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갖는 것과 얻는 것 (9/13)

4. 갖는 것과 얻는 것

“사장님, 거래 끝났다고 합니다.”

권호의 속삭임에 소파에 앉은 금산이 빙긋 웃음을 지었다. 맞은편에 앉아 상기된 얼굴로 제 남편과 자식들 이야기부터 소소한 근황까지 스스럼없이 털어놓던 여자가 의아한 눈길을 주었다. 그 눈길에 화답하듯 살짝 눈짓을 한 금산이 입을 열었다.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환대해 주신 덕분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신세를 졌네요.”

“어머, 신세라니요. 저야말로 이렇게 멋진 후배님이 찾아와 주셔서 정말 즐거웠는걸요. 그이가 오면 따져야겠어요. 이렇게 근사한 후배님이 계셨는데 꽁꽁 숨겨 놓고 자기만 봤다니요.”

정작 남편이 들으면 졸도할 이야기를 아무 사정도 모른 채 이어 나가는 여자는 진심으로 호감을 표하고 있었다.

“다음엔 와이프하고 같이 놀러 와요. 제가 이래 봬도 이 동네 셰프는 꽉 잡고 있거든요. 스페셜하게 모실 테니까, 한번 봬요. 물론 아이도 환영입니다?”

“아쉽지만, 초대에 응하려면 후일을 기약해야겠군요.”

“설마, 아직 미혼?”

“대표님처럼 운이 좋은 편은 아니어서요.”

대표님과 달리 운이 나쁜 저는 사모님처럼 훌륭한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는 행운까진 누리지 못했다는 금산의 입발림에 기분 좋게 웃은 여자가 기꺼이 배웅을 자청했다.

3층 저택을 물 샐 틈 없이 에워싼 인원들이 조용히 자취를 감췄다. 막 대문을 나선 금산에게 꾸벅 인사한 광연이 차 문을 열었다. 밖에서 세 시간 정도 대기한 광연은 지치거나 지루한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 꼴을 그냥 보고 지나치지 못한 권호가 괜한 시비를 걸었다.

“다음부턴 네가 모시고 들어가라.”

“싫습니다.”

“차라리 밖에서 대기 타는 게 낫지. 진이 빠져서, 나 원. 형님도 참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일반인을 장장 세 시간 동안이나 상대하면서 말실수 한 번을 안 하십니까? 저는 두 분께서 10년은 된 절친인 줄 알았습니다.”

“피 냄새 빼는 것보단 낫지. 손도 덜 가고.”

“…맞는 말씀이십니다.”

그들이 피 냄새 흠뻑 묻히고 집에 들어갈 때마다 제 품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던 일락을 떠올린 권호가 크게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피 냄새라는 게 의외로 잘 묻고, 쉽게 빠지지도 않아서 샤워 한 번하고, 옷을 갈아입는다고 해결되지 않았다. 그들에겐 핏물에 빠졌다가 나오는 게 일상이라 무뎌진 상태였는데, 일락을 키우다 보니 새삼 신경 쓰게 되었다.

“일락이 고것은 그새 더 예뻐졌대요?”

사람 장사 안 하는 대신 도맡은 건 일종의 뒤처리였다. 법인 상대로 사채업을 하는 태양 그룹에 해결사는 필수였고, 황금산의 업무 능력은 수준급이었다. 금산은 단순하고 깨끗한 방식을 선호했다. 피 튀겨가며 윽박지르고 내장을 따는 방식은 시끄럽고 지저분했다.

배 째라고 드러누운 채무자 동태 파악해 회장님 앞에 모셔다 놓고, 그들이 대질하는 동안 금산은 채무자의 가족들과 소소한 시간을 보냈다. 채무자의 후배, 선배, 또는 친구 노릇 하며 채무자의 가족과 담소를 나누면서 호감과 신뢰를 쌓았다. 낯선 사람의 방문에 긴장하거나 서먹서먹하게 굴던 그들도 차츰 경계심을 허물며 금산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웃는 얼굴로 같이 사진을 찍기도 하고, 푸짐하게 차려진 식탁 앞에서 인증샷을 찍거나, 채무자 가족들이 편안하게 오가는 집 안 풍경을 찍기도 했다.

사진은 찍는 족족 회장의 직속 번호로 전송돼, 채무자의 코앞에 들이밀어졌다. 채무자의 눈엔 제 안방과 가족 앞에 사나운 맹수들을 풀어놓은 장면처럼 보였을 것이다. 얼굴이 허옇게 질린 그들은 백이면 아흔아홉, 드러눕는 행위를 중단하고, 숨겨둔 재산을 담보로 내놓았다. 예외인 하나를 다루는 방식은 따로 있었다.

어찌 됐든 피 한 방울 보지 않고 맡은 일을 조용히 해결하는데 그룹에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엔 기자 몇 명, 어공, 늘공 입 막는 데도 한계가 있다며 말 많은 인간은 금산의 실력을 추켜세우길 서슴지 않았다. 삼 형제가 최근 들어 털을 바짝 세우게 된 배경이었다.

금산이 아무리 뛰어난들 피 묻은 손에 그룹을 통째로 안겨줄 리 만무한데, 삼 형제는 그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굴었다. 단체로 머저리처럼 구는 게 어이없었으나, 금산은 사실을 말해 줄 정도로 인심이 후하진 않았다. 물론 그들이 금산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리도 없었다.

“형아, 형아, 하면서 쫄랑쫄랑 따라다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일락이 고거는 누가 데려갈지.”

백미러로 뒷좌석에 앉은 금산의 눈치를 본 권호가 내친김에 휴대 전화를 꺼내 들었다. 갤러리로 들어가 잔뜩 찍어 놓은 일락의 사진을 정성스레 넘겨보며 쪽쪽, 방정맞은 뽀뽀를 날렸다.

“형님, 이번 주말에 일도 없는데….”

“만들어서라도 줄 테니까 걱정 마라.”

“그게 아니라요, 형님!”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눈살을 찌푸린 금산이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씨알도 안 먹히는 모습에 툴툴거리면서도 포기하지 않은 권호가 웃는 얼굴로 재차 찔러 보았다.

“그럼 핸드폰이라도 하나 장만해 주시죠? 요즘 핸드폰 안 들고 다니는 애가 어딨다고. 일락이 고것이 친구가 없지, 형들이 없는 건 아니잖습니까? 저랑 애들도 일락이 얼굴 본 게 언젠지 아주 까마득하다 이 말입니다. 이러다 얼굴 까먹…지는 않겠지만.”

“그 예쁜 얼굴 까먹으면 붕어 대가리 인증이죠.”

내내 말이 없다가 기다렸다는 듯이 한마디 거드는 광연에게 눈알을 부라리기는커녕 네가 웬일로 맞는 말을 하냐며 반색한 권호가 신나게 맞장구를 쳤다.

“맞아, 맞아. 우리 라기는 한 번만 봐도 뇌리에 콱 박히는 얼굴이지. 고 예쁜 것. 아까워서 누구한테 보내나. 어디 똑똑하고, 듬직하고, 잘생기고, 심신이 멀쩡한 애 없나? 성깔 드러워도 우리 라기한테만 잘하면 금상첨화인데.”

“제가 옛날부터 물색하고 다녔는데 맘에 차는 애가 없습니다.”

“진영 둘째 딸이 유도 국대라고 안 했냐? 라기보다 두 살 연상에다 성격이 좀 지랄맞긴 해도 가족한테는 잘한다며? 이상형이 예쁘고 어리고 착한 애라던데. 우리 라기가 딱 아니냐?”

“그 집 딸은 모르겠고, 진영은 튼튼한 애 타령해서 탈락입니다.”

“뭐야? 아니, 애가 착하고 예쁘고 어리면 됐지, 튼튼하기까지 해야 되냐? 애가 골골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어렸을 때 아파서 각막이식하고, 팔 수술하고, 난청 있는 거 빼고는 아픈 데도 하나 없구만! 그렇게 다치고도 멀쩡한 거 보면 오히려 튼튼한 거 아니냐고!”

“두강 셋째 딸도 일락이 또래에 미혼이랍니다. 어려서부터 승마랑 태권도 꾸준히 해서 튼튼하고 잘생겼는데, 이상형이 똑똑한 사람이라고 해서.”

“우리 애가 착하고 예쁘면 됐지, 뭘 똑똑하기까지 해야 해? 그리고 우리 라기가 특출나게 똑똑하지 못해서 그렇지, 애가 얼마나 싹싹하고 애교도 많냐? 기억력은 또 어찌나 좋은지, 일주일에 한 번 씻는다는 말을 아직까지 기억하더라니까? 그걸 내가 걔 열한 살 때 놀리려고 한 말인데!”

“농담 아니잖습니까.”

“아, 그래서 내가 3일에 한 번 씻는 걸 하루에 한 번으로 바꿨잖냐. 나갔다 와서 안 씻으면 세균 때문에 감기 걸리고 병 걸린다고. 형아 아파서 일찍 죽으면 어떡하냐고. 그 어린 게 어찌나 서럽게 울면서 걱정하던지. 내가 요즘에도 귀찮아서 안 씻으려다가 우리 라기 얼굴 밟혀서 꼬박꼬박 씻고 잔다니까?”

말을 말자, 라는 얼굴로 혀를 찬 광연이 가속페달을 밟으며 화제를 되돌렸다.

“싹싹하고 애교 많은 것도 공감 능력이 좋아야 한다는데, 공감 능력도 지능이랍니다.”

“맞아, 맞아. 그런 거 보면 우리 라기가 참 머리도 좋아? 우리 같은 깡패 새끼들 부모도 학을 떼는데 어디서 맞고 다닐까 봐, 그렇게~ 걱정을 해요. 이러니 내가 끔뻑 안 죽고 배겨?”

“그렇게 예뻐서 피도 안 씻고 달려가는 바람에 애 기겁하게 만듭니까?”

“아니, 그때는 애가 갑자기 열이 올라서 아프다니까 걱정돼서…!”

“요즘엔 비혼도 많다니까요.”

“비혼은 무슨! 난 우리 라기 꼭 좋은 애랑 결혼해서 애 낳고 알콩달콩 사는 모습 보고 죽을란다.”

“오, 그 발언 진짜 별로였습니다. 애 결혼했는데 몰래 문 따고 들어가실 건 아니죠?”

“비번 알려 주지 않을까?”

