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23)

02.

그러나 공식 남창 세스 그린과 풋볼팀 주장이자 쿼터백 존 리든의 스캔들은 며칠 가지 않았다. 일로인의 모두가 새삼스럽게 호모섹슈얼에 이성적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시작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세스 그린과 존 리든이 파생시키는 흥미를, 사실상 다른 모든 흥밋거리를 단박에 사라지게 할 만큼 강렬한 화젯거리가 월요일 아침 등교 시간에 맞춰 등장했다는 얘기에 가까웠다.

“…….”

툭.

세스가 입을 벌렸다. 손에서 교과서가 떨어졌다. 그는 저도 모르게 거울에서 시선을 떼고 몸을 돌려 알렉산더 랜스키를 바라보았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다른 아이들의 반응도 세스 그린과 비슷했다. 입을 벌리고 뭔가를 떨어트리며 알렉산더 랜스키를 바라보았다. 일로인의 왕자가 제이 에드거와 나란히 서서 복도를 걷고 있었다.

랜스키가 제이 에드거와? 주말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렇게 숙덕거리는 소리는 한참 뒤에나 들려왔다. 세스의 창백한 망막 위에 제이 에드거가 사르륵대는 미소와 함께 알렉산더 랜스키의 귀에 뭔가를 속닥이는 모습이 비쳤다.

“안…….”

안 되잖아. 저건.

단순히 제이 에드거냐 밀레나 헤이워드냐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알렉산더 랜스키였다. 그가 제이 에드거와 어울려 다니기 시작하면 랜스키 가문의 막내아들이 게이라는 소문은 그 누구의 생각보다 빠르게 번져 나갈 것이다. 제이 에드거는 이제껏 제 입으로 게이라는 사실을 떠벌리고 다니지는 않았지만 랜스키라는 성을 가진 인간과 섹스한다면 반드시 떠벌리고 다닐 인간이었다.

세스는 여기저기 깨지고 긁힌 채 검붉은 피딱지가 매달려 있는 손등으로 입술을 가렸다. 저도 모르게 알렉산더 랜스키가 밟아 짓이겨 놓은 상처를 꾹 깨물었다. 미지근한 피 맛이 번졌다. 그러나 알렉산더 랜스키가 제이 에드거와 함께 등교했다는 충격을 해소해 주진 못했다.

몸이 조금씩 떨려 왔다. 스스로는 몰랐지만 세스 그린은 울음이 터지기 직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째서, 알렉산더 랜스키가.

어째서 제이 에드거를.

몸을 빠르게 훑어 내리는 떨림을 제외하고는 미완의 조각상처럼 우뚝 멈춰 선 세스 그린의 옆을 알렉산더 랜스키와 제이 에드거가 스쳐 지나갔다. 단단한 회색 눈이 언뜻 세스를 향했다.

짧은 순간이었다. 알렉산더 랜스키의 시선은 곧 흥미를 잃고 떨어져 나갔다. 아무 일도 없다는 표정만큼이나 아무렇지도 않은 손으로 알렉산더 랜스키는 제이 에드거의 어깨를 휘감았다.

여기저기서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맙소사. 저건 좀 이상하잖아. 설마……? 누가 좀 아니라고 해 줘.

그것은 세스 그린도 마찬가지였다.

“안,”

안 돼.

세스가 저도 모르게 손을 움찔 내밀었다. 그 손은 꼭 알렉산더 랜스키를 말리려는 사람 같았다.

누군가의 커다란 키가 갑작스레 세스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세스 그린.”

존 리든이었다. 세스는 카페테리아에서 터키 샌드위치를 한입에 먹던 그를 바라보던 때와 비슷한 얼굴이 되었다. 존 리든이 또다시 이토록 가까운 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억울하냐? 랜스키가 게이라서?”

“…….”

세스가 거칠게 고개를 돌렸다. 저를 보는 존 리든의 시선이 굉장히 복잡해져 있다는 것을 세스는 알아보지 못했다.

“랜스키는 게이가 아니야.”

“뭐……?”

“게이가 아니라고.”

랜스키가 게이여선 안 돼. 거듭 비슷한 말을 반복한 세스 그린은 화풀이를 하듯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진짜 아는 척하지 마.”

세스가 존 리든을 떠밀었다. 그리고 어디론가 빠르게 사라졌다.

* * *

하루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제이 에드거를 말려야 했다.

세스는 타일 벽에 머리를 기댔다. 점심을 먹는 대신 3층 화장실로 온 세스는 기척을 죽이고 제이 에드거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볼을 누르는 차가운 타일 벽의 감촉이 체온을 식혔다.

교직원 구역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데다 어지간한 동선에서도 벗어나 있는 이곳은 이용하는 사람이 가장 적은 화장실이었다. 누군가를 괴롭힐 때에도, 정신 나간 섹스를 할 때도 일로인에 다니는 아이들은 이곳을 이용했다.

언젠가 세스는 이곳에서 제이 에드거를 마주친 적이 있었다. 올해 초에 잘린 생물학 교사와 바지 버클을 풀고 성기를 비비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때 제이 에드거는 점심시간 후에는 일부러 이 화장실로 와서 머리를 손질한다고, 벌어진 퍼스너 사이로 성기만 꺼내 쥔 상대에게 속삭였다.

끼익, 탁.

기다림은 헛되지 않았다. 제이 에드거가 화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세스는 제이 에드거가 꼼꼼히 세수를 한 다음 가방에서 화장수를 꺼내 바를 때까지 기다린 후에 반쯤 닫아 가려 두었던 칸막이를 열고 나섰다.

“아, 뭐야.”

세면대의 거울을 통해 세스의 모습을 확인한 제이 에드거가 혀를 찼다.

“나 기다렸던 거야?”

그러면서 그는 반쯤 웃고 있었다. 거울을 통해 좌우가 뒤바뀐 두 사람의 모습이 여과 없이 대비되었다. 한쪽은 눈이 부시게 현란했다. 다른 한쪽은 창백하고 어두웠다. 제이 에드거의 화려한 금발은 세스 그린의 우울을 조소하기 위해 누군가가 공들여 치장한 것처럼 보였다.

“왜?”

세스가 침을 한번 삼켰다. 상처투성이의 마른 손등이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

“랜스키……와는, 어떻게 된 거야?”

“아하. 어지간히도 궁금했나 보네.”

제이 에드거가 몸을 돌려 세면대의 마른 부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그는 무슨 동작을 해도 여유로웠다.

“랜스키가 언제부터 게이였던 건지 궁금해?”

세스 그린이 고개를 작게 저었다.

“아니.”

“헤에. 그럼 뭐가 궁금해서 이 지랄이야?”

“그러지 마.”

제이 에드거가 눈썹을 재미난 모양새로 휘었다.

“그러지 마?”

“응.”

세스 그린은 말라붙은 타액을 억지로 집어삼켰다. 제이 에드거에게 긴장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가 알렉산더 랜스키와 함께 걷는 걸 잠깐 봤다는 것만으로 세스는 긴장했다. 중증이었다. 랜스키와 관계되면 세스는 이상할 정도로 예민하고 기민한 반응을 보였다.

세스 그린은 많은 부분이 정상에서 벗어나 있었다. 다섯 살 때 처음으로 찾아갔던 소아정신과 의사가 알려 주었다.

