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상황은 어제와 비슷했다. 회색 머리를 가진 중년의 의사가 맥박과 혈압 등을 확인하고 동공을 살피더니 랜스키에게 무어라 얘기를 했고, 곧이어 젊은 간호사가 들어와 세스를 침대에 눕히고 주삿바늘을 꽂았다.
오는 사람이 없다던 별채는 조용했다. 반쯤 열어 놓은 창문 밖에서 초록 바람이 불었다. 담만 넘으면 곧장 하얀 백사장이 펼쳐져 있는 랜스키가의 저택은 배런트에서 녹지가 가장 많은 곳이기도 했다. 숨 막히는 계절의 열기만큼이나 짙고 무성한 녹음이 유리창을 투과해 바닥까지 드리워졌다.
알렉산더 랜스키의 침실은 제 침실과는 달랐다. 이곳은 정말로 왕자의 침실 같았다. 세스 그린은 육중한 느낌의 마호가니 침대 기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톡톡, 링거액이 떨어지는 소리가 지루하게 들려왔다.
“좀 자라고 했잖아.”
세스는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옷을 갈아입은 알렉산더 랜스키가 다가왔다.
“잠이 안 와?”
“리든은?”
세스의 질문에 알렉산더 랜스키가 미간을 구겼다. 그러나 아주 속 좁게 굴지는 않았다.
“구급차 불렀어. 지금이면 병원에 있을 거야.”
“아……, 그래.”
세스가 누운 침대가에 알렉산더 랜스키가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시선이 맞닿으며 그 어느 때처럼 그의 숨결이 이마 위에 부서져 흘러내렸다.
“호모 쿼터백하고는 무슨 사이야?”
세스는 지나치게 가까이 있는 회색 눈을 피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나 곧 턱이 쥐여 강제로 시선을 마주해야 했다.
“대답해.”
“친구.”
“친구? 같이 잤을 거 아냐.”
“안 잤어. 친구야.”
“쿼터백은 너하고 자고 싶어서 안달이 났는데 그게 무슨 친구야.”
“친구야.”
세스 그린이 한 말치고는 고집스럽게 들려오는 대꾸에 알렉산더 랜스키가 턱을 놓아주며 피식 웃었다.
“곧 죽어도 우기는 걸 보니 뭘 잘못했는지는 아는 모양이네. 앞으로 그 녀석과 있는 모습은 나한테 들키지 마.”
세스가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나한테 이러지 마.”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의 머리칼을 장난치듯 흩뜨리며 대꾸했다.
“이러는 게 뭔데?”
“네가 지금 하는 거.”
“지금 하는 거라면…… 어디 보자. 굶어 죽어 가는 너를 데려와 왕진 의사를 불러다 준 걸 말하는 거겠지. 주차장 구석에서 네가 상담을 마치고 오길 사십 분 넘게 기다려 가면서. 아, 하나 더 있다. 네가 죽기 직전이라니 벗겨서 박고 싶은 걸 내내 참고 있잖아. 그중 어떤 걸 하지 말라는 거야?”
알렉산더 랜스키는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지만 세스는 그 미소에 홀리지 않았다.
“그래, 그런 거. 하지 말라고. 나한테 잘해 주지 마.”
미소가 멎었다. 대신 머리칼을 만지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세스는 짧은 통증을 느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잘해 주는 건 알고 있어?”
“응. 너는…… 친절해. 그런데 나는 네가 나한테 친절한 게 싫어.”
당연하게도 알렉산더 랜스키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은 하나였다.
“왜?”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남창은 그를 좋아했다. 그런데 그가 친절하게 구는 것은 싫다고 했다.
사실 친절이라는 표현 자체가 웃겼다. 오늘 그가 한 짓은 그저 미친 짓이었다. 쿼터백의 다리짝을 차로 들이받은 상태에서 보란 듯 블로우잡을 시킨 것은 스스로도 낯설었다. 자신에게 그런 과시욕이 있었다는 것은 남창과 있기 전까진 알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남창은 자극적이었다. 저 입에서 싫다는 말이 나올 때마다 그는 몸속 어딘가가 들끓었다. 이제껏 그가 일로인에서 익숙해져 왔던 권태와는 정반대였다.
세스 그린은 한참 생각하다가 이렇게 답했다.
“네가…… 랜스키니까.”
“그 얘기라면 예전에 끝났어. 기껏 한 말은 어디로 들었어.”
“아니야. 나는…… 조용히 있고 싶어. 그런데 너와 다니면 애들이 떠들잖아. 난 그런 게 싫어.”
“네가 날 쳐다보는 것도 이미 애들이 실컷 떠들었을 텐데?”
“그건…… 달라.”
“뭐가 달라.”
“달라.”
알렉산더 랜스키가 이마로 흘러내린 세스의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러자 시선이 숨을 곳 없이 드러났다.
“너 좀 위험한 건 아냐?”
“…….”
“아, 말을 바꿔야겠군. 네가 나한테 위험해. 그게 무슨 소린지 알겠어?”
세스는 통 알아듣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 남창이 예민한 것은 몸뿐이었다. 머리는 그가 이제껏 부딪쳤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둔할 것이다.
“네가 싫다고 하면 나는 하고 싶어져. 아무리 말려도 하고 싶어진다고. 네가 키스하지 말라고 했지.”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의 머리를 끌어당겨 그대로 입을 맞췄다. 세스가 어깨를 움찔움찔 떨었지만 알렉산더 랜스키는 몸으로 그를 누르며 자비 없이 입 안을 범했다. 고개가 딸려 올라갔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의 뒷머리를 움켜쥐고 턱을 눌러 속절없이 입이 한껏 벌어지게 만들었다.
키스는 그저 입술을 탐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잔뜩 발기한 성기처럼 거칠게 안을 쑤시고 들어오는 혀가 세스의 호흡을 모두 먹어치웠다. 이런 키스를 겪고 나면 다른 키스는 키스처럼 느껴지지도 않을 것이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타액으로 젖은 입술을 들어 올리며 세스의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쓸었다. 한껏 부풀어 오른 붉은 입술이 잘게 떨렸다. 사람의 생살을 단순히 맛이 궁금해서 씹고 싶다는 충동이 든 것은 처음이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낮게 가라앉아 거칠어진 음성을 내뱉었다.
“싫다고 한 주제에 이런 표정을 지으면 반칙이지. 안 그래?”
“내, 내가 뭘…….”
“또 싫다고 해 봐. 삽입하는 게 싫어? 콘돔도 싫고? 안에다 싸는 것도 싫어?”