극혐하는 눈으로 권호를 쏘아본 광연이 뒤늦게 그 상대가 제 형님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곤 슬그머니 눈을 깔았다. 아니, 그러니까 웬 개소리를 저렇게 당당하게 해. 하여간 일락이 일이라면 일단 뇌를 빼놓고 생각한다니까.

“근데 일락이 연애 한 번도 한 적 없죠?”

“아직도 세상에서 우리 형님이 제일 좋다는 앤데 있겠냐? 원래 어렸을 적 콩깍지가 젤 안 떨어진댄다.”

“형수님이라도 보시는 날엔 일락이 대성통곡하는 거 또 보겠네요.”

“뭐, 그전에 우리 형님이 장가는 가시느냐가 문젠데. 4년 안에 가능하겠냐?”

금산이 말한 5년까지 딱 4년이 남았다.

“결혼은 뭐 상대만 있으면 당장 오늘이라도 가능하니까요.”

“됐어. 애 울려서 어따 쓰냐? 웃기만 해도 아까운 애를. 형님 4년 안에 장가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십쇼?”

쌍으로 덤앤더머 짓 하는 둘을 본 척도 않던 금산이 눈을 감은 채로 한마디 했다.

“애 나갈 때까지 얼씬도 하지 마라.”

주말에 몰래 먼 발치서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올 생각이었던 권호가 뜨끔한 얼굴로 아무 말을 주워섬겼다.

“에이, 참. 그러니까 형님도 애 핸드폰 하나 장만해 주시라니까. 영통 한 번 한다고 애 얼굴이 닳습니까? 형님은 눈에 가시 돋을 때마다 보러 가면서, 불공평하지 말입니다?”

“그럼 나 대신 네가 들여다보든가.”

“일락이가 퍽이나 좋아하겠습니다! 형님 열흘만 못 봐도 애가 끙끙 앓는다는데. 저 일락이한테 미움받는 꼴 보고 싶어서 그러십니까?”

“권호 형님. 아무리 그래도 일락이가 우릴 미워하지는 않을 겁니다.”

“맞다, 맞다. 네 말이 맞다, 광연아. 너 웬일로 맞는 말을 하냐? 평소엔 처맞는 말만 하더니.”

“권호 형님 닮아서 그렇죠, 뭐.”

“그냥 너 오늘 좀 맞자.”

“저 운전 중입니다만?”

일락이 보고 싶다면서 맨날 징징대면서도 황금 상가 근처엔 얼씬도 하지 말라는 금산의 엄명을 한 번도 어겨본 적 없는 둘이 시종일관 티격태격하며 나름대로 아쉬움을 달랬다.

일락을 보육원에 들인 뒤 주말마다 선물을 싸 들고 간 권호와 광연은 먹을 것도 넘치게 싸 들고 갔다. 매주 햄버거에 피자에 치킨에 고기 파티였다. 성장기에는 많이 먹어야 한다고 사비까지 써가며 보육원 식비에 관여했고, 과일하고 채소는 원산지에서 트럭째로 떼다 먹였다.

일락의 열세 살 생일 선물로 금산을 갖다 바치려다가 들킨 뒤로는 출입 금지 명령을 받고 돈지랄도 금지당했다. 그래도 식비만은 어떻게든 사수한 그들은 일락이 보육원을 나올 때까지 책임졌다. 먹인 게 다 어디로 갔는지 여전히 쪼그만 일락을 훔쳐보며 그때 더 좋은 걸 먹였어야 했다고 한탄하는 건 예사였다.

비록 몇 번 만나지도 못하고, 먼발치에서 얼굴만 봤지만, 마음으론 본인들이 업어 키우다시피 한 일락은 그들에게 조카 같은 존재였다. 또한 깡패 새끼들을 평범한 일상과 이어 주는 유일한 끈이기도 했다. 그래서 보육원에서도 순순히 손을 뗐고, 어쩔 수 없이 황금 상가에 들인 뒤에도 얼굴을 자주 비추지 않았다. 5년만 곁에 두고 아예 남남으로 살자는 금산의 결정에도 동의했다.

진영이고 두강이고 다 필요 없었다. 일락은 평범한 집안에서 나고 자란 여자애와 평범하게 살아가는 게 가장 잘 어울렸다. 아니, 어떤 여자를 만나든 평범한 행복과 일상을 영유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락아, 오늘 춥다. 올라가서 잠바 입고 내려와라.”

“네에!”

빌라 뒷문을 빠져나온 일락이 뒷마당을 쓸고 있는 세탁소 사장 정욱의 한마디에 도로 계단을 껑충껑충 뛰어 올라갔다. 옷장에서 봄 잠바를 꺼내 입고 계단을 내려왔을 땐 뒷마당이 비어 있었다. 계단을 빠르게 오르내려서 그런지 가쁜 숨을 몰아쉬는 일락의 폐 속 깊이 새벽 4시의 찬 공기가 빨려 들어왔다. 숨을 고른 뒤 디저트 카페 뒷문을 열고 들어간 일락이 뒷정리로 분주한 성진을 도우며 한참 재잘거렸다.

“오늘은 라면 말고 짜파게티 사 와.”

“다른 건요?”

“너 까까 하나 사 먹든가.”

픽 웃으며 던지는 말에 아싸, 주먹을 움켜쥔 일락이 이번엔 앞문을 통과해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일락이 안녕?”

“형, 안녕하세요?”

오늘도 여지없이 같은 시간에 문을 열고 들어서는 일락에게 알은척을 한 정현이 마저 진열하고 계산대 앞에 섰다.

“짜파게티네? 웬일로 과자까지?”

“성진이 형이 과자 사 먹어도 된다고 해서요.”

성진이 형이라면 ‘황금 디저트’ 사장님이었다. 이젠 눈 감고도 상가 사장님들 이름을 다 외게 된 정현이 쉽게 이름과 얼굴을 매치했다. 인상 좋으신데 정색하면 무서우신 분. 서른다섯 살이라고 했었다.

“까까 사 먹는 것도 허락받냐?”

“옛날에 과자 먹고 배탈 난 적 있었거든요. 그래서 형들이 과자 사 먹는 거 안 좋아해요.”

“라면 같은 건 먹이고?”

“이건 형들 거고, 저는 밥 먹어요. 현배 형이 맨날 밥 차려 주거든요.”

현배 형은 ‘황금 식당’ 사장님이었다. 인상도 성격도 무서운데, 일락이한테만 다정하신 분. 서른 살이라고 했었다.

“근데 가끔 먹긴 해요. 라면 맛있잖아요.”

솔직히 털어놓곤 티 없이 웃는 얼굴이 참 맑고 예뻤다. 이런 애가 자주 아프기까지 하니 사장님들의 과보호도 당연할 성싶었다.

“그럼 너 햄버거나 피자 같은 것도 잘 안 먹겠다?”

“보육원에 있을 땐 자주 먹었어요. 지금은 먹고 싶다 그러면 성진이 형이 만들어줘요.”

보육원에 있으면 오히려 잘 못 먹지 않나? 사장님이 만들어 주시는 거라면 유기농 어쩌구겠지. 내심 중얼거린 정현이 바코드를 다 찍고 계산을 해 주었다.

“넌 술도 못 먹고, 담배도 못 피워, 군것질도 맘대로 못 해, 핸드폰도 없어. 안 심심하냐?”

그런 걸 못 한다고 왜 심심하다는 건지 싶은 얼굴로 정현을 바라본 일락이 생긋 웃었다.

“형들이랑 있으면 재밌어요. 아저씨도 만날 수 있구요. 그리고 형도 바쁜데 저랑 이렇게 놀아 주시잖아요.”

“얘가, 얘가. 그렇게 안 봤는데, 예쁨받는 법을 아주 잘 알아요. 어허, 참.”

너스레를 떨며 잔돈을 건네준 정현이 빠이빠이 손을 흔들었다.

“얼른 가라, 형들 기다리시겠다.”

“네, 형. 또 봬요.”

잔돈을 주머니에 꼼꼼히 넣고 비닐봉지를 품에 가득 껴안은 일락이 편의점을 빠져나갔다. 걸을 때마다 살랑거리는 머리카락이 강아지 털 같았다. 일락을 애지중지하다 못해 과보호가 몸에 밴 형들보다 더 좋아하는 아저씨라니. 아르바이트 관두기 전에 그 유명한 아저씨 얼굴 한 번이라도 볼 수 있으려나? 잘생겨봤자 사장님들 수준이겠지. 일락이 눈엔 백퍼 콩깍지가 씌었을 테니까. 키득키득 웃은 정현이 곧 문을 열고 들어서는 손님을 발견하곤 표정 관리를 했다.

“어?”

현배가 끓여준 아욱국에 아침을 세 그릇이나 먹은 일락이 뒷정리하는 형들 곁에서 종알거리며 배를 꺼뜨렸다. 저희들은 이제 올라갈 테니까 가서 재운이랑 놀라는 형들을 배웅한 일락은 바쁜 재운을 뒤로하고 혼자 목욕탕에서 놀다가 막 귀가해 3층에 도착한 참이었다.

현관에 놓인 금산의 구두를 발견하고 반색한 일락이 얼른 신발을 벗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요란스럽게 움직이다 금산이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치자 금세 발소리를 죽였다. 다행히 거실 소파는 비어 있었다. 욕실에서도 아무 소리 안 났고, 반쯤 열린 안방도 조용했다. 그럼에도 일락은 다른 곳은 더 둘러보지 않고 안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평소 활짝 열려 있던 안방 문이 반쯤 닫혀 있다는 건 방 주인이 돌아왔다는 신호였다.

문가에 서서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침대가 봉긋하게 솟아 있었다. 금산이 요즘 자주 찾아와서 너무 좋았다. 실실 흘러나오는 웃음을 알아채지도 못한 일락이 살금살금 뒷걸음질을 쳤다. 손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안방 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섰다. 잠귀가 어두운 금산은 제가 유리라도 하나 깨기 전엔 눈을 뜨지 않겠지만, 일락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침대에 올라가 금산의 옆에 누웠다.

콩닥콩닥, 뛰는 가슴이 잠잠해질 때까지 부동자세로 있다가 슬그머니 옆으로 돌아누웠다. 곤히 잠든 금산의 옆얼굴이 두 눈 가득 들어찼다. 창밖엔 해가 뜨고, 하루가 시작된 지 오래였지만, 암막 커튼을 친 안방은 어둑어둑했다. 그래도 어둠에 익숙해진 일락의 눈은 또렷이 금산의 얼굴을 담아냈다.

세상에서 제일 잘생기고, 제일 멋진 우리 아저씨.