세스를 입양했던 게이 부부는 꽤나 많은 노력을 했다. QTL(Quantitative Trait Loci: 양적 형질 유전자좌 모델 연구) 결과에 따라 세스의 대뇌피질에서 5-HT1B라는 수용체 중 하나의 선택적 역할에 문제가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대립 유전자 중 5-HT2A가 발견되었으며 유전학적으로 SERT(Serotonin Transpoter: 세로토닌 운반체)의 분자 생산이 제한적이라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던 의사의 얘기에도 오래도록 귀를 기울이며 세스의 증상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10년간 병원을 다녔어도 세스의 무기력증과 부주의함, 공감 부족과 인지 부족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세스는 지금껏 식욕 부진과 우울, 집중력 장애에 시달렸으며 앞으로도 그럴 터였다. 그럼에도 양부들은 노력했다. 하지만 우연한 사고로 양부 중 하나가 먼저 세상을 떠남으로써 그 안타깝던 노력도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홀로 남은 양부 마이클 그린은 점차 세스와 비슷해져 갔다. 매사에 무기력했고 타인의 감정을 잘 느낄 수 없게 되었다. 우울에 젖어 버린 사고는 늘 피곤했다. 둘은 한집에서 살고 있지만 더 이상 서로를 사랑하지도,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유일하게 세스를 자극하는 것은, 남들에 비해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세로토닌 전달 물질을 단기간에 상승시키는 요인은 알렉산더 랜스키가 유일했다.

“뭘?”

제이 에드거가 되물었다. 세스는 껍질이 한 꺼풀 비틀리기 시작한 입술을 뗐다.

“랜스키를…… 놔둬. 랜스키는 게이가 아니야.”

“뭐?”

제이 에드거가 허리를 구부린 채 킬킬대고 웃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남창. 랜스키가 게이가 아니라고? 그런 것치곤 내 엉덩이에 잘만 박아 대던데?”

세스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생각이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 갔다. 알렉산더 랜스키와 제이 에드거가 어디서 어떻게 섹스했는지 온통 신경이 쏠렸다. 그러나 정말로 알고 싶지 않았다.

“네가 헤어지게 만들었잖아. 일부러, 헤이워드에게 그런 짓을 해서.”

제이 에드거의 웃음소리가 멎었다. 방금 전까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예쁘게 휘었던 입술이 지금은 잘라 낸 듯 뚝 멎어 있었다.

“뭐라는 거야, 남창?”

“랜스키는 건드리지……,”

“내가 뭘 어쨌다고? 랜스키가 왜 왕자인지 몰라? 너는 랜스키가 장난삼아 한번 건드려진 걸로 발정이 나서 헤테로인 것도 잊고 사내새끼 엉덩이에 박아 댈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진심으로?”

“…….”

“닥쳐. 랜스키는 원래 게이였어. 다들 몰랐을 뿐이야. 랜스키뿐 아니라 그 싸구려 여왕벌 헤이워드를 포함해서.”

세스는 할 말을 잃고 입술을 깨물었다. 제이 에드거가 좀 전과는 다른 차갑고 날카로운 눈으로 세스 그린의 구석구석을 살폈다.

“너는 왜 갑자기 그런 멍청한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랜스키와 헤이워드를 억지로 헤어지게 만들었다고? 진짜, 병신 짓도 가지가지 하고 있네. 랜스키한테 어디 한번 그런 소리 지껄여 봐. 뭉개지는 게 그 손 하나만이 아닐걸.”

제이 에드거가 날렵한 몸짓으로 세면대에서 내려왔다.

“그렇게나 랜스키를 스토킹했으면 너도 알 거 아냐. 겉으로는 흠 하나 없는 왕족처럼 보여도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걸. 밀레나 헤이워드가 왜 일로인의 왕자를 놔두고 다른 남자한테 눈을 돌렸는지 정말로 모르겠어?”

제이 에드거의 손이 세스의 어깨를 짚었다. 하지만 날갯짓처럼 사뿐한 손길은 매서운 파란 시선을 모두 감춰 주진 못했다.

“무사히 졸업하고 싶으면 입조심하고 살아, 남창. 괜히 분란 만들어서 좋을 거 없잖아? 어차피 랜스키가 볼 땐 그 사진을 찍은 나나 보여 준 너나 거기서 거기야. 네가 내 작은 죄를 고발해도 소용없다고. 이제 와 랜스키가 그 말을 믿을 것도 아니고.”

툭툭. 어깨를 두들기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그럼 나 먼저 간다.”

그렇게 가 버리려는 제이 에드거를 세스가 붙잡았다.

“돈 받을게.”

제이 에드거가 반사적으로 움찔 고개를 돌렸다.

“……뭐?”

“랜스키를 좋아해서 사귀려는 거 아니잖아. 앞으로는 돈 받을게. 그 돈 받아서 너한테 줄게. 그러니까 랜스키는 내버려 둬.”

“뭐?”

뭐, 라고 묻는 목소리가 한 음 높아졌다. 제이 에드거의 파란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정말로 놀랐다는 뜻이었다.

세스 그린이 일로인의 왕자에게 오래도록 미쳐 있었다는 사실은 새삼스럽지 않았다. 일로인에서는 랜스키를 욕망하지 않는 사람이 더 드물 테니까. 단지 그 방식이 문제였다.

“돈을 줄 테니 랜스키와 헤어지라고?”

뒤이어 제이 에드거의 입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으…… 하하, 뭐야. 정신이 나간 거야, 남창?”

랜스키가 얼마나 부자인지는 떠들 필요도 없었다. 랜스키는 배런트 카운티 전체를 먹여 살리는 대규모의 기업체였다. 랜스키가 그 막내아들에게 얼마나 인심이 후한지도 말할 필요가 없었다. 알렉산더 랜스키와 사귀는 지난 일 년간 밀레나 헤이워드는 주말을 쇼핑 타운에서 보냈으며 차를 두 번이나 바꾸었다.

“넌 헤이워드처럼 랜스키와 사귀는 게 아니잖아.”

폭소하는 제이 에드거와는 달리 세스는 웃지 않았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게이라는 소문이 나는 건 세스에게 조금도 우스운 일이 아니었다.

“랜스키가 게이와 사귈 리 없어. 랜스키는 너와 사귀지 않아. 너와 섹스를 해도, 너와 사귀지는 않아. 그리고 랜스키는 반년 뒤에 졸업해. 너와 나는 그보다 일 년은 더 일로인에 있어야 하고. 나는 일 년 반 동안 너한테 돈을 가져다줄 수 있어.”

제이 에드거의 붉은 입술이 이죽거렸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안다고 이렇게 시건방이야? 섹스는 해도 사귀지는 않을 거라니? 오늘 아침 내가 랜스키하고 등교하는 거 못 봤어?”

“봤어.”

세스 그린의 음성은 아주 작았다.

“그러니까, 그러지 마. 랜스키는 게이여선 안 돼.”

그래서 절박했다. 제이 에드거는 세스 그린이 이렇게 나오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마도 질투하다 못해 화를 내리라고 생각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게이였으면 내게도 기회가 있었을 거야, 이런 소리를 해 댈 줄 알았다. 세스 그린이 멍해 보이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그에게는 미묘한 자극점이 있었다. 보는 사람을 거슬리게 만드는, 그러나 혼자 놔두면 불안하게 만드는 기묘한 감각이. 세스 그린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마저 울컥 질투를 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어제오늘 존 리든이 안달복달하며 세스 그린의 주변을 서성이는 이유를 존 리든은 몰랐지만 제이 에드거는 알았다. 늘 정신 빠진 사람처럼 입 다물고 사는 세스 그린이 본격적으로 몸을 팔기 시작하면 일로인의 쿼터백과 드잡이질을 하려 드는 미친놈도 심심찮게 등장할 것이다.

제이 에드거는 알렉산더 랜스키를 가로챈 게 아니었다. 밀레나 헤이워드와 랜스키의 섹스 라이프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얘기를 우연히 흘려듣고는 혹시나 싶어 찔러본 게 제대로 걸려들었을 뿐이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바이인지, 클로짓 게이인지, 아니면 그저 색다른 재미에 끌렸을 뿐인지 정확한 건 몰랐다. 아랫도리를 한번 빨아 준 게 다였으니까. 랜스키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지만 오늘 아침에 옆자리를 차지하려고 드는 그의 노골성을 거절하지 않은 걸 보면 남자가 해 주는 블로우잡이 그리 나쁘진 않았던 모양이었다.

