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10/23)

09.

가끔 이 짙은 녹음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신선한 소금 내를 품고 있는 바닷바람도, 오염되지 않은 고요함도, 바다를 한눈에 끌어안고 있는 기가 막힌 전망도 가끔씩은 숨이 막혔다.

전부 다 가지고 싶어서.

루이 랜스키는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을 차지한 서재 정중앙에 놓인 묵직한 책상 앞에 앉아 잔잔히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유독 아름다운 바다였다. 그래서 더 성질이 비틀렸다. 어떻게 해야 이 모든 걸 가질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어서.

폭군과 왕자가 사라지면 되는 것일까.

“……개소리지. 노친네가 멀쩡히 살아 있는데.”

폭군과 왕자보다 먼저 죽어야 하는 것은 윌리엄 랜스키였다. 문제는 윌리엄 랜스키의 유언장이었다.

루이 랜스키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였다. 부친은 그에게 랜스키 왕국을 물려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부친은 전쟁광인 폭군을 베네수엘라의 캠프에 처박아 버렸고 이상성욕자인 사이코를 약물에 찌든 채 정신병자 딱지를 달고 살도록 내버려 두었다. 지금 일이 돌아가는 꼴을 봐서는 랜스키 왕국의 지분을 가장 많이 물려받는 것은 막내인 정복자 알렉산더가 될 듯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부친이 막내를 가장 많이 사랑하고 아낀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나이에 비해 영악한 막내가 지금껏 노친네 비위를 잘 맞춰 왔을 뿐이었다.

랜스키 왕국의 막내 왕자는 유감스럽게도 지금껏 딱히 문젯거리가 없었다. 그는 권력과 망상을 구분 못 하는 폭군도 아니었으며 이상성욕을 주체 못 하는 사이코도 아니었다. 유약하거나 멍청하지도 않았다. 어릴 때 오줌이라도 싸라며 겁을 줬더니 그 다음 날부터 호신술을 배우려 들던 녀석이었다. 지금은 프로를 고용하지 않으면 한번 손봐 주는 것도 불가능했다.

폭군이야 이제는 제 발로 베네수엘라에서 나올 생각이 없어 보인다지만 막내 왕자는 달랐다. 부친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제 노력만으로는 좁힐 수 없는 거리였다.

“시건방진 새끼. 아직 자지 털도 덜 굵어진 게 뭘 벌써부터 잘났다고 몸 사리는 법을 깨우친 거야. 애새끼면 애새끼답게 처놀기나 할 것이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루이 랜스키가 돌연 이맛살을 찌푸렸다.

“게이에 남창이라. 이것 참. 흠집으로 괜찮긴 한데 그 정도로는 너무 약해.”

잠시 후 책상 위에 놓아두었던 휴대전화가 울렸다. 루이 랜스키는 성급한 손길로 전화를 받았다.

“어떻게 됐어?”

전화기 안쪽에서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하시던 물건은 확보했습니다. 어떻게 전해 드릴까요?]

“직접 가져와.”

[망가진 전화기는 어떻게 할까요?]

“그런 건 알아서 처리해. 또 다른 건 어떻게 됐어?”

[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일단 지금껏 알아낸 것만이라도 보시겠습니까?]

“뭐 특별한 게 없다면 사람 귀찮게 하지 말고.”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습니다.]

“무슨 말이 그래?”

전화기 너머의 굵은 음성에 신중함이 깔리기 시작했다. 협상의 전초전이었다. 루이 랜스키는 부르는 게 값이라는 해결사의 일당을 생각하며 짜증스럽게 인상을 구겼다.

한때 해결사가 랜스키가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 고용됐던 경력이 없었다면 루이 랜스키가 개인적으로 선금 한 푼 지불하지 않고 부려먹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해결사에게 줄 만한 돈이 없었다. 최대한 시간을 끌며 막냇동생에게서 약간의 흠이라도 찾아낼 수밖에 없었다. 혹은 흠을 만들어 주거나.

어젯밤 실컷 귀여워해 줬던 에스코트 업체의 금발 머리 창부한테서 얻어 낸 사진 한 장 같은 것은 별것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 작은 것에도 매달려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가 살인죄를 비롯한 기타 수치스러운 죄목으로 재판대에 섰을 때 부친은 일말의 재고도 없이 그의 신탁 계좌를 없애 버리고 주식을 회수했다. 지금 루이 랜스키는 랜스키의 이름을 팔아 여기저기에서 빌린 돈으로 위태롭게 살아가는 중이었다. 그가 정신병자에 살인자인 것도 모자라 러시아 마피아 소속의 악덕 고리업자와 친구처럼 어울리는 사이라고 하면 부친은 이번에야말로 그를 베네수엘라로 보낼지도 모를 일이었다. 베네수엘라에는 부친이 키우는 식인 악어들이 언제나 굶주린 채 있었다.

탈출구가 절실했다. 지금으로서는 유능한 해결사만이 루이 랜스키에게 유일한 탈출구를 열어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알아보라고 지시하셨던 그 아이 말입니다. 입양 기록 중 묘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뭐? 그게 정말이야?”

루이 랜스키가 푹신한 가죽 의자에 파묻혀 있던 몸을 훌쩍 일으켰다.

“그게 뭔데?”

[출생 신고서가 불분명해서 입양 기관에서 임의로 손을 댄 흔적이 있더군요. 출생 당시 친부의 이름은 없고 친모의 이름만 기재가 되어 있었는데, 누군가 입양 전에 이 이름을 바꿔 놓았습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그래서 당시의 입양 담당자를 찾아서 얘기를 나눴습니다.]

정확히 얘기만 나눈 게 아니라는 사실은 루이 랜스키도 알고 있었다. 해결사는 손톱깎이 없이 다른 사람의 손톱을 아주 잘 깎았다. 손톱이 모자라면 발톱도 깎고 이도 깎았다.

[출생 신고서를 조작하게 만든 것이 벨체프라더군요.]

“벨체프? 그게 누군데?”

잠깐 대답이 늦었다. 어쩌면 해결사는 랜스키답지 않은 태평한 무지에 한숨을 쉬었을지도 몰랐다.

[……보그단 벨체프. 루마니아계 마피아입니다. 처음 미국에 정착할 당시에는 길거리 매춘과 에스코트 사업으로 소소하게 돈을 벌었는데 요새는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큰손이 됐습니다.]

“그게 뭐 어쨌다는 얘기야?”

[이미 이탈리아와 중국, 러시아인들로 포화 상태를 이루고 있는 마피아 비즈니스에 벨체프가 빠르게 자리를 잡게 된 이유는 랜스키가와 연줄이 닿았기 때문입니다.]

“……아?”

루이 랜스키는 이제야 뭔가 감을 잡은 모양이었다. 지루해하던 회색 눈에 흥이 생겨났다.

“랜스키가 그런 쥐 소굴에 발을 담갔다고? 그쪽은 잘해 봐야 구멍가게 수준이잖아. 그건 노친네 취향이 아냐. ……아, 그렇다면 폭군인가?”

[그렇게 보입니다. 아시다시피 그, 관계가 복잡하지 않았습니까.]

해결사는 둘러 얘기를 했지만 그건 맏형 시저 랜스키의 지저분한 스캔들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루이 랜스키가 알기로 시저 랜스키는 게이였다. 그가 랜스키가의 독자였던 시절이 꽤 길었던 탓에 부친은 그의 성적 소수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듣기로는 정신병원으로 끌고 가 강제로 불법 시술을 받게 했다고 했다. 시저 랜스키가 에스코트 업체의 남창들에게 헤프게 뿌리고 다녔던 애정 또한 빠짐없이 회수했다. 해결사는 그 일에 가장 많이 개입했던 인물이었다.

통화를 하는 루이 랜스키의 입이 찢어질 것처럼 늘어났다.

“계속해, 계속.”

[벨체프의 에스코트 서비스를 이용하다가 그쪽의 누군가와 연결이 된 모양입니다. 아마도 벨체프의 자식들 중 하나와.]

“흐음. 그래서?”

[제 추측으로는 캠프로 가는 무기 일부를 빼돌려 벨체프 쪽에 대 준 것 같습니다.]

폭군이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아랫도리가 헤픈 만큼 심장도 헤픈 인간이었으니.

“그걸 노친네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지. ……쯧쯧. 하다 걸렸겠군.”

