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야옹 (7/13)

3. 야옹

- 형님, 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놔둬. 내가 연락할게.”

- 그리고 권 이사한테도 전화 왔습니다.

눈살을 찌푸린 금산이 알았다며 전화를 끊었다. 모퉁이를 돌아 편의점을 지나치다 힐긋 유리 벽 안쪽을 쳐다보았다. 어디가 있나 했더니. 심부름이라도 하는 모양인지 라면으로 가득 채운 바구니를 계산대에 내려놓은 일락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새로 들어왔다는 알바가 대학생이라면서 눈을 반짝이던 게 엊그제 같은데 한 달이 훌쩍 지난 지금은 절친이 따로 없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알바와 일락의 웃음소리가 편의점 밖까지 들렸다. 또래랑 있으니까 딱 그만큼 철없어 보이고, 자연스러워 보이는 일락의 웃는 얼굴에서 시선을 거둔 금산이 골목을 빠져나갔다.

“이 정도면 아예 박스로 쟁여 놓는 게 낫지 않을까?”

“다른 데서 사면 재운이 형한테 혼나요.”

재운이 형은 ‘황금 편의점’ 사장이자 현재 근무 환경에 아주 크게 만족 중인 정현의 고용주였다.

“여기도 박스로 파는데?”

“성진이 형한테 물어볼게요.”

박스로 사다 놓고 먹으면 될 걸 매일같이 일락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황금 디저트 카페’ 사장 배성진의 의도 같은 건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일락이 배실 웃으며 현금을 내밀었다.

“잔돈은 심부름 값?”

“어? 형 진짜 똑똑하다.”

내가 똑똑한 게 아니라 여기 사장님들 편애가 유별난 거라는 말을 굳이 하지 않은 정현이 사은품으로 남은 막대 사탕 하나를 일락에게 물려 주고 저도 하나 까서 물었다.

“근데 넌 안 자냐? 뭐 한다고 맨날 이 시간에 빨빨거리면서 돌아댕겨?”

새벽 4시였다. 24시간 운영하는 편의점을 제외하면, 낮 12시에 셔터를 올리는 황금 상가 사장님들이 일제히 셔터를 내리는 시간이었다.

“저 지금 일어났어요.”

“엥? 안 잔 게 아니고? 몇 시에 자는데?”

“10시요.”

생각해보니 교대 시간인 밤 10시부터 일락이 심부름을 오는 새벽 4시까지는 얼굴을 본 기억이 없었다. 집에서 밤새 띵가띵가 놀면서 뒹굴다가 이맘때쯤 어슬렁어슬렁, 심부름은 핑계고 심부름 값 꽁으로 먹으려고 기어 나오는 줄 알았는데, 바른 생활 어린이였네.

“와, 너 진짜 생긴 대로 노는구나?”

아니지, 생긴 대로 놀았으면 이러고 허송세월 안 하지. 너튜브든 아웃스타든 알래스카TV든 셀럽으로 얼굴 팔면서 인생 꿀 빨고도 남았지.

부모님도, 대신 키워 주시던 할머니도 일찍 돌아가시고, 보육원에서 자라다가 아저씨 덕분에 형들하고 같이 살게 됐다는데. 피붙이도 아닌 동네 삼촌 같은 형들하고 같이 사는 게 뭐가 좋으며, 대체 그 아저씨는 어떤 분이길래 애가 푹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는지 얼굴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한두 번 든 게 아니었다.

대놓고 물어봐도 아저씨는 그냥 아저씨란다. 저 어렸을 때 보육원에 보내 주고, 눈 수술도 해 주고, 크게 다쳤을 때 병원비도 다 내 주고, 저한테는 정말 정말 고마운 사람이라고 말하는 일락의 얼굴이 그렇게 해맑을 수가 없었다.

눈 수술이 일반 라식 수술은 아니겠지? 크게 다친 건 또 뭐고. 아파서 1년 꿇었다더니, 뭐 얼마나 살았다고 애 인생이 이렇게 파란만장하냐. 생긴 것만 보면 돈 많은 집 막내나 외동으로 태어나 부둥부둥 예쁨만 받고 살았을 것 같은데.

의심한 적도 있었지만 지켜보니 암만 봐도 원조는 아닌 게 분명했고, 애 말만 들으면 키다리 아저씨 뭐 그런 거 같은데도 뭔가 미심쩍어서 정현은 이것저것 찌르고 캐물었다. 은근슬쩍 눈치 볼 것도 없었다. 거리낌 없이 묻는 족족 좋다고 답해 주는 일락을 보고 있자면 저도 모르게 걱정과 함께 웃음이 비져 나왔다.

새끼, 귀엽긴 존나 귀여워.

“그 잘난 아저씨 사진 같은 건 없냐?”

“많았는데 지금은 없어요.”

눈물 이모티콘 달아야 할 것 같은 얼굴로 시무룩해 하는 일락의 왼뺨이 사탕 모양 그대로 볼록 튀어나왔다. 무심코 찔러 보려다가 정신을 차린 정현이 괜히 사탕만 와그작 씹었다.

“많았는데 왜 없어?”

“핸드폰 압수당했거든요.”

“대체 뭔 짓을 하면 핸드폰까지 압수당하냐? 너 진짜 감금당하거나 뭐 그런 건 아니지?”

“진짜 아니에요, 형. 저 어제 목욕탕도 다녀오고, 만화 카페도 갔어요. 핸드폰은 문자 온 거 잘못 눌렀다가 통장에 있는 돈 다 빠져나간 적 있어서 압수당한 거구요.”

말로만 듣던 스미싱이었다. 어떤 얼빠진 인간이 그런 얼토당토않은 수법에 당하나 했더니만 바로 요기 있었다. 요즘엔 일반인들도 웬만한 수법은 싹 꿰고 있어서 해외에서 온 문자는 쳐다도 안 본다는데. 얘가 직구 같은 걸 하진 않을 것 같고.

“너 혹시 모바일 토토나 사다리 같은 거 타냐?”

그게 뭐냐고 묻는 일락의 맑은 눈동자를 마주한 정현이 저도 모르게 머뭇거렸다. 그래, 로또도 한번 안 사봤을 것 같은 애가 인터넷 도박 같은 걸 할 리가 없지.

“그게 뭔 줄 알고 링크를 냅다 눌러?”

“안 그래도 형들한테 된통 혼났어요. 통장에 10만 원 넘게 있었는데 그거 다 빠져나가고, 경찰서랑 은행 왔다 갔다 하고…. 아저씨가 다 해결해 줬는데 그때 이후로 통장은 잘 안 쓰게 돼요. 어차피 돈도 못 벌고, 쓸 데도 거의 없거든요.”

얘 진짜 생활력 제로네. 그렇게 힘들게 살아왔으면 조금이라도 악착같아지지 않나? 요즘 애들은 다 약아 빠졌다던데. 아니, 사는 게 별로 안 힘들었나? 아저씨 덕분에? 뭐, 아저씨는 몰라도 여기 사장님들이 오냐오냐하긴 하시지. 무슨 라면 20개 심부름시켜 놓고 5만 원씩이나 줘? 잔돈은 다 심부름 값. 그것도 매일매일. 이건 무슨 용돈 주려고 일부러 심부름시키는 수준이었다.

“너 용돈은 받냐? 알바도 못 하게 한다며? 설마 그 심부름 값이 용돈?”

물론 심부름 값만으로도 한 달 용돈 떡을 치겠지만.

“아니, 근데 돈을 어떻게 쓰고 다니면 통장에 10만 원밖에 안 남냐?”