“너 좀 이상하다, 남창?”

제이 에드거는 실제로는 별일 없었던 표정을 주의 깊게 감추며 이죽댔다.

“속에 뭘 감추고 있는 거야? 네가 자발적으로 진짜 남창이 되면서까지 랜스키한테 학부모 노릇을 하려는 이유가 뭔데? 랜스키가 게이면 안 돼? 대체 왜?”

“랜스키는…… 안 돼. 게이라는 소문은. 넌 랜스키와 섹스하면 그걸 자랑으로 여길 거잖아. 그럼 소문이 나. 랜스키는 정말로 게이가 되어 버려.”

몇 번을 들어도 같은 해명이었다. 세스 그린은 그 말밖에 할 줄 모르는 듯했다.

“아니, 그러니까 네가 왜 난리냐고. 랜스키가 게이라면 너도 좋은 거잖아. 랜스키한테 한번 박혀 보고 싶은 거 아니었어?”

세스는 그 말에 답하지 않았다.

그가 늘 알렉산더 랜스키를 지켜보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랜스키를 욕망하지 않았다. 랜스키가 게이가 되길 바라 본 적은 당연히 없었다. 밀레나 헤이워드가 알렉산더 랜스키의 여자 친구라는 사실은 무척 당연한 일이었다. 밀레나 헤이워드는 일로인에서 가장 예뻤다. 일로인의 왕자가 밀레나 헤이워드가 아닌 다른 사람을 여자 친구로 두었다면 그것은 또 다른 의미로 몹시 이상했을 것이다.

“돈이 싫은 건 아니잖아.”

“너야말로 랜스키가 게이인 게 싫지는 않을 거잖아. 왜, 랜스키가 게이라고 해도 너한테까지는 도통 차례가 올 것 같지 않아서 그래?”

“대답해. 어떻게 할 건지.”

“너야말로 좀 솔직해져 봐, 남창. 돈 받고 하는 것과 돈을 받지 않고 하는 게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고는 있어?”

“……돈 줄게.”

“일로인에서 돈이 나와 봤자 얼마나 나온다고 그래. 네 손님이라면 뻔하지.”

“그럼 다른 사람도 상대할게.”

“뭐?”

제이 에드거는 벌써 세 번째로,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표정이 가장 선명하고 반짝였다.

세스 그린이 정신병자에 가깝다는 얘기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의 성의 없는 수업 태도가 선생들한테 묵인되는 이유였다. 하지만 완전히 맛이 갔다는 게 마치 냄새를 맡듯 직접적으로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세스 그린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머릿속에 뭐가 처박혀 있는지는 몰라도 그게 엉망진창이라는 건 확실했다. 졸업할 때까지 몸을 팔아서 돈을 줄 테니 랜스키가 게이라는 소문이 나지 않게 하라는 말은, 정상적인 인간이면 생각도 하지 않을 얘기였다.

제이 에드거의 파란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세스가 옳았다. 돈이 싫은 건 아니었다. 일로인의 왕자가 랜스키라는 이름이 박혀 있는 블랙 카드를 마음대로 긁고 다니지 않았다면 왕자라는 별명이 붙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게 정말이야?”

세스 그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느다란 목이 움직였다. 창백하고 마른 몸이 움직이면 왠지 모르게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응.”

제이 에드거가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그런 쪽 사이트를 운영하는 사람을 하나 아는데. 손님이 될 만한 사람들을 소개시켜 줄 수 있어. 가능해?”

“그런 건 네가 알아서 해.”

“정말이야?”

쉬워도 너무 쉬웠다. 세스 그린이 일 년 반 동안 매춘을 통해 벌어다 줄 돈을 계산해 보는 제이 에드거의 머릿속이 기름칠을 한 것처럼 매끄럽게 굴러갔다.

“알았어, 그럼. 전화할게.”

세스는 얌전하게 고개만 끄덕이고 있진 않았다.

“그럼 랜스키는?”

“그쪽은 내가 알아서 할게. 어쨌거나 너는 랜스키가 게이라는 소문이 나는 게 싫은 거잖아. 그 정도는 처리하겠어. 대신 랜스키가 먼저 하자고 하면 나도 거절 못 해.”

세스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한번 적셨다. 보기 드물게 표정을 드러내던 얼굴이 다시 평소처럼 가라앉았다.

“그건…… 괜찮아. 알았어.”

“그래.”

제이 에드거는 뜻밖의 행운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그럼 또 보자, 남창.”

제이 에드거가 화장실 문을 열었다. 세스 그린은 그가 먼저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제이 에드거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화장실의 문고리를 붙든 채.

“얼마라고?”

화장실 앞에서 이렇게 묻는 사람은 알렉산더 랜스키였다. 제이 에드거의 얼굴에서 빠른 속도로 핏기가 사라졌다. 그것은 알렉산더 랜스키의 목소리를 들은 세스 그린도 마찬가지였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주춤 멎은 화장실의 공기 안으로 파고들었다. 시선이 부딪친 제이 에드거는 무의식중에 화장실 문을 좀 더 넓게 벌렸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그 너머로 세스를 바라보았다.

“묻잖아. 한번 박는 데 얼마냐고.”

그때서야 간신히 웃는 표정을 흉내 낼 수 있었던 제이 에드거가 손끝으로 슬쩍 알렉산더 랜스키의 팔을 건드렸다. 아침 등교 시간만큼이나 친근한 몸짓이었다.

“이러지 마. 누가 왕자한테 돈을 받는다고.”

알렉산더 랜스키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그는 제이 에드거의 조각 진 웃음을 밀어내듯이 어깨를 꿈틀거렸다. 제이 에드거가 눈치껏 웃음을 지우고 손을 뗐다.

“왜 그래…… 화났어?”

“너한테 물은 거 아니야.”

“……응?”

“넌 가라. 시끄럽게 하지 말고.”

“뭐……?”

“가라고.”

알렉산더 랜스키가 성큼,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그 바람에 상체만 떠밀린 제이 에드거가 균형을 잃고 문고리에 매달리다가 결국에는 뒤로 넘어졌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아무렇지도 않게 제이 에드거의 가슴팍을 밟고는 화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제이 에드거가 숨을 컥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소리마저 귀찮은 듯 문을 쾅 닫아 버렸다.

“…….”

세스와 알렉산더 랜스키 단둘만이 단절된 공간에 남았다.

숨을 한번 내쉴 때마다 사방이 조금씩 축소되어 가는, 그런 이상한 공간이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가방끈을 움켜쥔 세스 그린이 눈을 질끈 감으며 걸음을 뗐다.

“남창.”

알렉산더 랜스키의 팔이 소리 없이 뻗어 와 문을 가로질렀다. 빗장처럼.

그 안에 갇힌 세스 그린은 계속 축소된 공간이 등을 떠미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심장이 너무 쿵쿵 울려서 귓속이 어지러웠다.

“……비켜 줘.”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를 보며 느리게 입을 열었다. 평소보다 날카롭게 보이는 회색 눈이 세스를 위아래로 훑었다.

“대답하면.”

“……뭘?”

“얼마야?”

“…….”

꾹 다물리는 세스의 입술 선이 어그러졌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반대쪽 손을 들었다. 천천히, 마치 유영하듯 공간을 가로질러 온 랜스키의 손이 다물린 입술 선을 쓸었다. 훅, 하며 세스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고 알렉산더 랜스키는 뒷걸음질하는 세스를 쫓아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왔다.

숨을 곳이 없었다. 세스는 마르고 빈약한 알몸을 알렉산더 랜스키가 고스란히 쳐다보고 있을 것만 같은 공포를 느꼈다.

