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매일은 아니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은 일락이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제가 눈을 뜬 곳이 낯선 방이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펄쩍 침대에서 뛰어내리려다 그만 얼음이 돼버렸다.
“…아저씨?”
금산이 문을 열고 들어서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대를 마주친 일락은 입술을 벙긋거리지도 못했다.
“잘 잤어?”
“…….”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그저 홀린 듯이 저를 보고만 있는 일락을 침대에 제대로 앉힌 금산이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이제 여기서 살 거야, 너.”
“…네?”
“보육원에 있는 짐은 작은 방에 다 옮겨 놨으니까, 나중에 확인해.”
“…….”
“애들이 옷은 안 사줬나 보지?”
“…….”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해 답도 하지 못하는 일락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어본 금산이 휴대 전화를 꺼냈다.
“옷 몇 벌 사서 보내. 일락이 입을 걸로. 사이즈는 90.”
보육원에서 옮겨온 짐엔 교복을 제외한 옷이 고작 두 벌 뿐이었다. 주마다 뻔질나게 보육원에 들르면서 옷 같은 것 하나 제대로 챙기지 않은 권호와 광연을 따로 욕할 일은 아니었다. 평생 피 튀겨가며 치고 박고 싸우는 일에만 몰두한 놈들의 한계였다.
“어제 일은 기억나?”
“…….”
“라일락.”
여전히 금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일락은 입술 한번 달싹이지 못했다.
“아저씨가 부르면 대답해야지.”
“……네.”
그제야 뒤늦게 답하는 일락의 머리카락을 가만 쓸어준 금산이 다시 물었다.
“어디까지 기억해?”
“…학교 끝나고 버스 타러 가는 길이었어요.”
그 뒤로는 기억이 없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일락의 입으로 재차 확인한 금산이 상체를 뒤로 젖혀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하굣길에 납치당했어. 나 때문이고, 한 번 당했으니 두 번 세 번은 쉽겠지.”
당구장에서 떨어져 크게 다친 일락의 병원비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금산과의 관계가 부풀려지는 방향으로 노출됐다. 숨겨둔 자식, 변태성 놀잇감. 어느 쪽이든 일락에겐 좋은 현상이 아니었다.
“조용해질 때까지 여기서 지내.”
“…여기가 어디예요?”
“황금 빌라.”
“…….”
“당분간은 너랑 내가 살 집.”
“…아저씨도 같이 살아요?”
갑자기 환해지는 일락을 잠시 내려다본 금산이 저도 모르게 선을 그었다.
“매일은 아니고.”
“그래도 좋아요.”
제가 납치당했다는 말은 기억도 안 나는지, 그저 앞으로 같이 산다는 말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일락의 얼굴 가득 웃음이 번졌다.
“여기서 살래요. 아저씨랑 같이요.”
금산이 때맞춰 꺼내오지 않았다면 일락은 어젯밤 죽거나 죽는 게 나을 정도로 몹쓸 짓을 당했을 것이다. 제가 당한 일의 심각성은 하나도 모르는 얼굴로 해사하게 웃는 일락을 잠자코 내려다본 금산이 내심 인상을 썼다.
애가 병원에 있을 때보다 더 예뻐졌다. 불길할 정도로 눈에 띄는 외모엔 불운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그걸 아이가 이해하긴 어려울 것이고, 이해해야 할 의무 또한 없었다. 어제 당한 일과 당할 뻔한 일을 낱낱이 알려주면 경각심이야 가지겠지만, 그런다고 일락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지도 않았다. 쓸데없이 충격만 받겠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을 일락에게 그런 것들이 한두 개쯤 는다고 달라질 건 없을 것이다. 어차피 데리고 있을 거, 가끔 얼굴 들여다보고 금산이 좀 더 신경 쓰면 될 일이었다.
“저 아저씨 말 잘 들을 수 있어요.”
세상을 다 가진 듯이 웃는 일락을 권씨 삼 형제가 주목하기 전까진 매일같이 황금 빌라에 드나들게 된 건 나중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