[네, 그렇습니다. 회장님이 직접 나서서 일을 처리하신 것 같습니다. 무기 거래에 관련된 것은 그 이상 알아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랬겠지. 그런 꼴을 가만 두고 볼 양반이 아니니까. ……가만, 그러고 보니 폭군이 내내 캠프에 처박혀 있는 게 그 때문인가?”

[시기를 따져 보면 그렇습니다.]

“흠. 그래, 그 정도나 되는 사고를 저질렀으니 노친네가 저렇게 오래 삐쳐 있는 거겠지. 그런데 그게 내가 알아보라던 애새끼하고 무슨 상관이라는 거야?”

[…….]

해결사는 두 번째로 한숨을 흘렸다. 그는 자신의 가치를 잘 아는 고용인을 만나고 싶었다. 루이 랜스키는 이름만 랜스키였지 결코 윌리엄 랜스키와 같은 고용주는 되지 못했다. 랜스키라는 연줄을 계속 손에 쥐고 있으려고 받아들인 의외였지만, 지금에서는 과연 옳은 선택이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숫자가 계속 일치합니다.]

“숫자는 무슨 놈의 숫자?”

[벨체프에 랜스키 인더스트리의 무기 공급이 끊어진 해부터 회장님이 손을 쓰신 것처럼 관련 사항이 사라진 해, 그리고 사 년 뒤가 의뢰하신 상대가 입양된 해입니다. 아이의 나이는 당시 네 살이었고, 지금은 나이가……,]

“뭐라고?”

루이 랜스키가 해결사의 말을 잡아끊었다.

“뭐라는 거야. 그 애가 지금 폭군이 싸지른 애라는 거야, 뭐야? 그게 말이 돼? 폭군이 어떻게 애를 낳아. 폭군은 자지가 설 때부터 호모 새끼였다고. 노친네가 결혼을 세 번이나 시켰지만 애가 들어섰다는 말은 한 번도 없었어.”

[꼭 그렇다고 말씀드리는 건 아닙니다. 단지 신기할 정도로 숫자가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려 드리는 겁니다. 더 파면 뭔가 더 나올지도 모릅니다.]

“씹, 그런 게,”

[벨체프의 주요 사업은 인신매매였습니다. 아이 하나 팔아치우는 일이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데 공들여 출생 신고서를 조작해서 신분 세탁을 마친 다음 정식으로 입양을 보낸 겁니다. 아이를 팔거나 죽이고 싶지 않았던 이유가 있을 겁니다.]

“…….”

루이 랜스키가 입을 다물고 눈썹을 홱 치켜떴다.

아무 상관도 없는 아이에게 동유럽 마피아가 그만한 공을 들이지는 않았을 거라는 해결사의 말에는 구미를 당기는 무언가가 있었다. 거기에 더해 숫자가 맞아떨어졌다. 이 정도면 우연이라 할 수 없었다. 랜스키만큼 우연과 연관이 없는 집구석도 없을 것이다.

“어서 자세한 걸 알아 와. 그게 정말인지. 증거를…… 아니, 일단은 확인부터. 그래, 확인부터. 무슨 일인지 정확히 알아내.”

[예, 알겠습니다.]

해결사는 한시름 덜었다는 듯 여유롭게 뒷말을 덧붙였다.

[그럼 이제 선금을 받을 계좌를 알려 드려도 되겠습니까?]

루이 랜스키는 위험한 고리대금업자에게 빌린 돈 전부를 해결사에게 입금했다. MJ호텔의 스위트룸 숙박비를 포함해 처리해야 할 청구서가 산더미 같았지만 별수 없는 노릇이었다.

입금을 확인한 해결사는 빠른 속도로 루이 랜스키가 요구한 정보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 * *

세스는 점차 홀쭉해져 가는 반달이 떠오른 밤하늘로부터 등을 돌렸다. 자정이 지나 버린 밤은 고요했다. 세스는 옷을 벗고 침대에 누워 시트를 턱 끝까지 끌어 올렸다.

1층 어딘가에서는 그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양부가 발걸음을 서성이고 있을 것이다. 며칠이 지나도 양부는 세스에게 일로인에 계속 있어도 되는지 얘기해 주지 않았다. 이제는 슬슬 걱정이 되고 있었다.

어쩌지. 이것도 도망치는 거라고 생각하면.

마이아 페레즈의 집에서 사랑한다는 말을 해 준 뒤부터 알렉산더 랜스키는 더 집착적으로 굴었다. 등교 시간에 맞춰 집 앞으로 왔으며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아예 교실 문을 지키고 있었다. 세스는 수업을 빠지는 것도, 점심을 거르는 일도 하지 못했다. 그랬다간 알렉산더 랜스키의 끝나지 않는 질문 공세를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그는 세스의 상담 시간과 항우울제 복용 시간까지 재고 다녔다.

그건 좋기도 했지만 슬프기도 했다.

반년 뒤면 전부 물거품처럼 사라질 일이었으니까.

아니, 어쩌면 반년까지 가지 않을지도 몰랐다. 알렉산더 랜스키의 변덕이 얼마나 오래 갈지는 누구도 몰랐다. 그가 정말로 몹시 친절해졌다는 것과 더는 훔쳐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세스의 마음은 사실 거울 속을 들여다보던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부디 반년이 이대로 흐르지 않길.

부디 반년이 빨리 흘러가길.

그 두 가지 마음이 날마다 똑같은 속도로 자라나 터무니없이 나약하고 불안정한 세스의 머릿속을 휘저어 댔다.

“이런 건…… 한 번도 바란 적 없는데.”

세스가 문득 이불 속에서 가슴께를 움켜쥐고 중얼거렸다.

“이런 건 한 번도……,”

혼잣말을 하던 세스가 별안간 신음처럼 낮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세스는 저를 뿌리부터 뒤흔드는 이 강렬한 감정의 실체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행복인지 불행인지, 깨지 않아도 좋을 달콤한 꿈인지 아니면 어서 깨어야 할 악몽인지.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시간을 죽어 간다는 소리였다. 이제껏 우울과 상실이 중첩되는 삶을 세스는 그렇게 정의해 왔다. 날마다 조금씩 죽어 간다는 사실은 세스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반년 뒤 알렉산더 랜스키가 그의 삶에서 사라지고 나면 세스는 자신이 아주 깊은 바닥에 완전히 가라앉아 두 번 다시 떠오를 일이 없을 거라고 믿어 왔다. 그것은 지금 세스를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이유였다.

그런데 알렉산더 랜스키는 날마다 무언가를 잡아 깨워 흔들었다. 그와 있는 순간은 쉬지 않고 심장에 멀미가 일어났다. 세스는 자꾸만 다른 곳으로 튀어 올랐고 그래서 가끔 원래 있던 바닥을 잊어버리기까지 했다. 세스는 자신이 인생에서 유일하게 바라던 그 깊은 바닥으로 더는 돌아가지 못할까 봐 무서웠다. 하지만 알렉산더 랜스키를 제 손으로 놓아 버리는 것도 무서웠다. 그가 놓아줄 때까지 이 멀미를 꾹 참고 견딜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전학이라는 변수가 생겨났다. 반년이 내일이라도 끝날 수 있었다. 세스는 똑같다고 생각한 마음이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사실은 끝나기를 바라지 않았다. 적어도 알렉산더 랜스키가 먼저 저를 버리기 전에는 끝나지 않았으면 했다.

전화기가 깜박대기 시작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여보세요.”

세스는 혹시라도 시끄러운 소리가 전해질까 봐 목소리를 한껏 눌러 전화를 받았다.

[왜 안 자.]

알렉산더 랜스키였다. 어쩌다 보니 세스가 쭉 가지고 있게 된 전화기는 이제껏 그밖에 전화한 사람이 없었다.

“자려고 누워 있었어.”

[그럼 내가 깨운 거야?]

“……응.”

잠시 알렉산더 랜스키의 말이 끊겼다. 세스는 그가 미안해하는 중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이윽고 랜스키가 혀를 차는 소리를 섞어 이렇게 말했다.

[네가 오늘 한 번도 전화를 안 했으니까 이 시간에 내가 전화한 거 아냐.]

“전화……. 여러 번 했잖아.”

[다 내가 걸었어. 대체 너는 왜 전화를 안 하는 거야?]

