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5. 세 번의 밤 (5/19)

효후(哮吼)

2권

5. 세 번의 밤

최초의 기억은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이었다.

온기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싸늘한 돌바닥에 방치되어 있었다. 시체처럼 누워서.

바닥에 늘어진 그의 근처를 뚜벅뚜벅 무정한 발소리들이 스쳐 지나갔다. 가끔 선심 쓰듯이 먹고 남은 음식 찌꺼기나 상한 고깃덩이가 던져지기도 했다. 그런 것들로 간신히 목숨을 이었다.

가끔 제대로 된 식사와 잠자리가 주어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대가가 따랐다. 자신이 받은 것에 대한 대가.

그는 주로 컴컴한 거리를 헤매며 누군가를 쫓았다. 냄새나 발자국을 추적하기도 했다. 정체 모를 위험물이 발견되면 가장 먼저 확인해 보는 일도 도맡아 했다.

사실 그때의 기억은 뚜렷한 것이 하나도 없다. 누군가 지저분한 천으로 머릿속을 벅벅 문질러 닦아 놓은 것처럼. 기억할 만한 가치가 없어서이기도 하고,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장면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낯선 응접실이었다.

곁눈으로 옆을 슬쩍 돌아보자 검은 머리에 노란 눈을 가진 남자가 보였다. 정치가나 지도자보다는 무사에 어울리는 침착하고 차분한 눈빛을 가진 남자였다.

그리고 정면에는 속을 읽을 수 없는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뱀의 당주가 있었다. 포유류가 파충류를, 온혈동물이 냉혈동물을 보며 느끼는 묘한 거북함이 들었다.

뒤늦게 그는 자신이 악몽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가 꾸는 꿈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하제가 나오거나, 하제가 나오지 않거나. 하제가 나오지 않는 꿈은 악몽이었다.

그러니까 이 꿈은…….

‘그대도 뒷일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나. 나이가 적지 않은데 슬슬 후계자를 지목해야지.’

끔찍할 정도로 신맛이 나는 과일 차를 아무렇지도 않게 들이키며 뱀의 당주가 말을 건넸다.

‘정 안 되면 베타에게 물려주는 방법도 있고. 그렇게 되면 저자는 좋겠군.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원래 후계자를 밀어내고 가문을 차지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대수롭지 않게 민감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샛노란 눈동자가 스르르 움직여 그를 향했다. 순간적으로 목 안쪽이 턱 막혔다. 분노와 증오가 치밀어 올랐다.

‘아, 그게 아닌가. 원래 후계자가 살아 돌아오는 게, 더 좋은 건가? 참으로 이상한 자로군. 이런 기회를 마다하다니.’

교활한 뱀이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충성심이 대단한 건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지…….’

마치 자신의 속마음을 알아챈 것처럼.

당주는 고개를 느릿하게 돌리며 그의 옆에 앉은 남자에게 물었다.

‘실종되었다는 그대 아들의 이름이 뭐였더라?’

알면서도 모르는 척, 태연한 목소리로.

‘서문하제?’

* * *

뿌옇게 가라앉은 의식 너머로 처마를 두드리는 빗소리가 들린다. 딱딱한 나무 상의 표면에 닿은 한쪽 뺨이 차가웠다.

연오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일을 하려고 책상 앞에 앉았는데, 서류를 보다가 눈이 침침해져서 잠깐 쉰다는 게 팔을 벤 채 그대로 잠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그는 뻑뻑한 눈가를 꽉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정신이 맑아지며 책상 위에 마구잡이로 흐트러진 서류들이 또렷이 보였다. 잠들기 전 그대로였다.

기분 나쁜 악몽, 바깥에 추적추적 내리는 비, 축축하고 무거운 공기. 갑자기 덜컥 불안해졌다.

연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방금까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던 자로는 보이지 않는 다급한 움직임이었다. 문을 열고 나간 연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깥에 온통 부옇게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당의 흙이 축축하게 젖었다. 처마 끝에 맺힌 빗방울이 가느다란 기둥을 만들며 아래로 졸졸 흘러내리고, 마루 위로 후드득 물기가 튀었다.

집 안은 고요했다. 비가 내리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마당과 뜰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침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비 때문만은 아니었다. 누리가 병원에 입원하게 된 이후로 서문가의 분위기는 줄곧 이랬다.

“하제 님…….”

연오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드문드문 물방울이 튄 마루를 빠른 걸음으로 가로질렀다.

“어, 연오랑. 안녕하십니까.”

모퉁이를 돌자 갑작스레 내린 비에 투덜대며 빨래를 급하게 걷고 있는 가신 한 명이 보였다. 그는 연오를 보고는 한 팔에 옷가지를 잔뜩 안은 채로도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연오는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약간 안심했다. 시간이 우뚝 멈춰 버린 이상한 세상에 홀로 갇혀 있는 것 같다가, 다른 이의 존재를 확인하자 현실감이 들었다.

“가주님은?”

안도하던 것도 잠시, 연오는 다짜고짜 그를 붙잡고 물었다.

“가주님은 어디 계시냐.”

“예?”

청년이 맹하게 눈을 깜빡였다.

“잘 모르겠는데요. 아까 점심때쯤에 한 번 보고 못 봤는데. 어디 나갔다 오신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벽하한테 물어보시죠. 걔는 그런 거 세세하게 다 기억하잖아요. 청년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이 단순무식한 새끼들. 정도껏 생각 없이 살아야지, 제 가주가 어디 있는지도 몰라? 연오는 턱 끝까지 올라온 욕을 억지로 삼켰다.

하제가 저택에 돌아온 이후로 연오는 나름대로 성질을 죽이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내숭이었다. 연오는 하제 앞에서 노골적으로 내숭을 떨었다.

가신들을 죽어라 굴리고, 걸핏하면 쩌렁쩌렁 고함을 지르고, 엄격하다 못해 가혹할 정도로 완벽주의를 추구하던 남자가 하제 앞에서만 얌전한 낯으로 점잖게 굴었다. 다른 가신들이 보기에 서운하다 못해 가증스러울 정도로.

그러나 하제만 그 사실을 몰랐다. 가신들이 그에게 연오의 본모습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말해 주고 싶어도, 보복이 두려워서 실행에 옮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

연오는 화를 꾹꾹 눌러 참으며 그를 지나쳤다. 큰 보폭으로 마루를 성큼성큼 걸었다. 벽하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야 했다.

* * *

고급스러운 양탄자 위에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옆에 서 있던 사람이 마른 수건을 건넸다. 하제는 그것을 건성으로 받아들며 고개를 흔들었다.

파바박!

새카만 머리카락 끝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마구잡이로 물이 튀는데도, 그에게 수건을 건네준 뱀 수인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켰다. 언제 봐도 참 사람다운 느낌이 없는 족속들이었다.

“물에 빠진 들개 같군.”

큼직한 쿠션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아메트가 하제의 행동을 평했다. 하도 말투가 무미건조해서 욕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았으나, 일단 기분이 나빴다.

“물에 빠진 들개가 아니라 비 맞은 늑대다.”

하제가 짜증스럽게 대꾸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대강 닦았다. 아메트의 눈이 미동도 없이 그를 물끄러미 좇았다.

비 오는 날의 갑작스러운 방문자. 하제는 언질도 한 번 없이 다짜고짜 아메샤 스펜타의 본부에 쳐들어왔다.

아메트는 원래 방문자를 맞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다른 뱀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그 또한 볕이 잘 들지 않고 깊은 곳에 있는 스스로의 보금자리에서 홀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미리 약속이 되어 있지 않은 불청객은 거절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수하에게서 하제의 방문 소식을 전달받은 아메트는 의외의 지시를 내렸다.

그는 하제를 들여보낼 것을 명했다. 심지어 손님맞이용 응접실도 아닌 그의 개인실로.

“나가 봐. 내가 부르기 전까지는 오지 말고.”

아메트가 나른하게 손을 내저었다. 뱀 수인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그에 답하고 물러갔다.

하제는 무심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전에 응접실을 방문했을 때 느꼈던 이국적인 퇴폐미가 이 방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묘한 분위기의 은은한 조명, 방 한쪽에 놓인 향로와 몇 겹이나 천을 드리운 사주식(四柱式) 침대, 바닥에 흩어진 수많은 쿠션과 자수를 놓은 천들. 방탕한 술탄의 하렘 같은 풍경이었다.

“아메트. 협상을…… 하자.”

수건을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올려둔 하제가 양탄자 위를 걸어 그에게 다가갔다. 채 닦아내지 못한 물방울이 그의 걸음걸음마다 떨어졌지만, 아메트도 하제도 그에 신경 쓰지 않았다.

“서문하제. 이제 내 손을 잡을 마음이 들었나?”

웃음기 하나 없이 하제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눈이 사르르 가늘어졌다.

“뭐가 알고 싶지? 어떤 진실이 궁금해? 이 도시에 내가 모르는 건 없으니, 뭐든지 알려 줄 수 있어.”

“…….”

“네 부모의 죽음에 대한 것? 아니면, 요즘 화리연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최근에 겪었던 습격 사건? 뭘 알려줄까.”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아.”

하제가 이를 악물고 끊어 말했다. 의외의 대답이었다.

“아니, 궁금하더라도 네게는 물어볼 일 없을 거다.”

“그럼 협상이라는 건?”

“뱀들은 유능한 의사라고 했지.”

하제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아메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고쳐 줘. 내 가신을. 목을 다쳐서 더는 말을 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고 한다. 너희들이라면 고칠 수 있지?”

아메트는 의외라는 듯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같은 노란색이지만 색조도 채도도 다른 두 눈이 탐색하듯 서로를 훑어보았다. 맹독을 품은 식물 같은 샛노란 눈동자와 꿀과 햇살을 섞은 것 같은 금빛 눈동자. 아슬아슬한 침묵이 흘렀다.

“눈물겨운 동족애군. 무려 늑대들의 가주 되는 자가 비를 흠뻑 맞고 찾아와서 부탁한다는 게…… 고작 부하 하나를 고쳐 달라고?”

“내 결정을 네게 설득시키기까지 해야 하나? 너는 그냥, 나와 거래를 하면 되는 거잖아. 그게 전부 아닌가?”

“협상에는 항상 대가가 따르는 법이지.”

“그래, 뭐든지 주지. 내가 줄 수 있는 거라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단호한 어조였다.

세 치 혀로 상대를 살살 홀려 거래를 유리한 쪽으로 모는 게 뱀들의 특기였다. 약점을 잡아 상대를 궁지에 몰고, 결국 원하는 걸 모조리 얻어내고 마는 것.

하지만 상대가 이렇게까지 대책 없이 맹목적으로 나오니, 오히려 그럴 마음이 사라졌다. 아메트가 아무 표정 없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 가신이 그렇게 네게 중요한가? 내가 대가로 무엇을 요구할 줄 알고.”

“중요하다면?”

“늑대들이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그들은 나를 위해 목숨을 걸었어. 그럼 나도 그들을 위해서 모든 걸 걸어야 맞지 않겠나.”

그렇게 말하는 하제의 눈빛은 내내 담담했다. 각오를 다진 자의 눈이었다. 동시에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무거운 책임을 짊어진 자의 눈이기도 했다.

당장이라도 이 도시를 뛰쳐나가고 싶어 하며 불만스러워하던 이가 언제 저렇게 변했는지. 최근에 일어난 사건들이 일종의 계기가 된 모양이었다. 아메트는 더욱 그가 흥미로워졌다.

“네 베타의 속이 썩어 문드러지겠구나.”

“그게 무슨 말이지?”

아메트가 갑자기 연오를 언급했다.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하제가 슬쩍 인상을 쓰며 되물었다.

“그는 네가 유능하고 완벽한 가주가 될수록 싫어할 테니까.”

하제가 설명을 바라는 듯한 눈을 했지만,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기껏 그 집요한 남자의 감시를 뿌리치고 둘이서 독대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 이런 순간에까지 그자의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

“좋아, 서문하제. 제안을 받아들이지. 네 가신에게 보내마. 이 도시에서 가장 유능한 의사를…….”

승낙은 의외로 쉽게 떨어졌다. 그가 저렇게 순순히 받아들일 정도면, 그 대가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닐 터이다. 하제가 조용히 물었다.

