감싼 누리의 목덜미를 만지려 무심코 손을 뻗었다가 흠칫했다. 허공에 떠 있던 그의 손이 이윽고 힘없이 거두어졌다.
“다시는 말을 못 할 수도 있다고?”
“예. 하지만 부상에 비해서는 예후가 나쁜 편이 아닙니다. 조금만 더 칼날이 깊이 들어갔어도 경동맥과 신경이 잘려서 즉사할 수도 있었다고…….”
혼잣말처럼 던진 하제의 물음에 연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정신을 다른 데 두고 온 것 같은 하제를 대신하여 그는 의료진을 상대하고 다른 가신들을 진정시켰으며 입원 수속을 밟았다.
침대에 누운 누리는 숨을 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주 자세히 보면, 그가 착용한 마스크 안에 일정한 간격으로 자그맣게 김이 서리는 것이 보였다.
“너희는 이제 돌아가. 일단 해가 뜰 때까지는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까.”
하제가 고개를 떨어트린 채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드러난 이마 아래 참담하게 질끈 감고 있는 눈매가 언뜻 눈에 띄었다.
“어차피 안정 취해야 해서, 병원에서도 한두 명만 남고 다 가랬잖아. 내가 보고 있을게. 너희는 가서 눈 좀 붙여. 한숨 자고 와.”
그의 말에 가신들이 순순히 수긍할 리가 없었다. 가장 먼저 연오가 거부 의사를 보였다.
“하지만, 가주님.”
손안에 얼굴을 파묻은 채, 하제에게서 침통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혼자 좀…… 있게 해 줘.”
“…….”
연오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한참을, 아무 표정 없이.
그러나 그는 곧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연오가 손짓하여 다른 가신들을 병실 밖으로 내보냈다. 알파가 명령하고 베타가 수긍하니, 다른 이들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저를 찾으십시오.”
평소보다도 다소 가라앉아 있는 것 같은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병실 문이 달칵, 소리와 함께 닫혔다.
하제는 침대 옆의 보호자용 간이 의자에 앉은 채, 그 뒤로도 한참을 양손에 고개를 묻고 있었다.
그에게는 적이 많았다. 영경에 있을 때는 극소수의 동족들을 제외한 모든 인간이 적이었고, 이곳에 돌아와서도 그를 달갑게 보지 않는 수인들이 많은 것은 여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는 항상 혼자였기 때문에. 가족도 연인도 소속도 없는 외톨이였으므로, 잃을 것 또한 없었다.
자신을 향한 적대심에 일일이 상처 입고 아파하기에, 하제는 너무 무뎌져 있었다. 그래서 웬만한 악의들은 그냥 흘려 넘겼다. 무섭거나 걱정스럽기는커녕 가소로웠다.
하지만 화리연에 돌아오고 가주가 되고 나서, 하제에게는 처음으로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생겼다. 그의 밑에서, 그 하나만 보고 모인 사람들.
하제의 행동 하나하나에 수십 명분의 책임이 뒤따르게 되는 순간이었다.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인간 세상에서 보낸 하제는 누군가의 목숨과 삶을 통째로 짊어져야 한다는 개념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인간들이 말하는 ‘책임’과 늑대들의 ‘책임’은 엄연히 달랐는데, 그걸 간과하고 말았다.
외톨이 늑대이자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독불장군으로 지낼 때처럼 대응하면 안 되는 거였다. 마음껏 날뛸 테면 날뛰어 봐라 하는 식으로 상대에게 빌미를 주지 말았어야 했다. 스스로가 운 좋게 멀쩡하더라도 다른 이에게 불똥이 튈 수 있었다. 이런 참혹한 방식으로.
그 사실을 지금에서야 비로소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래서 누리에게 끔찍한 상처를 입혀 버리고 말았다. 어쩌면 평생 낫지 않을지도 모르는.
“미안해.”
하제가 누리의 이불 끝자락을 느리게 만지작거렸다.
“내가 모자라서, 네게…….”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는 쓰러지듯 이불 위에 이마를 기댔다.
상대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호흡기 안을 메우는 누리의 희미한 숨소리와 이따금 울리는 의료장비의 기계음만이 이 공간을 메웠다. 무능한 우두머리를 책망하는 것처럼.