“그야 네가 늘 먼저…….”

[됐어. 왜 벌써 자? 어제보다 이른 거 아냐?]

어제도 알렉산더 랜스키한테 걸려 온 전화를 받고 한참 늦게까지 통화를 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가 좋아하는 음식이라든지 자주 듣는 음악 같은 시시콜콜한 일들을 끈질기게 물었다. 별로 대답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안타까웠다. 그래도 알렉산더 랜스키는 좋아하는 음악 하나 없는 세스를 한심해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세스가 혼자 있으면 그냥 잠이 들거나 멍하게 있는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자해를 할 때도 있었지만 세스는 그런 얘기는 조심스레 감추었다.

세스도 알렉산더 랜스키에 관한 시시콜콜한 일들을 알게 되었다. 그가 격투기를 배우게 된 일부터 루이 랜스키가 얼마나 정신 나간 사이코인지, 나이 차이가 많은 폭군은 태어나서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열 손가락에 꼽는다는 얘기들을 들었다.

[내일도 양부가 집에 있어?]

“응……. 아마 그럴 것 같아.”

[쳇.]

알렉산더 랜스키는 요새 불만이 많았다. 세스는 양부가 출장에서 돌아온 뒤로 꼬박꼬박 귀가 시간을 지켰다. 양부와 세스의 관계를 아는 알렉산더 랜스키는 기막혀 했지만, 당분간이라는 세스의 말을 멋대로 무시해 버리지는 않았다.

[그럼 내일도 얼굴만 보고 헤어져야 한다는 소리네.]

세스는 이제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았다. 세스의 귀밑이 드물게 옅은 홍조를 띠었다.

“……그럼 내가 점심시간에 해 줄까?”

[뭘?]

“입으로.”

[…….]

수화기 너머에서 세스가 이해 못 할 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세스가 잠시 망설이다 물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거야?”

[……젠장. 나라고 다 아는 건 아냐.]

알렉산더 랜스키가 제 우울증이나 자존감 문제를 매사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걸 세스는 몰랐다. 부모와 함께 사는 다른 아이들처럼 알렉산더 랜스키가 얌전히 등하교 시간을 지키는 이유는 오로지 세스 때문이었다. 그는 얼굴도 한 번 본 적 없는 마이클 그린을 혐오했다. 지금도 마이클 그린과 세스가 함께 있는 게 탐탁지 않았지만 당분간 양부가 신경 쓸 일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세스의 바람을 억지로 듣고 있는 중이었다.

하여간 그래서 섹스에 관한 뒤틀린 인식을 바로잡는 데도 신경을 쓰고 있었다. 세스는 매사에 너무 희생적이라 늘 제 비위를 맞추려는 인간들에게 익숙해져 있는 알렉산더 랜스키조차 뭔가가 단단히 잘못되어 있다는 걸 알아차릴 정도였다.

[참겠어. 일단은.]

세스가 서운한 듯 눈을 내리깔았다.

“……싫어?”

[싫을 것 같아?]

“그게…… 한 지 좀 되긴 했으니까……. 네가 다른 사람하고 하겠다고 할지도 모르고 또……,”

[닥쳐.]

“…….”

세스는 영문도 모르고 입을 다물었다.

[한 번만 더 그런 소리 했다간 내 침실에 가둬 놓을 줄 알아. 농담 아냐.]

수화기 너머에서 알렉산더 랜스키는 몇 번씩 주먹을 쥐었다 폈다.

[네 머리가 이상하다는 건 알아. 그래서 웬만해선 험한 짓은 안 하려는 중인데…… 그래도 할 거야. 가둬 놓고 네가 더는 못 하겠다고 엉엉 울 때까지 할 거야. 알아들었어?]

“……그럼 하고 싶은 거 아냐?”

[제기랄. 하고 싶으니까 이러지. 지금도 아래가 터질 것 같은데 네가 한번 빨아 준다고 되겠냐고.]

“그럼…….”

[참을 거야. 네가 언제까지 모범생 놀이를 하려는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그것도 끝나긴 할 거잖아.]

“……응.”

세스가 날짜를 헤아렸다.

양부는 곧 아시아로 가야 한다고 했으니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길지 않을 것이다.

알렉산더 랜스키의 말대로 끝이 나긴 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그땐 당장 말해. 수업 같은 거 젖히고 내 방에 데려갈 거니까.]

“나한테는 수업 빠지지 말라고 했잖아.”

[아, 진짜. 넌 여기서 그런 말을 하고 싶어? 네 목소리 들으면서 한 발 빼려고 그랬는데 그 말 하는 순간 시들었어.]

짜증이 울컥울컥 튀어 오르는 목소리는 그가 별로 기분이 좋지 않다는 얘기였지만, 어쩐지 세스는 웃음이 나왔다. 딴에는 소리를 죽인다고 했는데 알렉산더 랜스키는 기가 막히게 그 작은 진동을 알아들었다.

[지금 웃어?]

“어, 그게……. ……미안해. 네가…….”

[내가 뭐?]

“……이젠 화내도 별로 안 무서워서.”

[…….]

“미안해.”

알렉산더 랜스키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이상한 순간에 웃어 버린 세스처럼 그의 한숨도 끝은 기묘한 웃음으로 변질되었다.

[……그래, 계속 그렇게 귀엽게 굴어. 전화로만 얘기하니까 내가 지금 어떤지 모르겠지. 지금 가서 끌고 나오고 싶네, 진짜.]

“아, 지금?”

세스가 전화기를 쥔 채 문으로 다가갔다. 저도 모르게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아래층에서 나는 기척을 살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이 과정들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됐어. 그냥 한 말이야. 당분간 너 하고 싶은 대로 놔두겠다고 했잖아.]

“아…….”

세스가 침대로 돌아와 방금 전과 똑같은 자세로 앉았다. 그러나 한번 멀미가 난 심장은 이전처럼 고요하지 않았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정말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터무니없이 보고 싶어졌다.

세스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있잖아.”

[뭐?]

지금 확실히 안 것 같아.

나는 가능한 한 네 곁에 오래 있고 싶어.

“내일 일찍 일어나서 기다리고 있을게.”

[뭐야, 그건. 내일 일찍 데리러 오라는 소리야?]

“아니, 그런 건 꼭 아니,”

[얼마나 일찍 나올 수 있는데. 몇 시간이나.]

“음…… 그럼 한 시간 정도?”

알렉산더 랜스키가 혀를 찼다.

[고작 한 시간 가지고 생색내지 마. 한 시간 반으로 해.]

제 귀가 잘못됐는지 자신이 그를 보고 싶어 하는 것보다 그가 자신을 더 많이 보고 싶어 한다는 소리로 들렸다.

“그럼 두 시간.”

[…….]

수화기 너머의 무음은 알렉산더 랜스키가 웃고 있다는 의미였다.

[알았어. 그럼 두 시간.]

“으응.”

[그럼 지금 자. 내일 늦게 일어나지 말고. 잊지 마. 두 시간 일찍 보는 거야.]

“응.”

[빨리 자. 끊는다. 바로 자야 해.]

“응…….”

전화가 바로 끊겼다.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다. 그건 더 많이 보고 싶다는 말이었다.

“알람 맞춰야겠다.”

길어진 통화 탓에 뜨끈해진 전화기의 온도를 마치 알렉산더 랜스키의 체온처럼 손에 쥐고 있던 세스가 느릿하게 할 일을 떠올렸다.

늦으면 안 되니까.

세스가 아직 익숙하지 않은 전화기 화면에서 알람 표시를 찾아 누르던 순간이었다. 전화기가 부르르 진동을 하더니 화면이 바뀌었다. 전화가 걸려 오는 중이었다.

세스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뭔가 더 할 말이 있어 전화를 했나 싶었다.

“다음에는 내가 먼저 하려고 했는데…….”

[그게 정말이야?]

알렉산더 랜스키와는 다른 목소리가 전화기 안쪽에서 킥킥댔다.

[네가 나한테 전화할 일이 뭐가 있다고?]

“…….”

불쾌할 때 알렉산더 랜스키가 그러는 것처럼 세스의 눈썹이 구겨졌다. 그밖에 모르는 새 전화번호로 전화를 건 것은 알렉산더 랜스키가 아니라 제이 에드거였다.