그가 정말로 옷을 벗길 것 같았던지 세스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몸을 뺐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를 느긋하게 지켜보며 싱긋 웃었다.
“또 뭐가 싫은데? 내가 입으로 해 주는 건 어떨 거 같아? 난 네 발가락도 핥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것도 싫어?”
세스가 진저리를 쳤다.
“그, 그러지 마!”
페니스가 일어서서 팬츠 안을 갑갑하게 만들고 있었지만 알렉산더 랜스키는 욕구를 뒤로 미뤘다. 단순히 삽입만 하고 배출하는 얌전한 섹스는 당기지 않았다. 지금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대로 섹스할 경우 가느다란 팔뚝을 파고든 저 바늘이 어떻게 될지 책임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대답을 잘 고르라고. 싫다는 말을 내뱉기 전에 그게 날 어떻게 자극하는지 생각 좀 해 봐. 난 벌써 여러 번 알려 준 것 같으니까.”
더 곁에 있다간 욕구를 참지 못할 것 같은 기분에 알렉산더 랜스키가 몸을 일으켰다.
“좀 쉬어. 자든지. 약은 세 시간짜리라고 했으니 시간 맞춰서 다시 올게.”
세스가 입술을 꾹 물고 있다 반쯤 체념을 섞어 물었다.
“오늘도…… 여기서 자고 가야 해?”
그 말이 알렉산더 랜스키를 멈추게 만들었다. 고집을 세운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는 회색 눈이 새로운 흥미로 번들거렸다.
당분간 질리려야 질릴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남창은 저를 자극하는 말만 잘도 골라서 내뱉는 재주가 있었다.
“자고 가는 것도 싫어?”
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싫어.”
“진짜 귀여워 미치겠네.”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의 턱을 덥석 물더니 이어서 입술을 목덜미로 미끄러트렸다. 쿡쿡대는 웃음소리가 살을 빨아 당기는 질척한 소리에 뒤섞였다.
“그럼 자고 가.”
그 말을 남긴 뒤 알렉산더 랜스키가 자리를 떴다.
혼자 침실에 남은 세스 그린은 링거액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 걸 멍하니 지켜보고 있다가 불쑥 주삿바늘을 뽑아 버렸다.
* * *
세스가 발걸음 소리를 죽이며 침실을 벗어나는 동안 알렉산더 랜스키는 지하의 피트니스 룸에 있었다. 덕분에 세스는 의외로 수월히 별채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문제는 저택을 벗어나는 방법이었다. 세스는 일단 정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경비실이 양측에 마련된 정문은 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원들까지 서 있었지만 들어오는 것이라면 몰라도 나간다는 데는 제재를 가할 것 같지 않았다. 알렉산더 랜스키를 만나러 왔다가 다시 돌아간다고만 하면 될 것이다. 벌써 두 번째 방문이라 세스는 이미 방문자 목록에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별채에서 정문까지는 정원을 가로지르고도 한참을 걸어가야 했다. 랜스키가의 저택은 애초에 걸어 다닐 것을 염두에 두고 지은 집이 아니었다. 단순히 산책을 하고 싶다면 개인 해변을 끼고 만들어진 산책로를 이용해야 하는 곳이었다.
세스가 걸어오는 모습이 눈에 띄자 예상대로 경호원들이 다가왔다.
“무슨 일입니까?”
랜스키가의 경호원들은 얼핏 십 대로 보이는 세스에게 존칭을 사용했다.
“돌아가려고요.”
“차도 없이 말입니까?”
“랜스키가…… 아, 저기…… 그러니까 알렉산더의 차를 타고 왔어요. 저는 차가 없는데요.”
“확인해 보겠습니다.”
경호원들에게는 무척 낯선 일이었다. 이제껏 랜스키가를 방문한 손님이 차도 없이 걸어서 돌아가는 일은 흔치 않았다.
경호원 중 하나가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별채에 연락 넣어. 손님이 가시는데 모셔다 드려야 하는지 여쭤 봐.”
세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말없이 사라지고 싶었지만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화를 내며 달려오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런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싫다고 도망치면 랜스키가 쫓아올 것을 바라서 이러는 게 아니었다. 세스는 랜스키가 계속 친절하고 상냥한 게 두려웠다. 자신이 어느 순간 그 상냥함을 욕심내게 될까 봐 무서웠다. 가장 무서운 일은 알렉산더 랜스키 역시 그를 원하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드는 것이었다. 존 리든과 함께 있었다고 화를 내는 랜스키는 그에게 지나치게 친절했다. 마치 질투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런 생각들이 제 머릿속을 더 망쳐 버리는 게 두려웠다.
이대로 별채에 연락이 닿아서 랜스키가 저를 붙들어 두라고 이른 다음 쫓아 나온다면. 다시 잡아끌고 방에 가둬 놓기라도 한다면. 그리고 두 번 다시 도망치지 말 것을 이르기라도 한다면.
도망치려는 의지는 계속 나약해져 갈 것이다. 제 머릿속은 도망치려는 쪽과 그러지 않으려는 쪽으로 갈라져 균열된 틈 사이로 무언가 끔찍한 게 돋아날 것이다.
뭍으로 기어 나오려는 순간의 바다는 인간에게 닿고 싶은 욕망을 이기지 못해 매 순간마다 자신을 부수었다. 세스는 바다처럼 알렉산더 랜스키를 사랑하고 싶었다. 아무리 닿고 싶어도 닿을 수 없도록. 혼자 말없이 거품이 되어 사라지도록.
“그냥…… 보내 주세요.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애원하는 듯한 세스의 말에 경호원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손님과 손님이 아닌 자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손님으로 온 자들도 아주 쉽게 손님이 아닌 자가 되곤 했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랜스키가의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알량한 호의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경호원들은 앞으로 나가려는 세스를 마치 벽처럼 가로막고 서서 별채로부터의 연락을 기다렸다.
“하아…….”
세스가 또 한 번 한숨을 쉬는 그 순간이었다.
부우웅, 끼익.
본채의 차고에서 빠져나온 날렵한 은색 차 한 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세스의 뒤에 멈춰 섰다.
“무슨 일이야?”
세스와 경호원들이 고개를 돌려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남자를 응시했다. 세스는 그가 누군지 몰랐다. 하지만 본채에서 나온 것을 보면 그 또한 랜스키거나, 아니면 랜스키 가문과 몹시 가까운 손님일 것이다. 세스는 짙고 매끄러운 갈색 머리를 보고 그가 랜스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이를 많이 먹지 않은 얼굴은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로 보였다.
