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6/23)

05.

“이러면 좋지 않아, 세스.”

세스는 일로인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퍼스트 네임으로 불러주는 상담사를 무심히 바라보았다. 사자처럼 풍성한 고수머리와는 달리 내내 차분한 표정으로 일관하는 상담 교사는 세스 그린의 상태에 대해서 그의 양부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네가 하는 상담은 모두 기록으로 남는다는 걸 알잖아. 갑자기 상담을 빠지거나 하면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어.”

“알아요.”

세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로인에 입학한 뒤 화장실을 제외하곤 가장 익숙한 공간이 되어 버린 상담실은 교장실과는 달리 단 한 차례도 인테리어를 바꾸지 않았다. 벌써 몇 년째 걸려 있는 구식 블라인드와 낡은 책상, 책장, 목록이 뻔한 몇 권의 책들, 액자 몇 개가 이 네모진 하얀 공간에 지루함을 더했다. 유일하게 생기가 넘치는 것이라고는 밝은 색 고수머리를 한 상담 교사 에밀리 고티뿐이었다.

“어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에밀리 고티는 한 번도 언성을 높이는 법이 없었다. 말투만큼이나 조곤조곤한 눈빛에 세스는 어쩐지 기운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갑자기 정신을 잃어서.”

“그래?”

일로인을 떠도는 가십에서 제외되어 있는 상담 교사는 정말로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대안학교라는 조건에 구색을 맞추기 위해 있는 상담실을 교칙대로 꾸준히 오는 학생은 얼마 되지 않았다. 세스 그린은 그중에서 가장 성실한 한 명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병원은 다녀왔어? 학교에 나와도 괜찮은 거야? 입원은?”

“……괜찮아요. 별거 아니라고 했어요.”

랜스키가의 주치의는 며칠 입원하는 게 좋겠다고 했지만 그건 곤란했다. 양부가 아직 출장 중이었다. 입원을 하게 되면 보호자인 양부에게 연락이 갈 게 분명했다. 세스는 졸업할 때까지 양부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제껏 자신 때문에 충분히 불행했던 사람이었다.

“병원 기록이 필요한데. 어느 병원이었지?”

세스가 대답 대신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에밀리 고티를 바라보았다. 상담 교사의 시선은 그저 차분했을 뿐, 그를 힐책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네가 거짓말로 상담을 피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런 일로 거짓말을 하는 성격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 단지 상담 날짜가 미뤄진 것에 대해 기록을 남겨야 해서 그래. 병원을 알려 주면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병원이 아니라…….”

“그럼?”

“따로 주치의를 불렀는데…….”

세스의 말끝이 작게 줄어들었다. 병원에 가는 대신 주치의를 부르는 경우는 드물었다. 배런트 카운티에서 그럴 만한 인간이라면 성이 랜스키일 것이다.

에밀리 고티가 안경을 밀어 올리다 미간을 찌푸렸다.

“주치의라니.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무슨 사정이 있었니?”

“그냥…… 어쩌다 랜스키하고 같이 있게 돼서.”

“랜스키? 알렉산더 랜스키 말이야?”

“……네.”

에밀리 고티가 인상을 풀고 세스를 바라보았다.

세스 그린이 거짓말을 하는 경우는 없었다. 거짓말을 하느니 차라리 입을 다물어 버리는 편이었다. 상담이 일 년 가까이 이어지자 세스는 상담 교사에게 어지간해서는 비밀로 간직하는 일이 없게 되었다.

처음 사물함 문에 거울을 붙인 날에도 에밀리 고티는 방과 후 세스와 상담실에서 만났다. 세스는 거울을 붙였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불안 증세를 보였다. 에밀리 고티는 피가 배어 나올 때까지 입술을 짓뭉개는 세스를 보며 누군가에 대한 동경이 죄는 아니라는, 꼭 심리학 전공서를 읽지 않아도 자라면서 누군가에게 한 번은 들어 봤을 법한 평범한 말을 무척 진지하게 들려주었다.

세스가 사물함 거울로도 모자라 주차장 벤치에서 알렉산더 랜스키를 훔쳐본다는 사실을 일로인에서 가장 먼저 알게 된 사람은 제이 에드거가 아니라 상담 교사 에밀리 고티였다.

“둘이 친해졌니?”

“……아니요.”

“그럼 왜?”

“랜스키가 알아 버렸어요.”

세스가 시선을 떨어트리며 눈썹을 엄지로 거칠게 문질렀다.

“내가 그간 쳐다봤다는 거…… 내가 자길 좋아한다는 것도 알아 버렸어요.”

에밀리 고티는 세스 그린을 볼 때마다 하고 싶은 얘기가 잔뜩 늘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 말들은 항상 입 밖으로 나가기 전, 제 안에서 꼬여 버린다는 것도.

세스 그린은 태어날 때부터 약물 중독이었다. 그를 임신했을 때부터 모친이 약물 중독자였다. 세스가 SERT 부족형이라는 것, 대뇌피질의 반응 영역이 일반인과 다르다는 것, 무기력증과 우울증을 평생토록 안고 살아야 한다는 것 또한 모체에서 유전된 약물 중독 증상이었다.

전공의도 아니고, 고작 고등학교 상담 교사가 다루기에는 벅찬 케이스였다. 에밀리 고티는 최선을 다해 세스를 돕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자신의 능력이 미치지 못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세스를 유지시키는 것은 그가 성실히 챙겨먹는 알약들이었다.

그럼에도 에밀리 고티는 세스 그린을 포기하지 못했다. 별반 도움도 되지 않는 상담에 꼬박꼬박 응하는 환자는 흔하지 않았다. 세스는 시키는 대로 처방약을 먹고 학교 수업도 거르지 않았다. 우울증으로 자신을 망치는 환자들은 얼마든지 있었지만 세스는 그러지 않았다. 남들 눈에는 그저 무기력한 것 같았지만 사실 세스 그린은 놀랍도록 성실하게, 긴 시간 꾸준히 우울을 견뎌 오고 있었다.

그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에밀리 고티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낫게 해 줄 수는 없어도, 곁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다.

“랜스키의 반응은 어땠어?”

“흥미가 생긴다고…….”

“너한테?”

“네.”

에밀리 고티가 진심 어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좋은 일이 아닐까? 랜스키가 세스 너를 좋아하게 될 수도 있는 일이잖아.”

세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알렉산더 랜스키가 주치의를 불러 의식을 잃은 그를 보살폈다는 뜻이었다. 에밀리 고티는 거기에서 나쁜 점을 찾아내지 못했다.

“전 싫어요.”

그러나 세스의 생각은 달랐다. 에밀리 고티의 미소가 반으로 줄어들었다.

“어째서?”

“랜스키가 절 좋아하는 건 싫어요.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고…… 랜스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세스 그린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불안정했다. 뭔가가 잘못되어 간다는 신호였다.

“제이 에드거가 소문을 낸다고 했는데도 랜스키는 그러라고 했어요. 전 그게 싫어요.”

“왜 싫은데?”

“랜스키가 남창과 어울려 다닌다는 소문이 좋을 리 없잖아요.”

“그건 애들이 하는 말이잖아. 넌 남창이 아니야.”

“남창이 맞을지도 몰라요. 돈은 안 받지만.”

