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교과서와 노트를 골라내고 사물함 문에 손을 대는 순간이었다.
탕탕.
초점을 다시 맞추는 데 시간이 걸릴 만큼 짤막한 거리를 두고 들려오는 소리에 세스가 고개를 들었다. 짧은 금발에 보기 좋게 근육이 붙은 어깨를 한 누군가가 사물함을 손가락으로 퉁기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녕.”
“…….”
“네가 세스 그린이지?”
세스가 그렇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누군지 알아?”
일로인 풋볼팀의 쿼터백 존 리든이었다. 이제껏 얘기를 나눠 본 적은 없었지만 얼굴 정도는 알았다. 수업이 두어 개 겹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없더라도 그가 누군지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정식 고교 리그에 출전하는 일은 없다 하더라도 쿼터백은 어느 학교에서나 스타였다.
세스가 알고 있다는 뜻으로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존 리든이 약간 쑥스럽게 웃었다.
“나 너한테 말 거는 거 처음이다.”
“…….”
세스는 낯선 인사를 무반응으로 흘려 넘겼다. 대꾸 없이 눈을 가만 피하는 세스를 보며 존 리든의 잘생긴 이마가 약간 구겨졌다.
“처음이라 어떻게 말해야 될지 잘 모르겠는데…… 오늘 3교시, 어때?”
듣는 것만큼이나 뜬금없는 소리는 아니었다. 세스에게 불쑥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은 보통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대가 없고 조건 없는 즉흥적인 섹스였다. 일 년쯤 전, 그러니까 학교 내에서 세스 그린의 공식 별명이 남창이 되고 나서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아무리 느린 인간이라 하더라도 학습은 했다.
세스는 본명보다 남창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일에 별 감정이 없었지만, 그게 제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일반적인 하이스쿨과 근방에서 유일한 사립학교인 일로인은 같으면서도 달랐다.
일로인의 학생들은 일반 하이스쿨의 십 대들보다 대개 한두 살 더 많았다. 사정상 일반 학교를 다닐 수 없는 아이들이 졸업장을 따기 위해 돈을 주고 입학하는 곳이었다.
일반 학교를 졸업할 나이를 지난 어정쩡한 성인들이 모여든 대안학교라 해도 학교는 여전히 학교였다. 그리고 학교라는 공간 안에서 비정상이 된다는 것은 꽤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몇 차례 문제를 겪고 난 다음부터 세스는 소문이 돌 만한 섹스 제안은 거절하고 있었다. 그래도 학교 내의 소문이라는 것은 이상해서 세스의 입을 빌려 나오는 미온적인 진실은 결코 알려지지 않았다.
“클래스 취소됐잖아. 들었지? 수학 선생이 어디 장례식인가 간대.”
“나는 별로.”
“……어?”
존 리든은 누구에게든 적당한 가격에 다리를 벌려 준다는 세스 그린의 거절이 자못 충격이었던지 눈썹을 거세게 웅크렸다.
“그거 혹시 내가 별로라는 소리야?”
“그냥……. 오늘은 좀 그래.”
세스는 늘 하던 거절을 입에 올렸다.
아무나하고는 안 해. 돈은 안 받아. 나는 남창이 아냐. 그런 식으로 말을 하면 대화가 쓸데없이 길어졌다. 어째서 그러냐며 이유를 꼬치꼬치 따지고 묻다가 폭력을 쓰는 경우도 있었다.
그 대신 오늘은 싫다는 말은 훨씬 더 간단한 거절이 되었다.
“……쳇. 애런슨한테 콘돔도 빌려 왔는데.”
존 리든이 아쉽다는 듯 입술을 삐죽거렸다.
남한테 무관심한 세스 그린에게도 그의 반응은 신선했다.
존 리든은 인기인이었다. 알렉산더 랜스키와는 다른 부류였지만 그는 늘 무리 안에 있었다. 그중에는 기꺼이 섹스를 해 주겠다고 하는 여자애들도 많을 것이다. 일로인은 여자의 비율이 남자에 비해 현저하게 낮았지만, 그럼에도 존 리든의 여자 친구가 되겠다는 사람들은 늘 있었다.
혹시 취향이 나쁜 걸까.
세스는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답을 생각해 냈다.
관계 안에서의 섹스는 지켜야 할 게 많다고 했으니 존 리든은 그런 걸 귀찮아하는 타입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런 부류와 하는 즉흥적인 섹스는 대개 안전하지 못했다.
“하여간 내가 별로라는 건 아니지?”
존 리든은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재차 물었다.
세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이 없기도 했다. 일로인의 인기 쿼터백이거나 아무나이거나 세스에게는 그저 섹스하기 싫은 사람일 뿐이었다.
그 누구도 알렉산더 랜스키가 아니었으므로.
세스의 침묵을 제멋대로 해석했는지 존 리든이 세스의 사물함 끝을 붙들고 그 너머로 고개를 훌쩍 기울였다. 입술이 귀를 간질일 수 있는 거리로 다가왔다.
낯선 간지러움에 세스가 휙 고개를 치켜들자 존 리든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다음에 하자. 너 시간 괜찮을 때 말해. 난 수업 빠져도 괜찮으니까.”
세스가 만일 다른 인간들의 평균치 정도 되는 눈치를 가졌다면 존 리든의 저 여유로운 미소는 사실 긴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하지만 세스는 평균이나 평범 같은 말과는 거리가 있었다.
“나중에 봐.”
존 리든이 후다닥 자리를 떠났다.
세스는 늘 그렇듯, 잠시 가까워졌던 타인과의 거리를 잊었다.
혼자 뒤처진 세계가 평소처럼 고요해졌다.
* * *
“뭐야, 갑자기. 이러는 게 어디 있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존 리든은 부지런히 세스의 마른 몸에서 진즈를 벗겨 냈다.
“아깐 싫다더니……. 아, 그래서 뭐라는 건 아니고. 좋다는 소리야.”
세스는 모르고 있었지만 존 리든은 애런슨에게서 빌렸다는 콘돔을 벌써 돌려주었다. 뒤늦게 세스가 섹스에 응하자 뭣 같은 새끼라는 욕을 먹으면서 다시 콘돔을 빼앗아 와야 했다.