선명한 얼굴 윤곽을 물끄러미 올려다본 일락이 구물구물 금산의 옆구리로 기어들어 갔다. 굵고 긴 팔을 제 목에 감고 금산의 넓은 가슴을 끌어안으며 언제 봐도 반가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제야 일락의 기척을 알아챈 금산이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주곤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두 눈을 뜬 일락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잠이 덜 깬 얼굴로 눈가를 비비며 침대에서 뛰어내리려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도로 주저앉았다.

아저씨 씻나 보다.

안도한 얼굴로 멍하니 앉아 있다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2시. 분명 밤새 잤는데, 금산이 옆에 있다고 또 정신없이 잔 모양이었다. 금산이 저한테 수면제를 탄 것도 아닌데. 마약 방석. 동물 예능에서 그런 걸 마약 방석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금산에게 대놓고 말할 생각은 아니었다. 비유라지만 제 입에서 마약이라는 단어 자체가 나오는 걸 싫어할 것 같았다. 금산은 그런 데서 엄격한 부분이 있었다.

별로 하는 일도 없는데 왜 저는 이렇게 잠이 많을까. 자주 보지도 못하는데 아저씨 얼굴이나 더 볼걸. 후회도 잠시, 얼른 침대에서 내려선 일락이 옷을 훌렁훌렁 벗으며 안방을 빠져나갔다.

“스케이트 타?”

몸에서 거품을 씻어내며 뒤를 돌아본 금산이 젖은 바닥에 미끄러진 일락을 잡아 주었다. 이미 몇 번 미끄러진 전적이 있는 일락이 가까스로 균형을 잡으며 금산을 올려다보았다.

“아저씨, 언제 일어났어요?”

“너보다 일찍.”

“씻고 바로 가세요?”

“일락이가 그러라면 그래야지.”

“아뇨? 저 그런 적 없어요! 오래오래 있다 가셔도 돼요!”

“춥다, 이리 와.”

팔을 붙잡힌 일락이 순순히 금산에게 끌려갔다. 곧 머리부터 발끝까지, 발가벗은 몸이 적셔지고 거품을 낸 손이 일락의 머리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눈알도 씻겨줄까?”

거품 들어가니까 눈 감으라는 소리에 히히 웃은 일락이 꾹 눈을 감았다.

“밥도 같이 먹어요?”

“일락이 혼자 먹고 싶으면 따로 먹고.”

“아니요! 같이 먹어요. 절대!”

“먹고 싶은 거 있냐.”

“앗, 형들은 벌써 다 먹었겠다.”

그러잖아도 점심때 맞춰서 안 내려오는 일락을 찾아 3층까지 올라온 현배를 돌려보낸 참이었다.

‘웬만하면 애 깨워서 같이 드시죠? 점점 애가 더 마르는 것 같아서 걱정인데.’

‘좀 더 재우고. 애 밤에 잠 안 자냐?’

‘웬 걸요. 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푹 자던데요. 새벽에 잠깐 얼굴 보러 들를 때마다 쿨쿨 잘만 자더라고요.’

저도 걱정돼서 밤마다 들여다본 모양인지 기다렸다는 듯이 답한 현배가 금산과 같은 생각에 미친 건지 대번에 얼굴색을 바꿨다.

‘추가 검진이라도 받아볼까요?’

올 초에 검진을 받은 지 채 3개월도 지나지 않았다.

‘검진하다 애 잡겠다. 먹을 것 좀 잘 챙겨라.’

‘쟤는 하루에 여섯 끼는 먹는다고요. 우리보다 더 잘 먹는데 대체 다 어디로 가는 건지.’

키도 안 커, 살도 안 쪄. 혀를 차는 현배의 불만스러운 말투와 달리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다. 그 걱정과는 달리 일락은 원래 불편한 곳 외에는 무쇠도 씹어 먹는다는 10대만큼이나 건강했다.

“아저씨는요? 아저씨 먹고 싶은 거 먹어요.”

“오랜만에 고기나 굽자.”

“아저씨, 수염 났어요.”

금산이 씻겨 주는 대로 머리를 헹구고, 팔을 들었다가 내리고, 다리를 벌렸다가 오므린 일락이 손을 뻗었다. 잠든 사이 수염이 거뭇하게 오른 턱을 건드리는 손끝이 조심스러웠다.

“기르라고 면도기 치운 줄 알았지.”

“그게 아니구요. 제가 청소하다가 놓쳐서 망가졌어요.”

“잘했어. 면도 공장도 먹고 살아야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웃는 일락이 넘어갈까 등허리를 받쳐 준 금산의 손바닥에 옆구리가 다 잡혔다. 삐쩍 마른 건 아닌데, 말랑한 살덩이 아래 뼈대가 작고 얇은 편이었다. 지그시 누르면 만져지는 뼈대는 아직도 성장기가 끝나지 않은 것처럼 연했다.

“청소는 뭐 하러.”

“씻고 정리하다가요.”

일주일에 두 번씩 청소 여사님이 오셔서 일락이 따로 손댈 일은 없었다. 밥은 형들 사이에 껴서 해결했고, 빨래도 여사님이 다 해 주셨다. 일락이 하는 건 흘린 물을 닦는 등 자잘한 집안일이 다였는데, 그마저도 제대로 못 해서 금산의 면도기를 망가뜨렸다.

“밤에 잠 안 자?”

면도기 따위 몇 개를 망가뜨려도 괜찮다고 답한 금산이 다른 걸 물었다.

“아저씨, 제가 제일 잘하는 게 뭔지 맞춰 보세요.”

뚱딴지같은 질문에도 금산은 눈살 한번 찌푸리지 않고 일락의 몸을 하얗게 덮은 거품을 헹궈냈다.

“뭔데?”

“잘 먹고 잘 자는 거요.”

피식 웃은 금산이 축축하게 젖은 일락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겨 주었다. 커다란 손바닥으로 얼굴에 남은 물기를 훑어 주자 순순히 감았다 뜨는 눈이 촉촉했다.

“저 밤 10시에 꼭 자요. 머리만 대면 아무 데서나 잘 수 있고, 하루 종일도 잘 수 있어요. 밥도 잘 먹어요. 여기 와서 한 끼도 굶어본 적 없고, 간식도 엄청 많이 먹어요.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일락이 발꿈치를 한껏 들어 올리고 고개를 크게 뒤로 젖히며 제 입가에 손바닥을 세웠다. 잠자코 상체를 숙여 귀를 내준 금산의 귓가에 작은 숨결과 속삭임이 닿았다.

“화장실도 잘 가요.”

금산 외에는 듣는 사람도 없는데 잔뜩 소리 죽여 속삭인 일락이 세운 손을 떨어뜨리며 발꿈치를 내렸다.

“훌륭하네.”

잘하고 있다며 아낌없이 칭찬해 준 금산이 제 몸도 마저 헹구고 수건을 꺼냈다. 슥슥,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일락의 젖은 몸을 닦아 주고 저도 대충 닦았다.

“아저씨 머리 제가 말려 줘도 돼요?”

“이번에도 한 대 치려고?”

“그땐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진짜 손에 힘이 빠져서 그런 거예요.”

머리 말려 주겠답시고 나섰다가 금산의 머리에 그대로 드라이기를 낙하시킨 전적이 있는 일락이 저를 끌어안는 팔에 몸을 맡기며 열심히 변명했다.

“그래, 머리에 구멍 안 났으면 됐지.”

“아저씨이.”

“드라이기 무거워.”

“오늘은 수건으로 말려 줄게요.”

“근력 키우려면 다른 방법도 있을 텐데?”

“머리 좀 말린다고 팔에 알 안 배겨요.”

“저번에 덕지덕지 붙이고 있던 건 파스가 아니라 스티커였나 봐.”

드라이기를 놓치는 바람에 머리를 다 말려 주지도 못했으면서 근육통 때문에 파스까지 붙인 일락이었다.

“그런 건 좀 잊어 주세요.”

“응. 다음부터.”

일락을 안아 든 채 거실을 가로지른 금산이 체중계에 올랐다. 합계에서 금산의 무게를 빼니 일락의 체중이 2kg 줄어 있었다.

“너 살 빠졌는데.”

“얼마나요?”

대답 대신 일락만 체중계에 올려놓은 금산이 줄은 체중을 확인하고 다시금 일락을 안아 들었다.

“오늘 고기 많이 먹어라.”

“네에.”

고개를 끄덕인 금산의 목을 끌어안고 있다가 슬그머니 눈을 맞췄다.

“많이 자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

“그래.”

“이따 밥 먹고 한 번 더 재봐요.”

“알았어.”

눈치를 보는 목소리에 타이르듯 대꾸한 금산이 소파에 일락을 내려놓고 각자 입을 옷을 꺼내왔다. 4월 중순이었지만, 반소매를 입기엔 날이 서늘했다. 긴소매 옷을 입혀 주고, 저도 평상복을 걸친 금산이 드라이기를 가져와 일락의 머리를 먼저 말려 주었다. 한 달 전에 자른 머리카락이 동그란 귀를 살짝 덮고 있었다.

“아저씨.”

“왜.”

일락의 머리를 꼼꼼히 말려 주고 제 머리는 대충 뿌리만 말려 넘긴 금산이 드라이기를 정리하며 시선을 주었다. 눈이 마주치자 첫 이슬을 맞은 꽃잎처럼 사르르 웃은 일락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요.”

때마침 내려앉은 햇살에 문득 눈이 부신 것도 같았다.

뒷마당 평상에 자리를 깔자 상가 사장들이 하나둘 어슬렁어슬렁 기어 나왔다. 불부터 고기까지, 상차림을 도맡은 현배 대신 가위와 집게를 잡은 포차 사장 이동수가 지글지글, 삼겹살을 솜씨 좋게 굽기 시작했다.

“어디 가냐, 락아. 익었나 맛 좀 봐라.”

반찬을 가지러 간 현배를 뒤따라가려던 일락이 도로 평상에 주저앉아 입을 벌렸다.

“잘 익었어요.”

“밥은 안 질고?”

동수의 연이은 질문에 고기를 씹다가 갓 지은 잡곡밥 한 술을 떠먹은 일락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 좋아요.”

“쌈은 싱싱한가 모르겄다.”