세스가 흐릿해진 시선을 돌렸다. 침을 삼킨 것은 그가 아니라 에밀리 고티였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애들은 다들 그렇게 알고 있잖아요. 내가 아닌 건 상관없어요.”

“아니, 절대 그렇지 않아. 네가 아닌 게 가장 중요해.”

세스는 에밀리 고티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째서요? 그래 봤자 소문은 랜스키가 남창하고 잔다고 날 텐데.”

“세스 그린,”

“그래서 못 견디겠어요. 소문이 날 거라고 아무리 말을 해도 소용이 없어요. 랜스키는 내 말을 안 들어요. 싫다고 하면 싫다는 걸 해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더는 가까워지면 안 되는데.”

에밀리 고티가 잠깐 한숨을 쉬었다.

상담은 오늘도 실패였다. 자신이 하는 말은 세스에게 닿지 않았다. 좀 더 도움이 되는 말을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능력 밖의 일이었다.

“랜스키가 너를 괴롭히니?”

“그건…… 잘 모르겠어요. 싫다는 말을 잘 안 들어요.”

“그럼 랜스키가 널 그렇게 대할 때 네 기분은 어때?”

세스가 잠깐 생각을 하더니 답했다.

“자해하고 싶었어요.”

에밀리 고티의 안색이 변했다.

“그래서, 자해했어? 어디를?”

“아뇨. 어쩌다 보니 랜스키가 계속 옆에 있어서…… 하고 싶었는데 잊고 그냥 자 버렸어요.”

“랜스키한테는 얘기했어? 네가 어떤 상태라는 걸?”

“아뇨.”

에밀리 고티가 책상 너머로 손을 뻗어 세스의 손을 잡았다. 세스가 불안정하게 흔들리던 고개를 들어 상담 교사의 눈을 마주했다.

“왜요?”

“네 상태를 알리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야. 더군다나 랜스키가 네게 자해 충동까지 일으킨다면. 랜스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해. 그래야 서로 조심할 수 있어.”

세스가 잠시 침묵했다. 에밀리 고티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동공을 바라보며 살며시 세스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싫어도 해야 해.”

“그때 한 번뿐이었어요. 그 뒤로는 별로…….”

“그때?”

세스가 의미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초점이 흐려진 눈동자는 더 이상 이쪽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상담을 벗어나 자신의 고치 속으로 틀어박히는 것은 세스에게 좋은 일이 아니었다. 에밀리 고티가 다시 세스의 손을 잡았다.

“세스 그린. 대답해.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데 자해하고 싶었던 거야?”

“안에다 사정했어요. 하지 말라고 했는데.”

“뭐……?”

에밀리 고티는 놀란 나머지 세스의 손등에 작은 손톱자국을 남겼다. 세스는 아프다는 신호를 보내는 대신 제 손등을 파고드는 손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잠시 후 실수를 깨달은 에밀리 고티는 당황한 표시를 내며 사과를 했고, 세스는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래에 손가락을 넣어서 정액을 빼 줬어요. 그게 제일 싫었던 것 같아요. 그때 정말 자해하고 싶었고.”

사정이 다른 만큼 일로인에서는 섹스하지 않는 아이들이 더 드물었다. 그러나 그 섹스는 에밀리 고티의 상식을 비웃듯 무절제하고 때로는 무자비했다. 가끔은 일로인의 상담 교사직을 받아들인 사실에 회의가 느껴질 때도 있었다.

세스 그린에게 남들보다 더 애착을 갖는 이유는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세스 그린은 백지처럼 선량했다. 그 사실이 우울에 가려져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른다는 게 안타까웠다.

“그건…… 혹시 랜스키가…… 제멋대로 했다는 건 강간이었다는 뜻이야?”

힘겹게 말을 마치고 나서도 강간이라는 단어가 여전히 입 안에 머무는 것 같아 소름이 끼쳤다.

“신고할 만한…… 그런 일이라도 있었니?”

세스가 에밀리 고티를 한참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없어요. 나도 몇 번씩이나 해 버렸고. 랜스키가 나쁘게 대한 것도 없었어요. 싫다는 걸 하긴 했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렇게 싫었던 것 같진 않아요. 키스했을 때 혀를 씹어서 피가 났는데도 랜스키는 그냥 참더라고요. 난 당연히 때릴 줄 알았는데.”

말하는 도중 세스 그린의 눈가가 우울로 구겨졌다.

“랜스키가 계속 친절하게 굴었는데…… 그게 견디기 어려웠어요. 랜스키가 친절한 게. 그건 자꾸만…….”

“자꾸만?”

“자꾸만…….”

세스는 끝내 답을 말하지 못했다. 에밀리 고티는 세스의 손을 잡아 주고 싶었지만 손등에 아직도 남아 있는 손톱자국을 보고는 그런 생각을 흘려버렸다.

“세스 그린.”

“말하세요.”

“랜스키와 친하게 지내려면 꼭 네 상태에 대해서 말하도록 해. 이건 의무야. 너를 감정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드는 상대와 가까워지는 것은 위험한 일이야. 너한테도 안 좋은 일이지만 상대도 너한테 영향을 받을 수 있어. 네가 불편하다고 하면 내가 랜스키와 따로 얘기할게.”

세스가 또다시 콧등을 구겼다. 세스가 드러내는 몇 안 되는 거절의 표시였다.

“얘기하기 싫은데……. 그럼 가까이 지내지 않으면 되나요?”

“그건 반칙이잖아. 성관계를 맺었다면 이미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는 뜻 아냐?”

“다신 안 할 거예요. 아무리 하자고 해도 절대로……,”

뭔가를 중얼거리던 세스가 고개를 돌려 화난 표정을 드러냈다. 꽤나 드문 일이라서 에밀리 고티는 약간 놀랐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 그린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세스 그린이 애써 구축해 놓은 불안정한 평화를 일로인의 폭군이 잔인하게 부숴 놓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었다.

“랜스키가 불편하면 가까이 지내선 안 돼. 네가 오래도록 좋아했던 것과는 별개로, 랜스키와 가까이 지내는 게 네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 같진 않아.”

“저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에밀리 고티는 세스를 향해 안쓰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상태를 말하기 싫은 건 랜스키뿐이니?”

“아마도요.”

“그럼 네 상태를 말해도 괜찮을 것 같은 상대를 찾아봐. 누군가와 친해지면 랜스키보다 그 사람이 더 좋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지는 않을 텐데.”

고집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세스 그린은 알렉산더 랜스키에 관해서만은 달랐다. 에밀리 고티는 그게 가엾고도 안타까웠다.

“함께 시간을 편하게 보낼 수 있는 친구가 생기면 네 삶의 많은 부분이 달라질 거야. 랜스키를 향한 감정도 달라질 수 있어.”

“아닐 텐데…….”

“아니라고만 하지 말고 한번 시도해 봐. 랜스키와 멀어지고 싶다고 했잖니. 그럼 그렇게 되도록 너도 애를 써야지. 감정은 거리를 두면 차츰 사라질 수 있어.”

사실 반쯤은 에밀리 고티의 희망 사항 같은 얘기였는데, 세스는 의외로 그 말을 진지하게 들었다.