* * *

세스가 숨을 들이쉬었다.

제이 에드거는 이 번호를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설마 알렉산더 랜스키가 알려 준 걸까. 그렇다면 왜.

[자는 거 아니지?]

“이 번호, 어떻게 알았어?”

[에이, 그딴 게 뭐 대수라고. 지금 좀 나와. 만나자.]

세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싫어.”

[저런. 이유는 들어 봐야 하는 거 아냐? 우리 친구가 된 거 아니었어?]

세스에게 친구는 존 리든 하나밖에 없었다. 알렉산더 랜스키 덕분에 지금은 그마저도 확실하지 않았다.

“아니야.”

[냉정하긴. 언제나 자기희생적이고 봉사 정신이 투철하던 일로인의 공식 남창이 어떻게 된 거야? 왜 이렇게 도도해졌어? 왕자하고 어울리다 보니 거만함이라도 옮았나?]

“할 말 없으면 끊을게.”

세스는 정말로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그러나 제이 에드거가 빠르게 내뱉는 말이 전화기에서 흘러나와 공기 중에 흩어졌다.

[아, 잠깐! 듣기는 해야 될 거 아냐.]

제이 에드거가 잔뜩 부은 목소리로 툴툴거렸다.

[내일이 무슨 날인지 알아?]

“몰라.”

[윌리엄 랜스키가 배런트 카운티에 돌아오는 날.]

윌리엄 랜스키.

알렉산더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과 조합되는 랜스키라는 성은 세스에게 일종의 병원균이었다. 끊어질 듯 위태로운 면역체계를 손쉽게 가르고 들어와 연약한 자아를 끝도 없이 분열하게 만들었다. 갑자기 몸이 떨려왔다.

“……그게 왜?”

[그래서 내가 부랴부랴 랜스키와 네가 키스하는 사진이 담긴 휴대전화 메모리칩을 원상 복구했다 이거지. 내일 커다랗게 뽑아서 랜스키 회장 앞으로 전달할 생각인데, 네 의견은 어떤가 궁금해서.]

“…….”

[뭐야. 대답 안 해, 남창?]

제이 에드거는 아마도 세스 그린이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네가 그랬잖아. 랜스키는 게이라는 소문이 나면 안 된다고. 그게 왜 그러겠어. 고작해야 졸업 앨범에 호모 왕자라고 인쇄되는 정도로 그렇게 달달 떨진 않았을 거 아냐. 그래서 생각해 봤지. 왜 일로인의 왕자가 게이면 안 되는 걸까. 그건 아무래도 무자비한 국왕 폐하께서 진노하실까 걱정하는 게 아니겠어? 아냐?]

“…….”

세스는 여전히 모친의 죽음을 기억했다.

모친이 저에게 했던 말 중에는 그 오렌지 향 시리얼처럼 도무지 잊지 못하는 것도 있었다.

-네 아빠가 누구냐고?

세스도 평범한 아이들처럼 한 번도 보지 않은 친부가 궁금했다.

-덜떨어진 게이 새끼.

네 살의 세스는 게이가 뭔지 몰랐지만 그 단어를 잊진 못했다. 그 말을 내뱉을 때의 경멸감이나 자조, 절망과 희미한 공포 같은 것들을.

-기껏 애를 뱄는데 게이라서 써먹을 수도 없지 뭐야.

써먹을 수 없다는 게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다만 그게 지금 부친이 그와 모친의 곁에 없는 이유일 것 같았다.

-미친 집구석 같으니. 핏줄이면 그냥 다 핏줄이지. 게이라고 자식 취급을 안 한다니. 그런 게 어디 있어.

그 말도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기억했다. 모친이 약에 취해 랜스키라는 이름을 입에 담을 때면 늘 무서워 떨었다는 것을. 한번은 세스가 랜스키가 누구냐고 묻자 모친은 사정없이 손톱을 세워 목이며 팔뚝을 할퀴어 댔다.

-절대 그딴 소리 지껄이지 마. 그럼 너나 나나 둘 다 죽어.

대답 소리를 내기 위해 세스는 손톱을 세워 허벅지를 긁어야 했다. 새빨간 자국이 돋아난 허벅지에는 금세 방울방울 피가 고였다.

네 살 나이가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기억했던 막연한 공포는 우연히 마이클 그린이 랜스키 인더스트리에 취직해 배런트 카운티로 이사 오고 난 뒤에야 구체화되었다.

미친 랜스키와 게이 자식과 쓸모가 없는 핏줄, 모친의 죽음 같은 것들이. 그것들은 전부 무서운 현실이었다.

[야, 남창. 듣고 있냐? 왜 이렇게 말이 없어?]

“하, 하지 마…….”

[씹, 듣고 있었으면서 왜 대답을 안 해? 네 의견은 어떠냐니까.]

“하, 하면…… 하면 안 돼……. 그럼……,”

[안 돼? 그럼 이 사진은 어쩌라고. 기껏 돈 들여 가며 뽑아 놨는데.]

“돈…… 내가 줄게. 사진은 나한테 줘.”

제이 에드거가 저 멀리에서 이를 갈며 동시에 웃었다.

[돈은 됐고. 사진 돌려받고 싶으면 지금 좀 나와 줘야겠는데.]

“…….”

세스가 눈을 감았다. 허벅지에서 흘러내린 피가 시트 위에 붉은 점을 찍었다.

[당장 와. 애딩턴 메모리얼 파크 정문이야.]

제이 에드거는 확신에 찬 상태로 세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 * *

애딩턴 메모리얼 파크는 그리 멀지 않았다. 머레이 힐의 주택가가 끝나는 한적한 곳에 위치해 있는 자그마한 공원은 걸어서 30분이 조금 넘는 거리였다. 세스는 양부가 차고에 처박아 둔 산악용 바이크를 타고 12분 만에 도착했다.

“왔어?”

어두운 공원 한구석에서 제이 에드거가 손을 흔들었다. 세스는 바이크에서 내려 제이 에드거가 몸을 감추고 있었던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진은?”

“급하긴.”

정문에 설치된 조명이 애매하게 비껴가는 위치에서 제이 에드거의 얼굴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어둠 속에서도 멍 자국은 선명했다. 양 끝이 찢어진 입술도, 한쪽이 부어오른 눈도 평소의 제이 에드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얼굴이 왜 그래?”

세스가 묻자 제이 에드거가 침을 탁 뱉었다.

“씨발, 너는 알 거 없고.”

옷으로 감춘 몸 안쪽에는 더 심한 상처가 남아 있었다. 제이 에드거는 거절할 수 없는 손님이 드러낸 가학성을 끝내 거부하지 못했다. 나중에는 돈도 필요 없다고 울면서 사정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지만, 손님은 살고 싶으면 얌전히 있으라는 무서운 소리를 뱉어 낼 뿐이었다.

“내가 왜 널 여기로 나오라고 한 줄 알아?”

제이 에드거가 따끔대는 입술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아니.”

“궁금하면 가르쳐 줘?”

세스는 침착하게 제이 에드거를 응시했다.

“사진은?”

“좀 기다리라니까. 씨발, 지금 내가 기분 좆같은 거 안 보여?”

그 뒤로도 중얼중얼 욕설을 뱉어 낸 제이 에드거는 불쑥 손바닥을 내밀었다.

“너 전화 갖고 왔지? 이리 내놔.”

세스는 후드 점퍼의 주머니에서 새 전화기를 꺼내 제이 에드거의 손에 올렸다. 제이 에드거는 재빨리 배터리를 뽑아 그것을 제 주머니에 넣은 뒤 빈 전화기를 돌려주었다.

“난 분명히 돌려줬어. 나중에라도 랜스키한테 허튼소리 마.”

“사진은?”

제이 에드거는 같은 말을 반복하는 세스를 질렸다는 듯 바라보았다.

“씨발, 공짜로 받아 가려고? 어림없지. 내 몸이 왜 이 꼴이 됐는데. 좀 기다려. 사진은 지금 갖고 오라고 할 테니까.”

제이 에드거는 뒷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어 자신의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가 통화 버튼을 누른 뒤 신호가 두 번도 채 가기 전에 전화기 너머에서 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창은 나타났어?]

밀레나 헤이워드의 음성이라는 것을 세스도 알 수 있었다.

“응.”

[알았어. 지금 갈게.]

