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미워요. (5/13)

2. 미워요.

녹색 야구잠바를 입은 일락이 코끝을 훌쩍거리면서 쭈쭈바를 깨물었다.

“이 추운 날 하드 물고 뭐 하는디. 감기 든다, 응? 아가 얼른 드가라.”

“할머니, 오늘은 왜 다섯 줄밖에 없어요?

잠바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자그마한 좌판을 들여다보던 일락이 쭈쭈바를 손에 쥐며 물었다.

“형아들하고 먹으려고 했는데.”

“리라 니나 많이 먹고 커야 쓰겄다. 형아들이 안 먹이는 것도 아닌디 왜 키가 맨날 똑가터?”

“제가 제일 많이 먹어요. 하루에 다섯 끼도 넘게 먹는데.”

“이런 하드 같은 거 말고, 고기랑 당근 같은 걸 많이 먹어야 쓰지.”

“당근은 맛없는데.”

그래도 할머니 김밥 당근은 맛있다고 씩, 웃는 일락이 다섯 줄을 다 달라며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형아들이 맨날 만 원씩, 5만 원씩 꽂아 주는 지갑은 비는 날 없이 두둑했다.

“안 그래도 아까 잔뜩 사 갔는디.”

“형아들이요?”

“그랴. 배 사장이 와서 다섯 줄 냄기고 다 사 갔다.”

퇴근하고 먹으려고 사 갔나 보다.

“어… 그럼 이건 내가 다 먹어야겠다.”

먹성 좋은 제 형들을 떠올리곤 히히 웃으며 지갑에서 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꺼낸 일락이 잔돈을 거슬러 받고 주섬주섬 김밥을 챙겨 들었다. 제법 사람들이 오가는 골목 입구로 들어서는 일락의 동그란 발꿈치가 발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저러다 감기 들라고 용을 쓰지, 용을 써.”

새벽같이 목욕탕을 다녀왔는지 뽀얀 얼굴이 더 뽀얘져서는 슬리퍼에 쭈쭈바에 김밥이 든 비닐봉지까지 덜렁덜렁 들고 가는 모습이 영락없는 애였다.

“저것이 워떠케 스물이 넘었다는겨.”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며 고개를 젓는 할머니가 조그만 좌판을 정리했다.

버스정류장에서 원룸촌까지 사선으로 쭉 이어진 골목길을 빠져나가면 3층 건물이 먼저 눈에 띄었다. 황금 포차, 황금 편의점, 황금 꽃집, 황금 세탁소, 황금 디저트 카페, 황금 부동산, 황금 식당. 1층은 상가였고, 2층은 다가구 주택, 3층은 주인 세대였다.

2층 다가구 주택엔 1층 상가 사장들이 입주해 살았고, 일락은 3층에서 금산과 같이 살았다. 사실 말이 같이 산다는 거였지, 한 달에 한두 번 들어올까 말까 한 금산 덕분에 일락은 넓은 3층을 거의 혼자 독차지했다. 혼자 있는 건 심심하고 또 무섭기도 해서 실제로는 2층 형들 집을 돌아가며 신세를 졌다. 포차부터 식당까지, 1층 상가는 금산의 밑에서 일하다 은퇴한 동생들로 알려진 떡대들이 운영했는데, 일락을 열 살 때부터 봐온 그들은 한번 내치는 법 없이 재워 주고 먹여 줬다.

모퉁이에 자리한 황금 편의점 오른쪽엔 포차, 왼쪽엔 꽃집, 세탁소, 디저트 카페, 또 반대쪽 모퉁이엔 부동산, 그 옆에 식당이 있었다. 현재 아침 9시. 24시로 운영되는 편의점을 제외하곤 상가 불이 모두 꺼진 채였다. 원룸촌과 유흥가가 맞물린 골목은 다른 동네에 비해 하루가 늦게 시작되고, 늦게 끝났다.

불을 환히 밝힌 편의점 유리 벽 너머에서 일주일 전에 새로 들어왔다는 알바가 진열을 하고 있었다. 일락보다는 세 살이 많고, 제대 후 복학 준비 중인 대학생이라고 했다.

