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깨어나 보니 날짜가 하루 사라져 있었다.
머릿속은 안개가 잔뜩 끼어 있는 듯했고 몸은 그보다 더 한심했다. 세스 그린은 하루 출석을 거른 학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축 늘어질 만큼 피곤함을 느꼈다.
이 피로는 오전 내내 이어질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학교에서 전화가 걸려 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아마도 출장 중인 양부에게 먼저 연락이 갔을 것이다. 양부가 굳이 집으로 전화를 걸지 않았다는 것은 양부 선에서 적당히 해결이 됐다는 소리였다. 언제나처럼 세스가 복용하는 정신과 약들이 좋은 핑계가 됐을 것이다.
세스는 알렉산더 랜스키가 벗어 놓고 간 찢어진 셔츠를 잘 개서 지퍼백에 담아 서랍장 안 가장 깊숙한 곳에 넣어 둔 다음 가방을 챙겨서 방을 나왔다. 셔츠를 되돌려 준다는 핑계로 말을 걸고 싶진 않았다. 셔츠 한 장을 아쉬워할 것 같지도 않았다.
쿵쿵.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세스는 주방을 지나고 나서야 아침을 걸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약,”
생각해 보니 약을 먹지 않았다. 그토록 절실히 약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순간을 떠올려 보면 놀라운 일이었다. 약을 먹지 않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떠난 뒤로는 거의 기억이 없었다. 그대로 쓰러져 죽은 듯 잠을 잤다. 세스가 놀라는 것은 잠에서 깨어난 지금에도 다른 충동이 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잠깐 서서 약을 먹을지 고민하던 세스는 곧이어 생각을 털어 냈다. 약이 없어도 괜찮을 듯했다.
세스는 그대로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일로인까지 가는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선 뛰어야 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그렇게 가 버린 새벽 이후로 세스는 스무 시간 이상을 잤다. 중간중간 허기 덕분에 깨긴 했지만 몰려오는 수면욕이 이내 허기를 잠재워 버렸다. 오늘 새벽에 일어나서 하루를 통째로 흘려버렸다는 것을 알고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했다. 세스는 이틀 내내 결석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뛰기 시작했다.
버스 정류장까지는 오 분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이틀을 굶은 몸은 일 분도 지나지 않아 한계를 호소했다. 세스는 결국 비틀대다 넘어지고 말았다. 다시 일어나 주섬주섬 가방을 주워 들고, 넘어지기 전보다 한껏 줄어든 속도로 기운 없이 뛰어가는 등을 향해 누군가 경적을 울렸다.
“…….”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처음 보는 낡은 포드가 눈에 들어왔다. 차창이 내려가고 존 리든이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버스라면 좀 전에 갔어.”
세스 그린은 버스가 떠났다는 사실보다 눈앞에 있는 존 리든의 존재가 더 당혹스러웠다.
“……왜 여기 있어?”
존 리든이 반대편 좌석으로 팔을 뻗어 문을 열었다.
“타.”
“……왜?”
존 리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같은 표정을 유지했다.
“이틀 결석이면 그냥은 안 넘어갈 텐데?”
“결석 안 해.”
“버스는 떠났다니까? 이제 한 시간 뒤에나 오지 않나?”
“걸어가면 돼.”
“지금부터 걸으면 점심시간에는 도착할 수 있겠다.”
“……그렇게 오래는 안 걸려.”
부웅, 하는 무거운 소리를 내며 포드가 좀 더 다가왔다.
“그러니까 타는 게 낫다고. 차고에 처박혀 있던 걸 갖고 나와서 몰골이 좀 흉하긴 하지만.”
존 리든의 빨간색 지프는 아직 정비소에 있는 모양이었다. 그 차는 알렉산더 랜스키가 망가트렸다. 덕분에 그도 차를 바꿔야 했다. 세스 그린은 랜스키가의 페라리에 탔던 기억을 떠올리며 잠깐 표정을 굳혔다.
타지 말았어야 했을까. 아니면 도망치지 말았어야 했을까.
알렉산더 랜스키의 말대로 애초에 쳐다보지 말았어야 했던 걸까. 아니면 아예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걸까.
……어려운 질문이었다.
“애들이 떠드는 거 너도 들었지? 어떤 미친놈이 멀쩡히 잘 세워 둔 차를 처박고는 달아났어. 젠장, 대체 어떤 인간이야.”
세스가 머뭇대다 물었다.
“누군지는…… 알아?”
“아니. 경찰에 신고했더니 이미 자진 신고가 들어와 있었대. 시팔, 어떤 놈인지 머리 쓰는 거하곤. 남의 차를 박아 놓고는 사과 한 마디 없이 수리비 청구서나 지 변호사 사무실로 보내라고 했대. 대체 경찰은 뭐 하는 거야.”
그 뒤로도 누구인지 모를 놈에 대한 욕설은 한참 더 이어졌다. 존 리든은 그가 욕하는 대상이 알렉산더 랜스키라는 것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세스는 안도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스스로도 흠칫 놀라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아무튼, 그래서 당분간 이 고물차야. 근데 넌 그런 거 따질 녀석은 아니잖아. 그냥 타. 정 부담스러우면 미리 내려 줄게. 다른 녀석들이 안 보게.”
“…….”
세스는 한참 망설이다 존 리든이 더는 참지 못하고 한마디 더 보태려는 찰나에 작게 대답했다.
“그럼, 고마워.”
“……뭐? 정말이야?”
점심시간까지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일로인까지는 먼 길이었다. 진땀이 조금씩 배어 나오는 몸으로 걸어가기는 무리였다.
세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존 리든의 차에 올랐다. 존 리든은 핸들을 쥐고 있던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하지만 짧은 곁눈질로도 그가 손바닥 안에서 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존 리든은 차를 출발시키며 이번에는 차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어떤 미친놈이 잘 찌그러트려 놓은 그의 지프는 정비소에 이 주일은 더 있어야 했다. 지금 끌고 온 포드는 칠십 년 대의 추억이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포드를 주말마다 손보는 것은 랜스키사에서 회계사로 일하는 아버지의 유일한 취미였다. 그리고 이 고물차를 월요일마다 끌고 나가려고 애쓰는 것은 그보다 네 살이나 아래인, 그래서 당연히 면허도 없는 그의 동생이었다. 요새 부쩍 반항기를 겪고 있는 동생 때문에 가족 중 유일하게 섬세한 인물인 어머니는 필라테스 강습을 두 배로 늘렸다고 했다. 구식 포드가 달리는 이십여 분 동안 세스는 존 리든의 가족들을 이름까지 전부 알아 버렸다. 그래도 뜬금없는 가족 얘기는 멈출 것 같지 않았다.