둘 중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제이 에드거는 입술을 실룩이며 세스를 쳐다보았다.

“아, 그 말 안 해 줬지. 내가 왜 여기로 나오라고 했냐면 이 공원에 지금 CCTV가 없기 때문이야. 때마침 오늘 낮에 CCTV가 고장 나서 관리 업체가 수거해 갔다더라고. 기막힌 우연이지?”

우연이 아니라는 말일 것이다. 아무런 증거도 흔적도 남지 않아 다행인 일이 지금부터 벌어지리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너, 샤워는 했냐?”

“…….”

반쪽 달이 까만 구름에 가리었다가 스스륵 풀려 흩어지고 있었다. 세스가 서 있는 어둠 위로 달빛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세스는 자신이 치러야 할 사진 값이 얼마나 되는지 미리 가늠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누가…… 오는 거야?”

하지만 종류는 알아야 했다. 제이 에드거는 루이 랜스키에게 엉망으로 당한 이후로 처음 미소를 지었다.

“궁금하지?”

“응.”

“안 가르쳐 줘.”

점멸해 가는 마지막 달빛 조각이 세스의 등줄기를 긁어내렸다. 달빛이 남긴 상처는 새하얀 소름이 되었다.

“하지만 기대해. 재미있을 테니까.”

“…….”

그 순간 정말로, 달이 지상에서 사라졌다.

* * *

“아, 좀. 그 각도에서는 얼굴이 잘 안 나온단 말이야. 옆으로 틀어 봐.”

“이렇게?”

장난스러운 말투가 오가더니 이어서 펑, 불빛이 터졌다.

세스가 죽은 것처럼 감고 있던 눈을 찡그렸다. 카메라였다.

“아냐, 별로 같아. 사람이 아니라 시체 같잖아.”

팔과 다리가 붙들린 채 상의가 벗겨진 세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람은 밀레나 헤이워드였다.

헤이워드는 혼자 오지 않았다. 제 패거리 중 질 나쁜 인간을 골라 데려왔다. 그중 한 명은 세스에게 남창이라는 별명을 지어 준 당사자였다.

다섯 명이 세스를 붙들고 옷을 벗겼다. 저항이 무의미했다. 축축한 잔디 물이 살갗에 온통 배일 정도로 버둥거렸지만 기어코 옷은 찢겨 나갔다.

“좀 더 진짜 하는 것처럼 해 봐. 이런 사진에 알렉스가 넘어가겠어?”

밀레나 헤이워드가 콧등을 찡그린 채 고개를 저었다. 손에 들린 건 휴대전화가 아니라 제법 묵직해 보이는 진짜 카메라였다. 헤이워드는 무게만큼 묵직한 고화질의 카메라로 아주 생생한 사진을 찍고 싶어 했다. 눈앞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그래야 믿지 않을 구석이 사라질 테니까.

“그래? 그럼 그냥 하지 뭐.”

이름이 브랜튼이었을 것이다. 세스는 저보다 두 살이나 많은 덩치 큰 그가 엉덩이를 벌리던 기억을 떠올리며 이를 꽉 물었다.

그와 섹스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그랬다. 그는 집요했고 저는 무기력했다. 첫 섹스는 죽은 듯 엎드려 참아 냈던 게 전부였다. 세스는 그대로 기절했고, 수업이 모두 끝난 다음에서야 어둑해진 화장실 한구석에서 눈을 떴다. 몸을 괴롭힌다는 점에서 섹스는 자해와 비슷했다. 다만 섹스는 흔적이 남지도 않고 그래서 상담 교사를 질겁하게 만들지도 않았다. 그걸 알아 버린 게 잘못이었다. 그다음에도 몇 번 더 섹스를 했다. 브랜튼이 무슨 말을 흘리고 다녔는지 섹스를 하자고 접근해 오는 인간들은 언제나 있었다. 내킬 때는 응하고, 그러지 않을 때는 거절한 게 전부였는데 언제부턴가 제 별명은 남창이 되었다.

“아, 뭐야. 너 게이였어?”

밀레나 헤이워드가 무슨 이유에선지 입술을 삐죽였다.

“그게 중요해? 사진이 별로라며. 야, 얘 좀 뒤집어 봐.”

신이 난 브랜튼과는 달리 다른 아이들은 머뭇대는 구석이 있었다.

“진짜로 하는 건 좀 그렇지 않아? 랜스키가 따지기라도 하면……,”

“그러니까 사진을 잘 찍어야지. 네가 랜스키면 너 말고 다른 인간들하고 단체로 떡이나 치고 다니는 걸레를 싸고돌겠냐?”

“아, 뭐. 그렇긴 하지.”

밀레나 헤이워드가 이마를 잔뜩 찡그렸다.

“그래도 게이 섹스 같은 건 안 보고 싶단 말이야.”

브랜튼이 헤이워드를 향해 싱긋 웃으며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네가 졸라서 나왔더니 무슨 소리야? 그럼 카메라 놓고 꺼지든가.”

헤이워드가 발끈했다.

“그딴 식으로 예의 없게 말하지 마. 누가 안 찍는데? 빨리 해 버려, 그럼.”

브랜튼이 킬킬 웃는 얼굴로 강제로 뒤집어 놓은 세스에게 다가가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야, 남창. 눈 떠. 그래야 사진이 예쁘게 나오지.”

세스는 눈가를 잔뜩 찌푸린 채 소용 없이 어깨를 버둥거렸다.

“하지 마……. 너하고는 안 해.”

“하, 씨. 뭐야. 랜스키 좆 맛을 보더니 이제 몸값 좀 높이겠다는 거야? 웃기고 있네. 다 닳아빠진 구멍이 이제 와서 비싸지겠냐?”

“놔. 강간으로 신고할 거야.”

“뭐? 강간? 남창 같은 걸 두고 누가 강간을 해. 개소리하네.”

찌익.

말하면서 브랜튼은 퍼스너를 내리고 성기를 꺼내 들었다. 손으로 주물럭거려 반쯤 일으켜 세운 성기를 다짜고짜 세스의 뺨에 대고 문질렀다.

“하지 마. 신고할 거야.”

“헛소리 됐고, 입 벌려. 일단 좀 빨아 봐. 밖이라 그런지 제대로 안 서니까.”

“싫어…….”

“싫긴 뭐가 싫어. 맛있게 잘만 빨았잖아.”

브랜튼이 세스의 턱을 한 손으로 움켜잡았다. 강제로 벌어진 입술 틈으로 브랜튼이 제 성기를 쑤셔 넣었다. 세스는 밀려오는 구역질을 내뱉는 대신 브랜튼의 성기를 깨물었다. 단단히 붙잡힌 턱이 움직이지 않아 시늉에 그친 게 유감이었다. 살갗이 이에 긁히는 감촉에 브랜튼이 화들짝 놀라 성기를 뽑아내고 세스의 뺨을 후려갈겼다.

퍽!

“이게 어디서!”

“……하지 마. 물 거야.”

세스가 목구멍에 고인 침을 퉤 뱉어 내고 브랜튼을 노려보았다. 그게 성질머리를 건드렸는지 브랜튼이 다시 손을 치켜들었다.

퍽! 퍼억!

“뭐라는 거야, 남창 주제에.”

세스의 뺨에 손자국이 남을 것 같자 밀레나 헤이워드가 뾰족하게 소리쳤다.

“얼굴은 때리지 마! 강간 같잖아.”

브랜튼이 짜증을 냈다.

“그런 건 알아서 찍으면 되잖아! 남창이 얻어맞는 취향이라고 하든지.”

“그래도 얼굴은 건드리지 마.”

“좆같네. 랜스키가 그렇게 무섭냐? 그렇게 무서운데 이딴 짓은 왜 꾸며 댔어?”

“그야……,”

밀레나 헤이워드가 잠깐 눈동자를 흔들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큰일을 벌일 생각은 없었다. 알렉산더 랜스키와 세스가 키스하는 사진을 윌리엄 랜스키한테 보낸다는 게 원래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잔뜩 맞고 온 제이 에드거가 일을 이렇게 키웠다. 기왕 헤어지게 만들 거면 이쪽이 더 확실하다는 얘기가 솔깃하긴 했지만, 어차피 헤이워드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남창과 키스하는 사진은 에드거의 손에 있었다. 제 계획을 따르지 않는다면 사진도 주지 않을 거라고 했다. 동조하는 수밖에 없었다. 변명을 하나 더하자면 귀가 원체 얇기도 했다.