“아…, 핸드폰을 고2 때 압수당했거든요. 그 돈도 아저씨가 까까 사 먹으라고 준 건데….”

같이 살기는 고2 때부터 같이 살았다고 했었다. 그때는 애라서 용돈을 덜 줬나? 쟤라면 용돈이 쌓이기도 전에 당한 걸 수도. 사정이야 어쨌든 일락은 스미싱 당한 것보다 아저씨가 준 돈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더 속상한 눈치였다. 하긴 지금도 애 같은데 그땐 더 애 같았겠지. 고딩 때면 스미싱도, 압수도 당할 만하고.

고2면 못해도 1년 반은 넘게 압수당했다는 건데, 답답하지도 않나? 친구도 없어 보이고. 학교도 안 다녀, 학원도 안 다녀, 알바도 안 해. 그런 거로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어. 인생 개꿀이긴 한데. 어린애가 이렇게 살아도 되나?

정현의 속내는 조금도 알지 못한 채 사탕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며 성의껏 답하는 일락의 속눈썹이 참 곱게도 깜빡거렸다.

“용돈은 형들이 조금씩 줘요. 알바는… 하는 게 더 돈 든다고 하지 말래서 못 하고요. 그래도 이제 청소는 잘할 수 있는데.”

일하는 족족 뭘 깨뜨리고 부수고, 하루 일하고 사흘 앓으면 저라도 못 하게 할 것 같긴 했다. 얘기 들어보면 손재주도, 일머리도 없는 거 같고. 공부엔 관심도 흥미도 재능도 없는 거 같다. 체력이 좋길 하나 운동에 재주가 있길 하나, 예체능에 소질이 있길 하나. 정말 잘난 건 아이돌 뺨치는 얼굴이랑 성격 좋은 게 다였다.

지능적으로 모자란 것 같진 않은데 세상 물정 하나도 모르고, 붙임성도 좋은데 경계심 같은 건 조금도 없고. 저랑 얼마나 봤다고 묻는 대로 미주알고주알 답해 주는지, 일락을 보고 있자면 덜컥 걱정이 앞섰다. 한편, 이런 애는 뭘 해도 등쳐 먹히기 십상이라 삼촌 같은 형들이 싸고도는 게 이해되는 것도 같았다.

“너튜브고 뭐고, 너 그냥 평생 형들이랑 아저씨한테 딱 붙어 있어라.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네 살길인 것 같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형들도 아저씨도 결혼하셔야죠.”

아니, 틀린 말은 아닌데. 왜 몹쓸 짓 하는 거 같지?

“야, 네가 그 말 하니까 어째 아빠랑 삼촌들 새장가 보내는 애새끼 같냐? 나는 돈 밝히는 매파 같고.”

“매파가 뭐예요?”

“매가 먹는 파…겠냐? 있어, 결혼 중개해 주는 사람. 결혼정보회사라고 알지? 그 결정사의 대모님 같은 거.”

뭔 맥락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지만, 어쨌든 제 말을 재밌어하는 것 같은 일락의 볼따구를 기어코 쿡 찔러 본 정현이 출입문을 가리켰다.

“얼른 가라. 형아들 목 빠지게 기다리겠다.”

“네~. 내일 봬요, 형.”

방긋방긋 웃으면서 인사하는 일락에게 손을 흔들어준 정현이 아무래도 찜찜한 얼굴로 힐긋 유리 벽 너머를 쳐다보았다. 동이 트지 않아 어둑한 새벽길을 환히 밝힌 간판 덕분에 골목은 어둡지 않았다.

모퉁이에 있는 편의점을 나가 왼쪽으로 돌아서면 황금 포차,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꽃집, 세탁소, 디저트 카페 등등이 있었다. 심부름을 시킨 건 디저트 카페 사장인데, 봉지 라면을 한가득 품에 안은 일락이 향하는 곳은 포차였다. 실내 포차인 황금 포차 사장도 일락의 형들 중 하나였다.

무겁지도 않은 걸 뭐 저렇게 꼬옥 안고 가냐. 아무튼 사장님들 아무리 봐도 전직 조폭 같은데. 손 씻고 갱생의 의미로 불쌍한 애 데려다 키우나? 그럼 그 아저씨라는 사람은 조폭 두목? 일락의 말처럼 운동선수처럼 키 크고, 몸 좋고, 배우보다 더 잘생긴 데다 돈 많고 착하기까지 한 조폭 두목이 실존할 수가 있나?

하긴 일락이 같은 애도 있는데. 사진 몰래 찍어서 기획사에다 슬쩍 찔러봐? 아니면 내 아웃스타에 올려? 아서라. 그러다 애 인생 망칠라.

고개를 저은 정현이 의자에 앉으며 턱을 괴었다. 4시 13분. 잠깐 떠든 것 같은데 벌써 10분이나 지났다. 이 시간엔 손님이 거의 없어서 더 졸리고 잡생각도 많이 났다. 그래도 일락이 고것이 왔다 가면 수다도 떨고 잠도 깨고 해서 도움이 됐다. 말로만 들은 그 아저씨 언제나 함 볼라나. 이제 퇴근 시간까진 두 시간도 안 남았다. 길게 하품하며 쭉 기지개를 켠 정현이 계산대를 돌아 나왔다. 이미 더 손댈 것도 없는 상품들을 건드리며 괜히 매장을 어슬렁거렸다.

“어?”

포차에서 한 솥 끓인 라면을 형들이 조지는 동안 식당 사장인 김현배가 뚝딱 끓여준 된장찌개에 달걀프라이, 흰 쌀밥을 싹싹 비벼 먹은 일락이 집으로 돌아와 3층 냉장고 문을 열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제 왔다 가셨지?”

과일 칸 두 개를 꽉꽉 채운 사과랑 딸기, 레드향을 내려다본 일락이 앞에 쪼그려 앉았다. 과일 칸 위쪽에 포스트잇 한 장이 붙어 있었다.

「깎지 말고 베어 먹어.」

옛날에 혼자 사과 깎아 먹다가 손가락을 벤 뒤론 금산이 꼭꼭 써 붙이고 가는 메모였다. 아래 칸을 다 채운 사과는 미리 깨끗하게 씻어 놓았을 게 분명했다.

“얼굴 보여 주고 가지.”

메모지를 곱게 펴서 제 손등에 붙이고 사과 한 알을 꺼낸 일락이 몸을 일으켰다. 아삭. 싱싱한 사과를 한 입 베어 물며 냉장고 문을 닫고 주방을 빠져나왔다. 제가 쓰는 작은 방을 찾아 들어가 책상 서랍을 열었다. 아직 버리지 않은 국어 교과서를 꺼내 펼치고 메모지를 끼워 놓았다. 수학 교과서엔 심부름 값으로 남은 용돈, 그리고 돼지 저금통엔 동전을 넣었다. 별거 없는 책상을 정돈하고 옷을 훌렁훌렁 벗었다. 외출복은 불편한 데다가 긴소매라 아직 난방 중인 집에선 더웠다. 위아래 반소매 실내복을 찾아 입고 먹다 만 사과를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3층에서 잘까? 그러면 아저씨가 오늘처럼 잠깐 왔다가도 볼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3층에 혼자 있는 것도 싫었고, 금산이 누군갈 데려오는 걸 보는 것도 싫었다. 그래도 되도록 티는 내지 않았다. 티를 내면 금산이 그나마 오는 횟수도 줄일 것 같아서. 그게 아니라도 금산은 주로 일락이 자고 있을 때 상가를 방문했다.

