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아…… 안 돼, 그건 하지 마.”
알렉산더 랜스키가 엉덩이 골 사이에 입술을 미끄러트리자 세스는 화들짝 놀라 허리를 퉁겨 올렸다.
처음 그가 등을 혀로 애무할 때까지만 해도 세스는 아래를 들썩이며 기꺼워했다. 그러나 혀를 고작 한 뼘 더 내렸다고 얼굴을 붉히며 말리려 들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혀를 내민 상태로 웃었다.
“넌 아직도 하지 말라는 게 있어?”
“싫어, 그런 건.”
정말로 얼굴이 붉었다. 감기라도 걸린 것 같았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열이 오르는 듯 붉어져 가는 피부를 손바닥 전체로 쓸며 물었다.
“왜?”
“그냥…… 싫어.”
“이유도 없는데 그만두라고? 그렇겐 못 하겠는데.”
알렉산더 랜스키의 혀가 짓궂게 주름으로 다물린 입구를 쓸었다. 세스는 더욱 필사적이 되어 붙들린 한쪽 발목을 버둥거렸다.
“싫으면 이유를 말해 봐. 내가 납득할 만한 걸로.”
“으…… 그건……,”
“그건?”
“너, 너무 친밀한…… 거 같……,”
“친밀해서 싫다고?”
세스가 입술을 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이까짓 게 뭐. 나는 네 내장도 만져 봤는데.”
“그…… 아냐, 언제…….”
“손가락 넣어서 안까지 휘저었잖아. 거기가 직장 아니야?”
“아…… 아냐!”
“뭐, 아니라면 말고.”
젖은 혀가 주름을 벌리며 느긋하게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흑! 하지…… 마…….”
여느 때처럼 저항은 말뿐이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혀를 늦추지 않으며 한 손으로 세스의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었다. 안타까울 정도로 느리지만 그래서 더 노골적인 움직임이었다.
그의 손길에 맞춰 세스가 눈에 보일 정도로 허리를 떨었다. 꾹 다문 입술 사이로 쌕쌕, 바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입술을 떼고 작게 웃었다.
“뭘 그렇게 참아?”
들려오는 목소리는 이미 울음이 잔뜩 뒤섞여 있었다.
“그, 그러니까…… 할 것 같잖아…….”
“뭘 해?”
“아……,”
짓궂게 물었어도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세스가 제 손에 안달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고집스럽게 시선을 외면한 채 싫다고만 하는 걸 볼 때 속이 들끓던 이유와 같을 것이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맨몸을 더 바싹 붙이며 낮게 속삭였다.
“어떤 게 그렇게 좋은 거야? 손이? 아니면 혀가?”
알렉산더 랜스키의 혀가 질척이는 소리와 함께 미끄러져 고환을 덮었을 때, 세스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가느다란 울음을 토하며 사정해 버렸다. 몸을 지탱하던 두 팔이 녹아내리듯 허물어졌다. 젖은 시트를 피하지도 못하고 그 위에 죽은 듯 엎드린 세스의 등 위로 알렉산더 랜스키가 상반신을 포개 왔다.
“반응이 너무 좋아도 문제잖아. 벌써 이러면 어쩌라는 거야. 나는 어떻게 하라고.”
세스의 입에서 흐물대는 것 같은 목소리가 가늘게 흘러나왔다.
“그냥…… 해.”
“뭘 해?”
“그냥…… 넣어서 하라고. 난 못 움직이겠지만 그래도 상관없으면…….”
말을 끝내기 전에 눈꺼풀이 먼저 감겼다. 눈을 감은 그대로 세스는 잠이 든 것처럼 보였다.
잠시 대답 없이 눈썹을 구기고 있던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의 이마에 손등을 댔다. 진땀이 희미하게 배어 나오는 이마는 체온보다 서늘했다.
“몸이 안 좋아서 그러는 거야?”
“안 좋긴 하지만…… 해도 괜찮아. 나까지 하게 만들지 않으면. 너는 자꾸만 나까지 사정시켜서 그게 힘든 거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알렉산더 랜스키가 낮아진 목소리로 조용히 되물었다. 너무 낮아서 그런지 뒷목의 솜털이 움찔 일어섰다.
“어……,”
세스는 자신이 한 말이 어디가 어려웠는지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 못 할 부분은 없었다.
“그게…… 네가 넣어서 하는 건 괜찮다고. 침대니까 자세가 많이 힘들지도 않고. 네가 할 때까지 참을 수 있어.”
“그러니까, 넌 몸이 너무 안 좋아서 할 생각도 없는데 나 혼자 알아서 해결 보라는 소리야?”
솜털의 반응은 알렉산더 랜스키가 지금 화를 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세스가 침을 한번 삼켰다.
“그럼…… 어, 어떻게 해 줄까.”
“내가 뭘 해 달라고 이러는 것 같아?”
어려운 말을 하는 것은 세스가 아니라 알렉산더 랜스키였다.
“그게 아니면 왜 화를 내?”
“왜 화를 내냐고?”
“화내는 거 맞잖아.”
몸을 일으켜 앉은 세스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를 화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안 한다고 해서 미안해. 네가 하자는 대로 할게.”
세스가 잠시 눈치를 살피다 몸을 돌려 한 손을 알렉산더 랜스키의 어깨에 올렸다. 고개를 길게 뻗어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올려놓았다.
“화내지 마.”
그가 기억하기로 알렉산더 랜스키는 좀 전에 저가 키스했을 때 꽤 좋은 반응을 보였다. 어쩌면 키스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세스가 키스하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그러나 알렉산더 랜스키는 고개를 젖혀 입술을 피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세스의 표정이 어려운 모양새로 굳어 버렸다. 분명 좋아했다고 생각했는데 틀린 모양이었다.
“아……. 미안.”
“뭐가 미안한데?”
“아? 그게 그러니까…… 키스하려고 해서.”
“키스는 왜 하려고 했는데?”
“네가 화를 내니까. 아까는 좋아했던…… 것 같아서.”
“아까 내가 어땠는데?”
“아…….”
추궁하듯 집요하게 이어지는 질문에 세스는 인상을 썼다. 이젠 도망칠 수도 없게 된 알렉산더 랜스키는 여전히 너무 어려웠다. 도망칠 수 없어서 더 어려워졌을지도 몰랐다. 세스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유는 잘 몰랐지만 알렉산더 랜스키는 그에게 화가 났고, 그러니 더는 뭔가를 하려고 들지 않는 게 나을 것이다.
이제껏 화가 났다고 해서 저를 때리는 일은 없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가 때린다면 저항은 하지 않겠지만 지금 몸 상태로 보면 그리 오래 견딜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대답해. 네가 키스했을 때 내가 어땠는데?”
세스는 대답 대신 도망치고 싶었다. 그래서 대답은 점점 느리고 작아졌다.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흥분했잖아. 너도 나한테 키스했고…… 그랬는데.”
“그래. 그래서 지금 둘 다 알몸이 돼서 침대까지 온 거지. 그건 기억해?”
“응.”
“그런데도 키스했다고? 내가 좋아했던 것 같아서?”
“……응.”
“그건 계속 섹스하자는 소리처럼 들리는데. 아니야?”
“맞아.”
“빌어먹을.”
알렉산더 랜스키가 어정쩡하게 상체를 일으키고 있던 세스를 휙 떠밀었다. 세스의 몸은 아주 쉽게 다시 침대 위로 쓰러졌다.
“힘들어서 더는 못 하겠다며. 그래 놓고 뭘 하자는 소리야?”
세스는 호텔 방의 천장과 알렉산더 랜스키의 얼굴 사이에 비딱하게 생겨 간 시야의 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네가 화났잖아.”
“사정할 기운도 없다면서 그따위로 구는데 그럼 화가 안 날 거라고 생각해?”
그게 왜 화가 날 일인지 세스는 알지 못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마주쳤을 때처럼 세스는 입을 다물고 보이지 않는 벽 속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의 두 눈이 어항 안에서 사람을 쳐다보는 물고기 같다고 생각했다. 두터운 물 벽 하나가 가로질러 놓인 다른 차원의 세상 안에서 세상 밖으로, 아무런 소리도 느낌도 전해지지 않는 그곳으로, 그럼에도 필사적인 신호를 보내고 있는 물고기 같다고.
“나만 싸고 만족하면 너는 상관이 없어? 다른 새끼들하고 자면서도 그랬어? 그럼 대체 섹스는 왜 했는데. 돈 받은 적도 없다며.”
“그건……,”
“나도 다른 새끼들하고 똑같아? 너는 좋지도 않고 생각도 없는데 내가 내내 붙잡아다 놓으니까 뒤나 대 주고 말자는 거였어? 그러면 얌전해질 것 같아서?”
“아니, 그……,”
“나만큼 지랄하는 새끼가 없어서 도망치지 않겠다고 한 거야? 알아서 떨어져 나갈 때까지만 참을 생각이었어? 너하고 나하고 지금 그런 사이인 거야?”
“아니, 그건…… 아니야.”
“그런데 왜 말을 그렇게 해! 다른 새끼들은 대체 널 어떻게 대했다는 말이야!”
“…….”
세스는 시간이 충분히 지난 뒤에야 알렉산더 랜스키가 하는 말을 이해했다. 저를 걱정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랜스키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친절하고 상냥했다.
“그건…… 아냐.”
세스가 애써 몸을 똑바로 일으켜 알렉산더 랜스키를 마주하며 말했다.
“너를 다른 애들하고 똑같이 생각해서 그런 건 아니야. 한 번도 그런 적 없어. 나는 네가…… 더 하고 싶다고 하니까 그게 좋아서……,”
세스의 손이 느리고 조심스럽게 알렉산더 랜스키의 맨 팔뚝을 쥐었다.
“나도 어떻게든 더 해 주고 싶었어.”
알렉산더 랜스키가 나직한 신음을 흘리며 세스의 몸 위로 엎드렸다. 힘껏 조이듯, 팔이 아니라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어쩐지 눈물이 흐를 것 같아 세스는 두 눈을 부지런히 깜박였다. 세스가 양팔을 내밀어 그를 마주 안았다.
세스의 목덜미에 연달아 숨결을 뱉어 내던 알렉산더 랜스키가 말했다.
“너, 다시는 지금처럼 굴지 마.”
“뭘?”
“너는 할 마음도 없으면서 나한테는 해도 된다고 하지 말라고.”
“…….”
“안 되면 안 된다고 해.”
세스는 그간 싫다는 말과 안 된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준 적이 없었던 쪽은 알렉산더 랜스키였다는 얘기를 굳이 들려주진 않았다. 그저 웃었다. 그렇게 말해 주는 그가 좋아서. 아니, 뭐든 말해 주는 그가 좋아서.
“응.”
“그럼 이제 키스해. 좀 전에 하다 말았으니까.”
세스가 고개를 살짝 뗐다.
“아까 네가 피했잖아.”
“그건 네 의도가 불순했으니까.”
알렉산더 랜스키가 고개를 낮춰 제 입술을 세스의 입술 위에 갖다 댔다.
“이젠 알았으니 됐어. 키스해.”
대체 뭐가 됐다는 것이고 뭐가 달라진 것인지 세스는 알지 못했지만 시키는 대로 얌전히 입술을 포갰다. 유독 여리고 부드러운 살갗이 서로에게 쓸리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벌리고 혀를 밀어 넣었다. 생각보다 한참 길어진 키스를 마치고 세스는 그대로 알렉산더 랜스키의 팔에 감긴 채 잠이 들었다.
자는 내내 말도 안 되는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 * *
잠결에 이런저런 소리들이 들려왔다. 세스는 무겁게 가라앉은 눈꺼풀을 들지 못해 그게 무슨 소리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그 뒤로도 한참의 시간이 찐득한 구름처럼 느리게 흘러갔고, 마침내 귓가에 크리스털 잔이 부딪치는 맑은 소리가 울리고 나서야 눈을 뜰 수 있었다.
“……?”
“그만 일어나. 학교 가야지.”
눈꺼풀 틈새를 비집고 동공을 찔러 대는 아침 해는 부드럽지만 집요했다. 결국 세스는 눈을 비비며 시트에 둘둘 말린 몸을 일으켰다. 아직은 흐릿한 시야 안으로 갓 샤워를 마친 듯 젖은 머리를 하고 있는 알렉산더 랜스키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옷 대신 배스 가운을 느슨하게 두르고 있었다.
세스가 몸을 일으키자 알렉산더 랜스키는 목이 얇은 잔에 담긴 오렌지 주스를 건넸다.
“마셔. 정신 좀 차리게.”
세스는 반사적으로 목을 길게 빼 랜스키의 어깨 너머를 응시했다. 어젯밤의 사고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대신 새하얀 레이스가 깔린 티 테이블 위에 아침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좀 전까지 들렸던 부산함은 룸서비스가 다녀가는 소리였다.
세스는 잔을 건네받는 대신 고개를 흔들었다.
“씻을래.”
“먹고 씻어.”
“씻고 싶어.”
“일단 먹고.”
“먼저 씻고.”
세스가 고집을 피우자 알렉산더 랜스키가 슬쩍 웃었다.
“그건 먹여 달라는 소리지?”
“그게 아니…….”
그가 잔을 내려놓고 테이블을 침대 쪽으로 밀었다. 두 명이 아니라 다섯 명은 먹어야 될 것 같은 음식들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테이블을 돌아 세스의 옆에 앉았다.
“뭐 좋아해?”
질문은 습관처럼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포크로 계란 요리를 잘라 세스에게 내밀었다.
“입 벌려.”
세스는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을 하기 위해 입을 벌렸다.
“아침은 잘 안 먹어.”
“이제부턴 먹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입 안으로 계란이 불쑥 들어왔다. 세스가 눈매를 찡그렸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웃음소리를 흘리며 입술을 겹쳐 왔다.
“다 씹어서 삼킬 때까지 막고 있을 거니까.”
타인의 입술이 입을 막은 상태에서 음식을 씹어 삼키는 일은 그리 편하지 않았다. 세스의 양 볼이 붉어졌다.
“다…… 먹었어.”
세스가 고개를 뒤로 젖히면서 말하자 기다렸다는 듯 이번에는 파삭파삭한 껍데기 속에서 갓 구워 낸 버터 향이 농밀하게 오르는 빵이 다가왔다.
“벌려.”
세스는 난처한 듯 알렉산더 랜스키를 바라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입 속에 빵을 넣어 준 알렉산더 랜스키가 주스 잔을 내밀었다.
“마셔.”
세스는 선명한 오렌지 빛깔을 한 차가운 유리잔을 싫은 표정으로 응시했다.
“이건…… 싫은데.”
“왜?”
“시어서.”
“애 같긴. 마셔.”