하제는 오랫동안 누리의 침상 옆에 엎드려 있었다. 새카맣던 창밖이 어느덧 푸르스름하게 흐려지고, 이내 하늘 귀퉁이가 조금씩 밝아 올 때까지.
이불 끄트머리가 사락, 작게 스치는 느낌이 들었다. 엎드린 채 깜빡 선잠이 들었던 하제가 그 희미한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눈을 떴다.
링거 바늘이 꽂힌 채 침대 위에 힘없이 놓여 있었던 손끝이 살짝 움직였다. 하제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누리야?”
그리고 힘겹게 눈을 떠 그를 바라보고 있는 갈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괜찮아?”
반사적으로 물어 놓고도 하제는 조금 후회했다. 저 꼴이 됐는데 괜찮을 리가 없잖아. 목이 반쯤 잘렸다는데, 다시는 말을 못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데, 괜찮을 리가…….
누리는 아주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하제를 응시했다. 서느런 새벽빛이 그의 옆얼굴에 어른어른 드리워졌다.
색색 힘겨운 소리와 함께 투명한 마스크 안에 뿌옇게 김이 서렸다가, 다시 잦아들었다. 하지만 말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내가, 미안해. 잘못했어.”
하제가 더듬더듬 말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한 채, 새벽 내내 몇 번이고 입안에 맴돌았던 말들을 아무렇게나 쏟아냈다.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 그 까마귀를 화나게 하는 게 아니었어. 자존심이 상하고 굴욕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냥 참고 넘겼어야 했는데.”
그는 이를 악물었다. 누가 목을 조르기라도 한 것처럼 목 안쪽이 꽉 메었다.
“난 가주 자격이 없어. 애초에 나 같은 건…… 너흴 이끌 자격이…….”
그때 누리의 손가락이 어렵게 이불 위를 움직여, 이불자락을 움켜쥔 하제의 손등을 가볍게 건드렸다. 하제가 그 자리에 굳어 버린 채 그를 주시했다.
괜찮아요.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만 느릿느릿 말하며, 누리가 희미하게 웃었다. 병색이 완연하고 기운도 없지만, 언제나처럼 천진한 웃음이었다.
“…….”
하제는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더는 상대를 똑바로 바라볼 수도, 뭐라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의 손이 누리의 큼직한 손을 간신히 한 번 잡았다 놓았다.
“쉬어.”
그는 차마 뒤를 돌아보지도 못하고 도망치듯 방을 나섰다.
병실 문을 닫고, 굳게 닫힌 문에 등을 댔다. 금속의 냉기가 전신에 퍼지자 정신이 조금 맑아졌다.
그러다 옆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가주님.”
병실 문 옆 벽에, 연오가 비스듬히 기댄 채 서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창백한 여명을 머금은 채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눈동자는 거의 백색에 가까웠다.
“돌아가시겠습니까. 지금부터는 다른 이가 간호하도록 지시하겠습니다.”
연오가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하제가 바로 응하지 않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만 있자,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 단정히 멈춰 서 있을 것만 같던 손이 다가와 하제의 손을 잡아챘다. 두 남자의 손이 마디마다 얽히며 단단히 맞물렸다.
싸늘한 복도에 몇 시간을 서 있던 이의 손이었다. 당연하게도 손끝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하제와 연오가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이른 아침이 되어 있었다. 기왓장이 얹힌 지붕 끄트머리에 아침 해가 걸렸다.
하나둘 잠에서 깨어나 하루를 시작해야 할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서문가의 저택은 텅텅 비어 있었다. 누리가 습격당한 일로 인해 대대적인 비상이 걸렸기 때문이다.
몇 명은 번갈아 가며 누리의 병실을 지키기 위해 병원에 가 있었고, 몇 명은 사건 수사를 위해 시내에 있었으며, 나머지는 비상 순찰을 도는 중이었다. 아무도 없는 집안에 서늘한 공기가 감돌았다.
“일단 잠자리에 드십시오. 따뜻한 차를 준비하겠습니다. 밤새 한숨도 못 주무셨지 않습니까. 이후의 일은 나중에 생각하시고…….”
“연오야.”
묵묵히 정문을 지나 안뜰을 걷던 하제가 우뚝 멈춰 섰다.
“이 도시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너는 알잖아, 줄곧 여기 살았으니까. 그러니까 대답해.”