처음엔 못해도 한 달에 3주는 머물러서 얼굴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그러니까 모르는 누나와 안방에서 섹스하는 걸 보인 이후부터 눈에 띄게 방문 횟수를 줄였다. 일주일이 나흘, 나흘이 이틀로, 이젠 한 달에 한 번 올까 말까였다.

곰곰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일락이 섹스를 목격할 때마다 금산의 방문 횟수가 줄었다. 지금까지 목격한 건 네 번. 네 명 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예쁘고 어른스럽고, 다정했다. 금산은 왜인지 그런 사람을 좋아할 것 같았다. 예쁘고, 어른스럽고, 다정한. 그리고 그런 사람이 잘 어울렸다.

나도 아저씨랑 그런 거 할 수 있는데. 그렇지만 아저씨는 저랑 그런 걸 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저는 어리고, 맹하고, 단순한 아르바이트도 제대로 못 하는 사고뭉치니까.

무엇보다 저는 남자였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스물한 살짜리 남자애. 예쁘지도, 어른스럽지도, 다정하지도 않은. 그래도 잘해 줄 수는 있어요. 노력도 평생 할 수 있는데.

금산은 선을 긋고, 곁을 주지 않았다. 그에게 일락은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다 허물어가는 판잣집에서 주워다 보육원에 맡기고, 어쩔 수 없이 떠맡게 된 애물단지에 불과했다.

앗, 아저씨가 사과 씨까지 다 먹지 말랬는데.

사과 씨는 물론 꼭지까지 다 씹어먹은 일락이 목울대를 삼키며 작은방을 나왔다. 이제 곧 형들이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다. 그러면 일락은 형들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3층 거실에서 뒹굴거나, 2층 조재운의 방에서 뒹굴거나, 상가 뒷마당에서 낮잠을 자거나, 문 닫은 디저트 카페 테라스 의자에 앉아 편의점에서 사 온 군것질거리들로 배를 채웠다. 형들 중에 유일하게 아침 일하는 재운은 일락하고 오전 시간을 같이 보내 주었다. 낮 12시가 지나면 셔터를 올린 형들과 같이 점심을 먹고, 저녁을 먹고, 시간 맞춰서 2층으로 올라가 잠자리에 들었다.

저녁 7시부터 슬슬 손님이 많아지면 일락은 상가 골목을 배회하기 어려워졌다. 길가마다 담배를 물고 선 손님들과 보행객들이 많아지기 때문이었다. 상가 건물은 어디든 금연이었는데, 바깥은 달랐다. 지금도 일락은 언제든 알레르기 때문에 병원에 실려 갈 수 있었다. 그래서 금산도 형들도 지금은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실내에서도 은근슬쩍 흡연하려는 손님들은 가차 없이 쫓아냈다. 고3 때 햄버거 프랜차이즈에서 알바하다가 119에 실려 간 뒤부터였다. 쓰레기봉투를 버리러 뒷문으로 나갔다가 골목에서 옹기종기 모여 줄줄이 담배를 피우는 중딩들하고 마주치는 바람에 편도가 알레르기성 발작을 일으켰다.

그 이후 알바도 금지됐다. 그래도 마냥 놀 수만은 없어서 이리저리 조른 끝에 황금 상가에서 알바하기로 타협을 했다. 첫 타자는 편의점이었는데 반나절 만에 잘렸다. 꽃집, 세탁소, 디저트 카페, 부동산, 식당도 마찬가지였다. 하나같이 하루를 못 가고 잘리기 일쑤였다. 편의점에선 진열하다가 음료를 깨 먹었고, 꽃집에선 화분을, 세탁소에선 손님 옷을, 카페에선 믹서기를, 부동산에선 복사기를, 식당에선 쟁반을 쏟아 그릇 열댓 개를 깨 먹었다.

그게 다 힘이 약해서였다. 덕수한테 쫓기다가 당구장에서 뛰어내린 후유증이었다. 특히 오른손. 깨끗하게 똑 부러진 갈비뼈나 정강이는 자연스레 붙었는데, 어중간하게 쪼개진 오른 팔목이 낫기까지 오래 걸렸다. 조각조각 난 뼈를 모아 붙인 데다 핀까지 박아야 해서 엄청난 대공사라고 했다. 그래서 유독 오른손 힘이 약했다. 다른 데는 날이 궂을 때 조금 쑤시는 정도에 그쳤는데, 오른팔은 끙끙 앓을 정도로 아팠다.

안 그래도 잘난 거 하나 없는데, 몸까지 엉망이었다. 눈도 아저씨가 고쳐준 건데….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금산이 좋아지고, 금산이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마음도 아팠다. 금산을 좋아하는 마음은 꼭 받아 주는 사람 없는 헹가래 같았다. 벅차 높이 떠올랐다가도 끝내 혼자 떨어지고 마는. 그래도 일락은 제 마음을 멈출 수도, 줄일 수도 없었다. 오히려 더 커지기만 했다. 그게 꼭 괴로운 것만도 아니었다. 괴로운 시간보다 좋고 행복한 시간이 더 많았다.

왜 출출하지.

사과 한 알을 다 먹고 나니까 입맛이 더 돌았다. 아침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뭐가 더 먹고 싶었다. 곧장 냉장고를 연 일락이 딸기를 꺼냈다. 스테인리스 볼을 가득 채운 빨간 딸기도 깨끗하게 씻겨 있었다. 주방을 두리번거리다 볼을 내려놓은 일락이 싱크대 옆 하부 장으로 기어 올라갔다. 매끄러운 상판에 두 무릎을 올려놓고 손을 뻗어 상부 장 문을 열었다. 다행히 손끝에 종이 접시가 닿았다.

맨 위 칸에서 종이 접시 하나를 꺼내놓고 조심조심 하부 장에서 내려오려던 일락이 흠칫 뒤를 돌아보았다.

“…….”

“안녕?”

“누구세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 일락을 흥미로운 눈길로 관찰한 남자가 식탁에 걸터앉으며 답했다.

“권세우 이사님.”

“아….”

이름 물어본 거 아닌데. 하면서도 슬금슬금 하부 장에서 내려온 일락이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권세우 이사님.”

“예의 바르네? 가르쳐줄 사람도 없는 것 같은데.”

“아저씨랑 형들이요.”

또 할머니도.

비꼬는 줄도 모르고 반색하며 답하는 일락의 뺨에 예쁜 웃음이 걸렸다. 순진하고 경계심이라고는 터럭도 없는 얼굴에 권세우는 내심 어이가 없었다.

황금산 이 새끼, 완전 도둑놈의 새끼였네.

“근데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저 문 잠긴 거 확인했는데.”

안 잠긴 것도 모르고 씻으러 들어갔다가 뒤늦게 들어온 금산한테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난 적이 있었다. 그런 사정을 알 리도 없고 관심도 없는 세우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비밀번호 누르고. 문 여는 소리 못 들었어?”

“네. 저… 난청이 조금 있거든요.”

얼씨구, 묻지도 않은 걸 술술 답도 잘한다. 새끼들, 빠져 가지고 대체 애 교육을 어떻게 한 거야?

“집주인은?”

“아저씨요?”

“아저씨가 누군데?”

“어…, 황금산 아저씨요.”

“황금산 아저씨? 뭐, 그 자식이 노안이긴 하지.”

“아저씨 친구분이세요?”

“그럴 리가.”

대놓고 키득거린 세우가 의자를 당겨 앉으며 말했다.

“딸기 맛있어 보인다?”

세우의 턱짓을 따라 볼에 가득 담긴 딸기를 쳐다본 일락이 상부 장에서 꺼낸 종이 그릇과 세우를 번갈아 보곤 조심스레 물었다.