‘아~ 네가 라일락?’

‘안녕하세요?’

‘진짜 아이돌 뺨치게 생겼네. 사장님이 너는 프리패스라더라. 심부름? 성인은 맞지?’

편의점 사장인 조재운이 말을 해 놨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인 일락이 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 보여 주었다. 아직 고등학생 티를 못 벗은 탓에 일락에겐 어느새 필수품이 된 신분증은 알바가 바뀔 때마다 당연한 절차처럼 보여 주게 되었다.

‘스물하나? 완전 애기네 애기. 신분증도 따끈따끈하니, 어? 이거 가라는 아니지?’

신분증이 막 구운 고구마라도 된 것처럼 이 손 저 손으로 옮기며 의심의 눈초리를 한 알바가 일락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씩 웃었다.

‘농담, 농담. 그런데 너는 심부름 하기 되게 불편하겠다.’

심부름 아닌데.

‘술 말고 담배 심부름도 하냐? 누구? 아빠? 형아? 누나?’

맥주 한 캔하고 백두장사 소시지 두 개를 비닐봉지에 담아준 알바가 눈을 빛내며 연달아 질문을 던졌다.

‘우리 사장님하고는 무슨 사이냐?’

뭐부터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눈만 굴리던 일락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형이에요.’

‘친형? 하나도 안 닮았는데? 사장님 마흔은 훨씬 넘어 보이던데?’

친형도 아니고, 유도 선수처럼 생긴 조재운과 제가 하나도 안 닮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게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진 않았다.

‘재운이 형 서른도 안 됐는데….’

‘뭐? 진짜?’

‘네, 스물아홉이에요.’

‘헉스.’

깜짝 놀란 알바가 이내 눈을 빛내면서 물었다.

‘대박, 우리 사장님 금수저냐? 아님 은수저? 스물아홉에 이 정도 운영하려면 못해도 은수저 정도는 돼야 할 텐데? 아, 여기 상가 다 이름이 똑같던데, 건물주? 아님 후계자?’

그런 얘길 왜 저한테 물어보는지 몰라서 눈을 끔벅거린 일락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일락은 이해가 잘 안되거나 할 말이 없을 때 잘 웃었다. 그러곤 아까부터 궁금했던 걸 조심스레 물었다.

‘형은 이름이 뭐예요?’

‘…이야~. 나 방금 네 뒤에서 후광 본 듯. 너 진짜 연습생도 해 본 적 없어? 막 길거리 다니면 사람들이 명함 같은 거 안 줘?’

보육원을 나온 뒤엔 이 골목을 벗어난 적 없었고, 덕분에 이 골목에선 일락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 일은 없었다며 거듭 고개를 젓는 일락의 뽀얀 얼굴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뺏긴 알바가 이내 정신을 차리곤 큼큼 헛기침을 했다.

‘뭐라 그랬지? 아, 내 이름 물어봤지? 고정현, 스물넷. 이제 막 제대했고, 담달에 쩌기 성문 대학으로 복학할 거야.’

성문 대학이라면 일락도 익숙했다. 고1 때 반년을 입원해 있던 병원 이름하고 같았다. 그 반응을 눈치 빠르게 읽은 정현이 또다시 넘겨짚기 시작했다.

‘너 혹시 성대 다니냐? 무슨 과? 나는 경영인데. 예대? 음대? 미대?’

이번에도 끼어들 틈 없이 묻는 정현의 질문에 입도 못 열고 있던 일락이 뒤늦게 웃으며 답했다.

‘저 대학 안 다녀요.’

‘아… 진짜?’

당황스러운 얼굴로 말끝을 늘인 정현이 괜히 눈치를 보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미안하다, 야. 내가 실수한 것 같네.’

저한테 왜 사과하는지 몰라서 눈을 끔벅거리는 일락을 안쓰러운 눈길로 쳐다보던 정현이 이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덧붙였다.

‘그래, 요즘 세상에 대학이 다 뭔 의미냐? 개나 소나 다 가는 대학, 돈만 주면 아무한테나 다 주는 졸업장이 뭐 중요하다고! 안 그래?’