알렉산더 랜스키는 비타민이 부족하니까 안색이 그렇게 형편없는 거라고 중얼대며 세스가 마실 때까지 잔을 입술에 대고 있었다.
“…….”
작게 한숨을 쉬었지만 세스는 도리 없이 오렌지 주스 잔을 비워 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그 뒤로도 계속 음식을 떠밀었다. 세스는 고분고분히 주는 음식을 모두 받아먹었다. 더 먹을 수도 없을 지경이 되자 오히려 신기해하는 쪽은 내내 음식을 먹인 사람이었다.
“잘 먹네. 평소에도 이렇게 먹어?”
세스는 다람쥐처럼 양 볼에 음식을 잔뜩 넣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그럼, 오늘은 내가 먹여 주니까?”
고개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 잘 듣는 애완견을 쓰다듬듯 세스의 머리카락을 헝클였다.
“그래, 잘했어. 앞으로도 말 잘 들어. 그만큼 귀여워해 줄게.”
“…….”
잠깐 멈추었던 세스가 다시 고개를 움직였다. 끄덕끄덕, 손바닥 아래서 느껴지는 세스의 움직임을 알렉산더 랜스키가 가만히 헤아렸다. 기묘한 충족감이 손가락 사이에 감겼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포크를 내려놓고 세스의 머리를 끌어당겨 가슴에 댔다.
언제부터 이 감각이 이렇게나 익숙해졌는지 신기했다. 이토록 충족적으로, 너무 익숙해져 버려서 이젠 사라진다면 허전함을 느낄 정도로.
세스 그린과 마주 얘기를 나누게 된 것은 이제 고작 2주였다. 시간의 흐름보다 몇 배나 더 놀라운 것은 감정의 흐름이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흘려 넣었다. 그마저도 순식간에 익숙해져 버렸다. 고개를 숙여 세스의 머리칼에 입술을 댔다. 바삭하게 비벼지는 감촉이 익숙해졌다. 눈을 감고 호흡을 들이켜자 몸속 아주 깊은 곳까지 체향이 스며들었다. 그마저도 아주 오래된 것인 양 익숙했다. 마주 닿으면 뼈의 생김새가 피부 위로 느껴지는 마르고 하얀 몸은 태어날 때부터 그와 한 쌍이었던 것처럼 몸에 익숙했다.
“이젠 씻어도 돼?”
그 와중에도 꾹꾹 씹은 음식을 삼켜 낸 세스가 물었다. 그가 더 이상 음식을 먹일 생각이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 한 말이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감았던 눈을 뜨고 세스를 놓아주었다. 짙어진 눈이 아쉬움을 담아 일렁였다.
“눈치는 더럽게 없어서. 씻어.”
세스가 연한 갈색 눈을 치켜떴다. 어떤 각도에서 보아도 공허하던 눈은 이제는 가끔씩 울컥대는 감정의 증폭을 불러일으킬 만큼 달리 보였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가 정말로 예쁜 눈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럼 더 먹어?”
“아직 배고파?”
“아니. 배불러.”
“그런데 뭘 더 먹겠다는 거야. 씻어.”
“……응.”
붙잡고 있던 몸을 놓아주자 세스는 곧장 몸을 일으켜 욕실로 들어갔다. 문을 쿵 닫더니 이어서 문까지 잠가 버렸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아직도 수줍음을 떨 구석이 남아 있는 세스를 향해 혀를 차며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호텔 컨시어지가 연결되자 알렉산더 랜스키는 갈아입을 옷을 주문했다. 매니저가 눈썰미 있는 사람이라면 알아서 적당한 옷을 가져다줄 것이다.
“……아, 두 벌이요. 하나는 내 거보다 한 치수 작은 걸로.”
매니저의 싹싹한 대꾸와 함께 전화를 끊은 알렉산더 랜스키는 불쑥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바지는 치수가 애매했다. 몇 번 벗겨 본 기억에 의하면 세스 그린의 진즈는 몸에 비해 훨씬 낙낙했다.
“더 작은 걸로 해야 되나.”
알렉산더 랜스키가 탕탕 욕실 문을 두드렸다.
“문 열어 봐.”
안에서는 대꾸가 없었다.
“아무 짓 안 해. 옷 사이즈 확인하려고 그러는 거야.”
“…….”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의 대답 대신 잠긴 문 너머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소음을 들었다. 신경을 긁어내는 불유쾌한 소리였다. 그가 문고리를 잡고 비틀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문 열어!”
절컥대며 비명을 지르는 문고리가 시끄러웠지만, 한번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나자 그 이상 귀를 자극하는 소리는 없었다.
“안 열면 내가 연다!”
쾅!
결국 문고리를 잡아 뜯어냈다. 고풍스러운 바로크풍 인테리어의 일부가 되었던 연약하고 호화롭던 문고리가 비틀려 버렸다. 망가진 문고리를 내던진 알렉산더 랜스키가 문을 쾅 열어젖혔다.
두툼한 매트가 깔린 세면실 너머 그 안쪽의 검은 대리석 바닥에 몸을 구부리고 있는 세스가 보였다. 세스는 변기 위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입가가 더러웠다. 욕실 문을 걸어 잠근 세스가 왜 변기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물어볼 것도 없었다. 오렌지 주스 외에는 싫다는 말 한 마디 없이 주는 대로 받아먹던 세스는 그가 보지 않는 데서 고스란히 그가 먹였던 것을 토해 놓았다.
세스를 보며 지금 이 순간 솟구치는 감정들을 어떻게 해소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단순히 화가 났다는 말로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세스 그린과 관계된 것은 모든 게 상식보다 복잡했다.
“…….”
더듬대는 것 같은 시선을 억지로 돌린 세스가 토사물이 가득한 변기의 물을 내렸다. 구토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몸 밖으로 흘러나온 비린 냄새는 여전했다.
그 냄새들을 모두 삼키고 나서야 입이 열렸다.
“……거식증이야 아니면 멍청한 거야.”
세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사나운 걸음으로 욕실을 가로질러 와 세스의 목덜미를 붙들어 일으켰다. 방금 전과 한눈에 비교가 될 정도로 창백해진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속이 뒤틀렸다.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둘 중에 뭐야.”
“이거 놔…… 놔줘.”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굶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면 너무 멍청해서 위가 감당하지 못하기 전에 그만 먹어야 되는 걸 몰랐어? 어느 쪽이야?”
“그런 거 아냐. 이거 놔. 씻을……,”
“대답하라잖아!”
텅!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의 몸을 검은 대리석으로 쌓인 벽에 밀어붙였다. 벽에 매달려 있던 거울의 차가운 온도가 세스의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놓아 줘…….”
저항하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연약한 목소리뿐이었다. 세스의 풀 죽은 눈동자는 타인이 사납게 구는 것을 벌써 체념하고 있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피부를 뚫고 소름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세스의 눈에 떠오른 체념은 상상하기 싫은 무언가를 억지로 연상하게 만들었다.
이제껏 이런 식이었을 것이다. 누가 무슨 요구를 하든 빠르게 체념하고 얌전히 견뎌 냈을 것이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의 어깨를 단단히 움켜쥔 채로 심호흡을 한번 했다.
“잘 들어. 그리고 잘 생각해 보고 대답해. 거짓말하거나 피하지 마. 알아들었어?”
“……뭘.”
“널 이렇게 만든 게, 네 부모라는 인간들이야?”
“어떤…….”
“영양실조든 거식증이든, 입 안 뚫린 개새끼처럼 한번 짖을 줄도 모르게 만들어 놓은 게 네 부모냐고.”
“아, 아냐. 그런 거.”
알렉산더 랜스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위협처럼.
“잘 생각해 보고 대답하라고 했지. 너한테 묻는 대신 사람 사서 알아보는 게 더 쉬울 거라는 건 알아. 그렇게까진 하고 싶지 않아서 일단 묻는 거야. 네 부모는 뭐 하는 사람이야? 어떤 인간들이기에 애를 이렇게 만들어 놨어?”
질문을 하면서 그 역시 스스로 머릿속을 정리하려고 애썼다. 쉽지는 않았지만, 노력은 했다.
세스의 몸에 학대의 흔적은 없었다. 맞은 자국이 있다면 그가 먼저 알아봤을 것이다. 하얀 피부는 그가 조금만 이를 세워도 금세 자국이 남을 만큼 연약하고 섬세했다. 그 음울한 집구석에서 육체적 폭력을 겪으며 사는 것은 아니었다. 그 점은 다행이었다.
하지만 방치 또한 폭력이었다. 세스는 어제부터 자신과 함께 있었고 집에 연락 같은 것도 하지 않았지만 이제껏 찾는 사람이 없었다. 일로인에 다니는 대부분의 아이들처럼 세스도 일반 학교보다 졸업이 늦은 케이스겠지만, 그렇다고 그가 부모에게서 완전히 독립을 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세스 그린의 부모는 여전히 세스를 보살펴야 했다. 세스처럼 문제가 있는 성격이라면 더욱 신경을 써야 했다.
세스의 어깨를 놓아준 알렉산더 랜스키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마디가 희게 불거져 나온 주먹은 금방이라도 누군가를 후려칠 것처럼 보였다.
“대답해.”
세스는 고개를 수그렸다.
“말하기…… 싫어.”
“왜?”
“그냥…… 너한테는 말하기 싫어.”
“그래?”
쾅!
눈앞으로 하얗게 움켜쥔 주먹이 날아들었다. 세스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러나 아프지는 않았다. 알렉산더 랜스키의 주먹이 닿은 곳은 호화로운 테두리를 두르고 있는 거울이었다. 주먹이 닿은 부근을 따라 거울이 맑은 소리를 내며 깨졌다. 갈라진 유리 조각 틈새로 피가 새어들어 뚝뚝 흐르기 시작했다.
“다시 물을게. 그 집구석에서 넌 어떻게 살았어?”
깨 버린 거울처럼 세스의 표정도 조각조각 깨어졌다. 세스가 조각난 얼굴로 기를 쓰고 알렉산더 랜스키의 손목을 붙들었다.
“이러지 마! 왜 이러는 거야!”
“대답할 거야?”
“다쳤잖아! 네가 다쳤잖아!”
“대답할 거냐고.”
“하지 마!”
“안 해?”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를 팔에 매단 채 또 한 번 주먹을 치켜들었다.
퍽!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깨진 거울이 또 한 번 깨졌다. 주먹이 한 번 더 피를 흘렸다.
“말해.”
“하지 마!”
“안 해?”
퍽!
어떻게든 귀를 감으려 들어도 소리에는 자비가 없었다. 세스는 두 눈을 질끈 감고는 온몸의 무게로 알렉산더 랜스키에게 매달렸다.
“안 돼! 하지 마!”
눈물이 툭 터져 나왔다.
“하지 마! 그런 게 아니야! 아무도 안 그랬어!”
알렉산더 랜스키가 멈칫 서서 저에게 매달리는 세스를 돌아보았다. 힘껏 그를 부둥켜안고 선 세스의 양팔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도 안 그랬어! 내가 이상한 거야!”
세스는 거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몸은 떨렸고, 울음이 뒤섞인 말은 아플 때 내지르는 비명 같았다.
“내가 잘못된 거야! 내 머리가 잘못되어 있었던 거야!”
세스가 알렉산더 랜스키를 놓고 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처박히듯 바닥에 주저앉아 몸을 오그려 말고는 양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 혼자만 폭우 아래 서 있는 사람 같았다.
“내가…… 그때 ……지 못해서…… 그때 내가…….”
알렉산더 랜스키가 천천히 다가왔다. 무릎을 바닥에 대고 눈높이를 맞춘 그가 세스의 턱을 붙들어 고개를 들게끔 만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
들어 올린 얼굴은 온통 젖어 있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손등으로 세스의 얼굴을 쓸었다. 눈물 자국은 사라지고, 대신 핏자국이 묻었다. 또다시 흐르는 눈물에 이번에는 핏자국이 번졌다. 또다시 얼굴을 쓸었다. 눈물과 핏자국이 한데 뒤엉켰다.
“머리가 잘못됐다니?”
세스가 고개를 약하게 흔들었다. 턱을 붙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벌써 말했잖아. 더 숨길 이유가 뭐 있어.”
단단히 턱을 붙든 손가락은 답이 들려오기 전까진 아무것도 놔주지 않을 기세였다. 세스는 거칠어진 숨을 한동안 토하다 잘 들리지도 않을 아주 작은 소리를 내뱉었다.
“약…….”
“약?”
“엄마가…… 약을 했어.”
알렉산더 랜스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임신한 와중에?”
“……응.”
“지금은?”
세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알렉산더 랜스키를 쳐다보았다.
“지금도 중독 상태냐고.”
“아니.”
모친은 죽었다. 벌써 오래 전에.
“엄만 죽었어.”
그리고 세스 그린은 모친이 죽던 순간을 지금껏 내내 기억하고 있었다. 약물 과용으로 죽은 모친의 시신 옆에서 세스는 사흘을 보냈다. 네 살은 죽음을 깨닫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종종 배가 고파지면 며칠 전에 사서 남은 시리얼을 조금씩 먹었다. 세스는 모친을 두고 혼자만 무언가를 먹는다는 데 죄의식을 느꼈다. 침이 섞여 묽어진 시리얼을 한 번씩 삼킬 때마다 세스는 모친을 돌아보며 어깨를 움츠렸다. 설탕물이 코팅되어 있는 오렌지 향의 시리얼은 어린 입맛에도 전혀 맛있지 않았다.
모친은 죽기에도, 그리고 엄마가 되기에도 너무 젊었다. 열아홉 살에 그를 낳은 모친은 약에 중독되면서 이전의 미모를 잃었지만 시체가 되고 나서도 여전히 젊고 아름다웠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윤기가 흘렀던, 그러나 그의 기억 속에서는 언제나 푸석했던 금발을 네 살의 세스가 손가락을 벌려 움켜쥐었다. 그가 머리카락을 만지면 모친은 그를 때렸다. 그러나 입가에 새하얀 거품을 물고 사흘 내내 가만히 있던 모친의 시신은 머리카락을 아무리 잡아당겨도 더 이상 그를 때리지 않았다. 세스는 모친이 어서 일어나 그를 때리기를 바라며 시체가 만들어 내는 침묵을 견뎠다. 더는 견디지 못할 것 같은 순간이 오자 울기 시작했다. 일박에 32달러짜리 싸구려 호텔의 옆방에 묵고 있던 누군가가 세스의 울음소리를 듣다못해 신고하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도 그곳에서 계속 울고 있었을 것이다.
혹은 모친과 함께 죽었을 것이다.
알렉산더 랜스키를 만나기 전까지 세스는 늘 그 순간을 되풀이했다. 그때 같이 죽었어야 했다고. 모친의 곁에 누워 아무리 배고파도 절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입을 단단히 다물고 있어야 했다고. 옆방으로 새어 나갈 소리는 아주 작게라도 흘리지 말고 까마득히 누워만 있었어야 했다고. 그랬으면…….