“……. 그렇다면요.”

“그래. 그렇게 해 봐. 분명히 달라지는 게 있을 거야. 그리고 다음 상담에는 늦지 마. 물론 그 전에도 얘기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언제든 찾아오고. 나한테 전화를 해도 괜찮으니까.”

“네.”

세스 그린은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 조용히 문을 열고 상담실을 나갔다.

“……커피라도 마셔야겠다. 아주 진하게.”

방금 전까지 세스가 앉아 있었던 빈 의자를 바라보던 에밀리 고티가 기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 *

“집으로 가? 태워 줄게.”

상담실을 나선 세스 그린을 중간에 가로챈 것은 존 리든이었다. 세스에게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사실 존 리든은 어제부터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오늘따라 겹치는 수업도 없는 데다 교실이 있는 층마저 달라서 하루 종일 세스 그린의 그림자도 마주치질 못했다. 존 리든은 지금 공복 때처럼 사나워진 상태였다.

세스 그린이 제 팔을 붙든 존 리든의 커다란 손을 뿌리치는 대신 가만히 바라보다 말했다.

“못 들었어?”

“뭘 못 들어?”

“제이 에드거가…… 무슨 말 안 해?”

“마주친 적도 없어.”

그 밥맛없는 새끼. 존 리든이 뒤에 욕설을 덧붙였다. 세스가 상담실에서처럼 콧등을 작게 구겼다.

“애들이 이상한 소리 하지 않아?”

일로인에서 소문은, 특히나 알렉산더 랜스키가 중심에 선 소문이라면 그 속도는 무서울 정도로 빨랐다.

“무슨 소리? 너 무슨 사고라도 쳤어?”

“아니…… 그럼 됐어.”

존 리든처럼 친구가 많은 녀석이 소문에서 열외가 되었을 리는 없을 테니 제이 에드거가 심부름을 하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일단은 안심이었다.

“다행이다.”

세스가 작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존 리든은 여전히 세스의 팔을 붙든 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럼, 다행이지. 내가 아니었으면 이 시간에 어떻게 집에 가려고 했어?”

“걸어서…….”

“닥쳐. 내가 어제 사고 치는 바람에 일주일 연습 금지가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냐고. 넌 오늘 운 좋은 줄 알아.”

세스 그린은 아직 존 리든이 풋볼 연습 중에 팀 메이트 패트릭 윌키의 어깨뼈를 탈골시킨 일을 모르고 있었다. 존 리든이 짜증나는 것은, 그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에도 세스 그린은 도통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거나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윌키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줘?”

“아니.”

그런 식이었다. 존 리든이 짜증을 부렸다.

“좀 궁금해하면 안 되냐? 아니면 좋아하기라도 하든가.”

“뭘 좋아해?”

“앞으로 일주일간은 내가 널 태워다 줄 수 있다는 소리잖아.”

세스가 멀뚱한 눈동자로 저를 올려다보았다. 순간 짜증은 아예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세스 그린이 지금처럼 빤히 눈을 마주쳐 오는 순간은 드물었다. 그래서 존 리든은 그새 거짓말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미쳤지. 고작 저런 게 좋아 죽겠다니. 진짜 등신이 다 됐어.

“아무튼 태워다 줄게. 그러니까 너도 등신처럼 랜스키한테 끌려 다니지 마.”

말이 되는 소리는 아니었다. 자신이 끌고 가는 것은 괜찮고 랜스키가 끌고 가는 것은 등신 같다니.

핑곗거리가 하나 있긴 했다. 랜스키는 세스 그린이 이상하다는 것만 알지 복잡한 정신과 질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모를 것이다. 그러니 랜스키보다는 저가 백번 나았다. 그는 세스 그린이 아무리 등신 같은 짓을 해도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실 그마저도 등신짓이었다. 대체 왜 스스로를 일로인의 왕자와 일일이 비교하고 있는지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언제부터 이 등신짓이 시작됐는지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어제, 세스 그린이 알렉산더 랜스키에게 업혀서 학교를 빠져나간 이후부터였다. 지금도 존 리든은 상담실 문이 잘 보이는 곳에 30분도 넘게 서 있었다. 상담이 언제 끝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랜스키와 마주칠 것 같다는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던 탓이었다.

존 리든은 이거 놔줘. 난 걸어갈 거야, 라고 말하는 세스의 팔을 더욱 힘주어 잡으면서 핑계를 늘어놓았다.

“난 좀 그래. 랜스키가 보란 듯 너와 얽히려 드는 거 말이야. 헤이워드가 잠잠한 것도 수상하고. 헤이워드가 그 성격에 랜스키가 다른 인간하고 어울려 다니는 꼴을 얌전히 두고 보겠냐고. 왠지 랜스키가 졸업하기 전 뭔가 지저분하고 유치한 일을 벌이려고 하는 것 같단 생각 안 들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랜스키가 그렇게까지 더러운 족속은 아니었다.

왕자가 왕자다운 점은 패거리에 휩쓸려 다니지 않기 때문이었다. 랜스키는 그저 랜스키였다. 헤이워드 패거리가 저를 등에 업고 일로인을 휘젓고 다닐 때에도 그는 남의 일처럼 한 발짝 물러나 있었다. 왕자의 여자 친구 밀레나 헤이워드는 일로인 안에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랜스키와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었다.

가끔 알렉산더 랜스키를 보면 진짜 왕자처럼 보일 때가 있어서 입맛이 써지곤 했다. 뭐든 손에 지니고 있고 뭐든 방해받을 게 없는 자신의 왕국에서, 저 높은 곳에 권태롭게 앉아 아랫것들이 노는 꼴이나 구경하는 인간 같아서.

젠장. 지저분하고 유치한 건 누구냐. 존 리든은 입 속에서 혀를 한번 씹었다.

“일단 헤이워드는 조심하란 말이야. 랜스키와 헤어진 걸 어떻게 분풀이할지 모르니까. 게다가 정말로 헤어진 건지 아닌지도 모르고.”

말이 안 되는 소리를 내뱉고 있으려니 스스로가 한심했다. 존 리든은 세스의 팔을 더욱 꽉 움켜쥐었다. 얼굴이 슬슬 달아올랐다.

“그러니까 내가 태워다 줄게.”

젠장. 진짜 등신짓이네. 헤이워드를 조심하는데 내 차를 탈 이유가 뭐야. 내가 들어도 개소리네. 시팔, 왈왈.

“……왜 나를 걱정해?”

그가 내뱉는 시답잖은 말들을 가만히 듣고 있던 세스 그린이 물었다. 존 리든은 세스를 붙들었던 손가락에 힘이 스르륵 풀려 가는 것을 느꼈다.

“걱정되니까.”

“왜?”

“넌 위태위태하잖아. 약해 빠진 주제에 적은 계속 늘리고 있고. 어제는 화장실에서 쓰러졌다며. 그걸 랜스키가 발견한 거야? 하여간 어제는 운 좋았던 거다. 그걸 윌키 같은 호모포비아가 봤으면 너는 무슨 꼴이 됐을지 몰라.”