바지를 벗겨 낸 존 리든이 세스가 입고 있는 브리프의 밴드를 쥐었다. 세스는 무감하게 제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옷들을 바라보았다. 존 리든이 마침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락커룸 옆의 공구실은 학교 안에서 섹스를 하는 데 최적의 장소일지는 몰라도 위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벗겨진 옷가지를 해묵은 먼지들이 무성의하게 덮쳤다.
“어떻게 하는 게 좋아? 입으로 해 줄까? 너부터 할래?”
반쯤 빈 페인트 통이 쌓인 캐비넷 한구석에 세스를 앉힌 존 리든이 브리프를 끌어 내리다 말고 얼굴을 들이댔다. 그가 혀를 내밀어 세스의 목덜미를 부지런히 핥았다.
세스가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키스는 하지 마.”
“뭐……?”
“다른 건 필요 없으니까 그냥 풀어 주고 넣어.”
“…….”
존 리든의 얼굴이 천천히 구겨졌다.
“뭐야, 그건. 남창의 자존심이야? 키스는 안 되는 거?”
세스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존 리든을 쳐다보았다.
“나는 그렇게는 안 하는데. 섹스는 서로 즐기자고 하는 거잖아. 설마 전희도 없이 대충 박히는 게 취향인 건 아닐 테고.”
세스가 시선을 돌렸다.
취향이라니. 그건 대답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섹스에 있어서 세스의 선호도는 크게 다치지 않을 것, 고작 그 정도였다.
“그냥, 해. 나는 사정 안 해도 돼.”
“……? 그게 무슨 소리야?”
“그냥 빨리 끝내.”
“…….”
존 리든의 안색이 달라졌다. 기대감으로 상기되어 있던 뺨이 그보다 낮은 색으로 식었다. 불룩하던 팬츠 안이 눈에 띄게 수그러들었다.
존 리든은 기가 차다는 듯 거친 숨을 세스의 얼굴로 뿌려 냈다. 바지만 벗은 세스와는 달리 존 리든은 상의만 벗은 채였다. 근육으로 채워진 가슴팍이 숨결을 따라 들썩였다.
“나한테 섹스하자고 한 이유가 뭐야?”
세스의 눈동자가 느리게 흔들렸다.
“……네가 하자고 했잖아.”
“거절해 놓고는 다시 와서 하자고 한 게 누구야. 처음에는 괜히 튕겨 본 거 아니었어?”
“…….”
하지 않으려고 했다. 처음에는.
그런데 존 리든의 말대로 3교시 클래스가 취소되면서 불안증이 시작되었다. 마침 오늘은 안정제를 가져오지 않았고, 세스는 독한 안정제가 주는 메스꺼움과 두통보다는 섹스가 낫겠다고 생각했다.
“네가 좋다고 했잖아.”
“……씹, 모르는 척은. 그럼 다시 묻자. 너는 왜 섹스를 하는데?”
존 리든이 브리프 위로 발기의 흔적이 없는 세스의 성기를 콱 움켜쥐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통증에 세스가 눈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세스는 놓아달라거나 건드리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흥분하지도 않았잖아. 하고 싶은 게 맞기는 해? 나하고만 이런 거야? 아니면 다른 애들하고 할 때도 이래?”
“…….”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이러는 거야?”
세스의 침묵은 거부가 아니라 무지였다.
사실 그도 답을 모르는 문제였다. 섹스가 좋은 것은 아니었다. 다급히 해소하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섹스에서만 얻을 수 있는 온기를 갈구하지도 않았다.
섹스는 그에게 이해하기 쉬울 뿐이었다. 시작과 끝이 분명했으니까. 대화나 감정 같은 것과는 달리.
견디면 언젠가는 끝났다.
“대답 안 해?”
“……할 거면 계속하고 안 할 거면 놔줘.”
존 리든은 잠시 이를 갈다 손에 쥔 성기를 휙 떠밀듯 놔주었다. 한 손에 쥐였던 성기는 여전히 말캉했다.
“됐다. 네가 괜히 남창이겠냐. 기대한 내가 등신이지.”
존 리든이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세스에게 퍽 던졌다. 그리고 제 상의를 손에 쥔 채 등을 돌려 공구실을 나섰다.
세스는 그 자리에 앉아 낡은 진즈를 열없이 손에 쥐었다. 섹스를 하기로 했던 존 리든이 왜 저 혼자 화를 내며 중간에 나가 버렸는지, 세스는 끝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불안의 틈새를 뚫고 희미하게 두통이 번지기 시작했다.
* * *
그러나 존 리든은 채 두 걸음도 떼기 전에 발을 멈췄다.
까르륵대는 호흡 가쁜 웃음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요란하게 뒤섞이는 발자국 소리가 다급하게 벽을 넘어왔다.
텅!
누군가의 등이 공구실의 문을 열며 서로 뒤엉킨 한 쌍의 남녀가 들어섰다. 맞닿은 입술이 한창 분주했다. 다리는 서로의 다리 사이에 얽혀 있었고 풀어헤쳐진 여자의 셔츠 안에서 브래지어가 달랑달랑 흔들렸다. 클래스가 취소된 틈을 노려 비어 있는 공구실을 생각해 낸 사람이 존 리든밖에 없던 것은 아니었다.
“……헤이워드?”
여자의 화사한 금발을 알아본 존 리든이 눈썹을 구부리며 이름을 내뱉었다. 그러자 얽혀 있던 한 쌍의 금발들이 동작을 뚝 멈추고 이쪽을 쳐다보았다.
“뭐……?”
밀레나 헤이워드의 입에서 요란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제껏 틈 없이 안고 있던 남자를 홱 떠민 뒤 셔츠 앞자락을 여몄다. 세 번째 단추가 떨어져 나간 셔츠는 손자국이 얼룩처럼 번져 있었다.
“이게 무슨……,”
그러나 밀레나 헤이워드가 당황하는 시간은 짧았다. 잘 짜인 상반신 근육을 드러낸 존 리든과 철제 캐비넷에 걸터앉아 있는 세스 그린을 보며 어렵지 않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챘다.