어느 순간 세스가 불쑥 물었다.
“왜 웃어?”
“……응?”
“왜 웃냐고. 아까부터 계속.”
“뭐?”
내내 웃는 그가 이상했다. 존 리든은 딱히 근사한 추억거리를 자랑하는 게 아니라 동생 욕을 하다 누나와 싸운 얘기를 하고, 다시 동생의 험담을 하는 식이었는데 그런 얘기를 하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웃어?”
“응.”
“어, 그게……,”
존 리든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귀밑에 설탕을 뿌려 놓은 모양새로 홍조가 흩어졌다.
세스는 조용히 색이 변해 가는 그의 뺨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세스의 시선을 느낄수록 존 리든은 점점 더 굳게 입을 다물었다.
마침내 두 사람이 탄 포드가 스쿨 존 안으로 들어섰다. 평소라면 등교하는 아이들로 북적여야 했지만 오늘은 시간이 늦어 그런지 다른 날보다 한산했다.
“어떻게 할래? 여기서 내릴래?”
존 리든은 그때서야 입을 뗐다.
“어지간하면 그냥 가자. 여기서 걸어가면 한참은 걸려. 네 몰골을 보니까 일주일은 굶은 홈리스처럼 보이는데. 걸을 기운은 있냐?”
“……애들이 보잖아.”
“보라고 해. 그게 뭐 어떻다고?”
“졸업 앨범에 호모 쿼터백이라고……,”
“작작 좀 해라. 그걸 왜 네가 나서서 걱정이야. 그리고 호모라고 소문 좀 나면 안 되냐?”
그 말에 세스 그린이 뜬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넌 쿼터백이잖아.”
“뭐 어때. 그게 뭐 대수라고.”
“어……?”
“그냥 취미야. 목숨 건 것도 아니고. 하는 데까지 하고 못 하게 되면 다른 거 하면 돼.”
“…….”
대답이 의외였던지 세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세스에게 있어서 존 리든의 정체성은 일로인의 쿼터백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세스에게는 존 리든을 설명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단어 한 마디로 한 사람을 전부 말할 수는 없었다. 존 리든은 쿼터백이라는 단어보다 더 복잡하고 입체적인 인물일 것이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존 리든이 갑자기 낯설어졌다. 세스가 머뭇대다 덧붙였다.
“그래도 나와 같이 있는 걸 보면 뭐라고들 할 거잖아.”
“알 게 뭐야.”
“나는 신경 쓰여. 난 애들이 쳐다보는 거 싫어.”
존 리든이 뜬금없다는 듯 세스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뭐야. 넌 바보냐?”
“…….”
“네가 나와 붙어먹든 다른 놈과 붙어먹든, 아니면 아무 놈과도 안 붙어먹든 애들은 항상 널 쳐다볼 거야. 왜 그걸 몰라?”
세스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왜…… 나를 보는데?”
“네가 절대 쳐다보지 말라는 식으로 구니까. 그러니까 왠지 더 쳐다보게 되는 거야. 제이 에드거하곤 정반대지. 에드거는 이래도 날 안 봐? 하는 식이고. 어쨌거나 쳐다보게 만든다고, 네가.”
“……그,”
“사람은 원래 그런 거잖아. 넌 너무 눈에 뜨여. 넌 안 그렇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하여간 그렇다고. 네 별명이 괜히 남창인 게 아냐. 게이 섹스 하는 애들은 너 말고도 있어. 그런데 네가 눈에 뜨이니까 네가 남창이 된 거야. 네가 아니라면 일로인 공식 남창은 진작 에드거가 됐을걸. 그 자식이 아무리 깔끔한 척하고 다녀도 뒤가 구린 거야 얼굴만 봐도 알겠고.”
“…….”
“네가 그렇게 눈에 띄니까 나도 너한테 말을 건 거야. 네가 자꾸…… 보이니까.”
오늘 갑자기 낯설어진 존 리든이 늘어놓는 자신도 낯설었다. 너무 낯설어서 아예 다른 사람의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그들이 탄 포드는 학교 안 주차장까지 들어왔다. 세스 그린은 존 리든이 A구역에 주차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태워 줘서 고마워.”
“나야말로 타 줘서 고맙다고 말해야 될 거 같은데. 너는 진짜……,”
말이 중간에 멈췄다. 차 밖으로 나가던 세스 그린의 동작도 멈췄다. 리든이 또 혼자서 웃어 버린 것이다. 세스가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 가만히 서 있는데 존 리든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게, 기분 좋았던 것 같아.”
“무슨…… 소리야?”
“아까 네가 왜 웃냐고 물었잖아.”
“응.”
“네가 차에 타서 기분 좋았다고.”
또다시 귀밑이 점점이 붉어졌다. 핑크색 설탕을 흩뿌려 놓은 것 같았다. 존 리든은 잘 짜인 근육질의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게 얼굴을 붉히면서 세스를 쳐다보았다.
“어제 걱정했어. 네가 학교 안 나왔다는 거 알고서. 집에 가 보려고 했는데 아직 그런 짓은 하면 안 되는 사이 같아서 관뒀어. 사실 아침에 네 집으로 가면서도 태워 줄 거라는 생각은 안 했어. 오늘은 제대로 학교에 나올 건지 그런 거나 알아보려고 했던 거지. 그런데 태워다 주게 돼서…… 좀 기뻤어.”
세스는 모를 것이다. 존 리든이 그에게 이 말을 하려고 사실은 이틀을 기다렸다는 것을.
첫 키스를 나누고 돌아가던 날부터 내내 분주하지만 않았더라도 존 리든은 이 말을 좀 더 빨리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망가진 차를 신고하고 정비소에 보내야 한 데다 부모님의 잔소리와 풋볼팀 훈련이 연달아 이어지는 바람에 세스 그린에게 말을 건넬 기회가 계속 늦춰졌다.
존 리든에게는 할 말이 많았다. 서두르거나 강요하듯 밀어붙이진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해 두긴 했지만 세스를 볼 때마다 울컥울컥 말이 튀어나와 제어가 어려웠다.
이런 감정들을 세스는 몰랐다. 그래서 그냥 존 리든이 낯설기만 했다.
“난…… 잘 모르겠어. 네가 왜 그러는지.”