“대가는?”

“너의…… 밤.”

아메트가 손을 들어 올렸다. 혈색이 창백하지만 동시에 사내답게 큼직큼직하고 긴 손. 흰 손등 위에 푸르스름하게 핏줄이 비쳐 보였다.

그는 느긋한 동작으로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았다.

“하나, 둘, 셋……. 세 번이면 되겠어.”

“…….”

“해가 지면 여기로 오도록. 이 방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밤 동안 여기 머무르며 내가 시키는 걸 하다가 해가 뜨면 마음대로 나가도 돼. 그게 조건이야.”

기묘한 조건이었다. 아메트가 대가로 요구하는 게 금전이나 재산 같은 건 아닐 거라 짐작하긴 했지만, ‘세 번의 밤’이라는 이상한 것을 원할 줄은 몰랐다.

“이곳에서 생긴 일은 결코 바깥으로 나가지 않을 거다. 소문이 퍼질 일도, 상처를 달고 나갈 일도, 다른 이들에게 영향이 가는 일도 없을 거야…….”

“방 안에 가둬놓고 밤새 고문이라도 할 셈인가? 아니면 신약 임상 실험? 화풀이용 샌드백?”

이상야릇한 표정을 하고 있던 하제가 일단 짚이는 것들을 하나하나 나열했다. 그의 머리로는 그 정도가 한계였다.

아메트는 아무 말 없이 빙그레 웃기만 했다. 온화하고 선량한 것과는 거리가 멀게 생긴 남자가 그리 웃으니 그저 등골이 오싹할 뿐이었다.

“그럼 첫 번째 밤을 시작할까. 아……. 혹시라도 내키지 않으면, 오늘은 이만 돌아가고 다음에 와도 좋아.”

“아니, 상관없어.”

하제가 즉답했다. 마침 창밖에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나았다. 아메트가 자신을 데리고 무슨 짓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괜히 불안과 두려움에 떨며 기다리느니 지금 겪기로 했다.

상대의 동의가 떨어지자 아메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하제는 맹세코, 저 남자가 저렇게 진하게 웃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아메트가 까딱까딱 손짓했다.

“그럼 이리 와서 앉도록 해.”

첫 지시는 생각보다 멀쩡했다. 정체불명의 독약을 마시라든가, 가만히 서서 때리는 대로 두들겨 맞으라든가, 그런 걸 상상했는데.

하제는 별생각 없이 옆에 있는 테이블에서 의자를 빼 앉으려 했다. 하지만 그의 동작은 도중에 저지되었다.

“아니, 하제야.”

아메트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그를 불러 세웠다. 스르르 느리게 흘러내리는 검은 비단 같은 저음이 귓가에 파고들었다.

“여기…….”

그는 한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확히는 쿠션에 나태하게 걸터앉은 자신의 다리 사이, 그 아래 양탄자가 깔린 바닥을.

“여기에 앉아야지.”

“뭐?”

상대의 말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하제가 멍하니 반문했다.

하지만 아메트는 자신의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다리 사이 바닥을 가리키고 있는, 느슨하지만 단호한 손짓.

반쯤 얼떨떨해진 채 그는 아메트에게 걸어갔다. 한 발짝 정도 간격을 두고 바로 앞에 서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눈으로 아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혼란과 당황, 어리둥절함이 고스란히 드러난 눈. 아메트는 그 모든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세 번의 밤을 대가로 받겠다는 말의 뜻을 곧장 이해하지 못할 때부터 짐작은 했지만, 서문하제라는 남자는 생각보다 순진했다.

의외였다. 인간 세상에서 오래 지냈으니 이미 온갖 상대들과 구를 대로 굴러 본 줄 알았는데. 기괴하고 변태적인 방식으로 쾌락을 즐기는 건 인간들을 따를 수가 없으니.

잠시 망설이던 하제가 아메트의 앞에 앉았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였다. 비를 맞으며 온 탓에 반쯤 젖어 있는 셔츠와 바지. 몸의 윤곽이 언뜻 드러났다.

“서문하제.”

아메트가 맨발을 뻗어 그의 다른 한쪽 허벅지를 꾹 눌렀다. 위에서부터 누르는 힘에 의해 억지로 무릎이 털썩 꿇려졌다. 본의 아니게 양쪽 무릎을 모두 꿇고 다소곳한 자세로 앉게 된 하제가 그를 노려보았다.

“옷 벗어.”

아메트가 가볍게 턱짓했다. 완벽한 명령조였다.

“젖은 옷을 언제까지 입고 있을 셈이야. 보는 내가 다 불쾌하군.”

빠득, 하제가 작게 이를 가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는 저항하지 않았다.

상대를 형형하게 쏘아보던 것도 잠시, 하제는 순순히 자신의 셔츠 단추에 손을 댔다. 아메트는 부드러운 쿠션 위에 팔을 얹고 턱을 괸 채 그가 하는 양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젖은 셔츠의 단추가 위에서부터 툭툭 거침없이 풀려나갔다. 색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무덤덤한 손길이었다. 그 아래 서서히 드러나는 속살은 비를 맞은 데다 축축한 옷을 계속 입고 있었던 탓에 조금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대체 무엇이 저 자존심 강하고 뻣뻣한 자를 저리도 고분고분하게 만든 것일까. 가주인지 뭔지 하는, 우두머리로서의 자긍심? 아니면 다친 이에 대한 개인적 호감?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아메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뱀들 사이에는 반역과 복종, 두 가지 관계만이 존재했으므로.

툭.

하제가 벗어 내린 셔츠가 허물처럼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바지 하나만 입은 차림이 되어, 이를 악문 채 말없이 바닥만을 내려다보았다. 수치심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아메트는 그의 수치스러워하는 반응마저도 달게 관찰했다.

아메트의 시선이 하제의 목덜미에서부터 허리 아래까지를, 소년과 청년의 사이에 있는 잘 짜인 육체를 쭉 훑어 내렸다. 성욕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는 노골적인 눈이었다.

코앞의 상대를 실컷 감상한 후에, 아메트는 손을 뻗었다. 스르르 다가온 그의 손끝이 하제의 젖은 앞머리에 닿았다.

하제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사람을 불러다 억지로 무릎을 꿇게 하고 옷까지 벗으라 하더니, 이제는 머리카락을 건드린다. 대체 아메트가 뭘 하고 싶은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

위에서 오싹할 정도로 낮은 어조로 명령이 떨어졌다. 하제는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참았다.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은 검은 머리칼 사이를 느긋하게 헤집던 손이 한순간 앞머리를 움켜쥐었다.

“윽!”

머리채를 휘어잡아 강제로 넘기자 이마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두피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하제가 인상을 썼다. 하제의 고개가 살짝 뒤로 젖혀지며 절로 아메트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메트는 여전히 아무 표정이 없었다. 나른한 눈매 아래 드리운 긴 속눈썹이 게으르게 깜빡였다. 위아래로 길게 뻗은 동공이 바늘처럼 가늘어지며, 황록색 눈동자가 서서히 하제의 얼굴 생김새를 더듬었다.

하제의 이마를, 눈매를, 콧잔등을 집요하게 훑어보던 눈길이 마침내 그의 입술에 닿았다. 아메트가 피식 웃었다.

“이제 뭘 해야 할지 알겠어?”

“무슨 말을.”

“다리 사이에 앉혀 놓고 옷을 벗겼으면, 그다음 시킬 일은 뻔하지 않나?”

아메트가 하제의 앞머리를 움켜쥔 그대로 확 잡아당겼다. 상대를 동등한 인격체로 보고 있지 않은 잔인한 손길이었다.

“큭.”

하제는 짤막한 신음과 함께 그의 허벅지 안쪽에 고개를 들이박았다. 남자의 허벅지는 탄탄했다. 근육에 부딪힌 이마와 뺨이 얼얼했다.

“지퍼 열어…….”

아메트가 나직하게 명령했다.

“열고, 빨아.”

하제는 순간 숨을 쉬는 것을 잊었다. 아메트가 자신에게 요구하려는 것을 드디어 눈치챈 탓이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그의 눈에 불이 확 붙었다.

“너, 이 씨발.”

“왜, 서문하제. 뭐든지 하겠다고 한 건 너 아닌가.”

“그래서 결국 시킨다는 게, 네 좆을 빨라고? 변태 새끼.”

하제가 살벌하게 이를 갈았다. 아메트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머리채를 쥐고 있던 손을 놓고 하제의 뺨을 손등으로 툭툭 건드렸다.

“상관없어? 호해유리가 평생 성대가 찢어진 채로 살아도.”

순수한 분노로 물들어 있던 하제의 얼굴이 그 말을 듣자마자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아, 이거였구나. 아메트의 속에 저열한 만족감이 퍼졌다. 하제를 틀어쥘 수 있는 약점을, 그를 한없이 꺾이게 만드는 근원을 발견했다.

서문가의 늑대들. 하제의 이름 아래 엮인 이들을 들이미는 한, 하제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하제는 그들의 알파였으므로.

그깟 가문이 뭐라고, 가신들이 뭐라고. 가문을 이어받는 게 싫어 집을 뛰쳐나간 주제에, 하제는 자신의 아버지가 짊어졌던 책임을 고스란히 이어받고야 말았다.

결국 이게 네 운명이라는 걸까. 누군가를 이끌기 위해 태어난 자의.

아메트가 흐릿한 웃음을 베어 문 채, 재촉하듯 손바닥 전체로 하제의 뒷머리를 감싸 당겼다. 하제가 질끈 눈을 감았다.

이윽고 지익, 하고 바지 지퍼 열리는 소리가 고요한 방 안을 메웠다.

남자의 성기를 동물에 비유하는 말은 많다. 귀두는 거북의 머리를 일컫는 말이며, 포경은 고래잡이라는 뜻을 가졌다.

또한 남성기는 뱀에 비유되기도 한다. 길고 굵으며, 유연하게 풀어졌다가도 얼마든지 단단해질 수 있는 기관.

하제는 더듬더듬 아메트의 허벅지에 손을 뻗어, 극심한 거부감과 혐오감을 드러내며 어렵게 지퍼를 열고 속옷을 끌어 내렸다. 그리고 잠시 말을 잃었다.

“…….”

뱀은 뱀이었다. 아니, 뱀이 아니라 구렁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 아메트는 종족의 이름에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사이즈의 소유자였다.

같은 남자끼리라서 거북한 게 아니었다. 하제가 동성끼리의 접촉을 꺼렸다면, 애초에 가리온에게 한 판 하자느니, 이쁜이라느니 하는 장난을 치지도 않았다. 누리에게 장난삼아 뽀뽀를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연오와 벗은 채 키스하며 뒹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냥 상대가 아메트라서, 지금 이 상황이 강압적인 관계여서 싫었던 것이다.

거기다 하제는 싫은 이유 하나를 더 추가했다. 누가 뱀 아니랄까 봐 저 새끼 좆은 좆같이 굵고 컸다. 이딴 걸 빨라니, 양심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남자 좆을 빨아 본 적은 없지만, 저건 눈으로만 봐도 대충 견적이 나왔다. 도저히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두려움이 고스란히 서린 눈으로 성기를 바라보고 있자니, 앞섶이 열린 바지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 한층 더 흉흉하게 고개를 들었다. 하제가 저도 모르게 흠칫 고개를 뒤로 물렸다.

“서문하제……. 뭘 보고만 있어.”

아메트의 음성에 어렴풋이 짜증이 어렸다. 이 정도면 그로서는 많이 참은 편이었다. 시킨 일을 하기는커녕 상대가 계속 꾸물대기만 하자, 슬슬 그의 얕은 인내심에도 한계가 왔다.

모욕감으로 처참하게 굳은 표정을 한 채, 하제가 어렵게 손을 뻗었다. 이 상황이 끔찍하게 싫어서, 아메트의 성기 아래쪽을 어렵사리 붙잡는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는 성기 위에 고개를 숙이고 아랫입술을 깨문 채 한참이나 숨을 골랐다.

결국 참지 못한 아메트는 하제의 뒷머리를 움켜쥐고 자신의 성기 위에 꽉 눌렀다.

“큽!”