“뭐야, 이건. 설마 존 리든이 호모였어?”
밀레나 헤이워드와 들러붙어 있던 남자가 이쪽을 향해 돌아서며 슬쩍 미소 지었다. 자연스럽게 밀레나 헤이워드의 어깨를 짚은 손 위로 그가 턱을 살짝 기댔다. 태평하게 밀레나 헤이워드의 말을 따라 중얼대는 남자는 제이 에드거였다.
“존 리든이 호모였다고?”
레몬처럼 옅고 화사한 금발을 지닌 그들은 마치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다. 예쁘장한 얼굴과 유리 같은 파란색 눈은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왔다. 호모라는 말을 내뱉으며 입술에 머금는 얇은 웃음도 똑같았다.
밀레나 헤이워드의 얼굴을 보면 굳이 유명인사라는 말이 필요 없었다. 헤이워드는 일로인에서 가장 예쁜 여자일 것이다. 학생들뿐 아니라 교직원과 카페테리아 직원 및 그 가족들까지 전부 통틀어서. 그래서 밀레나 헤이워드는 알렉산더 랜스키의 여자 친구였다.
세스가 몸을 일으킨 것은 그 때문이었다. 더 생각할 틈도 없이, 자신을 애매하게 가리고 섰던 존 리든을 마른 손가락으로 밀치고 앞으로 나선 세스가 숨 가쁘게 물었다.
“랜스키하고 헤어졌어? 에드거와 사귀는 거야?”
세 쌍의 눈이 세스 그린을 향했다. 세스는 그중 한 쌍만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대답해, 헤이워드.”
존 리든은 밀레나 헤이워드에게 말을 거는 세스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그가 알기로 세스 그린이 먼저 남에게 말을 거는 경우는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빠르게 말한 적도 없을 것이다.
밀레나 헤이워드는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표정을 작게 찡그렸다.
“나한테 말 걸지 마, 남창. 더럽게.”
밀레나 헤이워드는 세스 그린이 월 마트의 음식물 폐기 창고라도 되는 것처럼 시선을 사리며 존 리든을 채근했다.
“말해 봐, 리든. 너 정말 호모였어? 방금 일로인의 공식 남창과 섹스한 거야?”
밀레나 헤이워드의 얼굴에 생기 어린 미소가 감돌았다. 밀레나 헤이워드는 일로인에서 가장 예쁜 여자였다. 그리고 가장 못된 여자일 것이다. 아마도.
이런 종류의 가십은 여왕벌 밀레나 헤이워드가 가장 좋아하는 종류의 꿀이었다.
“에드거와 사귀는 거야? 랜스키도 알고 있어?”
세스 그린이 같은 말을 되물었다. 세스의 눈이 제이 에드거의 화보 같은 블론드에 가서 멎었다. 화려한 외모의 두 사람은 그럴싸한 그림이 되었지만 세스는 이 괴상한 조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알기로 제이 에드거는 게이였다. 그걸 떠나서 어째서 알렉산더 랜스키의 여자 친구가 다른 남자와 공구실에 숨어들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세스가 하얗고 마른 손가락을 허벅지 위로 문질렀다. 보이지 않을 만큼 가늘게 떨리는 손끝을 존 리든이 우연처럼 발견했다.
“대답해. 랜스키와 헤어진 거야?”
손끝처럼 목소리도 작게 흔들리고 있었다. 밀레나 헤이워드는 세스에게서 안 좋은 냄새라도 난다는 듯 손을 코앞에서 흔들며 다시 한번 물었다.
“저리 좀 비켜, 남창. 난 지금 존 리든에게 묻고 있잖아. 일로인의 쿼터백이 언제부터 게이였어?”
존 리든은 세스의 어깨를 끌어당겨 뒤로 물러나게 했다. 그 짧은 동작은 밀레나 헤이워드와 세스 그린의 사이에 안전거리를 확보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바이야. 그래서 뭐? 헤이워드 너도 그리 떳떳한 입장은 아니잖아. 이런 거 랜스키는 알고 있냐?”
밀레나 헤이워드는 금세 돌아오는 화살에 눈살을 찌푸렸다. 생기 넘치던 예쁘고 작은 얼굴이 비틀려 갔다.
“입 다물어. 호모 주제에.”
“일로인의 왕자를 놔두고 제이 에드거와? 그건 뭐야? 쿠데타냐?”
제이 에드거의 예쁜 게이 얼굴도 웃음으로 비틀렸다. 그는 입을 꾹 다문 밀레나 헤이워드를 대신해 대꾸했다.
“그렇게 거창할 것까지야. 원래 왕좌란 고독한 법 아니겠어?”
그 말에 밀레나 헤이워드가 킥킥대고 웃었다. 제이 에드거의 표정이 그 위로 겹쳤다. 두 사람을 하얀 캔버스 위에 나란히 늘어놓으면 데칼코마니처럼 보일 것이다.
존 리든이 두 사람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랜스키가 알면 숙청의 피바람이 불겠군. 헤이워드, 생각 좀 하고 살아. 가슴 크기와 두뇌 용적률은 반비례한다지만 넌 그렇게 글래머도 아니잖아. 일 년이나 사귀었으면 성격 정도는 파악하고 있어야지. 랜스키가 이 꼴을 잘도 봐주겠다.”
밀레나 헤이워드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목을 길게 늘이는 초원의 육식동물처럼 보였다. 매니큐어를 곱게 한 예쁘장한 손톱이 바짝 일어섰다.
“입조심해. 호모 주제에 누굴 협박하는 거야. 내 남자 친구가 누군지 몰라서 이래?”
“협박이 아니라 충고다. 구분 못 하겠어?”
“입 다물어. 랜스키한테 쿼터백 하나 교체하는 게 어려울 것 같아?”
“네가 하는 그게 바로 협박이다, 헤이워드. 영어 시간에 뭐 했냐?”
존 리든이 고개를 돌려 세스 그린을 바라보았다. 더 상대할 것도 없었다. 헤이워드가 바보가 아닌 이상 지금 이 공구실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 제 입으로 떠들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존 리든은 자신의 성적 기호에 관해 그리 입 다물고 살 결심을 한 것도 아니었다.