세스의 대꾸에 존 리든이 잠깐 표정을 굳혔다. 그러나 일로인의 쿼터백은 태클을 피해야 할지, 아니면 그대로 뚫고 나가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 순간을 본능처럼 알고 있었다.
“너한테 뭐 어쩌라는 거 아냐. 아직은. 그냥 알고 있으라고. 나는 너한테 관심도 많고 잘해 보고 싶다고.”
“…….”
“아, 제기랄. 다 들었으면 어서 내려. 수업 시작했을 거 아냐.”
“……응.”
세스는 가방을 움켜쥐고 존 리든의 낡은 포드에서 내렸다.
그가 먼저 주차장에서 떠날 때까지 존 리든은 수업 시작 종이 울리는 것을 들으면서도 계속 차에 머물러 있었다. 귀밑의 엷은 홍조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제법 오래도록.
* * *
일 교시 내내 허기가 느껴졌다. 세스는 유독 기운 없는 파리한 얼굴로 맥없이 앉아 식은땀을 흘렸다. 이 교시부터는 거의 집중을 못 하다가 삼 교시가 지났을 무렵에는 독한 현기증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
3층의 인적 드문 화장실에서 세스는 한바탕 구토를 하고 세면대 앞에 섰다. 빈속은 게워 낼 것도 없었지만 메스꺼움과 현기증은 여전했다. 수도꼭지를 돌리자 쏟아지는 찬물의 온도마저 메스꺼움을 불러왔다.
세스는 찬물로 얼굴을 훑었다. 연거푸 물을 끼얹고 나자 손끝이 시려 왔다. 거울 안으로 들여다보이는 입술이 거의 보랏빛이었다. 오늘은 학생 복지처의 상담사와 정기적인 상담이 있는 날이었다. 방과 후 상담 시간까지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세스는 페이퍼 타월로 대충 물기를 닦아 낸 다음 몸을 돌렸다. 그러나 두 걸음도 걷기 전에 시야가 아득해지며 다리가 풀렸다. 세스는 넘어지기 전 아예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한번 앉고 나니 더는 일어설 수도 없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초라한 몰골로 세스는 세면대 옆에 기대앉아 눈을 감아 버렸다. 의식이 가물가물 멀어졌다. 이대로 여기서 잠이 들 것 같았다.
짓궂게도 그 순간 시간이 장난을 쳤다. 세스 그린이 물컹한 젤리가 구겨진 자세로 화장실 바닥에 자리를 잡은 그 시간에 두 사람의 수선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화장실 문을 열었다.
“……인 건 어떻게 알았어? 여기 와 본 적 있어? 응?”
텅!
누군가의 어깨가 문을 밀치자 제일 먼저 화사한 금발이 감싼 작은 머리통이 보였다. 세스는 그가 제이 에드거라는 것을 금방 알아보았다.
뒤이어 에드거에게 옷깃이 쥐여 들어오는 사람은 알렉산더 랜스키였다. 세스는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구겨진 젤리가 사람을 쳐다보는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둘은 세스 그린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제이 에드거가 양팔로 알렉산더 랜스키의 목을 그러안으며 입술을 턱에 눌렀다.
“설마 왕자도 이런 데서 몰래 섹스하는 거야, 응?”
알렉산더 랜스키는 대답 대신 온몸으로 그에게 엉겨 붙는 제이 에드거의 작고 예쁜 턱을 붙들었다.
“아는 척은 됐고,”
알렉산더 랜스키가 고개를 숙여 제이 에드거의 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말해 봐. 뭘 해 줄 건지.”
“아, 그……. 네가 해 달라는 건 다 해 줄 수……. 으응…….”
제이 에드거가 신음 소리를 흘리며 알렉산더 랜스키의 다리 사이에 제 허벅지를 끼워 넣고 비비기 시작했다. 하체가 맞붙은 상태에서 알렉산더 랜스키는 제이 에드거를 벽 쪽으로 밀었다. 그는 제이 에드거의 턱을 옆으로 돌려 얼굴이 잘 드러나게 만든 다음 귓불을 느리게 핥으며 속삭였다.
“여기서도? 괜찮겠어?”
“여기…… 어차피 아무도 안…… 와.”
“흐음.”
알렉산더 랜스키의 입술이 꾸물대며 제이 에드거의 목덜미로 미끄러졌다. 세스 그린은 가느다란 숨을 내뿜으며 두 사람이 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타인의 목에 키스할 때 단정한 입술 선은 저렇게 움직였다. 부드럽고 강하게. 느리고 우아하게. 마치 소화 중인 육식 짐승처럼.
그래서 사냥감이 아닌 유흥거리가 된 제이 에드거는 식후의 아이스크림 같은 달콤한 얼굴로 알렉산더 랜스키를 마주할 수 있었다. 제이 에드거가 그의 허리를 제 팔로 감싸며 중얼거렸다.
“남창과는 그날 한 거야?”
“뭘?”
“무슨 말인지 알면서.”
제이 에드거가 살짝 눈을 흘겼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손으로 쥘 수 없는 물 같았다. 물처럼 매끄러웠다. 남창의 손을 잘 밟아 놓았을 때도 그는 매끄럽게 분노하고 매끄럽게 그 분노를 흘려보냈다. 저를 둘러싼 선망이나 욕정, 질시나 집착에도 그런 식이었다. 왕자가 왕자다운 이유는 그놈의 통 잡히지 않는, 그래서 손댈 수 없는 거리감 때문일 거라고 제이 에드거는 생각했다.
“남창은 괜찮았어? 듣기로는 꽤 맛있다던데.”
“그런 말은 어디서 들었는데?”
“하, 남창하고 잔 애들이 어디 한둘이겠어?”
제이 에드거의 손이 알렉산더 랜스키의 진즈 버클에 닿았다. 그가 도발적인 얼굴로 턱을 치켜세웠다. 붉은 혀가 그보다 옅은 입술 위를 핥았다.
“해 보니 어땠어? 여자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어?”
알렉산더 랜스키는 아래로 짧은 시선을 던졌다.
“헷갈리던데.”
“하하. 어떤 점에서?”
제이 에드거를 훑어보던 알렉산더 랜스키가 느릿하게 고개를 어깨 너머로 내밀었다. 제이 에드거는 한층 더 알렉산더 랜스키에게 바싹 밀착한 상태가 되었지만, 덕분에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통 볼 수 없게 되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키스를 하듯이 제이 에드거의 귓바퀴를 입술로 쓸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질근질근, 환장하게 조이더라고. 나는 남자 새끼 아랫도리가 그렇게 맛있는 줄 처음 알았어.”