세스는 몰랐지만 그는 알렉산더 랜스키의 둘째 형이었다.
“별채의 손님께서 돌아가신다고 하기에 연락을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경호원 중 하나가 깍듯이 답했다. 차 안에 탄 남자가 세스의 위아래를 노골적으로 훑어보았다.
“알렉스의 손님이라고?”
“예.”
시선이 세스의 목덜미에 닿는 순간, 또 다른 랜스키는 입술을 벌리며 시선보다 더 노골적인 웃음을 흘렸다. 세스의 목에는 알렉산더 랜스키의 입술이 남긴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알 만하군. 그 잘난 새끼가 어디서 이상한 취미를 배워 온 모양인데. 이젠 제법 좆이 여물었다 이건가.”
세스의 얼굴이 굳었다. 알렉산더 랜스키의 둘째 형은 그마저도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래도 취향은 랜스키답네. 나쁘지 않아. 이봐, 어디로 간다고?”
세스는 뭐라고 답을 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였다. 남자가 딱히 숨기지도 않는 알렉산더 랜스키에 대한 반감은 긴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에이, 너무 겁먹지 말고. 내가 누군지 몰라서 그러나? 난 루이야. 루이 랜스키.”
세스의 창백한 얼굴이 한층 더 하얗게 변했다. 랜스키라는 성을 지닌 인간들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랜스키들은 아직 모르고 있는.
“내가 태워다 줄게. 어때? 드라이브도 하면서 하나밖에 없는 동생의 학교생활에 대한 얘기도 듣고 하게. 아, 나는 외국에 있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됐거든. 내가 그놈의 시건방진 동생을 너무 사랑해서 말이야, 그 새끼가 밖에서 좆을 어떻게 굴리고 다니는지 너무너무 궁금하지 뭐야.”
“…….”
그때 무전기에서 치익, 소리가 들렸다.
“별채가 연결된 모양입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경호원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세스는 은회색 차 앞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네. 태워 주세요.”
위험할지도 몰랐다. 아니, 위험할 것이다. 또 다른 랜스키의 차를 타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더 랜스키와 함께 있는 것보다는 위험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세스가 도망치려는 상대는 알렉산더 랜스키였다.
루이 랜스키가 막냇동생처럼 웃었다. 생김새는 그리 닮지 않았지만 웃을 때 얼굴을 보면 둘이 형제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듯 보였다. 그의 미소는 랜스키의 미소였다.
“옳지. 말 잘 듣네. 어서 타.”
세스가 2인승 차의 조수석에 앉았다. 루이 랜스키가 경호원들을 향해 말했다.
“내가 얘하고 나간 건 비밀로 해.”
경호원들이 무전기를 입에 대고 난처한 표정을 짓는 사이, 루이 랜스키의 차는 정문을 빠져나갔다.
* * *
“배고프지 않아? 저녁 사 줄까?”
루이 랜스키가 성실하지 않다는 건 운전하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신호를 지키지 않았고, 운전하는 내내 곁눈질로 계속 세스 그린을 훑었다.
“말랐네. 난 너처럼 마른 애들이 좋아. 있는 대로 다 처먹고 살집을 뒤죽박죽 달고 다니는 것들은 혐오스럽지. 요새는 모델이라는 것들도 플러스 사이즈니 뭐니 해서 잘도 처먹더라니까. 대체 누가 그런 것들을 돈 주고 본다는 건지, 원.”
세스는 입을 닫고 전방만 응시했다. 루이 랜스키가 느물스럽게 입술을 늘어트렸다.
“원래 그렇게 말이 없어?”
“……여기서 세워 주세요.”
세스 그린은 랜스키 저택에서 적당히 멀어진 지점에서 말을 꺼냈다. 루이 랜스키는 보란 듯 액셀러레이터를 더 밟았다.
“좋은 데 데려가 줄게. 아, 그런데 너 몇 살이지?”
“괜찮아요. 여기서 내려 주시면 돼요.”
“아아, 그러지 말고. 내가 이렇게 사람 좋게 생겼어도 사실은 성격이 나빠서 말이야. 싫다는 말을 정말 싫어해. 우리 막내하고는 벌써 잔 사이야?”
싫다는 말을 듣지 못하는 건 형제간의 내력인 모양이었다. 세스는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 곁눈으로 세스의 옆얼굴을 훑던 루이 랜스키가 혀를 찼다.
“귀염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네. 그 성격에 잘도 알렉스와……. 아니지, 이건. 섣불리 판단하면 또 큰코다치겠지.”
“세워 주세요.”
“싫다는 말 싫어한다는 소린 어디로 처들었어. 차 안에서 험한 꼴 보려는 거 아니면 잠자코 있어. 너 같은 애는 뭘 사 줘야 좋아하지? 아, 애가 맞긴 한 거지? 그 얼굴로 벌써 술 마시고 콘돔 살 나이라고 하면 말이 안 되지. 안 그래?”
다시 입을 열기 조심스러워졌다. 그는 분명 알렉산더 랜스키가 아니었지만 싫다는 말을 싫어한다는 소리는 비슷하게 위험한 느낌이 들었다.
푹신하게 몸을 받치고 있는 가죽 시트가 등뼈를 우드득 눌러 대는 기분이었다. 세스는 긴장된 손바닥을 허벅지에 눌러 닦았다.
“그러실 필요 없는데요.”
“사양하지 마. 내가 사 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하도 간만에 돌아왔더니 이 근방에 아는 녀석들은 제대로 연락도 안 닿더라고. 넌 생긴 것도 괜찮고 조용하니 마음에 들어. 알렉스와는 언제부터 같이 잤어? 그 새끼가 언제부터 게이가 됐지?”
“……랜스키는 게이가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면 내가 헷갈리는데? 내가 더 그 이름으로 오래 불렸다는 건 알고서 하는 말이야? 아, 그래. 별명이 따로 있지 않아? 랜스키 말고. 우리 막내는 뭐라고 불리지? 나는 사이코였는데.”
루이 랜스키가 핸들 쪽으로 몸을 굽히고 킬킬 웃어 댔다.
“맏형은 폭군이었지. 랜스키가의 장남 이름이 시저라는 건 알고 있어? 우리 집 노인네가 망상이 하도 과해서 자식들 이름을 다 왕한테서 따왔어. 시저, 루이, 알렉산더. 웃기지도 않지 뭐야. 안 그래?”
딱히 답을 원하는 질문이 아닌 것 같아 세스는 그저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넌 이름이 뭐야?”
“……세스.”
“흠. 성은?”