“그러고 나서…… 입양이 됐어. 날 입양해 준 사람들이…… 그러니까 아버지들이 의사한테 데려갔어.”
지금도 음식을 입에 넣을 때마다 모친과 함께 있었던 사흘의 시간이 생각나는 것은 아니었다. 시체에서 흐르는 냄새와 뒤섞인 인공의 오렌지 향이 모든 음식에서 나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죄의식이 버릇처럼 몸에 익어 버린 것뿐이었다. 먹는 행위는 불편했다. 잘못을 저지르는 기분이었다. 세스 그린은 자신이 무언가를 먹으며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사실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모친과 함께 죽었어야 했다.
혹은 아예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모친은 지금도 아름답게 살아 있었을 것이다.
“내 머리가…… 좀 이상하다고 했어. 정상인하고는 다르대. 엄마가 약을 해서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했어. 나는 약을 계속 먹어야 해.”
세스의 어깨가 금방이라도 잘게 부서질 것처럼 떨려 왔다.
“이런 거…… 이런 말, 너한테 하기 싫었어.”
세스가 양 손목으로 눈을 눌렀다. 팔뚝이 얼굴을 모두 가려 버렸다.
“너한테는 하기 싫었어.”
말을 마친 세스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세스는 알렉산더 랜스키를 처음 봤던 순간을 되살렸다. 그때 느꼈던 감정들은 하나로 뭉쳐 뱃속에 단단히 자리를 잡았다. 그것들은 세스의 일부가 되었다. 숨을 쉴 때도, 걸을 때도. 잠을 잘 때도 그 감정들은 세스의 내부에서 생생히 호흡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저와는 달랐다. 그를 에워싼 공기마저 자신이 들이쉬는 것과는 다르지 않을까 싶었다. 며칠 뒤에서야 그의 이름이 알렉산더 랜스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는 이미 늦었다. 제 망가진 머리는 랜스키라는 성이 보내는 경고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무리를 이끌고 걷던 알렉산더 랜스키는 누군가 재미있는 얘기라도 했던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큰 소리로 웃어 버렸다. 그러자 무리가 멈췄다. 무리가 그를 따라 웃기 시작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다시 걷기 전까지 누구도 먼저 걸음을 떼지 않았다. 그는 일로인이라는 작은 우주를 회전시키는 사람이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달라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시선은 심장박동과 같았다. 자의로는 조절할 수도, 멈출 수도 없었다.
“……윽, 흐으…….”
세스는 흐느낌을 삼키기 위해 입술을 씹었다.
그가 보는 앞에서 우는 게 벌써 두 번째였다. 자신에 대해 무력감과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 몇 번째인지 셀 수도 없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저를 몰랐다면 좋았을 것이다. 이름도 존재도, 아무것도 몰랐다면 좋았을 것이다. 긴 하루의 몇 분씩 일로인의 왕자를 바라보며 세스 그린은 몇 분간의 안도와 행복을 느꼈을 것이다.
지금처럼 결코 하고 싶지 않았던 얘기를 하며 스스로를 견디지 못해 바보처럼 흐느껴 우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입술, 물지 말라고 했잖아.”
알렉산더 랜스키의 손이 느리게 다가와 세스의 입술을 건드렸다. 세스가 고개를 홱 피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예 팔이 목을 휘감았다.
“상처 내지 마. 내 허락 없이.”
“……놔. 쳐다보지…… 마.”
알렉산더 랜스키의 손가락이 입술 새를 비집고 들어와 입을 벌렸다. 잇자국을 따라 피가 옅게 배어 나왔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상처 난 세스의 입술에 제 입술을 대고 방울방울 번져 나오는 피를 들이마셨다.
상처가 불에 닿은 듯 뜨거워졌다. 비로소 상처가 아프기 시작했다. 세스가 인상을 쓰며 알렉산더 랜스키의 어깨를 꾹 붙들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잠시 후에 입술을 놓아주었다.
“엄마가 죽었고, 게이 부부가 널 입양했고, 너는 머리가 좀 이상하고. 그리고 또 뭐?”
“…….”
“그게 다야? 네가 나한테 말하기 싫었던 건?”
“…….”
“그럼 별거 아니잖아. 약이나 좀 챙겨먹으면 될 거 가지고. 유난 떨지 마. 괜찮으니까.”
대답이 없자 평소보다 붉어진 입술을 한 알렉산더 랜스키가 천천히 세스를 끌어당겨 제 가슴에 기대게 했다.
“괜찮아. 그 정도는.”
알렉산더 랜스키의 손이 느리게 세스의 등을 토닥였다.
별거 아니니까. 다 괜찮으니까. 그가 정수리에 입술을 대고 계속 같은 말을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 괜찮아.
느린 손짓을 따라 세스의 흐느낌도 느리게 잦아들었다.
“일어나. 세수하자.”
시간이 흐른 뒤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를 일으켜 어설프게 감겨 있던 시트 자락을 풀어냈다. 그리고 언젠가처럼 욕조로 데려가 씻겨 주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손길이 좀 더 조심스럽고 부드러워졌다는 것이었다.
* * *
“얼굴 펴. 그렇게 인상 쓰지 마.”
알렉산더 랜스키는 갓 다림질을 마쳐 배달된 새 셔츠의 단추를 잠그며 세스에게 말했다. 응급처치를 한 손에는 두툼한 붕대가 감겨 있어 단추를 잠그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세스는 통 거들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 알렉산더 랜스키의 말처럼 힘껏 얼굴을 구긴 채 새 옷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짓궂게 웃었다.
“그만하면 다행이지. 수트라도 가져왔으면 어쩔 뻔했어.”
호텔에 입점한 상점에는 등교할 때 입을 만한 옷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 영국의 어떤 축구선수 덕분에 유명 디자이너들이 앞다투어 뒷주머니에 제 이름을 박아 넣은 진즈를 만들어 내는 시즌이라 다행이었다. 청바지에 타이가 없는 셔츠라면 등교할 때 입더라도 어색하진 않을 것이다.
세스가 경악한 것은 사이즈만 다를 뿐 완전히 똑같은 옷을 입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하루 종일 어딜 가나 그를 보는 시선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소문은 한 시간도 안 되어 끔찍하게 몸집을 불린 허리케인처럼 일로인을 강타할 것이다.
“난 못 입어. 내 옷 돌려줘. 그냥 그걸 입을게.”
경악한 세스와는 달리 알렉산더 랜스키에게는 하루의 놀이였다. 세스 그린과 똑같은 옷을 입고 등교할 경우 생겨날 빤한 결과가 그를 유쾌하게 만들었다. 제이 에드거가 입을 놀리고 다니지 않아도 누구나 세스 그린의 소속을 알게 될 것이다.
나쁘지 않았다.
“네 옷 없어.”
“뭐?”
알렉산더 랜스키는 속옷만 입고 있는 세스에게로 다가가 그와 똑같은 흰색 셔츠를 걸쳐 주었다.
“팔 벌려. 그래야 입지. 네 옷은 아까 청소할 때 같이 버렸어.”
“왜!”
“더러워졌잖아.”
거짓이 아니라 루이 랜스키가 테이블을 엎을 때 튀었던 음식물의 잔해가 고스란히 묻어 있긴 했다.
세스는 양팔을 고집스럽게 그러안은 채 알렉산더 랜스키를 노려보았다.
“애들이 하루 종일 뭐라고 떠들지 생각 안 해 봤어?”
“했어. 잘됐지. 진작 이럴걸.”
“뭐……?”
“제이 에드거가 심부름을 안 했잖아. 덕분에 난 올해 들어서 차를 두 대나 망가트렸고. 그 페라리는 한정이라 새 걸 사다 놓을 수도 없어. 수리가 안 된다고 하면 나는 아버지한테 맞을지도 몰라.”
알렉산더 랜스키의 엄살은 그저 농담이었다. 세스가 알아듣지 못했을 뿐이다.
“그럼…… 어떡해?”
알렉산더 랜스키는 걱정의 무게로 인해 아래로 축 처지는 세스의 눈꼬리를 손바닥으로 훌쩍 쓸었다. 강아지처럼 표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눈매가 못 견디게 귀여웠다.
“어떡하긴. 그러니까 그럴 일 만들지 말아야지. 잔말 말고 입어.”
“그건 네가 그러지 않으면 될……,”
“아침부터 성질 건드리지 마. 사람이 한 시간째 기다리고 있는데 보란 듯 다른 새끼 차 얻어 타고 가 버린 게 누구야. 너나 그 새끼는 멀쩡히 놔두고 얌전하게 차만 망가트려 놓았다고 화가 안 났을 것 같아?”
“리든은 다쳤을 것 같은데…….”
“안 죽었잖아. 발 들어. 한쪽씩.”
알렉산더 랜스키는 빠르게 말을 내뱉으며 결국 세스 그린에게 옷을 입히는 데 성공했다. 새 옷을 입혀 놓은 세스는 보기 좋았다. 눈빛이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그쯤은 곧 괜찮아지리라고 생각했다.
“몸에 맞는 옷을 입으니까 더 예쁘네. 나가자.”
알렉산더 랜스키가 손을 내밀었다. 세스는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발끝을 쳐다보고 있다가 시간이 더 흐른 뒤에야 그가 내민 손을 쥐었다.
아직도 세스는 랜스키와 같은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처음 듣는 말이 생각을 저만치 떠밀어 버렸다.
“지금…… 뭐라고 했어?”
“음?”
“아까 뭐라고……. ……했냐고.”
조심스럽게 손끝을 붙든 세스는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목덜미에 스며들기 시작한 홍조가 새하얀 셔츠 깃에 묻어 나올 만큼 진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허리를 숙여 세스의 얼굴에 바싹 제 얼굴을 들이댔다.
“왜 이렇게 얼굴을 감춰?”
세스가 휙 고개를 돌렸다.
“대답해. 아까 뭐…….”
“뭐? 예쁘다고 한 거?”
그 순간 세스의 얼굴이 정말로 확 소리를 내며 붉어졌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재빨리 손을 뻗어 세스의 턱을 쥐었다.
“그만 감춰.”
“보, 보지 마!”
세스가 거칠게 머리를 흔들었다. 더 짓궂게 굴었다가는 울 것 같은 분위기라 그쯤에서 턱을 놓아주었다.
“네가 이러니까 자꾸 반응이 보고 싶어지지. 예쁘다는 말을 처음 들어 보는 것 같잖아.”
“…….”
아직 제 손을 쥐고 있는 세스의 손가락이 바르르 떨려 왔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진짜 처음이네.”
“아…… 아니야! 전에도 들어 봤어.”
“그래? 누구한테?”
“처음 아니라고!”
세스가 알렉산더 랜스키의 손을 홱 뿌리치고 저만큼 앞으로 가 버렸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성큼 걸어와 그 뒤를 쫓았다. 다시 손을 붙들자 세스는 얌전히 손을 내주었다. 최상층 전용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의 머리칼 사이에 입술을 묻었다. 오늘 아침 제 손으로 감기고 말려 준 머리칼에서는 사탕 같은 냄새가 났다.
“넌 예뻐.”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가늘게 떨고 있는 세스를 앞으로 밀어 엘리베이터를 타게 만들었다. 말 한마디에 꼼짝도 못 하고 떨고 있는 세스는 안타까울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버림받은 개를 닮았다는 생각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한 사람이 이렇게나 사랑스러워질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고작 말 한마디 했다고 울지 마.”
알렉산더 랜스키는 붕대가 감기지 않은 손등으로 세스의 젖은 뺨을 쓸어 주었다.
“진짜 예뻐서 죽을 것 같으니까.”
“…….”
다행히도 늦기 전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몇 초만 더 늦었어도 그는 다시 최상층으로 올라가는 버튼을 눌렀을 것이다.
* * *
호텔을 떠나는 랜스키를 매니저가 배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연하지 않은 것은 매니저가 조금 난처한 얼굴로 청구서는 어디로 보내야 하는지 물었을 때였다.
어젯밤 사과의 뜻으로 호텔비를 계산해 주겠다던 루이 랜스키의 말은 거짓이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피트니스 룸에서 운동을 하던 차림새 그대로 랜스키가의 경호 차량을 타고 이곳에 도착했고, 당연히 지불 수단 같은 것을 가져오지 않았다.
“하여간 미친 인간 같으니…….”
“예, 예?”
알렉산더 랜스키의 말을 오해한 호텔 매니저가 주춤 어깨를 굳혔다. 프랑스 본사에서 파견한 매니저는 종종 눈치가 없다는 말을 듣는 인물이었다.
“랜스키가 변호사 사무실로 보내요. 서명 필요해요?”
“아,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제야 자신에게 욕을 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매니저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곁에 서 있던 직원에게 눈짓을 보냈다.
직원이 헐레벌떡 달려가 청구서를 들고 왔다. 만년필을 건네받아 청구서에 루이 랜스키라고 서명한 알렉산더 랜스키는 펜을 돌려주려다가 무슨 생각에선지 매니저에게 손을 까닥였다.
“청구서 다시 써 와요. 차도 빌려야 할 것 같으니까.”
“호텔 리무진으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무거나.”
곧이어 새로 쓰인 청구서가 도착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서명을 마치는 사이 호텔 정문에 리무진이 도착했다. 제복을 입은 드라이버가 정중히 서서 뒷좌석의 문을 가리켰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매니저에게 손을 내밀었다.
“뭐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현금이 없어서요.”
매니저는 눈치 빠르게 자신의 지갑을 꺼내 들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지갑 안의 현금을 모두 빼 들어 그중 절반을 매니저에게 도로 건네주었다. 나머지 절반은 드라이버의 몫이었다. 깜짝 놀랄 만한 팁에 드라이버의 얼굴이 활짝 벌어졌다.
“차용증도 청구서에 포함해서 같이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무슈 랜스키.”
탁.
랜스키가의 막내아들과 그의 손님이 모두 차에 오르자 매니저가 직접 허리를 굽혀 차 문을 닫아 주었다. MJ호텔의 이름을 차체에 박아 넣은 호사스런 리무진이 일로인을 향해 출발했다.
* * *
등교 시간을 아슬아슬하게 맞춘 리무진이 스쿨 존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세스는 눈에 띄게 불안해졌다. 리무진이 주차장을 지나쳐 본관 건물 앞에 멈춰 서자 등교를 하던 아이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걸음을 세우고 이쪽을 주시했다.