밀레나 헤이워드의 시선이 일행과 좀 떨어진 곳에서 휴대전화 화면을 두드려 대는 제이 에드거를 향했다. 일을 꾸민 에드거는 정작 별 관심 없다는 듯 고개도 한 번 들어 보지 않았다. 헤이워드가 발끈한 것처럼 발을 쿵 구르더니 말을 이었다.

“……헤어지게 만들려고 그런 거지 알렉스한테 약점 잡히긴 싫단 말이야.”

브랜튼이 세스의 머리채를 움켜잡아 목을 홱 꺾으며 대꾸했다.

“포기해라. 이런 짓을 했는데 설마 랜스키가 널 다시 받아 주겠어?”

“뭐라는 거야! 내가 언제 다시 만나고 싶대? 게이는 나도 사양이야.”

“그럼 뭘 자꾸 방해야. 사진이나 찍어.”

세스가 쿨럭 기침을 내뱉으며 떨리는 팔다리를 휘저었다. 다섯이나 되는 인원은 사지를 하나씩 붙든 채 별로 힘겨워하지도 않았다.

“야, 제대로 하자. 옷부터 다 벗겨.”

브랜튼이 말하자 운동화가 양발에서 떨어져 나갔다. 달이 사라진 밤의 한기가 발가락 끝부터 파고들었다. 하얀 피부가 달을 대신해 창백해졌다.

“하지…… 마……. 이제 다른…… 안 해…….”

찌익, 진즈가 살갗을 긁으며 벗겨졌다. 바지가 벗겨지느라 잠깐 놓였던 발목을 세스가 죽을힘을 다해 쳐올렸다.

툭!

붙들려 있던 하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세스가 맨발로 바닥을 차며 기어가려고 애를 썼다.

“아, 씨발, 좀! 제대로 잡고 있어!”

브랜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퍽!

누군가가 달아나는 세스의 옆구리를 발로 걷어찼다. 마른 몸이 부러질 것처럼 접혔다. 마치 그게 신호인 것처럼 브랜튼 패거리가 발길질을 시작했다.

제이 에드거의 또렷한 목소리가 그 순간 끼어들었다.

“쯧, 작작해. 시체라도 만들 생각이야?”

퍽!

세스의 배를 걷어찬 브랜튼이 대꾸했다.

“아직 팔팔하니까 그런다. 힘을 좀 빼 놔야 얌전해질 거 아냐.”

“멍청하긴. 남창더러 가만히 있으라고 하면 되잖아.”

“뭐?”

브랜튼이 왈칵 인상을 쓰며 제이 에드거를 돌아보았다. 제이 에드거가 빈정대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했다.

“남창은 사진을 받으러 왔잖아. 협조해야 사진을 준다고 하면 될 거 아냐.”

“씨……. ……퉤! 진작 알려 주든가.”

브랜튼이 엎드려 버둥대던 세스의 머리통을 잡아 흙바닥에 눌렀다.

“들었냐, 남창?”

“…….”

“들었으면 이제 빨아 봐. 예전처럼.”

“…….”

세스가 눈을 깜박였다. 눈알이 뜨거워지다 곧 서늘해졌다.

“씨발, 울지 말고. 네가 협조해야 빨리 끝나. 다섯 명 다 언제 상대할래? 새벽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

세스가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미친 랜스키와 쓸모없는 게이 자식, 약에 취해 쓰러진 모친의 팔에서 주삿바늘을 뽑아 들던 어떤 남자의 뒷모습이 세스를 움직이게 했다.

아니,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 * *

제이 에드거가 불쑥 물었다.

“얼마나 찍었어?”

“……뭐? 사진?”

“응.”

“대충 서른 장쯤. 왜?”

“그만하면 됐겠네.”

제이 에드거는 주머니를 뒤져 세스의 전화 배터리를 꺼냈다. 그리고는 한쪽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세스의 옷을 뒤져 전화기도 찾아냈다. 밀레나 헤이워드가 카메라를 내리고 물었다.

“뭐 해?”

“신경 쓰지 말고 할 일이나 해. 사진 예쁘게 찍어야지.”

제이 에드거는 입술을 쉬지 않으며 배터리를 꽂아 넣고 전화기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전원이 들어올 때 나는 소리를 감추려는 듯, 제이 에드거가 딱 맞는 순간에 밀레나 헤이워드에게 말했다.

“아, 지금! 저거 찍어!”

“응?”

펑!

반사적으로 터지는 플래쉬 소리에 전화기가 켜지는 소리가 사라져 버렸다. 제이 에드거는 통화 버튼을 꾹 누른 전화기를 등 뒤로 감춘 채 세스의 곁으로 다가갔다.

“에이, 구경만 하려니 좀 심심하다. 남창한테 소리 좀 내게 시켜 봐. 아까부터 이건 뭐 마네킹하고 장난치는 것 같잖아.”

“……씨발, 그야 이 새끼가 너무 얌전하니까 그렇지. 대체 왜 앓는 소리 한번 안 내는 거야? 뭐가 좋다고 이렇게 가만히 당하고만 있어?”

누군가가 대답을 대신했다.

“그 사진 달라고 이러는 거잖아. 하여간 이 새끼도 징글징글한 등신이지 뭐야. 사진 한 장 찾으러 왔다가 되레 더 끔찍한 사진에 등장하게 될 줄은 몰랐겠지. 그것도 이번에는 랜스키 없이 단독 주연으로.”

“아, 그러니까 남창이 달라는 사진에는 랜스키도 찍혀 있는 거야?”

“응. 근데 그건……,”

제이 에드거가 대화의 중간을 툭 잘랐다.

“사진이고 뭐고 기왕이면 분위기가 좋아야지. 기껏 이렇게 근사한 장소를 골랐는데. 때마침 애딩턴 메모리얼에 CCTV가 고장 나 있을 거라고 누가 알았겠어? 어이, 안 쌀 거면 입에 물린 거나 좀 빼 보시지?”

“가, 가만……, 좀 있어 봐. 지금 막 올 거…… 끄응,”

입에 문 페니스가 질척한 더운 덩어리를 흘렸다. 그대로 페니스를 넣은 채로 있자 세스의 입가를 타고 타액과 피가 섞여 핑크빛이 된 정액이 툭툭 떨어졌다.

“아, 저거!”

밀레나 헤이워드는 사진작가라도 된 듯 수선을 피우며 셔터를 눌러 댔다. 높은 웃음소리가 플래쉬 소리에 섞여 괴상한 소음을 만들어 냈다.

“아, 진짜 남창 같아. 정말 난잡해 보여.”

까르륵, 웃음이 한차례 더 이어졌다.

“알렉스가 이걸 보고서도 남창이 내 거라느니 그런 소리를 계속할까? 에이, 알렉스한테만 보내지 말고 아예 사물함 구역에 붙여 놔야겠어.”

방금 전 사정을 마친 브랜튼이 정액이 묻은 페니스를 세스의 알몸에 문지르며 밀레나 헤이워드에게 말했다.

“너도 너무하네, 헤이워드. 랜스키가 너한테 꽤 잘해 주지 않았어? 사귀는 동안 짭짤하게 뽑아먹었다면서. 꼭 이렇게 화풀이해야 하는 거야?”

“닥쳐, 브랜튼. 잘못은 알렉스가 먼저 했어.”

“뭘 잘못했는데? 남창이 너무 매력적이라 마음이 떠난 걸 두고 하는 소리라면 좀 그렇지 않아? 듣기로는 네가 먼저였다며. 다른 놈하고 붙어먹은 건.”

“닥치라잖아!”

밀레나 헤이워드가 파르르 어깨를 떨며 브랜튼을 노려보았다.

“딴소리 말고 제대로 박기나 해. 이제 누가 할 거야?”

죽은 듯 바닥에 엎드려 있는 세스를 누군가가 잡아 일으켜 세웠다.

“이번엔 나야. 아까부터 존나게 참았어.”

브랜튼이 킬킬 웃으며 다른 친구의 어깨를 떠밀었다.

“기왕 하는 거 너도 같이해. 쟤가 입에 박을 동안 너는 뒤에 박으면 되겠네.”

