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불이 켜진 집은 사람의 기척이 있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따듯한 온기나 환영 같은 것은 없었다. 세스는 이사라도 가는 것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짐들과 커다란 포장 상자를 바라보며 할 말을 잃었다.
“……아,”
막 키친에서 맥주 캔을 꺼내서 걸어 나오던 마이클 그린이 응접실 소파 앞에 우두커니 멈춰 서 있던 세스를 발견하고는 잠시 발끝을 주춤거렸다.
“……일찍 왔구나.”
일찍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고도 한참은 지난 시간이었다. 존 리든의 병문안을 갔다가 랜스키와 저녁까지 함께 먹었다. 세스가 특별한 방과활동을 하지 않는 것은 마이클 그린이 알고 있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세스의 귀가 시간이 몇 시가 되어야 하는지 확인해 본 적이 없었다.
“앉을래?”
“아니…… 네.”
세스는 소파를 빙 둘러 따로 떨어져 있는 일인용의 자그마한 소파에 앉았다. 양부와 가능한 한 길게 거리를 두는 것은 어릴 때부터의 습관이었다. 양부 역시 세스에게서 가장 먼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는 것도 아닌, 등을 돌린 것도 아닌 이상한 공간에 함께 앉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를 입양했던 두 양부 중 혼자만 살아 있는 마이클 그린은 불편한 한숨을 이리저리 토하다 결국 입술을 뗐다.
“……회사를 옮길까 하는데.”
그 말은 배런트에서 더는 머물 이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세스의 표정이 처음으로 불안해졌다.
“그럼…… 이사해요?”
“그래야겠지.”
양부는 벌써 혼자 결정을 내리고, 혼자 짐을 꾸리는 중이었을 것이다. 세스는 타인과 머무를 때는 늘 공기처럼 익숙하던 단절감이 무척 난감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저도요?”
양부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세스를 바라보았다. 세스도 그를 바라보았다. 몇 년 만에 제대로 마주하는 것만 같은 양부의 시선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니.”
그리고 대답도 어려웠다. 세스는 그가 좀 더 쉽게 말을 해 주길 가만히 기다렸다. 양부가 답을 준 것은 답답한 고독이 한차례 흐른 뒤였다.
“만나는 사람이 있는데…… 아시아로 이주할 상황이 되었어. 같이 가자고 하기에 그러겠다고 했다.”
양부가 마침내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순간은 언제부터였을까. 한 명이 죽고, 둘만 살아남은 이 공간에서 함께 고독으로 벽을 쌓던 그 사람은 언제부터 혼자만 바뀌었던 것일까.
“시간이 많지 않아. 이번 주 안에 짐을 정리할 거야. 너는…… 어떻게 할래?”
답을 모르는 얘기를 너무 쉽게 묻지 않았으면 했다. 세스는 자그마한 원망을 담아 양부에게 물었다.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데요?”
“알아봤는데 동부에도 일로인 같은 학교가 또 있어. 거기는 기숙사도 있으니까 지내기도 나쁘지 않아. 방학 때도 기숙사에 머물 수 있도록 제도가 잘 마련되어 있다고 했어. 졸업할 때까지는 학비를 댈 테니까……,”
“…….”
세스는 비로소 양부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알아들었다.
“그러니 제발, 이제 그만 더 이상…… 널 보지 않아도 된다고…… 해 주겠니.”
“…….”
“이제 더는…… 제발이지 그만두고 싶어.”
양부의 말은 슬펐다. 세스를 슬프게 만드는 게 아니라 그가 얼마나 슬픈지를 말해 주기에 슬펐다.
입양을 원했던 쪽은 파트너가 아닌 마이클 그린이었다. 안정적인 직장과 수입, 생활 기반, 가족의 이해 등을 모두 가진 선량한 게이 부부는 아이를 키우는 일에 온전히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입양 기관에서는 게이 부부에게 그리 많은 기회를 주지 않았다. 1살 미만의 갓난아이를 원했던 마이클 그린의 바람은 번번이 풍선처럼 부풀다 터져 버렸다. 그린 부부가 둘 다 점차 까다로워지는 입양 기관에 지쳐 갈 무렵, 세스라는 선택지가 주어졌다. 벌써 네 살이나 된 아이였다.
아이는 말이 없었고, 한눈에도 상처 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파트너는 좀 더 기다려 보자고 설득했지만 마이클 그린은 고집을 피웠다. 더는 기다리기도 지쳤으며 네 살이나 먹은 아이도 좋은 가정에서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우겼다. 아이의 우울한 상처는 얼마든지 애정을 품어 낫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결정을 내린 순간만 하더라도 마이클 그린은 좋은 아빠가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문제는 서서히 드러났다. 마이클 그린이 아무리 애를 써도 세스는 마음을 열지 못했다. 좋은 아빠가 되겠다는 헌신적인 마음가짐이 오기와 집착으로 변질되어 갈 무렵, 사고가 일어났다.
세스를 재웠다고 생각한 마이클 그린이 아래층으로 내려가 부엌에서 물을 한잔 마신 뒤 다시 2층으로 올라와 침실의 문을 닫으려던 순간이었다.
문이 잘 닫히지 않았다. 두어 번 힘을 준 끝에 경첩에 뭔가가 끼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어두워진 복도의 불을 켜고 경첩을 막 살피려고 했다.
별안간 마이클 그린이 비명을 질렀다.
어두워진 복도에 자그마한 유령처럼 세스가 서 있었다. 아이의 작은 손가락은 문틈 사이에 끼어 두세 번 짓이겨진 채로 뭉개진 손톱을 따라 피를 흘렸다. 잠에 취해 있던 파트너가 침대를 박차고 달려올 때까지 마이클 그린은 멈추지 않고 비명을 질렀다.