의외로 시선에는 호기심의 비율이 낮았다. 등교 때나 하교 때나 호텔 리무진을 타고 나타날 인물이라고 하면 으레 랜스키가 연상된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짙게 코팅된 창 안을 억지로 들여다보려고도 하지 않았고, 드라이버가 내려서 뒷좌석의 문을 연 후에 정말로 알렉산더 랜스키가 내렸을 때에도 그럴 줄 알았다는 식이었다. 아마 알렉산더 랜스키가 어젯밤을 호텔에서 보냈다는 사실보다 그 화끈한 색깔의 페라리를 어떻게 했기에 호텔 리무진으로 등교했는지, 그런 이유를 더 궁금해하고 있을 것이다.
놀라는 건 다음 순간이었다.
“내려.”
몸을 돌린 알렉산더 랜스키가 고개를 숙여 차 안쪽을 향해 이렇게 말한 순간. 그가 손을 내민 순간. 그 손이 외면당한 순간.
결국 알렉산더 랜스키가 허리를 굽혀 내리기 싫어하는 누군가를 억지로 잡아끌어 내리던 순간. 그 누군가가 랜스키와 똑같아 보이는 옷을 입고 있는 순간.
그 누군가가 일로인의 공식 남창인 순간.
누군가는 손에 쥔 책을 떨어트리기까지 했다.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의 발을 밟았다. 누군가는 누군가의 등짝을 들이받았다.
“다 와서 왜 고집이야.”
알렉산더 랜스키는 리무진 뒷좌석에 걸쳐진 엉덩이에 힘을 주고 버티는 세스를 보며 웃었다.
“어서 내려.”
“애들이…… 너무 많잖아.”
“응. 그래서 어차피 볼 사람은 다 봤어.”
“……. 꼭 이래야 해?”
“출석은 해야지.”
세스가 눈을 마주한 채 계속 고개를 젓고 있자 그가 허리를 숙여 엉덩이 아래를 받쳐 들었다. 갑자기 몸이 들린 세스가 질겁하며 스스로 차에서 내렸다.
“잘했어.”
알렉산더 랜스키가 웃는 얼굴로 세스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세스는 꼭 어딘가로 끌려가는 듯한 얼굴을 했지만 결국 그와 속도를 맞춰 걸어갔다. 알렉산더 랜스키의 손가락이 손끝에 걸리는 대로 세스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세스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고, 알렉산더 랜스키는 장난처럼 울면 핥을 거라는 말을 속삭였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제 앞으로는 텅 빈 길을 걸어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정면의 로비를 지나 안쪽 복도에 이르자 아침마다 그와 무리를 형성했던 익숙한 얼굴들이 다가왔다. 밀레나 헤이워드를 다리처럼 두고 왕자와 어울리기 시작했던 아이들은 그리 개운한 표정들이 아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누군가가 망설이다 못해 묻자 알렉산더 랜스키는 어젯밤을 호텔에서 보냈다는 얘기를 대수롭지 않게 했다. 문제는 호텔에서 잔 게 아니라 남창과 같은 옷을 입고 나란히 등교했다는 사실이었지만 알렉산더 랜스키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그는 세스의 사물함을 여는 중이었다. 일 교시가 뭐냐는 질문에 영어라는 대답을 들은 알렉산더 랜스키는 교과서를 찾아 들고 더 필요한 게 없는지 물었다. 세스가 고개를 젓자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또다시 망설이던 누군가가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남창하고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쾅, 알렉산더 랜스키가 소리 나게 사물함 문을 닫았다.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흔들리는 사물함 문짝은 왠지 위협적이었다.
“수업 안 들어가? 시간 다 됐잖아.”
“어, 그건…….”
그건 너도 마찬가지일 거 아냐. 어물대는 입 모양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차피 같은 수업을 듣는 무리였다.
“내 사물함에서 책 좀 꺼내서 갖다 놔. 난 이 녀석 교실까지 데려다 주고 올 테니까.”
알렉산더 랜스키가 그렇게 말하며 세스를 돌려세웠다. 손에는 별로 무겁지도 않은 세스의 책이 고집스럽게 들려 있었다.
“대체 왜 그래?”
알렉산더 랜스키가 턱 끝을 돌려 대꾸했다.
“뭐가?”
“지금…… 왜 그러냐고. 그러니까 남창한테……,”
“내 거 내가 챙기는데 그게 뭐 어때서?”
“내, 내 거? 남창이?”
남창이라는 말에 회색 눈이 사나워졌다.
“입조심해. 내 거라고 했잖아.”
“그……,”
“이제부터 알아 둬.”
궁금한 것은 턱없이 많았지만 알렉산더 랜스키는 일방적인 통보로 대화를 끝내 버렸다. 이제껏 랜스키의 친구라 불렸던 무리가 뭔가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일로인의 왕자는 권태롭고 변덕이 심했다. 친구 역시 없었다. 그들이 왕자의 친구였던 적이 없었으므로.
알렉산더 랜스키는 어울릴 사람을 골라서 곁에 둘 뿐이지 친구를 만들지 않았다. 그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는 무리를 향해 랜스키가 한마디 던졌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사진 같은 건 찍지 마라. 귀찮은 일은 질색이니까.”
다시 고개를 돌린 랜스키가 등 뒤로 세스의 영어 교과서를 든 손을 흔들어 보였다.
“교실에서 보자.”
수업 시간을 몇 분 남겨 놓고 번잡스러워야 할 복도에 또다시 텅 빈 길이 생겨났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방금 전처럼 세스의 머리칼로 장난을 치며 세스와 발걸음을 맞춰 걸었다.
원래는 몹시 달랐어야 했을 두 사람의 모습이 처음으로 비슷하게 겹쳐 보였다.
그날 하루 종일 일로인은 정신이 없을 만큼 시끄러웠다.
* * *
점심시간이 됐다.
하루 종일 홍수같이 밀려오는 시선들에 시달린 세스는 카페테리아로 향하는 대신 풋볼팀의 락커룸 옆에 있는 공구실에 숨어들었다. 공구실의 자물쇠는 손으로 비틀어 따도 될 만큼 헐거웠다. 이곳을 다른 목적으로 이용하는 누군가가 손을 봐뒀을 것이라고, 언젠가 존 리든은 그를 데려왔을 때 시시한 농담을 했었다.
달칵 소리를 내며 세스의 손 안에서 자물쇠가 틀어졌다. 세스는 존 리든이 하던 대로 다시 자물쇠를 잘 걸어 둔 다음 공구실의 문을 닫고 어둡고 습진 구석에 틀어박혔다. 이제야 막혔던 숨이 스르륵 흘러나왔다.
일로인이 단 하루 만에 달라졌다. 랜스키가 교실까지 데려다 주었던 일 교시 수업은 숨 한번 내쉬기도 눈치가 보일 만큼 많은 시선이 쏟아졌다. 이 교시를 지나자 시선은 한참 더 노골적이 되어서 소리라는 형태를 갖추기까지 했다. 교과서 없어? 내 책 같이 볼래? 오늘은 왜 늦은 거야? 내 이름은 알고 있어? 너는 어쩌다 게이가 된 거야? 왜 남창 같은 걸 하고 있어? 안녕, 너한테 처음 인사해 본다. ……랜스키하고는 무슨 사이야?
틈새를 주지 않고 그를 몰아붙이던 질문들 사이에서 응, 아니라는 짧은 대답으로 일관하던 세스 그린은 결국 입을 다물어 버렸다. 시계를 쳐다보며 하루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하아…….”
세스는 가는 숨을 뿜어내며 등을 벽에 기댔다. 엉덩이에 닿는 바닥이 차가웠다. 세스는 무릎 위에 지친 뺨을 묻었다.
덜컥, 소리가 나며 공구실의 문이 열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
세스가 고개를 들어 관심 없는 시선으로 침입자를 바라보았다. 침입자는 비좁은 공구실을 몇 걸음 걸어와 세스의 앞으로 다가왔다.
툭.
침입자가 세스의 발밑에 무언가를 떨어트렸다. 리든가의 오래된 포드에 두고 내렸던 세스의 가방이었다.
“그거 전해 달라더라.”
존 리든의 팀 메이트였다. 이름이 커트 애런슨인가 그랬을 것이다. 존 리든이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간 게 어제였으니 그는 일로인에서 가장 빠르게 병문안을 갔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 고마워.”
세스는 다시 시선을 돌려 무릎 위에 피곤한 머리를 얹었다. 하지만 커트 애런슨은 단순히 심부름만 할 생각이 없었다.
“고작 그게 다야? 나는 애들 모르게 이걸 전해 주려고 2층 교실에서부터 널 따라왔는데?”
누가 따라오는 줄은 전혀 몰랐다. 세스는 그 정도까지 주변을 신경 쓰지 못했다.
“리든은 당분간 입원이야. 무릎뼈에 금이 갔대. 타박상은 말할 것도 없고. 쿼터백은 잘렸어. 뭐, 그 다리로는 코치가 더 하라고 해도 별수 없었겠지만. 윌키 패거리는 벌써부터 신이 나서 리든의 락커를 털었더라고.”
그런 일이 있었다. 어제 하루 동안.
그러고 보니 세스는 존 리든을 걱정하는 일을 잊고 있었다.
사귀자고 말할 때 어쩐지 수줍어 보이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친구가 되기로 했던 사이였다. 아마도 그를 걱정해야 옳았을 것이다.
애런슨이 혼잣말처럼 어제 일을 중얼대기 시작했다.
“어제는 진짜…… 씨팔, 아주 좆같았지. 난데없이 병원이라는 소리에 가 보니까 이 미친놈이 입원은 죽어도 못 하겠다면서 펄펄 날뛰지, 리든 부인은 펑펑 울고 있지, 의사는 이러면 더는 운동을 못 하게 될지도 모른다면서 협박이지…… 결국 코치까지 와서 실랑이하다가 잘리는 걸로 마무리됐어.”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한 모양이었다. 세스에게는 보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 적당한 말을 꾸며 낼 재주가 없었다. 안됐다거나 유감이라는 말은 전부 거짓이었다. 세스는 존 리든을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응.”
“리든 그 등신 새끼가 날 불러서 그러더라. 가방 가져다주고, 혹시 랜스키가 이상하게 굴면 좀 말려 달라고. 리든은 랜스키가 널 잡아 죽일 것처럼 얘기하던데. 아주 걱정도 그런 걱정이 없었지.”
표정에도, 대꾸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는 세스를 바라보는 애런슨의 시선이 험악해졌다.
“씨발, 그런데 진짜 좆같은 건 오늘 아침이지 뭐야. 리든은 입 다물고 그냥 차에 받혔다고만 했지만, 주차장에서 미쳤다고 어디 그만한 사고가 나. 그렇게 만든 건 랜스키잖아. 내 말이 틀려?”
세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시기가 묘한 침묵은 부정보다는 긍정으로 들렸다. 흥분한 커트 애런슨이 침을 튀기면서 말했다.
“왜 대답 안 해? 수치심은 없어도 양심은 있냐? 리든은 그 지경이 돼서도 네 걱정에 안절부절못하던데. 정작 너는 랜스키하고 똑같은 옷이나 처입고 등교해? 씨발, 그럼 리든은 뭔데. 그 자식이 혼자 정신이 나가서 랜스키와 네 사이에 끼어들었다가 봉변당한 거야? 랜스키가 널 벼르고 있다는 게 그 새끼 혼자서 착각한 거야? ……씨발, 진짜. 웃기고 있네.”
커트 애런슨은 존 리든이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멀쩡한 인간보다는 한 군데씩 모자라거나 비틀린 구석이 있는 인간들이 더 많은 일로인에서 존 리든은 꽤 괜찮은 녀석이었다. 패트릭 윌키 같은 쓰레기가 패거리를 이룬 풋볼팀이 이제껏 그럭저럭 굴러갔던 이유는 존 리든 덕이었다. 영리한 데다 성격도 좋아서 쓰레기 같은 인간도 곧잘 다뤘다. 게이이거나 말거나 일로인의 공식 남창과 어울리기에는 아까운 녀석이었다.
“왜 하필 너 같은 걸레가 그 녀석이랑 엮인 거야. 왜!”
세스는 여전히 대답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존 리든과는 차를 두 번 얻어 타고 친구가 되기로 했다. 그뿐이었다. 알렉산더 랜스키와는 다른 의미로 가끔 막무가내처럼 구는 존 리든의 존재감이 이전보다 조금 더 익숙해졌다고 느껴지기도 했으나 그 이상의 감정은 없었다.
먼저 다가와 섹스를 제안한 것도, 차를 태워 주겠다고 한 것도 존 리든이었다. 세스는 어디까지 고마워해야 하는지, 혹은 어디서부터 선을 그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존 리든이 다친 것은 안타까웠다. 가능한 한 다치지 않기를 바랐지만 운동에 지장이 있을 만큼 다친 모양이었다. 안타깝고 걱정이 되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존 리든을 차로 받아 버린 일이 혹시라도 알려지면 나쁘지 않을까 싶어서.
“네까짓 게 뭐라고 리든을 그 꼴로 만들어? 랜스키나 너나 다들 뭐야. 사람을 뭉개 놓고는 지들은 좋아서 희희낙락이야? 대체 어떻게 생겨먹었기에 인간이 그 지경일 수 있냐? 야, 남창. 입이 달렸으면 대답 좀 해 봐. 리든에게 대체 뭐라고 입을 턴 거야?”
세스는 눈앞에서 울큰 쥐어지는 주먹을 보았다.
“대답 안 해? 리든을 가지고 놀았어?”
세스가 천천히 달라붙어 있던 입술을 뗐다.
“정말로…… 말 안 했어?”
“뭘!”
“누가 그랬는지…… 랜스키가 그랬다고, 정말로 말 안 했어? 그럼 고소하지도 않겠대?”
“뭐야, 너는 지금…… 그러니까 지금 리든이 랜스키를 고소할지 말지가 궁금해? 리든이 저렇게 다쳐 있는데도?”
“……응.”
“이 새끼가, 진짜!”
커트 애런슨이 세스의 멱살을 와락 움켜쥐고 주먹으로 턱을 후려쳤다. 턱이 거세게 돌아가고, 세스는 입술 한쪽이 찢어졌다. 비난은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리든이 대체 어쩌다 너 같은 걸레한테 물려서 이런 꼴을 겪는지는 모르겠지만……! 씨팔, 그래도 너라는 새끼 양심이 뒷구멍보다는 깨끗하다면 더는 리든한테 수작 걸지 마. 알아들었어? 그 자식은 내버려 두라고!”
친구가 되기로 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마저도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세스는 핏방울이 묻은 턱을 끄덕였다.
“알았어.”
“……뭐?”
“그렇게 할게.”
고분고분 답하는 세스를 커트 애런슨이 의심을 섞어 바라보았다. 잔뜩 화를 내려던 기분이 허탈하게 꺼져 버린 표정은 더는 위협적이지 않았다.