“아, 뭐야……. 좋았어?”
“반응이 아주 좋던데. 손만 대도 자지러지는 수준이었어. 대충 문질러만 줘도 내내 싸고 말이야. 그래서 아, 이 녀석이 정말로 나한테 마음이 있는 모양이지. 그러니 에드거를 붙들고 그런 등신 같은 소리를 해 댔겠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자기 입으로는 끝내 아니라지 뭐야.”
알렉산더 랜스키의 매끄러운 음성은 제이 에드거의 귀를 애무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의 눈은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세면대 아래 몸을 구기고 있는 세스 그린을.
“그 이유가 뭐 같아?”
“……!”
세스의 눈이 알렉산더 랜스키와 마주쳤다.
* * *
들켰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알렉산더 랜스키는 자신이 여기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세스가 숨 막히는 표정으로 알렉산더 랜스키의 시선을 마주하는 동안 그는 제이 에드거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고개를 젖혀서 드러나는 목덜미를 소리 나게 빨았다. 그 와중에도 눈은 세스를 떠나지 않았다.
“너는 남창이 왜 그런 소리를 했는지 알고 있어?”
말은 제이 에드거에게 건넸지만 시선은 세스를 향했다. 그래서 세스는 알렉산더 랜스키의 물음이 사실은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세스가 말한 대로 하고 있었다. 섹스는 제이 에드거와, 일로인에 새로 합류한 게이로 소문이 나든 말든.
세스가 있다는 걸 모르는 제이 에드거는 허리를 잘게 떨면서 알렉산더 랜스키의 몸 여기저기를 양손으로 더듬었다.
“그건…… 흐, 남창이 좀 머리가 이, 이상하니……까. 아흣.”
“흠. 정말 이상하지. 남창이 날마다 주차장에서 날 보며 딸 친다는 네 말이 사실이라면.”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한 세스가 손으로 입을 막았다. 거래를 깨고 비밀을 드러낸 제이 에드거에게 화가 나는 것보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대체 얼마나 많은 사실을 알고 있을지 무서워졌다.
불안하게 가라앉는 세스 그린의 시선을 제 눈에 잡아 맨 채로, 알렉산더 랜스키가 제이 에드거의 바지를 끌어 내렸다. 곧이어 발목에 걸린 팬츠 위로 브리프마저 떨어트렸다. 세스의 시야 안에 제이 에드거의 하얗고 탄탄한 작은 엉덩이가 추가되었다.
“입으로 해 줄 때 남창 표정이 어땠는지 알아?”
“어땠……,”
“완전 꼴리던데. 진짜 맛있게도 먹더라고. 남창은 입술이 작잖아. 이빨로 긁을까 봐 입술을 꼭꼭 다물고 빠는데 돌아 버리는 줄 알았어. 그래서 일부러 턱을 잡아서 이빨에 대고 긁었어. 그랬더니 남창이 아래로 줄줄 흘리지 뭐야. 꼭 자기가 느끼는 것처럼.”
노출된 맨 허벅지를 주물럭대는 알렉산더 랜스키의 손끝에 제이 에드거가 거푸 신음을 흘렸고, 두 사람이 번갈아 내뱉는 외설적인 소리에 세스는 귀를 감고 싶었다.
“나, 나도 잘해. 저번에 해 줬잖아. 그건 별로였어? 지금 다시 해 줄까……?”
제이 에드거가 물었고 알렉산더 랜스키는 고개조차 젓지 않았다. 여전히 세스 그린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제이 에드거를 애무할 뿐이었다. 마치 정말 주무르고 싶은 것은 따로 있다는 듯이.
시선과는 반비례하는 손이 제이 에드거의 손을 이끌어 제 팬츠 위를 더듬게 했다. 제이 에드거는 달뜬 숨을 흘리면서 알렉산더 랜스키의 퍼스너를 내리고 그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를 바라보며 서서히 발기하기 시작했다.
“삽입은 안 된다면서 새침 떨더니 책상 서랍을 뒤적거려 콘돔을 찾아오잖아. 그러면서 뭘 넣지 말라는 건데. 손가락으로 대충 벌려서 그냥 박았는데도 앞이고 뒤고 내내 줄줄 흘려 댄 주제에. 그러면서 안에다 싸지는 말라는데……,”
그만.
세스는 눈꺼풀을 질끈 내리깔았다. 더는 엊그제 얘기를 듣고 싶지도, 두 사람이 뒤엉켜 있는 모습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세스는 기운 없는 손끝을 세워 벽을 더듬었다. 뭐든 붙들 수 있는 것을 잡고서 몸을 일으켰다. 기적적으로 움직이는 다리는 타인의 소유물처럼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침내 간신히 몸을 일으키는 순간, 알렉산더 랜스키가 이렇게 말했다.
“거기 서, 남창.”
“뭐?”
황당한 숨소리를 내뱉은 제이 에드거가 홱 고개를 돌렸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양손으로 제이 에드거의 엉덩이를 움켜쥐고 벌렸다.
“어딜 가. 섹스는 너 대신 제이 에드거와 하라며. 그럼 쳐다보고 있어.”
세스는 모욕당한 기분을 몰랐다. 그래서 모욕당했을 때 지을 법한 표정도 몰랐다. 하지만 알고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지금 알렉산더 랜스키를 마주 보며 지을 수 있도록.
세스는 세면대에 기댄 몸을 바로 세우지도 못하면서 짧게 고개를 저었다.
“싫어.”
제이 에드거가 저를 잡아 누르는 팔 안에서 버둥거렸다. 뭐야, 지금. 무슨 일이 있는 거야. 그가 수선스럽게 소리를 냈다. 그러나 알렉산더 랜스키는 팔 힘을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세스 그린을 바라보는 시선도 늦추지 않았다. 제이 에드거는 이곳에 아예 없는 사람 같았다.
“누구 마음대로 싫어? 거기서 얌전히 보고 있어.”
알렉산더 랜스키가 제이 에드거를 돌려세웠다. 싫어.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그렇게 버둥대는 제이 에드거의 입을 그가 제 입술로 막았다.
키스가 질척해지자 제이 에드거는 곧 저항을 그만두었다. 이 상황이 좀 기묘하긴 해도 랜스키라는 배부른 먹잇감을 놓칠 마음은 없었다. 그가 더 열렬히 키스에 응하며 바지런히 아랫도리를 비벼 댔다.