“권세우 이사님도 드실래요?”

“이사님.”

“네?”

“이사님이라고 불러.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꼬박꼬박 이름 붙여서 부르면 많이 건방져 보이잖아? 기껏 가르친 아저씨랑 형들 욕 먹이고 싶은 건 아니지?”

“네…, 이사님.”

크게 깨달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일락이 “잠시만요.” 하고는 다시 하부 장으로 기어 올라갔다. 딸기 달라니까 저긴 왜 기어 올라가는지, 심드렁한 얼굴로 일락을 쳐다보는 세우의 눈동자로 비웃음이 스쳤다. 펑퍼짐한 반소매 티 한 장 걸친 일락은 바지는 입었는지 벗었는지, 뽀얗고 매끈한 허벅지를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홀랑 벗겨 먹기 아주 좋은 차림이었다. 발그레한 뺨처럼 살굿빛이 도는 동그란 발꿈치에서 눈을 뗀 세우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맹하게 생긴 게 꼬리 치는 것도 일차원적이었다. 저게 여자라면 인심 쓰듯 한번 넘어가 줄 수도 있는데. 하여간 황금산 그 새끼랑은 취향부터 성격까지 맞는 게 하나도 없었다.

“마실 것도 드릴까요?”

어느새 하부 장에서 내려온 일락이 종이 그릇 두 개에 딸기를 예쁘게 덜어서 세우 앞에 놓고 제 앞에도 놓았다.

“일회용 접시라니, 새로운데? 손님 대접 못 받는 것 같고. 기분 째지네?”

“네? 아… 그게….”

“됐고. 물이나 한 잔 주지? 냉수 먹고 알아서 속 차리게.”

우왕좌왕하던 일락이 돌아서서 진열대에 놓인 머그잔을 두 손으로 꺼냈다. 정수기에서 냉수를 받고 세우 앞에 놓으면서도 머그잔을 깨뜨릴까, 두 손으로 조심조심 옮겨 놓았다. 그러곤 유리 접시도 한 장 꺼내서 딸기를 다시 예쁘게 덜어 세우 앞에 놓아 주었다.

냉수 그거 달란다고 기다렸다는 듯이 떡하니 갖다 바치고. 애가 사람 먹이는 데 고단수네. 일부러라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것 없이 굼뜨디굼뜬 일락의 행동을 기가 찬 얼굴로 쳐다본 세우가 담배를 꺼내 물며 한마디 던졌다.

“거북이 새끼도 아니고. 그렇게 주기 싫냐? 손님 대접하기 싫어?”

“네? 아니요.”

깜짝 놀란 일락이 손사래를 치며 얼른 덧붙였다.

“깨뜨릴 것 같아서요. 저 유리 같은 거 잘 깨뜨리거든요. 그리고 여기선 담배 피우시면 안 돼요.”

“왜? 너무 곱게 자라서 물 한 잔, 과일 한 접시 내주는 것도 격한 노동이라 힘드냐? 싸가지 없이 어디 어른이 담배 피우는데 이래라저래라 참견이야. 누가 고아 아니랄까 봐 못 배운 티 팍팍 내고 있어, 응?”

“어? 저 고아인 거 어떻게 아셨어요? 아저씨가 알려 주셨어요? 아저씨 그런 말씀 잘 안 하시는데…. 아저씨랑 진짜 친구 아니에요? 친한 친구라면 말씀하셨을 것도 같고…. 어, 그리고… 제가 못 배운 건 아닌데요, 머리가 나빠서 자꾸 까먹어요. 아마 형들이랑 아저씨가 분명히 가르쳐 주셨을 텐데 제가 이번에도 까먹은 걸 거예요. 담배는 참견 아니고요. 제가 알레르기가 있어서요. 담배 연기 잘못 마시면 119 불러야 할지도 모르거든요. 그러면 이사님한테 민폐 끼치는 거니까요.”

동그랗게 뜬 눈으로 신기해하다, 겸연쩍어하다, 오해하지 말라며 적극적으로 변명하는 일락의 표정이 참 다양도 했다. 저 주옥같은 말들은 세우를 비꼬거나 먹이는 게 아니고 뇌에서 필터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튀어나오는 순도 백 퍼센트 속마음이었다.

뭐야, 이 애새끼는. 이런 게 진짜 황금산 그 새끼 취향이라고?

황당한 얼굴로 일락을 쳐다보던 세우가 팍 인상을 썼다. 갑자기 벌떡 일어난 일락이 종종거리더니 포크 하나를 들고 와 세우 앞에 내주었다.

“딸기 드세요. 엄청 맛있을 것 같아요. 아저씨가 씻은 거라서 진짜 깨끗할 거예요.”

“…황금산이 손수 씻어 드렸다고? 너 먹으라고?”

황금산 그 새끼가 그렇게 세심하게 다정한 놈이 아닌데? 기가 차서 할 말을 잃은 세우가 새삼스러운 눈길로 일락을 훑어보았다. 11년 전에 작업장에서 주워다가 손수 고아원에 버린 애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재단 세탁소에 버렸길래 늘 쓰는 용도로 데려왔겠거니 했는데, 웬걸, 하는 짓이 점점 가관이었다.

주 종목 바꾸는 김에 속죄라도 하고 싶었는지 몰래 수술비도 대 주고 뒤도 봐주면서 키다리 아저씨 노릇 하기에 마음껏 비웃었다. 그런다고 지은 죄가 사라지나, 뼛속부터 깡패 새끼인 주제에 지랄 염병을 한다 싶었다. 아니,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미성년자 딱지도 아직 안 뗀 애를 아예 제 방구석에다 들여놨단다. 그럼 그렇지, 그 더러운 핏줄 어디 안 가지. 우습지도 않았다. 깡패 새끼들이 핏덩이 데려다가 제 집구석에서 할 짓이야 뻔했다. 빠구리를 뜨든가, 다구리를 치든가, 애새끼 돈 되는 대로 돌려먹든가.

한데 그 이후 아무런 소식도 들리지 않았다. 업소에서 가랑이가 헐 때까지 팔아 제낀다는 소식도, 어디 생활관에 들여보내 칼받이로 쓴다는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결국 제가 먹으려고 방구석에 들였다는 뜻이었다. 사람 장사 싫어서 손 털고 나갔다는 새끼의 위선에 구역질이 났다. 한편 눈앞에서 비웃어줄 생각에 신나기도 났다. 하지만 이번에도 황금산은 권세우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없던데요?’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로 담배를 꺼내 문 여자는 황금 빌라를 빠져나오자마자 불려와서인지 피로에 찌든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남자애든 여자애든 거기서 붙어먹는 것 같지는 않더라고요. 집도 평범하고, 명품 비슷한 건 보이지도 않고, 콘돔도 없어서 제 거 썼잖아요.’

섹스하러 가서 흘깃 본 것만으로 뭘 알겠나 싶지만, 스폰 받아 사는 애들 집은 특유의 생활감이 있었다. 아무렇게나 널린 명품들이나, 무언가 정돈되지 않은 분위기, 구석구석에서 잡히는 섹스 용품 등, 평범한 가정집하고는 아무래도 달랐다. 그런데 황금산이 애 하나 끼고 산다는 빌라에선 그런 징후를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누가 애지중지한다는 애를 그런 데다 던져 놔요? 더구나 황 사장님 같은 분이. 가오가 있지.’

가오 같은 소리 하네. 황 사장님 같은 분? 그런 분은 대체 어떤 분이라서? 고작 삼류 건달 출신 주제에. 씨발.