성문 대학이 아무나 갈 수 있는 대학은 아닌데. 물론 일락은 성문대는커녕 다른 대학 문턱도 못 밟아볼 정도로 공부를 못해서 수능은 보는 데만 의의를 뒀었다. 사실 대학이 가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수능도 금산이 보라고 해서 본 거였고, 문제도 거의 다 찍기만 했다. 1등으로 수능장을 나와서 권호가 사준 찹쌀떡을 먹고, 저녁에는 형들과 다 같이 모여 금산이 사준 소고기를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형들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것도 다 반나절도 못 가서 잘렸다.

‘형은 공부 엄청 잘했나 봐요.’

‘나? 못하진 않았지. 아니, 성대 올 정도니까 좀 했지.’

지방 대학이었지만, 재단이 바뀌고 부속 병원이 설립되면서 경쟁률이 높아진 성문대는 사실 좀 하는 정도로는 입학이 어려웠다. 피똥 쌀 정도로 공부해 놓고 괜히 아닌 척 으스대는 정현을 대단하다는 눈으로 올려다본 일락이 배시시 웃었다.

‘멋있다.’

진심 어린 감탄에 내심 머쓱해진 정현이 짐짓 표정을 바꾸며 진지하게 말했다.

‘근데 세상 살려면 대학 중요하긴 하더라. 너 혹시 재수…, 아니 3수냐? 어쨌든 다시 공부할 생각 있으면 나한테 와. 내 코가 석 자라 과외는 못 해 줘도 문제집 몇 개는 골라줄 수 있으니까.’

말해 놓고 잠시 일락의 얼굴을 쳐다본 정현이 말을 바꿨다.

‘아니, 너 정도 되면 공부 같은 거 안 해도 세상 살기 편하겠다. 너 나랑 너튜브 같은 거 해 볼 생각 없냐?’

‘너튜브 하면 좋아요?’

‘당근이지! 너튜브 스타 되면 한 달에 몇백이 뭐냐? 수억도 번다는데!’

‘저 돈 필요 없는데.’

‘얘가, 얘가, 얼굴만 애긴 줄 알았더니, 생각도 애기네? 응? 살다 보면 말이에요. 첫째도 돈, 둘째도 돈, 셋째도 돈! 돈이 제일 중요해요. 유가릿?’

‘그래도 아저씨가 돈 같은 거 안 벌어도 된다고 했어요.’

‘돈 같은 거어? 아저씨이? 무슨 아저씨? 여기 동네 아저씨? 그깟 동네 아저씨가 뭘 안다고? 하여간 어른들이 그으렇게 무책임해요. 아무것도 모르는 애한테 그게 무슨 망언이야? 돈 안 벌면? 그 아저씨가 너 평생 먹여 살려 주기라도 한대?’

‘어…? 어떻게 알았어요?’

‘헉!’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묻는 일락을 되레 식겁해서 쳐다본 정현이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너 혹시 원조하냐?’

‘네?’

질문을 이해하지 못해 멍청하게 반응하는 일락의 등 뒤에서 ‘엘리제를 위하여’ 멜로디와 함께 편의점 문이 열렸다. 새벽 5시 정도 되면 편의점도 한가해서 일부러 시간 맞춰서 나왔던 일락이 일하는 데 방해될까 봐 얼른 비닐봉지를 들었다.

‘형, 다음에 또 봬요.’

‘어? 어, 어…, 그래. 잘 가라.’

왜인지 떨떠름해 하는 정현에게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고는 편의점을 빠져나왔다.

그게 벌써 일주일 전이었다. 그날 맥주 한 모금 마시고 취해서는 베란다에서 잠든 바람에 금산한테 된통 혼났다. 폐렴이나 알코올 급성 중독으로 뒈지고 싶냐는 호통에 히히 웃었다. 그때는 어리고, 처음 마셔봤고, 또 소주를 맥주잔에 마셔서 그랬던 거고. 이제 맥주 한 모금 정도는 괜찮은데.