“가자, 세스 그린.”
세스는 존 리든이 마치 잡으라고 말하는 것처럼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나 결국 잡지 않았다.
홀로 떨어져 밀레나 헤이워드의 곁을 지나치는 순간 세스가 작게 말했다.
“바람피우지 마.”
“……뭐?”
예상하지 못했던 말에 밀레나 헤이워드가 입을 살짝 벌렸다. 곁에서 아직도 손을 내민 채로 세스를 지켜보던 존 리든이 밀레나 헤이워드와 비슷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바람피우지 말라고.”
“하……? 뭐라고?”
밀레나 헤이워드가 잠시 후 조소를 섞어 덧붙였다.
“네가 그런 말 할 주제야? 일로인의 공식 남창이?”
세스가 정색을 했다. 확실히 이상한 일이긴 했다. 그가 일로인의 공식 남창이라는 별명을 얻고 나서 일 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간 세스 그린이 남창이라는 별명에 대해 불평하거나 변명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돈 안 받아. 사귀지도 않고. 난 바람피운 적 없어.”
그래서 아무리 정색을 하고 부정했어도 별 의미를 갖진 못했다. 특히나 밀레나 헤이워드에게는.
“남창이나 걸레나.”
“바람피우지 마. 걸레도 안 하는 짓을 하는 너는 뭐야, 그럼.”
“뭐라고?”
짝!
밀레나 헤이워드의 손바닥이 세차게 세스의 뺨을 후려쳤다. 한쪽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존 리든이 밀레나 헤이워드의 손목을 붙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존 리든의 입에서 거친 소리가 튀어 나갔다.
“미쳤어? 뭐 하는 거야?”
“놔.”
“수준하고는. 설마 랜스키한테 차였냐? 그래서 지금 엉뚱한 데 화풀이하는 거 아냐?”
“닥쳐! 호모 새끼들이 누구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것도 아니라면 왜 이렇게 날뛰는데? 세스가 틀린 소리 했어? 바람피우지 마. 헤어진 게 아니라면 랜스키가 알아서 좋을 거 없잖아.”
“닥쳐! 이거 놔! 감히 누구한테 손을 대는 거야?”
밀레나 헤이워드는 존 리든에게 붙들린 손목을 흔들며 애를 썼다. 사납게 구겨지는 예쁜 얼굴을 향해 한심함을 뱉어 낸 존 리든이 밀레나 헤이워드를 떠밀었다. 밀레나 헤이워드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커다래진 파란 눈을 바르르 떨었다. 일로인에서 밀레나 헤이워드에게 손을 대도 괜찮은 남자는 이제껏 랜스키가 유일했다.
오늘은 여러모로 낯선 날이었다.
“됐다. 여기서 없던 일로 하자. 오늘 마주친 거, 전부 없는 일로 하자고. 알아들었지?”
존 리든은 이번에는 그저 손을 내미는 대신 직접 세스 그린의 팔목을 붙들었다.
“간다.”
쾅!
시간의 지체 없이 문이 닫혔다.
공구실을 나오자마자 존 리든은 세스 그린의 턱을 잡아 그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왜 그랬냐?”
시선이 사나웠다. 세스는 턱을 잡힌 상태로 시선을 애매하게 피했다. 타인의 손자국이 남은 뺨은 아직도 후끈했다. 존 리든에게 붙들린 턱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뭘?”
“헤이워드한테. 그런 소리 해서 굳이 맞을 건 없었잖아. 거기서 왜 나선 거야?”
“…….”
세스는 대답 대신 입을 다물었다.
밀레나 헤이워드는 알렉산더 랜스키의 여자 친구였고, 그래서 그와 섹스하는 사람이었다. 세스는 랜스키와 섹스하는 사람이 다른 남자와 섹스하면 안 된다는 자신의 생각을 존 리든에게 오해 없이 전달할 자신이 없었다.
이상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일로인의 공식 남창 세스 그린에게는 일로인의 왕자 알렉산더 랜스키가 섹스하는 상대를 신경 써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넌 아무 생각도 없이 사는 것 같으면서 왜 엉뚱한 남 일에 욱하고 그래. 그것도 하필이면 헤이워드 일에. 성격 개차반인 거 다 알잖아. 그런 소리를 듣고도 가만있을 줄 알았어?”
“…….”
세스가 여전히 입을 다물고만 있자 존 리든은 별수 없다는 듯 턱을 놓아주었다. 표정이 세스에게 바지를 던질 때와 비슷했다. 화는 나고, 화가 나는 마음은 설명할 길이 없어서 그냥 덮어 두고 멀어지려던 그때와.
“가라.”
팬츠만 입은 존 리든은 그대로 락커룸으로 들어갔다. 그의 등을 가만히 지켜보던 세스가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닫힌 문 바깥으로 세스와 존 리든이 서로 모르는 사람인 척 길을 나눠 걸어갔다.
닫힌 문 안쪽에서 제이 에드거가 웃고 있었다. 밀레나 헤이워드가 모르게.
* * *
3교시를 제외하고 세스는 오늘 있는 수업을 모두 참석했다.
존 리든과 섹스를 했다면 그대로 공구실에 주저앉아 멀거니 오후를 흘려보냈을지도 몰랐지만 오늘은 이래저래 낯설게 흘러갔다. 한쪽이 부어오른 뺨을 하고 나타난 그를 몇몇이 흥미롭다는 듯 쳐다보는 것도 그랬다. 세스는 시선을 피하느라 오후 내내 식은땀을 흘렸다.
하지만 일로인에 다니는 대다수는 세스 그린에게 관심이 없었다. 세스는 언제나 말이 없는 아웃사이더였고, 가끔씩 접근해 섹스를 요구하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접점도 없이 지내 왔다. 아웃사이더가 아니었다면 세스가 견뎌 내질 못했을 것이다.
세스는 주차장으로 터벅대며 걸어갔다. 주차장은 벌써 반이나 비어 있었다. 세스는 한번 주차장을 훑은 뒤 늘 머무는 벤치로 가서 주저앉았다. 한쪽 어깨에 메고 있던 백팩이 아무렇게나 떨어져 발등을 눌렀다.