숨을 곳이 없었다. 달아날 곳도 없었다. 숨을 쉴 곳도 없었다.

“보, 보지 마.”

그래서 세스는 스스로 눈을 감았다.

“비켜.”

“눈 뜨고 대답해. 한번 박는 데 얼마야.”

“돈은 안 받아.”

“에드거에게는 받겠다고 했잖아.”

“그, 그건……,”

알렉산더 랜스키가 장난처럼 세스 그린의 목을 쥐었다. 섬뜩한 느낌에 세스가 눈을 뜨자 알렉산더 랜스키는 곧 손아귀에 힘을 풀었다.

그러자 그건 그저 접촉이 되었다. 어떤 위협 같은 게 아니라.

“그건 소문 내지 않는 대가라고? 그럼 이쪽이 더 편하겠네. 에드거 대신 네가 박혀. 네가 떠들지 않으면 소문 날 일도 없잖아.”

세스 그린은 이마에 부딪쳐 흩어지는 알렉산더 랜스키의 숨결을 느꼈다. 어쩐지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위험했다. 뭔가를 느낀다는 건 그에게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세스는 단 한 번도 일로인의 왕자를 욕망하지 않았다. 그가 고집을 피우는 것은 사물함에 붙여 놓은 거울을 통해서 보는, 좌우가 뒤바뀐 모습뿐이었다. 그만으로도 충분했다. 알렉산더 랜스키와 말을 하지 않아도 좋았다. 마주하지 않아도 좋았다. 이토록 가까이 서서 숨결이 이마를 쓸다 부서져 얼굴 위로 흘러내리는 감각은 몰라도 좋았다.

울고 싶지 않았다. 한번 울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알렉산더 랜스키를 욕망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욕망하지 않았다. 이제 와 욕망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건…… 안 돼.”

“왜?”

“너는 게이가 아니니까.”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의 이마에 대고 피식 웃었다.

“네가 뭐라고 그런 걸 정해.”

부서진 웃음이 뺨을 타고 내려앉았다. 랜스키가 손가락을 뻗어 세스의 뺨을 툭툭 두들겼다.

“수업 끝나고 주차장에서 기다려.”

“그……,”

알렉산더 랜스키는 안 된다는 말을 더는 듣지 않고 화장실을 떠났다.

* * *

주차장을 지나지 않고 교문을 벗어나는 방법은 없었다. 주차장을 지나지 않고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방법도 없었다. 세스는 텅 빈 교실에 혼자 앉아 기다림을 참지 못한 알렉산더 랜스키가 먼저 떠나기를 기다렸다.

따가운 오후 햇살이 분말처럼 빈 교실 안을 떠돌았다. 세스는 턱을 약간 들어 올린 채 눈을 감았다. 고독이나 적막은 싫지 않았다. 세스는 혼자 있을 때가 가장 편했다. 혼자서 알렉산더 랜스키를 떠올릴 때가.

자신의 삶과는 아무런 접점도 없을 그를 고작 몇 시간 전에 헤어진 연인처럼 맹목적으로 그리워하는 순간.

세상이 온통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무기력해진 팔다리 역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가장 깊은 바닥에 누워 조용히 목을 짓누르는 어둠의 무게를 받아들이면 모든 게 고요해졌다.

침묵, 단절. 안락함. 그 모든 것의 끝. 알렉산더 랜스키가 기민하게 일깨우던 감각점들이 비로소 정지했다.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서 세스는 길고 긴 안도를 느꼈다.

이 모든 게 그가 알렉산더 랜스키를 사랑하는 이유였다.

탕탕.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세스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러자 누군가는 고집스럽게 다가와 등을 한 대 쳤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안겨다 준 안도감은 삽시간에 흩어져 사라졌다.

“왜 안 가고 있어?”

존 리든이었다.

세스가 귀찮은 듯 아주 천천히 눈을 떴다.

“……그냥.”

“그냥?”

“그냥.”

존 리든이 말을 멈추고 세스 그린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침묵이 불편하지 않은 세스는 그의 시선을 가만히 흘려보냈다.

카페테리아에서의 일은 의외였지만 세스는 지금 그가 섹스를 제안하러 왔다고 생각했다. 꼭 고집을 피운다면 할 수는 있었지만 장소가 문제였다. 교실처럼 개방된 장소에서 하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불과 몇 시간 전, 알렉산더 랜스키는 그에게 주차장에서 기다리라고 말했다. 존 리든과 섹스를 하게 되면 세스는 몸을 파고드는 이물감을 견디는 동안 머릿속을 비울 수 있었다.

그러나 존 리든은 제 페니스를 만져 보라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나가자. 관리인이 돌 시간이야. 이러고 있으면 상담실로 불려가게 될걸.”

“아아…….”

세스 그린이 잠시 입을 벌렸다가, 이어서 다물었다.

번거로운 일은 얼마든지 이어질 수 있었다. 최악의 경우는 양부를 호출해 상담교사가 재활원을 권하는 일이었다. 위기감을 느낀 세스 그린은 옆에 놓아둔 가방을 쥐고 일어섰다.

존 리든이 성큼 앞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그대로 나갈 줄 알았더니 세스가 다가올 때까지 문을 잡은 채로 서 있었다. 세스가 그 앞에서 멈춰 서자 존 리든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왜?”

그건 세스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왜 안 나가?”

왜 안 나가고 문을 잡고 있는 거야.

“먼저 나가.”

“…….”

세스가 멈칫대던 발을 다시 움직였다. 어느샌가 등 뒤로 문이 닫히고 존 리든이 바싹 붙어 섰다.

한쪽 어깨에 아무렇게나 메고 있던 가방끈이 느슨하게 흘렀다. 세스는 반사적으로 가방을 끌어 올렸다. 어깨 뒤로 돌아간 손은 어제 알렉산더 랜스키에게 밟혀 딱지가 앉아 있었다.

“내놔.”

존 리든이 훌쩍 가방을 앗아 갔다.

“……?”

세스 그린이 턱을 돌려 그를 응시했다. 그 시선에 얽힌 당황을 빠르게 훑어 내린 존 리든은 외려 뻔뻔하게 나왔다.

“그 손, 꼴 보기 싫어 죽을 것 같아 이런다. 약이라도 처바를 거 아니면 잔말 마.”

그는 가방을 돌려달라는 얘기를 아예 듣기 싫었던지 세스를 밀치고 보폭이 큰 걸음으로 저만치 성큼 가 버렸다.

“……손이 무슨 상관인데.”

작게 중얼거린 세스 그린이 텅 빈 복도를 걸어가는 존 리든의 뒤를 부지런히 쫓아갔다. 가방을 다시 돌려받기 위해.

가방을 사이에 놓은 작은 실랑이는 주차장까지 가는 내내 이어졌다.

“돌려줘.”

세스 그린은 벌써 열 번쯤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존 리든에게 손을 뻗었다. 세스보다 한참은 키가 큰 존 리든은 가벼운 손짓만으로도 손쉽게 그를 따돌렸다.

“집에 어떻게 갈 거냐?”

“이리 내.”

“사람이 물으면 대답 좀 해라. 차 없지 않아? 어떻게 갈 거야?”

“……걸어서. 돌려줘.”

“흠.”

존 리든이 몇 걸음 앞서던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를 뒤쫓기 위해 평소보다 서두르던 세스의 걸음이 엉켰다. 존 리든은 앞으로 고꾸라질 뻔한 세스를 한 손으로 붙들며 좀 전부터 계속 고민으로 묶어 놓고 있었던 말을 내뱉었다.

“내 차 타.”

“…….”

세스가 대답 대신 멍해진 눈을 깜박이다 이어서 찡그렸다. 그는 제 차를 타라는 존 리든의 말을 못 알아들은 것이 틀림없었다.