갑작스럽게 단도직입적인 명령이 날아왔다. 연오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그를 마주 보았다.
“왜 인간들을 죽이고, 혼혈들을 모욕하고, 그들을 감싼 수인까지 공격하는 거지? 대체 왜! 도시 전체에 인종 청소라도 할 셈인가? 순수한 수인들만 남을 때까지?”
상식도 없고 학식도 없다, 책을 안 읽는다며 매일 가신들에게 타박을 듣긴 하지만 하제는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잔머리가 지나치게 잘 굴러서 정석적인 공부를 싫어하는 쪽에 가까웠다.
추리는 어렵지 않았다. 하제는 그 몇 마디 안 되는 문장을 말하는 사이에 단숨에 결론에 도달하고, 핵심을 찔렀다.
“이 일이 우리 아버지의 죽음과도 관련이 있나?”
“가주님, 그건…….”
“까마귀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하제가 입술을 깨물며 연오에게로 한 발짝 다가섰다. 새소리조차도 들리지 않는, 섬뜩할 정도로 적막한 아침의 안뜰. 두 사람 사이로 한 줄기 상쾌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박연오. 넌 까마귀들 손에서 자랐잖아. 너도, 관련 있는 거냐?”
“하제 님. 지금, 저를…… 이 연오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
“당신이 직접 구해내서 데려온 저를…… 단지 제가 어렸을 때 까마귀들에게 길러졌다는 이유만으로.”
연오의 얼굴에서 혈색이 사라졌다. 그 대신 하제를 집요할 정도로 곧게 바라보는 시선에는 오히려 형형함이 더해졌다. 그가 이를 악물고 찬찬히 말했다.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모른다고? 아버지의 오른팔이었던 네가? 몇 년간 이 가문의 살림을 도맡아 했던 네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전 가주님께서도 아무것도 모르고 계셨거나, 제게 고의로 말씀해 주지 않으셨거나. 둘 중 하나겠지요!”
하제가 이를 빠득 갈며 거세게 추궁했다. 연오도 그에 지지 않고 마주 대꾸했다. 두 남자의 언성이 점점 과격하게 높아졌다.
“안 믿어. 아니, 못 믿겠다!”
“어떻게 제게…… 못 믿겠다는 말씀을, 하실 수가 있어요.”
잔뜩 날을 세우고 있던 연오는 그 순간 맥이 탁 풀렸다.
하제가 자신을 믿지 못한다고 했다. 그 말에 눈앞이 확 캄캄해졌다. 자신의 모든 세상을, 세상의 근원이자 중심을 부정당한 느낌이었다.
뒤이어 강렬한 충동이 밀려왔다.
이 자리에서 배를 가르고 손목을 그어서라도, 콸콸 솟는 새빨간 피를 보여서라도 하제에게 그의 충성을 증명하고 싶었다. 호해유리가 목에서 피를 흘려 하제의 마음을 얻어냈으니, 자신은 심장이라도 꺼내 보이면 믿어 주지 않으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갈 거야.”
하제가 흉흉한 어조로 선언하며 몸을 휙 돌렸다. 그들이 들어온 문 방향이었다.
“어딜 가신단 말입니까.”
“답을 들으러. 네가 말해 주지 않겠다니 다른 이에게 들어야겠다.”
“누구에게요?”
“진실을 알고 있을 만한 사람에게!”
그는 이윽고 출구를 향해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정말 이대로 저택을 떠나 버릴 기세였다. 연오는 이를 악물고 새파랗게 타오르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아메레타트에게…… 그 뱀에게 가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이 도시에서 자신이 모르는 게 없다고 했던 그 남자. 자신의 손을 잡으면, 가장 강력한 아군이 되어주겠다고 유혹적으로 속삭이던 그 남자. 그라면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을 알고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부정하지 않았으니 긍정이나 다름없었다. 연오는 속에서 격한 감정이 왈칵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것만큼은, 절대로 안 됩니다. 제게 얼마든지 분풀이를 하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 뱀만큼은 절대로!”
연오가 다급하게 하제의 팔목을 붙잡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메트의 손아귀에 하제가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씨발, 이거 안 놔?”
“제발!”
하제가 분노를 터뜨리며 연오의 손길을 뿌리쳤다. 하지만 연오는 포기하지 않았다. 더욱 바짝 다가붙어 그를 뒤에서부터 끌어안듯이 하여 움직임을 봉쇄했다.