그보다 일락은 수요일에도 다녀갔던 금산이 3일 만에 또 올 줄 몰라서 너무 기뻤다. 감기 걸리는 게 소원이면 홀딱 벗겨서 내보내 준다고 으름장을 놓는 금산이 반갑고 좋아서 목에 매달린 채로 꾸중을 들었다. 호되게 혼내는 중에도 제 엉덩이를 받쳐 안고 방까지 옮겨다 준 금산에게 코알라처럼 안겨 있었다.

아저씨, 왜 이렇게 빨리 왔어요? 나 보고 싶어서 왔어요? 앞으로도 자주 올 거예요? 오늘은 언제 갈 거예요? 다음엔 언제 와요? 일락이 묻는 말에는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고 금주령만 내린 금산은 그 뒤로 일주일째 오지 않고 있었다. 아니, 이번 달에는 더 안 올 가능성이 컸다. 벌써 두 번이나 왔다 갔으니까. 와도 얼굴만 비추는 수준으로 잠깐 있다 가면서. 그것도 아니면….

“…….”

3층 문을 열고 들어선 일락이 현관에 놓인 구두 두 켤레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하나는 제 운동화보다 훨씬 큰 남성용 까만 구두,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같은 색의 여성용 구두였다. 현관 등이 꺼졌을 때 시선을 든 일락의 눈에 넓은 거실이 비쳤다. 그 너머 굳게 닫힌 안방 문에서 좀체 익숙해지지 않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이며 현관을 빠져나온 일락이 자동으로 잠기는 문소리에 잠시 숨을 멈췄다. 유독 커다랗게 들리는 도어 록 소리가 안방까지 흘러들 것 같았다. 그래도 금산은 신경 쓰지 않을 테지만, 모든 소음이 걷힐 때까지 기다린 일락이 뒷걸음질을 치다 도로 계단을 내려갔다.

“어머, 얘! 추운데 여기서 뭐 하니?”

이제 완전히 날이 밝은 창밖을 보고 있던 일락이 움찔 뒤를 돌아보았다. 낯선 여자가 일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덜 말린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여자를 멍하니 올려다보던 일락이 주춤 몸을 일으켰다. 블랙 캐시미어 코트로 몸을 감싼 여자가 같은 색의 구두를 신은 채 계단 하나를 더 내려섰다.

“여기 계속 있었어? 안 춥니?”

걱정스러운 질문에 고개를 저은 일락이 괜찮다는 듯이 웃었다. 그런 일락을 가만 바라본 여자가 딱하다는 얼굴로 핸드백에서 지갑을 꺼내며 말했다.

“얘, 사정이야 있겠지만, 겨울엔 집 나오는 거 아니야.”

썩 따뜻해 보이지도 않는 야구잠바에 청바지, 그리고 슬리퍼까지. 딱 봐도 가출 청소년 행색인 일락에게 5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쥐여 주며 나직이 타일렀다.

“1층에 식당 있던데, 가서 밥 먹고 집에 들어가.”

그 식당은 점심때가 돼서야 문을 열었다. 그걸 모르는 걸 보니 이 친절한 누나는 여기가 처음인 것 같았다. 게다가 일락은 오는 길에 사 온 김밥을 먹으면 되었다.

“아니면 쉼터 같은 데 가도 되고. 요즘엔 그런 데도 잘 돼 있다더라.”

가볍게 일락의 머리카락을 흩뜨리곤 계단을 내려가려다 안 되겠는지 다시 돌아본 여자가 한마디 덧붙였다.

“까까 사준다고 아무나 따라가면 안 된다? 알았지?”

그녀의 따뜻한 조언에 사실을 밝히려다가 멈칫한 일락이 그냥 헤실 웃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누나.”

“그래~ 다음엔 보지 말자?”

가볍게 손을 흔든 여자가 마저 계단을 내려갔다. 건물을 빠져나가는 여자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자리에 앉은 일락이 5만 원짜리 지폐를 활짝 펴서 내려다보았다.

“사기꾼.”

위에서 툭 떨어진 음성에 앉은 채 고개를 뒤로 젖힌 일락이 반가움을 감추지 않고 환하게 웃었다.

“아저씨.”

2층 난간에 기대 일락을 내려다보던 금산이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편안한 실내복 차림에 두꺼운 패딩 하나를 왼쪽 옆구리에 낀 금산의 머리카락 역시 살짝 젖어 있었다.