이번엔 꽃집에서 설렁설렁 기어 나온 최영선의 한마디에 쌈 채소 바구니에서 상추 한 장을 꺼낸 일락이 뭘 살피기도 전에 두툼한 삼겹살 두 점이 척하니 올려졌다. 동수였다. 그 곁을 비집고 들어앉은 영선이 밥 한 숟가락을 얹어 주고 아삭아삭한 오이고추를 잘라 쌈장에 찍어 마저 올려 주었다. 형들이 올려 주는 대로 상추를 받치고 있던 일락이 그제야 넓은 상추를 오므려 입 안 가득 밀어 넣었다.

“싱싱하네.”

입에 든 걸 오물거리느라 말할 겨를이 없는 일락 대신 자문자답한 영선이 그 옆에 수저 한 벌을 새로 놓았다.

“형님도 드세요.”

편의점에서 필요한걸 사 들고 나온 금산이 묵직한 비닐봉지를 평상 한쪽에 내려놓고 일락의 옆에 앉았다. 봉지에서 맥주를 꺼내 상에 올리고 사과주스는 일락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사이 반찬을 가지고 온 현배가 제 자리를 찾아 앉았다. 오후 3시를 넘긴 시각이라 상가는 아직 한적했다.

“오늘도 출근하십니까?”

제 궁금증을 대신 풀어 주는 동수의 질문에 막 빨대를 문 일락이 눈동자를 굴렸다. 먹기 좋게 고기 쌈을 싼 금산이 일락의 작은 입술에서 빨대를 빼고 밀어 넣어 주었다. 적당한 크기였으나 입술도 입 안도 작은 일락의 양 볼이 빵빵하게 부풀었다.

“내일 할까?”

“모레 하셔도 되죠.”

“그렇지, 내가 사장인데.”

“맞습니다, 형님. 아니, 사장님.”

아직도 깡패 적 버릇 못 버리고 저를 나오는 대로 부르는 동수에게 눙치듯 한마디 던진 금산이 제 앞에 내밀어진 쌈을 말없이 받아먹었다.

“맛있죠.”

“그러엄. 우리 락이가 싸준 건데, 쪼기 현배 놈이 먹다 디져도 모를 만큼 맛있지. 그렇잖습니까? 형, 사장님?”

금산 대신 끼어든 동수가 저도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만큼 맛있는 거 먹어 보고 싶다 너스레를 떨자, 배시시 웃은 일락이 새 쌈을 싸서 동수의 입에도 넣어 주었다.

“애 귀찮게 뭐하냐?”

때마침 잔치 국수 한 솥을 들고나온 부동산 사장 오지훈이 인상을 쓰며 핀잔을 줬다. 들은 척도 않고 30인분은 돼 보이는 육수를 쳐다본 동수가 되레 한마디 덧붙였다.

“거기서 수영도 하겠네요, 형님.”

매장을 오며 가며 삼겹살에 맥주를 곁들이고 후식으로 잔치 국수까지 해치운 사장들이 뒷정리도 도맡았다. 저도 돕겠다고 깔짝거리는 일락을 안아다 꽃집 뒷문에 앉힌 세탁소 사장 황정욱이 옷걸이에 걸린 코트 한 벌을 꺼내와 덮어 주었다.

“감기 걸리면 고생한다.”

“네에.”

북적북적한 걸 좋아하는 일락을 알아서 안에 들어가 있으라 따로 잔소리하지 않은 정욱도 뒷정리에 동참했다. 춥진 않은데 코끝이 서늘해서 코트를 꼼꼼히 껴입은 일락이 의자에 두 발을 올리고 무릎에 턱을 괴었다. 장정 여덟이 움직이자 깨끗해지는 건 순간이었다.

“족구 한판 하시죠?”

“진 팀 주장이 일락이 소원 하나 들어주기.”

현배가 던지고, 동수가 거들었다.

“그럴까.”

대수롭잖게 제안을 받아들인 금산이 뒷마당 가운데를 차지한 평상을 가볍게 들어 한쪽 벽에 세웠다. 그사이 네트를 친 영선이 의자째로 일락을 들어 기둥 앞에 놓았다.

“락이는 심판 봐라.”

“네!”

능숙하게 자리를 잡은 일락이 그새 편을 먹고 갈라지는 형들을 쳐다보다 어느새 제 손에 쥐여진 호루라기를 삑- 불었다. 청팀 주장 황금산, 백팀 주장 김현배였다. 결과는 백팀의 완패였다. 지금까지 계속 백전백패를 당한 김현배가 땀에 흠뻑 젖어서는 일락의 앞까지 쫓아왔다.

“오늘도 형님 집에서 못 재우겠다, 락아.”

헐떡거리는 현배의 땀을 닦아준 일락이 괜찮다며 아하하 웃었다. 금산이 매일매일 집에서 같이 자 주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건 너무 큰 욕심이라는 걸 잘 알았다. 그래도 이렇게 같이 시간을 보내고, 형들이 저를 챙겨 준답시고 이기지도 못할 도전을 해 주는 게 고마웠다.

“사장님들! 이제 그만 일합시다! 식당에 오늘 단체 있어요!”

“포차도 두 팀 있습니다~!”

“여기도 집 보러 두 분 오신답니다!”

각 매장에서 뒷문을 열고 얼굴을 빼꼼 내민 알바와 직원들이 하나둘 제 사장들을 챙겨 들어갔다. 금산이 한쪽으로 치워 둔 평상을 제자리에 놓고 전화를 받으러 갔다. 휴대 전화를 귀에 붙이고 주차장과 이어진 출입구 쪽으로 향하는 금산의 등도 땀으로 흥건했다.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벽 너머로 사라지는 금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일락이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재운이 형, 물 한 병 가져갈게요.”

“5만 냥이다, 바코드 찍고 가라.”

“여기 10만 냥이요.”

능숙하게 바코드를 찍은 일락이 잡화 코너에 쪼그려 앉아 진열 중인 재운의 정수리에 쪽, 쪽, 뽀뽀를 두 번 날렸다.

“5만 냥은 팁이냐?”

“소시지값이요!”

생수 한 병이랑 같이 바코드를 찍은 백두장사 소시지를 흔든 일락이 으항 웃으며 편의점을 빠져나갔다.

“형! 어디 가세요?”

“어, 화장실. 시동 뿡뿡 걸다가 북한까지 가겠다.”

문도 안 잠가놓고 꽃집 뒷문으로 빠져나가는 영선의 뒤꽁무니를 쳐다본 일락이 알바 하나 없이 휑한 꽃집과 주차장 쪽을 번갈아 보았다. 금산은 아직 통화 중인 것 같았다. 벌써 저녁 7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라 손님이 많진 않겠지만, 꽃집을 비워 놓고 가는 게 맘에 걸렸다. 정작 주인은 꽁지가 빠지게 화장실로 달려갔는데. 결국 발길을 돌린 일락이 꽃집 카운터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활짝 열어 놓은 뒷문으로 뒷마당이 훤히 보여서 조금 안심이 됐다.

아저씨, 인사도 안 하고 출근하시진 않겠지?

나무 냄새와 꽃 냄새, 그리고 흙내가 어우러진 꽃집 한가운데 앉은 일락이 양손에 하나씩 움켜쥔 생수와 소시지를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활짝 열어 놓은 앞문에서도 차가운 저녁 공기가 흘러 들어왔다. 춥기보다는 상쾌하니 기분 좋은 온도였다.

어둑어둑해지면서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한 골목길에 소란스러운 생기가 돌았다. 맞은편 노래방 건물에서 빠져나온 일행 서넛이 꽃집 앞에서 담뱃불을 붙이는 게 보였다. 10분이 지난 뒤에도 드나드는 손님 하나 없어 우두커니 앉았던 일락이 매장을 가로질렀다. 담배 연기가 날아들기 전에 앞문을 닫으려는 찰나 일행 중 이쪽을 보고 선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특별한 반응 없이 시선을 돌리고 앞문을 닫은 일락이 앉은 자리로 돌아갔다.

눈처럼 새하얀 피부, 흑단 같은 머리칼, 탐미주의 화가가 심혈을 기울여 선을 그리고 색을 입힌 것 같은 일락을 발견하자마자 눈을 떼지 못한 남자가 툭, 제 곁에서 오두방정을 떨며 담뱃불을 붙이는 일행의 옆구리를 찔렀다.

“왜 병신아.”

“쟤 좀 보라고.”

“돛댄데 씨발, 불이 안 붙어.”

투덜거리며 남자가 가리킨 방향을 쳐다보는 일행의 미간이 확 좁아졌다.

“존나 예쁘네.”

“어디?”

“하여간 변태 새끼들, 예쁘기만 하면 눈이 홱 돌아 가지고.”

면박을 주며 차례차례 꽃집을 들여다보던 일행이 일제히 눈을 떼지 못했다.

“씨발, 미자 같은데?”

“여자야, 남자야? 여자치곤 키가 큰데?”

“숏컷인 거 아냐? 남자가 저렇게 예쁘다고?”

“치마 입고 있디?”

“몰라, 얼굴 보느라 못 봤어.”

“남자 같은데?”

“존나, 저렇게 예쁘면 남자라도 설 듯.”

되도 않는 개소리를 지껄이며 수군거리던 일행이 담배를 쭈욱 한 번에 빨아 태우고 꽁초를 바닥에 비벼껐다. 밑져야 본전이니까 확인이나 한번 해 보자며 괜히 옷매무시를 가다듬은 그들이 꽃집으로 향하려는 순간이었다.

“헉.”

“씨발.”

“저거, 인간이냐? 멧돼지냐?”

“조, 조폭 같은데.”

일행 중 누군가의 마지막 한마디에 잽싸게 꽃집에서 시선을 뗀 그들이 좆 됐다는 얼굴로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아예 휙 돌아서서 뒤도 안 돌아보고 자리를 벗어나는 그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꺼질 때까지 노려본 영선이 그제야 기척을 냈다. 카운터에 엎드려 돌돌 말린 포장 리본 끝을 톡톡 건드리던 일락이 반색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제 뒤에서 떡하니 버티고 선 최영선이 일락의 눈엔 멧돼지나 조폭이 아닌, 어려서부터 저를 돌봐준 다정한 형이었다.

“시원해요?”

“그래, 시베리아 맛 좀 보고 왔다.”

아하하, 웃은 일락이 얼른 제 물건을 챙겨서 일어섰다.

“형님이 그렇게 좋냐?”

말하지 않아도 왜 저렇게 서두르는지 알아챈 영선이 일락의 수북한 머리카락을 가볍게 흩뜨렸다.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두 번째는?”

“형들이요.”

해사하게 웃으며 답하는 일락에게 서운함보다는 애틋함을 느낀 영선이 괜히 일락의 뺨을 톡 치며 얼른 나가보라 재촉했다.