‘그냥 급식이나 학식 키우는 집 같던데. 황 사장님 숨겨둔 자식 그런 거 아닐까요?’

눈치를 보며 은근슬쩍 던지는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권세우가 아는 한 황금산이 여자 사고를 친 적은 없었다. 외려 보기와 다르게 깔끔한 편이었다. 콘돔 없인 섹스 자체를 하지 않았고, 매일같이 여자를 갈아치우며 화려한 여성 편력을 자랑하지도 않았다. 그런 놈한테 숨겨둔 자식이 있다고?

‘그나저나 저 이틀은 쉬게 해 주세요. 황 사장님 받고 오면 가랑이가 남아나질 않는다니까요?’

여자의 우는 소리가 엄살은 아니었다. 그 빌어먹게 흉측스러운 대물은 이 바닥 머저리들한테 황금산이 선망의 대상이 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아! 그 앤가? 가출 청소년인 줄 알았더니. 제 생각엔 이사님이 오해하시는 것 같아요. 그 남자애 얼핏 봤는데 몸집도 작고, 엉덩이도 작고, 걸음걸이는 또 멀쩡하던데요? 황 사장님이 건드린 것 같진 않았어요. 게다가 너무… 어리던데요.’

중간에 말끝을 흐리던 여자의 속내는 뻔했다. 이 바닥에선 어릴수록 비쌌고 경쟁력이 있었다. 그 잘난 황금산 사장도 변태 속물들과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겠지. 하여간 머저리 같은 것들.

보내는 여자마다 같은 소리를 지껄인 탓에 직접 행차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를 보내기 시작한 시점부터 황금산의 빌라 방문 횟수가 줄어 가뜩이나 짜증스러운 참이었다.

“야.”

“네?”

“너 이름 뭐냐?”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입술을 벙긋거린 일락이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라일락이요.”

하, 씨발. 황금산 음흉한 새끼.

업소에 앉혀만 놔도 돈을 쓸어 담을 정도로 애 와꾸가 환상적이었다. 이걸 저만 보겠다고 들어 앉혀? 애를 무슨 용도로 쓰든 황금산의 밑에 있는 한 이 꼬맹이도 조직 소유였다. 하물며 제 좆받이로도 안 쓰고 밥만 축내는 식충이로 놀리고 있다? 이건 횡령이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몇 살?”

“스물하나요.”

보기보다 나이가 많지만, 이 얼굴이면 미성년자 딱지 붙여서 내놓아도 문제없었다. 날개 돋친 듯 팔리겠지. 실제 성인이니까 더더욱 문제 될 게 없었다.

“일은?”

“네?”

“직업-. 딱 봐도 천애 고아 같은데 백수는 아닐 거 아냐? 너도 먹고살아야지. 설마 형들이랑 아저씨한테 빌붙어 사는 건 아니겠지? 스물하나씩이나 먹었는데?”

“와….”

정곡을 찔린 것처럼 반응하길래 얼굴이라도 확 붉힐 줄 알았는데, 눈앞의 꼬맹이는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이사님 되게 똑똑하시다.”

감탄한 얼굴로 세우를 올려다보며 히 웃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형들이 저는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라고 했거든요. 형들이랑 아저씨 도와준다고 설치다가 더는 속 썩이지 말랬어요.”

하여간 깡패 새끼들이 무르기는. 암만 봐도 생판 남은 아니란 말이야.

“가만히만 있어도 돈 벌 수 있으면?”

“네?”

“내가 그런 일 소개해 줄 수 있거든.”

“아얏!”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일락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어뜯은 세우가 요란스러운 반응에 피식 웃으며 행커치프로 머리카락을 감쌌다.

“가만히, 사고 안 치고, 네 형들이랑 아저씨 도와줄 수 있는 일.”

“어…, 그거 옷 벗고 해야 해요?”

“뭐?”

되레 정곡을 찔린 세우가 되묻는 순간 반짝 시선을 든 일락이 빠르게 주방을 빠져나갔다. 도어 록이 열리는 소리에 번개같이 반응한 것이다.

“아저씨!”

현관에 놓인 남성 구두 한 켤레를 내려다보던 금산이 저에게 뛰어드는 일락을 가볍게 받아 들며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 가신 거 아니었어요? 과일만 놓고 그냥 가신 줄 알았어요!”

그래서 정말 많이 서운했고, 또 그만큼 보고 싶었다며 마음껏 속내를 털어놓은 일락이 뒤늦게 세우를 떠올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저씨 친구분…, 아니, 권세…, 아니, 이사님이 오셨어요.”

“황 사장, 오랜만?”

한 줌도 안 되는 일락을 쉽게 추슬러 안은 금산이 모퉁이를 돌아서자 의자 등받이에 팔을 기대고 앉은 세우가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얼굴 보기 힘들어~? 자주 보여 주면 누가 실세 아니라고 깎아내리기라도 한대?”

“아직도 실세 타령이냐.”

성가신 얼굴로 한마디 대꾸한 금산이 제 품에서 내려가려는 일락을 놓아 주며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의자에 앉으면서도 저에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일락을 좇는 금산을 쳐다본 세우가 대놓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본다고 닳겠냐?”

“본격적으로 쥐새끼 짓 해 보겠다는 거면 화환 하나 챙겨 주고.”

발끈하는 세우의 눈꼬리가 확 치켜 올라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저한테 떨어져 나간 일락이 뭐하나 잠자코 지켜보던 금산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까처럼 하부 장에 올라가 상부 장에 달린 문을 열고 맨 위 칸까지 손을 뻗은 일락이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굵고 긴 팔 하나가 일락의 허리를 감고 하부 장에서 끌어내렸다.

“아저씨?”

“새롭게 다치는 방법, 뭐 그런 거 연구 중?”

“그런 게 어딨어요.”

아하하 웃으며 금산에게 몸을 맡긴 일락이 제가 하부 장에 올라간 이유를 설명했다.

“아저씨 딸기 드리려구요.”

“그냥 주워 먹으면 되지 뭐 이런걸.”

일락의 손끝에 딸려 나온 종이 접시를 가져간 금산이 힐긋 식탁을 내려다보았다. 새빨간 딸기가 수북한 볼 하나, 그 딸기가 옹기종기 담긴 유리그릇 하나, 그보다 조금 덜 담긴 종이 접시 하나, 아무것도 담은 것 없이 물기만 남은 종이 접시 하나를 훑어본 금산은 쉽사리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온 신경을 금산에게만 집중하고 있어서 금세 그의 눈길을 읽은 일락이 얼른 입을 열었다.

“아저씨한테도 깨끗한 접시에 담아 주고 싶은데 아저씨는 저 유리 드는 거 싫어하시니까요.”

그래서 유리그릇 대신 새 종이 접시에 담아 주려고 했다는 말이었다.

여벌로 내놓은 건 그새 다 쓴 모양이었다. 손을 뻗어 상부 장 맨 위 칸에서 일회용 접시를 한 묶음 꺼낸 금산이 빈 수납장을 채우고 식탁 앞에 앉았다. 금산이 꺼내놓지 않으면 일락은 필요할 때마다 하부 장에 기어 올라가 하나씩 꺼내쓰다가 미끄러지거나 떨어져서 또 어디 한군데 다칠 게 분명했다.

“포크 가져올게요.”

“괜찮아, 그건.”

대꾸하며 일락의 손을 움켜쥔 금산이 제 손보다 한참 작고 보드라운 손가락을 포크 대신 사용했다. 첨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그저 금산이 제 손을 잡아 주는 게 좋아서 입꼬리를 실룩거린 일락이 뒤늦게 알아차리곤 적극적으로 포크 노릇을 했다. 아저씨 오기 전에 손을 씻어 두길 잘했다는 얼굴이었다. 까먹지 않고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아저씨 저 손 깨끗하게 씻었어요.”