왜 네가 여기 있는 거야! 내가…… 내가 방금 재웠는데!
세스는 아무것도 없는 커다란 갈색 눈으로 마이클 그린과 파트너를 번갈아 보며 조용히 말했다.
배가 자꾸 아파서 말하려고요.
그런데 정말 아파 보이는 것은 배가 아니라 짓이겨진 손가락이었다.
왜 소리를 내지 않았어! 어째서 울지도 않는 거야! 아프지도 않아?
이어서 들려오는 세스의 대답을 둘 중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다.
울면 누가 듣잖아요.
할 말을 잊은 마이클 그린의 귀에 완전히 잠에서 깨어난 파트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병원에 데려가 봐야겠어.
현명한 판단이었다. 세스는 급성 장염을 앓던 중이었고, 결국 사흘이 넘도록 입원까지 해야 했다. 세스가 퇴원하는 날 마이클 그린과 파트너는 세스를 소아신경정신 전문의에게 데려갔다. 여러 명의 의사와 여러 번의 검사를 거친 후에야 마이클 그린은 세스가 어떤 상태인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 그것은 그간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 기울였던 마이클 그린의 온갖 노력을 순식간에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마이클 그린은 좌절했다. 파양을 고려할 정도였다.
마이클 그린을 말렸던 것은 파트너였다. 누구나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고 했잖아. 아이가 잘못되어 있다고 해서 그 가치마저 잘못되게 할 수는 없어. 그 뒤로 헌신적인 좋은 아빠의 역할은 마이클 그린이 아닌 파트너에게 넘겨졌다.
파트너는 직업마저 바꿔 가며 하루 종일 세스와 시간을 보냈다. 아픈 아이를 사랑하는 자상한 아빠가 된 파트너를 보며 마이클 그린은 마치 단죄를 받는 것 같았다.
그저 예쁜 아이를 아들로 두고 싶어 했던 죄를, 세스를 그만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파트너의 속물적 도덕성을 비웃던 죄를, 망가진 아이에게서 애정을 잃어버린 죄를.
마이클 그린은 파트너와 세스에게서 점차 소외되어 갔다. 어쩌면 그가 스스로 소외되길 원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연한 교통사고로 파트너가 죽은 그 섬뜩한 날을 계기로 마이클 그린은 자신의 소외감이 어디에서 기인했던가를 깨달았다.
그것은 질투였다. 마이클 그린은 파트너를 송두리째 빼앗아 간 세스를 질투하고 있었다. 그는 사랑할 수 없는 아이를 파트너가 대신 사랑했다. 사랑받는 법을 모르던 아이는 파트너에게 맹목적으로 사랑을 되돌렸다. 두 사람은 마이클 그린과 함께 머물고 있던 행성을 떠나 그 둘만의 별에서 살았다. 파트너의 죽음이라는 불시착으로 다시 이쪽 행성에 돌아온 세스는 그와는 아예 다른 언어를 썼다.
그 이후로는 세스를 보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세스를 볼 때마다 마이클 그린은 파트너를 떠올렸다. 파트너가 멸시했을 자신의 치졸한 바닥을 보았다. 세스를 볼 때마다 도망치고 싶었다. 어떻게 해도 그는 죽은 파트너도, 살아 있던 파트너를 빼앗아 간 세스도 용서할 수 없었다. 그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이렇게 떠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제는 그만 떠나고 싶었다. 두 행성 사이의 숨 막히는 무중력 같은 이 무겁고 끔찍한 공간을 마침내 만난 새 파트너에게까지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마이클 그린은 세스를 학대하지도 증오하지도 않았지만 사랑할 수도 없었다. 세스가 만들어 내는 무음이 나락을 가져왔던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날마다 상처가 자라기도 했다.
그러니 떠날 수 있었다. 마이클 그린은 더는 죄책감에 맞서지 않기로 했다. 어른이라도 달아날 수 있는 것이다.
“예. 알겠어요.”
세스는 무릎 위에 올려놓았던 손으로 허벅지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마이클 그린의 눈에는 세스가 상처 난 손가락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닦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는 안도했다. 세스는 더 이상 네 살 어린애가 아니었다. 다쳐서 피가 흘러도 스스로 닦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학교는 여기서 계속 다니고 싶은데요.”
마이클 그린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거칠게 쓸었다.
“일로인에는 기숙사가 없다는 걸 알잖니.”
“그래도 일로인에 있고 싶어요.”
“그건…….”
“곧 졸업이니까 그때까지 혼자 있어도 괜찮아요.”
아니, 괜찮지 않았다. 마이클 그린은 이 집을 팔 작정이었다. 그는 세스를 따로 돌보아 줄 사람을 고용하는 것도, 이 집에서 혼자 남은 세스를 걱정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까마득하게 잊고만 싶었다.
“그건 어려울 거야. 너 혼자 여기 있을 수는 없어.”
사실 세스는 이 집에서 늘 혼자 있었다. 마이클 그린도 알고 있었다. 홀가분할 줄 알았던 헤어짐이 계속 무겁게 변해 갔다.
“일로인에 있고 싶어요.”
“그건…….”
마이클 그린은 끝까지 세스의 바람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러기엔 15년이 넘도록 지고 살았던 죄책감이 너무 질겼다.
“……럼 방법을…… 찾아보마. 하지만 장담할 수는 없어.”
세스는 잠시 고개를 끄덕이다가 마이클 그린을 바라보았다. 어색하지만 언젠가 한 번쯤은 익숙했던 것도 같은 시선에 마이클 그린은 세스와 그가 어떤 면에서는 닮아 있음을 깨달았다.
“……이젠 행복해지세요, 아버지.”