존 리든이 입술을 실룩였다.

세스는 그가 이런 제안을 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다는 반응이었다. 사실 존 리든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방금 전 빈 교실에서 우연히 세스 그린을 발견하기 전까진.

무슨 일로 빈 교실에 멍하니 주저앉아 있는 건지 이유를 떠올리기 전에, 태워다 줘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옆 좌석에 태우고 주소를 묻고, 안전벨트를 매게 한 다음 일로인을 벗어나 처음 가 보는 길을 함께 달릴 것이다.

그러자 멈출 수가 없었다. 엔드 존(End zone: 미식축구에서 공을 가진 선수가 골을 넣을 수 있는 필드 끝 영역)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처럼.

“집이 어디야?”

다시 묻는 존 리든은 씩 웃고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기분이 좋았다. 호흡이 빨라지고 가슴께가 울렁대는 이 기분은 터치다운을 할 때의 그것과 비슷했다.

대답이 들려왔다.

“싫어.”

존 리든의 얼굴에서 보기 좋은 호선을 그리던 미소가 단숨에 씻겨 나갔다.

“왜?”

“가방 줘.”

세스 그린은 존 리든에게 붙잡혔던 팔을 잡아 뽑았다. 이제야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들은 하얀 얼굴이 석고상처럼 굳어 있었다. 존 리든의 표정이 세스와 비슷해졌다.

“바보야? 왜 싫다는 건데.”

“나한테 자꾸 아는 척하지 마.”

“새삼 모르는 척할 건 또 뭐야. 나는 네 거시기도 잡아 봤는데.”

“가방 돌려줘.”

존 리든은 세스 그린치고는 꽤나 필사적인 얼굴을 내려다보며 가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세스가 그런 얼굴을 하는 것은 가방을 돌려받기 위해서라기보단 자신의 제안이 정말로 받아들이기 싫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카페테리아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친절이랄 수도 없는 사소함을 거절하는 세스 그린은 그를 짜증스럽게 만들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집까지 걸어가는 게 그의 차를 얻어 타는 것보다 나을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아는 척하지 말라는 말은 그래서 어려웠다. 적어도 존 리든은 세스 그린이 혼자서 어깨에 늘어진 가방끈을 상처투성이 손으로 움켜쥐고 한 시간이나 터덜터덜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았다.

“차 태워 주면, 그걸 대가로 내가 뭐라도 요구할 것 같아서 그래?”

존 리든은 일부러 정색을 하고 물었다. 사실 스스로에게도 묻고 싶었다. 정말로, 이렇게나 저 손이 꼴 보기 싫은 이유는 단지 세스 그린의 엉덩이에 페니스를 박고 싶은 욕구 때문이겠냐고.

그 답은 세스 그린도 몰랐다.

“그건…… 아니, 생각 안 해 봤어.”

“그럼 왜? 설마 걷는 게 좋다는 거야?”

“……아니.”

집까지 걸어서 가는 게 좋아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답은 그의 차를 타는 게 싫어서였다. 존 리든은 이유를 물었다.

“왜야?”

“나는…… 불편해.”

“내가?”

“그냥 다.”

존 리든은 저 아래서 솟구쳐 오르는 날카로운 감정들을 느꼈다. 기분 좋은 울렁임이 순간에 사라졌다.

“공구실에서 바지만 내리고 나한테 뒤를 박히는 건 안 불편하고?”

기분 나쁜 상상이 일었다. 이대로 세스 그린의 마른 팔뚝을 움켜쥐고 제 빨간색 지프 안에 처박아 문을 닫고 싶었다. 버둥대는 얇은 몸 위로 안전벨트를 채찍처럼 휘감아 칭칭 묶어 두고 싶었다. 뭐라고 또 칭얼대면 뺨을 쥐고 입을 막아 버리고 싶었다. 존 리든은 이런 생각에 짜증이 났다.

“……됐다. 싫다는 놈 붙들고 실랑이하는 내가 등신이지.”

턱!

존 리든이 움켜쥐고 있던 가방을 세스 그린에게 떠밀듯 던졌다.

“네 마음대로 해. 걸어가든 말든.”

존 리든이 차에 올라 꽝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 거칠게 안전벨트를 당기는 사이 손톱 끝이 벨트의 모서리를 성급하게 긁었다. 존 리든은 손톱과 살갗 사이의 얇은 틈에서 생겨난 예리한 통증을 입술 위로 씹으며 시동을 켜고 주변을 살폈다.

그때였다. 주차장 C구역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던 납작한 검은 차가 굉음을 흩뿌리기 시작한 것은.

존 리든은 차를 빼다 말고 고개를 돌려 어디 세워 놓아도 한눈에 들어오는 알렉산더 랜스키의 차가 주차 구역을 빠져나오는 것을 보았다. 랜스키가 이 시간까지 학교에 남아 있을 이유가 궁금해지기도 전에, 갑자기 옆 좌석에서 쿵쿵 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전 태워다 주겠다는 그의 제안을 보기 좋게 거절했던 세스 그린이었다.

문을 열어 주자 그가 유령처럼 가벼운 몸짓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떨리는 손이 스스로 안전벨트를 채웠다.

“태워 줘.”

세스 그린은 한 박자 늦은 신호를 보냈다. 존 리든은 학교 밖으로 향하는 것이 아닌, 주차장 안쪽으로 들어오는 알렉산더 랜스키의 차와 세스 그린의 겁에 질린 눈동자를 번갈아 바라보다 그에게 자신의 차를 탈 이유가 갑자기 생겨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한 번 정체를 알 수 없는 날카로움이 치솟았다.

“등신. 그러게 타랄 때 타지. 남 속은 저 좋을 대로 긁어 놓고.”

끼익, 쿵!

존 리든의 차가 알렉산더 랜스키가 들어오는 반대쪽 방향으로 황급히 빠져나갔다. 존 리든은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면서 중얼거렸다.

“대체 랜스키한테 무슨 짓을 했는데? 너한테 왜 저러는 거야?”

세스 그린은 잠자리의 진동 같은 자그마한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나도 몰라.”

“제기랄, 대답은. 모른다는 새끼가 차 빼는 거 보자마자 내 차로 도망쳐? 그냥 말해. 설마 어제 그 일 때문에 그러는 거야? 대체 무슨 일인데 남의 손을 그렇게 개떡으로 뭉개 놓고도 성이 덜 풀려서 저 지랄이야?”

“그런 거…… 아냐. 그 일은 끝났어.”

“그럼 왜?”

“…….”

세스 그린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존 리든은 리어 뷰 미러를 한번 훑었다. 주차장을 밀어 버릴 기세로 달려오던 검은 차가 보이지 않았다. 잠깐 놀라는 사이 사각 지대에서 불쑥 튀어나온 알렉산더 랜스키의 차가 굉음을 흩뿌리며 그들을 추월해 앞으로 달려갔다. 기세에 비해서 싱거울 정도로 빠르고 무탈한 퇴장이었다.

“뭐야, 저건.”

“…….”

“네가 뭐 잘못 안 건 아냐? 랜스키가 널 기다리고 있던 게 맞아?”

“……나도 몰라.”

“흠.”

늘 창백해 보이는 세스 그린은 지금은 아예 껍질이 한 겹 벗겨져 나간 것처럼 파리했다. 그러나 알렉산더 랜스키의 차가 끔찍한 속도로 시야에서 사라지면서 차츰 안색이 돌아왔다.

어쩌면 별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어제 손을 밟혔던 기억이 꽤나 지독하게 남아서 세스 그린이 혼자 지레 겁을 먹은 걸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존 리든은 일로인의 다른 아이들처럼 왕자와 남창 사이에 그 어떤 접점이 존재하리라는 생각은 당연히 해 보지 않았다.

“집이 어디야.”