“그러냐.”

금산에게 딸기 하나를 물려 주고 저도 하나 입에 무는 일락의 왼뺨이 볼록해졌다.

일락을 안은 그대로 의자에 앉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허벅지에 일락을 올리게 된 금산은 맞은편의 세우 따윈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굴었다. 저런 금산의 태도에 익숙해지지 못한 세우는 이번에도 여지없이 불만을 드러냈다. 당연히 일락을 이용한 굴절 공격이었다.

“숙소에서 밥만 축내는 식충이라더라? 그 꼬맹이.”

딸기 맛있냐고 묻고, 아저씨 오기 전에 사과도 한 알 먹고, 옷도 갈아입었고, 오늘도 배성진 심부름으로 편의점에서 라면 사다가 형들이랑 같이 아침 먹었고, 편의점 아르바이트인 정현과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고, 시시콜콜 사소한 일 하나 빼먹지 않고 금산에게 쫑알거리던 일락이 그제야 세우 앞이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저 밥 조금만 먹을까요?”

세우의 신랄한 평가에 동의는 하는지 부정하지 않고 차선책을 제시하는 일락의 입술 새로 딸기 하나가 밀려들어 갔다.

“밥 안 먹고 군것질만 하려고?”

“아니요. 저 밥도 잘 먹고 군것질도 잘해요.”

“그래, 그렇게만 해.”

“놀고 있네. 설마 진짜 밖에서 낳아 온 애는 아니지?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데.”

빈정거리는 세우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금산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너 내 아들 할래?”

“싫어요.”

대번에 튀어나오는 거절에 눈살을 찌푸린 건 권세우였다.

“일도 안 하고 밥값도 못 하는 식충이가 심지어 네 핏줄도 아니다?”

“핏줄로 리빌딩 하는 시대는 지나지 않았냐.”

“핏줄 덕에 먹고살 만해진 새끼가 할 말은 아니지, 그게?”

왼쪽 팔로 일락의 등을 감싸 안아 세우와는 아예 눈도 마주치지 않게 방향을 잡아 앉힌 금산이 그제야 세우를 쳐다보았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느냐는 눈길엔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저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과 여유가 세우는 처음부터 맘에 들지 않았다.

금산이 제 능력을 발휘하며 두각을 드러낸 뒤에도 세우는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든 합법보다는 불법이 성공하기도 저지르기도 쉬웠다. 온갖 불법을 저질러 성과를 세우고도 권씨 성 하나 받지 못한 금산의 현재가 그 무능력을 방증했다. 그룹 회장인 모친 권태화의 신임을 얻으려고 아무리 발악해봤자 황금산은 삼류 양아치 새끼의 자식밖에 되지 못했다. 반쪽짜리 핏줄, 제 이부형제인 금산을 노려보는 세우의 눈길이 싸늘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

포크를 툭 던져 시선을 끈 세우가 입매를 끌어 올렸다.

“할머님께서 늘 강조한 말씀이잖아. 그 꼬맹이,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까 조직에 넘겨. 잘 쓰면 본전 정도는 남길 것도 같은데 뭘 끼고 앉아 있어?”

“너 뭐하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들은 것처럼 반응한 금산이 실소했다.

“본전 정도는 남겨?”

빈정거리며 일락의 작고 동글동글한 귀를 툭툭 건드리자 고개를 뒤로 젖혀 금산을 올려다본 일락이 제 손으로 제 귀를 틀어막았다. 잘했다는 듯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는 금산의 커다란 손은 마디마디가 굵고 핏줄이 도드라져 억세 보였다. 자세히 보지 않아도 눈에 띄는 흉터와 자잘한 상처 자국은 대부분 자상이거나 열상이었다. 거칠고 딱딱해 보이지만 막상 닿으면 부드러운 금산의 손이 어디든 저를 만져 주면 일락은 나른해지곤 했다.

“후려치기도 정도껏 해야지. 이제 초짜 아니잖아? 권세우 이사님.”

금방이라도 잠들 것처럼 늘어지는 일락의 변화를 알아챈 금산이 손끝으로 뽀얀 뺨을 톡톡 건드려 주의를 끌었다. 느릿느릿 눈을 깜박인 일락이 제 볼을 건드리고 아래로 미끄러지는 금산의 손바닥에 구물구물 제 턱을 올려놓았다. 귀를 오래 막고 있던 것도 아닌데 슬슬 어깨가 아파서 고민하다 슬그머니 고개를 틀었다. 왼쪽 귀를 금산의 손바닥에 붙이고 눈동자를 굴려 금산을 올려다보았다. 오른쪽 귀도 대신 막아 달라는 일락의 눈빛에 금산은 다른 손도 순순히 내주었다.

그 꼴을 코앞에서 목격한 세우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저를 투명 인간 취급하는 금산의 극악무도한 행태도 모자라 저 콩알만 한 놈까지 저를 공기 취급하는 걸 보니 배알이 뒤틀리다 못해 심기가 꼬였다. 안 그래도 삐뚤어진 세우의 심사가 더 삐뚤어지는 건 당연했다.

“초짜라서 혼자 왔겠냐? 그래도 동생이라고 다~ 너 생각해서 이 누추한 곳까지 행차해 주신 형님한테 감사합니다~ 넙죽 엎드리지는 못할망정, 넌 왜 그렇게 고마움을 모르냐? 누굴 닮아서 그렇게 뻔뻔해? 아~ 쏘리. 평생 양아치로 살다가 뒷골목에서 칼 맞아 죽은 네 아비를 닮았을 게 뻔한데, 괜한 걸 물어봤네, 내가? 긴말할 거 없어. 쟤 당장 보내. 아랫놈들 시켜서 저거 끌어낼 수도 있는데 너 얼굴 봐서 참아 주는 거야. 그러게 왜 도둑질을 해? 쟤 열 살 때부터 지금까지, 꼬박꼬박 조직 밥 먹여가며 키웠는데도 밥값 한번을 못 했더라?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인심이 후했다고?”

흥분해 떠벌거리던 세우가 저를 지그시 쳐다보는 눈동자를 마주하고 움찔했다. 어려서부터 금산은 저랬다. 주변에서 아무리 금산을 업신여기고 버러지 취급해도 주눅 들기는커녕 외려 한심하다는 눈길로 세우와 재우, 그리고 첫째인 일우를 쳐다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삼 형제는 길길이 날뛰며 패악을 부렸는데, 금산은 절대 얌전히 당하고 넘어간 적이 없었다. 도리어 건수 잡은 미친놈처럼 삼 형제를 떡이 될 때까지 두들겨 팼다. 호랑이 같던 할머님과 인정머리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어머니 앞에서도 금산은 한결같았다.

‘주제도 모르는 놈이 감히.’

밖에서 낳아 온 금산을 본래도 근본 없는 자식새끼 취급하던 할머님은 서릿발 같은 얼굴로 불호령을 내렸다. 정원 한가운데 앉혀진 금산은 멍석말이 당하듯 장정 두 명에게 매질을 당했다. 삼 형제와 집안 직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런 수모를 당하고도 금산은 우는소리 한번 하지 않았다.

삼 형제보다 더 심하게 얻어터지고도 살려달라 애원하지 않는 금산에게 치를 떨며 돌아선 할머님의 얼굴에 스친 건 흐뭇함이었다. 할머님은 그 흐뭇함도, 금산이 피떡이 되는 동안 한쪽에 처박혀 새하얗게 질린 제 손주들이 못마땅한 내심도 감추지 않았다.