세스가 눈을 들어 물었다.
“병원이 어디야?”
존 리든에게 말할 생각이었다. 더 이상의 관심도, 걱정도 사양하겠다고. 원래도 필요 없었던 것이었다. 에밀리 고티가 말한 대로 알렉산더 랜스키에게서 멀어질 이유가 되어 줄까 기대했을 뿐이었다.
제 삶에 한 발을 들여 놓은 알렉산더 랜스키만으로도 세스 그린은 벌써 충분히 버거웠다.
* * *
버거웠다. 넘칠 정도로.
오후 수업을 위해 교실로 이동하는 2층 계단 끝에서 알렉산더 랜스키와 마주친 것은 실수였다. 정확히는 제 모습에 관심이 없던 세스가 찢긴 입술을 그대로 드러내고 다녔던 게 실수라는 말이 어울렸다.
“어떤 인간이야.”
“…….”
방금 전의 일이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작은 발소리를 내며 계단을 오르던 세스의 뒷모습을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싱긋 웃었다. 점심시간 내내 보이지 않았던 세스를 생각하면 마냥 웃을 수도 없었지만 일단 모습이 보이니 스스로가 한심할 정도로 반가웠다. 무턱대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팔을 붙들었다. 점심은 뭘 얼마나 먹었으며 왜 자신을 찾아와 함께 먹지 않았는지 물어볼 작정이었다.
그런데 얼굴이 가관이었다. 부어오른 턱에 찢어진 입꼬리를 보자 온몸에서 열이 올랐다.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엉뚱한 생각으로 머릿속을 더럽히는 자신이었다. 점심시간에 사라졌던 세스가 느닷없이 얼굴에 폭행의 흔적을 달고 나타났다. 자신이 없던 점심시간에 누구와 무슨 짓을 했는지, 그 생각만으로도 한 가닥 실처럼 금방 툭 끊어질 것 같은 인내를 유지하기 위해 입 속에서 혀를 씹어야 했다.
“누가 이랬어?”
분명 그럴 리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동안에도 시선은 빠르게 세스의 다른 곳을 살폈다. 셔츠 단추가 멀쩡히 붙어 있는지, 목 아래 피부에 드러나는 자국은 없는지, 진즈의 버클이 벌어졌던 흔적은 없는지, 그런 것들을.
세스의 팔을 움켜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세스는 인상을 쓰면서도 놓아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너는?”
“아무 짓도…….”
“그런데 얼굴이 왜 이 모양이야!”
알렉산더 랜스키가 목소리를 한차례 높이는 동안 세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을 지켜보는 눈동자는 평소보다 훨씬 더 많았다.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 두 사람이 한 사람은 붙들고 한 사람은 붙들린 채 실랑이를 벌이는 광경은 그게 꼭 일로인의 왕자나 남창이 아니었다고 해도 신나는 구경거리였을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의외로 단호한 세스의 말에 알렉산더 랜스키가 붙잡은 팔을 홱 끌어당겼다. 세스의 몸이 물결이 출렁이듯 앞으로 쏠렸다.
“그런 게 아냐? 그런 게 뭔데?”
세스가 고개를 들어 알렉산더 랜스키의 회색 눈을 마주했다.
“내가 다른 애하고 잤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잖아.”
세스 그린은 가끔 둘러가는 법을 몰랐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자신의 치졸함을 들킨 것 같아 인상을 썼다.
“……그런 거 아니야. 섹스할 때마다 맞지도 않았고, 이제 다른 사람하고 섹스하지도 않아.”
우습게도 고작 그 정도 말에 미칠 듯이 끓어오르던 화가 절반쯤 사라졌다. 그러나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 그린이 누군가에게 얻어맞았다는 사실을 그냥 넘어갈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절반의 화는 고스란히 남아서 열병처럼 이마를 덥히는 중이었다.
“그럼 누구야?”
“너는 몰라도 돼. 별일 아니었어.”
“뭐?”
알렉산더 랜스키가 다른 손으로 부어오른 턱을 잡아채 시선을 고정시켰다. 세스는 미간을 구기면서도 가만히 서서 그가 손짓을 멈추길 기다렸다.
그 저항 없는 몸짓은 여느 때와 같았다. 그래서 그를 더 거세게 달구었다.
“네가 이 꼴이 됐는데, 그걸 내가 몰라도 된다고?”
분명 세스는 소리 한번 지르지 않고 가만히 맞고 있었을 것이다.
잠시 멎었던 피가 갈라진 상처를 타고 다시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피부를 미끄러져 내려와 엄지에 들러붙는 피의 감각이 머릿속에 섬뜩한 잔영을 남겼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를 끌어당겨 충동적으로 입술을 덮었다. 흘러내리던 피가 알렉산더 랜스키의 입 안으로 사라졌다.
세스가 고개를 흔들며 그를 밀어냈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누군가는 사진을 찍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 마. 애들이 보잖아.”
“넌 나한테나 신경 써!”
지금 이 순간 알렉산더 랜스키가 느끼는 것은 분노가 아니었다. 갈증이었다. 아침에만 해도 그는 세스를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이해했으니 더는 어렵지 않겠다고. 이대로 곁에 두면 되겠다고.
그러나 아직 멀었을지도 모르겠다. 세스는 여전했다.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고, 제 몸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무리 애정을 퍼부어도 이런 식이라면 구멍이 뚫린 어항에 물을 채우는 행위와 비슷할 것이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그 어항 속에서 말라죽어 가는 물고기가 세스일지, 아니면 자신이 될지 궁금했다.
“어디 한 번 더 말해 봐. 내가 몰라도 된다고.”
다시 턱이 붙들렸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그 언젠가처럼 과시욕을 담은 질척한 키스를 이었다. 누군가가 후려쳤을 때는 얌전히 맞고 있었을 세스가 제 키스는 강하게 거부하며 버둥거렸다. 그럴수록 알렉산더 랜스키는 사나워졌다.
“누구야.”
알렉산더 랜스키가 입술을 떼고 물었다. 세스가 고개를 저었다.
“말 안 할 거야.”
“그래?”
알렉산더 랜스키는 대답을 채근하는 대신 수십 쌍의 눈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세스를 밀어붙였다. 아침에는 물어뜯기고 점심에는 얻어터진 입술이 쓰리기도 할 것이다. 입술을 섞을수록 피 냄새도 섞여 들어왔다. 붉은 비린내는 머릿속 한구석을 헝클여 놓았다. 키스가 이어지고 세스의 저항이 길어질수록 그도 필사적이 되어 갔다.
“말하라고!”
“안…… 해.”
타오르던 갈증이 펑, 하고 터져 버리는 순간이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언뜻 눈가를 스치는 금발 머리를 보았다. 금발 머리의 손에는 휴대전화가 들려 있었다. 방금 전 사진을 찍은 흔적이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를 놓고 금발 머리에게 다가갔다. 제이 에드거였다.
제이 에드거가 웅성대는 아이들 틈새로 몸을 피하려는데 알렉산더 랜스키가 한발 빠르게 뒷덜미를 와락 움켜잡았다.
“너였어?”
“윽……, 왜 이래?”
제이 에드거가 양팔을 버둥거렸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한 손으로 제이 에드거의 휴대전화를 빼앗아 계단 아래로 던져 버렸다. 무언가가 망가져 버리는 소리가 아주 쉽게 들려왔다.
“네가 저 녀석 얼굴을 저 꼴로 만들어 놨냐고.”
“무슨…… 왜 생사람을 잡고 그래?”
“네가 아니라고? 그럼 누구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남창이 얼굴이건 어디건 두들겨 맞고 다닌 게 하루 이틀 일이야? 여자 친구 관리는 알아서 잘해. 왕자가 왜 남한테 아쉬운 소리를…… 윽!”
알렉산더 랜스키가 어떤 상태인지 알았다면 제이 에드거는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그는 어제부터 관리를 하라는 말에 몹시 예민해진 상태였다.
“……이거나 저거나.”
알렉산더 랜스키가 제이 에드거를 돌려세웠다. 한 손으로 목을 움켜쥔 그가 제이 에드거를 계단 끝까지 밀고 갔다. 제이 에드거의 발이 위태롭게 반쪽만 걸쳐졌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움켜쥔 목줄기를 놓으면 제이 에드거는 중력의 법칙을 따라 데굴데굴 굴러갈 것이다. 곁눈질로 보는 계단 밑은 꽤나 가파른 높이였다.
비명은 제이 에드거가 아닌 곁에서 보고 있던 아이들이 질러 댔다. 꺄악, 어떻게. 왜, 대체 무슨 일이야. 랜스키가 이상해. 에드거가 무슨 짓을 했나 봐. 왕자가 이상해. 무서워. 정말로 사람을 죽일 것 같아.
제이 에드거가 꽉 막힌 소리를 힘겹게 토해 냈다.
“커흑, ……윽! 왜, 왜 이러…….”
“네가 건드렸어?”
“아, 아니…… 큽……,”
“사진은 왜 찍었어?”
“그, 그건 그냥…… 그, 아,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었…… 사, 살려 줘!”
다급해진 제이 에드거가 주변을 돌아보며 마구 소리를 질렀다.
“사, 살려 줘! 도와줘! 누가 가서 아무 선생이나…… 으윽! 주, 죽이지 마!”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랜스키의 일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건 둘째 문제였다. 다들 이 상황이 무서웠다. 기어이 사고가 터져야 알렉산더 랜스키를 멈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에드거가 아냐.”
모두의 발밑에 고여 굳어 버린 순간을 세스 그린의 작은 목소리가 두들겨 부수었다.
“…….”
알렉산더 랜스키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세스가 아이들 틈을 비집고 그에게 다가갔다.
“에드거가 그런 거 아니야. 그러지 마.”
“지금 이걸 걱정해? 내가 아니라?”
“아니……. 학교니까. 다들 보고 있어서. 문제가 생기면 집에 전화가 갈지도 모르잖아.”
“…….”
그 말을 듣는 알렉산더 랜스키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것은 누구도 끼어들면 안 될 것 같던 랜스키의 영역에 생겨난 작은 균열이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새파란 얼굴로 바들바들 떨고 있던 에드거를 보다가 목을 움켜쥔 손을 툭 놓았다.
“으아악! 읏!”
에드거는 그 순간 균형을 잃고 계단을 데굴데굴 굴러갔다. 하지만 힘껏 팽개쳐질 때와는 달라서 구르는 속도는 현저히 느렸다. 계단 중간 즈음에서 에드거는 스스로 구르는 것을 멈추고 일어설 수 있었다. 무릎과 팔꿈치가 까지고 멍이 들었지만 그뿐이었다.
“말해 봐. 내가 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이 에드거를 놓은 알렉산더 랜스키가 몸을 돌려 세스를 마주했다. 거짓말처럼 차분해진 얼굴이었다. 계단을 굴러가는 제이 에드거는 그와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보였다.
세스가 대답처럼 그를 응시했다.
“네가 어디선가 맞고 입술이 터져서 왔는데, 그럼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해 봐.”
제이 에드거를 붙들고 눈이 먼 화풀이를 해 대도 핏자국이 묻어 있는 입술을 보자 화가 들끓었다. 그는 아직도 간발의 차로 세스를 붙들었던 어제저녁의 기억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세스는 더 엉망으로 다칠 수도 있었다. 운이 좋아 늦지 않았을 뿐이다. 간신히 손에 쥐었다며 한숨을 돌리기도 전에 세스는 핏자국을 매단 얼굴로 그를 마주하고 있었다.
알 수가 없었다. 이걸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 속에서 또 다른 인격의 자아가 자라나 스스로를 먹어치우는 기분이었다. 한 달 전에는 이름도 모르던 남창이 지금은 그 이름만으로도 그를 먹어치우고 있었다.
루이 랜스키를 향해 촛대를 휘두르는 순간 정말로 죽이지 않기 위해 얼마나 필사적으로 애를 썼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두 형들에 비하면 저는 그래도 멀쩡한 인간인 줄 알았는데 전부 착각이었다. 계기만 주어지면 언제든 폭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간 평범함을 지키며 살아온 그의 인생은 부친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결국 두 형을 제치고 랜스키 왕국을 이어받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부친이나 부친과 비슷하게 생겨먹은 두 형들과 같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와 피를 공유한 인간들은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니었다. 랜스키가의 비정상을 돈이나 특권으로 치장하는 것도 역겨웠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세스를 볼 때마다 뭉클대며 끓어오르는 비상식의 감정들이 원래부터 그의 내부에 있는 것이라면, 애초에 부친이나 두 형들과 같은 인간이었다고 해도 별반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같은 인간일 것이다. 같은 핏줄이니까. 그렇다면 감추려고 애쓸 것도 없었다. 더 나은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따분하고 권태롭던 시간들도 이제는 저와 상관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세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뭘…… 하지 않아도 돼.”
“어째서?”
“나는 충분하니까……. 아니, 버거워.”
지금 그에게 상관있는 것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유난히 멍울이 잘 지는 연한 입술뿐이었다. 입술이 열리며 빠르거나 느리게, 고요하거나 연약하게 흘러나오는 말들은 삽시간에 그를 자극했다.
지금도 그랬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들끓던 화가 얼어붙는 것 같다고 느꼈다. 겨울의 가장자리처럼 날카롭게.
“내가 버겁다고?”
“응.”
“…….”
대답을 잘 골라. 나는 지금 충분히 날카로우니까. 미리 경고를 해야 했다. 세스나 스스로가 다치기 전에.
하지만 세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는…… 너무 친절해. 그게 친절이라는 걸 아는데 가끔은 친절이라는 걸 알아채는 데 시간이 걸려. 그래서 버거워. 그런데 나도…….”
세스가 침을 한번 삼켰다.
“너한테…… 뭔가 해 주고 싶어. 받는 것만 아니고 해 주고 싶어. 그러니까, 그만둬. 내가 맞는 게 싫어서 그러는 거라면 이젠 조심할게. 다른 애들한테 맞고 그러지 않을게.”
입술이 한번 열릴 때의 효과는 놀라웠다. 겨울 같던 날카로움이 봄처럼 녹아 흐르기 시작했다.
“…….”
잠시 입술을 물고 있던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
세스는 훈련이 잘된 작은 강아지처럼 순종적으로 다가왔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손가락으로 입술 위의 상처를 쓸었다. 세스의 몸이 손끝을 따라 가늘게 진동했다.
숨을 참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세스는 아직도 그가 만질 때마다 긴장하고 숨을 참고 수줍어했다.
“내 허락 없이 상처 만들지 마. 이 얘기 두 번째야.”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의 상처 위에 입술로 꾹 낙인을 찍었다.
“세 번째는 안 참아.”