말을 하다 보니 이건 좀 그럴싸하게 들리는 것 같다가도 또 자기모순에 빠져 버렸다. 방금 전까지는 랜스키를 경계하라고 했으면서 지금은 또 랜스키라서 다행이었다니. 존 리든은 9학년 때 치렀던 지능지수 테스트 결과를 떠올렸다. 그땐 분명 나쁘지 않았다. 운동을 하다 보니 머리가 심각히 나빠진 모양이었다. ……제기랄.

“……화장실에서 쓰러진 건 맞는데. 랜스키가 발견한 건 아냐.”

“그럼?”

존 리든은 그가 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세스가 꼬집지 않은 사실에 반색하며 재빨리 말을 받았다.

“그럼 랜스키는 왜 그런 거야?”

“랜스키 때문에 그렇게 돼서.”

세스는 어제 랜스키가 자신을 집으로 데려가 주치의를 불러 치료를 받게 한 것은 책임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 전에도 그랬다. 랜스키는 굳이 그가 깨어나길 기다려 정액을 빼 주고 더러워진 몸을 닦아 주기까지 했다. 매너 없다는 소문이 정말로 싫은 모양이었다.

관심이 간다느니 하는 말은 거짓말일 것이다. 거짓말이어야 했다. 세스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존 리든의 눈썹이 굵은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랜스키 때문이라고? 랜스키가 무슨 짓을 했는데.”

“하지 말라는데 넣었어. 몸이 안 좋아서 못 버틸 것 같았는데. 그래서 쓰러졌던 것 같아.”

“그런 씨……!”

풋볼팀 연습 때나 쓰는 더러운 말들이 목구멍을 뚫고 뛰쳐나오려다가 멎었다. 예의를 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욕을 내뱉어야 할 대상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랜스키가 뭘 해? 화장실에서 넣었다고? 그것도 억지로?

무엇보다 가장 화가 났던 것은, 자신이 그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이런 등신 새끼! 그 얘길 왜 이제야 해!”

“……그 얘길 내가 왜 너한테 해야 해?”

“뭐? 그럼 왜……!”

할 말이 사라져서 존 리든은 또다시 중간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래, 대체 왜?

“따라와.”

고개를 한번 크게 털어 낸 존 리든이 세스를 잡아끌었다.

“어딜?”

“병원. 경찰서. 일단 병원 먼저. 씨발, 그놈의 왕자. 강간으로 처넣어 버리게.”

존 리든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배런트 카운티에서 알렉산더 랜스키를 강간죄로 기소할 검사가 있기나 할까? 아니, 그 전에. 사건을 접수할 경찰이 하나라도 있을까? 이걸 대체 어떻게 해야지?

“강간 아니었어. 그리고 병원 안 가도 괜찮아. 의사가 다녀갔어.”

세스 그린이 과열되기 직전의 머릿속에 찬물을 끼얹어 주었다.

“왜 강간이 아냐! 싫다는데도 했다며!”

“아냐.”

“그거 맞다니까?”

“아냐. 랜스키는 내가 몸이 안 좋은 걸 몰랐어. 싫다는 말을 안 들은 건…… 그냥, 내가 거짓말로 그러는 줄 알아서 그래.”

들려오는 대꾸는 어이가 없었다. 어이가 없을 만큼 그를 화나게 했다.

존 리든은 세스 그린을 한 대 치고 싶었다. 네 몸을 좀 소중히 여기라는, 그런 상담 교사 같은 소리를 진심으로 해야 될 때가 있으리라고는 이제껏 생각도 해 본 적 없었다.

“내가 싫어하지 않았어. 싫다고는 말했지만.”

세스 그린의 열없는 목소리가 그를 붙든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게끔 했다. 스르륵 힘이 빠지는 손을 보고 있던 세스가 그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네가 화내지 마.”

허탈할 정도로 화가 사라졌다. 저 조용한 갈색 눈은 마법일지도 몰랐다. 저를 순한 등신으로 만드는.

“그럴 일 아냐. 나는 괜찮아.”

“……네가 괜찮다고 하는 건, 랜스키를 좋아해서야?”

더는 멋대로 화를 낼 수 없는 이유를 존 리든은 알고 있었다. 세스 그린은 랜스키를 좋아했다. 어느 날 아침 랜스키가 제이 에드거와 등교했을 때 세스가 얼마나 넋 빠진 꼴을 하고 있었는지는 그가 옆에서 모두 보았다.

랜스키에게 아무리 화가 나도 스스로에게 화가 나는 정도와 비교할 수도 없었다. 그는 고작해야 차를 태워 주겠다는 말밖에 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그건……,”

뭔가를 생각하듯 입술 끝을 우물대던 세스가 존 리든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존 리든은 또다시 등신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자신이 이렇게나 단순하다는 사실을 그도 지금에서야 처음 알았다.

“……좀 달라.”

“뭐가 달라?”

“랜스키가 좋아서, 랜스키가 뭘 해도 괜찮은 건 아니라고.”

“그럼 뭔데.”

“더는 랜스키와 섹스하지도 않을 거고, 말을 하지도 않을 거야. 고티 선생이 그러는 게 좋다고 했어.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러니까…….”

세스 그린의 옅은 갈색 눈이 우울을 한 겹 털어 냈다. 계속 존 리든과 눈을 마주하면서.

“네가 뭔가를…… 그러니까 랜스키에 대한 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세스 그린이 말을 마치는 순간 존 리든의 입에서 충동적으로 다음 말이 튀어 나갔다.

“우리 사귀자.”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거라는 생각은 본능에 가까웠다. 이렇게 성급하게 말할 마음은 없었다는 것은 나중 일이었다.

존 리든은 세스를 끌어당겨 안았다. 지금이어야 했다. 랜스키를 좋아하냐는 물음에 세스 그린이 우물대며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하는 지금.

“사귀자.”

“……어?”

“사귀자.”

“…….”

“사귀자, 우리.”

존 리든은 코를 비집고 들어오는 체향을 들이마셨다. 옅은 세제 냄새 정도밖에 섞이지 않은 체향은 그럼에도 이해할 수 없는 강한 자극으로 몸속을 스며들었다.

“왜?”

이어서 들려오는 세스 그린의 대답은 짐작하던 그대로라서 외려 웃음이 나왔다.

“왜긴 왜야. 그러고 싶으니까.”

“왜?”

이번에는 왜 저와 사귀고 싶냐는 물음일 것이다.

“내가 널 좋아하니까.”

“아…….”

세스 그린이 꾸물대며 그의 팔 안에서 빠져나왔다. 오늘 벌써 세 번째로 시선이 완벽하게 이어졌다. 그리고 존 리든은 벌써 세 번째 등신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누군가의 시선을 받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기분이 좋아질 수 있었다. 그가 세스 그린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그래서 의문이 없었다.

“왜?”

“좋아하는 데 이유가 필요해?”

“너는…… 내가 어떤지 알잖아.”

순간 완벽히 맞닿아 있는 세스의 시선이 흔들리는 것을 존 리든이 알아챘다. 좋아한다는 고백을 받는 이가 정작 고백하는 쪽보다 더 위태롭고 나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망가져서 이상한 인간이라는 걸 알잖아.”

“이상하긴 하지. 그게 망가져서 그런 건지는 몰랐다만.”