“그린.”
“이름다워서 좋네. 시저가 뭐야, 진짜. 그 덜떨어진 폭군은 이혼한 셋째 마누라가 밖에서 무슨 말을 지껄이고 다니는지 알고 있나 몰라. 폭군이면서 마누라 하나 건사 못 하고. 노친네가 괜히 내놓은 자식 취급하는 게 아니라니까. 쯧. 아, 그래서 알렉스는 게이가 맞아?”
알렉산더 랜스키는 게이가 아니었다. 세스가 알기로는. 그리고 게이가 돼서는 안 됐다. 루이 랜스키 같은 형이 있기에.
“게이 아니에요. 잘못 아셨어요.”
“그래? 그럼 그건 뭐야? 목덜미에 그거.”
세스가 손을 들어 올려 목을 가렸다.
“잘못 아신 거예요.”
“그래?”
루이 랜스키는 담배를 피듯 손가락을 입술 위로 가져갔다. 눈매가 재미있다는 듯 휘어져 있었다.
“너는 게이지?”
“……예.”
“나 같은 아저씨는 어때? 아저씨도 상대하나?”
숨이 쿡 몰리는 기분에 세스는 작게 기침을 한 뒤 대꾸했다.
“……안 해요.”
“왜? 아저씨도 제법 괜찮아. 알렉스처럼 새파랗게 어려 봤자 서툴기만 하지. 어때, 알렉스는? 진짜 서툴러?”
“그런 건 잘 몰라요.”
“에이, 뭘 그렇게 긴장하고 그래. 그 정도쯤은 얘기해도 돼. 못 할 얘기도 아니고. 너는 알렉스 쪽이 취향이야? 녀석은 근육이 좀 있는 편이잖아. 무거운 게 좋아?”
그렇게 말하는 루이 랜스키도 보기 나쁘진 않았다. 스위스의 학교에서 퇴학을 당한 이후로 한동안은 약물에 중독돼 엉망이 되기도 했었지만 그 탓에 베네수엘라로 추방당하는 대신 재활원으로 갈 수 있었다.
재활하는 데 삼 년이나 걸렸지만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다. 그가 다시 배런트의 저택에 출입을 허락받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세스가 땀으로 차가워진 손바닥을 계속 바지에 문질렀다. 대화를 자꾸 일방적인 방향으로 몰아가는 루이 랜스키가 불안했다.
“내려 주세요.”
“너무 긴장하지 마. 나는 어린애 강간은 안 해. 그건 뒤처리가 골치 아프거든. 노친네가 가장 싫어하는 짓이기도 하고. 차라리 살인이 낫다고 할 양반이지. 미성년자 강간은 어쩐지 더러운 게 연상되잖아. 시체는 처리하기도 쉽지만 어린애들은 분별없이 나불대고 다니니까. 예전에는 입으로만 떠들었다지만 요새는 트위터니 뭐니 그런 게 잔뜩 있어서 말이야. 더 나빠졌다고.”
“이만 내리고 싶은데요.”
“저녁은 먹어야 되잖아. 근처에 좋아하던 식당이 있어. 아직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세스는 싫다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짓을 했다. 서툰 거짓말로 핑계를 끌어오는 일.
“아, 아버지가…… 오늘은 출장에서 돌아오셨을지도 몰라서 일찍 들어가 봐야 해요.”
“네 아빠는 뭐 하는 사람이야?”
“잘은 몰라요. 무슨 엔지니어…… 이런 거라고 들었는데.”
“배런트에 사는 걸 보면 어차피 랜스키에서 일할 테고. 엔지니어 어쩌구 하는 걸 보니 개발 쪽인 모양이군. 성이 그린이랬나? 알았어. 내가 잘 기억해 둘게. 밥이나 먹자고.”
루이 랜스키는 교차로에서 핸들을 꺾으며 재킷 안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누구한테 전화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통화 내용은 세스를 불안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나야. 사람 하나 알아 둬. 이름은 그린이고, 엔지니어래.”
세스가 잔뜩 눌린 음성으로 물었다.
“왜 그걸…….”
“이런 건 미리미리 해 둬야 되거든. 게으름 피우면 뒤늦게 후회해.”
루이 랜스키는 어떤 점을 후회하는지는 말해 주지 않았다.
“뭐 먹을래? 뭐 좋아해?”
날렵한 은회색 차가 배런트에서 가장 호화로운 호텔 정문을 향해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 * *
“너무 불안해하지 마. 네가 그딴 옷을 입고 있으니 식당에 못 들어간 거 아냐. 대신 룸서비스로 올려 보내 준다니까 감사해야지.”
루이 랜스키와 단둘이 호텔 스위트룸에 있다는 사실이 현명하지 못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끝내 벗어나지 못했다. 루이 랜스키는 집요하게 세스가 도망칠 틈을 지워 없었다.
무릎이 보이는 진즈 차림으로는 별 다섯 개짜리 호텔 레스토랑에 출입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도 루이 랜스키는 세스를 데려갔다. 매니저가 정중히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고 말하자 루이 랜스키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그럼 어쩔 수 없으니 객실로 올라가겠다고 했다. 매니저는 더 이상 고집을 피우지 않는 루이 랜스키에게 거듭 감사 인사를 하면서 주방에 따로 일러 룸서비스 형식으로 음식을 가져다주겠다고 했다. 루이 랜스키는 매니저의 옷깃에 백 달러짜리 지폐를 꽂아 넣었다.
세스가 그냥 가겠다고 하자 루이 랜스키는 때마침 걸려 온 전화를 세스에게 들려주었다. 마이클 그린은 아직 출장 중으로, 애리조나 주에 사흘 더 있을 거라는 말이 수화기를 타고 들려왔다. 루이 랜스키는 빙그르르 웃으며 양부가 아예 출장에서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지 물었다.
결국 떠밀리듯 호텔 안으로 들어왔다.
세스는 앉아 있지도, 그렇다고 서 있지도 못한 채 방 안을 서성였다.
“뭐야. 정신 사납게. 저기에 앉아 있어.”
세스는 잠시 루이 랜스키를 바라보다 그가 가리키는 대로 테라스를 마주 보는 테이블 앞에 의자를 빼서 앉았다. 열려 있는 문틈 사이로 호사스러운 침대 끄트머리가 얼핏 보이는 침실을 내내 곁눈질하며 루이 랜스키가 테이블로 걸어왔다.
“내 말을 그렇게 못 믿어? 어린애 강간은 안 한다고 했잖아.”