일락에게 금산은 하나의 지구였다. 숨을 쉬게 하고, 도려진 살을 돋게 하고, 부러진 뼈를 아물게 하는, 마음속에 작게 싹을 틔웠다가 일락을 다 집어삼켜 버린 유일한 세계였다. 작은 싹도 어린 일락에겐 아주 커서 비좁은 가슴을 가득 채웠었다.

일락이 채 다 자라 버리기도 전에 내부에서 몸집을 부풀린 세계는 도리어 바깥에서부터 일락을 포근히 감싸 안았다. 일락은 갇힌 게 아니었다. 마음속의 싹과 같이 자랐다가 속도를 맞추지 못해 뒤처졌고, 이제야 겨우 따라잡은 참이었다.

일락에게 금산은 가족이자 친구였으며, 연인이자 집이 되고 싶은 사람이었다. 비빌 언덕이고, 위로이고, 어느 때에도 편이 되어 주고 싶은 사람이었다.

“…….”

평상 앞에 쪼그려 앉은 일락이 잘생긴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피로했는지 평상에 누워 잠시 눈을 감고 있는 금산의 얼굴에 가로등 빛이 내려앉았다. 어쩌면 유흥 골목의 파편일지도, 높이 뜬 달빛의 조각일지도 몰랐다. 혹은 그 전부일 수도 있었다. 분명한 건 그 모든 조각이 다 금산의 일부라는 사실이었다.

‘잘 어울리네.’

아저씨.

‘예쁘고.’

좋아해요.

문득 가슴 속에서 풍선처럼 부푼 마음을 가누지 못해 그저 웃을 수밖에 없던 일락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작고 보드랍고 따뜻한 입술이 금산의 입술에 살짝 눌렸다. 충동적인 행동에 놀라고도 일락은 입술을 무르지 않았다. 고른 숨을 내쉬던 금산이 조용히 눈을 떠 시선을 마주쳐올 때까지 가만 입술을 붙이고 있었다.

“…….”

금산은 당황하지도, 일락을 밀어내거나,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저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이 일락을 잠자코 바라보기만 했다. 스스로 입술을 떼어내고, 눈썹을 내리깔다가 도로 금산과 눈을 맞춘 일락이 쪽, 쪽, 쪽. 연이어 금산의 뺨, 콧등, 턱 밑에 입을 맞추고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애정 표현이요.”

“…….”

“고양이들도 가끔 이렇게 핥곤 한 대요.”

그러냐는 말도 없이 빤히 일락을 응시한 금산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그 속도에 맞춰 얼굴을 뒤로 물리다 엉덩방아를 찧으려는 일락의 팔뚝을 잡아 준 금산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도둑질하다 들킨 아이처럼 초조한 속내를 끝내 감추지 못한 일락이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저씨, 반려동물은 죽을 때까지 데려온 주인이 책임져야 한 대요.”

먼저 부뚜막에 올라가 놓고 저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말에도 금산은 무표정할 뿐이었다. 화가 난 건지, 아니면 그저 아무런 취급도 하고 싶지 않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전자는 무서웠지만, 후자라면 금방이라도 가슴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그런데 아저씨는 이제 4년만 더 책임지면 되잖아요.”

그래서. 어쩌자고. 묻는 눈빛이었다.

“아저씨 미워요.”

그새 빨개진 눈으로 금산을 쏘아본 일락이 잔뜩 억울한 얼굴을 소매로 닦아내곤 팔랑 뛰어가 버렸다. 도망가봤자 고작 거기. 환한 낮엔 상가 골목, 어두운 밤엔 황금 상가 내. 금산이 미워져 일락이 홀랑 달아난 곳은 겨우 코앞의 편의점이었다.

“…….”

한숨 섞인 눈길로 일락의 잔상을 좇은 금산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일락의 미워요, 는 좋아요. 와 같은 말이었다. 아무리 둔한 놈도 이쯤 되면 알아차릴 텐데, 하물며 금산은 누구보다 머리가 비상하고 영민했다. 좋아해요, 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마음이란 것도 잘 알았다.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건지. 일락은 다 알고 있고, 상관없다 생각할 테지만, 현실은 달랐다. 유한한 관계와 무한한 관계는 그 깊이와 무게부터가 달랐다. 오롯이 일락이 짊어져야 할 것이었다. 가진 걸 잃는 건 오로지 일락일 테니까.

샤워를 마치고 세면대 앞에 선 금산이 거뭇거뭇한 턱을 가만 쓸었다.

쪽, 쪽, 쪽.

‘애정 표현이요.’

쉐이빙 크림을 넓게 펴 바르고 면도질을 시작했다.

‘꿈에서요.’

서걱서걱, 면도기가 지나간 자리가 깨끗하게 깎였다.

‘맨날맨날 봤어요.’

앞으로도 맨날맨날 그렇게 살 수 있을까. 평생, 여기 갇힌 채 나만 보면서.

어느새 출근 준비를 마친 거울 속의 금산이 혀를 찼다. 일락은 그럴 수 없을 것이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빌라를 빠져나온 금산이 집 나간 고양이를 찾아 뒷마당을 가로질렀다. 정확히는 산책 나간 수준이었지만. 일락은 예상대로 편의점에 있었다. 그 시간에는 꼭 잔다는 밤 10시가 8분쯤 지난 시각이었다.

손목시계에서 눈을 뗀 금산이 유리 벽 안쪽을 쳐다보았다. 창고나 계산대 구석에 있어야 할 일락이 혼자 카운터를 지키고 있었다. 성문대생이라는 알바는 간데없고 일락이 혼자 계산대에 서서 손님을 받고 있었다. 알바생 또래로 보이는 남녀 넷의 무리였다.

물건을 사는 것 같지도 않은데 계산대 앞을 차지하고 서서 와하하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후드티에 청바지를 입은 여자애가 무어라 입을 열자 나머지 남자 셋이 웃음을 터트렸고, 일락도 따라 웃었다. 저렇게 보니까 일락도 평범한 대학생 무리에 속한 것 같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야구모자를 쓴 남자애의 말에 집중한 일락이 눈매를 접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경 쓴 남자가 무어라 말을 거들며 일락의 뺨을 툭 건드렸다. 싫은 내색도 없이 눈가를 찡그리며 웃는 일락의 머리를 야구잠바를 입은 남자애가 흩뜨렸다. 등판에 성문대 로고가 박혀 있었다. 알바생 친구겠군. 그들의 정체를 짐작한 금산이 돌아서려다 걸음을 멈췄다.

야구모자가 휴대 전화를 꺼내 일락에게 들이밀고 있었다.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젓는 일락이 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래도 집요하게 휴대 전화를 들이미는 야구모자는 이 정도야 뭐, 어떠냐며 웃었다. 얼굴을 가리다 못해 계산대 밑으로 몸을 숨기려던 일락이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혔다. 그제야 다른 사람의 존재를 알아챈 성문대 무리가 뒤를 돌아보다 일제히 뒷걸음질을 쳤다.

“어어…?”

그들 앞에 선 거대한 남자의 존재감에 본능적으로 주눅이 든 무리가 절로 구석에 찌그러졌다. 눈길도 주지 않은 금산이 계산대 앞에 섰다. 금산이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설 때부터 보고 있던 일락의 커다란 눈동자에 금산의 얼굴이 가득 들어찼다.

“담배 한 갑 주지?”

물끄러미 금산을 올려다본 일락이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생긴 것처럼 말랑하지만 제법 단호한 목소리에 헉, 숨을 집어삼킨 건 성문대 무리였다. 야, 저거 말려야 되는 거 아니냐? 어떻게? 무슨 수로? 누굴? 우리 다 좆 될 것 같은데? 경찰 부를까? 다 들리게 소곤거리며 우왕좌왕하는 그들이 마침 창고에서 재고 파악을 하고 나온 정현의 입을 틀어막고 구석으로 끌고 갔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제 동기들을 둘러본 정현 역시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뭐야, 저 괴물은!

“왜?”

“건강에 안 좋아요.”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눈알을 굴리다가, 일락의 당돌한 대답에 내심 괴성을 지른 정현이 ‘일락아아-!’ 속으로만 울부짖으며 정작 겉으로는 아무 말도 뱉지 못했다. 외려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 질리게 하는 남자의 위협적인 분위기에 슬금슬금 거리를 더 두었다.

“여긴 손님 가려서 물건 파나?”

“그게 아니구요. 담배 안 피우시잖아요.”

“누가 그래? 담배 안 피운다고.”

“어…?”

정말 금시초문인 얼굴로 금산을 올려다본 일락이 그제야 조금 당황스러운 기색을 띠었다.

“아저씨, 담배 피우세요?”

“여기 직원이 많이 건방지네. 손님이 담배를 피우든 안 피우든 무슨 상관이지?”

낮게 깔려 나오는 목소리에 겁을 집어먹은 건 정현을 위시한 성문대 무리였다.

“물건 안 팔 거면 거긴 나오고, 사장 불러.”

“…….”

대놓고 시비 거는 어투에도 겁을 집어먹기는커녕 한참 금산을 올려다본 일락이 혼란스러움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이내 뺨부터 목덜미까지, 일락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담배… 피우시는구나.”

끊은 줄 알았다. 저 때문에. 알레르기가 있는 저를 걱정해서 아주 옛날에 끊은 줄 알았다. 지금까지 제가 아주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일락의 전신이 아예 홍시가 되었다. 그제야 평정심을 잃고 우물쭈물하는 일락을 내려다보는 금산이 툭 계산대를 건드렸다. 그에 반응하듯 눈꺼풀을 밀어 올린 일락이 입술을 열었다.

“아…, 뭐… 드릴까요?”

“알잖아.”

“…….”

“기억력 좋으시다며.”

서운한 기색도, 억울한 기색도 하나 없이 그저 오랜 기억을 떠올리려 머릿속을 열심히 뒤지기 시작한 일락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희었던 목덜미가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온통 빨갰다. 얼마지 않아 기억을 찾은 일락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말보로 맞으시죠?”

“…….”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는 금산의 시선에 거듭 당황한 일락이 제가 틀린 줄 알고 다시 기억을 뒤졌다. 큰 눈을 더욱 크게 뜨고 한 번씩 느리게 깜박거리는 모습을 내려다본 금산이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지나친 화풀이였다. 금산이 저에게 화풀이 같은 걸 할 것이라는 전제 자체를 하지 못하는 일락은 그저 열심히 정답을 찾으려 노력할 뿐이었다.