“나 없을 때 이러고 삥 뜯고 다니냐?”

“그게 아니라요.”

“볼 빨간 거 봐라.”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손을 꺼내 일락의 뺨을 감싸 안아 주는 금산의 체온이 조금 서늘했다. 손 하나만으로도 다 덮이는 일락의 젖살 통통한 양 볼을 장난스럽게 짜부시킨 금산이 옆에 앉았다. 편안한 실내복도 타이트해 보일 정도로 금산의 덩치와 근육이 거대해서 계단 폭이 훅 줄어든 것 같았다. 그래도 금산과 더 가까워질 수 있어서 일락은 좋았다. 이제 막 씻고 나온 금산의 냄새를 맡으며 무릎에 턱을 괸 일락이 창밖을 보았다. 2층과 1층 사이 계단참에서 보는 창밖 하늘이 청명했다.

“새벽같이 어딜 갔다 왔어?”

옆구리에 낀 패딩을 펼쳐 일락에게 입혀 주는 금산의 손길이 퍽 다정했다.

“때 밀고 왔어요.”

“오는 길에 김밥도 사 오고?”

계단 한쪽에 얌전히 내려놓은 비닐봉지를 활짝 열어 김밥 한 줄을 꺼낸 일락이 은박지를 찢었다. 추운 데 오래 있느라 빨간 손끝으로 은박지를 헤치고 김밥 두 개를 집어 금산에게 내밀었다. 군말 없이 받아먹는 금산이 바닥에 끌리는 패딩 지퍼 끝을 맞물리고 목까지 쭉 잡아 올렸다. 슬리퍼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일락의 장밋빛 발가락도, 김밥도 꽁꽁 얼어 있었다.

2층에서 놀고 있을 줄 알았더니. 제 버릇 못 버리고 새벽부터 빨빨거리고 돌아다닌 모양이었다. 가게 문 닫은 새벽엔 위험하니까 돌아다니지 말라는 잔소리에 꼬박꼬박 대답도 잘하는 일락은 까먹기도 잘 까먹었다.

“이거 어떻게 해요?”

“용돈 받았다 생각하고 까까 사 먹어.”

“아까 그 누나가 까까 사준다고 아무나 따라가면 안 된다고 했는데.”

“그 누나 따라가려고?”

“아저씨, 내가 까까 사줄게요.”

저는 아무나가 아니니까 같이 놀자는 일락의 추파에 피식 웃은 금산이 아무래도 안 되겠는지 그대로 일락을 들쳐 안았다. 30분 넘게 밖에 있었던 탓에 발이고 얼굴이고 일락의 몸뚱이가 다 얼음장이었다. 혹시나 싶어 나와봤기에 망정이지.

이번엔 패딩 대신 패딩으로 꽁꽁 감싼 일락을 옆구리에 끼고 계단을 올랐다. 매끼 고기반찬에 수시로 군것질까지 하면서 일락은 도통 무게가 늘지 않았다. 키도 열여덟 살 때보다 고작 3cm 커서 이제 겨우 170을 넘겼다. 먹은 게 다 어디로 가나 싶다가도, 빨빨거리면서 여기 참견하고 저기 참견하고 다니는 걸 보면 그럴 만도 했다.

“목욕탕엔 몇 시에 갔냐?”

“아까 4시 쫌 못 돼서요.”

가게들 문이 아예 닫기 전에 나간 걸 보니 금산의 말을 아주 까먹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근데 9시 넘어서와?”

“어? 저 아까 온 거 알았어요?”

“그렇게 요란하게 들어와 놓고 모를 줄 알았어?”

한창 섹스 중에 도어 록이 여닫히는 소리를 듣고 흥이 식은 금산은 여자의 몸속에서 성기를 빼내며 콘돔을 벗겼다. 그만할 거냐는 여자의 질문에 그러자며 욕실로 향하는 금산의 뒤에서 파김치가 된 여자가 다 쉰 목소리로 한마디 던졌다.

‘난 좀 쉬었다 씻을게요.’