“아직 있구나.”
세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알렉산더 랜스키의 차는 아직도 주차장에 있었다. 운이 좋았다. 이대로 잠시 앉아 있으면 그가 차를 타고 가는 모습을 쳐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난 뒤 가장 늦게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머레이 힐에 있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어쩌다 랜스키가 좀 미적대는 날에는 버스를 놓치기도 했다. 그런 때는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무턱대고 걸었다. 일로인에서 친구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퍽 다행이었다. 만일 누군가가 왜 버스를 놓치고 걸어가는지 묻는다면 몹시 난감했을 것이다.
누군가가 등 뒤에서 그를 불렀다.
“어이, 호모 친구.”
고개를 돌리자 제이 에드거와 눈이 마주쳤다. 웃는 얼굴로 손을 한번 들어 보인 그는 세스가 앉은 벤치의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좁은 엉덩이는 가볍고 날렵한 느낌이었다.
세스가 다시 무심히 고개를 돌리자 제이 에드거가 어깨를 툭 쳤다.
“리든 건 맛이 어때? 굵어?”
세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난 리든이 호모인 줄은 몰랐어. 호모가 지들 쿼터백이라고 하면 풋볼팀 애들 뒤집어지겠는데. 다음에 사진 한 장 부탁해도 될까?”
그때서야 세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꺼져.”
“에이, 왜 그래. 동종 업계 종사자끼리.”
“…….”
세스가 물끄러미 제이 에드거를 바라보았다.
“아, 뭐야. 몰랐다고? 이거 서운하네. 나는 은근히 너한테 친밀감도 느끼고 그랬는데.”
제이 에드거가 예쁘장한 얼굴로 해맑게 웃었다.
어쩌다 소문이 돌게 된 세스와는 달리 제이 에드거는 진짜 남창이었다. 매춘과 약이 얽힌 지저분한 형사 사건을 겪고, 운이 좋게 소년 법원에서 경미한 처분을 받고 끝났다.
졸업할 나이는 지났지만 제이 에드거는 유급과 졸업이 느슨한 일로인의 학칙을 이용해 계속 학생 신분으로 남아 있었다. 편의점에서 술을 살 때 일일이 운전면허증을 꺼내 드는 건 귀찮았지만 학생 신분은 돈을 벌기 훨씬 유리했다.
세스는 잠깐 놀랐던 눈을 다시 주차장 쪽으로 돌렸다.
제이 에드거가 무슨 일을 하건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다만 밀레나 헤이워드와의 관계가 심각할 리는 없을 것 같아 다행이었다.
세스가 땀이 밴 손바닥을 진즈에 눌러 닦았다. 이제 곧 알렉산더 랜스키가 나타날 것이다. 세스는 제이 에드거가 그 전에 그만 사라져 주기만을 바랐다.
“그래서, 요새 네 사업은 어때? 존 리든까지 낚은 걸 보면 제법 잘나가나 본데.”
“돈은 안 받아. 꺼져.”
“저런. 안 받아? 왜 그러는 거야. 내가 다 안타깝네.”
제이 에드거가 파란 눈을 나른하게 휘며 웃었다.
“너 제법 괜찮다며. 빠는 것도 잘하고 음, 뭐라더라……. 성실하댔나. 손님 스케줄이 항상 최우선이고 말이야.”
남들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하지만 신경이 쓰이진 않았다. 알렉산더 랜스키를 제외하고 세스 그린이 일로인에서 신경 쓰는 일은 거의 없었다.
반년. 반년이 남았다. 반년은 긴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렇게 길지도 않을 것 같았다. 지금처럼 주차장 구석 벤치에 앉아 있노라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가 버릴 것이다. 어쩌면 만조가 된 하프 문 베이에 온전한 형태의 반달이 떠오르는 시간보다 더 짧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랜스키 그룹의 첨단 방위산업 제조 시설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는 배런트 카운티의 유일한 볼거리는 하프 문 베이였다. 반달이 뜨는 시기와 만조가 우연히 겹치면 하프 문 베이에는 수면 위로 드리워진 제 그림자를 더해 온전한 둥근 달이 된 반달이 아주 크게 보였다. 검은 하늘과 검은 바다가 하나로 합쳐지며 커다랗고 둥근, 아주 하얀 달만이 시야를 차지했다.
장관이라는 말이 아쉬웠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선이 이지러지며 밤은 그저 하나의 커다란 공간으로 변했다. 망망한 우주 같은 공간이.
그것은 일종의 기적이었다. 우주에 홀로 서서 달과 단둘이 마주하는 하프 문 베이의 기적.
더욱 아쉽게도 그런 광경을 볼 수 있는 날은 일 년에 몇 번 되지 않았다. 인공위성을 몇 개나 쏘아 올리고 우주정거장에 사람이 상주하는 이 시대에도 하프 문 베이의 기적은 예측이 불가능했다. 그랬다면 이곳은 진작 유명하고 시끄러운 관광지가 됐을 것이다.
언제 떠오를지 모르는 달그림자를 찾아 배런트까지 오는 사람은 드물었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세스 그린이 알렉산더 랜스키를 볼 수 있는 시간은 하루에 몇 분 되지 않았다.
“랜스키한테 말할 거야?”
“…….”
알렉산더 랜스키가 언급되자 세스가 고개를 움칫대며 제이 에드거를 바라보았다.
제이 에드거는 밀레나 헤이워드와 섹스했다. 랜스키의 여자 친구와. 그리고 그 사실을 세스 그린에게 들켰다. 하지만 제이 에드거는 걱정을 하는 게 아니었다.
“아니.”
제이 에드거는 제 일이 아닌, 타인의 가십을 속 편하게 지껄여 대는 식의 가벼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헤에, 왜?”
“내 일이 아니야.”
“흠, 혹시 모르잖아. 여자 친구의 부정을 알려 줘서 고맙다고 해 줄지도. 그 대가로 다음 달에 있을 생일 파티에 초대해 줄지도 모르고 말이지.”
다음 달에는 알렉산더 랜스키의 생일이 있었다. 여느 해처럼 일로인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파티가 열릴 것이다. 세스는 한 번도 가 본 일이 없었다.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었다.