금산의 배려가 제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부터 분명 서운하고 민망하고 부끄러웠을 것이다. 그런 감정은 모두 뒷전으로 둔 채 제 눈치를 보고 기분을 맞추려는 일락의 모습이 거슬리는 한편 금산은 만족스럽기도 했다. 단지 이 정도 몰아붙였을 뿐인데도 평정심을 완전히 잃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일락이 제 곁에서 벌어지는 험한 일들을 견딜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명료해졌기 때문이었다.

이미 알고 있는 답을 재차 확인한 이상 더 일락을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현재 금산이 주의를 주고 화를 내야 할 대상은 일락이 아니었다.

“잠잘 시간 지난 거 아니냐.”

여전히 낮지만,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에 빠듯하게 마른 눈을 깜박인 일락이 금산을 올려다보았다.

“10시에는 꼭 잔다며.”

“…….”

일락은 혼란스러워하지도, 곤혹스러워하지도 않았다. 그저 안도만이 가득한 얼굴로 금산을 바라보며 맑은 눈을 반짝였다.

“아저씨 화 많이 났어요?”

“아니.”

“왜요?”

“화낼 이유가 없으니까.”

그 뽀뽀는 일락의 변명처럼 고양이도 하는 애정 표현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러니 금산이 화를 낼 이유도, 불쾌해할 이유도 없었다. 그 뜻을 이해한 일락이 여태까지 잘 참은 울음을 왈칵 쏟으려다 가까스로 삼켰다.

“미워해도 돼.”

“…….”

“나쁘다고 때려도 되고.”

울먹 떨리는 입술을 꾹 다문 일락이 고개를 저었다.

“아저씨 담배 피지 마요.”

겨우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은 눈으로 해죽 웃었다.

“저 때문이 아니고요. 아저씨 건강에 안 좋잖아요.”

이제 저는 절대로 그런 착각하지 않겠다며 웃는 일락을 내려다본 금산이 손을 뻗었다.

“알바.”

계산대 안쪽에 있는 일락을 가볍게 쑥 뽑아 올린 금산이 그대로 안아 들었다.

“고정현 씨.”

그제야 금산이 저를 불렀다는 사실을 깨달은 정현이 구석에 찌그러져 있다 앞으로 나섰다. 아니, 정현이 앞으로 나서기도 전에 동기 놈들이 등을 떠밀었다. 의리라고는 눈꼽만치도 없는 것들.

“네! 네?”

목소리까지 삑사리를 냈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자리 비울 땐 다른 사람한테 맡기지 말고, 문을 잠가요.”

저 좀 편하자고 만만한 애 부려 먹지 말라는 경고를 찰떡같이 알아먹은 정현이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일락이 아저씨라고 할 때부터 알아봤는데, 진짜 맨날 노래노래 부르던 그 아저씨가 맞았다.

운동선수처럼 키 크고, 몸이 좋다 못해 무시무시한 건 알겠는데, 잘생긴 데다 착하다고? 일락아. 너 눈에 대형 콩깍지가 씐 거니, 아예 보는 눈이라는 게 없는 거니? 잘생…긴 건 잘생겼는데, 저건 보통 사람의 평범한 잘생김이 아니잖냐. 게다가 착하긴 개뿔, 저게 착한 거면 이 세상 착한 사람들 다 얼어 죽었게?

눈물을 머금으며 계산대로 기어들어 간 정현이 슬쩍 일락을 훔쳐보았다. 남자에게 아이처럼 안긴 일락은 두 팔로 남자의 목을 끌어안은 채 그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애를 아주 쥐 잡듯이 잡으니까 저렇게 풀이 팍 죽지. 그래도 좋다고 남자를 꼭 끌어안고 있는 걸 보자니 맘속 깊은 곳에서 한숨이 터져 나오는 기분이었다.

“야구모자.”

“네? 네!”

구석에서 얼타고 있던 야구모자가 뜬금없는 호명에 화들짝 놀라며 반응했다. 금산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손을 내밀었다.

“폰.”

“네?”

금산은 두 번 말하지 않고 야구모자를 쳐다볼 뿐이었다. 이유를 물을 생각도 못 한 야구모자가 재빨리 휴대 전화를 꺼내 내밀었다.

“비번.”

길게 말하는 것도 성가시다는 투였다. 그럼에도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두려움을 느낀 야구모자가 후다닥 비밀번호도 풀어 넘겨주었다. 금산은 갤러리를 확인하고 연동된 데이터까지 모조리 삭제한 뒤 휴대 전화를 계산대 모서리에 내리쳐 박살 냈다.

“물.”

금산의 명령에 가장 먼저 반응한 정현이 생수 한 병을 뚜껑까지 따서 바쳤다. 우수수 흩어진 잔해에 물을 부은 금산이 빈 병을 대충 던졌다. 제 휴대 전화가 눈 깜박할 사이에 수명을 다하는 동안 한마디 말도 못 하고 어버버 거리는 야구모자 앞에 명함 한 장이 던져졌다.

“전화해서 계좌 불러요. 입금될 겁니다.”

“네? 아…, 네….”

“싫다는 사람한테 카메라 들이미는 버릇은 고치고.”

“네? 아, 네…, 네! 아, 알겠습….”

야구모자의 답은 다 듣지도 않고 돌아선 금산이 성큼성큼 편의점을 빠져나갔다. 작은 소동이 있는 동안 편의점을 들어오려다 아예 문밖에서 돌아선 손님들은 저 무시무시한 남자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서도 한동안은 얼씬도 하지 않았다.

“야, 고정현. 쟤 저렇게 보내도 되는 거냐?”

“일락이? 아, 아마…? 저분이 걔가 죽고 못 사는 그 아저씨거든.”

“엑? 조폭 아냐? 덩치도 덩친데! 아니, 얼굴에 막!”

살벌하게 잘생긴 얼굴에 그보다 더 살벌한 칼자국이 사선으로 그어져 있었다. 정확히 이마 왼쪽에서부터 콧등을 가로질러 오른쪽 턱 밑까지. 100m 떨어진 곳에서 텀블링하면서 봐도 칼부림으로 난 상처였다.

“내, 내 폰 박살 낸 거 봐! 쟤는 한 대만 맞아도 묵사발 된다니까?”

“경찰 부를까?”

“남 일하는 데서 뭔 놈의 경찰이야! 그러니까 왜 애 얼굴을 함부로 막 찍고 그래? 나 짤리면 네가 책임질 거냐?”

“이 새끼 봐라? 너튜브하자고 함 꼬셔 보라며!”

“내가 꼬시라 그랬지, 언제 얼굴 찍으라 그랬냐?”

“카메라 테스트는 해 봐야 할 거 아냐!”

“일락이 걔가 무슨 카메라 테스트가 필요해?”

“하긴.”

후드티의 긍정 한마디에 서로 흥분해 달려들던 무리가 조용해졌다.

“막 찍어도 베스트에다 똥손도 금손으로 만들어 줄 만큼 예쁘더라. 난 무슨 요정인 줄?”

“난 투디 실사판인 줄.”

“너튜브는 어렵겠지?”

“섭외하다가 우리 골로 갈 각. 무슨 눈에서 레이저가. 딱 봐도 조폭이던데, 진짜 쟤 괜찮냐?”

덤앤더머처럼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기들을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쳐다본 정현이 에휴, 모르겠다는 얼굴로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래 봬도 일락이는 아주 끔찍하게 생각해 준단다.”

“에이, 아니던데? 애를 작정하고 갈구더만. 나 같으면 무서워서 오줌부터 지렸을 텐데, 걔 은근히 깡 좋더라?”

“아니, 그러니까 왜 애 허락도 없이 카메라를!”

아오! 승질을 부린 정현이 기어코 뒷목을 잡았다.

“진짜로 나쁜 뜻은 없었다니까? 테스트 한 번만 해 보려고 한 건데.”

“야! 우리 일락이 없었으면 백퍼 오늘이 제삿날이었어!”

애를 왜 그렇게 무섭게 다그치나 했더니, 일락이 저희들 대신 혼난 거였다. 아무리 개인정보 풀리면 좆 되는 시대라지만, 그래도 뭘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지? 고작 사진 한 장인데. 우리가 어디다 막 풀고 다닐 것도 아니고. 물론 처음 본 놈들 뭘 믿겠냐만. 역시, 도둑질도 해 본 놈이 잘한다고. 나쁜 짓에 정통한 인간이라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한 건가!

“진짜 괜찮겠지?”

“경찰에 신고 안 해도 돼? 걔 막 물고기 밥 되고 그러는 거 아니지?”

“지금이라도 신고할까?”

겁 많은 쫄보에, 줏대 없고, 행동보다 입이 더 시끄럽지만, 그래도 마음은 착한 제 동기를 돌아본 정현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 괜찮아. 애 울까 봐 얼른 안고 데려가는 거 못 봤냐? 와, 무슨 이중인격인 줄. 완전 생양아치처럼 다그칠 땐 언제고. 애 하얗게 질리니까 목소리 싹 바꿔서는. 소름 끼치기는 한데, 세상 인정머리 없고 살벌하게 생겼어도 일락이 걔한텐 찐으로 다정한 것 같아.”

“어, 진짜?”

“그런 것도 같고.”

“야, 근데 아무리 다정해도 찐 조폭 같던데?”

동기들 의견이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왠지 편을 들어줘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정현이 입을 열었다.

“걔 어려서부터 키다리 아저씨처럼 알뜰살뜰 보살펴 준 분이시래.”

“엑? 하나도 안 어울려!”

“나도 그렇게 인상적인 분이신 줄은 몰랐는데, 아무튼 일락이 눈 수술도 해 주시고, 사고 나서 대수술할 때도 병원비 다 내 주셨다더라. 집도 절도 없는 애 지금까지 보살펴 주시고.”

말하다 보니, 괜히 저희들이 외모만 보고 편견을 가진 것 같아 죄의식이 든 정현이 내심 멋쩍은 마음에 좀 더 적극적으로 옹호하기 시작했다.

“여기 상가도 다 그분 거래. 상가 사장님들도 다 일락이 예뻐하셔. 아무튼 그분이 일락이 평생 일 안 해도 먹고 살 수 있게 해 준다고 하셨다더라. 애 몸 약하다고 알바도 못 하게 해.”

“야, 그건 대박 부럽다.”

“들으면 들을수록 너튜브 콘텐츠로 딱인데.”

어휴, 내가 말을 말지.