뻣뻣이 일어선 성기가 입매 위에 꾹 눌러지다가, 결국 힘이 빠진 입술 사이를 비집고 밀려 들어갔다. 두꺼운 귀두가 혀 위를 누르며 들어와서 입천장 안쪽을 찔렀다.

한순간 헛구역질이 왈칵 치밀어 올랐다. 하제가 반사적으로 팔을 뻗어, 있는 힘껏 아메트를 뿌리쳤다. 그는 몇 번이고 기침을 했다. 눈가와 뺨에 발갛게 물이 들고, 생리적인 눈물이 고였다.

“서문하제.”

아메트가 신경질적으로 하제의 고개를 확 젖혔다. 머리칼이 통째로 뽑혀나가는 것처럼 아팠다. 하제가 헐떡이며 눈물 맺힌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노란 눈동자가 괴로움으로 흐려져 있었다.

“내가 네게 얼마나 더 관용을 베풀어야 하지? 응?”

“콜록, 컥, 허억.”

하제의 머리채를 잡아 젖힌 채, 아메트가 시선을 돌렸다. 마침 벽에서부터 길게 늘어진 휘장이 눈에 들어왔다. 자줏빛 공단에, 끝에 금으로 된 사슬이 달려 있는.

뚜둑!

아메트는 휘장 끝에 달린 사슬을 뜯어냈다. 금속으로 된 사슬이 그의 손힘을 못 이기고 허무할 정도로 쉽게 뜯겨 나갔다.

사슬은 장식용이라 굵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튼튼했다. 누군가를 구속할 만큼은.

차르륵. 금빛 사슬이 아메트의 손아귀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것을 손에 쥐고 한 번 팽팽하게 잡아당겨 본 아메트가 하제의 목에 사슬을 둘렀다.

살갗에 차가운 금속이 닿는 느낌에 하제가 흠칫했다. 뜯어낸 끄트머리 부분을 사슬 중간에 찰칵, 끼워 넣자 금속 목줄이 완성되었다.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으려 했는데. 그러게 왜 말을 안 들어.”

아메트가 작게 혀를 차더니 사슬 끄트머리를 짧게 고쳐 쥐고 확 잡아당겼다. 하제가 큭, 하고 신음하며 강제로 끌려왔다. 증오 어린 눈동자가 아메트를 올려다보았다.

“빨라고 했잖아, 하제야…….”

요사스러운 뱀의 목소리가 가만가만 속삭였다.

“왜, 못 하겠어? 그만둘까?”

창백한 안색으로 그 말을 듣던 하제가 파르르 떨리는 눈을 감았다. 입술은 이미 몇 번이고 짓씹어서 핏기가 맺혀 있었다.

끓어오르는 모멸감과 분노를 표출할 길이 없었다. 그는 바닥에 깔린 부드러운 양탄자를 마구잡이로 쥐어뜯었다. 악에 받쳐 잔뜩 힘이 들어간 손등에 뼈대가 서고 힘줄이 돋았다.

참아야 했다. 누리를, 그리고 자신이 지켜야 할 이들을 위해서. 그는 가신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마침내 생각이 연오에게까지 닿자, 마음 한쪽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싸해졌다.

하제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커다란 귀두를 입술 사이에 어렵게 물었다.

귀두와 기둥 끄트머리를 문 것만으로도 입안이 가득 찼다. 귀두가 자꾸 목구멍 쪽을 찔러서 숨이 막히고 구역질이 났다. 하제는 악전고투 끝에 간신히 혀를 움직이려 노력해 보았다.

“더럽게 못 하는군.”

아메트가 한 마디로 그의 혀 놀림을 평했다. 그 말을 듣던 하제는 울컥했다. 씨발, 그럼 시키질 말든가. 속에서부터 반사적으로 쌍욕이 확 치솟아 올랐다.

차가운 손이 목줄이 채워진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아메트는 하제의 목덜미를 꾹 눌러 억지로 자신의 것을 더욱 깊이 머금게 했다.

굵은 기둥이 좁은 입안을 억지로 벌리며 꾸역꾸역 밀고 들어왔다. 연한 안쪽 입천장을 무자비하게 짓이긴 성기가 한 번 뒤로 빠졌다가, 다시 콱 박혀 들었다. 이번엔 더 깊었다.

“컥……!”

목구멍이 빠듯하게 벌어졌다. 하제가 괴롭게 신음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렁그렁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려고 할 때마다 아메트가 가혹한 손길로 목에 매인 사슬을 잡아당겼다.

상대의 입속을 무자비하게 유린하며 퍽퍽 찧다가, 아메트가 나른하게 한숨을 쉬며 사슬을 쥔 손을 느슨히 했다.

“서투른 것도 정도가 있지, 이래서는 아무리 해도 끝이 안 나겠어. 아, 혹시…… 밤새 내 걸 빨고 싶은 건가?”

아메트가 놓아주자 턱턱 막히던 호흡이 일시에 터져 나왔다. 하제는 헐떡이며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입술이 타액인지 뭔지 모를 것으로 젖고, 뺨은 이미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씨, 발. 닥쳐, 물어뜯어 버리기 전에.”

“시범이라도, 보여 줄까?”

혀를 내밀어 자신의 입술을 핥은 아메트가 목 안쪽으로 낮게 웃었다.

“내가 네 걸 빨아주면…… 좀 학습이 되겠어?”

욕망이 듬뿍 담긴 유혹적인 목소리였다. 그의 발이 무릎을 꿇고 앉은 하제의 허벅지 안쪽을 파고들었다. 희고 모양 좋은 맨발이 노골적인 의도를 가지고 바지 앞섶을 꾹 누르며 문질렀다.

“흑, 으읏, 하지 마!”

상대방이 끔찍이도 싫은 것과 별개로, 자극은 충실하게 주어졌다. 하제가 이를 악물며 그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저딴 새끼의 발에 짓이겨지며 발기하기는 죽어도 싫었다.

“정말로 말을 안 들어 먹는군. 전혀 길이 안 들었어.”

그래서 네가 마음에 드는 거지만. 뒷말을 속으로 삼키고, 아메트는 쿠션이 마구잡이로 쌓인 소파 옆으로 손을 뻗었다.

레드 와인 병이 손에 잡혔다. 하제가 그를 방문했을 때 마침 마시려고 곁에 두고 있던 것이었다. 코르크는 열어 놓았으나, 아직 한 잔도 마시지 않아 술은 병목까지 찰랑찰랑 차 있었다.

아메트는 술병을 거꾸로 들어, 그 안에 든 와인을 하제의 몸에 거리낌 없이 쏟아부었다.

촤악, 주르륵.

차갑고 붉은 액체가 하제의 목덜미를, 아무것도 걸치고 있지 않은 맨 어깨를, 잘 빠진 배와 옆구리를, 무릎을 꿇고 앉은 탄탄한 허벅지를 적셨다.

“…….”

하제는 너무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넋이 나가서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기만 했다. 값비싼 양탄자가 술에 흠뻑 젖었다.

아메트가 사슬을 잡아당겼다. 아까보다 훨씬 억센 손길이었다. 기도가 콱 조였다. 하제의 상체가 속절없이 끌려 올라갔다.

“어쩔 수 없잖아. 다른 방법을 택할 수밖에.”

“미친 새끼야, 뭐 하는 거야!”

그는 하제의 반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큼직한 쿠션 쪽으로 밀어 쓰러뜨렸다. 어두운 붉은빛 벨벳 커버가 씌워진 보드라운 쿠션에 옅게 와인 얼룩이 졌다.

한 손에 목줄을 쥔 채 다른 손으로 하제의 어깨를 잡아 쿠션 위에 짓누르며, 아메트는 그의 위에 올라탔다.

“네가 끔찍이도 혀를 못 쓰니까.”

적포도주가 엷게 스민 쇄골에 타인의 혀가 닿았다. 아메트는 하제의 목덜미에 고개를 박은 채 여린 살갗을 깨물고 핥았다. 따뜻한 체온에 데워져 한층 풍부해진 와인 향이 혀끝에 감돌았다. 쓰고, 달고, 떫고, 요염했다.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아래로 손을 뻗어 이미 잔뜩 젖어 제 기능을 못 하게 되어 버린 하제의 바지 단추를 풀었다.

기어이 아메트의 손길에 의해 하의가 벗겨졌다. 하제는 쿠션 위에 잔뜩 흐트러진 자태로 파묻힌 채 알몸이 되었다.

쪽, 쪼옥. 살결 위에 입술이 닿는 소리가 적나라했다. 아메트는 하제의 몸에 쏟아 버린 와인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핥아먹을 요량인지, 집요하게 그의 몸 곳곳을 애무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이번엔 간지러웠다. 하제가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뒤척였다. 아메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어깨를 꽉 붙잡은 채 입술을 묻었다.

젖은 소리를 내며 목을 핥고 빨던 입술이 아래로 내려갔다. 보드라운 혀로 쇄골과 어깻죽지를 약하게 간질이다가, 유두를 물었다. 잔인하리만치 폭력적으로 굴던 이답지 않게 부드러웠다.

“읏!”

묘한 간지러움을 못 이긴 하제의 손이 아메트의 등을 붙잡으려 무심코 허공에 휙 올라갔다가, 상대가 누군지를 깨닫고 다시 스르르 내려갔다.

“그만.”

하제가 헐떡이며 상대의 팔을 붙잡았다. 야릇한 감각을 참느라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그가 색색 거친 숨을 내쉬며 아메트를 올려다보았다.

“차라리 때리고 목을 졸라. 이건 도저히 안 되겠으니까…….”

아메트가 소리 없이 웃었다. 이제 슬슬 하제를 다루는 법을 알 것 같았다.

목줄을 잡아당기고 입에 억지로 성기를 쑤셔 넣으며 학대했을 때는 이를 악물고 끝까지 견디던 남자가, 조금 부드럽게 다루어 준 것 가지고 금세 약한 소리를 한다. 폭력보다는 쾌감에, 통증보다는 수치에 면역이 없는 자였다.

애무를 잠시 멈추고 하제의 위에서 반쯤 몸을 일으킨 아메트가 혀끝으로 스스로의 아랫입술을 슬쩍 훑더니, 입고 있던 셔츠를 느리게 벗었다.

약간 흐트러진 흑발, 혈색 없이 차가워 보이는 얼굴. 단추를 툭툭 풀고 어깨 아래로 옷자락을 끌어 내리는 모습이 이상하게도 유혹적이었다.

누가 누굴 유혹해? 저 새끼가, 나를?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뱀이 사냥감 잡아먹기 전에 혀 날름거리는 거랑 다를 바 없어 보이는데. 하제는 자신의 생각을 재빨리 부정했다.

털썩.

아메트의 새카만 셔츠가 아무렇게나 던져졌다. 옷자락 아래 흰 피부가 드러났다. 왼쪽 어깨와 가슴, 팔뚝 윗부분을 복잡한 문신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의 문신은 기괴한 동시에 경건했으며, 요사스러우면서도 아름다웠다.

가시덩굴인지 얽힌 끈인지 모를 정교한 장식들, 금속 쐐기들, 신화적 상징들 가운데 스스로의 꼬리를 물고 둥글게 몸을 만 뱀 한 마리가 있었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비늘 하나하나까지 극도로 섬세하게 묘사해 놓았다.

저 뱀은 우로보로스일까, 요르문간드일까. 아메트의 어깻죽지에 자리한 뱀의 섬뜩한 눈동자가 하제를 흉흉하게 노려보는 것 같았다.

하제를 위에서 빤히 내려보다가, 아메트는 그의 입술 사이에 엄지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길고 단단한 남자의 손가락이 강제로 입술을 헤집자, 타의에 의해 하제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아메트는 아무 표정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얼굴이 느릿하게 다가왔다. 흘러내린 흑발이 하제의 뺨을 언뜻 스쳤다.

둘의 입술이 막 닿을 듯 말 듯 가까워지는 순간, 하제가 고개를 확 돌렸다. 명백한 거부였다. 잠시 그 자세 그대로 멈추어 있던 아메트가 스르르 고개를 들며 명령했다.

“……서문하제. 다리 벌려.”

이윽고 아메트의 손이 우악스럽게 하제의 허벅지를 잡아 벌렸다. 가슴과 배가 맞닿도록 몸을 겹치고, 손아귀 안에 두 개의 성기를 동시에 감싸 쥐었다.