“안 해.”
제이 에드거가 예쁜 파란색 눈으로 싱긋 웃었다.
“그럼 동류에 대한 의린가? 이거 눈물 나겠는데. 이참에 우리 친구 할까?”
“싫어.”
“튕기긴.”
그사이 알렉산더 랜스키가 주차장에 도착했다.
시저 도어가 올라가고 그가 차에 올랐다. 오늘은 밀레나 헤이워드나 친구들이 옆에 없었다. 그 혼자였다. 보통 알렉산더 랜스키의 곁에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사람이 많은 편이었지만 가끔은 저렇게 혼자일 때도 있었다.
세스 그린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그가 더 편했다. 그렇다면 이쪽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들킬 위험도 덜할 테니까.
알렉산더 랜스키가 나타나는 순간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드는 것을 세스 그린은 알지 못했다.
“어? 랜스키다.”
제이 에드거는 세스와는 달리 거리낌 없이 알렉산더 랜스키를 손가락질로 가리켰다.
“저 차 얼마나 하는지 알아?”
세스는 침묵으로 모른다는 대답을 대신했다. 덩치가 큰 알렉산더 랜스키의 차는 좁은 주차장을 거리낌 없이 질주하듯 빠져나갔다. 다른 차에서 나는 것보다 훨씬 요란하고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오늘 전하께서는 기분이 아주 더러우신가 봐. 차 빼는 솜씨하고는.”
제이 에드거가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알렉산더 랜스키를 본 시간은 길어야 오 분이 되지 않았다. 어쩌면 삼 분도 되지 않을지 몰랐다. 세스는 반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 삼 분이 차지하는 비율이 얼마나 될지를 계산하고 싶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프 문 베이의 기적이 측정 불가능한 것처럼.
알렉산더 랜스키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세스는 발치에 떨어트려 놓은 가방을 움켜쥐고 일어섰다. 그때였다.
“아하.”
제이 에드거가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랜스키였어?”
세스의 고개가 움직였다. 무시했어야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는 듯. 빠르게.
“뭐가?”
“네가 돈을 안 받는 이유.”
“그게 무슨…….”
“쯧쯧. 애절해라.”
“…….”
세스는 제이 에드거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제이 에드거의 눈이 위험하게 반짝거렸다.
“전화번호 줘. 헤이워드의 사진을 한 장 전송할게. 내일 랜스키한테 가서 그년이 나하고 씹질했다고 말해.”
“……안 한다고 했잖아.”
“해.”
제이 에드거가 감자튀김을 바라보는 표정으로 세스를 응시했다. 급식판에 올려진 감자튀김 접시를 말끔히 비워 내는 인간은 드물었다. 대충 몇 개 입에 물다가, 대충 버렸다.
“아니면 네가 날마다 주차장 벤치에 앉아서 랜스키를 보며 딸 친다고 소문 낼 거야.”
“……그런 적 없어.”
진실은 별 소용이 없었다.
“그게 뭐가 중요해. 너는 돈도 안 받는데 공식 남창이잖아. 중요한 건 위대하신 랜스키 전하께서 일로인 공식 남창이 얼마나 딱한 인생인지 들으시고 너그러이 굽어 살피느냐 마느냐지.”
“…….”
“안 그래?”
제이 에드거를 바라보는 세스 그린의 표정이 튀겨지기 직전의 감자처럼 잘게 썰려 버렸다.
* * *
알렉산더 L. 랜스키의 별명은 처음부터 왕자였다.
그가 일로인의 공용 주차장에서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는 데다 양옆으로 들리는 문이 달린 스포츠카를 가지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랜스키 가문의 막내아들이라는 이유 때문만도 아니었다.
왕자라는 별명에 딱히 이의를 가질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특출하게 우수했고 특출하게 잘생겼다. 특출하게 부유했으며 특출하게 눈에 띄었다. 그는 어느 무리에서나 중심에 있었다. 지구는 아마도 그를 중심으로 회전할 것이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남들에 비해서 가장 특출한 점은 이 모든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자신이 최우선이 아닌 세상에서는 단 한 번도 지내 본 적이 없는 사람 같았다.
알렉산더 랜스키를 처음 본 순간 세스가 사는 지구는 중심축을 옮겼다. 세스는 여전히 지구에 사는 70억 명 중의 한 명이었지만 그의 지구는 알렉산더 랜스키를 축으로 회전했다.
“…….”
세스가 시선을 돌렸다. 곤란했다. 입술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떨림은 목을 타고 내려와 몸속 깊은 곳까지 이어졌다.
알렉산더 랜스키였다. 눈앞에 알렉산더 랜스키가 있었다.
저기, 할 말이 있는데.
그런 말로 클래스가 끝나고 교실을 이동 중인 알렉산더 랜스키를 붙들었다. 제이 에드거의 요구 사항이었다. 첫째, 오늘 내로 보여 줄 것. 둘째, 가능한 한 지켜보는 애들이 많은 곳에서 할 것.
세스는 제이 에드거의 요구 사항을 성실히 이행했다. 그가 알렉산더 랜스키에게 말을 건네는 순간부터 그들을 쳐다보는 눈은 매초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었다.
밤이 새도록 세스는 알렉산더 랜스키에게 건넬 첫 마디를 생각했다. 그것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고, 멈추지 않는 떨림이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 새하얗던 새벽은 아무 소용도 없이 세스는 그저 그렇게 말했다. 저기, 할 말이 있는데. 알렉산더 랜스키는 일로인에서 그런 말을 수백 번쯤 들어 봤을 것이다.
저기, 할 말이 있는데. 그런데 그다음은 딱히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또 우물대는 중이었다.
세스는 지금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제이 에드거가 시키는 대로 해야 했을까, 혹은 그러지 말아야 했을까를.
“뭔데?”
알렉산더 랜스키의 음성이 엇나간 시선을 타고 흘러 세스에게까지 와 닿았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알렉산더 랜스키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세스는 손등으로 떨리는 입술을 가렸다.
“보여 줄…… 게 있어서.”
“봐 봐.”