존 리든은 다시 한번 세스를 끌어당겨 안았다. 흔들리는 세스가 팔 안에 나직하게 감겨 왔다. 고백하는 순간 세스가 저를 밀어내지 않는다는 사실이 어쩐지 감격스러웠다.

“난 그냥 네가 좋은 거야. 난 망가져서 이상한 너밖에 모르니까 그런데 왜 좋아하냐고 물어도 소용없어.”

세스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그가 안고 있는 대로 가만히 안겨 있었다. 잠깐의 시간이 아주 긴 강처럼 흘러갔다.

“나는,”

세스 그린의 낮은 숨소리가 피부로 새어 들었다.

“……좋아한다는 말 듣는 거, 처음이야.”

존 리든도 처음이었다. 남자한테 말해 보긴.

“네가 처음이야.”

반복해서 처음이라는 얘기를 듣고 나니 어쩐지 충동적인 고백도 특별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반응이 좋을 줄 알았다면 진작 말해 볼걸. 랜스키가 수상쩍게 굴기 전에.

매사 랜스키를 끌어들이는 게 자신이 한심한 인간이라는 뜻이겠지만 지금은 한심한 인간이 된 기분도 썩 나쁘지 않았다.

“그럼 내가 첫사랑이겠네.”

짝사랑은 안 쳐 줄 거라고 존 리든이 속으로 심술궂게 중얼거렸다. 긴장을 지운 손이 느긋하게 세스의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오늘 데이트하자. 남자 친구 된 기념으로.”

한심한 거나 유치한 거나. 기왕 한심해졌으니 좀 유치해진들.

그 말에 세스 그린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싫어.”

“……뭐?”

“데이트 안 해. 사귀지 않을 거야.”

붕 들뜰 준비를 하던 기분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쭈그러들었다.

“뭐? 갑자기 왜!”

분위기 좋던 게 아니었나.

존 리든이 억울함을 담아 소리쳤다. 세스가 어깨를 구부려 그의 팔 안을 빠져나갔다.

“잘 모르는 건 안 해.”

등을 돌려 가 버리는 세스 그린을 잠시 멍청한 표정으로 서서 바라보다가 존 리든이 그 뒤를 따라갔다.

“잘 몰라서 안 해? 그런 이유가 어디 있어?”

“잘 모르는 건 싫어. 어려워.”

“그럼 알려 주면 되는 거냐? 야, 세스 그린. 그러지 말고 대답 좀 해 봐.”

“싫어. 남자 친구는 안 해.”

“저게 진짜. 고민도 안 해 보고!”

세스 그린이 그답지 않게 걸음을 재촉했다. 존 리든이 그를 계속 쫓아왔고, 자꾸만 도망치듯 멀어지는 세스 그린의 가방끈을 잡아당겼다. 백팩이 떨어지자 두 사람은 서로 먼저 가방을 줍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존 리든은 세스의 머리통이 눈앞에 얼쩡대자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끌어당겨 키스해 버렸다. 그 이후는 또 비슷했다. 세스는 가방을 움켜쥐고 빠르게 자리를 벗어나려 했고, 존 리든은 입술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부리나케 세스의 뒤를 쫓아갔다. 주차장까지 가는 내내 그랬다. 달라진 게 있다면 결국 존 리든이 세스의 가방을 빼앗아 제 차 안에 넣어 버린 것이었다. 그의 차는 아직도 할아버지의 구식 포드였다.

“돌려줘.”

세스 그린이 떼를 쓰듯 말했다. 존 리든은 화가 나서 눈가가 발긋하게 물든 세스 그린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눈가를 핥고 싶어 안달이 났다. 결국 참지 못하고 얼굴을 끌어당겨 눈가에 혀를 들이댔다가 세스에게 떠밀렸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아주 빨랐다. 존 리든은 벌써 그 무엇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너도 타면 되잖아. 태워다 준다니까.”

“남자 친구니 뭐니 이상한 소리 할 거잖아.”

“이상하게 구는 건 너잖아. 좋아하면 사귀는 거지 그게 뭐 어려워?”

“사귀는 게 뭔데?”

의외로 대답은 빨리 나왔다. 세스 그린에게 사귀자는 말을 하는 인간이라면 이런 질문이 되돌아오리라는 것쯤은 미리 생각해 뒀어야 했다.

“네가 내 차를 타고 집에 가는 거.”

세스 그린의 눈가가 구겨졌다. 어쩐지 웃고 싶어지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존 리든은 애써 정색을 했다. 지금은 아주 진지해지고 싶었으니까.

“내가 널 보고 웃는 거. 집이 빌 때 함께 있는 거. 네가 나한테 맥주 대신 소다를 가져다주는 거. 내가 널 걱정하는 거. 그래서 등교 시간에 맞춰 빙 둘러 네 집 앞까지 가는 거.”

“…….”

그건 이미 세스 그린이 존 리든과 했던 일들이었다.

“그리고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그걸 나한테 제일 먼저 말하는 거. 네가 앞으로 나하고만 섹스하는 거. 내가 알기론 그런 게 사귀는 거야.”

“…….”

세스 그린이 입을 다물었다. 그가 한 말을 제법 진지하게 곱씹는 것 같아 또 비실비실 웃음이 번지려고 했다.

“지금 당장 대답 안 해도 돼. 대신 차는 타고 가. 어제도 쓰러졌다며. 네가 안 탄다고 하면 나도 걸어서 따라갈 거야.”

“……. ……,”

세스 그린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처럼 입을 뻐끔대다 말았다. 그게 꼭 눈이 커다란 물고기 같았다. 방금 전까진 모르던 일이었지만 존 리든은 자신이 물고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왜냐고 물어볼 거 같아서 미리 말하는데, 그건 내가 널 좋아해서야. 난 네가 또 쓰러질까 봐 걱정돼 죽을 것 같다고. 그러니까 제발 이런 등신 같은 말싸움은 그만하자. 그냥 좀 타. 제발.”

세스가 뻐끔대던 입을 다물었다. 그는 언제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존 리든은 세스가 사실 복잡한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 생각이 어렵고 집중이 힘들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저 머리를 비우고, 생각에 반비례하며 복잡해지는 감정을 헤아리고 있을 것이다.

“……친구.”

“뭐라고?”

“남자 친구 말고, 친구. 그럼 탈게.”

세스 그린은 이 순간 그의 상태를 이해하는 친구가 생기면 인생의 많은 부분이 달라질 것이라는 상담 교사의 말을 떠올리는 중이었다. 어쩌다 그게 존 리든이 됐는지는 몰라도 그 스스로 자신의 상태에 대해 처음 말을 한 상대는 존 리든이었다. 그리고 존 리든은 그에게 처음으로 좋아한다는 말을 해 준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상담 교사가 말한 인물은 존 리든이 가장 가까울지도 몰랐다. 다른 건 몰라도 존 리든은 알렉산더 랜스키처럼 저를 불안하게 만들지 않았다.

어쩌면 그를 좋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알렉산더 랜스키를 대신해. 다른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어떤 건지 지금은 잘 알 수가 없었지만 그게 존 리든이라면 제 상태가 나빠질 일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간 너는……,”

알 수 없는 소리를 우물대던 존 리든은 조수석의 문을 열어 주었다. 세스가 차에 올랐다. 존 리든은 허둥지둥 차를 돌아오는 게 아니라 후드를 손으로 짚고 훌쩍 미끄러져 운전석으로 왔다.