세스 그린의 시야에는 이 모든 것들이 불편한 조각이 되어 깨진 유리처럼 박혔다. 세스가 걸음을 옮겨 도망치려고 했다.
“나가면 가만 안 둔다.”
알렉산더 랜스키의 차가운 음성이 세스를 붙들었다.
“두 눈 똑바로 뜨고 봐. 끝까지 못 보면 네가 질투하는 걸로 알겠어.”
“…….”
제이 에드거의 등을 단단히 누르며 알렉산더 랜스키는 금방이라도 삽입할 것처럼 엉덩이를 벌렸다. 제이 에드거는 약간 싫은 표정을 지었지만 이 상황 자체를 아예 못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었다.
일로인의 왕자가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흠 하나 없이 말끔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밀레나 헤이워드에게서 들을 만큼 들었다. 제이 에드거는 알렉산더 랜스키에게 별난 섹스 취향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돈 많고 제정신이 아닌 인간들은 백에 아흔아홉쯤 그랬으니까.
그게 제3자가 쳐다보는 섹스라면 괜찮았다. 그건 범죄도 아니었고, 그 정도 과시욕은 저에게도 있었으니까. 가학 성향을 지니지 않았다는 게 환영할 일이다. 어쩌면 그와 일로인의 왕자는 죽이 잘 맞는 커플이 될지도 몰랐다.
“질투하면 나한테 마음이 있는 거잖아. 안 그래?”
어느 한순간 손끝이 거세졌는지 제이 에드거가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제이 에드거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다정해 보일 정도로 목을 구부린 채 그의 목덜미를 빨았다.
“아흐…… 읏.”
제이 에드거가 턱선을 틀어 키스를 요구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를 보면서 제이 에드거의 혀를 빨았다.
세스가 더는 볼 수 없겠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눈 돌리지 마.”
알렉산더 랜스키가 제이 에드거의 뺨을 훑으면서 말했다. 그럴수록 세스가 이제껏 모르고 있던 감정이 무표정의 거죽을 뚫고 삐져나왔다. 속이 울렁거리기도 했고 화가 나기도 했다. 수치스럽기도 했고 심장이 따끔거리기도 했다.
낯선 감정을 접하면 그는 혼란스러워졌다. 혼란은 그에게 자해만큼이나 치명적이었다.
“……싫어. 갈 거야.”
세스는 아직도 남의 것 같은 다리를 움직이려고 애썼다. 위를 넘어서 식도까지 할퀴어 대는 발톱 같은 허기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제이 에드거와 알렉산더 랜스키가 만들어 내는 질걱대는 마찰음은 듣지 않으려고 애썼다. 속이 날카로웠다. 그 모든 게 그저 허기라고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 문 열면,”
알렉산더 랜스키의 말은 듣지 않으려고 애썼다. 세스는 그대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그러자 알렉산더 랜스키가 제이 에드거를 아무렇게나 밀쳐 내고는 달려왔다.
쾅!
세스가 막 열려던 문이 소용없이 도로 닫혔다.
“가만 안 둔다고 했지.”
알렉산더 랜스키의 낮고 위협적인 음성이 코앞에서 부서졌다. 세스는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알렉산더 랜스키의 입술을 쳐다보았다.
그 입술은 방금 전까지 다른 사람을 물고 핥아 댔다. 그저 그뿐이었는데 세스는 위를 갉아 대는 허기를 느꼈다.
“가서…… 하던 거나 마저 해.”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의 눈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그의 입술이 미소를 짓는 것처럼 잠깐 벌어졌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눈을 가린 채 물었다.
“질투해?”
“……아냐.”
“그럼 왜 달아나는데?”
“질투 안 해.”
“그 표정은 뭐야?”
“내가 뭘…….”
“눈이 빨개. 울 것 같잖아.”
“아니…… 읏,”
갑자기 알렉산더 랜스키의 손이 허리춤 안으로 들어와 페니스를 움켜쥐는 바람에 세스는 혀를 깨물었다.
눈을 가린 손이 치워졌다. 세스는 단 한 번도 지어 본 적이 없는 날 선 표정으로 알렉산더 랜스키를 노려보았다.
“하지 마.”
“그런데 왜 서 있어?”
“……뭐?”
“앞에 젖었잖아. 몰랐어?”
알렉산더 랜스키가 엄지손가락으로 귀두의 앞부분을 쓸었다. 미끈한 점액이 살갗 사이에서 미끄러지는 그 감각에 세스가 진저리를 쳤다.
“이러지 마. 나한테 왜……,”
“질투는 나는데 하고는 싶었어?”
알렉산더 랜스키가 악력을 더해 페니스를 움켜쥐며 세스의 허리를 끌어당겨 몸에 밀착시켰다.
엿 먹일 땐 짜증나더니 질투는 귀엽게 하네. 알렉산더 랜스키가 그런 소리를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혀가 말보다 빨리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세스가 오르르 돋는 소름을 느끼는 동안 알렉산더 랜스키는 빠르게 입술을 미끄러트려 세스의 턱을 깨물었다.
“새침은 그만 떨어. 이유가 뭔지는 몰라도 이제 상대해 준다잖아. 일 년이나 혼자서 딸 쳤으면 할 만큼 했어. 보상은 받아야지.”
“난 안…… 안 그랬어.”
“거짓말은 이제 슬슬 질리는데.”
달깍. 알렉산더 랜스키의 손이 진즈의 버튼을 풀었다. 세스 그린은 파편처럼 부서진 힘들을 기워 미욱한 저항을 했다.
“하지 마.”
“왜? 질투는 네가 했잖아.”
“안 했……다니까.”
“그럼 왜 울었는데?”
“안 울었어.”
“거짓말하지 말라니까.”
세스의 바지를 흘러내리게 내버려 둔 알렉산더 랜스키는 옷자락을 헤집어 제 페니스를 꺼냈다. 흉흉할 정도로 곧은 페니스가 아무런 준비도 없는 입구를 파고들어 왔다. 세스가 반사적으로 몸을 틀며 알렉산더 랜스키를 밀어냈다.
랜스키가 세스의 허리를 단단히 고정시켰다. 잘 벌어지지 않는 틈바구니를 강제로 밀치고 들어오는 힘은 잔인할 정도였다. 입구를 팽팽하게 잡아 늘리며 성기의 머리 부분이 들어왔다.
“아, 아파.”
세스의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옅게 웃으며 세스의 눈물을 핥았다.
“봐. 울었잖아.”
“이건 네가 일부러……!”