금산의 섹스 상대는 대부분 일회성이었고, 섹스 직후엔 하나같이 몸을 가누지 못했다. 으레 그랬던 일이라 알았다며 욕실에 들어선 금산이 먼저 샤워를 했다. 머리를 감고 몸에 거품을 걷어내는데 알몸인 여자가 욕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겸연쩍은 얼굴로 머리를 틀어 올린 여자가 무릎을 꿇고 금산의 좆을 빨았다. 두어 번 빨았을까, 이미 열기가 식은 금산이 여자를 일으켜 주고 마저 몸을 씻었다.

‘이사님이 황 사장님 좆물 한 번은 빼 주고 오랬는데.’

‘열 번 뺀 거로 해.’

하하 웃은 여자가 ‘그러면 나야 좋지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옆에서 같이 샤워를 했다. 도어 록이 열렸다 닫힌 게 9시 11분이었다. 그 시간에 3층을 들락거릴 사람은 많지 않았다. 섹스하는 소리에 용건도 말하지 않고 냅다 도망갈 사람은 라일락 하나밖에 없었다. 쯧. 익숙해질 만도 한데 일락은 매번 이런 상황을 맞닥뜨릴 때마다 놀란 토끼처럼 뛰어나가곤 했다. 초반 몇 번은 그랬고, 지금은 살금살금 기어나갈 정도로 발전하긴 했지만 이처럼 꼭 흔적을 남겨두고 갔다. 일락이 흘리고 간 신분증을 주운 금산이 슬쩍 미간을 좁혔다.

증명사진 속 일락은 교복까지 입고 있어서 더 앳돼 보였다. 애한테 좋은 환경은 아니지. 금산이 황금 빌라를 방문할 때마다 때맞춰 여자를 보내는 권세우의 유치한 속내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다음부터는 더 조심할게요.”

“그럴 거 없어.”

한시적이라지만 제집도 마음대로 못 드나들게 하면서 데리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일락이 조심한다고 피해지는 일도 아니고. 금산이 빌라에 들르는 횟수를 더 줄이면 될 일이었다.

“아저씨.”

“왜.”

“라일락은 리라 꽃이라고도 부른대요.”

옆구리에 낀 일락을 소파에 앉힌 금산이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 주고, 패딩 지퍼를 내리며 계속 말하라는 듯 눈길을 주었다.

“리라는 프랑스 말이래요.”

“그러냐.”

패딩을 마저 벗기고 일락의 잠바 주머니에 손을 쑥 집어넣어 지갑을 꺼낸 금산이 신분증을 도로 끼워 주었다.

“아저씨는 프랑스 가본 적 있어요?”

“아니.”

지갑도 제자리에 넣어 주고 야구잠바를 벗겨준 금산이 김밥이 든 비닐봉지를 가져갔다.

“라면 끓여줄 테니까 같이 먹어.”

일락을 또 옆구리에 낀 금산이 식탁 의자에 그를 앉히고 라면 물을 올렸다. 김밥은 차갑게 굳어서 입 안에서 알갱이가 굴러다닐 정도였다. 냉장고에서 달걀을 꺼내 밥그릇에 풀고 김밥을 담갔다.

“프랑스 파리가 되게 유명하잖아요. 거기가요, 생각보다 많이 더러운데, 그래도 살면서 한 번쯤은 가 봐도 좋은 곳이래요.”

“누가?”

“김밥 할머니가요.”

지지직-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달걀물을 입힌 김밥을 올린 금산이 라면 네 개를 쪼개서 끓는 물에 넣었다. 스프와 달걀을 한 번에 때려 넣고 고기만두 대여섯 개도 넣었다. 보글보글 라면이 끓는 동안 부친 김밥을 접시에 옮기는 금산의 손길은 건성인 듯 능숙했다.

“손 씻고.”

김치를 식탁에 놓은 금산이 저만 쳐다보고 앉은 일락에게 화장실을 가리켰다. 얼른 뛰어가서 손을 씻으려던 일락이 바닥 수챗구멍에 엉킨 긴 머리카락을 발견하곤 그대로 쪼그려 앉았다. 휴지를 뜯어서 꼼꼼히 쓸어 담고는 휴지통에 버린 일락이 손을 씻고 나와서 다시 식탁 앞에 앉았다. 그사이 상을 다 차린 금산이 수저를 내주며 저도 맞은편에 앉았다.