믿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루이 랜스키는 거짓말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려는 수고조차 하지 않았다. 그가 사이코라는 별명을 얻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세스는 새하얀 테이블보를 바라보며 작게 대꾸했다.
“뒤처리가 곤란했다고 했으니까 해 본 적은 있다는 소리잖아요.”
“뭐? 나 참. 어린 게 사람 잡네. 그런 일 없었다니까. 노친네가 얼마나 성질을 부려 댔는데. 내가 그 짓을 또 하면 랜스키가 아니지.”
루이 랜스키는 겁을 주듯 일부러 차근차근 말을 바꿨다.
“아아, 농담이야. 나는 정말로 우리 막내가 어떤 애들과 어울리는지 궁금했던 거야. 학창 시절 친구는 정말 중요한 거잖아. 안 그래?”
그렇게 말하며 루이 랜스키는 세스를 핥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아, 그 목덜미 좀 더 보여 줄래? 단추 풀어 봐. 쇄골이 예쁘네. 씹어서 잇자국을 남겨 놓고 싶어. 알렉스가 먼저 빨아 놓은 그 자국은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지? 좀 아프긴 하겠지만 도려내도 되겠어?”
“…….”
세스가 재빨리 손으로 목덜미를 가렸다. 겁을 먹고 커다랗게 벌어지는 눈에 대고 루이 랜스키가 낄낄 웃었다.
“너, 어디 가서 그러지 마라. 엉뚱하게 아무 자지나 건드릴 수 있으니까. 돈 받고 할 생각은 없어?”
“없어요.”
“에이, 매정하긴. 섭섭하지 않게 줄게.”
“싫어요.”
“음? 지금 싫다고 했어?”
루이 랜스키의 눈이 스위트룸의 아늑한 조명을 받아 묘한 주황빛으로 번들거렸다.
“싫다는 말은 조심해서 하라고 했잖아.”
확실히 형제는 닮아 있었다. 닮지 않아도 괜찮았을 부분이.
“……네.”
“그래. 고분고분하게 구니까 좋잖아. 머리칼 좀 만져 보자. 이건 타고난 거야?”
루이 랜스키가 머리를 만질 것처럼 손을 뻗었다. 세스가 다급히 몸을 뒤로 젖혔다. 루이 랜스키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겁이 많네. 아주 귀여워. 그런 성격에 용케도 알렉스와 같이 잤어. 그 새끼가 어떤 인종인지도 모르고.”
“그건…….”
세스의 얼굴이 곤란해지는 것을 보며 루이 랜스키의 웃음도 커져 갔다.
“아하. 혹시 알렉스가 정신 못 차리고 덤벼든 거야? 강제로?”
“아니…… 아니에요. 그런 거.”
“그럼 뭐야? 그렇게 빼지 말고 속 시원히 얘기 좀 해 봐.”
“전 정말 가 볼게요. 저녁은 됐어요.”
세스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그보다 빠르게 루이 랜스키가 테이블을 건너와 세스의 무릎을 손으로 눌렀다.
“아……!”
“그러지 말고 얘기 좀 하지.”
“손 치워 주세요. 아파요.”
“에이, 이 정도 가지고 뭘. 알렉스는 더하지 않았어? 그 새낀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성질은 아주 개 같거든. 대체 누굴 닮아 그 모양인지. 사람이 모름지기 폭력을 쓰면 안 되잖아. 안 그래?”
“갈게요. 이러지 마세요.”
“저런. 그렇게 새파랗게 쳐다보니까 아랫도리가 벌떡벌떡 일어설 것 같은데. 그런 말 많이 들어 봤지?”
“놔주세요.”
“너무 새치름하게 굴 거 없어. 난 너같이 예쁘고 마른 애라면 사족을 못 써. 뭐 사 달라고 하면 다 사 줄게. 뭐가 갖고 싶어?”
“놓으세요.”
“그러지 말라니까.”
루이 랜스키가 느닷없이 입술을 덮은 것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거의 동시에 도어 벨이 울렸고, 덩달아 루이 랜스키의 휴대전화도 울렸다. 루이 랜스키가 살짝 닿았던 입술을 떼고는 문을 가리켰다.
“문 좀 열어 줘. 룸서비스일 거야.”
“…….”
세스가 그를 노려보는 동안 루이 랜스키는 태연하게 휴대전화를 받았다.
“아아, 장난 좀 친 거 가지고 뭘 그래. 내가 정말 키스하려고 했으면 설마 입술만 닿고 끝났겠어? 그런 걸 키스했다고 하면 아주 억울하지. ……여보세요. 아, 말해.”
통화가 이어지는 것을 듣고 세스는 현관으로 갔다. 문을 여니 루이 랜스키의 말대로 하얀 조리복을 입은 사람 둘이 커다란 카트를 앞에 두고 서 있었다.
“룸서비스입니다.”
세스가 한쪽으로 비켜섰다. 저들이 방 안으로 들어가서 북적해지는 틈을 타 밖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느샌가 다가온 루이 랜스키가 유령처럼 뒤에 서서 세스를 꽉 붙들었다.
“음식은 저 안쪽으로 옮겨 줘. 촛불도 잔뜩 켜 주고. 내 동생의 소중한 친구야.”
“알겠습니다.”
루이 랜스키는 여전히 휴대전화를 귀에 대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싱긋 웃으며 전화기를 향해 말했다.
“들었지? 그냥 밥만 먹는 거야.”
통화가 끝났는지 루이 랜스키는 전화기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세스가 붙들린 팔을 비틀었다.
“전 갈게요.”
“뭐, 간다고?”
루이 랜스키가 의도가 다분한 짓궂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늦었어. 이 전화, 알렉스가 걸었거든. 경호원들이 이제야 입을 열었나 봐.”
“…….”
“전화 끊는 기세를 보니 지금 달려올 모양인데. 네가 없으면 어떻게 되겠어. 그 성질 못 이기고 사고라도 치지 않겠어? 네가 여기 있다가 해명해 줘야지. 키스 같은 건 그저 장난이었다고 해. 키스는 무슨. 살만 잠깐 닿았다 떨어진 걸 가지고. 혀는 넣지도 않았는데.”
루이 랜스키는 아직 호텔 직원들이 있는데도 잘만 떠들어 댔다. 어쩌면 일부러 그럴지도 몰랐다. 목격자가 필요할 상황이 오면 저들이 들은 말들은 꽤나 유용할 것이다. 루이 랜스키는 어디까지나 장난을 했을 뿐이니까.
입술을 꾹 깨물고 있던 세스가 물었다.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에요?”
“내가 뭘?”