아메트는 하제를 괴롭히며 아슬아슬한 성적 긴장을 즐기던 태도를 손바닥 뒤집듯 바꾸었다. 그는 더 이상 뜸을 들이지도 간을 보지도 않고, 본능에 충실하게 움직였다.

성기끼리 진득하게 비벼지도록 흔드는 동작은 매우 정직했다. 자지를 문질러서 정액을 내보내야겠다는 의도 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손길이었다.

탁, 탁, 탁. 외설적인 소리가 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메트는 점차 속도를 높였다. 상대의 사정 따윈 전혀 봐 주지 않는 강압적인 애무였다.

“으, 읏, 흐윽.”

하제가 이를 악물며 힘겹게 고개를 뒤척였다. 잇새로 드문드문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차라리 두들겨 패고, 모욕을 주고, 고통을 가하는 게 나았다. 이런 건…… 정말로 견디기 힘들었다. 끔찍이 싫은 상대의 손에 성기를 잡힌 채 발기하는 자신이, 이 행위에서 쾌감을 느끼는 자신이 못 견디게 혐오스러웠다.

사정을 억지로 참느라 하제의 허벅지에 뻣뻣하게 힘이 들어가고 발끝이 오므라들었다. 그것을 민감하게 알아챈 아메트가 그의 목에 걸린 사슬을 잡아당기며 귓가에 속삭였다.

“싸도 돼.”

“되긴 뭘, 돼, 씨발 놈아. 흐윽, 당장 손 떼.”

하제는 속으로 온갖 욕설을 주워섬겼다. 쾌락과 수치와 자기 혐오와 상대방에 대한 증오가 뒤섞여서,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는 언제까지고 참지는 못했다. 쾌감을 꾸역꾸역 참던 하제는 한계까지 억지로 몰린 끝에, 쿠션에 옆얼굴을 파묻고 이를 빠득 갈며 사정했다.

“헉, 흐으……!”

손을 위아래로 움직여 기둥을 문지를 때마다 새하얀 정액이 울컥울컥 새어 나왔다. 아메트는 절정에 달하는 하제의 얼굴을, 그의 배를 스스로의 정액이 적시는 것을 낱낱이 확인하고 나서야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큭…….”

짤막한 신음. 하제의 옆에 짚은 그의 한쪽 팔이 순간 움찔, 떨렸다. 절정의 신호였다.

어딘가 살아 있는 생물 같지 않던 아메트가 그 순간만큼은 하제와 똑같은 사람으로 느껴졌다. 피가 돌고 심장이 뛰고, 욕구를 느끼는.

이윽고 타인의 뜨뜻한 정액이 하제의 배 위에 한 번 더 떨어졌다. 두 사람분의 반투명한 체액이 뒤섞여 하제의 옆구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 * *

벗은 상체 위에 부드러운 천 자락을 휘감은 채로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 아메트가 하제에게 느리게 손짓했다.

“오늘은 이만 가 봐…….”

한 번 쾌락에 젖었던 얼굴에는 아직도 은은하게 혈색이 돌았다. 느슨하게 늘어지는 말꼬리에 권태가 묻어났다.

냉혈동물들의 특징이었다. 한 번 욕구가 동하면 무시무시하게 돌변했다가, 수그러들고 나면 느릿느릿하고 무기력해지는 것.

“아직 해가 안 떴는데.”

“해 뜰 때까지 있었던 걸로 쳐 줄 테니, 가 보도록 해.”

“…….”

“왜 그러지? 나와 밤새 있고 싶은 건가?”

아메트가 나른하게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전혀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 물음이었다. 하제의 낯이 소태를 씹은 것처럼 일그러졌다.

“아니. 네놈과 1초라도 더 같이 있기 싫다.”

그의 답을 들은 아메트는 배부른 맹수 같은 얼굴로 부드러운 쿠션에 몸을 기댔다.

“두 번째 밤은 각오해야 할 거야. 이렇게 다정하게 대해 주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 테니.”

“다정? 지랄하고 있네. 목줄을 매서 짐승 취급을 하는 게 다정이냐? 세상 다정 다 나가 뒈졌나.”

전혀 거리낌 없는 직설적인 반응이었다. 하제는 이제 아메트의 앞에서 몸을 사리는 걸 포기했다.

앞으로 그에게 성적으로 착취당할 일이 두 번이나 더 남았다. 이제 와서 탐색전을 하고 상대의 의중을 살피며 간을 보기는 너무 늦었다. 피차 서로의 밑바닥까지 다 까발린 김에, 더는 겸양 떨지 않기로 했다.

“누리를 고쳐 줄 수 있는 거, 맞지?”

방을 나서기 전 하제는 다시 한 번 되물었다. 쐐기를 박듯이.

“…….”

아메트는 대답조차 하지 않고 고개를 돌린 채 건성으로 손짓했다. 그렇다는 건지 말 걸지 말라는 건지 모를 제스처였다.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저 뱀 새끼는 참 최소한의 예의조차 없는 새끼였다. 하제는 짜증스럽게 그의 문을 쾅 닫고 나섰다.

자정에 가까운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아메샤 스펜타의 본부 입구를 지키는 뱀 수인은 언제나처럼 빈틈없는 태도였다. 하제는 별생각 없이 그를 지나쳐 밖으로 나서려 했다.

그때 뱀 수인이 그를 불렀다.

“실례합니다. 당주님께서 손님께 드리라 하셨습니다.”

그는 새까만 장우산 하나를 양손에 받쳐 든 채, 하제를 향해 공손하게 내밀었다. 하제는 그가 내민 우산을 한 번, 빗소리가 들리는 바깥쪽을 한 번 쳐다보았다.

하제가 아메트를 찾아왔던 몇 시간 전보다 비가 한층 거세어졌다. 언뜻 보이는 바깥은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거센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제는 선뜻 우산을 받아 들었다. 그는 길쭉한 장우산을 양손으로 들고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빠직, 콰드득.

그의 손안에서 우산이 깔끔하게 두 동강이 났다. 살이 죄다 꺾이고 기둥이 으스러졌다. 하제는 박살 난 우산을 다시 턱 건넸다.

“네 당주에게 전해 드려라.”

그렇게 말하며 씩 웃는 얼굴이 태연자약했다. 뱀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우산을 받아들고 무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예.”

하제는 우산 하나 없는 맨몸으로 문을 나서, 쏟아지는 비 가운데로 걸어 나갔다. 이윽고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 사이로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 * *

하제는 억수같이 내리는 빗속을 하염없이 걸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길에는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늦은 밤인 데다가 이렇게 비가 많이 내리니, 인적이 없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머리로, 어깨로, 팔다리로 쏟아지는 비는 차갑고 따가웠다. 그러다가 몸이 식으며 어느덧 미지근해졌다. 바닥을 세차게 때린 빗방울이 도로 튀어 하제의 발목을 적셨다.

그는 이 비가 오히려 반가웠다. 아예 더 세게, 더 빽빽하게 내려서 그의 몸에 남은 아메트의 흔적을 모두 지워 주길 바랐다.

모퉁이 하나만 돌면 서문가의 정문이 나온다. 널찍한 길 가운데 서서, 하제는 잠시 숨을 골랐다.

정확한 행선지도, 귀가 시간도 알리지 않고 나왔으니 지금쯤 집에서는 그를 걱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이유는 몰랐다. 그냥, 지금은 가신들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하제는 고개를 젖혀 새카만 하늘에서 퍼붓는 밤비를 고스란히 맞았다. 굵은 비가 혈색을 잃어 희게 질린 얼굴 위로 끊임없이 쏟아져 내렸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그는 곧 결심을 굳히고 발걸음을 옮겼다.

빗줄기에 가려 흐릿하게 빛나는 가로등 사이로 서문가의 정문이 보였다. 우아하게 뻗은 처마, 그 아래 문간에 누군가 서 있었다.

“연오야.”

무슨 생각을 하는지, 기둥에 기대어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연오의 시선이 하제에게 와 닿았다. 우렁차게 내리는 비와 캄캄한 어둠 속에서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푹 젖은 하제의 꼴을 보고, 그는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속을 읽을 수 없는 차분한 눈이었다.

“비를 맞으셨군요.”

“우산을 안 가지고 나가서…….”

하제가 말끝을 흐렸다.

어딜 갔다 오는 거냐고 무섭게 추궁할 줄 알았다. 아니면 누구와 있었던 거냐고 캐묻거나. 하지만 연오는 둘 중 어느 것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불길했다.

“술을 드셨습니까?”

연오가 불쑥 물었다. 하제는 잠시 말을 잃었다.

곧 짚이는 구석이 떠올랐다. 요란하게 내린 비가 그에게서 뱀의 체취와 정액의 냄새를 씻어냈을지언정, 옷에 흠뻑 스며든 와인의 향은 지우지 못한 모양이었다.

두 남자 사이에 한동안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다시 깬 것은 연오였다.

“이리 흠뻑 젖으셔서는…… 감기 걸리십니다.”

“아니, 감기는 네가 걸리겠다. 대체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야? 왜 겉옷도 안 걸치고 이런 얇은 차림으로 나와서 밤비를 맞아.”

“밤이 늦었는데도 돌아오시지 않기에.”

“내가 늦게 오든 말든 일단 너는 살고 봐야 할 거 아니냐. 내가 안 오면 너도 죽을래?”

“하제 님.”

연오가 조용히 그를 불렀다. 연오 자신은 알고 있을까. 하제가 가주가 된 뒤에도, 하제를 부르는 그의 호칭이 종종 오락가락한다는 것을.

“이 연오는 당신이 없으면 죽습니다.”

장난기가 조금도 없는 진지하고 단호한 음성이었다. 하제는 그의 눈동자를 지그시 올려다보다가, 쓰게 웃었다.

“그래.”

연오를 저렇게까지 불안하고 맹목적인 상태로 만든 건 자신이었다. 그러니까 책임을 져야 했다. 무엇을 걸어서라도, 어떤 일을 해서라도.

하제는 누리를 구하기 위해 세 번의 밤을 내걸었다. 연오를 구하기 위해서도 그는 얼마든지 자신을 희생할 수 있었다. 자괴감으로 흔들리던 마음이 연오의 말 한마디에 굳어졌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으셔서. 혹시 이번에야말로 제가 싫어져서 떠나신 걸까, 가신들이 너무도 무능해서 환멸이 나신 걸까, 한참 생각했는데.”

연오가 속삭였다. 싸늘하게 식어 있던 손이 하제의 파리한 뺨을 매만졌다.

“그래도, 기다렸습니다. 못 참고 당신을 찾아 헤맸다간 또 제게 화를 내실 거잖아요.”

“…….”

“착하게 기다렸으니까, 상을 주세요…….”

그는 저택의 커다란 나무 문 위에 하제를 기대게 한 채, 그를 자신의 품 안에 가두며 입을 맞추려 했다.

무심코 그의 입술을 받으려다 문득 아까 있었던 일이 하제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입은 몇 시간 전, 아메트의 것을 억지로 물었다. 이런 입술로 연오에게 닿을 수는 없었다.

탁!

반사적인 움직임이었다.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하제는 연오의 손길을 뿌리치며 몸을 뒤로 물렸다.

“아.”

연오가 짧게 탄식했다. 놀란 건지 기분이 상한 건지 모를 반응이었다.

하제는 자신이 상대를 밀어내 놓고도 영 혼란스러운 기색이었다. 어둡게 가라앉은 노란 눈동자가 자신의 손과 연오의 눈을 멍하니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만 들어가시지요. 몸이 많이 차가워지셨습니다.”

명백히 불안해 보이는 하제를 내려다보던 연오가 정중히 문을 열고 그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끊임없이 퍼붓는 차디찬 비와 함께 첫 번째 밤이 끝났다. 아직 두 번의 밤이 더 남았다.

* * *

하제가 두 번째 밤을 보내기 위해 아메트를 찾아간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한밤중에 비를 흠뻑 맞으며 돌아간 뒤로 그는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다. 물론 인간들만큼 몸이 약하지 않으니 비를 좀 맞았다고 해서 앓아눕지는 않았지만, 묘하게 몸이 무겁고 머리가 띵했다.