투두둑, 단추 뜯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제가 자신이 입고 있던 셔츠 단추를 거의 찢다시피 하여 벗어던지고 연오의 품을 벗어났다. 구겨진 셔츠가 펄럭 허공을 날아 한순간 그의 눈앞을 가렸다.
그러나 시야를 메운 옷자락이 거두어졌을 때 연오가 본 것은, 청년의 맨 등이 아닌 짐승의 새카만 털이었다.
크르릉……!
주인을 잃은 옷가지들이 바닥에 털썩 떨어졌다. 맹수의 섬뜩한 으르렁거림이 공기 중에 퍼졌다. 선명한 노란 눈을 가진 검은 늑대가 흙바닥을 박차며 달려 나갔다.
절박한 것은 연오도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그를 보낼 수는 없었다.
다음 순간, 검은 늑대의 뒤에 있는 것은 망연한 눈을 한 청년이 아닌 또 다른 늑대였다. 검은 늑대보다 체격이 조금 더 크고, 얼음처럼 시린 눈을 가진 검붉은 털의 늑대.
연오는 하제를 놓치지 않기 위해 몸을 날렸다. 발톱을 세운 앞발로 무자비하게 그를 찍어 눌렀다.
콰앙!
하제는 연오의 체중이 실린 공격을 고스란히 받으며 땅에 내팽개쳐졌다. 커다란 소리가 마당을 울렸다.
본의 아니게 바닥을 뒹굴게 된 흑랑의 털에 뿌옇게 흙먼지가 묻었다. 그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낸 채 위협적인 울음을 흘리며 연오를 밀쳐내고 몸을 일으켰다.
두 늑대의 눈이 마주쳤다. 하제의 노란 눈동자. 연오를 노려보는 그 눈에는 배신감과 분노, 답답함, 그리고 약간의 슬픔이 차 있었다.
하제의 의심은 단순히 연오가 까마귀에게 길러졌다는 것 하나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전 가주의 베타였다. 당연히 까마귀를 포함하여 다른 수인들과 만나는 공식적, 혹은 비공식적인 자리에 수없이 동석했을 것이며, 여러 중요 사안을 처리했을 것이다. 하제가 자리를 비운 동안은 혼자서 거의 가주 노릇을 해 왔었고.
일례로, 연오는 아메트와 구면이었다. 서로 죽일 듯 노려보며 증오할지언정 하제보다도 오히려 둘의 사이가 더 가까워 보였다.
그런데도 연오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한 마디로 하제의 타당한 의문을 묵살했다. ‘나는 무고하다’고 주장할 수는 있을지언정 ‘아무것도 모른다’고는 할 수 없는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못내 서운했다.
그가 연오를 못 믿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애초에 연오부터가 하제를 신뢰하고 있지 않으니.
하제는 깨달았다. 연오의 ‘모른다’는 말 그대로 ‘모른다’가 아니라, ‘말할 수 없다’ 내지는 ‘당신은 몰라도 된다’에 가까울 것이라는 사실을.
크릉, 컹!
조용하고 널찍한 서문가의 앞마당을 두 짐승의 거친 숨소리와 으르렁거림이 메웠다. 한쪽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가야 했고, 한쪽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했다. 둘 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원망도 질책도 나중에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지금은 하제가 아메트에게 가지 못하도록 붙잡아 놓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 과정에서 하제가 다소 다치게 된다 할지라도.
몸싸움은 팽팽하게 이어졌다.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던 마당이 군데군데 움푹 패고, 뜰 가장자리를 따라 심어 놓은 관목이 뿌리째 뽑혔다. 굵직한 본채의 나무 기둥에 길게 발톱 자국이 났다.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연오를 피해 하제가 마루 위에 올라섰다. 연오는 마당 아래에서 훌쩍 뛰어 그를 쫓았다. 자신의 무게를 고스란히 실어 검은 늑대의 몸통을 옆에서부터 힘껏 들이받았다.
퍼억, 쿵!
창호지를 바른 나무문이 결국 늑대 두 마리의 체중을 이기지 못하고 부서졌다. 문틀이 빠각, 부서지며 하제가 방 안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다행히 아무도 쓰지 않아 비어 있는 방이었다.