결국 도돌이표처럼 감정이 되돌아왔다. 존 리든은 처음 세스 그린이 그의 제안을 거절했었다는 사실을 그새 잊어버렸다. 그는 얌전히 안전벨트를 채운 세스를 태우고 처음 가 보는 길을 달릴 것이다. 가슴께가 다시 일렁대기 시작했다.

“머레이 힐.”

대답은 한참 후에나 들려왔다. 존 리든은 그 간격 동안 세스 그린이 중간에 내릴지 말지 고민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하…… 진짜.”

존 리든이 이를 갈며 내뱉자 세스가 눈을 내리깔았다.

“싫으면 내릴게.”

세스 그린은 병적이었다. 이 정도면 딱히 저가 싫은 게 아니라 세상 모든 호의와 관심이 싫은 수준이었다. 존 리든의 눈에 세스 그린은 외면과 고독이라는 투명 망토를 뒤집어쓰지 못해 안달인 사람으로 보였다.

그러다 보니 오기가 생겨났다. 존 리든은 세스가 투명 망토 아래 감추려 드는 게 뭔지 보고 싶었다.

“주소 불러.”

* * *

의외로 세스 그린의 집은 평범했다. 그림처럼 화목해 보이는 집은 아니었지만 머레이 힐의 안정적인 중산층 가옥들이 그렇듯 말끔한 하얀 지붕과 단정한 잔디밭이 보기 좋게 어우러진 곳이었다.

“맥주 있어?”

존 리든은 세스 그린이 현관문을 여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를 훌쩍 밀치며 먼저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아직도 세스 그린이 궁금했다.

불 켜진 곳이 한 군데도 없는 집 안은 어둡고 침울했다. 하얀 지붕과 잔디밭이 주는 의외성은 현관문을 경계에 두고 끝났다.

“키친은 어디야?”

세스 그린은 집 안으로 향하려는 존 리든의 앞을 막아섰다. 존 리든이 어깨 근육을 팽팽히 긴장시키는 것으로 말을 대신했다. 나는 그냥은 돌아가지 않을 거야, 라고.

세스가 체념처럼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맥주는 안 돼. 그건 술이니까. 대신 소다는 있어. 2층에 올라가 있어. 가져다줄게.”

존 리든의 고집이 이겼다. 기분이 좋아진 그가 세스의 검은 머리카락을 헝클였다. 세스 그린이 그 순간 고개를 휙 돌리지 않았다면 기분이 좀 더 좋았을 것이다.

“알았어. 빨리 와.”

세스가 주방으로 사라지고 존 리든은 먼저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서 세스의 방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별다른 장식 없는 침울한 공간은 1층과 비슷했다. 2층에는 베드룸 두 개에 작은 욕조가 들어찬 욕실이 하나 있었다. 베드룸 하나는 문이 잠겨 있었기 때문에 존 리든은 자연히 문이 열리는 방으로 들어갔다. 짐작했던 대로 그곳이 세스의 방이었다.

“……성격하고는.”

방은 세스를 닮은 침묵과 소외를 벽지처럼 두르고 있었다. 하얀 벽에는 흔한 포스터 한 장 붙어 있지 않았다. 책상 위에는 책 한 권 없었고, 눈에 띌 만한 다른 취미의 흔적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정신병동 같다고 말했을 것이다. 털썩 주저앉은 침대 위에서 베개로 덮어 놓은 낡은 앨범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손때가 탄 가죽 표지의 앨범은 앞의 몇 장을 제외하고는 텅 비어 있었다. 화사한 금발머리를 지닌 젊고 아름다운 여자의 사진 몇 장이 고작이었다. 사진 속 여자는 세월과 다름없는 무수한 손자국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딘지 모르게 익숙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엄마인가.”

전체적인 생김새는 닮지 않았지만 구석구석이 비슷했다. 표정이라든지 표정을 감싸고 있는 느낌이라든지 하는 부분이. 세스의 검은 머리는 우울해 보였지만 모친을 닮아 금발이었다면 훨씬 더 보기 좋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탁.

작은 발소리와 함께 세스가 들어왔다. 세스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존 리든의 손에서 앨범을 빼앗아 들었다.

“왜 그래? 보면 안 되는 거야?”

“…….”

세스는 대답하지 않고 앨범을 침대 아래에 처박았다. 그리고 그에게 차가운 소다 캔을 건넸다.

“여기.”

존 리든은 세스의 표정을 살피며 캔을 뜯었다. 간절히 목이 타는 기분에 입술을 떼지 않고 절반이나 비워 버렸다. 그가 책상 위에 캔을 내려놓자 세스가 물었다.

“콘돔은 있어?”

“……뭐?”

세스는 몸에 팔을 둘러 입고 있던 반팔 티셔츠를 벗었다. 골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마른 몸은 존 리든의 눈에 지나칠 정도로 하얬다. 세스는 스스로 옷을 벗으면서도 존 리든을 바라보지 않았다. 평소처럼 애매하게 초점이 흐린 시선으로, 마치 표면을 더듬어 자리를 찾는 듯 답답한 시선으로 이쪽을 응시하며 세스가 말했다.

“시트가 더러워지면…… 아버지한테 말하기 곤란해서.”

“아버지?”

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존 리든은 세스 그린의 가정사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겉보기에는 말끔한 집 안이 왜 이리 차갑고 어두운지, 생활의 흔적은 있되 온기는 조금도 없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럼 넣지는 마. 입으로 해 줄게.”

세스가 다가와 존 리든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빨리 해치우고 어서 나가라는 식이었다. 존 리든은 이를 깨물지 않기 위해 호흡을 한 모금 물었다 뱉었다.

“넌 머릿속에 그 생각밖에 없냐?”

세스 그린의 고요한 눈동자가 빠른 속도로 공허해졌다.

“……그럼?”

“내가 네 방까지 들어온 게 공짜 섹스 때문일 것 같아?”

대답은 같았다.

“그럼?”

그럼, 그게 아니라면. 대체 왜 왔냐는 뜻일 것이다. 존 리든은 세스 그린의 머리통을 열어서 안을 들여다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눈이 가서. 너한테.”

“…….”

제 사타구니 사이에서 세스가 가만히 눈동자를 굴렸다. 존 리든은 충동적으로 세스의 검은 머리칼을 문질렀다. 세스는 그래도 가만히 있었다. 그 모습은 괜히 귀여웠다.

“그게 한번 자고 싶은 건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건 아니었나 봐.”

“…….”

“너하고 좀 더 친해지고 싶어.”

그 말에 세스는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안 할 거면 가.”

“세스 그린,”

존 리든이 세스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세스는 동물원 우리 안에 갇혀서 사육사를 바라보는 작은 짐승처럼 그를 바라보았다. 울컥,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덩어리가 되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넌 뭐가 그렇게 무섭냐?”

존 리든에게 붙들린 세스의 팔뚝에서 뿌득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스는 신음을 뱉어 내는 대신 입술을 깨물고 소리를 억눌렀다.

“내가 무서운 거야? 아니면 그냥 사람이 무서운 거야?”

“이, 이러…….”

“똑바로 말해. 도망치려고만 하지 말고 대답을 하라고. 그 전엔 안 놔줘. 넌 대체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 피하려고만 드는 거야?”

존 리든의 말은 그저 던지고 보는 허세가 아니었다. 팔뚝을 붙들고 있는 것만으로 근육이 불거져 나오는 존 리든을 물리적인 힘만으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물리력의 차이가 압도적인 상대에게는 섣불리 힘으로 대응하려 들면 으레 상처가 남았다. 세스 그린은 애써 벗어나려는 노력 대신 눈매를 찡그렸다.

“……이런 게, 싫어.”

제법 선명한 대꾸에 존 리든은 살짝 손아귀 힘을 늦추었다.

“이런 게 뭔데?”