세스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순간, 오후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가자.”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의 어깨에 손을 얹고 계단을 내려갔다. 긴장으로 눈만 굴리며 그들을 지켜보던 아이들이 허둥지둥 길을 비켜섰다. 보이지 않는 카펫이라도 깔려 있는 것처럼 계단을 곧게 밟아 내려가던 알렉산더 랜스키는 계단 중간에 주춤 구겨져 있던 제이 에드거의 곁을 지나쳐 갈 때가 되자 요철이 돋은 것 같은 시선을 던졌다.
“한 번만 더 이 녀석 옆에서 얼쩡대다 걸리면 계단에서 밀어 버리는 것만으로 안 끝나.”
“어, 으……. 아, 알았…….”
“사진 찍는 버릇도 고쳐.”
“으, 응…….”
제이 에드거가 겁을 먹고 목을 한껏 움츠리는 것까지 확인한 뒤 알렉산더 랜스키는 시선을 거두었다.
그가 세스와 계단을 다 내려가자 비로소 다른 아이들이 멈췄던 걸음을 후다닥 이었다.
왕자가 먼저 가야 한다는 암묵적인 규칙은 여느 때와 같았다.
* * *
“그래서, 사진이 없다는 소리야?”
제이 에드거와 밀레나 헤이워드의 관계는 끝나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왕자와 헤어졌다는 사실을 일로인의 모두가 알게 되었을 때 밀레나 헤이워드는 아침마다 등교 거부를 위한 히스테리를 부려 댔지만, 정작 헤어짐의 원인이 되었던 제이 에드거와는 계속 얼굴을 맞대는 사이로 남았다.
서로 진짜 친구가 되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예쁘고 화사한 외모보다 내면을 더 많이 빼어 닮은 그들은 아직 서로를 필요로 했다.
“말했잖아. 왕자가 박살 냈다고.”
“되살리는 방법이 있을 것 아냐.”
“그건 가서 알아봐야 하는 거고. 지금 당장은 없어.”
“……좆같아.”
밀레나 헤이워드가 작게 욕설을 뱉어 냈다. 제이 에드거는 익숙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다 밀레나 헤이워드가 엄지손톱을 신경질적으로 씹기 시작하자 절친한 친구처럼 등을 토닥여 주었다.
“뭐가 그리 급해서 그래? 손톱 망가지잖,”
“남창이 계속 얼쩡대잖아!”
밀레나 헤이워드가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제이 에드거의 손을 쳐냈다. 제이 에드거가 찌푸린 얼굴로 혀를 차는 사이, 밀레나 헤이워드는 솟구치는 짜증을 이기지 못하고 핸들을 쾅 내리쳤다.
“남창이잖아! 남창이라고! 왜 하필 그런…… 왜 하필 그런 거야? 왜!”
제이 에드거는 약간의 동정심을 발휘해 화를 내는 밀레나 헤이워드를 참아 주었다.
헤이워드가 랜스키와 헤어진 것은 남창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었다. 여자 친구가 다른 남자와 엉켜 있는 사진을 보면 대개는 이별을 고했을 것이다. 물론 그래서 그 사진도 일부러 찍었고, 저와는 상관없는 인간을 시켜 랜스키에게 넘겼다. 그 사진을 찍기 위해 헤이워드의 비위를 맞추며 헤테로인 척한 게 무려 한 달하고도 반이었다.
남창을 끼워 넣은 게 실수였다. 한 달 반이나 공을 들였는데 남 좋은 일만 시킨 꼴이 됐다. 그가 세스 그린에게 품은 원한은 헤이워드와 비교할 게 아니었다.
“아악, 진짜! 내 꼴이 이게 뭐야! 왜 하필 그런 거야! 왜!”
그건 제이 에드거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왜 하필 남창이냐고. 왜 자신이 아니라.
“진정해. 이제 와 그런 말 해 봤자 뭐 한다고. 일은 벌어졌으니 최선을 다해서 헤어지게 만들어야지. 랜스키가 일로인에 있을 시간은 앞으로 반년밖에 없잖아. 설마 랜스키의 마지막 여자 친구를 남창으로 남겨 둘 셈이야?”
밀레나 헤이워드가 새파랗게 쪽진 눈으로 제이 에드거를 노려보았다.
“네가 등신같이 기껏 찍은 사진을 들키지 않았으면 더 확실했겠지.”
제이 에드거가 짜증을 감추듯 웃었다.
“하는 꼴을 보니 앞으로도 내내 붙어 다닐 것 같은데 뭘. 그깟 사진 한 장 찍는 게 어렵겠어?”
그 말에 밀레나 헤이워드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랜스키의 마지막 여자 친구는 자신이어야 했다. 졸업 앨범에도 그렇게 남아야 했다. 일로인에서 가치 있는 건 딱 하나뿐이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헌신적인 남자 친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감히 헌신밖에 없는 다른 남자들과 비교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랜스키가의 막내 왕자가 저를 여자 친구로 삼았다는 것만으로 제 인생은 최고가 되었다.
하지만 랜스키는 단 한 번도 남창에게 하듯 저를 대하지 않았다. 시선만으로도 남들이 모두 알아챌 수 있게 쳐다보지도 않았고, 장소를 가리지 않고 키스를 하지도 않았다. 랜스키는 남자 친구라기보단 그저 왕자였다. 사랑처럼 달콤하진 않았지만 권력인 양 짜릿했다. 그 짜릿함은 밀레나 헤이워드의 스무 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도저히 봐줄 수가 없었다. 전 여자 친구조차 선명히 아는 사실을 남들이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벌써 친구들은 왕자가 남창과 다니면서 달라졌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제 앞에서 늘어놓는 중이었다.
같은 옷까지 입고 등교하다니, 그건 진짜 놀랬어. 이젠 아무도 남창한테 돈 줄 테니 섹스하자는 말은 못 할 거야. 그런데 그렇게 입으니까 남창도 꽤 예쁘게 생겼더라. 난 랜스키가 그런 취향이 있을 줄은 몰랐어. 헤이워드 너한테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혹시 랜스키는 원래 게이였던 거야? 그럼 너하고 사귄 건…….
“그만해!”
친구들이 내내 떠들어 대던 얘기를 곱씹던 헤이워드는 지금도 옆에서 그 소리가 들려오는 것처럼 왈칵 소리를 질렀다.
견딜 수가 없었다. 게이였던 랜스키가 헤테로인 척하기 위해 일부러 여자와 사귀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은 자존심을 산 채로 파먹었다.
밀레나 헤이워드는 전 남자 친구에게 이용당한 불쌍한 여자가 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밀레나 헤이워드는 랜스키의 여자 친구였다. 왕자가 반했던 유일한 여자였다. 차라리 다른 남자와 뒹굴던 것을 걸려서 헤어지는 것으로 남는 게 몇 배는 더 나았다. 이제껏 그저 이용당했을 뿐이라고 하는 말은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절대…… 가만 안 둘 거야. 반드시 갈라놓을 거야.”
핸들을 쥔 손등에 이마를 파묻고 이를 가는 헤이워드의 어깨 뒤에서 제이 에드거가 들리지 않게 혀를 찼다.
“그래. 꼭 그렇게 하자고. 나도 남창이 설치고 다니는 꼴은 더는 못 봐 주겠으니까. 뭐든 성심껏 거들게.”
제이 에드거는 랜스키가 사 준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은 헤이워드의 차에서 내릴 준비를 했다.
“그러니까 사진 없이도 뭐가 가능한지 좀 생각해 봐. 너무 고전적으로만 가지 말자고. 방법이야 참신할수록 잘 먹히는 거 아니겠어?”
밀레나 헤이워드가 표독하게 쏘아붙였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네가 말해 보지 그래? 알렉스를 신경 쓰게 만드는 일이 그렇게 쉬운 줄 알아?”
그렇게 말하는 제이 에드거의 목에도 오늘 낮에 알렉산더 랜스키가 만들어 놓은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때는 정말로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밀레나 헤이워드의 말에 의하면 왕자의 고상한 취미는 격투기였다. 집에 프로 선수를 불러 훈련을 한다고 했다. 종목도 다양해 펜싱과 복싱을 배우다가 몇 년 전에는 무에타이를 시작했다. 그 정도면 집착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거나 랜스키는 위험하다는 말이 부족한 인간이었다. 그는 점심시간이 끝난 그 계단에서 정말로 한 손으로 제 목을 졸라 죽일 수도 있었다.
밀레나 헤이워드의 말은 그런 면에서 옳았다. 알렉산더 랜스키를 겁줄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마도 사진을 쓰는 게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알았어, 알았어. 화내지 마. 그럼 나는 이만.”
제이 에드거는 산뜻하게 몸을 일으켜 헤이워드를 떠났다.
뒷주머니에 꽂아 둔, 오로지 받는 용도로만 사용하는 휴대전화가 울린 것은 그로부터 몇 걸음 멀어지지 않았을 때였다.
“나 오늘은 좀 곤란해요.”
제이 에드거는 전화를 받아 시큰둥한 소리를 냈다.
“학교에서 사고가 좀 있어서……. 목에 손자국이 났어요. 이런 꼴로는 좀 그런데. 자칫 이상한 이미지가 박힐 수도 있잖아요. 험하게 굴러먹는다는 인상이 남으면 어쩌라고. 나는 이 바닥에서 오래 벌어먹고 싶은데 그런 건 도움 안 될 거 아니에요. 내 몸은 내가 아껴야지.”
전화기 안쪽에서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장으로 좀 가리면 안 될까? 가능한 한 어린애로 보내 달라고 해서 말이야. 얼굴은 네가 제일 어려 보이잖아. 아, 물론 예쁘기도 네가 제일 예쁘지. 아아…… 정말 그렇게나 곤란해? 도무지 거절할 수 없는 사람이야.
“그럼 팁도 주나?”
일 년 정도 함께 일해 온 에스코트 업체의 사장이 전화기 너머에서 징그럽게 웃어 댔다.
이거 왜 이래, 새삼. 포주와는 상의도 없이 이용 요금을 몇 배나 올려 받는 건 네 특기 아니었어?
“뭐, 그야 그렇죠. 나는 예쁜 데다가 어리니까.”
결국 제이 에드거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자국 정도야 잘 해명할 수 있을 것이다. 값비싼 에스코트 서비스를 이용하는 인간들은 겉보기에는 점잖은 재력가가 많아 말이 아예 안 통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알았어요. 어디로 가면 돼요?”
* * *
전화를 끊은 제이 에드거가 도착한 곳은 MJ호텔의 최상층 스위트룸이었다. MJ호텔은 몇 번 와 봤지만 스위트룸은 처음이었다. 거절할 수 없는 손님이라는 말은 결코 과하지 않았다.
제이 에드거는 새삼 목덜미에 신경을 쓰며 도어 벨을 눌렀다. 좀 더 그럴싸한 옷을 입고 왔으면 좋았을 것이다. 도착하기 전 꼼꼼히 얼굴과 머리를 다듬기는 했지만 돈이 많은 손님일수록 사소한 트집을 잡는 경우가 많았다.
삐비빅, 소리가 나며 찰칵, 문고리가 돌아갔다. 반쯤 열린 문 너머로 에스코트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스위트룸을 빌린 거절할 수 없는 손님의 얼굴이 드러났다.
“안녕하세요.”
제이 에드거가 가능한 한 수줍게 보이도록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그는 자신이 짓는 미소가 어떤 효과를 발휘하는지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잘 알고 있었다. 꿀처럼 달콤한 금발과 한데 어울려 어렵지 않게 추가 비용을 받아 내는 미소였다.
“으음……. 뭐, 쓸 만하군. 들어와.”
거절할 수 없는 손님이 거만하게 턱짓을 했다. 제이 에드거는 미소를 주의 깊게 가다듬으며 호텔 룸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젊으시네요.”
거절할 수 없는 손님은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으로 보였다. 이제껏 이렇게 젊은 손님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표정이나 눈빛이 어딘지 모르게 오싹오싹 등골을 달군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외모만큼은 꽤 마음에 드는 손님이었다. 매끄러워 보이는 짙은 갈색 머리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내가 묻기 전엔 함부로 입 놀리지 마. 흥이 가시니까.”
그리고 비슷한 머리색을 가진 누구 못지않게 기분을 더럽게 만드는 재능도 있었다.
“……예.”
거절할 수 없는 손님은 드넓고 호화로운 거실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매끄럽게 휘어진 벨벳 소파로 걸어가 털썩 앉았다. 그리고 어색하게 서 있는 제이 에드거를 품평하는 시선으로 훑어 내렸다.
“일단 벗어 봐.”
“네.”
제이 에드거는 두말없이 옷을 벗었다. 빠르게 알몸이 드러났다. 어리고 예쁜 몸이었다.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대로.
“흠. 몇 살이지?”
제이 에드거가 살짝 웃었다.
“생각하시는 것보다는 더 어려요.”
“학생이야?”
“그쪽이 좋으시다면요.”
거절할 수 없는 손님이 입꼬리를 얇게 말아 웃었다.
“살살대긴. 목 좀 들어 봐. 그건 또 뭐야?”
손님은 눈썰미가 좋았다. 아마 취향도 그만큼 까다로울 것이다. 제이 에드거는 조심스럽게 목을 들어 올리면서 부디 그에게 이상한 취미가 없기를 빌었다.
“어디서 지저분하게 논 모양이군. 난 싸구려는 취급 안 하는데.”
역시나 그런 말이 들려왔다. 제이 에드거는 과장된 한숨을 오물오물 흘렸다.
“말해 두지만 지저분하게 놀다가 그런 거 아니에요. 학교에 망나니 왕자가 하나 있어서요. 사람 목을 졸라도 아무도 못 건드리는 인간이.”
금방이라도 흥이 떨어졌으니 이만 나가 보라고 할 것 같았던 손님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뭐?”
“안 믿기시죠? 그런데 정말 있어요. 아빠가 더럽게 부자라서. 교육위원회나 장학재단에 흘러들어 오는 돈이 모조리 그쪽 주머니에서 나오거든요. 무슨 짓을 해도 못 본 척하는 거죠, 다들.”
갑자기 손님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뭐? 하하, 이거 갑자기 재미있어지는데? 너, 일로인에 다녀?”
제이 에드거가 파란 눈을 둥글게 떴다.
“어? 어떻게 아세요?”
“나도 거기 출신이야.”
손님이 양팔을 벌려 소파의 등받이에 올리며 느슨한 자세를 잡았다.
“오늘은 어째 할 얘기가 많을 것 같은데. 이리 가까이 와 봐.”
제이 에드거가 다가가자 손님은 그를 제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앉게끔 했다. 알몸으로 무릎을 꿇은 제이 에드거는 얌전히 손을 뻗어 손님의 신발을 벗겼다. 양말과 바지까지. 손님은 제이 에드거가 종아리부터 혀로 핥아 올리는 동안 그의 금발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럼 어디 그 망나니 왕자 같은 내 동생 얘기를 좀 들어 볼까.”