방 안은 이렇다 할 세간 하나 없이 텅 비어 있는 데다 문짝은 도저히 회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박살 났다. 을씨년스러운 광경이었다.
널찍한 방에 속절없이 쓰러진 하제가 힘없이 신음했다. 밤하늘 아래 빛나는 강철과도 같은 색의 모피 아래, 배가 가쁘게 오르내리는 것이 보였다.
하제는 더 이상의 도주 시도를 그만두었다. 조금 전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어서 그렇다기보다는 그저 스스로가 저항 의지를 상실한 것 같았다.
방바닥에 쓰러진 하제를 문간에 선 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또 다른 늑대가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마루 아래로 내려섰던 그는 잠시 후에 돌아왔다. 입에 자신의 옷가지를 문 채였다.
펄럭.
연오의 겉옷이 하제의 위에 덮였다. 하제는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고, 그저 힘겹게 색색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잠시 후 커다란 짐승의 몸을 덮느라 위로 불쑥 솟아 있던 옷자락이 스르르 내려앉았다.
“허억, 헉…….”
그 아래에 흑발의 청년이 보였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쓰러진 채 헐떡이고 있었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등과 어깨, 맨 종아리와 발목이 옷자락 밖으로 언뜻 드러났다.
“하제 님.”
뒤이어 연오도 곧 사람의 모습을 되찾았다. 격렬한 몸싸움으로 인해 숨이 거칠어진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단정한 목소리 곳곳에 헐떡임이 섞였다.
눈을 감은 하제의 시야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리고 끝내 그를 보지 않으려 했는데, 한쪽 뺨에 연오의 손이 닿았다.
하제의 옆에 한 팔을 짚은 연오가 위에서부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웃옷을 챙겨 입을 겨를이 없어, 조각상 같은 상체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나마 겨우 입고 있는 바지마저도 앞섶은 풀린 채였다.
“연오야.”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흑발. 연오가 무심코 홀린 듯이 하제의 머리칼을 손가락 끝으로 매만지고 있다가, 하제의 호명에 흠칫 놀라 손을 거두었다.
“내가…… 내가 왜 가주 자리에 있는지, 알아? 죽기 싫어서? 도망갈 곳이 없어서? 척살령을 내렸다는 네 협박이 무서워서?”
그를 망연자실하게 올려다보던 하제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너를, 내가 함부로 망가뜨려 버린 너를 책임져야 할 것 같아서 그랬어.”
그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팔을 들어 눈을 가려 버렸다. 방금까지 짐승 모습으로 연오와 뒤엉켜 힘겨루기를 하느라 입술 가장자리가 살짝 터져 있었다. 다친 입술을 깨물자 금세 핏기가 맺혔다.
“너를 책임지려고 모두 버리고 머물렀는데……. 너는 왜, 내게 중요한 건 무엇 하나 알려주지 않는 거야.”
“…….”
“넌 항상 그런 식이었지. 나는 아무것도 몰라도 된다는 것처럼!”
알려주지 않는 게 아니었다. 알려줄 수 없는 거였다. 하제가 없었을 때의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떤 짓을 저지르고 살았는지 알게 된다면…….
하제는 필시 그를 혐오하게 될 테니까.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 나를 가주로 만든 건 너잖아. 네가 직접 날 끌어올려 앉혔잖아. 대체 언제까지 나를 허울뿐인 가주로 만들 셈이야.”
“저는, 당신이.”
연오의 음성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갑자기 왈칵 목이 메어서,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는 눈가를 가린 하제의 팔목을 잡아 치우려 했다. 그러나 하제는 완강히 버티며 끝내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결국 연오는 하제와 눈을 마주하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얼굴 위를 가로질러 힘없이 늘어져 있는 하제의 손에 단단히 깍지를 끼고, 고개를 비틀어 입을 맞추었다.
입맞춤은 길게 이어졌다. 길어질 뿐만 아니라, 갈수록 점차 깊어졌다.
“흣, 으, 흐윽.”
하제의 팔이 연오의 등 뒤로 뻗어 나와 그를 끌어안았다. 절박한 숨소리가 스스로의 것인지 상대의 것인지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깊게 혀를 얽었다.
길고 마른 손가락이 탄탄한 남자의 등을 할퀴듯이 긁어내렸다. 그의 손톱은 짧게 정돈되어 있어 피부가 긁히지는 않았다. 그저 살 마찰하는 소리와 함께 손끝이 길게 미끄러져 내렸을 뿐이었다.