알렉산더 랜스키는 얇은 점막으로 이루어진 연한 속살을 귀두로 쿡 눌렀다. 세스가 그의 옷자락을 쥐어뜯으며 소리를 질렀다.
“아프다고!”
“우니까 보기 좋네. 그렇게 질투가 났어?”
“질투한 게 아니라…… 아윽!”
세스가 알렉산더 랜스키의 어깨에 매달려 신음을 토했다. 눈물이 스며들어 번져 나간 어깨가 곧 축축해졌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세스를 벽에 붙인 뒤 온통 젖어 있는 얼굴을 소리 나게 핥았다.
“넌 날 좋아하잖아, 남창. 다른 놈하고 있는 걸 보면 질투하면서 울 만큼. 안 그래?”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의 혀를 먹어 버렸다. 뜨거운 혀가 솟구치는 감정들을 녹였다. 벌을 주듯 다짜고짜 아래를 헤집은 고통도 녹여 사라지게 만들었다.
온몸의 근육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저항은 불가능했다.
세스가 알렉산더 랜스키의 혀를 받아 삼켰다. 힘을 빼고 그가 안는 대로 안겼다. 마른 손가락이 저를 단단히 받친 어깨에 힘없이 내려앉았다.
원하는 만큼 세스를 집어 삼키던 알렉산더 랜스키가 입술을 뗐다. 세스를 살짝 들어 삽입한 자세에서 그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애매하게 흘러 닿는 곳은 도무지 뭐라 표현하기 난해한 표정을 짓고 있던 제이 에드거였다.
“넌 그만 가라. 볼 건 다 봤을 거 아냐.”
제이 에드거는 핏자국이 배일 만큼 세게 입술을 씹었다.
“……이러려던 거였어? 애초에?”
“뭘 묻고 그래.”
“나를…… 작정하고 속였어?”
“뭐든 좋다고 따라온 게 너잖아.”
“나보다 남창이 낫다고?”
파르르 떠는 파란 눈매가 독기를 품기 시작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제이 에드거의 시선을 흘려 넘겼다.
“그래.”
일로인의 왕자는 게이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일로인에서 가장 예쁜 게이한테는 관심이 없었다. 대신 그는 남창을 마음에 들어 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아니, 일 년 동안 저를 보며 주차장에서 딸을 쳤다는 이유로.
제이 에드거에게는 도무지 용납이 되지 않는 이유였다.
“하……! 이게 무슨…… 이러고도 내가 가만있을 것 같아?”
“가만 안 있으면.”
그게 아니라면. 네가 뭘 어쩌려고. 알렉산더 랜스키는 그런 의미를 담아 무성의하게 고개를 돌렸다. 하얗게 질린 세스의 얼굴로 돌아온 시선이 다시 흥미를 드러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제이 에드거의 존재를 잊어버린 알렉산더 랜스키가 차가워진 세스의 살갗을 쓸었다.
제이 에드거가 아드득, 이를 갈다 내뱉었다.
“……다 말할 거야. 왕자가 남창하고……,”
“그렇게 해.”
알렉산더 랜스키가 이유 모를 진득한 웃음을 흘렸다. 그가 한 손을 뻗어 세스의 머리통을 끌어당겨 뺨을 맞닿게 했다.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이 지나치게 창백한 얼굴과 기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남창은 이제 나하고 자기로 했다고. 이 녀석은 내 전용이 됐다고. 가서 말해.”
“못 할 줄 알아? 진짜 그럴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 이 녀석 만지려면 내 허락부터 받으라는 말도 해 주고. 수고해라.”
“…….”
제이 에드거가 입을 다물고 한 사람처럼 엉켜 있는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의 등을 느리게 다독이며 제이 에드거에게 화장실 문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나가.”
“…….”
쾅!
제이 에드거의 몸이 빠져나간 빈 공간에 신경질적인 소음이 들어찼다. 세스가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알렉산더 랜스키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정말 말하면…… 어쩌려고. 왜 이러는 거야. 에드거는……,”
“됐어. 심부름 좀 시킨 것 가지고.”
알렉산더 랜스키는 느슨하게 웃으며 혀로 세스의 입술을 벌렸다. 세스는 입 속에서 그가 속삭이는 말을 들었다.
“너는 다른 거 말고 나한테나 신경 써.”
“나는,”
“지금 엄청 꼴리는데. 한번 할까?”
“……후읏!”
갑자기 그가 허리를 거세게 추어올리는 바람에 세스가 급작스런 신음을 내뱉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삽입이 섹스로 이어지진 않았다. 목 쉰 소리로 내뱉던 신음이 멎었다 싶은 순간 세스 그린은 정신을 잃고 몸을 축 늘어트렸다. 이틀 전보다 더 따듯하고 습해서 기분이 좋다고 생각했던 몸은 사실 앓던 중이었다. 끈적하게 흐르던 땀은 흥분해서가 아니라 열을 식히기 위해서였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대충 퍼스너만 올린 채 세스 그린을 안고 뛰었다.
남창을 안고 달려가는 일로인의 왕자를, 다들 수업 중에 창밖으로 목격했다. 학교 전체가 일제히 소란스러워졌다. 눈으로 보지 못한 아이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귀로 전해 들었다. 아직 왕자와 남창이 무슨 관계였는지 모를 시점이었기에 두 사람에 대한 얘기는 여러 가닥으로 나뉘어 하루 종일 일로인을 뜨겁게 달구었다.
존 리든 역시 세스 그린을 업고 주차장으로 뛰어가는 알렉산더 랜스키를 보았다. 하루 종일 불안과 짜증이 얽힌 채로 있던 존 리든은 결국 오후의 풋볼 연습에서 무리한 태클로 팀 메이트에게 부상을 입혔다.
* * *
똑똑.
세스는 투명한 액체가 한 방울씩 떨어지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낯선 곳이었다. 높은 천장이 묵직하고 고풍스러운 원목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테두리마다 새겨진 조각이 흐릿하게 눈에 들어왔다. 세스 그린은 이런 천장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고개를 돌렸다. 투명한 액체의 정체는 링거액이었다.
“……!”
세스가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일으켰다. 순간 온통 낯선 이곳에서 유일하게 낯설지 않은 음성이 귓가에 들러붙었다.
“일어났어?”
좁은 시야에 초점을 모으자 알렉산더 랜스키의 얼굴이 드러났다. 세스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일그러졌다.
“여기…… 어디야?”
“급성 영양실조라던데. 엊그제 내가 간 뒤로 계속 굶은 게 맞아?”