“…….”
거절할 수 없는 손님의 이름은 루이 랜스키였다.
* * *
“……너,”
병실에 들어서는 세스를 발견한 존 리든은 그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기대를 전혀 안 했다면 거짓이겠지만 그래도 정말로 올 줄은 몰랐다. 그것도 혼자서.
“어, 어떻…… 어떻게 왔어? 택시라도 탄 거야?”
세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애런슨이 태워 줬어.”
“뭐? 그 녀석이?”
존 리든은 자신이 깁스를 한 상태라는 것도 잊고 침대에서 뛰어내려 세스를 맞이할 뻔했다. 침대에 누워 있던 몸을 일으키려 팔로 매트를 짚다가 링거 바늘이 따끔하게 피부를 찌르는 바람에 존 리든은 일어나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세스에게 손짓을 했다.
“여기 와서 앉아. 그럼 애런슨도 여기 와 있다는 소리야?”
“응. 내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대. 카페테리아에서 뭐라도 먹고 있겠다고 했어.”
“나 참. 그 자식이 왜 답지도 않게 착한 일을 하고 그래? 어쨌거나 잘 왔어.”
존 리든은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무시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 보고 싶었어?”
나름 각오를 하고 해 본 말인데 세스 그린은 영 못 알아들을 외국어라도 들은 듯 눈을 깜박였다.
“……아니. 왜?”
존 리든이 붉어진 목덜미를 신경질적으로 문지르며 한숨을 토했다.
“젠장. 됐다.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넌 괜찮아?”
“괜찮아. 근데 뭐가?”
“뭐가라니. 그날 랜스키가 미친놈처럼 날뛰……,”
그러다가 존 리든은 세스의 얼굴에 난 상처를 발견했다.
“뭐야 이건! 랜스키가 그랬냐?”
성급하게 손이 튀어 나가 세스의 턱을 붙들었다. 세스는 평소처럼 얌전히 턱을 내주었지만 입으로는 저항했다.
“아파. 놔줘.”
“아, 잠깐 좀 봐 봐. 씨팔, 진짜. 개새끼 같으니. 랜스키 그건 네 몸에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손을 올리고 지랄이야?”
“랜스키가 아니야.”
“……뭐? 랜스키가 아냐? 그럼 누가 이랬는데?”
“애런슨이.”
“애, 애런슨이?”
“응.”
“…….”
존 리든의 손이 세스의 턱에서 떨어졌다. 거짓말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랜스키가 미친 짓을 하지 못하도록 세스를 부탁했던 친구가 정작 세스를 때린 장본인이라는 소리도 믿기 어려웠다.
“왜?”
존 리든이 넋 빠진 얼굴로 물었다.
“내가 오늘 아침 랜스키와 같은 차를 타고 등교해서.”
넋 빠진 얼굴이 다시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랜스키하고…… 같이 등교했다고? 왜?”
“어제 같이 호텔에서 잤어.”
“…….”
존 리든은 잘 벌어지지 않는 입을 움직이려고 애썼다. 갑자기 다친 다리가 욱신대기 시작했다. 20분 전에 맞았던 진통제 기운이 벌써 사라진 모양이었다.
“……왜?”
간신히 목소리가 나왔다. 세스가 살짝 고개를 돌리며 대꾸했다.
“그냥…… 그럴 일이 있었어.”
“왜?”
“다 말하려면 길어.”
“왜?”
“……그래서 이 말 하려고 왔어. 랜스키는 걱정하지 마.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 그리고 이젠 너하고 친구 안 할 거야.”
“왜!”
세스가 고개를 들어 존 리든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존 리든은 세스가 언제 그렇게 구는지 알고 있었다. 평소처럼 이러든 저러든 별 상관없을 때가 아니라 꼭 할 말이 있을 때였다. 그러니 친구도 안 된다는 저 말이 진심이라는 뜻이었다.
“랜스키가 싫대.”
“씨팔, 그게 무슨 소리야! 랜스키가 싫은 게 무슨 상관인데!”
좀 전부터 존 리든이 내뱉는 소리는 하나였다. 그 말에 들어간 의미도 하나였다.
어째서 랜스키가 나오는 거야, 우리 사이에.
왜 랜스키인 거야, 내가 아니라. 너하고 사귀자고 한 건 나였어.
존 리든은 저를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는 세스의 팔뚝을 붙들었다.
“대답해 봐! 어째서 랜스키가 신경 쓸 일이 아냐! 그 새끼가 너한테 어떻게 굴었는지 잊었어?”
세스가 조용히 대꾸했다.
“랜스키는 잘못한 거 없어.”
“왜 잘못한 게 없어! 내가 본 것만 해도……!”
울컥 소리를 지르던 존 리든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어금니를 씹었다.
꺼내서, 핥아. 세상에서 제일 당연한 일을 하라고 하는 것처럼 거만하게 지시를 내리던 랜스키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런 말을 했다는 것 자체가 개새끼라는 소리였다. 멀쩡한 인간이라면 그런 말을 할 리 없었다. 좋아해서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 그딴 식으로 말할 리도 없었다.
그건 세스에게 한 말이 아니라 그에게 한 말이었다. 남의 걸 넘보지 말고 꺼지라는 뜻이었다. 존 리든은 꺼지라는 말보다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하기 위해 세스를 물건 취급하는 태도에 더 열이 받았다.
아마도 세스의 상태를 알지 못했다면 세스에게도 잔뜩 화를 냈을 것이다. 화를 내고 실망했을 것이다. 대체 랜스키가 뭐라고 그런 모욕을 고분고분 들어주고 있느냐며 등신이라고 소리를 질러 줬을 것이다.
결론은 랜스키가 개새끼였다. 세스의 무기력을, 세스의 짝사랑을 그런 식으로 이용해 먹는 랜스키가 문제였다.
잘못한 게 없다는 말은 그러니까 개소리였다. 세스가 랜스키를 좋아한다는 말도 개소리였다.
“그 새끼가 널 강간했잖아. 그런데 잘못한 게 없어?”
세스가 시선을 마주친 상태에서 입술을 열었다.
“랜스키는 친절해. 강간이 아니었어.”
“씨발, 싫다는데 강제로 박았다고 네 입으로 말했잖아! 그게 어째서 강간이 아냐!”
이젠 세스에게도 화가 났다. 꺼내서 핥아. 그따위 말을 지껄이는 새끼가 친절하다니, 그게 무슨 개소리야.
존 리든은 좀 전부터 붙들고 있던 세스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아니면 거친 게 좋은 거야? 강제로 당하는 게 좋아? 그게 너한테는 친절한 거야?”
존 리든은 침대 옆 의자에 앉은 세스를 홱 잡아당겨 목에 팔을 둘렀다. 자신이 하는 짓이 랜스키가 하는 짓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은 일부러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다른 것들을 차단시킨 채 강제로 입술을 부딪치며 억지로 혀를 밀어 넣었다.
“……!”
세스가 어깨를 뒤로 빼며 존 리든을 밀어냈다.
“이러지 마.”
혀가 떨어져 나가자 세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숨이 가팔랐다. 세스는 가슴을 들썩이며 호흡을 골랐다.
“이제 이런 건…… 안 하기로 했어.”
세스는 왜 강제로 키스했냐며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씨발, 이런 게 뭔데?”
“다른 애들한테 맞는 거. 그리고 섹스도.”
기분 나쁜 예감이 먹구름처럼 뭉게뭉게 머릿속을 번져 왔다. 세스는 여전히 시선을 곧게 마주하고 있었다. 그 시선에 가슴이 두근거릴 때가 있었다. 약이라도 한 것처럼 붕 뜨는 기분은 제어가 되지 않았다. 같은 행동이 지금은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 예감은 불길했다.
“왜?”
그새 어깨가 축 늘어진 존 리든이 물었다.
“이젠 도망치지 않기로 해서.”
“그게 무슨 소리야?”
“랜스키한테…… 약속했어. 도망치지 않겠다고.”
불길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그건 네가 랜스키하고 무슨 사이라도 돼 버렸단 뜻이야? 둘이 사귀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그건…… 잘 몰라. 하지만 도망치지 않기로 했어.”
“사귀면 사귀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잘 모르는 건 또 뭐야? 그건 안 사귀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 그 개새끼가 그냥 널 이용하고 말 생각이라고.”
“그래도 돼.”
“뭐……?”
터무니없는 얘기를 하는 세스는 터무니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존 리든은 세스 그린이 저렇게나 간절히, 마치 기도하는 사람 같은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제발 들어달라고 호소하는 것 같았다.
“랜스키가 뭘 해도 괜찮아. 네가 걱정할 일은 없어. 이젠 신경 쓰지 마.”
“…….”
간절한 세스 그린이라니, 질이 나쁜 농담 같았다. 존 리든은 세스가 한 마디씩 할 때마다 무언가가 조금씩 피부를 베어 내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좋아하는 것이다. 세스 그린은 알렉산더 랜스키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가 제 마음을 알았을 때는 벌써 너무 늦어 있었다. 알고는 있었다. 다만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다.
“……그럼 하나만 묻자.”
존 리든이 찌푸린 눈매를 아예 감아 버리며 물었다. 깁스 안의 다리뼈가 또다시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세스의 시선이 닿은 피부가 베인 듯 저려 왔다.
“너는 그렇다 치고, 랜스키는?”
“랜스키가 뭐?”
“그 새끼도 널 좋아하냐?”
“그건…….”
그건 아마 아닐 거야. 세스가 그렇게 고개를 저으려던 순간이었다.
“좋아해.”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세스가 홱 고개를 돌렸다.
알렉산더 랜스키였다. 학교에서 헤어졌던 그가 태연하게 존 리든의 병실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세스와 어느 한 구석도 닮아 있지 않은 랜스키의 모습이, 묘하게도 세스와 겹쳤다. 한차례 시선이 흘러가고 나서야 존 리든은 그 이유를 깨달았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와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어쩐지 시야가 아찔해졌다. 단 하루만 병원에 있었을 뿐이었는데 세스와 랜스키 사이에는 그가 손댈 수 없는 일이 잔뜩 쌓여 버렸다.
존 리든은 무기력과 모욕감을 동시에 느꼈다.
늦었구나.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동안.
“좋아하니까 이런 데까지 쫓아오지. 나 몰래 다른 놈이나 만나고 있는데도.”
세스가 놀라는 소리를 낼 틈도 없이 존 리든은 반사적으로 등 뒤의 두툼한 베개를 집어 알렉산더 랜스키에게 던졌다.
“넌 꺼져! 이 씨발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와!”
알렉산더 랜스키는 상체를 틀어서 날아오는 베개를 가볍게 피했다.
“못 올 데 온 거 아니잖아. 어차피 입원비도 내가 부담하는데.”
덧붙여 말하면 존 리든이 입원한 병원에 매년 거액의 후원금을 내는 곳도 랜스키 재단이었다. 존 리든이 차지한 특실은 랜스키 가문을 위한 것이라 일 년에 몇 번 사용하지도 않는 곳이었다.
“씨발! 남 멀쩡한 다리뼈를 부숴 놓은 게 누군데!”
“사과했잖아.”
“젠장, 난 못 들었어!”
“그래? 그럼 변호사한테 다시 사과하라고 할게. 녹음도 해 오라고 해야겠군.”
존 리든은 다시 베개로 손을 뻗었다.
“그딴 사과 필요 없어! 네 입으로는 사과도 못 하냐! 대체 얼마나 비싼 입이라서!”
다시 베개가 날아갔고, 알렉산더 랜스키는 이번에는 피하는 대신 받아서 내던져 버렸다.
“정 억울하면 고소해. 그 정도는 받아 줄 테니까.”
존 리든이 숨을 씨근덕대며 랜스키를 노려보았다. 저 잘난 새끼는 단 한 번도 곤란을 겪어 보지 않았을 것이다. 존 리든은 새삼 랜스키가의 끔찍한 권력을 실감했다.
당장 제 부모만 해도 그랬다. 사고를 낸 인간이 알렉산더 랜스키라고 밝히지도 않았는데도, 주인을 닮아 거만한 낯짝을 지닌 변호사 군단이 몰려와 빠르게 사고를 수습해 내는 과정에서 그의 부모는 고소라는 말을 아예 입에 담지도 않았다. 경찰은 와 보지도 않았다. 존 리든은 혹시라도 부모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미안하단 말을 꺼낼까 봐 랜스키라는 이름을 끝내 언급하지 않았다. 주차장에서 사고가 났다는 게 그가 한 말의 전부였다. 그 뒤로는 모든 게 신속히 자리를 찾아갔다.
왕자라는 별명은 이제 별명이 아니라 신분처럼 느껴졌다. 배런트 카운티를 다스리는 건 랜스키 가문이었다. 배런트를 벗어나지 않는 한 랜스키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등 뒤에서 세스를 끌어안았다.
“난 정당방위였어.”
“이 미친 새끼야! 그게 어떻게 정당방위야!”
알렉산더 랜스키가 느리게 세스의 목을 기울여 드러나는 귓불에 살짝 키스했다.
“네가 내 물건을 훔쳐가려고 했잖아.”
“물건? 말하는 꼬라지하고는. 씨팔, 내 앞에서 더듬지 좀 마! 세스 너는 저런 말을 듣는데도 친절하다는 소리가 나와? 싫으면 가만히 있지 말고 싫다고 좀 하란 말이야!”
세스가 살짝 붉어진 뺨으로 말을 약간 더듬었다.
“난…… 나, 나는 안 싫어서…….”
“이런, 씨……!”
할 수만 있다면 랜스키의 머리통을 붙들어 럭비공처럼 던져 버리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랜스키가 반대쪽 귓불을 입술로 무는 동안 세스가 작게 속삭였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새삼. 네가 도망칠 때마다 얼마 못 가고 붙잡혔던 건 그새 까먹었어?”
“그래도……. 오늘은 도망친 거 아니잖아. 집에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사라졌지. 그게 왜 도망친 게 아냐.”
알렉산더 랜스키는 귓불을 놓고 세스의 머리카락을 흩뜨렸다.
“한 번만 더 이딴 식으로 굴어 봐. 아예 목줄을 채워 놓을 테니까.”
존 리든이 세스를 대신해 소리쳤다.
“야 이 개새끼야! 무슨 말을 그따위로 하는데!”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를 대하는 태도는 아무리 해도 용납하기 어려웠다. 꺼내서 핥으라는 말과 달라진 게 없었다. 저런 게 좋아한다는 뜻이면 랜스키는 정신병원에 처박혀야 했다.
“세스가 네 애완용 강아지도 아니……,”
그러나 말을 잇다 말고 존 리든은 문득 혀를 멈췄다.