망설이던 세스는 그렇게 말했다. 마이클 그린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세스에게 그만 혼자 있게 해 달라고 말했다.
마침내 혼자가 되었을 때, 그는 울기 시작했다. 손바닥으로 가린 얼굴을 다시 드러낼 용기는 끝끝내 생기지 않았다.
* * *
토요일 아침은 빠르게 찾아왔다.
세스 그린은 낯선 휴대전화 벨 소리에 잠에서 깼다.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서야 벌써 아침이 절반쯤 사라진 시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여보세요.”
전화기 너머에서 어쩐지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렉산더 랜스키였다.
[뭐 하느라 아직까지 자고 있는 거야? 나와. 집 앞이야.]
세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내가 보여?”
[안 보여. 넌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데 어떻게…… 내가 이제껏 잔 걸 알았어?”
[그야 네가 한 번도 전화를 하지 않았으니까.]
알렉산더 랜스키의 신경질은 너무 당당한 느낌이라 세스는 정말로 자신이 뭔가를 잘못한 것만 같았다.
“미안해. 해야 되는 줄 몰랐어.”
[멍청하긴. 전화기는 괜히 쥐어 준 줄 알아? 어쨌거나 빨리 나와.]
“나가……? 어디로.”
[나와 보면 알 거 아냐.]
랜스키는 그렇게 날카로운 음성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세스는 그가 어제저녁 헤어지고 나서 집에 돌아간 순간부터 전화기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결국은 참다못해 먼저 전화를 했다는 것도.
세스는 오늘따라 무거운 몸을 느리게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
“늦었어.”
알렉산더 랜스키의 차는 오늘도 한눈에 찾기 쉬웠다. 세스는 옆 좌석에 오르며 조심스러운 손길로 안전벨트를 맸다.
“미안해. 급하게 했는데.”
세스에게는 아직도 물기가 묻어 있었다. 머리는 말리지 못해 잔뜩 젖은 상태였고 뒷목을 타고 흐르던 물이 셔츠 위에 어른어른 번졌다. 벌써 익숙해진 비누 냄새가 감돌자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의 어깨를 붙들었다.
“고개 숙여.”
“…….”
세스가 영문도 모른 채 고개를 조금 앞으로 숙였다. 그러자 물기 탓에 평소보다 차갑고 촉촉한 피부를 혀가 쓸었다. 세스가 움찔대며 몸을 빼려고 들었다.
“왜…… 이러는 거야.”
“그걸 묻는 게 더 이상하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혀를 더 아래로 내렸다. 셔츠가 거치적거리자 아예 안으로 손을 넣어 셔츠를 걷어 올려 버렸다. 세스가 알렉산더 랜스키의 손을 피해 고개를 흔들었다.
“여기선 안 돼. 누가 볼지도 몰라.”
세스의 눈이 불안하게 차창 밖을 향했다. 갈색 눈이 계속 떨렸다. 그 모습은 알렉산더 랜스키에게 상반된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거절은 짜증이 났지만 그래도 납득할 만한 이유라는 점에서는 인내할 만했다. 이제 세스는 밑도 끝도 없이 너라서 싫다는 말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미련을 떨궈 내듯 목덜미를 한번 강하게 빨았다. 살이 조이는 감각에 세스는 표정을 약간 구겼지만 싫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제 입술 자국이 남은 살갗 위에 숨을 한번 훅 불어 낸 다음 세스를 놓아주었다.
“그럼 여기 말고는 괜찮아?”
세스는 고개를 약간 숙이고 느리게 말했다. 평소보다 한참은 더 느려진 말투가 수줍게 들렸다.
“……으응.”
창백한 뺨 위로 옅은 붉은색의 열기가 번졌다. 그것은 알렉산더 랜스키의 몸 안에서 심장박동과 함께 생겨나는 무언가를 증폭시키는 장치였다. 세상은 아주 작은 것으로도 뒤집어질 수 있었다. 언젠가 했던 말처럼 세스는 그에게 위험했다. 여기서는 안 된다며 얼굴을 붉히는 세스를 울게 해서라도 저처럼 만들고 싶었다. 누가 보든 말든. 그런 것들은 엿이나 먹으라고 해. 나는 너를 안고 싶어. 어디라도 상관없어. 그런 정신 나간 소리를 할 수 있게끔.
“……젠장. 눈 떠. 고개 돌려.”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에게서 시선을 돌려 전방을 바라보며 기어 스틱을 잡아당겼다.
“차 멈출 때까지 나 쳐다보지 마.”
세스는 이번에도 얌전히 그의 말을 들었다. 정면을 향해 허리를 돌려 앉아 입을 꾹 다물고 앞만 쳐다보았다. 짜증과 인내가 빠르게 교차했다.
입 속에서 세스가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굴린 알렉산더 랜스키가 빠르게 차를 몰았다.
* * *
“다 왔어. 내려. 좀 걸어야 해.”
드라이브에 걸린 시간은 두 시간에 조금 못 미쳤다. 차에서 내렸을 때는 해가 수평선과 직각이 되는 높이에 걸려 있었다. 배런트 카운티의 여름 해는 연평균 기온이 24도가 넘는 이 더운 지역에서도 유독 사나웠다. 정오의 하늘 아래 숨김없이 드러나는 세스의 창백한 피부를 태양광이 물들였다. 세스는 현기증을 감추기 위해 더욱 느리게 움직였다.
“여기가 어디야?”
사람이 거의 없는 한적한 바닷가였다. 고작 한 시간만큼 멀리 있는 배런트 카운티의 정돈된 해변과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해변을 끼고 모여든 크지 않은 집들은 비바람에 닳은 채 낡아 있는 곳도 더러 있었다.
“여기서 점심 먹을 거야.”