컨디션의 난조는 겉으로도 티가 났다. 맹수다운 예기로 빛나던 노란 눈이 힘없이 가라앉고 뺨과 입술이 파리하게 질렸다.

자신의 방에 찾아온 하제를 물끄러미 보던 아메트가 인사 대신 불쑥 말했다.

“살이 빠졌군.”

“근데, 뭐 어쩌라고.”

이 새끼랑 내가 서로 주거니 받거니 안부를 물을 사이인가? 하제는 그의 쓸데없는 질문이 짜증스러웠다. 그냥 불러다가 시킬 일을 시키고, 뒤끝 없이 재깍 헤어져 주는 게 그의 바람이었다.

“늑대들은 그나마 봐줄 거라고는 몸밖에 없지 않나. 그런데 그 몸까지 축나다니. 안타깝군.”

“네게 잘 보이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입 좀 닥치지그래.”

“자주 여기저기 아픈 모양이야……. 저번에 준 술이 몸보신하기에 모자랐던가?”

벨벳이 깔린 소파에 길게 드러누운 채 게으른 동작으로 차를 마시고 있던 아메트가 스르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그가 병문안을 왔을 때 선물한 뱀술에 대한 이야기였다.

“존나 충분했으니까 다신 그딴 거 가져오지 마라. 아니, 그냥 우리 집에 발을 들이질 마.”

모자랐다고 장난으로라도 말했다간 당장 문 앞에 선 제 부하를 잡아다 술을 담가 줄 기세였기에, 하제는 인상을 쓰며 재빨리 대답했다. 평소보다 낮게 잠긴 목소리 끝이 조금 갈라졌다.

“뭐…… 어찌 되었든, 받을 건 받아야겠지.”

아메트는 심드렁하게 이 영양가 없는 대화에 종지부를 찍었다. 하제의 몸 상태에 대해 언급한 건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흥미, 혹은 변덕에 지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서문하제. 여기 앉도록.”

그가 태연하게 손짓했다. 이번에 아메트가 가리키는 곳은 자신의 무릎 위였다.

아, 저 좆 같은 변태 새끼. 하제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아메트는 자신의 무릎 위에 하제를 앉혔다. 아무리 아메트가 하제보다 제법 크다지만, 그래도 다 큰 남자가 다 큰 남자를 허벅지에 올려 앉힌 광경은 이상야릇하기 짝이 없었다.

“차라리 그냥 바닥에 앉겠어. 저번처럼.”

그의 다리 위에 어정쩡하게 올라앉아 있다가, 결국 수치를 못 이긴 하제가 자신의 주장을 피력했다. 아메트는 진심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했다.

“왜지? 내 위에 올라타게 해 주겠다잖아. 아니면 목줄을 찬 채로 바닥을 뒹굴면서, 하등한 짐승 취급받는 게 더 좋은 건가?”

내가 말을 말자, 시발. 하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오늘 밤 아메트는 전략을 바꾼 것 같았다. 하제에게 고통을 주기보다는 그를 아예 수치와 굴욕으로 말려 죽일 모양이었다.

그는 하제와 했던 약속을 철저히 지켰다. 이 방 안에서 있었던 일을 결코 바깥으로 새어나가게 하지 않겠다던.

아메트의 부하들은 두 남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실제로 그들이 알든 모르든 간에, 일단 겉으로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또한 아메트는 하제가 돌아간 후에까지 후유증이 남을 만한 상처를 결코 새기지 않았다. 목줄에 쓸린 자국도, 아메트의 입술에 빨린 자국도, 몇 시간 후 해가 뜰 즈음이 되자 감쪽같이 사라졌다. 모든 것이 철저하게 계산되어 있었다.

상처가 좀 남더라도, 차라리 제 분을 못 이겨 마구잡이로 폭력을 휘두르는 게 나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몹시 불쾌했다.

“저번보다 확실히 몸이 상했어.”

하제를 자신의 허벅지 위에 마주 보는 자세로 앉혀 끌어안은 채, 비스듬히 소파에 등을 기대며 아메트가 말했다. 원래도 그다지 우락부락한 체격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팔 안에 감기는 허리가 확실히 가늘어져 있었다.

“근육이 빠진 건가.”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 같은 덤덤한 어조였다. 아메트가 하제의 건강 상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아직 버리지 못한 일종의 직업병 같은 것이기도 했고, 그저 그가 하제 자체에 지대한 흥미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다른 수인들 사이에서 늑대는 그다지 좋은 연애 상대가 아니었다. 그들은 일단 자신의 알파에게 몹시도 충성스러웠고, 일생에 단 하나뿐인 반려에게 영혼까지 뽑아 바칠 듯 애틋하게 굴었다.

지나치게 폐쇄적인 성정 탓에 동족을 제외한 다른 이들에게는 이를 드러내며 죽을 때까지 저항했다. 타인에게 길드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할 이들이었다.

여우처럼 앙큼하게 교태를 떨지도 않고, 개처럼 호감을 직설적으로 드러내며 구애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늑대들이 매력적인 점이 있다면 바로 몸이었다.

뇌까지 근육으로 가득 찬 단순무식한 족속들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그들의 몸매 하나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과하게 육중하지도 너무 빈약하지도 않은, 늘씬한 근육으로 다져진 건강한 몸.

“헛소리하지 마. 안 빠졌으니까.”

나름대로 종족의 자부심이라면 자부심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을 지적받으니 기분이 나쁜 게 당연했다. 하제가 자신의 허리에 둘린 아메트의 팔을 휙 뿌리쳤다.

아메트는 그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소리죽여 웃었다. 느긋한 웃음이 목을 낮게 울렸다.

그는 하제의 목덜미에 입술을 댔다. 콩, 콩, 규칙적으로 뛰는 경동맥의 움직임을 윗입술을 통해 가만히 느꼈다.

온혈동물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그냥 그의 특성인 건지, 하제는 아메트보다 확실히 맥이 빠르고 강했다. 몸 상태가 나쁜 탓에 평소보다 체온이 높았다.

“읏…….”

목에서 느껴지는 간질간질한 느낌에 하제가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아메트는 그의 허리를 붙잡아 고정하며, 다른 한 손을 바지 속으로 밀어 넣었다.

남자의 큰 손이 옷 속으로 비집고 들어와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만져질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곳에 낯선 손이 닿았다.

하제가 크게 놀라 움찔했다. 그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뻣뻣하게 세웠다. 아메트의 위에 걸터앉아 있던 몸이 순간 미끄러지며, 다리 사이로 타인의 허벅지가 더욱 깊숙이 들어와 얽혔다.

“시발, 어딜 만지는…….”

“내가 네 겉만 물고 빨다가 곱게 돌려보내 줄 줄 알았어?”

손이 더욱 깊이 들어왔다. 속옷 위로 엉덩이를 한 번 콱 움켜쥐었다 놓더니,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이제는 아주 속옷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여길 건드리는 게 당연하잖아. 교미를 하려면.”

하제는 말을 잃었다. 아메트가 다짜고짜 구강성교를 강요할 때부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정말로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그는 섹스보다는 상대를 학대하고 고문하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아 보였으니까.

팔자에도 없던, 죽도록 싫어하는 뱀 새끼와 몸을 섞어야 할 처지에 처했다. 그것도 자신이 깔리는 쪽으로.

생각만 해도 속이 뒤집히고 소름이 돋았다. 저번에 보았던 아메트의 흉흉하기 짝이 없는 거대한 물건을 생각하자 기분이 더욱 불쾌해졌다.

“죽여 버리겠어.”

하제가 고개를 푹 숙이며 이를 갈았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서 갈 곳을 잃은 증오와 모멸감이 뚝뚝 묻어 나왔다. 아메트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 꼭 내가 강제하는 것 같이 들리는군. 싫으면 얼마든지 그만두고 나가도 좋아. 지금이라도.”

“…….”

“네 가신의 수술이 당장 내일이라던데…… 부디 쾌유를 빌지.”

“씨발 새끼.”

하제가 힘겹게 입술을 깨물며, 분노로 거칠어지려는 숨을 참았다.

누리를 걸고 협박하며 몰아붙이는 아메트도 싫고, 이 지랄 같은 상황 자체도 싫었으며……. 그보다도, 가신 하나 제 손으로 지키지 못해 다른 이의 힘을 빌려야 하는 스스로가 가장 싫었다.

그는 어느새인가 주먹을 힘껏 움켜쥐고 있었다. 손마디가 하얗게 질리고 손톱이 손바닥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아메트의 희고 큰 손이 스르르 뻗어 와, 주먹을 쥔 하제의 손을 느릿하게 폈다. 작은 초승달 모양의 손톱자국이 여러 개 남은 손바닥 위에 자신의 손을 겹치고 단단히 깍지를 꼈다. 더는 자해하지 못하도록.

“하제야.”

아래에서 샛노란 눈을 가진 남자가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천진난만하고 흉악한 얼굴로.

“…….”

하제는 끝내 그의 호명에 답하지 않았다.

* * *

상의는 훌렁 벗겨져 저만치 나뒹굴고 있고, 하의는 속옷과 함께 종아리에 아슬아슬하게 걸렸다.

하제는 맨몸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아메트의 위에 앉혀졌다. 그 와중에 아메트는 옷자락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완벽한 차림이라는 점이 더욱 그의 수치심에 불을 지폈다.

아메트는 작은 유리병을 기울여 그 안에 든 것을 손바닥에 따랐다. 투명하고 점성이 있는 액체가 스르르 흘러나왔다.

“원래는 그냥 벗겨서, 쑤셔 박으려고 했는데.”

손바닥 위에 고인 향유를 아무 감흥 없는 동작으로 손가락에 문질러 바르며, 아메트가 담담하게 고백했다.

“울부짖고, 피가 낭자하고, 도중에 기절하는 것도 꽤 괜찮을 것 같아서.”

하제는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저 새끼는 그냥 변태 새끼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변태도 저런 상변태가 없었다. 취향이 참으로 추악하고 흉물스러웠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이쪽이 더 재미있겠더라고.”

그는 하제를 고통으로 울리는 것보다는 쾌락으로 울리는 쪽을 택했다. 자신의 손에 발기했다는 것만으로도 몹시 수치스러워하던 이인데, 그런 상대에게 박히면서 느끼면 과연 어떤 표정을 보여 주려나 싶어서 벌써 마음이 설렜다.

아메트가 하제에게로 고개를 기울였다. 맥박이 뛰는 자리를 앞니로 살짝 긁다가, 입술로 가볍게 빨았다. 살갗이 연한 곳이라 곧 붉은 자국이 남았다.

“힘 풀어.”

향유를 발라 매끄러워진 손가락이 엉덩이 사이로 파고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행위에 극도로 거부 반응을 보이는 몸을 억지로 열고, 손가락 하나를 밀어 넣었다. 안쪽이 뜨거웠다.

“아…… 아, 흐윽.”

하제가 잇새로 앓는 소리를 내며 아메트의 어깨 위로 쓰러졌다. 죽어도 저 남자에게는 기대기 싫어 아득바득 몸을 세우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럴 겨를마저도 없어진 모양이었다.

“서문하제. 힘, 풀라고 했을 텐데.”

아메트가 무미건조하게 말하며 젖은 손가락으로 느리게 안을 헤집었다.

“손가락 하나도 제대로 못 받아먹잖아……. 대체 언제까지 시간을 끌 셈이야. 응?”

아메트는 하제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이렇게 꾸물거리다간, 해가 뜰 때까지 내 걸 품고 있어야 할 거다.”

“…….”

“제대로 안 풀고 처박히는 게 좋으면 그렇게 해 주지.”

“아메트…….”

하제의 표정이 왈칵 일그러졌다. 그는 씹어 뱉는 것 같은 목소리로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왜 갑자기 그의 이름을 부른 것일까. 애원하려는 건지, 상대를 저주하려는 건지, 아니면 그저 울분을 터뜨리려는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아메트는 집요하게 그를 끌어안은 채로, 결국 손가락 두 개를 하제의 안에 넣는 데 성공했다.

긴장이 조금도 풀리지 않아 내벽은 여전히 좁았고, 안쪽의 체온이 델 것처럼 뜨거웠다. 원래 체온이 낮은 편인 아메트에게는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강한 열기였다.