“이유 없이…… 같이 있는 거.”

“같이 있는 게, 왜?”

“불편하고…… 어려우니까.”

“뭐가?”

“뭔가를 해야 되잖아. 얘기라든지, 그런 거.”

“…….”

“난 그런 거 잘 못 하니까.”

이번에는 존 리든이 입을 다물었다. 생각을 잇느라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눈썹을 문질렀다.

“왜 못 하는데?”

들려오는 대답은 뜻밖이었다.

“난 머리가 이상하니까.”

“……뭐?”

“너도 들어 봤을 거 아냐.”

일로인의 공식 남창 세스 그린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말은 그저 악의 섞인 농담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야 얼빠진 구석은 있었지만 그저 무심함이 지나친 성격 탓인 줄 알았다.

“그게 정말이라고?”

세스 그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을 먹어야 해. 아니면 집중하기가 힘들어서…… 계속 그러면 불안해져. 스스로 조절을 못 해.”

대답을 마친 세스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티셔츠를 주워 들고 다시 입었다. 존 리든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집중하기가 어렵다고?”

“응. 생각…… 하는 게.”

세스는 가끔 자신이 물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인 채로 흐르지도 않고 바람에 흔들리지도 않고 조금씩 증발해 가는 물이었으면 좋겠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알아서 사라져 가는 무엇이었으면 좋겠다고.

이런 말까지는 입술 위로 밀어내지 않았다. 하지만 존 리든은 세스 그린이 내뱉은 말 이상의 것을 알아차렸다.

“그럼 네가 뭐든 섹스하고 연결 짓는 것도 그런 이유야? 다른 건 생각할 수가 없어서?”

“그건……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게 무슨 뜻이야?”

“다른 건 나한테 말해도 잘 모르겠고, 뭘 원하는 건지도 모르겠는데…… 섹스가 하고 싶은 거라면 그건 이해할 수 있으니까.”

존 리든은 시간을 들여 세스가 한 말을 이해했다. 어쩌면 세스 그린은 어딘가 이상한 게 아니라 몹시 수줍고 서툰 사람일지도 몰랐다.

그가 가엾게 느껴진 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그다음에는 이해가 좀 더 커졌고, 이해를 지나치자 이번에는 이해시키고 싶었다. 타인을 마주하는 게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은 일이라는 걸 알려 주고 싶어졌다.

그 또한 이해하는 중이었다. 세스 그린을 마주 보는 자신의 감정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을.

짙은 우울 같은 세스 그린의 검은 머리카락이 창을 통해 비껴 들어오는 햇살에 닿아 밝아진 갈색을 띠었다. 그러자 창백한 얼굴이 조금은 덜 우울해 보였다. 존 리든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세스 그린.”

그가 다시 손을 내밀자 세스는 멀거니 선 채로 고개만 돌렸다.

“이리 와.”

“…….”

잠시 망설이던 그가 다가왔다. 존 리든은 그대로 세스의 팔을 낚아채 끌어당겼다. 시선이 아주 가까운 곳에서 부딪쳤다.

“그럼 말 같은 거 안 하면 되는 거야?”

“뭐가?”

“그럼 이유 없이 같이 있어도 되냐고.”

“왜……,”

이유가 없는 것은 아마도 세스 그린뿐일 것이다. 존 리든에게는 같이 있고 싶은 이유가 생겨났다. 지금 이 순간, 갑자기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세스 그린에게 키스하고 싶어졌으니까.

“이건 말하는 게 아니잖아. 그러니까 괜찮은 거지?”

바싹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한 팔로 등을 받치며 다른 손으로는 턱을 붙들어 끌어 올렸다. 입술이 닿았다. 존 리든은 세스 그린의 입술을 숨 막히게 빨아들였다.

아마도 첫 키스였을 것이다. 열어 놓은 창문으로는 비스듬히 햇살이 쏟아졌다. 길가를 거니는 소음들이 햇살과 섞여 아스라이 귓가를 번져 왔다. 존 리든은 늘 차가울 것 같던 세스 그린의 창백한 피부가 주는 온기를 손바닥으로 느끼며 틈새 없이 그를 끌어안았다.

키스가 끝나고, 존 리든은 평소보다 더 멍해 보이는 세스 그린을 놓아주었다.

“대답해 봐. 이런 건 괜찮냐?”

세스 그린은 통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존 리든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가, 이제.”

알아먹기는 어려웠지만 존 리든은 지금 세스 그린의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표정이었다. 세스 그린이 늘 무관심과 안정제로 가려 두고 있던 서툰 모습을 존 리든이 처음으로 보았다.

“그래, 갈게.”

아마도 순순히 그 말을 들을 생각이 들었던 것은 그 얼굴 때문일 것이다. 그는 세스에게 뭐든 해 주고 싶었다.

“내일 학교에서 보자.”

존 리든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별로 섬세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지금 일어난 일에는 의미를 따져 보게 되었다. 일로인에서 세스 그린과 가장 많은 대화를 한 사람을 꼽으라면 자신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스 그린의 침대에 앉아 대화를 나눈 사람도 자신이 유일할 것이다. 별 의미도 없을 의미 부여는 기분이 썩 괜찮았다.

“간다.”

또 한 번 의미 없는 말이 반복됐다. 실은 그저 말을 한 번 더 건네고 싶었을 것이다. 말 자체는 의미 없었지만 말을 건네는 일에는 의미가 새겨졌다.

“간다.”

존 리든은 그가 몸을 일으키고 난 뒤 쓰러지듯 침대 위에 드러누운 세스 그린을 등 뒤로 남기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키스를 하기 전부터 시작된 미소는 키스를 끝마친 후에도 계속 미련처럼 남아 있었다.

“…….”

그러나 차고가 아닌 길가에 주차해 놓은 지프를 보는 순간 존 리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지프는 다른 차가 일부러 들이받은 듯 짓궂게 망가져 있었다. 세스 그린과 키스할 때 창문을 넘어 번져 오던 소음의 정체가 지프에 덕지덕지 들러붙은 채 빤한 눈길로 존 리든을 응시했다.

* * *

세스의 아침은 여느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사물함의 문을 열어 놓고 책을 고르는 척 거울 안을 들여다보는 것. 그게 전부였다. 좌우가 뒤바뀐 알렉산더 랜스키가 거울 속에 나타나면 잠시 숨을 멈추기도 했지만 그 외에는 바라보는 것이 유일했다.

오늘 아침은 약간 수선스러웠다. 간간이 들려오는 말을 들어 보면 알렉산더 랜스키가 다른 차를 타고 나타났다고 했다. 뚜껑이 없는 새빨간 페라리라고 했다. 차를 바꾼 이유를 물어보니 누군가 새치기를 한 탓에 기분이 나빠져서 그대로 박아 버렸다는 대답이 들려왔다고도 했다. 덕분에 평소 타고 다니던 납작한 검은 차는 지금 수리 중이었다.

오늘 등장한 새 차도 눈에 번쩍 뜨이긴 마찬가지였다. 다들 랜스키 저택의 차고에 한정판 수퍼 카가 몇 대나 더 있을지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세스는 알렉산더 랜스키가 사물함 앞에 서는 것을 보았다. 오늘 주차장에서 그를 지켜보려면 검은 차가 아니라 빨간 차를 찾아야 할 것이다. 세스는 그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머릿속에 한 번 더 기억해 두었다.

이어서 세스는 사물함을 열려던 알렉산더 랜스키가 우뚝 고개를 들고는 몸을 돌리는 것을 보았다. 그가 저벅저벅, 방향을 돌려 걸었다.

“…….”

바라본다는 행위에 새삼스럽게 문제가 생겨나지 않았다면 알렉산더 랜스키는 분명히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간 거울 속에서 단 한 번도 크게 확대되어 본 적이 없었던 알렉산더 랜스키가 뚜렷하게 커지고 있었다. 실제의 거리가 단축되는 만큼 거울 속의 존재는 커다래져 갔다.