알렉산더 랜스키는 그렇게 말하며 세스를 향해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작은 바람이 불어왔다. 알렉산더 랜스키의 머리카락이 전날처럼 이마 위로 흘러내렸다. 체취가 코 속으로 흘러들어 왔다. 세스는 저도 모르게 숨을 훅 들이켰다.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세스는 한껏 경직된 얼굴로 모양새가 달라진 알렉산더 랜스키의 눈썹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보지 말았어야 했다. 알렉산더 랜스키의 눈을 이토록 가까이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세스는 알렉산더 랜스키의 회색 눈을 둘러싼 속눈썹의 개수를 셀 수도 있을 것처럼 시야가 확대되는 것을 느꼈다. 어지러울 정도로 확장된 시야를 메운 것은 오로지 랜스키의 두 눈이었다. 숨 쉬는 것을 잊었다. 그 눈을 보고 있기 위해.
알렉산더 랜스키에게 세스 그린이 숨을 쉬지 않는 이유가 보일 리 없었다. 그는 약간 짜증을 내며 다시 물었다.
“어이, 남창. 보여 줄 게 있다며.”
세스의 얼굴이 훅 달아올랐다. 남창이라는 발언에는 경멸이나 조롱의 흔적 같은 것은 없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그저 그의 별명을 부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세스는 알렉산더 랜스키가 자신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별로 탐탁지 않은 그 별명마저도 알고 있다는 데 놀랐다.
어째서일까. 자신은 그저 70억 중의 한 명일 텐데.
“돈은 안 받아.”
말이 먼저 퉁겨 나갔다. 알렉산더 랜스키의 짙은 갈색 눈썹이 잠깐 휘었다.
“뭐?”
“돈 받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어.”
이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니었다. 그러나 남창이라는 오해를 새삼 걱정하기라도 하듯, 세스는 의도하지 않은 항변을 하고 있었다.
“네가 잘못 안 거야.”
세스를 쳐다보는 회색 눈에는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보여 줄 게 뭐야.”
알렉산더 랜스키가 툭, 시선을 돌렸다.
시야와 시야가 맞닿아 생겨났던 직선이 이지러지다가 결국 사라지자 세스는 비로소 안도했다. 여전히 피부 위로는 잔떨림이 남아 있었지만 그가 저를 똑바로 쳐다볼 때처럼 끔찍한 불안감은 없었다. 세스는 입술 안쪽까지 흘러나온 약한 신음을 다시 꾹 눌러 삼켜 버렸다.
세스가 회색 후드 점퍼의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사실 뒤적일 것도 없었다. 알렉산더 랜스키에게 말을 걸기 전 몇 번이나 확인했으니까. 주머니 안의 휴대전화가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전화기는 어김없이 손안에 잡혀 왔다. 단단하고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을 아프도록 찔렀다.
“남창. 보여 줄 게 있기는 해?”
세스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돈은 안 받았어. 한 번도 받은 적 없어. 나는 남창이 아냐.
소리 없고 의미도 없는 저항이 회색 시선에 삼켜졌다.
세스는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제이 에드거가 전송한 밀레나 헤이워드의 사진을 뜨게 했다. 셔츠를 풀어헤친 채 가슴을 반이나 드러내고 제이 에드거와 키스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이었다.
세스는 그 화면을 앞으로 내밀었다. 전화기를 쥔 마른 손가락이 뒤늦은 망설임으로 흔들렸다.
“…….”
탁!
알렉산더 랜스키가 휴대전화를 낚아챘다. 손가락이 닿았다. 손가락 끝에 느껴지는 맨살의 감촉에 세스가 움찔 놀라 뒷걸음질을 했다.
툭!
그가 휴대전화를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한 번 퉁겼다가 몸을 뒤집어 다시 모서리부터 지면과 충돌한 세스의 전화기는 액정에 길게 금이 가면서 전원이 나가 버렸다. 지켜보던 몇몇 애들이 소리를 질렀고, 이어서 흥미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한 발자국씩 앞으로 다가왔다.
“아,”
세스가 반사적으로 허리를 굽혀 전화기를 집는 순간이었다.
콰직!
“……아,”
알렉산더 랜스키가 바닥에 떨어진 전화기를 세스의 손가락까지 함께 발로 밟았다. 세스는 이를 물고 잠자코 통증과 신음을 인내했다.
화가 났을 것이다. 그게 당연했다. 세스는 밀레나 헤이워드가 제 남자친구를 두고 제이 에드거와 섹스한 사실을 그에게 알리고 싶진 않았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얼마든지 화를 낼 권리가 있었다.
찌익.
알렉산더 랜스키가 신발 뒤축으로 세스의 손을 짓이겼다.
“이걸 왜?”
“…….”
“이걸 봐서 뭐 어쩌라고?”
“…….”
“친절하게도 나한테 보여 주려고 사진까지 찍었어?”
아니었다. 사진을 찍은 것은 세스가 아닌 제이 에드거였다. 진짜 남창인 그는 알렉산더 랜스키의 여자 친구와 함께 있는 장면을 스스로 찍어 그 사진이 랜스키에게 건네지도록 했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별로 유쾌하진 않을 이유가.
아무것도 모르는 세스는 그저 제이 에드거가 입 다물고 있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를 바랄 뿐이었다.
“왜 대답을 안 해?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는 건데?”
세스는 알렉산더 랜스키의 발아래 밟힌 손을 짧게 움직였다. 통증과 신음은 참을 수 있었지만 그에게 밟히는 기분은 그리 좋지 못했다.
“아무것도……. 그냥 알려 주려고.”
“그게 다야?”
“응…….”
“그럼 꺼져.”
알렉산더 랜스키가 발을 치웠다. 세스는 망가진 전화기를 붙들고 일어섰다. 찢어진 진즈 밖으로 튀어나온 무릎이 더러웠다. 세스는 묵묵히 무릎을 털었다.
“전화기 내놔, 남창.”
세스가 망가진 전화기를 쥔 손을 들어 올리며 잠깐 망설이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 자신의 전화기를 원하는지 그가 얘기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놔.”
세스는 전화기를 알렉산더 랜스키의 손바닥에 놓았다. 랜스키는 그것을 한번 단단히 움켜쥐더니 복도 맞은편 벽을 향해 던져 버렸다.