“설마 너희 집이야?”
“네 부모는 대체 뭐 하는 인간들이야? 신고하려다가 참았어. 네 입으로 얘기해.”
“너희 집이냐고.”
“신고할까?”
“…….”
세스는 몸을 덮고 있던 시트를 걷고 팔에 꽂아 놓은 주삿바늘을 집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다가와 세스의 손목을 눌렀다.
“뽑기만 해 봐.”
“……집에 가야 해.”
“가서 영양실조나 걸리려고?”
“갈 거야.”
“그래라. 신고해 줄게. 아는 변호사는 있어?”
“…….”
세스가 알렉산더 랜스키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랜스키는 단호했다.
사실 그는 화를 내는 중이었다. 대안학교라지만 일로인은 값비싼 사립학교에 더 가까웠다. 더는 받아 줄 학교가 없을 때 돈을 내고 기어들어 오는 넉넉한 중산층 출신의 등신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곳에서 영양실조 환자를 목격할 줄은 몰랐다. 대체 어떤 인간들이 제 아들을 이따위로 굶겨 죽이고 있는지 기가 찼다. 더 기가 찬 것은 아무 말 없이 살고 있는 세스 그린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가 세스 그린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일로인의 공식 남창. 마르고 창백한. 유령처럼 표정 하나 없는 얼굴. 하지만 하얀 얼굴에 드리워진 검은 머리카락이 만들어 내는 대비가 선명해서 어쩌다 시선이 닿으면 곧장 알아볼 수 있었다.
언제나 그를 바라보고 있는 갈색 눈은 얼마 전까지 제대로 한 번 마주친 적도 없었다. 그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게 전부였다.
세스 그린이 왜 지금 이 시간에, 제 침대에 누워 랜스키가의 주치의로부터 급성 영양실조 진단을 받고 주삿바늘에 꿰어 있는지 그도 잘 알지 못했다. 심지어 3층 화장실에서 실컷 신음을 내뱉다 갑자기 앞으로 고꾸라진 세스 그린을 들쳐 업고 정신없이 주차장으로 달려가 주치의에게 전화를 걸어 당장 오라고 소리를 질러 댔던 이유마저 모호했다.
결국 세스 그린이 눈을 뜰 때까지 그는 꼼짝도 않고 이 방에 묶여 있었다.
그런데도 세스 그린은 자신이 이곳에 있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중이었다.
대체 왜. 나도 네가 여기 있는 이유를 알 수가 없는데.
“너희 집에 있으면 안 돼.”
“왜?”
간단한 질문이었는데 들려오는 대답은 한참을 머뭇대다 겨우 이어졌다.
“너는…… 랜스키니까. 네 가족들이 보면 좋을 게 없어. 들키기 전에 가야 해.”
세스 그린은 내내 어깨를 움칠거렸다. 좌우로 움직이는 동공은 정말로 겁을 먹은 것처럼 보였다.
“여긴 별채라서 들여다볼 사람 없어.”
“그건…… 아냐, 그래도 가야 해. 난 여기 있으면 안 돼.”
세스가 주삿바늘을 움켜쥐었다. 망설임 없이 그것을 뽑아 들기 전에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의 손을 눌렀다. 저도 모를 이유로 눈매가 사납게 변했다.
“손 떼.”
“…….”
시선에 밀렸던지 세스가 주춤, 손에 힘을 풀었다. 그러자 다시 표정을 바꾼 알렉산더 랜스키가 침대에 올라 세스의 옆에 털썩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설마 아직도 중세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 테고.”
“가야……,”
“이유가 뭐야?”
“…….”
시선을 피하는 옅은 갈색 눈에는 불안이 선명했다. 제 손바닥 아래 짓눌려 있는 마른 손등이 파르르 떨려 왔다. 그 진동에 어쩐지 자신도 떨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짜증스럽게 눈썹을 구겼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꾸 겁을 먹고 떠는 세스 그린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키는 대로 굴기는 했어도 거칠게 대한 적은 없었는데 그는 자신이 못 할 짓이라도 한 것처럼 내내 달아날 생각이나 했다.
“좋아. 보내 줄게. 그 전에 사실대로 말하면. 에드거와 무슨 짓을 했던 거야?”
갈색 눈에 갈등이 피어올랐다. 랜스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 네가 나한테 할 얘기는 안 하고 계속 도망이나 치고 있잖아. 그건 쫓아오라는 얘기밖에 안 돼. 부정하려면 해 봐.”
“…….”
마침내 세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누르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얘기해. 처음부터. 헤이워드 사진은 네가 찍은 게 맞아?”
“……아니.”
“그럼 에드거가 찍어서 넘겼겠군. 넌 왜 그런 수작을 거들었어?”
“에드거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말하겠다고 해서.”
“뭘?”
“내가 주차장에서 널 쳐다본다고.”
알렉산더 랜스키가 잠깐 웃었다. 일로인에서는 그를 쳐다보지 않는 인간을 골라내기가 더 쉬울 것이다. 그중에 남창이 하나 섞였다고 해도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그 보잘것없는 이유에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왜 그토록 필사적이 되어 좋아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려 드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이유 한번 신선하네. 그러니까 네가 직업 남창이 되겠다고 나선 이유도 별거 아닐 거 같은데. 그건 왜 그랬어?”
대답이 또 잠시 멈췄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는 세스의 머리카락을 살짝 잡아당겨 그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말하면 보내 준다잖아. 계속 여기 있을래?”
세스가 한숨을 쉬듯 입을 열었다.
“그건 네가…… 게이라고 소문나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러니까 왜? 네가 그걸 왜 신경 쓰는데.”
“네가 랜스키라서.”
그 대답은 벌써 여러 번 들었다. 대답이랄 수도 없는 대답이었다. 남창과는 상관도 없을 이름이 뭐라고 이 고집을 부려 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제대로 대답 안 해?”
세스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가 스스로 눈을 마주치는 순간은 아주 드물다는 걸 알렉산더 랜스키도 깨달았다.
“랜스키가는…… 무서우니까.”
“뭐?”
세스 그린의 대답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랜스키가에 문제가 있다는 말은 사실일지 몰랐다. 그는 학창시절에 재미삼아 게이 섹스를 몇 번 해 보는 것은 별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아예 게이라고 소문이 나는 건 또 다른 일이었다. 부친은 그가 게이라는 소문을 탐탁지 않게 여길 게 뻔했다.
그러나 그걸 세스 그린이 대신 걱정해 주는 건 확실히 문제가 있었다.