“왜 그렇게 싫어하세요?”
“뭘 싫어해? 알렉스 말이야? 저런, 안 싫어해. 오히려 귀여워서 죽는걸. 알렉스처럼 성질머리 더러운 동생을 이렇게 아끼는 형도 흔하지 않지. 친구까지 데려와서 맛있는 걸 먹이려고 하잖아.”
거짓말이다. 그는 좋은 형도 아니었고 동생을 아끼지도 않았다. 루이 랜스키가 짝짝 손뼉을 쳤다.
“일 다 했으면 다들 나가. 배고파. 어서 먹어야겠어.”
룸서비스를 가져온 직원들이 테이블 세팅을 마치고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루이 랜스키가 후한 팁을 주머니에 찔러 넣어 주었다. 팁을 주며 그가 호텔 직원들의 귀에 뭐라고 속삭였는지는 비밀이었다.
* * *
“자, 입 벌려. 내가 한 입 먹여 줄게.”
포크에 찍은 스테이크 한 점을 건네는 루이 랜스키를 향해 세스는 싫다는 말 대신 고개를 저었다.
“음, 까다롭긴. 침이 섞일까 봐 그래? 그런 건 키스할 때도 마찬가진데 말이야.”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왜? 내가 먹여 주는 게 싫어?”
“예.”
“저런. 왜?”
“불편해서요.”
“뭐가 불편해? 입 열어서 받아먹기만 하면 되는데.”
“그런 거 말고…… 친하지 않은데 친한 척하는 거요.”
루이 랜스키가 포크를 테이블 위로 떨어트리더니 허리를 구부리고 웃어 댔다.
“하하……. 넌 거짓말은 전혀 못 하는 성격이구나? 이거 참. 점점 더 귀여워지는데. 알렉스는 침대에서 어떻게 굴지? 하는 짓을 보면 욕심을 꽤나 부릴 것 같은데. 아냐?”
“아니에요.”
“아니긴. 부끄러워서 그래? 그러지 마. 섹스 안 하고 사는 인간이 어디 있다고.”
달칵.
세스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알렉산더 랜스키와 통화했다는 말이 신경 쓰여서 계속 머물기로 한 것이 바보짓처럼 느껴졌다. 방금 통화를 했다는 것도 거짓말일지 몰랐다. 루이 랜스키는 거짓말을 아주 빠르게, 무한대로 늘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제 정말 갈게요. 식사 잘했습니다.”
세스는 포크만 몇 번 갖다 댔을 뿐 거의 먹지 않은 음식을 놓고 일어섰다. 루이 랜스키가 테이블 위로 손을 뻗었다.
“앉아. 다 먹기 전엔 못 가.”
“갈게요.”
“앉으래도.”
“싫어요.”
“흠. 싫다고?”
그 순간이었다. 루이 랜스키가 탁자 다리를 발로 걷어찼다. 와장창 소리를 내며 테이블이 쓰러졌다. 순식간에 테라스가 엉망이 되었다. 일박에 만 달러나 되는 사치스러운 공간이 빠르게 분위기를 바꿨다. 세스의 옷과 몸에도 음식물이 튀었다.
세스가 질린 표정으로 서 있자 루이 랜스키가 의자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저런, 더러워졌네? 내가 닦아 줄게.”
세스가 미처 말릴 틈도 없이 루이 랜스키의 팔이 허리를 휘어 감았다. 그는 장난처럼 웃으며 음식물의 잔해가 묻은 세스의 뺨에 혀를 들이댔다. 세스는 필사적으로 허리를 틀면서 루이 랜스키를 밀어내려고 애썼다.
“하지 마세요!”
삐비빅, 묵직한 전자음이 들리면서 호텔 룸의 문이 열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
세스가 멈칫했고, 루이 랜스키도 그를 따라 하듯 짓궂게 들이대던 혀를 멈췄다. 어느샌가 눈앞에 알렉산더 랜스키가 서 있었다.
* * *
눈이 약간 붉어진 것도 같았다. 세스는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몰라 알렉산더 랜스키만 바라보았다. 차라리 그가 먼저 묻기를 바랐다. 묻는 말에 대답하는 일이 훨씬 더 쉬울 것 같았다.
그러나 알렉산더 랜스키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오히려 루이 랜스키가 입매를 단단히 굳힌 채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막냇동생에게 이죽대며 말을 걸었다.
“이제 왔어? 좀 느리네. 뭐 타고 왔는데?”
알렉산더 랜스키는 천천히 다가와 둘째 형과 그에게 얽혀 있는 세스 그린을 지나쳤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쓰러져 있는 테이블이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불유쾌한 혼잡을 드러내고 있는 광경을 바라보다 입을 뗐다.
목소리가 찼다. 마치 겨울처럼. 세스는 뒷목을 잡아당기는 한기를 느꼈다.
“이건 왜 이렇게 됐어?”
루이 랜스키가 일부러 자극적인 대답을 골랐다.
“뻔하지. 보면 알잖아.”
뻔하다는 말은 의미심장했다. 밥만 먹겠다던 두 사람이 갑자기 탁자를 엎고 서로 부둥켜안았던 것으로 들릴 테니까.
“그래?”
알렉산더 랜스키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깨진 그릇들과 음식물의 잔해 사이에서 뒹굴고 있는 촛대를 집어 들었다. 음식이 묻어 더러워진 촛대가 알렉산더 랜스키의 손에 들린 채 샹들리에의 조명을 받아 칼날처럼 반짝였다.
“어디까지 했는데?”
세스는 알렉산더 랜스키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루이 랜스키는 알아들었다.
“흥정 중이었지. 가격은 중요한 거잖아. 더군다나 이렇게 맛있어 보이는 물건이면. 아, 오해는 하지 말고. 나는 네 친구라는 말에 넉넉히 챙겨 주려고 했어.”
세스의 부정보다 알렉산더 랜스키의 말이 반 박자 빨랐다.
“그래?”
두 번째로 그래, 라는 말이 들려왔다. 반짝이는 촛대에 어른대던 칼날의 잔상은 이번에는 알렉산더 랜스키의 눈으로 옮겨 갔다. 시선이 칼처럼 저를 찌른다고 느낀 세스는 저도 모르게 알렉산더 랜스키의 앞을 막아섰다.
“그런 거…… 그런 거 아니야. 오해하지……,”
“넌 좀 기다려.”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를 옆으로 떠밀었다. 세스가 쿵 소리를 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를 지나쳐 루이 랜스키의 코앞까지 걸어갔다. 열한 살이 많은 형보다 동생의 체격이 더 컸다. 표정이나 사고방식이 종종 비슷하게 닮아 있던 두 사람은 지금 이 순간 선명한 대비점을 드러내며 마주 섰다.