알렉산더 랜스키는 그렇게 말하며 세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세스는 한결 익숙해진 동작으로 그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여기 식당이 있어?”
“아니.”
“……그럼?”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의 손을 움켜쥐고 하얀 모래가 신발에 들러붙는 길을 잠시 걸었다. 걸음이 멈춘 곳은 저를 닳아 낡아 가게 만드는 바다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파란색 집이었다. 초인종이 없는 현관문 앞에 서서 알렉산더 랜스키는 나무문을 두드렸다.
“마이아! 나 왔어.”
대답 대신 안에서 쿵쿵대는 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뭐, 누구? 라는 외침도 들렸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피식 웃는 만큼의 시간을 기다리게 했던 사람이 마침내 문을 열었다.
“……세상에. 맙소사, 알렉스!”
마이아라고 불린, 나이가 많지도 적지도 않은 라틴계 미녀가 두 팔을 한껏 벌려 랜스키를 끌어안았다. 세스는 그렇게 무방비한 얼굴로 남에게 안기는 알렉산더 랜스키를 처음으로 목격했다.
“여긴 어쩐 일이야! 연락도 없이! 내가 없었으면 어쩌려고!”
말이 빠른 미녀는 알렉산더 랜스키를 두세 번 더 끌어당겨 안았다. 품에 안았다가 얼굴을 들여다보고 키가 한참 자랐다며 중얼대다가 탄력 있는 어깨를 쓸어 보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을 세스는 처음으로 겪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태평하게 얼굴을 내맡긴 채 말했다.
“밥 줘, 마이아. 배고파.”
“뭐? 이 시간에 무턱대고 와서는 밥이나 내놓으라고? 어쩌다 이런 형편없는 남자가 돼 버렸어! 아니, 원래도 싹수가 보이긴 했지.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아, 그 옆은 누구야? 친구? 아무튼 들어와. 맙소사, 맙소사.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마이아가 먼저 등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를 끌어 뒤를 따라가게 했다.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순간 바다를 바라보던 파란 집은 오래전에 영업을 끝낸 술집처럼 아늑하고도 쓸쓸한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집 안에 대접할 거라고는 맥주 빼곤 아무것도 없는데. 그런데 뭐가 먹고 싶어? 아, 젠장. 그런데 정말 아무것도 없다니까. 너무해. 미리 말했으면 뭘 사다 놓기라도 했을 것 아냐.
등등.
마이아가 말을 멈추는 순간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는 알렉산더 랜스키와 세스를 아담한 응접실의 카우치에 앉히고 난 뒤 주방으로 사라지고 나서도 말이 계속 이어졌다. 대부분은 질문이 아니라 혼자 하는 얘기였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원래 저런 성격이라며 일일이 대꾸를 해 주는 대신 때때로 옅은 웃음을 짓기만 했다.
그가 가리키는 대로 알록달록한 천을 씌운 일인용 카우치에 앉아 있던 세스가 작게 물었다.
“누구야?”
“티아 마이아. 어릴 때는 그렇게 불렀어.”
마이아 페레즈는 모친이 몹시도 싫어하던 파트타임 베이비 시터였다. 제 명의로 스코틀랜드의 성을 두 채나 소유하고 있는 귀족 가문 출신의 모친은 영국 출신의 나이 지긋한 내니를 선호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영국에서 소개를 받아 온 몸값 비싼 내니들은 모친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신의 가치를 잘 아는 사람일 경우가 많았다. 제 나이의 반밖에 되지 않는 랜스키 부인의 히스테리를 무슨 고행이라도 하듯 한없이 견디고 있지는 않았다는 소리였다.
다섯 번째 내니가 짐을 싸서 영국으로 돌아가 버리자 모친도 손을 놓았다. 모친은 우아한 계절감을 조금도 느낄 수 없는 배런트를 저주하더니 우울증 약을 챙겨 들고 휴가를 떠났다. 랜스키가의 고용인들은 차라리 안도하며 다른 시터들을 찾았다. 그중 하나가 마이아 페레즈였다.
스물한 살의 마이아 페레즈와 다섯 살의 알렉산더 랜스키가 친구가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딱 사흘이었다. 그 뒤로 모친이 생각보다 지루했던 석 달짜리 휴가를 끝내고 돌아오기까지 알렉산더 랜스키는 배런트 카운티의 저택에서 거주한 이후로 가장 충족적인 시간을 보냈다.
모친이 돌아오자마자 한 일은 마이아 페레즈의 라티노 억양에 마시던 샴페인 잔을 떨어트리며 사레들린 시늉을 한 것이었다. 그다음부터 모친은 마이아 페레즈를 해고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고용하는 일을 수차례 반복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그때부터 자신이 결코 모친을 좋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모친은 더 이상 배런트 카운티를 견디지 못하고 부친과 이혼했다. 지금쯤 모친은 스코틀랜드의 어느 고성에서 관절까지 파고드는 추위를 우아하게 즐기며 살고 있을 것이다.
“여기…… 자주 와?”
“아니. 그렇게는 못 해. 아버지가 싫어해서.”
모친이 왔던 곳으로 떠나고, 알렉산더 랜스키가 마이아 페레즈와의 일상을 이어 가며 상실감 대신 묘한 안도감을 느낄 무렵.
마이아가 뒤늦게 커뮤니티 칼리지에 입학 신청서를 넣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알렉산더 랜스키는 때마침 배런트의 저택에 와 있던 부친에게 작은 부탁을 했다. 마이아가 학교에 갈 거래요. 장학금이란 거 주세요.
