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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38년 3일 (1/13)

epilogue 38년 3일

소파에 누워 쪽잠을 자던 금산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현관문이 여닫히고, 신발을 벗고, 옷을 벗으며 빌라 내부를 부산스럽게 오가는 기척의 주인을 짐작하곤 찌푸린 미간을 폈다.

현관 한쪽을 차지한 구두를 발견하자마자 일락은 기척을 죽였지만 그럼에도 들뜬 기분을 감출 순 없었다. 일찌감치 일을 마치고 귀가한 금산의 잠을 이미 방해한 것도 모르고, 살금살금 작은 방으로 들어가 후다닥 옷을 갈아입고 또 살금살금 빠져나와 소파 앞에 섰다. 새벽 5시. 베란다 너머에서 흘러드는 가로등 빛 아래 어스름하게 드러난 금산의 얼굴 윤곽을 내려다본 일락이 그대로 쪼그려 앉았다.

권세우가 다녀간 뒤로 금산이 빌라를 방문하는 횟수가 조금 늘었다. 한 달에 두어 번에서 일주일에 한 번 정도로. 시간은 불규칙했다. 환한 낮일 때도, 늦은 밤일 때도, 오늘처럼 이른 새벽녘일 때도 있었다. 일락의 얼굴을 보고 갈 때도, 그냥 갈 때도 있었다. 오늘처럼 잠을 자기도, 청소를 하기도, 상가에 들러 형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오롯이 일락을 위해서 시간을 빼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일락은 좋았다. 더는 모르는 누나들이 금산을 찾아오지 않는 것도 좋았다.

아저씨 씻었나 보다.

말끔하게 면도가 된 턱선과 부드럽게 흐트러진 머리카락, 청결한 냄새를 풍기는 금산을 꼼꼼히 쳐다보다 끌고 나온 이불을 뒤늦게 덮어 주었다. 그러고도 아쉬워서 한참 금산을 바라보다가 꾸물꾸물 움직이기 시작했다.

금산의 목까지 덮어 준 이불을 슬그머니 끌어 내리고 조심조심 올라갔다. 저보다 두 배는 덩치가 큰 금산의 배에 올라가 엎드려 누운 다음 이불을 제 머리끝까지 덮어 올렸다. 금산이 깰까 봐 걱정하지는 않았다. 이러는 게 처음은 아니었고, 의외로 잠귀가 어두운 금산은 지금까지 한 번도 잠에서 깬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그래도 혹여나 금산이 깼을까 숨을 죽인 일락이 딱 10초 후에 안심하며 몸에서 힘을 뺐다. 그러느라 자연스럽게 금산에게 모든 체중을 실으며 온몸을 기대게 된 일락이 오른뺨을 근육질의 가슴에 기댔다. 오른쪽 귀로 금산의 고른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금산과 있는 모든 순간이 좋았지만, 이렇게 제 귀로 금산의 심장을 느끼는 건 좀 더 특별한 순간 중 하나였다. 이 순간만큼은 뭔가 저도 금산의 일부가 된 기분이었다.

“…….”

그새 새근새근 잠든 일락을 추슬러 안은 금산이 슬쩍 한쪽 눈을 떠서 시간을 확인했다. 5시 13분. 눈물도 많고 웃음도 많은 일락은 잠도 많았다.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숙면을 하고도 일락은 금산의 곁에선 언제나 쉽게 나른해지고, 꾸벅꾸벅 졸기도 잘 졸았다. 신경 줄이 굵은 만큼 예민하기도 한 금산이 일부러 잠든 척하는 걸 모를 정도로 둔하기도 했다.

그 태평함이 옮기라도 한 건지, 일락의 부산스러움에 잠을 깨고도 금산은 어렵지 않게 재차 잠들 수 있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저에게 기대오는 무게와 뜨끈한 체온에 숙면을 취하게도 되었다.

한 시간쯤, 가벼운 잠을 더 즐긴 금산이 아예 낮게 코까지 골며 잠든 일락을 추슬러 안았다. 이불째로 안아 들고 작은 방으로 향했다. 싱글 침대 하나, 책장이 딸린 책상 하나, 하늘색 커튼, 단출하고 깔끔하게 정리된 방에 들어선 금산이 침대에 일락을 누였다. 햇빛이 들어오지 않게 커튼을 치고 이불을 덮어 준 뒤 나가려다 책상 앞에 섰다.

평소와 같지 않게 책상에 노트 한 권이 펼쳐져 있었다. 낙서하다가 급하게 어딜 나간 건지, 대충 펼쳐진 노트 주변에서 볼펜 서너 자루가 뒹굴고 있었다. 책상 앞에 선 금산이 한 자도 쓰지 않아 백지인 노트를 내려다보다 서랍을 열었다.

많이 본 국어 교과서가 바로 보였다. 이게 뭔가 싶은 기색도 없이 교과서를 열어보는 금산의 눈에 지금까지 일락이 도토리처럼 소중히 모아온 종이 뭉치가 비쳤다. 모두 금산이 남긴 쪽지였다. 일락의 수집벽을 몰랐던 바도 아니었다. 수학 교과서엔 깡패 새끼들이 심부름 값이라고 찔러준 용돈이 수북할 터였다. 변함없는 일락의 보물창고 아닌 보물창고를 들여다본 금산이 서랍을 닫고 문제의 노트를 건드렸다. 페이지를 넘겨 이전 장을 펼쳐보았다.

암호 같은 숫자가 일락의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깨알 같이 적혀 있었다.

1주 – 1개월

2주 – 3개월

3주 – 6개월

1개월 – 1세

2개월 – 3세

3개월 – 5세

1세 – 17세

5세 – 36세

10세 – 56세

15세 – 76세

20세 – 96세

25세 – 116세

30세 – 136세

35세 – 156세

38세 – 16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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