누군가 나서서 이러니저러니 얘기해 주지 않아도 한 집안에서 형제로 태어난 두 사람이 어떤 사이로 어떻게 지내 왔는지 한눈에 보였다. 두 사람을 쳐다보는 세스의 눈꺼풀이 자꾸만 떨려 왔다.
“목적이 뭐야?”
알렉산더 랜스키가 물었다. 루이 랜스키는 튀는 방향을 짐작하지 못하게 만들어 놓은 고무공처럼 웃어 댔다.
“오랜만이네, 동생아. 그간 잘 지냈어? 반가워서 그러는데 악수라도 한번 할까?”
“알잖아. 내가 여기서 널 죽여도 나는 괜찮다는 걸. 네 시체는 전용기에 실려서 베네수엘라로 가는 게 고작이야.”
그리고 부친이 키우는 악어들이 간만에 인육을 포식할 것이다. 시체를 처리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였지만 부친의 경우에는 철저히 흔적을 남기지 않는 쪽을 선호했다. 설령 어느 정신 나간 검사가 윌리엄 랜스키 소유의 악어들을 상대로 위 수색 영장을 신청한다 하더라도 거기에 사인해 줄 판사를 찾느라 발을 동동 구르는 사이 악어들은 이빨 하나 남기지 않고 위 안에 든 인육을 소화시켜 배설까지 마쳤을 것이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입버릇하곤. 명색이 형인데 무슨 말을 그렇게 험하게 해. 그거 내려놓고 손이나 내놔. 악수하자니까.”
“죽고 싶어서는 아닐 테고. 내 눈앞에서 이런 짓을 하는 이유가 뭐야?”
“이거 참. 예전에는 이렇게까지 버르장머리가 없진 않았는데 말이야. 귀엽던 내 동생은 대체 어디로 가 버렸는지. 밤마다 엄마가 보고 싶다며 빽빽 울던 게 얼마 전인 것 같은데 말이야.”
엄마가 보고 싶다며 운 기억은 없었다. 그러나 루이 랜스키는 열 살도 안 된 동생을 가리키며 뒷구멍을 뚫어 다시는 걷지 못하게 만들어 주고 싶다는 섬뜩한 소리를 지껄이던 장본인이었다. 저택 안을 떠도는 고용인들은 누구도 그 말을 들은 척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알렉산더 랜스키는 리틀 야구단에서 쓰던 나무 배트를 가져와 침대 머리맡에 놓고 자는 습관을 들였다.
유년기의 기억은 대부분 그런 것이었다. 루이 랜스키는 뒤틀리고 망가진 정신이상자였다. 그리고 그는 동생을 증오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제 형들을 혐오하는 만큼.
“아, 혹시 내가 널 못 죽일 거라고 생각했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알렉산더 랜스키가 촛대를 휘둘러 루이 랜스키의 머리통을 휘갈겼다. 아슬아슬하게 비껴 맞은 뒤통수가 얕게 찢어져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루이 랜스키가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화를 내는 지금도 그는 거짓인지 진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거 왜 이래? 내가 뭘 어쨌다고? 이 형을 죽일 참이야?”
“벌써부터 엄살 부리지 마. 아직 제대로 안 때렸어.”
“남자 친구 간수는 네가 잘했어야지! 왜 나한테 화풀이야?”
“네가 어슬렁거릴 줄 알았으면 집에 데려다 놓지도 않았어.”
캉!
촛대가 또다시 루이 랜스키를 후려쳤다. 어느덧 벽까지 밀린 루이 랜스키가 재빨리 몸을 구부리는 바람에 벽을 더 많이 때렸지만 귀가 긁혀 피가 더 많이 흘러내렸다. 묵직한 촛대는 벽에 부딪친 부분이 사정없이 휘어 버렸다. 루이 랜스키가 비명을 지르며 아예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만해! 그만하라고! 어차피 장난이었어! 저런 애는 내 취향도 아니라는 걸 알잖아!”
“내 걸 두고 왜 네 취향을 끌어다 붙여.”
캉!
또다시 알렉산더 랜스키의 손에 들린 촛대가 벽을 찍고 거세게 휘어졌다. 이젠 그가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아닌지도 헷갈렸다.
결국 루이 랜스키가 졌다. 벽에 들러붙어 머리를 감싸고 있던 그가 네 발로 기어서 도망치려 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달아나려는 루이 랜스키의 목덜미를 붙들어 강제로 돌려세운 다음 여기저기 휜 촛대 끝을 눈가에 들이밀었다.
루이 랜스키가 더듬더듬 양손을 들어 올렸다.
“지, 진정해. 이렇게까지 열받을 일은 아니었잖아. 그냥 잠깐 장난한 거야. 호텔비는 형이 내줄 테니 오늘 밤 천천히 즐기다 가는 게 어때? 노친네한테는 네 남자 친구도 비밀로 해 줄게.”
“아직 대답 안 했어. 네 취향도 아니라는 애를 건드린 이유가 뭐냐고. 내가 날뛰다 아버지 귀에 들어갈 만한 사고라도 치길 바랐어?”
루이 랜스키는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히죽대는 거짓 웃음을 지었다.
“에이, 그럴 리가. 피해망상에 찌든 애새끼 같으니. 그새 큰형한테 배웠냐?”
“폭군보다야 너한테 더 많이 배웠지.”
알렉산더 랜스키는 스테이크 소스와 피가 한데 뒤엉킨 촛대를 움직였다.
“으악! 안 돼!”
겁을 집어먹은 루이 랜스키가 눈을 꽉 감고는 두 다리를 달달 떨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그 꼴을 한심하게 지켜보다가 손을 놓아주었다.
“꺼져. 진짜 찍어 버리기 전에.”
험악한 말을 내뱉으면서도 알렉산더 랜스키의 표정은 담백했다. 세스는 오히려 그 표정이 낯설었다. 그가 알던 알렉산더 랜스키와는 한 겹 다른 인물이 서 있는 듯했다.
루이 랜스키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피 흐르는 상처를 눌렀다. 그의 표정 역시 난감했다. 손아래 형제에게 맞아서 피가 줄줄 흐르는데도 그는 아직 옅은 거짓 웃음을 입에 물고 있었다.
“그럼 잘 놀아라, 동생아. 게이가 된 걸 축하해. 노친네가 아주 기뻐하겠네.”
“꺼지라고 했어.”
