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그렇게 해 주세요.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형들이 잔뜩 쟁여 놓고 간 주전부리를 싸 들고 온 일락이 노크도 없이 병실 문을 열었다가 그만 얼어붙었다.
창가 근처에서 금산과 마주 보고 선 여자가 빼꼼 고개를 내밀곤 손을 흔들었다.
“안녕?”
“…안녕하세요?”
반사적으로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일락을 관찰하듯 응시한 여자가 싱긋 웃었다.
“예쁘네. 황 사장 취향 제법 근사해?”
“시간 그만 뺏고 가라.”
“나도 바쁘거든요?”
산뜻하게 대꾸한 여자가 재킷을 바로 입으며 창가를 벗어났다. 좀 더 가까이에서 본 그녀는 늘씬한 체구에 지적인 인상을 풍겼다. 원체 큰 금산의 곁에선 잘 몰랐는데, 바로 앞에서 마주한 그녀는 상당히 키가 컸다. 저보다 반 뼘쯤 위에 있는 그녀와 눈을 맞춘 일락이 잠시 고민하다가 웃음을 지었다.
“안녕히 가세요.”
“그래, 다음에 또 보자?”
일락의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지나쳐 간 그녀가 이내 뒷걸음질을 쳐 일락의 품에 든 간식 보따리에서 초콜릿 하나를 꺼내 들곤 찡긋 윙크했다.
“진짜 안녕~.”
웃는 모습이 누굴갈 닮았다는 생각을 하는 동안 병실을 빠져나간 그녀는 더 보이지 않았다.
누굴 닮은 거지.
“퇴원하기 전에 그거 다 먹을 수 있겠어?”
이틀 후 퇴원이었다. 입원한 지 벌써 2주째인 지금 일락은 입원 전보다 더 건강해졌지만, 금산의 퇴원 일정에 맞췄다.
“권호 형이 집에 다 옮겨준대요.”
물론 집까지 운전하는 건 광연일 것이다. 불탄 빌라는 개보수에 들어갔고, 빈집으로 놀리던 아파트에 새로 입주하기로 했다.
“치과 선생 또 만나고 싶은 거 아니면 적당히 먹어.”
잔소리를 듣고도 이리 오라는 손짓에 방긋 웃은 일락이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품에 가득 든 걸 침대에 쏟자마자 금산의 손에 잡혀 그 품에 가두어졌다. 갈비뼈와 왼팔에 금이 간 금산은 이제 완전히 다 나아서 환자복이 다 어색할 정도였다.
“이거랑, 이것만 먹어.”
고개를 끄덕이며 금산이 준 소시지와 초코 과자를 받아 든 일락이 우물쭈물하다 입을 열었다. 금산의 앞에서 특히 더 일락은 제 마음을 숨기는 재주가 없었다.
“아까 그분은 누구예요?”
“권해영.”
“권해영이요?”
“내 이부동생.”
“아….”
제가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일락의 목덜미가 새빨개졌다. 다리 사이에 일락을 앉혀 부드럽게 가둬 놓은 금산은 일락의 목덜미가 빨개지기도 전에 일락의 속마음을 눈치챈 뒤였다.
“권세우 알지? 저번에 딸기로 진상 부리고 간 놈.”
“네에….”
“걔 위로 형이 두 명 더 있고, 아까 동생까지 해서 다섯인데 나만 부친이 달라.”
가만 고개를 끄덕인 일락이 소시지를 내려놓고 초코 과자를 뜯기 시작했다.
“내 부친은 깡패 수준도 못 되는 삼류 양아치였는데, 일찍 죽었어.”
뻔한 전개였다. 밤늦게 술 먹고 돌아다니다가 칼 맞아 죽는, 삼류 양아치다운 마감이었다.
“모친은 엘리트 깡패 집안 출신에다 신분 세탁까지 완벽하게 마친 그룹 회장님이시고.”
모친에게 부친은 불같은 장난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시작부터 파투 난 관계. 모친이나 금산이나 서로가 탐탁지 않은 사이였기에, 권해영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서로 보조해 주기로 합의했다. 그 기간이 5년이었다. 금산은 이 바닥을 뜨고, 그룹은 잠재적 불안 요소를 해치우고. 금산은 은퇴 후 소일거리 삼아 일락이 몰래 그 뒤를 봐줄 생각이었다. 물론 이번 일을 계기로 계획은 전면 수정되었다. 권해영은 일시적이 아닌 영구적인 협력을 원했다. 이번 사건으로 완벽하게 노출된 일락을 보호하려면 그룹을 확실하게 등에 업는 건 괜찮은 수단이었다. 당연히 일련의 과정을 일락이 알 필요는 없었다.
“아저씨는… 누구 닮았어요? 저는 엄마를 똑 닮았대요.”
양면에 초콜릿을 듬뿍 묻힌 과자 하나를 금산의 입에 물려주고 저도 하나 입에 넣는 일락의 한쪽 볼이 그새 볼록해졌다. 살면서 금산에게 무엇이든 단 것을 물려준 건 일락이 유일했다.
“성격도 외모도 외탁했지.”
“우리 같은 거 생겼다.”
히 웃은 일락이 저를 끌어안은 금산의 왼팔에 쪽 입을 맞췄다. 반깁스로 바꿔 채운 왼팔은 수술 없이 완치돼 일락처럼 흉터가 남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 다행이었다.
“실은요, 아저씨. 저는 아까 그분이 아저씨랑 그런 사인 줄 알았어요.”
“어떤 사이?”
알고도 묻는 금산의 시야로 더 할 수 없이 빨개지는 일락의 목덜미가 비쳤다.
“제가 질투해야 되는 사이요.”
오독오독. 입에 물고만 있던 과자를 이제야 씹는 일락의 동그란 귀도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래서 조금 안심했어요. 아니, 아주 많이요. 한심하죠.”
순탄치 않았을 금산의 가정사를 듣고 안심이나 하는 스스로가 매우 부끄럽고 한심하다는 일락의 고개가 좀 더 아래로 수그러졌다. 그럴수록 더욱 도드라지는 목덜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금산이 고개를 숙여 입술을 붙였다. 붉게 달아오른 목덜미에서 아이처럼 따끈한 일락의 체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래도 돼.”
움찔, 어깨를 움츠린 일락이 조심스레 금산을 돌아보았다.
“더 욕심내야지. 내가 너한테 준 건데.”
목덜미만큼 달아오른 얼굴로 금산을 올려다본 일락의 커다란 눈에도 홍조가 피는 듯했다.
“그럼요, 아저씨.”
“응.”
“우리 이제 사귀어요?”
“…….”
아무런 답이 없는 금산의 반응이 무섭지만, 그래도 확인해볼 수밖에 없다는 눈으로 금산을 올려다본 일락이 조금 더 용기를 냈다.
“우리 사귀어요.”
얼토당토않은 질문에 실소도 하지 않은 금산은 대답 대신 일락의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이윽고 입술을 가까이 붙이며 속삭였다.
“우리 일락이는 안 사귀는 사람하고도 이런 짓을 해?”
잔뜩 긴장한 눈으로 금산을 응시한 일락이 울 듯 말 듯 한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니요, 아저씨.”
저는 아저씨랑만요.
“그러니까 아저씨도 그렇게 해주세요.”
“그래, 그럴게.”
이번엔 고개를 끄덕이고 목소리를 내어 정확히 답해 준 금산이 가까이 붙인 입술을 깊이 포개며 일락을 꽉 끌어안았다. 그 거대하고 단단한 품 안에서 작고 말랑말랑한 일락의 몸이 맞춤처럼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