하제가 한 팔로 연오의 허리를 감아 끌어당기며 누워 있던 몸을 반쯤 일으켰다. 그의 몸을 덮고 있던 연오의 겉옷이 허리께로 스르르 흘러내려 갔다.
그는 맨 상체를 드러낸 채로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상대의 뒷머리를 감싸 자신 쪽으로 이끌며 잡아먹을 듯이 입을 맞추었다.
“헉…….”
하제의 손이 연오의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움켜쥐는 순간 연오에게서 낮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 반항의 기미는 없었다. 연오는 그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딸려갔다.
딱 한 장의 천, 하제를 감싸고 있던 그 옷가지 하나가 흘러내려 가 버린 지금 그들의 사이를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윽고 두 남자의 벗은 가슴이 맞닿았다.
수인이든 아니든, 이제 그들의 행위는 일반적인 친밀감 표현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어 있었다. 누가 보아도 애무였고 어떻게 보아도 키스였다.
둘의 몸이 꼭 맞붙으며 자연스럽게 허벅지가 얽혔다. 연오가 하제의 위에 올라탄 것 같은 자세였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상대의 체중이 실리고, 바지를 뚫어버릴 것처럼 단단하게 발기한 남자의 성기가 느껴졌다. 딱딱하게 고개를 치켜든 것이 허벅지 안쪽을 아플 정도로 눌렀다.
“아, 읏!”
하제가 반사적으로 흠칫하며 다리를 움츠렸다. 연오가 하제의 허벅지 사이로 허리를 밀어 넣으며 더욱 깊이 파고든 탓이다. 이쪽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너 나 할 것 없이 흥분해 있었다.
핏줄은 다르지만 어렸을 때부터 한 형제처럼 자란 사이. 한때 자신의 아버지가 총애했던 오른팔. 가주와 가신, 알파와 베타. 돌이킬 수 없는 배덕이었다. 연오와 키스하는 내내 하제는 기묘한 죄책감을 느꼈다.
결코 이래서는 안 된다, 이 남자와 지금 이런 짓을 하면 안 된다. 몇 번이고 머릿속에 경고등이 켜졌다.
하지만 한계까지 몰리고 시달린 그의 본능은 이성보다 강했다. 기댈 곳이 필요했다. 착잡한 감정을 풀어낼 상대가 필요했다. 그냥 이대로 연오를 쓰러뜨려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하제는 질끈 눈을 감고 연오를 밀어냈다. 오래도록 뒤엉키던 혀와 입술이 기어이 떨어졌다.
“미안하다…….”
연오를 차마 마주 보지 못해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린 채, 손등으로 입가를 문지르며 하제가 나직하게 사과했다. 마음 한쪽이 몹시도 쓰라렸다.
누리를 다치게 한 것에 대한 사과인지, 연오를 의심하고 추궁한 것에 대한 사과인지, 연오가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뛰쳐나가려고 한 것에 대한 사과인지, 아니면…… 조금 전 있었던 키스에 대한 사과인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 * *
풍비박산이 난 문을 등 뒤로 한 채, 하제와 연오는 뜰이 훤히 내다보이는 마루에 나란히 앉았다. 어느덧 완연히 중천에 떠오른 해가 싱그러운 풀과 나무들을 비추었다.
웅장함과 엄숙함을 주기 위해 서문가의 저택은 크고 넓게 지어졌다. 거기다 체격이 큰 늑대들에게 맞추기까지 해야 했으므로, 마루는 상당히 높았다. 신발을 신은 연오의 발끝이 딱 맞게 땅에 닿고, 하제의 맨발은 달랑달랑 허공에 떠 있었다.
“내 어머니 말이야. 왜 돌아가셨는지 알아?”
하제는 바지만 입은 방만한 차림이었다. 맨 상체에 연오의 겉옷을 담요처럼 대충 두르고 있었다. 어깨에 걸쳐진 타인의 옷자락을 느슨하게 여민 상태로, 발을 아무렇게나 흔들며 말을 이었다.
“아니요. 모르겠습니다.”
연오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하제의 어머니는 그의 출생과 동시에 숨을 거두었다는 것만 알았다. 연오가 서문가에 적을 두기 이전의 일이었다.