탕!

세스 그린은 황급히 사물함의 문을 닫고 돌아섰다. 그러나 알렉산더 랜스키가 더 빨랐다.

“또 도망이야?”

몸을 돌리는 순간 세스 그린은 하마터면 알렉산더 랜스키와 부딪칠 뻔했다. 그렇게나 거리가 가까웠다.

세스가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자 알렉산더 랜스키는 팔을 뻗어 반쯤 닫히다 말고 다시 열린 사물함의 문짝을 텅 소리가 나게 붙들었다. 세스는 달아날 틈이 없는 아주 좁은 공간에 갇혔다.

너무 놀라면 소리가 먼저 사라진다는 사실을 세스는 처음으로 알았다. 분명히 그와 알렉산더 랜스키를 지켜보는 아이들의 입술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세스는 그 어떤 소리도 듣지 못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비로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온갖 소리들 속에서 세스의 귀에 꽂히는 소리는 오로지 알렉산더 랜스키의 목소리 하나였다.

“아니면 선약이 있는 건가? 어제처럼?”

“아…….”

세스는 물고기처럼 소리 대신 입술을 뻐금거렸다. 남들보다 유난히 대칭이 잘 맞는 알렉산더 랜스키의 반듯한 얼굴이 세스를 보며 묘하게 비틀려 갔다.

“그래, 한 번쯤은 그럴 수도 있겠지. 어제는 즉흥적이기도 했고. 선약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안 해 본 내 탓도 있겠지.”

어제 주차장에서 알렉산더 랜스키는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게 맞았다. 아마도 존 리든의 빨간색 지프를 타고 함께 떠나는 것도 보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은 미리 말해 둘게. 수업 끝나고 기다려.”

하지만 그가 틀렸다. 세스가 도망친 것은 선약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싫어.”

확실한 거절이 필요했다. 세스는 드물게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너랑은 안 해.”

그러자 알렉산더 랜스키가 몹시 괴상한 얼굴을 했다. 그런 말을 연달아 들을 줄은 몰랐다는 식이었다.

“이유를 말해 봐.”

세스가 눈썹을 내리깔았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이해할 수 없을 테지만 이유는 제법 많았다. 그가 랜스키라서. 저는 매일 아침마다 사물함에 붙여 놓은 거울로 몰래 그를 바라보는 70억 인구 중의 하나라서. 알렉산더 랜스키는 게이가 아니라서. 그가 왕자라서.

“너랑은 안 해. 비켜 줘.”

세스 그린은 허리를 숙여 알렉산더 랜스키의 팔 아래로 몸을 미끄러트렸다. 그 순간이었다.

쾅!

알렉산더 랜스키가 사물함의 문을 후려치는 바람에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찌그러진 사물함 문짝이 끼걱대며 흔들렸다.

“넌 남창이잖아. 상대를 가리는 건 아닐 테고. 이유가 뭐야?”

“너랑은 안 해. 돈을 줘도 안 할 거야. 어차피 돈은 안 받지만.”

세스는 그답지 않게 부지런히 입술을 움직이며 어떻게든 등으로 사물함 안에 붙여 놓은 거울을 가리려고 애썼다.

“다른…… 사람을 찾아. 헤이워드와 헤어진 거면 여자 친구를 사귀어. 넌 게이도 아니잖아.”

“어제도 얘기했잖아. 내가 게이인지 아닌지 그걸 왜 네가 정해. 핑계를 대려면 다른 걸 대 봐.”

세스의 발꿈치가 애매하게 들렸다. 그는 알렉산더 랜스키의 숨결이 닿지 않는 공간으로 몸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너는…… 내, 내 취향이 아니야.”

“그래? 취향이 아니라고?”

세스 그린의 대답이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알렉산더 랜스키가 슬쩍 입술 끝을 물었다. 꼬리가 물린 입술에서 불쾌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런 표정을 짓는데도 반듯한 이마는 흔들림이 없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물려받은 랜스키가의 매끄럽고 짙은 갈색 머리는 햇살이 닿는 순간 점점이 금빛을 흩뿌렸다. 그 금빛이 단단하고 투명한 회색 눈동자와 부딪쳐 순간의 마법을 만들어 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지나치게 잘생겼다. 일로인의 누구라도 그렇게 말할 것이다.

“취향이 아니라고?”

“응…….”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의 팔을 붙들어 그를 휙 돌려세웠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게끔 주의 깊게 붙여 놓은 작은 거울 안에 알렉산더 랜스키와 세스의 모습이 동시에 비쳤다.

“매일 넋 빠진 얼굴로 힐금힐금 쳐다보는 주제에 취향이 아니라고?”

세스의 얼굴이 훅 달아올랐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알았다. 아니, 알고 있었다. 세스 그린의 사물함 안쪽에 거울이 붙어 있던 이유를. 대체 언제부터.

세스가 어쩔 줄 모르고 눈을 감아 버렸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그의 일과는 견고했다. 그 견고함에는 알렉산더 랜스키가 파고들 틈이 없었다.

하지만 알렉산더 랜스키는 그게 아니었다고 말하는 중이었다. 한순간 와르르 무너진 견고함의 무게가 고스란히 폐 위에 쌓이는 기분이었다. 숨이 눌렸다. 세스의 입술 사이로 억눌린 숨소리가 신음처럼 새어 나왔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를 팔 안에 가둔 채로 사물함에 붙여 놓은 거울을 뜯어냈다. 그리고는 그 옆을 지나치지 못하고 힐금대며 서 있던 누군가를 손짓으로 불렀다.

“거기,”

“어……? 나? 왜?”

알렉산더 랜스키가 뜯어낸 거울을 훌쩍 던져 주었다.

“그거 가져.”

“어?”

그는 난데없는 선물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다시 돌려줄 생각은 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사물함 문 안쪽에 붙여 두는 것 외에는 별다른 쓸모가 없을 거울을 들고 주춤 물러났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창백해진 눈을 꾹 감고 있는 세스 그린의 눈꺼풀 위로 숨을 훅 불었다. 세스가 놀라 눈을 떴다. 그러다 코앞에 알렉산더 랜스키가 보이는 것을 알고는 황급히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 전에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의 턱을 낚아챘다.

“오늘 선약은 나야. 수업 끝나고 주차장에서 기다려.”

“…….”

시선이 맞부딪치자 세스 그린은 강제로 발가벗겨졌을 때와 비슷한 수치심을 느꼈다. 그러나 고집을 꺾진 않았다.

“싫어.”

고집은 알렉산더 랜스키도 못지않았다.

“오늘도 도망치면 이번에는 사람 탄 채로 박아 버린다.”

세스는 존 리든의 차가 망가졌다는 사실을 아직 몰랐다. 그래서 알렉산더 랜스키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아듣지 못했다.

“……뭐?”

“기다리게 하지 마. 어제는 열받아 죽을 것 같았으니까.”

말이 끝나자 기울어졌던 알렉산더 랜스키의 몸이 선뜻 멀어졌다. 생각해 볼 새도 없이 말이 먼저 튀어 나갔다.

“왜, 왜 이러는 거야.”

알렉산더 랜스키가 뒤돌아서려던 동작을 잠시 멈췄다.

“뭘?”

“내가…… 너한테는 내가 아니어도 되잖아.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알렉산더 랜스키가 삐딱해진 턱선을 잠깐 움직였다. 입술에 가는 선처럼 보이는 미소가 그려졌다.

“궁금해?”

“……응.”

“주차장으로 오면 알려 줄게.”

그리고 알렉산더 랜스키가 사라졌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일로인의 공식 남창을 훑는 두 종류의 시선이 남았다. 예리한 호기심과 둔탁한 적대감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