차에 타자 이미 세스는 안전벨트를 매고 있는 상태였다. 존 리든이 차 열쇠를 꽂으며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너 좋을 대로 해먹을 생각은 마라. 누가 멋대로 친구래. 남자 친구야.”

뜻밖에도 세스가 작게 웃었다. 존 리든이 순간 멍해졌다. 이제껏 세스가 웃는 얼굴을 본 적이 있었나 싶었다.

웃으면 저렇구나. 저렇게 웃는구나.

웃는구나.

웃고 있어. ……저 멍한 녀석이.

“친구야.”

“친구…… 아니, 아니. 친구는 무슨. 남자 친구라고.”

“친구도 처음이야.”

“남……, 젠장.”

존 리든이 시동을 걸었다. 언젠가 본 적이 있었던 분홍색 설탕 가루가 그의 귓불에 점점이 흩어져 가고 있었다.

세스가 웃는다는 걸 알게 되자 다른 말은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안 된다는 말은 그중 첫 번째였다.

“그럼 당분간만이야.”

구식 포드가 구름 같은 매연을 엉덩이에 매달고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 * *

42분. 더해서 15초하고 절반 정도.

알렉산더 랜스키가 주차장에서 세스 그린을 기다린 시간이었다. 42분 15초하고 그 반 정도의 시간은 핸들을 툭툭 두드리고 있는 손가락이 녹아내릴 정도로 지루했다. 그러나 의외로 두 번 다시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할 만했다. 의외로.

그때 했던 섹스가 의외로 괜찮았던 것처럼.

“…….”

툭툭.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중이었다. 지루하긴 해도 흘러갔다. 이곳에서 남은 반년도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윌리엄 랜스키의 세 아들 중 두 아들은 배런트 카운티에 적응하지 못하고 화려한 기소유예 이력을 남긴 뒤 결국에는 스위스의 이름 모를 군사학교에 처박혔다. 부친인 윌리엄 랜스키는 아직 제 앞가림도 못 하는 유약한 아들들을 국외로 추방하는 일에 눈 한번 꿈쩍하지 않았다. 아들들이 스위스에서도 사고를 치면 그 다음은 베네수엘라였다.

베네수엘라에는 랜스키 인더스트리에서 흘러나온 군사 무기로 운영되는 캠프가 있었다. 말이 캠프지 실상은 군대였다. 중앙아시아의 작은 나라 하나쯤은 하룻밤 사이에 꿀꺽 집어삼킬 수 있을 만한 규모의. 어떤 인간들이 그곳에 처박혀 있는지는 윌리엄 랜스키조차 별로 알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랜스키의 합법적인 왕국인 배런트 카운티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은 막내아들인 알렉산더 랜스키뿐이었다. 윌리엄 랜스키의 막내아들은 제 유년기를 랜스키라는 유용하고 값비싼 면죄부를 그토록 한심스럽게 낭비하는 두 형들을 비웃는 데 써 버렸다.

그 대가로 그는 두 형들이 더는 견디지 못했던 이 무료하고 따분한 변두리에서 조용히 권태와 뒤엉켜 지내는 중이었다. 그가 단지 스위스의 군사학교보다 이 지루한 시골 학교가 더 마음에 들어서 배런트에 남는 선택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의도한 것은 자신이 두 형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부친인 윌리엄 랜스키가 인지하는 것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반년 뒤 무사히 대학 진학을 하게 되면 부친은 더욱더 그가 형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위로 둘 있는 형들은 훌륭한 반면교사였고, 그는 무사했다.

문제는 그를 좀먹는 권태였다.

권태. 따분함. 지루함.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화. 뒤바뀌는 사람 하나 없는 안정성. 랜스키 왕국의 강고한 일상.

배런트에서의 삶은 그게 다였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이 모든 것을 질색하던 시절도 지나갔다. 이제는 배런트의 모든 것은 그저 부츠 아래 무심히 밟히는 개미와 비슷했다. 일 년 동안 여자 친구라 불렀던 밀레나 헤이워드도 마찬가지였다.

그 와중에 등장한 게 남창이었다. 남창은 잠잠하던 권태에 한 방울의 잉크를 떨어트렸다.

전화기를 내미는 하얀 손은 딱할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그가 쳐다보는 순간 소리가 날 정도로 숨을 훅 들이켠 남창은 꽤나 오래도록 다시 숨을 내쉬지 못했다. 말 그대로 얼어 버렸다. 대신 남창의 두 눈은 필사적으로 그를 좇았다. 그게 그저 겁을 먹어서가 아니라는 것은 그의 갈색 눈을 어디선가 봤다는 기억이 스쳐가는 순간에 알았다.

아아, 그래. 언젠가부터 사물함 거울로 날 힐긋힐긋 쳐다보던 그 등신이네.

알렉산더 랜스키는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기민하게, 혹은 과도하게 반응하던 남창의 표정이 흥미로웠다. 좋아한다며 달려드는 인간들이야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남창 같은 시선은 처음이었다. 눈 한번 깜박이지 않는 간절함은 보는 이쪽이 다 아려 올 정도였는데 남창은 무표정한 얼굴로 무심을 가장했다. 눈으로는 그렇게 필사적인 신호를 보내고 있으면서.

제이 에드거는 그 다음 날 접근해 왔다. 여자와 하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을 거라는 부추김을 굳이 거절하진 않았다. 다가오는 사람 중 마음이 가는 쪽을 고르는 것은 이 권태 속에서 그나마 누리고 있는 특권이었다. 제이 에드거는 밀레나 헤이워드와 쌍둥이처럼 닮은 인간이었고, 빈자리를 메우기에는 가장 손쉽고 빠른 선택지였다.

그 선택이 또다시 남창을 이끌고 왔다. 남창은 제이 에드거에게 그조차 생각하지 못했던 말을 했다. 랜스키는 게이가 돼서는 안 돼. 랜스키와 헤어지면 내가 돈을 줄게. 몸을 팔아서.

그 말을 해석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 정도였다. 자신이 게이라는 소문이 나서는 안 되는 이유와 남창이 그 소문을 매춘업으로 돈을 벌어 책임져야 하는 이유 사이에는 어떠한 접점도 없었다. 권태로 느슨해지던 머릿속이 제법 복잡해졌다. 계속 도망치는 남창을 붙들며 알렉산더 랜스키는 간만에 혀가 당길 정도의 욕구를 느꼈다.

결국 남창과 섹스했다. 남창은 그게 알렉산더 랜스키의 첫 게이 섹스라고 알고 있겠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여자와 하는 섹스가 시들해지기 전부터도 알렉산더 랜스키는 남자도 상대했다. 어느 쪽이 낫다는 비교는 딱히 해 보지 않았지만 남창과 자 보니 알 것 같았다. 이쪽이 훨씬 더 취향이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입으로는 반발하는 남창을, 말 그대로 숨 가쁘게 범했다.