그는 하제의 얼굴을 무심코 올려다보았다. 싫은 것을 참아내느라 찡그린 얼굴, 꽉 깨문 입술. 상대의 낯빛을 낱낱이 살피며 손가락을 느릿하게 움직였다.

“흐으, 윽.”

어느 순간 하제가 흐느끼듯이 신음하며 몸을 굳혔다. 기분 나쁠 정도로 생경한 감각이었다. 둔탁하고 느슨한 열기가 배 안쪽에서부터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안쪽을 문지르며 움직이는 동작이 조금 더 과감해졌다. 하제는 어쩔 줄 몰라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아메트의 어깨를 밀어냈다. 하지만 대리석을 조각한 것 같은 탄탄한 어깨는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아, 읏, 하지 마. 하지 마, 제발!”

처음으로 하제에게서 제발, 이라는 애원의 말이 튀어나왔다.

“너…… 섰어.”

아메트가 손을 멈추지 않고 움직이며 무표정하게 그의 상태를 알렸다. 하제는 더욱 참담한 기색이 되었다. 어떻게든 상대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뒤틀고 고개를 필사적으로 내저었다.

“하지 마! 목줄이든, 무릎 꿇는 거든, 뭐든 할 테니까.”

손가락을 깊숙이 밀어 넣고 안쪽을 꾹꾹 문지르며, 아메트는 다른 한 손으로 하제의 성기를 붙잡았다. 반쯤 일어선 것을 몇 번 만져 주자 금방 딱딱하게 모양을 갖추었다.

“아메트, 제발.”

끊어질 듯 절박한 목소리였다. 목이 쉬어서 음색이 쩍쩍 갈라지는 것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하제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결국 아메트의 어깨에 이마를 털썩 기댔다. 이마마저 불이 붙은 듯 뜨거웠다.

열이……. 아메트는 동요 없는 서늘한 표정 아래로 생각했다. 상대의 성기를 쥐고 문지르며 동시에 빠듯한 내벽을 쑤시는 손길이 조금 더 격렬해졌다.

“흐윽, 읏, 아, 아!”

잔뜩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조금도 원하지 않는 쾌감이 멋대로 몸 안쪽을 조여들게 하고, 아랫배를 간지럽혔다.

결국 하제는 아메트의 허벅지 위에 앉아 그를 마주 본 채로, 그의 손가락을 뒤로 꽈악 조이면서, 처참하기 짝이 없는 꼴로 절정에 달했다. 쏘아진 정액이 하제의 배와 아메트의 셔츠를 동시에 적셨다.

그는 사정이 끝난 뒤에도 아메트의 품 안에 힘없이 쓰러진 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푹 떨군 탓에 마구잡이로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 창백한 목덜미. 불안정한 숨소리가 힘겹게 색색 새어 나왔다.

“…….”

아메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 없는 얼굴로 하제를 한참이나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는 천천히 팔을 뻗어 향유와 정액으로 진득하게 젖은 손을 옆에 놓인 벨벳에 아무렇게나 닦았다.

이윽고 아메트는 하제를 품에 안은 채 조용히 일어섰다. 양탄자가 깔린 널찍한 방을 가로질러, 짙은 빛깔의 하늘하늘한 천이 가득 드리운 당주의 침대에 그를 눕혔다.

하제는 그날 밤이 지나고 해가 뜰 때까지 아메트의 침대에서 잠들어 있었다. 누리가 수술을 받는 날이 밝을 때까지.

* * *

서문가의 저택에는 가신들 전원이 모이는 일이 드물었다. 새벽부터 밤까지 각자 번갈아 가며 순찰을 다녀와야 했기 때문이다. 열 명은 넘고 스무 명은 안 되는 구성원들 중 일고여덟 명 정도는 항상 부재중이었다.

하제가 해가 뜨고 나서 집에 돌아왔을 때도 연오는 마침 일 문제로 쭉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를 일이었다.

오늘 저녁, 저택의 본당에는 늑대들이 거의 모두 모여 있었다. 보기 드문 일이었다. 누리의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 것을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누리는 아직 퇴원하지 못했으므로 이 자리에 없었다. 말하자면 누리 없는 누리 팀이었다.

주인공을 빼놓은 채로도 연회는 착착 준비되었다. 술을 준비하고, 사람 수대로 잔과 수저를 놓았다.

그때, 드르륵 소리와 함께 안채에서 본당으로 이어지는 문이 열렸다. 하제가 막 순찰을 마치고 돌아왔다. 연청색 철릭에 붉은 술이 달린 끈으로 허리를 졸라맨 차림이었다. 눈매를 따라 붉은 화장을 하고, 귓가에 은 귀걸이를 달았다.

“가주님이다!”

“가주님 오셨다!”

늑대들이 신이 나서 소리를 질렀다. 이 파티에 빠질 수 없는 사람의 등장이었다.

“시끄럽다……. 소리 지르지 마라.”

하제가 짜증스럽게 손을 내저었다.

누리가 다친 이후로 하제는 묘하게 무기력해졌다. 울적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누리의 부상이 하제 탓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으므로, 가신들은 그의 우울이 그저 의아하고 걱정스럽기만 했다.

“가주님, 우리 술 마셔요! 누리 완치 기원 파티 합시다!”

“다른 애들이 지금 먹을 거 사러 갔습니다.”

“족발! 보쌈! 닭발! 삼겹살!”

덩치 큰 사내놈들이 우렁차게 언성을 높여 왁자지껄 떠들어 댔다. 머릿속이 웅웅 울리고 귀가 아팠다. 하제의 얄팍한 인내심이 동이 났다.

“시끄럽다고! 이 개새끼들아. 안 닥치냐?”

“…….”

늑대들은 딱 3초 동안 정적을 지켰다. 그러다가 아까보다 더 큰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우와, 가주님이 짜증 냈다!”

“가주님 짜증 내셨다!”

“우리한테 개새끼라고 막말하셨다!”

요 며칠 동안 말을 걸어도 듣는 둥 마는 둥, 시큰둥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던 하제가 드디어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일제히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하제를 던졌다 받으며 헹가래라도 칠 기세였다.

“시발…….”

하제는 착잡하게 이마를 감쌌다. 이 단순무식한 새끼들한테 화를 내어서 무엇 하나, 스트레스받는 건 결국 자신인데.

그는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이 복잡다단하고 미묘한 감정을 가신들에게 납득시키는 것을 포기했다. 감수성이라고는 머릿속을 닥닥 긁어도 안 나오는 놈들이었다.

오늘의 술자리를 이제 와서 무르기는 늦은 것 같았다. 해산하라고 한마디라도 했다간, 이 개새끼들은 일제히 귀와 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올망졸망하게 하제를 쳐다볼 게 분명했다.

“누리는? 괜찮대?”

그는 허리끈을 풀고 입고 있던 겉옷을 벗으며 말했다.

“네. 수술 엄청 잘 됐습니다. 말하는 데도 별문제 없을 거래요. 이렇게 잘 될 수가 있냐고, 의사도 놀라던데요.”

“의사가 왜 놀라. 자기가 수술했을 거 아니냐.”

“그게……. 수술실 앞 지키고 있던 놈한테 들은 건데, 중간에 집도의가 한 번 바뀌었다고…… 하던데 말입니다.”

“뭐? 누구로?”

벗은 옷을 대충 본당 구석의 옷걸이에 걸어 놓던 하제가 돌아보았다.

“수술복 입고 마스크 끼고 지나가는 걸 언뜻 본 거라 누군지는 모르겠는데요. 다른 의사들이랑 간호사들이 다, 90도로 인사하더라고.”

아메트가 했던 말. 두 가지 말이 퍼즐 조각처럼 묘하게 맞아떨어졌다.

화리연에서 가장 큰 병원은 아메샤 스펜타의 여섯 당주 중 한 명의 관할하에 있다는 말과 자신이 아는 가장 유능한 의사를 보내 주겠다는 말.

설마, 진짜 병원장한테 누리의 수술을 맡겼겠어. 당주씩이나 되는 높으신 몸한테. 그래,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지. 하제는 자신의 추리를 어렵사리 부정했다.

“연오는.”

“일 처리할 거 있어서 나가셨는데요. 복귀가 늦어질 것 같으니 먼저 마시고 있으라 하셨습니다.”

어쩐지 굉장히 당당하게 술판을 벌인다 싶었더니, 그 배후에는 연오의 암묵적인 허락이 있었던 모양이다.

누리의 수술 성공을 축하한다는 건 핑계고, 사실은 그냥 너희들끼리 먹고 놀고 싶었던 거 아니냐? 그렇게 묻고 싶었다.

사실 꽤 일리 있는 추측이었다. 정작 주인공인 누리는 병원 침대에 누워서 환자식이나 깨작깨작 먹고 있을 테니까.

하제는 한숨을 푹 쉬었다. 이 집안, 과연 이대로 괜찮은 걸까. 이딴 놈들한테 도시의 치안을 맡겨도 되는 걸까.

“가주님, 솔선수범하셔서 뭐 하나 보여 주시죠!”

이제 늑대들은 하제에게 슬쩍 다가와서 어깨동무를 한 채 은밀한 권유를 시작했다.

“보여주긴 뭘 보여줘.”

“연회의 시작을 알리는, 분위기 띄우는 거 있잖아요! 술을 원샷 하거나, 폭탄주를 말아 주시거나, 그런 거요.”

“내가 광대냐? 가주 체면이 있지, 너넨 대체 나를 뭘로 보는 거야!”

“아, 그러지 마시고요. 가주님!”

“됐다. 안 한다. 꺼져. 너희들끼리 놀아. 난 쉴 거야.”

하제가 자신의 어깨에 감긴 남자의 굵직한 팔을 억지로 밀어냈다. 그 와중에 근육은 더럽게 많아서 목이 다 뻐근했다.

“이따 통닭 사 오면 다리는 가주님 드릴게요.”

한껏 성질을 내던 하제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붉게 덧그린 눈매가 가신들을 돌아보았다.

“하나만?”

“두 개 다.”

하제는 묵묵히 걸어가 상 위에 놓인 탁주 병을 집었다. 기대감 가득한 청년들의 눈빛이 일제히 그에게 집중되었다.

하제는 술병을 호쾌한 동작으로 한 번 던졌다 받았다. 제법 무거울 터인 술병을 핑그르르 화려하게 돌리다가, 병 아랫부분을 탁 치고, 마지막으로 손날로 병목을 날렸다.

펑!

샴페인처럼 풍성한 거품이 병 입구로 솟아올라 흘러내렸다. 그를 둘러싼 가신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우와아아!”

“가주님 최고! 졸라 멋있어!”

영경의 술집에서 잠깐 일했을 때 배웠던 잔재주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 * *

“으으…….”

하제는 앓는 소리를 내며 얕은 잠에서 깨어났다.

가신들이 싱글벙글 웃으며 내미는 술을 차마 거절할 수 없어 받아 마셨다.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석 잔, 넉 잔이 되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빈방에서 주정뱅이들과 뒤엉켜 자고 있었다. 실내는 캄캄하게 불이 꺼져 있고, 사방에서 사내놈들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아, 좀.”

그는 짜증스럽게 자신의 배 위에 올라가 있던 누군가의 다리를 퍽 밀어 치웠다. 무겁기 짝이 없었다.

다들 덩치는 어찌나 쓸데없이 좋은지, 하제를 아주 방구석에다 밀어붙여 찌부러트릴 기세였다. 티셔츠 자락 아래 드러난 근육 잡힌 옆구리를 벅벅 긁으며 자는 꼴이 몹시 태평해 보였다.

술기운이 어느 정도 가시자 목이 말랐다. 하제는 인상을 쓰며 이마를 꾹꾹 누르다가, 어둠을 더듬어 방 밖으로 나섰다.

부엌까지 가는 동안 슬쩍 들여다본 본당도 말 그대로 개판이었다. 바닥에는 술잔이며 젓가락 한 짝이 나뒹굴고, 먹다 만 안주와 빈 술병이 상 위에 즐비했으며, 곳곳에 인사불성이 된 남자들이 드러누워 뻗어 있었다.