“와, 씨. 나 뒤에 해 본 적 없는데.”

“잘됐네. 한번 먹어 봐.”

브랜튼이 엉덩이를 잡아 벌리는 동시에 한쪽이 찢어져서 쓰린 입술을 비집고 비릿한 성기가 들어왔다. 세스가 구역질을 하느라 성기를 뱉고 허리를 구부렸다.

“고개 숙이지 마! 사진이 잘 안 나오잖아!”

밀레나 헤이워드가 앙칼진 음성을 토해 냈다. 그래서 아무도 듣지 못했다. 세스의 전화기에서 나오는 툭, 소리를.

전화가 끊어지는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제이 에드거 하나였다.

제이 에드거는 통화가 끊긴 전화기를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얌전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럼 난 이만 가 볼게. 마저 잘 놀아.”

“뭐? 벌써 간다고?”

“응. 뭐, 내가 남창을 어떻게 할 것도 아니고. 보기만 하는 것도 영 재미없네.”

제이 에드거는 산뜻한 표정으로 일행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럼, 좋은 밤.”

제이 에드거는 세스가 타고 온 산악용 바이크에 올라 페달을 밟았다. 어둠과 똑같은 색깔을 한 밤바람이 그의 금발을 나른하게 흔들었다.

헤이워드 무리로부터 안전하게 거리를 벌릴 때까지 자전거를 달린 제이 에드거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시키신 대로 했어요. 이제 왕자도 곧 도착할 거예요. 구경하시려면 지금 출발하셔야 될 것 같아요.”

[아아, 수고했어.]

제이 에드거의 부어터진 입술이 씨발, 개좆같은 변태 새끼, 라고 소리 없는 궤적을 그렸다.

“뭘요. 그때 잊었던 에스코트 비용이나 입금해 주세요.”

[하하……. 가서 보고. 네가 일을 잘해 놨으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징징대지 마. 나중에 연락할게.]

상대방이 전화를 끊었다. 제이 에드거는 더 이상 수화기 너머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한 후 욕설을 소리로 만들었다.

“씨발, 개좆같은 변태 새끼.”

오늘 일을 만들어 낸 것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카메라를 쥐고 설치는 밀레나 헤이워드가 아니었다. 사진을 미끼로 세스를 불러낸 제이 에드거도 아니었다.

개좆같은 변태 새끼인 루이 랜스키였다.

* * *

끼이익, 쾅!

느닷없이 공원 울타리를 부수며 눈앞으로 날아든 차 한 대를 바라보며 헤이워드 무리는 일단 눈을 깜박였다. 생각은 감각보다 한차례 늦었다. 길도 없는 공원 한복판에 어째서 차가 움직이고 있는 건지, 잠시 두뇌가 상식을 두고 고민을 하는 동안 감각은 손끝을 굳게 만들었다.

“이게 뭐…… 누구?”

밀레나 헤이워드가 입술을 더듬거렸다. 그 말에 대꾸라도 하듯 차 문이 철컥 열리고 누군가가 내렸다. 한 손에 길쭉한 벽난로용 포커를 쥐고 있는 알렉산더 랜스키였다.

“여, 여……!”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하지만 밀레나 헤이워드는 답을 들을 수 없었다. 입술이 겨우 두 번 움직이는 사이 알렉산더 랜스키가 포커를 휘둘렀다.

퍼억!

머리를 얻어맞은 밀레나 헤이워드는 비명도 없이 그 자리에 풀썩 쓰러져 버렸다. 나머지 무리가 수치심을 대신해 공포를 느낀 것은 그 순간이었다.

“뭐, 뭐야!”

“쳐, 쳤어! 저…… 저걸로 사람을!”

“랜스키가 왜 여기 있는 거야!”

알렉산더 랜스키는 지금 눈만 없는 사람 같았다. 단단하고 맑던 회색 눈이 지금은 아예 없는 것처럼 어둡고 까맸다.

“……다섯.”

그가 입술을 달싹이며 만들어 내는 작은 소리를 무리는 듣지 못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바닥에 알몸으로 쓰러져 있는 세스에게 아무런 눈길도 주지 않고 다섯 명을 그렇게 까만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씨…… 마, 말해 두는데 억지로 한 건 아니다. 남창이 먼저 하자고 했어. 그, 그런 거야. ……아, 그렇지. 헤이워드가 그렇다고 했어. 헤이워드한테 물어보면……,”

브랜튼이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주절대며 눈동자를 굴렸다. 상대는 하나라지만 도망치고 싶어졌다. 이쪽은 다섯이나 되니까 먼저 도망치면 랜스키가 쫓아오진 못할 것이다.

“그, 그러니까 일단 그건 좀 놓고, 서로 오해는 말……,”

늦었다.

뻑!

알렉산더 랜스키가 포커를 휘둘렀다. 어깨를 얻어맞은 브랜튼이 비명과 함께 바닥으로 쓰러졌다.

퍽!

시작부터 울리는 소리가 기분 좋게 귓가를 덥혀 왔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그게 뼈가 부러지는 소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 *

형태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다섯 놈을 뭉개고 나서야 세스를 쳐다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기에 정신을 잃은 줄만 알았다. 그러다 곧 눈이 마주쳤다.

“…….”

알렉산더 랜스키는 눈이 마주하는 순간 굳기 시작한 발을 지면에서 뜯어내듯 천천히 걸어갔다. 세스는 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미동 하나 없이 눈만 뜨고 있었다.

툭.

마침내 걸음이 멎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허물어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양손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제 피도 있었고 남의 피도 있었다. 중간에 포커를 떨어트린 뒤로는 맨손을 사용했다. 그러자 스스로가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 된 기분이었다. 놈들 중 하나가 포커를 주워 들어 등을 콱 쑤셨을 때는 특히나 더 그랬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제 손으로 포커를 뽑아 들고는 놈을 붙들어 더 이상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내리쳤다. 살이 찢기는 소리는 아무런 자극도 되지 못했다. 저도 맞고 밟히며 결국 다섯 놈을 모두 원하는 꼴로 만들었을 때는 양팔을 들어 올릴 기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원래의 색을 알아보기 어려워진 셔츠를 벗었다.

“이거라도 입자.”

가만히 누워 있던 세스가 유령처럼 몸을 일으켰다. 셔츠를 입혀 주려는 팔은 경련이 일어나는 것처럼 쉬지 않고 떨려 왔다.

자꾸만 헛손질을 하는 알렉산더 랜스키를 쳐다보던 세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입을게.”

알렉산더 랜스키가 고집스레 고개를 저었다.

“팔 들어.”

“…….”

세스가 팔을 들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저에 비하면 훨씬 양호한 상처를 달고 있는 세스의 맨몸에 피에 젖은 셔츠를 입혀 주었다.

“어서 병원 가야 되겠는데.”

“아냐……. 난 별로 안 다쳤어.”

떨리는 손이 세스의 머리를 쓸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무거워진 이마를 세스의 이마에 기댔다. 그가 자꾸만 허물어져 버릴 것 같아 세스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네가 더 많이 다쳤어. 너는 괜찮아?”

“괜찮……. 하, 하하…….”

이마를 맞붙인 알렉산더 랜스키가 양손으로 세스의 얼굴을 조심스레 감쌌다.

“숨 쉬어 봐. 커다랗게.”

알렉산더 랜스키의 말에 세스가 훅 숨을 내뿜었다. 숨에 섞여 있는 피 냄새가 코 속으로 번져 왔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이마를 떼고 새삼스럽다는 듯 세스를 바라보았다.

“아, 살아 있는 거 맞구나.”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이마가 세스의 어깨에 주저앉았다. 세스는 눈에 닿을 것 같은 알렉산더 랜스키의 뒷목을 하염없이 응시했다.

“놀랬어.”

“아냐……. 난 그냥…… 별일 없었어. 진짜야. 나는 그냥…….”

세스는 자신이 겪은 일을 설명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말을 마칠 수는 없었다.

“네가 와 줘서…… 그래서 별일 없었…….”

“놀랬어. ……죽었을까 봐.”

“…….”

“놀랬……. 죽어서…… 너무 늦었을……, ……잃었을…… 까 봐…….”