대체 왜. 이제껏 아무런 상관도 접점도 없던 일로인의 남창이 뭐기에. 이제껏 말 한 마디 나눠 본 적 없던 그가 무슨 이유로.
“네가 뭐라고?”
세스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고작 그런 이유로 직업 남창이 되겠다고 말한 거야?”
“……에드거라면 돈을 받을 테니까.”
잘생긴 눈썹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남창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그래서 네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생각 안 해 봤어?”
“그건 상관없어. 어차피 나는…….”
세스가 머뭇대며 말을 멈췄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끈질기게 뒤를 채근했다.
“어차피 너는?”
“……별거 아니니까. 네가 괜찮으면.”
“…….”
알렉산더 랜스키는 잠시 숨을 멈췄다. 피부 위로 연한 소름이 번졌다.
저 한심한 말은 그 어떤 것도 계산되어 있지 않았다. 일부러 그를 자극할 말을 골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세스 그린이 그런 성격이었다면 애초에 일이 여기까지 흘러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저건 모두 진심이었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도, 그러니까 그렇게까지 할 수 있다는 말도.
“그게 어떻게……,”
알렉산더 랜스키가 눈매를 찡그리며 무슨 말인가를 내뱉다가 멈췄다.
그게 어떻게 좋아한다는 말이 아닌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내 침대에 있는 것도 싫고, 나와 어울린다는 소문이 나는 것도 싫고, 나와 섹스하는 것도 싫은데…… 나만 괜찮으면 된다고?”
세스는 대답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손은 여전히 주삿바늘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의 손가락 끝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세스가 주삿바늘을 뽑으려 든다면 그 전에 말릴 생각이었다.
“대답해, 남창.”
알렉산더 랜스키가 다시 세스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코가 맞닿을 정도로 바싹 끌어당겨 억지로 눈 안쪽의 아주 깊은 곳을 들여다보게 만들었다.
“……반년.”
오래도록 알렉산더 랜스키의 집요한 시선을 견뎌 내던 세스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대답을 토해 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눈썹을 구기며 되물었다.
“반년?”
“반년이면 너는 졸업하잖아.”
“그래서?”
“나는…… 여기 남아.”
“그런데?”
“반년은 짧아.”
반년은 짧아. 나는 그 반년만 기다리면 돼. 반년만 너를 참아 내면 돼.
세스가 뒷말을 삼키는 동안 알렉산더 랜스키는 느닷없이 폭소를 터트렸다. 허리를 젖히고 눈가에 눈물이 맺힐 정도로 크게 웃어 댔다.
세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 이제 알겠다.”
“…….”
알렉산더 랜스키는 이제 저 표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스 그린은 그가 이름도 알기 전부터 자신을 버릴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 애절함이나 멍청함은 이상할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성격하고는.”
알렉산더 랜스키가 불시에 손을 뻗어 세스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아차 하는 사이 이마가 알렉산더 랜스키의 어깨에 닿았다. 그가 반대편 손으로 세스의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헝클였다. 사람이 아니라 귀여운 애완견을 다루는 것 같은 손길이었다.
“뭐야, 그건. 애정 결핍인가?”
세스 그린은 상처 입고 떠도는 작은 개 같았다. 그리고 알렉산더 랜스키는 자신이 개를 별로 싫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개처럼 들러붙던 인간들은 언제나 있었다. 그런데 들러붙고 싶다는 눈짓만 오래도록 보내오던 수줍은 개는 막상 그가 다가가니 겁을 먹고 물러났다. 그 꼴을 보자 오기가 생겼다.
“그렇다고 달아나면 안 되지. 먼저 나타난 주제에.”
알렉산더 랜스키가 양손을 들어 세스의 뺨을 단단히 붙들었다.
“그럼 너는 이제부터 내 전용이야.”
세스가 움칫대며 고개를 뒤로 뺐다.
“싫어. 왜 이러는 거야. 너야말로 나한테 이럴 이유 없잖아.”
상처받은 개는 여전히 인간을 불신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의 뺨을 당겨 그대로 입술을 빨았다. 타액이 섞여 질척대는 소리가 탐욕스럽게 들려왔다.
“이유가 필요해?”
“……아니, 필요 없어. 나한테 이러지 마.”
“너한테는 먹이 주는 보람이 있을 것 같아.”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의 이마에 장난스럽게 제 이마를 쿵, 부딪쳤다.
“늦었어. 자고 가. 네 부모라는 미친 인간들은 별 상관 안 할 테니 괜찮지?”
세스가 커다래진 눈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안 돼. 싫어. 난…… 난 네 전용도 뭣도 아냐. 네 멋대로 말하지 마.”
“한 번만 더 싫다고 하면 바늘 꽂은 채로 해 버린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그런 얘기를 웃으면서 했다. 그는 세스가 겁을 먹고 움칠대는 모습마저 즐길 생각이었다. 한번 잘못 든 버릇을 고치려면 수고가 들기 마련이다. 처음부터 윽박질러 대는 것은 소용이 없었다.
“그거 영양제야. 다 맞을 때까지 더 자.”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 그린의 코밑까지 시트를 끌어 올려 덮었다. 그리고는 저도 그 옆에 누워 버렸다.
어쩌다 몇 달에 한 번씩 배런트의 저택에 오는 부친과 얼굴을 마주하기 싫다는 이유로 혼자 쓰는 별채는 늘 조용했다. 고용인은 그가 학교에 가 있는 사이에 다녀갔다. 냉장고에는 그날 한 음식이 가득했지만 늘 차가웠다. 베드룸이 세 개에 욕실이 세 개, 지하에는 영화 감상실과 피트니스 룸을 따로 갖추고 있는 별채에 인기척이 나는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옆에서 세스 그린이 힘없이 중얼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여기 있으면 안 돼. 가야 해.”
알렉산더 랜스키는 피식 웃으며 세스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계속 귀여운 척하려고 애쓰지 마. 네가 그럴수록 나는 자꾸 박고 싶어져.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들을래?”
손바닥 안에서 세스 그린이 뻐끔 입을 벌렸다가 다시 뻐끔 다물었다.
“알아들었으면 자. 얌전히. 깨어나면 먹이 줄게.”
“…….”
결국 세스 그린은 다시 간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고, 알렉산더 랜스키도 입을 막은 손을 치워 주지 않았다.
세스가 다시 잠이 들자 알렉산더 랜스키는 손가락 하나를 입술 사이에 넣고 입 안의 말캉한 점막이 주는 감촉을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