그 섹스는 괜찮은 것 이상이었다. 남창은 온몸으로 그에게 반응했다. 이제껏 그 어떤 섹스 상대도 남창만큼 감도가 좋은 몸을 지니진 못했다. 남창은 그가 손을 대기만 해도 몸을 떨었다. 남창이 느끼는 표정만 봐도 사정이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런 주제에 입으로는 안 된다고 하는 게 거슬렸다. 몸으로는 제 페니스를 단숨에 집어삼켜 그대로 녹여 버릴 것처럼 반응하면서 전부 싫다고만 했다. 남창의 몸속에 두 번째로 사정하는 순간부터는 그마저도 귀엽게 느껴질 정도였다. 주차장에 차를 대 놓고 42분 15초를 기다리는 수고를 할 만큼 귀여웠다. 실컷 울리고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그 창백한 얼굴로 사정하는 걸 지켜보고 싶었다.

벌써 아래가 빠듯하게 당겨 왔다. 남창은 더 이상 개미가 아니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간만에 제 머리를 천천히 녹여 가던 이 권태로부터 달아날 방법을 찾았다.

톡톡.

15초 반에서 다시 15초 반이 더 흐르는 사이.

“아,”

남창의 모습이 시야에 드러났다. 꽤나 멀리서 오는 중이었지만 이제는 한눈에도 구별이 갔다. 저 검은 머리칼이 맨살에 닿아 바스락대는 감촉이 어떤지 단박에 떠올릴 수 있었다. 어쩌면 그날 이후로 아예 사라지지 않는 감각일지도 몰랐다.

남창의 뒤에서 덩치 큰 쿼터백이 따라오고 있었다. 알렉산더 랜스키의 미간이 구겨졌다. 요새 들어 남창의 근처를 맴돌며 추근대는 꼴을 보면 쿼터백은 성가신 개미가 될 모양이었다.

툭툭.

알렉산더 랜스키는 핸들을 두들기며 남창이 개미를 떨구고 오기를 기다렸다. 어제는 제 침대에서 남창을 재웠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함께 등교했다. 남창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이제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다 눈길이 닿은 곳에서 제이 에드거가 새파래진 얼굴로 파르르 떠는 모습이 보였다. 하는 꼴을 보면 자신이 시킨 심부름을 제대로 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제이 에드거의 성격상 그런 식으로 도발하면 제 입으로 말하고 다니지 않을 거라는 계산에서 한 말이었지만 지금 남창 뒤에 꼬리처럼 매달린 쿼터백을 보니 제이 에드거가 심부름을 착실히 해 주는 편이 나았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툭툭.

알렉산더 랜스키는 핸들을 두들기며 A구역에 주차되어 있는 구식 포드 주변을 바라보았다. 쿼터백이 남창의 가방을 빼앗아 포드 안에 집어넣었다. 남창이 뭐라고 항의하는 듯했다. 쿼터백은 화를 내는 남창을 끌어당겨 눈가를 핥았다. 남창이 쿼터백을 떠밀었다. 쿼터백과 남창은 그 뒤로도 몇 마디 더 주고받았다. 그리고 남창이 제 발로 포드에 올랐다.

툭.

핸들을 두들기던 손짓이 멎었다. 남창은 가방을 되찾기 위해 포드 안으로 기어들어 간 게 아니었다. 이 거리에서도 남창이 짓는 웃음이 또렷이 보였다.

남창이 웃고 있었다. 쿼터백을 향해. 쿼터백의 차 안에서. 제 차가 아니라.

부웅.

다음 순간 알렉산더 랜스키는 거칠게 차를 빼고 있었다.

* * *

끼이익!

존 리든은 브레이크를 밟다가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갑자기 정신 나간 속도로 달려온 스포츠카가 급하게 몸체를 휘며 그들의 앞에 급정거를 했다. 일로인에서 저런 차를 타고 다니는 인간은 알렉산더 랜스키밖에 없었고, 주차장을 레이싱 서킷처럼 질주할 인간도 그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랜스키가 그들 앞을 가로막았다는 소리였다.

“괜찮아?”

존 리든은 일단 옆 좌석을 돌아보았다. 다칠 정도의 충격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세스 그린은 핏기가 쑥 빠져나간 창백한 얼굴로 정면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며 존 리든은 세스가 다독여 놓았던 화가 울컥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미친 왕자 새끼. 어제 무슨 짓을 했다고?

그것도 모자라 왜 이 지랄이야.

“넌 가만있어.”

존 리든은 성급히 안전벨트를 풀고 밖으로 나갔다. 카브리올레 형식의 스포츠카는 굳이 불러내지 않아도 알렉산더 랜스키의 거만한 낯짝이 똑똑히 드러났다.

“차 치워.”

존 리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그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때와 비슷했다. 손으로는 제이 에드거를 더듬고 있었지만 시선은 세스 그린에게서 한 차례도 떠나지 않았던 그때와.

“내려, 남창.”

존 리든이 입술을 실룩였다. 얼굴의 잔근육이 멋대로 튀어 올랐다.

“닥쳐, 랜스키. 세스가 너한테 뭘 어쨌다고 여기서 이 지랄이야? 강간으로 신고라도 할까 봐서 그래?”

“……강간?”

알렉산더 랜스키가 그제야 존 리든을 힐긋 돌아보았다.

표정이 꽤나 재미있었다. 왕자와 강간이라니, 어색한 조합이긴 했다.

강간이라는 단어가 주는 곤혹스러운 느낌에 잠시 입술을 물었던 알렉산더 랜스키는 이어서 핸들 중앙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빵! 하는 날카로운 경적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남창! 내려!”

“남창이라고 하지 마! 강간범 주제에 누구더러 남창이라는 거야!”

존 리든은 알렉산더 랜스키를 향해 한 발짝 더 다가가며 신경질을 내뱉었다.

“내가 경찰서부터 가겠다는 걸 세스가 간신히 말려서 참은 줄 알아. 그 잘난 랜스키 이름이 더러워지는 꼴 보기 전에 사라져라. 네 낯짝 보자마자 덜덜 떠는 세스가 안쓰러워서 한 번은 참아 줄 테니까.”

“남창! 내 말 안 들려?”

“너야말로 내 말 안 들리냐, 랜스키? 남창이라고 하지 말라니까!”

그때였다.

부웅!

알렉산더 랜스키가 갑자기 차를 출발시키는 바람에 존 리든은 황급히 뒷걸음질을 쳤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그대로 사람을 깔아뭉갤 기세로 존 리든을 몰고 갔다.

“이 미친 새끼! 무슨 짓이야!”

끼익, 텅!

알렉산더 랜스키는 주차장 펜스까지 존 리든을 밀어붙였다. 미처 몸을 피할 틈이 없었던 일로인의 쿼터백은 알렉산더 랜스키의 차와 펜스 사이에 다리 한쪽이 낀 상태가 되었다. 통증으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씨팔! 정신이 나갔냐? 차 빼!”

끼익, 퉁!

알렉산더 랜스키가 액셀러레이터를 좀 더 밟았다. 결국 존 리든이 비명을 터트렸고 랜스키는 고개를 돌려 구식 포드의 조수석을 향해 말했다.

“나와!”

“크윽……! 그만둬! 뭘 어쩌려는 거야!”

“나와, 남창!”

“나오지 마, 세스! 그냥 경찰 불러!”

“나오라니까!”

“나오면 저 미친놈이 무슨 짓을 할지 알아! 경찰에 전화해!”