알렉산더 랜스키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은 문장으로 완성되지 못했다. 그래서 말보다는 그저 소리에 가까운 무엇이 되었다. 세스는 손을 뻗어 흔들리는 알렉산더 랜스키의 어깨를 마주 안았다. 그를 흉내 내는 것처럼 어깨에 뺨을 묻었다.

세스가 불안감이 증폭된 터무니없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왜…… 울어.”

소리 없이 알렉산더 랜스키의 뺨이 젖어 갔다. 세스는 그가 흘리는 눈물을 한 방울도 빠짐없이 느꼈다.

“울지 마. 왜 울어.”

세스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그와 마찬가지로 소리 없이 눈물이 굴러떨어졌다.

“왜 울어. 왜 네가…….”

알렉산더 랜스키가 띄엄띄엄 젖은 입술을 열었다.

“……네가 살아 있어서.”

그렇다면 세스도 지금 자신이 우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널 잃어버리지 않아서.”

“…….”

“……널 사랑해서.”

“……. ……흑,”

세스의 눈물이 비로소 소리가 되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커다랗게 소리를 지르며 울기 시작했다. 울음소리가 제 귀에 꼭 사랑해, 라는 말로 들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울었다.

그리고 10분 뒤, 누군가가 미리 계산을 해 놓은 듯 시간에 맞춰 구급차가 당도했다.

* * *

“두 명은 아직 혼수상태에 있고, 한 명은 베지터블 판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는 팔뼈가 완전히 바스라졌고, 또 하나는 성형으로도 회복 불가능한 영구 안면 장애가 생겼습니다. 그나마 경상이 갈비뼈에 금이 간 건데 PTSD가 아주 심각하다네요.”

루이 랜스키는 자신이 연출한 작품에 뻐근한 자부심을 느꼈다. 평소에도 짐승 같은 새끼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정말로 이렇게 야수가 되어 버릴 줄은 몰랐다. 살인자 딱지를 달지 못한 것은 조금 유감이었지만, 눈앞에서 보고를 받는 부친의 얼굴이 저렇게 일그러져 가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성공적이었다.

“심각하네요. 쉽게는 안 넘어가겠는데요.”

윌리엄 랜스키는 쉽사리 남의 의견에 동조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평소에 몸집이 좀 큰 벌레 취급을 하는 둘째 아들의 의견이라면.

“이유가 뭐라고?”

루이 랜스키는 미소를 짓지 않기 위해 정말로 애를 썼다.

사실 그 이유가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이었다. 프로 해결사는 그쪽 분야의 신처럼 유능했다. 사소한 단서만으로도 엄청난 결과를 물어 왔다. 자신이 부친의 자리에 앉게 되면 정규직을 제안하고 싶을 정도였다.

“남자 친구 때문이라는데요?”

“남자 친구?”

이 순간 루이 랜스키는 고개를 돌려 빠르게 미소를 흘려보내야 했다. 그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노란 봉투에서 사진을 한 장 꺼내 들었다.

“이 아이입니다.”

첫 번째는 부친의 사랑스러운 막내 왕자가 남자 친구와 키스하는 사진이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좀 들어 보니 소문이 좋지 못하더군요. 그래서 제법 더 신경을 써서 알아봤습니다. 여기,”

루이 랜스키가 두 번째 물건을 꺼내 들었다. 세스 그린의 병원 진료 기록과 정신과 전문의의 소견서 등이었다.

“…….”

부친의 얼굴이 말도 못 할 만큼 구겨졌다. 부친은 셋 중 가장 쓸 만하다고 믿어 왔던 막내가 제 형들 못지않은 대형 사고를 일으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겉으로는 한 번도 자상히 구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지만 루이 랜스키는 막내를 대하는 부친의 태도가 저나 맏형과는 근본부터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추상화처럼 헝클어져 가는 부친의 얼굴은 성욕과 구분이 안 되는 쾌감을 불러 일으켰다. 믿지 않고 있을 때와 믿고 있을 때의 배신감이란 우연과 운명만큼 다르기 마련이었다.

스멀스멀, 독 같은 쾌감이 전신에 번져 왔다.

“어젯밤에 경찰서장이 전화를 했답니다. 아직까진 진술이 불가능한 상태라는 주치의의 소견이 있으니 일단 좀 기다리라고 해 놓았습니다. 다음은 어떻게 할까요?”

이런 일에는 절차가 있었다.

할 수 있는 한 경찰 조사를 보류시킨 뒤 사고를 저지른 당사자를 감춰 두고 그 다음 변호사 군단이 움직였다. 유능함을 따지자면 다른 사람들과 비교되는 것을 모욕이라고 받아들일 정도로 비싼 몸값을 톡톡히 해내는 랜스키가의 변호사들이 형법 전문가에 자문을 구하고 전직 경찰이나 FBI 출신의 조사원들을 대거 고용해 가능한 한 모든 증거를 수집하고 조작하고 소각했다.

조금 심각한 일이라면 랜스키라는 성을 가진 사람이 은밀한 저녁 식사를 두 번에 걸쳐 해야 했다. 한 번은 사건 담당 판사와, 또 한 번은 지역 검사장과. 미디어는 걱정할 것이 없었다. 어차피 사건 보도가 가능한 대형 미디어들은 어떻게 해서든 랜스키 인더스트리와 연관이 있었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저널리스트와 블로거들은 약간 문제가 될 수 있었지만, 이쪽은 얼마나 넉넉한 숫자의 해결사를 고용하느냐의 문제일 뿐이지 해결 자체를 고민해야 되는 문제는 아니었다.

루이 랜스키가 노리는 것은 그 과정에서 자신이 랜스키의 이름을 달고 움직이는 일이었다. 이 일을 얼마나 잘 다뤄 놓느냐에 따라 부친은 다시금 그를 사람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번거로우시다면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

이제껏 얼굴을 구기고 있던 부친은 대답 대신 침묵을 먼저 내밀었다. 부친의 침묵은 그에게 가장 섬뜩한 무엇이었다. 침묵하는 사이 부친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누구도 몰랐다.

“아니, 내가 알아 하지. 너는 손을 떼.”

루이 랜스키는 섣불리 실망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부친은 절대자였다. 부친은 자신의 결정을 언제나 무오류로 만들 수 있는 권능자였다.

“만족하실 만큼 잘 해결해 두겠습니다.”

“만족……?”

부친의 표정에서 침묵이 서서히 미소에 밀려났다. 그것만으로도 루이 랜스키는 섬뜩한 모욕감을 느꼈다. 그건 자신은 절대 부친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뜻이었다.

“직장이라도 구하지 그러느냐. 더 나이 들기 전에.”

부친은 턱으로 서재의 문을 가리켰다.

“나가라.”

“……예, 아버지.”

등을 돌려 서재를 나서는 루이 랜스키의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제기랄.”

몇 발자국 가지 못해 발이 꼬였다.

루이 랜스키는 넘어지기 전 가까스로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구부렸다. 심호흡을 거푸 들이켜고 나자 배 속이 드글드글 끓기 시작했다. 연약하고 만만한 존재가 필요했다. 무슨 짓을 해도 저항하지 못하는, 그런 하찮은 존재가.

루이 랜스키는 충동을 억누르지 못하고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목록을 뒤져 통화 버튼을 누르자 얼마 지나지 않아 제법 귀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이 랜스키는 전화기를 통해 표정까지 전달되지 않는 사실에 안도하며 말했다.

“오늘 밤. 전에 그곳으로 와. 돈을 줄게.”

말이 많은 금발의 창부는 돈을 준다는 말에 제꺽 알겠다고 대답했다. 루이 랜스키는 전화를 끄고 숨을 한껏 들이켰다. 내장이 온통 어긋난 것 같았던 충동들이 차츰 제자리로 돌아왔다. 오늘 밤에 금발의 창부와 할 수 있는 일들을 한차례 머릿속에서 그려 내자 두뇌가 적당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진짜 어지간하면 노친네 더러운 과거는 나이를 봐서라도 덮어 주려고 했는데 말이야. 꼭 이런 식으로까지 하게 만든다니까.”

루이 랜스키는 잔뜩 찌푸린 억지웃음을 지으며 이번에는 통화 목록을 뒤질 것도 없이 외우다시피 한 해결사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네.]

이어서 들려오는 짧은 대꾸에 루이 랜스키 역시 짧게 용건을 얘기했다.

“사진하고 유전자 감식 결과 보내.”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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