가주의 죽은 반려에 대한 이야기는 입에 올릴 필요도, 입에 올릴 이유도 없었다. 하제의 아버지부터 시작해서 모두가 그에 대해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태어나기 전에, 쌍둥이 동생들이 많이 있었어. 몇 명인지는 나도 정확히 모르겠는데…… 서너 명은 됐을걸.”
수인들은 인간과 달라서, 때때로 짐승으로서의 본성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드러나곤 했다. 다태아(多胎兒)의 임신이 그러했다.
한 배에 대여섯 마리, 때로는 열 마리가 넘는 수의 새끼를 낳는 동물의 습성이 남아서, 수인 또한 드물지만 비정상적으로 많은 쌍둥이를 수태하는 경우가 있었다.
“동물이면 몰라도 사람은 죽잖아. 그렇게 아이를 많이 가지면. 인간들이었다면 그 사실을 알자마자 바로 중절 수술을 했을 거라고. 그대로는 산모도 아이도 다 죽게 되니까.”
“…….”
“그런데 어머니는 목숨이 위험해져도 좋으니 아이를 낳겠다고 하셨어. 아버지는 말리지 않았고. 우리 부모님뿐만 아니라 다른 수인들도 다 그리 한다더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게 본능이니까.”
그렇게 몇 달이 흘렀다. 결과는 뻔했다.
가장 먼저 태어난 남자아이 한 명만 겨우 살아남았다. 그마저도 채 여덟 달을 못 채우고 나왔다. 나머지 아기들은 배 안에서 나오지도 못한 채, 모체와 함께 그대로 목숨을 잃었다.
“어느 정도 나이가 차고 나서 아버지한테서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너무 화가 나서 미칠 것 같더라. 화가 나고 답답했어. 나나 동생들이 태어나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어머니를 살리는 게 맞는 거 아니냐고!”
인간들의 세계에는 의학이 고도로 발달해서 잘린 팔다리도 붙이고 없는 장기도 만들어낸다는데, 왜 우리는 아직도 이렇게 살아야 하냐고. 하제는 아버지에게 몇 번이고 의문을 던졌고, 몇 번이고 항의했다.
그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인간과 우리는 다르니까. 그게 우리의 본성이니까.
“그래서 이상향을 찾아서 집을 나갔지. 인간들의 도시에 가면, 좀 나아질 줄 알았거든. 결과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그럼…… 하제 님께서는 전 가주님이 싫으신 겁니까?”
말없이 그의 이야기를 듣던 연오가 문득 물었다. 하제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아버지가 싫은 게 아니라, 이 질서가 싫은 거야. 서열도, 천적도, 번식도, 영역싸움도, 전부 다.”
하제가 그를 마주 보았다. 아까의 혼란이 모두 가라앉은 차분한 눈이었다.
“연오야. 이제 여기서 끊자.”
“네?”
연오는 한순간 그 눈에서 어린 시절의 하제를 보았다. 영리하고, 침착하고, 그러면서도 제 할 말은 꼭 다 하고야 마는 어른스러운 소년을.
“나는 평생 반려를 맞지 않을 거야. 당연히 자식도 안 낳을 거고. 이대로 살다가, 만약 너보다 내가 먼저 죽으면…….”
“죽는다니요, 그게 무슨!”
“그러면, 계승권은 이번에야말로 너한테 가겠지만 말이다. 만약 그렇게 되더라도 가문을 이어받지 말아 줘. 부탁할게. 그러니까.”
깊게 숨을 들이쉬며 한 차례 뜸을 들이다가, 하제가 힘주어 말했다.
“서문가는…… 여기서 끝내자.”
가문의 유일한 주인이, 스스로 가문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겠다고 말했다.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을 허물고, 가신들에게 곳간에 쌓인 재물을 아낌없이 안겨 떠나보내고, 지도에서 가문의 이름을 영영 지우자고.
연오는 하제가 가주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에 가문이 어찌 될 것인지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계승권의 향방 따위도 안중에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가문이 사라지든 말든 상관없다는 마음이었다.
하제가 죽는다면, 그도 더는 세상에 없을 것이므로.
“네.”
연오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할 나위 없이 충성스럽고 얌전한 가신의 가면을 쓴 채.
『효후(哮吼)』 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