결국 입을 닫은 정현이 일하는 데 방해된다며 동기들을 쫓아 버렸다.

‘아저씨…, 또 올 거죠?’

일락을 재우고 나온 금산이 불안해하던 얼굴을 떠올리곤 시트 깊숙이 상체를 파묻었다. 앞으로 4년은 더 곁에 있을 텐데. 일락은 지금까지의 믿음이 무너진 것처럼 굴며 매달렸다. 지나친 화풀이였다. 적당히 조절을 해야 했는데. 그 얼간이들이 일락을 아무렇게나 만져댈 때부터 거슬리던 신경이 억지로 웃으며 카메라를 피하는 일락을 본 순간 뚝 끊어진 기분이었다.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금산은 자문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여러 번 곱씹는 취미는 없었다.

밤거리가 휙휙 지나가는 차창 밖을 내다본 금산이 휴대 전화를 꺼내 들었다.

「새우 대가리」

권세우의 전화였다. 성가신 얼굴로 수신 거부를 누르자마자 다시금 전화가 울렸다. 권세우였다. 삼 형제 중 금산을 제일 귀찮게 하는 건 별명 그대로인 권세우였다. 못마땅한 얼굴로 액정을 쏘아본 금산이 전화를 받았다.

- 야! 황금산! 한 번만 더 끊어…,

세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린 금산이 시간을 확인했다. 사무실까지는 20분 정도가 남았다. 두어 번 더 휴대 전화가 요란을 떨고서야 다시금 세우의 전화를 받아 주었다.

- 끊지 마, 황금산! 너 진짜 후회한다!

이번에도 금산은 미련 없이 끊어 버렸다. 정확히 5분이 지난 후 연신 신경질적으로 울려 대는 전화를 받았다.

- 라일락! 그 애새끼 일이라고!

“…뭔데.”

이번에도 시끄럽게 하면 아예 전원을 꺼 버릴 생각이었던 금산이 눈살을 찌푸렸다. 별거 아닌 일로 일락을 거론했다간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가 기저에 깔린 목소리에 움찔한 세우가 되레 버럭 소리를 질렀다.

- 너 진짜 내가 얘기 안 해 주려다 하는 건데!

세우가 무어라 지껄이기 전에 이미 차를 돌리게 한 금산이 조재운에게 전화를 거는 권호를 쳐다보았다.

“한 번만 더 간 보면 끊는다.”

- 최석두 말이야!

스톤 대가리. 돈 끌어다 쓰고 잠적한 놈 건져 내려고 막 수술하고 나온 와이프 병실에서 친절히 인증샷을 찍어 보냈었다. 3년 전 일이었다. 같은 병원에서 3층 반 높이에서 떨어져 응급수술을 받고 나온 일락과 두 번째로 얼굴을 마주한 날이기도 했다.

- 걔가 그 꼬맹이 뒷조사하고 다닌다더라.

“최석두는 그쪽에서 처리한 줄 알았는데?”

- 그게….

띨띨한 새끼들.

“형님. 애들이 전화를 안 받습니다.”

권호의 나직한 속삭임에 광연이 속도를 미친 듯이 밟기 시작했다. 황금 상가에 박아 놓은 사장들은 모두 전직이 아닌 현역이었고, 4년 뒤 일락을 내보내면서 은퇴하기로 한 놈들이었다. 아직까진 칼날이 살아있는 놈들이란 뜻이었다.

“지껄여 봐.”

- 돈 많은 마누라한테 버림받고 쪽박 차고 노름방을 전전하다가 중국 놈들한테 붙었댄다. 네가 저번에 해결한 건수, 중국 할배랑 엮인 거잖냐. 아무튼 그 할배 사주받고 중국 쪽 해결사 몇 놈 끼고 오늘 상가 쳐들어간다고 하더라. 너 지금 가는 약속도 연막이야.

“라일락 생채기 하나에 씹새끼들 모가지 하나씩이다.”

- 야, 황금산. 그 할배도 검새 끼고 있어. 적당히 날뛰라고. 너 그러다 진짜 콩밥 먹어.

“권세우. 네 놈이라고 무사할 줄 알아? 최석두 살려둔 걸 지금까지 입 쳐 닫고 있었다? 이딴 식으론 일 못 하지. 라일락 손끝 하나 다치지 않길 기도해라. 빌어먹을 권씨 집안 놈들 손가락 마디부터 썰어줄 테니까.”

- 야, 황금산! 금산아! 산아!

휴대 전화를 던져버린 금산이 재촉하지 않아도 광연은 최고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형님. 3분 안에 도착합니다.”

“더 밟아.”

마침내 덩치 큰 SUV가 골목 어귀에 들어서자마자 벌컥 문을 열어젖힌 금산이 차가 멈추기도 전에 뛰어내렸다. 평소 유흥을 즐기러 온 사람들로 정신없이 북적거릴 골목이 한산했다. 대신 황금 빌라 주변에 인파가 몰려 있었다. 3층 건물에서 피워 오르는 시커먼 연기를 발견한 금산이 거의 날다시피 골목을 가로질러 갔다.

울다가 지쳐 잠든 일락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눈을 떴다.

으, 머리 아파.

너무 많이 울긴 했다. 눈이 퉁퉁 부어서 떠지지 않을 정도였다.

벌에 쏘인 것 같아. 물론 벌에 쏘여본 적은 없지만.

혼자 웅얼거리며 일어나 앉은 일락이 눈두덩의 부기가 조금이라도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잠도 잘 깨지 않았고, 머리도 너무 무거웠다. 그래서 그런지 문밖에서 웅성웅성, 와글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주말도 아닌데.

늘 그렇듯 유흥 골목 상가는 이른 저녁부터 늦은 새벽까지, 그리고 금요일 밤부터 일요일 밤까지 가장 붐볐다. 평일이라고 조용한 건 아니었고, 가끔 단체 모임이나 회식이 잡히면 주말만큼이나 소란스러웠다. 오늘도 그런 날인가 보다, 하며 침대에서 일어나려던 일락이 그만 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머리가 띵했다.

왜 이러지.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고 일어나려는데 윙윙 진동 소리가 머리를 두들겼다. 아니, 고막인 것도 같았다. 쿵, 쿵, 쿵, 쿵. 무언가 문이 부서지도록 부딪쳐오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몸이 많이 안 좋은가 싶어서 머리를 감싸 쥐고 있다가 짝- 소리가 나도록 두 손으로 얼굴을 때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몸이 무겁고 머리가 멍할 때에는 샤워를 하면 좀 나아졌다.

아저씨도 다시 온다고 했으니까. 이제 더 울지 말고 건강하게 있어야지. 잠도 잘 자고, 밥도 잘 먹고, 산책도 열심히 하고. 아, 그러고 보니 아저씨랑 체중을 안 재봤네. 밥 먹고 한 번 더 재보기로 했는데. 지금 몇 시지? 밖이 아직 컴컴한 걸 보니, 새벽쯤인 것 같았다.

일락은 정말 밤 10시에 자면 새벽 4시까지는 한 번도 깨지 않고 쿨쿨 잤다. 그런데 어쩌다 한 번씩 새벽 1시쯤에 깨서 도로 잠들지 못할 때가 있었다. 그런 날엔 아무리 노력해도 다시 잠들기가 힘들었다. 어쩐지 오늘도 그럴 것 같았다. 그런데 시간은 이제 막 11시 10분을 지나가고 있었다. 금산이 빌라를 떠난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

와, 오늘 나 진짜 힘들었나 보다. 아저씨 얼굴 오래 봐서 좋았는데. 물론 헤어질 때쯤엔 별로 좋지 못했지만. 그래도 아저씨는 다시 오신다고 했다. 살면서 이렇게 힘든 날도 한 번씩 있는 법이다. 일락은 쉽게 실망하지 않고, 쉽게 절망하지 않고, 쉽게 기대하지도 않았다. 세상엔 일락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 훨씬 많았다.

작은방 문을 열고 나서려던 일락이 그만 뒷걸음질을 치다 문까지 도로 닫고 말았다.

“콜록, 콜록, 콜록!”

시커먼 연기가 그 짧은 순간 작은방을 집어삼킬 듯이 몰려 들어왔다.

불.

불이었다.

형들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찰나 웅웅거리던 소리들이 실체가 되어 일락의 귓전을 때리기 시작했다. 일락은 곧장 작은방 창문을 활짝 열었다. 빌라 주변을 빙 두른 사람들이 한눈에 보였다. 불이 난 것 같은데, 소방차나 구급차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다. 형들은 괜찮은가 보다.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린 일락이 출구를 찾아보려 돌아서려는 순간이었다.

“라일락!”

저 밑에서 누군가 일락을 크게 불렀다. 금산이었다. 일락은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 그런데 왜 아저씨가 지금 여기에.

“뛰어내려!”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민 일락이 구경꾼들 틈에서 금방 금산을 찾아냈다.

“뛰어내려! 지금 당장!”

일락은 3층에 있었다. 불이 났지만, 잘하면 창문 외에 다른 출구를 찾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일락은 조금의 주저도 없이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고, 훌쩍 뛰어내렸다. 저 밑에서 저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선 금산에게 일락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몸을 내던졌다. 그리고 언젠가 금산이 알려준 대로 머리를 둥글게 감싼 채 뚝 떨어졌다. 정확히 금산의 품 안으로.

아마추어 솜씨였다. 결국 권세우가 제공한 정보에도 오차가 있었다. 빈털터리가 된 최석두에게 새로운 뒷배 따위는 없었다. 오로지 혼자서, 삐뚤어진 집념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오랜 시간 기회를 노린 끝에 저지른 행위였다. 최석두가 노린 건 라일락 하나였다.

이 바닥 누구도 정확한 정체를 모르지만 괴물 황금산이 싸고돈다는 유일한 대상. 바깥 사람들에게 일락은 금산의 숨겨둔 자식이기도 했고, 배다른 동생이기도 했고, 특별한 장난감이기도 했다. 무엇이든 금산이 아끼는 존재라는 건 분명했다.

그래서 지역 일대가 조직 소유인 도시 가운데 떡하니 요새를 만들어 놓고, 가장 실력이 좋고 신임이 두터운 부하들을 경호원으로 세워 놓고, 경계선 밖으론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했다. 라일락은 골목 경계선을 넘어가지 않겠다는 금산과의 약속을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다. 그 때문에 최석두는 최후의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경호원이랍시고 세워 둔 깡패 새끼들의 상상력은 제한적이었다. 그들은 다른 깡패 새끼들이 연장을 들고 쳐들어오거나, 일락을 납치하거나, 무력으로 제압할 것이란 추측밖에 하질 못했다. 그래서 화재로 라일락을 잡기로 한 최석두의 계획은 허를 찌른 수법이었다.