랜스키의 이름을 달고 있거나 혹은 감추고 있는 장학재단을 더하면 수십 개가 넘었다. 전국에 걸쳐 다양한 방면의 인재를 장학금으로 회유해 포획하는 것은 랜스키 왕국이 나날이 공고해지는 이유 중 하나였다. 다섯 살의 알렉산더 랜스키가 이런 사실들을 다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는 마이아 페레즈에게 뭔가를 해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난 뒤 부친은 예정에도 없이 알렉산더 랜스키를 스위스의 별장으로 보내 버렸다. 선물이라며 보냈던 스키 장비는 다섯 살짜리의 불만을 눈처럼 뒤덮어 버렸다. 그러는 동안 부친은 마이아 페레즈를 해고했다. 이 일련의 행위가 존재했던 이유는 명확했지만 대여섯 살의 나이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고용인과 친해지는 것은 나쁜 버릇이다. 배런트로 돌아와 마이아를 찾는 그에게 부친은 그렇게 말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고용인이라는 말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게 티아 마이아와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마이아 페레즈는 알렉산더 랜스키가 다섯 살이 되는 해에 그의 인생에서 떠나갔다. 그가 마이아 페레즈를 다시 찾은 것은 경호원을 따돌릴 수 있게 되었던 열다섯 살 이후의 일이었다.
“오늘은 왜 온 거야?”
세스는 묘하게 불안정해 보였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가 결국은 마이아와 친구가 되었던 것처럼, 세스 또한 그렇게 될 것이다. 자신에게 가장 따듯한 것을 세스에게도 나눠주고 싶었다.
“너한테 먹이 주려고.”
“…….”
알렉산더 랜스키는 손을 내밀어 세스에게 다가오라는 신호를 건넸다. 주방 쪽을 한번 바라본 세스가 둥근 나무 테이블을 둘러 왔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제 옆자리에 세스를 앉혔다. 둘이 앉기에는 너무 좁은 일인용 소파는 두 사람의 무게로 끼걱대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세스의 반쪽이 알렉산더 랜스키의 반쪽과 겹쳐 그를 누르는 모양새가 되었다. 무거워, 라는 말에 그는 제발 무거워져 봐, 라고 대답했다.
“나도 음식을 잘 못 먹던 때가 있었어. 아주 어릴 때지만. 그런데 마이아가 해 주는 건 맛있었어.”
세스는 어깨를 나직이 눌러 오는 알렉산더 랜스키의 무게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오늘은 너 때문에 온 거야.”
“…….”
더는 말이 없었다. 세스는 그가 내뱉는 호흡을 어딘가에 저장이라도 하려는 듯 무언가를 헤아리기 시작했고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가 그러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시간이 조용히 밀려왔다 조용히 흩어졌다. 흩어진 시간의 파편들은 결코 사라지는 일 없이 두 사람 안에 차곡차곡 쌓여 갔다.
* * *
아무것도 없다는 마이아 페레즈의 말은 거짓인지 엄살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식탁 위에는 세스가 한숨을 내쉴 정도로 많은 음식이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세스와 알렉산더 랜스키를 식탁에 앉힌 마이아는 이것만으로는 모자라지 않겠냐는 걱정을 한가득 늘어놓았다.
“잔뜩, 가득 먹어. 너희들은 젊잖아.”
알렉산더 랜스키는 마이아가 종류를 가리지 않고 음식을 가득 퍼서 세스의 접시에 담으려 할 때마다 참견하느라 분주했다.
이건 먹을 수 있겠어? 양은 많지 않아? 맛없으면 손대지 마. 싫어하는 건 오렌지 말고 또 뭐가 있어? 그런 건 아예 치워 버리게. 누가 보면 다섯 살짜리 애를 돌보는 줄 알았을 것이다.
어이가 없어진 마이아 페레즈가 눈을 흘겼다.
“연락도 없이 쳐들어와 놓고 맛이나 품평하다니. 알렉스 너는 저질이야.”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가 거의 손을 대지 않은 카차파를 나이프로 자르며 태연히 대꾸했다.
“내가 먹는 게 아니라서.”
마이아 페레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내 귀가 이상해진 거 아니지?”
알렉산더 랜스키가 씨익 웃었다.
“애인이 생기면 보여 줘야 한다고 했잖아.”
순간 마이아가 괴성을 질렀다.
“알렉스! 지금 네가 게이였다고 말하는 거야? 아, 맙소사. 커밍아웃이라니. 너무 이상해!”
입에 넣어 주는 대로 뜨끈한 치즈가 녹아내린 옥수수 전병을 우물대던 세스가 쿨럭 기침을 했다. 랜스키가 재빠르게 세스의 등을 두들겼다.
“괜찮아? 그러게 맛없으면 억지로 먹지 말라니까.”
마이아가 주먹을 쥐고 붕붕 휘둘렀다.
“너 그런 소리 하려거든 나가!”
두 시간에 걸친 식사는 내내 그런 식이었다.
* * *
“정말이지, 아직도 난 적응이 안 되네.”
마이아 페레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라임을 잘라 넣은 맥주병을 건넸다. 식사를 마치고 응접실로 자리를 옮긴 세스는 좀 전처럼 알렉산더 랜스키와 나란히 앉아 있다가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맥주병을 보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뇨……. 괜찮아요.”
“아직 마시면 안 되는 나이라서 그러나?”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술은 안 좋아해요.”
“배런트에 살면서 맥주를 안 마신다고? 왜?”
마이아 페레즈는 알렉산더 랜스키가 다섯 살이었을 때도 습관처럼 맥주병을 건네다가 제풀에 놀라던 사람이었다.
“나 줘.”
알렉산더 랜스키가 중간에 맥주병을 가로챘다.
“이 녀석은 잘못 건드리면 놀라. 싫다는 건 내버려 둬.”
“와……. 어이가 없네.”