하제는 찬물을 마시기 위해 부엌에 들어섰다. 하지만 그곳에는 예상 밖의 인물이 있었다.

그는 고즈넉한 전통 가옥에 어울리는 짙은 녹색의 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옆모습마저 그린 듯이 단아했다.

“가주님.”

커피포트에 물을 올려놓은 채 미동도 없이 식탁 앞에 앉아 있다가, 인기척을 느낀 연오가 그를 스르르 돌아보았다.

“언제 왔어?”

“방금 돌아왔습니다. 주무시는 것 같기에 따로 인사는 드리지 않았는데.”

“커피 마실 거냐? 이 밤중에? 물은 왜 끓이고 있어.”

“이건, 제가 마실 게 아니라 가주님께 드리려고.”

“나한테?”

마침 커피포트에서 물이 끓었음을 알리는 신호음이 들렸다. 연오가 자리에서 일어나 컵에 뜨거운 물을 따랐다.

그는 유리 단지의 뚜껑을 열어 작은 숟가락으로 꿀을 두어 스푼 덜어냈다. 하제는 그의 맞은편에 앉아서 김이 피어오르는 컵 속에 꿀이 섞이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드십시오. 속 버리시면 안 되니까요.”

“고맙다.”

따뜻한 꿀물이 든 컵을 양손으로 받아 든 하제는 순순히 내용물을 홀짝홀짝 마셨다.

연오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약간 뻗친 데다 아직도 화장을 지우지 않아 눈가에 붉은 칠이 남아 있었다.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다기보다는 이상하게도 요염했다. 소년과 청년을, 미성년과 성년을, 사람과 늑대 사이를 오가는 묘한 생김새.

꼭 방금까지 침상에서 흐트러져 있던 것 같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연오는 숨을 멈추었다. 지나치게 불경한 생각이었다. 스스로가 경멸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너랑 대작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네.”

“예전에 가주님은 고작 열 살 아니셨습니까. 전 열여섯이었고요. 그 나이에 대작은 무슨…….”

하제는 대답 대신 실실 웃으며 꿀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야, 연오야.”

“네.”

“우리끼리 한 잔 더 할래? 애들 다 자는데.”

“지금도 눈이 반쯤 풀리셨는데,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과음하시면 다음 날 숙취로 고생하실 겁니다.”

“아니, 원래 술은 술로 다스리는 거지. 해장술 모르냐.”

하제가 싹 비운 머그잔을 내려놓으며 강경하게 주장했다. 그는 손을 들어 술잔을 꺾는 제스처까지 곁들였다.

대체 어떤 망할 놈이 가주님께 저딴 걸 가르친 거지? 연오는 조금 화가 나려고 했다. 가신들인가? 아니면 빌어먹을 인간들?

결국 연오는 하제에게 졌다. 언제나처럼. 그는 얕게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 한 잔만 하고, 얌전히 주무시는 겁니다.”

둘만의 작은 주연은 하제의 방에서 이루어졌다. 하제가 뻗으면 곧바로 이부자리로 배달할 수 있도록.

“그때는 그래도 좀 귀여운 구석이 있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커다래지고 무서워졌냐, 연오야.”

“그때도 고작 제 허리까지 오던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닌 듯합니다.”

“에이, 허리는 아니다, 허리는. 그래도 한, 이까지는 왔을걸?”

취기가 오른 하제가 킬킬 웃으며 연오의 가슴께를 툭 건드렸다.

옛날에는 자신이 자라면 연오의 키를 넘어설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었는데. 십 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그들 사이에는 여전히 넘을 수 없는 신장의 격차가 있었다.

어린 시절의 추억들을 떠오르는 대로 두서없이 꺼내고, 가신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 당시 가문에 속해 있었던 가신들의 행방을 묻기도 하고, 지금 있는 이들은 어쩌다 들어오게 된 것인지 묻기도 했다.

은은한 조명 아래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가 오갔다. 한 잔만 하겠다던 약속은 어디로 갔는지, 잔을 곧잘 비우는 하제를 연오조차도 말리지 않았다.

“까마귀들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건지, 네가 아는 걸 말해 줄 마음은…… 아직도 없어?”

몇 번이나 서로 잔을 부딪쳤을까. 자신의 팔에 비스듬히 고개를 기댄 하제가 물었다.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처럼 침묵뿐이었다. 하제가 쓰게 웃었다.

“그래, 그렇겠지. 너는 알고 있는 게 없겠지.”

“당신께서 알고 싶어 하시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꼭 알아내실 필요는 없습니다. 모르셔도 됩니다.”

가만히 입을 다물고 눈을 내리깔고 있던 연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셔도, 제가 뭐든지 다 해 드리겠습니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되도록 제가 무엇이든 할 테니까. 부디 그냥 이 자리에 계셔만 주십시오.”

하제는 점차 감기려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다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내가 아니라 네가 가주였다면 좋았을 텐데.”

“그게 무슨.”

“넌 유능하고 똑똑하잖아. 아는 것도 많고. 네가 가문을 이끄는 게 낫지 않을까. 너는 나보다 훨씬 좋은 가주가 될 테니까.”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사실이잖아. 다른 놈들도 그렇게 생각할걸.”

“저는, 하제 님. 저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태어났고…… 당신을 모시기 위해 살아 있습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담담하게 흘러나오는 말에 실린 무게가 너무 무거웠다. 하제는 술잔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미적미적 덧그리며 말했다.

“연오 넌 너무 자기희생적이야. 네 잇속도 좀 챙겨 봐라. 후계자가 행방불명되고 가주는 죽고, 망해 가는 가문을 왜 3년씩이나 아득바득 지켰어? 뭐 얻을 게 있다고. 나 같으면 당장 재산 한몫 챙겨서 내뺐겠다.”

연오는 그에게 항상 아픈 손가락이었다. 답답하고 고맙고 밉고 미안했다.

그냥 학대당하고 있던 이를 데려와서 거두고, 이름을 지어 줬을 뿐이다. 그게 무어가 대단한 은혜라고, 처음 본 사람에게 각인된 새끼 새처럼 하제에게 헌신하고 집착하는 건지.

하제는 내가 너희들을 위해 아메트의 앞에서 그런 수모까지 겪었노라고, 내 고초를 알아 달라고 하소연하고 싶었다. 동시에 그 일을 결코 밝히고 싶지 않았다.

그는 연오의 앞에서 언제까지나 따를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있고 싶었다.

“박연오……. 연오야.”

그가 연오의 손을 잡아 끌어당겼다. 조금도 힘이 실려 있지 않은 손길이었지만, 연오는 순순히 그가 이끄는 대로 손을 내주었다.

하제는 눈을 감고 연오의 손마디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소리조차 나지 않는, 조심스럽고 경건한 입맞춤이었다. 이윽고 그가 힘없이 웃었다.

“내 형제, 내 친우, 내 하나뿐인 가족…….”

입술을 달싹이며 뭐라 말을 더 이으려던 하제는 연오의 손을 잡은 채 잠에 빠졌다. 벽에 기대어 앉은 채로도 그는 새근새근 잘도 잤다.

연오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노련한 손길로 주안상을 척척 치우고 하제를 이부자리에 반듯하게 눕혀 이불까지 덮어 주었다.

불을 모두 끄자 방 안에는 푸르스름한 달빛만이 들어왔다. 하제의 곁을 떠나기 전, 연오가 혼잣말처럼 가만히 입을 열었다.

“형제, 친우, 가족이라고요.”

잠든 이에게 닿지 못할 조곤조곤한 음성이었다. 연오는 이윽고 피식 메마른 웃음을 지었다.

“전 한 번도, 단 한 순간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습니다.”

달칵. 이윽고 하제를 방 안에 남겨둔 채 문이 닫혔다.

“…….”

캄캄한 방에서 하제가 스르르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맹수의 노란 눈동자가, 한참 동안 연오가 나간 문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며칠 동안 회복 기간을 가진 끝에 누리가 돌아왔다.

목에 흰 거즈 한 장을 붙였을 뿐 굉장히 멀쩡하고 건강해 보이는 몰골이었다. 원래 팔다리가 부러져도 고기반찬 먹고 푹 쉬면 낫는 늑대들이다 보니 회복력 하나는 무시무시했다.

서문가의 정문을 통해 들어선 누리에게 남자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누리 너 없으니까 괴롭힐 상대가 없어서 심심했어.”

“오랜만이다. 용케 안 죽고 살아 돌아왔네?”

“병원 밥 맛있냐? 병원 침대 편했냐? 우린 네 몫까지 순찰 뺑뺑이 도느라 죽는 줄 알았는데 혼자 쉬니까 좋았냐?”

퍽이나 다정한 격려였다. 아군인지 적군인지 모를 언사가 쏟아졌다. 평소에도 툭하면 치고받고 흙바닥을 뒹굴며 노는 작자들인데, 동료가 좀 다쳤다고 해서 애틋해질 리가 없었다.

누리는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으며 동료들의 열렬한 축하를 한 마디로 일축했다.

“아니, 그게……. 좋은 일로 자리 비웠던 것도 아닌데, 이렇게 환영해 주시면.”

누리의 항변은 곧 묻혔다. 덩치 큰 남자들이 그를 퍽퍽 때리고 얼싸안으며 반가움을 표했다. 그러다 누리는 문득 마루 위에 있던 하제와 눈이 마주쳤다.

“가주님!”

누리의 얼굴이 반가움으로 확 밝아졌다. 그는 널찍한 어깨에 둘러메고 있던 가방을 내리며 그를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언제나처럼 예의 바르고 다소 어리숙한 인사였다. 하제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할지, 이렇게 건강하게 나아서 돌아온 것을 고마워해야 할지, 내가 널 구하려고 무슨 짓까지 했는지 아느냐고 넋두리를 해야 할지. 너무도 복잡한 감정이 일시에 오갔다.

그는 입매를 참담하게 굳힌 채 아무 말이 없었다.

혹시나 자신이 가주님의 기분을 상하게 한 건가 싶어서 누리가 슬슬 당황스러워질 즈음, 하제가 씩 웃었다.

“잘 왔다.”

“가주님…….”

누리는 찡해졌다. 하제가 그에게 미안했던 만큼 그도 하제에게 미안했다.

그를 강하게 만들어 주기 위해 하제가 그 고생을 했는데, 하제의 기대를 배반하고 자신의 무능을 만천하에 증명해 보인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하제를 볼 면목이 없다고도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주님은 언제나처럼 그를 반겨 주었다. 약해빠졌다고 타박하지도 않고, 멍청함을 질책하지도 않고.

“누리야!”

“가주님!”

하제는 마루에서 훌쩍 뛰어내려 누리의 품에 안겼다. 누리는 기다렸다는 듯 그를 덥석 받아 안았다.

“보고 싶었어요!”

“나도!”

누리는 전혀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가뿐한 몸짓으로 하제를 안고 둥기둥기 얼렀다. 그들은 잠시 둘만의 세계에 빠져 기쁨을 나누었다.

“…….”

그걸 지켜보던 연오는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빠졌다.

* * *

서문가는 다시 활기를 되찾은 것 같았다. 일단 겉으로는 그렇게 보였다.

하제는 아직 아메트와 보내야 할 세 번째 밤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다른 사람에게 빚을 지고는 못 살아서, 뭐든지 빨리 갚아 버리고 잊는 게 그의 방식이었다. 이런 식으로 부담의 여지를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세 번째 외박은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하제는 비를 쫄딱 맞은 데다 숙취까지 겹쳐 한동안 몸 상태가 쭉 나빴다.

사실 그의 건강이 악화된 원인은 물리적인 것보다는 심리적인 게 컸다. 아메트에게 강제로 붙들려서 차마 생각지도 못했던 충격적인 경험을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가신들은 그냥 하제가 몸살이 나 앓아누웠다고만 여겼다. 그들이 하제를 밖에 나가도록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심지어 고작 며칠 전까지는 자기도 환자였던 주제에, 누리까지 나서서 하제의 요양을 도왔다.

결과적으로 하제는 일주일이 넘는 기간 동안 집에 콕 틀어박혀서 누리가 까 주는 과자를 받아먹으며, 벽하의 감시하에서 연오가 내 준 숙제를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벽하는 하제의 글씨가 더럽다고 질색을 했다.