3층 현관문에 기름을 뿌리고 복도와 계단 구석구석에도 기름을 뿌린 최석두가 마지막으로 한 일은 라이터 불을 켜는 것뿐이었다. 이미 도박 빚으로 장기 몇 개를 털린 최석두는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다. 최석두가 지르는 괴성에 빌라 계단을 뛰어 올라온 상가 사장들이 발견한 건 이미 시뻘건 불덩어리가 된 최석두의 몸뚱이와 새카맣게 타들어 가고 있는 3층이었다.

눈이 뒤집힌 사장단들이 119를 부르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불을 끄려고 난리를 치는 시각, 금산이 골목에 들어섰고, 일락이 작은 방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왼팔에 깁스를 한 금산이 침대 옆에 앉았다. 유독 가스를 제법 들이마신 일락은 3층에서 떨어진 충격보다 중독 후유증으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래도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며 금산에게도 안정을 권하는 의사를 뒤로한 채 일락의 병실을 찾았다. 이제 막 중환자실에서 나온 일락의 안색은 평소와 같았다. 뽀얗고, 말랑한 뺨에 옅은 홍조가 올라와 있었다.

저를 발견하자마자 이슬 먹은 꽃잎처럼 환해지던 얼굴이 슬로우모션처럼 뇌리에 박혔다. 시커먼 연기가 활화산처럼 피워 오르는 창가에 선 일락을 발견한 순간 금산은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제가 뛰어내리라 지껄인 소리에 고민 한번 없이 뛰어내린 일락을 받아 안은 뒤에야 얼어붙은 심장이 다시 뛰는 것 같았다. 그 찰나에 금산의 내부를 점령한 건 깊은 안도와 당혹스러울 정도로 충만한 만족감이었다. 아마 일락은 금산이 불구덩이였더라도 한번 망설임 없이 뛰어내렸을 것이다.

“…….”

일락은 잠에서 깨어날 때도 평소와 같았다. 긴 속눈썹을 밀어 올리며 습관적으로 금산을 찾고, 제 시야를 가득 채우는 금산을 발견하자 배시시 웃었다.

“아저씨.”

“일락아.”

“네.”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

“…….”

뒤늦게 금산이 걸친 환자복과 깁스를 알아차린 일락이 벌떡 몸을 일으키려 했다. 손짓 하나로 일락의 움직임을 멈춘 금산이 누워 있으라며 가슴을 슬쩍 눌렀다.

“아저씨 다쳤어요? 저 때문에요? 얼마나요? 많이 아프죠. 미안해요. 미안해요, 아저씨.”

금산이 시키는 대로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 속사포로 질문을 던지는 일락은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나 때문에 죽을 뻔한 건 너야, 일락아.”

“…아저씨가 구해 줬잖아요.”

기어코 가득 차오른 눈물이 새빨간 눈시울을 적시고 굴러떨어졌다.

“아저씨가 다쳤잖아요.”

“뼈 좀 부러진 게 다야. 이틀이 지났고, 너 이제 막 중환자실에서 나왔어.”

“…저는 아픈 데가 없어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일락을 잠자코 내려다본 금산은 울지 말라 달래지도, 흠뻑 젖은 눈가를 닦아 주지도 않았다.

“내 곁에 있으면 계속 겪게 될 일이야.”

“…….”

“4년만 지나면 완전히 벗어날 수 있어. 평생 먹고살 수 있게 해 줄 거고, 다시는 나 같은 놈과 엮이는 일 없이 평범하게 살 수 있게도 해 줄 거야.”

“저는….”

“끝까지 들어.”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에 입술을 꾹 다문 일락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곁에 있으면, 일락아. 두 번 다시 벗어날 수 없어. 골목보다 더 좁은 곳에서 평생 나만 기다리며 살다가 죽을 수도, 상상하기 힘들 만큼 끔찍한 일을 겪을 수도, 이번처럼 운 좋게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어.”

“…….”

“나는 지금까지 내 걸 가져본 적이 없어. 살면서 갖고 싶은 것도 없었어. 그래서 뒤를 보지 않고 살아왔어. 적을 만드는 데 거리낄 게 없었거든. 그런 내가 널 갖게 된다면.”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때문에 물만두처럼 퉁퉁 부어버린 일락의 얼굴을 담아내는 금산의 눈은 깊게 가라앉은 채였다.

“나도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겠다.”

뒤늦게 제 조카라도 팔아먹겠다고 찾아온 일락의 삼촌을 처리한 건 금산이었다. 덕수 패거리는 사람 구실을 못 하게 됐고, 포주 짓 하던 양아치 새끼들은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지워졌다. 어린 일락에게 호시탐탐 달라붙던 버러지들도, 열여덟 일락을 납치한 씹새끼들도 모두 산 채로 갈아버렸다.

“다음엔 납치로, 방화로 끝나지 않을 수 있어, 일락아.”

“아저…씨.”

“응.”

“저… 목말라요.”

스스로 눈물을 닦으며 울음을 삼켜보려는 일락이 두 손을 쭉 내밀었다. 일으켜달라는 몸짓을 이번엔 제지하지 않은 금산이 두 손을 잡고 제 목에 감았다. 금산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꼭 매달리는 일락의 등허리를 커다란 손이 받쳐 안았다.

손 대신 베개를 밀어 넣어 편하게 앉혀 준 금산이 실온에 내놓은 생수 한 병을 가져왔다. 손수 꽂아 준 빨대를 입에 문 일락이 천천히 마시라는 나직한 목소리에 속도를 늦추었다. 조금씩 나눠 가며 500ml짜리 생수 한 병을 다 마신 후에야 다소 진정된 얼굴로 금산을 올려다보았다.

“아저씨는 바보예요.”

농담도 빈말도 아니었다. 일락은 진심이었다.

“저는요, 아저씨를 만나서 모든 걸 얻기만 했어요. 삼촌한테서 날 구해 준 것도, 눈을 잃지 않게 해 준 것도, 아픈 날 보살펴 준 것도, 아무도 없는 나한테 집을 만들어 주고, 형들을 만나게 해 준 것도 다 아저씨예요. 나는요, 아저씨를 얻고 그렇게 많은 걸 다 얻었어요.”

금산이 아니었다면 가질 수도 없는 것들이었다.

“제가 그랬잖아요. 저는 아저씨가 원하면 다 줄 거예요. 저를 다 가져도 돼요. 그런데, 저를 갖는 게 싫으면요. 저를 얻었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아저씨가 갖는 게 아니고, 제가 저를 주는 거예요. 저도 그렇게 아저씨가 준 것만이 아니라, 아저씨까지 다 얻고 싶어요.”

“네가 가진 걸 다 잃을 거야. 네가 당연히 누려야 할 자유, 안전, 그리고 평범한 생활까지. 나는 필요하다면 너를 방 안에만 가둬 놓고 살 수 있어. 그러면서 만족할 거야. 네가 주저 없이 내게 몸을 던졌을 때처럼 오히려 기뻐하겠지.”

“저도 기뻤어요. 그때 아저씨가 망설임 없이 저를 불러줘서. 다치면서까지 저를 받아줘서.”

“…….”

“아저씨가 다쳐서 슬픈데요, 많이 기쁘기도 해요.”

그새 또 차오른 눈물이 뺨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저도 그랬어요. 아저씨.”

말없이 일락을 응시한 금산이 눈물로 흥건한 뺨을 감싸 안았다. 그저 그뿐인 금산의 손바닥에 제 뺨을 기대는 일락의 젖은 입술이 울먹 떨렸다.

“저 지금까지 아저씨 말 한 번도 어겨본 적 없어요. 잠도 잘 자고, 밥도 잘 먹고, 아무 일도 안 하고, 건강하게만 있었어요. 가끔, 아주 가끔 새벽에 깼다가 못 잘 때도 있었지만, 그런 날엔 낮잠을 많이 잤어요. 골목 밖으로 나간 적도 없었어요. 그리고, 그리고….”

제가 잘한 것을 떠올리려고 한참 머릿속을 뒤진 일락이 후드득 눈물을 떨어뜨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더는 잘한 게 없었다. 더 말해 줘야 하는데. 아저씨 곁에 있으려면 제가 정말 시키는 대로 하려고 노력했다는 걸 알려줘야 하는데.

“3층에서 뛰어내릴 때도… 머리부터 감싸 안고 뛰어내렸어요. 원하는 건 다 해 주겠다는 말도 아저씨 말고는 아무한테도 안 했어요.”

“…….”

“아저씨.”

“…….”

“아저씨이.”

아무런 답이 없는 금산을 애타게 부르며 저 때문에 축축해진 손바닥에 뺨을 부빈 일락이 펑펑 눈물을 쏟았다.

“나랑 같이 살아요. 4년 말구요. 평생이요. 죽을 때까지 같이 살아요.”

계속해서 금산의 손바닥에 뺨을 부비며 구애했다.

“제가 잘해 줄게요. 더 잘할게요. 말도 잘 들을게요. 건강하게, 아저씨 옆에만 있을게요.”

눈물이 방울방울 맺힌 속눈썹을 밀어 올리며 금산을 바라보았다.

“좋아해요, 아저씨.”

“…….”

“정말 많이 좋아해요.”

결국 더 견디지 못한 금산이 손끝을 움직여 일락의 눈물을 조심스레 훑어 주었다.

“언젠가 후회해도 어쩔 수 없어.”

수도꼭지처럼 흘러 내리는 눈물이 금산의 손마저 흠뻑 적셨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무를 기회를 줄게.”

고개를 저은 일락이 눈물을 떨어뜨리며 웃었다.

“사랑해요, 아저씨.”

말없이 일락을 내려다본 금산이 뒷목을 부드럽게 끌어안으며 나직이 속삭였다.

“그래.”

젖은 입술을 어루만지듯 가볍게 입을 맞추고, 습기 가득한 일락의 몸을 품 안으로 깊숙이 당겨 안았다.

“그러자.”

평생, 죽을 때까지.

마침내 금산의 동의를 받아낸 일락이 어헝- 울음을 터트리며 커다란 몸을 마주 안았다. 희고 작은 손이 꾸물꾸물 기어 나와 널따란 금산의 등을 꼭 움켜쥐었다. 그보다 더 간절하고 애틋할 수가 없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