마이아 페레즈가 한참 혀를 차다 세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알렉스가 게이……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런데 이런 애인이 되다니. 어릴 때부터 좋은 남자가 될 구석은 눈곱만큼도 없었는데. 지금은 뭐야. 보고 있으려니 무서울 정도네. 그렇게 좋아?”
“손이 많이 가. 그런데 예뻐서 별로 안 귀찮아.”
“어이가 없다, 어이가.”
마이아 페레즈가 손에 든 맥주를 벌컥벌컥 비웠다.
“알렉스가 이렇게 될 줄이야. 예전에 하던 짓을 보면 순 자기만 아는 사고뭉치였는데.”
알렉산더 랜스키가 맥주병을 입에 댄 채 눈을 흘겼다.
“내 험담 들으라고 데려온 거 아닌데.”
“아, 애인이라며. 알 건 알아야지. 네가 얼마나 제멋대로인지. 그때 생각나? 루이하고 싸우고 나선 루이가 키우던 뱀을 훔쳐서는 멋대로 내 가방에 감춰 뒀잖아. 그래 놓고 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커녕 알려 주지도 않아서 내가……,”
“그럼 어쩌라고. 내 방에 놔두면 그게 금방 찾아냈을 텐데.”
“거봐. 저런 식이라니까. 나는 심장마비가 올 뻔했다고.”
“심장마비는 무슨. 그 뱀 잡는다고 벽에 걸어 둔 사냥총부터 집어 들던 사람이 누구야.”
“심장마비가 올 것 같아서 그런 거야.”
“그렇다고 해 줄 테니까 험담은 그만둬. 이 녀석이 겁먹으면 곤란해.”
마이아 페레즈가 혀를 끌끌 찼다.
“너도 실컷 했잖아. 밥 먹으면서.”
“맛있냐고 좀 물어본 거 가지고. 속 좁긴.”
“시끄러워. 그러게 왜 말도 없이 애인을 데려오고 그래. 그나저나 둘이 어떻게 만났어? ……아, 이런. 내 정신 좀 봐. 두 시간 내내 같이 밥을 먹었으면서 이름도 안 물어봤네. 이름이 어떻게 돼? 나는 마이아.”
“……세스 그린.”
“만나서 반가워.”
마이아 페레즈가 세스를 향해 악수와 미소를 동시에 청했다. 세스는 머뭇대다가 내키지 않는 태도로 마이아 페레즈의 손을 손가락 끝으로 살짝 쥐었다. 마이아는 개의치 않고 덥석 세스의 손을 붙들어 위아래로 힘차게 흔들었다. 세스는 팔이 흔들리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악수가 끝나자마자 감추듯 손을 가져왔다.
“아, 그렇지. 사진 볼래? 우리 집에 알렉스 어릴 때 사진이 몇 장 있는데. 좀 기다려 봐.”
말을 마친 마이아 페레즈가 후다닥 일어섰다. 앨범은 응접실 한구석을 차지한 나무 선반에 고이 놓여 있었다. 두어 걸음 만에 오래된 앨범을 안고 온 마이아 페레즈는 앨범을 열어 세스의 앞에 돌려놓았다.
“어때? 한눈에 알아보겠지?”
열 장 남짓한 사진 속에서 알렉산더 랜스키는 대부분 짓궂게 웃고 있거나 아니면 무언가에 심통이 나 있는 표정이었다. 마이아 페레즈가 간직한 사진 속의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이전의 시간에 존재하고 있었다.
열 장 남짓한 사진을 보물처럼 두툼한 앨범에 꽂아 간직하고 있는 마이아 페레즈를 세스는 여전히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렇게 불편한 감정은 처음이라 스스로가 낯설었다.
“……네.”
탁.
세스는 더는 사진을 보지 못하고 앨범을 덮었다.
“잘 봤습니다.”
세스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가 알렉산더 랜스키의 어린 시절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듯 보였을 것이다. 사실 이 파란 집에 도착한 뒤로 세스의 태도는 내내 그랬다. 그래서 마이아 페레즈는 약간의 오해를 하게 되었다. 세스를 향하던 난처한 웃음은 알렉산더 랜스키를 향한 짓궂고 애틋한 걱정으로 변했다.
“아무래도 이거, 알렉산더 랜스키가 처음으로 혹독한 운명을 마주한 것 같은데. 둘이 어쩌다 애인이 된 거야?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건데?”
알렉산더 랜스키는 마이아 페레즈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잘 알아채지 못했다. 세스가 그를 좋아하는 것은 이미 명제화된 일이라 그에게는 아무런 의심도 없었다.
“날 좋아해서.”
당연하게 들려오는 대답에 마이아 페레즈의 입술에서 맥주 방울이 튀었다.
“……뭐?”
“누구도 못 할 만큼, 그렇게 좋아해서.”
마이아 페레즈의 고개가 좌우로 까닥까닥 기울기 시작했다. 귀엽게 망가진 메트로놈 같았다.
“아하…… 사랑에 빠진 남자는 무섭다더니. 세상 모든 원칙과 상식을 무시해 버리네. 뭐, 알렉스 너답긴 하다.”
마이아 페레즈가 라임 향이 나는 맥주병을 내려놓고는 고개를 낮춰 세스와 바싹 시선을 맞췄다.
“차라리 그냥 인정하지 그래? 저 예쁜 얼굴에 네가 먼저 반한 거 아냐?”
갈색으로 잘 그은 근육질의 몸이 남성미의 기준이라는 배런트 카운티의 편견을 버린다면, 세스를 두고 미인이 아니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검은 머리는 결이 고왔고 피부는 이렇게 햇볕이 강한 지역에서는 보기 드물 정도로 말끔했다. 우울한 눈매는 유약해 보이기도 했지만 그래서 외려 까닭 모를 질투를 불렀다. 세스의 존재감은 흐릿한 게 아니라 모호했다. 길을 걷다 마주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씩은 그 수상한 느낌에 세스를 돌아볼 것이다.