“내가 글씨 더럽게 못 쓰는 데 보태준 거 있냐.”

“보태준 게 없으니까 이런 말을 하는 거 아닙니까. 이런 충격적인 필체를 형성하는 데 제가 보탠 게 있었다면, 미안해서 고개도 못 들죠!”

“이 자식. 말만 쓸데없이 잘 해 가지고는!”

“맞는 말이잖아요, 솔직히!”

“맞는 말이긴 한데 기분이 나빠. 넌 괘씸죄다. 어딜 가주한테 대들어!”

하제는 벽하를 확 끌어당기더니 목에 팔을 걸고 졸랐다. 벽하는 깨갱 하고 죽는소리를 내며 괴로워했다.

또 시작이네. 왜 괜한 애 괴롭히고 있어. 인성 한 번 끝내준다. 우리 가주님이지만 참 또라이 같아. 방 옆을 지나던 다른 사람들이 하제를 한 번씩 차게 식은 눈으로 보았다.

어쨌든 간에 시간은 평화롭게 흘러갔다. 아니, 평화롭게 흘러가야 할 터였다.

“가주님!”

누군가 노크도 없이 하제의 방에 뛰어들어 오며 그를 불렀다. 책을 편 채 심드렁하게 턱을 괴고 넋을 놓고 있던 하제가 그를 돌아보았다.

“어, 해솔아. 왜.”

“빨리 도, 도망치세요. 여긴 제가 막겠습니다!”

밖에, 밖에……. 그는 말을 차마 못 잇고 얼굴이 새파래진 채 뒤를 돌아보았다. 하제가 무슨 일인가 하여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였다.

퍼억! 쨍그랑!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창호지를 바른 하제의 방 문짝이 박살 났다. 견고한 나무 문틀이 맥없이 부서지고, 그 위로 큼직큼직한 도자기 파편들이 튀었다.

하제는 문 건너편을 보았다. 흑발에 황록색 눈, 맹독을 품은 꽃처럼 요사스러운 미모를 자랑하는 키 큰 남자가 문간에 서 있었다.

“안녕, 서문하제.”

아메트가 한 손에 들고 있던 청자 파편을 바닥에 팽개치며 태연하게 인사를 했다.

“찾아올 기미가 안 보이기에…… 혹시나 도망친 건가 싶어서.”

“뭐……?”

하제가 멍하니 반문했다.

아메트는 덤덤한 표정으로 자신이 부순 문짝을 내려다보았다. 한쪽은 그나마 반 정도는 멀쩡했고, 한쪽은 도무지 회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뭉개져 있었다.

문을 보며 잠깐 고민하던 그는 이윽고 발을 들어 그나마 멀쩡한 한쪽 문을 걷어찼다. 빠각! 경쾌한 소리와 함께 남아 있던 문짝마저 쪼개졌다. 푸른 도자기 파편과 찢긴 창호지 위에 몇 개의 나무 문틀 조각이 더 추가되었다.

저 새끼 지금 양쪽 대칭 맞추려고 저 지랄한 거야? 미친 새끼. 하제는 망연하게 탄식했다. 아메트의 광기는 매번 보면 볼수록 새로웠다. 자신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의 사이코였다.

“이 사악한 뱀 같으니라고!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쳐들어오느냐!”

그 와중에 해솔은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눈물겨운 충성이었다.

아메트가 으르렁대는 늑대를 말없이 돌아보았다. 핏기 없는 흰 얼굴에 노란 눈동자가 요요하게 빛을 발했다.

막상 기세 좋게 소리를 질러 놓고도 정작 뱀의 당주를 코앞에서 마주하자 해솔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인간이든 수인이든, 원래 포유류들은 파충류를 마주하면 본능적인 공포와 혐오를 느끼기 마련이었다. 해솔도 예외는 아니었다.

“해솔아. 일단 넌 좀 물러가 있어라.”

하제가 그를 조용히 만류했다.

“이 작자한테 시비 걸어 봤자 좋은 꼴 못 본다. 더 심하게 좆 되면 모를까. 가서 다른 놈들한테 방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전해 주고.”

“하지만, 가주님!”

“그렇지. 그전에, 창고에 가서 내 검 좀 가져와.”

해솔은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했다. 그러나 그는 하제를 무작정 감싸기보다는 하제의 검술 실력을, 그리고 하제가 내린 명령을 믿었다. 그는 복도를 가로질러 잽싸게 달려 나갔다.

“왜 말도 없이 발을 끊었지?”

“연락 미리 못 한 건 미안한데……. 아니, 근데 시발. 내가 왜 네놈에게 미안해해야 하지? 애초에 거래에는 그딴 조건은 없었잖아!”

저도 모르게 사과하던 하제가 버럭 화를 냈다. 아메트는 세 번의 밤을 조건으로 걸었을 뿐, 그 조건에 기한을 두지는 않았다. 따져 보면 하제가 잘못한 건 없었다.

“너한테 내 좆을 쑤셔 박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데. 하면 할수록, 네가 내 눈앞에 안 보이는 게 짜증이 나서.”

아메트가 발밑에 걸리는 문짝과 청자 파편들을 구둣발로 툭툭 걷어차 치우며 문지방을 넘어 들어왔다. 제집 안방 들어오는 것처럼 유유자적한 태도였다.

“그래서 남의 집에 쳐들어와서는, 도자기를 냅다 들어서 문을 내리치셨다? 미친 새끼. 저게 얼마짜린지는 아냐?”

“내가 네 가신에게 보낸 의사는 얼마짜리였는지 알아?”

아메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태연자약하게 물었다. 하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하제가 뭐라 대꾸하려는 찰나 복도를 가로질러 여러 쌍의 긴박한 발소리들이 다가왔다. 해솔이 검을 가져온 건가 싶어 옆을 돌아보았는데…….

챙!

예리한 칼끝이 정확히 아메트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검을 뽑아 든 연오가 살기등등한 음성으로 경고했다.

“꺼져라. 그분에게서 당장 떨어져.”

“그만!”

하제가 다급하게 외쳤다.

아메트는 하제의 입에 맞지 않는 차를 내 왔다는 이유로 부하의 목을 뽑아 죽이려고 했다.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댄 생판 남을 어떻게 다룰지는,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서문하제.”

아메트는 연오가 아예 보이지 않는 듯, 목에 들어온 칼날에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평온하게 말을 이었다.

“다음번엔 날 언제 찾아올 거지? 기다리는 것도 슬슬 한계라.”

하제의 낯빛이 하얗게 질리고, 결코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을 들어 버린 연오가 그 자리에 우뚝 굳었다. 당황과 경악은 잠깐이었다. 치 떨리는 분노가 그 뒤를 이었다.

“너…… 말, 하지, 않는다고.”

“나는 약속을 지켰는데.”

그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대꾸했다.

아메트가 약속한 건 ‘방 안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발설하지 않을 것’이었다. 단순히 언제 올 건지만 물어봤으니, 계약 위반은 교묘하게 피해 갔다.

“뭘 꾸미는 거지? 가주님께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대답해! 대답 여하에 따라, 여기서 네놈의 목을 날릴지 말지 결정하겠다.”

연오가 스산하리만치 낮아진 목소리로 말하며 칼날을 조금 더 바짝 들이댔다. 나른한 시선이 연오에게로 찬찬히 옮겨 갔다.

“박연오. 내가 예전에도 경고했잖아.”

아메트는 동공이 확 좁아진 섬뜩한 눈동자를 깜빡이며 말을 이었다.

“네 가주 앞에서 얌전한 척 착한 척 행세할 거면, 그 눈빛부터 숨기라고.”

연오의 눈에서 한순간 새파랗게 불꽃이 일었다.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손잡이에서 뿌드득 살벌한 소리가 났다.

“연오야.”

부르르 떨리는 연오의 손 위에 하제의 손이 겹쳐졌다. 그는 연오가 들고 있던 검을 받아 들었다. 힘을 가해 억지로 빼앗은 것도 아닌데, 손에 절로 스르르 힘이 풀렸다.

“아메트.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어. 그런데, 오늘은 아니야.”

하제가 한 번 크게 숨을 들이쉬고 또렷하게 말했다. 검을 든 오른손은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채였다.

“이만 돌아가지그래. 가신들이 걱정하고 있잖아.”

아메트는 그제야 생각난 듯 주위를 느긋하게 한 번 돌아보았다.

박살난 하제의 방문 너머로 늑대들이 모여 있었다. 하나같이 살기 어린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언제라도 칼을 뽑을 수 있도록 몸을 바짝 긴장시키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세가 흉흉한 것은 단연 연오였다. 하제가 그에게서 칼을 건네받았기에 망정이지, 그대로 검을 들려 놓았었다면 벌써 아메트를 백 번은 찌르고도 남았을 눈빛이었다.

아메트가 소리 없이 웃었다. 박대당하고 축객령까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흡족한 미소였다. 마치, 자신의 목적을 모두 달성했다는 듯한.

“그래. 기다리지. 나는 기다리는 데는 재주가 없지만, 서문하제. 너를 위해서라면…….”

그는 끝까지 연오와 하제의 속을 동시에 득득 긁어 놓는 소리를 하고 떠났다. 흉악한 등장과는 달리, 박살 난 문의 잔해를 지나쳐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뒷모습은 짜증이 날 정도로 멀끔했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씁쓸한 감정의 골뿐이었다.

처참한 꼴이 된 방 안, 연오가 흔들리는 눈으로 하제를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절박한 추궁이 이어졌다.

“가주님. 대체 저자와 무슨 말씀을 나누셨던 겁니까? 다음번에 찾아오라니, 그럼 저번에도 가주님께서는 이미 그를…….”

“연오야, 너도.”

하제가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너도 나한테 숨기는 게 있잖아. 피장파장 아니냐?”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연오의 표정이 점점 참담하게 가라앉았다. 무심코 허공에 뻗었던 손이 차마 하제에게 닿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졌다.

가시방석 같은 정적을 견디다 못한 하제가 몸을 휙 돌렸다. 꾹꾹 눌러 오던 감정이 결국 폭발했다.

“박연오. 나는!”

하제가 여전히 한 손에 칼을 든 채 연오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는 다짜고짜 연오의 멱살을 잡아 끌어내렸다. 눈높이가 그제야 얼추 맞았다. 악에 받친 노란 눈이 연오를 형형하게 노려보았다.

“나는 연오 널 좋아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숨이 턱 막혔다. 조금도 생각하지 못한, 너무도 갑작스럽고 느닷없는 말이었다. 심장이 돌덩이처럼 무겁게 쿵 내려앉았다.

하제의 좋아한다는 말이 과연 어떤 의미인지 따져 볼 겨를조차 없었다. 형제로서 친애한다는 말인지, 아니면 가신으로서 총애한다는 말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러니까 너도 나를……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더 믿어 줘. 네게 해가 될 일은 결코 하지 않을 테니까.”

연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딱딱하게 굳은 낯으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하제는 들고 있던 칼을 연오의 허리춤에 달린 칼집에 밀어 넣었다. 철컥, 묵직한 소리와 함께 검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하제가 방을 떠날 때까지도 연오는 망연히 홀로 서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아메샤 스펜타로부터 커다란 소포가 배달되었다.

내용물이 깨어지지 않도록 몇 겹이고 포장을 한 소포 안에는 문 수리비라는 명목으로 거액의 현금이 첨부되어 있었으며, 큼직한 항아리 하나가 들어 있었다.

항아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국풍이었다. 전면에 화려하고 신비한 아라베스크 문양을 그려 넣었고, 순금을 덧대어 코끼리, 뱀, 고양이 따위를 새겨 놨다. 당연하게도 서문가의 고즈넉한 인테리어에 맞을 리가 없었다.

하제는 가신들이 가져온 항아리를 돌아보지도 않고 짜증스럽게 손을 내저었다.

아메트가 보낸 선물이 아직 치르지 않은 마지막 대가를, 세 번째 밤을 잊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 같아서 불쾌했다. 그는 항아리를 부엌에 두고 음식 찌꺼기를 버리는 용도로 쓸 것을 명했다.

그렇게 천금을 주고도 못 살 귀한 장식용 항아리는 음식물 쓰레기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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