팍!
전화기가 파편을 흩뿌리며 부서져 버렸다. 맑고 선명하지만 차가운 회색 눈이 세스를 향했다.
“억울하면 변호사 사. 고소해.”
억울하지 않았다. 하지만 휴대전화는 새로 사야 할 것이다. 양부가 새것을 사 주기 전까지 당분간은 휴대전화가 없는 생활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럴 일 없어.”
세스는 까져서 피가 맺힌 손으로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조용히 대꾸했다. 가는 머리카락에 피가 묻었지만 세스는 알지 못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방금 밟아 뭉갠 손가락을 쳐다보다 한마디 덧붙였다.
“그 사진 어딘가에 올리면 내가 변호사 산다.”
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알렉산더 랜스키에게 말을 건네는 순간부터 이쪽을 향했던 다른 아이들의 시선은 그때서야 한 발자국 물러났다.
어쨌거나 제이 에드거가 시킨 일은 했다. 이제 자신이 주차장 벤치에서 날마다 일로인의 왕자를 보고 있다는 비밀은 무사할 것이다.
* * *
“손 내놔.”
교내 카페테리아 한구석에서 입맛 없는 점심을 쳐다보고 있는 세스의 앞으로 존 리든이 다가와 앉았다. 그의 손이 다짜고짜 사과 주스를 쥐고 있던 세스의 손목을 움켜잡아 끌어당겼다.
세스는 당황해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벌써 이쪽을 쳐다보는 시선들이 있었다. 알렉산더 랜스키에게 말을 걸 때부터 세스는 너무 많은 관심에 짓눌려 압사하는 기분이었다. 거기에 새로운 관심을 더하고 싶진 않았다.
세스가 재빨리 눈을 내리깔고 작게, 하지만 딴에는 단호하게 내뱉었다.
“아는 척하지 마.”
“왜? 네 기둥서방이 감시라도 하고 있냐?”
“애들이 보잖아.”
“랜스키한테도 그래 보지 그랬냐? 씨발, 손을 개떡으로 만드는데 그냥 당하고 있었다며? 대체 왜 그런 거야? 사진은 또 언제 찍었는데?”
“…….”
세스는 입을 다물고 존 리든의 시선을 자신의 시야에서 솎아 내 버렸다. 불안감이 뱃속에서 치고 올라왔다. 카페테리아 같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이렇게나 길게 얘기를 나누는 데 적합하지 않은 상대를 손꼽자면 존 리든은 단연코 세 손가락 안에 들었다.
존 리든은 문제가 많은 사립학교에 다니는 문제아치고 썩 괜찮은 인간이었다. 취미로 하는 풋볼이었지만 연습을 빼먹지 않았고 성적도 좋았다. 그가 일로인에 온 이유는 삼 년 전 가족여행에서 겪은 경비행기 추락사고 때문이었는데, 재활이 길어지는 바람에 일반 학교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다고 했다. 지금도 존 리든의 뒤통수에는 수술 자국이 남아 있었다. 가끔 욱하는 성질머리가 드러날 때는 남들이 사고 후유증이라고 둘러대 줄 만큼 평소 성격도 좋은 편이었다.
그래서 세스는 그가 자신을 일로인의 공식 별명이 아닌 이름으로 부른다는 사실이 불편했다.
존 리든과 자신은 이제껏 아무런 접점이 없던 사이였고 앞으로도 그래야 했다.
“아는 척하지 마. 네가 나한테 왜 이러……,”
“씨발, 좀 내놓으라고!”
존 리든은 사과 주스 팩을 빼앗아 한 손으로 구겨 던져 버리고는 세스의 손을 테이블 위에 얹게 했다.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 중에는 밀레나 헤이워드의 친구 무리도 있었다. 너무 많은 시선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세스의 얼굴이 평소보다 더 창백해졌다.
“일 분만 더 이렇게 있다간 졸업 앨범에 존 리든 대신 호모 쿼터백이라고 인쇄될걸.”
“남창이 지금 누굴 걱정하냐.”
존 리든은 여기저기 까진 손등을 화학 수업 실험 때처럼 눈에 들이대고 살폈다.
“뼈는 안 보이네. 부은 것치고는 잘 움직이고. 양호실은 갔다 왔…… 아니, 그 꼴을 보니 당연히 안 갔겠지. 왜 안 갔어?”
세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존 리든도 답을 구하기 위해 묻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스는 식판 위에 놓여 있던 것 중 아직 손을 대지 않은 터키 샌드위치를 존 리든에게 내밀었다.
“이거 가지고 그냥 가. 그럼 애들도 이상한 소리는 안 할 거야.”
“세스 그린.”
존 리든은 샌드위치를 빼앗아 가는 대신 세스의 이름을 불렀다.
“내가 친한 척하는 게 이상해서 그래? 씨발, 나도 그건 좀 헷갈렸는데…… 뭐 어때. 같은 학교고 이제 서로 얼굴도 아는데. 다쳤으니까 걱정 좀 하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싫으냐?”
세스는 모로 돌렸던 시선을 테이블 아래로 떨어트렸다. 존 리든이 아니라 누구와도 친해질 생각은 없었다.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가라니까.”
“젠장.”
세스의 고집에 존 리든이 욕설을 내뱉었다.
“고집은. 뭣 때문에 그렇게 궁상떠는지는 모르겠는데, 그 손 그대로 놔두면 고생 좀 할 거다.”
탁!
존 리든은 세스의 점심이었던 터키 샌드위치를 낚아챘다.
세스는 그가 그 샌드위치를 자신의 얼굴에 뭉개 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화가 난 얼굴이었으니까.
그러나 존 리든은 성질을 부리는 대신 한입에 샌드위치를 털어 넣었다. 이제 와 그가 다친 손을 걱정해서 말을 건 게 아니라 그저 터키 샌드위치를 빼앗아 먹기 위해 수작을 부렸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겠지만, 그래도 걱정을 덜어 주려는 것처럼 세스의 말을 따랐다.
“간다.”
우적대며 샌드위치를 씹어 먹은 존 리든이 짧은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날 오후 내내 일로인은 세스 그린에 관한 이야기로 수다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