“아, 그런데 이런 말 해도 되나? 생김새를 보면 통 어느 쪽인지 모르겠어. 선이 가늘어서 아시아 쪽 혼혈 같기도 한데 그러자니 피부가 너무 하얗고.”
고개를 갸우뚱하던 마이아 페레즈를 두고 알렉산더 랜스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유럽계 아냐?”
“아, 그럼 동유럽? 맞나?”
세스가 자신을 쳐다보는 두 사람을 차례로 응시했다. 세스의 눈은 어쩐지 비를 맞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대답은 한참 뜸을 들인 후에야 흘러나왔다.
“……예, 맞아요. 엄마가.”
알렉산더 랜스키는 손을 뻗어 세스의 머리칼을 약간 잡아당겼다.
“음…… 그럼 나는 루마니아. 검은 머리 하면 어쩐지 루마니아 같잖아.”
대충 한 말이었지만 맞았다. 세스의 모친은 검은 머리가 아니라 금발이었지만 루마니아 출신이었다. 세스의 연하고 가는 검은 머리는 모계 쪽의 격세유전이 아니면 부계의 영향일 것이다.
“루, 루마니아?”
마이아 페레즈가 약간의 시차를 두고 되묻는 사이 세스가 알렉산더 랜스키에게 대꾸했다.
“응. 루마니아였어, 엄마는.”
“엄마가 검은 머리였어?”
“아니. 엄마는 금발이었어.”
“그럼 친부는?”
“그건 몰라. 나는 본 적이 없어.”
“흐음.”
이런 얘기를 꺼내며 알렉산더 랜스키는 그간 세스의 부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약물 중독자였던 세스의 모친은 혼자 힘으로 죽기 전까지 아이를 키웠을 것이다. 왜 그런 지경에 와서도 친부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가 이내 화가 났다.
“네 부모란 것들은 대체 뭐 하던 인간들이야? 애를 낳기 전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이어지는 세스의 대답은 화를 낼 수도 없게 만들었다.
“엄마는 매춘부였어.”
“……뭐?”
화가 나지만 동시에 화를 결코 드러낼 수 없게 만드는 대답이었다.
퉁.
마이아 페레즈가 반사적으로 꿈틀댄 팔꿈치가 마시다 만 맥주병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당황해서 테이블 아래로 기어 들어가 쓰러진 맥주병을 세웠지만 이미 카펫은 축축하게 젖은 뒤였다. 테이블 위에서는 세스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젖은 카펫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마이아 페레즈는 자신이 세스의 얘기를 피해 테이블 아래로 숨어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귀를 막을까도 고민했다. 그러나 손은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돈을 벌려고…… 미국에 와서 힘들게 억양을 고쳤대. 그런데 나를 임신하는 바람에 더는 그럴 수 없었다고 했어.”
“그게 무슨……,”
알렉산더 랜스키는 잘 다물리지 않는 입을 손으로 문질렀다. 말을 하는데 괜히 턱이 욱신거렸다.
“대체 그런 미친 여자가 어디 있어. 어린애한테 무슨 소리를 한 거야.”
“엄마는 나쁘지 않아.”
세스의 연한 갈색 눈은 툭 트인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바닷가의 진한 태양 아래에서도 빛이 전혀 닿지 않는 심해처럼 우울하고 무거웠다.
“엄마는 나하고 같이 살기 위해서 계속 노력했어. 엄마는 나쁘지 않아.”
알렉산더 랜스키도, 테이블 아래의 마이아 페레즈도 루마니아계 마피아가 미국 사회에 정착하기 위해 매춘업을 발판으로 삼는다는 뉴스 너머의 얘기는 알지 못했다. 해마다 미국으로 밀입국하는 루마니아의 십 대 소녀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중 삼분의 일 이상이 미국에 도착하는 그해 신원미상이라는 네임 태그를 달고 시체 공시소에 쌓여 가는 것도 알지 못했다. 살아남은 소녀들은 삼십 대가 되기 전까지 마피아의 돈벌이에 혹독하게 이용되다가 절반 이상이 약물 중독으로 죽거나 인생을 망쳤다.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가는 소녀들은 전체의 일 할도 되지 않았다. 대부분이 미국 땅에서 죽었고, 평균수명은 32세를 넘지 못했다. 시체가 발견되는 소녀들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최소한 죽음을 확인해 준 타인이 있었다는 소리였으니까.
그 모든 것들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모르거나 관심을 갖지 않는 얘기였다.
“나쁜 건 나야.”
죄책감도 슬픔도 없는 얘기였다.
내가 태어난 게 나빴던 거야.
세스에게는 그게 당연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아무 일도 없었으리라는 것을 세스는 알고 있었다.
“내가 없었으면 엄마도 계속 살았을 테고 너와도 만나지 않았을 거야.”
화가 나게 만들지만 동시에 화를 내뱉을 수도 없게 만드는, 그런 얘기였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화를 내지 않았다. 세스를 비난하거나 우울한 사고를 뜯어고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세스가 불쌍해서도 아니었고 세스를 이해해서도 아니었다.
-내가 없었으면.
세스를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그 말이 아주 빠른 속도로 그의 어딘가를 날카롭게 베어 버렸다.
“네가 없었으면…… 만나지 않았을 거라고?”
“응.”
“네 머리로는 그게 더 나았을 것 같아?”
“……응.”
“누가 그러는데?”