“아아, 갈 거야. 간다고. 너무 이빨 드러내지 마. 삼 년 만에 봤잖아, 우리.”
루이 랜스키가 피 흐르는 뒤통수를 누른 채 호텔을 빠져나갔다. 아직 음식 냄새가 가라앉지 않은 호텔 방에는 알렉산더 랜스키와 세스가 남았다. 세스는 여전히 촛대를 움켜쥐고 있는 알렉산더 랜스키에게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몰랐다.
지금의 그는 사납다는 말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저 무서웠다. 움켜쥔 주먹의 하얀 뼈마디도, 팔뚝에 툭툭 불거져 나오는 파란 힘줄도, 흰자위를 붉게 물들이는 핏대도 정상처럼 보이지 않았다. 제 힘을 이기지 못해 잘게 떨려 오는 손가락은 촛대를 붙들고 있는 게 아니라 놓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알렉산더 랜스키에게서 멀쩡해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담백한 표정뿐이었다.
세스가 머뭇대며 이렇게 말했다.
“아, 아무 일 없었어. 네가 오지 않았어도……,”
텅!
알렉산더 랜스키가 그제야 촛대를 집어 던졌다. 처음 입술을 열었을 때는 말 대신 김빠진 바람 소리가 먼저 흘러나왔다. 그가 몇 번씩 헛숨을 내뱉은 후에야 말을 시작했다.
“저 새끼, 소아성애자야.”
“…….”
알렉산더 랜스키는 손이 저려 오는지 계속해서 주먹을 폈다 쥐기를 반복했다. 세스는 그런 알렉산더 랜스키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얼굴이 되었다. 그가 불안해 보였다. 세스는 그의 불안을 이해하지 못했다.
“삼 년 전에 어린애 하나 죽였어. 노친네 손 안 빌리고 저 혼자 처리해 보려다 걸려서 난리가 났어. 약쟁이 흉내를 내서 어떻게 잘 빠져나오긴 했지만 저건 미쳤어.”
“…….”
“네가 두 살만 더 어렸어도 지금쯤 두 발로 못 서 있었어. 알아?”
“…….”
비로소 알렉산더 랜스키의 얼굴에서 담백함이 사라졌다. 랜스키가 뒤집어쓰고 있던 담백함은 한 겹도 채 되지 않는 것이었다. 세스가 느꼈던 것보다 훨씬 더 얇고 위태로웠다.
“네가 방금 무슨 짓을 당할 뻔했는지 아냐고, 이 멍청아! 내가 안 왔으면! 그럼 무슨 일이……!”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언제라도 흔들릴 일이 없을 것 같았던 그가 온몸을 떨었다.
누군가 발밑 공간을 도려내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알렉산더 랜스키가 고꾸라질 것처럼 앞으로 몸을 기울이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한쪽 무릎을 꺾은 그가 한 손으로 대리석이 깔린 바닥을 짚어 넘어지는 것을 피했다.
거칠어진 숨이 파도처럼 세스에게 밀려왔다. 망설이던 세스는 느릿느릿 걸어 바닥을 손으로 짚은 알렉산더 랜스키에게 다가갔다.
“미안……해.”
알렉산더 랜스키가 바닥을 짚은 채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
“사람 가지고 노는 것 좀 작작 해! 얌전히 자고 있을 줄 알았더니 왜 도망친 거야! 저 새끼 차는 왜 얻어 타서……! 시팔, 진짜……!”
알렉산더 랜스키가 목구멍 밖으로 거친 말들을 뽑아냈다. 아직도 진정이 되지 않는 듯 주먹을 잔뜩 움켜쥐고 있는 양팔이 부르르 떨려 왔다.
그 모든 것들이 세스에게도 고통이었다. 그는 알렉산더 랜스키를 분노하고 상처받게 만들기 위해 도망쳤던 것이 아니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세스가 무릎으로 걸어 알렉산더 랜스키에게 다가갔다.
떨리는 주먹을 손으로 감쌌다. 진동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미안해. 이젠 도망치지 않을게.”
도망치지 않으면, 그럼 어떻게 되는 걸까.
도망치지 않는다는 말에는 세스가 당연히 가졌어야 할 무거운 질문들이 남아 있었다. 그 무게감이 저를 힘껏 눌러 숨을 쉬지 못하게 만드는 기분이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모를 것이다. 도망치지 않겠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진심이야.”
세스 그린이 알렉산더 랜스키를 사랑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렉산더 랜스키를 사랑하게 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초침이 다섯 번도 흐르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를, 윌리엄 랜스키의 막내아들을 사랑하게 된 까닭에 대해서 세스는 오래도록 갈등한 끝에 이유를 알았다. 자신이 망가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사랑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대신 알렉산더 랜스키를 사랑해서 결국 다가올 대가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언젠가 모두 알게 되는 날이 온다면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가 스스로를 혐오하는 만큼 그를 혐오하게 될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 대신 세스는 그에게 버림받는 시간을 그때까지 미뤄 놓기로 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붉게 핏줄이 돋아난 눈으로 세스를 쳐다보며 불쑥 말했다.
“그럼 증명해.”
“…….”
“넌 이제껏 계속 달아났잖아. 이젠 안 그럴 거라는 말 한마디로는 안 돼. 못 믿겠어. 증명해.”
여느 때처럼 흐리고 멍한 시선 안에 알렉산더 랜스키가 담겼다. 세스가 갑자기 몸을 기울여 알렉산더 랜스키의 입술에 키스했다.
지금의 키스는 저 멀리서 오래도록 인간을 그리워하던 바다가 처음으로 뭍에 제 몸을 부딪치던 순간과도 같았다. 어쩌면 아예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던 키스는 처음으로 제 몸을 부딪쳐 무언가를 탄생시켰다.
세스의 안에서 무언가가 태어났다. 망망한 공허만이 헤엄치던 텅 빈 내부에 무언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입술 선만 서로 포개진 수줍은 키스였다. 그 부드럽고 조용한 키스는 세스와 닮아 있었다. 그러나 곧이어 혀가 건너오며 머리가 녹을 것처럼 뜨거워진 키스도 세스와 닮았다. 이제껏 누구도 본 적이 없었을 뿐이었다.
키스는 처음처럼 달았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의 뒷머리를 움켜쥐고 더 깊숙이 혀를 밀어 넣었다. 입맞춤과 함께 새어 나오는 거친 숨소리는 웃음처럼 들리기도 했다.
무언가가 태어났다. 세스의 안에서, 그리고 알렉산더 랜스키의 안에서.
<다음 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