시끄럽게 얽히는 고함들은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 틈새를 비집고 작고 조용한 소리가 섞여들어 왔다. 세스가 차 문을 열고 나오는 소리였다.

세스 그린이 붉은색 스포츠카의 운전석 옆으로 다가갔다.

“이러지 마.”

잠시 세스를 올려다보던 알렉산더 랜스키가 왈칵 차 문을 열었다.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알고 있어?”

“집에 가려던 것뿐이야.”

“아침에 내려 주면서 말했잖아. 기다리라고.”

“난 싫다고 했어.”

“또 세 번 말하게 하네.”

알렉산더 랜스키가 손을 뻗어 세스 그린의 멱살을 휘어잡았다. 그가 세스를 억지로 끌어당겨 차 안이 똑똑히 보이게끔 했다. 액셀러레이터 위에 올라간 발이 금방이라도 힘을 줄 것처럼 잔뜩 긴장해 있었다.

“넌 내 전용이라고 했지. 어제 한 번, 그리고 오늘 두 번. 한 번만 더 내 입에서 그 말 나가면 호모 쿼터백이 무슨 꼴이 될지 나도 몰라. 알아들었어?”

“…….”

난감한 표정으로, 세스가 이제 막 친구가 되기로 한 존 리든을 돌아보았다. 존 리든은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저를 짓누르는 차 위로 상체를 수그리고 있었다. 그는 짜증과 고통이 뒤섞여 일그러진 표정으로 세스를 향해 말했다.

“저건 미친…… 놈이야. 아예 말을 섞지……,”

세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알렉산더 랜스키를 쳐다보았다.

“놓아줘. 아니면 경찰에 전화할 거야.”

“경찰이 여기까지 오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 같아? 내가 액셀을 밟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빠를 것 같아?”

부웅.

알렉산더 랜스키가 위협처럼 발끝을 까닥였고, 차는 곧장 앞으로 튀어 나갈 것처럼 굉음을 토했다. 세스가 당황해 소리쳤다.

“하지 마!”

“세 번은 말 안 해. 이리 와.”

알렉산더 랜스키가 손짓을 했다. 세스는 존 리든을 쳐다보지 않은 채 차를 향해 몸을 숙였다. 그러자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의 옷깃을 움켜쥐고 세게 아래로 눌렀다. 세스의 고개가 알렉산더 랜스키의 다리 사이에 처박혔다.

“꺼내서, 핥아.”

그 단순한 말의 의미를 존 리든은 단숨에 알아듣지 못했다. 차와 펜스 사이에 끼인 허벅다리가 엄청나게 아프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 상황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세스 그린은 알렉산더 랜스키를 오래도록 혼자서 좋아해 왔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 그린의 손을 짓뭉갰다. 그 다음 주 월요일에 랜스키는 제이 에드거와 등교했고, 세스 그린은 랜스키를 쳐다보기만 했다. 랜스키가 세스를 강간했다. 그가 아는 것은 그게 다였다. 여기서 갑자기 일로인의 왕자가 세스 그린으로 인해 정신이 나가게 된 이유를 설명해 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세스는 잠시 그대로 알렉산더 랜스키의 다리 사이에 고개를 수그린 채 있었다. 그러나 곧 찌익대며 퍼스너를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존 리든이 차를 쾅쾅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야! 이게 무슨……! 하지 마! 그러지 말라고!”

그 말에는 랜스키도, 세스도 대답하지 않았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의 머리칼을 움켜잡았고 세스는 랜스키의 페니스를 입에 물었다. 찰박이는 젖은 소리가 들려왔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신음을 흘리는 대신 세스를 더욱 세게 움켜잡았다. 소음을 만들어 내는 것은 존 리든 혼자였다.

쾅!

“하지 마, 이 미친 새끼들아! 하지 말라고!”

콰앙!

존 리든이 차를 밀쳐 내려고 버둥대기 시작했다. 덕분에 차가 움찔거렸다. 운전석에 앉아 있는 알렉산더 랜스키도, 그의 다리 사이에 고개를 수그리고 있는 세스도 조금씩 몸을 움찔거렸다. 그 작은 진동은 랜스키가 사정을 마칠 때까지 이어졌다.

질척하게 젖은 입술 사이에서 페니스를 뽑아 든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의 턱을 쥐었다.

“삼켜.”

그러나 말하기도 전에 세스가 이미 목울대를 움직이던 중이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세스가 손등으로 입술을 문지르는 동작을 끝내길 기다렸던 그가 옷깃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혀를 움직이는 소리가 노골적으로 새어 나가는, 과시적인 키스였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의 입 안에서 나는 비린 맛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키스를 멈추지 않았다. 창백하던 얼굴에 설핏 붉은 기운이 돌자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를 놓아주었다.

“가서 가방 가져……. 아니, 됐어. 그냥 타.”

세스가 한숨 같은 시선으로 알렉산더 랜스키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랜스키의 발은 아직도 액셀러레이터 위에 있었다. 결국 세스는 그대로 랜스키가의 스포츠카에 올라탔다.

탁.

차 문이 닫히자 알렉산더 랜스키가 차를 움직였다. 존 리든이 균형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이런 씹……. 야, 세스 그린! 당장 내려! 저 새끼가 또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차에 타는 건데! 내려, 어서!”

다급하게 소리를 지르던 존 리든은 후진하던 알렉산더 랜스키가 갑자기 핸들을 트는 것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이어서 한정판이라는 페라리가 사람과 차 사이의 위태로운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리든가의 구식 포드를 들이받아 버렸다.

쾅!

존 리든이 입을 벌렸다.

“저거…… 진짜 미쳤……,”

끼익!

페라리의 타이어가 땅을 긁어 댔다. 페라리는 포드보다 더 가차 없이 망가져 있었다. 차를 존 리든의 옆에 잠깐 세운 알렉산더 랜스키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향해 말했다.

“수리비는 나 말고 우리 집 변호사한테 연락해서 받아 가. 번호 모르면 네 부모한테 물어보고.”

존 리든의 부친은 랜스키사에서 회계사로 일하고 있었다. 사실 배런트에 사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크든 작든 랜스키 가문과 연관된 직종에 종사하고 있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괜히 왕자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존 리든은 순간 자신이 배짱 좋게 세스 그린에게 미친 왕자의 호박마차에서 뛰어내리라는 말을 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알렉산더 랜스키도 그 점을 알았다. 그는 단 한순간도 세스 그린을 놓고 자신과 존 리든을 저울질해 보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존 리든의 이름은 랜스키가 아니었으니까.

“남창은 내 전용이니까 앞으로는 넘보지 마. 정 욕심이 나거든 네 아빠한테 허락부터 받고 와.”

존 리든은 일로인의 왕자가 권태에 찌들었을 때가 더 낫다는 것을 깨달았다. 뒤늦게 유흥거리를 찾아 권력을 남용하기로 한 왕자는 손쓸 도리 없이 비열했다.

“명심해.”

끼이익, 부웅!

알렉산더 랜스키가 떠났다. 한바탕 전쟁을 겪고 승리한 듯 찌그러진 페라리를 타고. 옆 좌석에는 전리품인 세스 그린을 태운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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