‘못난 놈들.’

삼 형제의 열등감이 깊어진 순간이었다. 불행히도 삼 형제는 하나같이 친탁을 했다. 대대로 기골이 장대하고 인물이 빼어난 외가 쪽은 하나도 닮지 않고, 온통 박색투성이에다 내세울 것이라곤 기회주의자적인 머리밖에 없는 친가만 똑 떼어다 붙인 듯이 닮았다. 그나마 부친은 교활한 머리라도 가지고 있었는데, 삼 형제는 제 부친에게서 옹졸하고 비열한 성정만 내리받았다.

깡패 업으로 밑바닥 자본시장을 장악한 할머님은 저를 닮아 똑똑하고 빼어난 딸자식 권태화를 앞세워 신분 세탁을 감행했다. 일방적인 정략혼은 아니었다. 권태화 역시 조직과의 신분 세탁에 적극 동의해 스물 이른 나이에 정략혼을 자청했다.

지방 유지에다 대대로 의원직을 물려받다시피 한 최씨 집안과의 정략혼은 양가 모두 흡족한 결합이었다. 게다가 최씨 집안은 차남을 권씨 집안에 선뜻 데릴사위로 내주고, 자식들에겐 성씨마저 양보했다. 할머님의 유일한 자식인 권태화는 제 성을 제가 낳은 자식들에게 물려주었다. 물론 그 대가로 최씨 집안은 거액의 지참금을 챙겼다.

그러나 줄줄이 낳은 자식들의 열등함에 실망한 권태화는 삼 형제의 찌그러진 호박 같은 외모보다는 모자란 머리에 더 분노했다. 제 난자를 추출해 낳은 게 아니었다면 제 자식들이라 인정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시술 과정에서 실수가 있을 것이라 의심해 유전자 검사까지 감행했다. 99% 일치 결과가 나온 뒤엔 실수로라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세 번째까지 실패한 권태화는 바깥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10년 만에 철저히 외탁한 핏줄을 집안에 들였다.

‘그거 네놈들 동생이니까 잘 지내봐라.’

금산은 할머님과 모친 권태화를 빼다 박았다. 외모도, 성정도, 지능도 장점만 쏙쏙 빼서 욱여넣은 것처럼 개같이 완벽했다. 그렇다고 할머님과 권태화가 금산을 특별 취급한 건 아니었다. 할머님은 여전히 완벽한 적자를 원했고, 권태화 역시 흠 없는 물건을 원했다. 마침내 그들의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권태화는 남편인 최창욱과의 사이에서 원하던 2세를 만들어 냈다.

삼 형제는 늦둥이 동생에겐 껌벅 죽었다. 명실상부 권씨 집안의 후계자가 될 상대를 향한 본능적인 굴종이 반이라면 나머지 반은 그들만의 동질감을 바탕으로 한 애정이었다. 삼 형제와 늦둥이 막내는 모두 집안의 적자였고, 권태화가 아닌 다른 여자의 몸을 빌려서 태어났다. 권태화가 제 배 불러 낳은 자식은 밖에서 낳아 온 황금산이 유일했다.

그 또한 삼 형제의 열등감에 불을 붙이는 기폭제이자 근원이었다.

“사실… 난 쟤가 네 전용인 줄 알았다? 변태 새끼 신고해 버릴까 싶다가도, 그 싸구려 핏줄이 어디 가겠나 싶어서 봐준 건데 내가 헛짓거리했더라고. 쟤, 몸 팔고 다니더라?”

이건 또 무슨 개소린가 싶은 금산의 눈초리가 느껴졌다.

모르고 있을 리가 없는데, 새끼가 끝까지 오리발이야. 나도 참 순진하지, 황금산 같은 놈이 아무 쓸모도 없는 걸 공짜로 먹고 재워 줄 리가 없었다. 저것도 꼴에 상품이라고 떡을 밖에서 치고 다니니까, 백날 여자들을 보내 염탐을 해봐야 나오는 게 없었던 거다. 설사 핏줄이라 해도 봐줄 인간이 아닌데, 혼자 무슨 착각을.

“쟤 떡값 네가 꼬불친 건 아니지? 설마, 모르고 있었냐?”

“야, 새우 대가리.”

“새우가 아니라 권세우라고!”

“그래, 새우 대가리. 얘 내 거 맞아.”

백날 정정해봐야 고칠 생각 없는 금산에게 자동으로 버럭한 세우가 “뭐?”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유치한 새끼 상대하느라 저까지 유치해지는 게 못마땅한 얼굴로 눈살을 찌푸린 금산이 일락의 귀를 틀어 막아준 손을 치웠다. 그때까지도 얌전히 금산의 손바닥에 뺨을 묻고 혼자 꼼지락거리던 일락이 고개를 바로 하며 금산을 올려다보았다. 얘기 다 끝났어요? 하고 묻는 듯한 눈을 마주한 금산이 제 양손에 눌려 그새 빨개진 일락의 볼을 쿡 찔렀다.

“일락이 너 몸 팔고 다니냐.”

아저씨가 그런 걸 왜 묻지? 하면서도 고개를 가로저은 일락이 답했다.

“아니요. 저 그런 적 없어요.”

“왜?”

“아저씨가 안 해도 된다고….”

“그러니까 왜.”

“저는 아저씨 거니까요.”

마치 당연한 사실을 주고받는 것처럼 막힘 없는 대화에 할 말을 잃은 세우가 기가 찬 얼굴을 했다.

“야, 꼬맹이. 너 벌써부터 앞뒤가 달라서 되겠냐? 세상 순진한 얼굴로 뭐? 하긴, 이 바닥에 순진한 놈이 있을 리가 없지. 너 아까 내가 일 소개해 준다고 했을 때 옷 벗고 하는 일이냐면서 물어봤잖아. 말하는 꼬라지 보니까 이미 볼 장 다 본 것 같은데 왜 이제 와서 내숭이야? 황금산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아니면 진짜로 너 황금산 몰래 떡값 삥땅 치고 다니냐? 와하하, 진짜 난 놈이네, 이거?”

“어, 그, 그건요….”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은 일락이 순간 입술을 닫으며 금산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의자 등받이에 한쪽 팔을 걸치고 상체를 뒤로 한 금산이 조용히 일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툭 도드라진 눈썹뼈 아래 깊은 눈은 어둠처럼 까맣고 늘 동요 없이 고요했다. 그래서 일락은 당황스럽거나 놀랐을 때마다 충분한 시간을 갖고 차분해질 수 있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아까 이사님이 저한테 가만히 사고 안 치고 형들이랑 아저씨 도와줄 수 있는 일 소개해 준다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형들이 그렇게 쉽게 돈 벌 수 있는 건 몸 파는 일밖에 없으니까 누가 그런 일 하자고 하면 말도 섞지 말고 도망가라고 했는데요.”

말을 하다 말고 세우의 눈치를 보는 일락의 볼을 쿡 찔러 저를 보게 만든 금산이 뒷말을 기다렸다. 자연스럽게 금산에게만 신경을 쏟게 된 일락이 붉은 입술을 거듭 달싹거렸다.

“이사님은 아저씨 친구 같아서 그렇게 못 했어요.”

“새우 대가리가 내 친구 같았어? 왜?”

빠득, 세우가 이를 가는 소리에 한눈을 팔려는 일락의 볼이 또 슬쩍 질렸다. 어렵지 않게 다시 금산에게 집중한 일락이 조금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제가 고아라는 걸 알고 계셔서요. 아저씨가 알려 주신 것 같은데, 아저씨는 아무한테나 그런 걸 말하지 않으니까요.”