세스가 답을 찾지 못해 스스로 혼란에 잠겼다. 자신이 없었으면 모든 게 더 나았을 것이라는 명제는 세스에게 바다 같은 것이었다. 세스는 아무도 없는 그 바다에서 말라 죽지도 못하고 있는 작은 물고기였다. 이제껏 늘 그랬다. 누가 널 그 바다에 처넣었냐는 알렉산더 랜스키의 질문은 세스에게 창세 이전을 묻는 것과 다름없었다.
“나한테 네가 없는 게 더 낫다고, 어떤 새끼가 그랬냐고.”
“…….”
작은 물고기가 된 세스는 갑자기 지금껏 있던 심해에서 위로 끌어 올려진 것처럼 파닥이는 눈을 했다.
“그 새끼 보면 내가 죽여 버린다고 그래. 곱게는 안 죽여.”
“…….”
알렉산더 랜스키가 손을 뻗어 세스의 목을 휘감았다. 품 안에 들어오는 동그란 뒤통수에 그가 충동적으로 입술을 묻었다.
“사라질 생각 하지 마. 늦었어.”
늦어도 너무 늦었다. 이 감각을 모르던 때로 돌아갈 방법은 이제 없을 것이다. 놓을 생각도, 싫증을 낼 생각도 없었다.
“절대 사라지지 마.”
“…….”
대답 같은 것은 필요 없었다. 싫다고 고집을 피우지 않는 이상 세스는 전부 다 받아들였으니까.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의 고개를 돌려 입술을 덮었다. 얌전히 입을 열어 주는 세스를 빨아 당기는 입술은 오늘따라 집요했다.
제발.
이제야 손이 움직였다. 테이블 아래 구겨져 있던 마이아 페레즈는 입술과 혀가 서로 섞이는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도록 귀를 막았다.
제발. 부디 아니기를.
제발. 그날의 기억이 잘못됐기를.
마이아 페레즈는 해고당한 게 아니었다. 제 발로 랜스키가를 떠났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없던 배런트의 저택에 누군가가 찾아온 그날, 여느 때처럼 출근한 마이아 페레즈는 알렉산더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 전날까지 스위스 여행에 대해 아무런 언질도 듣지 못했던 마이아 페레즈는 알렉산더를 찾아 저택 안을 뒤지고 있었다. 그가 못된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줄 알았다.
알렉산더가 숨기 좋아하는 곳은 정해져 있었기에 크게 걱정하지도 않았다. 3층의 다락방을 훑어보다 2층의 유리온실을 뒤졌고, 이어서 1층의 패닉 룸에 들어섰다. 문제는 패닉 룸이 서재와 곧장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텅 빈 패닉 룸을 둘러보고 내친 김에 서재까지 살피려던 마이아 페레즈의 귀에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벨체프와 얘기가 끝났습니다. 해결됐습니다.’
서재의 문은 기적처럼 소리 없이 열린 상태였다. 그 순간 마이아 페레즈는 엄청나게 묵직한 대신 여닫는 소리가 거의 나지 않는 이 거대한 저택의 터무니없는 고급 문들에 감사했다.
듣지 말아야 할 이야기를 들어 버린 것을, 그래서 아무런 흔적도 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마이아 페레즈는 필사적으로 입술을 물고 숨을 죽였다.
윌리엄 랜스키의 대답이 이어졌다.
‘시체는?’
‘하던 방식대로 처리한다고 했습니다. 루마니아인이니까요.’
‘그 말을 믿나?’
‘아니면 직접 처리하실 겁니까? 그쪽은 위험부담이 높습니다.’
‘사진이라도 가져와.’
‘그러실 줄 알고 받아 왔습니다.’
‘…….’
마이아 페레즈는 아주 좁은 문틈 사이로 눈을 크게 떴다. 이쪽의 손에서 저쪽의 손으로 오가는 사진은 잘 보이지 않았다. 대신 젊은 여자의 사진이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푸른빛이 도는 시체는 연한 금발 머리를 하고 있었다.
윌리엄 랜스키는 한번 쳐다본 사진을 아무렇게나 툭 내던졌다.
‘사진 없애고, 루마니아 마피아가 다시는 내 집에 전화하는 일이 없도록 해 둬. 앞으로 일주일간은 전국 어디에서라도 루마니아 매춘부가 살해당했다는 기사 같은 것은 내보내지 마.’
윌리엄 랜스키의 앞에 서 있던 누군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마이아 페레즈는 해가 저물도록 패닉 룸에서 나오지 못했다. 간신히 움직일 수 있게 되자 알렉산더의 빈 방으로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흐느껴 울었다. 알렉산더를 생각하면 충분히 미안했지만 이 집을 더는 견뎌 내지 못할 거라는 생각만이 들었다. 그렇게 이틀을 엉망으로 보낸 뒤 자신을 고용했던 변호사에게 그만두겠다는 문자 메시지를 덜렁 보내고는 알렉산더가 스위스에서 돌아오기 전에 달아나 버렸다. 윌리엄 랜스키가 일개 고용인에게 일일이 신경을 쓰지 않는 성격이라 다행이었다.
지금도 그때 목격한 시체 사진은 화상 자국처럼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시체, 매춘부, 루마니아, 금발 머리.
알렉스가 데려온 눈이 유독 예쁜 남자 친구도 그렇게 말했다.
엄마는 매춘부였어. 엄마는 금발이었어. 엄마는 루마니아에서 왔어.
제발.
귀를 틀어막는 손짓이 한층 절박해졌다.
제발. 저 아이가 알렉산더 랜스키가 맞닥뜨린 혹독한 운명 같은 게 아니라고 해 줘.
그건 그냥 농담이었으니까. 그저 우연이라고.
제발.
그러나 마이아의 기도는 듣는 사람이 없었다. 잠시 후 알렉산더 랜스키가 이렇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랑해, 세스 그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