세스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가 강제로 키스했을 때 그랬듯이 숨을 가만 삼키며 참았다.
그러나 단지 화만 내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세스는 창백한 얼굴에 드물게도 열기를 띠우고, 머리칼로 장난을 치는 알렉산더 랜스키를 향해 아주 조금씩 조심스럽게 고개를 기울이는 중이었다.
아, 저게…… 좋아하는 얼굴이구나.
존 리든의 턱이 벌어졌다.
오늘 세스는 낯설었다. 너무도 낯설어서 바다 저 건너편에 있는 사람 같았다. 아무리 팔목을 붙들고 강제로 혀를 들이밀어도 결코 닿을 수 없는 수평선 너머의 허상 같았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에게서 눈을 돌려 존 리든을 바라보았다. 세스가 허상이라면 랜스키는 정반대였다. 눈을 감아도 저 거만한 얼굴은 눈꺼풀 안에 콱 틀어박혀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내 걸 가지고 내가 뭘 하든 상관도 없는 녀석이 잔소리하지 마. 그 얘기 하려고 굳이 여기서 네 얼굴 보고 있는 거야. 네 거 아니니까 탐내지 마.”
저 개새끼가. 존 리든이 시큰대는 턱을 억지로 움직여 욕설을 중얼거렸다.
저 개새끼가. 하필이면 저런 개새끼를.
“닥쳐, 랜스키. 개소리하지 마. 우린 벌써 친구야.”
“친구? 어림없는 소리 마. 안 돼.”
“왜 안 되는데.”
“내 거니까.”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의 손을 붙들어 잡아당겼다. 그만 일어나라는 신호였다. 세스가 얌전히 그를 따라 일어섰다. 순간 존 리든은 침대가 들썩할 정도로 몸을 날려 세스의 반대편 팔목을 움켜쥐었다.
“가지 마.”
자신이 그렇게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지 존 리든도 몰랐다. 그래서 놀라는 중이었다. 늦었다는 것도 알았고 세스가 보기만 해도 기분 더럽게 만드는 개새끼에게 푹 빠져 있다는 것도 알았다. 유감스럽지만 개새끼도 비슷한 마음인 것 같았다.
그런데도 손이 멋대로 움직였다. 늦었지만 아직 지기는 싫은 모양이었다.
늦긴 해도 지금은 확실히 붙들었다. 세스는 허상이 아니었다. 이 들끓는 감정도 허상이 아닐 것이다.
“병문안 온 거 아냐? 그런데 너는 나 괜찮냐고 물어보지도 않았잖아. 환자 앞에서 할 말만 하고 가 버리는 게 어디 있어?”
“아…….”
미처 그런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는 식으로 세스가 느리게 눈을 깜박거렸고, 존 리든은 그 표정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그래서 알렉산더 랜스키도 알았다. 사람이 사람을 놓치지 못할 때의 마음 같은 것을.
알렉산더 랜스키는 밖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틀어 존 리든과 세스의 사이로 다가갔다. 그가 존 리든의 팔목을 잡아 비틀었다.
“그 손 놔.”
존 리든이 한껏 얼굴을 구기면서 답했다.
“못 놔.”
“손도 한쪽 못 쓰게 해 줄까?”
“미친 새끼. 매사 그따위로 날뛰면 사람이 붙어 있기나 하냐? 세스가 병을 앓고 있는 걸 고맙게 여겨. 그게 아니라면 너 같은 새끼는 쳐다보지도 않고 도망쳤어.”
“괜찮아. 도망치는 애 쫓아다니는 건 이골이 붙어서. 무릎뼈가 박살 난 누구는 하고 싶어도 못 할 테지만.”
“이 개새끼야. 박살 난 게 아니라 금 좀 간 거야. 들러붙는 대로 세스는 내가 돌려받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박살 났다는 게 무릎뼈가 아니라 머리였던 모양이군. 애초에 내 거였는데 뭘 돌려받겠다는 거야.”
“씨발, 너보다 내가 먼저였어.”
“뭐가 먼저라는 건데. 둘이 잔 적도 없다면서. 청승 그만 떨어.”
“저질 새끼. 너는 인간관계든 뭐든 그 짓 빼고는 성립이 안 되냐? 자는 거 말고도 할 거 많아. 세스가 첫 키스는 나하고 한 건 알고 있냐?”
“……뭐?”
존 리든의 팔뚝을 붙든 손가락 마디가 울컥 불거져 나왔다. 존 리든이 더는 통증을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고 나서야 세스가 랜스키를 말렸다.
“그만둬. 또 다치면 어떻게 하려고.”
“너……,”
알렉산더 랜스키는 존 리든을 놓아주고 대신 세스의 양 어깨를 붙들었다. 세스를 붙들기 위해 내키지는 않지만 존 리든을 놓아주었다는 말이 맞았다. 존 리든이 손자국이 파랗게 찍힌 팔목을 문지르는 동안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를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았다.
“저 새끼하고 뭘 했다고? 첫 키스?”
세스는 표정 없는 순한 얼굴을 끄덕였다.
“응. 리든이 처음이었어.”
그 말에 존 리든은 아픔을 지우며 씨익 웃었고 알렉산더 랜스키는 이제껏 세스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얼굴을 했다.
저도 이상하다 싶었던지 세스가 조심스레 눈치를 보며 물었다.
“왜…… 그래?”
“지금 그걸 몰라서 물어?”
“너도 키스해 봤잖아. 그게 왜 화를 낼 일이야?”
“…….”
알렉산더 랜스키가 할 말을 잃고 눈썹을 구겼다. 존 리든이 그 꼴을 보며 소리 내어 웃었다. 랜스키가 세스를 꾹 쥔 채 존 리든에게 말했다.
“웃지 마.”
“씨발, 이걸 어떻게 안 웃어. 웃겨 죽을 것 같은데.”
존 리든은 배가 아파서 눈물이 흐를 때까지 웃어 대다가 갑자기 정색을 하고 말했다.
“역시 포기 못 하겠어. 내가 머리를 다친 게 아니고서야 세스가 너 같은 미친 새끼한테 가는 꼴은 못 보지. 퇴원하고 제대로 말려 주겠어.”
“……역시 팔도 하나 부러트려야겠는데.”
웃다 말고 이미 끝난 얘기를 하는 존 리든이나, 이제야 그를 돌아보며 양쪽 팔을 훑어보는 알렉산더 랜스키나 너무 진지해서 이상해 보일 정도였다.
세스가 랜스키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또 다치면 리든의 부모가 정말로 고소할지도 몰라.”
“하라고 해. 그게 뭐 대수라고.”
존 리든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팔이 부러져도 다리만 멀쩡하면 쫓아갈 수 있어! 그리고 멀쩡한 팔을 왜 부러트리고 난리야? 내가 씨발, 등신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당하고 앉았겠냐?”
알렉산더 랜스키가 존 리든을 보며 짜증스럽게 웃었다.
“병원에 처박힌 주제에 되지도 않는 미련이나 부리는 게 등신이지.”
“너하고 세스는 아직 아무 사이도 아냐. 도망치지 않기로 한 게 대체 뭔데? 사귀자는 말도 제 입으로는 못 하는 게 등신이지.”
“닥쳐.”
존 리든과 알렉산더 랜스키가 서로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대는 시간이 이어졌다. 사이에 낀 세스가 불안한 듯 시트 자락을 만지다 더는 못 견디겠던지 작게 말했다.
“그럼…… 나는 그만 가 볼게.”
알렉산더 랜스키가 기다렸다는 듯 세스의 어깨를 돌려세웠다.
“잘 생각했어. 한 번 왔으니까 다시는 올 생각 마. 팔팔한 거 보니 걱정할 필요도 없겠어.”
존 리든이 뒤늦게 조금만 더 있다 가라고 소리쳤지만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의 머리를 꾹 붙들어 고개를 돌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 * *
“잠깐 서 봐.”
알렉산더 랜스키는 병실 문을 꽝 닫고 나서 세스를 돌려세웠다. 세스가 고개를 들자 곧장 입술이 내려왔다.
키스가 아니었다. 알렉산더 랜스키의 혀가 집요하게 세스의 입술과 입 안쪽, 그리고 잇몸과 입천장을 샅샅이 핥았다. 한동안 이어지던 행위는 키스로 연결되지 않고 거기서 끝이 났다. 세스가 조용히 물었다.
“왜 이러는 거야?”
“소독.”
그러고 난 다음에서야 알렉산더 랜스키의 손바닥이 머리칼 사이를 파고들며 한결 여유롭게 입술을 포개 왔다. 느긋하게 성감을 자극하는 움직임이 비로소 키스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망설이던 세스가 저를 붙든 팔에 손을 얹자 알렉산더 랜스키가 입술을 귓가로 미끄러트렸다.
“환자라서 한번 봐준 줄 알아. 다음부터 가만 안 둬.”
나직하지만 날카롭게 파고들어 귓속을 진동시키는 목소리에 세스가 작게 목덜미를 떨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모르는 척하긴. 멍청하게 당하고 있지 말라고.”
알렉산더 랜스키는 모습을 드러내기 이전에 병실에 이미 도착해 있었다. 존 리든이 세스에게 강제로 키스하는 순간에도 있었다.
자신이 등장할 적당한 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욱하는 성질이 폭발하기 전에 세스가 그를 늦추는 말을 했던 것뿐이었다. 다른 애들하고 이런 거 하지 않을 거야. 이젠 도망치지 않기로 했거든. 네가 신경 쓸 일은 이제 없어.
호모 쿼터백이 세스를 넘보는 것은 충분히 짜증나는 일이었지만 그게 세스의 잘못은 아니었다. 게다가 쿼터백과 있으면 세스가 저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다른 놈들과 저는 달랐다. 친구랍시고 얼쩡대는 호모 쿼터백은 그저 다른 인간들 중 하나였다. 유감스럽게도 주제 파악을 하는 데 굼뜰 뿐이었다. 그러니 첫 키스 같은 시건방진 얘기를 주제도 모르고 꺼내 들었을 것이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친절히 주의를 주었다.
“난 저 새끼 마음에 안 드니까 앞으로 친구랍시고 들러붙지 못하게 해. 친구도 하지 마.”
“벌써 한다고 하긴 했어.”
“했거나 말거나. 앞으로는 하지 말라고.”
세스는 어쩌면 그렇게 하겠다며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하지만 방해가 있었다.
“……어엇!”
툭!
누군가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다 입에 물고 있던 소다 캔을 떨어트리는 사고가 두 사람의 눈앞에서 벌어졌다. 데구르르 굴러간 캔이 입을 벌리고 안에 든 소다를 뻐끔뻐끔 흘려 댔다.
“조심해.”
알렉산더 랜스키는 바닥을 흘러온 코크가 발끝을 더럽히기 전에 세스를 들어 올려 옆으로 비켜서게 했다.
“어, 어…….”
소다 캔을 떨어트린 장본인은 턱을 벌리고 멍청하게 서 있기만 했다.
카페테리아에서 막 올라오던 커트 애런슨이었다. 풋볼 같은 단체 스포츠에 별 관심이 없던 알렉산더 랜스키는 애런슨을 몰랐지만 그가 누구라는 것은 쉽게 짐작했다.
“아, 마침 잘됐네. 네가 그 애런슨이지?”
“어, 그런……데.”
커트 애런슨은 당황하느라 존 리든의 병실 앞에서 왕자와 남창의 조합을 마주한 일에 화내는 걸 잠시 잊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성큼성큼 애런슨의 앞으로 걸어가 붕대가 감기지 않은 왼손으로 다짜고짜 턱을 후려갈겼다.
퍽!
“크윽!”
커트 애런슨이 턱을 움켜쥐고 허리를 구부렸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애런슨이 얻어맞은 부위는 세스가 맞은 곳과 정확히 일치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를 돌아보며 개운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호모 쿼터백과 친구 하지 마. 알아들었지?”
애런슨은 통증을 이기지 못하고 계속 신음을 흘렸고, 그래서 알렉산더 랜스키가 하는 말은 협박이 되어 버렸다. 오른손을 썼으면 애런슨의 턱뼈가 아예 망가졌을 것이라는 설명을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 * *
“마음에 안 들어.”
머레이 힐로 들어서는 경호 차량 안에서 알렉산더 랜스키가 불쑥 중얼거렸다. 세스는 그가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같이 안 있겠다는 거야.”
“……계속 집에 안 들어갔잖아.”
“어차피 그 미친 집구석은 아무도 없을 거 아냐. 왜 굳이 혼자 있겠다는 거야?”
“아버지가 돌아오실 거야.”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일이잖아. 전화를 해 보지 그래?”
“…….”
세스의 침묵에는 그가 휴대전화를 밟아 부순 이후로 아직 새 전화기를 살 만한 상황이 되지 않았다는 의미가 들어 있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한 박자 늦게 세스의 말 없는 설명을 알아들었다.
“……젠장. 너는 왜 여태 그런 말도 안 하고 있었어?”
변명을 하자면 그럴 만한 틈이 없었다. 그와 있을 때면 늘 무언가가 정신없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으니까. 마치 멈추지 않는 롤러코스터 같았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습관처럼 주머니를 뒤적대다가 그도 빈손이라는 것을 알아채고는 조수석에 타고 있는 경호원에게 말했다.
“전화기 있죠? 이리 주세요.”
랜스키가의 경호원은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않고 수트 안주머니의 휴대전화를 건네주었다.
“오늘은 이거 가지고 있어.”
알렉산더 랜스키는 경호원에게서 건네받은 휴대전화에서 저장된 번호들을 통째로 지운 다음, 제 번호를 입력해 세스에게 건네주었다.
“저장은 해 뒀지만 내 번호는 외우고 있어. 내일 검사한다.”
내일은 토요일이었다. 둘 다 학교에서 볼 일은 없었다. 랜스키의 말은 내일도 만나자는 소리였다.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알아듣지 못했는지 세스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알렉산더 랜스키는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도망치지 않겠다고 했으니 찾는 순간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갈게.”
랜스키가의 육중한 경호 차량이 머레이 힐의 주택가에 섰다. 세스는 간만에 불이 켜져 있는 집을 보며 작별 인사를 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의 턱을 돌려 저를 돌아보게 만들며 인사를 받았다.
“사람 보고 얘기해. 간다는 말 같은 건 성의 없게 하지 마.”
알렉산더 랜스키가 몸을 기울여 콧잔등에 입술 자국을 남겼다.
“그럼 들어가. 내일 봐.”
세스가 차에서 내렸고, 알렉산더 랜스키는 따라 내리지 않은 채 시선으로만 배웅했다.
대신 그는 세스가 무사히 현관을 열고 집 안까지 들어서는 것을 꼼꼼히 지켜본 다음에야 차를 출발시키도록 지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