“일락아.”

“네.”

“나를 아는 놈 중에 사지 멀쩡한 놈들이라면 다 널 알고 있어.”

“…네?”

일락이 얼른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금산이 그렇게 키웠으니까.

“너를 안다는 건 단순히 네 이름이나 얼굴을 안다는 게 아니라.”

의자에 걸친 손을 뻗어 일락의 오른팔을 감싸 쥐었다. 굵고 긴 엄지가 팔목에 짙게 남은 10cm가량의 수술 자국을 가만 쓸어내리고, 맑은 빛을 띤 일락의 까만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네 몸에 남은 상처들의 원인과 결과를 안다는 뜻이기도 해.”

금산의 설명은 친절했으나, 일락에겐 조금 어려웠다. 그래서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왜요?”

좀 더 설명해달라는 일락의 요구에 금산은 기꺼이 응했다.

“네가 내 거니까. 걔들은 내 거에 서로 흠집 내고 싶어 안달이고, 그러려면 너에 대해서 아주 잘 알아야 하거든.”

“어…, 그럼 그때 이 골목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한 것도 그 사람들 때문이에요?”

“답답해?”

“아니요. 전 집에만 있어도 좋아요. 아저씨가 오기만 하면요.”

“그러냐.”

알았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금산의 손길을 마음껏 만끽한 일락이 꾹 감은 눈을 떴다.

“다행이에요, 아저씨.”

“뭐가?”

“저는 그때 아저씨가 화나서 그런 줄 알았어요.”

“그렇다면 안심하긴 일러.”

“네?”

“그땐 머리끝까지 화가 난 게 맞거든.”

“지금은요?”

“진작에 풀렸지.”

“네.”

히히 웃는 일락의 볼을 콕 찌른 금산이 그제야 세우에게 시선을 주었다. 입을 벙긋거리려고 할 때마다 저를 사납게 노려보는 눈초리에 기가 질려 금붕어 행세만 하던 세우가 씩씩거리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금산에게 쥐어 터지면서 자란 세우를 포함한 삼 형제는 나대도 될 때와 아닐 때를 기가 막히게 구분할 줄 알았다. 사실 삼 형제에게 금산이 지독한 놈으로 각인된 건 그들이 깐족거릴 때마다 1초의 틈도 없이 날아오던 주먹 때문만은 아니었다. 삼 형제를 쥐어패면 꼭 멍석말이를 당해 그보다 배는 더 얻어터지면서도 절대 꺾이지 않던 금산의 오기인지 의지인지 모를 것에 기가 확 꺾인 게 훨씬 컸다.

“권세우.”

“야…! 그, 그래도 내가 너보다 열 살은 더 많은데!”

“그래, 권세우 형님.”

순순히 형님 자를 붙여 주는 금산의 모습에 더욱 경계심을 띤 세우가 눈썹을 확 치켜떴다.

“왜, 왜!”

“내 전용이면 눈감아 주려고 했다면서?”

“하! 고작 몇 마디 말로 쟤가 네 거라는 걸 믿으라고? 말이 되냐? 너 쓸모가 없는 건 아예 거들떠도 안보잖아. 어디다 쓰는데? 칼빵도 안 내, 샌드백으로도 안 써, 어디다 갖다 팔지도 않으면서 네 거? 하다못해 집안일도 안 시키고 딸기까지 제 손으로 씻어다 먹이는 애가 네 전용 쎅받이라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씨부리면서 입에 침도 안 바르냐, 너는?”

“형님, 아무리 나라도 수간 같은 취미는 안 키워.”

“뭐 인마?”

“그런 거라고.”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버럭 소리를 지르려는 세우의 시야에 금산의 손가락에 감겼다가 미끄러지는 일락의 가는 머리카락이 잡혔다. 저건 뭐 애완동물도 아니고 성인 남자 무릎을 떡하니 차지하고 앉아서….

“손도 많이 가고 돈도 많이 들고 예쁜 거 빼고는 딱히 쓸 데도 없는데 곁에는 두고 싶은 거.”

금산의 다음 말을 상상도 하지 못한 세우가 다시 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렸다.

“그래, 반려동물.”

“이 미친놈이?”

전혀 미친놈 같지 않은 얼굴로 싱긋 웃는 금산이 진짜로 미친놈 같아 보여서 순간 허예진 세우의 안색이 간신히 본래대로 돌아왔다. 하여간 씨발, 저 빌어먹게 살벌한 면상. 내심 이를 갈면서도 세우는 이번엔 섣불리 깐족거리지 않았다.

“조용히 고양이나 키우면서 하던 일 마무리 할 테니까 설레발들 그만 좀 치라고 해.”

“네 놈을 어떻게 믿냐?”

“안 믿으면 어쩌시게.”

“너…!”

“이제 여자 보내지 마. 보다시피 고양이가 아직 어려서 그런 데 예민해.”

금산의 허벅지에 잠자코 앉은 일락의 머리가 금산의 가슴 쪽으로 조금씩 수그러졌다. 그러느라 허옇게 드러난 목덜미가 눈에 띄게 빨개졌다.

“스물한 살짜리가 어리긴 뭐가…!”

발끈해서 버럭하려던 세우가 저를 쳐다보는 금산의 눈길에 움찔 입을 다물었다.

“까마득한 형님이 기별도 없이 여기까지 오셨는데 빈손으로 보낼 수도 없고.”

한숨 쉬듯 말한 금산이 손수 제 머리카락 두어 개를 뽑아 식탁에 올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세우는 곧장 반응도 못 하고 말만 더듬었다.

“무, 뭐, 뭔데?”

“대조할 게 있어야 할 거 아냐. 기껏 애 머리카락 뽑아 놓고선 쓰지도 않고 버리시게?”

애꿎은 애 머리카락은 왜 자꾸 쓰다듬나 했더니. 저 여우 같은 새끼, 눈치는.

꼴에 기업 이사라고 항상 입는 스리피스 정장 왼쪽 가슴에 꼬박꼬박 끼우고 다니던 행커치프가 보이지 않아 쉽사리 머리를 굴린 금산의 예측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재킷 주머니에 황급히 찔러 넣은 행커치프에 직접 머리카락을 끼워 넣어 주는 수고까진 들이지 않고 그만 꺼지시라, 눈짓했다.

“저, 정말 얌전히 있을 거냐?”

“어. 형님이 3초 안에 꺼지시면.”

더듬더듬 묻던 세우가 순순히 나오는 대답에 재깍 몸을 뺐다. 그 와중에도 정말 애착 동물처럼 금산에게 찰싹 달라붙은 일락을 보는 눈길이 곱진 않았으나, 3초가 지나기 전에 얼른 현관을 빠져나갔다.

도어 록이 잠기는 소리가 들리고도 얼마간 금산의 가슴에 머리를 박고 있던 일락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아저씨, 내가 돈도 많이 들고 손도 많이 가고 딱히 쓸 데도 없어요?”

일락이 알아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린 금산이 여상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런데도 속상한 기색 하나 없이 금산을 올려다보는 일락은 외려 기쁜 기색이었다.

“그래도 예뻐요? 곁에 두고 싶을 만큼?”

“백번 말해 줄까?”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고개를 젓는 일락의 맑은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이렇게 앞뒤가 같고, 속내가 투명한 일락이라서 더 예쁘기도 했다.

“그럼 저 이제부터 아저씨 고양이에요?”

“싫으냐?”

이번엔 좀 더 크게 고개를 저은 일락이 눈매를 접으며 입을 열었다.

“야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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