“나중에 애인 생기면 가 봐.”

“어딜요?”

“프랑스.”

“아….”

제게 용돈을 준 누나의 긴 머리카락을 떠올리고 있던 일락이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수저를 들었다.

“나는 아저씨랑 가고 싶은데.”

“아저씨는 비행기 싫어해.”

“그럼 배 타고 갈래요?”

시무룩한 얼굴은 어디 가고, 금세 눈을 반짝거리며 묻는 일락을 익숙한 눈초리로 쳐다본 금산이 국그릇에 라면을 한가득 퍼서 놓아 주었다. 노른자를 안 터트린 달걀 하나하고 고기만두 네 개는 덤이었다.

“먹고 이발 좀 하러 가자.”

“머리 더 기르고 싶은데.”

“눈 나빠져. 싫으면 묶고 다니든가.”

“아저씨가 묶어 주세요!”

“이발하는 게 더 생산적이지 않겠냐?”

저 머리 묶어 주러 맨날맨날 와 주라는, 본인도 모르는 일락의 어리광을 잘도 알아채 놓고 맞장구는 쳐 주지 않는 금산은 그새 라면 한 그릇을 다 비워 내고 있었다. 금세 실망했다 또 금세 풀어진 일락도 지지 않고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며 금산이 뚝딱뚝딱 만들어준 아침을 빠르게 해치웠다. 누가 뺏어 먹는 것도 아닌데, 먹는 속도가 빠른 일락을 쳐다보던 금산이 내심 혀를 찼다.

열 살부터 보육원 생활을 한 일락은 뺏기는 데 익숙하고 양보하는 데 익숙했다. 형들이나 친구한텐 주로 뺏겼을 것이고, 동생들한텐 양보했을 것이다. 제가 빼앗기는 줄도 모르고, 양보가 습성이 된 줄도 모른 채, 밥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으려고 저도 모르게 먹는 속도가 빨라졌을 것이다. 생존 욕구의 소극적인 발현이었다. 그런 성격이었다. 맹하고, 생활력 없고, 마음 약하고, 융통성 없고, 모난 데 없이 순하고, 가끔 멍청할 정도로 착한. 그런데 지나치게 예쁘고.

“…….”

풍성하고 긴 속눈썹과 오뚝한 콧잔등 사이를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을 가만 쳐다본 금산이 손을 뻗었다. 여기만 살짝 자르면 괜찮을 것….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무심코 건드린 찰나였다.

“아….”

하도 손을 타서 금산이 제 얼굴을 만지든 어딜 만지든 대수롭잖게 받아들여 온 일락이 이번엔 그만 흠칫해 버리고 말았다. 마치 온 신경을 금산에게 곤두세우고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그걸 금산에게 들켰다는 사실을 알아챈 일락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

전신이 발갛게 물든 일락을 말없이 응시한 금산이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떼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식사를 재개했다. 장미꽃처럼 빨개진 얼굴로, 동그란 눈을 커다랗게 뜬 채 금산을 바라본 일락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시선을 내렸다. 그러곤 크게 뜬 두 눈을 두어 번 깜박거렸다.

순간적으로 금산이 밉고 서운했다. 저한테 아무런 맘도 없다는 걸 모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차분하게 선을 긋는 금산을 마주할 때면 가슴에 불이 난 것처럼 아파서 왈칵 눈물을 쏟아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일락은 눈물 대신 마음을 쏟아버렸다.

“아저씨 미워요.”

“알아.”

“김밥 먹지 마요. 내가 다 먹을 거예요.”

“알았다, 알았어. 그러니까 천천히 먹어.”

순순히 수저를 내려놓은 금산이 물을 따라 일락의 앞에 밀어 주었다. 그래 놓곤 자리를 피해 주지도 않았다. 일락의 마음은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금방 스쳐 지나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한 줄기 미풍인 것처럼 취급했다.

저에게 최고로 다정하면서 최고로 잔인한 아저씨가 일락은 세상에서 제일 미웠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